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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72/ 터키1

상림은내고향 2022. 7. 26. 11:20

지구촌 여행/ 국가별72/ 터키1

■  터키 = 튀르키예공화국 

Republic of Türkiye 터키공화국, Republic of Turkey, 토이기, 土耳其, Türkiye, 터키, Turkey

▲국기

 

지중해 동북쪽에 연해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영토를 갖고 있는 나라. 수도는 앙카라이며, 주요 인종은 지중해-튀르크인이며 튀르크어를 사용한다.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공존하는 개발도상국 경제체제를 취하고 있으며, 산업·서비스 부문이 농업보다 우세하다. 목화나 담배 같은 환금작물은 수출용으로 중요하다. 전국토의 1/4을 차지하는 이 삼림지대는 지금까지 거의 개발되지 않고 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국호는 2021년까지 '터키'였으나 2022년 '튀르크인의 땅'을 의미하는 '튀르키예'로 변경했다.

 

지중해의 동북쪽에 연한 국가. 공식 명칭은 튀르키예공화국(Republic of Turkiye)이다. 수도는 앙카라이며, 북쪽으로 흑해, 동쪽으로 조지아·아르메니아·이란, 남쪽으로 이라크·시리아·지중해, 서쪽으로 에게해·그리스·불가리아와 접해 있다. 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역인 트라케는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나누어진다. 튀르크어 국호는 'Türkiye Cumhuriyeti'이다. 2021년까지 국제적으로 통용되었던 국호는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었으나, 2021년 12월 '튀르크인의 땅'을 뜻하는 '튀르키예공화국(Republic of Turkiye)'으로 변경하고 2022년 국제연합(UN)에 국호를 '튀르키예'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2022년 6월 한국어 표기도 '튀르키예'로 변경되었다.

 

튀르키예는 오스만 제국이 몰락한 이후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운 공화국으로서 1946년까지 1당 국가체제를 유지했다. 이후 여러 정당들이 집권 경쟁을 벌였고 대부분 기간 문민 의회정치로 운영되었다.

 

1987년과 1995년 2차례 개정된 1982년 신헌법은 의회민주정치체제에 대해 규정하고 있었으며 헌법상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튀르키예대의회(국회)에 의해 7년 단임으로 선출되고, 550명의 국회의원은 직접보통선거에 의해 5년 임기로 선출되도록 했다. 2007년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에서 5년 중임으로 개정하고, 선출 방식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변경했다.

 

2017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다시 헌법을 개정했는데, 주요 골자는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의 변경이었다. 이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임기를 5년으로 정하고 중임이 가능하도록 했으나, 중임 임기중에 대통령이 조기선거를 통해 다시 당선되면 5년의 추가 임기를 재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대통령이 사법 체계에 개입할 수 있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으며, 의회의 견제 없이 공직자를 바로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튀르키예 공화국 성립시에는 인구의 10% 정도만이 글을 읽을 줄 알았으나 아타튀르크의 국민교육 강조 정책에 힘입어 20세기말에 오면서 문자해득률이 성인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국가 교육 체계는 초등교육에 한해 5년간의 무료의무교육을 제공하며 중등교육과정은 6년이다. 대학교 수준의 고등교육 기관이 20개 정도 있다. 정부는 보건복지정책을 관리하고 많은 병원과 진료소를 운영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평균수명은 71세까지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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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터키의 신화, 그리고 역사

역사와 신화(神話)의 차이는 무엇일까? ‘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 시리즈를 시작한 뒤 그리스, 이탈리아, 터키를 두루 돌아보면서 받은 느낌은 소설가 이병주의 아포리즘(aphorism) 그대로였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褪於日光則爲歷史, 染於月色則爲神話)” 그의 소설 <산하>에 나오는, 그가 가장 자주 쓰던 격언 중의 하나였다.

 

고대 도시 에페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거의 매일 세계 각국의 방문객들로 붐빈다.

 

일광의 역사와 월색의 신화. 추상적으로 구분하면 그렇다. 구체적으로는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이 사실적, 고고학적으로 검증이 되면 역사가 되고, 그냥 묻혀 있으면 신화적 상상력만 발휘하게 된다는 의미다. , 밝혀진 사실을 역사학자들이 역사적으로 팩트(fact)로 확인한 것과 확인하지 않은 채 그냥 내버려두는 것과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다르게 표현해서 승자의 기록은 역사가 되고, 패자의 기록은 신화가 된다는 말도 된다. 좋고 나쁘고의 가치판단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리스 파르나소스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델피신전에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답사하고 있다.

 

 동양학은 다소 신화적 요소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팩트)과 보이지 않은 것(픽션)을 연결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사람들은 반신반의한다. 하지만 대부분 이를 믿는다. 물론 역사적으로 검증된 건 결코 아니다. 그래서 동양학으로 고대문명을 보면 역사학자들이 보지 못한 팩트와 픽션으로 하나의 새로운 문명적 해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것도 한국의 대표적인 동양학자인 조용헌 박사의 시각을 통해서. 20여명의 참가자와 조 박사와 함께 고대문명 발상지인 터키로 향했다. 흔히들 여행을 다닐 때 최종적으로 터키를 다녀오라고 한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고, 터키를 보고나면 다른 지역은 시시해서 못 간다고 할 정도다. 기대를 듬뿍 안고 출발이다.

 

▲고대 터키 에페스 도시 구조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웅장한 건물이 셀수스도서관이고 그 앞에 미로로 된 건물이 유곽이고, 그 옆은 목욕탕이다.

 

터키는 지중해와 페르시아만을 두루 아우르는 고대문명 발상지이자 그리스문화권이었다. 아니 그리스와 터키는 동일문화권이었다. 그리스문화권이라는 의미는 터키를 지칭하는 ‘아나톨리아(Anatolia)’라는 개념이 이를 반증한다. 아나톨리아는 그리스어로 ‘태양이 솟는 곳’이란 뜻인 아나톨(Anatole)에서 유래했다. 아나톨리아는 태양이 솟는 곳에 있는 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지중해 너머 유럽에 있는 그리스에서 아나톨리아를 소아시아라고 부르며, 터키를 지칭하는 말이 됐다. 그 역사는 무려 1만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스타디움 입구에 아치형 성벽이 있다.

 

우리의 단군신화보다 더 오래된 역사다. 지중해와 육상으로 서로 맞대고 있는 그리스와 터키는 둘도 없는 앙숙이다. 피도 섞이고 지명도 섞이고 생활양식도 섞이고 문화도 섞인 두 국가가 앙숙이라니…. 아마 수천년에 걸쳐 서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반복되면서 쌓인 감정이지 않을까 싶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자세히 설명할 부분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아크로코린트 언덕 아래 코린트 도시가 번성했으며, 그 중심에 코린트신전과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아크로코린트 언덕 위에는 BC 3,000년경에 쌓았던 요새가 지금까지 있다.

 

터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 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끼고 있고, 고대 샤머니즘과 기독교이슬람이 공존하며, 유럽과 아시아가 동시에 있으며,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로서 문명사적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지역이다. 특히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은 성서에 언급된 최초의 강이기도 하며, 두 강 사이에 인간의 첫 거주지인 에덴동산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도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란 뜻이다. 여기에도 그리스신화가 전한다.

 

▲당시 1만 명 수용할 정도로 규모가 큰 터키의 에페스 원형극장 앞으로 항구까지 이어지는 유일한 도로가 연결돼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빌론의 아름다운 여인이다. 메소포타미아에게는 티그리스(Tigris)와 유프라테스(Euphrates)라는 이름의 언니들이 있었다. 그녀는 3자매 중에 가장 추했으나 아프로디테의 축복을 받아 자라면서 미의 여인으로 변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아름다움에 반한 세 명의 젊은이가 동시에 청혼을 하자 고민 끝에 그녀는 공정한 심판자로 보코로스(Bochorus)에게 선택을 맡겼다. 보코로스는 메소포타미아를 선택했다. 하지만 다른 두 자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 다투다 결국 모두 죽어버렸다는 신화다.

 

▲그리스 최고의 신 제우스 신상이 있었던 신전에서 방문객들이 제우스 신상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터키로 떠나는 이슬람 건축 기행

세상에 이보다 더 완벽한 건축물은 없다

터키 에디르네 셀리미예 모스크 내부. 시난이 자신의 역작으로 꼽은 이 모스크는 거대한 사원을 단 하나의 돔으로 덮었다. 사람들은 사원 안에서 같은 하늘 아래 하나가 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사진=한상무(noon 스튜디오)

 

거대한 돔은 장엄함으로 보는 이를 압도했다. 사원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아랍어 캘리그래피와 기하학적 무늬는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기도 시간이 되자 신자들은 일제히 동남쪽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했다. 99개의 창을 통과한 빛이 사원 안을 은은하게 감쌌다. 모스크 안 세상은 빈틈없이 정연했다. 

불가리아, 그리스와 맞닿은 터키 서북부 도시 에디르네. 이곳에 자리 잡은 셀리미예 모스크는 오스만튀르크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로 꼽힌다. 이 모스크를 만든 이는 미마르 시난(?1588)이다. 미마르는 터키어로 ‘건축가’라는 뜻이다. 시난은 이슬람 문화와 건축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술레이만 1세 시절 궁정 건축가가 된 시난은 셀림 2세와 무라드 3세 때까지 활동하며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지었다. 그는 당시까지 도시마다 달랐던 건축 스타일을 하나로 통합했다. 거대한 돔 건축물과 그 주변 세워진 높은 첨탑인 미나레트를 특색으로 하는 오스만식 건축 양식은 시난 시절 확립된 것이다.


“돔 아래선 모두가 하나가 되는 느낌” 

이스탄불 술레마니예 모스크(위 사진)와 셀리미예 모스크 돔 지붕에 그려진 캘리그래피. ‘알라는 오직 한 분이다’ 같은 이슬람 경전 꾸란의 구절이 쓰여 있다.

 

시난이 80대였던 1574년 완성한 셀리미예 모스크는 그가 자신의 ‘역작’이라고 칭한 건축물이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모스크의 넓이는 1620m², 높이는 43.3m. 특히 지름 31.2m인 돔의 무게는 2000t에 이른다. 사실 셀리미예는 동로마제국 시절 그리스도교 대성당으로 이스탄불에 세워진 하기아 소피아(537)와 모양새가 닮았다. 건축가로서 시난이 마음에 담은 목표가 하기아 소피아였기 때문이다. 셀리미예는 돔의 크기는 하기아 소피아와 비슷하지만 높이는 54m인 전자에 다소 못 미친다. 그러나 구조적 안정감과 논리적 정교함에선 하기아 소피아를 능가한다. 8개의 기둥과 아치로 받쳐진 거대한 돔은 정사각형 외벽으로 부드럽게 연결됐다. 실제로 하기아 소피아가 지진으로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해 왔다면 셀리미예는 17세기, 18세기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1913년 불가리아가 에디르네를 점령했을 당시 모스크는 대포 공격을 받았지만, 돔 일부에 작은 흔적만 남았을 정도로 견고함을 자랑한다. 사원 안에 더 많은 창을 내고 내부에 빛을 충분히 통과시킬 수 있었던 것 역시 튼튼한 구조 덕분이다 

수피 사치 터키 바키프대 건축학과 교수는 “시난은 모든 오스만 건축의 표준을 만들었다. 특히 셀리미예만큼 완벽한 구() 형태의 거대한 돔을 올리는 것은 시난 이후의 제자들도 실패했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셀리미예는 사원으로 쓰인다. 매주 금요 기도회에는 50006000명의 이슬람 신도가 이곳을 찾는다. 셀리미예는 대형 기도회에 최적화돼 설계됐다. 기둥을 벽 쪽으로 밀착시켜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을 없앴고, 메카의 방향을 알리는 미흐라브를 비롯한 니치형 벽감은 이맘의 목소리를 확산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 사원의 타메르 발라트 이맘(이슬람 성직자)은 “하나의 돔 아래서 모두가 함께 있는 느낌을 얻는다”고 했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한 오스만의 ‘미켈란젤로’ 

에디르네에있는미마르시난의동상.

 

시난은 종종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미켈란젤로(14751564)와 비교된다. 다재다능한 재주를 가졌고, 신에 대한 신실함을 바탕으로 재능의 최대치를 이뤄 낸 천재라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다만 활동 무대의 넓이와 작업량만 비교한다면 시난은 미켈란젤로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시난의 건축물은 오늘날 헝가리,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시리아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80여 개 모스크를 비롯해 그가 참여한 건축물은 400여 개에 이른다 

 
시절 시난이 이처럼 많은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였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난의 손을 거친 통일된 형식의 건축물들은 오스만이 지배한 땅에 소속감을 부여하며 제국의 통합에 기여했다. 최근 터키 문화관광부가 시난의 건축물을 소개하는 데 역점을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난의 건축물을 소개하는 건축 기행도 생겼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터키 관광이 이슬람을 벗어나 기독교 성지 순례나 오스만 이전 역사 유적지에 집중됐다면 시난을 중심으로 한 기행은 정통 이슬람 문화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에디르네 지역을 관할하는 마흐무트 샤힌 트라키아 주정부 개발공사 사장은 “이스탄불과 트라키아 주정부가 연대해 ‘미마르 시난의 건축 기행’ 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종교를 떠나 진정한 터키의 문화예술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시난은 10대에 오스만 제국 내 이교도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부대 예니체리에 징집된 뒤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터키의 근위병이 됐다. 당시 공병으로서 여러 지역을 두루 다녔던 경험은 훗날 그의 건축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오스만식 건축은 고대 로마의 아치나 높이를 추구했던 중세 유럽의 건축, 비잔틴 건축의 돔 양식 등 다양한 문화의 건축양식을 실용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술레이만 1세 시절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인 이스탄불은 시난이 수습 시절 참여했던 건축물부터 그가 참여한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천재라는 칭송을 들었던 이 건축가는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이뤘던 노력파이기도 하다. 시난의 건축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돔의 크기가 커지는 한편 내부 공간의 효율성도 높아진다 

특히 술레이만 1세를 위해 만든 술레마니예 모스크(1557)는 셀리미예 모스크와 함께 시난의 대표작이자 가장 유명한 오스만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시난은 술레마니예에 대해 ‘진정한 첫 작품’이라고 했다. 골든혼이 내려다보이는 이스탄불의 서쪽 언덕 위에 세워진 이 모스크는 웅장한 세련미가 특징이다. 길이 59m, 너비 58m(3422m²)의 거대한 사원에 지름 26.2m의 거대한 돔이 49m의 높이로 올려져 있다. 모스크를 중심으로 200m 근방에 위치한 신학교와 병원 목욕탕 식당 숙소 등을 포함해 쿨리예라 불리는 사원 주변 시설을 돌다 보면 ‘대제’라고 호칭되는 술레이만 1세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미술 사학자인 안현배 씨는 “셀리미예와 술레마니예 모스크는 이후 오스만 건축 양식의 표본이 됐다. 한 사람의 생애 동안 이처럼 대규모의 건축물을 여럿 내놓을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했다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을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술레마니예 모스크의 북쪽 주변에는 시난이 생전에 그 위치를 직접 골랐다는 그의 무덤이 있다. 무수하게 많은 대규모 건축물을 지었던 건축가의 무덤은 겨우 길 끝 모서리 몇 평을 채울 정도로 소박했다. 묘비에는 시난의 친구이자 작가인 사이 무스타파 첼레비가 쓴 글이 남겨져 있다.

“…성스러운 거장은 팔십 군데가 넘는 모스크를 지었네/그가 백수 넘게 살고 마침내 삶을 마감했으니/그가 누운 곳이 장미의 정원이 되었네…시난, 건축가들의 거장이 이제 떠났네/모든 사람들이여 그를 위해 파티하(이슬람 경전 꾸란의 한 구절)를 암송하시오.  

에디르네·이스탄불=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취재 지원=터키 문화관광부, 터키항공  

 

◆2017.12.29 터키 앙카라 기행 - 터키는 지금 ‘쿠데타 잔당 청산’ 중

2016 7 15일 불발 쿠데타… 250여 명 사망, 29000명 체포, 10만명 해직
⊙ 곳곳에 케말 파샤의 동상과 사진… 다른 한편에서는 모스크 건설 한창
⊙ “미니스커트 입고 버스 타면 눈총받는 분위기가 너무 싫다… 이스탄불로 가고 싶다”

▲불발 쿠데타 와중이던 2016 7 16일 테러가 일어났던 복합문화단지 앞. 7·15신화’라는 조형물이 서 있다.

 

  MIKTA 저널리스트 프로그램 참석차 지난 11 13~17일 터키에 다녀왔다. MIKTA 2013년 유엔총회 이후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가 만든 협력체이다. 경제 규모로 세계 10위권에 드는 중견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자고 만든 모임이다. 해마다 행사 주관국을 정해 언론인, 청소년, 종교인 교류 행사 등을 갖고 있다. 이번에는 터키가 행사를 주관하게 됐는데, 한국, 멕시코, 인도네시아 기자들이 참석했다.
  
 
행사는 이스탄불상공회의소, 터키항공, 민간방송사 방문을 제외하면 주로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진행됐다. 인구 515만명의 앙카라는 한마디로 ‘100년 된 세종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이스탄불을 대신해 앙카라가 터키공화국의 수도가 된 것은 1923년이다. 앙카라는 그 이전에는 유럽에 ‘앙골라’라고 알려진 도시였다. 앙골라 양모, 앙골라 토끼 할 때의 그 ‘앙골라’다

  
  
앙카라 시내로 가는 길

앙카라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정치선전물. 7·15 불발 쿠데타를 진압한 대통령과 민중을 예찬하고 있다.
 

  오스만튀르크제국의 깡촌이던 이곳이 신생 터키공화국의 수도가 된 것은 순전히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1881~1938) 덕분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튀르크제국이 패망한 후 터키공화국을 세운 케말 파샤는 구(舊)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을 떠나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벽촌이던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종시로 행정수도를 옮기겠다면서 “구세력의 뿌리를 떠나 새 세력이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터를 잡기 위해 천도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한 시대와 지배 세력의 변화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앙카라는 ‘터키의 세종시’인 셈이다.
  
  100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는 515만명에 이르는 대도시가 됐다. 하지만 아직도 앙카라는 이스탄불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국제공항과 앙카라의 앙카라국제공항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전자(前者)가 세계 각국에서 항공기가 몰려드는 명실상부한 허브(hub)공항이라면 후자(後者)는 국내선 위주의 공항이라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공항에서 앙카라공항으로 향하는 길.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곳곳에서 진행 중인 모스크(이슬람 사원) 공사였다. 다른 하나는 시내로 들어가는 길 도로변에 붙어 있는 정치 선전물이었다.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2016 7 15일 불발 쿠데타 당시 거리로 나왔던 시민들, 그리고 쿠데타 당시 희생된 시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이슬람원리주의로의 회귀(回歸)와 쿠데타 잔당(殘黨) 청산이라는 터키의 양대(兩大) 관심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테러가 일어났던 복합문화단지

복합문화단지 안에 있는 모스크. 에르도안 대통령이 알라에게 바치는 사원인 듯하다.
 

  터키에 있는 내내 2016 7 15일 있었던 불발 쿠데타와 관련된 얘기를 들었다. 11 13일 도착 직후 점심 식사를 같이한 외무부 관리들부터 시작해서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단어가 있었다. FETO, 즉 ‘펫훌라흐 귈렌 테러 조직’이었다. 어딜 가나 FETO 얘기가 나왔다. 국회, 경제부, 공보처, 국영방송국, 재난관리처, 민간방송국, 심지어 해외원조기관에서도…. ()-()-()-FETO였다
  
 
펫훌라흐 귈렌은 에르도안 정권이 2016년 불발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인물. 에르도안 대통령이나 펫훌라흐 귈렌 모두 케말 파샤 이후 터키가 지향해 온 세속주의 노선의 수정을 요구하는 점에서는 흡사하다. 다만 펫훌라흐 귈렌은 교육, 복지, 사회봉사, 종교 간 대화 등의 문화적 영역에서부터의 의식 개혁을 추구하는 반면, 에르도안은 정치 권력을 통한 이슬람으로의 복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은 한때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지금은 정적(政敵)이 됐다. 귈렌은 에르도안의 부패와 독재를 비난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귈렌을 불발 쿠데타의 배후 조종자라면서 미국에 그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외무부 관리들과 식사를 마친 후 터키 측이 처음 안내한 곳은 FETO의 테러가 저질러졌다는 현장이었다. 현장은 대통령궁 주변에 조성되고 있는 복합문화단지였다. 모스크, 컨벤션센터, 국립도서관 등이 들어서기 위한 공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쿠데타 와중이던 2016 7 16일 이곳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17명이 희생됐다는 것이 터키 당국의 설명이었다
  
 
현장에는 당시 상황을 알리는 설명판과 함께 ‘7
15 신화(神話)’라는 붉은색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통령궁에서 신화는 시작된다”는 글귀도 있었다. 이 조형물은 국회의사당, TRT(터키라디오텔레비전국영방송국) 등 쿠데타 당시 쿠데타군과 시민들의 충돌이 일어났던 곳마다 만날 수 있었다.
  
 
복합문화단지 안에는 지은 지 1년밖에 안 되었다는 모스크가 있었다. 오스만튀르크제국 시절 술탄이나 고관(高官)들이 이스탄불에 화려한 모스크를 지어 알라()에게 헌납했던 것처럼, 이 모스크는 ‘21세기의 술탄’ 에르도안 대통령이 알라에게 바치는 헌물(獻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스크 내부를 둘러보았다. 한구석에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이 있는 게 이채로웠다


  
건국의 산실, 옛 국회의사당

터키 건국의 산실인 옛 국회의사당.

 

  테러 현장을 둘러본 후, 지금은 박물관이 된 공화국 초기의 국회의사당을 구경했다. 작고 평범한 석조 건물이었다. 감동이 밀려왔다
  
 
이 작은 건물에서 터키인들은 오스만제국의 폐허 위에서 일어나 ‘근대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이슬람 세계 초유의 실험을 시작했다. 공화정을 도입했고, 여자들에게도 참정권을 주었다. 90여 년 전에 벌써 여성 국회의원들을 배출했다. 아랍어 문자를 폐지하고 프랑스 및 독일의 것과 흡사한 라틴 문자를 채택했다. 전통적인 터키 복장을 폐지하고 양복을 입도록 했다
  
 
가장 큰 혁명은 정교(政敎)분리였다. 버나드 루이스 같은 이슬람 전문가들이 이슬람 세계 쇠퇴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은 게 이슬람 특유의 정교일치체제였다. 터키공화국은 정치는 물론 사법과 교육의 영역에서까지 이슬람의 영향력을 몰아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슬람신학교는 정부의 엄격한 감독을 받았다.
 

터키 국회의사당에 있는 아타튀르크의 동상.

 

  이 모든 혁명의 중심에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가 있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옛 국회의사당 건물 곳곳에 그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그의 집무실, 그의 초상, 그의 흉상, 그가 쓰던 모자….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가 원래 성()이 없던 터키인들에게 성을 쓰게 했을 때, 터키 국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헌정(獻呈)했다. 글자 그대로 그는 ‘국부(國父)’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튀르크제국이 패망한 이후 영국·프랑스 등 열강은 오스만튀르크제국을 해체하려 들었다. 이들은 그리스를 사주해 빈사(瀕死)지경에 이른 오스만튀르크를 침공하게 했다. 그리스는 350여 년간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원한을 씻고 고대(古代) 그리스의 식민도시국가들이 번성했던 고토(古土) 소아시아를 회복해 ‘신()헬레니즘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 꿈을 산산조각낸 사람이 무스타파 케말 파샤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전투에서 호주·뉴질랜드군을 격멸한 명장(名將)이었다. 그는 앙카라를 중심으로 한 아나톨리아(소아시아)에서 저항군을 결성,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결국 그는 그리스군을 격퇴하고 이스탄불 주변과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터키 민족이 근대국민국가로 존속할 수 있는 영역을 획득한 것이다.
  
 
앙카라에서 소집된 터키 대국민회의(국회) 1922 12 1일 술탄(황제)제 폐지를 결의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듬해 7 24일에는 로잔 조약에서 정식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해 1923 10 29일에 정식으로 터키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앙카라는 새 공화국의 수도가 됐다. 아타튀르크는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이 작은 박물관은 건국의 산실이었다.


  
7·15 불발 쿠데타

  당연히 앙카라는 ‘아타튀르크의 도시’였다. 어딜 가나 그의 동상이나 초상이 있었다. 국회의사당에도 국민을 이끄는 아타튀르크의 모습을 형상화한 커다란 석상이 있었다.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흉상 하나 설치하는 것을 두고도 여러 해 동안 인색하게 굴었던 우리의 현실과 대비됐다.
  
 
국회 사무총장과 만나기로 한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가 왜 MIKTA 저널리스트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만나자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기자들 자리마다 《터키 7
15쿠데타 시도와 민중의 승리(July coup attempt in Turkey and people's victory)》라는 책자와 ‘Stop to the coup attempt’라고 적힌 USB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 사무총장은 열정적으로 불발 쿠데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쿠데타 세력, 즉 ‘FETO’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럴 만도 했다. 불과 하루 만에 진압된 불발 쿠데타였지만, 그 양상은 격렬하고 참혹했다. 쿠데타군은 공군 전폭기와 육군 헬리콥터를 동원, 국회의사당을 폭격했다. 당시 부서진 건물 부위는 유리로 덮여 보존되고 있다. 하루 사이에 250여 명이 사망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군부 숙청을 단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군부가 입수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주요 부대 지휘관들을 비롯한 군 상층부가 가담했지만,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병(身柄)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자신은 안전하다면서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나 달라”고 호소했다. 국민들은 국기를 흔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쿠데타군의 발포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결국 하루 만에 쿠데타는 진압됐다. 공화국 건국의 주역이자, 케말 파샤의 건국 이념인 ‘세속주의의 수호자’로 1960, 1971, 1980년 세 차례 쿠데타를 감행했던 터키 군부는 처참하게 침몰했다. 시민들은 포로가 된 쿠데타군에게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가히 ‘민중의 승리’라고 할 만했다.


  
29000명 체포, 10만명 해직
  

그 이후가 문제였다.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해직됐다. 넘쳐나는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해 죄수들을 풀어주는 바람에 치안이 나빠졌다는 얘기마저 돌 정도였다.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개헌안이 통과됐고, 사형제도가 부활했다. 한국에서는 ‘촛불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적폐청산’이 한창이라면, 터키에서는 ‘715신화’라는 이름 아래 ‘쿠데타 세력 청산’이 한창이다. 그러면서 터키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국민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독재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면,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이 있을까?  


 
국회 사무총장에게 물어보았다
 

“불발 쿠데타 이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체포됐느냐?” “많은 장교, 교사, 교수, 언론인, 공무원들이 해직됐다고 들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체포된 사람은 29000여 명, 해직된 사람은 10만명에 달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함께 갔던 이상현 연합뉴스 기자는 “쿠데타 이후 터키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국회 사무총장은 “정부와 의회가 제 기능을 하고 있고, 이렇게 기자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통역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그 질문을 통역하면서 진땀이 났다”고 말했다. 그 말에 오늘날 터키 사회의 분위기가 묻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7·15 스튜디오

    FETO, 펫훌라흐 귈렌 테러 조직에 대한 이야기는 11 14일 아침 공보처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나왔다. 청사 1층에는 715 불발 쿠데타 당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사진을 배경으로 악수를 나누는 처장과 에르도안 대통령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인도네시아 기자들이 터키 내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위협에 대해 물었다. 알 카에다나 IS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인도네시아 기자들로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문제였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도 FETO가 튀어나왔다. FETO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파워풀한 테러 조직” 운운하는 얘기였다.
  
 
국영방송국 TRT 관계자들과의 만남도 쿠데타 얘기로 시작됐다. 메인 스튜디오 입구에는 ‘7
15 스튜디오’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보도국장은 “쿠데타 당시 군인들이 ‘군이 전국을 장악했다’는 방송을 하라고 강요했지만 아나운서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를 기념해 이 방을 ‘715 스튜디오’라고 명명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방송국 메인 스튜디오를 그렇게 명명하는 것 자체가 벌써 정치적 편향의 발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발 쿠데타 이후 ‘언론의 자유’가 잘 보장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문제 없다”고 말했다.
  
 
이스탄불의 민간방송국 국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표현하는 언론도 있다”면서 “언론자유에 관한 한, 터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 중 하나”라고 단언했다. 다만 그는 “언론인이라고 해도 범죄를 저질렀다면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불발 쿠데타 이후 발행부수가 가장 많던 《자만》 등의 신문들이 쿠데타 연루 혐의로 폐간된 것을 감안하면,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아타튀르크 영묘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의 영묘.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었던 곳은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 영묘(靈廟)’였다. 어린 시절 위인전에서 ‘케말 파샤’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이후 그는 내가 줄곧 존경해 온 이였다. 아타튀르크의 묘소이자 기념관인 이곳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장엄했다. 엄숙한 표정의 위병(衛兵)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묘소를 지키고 서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참배객들이었다. 국기를 흔들면서 영묘로 향하는 ‘사자(獅子)의 길’을 걸어오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해맑았다.
  
 
어딜 가나 거리 곳곳에는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아타튀르크 주간(週間)’이라고 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초등학교 건물 벽에는 독립전쟁 당시 케말 파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적어도 터키는 누가 자기 조국을 세웠는지는 제대로 가르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웠다.

 

아타튀르크 영묘에서 근무 교대를 위해 이동하는 위병들.

 

  하지만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숭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슬람 회귀 노선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 출신인 그는 섣부르게 세속주의에 도전하다가 군부의 반격을 받았던 일부 전임자들과는 달리 2003년 총리로 취임한 이래, 경제발전, 인프라 확충, 복지 확대 등의 정책을 펴서 인기를 얻었다. 몇 번의 정치적 음모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는 군부사법부행정부 등에 포진한 세속주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2014년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2016년 불발 쿠데타 이후 개헌을 통해 대통령 권력을 강화했다.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만제국을 혐오하고 터키인의 근대국민국가를 창출하고 싶어 했던 케말 아타튀르크와는 달리, 에르도안은 ‘오스만제국의 영광’을 강조하고 있다. 터키의 대외원조기관인 TIKA의 홍보영상에는 에르도안이 “이 모든 재앙은 오스만제국의 붕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에르도안이 옛 오스만제국의 강역이었던 외국의 재해지역을 돌아보고 터키의 지원을 약속하는 대목인 듯했다. 이슬람교와 거리를 두려 했던 아타튀르크와는 달리 에르도안은 2071년까지 터키를 완전한 이슬람국가로 되돌리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변화하는 터키

▲국기를 흔들면서 아타튀르크 영묘를 참배하러 오는 어린이들.

 

  앙카라는 아타튀르크의 도시였지만, 지금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이는 에르도안 대통령이다. 아타튀르크의 동상들은 여전히 거리 곳곳을 지키고 서 있고, 공무원부터 어린이들까지 그를 기리고 있지만, 터키의 내면은 이미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송국에서는 셔츠나 민소매 차림의 젊은 여직원들 옆에서 히잡을 단정하게 두른 여직원들이 일하고 있었다. 거리에서도 히잡을 쓴 여성들이 많이 보였다. 터키의 시골에서는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페인트 공격을 받는 일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앙카라 거리에서 만난 한 젊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버스를 타면, 눈총을 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아닌가? 한쪽이 자기주장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위기가 너무 싫다.” 그는 “이스탄불로 떠나고 싶다”면서 “앙카라를 떠나 이스탄불로 가는 것은 이곳 젊은이들의 로망”이라고 말했다.

월간조선

 

◆세계 제국의 1000년 수도 이스탄불

⊙ 아야 소피아 사원, 발렌스 수도교, 예레바탄 사라이, 술레이마니에 사원, 톱카프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리… 곳곳에 비잔틴제국·오스만튀르크 제국 유적
⊙ 재작년 불발 쿠데타 이후 소피아 사원, 탁심광장, 이스티크랄 거리 등에는 무장경찰 배치
⊙ 곳곳에 아타튀르크 동상… 4 23일 국회개원기념일 맞아 시내 곳곳에 국기와 아타튀르크 초상 걸려

▲아야 소피아 사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기독교 성당으로 건립됐으나, 오스만튀르크에 정복된 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다.

 

  터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탄 지 30여 분. 왼쪽으로 적갈색 성벽이 나타났다. 비잔틴제국 시절의 성벽이다. 반갑다. ‘드디어 다시 이스탄불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이스탄불을 찾은 건 5개월 만이다. 작년 11월에는 MIKTA 저널리스트 프로그램 참석차 출장을 왔었다. 그때 알았다. 이스탄불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최고의 관광지라는 것을!
  
 
터키는 물가가 싸다. 특히 지난 수년간 정치
경제상황이 나빠지면서 터키 리라(1TL= 230)화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로마나 피렌체, 베네치아, 파리 같은 곳에서 낡고 좁은 3성급 호텔에 묵을 비용이면 이스탄불에서는 유서 깊은 5성급 럭셔리 호텔에서 묵을 수도 있다.
  
 
볼 것 또한 엄청나게 많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오스만튀르크의 유적(遺跡)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1000년간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답다


  
아야 소피아와 술탄 아흐메드 사원

이스탄불 舊시가지의 중심 히포드럼에 배치되어 있는 경찰 장갑차. 뒤에 보이는 것이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블루 모스크)이다.

 

  이스탄불 관광의 시작은 아야 소피아 사원이다.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립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건축의 최고 걸작이다.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다. 동로마제국 시절의 성화(聖畵아이콘)들을 회칠을 해서 덮었고, 성당 바깥에는 미나레트(무에진이 올라가 예배시각을 알리는 첨탑)를 만들었다. 터키공화국이 들어선 후인 1934년 박물관으로 개조하면서 성화들을 복원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이 사원에서 이슬람교건 기독교건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지난 3 31일 레제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소피아 사원에서 열린 비엔날레 개회사를 하면서 코란의 첫 구절을 암송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 작품을 유산으로 물려준 모든 영혼, 특히 이스탄불의 정복자(메메드 2)에게 이 기도를 바친다”고 했다.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사원을 이슬람 사원으로 되돌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금처럼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아야 소피아를 찾는 건 조만간 옛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소피아 사원 인근 히포드럼에는 경찰 장갑차가 지키고 있다. 히포드럼은 비잔틴제국 시절 전차경주장이 있던 곳.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의 오벨리스크 등 유적들이 많이 있다.
  
 
이스탄불의 명동거리라고 할 수 있는 이스티크랄 거리나 탁심광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어디서나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관과 경찰 장갑차들을 볼 수 있다. 현지에서 만난 교민들 얘기로는 재작년 군부(軍部)의 불발 쿠데타 이후 계엄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 그렇다는데, 덕분에 치안은 오히려 좋아진 측면이 있다고 한다.

 

4세기 동로마제국의 발렌스 황제가 건설한 발렌스 수도교. 이스탄불 서북쪽으로 19㎞ 떨어진 상수원에서 물을 끌어 왔다.
  

  소피아 사원 맞은편 술탄 아흐메드 사원은 17세기 초 술탄 아흐메드 1세가 아야 소피아를 능가하는 건물을 짓겠다고 세운 사원이다. 통상 이슬람 사원(모스크터키에서는 ‘자미’라고 함) 주위에 세우는 미나레트가 4개인데, 이 사원은 미나레트가 6개나 되는 데서도 아흐메드 1세의 호승심(好勝心)을 엿볼 수 있다. 푸른색 타일을 많이 사용해 흔히 ‘블루 모스크’라고 한다.
  
 
아야 소피아 사원 옆에는 ‘지하궁전’ 예레바탄 사라이가 있다. 사람이 살던 궁전은 아니고 비잔틴제국 시대에 만든 지하저수조이다. 동로마인들은 이스탄불 서북쪽으로 19km 떨어진 벨그라드 숲에서 나오는 물을 발렌스 수도교(水道橋)를 통해 끌어다가 이곳에 저장했다. 70m, 길이 140m, 넓이 9800m2에 달한다. 이 지하궁전에서는 전시회나 연주회도 한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미술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인페르노〉의 마지막 결전장으로도 유명하다

  
  
갈라타의 구두닦이

중세 제노바 상인들이 거주했던 갈라타 지구에 있는 갈라타 타워.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갈라타 지구이다. 중세 제노바 상인들의 거주지였던 곳이다. 언덕 위에 있는 갈라타 타워는 이스탄불의 상징 가운데 하나다.
  
 
갈라타 타워를 향해 올라가는데 앞에 가는 구두닦이가 구둣솔을 떨어뜨린다. 그걸 주워줬더니 “땡큐”라고 인사를 한다. 우리를 앞서 올라가던 그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신발을 닦아주겠다고 한다. 사양했지만 기어코 닦아주겠다고 신발을 내밀라고 한다. 고맙다고 저러는데 마냥 사양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신발을 내밀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하기에 “코리아,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 “오! 코리아!”라며 반색을 한다. 터키에 가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고 환영받는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싶어서 흐뭇했다. 그는 계속 수다를 떤다.
  
 
“나는 앙카라에서 왔다.
  
 
작년에 앙카라에 가봤다고 했더니 더 반가워한다.
  
 
“앙카라에는 가족이 있다. 가난해서 내가 돈을 벌어야 한다.
  
 
내 신발을 다 닦은 그는 아내 신발도 닦아주겠다고 한다. 아내는 사양했지만 막무가내. 결국 아내도 발을 내민다. 구두닦이의 수다는 계속된다. “나는 닥터다.
  
 
놀라웠다. 닥터가 구두닦이를 하다니…. 안쓰러운 마음에 “정말이냐?”고 묻자 그는 히죽 웃으며 말한다.
  
 
“슈즈 닥터다.
  
 
아내 신발을 다 닦은 후, 그가 말한다.
  
 
18리라.
  
 
! 공짜가 아니었다!
  
 
“고마워서 닦아준 게 아니었냐?”라고 따져도 그는 “18리라”만 되풀이한다. ‘오죽하면 그러랴’ 싶어서 15리라를 꺼내준다. 아내는 화가 나서 붉으락푸르락!
  
 
며칠 후, 다시 같은 길을 지나게 됐다. 앞에 가던 구두닦이가 구둣솔을 떨어뜨린다. 가만히 보니 바로 그 녀석이다. 우리 부부는 물론 모른 척한다. 우리 뒤로 한 무리의 관광객이 몰려온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솔을 주워줄 생각을 안 한다. 솔을 주워든 구두닦이는 몇 걸음 올라가다가 다시 솔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아무도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다. 아마 미리 가이드에게 주의를 받은 것 같다.  

  
  
에르도안에게 숨죽인 언론과 군부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술레이마니에 사원. 오스만의 천재 건축가 시난의 작품이다.
  

  현지 식당에서 조우한 교민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깔깔거리며 말한다.
  
 
“그거, 여기 구두닦이들의 상습적인 수법이에요. 
  
 
그들은 모두 터키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한 사업가는 이렇게 말했다.
  
 
“터키는 지금 개판입니다. 한국은 개판 5분 전이고, 베네수엘라는 개판 5분 후입니다.
  
 
그에게 터키 정정(政情)에 대해 물어보았다.
  
 
― 에르도안 정권이 오래갈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터키인들에게는 유목민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누군가 힘이 있다고 하면 그리로 몰려가는 습성이 강해요. 민주화니 정의니 하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해 희생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대신 에르도안이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싶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어요.
  
 
― 언론은 어떤가요?
 
“사실상 정부가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어요. 관영언론은 물론 민간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뉴스시간에 자기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이 나오자, 직접 방송사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해당 기자를 자르라고 말했어요. 두 사람의 대화내용이 인터넷에 공개됐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비난이 나오기는커녕 ‘정말 대통령이 힘이 세구나’ 하면서 언론이 더 움츠러들었어요.
  
 
― 곳곳에 경찰이 쫙 깔려 있던데요.
 
“불발 쿠데타 이후 계엄상태입니다. 에르도안 정부는 군부의 힘을 빼는 대신 경찰력을 군대에 준하는 수준으로 키우고 있어요. 군부대 출입도 경찰이 통제하고 있어요. 국가 건설의 주역이던 군부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겠죠. 적폐세력으로 몰린 군부는 과거 3차례 쿠데타를 했던 것도 모두 잘못한 일이었다고 자아비판(自我批判)하고 있어요.
  
 
― 에르도안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이슬람화()는 어디까지 진행될까요?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슬람화를 추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 때문이지, 그가 종교적으로 신실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국내정치 상황에 따라 이슬람화 속도가 다를 겁니다. 만일 국내정치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이슬람화를 급속하게 밀어붙이겠지요.


  
아타튀르크박물관

이스탄불 시슬리 거리의 아타튀르크박물관 앞에 휘날리는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의 초상 깃발. 국회개원일인 4 23일 ‘국민주권의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에르도안 정권은 터키공화국의 국부(國父)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世俗主義)’ 노선, 즉 서구화·근대화 노선으로부터 일탈해서 이슬람주의를 강화하고,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려 하고 있다
  
 
그래도 한편에서는 아타튀르크에 대한 기억이 계속되고 있다. 여행 기간 내내 시내 곳곳에서는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의 얼굴을 담은 깃발을 볼 수 있었다. 알고 봤더니 4 23일이 국경일 중 하나인 ‘국민주권의 날’이자 ‘어린이날’이었다. ‘국민주권의 날’은 1921년 터키의 대국민의회(국회)가 개원(開院)한 날이다. 대국민의회 초대 의장은 아타튀르크였다. 이날을 기리는 ‘4 23일 행진곡’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오늘은 아타튀르크로부터의 선물,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노예가 되었을 거라네.
  
 
이스탄불의 신시가지에 해당하는 시슬리에 있는 아타튀르크박물관을 찾았을 때에도 거리 곳곳에는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의 초상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오스만베이지하철 역에서 나오면서 지나가던 젊은 여성에게 “아타튀르크박물관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잘 모르겠다”면서 지하철 입구의 경찰관에게 물어보았다. (이스탄불의 모든 지하철 개찰구 앞에는 보안검색대가 설치되어 있고 경찰이 지키고 서 있다.) 그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보니 모두 “이 근처에 박물관이 있다고? 금시초문(今時初聞)이네” 하는 눈치였다.
  
 
경찰관이 자신 없어 하면서 가르쳐주는 대로 지하철역을 나왔다. 다시 지나가는 노인에게 “아타튀르크박물관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반대방향을 가리키면서 “저기 두 번째 터키 국기가 걸려 있는 곳”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는 ‘외국인이 아타튀르크박물관을 다 찾고, 기특하네’라는 듯 내 등짝을 쳤다.
  
 
아타튀르크박물관은 군인 시절 아타튀르크가 세 들어 살던 곳이다. 지금은 건물 전체를 그의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타튀르크가 입던 군복, 신사복, 그가 쓰던 권총과 수류탄, , 독립전쟁을 그린 그림들, 아타튀르크의 초상과 흉상, 밀랍인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가슴이 뭉클했다. 국가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감동스러웠다. 호우와 산사태로 유물이 상한 후 텅 비어버린 이화장, 진짜 유품은 하나도 없는 신당동 박정희 대통령 사저(私邸). 에르도안 정권 아래서 많이 흔들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터키공화국은 자기의 뿌리는 잊지 않고 있다.


  
‘짝퉁 근대화’의 상징 돌마바흐체

압둘메지드 1세가 지은 돌마바흐체 궁전. 베르사유 궁전 등 서구 궁전 양식을 모방했다.

 

  해변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나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 등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모습을 갖춘 서양식 궁전이다. 철책 너머로 보이는 마르마라해의 모습은 일품이다. 1843년부터 13년간에 걸쳐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세웠다.
  
 
터키가 한창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기에 즉위한 압둘메지드 1세는 종전의 낡은 궁전을 화려한 서양식 석조궁전으로 다시 지었다. 19세기 중반 오스만튀르크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근대화는 실질은 따르지 않는 흉내 내기에 불과했다. 1877 3월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최초의 의회가 개원(開院)했지만, 몇몇 의원이 술탄의 실정(失政)을 비판하자 채 1년도 되지 않아 해산됐다. 궁전은 서구식으로 화려하게 지었어도 술탄의 의식(意識)은 여전히 전()근대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의회는 30년 뒤 청년튀르크당의 쿠데타가 있은 후에야 다시 열렸다.
  
 
돌마바흐체 안에 있는 하렘도 이 시기 오스만튀르크의 전근대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톱카프 궁전에도 하렘이 있지만, 하렘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소굴은 아니었다. 하렘은 술탄과 관련되는 모든 여인의 거처였다. 황후나 후궁은 물론, 황태후도 이곳에 살았다. 3대륙에 걸친 대제국 황제의 여인들이 사는 곳답게 화려하기 짝이 없다. 복도에 걸린 전기시설과 수세식 화장실, 복도에 걸린 서양화들은 ‘서구’를 따라가려 발버둥 치던 19세기 말~20세기 초 오스만튀르크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의회의 견제를 견뎌내지 못했던 술탄은 여성을 자신의 종속물로 보는 사고(思考)에서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오스만튀르크의 근대화는 ‘절름발이 근대화’였다.
  
 
돌마바흐체에도 아타튀르크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궁벽한 시골이던 앙카라를 신생 터키공화국의 수도로 삼았지만, 이스탄불에 머물 때에는 이곳 하렘의 방들을 침실과 서재, 집무실로 사용했다. 그는 1938 11 10일 이곳에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묵었던 방의 시계는 그가 사망한 시각인 오전 95분에 멈춰져 있다. 그의 침실, 그의 서재 등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지만, 실내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아쉬웠다.
  
 
돌마바흐체를 돌아보는 내내 덕수궁 석조전을 생각했다. ‘짝퉁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돌마바흐체와 석조전은 닮은꼴이다.
  
 
고종과 오스만튀르크의 술탄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극동의 작고 가난한 나라 대한제국의 군주였던 고종은 간신히 석조전 하나 짓는 데 그쳤지만(그나마 석조전이 완공되었을 때는 나라가 이미 망한 후였다),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의 주인이었던 압둘메지드 1세는 그래도 유럽 여러 나라의 왕궁 못지않은 번듯한 돌마바흐체를 남겼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돌마바흐체는 오래가지 못했다. 츠라안 궁전, 이을드즈 궁전 같은 새 궁전들을 짓고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런 궁전 짓기 도락에 나라는 점점 더 기울어져 갔다


  
귤하네 공원의 이즈미르 행진곡

400년 가까이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궁전이었던 톱카프 궁전. 입구에 대포를 배치해 놓았던 데서 ‘톱카프’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반면에 아야 소피아 사원과 붙어 있는 톱카프 궁전은 1478년부터 400년 가까이 제국의 정궁(正宮)으로 군림했다. 톱카프는 ‘대포’라는 뜻으로, 입구에 대포를 배치했던 데서 유래했다. 군사국가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걸맞은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톱카프 궁전은 술탄과 그 가족의 거성(居城)일 뿐 아니라, 총리와 각료들이 근무하는 정부종합청사였고, 친위대가 주둔하는 요새이기도 했다. 지금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화려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일종의 박물관이기도 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도자기관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중국의 청화백자, 일본의 아리타자기들도 있다. 유럽인들에게 중국은 물론 일본도 얼마나 일찍부터 문명국으로 인식되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조선백자는 없다
  
 
톱카프 궁전을 나오면 귤하네 공원이 있다. 원래 톱카프 궁전 부설 정원이었지만, 지금은 공원이 되어 있다. 1839 11월 술탄 압둘메지드가 탄지마트 개혁을 선포한 역사적인 장소다.

 

이스티크랄 거리의 명물 미니 트램. 이스티크랄 거리는 쇼핑센터와 역사적 유적, 거리의 악사들이 어우러진 ‘이스탄불의 명동’이다.

 

  종래 역사에서는 19세기 중반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탄지마트 개혁은 ‘실패한 개혁’이라고 평가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 시기부터 양성된 군인과 관료들이 후일 청년튀르크당의 혁명, 그리고 터키공화국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는 데 주목해 탄지마트 개혁을 재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에 단절은 없는 법이다.
  
 
이런 역사의 연속성을 웅변하듯이 귤하네 공원에는 아타튀르크의 좌상(坐像)이 있다. 공원 입구가 시끌시끌해서 돌아보니 한 무리의 어린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씩씩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다. 어딘지 귀에 익은 노래다. 곰곰 생각해 보니 유튜브에서 들은 적이 있는 ‘이즈미르 행진곡’이다. 아타튀르크가 그리스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는 노래다.
  
 
젊음의 거리 이스티크랄에서도 거리의 악사가 ‘이즈미르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스티크랄 거리가 시작되는 탁심광장에는 아타튀르크가 이끈 독립전쟁과 국가건설을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다. 음식점에 아타튀르크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은 흔한 일이다. 대형 마트에서는 아타튀르크의 대형 초상도 팔고 있다. 이런 식으로 국부의 정신은 세대와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 부러웠다.  


  
루멜리 히사리에서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 침략의 전진기지로 세운 루멜리 히사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대교가 보인다.

 

  루멜리 히사리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대교 옆에 있는 성채다. 메메드 2세는 1451년 즉위한 후 바로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나섰다. 당시 비잔틴제국은 이미 콘스탄티노플 주변부로 줄어들어 있는, 사실상 오스만튀르크의 속국이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총리 할릴 파샤는 비잔틴제국과 공존하면서 조공을 받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메드 2세는 즉위하자마자 총리에게 말했다


 
“저 도시를 내게 주시오!

  젊은 정복자의 야망 앞에서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1452년 건설된 루멜리 히사리는 콘스탄티노플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루멜리는 ‘로마’라는 뜻으로 당시 오스만튀르크가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메메드 2세는 세 명의 중신에게 하나씩 탑을 짓도록 경쟁을 시켜 넉 달 만에 루멜리 히사리를 완공했다.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이 눈앞으로 닥쳐와도 비잔틴제국은 당쟁(黨爭)으로 날을 지새웠다. 당쟁의 가장 큰 쟁점은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서구 가톨릭 국가들과 손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로마 교황은 그 전제조건으로 그리스정교회가 가톨릭 밑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그리스정교회는 물론 백성들, 조정 대신들이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총리 노타라스는 “교황의 삼중관(三重冠)을 보느니, 터키인들의 터번을 보는 게 낫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1453 5 29일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튀르크군에게 함락됐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분전(奮戰)하다가 장렬히 전사(戰死)했다.
  
 
루멜리 히사리에서 내려다보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아름답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다. 해협 건너편은 아시아다. 멀리 아나톨루 히사리가 보인다. 루멜리 히사리를 만들기 60여 년 전 바예지드 1세가 비잔틴 정복을 염두에 두고 세운 전초기지다.
  
 
이렇듯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비잔틴제국은 설마 설마 하면서, 그리고 ‘돈으로 평화를 사는’ 미봉책(彌縫策)으로 일관하다가 결국은 멸망당하고 말았다.
  
 
어린 소녀가 요새 안에 전시해 놓은 오래된 대포 위에서 놀고 있다. 평화롭다. 흑해로 향하는 커다란 화물선이 지나간다. 작은 배들이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처럼 흔들린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8 월간조선 7월호

 

◆ 터키의 매력적인 여행지들

동양학이 최근 인기를 끄는 이유 중의 하나가 팩션(Faction=Factor·사실+Fictoin·허구)적 요소가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동양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를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설명해 내는 강력한 논리적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

 

사실 세상에는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이에 대한 답은 없다. 그러면 이를 무엇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연구한다. 고고학자들도 유적발굴을 통해 인과관계를 찾아 현대사회와 고대사회의 연결고리를 밝히려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다. 이때 동양학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

 

동양학은 기본적으로 하늘과 땅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밝히려고 한다. 조금은 추상적인 반면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경험적으로 인과관계가 있을 법한 임기응변적 인과관계를 설명한다. 인간의 삶이란 원체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변수가 결코 결정적이지 않다. 따라서 우리 고대문명이나 서양 고대문명을 밝히는 데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동양학적인 해석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날이 곧 오지 않을까 싶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는 샤머니즘이 큰 영향을 미쳤다. 신들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마디로 신인불이(神人不二) 사회였다. 한 사회의 샤먼은 그 조직의 우두머리였고, 그 조직을 통제하는 강력한 파워를 지니고 있었다. 그 파워는 하늘에서부터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구성원 모두가 인정했다.

 

고대 그리스와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 터키에서도 강력한 샤먼이 있었고, 그 샤먼은 하늘과 통하는 주술적 기능을 발휘하면서 사회를 지배했다. 또한 고대문명을 형성하는 결정적 파워를 지닌 우두머리로 군림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겸한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된 터키의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Hierapolis-Pamukkale)도 고대도시문명이 있는 지역이다. 정경(정치와 경제)이 분리되지 않은 전형적인 고대도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 사회의 지도자를 겸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파묵칼레’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곳은 히에라폴리스라는 고대도시다. 히에라폴리스라는 말 자체에 고대사회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히에라폴리스는 ‘성스러운 도시(Sacred City)’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히에라’라는 이름은 페르가몬의 전설적 건국자인 텔레포스(Telephos·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의 아내인 히에라(Hiera)로 인해 히에라폴리스로 불리게 됐다.


파묵칼레는 고대 로마 황제들의 온천 휴양지

히에라폴리스는 페르가몬 왕조의 에르메네스 2세에 의해 BC 190년에 건립됐으며, 페르가몬3세 때 로마왕조에 편입됐다. 이후부터 로마황제들의 요양지 겸 휴양지로 줄곧 사용됐다. 이 고대도시도 인간이 살기 가장 편안한 고도에 가까운 600m에 위치해 있다.

 

평원 위로 솟은 높이 약 200m의 절벽의 샘에서 나오는 칼슘을 함유한 온천수는 자연과 시간이 어우러진 경이로운 장면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파묵칼레(Pamukkale)라고 부른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Cottons castle)’을 뜻한다. 단층을 뚫고 나오는 석회성분을 다량 함유한 온천수의 칼슘 퇴적물이 수 세기 동안 바위 위를 흐르면서 형성한 독특한 지형지물의 생김새가 마치 목화를 쌓아놓은 것처럼 하얗게 층을 이뤘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이를 광물의 숲, 석회폭포 등이라 부르며,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고대 로마의 왕들도 단층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따뜻한 온천에서 목욕을 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수영복을 입고 온천을 즐긴다. 우리 일행들도 신발과 양말을 재빨리 벗고 족욕 행렬에 일제히 동참했다. 비키니만 입은 여성들도 부지기수. 경이로운 경관과 더불어 눈길을 잡을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온천수의 치유력은 거대한 온천수 분지와 수영장 등 다양한 온천시설로 지금 활용되고 있다. 물을 이용한 치료법은 샤머니즘과 더불어 생긴 종교적 관습이었다. 그 온천수를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아폴로신전을 포함한 고대도시가 형성돼 있다. 고대의 대형 공동묘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리스·로마시대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성당, 세례당, 교회 등 당시에 세워진 기독교 건축물들은 초기 기독교 건물의 우수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동양학자 조용헌 박사는 파묵칼레와 도시 주변을 이곳저곳 둘러보고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존돼 있어, 자연의 영감을 받기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히에라폴리스는 고대부터 경이로운 자연의 장관을 감상하면서 심신의 치료를 겸한 최고의 휴양지였다.

 

올림포스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거주한 듯

파묵칼레의 진한 여운을 뒤로한 채 그리스의 성스러운 산 올림포스와 같은 이름의 터키 올림포스(Olympos)산으로 향한다. 아니, 어떻게 그리스 최고의 신들의 터전인 올림포스가 터키에도 있을까? 터키의 올림포스엔 어떤 신화가 전승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터키 올림포스산의 비밀은 야나르타시에 있었다. 야나르타시는 ‘불타는 돌’을 말한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바위틈에서 꺼지지 않은 불꽃이 있는 산이 올림포스다. 이 불타는 바위산에 바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살았다. 그는 ‘하늘의 주’이신 제우스와 그의 아내 헤라의 아들로, 태양신 아폴론의 배다른 동생이다. 불꽃의 화신 헤파이스토스는 태어나자마자 불꽃을 휘날리고 빛을 내뿜었다. 그 불타오르는 듯한 형상에 혐오감을 느낀 어머니 헤라가 그를 그리스 올림포스에서 추방해 버렸다.

 

그는 지중해 북쪽인 이곳에 내려와 자신의 불꽃을 이용해서 무기와 방어기구를 만들었다. 검·창·갑옷·방패뿐만 아니라 아폴론이 타는 전차·황금장화까지 만들었다. 그의 아내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즉 로마 신화의 비너스다. 그는 아름다운 무기와 갑옷을 만들면서도 언제나 자기 작품이 아내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이 무기의 실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까지 갖추게 하는 동기가 됐던 것이다.

 

고대 국가에서는 불을 다루는 샤먼을 최고로 여겼다. 올림포스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는 바위산 야나르타시에 헤파이스토스가 살았다는 신화는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야나르타시 입구에서부터 현장까지는 약 40분간 등산하듯 올라가야 한다. 등산로는 잘 조성돼 있다. 산 중간쯤 도착하자 불 탄 흔적들이 조금씩 보인다. 이어 바위틈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비가 내려도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불꽃이 아닐까 싶다. 수천 년 동안 꺼지지 않은 불꽃이 이곳 말고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말 신기하다. 우리 일행은 오징어를 꺼내 굽기 시작했다. 천연가스 불에 굽는 오징어맛도 별미다.

 

불타는 바위 주변에 신전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다. 대장장이 신들이 제사를 지내던 제단도 보인다. 저 아래로는 지중해 바다가 있다. 조용헌 박사는 “고대 샤먼 왕국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신이 있었다. 하나는 신을 향해서 날아오르는 페가수스이고, 다른 하나는 불을 지르고 운용하는 대장장이였다. 이곳에서는 그 둘을 모두 아우르는 듯 보인다. 정말로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이다”고 감동했다. 그러면서 “대장장이 신의 원조를 본 듯하다. 고대에서는 무기를 만드는 자, 즉 야금술(冶金術)을 지닌 자가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다. 야금술을 획득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단전호흡을 통해 내면의 불을 질러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을 통해 불을 얻어 가지는 자였다. 자연에서 불을 얻는 방법이 키메라였다. 키메라는 사자의 얼굴에 염소의 몸통, 뱀의 꼬리를 지닌 신화 속의 영특한 동물이다. 그러면서 불을 내뿜는다. 사자의 얼굴은 용맹스러움, 염소는 우유, 뱀의 꼬리는 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키메라를 억누를 그 어떤 동물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조 박사는 “올림포스의 야나르타시는 완벽한 신화세트장”이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어 지중해 휴양도시인 안탈랴(Antalya)로 이동한다. 항구도시 안탈랴도 페르가몬 왕 2세인 아타로스(Attalos)에 의해 BC 159~138년 사이 건설됐다. 도시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산과 바다를 두루 갖춘 터키 최고의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유럽 각국에서 온 휴양객들로 안탈랴의 지중해 해변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시원하면서 아름다운 휴양도시다.

 

고대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된 페르게

안탈랴에서 동쪽으로 20km가량 떨어진 곳, 고대 팜필리아 도시 중의 하나인 페르게(Perge)로 간다. 페르게는 터키의 고대 도시 중 보존이 가장 잘된 도시다. 특히 다른 어느 도시보다 페르게는 헬레니즘(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부터 예수 탄생 직전 로마의 이집트 병합까지 그리스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이 혼재된 소아시아의 대표적 도시다.

 

페르게의 성벽은 반쯤 남아 수천 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성벽을 복원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헬레니즘 문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크로폴리스도 있고, 공동목욕탕과 그곳에 물과 난방을 공급하는 시설은 그대로 남아 있다. 도시 중앙에 집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를 건축한 흔적도 잘 보존돼 있다. 수천 년 전에 이런 시설을 한 문명이 부러울 뿐이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수로의 납파이프로 인한 중금속 오염 때문에 페르게 시민들의 수명이 단축됐다는 주장도 한다. 수로에 물을 공급하는 ‘대양의 신’ 오케아누스는 신전 바로 앞에 누워 있다. 형상화된 신들도 각각의 역할과 기능이 따로 따로 주어져 있다. 그리고 건축물 하나하나에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 영화를 조금이나마 상상 속에서 그려본다.

 

페르게에서 동쪽으로 20km 남짓 가면 아스펜도스(Aspendos)란 고대도시가 있다. 아스펜도스에 있는 원형극장은 세계의 원형극장 중에 가장 보존이 잘된 것이다. BC 6세기 무렵 도시가 형성됐고, BC 5세기 무렵에는 자신의 도시의 이름으로 은화를 주조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 뒤 BC 2세기 말에 로마제국에 합병됐다. 당시 건설된 로마의 거대한 원형극장은 객석 형태가 반원꼴이며,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극장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지어진 원형극장은 이 지역 출신의 건축가인 제논(Xenon)에 의해 설계됐다.

 

아스펜도스의 원형극장이 유명한 이유는 원형이 잘 보존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극장의 완벽한 음향효과에 대한 비밀이 아직 밝혀지지 않을 정도로 음향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현재도 오페라와 발레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카르멘과 라트라비아타,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한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상상만 해도 당시의 뛰어난 건축술에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다.

 

고대도시의 유적지를 따라 가다 이제 이슬람 신비주의 메블라냐교의 본산지이며 이슬람의 색채가 매우 강한 콘야(Konya)로 간다. 콘야는 ‘우상의 도시(City of Icons)’를 의미한다. BC 2000년 즈음부터 이 도시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콘야는 사도 바울의 제1회 전도지이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의 잔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이슬람 색채가 가장 짙은 곳이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밤에는 아예 술을 팔지 않는다. 12~13세기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로서 번성했으며, 이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슬람 색채 강한 콘야는 해발 1,000m 넘는 평원지대

해발고도가 무려 1,040m나 되는 고원평원지대다. 해질 무렵만 되면 여름에도 매우 쌀쌀하다. 낮과 밤의 일교차는 매우 심하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낮에는 무척 덥지만 해가 없는 저녁부터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따라서 과일은 당도가 높아 매우 맛있다.

 

더 넓은 평원엔 옛날부터 캐러밴(Caravan·대상)들이 오고갔다. 그들에게 쉼터가 필요했다. 평원 중앙에 이슬람사원 외에 우뚝 솟은 건물은 ‘캐러반사라이 술탄한(Sultanhan Kervansaray)’이다. 낙타에 짐을 싣고 나르던 대상들의 숙소다. ‘술탄’은 통치자, ‘한’은 숙소를 말한다고 한다. 높은 장벽으로 둘러싸여 도둑과 추위를 막아 주고, 각종 편의시설이 모두 갖춰진 호텔 같은 곳이다. 숙소는 물론 목욕탕, 가게, 약국, 도서관, 식당 등이 있고, 낙타를 위한 쉼터도 있다.

 

캐러반사라이 술탄한 주변은 광활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른바 말로만 듣던 지평선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수평선은 숱하게 봤지만 지평선을 본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그 광활한 지평선 사이로 터키 여행의 하이라이트 카파도키아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실크로드를 따라 가고 있다. 가끔 보이는 양떼들은 전형적인 유목지역이라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양들이 주는 고기와 우유, 극심한 일교차로 인한 맛있는 포도와 과일, 고지대에서 생산하는 밀은 이들에게 식량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했다.

 

터키가 왜 매력적인 여행지인가?

동·서양, 기독교·이슬람, 문명·자연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 만들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히 “터키는 마지막 여행지로 택하라”고 말한다. 터키를 먼저 가고 다른 나라에 가면 시시해서 못 본다는 의미라고 한다. 터키가 정말 매력적인 여행지인가?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을까?

 

터키는 알려진 대로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이다. 다르게 표현해서 실크로드의 시작점이자 종점이었다. 중국과 인도, 즉 동방에서 생산한 실크를 포함한 각종 생산품들을 낙타에 싣고 마지막 종착지인 이스탄불에 도착한다. 그러면 기다리던 있던 서양 상인들에 의해 유럽 각국으로 팔려나갔다.

 

두 번째로,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슬람은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무하마드가 완성시킨 종교다. 이슬람이 탄생되기 전에 기독교가 번성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출발해서 제1의 전도지로 도착한 곳이 터키의 콘야였다. 특히 고대문명 발상지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주변은 성서에 나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터키에 이슬람 문화가 형성되기 전에 이미 기독교 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흔적은 터키 곳곳의 유적지에 그대로 나타난다. 두 종교의 공존으로 인한 문화도 독특하게 형성되고, 터키 국민의 정신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고대문명과 기독교·이슬람문명이 뛰어난 자연과 어울린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암벽을 뚫고 집을 짓는다든지, 지하세계에 대형 주거단지를 조성한다든지 등의 자연환경을 적절하게 살린 터키만의 문화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모습들이다.

 

네 번째로, 터키 민족은 터키인, 쿠르드인,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기타 그리스인, 유태인 등으로 구성돼 있다. 크게 보면 이렇게 나누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은 소수민족까지 포함하면 70여 민족이 산다고 한다. 터키 민족 중에 터키인은 한민족과 조상이 동일한 돌궐족의 후예인 흉노족, 즉 훈족에서 갈라져 나와 중앙아시아 동남부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해서 10세기 전후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한 민족이다. 그래서 터키는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터키인들에게서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라는 민족 정체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복잡한 민족 구성원은 복잡한 문화를 낳았고, 또한 다양한 문화를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문화는 복잡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터키는 유럽의 멋과 아시아의 정이 어울린, 전통과 현대가 혼재된 ‘죽기 전에 한 번쯤 가볼 만한’ 충분히 버킷리스트에 오를 만한 그런 여행지임은 분명하다.

박정원 월간산 부장대우 

 

◆고대세계 8대 불가사의 ‘데린쿠유’ 지하도시…

터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카파도키아(Cappadocia). 동서양 문명의 교착점이자 실크로드의 시·종점이었고, 비잔틴문명의 중심이었던 이스탄불도 물론 풍성한 역사유적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스탄불이 문명적 측면에서 가볼 만하다면 카파도키아는 자연적 측면에서 꼭 봐야 할 장소다.

카파도키아는 누구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세계 100대 경관 중의 한 곳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 기이한 경관으로 SF영화의 선구자격인 ‘스타워즈’ 1편의 촬영지다. 그 기이한 경관으로 거장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감독 의 상상력과 창의성이 ‘스타워즈’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실제 루카스 감독은 “지구의 자연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지역”이라고 했다. 카파도키아라는 촬영장소의 선택도 영화 성공의 중요한 한 요소였던 것이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고깔모자와 버섯같이 생긴 지평선 위의 기기묘묘한 기암괴석, 높이 50m에 달하는 모래 빛깔의 원뿔 모양의 둔덕,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동굴암벽, 동굴 속에 암벽을 뚫고 지은 은신처와 교회 등등…. 상상 이상이다.

카파도키아의 자연은 수백만 년 전 에르시예스산(Erciyes·3,916m)에서 격렬한 화산폭발이 있은 후, 두꺼운 화산재가 쌓여 굳어간 조형물이라 한다. 카파도키아인들은 신이 빚은 듯한 이 조각물을 ‘요정의 굴뚝(페리 바잘라르)’이라 한다. 그 후 수십만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래와 용암이 쌓인 지층이 몇 차례의 지각변동을 거치며 비와 바람에 쓸려 풍화되어 갔다. 그렇게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응회암은 인간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굴을 팔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웠다. 날카로운 돌만으로도 절벽을 뚫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 집들이 마치 고대 아파트같이 층층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히 장관이다.

 

바위교회·바위은신처는 마치 고대 아파트 같아

카파도키아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눠서 볼 수 있다. 뛰어난 자연경관과 거친 현무암 망토를 걸친 옥수수 모양의 기둥처럼 생긴 수도원,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계곡들이 첫째 볼거리다. 둘째, 예수·성모마리아·성서 속의 사건과 성인들을 그려놓은 프레스코화가 있는 바위교회, 마지막으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평가되는 지하도시는 은신처이자 예배를 드리는 비밀장소로 사용된 곳으로, 기원전부터 지어졌으며 점차 확대했다.

 

먼저 계곡으로 간다. 으흐랄라계곡(Ihlara Valley)이다. 실크로드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에서 지하 150m 이하로 움푹 빠진 지형이다. 천혜의 요새 같다. 멀리서 보면 계곡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계곡 중간으로 강이 흐른다. 메렌디즈(Melendiz)강이다. 세계 어느 곳이든 강 주변, 아니 물 주변에는 사람이 산다.

지평선 사이 움푹 빠진 으흐랄라계곡에는 거의 1만 개의 바위동굴과 105개의 바위교회가 있다. 계곡에 있는 많은 교회들은 수도사들의 은신처 역할을 했으며, 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단층 혹은 복층 구조로 교회를 지어, 석회로 벽화를 그린 프레스코화가 아직 남아 있다. 정말 신기하다.

절벽을 뚫어 집을 지은 바위촌의 첫 입주민은 4세기 이후 기독교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의 은신처로 주로 사용돼 왔다. 무슬림이 아나톨리아를 지배하고 있을 때, 기독교도들은 자연적으로 이 은신처를 활용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 암벽과 바위 계곡 사이를 파고 깎고 다듬어 교회와 마구간이 딸린 집들과 납골소와 성채를 만들고, 지하도시까지 건설했다.

또 이들은 바위동굴에서 비둘기를 많이 키웠다. 지금도 곳곳에 비둘기 배설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비둘기는 이들에게 여러 모로 유익한 새였다. 첫째, 이들은 주로 포도나 감자농사를 짓고 살았다. 염기가 강한 토양은 산성이 강한 비둘기 배설물을 모아 비료로 사용하면서 땅을 중성화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둘째, 비둘기는 마을 간 연락을 할 때 메신저 역할을 했다. 비둘기 다리에 편지를 묶어 보내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바로 그 장면이다. 셋째, 비둘기 알은 프레스코화를 그리는데 염료와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비둘기를 때로는 먹이로도 활용했다고 한다. 비둘기는 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생활수단이었던 것이다.

바위동굴에는 그들의 생활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으흐랄라계곡은 자연과 역사와 문화유적이 보존된 ‘카파도키아의 진주(The pearl of Cappadocia)’로 대표되는 지역이다.


조 박사, “카파도키아는 정감록의 제1지에 해당”

동양학자 조용헌 박사도 상상력을 벗어난 자연의 경관에 말을 잊은 듯 조용하게 있다, 마침내 한마디한다.

“한국의 정감록에 10승지가 있는데, 터키로 치자면 제1 지역이 카파도키아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움푹 빠진 계곡에 있는 바위동굴 속의 은신처는 어떤 적()이 와도 못 찾을 겁니다. 정말 이걸 두고 천혜의 요새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으흐랄라계곡에 있는 바위교회와 수도원은 지형적 조건과도 무관치 않은 듯 보인다. 주변 광활한 지평선에 집을 지으면 그대로 노출된다. 하지만 바위 속에 은신처를 마련하면 적의 눈에 띄지 않는다. 더욱이 바위는 날카로운 칼로 깎으면 쉽게 다듬어진다. 우리는 산에 나무가 있어 언제든 나무로 집을 지으면 되지만 이곳은 황량한 사막지대라, 집을 지을 수도 없고 지으면 적의 표적이 된다. 이러한 환경적 상황을 고려하면 카파도키아의 동굴 은신처와 바위교회는 어쩌면 자연스런 주거형태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더욱이 동굴 속은 일 년 내내 일정한 온도가 유지된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다. 초기엔 단층으로 짓다 시대가 흐를수록 지상과 지하로 방을 낸 복잡한 정착촌도 나타난다. 데린쿠유란 지하도시가 바로 그 형태를 보인다. 데린쿠유로 향한다.

 

무려 85m까지 지하도시 건설

데린쿠유 지하도시(Derinkuyu Underground City)는 거대한 바위에 20층까지 방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지하 8층 규모만 공개한 상태다. 그것만 해도 거대한 지하도시다. 깊이만 무려 85m 정도 된다. 한때 이곳에 무려 1만여 명이 살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지만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다. 고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터키에 있는 많은 지하도시 중에 가장 크다.

BC 8~7
세기 원시 히타이트 민족들이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로마시대, 비잔틴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다른 민족들이 살았다. 지하 1층은 원시 히타이트인들이 저장고로 삼았으며, 다른 종족들이 숨어살면서 지하 8층까지 확장하게 됐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신기하지 그지없다. 한 번 벌어진 입은 다물 줄 모를 정도다. 어떻게 이런 동굴을 고대부터 축성할 생각을 했는지, 정말 상상 이상이다.

카파도키아 지역에는 모두 36개의 지하도시가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서기 6~7세기에 아랍민족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그들만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비밀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성경학교는 물론이고, 수도원, 부엌, 저장고, 침실, 응접실, 와인창고, 식당들이 주로 1,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무기저장고와 은신처, 각종 터널들은 3, 4층에 있다. 출입구가 있는 복도에는 돌문이 있다. 급습을 당했을 때는 지하로 내려와 볼트를 풀어 문을 닫음으로써 긴급대피했다. 외부에서 이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지막 층에는 특별히 견딜 수 있게 우물, 숨겨진 무기, 교회, 회의실, 고해성사실, 무덤, 환풍구가 있다. 교회에 가만히 앉아 보니 경건하기 이를 데 없다. 일반 교회보다 훨씬 신앙심을 발휘하게 하는 듯하다. 종교의 힘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데린쿠유 지하도시에는 모두 52개가 넘는 공기환풍구가 있는데, 가장 밑부분에 우물이 있다. 가장 상층부에는 공기구멍이 있어, 모든 층에 공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숨이 가쁠 정도로 상당히 내려왔는데 전혀 숨 쉬는 데 지장이 없다. 지하우물의 물은 1962년까지 도르래를 이용해서 끌어올려 사용했다고 한다.

이 지하도시에 살던 상주인구를 1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 정확히 10만여 명이 30년 동안 작업을 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이곳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이 방대한 규모의 공사를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됐을까? 이에 대한 답은 세계 어느 고고학자도 아직 정확하게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지하도시임에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카파도키아 유적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독교도들이 남겨놓은 유적이다. 그들은 계곡 바위산 곳곳에 동굴을 뚫어 수도원과 성당을 건설했으며, 그 내부에 수많은 벽화를 그려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종교 벽화의 대부분은 비잔틴제국(9~13세기 후반) 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이색지역 젤베(Zelve)로 간다. 젤베는 야외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수도원과 동굴교회가 많다.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도 이곳에 있다. 이곳 교회와 수도원들은 대개 우상파괴주의가 성행하던 8~9세기경에 지어졌다. 동굴은 그 당시 은신처로 이용됐다. 젤베의 특징 중 하나가 1924년까지 이슬람과 기독교도가 함께 살았다. 그리스와 터키의 역학관계가 변하면서 기독교도들은 계곡을 완전히 떠나야만 했다. 이슬람교도들 역시 1950년 침식으로 인한 거주 위험으로 젤베계곡을 완전히 떠났다.

잠시 카파도키아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자. 최초로 카파도키아 지역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아시리아 상인들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BC 1900년경 교역을 위해 식민지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 후 BC 1600~1100년에는 히타이트가 노예와 광산물을 사고파는 교역도시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히타이트 멸망과 함께 카파도키아는 쇠퇴했다. 1세기 전반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는 카파도키아 지역을 수중에 넣고 페르시아와 국경선을 정했다.

2
세기 후반에는 기독교도들이 포교를 위해 이곳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위험한 종교로 생각해서 신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신비감을 느낄 수 있는 카파도키아로 기독교도들은 로마의 탄압을 피해 4세기 초까지 계속 이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307~337년 재위)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카파도키아는 기독교도들의 수행장이 되어 더욱 많은 신도들이 몰려들었다.

7
세기 후반에 이슬람교도들이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자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카파도키아로 이주해 당시 인구는 6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렇게 몰려온 사람들은 주거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바위산을 뚫어 지하도시를 건설했다.

8~9
세기 전반에는 비잔틴제국에서 일어난 우상파괴운동으로 인해 수많은 초기 벽화들이 파괴됐다. 그러나 우상파괴에도 불구하고 10세기 무렵에는 동굴 속에 건설된 성당과 수도원의 수가 360개를 넘었으며, 11세기에는 인구가 7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11
세기 후반에는 아나톨리아 일대가 터키 셀주크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카파도키아는 완전히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했지만 기독교도들은 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근근이 신앙을 이어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도의 수행장이자 은신처

결론적으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역로였던 카파도키아는 하나의 제국이 일어설 때마다 전쟁터로 변했다. 기원전 히타이트인들이 정착한 이래, 페르시아, 로마, 비잔틴,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차례로 이곳을 점령했다. 로마와 비잔틴시대에 기독교인들의 망명지가 됐던 이곳은 4세기부터 11세기까지 기독교가 번성했다.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암굴교회와 수도원들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크로드의 중간거점으로서 동서문명의 융합을 도모했던 카파도키아,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보루이자 오스만투르크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카파도키아, 수천 년의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인류문명의 중요한 자산이다. 그 신비하고 신기한 자연과 역사와 문화유적의 잔상을 지울 수 없다. 이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돼, 항상 세계 곳곳에서 자연과 문화와 역사를 보기 위해 찾아온 방문객들로 붐빈다.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는 왜 앙숙인가?
비슷한 역사이면서 지배·피지배 반복…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감정의 골 깊어진 듯

그리스와 터키는 한국과 일본 관계 못지않게 앙숙이다. 아니 한일관계보다 훨씬 더 심한 적대적관계다. 지난 12월 초 영국언론은 그리스를 방문한 아흐메트 다부토울루 터키 총리가 안토니스 사마라스 그리스 총리와 고위급 협력회의를 개최한 결과 무역과 관광, 에너지, 불법이민 근절 등의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공동성명은 “상호 존중과 신뢰, 국제법을 기반으로 좋은 이웃국가 관계를 촉진하자”고 밝혔다. 사실 이 정도의 보도라면 웬만한 국가에서는 별로 뉴스로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앙숙관계인 두 나라가 손을 잡고 좋은 관계로 나가보자고 하니 뉴스가 되는 것이다. 두 나라 관계는 그 정도다. 언제부터 그리스와 터키가 앙숙관계가 됐을까? 정확한 시점과 유래를 아는 역사학자들은 없지만 두 나라의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알려진 대로 그리스는 서구문명의 기원이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아크로폴리스,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 소크라테스 등 서구문명은 그리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원 전 강력한 도시국가를 건설한 그리스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인근 국가들로 진출한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터키는 당연히 그리스의 첫 번째 진출국이었다. 터키에 그리스와 유사한 신화가 많이 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통일된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터키·인도까지 진출한 알렉산더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한다. 하지만 그의 사후 그가 지배했던 국가는 다시 산산조각 난다.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로마가 등장한다. 로마는 그리스와 그 주변국을 점령하고, 거대해진 국가는 동서로마제국을 건설한다. 서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고,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정하고 통치한다. 수세기 동안 통치한 동로마는 서서히 힘이 쇠약해진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453년 쇠약해진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다. 이슬람국가인 오스만투르크는 수백 년간 그리스가 있는 펠레폰네소스반도를 지배한다.

그리스는 1821년부터 1829년까지 독립운동을 벌여 1830년 독립을 쟁취한다. 다시 그리스란 이름의 국가를 되찾은 것이다. 무려 400년간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다. 이와 같이 근대까지 그리스와 터키는 서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계속 반복해 왔다. 그 과정에서 민족도 상당히 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의 역사와 터키의 역사가 상당 부분 중복되는 측면도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400년간 지배를 받은 그리스가 터키를 미워하는 건 당연하다고 보는 측면도 있다. 마치 한국이 일제 36년을 겪은 뒤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감정은 현대 들어서 폭발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터키는 독일편에 가담했다가 패하고, 그리스는 연합국 측에 가담해 전승국 대열에 선다. 여기서 터키는 많은 땅을 빼앗긴다. 발칸반도의 땅은 이스탄불만 남겨놓고 모두 넘겨준다. 이때 400년간의 지배를 받은 그리스는 결정적으로 터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스는 과거 비잔틴 제국의 영광을 되돌리고 소아시아 해안과 에게해 일대의 그리스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스탄불을 함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터키의 본토인 아나톨리아까지 원정 가서 초토화시킨다. 그리스 원정군은 열강의 도움을 받으며 별 어려움 없이 오스만 제국 영토로 진군해 많은 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터키의 자존심을 굉장히 무너뜨린 진군이었다. 어쩌면 감정 대 감정싸움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하긴 전쟁 자체가 감정싸움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이로 인해 두 나라는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현재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세력을 규합한 터키 독립군은 각지에서 그리스군과 전투를 벌여 대항했고, 결국 초반의 열세를 뒤엎고 터키군이 각지의 그리스군을 거의 대파하면서 마무리됐다.

지도를 보면 터키 바로 앞에 있는 지중해의 섬까지 그리스 영토로 표시돼 있다. 배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섬도 그리스령이다. 그러니 심심찮게 영토분쟁, 아니 섬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 박정원 월간산 부장대우 

 

◆터키 인문탐사 기행  이석연 변호사  조선일보

◇2015.07.08  서양 역사의 뿌리...트로이 전쟁터를 찾아

트로이 유적지에 있는 트로이 목마 모형.

 

기원전 12세기, 서방의 그리스 연합군과 동방의 트로이 간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함으로써 서양문화의 모태(母胎)가 된 헬레니즘 문화가 태동한다. 헬레니즘은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서양문화의 2대 원류(源流)로서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한편 트로이 전쟁의 와중에서 트로이 왕의 사위였던 아이아네스가 그 일족을 이끌고 불타는 트로이를 빠져나온다. 이들은 에게해, 지중해를 전전하다가 현재의 이탈리아 중부에 정착해 ‘알바롱가’라는 도시를 세운다. 이 도시가 훗날 로마의 모체가 되고 아이아네스는 로마의 건국시조가 되었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은 서양역사의 뿌리이자 자궁이다. 서양의 모든 역사책은 트로이 전쟁부터 시작한다.

그로부터 3000여년 후인 제1차 세계대전 때 멀리 트로이가 시야에 들어오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안(兩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이 연합군에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를 고립시켜 결국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그 후 세계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3000년을 뛰어넘는 두 전쟁의 격전지 탐사는 ‘트로이 가는 길’이다. 1871년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에 의해 발굴되어 신화의 영역에서 역사의 세계로 편입된 트로이 탐사, 오랫동안 별러왔던 길이었다.

2013
510일 이스탄불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아침 630분 현지인 가이드와 운전기사, 그리고 아내와 넷이서 숙소인 그랜드하얏트 호텔을 출발했다. 20여분을 채 못가 이스탄불 시내를 벗어나 그리스 국경 방향으로 난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근처 휴게소에 들러 터키식 아침식사를 했다. 뷔페식의 샐러드와 빵, 그리고 갓 구워 낸 터키 전통의 치즈토스트가 없던 식욕을 불러온다. 휴게소는 깨끗하고 시설이나 서비스의 질도 좋았다. 휴게소를 나서 1시간가량 달려 테키르타크(Tekirdag)를 지나자 날씨가 개면서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명하고 드높은 대기가 아름다운 대지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초록과 진한 황초색의 건물이 어우러진 산야는 눈의 피로를 덜어주면서 마음을 저 원초적인 어머니의 품으로 끌어 들이고 있었다.

그리스 국경 가까운 케잔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겔리볼루(Galibolu) 방향으로 향한다. 조금 달리니 지도상 잘록하게 들어간 지점에 다다르고 비로소 양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오른쪽은 에게해고 왼쪽은 마라마르해다. 양 바다는 다르다넬스 해협(터키에서는 차낙칼레 해협으로 불림)을 통해서만 연결된다. 오전 1030분경 겔리볼루항 선착장에 도착했다. 겔리볼루는 인구 약 1만명의 항구도시로 차낙칼레주의 유럽지역과 같은 주의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주요지점으로 역사적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의 장악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한 곳이다. 6·25전쟁 때는 미국, 영국에 이어 가장 많은 전투 병력을 파견한 터키의 참전 군인들이 한반도의 부산항을 향해 출항한 곳이기도 하다.

 

▲이석연 변호사가 트로이 유적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제공 : 이석연 변호사)

 

터키 공화국 탄생의 배경지, 다르다넬스 해협

1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 겔리볼루에서 차낙칼레로 이어지는 다르다넬스 해협 양안의 장악을 둘러싸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등의 연합군과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했던 오스만 투르크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오스만 투르크의 무스타파 케말(아타튀르크)장군이 군지휘관으로서 진가를 발휘하여 전후 터키 공화국 수립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1915 5월부터 9개월 사이에 연합군과 터키군 장병 11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차낙칼레 전투에서 터키군은 연합군을 격퇴한다. 이곳 다르다넬스 해협에서의 터키군의 승리로 흑해로 진격하여 연합군 측에 가담했던 러시아 황제를 도우려 했던 연합군의 전략은 차질을 빚게 되고 이로 인하여 러시아는 고립되어 정정 불안 속에 결국 로마로프 왕조를 타도하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만약 오스만 제국이 차낙칼레 전투에서 패했다면 연합국의 원조를 받은 러시아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오전 1050분 페리에 승선하여 30분 후 양안의 아시아 쪽 지점인 차르닥항()에 도착했다. 페리 선상에서 멀어져가는 겔리볼루의 전경을 바라보니 더 없이 소박하고 평온한 모습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어 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음을 무색하게 한다. 멀리 겔리볼루 항구의 킬리트바히르(Kilitbahir) 언덕 위에 커다란 글씨가 터키어로 새겨져 있다.

“멈춰라. 여행자여, 그대가 아무 것도 모른 채 발을 들여 놓는 이곳은 한 시대가 가라앉은 곳이다.

잠시 숙연한 마음이 든다. 이 차르닥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랍세키, 차낙칼레를 거쳐 우회전하여 50여분 지나면 트로이에 닿는다. 해협 건너편 대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고 짙푸른 바다 빛이 마음을 씻어주고 심장까지 싱그러운 내음을 불어넣고 있다.

 

왜 다르다넬스 해협이 숱한 전투와 영웅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는지 이곳에 오니 깨닫게 된다. 바로 양안의 대지가 비옥하고 손에 닿을 듯이 가까운 양안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음을. 길이 61km, 1~6km의 다르다넬스 해협은 이스탄불을 양분하는 보스포로스 해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군사·정치적 의의가 큰 곳이다. 이곳을 봉쇄(장악)하면 마르마르 해협을 거쳐 흑해로 나가는 길이 막혀 바닷길은 무용지물이 된다. 기원전 5~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공격할 때 이곳 해협을 건넜으며 알렉산더대왕의 아시아 원정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 신화의 영웅 이아손이 지휘하는 아르고(Argo) 탐험대도 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여 흑해 연안의 콜커스 왕국까지 황금모피를 찾으러 떠났다가 다시 이곳을 거쳐 그리스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터키 정부는 2023년부터 이곳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통행세를 징수할 방침이라고 한다. 지금도 군함 3척 이상은 통과를 제한하고 있다.

 

▲연합군과 터키군 장병 11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1915년 차낙칼레 전투에서 터키군은 연합군을 격퇴한다. 사진은 차낙칼레 성터 모습.

 

한가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트로이

트로이에 진입하면서 주변을 보니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짙푸른 나무와 비옥한 토지가 드러나는 평화로운 지역임을 금세 느낄 수 있다. 터키의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주변은 비교적 한가하고 차량도, 사람도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는 더 위안이 되었다.

 

 ‘트로이 6’과 ‘트로이 7’의 성벽을 지나 성문 왼쪽으로 몇 계단을 오르면 트로이의 가장 높은 전망대에 다다른다. 멀리 다르다넬스 해협이 보이고 드넓은 평원이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지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트로이의 항구가 있었는데 그곳이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함대가 정박했던 곳으로 보여진다. 지금은 평원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성 밑 바로 아래까지 바다였던 것이다. 슐리만은 바로 이 점을 인식하고 이곳이 트로이 전쟁의 현장이었음을 직감하면서 발굴작업을 감행했다.

어린 시절부터 호머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전쟁의 사실성을 굳게 믿은 슐리만은 사업가로서 많은 돈을 모은 40대 후반 트로이 탐사와 발굴에 나섰다. 당시 소위 전문가라는 학자들은 그를 비웃고 매도하면서 그의 발굴작업을 방해하고 심지어 자객을 보내 암살까지 하려고 했다. 드로 자하비 감독이 만든 ‘더 트로이(The Hunt for Troy)’는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과정을 다룬 영화로서 3시간에 걸친 대작이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이 영화를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은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안정된 인생항로를 걷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영역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역사는 바로 그런 아마추어와 아웃사이더들의 꿈과 열정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 수단이 순수하다면 자격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그런 꿈과 열정을 지닌 아마추어와 아웃사이더들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이어 ‘트로이 2’의 성 앞에 가까이 다가가니 한 무리의 독일인 관광객이 가이드의 설명을 경청하면서 멈춰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슐리만이 프리아모스 보물을 발견했던 곳이다. 당시 슐리만은 보물이 묻혀 있는 것을 직감하고 인부들에게 마침 오늘이 자기 생일이어서 하루 쉰다면서 모두 돌아가도록 지시하고 아내 소피아와 함께 떨리는 손길로 보물들을 캐내기 시작했다. 그는 소피아에게 금제왕관과 금목걸이를 씌우면서 ‘당신이 바로 헬레나요’라고 하였다 한다. 공회당과 시장터가 있던 언덕에서 한참을 밑으로 내려가니 관람경로 맨 마지막에 동굴이 보인다. 이 동굴은 트로이 지하도를 통하여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트로이 멸망 시 아이아네스 등이 이 동굴을 통하여 바다로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 와서 보니 충분히 현실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트로이 유적지 곳곳에는 빨간 장미처럼 보이는 이름 모를 꽃들이 간간이 피어 있고 짙푸른 숲이 우거져 금방이라도 옛 트로이인들이 튀어나와 얘기를 걸어올 것 같은 착시현상까지 느껴진다. 트로이는 분명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트로이 성곽은 주변에 수목과 산림이 어우러져 있고 멀리 평원을 아우르는 자태로 의연히 서 있었다. 누가 트로이를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볼 것 없고 목마조차도 조잡하여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폄훼하고 있었던가! 목마(木馬)를 보려면 차라리 차낙칼레 해변 공원에 있는 영화 ‘트로이’ 촬영 후 기증된 그 목마를 보러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트로이 성 언덕에 한참을 서있으려니 트로이인들의 번영의 속삭임과 함성이 저 들판에서, 한편으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3시간여 머물다 트로이를 떠나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이고 뒤돌아 봤다. 마치 오랫동안 정든 사람, 정든 땅과 이별하는 듯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처럼.

 

터키인들의 聖地 차낙칼레 지역

차낙칼레 시내의 한 아울렛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맞은편(유럽지역)에 있는 ‘아베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5분 거리의 에게해 바다가 시원스럽게 보이는 곶(Cape)의 끝부분 마비다트에는 차낙칼레 전쟁기념탑이 있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 패하였음에도 터키 본토가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차낙칼레 전투의 승리 덕분이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끼고 있는 겔리볼루, 차낙칼레 지역은 현재의 터키인들에게 성지나 다름없다. 그 바로 근처 안작(Anzac) 마을에는 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호주와 뉴질랜드 군인들의 묘지가 있어 지금도 많은 호주인과 뉴질랜드인들이 찾고 있다. 특히 이 묘지에는 터키공화국이 건립된 직후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안작을 방문하는 추모자들을 위하여 직접 쓴 글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이 힘들게 찾아와 표표히 떠나가는 나그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피를 쏟으며 생명을 던진 영웅들아, 지금은 친구의 나라 땅에 누워 있구나. 평안하게 누워 있으라. 우리 땅에 나란히 누워 있는 조니(서양인)들과 메흐멧(터키 병사)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당신들, 아들들을 먼 나라에 보낸 어머니들, 눈물을 닦으라. 당신들의 아들들은 우리의 품속에 편안히 누워 있다. 생명을 이 땅에 바쳤기에 그들도 우리의 아들이다.

오후 5시반 경 이스탄불을 향해 출발했다. 특히 에게비트에서 겔리볼루에 이르는 주행로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바짝 끼고 나 있어 짙푸른 해협의 정취를 청명한 하늘빛과 함께 맛볼 수 있었다. 건너편 아시아 쪽 대지가 더 가깝게 손짓하고 있다. 차에서 내려 아내와 함께 걸으면서, 멈추면서 풍광을 감상하려니 그지없이 삽상하고 흔쾌한 기운이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이 느긋함과 낭만과 한가로움이여! 여행의 멋과 품격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2015-08-26  카파도키아 전경에 <열하일기(熱河日記)> 속 구절 떠올라

기구비행선(Balloon flight·열기구) 투어로 유명한 카파도키아.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신과 인간의 합작품, 카파도키아의 풍물을 찾는 여정이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아침 950분 출발 예정이던 터키항공이 40여분 지연되는 바람에 1150분에 카파도키아 여행의 관문인 카이세르 공항에 착륙했다. 예약했던 호텔  리무진을 타고 1시간여를 달려 카파도키아 비경 지역 내의 우치히사르에 있는 카파도키아 케이브 리조트 스파 호텔(CCR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위치나 시설, 서비스 면에서 완벽했다. 동굴 호텔의 묘미가 가득 차 있고 밤에는 온돌식으로 바닥에 불을 넣어주기도 했다. 과연 고품격의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느껴졌다. 지구를 떠나 우주선을 타고 수십광년 떨어진 행성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주변을 볼 때마다 눈이 쉴 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시 외계인들이 보이지 않나 신경을 곤두세우게까지 하게끔 한다.

체크인 후 호텔 바로 뒤편에 있는 우치히사르성(UCHISAR Castle)에 걷거니 뛰거니 하면서 한 달음에 올랐다. 히타이트 시대부터 천연요새였고 비잔틴제국이 아랍 세력에 대항할 때도 요새로 쓰였던 곳이다. 우치히사르성의 정상에 서니 카파도키아 전경이 사방으로 한눈에 펼쳐진다. 신의 기예를 뛰어넘는 자연의 조화 앞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인간의 알량한 필력으로 어떻게 이 대자연의 조화로움을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쯤에서 풍광묘사의 붓을 놓기로 한다. 붓을 던지고 나니 어쩐지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한 바탕 울고 싶은 심정이 북받쳐 오른다. 갑자기 평소 즐겨 읊던 당시(唐詩) <열하일기>의 한 구절이 연상(聯想)작용으로 떠오른다.

 

전불견고인(前不見古人)
후불견래자(後不見來者)
염천지지유유(念天地之悠悠)
독창연이제하(獨愴然而涕下)

 

앞을 봐도 옛사람 보이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도 오는 사람 보이지 않네
천지의 아득함을 생각하니
홀로 서글퍼 눈물 떨구네

 

중국 당나라 초기의 시인이자 장수였던 진자앙(陳子昻)의 ‘유주대에 올라’는 장부의 웅지와 현실의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는 명시(名詩)이다.

조선 후기의 천재 문장가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탁 트인 천릿길 요동벌을 바라보면서 그 감격을 한바탕 울 만하다고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 요동벌에서 산해관까지 1200리 길, 사방에는 모두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은 마치 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놓은 것만 같아 옛날의 비, 지금의 구름이 오직 푸르고 푸를 뿐이니 한바탕 울어 봄직 하지 아니한가?

마치 지금의 내 처지와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주변의 풍광도 잊은 채 벌써 이 구절을 몇 번째 되뇌고 있었다.

호텔식당에서 바라보는 황혼녘에 검게 물들어가는 카파도키아 전경, 마치 눈이 덮인 산과 골짜기처럼 변하는 모습이 또 다른 장관이었다. 호텔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아내와 나는 여행의 멋과 품격, 인생의 의의와 격조 등에 대하여 카파도키아산() 와인 잔을 기울이면서 담소했다.

 

50여개 기구비행선 이륙, 또 다른 장관

이튿날(2013 512)엔 새벽 4시에 기상했다. 기구비행선(Balloon flight)을 타기 위해서다. 445분 호텔을 출발해 기구비행선 주선사인 ‘레인보우’ 사무실에 집합하여 각자 탈 기구와 파일럿을 배정받고 545분경 비행선 출발 현장에 도착했다. 비용은 1인당 150유로(22만원)로 싼 편은 아니다. 내가 탄 비행선은 20명이 승선하였고 555분경 이륙했다. 파일럿은 스페인인 아르투르(ARTURO)로 멋진 외모에 능숙한 비행기술을 자랑하는 조종사다. 50여개의 기구비행선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이륙하는 모습은 카파도키아의 장관 못지않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비행기구에서 본 카파도키아 일대는 일생 한번 보고 감탄하기에는 우리의 생이 너무 짧을 정도로 환희의 시간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이 장엄한 풍광을 유창하고 낭랑한 언어로 옷을 입힐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날씨는 흐리고 쌀쌀했으나 그리 추운 날은 아니다. 바람이 좀 불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기구가 하늘로 치솟으면서 잠잠해지고 착륙해서도 사위(四圍)는 비교적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구름이 짙게 끼어 일출 장면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주변 풍광의 수려함에 비추어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파일럿은 과연 베테랑답게 기구의 흔들림이 거의 없이 완벽하게 착륙시켰다. 다른 기구 중 상당수가 착륙 때 크게 요동치면서 탑승자들이 놀라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비행시간 45분 포함하여 착륙 후 간단한 칵테일 세리머니를 마치고 호텔에 당도하니 오전 8시다.

조식 후 호텔에서 주선해 준 그룹투어에 참여했다. 점심식사를 포함해 6시간 30분간 진행되는 카파도키아 일대 유명 포인트를 들르는 일정이다. 1030분 호텔을 출발한 우리팀은 네덜란드인 모녀, 미국인, 인도인 젊은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 등 8명으로 구성됐다. 카파도키아 절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된 파노라마 전망대 두 곳과 어제 호텔에서 산책 삼아 오른 우치히사르 캐슬을 어제와는 다른 방면에서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 등을 거쳐 괴레메 야외박물관에 당도했다. 날씨는 여행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주고 있다. 조망 포인트 중 하나인 아우클라르의 ‘오스만 집’에서 구운 땅콩과 호박씨 맛을 보았다. 직접 손으로 호박씨를 까서 먹는 즐거움을 통해 오랜만에 잊었던 젊은 날의 향수가 묻어 나온다. 괴레메 야외박물관에는 많은 동굴 교회(암굴교회)와 그 안의 성화(프레스코화)가 있어 초기 기독교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터키의 아와노스, 이즈닉 세라믹 도자기는 타일 작품이 화려하고 세련된 문양과 자태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초기 기독교 성지 괴레메 야외 박물관 관람

카파도키아는 실크로드의 교역 중심지인 관계로 기독교가 일찍 전파되었다. 특히 위대한 신학자 세 명의 고향으로 초대 기독교의 중요한 성지이기도 하다. () 바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동방교회수도원의 기초를 닦은 신학자 카이제리의 ‘바실’, 그의 동생이자 신비한 명상적 분위기를 띤 작품으로 유명한 니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이들의 친구로서 시인이자 웅변가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동굴교회와 수도원이 가장 많은 곳이 괴레메다. 이곳에는 초기 비잔틴 시대부터 13세기 말까지 서로 다른 시기에 걸친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곳은 오스만 제국 말기까지도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로 사용되었다. 석회질의 바위를 파서 만든 교회는 단순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돔과 기둥이 있고 설교를 하는 엡스가 있으며 벽이나 천장에는 프레스코화로 된 성화가 그려져 있다. 괴레메 수도원 입구의 정면에 있는 ‘바위 속의 여자수도원(크를 킬리세)’을 시작으로 ‘성 바실교회’, ‘엠마 킬리세교회(사회 교회), ‘성 바르바라교회’ 등의 순서로 둘러보았다. 가이드의 설명보다도 암굴 속 교회의 형태와 벽화가 더 생생한 당시의 상황과 종교적인 거룩함을 말해주고 있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도자기와 카펫 마을로 유명한 아와노스로 갔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아담한 이 소도시 한가운데로 붉은 강이라는 뜻의 크즐으르막 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은 전장(全長) 1355km, 터키땅에서 발원하여 흑해로 흘러드는 강 중 가장 긴 강이며 이곳 아와노스는 그 상류지역이다. 이곳의 흙은 붉은 빛깔을 띠고 있어 항아리를 빚는 데 적당해서 도공들이 직접 운영하는 도자기 공방이 여러 군데 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4000여 년 전 히타이트인들이 남긴 대표적인 유적지 토기항아리를 굽던 지역이다.

 

식사장소는 시내 소파호텔 옆에 있는 터키식 전통식당이다. 음식맛이 일품이고 분위기 또한 산뜻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 테이블에 앉아 주요리와 음료 등을 각자 취향대로 선택했다. 나는 생선구이를, 아내는 버섯치즈요리를 선택하고 음료는 로컬 레드와인을 시켰다. 분위기와 음식맛이 어우러져 모두는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젊은 미국 부인의 수다가 좀 시끄럽기는 했지만.

식사 후 아와노스 근교에 있는 도자기 공방인 베네사 세라믹(Venessa Seramik)에 들렀다. 이 도자기 공방은 아와노스에서도 가문의 전통을 이어온 유명한 공방으로, 공방 주인 조카의 설명 하에 직접 주인 도공 아저씨가 도자기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4000여 년 전 히타이트 민족이 만들었던 대표적인 손잡이가 달린 호른 모양의 큰 와인잔을 흙으로 빚어 완성하는 데 5분도 채 안 걸린다. 능숙한 도공의 장인정신이 엿보였다. 수 대째 가문을 이어 도예에 종사한다는 그가 흙 묻은 손을 추스르기 전에 인사를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나는 여행 중 사진을, 특히 특정인들과 어울리는 연출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 편인데 이번은 내가 관심이 있는 옛 도자기 관련인데다 장인정신이 우러나오는 도공아저씨의 매력에 끌려 모처럼 한 컷 찍었다.

이어 옆방으로 옮겨, 구운 도자기에 아름다운 채색을 하는 전문 화공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윗층의 아트갤러리에는 터키 전통의 도자기와 타일 작품들이 전시 판매되고 있었다. 이곳 아와노스의 도자기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즈닉 세라믹 도자기와 타일 작품이 화려하고 세련된 문양과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이즈닉 세라믹은 더 높은 가치 평가를 받고 있었다. 나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왕의 행차를 담은 20cm×20cm 크기의 평면 이즈닉 세라믹 작품 한 점을 기념으로 구입했다. 해외여행 중 내가 기념품을 산 것은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 내가 관심 있고 나름대로 연구하고 있는 도자기 분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특히 탐구하고 있는 도자기 분야는 중국 도자기의 해외 수출 경로와 현지 도자기에 미친 영향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즈닉 세라믹 도자기

도자기 공방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기암괴석의 열병식이 펄럭거리는 포인트에서 잠시 경관을 감상했다. 낙타, , 버섯, 손바닥 모양의 바위가 폼을 잡고 있는 가운데, 뒤편에 있는 ‘나폴레옹 모자’ 바위가 그럴 듯하게 보인다. 참 기발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어 ‘파보비스’라는 카파도키아 기암괴석 열병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포인트를 마지막으로 찾았다. 카파도키아를 소개하는 방송 등 언론과 책자에서 단골메뉴로 올라 있는 지점이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알려진 곳보다 무명인 채로 나름의 자태를 드러내는 장소와 지역을 더 좋아한다.

 

호텔에 돌아오니 오후 5, 적당한 귀가 시간이었다. 호텔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을 시작하려는데 밖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휘몰아치는 광풍과 함께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1시간 가량 내리다가 저녁까지 이슬비가 이어지고 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적당하게 맑고 개이기를 반복하면서 여행의 흥을 돋우던 날씨가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오자마자 변덕을 부리는 것을 보고 행운을 잡았다고 자평했다. 저녁식사는 역시 호텔의 격조 높은 어제의 그 레스토랑에서 토속 맥주를 곁들여 느긋한 마음으로 들면서 카파도키아 여정의 뜻 깊고 고이 간직하고 싶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만끽했다.

 

◇인류문명의 살아 있는 희망, 이스탄불

①우리와 한 뿌리인 터키

▲아야소피아 성당 외관. /터키관광청 한국사무소

 

터키공화국은 1952년 ‘건국 14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에는 AD 552년 돌궐의 수장인 토문(土門)이 유연(柔然)을 격파하고 그 수장 두병가한을 자살하게 했다고 적혀 있다. 돌궐이란 투르크(터키)족을 말한다. 돌궐은 흉노의 일파로서 사마천의 <사기>에는 정령(丁靈)으로 언급되고 있다. 흉노의 역사를 이어받은 터키족이 바로 돌궐족이다. 그 후 돌궐은 몽골계 민족인 유연에 속해 있었으나 552년 토문(이리가한)이 유연을 격파하고 독립했기 때문에 터키공화국은 그 해를 건국의 해로 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장소는 현재의 아나톨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알타이 산맥 부근이었다.

터키족은 우리 한민족과 같은 알타이 문화권에 속한다. 아득한 옛날 두 민족은 중앙아시아에서 한 핏줄로 살다가 그들은 서쪽으로, 우리는 동쪽으로 이동해 왔다. 흉노로부터 시작한 터키족은 돌궐족, 위구르족으로 이어지고 그들의 일파가 다시 서쪽으로 진출해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해 셀주크투르크 제국, 오스만 제국에 이어 1924년 오늘의 터키공화국을 건설한 것이다. 때문에 터키에서의 국사는 흉노로부터 시작하는 민족사를 의미한다. 반면 현재 터키 국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명멸했던 히타이트, 우르라트 왕조, 프리기아 왕조, 사산조 페르시아, 비잔틴 제국의 역사는 세계사로 가르치고 있다. 터키는 우리와 고대사의 일정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한 민족적 동류의식을 느끼게 한다.

 

▲아야소피아 성당 내부 /터키관광청 한국사무소  

 

6년 만에 다시 찾은 이스탄불

비행기 상공에서 내려다 본 이스탄불 부근의 짙푸른 초원과 산야(山野)는 마치 한국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이스탄불 시내의 스카이라인과 도시의 모습이 정겹게 눈에 들어온다. 한양대학교 이희수 교수는 이스탄불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가슴이 마구 뛴다고 한다. 누구든 이스탄불을 한번 방문하기만 하면 그 매력에 빠져 심하게 열병을 앓는다고도 한다. 나 역시 열병을 앓다가 6년 만에 다시 이스탄불과 해후하게 됐다. 인류역사의 축소판, 아시아를 가로질러온 실크로드의 대()여정이 마무리되는 바로 그 이스탄불과 말이다.

공항에서 곧바로 구 시가지에 있는 한식당 서울정에 들러 저녁식사를 하였다. 6년 전 그때보다도 음식의 맛과 질이 향상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스탄불의 날씨는 흐린데다가 제법 쌀쌀하기까지 하다. 이집트의 열기 속에 뛰어들어 막 나온 탓에 체감온도가 더 낮게 느껴졌으리라. 이스탄불 신도시인 탁심 지역의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 체크인한 후 모처럼 헬스클럽에서 1시간 가량 운동을 했다.

이튿날 일찍 기상해 밖을 보니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고 어제 저녁보다 더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비만 오지 않는다면 시내 관광하기에는 적합하겠다 싶다. 신학과 역사를 전공했다는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먼저 술탄 아흐멧 지구로 갔다. 술탄 아흐멧 모스크(일명 블루 모스크)를 둘러보고 이어서 바로 옆의 하포드롬 광장을 찾았다. 광장에 버티고 있는 4개의 구조물은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다. 광장 남쪽에 웅장하게 서 있는 25.6m의 오벨리스크는 3일 전 방문했던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운반해온 것으로, 상형문자가 아름다운 부조작품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집트를 찾은 여파일까, 어쩐지 상형문자가 낯설지 않고 배워서 조금이라도 해독하고 싶은 충동이 이집트에서부터 내내 일고 있었다. 가운데의 청동뱀기둥(8m)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윗부분이 잘려 나갔다. 십자군(4)의 소행이다. 제일 안쪽에 있는 돌로 만든 오벨리스크는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가 만든 것으로, 원래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십자군들이 금장식을 뜯어가는 바람에 돌탑만 볼품없이 서 있다. 광장 한쪽의 8각형 건축물은 독일의 빌헬름 2세가 기증한 것으로, ‘독일의 샘’이라고도 불린다.

<②편에 계속>

 

007 시리즈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이스탄불의 지하저수궁전

<①편에서 계속> 

▲007 시리즈 영화의 배경이 됐던 지하저수궁전(1)과 내부 가장 안쪽에 있는 메두사(2). /터키관광청 한국사무소

 

007 시리즈 배경이 됐던 지하저수궁전

광장을 벗어나 아야소피아 성당과 술탄 아흐멧 모스크 중간 지점에 있는, 007 시리즈 영화의 배경이 됐던 지하저수궁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336개의 다양한 석주(石柱)가 받치고 있는 지하저수지에는 배가 떠다닐 정도로 물이 차 있다. 지하저수지 가장 안쪽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2개의 메두사 머리 부근에 많은 사람들이 붐벼 발을 들여놓기가 힘들 정도였다. 6년 전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어 아야소피아(성소피아 성당) 경내를 관람하려 했으나 30여 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오후로 미루고 톱카프사라이 구내에 있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을 찾았다. 술탄 아흐멧 지구뿐만 아니라 시내 전체가 사람의 물결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다. 6년 전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내일 찾을 트로이를 떠올리면서 트로이관()을 비교적 자세히 훑어보았다. 수메르 문명, 앗시리아 문명, 히타이트 문명 등 이집트 문명에 버금가는 세계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진수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점토판에 새겨진 쐐기문자(설형문자)로 된 길가메시 서사시와 함무라비 법전이 눈길을 끌었다. 이 박물관의 백미(白眉) 중의 하나로서 그 동안 알렉산더의 석관(石棺)으로 알려진 석관은 최근 알렉산더의 부장인 아브달로니모스(Abdalonymos)의 것으로 밝혀졌다. 무엇보다도 이 박물관이 자랑하는 걸작품은 설형점토 문자판에 새겨진 카데쉬 평화협정문이다. 기원전 13세기 중반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쉬왕 사이에 맺어진 협정문은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국제조약 문구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동맹국 또는 회원국 일국에 대한 위협은 전체 동맹국 또는 회원국에 대한 위협으로 본다’는 규정의 효시는 바로 위 평화협정문이다.

부근에 있는 한 호텔 옥상의 터키음식점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보면서 생선요리로 점심을 때우고 아야소피아를 찾았다. 사람의 줄이 없어지고 좀 한산한 모습이었다. 기원후 4세기 맨 처음 세워진 후, 두 차례 지진과 방화로 소실된 것을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6년이라는 불가사의한 짧은 기간에 재건한 후 1500년을 버텨온 저력에 걸맞게 내부와 외부 모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비록 532년 발생한 니카반란으로 불명예의 시절을 겪기도 했으나 정신적(무형), 물질적(유형)으로 위대한 인류문화유산을 남겨 그 이름을 만고에 빛내게 되었다. 바로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과 아야소피아 사원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우리의 민법전에도 많은 조항이 반영될 정도로 지금까지 세계 각국 법전의 기본이 되고 있다.

나는 아야소피아 경내를 관람하다가 한 무리의 한국 여행객들과 조우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아야소피아 벽면의 손상된 모자이크 성화(聖畵)를 보면서 오스만 제국이 저렇게 손상시켰다고 제법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고 일행 대부분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손상된 모자이크 성화는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같은 기독교인인 라틴 기사들의 물욕이 빚어낸 소행이었다. 오스만 군대는 그 위에 회칠을 해서 그 형상을 가렸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카파도키아 동굴 벽화(성화)의 파괴 역시 비잔틴 제국 시절 성상(聖像)파괴운동의 결과였다.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메흐멧 2세는 신앙에 있어 관용적이었으며 절대 광신적이지 않았다. 그 전통은 오스만 제국 말기까지 이어졌다. 비록 아야소피아를 비롯한 이스탄불의 8개 기독교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성직자를 살해하거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성당을 파괴하지도 않았다. 이슬람의 우상숭배 금지에 따라 회반죽으로 성화를 가리도록 했을 뿐이다.

<③편에 계속> 

 

③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오스만 제국의 힘은 관용과 공존

<②편에서 계속>

▲보스포러스 해협 /터키관광청 한국사무소

 

오스만 제국의 진정한 힘은 관용과 공존의 정신  

이는 스페인에서의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 이후 기독교 통치자들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모스크의 중앙 핵심 부분을 헐어내고 기독교 성당을 세운 것과 대비된다. 비록 메흐멧 2세가 관례에 따라 3일간(실제는 하루)의 약탈을 허용했으나 일반 민중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반면 제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이교도인 주민들을 대량학살 했을 뿐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아야소피아 내를 철저히 약탈했다. 메흐멧 2세는 정복 후 바로 겐나디오스 2세를 기독교회(동방정교)의 총주교로 임명했고,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자치조직을 허용했다. 그 결과 이스탄불의 인구는 20세기 초까지 비()무슬림이 더 많았다. 이교도가 인구의 절반이 넘는 수도를 가진 제국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하고 관용적이다. 또한 피지배민족의 다양한 관습과 종교, 정체성은 밀레트라는 제도의 틀 속에서 보호·유지되었다.

이러한 공존의 정신이야말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쳐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오스만 제국의 진정한 힘이었다. 그럼에도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서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지위와 역할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고 그것마저도 부정적 측면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도 서양이 공격하면 정복이나 위대한 승리이지만, 동양(훈족, 몽골족, 오스만 등)이 공격하면 찬탈이나 파괴가 되어야 하는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 방식에 익숙해 있다. 한마디로 오스만 제국사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찢겨나간 페이지가 되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성격과 통치 스타일(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관용성)은 재평가,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의 터키 기행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한 몫을 했다.

이어 톱카프사라이(궁전)를 찾았다.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면서 날씨가 흐린 것이 다행이라고 몇 번을 생각했다. 잔뜩 벼르고 있었던 궁전부엌을 개조하여 만든 중국 도자기관은 벌써 4~5년 전부터 휴관이라고 하여 실망을 금치 못했다. 6년 전 왔을 때 나는 두 번이나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이곳은 현재 12000여점의 중국 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득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쓴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추리소설이 생각난다. 톱카프사라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추리소설이다.

해거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찾은 곳은 신시가지인 탁심 지구 패라(PARA) 지역에 있는 패라 팔라스 호텔이었다. 내가 탐독했던 추리소설의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오리엔탈 특급살인사건>을 집필한 현장이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열강의 정보원들이 머물면서 첩보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호텔 프런트에 그녀가 머물던 411호실을 볼 수 있느냐고 문의하니 지금은 보여줄 수 없다고 한다. 아마 투숙객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방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출처 | 이코노미조선 2015년 7       -   | 이석연 변호사   사진 |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정치

2016년 07월 16일   터키 군부 ‘6시간 쿠데타’ 종료… 대대적 체포작전

체포되는 쿠데타 가담 군인들(AP=연합뉴스)

 

쿠데타군 속속 투항 목격돼…60여명 숨지고 750여명 체포돼
터키 관리 “정부조직 온전”…국제사회 ‘쿠데타 반대’ 표명
에르도안, 쿠데타 배후로 망명 종교지도자 귈렌 지목…귈렌은 부인

터키에서 15(현지시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한때 수도 앙카라와 최대도시 이스탄불의 국제공항 등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 60명의 경찰관과 민간인이 숨졌고 쿠데타를 시도한 혐의로 750여명이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휴가중이었고 망명설까지 돌았으나, 6시간만에 이스탄불 국제공항을 통해 복귀해 ‘쿠데타는 실패했다’고 선언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유엔과 나토, 미국 등 국제사회는 일제히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고 에르도안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스탄불 공항에는 한국인 120명이 비행기 탑승 또는 환승을 위해 있다가 발이 묶였으나 신변에는 이상이 없는 상태다.

 

▲ 16(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탁심 광장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자들이 국기를 흔들며 쿠데타에 항의하고 있다[AP=연합뉴스]
 

15일 터키 국영 아나돌루 통신과 외신 등을 종합하면 터키 군부는 이날 저녁 민영 NTV 방송국과 도안 통신사를 통해 전국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주장했다.

군부는 “법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도록 헌법 질서, 민주주의, 인권, 자유를 다시 세울 것”이라며 쿠데타를 선포했다. 군부는 현존하는 외교관계는 계속될 것이며 법치를 계속 중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터키 고위 관리는 친정부 세력이 군사본부를 장악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탱크와 헬기를 동원한 군부 쿠데타로 한때 군사본부에 억류됐던 터키군 참모총장 등 인질들도 구조됐다.

최대도시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과 보스포러스해협 대교 2, 국영방송 등도 쿠데타 세력에 장악됐다.

쿠데타로 터키 곳곳에서 폭발과 총격이 오가고 전투기가 날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수십명이 사망하고 의회 건물 등이 폭격을 맞았다.아직 소수 반군 세력의 저항은 아직 계속되고 있으며, 이들이 일부 군용 헬기를 통제하고 있다.

터키의 한 고위 관리는 AFP통신 인터뷰에서 밤사이 벌어진 쿠데타 시도 과정에서 최소 60명이 숨졌고 754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이 관리는 사망자 대다수가 민간인이며 쿠데타를 모의한 16명도 숨졌다고 밝혔다. 체포된 이들의 대다수는 군인들이며, 터키 군부의 대령 29명과 장군 5명이 직책을 박탈당했다고 덧붙였다.

터키 NTV방송은 검찰을 인용해 쿠데타 시도 과정에서 불거진 충돌로 앙카라에서만 최소 42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들 가운데 쿠데타 세력에 맞선 경찰관 17명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앞서 AFP통신은 군부가 군중에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터키 대통령[AP=연합뉴스 자료사진]
 

에르도안 대통령은 CNN튀르크와의 스마트폰 영상 통화에서 쿠데타를 ‘군부 소수 세력의 반란’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또 이날 TV 연설을 통해 이번 쿠데타의 배후로 미국으로 망명한 터키 종교 지도자인 펫훌라흐 귈렌을 지목했다.


그러나 미 펜실베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귈렌은 이날 성명을 통해 “수차례의 군부 쿠데타로 고통을 겪은 사람으로서 내가 이번 공격에 연루됐다는 주장은 모욕적이며, 이 같은 혐의를 단호히 부인한다”며 이번 쿠데타를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밝혔다.


서부 이즈미르 지역에서 휴가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 에르도안 대통령은 한때 영국이나 독일로의 망명설도 나돌았다.


그러나 그는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고 발표한 지 약 6시간만인 16일 오전 4시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쿠데타를 ‘반역행위’로 규정하며 “쿠데타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큰 대가를 치를 것이며 ‘청소’를 하겠다”라고 천명했다.


터키 정부의 한 관리도 이날 “쿠데타 시도가 격퇴당했다”며 “모든 정부 관계자들이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AP 통신에 전했다.


앞서 터키 국가정보국(MIT)도 쿠데타가 진압돼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과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군을 앞세운 정부에 맞선 쿠데타군은 16일 날이 밝자 투항하는 모습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군부가 쿠데타를 시작하기 전 처음으로 점거한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대교에서는 군인 50여명이 무기와 탱크를 버리고 손을 들고 다리를 걸어 나왔다.


그러나 터키 정부군 공보실은 로이터 통신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아직도 교전이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제사회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며 쿠데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일제히 표명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성명을 통해 “터키의 모든 정당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군부의 국정 개입을 용납할 수 없다”며 “터키가 조속히 평화롭게 민간 통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성명을 통해 촉구했다.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 -클로드 융커 집행위원장, 페데리카 모게리니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공동성명에서 “EU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 그 국가의 제도, 법치를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쿠데타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반체제 인사와 언론에 대한 탄압 등으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터키가 정치적인 혼란을 겪는 가운데 발생했다.


또 에르도안 대통령은 터키 당국과 쿠르드 반정부 세력 간 평화적 합의가 깨진 이후 쿠르드 반군에 강경책을 펼쳐 반발을 샀다.


지난해 7월 평화적 합의가 깨지고 나서 쿠르드노동자당(PKK) 대원들과 그 연계 세력의 폭탄 공격이 빈번하게 일어나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시리아 내전 초기 시리아 반군에 사람과 무기 공급을 용인한 것으로 알려져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 세력의 성장을 돕는다는 비판도 받았다.

문화일보 연합뉴스

 

2016.07.18  SNS 시민들에 굴복한 터키 '6시간 쿠데타'

[노석조 특파원 이스탄불 르포]

軍·판검사 6000명 체포 '피의 숙청' 예고… 터키 리라貨 4% 폭락
"
거리로 나가 군인들과 맞서라" 에르도안 대통령, 휴가지서 독려
시내서 交戰… 최소 265명 사망

에르도안 "神이 주신 숙청 기회"… 권위주의 강화, 경제위기 가능성
정권 이슬람주의 강화와 軍 충돌, 對시리아·IS '대응 미숙'도 빌미
서방의 테러·난민전략 흔들릴 듯

 

17(현지 시각) 오전 2, 터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주변은 '쿠데타 세력 척결!' 구호를 외치는 2000여 명의 정부 지지 시위대로 가득했다. 도심으로 가는 도로는 붉은색 터키 국기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사진을 걸고 경적을 울리는 차량으로 꽉 막혔다.

중동과 유럽을 잇는 이스탄불 서부 보스포루스 해협 다리에선 아직도 피비린내가 났다. 이틀 전인 15일 밤 10시 탱크를 앞세우고 정권 전복을 시도한 쿠데타 세력이 정부군과 6시간 동안 교전하다 결국 제압당한 현장이었다. 수도 앙카라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소 265명이 사망하고, 1500여 명이 다쳤다.

쿠데타 당시 터키 남부 휴양지 마르마리스에 머무르고 있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오전 4시 이스탄불로 돌아와 "쿠데타 실패"를 선언했다. 터키 헌정(憲政) 사상 5번째 쿠데타는 이렇게 6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터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장교·병사 등 쿠데타 가담자와 이들에 동조하고 협력한 판·검사 등 6000여 명을 체포해 구금 중이다. 비날리 이을드림 터키 총리는 사형제 부활을 검토하겠다고 밝혀, 피의 숙청이 뒤따르는 것 아니냐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이번 쿠데타 진압의 1등 공신은 소셜미디어(SNS)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 직후 아이폰 영상통화 앱인 페이스타임을 통해 가진 CNN 인터뷰에서 "거리로 나가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에게 국민 여러분의 답을 알려줘라"고 했다. 트위터를 통해서도 "국민 모두 광장과 공항으로 나가 (쿠데타 군인과) 맞서라"고 호소했다. 이런 메시지는 SNS를 통해 터키 전역으로 확산했고, 지지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들은 맨몸으로 탱크에 올라가 군인들과 싸웠다. 쿠데타군은 신속하게 앙카라에 있는 국영방송 TRT를 장악했지만 SNS의 힘을 당하지 못했다. 탱크를 몰고 정부 주요 시설을 점거하는 20세기적 쿠데타 방식이 SNS를 이용한 21세기의 여론전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이번 쿠데타는 과거 네 차례와 마찬가지로 세속주의파인 군부와 이슬람주의 정권 간의 충돌이었다. 군부가 건국 이념인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이슬람주의로 바꾸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군부는 14년째 이어지는 에르도안의 장기 집권, 그의 친·인척 부정부패 의혹 등도 문제 삼았다.


에르도안 정부가 지난 2년간 시리아 내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출범 등 주변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군부에 빌미를 줬다. 지난 1년 사이 터키 앙카라와 이스탄불 등지에서는 터키 쿠르드 반군과 IS에 의한 테러가 14차례나 발생했다. 이로 인해 터키 관광산업은 곤두박질을 쳤다.

 

▲탱크에 올라타고 저지 - 16일 새벽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민들이 군부 쿠데타 세력의 탱크 위로 올라가 군인들을 끌어내리며 맞서고 있다. /EPA 연합뉴스

 

터키 국영 통신에 따르면 쿠데타 주도 세력은 전() 공군 사령관 아킨 외즈튀르크와 아뎀 후두티 육군 2군 사령관, 에르달 외즈튀르크 육군 3군 사령관 등으로 구성된 군 내부 조직 '평화위원회'로 밝혀졌다. 이들은 지난 15일 밤 10시 무렵 훌루시 아카르 참모총장을 앙카라 인근 공군기지에 감금하고 탱크와 전투기, 헬기 등을 동원해 이스탄불과 앙카라의 방송국과 의회, 경찰본부 등 주요 시설 장악을 시도했다. 이날 오후 10 29분 지역 방송을 통해 이들이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해협 다리 등을 장악하고 이동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독일 망명설 등 자신에 대한 괴담이 유포되기 시작할 무렵 SNS로 건재한 모습을 드러내고 국민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정부군이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앙카라에서는 쿠데타 세력의 군용 헬기가 정부군 전투기에 격추됐다. 시민들은 맨몸으로 탱크를 제지하고 타고 있던 쿠데타군을 끌어내렸다.

 

▲대통령의 호소 - 15일 군부 쿠데타 당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아이폰의 영상통화 ‘페이스타임’을 통한 CNN 인터뷰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나서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번 사태로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는 한층 더 강화될 전망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쿠데타는 신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다. 군을 숙청할 수 있는 이유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반면, 쿠데타 이후 정정이 불안해지면서 터키 경제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16일 국제 외환시장에서 터키 리라화는 달러 대비 4.22% 폭락, 달러당 3.0157리라를 기록했다. 하루 하락 폭으로 지난 2008년 이후 가장 컸다. 장중엔 5.42%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리라화 약 세는 국내 물가 상승과 해외 투자 격감을 초래해 터키 경제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서방의 대()테러 전략과 중동 난민 해법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쿠데타 배후 꼽고 있는 펫훌라드 귈렌 송환을 둘러싸고 미국과 터키가 대립하면서 시리아·이라크 내 IS 격퇴전을 벌이는 국제 연합군 전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2016.07.20  '술탄' 에르도안 연봉 646억원… 터키판 아방궁 7500억원

[英 데일리메일, 터키 대통령 부부의 사치 행각 보도]

세계 정치인 중 연봉 순위 1위… 재산 2000억원… 궁궐 3채 보유
화장실 벽지 1롤에 300만원짜리

아내는 '쇼핑중독자'로 유명세… 백화점 문 닫고 다 쓸어담기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부인 에민 에르도안 여사가 "백화점 문을 닫게 하고 혼자서 물건을 쓸어담는 쇼핑 중독자(shopaholic)"라고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이 19(현지 시각) 보도했다.

 

터키에선 지난 15 '세속주의(정치·종교를 분리하는 터키의 건국이념) 군부'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하면서 독실한 무슬림인 에르도안 대통령 주도 아래 급격한 이슬람 국가화가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평소 "검소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이슬람 가치를 따르며 살아야 한다"고 밝혀온 대통령 부부의 사치 행각이 주목을 받고 있다.

 

 

황금 마니아' 후세인도 울고 갈 호화 궁궐 - 터키 수도 앙카라 교외에 위치한 에르도안 대통령궁()은 공사비만 5억파운드( 7520억원)가 들었다. 궁궐에서는 초호화 연회가 수시로 열리며(왼쪽 사진), 대리석·금()·실크 벽지·카펫 등 사치스러운 장식이 가득하다(가운데). 영부인 에민 에르도안 여사는 해외 순방 때 값비싼 골동품 매장을 찾아 상점 문을 닫고 나 홀로 쇼핑을 즐기곤 한다(오른쪽). /데일리메일

 

데일리메일은 "터키 '폭군'의 호화 궁궐은 황금에 집착했던 사담 후세인(전 이라크 대통령)조차 당황하게 만든다" "터키 국민의 25%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200만명 가까운 국민이 하루에 겨우 3파운드(4500)로 살아가는 모습과 대비된다"고 보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주식과 부동산 투자 등으로 13900만파운드( 209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축적했고, 궁궐 3개를 보유하고 있다. 연봉도 4300만파운드( 6462000만원)에 달해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 조사에서 '세계 정치인 연봉 1'에 올랐다.

 

▲에민 여사가 지난해 10월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했을 때 상점 문을 닫고 쇼핑을 하던 프랑스 가방‘롱샴’매장. /데일리메일

 

영부인 에민 여사의 씀씀이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데일리메일은 그녀가 '제트셋(jet set·제트족·비행기 등을 타고 세계를 누비는 부유층)'의 삶을 누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에민 여사의 취미는 1㎏에 1500파운드( 225만원)짜리 고급 차()를 황금 찻잔에 우려 마시는 것이다. 그녀는 해외 순방 때 쇼핑 일정을 빼놓지 않는데, 지난해 10월 초 벨기에 브뤼셀 애비뉴 루이제 거리에 있는 상점문을 닫게 하고 '나 홀로' 쇼핑을 즐기는 모습이 현지 언론에 포착됐다. 벨기에 일간지 라 카피탈은 "에민 여사가 쇼핑하던 애비뉴 루이제 일대 교통이 경호 때문에 한 시간쯤 통제되고, 일반 손님들이 상점에 출입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에민 여사는 이날 프랑스 중저가 가방브랜드 '롱샴' 가게에서만 1500유로( 190만원)를 쓰고, 다른 매장에서도 나 홀로 쇼핑을 즐긴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에르도안 대통령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서 각국 정상들과 난민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지난 8~9일 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에르도안 대통령이 폴란드 바르샤바에 출장 갔을 때도 에민 여사는 전통시장에서 골동품 37000파운드( 5600만원)어치를 사들였다. 폴란드 언론은 에민 여사 경호원들이 커다란 서랍장과 의자 등 고가구를 차량에 옮겨 싣는 모습을 보도했다.


수도 앙카라 교외 궁궐은 공사비만 5억파운드( 7520억원) 들었다. 수백 개 방의 방문 한 짝당 가격이 36000파운드( 5400만원), 카펫 비용은 700만파운드( 10520 00만원), 화장실에 바른 실크 벽지는 한 롤당 2000파운드(300만원)에 달했다. 데일리메일은 "에르도안 대통령은 호화 궁궐을 터키를 번영하게 만든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은 '철권 통치'의 부산물이라고 여긴다"고 비판했다.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궁궐 디자인에 대해서는 "(크고 무지막지한) '중국 기차역' 같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경진 기자

 

2017.07.11  "에르도안 물러나라" 터키 100만명 시위

450 '정의의 행진' 이끈 제1야당 대표가 주도
"
쿠데타 관련없는 사람 석방하라"
에르도안 "테러 세력 돕는 짓"

▲에르도안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강압 정치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9(현지 시각)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렸다고 AP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터키 경찰은 시위 참석자를 100만여 명으로 집계했으나, 야당 등 시위 주최 측은 200만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작년 7 15일 에르도안 정권에 대항한 군사 쿠데타가 진압된 후 1년 만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시위를 통해 에르도안 정부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커지고 있다는 게 확인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시위 참석자들은 흰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adalet(아달레트·정의)'라고 적힌 티셔츠와 모자를 쓰고 "사으! 후쿠크! 아달레트!(권리, , 정의)"를 외치며 비폭력 시위를 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군부 세력의 쿠데타 진압 이후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개헌을 단행하고 독재에 가까운 강압 정치를 하고 있다. 쿠데타 진압 이후 연루 혐의로 5만여 명이 체포됐고, 언론과 교육계, 경찰, 군 조직에서 14만명 이상이 쫓겨나기도 했다.

 

▲쿠데타 진압 1년만에 대규모 시위… 폭력 사태는 없었다 - 9(현지 시각) 터키 이스탄불 말테페 해안공원에 모인 시민들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강압 정치에 항의하며 “권리, , 정의”를 외치고 있다. 터키 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은 이날 25일 동안 이어진 앙카라~이스탄불까지 450㎞에 걸친 ‘정의의 행진’을 끝냈다. 이날 시위에는 경찰 추산 100만명(주최측 추산 200만명)이 모였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군부 세력의 쿠데타 진압 이후 독재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날 시위는 터키 제1 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주도로 이뤄졌다. 그는 지난달 15일 수도 앙카라에서 출발해 이스탄불까지 450㎞ 거리를 행진하는 '정의(正義)의 행진'을 이끌었고, 이날 행진을 마무리하는 시위를 이스탄불에서 열었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정부는 죄 없는 사람들을 즉각 석방하고, 1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국가비상사태를 즉각 해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린 공포를 무너뜨렸고, (에르도안)를 끌어내릴 방법을 찾아냈다" "정의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시위 때 폭력 사태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반정부 여론이 커질 것을 우려해 시위를 무력 진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를 이끈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도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본떠 비폭력 방식을 호소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시위에 대해 "국가 안보를 해치고 테러리스트 같은 위험 세력을 돕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야당은 "정부에 건전한 비판을 하는 시민들을 테러리스트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에 해가 되는 행위"라고 반박했다.

조선일보  런던=장일현 특파원

 

◆볼거리

◇이스탄불 히포드럼 광장

 

길이 480미터, 폭 117미터로 최대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차 경주장 유적으로 AD.200년경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만들었고, 330년 5월 11일 로마제국의 수도이전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던 이곳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나 장군의 개선 행진 혹은 정치적 반란의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전차경주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이륜전차로 달리는 경주로 당시 경주장 남쪽에 있던 네마리의 청동기마상은 4차 십자군(1204년) 이후 베니스로 약탈되어 옮겨져 지금현재 산마르코성당 정면에 놓여있습니다 오스만제국때 경주는 없어지고 1609~1616년까지 이곳의 돌을 이용해 블루모스크를 짓기도했습니다 현재에 길을 닦아서 경주장의 흔적을 보여주곤있으나, 실제 마차가 달리던 길은 2미터 아래에 아직도 묻혀 있습니다.

 

▲빌헤름 샘 - 독일황제 카이저 빌헤름 2세가 1901년 술탄 압둘자미드 2세에게 우정의 표시로 선물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오벨리스크

 

940년 콘스탄티누스가 만든 오벨리스크로서 표면에는 청동으로 입혀져있었으나 십자군전쟁당시 뜯어다가 용해되었다합니다... 지금은 껍데기가 다 벗겨진 앙상한 몰골로 남아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BC. 15C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3세가 태양신에게 바치기 위해 세운것으로 룩소의 카르낙신전에 있던것을 AD.390년 이곳으로 가져다 세웠다합니다.

 

 

▲세마리의 뱀이 나선형으로 몸을 감고있는 청동기둥은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신전에 있던것을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천도를 기념하기위해 가져왔으나 3개의 머리부분은 18세기 손상되었으며 일부분은 박물관에 보관중이나 남은 한개는 아직도 행방을 알지못한답니다

 

▲'에레바탄 사라이'(지하궁전)

 

터키어로는 Yerebatan Sarnici 지하 물궁전으로 532년에 완성된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시대의 지하 대저수지, 물은 아타튀르크거리에 있는 동로마시대의 수도교에서 끌어왔는데, 오스만 시대엔 톱카프궁전에서 거주하던 술탄들의 식수로도 공급되었답니다. 현재에 있는 통로는 1987년 복원당시 관광용으로 새로만든것으로 길이 140m,폭 70m에 높이가 14.9m, 약 8만톤의 물을 저장할수있고 내부의 기둥 총 갯수가 336개이며 그중 2개는 메두사의 머리가 조각되어있으며 각각의 기둥들이 모양이 다른것은 건축당시 만들어진것이 아니고 정복지에서 가져다 사용하였답니다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고대 저수조중 가장 가장큰 저수조라합니다

 

 

▲불행한 메두사의 모습을 표현한 기둥의 주춧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는 포세이돈의 사랑을 받는 다는 이유로 아테네의 질투를 받아 아름다운 머리결이 뱀으로 변하고 그의 눈으로 보는 것은 돌로 변하는 저주를 받게 되며 그것도 모자라 아테네는 페르세우스를 시켜 살해하지만 메두사를 사랑하는 포세이돈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날개 달린 말인 페가수스로 환생시킴니다.


아름다운 여인 메두사는 질투의 여신 아테네의 저주를 받아 가장 불행한 여인이 되었지만 사랑하는 포세이돈의 축복으로 결국 천마가 되어 하늘의 별이 되었답니다.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박물관은 본래 성당이었던 곳으로 성소피아 성당은 537년 금 90톤에 해당하는 비용을 들여 유스티아누스황제가 건립한 것으로 천년 넘게 계속된 비잔틴 제국 기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지름 31m의 대형 돔과 여러개의 보조 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오묘한 빛깔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 지금까지도 성소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비잔틴 건축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점령으로 인해 회교사원으로 개조되었는데 회교 시원에는 인물이나 상징물들의 그림이 없게 하기 위하여 그림을 훼손하지 않고 그위에 덧칠을 하여 회교 사원으로 사용. 지난 1935년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가 일체의 종교의식을 금하면서 성당도 회교사원도 아닌 박물관으로 바꿔서 덧칠을 약품처리하여 벗겨내니 전에 성당의 그림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답니다. 일부는 처리 과정에서 훼손되기도 하였지만 과거 성소피아 성당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답니다.

 

 

 

 

 

 

 

 

 

 

 

 

 

 

 

 

 

 

 

◇이스탄불의 풍경

▲눈 내리는 이스탄불

 

 

 

▲아름다운 야경

 

 

 

 

◇파묵칼레

 아름다운 터키 남부의 작은 마을 '파묵칼레'   세월이 빚어놓은 아름다움의 결정체 목화솜처럼 새하얗게 빛나는 석회층과 그 위로 흘러내리는 온천물이 만들어낸 풍경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터키어로 파묵은 `목화`를 뜻하고, 칼레는 ``을 뜻하므로 파묵칼레는 `목화의 성`이라는 뜻이다멀리서 보면 속내를 드러낸 하얀 목화솜이 마치 성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때부터 온천지로 각광받은 파묵칼레에서는 질 좋은 칼슘 중탄산염을 함유한 온천수가 솟아난다이 곳의 온천수는 이산화탄소, 유황성분과 나트륨, , 마그네슘 등이 함유되어 있어 치유 효과가 뛰어나 많은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9uqFUc_K5wk  -  고대도시 카묵칼레

 

 

 

 

 

 

 

 

 

 

 

 

 

 

◇카파도키아

 

 

 

 

 

 

 

 

 

 

 

 

 

 

 

 

 

 

 

 

 

 

 

 

 

 

 

 

 

 

 

 

 

 

 

 

 

 

 

 

 

 

 

▲암굴 교회

 

 

 

 

 

▲잘생긴 남근바위들 - 요정의 굴뚝

  

신이 민든 조형물들

바위기둥 지형은 화산과 빗물 바람에 의해 형성됐다고 한다. 카파도키아 일대는 화산지대였다.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제일 높은 에르지예스산과 하산산이 폭발해 화산재가 쌓였다. 화산재는 응회암으로 굳었고,그 위에 용암이 흘렀다. 다음은 빗물과 바람 차례.스며든 빗물에 바위층의 부드러운 부분이 씻겨 내려갔다. 바람은 흙부스러기를 날려보내며 마무리 작업을 했다.

 

 

 

 

 

 

 

 

 

 

 

 

 

 

 

 

 

 

 

 

 

 

 

 

 

 

 

 

 

 

 

 

 

 

 

 

 

 

 

 

 

 

 

 

카파도키아는 단순한 자연관광지는 아니다. 성지순례 코스의 주요 목적지이기도 하다. 괴레메 야외박물관에 암굴교회가 있다. 카파도키아에는 200여개의 암굴교회가 있는데 이 중 10개가 괴레메에 있다. 로마시대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어온 기독교인들의 신앙공간이라고 한다. 여러 암굴교회의 벽과 천장에 성화가 그려져 있다. 예수의 행적이나 성경의 내용을 옮긴 것들이다. 토칼르교회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비잔틴시대 벽화를 제외하면 많이 훼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