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일본 物語/ 〈11〉 ‘요미우리’와 ‘히키후다’ - 〈20〉 동아시아 3국의 운명을 가른 ‘팩토리’
신상목의 일본 物語/ 〈11〉 ‘요미우리’와 ‘히키후다’ - 〈20〉 동아시아 3국의 운명을 가른 ‘팩토리’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이야기
〈11〉 ‘요미우리’와 ‘히키후다’
에도시대 과학적 사고의 문을 연 《해체신서(解體新書)》
⊙ 스기타 겐파쿠·나카가와 준안, 네덜란드의 해부학 서적 《타펠 아나토미아》 번역 ….
연골·신경·동맥 등 용어 창안
⊙ 1804년 하나오카 세이슈(華岡青洲), 유방암 수술하면서 전신마취 수술 성공
⊙ 호시노 료에츠(星野良悦), 1792년 인체 목골(木骨) 만들어
⊙ 서구의 과학적 사유(思惟) 도입, 세계관의 전환 계기
▲스기타 겐파쿠의 《중정(重訂)해체신서》(1820년)에 실린 인체 골격도.
근대성을 구성하는 합리성은 관찰·가설(假說)·검증이라는 과학적 사유 과정을 근간으로 한다. 합리성은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분석(分析)’을 중시한다. 분석을 의미하는 ‘analysis’는 어원적으로 ‘잘게 쪼개는 것(breaking down)’에서 연유하였다. 분석은 대상을 양파 까듯 계속 쪼개고 나누어 더 작은 요소(element)로 쪼갤 수 없을 때까지 쪼갬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는 발상이다. 현대 과학문명은 분석을 기초로 하는 귀납적(歸納的) 사유의 산물이다.
인체의 질병규명과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지식체계인 의학은 15세기 이후 서구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 현상을 분석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서양의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체의 내부구조를 파악하고, 각 기관의 기능, 역할, 상호관계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인체분석의 기초로 ‘해부’(解剖·anatomy)를 중시하였다. 동양의학은 서양의학과 달리 해부를 경원시한다. 히포크라테스가 해부학의 시조로 불릴 정도로 ‘의학=해부학’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서양의학과 달리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의학은 기(氣), 정(精), 신(神)의 수양(보양)을 중시하며, 몸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조화를 중시하고 생명 작용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해부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전통 동양윤리의 관점에서 사체에 손을 대는 것은 불경(不敬)이었고,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둔 생명론의 관점에서 사자(死者)의 골격과 장기(臟器)로부터 생로병사의 단서를 찾을 수도 없었다.
일본 지식계를 강타한 서양의 해부학
▲《해체신서》를 펴낸 스기타 겐파쿠.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례(葬禮)의 역(役)을 부여받은 일부 하급 신분을 제외하고는 의사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터부시되었다. 18세기 들어 일본에 서양의 의학서가 전래되자 일본 지식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진다. 데지마상관(出島商館·나가사키에 마련된 네덜란드인 전용 거류구역)에 체류하는 네덜란드 의사 등이 가져온 근대 의학서, 특히 해부학 서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시 서양의 서적들은 금서(禁書)로서 막부의 허가 없이는 유통이 제한되었지만, 실제 의술을 담당하던 의사들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인체를 이토록 자세하고 정밀하게 뜯어볼 생각을 하다니. 처음 접하는 인체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앞에 두고 일본 의사들의 직업의식이 꿈틀거린다.
1754년 고방파(古方派·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한방의학) 의학자인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가 사형수의 시체 해부에 입회한 후 1759년 관찰 내용을 기록한 《장지(蔵志)》라는 해부 도감을 출간한다. 일본 최초의 해부 실험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나, 서양 해부학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인체 내부의 외관을 묘사한 수준으로 진정한 의미의 해부도해(解剖圖解)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전기가 찾아온다. 1771년 봄 난방의학(네덜란드 의학)에 관심이 많은 의사인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은 데지마상관장이 에도 출부(出府) 시 숙박하는 거처인 나가사키야(長崎屋)를 방문한 차에 《타펠 아나토미아》를 비롯한 서양 해부학 서적을 접한다. (《타펠 아나토미아》는 독일 의사 쿨무스가 저술한 《Anatomische Tabellen》이라는 해부도보의 네덜란드어판인 《Ontleedkundige Tafelen》의 일본어 통칭이다.)
《타펠 아나토미아》의 정교한 인체 내부 묘사에 감탄한 나카가와는 동향의 의사인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에게 동 서적들을 소개하고 구매를 권유한다. 매사 의욕이 넘치던 활동가 스기타의 자금 마련으로 책을 입수한 두 사람은 《타펠 아나토미아》를 탐독하면서 자신들의 무지(無知)를 깨닫고 강렬한 지적 탐구욕을 느낀다. 같은 해 3월 사형수의 해부를 참관하기 위해 죄수 처형장을 방문한 스기타와 나카가와는 오이타(大分) 출신의 의사인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와 조우한다. 우연히도 마에노 역시 별도의 루트를 통해 《타펠 아나토미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의사였지만 이들도 인체 내부를 상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3인의 의사는 해부를 참관하면서 《타펠 아나토미아》에 묘사된 인체가 실제의 인체와 정확히 일치하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서양 해부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뜬 3인은 그 자리에서 《타펠 아나토미아》를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의기투합한다.
일본 최초의 본격 번역서 《해체신서》
번역을 목표로 삼기는 했으나, 변변한 네덜란드어 사전 하나 없이 의학서를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에노가 약간의 네덜란드어 지식이 있었으나, 인사말을 나누는 정도의 초급 수준이었다. 이후 번역 과정은 한 편의 장대한 ‘맨땅 헤딩’ 스토리였다. 암호 해독과 다를 바 없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극복하는 방법이 고안된다.
대략적인 방법은 이렇다. 우선 기존 지식으로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 표시해 둔다 → 의미가 확정된 단어로부터 전후 단어의 의미를 유추한다 → 모르는 단어는 일단 건너뛰어 리스트를 만들어 두었다가 그림 또는 여타 문장에서 힌트를 얻어 가능성을 좁혀 나간다 → 한 문장에서 의미가 확정된 단어가 일정 수준 이상 확보되면 문장 전체의 뜻을 추측하여 그로부터 각 단어의 의미를 추정하고, 그 의미를 다른 문장에 사용된 같은 단어에 대입해서 말이 통하는지를 확인해서 의미를 잠정적으로 확정한다 → 의미가 확정되면 다시 그로부터 전후 단어의 의미를 유추한다. 이런 과정의 계속적인 반복이다.
스기타 자신이 “키(舵)도 돛도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듯하다”고 표현한 어려움 속에서 수수께끼 풀 듯, 퍼즐 맞추듯 번역이 진행되었다. 기의(記意·signified)를 알아도 그에 해당하는 일본어 기표(記表·signifier)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단어를 창조해야만 했다. 신경(神經), 연골(軟骨), 동맥(動脈) 등 기존 동양의학의 관념에는 없던 인체의 부위와 기관에 새로운 일본식 이름이 부여되었다.
참여자들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번역에 매달린 지 3년 후인 1774년 《타펠 아나토미아》의 번역본인 《해체신서》(解體新書)가 출간된다. 가장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진 마에노가 번역이 충분하지 못함에 부담감을 느껴 극구 작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는 것을 사양했다고 할 정도로 번역 자체의 수준은 높지 않다.
그러나 번역의 수준을 떠나 《해체신서》의 출간은 일본의 지식사(知識史)에 있어 분기점(分岐點)을 찍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해체신서》는 서양 언어로 된 서적을 일본어로 옮긴 최초의 본격적 번역서이다. 더구나 그 내용은 기존의 관념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터부의 영역이었다. 《해체신서》는 일본인들이 서구의 관념을 자신들의 관념으로 변환하는 번역이라는 언어적 통로를 만들기 시작하는 본격적인 출발점이자, 기존의 윤리, 규범에 가로막혀 있던 금단(禁斷)의 문턱을 넘어 세계관의 전환을 기하는 계기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오카 세이슈의 세계 최초 전신마취 외과수술
▲일본 의학계는 하나오카 세이슈(왼쪽)가 세계 최초로 전신마취 유방암 절제 수술(오른쪽)을 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의학은 《해체신서》 이전의 의학과 이후의 의학으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해체신서》가 일본 의학에 미친 임팩트는 컸다. 《해체신서》는 의학이 책상머리 고담준론에서 벗어나 실증과 실용의 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해체신서》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에 노출된 일본 의학계에는 특유의 탐구정신과 성실함으로 서구를 포함한 당시 시대를 앞서는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속속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하나오카 세이슈(華岡青洲)의 전신 마취 외과수술이다. 서양 의학계에서는 1846년 미국 하버드 의대의 존 워런(John Warren)이 에테르를 사용하여 집도한 환자의 목 혹 제거 수술이 세계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 의학계는 세계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은 1804년 일본인 의사 하나오카 세이슈의 유방암 수술이었다고 주장한다.
하나오카는 동양의학과 난방의학을 두루 섭렵하며 절개, 절제, 봉합, 소독 등 외과술을 집중적으로 연마한 의사였다. 하나오카는 외과적 치료를 요하는 상황에서 환자의 고통이 너무 커서 제대로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자주 처하자 환자의 고통을 경감할 수 있는 마취제 개발에 진력한다. 모친과 아내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가 모친이 사망하고 아내가 실명하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집념 어린 노력 끝에 ‘통선산(通仙散)’이라 불리는 마취제를 개발한 하나오카는 1804년 당시 60세 여성 환자의 말기 유방암 절제(切除) 수술을 집도한다. 환자는 결국 수술 4개월 만에 사망하였으나, 수술 후 20일 만에 기력을 회복하여 수백 리 떨어진 귀향길에 오를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는 등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일본 의학계는 하나오카의 제자가 남긴 제법(製法) 기록에 근거해 분석한 결과 통선산의 마취 효과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수술에 대한 기록이 명시적으로 남아 있어 서양 의학계에서도 하나오카가 세계 최초로 전신마취 수술을 했다는 주장을 긍정하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호시노의 인체 골격 모형
▲호시노 료에츠가 제작한 인체 목골.
《해체신서》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以上)을 추구한 의사도 있다. 해부학에 기초한 의학 교육에는 인체 골격 모형(human skeleton model)이 매우 유용하지만, 당시에는 의사라 할지라도 실물 인골(人骨)을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히로시마의 의사 호시노 료에츠(星野良悦)는 솜씨 좋은 의사로 평판이 높았지만 숙모의 하악(下顎) 관절 탈골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낭패를 겪는다. 호시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의사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인체 구조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절감하고 정부의 특별 허가를 얻어 사형수를 직접 해부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인체 골격 모델 제작에 나선다. 1792년 솜씨 좋은 목공의 도움을 얻어 300여 일의 제작 기간을 거친 끝에 인체 목골(木骨)이 완성된다. 일본 의학계가 세계 최초의 인체 골격 모형이라고 주장하는 ‘호시노 목골’의 탄생이다. 혈관이 통하는 뼈의 구멍까지 구현될 정도로 실물에 가깝게 세밀하고 정교하게 제작된 호시노의 목제 골격 모형은 후에 막부에 헌상되면서 에도로 옮겨져 의학 전공자들의 연구 및 교육에 활용되었다.
이후 호시노의 제자인 가가미 분켄(各務文献)이 제작한 ‘가가미 목골’(1810), 가가미의 제자인 오쿠다 마쓰리(奧田万里)가 제작한 ‘오쿠다 목골’(1819) 등의 등신대형 인체 골격 모형이 차례차례 제작되어 에도시대 실증 의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비슷한 시기 조선의 사정은 어땠을까?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병원을 견학한 조선의 신진관료 송헌빈은 그곳에서 해부도와 해부용 인형 등을 보고는 “정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다. 이는 인술(仁術)을 하는 자가 할 짓이 아니다. 고약하고 고약하다”고 적었다고 한다. 《타펠 아나토미아》가 조선에 먼저 전래되고 조선의 지식인이 새로운 세계관에 노출되었다 할지라도 조선이 과학적 합리성에 눈 뜨고 스스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는 이유이다.⊙ 월간조선 6월호
〈12〉 사전(辭典)으로 서양 언어와의 통로를 열다
⊙ 이나무라 산바쿠, 1796년 일본 최초의 난화사전(蘭和辭典)으로 알려진 《하루마와게(ハルマ和解)》
편찬
⊙ 에도 막부, 네덜란드인 되프 고용해 《두후하루마(ドゥ一フハルマ)》 편찬
⊙ 1814년 최초의 영일사전인 《안게리아고린타이세이(諳厄利亞語林大成)》 편찬
⊙ 사전 번역 과정에서 자유(自由·liberty), 경제(經濟·economy), 물리(物理·physics) 등 근대 개념어
만들어 내
▲나가사키 데지마의 화란(네덜란드)인들. 이들과 접촉하면서 일본에서는 화란어 사전이 편찬되기 시작했다.
1774년 《해체신서》의 출간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 일대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서양의 문물은 물건의 형태로 접하거나 대화를 통해 단편적 내용을 파악하는 수준이었을 뿐, ‘책’이라는 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책에 그려진 그림이나 얼마 되지 않는 아는 단어를 통해 추측할 뿐 지식의 보고인 책이 지식 흡수에 전혀 도움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체신서》가 출간되자 난학자(蘭學者)들 사이에 ‘번역’에 대한 욕구가 샘솟는다. 그 이전부터 서양의 책에 적혀 있는 꼬부랑 글자의 뜻만 알 수 있으면 그 지식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체신서》 이전에 번역서가 없었던 것은 ‘사전(辭典·dictionary)’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 대화의 수준을 넘어 외국어를 통한 지식의 흡수를 위해서는 도구적 기초로서 사전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해체신서》의 출간을 계기로 일부 뜻있는 난학자들이 ‘난일(蘭日)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편찬 작업에 착수한다.
당시 난학계는 크게 에도파와 나가사키파로 나뉘어 있었다. 나가사키에서는 화란인(네덜란드인)들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유창하게 화란어를 구사하는 통사(通詞·번역관)들이 난학 전파에 힘쓰고 있었다. 에도에서는 의사 중심의 지식인들이 일문(一門)을 이뤄 화란어 실력은 나가사키파에 못 미치지만 난학을 학문적 관점에서 열성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이 중 에도파의 이나무라 산바쿠(稻村三伯)가 화란어 사전 편찬에 도전장을 던진다. 아무래도 대면(對面) 통역보다 서적을 통한 지식 흡수의 필요성이 높았던 에도파가 사전의 필요성을 더 절감했던 사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산바쿠는 본래 의사 출신으로 당시 에도 난학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오쓰키 겐타쿠(大槻玄澤)의 《난학계제(蘭學階梯)》를 접하고 난학 연구에 몰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전 편찬의 꿈을 꾸게 된다.
蘭佛사전 원용해 蘭日사전 편찬
▲일본 최초의 서양어 사전으로 알려진 《하루마와게》.
산바쿠 이전에도 난일사전 편찬의 시도가 있었다. 당시 어학 실력이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 나가사키 통사 니시젠 사부로(西善三郞)가 화란어 사전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수만 개에 이르는 단어의 내용 파악도 내용 파악이지만 알파벳 순서로 정렬되어 있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가 없는 상황에서 사전을 발간하는 것은 일개인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산바쿠는 이를 우회하는 방법으로 시간 단축의 실마리를 찾는다. 나가사키 통사 출신으로 겐타쿠가 화란어 교사로 에도로 초빙한 이시이 쇼스케(石井庄助)로부터 《난불사서(蘭佛辭書·Woordenboek der Nederduitsche en Francsche Taalen)》를 소개받고 이 사전을 활용해 난일사전을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난불사서》는 프랑스인 François Halma(일본 발음 프랑소와 하루마)가 1729년 편찬한 Dutch-French 사전이다. 난불사전으로 일본어 사전을 만든다는 발상은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네덜란드어도 모르는데 불어로 뜻풀이가 되어 있는 사전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배경은 이렇다. 화란은 19세기 초까지 국어(화란어)사전이 없었다. 18세기 전반에 걸쳐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면서 고유의 국어사전을 발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화란어 사전이 있었다면 일본의 난학자들이 그를 기초로 난일사전을 만들 생각을 했겠지만 화란어 사전이 없으니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때 화란어 사전의 대용(代用)으로 착목된 것이 하루마의 《난불사서》이다.
하루마 《난불사서》에는 알파벳 순서로 화란어 표제어를 나열하고, 각 표제어에는 먼저 화란어로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 주석(註釋)이 달리고, 그다음에 본문으로 그에 해당하는 프랑스어가 설명되어 있었다. 이러한 독특한 체계는 당시 화란어 사전이 없었다는 사정에 기인한다. 화란인들도 이 사전을 자국어 사전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산바쿠는 이 중에서 프랑스어는 제쳐두고 화란어 표제어와 그에 대한 화란어 주석을 활용하여 난일사전을 만든 것이다. 사전의 편찬에는 산바쿠의 뜻에 동조하는 우타가와 겐즈이(宇田川玄隨), 오카다 호세쓰(岡田甫說) 등의 동료 난학자들이 같이 참여하였다. 13년에 걸친 편찬 작업 끝에 1796년 일본 최초의 난화사전(蘭和辭典)으로 알려진 《하루마와게(ハルマ和解 또는 波留麻和解)》가 탄생하였다.
1796년 초판 원고가 완성된 이후 2~3년에 걸쳐 30여 부가 간행되어 에도 난학계에 보급되었다. 약 6만여 개의 방대한 표제어를 수록하고 있으나 단어 설명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아 현대로 치면 어휘집 내지 단어장 정도의 성격이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에도 난학계의 연구는 큰 탄력을 받았고 《하루마와게》 출간 이후 에도에서 각종 서양서적 번역서가 연달아 출간되면서 에도의 난학이 크게 융성한다.
막부, 번역기관 설치
본격적인 난일사전의 편찬은 에도 막부에 의해 추진된다. 막부는 서양 언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1811년 막부 기관인 천문방(天文方)의 부속 기관으로 양서 번역을 담당하는 ‘반쇼와게고요’(蕃書和解御用)를 설치, 유능한 난학자들을 번역관으로 임명하였다. 반쇼와게고요는 번역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본격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나가사키 데지마상관장으로 일본어에 능통한 헨드릭 되프(Hendrik Doeff)에게 난일사전의 편찬을 의뢰한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네덜란드는 ‘바타비아공화국’이라는 프랑스의 위성국이 되었다. 혼란의 와중에 화란동인도회사가 1799년 해산되고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던 영국이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남아의 화란 식민지를 접수하기 시작하자 동남아 일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동인도회사의 인력은 본국의 도움 없이 자력갱생으로 생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되프 역시 1803년 도일(渡日)한 이후 하염없이 귀국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되프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일본으로서는 그의 존재가 행운이었다. 1812년 반쇼와게고요의 의뢰를 받은 되프는 나가사키 통사들의 협조를 얻어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한다.
그의 우수한 어학 실력 덕분에 빠른 속도로 번역이 진행되었다. A~T 항목까지 번역이 진행된 1817년 유럽의 정세 변동으로 되프가 갑자기 본국으로 귀국함에 따라 번역 작업은 암초를 만나게 된다. 나가사키의 통사들이 작업을 이어받았으나 마무리 작업에는 16년이 추가로 소요되었고 1833년이 돼서야 초고(草稿)가 완성되었다.
《두후하루마》, 총 5만여 개의 표제어 수록
▲일본 난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본격 난일사전 《두후하루마》.
되프가 주도한 이 사전의 정식 명칭은 《통포자전(通布字典)》이나 일반적으로는 《두후하루마(ドゥ_フハルマ)》로 알려져 있다. 《두후하루마》도 《하루마와게》와 마찬가지로 프랑소와 하루마의 《난불사서》를 베이스로 프랑스어를 제외한 화란어 표제와 주석 설명을 활용하여 편찬되었다. 이에 따라 에도에서 만들어진 하루마 번역본을 《에도하루마》,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번역본을 《나가사키하루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후하루마》는 총 5만여 개의 표제어를 수록하고 있으며, 상세한 설명과 예문을 기재한 57권, 3000여 쪽의 방대한 책자로 구성되어 있다. 《두후하루마》의 초고를 접수한 막부는 서양 지식의 전파를 우려하여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만 30여 부 제작하고 배포처도 막부와 일부 번으로 한정하였다. 뜻있는 난학자들이 서양 세력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서양을 알아야 한다면서 막부를 설득하였으나 막부는 정식 간행에 소극적이었다. 이 책은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인 1854년이 되어서야 겨우 정식 간행이 허가되었다.
▲막부 말기~메이지유신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쓰 가이슈도 《두후하루마》를 필사해 공부했다.
《두후하루마》는 난학 연구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지식의 보고였다. 막부가 배포를 통제하는 동안에도 서로 앞다투어 입수하려고 경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비공식 사본(寫本)이 만들어져 유통되었다. 《두후하루마》를 입수한 쥬쿠(塾·사설학교)와 그렇지 못한 쥬쿠 간에 입학생 모집에 큰 차이가 발생할 정도였다. 워낙 비싼 책자였기 때문에 이를 보유한 쥬쿠들은 외부의 요청으로 사본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운영비를 보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막부의 해군장관으로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젊은 시절 일화에 이와 관련한 대목이 있다. 가이슈는 학비가 없어 쩔쩔매던 젊은 시절 10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한 의사로부터 《두후하루마》를 빌렸다. 그는 1년에 걸쳐 두 질(秩)의 사본을 만들어 한 질은 본인이 소유하고 한 질은 빌린 값보다 몇 배의 가격을 붙여 팔아 이득을 남긴 후 그 돈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도 자서전에서 자신이 다니던 오사카 최고의 난학교습소 ‘데키쥬쿠’(適塾)에도 《두후하루마》가 한 질밖에 없어 문하생들이 한 번이라도 사전을 더 보려고 한밤중까지 자지 않고 경쟁을 펼쳤다고 회고했다. 이 정도로 《두후하루마》는 일본 난학의 발전에 소중한 존재였다.
페이튼호 사건
에도 후기 외국어 사전의 발간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으로 불리는 《안게리아고린타이세이(諳厄利亞語林大成)》이다. 이 사전의 편찬에는 배경이 있었다.
1808년 8월 나가사키항 앞바다에 화란 국기를 게양한 한 척의 배가 출현한다. 입항 절차 수속을 위해 화란상관원과 통사들이 동 선박에 접근하자 이 선박의 승조원들이 돌연 화란상관원 두 명을 납치하고 화란기 대신 영국(잉글랜드)기를 게양하더니 나가사키항에 침입하여 화란인들을 색출한다면서 무장을 한 채로 거리를 활보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 배는 사실 영국의 페이튼(Phaeton)호로, 동남아 일대의 화란적(籍) 선박을 나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군함이었다.
이들의 적대 행위에 놀란 나가사키 부교(奉行·지역관리책임자)가 인질의 석방을 요청했으나, 페이튼호는 이를 거부하고 물, 식량, 연료의 보급을 요구하면서 적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일본 측은 페이튼호를 격침하려 하였으나, 당시 나가사키 수비 임무를 맡고 있던 사가번의 군대는 페이튼호를 공격할 수 있는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일본 측이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나서야 페이튼호는 나가사키를 벗어나 이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굴욕을 맛본 막부는 큰 충격을 받는다. 후유증도 컸다. 이국선(異國船)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죄를 물어 나가사키 부교와 멋대로 막부 직할령의 수비병력을 줄인 사가현의 중신 여러 명이 할복을 해야 했다. 사가번주는 100일의 폐문(閉門) 근신 처분을 받았다.
영일(英日)사전의 편찬
▲최초의 영일사전 《안게리아고린타이세이》
막부는 호전적인 이국선의 출현을 계기로 영국이라는 존재에 대해 경각심을 품고 나가사키 통사들에게 영어와 러시아어를 배울 것을 지시한다. 러시아어가 포함된 것은 당시 상관장이었던 되프가 둘러댄 거짓말 때문이었다. 되프는 화란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 알려지면 자신들의 독점무역권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러시아가 영국을 사주하여 나가사키의 방비(防備) 태세를 시험하기 위해서 온 것이며 화란 선박을 나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허위 보고를 했던 것이다. 이미 페이튼호 사건 1년 전에 러시아의 군함이 사할린 근처의 섬에서 위협적인 행동을 하며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었기에 막부는 되프의 말을 믿었다.
영어 공부를 지시받은 나가사키의 통사들은 영국 거주 경험이 있는 화란인 상관원 얀 콕 블롬호프(Jan Cock Blomhoff)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1811년 영어의 기본체계와 기초 어휘를 정리한 《안게리아겐고와게(諳厄利亞言語和解)》라는 책자를 발간한다. 이 책자를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3년 뒤에 6000여 표제어와 품사 등을 구분 수록하여 발간한 《안게리아고린타이세이》를 최초의 영일사전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서양 세력에 대한 막부의 경각심이 영어 학습의 동기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의 실천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사전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
서양 언어 사전을 최초로 만든다는 것은 기존의 한자로 된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지적(知的) 작용을 요구한다. 표의(表意) 문자와 표음(表音) 문자의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서양 언어로 표현된 개념을 일본어로 옮기기 위해서는 그 개념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안게리아겐고와게》에는 ‘handkerchief’가 ‘하나후키’(鼻拭き)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말로 하면 ‘코닦기’ 정도의 의미이다. 일본에는 없는 물건이지만 그 용도를 파악하여 적절한 대역(對譯)어를 조어(造語)한 것이다.
이보다 더 관념적인 단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liberty’를 자유(自由)로, ‘economy’를 경제(經濟)로, ‘physics’를 물리(物理)로 번역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 없는 개념을 번역하기 위해 사전의 편찬자들은 서양의 개념을 수용한 후 그를 자국어로 변용하는 언어의 재창조 작업에 몰두하였다.
최초로 그러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단어 하나하나가 문화의 충돌이었고 문화의 이양(移讓)이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번역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일본의 근대화에는 서구화가 본질적 요소로 내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의 관념을 일본의 관념으로 변환시키고 내재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는 그보다 70년 이전부터 수많은 지식인의 노력으로 닦아온 ‘언어의 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참고로 최초의 영한사전은 언더우드(H.G. Underwood)가 집필한 《영한자전》이다. 조선에는 마땅한 인쇄시설이 없어 1890년 요코하마에서 발행되었다. 언더우드는 서문에서 영어에 대한 한국어 사전이 없다는 것이 편찬의 동기가 되었다고 하면서 한국에 온 지 수개월 후부터 5년 동안 단어를 수집하는 준비 과정을 거쳤으며, 한영사전은 게일(J.S. Gale)의 도움으로, 영한사전은 헐버트(H.B. Hulbert)의 도움으로 완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월간조선 7월호
〈13〉 상인(商人)의 길을 밝힌 이시다 바이간
⊙ 이시다 바이간, 포목상 출신으로 45세에 은퇴한 후 학문 연마, 석문심학(石門心學)의
개조(開祖)가 됨
⊙ “상인이 이익을 취하는 것도 천하로부터 인정된 녹봉”
▲상인도를 정리한 심학을 개척한 이시다 바이간.
17세기 후반 일본은 체제적으로는 무가(武家)가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구조적으로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었다. 화폐는 주조되어 시장에 풀리는 순간 주조권자의 통제를 벗어났고 부(富)의 분배, 소비, 저축, 투자의 결정에 있어서 정치적 권위는 점점 시장에 주도권을 내주고 있었다. 화폐의 분배와 자본의 축적은 거대한 다층적 이해관계를 형성해 정치적 권위의 자의적(恣意的) 통제의 폭을 좁혔다.
초기 자본주의의 양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이러한 구조 변화의 과정에서 사회적 지분을 늘려간 것은 상인이었다. 도시화로 인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야 하는 유통 수요가 폭증한 일본에서는 여타 지역, 심지어는 유럽에 비해서도 상인 계층의 부상(浮上)이 두드러졌다.
상인들이 부를 축적하며 사회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자 일본 사회는 모순에 봉착한다. 상인 계층이 생산과 소비를 매개(媒介)하는 주체로서 사회 기능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에 기반한 재래의 신분 관념에서는 상인들이 여전히 최하급 계층으로 간주되는 일종의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에도시대의 상업
▲에도시대 시장의 모습.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상인들의 사회적 역할이 커졌다.
(천민을 제외하면) 가장 미천한 신분인 상인이 돈을 벌고 잘사는 모습을 대하는 여타 계층의 인식은 곱지 않았다. 상인들 스스로도 사회적 요구가 있으니까 자신들이 존재하고 부를 축적하는 것인데 신분적으로 여전히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다.
재래의 농본주의 (또는 생산자 중심) 관념하에서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상인들의 이윤 추구는 타인이 땀 흘려 생산한 결과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 이익을 편취(騙取)하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상업의 이윤 획득은 비천한 것으로 여겨졌고 무가들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수치(羞恥)’로 규범화하였다.
상인들은 상인들대로 눈앞의 이익 챙기기에 급급했다. 경제 호황으로 수요가 늘어날 때에는 투기와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일삼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정경유착으로 거래를 독점하고 일물일가(一物一價)가 아니라 상대를 보고 가격을 후려치는 것을 당연시했다.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낮아 어차피 명예와는 거리가 먼 처지였다. 오로지 돈만이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었다. 상업의 사회적 중요성은 점점 커지는 데 비해 상업을 바라보는 쪽도 상업에 종사하는 쪽도 상업의 정체성과 바람직한 존재 방식에 대한 가치관은 불모의 상태였다.
상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사회적 좌표 부여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를 배경으로 새로운 사상의 조류가 18세기 초반부터 태동한다. 그 물꼬를 튼 것이 석문심학(石門心學)의 개조(開祖)로 불리는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1685~1744)이다.
‘상업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
▲이시다 바이간은 자택의 방 하나를 개조해 강담소를 열어 심학을 강의했다.
이시다 바이간은 1685년 교토 인근 가난한 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농가의 자식들이 그랬듯이 바이간은 유소년기에 교토의 포목점에 견습생으로 보내져 혹독한 환경 속에서 도제식 상인 수업을 받는다.
10대 후반기에 일하던 포목점의 도산으로 귀향했다가 20대 초반 교토의 ‘구로야나기(黑柳)’라는 포목점에 다시 일자리를 잡아 판매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는 늦깎이 출발, 별 볼 일 없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근면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42세의 나이에 반토(番頭·대표)에 오른다.
20년 넘게 판매업의 일선을 지키는 동안 바이간은 현장 경험을 통해 상업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품게 된다. 바이간은 성격이 대쪽 같고 학구열이 높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불교, 유교 학습서를 품에 넣고 다니며 항시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다.
오구리료운(小栗了雲)이라는 학식 높은 재야 승려를 만나면서 그의 학식은 일취월장하고 학문도 틀이 잡힌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그는 43세에 현역에서 물러난 후 2년 뒤인 45세의 나이에 자신의 깨달음을 조용히 실천으로 옮긴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택의 방 하나를 개조하여 조그마한 강담소(講談所)를 개설하고 대중 강연을 시작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무료로 참가할 수 있는 오픈 강좌였다. 처음에는 반응이 신통치 않았지만, 강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의 강연에는 유불신(儒佛神) 어느 하나에 얽매이지 않은 포용성이 있었고, 자신이 무학(無學)의 아마추어 학자였기에 겪어야만 했던 고초(苦楚)를 바탕으로 청중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설명하는 배려가 있었다. 그의 강연은 무엇보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이었다. 상인들이 직역(職役)에 긍지를 갖고 매진(邁進)할 수 있도록 지적, 도덕적 동기를 부여하는 그의 강연은 곧 소문이 났고 문하생들이 몰려들었다.
‘상인의 도(道)’
▲이시다 바이간이 지은 《도비문답》. 에도시대 ‘상인들의 바이블’이 됐다.
바이간의 사상은 바이간과 한 유학자의 대담을 기록한 《도비문답(都鄙門答)》이라는 책에 요체가 정리되어 있다. 구(舊)제도권 사상을 상징하는 유학자와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사상을 주창하는 바이간 사이에 가시 돋친 설전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처럼 펼쳐지는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학자 : 상인들은 탐욕스럽고 사사로운 욕망〔私慾〕으로 행동한다. 그런 자들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고양이에게서 생선을 뺏는 것과 같다. (바이간이 강담소를 개설한 것을 두고) 그들에게 배움을 권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이간 : 상인의 도(道)를 모르는 사람은 사사로운 욕심으로 행동하고 결국은 타인과 자신을 모두 망치게 된다. 그러나 상인의 도를 알게 되면 사욕으로부터 벗어나 인(仁)의 마음을 얻게 되고 상인도(商人道)에 걸맞은 행동을 하여 번성하게 된다. 그것이 배움의 덕(德)이다.
유학자 : 그렇다면 파는 상품에서 이익을 취하지 말고 원가에 팔도록 가르치면 어떤가?
바이간 : 상인의 이윤은 무사의 녹봉과 같은 것이다. 상인이 이익을 취하지 않고 물건을 파는 것은 무사가 녹봉 없이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건을 만드는 직인에게 공임을 지급한다. 그것은 직인에 대한 녹봉이다. 농민들은 공납하고 남은 생산물을 소유한다. 이는 무사가 녹봉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인이 이익을 취하는 것도 천하로부터 인정된 녹봉이다.
유학자 : 상인이 매매를 통해 이윤을 취하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상인들이 남을 속이고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사실 아닌가.
바이간 : 그 말은 맞다. 세상에는 상인인 척하는 도둑이 있다. 생산자에게는 가격을 후려치고 소비자에게는 바가지를 씌우며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무리가 있다. 이것은 도둑질과 매한가지이나,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가르침이 없으니 그것을 수치라 생각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무도(無道)함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배움의 힘(力)이다.
《도비문답》에 담긴 바이간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상인들이 이윤을 취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멸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음을 당당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상인들도 이익 수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상인의 도가 있어야 함을 설파한다. 무사들에게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따라야 할 무사의 도가 있듯이 상인들에게도 스스로의 존중을 위해 따라야 할 상인의 도가 있다는 것이다.
‘후지산처럼 돈이 쌓여도 부끄럽지 않다’
▲이시다 바이간의 강담소. 이후 전국 34개 번에 180개소에 이르는 심학을 강의하는 강담소가 생겼다.
그가 제시하는 상인도(商人道-일본어로는 ‘아킨도’라고 읽는 경우가 많다. 상인도는 현대에 와서 바이간의 사상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유행한 말이며 실제 에도시대에 상인도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아니다)를 가장 함축적으로 대변하는 문구가 “真の商人は先も立ち, 我も立つことを思うなり”이다.
진정한 상인은 손님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도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무사가 ‘충(忠)’으로 주군을 섬기듯 상인도 ‘성(誠)’으로 고객을 섬겨야 하며, 자신의 이익을 줄일수록 손님의 이익이 늘어나므로 상인은 스스로 ‘검약’해야 하며 ‘제업즉수행(諸業卽修行)’, 즉 일은 곧 인격 수양이므로 나태를 경계하고 ‘근면’하게 맡은 바 소임에 정진함으로써 ‘신용(信用)’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바이간이 주장하는 상인의 도였다. 그는 상인들에게 이러한 도에 입각하여 정직하게 번 돈은 ‘후지산만큼 돈이 쌓이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며 상인들이 긍지를 갖고 생업에 종사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선의 유교적 전통이 우주의 원리로서 ‘이(理)’와 ‘기(氣)’라는 거대 담론에 치중하였다면, 일본의 유교적 전통에서는 인간의 원리로서 ‘심(心)’과 ‘성(性)’이 생활 철학으로 중시되었다. 심은 인간의 근본으로서 모든 사유, 인식의 출발점이며, 성은 개개에 나타나는 심의 발현이다.
바이간은 상인의 심은 본시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근본이며, 그 근본을 실현하기 위해 평소 성실, 검약, 근면의 생활태도를 견지하여 신용을 쌓음으로써 각자의 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심을 중심에 놓은 그의 사상은 문하생들에 의해 석문심학으로 체계화되고 다듬어져 교토, 오사카, 에도 등지에 그의 사상을 가르치는 강담소가 퍼져나갔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귀에 쏙쏙 들어오는 쉬운 화법으로 정리된 그의 사상은 일본 사회에 큰 울림을 전했다.
상인들은 물론 정치 개혁에 관심이 있는 막부나 번의 관료들도 심학 강의를 청취하였다. 바이간의 《도비문답》은 상인들의 바이블처럼 여겨져 에도시대에만 10회에 걸쳐 재판(再版)이 출간되었고 가장 많을 때에는 전국 34개 번에 180개소의 심학 강담소가 설치될 정도로 바이간의 사상은 대중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일본식 장인정신 문화의 토대
꼭 바이간의 영향만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에도시대의 유명 상가(商家)들은 무가(武家)를 본떠 상가의 가훈(家訓)을 지어 종업원과 자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하는 문화가 있었다. 신용을 중시하고, 가업(家業)을 소중히 하며 고객 만족을 위해 정직과 친절을 실천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교훈들이다.
현대 일본 경영학에서는 이를 시대를 앞서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실천적 사례로 보기도 한다. 비단 상인뿐 아니라 공(工)에 종사하는 직인(職人)들 사이에도 기술이 곧 마음이므로 기술 연마에 정진하는 것이 기술자의 본분이라는 ‘기시심야(技是心也)’ 또는 ‘심기일체(心技一體)’ 등 마음(心)을 중시하는 독특한 일본식 장인(匠人)정신 문화가 형성되는 등 성실, 검약, 근면의 삼덕(三德)과 신용 본위의 삶을 강조하는 석문심학은 일본 사회 전반의 인생관, 직업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8월 호
〈14〉 에도 지식인의 초상 ‐ 오규 소라이
⊙ 전국시대 거치며 승려의 지식 독점 마감, 실용주의 확산
⊙ 오규 소라이,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며 주자학 비판
⊙ 오규 소라이 이후 직접 공자 시대의 고전을 탐구하는 학풍 수립, 메이지 유신의 기반이 됨
▲‘일본의 마키아벨리’ 오규 소라이.
유럽 근대화를 촉발한 종교 개혁의 본질은 지식 혁명이다. 마르틴 루터의 성경 번역은 교회의 지식 독점을 해체하고 지식을 민중에게 돌리려 한 시도였다. 유럽의 근대화 과정은 교회의 지식 독점이 해체되면서 민중이 종교적 권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정치와 경제가 세속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유럽과 같은 드라마틱한 종교 개혁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교 개혁의 본질에 해당하는 과정이 근세기에 존재하였다. 형태만 다를 뿐 원리는 유사한 근대화의 궤적이다.
일본이 국가 체계를 갖춘 이래 지식을 독점한 것은 승려들이었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학문의 속성을 갖고 있다. 중국에 유학을 갔다온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권위를 얻었다. 유학(儒學)도 승려들이 경전을 반입하여 해석하고 전파하였다. 승려들은 세속 세력에 대한 지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사(國師), 즉 나라의 스승으로 모셔졌다. 승려들은 오랫동안 지식의 정점이었고, 교육의 중심이었다.
승려의 지식 독점은 비슷한 시기 고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해체 과정이다. 조선에서는 사대부가 등장하여 불교의 지식 독점을 해체했다.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해체의 주역이 되었다. 오직 실력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하극상(下剋上)의 시대였던 전국(戰國)시대를 맞아 기존의 권위는 의심되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지식과 정보가 중시되었다.
가장 먼저 천하통일에 근접하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뜻을 거스르는 불교 집단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척결하였다.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교세력의 무장을 해제하고 거주지를 제한하며 통제를 강화하였다. 억불 정책은 에도 막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승려들의 지적 권위는 무너졌고 정치는 종교에서 벗어나 세속화하였다.
이 지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지식 생태계가 분기(分岐)한다. 조선의 사대부는 본질적으로 지식인 집단으로, 불교의 지식 독점을 해체한 이후 스스로 지식을 독점하였다. 반면 일본의 무가는 스스로 지식을 독점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집권과 통치에 도움이 된다면 다양한 소스(source)의 지식을 취사선택하는 실용적·실리적 접근을 취하였다.
일본 주자학의 토대 닦은 하야시 라잔
▲일본 주자학의 토대를 닦은 하야시 라잔.
에도 막부가 집권 후 정권 차원에서 통치철학으로 채택한 것은 유학, 그중에서도 주자학이다. 그 토대를 닦은 것이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다. 1583년 교토에서 낭인(浪人·주군이 없는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하야시는 유소년 시절 교토의 건인사(建仁寺)에 위탁되어 불교를 공부한다.
사원이 소장한 방대한 서적을 탐닉하던 하야시는 불경보다 유학의 경전에 흥미를 느끼고 주자학 공부에 천착한다. 당대 유학의 권위자이자 스승이었던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천거로 이에야스의 상담역이 된 그는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 3대 이에미츠에 걸쳐 쇼군의 스승으로서 막부가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공고한 신분제, 예(禮)에 바탕한 사회 질서, 충과 효의 강조 등 막부에 시급하였던 통치 안정화의 이론적, 사상적 토대를 하야시가 완성해 주었다. 막부의 하야시 등용으로 주자학은 막부의 관학(官學)이 되었고 주자학은 무가(武家)의 필수 지식이 되었다.
주자학이 관학이 되기는 하였지만 무(無)비판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야시의 주자학은 조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론(理氣論)을 신봉하였고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배척하였다. 전술(前述)한 대로 일본의 무가적 전통은 지식의 교조화(敎條化)보다 실용적·실리적 융통성을 선호한다. 하야시의 도덕론, 관념론에 치우친 주자학 절대화 학풍은 곧 비판에 직면한다.
오규 소라이의 주자학 비판
▲오규 소라이를 중용했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그 선봉에 선 것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였다. 오규는 1666년 에도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좌천으로 모친의 고향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독학으로 불교, 유학의 경전과 고전을 탐독하면서 지식의 기반을 쌓는다.
부친의 복권(復權)으로 에도에 복귀하였을 즈음에 극심한 생활고로 저잣거리의 인정과 비정(非情)을 두루 경험한 그는 학문은 민중의 삶에 기여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오규는 후에 학식을 인정받아 관직에 오르고 8대 쇼군 요시무네에게 정치적 자문을 하면서 이러한 신념을 정치에 투영하려 하였다.
오규가 에도 지식사(知識史)에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정치적 실적보다는 그의 개혁적 사상에 있다. 당시 일본은 막부 창업 이래 1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내부적 모순과 갈등이 노정되고 있었다. 직전 20년간 아라이 시라이시(新井白石)가 주자학에 기초하여 주도한 정덕의 치(正德の治) 개혁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고 도시와 농촌 모두 불만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쇼군 요시무네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취임과 동시에 사회 분위기 일신과 제도 개혁을 모색한다. 에도시대 3대 개혁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향보의 개혁(享保の改革)’이다. 오규는 이러한 시대상 속에서 개혁 정책에 자신의 뜻을 반영코자 하였던 것이다.
오규는 당시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인정(人情)에 이끌리지 않는 규율과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정치 철학을 설파하였다. 어찌 보면 유가보다는 법가에 가까운 법치 중시의 사상이었다. 오규는 주자학이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기론(理氣論)이라는 틀에 세상을 끼워 맞추려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모순을 안고 있는 주자학으로는 세상을 개혁할 수 없으며 보다 현실적인 세계관으로 기성관념을 혁파하여 ‘안천하(安天下)’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정도(正道)라고 강조하였다.
일본의 마키아벨리
그는 주자학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중국어, 특히 고어(古語)를 집중적으로 연마하여 유학의 경전을 주자의 해석이 아닌 원전을 통해 직접 해석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중용(中庸)》을 받아들임에 있어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에 의존하지 않고 체계적인 방법론을 통해 원전을 분석한 《중용해(中庸解)》를 집필하여 주자의 해석이 오류와 독선으로 점철되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다른 관료나 학자들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유교적 도의(道義)를 논하면 오규는 원전을 근거로 선현(先賢)의 뜻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추궁하였다. 주자의 해석에 의존한 사람들이 원전에 근거한 그의 논박 이상의 지적 권위를 제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원전으로 읽은 사람과 다이제스트 번역본으로 읽은 사람 간에 논쟁이 붙었을 때 지적 권위의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규의 이러한 고전 중시 해석론은 ‘고문사(古文辭)학파’ 또는 그의 호를 따서 ‘겐엔(蘐園)학파’를 이루었다. “주자학 등 후세의 해석에 좌우되지 말 것. 직접 중국 고전으로 돌아가 배울 것”을 강조한 오규의 사상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실증적 연구와 고증을 중시하는 일본 유학계 학풍의 초석이 되었다.
오규의 학문적 성과는 후에 조선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오규의 《논어징(論語徵)》을 대거 인용하면서 “이제 그들(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우리나라를 훨씬 초월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일본 정치사상계의 대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政男)는 오규를 “근대성의 사상적 개척자이자 정치의 발견자”라고 평한다. 유럽의 지식사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것이 근대 정치의 토대를 닦았듯이 오규가 통치 철학으로서의 유학이 교조적 관념론, 도덕론에 치우치지 않고 실증과 실용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한 것은 근대 정치의 발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기틀
유학을 현실에 밀착시키려 한 오규의 사상은 중농주의적 유교관에서 탈피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용적 경제관을 바탕으로 위정자의 덕(德)을 도덕적 통치를 넘어 국가 경영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에도 후기 경세가들의 사상으로 이어졌다.
막부 관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주자학이 주류로 남아 있었지만, 시대 변화에 민감한 번에서는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유능한 경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막부 말기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압력으로 막부체제가 흔들릴 때 사쓰마, 조슈, 도사, 사가 등 서남지역의 번(藩)들은 유능한 경세가들을 전국에서 초빙하여 신지식으로 무장한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자체적인 부국강병, 식산흥업의 정책을 통해 국력을 배양하여 막부 타도 및 메이지유신, 근대국가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유학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망칠 수도 흥하게 할 수도 있다. 에도시대의 유학은 독점되지 않았고 종교화하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해석은 배척이 아니라 공존·경쟁의 길로 걸었다. 조선의 유교와 일본의 유학은 같은 뿌리에서 자랐지만 다른 열매를 맺었다.⊙
(15) 없음
〈16〉 ‘황금의 나라’ 지팡구
⊙ 에도 시대 서양과 접촉하기 훨씬 전부터 ‘일본’의 존재가 서양에 알려져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치팡구(Chipangu)는 카타이(중국)의 동쪽 1500 마일에 위치한 위대한 섬나라’
⊙ ‘Japan’은 ‘일본국(日本國)’이라는 한자의 남중국(오(吳)나라 계통) 방언 발음인 ‘Jih-pen-kuo’에서 유래
▲1561년에 제작된 제바스티안 뮌스터의 지도. 일본이 ‘지팡구니(Zipangni)’라는 이름으로 남북아메리카대륙의 왼쪽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화를 본질적 요소로 내포하고 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서구(西歐)의 사상과 관념을 수용하고 내재화하면서 급격한 서구화의 압력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것이 일본의 근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같은 시기의 청(淸), 조선과 일본이 가장 대별되는 사회발전 양상이기도 하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일본의 서구에 대한 이해도가 그만큼 타국(他國)에 비해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에 대한 높은 이해도는 그에 상응하는 교류의 역사를 전제로 한다. 한국에서도 센고쿠(戰國) 시대 포르투갈로부터의 철포(鐵砲)나 천주교의 전래 등으로부터 시작된 유럽과 일본의 교류 역사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의 유럽 교류사는 생각보다 역사의 연원도 깊고, 내용도 알차고, 교류의 방향도 일방적이지만은 않았다. 따라서 일본 근대화의 성공 요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유럽 간의 교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번 호부터 수회에 걸쳐 일본 근대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일본과 유럽 간 교류사의 하이라이트 몇 장면을 소개한다.
‘카탈루냐 지도’
▲아브라함 크레스케스가 1375년에 제작한 ‘카탈루냐 지도’.
1375년, 중세 유럽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한 편의 지도책이 ‘나침반의 달인’으로 알려진 유대인 지도제작가 아브라함 크레스케스(Abraham Cresques)에 의해 발간된다. 최초의 근대적 지도로 알려진 ‘카탈루냐 지도(Catalan Atlas)’이다. 카탈루냐는 최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문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지역이다.
카탈루냐는 1714년 스페인에 복속되기 전까지 고유의 언어를 가진 독립국으로 존속했으며, 중세에는 지중해 무역의 주역으로 크게 번성했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카탈루냐에서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에 의한 상업 활동이 활발했던 탓에 일찍부터 항해술과 지도제작 기술이 발달하였다.
후세에 ‘마요르카 지도학파’(Majorcan cartographic school)로 불리며 기존의 고대(古代) 지도보다 실제성과 실용성 면에서 진일보한 지도를 제작하던 크레스케스와 그 문하생들이 발간한 ‘카탈루냐 지도’에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지역과 지명이 다수 등장한다.
카탈루냐 지도는 세계전도(Mappa Mundi)의 형식으로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4장이 오리엔트, 즉 동방의 지리에 할애되어 있다. 기존에는 막연한 상상의 영역으로 표기되어 있던 동방 지역이 새로운 지명과 함께 세밀하게 묘사될 수 있었던 것은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 발간의 영향이 컸다.
베니스 출신의 이탈리아 상인이자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는 1271년 베니스를 떠나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로 향했으며, 1274년 몽골의 샨두(商都)에 입성하여 무려 17년 동안 원(元)나라에 머무르다가 자바, 말레이 반도, 스리랑카, 인도 등을 거쳐 1295년 베네치아로 귀향한다.
마르코 폴로는 1298년 베네치아와 제노바 간의 전쟁에 참가했다가 제노바의 포로가 되어 투옥되는데, 그곳에서 만난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켈로(Rustichello)에게 자신의 세계 여행 경험을 구술하여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이라는 제목의 기록을 남긴다. 《동방견문록》으로 알려진 바로 그 책이다.
《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을 지은 마르코 폴로.
고(古)이탈리아어 방언의 영향이 강한 프랑스어로 쓰인 《동방견문록》은 원본 발간 이후 수많은 사본과 번역본이 제작되어 유럽 전역에 퍼졌고, 당시 유럽인들의 동방에 대한 관심과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을 ‘카타이(Cathay)’라고 부르며, ‘그랑 칸’(大汗·‘위대한 군주’라는 뜻) 쿠빌라이의 지배하에 온갖 재화와 물산이 넘쳐나는 풍요로움의 땅으로 묘사한다.
《동방견문록》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마르코 폴로가 거짓말을 했다기보다는 그가 직접 목격한 것 이외에 현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소문이나 전설 등을 주요 소재로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당시 유럽인들의 세계관 또는 지적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마르코 폴로가 풍요와 신비함의 땅으로 묘사한 카타이를 비롯한 동방 일대는 이후 유럽 상인과 선교사들의 호기심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당시 유럽인들의 동방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여 동방 진출의 전초 작업으로 제작된 것이 ‘카탈루냐 지도’이다.
▲마르코 폴로가 ‘그랑 칸’이라고 표현한 몽골제국의 쿠빌라이 칸.
유럽인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한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인도’로의 신항로 개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마르코 폴로가 몽골의 그랑 칸이 지배하는 영역을 대인도, 중인도, 소인도 등 ‘세 개의 인도’로 기술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15세기 이후 대항해 시대를 거쳐 서양 세력이 동양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또는 본격적으로 동양을 탐하는) 역사의 시동을 건 것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서구의 동방 진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동방견문록》에 일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동방견문록》보다 앞서 10세기경 아랍의 지리지에 ‘와코쿠(倭國)’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와쿠와쿠’라는 지명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아직까지 일본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Japan’의 어원이 된 ‘치팡구’
《동방견문록》에서 일본은 ‘치팡구(Cipangu 또는 Chipangu)’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치팡구의 어원(語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그중에서 ‘일본국(日本國)’이라는 한자의 남중국(오·吳나라 계통) 방언 발음인 Jih-pen-kuo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방견문록》이 워낙 다양한 언어로 기록되어 치팡구의 스펠링은 일률적이지 않다. 현재 일본에서는 ‘지팡구(ジパング)’로 표기되고(이의 영향으로 알파벳도 일반적으로 ‘Zipangu’ 또는 ‘Jipangu’로 표기), 나아가 일본의 영어권 명칭인 ‘Japan’을 비롯하여 독일어의 ‘Japon’, 프랑스어의 ‘Jap'on’, 이탈리어어의 ‘Giappone’ 등 유럽어 계통 명칭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Japan’의 기원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이 자바나 말레이 반도 등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을 ‘Jepang’, ‘Jipang’ 등으로 부르던 것을 참고하여 유럽에 일본을 ‘Jap ̄ao(자퐁)’으로 소개한 것이 널리 퍼진 영향이 크다.
그러나 ‘Jepang’, ‘Jipang’ 등 동남아 명칭 자체가 ‘일본(日本)’의 남중국어 발음을 음차용(音借用)한 것이므로, ‘Cipangu’와 ‘Japan’이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치팡구 - 황금의 나라
▲일본을 침공한 몽골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그랑 칸의 지팡구 원정 이야기가 나온다.
이름이야 어찌 되었건, 마르코 폴로가 전하는 치팡구는 전설에나 나올 법한 ‘황금의 나라’이다. 《동방견문록》에서는 치팡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치팡구(Chipangu)는 카타이(중국)의 동쪽 1500마일에 위치한 위대한 섬나라이다. 사람들은 희고, 문명화되어 있으며, 좋은 대접을 받는다. 이들은 우상숭배자(Idolaters·비기독교신자라는 의미)이며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국이다. 이들이 보유한 금의 양은 끝이 없다. 이 금들은 이 나라에서 생산된 것이며, 왕은 금의 유출을 금하고 있다.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상인들은 드물며, 이에 따라 이들의 금은 측정할 수 없으리만치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내용을 필두로, 치팡구는 궁전의 지붕이 금으로 덮여 있고 마룻바닥은 금으로 깔려 있으며, 주민들은 장례 때 진주를 사자(死者)의 입에 올려놓고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다는 등 엄청난 보물이 널려 있는 나라로 묘사된다. 아울러 쿠빌라이 칸이 황금을 얻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으나 태풍으로 함대가 전멸하였고, 살아남은 일단의 병사들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끝에 화의(和議)를 맺고 현지에 거주하기로 했다는 등의 역사적 내용도 기술되어 있다.
《동방견문록》의 치팡구가 일본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이론(異論)도 없지 않지만,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당시 시대상과 정황 등을 들어 치팡구=일본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8세기경부터 사금(砂金)이 채취되었는데, 이 사금을 이용하여 당시 수도인 나라(奈良)에 황금으로 도금된 15m 높이의 대불(大佛)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을 방문한 신라, 당(唐)나라, 인도의 승려 등에게 일본의 황금 대불은 인상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또한 9세기 이후 수백 명 규모로 파견되기 시작한 견당사(遣唐使)들에게 1인당 수 킬로그램(kg)씩 사금으로 제조한 황금이 지급되었다. 이들이 중국에서 이 황금을 경비로 사용함에 따라 중국인들에게 일본은 ‘황금의 나라’로 알려지게 된다.
당시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이슬람 상인들에게 이 소문이 전해졌고, 이러한 상인들의 전언(傳言)을 이슬람 지리학자인 이븐 후르다드-비(Ibn Khurd^adh-Bih)가 자신의 지리서에 “개와 원숭이의 목줄이 황금으로 만들어지는 나라 ‘와쿠와쿠’”로 소개하였다(와쿠와쿠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니라 묘사의 내용상 열대 지방, 즉 동남아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치팡구는 일본인가?
송(宋)나라 시대에 들어 일본의 대(對)중국 교역은 더욱 활발해졌고, 일본은 동전,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하는 대가로 중국 상인들에게 사금을 지불하였다. 1124년 사금의 주산지인 오슈(奧州·일본의 동북부 지방, 현재의 이와테·岩手현에 해당)에 소재한 주손지(中尊寺)라는 사찰 내에 건물 전면(全面)에 금박을 입힌 ‘곤지키도(金色堂)’라는 법당이 건축된다.
오슈의 호족인 안도우지(安東氏)는 당시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주손지가 위치한 오슈의 히라이즈미(平泉)는 수도인 교토에 이은 제2의 도시로 크게 번성하였으며, 중국 상인들도 이곳을 빈번하게 출입하였다. 이들 중국 상인이 곤지키도를 목격하고 전한 황금 전당(殿堂)의 이야기가 중국인들 사이에 퍼져 황금의 나라 일본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풀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이후 몽골 제국의 성립과 함께 몽골에는 이슬람 상인을 비롯한 서역인이 왕래하며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무역이 전개된다. 당시 유라시아 무역의 동방 중심이 된 국제무역항 사이퉁(지금의 푸젠성 취안저우·泉州시)에는 수만 명의 이슬람 상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기존의 와쿠와쿠 전설에 중국 상인들의 곤지키도 목격담 등이 더해져 황금의 나라 일본에 대한 인식이 이들 서역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고, 마르코 폴로는 중국 여행 중 방문한 사이퉁에서 이들을 통해 치팡구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동방견문록》에는 쿠빌라이 칸의 치팡구 원정군 파견 스토리가 기술되어 있다. 여몽(麗蒙)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1274년과 1281년으로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체재하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도 치팡구가 일본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꼽히고 있다.
환상의 나라 일본
▲콜럼버스(왼쪽)는 여백에 메모를 해 가면서 《동방견문록》을 열심히 읽었다.
마르코 폴로가 말한 치팡구가 일본이건 아니건, 《동방견문록》에 수록된 치팡구는 유럽인들에게 동방의 신비롭고 진기한 보물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찾겠다고 동쪽이 아닌 서쪽 항로를 고집한 것도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치팡구에 먼저 도달하기 위한 동기가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일본은 생각보다 일찍부터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동경을 부르는 환상의 나라로 자리하고 있었다.⊙
〈17〉 ‘뎃포(鐵砲)’로 본 유럽과 일본의 만남
⊙ 다네가시마 영주, 병사 200명을 1년간 유지할 돈을 주고 포르투갈인으로부터 화승총 2자루 구입
⊙ 오다 노부나가, 뎃포 생산지 구니토모 점령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생산 관리 맡겨
⊙ ‘뎃포’의 국산화 성공은 일본이 외국 문물 받아들여 뿌리 내리게 한 대표적 사례
▲일본은 화승총이 전래되자마자 이것을 금방 자기 것으로 만들어 전국으로 퍼뜨렸다. 그림은 전국시대에 나온 사격 교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발간 이후 유럽인들은 동방으로의 길을 갈구한다. 향신료, 금을 원하는 세속적 동기와 기독교 포교의 종교적 이유가 교차하면서 욕구는 현실적 추진력을 얻고 행동으로 옮겨진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동방으로 가는 바닷길을 현실화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콜럼버스는 당시 존재하던 모든 지리·천문·역사 서적을 탐독한 후, 지구는 둥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론은 맞았지만 결론의 기반이 된 팩트는 사실 오류투성이였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유럽에 형성된 지리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구의 크기를 실제보다 훨씬 작게 추정하였고, 따라서 서쪽으로 3000마일만 항해해 가면 일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실제 유럽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는 1만 마일이 넘는다). 그러한 오류의 신념이 그에게 서쪽으로의 항해를 향한 용기와 자신감을 주었다.
콜럼버스가 3000마일을 항해하여 도달한 곳은 아시아가 아닌, 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불리게 되는 신대륙이었지만,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믿었다. 콜럼버스가 도달한 곳이 어디건, 그는 지구가 바다 끝에 낭떠러지가 있는 원반(圓盤)이 아니라 공처럼 둥근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인도로 가는 서쪽 뱃길이 존재한다면 동쪽 뱃길이 존재하지 않을 리가 없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진출
지중해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중계무역 덕을 톡톡히 보던 리스본 왕국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안(西岸)을 훑으며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워밍업을 하고 있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코 다 가마 등이 이끄는 원정대가 결국 아프리카를 둘러 아라비아해를 거쳐 인도로 가는 뱃길 개척에 성공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포르투갈인들은 콜럼버스 이전에 이미 서쪽으로 가면 신대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항해의 귀신들이었다.
유사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무력 충돌을 불사하며 경쟁을 벌이자 종교적 권위가 나선다. 1494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로 포르투갈·스페인 양국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고 대서양 한복판에 그은 선을 기준으로 스페인은 서쪽을, 포르투갈은 동쪽을 차지하기로 합의한다. 선을 어디에 그을지 밀고 당김 속에 남미의 브라질은 포르투갈, 아시아의 필리핀은 스페인 차지가 되었다. 유럽의 두 기독교국이 배를 좀 탈 줄 알게 되었다고 비기독교 세계를 평화롭게 나누자는 합의를 하고 교황은 그를 신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그 어처구니없는 합의가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신호탄이 되었다.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 ‘정복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들은 신대륙에서 원주민 학살을 마다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여 식민지를 점령하고 통치하면서 그곳에서 얻어지는 산물을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반면 포르투갈은 해양로 장악을 통한 해양영토 확보와 그에 따른 독점적 무역 이익 추구를 기조로 삼았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안(東岸), 아라비아해, 인도양에 이르는 해역에서는 핵심 거점 지역을 점령하면서 거대한 해양제국(Estado da India·포르투갈어로 ‘인도제국’이라는 뜻)을 구축했으나, (일부 동남아 제도·諸島 지역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권역에서는 해상 교역 루트 확보에 만족해야 했다. 중국·태국·베트남·일본 등 비유럽 문명권의 기존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기에는 힘이 부쳤기 때문이다.
인도 서부 해안에 위치한 고아(Goa·포르투갈령 인도)는 1510년 정복자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에 의해 포르투갈령이 된 이후 포르투갈 해양제국의 최대 거점이 되었다. 인도양 일대에서 획득된 막대한 양의 향신료와 노예가 고아를 거쳐 유럽에 수출되었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며 기독교 수호자를 자처하던) 포르투갈 왕실이 후원하는 선교사들이 고아를 기점으로 아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더 큰 부(富)를 찾아 동진(東進)을 거듭하며 중국에 접근할 기회를 노리던 포르투갈은 1553년 마카오의 일부를 명나라로부터 조차(租借)한다. 당시 중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외국인 전용 거류지였다. 이로써 인도양, 남중국해를 넘어 동중국해 일원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포르투갈의 해양로 거점이 완성된다.
다네가시마의 뎃포 전래
▲뎃포가 처음 전래된 다네가시마의 뎃포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진출하기 10년 전인 1543년, 일본과 포르투갈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1606년 일본의 승려 난포분시(南浦文之)가 집필한 《철포기(鐵砲記)》에 의하면, 1543년 8월 수상한 배가 다네가시마(種子島·규슈 남단에 위치한 섬) 해안에 표착(漂着)한다. 배에는 100명이 넘는 중국인이 타고 있었고, 그중에 흰 피부, 곱슬머리의 해괴한 외모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지역 책임자가 승선해 있던 중국인과 필담을 통해 남만(南蠻)의 상인들임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일본 문헌에 ‘牟良叔舍’(Francisco Zeimoto)와 ‘喜利志多陀孟太’(Antonio Da Mota)로 기록된 포르투갈인들로, 일본 땅에 최초로 발을 디딘 유럽인들이었다.
이들은 곧 도주(島主)인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 앞에 불려간다. 도키타카는 이방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호기심 충만한 젊은 지배자와 지배자의 환심을 사려는 이방인 사이에 중국어·포르투갈어 이중 통역으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도키타카는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길쭉한 막대 같은 물체가 무엇인지 묻는다. 이방인들의 답변을 들은 도키타카의 눈이 번뜩인다. 도키타카의 흥미를 눈치챈 이방인들이 곧 시연(試演)에 나선다. 과녁을 세우고 화약을 재운 후 방아쇠를 당기니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목표물이 박살난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 속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네가시마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에 일본에서 ‘뎃포’(鐵砲)로 불리게 되는, 근대 무기의 대명사 소총(musket)이 일본 땅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포르투갈과 일본의 만남에 대한 유럽측 기록은 이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포르투갈의 군인이자 외교관인 안토니오 갈바노(Antonio Galvano)는 포르투갈령 인도 일대의 통치를 관장하면서 현지의 사정에 대해 생생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1563년에 간행된 그의 저작 《신구(新舊)세계 발견기(Tratado dos Descobrimentos, antigos e modernos, feitos ate' a era de 1550)》에는 포르투갈인들의 일본 방문(또는 발견)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기술(記述)이 있다.
포르투갈인들, ‘지팡구’를 발견
〈1542년, 샴 왕국(지금의 태국)의 도드라에 정박해 있던 배의 선장 디에고 데 프레이타스 휘하 포르투갈 선원 3인이 허가 없이 정크선을 타고 중국으로 출항하였다. 안토니오 다 모타, 프란시스코 제이모토, 안토니오 벤토 3인은 북위 30도 부근에 있는 닝보(寧波)로 가고자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육지로부터 멀어져 바다로 떠밀려가다가 북위 32도에서 동쪽에 있는 섬을 발견했다. 그 이름은 일본(Japoes)이라고 하며, 실로 소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부귀(富貴)의 섬 지팡구와 같이 금은보화가 넘쳐 흘렀다.〉
일본과 포르투갈의 기록이 각각 1543년과 1542년으로 1년의 시차가 있어 어느 쪽이 정확한 연도인지를 놓고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일본과 서양의 첫 만남이 어떠한 시대적 배경과 정황하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1년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 하겠다.
갈바노의 기술에서 볼 수 있듯 그때까지도 일본은 유럽인들에게 마르코 폴로가 심어 놓은 환상의 황금 나라 ‘지팡구’로 인식되고 있었다.
뎃포의 위력에 반한 도키타카는 뎃포 2정을 2000냥을 주고 사들였다고 한다. 10냥이면 병사 한 명의 1년치 봉록에 해당하니 2000냥이면 200명의 군대를 1년간 유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훗날 이 소문이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유럽에 퍼지면서 일본은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챙길 수 있는 엘도라도의 땅으로 다시 한 번 유럽인들의 뇌리에 각인된다.
대장장이 딸 와카사의 전설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사격술을 습득한 도키타카는 뎃포에 푹 빠진다. 머리 좋은 가솔(家率)에게 작동법과 화약 제조법을 익히게 하는 한편, 한 정을 리버스 엔지니어링용(역설계) 샘플로 기술자에게 제공한다. 카피의 명을 받은 것은 섬에서 제일가는 도검(刀劍)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 기요사다(八板金兵衛淸定)였다. 기요사다는 이듬해인 1544년 뎃포 복제에 성공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음 접하는 메커니즘의 서양 무기이기에 낯설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간단한 구조여서 총신(barrel) 등은 솜씨 있는 대장장이라면 못 만들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나사’(screw)였다. 당시 화승(火繩·matchlock) 방식의 유럽 소총은 화약을 총신 안에 재운 후, 총열의 후미 안쪽을 암나사(bolt)로 깎고 수나사 마개를 돌려 넣어 폭발 압력이 배출되지 않도록 입구를 열었다 막았다 하는 것이 핵심 기술이었다.
당시 일본의 금속 가공 기술로는 정확한 매칭의 나사를 제조할 수가 없었다. 뎃포가 전래된 이듬해인 1544년 다른 배를 타고 포르투갈인 기술자가 다네가시마를 방문했을 때, 기요사다가 그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히 어떻게 나사 문제를 해결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네가시마 민담에는 대장장이 기요사다의 딸인 와카사(若狹)가 아버지를 돕기 위해 프란시스코 제모토와 결혼하여 해외로 나갔다가 1544년 포르투갈 기술자를 데리고 귀국하였다는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일본에서는 와카사를 유럽인과 혼인한 최초의 일본 여성으로 보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다(그 가련한 스토리로 인해 와카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오페라가 창작될 정도이다).
이렇듯 뎃포의 전래와 복제가 다네가시마에서 이뤄진 배경 때문에 뎃포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전까지 뎃포는 다네가시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뎃포’의 상업화
▲사카이의 뎃포공장. 상공업 중심지였던 사카이는 초기 뎃포 생산지 중 하나였다.
다네가시마의 복제 성공 이후, 뎃포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일본 각지에서 생산되기 시작한다. 다네가시마는 철 함유량이 높은 모래의 산지로, 그를 제련하여 생산한 철을 수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다네가시마에는 사카이(堺·오사카 인근에 위치한 상공업 중심지) 출신의 다치바나야 마타사부로(橘屋又三郞)라는 주물(鑄物)품 전문 상인이 체류하고 있었다. 다치바나야는 다네가시마 체류 기간 중 뎃포 제작기법을 익힌 후 사카이에 돌아와 뎃포 제작에 나선다. 사카이는 전국에서 상인과 기술자들이 몰려들던 곳이다. 다치바나야의 뎃포는 오사카와 교토의 긴키(近畿) 지역은 물론 멀리 간토(關東) 일대에까지 알려져 구매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다치바나야는 ‘뎃포마타’(鐵砲又)로 불리는 대상인이 되어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기이노쿠니(紀伊國·지금의 와카야마·和歌山현)의 유력 무장(武將) 쓰다 가즈나가(津田算長)는 뎃포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발 빠르게 움직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직접 다네가시마에 가서 뎃포를 손에 넣은 후, 도검 철장(鐵匠) 시바쓰지 세이에몬(芝辻淸右衛門)에게 복제를 의뢰한다. 시바쓰지가 복제에 성공하자 쓰다는 뎃포의 대량 생산을 후원했고, 이후 쓰다의 본거지인 네고로(根來)는 일대 뎃포 생산지가 되었다.
쓰다는 스스로가 뎃포의 명사수였으며, 그가 고안한 뎃포 활용 전술은 쓰다류포술(津田流砲術)로 불리며 뎃포의 실전화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쓰다 일족은 네고로지(根來寺)라는 사찰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는데, 쓰다의 지휘하에 뎃포로 무장한 이곳 승병들은 ‘네고로슈’(根來衆)라 불리며 센고쿠시대의 전란 속에서 주군(主君)을 바꿔 가며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용병 집단으로 활약하였다.
‘뎃포’ 생산 책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는 뎃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구니토모를 점령했다.
이외에도 히노(日野) 등 많은 곳에서 뎃포 생산이 이루어졌으나, 특히 주목할 곳은 사카이, 네고로와 함께 3대 뎃포 생산지로 명성을 떨친 구니토모(國友·지금의 시가·滋賀현)이다.
구니토모는 당시 집권 세력인 무로마치 막부가 직접 나서 뎃포를 전력화(戰力化)한 사례이다.
1544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는 다네가시마로부터 헌상받은 뎃포를 보고 즉각 뎃포 생산을 명한다(그의 아들 요시테루(義輝)가 명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내분과 하극상(下剋上)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략무기에 해당하는 뎃포의 존재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쇼군의 명을 받은 구니토모 젠베에(國友善兵衛)를 필두로 하는 구니토모의 대장장이들이 1544년 두 정의 복제품을 완성하여 쇼군에게 헌상한다(《구니토모철포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으나 연도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쇼군의 명에 의해 최신 전략병기를 생산하는 구니토모는 최중요 전략시설이 된다. 가장 먼저 구니토모를 낚아챈 것은 뎃포가 전쟁의 판도를 바꿀 것을 직감한 오다 노부나가였다. 오다는 구니토모에 뎃포 주문을 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1570년 아예 구니토모를 장악하고 소령(所領)으로 삼아 뎃포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이때 뎃포 생산을 관장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오다는 뎃포를 사용한 혁신적 전법으로 경쟁 다이묘들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전국 통일을 향한 기선을 잡았다. 오다의 휘하에 있던 도요토미 역시 뎃포의 생산과 사용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전문가였다.
도요토미의 뒤를 이어 덴카비토(天下人·전국을 통일하여 권력을 잡은 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구니토모를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핵심 기술자들에게 뎃포다이칸(鐵砲代官)이라는 공직을 부여하는 한편, 구니토모 이외의 무허가 뎃포 생산을 금하였다. 이에 따라 에도 막부 치하에서 구니토모는 실질적으로 뎃포의 생산과 관리를 독점하는 국가기관으로 기능하였다.
‘전파’와 ‘전래’
포르투갈에 의해 뎃포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1510년 고아를 접수한 포르투갈은 1515년 아르케부스(arquebus·일본에 전래된 화승총의 명칭) 생산을 위한 대규모 병기창(兵器廠)을 건립한다.
포르투갈의 해외 제국은 지도·나침반·아르케부스로 유지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르케부스는 포르투갈이 동방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은 존재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아르케부스를 가득 싣고 다니다가 문명의 정도가 낮은 곳에서는 아르케부스를 사용해 약탈에 나서고, 문명의 정도가 높은 곳에서는 아르케부스를 상품으로 판매하였다. 해적과 상인의 구분은 그들에게 무의미하였다. 1525년 고아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동남아와 중국 각지에 아르케부스가 전파되었다. 지팡구 전설에서 비롯된 일본에 대한 환상이 포르투갈의 동진을 부추긴 중요한 동기였기에, 일본에 뎃포가 소개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상황이었다.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 뎃포가 언제 어떻게 일본에 전해졌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뎃포를 받아들인 일본의 대응방식이다. 일본의 학자들 중에는 유럽 세력의 진출에 대한 동아시아 각 지역의 대응을 개념화하면서 ‘전래(傳來)’와 ‘전파(傳播)’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전래’는 ‘외부의 문물이 도입되어 현지에 뿌리 내리고 내재화되는 현상’으로, ‘전파’는 ‘외부의 문물이 도입되어 널리 퍼지는 현상’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유럽의 아르케부스가 ‘전파’된 것은 남아시아와 중국이 먼저이지만, 능동적 대응을 통해 전파가 짧은 시간 안에 ‘전래’로 성격 전환이 이루어진 곳은 일본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지 불과 수년 만에 뎃포의 국산화와 연이은 대량 보급에 성공하고 그로 인해 전쟁의 양상과 국면이 완전히 달라지는 획기적 변화가 일본에서 있었음을 생각할 때 딱히 부정하기도 어려운 일본인들의 자화자찬이다.⊙
03월 호
〈18〉 뎃포(鐵砲)가 운명을 바꾼 두 개의 전투
⊙ 신립의 8000 기병, 탄금대에서 일본의 조총 부대에 전멸
⊙ 오다 노부나가, 나가시노에서 3000명의 뎃포부대로 일본 최강 다케다군 기병부대 제압
⊙ 신립의 패전은 동시대 일본의 군사동향에 무지했던 정보전의 패배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왼쪽)는 기병대를 막기 위한 마방책을 치고 뎃포부대를 앞세워 다케다군의 기병대(오른쪽)를 완패시켰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으로 조선 침략의 선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은 상륙과 함께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일거에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한다. 밀양, 대구, 상주, 문경을 지나 불과 2주 만에 충주에 도달한 일본군은 삼도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이끄는 조선의 주력군과 맞닥뜨린다. 양측은 이곳에서 전쟁 초기의 향방이 달린 물러설 수 없는 결전을 벌인다. 소위 탄금대 전투이다.
조선 조정은 북방 여진족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신립에게 왜적 격퇴의 기대를 걸었다. 선조가 직접 나서 군주의 상징인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고 군무(軍務)에 관한 전권을 신립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4월 28일의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8000 병사(《징비록》 기록)는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패했고 신립도 군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졌다.
신립이 배수(背水)의 진(陣)을 치며 주력 부대를 남김없이 투입한 결전의 패배는 뼈아팠다. 한양 사수의 관문인 충주가 함락되자 도성까지의 길이 무방비 상태로 뚫리는 지경에 처했고, 임금과 중신들은 허둥지둥 도성을 빠져나와 피신을 가야 했다. 분노한 백성들은 궁성에 불을 지르고 백성을 저버린 지배층을 원망했다.
조총으로 기병 무력화(無力化)
탄금대 전투의 패인(敗因)은 무엇일까? 많은 연구자들은 신립이 방어에 유리한 산악지형의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 일대의 평지를 전장으로 삼은 것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지적한다. 신립은 기병전의 권위자였다. 자신의 장기인 기병 전법을 이용해 적을 패퇴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을 제압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전법이 일본군에게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신병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주위의 만류와 권고에도 불구하고 신립은 완고했다. 신립은 조총의 위력에 대해 “쏘는 대로 그것이 다 맞는다더냐?”고 반문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신립은 조선의 궁기병(弓騎兵)이 보병 중심의 일본군보다 전력(戰力)상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군과의 결전에 나선 신립의 조선군은 정예 기병을 주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병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지를 전장으로 택한 것은 어찌 보면 합리적 선택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일본군이 이미 조선의 기병을 무력화(無力化)할 수 있는 전술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마병의 최대 강점은 기동력과 돌파력이다. 적이 보유한 무기의 최대 사거리 언저리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마상(馬上) 활쏘기로 적의 예봉을 꺾은 후, 단숨에 전선을 돌파하여 적진을 교란시키고 진영을 붕괴시키는 것이 조선 기병의 전법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전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항하기 위한 솔루션을 예비하고 있었다. 약체로 위장한 중앙군을 전면에 내세우고 좌우에 주력군을 매복시킨 다음, 조선의 기병을 방심시켜 깊숙이 끌어들이고는 3각 화망(火網)을 형성하여 집중 사격함으로써 조선 기병을 제압하였다. 정예병인 기병이 제압되자 급조된 나머지 보조군은 그저 살육전의 사냥감 신세에 불과했다.
조선 기록에 의하면 탄금대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4명이라고 한다. 일본 문헌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15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조선군의 완패였다.
세상 모든 일은 지나고 나서 보면 쉬워 보이는 법이다. 조령이 아닌 탄금대를 택한 신립의 판단 또한 그 당시 그 현장에 서 보지 않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후세 역시 조상의 실책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쉬우나, 교훈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그 교훈의 피상이 아니라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같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말란 법이 없다. 신립의 판단을 한 개인의 자만심 또는 무모함으로 환원하여 교훈을 찾으려 한다면 별다른 쓸 만한 교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개인의 능력은 통제할 수 있는 변인(變因)이 아니다.
탄금대 전투의 교훈은 ‘국가로서의 조선의 안보 태세’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찾을 수 있고 또 찾아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본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이다. 승리의 첫 번째 요건인 ‘지피’는 현대전으로 말하면 ‘정보전’이다. 정보력이 열세인 전장에서 승리를 바라는 것은 전쟁을 운에 맡기는 것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이 가장 취약한 것은 정보전이었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전황(戰況)에 반영되었다. 탄금대 전투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다 노부나가 vs. 다케다
▲오다 노부나가는 뎃포부대를 앞세우는 군사상의 혁신을 단행했다.
탄금대 전투 이전에 일본에서는 탄금대 전투와 매우 유사한 전투가 벌어진 적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통일의 고삐를 바짝 당기는 계기가 된 ‘나가시노 전투(長篠の合戰)’이다.
1573년 천하통일을 놓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자웅을 겨루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급서한다. 신겐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反)노부나가 동맹의 견제로 천하통일 행보에 제동이 걸렸던 노부나가는 차례차례 반대세력을 제압하면서 승기를 확고히 할 기회를 모색한다. 다케다군을 꺾는다면 천하통일의 8부 능선을 넘을 수 있다.
노부나가는 다케다군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신겐의 뒤를 이은 가쓰요리(勝頼)는 다혈질의 젊은 무장이었다. 다케다군은 당시 막강한 기마군단의 최강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부친이 물려준 군사적 유산의 강성함에 큰 자긍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가쓰요리는 신겐 사후(死後) 동맹세력의 동요를 막고 신겐의 후계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부나가와의 한판 승부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양측의 결전을 향한 의지가 맞부딪친 곳이 미카와(三河の國 ; 지금의 아이치·愛知현)의 나가시노이다.
나가시노는 본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소령(所領)이었으나, 1571년 신겐이 탈취했다가 1573년 이에야스가 다시 차지하면서 양측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섬광 지역(flash point)’이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 연합세력의 일원이 되어 다케다가에 대한 협공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가쓰요리는 눈엣가시 같은 이에야스를 선공(先攻)의 타깃으로 선택한다. 1575년 가쓰요리는 1만5000의 정예군을 이끌고 미카와 침공에 나선다. 다케다군의 나가시노성(城) 포위 소식을 접한 노부나가·이에야스 연합군도 각각 3만 및 8000의 군사를 동원해 나가시노로 출정한다. 나가시노성 인근에 위치한 시타라가바라(設楽原)에서 대치하게 된 두 진영은 운명을 건 결전에 돌입하는데, 그 결과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뎃포부대를 주(主)전력화
▲다케다 가쓰요리.
노부나가는 다케다군과의 결전에 대비해 두 가지의 비책을 궁리해 두었다. 첫째는 뎃포(鐵砲·조총)부대의 주(主)전력화이고, 둘째는 마방책(馬防柵)의 도입이었다.
전투 초기 중장기병이 적진을 돌파하여 기선을 제압하면 후방의 보병이 백병전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다케다군의 전법이었다. 이에 따라 다케다군은 기병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지를 전장으로 선호하였다. 노부나가는 이러한 적의 승리 공식을 역으로 이용하였다. 노부나가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인 3000정의 뎃포를 확보한 후, 사수병을 5개 부대로 편제하여 주력부대로 삼았다. 뎃포 사거리 내로 적 기병을 깊숙이 유인한 후 마방책으로 군마의 기동력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마방책 배후에 배치된 뎃포 사수들이 집중 사격을 가해 기병을 제압하는 전술이 고안되었다. 후자(後者)의 집중사격법은 세계 최초의 ‘3단쏘기’(三段撃ち·volley fire ; 사수를 3열로 배치하여 사격과 장전을 교대로 행함으로써 사격 간 인터벌을 최소화하는 방식)로 알려졌으나, 이는 후세의 추측일 뿐 정확한 방식에 대해서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대량의 뎃포를 동원하여 부대를 편제하고 마방책과 연동된(현대로 치면 화망 형성 사격술에 해당하는) 집중 사격 방식을 고안한 것만으로도 뎃포 전력화에 한 획을 그은 획기적인 발전으로 평가된다.
전투가 개시되자 다케다군의 기마병이 바람같이 내달려 적진 앞에 도달하지만, 방책에 막혀 놀란 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방책 뒤에 늘어선 뎃포가 불을 뿜었다. 당대 최강 기마군단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총탄 세례 속에서 속절없이 스러져 갔다. 중앙 선봉대의 돌파가 좌절되자 우측 2번대, 좌측 3번대가 차례차례 돌격해 나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불과 8시간의 전투 끝에 다케다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퇴한다.
다케다 진영에는 역전의 명장들이 많았다. 이들은 개전 전부터 노부나가의 유인계(誘引計)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군에게 재삼 숙고와 자제를 요청하였으나, 젊은 혈기의 가쓰요리가 이를 뿌리치고 원정을 감행했던 터였다. 다케다가는 나가시노 전투로 인해 주력 전투부대를 완전히 상실하는 회복불가의 타격을 입고 패잔(敗殘)의 길을 걷게 된다.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강함만을 믿고 행동에 나선 가쓰요리는 그 대가를 멸문(滅門)으로 치렀다.
‘등자 명제’
▲방책 뒤에서 뎃포를 쏘는 병사들. 뎃포의 등장은 일본의 전술을 전면적으로 변화시켰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의 전쟁 양상을 일거에 바꿔 놓았다고 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는 널리 알려진 전투였다. 뎃포의 등장으로 기존에 필승 전력으로 인식되던 기마병의 중요성과 유용성이 재(再)정의되고, 전쟁의 승리 공식 자체가 뎃포를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결과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역사학계에는 ‘등자 명제(Stirrup Thesis)’라는 것이 있다. 일찍부터 등자가 발달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 달리 유럽에는 8세기가 되어서야 등자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타운센드 화이트는 등자의 등장이 8세기 이후 유럽 역사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등자 명제’라고 한다. 화이트는 등자의 사용으로 인해 장창(長槍)과 충격법을 주무기로 하는 중장기병(重裝騎兵)이 등장하였으며, 전장에서 활약이 큰 이들이 왕과 봉신 계약을 맺은 기사(knight)계급으로 성장하여 유럽이 봉건체제로 이행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이에 대해서는 기술결정론이라는 비판과 반론이 제기되고 있고, 화이트의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의 주장을 계기로 등자에 관심이 모아지면서 등자가 유럽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가설(假說)은 8세기가 아닌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훈족의 대침략 시 유럽이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던 것은 그들의 궁기병이 등자를 사용함으로써 유럽인들에 비해 안정된 마상 전투를 할 수 있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으로) 등자의 존재로 인해 기마병을 양성하는 시간이 단축되어 훈족이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설의 핵심이다. 즉 등자가 없던 시절에는 숙련된 기마병을 양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기마병 손실은 단기간 내에 메울 수가 없어 기마병을 주력으로 하는 전력 구성이 어려웠으나, 등자의 등장으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기마병의 명실상부한 주전력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무뎃포’
등자 가설이 얼마나 적확(的確)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꿰뚫어 본 뎃포의 가능성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당시 주전력인 기마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수년의 집중적 훈련과 기술 연마가 필요하였지만, 뎃포의 경우는 불과 몇 달의 훈련으로도 기마병을 제압할 수 있는 전력으로서의 활용이 가능하였다. 나아가 군비(軍費)의 면에서도 당시 뎃포가 매우 비싼 무기이기는 했지만, 군마를 사육·조련하여 전장에 동원하는 것에 비하면 비경제적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노부나가는 사카이(堺)와 구니토모(國友) 등 뎃포 주생산지를 우선적으로 손에 넣고 자원을 투입하여 뎃포 대량생산에 나서는 한편, 일자리가 없어 빈둥거리는 젊은 청년들을 대거 모집하여 뎃포 사수로 양성하였다. 그 결과 불과 3개월 훈련받은 아시가루(足輕·최말단 병사 계급)가 발사한 총탄에 10년을 전장에서 누빈 베테랑 기마 무장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핵심 전력의 개념 전환을 맞아 전쟁의 양상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뎃포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 되었다. ‘무뎃포(無鐵砲)’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앞선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나가시노 전투와 탄금대 전투는 교전자 간의 전력과 전술 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만약 조선이 일본의 동향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알고자 했다면 나가시노 전투에 대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문헌 어디에도 그러한 정보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립의 언행을 보아도 나가시노 전투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추측하기 어렵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신립이 뎃포와 방책(防柵)을 활용한 기병 무력화 전법이 일본에서 개발되었고, 일본군이 그러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른 판단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000년 전 중국의 전쟁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는 조선의 지배층이었지만, 스스로 한 수 아래의 야만국으로 규정한 일본에 대해서는 동(同)시대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터럭만큼도 알려 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탄금대 전투의 패인이 달리 있을까 한다.⊙
04월 호
〈19〉 일본의 뎃포 전력화(戰力化)는 전략적 ‘아웃소싱’의 산물이었다
⊙ 왜구, 16세기 이후 일본인 중심의 해적 집단에서 일본인·중국인·동남아인들이 참여하는 다국적(多國籍) 해상(海商) 집단으로 변모
⊙ 포르투갈-중국의 동아시아 무역에서 중국인 왜구 집단이 연결 고리 역할… 일본에 뎃포(조총) 전한 선박도 중국인 왜구의 배
⊙ 일본 다이묘들, 왜구의 경제적·전략적 이익 주목… 왜구를 통해 초석·목면·철 등 전략물자 입수해 뎃포 전력화에 성공
▲일본 나가사키에 온 포르투갈 무역선. 일본인들은 ‘남만선(南蠻船)’이라고 불렀다.
1543년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뎃포(鐵砲)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요동치게 하는 일대 요인이 되었다. 뎃포의 등장으로 전국(戰國)시대 패권 양상이 변화하여 통일 일본이 탄생하였고, 나아가 일본의 조선 침공으로 한·중·일(韓中日) 3국간에 대규모 국제전이 발발하였다. 신흥국의 부상(浮上)으로 세력 균형이 깨지면 신흥 강국의 현상타파 의지와 기존 강국의 현상유지 의지가 충돌하여 전쟁이 발발한다는 논리가 ‘투키디데스의 덫(Thucydides trap)’으로 불리는 고전적 전쟁론이다. 16세기 말 동아시아에서는 조선과 중국이 일본을 신흥 강국으로 여기고 견제하고자 하는 인식의 전환을 기할 틈도 없었다. 중화문명의 핵심부에 있던 두 나라는 변방국 일본의 침공을 받고 나서야 판도 변화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만큼 일본의 전력(戰力) 상승은 전격적이었다.
뎃포의 도입이 이러한 전란을 촉발한 중요한 기술적 요인이 되었다는 것에는 역사가들의 이론(異論)이 없다. 역사적으로 신무기의 등장이 세력 균형의 변동을 초래하고 전쟁으로 귀결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다만 16~17세기에 걸쳐 뎃포가 동아시아 각국의 전력에 미친 영향을 이해함에 있어 놓쳐서는 안 될 특기(特記) 사항이 하나 있다. 일본은 당시 뎃포 운용에 필요한 핵심 요소를 완벽하게 내재화하지 못한 ‘반쪽 상태’에서 뎃포의 주(主)전력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화약 제조가 어려운 나라
▲조선의 화포 천자총통. 조선은 화약 원료가 부족해 화포의 전력화(戰力化)가 쉽지 않았다.
뎃포의 무기화를 위해서는 제반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뎃포는 ‘화약’의 존재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화약은 인류 3대 발명품이라 불릴 정도로 역사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친 기술적 개가(凱歌)의 상징이다. 그만큼 15세기 이전까지 화약 제조 기술은 최중요 전략기밀로 취급되었다. 원(元)나라는 특수 관계의 부마국(駙馬國) 고려에도 그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다.
엄격한 통제를 뚫고 최무선이 원의 상인을 통해 어렵사리 카피한 것이 한반도 화약 역사의 시초였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중국의 화약 기술을 흡수한 고려는 당대의 화약 선진국이 되었다. 14세기 말에 이미 완성도 높은 화약을 제조하여 그 폭발력을 인명 살상력으로 전환한 무기를 제조하여 실전에 활용했다. 그를 이어 받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나 조선의 화약 기술은 다른 의미에서 보안을 유지해야 했다. 타국(他國) 전파를 우려하기 이전에 중국에 버금가는 화약 기술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괘씸죄로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한반도는 화약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단절된 관계였다. 현대 개념으로 말하면 원이나 명(明)은 고려나 조선이 우방국이 된 다음에도 화약이라는 전략기술을 이전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화약은 초석(礎石·saltpeter), 유황(sulfur), 숯(carbon)을 각각 75:10:15의 비율로 혼합하여 제조한다. 이들 중 핵심은 초석이다. 초석은 자연 채취가 아니라 제조(manufacture)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 공정이 꽤 복잡하여 우연적으로 그를 터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고려나 조선은 화약 제조법을 획득하기는 하였으나, 기술이 있다고 원하는 만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재료의 확보였다. 한반도에는 초석이 부족했다. 보다 정확히는 초석의 원료가 되는 질산칼륨을 다량 함유한 염초토(焰硝土)가 부족했다. 동물의 분변(糞便)에 소변의 요소(尿素)가 가해져 장시간 박테리아의 분해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이 천연 질산칼륨인데, 한반도는 염초토 생성을 위한 인구나 가축의 수가 부족하였다. 인위적으로 초석 생산을 늘리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일본, 무역을 통해 화약 기술 입수
유럽은 이보다 사정이 나았다. 일단 가축이 많았고 가축의 분변을 고(高)순도 질산칼륨 생성에 유리하도록 처리하는 기술이 있었다. 13세기 이후 아랍에서 건너온 연금술(鍊金術)로 축적된 화학의 기초가 도움이 되었다. 인도와의 직교역로가 열린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더욱 많은 양의 초석을 외부로부터 조달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화약 발명국이라 알려져 있지만, 기록이 없을 뿐 인도가 먼저 가연성, 폭발성이 높은 폭죽을 만들어 축제 때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인도에는 유럽보다 앞선 초석 제조 기술이 있었다. 그것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이 있었다. 유럽인들은 인도의 초석을 약탈적 무역으로 획득하여 가져갔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역사는 화기(火器)를 사용하는 전쟁으로 점철되는데, 인도에서 공급되는 초석이 없었다면 그 정도의 화기전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화약의 불모지대였다. 대륙과 한반도에서 기술 이전이 차단된 상태에서 독자적인 기술이 발생할 수가 없었다. 실질적으로 15세기까지 화약이 부재한 지역이었다.
전기(轉機)가 마련된 것은 16세기 중엽이다. 포르투갈인들이 일본 땅에 발을 디디면서 화약을 둘러싼 일본의 상황이 일변한다. 이때는 이미 유럽의 화약 기술이 중국을 넘어서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과의 조우를 기화(奇貨)로 단숨에 화약의 실전(實戰) 무기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중화(中華)체제하에서 중국으로부터 화약 기술을 정상적으로 입수할 방법이 없었던 일본은 그 체제를 우회하여 서양 세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화약 문명 편입의 돌파구를 마련한 셈이다. 중화 체제의 변방에 위치한 덕분에 누리던 자율성의 틈새가 득이 되었다. 틈새의 핵심은 ‘무역’이었다. 일본 스스로의 능동적 노력이 아닌 서양의 접근이 제공한 수동적 기회였지만, 어쨌건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해상 교역의 파일럿, ‘왜구’
▲중국-일본의 공(公)무역은 중국의 인가장을 소지한 주인선(朱印船)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본의 뎃포 전력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가 ‘왜구(倭寇)’이다. 한국에서는 노략질이나 일삼던 일본의 해상 도적떼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만, 왜구의 실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최근 서양의 동양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16세기 왜구에 대해 다양한 연구와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해석의 포인트는 왜구의 존재가 서양문물의 동아시아 전파에 있어 ‘길잡이’ 또는 ‘파일럿(pilot)’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같은 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15세기 이전의 왜구와 16세기 이후의 왜구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전자(前者), 즉 전기(前期) 왜구는 주로 일본 지역에서 발흥한 해적 집단이 주를 이루나, 후기(後記) 왜구는 인적 구성이나 활동 영역과 성격 면에서 완전히 다른 집단이었다.
후기 왜구는 중국인들이 주를 이룬다. 일본인들은 오히려 소수(少數)였고, 일부 동남아인들도 섞여 다민족(多民族)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러 갈래의 그룹이 있으나, 본거지에 따라 동남아 거점, 남중국 연해 거점, 일본 규슈 거점의 왜구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인들이 다수였음에도 ‘왜(倭)’구라고 부르는 것은 명나라의 사가(史家)들이 그러한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명의 사가들은 명의 법도에서 벗어난 불법 집단을 자국민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탓에 기존의 이국 해적에 대한 멸칭(蔑稱)을 사서(史書)에서 그대로 사용했다.
후기 왜구의 발흥은 명의 해금(海禁) 정책에 기인한다. 명은 조공(朝貢)무역 체제 유지를 위해 바닷길을 통한 사무역(私貿易)을 규제했다. 심할 때에는 연안 어부들이 아예 바다로 나가지 못하도록 출어(出漁)를 금지하고 연안 도서(島嶼)의 무인도화 정책으로 섬 주민을 강제로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이러한 폐쇄 정책은 남중국 연안 주민의 생존권을 크게 위협하였다. 중국의 푸젠(福建)성, 저장(浙江)성 일대의 연안은 토질이 척박하여 농업만으로는 거주민들의 생계 유지가 어려운 지역이다. 더구나 이곳은 당(唐), 원, 송(宋)에 걸쳐 대대로 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누린 경험이 있는 곳이다. 명 조정의 해금 정책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순응하기 어려운 압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 상인과 왜구의 만남
16세기 들어 명 조정의 통치력 약화를 틈타 밀어(密漁)와 밀무역(smuggling)에 나서는 주민들이 생겨났다. 변경 지역에서 무역(trade)을 억제하면 밀무역이 성행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현상이다. 특히 해안 지역은 그러한 속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바다는 드넓은 곳이다. 쾌속정이 단속을 하는 현대에도 바다를 통제하는 것이 어려운데 그 옛날 무동력선으로 관리들이 바다를 엄격히 통제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노릇이다. 무역 통제가 심할수록 밀무역의 이익은 커진다. 상인 기질이 뛰어난 광둥, 푸젠, 저장의 주민들은 점점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밀무역의 영역을 넓혀 갔다.
이러한 중국 쪽 밀무역 상인들의 활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 포르투갈의 등장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Goa)를 기점으로 15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진출을 모색한다. 말라카, 자바, 시암, 참파 등에 무역 포스트가 만들어지고 1540년대 들어서는 드디어 동중국해에 진입한다.
포르투갈은 명과의 무역을 희망했지만, 전술(前述)한 대로 명 조정은 조공무역 외의 사무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중국 밀무역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동남아 일대의 무역 포스트에서 거래를 트기 시작한 두 세력은 점점 활동 범위를 넓혀 동중국해 일대에서 이인삼각(二人三脚)의 무역 파트너십을 형성한다. 포르투갈인들이 유럽과 동남아에서 운반해 온 물자를 중국 상인들에게 넘기면 중국 상인들이 이를 자신들의 밀무역 유통망을 가동하여 처분하고, 그 대가로 얻은 이익을 포르투갈 상인들과 나누는 일종의 대리무역이 성행하였다.
1543년 이러한 활동에 종사하던 중국인 왜구 왕지(王直, Wang Zhi)의 정크선이 태풍의 영향으로 규슈 남단의 다네가시마에 표착한다. 바로 그 배에 일본에 조총을 전한 포르투갈인들이 타고 있었다. 유럽과 일본의 만남 자체가 왜구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일본 다이묘들, 왜구를 체제 내로 편입
▲왜구와 명나라 군대의 전투. 16세기 이후 왜구는 해적 집단에서 해상(海商) 집단으로 변모한다.
후기 왜구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니다. 처음부터 도적 집단인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중국 왜구들은 그저 생계를 위해 밀무역에 종사하다가 관헌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복귀 시 처벌을 면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신분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상업적 거래와 무력적 약탈을 병행하는 불법 집단으로 변모해 간 것이다. 이들의 해상 본거지에는 일본인들과 류큐인들이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하고 동남아인들이 합류하기도 하는 등 다국적 또는 무국적 변경인(邊境人) 집단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일본계 왜구와 중국계 왜구의 처지를 가른 것은 이들에 대한 출신국의 태도였다. 중국인들은 중국에 돌아가면 모두 범죄자로 처벌받는 신세였다. 일본의 다이묘(大名)들은 왜구의 이용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협력을 모색했다.
16세기 들어 동중국해에서 왜구들에 의한 밀무역이 성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과 명 사이의 공무역인 ‘감합(勘合)무역’이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이다. 중앙 통치력이 부재한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생존을 건 부국강병을 추진해야 했던 규슈 지방의 다이묘들은 왜구를 비호함으로써 공무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제적 이익을 올릴 수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포르투갈이 밀무역의 한 축으로 등장하자 왜구의 가치가 일본 다이묘들에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기존의 생사(生絲)나 도자기 등 사치성 소비재를 넘어 조총, 화약 등 전략물자 조달 중개자로서 왜구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아르케부스(뎃포)와 불랑기포 등의 총포류로 촉발된 화약 수요는 남중국과 일본 간에 상호 비교우위 품목의 교역 확대 유인(誘因)을 제공하였다. 공무역이 제한된 환경 속에서 왜구들에 의한 사무역 또는 밀무역은 그 이익 실현을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규슈 지방의 다이묘들은 유력 왜구 집단을 가신화하면서 능력 본위로 경제적·신분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이들의 해상 활동을 후원하였다.
뎃포 전력화의 핵심인 화약의 경우, 일본 규슈 지역에서는 고품질의 유황이 생산되었으나, 일본인들은 초석 생산 능력이 없었다. 반대로 중국 남부 해안 지방에서는 초석이 생산되었지만, 그곳의 화약 제조업자들은 질 좋은 유황 확보에 애로를 겪고 있었다. 공무역 체제하에서는 양자 간의 거래가 성립될 수 없었으나, 왜구는 그 체제를 우회하여 거래를 성사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규슈 및 세토 내해(內海) 일대의 왜구들이 다이묘들의 해상 전력 집단으로 포섭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무역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각 다이묘 관할 운송선의 경비(警備)와 안전 확보를 담당하는 일종의 해군 또는 해안경비대 역할이 부여되고 그에 상응하는 가신화(家臣化)가 진행된 것이다. 일본의 다이묘들은 왜구를 제도권으로 편입시키고 공적 영역으로 흡수하였지만, 명 조정은 끝까지 왜구의 존재를 부정하고 대역 죄인으로 취급하였다.
일본, 무역을 통해 전략물자 입수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상인들. 일본은 서구와의 교역을 통해 전략물자를 확보했다.
비단 화약뿐만 아니라, 일본의 뎃포 생태계 자체가 기본적으로 포르투갈-중국-일본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은 뎃포의 몸통 생산을 위해 남만철(南蠻鐵)로 불리는 주조철(鑄造鐵)을 수입했다. 기존에 도검류 제작에 사용되는 일본산 철은 사철(沙鐵)이라 불리는 단조용(鍛造用) 연철(軟鐵)로 주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만철도 화약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상인과 연계된 왜구를 매개로 하여 남중국에서 입수되었다.
뎃포는 ‘화승총(火繩銃)’이라고도 한다. 불을 붙이는 심지라는 의미의 화승은 한자로만 보면 짚으로 꼰 새끼(繩)라는 의미이나, 실제로는 목면(木棉)을 꼬아 만든 심지를 사용하였다. 뎃포의 등장으로 면은 소비성 직물을 넘어 전략물자가 되었다. 일본은 16세기 말에 면화 재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면포의 국산화가 이루어진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그 전까지는 면도 (조선과의 왜관무역 등 공무역도 있었지만) 밀무역을 통해 조달되었다.
일본은 이처럼 무역에 있어서 자율적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전략물자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이용 가치가 있다면 왜구이건 포르투갈인이건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조선이 많은 공을 들여 기술을 습득하고 민간에 폐를 끼쳐 가며 전국토를 훑어도 전략물자 확보에 애를 먹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가치가 있는 특기사항은 무역의 결제수단이다. 당시 국제 결제수단은 중국이 선호하는 은(銀)이었다. 무역의 길이 열리더라도 결제수단이 부족하면 그림의 떡이다. 일본은 은광석이 풍부하였지만, 제련 기술의 미발달로 은 보유고가 높은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던 일본이 16세기 중반 이후 갑자기 세계 유수의 은 생산국이 되었다. 1530년대에 조선으로부터 잠상(潛商·밀무역상)을 통해 회취법(灰吹法)이라는 은연(銀鉛)분리법이 도입되어 고순도 은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무역의 전략적 중요성에 눈 뜬 일본으로서는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에 터진 ‘잭팟’이었다.
신문물에 대한 개방성
이처럼 일본은 16세기 중반 이후 형성된 동아시아의 비공식 해상무역망에 한 꼭지로 편입되면서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전략물자를 무역을 통해 입수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한다.
일본의 뎃포 전력화는 그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전략적 ‘아웃소싱’의 결과물이다. 외부와의 통교(通交)를 통해 가용한 자원을 결합하여 즉각적 전력화를 기하는 한편, 기술의 흡수와 내재화를 꾸준히 병행한 것이 기존의 폐쇄 체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속도와 효율성으로 달성한 부국강병의 비결이었다. 신문물을 이념으로 배제하지 않고 이용 가치로 평가하고 개방적 태도로 수용한 실리주의가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유럽 세력의 진출과 함께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기술과 물자가 정치적 권위에 의한 배분이 아니라 상업 논리로 거래되는 환경의 변화를 맞아, 고유의 문물이 얼마나 우수한가가 아니라 타자(他者)의 문물을 어떻게 유입시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느냐가 국력의 척도가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대한 개방성과 수용성이 이후 동아시아 3국의 번영 또는 쇠퇴의 길을 갈랐다. 제1차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해도 좋을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조선은 무풍(無風)지대로 남아 있었다. 축복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저주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5월 호
〈20〉 동아시아 3국의 운명을 가른 ‘팩토리’
⊙ 포르투갈·네덜란드, 전 세계 해양을 연결하는 무역망 ‘팩토리’ 건설
⊙ 중국은 광주13공행, 일본은 나가사키 데지마 만들어 ‘팩토리’에 대응
⊙ 일본, 기독교 믿는 다이묘 등장, 자기들과 무역하지 않는다고 포르투갈과 무력분쟁 일으키기도
▲포르투갈은 해외 무역거점이었던 ‘팩토리’의 네트워크를 통해 해양을 지배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국가 또는 문명권에는 사활적(死活的) 이익이 달린 전략적 요충지(要衝地)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주요 해양로에 위치한 지정학적 거점은 어느 세력이 그곳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흐름이 갈릴 정도로 국가 또는 문명권의 흥망성쇠에 큰 의미를 갖는다.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선구로 촉발된 대항해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의 개념에 큰 변화를 불러온다. 소위 ‘팩토리’(factory)의 등장이다.
팩토리는 (물건을 제조하는 ‘공장’이라는 뜻이 아니라) 역사적 용어로서, 중세 말부터 근세에 걸쳐 원거리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한 무역항을 뜻한다. 본래는 특정 건물을 지칭하였으나, 점차 기능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무역지대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팩토리의 원형은 중세 유럽의 무역동맹인 한자(Hansa)동맹의 ‘칸토’(contor)에서 찾을 수 있다. 칸토란 한자동맹의 길드가 하안(河岸)이나 해안 도시에 설치한 역외(域外) 물산 집산지를 말한다. 한자동맹의 길드는 수상운송이 편리한 지역에 물류창고, 거래소, 사무소 등으로 이루어진 단지를 건립하고 지역 통치자와 계약을 맺어 이들 시설에 대한 일정한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일종의 초기 형태의 자유무역 지대라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 해양제국의 기초가 된 팩토리
대항해 시대의 물꼬를 튼 포르투갈은 칸토를 모델로 주요 해양로 거점에 무역관을 설치하였는데, 이 무역관의 명칭이 팩토리(포르투갈어로는 ‘feitoria’)이다.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 남단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 서안(西岸)을 거쳐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서안을 거슬러 올라온 후, 아라비아해를 건너 인도양, 남중국해, 동중국해에 이르는 동서교통 해양로를 개척하고 장악함으로써 당시로서는 미증유의 거대한 해양제국을 건설하는데, 이 해양제국의 기초가 된 것이 바로 팩토리이다.
포르투갈의 팩토리는 한자동맹의 칸토와 달리 이(異)문명 지역을 대상으로 설치되어야 했다. 오랜 항해 끝에 인종, 언어, 종교, 문화, 제도, 관습 등 제반 삶의 양식을 달리하는 이질적 지역과 조우한 후, 그곳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구축하고 생존 공간을 확보하는 작업은 사실 유럽인들만이 경험해 본 유럽의 전매특허 역사이다. 여타 인종 또는 민족은 그러한 역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미지 또는 미답의 영역에 발을 내딛고자 하는 강한 욕망은 지금도 유럽 문명을 특징짓는 요소의 하나이다. 당시 유럽인들의 정서를 지배하였던 경제적·종교적 열망은 동방 항로를 향한 모험을 촉발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인류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變曲點)을 가져왔다.
목숨을 건 모험이 대가를 바라지 않을 수는 없다. 치명적 리스크를 상쇄하는 보상으로서 독점적 무역이 추구되었고, 그 실현을 위한 장소적 기초로서 팩토리 확보가 최우선적으로 추진되었다. 포르투갈의 팩토리는 현지 세력과의 합의에 의하거나 무주지(無主地)를 평온하게 점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력행사를 통해 강제 점령해야 했다. 현지 세력의 적대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기에 팩토리는 방벽과 포대 등 군사시설을 갖춘 요새와 일체화되는 형태로 건설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전성기에 포르투갈은 50개가 넘는 요새화된 팩토리를 구축하였다. 이에는 북유럽의 앤트워프에서 시작하여 아프리카 동안(東岸)의 탕헤르와 세우타, 서안(西岸)의 모잠비크, 아라비아해의 호르무즈, 인도의 고아, 동남아의 말라카, 동중국해의 마카오에 이르기까지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을 아우르는 최중요 해상 요충지가 포함되어 있다.
팩토리의 중심에는 리스본에 소재한 인도무역청(Casa da I′ndia)이 있었다. 인도무역청은 팩토리를 관장하여, 해상제국 각지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상품과 보화(寶貨)들을 유럽에 유통시키고 관세를 거둬들이는 왕실 기구이다. 본국의 무역청과 해외 팩토리를 연결하는 해상교역망 구축을 통해 포르투갈은 당대 유럽 최고의 부국(富國)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처럼 팩토리는 해양제국 포르투갈의 힘의 상징이었고 국부의 원천이었다. 대항해 시대를 ‘팩토리의 시대’라고 명명하여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16세기 이후 초기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역사는 팩토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무역 네트워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선박. 네덜란드는 남아프리카-아라비아반도-동남아-일본에 이르는 팩토리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제해권을 장악한 네덜란드 역시 팩토리를 기초로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는 기본적으로 네덜란드어로 ‘factorij’라 불리는 지점간의 네트워크 조직이었다. VOC가 활약하던 시대에는 인도, 동남아 일대의 상업 플랜테이션 진전에 따라 팩토리가 단순한 상품거래소를 넘어 주요 원자재의 1차 상품화를 위한 집산, 가공소로 발전하면서 기능과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VOC의 팩토리가 설립된 대표적인 지역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예멘의 모카, 남인도의 캘리컷, 인도네시아의 암본,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 스리랑카의 콜롬보, 포르모사(지금의 대만), 데지마(出島, 지금의 나가사키) 등을 망라한다.
16세기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팩토리가 갖는 의미는 많은 지역에서 팩토리가 유럽과 현지 세력 간의 접점이자 유럽 신문물의 창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해양지대는 대항해 시대 이전에는 유럽과 직접 접촉할 기회가 봉쇄되어 있었지만,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과 직접 연결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팩토리는 그 이(異)문명간 연결의 핵심 고리였다. 앞서 설명한 대로 포르투갈의 해양제국은 영토 획득보다는 무역 이권의 독점을 목표로 형성되었기에 현지 세력과의 관계에서 충돌과 협력의 유인이 공존하였고, 그에 따라 그 관계의 양태도 침략적 수탈과 호혜적 무역이 교차하였다. 일례로 말라카 지역은 토착 이슬람 세력과의 60년에 걸친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면서 지역민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나, 명나라로부터 조차한 마카오는 동방의 진주로 불리며 무역항으로 흥성(興盛)하였다. 동서 교류의 지각 변동을 맞아 동아시아 각 지역의 운명은 유럽 세력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에 의해 절대적 영향을 받게 된다.
중국, 조공무역에서 해관무역으로
16세기 이후 한·중·일 3국의 역사 경로에서 각국 간에 가장 대별되는 지점의 하나가 바로 팩토리에 대한 수용 또는 대응의 역사이다. 명(明)과 그 뒤를 이은 청(淸)의 대외무역은 황제국이라는 이념에 종속되었다. 이에 따라 무역은 경제활동 이전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표하는 의식(儀式)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었다. 조공(朝貢)무역 체제를 기본으로 하였고, 특히 바닷길을 통한 사무역은 해금령을 통해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러한 중화질서 속에서 팩토리가 중국의 영토에 자리를 잡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1557년 마카오의 일부를 조차하여 팩토리를 건설하였지만, 마카오는 중국 본토와의 교역 창구가 되지는 못하였다.
전기(轉機)가 찾아온 것은 강희제(康熙帝) 연간인 1684년이었다. 청조(淸朝)는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기존의 유명무실한 시박사(市舶司)를 폐지하고 본격 해상무역 관리기관인 해관(海關)을 설치하는 교역 개방 조치에 나선다. 광저우(廣州)의 월해관(粤海關), 하몽(夏門)의 민해관(閩海關), 닝보(寧波)의 절해관(浙海關), 원타이산(雲臺山)의 강해관(江海關) 등 총 네 곳에 해관이 설치되어 외국 선박의 입항을 허용하되, 청 당국이 교역품을 통제하고 관세를 징수하는 관리무역 체제가 가동되었다.
이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본과의 교역 창구였던 닝보였다. 일본에서 유입되는 은과 일본으로 향하는 강남(江南)의 물산은 물량 면에서 여타 지역을 압도했고, 중국-일본-유럽을 잇는 삼각무역의 성행으로 유럽 상선들까지 몰려들면서 닝보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쳐 최대의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청 조정은 닝보의 독주와 광저우의 상대적 쇠락을 막기 위해 건륭제 연간인 1757년 모든 서양 선박의 기항을 광저우로 한정하는 상유(上諭, 황제의 조칙)를 발령한다. 소위 ‘일구통상’(一口通商) 조치이다.
중국의 항구에서 무역 중개 등의 상행위와 더불어 통관, 관세 징수 등 국가사무를 대리하여 수행하는 업자를 ‘행’(行)이라 한다. 광저우에는 명대(代) 이래로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이라 불리는 공행(公行) 연합(십삼행은 관용적 표현일 뿐 실제로는 더 많은 숫자의 행들이 있었다)이 있었다. 이 명칭이 서양에 ‘Kanton thirteen factories’로 알려진다. ‘行’을 ‘factory’로 번역하게 된 것은 유럽인들이 십삼행 소유 건물 또는 부지를 임차하여 광저우에 무역사무소를 두었기 때문이다. 비록 완전한 할양지나 조차지는 아니었으나, 광저우의 팩토리에는 유럽의 상인들이 상주하면서 무역 사무에 종사하고 대중국 통교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광저우는 18~19세기 초반에 걸쳐 유럽인들을 비롯한 인도, 아랍의 이국인들이 상주하고 대규모 화물선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국제도시가 되어 상업적으로 큰 활기를 띠면서 흥성하였다.
이 시기의 광저우는 현대인들이 방문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현대의 홍콩을 연상시키는 코스모폴리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광저우를 비롯한 남중국 일대에서는 유럽인들과 2인3각의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한 행상(行商)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신흥 세력으로 대두하였고, 청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무역항을 통해 유럽의 사상과 문물이 자연스럽게 중국 사회에 유입되었다. 남중국 연안과 배후 지역 일대는 섬유, 도자기, 차(茶) 등 수출 품목에 특화된 수공업과 연관 산업이 발달하였고, 그 대가로 유럽과 일본에서 유입되는 은(銀)이 넘쳐나면서 경제는 흥청거렸다. 베이징(北京)의 조정이나 내륙 거주민들은 여전히 중화사상에 젖어 유럽과의 무역을 오랑캐에 대한 시혜적 조치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들 무역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목도하고 경험한 중국인들은 세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가사키 데지마
▲일본은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를 만들어 네덜란드와 무역했다.
16세기 중반 유럽 세력과 최초로 조우한 일본은 누구보다 이 생면부지의 이방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1543년 다네가시마(種字島)에 최초로 발을 내디딘 이래 일본처럼 교역의 물꼬가 순조롭게 트인 곳은 없었다. 일본에 도달하기 전에 거쳐 온 인도, 동남아, 중국 등지에서 적대적 환경 속에서 어렵사리 교역의 문을 두드려야만 했던 포르투갈인들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교역의 문을 열고 자신들을 대하는 일본은 신비하고도 특별한 존재였다.
에도 막부가 1634년 나가사키에 데지마(出島)라는 인공섬을 만들어 네덜란드 상관을 이전하고, 쇄국정책의 기조하에 데지마를 유럽과의 교역 창구로 열어 두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데지마에 설치된 상관(商館)이 팩토리에 해당하는 시설이다. 네덜란드인들로서는 격리된 협소한 장소에 팩토리를 두는 것이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워낙 일본과의 교역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막대하였기에 거액의 사용료를 내면서까지 데지마에 팩토리를 19세기 중반까지 유지하였다. 데지마라는 인공섬의 조성 경위도 흥미롭지만, 사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본인들이 데지마 조성 이전인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쳐 당시 접근해 온 유럽인들에 대해 보인 인식과 태도였다.
▲ 히라도의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
포르투갈과 일본 사이에 가장 먼저 교역이 이루어진 곳은 히라도(平戶)이다. 히라도의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松浦隆信)는 1550년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히라도 체재와 선교를 허용하는 대가로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을 유치한다. 마쓰라가 기대한 대로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은 히라도에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기독교 포교로 인한 불교도들과의 마찰로 교회가 불타고 거래 분쟁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살상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포르투갈인들은 1562년 입항지를 인근 요코세우라(横瀬浦)로 옮겨 버린다.
요코세우라의 영주였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는 기독교 포교의 자유와 선교사의 안전을 확약하는 한편, 스스로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 기독교로 개종한 다이묘)가 될 정도로 포르투갈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기독교에 귀의한 오무라는 완전히 종교에 심취하여 주위의 친지와 가신에게 개종(改宗)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오무라의 독단적 행동은 곧 가신과 영민(領民)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오무라를 등지는 가신이 속출하고 요코세우라에 건립된 교회들이 습격을 받아 불타는 등 선교사와 선원들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자 포르투갈인들은 입항지를 후쿠다우라(福田浦)로 재차 이전한다.
1565년 10월 일본인과 유럽인 간에 벌어진 사상 최초의 무력(武力)분쟁으로 일컬어지는 ‘후쿠다우라 전투’가 발발한다. 후쿠다우라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포르투갈의 선박을 히라도의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 휘하의 군대가 공격한 사건이다. 마쓰라는 포르투갈인들이 히라도에서의 무역을 거부하고 여전히 오무라의 영지인 후쿠다우라에 입항한 것에 불만을 품고 포르투갈의 캐락선을 공격하는 보복에 나섰으나, 압도적인 포르투갈의 화력 앞에 무릎을 꿇고 패퇴하고 만다. 유럽 세력의 접근을 거부하며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곳은 많아도 자신들과 교역을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공격해 온 지역은 일본밖에 없을 것이다. 1570년 오무라는 더욱 안전한 항구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포르투갈인들에게 (당시 조그만 어촌에 불과하던) 나가사키를 제공하였고, 이후 나가사키는 유럽과 일본을 연결하는 접점이자 유럽의 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되는 관문으로 일본 역사에 큰 의미를 갖는 장소가 된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무풍(無風)지대 조선
▲천주교 의식을 거행하는 서양인 사제와 일본인들. 일본 다이묘들은 무역의 이익을 얻기 위해 천주교를 수용했다.
전국(戰國)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 속에서 규슈 일대의 다이묘들은 군사적·경제적 힘을 기르기 위해 전력(全力)을 경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환경하에서 눈앞에 나타난 포르투갈인들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세력에 결부시켜야 하는 포섭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이 여타국과 일본이 가장 대별되는 점이다. 다이묘 간에 기독교 개종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유럽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유럽 세력과의 통교와 신문물의 적극적 도입을 통해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려 한 대표적 존재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에 접어들어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기독교 포교 세력을 추방하고 일본이 원하는 형태와 방식의 교류만을 남겨두려 하고, 네덜란드가 그에 동의하면서 데지마에 팩토리가 설치되었다. 데지마가 위치한 나가사키는 유럽과의 문물 교류의 관문이자 난학(蘭學)의 중심지로서 200여 년 동안 일본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이 되어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선 땅에는 팩토리가 존재한 적이 없다. 벨테브레나 하멜 등 조난에 의해 표착한 경우를 제외하면 조선과 유럽의 본격적인 접촉 자체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300년이나 늦은 19세기 말에 이루어진 상황에서 팩토리가 한국의 역사 속에 자리할 여지가 있을 수가 없다.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제1차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흐름에서 조선은 완전히 초연(超然)한 무풍(無風)지대로 남아 있었다. 이보다 유럽과의 접촉이 늦고 유럽 문명에 대한 노출 기간이 짧은 지역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그토록 세계와 단절되어 있던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이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을 넘보는 나라가 되었으니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