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분수대(중앙일보) 2022-06/ 06.01(수) 김포공항 - 06.30(목) 경란(警亂)

상림은내고향 2022. 6. 30. 15:43

분수대 2022-06 중앙일보

06.01(수)  김포공항

6·1 지방선거 막판, 이전 공약으로 논란이 된 김포공항은 올해로 지어진 지 83년이 됐다. 1939년 일본군이 활주로를 건설한 게 김포공항의 시초다. 일본군 육군 항공대가 비행 훈련장으로 쓰는 등 군사적 목적이 뚜렷한 비행장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 비행장으로 쓰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빼앗기고 점령하기를 반복했다. 미군과 북한군 항공기가 번갈아가며 김포공항 활주로를 이륙해 적의 급소를 노렸다.

 

김포공항이 국제공항 타이틀을 단 건 1958년이다. 1971년 국내선, 1973년 국제선 청사를 준공하는 등 70년대 내내 확장을 거듭한 뒤 80년대에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렀다. 한국의 고도성장 기간, 나라의 대표 관문 역할을 하며 공항으로서 전성기를 보낸 셈이다.

 

역사가 긴 만큼 사건·사고도 많았다. 1970년 일본 극좌 조직에 의해 공중납치된 일본항공 351편의 인질 100여 명이 김포공항에서 전원 구조됐다. 1986년에는 서울 아시안게임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국제선 청사 내 쓰레기통에서 사제 시한폭탄이 터져 5명이 숨지는 일이 일어났다. 범인을 잡지 못해 사실상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김포공항은 2001년 인천공항이 개장한 뒤 한동안 국내선 전용 공항으로 운영됐다. 그러다 2년 만에 ‘김포-하네다’ 항공편이 부활했고, 현재는 제주 등 국내 뿐 아니라 일본·중국 주요 도시 여러 곳에도 노선이 있는 동아시아 셔틀 공항이 됐다. 지난 4월 한 달간, 106만 명이 김포공항에서 6150편의 항공기를 이용했다. 이처럼 많은 이용객을 인천공항이 수용할 수도 없을 뿐더러, 서울에서 공항이 멀어지는 만큼 수도권 시민들의 불편이 가중될 수 있다는 게 여당 주장이다.

 

반면 공항을 이전하고 그 자리에 대규모 개발을 한다는 이재명·송영길 후보의 구상이 그 자체로 허무맹랑한 발상은 아니다. 국내에도 1916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으로 만들어진 여의도공항을 이전하고 개발한 사례가 있다. 1958년 김포공항에 민간항공 기능을 이전한 여의도공항은 1971년 군사 기능도 서울공항(성남시 소재)로 이관하며 폐쇄됐다. 공항이 있던 자리에는 왕복 10차로의 여의대로와 여의도공원이 들어섰다. 다만 선거 막판 등장한 김포공항 이전 공약이 오랜 역사 만큼의 고민을 담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6.02  모래주머니

 체력단련을 위해 발목에 차는 중량 밴드, 모래주머니가 요즘 자주 언급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규제를 이 모래주머니에 비유하면서다. 지난달 3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윤 대통령은 “모래주머니를 달고선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고 뛰기 어렵다”고 말했다. 삼성·현대차·SK·롯데 등 대기업이 잇따라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한 뒤에 나온 발언이다. 규제 철폐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규제를 모래주머니에 빗댄 표현력은 참신하지만, 따지고 보면 규제 철폐 구호는 역대 정권에서 늘상 있어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봇대 뽑기’를 내세웠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손톱 밑 가시’를 빼주겠다고 했으며,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규제샌드박스’를 만들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규제가 계속 화두가 된 이유는 유독 한국에 규제가 많거나, 없앤 것 이상으로 새 규제를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구호만 외쳤지 규제 철폐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도 된다.

 

윤 대통령의 모래주머니 없애기는 어떤 차별성이 있을까. 윤 대통령은 “법령과 관계없는 행정 규제 같은 그림자 규제는 확실하게 개선하고 법령개선 등 필요한 것 중에 대통령령과 부령으로 할 수 있는 규제들은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며 “법률개정이 필요한 것은 국회와 협조해서 규제 철폐를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빨리 없앨 수 있는 규제는 빨리 없애고, 법률 개정이 걸린 규제는 야당 설득을 잘하겠다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사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전담 조직과 회의 몇 개 만드는 수준이어선 곤란하다. 구둣발이 닳을 만큼, 기업의 애로를 청취하고 현장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 속전속결로 두 달 만에 이뤄진 대통령실 이전, 통상 40일인 입법예고 기간을 이틀로 줄여서 추진한 법무부 인사검증 조직 신설 등 임기 초 윤 대통령이 보여준 특유의 추진력을 국민이 진짜 체감할 수 있는 데에 써야 한다. 규제 철폐가 딱 그런 분야다.

규제 철폐는 우리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이다. 기업과 근로자, 즉 국민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더 이상 늦춰서도 안되고, 늦출 이유도 없다. 전봇대→손톱 및 가시→모래주머니… 그다음 더 그럴싸한 표현이 나온대도, 이젠 너무 식상하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6.03(금)  집시법

 경찰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 근거해 집회 시위 현장에서 직권으로 소음을 측정한다. 등가소음도와 최고소음도 두 가지 측정 방식을 병행한다. 등가소음도는 10분간 발생한 소음의 평균값을 측정한다.

수 분간 최대치로 틀어놨다가 나머지 시간은 ㏈(데시벨)을 줄여 처벌을 피하는 꼼수를 단속할 수 없었던 이유다. 2020년 12월 신설된 최고소음도는 1시간 동안 3회 이상 기준 초과 시 위반이 된다. 등가소음도 허점의 악용을 차단하고 주민의 평온권을 두텁게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최고소음도는 일본과 독일, 미국 뉴욕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

 

소음 기준을 위반하면 경찰이 집시법 제14조에 따라 기준 이하 소음 유지, 또는 확성기 사용 중지 명령, 확성기 일시 보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경찰에 따르면 소음 측정 횟수는 늘어나고 있지만 유지·중지 명령 조치는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해 1월~10월까지 4만1263회의 소음 측정 결과 유지·중지 명령은 1364회(3.3%), 일시보관은 3회(0.01%)였다. 나머지 3만9896회(96.7%)는 기준 이하였다. 대부분은 경찰이 “줄여주세요” 하면 협조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 주변 집회를 둘러싸고 잡음이 일고 있다. 지난 1일 문재인 정부 출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경찰이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며 양산경찰서를 항의 방문했다. 사저 주변에서 욕설과 고성이 뒤섞인 보수단체의 집회가 반복되고 있어서다. 경찰의 측정 결과 이들 집회가 최고소음도 기준을 위반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필요 이상으로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고 거주자의 평온권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선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민주당 의원들은 이에 더해 욕설이나 혐오성 발언을 제한하는 집시법 개정안을 추가로 발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장 경찰들도 보수단체의 집회 내용은 명예훼손 소지가 다분하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사저 주변 소음 문제는 수사로 풀면 되지 혐오성 표현을 규제하는 집시법 개정으로 접근할 사안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차라리 금지통고에 앞서 제한통고부터 하게 되는데, 벌칙조항이 없어서 실효성이 없다는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전면적인 집회 시위 금지통고는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과도한 처분이 될 수 있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6.06(월)  감자튀김

 감자튀김을 부르는 말은 다양하다. 그중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명칭은 프렌치프라이(French Fries)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서 감자튀김을 처음 본 미국·영국 군인들이 프랑스 요리인 줄 알고 프렌치 프라이드 포테이토(French Fried Potatoes)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벨기에와 프랑스는 아직 프렌치프라이의 원조 자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튀김 요리가 발달한 벨기에는 18세기부터 감자를 튀겨 먹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는 같은 시기 파리에 정착한 상인들이 감자튀김을 먹기 시작했고 이후 벨기에로 전파됐다고 본다. 신경전은 벨기에가 유네스코에 프렌치프라이를 벨기에 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프랑스는 “우리 전통 음식으로 엉뚱한 짓을 한다”는 반응이다.

 

감자튀김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감자 요리가 된 데는 패스트푸드의 역할이 컸다. 햄버거와 함께 감자튀김을 제공했는데 패스트푸드가 세계적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감자튀김도 함께 전파됐다.

 

그런데 패스트푸드 메뉴판에서 감자튀김이 사라질 판이다. 햄버거 세트를 시키면 감자튀김 대신 치킨너깃이나 치즈스틱을 준다. 감자를 확보하지 못해서다. 주요 감자 수출국의 수확량이 기후 영향으로 확 줄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인한 물동량 증가로 해상·항공 물류난이다. 감자를 확보해도 한국으로 들여올 방법이 없다. 밀도 마찬가지다. 14개국이 밀 등 곡물 수출을 금지했다.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19.3%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바닥권이다. 쌀(90~100%)을 제외하면 밀(0.7%), 옥수수(0.7%), 콩(6.6%) 등 대부분 곡물을 수입에 의존한다. 우리는 먹거리가 무기인 ‘식량안보’ 시대에 약소국이다.

 

그런데 정부의 대응이 갸우뚱하다. 2025년까지 3년 만에 밀 자급률을 0.7%에서 5%로 높이겠다고 나섰다. 2018년과 똑 닮았다. 당시 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까지 밀 자급률 9.9%를 달성하겠다고 했다. 수요가 줄어드는 쌀 대신 밀 농사를 짓겠다는 건데 논을 밭으로 바꾼다는 얘기다. 식품업계에선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국산 감자는 전분 함량이 적고 수분이 많아 튀김으로 적합하지 않다. 생산이 늘어도 외국산 품종을 대체하기 마땅찮다. 이번엔 실효성 있는 현장 행정이 필요하다. 내년에 또 ‘감튀’ 대란을 겪고 싶지 않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6.07  대통령 집무실 이름

 조선왕조의 각종 현판에선 건물의 용도와 건립 의미, 나아가 정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덕수궁이 경운궁이던 시절 남쪽 정문에는 ‘인화문(仁化門)’ 현판이 걸렸다.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다. 광화문(光化門), 돈화문(敦化門), 홍화문(弘化門) 등 궁궐 바깥 정문 이름에는 ‘화(化)’자가 들어간다. 백성을 유교적 가치로 널리 교화하려는 의미가 담겼다.

 

왕의 글씨인 어필을 새긴 현판은 더 귀하게 여겼다. 철종이 쓴 ‘염자보민(念玆保民)’은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는 의미다. 창덕궁 정자 취운정엔 ‘진실로 중도를 지키라’는 뜻의 ‘윤집궐중(允執厥中)’이란 어필 현판이 걸렸다. 경희궁 경현당 북쪽엔 ‘양덕당(養德堂)’이란 어필 현판이 있었다. 성군이 되려면 덕을 길러야 한다고 왕이 왕세자를 가르친 것이다.

 

제아무리 왕이라도 제 맘대로 정치를 하지는 못했다. 신하에게 권한을 나눠주고 의견을 모아 합의해 결정했다. 조선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근무하던 곳의 이름은 ‘정본당(政本堂)’이었다. 신하의 역할이 곧 ‘정치의 근본’임을 상징한다. 홍문관에는 ‘옥당(玉堂)’ 현판이 걸렸다. 왕과 학문을 논하고 자문을 맡았던 이들이 근무하는 곳을 ‘옥과 같이 귀중한 집’이라 부른 것이다. 앞서 거론한 현판은 모두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의 이상을 걸다-궁중현판’ 특별전에서 만날 수 있다.

 

용산 대통령 집무실 이름 후보작이 5개로 추려졌다. ‘국민의집’ ‘국민청사’ ‘민음청사’ ‘바른누리’ ‘이태원로22’ 등이다. ‘국민의집’은 국민이 대통령실의 주인, ‘국민청사’는 국민의 소리를 듣고(聽), 생각한다(思)는 의미다. ‘민음청사’는 국민의 소리를 듣는 관청, ‘바른누리’는 공정한 세상이란 뜻이다. 집무실 도로명에서 딴 ‘이태원로22’엔 대통령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소통하겠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고 노태우 대통령은 “나는 보통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바꿔 말하면 이전 대통령까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소통을 강조하는 이름이 더 권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지금은 왕조시대도, 군부독재 끝물도 아니다. 집무실 이름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겠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6.08  삶은 개구리 증후군

 ‘끓는 물에 개구리를 갑자기 넣으면 뛰쳐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고 천천히 끓이면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건 유명한 은유다. 이른바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다. 19세기 말 미국의 몇몇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주장한 게 시초가 됐다. 분당 0.2℃ 미만의 느린 속도로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가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경제 위기, 기후 위기가 찾아오는데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의 비유로 자주 쓰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구리를 끓는 물에 넣으면 펄쩍 뛰지 않고 죽지만, 찬물에 넣으면 더워지기 전에 펄쩍 뛰어 탈출한다”(더글라스 멜튼 하버드대 생물학과 교수)고 한다. 팔팔 끓는 물에서는 달걀흰자가 굳듯 단백질 변형이 와 탈출이 어려울 수 있지만, 오히려 서서히 물 온도를 높이면 위험을 인지한 개구리가 어느 순간 냄비에서 뛰쳐나간다는 것이다.

 

유튜브에는 10분에 5℃씩 온도를 올렸을 때 개구리의 반응을 찍은 실험 영상도 있다. 이 영상에서도 개구리는 물이 끓기 전 냄비를 벗어났다. 개구리가 주변 온도에 따라 체온이 바뀌는 변온동물임에도 ‘치사 온도’를 정확하게 느끼고 몸이 반응하는, 통념과 다른 생존 능력을 갖춘 게 입증된 것이다.

 

지난해 4·7 재보궐 선거 직전까지 국민의힘 상황도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였다. 2011년 무상급식 파동 이후 정책 담론에서 민주당에 판판이 밀렸고,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는 공천 파동으로 온 국민에게 손가락질을 당했다. 이후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2020년까지 이어지는 초유의 전국 선거 4연패로 거의 숨통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마치 현실의 개구리처럼 ‘치사 온도’에 달해서야 4·7 재보궐 선거를 통해 간신히 냄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흐름을 타고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국민의힘이 당내 패권 싸움에 시동을 거는 모습이다. 이준석 대표의 우크라이나행과 당 혁신위 설치를 두고 이른바 ‘윤핵관’들과 이 대표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이 대표를 향한 윤리위 징계, 조기 사퇴론을 거론하는 인사도 있다. 2년 뒤 총선 주도권 싸움이란 해석이 나온다. 끓었던 물이 채 식기도 전이지만, 20대 총선의 ‘옥새 파동’을 연상케 한다. 보수정당이 다시 위기에 빠졌을 때도 냄비 밖으로 뛰쳐나갈 힘이 남아있을지 의문이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6.09  능력주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2021)에서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능력주의가 시장경제에서 효율성이라는 긍정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성공은 모두 능력과 우수성 때문이며 실패는 부족함과 태만 탓이라는 생각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음에도, 성공하면 ‘잘나서’고 실패하면 ‘못나서’라는 믿음을 진리로 여긴다는 비판이다.

 

가령 비싼 돈 내고 과외를 받거나 유학 컨설팅을 받은 학생은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괜찮은 직업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모두 이럴 수는 없다. 부모가 능력이 있어야 한다. 샌델 교수와 더불어 대표적인 능력주의 비판론자인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교수는 『엘리트 세습』(2020)에서 현대 사회에서 능력은 아이의 재능과 노력의 결과라기보다 부모의 능력에 의존해 만들어진다고 비판했다.

 

능력주의 비판론자의 이야기를 능력주의 무용론으로 떠받들 필요는 없지만, 능력주의 맹신에 대한 경고로는 새겨들을 만하다. 그런 측면에서 ‘철저한 능력주의’만 강조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인사 원칙은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실제로 내각과 차관급 초기 인사에서 ‘서오남(서울대, 50대 이상 남성)’에 편중됐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윤 대통령이 내세운 능력주의가 실상은 선민주의 혹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다.

 

최근엔 검찰 출신이 주요 보직을 줄줄이 꿰차면서 비판이 더 커졌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국정원 기조실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법제처장, 대통령실 공직기강·법률·총무·인사비서관까지 모두 검찰 출신이다. 7일에는 이복현 전 서울북부지방검찰청 부장검사를 금융감독원장으로 임명했다. 금감원 설립(1999년) 이래 첫 검찰 출신 원장이다. 검찰 출신 편중 인사 지적에 윤 대통령은 “우리 인사 원칙은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물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을 쓸 때, 주변부터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검찰 밖 다양한 분야의 유능한 인사, 정부 내 견제와 균형을 위한 인사, 사회통합을 고려한 상징적 인사 등 다양한 인재를 찾으려는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능력뿐 아니라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적재적소의 인재가 검찰에, 유독 윤 대통령 주변에만 몰려있었다고 믿어야 할까. 그 믿음이 곧 공정하다는 착각이 된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6.10(금)  소울리스좌

 “야.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아.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올 2월 발매된 가수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의 가사 일부다. 이번에도 특유의 랩인지 노래인지 모를듯한 창법으로 가사를 읊조린다. 목소리는 무덤덤하다. ‘세상에 부러움이란 걸 모르는 놈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나’라는 내용이다. 허세 같지만 중독성 있는 멜로디에 일단 귀를 기울여보기로 한다. 장기하의 노랫말은 귀에 착착 감긴다.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말의 리듬을 잘 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장기하만큼 뛰어난 ‘가사 전달력’의 소유자를 발견했다. 에버랜드 대표 놀이기구인 ‘아마존 익스프레스’의 아르바이트생 김한나(23)씨다. 김씨 영상은 유튜브에서 1800만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중이다. 속사포로 안내 멘트를 쏟아내는데 귀에 쏙쏙 들어온다. “옷, 머리, 신발, 양말, 신발, 양말, 머리 싹 다 젖습니다. 젖는 겁니다~ 젖습니다. 젖는 겁니다~ 젖습니다. 안 젖-을 수 없는. 여기는 아마, 아마-존.” 그의 영혼 없는 눈빛이 포인트다. 엇박자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리듬감도 돋보인다.

 

이런 김씨에게 ‘영혼(soul) 없이(less) 일하는 사람 중 최고(본좌)’라는 뜻의 ‘소울리스좌’란 별명이 붙었다. 김씨를 보고 프로의 경지를 넘어 통달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4년 차 알바생인 김씨는 “한 달 동안 계속 말을 열심히 내뱉었던 것 같다”며 “하루아침에 된 건 절대 아니다”고 말한다.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다. 안 되더라도 시도를 계속해보면 어느 정도 되더라고요”라고도 말한다. 에버랜드 n년차 아르바이트생의 ‘짬바(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노련미)’다. 장기하도 김씨의 영상을 봤을까.

 

감정이나 체력을 전부 쏟지 않는다고 해서 프로페셔널(professional)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적정선을 지키는 것도 능력이다. 장기하와 김씨 모두 눈빛과 움직임은 건조하지만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편안하다. 노동과 업무도 마찬가지다. 숙련된 기술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면 된다. 장기하가 툭툭 내뱉듯이 노래를 부른다고 최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 없어지기 전까지 숱한 노력이 있었을 것 같아서.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6.13(월)  수의계약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등 정부가 체결하는 모든 계약은 경쟁계약으로 이뤄진다. 해당 계약을 맺길 원하는 여러 업체를 경쟁시켜 가장 유리한 계약 내용을 제시하는 곳을 선정하는 방식이다. 입찰이나 경매가 일반적이다. 예컨대 새 청사를 짓는다는 공고를 내면 해당 공사를 맡길 원하는 업체들이 입찰에 참여한다. 그중 공사가격을 가장 낮게 제시한 업체(최저가낙찰제) 혹은 공사가격이 가장 낮지 않아도 좋은 자재나 기술을 적용하겠다는 업체(제한적 평균 낙찰제) 등을 선정한다.

 

정부가 맺는 공사 도급이나 국·공유 자산 매각(불하), 관용품 구매 계약까지 원칙적으로 경쟁계약이다. 공정성을 지키고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요즘은 민간기업도 대부분 발주를 경쟁계약으로 진행한다. 해당 업체 선정을 두고 가타부타 논란 방지 효과는 물론이고 입찰에 참여한 업체간 경쟁을 통해 보다 유리한 계약 내용을 끌어낼 수 있어서다.

 

예외도 있다. 적당한 상대방을 임의로 선택해 맺는 계약, 즉 수의계약이다. 지자체장이나 해당 계약 담당자가 계약의 목적·성질·규모·지역 특수성 등을 고려해 수의계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다. 그런데 그간 수의계약은 온갖 비리의 중심에 있었다. 시의원이나 지자체장의 가족이나 지인이 해당 지자체와 수의계약을 맺어 이익을 취한 사건은 셀 수 없다. 부처 공무원이 내부 정보를 활용, 수의계약으로 토지를 사들여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기도 했다. 수의계약이 부정 축재의 치트키(Cheat Key, 게임 제작자만 알고 있는 속임수)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시끄럽다. 지난해 12월 창업한 신생업체에 간유리(불투명유리) 공사를 수의계약으로 맡겨서다. 실제 기술자가 1명뿐인 영세한 업체라든가, 이미 보안성 검토를 마친 다른 업체가 있었다든가, 선정기준을 밝히라든가…. 이런 지적에 대통령실은 “공사 진행이 긴급해 수의계약했다”고 해명했다.

 

잘 익은 자두가 열린 나무 아래서 모자를 고쳐 쓰려고 손을 뻗어 올리면 자두를 따는 것처럼 보인다(李下不正冠). 남에게 의심받을 짓을 삼가라는 의미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운 새 정부의 몸가짐이 보다 진중해야지 싶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6.14  베이비박스

배우 송강호에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는 베이비박스를 둘러싼 이야기다. 베이비박스는 키울 형편이 안 되는 아기를 안전하게 두고 가는 작은 상자다. 중세 이탈리아에선 신생아를 강물에 버리는 일이 잦았다. 영아 살해를 막기 위해 1198년 ‘버린 아기 회전판’을 교회 벽에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퍼져 19세기까지 광범위하게 쓰였다. 그것이 현대적 형태로 다시 나타난 게 베이비박스다.

 

한국에선 2009년 서울 주사랑공동체교회 담벼락에 최초로 설치됐다. 그러나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고, 영아유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국가의 환영을 받진 못했다. 베이비박스에 두고 간 엄마가 아동복지법 위반(영아유기)으로 처벌받은 판례도 있다. 통상 징역 4~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다. 주사랑공동체 양승원 사무국장은 "2017년 아동복지법이 강화되면서 아이를 되찾으러 온 친모를 경찰이 인지하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처벌을 피하려면 영영 아이를 안 찾아야 하는 셈이다.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2년 개정된 입양특례법 역시 난관이다. 친생부모가 실명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양육 포기에 동의한 뒤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아이를 입양 보낼 수 있어서다. 아기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법 개정이었지만, 베이비박스에 놓인 아기의 수는 오히려 늘었다. 우리 법에서 혼외자 출생신고는 친모 몫이다. 무사히 입양되면 친모의 가족관계등록부 등에서 아이의 기록이 삭제된다. 하지만 혹여 파양되면 민법에 따라 입양 전 친족 관계가 부활한다.

 

주사랑공동체 측은 베이비박스에 놓인 아기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고 강변한다. 생명을 죽이지 않으려는 엄마들의 마지막 선택지라서다. 베이비박스를 찾은 친모 중 15~16%는 교회의 지원을 받아 손수 아이를 키운다. 반면 나라에선 출생신고 없이는 출산장려금은커녕 분유 한 통 지원받기 힘들다. 형편이 안 돼 아이를 남의 손으로라도 잘 기르려는 엄마를 우리의 법은 처벌 대상으로만 보는 듯하다. 어떤 형편에 놓인 엄마여도 출산을 환영하고 지지해주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영화 ‘브로커’에서처럼, 모든 생명에게 “태어나줘서 고마워”라 말해줄 수 있도록.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6.15  과잉경호

 고대 로마 황제의 친위대 ‘프라이토리아니’는 수도에서 황제를 경호할 땐 평상복인 ‘토가’ 차림으로 근무했다. 갑주는 훈련과 전투 때만 썼다. 2000여 년 전임을 고려하면, 정장·평상복 차림의 요즘 경호원들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반면 5차례에 걸친 진시황의 ‘천하 순행’은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중무장한 보병·기병이 황제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 움직이는 궁궐을 떠올리게 했다고 한다. 순행지의 도시들은 황제의 행차에 맞춰 도로를 정비했다. 순행은 지역 민심을 살피고, 황제의 권위를 알리는 게 목적이다. 진시황의 행차는 그 거대한 인의 장막만큼 민심과 멀어졌다.

 

무장 경호원의 규모만 권력과 민심의 장벽이 되는 건 아니다. 한국에선 대통령 경호책임자들의 과잉 충성이 여러 차례 논란이 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세동 경호실장은 “신변 보호를 넘어 심기까지 편안케 해야 한다”며 이른바 ‘심기 경호’라는 신조어를 만든 걸로 유명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경호실장 차지철은 ‘대통령을 지키겠다’며 새벽 1~3시 전차중대에게 청와대 부근을 돌게 하는 기행을 벌였다. 일반 국민 입장에선 상식 밖의 일이다.

 

민주화 이후 이런 막무가내식 과잉경호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됐다. 정권 실세가 경호처장이 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나 경호처가 대통령실의 터줏대감이라는 점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집권 세력은 5년마다 교체되지만, 경호처는 늘 자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올해 기준 경호처 예산(969억9600만원)은 비서실 및 국가안보실 예산(955억7000만원)보다 많다.

 

경호의 논리가 대통령의 어젠다를 때때로 누르는 경우도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광화문 대통령’을 공약했다가 경호와 안전 등의 문제로 철회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경호 등 문제로 격론 끝에 용산청사를 택했다.

 

윤 대통령 부부의 지난 11일 성북구 빵집 쇼핑을 두고 일각에서 과잉경호라는 주장이 나왔다. 대통령 부부의 빵 구입을 위해 일대 교통을 통제해 시민 불편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취임 후에도 “한 시민의 모습을 저도 좀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며 주말 시장·백화점을 즐겨 찾는 윤 대통령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지적이다. 대통령실은 “오히려 교통 정체를 해소하려 했다”며 억울해했다. 하지만 그보다 유연한 경호 방법을 고민했으면 한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6.16  인터넷 익스플로러

 1995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MS)가 선보인 인터넷 익스플로러(IE)는 한때 시장을 평정했다. IE는 윈도우95에 기본 프로그램으로 설치된 웹브라우저로 출발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 없던 시절, 개인 컴퓨터(PC)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IE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2003년 기준, IE의 웹브라우저 점유율은 95%에 달했다.

 

승승장구하던 IE도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고 경쟁 브라우저인 크롬이나 파이어폭스 등이 치고 나가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다. MS가 버전을 계속 업그레이드하며 대응에 나섰지만, 보안과 편의성 등에서 큰 점수를 받지 못하면서 사용자들이 외면하기 시작했다. 트래픽 분석사이트 스탯카운터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IE의 국내 웹브라우저 점유율(데스크톱 기준)은 1.59%에 불과했다. 구글의 크롬이 71.25%로 절대다수의 선택을 받았다.

 

결국 IE는 27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MS는 15일부터 이 서비스를 비활성화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용자가 윈도10 업데이트를 진행하면 IE 애플리케이션이 비활성화되고, 대신 새로운 브라우저인 에지(edge)로 자동 전환된다. 에지는 MS가 윈도10부터 채택한, 보안을 강화한 기본 브라우저다. 에지에서도 IE에 친숙한 사용자를 위한 IE모드를 2029년까지 사용할 수 있지만, 액티브엑스 설치 같은 확장 기능을 지원하지 않는다. 정상적 브라우저로 활용할 수 없는 셈이다.

 

MS가 갑자기 IE 서비스 종료에 나선 건 아니다. 2016년 윈도10과 에지를 공개하면서 사실상 서비스 중단을 예고했다. 2020년에는 IE에서 협업 플랫폼 ‘팀즈’와 구독형 오피스 서비스 ‘마이크로소프트365’ 등 주요 기능의 실행을 막으면서 서비스 종료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단계적 예고로 혼란을 최소화하고, 사용자들에게 대비할 시간을 준 셈이다.

 

대다수 민간 기업과 기관은 예고된 변화를 단단히 준비했다. 그런데 일부 공공서비스와 공기업 홈페이지는 여전히 IE에서만 홈페이지를 이용할 수 있다. 크롬과 같은 브라우저로는 홈페이지가 열리지도 않는다. 일부 사이트는 “IE지원이 종료되면 에지 브라우저의 ‘IE모드’를 사용해달라”고 안내하고 있다. 늑장대처로 인한 불편을 방문자가 감수하라는 것이다. ‘인터넷 강국’이란 말이 민망하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6.17(금)  범죄도시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는 강력계 형사의 활약을 그린다. 서울 금천경찰서 강력반 부반장(데스크)인 ‘마석도’ 형사가 주인공이다. 2017년 10월 개봉한 ‘범죄도시1’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족 폭력조직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모티브가 됐다. 2004년 5월 서울 남부경찰서에 ‘왕건이파’ 조직원인 조선족 14명이 붙잡히고 2007년 4월 서울 금천서가 연변 출신 ‘흑사파’ 조직원 32명을 체포한 사건이다.

 

서울 남부서는 금천서의 전신이다.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불렸던 ‘난곡’과 독산동·가리봉동 일대 ‘쪽방촌’을 관할했다. 크고 작은 형사 사건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소위 형사들 사이에선 “밭이 좋다”고 일컬어졌다. 남부서는 그래서 ‘형사사관학교’로 유명했다. 남부서에서 승진한 형사들은 인근 경찰서 강력반장(외근), 또는 형사반장(내근)으로 불려갔다.

 

1972년 문을 연 남부서는 영화 속 장면처럼 건물이 낡고 시설이 열악해서 일부는 컨테이너를 사무실로 썼다. 그러나 남부서 형사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끈기와 열정으로 묻힐 뻔한 사건도 발굴해냈다. 최초의 외국인 조폭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왕건이파’ 소탕 작전이 대표적이다. 사건은 영화처럼 한 유흥주점에서 발생한 소란으로 시작됐다. 피해를 본 직원은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첩보를 입수한 남부서 형사들이 피해자를 설득하고 근성을 발휘해 왕건이파 실체를 쫓기 시작했다. 남부서는 서울 관악경찰서(1976년), 서울 구로경찰서(1980년)에 관할 구역 일부를 떼어주고 2006년부터 금천구 관내만 담당하는 금천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범죄도시2’는 베트남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론 2012년 5월 필리핀 코리안데스크 개설 계기가 된 사건을 다룬다. 한인 3인조가 관광객을 상대로 금품을 갈취하고 살인을 저지른 이른바 ‘필리핀 연쇄 납치·살인사건’이다. 한국인 대상 범죄를 전담 처리하는 코리안데스크는 2015년 12월 베트남에도 설치됐다.

 

개봉 25일째인 지난 11일 ‘범죄도시2’가 누적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이다. 불의를 보면 불도저처럼 정의의 법을 밀어붙이는 영화 속 마석도는 국민이 보고 싶어하는 실제 경찰의 모습이다. 1000만 관객의 응원이 음지에서 뛰고 있는 형사들에게도 닿길 바란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6.20(월)  김여사, 김씨

 여사(女史)는 3000년 전 중국 고대국가인 주나라(기원전 1100~기원전 256) 때부터 쓰였다. 당시 왕실에 여사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후궁을 섬기며 기록·문서를 맡았던 여관(女官)이었다. 점차 역할이 커져 황제와 동침할 후궁의 순서를 정해주는 일까지 맡게 됐다. 궁궐 내 대단한 권력이었다. 이후 고위 관료의 부인 호칭으로 사용됐는데 공식적 권력(남편) 뒤 실질적 권력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여사는 청나라(1616~1912) 말기 술집 포주나 창녀를 부르는 말로 확 바뀌었다. 그러자 근대 들어 지각 있는 여성들이 의미를 바꾸려고 여사(女史)를 여사(女士)라고 쓰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조선왕조실록』에 여사라는 말이 등장한다. 대개 왕족이나 사대부 집안 여성 중 절개·효도·내조 등 모범적인 행실을 보인 여성을 칭찬하는 말로 쓰였다. 한국에서 여사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1750년대 영국에서 문학이나 학문에 관심이 많은 여성을 ‘블루스타킹’(Bluestocking)이라고 칭했는데, 일본에선 이 단어를 여사로 번역해 사용했다. 당시 일본에선 결혼한 여성의 성 뒤에 여사를 붙여 존칭으로 사용했고 한국도 영향을 받았다. 현재는 다른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거나 호칭이 마땅치 않은 나이 많은 여성을 ‘아줌마’ 대신 부를 때 사용한다.

민폐 운전을 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로 ‘김여사’가 있다.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인 ‘김’에 여사를 붙였다.

 

최근 대통령 부인의 지칭이 도마 위에 올랐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로 칭해야 할지, 김건희 씨로 불러야 할지 갑론을박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시절(1963~1979) 언론은 박 대통령을 박정희씨라고 칭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1988~1993) 때도 노태우씨라고 썼다. 당시 씨는 존칭이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1990년대 말 들어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라고 쓴 언론은 비난받았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 부인 권양숙씨, 2017년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씨도 질책 대상이었다. 예의에 어긋나고 무시한다는 이유였다. 씨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여사·씨·영부인·국모…. 사회적 합의만 있다면 대통령 부인을 칭할 말은 많다. 그런데 아쉽다. 지금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칭이 아니라 공식적 권력 뒤 실질적 권력의 행보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6.21  폭염

 폭염(heatwave)은 비정상적인 고온 현상이 지속하면서 인명과 재산피해를 가져오는 자연재해를 가리킨다. 폭염의 기준은 나라별로 다르다. 우리나라는 일 최고 체감온도 33℃ 이상인 날이 이틀 이상 이어질 것으로 예측되면 폭염주의보를 발령한다. 지난 19일 대구와 광주·경북 대부분 지역, 경남·전남 일부 지역에 대해 올해 첫 폭염주의보를 발효했다. 지난해보다 3주가량 당겨졌다.

 

때 이른 폭염은 중서부 유럽과 미국 등도 강타하고 있다. 프랑스 남서부 도시 피소스의 지난 주말 최고기온은 무려 43.4℃에 달했다. 미국도 ‘열돔(heat dome)’ 때문에 수십 개 주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열돔은 뜨거운 공기 덩어리가 고압의 대기층 아래에 갇혀 열기를 솥뚜껑처럼 가두는 현상이다.

 

폭염은 사회 전 부문에 영향을 미친다. 농작물이 고사하고, 가축이나 양식장 물고기가 폐사하며 물가가 오른다. 전력난도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인명 피해다. 우리나라의 자연재난 중 폭염의 인명 피해가 가장 크다.

 

기록적인 폭염이 왔던 2018년 여름, 온열 질환 사망자는 145명에 달했다. 그러나 폭염이 사망의 간접 원인인 '초과사망자'까지 경우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무더위는 뇌·심장·신장·심혈관계 등 인체의 여러 장기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018년 폭염으로 인한 초과사망자가 929명에 달할 것이라 추정한 연구(박종철·채여라, 2020)도 있다. 그늘막, 무더위쉼터와 에어컨 보급 등의 영향으로 1994년 폭염 당시 보다는 피해가 줄었다는 평가다.

 

모든 재난이 그렇지만 폭염 역시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 '2020 폭염영향보고서'(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폭염 당시 온열질환자 24%가 70세 이상 노인이었다. 온열질환의 73%가 야외작업장(28.1%)이나 논밭(11.2%) 등 실외에서 발생했다. 실외에서 일하는 노동자 1만 명당 28.7명이 온열질환을 앓았다. 그 외 직업군(3.5명)의 8.2배에 달한다. 소득에 따라서도 차이를 보인다. 저소득층(의료급여 수급자)은 1만 명당 21.2명이었으나, 고소득층(상위 5분위)은 4.8명에 그쳤다. 더위를 피할 수 없는 작업장 및 주거 환경이 건강을 위협하는 셈이다. 취약계층의 특성을 고려한 세밀한 대책이 필요하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6.22  친환경 마케팅

 2020년대 한국 도시에서 가장 뜨거운 소비 대상은 자연 같다. 연예인들이 자연인 콘셉트로 ‘5도 2촌’(일주일 중 닷새는 도시에서 이틀은 촌에서 생활) 라이프를 재연하는 프로그램이나, 낚시 버라이어티 예능이 TV에서 인기를 끈다. 도심 공원 건설은 철도·도로에 몰렸던 지방선거 출마자들의 주요 SOC(사회간접자본) 공약으로 파고들었다.

 

기업들은 전방위 ‘친환경 마케팅’으로 이런 분위기에 호응하고 있다. 전기차나 친환경 에너지는 이미 이 분야의 고전격이다. 동물사료를 만드는 회사는 가축의 메탄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친환경 사료를, 화장품 업계는 친환경 성분을 사용해 만든 비건 화장품을 앞세우고 있다. 윤리적 차원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친자연·친환경이 이미 중요한 소비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 자연과 시골 고유의 매력을 즐기는 ‘러스틱 라이프(Rustic Life)’를 올해 10대 소비 트렌드 키워드로 제시했다.

 

공적 영역에서도 친환경은 범람하고 있다. 친환경 대중교통 수단 확충을 실적으로 내세우는 게 일반적이고, 강이나 호수·천변에 난 자전거길에도 ‘친환경’ 딱지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친환경 급식은 공적 영역의 대표 친환경 상품이다. 잔류농약, 방사능, 항생제, 합성첨가물, 유전자 변형 등이 없는 친환경 농·축산물을 사용한 학교 급식을 대다수 지자체가 권장하고 있다.

 

서울 고등학교 급식에서 최근 보름 사이 두 차례나 개구리 사체가 발견됐다고 한다. 지난달 30일 강서구 여고 급식에서는 열무김치에서, 지난 15일 서울 중구 한 여고의 열무김치말이국수에서 개구리 사체가 발견됐다.

황당했던 건 친환경을 급식 특성상 원재료에 청개구리·민달팽이 등이 섞이는 경우가 있다는 일부 급식업체들의 설명이다. 친환경 농산물에는 청개구리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다행히 서울시 교육청은 해당 식재료를 전량 폐기했다.

 

벌레 먹은 사과를 내놓고 친환경이란 이유로 소비자에게 이해를 구할 순 없다. 메탄가스 저감 사료도, 비건 화장품도 부작용이 있거나 효능이 떨어진다면 소비자들이 외면할 가능성이 크다. 친환경만 앞세우다 기본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6.23  티타임

 지난 6일 영국 왕실 유튜브 공식 계정에 ‘마멀레이드 샌드위치는 어때요, 폐하?’(Ma’amalade sandwich Your Majesty?)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영국을 대표하는 곰 캐릭터인 패딩턴과 버킹엄궁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내용이다. 엘리자베스 2세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티넘 주빌리’ 행사에서도 이 영상이 상영됐다. 차(茶)와 패딩턴으로 영국의 대표 문화상품을 보여준다는 의도다.

 

실제로 ‘차를 마시는 시간’인 티타임은 영국에서 시작됐다. 차는 고대 중국에서 시작돼 8세기에 인접 국가로 전파됐고, 영국과 유럽에는 17세기 초에 전해졌다. 하지만 영국인은 누구보다 ‘차에 진심인 사람들’이 됐다. 일레븐지스(오전 11시), 애프터눈 티(오후 4시~6시), 하이 티(오후 5시~7시) 등 하루에도 여러 차례 티타임을 가질 정도다.

 

한국에선 하던 일을 멈추고 온 나라가 차를 홀짝이는 영국 같은 티타임이 생소하다. 그래서 이 용어는 격의 없는 소통, 또는 비공식 미팅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공식적으로 소통할 필요가 없거나 곤란한 경우에 유용한 방식이다.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가 출입기자들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취재에 응하는 형식의 티타임도 자주 갖는다. 기자들도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다.

 

검찰도 언론과 티타임을 가져왔다. 국민적 관심이 쏠린 사건이나 현안에 대해 기자들의 대면 질의를 받는 형식으로 매주 한두 차례 진행한 비공개 정례 브리핑이다. 하지만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취임한 뒤에는 ‘피의사실 공표 금지’를 강조하면서 티타임 횟수가 쪼그라들었고, 2019년 12월 법무부 훈령인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이 시행되면서 완전히 폐지됐다. 이후 전문공보관이 수사 검사를 대신해 공보 업무를 전담해오고 있다. 기자가 취재를 위해 검사를 만나는 것을 막은 셈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검찰과 언론의 티타임을 되살린다고 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바람직한 조치다. 잘못 없앤 제도를 되살리는 일은 좋은 제도를 새로 만드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제 한 장관이 검찰총장 임명에 속도를 냈으면 한다. 총장 없는 직제 개편과 정기 인사는 “법무부 장관 겸 검찰총장(박지원 전 국정원장)” 비판을 키운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6.24(금)  시행령 정치

 시행령은 법률의 하위 규범이다. 국회에서 모든 내용을 법률로 규정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할 때 세부적인 내용을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한다. 시행령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공포한다.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뜻에서 대통령령으로도 불린다.

 

국회의 법 개정을 일일이 거쳐서는 행정부가 제대로 된 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 역대 어느 정부에서나 ‘시행령 정치’가 이뤄졌던 배경이다. 미국에도 비슷한 개념으로 ‘행정명령(executive order)’이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1호 업무지시였던 ‘일자리위원회’ 설치. 취임 엿새 만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관련 시행령이 통과되면서 출범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고위공직자 후보자를 검증하는 법무부 산하 인사정보관리단. 지난달 31일 국무회의에서 관련 시행령 두 개가 개정되면서 지난 7일 공식 출범했다. 지난 21일 행정안전부 경찰 제도개선 자문위원회가 권고한 행안부 내 경찰 지원조직 신설도 시행령 개정을 통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차관 정치’도 시행령 정치와 비슷한 개념이다. 차관 임명은 장관과 달리 국회 청문회를 거칠 필요가 없다. 정권 교체기에 정부 부처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국정개혁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 차관 정치를 가동하기도 한다.

 

시행령의 하위 규범도 있다. 부령이다. 대통령령의 시행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해 ‘시행규칙’으로도 불린다. 부령은 행정 각 부 장관이 대통령의 위임을 받아 또는 직권으로 제정할 수 있다. 부령 아래로 훈령도 있다. 훈령은 정부 조직 내부의 행동지침이거나 운영규칙으로 간주해 국무회의 의결이나 법제처 심사조차 거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에서 형사사건 공개 금지를 규정한 것도 장관이 법무부 훈령을 개정해서였다.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4일 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 통제권을 강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소야대 상황 속에 윤석열 정부가 시행령 개정으로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을 우회하려는 움직임을 견제하겠다는 취지다. 시행령을 남발하면 ‘입법 패싱’ 논란이 제기된다. 그렇다고 시행령 개정에 국회가 개입하면 삼권분립(입법·사법·행정) 침해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시행령 정치의 유효 기간은 정권이 유지될 때까지다. 국민을 위하는 제대로 된 입법은 유효 기간이 없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6.27(월)  전세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주거 형태인 전세의 뿌리는 전당(典當)이다. 약속한 기한 내에 빌린 돈이나 재화를 갚지 못하면 맡긴 담보를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이뤄지는 거래다. 기원전 15세기 메소포타미아 시대에 안티크레시스(antichresis)라는 전당이 있었다. 당시 일정 기간 노동력(아들)을 맡기고 보리 같은 식량을 빌리곤 했다.

 

국내에는 고려시대 중국을 통해 전당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논·밭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해당 논·밭의 수확물을 이자로 받는 형태였다. 조선시대 이르러 전당의 담보는 가옥까지 확대됐는데 ‘가옥전당’이 지금의 전세다. 집값의 50~80%에 이르는 목돈을 집주인에게 맡기고 일정 기간 거주한 후 맡긴 목돈을 돌려받았다. 초가집이냐, 기와집이냐에 따라 전셋값 차이가 컸고 거주 기간은 100일~1년이었다.

 

전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는 1970년대다. 급격한 산업화로 서울에 사람이 몰렸고 집값은 급등했다. 적은 돈으로 살 곳이 필요했던 임차인과 시세차익을 노린 임대인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임차인은 집값보다 적은 돈으로 일정 기간 안정적으로 거주할 주거지를 확보했다. 월세나 거래세·보유세 같은 세금을 내지 않아 저축할 여유도 생겼다. 전세가 내 집 마련을 위한 ‘주거 사다리’로 불리는 이유다. 임대인은 무이자 대출(전세보증금)을 받아 자산(집)을 확보했다. 물론 집값이 올라 이익을 얻는다는 전제가 깔렸다.

 

새 정부가 첫 부동산 대책을 통해 임대차 시장 안정 방안을 내놨다. 앞으로 임대료를 직전 계약의 5% 이내로 인상한 ‘상생 집주인’은 2년 거주 요건을 채우지 않아도 양도소득세 비과세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장 반응은 시큰둥하다. 집주인이 1가구 1주택(일시적 2주택)이어야 하고, 직전 계약의 기준도 복잡해서다. 오는 8월 시작될 ‘임대차3법’ 후폭풍을 고려한 정부의 처방에도 전세 만기가 돌아오면 ‘올릴 수 있을 때 올리겠다’는 집주인이 수두룩한 이유다.

 

전세를 ‘갭투자’ 수단으로 치부할지, 서민의 주거 사다리로 볼지는 새 정부의 몫이다. 다만 전 정권이 26번의 부동산 대책을 쏟아내며 ‘누더기 규제’라는 오명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테다. 이미 시장은 잦은 규제로 인한 피로가 잔뜩 쌓였다. 국민은 ‘제대로 된’ 정책의 효험을 보고 싶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6.28  산골(散骨)

 1990년대 초까지 경기도 파주는 취수원이 있는 한탄강가에 유골을 뿌리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벽제 서울시립화장장에 때때로 공문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다. 서울시립화장장 역시 화장로를 청소할 때 나오는 뼛가루 처리 문제로 고민하던 터라, 분골을 뿌리고 간단한 제를 올릴 수 있는 산골 시설을 1992년 설치하게 된다. 『화장문화의 이해』(2017)에 따르면 산골 시설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살아서는 주택, 죽어서는 유택”이라고 농담처럼 던진 말이 이의 없이 채택돼 ‘유택동산’이 됐다.

 

화장한 뼛가루를 자연에 뿌리는 장례를 산골(散骨) 혹은 산분장(散粉葬)이라고 한다. 산분장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리라”는 유언대로 경주 앞바다 대왕암에 장사를 지냈다. 효성왕·선덕왕·진성왕·경명왕도 동해에 뼈를 뿌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오늘날 실제로 이를 채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건복지부가 2020년 유족 19만6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산이나 강에 뿌렸다’는 응답은 2.63%에 그쳤다. 통계청 2021년 사회조사에서 22.3%가 선호하는 장례 방법으로 ‘화장 후 산·강·바다에 뿌림’을 희망한 것과는 동떨어진 현실이다.

 

1992년 서울시립화장장에 유택동산이 처음 설치된 이후 한탄강 식수원의 유골 문제는 해결됐다. 그러나 산분장은 현재 합법도 불법도 아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에 따르면 상수원 보호구역이나 하천 인근에서 장례를 지낼 수 없는데, 법에 규정한 장례 방법에 ‘뼛가루를 뿌리는 행위’ 자체가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막을 근거도 없다. 유택동산은 2001년 장사법령에 ‘화장한 유골을 뿌릴 수 있는 시설’로 규정됐을 뿐, 공식 장례 방법에 포함되진 않았다. 보건복지부가 올 하반기 발표할 ‘제3차 장사시설 수급 종합계획(2023~2027)’에 비로소 산분장을 제도화하는 방안이 담길 예정이다.

 

산분장은 유골을 가장 빨리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이다. 추가 관리 부담이 없어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상황에선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품위 있는 장례 방법의 하나가 되도록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게 미래지향적인 해법이겠다.

참고도서: 『화장문화의 이해』(박복순·박태호·이필도·김시덕, 2017)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6.29  반일 코드

 1988년 공개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는 주인공 세이타·세츠코 남매가 2차 세계대전 중 겪는 피난 생활을 다룬다. 일본 해군 대위인 남매의 아버지는 전사하고, 어머니도 미군 공습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던 남매가 영양실조로 비참하게 죽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완성도가 빼어나 세계 애니메이션사에 남을 명작으로 꼽힌다.

 

국내에선 2005년 개봉이 추진됐지만, 배급사 측이 “국민 정서에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며 연기했다. 2014년 개봉 뒤에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논란 때문이다. 그러나 원작 소설의 작가 노사카 아키유키는 2015년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이 나라에 태평양 전쟁 전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이 확실하다”며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했다. 일본이 피해자라는 걸 강조할 의도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일감정 때문에 명작을 외면한 꼴이 됐다.

 

반일 코드는 국내에서 오랜 기간 흥행과 평판의 주요 변수로 작용해왔다. 2020년 간담회에서 “150만 친일파를 전부 단죄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던 소설가 조정래는 우리 문학계의 상징 같은 존재다. 그가 쓴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 등 근현대사 대하소설 3부작은 1550만 부가 팔렸다.

 

2019년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반일감정의 파도를 적기에 올라탄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일본 상품 불매운동까지 벌어지며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개봉했다. 예상대로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바람을 일으켰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종이의 집 한국판’을 두고 일각에서 반일 코드 논쟁이 일고 있다. 주인공 도쿄가 “왜 이름을 도쿄로 지었느냐”는 질문에 “그야, 나쁜 짓을 할 거잖아”라고 대답한 장면이 논쟁 포인트다. 스페인 원작에서는 “일본에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도쿄의 작명 이유로 강조됐다. 이 때문에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국판에서 억지로 반일 코드를 심었다” “문제없다”는 의견으로 논쟁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작품에 어떤 대사를 넣는지는 전적으로 창작자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번 논쟁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 작품 속에 심어진 반일 코드만으로 인기를 끄는 시대는 지나고 있는 것 같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6.30(목)  경란(警亂)

 검찰의 단체행동을 검란(檢亂)이라고 부른다. 2003년 강금실 당시 법무부 장관의 기수 파괴 인사, 2012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 최근의 검수완박 추진까지 다양한 이슈에 검사들은 목소리를 내왔다. 직급별 회의나 입장 발표를 통해서다. 고위직 또는 중간간부들은 항의의 뜻으로 직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동료들은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도, 그들의 결기에 박수를 보냈다.

 

검찰만큼은 아니지만, 경찰도 가끔 단체행동에 나선다. 2007년 5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 수사에 대한 로비 의혹과 경찰청 감찰 결과를 두고서 벌어진 경란(警亂)이 대표적이다. 당시 한화 고문이던 전직 경찰청장이 후배들에게 “잘 봐달라”며 전방위 로비를 펼쳤고, 경찰은 문제가 된 간부 중 일부만 검찰에 수사 의뢰하는 식으로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이택순 당시 청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이 발표되는 등 반발이 거셌다.

 

15년이 지난 지금, 행정안전부의 경찰국 신설 추진을 두고 경찰은 다시 꿈틀대고 있다. 경찰 통제 움직임에 김창룡 경찰청장은 27일 임기를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전격 사의를 표했다. 이에 앞서 치안감 인사가 2시간 만에 번복된 일을 두고 윤석열 대통령은 “경찰의 국기문란”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는데, 경찰 내부에선 경찰국 신설을 밀어붙이기 위한 의도된 비판이라는 의혹도 나왔다. 내부망엔 지휘부의 강경 대응을 촉구하는 글도 많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검수완박으로 경찰권이 ‘공룡경찰’ 우려가 나올 만큼 비대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걸 민주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필요한 것도 맞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손 놓고 있는 것이 직무유기”라고 하는 이유다. 반면 경찰은 경찰국 설치가 독립성과 중립성을 침해하는 “치안본부 시절로의 회귀”가 될 것이라 걱정한다. 경찰국이 권력에 악용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경찰로선 제기 못 할 우려는 아니다.

 

정부는 다음 달 15일까지 최종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 기간에 치열한 소통에 나서야 한다. 행안부는 경찰 현장의 목소리와 우려를 충분히 듣고 최종안에 반영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경찰도 섣부른 단체행동에 나서거나 무조건 반대만 외쳐서는 안 된다. 갈등이 커지면 치안 공백을 낳는다. 피해는 국민 몫이다.◎

장주영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