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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69/ 콜롬비아 - 콩고 - 쿠르드 - 쿠바

상림은내고향 2022. 7. 22. 15:14

지구촌 여행/ 국가별69/ 콜롬비아 - 콩고 - 쿠바

■ 콜롬비아 Colombia

콜롬비아 공화국, Republic of Colombia

▲국기

 

수도는 보고타. 공식언어는 스페인어이며 화폐단위는 페소다. 인구의 대부분은 산악 내륙에 집중되어 있다. 국민은 대다수가 메스티소다. 국가의 이름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이름을 땄다. 스페인 식민지로서의 역사를 강하게 나타낸다. 남아메리카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한 로마 가톨릭교 문화로 나타난다. 내륙 산계의 삼림과 사바나에는 인디언 부족들이 전통방식의 삶을 살고 있지만 서늘한 산악지대에는 현대적 도시들이 전통적 농촌 풍경과 공존한다. 경제는 전통적으로 농업에 기반하고 있는데, 특히 커피와 과일 생산이 중심이다.

 

역사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대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스페인인들의 도착 당시에는 서부 산간지역에 치브차어족 인디언이 확고한 정치제도를 이루지 못한 채 모여살고 있었다. 스페인의 콜롬비아 정복은 사실상 1525년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가 산타마리아 시를 건설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533년 페드로 데 에레디아가 세운 카르타헤나는 신대륙 내 스페인 왕국의 주요 해군·상선 기지가 되었다.

 

1550년경 페루 부왕령의 일부인 산타페데보고타 아우디엔시아가 세워지면서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지역 인구는 스페인 정복 이후 번진 질병과 인디언에 대한 경제적 수요 때문에 감소했다. 현존하는 인디언들의 독특한 문화 특징들은 문화 변용과 통혼으로 파괴되었다.

 

1740년 아우디엔시아는 새롭게 창설된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지금의 콜롬비아·베네수엘라·에콰도르로 구성)으로 이전했다. 몇몇 집단, 특히 새롭게 부상한 크리올 중산층은 행정 개선과 무역 증진으로 번영을 누렸다. 1819년 보야카에서 스페인이 패배한 후 누에바그라나다가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이 된 1821년 콜롬비아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프란시스코 데 산탄데르의 지도하에 질서가 잡힌 정부가 세워졌으나 1840년 내란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자유당과 보수당이라는 2개의 주요정당이 조직되었다. 끊임없는 폭력사태 속에 양당간의 정권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자 드디어 천일전쟁(1899∼1903)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후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이 이어졌으나 1948년 자유당과 보수당 사이의 적개심이 다시 폭발되었다.

 

1958년 양당은 서로 교대로 집권한다는 계획에 동의했다. 1968년에 통과된 개정 헌법에 따라 1974년 대통령과 국가 수준의 모든 입법단체들이 형평성과 관계없이 선출되었다. 1990년대까지 기존의 정당들이 주도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내란과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게릴라전이 전국에서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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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콜롬비아 까뇨 크리스탈레스 강 - 노란 빨간 녹색과 검은색벽으로 치장한 강

 

 

▲콜롬비아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 12. 3. 8.

 

▲칼다스 지역 루이스 화산 - 13. 4. 10

 

◆일상

▲콜롬비아의 악령 내쫓는 퇴마의식

 

▲마약단속반이 압수한 5톤 가량의 마약 12.9.16.

 

▲콜롬비아 학생이 시위중

 

▲뽀빠이

 

▲옥외 에스컬레이터- 콜롬비아의 달동네

 

▲몬세라테 교회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와 야경

 

▲콜롬비아는 여름 12.12.16.

 

▲토마토 축제

 

▲칼리에서 열리는 축제 12.12.28

 

 

▲콜롬비아 메데진

 

▲콜롬비아 보고타 시내

 

 

▲보고타 볼리바르 광장

 

 

▲홍수 2011.11.23. 보고타

 

▲폭우 11.12.5.

 

 

▲홍수 12. 6. 24

 

▲콜롬비아 칼리 폭우 홍수 산사태로 사망자 이재민 수천명 발생 17.5.15

 

 

 

 

 

 

 

 

 

 

 

■ 콩고 Congo

콩고 공화국, Republic of the Congo

▲국기

 

중서부 아프리카의 적도에 걸쳐 있는 나라. 수도는 브라자빌이며 화폐는 세파프랑이다. 중앙계획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며 석유 생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결과 농업·임업·제조업 부문에서 국가 경영에 문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보건상태가 매우 나쁘다.

 

인구의 거의 절반이 콩고 부족에 속한다. 콩고 부족들로는 순디족·콩고족·랄리족·쿠그니족·벰베족·캄바족·돈도족·빌리족·욤베족 등이 있다.

 

테케족은 보다 수가 적고 우방기족도 마찬가지인데, 우방기족에는 마쿠아·쿠유·음보시·리쿠알라·응갈라·봉가 등의 지족이 포함된다. 상가족, 즉 가봉의 반투인도 여러 하위 집단으로 나뉜다. 빙가 피그미족은 작은 무리들을 이루고 산다. 콩고에 있는 유럽인의 대다수는 프랑스인이며, 소수의 아프리카 외국인, 포르투갈인, 중국인도 있다. 원주민은 모두 반투계의 여러 언어를 쓰며, 이 나라 곳곳에 흩어져 사는 피그미족은 이웃 주민들이 쓰는 반투어를 쓴다. 공용어로는 어느 한 부족어에도 우선권을 주지 않기 위해 프랑스어가 채택되었다.

 

전체 인구의 약 1/2이 전통 신앙을 지키고 있다. 그리스도교도 가운데는 약 2/3가 로마 가톨릭교도이며, 나머지는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이고 최대 종파는 콩고 복음주의 교회이다. 예언자 시몽 킴방구가 일으킨 지상 예수 그리스도 교회 신도들은 아프리카 최대의 독립 그리스도 교회를 이루고 있으며, 그보다 작은 여러 독립교회와 소수의 이슬람교 공동체도 있다.

 

정부는 인구성장의 수준 및 추세와 출산율을 적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80년대초의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45명, 사망률은 1,000명당 17명이었다. 연간 자연증가율은 2.8%였다.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다. 2022년 추계 인구는 573만 1,123명이며, 전체 인구의 66%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15세 이하의 인구의 비율은 42%이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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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고 ‘암흑의 중심서 아프리카 중심으로’

  2015 8월 콩고민주공화국 반둔두 지역에서 KOICA가 말라리아 퇴치사업의 일환으로 콩고인 간호사들의 역량강화사업을 시행하면서 찍은 모습.

 

권기창 / 駐콩고민주공화국 대사

콩고는 암흑의 나라였다. 콩고의 역사는 시련과 전쟁의 역사다. 신생국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는 1870년대 콩고 전역을 탐험한 헨리 스탠리를 콩고에 보내서 400여 부족의 콩고 부족장들과 주권이양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레오폴드는 1885년 베를린 회의에서 열강들로부터 콩고를 자신의 사유지로 인정받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자전거 발명 및 차량의 고무타이어 사용으로 고무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 레오폴드 2세는 콩고 각 마을에 고무 채취 할당량을 정하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주민들의 손목을 자르거나 마을을 불살라버렸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인구의 절반이 살해되거나 전염병, 기아 등으로 죽었다. 폴란드 출신 작가 조지프 콘래드는 1890년대에 콩고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후, 소설 ‘암흑의 중심(Heart of Darkness)’을 썼다. 그 이후 암흑의 중심은 콩고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콩고를 생각하면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 간의 복싱경기와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시절에 벌어진 국제전쟁을 쉽게 떠올리게 된다. 1974년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의 이전 국명)의 수도인 킨샤사에서 알리와 포먼 간의 복싱경기가 개최됐다.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고 전성기가 지난 32세의 알리가 40연승 무패가도를 달리던 25세의 포먼에게 9 KO승을 거두었다. 모부투 대통령과 프로모터 돈 킹이 후원하고, ‘정글의 난투극(rumble in the jungle)’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이 경기는 20세기 최고의 복싱경기로 남았다.

당시의 경기 포스터를 보면, 이 경기가 국민에 대한 모부투 대통령의 선물이라고 쓰여 있다. 모부투가 이 경기를 후원한 것은 자이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모부투는 이 경기로 자이르를 세계에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된 선물이 아니었다. 그가 1965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32년간 자이르는 경제적으로 사실상 붕괴됐다

1960
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직후만 해도 콩고는 아프리카에서 앞서가는 나라여서 인접국에서 유학을 올 정도였다. 모부투 정권이 부패와 실정을 일삼자 로랑 카빌라(현 대통령 조제프 카빌라의 부친)가 르완다 등 인접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1997년 모부투 정권을 타도하게 된다. 이후 콩고는 인접국가들이 편 갈라 참여해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소위 ‘아프리카판 세계대전’을 치렀다. 콩고의 동부지역에는 아직도 르완다 및 우간다의 반군세력이 활동하고 있고, 콩고군은 유엔평화유지군(MONUSCO)과 함께 반군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을 진행 중이다

1960
년대에는 콩고의 경제상황이 우리와 비슷했으나, 그 이후 정세 불안, 정부의 행정 역량 부족 등으로 현재 1인당 국민소득 450달러의 최빈국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콩고는 구리, 코발트, 다이아몬드 등 풍부한 광물자원과 7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아프리카의 대국이다. 국토는 스페인을 제외한 서부 유럽과 같은 규모이고, 인구는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암흑의 중심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중심(Heart of Africa)’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콩고가 아프리카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평화와 개발이 긴요하다. 콩고 장관들을 만나보면 한국이 콩고의 발전 모델이라고 하면서 급속한 성장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우리나라는 콩고의 국가재건사업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의 발전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KOICA 및 여러 부처가 농촌개발, 보건·의료, 식수개발을 중심으로 개발원조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카빌라 대통령의 요청으로 콩고인들의 역사적 정체성 확보를 위해 2000만 달러 규모의 국립박물관 건립사업도 진행 중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라는 책을 쓴 대런 애스모글루 MIT 경제학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 하버드 정치학 교수는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적인 정치·경제제도가 발전과 번영을 불러오고, 지배계층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낳는다고 썼다. 콩고가 ‘아프리카의 부상(Africa Rising)’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적인 정치·경제제도를 확립해나가는 것은 콩고 모든 정치지도자의 과제다. 올해 11 27일 콩고에서는 대선이 예정돼 있다. 국민의 화합과 존중 속에 평화롭게 대선이 실시될지 국제사회가 주시하고 있다. 이번 대선이 콩고가 아프리카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콩고 국민에게 선물로 안겨줄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문화일보

 

◆풍경

◇사막

▲고비사막 속의 마을

 

 

 

 

 

 

 

 

◇호수

▲용암호수 - 콩고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용암호수

 

 

 

▲니이라의 화산 - 세계에서 가장 큰 용암 호수

 

◇화산

▲나이라가라  화산

 

 

▲콩고민주공화국 나물라기라 화산에서 거대한 용암 분출 11.11.11.

 

◆일상

▲정부군

 

▲내전으로 인한 콩고 난민들

 

 

▲12.7.25.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전쟁을 피해 피난가는 사람들

조선일보

 

■ 쿠르드족 Kurd

 튀르키예·이란·이라크 인접지역인 쿠르디스탄과 시리아·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민족. 인구는 전 세계에 걸쳐 3,0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며, 국가를 이루지 못한 민족으로는 가장 인구가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으로 메소포타미아 평원과 튀르키예, 이란의 고지대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생활을 했으나 근대에 들어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부락을 이뤄 정착농경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도이지만 수피교도도 많으며 오랫동안 특정 지역에서 살아왔지만 민족국가를 이룬 적은 없었다. 현대에 들어 거주하는 나라에서 민족갈등이 일어나면서 민족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무장한 쿠르드족.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민족 중 세계에서 인구가 많은 편이다. 내부적으로도 분열되어 있어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극렬 독립파인 PKK와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등으로 분열되어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족을, 이라크는 이란의 쿠르드족을 지원해 갈등 관계에 빠지기도 했다.

 

쿠르드라는 이름의 유래는 7세기경 이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르드족의 유사 이전 시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의 선조는 1,000년 동안 현재의 거주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메소포타미아 제국 초기의 기록들을 보면 '쿠르드'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산악부족들이 자주 언급된다. BC 401년 지금의 튀르키예 국경 바로 남쪽 이라크 자후 근처에서 크세노폰과 텐사우전드를 공격했던 카르두초이족은 쿠르드족으로 추정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전통적으로 쿠르드족은 메소포타미아 평원과 튀르키예와 이란의 고지대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생활을 해왔고, 농사는 최소한으로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각 나라의 국경강화조치로 계절적인 유목생활이 가로막혀 대부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포기하고 부락을 이루어 정착농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쿠르드족은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도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수피교도도 많으며, 나머지는 신비주의적·이단적인 종파를 믿는다. 이들은 오랫동안 특정 지역에서 살아왔지만 민족국가를 이룬 적은 없다. 이들의 군사적인 용맹성은 널리 알려져 많은 군대에서 용병으로 활약했다. 서구에 가장 널리 알려진 쿠르드족 출신의 전사인 살라딘은 쿠르드족의 군사적인 명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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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1  쿠르드 독립, 가능할까?

⊙ 터키·이라크·이란·시리아 등에 3000만명이 흩어져 살아
⊙ 터키, 시리아 좌파 쿠르드 YPG IS 격퇴에 공 세우자 ‘살라훗딘의 후손들’이라는
민병대 만들어 견제
⊙ 쿠르드족이 잠잠하던 이란에서도 최근 이란쿠르드민주당이 혁명수비대원 살해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지난 9 3일 독일 쾰른에서는 수천 명의 쿠르드인이 모여 터키가 투옥하고 있는 PKK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의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AP/뉴시스

 

2015 9 2 3세짜리 시리아 난민 아이가 터키의 지중해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아이의 가족은 IS를 피해 시리아에서 터키로 들어왔다가 보드룸(Bodrum)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그리스 고스섬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높은 파도에 보트가 전복되면서 아버지만 살고 아이와 아이 엄마, 5세 된 형이 익사했다.


출발지 보드룸 해변으로 밀려들어 와 잠자는 듯 모래에 얼굴을 묻고 등을 보이며 누워 있는 알란 쿠르디(Alan Kurdi)의 최후 모습은 터키 기자의 카메라에 담겨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이 사진 한 장으로 난민 수용을 놓고 격론을 벌이던 유럽의 여론이 기울어 많은 시리아 난민이 새 삶을 찾았다.


아이의 성은 쿠르디가 아니라 셰누(Shenu)인데, 쿠르드(Kurd)족이기에 쿠르드 사람이라는 뜻인 쿠르디로 불렸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아이의 비극적인 죽음의 원인이 된 시리아 내전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쿠르드족의 슬픈 역사도 계속 진행 중이다. 2011년 ‘아랍의 봄’과 함께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터키·이라크·이란 등 4개국에 걸쳐 살고 있지만 세계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약 3000만명에 달하는 나라 없는 민족 쿠르드인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쿠르드, 그들은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국가를 이루지 못한 것인가?

 

터키에서는 ‘산사람들’이라고 불러

쿠르드라는 말은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의 점토판에 카르다카(Kardaka)로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두 단어의 관계는 정확하게 규명하기 힘들다. 쿠르드인은 언어적으로 이란어계에 속하는 사람들로 주로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 거주했다. 쿠르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터키가 쿠르드라는 말 대신 ‘산()사람들’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다.


쿠르드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7세기 이후 이슬람 시대에 들어서다. 쿠르드인들의 땅이라는 뜻인 쿠르디스탄(Kurdistan)이라는 표현은 셀주크튀르크의 마지막 술탄인 산자르(Sanjar, 1157년 죽음) 시대에 처음 쓰였다. 산자르는 바하르(Bahar)를 수도로 하는 쿠르디스탄주를 만들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로레스탄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이후 시대에 따라 쿠르디스탄의 면적은 부침을 거듭하다가 16세기에 들어서는 오스만튀르크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다툼 속에 영토의 통일성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게 됐다. 오늘날 쿠르디스탄이라는 말은 쿠르드인이 사는 국가 중 이란에서만 공식적인 주명으로 쓰고 있다. 현대 이란어로는 코르데스탄(Kordestan)이라고 부르고, 주도는 사난다지(Sanadaj), 면적은 29137km2로 경기도의 3배 크기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과 프랑스가 주축이 된 승전국들은 1920 8 10일 프랑스 세브르(Sevres)에서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반도를 완전히 해체하는 내용을 담은 조약에 서명했다. 이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남쪽에 쿠르드인만의 영토를 획정하여 쿠르디스탄 독립국 설립 가능성을 열어두었는데, 오늘날 시리아나 이라크를 포함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시리아는 프랑스가, 이라크는 영국이 이미 차지했기 때문이다.


기울어져 가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술탄은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이에 반대하여 앙카라에 정부를 세우고 2년간 터키 독립전쟁을 벌여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켰다. 그 결과 세브르 조약은 폐기되고, 로잔 조약이 1923년에 맺어졌다.


3000만명의 나라 없는 사람들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시리아, 이란 등에 3000만명이 흩어져 사는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이다.

 

 이에 따라 1914년부터 쿠르디스탄 독립을 위해 오스만튀르크에 맞서던 쿠르드인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자신들이 지배하는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쿠르드인을 위해 땅을 떼어 독립국을 세워주리라 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라크라는 나라를 만들면서 영국은 쿠르드 지역을 이라크에 붙여버렸고, 프랑스 역시 시리아를 다스리면서 쿠르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국가는커녕 자치권마저 확보하지 못한 쿠르드인들은 새로이 만들어진 여러 근대 국가 안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터키에 약 1500만명, 이란에 약 600만명, 이라크에 약 600만명, 시리아에 약 200만명 등 무려 3000만명에 달하는 쿠르드인들이 서로 다른 국적을 지니게 되었다.


터키는 1990년대 초까지 국민의 20%를 차지하는 쿠르드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였다. 1991년까지 쿠르드어를 금지하였고, 2003년까지 쿠르드식 이름을 쓰지 못하게 막았으며, 쿠르드 문자 역시 2013년까지 불법이었다.


시리아는 쿠르드인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아랍식 이름을 쓰지 않으면 출생신고도, 학교 입학도, 사업도, 출판도 불가능하였다. 쿠르드어 교육이 금지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2011 4월 하사카 지역 쿠르드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에 대통령이 서명하기 전까지 이들은 외국인으로 살았다.


이라크 쿠르드인들은 사담 후세인이 몰락한 후에야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인 1988 3 16일 아침 쿠르드 반군을 토벌한다는 목표 아래 이라크군이 북부 이라크 쿠르드 마을인 할랍자에 생화학가스를 살포했다. 순식간에 5000여 명이 살해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망자는 12000명으로 더 증가하였다. 무자비한 범죄였다. 또한 1991년 쿠르드인들의 항거 역시 무참히 진압했다.


이에 비하면 이란의 쿠르드인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삶을 유지한 편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직후 쿠르드인들이 자치권을 요구하며 항거를 하다가 진압된 이래 표면적으로 쿠르드인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 이래 민족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족은 세속적인 개념으로 이슬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민족을 모른다.


잠잠하던 쿠르드 문제가 최근 중동 정세의 변화를 타고 똬리를 틀고 있다. 북부 이란에서 쿠르드 반정부 조직인 이란쿠르드민주당이 이란 혁명수비대 군인을 사살하면서 거의 20년 만에 투쟁에 나섰다. 이란 정부가 쿠르드인 지역에서 쿠르드인들의 정치활동을 갈수록 더 탄압하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라크의 쿠르드 지방정부

현재 유일하게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쿠르드 공동체는 이라크 쿠르드 지방정부(이하 KRG·Kurdistan Regional Government). 2003년 사담 후세인의 압제에서 해방된 이래 KRG의 도약은 놀랍다. 지난 8월 방한한 팔라 무스타파 바키르 KRG 대외관계장관은 “이라크 쿠르드인들이 자이툰 부대가 보여준 봉사정신, 친절, 우의를 잊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라크 쿠르드인들의 미래는 과거보다 훨씬 위대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강조했다. 그는 “쿠르드 지방정부는 세속 정부이기에 종교적 도그마에서 자유로우며, 주변 국가의 쿠르드 공동체와 별도로 개별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면서 이라크라는 지역의 한계를 벗어난 쿠르드 민족국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정답이라는 말이다.


KRG
의 목표는 한국처럼 발전하는 것이다. 한국에 바라는 것은 쿠르드인들이 자생할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해 달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쿠르드인들은 집안에서 아주 훌륭한 치즈를 생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표준화된 공정을 통해 품질을 유지한 채 대량생산하고 판매하여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법을 모르기에 그러한 법을 한국인들이 가르쳐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국인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거듭 강조했다. KRG는 바그다드 중앙정부와 긴밀히 협조하며 이견을 대화를 통해 하나씩 해결하고 있다.


쿠르드 지방정부가 독립을 원한다 해도 현재 국제정세는 독립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지난 3월 중동의 유력 일간지 《알-모니터》와 가진 인터뷰에서 바르자니 쿠르드 지방정부 대통령은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한 뒤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독립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미 1월에 독립국가 건립 국민투표를 제안하기도 한 바르자니는 쿠르드 독립국가 수립에 국제정세가 우호적이라고 강조했다.

 

어려운 독립의 길

▲작년 9 2일 터키 해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알란 쿠르디는 쿠르드족 어린이였다. 사진=AP/뉴시스
 

쿠르드 독립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쿠르드 지방정부는 예산을 중앙정부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고, 대형 국책사업도 중앙정부의 뜻을 거슬러 독자적으로 할 수 없다. 국제정세 역시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은 쿠르드 독립에 묵묵부답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은 바그다드 중앙정부와 이란이다.


특히 이란은 공개적으로 쿠르드 지방정부의 독립을 반대하고 있다. 현재 이라크의 시아파 정부는 이란의 우군이다. 이라크는 테헤란의 ‘꼭두각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란은 쿠르드 지방정부가 이라크 헌법을 준수하여 이라크 안에 남길 강력히 원하고 있다. 이라크의 분열은 중동 역내 및 국제안보를 해치고 IS와 이스라엘만 이롭게 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이란의 입장은 사실 터키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터키는 독립을 꿈꾸는 쿠르드 반군 PKK(쿠르드노동자당), 이와 연계된 것으로 간주하는 시리아의 YPG(시리아 쿠르드민병대) IS와 다를 바 없는 테러리스트로 규정, 응징하고 있다. 그러나 KRG와는 밀접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란은 터키의 친()이라크 쿠르드 정책을 시아파 이라크 정부와 이란을 의식한 행보로 여기고 있다. 터키가 전통적으로 수니파 이슬람에 속하는 쿠르드와 연계하여 수니 세계의 맹주가 되고자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란은 터키의 쿠르드 문제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있다. 국내 쿠르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KRG를 후원하다가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KRG
는 이란과 터키 사이에서 경제를 통한 상생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터키가 KRG에 우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석유를 공급받고 있고 터키의 대()이라크 수출의 상당부분이 쿠르드 지역에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또 터키 기업이 수도 에르빌에서 각종 사업을 벌이며 경제이익을 거두고 있다.


터키, YPG의 작전 방해

▲시리아의 쿠르드족 민병대 YPG 병사들. 터키는 YPG의 약진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KRG는 이란과도 원유 거래를 하고자 하나 현재 파이프라인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현실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유조차를 통해 거래하는 것은 도로 기반이 열악하여 경제적 타산이 맞지 않는다. 파이프라인이 건설된다면 양측의 관계도 현재보다 더 가까워질 것이다.


자국과 이웃 국가 쿠르드에 대한 터키의 정책은 자국 내 쿠르드 반군 세력 제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터키로서는 반()IS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미국의 든든한 아군인 시리아의 YPG의 선전(善戰)이 몹시도 껄끄럽다. 특히 YPG가 터키 국경과 맞닿은 시리아 도시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것에 대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훼방까지 놓고 있다.


가장 도드라진 예가 바로 코바니(Kobani) 전투다. 코바니는 시리아 쿠르드 지역으로 터키 국경에 가까운 도시다. 이곳을 IS가 공격해 오자 코바니와 가까운 터키의 국경도시 지즈레(Cizre)의 쿠르드인들이 국경을 넘어 코바니 쿠르드인들을 돕고자 하였으나 터키 정부가 막았다.


이에 분노한 터키 쿠르드인들이 터키군과 무력 충돌을 벌여 2014 10월에만 35명이 사망하였다. 터키의 PKK 지도자 오잘란은 1999년 투옥됐다. 그는 옥중 메시지를 통해 PKK 동지들에게 유혈 투쟁을 멈출 것을 당부하면서 터키 정부에 휴전을 제안하였고, 한동안 잘 지켜졌으나 IS로 인하여 현재는 사실상 평화가 깨진 상태다.


터키, 시리아 쿠르드인들 간 내분 조장

▲아유브왕조를 창건한 쿠르드족 출신 이슬람의 영웅 살라훗딘. 19세기 프랑스 판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이다.

 

터키의 최대 관심은 IS가 아니라 PKK와 함께 PKK와 연계된 시리아 쿠르드의 약진이다. 이를 막기 위해 시리아 쿠르드 PYD(민주통일당) PYD의 무장조직인 YPG가 터키 국경 인근 시리아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 IS를 공습하겠다던 공군기가 IS와 전투를 벌이는 YPG를 공격한 것도 그런 이유다.

 

PKK, PYD, YPG는 모두 좌파 조직이다. 같은 쿠르드인이지만 이라크 지방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코바니 전투 시 PKK 소속 전투원들이 시리아로 들어가 싸우는 것을 막는 대신 이라크 쿠르드군 조직인 페시메르가(Peshmerga)가 터키를 거쳐 시리아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 것도 쿠르드의 사상적 차이를 계산해서다.

 

시리아 쿠르드는 시리아 내전이라는 기회를 살려 쿠르드 자치정부를 세우고자 미국의 아군이 되어 반IS 전선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런데 터키 정부는 이를 막고자 12세기 십자군 전쟁의 무슬림 영웅으로 쿠르드 출신인 살라훗딘(살라딘)의 이름을 딴 새로운 시리아 쿠르드 군사 조직 ‘살라훗딘의 후손들’을 후원하여 IS에 맞서게 하고 있다. 터키는 더 나아가 이들에게 같은 시리아 쿠르드인인 YPG를 공격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살라훗딘의 후손들’ 사령관 마무드 아부 함자는 자신의 조직은 600여 명의 전사(戰士)로 구성되어 있고, 터키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YPG는 아랍인과 쿠르드인 사이에 긴장감을 조성해 분열을 일으키고 쿠르드인을 적대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IS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 쿠르드 자체 분열의 참극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살라훗딘은 십자군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집트 카이로를 건설한 이스마일, 시아파, 파티마조를 몰아내고 아유브(Ayyub)조를 세운 무슬림의 영웅이자 3000만 쿠르드인의 자랑이다. 쿠르드인들은 그의 군대와 아유브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유브조가 쓰러진 후에도 쿠르드인들은 시리아 지역에서 쿠르드 정권을 한동안 유지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의 이름을 딴 후손들이 터키의 전략에 동조하여 시리아 내 쿠르드 세력을 공고하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는지 모른다.

 

미국의 고민

 미국은 터키가 YPG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것이 못마땅하다. YPG가 러시아 쪽으로 기울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터키 때문에 러시아와 밀착한다면 시리아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진다. 그렇지 않아도 YPG는 바샤르 정권과 암묵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 서로의 이익을 얻기 위한 적대적 우호관계다. ‘살라훗딘의 후손들’이 YPG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이유다. 


1920
년 세브르 조약이 성사되었더라면 쿠르드는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난 현재 3000만 쿠르드인이 시리아, 이라크에서 독립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187년 살라훗딘이 십자군의 항복을 받아 예루살렘에 승리자로 입성하였듯 쿠르드인이 기나긴 슬픈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과거보다 위대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을까? 역사가 타바리의 말마따나 오로지 신만이 잘 아시리라(알라후 아을람)!

[월간조선 2016 10월호 /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2017년 09월 22일  IS 격퇴 ‘일등공신’ 쿠르드족, 이번엔 ‘나라 없는 설움’ 날릴까

  지난해 북부 시리아 한 사격장에서 이슬람국가(IS)와의 전투를 앞두고 훈련을 받고 있는 시리아민주군(SDF) 모습. 쿠르드족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SDF에 대거 참여해 있다. AP 연합뉴스

 

 

25일 독립 주민투표 

세계 최대의 국가 없는 단일 민족 쿠르드족이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퇴조를 활용해 독립 염원을 이룰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라크, 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던 IS는 현재 주변국과 국제사회의 합동 공세에 의해 급격히 세를 잃어가고 있다. 이라크, 시리아 등 IS와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들을 비롯해 미국, 러시아, 이란 등은 IS가 점령했던 지역을 놓고 저마다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여기에 큰 변수가 있다. 바로 쿠르드족이다. IS 격퇴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희생을 감수한 이들 쿠르드족은 그 대가로 민족의 염원인 독립국가 건설 혹은 자치 권한 확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고유 언어와 문화를 지닌 쿠르드족은 ‘중동의 집시’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터키(1600만 명), 이란(600만 명), 이라크(500만 명), 시리아(200만 명), 아르메니아 국경에 걸쳐 있는 ‘쿠르디스탄’이라는 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고대 한때 중동 지역 최강을 자랑했던 메디아 후손을 자처하는 쿠르드족은 쿠르디스탄과 주변 지역에서 크고 작은 국가를 세우며 생존하다가 15세기 오스만튀르크 제국 등장 이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캅카스 계통인 쿠르드족은 7세기 무렵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이 세력을 확대하자 이민족으로선 최초로 이슬람교(수니)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르드족은 그동안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지만 강대국의 배신, 주변국의 반대, 국제사회의 외면 등으로 나라 없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오죽하면 ‘쿠르드족에는 친구가 없고 산(山)만 있다’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다. 이라크 정부군이 IS의 이라크 내 최대 근거지 키르쿠크주(州) 모술을 탈환하면서 쿠르드족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이라크 정부군의 모술 점령 과정에서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KRG)가 운영하고 있는 ‘페슈메르가(죽음에 맞서는 자)’ 민병대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라크 쿠르드족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미국을 지원한 대가로 북부지역에 자치정부를 세웠다. KRG의 영토는 공식적으로 다후크, 아르빌, 술라이마니야 등 3개 주지만 니나와, 키르쿠크 등 북부 4개 주도 현재 페슈메르가가 통제하고 있다. 마수드 바르자니 KRG 수반은 IS 격퇴 과정에서 생긴 발언권에 힘입어 오는 25일 독립 투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대상은 쿠르드 관할 3개 주를 비롯해 쿠르드족 주민이 많은 키르쿠크, 니나와주 일부다. 이러한 시도는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반대에 직면했다. 일단 이라크는 이에 대해 강경하게 나오고 있다. 키르쿠크주가 이라크 부의 원천인 원유 매장 밀집 지역이라는 점도 고려가 됐다. 이라크 정부는 군사적 대응까지 예고하고 있다. 터키, 이란 등도 이러한 쿠르드족의 움직임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자국 내 쿠르드족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미국, 러시아 등 국제사회도 기존 질서를 흔들지 말라며 이에 반대하고 있다. 다만 중동지역 국가들의 공공의 적 이스라엘만이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하고 있다. 중동 지역 적대 국가들의 교란을 유발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시리아에서도 사정은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재 미국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민주군(SDF)과 러시아·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 정부군은 IS에 맞서 힘을 합쳐 싸우고 있는 상태. 이미 전세는 반(反)IS 쪽으로 넘어와 있다. SDF는 20일 IS의 최대 거점인 시리아 락까를 80% 탈환하는 등 탈환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제 관건은 SDF와 시리아 정부군 중 어느 세력이 IS의 빈자리를 차지하느냐는 것이다. 특히 터키는 자국 내 쿠르드족 무장조직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인민수비대(YPG)가 밀접하게 연관됐다고 보고 SDF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미국의 입장은 애매하다. 시리아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갖고 있고 YPG가 주축이 된 SDF를 지원하고 있지만 시리아 내 쿠르드족 자치국가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선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나라 없는 설움 속에서 오랜 기간 살았던 쿠르드족이 주변 대다수의 반대 속에서 기적적으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유회경 기자 yoology@munhwa.com 

 

◆2017-09-25  중동의 집시’ 쿠르드족은 누구…왜 독립 원할까

국가 없는 최대 단일민족…이라크서 독립투표
IS로 명분 찾은 KRG…국제사회는 ‘싸늘’

이라크 내 쿠르드족 자치정부(KRG)가 민족의 오랜 염원을 담은 분리독립 투표를 25(현지시간) 개시했다. 

이라크 정부와 주변국, 이해관계가 얽힌 서방 국가들은 연일 반대와 경고를 던지고 있지만 통하지 않는 모습이다. 쿠르드족은 어떤 이들이며 왜 법적 구속력도 없는 이번 투표를 추진하는 것일까 


◇중동의 집시 

쿠르드족은 흔히 ‘중동의 집시’로 불린다. 2500~3500만명의 단일 민족이 고유 문화·언어·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국가 없이 중동 산악지대에 흩어져 있어서다

기원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기원전 3000년 전 제작된 수메르 점토판에 적힌 ‘카르다’(karda) ‘카르두치’(Qarduchi) ‘쿠르티’(Qurti)가 원조란 가능성을 점칠 뿐이다. 

 

비아랍 민족인 이들의 종교는 수니파 이슬람교가 대다수다. 기독교를 믿는 이들도 있다. 오늘날에는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를 중심으로 거주한다.

가장 많은 쿠르드족이 사는 국가는 터키다. 전체 인구의 20%에 달하는 1200~1500만명이 거주한다. 그러나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이는 터키 쿠르드노동당(PKK)은 눈엣가시다. 터키 정부와 서방은 이들을 반군, 테러단체로 분류하고 있다

이라크 내 쿠르드족은 북부 아르빌·도후크·술레이마니아 3개 주()를 중심으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역내 동맹을 형성하고 ‘쿠르드족 인종 청소’를 자행했던 사담 후세인에 맞섰으며 오늘날 민병대 ‘페슈메르가’ 등이 미국이 주도하는 이슬람국가(IS) 격퇴전의 선방에 있다

시리아에서는 민병대 인민수비대(YPG) IS 격퇴전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국토의 10%에 달하는 북부·북동부를 통제한다 


◇기회가 된 IS, 서방의 침묵 

이번 독립투표는 이라크 KRG 자치지역 외에도 유전지대인 키르쿠크를 비롯한 쿠르드 거주 지역을 대거 포함했다. 유권자 수는 530만명에 달한다

명분은 IS. 2014년 세력이 최고조에 달한 IS가 이라크 북부를 침략했을 당시 정부군이 아닌 쿠르드 민병대가 맞섰다는 주장이다. 이라크 내 쿠르드족이 IS 격퇴전에 앞장선 속내 역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라크 중앙정부는 반발하고 있다. 쿠르드족의 독립투표도 못마땅한 데 ‘돈줄’인 유전지대까지 투표 대상이 됐다. 지난해 키르쿠크에서 생산된 원유 규모는 이라크 전체의 12%에 달한다 

주변국이 이번 투표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구속력은 없지만 자국에 거주하는 쿠르드족까지 동요할 수 있다는 점이 우려되는 것. 4000만에 가까운 쿠르드족이 동시에 독립을 들고 일어날 경우 자국 영토뿐 아니라 중동 전역의 분열도 가능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반응도 차갑다. 이들은 IS 격퇴전에 쏟아야 할 노력이 분산될 것이란 우려를 하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최근 만장일치로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안보리는 “잠재적으로 불안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했다


◇제2의 마하바드 공화국을 꿈꾸며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46 1월에는 소련의 도움으로 이란에 ‘마하바드 공화국’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국가는 건국 4개월 만에 소련이 이란에서 철수하며 1년 만에 무너졌다

현재 KRG 수장인 마수드 바르자니 수반은 마하바드 공화국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공화국 출범을 위해 투쟁한 민족운동가였다. 이번 투표가 단순 도발이 아닌 세대에 걸쳐 내려 온 민족의 숙원이란 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쿠르디스탄 주민 대부분은 바르자니 수반을 지지하지만 파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아흐마드 술레이만(30)은 “투표 이후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고대하고 있다”면서도 “우리가 두려운 것은 적들이 우리를 향해 악의를 갖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서울=뉴스1)  

 

◆10-02 쿠르드족, 독립의 열망과 냉혹한 현실

▲이집트 카이로 외곽 메나하우스 호텔에 세워져 있는 카이로 선언(1943) 기념비.

 

카이로 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피라미드보다 먼저 둘러본 곳이 있다. 카이로 외곽의 대피라미드 바로 옆에 자리한 메나하우스 호텔이다. 1886년에 개관한 이 호텔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호텔에 도착해 로비에서 잠시 쉬고 있던 내게 직원이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오셨죠? 호텔 정문 옆 언덕 위 정원에 기념비가 있으니 가서 꼭 확인해 보세요.

메나하우스 호텔은 1943 11월 카이로 회담의 본부였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 중국 총통 등 3개국 정상이 이곳에서 이른바 ‘카이로 선언’에 합의했다. 이들은 전후 처리 문제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자유 독립을 처음으로 약속했다. 카이로 선언의 내용은 1945 7월 포츠담 선언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주이집트 한국대사관은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2015 10 1일 카이로 선언 기념비를 설치했다.

카이로 선언보다 앞선 1920 8월 쿠르드 민족도 자주 독립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승전국인 연합국은 오스만튀르크 제국과 맺은 세브르 강화 조약에서 ‘쿠르드족이 원한다면 조약 발효 1년 이내에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하도록 명시했다. 

그러나 불과 3년 뒤 이 같은 합의는 번복된다. 독립전쟁을 통해 강대국으로 부상한 터키와 연합국이 새로 체결한 로잔 조약에 쿠르드의 독립 조항은 아예 삭제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국경선을 그어 나눠 먹은 중동 지역에 풍부한 유전을 보유한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중동 고원과 산악지역)이 독립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 결과 쿠르드 지역은 터키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르메니아 영토의 일부로 강제 귀속됐다. 쿠르드족이 “100년 이상 독립투표를 기다려 왔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브르 조약 이후 1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쿠르드는 주권 없는 민족으로 남아 있다. 쿠르드 민족은 주권국가, 특히 강대국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쿠르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분리 독립을 약속받고 영국의 동맹군으로 참전했지만 세브르 조약은 휴지조각이 됐다. 5개 지역으로 쪼개진 쿠르드에 돌아온 것은 탄압과 대규모 학살이었다. 

쿠르드는 1920년대 무장투쟁을 전개했지만 이라크와 요르단 지역을 점령한 영국은 쿠르드인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처칠은 “벌레 같고 하찮다”며 독가스를 사용해 쿠르드인을 말살시키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당시 영국군은 독가스가 부족해 실제 독가스 학살이 자행되지 않았지만 쿠르드인 수만 명이 죽었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독가스를 사용해 약 18만 명의 쿠르드인을 학살했다. 쿠르드가 이란을 도왔다는 이유로 인종청소에 가까운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당시 영국 언론이 이를 비난하자 후세인은 “처칠에게 배운 것일 뿐”이라며 비웃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이스라엘은 주적인 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쿠르드를 지원했지만 우방 터키 정부의 쿠르드 탄압을 돕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1999년 케냐 수사당국에 정보를 제공해 터키 쿠르드노동자당(PKK)의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을 케냐 나이로비에서 체포하도록 도왔다. 걸프전쟁에서 쿠르드의 도움을 받았던 미국은 오잘란의 망명을 거부하도록 유럽 국가에 압력을 넣었고, 러시아도 오잘란의 망명을 거부했다.

쿠르드는 지난 3년간 이라크 정부군을 대신해 북부 키르쿠크주와 니네베주를 이슬람국가(IS)의 손아귀에서 지켜냈다. 쿠르드는 IS 격퇴전으로 높아진 위상과 명분을 내세워 독립을 협상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지난달 25일 분리·독립 주민주표를 강행했다. 투표 결과 92.73%가 찬성표를 던졌지만 이라크 중앙정부와 미국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대로 독립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쿠르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한민족의 독립은 어쩌면 커다란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대국들이 카이로 선언에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라는 조건부 표현을 넣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반도가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더라도 곧바로 자주 독립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구상했던 신탁통치안은 결과적으로 광복 이후 한반도를 둘로 쪼개 놓았다.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에서 주권국가를 차리지 못한 민족은 물속을 부유하는 플랑크톤 신세일 뿐이다.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minwoo@donga.com

 

◆ 2017.11.07 쿠르드 지도자의 善한 惡手

쿠르드는 반만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하지만 힘이 없어 페르시아·아랍 등 제국을 이룬 민족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도 언어 등 고유문화를 지키며 꿋꿋이 살았다. 피지배층이었지만 고위층에 오르고 큰 공도 세웠다. 살라딘 장군이 대표적이다. 그는 12세기 십자군을 물리치며 '구국 영웅'이 됐다. 그의 갑옷엔 이슬람 왕조의 휘장이 달려 있었지만 몸엔 쿠르드의 피가 흘렀다.


20세기 이들의 인구는 3000만명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나라가 없었다. 이란·이라크·시리아·터키 등에 흩어져 '셋방살이'를 했다. 각국 정부는 덩치가 만만찮은 쿠르드인들을 잠재적 위협 세력으로 여겨 탄압했다.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1988년 이란과의 전쟁을 끝낼 무렵 쿠르드 마을에 화학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들이 혼란기를 틈타 분리 독립하거나 이란과 손을 잡을지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18만명이 사망하고 수십만명이 부상했다. 중동판 홀로코스트였다.

쿠르드에게도 ''이 오는 듯했다. 미국은 2003년 후세인을 축출했다. 쿠르드는 그해 민병대 '페슈메르가'를 창설하고 2005년 북부 지역에 '쿠르드 자치 정부'를 공식적으로 세웠다. 쿠르드는 독립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외교 특사를 파견해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존재와 독립 의지를 지속적으로 알렸다. 2014년 이슬람국가(IS) 사태가 발발해 이라크 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쿠르드는 페슈메르가를 파병해 이라크 정부군을 도왔다. IS 최대 점령 도시였던 이라크 모술을 탈환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마수드 바르자니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 수반이 지난 924(현지시각) 자치정부 수도 아르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바르자니 수반은 1029일 쿠르드 자치의회에 서한을 보내 수반에서 퇴임하겠다고 밝혔으며 자치의회는 이를 승인했다. /AP 연합뉴스

자신감에 찬 마수드 바르자니 쿠르드 자치 정부 수반은 승부수를 던졌다. 독립 투표를 지난 9 25일 단행해 압도적인 '찬성' 결과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악수(惡手)였다. 이라크 정부가 지난달 말 "국가 통합을 저해하는 분리 독립 투표는 용인할 수 없다"며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쿠르드족이 점유한 유전 지대 키르쿠크를 빼앗았다. 주요 수입원을 한순간에 잃은 쿠르드는 자치 정부 명맥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IS 격퇴 전만 해도 쿠르드에게 우호적이었던 국제사회는 입을 닫고 쿠르드를 외면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따로 없다.

국제사회가 냉혹하다고 원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보다 바르자니 수반의 오판이 더 안타깝다.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인 그는 '독립해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나라 안팎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민족 독립의 당위를 주장하면 안에서야 박수받겠지만 국제사회는 각국의 이익을 따지는 주판알을 튕긴다. 바르자니 수반은 분리 독립 카드를 꺼내더라도 과연 지금이 적기(適期)인지 면밀하게 따졌어야 했다. 만약 쿠르드가 모술 탈환전에 이어 이라크 국가 재건에도 협력하며 장기적 안목을 갖고 독립 정책을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바르자니는 자신의 실수를 책임지고 지난 1일 사퇴했지만 쿠르드가 셋방살이에서 벗어날 날은 기약 없이 멀어지고 말았다.

조선일보  노석조 국제부 기자

 

■쿠바 Cuba

쿠바 공화국, Republic of Cuba

▲국기

 

하나의 큰 섬과 여러 작은 섬들, 산호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국 플로리다 주 남단에서 남쪽으로 145km 떨어진 대서양상에 있다. 멕시코 만 입구를 지나는 북회귀선 바로 남쪽에 있으며, 서인도제도 전체 육지면적의 1/2 이상을 차지한다. 수도는 아바나이다. 동서길이는 약 1,250km, 너비는 북서부가 31km, 남동부가 191km이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쿠바에는 초기 원주민에 이어 그 지역을 차지한 타이노족 인디언이 살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그 지역을 스페인 영토로 선포했다. 18세기 쿠바는 스페인 제국에 원당을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공급처가 되었고, 나중에 '앤틸리스의 진주'(Pearl of the Antilles)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페인은 쿠바인들의 독립운동에 맞서 수차례 어렵고 값비싼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1898년까지 유지했다. 하지만 1898년 스페인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과 쿠바 독립군에 패했다. 쿠바는 인접한 미국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 아래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공식적으로 독립을 얻었다.

 

1959년 1월 1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은 독재정치를 일삼던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 정권을 무너뜨렸다. 2년 후 카스트로는 그 혁명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사회주의 혁명임을 선포했다. 쿠바는 소비에트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경제적 발달을 이루었기 때문에 북부의 인접 국가들로부터 경제적 고립을 겪었다. 게다가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자 쿠바는 더욱 더 고립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쿠바인들이 완곡하게 표현하여 '경제적 특별기간'(periodo economico especiall)이라고 일컫는 전방위적 결핍과 재정적 불안정의 경제위기를 가져왔다. 21세기 들어 쿠바는 경제·사회적 긴축정책들의 일부를 완화시켰다. 하지만 미국은 쿠바가 지속적인 경제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카스트로 정부에 대해 수십 년간 무역금지조치를 이어나갔다.

 

식량·교통·전력 및 다른 생필품들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쿠바인들의 삶은 쉽지 않다. 하지만 많은 쿠바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라틴 아메리카의 유일한 혁명국가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류학자 미구엘 바르네트의 소설 〈Cancion de Rachel〉(1969, 1991년 영어판 〈레이첼의 노래 Rachel's Song〉로 출간됨)의 주인공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섬은 무언가 특별하다. 가장 낯설고 가장 비극적인 것들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섬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처럼 대지도 자신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쿠바의 운명은 신비에 싸인 운명이다."

 

쿠바에는 대도시가 단 1개 발달했지만 대체로 도시 중심 국가이다. 이 유일한 대도시인 아바나는 북서쪽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나라의 수도이자 상업의 중심지이다. 약간은 쇠락했지만 멋이 있는 도시 아바나는 경치 좋은 부둣가가 있고 훌륭한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바나는 세계적으로 매력적인 장소로 알려져 해외 관광객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산티아고, 카마구에이, 올긴, 특히 트리니다드 같은 쿠바의 도시들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아름다운 건축물과 현대적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스페인 정복 전에는 인디언 인구가 약 11만 2,000명에 달했으나, 정복 이후 이들은 거의 사라졌다. 인구의 1/3은 흑인과 스페인인 사이의 혼혈인 물라토이거나 스페인인이 아프리카로부터 사들인 약 75만 명의 흑인노예의 후손들이다.

 

1900년대 초 주로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백인 이주민들이 정착했고 현재 백인은 전체인구의 2/3에 달한다. 전통적으로 백인과 메스티소가 쿠바의 정치·경제·문화를 주도했으나 인종통합을 지향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1959년 이후 공공의료시설이 크게 향상되어 출생률과 사망률이 감소했다. 1970년대에 정부는 증가하는 아바나 시의 빈민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농촌인구의 도시 유입을 규제했다.

 

2000년대 이후 연간 인구성장률은 0.1%로 미미하며, 인구수는 2000년 1,115만 명, 2010년 1,133만 명으로 소폭 증가해오다가, 2022년 기준 1,140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인구밀도는 103명/㎢이다. 15세 이하 인구가 전체의 약 16%를 차지하고 있으며, 도시 거주자가 전체 인구의 75%에 해당한다.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이다. 최근에 개혁개방이 되고 혁명 후 단절되었던 미국과의 재수교가 이뤄지면서 교육과정에 영어 과목이 포함되었다. 지배적인 종교는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교였으며 공산주의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전히 공공연히 인정되어온 최대종교이다. 로마 가톨릭교를 믿는 사람이 계속 이어져 전체 인구의 약 60%에 가까우며, 무교가 약 23%, 아프리카 토속종교가 약 10%, 기타 개신교와 소수종교로 되어있다.

 

정치와 사회

사회주의 국가로서, 유일한 합법정당인 쿠바 공산당(Partido Comunista de Cuba/PCC)이 집권하고 있다. 1976년의 헌법은 PCC가 최고권력당임을 천명했으며, 정부구조는 다른 공산당과 비슷하다.

 

PCC의 정치국이 최고 정책결정기관으로서 모든 공식통치기구들을 장악하고 있다. 입법권은 지방의회에서 5년마다 선출되는 510명의 인민의회에 있다. 인민의회 의원 중에서 의회상설기관인 국가평의회의 구성원이 선출되며, 임명받은 각료들로 구성되는 각료회의가 행정집행권을 가진다. 국가평의회 의장이 각료회의의 의장을 겸하며, 국가와 행정부의 수반이 된다. 최고사법기관은 인민최고법원이다.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어 있어 질병·출산·산재 수당 등 광범위한 수당제도와 노년·신체장애·유가족을 위한 연금제도가 시행되고 있으며, 의료혜택은 모든 시민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평균수명이 74세 이상이고 유아사망률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낮은 편으로 보건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수준 높은 의료진을 갖춘 현대식 의료시설들이 많다. 교육은 모두가 무료이고, 6∼12세의 아동들이 의무교육 대상자들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학습과 육체노동을 결합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PCC의 기관지인 〈그란마 Granma〉는 발행부수가 많은 일간지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교육과 정치 정보를 제공하는 데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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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9  해외자본으로 고공 성장하는 쿠바, 美와 악연에서 동반자로…

[이코노미조선:쿠바의 자본주의 바람]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유독 길게 늘어선 행렬이 눈에 띄는 이곳은 시내 환전소다. 미·쿠바 간 국교 정상화 이후 1년 반이 흐른 지금 이곳은 쿠바 내에서도 가장 붐비는 곳이 됐다. 여행객들의 국적은 다양하다. 미국·캐나다·영국·독일·프랑스 등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이 나누는 대화소리가 거리에 넘쳐난다.

 

해외 은행에는 쿠바화폐가 마련돼 있지 않아 현지에 와서 환전하는 여행객들이 대부분이다. 환전소 앞 여행객들은 저마다 달러·유로 등을 들고 골똘히 계산해본다. 쿠바의 화폐는 외국인용 화폐 쿡(CUC)과 일반인용 화폐 쿱(CUP)으로 나뉘는데, 1쿡은 1쿱의 25배에 달한다.

 

아바나의 구시가지 올드 아바나에 있는 한 고급 레스토랑은 관광객들로 연일 문전성시를 이룬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고급 레스토랑의 평균 음식 가격은 보통 20~30달러 정도다. 쿠바 주민들은 일반 회사에 다니며 평균 30달러의 월급을 받기 때문에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고급 레스토랑인 만큼 임금 수준도 높다. 이곳 종업원들은 평균 월급으로 1000~2000달러 정도를 받는다.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일하기 때문에 외국어를 잘하면서 백인이거나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주로 채용한다.

 

▲쿠바 아바나항에 도착한 美 크루즈선 아도니아호에서 내린 한 승객이 관광객을 맞이하는 쿠바의 여성들로부터 볼에 입맞춤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 DB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이후 달라진 풍경은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350만명 수준이던 쿠바관광객은 몇달 새 370만명을 훌쩍 뛰어넘었는데, 현지인들은 조만간 4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

 

관광객이 늘자, 관련 서비스의 물가도 껑충 뛰어올랐다. 최근 몇달 만에 호텔 숙박비는 약 20~30%,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 가격은 40~45% 상승했다. 쿠바 택시는 보통 미터기를 사용하지 않고 흥정을 통해 요금을 받는데, 과거 짧은 거리엔 5달러 정도였던 기본요금이 최근 10달러로 올랐다.

 

갑자기 급증한 관광객들로 숙박대란도 벌어지고 있다. 쿠바 정부는 발빠르게 움직여 호텔을 신축하고 기존 호텔을 리모델링하고 있다. 쿠바 정부는 현재 64000개인 객실 수를 2020년까지 85000개로, 2030년까지 11만개로 확대할 예정이다. 호텔보다 저렴한 민박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수개월 새 호텔·음식비 20~45% 상승

 

성수기에는 대부분의 좋은 민박들이 만실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름한 숙소로 향하는 여행객들도 발생한다. 쿠바 정부가 한 사람이 여러 채의 민박을 운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다 보니 배우자나 자식의 이름으로 민박 수를 늘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현재 숙박비는 저렴한 곳은 30달러, 시설이 좋은 경우 70~100달러선이다. 얼마 전 쿠바로 여행을 다녀온 이영주(29)씨는 “카사(민박집)를 소개하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편리하게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다”고 했다.

 

국내총생산(GDP) 70%를 관광업에 의존하는 쿠바는 적극적으로 국제화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12월 쿠바 정부는 “쿠바 경제를 끌어올리기 위해 영어는 필수”라며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영어공부를 권고했다. 아바나에는 영어 학원들이 문을 열었고 청소년뿐 아니라 관광업에 종사하고 싶은 주민들도 영어공부에 한창이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조명되면서 쿠바 아바나 관광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는 쿠바의 명음악들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가득하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은 1959년 쿠바 혁명 이전의 음악 세대를 대표하는 그룹이다. 이곳에서는 영화 속처럼 80세 이상의 노련한 가수들이 나와 옛 노래를 들려준다. 이 클럽은 영화가 유명세를 타면서, 쿠바 여행의 로망이 됐다. 젊은 사람들보다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추억하려는 나이 드신 분들이 즐겨 찾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자주 갔던 바(Bar)를 찾아 그의 발자취를 좇아보겠다는 관광객들도 있다.

 

급격한 관광산업붐이 일고 있지만 통상 이런상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여행객들에게 기념품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파는 등 ‘바가지 현상’이 거의 없다는 것. 쿠바사람들 대부분이 밝고 쉽게 외국인에게 마음을 연다. 욕심 없이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주위의 힘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하는 게 쿠바인들의 장점이다.

 

 

1961년 미국과 단교(斷交) 이래 굳게 걸어 잠겼던 쿠바의 빗장이 풀리면서 지금 쿠바에는 자본주의 바람이 불고 있다. 물밀듯이 쿠바로 유입되는 외국인 관광객과 해외 투자 자본은 미·쿠바 국교 정상화가 이뤄 낸 결과다. 2014 12월 미·쿠바 국교 정상화 선언 후, 양국에 수감된 포로들을 교환하는 것으로 양국의 관계 완화가 시작됐다.

 

미국 내 수감 중이던 쿠바 정보요원 3명과 1995년 체포돼 25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전직 쿠바 정보국 장교 롤란도 사라프 트루히요(Rolando Sarraff Trujillo)가 교환됐다. 트루히요는 미국을 위해 활동한 스파이다. 이 쿠바 정보요원들은 ‘5명의 쿠바인(Cuban Five)’ 중 2명이 풀려난 뒤 남아있던 3명이다.

 

 

쿠바는 미 국무부 대외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의 직원 앨런 그로스(Alan Gross) 또한 석방하고 추가로 53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오바마는 집권 후 쿠바와 협력하기 위해 노력했다. 2009년에는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만들어놓은 여행 및 송금 규제를 완화시켰고 미국 통신회사들이 쿠바에 휴대전화와 위성장치를 보급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미국 시민들이 가족이 아닌 쿠바인들에게도 송금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미국과 쿠바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국제적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는데, 2013년 유엔 총회는 23년 동안 쿠바를 옥죄고 있던 엠바고 해제를 승인했다. 이때 총 188개 국가의 합의가 이뤄졌다. 미국은 지난해 1월 여행과 무역에 대한 규제를 풀고 항공사들의 상업적 활동도 허용했다. 2009년 교육 또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허가증이 있어야만 갈 수 있었던 여행에 대한 규제가 사라진 것이다. 지난해 7월에는 양국 수도에 대사관을 열면서 국교 정상화가 공식화됐다.

 

▲1959년 집권한 피델 카스트로는 2006년 장출혈로 수술을 받은 뒤, 2년 뒤인 2008년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겨줬다. 형과 달리 실용주의자였던 라울 카스트로는 집권 후 시장 메커니즘 도입 등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블룸버그

 

오바마 “쿠바 스스로도 변화하라”

올해 3월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 아바나를 방문해 라울 카스트로(Raúl Castro) 쿠바 대통령 앞에서 엠바고 해제 선언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엠바고를 해제했지만 자체 내의 변화 없이 쿠바의 발전가능성을 최상으로 끌어낼 순 없다”며 쿠바의 정치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한 것은 1928년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 이후 88년 만이다.

 

해외자본, 쿠바 관광·자원 시장 눈독

지난 5월에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출발한 크루즈선이 플로리다 해협을 지나 쿠바 아바나항에 정박했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퇴임 전 여행 제한 조치를 해제한 후 40여년 만의 일이다.

 

승객 700여명을 태운 카니발사 ‘아도니아(Adonia)호’의 출항은 국교 정상화 이후 재개된 첫 크루즈 여행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미국쿠바무역경제위원회(USCTEC)에 따르면, 현재 운항 계획 중인 10여개 선사가 예정대로 쿠바행 크루즈선을 운영할 경우 쿠바 정부는 연간 8000만달러( 910억원)를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된다. 크루즈 선사가 운항 1회당 약 50만달러( 57000만원)를 쿠바 정부에 지불하고 승객 1인당 약 100달러( 11만원)를 사용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결과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풀리면서 외국인 투자와 인프라 개발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지난 3월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방문 이후 미국 및 서구권 다국적 기업의 진출도 활발하다. 온라인 호텔 예약 업체인 프라이스라인은 쿠바 아바나 내 호텔 예약 서비스를 제공한다. 매리엇 호텔 체인은 지난 3월 쿠바 연방 재무부의 승인을 받고 쿠바 전역의 호텔 매입과 파트너십 계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숙박공유 업체인 에어비앤비는 지난 4월부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송금전문 업체인 웨스턴유니온은 6월 말부터 쿠바 내 송금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현재 해외 자본의 대부분은 유럽과 미국에서 유입되고 있다. 주요 투자국은 캐나다(광업), 스페인(관광), 중국(항만 건설) 등이다. 캐나다는 쿠바 동부 지역의 대규모 니켈광산에 투자해 수십년간 쿠바와 공동으로 니켈을 개발하고 있으며, 스페인의 멜리아(Melia) 체인은 쿠바의 호텔·리조트 등에 대규모로 투자하고 있다. 특히 쿠바의 풍부한 옥수수 자원은 바 연료를 만드는 미국에 매력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하상섭 한국외대 한중남미녹색융합센터 연구교수는 “미국의 장기적인 재생에너지원 발전전략에는 쿠바의 옥수수 자원이 고려돼 있다”며 “쿠바는 옥수수로 에탄올을 만드는 브라질의 선진 기술이 전파된 곳이면서 기후 등 자연조건도 훌륭하기 때문에 미국에 매력적인 땅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쿠바 국교 정상화는 중국의 거대 자본이 투입되기 전 미국이 쿠바의 에탄올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조선일보 백예리 이코노미조선 기자 

정덕래 코트라 아바나 무역관장 

편집=최원철

 

◆ Hola! Cuba! 

2016-04-15  중앙일보 김춘애 여행가

 

▲올드 아바나 시가지의 전경.

 

쿠바는 40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크게 3 지역으로 나뉘는데, 서부 옥시덴떼(Occidente) 지역에 수도 아바나(La Habana)가 있다. 아바나는 풍부한 역사만큼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아바나의 구시가지, 즉 올드 아바나는 이름 그대로 오래된 건물과 유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쎈뜨로 아바나(Centro Habana)와 베다도(Vedado)는 주거 지역으로 고층 빌딩과 신식 건물이 눈에 띄는 신시가지다. 여행자 대부분은 올드 아바나에 머물지만, 쎈뜨로와 베다도 또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다양하다.  

 

▲까사 블랑카(Casa Blanca)에서 바라 본 아바나 시가지.


우여곡절 많은 쿠바의 역사

아바나(La Habana)는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1519년에 건설되어 1607년에 쿠바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 아바나는 남미에서 황금을 가득 싣고 스페인으로 향하던 상선이 반드시 거쳐가던 항구였다. 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도시는 점점 풍요로워졌지만 동시에 많은 해적의 표적이 되었다. 해적이 들끓자 스페인 선박들은 안전을 위해 1년에 두 번 아바나 항에 모인 후 군함의 보호를 받으며 본국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스페인은 해적의 습격을 대비해 아바나에 모로 요새와 까바나 요새를 건설했다. 1898년,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아바나는 또 다른 변화를 맞게 됐다. 독립은 자주 독립이 아니었다. 사실상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지배권을 넘겨받은 형태였다. 1920년대 미국 정부가 금주령을 내린 뒤, 많은 미국인이 럼(Rum) 주와 시가를 즐기기 위해 쿠바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레 아바나는 화려한 동시에 문란한(?) 일탈의 도시가 되어갔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친구들이 혁명을 통해 아바나에 입성하기 전까지 말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많은 역사 때문인지 아바나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문화와 풍경을 품고 있다.

▲재공사 전의 까삐톨리오, 지금은 보수 공사 중이다.


아바나의 랜드마크, 까삐똘리오

아바나를 찾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사진을 찍는 장소가 있다. 바로 까삐똘리오(El Capitolio)다. 까삐똘리오는 스페인어로 시청사나 국회의사당 등 도시의 중심 건축물을 일컫는 말이다. 아바나의 까삐똘리오는 네오 클래식과 아르누보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아바나 뿐 아니라 쿠바 전체에서도 랜드 마크로 꼽히는 곳이다. 미국의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건축가가 1929년에 완성한 것이어서 미 국회의사당의 축소판이라 부르기도 한다. 돔형 지붕은 멀리서도 보일 만큼 웅장하다. 1959년 혁명 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층 로비 바닥에는 24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전시돼 있다. 우습게도 가짜 다이아몬드란다. 그럼에도 모조 다이아몬드는 아바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쿠바에서 거리를 재는 기준점이 바로 이 다이아몬드라고 한다. 7년 전, 처음 쿠바에 갔을 때 까삐똘리오 1층에는 인터넷 카페가 있었다. e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30분이 걸렸던 추억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아바나의 공원에서도 무선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고 제법 속도도 빨라졌다. 까삐똘리오는 현재 보수 공사로 휴관 중이다.

 

▲빠르께 쎈뜨랄(Parque Central) 앞 잉그라테라 호텔과 거리 풍경.


빠르께 쎈뜨랄의 거리 사진관

까삐똘리오가 유명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핀홀 카메라(Pinhole Camera)로 사진을 찍는 거리의 사진사 때문이었다. 핀홀 카메라는 렌즈 없이 사진을 찍는 일명 ‘바늘구멍 사진기’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까삐똘리오 앞에는 핀홀 카메라를 든 사진사가 서너 명 있었다.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영 볼 수가 없었다. 운좋게도 근처 빠르께 쎈뜨랄(Parque Central), 즉 중앙공원에서 한 핀홀 사진사를 만났다. 낡은 카메라 앞에는 유럽에서 온 여행객 부자(父子)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핀홀 카메라가 신기한지, 부자는 사진 한장 찍으면서도 무척 즐거워했다. 알고 보니, 아들의 직업도 사진작가란다.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신기하게도 사진 한 장이 완성되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도, 사진을 받아든 사람도 모두 행복해보였다. 낡은 핀홀 카메라에는 사진사의 할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카메라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란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천천히 얻어내는 사진 한 장은 예나 지금이나 아바나 여행의 명물임이 틀림없다. 

 

▲부산 광안리를 연상시키는 말레콘의 밤.

 

짓궂은 말레콘, 짭짜름한  첫 인사  아바나의 명물 중 하나는 말레콘(Malecon)이다. 말레콘은 베다도부터 올드 아바나까지를 일컫는 해안 지역이다. 여름이면 높은 파도가 치는데 이따금 자동차도로까지 넘친단다. 파도가 달리는 자동차를 덮치는 광경이 TV 광고에도 나온 적이 있다. 말레콘이 여행자들과 인사하는 방법은 짓궂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바닷가를 거니는 여행자를 덮친다. 당황한 여행자들은 기겁하며 폴짝폴짝거리지만 이내 깔깔 웃고 만다. 짭짜름한 바닷물에 흠뻑 젖어도 마냥 즐겁다. 해가 진 뒤, 말레콘은 더욱 매혹적인 휴식처로 변신한다. 기타와 색소폰을 연주하는 악사들, 친구들과 럼주를 나눠 마시는 청춘들,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족, 꼭 껴안고 입맞춤을 나누는 연인들 그리고 들뜬 표정의 여행자까지. 모두 아늑한 말레콘의 밤을 만끽한다. 유난히 붉고 아름다운 아바나의 저녁노을이 모두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다.

김춘애

 

① 반가워요, 쿠바 

 

개도 고양이도 살사를 추는 나라’,  ‘쿠바에 애인을 혼자 보내지 마라’

 쿠바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책의 제목이다.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 모히또와 시거, 살사와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육감적인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춤을 추는 쿠바나(Cubana. 쿠바 여성), 구릿빛 피부에 단단한 근육의 쿠바노(Cubano. 쿠바 남성)까지. 쿠바는 여행자를 늘 설레게 하고, 꿈꾸게 한다.


▲오비스뽀 거리의 자전거 택시 기사, 그들의 밝은 미소가 아름답다.


20세기에 멈춘 쿠바나의 시계와 21세기를 무제한의 속도로 달리는 지구의 시계 사이에서 오늘의 쿠바는 앓고 있다. 쿠바 여행은 아프고 아름답고, 유쾌하고 때로는 짜증이 난다. 놀라움과 즐거움과 짜증이 뒤섞인다. 그러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쿠바를 추억하며 되뇐다. ‘아 쿠바! 다시 가고 싶다.’ 부족하고 아쉬움 투성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쿠바다.

 

▲올드 아바나의 골목. 저 멀리 혁명 박물관의 지붕이 인상적이다.


 쿠바의 역사는 1492년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시작된다. 원주민이 살던 조용한 섬에 스페인의 탐험가가 첫 발을 디딤으로써 쿠바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와 미군정을 지나 1902년 독립, 1959년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지금의 쿠바가 만들어졌다. 악어 모양을 한 작은 섬은 다양한 인종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지구에서 몇 안 되는 공산국가다. 미국의 턱 아래에서 입 안의 가시가 됐던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와는 수교가 없지만 북한은 형제라고 말하는 나라. 이런 이유로 쿠바 여행에서 늘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었다.
 “북한에서 왔어요? 아니면 남한에서?”
 
한국에서 쿠바까지는 비행기로 꼬박 하루를 날아가야 한다. 쿠바는 사계절이 여름이라 겨울을 알지 못한다. 1년의 반은 습하고 비가 온다. 나머지 반은 태양이 뜨겁다. 날마다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리는 하늘을 가진 나라다. 쿠바 여행의 가장 적기는 11월부터 4월까지다.


▲센트로 아바나의 주택가 풍경, 낡은 건물 뒤로 공사 중인 까피톨리오가 보인다.

 

이태 전 쿠바가 미국과 재수교를 한 이후 쿠바를 찾는 여행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급작스러운 쿠바의 변화를 우려한 성급한 여행자다. 54년이나 굳게 닫혀있던 쿠바의 문이 다시 열린 2014년 8월 이후 쿠바를 동경하던 전 세계 여행자들의 희망과 기대, 그리고 기다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변하지 않는 모습의 쿠바를 원하는 여행자의 이기심은 이제 접어야 할 듯싶다. 밀려드는 여행자를 상대로 호객 행위가 더 늘었지만, 이제는 길거리에 나온 쿠바노의 주머니도 이전보다는 나아졌으면 싶다.


▲말레콘의 저녁. 낚시꾼의 머리 위로 어둠이 내린다.

 

작은 아파트에서 까사(Casa. 쿠바의 민박집)를 운영하는 오달리스 아줌마는 아바나 대학의 교수였다. 남편은 까사를 운영하고 본인이 대학교수였을 때는 집안 살림을 꾸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이후 그녀는 대학교수를 그만두었다. 교수 월급만으로는 살기 힘들어서가 이유였다. 까사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벌이다. 언제나 웃음을 달고 사는 그녀다. 지금처럼 여행자가 밀려드니 그녀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 낡은 아파트 2층의 작은 까사는 그녀에게 전부다.
 

▲모로성에서 본 아바나의 일몰, 붉은 노을이 아바나를 덮었다.

 

 그녀의 아파트 맞은편에는 낡았지만, 화려했을 과거를 연상할 수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6층 높이의 건물은, 2층까지는 사무실로 사용하지만 3층 이상은 깨진 유리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빈집이다.

 “오달리스, 저긴 왜 비어있어요?”
 “아 저기 곧 호텔이 만들어질 거예요”
 “아, 정말요. 잘 된 일이네. 언제요?”
 “몰라요. 언제 오픈할지는 아무도 몰라요. 아마도 한 5년, 10년? 하하하.”

 호탕한 그녀의 웃음소리 뒤에 쿠바의 현실이 숨어 있다. 지금 쿠바는 그 변화의 가운데에 있다.

② 쿠바 여행의 시작 올드 아바나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쿠바 여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크게 올드 아바나, 센트로 아바나 그리고 베다도 지역으로 나뉜다. 올드 아바나는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바나 여행의 중심이다. 건물 대부분이 100년 전에 지어졌다. 올드 아바나가 아니어도 쿠바에는 새로 지어진 건물이 드물다. 고작해야 2층은 3층으로 올리고, 옆 건물을 터서 넓히는 정도다. 미국의 경제봉쇄정책 이후 ‘개발’이라는 단어는 쿠바에서 잊혀졌다. 그러니까 올드 아바나의 시간은 1959년에서 조금 더 지난 그날 이후에서 멈춰 서 있다. 곧 무너질 듯 위태로운 아파트의 한편에 사람과 고양이 그리고 개가 뒤섞여 살고 있다.

 

▲올드 아바나 오비스뽀 거리는 늘 여행자와 생활자로 북적인다.

 

 오비스뽀 거리는 아바나의 인사동이다. 작은 박물관, 오래된 가게, 환전소 그리고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 하루 종일 걸어도 심심하지 않다. 여기에 모히또 한 잔 또는 시원한 크리스털 맥주 한 병이 더해지면 그만이다. 골목 안에는 여행자의 발목을 잡는 것이 너무 많다. 라이브 밴드의 살사 음악은 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살사 음악이 끝나기 무섭게 요란한 최신 레게똥(reggaeton. 스페인어로 부르는 레게 음악) 음악을 튼 자전거 택시 한 대가 쌩 하니 지나간다. 

 

▲올드 아바나 대성당 광장의 산 크리스토발 대성당.

 

 올드 아나바 여행은 대게 대성당 광장으로 시작해서 산 프란시스코 광장에서 끝이 난다. 대성당 광장에는 1777년 지어진 산 크리스토발 대성당이 있다. 2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곱다. 보드라운 속살 같은 하얀 대리석에 비대칭 종탑 두 개가 호위병처럼 서 있다. 콜럼버스의 유해가 100년간 안치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직선과 곡선, 대칭과 비대칭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성당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헤밍웨이가 자주 들러 모히또를 마셨다는 술집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의 긴 줄과 마주한다. 술집 앞에 늘어선 줄의 길이에서 인기를 실감한다.

 

▲아르마스 광장은 서점과 벼룩시장 작은 가게들이 가득하다.

 

 아르마스 광장은 중남미 어느 도시에나 있는 흔한 이름의 광장이다. 아바나의 아르마스 광장은 벼룩시장이 볼거리다. 쿠바 독립영웅 쎄스페데스의 동상이 광장의 중심을 이룬다. 나무가 우거졌고 주변으로 작은 노점상이 있다. 날마다 서는 벼룩시장은 이 광장의 특별한 볼거리다. 30년이 더 된 카메라를 비롯하여 스푼·엽서·잡지 등 없는 게 없다. 거리 책방엔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라울 카스트로가 경쟁하듯이 책 표지를 장식한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기타 연주를 들려주고는 귀엽게 팁을 요구하는 듀엣과 만나면 기분 좋게 노래 듣고 1달러를 기꺼이 내준다.

 

▲한낮의 비에하 광장.

 

 비에하 광장은 여행자의 여유가 가장 잘 묻어나는 장소다. 광장 주변의 식당, 카페 그리고 맥줏집은 늘 만원이다. 생맥줏집 팍토리아 플라사 비에하에서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이면 걷다 지친 에너지가 금세 충전된다.

 

▲산 프란시스코 광장의 한낮 풍경.

 

다음은 산 프란시스코 광장이다. 사면이 꽉 막힌 다른 곳과 달리, 광장 한 면이 뻥 뚫려있어 시원하다. 듬직하게 서 있는 산 프란시스코 교회가 광장 한 면을 가득 채운다. 맞은편에는 상공회의소 건물이 고풍스러운 자태로 서있다. 이 광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인공이 ‘파리의 신사’다. 1950년대 아바나의 노숙자였다는 그의 진짜 이름은 호세 마리아 로페즈 예딘(José María López Lledín)였다. 1899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86세가 되던 해 1985년 아바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모두에게 친구 같았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바나 사람들이 그를 위해 동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수염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수염이 반질반질 칠이 벗겨졌다. 우체국에서 엽서 한 장을 보내고 나면 오늘 하루 올드 아바나 투어가 끝이 난다.

 쿠바는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할 뿐 현재는 화려하지 않다.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고 들어갔다간 실망하기 십상이다. 그들의 역사를 알고 나면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미안한 일인지 알게 된다. 쿠바는 딱 그 만큼이다. 보이는 만큼, 내가 느끼는 만큼. 그것이 쿠바다.

 

③ 날아라 선더버드 - 쿠바의 클래식 카

▲까피톨리오 맞은편 중앙공원에 서 있는 클래식 카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멈춘 것 중 하나가 거리의 풍경이다. 자동차. 아바나 공항을 빠져나온 뒤 가장 먼저 놀란 것이 아바나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였다. 쿠바를 ‘움직이는 자동차 박물관’이라 했던가. 전시장에서도 보기 힘들 것 같은 오래된 자동차가 도로를 마구마구 달리고 있었다.
 

센트로 아바나의 가장 번화가인 중앙공원은 클래식 카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색색의 클래식 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5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잘 관리된 자동차는 가지런히 줄을 서 손님을 기다렸다. 카피톨리오를 향해 궁둥이를 쭉 빼고 있는 쉐보레, 늘씬한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요염하게 서 있는 선더버드. 시트는 뽀얀 속살 같고 핸들은 가늘고 섹시했다. 단순한 듯 매력적인 클래식 카가 발길을 자꾸만 잡고 늘어졌다.

 

▲거리를 달리는 쉐보레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1960년대 초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 조치를 시행한다. 모든 미국 제품이 수입이 금지되면서 공산 혁명 직전에 들어온 미국산 자동차가 그대로 쿠바에 남겨졌다. 그 이후 미국산 자동차는 쿠바에서 고치고 닦고 조여 50년 이상을 버텼다. 그 긴 세월을 견디다 못한 자동차는 시체처럼 골목에 방치되기도 한다. 껍데기는 미국산이이지만, 알맹이는 중국산 자동차도 있다. 위험한 일이지만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합승 택시가 비실비실 시동을 꺼뜨렸다. 아무리 운전사가 다시 시동을 걸려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올해 예순 살이 된 쉐보레는 그렇게 운명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쉐보레보다 조금 젊은 택시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쉐보레 택시기사를 생각했다. 이제 그는 무엇을 해서 먹고 살까? 그에게는 그 고물 자동차가 더 없이 소중한 재산이었을 테니 말이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아바나에서 자동차로 16시간 떨어진 쿠바 제 2의 도시다. 제 아무리 포드 자동차라 해도, 낡은 자동차는 관광객을 태우는 시티 투어를 할 수 없다. 주로 현지인이 합승으로 이용하는 콜렉티보 택시(합승 택시를 부르는 말)나, 불법으로 택시 영업을 한다. 세스페데스 광장에서 터미널로 가는 길에 내가 탄 택시는 굴러가는 것이 용할 정도로 낡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미안했지만, 나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 이 차 정말 오래된 것 같은데, 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일해요?”
 “걱정 없어요. 아직 10년은 더 탈 수 있어요.”


 정말 이 차가 10년은 더 탈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건지, 10년은 더 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인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라면, 쿠바라면 10년을 더 굴러갈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 쿠바에서 운전하려면 이 정도의 깡다구는 필수다
!
 

포드 선더버드 Ford Thunderbird

▲귀여운 핑크색 포드 선더버드

 

마를린 먼로의 애마이자 영화 ‘델마와 루이스’로 유명한 자동차다. 쿠바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자동차 중 하나다. 1955년 처음 생산되었으니 나이가 60세다. 생산과 동시에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했던 세기의 자동차로, 미국의 경제 부흥기를 상징했던 자동차다. 선더버드는 그 인기를 쿠바에도 고스란히 남기고 떠났다. 누가 이 자동차를 60년이 되었다고 감히 생각할 수 있을까. 우아하고 늘씬한 차체에 감각적인 색깔은 시간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세련되었다. 


머큐리 Mercury

▲포드의 머큐리 자동차

 

미국의 포드 모터 컴퍼니에서 생산했던 차종으로 지금은 더 이상 볼 수 있는 이름이다. 2011년 그랜드 마퀴스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쿠바의 거리에서는 아직도 그 머큐리를 흔하게 볼 수 있다.


GM 쉐보레 Chevrolet

▲GM의 쉐보레

 

포드가 선더버드를 만드는데 영향을 준 모델 중 하나가 쉐보레라고 한다. 가장 흔하게 아바나 거리를 활주하는 클래식 카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차체에, 쿠바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색상이 갖고 싶은 욕망을 마구마구 부채질한다. 


GM 뷰익 Buick

▲GM의 뷰익 자동차

 

1959년산 뷰익 역시 아바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차종 중 하나다. GM 산하 브랜드 중 하나로 파랑, 흰색 그리고 빨간색으로 출시되었다고 한다.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다 멋지다.


닛산 페어레이디 Fairlady

▲닛산 닷선의 페어레이디

 

일본의 자동차 브랜드 닛산이 1959년에 만든 자동차. 닷선 페어레이디(Datsun Fairlady)는 포드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쿠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클래식 카 중 하나다. 

 

④ 헤밍웨이와 쿠바 칵테일

영화 ‘내부자들’ 덕에 유명해진 술이 있다. 바로 모히또다. 이병헌의 대사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나 한 잔’ 때문이다. 한데 모히또의 고향이 쿠바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몰디브도 좋지만 원조 모히또를 마시려면 쿠바를 가봐야 한다.

“내 모히또는 라 보데기따, 내 다이끼리는 엘 플로리디따(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

쿠바를 사랑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아바나의 레스토랑 겸 바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에 남긴 낙서다. 그렇다. 쿠바를 대표하는 칵테일이 바로 모히또와 다이끼리다. 쿠바에서 마시는 모히또와 다이끼리는 특별하다. 어떤 이에게는 쿠바를 찾아가는 이유가 되고, 어떤 이에겐 쿠바를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새콤달콤 모히또

▲아바나 카페 슬로피 조(Sloppy Joe‘s) 의 모히또.

 

쿠바 칵테일이 대부분 그렇듯 모히또 역시 럼을 기본으로 한다. 예전에는 바카디(Bacardi) 럼을 주로 사용했다. 바카디 럼은 스페인 이민자인 돈 파쿤도 바카디 마소가 1862년에 처음으로 만들었다. 쿠바의 대표 럼으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지만 혁명 이후 모든 외국계 기업이 쿠바를 떠나면서 바카디 역시 쿠바와 작별해야 했다. 바카디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럼이다.

지금 쿠바에서는 모히또를 만들 때 바카디 대신 아바나 클럽(Havana Club)을 사용한다. 혁명 이후 쿠바의 대표 럼으로 자리 잡은 것이 아바나 클럽이다.


▲아바나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La bodequita del medio)의 모히또.

 

모히또는 라임주스에 설탕을 넣고 잘 녹인 후 예르바 부에나(Yerba Buena)라는 민트 잎을 넣고 부드럽게 찧는다. 그리고 얼음, 화이트 럼과 소다수를 넣고 라임으로 장식한다. 예르바 부에나는 낯설다. 실은 껌 이름으로 익숙한 스피아민트(Spearmint)와 같은 향신료다. 한국에서 파는 모히또는 페퍼민트나 애플민트를 주로 사용하지만 예르바 부에나를 넣어야 원조 모히또의 맛을 낸다.

설탕이 잘 녹도록 저어서 마시면 라임주스의 새콤함과 설탕의 달콤함 끝에 럼의 강한 맛이 함께 느껴진다.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 그래서 한 잔 한 잔 마시다 보면, 금세 네댓 잔을 마시기 십상이다. 저녁이면 볼이 발개지며 살짝 취기가 오른다.


▲헤밍웨이 단골집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는 낙서로 빼곡하다.

 

올드 아바나에 있는 헤밍웨이의 단골집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에서는 하루에도 모히또 수백잔을 만든다. 레스토랑 입구의 좁은 바에서는 라이브 밴드가 공연을 하고, 흥건하게 모히또에 취한 여행객들이 여유를 만끽한다. 그 옛날 헤밍웨이가 그랬듯 모두 헤밍웨이가 된 듯 밤을 즐긴다. 


아삭아삭 다이끼리

▲아바나 엘 찬추예로(El Chanchullero)의 다이끼리.

 

다이끼리는 모히또와 쌍벽을 이루는 쿠바의 대표 칵테일이다. 쿠바에서는 얼음을 갈아서 만든 ‘프로즌 다이끼리’를 많이 마신다. 헤밍웨이는 당뇨 때문에 설탕을 줄인 대신 럼을 더 넣은 프로즌 다이끼리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헤밍웨이를 따라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쿠바에서 다이끼리를 주문하면 묻지 않고 프로즌 타입으로 낸다.

▲꼬히마르의 라 떼라싸(La Terraza)의 다이끼리. 꼬히마르는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온다.

 

다이끼리는 라임 외에도 망고, 딸기 등 다양한 과일과 함께 여름철 대표 칵테일로 한국에서도 인기다.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시원한 얼음과 어우러져 목까지 얼얼하다. 한 잔이면 그 매력에 폭 빠지고 만다. 문득 헤밍웨이가 럼을 사랑한 것인지, 이 달콤함을 사랑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비냘레스 3J 따파스 바(3J Tapas Bar)의 다이끼리와 아바나 클럽.

 

헤밍웨이의 또 다른 단골집은 ‘엘 플로리디따(El Floridita)’다. 간판에 커다랗게 쓰인 ‘다이끼리의 요람(La Cuna del Daiquiri)’이라는 문구만 봐도 이곳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엘 플로리디따에는 헤밍웨이의 동상이 있다. 마치 헤밍웨이가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 같다. 누구든 엘 플로리디따를 찾은 여행객은 담배 연기 자욱한 바에서 다이끼리를 즐기며 헤밍웨이를 추억한다.

▲다이끼리의 요람(La Cuna del Daiquiri) 엘 플로리디따(El Floridita).

 

쿠바를 여행한 이에게 무엇이 가장 그립냐고 물으면, 대부분 칵테일을 꼽을 것이다. 쿠바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특별한 게 칵테일이다. 특별한 레시피는 없는 것 같지만 쿠바에서 마시는 칵테일은 각별하다. 한 모금 들이키면 톡 쏘며 목을 타고 내려가며 몸을 전율케 한다. 그리곤 심장이 소리 지른다. 새콤달콤하고 청량한 이 오묘한 맛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고!

 

⑤ 거리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올드 아바나의 명물 밴드 로스 맘비세스(Los Mambise).

 

오토바이가 올드 아바나의 낡고 허름한 골목을 달린다. 쓰러질 듯 낡은 아파트에는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 있다. 수십 년 된 낡은 그림 같은 장면으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시작한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쿠바의 대표적인 사교 클럽이자 여기서 공연하는 밴드 이름이다. 영화 덕분에 이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고, 쿠바 음악을 전 세계에 알렸다. 지난 2000년에 개봉한 뒤 2015년 11월 다시 국내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후아니까와 찬찬이 바다에서 모래를 체로 칠 때 그녀의 체질하는 모습에 찬찬의 가슴은 두근거렸네.”

상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이 아름다운 구절은 그들의 대표곡 ‘찬 찬(Chan Chan)’의 가사다.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의 고혹적인 저음과 엘리아데스 오초아(Eliades Ochoa)의 맑은 고음이 매혹적으로 어우러지는 곡이다. 쿠바에서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처럼 유명하진 않아도 쿠바의 혼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을 골목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7 만에 만난 로스 맘비세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멤버 꼼빠이 세군도의 묘.

 

쿠바를 대표하는 밴드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면 로스 맘비세스(Los Mambises)는 올드 아바나를 대표하는 밴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구성된 거리 밴드로, 쿠바 여행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한다. 올드 아바나의 암보스 문도스 호텔 옆에서 늘 같은 시간에 노래를 부른다. 절로 흥이 난 사람들과 함께 살사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맘비세스는 스페인에 저항한 쿠바의 독립군을 부르던 이름이다.

 

▲아바나 재즈 바 ‘Jazz Cafe’ 에서 공연하는 밴드.

 

그들을 다시 만난 건 7년 만이었다. 알베르또(Alberto)와 올가(Olga)는 고맙게도 나를 기억했다. 실은 살아 있는 멤버가 둘 뿐이었다. 세상을 떠난 멤버의 자리는 낯선 이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알베르또는 보컬이고 올가는 밴드의 홍일점으로 CD 판매와 팁 수거를 담당한다. 알베르또는 라틴 타악기 봉고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늘어난 주름과 수척해진 얼굴이 7년의 세월을 말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안타깝게도, 몇 푼 되지 않은 팁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CD 판매 금액도 달라지지 않았다.
 

▲비냘레스 전망대의 거리 밴드 공연.

 

헤어지던 날, 알베르또 아저씨는 내게 볼품없는 CD 하나를 건넸다. 자신의 음악이 담긴 CD였다. 흐릿한 컬러 사진을 출력해 만든 겉표지, 하얀 속지는 그의 손글씨로 빼곡했다. 너무 흘려 써서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언제’라는 기약은 없지만 ‘또 다시’ 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들은 이미 나에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었다.


로스 반반(Los Van Van) 꿈꾸는 이들

▲뜨리니다드 거리 밴드, 자장가처럼 감미롭던 그들의 음악.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영화를 제작하면서 구성된 밴드다. 실제로 쿠바 뮤지션들이 가장 선망하는 밴드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아니라 ‘로스 반반(Los Van Van)’이다. 센트로 아바나의 골목을 걷다 우연히 어느 밴드의 연습 장면을 구경했다. 꽤 넓은 공간이었지만 뮤지션들의 연습실이라 하기엔 너무나 초라했다. 벽에는 ‘로스 반반’과 쿠바의 유명 가수 ‘베니 모레(Benny More)’의 낡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산티아고 데 쿠바 세스페데스 공원의 거리 밴드.


“로스 반반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밴드에서 콩가를 치고 싶어”라고 말하던 젊은 콩게로(라틴 악기 콩가를 연주하는 사람). 전 세계를 돌며 쿠바 음악을 알리는 로스 반반처럼 되는 게 그의 꿈이었다. 수많은 쿠바의 음악인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듯 그도 그랬다. 나는 그의 꿈을 응원한다. 

 

▲아프리카 타악기가 많던 산티아고 데 쿠바의 거리 밴드.


오늘(3월 1일)은 오케스트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한국 공연이 있는 날이다. 이젠 화려함도 특별함도 조금은 옛이야기가 된 빛바랜 밴드지만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쿠바가 아련해진다. 당장 쿠바로 날아가 후미진 골목에서 거리의 음악인들이 부르는 노래를 온종일 듣고 싶어진다.

 

⑥ 쿠바를 사랑한, 쿠바가 사랑한 게바라

▲예수상과 게바라 박물관이 있는 마을 ‘까사 블랑카’.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년 아르헨티나 출생, 검은 베레모와 군복, 훤칠한 키, 슬픈 듯 맑은 눈,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에 물려있는 시거. 이쯤이면 누구에 대한 묘사인지 감을 잡았을 것이다. 바로 쿠바의 영웅 ‘체 게바라’다. 
 

▲게바라가 살던 아담한 집은 지금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게바라는 1956년 멕시코에서 만난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와 함께 그란마 호(보트의 이름)를 타고 쿠바로 들어가면서 쿠바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다. 지금까지도 쿠바 사람들은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가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난 게바라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그리워 한다. 

 

▲혁명광장 내무부 건물에 있는 게바라의 철근 부조. 


게바라는 쿠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바나에서 산타 끌라라까지. 오롯이 남아 있는 게바라의 흔적을 되짚으며 쿠바의 어제와 오늘을 만날 수 있다. 


혁명광장의 상징, 게바라 초상화

쿠바 여행에서 기념사진을 꼭 찍는 장소가 몇 곳 있다. 그 중 게바라의 부조(浮彫)를 새긴 혁명광장 안 내무부 건물이 가장 인기다. 원래는 스페인에 저항한 쿠바의 독립 영웅 호세 마르띠의 기념비가 있는 시민광장이었다가 1959년 혁명 이후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ón)’으로 바뀌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해 미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쿠바의 국가적인 큰 행사는 대부분 이곳에서 진행한다. 

내무부 건물은 혁명 광장의 상징적 공간이이다. 이곳을 방문한 젊은 여행자들은 게바라의 뜨거운 기를 받으려는 듯 너도나도 기념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초상화 아래에 새겨진 문구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를 게바라처럼 외쳐본다. 


▲동상 옆 돌기둥에는 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쓴 마지막 편지 내용이 적혀 있다. 


바로 옆 정보통신부 건물 외벽에는 게바라의 혁명 동지이자 친구였던 까밀로 씨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의 부조가 있다. 온화한 표정의 씨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는 쿠바인들이 사랑하는 혁명가 중 하나다.  

 

▲쿠바의 거리 어디에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게바라 기념품.


게바라가 살던 집 ‘까사 블랑카’
 

두 번째로 게바라를 만나는 곳은 까사 블랑카에 있는 체의 집이다. 올드 아바나의 대성당 광장에서 아바나 항구 쪽으로 걷다보면 이름도 아름다운 마을 ‘까사 블랑카(Casa Blanca)’가 바다 건너편으로 보인다. 멀리서 보면, 대형 예수상과 아담한 하얀 집 하나가 눈에 띈다. 집에는 벽돌색으로 ‘Che’라고 쓰여 있다. 한 때 게바라가 살았고 집무실로도 쓰던 곳으로 지금은 그를 기리는 박물관(Museo Casa del Che)으로 쓰인다. 게바라의 유해를 옮겼던 관과 사진들, 그가 사용하던 책상 그리고 집기가 전시돼 있다. 그러나 게바라를 느끼기엔 무언가 부족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채우다 만 듯한 그의 박물관은 돌아서 나오는 발길을 자꾸만 잡아챘다. 박물관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아바나는 평온하고 아름답다. 게바라도 이 풍경에 반해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리라. 
 

▲체 게바라를 상징하는 베레모도 인기 기념품이다.


산타 끌라라 체 게바라 기념관
 

산타 끌라라(Santa Clara)는 게바라의 도시다.  자동차를 타고 아바나에서 서쪽으로 약 4시간 가면 나오는 작은 도시다.  이 평범한 마을이 게바라가 잠든 곳이다. 그의 유해는 1997년 콜롬비아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산타 끌라라는 쿠바 혁명 전, 게바라가 가장 치열하게 전투한 곳이다.  지금까지도 비달 광장의 주변 건물에는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체 게바라 기념관(Monument memorial Che Guevara)은 도시의 중심 비달 공원에서 서쪽으로 약 2㎞ 거리에 있다. 이른 아침 해가 뜨겁기 전, 기념관을 찾아나섰다. 온통 푸른 공원을 지나니 곧 게바라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그의 동상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동상과 기념비 뒤편에는 기념관이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편지와 사진 등 인터넷에서도 보지 못했던 자료가 많아 게바라의 생애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아바나의 박물관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해소된 기분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게바라처럼 뜨겁게 일생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념관에서 나오는 길, 살짝 당돌한 생각이 들었다. 게바라는 ‘한 번쯤 사랑에 빠져 보고 싶은 남자’라고.

 

⑦ 헤밍웨이의 추억이 묻어있는 곳 ‘꼬히마르’

▲꼬히마르의 낚시꾼, 밝은 미소로 여행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노인 산티아고는 드디어 550㎝가 넘는 어마어마한 물고기를 낚는다. 84일을 허탕치고 85일째 되던 날 잡은 물고기다. 외로움과 배고픔과 싸워 얻어낸 소중한 성과였다. 그러나 너무 먼 바다로 나갔던지라 산티아고는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를 만난다. 결국 상어 떼는 노인이 어렵게 잡은 물고기를 앙상한 뼈만 남기고 발라버린다. 낡고 텅 빈 판잣집에 돌아온 그는 깊은 잠에 빠진다. 노인의 유일한 친구 소년 마놀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보살핀다.  


이는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로 1953년 퓰리처상을,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꼬히마르(Cojimar)는 작은 어촌이다. 이 작고 평범한 마을이 매일 관광객들로 넘치는 이유는 헤밍웨이다. 이곳은 『노인과 바다』의 배경지자 헤밍웨이가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헤밍웨이를 추억하는 또 하나의 그곳, 꼬히마르로 떠나보자.  


헤밍웨이의 낚시터 꼬히마르(Cojimar)

헤밍웨이는 1939년부터 약 20년을 쿠바에서 머물렀다. 그중 많은 시간을 낚시하며 보냈고 나머지 시간은 글을 썼다. 그는 보트 필라(Pilar)호를 타고 일등 항해사 그레고리와 함께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거나 같이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은 꼬히마르는 요란스럽거나 유난스러울 법한데 그렇지 않다.

 

호들갑 떨지 않은 꼬히마르 덕에 헤밍웨이의 추억을 찾아 잔뜩 기대하고 온 여행객들은 간혹 실망을 안고 돌아가곤 한다. 헤밍웨이 동상과 그가 자주 들렀던 단골집 라 떼라사(La Terraza)에서 모히또(Mojito, 쿠바 칵테일) 한잔을 마시는 것 외엔 달리 그를 추억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작은 바다 마을 꼬히마르의 풍경


꼬히마르는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약 10㎞ 정도 떨어져 있다. 나지막한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은 유난히 조용했다. 바다로 길게 난 낡은 다리에는 너덧 명의 낚시꾼들이 지루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고, 짙은 색의 바다엔 은비늘이 눈부셨다. 낚은 고기도 없고 낚싯줄은 움직일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일을 하는 것인지 시간을 때우고 있는 것인지는 달리 구분할 수 없지만 이들의 직업은 아마도 어부일 터이다. 그러고 보니 꼬히마르는 어촌인데 배가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낚시를 즐기는 꼬히마르의 사람들

 

엉기성기 나무를 얹어 만든 다리는 낡아 있었다. 군데군데 틈이 있어 행여 물에 빠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리 끝에 걸터앉았다. 젊은 청년 하나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하얗게 반짝이는 바다의 한 틈을 그가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물고기 떼다. 짧은 낚싯줄로는 눈앞에 고기가 보여도 잡을 수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비릿한 바다 냄새가 담겨 왔다.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낡은 배의 노를 저어 지친 표정으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헤밍웨이 단골집 라 떼라사(La Terraza)

바다를 지나 골목으로 조금 걷자 커다란 간판이 눈에 띈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들린다는 헤밍웨이 단골집 라 떼라사다. 소설 속에서 산티아고 할아버지와 마놀린이 맥주를 마셨고, 마놀린이 할아버지를 위해 커피를 받아왔던 곳이다. 레스토랑의 입구를 들어서자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바나 클럽 등의 럼이 진열되어 있다.

▲헤밍웨이 단골 바 라 떼라사 입구


안으로 들어서면 깔끔하게 정리된 테이블과 벽을 가득 채운 헤밍웨이의 사진이 보인다. 물고기를 낚은 헤밍웨이, 낚시 대회에서 우승한 피델 카스트로와 헤밍웨이를 함께 찍은 흑백 사진 등이 걸려 있다.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창가 자리는 헤밍웨이 지정석이었다. 창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밀려오고 창 너머로 그림 같은 바다의 풍경이 펼쳐졌다. 헤밍웨이가 사랑했을 그 풍경, 그 바람이리라. 모히또 대신 다이끼리(Daiquiri, 쿠바 칵테일) 한 잔을 마셨다.

 

▲카페 라 떼라사의 내부, 헤밍웨이의 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꼬히마르는 누군가에게 볼거리 없고 특별하지 않은 수 있다. 그렇지만 내겐 소설 속 산티아고 할아버지와 소년 마놀린이 마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고향 마을처럼 소박하고 평온하고 정이 듬뿍 느껴졌다. 꼬히마르는 매년 낚시 대회를 열어 헤밍웨이를 추억하고 있다.
 

⑧ 오바마 찾아간 쿠바는 세계 최고급 시가 생산국 

쿠바의 유명가수 꼼바이 세군도(Compay Segundo), 영국의 전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그리고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공통점은 무얼까. 이들은 모두 국적도 직업도 다르다. 그러나 ‘쿠바’라는 힌트를 내면 아마 ‘아!’하고 무릎을 탁 치지 않을까. 그렇다. 이들은 모두 시가(Cigar) 담배 애호가이다. 쿠바의 상징이자 쿠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품인 시가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시가의 역사와 쿠바 시가

시가를 처음 유럽으로 전파한 사람은 탐험가 콜롬버스였다. 쿠바에서 처음으로 담배를 발견한 것은 콜럼버스의 두 부하 로드리고 데 헤레스와 루이스 데 토레스였다. 둘은 1492년 쿠바 내륙을 탐험하던 중 아메리카 원주민의 담배 풍습에 대해 알게 된다. 원주민은 신성한 종교의식을 올릴 때도 시가를 사용했지만 일상 속에서도 담배를 늘 가까이 했다. 담뱃잎을 씹어먹고 즙을 짜서 마시고 잎을 태운 연기를 코로 들이마셨다고 한다. 이후 스페인으로 담배가 전파되었고, 쿠바산 시가는 부의 상징이 되었다. 스페인은 담배 무역을 통해 큰 부를 거머쥐었다. 쿠바는 담배를 헐값에 공급하는 생산지로 전락했다. 

쿠바는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시가 생산국이다. 쿠바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시가가 있다. 대표 브랜드는 코히바(Cojiba), 몽떼크리스토(Montechristo) 그리고 로메오 이 훌리에타(Romeo y Julieta, 로미오 앤 쥴리엣)다.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것은 코히바다. 몽떼크리스토는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고 로미오 이 훌리에따는 독특한 향으로 유명하다. 

쿠바의 시가가 지금까지도 세계 최상급으로 인정받는 건 시가를 마는 기술자가 있어서다. 시가 기술자는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평생 시가를 만다. 흥미롭게도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수상, 할리우드 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 같은 유명인들은 전속 시가 기술자를 두고 자신만의 시가를 즐겼다고 한다. 시가의 맛과 품질을 좌우하는 건 ‘기술자의 손 맛’이라는 말이다.    


담배가 익어가는 비냘레스

비냘레스(Viñales)는 쿠바의 서쪽 피나르 델 리오(Pinar del Río)주의 작은 농촌 마을이다. 반나절이면 다 둘러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마을에 여행자들이 몰려든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담배 때문이다. 독특한 모양의 모고테(Mogote, 언덕 모양의 봉우리)가 있고, 여기서 쿠바 최고로 인정받는 시가의 원재료인 잎담배가 자란다.

비냘레스의 번화가를 조금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 한참을 걸었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커피 밭을 지나자 파릇파릇한 담배밭이 보였다. 밭 옆에는 짚으로 만든 움막이 있었다. 언뜻 봐도 담배 말리는 곳 같았다. 밭을 지나 조심스레 농가에 들어서자 젊은 여자가 나왔다. 시가를 구경하러 왔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작은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능숙한 솜씨로 시가를 만 여인이 자연스럽게 한 모금 빨았다.

 

말린 잎담배 뭉치를 들고온 그녀는 담배를 말면서 시가 만드는 법을 설명했다. 시가는 담배 잎사귀에 물과 꿀, 라임 등을 섞은 액체를 살짝 뿌린 후 45일간 잘 보관한다. 그 다음 담뱃잎 여러 겹을 말면 향과 맛이 밴 맛있는 시가가 된단다. 그녀가 방금 말아 낸 시가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자 연기가 몽글몽글 퍼졌다. 첫 맛은 아주 달콤했다. 그리고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이번엔 어질어질했다. 역시나, 시가는 초보자에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담배 키우는 마을, 비냘레스의 풍경. 멀리 보이는 언덕을 모고떼라 부른다.

 

어릴 적 시골 이웃집에는 담배 밭이 있었다. 여름이면 분홍색 꽃이 담배밭에 가득했고, 푹푹 찌는 담배 냄새가 우리 집 마당으로 살살 넘어오곤 했다. 노랗게 잎이 변한 늦여름에는 앞집 언니 오빠들이 넓적한 담뱃잎을 어깨에 메고 언덕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쿠바의 담배밭에서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⑨ 낡아서 더 정겨운 아바나의 풍경

▲올드 아바나 시가지의 전경.


쿠바는 40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크게 3 지역으로 나뉘는데, 서부 옥시덴떼(Occidente) 지역에 수도 아바나(La Habana)가 있다. 아바나는 풍부한 역사만큼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아바나의 구시가지, 즉 올드 아바나는 이름 그대로 오래된 건물과 유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쎈뜨로 아바나(Centro Habana)와 베다도(Vedado)는 주거 지역으로 고층 빌딩과 신식 건물이 눈에 띄는 신시가지다. 여행자 대부분은 올드 아바나에 머물지만, 쎈뜨로와 베다도 또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다양하다.  


▲까사 블랑카(Casa Blanca)에서 바라 본 아바나 시가지.


우여곡절 많은 쿠바의 역사

아바나(La Habana)는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1519년에 건설되어 1607년에 쿠바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 아바나는 남미에서 황금을 가득 싣고 스페인으로 향하던 상선이 반드시 거쳐가던 항구였다. 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도시는 점점 풍요로워졌지만 동시에 많은 해적의 표적이 되었다. 해적이 들끓자 스페인 선박들은 안전을 위해 1년에 두 번 아바나 항에 모인 후 군함의 보호를 받으며 본국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스페인은 해적의 습격을 대비해 아바나에 모로 요새와 까바나 요새를 건설했다. 1898년,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아바나는 또 다른 변화를 맞게 됐다. 독립은 자주 독립이 아니었다. 사실상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지배권을 넘겨받은 형태였다. 1920년대 미국 정부가 금주령을 내린 뒤, 많은 미국인이 럼(Rum) 주와 시가를 즐기기 위해 쿠바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레 아바나는 화려한 동시에 문란한(?) 일탈의 도시가 되어갔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친구들이 혁명을 통해 아바나에 입성하기 전까지 말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많은 역사 때문인지 아바나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문화와 풍경을 품고 있다.

 

▲재공사 전의 까삐톨리오, 지금은 보수 공사 중이다. 


아바나의 랜드마크, 까삐똘리오

 아바나를 찾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사진을 찍는 장소가 있다. 바로 까삐똘리오(El Capitolio)다. 까삐똘리오는 스페인어로 시청사나 국회의사당 등 도시의 중심 건축물을 일컫는 말이다. 아바나의 까삐똘리오는 네오 클래식과 아르누보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아바나 뿐 아니라 쿠바 전체에서도 랜드 마크로 꼽히는 곳이다. 미국의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건축가가 1929년에 완성한 것이어서 미 국회의사당의 축소판이라 부르기도 한다. 돔형 지붕은 멀리서도 보일 만큼 웅장하다. 1959년 혁명 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층 로비 바닥에는 24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전시돼 있다. 우습게도 가짜 다이아몬드란다. 그럼에도 모조 다이아몬드는 아바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쿠바에서 거리를 재는 기준점이 바로 이 다이아몬드라고 한다. 7년 전, 처음 쿠바에 갔을 때 까삐똘리오 1층에는 인터넷 카페가 있었다. e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30분이 걸렸던 추억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아바나의 공원에서도 무선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고 제법 속도도 빨라졌다. 까삐똘리오는 현재 보수 공사로 휴관 중이다.

▲빠르께 쎈뜨랄(Parque Central) 앞 잉그라테라 호텔과 거리 풍경.


빠르께 쎈뜨랄의 거리 사진관

 까삐똘리오가 유명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핀홀 카메라(Pinhole Camera)로 사진을 찍는 거리의 사진사 때문이었다. 핀홀 카메라는 렌즈 없이 사진을 찍는 일명 ‘바늘구멍 사진기’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까삐똘리오 앞에는 핀홀 카메라를 든 사진사가 서너 명 있었다.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영 볼 수가 없었다. 운좋게도 근처 빠르께 쎈뜨랄(Parque Central), 즉 중앙공원에서 한 핀홀 사진사를 만났다. 낡은 카메라 앞에는 유럽에서 온 여행객 부자(父子)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핀홀 카메라가 신기한지, 부자는 사진 한장 찍으면서도 무척 즐거워했다. 알고 보니, 아들의 직업도 사진작가란다.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신기하게도 사진 한 장이 완성되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도, 사진을 받아든 사람도 모두 행복해보였다. 낡은 핀홀 카메라에는 사진사의 할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카메라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란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천천히 얻어내는 사진 한 장은 예나 지금이나 아바나 여행의 명물임이 틀림없다. 

 

▲부산 광안리를 연상시키는 말레콘의 밤.

 

짓궂은 말레콘, 짭짜름한 첫 인사

아바나의 명물 중 하나는 말레콘(Malecon)이다. 말레콘은 베다도부터 올드 아바나까지를 일컫는 해안 지역이다. 여름이면 높은 파도가 치는데 이따금 자동차도로까지 넘친단다. 파도가 달리는 자동차를 덮치는 광경이 TV 광고에도 나온 적이 있다. 말레콘이 여행자들과 인사하는 방법은 짓궂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바닷가를 거니는 여행자를 덮친다. 당황한 여행자들은 기겁하며 폴짝폴짝거리지만 이내 깔깔 웃고 만다. 짭짜름한 바닷물에 흠뻑 젖어도 마냥 즐겁다. 해가 진 뒤, 말레콘은 더욱 매혹적인 휴식처로 변신한다. 기타와 색소폰을 연주하는 악사들, 친구들과 럼주를 나눠 마시는 청춘들,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족, 꼭 껴안고 입맞춤을 나누는 연인들 그리고 들뜬 표정의 여행자까지. 모두 아늑한 말레콘의 밤을 만끽한다. 유난히 붉고 아름다운 아바나의 저녁노을이 모두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다.

 

⑩ 시간이 멈춘 도시, 뜨리니다드

▲뜨리니다드 쎄스페데스 공원의 오후.


예부터 쿠바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주인공은 사탕수수다. 쿠바는 사탕수수로 설탕과 럼(Rum)을 만들어 세계 각지로 수출했다. 사탕수수 농업이 가장 호황을 누리던 건 18~19세기다. 그 시절의 풍요로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가 있다. 바로 해안도시 뜨리니다드(Trinidad)다. 수도 아바나 다음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이곳에서는 밤마다 야외 공연장에 수백 명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음악과 춤을 즐긴다. 근사한 레스토랑, 아기자기한 골목길, 도심 외곽의 아름다운 자연과 공원 등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이 넘쳐난다.


19세기 사탕수수 농장의 흔적

▲뜨리니다드의 상징 산 프란시스코 교회 수도원(지금은 박물관)이 보이는 골목.


뜨리니다드는 쿠바에서 자동차로 약 6시간 거리에 있다. 쌍끄띠 스삐리뚜스(Sancti Spíritus)주에 속한 작은 도시로, 쿠바 섬 중부에 위치하고 남쪽으로 카리브 해를 바라보고 있다. 1514년에 건설된 유서 깊은 도시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쿠바 초대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께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가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설탕 수출이 호황을 이루면서 뜨리니다드는 도시로서,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종탑에서 바라 본 뜨리니다드의 풍경.

 
뜨리니다드의 골목은 앙증맞고 예쁘다. 색색의 식민지풍 주택이 울퉁불퉁한 길과 어우러진다. 한적한 길을 따라 박물관, 전망대, 레스토랑 그리고 갤러리가 늘어서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19세기를 걷는 느낌이 든다.  

옛 사탕수수 농장 지대를 만나려면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바로 뜨리니다드 동쪽 8㎞ 거리에 있는 로스 잉헤니오스 계곡(Valle de los Ingenios) 지역이다. 1988년 뜨리니다드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오전 10시, 하루 한 번 운행하는 관광열차를 타고 잉헤니오스로 출발했다.

기차는 1시간 뒤 ‘마나까 이스나가(Manaca Iznaga)’에 멈춰섰다. 대부호 뻬드로 이스나가가 1795년에 지은 저택과 높은 탑이 보였다. 높이 44m에 달하는 탑에 올랐다. 좁고 낡은 나무 계단은 발을 옮길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만만하게 봤는데 계단을 오를수록 오금이 저렸다.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은 장관이었다. 지금은 푸른 벌판에 듬성듬성 주택이 들어서 있지만 오래 전에는 사탕수수가 빽빽히 들어선 농장지대였다고 한다.

이 높은 탑은 농장에서 일하던 노예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현재 탑 입구에는 기념품과 옷을 파는 노점이 줄지어 있다. 상인 대부분은 옛 농장 노예의 후손일 것이다. 


매일 밤 파티가 열리는 언덕

여행자들이 뜨리니다드에서 반드시 경험해봐야 하는 것은 매일 밤 벌어지는 살사 파티다. 파티는 뜨리니다드 곳곳에서 펼쳐지지만 이왕이면 유명한 술집 ‘까사 데 라 뮤시카(Casa de La Musica)’를 찾아가보자. 까사 데 라 뮤시카는 스페인어로 ‘음악의 집’이란 뜻으로, 마요르 광장(Plaza Mayor) 북동쪽 언덕으로 조금만 오르면 된다. 매일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라이브 음악과 룸바 공연(아프리칸 흑인 노예들의 전통 춤)이 펼쳐진다.

저녁식사를 마친 여행자들은 밤이면 이곳으로 모여 계단을 가득 메운다. 라이브 밴드의 음악과 함께 흥겨운 파티가 시작된다. 작은 무대에서 라이브 연주와 룸바 공연이 펼쳐지고 무대 앞 작은 공간에서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여행자들이 춤판을 벌인다. 


▲앙콘 해변과 바다.


뜨리니다드가 품은 또 하나의 매력은 아름다운 카리브해를 끼고 있다는 것이다. 도심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앙콘 해변(Playa Ancon)이 특히 아름답다.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택시 혹은 투어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시설이 좋거나 즐길 거리가 많은 것은 아니다. 그저 자연 그대로의 바다와 식당 한두개, 아담한 해양 레포츠숍이 있을 뿐이다.


▲한낮의 앙콘 비치, 여행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곳은 뜨리니다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다. 특히 가난한 여행자에겐 더욱 그렇다. 하루 종일 썬 베드를 빌려도 2페소(2달러)면 충분하다. 바다에 은비늘이 반짝이고 저무는 해가 바다를 물들이는 시간, 앙콘 해변은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빨간 태양이 바다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발길을 떼지 못했던 그날이 문득 떠오른다.  

 

(11) 혁명의 태동지, 산티아고 데 쿠바

▲산티아고 데 쿠바의 골목, 구시가지가 언덕 위에 있다.


쿠바 근대사에서 가장 굵직한 사건은 ‘쿠바 혁명’이다. 쿠바를 완전히 변화시켰을 뿐더러 20세기 중반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쿠바 혁명은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에서 시작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수도였던 이곳은 지금, 쿠바 제2의 도시이다. 또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의 고향이자 룸바(Rumba, 아프리칸 리듬의 쿠바 전통춤)의 도시이기도 하다. 바카디 럼의 원산지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22시간 버스를 타고 찾아간 도시

아바나에서 버스를 잘못 탄 바람에 22시간이나 걸려 산티아고 데 쿠바에 도착했다. 보통 16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는데 직행 우등버스 가격을 내고도 버스가 고장이 나 완행버스를 탔다. 그럼에도 버스회사는 사과를 하거나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버스에서 거의 하루를 버텼다.

 

▲해질 무렵의 거리, 멀리 바다가 보인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아바나에서 남쪽으로 약 870㎞ 떨어져 있다. 거리도 멀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많은 여행자가 기어코 산티아고 데 쿠바를 찾아간다. 춤, 음악 그리고 혁명이라는 키워드 때문이다. 지금은 그 명성을 수도 아바나에 빼앗겼지만, 여전히 산티아고 데 쿠바는 매력적인 도시다.

 

▲바카디 럼을 성공시킨 에밀리오 바카디의 묘.

 

쿠바 혁명을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고 2008년 1월까지 쿠바의 최고지도자였다. 그의 고향은 올긴(Holguin)이지만 산티아고 데 쿠바는 그에게 고향과 다름없는 곳이다. 학창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아바나에서 대학 졸업 후 혁명의 도화선이 된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을 일으킨 곳도 바로 산티아고 데 쿠바다.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은 1953년, 피델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정권에 항의했던 첫 번째 사건이다. 습격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는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법학을 전공한 그는 자신을 변호하며 장장 5시간에 걸친 연설을 했다. “역사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La historia me absolvera)”는 명 연설이 이때 나왔다. 
 

▲몬카다 병영, 지금은 일부만 박물관으로 쓰이고 나머지는 학교로 사용 중이다.


당시 피델의 나이는 27세였다. 이후, 동생 라울 카스트로와 함께 멕시코로 건너간 그는 체 게바라를 만났다. 1956년 혁명 용사 82명을 태운 그란마 호가 멕시코에서 출발해 쿠바에 도착해 침공을 기도했다. 이 또한 실패로 끝났지만 1959년, 마침내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혁명을 성공시켰다. 하여 산티아고 데 쿠바 곳곳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당시 혁명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몬카다 병영은 일부를 박물관으로, 나머지는 학교로 사용하고 있다. 


피델의 이웃집 누나, 마리아를 만나다

비가 내렸다. 언덕을 올라 피델 카스트로가 살았던 집에 도착한 날이었다. 피델이 살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쉬운 걸음을 돌리려 했는데, 쿠바인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이웃집을 가리키며 피델 카스트로의 옛 친구가 살고 있다고 알려줬다. 염치를 불구하고 그 집을 노크하고 피델 카스트로의 친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피델 카스트로의 옆집 누나, 마리아 할머니.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나왔다. 그녀는 피델의 이웃집 누나, 마리아 에스떼야(Maria Estella)였다. 2003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곳 산티아고 데 쿠바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피델을 만났다. 그녀의 기억 속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독재자도 혁명가도 아닌 여섯 살 어린 동네 동생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내게도 보여주며 그녀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피델의 옆집 누나, 마리아 할머니였다. 

바카디(Bacardí)는 럼(Rum)의 대표 브랜드다. 럼 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다는 바카디의 고향이 바로 산티아고 데 쿠바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바카디 가(家)는 1862년 처음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럼 사업을 시작했다. 설립자의 아들 에밀리오 바카디(Emilio Bacardí)는 럼 사업을 크게 성공시킨 후 1899년 산티아고 데 쿠바의 시장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1959년 혁명 이후, 쿠바 정부가 모든 기업을 국영화하려 하자 바카디는 본사를 버뮤다로 이전시켰다. 바카디가 떠난 뒤, 쿠바를 대표하는 럼의 자리는 ‘아바나 클럽(Havana Club)’이 차지했다

1899년에 세워진 바카디 박물관(Museo Municipal Emilio Bacardí Moreau)은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이다. 1층에는 바카디 가의 이야기가 잘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을 보며, 럼의 역사 뿐 아니라 쿠바의 치열했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12)  파란색으로 기억되는 도시 씨엔푸에고스

▲씨엔푸에고스의 중심, 호세 마르띠 공원.

 

 

 

색으로 기억되는 도시가 있다. 파란 하늘, 푸른 바다, 쨍하게 맑은 날씨를 자랑하는 쿠바 ‘씨엔푸에고스(Cienfuegos)’를 두고 하는 말이다. 씨엔푸에고스에서는 아침이면 리드미컬한 말발굽 소리가 잠을 깨우고 거리에선 경쾌한 베니 모레(Benny Moré)의 노래가 귀를 즐겁게 한다. 아직까지 여행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며칠만 머물면 정이 들어 떠나고 싶지 않아지는 도시다.


프랑스 신사 같은 도시

씨엔푸에고스는 1819년 프랑스 이민자에 의해 만들어진 항구 도시다. 쿠바 섬 남부에 위치한 곳으로 인구는 15만 명이 조금 넘는다. 아바나에서 약 250㎞ 떨어져 있고 산타 클라라(Santa Clara)와 뜨리니다드(Trinidad)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이곳은 쿠바의 다른 도시보다 세련미가 있다. 한데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니다. 여행자 대부분이 그냥 지나쳐 가는 이곳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깔끔한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프랑스 신사 같은 곳이랄까. 

씨엔푸에고스에서 흥미로운 건 골목 풍경이다. 골목이 넓고 시원스레 쭉쭉 뻗어 있다. 골목 이름은 따로 없다. 가로와 세로만 구분하고 숫자만 있다. 바로 그 단순함이 좋았다. 골목에는 가로수가 있어 늘 푸르다. 가로수와 어우러진 파스텔 톤의 주택들은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TV 소리가 시끄럽게 골목으로 흘러나오기도 하지만 가끔은 가족이 신나게 살사 한판을 벌이며 배꼽이 빠지도록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도심에서 몇 블록만 외곽으로 가면 바다다. 항구에 정박한 배도 있고 방파제에서 낚시를 즐기는 낚시꾼도 있다. 모든 풍경이 평온하고 따스해 보인다. 사람들 또한 친근하면서도 여행자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씨엔푸에고스 센트로에는 호세 마르띠 공원(Parque Jose Martí)이 있다. 큰 세비야 나무가 우거져 있고 깔끔하게 정돈된 공원이다. 쿠바의 시인이자 독립 영웅 호세 마르띠(Jose Martí)의 이름을 딴 공원이다. 주변으로 주 청사, 박물관, 극장, 갤러리, 성당 등이 있는데 건축물이 모두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유난히 공원 주변에는 갤러리가 많다. 

그중 내가 만난 이르빙 또레스 바로쏘(Irving Torres Barroso)는 특히나 인상 깊은 화가였다. 그는 빨간색, 노란색 등 원색을 주로 사용하고, 사진이나 신문 등을 작품에 활용하기도 했다. 모든 작품은 뚜렷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작업실 겸 갤러리를 잠시 둘러보며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작업실은 독특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물감과 찢어진 신문, 사진이 붙어 있었다. 반면 눈매가 선한 바로쏘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의 작품은 이미 독일이나 다른 나라에서 꽤 알려졌단다. 그는 쿠바의 유명 가수 베니 모레(Benny Moré)를 위한 기념행사에 전시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쿠바에는 바로쏘 같은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꽤 많다. 이들이 언제쯤이면 그들의 재능을 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을까. 작은 그림 두 점을 사들고 작업실을 나왔다. 언젠가 한국에서 그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쿠바인이 사랑한 가수 베니 모레

가수 베니 모레(Benny Moré)의 본명은 바르또로메 막시밀리아노 모레(Bartolomé Maximiliano Moré)다. 모두 그를 베니 혹은 베니 모레라고 불렀다. 그는 쿠바의 국민 가수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편안한 그의 테너 음과 표현력을 사랑했다. 그는 끼가 넘치는 천재 가수였다. 1919년 산타 이사벨 데 라스 라하스(Santa Isabel de las Lajas, 지금의 씨엔푸에고스)에서 태어나 43세의 짧은 생을 아바나에서 마감했다. 여섯 살에 기타를 배웠고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고향을 떠나 아바나로 향했다. 흠집 난 과일이나 채소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고 이후엔 기타를 들고 거리 공연을 해 돈을 벌었다. 고향에서 난 천재 음악인을 사랑한 씨엔푸에고스 시민들은 프라도 거리(paseo del prado, 가로수길)에 그의 동상을 만들었다. 바라데로(Varadero, 쿠바의  도시)에서 만났던 민박집 주인 또레스(Torres) 아저씨는 음악 이야기를 나누다 베니 모레 이야기가 나오자 진지하게 그에 대해 설명했다. “베니 모레는 국민가수야. 그가 대단한 이유는 혼자서 악기와 음악을 배웠다는 거야.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많은 공연과 음악 활동을 했고 그의 노래를 모두 사랑했지. 나 역시 최고의 가수를 꼽으라면 베니 모레를 꼽지.”

안타깝게도 베니 모레는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쿠바인 10만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13)  진한 흙냄새, 낡은 소달구지…고향 같은 비냘레스

▲자연 그대로 남아있는 비냘레스의 풍경, 멀리 보이는 산들이 모고떼다.

 

씨엔푸에고스(Cienfuegos)가 파란색의 도시라면, 비냘레스(Vinales)는 녹색의 도시다. 비냘레스는 초록빛 자연에서 여유를 누리고 힐링을 경험해야 한다. 비냘레스에서 맞는 아침은 정겹다. 이른 아침, 재잘재잘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 문을 열면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밭으로 나간다. 여행자도 일찌감치 자전거를 끌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내 고향, 경북 봉화에서 맞는 아침도 비슷했다. 아버지는 지게에 쟁기를 얹고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갔다. 문을 열면 아침 해를 받은 거름 자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곤 했었다. 비냘레스가 고향처럼 포근하게 느껴진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쿠바의 평온한 시골 풍경

▲비냘레스 시가지의 풍경.

 

비냘레스는 아바나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 떨어진,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농촌 지역이다. 자동차가 아바나 도심을 벗어나자 길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할 때마다 풍경도 달라졌다. 금세 도착할 듯했는데 제법 오래 걸렸다.  푸른 나무 사이로 듬성듬성 회색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석회암이었다. 세월의 흐름 대로 그 형태는 제각각이었다.

▲자전거로 비냘레스를 둘러보는 여행자들의 행렬.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고 지나가자 선명하게 단장한 비냘레스가 나타났다. 여행자들은 다시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고 자동차는 그들의 흐름에 맞춰 서두르지 않고 지나갔다. 왕복 4차선 도로가 마을을 가로지르고 도로를 중심으로 가게와 까사(민박집)가 늘어서 있다. 붉은 지붕에 알록달록 색을 칠한 집은 모두 똑같이 닮았다. 문패와 번지수가 없다면 찾지도 못할 판이다. 시내를 둘러보는 건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비냘레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달구지와 농부.

 

비냘레스는 시가의 재료인 담뱃잎 재배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시가는 쿠바에서도 인정받은 품질 좋은 시가다. 마침 밭에선 어린 담뱃잎이 마음껏 햇살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비와 바람과 햇살이 만든 곳

비냘레스 마을이 있는 비냘레스 계곡은 1999년 쿠바 정부가 ‘국가 기념물’이자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곳이다. 같은 해 유네스코는 비냘레스 계곡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다.

 

비냘레스에서는 모고떼(Mogote)라 부르는 독특한 모양의 언덕이 유명하다. 모고떼는 석회암 덩어리가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용식작용에 의해 생긴 독특한 지형이다. 그 모양이 제주의 오름과 흡사하다. 몽실몽실한 언덕에는 날카롭게 깎여나간 곳도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붉은 흙, 쭉쭉 뻗은 야자수 그리고 모고떼가 만든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비냘레스에선 말을 타고 마을을 둘러보는 투어가 인기다.

 

비냘레스에서는 석회암 동굴 탐험, 암벽 등반, 카노페(Canope)라 부르는 짚라인(Zipline) 등 다채로운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다. 5페소(약 6000원)만 있으면, 승하차 제한이 없는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닐 수도 있다. 딱히 들를 만한 박물관도 없고 꼭 들려야 할 특별한 곳도 없지만 비냘레스에서 보내는 시간은 마냥 행복하다. 넉넉한 자연의 품이 여행자를 한없이 여유롭게 안아주기 때문이다.


비냘레스에도 변화의 바람이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바 `3J 따빠스(3J Tapas)`.


고향 같은 풍경으로 남아 있을 줄 알았던 비냘레스가 변하고 있다. 외국인의 입맛과 취향에 맞춘 레스토랑과 바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마을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현대식으로 꾸민 인테리어, 세련된 음식 플레이팅, 젊고 잘생긴 웨이터의 쿠바답지 않은 서비스. 레스토랑이나 바에 앉아 있다 보면, 이곳이 정말 쿠바인가 하는 곳이 제법 늘었다.

 

▲비냘레스 라 꾸엔까(La Cuenca) 레스토랑의 내부.

 

‘라 꾸엔카(La Cuenca)’도 대표적인 최신식 레스토랑이다. 흑백의 강렬한 대비가 인상적인 인테리어에 최신식 개방형 주방까지 갖추고 있었다. 젊고 잘생긴 바텐더도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바나 클럽 럼이 들어간 칵테일을 석 잔이나 마셨다. 톡 쏘고 달콤, 상큼한 맛이 익숙한 맛이었다.

▲라 에르미따(Hotel La Ermita) 전망대의 오후 풍경.

 

혹자는 비냘레스의 변화를 염려한다. 그러나 생각은 다르다언젠가 거리가 모두 변해 쿠바의 여느 도시와 다를 없어진다 해도 마을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마을 풍경이 변치 않기를, 마을 사람들이 전통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여행자의 이기심일 것이다. 그래도 가지 바람은 있다. 비냘레스 담뱃잎으로 만든 시가의 맛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14)  세련된 혁명 도시, 산타 끌라라

▲소도시 산타 끌라라의 풍경.


버스가 산타 끌라라(Santa Clara) 터미널에 도착하기 무섭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10월 말, 우기가 지나갔으리란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섬나라 쿠바에서 이 무렵 비를 따돌릴 수 있는 도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길 곳곳이 물에 잠겨 기분이 심란했지만 택시 기사는 대수롭지 않게 골목골목을 잘 빠져나갔다


▲양파와 마늘을 파는 젊은이들.

 
산타 끌라라는 쿠바 섬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비야 끌라라(Villa Clara) 주의 주도로 아바나에서 자동차로 약 4시간 거리다. 산타 끌라라가 유명해진 것은 혁명가 체 게바라 덕분이다. 1958년 12월 31일, 산타 끌라라에서는 게바라가 지휘하는 혁명군이 쿠바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그리고 혁명은 성공을 거뒀다. 도시의 중심인 비달 공원(Parque Vidal) 주변 건물 외벽에는 당시의 총탄 흔적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97년, 게바라의 유해는 사후 30년 만에 산타 끌라라로 돌아왔다. 돌아온 게바라를 따뜻하게 맞아준 산타끌라라는 이제 전 세계 여행자가 찾아드는 여행지가 되었다


▲체 게바라 기념관. 게바라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쓴 마지막 편지가 새겨져 있다.


체 게바라 기념관을 둘러본 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낡은 교회 앞을 지날 무렵, 흑백 대비가 인상적인 건물을 발견했다. 바로 카페 겸 식당인 ‘라 보데기따(La Bodeguita)’이다. 식당 내부에는 꼼바이 세군도(Compay Segundo) 등 쿠바의 유명 가수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낡은 TV에서는 오래된 가수들의 공연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페 주인 세니아(Zenia)는 가게를 기웃거리던 나에게 시원한 커피 한 잔을 공짜로 대접했다. 큰 체구에 하얀 피부, 오뚝한 콧날과 큰 눈을 가진 그녀는 첫눈에 봐도 ‘부잣집 딸’ 같아 보였다


▲체 게바라가 아이를 안고 행진하는 동상.

 

그녀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가 1958년 체 게바라의 혁명군을 도왔단다. 그녀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 이름은 ‘라 까쏘냐 게바라(La Casona Guevara)’였고 식당 입구 벽에는 아주 큰 게바라의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라 보데기따에서 테이블을 가득채운 음식과 칵테일을 원없이 즐겼다. 그리고 라이브 밴드의 연주에 맞춰 밤늦도록 노래하고 춤췄다. 쿠바는 가난한 나라이지만, 쿠바인들은 어떤 부자 나라보다도 마음이 넉넉했다

▲산타 끌라라에서 가장 핫한 공간 메훈헤. 밤이면 음악과 춤으로 떠들썩하다.


이 작은 도시에서 게바라 외에 어떤 볼거리가 있는지 사람들에게 물었다. 한결 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메훈헤(Mejunje) 가봤어?’였다. 산타 끌라라 사람들은 메훈헤를 외국인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런 곳이 산타 끌라라에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 한낮에 메훈헤를 찾아갔다. 

1층 기념품 숍을 지나 2층에 오르니 사진이 전시된 전시장이 나왔고 술을 파는 바도 있었다. 입구에는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음료를 마시며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낮에는 한갓지지만 메훈헤는 밤이 되면, 젊은이들이 모여 열정을 불사르고 끼를 발산하는 공간으로 변신한다. 작은 야외 공연장에 불과한 이곳이 밤이면 남녀노소, 장르를 불문하고 예술로 하나가 된다. 콘서트, 연극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그러니까 메훈헤는, 소도시 산타 끌라라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세련된 2016년의 쿠바였다.

 

(15)   예술의 도시 까마구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까마구에이의 거리 풍경.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이른 아침에 도착한 곳은 까마구에이(Camagüey)였다. 조용하고 맑은 공기와 깔끔한 식민지풍 건물이 눈에 띄는 이 도시는 스페인이 건설한 7개 도시 중 하나이자 쿠바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다. 1528년에 건설된 도시 까마구에이는 수도 아바나에서 약 550㎞ 떨어져 있다. 자동차로 약 6시간 반 걸린다. 

 

영화와 도자기의 도시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지구에 있는 작은 호텔 까미노 데 이에로(Camino de Hierro)는 1800년대에 지어진 부띠끄 호텔이다. 호텔의 로비는 아담하다. 식민지 풍의 건물답게 큰 문이 있고 열린 문 사이로 시원하게 밖이 내다보였다. 노란 교회와 작은 광장, 바쁜 걸음으로 아침을 여는 사람들까지. 낯선 도시 까마구에이는 첫인상부터 단정했고 친근했다.

 

▲쿠바 유명 여배우 이사벨라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 이사벨라’.

 

 까마구에이는 예술 도시다. 영화와 문학, 미술과 깊은 인연이 있다. 쿠바의 유명 시인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이 까마구에이 출신이다. 쿠바의 유명한 영화배우 이사벨 산토스(Isabella Santos)도 까마구에이가 고향이다. 도시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식당 ‘레스떼우란떼 라 이사베야(Restaurante la Isabella)’가 있다. 영화를 테마로 한 식당이다. 벽에는 영화 포스터가 가득 걸려 있고, 영사기도 전시해뒀다. 의자에는 유명 감독과 영화배우의 이름이 쓰여 있다. 레스토랑 주변 거리에도 영화를 테마로 한 카페나 극장이 즐비하다. 

 

▲물을 받아 생활에 사용하던 물 항아리.

 

까마구에이는 스페인 안달루시아(Andalucía)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흙을 재료로 한 예술품이 많은 것도 이와 관련 있다. 물항아리가 대표적이다. 까마구에이의 오래된 건물이나 박물관 등에는 흙으로 만든 동글동글한 물 항아리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물을 받아서 생활에 사용하던 것이다. 물론 흙 도자기뿐 아니라 예술가의 감각이 물씬 묻어나는 다양하고 재미난 작품을 전시해둔 갤러리도 많았다.  

 

친구처럼 편안한 도시  

▲산 후안데 디오스 광장의 한낮. 파란 하늘과 파스텔톤 건물이 잘 어울린다.

 

까마구에이는 천천히 걸어서 여행하기에 좋은 도시다. 작고 아담한 광장이 도시 곳곳에 있다.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게 오래된 파스텔톤 건물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걸어서 골목을 걷다 보면 꼬불꼬불 난 길에서 몇 번이고 지도를 펼치거나 길을 다시 물어야 한다. 다른 도시가 반듯하게 자로 댄 듯 구역이 정비된 것에 비해 이곳은 조금 독특하다. 골목이 비뚤빼뚤해서 여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걷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독특한 건축과 친절한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바 엘 깜비오(Bar El Cambio)는 1909년 지어진 건물에 들어선 작은 바다. 아그라몬떼(Agramonte) 공원이 바로 보이는 곳에 있다. 작은 공간의 벽면은 예술 작품으로 가득하다. 흥미롭게도 칵테일이 유명한 이 작은 술집은 1959년 혁명 이후 국영화되었다. 바텐더는 쉰 살이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와 스물이 갓 넘어 보이는 앳된 청년이다. 언뜻 보기엔 어색한 조합이었지만 둘의 호흡은 제법 잘 맞았다. 그들은 지구 반대편의 낯선 여행자에게 정성을 가득 담아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고, 편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날마다 들러 수다를 떨고 싶을 만큼 쉽게 친해졌다. 

작은 도시 까마구에이가 남긴 인상은 바로 이 술집처럼 푸근했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이름도, 찾아가는 길도. 그러나 금세 친해지고 나니 오랜 친구처럼 헤어지기 아쉬워 한없이 머물고만 싶었다. 

  

(16)  호텔보다 매력적인 까사

▲빨간색 표식이 붙은 곳은 내국인 전용 까사다.


'Mi Casa, Su Casa' 쿠바의 민박집에 붙어 있는 표현이다. 까사(Casa)는 스페인어로 집이란 뜻이다. 직역하면 ‘내 집, 당신 집’이란 뜻, 즉 ‘내 집이 곧 당신 집이니 편안하게 쉬세요’와 같은 말이다. 쿠바를 찾는 일반 여행객은 대부분 호텔이 아닌 까사에서 묵는다. 까사에서 머무는 일은 쿠바를 경험하는 또 다른 형태의 여행이다. 대체 까사가 무엇이기에?


쿠바만의 독특한 민박 혹은 하숙집, 까사(Casa)

▲까마구에이에서 본 까사.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묻어난다.

 

까사는 ‘까사 빠르띠꿀라르(Casa Particular)’의 줄임말이다. 까사(Casa)는 ‘집’, 빠르띠꿀라르(Particular)는 ‘특정한, 특별한 또는 개인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집은 집인데 조금 특별한 집, 손님을 받고 영업을 할 수 있는 집이 까사인 것이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장식품으로 채워진 까사 거실이 마치 박물관 전시장 같다.


쿠바 정부가 개인에게 숙박업 허가를 내준 것은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 1990년대 초 쿠바는 소련이 붕괴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동시에 국제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쿠바로 여행객이 몰렸다. 1990년대 후반 쿠바를 찾는 여행객이 급증했고 쿠바 정부는 외화벌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관광산업을 육성하면서 다양한 관광 인프라 조성에 힘썼다. 호텔 객실이 부족해 가정집에서도 관광객을 받을 수 있도록 허가를 내준 것이 까사의 탄생 배경이다. 
 

쿠바 까사의 묘미, 문화 체험

▲쿠바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시절부터 사용했다는 침대.


까사는 내국인용과 외국인용으로 구분된다. 대문 앞에 집 모양의 빨간색 표식이 붙어있으면 내국인용, 파란색 표식은 외국인용이다. 가격도 다르다(쿠바에서는 내국인과 외국인이 각각 다른 화폐를 사용한다).


▲뜨리니다드에 있는 어느 까사의 주방. 따뜻하고 친근감이 묻어나는 주방이다.


 
까사마다 규모도 시설도 다르다. 외관이 낡았어도 안에는 에어컨, 냉장고, TV 등 있을 건 다 있다. 거실은 보통 여행자와 주인이 같이 사용하는 공간이자 만남의 장이다. 식사가 끝나고 남는 시간에 나누는 쿠바 가족들과의 대화는 그들의 삶과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파란 도자기가 장식된 까사 주방.


 
숙박요금은 정부가 책정하지만 식사 가격은 오롯이 주인이 결정한다. 그래서 간혹 여행자와 주인 사이에 음식을 놓고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보통 아침과 저녁을 미리 예약하면 시간에 맞춰 식사를 내어준다. 주인의 음식 솜씨는 복불복이다. 웬만한 레스토랑 못지않게 차려내는 곳이 있는가하면 적잖이 실망하는 곳도 있다. 
 

엄마 같은 까사 주인

▲신혼부부를 위한 까사.


아바나의 베다도 지역에서는 까사에 묵었다. 피로가 누적된 것일까, 친구는 종일 열이 났다. 급기야 저녁도 먹지 못하고 방에서 앓아누웠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친구를 깨우러 까사 문을 두드리니 친절한 주인아줌마가 반갑게 맞아줬다. 오전 5시30분, 이른 시간이었지만 귀찮은 내색 하나 없었다.


▲바라데로에 있는 까사에서 먹은 아침밥.


친구는 한층 밝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고 다행히 제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어보니, 밤새 주인집 아줌마와 할머니, 딸이 번갈아가며 친구의 방을 살폈단다. 먹을 것도 만들어 책상머리에 올려 두고 약과 따뜻한 차까지 줬다는 주인아줌마 가족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였다. 까사는 그저 하룻밤 머물다 가는 곳이 아니라 쿠바 사람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17)  순박한 쿠바인의 미소

▲까마구에이, 학교 앞에서 만난 고등학생과 선생님.

 

쿠바는 지금 핫한 여행지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대 교황 중 세번째로 쿠바를 방문했다. 그런가 하면 올해 3월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문해 라울 카스트로 쿠바 평의회 의장을 만났다. 지난 5월에는 명품 브랜드 샤넬이 아바나의 파세오 데 마르티(Paseo de Martí, 구 프라도 거리) 거리에서 2017년 크루즈 컬렉션을 열어 화제가 됐다. 여행자들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졌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쿠바의 발전으로 이어져 더 이상 옛 쿠바의 멋이 사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쿠바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가끔 짜증이 날 정도로 호객 행위를 하기도 하지만 쿠바노(Cubanos, 쿠바인) 대부분은 아직 순수하다. 


쿠바 사람들

▲산타 끌라라 거리에서 만난 학생들.


쿠바는 참 피곤한 나라다. 여행을 하는 내내 흥정과 호객 행위에 시달려야 한다. 수도 아바나와 제2의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는 더 그렇다. 피곤할 정도로 귀찮게 따라붙는 일명 삐끼들, 발을 떼기 무섭게 불러대는 ‘치노(Chino, 중국인 혹은 동양인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 와 독특한 입소리(우리가 동물을 부를 때나 쓰는 ‘쭈쭈’ 소리를 쿠바에선 사람을 부를 때 쓴다), 여자들을 공주병에 걸리게 만드는 ‘벨라(Bella, 아름다워)’ 혹은 ‘보니따(Bonita, 예뻐)’라는 말은 며칠 지나면 실증이 날 정도다. 가끔은 친절인지 작업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분명 그들은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다. 낯선 이와 대화하는 것을 즐기고 음악과 춤으로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유럽에서 백인 정복자들이 들어오고, 아프리카의 노예, 중국의 노예 그리고 일부 동양인까지 섞여 쿠바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가 섞여 만들어진 나라다. 쿠바의 전통 음식 중 아히아코(Ajiaco)라는 수프가 있다. 산이나 들에서 구한 다양한 재료로 만든 수프다. 다른 피부색, 다른 언어 그리고 다른 문화가 섞여 만들어진 나라 쿠바, 그들은 스스로를 아히아코라 부르기도 한다.  

 

가난하지만 낭만적인 사람들

▲아바나 거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나와 노래를 불러주던 아저씨.


까이에혼 데 하멜(Callejón de Hamel) 거리는 룸바 공연이 펼쳐지는 곳이다. 일요일 오후, 비가 오는 와중에도 혼을 담은 쿠바인들의 공연을 본 뒤, 나는 느릿느릿 걸으며 낯선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저 멀리 낡은 아파트 입구에서 까만 피부의 아저씨 한 명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문틈에 아저씨가 끼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파트는 입구가 좁고 낡았다. ‘올라’하고 인사를 하자 아저씨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으로 들어가더니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작은 태극기 깃발과 기타를 들고는 아이처럼 웃는 아저씨가 어찌나 귀엽던지. 어디서 난 건지 물었더니 한국인 친구가 주고 갔단다. 그리곤 태극기를 문 앞에 꽂아두고 좁은 문틈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직업이 가수라는데 노래 실력은 신통치 않았다. 그럼에도 따뜻한 기타 소리와 마음이 전해져 어떤 유명 가수의 노래보다 낭만적으로 들렸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거리에서의 즉석 공연이라.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값진 선물이었다. 

 

쿠바의 미소

▲고된 일을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던 아저씨.

 

최근에는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 촬영을 할 때 ‘사진 찍기가 무섭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러나 쿠바는 아직 예외다. 이 사람들, 카메라만 보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포즈를 취한다.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눈만 마주치면 사진을 찍어 달란다. 그리고 카메라 LCD로 사진을 보여주면 깔깔거리며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카메라를 보자 흥미로운 포즈를 취한 사람들.


산타 끌라라에서 체 게바라 기념관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내내 나는 사진을 촬영하느라 4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1시간 이상 걸으며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버스 정류장처럼 보이는 곳에서 점잖아 보이는 공무원 4명을 만났다. 내 카메라를 보더니 예외 없이 사진을 찍어 달랬다. 그들의 포즈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찍은 사진을 보며 깔깔거리는 그들, 잠시 무안했던 나도 그들과 함께 웃으며 다시 힘을 내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여행할 맛이 나는 곳이 쿠바다.

 

<18> 아바나에서 가볼만 한 레스토랑 & 카페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먹는 재미’다. 한데 쿠바는 먹는 재미로 따지면 낙제점이다. 모히또, 럼 등 ‘마실 거리’는 풍족하지만 ‘먹을거리’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쿠바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약 5년 전부터 쿠바 정부는 일부 업종에 대해 자영업을 허가했다. 까사(개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와 식당이 대표적이다. 빨라다르(Paladar, 스페인어로 맛 또는 미각이란 뜻)라고 하는 개인 식당이 최근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외국인 뿐 아니라 주머니 두둑한 쿠바인들도 팔라다르를 찾는다. 젊은 종업원의 발랄한 서비스, 맛있고 독특한 음식과 저렴한 가격까지 모두 매력적이다.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가볼 만한 레스토랑과 카페 4곳을 추천한다.

국영 레스토랑 엘 템플레떼(Restaurante El Templete)

▲여행자로 붐비는 레스토랑 엘 템플레떼

 

사실 이곳은 팔라다르가 아니다. 쿠바 정부가 운영하는 국영 레스토랑이다. 보통 쿠바의 국영 레스토랑은 하나같이 불친절하고 특색이 없는데 이 집은 좀 다르다. 스페인식 요리를 근사하게 선보이는 곳으로 직원들도 젊고 친절하다. 원래 생선 요리로 유명한 집이었지만 지금은 고기와 생선 요리 모두 맛있다. 올드 아바나 오비스뽀 거리의 끝에 자리하고 있다. 아바나 항이 보이는 전망도 근사하다. 가격은 다소 비싼 편이지만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


헤밍웨이가 모르는 맛집, 엘 찬츄예로(El Chanchullero

▲엘 찬추예로의 브로체타(케밥), 아보카도, 토마토 그리고 오이를 아낌없이 담아 준다.

 

까삐똘리오 맞은편 브라질 거리에서 직진하면 유난히 많은 사람이 줄지어 선 작은 레스토랑이 나온다. 오후 1시에 도착하면 4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좁은 입구엔 ‘헤밍웨이가 한 번도 오지 않은 집’이라 쓰여 있다. 개성 넘치는 인테리어로 젊은 외국인 여행객에게 인기다. 2페소(약 2달러)짜리 다이끼리(Diquiri, 럼을 넣은 칵테일)가 유명하고 음식도 맛있다. 쿠바에서 보기 드문 개방형 주방을 갖췄고 저렴하고 푸짐한 음식을 자랑한다. 신선한 아보카도와 토마토를 아낌없이 썰어 넣은 접시를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운치 있는 카페, 에스또 노 에스 운 카페(Esto no es un Café)

가게 이름을 해석하면 ‘이것은 커피가 아니다’인데 커피가 아주 맛있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다. 올드 아바나의 대성당 광장 인근 골목에는 소문난 카페와 식당이 많은데 이 집도 그 가운데 하나다. 파라솔 아래 예쁜 화분이 하얀 테이블보 위에 앙증맞게 놓여 있는 모습만 봐도 머물고 싶은 집이다. 음식 이름이 재미있다. 이를테면 뒤샹의 샘(La fuente de Duchamp, 뒤샹은 프랑스 화가), 치킨 폴락(Pollo Pollock, 폴락은 미국의 행위미술가)이라는 메뉴가 있다. 햇살 좋은 아침,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기 더없이 좋은 집이다.

정겨운 카페 아르크앙헬(Café Arcángel)

▲카페 아르크앙헬의 스타벅스 시티 머그컵 콜렉션. 서울 것도 있다.

 

아르끄앙헬은 천주교 용어로 대천사(大天使)를 뜻한다. 카페 아르끄앙헬은 까피톨리오에서 멀지 않은 센트럴 아바나에 있다. 낡은 아파트 1층에 자리잡은 카페인데 작은 간판과 파스텔톤으로 칠한 외관이 정겹다. 카페 내부에는 타일로 된 엔티크 테이블이 따뜻한 느낌을 주고, 낡은 흑백 TV에선 찰리 채플린 영화가 나온다. 서울, 브라질, 이스탄불 등지에서 가져온 ‘스타벅스 시티 머그컵’도 전시해뒀다. 주인 아주머니가 여행을 다니며 모은 것도 있고, 여행 친구들이 준 선물도 있단다. 카페에서 느긋이 차를 마시면, 이곳이 공산주의 국가, 그것도 수도 아바나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카페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19> 쿠바에서 만난 소울푸드

▲아바나 슬로피 조(Sloppy Joe`s Bar)의 햄치즈 샌드위치.

 

그동안 쿠바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흉을 봤다. 쿠바에서는 맛집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 그래도 쿠바에서 먹었던 음식을 정리해 보니 나름 맛있는 음식이 많았고, 따뜻한 추억도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쿠바 음식은 바로 쿠바 샌드위치다. 만드는 법은 대략 이렇다. 쿠바 바게트를 반으로 잘라 버터를 바른다. 양념한 돼지고기를 구워 도톰하게 자른 뒤, 햄, 스위스 치즈와 딜 피클과 함께 바게트에 넣는다. 그리고 조지 포먼 그릴에 눌러 노릇노릇 구워내면 치즈가 녹아내리고 빵이 바삭바삭한 오묘한 맛의 샌드위치가 탄생한다. 양념에 잘 재운 로스트 돼지고기는 부드럽고 치즈가 녹아내려 하나가 된 햄도 부드럽다. 곁들이는 소스는 고작해야 머스터드. 쿠바 샌드위치는 할리우드 영화 아메리칸 셰프(Chef, 2014)에 소개된 후 열풍처럼 전 세계로 번져갔다. 

 

▲아바나 거리의 샌드위치와 햄버거, 가격은 제일 비싼 것이 1달러.

 

쿠바 샌드위치의 기원은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쿠바와 미국, 특히 플로리다 주는 이웃이나 다름없었다. 시가 산업이 활발하던 당시, 미국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Keywest), 템파(Tampa), 마이애미(Miami) 등지에서 일하던 쿠바 출신 공장 노동자들은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며 샌드위치를 자주 만들어 먹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쿠바 샌드위치가 이때부터 미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정작 쿠바에서는 지금 우리가 먹는 ‘미국화된’ 쿠바 샌드위치는 찾기 쉽지 않지만 정통 쿠바 샌드위치는 어디서나 먹을 수 있다. 햄과 치즈만 넣은 것이 대부분이고, 야채가 들어간 것도 있다. 가격은 무척 저렴하다. 비싼 게 1달러 정도다.

 

참고로 최근 한국에도 쿠바 샌드위치를 파는 곳이 많이 생겼다. 쿠바인 아우구스토(Augusto)가 직접 샌드위치를 만드는 신촌의 리틀 쿠바(Little Cuba)가 특히 맛있다. 아우구스토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으며 쿠바 이야기를 나누면 마치 쿠바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시엔푸에고스에서 먹은 거리 피자, 크고 싸지만 맛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쿠바에서 샌드위치 다음으로 흔한 것은 피자다. 지방에도 피자를 파는 식당이 수두룩하다. 쿠바인의 주식이 피자인가 싶을 정도다. 맛이 빼어나진 않지만 저렴한데다 양이 많아 밤 늦게까지 피자집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선다.

 

▲시엔푸에고스 바닷가에서 팔던 케밥과 쿠바 맥주 부카네로, 2달러의 행복.

 

사탕수수 주스나 생과일주스는 상상 이상으로 저렴하다. 한 잔이 300~500원 수준이다. 계산을 하면서도 단위를 잘못 본 것이 아닌지 다시 확인하게 되고, 돈을 내면서도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다. 올드 아바나 거리엔 추러스를 파는 곳도 더러 있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먹은 닭고기 요리.

 

“양파와 마늘을 듬뿍 넣고 살짝 매콤한 맛의 닭 요리를 먹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밥이 먹고 싶어요”

 

▲까마구에이에서 먹은 점심. 쇠고기를 양파, 마늘로 양념해 느끼하지 않다.

 

내 앞엔 빨간 양념에 양파와 마늘이 듬뿍 넣어 볶은 닭볶음에 하얀 밥이 나왔다. 마술처럼 고추장 맛이 났다. 우리의 맛과 같을 리 없지만 나만을 위해 정성을 가득 담아 만들어준 특별식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3성급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는데. 그날 저녁 식사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깨끗이 핥았다. 

 

<20> 쿠바 여행 준비하는 법

지난해 8월 미국과의 수교 재개 이후 쿠바가 들썩이고 있다. 급증한 관광객으로 인해 이미 호텔 잡기가 어려워졌다. 까사(민박)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을 터다. 한국에서도 쿠바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비자부터 항공권·숙소 예약, 환전 등 쿠바 여행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모아봤다.


비자

공산주의 국가 쿠바는 한국과 미 수교국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비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수교 여부를 떠나 관광 목적일 경우에는 비자 없이도 쿠바를 여행할 수 있다. 미국이 여권에 쿠바 방문 기록이 있는 사람의 입국을 거부하는 게 문제가 됐는데 이 또한 대안이 있다. 여행자 카드를 구입하면 된다. 모든 외국인 여행자는 쿠바 입국 시 여행자 카드(Tourist Card)를 구입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지난 2월부터 국내 쿠바 전문 여행사에서 여행자 카드를 판매하고 있다. 약 5만원이다.

 

▲쿠바 여행자 카드.

 

여행자 카드는 어느 나라를 경유해 쿠바로 가느냐에 따라 구입 방법이 달라진다. 유럽을 경유하는 경우에는 여행자 카드를 한국에서 미리 사가야 한다. 에어캐나다를 이용해 캐나다를 경유할 경우, 항공료에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멕시코를 경유할 경유, 공항 항공사 카운터에서 구입할 수 있다. 여행자 카드를 소지한 사람은 30일간 쿠바에 체류할 수 있고, 2회 연장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최대 체류일은 90일이다. 1회 연장 시마다 25페소(25달러)를 내야 한다.  캐나다를 경유는 2016년 3월 15일부터 eTA(전자여행 허가)가 필요하다.


항공권 구입

현재 쿠바로 가는 가장 빠르고 저렴한 방법은 캐나다를 경유하는 것이다. 캐나다 동부 토론토에서 아바나까지 불과 3시간30분 거리다. 마침 반가운 소식이 있다. 이달 18일부터 에어캐나다가 인천~토론토 직항편을 매일 운행한다. 비행시간은 약 13시간이다.


미국에서 쿠바로 바로 가는 항공편은 아직까지 없다. 멕시코·파나마·바하마나 도미니카 공화국 등을 경유해야 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미국을 경유해 쿠바로 간다면 최소 2번은 환승을 해야 한다. 영국 런던, 스페인 마드리드, 프랑스 파리에서 아바나로 가는 직항편도 있다. 여행 기간, 비용에 맞춰 경유지를 선택하면 된다. 일찍 예약해야 저렴한 자리를 확보하는 것은 어느 여행이든 진리다.

 

쿠바의 날씨와 여행 시기

▲쿠바의 랜드마크 까피톨리오.

 

쿠바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는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다. 아바나의 최고 기온이 25~30도이고, 습도가 낮은 편이어서 수많은 여행객이 올드 아바나의 골목을 점령한다. 호텔은 예약이 어렵고 까사 잡기도 쉽지 않다.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인기 휴양지 호텔은 엄두도 못 낸다. 쿠바에서는 뜨거운 태양을 조심해야 한다. 살을 익힐 듯 무섭게 내리쬐는 태양을 가려줄 옷가지와 선크림 등을 반드시 준비하자. 반대로 5~10월은 우기다. 최고 기온도 31~32도로 무덥다. 매일 오후가 되면 검은 먹구름이 무서울 만큼 몰려와 비를 뿌리고 지나간다. 다행히 쿠바의 호텔이나 식당, 카페 대부분은 에어컨 시설을 갖추고 있어 불편하지 않다. 밤이면 약간은 싸늘해질 수 있으니 긴팔 옷을 준비하자.

 

환전 및 신용카드

쿠바 화폐는 한국에서 구할 수 없다. 하여 캐나다달러나 유로화를 산 후, 쿠바 현지의 은행이나 국영 환전소 ‘까데까(CADECA)’에서 현지 화폐로 바꾸면 된다. 쿠바 현지에서는 달러나 유로화 등 외화가 직접 통용되지 않는다. 쿠바는 이중 화폐를 사용한다. 국영 환전소나 은행이 아닌 곳에서 환전을 하는 경우 위조지폐나 CUP과 CUC의 환차 손해를 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현금은 넉넉하게 챙겨가는 게 좋다. 현금이 떨어지고 카드 사용까지 안 되면 꼼짝없이 눌러 앉아야 한다. 참고로 신용카드는 일부 큰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는 사용할 수 있지만 변수가 많다. 현금 인출은 카드사의 현금서비스만 가능하다. 보통 체크카드는 사용할 수 없다. 


호텔 및 까사 예약

▲아바나의 까사 요반나 1층 거실에 있는 여행자의 낙서.

 

지금은 국내의 쿠바 전문 여행사를 통하면 호텔과 까사 모두 예약할 수 있다.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예약 대행 사이트를 찾아보자. 트립 어드바이저(tripadvisor.com)나 쿠바정키(cubajunky.com)가 대표적이다. 직접 사진을 보고 후기까지 살펴본 뒤 예약하면 된다. 단, 쿠바는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다. 인터넷으로 예약했더라도 숙소에서 한참 뒤에 확인을 할 수도 있다. 하여 충분히 시간 여유를 갖고 미리 문의를 하고 예약하는 게 안전하다. 여행이 임박해 문의를 했다간 여행 당일에 예약 불가 메일이 올 수도 있다. 다행히 쿠바의 민박은 손님을 문전박대하지 않는다. 친구의 집이라도 찾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니 너무 걱정은 말자. 여행 당일에 갈 곳만 확실히 정하고 떠나도 괜찮으니 전 일정 사전 예약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여행자 보험

여행자 보험은 여행자에겐 필수다. 그런데 쿠바를 간다면, 필수 정도가 아니라 의무 혹은 강제 사항이라 해야 하겠다. 쿠바 공항에서 입국심사원이 여행자 보험 증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 여행자 보험을 가입하지 않고 가면, 쿠바의 의료보험에 강제로 가입해야 할 수도 있다. 하루 3페소씩 여행 기간 만큼 현금으로 지불해야 입국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여행 출발 전, 주요 보험사를 통해 영문 증서를 발급 받아 가면 된다. 만약 가입을 잊었다면 인천공항에 가입해도 된다. 다만 같은 조건이어도 인터넷에서 미리 가입하는 것보다 가격이 훨씬 비싸다.

21 특별한 쿠바 여행을 위한 Must Do 5

1. 노을 지는 모로성에서 엽서 쓰기 

 

쿠바는 한국과 미수교국이지만 여행은 자유롭다. 편지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쿠바로 편지를 부칠 수 있고, 반대로 쿠바에서도 편지를 보낼 수 있다. 편지를 쓰기 좋은 장소로는 아바나의 모로성 만한 곳도 없다. 모로성은 저녁에 진가를 발휘한다. 아바나 시내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 풍경이 모로성에서 가장 잘 보인다. 해 질 녘 모로성 성곽에 앉아 엽서를 쓰자. 이왕이면 나에게 엽서를 보내보자. 언젠가 일상에 지쳐 쿠바 여행이 잊혀질 때 쯤 한 장의 엽서가 도착할 것이다. 그때 쿠바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2. 꼬히마르에서 『노인과 바다』 읽기 

 

쿠바 여행을 떠나기 전 소설 『노인과 바다』를 사자. 그리고 아바나에서 멀지 않은 꼬히마르(Cojimar)에 가자. 꼬히마르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지로, 'Hola, Cuba ⑦'에서 소개했다. 꼬히마르는 아바나에서 택시나 버스로 쉽게 갈 수 있다. 꼬히마르 어디도 좋다. 바닷가 나무다리도 좋고 헤밍웨이가 칵테일을 마셨던 라 떼라사(La Terraza)도 좋다. 바다가 보이는 곳이면 어디라도 어떤가. 소설을 다 읽을 쯤 오늘 잡은 물고기를 들고 집으로 가는 쿠바노(Cubano, 쿠바인)를 만날지도. 


3. 클래식 타고 아바나 투어하기 

 

아주 특별하면서도 쉽게 할 수 없는 클래식 카 투어를 쿠바에서는 일상처럼 즐길 수 있다. 아바나를 비롯하여 쿠바의 도시 어디에서든 클래식 카 투어는 있다. 50년도 더 된 클래식 카를 타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달려보자. 당신이 탄 차가 몇 년식, 또 어떤 브랜드의 자동차인지 알게 된다면 더 의미 있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아마 머지않아 이 또한 쿠바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투어가 되겠지만.  


4. 게바라 기념관 둘러보기 

 

열정의 아이콘 체 게바라(Che Guevarra). 산타 끌라라(Santa Clara)의 체 게바라 기념관은 다른 어느 곳보다 그의 일생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장소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짧은 일생은 한 편의 영화 같다. 그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기념관을 둘러보면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5. 카사 무시카에서 살사 추기 

▲뜨리니다드(Trinidad)에 간다면 이곳을 빼놓을 수 없다. 매일 밤 파티가 열리는 카사 데 라 무시카(Casa de la Musica)다. 뜨리니다드의 춤꾼은 모두 이곳에 모인다. 전 세계에서 모여 든 여행자들도 하나가 되어 신나게 춤판을 벌인다. 살사를 못 춰도 괜찮다. 초보라도 좋다. 가운데 무대로 과감하게 나가자. 그리고 내 몸이 움직이는 대로 음악을 즐기면 된다. 밤하늘의 별이 당신을 바라볼 뿐 아무도 당신의 살사 실력을 평가하지 않으니 걱정 말고 즐기자. 뜨리니다드 여행의 묘미가 바로 카사 데 라 무시카에서 춤 추는 것이니까.


<22> 쿠바 여행이 남긴 것들  (끝)

▲올드 아바나 비에하 광장의 평화로운 한낮 풍경.

 

22주.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걱정과 기대와 자신감으로 시작한 쿠바 여행기 ‘Hola! Cuba!’가 어느덧 마지막 회에 이르렀다. 수도 아바나를 시작으로 비냘레스, 산티아고 데 쿠바, 까마구에이, 뜨리니다드, 씨엔푸에고스 그리고 산타끌라라까지 7개 도시를 소개했다. 그리고 ‘쿠바’ 하면 생각나는 키워드 ‘헤밍웨이’ ‘체 게바라’ ‘시가’ 그리고 ‘칵테일’을 이야기했다.    

 

▲올드 아바나의 골목, 쿠바 국기 너머 혁명박물관이 보인다.

 

글을 쓰고 사진을 정리하는 시간은 마치 쿠바를 여행하는 듯 즐거웠다. 물건 값을 흥정하느라 신경이 곤두섰던 일, 바가지요금에 운전기사에게 투덜거렸던 일, 미국으로 탈출 후 다시 고향을 찾은 어느 남자의 영화 같은 탈출 이야기가 새록새록 다시 떠올랐다.    

▲유난히 아름답던 아바나의 저녁 노을.

김춘애

 

◆ 풍경

▲깨끗한 바다와 하늘 - 카요 코코섬

 

↕아바나

 

 

 

◆ 일상

 

 

▲축구장 보다 큰 목탄 초상화 오바마

 

▲쿠바의 대홍수 17.1.24 아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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