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임용한의 전쟁사]/ 〈201〉두 종류의 승리 - 〈220〉용사의 후손들에게서 배운 것

상림은내고향 2022. 7. 14. 16:48

[임용한의 전쟁사] 동아일보 역사학자 2022 〈201〉두 종류의 승리 - 〈220〉용사의 후손들에게서 배운 것

03-01

〈201〉두 종류의 승리

 
 

사람들이 묻는다.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가? 미국은 왜 방관하는가? 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모두 선뜻 대답하기 힘든 문제다. 이 전쟁에는 각국의 정치경제적 사정만이 아니라 유럽연합(EU)과 동유럽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다 얽혀 있다. 푸틴은 이런 난마 같은 이해관계의 틈을 이용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얼마나 버틸지, 침공 당시 러시아가 전쟁기간을 얼마로 잡았는지, 설사 우크라이나가 항복하고 러시아가 원하는 괴뢰정권이 수립된다고 해서 과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가 원하는 나라가 될지? 이건 슈퍼컴 수준의 정보와 분석이 필요해서 개인이 속단하기 어렵다.

 

너무나 강한 적, 화산 폭발이나 해일 같은 너무나 강한 파워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과 저항이 무력해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신의 몫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전쟁에는 예상을 깨는 항전과 국민의 단합이 요구되는 것이다. 전쟁에는 두 가지 승리가 있다. 깃발의 승리는 상대의 땅에 자신의 깃발을 올리는 것이다. 두 번째 승리는 국민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다.

마음을 지배하려면 체제의 우월성, 더 높은 도덕과 청렴, 우리의 후원자라는 신뢰가 필요하다. 러시아는 이 세 가지 모두를 갖추지 못했다. 나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감동적인 저항으로 러시아가 깃발의 승리도 거두지 못하기를 바란다. 설사 깃발이 오르는 날이 오더라도, 그날을 최대로 늦추는 것은 러시아의 딜레마를 더 어렵게 한다. 독재자의 사정은 독재자가 제일 잘 안다. 독재자가 무리수를 둘 때는 내부적으로 그만한 불안 요인이 있는 법이다.

저항이 길어지고 통치가 어려워지면 우크라이나 지배에도 무리수와 과욕이 따른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더 심한 고통을 겪겠지만, 러시아도 얻을 것은 분노밖에 없다. 러시아도 러시아 군부도 전쟁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푸틴이 속전속결을 노리는 이유 중 하나가 군부의 타락과 후유증이 무섭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승리를 기원한다.

 

〈202〉우크라이나 전쟁이 바꿀 미래

 
 

세계가 숨을 죽이고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주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병사와 시민의 영웅적인 항전에 감동하고, 응원하고, 그리고 궁금해한다. 전쟁은 언제, 어떻게 끝날까? 러시아는 무슨 생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까? 푸틴은 노망인가 오판인가? 아니면 독재자의 말로인가? 이 전쟁 후에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세계의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전망을 내놓지만, 아직은 추정에 불과하다. 정확한 분석을 할 만한 정보는 베일 속에 있다. 우크라이나는 잘 싸우고 있지만 승리의 길은 아직 위태롭고 멀어 보인다. 러시아군이 허우적거린다고 해도 덩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푸틴은 가시적인 성과 없이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성과를 거둔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피해자가 될 것이다. 설사 항복을 받아 친러 정권을 세운다고 해도 통치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에 수십만의 군대를 주둔시켜야 하고, 그 역시 장기적인 통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엄청난 군사비, 전쟁 후유증, 국민의 불만은 선전과 꼼수로 막을 수 없다.

러시아가 철군한다고 해도 우크라이나는 파괴된 땅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고난의 길이 앞에 있지만, 멀리 보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이 전쟁은 전 세계인이 인권의 가치를 얼마나 깊게 공유하며 강대국의 횡포를 증오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전기가 될 것이다.

 

미국의 후퇴와 중국의 횡포를 걱정하지만 반대로 될 수도 있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파트너를 얻게 되었다. 독일이 재무장하고, 유럽의 군사력은 급격히 불어날 것이다. 러시아 덕에 군축과 평화가 남매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커져 갈 것이다. 동유럽 국가의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요구는 높아지고, 어쩌면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EU는 그동안 완고하게 유지해 오던 EU의 이상과 운영원리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그 덕에 미국은 태평양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가 꼭 좋은 결과만 가져온다고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미래는 미지의 세계이다. 이제 진짜 21세기가 시작되나 보다.

 
 

〈203〉키이우까지 25km

 
 

어제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국제여단 의용군이 무려 2만 명이라는 소식이 들리더니 오늘은 러시아군이 키이우 25km까지 접근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의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여단이 참전했다. 유럽의 자유주의 지식인, 사회주의자,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국제 공산당, 경제 공황으로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던 사람들…. 하여간 다양한 사람들이 스페인으로 왔다. 이 중에는 헤밍웨이,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앙드레 모루아, 조지 오웰 같은 유명 인사들, 아니 이 전쟁으로 유명해지거나 더 유명해질 사람들도 있었다.


모루아는 이 참전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작가, 역사가, 정치가로 맹활약을 했다. 근래에는 스페인에서 그의 행적은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는 모리배에 가까웠다는 폭로가 있었다. 헤밍웨이도 실제 참전은 하지 않았고 허세에 언론 플레이만 하고 다녔다고 한다. 좌우간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일생의 명작을 두 편이나 썼다.

행동이 맘에 안 들어도 모루아는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희망’이란 소설을 남겼다. 전쟁의 양상을 다큐 형식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승리의 희망이 사라지고, 수도를 향한 프랑코군의 최후의 공격이 임박한 가운데, 반군의 반격이 성공해서 5km, 10km 전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제목이 희망이다.

 

우크라이나의 전황을 들으면서 ‘희망’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우크라이나의 국제여단은 스페인의 여단보다 훨씬 정예이고 내부에 역겨운 기회주의 지식인도 없는 것 같다. 다만 그들이 상대하는 적도 프랑코의 군단과 모로코 용병보다 훨씬 강대하다. 그때는 코민테른이 국제여단을 지원했지만 지금은 서방세계가 국제여단을 지원하고 있다.

스페인은 프랑코의 승리로 끝났지만 우크라이나는 절대 푸틴의 승리로 끝날 수 없다. 단기적인 성과를 거둔다고 해도 길게 보면 반드시 실패로 끝날 것이다. 다만 지금 푸틴에겐 퇴로가 없다. 정녕 우크라이나군의 진짜 승리만이 희망일까?

 

〈204〉스탈린그라드와 키이우

 
 

스탈린그라드는 인구 60만 명이 살던 소련 제3의 공업도시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면 중요하지만 이 도시 하나로 전쟁의 승패가 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1942년 8월 독일 제6군 25개 사단이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몰려왔다. 그중 8개 사단이 도시 공격에 투입된다.


시가전의 어려움을 알던 독일군은 대규모 폭격과 포격으로 도시의 건물을 초토화시키고, 시가로 진입했다. 겨우 1만 명의 소련군은 시민군과 함께 한 달을 버텼지만, 함락 직전에 몰렸다. 이때 동쪽에서 지원부대가 도착했다. 소련군은 계속 병력을 투입했고,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은 그야말로 난투극이 됐다.

양측은 10명 이하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폐허에서 저격병, 소총 수류탄, 삽까지 동원해 숨바꼭질하듯이 싸웠다. 전선도 없고 방어거점도 없었다. 이것이 시가전의 실체이자 악몽이다.

독일군은 악착같이 저항하는 소련군에게 진절머리를 냈지만 조금 후에 상황이 바뀌었다. 동부 시베리아에서 대규모 증원군이 도달하면서 독일 6군은 거꾸로 소련군에게 포위됐다.

독일군은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히틀러는 철수 명령을 거부했다. 이전부터 전황이 꼬이자 참모총장을 비롯해 장군들을 마구 해임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독일군은 도시 폐허를 무기로 2개월을 버텼다. 1943년 기아 상태에 몰린 독일군 9만 명이 결국 항복한다. 이때 도시에 남아 있던 시민은 겨우 1000여 명이었다.

도시 시가전은 최악의 전쟁이다. 그 자체가 전쟁범죄나 다름없다. 러시아가 지금 키이우에서 스탈린그라드를 재현하려 하고 있다. 이미 다른 도시에서 무차별 포격을 감행하고 있고, 키이우에서는 더 심한 짓도 할 수 있다는 기세이다. 허세일 수도 있지만, 이미 푸틴은 3번 이상 서구의 예측을 넘었다. 러시아가 내세우는 침공 이유가 돈바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의 학살과 만행이다. 이건 아직 검증된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라고 해도 이런 전쟁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

 

〈205〉세계 최장 현수교와 차나칼레

 
 

3월 18일 세계 최장의 현수교가 한국 기업에 의해 준공됐다. 다리가 놓인 다르다넬스 해협은 갈리폴리(겔리볼루) 반도와 소아시아 사이에 놓인 지협이다. 고대로부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였다. 차나칼레는 이 해협을 건너는 중요한 나루로, 페리가 이곳에서 운항됐다. 한 15분이면 건너가는 멀지 않은 해협인데, 다리를 놓기가 쉽지 않았다. 폭은 좁지만 수심이 대단히 깊다. 덕분에 짙푸른 물빛은 지극히 아름답고, 거대한 화물선과 흘수 깊은 군함들이 쉽게 항해할 수 있다.

이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다르다넬스를 봉쇄하면 흑해는 꼼짝없이 호수가 되어 버린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다리가 충분히 높아야 하므로 현수교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수많은 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2세는 이 해협에 배다리를 세우고 건너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유목민족에게 패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아들 크세르크세스도 100만 대군을 이끌고 이 해협을 건너 그리스를 침공했다. 해협에 파도가 치자 바다를 벌한다며 수면을 채찍으로 때리던 그는 막상 건널 때는 통행료로 황금그릇을 바다에 넣었다. 20세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정복을 시작한 것도 이 해협을 건너면서부터였다.

차나칼레 서쪽에는 트로이가 있다. 동쪽으로 올라간 지역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전쟁의 승패를 바꾼 두 번의 중요한 해전이 이 해협에서 벌어졌다. 처칠 평생의 굴욕이 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투 장소도 이곳이다. 영국 해군과 오스만 제국 해군은 잠수함까지 동원한 격전을 벌였다.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이처럼 거대한 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곳이 또 있을까? 터키 답사 때 차나칼레는 인상 깊은 곳이었다. 전쟁의 기억은 흔적도 없고, 해변은 밝고 아름답고 활기차기만 했다. 수천 년의 염원이던 다리를 이제 한국 기업이 가설했다. 이 다리가 군사용이 아닌 번영과 평화를 위한 가교가 되길 바란다. 그런데 이 해협의 끝 흑해에는 지금 포연이 가득하다. 

 

〈206〉러시아군, 철수일까 계략일까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물러나고 있다. 상당한 병력이 국경을 넘어 벨라루스로 들어갔다. 종전을 위한 제스처일까? 아니면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 힘들 정도로 전력이 손실된 군대를 재정비하고 휴식을 취하려는 의도일까? 재정비 후에는 다시 키이우를 공격할까? 아니면 키이우 방면은 우크라이나군 병력을 묶어 두는 정도에 만족하고, 돈바스와 크림반도를 잇는 동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려는 계략일까? 후자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계략을 더한다면 동부의 전략 요충에 병력을 집중하는 한편 서부전선에서는 점령 지역에서 물러나면서 우크라이나군을 분산시키고, 특정 지역으로 우크라이나군을 유도해 결전을 추구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1라운드는 우크라이나군의 선전과 러시아군의 낭패로 끝났다. 러시아군의 계략도 성공하기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군과 서방은 계략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고, 휴식기에 병력과 무기를 보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체력 회복보다 우크라이나군의 강화가 더 빠를 수 있다. 어쩌면 소강기 이후에 동부전선에서 지금보다 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군이 저토록 형편없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눈에 띄는 이유 중 하나는 조직력 부족이다. 일단 전략적으로 산만하고 전력이 너무 분산됐다. 통합지휘부와 통일된 전략이 없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공군과 육군, 기갑과 보병, 제병 협동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군을 너무 얕본 탓일까? 실전 경험 부족일까? 푸틴의 독선 때문일까?

 

독재국가 군대의 전형적인 특징이 협력 부족이다. 얼핏 그 반대일 것 같다. 강력한 권력이 군을 일사불란하게 만들지 않을까? 퍼레이드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부당한 권력일수록 군의 단합을 경계한다. 지휘부를 나누고, 장군들을 서로 견제하게 하고, 부대를 이격시킨다. 전쟁의 승패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체제의 건강성이 이래서 중요하다. 정치가 군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논리가 과도하게 개입하면 군은 반드시 약해진다.

 

〈207〉단 한 명이 베르됭 전투를 망쳤다

 
 

1916년 3월 21일 아침, 1200문의 독일군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오후 4시까지 지속된 포격은 베르됭의 요새와 참호, 프랑스군 포대, 철도를 뒤집어 놓았다. 1차 세계대전 때는 420mm, 380mm 대포도 있었다. 독일군은 1주일분으로 250만 발의 포탄을 준비했다.

가공할 화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독일군의 무시무시한 계획과 준비성이었다. 베르됭의 포격 전술은 4개월 후에 벌어지는 솜전투에서 영불 연합군이 사용한 포격 전술보다 더 정교하고, 더 파괴적이고, 더 선진적이었다.

독일군은 대포의 성능과 사정거리에 따라 정확하게 임무를 배당했다. 중포는 참호와 병사를 타격하고, 사정거리가 길고 속사가 가능한 야포로는 프랑스군의 포대와 병참선을 공격한다. 1차 포격이 끝나면 박격포로 방어 1선의 프랑스군을 다시 두들기고, 야포는 1선 후방에 탄막 포격을 개시, 1선으로 달려오는 증원부대를 공격한다.

 

적의 방어선이 뒤로 물러나면 즉시 포대를 앞으로 이동시켜 연속적인 포격 지원을 한다. 이때 예상되는 프랑스군의 대응 포격을 피하고 혼돈 없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해 포대 상호간에 지원 포격을 하며 이동한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1차, 2차 세계대전 중에 전술적으로나 조직력에서 선구적이고 뛰어났던 군대는 독일군이었다. 슐리펜 계획, 전격전 같은 혁신적인 전술만이 아니라 앞선 전투에서 얻은 교훈을 즉시 다음 전투에 적용하는 응용과 개량 능력에서도 독일군이 항상 앞섰다. 간단한 예를 들면 솜전투에서 영불 연합군은 베르됭에서 독일군이 보여준 개량 전술을 전혀 채용하지 못했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지는 모든 군사연구자가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차별적인 능력을 보유하고도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참혹하게 실패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었다. 절대 부적격자였던 그가 총장이 된 이유는 오직 빌헬름 2세의 총애 덕분이었다. 베르됭 전투는 단 한 명의 부적절 인사가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증거다. 지난 수십 년간 좋게 끝난 정권이 없다. 왜일까?

 

〈208〉마리우폴 상공의 장거리 폭격기

 

4월 15일 러시아는 장거리 폭격기를 동원해 마리우폴을 공격했다고 밝혔다. 러시아에는 투폴레프(TU) 95와 160이라는 두 기종의 장거리 폭격기가 있다. 정확한 기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슨 기종이든 이들이 마리우폴 상공에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군은 마리우폴을 90% 이상 장악했다. 한 줌 거점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영웅적인 저항을 펼치고 있다. 도시를 융단 폭격할 것도 아니고, 저항 거점을 정밀 타격할 것이라면 굳이 폭격기를 띄울 이유가 없다. 투폴레프 출현은 핵 무력시위다. 이미 러시아군은 21세기 강대국의 전쟁에서는 차마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전략과 행동을 다 보여줬다. 그러니 핵 투발도 못할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린 한다면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것이 창공에 띄운 메시지다.

러시아는 3중의 곤경에 빠져 있다. ‘알고 보니 러시아군은 종이호랑이더라’라는 인식이 세계에 퍼졌다. 러시아의 의도와 반대로 나토는 더 강해지고 있다. 스웨덴과 핀란드마저 나토에 가입하고, 독일은 재무장을 선언하면서 앞으로 나토군이 증강될 것이 확실하다. 러시아가 나토 동진을 우크라이나 침공의 이유로 내세웠지만, 사실 지금까지 나토군의 즉시 전력은 놀라울 정도로 형편없었다. 숫자로만 비교하면 러시아군의 한 주먹거리도 안 돼 보일 정도였다. 러시아의 침공은 ‘잭의 콩나무’를 심은 격이다. 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절치부심 전력을 집중해 돈바스 대공세를 예고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군은 겁먹지 않고 있다. 만에 하나 이번 대공세가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달라질 일은 없다.

러시아군의 악명만 더 높아질 것이다. 러시아군의 핵위협은 그들이 당혹 속에서 내놓을 카드가 떨어졌다는 의미다. 핵카드를 꺼내들고 “우린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위협은 1956년 수에즈 위기 때부터 써먹던 수법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위협이 곧잘 통했다는 사실이다. 소련 시절부터 공개적으로 핵카드를 꺼내지 않아도 서방세계는 늘 러시아를 굶주린 호랑이처럼 조심스럽게 대해줬다. 이번에도 통할까? 아니면 이번에는 진짜일까?

 
 

〈209〉절대무기에 대한 환상

 
 

1915년 4월 22일 이스프리 전투에서 독일군이 영국, 프랑스군을 향해 독가스를 살포했다. 독가스 사용은 이미 국제협약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전쟁이 치열해지자 독일군이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화가 난 연합군도 독가스 사용 금지를 풀었다. 이로부터 1차 세계대전은 유례없는 화학무기의 실험장이 됐다.

독일군이 금단의 무기에 유혹된 이유는 무슨 수를 쓰든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나라와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논리였다. 이건 별로 창의적인 논리도 아니다. 기관총부터 핵무기까지 가공할 살인무기가 등장할 때 늘 이마에 붙이고 있던 명분이었다.

그러면 독가스는 게임체인저가 됐을까? 아니다. 처음 독가스를 분사했을 때 독일군은 수천 명의 연합군을 단숨에 살상하고 패퇴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살상극을 벌이고도 독일군이 진격한 거리는 10km가 되지 못했다.

 

연합군은 금세 해결책을 찾았고, 방독면을 제작해 보급했다. 초기 방독면은 지금 기준에서 보면 엉성했지만, 의외로 효과적이었다. 독가스도 초보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독가스는 양측 병사들을 지독히 괴롭혔다. 수많은 병사들에게 평생의 장애와 후유증을 남겼다. 그뿐이었다. 전쟁을 더 참혹하게 만들었을 뿐, 전쟁의 승패와는 무관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독가스가 게임체인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독일이나 연합군의 과학기술, 산업력은 엇비슷하다. 한쪽 제품이 더 우월할 수는 있지만 일방적인 우위는 아니다. 열쇠와 자물쇠처럼 공격용 무기를 만들 기술이 있다면 방독면처럼 방어용 장비도 만들 수 있다. 비행기가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하늘에서 지상군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어떤 이들은 환상을 품었다. 제우스의 번개 같은 절대병기가 등장했다는 것. 아니었다. 대공포와 대공미사일이 그 꿈을 꺾었다. 더 치명적인 대항마는 상대의 항공기였다.

왜 인간은 절대무기에 대한 환각을 버리지 못할까? 경영에서 정치에서 인생에서도 그렇다. 이것만 되면 만사 오케이라는 한 방의 유혹에 집착하면 얻는 것은 카운터펀치뿐이다.

 

〈210〉전차의 시대는 끝났는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희생자’ 중 하나가 탱크다. 이 전쟁은 역사상 최대 규모로 대전차화기가 투입된 전쟁으로 기록될 것 같다. 오늘까지 미국이 제공한 재블린 미사일만 7000기가 넘는다고 한다. 그 외의 무기들까지 합하면 1인 1대전차화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러시아는 전통적인 탱크 강국인데, 무수한 탱크가 파괴되면서 전차 무용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전차가 처음 등장한 전투는 1차 세계대전 때의 솜 전투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별 활약을 못 했지만, 전차의 가능성에 영감을 받은 지휘관들이 전차를 이용한 획기적인 전술을 개발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전차는 스타로 떠올랐다. 구데리안, 로멜, 패튼과 같은 기갑지휘관이 스타 장군이 되었다. 소련은 T-34라는 전설의 탱크를 개발했고, T-34는 한국전쟁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우크라이나 국경 바로 북쪽에 있는 쿠르스크는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바로 그 땅에서 세계 최고라는 러시아 탱크들이 대전차미사일과 대전차포에 여지없이 파괴되고 있다. 이제 전차의 시대는 끝난 것일까? 필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전차 무용론을 제기하려면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전쟁에서 전차가 수행하는 역할의 필요가 없어졌는가?” 당연히 아니다. 장갑차량과 이동포대의 필요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대전차무기가 발달하면서 현존하는 전차들이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커진 것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전차가 전술적 역할을 수행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그게 바로 전차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유가 아닐까?

언젠가 전차가 사라질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질문은 전차가 사라진다가 아니라 전차를 대체할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에 따라 또 새로운 전술이 등장하고, 전쟁의 양상이 바뀌고 미리 예측하고 대비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 사이에서 극적인 승부가 연출될 것이다. 그것이 전쟁사에서 반복되는 법칙이다.

 

〈211〉스펙으로 세상을 보지 마라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됐다. 러시아가 종전을 선언한다는 첩보도 있었고, 반대로 전면전을 선포한다는 엄포도 있었다. 듣다 보면 우습기도 하다.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종전을 선언한다고 해서 종전이 될 상황이 아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9일 전승전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뚜렷한 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이 전쟁으로 전 세계에 고통과 공포가 확산되다 보니 우크라이나가 적당히 양보하면 안 되겠나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헤르손-크림-돈바스 회랑은 지금 러시아군이 확실히 장악한 상황도 아니고, 전쟁을 그칠 방안도 아니다. 러시아군이 2, 3년 후 이번에 획득한 영토를 기반으로 다시 침공한다면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진짜 바람 앞의 등불이 된다.

전면전 선포도 별 의미가 없다. 동원령을 내린다고 해도 러시아군의 능력이 6개월 이내에 환골탈태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경제 제재는 생각처럼 즉각적인 효과는 없다. 러시아의 독특한 경제와 국민성을 감안할 때 적어도 빵과 연료는 있으니 옛 소련 시대를 각오한다면 더 오래 아주 오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국방력 강화는 요원하다.

 

러시아는 이미 현명하고 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다. 그래서 더 끝을 알 수 없다. 분명한 교훈은 하나뿐이다. 이 전쟁 전에 러시아군은 공포의 군대였다. 냉전시대의 편견으로 러시아군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평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대의 러시아군은 독소전쟁 때와 또 달라서 엄청난 양과 성능의 무기를 보유한 일급의 군사국가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실전을 보니 엉성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 군사력에서 병력과 무기는 중요한 척도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세계 군사력 순위도 이런 스펙이 작용한다. 그러나 순위보다 중요한 것이 능력이다. 순위가 능력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이것이 아닐까?

 

〈212〉고구려의 잔인했던 5월


 

 645년 음력 3월 당나라 태종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동에 도착했다. 숙원이던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승승장구했다. 수나라가 4번 침공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던 요동성이 한 번 공격에 떨어졌다. 개모성, 백암성이 함락당하면서 고구려 1선 방어선을 돌파하고, 2차 방어선인 압록강까지 침투할 기세였다. 이때가 5, 6월 무렵이었다. 당황한 고구려는 1선에서 당군을 격멸하기 위해 대군을 내보냈는데, 주필산 전투에서 그만 대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보루였던 안시성이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웠다. 음력 7월에 시작한 공격은 3개월을 끌었지만 안시성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사이에 당군이 계획했던 침공의 시간이 다 소모돼 버렸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이런 전면전을 무한정 지속할 수는 없다. 태종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 시절부터 참전해서 평생 화려한 승리와 명성을 쌓았던 태종에게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치욕 중의 치욕이었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그는 2년 뒤에 전면침공에서 소모전쟁으로 전략을 바꾼다. 원정군 규모를 줄이고 고구려 방어선 전면을 공격하는 대신 특정 지역만 공략하고 빠지는 방식으로 괴롭혔다. 그렇게 고구려의 체력을 소모시킨 뒤 649년 5월 다시 대대적인 2차 침공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사망했다.

죽기 직전에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중지하라는 교서를 내렸지만, 당나라는 전쟁을 계속했다. 그 결과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지만, 과도한 전쟁과 과도하게 키워놓은 군벌 탓에 당나라도 내전으로 약해진다.

 

푸틴은 당 태종만큼 명장도 아니고, 직접 일선에 나서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문득 우크라이나 전쟁이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모한 전쟁, 독재자의 야망에 의한 전쟁은 모두를 파멸시킨다. 6월이 되면 러시아 사회도 체감고통이 커져갈 것이다. 푸틴이 전쟁을 포기한다고 해도 세계는 최소 내년까지 심각한 식량과 경제 문제로 고난의 시기를 겪게 될 것이다. 전쟁은 모두를 희생자로 만든다. 이기적인 독재자도 그 속에 포함된다. 6월은 누구에게 가장 잔인한 한 달이 될까.

 

〈213〉님의 침묵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한용운이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평론가들은 이 복종을 타율적 복종이 아닌 자발적 복종, 저급한 가치나 일제 권력에 대한 복종이 아닌 절대자의 진리, 민족의 독립과 같은 숭고한 가치에 대한 복종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이해관계와 책임이 부가되면 기꺼이 자유를 위나 아래 혹은 매뉴얼에 넘긴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희생하는 따위야 우습다. 그래서 절대자의 자유에 대한 복종이 개인이 자기 이익을 위해 실행하는 자유보다 더 자유롭고 정의로운 것이 될 수 있다.

자유와 복종은 전쟁에서도 늘 갈등을 일으킨다. 상급 부대의 부당한 명령, 잘못된 지시에 맹종해야 하는가? 오전까지는 올바른 지시였지만 순식간에 잘못된 지시로 바뀌는 경우도 전쟁터에서는 허다하다.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참사로 꼽히는 솜 전투 때 한 영국군 중대는 전방의 독일군 고지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침 독일군이 교대하느라 철수한 틈에 전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군 중대장의 목표는 다른 곳이었고, 그 고지 공격을 담당한 중대는 진격 중에 와해되고 말았다. 이런 경우 지시대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현장 지휘관의 재량으로 목표를 변경해야 하는가?

임무형 전술을 발전시킨 독일군은 “우리라면 당장 고지로 갔다”고 말한다. 반론도 있다. 그 임무형 전술 덕분에 실패한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어떤 이는 독일군이 항상 처음에는 기발하고 대담하지만 꼭 결정적인 순간에 방향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것이 전통이고, 실패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임무형 전술도 본질은 절대가치에 대한 복종이다. 그 본질은 리더의 책임감이다. 전장의 상황은 급변하고 어떤 지시도 돌발 상황을 다 커버하지 못한다. 이때 지시와 매뉴얼에 숨지 말고 리더의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 본질이다. 그래서 나는 임무형 전술을 좋아한다. 권한은 크고 책임은 지지 않는 리더, 대중의 감성에 편승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리더를 그만 좀 보고 싶다. 

 

〈214〉태교음악 순위 매기기

 

 청년 때 어떤 모임에서 일한 적이 있다. 구성원 대부분이 젊은 부모여서 쉬는 시간이면 육아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다들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키우던 터라 질문도 하고 하소연도 하면서 위안을 얻었다. 그중 한 친구가 조금 특이했는데, 다른 사람이 아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수첩을 꺼내 들고 와서 이렇게 물었다. “태교 때 어떤 음악을 들려주셨어요?” 상대 부모가 답을 하면 수첩에 받아 적으면서 “이 음악은 들려주지 말아야겠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 명확하고 단순한 결론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한 번 원인으로 지목되면 “이건 좋지 않은 것”이라고 낙인을 찍는다. 수첩을 들고 다니던 이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 이유가 태교음악 때문이란 근거가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도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전투에서 승리자는 영원한 명장으로, 패배자는 영원한 멍청이로 남는다. 군대 간 대결, 무기 간 대결에서도 손쉽게 이런 낙인을 찍는다. 4차 중동전, 골란고원 전투에서 시리아의 소련제 T-62는 115mm 활강포를 장착하고도 105mm 포에 장갑도 약한 이스라엘군의 영국제 센추리온 탱크에 완패했다. T-62가 센추리온보다 못한 탱크였을까? 그렇게 단언해서는 안 된다. 이 패전에는 탱크 조종술, 전차 승무원의 역량, 지형, 전술능력과 지휘능력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그러면 또 묻는다. 세상에 전차는 많은데, 굳이 T-62를 변호할 필요가 있느냐고. 혹시 소련을 좋아하는 건 아니냐고. 이런 식의 사고는 사고력과 분석력을 퇴행시킨다. 우리가 무기를 분석하는 것은 서류상 스펙으로 순위를 매기기 위함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에서 그 무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서다. 스펙은 능력의 바로미터가 아니다. ‘조직이 시도하는 행동에서 어떤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느냐’가 올바른 기준이다. 스펙 또한 목적에 맞게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기계적인 스펙만 늘고 인재는 사장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215〉현충일의 기원

 

1944년 6월 6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행된 날이다. 12년 후인 1956년 우리나라는 6월 6일을 현충일로 제정했다. 이 날짜를 정한 이유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고려 현종 5년(1015년) 6월 6일 전사자의 뼈를 집에 보내 제사하게 하는 풍속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조선 시대에는 망종에 병사의 뼈를 묻어주는 풍속이 있었는데 마침 1956년 망종이 6월 6일이어서 이날로 정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런 주장은 좀 이상하다. 고려 현종 때 일은 거란과의 전쟁 중에 시행된 일이라 연례행사는 아니었다. 망종 때 병사의 뼈를 묻는 풍속도 이해하기 힘든 게, 망종은 연례행사고 전쟁은 불특정하게 발생한다. 게다가 망종은 농사 절기 중에서도 제일 바쁜 시기다. 이때까지 파종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쟁기질을 하다가 뼈를 발견하는 수는 있겠지만 전사자에 대한 예우와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와 관련된 행사는 여제((려,여)祭)다. 여제는 전쟁, 공사, 재해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희생자들을 위해서 지내는 제사다. 여제는 1년 3차례 지냈는데 청명, 7월 15일, 10월 1일이다. 절기가 아니라도 전투가 벌어져 전사자가 발생하면 여제의 의례를 따라 제사를 지냈다. 1605년 종성의 동관진이 여진족의 습격에 함락되어 병사와 주민이 살해되고 첨사도 사망한 일이 있었다. 다음 해 2월에 사망자를 위한 제사를 지냈는데, 조선 시대답게 남녀를 구분해서 시신을 묻고 별도로 제사를 지냈다. 여제를 현충일로 본다면 조선 시대는 1년에 3번이나 현충일이 있었던 셈이다.

 

6월 6일과 망종설은 아마도 6·25전쟁이 발발했던 6월에 날을 정하려다가 생긴 것 같다. 그렇다고 현충일을 1년에 3번으로 늘린다거나 다른 날로 바꾸자는 주장이 아니다. 다른 나라 역사를 봐도 역사적인 기념일은 단 한 번의 에피소드로도 얼마든지 제정된다. 그냥 6월이 6·25전쟁이 발발한 달이고, 고려-거란 전쟁은 수도가 함락되고 엄청난 희생자를 냈던 전쟁이었으니, 1015년 6월 6일의 일은 그 한 번만으로도 현충일의 의미가 충분했을 것이다. 날짜 선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해설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 

 

〈216〉피 묻은 정의의 여신

 
 

프랑스군의 참호에 영국군이 발포한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포병들은 참호 라인을 따라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포격이 놀랄 정도로 정확해서 한 발이 터질 때마다 희생자가 나왔다. 영국군이 포격을 중지하고 전진을 시작하기까지 5명의 장교와 80여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 장면은 현대 전쟁의 한 장면이 아니다. 1704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중에 독일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전투 장면이다. 이날 영국군 지휘관은 처칠의 조상인 말버러 공 존 처칠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포는 청동제 대포로 현대의 대포에 비하면 성능과 위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포의 결정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희생이 컸던 진짜 이유는 병사들이 고개도 숙이지 못한 채 꼿꼿하게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휘관들은 적이 돌격해 올 때 재빠르고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당당하게 차렷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고개를 들고 전장을 응시하고 있어야 한다.

 

겁쟁이처럼 웅크리고 있다가는 자신감을 잃어버릴 것이고, 적이 진격을 시작했을 때 고개를 들고 그 방향으로 총을 겨누기보다는 공포와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당시의 귀족 장교들이라고 해서 병사들의 생명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이런 ‘허세의 논리’를 너무 쉽게 믿었고, 실험과 시도로 대항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똑같은 주문을 외운다. “우리는 더 큰 재난(패전)을 피하기 위해서 그 희생을 감수하고 있어야만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격렬한 분노와 비난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그런 분들일수록 단순한 명제와 도그마에 집착하는 성향이 더 강하더라는 것이다. 전부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렇다. 당신의 도그마는 검증해 보았냐고 하면 이미 검증된 것이라고 말하거나, 검증에 실패하면 정의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부당한 조치와 가혹행위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다.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217〉성스러운 길

 
 

필리프 페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패전하자 나치에 부역한 비시 정권의 수반을 지냈다. 만년이 정말 좋지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를 구한 최고의 전쟁영웅이었다.

베르됭 전투가 위기에 빠졌을 때, 페탱이 구원자로 투입됐다. 그는 1차대전을 지옥으로 만든 맹목적인 돌격전술을 혐오했다. 그가 찾아낸 대안은 포병을 이용한 화력전이었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독일군답게 정밀한 포격 계획을 세워 프랑스군 진영을 초토화했다. 페탱은 우왕좌왕하던 포병을 다잡고, 화력을 증원하고, 체계적인 집중 포격으로 독일군에 악몽을 되돌려 주었다.

화력전으로 전환되자 포탄 조달이 관건이 되었다. 페탱은 프랑스 전역을 뒤져 트럭과 가용한 운송수단을 다 끌어모아 3500대의 차량을 마련했다. 그런데 도로가 없었다. 베르됭으로 오는 철도와 도로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독일군의 포격으로 다 절단되었다. 단 하나의 도로만 남아 있었다. 도로는 폭이 6.5m로 트럭 두 대가 간신히 비켜갈 수 있었다. 너비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도로의 내구성이었다. 부드러운 프랑스의 대지 위에 설치된 비포장도로는 엄청난 물량의 수송을 감당할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페탱은 유능한 공병감을 시켜 철저한 도로 관리 계획을 세웠다. 도로에는 트럭과 공병들이 빽빽하게 늘어섰다. 트럭들이 기차처럼 길게 줄을 지어 이동하는 동안 길가의 공병들은 삽으로 겨울에는 모래를, 비가 오면 자갈을 도로에 부었다. 이 도로는 성스러운 길(부아사크레)이라고 불렸는데, 원래의 뜻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이란 의미였다. 바꿔 말하면 죽음의 길이란 의미인데, 그 죽음들 덕분에 거의 패배했던 베르됭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니 성스러운 길이 틀린 말도 아니다.

전쟁에서 도로는 말 그대로 생명선이다. 도로를 통해 누가 얼마나 빨리 대량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하지만 이들의 공로는 곧잘 잊혀진다.

 

〈218〉6·25와 우크라이나 전쟁

 
 

6·25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외국에 의한 강제적 분단 상황, 이념과 체제의 대립, 세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의 접경, 국제 전쟁, 분단 상황에서의 일시적 휴전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이 닮았다. 6·25전쟁 때는 진영에 속해 있는 군대들이 직접 참전해서 물리적으로 싸웠지만, 지구촌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적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정반대다. 전장은 약간의 용병, 의용군을 제외하고는 당사자들의 군대가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러시아는 겨울까지만 공세를 유지하면 서방이 어떤 형태든 우크라이나에 압력을 넣어 분단 상황을 인정하고 평화협정에 사인하도록 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된다면 닮은 점이 차이점을 압도하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분단국가가 되고, 전후 유럽은 당장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5년, 10년 정도의 기한으로 러시아의 에너지와 곡물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에 착수할 것이다.

나토는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미국 의존도가 너무 높은 나토군을 재조직하려 할 것이다.

 

지구적 관점에서 6·25전쟁은 냉전 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신냉전의 시작을 예고한다. 임기 중에 그토록 칭송을 받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지탄을 받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임기 중에 뭔가 놓친 게 없는지 매일 자문하고 있다.” 그녀가 놓친 것이란 바로 이런 고민일 것이다.

군비를 축소하고, 국가 간의 상호수혜적인 경제적 교역과 서로 간에 경제적 의존관계를 확대하는 것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방법인가? 아니면 당장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익구조를 집단화시켜서 집단적 대립, 세계대전을 야기하는 통로가 되는가? 메르켈의 책임을 떠나 인류 모두의 영원한 숙제다.

 

〈219〉히틀러와 스탈린의 악수

 

 제1차 세계대전을 시작하기 전에 독일은 전쟁 준비를 하면서 절대로 러시아를 침공해서는 안 된다는 준칙을 세웠다. 만에 하나 침공한다면 우크라이나로 한정한다. 독일에 필요한 땅은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였다. 다행히 이때는 이 원칙이 지켜졌다.

1930년대 히틀러의 구호는 ‘독일의 생존’이었다. 독일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영토가 필요하다는 것.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등 동유럽 국가를 지목하고, 이곳을 얻기 위해 소련과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떠들었다. 1938년 히틀러가 체코를 병합했다. 베르사유 체제를 폐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한 독일은 어느새 유럽 최강이 되어 있었다. 프랑스 군부는 솔직히 독일군이 더 강하며 자신들은 방어는 가능하지만 공격은 어렵다고 고백했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1000만 명의 희생자를 낸 1차 대전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눈에 들어온 나라가 소련이었다. 소련은 1차 대전 때 연합군과 함께 독일과 싸웠다. 히틀러는 체코 다음 목표로 폴란드를 노렸다. 소련 입장에서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 우크라이나가 위험했다. 독일은 1차 대전 전부터 우크라이나에 눈독을 들였고, 히틀러는 입만 열면 마르크스주의의 박멸이 나치당의 소명이라고 떠들고 있었다.

 

폴란드도 이를 알고 소련과 상호방위협약을 맺고 있었다. 영, 프의 사절단이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3국이 힘을 합쳐 히틀러의 야욕을 꺾자고 했다. 정세상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는데, 스탈린은 시큰둥했다. 알고 보니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보호할 방법이 또 있었다. 폴란드를 독일과 반씩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비밀리에 탄생한 조약이 독소불가침 조약이다. 두 나라는 폴란드를 침공해 반분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힘쓰는 시늉만 하다가 끝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교착상태로 들어가자 러시아는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독일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두 나라는 또 손을 잡을까? 이번에는 그럴 가능성이 낮지만 언제 누가 배신할지 모른다. 아니 국제정치에는 배신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220〉용사의 후손들에게서 배운 것

 

 6·25전쟁 참전 장병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해 만날 기회가 있었다. 유엔군의 국적만큼이나 국적과 연령층도 다양했고, 젊은 학생도 많았다. 참전 장병의 증손도 있다고 한다.

6·25전쟁의 세계사적 의미, 20세기에 발생한 세계대전과 냉전, 21세기에 다가올 전쟁의 위협과 평화를 위한 노력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는데, 좀 놀랐다. 학생들의 생각과 토론 수준이 의외로 높았다. 더 깊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고 싶은 학생들도 있었던 것 같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질문의 수위를 낮추거나 배려를 많이 해주었던 것 같다.

젊은 학생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신선하고 새롭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우리도 그때 똑같은 고민을 했었고 그런 고민들이 세계의 현실과 만나면서 겪었던 여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게 왜 새롭냐고? 진부하고 뻔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바뀌지 않고 인류는 같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지는 않는다. 50년이 된 도로라고 해도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바뀐다. 도로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갈등은 같다고 해도 사람은 바뀌고, 그들은 또 그들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구세대가 판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엮어낼 결론이 아니라 문제에 맞서려는 선한 의지와 용기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인 만큼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면 국가 간의 문제, 대륙 간의 갈등, 빈부격차, 슈퍼파워의 역할 또는 지배에 대해 논쟁적인 대화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런 문제의식들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아는 것과 대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의 유무이다. 세상을 분열시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악의 영역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는 대화로 풀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한다. 아니다. 대화 이전에 세상을 선악으로 보고, 선과 악을 단순화하는 마음가짐부터 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