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4/ <31회> “자유 지키려면 반지성주의와 싸워야” - 〈40〉 “예술은 권력 이긴다”...중 예술가들의 ‘시니컬 리얼리즘’
송재윤의 슬픈 중국4/ <31회> “자유 지키려면 반지성주의와 싸워야” - 〈40〉 “예술은 권력 이긴다”
2022.05.14
<31회> “자유 지키려면 반지성주의와 싸워야”...문혁 겪은 중 지식인의 깨달음

▲<문혁 시기 마오쩌둥 개인숭배. 사진/공공부문>
2022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웠다. 그물코처럼 자유가 공정, 민주, 번영, 연대, 박애 등의 가치를 한 줄로 꿰고 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란 과학과 진실을 거부하는 불합리와 소수 의견을 억누르는 다수 폭력이다.
국가원수가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와의 투쟁을 선포한 사례는 드물 듯하다. 다만 각국의 지도자들은 정보 왜곡과 다수 폭력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거론해 왔다. 일례로 2021년 1월 20일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모든 의견 차이가 반드시 전면전(total war)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취임 2주 전인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무장 점거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진실게임과 세몰이에 휘둘리는 미국 정치의 분열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2022년 5월 10일, 20대 대통령 취임식. 사진/조선일보 DB>
정보화 혁명 이후 개개인은 인터넷의 알고리즘을 타고 제각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다수가 에코 체임버(echo chamber)에 갇힌 포로의 삶을 살아간다. 보고 싶은 기사만 찾아서 보고, 듣고 싶은 뉴스만 골라서 듣고, 믿고 싶은 이야기만 가려서 믿는다. 지식과 정보는 광속으로 이동하는데, 나치식 선전과 공산당식 선동이 오히려 더 잘 먹힌다. 이성의 추락, 문명의 역리(逆理)가 아닐 수 없다. 갈수록 진영싸움과 부족 전쟁이 심해진다. 문혁의 광풍이 정치의 쓰나미가 되어 불시에 세계 각국을 강타할 기세다. 이 난제를 과연 어떻게 풀 수 있나?
취임사의 메시지대로 “자유 시민”이 “진실과 과학을” 등불 삼아 “반지성주의”와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 상식을 포기하고 이성을 부정하면 인류의 문명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문혁 “10년의 대동란”을 직접 겪은 중국 지식인들의 깨달음도 다르지 않았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반지성주의와 투쟁해야 한다는 것!
‘마오가 불세출의 영웅’이라는 미신...문혁 시기 반지성주의에 대한 중 지식인의 비판
대표적 인물로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인민일보>> 부편집장을 역임했던 철학자 왕뤄쉐이(王若水, 1926-2002)를 꼽을 수 있다. 1926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왕뤄세이는 1948년 베이징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직후부터 인민일보사에서 근무했다. 1950년대 그는 민감한 국면마다 예리한 논평을 써서 마오쩌둥의 환심을 샀다. 특히 1957년 4월 “백화제방” 운동을 개시할 때 그가 썼던 논설에 대해 마오쩌둥은 격찬했다. 문혁 이전 40대의 왕뤄세이는 이미 인민일보사에서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1972년부터 그는 사인방을 비판하면서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났고, 결국 인민일보사에서 쫓겨나 4년간 베이징 외곽 다싱(大興)구의 한 인민공사에서 “노동개조”의 형벌을 받았다. 1976년 인민일보사에 복귀한 왕뤄세이는 본격적으로 문혁 시절의 광기와 폭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979년 2월 13일 후야오방이 주재하는 “이론 무허회(務虛會, 대토론회)”에서 마오쩌둥 개인숭배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가 발표한 글의 제목은 “문화대혁명의 교훈은 반드시 개인 미신(迷信)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인 미신”은 현대중국어에서 인격숭배나 개인숭배와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개인숭배와 “개인 미신”의 어감은 확연히 다르다. 미신이란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없는 맹목적 믿음을 이른다. 모든 개인숭배가 불합리하지만, “개인 미신”은 그중 최악을 이른다.
마오쩌둥이 불세출의 구세(救世) 영웅이라는 미신, 마르크스주의가 절대 진리라는 미신, 레닌의 민주집중제가 최선이라는 미신, 마오쩌둥 사상이 인류를 구원하는 혁명 이론이라는 미신, 마오쩌둥에 반대하면 반혁명 분자라는 미신, 반혁명 분자는 모두 색출해 제거해야만 한다는 미신, 계급투쟁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미신, 사회주의가 가장 우월한 체제라는 미신,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개인은 기꺼이 한 몸을 바쳐야 한다는 미신, 자본주의는 악이라는 미신, 자산가는 노동자를 착취만 한다는 미신 등등 문혁 당시 중국 인민의 의식을 지배하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비과학적, 비상식적 믿음일 뿐이다.

▲<1998년 5월 4일 모교 베이징 대학 100주년을 맞아 잠시 귀국했던 왕뤄쉐이의 모습. 사진/wikipedia.com>
문혁 시기 중국 인민은 날마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비판대회, 투쟁대회, 강용(講用)대회, 성토대회에 불려 나가 “마오쩌둥 만세!”를 외치며 “인민의 적”을 향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집체적 세뇌의 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 인민은 마오쩌둥을 신처럼 섬기고 떠받드는 “개인 미신”의 신도들로 전락했다.
1972-1976년 사이 강제노역에 내몰린 왕뤄세이는 맨 밑바닥 생산의 현장에서 마오쩌둥에게 영혼을 팔려버린 인민대중의 정신적 빈곤을 관찰했다. 그는 인민대중을 “개인 미신”의 늪에 빠뜨린 마오쩌둥의 저의를 추적했다.
왕뤄쉐이의 연구에 따르면, 1956년 덩샤오핑은 “영수에 대한 애호는 당과 계급과 인민에 대한 애호의 표현일 뿐, 일개인의 신격화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후, “우리의 임무는 계속 견결히 중앙이 개인의 돌출을 반대하고, 개인에 대한 찬양과 송덕을 반대한다는 방침을 견지하는 것”이라 밝혔다. 적어도 1956년 중공중앙은 개인숭배를 거부하는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혁 시기 비투(批鬪) 대회. 사진/李振盛, “紅色新聞兵”에서>
1958년이 되면 마오쩌둥은 개인숭배를 논하면서 “개인숭배에 대한 반대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인민의 숭배가 반드시 틀릴 수는 없다며 스스로 신이 되는 길을 슬그머니 열었다. 1963년 마오쩌둥은 “개인 미신”에 대한 반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인숭배에 대한 반대는 영수, 정당, 계급, 인민의 유기적 상호관계에 대한 레닌의 완정(完整)한 학설을 부정하고, 당의 민주집중제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 당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망쳐놓은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농업우선정책”을 내걸고 과감한 실용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행정의 실권을 상실한 마오쩌둥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긍정했다.

▲<“계속 혁명의 노상에서 더 큰 승리를 탈취하자!” 문혁 시기 마오쩌둥 개인숭배 포스터. 그림/공공부문>
왕뤄쉐이는 말한다. “개인 미신이 없었다면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는 중공중앙의 공식 석상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문혁에 대한 마오쩌둥의 총책임을 직접 물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1981년 6월 27일 “역사결의”에서 중공중앙은 공식적으로 “문혁의 최종적 책임은 마오쩌둥에 있다”고 선언했는데, 그 문건에서 사용된 단어나 어기(語氣)를 보면 왕뤄세이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왕뤄세이가 직접 쓴 다음 문단을 보자.
“문화대혁명은 우리 당과 우리 민족의 한편의 커다란 재난이었다. 이는 주로 린뱌오와 사인방의 파괴적 행동이 빚은 것이지만, 어떻게 이 몇 사람이 8억 인구의 커다란 나라, 3천만 당원의 거대한 당을 하늘과 땅이 뒤집히도록 흔들 수 있겠는가?
영묘한 마오 주석이 어찌하여 즉시 그들의 음모를 발각하고 격파하지 못했는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마오 주석의 깃발을 들게 하고, 마오 주석의 권위와 명망을 빌어서 그토록 많은 나쁜 짓을 하도록 했는가? 이는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두 ‘문혁은 마오 주석이 친히 일으키고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문혁은 당이 일으키고 이끌었다고 하지 않는다. 진정 그러하다면, 문혁은 마오 주석 일개인이 일으키고 이끌었음이 분명하다!”
전반적인 글의 논의는 물론, “마오주석이 친히 일으키고 이끌었다”는 문장은 토씨까지 그대로 1981년 6월 27일 “역사결의”에 그대로 포함되었다. 왕뤄세이의 마오쩌둥 비판이 그대로 중공중앙의 공식 입장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왕뤄쉐이, 옌자치, 리홍린...자유를 등불 삼아 반지성주의와 싸웠던 대륙의 자유인들
지난주 “슬픈 중국” 30회에 소개된 옌자치(嚴家其, 1942- )의 회고에 따르면, “1979년 2월 문혁에 대한 왕뤄세이의 체계적 분석은 많은 사람들의 격찬을 받았다.” 특히 “문혁은 잘못된 방법으로 그릇된 대상을 겨누고 진행된 잘못된 혁명”이라는 왕뤄세이의 발언이 널리 인용되었다. 옌자치는 왕뤄세이의 문혁 비판에 큰 자극을 받아서 문혁에 대한 역사적 탐구를 개시했고, 그로부터 7년 후 기념비적 대작 <<문화대혁명 10년사>>를 출판했다. 젊은 시절 옌자치의 지적 모험과 이후 해외에서 그가 주도한 중국 민주화 투쟁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차 살펴보기로 한다.
1980년대 개혁파의 이론가 리훙린(李洪林, 1925- )은 2015년 막역한 친구 왕뤄세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왕뤄세이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라는 점을 믿고 혁명에 투신했다.” 그는 “단순히 당대(當代) 중국의 철학자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용감한 전사였다.”

▲<중국의 자유사상가 리훙린(李洪林, 1925- )의 모습. 사진/중국인터넷>
1959년부터 중공중앙의 이론가로 활약했던 리훙린은 문혁 시기 극심한 박해를 당하고 오지에 하방(下放)되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77년 중앙선전부 이론국의 부국장으로 복귀한 후, 그는 1978년 출판한 <<과학과 미신>>에서 수령에 대한 “현대의 미신”을 비판했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그의 투쟁은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고, 결국 톈안먼 대학살 직후 그는 구속당했다. 1990년 출옥한 후 리훙린은 중공중앙 주도의 소위 “투쟁운동”을 상세하게 기록한 <<중국사상운동사 1949-1989>>를 집필했다. 개인적 체험을 충분히 반영한 이 기념비적 저서는 중국의 정치운동사, 특히 1980년대 중국 민주화 운동에 관한 필독서다. 이 책의 서문에는 다음 문단이 보인다.
“1949년 이래 중화 대륙의 사회생활은 온통 ‘사상투쟁운동’이었다.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당의 지도력, 곧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옹호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군중을 격동시켜 비판 투쟁을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그 점에서 사상 영역의 군중 운동이라 할 수 있겠지만, ‘군중성(群衆性) 투쟁’이란 결국 무력에 의한 강압이기 때문에 투쟁을 당한 사람은 당연히 심복(心服)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압력은 갈수록 심해지고, 규모는 갈수록 확대되고, 횟수는 갈수록 빈번해졌다.”
왕뤄쉐이, 옌자치, 리홍린은 모두 문혁의 광기를 직접 겪은 고난의 체험자였다. 진실을 왜곡하고 과학을 부정하는 반지성주의의 폐해를 목도(目睹)했기에 그들은 모두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갈망했다. 그들은 모두 자유를 되찾기 위해 중국 사회를 지배하는 일당독재의 반지성주의와 투쟁했던 대륙의 자유인들이었다. 깊은 반성과 심오한 사색이 담긴 이들의 저서들을 읽다가 보면 절로 깨닫게 된다.
자유를 빼앗긴 개인은 권력자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병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유를 잃은 개인은 권력자의 노예로 전락한다. 여기서 노예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잃고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길들여진 수동적, 피동적, 종속적 존재를 이른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후 미국으로 망명한 왕뤄세이는 2002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문혁의 실상을 고발하는 강연을 하다가 병사했다. 역시 1989년 톈안먼 이후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한 옌자치는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중국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지금도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다. <계속>

▲<1989년 톈안먼 광장의 시위 현장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옌자치의 모습. 사진/중국인터넷>
<32회>이념에 빠져 과학 거부하면서 독재자 숭배하는 좌편향 오류

▲<1966년 9월 14일 중국의 홍위병들이 마르크스의 초상화를 들고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들고 흔들며 가두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공공부문>
탈원전 추진한 지난 정권, 원자력 전문가의 경고는 무시
지난 1월 탈원전 정책의 결과 경상북도에서만 피해액이 28조가 발생했다는 연구조사가 발표됐다. 지난 정권이 탈원전 정책을 강행할 때, 원자력 공학과 교수들을 위시한 대다수 전문가 집단은 강력하게 저항하며 비판을 이어갔지만, 대통령과 청와대는 막무가내였다. 최상급 정보와 전문 지식이 모이는 세계 10대의 부국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그렇게도 무모한 엉터리 정책을 강행해서 범국민적 피해를 초래하는가? 탈원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고 집권 후 다짜고짜 밀어붙인 대통령 한 명의 고집 때문일까? 그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참모진의 문제일까? 대통령을 현혹하는 일부 편향된 전문가 집단의 영향력 때문일까? 아니면, 그 모두가 합쳐진 총체적인 정부의 실패인가?
한국과 달리 중국은 한반도에 인접한 연안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중국의 연안 지역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불의의 사고가 발생한다면, 한반도 역시 무사할 수 없음은 불문가지다. 핵무장에 성공한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흘돌이 미사일을 쏴대고, 중국은 전력난의 해소를 위해 원자로 건설을 점차 늘려가는데, 한국만 “탈원전”을 선언한들 애당초 원전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체계적으로 발전해 온 한국의 원전 기술은 2016년 가히 세계 최첨단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객관적으로 한국의 원전은 중국의 원전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건설되고 유지되고 있었음은 세계가 인정하는 바였다.

▲<현재 가동하고 있거나 2030년까지 건설될 중국의 원자력 발전소의 현황. 붉은색은 가동 중, 푸른색은 건설 중, 노란색은 건설 계획된 원자력 발전소를 가리킨다. (S. Yu, et al., “The role of nuclear in China’s energy future: Insights from integrated assessment,” Energy Policy 139 [2020]>.
그럼에도 북한과 중국에는 한마디 항의도 없이 자발적으로 무장 해제하듯 최첨단의 원전 기술을 스스로 무너뜨린 지난 정권은 앞으로 두고두고 비판과 단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사필귀정 관련자를 문책하고 최종 결정자를 가려내서 처벌해야 한다. 법적 단죄를 넘어 지난 정권이 탈원전을 추진했던 이념적·정치적·정책적·외교적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학계의 여러 방면에서 수백 편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올 듯하다. 특히 전문가의 경고를 무시한 채 파괴적 탈원전을 추진했던 지난 정권 수뇌부의 정치적 동기와 심리상태에 대해서 정교한 분석이 요구된다. 그들은 대체 무슨 근거로, 어떤 목적으로, 무슨 배포로 탈원전의 막장 정치를 이어갔는가?
이념과 독재 앞에선 무릎 꿇고, 스스로 진리를 독점했다고 믿는 정신분열증
지난 정권의 수뇌부가 전문가의 경고를 싹 무시한 채 탈원전을 추진했던 심리적 배경을 보면, 그들이 일찍이 1980년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에 매료되어 있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는 그야말로 마르크스와 김일성으로 도배돼 있었다. 치기 어린 학생들은 대학 입학 후 3개월 만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반년쯤 되면 볼셰비키 혁명 모델을 따라 계급해방의 제헌의회에 가입할지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의 투쟁전략에 따라 민족해방의 통일전선에 가담할지 실존적 결정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산주의에 매료된 젊은이들은 특유의 정신 분열증을 보인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서 스스로 절대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 노예근성과 소(小)엘리트주의가 혼재된 기묘한 심리상태를 보인다. 실상 종교적 광신주의와 다르지 않은데, 공산주의 이론은 묘하게도 젊은이의 뇌리에서 지적 우월감을 부추기는 이념적 환각제로 작용한다. 레닌은 이러한 현상을 “좌익 소아병(leftist infantilism)”이라 불렀고, 마오쩌둥은 “좌의 착오”라 불렀다. 공산주의는 어떻게 젊은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노예근성과 우월의식을 동시에 부추길 수 있었을까? 답은 공산주의 이론 속에 들어 있다.

▲<1952년도 중국의 포스터. “열심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공부해서 부강하게 번영하는 신중국을 건설하자!” 그림/chineseposters.net>
마르크스주의, 과학인가 종교인가...개인숭배 전체주의 광기 낳은 근본원인
마르크스(1818-1883)와 엥겔스(1820-1895)는 역사의 합법칙성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듯, 자신들이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으며,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이론적으로 정립하여 인류가 나아갈 길을 밝혔다고 믿었다. 그들의 사회발전론은 ‘유물변증법’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정립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탁월한 지력과 인류애를 발휘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시했다고 칭송하지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물변증법의 제1 명제가 자연과학적 진리인가? ‘사회적 존재(계급)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역사적 유물론의 제1 명제가 과연 사회과학적 진리인가? 엄격히 말하면 이 두 명제는 과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직관적 가설이거나 정치적 주장에 불과하다. 경험적으로 인간의 의식이 환경에 지배받는 경향이 크지만, 인간의 생각이 환경을 변화시키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20세기 초반의 양자역학은 이미 의식의 개입이 없이는 물적 현상 자체가 관찰될 수 없음을 일깨워 준다. 또한 세계사를 보면, 인간의 가치, 신념, 관념 등 주관적 요인이 물질적 조건을 극적으로 바꾼 사례가 부지기수다.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러시아와 인구의 90%가 농민이었던 중국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이야말로 마르크스의 독단론을 뒤엎는 반증 사례라 할 수 있다.
인간사회에서 발견되는 특정 경향성을 역사적 법칙으로 뒤바꾸고, 나아가 절대 진리로 격상시키는 마르크시즘의 조악한 인식론은 그 자체가 논리적 비약이며 경험적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오만하고 독단적인 마르크스의 진리관이 결국 공산 전체주의의 광기를 낳은 근본 원인이었다.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역시 문제투성이의 책이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품의 본래 가치를 생산에 투입된 노동의 총시간으로 환원하지만, 현실적으로 특정 상품의 가치는 생산에 투입된 노동 시간이 아니라 생산자의 창의성과 상품 자체의 사회적 수요에 의해 결정된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마르크스의 <<자본론>> 사진/ https://www.redpepper.org.uk/marxs-capital-at-150-an-invitation-to-history/>;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가 창출한 막대한 부가 애플사 피고용인의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됐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천재적인 기술력, 창의력, 디자인 감각과 경영기법 등 모든 면에서 애플사의 성공에 있어 잡스의 기여는 가히 절대적이었는데, 그의 기여는 상식적으로 투입된 노동 시간으로 환산될 수 없다. 현재 전 세계의 대부분 기업은 노동 시간이 아니라 이윤 창출에의 기여도를 엄격하게 평가해서 개인별로 연봉을 결정한다.
요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을 뿐, 실상은 사회변혁을 갈구하는 혁명가의 종교적 신념과 다르지 않다. 현실 사회주의가 예외 없이 공산당 무오류설, 영도자에 대한 개인숭배 등으로 점철된 전체주의로 귀결됐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열역학 법칙을 정식화했지만, 그 누구도 뉴턴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 혁명의 신전에서 불멸의 우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뉴턴의 물리학은 과학이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변증법은 유사(類似) 과학이기 때문이다.
문혁 말기 ‘상대성 이론’ 비판하는 열광적 정치운동 ”아인슈타인은 반동”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의 학계에서는 아인슈타인(1879-1955)의 상대성 이론을 비판하는 열광적인 정치 운동이 일어났다. 문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4년에서 1975년 사이 그 강도가 더욱 심해졌다. 물리학 및 철학 연구자들이 선두에 섰다. 주로 <<자연과학쟁명(自然科學百家爭鳴)>>이라는 과학지에 그들의 비판이 실렸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극복하고 유물론적 관점에서 새로운 과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다.
예컨대 그들은 “빛의 속도는 불변하며, 절대로 광속을 초월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가설은 유물변증법의 기본 전제에 반하는 “완고한 형이상학적 관념”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유물변증법에 따르면 “우주와 시공은 무제한적이므로 인간이 광속을 넘어설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반드시 진실일 수는 없다”는 묘한 주장을 펼쳤다. 결국 그들의 주장은 “유물변증법은 절대 진리”라는 대전제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유물변증법에 위배된다”는 소전제에서 “고로 상대성이론은 오류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그럴싸한 삼단논법의 구조를 취했지만, 결국 증명되지 않은 대전제에서 원하는 결론을 취하는 정치적 순환논리일 뿐이었다. 그 당시 중국의 학계에 이토록 무리한 비과학적 논쟁에 벌였던 의도는 결국 과학을 정치에 종속시키기 위함이었다.
문혁 시절 중국 전역에는 어디를 가나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관습, 낡은 습관” 등 네 가지 낡은 것을 깨부수라는 “파사구(罷四舊)”의 구호가 흔히 보였다. 문혁의 광풍 속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낡은 사상”으로 몰리고 있었다. 과학의 진리성을 가리는 최고의 판단 기준이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변증법이라는 정치적 주장에 불과했지만, 문혁의 광기 속에서 과학은 이미 독자적 존립 근거를 상실했다. 문혁 시절 과학적 지식의 타당성은 혁명적 당파성에서 도출되어야만 했다.
‘슬픈 중국’ 30회와 31회에서 이미 소개됐던 철학자 옌자치(嚴家其, 1942- )는 정치 논리로 과학의 진리성을 판단하는 당시 과학자들의 불합리를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1975년 상반기 그는 “실천, 가설, 과학적 방법: 상대성 이론 논쟁에 관해서”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서 <<자연과학쟁명>>에 기고했다. 옌자치는 자서전에서 당시 그가 썼던 논문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중세 스콜라주의 방법과는 대조적으로 과학적 방법은 지식을 확립할 때 결정적으로 관찰, 실험, 실천의 중요성과 기능을 강조한다. 과학적 방법으로 자연 현상을 설명할 때는, 강단 철학처럼 고대(古代)의 저작물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의 삶과 자연 세계에 기초한다. 과학적 방법으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할 때는 실천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인정되지 않는다. 특정 과학이론의 진리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오로지 실천 밖에는 없다. 과학적 방법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이론은 그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날 때에만 번복될 수 있다.”
학부에서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고 철학의 길에 들어섰던 옌자치는 과학적 방법이 무엇인지 또렷이 알고 있었다. 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기에 그는 유물변증법이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 정치 이론이란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과학적 진리의 기준은 오로지 경험적 관찰, 실험 및 실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69년 11월 상하이 중국과학원 “자연과학 이론 중 자산계급 반동 관점을 비판하는 마오쩌둥 사상 학습반”에서 펴낸 “상대성 이론 비판.” 사진/공공부문>
물론 옌자치의 논문은 문혁의 광기 속에서는 출판될 수 없었다. 과학적 방법은 경험적 탐구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그의 언명은 곧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변증법이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는 민감한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물변증법이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면, 마르크스주의의 진리성이 통째로 부정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 아니라면, 그 반석 위에 놓인 마오쩌둥 사상도 역시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 과학이 아니라면, 두 이론을 양대 축으로 삼는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정당성이 위협받게 된다.
문혁 시기 옌자치는 비록 논문조차 출판할 기회를 박탈당했지만, 그의 과학적 입장은 2년 후인 1978년 5월 중공중앙 조식부 부장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덩샤오핑의 지원 아래 전개한 “진리 표준 대토론”을 통해서 국정의 제1 의제로 부상됐다. 개혁개방은 이처럼 과학과 정치를 구분하고, 과학 탐구의 독자 영역을 확보하는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했다.

▲<문혁 시절의 걸개그림을 꺼내 드는 한 중년 부부. 2016년 중국의 한 도시. https://www.thequint.com/news/world/china-calls-maos-cultural-revolution-a-huge-disaster#read-more>;
얼마 전 한 좌파 경제학자가 내게 “팩트(fact)라고 있는 그대로 다 말하는 학자는 정치적 백치”라고 말했다. 그 뜻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결국 팩트라도 있는 그대로 다 말하지 말고 정치적 효력을 따져서 시의적절하게 발설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결국 역사적 사실의 기술도 특정 계급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1980년대 운동권의 낡은 사유 방식이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에서는 “모든 주장은 당파성을 갖는다,” “역사적 사실은 계급성을 갖는다,” “”가치중립성은 부르주아지의 가치다,” 등등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주장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한 주장의 연원을 추적해보면, 1960년대 이른바 “자유화 혁명(liberal revolution) 때 구미 대학가를 휩쓸었던 좌파 혁명이론이 일본을 거쳐 한국의 지식계에 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구소련이 붕괴를 초 읽고 있던 때, 한국 지식계에는 때아닌 마르크스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의 열풍이 몰아쳤다. 탈원전 정책을 강행했던 지난 정권의 수뇌부는 아마도 그때 좌익소아병을 심하게 앓았었나 보다. 그 이후 그들은 한 살도 더 안 먹고 살아온 듯하다. 권력자가 이념에 눈이 멀어 과학을 부정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계속>

▲<1989년 6월, 톈안먼 광장에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옌자치(嚴家其)의 모습. 배경에는 당시 학생들이 조각한 석상 아래 “민주의 신”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보인다. 사진/공공부문>
<33회> 다가오는 톈안먼 33주기...인민해방군이 짓밟은 자유화 운동

▲<1989년 5월 4일 톈안먼 광장의 시위 군중. “민주주의여, 안녕하십니까?” 위의 표어에 적힌 “덕선생(德先生)”은 1919년 5.4운동 당시 “민주주의”의 별칭이었다. 사진/공공부문>
국가의 철학이 바뀌면 국민의 운명이 바뀐다...한반도의 현대사를 보라
“국가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state)”이 바뀌면 그 나라 국민의 운명이 바뀐다. 세계 여러 나라의 경제 발전사를 경험적으로 탐구해 온 여러 경제학자의 주장이다. 국가의 철학이 사회·경제적 기본 제도를 결정하고, 그 제도에 따라 국민 개개인의 삶이 바뀔 수밖에 없다.
국가의 철학이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면 개개인은 창의력과 자립심을 잃고서 정부의 명령을 맹종하는 노예적 삶을 면할 수 없다. 국가의 철학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때, 혁신과 창조의 정신력이 발휘되어 비약적 경제성장이 가능해진다.
한반도의 현대사가 바로 그 점을 웅변한다. 북한은 공산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을 국가의 철학으로 삼아 온 결과 극빈의 전체주의 체제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 보편적 인권, 법의 지배를 국가의 철학으로 삼아 왔기에 최첨단 산업기술과 문화 콘텐츠를 가진 세계 10대 부국으로 성장했다.
지난 70여 년 중국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마오쩌둥 시대(1949-1976) 국가의 철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었다. 그 결과 중국은 대기근의 참상과 문화대혁명 “10년의 대동란”을 겪으면서도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이후 덩샤오핑은 실용주의의 기치 아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후 불과 한, 두 세대 만에 경제 규모 세계 제2위까지 도약할 수 있었다.

▲<1979년 1월 29일, 미국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 중국의 최고영도자 덩샤오핑과 미국의 카터(Jimmy Carter, 1924- ) 대통령. 사진/ https://www.globaltimes.cn/galleries/591.html >
덩샤오핑, 실용적 개혁개방으로 경제 성장...그러나 국가 철학은 개조 못해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 철학”이라고 선언했다.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은 투쟁 철학 대신 경제성장을 위한 실용적인 개혁을 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마오쩌둥의 주술을 벗어던졌기에 중국의 경제는 연평균 10%의 초고속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국가의 철학을 개조할 수 없었다.
덩샤오핑이 1990년대 천명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모순어법 속에 중국이 당면한 국가 철학의 딜레마가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덩샤오핑은 경제개혁을 주도했으나 국가의 철학을 바꿀 수는 없었다. 국가 철학으로서의 사회주의가 폐기되면, 중국공산당 역시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은 국가의 철학을 둘러싼 이념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고수하는 보수파와 경제적 자유화를 넘어 정치개혁까지 요구하는 개혁파 사이의 대립으로 펼쳐졌다. 2차 대전 이후 동아시아 신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발전 궤적을 추적해보면, 1) 경제적 자유화가 2) 정치적 민주화로, 3) 다시 법제 개혁을 거쳐 4) 새로운 헌정 체제로 나아가는 국가 개조의 선순환을 보여준다.
1980년대 중공중앙은 1) 경제적 자유화에서 2) 정치적 민주화로 가는 제1단계의 변화 자체를 좌초시켰다. 그 결과 개혁개방 이후 경제적 자유화와 정치개혁을 이끌었던 이른바 “덩(샤오핑)-후(야오방)-자오(쯔양)” 체제가 1989년 톈안먼 민운(民運, 민주화 운동)을 끝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불과 10년 만에 덩샤오핑 정권은 광장의 시위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다. 자유와 민주를 외치는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마할 수 있는 대항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결국 “철학적 빈곤”이었다.
자유화 투사 리훙린, 1980년대 중국 공산당의 일당 독재 공개 비판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1회>에서 잠시 소개했던 리훙린(李洪林, 1925-2016)은 베이징에서 폐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며 민주화를 추구했던 대륙의 자유인이었다. 그는 1980년대 중국공산당의 반(反)자유화 운동에 맞서서 “신(新)계몽 시대의 자유화 운동”을 이끌었다.

▲<중국의 자유화 사상가이자 자유투쟁의 기수 리훙린. 2,000년대 중국의 자유주의 저널 [염황춘추(炎皇春秋)] 관련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 https://2newcenturynet.blogspot.com/2016/06/blog-post_41.html >
1925년 랴오닝성 서북부 궁벽한 가이핑(蓋平)현의 빈민굴에서 태어난 리훙린은 6세 이후 부모와 함께 유랑 걸식하듯 황허강 유역을 떠돌며 살아야만 했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학문에의 뜻을 굽히지 않고 독학을 이어갔던 그는 힘겹게 산서(陝西)성의 시베이(西北) 농학원(農學院, 농업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리훙린은 1946년 3월 30일 중국공산당 지하당 특위 서기였던 그의 스승의 인도로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이후 당의 지령에 따라 학생운동에 투신한 리훙린은 국공내전의 포화 속에서 감시망이 좁혀져 오자 국민당의 봉쇄망을 뚫고 중공 혁명의 성지 옌안으로 갔다. 그는 옌안에서 지식분자에 대한 정풍(整風)이 몰아쳤을 때 잠시 투옥되어 고초를 치렀지만, 공산당원으로서 그의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다.
1950년대 내내 리훙린은 중공중앙 정치연구실에서 복무했다. 대약진운동 당시 그는 후차오무(胡喬木, 1912-1992)의 명령에 따라 인민의 철강생산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 후차오무는 1941년부터 1966년까지 마오쩌둥의 비서로서 활약했던 인물인데, 1980년대 중공중앙에서 “마오쩌둥의 기치를 다시 들고” 개혁개방에 반대했던 강경 보수파였다. 리훙린은 그렇게 후차오무의 수하에서 공산당의 정책을 홍보하고 선전하는 일에 몰두했는데······.
1959년 대약진운동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당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사상적 전기가 찾아왔다. 후베이성 우한에서 장즈쉐이(張治水)라는 한 대학생이 마오쩌둥 앞으로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하는 3만 자의 서신을 써서 올린 사건이었다. 서신을 먼저 읽은 리훙린은 대기근의 참상을 당 중앙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우선 자신이 직접 편집하던 <<사상계 동태(動態)>>지에 그 서신의 축약본을 게재하고, 중공중앙에 그 서신의 원본을 발송했다.
바로 그때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앙의 영수들은 장시(江西)성 루산(廬山)에 모여서 마라톤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가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하며 마오쩌둥의 실책을 비판했다. 이에 격분한 마오쩌둥은 작심하고 펑더화이와 그의 직속 부하들을 반동집단으로 몰고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장즈쉐이의 서신을 받아 읽은 마오의 측근 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베이징에 전화를 걸어서 인쇄된 간행물을 모두 파기하라 지시했다. 이후 서신을 써서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한 장즈쉐이와 리훙린은 모두 당을 공격한 “소(小)펑더화이”로 낙인 찍히고 박해를 받았다. 리훙린이 맡아온 <<사상계 동태>>는 정간(停刊)당했고, 리훙린은 농촌에 하방되어 “노동 단련”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당은 리훙린에게 우경(右傾) 사상을 교정하라며 하방시켰지만, 농촌의 참혹한 현실을 몸소 체험한 그의 사상은 더욱 오른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의 질곡서 해방되지 않고선 진흙탕서 벗어나 현대화의 큰길로 갈 수 없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중국 지식계에서는 개혁파의 영수 후야오방(胡耀邦)이 이끄는 사상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후야오방은 당시 사상해방운동에서 일군의 맹장들이 출현했다고 말했다. 리훙린은 분명 자유화의 맹장이었다. 그가 쓴 글들이 잇달아 지식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리훙린은 “신(新) 계몽시대”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1978년 초 리훙린은 문혁 시절의 집단 폭력과 개인숭배의 광열을 비판하는 “과학과 미신”을 발표했다. 훗날 그는 “마오쩌둥의 질곡에서 해방되지 않고선 중국이 진흙탕에서 벗어나 현대화의 큰길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작심하고 이 글을 썼다고 회고했다.
이어서 1979년 1월 리훙린은 “영수(領袖)와 인민”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1) 영수가 인민에 충성을 바쳐야 하고, 2) 오직 인민이 역사를 창조하며, 3) 영수는 하늘이 낸 인물이 아니라 실천 중에 성장한 일개 인간일 뿐이며, 4) 인민은 영수를 비판할 수 있고, 5) 영수는 1인이 아니라 다수의 지도자를 의미하고, 6) 종신제와 후계자 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며, 7) 개인숭배는 용납될 수 없다는 일곱 가지 주장을 펼쳤다.
덩샤오핑이 민주장 운동을 탄압한 직후인 1979년 4월 리훙린은 <<독서(讀書)>>지를 창간했다. 창간호의 권두에 “독서엔 금구(禁區, 금지된 구역)가 없다!”는 그의 시론이 실렸다. 독서에 금구가 없기 위해선, 모든 책이 다 출판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책이 다 출판될 수 있기 위해선,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표할 수 있어야만 한다. “책을 읽을 권리”를 내세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이 글은 새로운 시대에 맞게 “국가의 철학”을 개조하라는 실로 강력한 요구였다.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은 막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한 후 사회주의 4항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4항 기본원칙이란, 1) 사회주의 노선 견지, 2) 무산계급 독재 견지, 3) 공산당의 영도력 견지, 4)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견지를 의미했다. 경제개발을 위해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하지만, “국가의 철학”은 절대로 바꾸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리훙린의 초상화. 옆의 손글씨는 1979년 발표된 “독서에는 금구가 없다”는 원제(原題)는 “독서의 금구를 타파하라”였는데, 편집 과정에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그림/ https://theinitium.com/article/20160603-mainland-lihonglin/ >
그 당시는 누구도 입을 열어 덩샤오핑을 비판할 수 없는 엄혹한 시국이었다. 바로 그때 리훙린이 덩샤오핑에 직격탄을 날렸다. 1979년 5월 19일 인민일보에는 리훙린의 시론 “대체 어떤 사회주의를 견지하나?”가 게재되자 중국 지식계에 일대의 환호성이 터졌다. 크게 고무받은 리훙린은 나머지 3개 기본원칙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마침내 완성된 리훙린의 “4대 기본 원칙” 비판은 중국 지식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인민해방군 투입한 톈안먼 대학살로 사상투쟁 종식...리훙린 책은 지금도 금서
1999년 자유의 해방구 홍콩에서 리훙린의 <<중국사상운동사 1949-1989>>가 출판됐다. 톈안먼 대학살이 발발하고 꼭 10년 되던 해였다. 지금도 중국의 금서 목록에 올라 있는 이 책에서 리훙린은 1949년 건국부터 1989년 톈안먼 대학살까지 40년의 역사를 중국공산당이 일으키고 이끈 “사상투쟁”의 역사로 정리한다. 여기서 사상투쟁이란 중국공산당의 지시 아래 다수 인민이 소수의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군중 폭력에 의한 정치운동을 의미한다.
마오쩌둥이 지배하던 27년의 세월 중국의 전 인민은 틈만 나면 정치 집회에 나가서 구호를 외치며 “인민의 적”을 향한 분노와 적의를 표출해야만 했다. 끝도 없는 사상투쟁의 연속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개혁개방 시대가 열렸지만, 1980년대 중국공산당은 끊임없이 사상투쟁을 이어갔다.
그 중 “정신 오염 청소” 운동(1983-1984)과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 운동(1986-1992)이 대표적이었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중공중앙의 사상투쟁은 자유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개혁 세력의 저항에 부딪혔고, 급기야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낳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사진/China Today>
리훙린은 중국공산당이 톈안먼 대학살을 감행함으로써 40년 동안 지속됐던 강압적인 사상투쟁을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종식했다고 질타한다.
“최후에는 ‘무기의 비판’이 ‘비판의 무기’를 대체했다. 인민 해방군의 탱크와 총기는 물론 자유화의 붓대보다 강력했다. 6.4 대학살 이후 인민 해방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자유화의 전군(全軍)은 몰락했다. 자유화 운동 세력이 일망타진되었기에 ‘반(反)자유화 투쟁’의 대상도 사라졌다. 비판 대상이 없어졌기에 더는 군중을 동원한 사상투쟁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1844년 26세의 청년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고 썼다. 이 구절은 사회주의 혁명가 사이에서 무기를 들고 투쟁하라는 정치 구호로 활용되었다. “무기의 비판”이란 이론투쟁이 아니라 무장투쟁을 의미한다. 민초가 막강한 관군에 저항하는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1989년 톈안먼의 시위 군중은 “비판의 무기”만을 휘둘렀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인민 해방군을 “비판”하지 않았다. 시민의 정당한 비판 앞에서 논리가 막혀버린 중국공산당은 “무기”를 들고 시위 군중을 제압했다. 다음 주 토요일(2022년 6월 4일)은 톈안먼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33주기다. <계속>

▲<1989년 5월 30일,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고 있는 시민들의 오토바이 부대. 사진/Jian Liu/Humanitarian China>
<34회>톈안먼 33주기 애도의 물결... “젊은이를 어찌 다 죽일 수 있으랴”
▲<“6.4 도살은 중공의 범죄다!” 2019년 톈안먼 대학살 30주기를 맞아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거행된 추모회. 사진/공공부문>
톈안먼 기억을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영국 대사 “민간인 사망자 최소 1만명”
33년 전 오늘 중국 정부는 20만 병력을 투입해서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자유와 민주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군중을 학살했다. 실제 희생자의 수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9년 6월 30일 베이징 시장 천시통(陳希同, 1930-2013)은 학생 38명을 포함한 241명이 사망하고 3000여 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사망자가 천 명을 훌쩍 넘어 수천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2017년 10월 공개된 주중 영국대사 도널드(Alan Donald)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사망자의 총수는 최소한 1만 명에 달한다.
▲<2017년 12월 20일 보도된 도널드 주중 영국대사의 극비 보고서. 홍콩 언론 “홍콩(香港) 01” 기자가 영국의 기록보관소에서 이 문서를 찾아내서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hk01.com>
톈안먼 민주화 운동 33주년을 앞두고 최근 베이징시 인민 정부 산하 톈안먼 지구 관리위원회는 5월 25일에서 6월 15일까지 텐안먼 광장의 당일 방문 예약을 모두 중단시켰다. 광장에 군중이 운집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톈안먼 어머니회” 등 톈안먼 희생자 유가족은 특히 삼엄한 감시를 당하고 있다. 해외로 망명한 톈안먼 민주인사는 중국 내 가족들과 자유롭게 전화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2021년 7월 후베이(湖北) 지방법원은 인권운동가 인쉬안(尹旭安, 1974- )에게 4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그가 트위터에 올린 톈안먼 추모식의 사진을 결정적 증거로 채택했는데, 죄명은 “싸움을 걸고 문제를 일으켰다”는 의미의 심흔자사죄(尋釁滋事罪)였다. 오늘날 심흔자사죄는 인권운동가와 민주인사를 체포하고 처벌할 때 적용되는 이현련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법이다.
2021년 10월 광둥(廣東) 지방법원은 인권운동가 장우저우(張五洲, 1969- , 여)에게 톈안먼 일인 추모식을 거행하고 홍콩 국가안전법에 반대를 표명했다는 이유로 2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장우저우에게도 공무집행방해죄와 심흔자사죄가 적용됐다.
2021년 12월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지방법원은 인권운동에 전념해온 블로거 천윈페이(陳雲飛, 1967- )에게 심흔자사죄로 4년 형을 선고했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천윈페이는 2015년 톈안먼 희생자 추도회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이미 체포된 전력이 있었다. 당시 고작 스무 명이 참석한 추모식의 현장에 100명의 경찰이 들이닥쳐서 그를 “국가권력 전복 선동죄”와 심흔자사죄로 체포했다. 결국 2019년에야 만기 출소한 천윈페이는 불과 2년 만에 다시 갇힌 몸이 되었다.
▲<1989년 6월 베이징 톈안먼에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몰려드는 탱크 부대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역시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황치(黃琦, 1963- )는 톈안먼 실종자를 찾기 위한 톈왕(天網) 인권센터를 세운 인권운동가이다. 그는 1999년 중국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고발하는 인터넷 사이트 “64톈왕(天網)”을 창시했고, 2000년 황치는 “국가 기밀 불법 보유죄”로 체포되었다. 2006년 출옥한 그는 곧바로 다시 “톈왕”을 재건했지만, 그해 8월 18일 불의의 사이버공격으로 사이트가 폭파되어버렸다. 2019년 황기는 “고의성 국가 기밀 누설죄”와 “불법성 국가 기밀의 해외 누설죄”로 1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 밖에도 중국 당국은 해외에서 체류하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가들을 여전히 감시하고 압박하고 있다. 베이징 대학 법대생으로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슝옌(熊焱, 1964- )은 19개월간 죄명도 없이 악명 높은 친청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출옥 후 그는 기독교도가 되어 1992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군에 입대하여 군목으로 복무했던 슝옌은 최근 뉴욕시 하원 선거구에 민주당 대표로 출마했는데, 최근 그는 다섯 명의 중국 정부 요원들이 그를 스토킹하며 회유와 협박을 가하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2019년 1월 29일 중국의 제1호 사이버 전사 황치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홍콩의 민주투사들. 사진/Anthony Wallace/AFP>
홍콩에서 추모식 없앤 중국 공산당...톈안먼 희생자 추모제 2020년 이래 금지
1989년 이래 자유의 허브 홍콩에서는 톈안먼 대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민주와 인권의 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홍콩의 교회에선 해마다 64 희생자 추도예배가 거행되었고, 빅토리아 공원에서는 대규모 시민들이 참여하는 추모식이 거행되어왔다.
2020년 6월 3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홍콩 국가안전법이 통과되었다. 2021년 3월 30일에는 베이징의 입맛에 맞게 홍콩 선거제가 개편되었다. 최근 홍콩 정부는 베이징의 눈치를 보면서 노골적으로 톈안먼 관련 활동 전반에 대대적인 압박과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열리던 빅토리아 공원의 톈안먼 희생자 추모제는 2020년 이래 금지되었다. 2021년 홍콩 경찰은 톈안먼 희생자 추모 집회를 개최한 26명의 민주화 인사들을 구속했다.
2014년 “우산 혁명”의 젊은 영웅 조슈아 웡(Jushua Wong, 黃之鋒, 1996- ), 반중 기업인이자 빈과일보(蘋果日報)의 발행인 지미 라이(Jimmy Lai, 黎智英, 1947- ), 2019-2020년 홍콩 시위를 심층 보도한 언론인 과이니스 호(Gwyneth Ho, 何桂藍, 1990- ) 등 26명의 민주 인사들이 4개월에서 1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죄명은 대부분 선동죄였다. 2020년 톈안먼 대학살 추모식에 타인들을 참석하라고 권유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1월, 홍콩 법원은 인권변호사 초우항퉁(Chow Hang-tung, 鄒幸彤, 1985- )에게도 2020년과 2021년 톈안먼 추모회에 참석해서 선동했다는 죄명으로 22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초우 변호사는 “애국민주 운동을 지지하는 홍콩 시민 운동연합회”(이하, 홍콩 연합회)의 부의장이다. 2021년 6월 홍콩 경찰은 홍콩 연합회가 운영해 온 “6.4 기념관”의 폐쇄를 명령했다. 홍콩 연합회가 이에 불응하자 홍콩 경찰은 3개월 후 기념관을 습격해서 강제로 폐쇄하는 강공책을 펼쳤다.
홍콩대학에 있던 톈안먼 대학살 희생자 기리는 상징 ‘치욕의 기둥’ 2021년 철거
2021년 12월 23일 홍콩 대학에서 “치욕의 기둥(Pillar of Shame)”이 사라졌다. 청동, 구리, 콘크리트로 제작된 “치욕의 기둥”은 8미터 높이로 2톤쯤 나가는 대형 조형물이다. 1997년 홍콩 반환을 몇 주 앞두고 덴마크 조각가 갈쉬오트(Jens Galschiot, 1954- )가 완성한 이 작품은 1997년 6월 3일 톈안먼 8주기 추모식에 맞춰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이후 “치욕의 기둥”은 1998년 12월 홍콩 대학으로 옮겨져서 23년간 그 자리에 줄곧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2021년 11월 홍콩 대학이 “치욕의 기둥” 철거를 결정하자 홍콩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서 기둥을 닦고 있다. 사진/Reuters>
멀리서 보면 울퉁불퉁 땅 위로 솟아오른 원통 모양이지만, 자세히 보면 꿈틀꿈틀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형상이다. 누가 봐도 톈안먼 대학살의 희생자를 기리는 자유와 인권의 상징이다. 이 작품의 밑동에는 “6.4 도살(屠殺)”라는 큰 글씨 옆에 “늙은이가 어찌 젊은이를 다 죽일 수 있으랴(老人豈能夠殺光年輕人)!”란 글귀가 초서(草書)체로 새겨져 있다.
최근 수년간 중공중앙은 홍콩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극단적 조치로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급기야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생명으로 하는 대학이 어떤 압력에 시달렸는지 “치욕의 기둥”을 철거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갈쉬오트는 작품을 덴마크로 옮겨오려 했지만, 어느 운송업체도 정부의 “보복이 두렵다며” 나서지 않았다. 학생들은 항의하며 경찰의 감시를 피해 “번개” 집회를 열기도 했지만, 톈안먼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는 홍콩 정부의 시도는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치욕의 기둥”은 중국어로 흔히 “국상지주(國殤之株)”라 번역된다. 중국어에서 국상(國殤)은 흔히 순국열사를 가리키지만, 여기서 “상(殤)”자는 본래 일찍 죽는다는 뜻이다. 국상이라는 단어는 “국가 때문에 요절했다”는 항의의 의미와 함께 “나라를 위해서 일찍 순절(殉節)했다”는 안타까운 칭송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국가 폭력으로 꽃다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다.
▲<“치욕의 기둥 밑에 적힌 글귀. “6.4 도살(屠殺): 늙은이가 어찌 젊은이를 다 죽일 수 있으랴(老人豈能夠殺光年輕人).” 사진/wikipedia>
이제 홍콩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조형물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자유의 허브 홍콩에서 톈안먼 대학살을 규탄하고 희생자를 추모할 수 없다면, 이제 중국의 영토 내에서 6.4의 기억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은 없게 된다. 어둠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중국공산당의 만행이 중국의 인민을 망각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다.
대만에서 계속되는 톈안먼 추모제...“‘치욕의 기둥’ 재건할 것” 선포
홍콩에서 톈안먼 희생자를 추모할 수 없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1989년 톈안먼의 민주투사들은 올해부터 대만에서 톈안먼 추모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3월 21일 국제 중국 민주화 운동단체 “화인 민주 서원”의 대표들은 대만에 모여 홍콩 대학에서 철거된 치욕의 기둥을 재건할 것을 선포했다. 그들은 또한 원작자 갈쉬오트를 초빙해서 제막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학생대표였던 왕단(王丹, 1969- )도 이 운동에 동참할 의사를 밝혔다.
▲<타이완에 3월 21일 타이완에서 “치욕의 기둥” 모형을 들고 기둥의 중건을 선포하는 화인민주서원의 대표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역사학자 우런화(吳仁華)다.>
30년에 걸쳐 톈안먼 대학살에 관한 3부작의 역사서를 저술한 재미 망명가 우런화(吳仁華, 1956- )는 이날 현장에서 “인권엔 국경이 없다”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출생지와 상관없이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 1980년 한국 광주의 희생자들과 1947년 대만의 2.28사건 희생자들의 고통을 추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톈안먼 대학살이 중국에서 일어난 중국만의 사건이 아니라 인류가 희생당한 범인류적 사건이라는 자각이다. 우리는 모두 한 국가의 국민이기 이전에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깨달음이다. 때마침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금지돼버린 홍콩의 추모 집회를 대신하기 위해 올해부터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런던, 파리, 서울, 타이베이, 울란바타르, 시드니, 오슬로, 암스텔담 등 세계 각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글로벌 추모대회를 거행한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인의 뇌리에서 어둠의 기억을 지우려 하지만, 절대로 인류의 공동 기억을 파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우런화는 1990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 30년에 걸쳐 톈안먼 대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세 권의 방대한 역사서를 펼쳐낸 집념의 역사학자이다. 그는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바쳐 톈안먼 대학살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해야만 했을까? <계속>
▲<역사·문헌학자 우런화는 30년에 걸쳐 톈안먼 대학살의 진상을 규명한 3부작의 역사서를 출판했다. 사진/台灣中央社記者孫仲達>
〈35〉‘기억상실 인민공화국’에 맞선 중 지식인 “기록이 저항이다”

▲<1989년 6월 4일 새벽, 톈안먼 광장에서 군대와 대치 중인 학생들. 사진/공공부문>
중국 헌법 총강 제1조 “사회주의 제도 파괴하는 모든 활동 금지” 명시
10년간 중국에 체류하며 군인, 학생, 모친, 관리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심층 인터뷰로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의 실상을 예리하게 파헤친 루이자 림(Louisa Lim)은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새 이름을 붙였다. 바로 “기억상실 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Amnesia)이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전 인민을 몰아서 망각의 강물 속에 빠뜨린다. 특히 1989년 봄 베이징의 민주화 운동과 6.4 대학살의 기억은 더욱 철저하게 삭제되고 있다.
중공 정부가 인민의 기억을 지우는 방법은 쉽고도 간단하다. 중국 헌법 총강 제1조에는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조직이나 개인의 모든 활동은 금지된다”고 적혀 있다. 바로 그 조항에 따라 헌법 35조에 보장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가두) 행진 및 시위” 등 공민의 자유를 제약하면 된다. 자유를 제약하는 방법도 지극히 단순하다. 중공 중앙이 과거사에 대한 유권해석을 제시한 후, 정부의 공식 발표에 어긋나는 말이나 생각을 표현한 사람들을 샅샅이 찾아내서 가둬버리면 된다.
1989년 6월 3일 밤에서 6월 4일 새벽까지 중공중앙은 20만의 군 병력을 동원해서 베이징을 점령하고 평화적 시위를 이어가던 학생과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 직후 민주화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공 중앙은 본격적인 선전전에 돌입했다.
대학살 닷새 후, 6월 9일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덩샤오핑은 계엄군의 공로를 치하하며 “인민해방군은 진정 당과 국가를 지키는 철의 장성”이라 치켜세웠다. 그의 딸 덩룽(鄧榕, 1950- )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죽을 때까지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그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했다. 덩샤오핑의 의도에 따라 중공중앙 선전부는 강력한 이념교육과 선전·선동을 이어갔다.
톈안먼 학살 모르는 중 젊은이들...탱크 사진 보고 “예술작품인가?”
1989년 6월 30일 중공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베이징 시장 천시통(陳希同, 1930-2013)은 “동란 제지와 반혁명 폭란(暴亂)의 종식에 관한 정황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9년 6월 3일 오후 다섯 시 경, 불법조직 ‘베이징시 고교(대학교 이상) 학생 자치 연합회(고자련)’과 ‘베이징 공인(노동자) 자치 연합회(공자련)’의 우두머리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과도, 비수, 쇠몽둥이, 철제 체인, 죽창 등을 나눠주며 군경을 모두 잡아서 죽여버리자고 외쳐댔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불법 조직이 선제적으로 사회주의를 파괴하는 반혁명 폭란을 일으켰기에 군대가 정당방위로 무력을 사용해서 희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현장을 지켰던 수많은 증인의 회고에 따르면, 천시통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일 뿐이었지만, 탱크를 앞세워 시위를 진압한 정권은 인민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의 젊은 세대는 톈안먼 대학살에 대해서 거의 듣고 본 바가 없다. 2006년 다큐멘터리 “탱크맨(The Tankman)”을 보면, 베이징 대학 학생들에게 1989년 톈안먼의 “탱크 맨” 사진을 보여주며 아느냐고 묻자 “예술 작품이냐?”고 되묻는 장면이 나온다. 1985년 6월 5일 혼자서 맨몸으로 대규모 탱크부대를 막아선 이 청년의 영상은 이후 전 세계에서 톈안먼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중국의 젊은이들에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딴 세상의 일일 뿐이다. 14억 인구의 비대한 대륙은 “기억상실의 이상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좌측, 하단, 흰색 셔츠 “탱크맨”의 모습. 1989년 6월 5일, 대학살 직후 한 청년이 톈안먼으로 들어오는 탱크부대를 맨몸으로 막아섰다. 다음 순간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와서 그를 데리고 갔다. 사복 경찰이었다는 설도 있고, 그를 안전하게 도피시킨 시민들이라는 설도 있다. 이후 그의 행방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사진/Sin Wai Keung / Sing Tao>
망각에 저항하는 우런화의 기억 투쟁...방대한 역사서로 정리
“권력과 인간의 투쟁은 망각과 기억의 투쟁이다.” 체코 출신 작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의 명언이다. 32년간 망명객으로 미국에 체류해온 역사·문헌학자 우런화(吳仁華, 1956- )는 쿤데라의 이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다.
1989년 당시 그는 중국 정법대학의 젊은 교수였다. 대학살 이후 중공 당국의 수배령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우런화는 거짓과 모략에 맞서 진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30년에 걸친 그의 기록 투쟁은 급기야 201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과 64대학살에 관한 3권 방대한 역사서로 정리되었다.
200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출판된 <<톈안먼광장 유혈 철거 내막(天安門廣場血腥淸場內幕)>>은 1989년 6월 3일 오후 3시 40분부터 4일 오전 10시까지 톈안먼 대학살의 실상을 분 단위로 상세하게 기록한 474쪽의 대작이다. 이어서 2009년 우런화는 <<64사건 중의 계엄부대>>를 출판했다.
이 책은 1989년 당시 베이징, 선양, 지난, 난징 등에서 차출된 20여만 병력의 실체를 부대별로 상세하게 밝힌 독보적인 저작이다. 마침내 2019년 5월 우런화는 톈안먼 대학살 30주년을 맞아 1989년 4월 15일부터 1989년 6월 30일까지 주요 사건을 날짜별로 정리한 643쪽의 <<64사건 전 과정 실록>>을 출판했다.
우런화가 그의 첫 책에서 1989년 6월 3일 저녁부터 6월 4일 아침까지의 짧은 시간에 거의 5백 페이지의 지면을 할애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중공중앙의 교묘한 역사 왜곡과 조직적인 선전·선동을 진실의 힘으로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 초 홍콩으로 탈출한 우런화, 그후 30년간 그는 중공중앙의 역사조작에 맞서서 톈안먼 대학살의 실상을 세밀하게 파헤치고 기록했다. 사진/ https://theinitium.com/article/20190531-hongkong-6430-interview-wurenhua/>;
1989년 6월 4일 새벽 수천명 학생 깔아뭉개는 현장 목격 “영원히 잊지 않겠다” 다짐
톈안먼 시위 진압을 위해 중공 당국은 해군을 제외한 전군의 각종 부대를 출동시켰다. 그중엔 장갑병, 탱크병, 육군, 공군, 포병부대도 속해 있었다. 1989년 6월 4일 새벽 6시경, 계엄부대 수만 명 병력이 톈안먼 광장을 전면 통제했다. 광장의 모든 진입로는 봉쇄되었다. 탱크와 장갑차가 도열하고, 중무장한 계엄군이 광장을 점령했다. 계엄군은 단식투쟁을 이어가던 톈안먼의 시위대를 향해 최후통첩을 선포했다. 그들의 임무는 6월 4일 아침까지 시위대를 모두 내쫓고 광장을 완벽하게 비우는 것이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즉시 광장에서 떠나지 않으면 즉각 무차별 발포하겠다고 협박했다.
시위대의 다수가 결사 항전을 외쳤으나 지난밤 11시 무렵부터 들려오는 총성은 갈수록 더 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학생들은 해산을 결정했고, 광장 한 모퉁이로 열을 맞춰 모두 빠져나갔다. 7주 동안 이어진 톈안먼 광장의 민주화 운동은 그렇게 군대의 총칼 앞에서 서글프게 막을 내렸다.
학생들과 함께 톈안먼 광장을 빠져나온 우런화는 북서쪽으로 10.5킬로 떨어진 중국 정법(政法)대학의 숙소로 향했다. 1989년 6월 4일 새벽 6시경 톈안먼 광장에서 서쪽으로 불과 1.5킬로 떨어진 류부커우(六部口)를 지날 때였다. 3대의 탱크가 황색 매연을 뿜는 독기탄(毒氣彈)을 쏘면서 달려와선 인도 위에서 줄 맞춰 걷고 있는 수천 명 학생의 대오를 들이받아 깔아뭉개고 갔다. 우런화는 수많은 학생 틈에서 그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1989년 6월 4일 새벽, 베이징 텐안먼 부근 류부커우(六部口)에서 학생들을 깔아뭉개고 계속 앞으로 돌진하는 탱크부대. 사진/Time (1989/06/19)>
그는 눈물을 쏟으며 공포에 질린 학생들과 함께 정법대학의 캠퍼스로 돌아갔다. 그날 아침 10시경 톈안먼 광장에서 마지막까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학생과 교수들이 중국정법대학의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 전날 밤 계속되는 날카로운 총성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수천 명의 정법대 교수와 학생들은 가슴을 졸이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캠퍼스 동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런화는 캠퍼스 중앙 건물 앞 의자 위에 눕혀진 다섯 구의 시신을 보았다. 바로 그날 아침 탱크에 깔려서 급사한 다섯 명의 학생들이었다. 일순간 캠퍼스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우런화는 그 참혹한 현장에서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서 목 놓아 통곡했다. 그의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한 마디를 읊조렸다. “영불유망(永不遺忘, 영원히 잊지 않으리)!”
4시간 바다 헤엄쳐 마카오로 탈출, 홍콩 거쳐 미국 망명...30년간 이어진 기록 투쟁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우런화도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1989년 6월 5일 그는 고향 저장성 원저우(溫州) 지역에 숨어든 후 좁혀오는 공안의 수사망을 피해서 도망을 다녀야만 했다. 반년의 도주 생활 끝에 그는 1990년 2월 광둥성 남단의 주하이(珠海)에 당도했다. 주하이의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는 4시간 헤엄을 쳐서 마카오로 탈출했고, 곧 홍콩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1989년 6월 4일 새벽, 톈안먼 광장으로 들어가는 탱크. 사진/공공부문>
당시 홍콩의 인권단체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가들을 홍콩으로 탈출시키는 “황작(黃雀, 누런 참새)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대학살 발생 직전인 1989년 6월 3일 점심께 우런화는 베이징 대학에서 열린 “애국 호헌 연석 회의”에 참가했다. 각계 민주화 활동가들이 모이는 비밀회의였는데, 그때 그곳에서 홍콩 침례교 대학 사회학과의 츄옌량(邱延亮)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타이완 출신의 노동운동가인 츄 교수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핵심 인물들을 국외로 피신시키기 위해 그들의 신상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인연으로 우런화는 “황작 작전”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홍콩으로 망명한 후 우런화는 곧바로 스스로 직접 겪었던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생생한 경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1990년 7월 우런화는 다시금 “황작 작전”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우런화는 해외로 망명한 톈안먼 민주화 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민주중국진선(陣線. The Federation for a Democratic China)”에 가입해 맹활약하면서도 기록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미 언급한 대로 30년에 걸친 그의 기록 투쟁은 2019년 3부작의 방대한 역사서로 정리되었다.
톈안먼 대학살에 대해 아예 말도 꺼낼 수 없게 하는 중국공산당의 부당한 폭력 앞에서 집체적인 망각에 맞서는 한 지식인의 무서운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막강한 중국공산당의 권력 앞에서 미국에 체류하는 일개 망명가의 기록이 미약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역사는 동시대인의 생생한 기록이 모여서 흘러가는 도도한 강물과도 같다. 막강한 중국공산당이지만, 우런화의 진실한 기록을 이길 수는 없다. 중국공산당의 인권 유린과 정치범죄를 직시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런화의 기록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 광장 앞 창안(長安)가에서 무장 군인을 향해 돌을 던지는 시민. 사진/공공부문>
33년 지난 일에 언론 보도 금지하고 학술토론조차 감시 처벌하는 이유
마오쩌둥 사후 1년밖에 되지 않은 1977년 9월 덩샤오핑은 문혁 시기 발생한 3백만 건 이상 억울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발란반정(撥亂反正)” 운동을 개시했다. 반면 33년 전에 벌어진 톈안먼 대학살에 관해서 중공중앙은 오늘도 탄압과 검열의 고삐를 조이고 있다. 왜 중공중앙은 과거사의 오류를 인정하고 유가족의 슬픔을 달래주는 정치적 출구조차 찾을 수 없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듯하다.
첫째, 중공중앙은 문혁 시기의 착오를 비판함으로써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는 이념적 전환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반면 톈안먼 대학살의 과오를 시인하는 순간, 중공중앙은 1989년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언제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중공중앙이 톈안먼 대학살의 규모를 축소하고 왜곡해왔기 때문이다. 영국의 비밀 외교문서에 적혀 있듯 만일 “민간인 희생자가 최소 1만 명”에 달한다면, 중공중앙은 절대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힐 수가 없다. 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 중공중앙은 그 자체로 통치의 정당성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아니라면, 중공중앙은 과연 왜 이미 33년이나 지나버린 과거사에 대해서 언론 보도는 고사하고 학술 토론조차 할 수 없게 갈수록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고 있을까? <계속>
▲<1989년 6월 4일, 부상자를 싣고 응급실로 달려가는 시민들. 사진/공공부분>
〈36〉‘개혁개방’ 덩샤오핑이 톈안먼 대학살 감행한 이유는?

▲1989년 4월 22일, 톈안먼 광장, “베이징의 봄.” 후야오방 전 공산당 총서기의 서거를 애도하는 군중이 정치 자유화와 부패 척결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Catherine Henriette/AFR
대한민국 친중 세력의 편견과 아집, 모순과 불합리 담긴 ‘짱개주의’
지난 6월 9일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짱개주의’를 내세웠다”고 주장하는 친중공 성향의 책을 한 권 추천하면서 “언론이 전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라는 트윗에 날렸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언론에 “슬픈 중국”의 실상을 기록해 온 1인으로서 전직 대통령의 그 발언을 묵과할 수 없다. 그 짧은 글귀 속에 대한민국 친중공 세력의 편견과 아집, 모순과 불합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중국 밖의 지식인이 중국공산당 정부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비판하면, 중국 안팎의 친중주의자들은 으레 “서구중심주의,” “오리엔탈리즘” 등의 현학적 상투어를 들이대며 중국공산당을 옹호한다. 특히 구미의 지식인이 중공 정부를 비판할 때, 이들은 “인종주의”의 프레임을 씌우고 반발한다. 중국 내부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의 실상을 비판하는데, 비판자의 피부색이 왜 문제가 되는가? 오히려 정당한 비판에 반발하는 자들이야말로 “중화 중심주의,” “중국 특수주의,” “중국 예외주의,” “아시아 우선주의,” “황색 인종주의” 등 낡고 뒤틀린 20세기적 편견에 빠져 있지 않은가?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등은 서구만의 가치가 아니라 유엔 헌장에 명기된 인류의 보편가치이다. 세계 196개 유엔 회원국은 유엔 헌장에 따라 기본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을 보장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하물며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하나인 중화인민공화국임에랴! 중국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의 실태를 고발하는데, “제국주의적 내정 간섭”이라는 중공의 반발은 궁색하기만 하다. 14억 중국 인민은 “보편가치”에서 벗어난 예외적 인류라는 말인가? 근대 서구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설파한 공자(孔子)의 휴머니즘에 따라도 중국공산당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는 용납될 수 없다.

▲<1989년 5월 18일. 100만이 넘는 베이징의 학생, 시민, 노동자 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고 있다. 차량 위 마분지에는 “덩샤오핑 하야! 학생 수업거부, 노동자 파업” 등의 구호가 적혀 있다. 사진/Catherine Henriette/AFR>
오늘날 중국인들도 인권, 자유, 민주, 법치를 갈망하고 있다. 다만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국의 인민은 민주를 향한 “타는 목마름”을 억누를 수밖에 없을 뿐이다. 탱크와 장갑차로 중무장한 20만 병력을 투입해서 수도를 통째로 점령하는 광폭한 권력 앞에서 비무장의 시민들이 저항을 이어갈 수는 없는 까닭이다. 1970-80년대 한국과 대만 등의 권위주의 독재 하에선 민주화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지만, 북한이나 중국 같은 전체주의 체제 아래서는 민주화 운동의 불길조차 일어날 수가 없다. 특히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은 민주의 싹을 자르고 불사르는 전체주의적 인권유린이었다. 중공중앙은 대체 왜 그토록 잔악무도한 대학살을 감행해야만 했는가?
탱크 장갑차 무장 20만 병력 투입...보수파로 기운 덩샤오핑, 개혁파 제압 노려
1989년 “베이징의 봄”이 전 세계에 보도되고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민주, 자유, 부패 척결을 외치며 평화롭게 시위하는 학생과 시민을 향해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20만 병력을 투입했다. 그 20만 병력은 국가의 수도를 에워싸고 들어와서 점점 포위망을 좁혀가다가 일격에 도심을 탈취하는 군사작전으로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학살하고 진압했다. 진정 중공중앙이 대학살을 감행할 때 시위를 해산하고 인민을 겁줘서 굴복시키려는 일차원적 의도밖에 없었을까? 그 목적이 다였다면 인명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시위대를 해산하는 전술이 없었을 리 없다. 비근한 예로 1976년 4월 톈안먼의 시위를 진압할 때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13년 전 이미 군 동원 없이 톈안먼 광장의 시위를 큰 무리 없이 진압했던 중공중앙이 1989년 6월에는 20만 병력을 동원하는 실로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49년 1월 국공내전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의 군대가 베이징을 “해방”한 후, 그토록 대규모의 병력이 수도를 점령한 사례는 없었다. 덩샤오핑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20만 병력의 출동을 명했는가?
우선 그 당시 동원된 군병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래 표와 같이 베이징 주위 경기(京畿) 지역 방위 부대 외에도 랴오닝성의 선양(瀋陽), 상둥성의 지난(濟南), 심지어는 베이징에서 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난징(南京)에서도 대규모의 군부대가 동원되었다.
지역 군구(軍區) | 소속 부대 |
베이징 | 육군 제24집단군, 제27집단군, 제28집단군, 제38집단군, 제63집단군, 제65집단군 |
선양(瀋陽, 랴오닝성) | 육군 제39집단군, 제40집단군, 제64집단군 |
지난(濟南, 산둥성) | 육군 제20집단군, 제26집단군, 제54집단군, 제67집단군 |
난징(南京) | 육군 제12집단군 |
중앙군사위원회 직속 | 낙하산병 제15군 |
베이징 | 포병(炮兵) 제14사(師) |
베이징 위술구(衛戍區) | 경위(警衛) 제1사, 경위 제3사 |
톈진(天津) 경비구(警備區) | 탱크 제1사, 무장 경찰 부대 |
베이징시 | 총대(總隊) |
도합 병력 총수 | 20만 이상 |
<吳仁華, [[六四事件中的戒嚴部隊]] (眞相出版社, 2009), 8쪽 > |
지난주 소개했던 “톈안먼 대학살”의 연구자 우런화(吳仁華, 1952- )는 톈안면 대학살의 최종결정자인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과 중공중앙의 보수파에겐 두 가지의 더 큰 이유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덩샤오핑과 양상쿤(楊尙昆, 1907-1998)이 이처럼 방대한 병력을 동원해서 이처럼 주도면밀한 군사작전을 진행한 것은 분명 평화롭게 시위하는 학생들과 학생들을 성원하는 시민들을 진압하는 목적뿐 아니라 동시에 그들은 중공 당내에서 정변(政變)을 막고, 군대의 병변(兵變)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吳仁華, <<六四事件中的戒嚴部隊>>, 27쪽)
덩샤오핑과 양상쿤의 입장에서 당내에서 “정변”을 획책할 수 있는 요주의(要注意)의 인물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과 중공중앙 정치국 상위의 후치리(胡啓立, 1929- ), 중앙서기처 서기 루이싱원(芮杏文, 1927- ), 통전부(統戰部) 부장 옌밍푸(閻明複, 1931- ) 등이었다. “정변”이란 권력투쟁을 통해 정부의 권력이 교체되는 상황을 이른다. 만약 1989년 상황에서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정권의 구심을 탈환하는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987년 전국 인민대표대회(10월 25일-11월 1일)의 폐막식에서 거수 결정에 참여하는 중공중앙의 영도자들. 왼쪽부터 덩샤오핑, 자오쯔양, 후야오방. 사진/ https://www.thinkchina.sg/most-outstanding-ccp-leaders>;
1979년부터 개혁개방 초기부터 덩샤오핑은 흡사 두 날개의 새처럼 좌우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하는 “보수파”와 시장주의 자유화를 지향하는 “개혁파”를 끌어안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보수파에 기운 덩샤오핑은 이미 1987년 1월 15일 개혁파의 영수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을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파면했다. 후야오방에 이은 개혁파 영수 자오쯔양 역시 6.4 대학살 이후 가택 연금을 당해야만 했다.
덩샤오핑으로선 군대의 동원이야말로 일거에 개혁파를 제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덩샤오핑은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국무원 총리의 직책을 모두 밑 사람에 양보한 채로 오직 중앙군사위 주석의 직위만을 견지하고 있었다. 본래 어떤 국가든 군권을 장악하고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군대의 최상위 통수권자이지만, 동시에 의회가 군사 명령계통을 결정하고 군사 조직을 창설하거나 개편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는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통해서 군의 정치적 개입은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근대 입헌주의의 군사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달리 중국은 정부 내 권력분립을 이념적으로 부정하기에 270만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에 귀속된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은 최고 영도자가 정변의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20만 병력을 통원해 수도를 통째로 점령하는 대규모 무력 시위를 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민주적 절차의 국민 총선거가 아니라 내전을 통해 군사작전으로 건설된 나라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중국에서조차 군권의 장악은 절대로 쉬운 일일 수 없다. 당내 권력의 역학관계에 따라서 군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 자체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마오의 兵法 활용...“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쿠데타를 막아라”
덩샤오핑은 분명 마오쩌둥의 선례를 통해서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증험했던 듯하다. 73세의 고령으로 전 중국으로 문혁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고 정적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던 마오쩌둥의 정치권력도 실은 그의 군사 대권에서 나왔음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덩샤오핑이 몰랐을 리 없다.
문화혁명 관련 야사(野史)에 따르면, 문혁의 공식적 개시를 3개월 앞둔 1966년 2월 마오쩌둥은 이미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여서 베이징을 통째로 포위하는 친위(親衛)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마오쩌둥의 “2월 병변(兵變)”이다. 1965년 11월 베이징을 떠나 남방에 머물던 마오쩌둥은 현실적으로 남방의 병력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고 국방장관 린뱌오(林彪, 1907-1971)와의 긴밀한 조율 아래 랴오닝성 선양(瀋陽) 군구의 정예부대 제38군을 베이징으로 진격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선양 제38군은 본래 1950년 한국전쟁에 투입됐던 병력으로 전 중국 육군 유일의 기계화 부대였다. 마오쩌둥은 1644년 만주족이 진입했던 바로 그 산해관(山海關)으로 선양 제38군을 진입시켜서 베이징을 포위하는 작전을 짰다. 소련의 침략에 대비하라며 베이징의 수도방위부대를 산시(山西)와 네이멍구(內蒙古)의 중·소와 중·몽의 국경지대로 “천릿길 야영” 훈련을 보낸 후, 마오쩌둥이 베이징의 빈틈을 위협하는 무력 시위를 벌였다는 이야기다. 이 가설의 진위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군에 대한 막강한 장악력이 없었다면 마오쩌둥은 결코 문혁을 일으키고 이끄는 정치권력을 발휘할 수 없었음엔 틀림없다.
마오쩌둥의 권력 기반을 꿰뚫고 있었던 덩샤오핑은 1989년 상황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이야말로 군부의 병변(兵變), 곧 쿠데타를 막기 위한 최선의 묘수라 여겼을 수 있다. 덩샤오핑으로선 군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선 군사 훈련을 넘어 실제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1989년 5월 말부터 톈안먼 진압의 명령을 받은 군부 장성들이 중공중앙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는 조짐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6년 톈안먼 광장에 집결한 군중 앞에서 접견식을 거행하는 마오쩌둥과 린뱌오. 사진/공공부문>
1989년 5월 말 군부 일각의 항명... 군 투입 반대 연명 성명서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 문혁 당시 최초로 군부의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지목됐던 비운의 장성이었다. 홍위병의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투신한 후 불구가 되었음에도 그는 들것에 실려 다니면서 계속 조리돌림을 당해야만 했다. 그의 딸 뤄뎬뎬(羅點點, 1951- , 본명 峪帄)은 1989년 당시 해군 병원 문진과의 주임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중공중앙이 군대를 투입해 시위 군중을 진압하려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뤄뎬톈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뤄뎬뎬은 아버지 뤄루이칭의 군맥(軍脈)을 총동원하여 군부의 중요한 인물들을 곧바로 접촉했다. 1989년 5월 22일 단 하루 만에 그는 1955년 장군 직위를 수여 받았던 해방군 상장(上將, 중장과 대장 사이 계급) 중에서 7명의 서명을 받아 냈고, 곧이어 계엄 지휘부에 톈안먼 광장에의 군대 투입을 반대하는 연명(聯名) 성명서를 작성해 올렸다. 물론 해방군 원로 상장 7인의 연명 성명서 관련 뉴스는 중국 관영 매체에선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다만 무력 진압을 주장해 온 덩샤오핑 등 중공중앙의 강경파는 군부의 반대 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뤄뎬뎬은 그 후 긴급 체포되어 1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한 후에야 덩샤오핑의 딸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지만, 군직은 박탈당했다.)
군부 원로의 반발에 부딪혀 무력 진압을 포기한다면, 중공중앙의 군권 장악력은 급속히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덩샤오핑과 양상쿤은 더욱 강경한 무력 진압을 결정한다. 1983-1988년 덩샤오핑의 아래서 국가주석직을 맡았던 리셴녠(李先念, 1909-1992)의 조카딸 류야저우(劉亞洲, 1952- )는 공군(空軍)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내부 보고서에서 당시 베이징 군구 병력은 지역 사정에 영통(靈通)한데다 학생들과 연계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톈안먼 무력 진압에 적합하지 않다며 다른 지역의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계엄군의 구성이 베이징 부대뿐만 아니라 선양, 지난, 난징의 부대까지 혼합된 다지역의 복합 부대로 구성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병사와 시민 사이의 유대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1989년 5월 20일 계엄군 병력을 에워싸고 군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대화를 거는 학생과 시민들, 사진/Catherine Henriettㄷ/AFP>
실제로 1989년 5월 말 계엄군을 1차 투입했을 때, 학생과 시민들은 군사 차량을 몸으로 막으면서 굶주린 병사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절대로 시민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 설득했다. 이에 진입이 막혀버린 계엄군은 즉각 군부대를 철수해야 하는 긴급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러한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1989년 6월 초 계엄군을 새로 정비한 후 중공중앙은 새로운 기동 전술을 펼쳐서 톈안먼 대학살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상세한 내용은 차후 당시 계엄군 병사의 진술을 근거로 서술할 예정이다.)
대학살 참상 알고도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 시대착오적 친중공 사대주의
톈안먼 대학살을 감행함으로써 덩샤오핑은 당내의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군부의 저항 집단을 선제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으로선 일거양득의 권력 게임이었지만,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비참하게 사망할 수밖에 없었다.

▲<호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고발하고 있는 반중 예술가 파듀차오(Badiucao)의 작품. 그림/Badiucao.com>
결론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에 대한 비판은 자유와 민주를 중시하는 세계시민의 당연한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짱개주의”를 내세운 게 아니라 낡고 부패한 좌파 기득권 세력이 권력 유지를 위해 시대착오적 “친중공 사대주의”를 내세웠다. 중국 현대사의 참상을 직시한다면 그 누구도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라 칭송하는 비례(非禮)의 우(愚)를 범할 순 없다.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식 외교 석상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그 나라의 지식정보 체계가 마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진정 대통령이 “전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계속>
<37회>전 세계 반중 정서 진원지는 중국공산당

▲<1989년 5월 23일 베이징 자금성 톈안먼 성루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카키색 천에 싸여 있고, 그 아래 일군의 시위대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당시 시위 군중은 마오쩌둥의 초상화에 파랑, 빨강, 노랑 페인트를 뿌리는 강력한 퍼포먼스까지 연출했다. 사진/AFP>
“반중 정서 배후는 미국” 주장, 한국민의 지적 능력 무시하는 교만
최근 전 세계에서 반중 감정이 갈수록 거세지가 한국의 친중공 지식분자들은 그 배후가 미국이라는 음모설을 또 들고나왔다. 미국이 전 세계에 반중 정서를 유포해서 한국인도 “반중 바이러스”에 전염됐다는 식의 주장인데, 1980년대식 반미주의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대한민국은 전 세계로 활달하게 개방된 나라이다. 그 나라에서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명석한 시민들이 실시간으로 세계 각국의 뉴스를 검색하며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렇게 활짝 열린 사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반중 정서를 퍼뜨렸다”고 주장한다면, 한국 국민의 지력을 무시하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독설일 뿐이다.
게다가 불과 몇 해 전까지만해도 한국의 친중공 세력은 언론매체를 장악하고 노골적인 친중주의 선전·선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을 큰돈 벌 수 있는 꿈과 희망의 나라로 미화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중국공산당 일당독재가 오히려 더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 주장하는 한 유명인의 강연 방송이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던 2017년 무렵 한국의 친중공 세력의 발호는 절정에 달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깨어 있는 시민들은 친중주의의 모순과 불합리를 꿰뚫어 보고 중국공산당의 반민주적, 반자유적, 반인류적 행태에 대한 강렬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둘째, 전 세계에 만연한 반중 정서는 중국공산당이 지난 70여 년 동안 자행해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잘못과 오류에 뿌리내리고 있다. 물론 현재 미국에는 중국공산당이 지난 70년 자행해 온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낱낱이 기록하고 연구하는 두터운 전문가 집단이 존재한다. 그 전문가 집단 중 상당수는 1950-60년대 중국에서 태어나서 문화대혁명의 광열을 직접 경험한 후 학문의 자유를 찾아 망명하거나 유학길에 올랐던 중국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미국 내에서 중국공산당을 향해 냉철한 분석과 강력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반대 여론을 억압하는 중국과 달리 미국에는 중국공산당의 통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미국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반체제 인사들도 활약하고 있다. 미국에서 반중 이데올로기가 생겨났다면 다양한 시민조직, 인권단체, 학자집단, 언론매체가 자유로운 사상의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 형성된 민주적 공론일 뿐이다.
요컨대 전 세계에 확산된 반중 정서는 그 누구의 음모론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중국의 현실을 점점 더 깊게 알게 된 시민들의 자발적인 각성의 결과일 뿐이다. 그 뿌리에는 바로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착오, 이념적 모순, 정치적 오류가 놓여 있다.

▲<1989년 5월 22일, 중국공산당의 대표적인 기관지 “인민밀보”의 기자단이 “군정 철폐와 수도 사수!”의 구호를 들고 가두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 Catherine Henriette/AFP>
학문 자유 찾아 미국에 망명한 중국인들이 중국공산당 비판
중국과 달리 미국은 사상과 학술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이다. 그 때문에 중국공산당에 맞서는 중국 지식인들이 다수 미국에 정착해서 반(反)중공 투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미국에선 중국공산당의 잘못과 오류를 고발해 온 중국 내부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공들여 쓴, 중국에서는 절대로 출판될 수 없는, 이른바 “위험한” 서적들이 다수 영역되어 매해 새롭게 출판되고 있다. 그 수많은 비판적 지식인의 명단과 연구성과를 열거하자면, 수백 쪽의 지면이 필요할 정도다.
중국 안에 갇혀 있으면 오히려 중국의 실상을 파악할 수가 없다. 열린 사회의 정보 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중국공산당의 잘못과 모순을 고발해 온 중국계 지식인들은 모두가 역사적 증인이며 당대 최고의 중국통 전문가라 할 수 있다. 미국이 세계반중 정서의 진원지라면 바로 그들의 피맺힌 노력과 분투 덕분이다. 그들은 1950-60년대 중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직접 겪었던 생생한 삶의 기억을 토대로 중국공산당의 모순과 불합리를 파헤쳐서 전 세계에 중국의 실상을 알린 주역이다.

▲<1989년 5월 18일 법복을 입은 베이징 법원의 법관들이 “중국은 민주를 원한다! 중국은 법제를 요구한다!”, “법원은 (민주화 운동을) 성원한다!” “인민법원은 인민을 사랑한다” 등의 구호를 들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사진/Catherine Henriette/AFP>
물론 중국공산당은 그들을 서구추종주의자, 제국주의 하수인, “나라이주의자”(拿來主義者, 무조건 외제만 “갖다 쓰는 주의자”), 심지어는 한간(漢奸, 한족 간신배), 내간(內奸, 내부의 간신배), 매국적(賣國賊, 매국하는 도적) 등으로 매도하고 있다. 앞으로 “슬픈 중국”은 그들의 생생한 삶의 기록과 학술적 연구성과를 더 적극적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역사의 1차 사료(史料)는 바로 당대인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특히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많은 중국 반체제 인사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수배령을 피해 도망하다가 홍콩을 거쳐 프랑스나 미국 등 서방세계로 망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민주장 운동의 상징적 인물 웨이징셩(魏京生, 1950- )처럼 장시간 무시무시한 친청(秦城) 감옥에 수감당하다가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국제사회의 비판이 들끓자 중국공산당이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뒤늦게 망명을 허용한 사례도 있었다.
중국은 지금도 해외의 반체제 인사들을 검은 명단에 올려놓고 입국을 막고 있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에 투입된 20만 병력이 톈안먼 광장의 시위를 완벽하게 소탕할 때, 그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에 남아 단식투쟁 중이었던 대학생 대표단 중에서 왕단(王丹, 1969- ), 차이링(柴玲, 1966- ) 펑총더(封從德, 1966-), 우얼카이시(吾爾開希, 1968- )는 모두 이후 미국으로 갔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학생대표들: 왼쪽부터 차이링, 왕단, 펑총더, 리루(李錄, 1966- ). 사진/ Reuters>
당시 부부였던 차이링과 펑총더는 프랑스 외교관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망명했다. 펑총더는 15년간 프랑스에서 살면서 소르본 대학에서 중국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류하며 반중공 민주화 운동을 열정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2009년 출판된 그의 저작 <<6.4 일기: 광장 위의 공화국>>은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바로 그 당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일들을 깨알같이 적은 일지를 기초로 이뤄진 기록문학의 백미다.
하버드 대학에서 중국 현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왕단은 나와 함께 중국 청대사(淸代史)의 대가 필립 큔(Philip A. Kuhn) 교수의 세미나에 참석했던 동학이었다. 그는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21명 긴급수배자 명단의 맨 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1989년 7월 2일 구속된 후 그는 2년 동안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구금 상태로 있어야 했고, 4년 형을 살고 1993년에 풀려났다. 그는 석방 직후부터 다시 중공 정부를 비판하며 민주화 활동에 나섰고, 1995년 5월 체포된 후 17개월 후에 11년 형을 선고받았다.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 후로 왕단은 공개적으로 중공 정부를 비판하면서 해외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활약하고 있다. 2008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왕단은 대만의 칭화(淸華)대학에서 가르쳤는데, 2017년 6월 다시 미국 수도 워싱턴에 이주해서 중국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미 상세히 소개했듯 우런화(吳仁華, 1956- )는 미국에서 30년에 걸쳐서 모두 2천 페이지에 달하는 “톈안먼 대학살” 3부작을 완성해서 출간한 대표적인 망명 논객이다. 중국의 반체제 작가 정이(鄭義, 1947- ) 역시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위험” 인물이다. 그는 1980년대 내내 1968년 문화혁명 당시 10만에서 15만 명이 학살당한 광시(廣西) 대도살(大屠殺) 과정에서 가해자들이 집단광기 속에서 피해자들의 인육(人肉)을 발라먹은 사건을 심층 취재한 이른바 “보고(報告) 문학”의 역작 <<홍색 기념비>>를 집필하고 있었다. 톈안먼 대학살 이후 그는 3년간 그 책의 원고를 들고 오지에 은신하다가 가까스로 홍콩으로 탈출해서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앞으로 “슬픈 중국”은 그의 파란만장한 역정과 저술 활동도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1989년 5월 27일 톈안먼 광장에서 연설하는 왕단의 모습. 사진/Mark Avery/Associated Press>
이 밖에도 많은 중국계 학자들이 미국에 살면서 1950-70년대 마오쩌둥 치하 중국공산당이 저지른 인권유린과 정치범죄의 실상을 파헤치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현재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국계 학자 중에는 중국공산당의 편에 서서 노골적으로 친중 노선을 걷고 있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본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지식 사회는 숙명적으로 상반되는 정치적 입장과 이념 차이로 하여 갈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미국이 톈안먼 대학살 이래 중국공산당에 공민의 기본권을 짓밟히며 저항해 온 “대륙의 자유인들”에게 인간답게 살면서 자유, 민주, 인권 등 인류의 보편가치를 외치며 중국 민주화 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와 권리를 보장해 준 고마운 나라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천체물리학자 팡리즈, 덩샤오핑에 “정치범 석방” 편지...공개 서신 시위 이어져
비판적 지식인을 향한 중국공산당의 억압과 탄압에는 아량도 금도(襟度)도 없다. “슬픈 중국” 30회에서 이미 다뤘듯, 1979년 2월 중국공산당 영도자의 임기를 제한하는 규정을 제안해서 결국 덩샤오핑을 설득할 수 있었던 중국 사회과학원의 철학자 옌자치(嚴家其, 1942- )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수배당하다가 부인과 함께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옌자치 교수보다 더 극적인 미국으로의 탈출 사례는 1980년대 저명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1936-2012) 교수과 그의 부인 베이징대 물리학과 교수 리수셴(李淑嫻, 1936?- )의 서글픈 망명 혹은 추방 과정에서 볼 수 있다.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천체물리학자 팡리즈 교수는 1980년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1958년 8월부터 1987년 1월까지 28년 4개월 동안 중국과학기술원에서 근무했던 팡리즈 교수는 두 번이나 공산당원으로서 당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첫 번째 수모는 1957년 반우파 운동 때였다. 두 번째 수모는 1986년 12월 7년 1월 전국 29개 도시의 156개 대학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을 때였다. 팡리즈는 학생들을 선동하는 반체제 인사의 낙인을 받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1987년 베이징에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는 팡리즈 교수. 사진/AIP Emilio Segre Visual Archives/Ge Ge>
이에 굴하지 않고 팡리즈 교수는 1989년 1월 6일 덩샤오핑 앞으로 공개 서신을 발송했다. 이 서신에서 그는 “건국 40주년,” “5.4운동 70주년,”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는 1989년 “자유, 평등, 박애, 인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웨이징성을 비롯한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편지가 당시 베이징을 방문 중이던 전 프린스턴 대학 교수 페리 링크(Perry Link, 1944- )를 통해서 국제 언론에 전문이 번역 게재되었다.
팡리즈 부부, 톈안먼 대학살 발발 직후 베이징 미 대사관으로 384일간 피신
이어서 1989년 2월 중국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팡리즈의 뒤를 이어 중공중앙에 공개 서신을 써서 올리는 시위를 이어갔다. 팡리즈의 부인 리슈셴 교수는 베이징대가 위치한 하이뎬(海淀)구의 인민대표로 당선되면서 불과 두 달 후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나서게 될 학생 대표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4월 15일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불이 붙었을 때, 중국공산당은 민주화 운동의 배후로 팡리즈를 지목했다. 톈안먼 광장 근처에도 가지 않고 두 달 넘게 자택에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던 팡리즈와 리슈셴은 점점 조여오는 중공중앙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톈안먼 대학살 발발 직후인 1989년 6월 6일 신변 위협에 시달리던 두 사람은 미국 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했다. 곧바로 백악관 대변인이 두 사람의 행방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내 나라에서 외국 공관에 망명하는,” 한국인에겐 흡사 구한말 고종(高宗)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피신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전례 없는 두 사람의 피신 생활은 정확히 384일 10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계속>
<38회>망명한 중 민주인사 팡리즈 “중국 인민도 자유, 인권, 민주를 원한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당시 한 청년이 상의를 벗고서 평화의 상징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Stuart Franklin—Magnum>
자유와 민주를 기억하는 시민은 신민으로 돌아갈 수 없다
민주주의가 반드시 인간의 본성에 딱 맞는 제도라 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을 듯하다. 고대 그리스의 소규모 폴리스에서도 플라톤은 민주정이 최악의 중우정치로 귀결된다고 비판했다. 불과 200년 전만 해도 대다수 인류는 군주의 통치를 받으며 신민(臣民)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당시 신민이 모두 스스로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부자연스럽고 기괴한 제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꼈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은 본래 언제 어디서든 적당히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적응력을 발휘한다.
다만 누구든 자유의 맛을 보고 민주의 의미를 알게 되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서 군주의 신민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정신적 해방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노예가 노예로서 노예답게 노예적 삶을 사는 이유는 본성상 노예라서가 아니라 자유가 무엇인지 몰라서이다. 달아난 노예 신분으로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던 19세기 미국의 흑인 정치가 프레데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 1817?-1895)가 말했듯, “앎은 인간을 더는 노예로 살 수 없게 한다(knowledge makes man unfit to be a slave).”
1989년 베이징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선 중국인의 뇌리에 새겨져 있는 자유와 민주의 기억을 들춰내야만 한다. 그 당시 톈안먼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은 분명 1919년 5월 4일 같은 장소에서 “평화조약 무효,” “배신자 처단”과 함께 그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덕선생(德先生, 민주, 덕은 “democracy”에서 “de”의 음역)”을 부르짖었던 선배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더 가까이는 1976년 4월 5일 바로 그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를 원한다! 파시스트는 물러가라!”를 외쳤던 성난 군중의 울부짖음을 되새기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톈안먼 민운(民運, 민주화 운동)”의 기억을 지워서 “인민 망각 공화국”을 만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유의 맛을 본 노예는 달아나거나 반항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여, 안녕하십니까!” 1989년 톈안먼 광장에 모인 학생들은 1919년 5.4운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덕선생”은 5.4운동 당시 민주주의의 별칭이었다. 사진/64memo.com>
방중 중인 부시 대통령 초청 만찬에 반정부 인사 팡리즈 부부 참석 못하게 막아
톈안먼 대학살이 발생하기 석 달 전, 1989년 2월 28일 저녁 베이징 셰라톤 호텔에서 당시 방중 중이던 취임 1개월 된 조지 H.R.부시(1924-2018) 미국 대통령이 중국 각계 500여 명의 인사들을 초청해서 “텍사스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그날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엔 당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1936- )와 그의 부인 베이징대 교수 리수셴(李淑嫻, 1936?- )도 포함돼 있었다.
팡리즈와 리수셴은 중국공산당이 예의주시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반정부 인사들이었다. 그 점을 잘 아는 미 대사관은 그날 만찬장에서 팡리즈에게 인권에 관한 연설을 부탁해놓았다. 팡리즈가 중국의 저명인사 500명 앞에서 보편적 인권에 관한 연설한다면, 중국공산당으로선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중국 측은 미국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면서 팡리즈가 참석하면 만찬을 거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미국 측은 팡리즈 초청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당일 점심께 미국 측은 팡리즈와 리슈셴 부부가 예정대로 만찬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중국 측에 알렸다.

▲<1989년 6월 5일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와 베이징 대학 교수 리수셴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공공부문>
이에 중국 측은 미국 측과 정면충돌하는 대신 경찰을 동원해서 팡리즈 부부의 진입 자체를 무력으로 막는 비상 수단을 썼다. 텍사스 바비큐는 그대로 두고 팡리즈 부부만 불참시키면 된다는 발상이었다. 경찰은 만찬장으로 향하던 팡리즈 부부의 앞길을 막더니 다른 차량을 이용할 수 없게 했다. 팡리즈 부부는 지지 않고 살을 에는 베이징의 삭풍을 맞으며 걸어가기 시작하자 경찰은 3시간이나 따라붙으며 그들의 걸음을 훼방했다. 결국 그날 만찬은 팡리즈 없이 진행되었다.
당시 그 현장을 취재하던 서방 기자들은 일제히 팡리즈 부부가 불참한 이유를 파헤치는 기사를 쏟아냈지만, 대통령은 베이징을 떠나기 전 “유감”이라는 한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대통령 대신 미국 국가안보 고문은 당시 주중 미국 대사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다.
미국이 중국에 공식적으로 항의한다면 중국은 내정간섭이라면 반발했을 터였다.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원치 않았던 미국은 대충 그 문제를 덮어두고 가려 했다. 당시 팡리즈 부부 초빙을 배후에서 건의하고 주선했던 페리 링크(Perry Link, 1944- ) 전 프린스턴 대학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당시 부시 대통령은 사전에 그 계획을 허락했음에도 중국과의 외교 마찰로 임기 초 지지율 하락을 우려해서 대사 문책 정도로 넘어갔다고 해석한다.
해서 미국 정부는 팡리즈 부부의 인권이 짓밟혔음에도 “유감”이라는 한마디로 슬쩍 덮어버렸다. 적어도 미·중 관계는 순조롭다는 인상을 대중의 머리에 심기 위함이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 정부 내의 그 누구도 한 달 보름 후에 베이징을 통째로 삼킬 거대한 민주화의 태풍이 일어나리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치개혁 상징’ 후야오방 장례식에 학생 10만여명 인민대회당 앞에 결집
1989년 4월 15일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사망했다. 이틀 후, 대학생 수만 명이 자발적으로 민주의 광장에 모였다. 학생들은 반부패와 정치개혁의 상징적 인물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자유의 확대와 정치개혁을 부르짖었다.
4월 18일에서 21일 사이 나흘에 걸쳐서 순식간에 베이징에서 일어난 민주의 돌개바람이 전국의 다른 도시들로 불어갔다. 대학가의 학생들이 움직이자 노동자와 관료들이 시위대에 동참했다. 민주의 구호 아래 집결한 노동자들은 인플레, 저임금, 치솟는 집값 등 생계 밀착형 이슈를 내걸고 격렬하게 반정부 시위를 이어갔다.

▲<1989년 4월 21일, 톈안먼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 사진Sadayuki Mikami / AP>
중공중앙은 시위가 사회적 혼란을 부추겨서 급기야 큰 반란으로 폭발될까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리펑(李鵬, 1928-2019) 총리를 위시한 당내의 보수파는 “자산계급 자유화 세력”의 검은손이 민운(民運)의 배후라고 주장했다.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 등 소수의 당내 개혁파는 학생 대다수는 정신이 올바르며 애국적이라며 두둔했다. 리펑이 싹부터 잘라야 한다며 선제 진압을 요구했지만, 자오쯔양은 후야오방 추모식만 일단 잘 넘기자며 유화책을 제안했다.
1989년 4월 19일 학생들은 톈안먼 광장에서 동쪽으로 불과 1-2킬로 떨어진 중난하이(中南海)를 향해서 행진했다. 중난하이는 중공중앙의 집무실이 밀집해 있는 중국 정치의 심장이었다. 학생들이 중난하이 부근에서 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몰려와서 충돌이 일어났다.
4월 22일 후야오방 장례식이 거행될 때, 10만 이상의 학생들이 인민대회당 앞에 결집해 있었다. 그때 세 명의 학생들이 손수 작성한 청원서를 들고 인민대회당 계단에 올라가서 리펑과의 만남을 요구했지만, 리펑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격분한 학생들은 동맹휴업에 돌입했고, 여러 대학의 대표들이 모여서 중국에선 불법화된 학생조직을 결성한다.
인민일보 ‘혼란에 맞서야 한다’ 사설에 격분한 15만 학생들 톈안먼 광장으로
4월 25일 자오쯔양이 북한을 방문길에 오르자 리펑은 정치국 회의를 열고 강력한 사전 진압을 주장하며 실질적인 최고 영도자 덩샤오핑을 설득했다. 덩샤오핑은 학생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을 인정하고, 강력한 선제 진압을 결정했다. 4월 26일, <<인민일보>>는 제1면에 학생들을 반란 세력을 몰아가며 “혼란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 “반드시 선명한 깃발로 동란을 반대해야!” 1989년 4월 26일 인민일보 제1면의 사설. 이 사설이 발표된 후 시위는 더욱 커졌다.>
편파 보도에 격분한 15만 명의 학생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갔다. 다음 날엔 이에 호응한 인민들이 전국에서 시위에 나섰다. 이때부터 톈안먼 민운은 점점 더 범시민적 총궐기의 양상으로 발전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현장을 취재하던 캐나다 기자 잰웡(Jan Wong, 黃明珍, 1952- )에 따르면, 베이징 시민 열 명 중 한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의사, 간호사, 과학자, 심지어는 군인까지 시위에 동참하는 놀라운 상황이었다.
4월 29일에서 5월 3일까지 서방 언론엔 날마다 톈안먼 민주화 운동 관련 보도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중공중앙은 시위 진압 방법을 두고 양분되었다. 자오쯔양은 학생들의 정치개혁 요구를 수용하자 했고, 리펑은 개혁 이전에 사회 안정이 급선무라며 맞섰다.
사복으로 광장에 온 군인들, 인민대회당 지하실서 군복 갈아입고 진압 작전
급기야 5월 4일, 10만의 학생들이 70년 전 5.4운동을 기리며 톈안먼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었고, 이에 호응한 자오쯔양은 학생들의 애국심에 지지를 표명했다. 자오쯔양의 그런 행동은 중공중앙의 보수파를 격분케 했다. 5월 5일 금요일부터 일주일간 광장에 모였던 많은 학생들은 일단 학교로 돌아갔지만, 캠퍼스는 지도부가 없는 중구난방의 상황이었다. 학생 중 일부는 더 큰 시위가 필요하다며 단식투쟁을 계획했다.
한편 중공중앙은 5월 18일로 예정된 소련 당서기 고르바초프 방중을 앞두고 바싹 긴장했다. 덩샤오핑은 고르바초프가 도착하기 전까지 광장을 싹 비워야 함을 강조했다. 군사 진압의 기미를 감지한 자오쯔양은 학생들에게 시위를 취소하라고 설득했으나 학생들의 저항은 완강했다. 5월 13일, 중공중앙은 단식투쟁하는 학생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격분한 학생들은 단식투쟁에 동참했다. 그 수가 1000여 명에 달하는 극한상황이었다.
5월 17일과 18일에는 1백만 명 이상이 광장에 모여들었다. 결국 중공중앙은 톈안먼 광장을 향해 군대를 보냈는데······. 놀랍게도 학생과 시민은 다가오는 군용 차량을 맨몸으로 막으며 굶주린 군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형제, 아들, 조카 같은 그들을 향해 민주와 자유를 설교하기 시작했다.
절대 함구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처음에는 돌부처처럼 트럭 짐칸에 앉은 채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시민과 학생들이 계속 말을 붙이고 음식을 주자 점점 마음을 풀고 담소까지 나누는 상황이 벌어졌다. 군부에서도 반발 조짐이 일자 중공중앙은 군대에 즉각 퇴각을 명령했다. 문화혁명 때처럼 군과 민이 결합하는 위험 상황이 표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복귀한 군인들은 재투입될 때까지 2주에 걸쳐 혹독한 이념 교육을 거쳐야 했다.
5월 30일에는 톈안먼 광장의 한복판에 석고를 빚어서 만든 대형의 “자유 신상”이 세워졌다. 바로 그 순간이 학생과 시민이 세운 “광장의 공화국” 그 짧은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지난 100여 년 중국의 현대사에서 인민이 광장의 주인이 된 그 순간보다 더 자유로운 민주의 모멘트는 없었으리라.
급기야 6월 2일, 탱크와 무장 병력을 앞세운 인민해방군은 베이징을 향해 돌격했다. 시민과 학생에 휩싸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2주 전의 수모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군인들에게 사복을 입힌 후 대중교통을 타거나 걸어서 개별적으로 광장에 잠입하게 하는 작전을 펼쳤다. 군부는 내부를 개조한 시내버스에 다량의 무기를 꽉 채워 싣고서 몰래 광장 주변으로 진입했다. 사복을 입고 톈안먼 광장에 들어간 군인들은 한 명씩 서둘러 광장 서쪽 인민대회당의 지하실에 결집했다. 그들은 건물 안에서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당시 17세 어린 병사로서 톈안문 광장의 현장에 있었던 천광(陳光, 1971- )의 증언에 따르면, 6월 3일 자정 즈음 군인 개개인에게 40-50발의 실탄이 지급되었다. 광장에 나가면 언제든 발포해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대기 중인 군인들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실내에서 오발탄을 쏘기도 했다. (이후 천광은 그 당시 톈안먼의 경험을 화폭에 담아서 중국공산당에 항의하는 반체제 예술가가 되었다. 천광의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소개할 예정이다).
6월 3일 밤 10시를 전후해서 베이징 거리에선 산발적인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베이징의 곳곳에서 총상을 맞고 쓰러진 시민들이 들것에 실린 채로 응급실로 옮겨졌다. 병원마다 치명상을 입은 시민들의 시신이 쌓이고 있었다. 마침내 6월 4일, 이른 새벽, 군대는 톈안먼 광장을 모조리 싹 치우는 청장(淸場) 작전을 감행했다. 군대와의 담판 끝에 광장의 시위대는 철수를 결정했기에 다행히 광장에선 대량 학살이 없었다.
수배자 팡리즈와 리슈셴의 망명...베이징 미 대사관에 신변 보호 요청
1989년 6월 5일, 수배자 명단 맨 위에 오른 팡리즈 부부는 베이징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서 신변 보호를 요청하며 며칠 만 묵자고 했다. 미 대사관의 최고위 외교관들이 3시간 동안 팡리즈 부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우회적으로 난감함을 표현했다. 결국 팡리즈 부부는 그날 밤 호텔에서 머물렀는데, 다음 날 아침 미국 대사관 직원이 그 호텔로 찾아가서 부시 대통령의 손님으로 미국 대사관저에 머물러도 좋다고 통보했다.
미국 대사관 측은 만에 하나 팡리즈 부부에게 비상사태가 터진다면 미국도 인권 유린을 방조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며 백악관을 설득했다. 부시 대통령은 1989년 6월 20일 대학살을 규탄하며 미·중 정부 사이의 교류를 금지했다. 그러나 다음 달 부시 대통령은 극비리에 사절단을 베이징으로 보냈다. 백악관이 엠바고가 걸려서 5개월 후에야 이 사실은 미국 언론에 공개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주주의의 정치인들이란 그저 자신들의 인기 관리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이후 미국에 망명한 직후 애리조나 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는 역시 물리학자인 부인과 공동 집필한 천체물리학 서적 <<우주의 창조>>를 싱가포르에서 출판했다. 그는 물리학자로 남길 원했지만, 과학적 진실도 탐구할 수 없게 하는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해선 과감하게 저항했다. 197-80년대 팡리즈는 물리학 논문 집필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필요할 때면 정치 시론을 써서 대중을 일깨웠다. 그의 시론 속에는 주옥같은 명언이 수북하다.
“사회주의를 사랑하지 말고 의심해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내버려야 할 낡은 옷이다!”
“자유, 평등, 박애, 민주, 인권 등 그 좋은 모든 말이 부르주아적이라고? 그럼 우리에겐 무엇이 남나?”
오늘도 한국 일각에선 내재적 접근 운운하며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미화하는 시대착오적 집단이 준동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심장을 향해 팡리즈가 울부짖는다. “바보들아, 중국 인민도 자유, 인권, 민주를 원한단다!” <계속>
〈39〉 중국엔 왜 자유가 없냐고?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야!”
▲<1989년 5월 17일, 톈안먼 광장의 시위. 사진/AP Photo/Sadayuki Mikami>
“인웨이 자이 중궈 런타이둬(因爲在中國人太多, 왜냐면 중국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중 수교 이듬해인 1993년 늦봄, 서울 종각 부근 어느 중국어 학원에서 연변 출신 조선족 강사 “우라오스(吳老師, 오선생, 가명)가 열다섯 명 쯤 되는 학생들을 향해 “중국을 알고 중국인의 마음을 읽으려면 꼭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표현”이라며 큰 소리로 따라 읽으라 했다.
“인웨이 자이 중궈 런타이둬! (因爲在中國人太多, 왜냐면 중국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스무 살에 입대하여 10년의 군 생활을 했다는 우라오스는 중국어도 알기 쉽게 잘 가르쳤지만, 중국 관련 얘기라면 정치, 문화, 관습, 음식, 무술, 의학, 암흑가 무용담, 연예계 스캔들까지 그 어떤 주제라도 막힘없이 걸쭉한 함경도 사투리로 “군인정신”을 발휘해 소상히 알려주는 자타공인의 “중국통(中國通)”이었다.
우라오스가 진도를 뽑다가 슬금슬금 옆길로 샐 때면 동학들의 얼굴엔 방실방실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목소리가 점점 더 고조되어 급기야 한방 제대로 빵 때릴 땐 학생들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쾅 내려치며 폭소를 터뜨리곤 했다. 여학생들 중에는 웃다가 눈물을 닦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누기든 중국 가서는 꿈에라도 범법 활동을 해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왜서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마약거래, 인신매매, 장기밀매, 금괴밀수, 불법도박 기타 등등, 그따위 악행을 범하다가 공안에 딱 걸리는 날이면, ‘즉결처형!’ 언도받고, 공개로 총살돼버리기 때문임다. 군에 있을 때 나가 공개처형을 현장에서 직접 감독을 해봐서 잘 아는데, 사형수가 잡혀 와서 총살을 당할 때는 맨 앞줄에다가 비행청소년, 불량배, 잡범들을 앉혀 놓고 ‘느그들도 악행과 망동을 계속하면 저렇게 총살당한다야, 잘 보라!’며 그 모습을 필시 지켜보게 합니다. 보통 총살형을 할 때는 죄인을 양손을 등 뒤로 묶어서 고개를 앞으로 푹 수그리게 하고 무릎을 꿇려서 멍하니 땅만 보게 한 후에 뒤통수를 조준해서 쏩니다. 문신투성이 깡패, 상처투성이 왈패 녀석들도 눈앞에서 총 맞고 쓰러지는 잔인한 장면을 보는 순간엔 벌벌 떨면서 오줌을 지리고 말아요.”
▲<55명에 대한 사형 공개 선판(宣判, 판결 선고) 대회 장면. 사형 선고 직후 트럭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 중국은 해마다 수천 건의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사진/Reuters>
학생들의 얼굴에 공포, 놀라움과 함께 잠시 웃음도 스쳐갔다. 그때 우라오스가 말을 이어갔다.
“양코배기야 바깥에서 중국을 욕하고 비난하겠지만, 그건 다 모르고 떠드는 소립니다. 중국이란 큰 땅띠가 어캐 저러케 돌아가는지 쥐뿔 몰라서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가 아니가 싶단 말이지요! 왜서 그러냐면, 자유니 인권이니 인구가 1-2억 정도면 몰라도, 10억 넘어가면 그런 게 다 통할 리가 없다 이 말임다. 13억 인구 전부에게 자유를 주고, 인권을 주면, 사회가 통제가 되겠음까? 꽉 잡아도 온갖 위법, 불법, 탈법, 비행, 악행, 부패, 사기, 협잡, 공갈, 날마다 범죄가 터지는데, 중국 같은 큰 나라에서 자유니 인권이 다 뭔 호랑말코 우스개냐 이 말임다. 중국 같은 큰 나라는 고저 군이 나서서 꽉 잡아야 합니다. 모택동도, 등소평도 다 군으로 전 사회의 질서를 잡고, 군으로 전 인민의 군기를 잡은 혁명군 장수들임다!”
연변 출신 중국어 교사의 주장 “중국 같은 큰 나라는 군이 질서 잡아야”
신명 나서 강의를 할 때면 우라오스는 늘 장황하게 중국의 숱한 문제점을 일일이 열거하고선, 해결책을 얘기할 땐 일언지하로 오로지 중국공산당만이 군대를 앞세워서 통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0년 간 군 생활을 한 사람답게 우라오스는 질서, 규율, 정리정돈만이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원밍즈루(文明之路, 문명의 길)”라 설파하곤 했다.
“자, 지금 내가 여러분께 알려주는 이 표현이 중국 가면 어디서나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중요한 말인데, 교과서엔 절대로 이런 게 나오지를 않아요. ‘인웨이 자이 중궈 런 타이둬!’ 중국엔 인간이 너무 많아서다, 이 말임다. 바쁠 땐 그냥 줄여서, 런 타이둬 人太多! 런타이둬! 사람이 너무 많다, 사람이 너무 많아! 그렇게 말을 하면 주변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런 타이둬, 런 타이둬! 이 말이 중국에선 ‘밍톈 자이 수어바(明天再說吧, 내일 다시 얘기합시다)’ 다음 2등으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이겁니다. 이 말을 모르고선 중국을 이해할 수가 없슴다.”
우라오스는 학생들에게 “인웨이 자이 중궈 런 타이둬”란 구절을 여러 차례 복창시켰다. 런 타이둬! 런 타이둬! 사람이 너무 많다! 사람이 너무 많다! 이후 중국을 드나들며 확인할 수 있었지만, 중국 사람들은 실제로 날마다 이 말을 자주 한다. 구글 검색창에 따옴표를 쳐서 그 문장을 통째로 찾아보면, 비슷한 표현까지 13억 7천 만 개 정도가 순식간에 나올 정도다.
▲<중국 저장성 원저우의 선판 대회. 사진/Reuters>
일당 독재 치하에서 작은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체념과 적응의 논리
중국인들이 왜 입버릇처럼 “런 타이둬”라 말을 할까? 실제로 중국의 인구가 세계 최대이기 때문이지만, 그 한 마디 속엔 공산당 일당독재 치하에서 산더미처럼 큰 기계의 작은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힘없는 개개인의 체념과 적응의 논리가 담겨 있다.
중국은 인구 14억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지극히 예외적인 국가이므로 중국에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중국만의 정치문화, 중국만의 사회·경제 제도가 따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발상이다. 근대 산업화는 중국 인구의 급증을 불러왔고, 그 결과 더 강력한 독재 권력의 지배가 불가피하다는 중국식 일당독재의 인구학적 설명이다.
중국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것도, 마오쩌둥의 권위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도,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인권이 무너진 것도, 산아제한을 위해 정부가 여성의 몸에 IUD(피임용 자궁 내 링)를 삽입한 것도, 위구르족 100만 여명이 구금하고 시진핑 사상의 학습을 강요하고 있는 것도, 헌법에 명시돼 있던 임기 제한 규정을 없애버리고 현직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재집권을 노리는 것도, 그 모든 중국의 문제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라는 설명이다. 그 말을 잘 되새겨 보면 서구나 북미 사회와는 전혀 다른 중국역사의 특이성, 중국 사회의 특수성, 중국문화의 고유성, 중화문명의 예외성을 강조하는 발상이다.
단순히 우스개가 아니라 중국 사람들 다수가 공산당 일당독재를 견디는 이유는 바로 그 시스템이 14억 인구의 광대한 대륙국가에서 분열과 혼란을 피해 그나마 잘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생존전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통치능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서방의 지식인들도 바로 그 점을 강조한다. 15년 전쯤 보스턴의 한 학술토론회에서 들었던 나이 지긋한 한 미국인 여성 학자의 발언을 잊을 수 없다.
“인민에게 배 굶는 민주주의가 다 무슨 소용일까요? 중국의 문제는 ‘민주냐 독재냐?’가 아니라 ‘혼란이냐 거버넌스냐?’가 아닐까요?” 중국은 14억의 인구가 모여 사는 대륙 국가이기 때문에 자유, 민주, 인권보다 치안과 질서가 인민의 실생활 더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정부의 정치체제가 독재든 민주든 진정 중요한 건 치안유지와 생계보장 등 인민의 “살 권리” 보장이라는 개발독재의 변론이다.
인구가 너무 많아 인간의 가치가 추락한 슬픈 나라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한(漢)제국에서 당(唐)제국 중엽까지 인구는 5천만~6천만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 중세 농업혁명의 결과 3세기 만에 인구가 두 배로 늘어서 1100년이면 1억이 넘었다. 몽골 지배 시기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구가 3분의 1 이상 급감했지만, 명말(明末) 상업혁명으로 인구가 다시 1억 4천만까지 치솟았다. 17세기 “작은 빙하기”를 거치면서 10-20% 감소했다가 청(淸)제국 초기 150년 태평성세의 결과 19세기 중엽엔 4억을 돌파하는 명실 공히 인구 폭증을 경험했다. 수리시설의 확충, 곡물의 품종개량, 영농 기술의 보급, 천연두 통제 등 의학 발전이 인구 증가에 기여했다. 또한 감자, 고구마, 옥수수, 사탕수수, 대두 등 신대륙의 작물이 유입은 빈곤층의 생존율을 놀랍게 향상시켰다.
▲<188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축제. 19세기부터 본격적인 중국인의 이산(離散, diaspora)이 시작되었다. 2010년 경 전 세계 중국계 인구는 4천 만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사진/공공부문>
전통시대 인구의 증가는 물론 정치적 통합과 경제성장의 결과이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인구를 빈곤의 악순환에 몰아넣는 환경재앙과 실업대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생존한 사람들은 늘어나는데, 다수의 생활수준은 저하되는 “발전 없는 성장”이 이어지게 된다.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서 농지를 잃은 빈민은 산지와 황무지를 개간하지만, 그 역시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일상적 경쟁을 의미했다. 고향에서 뿌리 뽑힌 빈민들은 인근지역을 유랑하다가 더 큰 생존의 기회를 찾아서 대도시나 해외로 탈출하거나, 대규모 민란에 가담하는 극한 선택에 내몰렸다.
중국 근세기 인구 폭증은 그야말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인간의 가치가 하락하는 내권(內卷, involution, 안으로 말림)의 현상을 낳았다. 여기서 내권이란 경제학적으로 투입되는 총 노동량에 비례해서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는 “안으로 돌돌 말린” 상태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일꾼들이 임금의 10%를 더 벌기 위해서 두 배 이상 노동을 해야 하는 고난 상황이다.
요컨대 중국의 근·현대사에선 인구가 늘면 그만큼 인간의 가치는 하락하는 기막힌 역설이 발생했다. 인구학에서 말하는 바로 그 “맬서스의 인구 함정(the Malthusian population trap)”이다. 오늘날 중국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인간 개개인의 가치가 집체적으로 하락한 슬픈 나라가 되어버렸다.
중국 인민이 원하는 건 자유 민주가 아니라 유능한 통치? “사람아, 아, 사람아!”
탱크부대를 보내서 시민들을 압살하는 톈안먼 대학살을 자행한 후에도 중국공산당은 권력 강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30년 전 종각 부근 한 중국어 학원에서 우라오스가 말했듯 “사람이 너무 많아(人太多)!”가 아니라면, 다른 설명이 가능할까? 진실로 “런타이둬!”는 오늘날 중국의 정치 문화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아닐 수 없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대도살 이후 중국 정부는 사람들을 두 개의 문이 달린 큰 방에 몰아넣고 선택을 강요했다. 왼쪽 문 밖에는 자유, 민주, 인권을 향한 가시밭길 길이 펼쳐진다. 오른쪽 문 밖에는 일당독재 하의 경제적 보상이 따른다. 그러한 양자택일의 극한 상황에서 대다수 중국 인민은 후자를 선택했다.
중국학자들뿐만 아니라 서방의 학자들 중에도 바로 그러한 인민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인민이 진정 원하는 건 자유, 인권, 민주가 아니라 치안유지와 경제성장을 보장하는 유능한 통치이며,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는 바로 그 점에서 인민의 기본욕구를 충족시켜준다고 주장하는 분석가들도 많다. 오늘날의 중국은 실제로 진시황 이래 2천년 지속된 황제체제의 연장일 수 있다.
문제는 중국과 전 세계 대다수 국가와의 경제적 공생 관계가 갈수록 더욱 강화되면서 중국은 안팎에서 더욱 거센 개방개혁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라고 둘러대기엔 그 사람들 개개인의 정치의식이 갈수록 고양되고, 권리주장도 갈수록 강화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문화대혁명의 참상을 11명의 인물이 돌아가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고발하는 다이허우잉(戴厚英, 1938 – 1996)의 눈물겨운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가 보여주듯,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소중한 한 명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속>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자유가 없으면 차라리 죽겠노라!” 사진/ https://www.wilsonquarterly.com/quarterly/_/tiananmen-square-at-25>;
2022.07.16
〈40〉 “예술은 권력 이긴다”...중 예술가들의 ‘시니컬 리얼리즘’
▲<“흥분(Excitement), 텐안먼 (1998).” 호주에서 활약하는 중국 출신 반체제 예술가 궈젠(郭健, 1962- )의 작품. 17세 입대하여 3년 간 군 생활을 했던 궈젠은 1989년 톈안먼 대학살 당시 베이징에서 시위에 참가했다. 1992년 이후 그는 표현의 자유를 찾아 호주로 이주했다. 이미지/Wiki Commons>
권력은 짧고 예술은 길다. 독재자가 폭력으로 사람들의 입을 잠시 막는다 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상념까지 깡그리 지울 순 없다. 머릿속 이미지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바위 틈새로 빠지는 물살처럼, 마음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때론 인간의 표현욕이 식색(食色)의 욕구를 압도하고, 죽음의 공포도 물리칠 수 있다.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정부는 톈안먼 대학살로 권력을 유지했지만, 예술가의 표현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간사를 돌아보면, 정권은 불꽃처럼 단명하고, 기록은 산맥처럼 오래 남는다. 권력은 예술을 이길 수가 없다. 권력은 허망하고 예술은 거룩하다.
톈안먼 대학살 넉 달전 1989년 2월 ‘중국/아방가르드 전시회’
톈안먼 대학살이 자행되기 넉 달 전이었다. 1989년 2월 5일 오전 9시 베이징의 중국미술관에서는 “중국/아방가르드(China/Avant-garde) 전시회”가 개막을 선포했다. 이 전시회는 중국 전역 186명 예술가들이 창작한 300여 점의 작품이 선보이고 있었다. 개막식 직후, 긴 머리로 새우를 파는 인물이 등장하고, 관객을 향해 콘돔을 던지는 퍼포먼스가 연출되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그려진 세숫대야에 발을 씻는 행위예술도 펼쳐졌다. 엄숙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나라 중국에서 그 자체로 커다란 도발이었다.
오전 11시 10분 경, 전시장 한 켠 설치미술 “대화” 앞에 한 20대의 여인이 나타났다. 두 개의 공중전화 부스에 각각 여자와 남자의 표시가 있고, 그 사이에는 큰 거울이 배치돼 있는 묘한 작품이었다. “대화”라는 제목과는 달리 두 사람 사이의 “불통”이 묘사된 듯한 이 작품 앞에서 여인은 중간의 거울을 정조준해서 권총의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캉! 캉!” 폭발음을 내는 가짜 화약총에 불과했지만, 그 효과는 충격적이었다. 황급히 달려온 사복 경찰은 관련자를 즉시 체포하고 전시회를 긴급 폐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1989년 2월 5일, 중국미술관에서 개최된 “중국/아방가르드 전시회”에서 샤오루가 자신의 작품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사진/ttps://post.moma.org/xiao-lu-dialogue/ >
총을 쏜 여인은 “대화”의 설치미술가 샤오루(肖魯, 1962- )였다. 샤오루는 전시회 뒷문으로 빠져 나가서 버스에 몸을 싣고 도시를 돌다가 그날 4시 경 중국미술관으로 돌아가서 자수했다. 샤오루는 설치 예술의 개념을 충분히 소명한 후 나흘 만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샤오루의 도발로 “중국/아방가르드 전시회”는 허망하게 막을 내렸지만, 경찰 당국이 이례적으로 관용을 베풀어 예정된 폐막식까지 두 차례 전시회가 열릴 수는 있었다.
“중국/아방가르드 전시회”는 1985년 이래 중국 미술계의 “신예술 사조(思潮)”가 이룬 첫 번째 결실이었다. 1978년 12월 “개혁개방” 이후에야 중국의 예술가들은 이념의 족쇄를 벗고 독특한 개성과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창작의 세계를 날았다. 그들의 신사조는 “실험 미술”이라 불렸다.
중국의 미술가들은 이미 1986년 광둥성 주하이(珠海)에 모여서 새로운 작품들의 슬라이드를 함께 감상한 후, 1987년 7월 베이징에서 대규모 작품전을 열기로 계획했었다. 바로 그해 중공중앙이 “반(反)자산계급 자유화 운동”을 벌이면서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들은 계속 논의를 이어갔고, 결국 1989년 2월에야 “중국/아방가르드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중국의 통념을 깨는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 전시회가 톈안먼 대학살을 넉 달 앞두고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민주화와 자유화가 그 당시 중국의 시대정신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예술가들로선 그들의 영혼을 억누르는 교조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과의 투쟁이었다.
예술을 정치의 시녀로 삼고 작가의 예술혼 죽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르면, 예술가는 노동자·농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야만 한다. 예술가는 사회주의 혁명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농부가 땅을 갈고 노동자가 기계를 만지듯 예술가는 손을 놀려 혁명정신을 고취해야 한다. 유희의 예술, 탐미적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 자기표현으로서의 예술은 부르주아 퇴폐주의라 간주된다. 예술가가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면 반혁명 분자의 낙인을 받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을 정치의 시녀로 삼는다. 공산주의는 그렇게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예술가의 예술혼을 억압한다.
▲<중국공산당에 저항하는 중국의 대표적 화가 옌정쉐(嚴正學, 1944- ), 2014년 워싱턴포스터와의 인터뷰. 사진/washingtonpost.com>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중국 수묵화의 대가 옌정쉐(嚴正學, 1944- )는 1960-70년대 20여 년의 세월 동안 중앙선전부의 명령에 따라 삼엄한 감시 아래서 날마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그려야만 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남이 시키는 대로 맨날 같은 것만 그려야 했던 그 시절은 지옥 같았다”고 회상한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척박한 중국의 예술적 토양에서 새롭게 움튼 아방가르드 운동에 동참했다. 1980년대 전통 수묵화의 기법으로 추상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충격에 휩싸인 그는 공개적으로 중공 정부와의 투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20년간 열두 차례 이상 구속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1993년 구속되어 가혹한 구타를 당한 후, 그는 예술가가 감히 중국공산당 정부를 고소하는 “행위예술”을 연출했다. 다시 그는 노동 교화형에 처해졌지만, 굴하지 않고 영어(囹圄)의 몸으로 100여 점의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톈안먼 대학살을 규탄하고,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 작품이 주종이었다. 감옥에서 어렵게 빼돌린 그의 작품은 정치적 탄압 아래서 잔뜩 얼어붙은 중국 미술계에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대표작 “89.6!!!!”은 제목이 말해주듯 톈안먼 대학살의 광기를 고발한 작품이다. 중후한 수묵화 기법으로 표현된 검은 태양, 진물 나는 핏줄, 쇠사슬의 이미지는 중국공산당에 맞서는 그의 저항 정신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석방된 후 옌정쉐는 2007년 다시 “국가 체제 전복”의 죄명으로 구속되었다. 그 당시 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리적 침체기를 겪었지만, 2009년 석방된 후 다시 저항적 작품 활동은 이어가고 있다.
▲<톈안먼 대학살을 고발하는 옌정쉐의 작품 “89.6!!!!” 이미지/washiongtonpost.com>
1989년 이후 “시니컬 리얼리즘”의 대두...풍자와 해학에서 새로운 출로 찾아
톈안먼 대학살은 중국의 예술인들을 다시금 어둠의 궁지로 몰아넣었다. 다채로운 예술 실험으로 막 기지개를 켰던 예술가들은 다시 감시와 검열에 시달려야 했다. 톈안먼 대학살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작품 활동은 예술적 자살 시도와 같았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연자약 작품 활동에 몰두할 수도 없었다. 1970년대 한국의 저항시인 김지하가 말했듯, 정치적 탄압을 직면한 예술가에겐 “풍자냐, 자살이냐?”의 실존적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김지하 시인처럼 중국의 예술가들은 자살 대신 풍자와 해학에서 새로운 출로를 찾았다.
1989년 이후 새롭게 일어난 중국의 미술 사조는 “시니컬(cynical) 리얼리즘”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 누구도 탱크부대를 보내서 인민을 압살하는 정권에 정면으로 부딪혀 싸울 수는 없다. 다만 무지몽매한 정치권력을 비웃고, 조롱하고, 풍자할 수는 있다. 여기서 풍자란 정치권력의 검열을 피해 대중에 다가가는 은밀하고도 기발한 소통의 방법이다. 정부로선 딱히 처벌의 빌미를 찾을 수 없는데, 대중은 그 작품들 속에 숨어 있는 비판과 풍자의 코드를 읽어낼 수 있다.
1989년 이후 웨이민쥔(岳敏君, 1962- )이 찾은 예술적 출로는 “폭소(爆笑)”였다. 팝아트와 초현실주의를 결합한 듯한 그의 작품 세계는 세상의 부조리를 향한 유쾌한 조롱, 건강한 해학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정치적 의미를 과도하게 해석하지만, 웨이민쥔은 자신의 작품이 “시니컬하지도, 부조리하지도 않다”며 넌지시 한 발 물러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비정치적이라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의미를 찾는 관객은 어느 작품에서건 원하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현재 웨이민쥔은 2천여 명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베이징 동쪽 교외의 쑹좡예술구(宋莊藝術區)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웨이민쥔, 2015년 작품 “무제, 2015,” 캔버스 유화, 250 cm X250 cm. 이미지/artnet.com>
1989년 신예술조류의 선두주자로 1990년대 문화운동을 이끈 팡리쥔(方力鈞, 1963- ) 역시 시니컬 리얼리즘의 기수로 꼽힌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대머리 인간군상의 다양한 얼굴들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작품 속 대머리 인간군상은 뭔가 무료한 분위기를 뚫고 슬그머니 불량기를 드러내는 “건달의 해학(潑皮幽默)”의 상징으로 읽힌다. 그는 1992년 이후 베이징 북서쪽의 위안밍위안(圓明園) 마을에서 일군의 예술가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4년 여름”, 팡리쥔의 작품, 캔버스에 유화, 180 cm X 250 cm. 이미지/artbasel.com>
여인의 잘려진 머릿단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던 광장의 17세 병사
1989년 6월 3-4일 베이징의 봄은 탱크 부대에 처참하게 짓밟혔다. 6월 3일 밤 10시경 톈안먼 광장 북쪽 창안(長安)에서 처음 울린 총성은 밤새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고궁(古宮) 주변 큰 길 콘크리트 바닥에는 총탄을 맞고 즉사한 사람들이 붉은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베이징 시내 병원 응급실마다 피투성이로 들것에 들려, 수레에 실려, 동료의 등에 업혀 부상자들이 헐떡이다 한 명씩 세상을 떠났다.
정치개혁과 자유화·민주화를 외치며 단식투쟁을 하던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는 1989년 6월 4일 새벽 군부대의 최후통첩 앞에서 7주 동안 지켜왔던 “광장의 공화국”을 버리고 철수했다. 시위대가 모두 빠져나간 광장은 이제 군대에 맡겨졌다. 한 달 넘게 광장을 점령하고 투쟁을 이어가던 시위대는 텐트, 침구, 자전거 외에도 수많은 개인 용품을 남겨두고 떠났다. 청장(淸場)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텅 빈 광장에 남겨진 시위대의 물품들을 싹싹 쓸어 모아 불을 질렀다.
▲<1989년 6월 4일, 군인으로서 직접 현장에서 목격했던 장면을 화폭에 옮긴 천광의 작품. 이미지/ scmp.com>
그때 불길 속으로 고철이 다 된 자전거 한 대가 휩쓸려 들어갔다. 그 자전거의 바퀴살에는 누구의 것인지, 어떤 일인지, 곱게 땋아 붉은 고무줄로 묶은 한 여인의 잘려나간 머릿단이 끼어 있었다. 불길 앞에서 군복을 입고 광장을 청소하던 17세의 어린 병사 천광(陳光, 1971- )의 시선은 바퀴살에 걸려 있던 그 머릿단에 머물러 있었다. 만성 설사에 시달리던 병약하고 섬세한 17세의 어린 병사 천광은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현장을 찍는 사진 병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재빨리 카메라를 들이댔을 땐 바퀴살에 걸려 있던 머리자락이 불길에 휩싸인 다음이었다. 그날 이후 그 머리털의 이미지는 어린 천광의 의식에서 떠나지 않았다.
잔인한 시간이 급물결로 흘러가도 기억은 암초처럼 뇌리에 박혀 있다. 기억은 기름진 의식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날마다 식물처럼 자라난다. 기억의 나무는 열매를 맺고 씨앗을 뿌려 방대한 서사(敍事)의 숲을 이룬다. 그날 천광의 뇌리에 심어진 기억의 씨앗은 그의 예술혼을 깨웠다. 밤새 멈추지 않던 총성, 매캐한 화약연기, 어지럽게 찢긴 채 나뒹구는 깃발들, 잿더미로 불태워진 시위 군중의 옷가지들·······. 그날의 모든 기억은 의식의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으며, 가지를 쳤다.
▲<중국의 화가 천광(陳光, 1971- )의 모습. 사진/Louisa Lim “The People Republic of Amnesia”>
1989년 가을 천광은 직접 카피한 고흐 “해바라기”의 모작으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서 군사예술 학원에서 수학할 기회를 얻었다. 1992년에는 톈안먼 광장에서 몇 걸음 안 떨어진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했다. 이후 15년간 그는 줄곧 1989년 톈안먼의 기억을 피해 도망을 다녔음에도, 과거의 기억은 더욱 생생하고 또렷하게 그의 의식을 점령했다. 결국 신내림을 받은 무당처럼 천광은 예술혼이 이끄는 대로 큰 폭의 캔버스에 그날의 기억을 옮겨 담았다.
벌이가 빠듯한 순수 예술가로서 금지된 영토로 들어선 천광은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의 그림은 현재 중국 내에선 전시될 수도 없고, 온라인에 게시될 수도 없었다. 2014년 5월 10일 경 톈안먼 대학살 25주년을 앞두고 천광은 긴급 체포되어 구금 상태에서 한 달 넘게 보내야만 했다. 정부 당국이 어떤 법적 명분으로 그를 구금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금지된 기억을 표현한 죄 말고는 그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천광은 오늘도 가시밭길을 걷고 있지만, 과연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역사를 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 대학살을 덮으려는 독재 정권의 몸부림은 비겁하고 뻔뻔하다. 대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예술가의 손길은 용감하고 당당하다. 비겁한 권력은 용감한 예술을 이길 수가 없다. 권력은 허망하고 예술은 거룩하다. <계속>
▲<베이징에서 활약하는 ‘시니컬 리얼리즘’의 기수 류이(劉韡, 1972 - )는 2006년 몰래 숨어서 톈안먼 대학살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부인과 가까운 친구들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이 그림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이 그림들은 미래 세대를 위한 당대인(當代人)의 증언이다.
사진/washingtonpos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