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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조선일보) 2022-06/ 06.01(수) 어딜 가나 개 고양이 - 06.30(목) 캥거루족도 고령화

상림은내고향 2022. 6. 30. 15:40

만물상 2022-06 조선일보

06.01(수)  어딜 가나 개 고양이

매일 운동 삼아 한참을 걸어서 출근 버스를 탄다. 하루도 개와 마주치지 않은 적이 없다. 목줄 달고 걷는 개만 보는 것도 아니다. 유모차가 다가오기에 귀여운 아기인가 하고 들여다봤다가 개가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맞은편에서 자전거가 달려오는데 뒤에 개가 탄 걸 보곤 웃고 말았다. 아내와 산책 나갔다가 송아지만 한 개가 달려들어 기겁한 적도 있다. 그 후 한동안 호신용으로 등산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우리 국민 1500만명이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한다. 어디를 가든 ‘개·고양이 반, 사람 반’이다. 통계청은 인구주택총조사 때 사회 변화를 반영해 조사 항목을 가감하는데, 2020년 조사부터 반려동물 항목을 신설했다. 바뀐 것은 통계 항목만이 아니다. 일부 정치인은 지역구 관리 방식을 애견인에게 맞춘다. 산에서 유권자를 만나면 전에는 가족 이름을 물었는데, 요즘엔 주인 따라온 개 이름을 외운다. 다음에 만났을 때 개 이름을 불러주면 주인이 반색한다. 관광지 호텔과 콘도는 반려동물을 동반할 수 있는 객실이 일반 객실보다 먼저 마감된다. 아마존·구글처럼 개, 고양이와 동반 출근을 허용하는 회사도 늘고 있다.

 

▶하지만 사고도 함께 는다. 소방방재청이 지난해 5년간 개 물림 사고 누계를 발표했다. 1만1000여 건으로, 하루 6건이 넘는다. ‘개통령’이라 불리는 유명 조련사도 얼마 전 개에게 물렸다. 인터넷에서 개에게 물리지 않는 법을 찾아봤다. ‘등을 보이며 도망가지 말라’는 건 알겠는데, ‘맹견이 다가오면 눈을 마주치지 말라’는 항목에선 어이가 없었다. “뭘 봐!” 하며 시비 거는 깡패 피하는 법과 다른 게 뭔가.

 

▶과거 우리 사회에서 개는 가축이었다. 소, 돼지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많은 사람이 개, 고양이를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 많던 보신탕 집이 거의 사라졌다. ‘우리 아이가 1등 했어요’라고 자랑하는데 알고 보니 개 유치원에서 1등 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 근교 산에는 개가 많은지 사람이 많은지 모를 지경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개, 고양이 다루는 매너는 확립되지 않았다. 맹견에게 입마개 하는 법규를 두고도 ‘모든 개가 해야 한다’는 주장과 ‘맹견 입마개조차 가혹하다’는 반박이 맞선다.

 

▶반려동물은 키우는 이에게 큰 기쁨을 주지만, 어떤 이웃에겐 불편과 공포가 되기도 한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개와 함께 타는 것이 누구에겐 당연한 일이지만, 이웃에겐 폭력일 수 있다. 반려동물 800만마리 시대에 맞는 애견·애묘 예의 확립도 필요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06.02  “평생 국민연금 보험료 냈더니…”

 

은퇴 이후 자녀와 손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할아버지·할머니는 누구일까. 답은 용돈 주는 할아버지·할머니라고 한다. ‘나이가 들면 입 지퍼를 닫고 돈 지퍼를 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기댈 수 없는 지금 노인 세대는 손주 용돈이 아니라 자신들 생활 자체가 문제다.

 

▶지난해 ‘아내 몰래 비상금 3억 모으기’란 책을 낸 문석근 농협대학 교수는 “아무리 현역에서 퇴장했어도 친구를 만나 커피 마시고, 저녁엔 술자리도 가야 하는 남자들만의 영역이 있다”며 ‘은퇴 지옥’을 피하려면 은퇴 전에 비상금을 모아두라고 했다. “아무리 착한 아내라고 해도 수입 없는 남편이 자꾸 용돈을 달라고 하면, 결국 부부 갈등의 씨앗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한 현 노인 세대에게, 자식들 대신 나라에서 용돈을 주겠다는 개념으로 도입한 것이 기초연금 제도다. 2008년 월 10만원(당시는 기초노령연금) 정도로 시작한 기초연금은 대선을 치를 때마다 10만원씩 올라 현재 30만원 정도를 지급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중 기초연금을 4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40만원으로 오르면 65세 이상 부부는 월 64만원(부부는 20% 감액하기 때문)을 받는다. 여기에다 부부가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월 27만원씩 받는다면 118만원 정도를 나라에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을 받는 사람들과 형평성이 문제다. 부부가 월 64만원을 받으면 국민연금 월평균 지급액(57만원)보다 액수가 많다. “평생 월급에서 꼬박꼬박 국민연금 보험료 낸 사람은 바보냐”는 불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열심히 일한 게 죄냐는 것이다. 국민연금을 많이 받으면 기초연금을 최대 50%까지 감액한다. 소득 상위 30%는 아예 기초연금에서 제외된다. 세금 많이 낸 사람일수록 나라에서 받는 혜택은 없다.

 

▶기초연금 예산은 2008년 2조2000억원으로 시작해 올해 약 20조원으로, 14년 만에 9배로 늘었다. 앞으로 지급액이 늘고 65세 이상 인구도 늘기 때문에 예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형평성 시비에 더해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생기는 이유다. 원래 기초연금은 국민연금 제도가 정착할 때까지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얼마 전 대통령직인수위는 “국민연금 등 연금 제도 전반을 논의하기 위한 공적연금개혁위 설치를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이 위원회에서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형평성 시비를 줄이면서도 지속 가능한 제도를 내놓기 바란다.

김민철 논설위원

 
 

06.03  더 심해진 이대남, 이대녀

지난 대선, 20대 여성들은 이재명 후보를 ‘개아빠’라 부르며 ‘개딸’을 자처했다. 이들은 대선 패배 이후 좌절감으로 더 강하게 결속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인천 계양을에서 승리한 이 당선인을 ‘잼파파’라고 부르며 다음 대선까지 이대로 가자고 응원한다. 이 당선인과 친하다는 이유로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까지 ‘영기리보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한다.

 

 

▶6월 1일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대승했지만 20대 여성은 달랐다. 지난 대선 20대 여자는 이재명 58%, 윤석열 33.8%(이하 방송 3사 출구조사)로 찍었다. 두 후보 간 격차는 24.2%p였다. 20대 남자는 윤석열 58.7%, 이재명 36.3%로 격차가 반대로 22.4%p였다. 6월 1일 선거에서는 이대녀, 이대남 쏠림 현상이 더 심해졌다. 민주당을 찍은 20대 여성은 66.8%, 국민의힘은 30%였다. 격차가 36.8%p로 더 벌어진 것이다. 남자는 국민의힘(65.1%)이 민주당보다 31%p 앞섰다. 그동안 민주당의 철옹성 지지는 40대 남성(63.2%) 몫이었는데 이대녀 지지가 이를 넘어섰다. 회사 부장과 신입 여사원의 정치지향이 같은 셈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할 수 없던 일이다.

 

▶부모가 보수이고, 자신도 보수라는 20대 여성 후배는 대선에 이어 이번에도 민주당을 찍었다고 했다. “대통령과 이준석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당은 박지현이라도 내세워 우리에게 맞추는 시늉이라도 한다”고 했다.

 

▶정부 출범 후 “내각 대부분이 남성”이라고 외신 기자가 지적하자 닷새 만에 여성 장관 후보 2명, 이어 차관급 2명을 더 지명했다. “성별에 따른 안배는 없다”던 대통령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쌀밥만 먹느냐’고 지적받자 콩을 주먹으로 투척한 셈이다. 그런데도 20대 여성은 국민의힘을 안 찍는다. 여성 장관 지명에 20대 여성은 “안물안궁(안 물어봤다, 안 궁금하다)”이라 할 것이다. MZ세대는 자기 이익에 충실하다. 구세대 여성이 장관 되건 말건 관심 없다. 안전, 젊은 여성이 살기 좋은 세상, 경제적 보상, 그들의 키워드다. 이들에게 지금 국민의힘과 이준석 대표는 그 대척점에 서 있다.

 

▶나이키, 크록스, 마라탕, 소금빵, 크로플…. 요즘 MZ는 최선을 다해 남과 같아지려고 노력한다. 남이 열광하는 브랜드를 사고, 즐기다, 물리면 바로 버린다. ‘남’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인터넷 카페로, SNS로 연결된 친구들이다. 이재명 지지는 이제 MZ 여성에겐 ‘브랜드 소비 놀이’가 된 것 같다.

박은주 에디터 겸 에버그린콘텐츠부장

 
 

06.04(토)  33년 전 그 청년은 어디서 무슨 생각 할까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한 청년이 탱크 행렬을 맨몸으로 막아서고 있다. /조선일보 DB

1988년 8월 미얀마에서 군부 독재를 비판하는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경제 실정이 겹치면서 학생뿐 아니라 시민들도 빠르게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군부는 주저 없이 총을 꺼내더니 발포했다. 3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1988~1989년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쿠르드족 민간인에게 화학 무기를 썼다. 5만~10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를 집단 매장하고 그 위에 고속도로까지 만들었다. ‘안팔 학살’이다. 사람을 파리처럼 죽일 수 있는 체제엔 민주화 바람이 통하지 않는다.

 

▶33년 전 오늘 베이징 천안문(天安門) 광장은 탱크와 기관총, 비명 소리로 아수라장이었다. 부패 척결과 정치 개혁,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런데도 중국 공산당은 시위대 사망자는 27명에 불과하고, 진압하던 군인이 1000명 희생됐다고 선전했다. 1년이 지나서야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위를 이끈 학생들은 ‘사망자가 7000명 이상’이라고 한다. 실제 피해 규모조차 불분명하다.

 

 

▶한 청년이 맨몸으로 탱크 행렬을 가로막는 사진이 전 세계에 천안문 비극을 알렸다. 사진 기자는 “청색 옷의 남자 2명이 그를 바로 끌고 갔다”고 했다. 장쩌민 전 주석은 1990년 미국 인터뷰에서 “그를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왕웨이린(王維林)이란 사람인데 대만으로 이주했다’ ‘감옥에 있다’ ‘평범하게 살고 있다’ 등 온갖 소문이 돌았지만 지금껏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시진핑 집권 초만 해도 ‘천안문 역사’와 화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피해자 가족의 소규모 추모 행사를 허용하고, 천안문 비극을 소개한 해외 학자의 책도 출판하게 했다. 시진핑이 정적 제거에 이용한 ‘반(反)부패’가 천안문 시위대의 요구 중 하나였다. 그런데 시진핑이 1인 독재를 강화하면서 ‘천안문’은 다시 탄압 대상이 됐다. “미국이 중국을 궁지에 몰려고 민주화를 부추긴다”고 몰고 갔다. 천안문 시위 관련 검색어는 전부 막았다. 중화 애국주의 교육을 받은 신세대는 천안문 사건이 뭔지도 잘 모르는 지경이다.

 

▶작년까지 홍콩에선 천안문 희생을 추모하는 성당 미사와 집회가 열렸다. 그런데 홍콩 당국이 민주 인사인 추기경을 체포하면서 미사가 취소됐다. 집회 신청도 불허했다. 중국 본토는 물론 홍콩에서도 천안문을 지우려는 것이다. 서방세계는 중국이 경제 발전을 하면 민주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돈과 기술을 지원했다. 헛된 기대였다.

안용현 논설위원

 
 

06.06(월)  “부부싸움은 말 대신 문자로”

코흘리개 시절 친구들끼리 부모님 얘기를 하다보면 공통점이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싸우실 때는 꼭 일본말을 쓰신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또래의 부모님들은 대개 1920~1930년대 태어나신 분들이어서 일본어 소통이 웬만큼 되셨다. 어지간한 살림은 방 한두개에 갇혀 밀착된 생활이 불가피했던 때라 자식들 귀에 민망한 말싸움이 필요하면 ‘외국어’를 동원하신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엄마 아빠만의 ‘카톡 대화방’으로 피신하신 것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부부싸움을 위한 소도(蘇塗)는 둘만의 채팅방이다. 은밀하게 부딪히기도 하고 화해도 할 수 있다. 내색하기 곤란한 연로한 부모님을 모셨거나 혹은 어린 자식과 부대끼며 살다보면 이런 사이버 공간은 꼭 필요하다. 미국 대통령 부부도 사정이 비슷했던 것 같다. 퍼스트 레이디 질 바이든이 “남편과 싸울 일이 있으면 말이 아닌 문자로만 한다”고 인터뷰했다. 항상 곁에 있는 경호원들 때문이라고 했다.

 

▶영어권에서는 SNS와 문자를 버무린 합성어가 많다. 싸우다는 뜻의 ‘파이트’에 문자 교환이란 뜻의 ‘텍스팅’을 보태서 ‘펙스팅’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2008년에 이미 신조어 사전에 등장했다. 펙스팅은 상호 감정이 격앙되는 것을 막고, 표현을 두번 세번 가다듬고 조심스러워하게 된다고 했다. 주워 담을 겨를 없이 튀어나가는 말보다 문자 싸움이 한결 낫다는 것이다. 이른바 소통의 심사숙고 효과다.

 

▶반론도 있다. 문자메시지는 얼굴 표정, 몸짓 언어, 억양 같은 것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곡해하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상대의 기분이 진정되는 국면인지 아니면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같은지 헷갈릴 때도 있다. 게다가 문자는 기록으로 남는다. 말싸움은 화해 뒤에 휘발되고 말지만, 문자 싸움은 두고두고 남아서 나중에 불화의 씨앗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 그래서 남편 바이든도 “당신이 보낸 문자는 역사에 남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농반진반일 것이다. 대통령 부부의 펙스팅은 결코 사사로울 수 없는 기록물인 건 맞는다. 그래도 아내 질은 부부싸움이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거나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막는 지혜를 동원한 셈이다. 평소에는 서로 내림말을 하다가 싸움을 할 때는 존댓말을 쓰는 부부도 있다. 유학파 부부는 영어로 싸운다. ‘교수님’ ‘국장님’ 같은 직책을 붙여 부른다는 부부도 봤다. 바이든 부부는 80세·71세다. 그 나이에도 여전히 삶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만들려 애쓰는 중이다.

김광일 논설위원

 

06.07  북한과 싸우는 자유인

두 달 전 별세한 윌리엄 웨버 대령은 6⋅25 전쟁에서 팔과 다리를 잃고도 자유 한국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그를 존경하는 사진작가 라미 현이 그의 생전 미국 자택을 방문해 자신이 찍은 대령의 사진을 액자에 담아 전했다. 기뻐하는 웨버 대령은 “(대가로) 뭘 해주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현 작가는 “대령님은 이미 전쟁 때 다 지불하셨다”고 했다. 그러자 웨버 대령은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빚진 것은 없다. 자유를 가진 사람에게는 의무가 있다. 자유가 없거나 자유를 잃게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전하고 지키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전한 것은 우리의 의무였다. 우리가 준 자유를 얻었으니 너희도 의무가 생긴 것이다. 북쪽에 있는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달하는 것, 그것이 너희들 의무다. 그 의무를 다했으면 한다.”(책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북한의 무기 밀매를 폭로한 다큐멘터리 영화 ‘잠입(The Mole)’이 지난 주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됐다. 덴마크 배우 울리히 라르센은 10년 전 스페인 친북 단체에 가입해 임원이 된 뒤 북한과 우간다, 요르단 등지를 오가면서 무기 밀매 논의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10년 동안 정체를 속여 북한에서 훈장도 받았다고 한다. 탄로 났다면 큰 화를 입었을 것이다. 그의 본지 인터뷰 발언이 인상적이다. “2500만 북한 주민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

 

▶북한과 싸우는 투사 중엔 미국 대학생 웜비어의 부모, 한국과 일본의 납북 피해자 가족, 각국에 퍼진 탈북자들처럼 북 만행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신념으로 싸운다. 북한 인권 운동의 간판 미국의 수잰 숄티, 북한의 권력 범죄를 밝히려고 재산까지 쏟아부은 이스라엘의 변호사 니트사나,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을 습격한 자유조선의 크리스토퍼 안, 에이드리언 홍 등. 웨버 대령이 말한 “자유인의 의무”를 지키려고 싸움을 시작한 자유인들이다.

 

▶자유 국가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킨 한국은 당연히 세계에서 이 의무가 가장 무겁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 한국 정부는 북한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의무를 지키는 자유인을 적대시하고 탄압했다. 동포의 자유와 인권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배우 라르센은 “잔혹한 독재국가를 어떻게 찬양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친북 단체에 들어가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런 단체가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란 사실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선우정 논설위원

 
 

06.08  독일 재무장

독일 제국의 중추였던 프로이센은 1806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맞섰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잇단 전투에서 패한 뒤 틸지트 조약을 맺었다. 엘베·라인강 서안, 폴란드 일부를 넘기고 병력도 4만2000명 이하로 제한됐다. 독일 역사상 첫 군비 제한이었다.

 

 

▶프로이센은 절치부심했다.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와 참모총장 몰트케의 주도하에 군대를 혁신하고 신무기를 개발했다. 총구가 아닌 총잡이 쪽에서 장전하는 고속 사격 소총과 기관총, 철도를 통한 신속·대량 이동 전략으로 1866년 유럽 최대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4년 후 프랑스와 한 전쟁에선 폭발력과 사거리, 정확도가 획기적으로 커진 대포를 선보였다. 이는 스당 포위전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고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1871년 통일 이후에도 군비를 급속 확장해 당시 패권국인 영국이 위기감을 토로할 정도가 됐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영토의 15%를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됐다. 징병 제도는 폐지되고 병력은 10만명으로 제한됐다. 전차·군용기·잠수함 보유가 금지되고 무기 공장도 폐쇄됐다. 이에 대한 독일 국민의 좌절감과 분노를 이용해 집권한 것이 히틀러다. 히틀러는 1935년 재군비 선언 뒤 신형 전차와 폭격기, 잠수함, 초대형 전함을 선보이고 기계화 부대와 공군을 창설했다. 독일이 만들면 대부분 세계 최신 최강의 무기가 됐다.

 

▶독일은 2차 대전 패전 후 다시 무장 해제됐다. 한국전쟁 여파로 1955년엔 독자 군대를 보유하고 NATO에도 가입했지만 전범국이란 굴레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1991년 통일 이후엔 군사력을 크게 줄였다. 병력은 최대 50만명에서 17만명으로 줄고 전투기·전함·전차도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사실상 허울뿐인 군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했다. 1000억유로(약 134조원)의 특별 방위 기금 조성안을 틍과시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독일 국방비는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셋째로 올라섰다. 최신형 스텔스기인 F-35를 대량 구매키로 하고 미사일 방어 시스템인 아이언돔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독일 언론은 ‘역사적 전환점’이라 한다. 국민 대다수는 물론이고 주변국도 지지하고 있다. 러시아에 패해 무장 해제됐던 독일이 러시아 때문에 재무장의 길로 돌아선 것이다. 독일이 무장하면 너무 강해져 결국 비극을 불렀다. 이번만은 예외이길 바란다.

배성규 논설위원

 

 

06.09  이제 천국노래자랑 사회 볼 송해

황해도 재령 출신 청년 송복희는 해주의 음악학교에 다니던 중 6·25를 맞았다. 폭설이 쏟아지던 그해 겨울, 목숨 걸고 피란길에 올랐다. 폭격으로 무너진 철로를 건널 땐 총탄이 날아왔다. 그걸 피하다가 추락했는데 비죽 튀어나온 철근을 붙잡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해주에서 연평도로 나와 유엔군 상륙함을 얻어 타고 남하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 바다 위에서 이름을 송해로 바꿨다.

 

 

▶송해는 서울 입정동에서 황해도 출신이 운영하는 냉면집을 즐겨 찾았다. 몇 해 전 그곳에 갔는데, 주인이 “합석해도 되느냐?” 묻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송해였다. 반색하며 “음식 값은 제가 내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짜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베풀기를 좋아했다. 새해가 되면 후배들 불러 밥을 샀다. 송해는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주머니 사정을 걱정한다며 후배들이 하는 말이 “100명만 모을까요?”였다. 300명 밥을 산 적도 있다. 장지갑에 5만원권 두둑이 채워두고 세배하러 오는 이들도 맞았다. 너무 몰려와 돈이 떨어지면 “외상이야, 내년에 와!”라며 돈 대신 웃음을 줬다.

 

▶송해는 라디오 교통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던 80년대 말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사고 후 “자, 오늘도 안전 운전 합시다!”라는 오프닝 멘트가 입 밖에 나오지 않아 방송을 중단했다. 슬픔에 빠져 살던 그에게 배우 안성기의 형인 안인기 PD가 찾아왔다.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기며 “나랑 전국을 떠돌며 바람이나 쐬자”고 했다.

 

▶이 프로그램이 송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한번은 세 살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출연했는데, 아빠가 브라질에 있다기에 아빠에게 인사하라고 시켰다. “아빠, 빨리 못 와? 아프지 마!”라는 아이를 보며 목이 탁 막혔다. 송해는 “이 프로그램이 내가 평생 배워야 할 교과서구나. 이걸 하길 잘했다” 생각했다고 한다.

 

▶방송인 송해가 95년 인생 항해를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그가 건넌 한국 현대사의 바다는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격랑이었다. 전란 속에 고향을 등졌고 부모와 생이별했다. 젊은 시절 가난에 절망해 남산에 올라 투신했다가 소나무에 걸려 목숨을 건진 적도 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남 앞에 드러내 위로를 구하지 않았다. 마이크를 든 송해는 ‘일요일의 남자’로, ‘오빠’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별세를 전하는 기사에 “하늘에선 천국노래자랑 사회를 보시라”는 댓글이 붙었다. 국민 가슴속에 오래 살아 있을 그를 이제 보낸다.

김태훈 논설위원

 
 

06.10  K뷰티의 경쟁력

“안녕하세요. 남자입니다. 피부 트러블 때문에 스킨, 토너, 앰플, 진정 크림, 나이트 크림, 수분 크림을 구매했는데 어떻게 발라야 할까요?” 인터넷에는 가짓수 많고 이름도 어려운 기초 화장품을 어떤 순서로 발라야 할지 물어보는 사회 초년생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자칭 화장품 고수들이 “묽은 제품을 처음에 발라주고 되직한 화장품을 뒤에 발라주라”고 조언해주는가 하면 “평소에는 기초 2~3종만 바르는 ‘화장품 다이어트’를 하다 환절기에 6~7단계의 ‘피부 심폐 소생술’을 하라”며 경험담을 들려준다.

 

 

▶화장품 사용법은 나라별로, 기후별로 크게 다른데 얼굴에 이토록 ‘다단계 덧방’을 하는 건 한국식이다. 화장품 판매를 늘리려고 일본에서 시작된 마케팅이라는데 한국에서 더 ‘발전’했다. 갈수록 얼굴에 발라야 할 화장품 가짓수는 늘고 있다. 일본 시세이도연구소가 세계 주요국의 화장법을 연구했더니, 밤마다 피부 관리에 들이는 시간이 일본 여성은 8분 정도인데 한국 여성은 18분이었다.

 

▶미용 산업에서도 K뷰티(한국), C뷰티(중국), J뷰티(일본)의 3파전이 치열해지고 있다. K뷰티는 K팝과 K드라마 인기를 업고 중국에서 급성장했는데 코로나 와중에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 중국산 화장품 소비가 늘어나는 등의 이유도 있지만 너무 복잡한 한국식 스킨 케어에도 이유가 있다고 홍콩 신문이 보도했다. 중국 소비자들이 많게는 10단계에 이르는 한국 화장법 대신 단순함과 좋은 성분을 강조한 서구나 일본 화장품으로 눈 돌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장품 강국 일본에서 뒤늦게 K뷰티의 인기가 높아진다는 소식이다. 2년 새 대일 화장품 수출이 약 2배로 늘었다. 일본 여행 다녀오면서 한국 주부들이 1순위로 사 오는 제품이 시세이도 화장품이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 연예인을 따라 하는 한국식 화장법이 유행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한다.

 

▶화장품은 선진국 산업이다. 한국은 화장품 무역 적자국이었다. 2012년부터 수출이 수입을 앞질러 이제는 확고한 흑자다. 2020년 기준 프랑스,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화장품 수출국이 됐다. 아모레, LG생활건강 같은 한국 화장품 회사의 브랜드 파워가 커진 덕분도 있지만 화장품 제조 강국의 인프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코스맥스, 한국콜마 등 자체 기술력으로 제품을 개발해주는 역량까지 갖춘 ODM(제조업자 개발 생산) 업체가 로레알, 에스티로더, 시세이도 등 세계적 화장품 브랜드 곳곳에 납품한다. 한국 제조업의 위력이다.

강경희 논설위원

 
 

06.11(토)  ‘롱 코비드’

자영업을 하는 60대 중반 최모씨는 지난 3월 코로나19에 걸렸다가 회복됐다. 그는 평소에 서울 남산 길을 가뿐하게 올랐다 내려왔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숨이 차서 쉬다 걷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콧물이 목 뒤로 넘어가고, 잔기침도 멈추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여겨, 병원을 찾은 결과, 예상치 않게 천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축농증도 발견됐다. 요즘 최씨처럼 코로나 ‘덕’에 숨어 있던 질병이 악화되어 드러나는 환자가 많다.

 

 

▶일본 이비인후과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인두염을 줄이고 재감염을 막기 위해 B스팟 요법을 한다. 긴 면봉에 염화아연 소독액을 묻혀서 코 안 깊숙이 넣어 목에 닿는 부위(B스폿)를 문질러 닦는다. 코로 마신 공기가 처음 목에 닿는 부위로, 먼지와 바이러스가 잘 붙어서 염증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여기를 비벼서 바이러스를 털어내는 식이다. 50년 전 개발된 치료인데, 한동안 쓰지 않다가 코로나 유행 이후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 병원도 이를 시작하는 곳이 생겼다.

 

▶코로나에 걸리고 나서 머릿속이 흐릿하고 기억력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꽤 많다. 뇌 주변에는 뇌혈관장벽(BBB)이라는 게 있어, 외부 물질이 뇌로 들어가는 것을 차단한다. 뇌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 빗장을 뚫고 뇌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냄새 맡는 후각 신경 통로를 타고 들어간다는 얘기도 있다. 코로나 감염 후에 오는 권태감, 우울감, 뇌 안개 현상 등이 뇌신경세포 코로나 감염으로 설명된다.

 

▶국내 코로나 확진자가 2000만명에 육박한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확진자 수의 약 50%는 자신도 모르고 앓고 지나간 감염자로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서 코로나에 걸렸다가 회복된 이는 실제 3000만명으로 추산된다. 감염병 학자들은 에이즈 이후 이렇게 여러 인체 기관에 영향을 미치는 바이러스는 처음 본다고 말한다. 그러니 코로나 감염자 열 명 중에 일곱이 크고 작은 후유증을 호소한다. 흔히 ‘롱 코비드’라고 부른다. 후유증 클리닉이 우후죽순 생길 만도 하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코로나 후유증에 대한 대규모 조사를 실시해 진단과 치료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고 했다. 진작 했어야 한다. 요즘 후유증 없앤다며 마늘 주사, OO탕, 고농도 산소 등 근거 없는 치료가 횡행한다. 코로나 후유증은 한 가지 형태가 아니다. 호흡기내과, 신경과, 심장내과 등 여러 과가 통합 진료하는 곳을 가야 한다. 코로나19,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김철중 논설위원, 의학전문기자

 

06.13(월)  수박은 죄가 없다

수박이 정치적 수난을 겪고 있다. 겉은 녹색인데 속은 빨갛다는 점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선 진작에 ‘수박 정치학’이 등장했다. 겉으로 찬성하는 정당과 속으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를 때 썼고,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두드러졌다. 잠비아 야당은 ‘수박 캠페인’을 펼친 적도 있다. 밖엔 집권당 색인 초록 옷을, 안에는 야당을 지지하는 빨간 옷을 입자는 선거 운동이었다

 

 

▶해방 이듬해 창간된 좌파 신문 ‘독립신보’는 1947년 ‘거리’라는 칼럼을 통해 좌익의 스펙트럼을 과일·채소에 빗대고 있다. ‘수박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빨간 놈도 있고, 수밀도 모양으로 거죽도 희고 속도 흰데 씨만 빨간 놈이 있고…’ 하는 식이다. 안팎이 모두 붉으면 토마토 혹은 고추라고 했다. 수박을 ‘기회주의자’로, 수밀도를 ‘진짜 빨갱이’로 분류한 점이 흥미롭다. 씨부터 빨개야 진짜 대접을 받은 셈이다.

 

▶작년 9월 민주당에 수박 논쟁이 점화됐다. 커뮤니티 공간에 잠복해 있던 이 ‘말 폭탄’은 이재명 후보가 직접 대장동 특혜를 반박하면서 뇌관이 터지고 말았다. 그는 “공영개발을 포기하라고 넌지시 압력을 가하던 우리 안의 수박 기득권”이라며 칼을 뺐다. ‘우리 안의 수박’은 당연히 민주당 내부를 가리켰다. 이낙연 측이 수박을 호남 비하라며 쓰지 말라 했는데, 이재명이 되받아친 것이다. 관용구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양쪽은 부글부글 끓었다.

 

▶수박이 한창인 요즘 민주당이 또다시 ‘수박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6·1 지선 참패 후 비명(非明)계가 ‘이재명 책임론’을 들고 나오자 개딸들이 “너희는 수박이라서 겉은 민주당 같지만 속은 빨개서 국민의힘 편”이라고 화살을 퍼부었다. 원래는 좌파가 적색인데, 국민의 힘 상징색이 빨간색이라 좌우가 뒤바뀌어 버렸다. 수박 싸움이 달아오르며 박 터지게 싸우자 당 비대위원장이 “수박 표현 쓰면 가만 안 두겠다”고 나섰다.

 

▶이집트는 ‘30년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한 뒤 무슬림과 군부가 번갈아 정권을 잡았지만 대국민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수박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유세 때 돈 받고 모인 사람을 ‘수박 군중’이라고도 했다. 어떤 이재명 지지자는 ‘수박 대표 명단’이란 글을 올렸다. “기록을 위해 담벼락에 써놓겠다”며 이낙연 후보를 비롯한 상대 진영 인물 9명 이름을 적었다. “참 정치 수준 하고는…” 혀를 차는 독자가 많다. 수박에 입이 있다면 “제발 나좀 가만히 두라”고 비명을 지를 것 같다.

김광일 논설위원

 
 

06.14  두 얼굴의 사우디 왕세자

2019년 10월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방탄소년단(BTS) 공연은 ‘사우디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하루 다섯번 코란 경전을 읽던 도시에 K팝이 울려 퍼지자 공연장에 몰려든 청춘 남녀 3만명이 열광했다. 플래시 켜진 스마트폰을 흔들며 한국어 떼창과 파도타기 응원으로 화답하는 무슬림 아미(BTS 팬클럽)는 서방의 젊은이와 다를 게 없었다. 이날 BTS 공연을 성사시킨 주인공은 사우디 차기 왕으로 부상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다.

 

  

▶사우디 왕위는 지금껏 형제 상속으로 승계됐다. 7대인 현 국왕 살만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하나같이 고령 등극이었다. 살만 국왕이 80세로 즉위한 2015년 당시 왕세제도 이미 60세를 넘긴 사촌동생 무크린이었다. 살만 국왕이 무크린을 몰아내고 32세 아들 빈 살만을 왕세자로 책봉하며 형제 상속 관행을 깼다.

 

▶젊은 후계자 빈 살만은 개혁 군주의 길을 천명했다. 2014년 국제 유가 폭락 사태를 지켜본 뒤 석유에 의존한 통치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경제·사회·문화를 대대적으로 수술하는 ‘비전 2030′ 청사진을 제시하며 홍해 자유관광지구, 서울의 44배에 이르는 미래 신도시 계획 등을 내놓았다. 농업 개혁에도 나서 사막엔 원형 농장 수천개가 들어섰다. 여성 운전과 남녀 동석 허용 같은 변화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K팝처럼 사우디 팝을 육성할 계획도 세웠다. 인천-리야드 직항도 올 연말 열릴 예정이다.

▶엊그제 영국에서 끝난 리브(LIV) 골프대회도 빈 살만 왕세자가 관리하는 사우디아라비아 공공투자기금이 자금을 지원했다. 말 그대로 돈을 쏟아부었다. 1등 상금 400만달러, 꼴찌를 해도 어지간한 한국 골프대회 우승 상금인 12만달러(약 1억5000만원)를 받는다. PGA가 누리던 중계권 수입과 골프 산업 주도권을 노린 건가 했는데 전 세계 방송사들에 올해 대회 무료 중계를 허용했다. 빈 살만의 치적 쌓기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개혁가 빈 살만의 이면에는 잔인한 절대군주의 모습이 겹쳐 있다. 권력 장악에 방해될 왕족들을 부정부패 혐의로 제거했다. 사우디 왕가에 비판적이던 언론인 카슈끄지 암살 혐의도 받고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이를 비판하자 러시아·중국과의 에너지·군사협력 강화로 맞섰다. 미국의 석유 증산 요청은 거부했다. 유가 급등과 인플레이션으로 바이든이 사우디와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BTS에 열광하는 사우디 젊은 세대가 빈 살만 리더십을 언제까지 용인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김태훈 논설위원

 

06.15  서울 공기가 뉴질랜드보다 좋다니

14일 오후 3시 서울 종로·중구 일대 초미세 먼지 농도는 6~7㎍/㎥였다. 가장 높은 노원·은평·도봉구도 13에 불과했다. 같은 시간 뉴질랜드 오클랜드 초미세 먼지 농도는 14였다. 비록 한때지만 서울 공기가 청정의 대명사 뉴질랜드 도시보다 깨끗했던 것이다. 요즘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에 “여기 한국 맞아?”를 연발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14일 오전 서울 광진구 뚝섬한강공원 상공 위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뉴스1

 

▶올해 봄 서울의 초미세 먼지 농도는 관측 이래 가장 낮았다. 지난 3~5월 서울의 초미세 먼지 농도는 20으로, 2014년 초미세 먼지 연중 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최근 3년(2019~2021년) 봄철과 비교하면 23% 감소한 수치다. 이 기간 초미세 먼지가 ‘좋음’(15 이하)인 날도 관측 이래 가장 많은 36일을 기록했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고농도일(50 초과)은 하루도 없었다. 믿기지 않는 수치다.

 

▶불과 3년 전 이맘때 동료 기자들과 ‘미세 먼지 재앙… 마음껏 숨쉬고 싶다’ 기획 연재 보도를 했다. 그때는 말 그대로 숨쉬기가 거북한 정도로 대기 질이 최악인 날이 많았다. 측정기를 들고 서울 도심 곳곳을 다녔는데 120~130으로 나오는 수치를 믿을 수 없어서 기상청 발표 수치를 찾아볼 정도였다. 아이들이 하늘을 그릴 때 파란색 대신 회색 크레파스를 칠했다는 기사를 쓴 것도 그때였다. 이런 나라에서 어린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는 개탄이 쏟아졌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격세지감까지 느낄 정도다.

 

 

▶공기 질은 바람 방향과 대기 정체 등 기상 여건, 중국과 국내 대기 오염물질 배출량 등 많은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14일 유난히 맑은 공기는 동해 쪽에서 불어오는 동풍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서울시는 중국 북동부 지역 초미세 먼지 농도가 지난해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올랐다가 올해 다시 낮아져서 서울 대기질 개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했다. 정부가 추진해온 자동차 저공해 사업 등 정책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코로나가 끝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코로나 봉쇄를 풀면 다시 공기 질이 나빠질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내외 요인 모두 긍정적이다. 중국도 자국 민심 때문에라도 공기 질 관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올 1분기 전기자동차 등록 대수가 25만대를 넘었는데, 앞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새 정부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를 공약했다. 탄소중립에 대응하기 위해 석탄 발전 규제를 늘려나갈 수밖에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서울 공기가 요즘만 같으면 좋겠다.

김민철 논설위원

 

06.16 K팝의 두 얼굴

뉴욕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 ‘위플래쉬’는 드럼 연주자의 탄생 과정을 보여준다. 신입생 앤드루는 드럼을 배우다가 교수에게 막말을 듣고 손찌검까지 당한다. 하지만 원망은커녕 최고가 되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는다. 연습 시간이 부족하자 여자 친구와 절교하고, 드럼을 두드리다가 손가락이 찢어져 피까지 흘린다. 그런 앤드루도 울고 갈 연습 지옥이 있다. 한국의 K팝 연습실이다.

 

 

▶K팝 연습생은 사생활부터 식사량, 소셜미디어까지 모든 것을 통제당한다. 하루 12시간씩 10년을 연습하고도 95% 이상이 데뷔 무대에 서지 못한다. 데뷔조(組)에 들어가면 그때부터가 진짜 고생이다. 무대에 서기까지 평균 2년을 합숙하며 집에도 못 간다. 노래하는 기계일 뿐, 최소한의 교양조차 없는 경우도 흔하다. 많은 해외 언론이 한국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을 비판하는 이유다.

 

▶방탄소년단(BTS)이 엊그제 그룹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리더 RM은 “K팝이 사람을 숙성하게 놔두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BTS의 활동 중단 선언은 음영이 뚜렷한 K팝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BTS조차 탈진할 만큼 K팝 생태계는 혹독하다. 멤버 대부분이 20대 후반이어서 더 이상 병역을 미룰 수도 없다.

 

▶하지만 개인으로 부족한 스타성을 집단이 함께 흘리는 땀으로 극복하는 K팝은 한국 엔터테인먼트 현실에서 최적의 모델이기도 하다. 보이그룹은 물론이고 블랙핑크 같은 걸그룹조차 격하게 몸을 흔들며 노래할 때 음정 떨림이 없다. 춤과 동선을 하나의 군무로 완성할 때까지 한 곡당 몇 달씩 땀 흘리는 모습은 외국인에게 경이 그 자체다. 핑크 레이디나 엑스재팬 같은 일본 아이돌 프로듀싱 시스템 모방으로 시작한 K팝이 그렇게 일본을 뛰어넘었고 세계를 호령한다. 한국 노래 가사를 영어로 쓴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의 합성어)’이 유튜브에 등장할 줄 누가 상상이나 해봤나. 이젠 국적도 초월한다. K팝 걸그룹 NiziU는 모두 일본인이고 일본에서 활동하지만 무대에 선 모습은 영락없는 K팝 아이돌이다.

 

▶'하드 투 세이 아임 쏘리’를 부른 미국의 남성 10인조 그룹 시카고는 1967년 결성됐고 로버트 램 등 주축 멤버가 70대이지만 지금도 무대에 선다. 올해 8년 만에 새 앨범도 냈다. 체력 소모가 많은 K팝 아이돌이 그처럼 장수하긴 힘들 것이다. 대신 메시지가 분명한 가사, 노래 밖에서 발휘하는 선한 영향력은 춤보다 오래갈 것이다. BTS가 지난 9년,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 돌아온다면 큰 박수로 맞을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6.17  탐욕 인플레(Greedflation)

얼마 전까지 세계는 디플레이션(저물가)을 걱정했다. 디플레 선두 국가 일본에선 저성장·저물가가 20년 이상 지속되자 출세와 돈 욕망은 접고, 연애와 소비에 소극적이고 꿈마저 소박한 ‘초식남’이 대거 등장했다. 일본 학계에선 “디플레이션 시대에 적응한 신인류”라고 했다. 세계의 일본화(japanification) 기류에 따라 미국, 유럽에서도 머잖아 초식남이 대거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글로벌 공급망 붕괴, 원유, 곡물가 폭등이 40년 이상 잊혔던 ‘인플레이션 시대’을 재소환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2030세대는 물론이고 4050세대조차 ‘월급 빼고 다 오르는’ 인플레이션 시대를 경험한 바 없어 ‘냉면값 1만3000원’ ‘기름값 5달러’ 앞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커피플레이션, 누들플레이션, 런치플레이션(점심값 공포), 베케플레이션(vacation·휴가비 폭등) 등 각종 신조어가 난무한다. 엊그제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그리드플레이션(Greed+inflation)은 신조어 최신 버전에 속한다.

 

▶인플레이션이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 중엔 ‘메뉴 비용’이라는 게 있다. 판매 가격을 고쳐 붙이는 비용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원가 상승 요인 이상으로 가격을 부풀릴 수 있다. 미국 민주당에서 “대기업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핑계 삼아 상품·서비스 가격을 과도하게 올려 물가난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탐욕 인플레이션을 주장한다. 바이든 대통령도 엑손모빌(정유사)을 콕 집어 “지난해 하느님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다”고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사실만 보자면 과장된 주장이다.

 

▶그런데 정유사를 대상으로 횡재세(windfall tax)를 걷겠다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과처럼 품 들이지 않고 얻은 이득이니 초과이윤세를 내라는 것이다. 국민 원성을 정유사로 돌리고 증세 효과까지 얻는 일석이조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영국이 첫 깃발을 들었고,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등이 뒤따르고 있다.

 

▶미국이 28년 만에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을 단행할 정도로 고물가 문제가 심각해졌다. 인플레 악화는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돈을 뿌린 바이든 정부의 실책 탓도 크다. 민주당의 그리드플레이션 주장은 책임 회피를 위한 희생양 만들기 혐의가 짙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는 신조어”라고 했다. 탐욕이 물가 상승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정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06.18(토)  비밀번호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저서 ‘히스토리아’에 “로마군은 불침번 교대를 하면서 비밀 글자가 쓰인 나무판을 주고받아 아군임을 확인했다”고 썼다. 이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비밀번호다. 로마와의 전쟁에 참전했던 폴리비오스는 정사각형에 25개의 칸을 만든 뒤 알파벳과 숫자를 넣어 암호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폴리비오스 암호로 불리는 이 방식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쓰였다

 

 

▶군에서 주로 사용되던 비밀번호가 대중화된 것은 컴퓨터 때문이다. 1961년 미국 MIT는 학내 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비밀번호로 접속하는 ‘로그인’을 도입했다. 학생이나 연구원들에게 공평하게 사용 시간을 배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듬해 앨런 셰어라는 학생이 모든 사용자의 비밀번호를 통째로 훔쳐 사용했다. 역사상 첫 암호 해킹범인 셰어는 훗날 IBM 수석과학자가 됐다.

 

▶현재 암거래 사이트인 다크웹에서 판매되는 ID와 비밀번호 세트는 246억개에 이른다. 유출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의 방심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밀번호는 ‘123456′, 비밀번호를 뜻하는 ‘password’, 키보드 왼쪽 위 알파벳 나열인 ‘qwerty’ 등이다. 2013년에는 미국 핵미사일 발사 비밀번호가 20년간 ‘00000000′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구글과 애플이 잇따라 비밀번호를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고객들에게 복잡한 비밀번호를 만들게 하고, 계속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사람의 생체 인식으로 간편하고 안전하게 로그인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얼굴, 지문, 홍채, 정맥, 목소리는 전 세계 80억 인간이 모두 다르다. 이 생체 정보를 비밀번호 대신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거창하고 비싼 기술 같지만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지문 인식 센서 가격은 5달러도 되지 않는다.

 

▶구글 등의 구상이 실현되면 사람들은 비밀번호를 갖고 태어나는 게 된다. 물론 우려도 있다. 피곤하면 얼굴이 붓는 것처럼 사람의 몸은 시시각각 변한다. 이 때문에 생체 인식은 정확도를 95~99% 정도로 설정한다. 오작동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버에 저장된 생체 정보의 대량 유출을 경고하는 사람도 있다. 얼굴이나 지문을 비밀번호처럼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니 문제가 현실화되면 치명적이다. 세상은 점점 편리해지고 있지만 동시에 피곤해지고 있다. 사이버 보안 업계의 경구가 있다. ‘해킹과 정보 유출의 위협에서 완벽히 벗어나는 방법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아예 쓰지 않는 것뿐이다.’

박건형 논설위원

 

06.20(월)  국제 금기어 ‘Z’

알파벳 문명권에서 마지막 철자 ‘Z’는 ‘궁극적인 경지’ 또는 ‘최종적인 사태 해결’을 상징한다. 대중문화 캐릭터 ‘쾌걸 조로’가 그런 사례다. 조로(Zorro)는 홀연히 나타나 악당에게 철퇴를 가한 뒤 ‘정의를 실현했다’는 취지로 칼을 휘둘러 자신의 머리글자 Z 표시를 남기고 떠난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좀비 영화 ‘월드 워 Z’의 Z도 인류 명운을 걸고 좀비와 벌이는 마지막 전쟁이란 의미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Z를 긍정적인 의미로 즐겨 활용한다. 포켓몬의 필살기 이름이 ‘Z 기술’이다. 전투 중 한 번밖에 못 쓰지만 대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로봇 ‘마징가Z’는 어떤 공격에도 파괴되지 않으면서 가볍기까지 한 상상의 금속 ‘초합금 Z’로 만들어졌다. Z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제왕 제우스(Zeus) 또는 정점(zenith)을 떠올리게도 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Z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에 버금가는 국제적 기피 대상으로 전락했다. 러시아가 자국 탱크와 트럭에 피아 식별용으로 Z를 써붙이면서다. Z의 뜻은 분명치 않지만 러시아어 ‘승리를 위하여’(za pobedy)’에서 비롯됐거나 서쪽(zapad)인 우크라이나로의 진격 방향을 나타낸다는 추정이 나와있다. 어떤 의미든 국제적 시각에선 침략의 상징적 기호가 됐다.

 

▶일본 항공사 ‘집(Zip) 에어 도쿄’가 엊그제 자사 항공기에 새긴 Z 로고를 지우겠다고 발표했다. ‘zip’은 ‘쌩쌩 난다’는 뜻으로 러시아와 무관한데도 회사 이미지 악화를 우려해 내린 조치다. 스위스 도시 취리히(Zurich)에 있는 취리히 보험도 Z가 들어간 회사 로고를 당분간 쓰지 않기로 했다. 삼성이 만든 접는 휴대전화 갤럭시Z도 유럽에선 폴드3, 플립3으로 이름을 바꿔 판매한다. 모두 회사 로고나 제품명에서 Z를 뺐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리투아니아는 Z가 들어간 기호나 문양을 금지하는 법도 제정했다. Z를 ‘전체주의 권위주의 정권’과 ‘군사행동, 반인륜·전쟁 범죄 자행을 부추기는’ 상징물로 규정했다.

 

▶Z는 알파벳에서 X와 함께 사전 표제어가 가장 적은 철자다. 안 그래도 사용 빈도가 낮은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입지가 더 좁아졌다. 그런 와중에 Z의 복권(復權) 움직임도 시작됐다. 러시아의 한 록 밴드가 ‘Z세대’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러시아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침략자가 물러나고 궁극적인 평화의 상징으로 Z가 거듭나길 소망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6.21  콩쿠르 강국의 이면

 한국은 보릿고개로 배곯을 때도 국제 콩쿠르 정상을 꿈꾸던 나라다. 전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4년 당시 배재중학교 학생이던 13세 소년 피아니스트 한동일도 큰 꿈을 품고 미국 줄리아드 유학길에 올랐다. 11년 뒤 레벤트리트 콩쿠르 정상에 오르며 한국인 첫 국제 콩쿠르 우승자가 됐다. 1974년엔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우승이나 다름없는 쾌거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고, 수만명이 쏟아져나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해외 유학파다. 한국에는 따를 거장도, 체계적인 교육도 없던 시절이니 유학밖에 선택할 길이 없었다. 신수정·강충모·김대진 등이 유학에서 돌아와 후진을 양성하며 변화가 시작됐다. 국내파 김선욱이 2006년 영국 리즈 콩쿠르 정상에 섰다. 2015년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 문지영도 유학 경험 없는 국내파다.

 

▶세계 음악인들은 이들을 탄생시킨 한국식 엘리트 발굴·육성 시스템을 주목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음악 신동을 찾아내고 금호영재콘서트는 해마다 청소년 수십명을 무대에 올려 공연 경험을 쌓게 한다. 이후 한화 교향악 축제나 서울시향, 코리안심포니 등을 통해 협연자로 데뷔시킨다.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클래식 선진국들과 다른 방식이다. 세계적인 콩쿠르 결선에 한국 출신이 미국·러시아 출신을 앞지르면서 ‘K클래식 전성시대’라는 말도 나온다.

 

▶한예종 재학생인 임윤찬이 그제 미국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한국식 영재교육의 경쟁력을 다시금 입증한 쾌거란 반응이다. 하지만 수상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이런 댓글도 붙었다. ‘콩쿠르에서 입상한 많은 연주자가 왜 30대 후반 40대 넘어가면서 무대에서 사라지는가’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한 젊은 연주자들이 잠시 반짝하곤 점점 보고 들을 수 없어 안타깝다.’

 

▶손흥민이 영국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 됐다고 한국 축구도 프리미어급(級)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축구팬이 축구장 찾듯, 연주회를 찾아가는 음악 향유층이 두꺼워야 전업 연주자가 실력을 연마하고 무대에 설 힘도 얻는다. 국제 콩쿠르 출신 신예 일부는 본업인 피아노를 밀쳐두고 부업에 내몰리기도 한다. 세계 정상급 악단이 일본에선 한 달씩 머무는데 한국을 외면하는 이유도 우리 시장이 작기 때문이라 한다. 클래식 공연 기획사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지만 선진국 수준에는 여전히 못 미친다. 임윤찬의 수상을 축하하며, 한국 클래식이 더 풍성해지길 기대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6.22  표절

소설가 김경욱의 단편 ‘천년여왕’은 독창적인 작품을 써야 하는 작가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다룬다. 주인공은 소설을 다 쓰면 아내에게 먼저 보여주는데 늘 “남이 쓴 작품 베낀 것 같다”는 핀잔을 듣는다. 실제로 베껴서가 아니다. 엄청난 독서가인 아내는 기존 작품에서 유사성을 찾아내 “독창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주인공은 그런 아내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소설가든 화가든 음악가든 독창성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015년 인기 소설가 두 명이 동시에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한 작가는 일본 유명 작가의 단편을 베꼈다는 의혹이 일자 해당 단편을 자신의 작품 목록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표절을 흔쾌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문제가 된 작품을 읽은 것 같지 않다”고 했다가 “내 기억을 믿지 못하겠다”고도 했다. 애매한 해명이었다. 또 다른 작가도 처음엔 “혼자 동굴에 앉아서 완전한 창조를 한다고 해도 우연한 일치가 일어날 수 있다”며 부인했다가 추가 증거가 제시되고서야 “도용했다”고 고개 숙였다.

 

▶가요계도 표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몇 해 전 한 아이돌 그룹이 발표한 신곡이 일본 가수 것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다른 가수는 독일 그룹이 30년 전 발표한 곡과 거의 같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저작권을 해결하겠다”며 뒤늦게 독일까지 날아갔다. 두 사례 모두 표절인지 아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 마무리돼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작곡가 유희열씨가 최근 발표한 피아노곡이 일본 저명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곡을 표절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엊그제 주고받은 사과와 이해의 말들은 이전 표절 논란과 대비되는 품격을 보여줬다. 유희열은 사카모토에게 표절 의혹이 제기된 사실을 먼저 알리고 사과했다. 사카모토는 법적으로 다툴 뜻이 없다며 “내게도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며 많은 것을 배운 바흐나 드뷔시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몇몇 곡이 있다. 모든 창작물은 기존 예술의 영향을 받는다”고 유씨를 배려했다. 담백한 사과와 대가다운 포용을 주고받는 모습이 훈훈한 느낌마저 줬다.

 

▶ 그러나 아무리 좋게 매듭지어도 표절 논란에 말려들면 해명은 구차해지고 창작 의욕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2015년 표절 시비를 겪었던 작가는 4년이 흐른 뒤에야 새 작품을 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벼락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던 시절’ ‘누추해진 책상’이란 말로 그간의 심적 고통을 털어놓았다. 이번 일이 유씨에게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김태훈 논설위원

 

06.23  원숭이두창

▲22일 부산 강서구 김해국제공항 청사에 원숭이두창 주의를 알리는 문구가 모니터에 송출되고 있다. /뉴스1

 

천연두는 기원전 1000년쯤부터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힌 질병이다. 두창(痘瘡) 또는 ‘마마’라고도 불렀다. ‘두’는 역질, ‘창’은 부스럼이란 뜻이다. 1796년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우두접종법(종두법)을 발견하기 전까지 상당한 사망률을 보였고 살아남아도 실명·지체부자유·곰보 등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980년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사라진 줄 알았던 두창이라는 말이 ‘원숭이’라는 단어와 함께 다시 등장했다. 천연두(Smallpox)는 사라졌지만 원숭이두창(Monkeypox)이라는 새로운 감염병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1958년 연구용 원숭이들에게서 처음 발견돼 이 같은 이름이 붙었고 1970년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첫 인간 환자가 나왔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중·서부 아프리카 국가에 국한된 풍토병이었다. 그런데 지난 5월부터 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하더니 21일 국내에서도 첫 원숭이두창 확진자가 나왔다.

 

 

▶원숭이두창 바이러스는 천연두 바이러스의 사촌쯤이다. 그래서 어려서 천연두 백신, 이른바 ‘불주사’를 맞은 사람들은 원숭이두창에 대한 예방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서유럽 원숭이두창 확진자를 보면 대부분 천연두 백신을 맞지 않은 젊은 층”이라며 “우리나라의 경우 50대 이상은 어려서 천연두 백신을 맞았기 때문에 예방 효과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천연두 백신 접종을 시행한 것은 1978년이었다.

 

▶원숭이두창이라는 이름 때문에 원숭이에게서 옮겨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원숭이만 아니라 쥐·다람쥐 등 설치류를 통해서도 감염될 수 있다. 2003년 미국 일리노이주 등 6개 주에서 어린이를 중심으로 47건의 원숭이두창 집단감염 사례가 나왔다. 역학 조사 결과, 아프리카에서 애완용으로 수입한 프레리도그라는 설치류를 통해 전파된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 첫 원숭이두창 확진자가 발생했지만 크게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코로나처럼 공기로 전파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주로 피부 접촉이나 감염 동물을 만졌을 때 옮기기 때문이다. 사망률도 서아프리카형은 1%, 콩코분지형은 10% 정도였지만 아프리카 이외 지역에서 사망한 사례는 없다. 가급적 원숭이두창 발생 지역 방문을 피하고 손 씻기, 마스크 착용 등 개인 위생 수칙을 잘 준수하면 크게 우려할 감염병은 아니라는 것이다.

김민철 논설위원

 

06.24  조순

1966년 입학한 서울대 상대 24기는 경제학과 졸업생 49명 중 23명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다수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관계에도 진출해 경제 정책에 관여했다. 정운찬 전 총리, 김중수 전 한은총재, 구본영 전 과기처 장관, 최광 전 보건복지 장관 등이 이 기수다. 외국 여행 나가기도 만만치 않던 시절에 동기들이 떼를 지어 유학길에 오르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러스트=박상훈

 

▶이들이 2학년이 된 1967년, 미 버클리대 박사 출신 조순 교수가 경제학과 강의를 시작했다. 케인스의 고전 ‘일반이론’을 교재 삼은 경제학 강독이었다. 그때까지 우리 대학 경제학 강의는 수요, 공급 곡선 달랑 그려 놓고 쌀 값, 연탄 값 파동을 논하는 수준이었다. 미국 본토에서 주류 경제학을 제대로 배운 조순 교수가 영어, 독어에 한시까지 곁들여 가며 설파하는 경제학 강의는 처음 경험해 보는 신세계였다. 젊은 학도들은 “나도 조순처럼 되고 싶다”며 너도나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 경제학의 바이블이 1948년 발간된 새무엘슨의 ‘이코노믹스’라면 대한민국 경제학 교과서는 조순 교수가 1974년 초판을 낸 ‘경제학원론’이다. 1990년 조 교수의 첫 제자 66학번 정운찬이 제2 저자, 정운찬의 첫 제자 78학번 전성인이 제3 저자로 차례차례 합류하면서 11판까지 나왔다. 조순은 경제부총리, 한은총재를 역임한 데 이어 정계에 진출해 서울시장과 고향 강릉 국회의원을 지냈다. “햇볕 정책이 북한에 무조건 유연해야 한다는 경직성에 빠졌다”던 조순 의원의 국회 외통위 발언이 기억난다. 경직성이라는 경제학 용어로 유연함이 경직화된 햇볕 정책의 모순을 질타한 것이다.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조순은 서당 훈장님처럼 제자들에게 엄격했다. 학생들이 시국을 핑계 삼아 단체로 수업을 거부하자 “공부 안 하고 어떻게 나라를 구한다는 거냐”고 학점을 깎았고, 중간고사 때 커닝 기회 모색을 위해 뒷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에 “당당치 못하게 무슨 짓이냐”고 호통을 쳤다. 평생 경제학을 공부하겠다는 제자들에겐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할 각오가 돼 있냐”고 물었다.

 

▶나라 경제 걱정하며 평생을 보냈지만 집안 살림 키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서울대가 관악 캠퍼스로 옮긴 후 지은 봉천동 주택에서 25년 넘게 살았다. 자식들이 편한 곳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내가 심고 가꾼 나무들이 이사 가지 말라고 말린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가 23일 9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대한민국 학계를 떠받쳐온 큰 나무가 졌다.

김창균 논설주간

 
 

06.25(토)  국정원의 양지와 음지

청나라 옹정제는 일을 많이 한 황제 중 하나로 꼽힌다. 재상이 전결하던 문서를 가져다 결재했고, 지방관의 보고에 일일이 답했다. 날마다 50~60통의 편지를 쓰느라 밤을 새웠다. 그의 좌우명은 ‘위군난(爲君難·군주가 되는 길은 어렵다)’이었다. 좌우명은 ‘자리(座)의 오른쪽(右)에 지침이 될 글을 새겨(銘)’ 놓은 것이라고 한다

 

 

▶집과 학교에도 좌우명이 있다. 가훈, 교훈이다. 국가기관 중 직원에게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는 정보기관에서 ‘모토’를 쓴다. 미국 CIA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일, 정보의 중심’을, 비공식으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를 모토로 삼고 있다. 영국 MI6는 ‘언제나 비밀’, 이스라엘 모사드는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고,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이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61년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초대 부장을 맡아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를 모토로 삼았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백악관 참모들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쓴 ‘익명의 열정(passion for anonymity)’이란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우리 정보가 국가에 이바지하면 그것이 바로 양지를 사는 것”이라고 했다. 모토는 한번 정하면 영원한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이조차 정권 따라 바뀐다. 김대중 정부는 ‘정보는 국력’ 이명박 정부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박근혜 정부는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문재인 정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바꿨다. 문 정부는 이 모토를 간첩 혐의로 20년간 복역한 신영복의 글씨체로 새기는 황당한 일까지 했다.

 

▶국정원이 24일 원훈(모토)을 다시 바꿨다. 최근 직원 설문조사를 했는데, 첫 원훈을 다시 쓰자는 의견이 절대다수였다고 한다. 원훈석도 1961년 것을 다시 설치했다. 그동안 국정원 내부에 보관했다고 한다. 한때 음지로 들어갔던 원훈석이 23년 만에 양지로 나온 것이다. 국정원이 오랜 역사를 되찾되 과거의 어두운 일탈로 돌아가지는 말았으면 한다.

 

▶국정원 본관 1층에는 아무 설명과 장식 없이 별만 19개가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이름 없는 별’이라고 부른다. 임무 수행 중 순직한 직원 19명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순직 경위는 물론 요원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2018년에는 별이 18개였는데 2021년엔 19개가 됐다. 음지에서 일하고 나라를 양지로 만드는 게 국정원의 존재 이유다.

황대진 기자

 
 

06.27(월)  애그플레이션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가 공무원 주 4일 근무제를 발표했다. 달러가 바닥나 외채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나라에서 공무원 100만명한테 금요일마다 유급 휴가를 주겠다고 한다. 스리랑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력 관광 산업이 붕괴했다. 달러 고갈로 식량도, 석유도 못 들여왔다. 식료품값이 1년 전보다 57% 넘게 올랐다. 기름 없으니 출근하지 말고 집 뒷마당에 농사 지어 자급자족하라고 긴급 도입된 황당한 주 4일제다.

 

 

▶국제 곡물가가 급등하던 2008년 초 이집트 총리가 “정부 보조금을 받은 밀가루를 암시장에 팔면 징역 15년형에 처하겠다”고 성명을 냈다. 이집트 정부는 밀가루에 보조금을 지급해 국영 빵집에서 빵 하나 10원꼴로 무상에 가깝게 공급해왔다. 튀니지 정치학자 사디키는 이런 시혜 정책을 ‘빵 민주주의’라고 표현했다. 국제 곡물가 상승으로 시중 빵값이 치솟으니 사람들이 국영 빵집에 장사진을 쳤다. 빵사기 전쟁 통에 시비가 붙어 목숨을 잃는 ‘빵 순교자’까지 생겼다. 재정도 감당이 안 됐다. 급등한 곡물가가 이집트 ‘빵 민주주의’에 타격을 가해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궁극에는 30년 독재의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는 단초를 제공했다.

 

▶기원전 75년 무렵 로마의 속주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지중해 일대에 해적이 준동해 식량 운송에도 차질이 생겼다. 로마는 식량을 수입에 의존했다. 빵값이 치솟자 폭동이 일어나 두 명의 집정관이 쫓겨났다(윤덕노, 음식으로 읽는 로마사). 역사적으로 생존과 직결되는 식료품 가격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오르면 나라가 흔들렸다.

 

▶2007~2008년 당시 월가의 투자 보고서에 ‘애그플레이션’이 등장했다. 다른 물가에 비해 유독 농산물 가격이 급등한 현상을 가리켜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을 조합해 그리 불렀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애그플레이션을 사회 안정을 뒤흔드는 ‘침묵의 쓰나미’라고 했다. 유엔기구들이 잇달아 식량 위기를 우려한다. 2007~2008년의 곡물가 파동이나 2011년 아랍의 봄보다 지금 상황이 더 나쁘다는 것이다.

 

▶경제부총리가 6월 또는 7~8월에 물가 상승률이 6%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1998년 이후 20여 년 만에 처음 겪는 높은 물가 상승률이다.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 곡물가가 급등해 정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타격받는 저소득층을 각별히 챙기고,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 이 파고를 넘어야 한다.

강경희 논설위원

 

06.28  이단아 최명재

▲26일 별세한 민족사관고 설립자 최명재 이사장(95). 영결식은 28일 오전 9시 강원도 횡성 민족사관고에서 거행된다. / 뉴시스

 

26일 영면한 최명재 민족사관고 이사장을 만난 적이 있다. 1989년 9월인데, 최 이사장이 설립한 파스퇴르유업이 소비자보호원을 상대로 ‘공부 더 하십시오’라는 등의 공격 광고를 내던 때였다. 검은 바탕에 특호(特号) 이상 활자를 쓴 시리즈 광고였다. 파스퇴르 우유가 기존 우유와 질적으로 차이 없다는 소보원 발표를 겨냥한 것이다. 파스퇴르는 우유 업계의 이단아였다. 저온살균법을 들고나와 기존 우유 업계를 향해 난사했다. ‘고름 우유’라는 표현까지 썼다. 광고가 너무 심하지 않으냐는 비판 기사를 썼더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긴장해서 어느 찻집에서 만났는데 의외로 싹싹했다. “젊은 기자가 열심히 한다”는 취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나중 어느 인터뷰에서 “전투에는 져도 전쟁엔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고소, 소송 등에서 져도 분쟁을 이어가는 동안 소비자 뇌리엔 ‘파스퇴르 우유’가 새겨진다는 뜻이었다. 언론의 비판도 ‘노이즈 마케팅’에 도움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우유 사업에서 번 돈으로 1996년 강원도 횡성에 민족사관(史觀)고를 세웠다. 원래 생각한 학교 이름은 ‘민족주체고’였다는 것이 한만위 민사고 교장 설명이다. 북한을 연상시킨다는 것 때문에 포기했다. 1927년생인 최 이사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이순신 장군 소설을 읽고는 민족 주체성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교복으로 개량 한복을 입게 하고, 학교에 99칸 한옥을 복원시켰다. “똑똑한 이완용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평소 말해왔다고 한다.

▶최 이사장은 “창의적인 천재 한 명이 수백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영재교육의 취지를 설명해왔다. 자신은 장사꾼인데, 교육이야 말로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그가 38만평 부지에 민사고를 짓고 운영하는 데 들인 돈은 1000억원쯤 된다. 민사고는 매 학기 개설 강좌가 200개를 넘는다. 학생들이 교사들 각자의 방으로 찾아가 수업을 듣는데, 학생마다 시간표가 다 다르다. 국내 대학보다는 외국 명문대 입학을 의식한 교육이다.

▶최 이사장이 2004년 낸 자서전은 ‘20년 후 너희들이 말하라’는 제목이다. 1회 졸업생이 졸업한 지 23년 됐다. 졸업생들 가운데 벤처기업을 하는 경우가 2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민사고를 두고는 ‘귀족 학교’ 등의 논란이 있어왔다. 민사고 졸업생들이 각자 자기 성공만 찾아가는 게 아니라, 각 분야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뚜렷한 성과를 보여준다면 귀족 학교 시비는 저절로 잦아들 것이다.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06.29  얼굴 팬티

▲실외 마스크 의무화 지침이 완화되면서 마스크를 벗고 거리에 나서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자영업자들을 중심으로는 실내 마스크 규제도 해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실외와 달리 식당 등에서는 실내 착용 지침이 유지되면서 고객을 상대하는 데에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3일 오후 점심시간을 맞아 서울 중구 식당 밀집 골목에서 직장인들이 마스크를 쓰고 이동하는 모습. /뉴시스

 

이번 주 금요일부터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브로드웨이 극장들이 다음 달 1일부터 실내인 극장 안에서도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2년 4개월 만에 코로나 사태 이전 모습을 되찾는 셈이다. 브로드웨이만 아니라 미국·유럽에서는 대중교통을 제외하면 실내 마스크도 착용 의무를 해제한 곳이 많다.

 

▶우리나라와 미국·유럽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야외 마스크 풍경일 것 같다. 얼마 전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분은 “유럽에선 야외에서 마스크 쓴 사람을 한 명도 보기 어려운데 귀국해보니 아직도 야외에서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며 “적응하기 힘들 정도”라고 했다. 최근 들어 날씨가 더워지면서 야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턱스크’ 등으로 대충 쓰는 사람이 늘긴 했지만 아직도 다수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런데 야외에서는 잘 쓰다가 감염 위험이 야외보다 훨씬 높은 식당·카페에 들어가자마자 마스크를 벗는다. 어이없는 모습이다.

 

 

▶일본도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지 않는 것이 우리와 비슷하다. 일본 정부는 지난 5월 중순 야외에서는 마스크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일본인 대부분은 여전히 야외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얼마 전 일본 신문은 “마스크를 벗는 것이 마치 속옷을 벗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마스크를 ‘얼굴 팬티’라고 부르는 젊은이들도 있다”고 보도했다. 팬티가 치부를 가리는 것처럼 마스크도 쓰지 않으면 부끄럽고 이상한 무엇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마스크가 도리어 편하다는 사람들도 생겼다. 일본 한 여론조사에서 ‘마스크를 계속 쓰겠다’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남성의 20~30%는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된다’, 여성의 30~40%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를 들었다. 10대 여성의 40%는 ‘귀엽고 예뻐 보인다’를 이유로 들었다. 실제로 마스크를 쓰면 실제 얼굴을 더 예쁘게 상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조사 결과가 없지만 엇비슷한 수치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백신 접종도 마스크 쓰기와 함께 동서양이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우리는 백신 접종 완료율이 87%지만 영국은 73%, 프랑스는 78%, 미국은 67%에 불과하다. 인구 100만명당 코로나 누적 사망자가 미국은 3052명, 영국은 2641명인데 한국은 478명, 일본은 247명이다. 백신의 효과가 클 것이다. 백신 맞고, 손 잘 씻고, 실내에선 최대한 마스크를 쓰되, 의미 없는 야외 마스크는 이제 우리도 그만 썼으면 한다.

김민철 논설위원

 

06.30(목)  캥거루족도 고령화

“학생 때 그렇게 엄마를 떠나고 싶어 안달이더니 결혼 앞두고 엄마의 숟가락이 필요하다며 눌러앉은 게 벌써 4년이 되었네요. 월세 받아야 하는데 한 번도 못 받았어요. 청약통장과 종신보험도 제가 내주지요.” 캥거루족 아들과 함께 사는 노모가 온라인에 글을 띄웠다. 캥거루 자식들 사연도 넘쳐난다. “녹록지 않은 사회생활, 차라리 떳떳한 캥거루족이 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님 집에 얹혀서 하는 부동산 투자가 최고라고 합니다. 어떤 재테크를 하든 캥거루는 이득입니다.”

 

 

▶성인이 되어도 독립하지 않고 부모에게 얹혀사는 자녀를 캥거루족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밤보치오니’(bamboccioni·큰 아기)라 부른다. 2년 전 자신의 계약직 교사 연봉이 적으니 부모한테 돈 달라고 소송을 낸 35세 남성에 대해 이탈리아 대법원이 “부모가 매달 300유로의 용돈만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다른 유럽 국가 같으면 30대 자식한테 무슨 용돈이냐며 황당한 판결이라고 여겼겠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던져준 교육적 판결”이라고 환영했다. 그만큼 이탈리아는 자녀들을 오래 뒷바라지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 가족 중심 문화에, 높은 청년 실업으로 생겨난 현상이다.

 

▶3년 전 일본 도쿄에서 76세 아버지가 44세 아들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농림수산성 차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아들은 캥거루족일 뿐만 아니라 게임에 빠져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였다.

 

▶초고령사회에 장기 불황을 겪은 일본은 4050 중년의 캥거루가 7080 부모에게 얹혀사는 ‘7040′ ‘8050′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다. 1990년대 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모에게 얹혀살던 20대 캥거루족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그대로 나이 먹어 50대 캥거루가 됐다고 한다. 이들은 70~80대 노부모가 타는 연금으로 먹고산다. 부모가 세상을 뜨면 그야말로 생계 수단이 끊긴다. 캥거루 고령화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경고다.

 

▶그제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50세 미만 성인 10명 중 3명이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같이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직장이 없거나 결혼을 안 하면 거의 절반이 부모에 얹혀산다. 그저 자립이 좀 늦어지는 게 아니고, 영원히 독립 못 하는 중장년 캥거루다. ‘4070′ ‘5080′ 문제가 우리에게도 현실로 닥쳐오는 듯하다.◎

강경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