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51/ 일본4/ 일본 여행 - 후쿠오카-나가사키-가고시마 - 오키나와 이야기 - 홋가이도
지구촌 여행/국가별51/ 일본4/ 일본 여행 - 후쿠오카-나가사키-가고시마 - 오키나와 이야기 - 홋가이도
◆ 일본 여행 2015-01-19
김현주 광운대 교수
◇(1) (서울-후쿠오카-나가사키-가고시마)
▲후쿠오카 텐진(天神)
- (마음 편한 일본 여행) 언어는 몰라도 일본여행은 언제나 마음 편하다. 언어가 자유로와도 뭔가 한두 가지 불편한 미국이나 유럽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포근함이 있어서 좋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세계에서 용모가 가장 비슷한 두 민족 아닌가? 버스로 텐진(天神)에 내려 호텔을 찾아들어간다. 한국인들이 들이닥친 후 후쿠오카의 모든 시설과 도로안내판, 심지어 시내버스 안내방송과 안내전광판에도 한국어가 나온다. 예약한 호텔에서 텐진역과 버스센터가 지척에 있으니 여행이 무난히 풀릴 것 같은 기대감에 부푼다. 하카타(博多)와 텐진을 합쳐서 탄생한 후쿠오카는 도시 사이즈가 적절해서 도심의 왠만한 지역은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어서 좋다.
▲어항(漁港) 위로 도시고속도로가 지난다
▲후쿠오카 시내를 운하가 관통한다
▲후쿠오카 환락가 나가수(中州)의 어느 골목. 신정 연휴로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하카다(博多) 카날시티
- 카날시티에서 돈코츠라면으로 저녁을 먹는다. 역시 일품이다. 식당가는 만두(餃子), 나베(鍋) 등 음식의 낙원이다. 큰 골목 작은 골목, 앞 골목 뒷 골목을 누비며 오랜만에 찾은 일본 분위기에 젖어드는 저녁이다. 호텔에 돌아와 삿포로 맥주 한 캔으로 목을 축인다. 가끔씩 시간 맞춰 지나가는 전철의 바퀴 소리가 오히려 경쾌하게 들린다.
2일차. 2015. 1. 5 (월) (후쿠오카 - 나가사키 왕복 - 가고시마 행)
- (상쾌하게 아침을 연다) 한국에서 구입해 온 全산큐패스 3일권을 오늘부터 시작한다. 기왕에 왔으니 욕심을 내어 남큐슈 가고시마(鹿兒島)부터 북큐슈 간몬해협(關門海峽)너머 시모노세키(下關)까지 둘러보는 분주한 여정을 시작하기 위하여 새벽에 길을 나선다. 버스터미널 직원의 친절함으로 상쾌한 아침을 연다. 한때 세계 1위 경제대국 자리를 넘보며 잘나가던 이 나라가 정치, 경제, 금융, 교육의 비효율과 개혁 실기(失機)로 어두운 터널을 헤매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도 포근한 날씨다. 북큐슈 지역은 아침 최저 5도, 낮 최고 15도를 예상한다
▲쿠마모토항-시마바라항 페리 Ocean Arrow
▲시마바라(島原)항
- (역사의 슬픔 머금은 시마바라) 후쿠오카를 출발한 고속버스는 한시간 반 걸려 쿠마모토 교통센터에 도착했다. 연휴를 끝낸 새해 첫 출근길로 거리는 분주하다. 인국 73만명의 쿠마모토는 쿠마모토성과 아소산(阿蘇山)으로 유명하다. 버스센터 인근에는 일본에서 세 번 째로 큰 쿠마모토성이 우아하고 우람하게 서있다. 시내버스로 쿠마모토항으로 이동하여 오션애로우(Ocean Arrow) 페리로 시마바라만(島原灣)을 30분만에 건너 나가사키현 시마바라(島原)에 닿는다. 1,486m 높이의 헤이세이신잔(平成新山)이 시마바라항 바로 앞까지 드리워진 모습이 장엄하다. 시마바라는 전통 일본식 가옥과 소담한 골목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지만 3만7천명의 기독교도들과 농부들이 참수당한 시마바라혁명(Shimabara Rebellion, 島原の?, 1637-1638)의 애절한 역사가 서린 곳이다. 1991년에 분출하여 43명의 사망자를 내고 도시 일부를 잿더미로 만든 운젠(雲仙) 화산 또한 이 도시에 아픈 기억을 보탠다.
▲운젠 지고쿠(雲仙地獄)
- (큐슈여행의 필수품 산큐패스) 페리터미널 앞에 운젠행 버스가 정확하게 시간맞춰 온다. 이 버스 또한 산큐패스를 이용한다. 징그러울 정도로 시간이 정확한 일본의 대중교통수단 덕에 나의 여행은 당초 준비했던 스케줄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진행된다. 오션애로우 페리도 그랬지만 이 벽지를 운행하는 시마데스(島鐵)버스도 산큐패스로 문제없다. 산큐패스가 아니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동많은 여행은 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 온천의 유황 냄새와 수증기로 가득찬 운젠지고쿠(雲仙地獄) 입구에서 이사하야(諫早)행 버스로 갈아탄다. 물론 나가사키(長崎)는 후쿠오카에서 고속버스로 직행하면 훨씬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지만 페리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시마바라 반도를 통과해 보려고 일부러 복잡한 여정을 계획한 탓에 여러번 버스를 갈아타고 있는 중이다. 미국 대통령과 이름이 같은 오바마(小浜)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굽이굽이 돌아 버스는 이사하야에 닿는다. 여기서 나가사키행 고속버스로 갈아타니 복잡한 여정이 무사히 마무리된다.
▲나가사키 트램(노면전차)
- (비운의 나가사키) 나가사키 반도는 험한 산들로 둘러싸인 때문인지 도쿠가와 막부(?川幕府, 에도막부)의 쇄국 시절(17세기초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약 260년간) 개항지로 지정했을 것이라는 추리를 해 본다. 나가사키는 아름다운 도시지만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 째 원자탄 투하로 10만명이 희생된 아픔많은 곳이다. 원래 원자탄은 북큐슈 고쿠라(小倉) 철강산업 지역에 투하될 예정이었으나 그날 고쿠라 상공에 낀 짙은 구름 때문에 B-29 폭격기는 나가사키로 기수를 돌렸으니 겹치고 겹친 불운 끝에 참혹한 결과를 맞이한 것이다.
▲나가사키 평화공원
▲나가사키 원폭 투하지점 원점
-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하여 조성한 평화공원을 먼저 찾는다. 원자탄 덕에 해방을 맞이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순간 느끼는 묘한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다. 평화공원의 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공원 옆에는 원자탄 낙하 원점(원點)이 추념되어 있고 당시이 곳에 있던 형무소 외벽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인근 우라카미성당(浦上天主堂)은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으나 원폭투하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은 같은 자리에 새로 지은 붉은 벽돌 건물이 서있다.
- (글로버 언덕 야경) 그린라인 전차종점인 이시바시(石橋)역에서 글로벌 스카이로드(Glover Skyroad)를 찾아간다. 경사진 엘리베이터를 끝까지 타고 오르니 나가사키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산 서구 감천고개 마추픽추를 연상하게 하는 이 높은 언덕에서 보이는 나가사키 도시와 항만의 풍경은 압도적이다. 로프웨이를 타고 올라가는 이나사야마(?佐山) 야경이 천만달러짜리라지만 글로버 언덕의 야경도 못지 않게 아름다룰 것이다. 다만 해질녘까지 이 도시에 머무르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나가사키 전경 1
▲나가사키 전경 2 (부산 감천고개를 많이 닮았다)
- 글로버 언덕 주변에는 글로버 정원, 외국인 주택지역, 그리고 오우라(大浦)성당 등 볼 것이 많다. 1933년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성당은 일본의 기독교 공인을 기념하여 1864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건립한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목조 고딕양식의 성당은 아무리 보아도 특이한 모습이다.
▲오우라 성당
▲나가사키 차이나타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이다.
- (개항과 쇄국 사이) 국제페리터미널 지역으로 내려가 차이나타운을 탐방한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중국 상인들과 선원들의 거류지였던 곳으로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이다. 역전으로 돌아가 26성인순교지를 찾는다. 1597년 초기기독교인 20명과 유럽인 선교사 6명이 처형당한 곳이다. 26인 순교자들은 1862년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이렇듯 개항기 물밀 듯 밀려오는 서양 세력과 쇄국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사연을 나은 도시를 떠나 후쿠오카 텐진에 돌아오니 밤 10시 가까운 시각이다.
▲26인 성인 순교지
3일차. 2015. 1. 6 (화) (가고시마 → 후쿠오카 도착)
- (사쿠라지마) 가고시마행 야간버스에서 새날을 맞는다. 버스는 세찬 비를 뚫고 남국으로 향한다. 가고시마에 도착하니 여전히 빗줄기가 세차다. 일출을 기다려 사쿠라지마 페리에 오른다. 가고시마만의 검붉은 바다를 15분만에 횡단하여 사쿠라지마에 도착했지만 비 때문에 온다케(御岳)산의 화산을 볼 수 없다. 사쿠라지마 페리터미널에서 섬내 버스를 타고 20여분 이동하여 아리무라(有村) 용암전망대를 찾아 이른 아침 나 혼자만의 대자연을 누린다. 여기서 보는 섬 풍광은 하와이 빅아일랜드를 연상하게 한다. 화산재가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것 같다. 더욱 거세진 비 때문에 아름다운 사쿠라지마를 더는 둘러보지 못함을 안타까와하며 가고시마행 페리에 오른다.
▲사쿠라지미 아리무라(有村) 용암전망대
▲사쿠라지마 페리터미널
- (젊은 사쓰마의 군상) 먼저 가고시마 중앙역을 찾는다. 화산재를 뿜고 있는 사쿠라지마도 인상적이지만 가고시마는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薩摩) 세력의 본거지로 더욱 의미가 큰 도시이다. 역전 광장에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群像)’ 동상이 방문자를 반긴다. 1865년 아직도 쇄국정책이 짓누르던 시절, 스코틀랜드 사업가 글로버(Glover)의 도움을 받아 막부에서 극비리에 파견한 19명의 젊은 유학생들을 기념한 동상이다. 이들은 일본을 떠나 당시 영국이 통치했던 홍콩, 싱가포르, 봄베이, 수에즈, 몰타, 지브롤터를 거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이 보고 배우고 느낀 서양의 문물과 제도는 훗날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명분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가고시마 중앙역전 ‘젊은 사쓰마의 군상(群像)’ 동상
- (역사루트 유신 후루사토) 가고시마 중앙역 부근 고쓰키 강(甲月川)을 따라 역사루트 ‘유신 후루사토(故?, ふるさと)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강변 녹지대에 무가저택 및 사쓰마 영웅들의 탄생지와 성장지, 교육장들을 재현해 놓았다. 한 나라의 운명은 순간에, 적은 무리의 선각자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당시 일본에는 역사의 서광이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높은 파도를 깨우치며 서구의 힘을 느낀 끝에 다른 모든 아시아 나라들에 앞서서 일본이 쇄국을 벗고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일본굴기’(?起)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 (하비에르 선교사) 비가 좀처럼 그칠 줄 모르니 일본열도 남쪽 끝 변방도시를 방문한 기억을 더욱 강렬하게 남겨준다. 도시순환버스 시티뷰버스로 한 바퀴 돈다. 가고시마에는 상륙기념비, 체류기념비, 하비에르 공원 등 1549년 이 도시에 첫 발을 디딘 에스파냐 출신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하비에르(Francis Xavier)의 흔적이 많다. 가고시마는 이렇듯 일본에서는 변방 중의 변방이지만 가장 남쪽, 바깥 세계와 통하는 길목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외세와 가장 먼저 접촉한 운명을 타고난 도시이다.
▲역사루트 ‘유신 후루사토(故?, ふるさと)의 길’
- (서로 조금씩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한국과 일본) 후쿠오카로 돌아오는 버스에 오른다. 날이 개이기 시작하니 아름다운 남국의 산하가 드러난다. 볕이 쏟아지는 들녘이 찬란하게 아름답다. 일본에서 가장 온화한 기후를 가진 남큐슈를 떠난다. 후쿠오카까지는 부지런히 달려도 5시간 가까이 걸리는 길이다. 큐슈 남쪽 끝과 북쪽 끝의 거리가 서울-부산 정도의 거리이다.
큐슈 면적이 남한의 43%쯤 되는 것을 보면 일본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님을, 아니 역설적으로 우리나라가 얼마나 좁은 땅인지 확인한다. 고속도로에는 차가 드문드문 있고 버스나 트럭 이외에는 대부분 경차다. 연중 자동차와 통행객으로 붐비는 한국의 고속도로와 휴게소를 비교해 본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뭔가 서로 조금씩 지나치거나 아니면 뭔가 모자라는 듯 하다면 적절한 표현일까? 후쿠오카 호텔로 돌아오니 마치 내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다. 1박 2일의 남큐슈 여행이 무사히 끝남에 감사한다.
(2편에 계속)
(2) - 오키나와 - 열강 사이 풍전등화같은 소국의 운명
서울 출발 -(티웨이항공)- 후쿠오카 -(버스)- 나가사키 -(버스) (후쿠오카 환승) (야간버스)- 가고시마 -(버스) (후쿠오카)- 시모노세키 - 모지 - 후쿠오카 -(Peach 항공)- 나하, 오키나와 -(Peach 항공) (오사카 환승)- 삿포로 -(열차)- 구시로 -(열차)- 아바시리 -(열차) (삿포로)- 오타루 왕복 -(열차)- 하코다테 왕복 - 삿포로 -(티웨이항공) - 서울 도착 (여정표는 맨 끝 편에 첨부)
▲4일차. 2015. 1. 7 (수) (후쿠오카 - 시모노세키. 모지 왕복 - 나하, 오키나와 도착)
- (간몬해협과 세토내해) 시모노세키 가는 길은 공장지대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높은 산들과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기타큐슈(北九州)에 거의 다다르니 조선소, 제철소 등 번잡한 공업지역과 거대한 도시군이 나타난다. 고쿠라(小倉)는 2차대전시 미군의 원자탄 투하 원래 목표였을 만큼 제철소를 비롯한 전략산업 집결지이다. 기타큐슈시는 1963년 5개 인접 도시를 통합하여 탄생했으며 시모노세키까지 합치면 인구 130만명의 메트로폴리스이다. 후쿠오카 출발 한 시간 남짓 지나 긴 터널을 나오니 드디어 멀리 간몬해협(關門海峽)과 그너머 일본의 다도해, 일본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낭만의 바다 세토나이카이(세토내해, ???海)가 보인다.
▲간몬대교. 왼쪽이 혼슈, 오른쪽이 큐슈다.
- (일본의 운명 결정지은 역사의 현장) 버스는 삽시간에 간몬대교를 건너니 혼슈(本州)땅 야마구치(山口)현 시모노세키다. 시모노세키(下關), 글자 그대로 일본의 ‘아랫쪽 관문’을 지켜온 수문장인 것이다. 그런 만큼 이곳 또한 역사의 사연이 많다. 막부 말기인 1863년 서양과의 불평등 개항조건에 반기를 든 조슈(長州) 반란을 비롯하여 청일전쟁 이후인 1895년 일본의 존재감을 세계에 과시한 계기가 된 시모노세키 조약까지... 그야말로 일본의 국가 운명을 결정지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요충중의 요충에 오니 감회가 새롭다. 또한 한국인이라면 어려서부터 들어왔을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의 도시 아닌가? 일본 식민지 시대를 겪은 선대 어른들 중 부관연락선과 사연이 있는 분들 또한 많을 것이다. 바로 그 역사적 상징성 때문에 큐슈에 오면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다.
▲시모노세키 카이코유메타워(海?ゆめタワ?)
▲시모노세키에도 선교사 하비에르의 상륙기념비가 있다
- (아, 부관연락선) 역에서 300m 떨어진 시모노세키항에는 오늘 부관연락선, 아니 부관페리 성희호가 들어와 있다. 153m 높이의 카이코유메타워(海?ゆめタワ?)의 모습이 도시 스카이라인에 권위를 부여한다. 시내에는 아직도 영업을 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우체국을 비롯하여 100년 이상된 역사적 랜드마크 건물이 여럿 있다. 역에서 멀지 않은 히요리야마(日和山) 전망대를 향하여 계단길을 오른다. 사방으로 해협 아니면 항구 풍경이다. 어제 비가 오더니 공기가 차다 못해 춥다.
▲복어는 시모노세키의 상징이다. 일본 전체 복어 소비의 70%를 이곳에서 산출한다
- (복어의 70%를 산출) 하라토(唐戶)항으로 발길을 옮긴다. 간몬해협 건너편 큐슈쪽 도시 모지(門司)가 보이고 멀지 않은 곳에는 간몬대교가 높이 걸려있다. 빠른 물살위로 배들이 심심치 않게 다닌다. 하루 700척의 배가 왕래한다는 간몬해협은 세계에서 가장 번잡한 항로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시모노세키의 또다른 상징물은 복어(후구, ふぐ)다. 음식은 물론이고 로고, 조형물, 악세사리까지 여기서는 복어가 단연 테마다. 간몬기선의 페리를 타고 건너편 모지항으로 건너간다. 작지만 속력을 내어 좁지 않은 해협(500m)을 삽시간에 건넌다.
▲모지항 부근 풍경
- (볼 것 많은 모지항) 모지항에는 아직도 온전히 사용중인 백년 이상된 건물이 여럿 있다. 보존하고 보관하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섬세함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간몬대교 밑에는 해저터널이 있으나 거리가 꽤 되어 걷는 것을 포기한다. 모지에도 불 것과 먹을 것이 많은데 이 고장의 볶음 카레 또한 명물이니 나도 한 그릇 점심으로 뚝딱 해치웠다. 하루나 이틀쯤 투자해도 될 만큼 볼 것이 많고 역사가 농축되어 음미할 것도 많은 곳을 바람처럼 스쳐가니 아쉽고 미안하다. 언젠가 다시 시간을 내어 깊이있게 탐구할 기회를 가질 것을 다짐하며 고쿠라로 나와 후쿠오카행 고속버스에 오른다.
▲오키나와 나하 슈리성 전경
- (오키나와행 피치항공) 오늘 밤에는 오키나와 나하(那覇)로 떠난다. 대중교통이 비싼 일본에서 국내선 항공여행이 가능해진 것은 갖은 종류의 패스와 저가항공의 확장, 그리고 엔저덕이다. 공항으로 나가는 A번 버스조차도 산큐패스를 이용하니 산큐패스 3일권을 알뜰하게도 활용한 셈이다. 큐슈의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니 공연히 더 남쪽 오키나와 여행이 기대된다. 인간은 얼마나 변덕스러운 것인가? 그러려니 하며 한국의 겨울을 견디어내며 수십년 살아왔건만...
- 오키나와 나하행 피치(Peach) 항공기는 정시에 출발하여 두 시간 걸려 나하에 도착한다. 나하공항 터미널이 도착하고 떠나는 미군들로 분주한 것을 보며 오키나와의 특수한 지정학적 조건을 읽는다. 오키나와 주둔 미군들로 인한 성범죄, 환경오염 등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 GDP의 5% 정도가 미군과 관련한 업종에서 생성된다.
- (어쩔 수 없는 미군주둔?)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치른 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로 12만명,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1/4을 잃은 비극을 겪기도 했다. 오키나와는 2차대전 직후 미군정아래 있다가 1972년 일본에 귀속되었지만 아직 오키나와는 동북아 주둔 미군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이고 한국의 안보에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슈리성 입구 1
- (류쿠국에서 오키나와현으로) 오키나와는 원래 류쿠국(琉球國, 유구왕국)으로서 1429년 통일하여 건국한 이후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 등과 중계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해오다가 1609년 사쓰마 번의 침공 이후에는 도쿠가와(?川) 세력에게도 조공을 바치며 줄다리기 외교를 통하여 균형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결국애는 1872년 메이지유신때 일본에 합병되었고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일본에 귀속되었다. 메이지시대 이후로 일본은 오키나와의 일본 동화(同化)를 시도해왔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차별을 느낀 많은 오키나와인들이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슈리성에서 본 도시 풍경 1
- (오키나와인의 용모) 오키나와는 가라데의 본 고장으로 알려진 것말고도 미국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대중음악으로 일본에서 인지도가 높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기 위하여 승차한 모노레일에서부터 현지인들의 독특한 용모를 엿본다. 누가봐도 분명 본토인(內地人)들과 확연히 다른 폴리네시안 계열 얼굴의 현지인들을 드물지 않게 본다. 약간은 짙은 피부, 곱슬머리에 쌍가풀진 둥근 눈을 가진 사람들이다. 중국도, 일본도, 동남아시아도 아닌 오키나와의 묘한 정체성을 새삼 확인한다.
▲국제거리 1
- 모노레일은 오키나와현의 수도 나하(那覇)시 중심으로 진입한다. 번화하면서도 깨끗한, 그러면서도 일본 본토와는 다른 도시의 모습을 본다. 오키나와 전체 인구(142만)의 거의 절반인 70만명이 거주하는 대도시이다. 현청앞(?廳前)역에서 내려 예약해 놓은 숙소를 찾아들어가니 전형적인 오키나와인 용모의 젊은 남성이 멀리서 온 여행자를 반긴다. 오키나와에서는 내일 온전히 하루가 주어지는 일정이다. 효율적인 도시 탐방을 위해서 늦은 시각이지만 이런저런 정보를 챙긴다.
5일차. 2015. 1. 8 (목) (나하, 오키나와)
- (교통 불편한 오키나와) 나하 시내 이동은 나하순환버스(那覇市內觀光 周遊バス)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버스 요금이 터무니없이 비싼 오키나와에서 이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시간 관계상 나하시내만 탐방하기로 했지만 시외곽의 목적지는 아마도 자동차를 렌트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순환버스 1일패스를 사러 버스터미널로 간다. 그곳과 공항에서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은 흐렸지만 춥지는 않다. 오늘 최고기온은 섭씨 15도를 예상하는데 이곳 기준으로 그 정도면 추운 날이 아닐까 싶다.
▲슈리성 입구 2
- (한국인 인기관광지) 하늘에는 미 공군기들이 수시로 날아다닌다. 나하 북쪽 40km 오키나와시에 있는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발진했을 것이다. 거리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적지 않다. 최근 한국의 거의 모든 저가항공사들이 오키나와 취항을 시작한 것과 관련있을 것이다. 과거 메이저 항공사가 독점하던 시절, 오키나와는 유독 항공요금이 비싸서 오기 힘든 머나먼 곳이었다.
▲류쿠국 왕궁 1
▲류쿠국 왕궁 2
- (UNESCO 문화유산 슈리성) 먼저 도착한 곳은 슈리성(首里城)이다. 류쿠국의 왕궁으로서 2차대전때 철저히 파괴되었으나 두 차례에 걸쳐 재건했다. 류큐 건축양식의 독자성이 인정되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도시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성에서는 도시 전체와 멀리 동중국해까지 보인다. 역사교과서에 한두 줄로만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쳐버린 류쿠왕국이지만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것을 깨달으니 전율이 느껴진다. 일본과 중국, 두 강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정체성을 지켜 고유 문화를 남긴 왕국이 눈 앞에 되살아 나는 것 같다. 성을 나와 잠시 걸으니 소담한 돌포장길이 정연하게 깔린 고즈넉한 마을이 나타난다. 긴조초이시다타미 지역이다. 돌포장길과 함께 오래된 예쁜 집들이 뿜어내는 분위기에 젖어 한참을 머문다.
▲긴조초이시다타미
- (A+ 현립박물관) 시내에 있는 현립박물관을 찾는다. 해양 생태학, 고고학, 해양 교류사, 자연사, 역사, 민속, 예술과 미술까지 모두 갖춘 종합 박물관이다. 뒤늦게 1429년에 이르러서야 통일 왕국이 성립되었지만 1879년 사쓰마 세력에 의해서 왕국이 멸망하고 일본에 현으로 편입될 때까지의 역사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중국(청나라)과 일본, 두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정체성을 지켜온 왕국의 험난한 역사가 곧 소국 우리나라 같아서 크게 관심이 간다. 심지어 청나라와 일본은 류쿠를 분할해서 나누어 가지자는 논의까지 있었다. 청일전쟁으로 분할 논의는 종지부를 찍었지만 열강각축 시대에 풍전등화같았던 소국의 운명을 확인하니 왠지모를 연민과 동정이 인다.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오키나와 전투, 문제많은 미군 주둔과 미군정, 가난과 차별을 피해 수없이 떠난 이민 행렬 등 근현대사의 기록이 특히 상세하다. 아주 잘 설계되었고 정성스럽게 준비된 썩 훌륭한 박물관이다.
▲국제거리 2
- 해변을 맛보러 나미노우에(波の上)비치를 찾는다. 나하 유일의 해수욕장이지만 임해고속도로 교각 아래에 위치하는 등 초라한 모습이다. 그래도 동지나해 한복판에 발을 적셔본다. 순환버스로 시내를 반바퀴 돌아 슈리성을 다시 찾는다. 조명을 받은 성루(城樓)와 함께 산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도시 야경이 삼삼하다.
▲슈리성에서 본 도시 풍경 2
- (에너지 넘치는 국제거리) 마지막으로 국제거리(고쿠사이도리, 國際通り)를 걸어서 지난다. 현지인들의 쇼핑과 오락 공간이라서 ‘국제’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지만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다양하고 화려한 거리이다. 시민들의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나하의 명동인 셈인데 음식점, 옷가게, 클럽, 바, 면세점 등 없는 것이 없다. 기발한 아이디어 가게도 많다. 예를 들어 미군방출품 전문점 같은 것들이다.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는데 쇼핑객들은 이 거리에 들어서면 얼마나 신날까? 구운 요리가 많은 오키나와 음식을 조리하는 냄새가 쉬지 않고 식욕을 자극한다. 마침 거리는 나하의 공설시장 마키시(牧志)시장과 닿아 있어서 더욱 많은 볼거리를 선사한다. 너무나 짧은 오키나와 일정이라서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섬의 찬란한 자연을 접한 후에야 오키나와에 대한 온전한 느낌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국제거리 3
(3편에 계속)
(3) - 우아하게 눈이 내리는 광활한 설국 홋카이도
일본 큐슈·오키나와·홋카이도 여행(2015. 1. 4 - 2015. 1. 13)
서울 출발 -(티웨이항공)- 후쿠오카 -(버스)- 나가사키 -(버스) (후쿠오카 환승) (야간버스)- 가고시마 -(버스) (후쿠오카)- 시모노세키 - 모지 - 후쿠오카 -(Peach 항공)- 나하, 오키나와 -(Peach 항공) (오사카 환승)- 삿포로 -(열차)- 구시로 -(열차)- 아바시리 -(열차) (삿포로)- 오타루 왕복 -(열차)- 하코다테 왕복 - 삿포로 -(티웨이항공) - 서울 도착
6일차. 2015. 1. 9 (금) (나하, 오키나와 → 오사카 환승 → 삿포로 도착)
-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로 대반전) 오늘은 Peach항공으로 나하를 떠나 오사카에서 환승하여 삿포로로 가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일기예보를 챙겨보니 일본의 전형적인 겨울 기단배치인 동고서저(東高西低)가 나타난다고 한다. 서쪽 동해쪽은 흐리거나 눈이 오고 동쪽 태평양쪽은 화창하다는 뜻이다. 예컨대 홋카이도의 경우 삿포로는 눈이 오지만 도동(道東), 즉 쿠시로 등 섬의 동쪽은 맑다는 얘기다. 곧 확인하게 될 것이다.
- 어제와는 달리 바람이 잦아든 쾌적한 아침이다. 항공기가 나하공항을 이륙하자 점점이 박힌 섬들이 보인다. 류쿠열도는 200개의 크고 작은, 유인 무인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정시 도착했으나 동북지방에 눈보라를 동반한 폭설 때문에 항공기 출발이 지연되고 있다. 최근 일본 저가항공의 급성장에 따라 간사이 공항에도 Peach(인천-오사카 취항), Vanilla(인천-나리타 취항), Jet Star 등 저가항공 전용 터미널이 생겼다. 지갑이 얇은 젊은 승객들이 많다. 홋카이도 신치토세(新千歲) 공항 사정 때문이라며 출발 시각을 계속 늦추던 항공기가 갑자기 출발한다.
▲눈과 얼음으로 덮힌 신치토세공항 활주로에 사뿐히 착륙하는 Peach 항공기
- (폭풍설속에 삿포로 착륙) 일본 여행에서 오키나와와 삿포로는 변수가 많은 지역이다. 오키나와는 여름철 태풍, 삿포로는 폭설로 여행에 제약을 받는 일이 생길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항공기는 도호쿠(東北)지방의 눈덮힌 장엄한 산들을 지나 신치토세 공항 상공에 도착하니 온통 두꺼운 구름으로 덮혀있다. 구름을 뚫고 내려가니 설국, 눈과 얼음의 땅이다. 항공기는 엄청난 눈바람을 맞으며 무사히 내렸다. 항공기는 눈과 얼음으로 덮혀 있는 활주로를 유도등에 의지하여 엉금엉금 터미널을 찾아 들어간다. 나로서는 머릿털이 곤두서는 경험이다. 악조건에서도 안전하고 사뿐하게 항공기를 착륙시킨 기장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토쿄-삿포로 항공 루트는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항로 10위에 꼽힐 정도로 승객이 많은 만큼 공항 시설은 꽤 크다.
- 터미널 지하에 있는 JR역에 들러 한국에서 구입해온 홋카이도 레일패스 교환권을 실물 패스로 바꾼다. 열차로 시내로 나온다. 오후 5시 조금 넘은 시각이지만 도시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북위 43도가 넘는 높은 위도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와보고 싶었던 홋카이도(北海道) 땅을 드디어 밟았다. 그것도 눈이 펑펑 내리는 하얀 겨울날 찾아왔으니 감개무량할 뿐이다.
▲삿포로에키마에거리(札幌驛前通)
- (러시아 견제를 위해서 홋카이도 본격 개발 시작) 원래 아이누(Ainu)의 땅이었던 홋카이도에 본토인들의 유입이 조금씩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개발과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세기 초반과 중반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국은 농업과 광업 기술을 도와 주었다. 그런 이유로 홋카이도는 오늘날 농산물과 유제품, 목재 생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하염없이 걷는 눈오는 밤) 눈은 계속 내린다. 밤새도록 내릴 기세다. 시내 산책에 나선다. 우선 오도리공원(大通公園)으로 나간다. 삿포로 중심부에 동서로 뻗은 오도리 거리(大通)을 따라 1.5km에 걸쳐 조성된 공원이다. 공원의 동쪽 끝에는 에펠탑을 본딴 TV타워가 불을 밝히고 있다. 2월 첫째 주말에 있을 삿포로 눈축제(雪祭, 유키마츠리, 雪まつり)를 준비하느라 구조물 설치를 비롯하여 이미 바쁘다. 오도리 거리와 직각으로 만나는 삿포로의 남북 중심가로인 삿포로에키마에거리(札幌驛前通)는 멋진 전구장식(화이트 일루미네이션, white illumination)으로 분위기에 한 몫 보탠다. 그 거리들을 눈을 밟으며 하염없이 걷는다.
▲구 현청건물
- 일찍이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절묘한 겨울날씨다. 눈은 오지만 축축하지 않고 기온은 분명 영하지만 춥지 않다. 붉은 벽돌로 유명한 구(舊) 현청건물과 그앞 정원에 쌓인 눈은 아름다운 겨울 파라다이스를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올드 팝가수 잉글버트 험퍼딩크(Englebert Humperdinck)의 ‘Winter world of love' 노래를 흥얼거린다. 홋카이도가 또 어떤 것들을 보여줄지 궁금해 하며 일단 호텔로 귀환했다.
7일차. 2015. 1. 10 (토) (삿포로 - 오타루 왕복 → 구시로 도착, 1박)
- (홋카이도 레일패스 개시) 오늘부터 홋카이도 레일패스 3일권이 시작된다.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오타루(小樽)행 열차에 오른다. 삿포로에서 40분쯤 거리에 있는 오타루는 삿포로의 외항(外港)쯤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열차는 새벽부터 자정 무렵까지 매우 자주 다닌다. 어젯밤부터 내린 눈이 밤새도록 왔는지 아직도 내리고 있다. 주말을 맞은 아침 7시 삿포로역은 붐빈다. 젊은이들 중에는 스키복장과 장비를 가지고 열차에 오르는 이들도 많다.
▲오타루 운하 1
- (파우더 스노우) 세계 최고의 설질(雪質)을 자랑하는 파우더 스노우(powder snow)로 유명한 곳 아닌가? 눈이 와도 조용하고 우아하게 와서 좋다. 축축하고 질퍽거리지 않고 도로나 차량도 더럽히지 않는 고마운 눈이다. 그래도 여기 사는 사람들은 겨우내내 눈에 시달려야 할테니 방문자의 눈과 현지인들의 눈은 느낌이 다를 것이다.
- 오타루 가는 길, 열차가 서는 곳마다 예쁜 작은 어촌들이 이어진다. 동해 바다의 거친 파도가 열차를 삼킬 듯 밀려온다. 미나미오타루(南오타루)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다. 초자(硝子)에 라커를 칠한 각종 공예품점(라커웨어), 유리공예점, 해산물 음식점, 카페들이 이어진다. 동화속에나 나올 법한 그림같은 마을이 계속 눈을 즐겁게 한다.
▲오타루 거리
- (운치있는 오타루 풍경) 세월의 연륜을 머금은 서양식 건물과 일본식 건물이 섞여 이 도시의 탄생 사연을 말해 준다. 그런 건물 중에는 은행 건물이 특히 많다. 메이지유신 이후 많은 은행이 이곳에 진출함으로써 북쪽의 월가(Wall街)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드디어 운하 지역이 나타난다. 일찌감치 메이지시대부터 서양 선박들이 드나들었던 오타루는 1923년 1.1km의 운하를 건설하여 외항과 시내 창고를 바로 연결하였다. 창고중 더러는 온전한 모습으로 아직도 잘 쓰이고 있다. 밤새 쌓인 눈위에 첫 발자국을 내며 운하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걷는다. 이 멋진 길은 밤에는 가스등으로 밝혀 운치를 더한다니 삿포로에 머무는 동안 어느 눈오는 밤 일부러 다시 찾아오리라고 다짐한다.
▲오타루 항
▲미나미(南) 오타루역
- 오타루를 떠나 삿포로에 돌아오니 해가 난다. 시민들은 며칠씩 쌓인 눈을 치우느라 분주해진다. 쿠시로(釧路)행 열차 출발까지 시간이 남아서 역 주변을 산책한다. 후쿠오카가 그랬듯이 삿포로도 도심이 지하보도로 연결되어 있지만 외지인들은 지형지물이 없는 지하보도 안에서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 (삿포로 시계탑) 출구를 잘못 찾아 몇 번 들락날락한 끝에 삿포로의 상징물 중 하나인 시계탑(時計台, 시토케다이)에 닿았다. 시계탑은 구현청건물과 함께 삿포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878년 삿포로 농과대학(현 홋카이도대학)을 위해 건립된 만큼 건물 앞에는 삿포로 농과대학의 설립자이자 선교사인 클라크(William Clark)의 ‘Boys, be ambitious' 명구절이 그의 흉상 받침대에 새겨져 있다.
▲시계탑
- (남한 면적의 90% 홋카이도) 먹을 것을 그럭저럭 챙겨 쿠시로행 열차에 오른다. 328km, 네 시간 여정이다. 홋카이도 레일패스 덕에 홋카이도를 동서남북으로 누비는 여정을 감히 계획한 것이다. 특급열차 오조라(Ozora)호는 온통 눈밭과 침엽수림 뿐인 홋카이도 설원을 달린다. 홋카이도 거대한 섬이다. 남한의 90% 면적에 인구 542만(삿포로 200만명)이다. 오비히로(帶廣)를 지나며 해가 쨍쨍나지만 기온은 낮아져 한국의 겨울 날씨 비슷해졌다. 홋카이도 내에서도 동고서저의 기압배치가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한다.
▲겨울의 홋카이도는 어디를 가도 이렇게 설원이다
▲구시로 역전
- (광활한 대지) 홋카이도의 광활한 대자연은 미국 서부를 닮았다. 누가 일본을 작은 섬나라라고 했던가? 인구로 보나 국토면적으로 보나 일본은 대국이다. 멀리 아칸(阿寒)국립공원의 높은 산들이 힐끗힐끗 보이더니 드디어 검푸른 북태평양을 만나고 곧 쿠시로다. 쿠시로는 홋카이도 제4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변방 중의 변방이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끝까지 왔으나 드넓은 평원과 태평양을 만나서 그런지 가슴은 터질 것 같다.
▲쿠시로 항
- 호텔에 체크인하고 잠시 도시 탐방에 나선다. 기온도 낮지만 쿠시로는 바닷 바람이 체감온도를 낮추어서 몹시 춥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위해서 장갑을 벗을 때마다 손끝이 아리다. 누사이아다리(弊舞橋)를 건너 어항까지 갔다 온다. 항구를 가득 메웠어야 할 어선들은 어디에선가 겨울잠을 자는지 항구가 썰렁하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드센 바람에 어선마다 걸린 깃발이 세게 날린다. 저녁을 일찍 챙겨먹고 여행기를 정리하는 밤이 아늑하기 그지없다.
8일차. 2015. 1. 11 (일) (구시로 → 아바시리 → 삿포로 도착)
- (토요코인) 내가 머물고 있는 토요코인(東橫イン)은 일본의 비즈니스호텔 체인이다. 우리나라 서울과 부산에도 여러 곳 있는데 깨끗하고 실용적인 것은 물론이고 아침식사 또한 훌륭한데 가격은 놀랍게도 착해서 싱글룸 기준 하룻밤에 4,500엔(한화 4만원 남짓) 정도이다. 밥과 국, 반찬과 카레가 나오는 정식 조찬을 먹고 쿠시로 역으로 나온다.
▲토요코인의 싱글룸 객실
- (홋카이도 동부의 국립공원들) 오늘은 쿠시로에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돌아서 삿포로에 귀환하는 것으로 여정을 짰다. 쿠시로에서 시레토고샤리(知床斜里)를 거쳐 아바시리(網走)에 닿고, 그곳에서 삿포로행 특급열차에 오를 예정이다. 홋카이도 동부(도동, 道東) 지역은 일본에서는 가장 오지이지만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대표적으로 아칸(阿寒)국립공원, 시츠겐(濕原, 습원)국립공원, 시레토고(知床)국립공원 등이 있으니 다른 계절이었다면 며칠을 머물러도 모자랄 관광의 보고이다.
▲1량 편성 지선(支線)열차들
- (센모혼센 1량 열차) 아바시리행 센모혼센(釧網本線) 열차는 1량 편성의 디젤동차이다. 언젠가 NHK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바로 그 꼬마열차에 오른다. 경쾌한 디젤엔진음으로 출발하니 또다시 가슴이 부푼다. 열차 출발 15분쯤 지나자 습원지대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열차는 거의 한 시간 시츠겐 국립공원을 관통하며 볼거리를 쉬지 않고 선사한다. 중간 중간 열차가 서는 간이역은 어디에서 내려도 훌륭한 습지 체험 장소가 될 것이다. 숨막히게 장엄한 대설원은 미국 서부 와이오밍(Wyomong) 대평원과 흡사하다. 사방 수백 평방킬로미터에 걸쳐 끝없이 펼쳐진 습지는 천연기념물 두루미를 비롯한 야생동물들의 낙원이다.
▲시츠켄 국립공원 1
▲시츠켄 국립공원
- (시레토코 반도) 습지가 끝나며 산악지대에 접어든다. 아칸국립공원의 연봉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열차는 눈터널을 계속 지나더니 쿠시로 출발 두 시간 20분 시레토코샤리(知床斜里)에서 오호츠크해의 검푸른 겨울바다를 만난다. 이곳은 시레토코반도와 국립공원의 초입으로서 일본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쿠릴열도의 남쪽 끝이 가깝다. 맑은 날 시레토코 고개에 올라서면 쿠나시리(Kunashir) 해협 건너 쿠릴열도의 일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따라 일본은 당시까지 통치했던 사할린섬 50도 이남을 돌려 주고 러시아로부터 쿠릴열도 남단 4개 섬을 대신 받았으나 2차대전 패전으로 러시아(소련)에 빼앗겼으니 북방 4개도서에 대한 일본의 집착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아바시리 항
- (아바시리 감옥) 시레토코샤리에서 종점 아바시리까지 열차는 바다와 닿을 듯 해안을 가까이 끼고 40분을 더 달린다.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센모혼센 덕분에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아바시리에는 오호츠크해 유빙(遊氷) 관광 쇄빙선 오로라와 아바시리 감옥이 유명하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 삿포로행 열차로 바꿔타야 하지만 여기 또한 알맞은 계절에 다시 와보리라 다짐하게 한다. 아바시리 감옥은 메이지시대 이래 죄수들을 처형하는 대신 교화한다는 서구식 개념을 도입하여 머나먼 변방에 세운 감옥이다. 죄수들은 주로 도로공사에 동원되었고 난방없는 감옥방에서 때로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견뎌야 하는 악명높은 감옥이었다. 1984년 감옥은 영구 폐쇄되었고 대신 도시 외곽 텐토잔(天都山)에 감옥을 재현한 박물관을 세웠다.
- (오호츠크호 특급열차) 열차 환승시간을 이용하여 역에서 멀지 않은 아바시리항을 찾아가 상징적 사진 몇 장을 찍고 오후 1시 29분 삿포로행 오호츠크호 특급에 오른다. 347km, 5시간 30분 걸리는 먼 길이다. 열차는 홋카이도 내륙 중앙부의 험준한 산맥을 관통한다. 여태까지 홋카이도 다른 지역에서 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설경을 만끽한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심산유곡의 겨울풍경을 열차에 앉아 구경하는 호사를 누렸다. 홋카이도는 역시 설국(雪國)이다. 열차는 정시에 삿포로역에 도착하니 1박 2일 홋카이도 동부 여행이 무사히 끝났다.
▲오타루 운하 2
- (오타루 밤 풍경) 마침 눈이 오길래 역에서 삿포로역에서 곧장 열차를 바꿔타고 오타루로 향한다. 어제 아침에 다녀왔지만 밤의 오타루를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오타루 운하에는 가는 싸락눈이 가스등 불빛 아래 안개처럼 흐트러지며 몽환적인 정취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침 나같은 사람이 몇 명 더 있는지 운하교(運河橋) 위에서 이 멋진 오타루의 밤풍경을 정성스레 카메라에 담고 있다. 삿포로에 돌아와 호텔에 체크인하니 집에 온 듯 아늑하다.
(4편)에 계속
(4) (끝) 일본 큐슈·오키나와·홋카이도 여행(2015. 1. 4 - 2015. 1. 13)
서울 출발 -(티웨이항공)- 후쿠오카 -(버스)- 나가사키 -(버스) (후쿠오카 환승) (야간버스)- 가고시마 -(버스) (후쿠오카)- 시모노세키 - 모지 - 후쿠오카 -(Peach 항공)- 나하, 오키나와 -(Peach 항공) (오사카 환승)- 삿포로 -(열차)- 구시로 -(열차)- 아바시리 -(열차) (삿포로)- 오타루 왕복 -(열차)- 하코다테 왕복 - 삿포로 -(티웨이항공) - 서울 도착
(여정표는 맨 끝 편에 첨부)
9일차. 2015. 1. 12 (월) (삿포로 - 하코다테 왕복)
- 오늘 아침은 일단 맑은 날씨로 시작된다. 그러나 언제 또 눈이 올지 모른다. 토요코인의 훌륭한 아침식사를 먹고 역으로 향한다. 눈이 멎으니 멀리 도시를 둘러싼 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1972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답게 산에는 스키슬로프들이 하얀 커튼을 드리우듯 아래로 펼쳐져 있다. 도시 서쪽 외곽 윈터스포츠 뮤지엄에서는 눈이 없는 계절에도 스키를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있다고 한다.
▲삿포로-하코다테 호쿠토(北斗) 특급열차
- (개항도시 하코다테) 하코다테(函館)행 호쿠토(北斗) 특급열차에 오른다.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홋카이도의 또다른 꿈의 도시다. 메이지유신때 도쿠카와 막부의 제독이었던 에노모토 타케아키가 유신에 반대하여 1868년 독립선언하며 세워 짧게 존속했던 에조공화국(蝦夷共和國)이 수도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요코하마(橫浜), 코베(神戶) 등과 함께 일찍 개항했던 만큼 (특히 건축물에 있어서) 서양의 흔적이 두드러지는 곳이다. 일본인들도 방문지 상위에 꼽는 도시이다.
▲에조공화국의 메이지 세력에 대한 투항을 찬양한 글. 과연 그럴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쓰가루 해협과 세이칸 터널) 나는 삿포로에서 열차로 내려가지만 혼슈에서 육로로 올라온다면 아오모리(靑森)에서 열차로 세이칸(靑函)터널을 건너서 오거나 페리를 타고 쓰가루해협을 건너오게 된다. 1988년 개통된 세이칸 터널은 총 길이 53.85km이고 해저구간이 23.3km로서 현재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터널이다. 스위스의 고타드(Gotthard) 터널이 완성되더라도 여전히 해저터널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터널이다. 멀리 동경 우에노(上野)에서 떠난 호쿠토세이(北斗星) 특급열차가 11시간 30분 걸려서 하코다테에 닿는다. 좀더 비싼 카시오페아 열차도 같은 구간을 달린다.
- (아름다운 임해열차) 삿포로에서 하코다테까지는 열차로 250km, 4시간 여정이다. 열차는 출발 한 시간후 바다를 만난다. 여기서부터 열차는 하코다테까지 대부분의 구간을 우치우라완(內浦灣)을 끼고 도는 임해구간을 달린다. 따라서 삿포로에서 하코다테 방향 기준 열차 진행 좌측에 앉아야 바다를 조망하여 갈 수 있다. 해안을 따라 산업과 물류시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엊그제 방문했던 도동(道東) 해안지역과 비교하면 여기 홋카이도 남서부 해안지역은 날씨와 지정학적 조건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치우라완(內浦灣)을 끼고 도는 아름다운 임해(臨海)철도
- 열차는 노보리베츠(登別), 무로란(室蘭), 오샤만베(長万部) 같은 야릇한 이름을 가진 작은 도시들을 지난다. 일본인들에게도 읽기 쉽지 않을 듯 하다. 아마도 아이누 지명을 한자를 차용해서 표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들이 나왔을 것이다. 쾌적한 열차에 앉아 바로 왼쪽으로는 바다를, 오른쪽으로는 해안을 따라 뻗은 산들을 조망하며 아름다운 길을 달리니 모든 상념이 사라지는 것 같다. 홋카이도 겨울여행은 분명 힐링 요소가 강하다.
- (에조공화국) 하코다테에 도착하니 해가 쨍난다. 다만 항구도시라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섭다. 홋카이도에서 혼슈로 건너가는 길목인 만큼 열차에서 방금 내린 많은 여행객들이 바삐 어디론가 이동한다. 역 출구로 향하는 벽면에는 하코다테의 역사를 설명하는 대형 서사(敍事) 부조가 있다. 에조공화국을 스스로 해체하고 혁명 완성에 참여한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글귀로 부조는 끝을 맺으니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대입합격 기원 게시판
- (야경 감상은 포기) 역 대합실에 설치된 합격기원 게시판이 대학입시 시즌의 시작을 알린다. 하코다테 방문 중 해야 할 일 1순위는 하코다테산에 올라가 야경을 감상하는 일인데 오늘 일이 어렵게 되었다. 역전 4번 버스승강장에서 출발하는 산정행 버스가 겨울동안 운휴란다. 게다가 삿포로로 돌아가는 열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해질 녘까지 기다릴 시간도 없다. 아무튼 이번 여행에는 나가사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야경 감상과는 인연이 없나 보다.
▲러시아인 묘지
▲외국인 기독교도 묘지
- (외국인 묘지) 대신 트램 1일승차권을 구입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장 먼 외국인 묘지부터 탐방을 시작한다. 외국인 묘지라는 장소가 함축하듯 여행자를 상념에 잠기게 한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스러져간 저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쌓여있을 사연을 생각해 본다. 도시 변두리 외딴 언덕,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러시아인 묘지와 외국인 기독교도 묘지가 이웃하며 자리잡았다. 19세기 후반 개항기에 조성된 묘지는 당시 이 도시에 드나들었던 많은 탐험가와 상인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이렇듯 하코다테의 거의 모든 역사와 유적은 개항과 관련된 것들이다.
- (이국적인 모토마치) 모토마치(元町)공원 지역으로 이동한다. 멋진 항구도시가 그렇듯이 하코다테도 항구를 안고 뒤로 언덕을 향하여 도시가 뻗어 올라간 구조다. 어디서나 항구와 푸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모토마치도 그런 곳이다. 하코다테산 기슭 가장 목 좋은 곳에 각종 교회와 성당, 각국 영사관, 그리고 주택이 들어서있고 그중 가장 높은 언덕에는 구(舊)공회당(Old Public Hall)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공회당 건물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세계 각국 모든 건축 양식이 조금씩 가미된 절묘한 ‘하이브리드’ 외관이 이채롭다.
▲모토마치(元町) 부근
▲구 공회당 건물
▲페리광장
- 그 아랫 쪽 거리에 조성된 페리광장에는 개화기 주역들의 치적이 전시되어 있다. 페리(Matthew Perry) 미국 해군제독은 흑선 선단을 이끌고 1854년 5월 하코다테에 입항했고 하코다테는 1855년 개항을 맞는다. 부근에는 영국영사관 및 개항기념관이 있고 주변 여러 블록에 걸쳐서 러시아정교당, 가톨릭 성당, 그리스정교회 교당, 일본식 사원 등 종교 시설이 흩어져 있다. 참으로 이국적인 풍경이다. 홋카이도 남서부 작은 항구도시가 이런 사연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당시 영국, 러시아 등 물밀 듯 밀려오는 서양세력을 일본은 근대화의 호기로 삼은 역사의 현장이다.
▲모토마치 부근에는 모든 종교의 교당이 다 있다
- (세계 3대 야경?) 모토마치 부근에는 하코다테산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로프웨이) 승강장이 있다. 하코다테는 나폴리, 홍콩과 함께 세계 3대 야경을 가지고 있다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니 안타깝다. 북방의 짧은 겨울해는 여행자의 마음을 자꾸만 분주하게 한다. 여유롭게 이 멋진 도시를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며 아쉬움을 접는다.
▲하코다테 트램. 600엔에 1일 패스를 구입하는 것이 낫다.
- (하코다테의 지정학적 가치) 마지막으로 붉은벽돌 창고군(群)을 찾는다. 수십, 수백으로 들어선 창고 중에는 여전히 창고로 쓰이는 것도 많지만 더러는 음식점, 가게, 공방, 심지어는 쇼핑몰 등으로 변신해 있다. 메이저시대 말기에 지은 창고들로서 동해(일본해)와 북태평양을 연결하는 길목이자 신개척지 홋카이도의 관문, 그리고 정어리 등 어류와 목재가 풍부한 하코다테에 서양 상인, 개척자들의 몰려든 것은 당연하다.
▲붉은 벽돌 창고군(群) (Red Brick Warehouses)
- (국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19세기말 일본) 정신없이 이곳 저곳을 바쁘게 걸어 다니다 보니 추운 줄도 몰랐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열차역으로 향하는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도시와 항구가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말까지 백년을 그들의 뜻대로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일본에게 국가운명의 상승곡선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느끼며 삿포로행 열차에 오른다.
- 차창에 기대어 완전히 어두워진 밖을 내다보며 머릿속으로 하루를 정리해 본다. 서양 세력이 현대 문물을 앞세워 우리나라 바로 옆 일본을 드나들 때 우리는 아직 쇄국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일본과 한국(조선)의 엇갈린 판단이 가져온 일제 36년이라는 역사는 그냥 하루아침에 총칼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열차는 칠흑같은 홋카이도의 밤길을 달려 밤 9시 삿포로에 닿는다. 오늘 하루 멋진 꿈을 꾼 것 같다.
10일차. 2015. 1. 13 (화) (삿포로 → 인천 도착)
- (홋카이도대학 산책) 아침식사 전에 호텔 바로 건너편에 있는 홋카이도대학(北大) 캠퍼스를 둘러본다. 정문을 들어서자 ‘大志를 품어라’는 명귀가 새겨진 석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캠퍼스 초입 중심적인 위치에는 이 학교 설립자 클라크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다. 1876년 설립된 홋카이도대학은 목가적인 풍경에 역사와 전통의 깊이까지 갖춘 일본의 명문대학이다.
▲삿포로대학 구내 클라크(설립자) 흉상
▲아름다운 캠퍼스
- (비어가든) 오늘은 서울행 항공기 출발이 오후 4시이므로 오전 시간이 여유로와 삿포로 시내 탐방에 나선다. 호텔에서 20분쯤 걸어서 삿포로 비어가든과 맥주박물관을 찾는다. 비어가든 입구에서 삿포로 맥주의 아이콘이자 북극성을 상징하는 붉은 별이 먼저 반긴다. 그런데 오늘 휴관이라서 박물관은 바깥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30년 가까운 역사만큼이나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삿포로맥주의 연륜을 말해 준다.
▲삿포로 맥주원(麥酒園) 입구
▲삿포로 맥주 박물관
- (스스키노 라면골목) 비어가든을 나와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며 남쪽으로 향하니 30분후 버스터미널 근처, TV타워앞, 오도리공원 동쪽 끝에 닿는다. 날씨는 푸근하고 바람조차 없으니 걷기에는 그만이다. 오도리공원을 지나 삿포로에키마에거리(札幌驛前通)를 만나 남쪽으로 조금 더 걸어 스스키노(すすきの) 지하철역 교차로에 닿으니 그 유명한 라면골목이 불과 한두 골목 떨어져 있다. 골목의 규모는 생각보다 작지만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맛에 관한 한 한 가닥하겠다는 신뢰를 주기에 충분하다. 들른 김에 미소(된장) 라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다. 가격도 착하다(800엔, 약 7천원). 스스키노 지역은 밤에 왔어야 했다. 화려함이 도쿄 신주쿠(新宿)에 버금가는 삿포로 최대의 환락가 아닌가?
▲삿포로 TV타워
▲스스키노 거리
- (한국과 일본 대타협?) 호텔로 돌아와 가방을 챙겨 공항으로 향한다. 국제선터미널에서는 주로 아시아 지역으로 항공기가 떠나는데 그중에서도 홍콩과 대만행이 가장 많다. 티웨이항공 탑승게이트는 한국인 승객들이 대부분이다. 왁자지껄하다. 조용한 나라를 다니다가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한국인들과 함께 하니 이미 한국에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도 한국인들은 좀 지나치고 일본인들은 많이 부족하니 두 나라를 섞으면 어떨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본다. 일본이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여 두 나라가 화해하고 협력하는 것이 무자비한 강자 중국에 대응하는 길 아닐까?
▲라면 골목
- (일본은 역시 선진국) 일본의 남쪽 끝과 북쪽 끝을 섭렵한 장쾌한 여행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일본은 역시 이웃나라였다. 거리에서 전혀 아무도 나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두 나라는 가깝기에 더욱 마음편한 여행이었다. 일본은 여전히 여러모로 한국보다 앞서 있음을 확인한 여행이기도 했다. 대도시부터 소도시, 남에서 북, 큰 길부터 골목길까지 모두 밟아보면서 한국과 비교한 끝에 받은 숨길 수 없는 느낌이다. 결국 가까운 장래에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선진국의 모습을 일본을 통하여 미리 보는 것 같았다.
- (변방에서 일본을 다시 보다) 큐슈에서 오키나와로, 그리고 추운 겨울에 난데없이 홋카이도로 방향을 틀었어도, 극과 극의 기후변화 또한 잘 견뎌준 나의 신체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저가항공의 매력적인 요금 덕분에 큐슈에서 오키나와까지, 오키나와에서 북쪽 끝 삿포로까지 가능했던 여행이다. 항공요금과 교통여건에 내 일정을 맞추다 보니 우연하게도 이번 일본 겨울여행의 테마는 ‘일본 변방 탐방'이 되었다. 일본에 관한 나의 인식에 중요한 부분을 보탠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 끝 -
◇2016.10.12 日 규슈 여행...
‘시마바라(島原) 난’의 원초적 본능 아마쿠사(天草)
구마모토(熊本) 현의 남서부에 위치하는 아마쿠사(天草)는 크고 작은 120여의 섬으로 형성된 제도이다. 단절과 고립, 그리움과 외로움을 덜어낸 교량이 50주년이 되었는지 ‘50년’이라고 크게 새겨진 깃발들이 곳곳에서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아마쿠사는 푸른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돌고래들의 유희(遊戱)를 즐길 수 있는 곳이며, 일본 최대급 육식 공룡의 화석이 발견된 지역이기도 하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유럽 문화와 크리스천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아마쿠사는 ‘자연과 문화로 육성된 섬’으로 불린다.
▲아마쿠사 메모리얼 홀
버스는 해안을 돌아 산을 넘으며 길게 반복되는 흐름으로 전진했다. 한 시간 반 쯤 후 달리다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朗) 메모리얼 홀’을 만났다.이 홀은 ‘아마쿠사 시로’를 기념하는 전시관이다. 전시관은 남국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나무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朗)는 누구인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 1621년-1638)는 아마쿠사(天草) 섬에서 태어난 크리스천이다. 본명은 마스다 시로(益田四朗). 가톨릭 다이묘 고니시(小西)의 낭인 ‘마스다 진베이(益田甚兵衛, 1583-1638)’의 아들이다. 그는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 당시 16세의 나이로 무장봉기군의 총대장이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본래의 세례명은 제로니모(Geronimo)였으나 전투 당시 프란시스코(Francisco)로 바꿨다.
슬픈 역사의 기념관 속으로...
계단을 오르자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8호 태풍 차바(Chaba)의 영향이었다.
“저 건물의 형상에서 뭔가를 느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바로 성모마리아가 미사포를 쓴 형상입니다.”
▲아마쿠사 메모리얼 홀의 외관
기념관 입구에서 만난 나카야마 히로미(中山裕巳) 관장의 말을 듣고서 건물 외관에서부터 특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시장은 남만(南蠻) 문화와 천주교의 전래를 전시한 역사 테마관이었다. 테마의 중심은 ‘시마바라·아마쿠사 난(乱)’과 비극의 주인공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였다. 에도(江戶) 막부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의 ‘박해와 탄압’을 계속했다.
1633년 에도 막부는 외국과의 왕래를 금지하고 크리스천 탄압에 열을 올렸다. 개종을 강요하고 ‘크리스천 전향증서’를 발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잠입한 선교사들은 은밀하게 포교 활동을 했다. 그 결과 아마쿠사(天草)와 나가사키(長崎)에 크리스천이 늘어났다. 특히 아마쿠사는 본토와 멀리 떨어진 섬인 관계로 감시의 눈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무렵 결정적인 민중봉기를 촉발시킬만한 참혹한 사건이 있었다. 규슈의 가고시마(鹿島)에서 한 임산부가 밀린 세금 때문에 차가운 강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를 계기로 민중의 폭발이 야기됐던 것이다.
‘신의 깃발아래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은 일본 역사상 최초이면서 대규모 무장봉기(一揆)이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이 농민과 함께 일으켜 기리시탄의 난(吉利支丹の亂)이라고도 하며, 나가사키의 시마바라와 구마모토의 아마쿠사가 공동 전선을 펼친 관계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亂)이라고도 한다.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 메모리얼 기념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기념관에는 전설과 수수께끼에 싸인 불과 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의 싸움인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에 대한 기록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습니다. 아마쿠사 시로의 진정한 모습과 민중의 뜨거운 생각을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체험적 테마관입니다.”
나카야마 히로미(中山裕巳) 관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자신의 사진 촬영을 극구 사양하는 것 외에는 취재를 위한 모든 편의를 완벽하게 제공했다. 그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장대한 로망의 궤적을 더듬는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일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번쯤은 방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시마바라의 난’의 근본적 원인은 주민들의 혹사와 과중한 세금이었다. 해마다 현물로 바치는 공납으로 수입의 약 50%를 쌀로 바쳤다고 한다. 거기에 번(藩)의 크리스천 박해와 기근에 의한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무장봉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크리스천을 중심으로 3만 7천명이 뭉친 이 반란은 궁핍한 생활에 빠져있던 농민뿐 아니라 어업, 수공업, 상업 등 거의 모든 산업 종사자들까지 크고 넓게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12만 여명의 막부군에 의해 90일 만에 끝이 나고 말았다. 그 후 막부의 크리스천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기념관에 전시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하라(原)성의 공방전
<1637년 12월 1일. 시마바라의 무장봉기군은 하라(原)성터에서 농성을 준비했다. 12월 3일에는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가 입성했다. 아마쿠사(天草)의 봉기군 1만3천명이 12월 9일까지 각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합류해 무장봉기군은 총 3만7천 여 명에 이르렀다. 12월 20일 막부군 4만 명이 하라성을 공격했으나 봉기군은 세 번에 걸쳐 막아냈고 막부군은 대패했다. 1638년 1월 1일의 총공격에서는 네덜란드의 군함에 의한 포격이 가세했고, 하라성의 포위를 강화해서 성내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작전을 폈다. 그런 가운데 그해 2월 27일 서남제도로부터 동원된 연합군 12만 5천명이 총공격을 개시했고, 28일에는 하라성이 떨어지게 됐다. 시로(四郞)를 비롯한 3만 7천 여 명의 봉기군은 모두 죽음을 맞았다.
▲모형으로 재현한 그 당시의 진지
이 전투에서 막부군은 사망 2천명, 부상 1만 명이 나왔다. 이 전투 이후 아마쿠사는 막부직할 관리영토가 되었고, 크리스천 탄압은 더욱 강화되어 1639년에는 최종적인 쇄국령이 선포되었다. 이후 200년 이상에 걸쳐서 쇄국의 시대가 계속되었으나, 그러한 통제 하에서도 신앙은 은밀히 계속되었다. 메이지(明治) 6년(1873년) 크리스천 금제(禁制)가 해제되고, 다음해에 오에(大江)교회가 창립돼 드디어 종교 자유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크리스천 박해 영상의 한 장면
3만 7천명의 무장봉기군은 “지금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 생애까지 친구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최후를 맞았다. 그런데, 이 봉기군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 야마다 에모사쿠(山田右衛門作, 1575-1657)이다. 그는 막부군과 내통했던 사람이다. 이유 불문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배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나카야마(中山) 관장은 평범하게 답했다. '그에 대한 정보는 어떠한 것도 없다'고 했다.
“막부군과 내통했던 사람입니다. 그 역시 크리스천이었지요. 에도에서 살다가 나가사키에 귀향해서 병사했다는 설과 해외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무성할 따름입니다.”
‘난(乱)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전투이다’
푸르고 맑은 하늘이었다.
투명한 쪽빛의 바다였다.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자유는 빼앗겼고, 평등은 없었다.
▲'자유와 평등' 코너의 그림
“엄밀히 말하면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乱)’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싸움’입니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는 자유·평등·박애의 상징이지요.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이 작은 섬에 자유와 평등의 씨앗이 발아(發芽)된 것입니다.”
나카야마 히로미(中山裕巳) 관장은 당초보다 다소 숙연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큰 울림이 있었다. 이 코너에는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는 르네상스(1500-1700), 프랑스 혁명(1789-1799),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에 대한 기록의 전시도 함께하고 있었다. 시마바라·아마쿠사의 싸움(1637-1638)과 나란히.
자유·평등·박애-프랑스의 혁명정신이다. 오늘의 자유와 평등은 많은 사람들의 피에 의해서 이룩된 고귀한 희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취를 위한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이를 살생으로 몰아가는 권력자들의 횡포도 사라져야 한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장대한 로망의 궤적’이라고 했던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朗) 메모리얼 홀에 담긴 로망의 궤적들이 오히려 무거운 짓눌림으로 다가왔다. 기념관을 나서자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고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계속).
글 | 장상인JSI 파트너스 대표
◆2015-08-13 2차대전 후 한국은 독립하고 오키나와는 독립하지 못한 이유는?
▲저녁이면 매일 볼 수 있는 석양이 지고나면 내일 다시 태양이 떠오를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해군사관학교 연병장을 따라 운동을 하다가 석양이 너무 예뻐서 스마트 폰으로 찍었는데, 신기하게도 11시 방향에 불그스레한 반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자 쓴 옥포만 석양>으로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옥포만이란 이름의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첫 해전이 옥포해전이었기 때문에 이 충무공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해군사관학교 연병장 전면에 펼쳐진 만 이름을 옥포만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위의 해가 지고나면 내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동쪽으로부터 아침 해가 떠오를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국을 일본에 빼앗기고 3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이어왔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으로 돌아가 본다면, 해는 단순한 해가 아니라 ‘희망 그 자체(hope itself)’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오늘 아침 다시 바다 위로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해를 보며 언젠가 나라를 되찾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생도 3학년 때인 1984년 7월에 美7함대실습 기간 동안 美해군 제7함대 소속 세이트 루이스함(USS St. Louis, LKA-116)에 승조하여 괌, 오키나와, 필리핀 수빅 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실습을 떠나기 전에 실습을 준비하면서 실습을 함께 할 동기생과 도서관에서 방문 도시가 지니고 있는 역사·전략적인 가치에 대해 부지런히 자료를 찾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실습을 시작하던 날, YP정을 타고 부산 외항에 투묘하고 있던 세인트 루이스 함 현측에 도착하여 사다리로 오르면서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생도 신분으로 美해군 장병들과 한 달간의 실습을 잘 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도 되었지만 사관실에서 함장님께 신고한 후 안내 장교의 안내를 따라 침실을 배정 받고 저녁을 함께 하면서 처음에 염려했던 점들은 기우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함 장병들의 도움으로 한 달 동안 마치 가족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예정된 실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함장님께서 저희 두 생도에게 당부했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실습 기간 동안 장교의 시각이 아니라, 생도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대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라.”
▲1969년에 취역한 세인트 루이스함은 찰스톤급 상륙수송함으로서 베트남전과 한미연합상륙훈련에도 참가하는 등 한국과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세인트 루이스함은 50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592명의 승조원으로 편성되었다.
▲세인트 루이스 함에서 받은 실습기념패
실습기간 동안 방문했던 오늘날 오키나와와 주위 140여 개의 도서들은 오래 전에 류큐왕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00여 년간 삼국으로 분할되어 있던 도서들을 1429년에 중산국(中山國)이 통일하여 류큐왕국을 건국하였습니다.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주변국과의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습니다. 류큐왕국은 면적이나 인구 면에서는 작은 나라였지만. 우리나라 조선왕조와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는 1392년, 류큐왕국은 1429년에 건국되어 두 왕조의 건국 시기가 비슷합니다. 두 왕조 모두 독립 국가였지만 호혜 실리의 차원에서 당시 아시아에서 최강대국이었던 중국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482년, 류큐왕국은 450년 지속되어 두 왕조의 연수도 비슷합니다. 두 왕조 모두 일본에 의해 망했습니다. 일본에 의해 망한 시기도 비슷합니다. 류큐왕국은 1879년에 일본에 무력 병합되어 일본의 오키나와 현이 되었고, 조선은 1910에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습니다.
류큐왕국과 조선왕조 사이에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한민국으로 독립을 회복한 반면, 류큐왕국은 독립하지 못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당시 오키나와에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유서깊은 유적들을 대하면서 “왜 류큐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하지 못하고 영영 일본의 부속도서가 되어버리고 말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은 그때 이후 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경희대학교 강효백 교수의 글을 통해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류큐 의상은 류큐 왕국 시대에 왕족과 사족만 입을 수 있었던 전통 의상이다. 요즘에는 현대식으로 개량된 옷이나 드레스도 있다./오키나와 관광청 자료
▲오키나와 본섬 북부 온나손에 있는 만좌모(萬座毛)는 18세기 말 류큐 왕 쇼케이가 “만 명이 앉아도 족하다”고 칭한 것이 이름의 유래로 전해지고 있다. 초원이 펼쳐진 끝부분은 동중국해의 수평선을 바라다볼 수 있는 절경이며 옆에서 보면 코끼리 모양을 하고 있다.
강효백 교수는 「루즈벨트와 장제스」라는 제목의 글 속에서 최근에 공개된 카이로회담의 회의록과 미국 스탠포드대 후버연구소가 보관하고 있는 장제스 총통의 일기장을 토대로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11월 22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만나 서로 회담을 통해 종전 후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카이로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일본이 강탈 또는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해야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카이로 선언문이 우리 민족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이 이 선언문 속에 최초로 명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 사이에 개인 회담은 1차 회담이 11월 23일에 열렸고, 2차 회담은 이틀 뒤인 11월 25일에 열렸습니다. 두 회담에서 모두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무력으로 병합한 류큐 열도를 만약 중국이 원한다면 옛날 류큐왕국이 조공을 바쳤던 중국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장제스 총통은 미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류큐 열도를 신탁통치하자는 식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만약 장 총통이 당시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오늘날 오키나와와 인근 140여 개의 섬들은 중국령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왜 그때 장제스 총통이 류큐 열도를 넘겨주겠다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당시 장제스 총통은 타이완이나 만주처럼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던 중국의 영토에만 관심이 있었다든지, 대륙 출신인 장제스 총통은 해양의 가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든지, 당시 장제스 총통은 모택동의 공산군을 섬멸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류큐 열도 같은 곳에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든지, 류큐 열도를 제안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진의를 장 총통이 의심하고 있었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설들입니다.
이러한 설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제스 총통은 류큐 열도를 가지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은 거절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왜 장제스 총통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조그마한 한국의 독립은 주장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강효백 교수는 분명하고 자신있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류큐왕국에는 독립을 원하는 독립투사들이 없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독립을 원하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장제스 총통은 청년 윤봉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24세였던 청년 윤봉길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뇌부를 괴멸시킨 것을 본 후, 장제스 총통은 자기 휘하 100만 중국군이 수행할 수 없는 일을 한국 청년 한 명이 해내었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장제스 총통은 당시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상해 임시정부의 가장 든든하고 확실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이로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1943년 7월 26일 장제스 총통은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 선생을 불러 접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완전 독립과 국제 공동 관리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구 조건을 그대로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카이로회담이 열린 첫 날이던 1943년 11월 22일 장제스 총통은 카이로에서 자신의 일기장에 종전 후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제안할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카이로회담 석상에서 실제로 한국을 신탁통치하자는 처칠 수상의 제안을 일축하고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선언문에 명문화시켰습니다.
장제스 총통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던 우리나라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장제스 총통이 한국 독립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강효백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에서 진수식을 가진 대한민국해군 214급 잠수함 5번함인 윤봉길함(ROKS SS-077)의 위용/해군본부 정훈공보실
올해 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70년 전에 우리에게 잃어버린 빛을 회복할 수 있는 광복의 능력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일본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군대가 있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강대국에 의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 강대국들이 조선 왕조와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던 류큐왕국까지 책임져 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강대국들이 우리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은 윤봉길 의사처럼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기 희생과 죽음의 속박을 감수했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인해 우리 민족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 주위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와 비슷한 조건과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류큐왕국의 패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나라를 빼앗긴 날부터 독립을 되찾는 날까지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독립운동을 벌여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을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와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액자 속에 갇혀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태극기. 파랑색과 빨강색의 농노는 만드는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다. 위의 태극기는 규정으로 정한 색과는 거리가 먼 것 중의 하나다.
자, 이제 태극기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태극기는 흰 바탕의 기 위에 빨강색과 파랑색의 태극 문양을 가운데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싸고 있습니다. 태극기의 최초 도안자는 고종이었습니다. 태극기는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인 ‘태극 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만들었고,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과 9월 박영효 등 일본 수신사 일행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태극기는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공식 국기로 사용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속 정식 국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태극기에 대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색농도에 대한 것입니다. 선진국의 기준이 여러 가지 있지만 저는 그중에 하나가 규격화와 표준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태극기는 분명하게 색상으로 빨강색(#C60C30), 파랑색(#003478), 검정색(#000000), 흰색(#FFFFFF)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검은색과 흰색은 말할 필요가 없는데 파랑색과 빨강색의 농도는 만든 회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태극기를 언제 어디에서 제작하든지 크기와 색상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루빨리 전국 어느 곳에서든지 같은 색농도의 태극기를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둘째, 전세계에서 국기를 액자에 넣어서 전시하는 ‘유이(唯二)한’ 국가는 우리나라와 일본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가까운 이웃나라이면서도 정서적으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36년 동안의 일제강점기를 경험하면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점은 그렇게 일본을 싫어하면서도 독도문제와 위안부 문제로 한일관계가 근래에 들어 최악의 상황이었던 2008년 8월 한 달 동안 일본차 수입증가율은 어느 때보다 높았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남묘호랑교를 비롯하여 40여 종의 일본 토착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아가 광복 70주년을 맞이했는데 아직도 우리는 일제시대의 문화를 아무 생각없이 따라하면서 국기인 태극기를 액자 안에 넣어서 사무실 벽에 게시해 왔습니다.
유리 액자 속에 태극기를 게시하는 것은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였던 일제시대의 일장기 게시방법이었는데, 해방된 지 44년이 지난 1989년에 와서야 비로소 정부는 위와 같은 유리 액자 속의 태극기 게시 방식을 폐기하고 지난 2002년 좌우보필형, 족자형 등 새로운 국기의 틀을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지역의 학교와 관공서에서는 일제의 잔재인 유리액자 태극기가 버젓이 교실과 관공서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태극기가 액자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오늘부터라도 태극기를 액자에서 꺼내 숨을 마음껏 쉴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정부고시(행정자치부 고시 제2002-16호)로 지정된 좌우보필형 국기 게양 방식은 왕의 교지나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 사용되었던 족자 형태로 가로 574mm, 세로 350mm, 밑판에 두께 18mm로 제작해 유리를 없애고 실내조명이 반사되지 않도록 무광 처리하였다. 4괘 색상과 마찬가지로 족자 색상도 정확하게 규정해야 할 것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올해 광복절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 왜 서 있는지를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미국 Washington D.C.에 있는 알링턴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 내 한국전쟁기념관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단어 하나를 더하고 싶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 선물이다.(FREEDOM IS NOT FREE BUT PRESENT)”라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 선조들의 희생을 댓가로 물려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짜로 받은 것은 누가 준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갚아야 할 의무가 없지만, 선물은 누가 주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후손들에게 지금보다 더 밝고 살기좋은, 반 만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기보다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진 정신이 건강한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모습 이대로는 안 됩니다.
▲미국 알링턴국립묘지 내 한국전쟁기념관에 새겨 놓은 문구. 전쟁의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조덕현 칼럼니스트
경북 영덕 출생. 배정고, 해군사관학교(공학사), 고려대학교 사학과(문학사), 고려대학교대학원 서양사학과(문학석사), 美오하이오주립대 역사학과(문학박사, 군사사 전공)
해군사관학교교수로서 해전사와 전쟁사를, 美해군사관학교 교환교수로서 미국해군사(American Naval History), 한국사(Korean History)를 강의했으며, 교환교수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유공훈장을 수훈하였다
◆2016.01.16 조선의 ‘아우 나라’ 자처했던 일본 오키나와(流球國)
▲류큐왕국의 왕성 슈리성으로 가는 길. 류큐 전통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이 관광객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돈을 받는다. 성 입구에 중국이 류큐왕국을 일컫던 ‘수례지방(守禮之邦)’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자국의 섬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는 그들의 침략 근성에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후 해외 침략에 나섰다. 제일 먼저 영토화한 것은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流球國)이었다. 오키나와는 일본 침탈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유구국은 고려·조선 그리고 중국 명(明)나라와 교분을 돈독히 해 온 소왕국(小王國)이었다. 그들은 자주 사신(使臣)과 예물(禮物)을 명(明)과 조선에 보내서 친분을 쌓았다.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 관계 기록인 《고사촬요(攷事撮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고사촬요》는 명종 때 어숙권(魚叔權)이 저술하기 시작해서 대대로 조정 신하들이 기록해 나간 사료(史料)였다.
〈병오(丙午・조선 선조재위 39년) 4월에 유구국 중산왕(中山王) 세자(世子) 상녕(尙寧)이 자문(咨文·조선 시대 외교적인 교섭·통보·조회할 일이 있을 때에 주고받던 공식적인 외교문서)을 보냈으니 그 자문에 “거듭 후한 예의를 보답하려 합니다. 왜국(倭國)의 관백(關白)이 패역(悖逆·인륜에 어긋난 행패)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여 귀신이나 사람이 모두 분하게 여겼는데 하늘이 교만한 오랑캐(일본)를 망하게 하여 해내(海內·사방이 바다인 곳)가 모두 좋아 날뛰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천조(天朝·명나라를 칭한 것)의 신무(神武·뛰어난 무술)가 크게 떨쳤고 귀국(조선)의 위령(慰靈·영혼)이 다시 강하여져서 여얼(餘孼·아주 망한 사람의 자손)을 이미 죽여 없앴고 하여 추한 오랑캐 놈들 모두가 넋을 잃고 담이 떨어지지 않는 놈이 없었습니다. 이다음에 어찌 자기 자신의 힘을 생각하지 않는 관백이 있겠습니까. 간혹 패역이 다시 나타나고 하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번봉(藩封·종속관계라는 것)에 있고 귀국(조선)과는 정의(情誼)가 우방(友邦)관계에 있으니 우리 스스로가 계책을 가지고 그들 왜인을 정탐해서 천조(天朝)와 귀국에 전하도록 하겠으니 깊이 염려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유구 사신이 말한 3가지 壯觀
▲남중국해에 있는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때 독립왕국을 이루었으나, 결국 일본에 합병되었다.
이 자문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끝난 후 보내 온 것이었다. 이와 함께 견제품(絹製品)인 비단 물목(物目)들도 보내 왔다고 한다. 광해군 때 유구국에서 보내 온 자문도 있었다. 광해군 재위 첫해에 보내 온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기유년(己酉年·재위 원년)에 유구국 중산왕이 자문을 보냈는데 “우리나라와 귀국(조선)이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똑같이 천조(명나라)에 대하여 신(臣)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모두 천지(天地) 안에 있어서 마음으로 서로 사귀고 정신으로 서로 통하고 하여 돈독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문안(問安)을 하는 일도 끊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저희 나라가 무엇을 잘하여 귀국으로부터 훌륭한 대우를 받아 왔겠습니까.
저희가 근년에 천조로부터 관복(冠服)을 받고 왕작(王爵·왕 칭호)을 그대로 봉해 주시는 은혜도 입었고 하여 비로소 귀국(조선)과 형제의 의(誼)를 맺게 되었고 같이 천조의 번복(藩服·하사받은 옷)으로서 고굉(股肱·팔과 다리)의 신하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이후로는 길이 동맹을 맺어 귀국은 형이 되고 저희 나라는 아우가 되어 형제국으로 천조를 섬기고 즐겁게 화목과 예로 방문하고 해서 영구히 변함없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그리고 물목으로 각종 베(피륙), 비단, 건선(建扇·부채) 등을 보내 왔다.〉
이에 앞서 9대 성종 재위 때 유구국 사신이 온 기록도 있다. 조선 중기 때 인물 성현(成俔)의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성종 정유년(丁酉年·재위 8년)에 유구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니 임금께서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접견을 하였다. 그 사신이 물러나 관사(官舍)에 와서 통사(通事·통역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국에 와서 세 가지 장관(壯觀)을 보았다”라고 하니 통사가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신이 대답하기를 “경회루 돌기둥이 그 한 가지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공의 풍채(風采)가 준수(俊秀)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온 것이 그 두 가지요, 예빈정(禮賓正·외국 사신을 담당하는 수장, 정3품)이 잔치할 때마다 아주 큰 잔에 술을 마음대로 마구 마시면서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하였다. 그때 이숙문(李叔文)이 예빈부정(禮賓副正·종3품)이 되었는데 그 말이 몹시 우스워 배를 안고 웃었다.〉
벼슬·姓 등 조선·중국과 유사
조선 성종 때 문신(文臣) 최부(崔溥)가 중국에 표류(漂流)해 갔을 때의 기록을 왕명으로 적은 책인 《표해록(漂海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바다에 표류되어 북경(北京)에 갔었다. 그때 유구국의 사신 정의대부(正義大夫) 정붕(程鵬) 등이 와서 뒤편 관사(官舍)에 들어 있었는데 그와 함께 온 사람인 진선(陳善), 채새(蔡賽), 왕충(王忠) 등이 떡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므로 최부가 손을 내저으며 받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나라 임금이 20년 전에 우리 아버지를 보내어 귀국(유구국)에 갔을 때 대인(大人·남의 어른 존칭)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므로 항상 그 은정(恩情)을 생각해 왔는데 지금 공(公)과 서로 보게 되는 것만도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 내용에서 볼 때 유구국 사람들은 왜인과 다르게 대부(大夫)라는 중국식 호칭의 관직이 있었고, 성(姓)도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사용하는 것과 유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은혜를 알고 정의(情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인 돌려보내기도
《고려사》의 창왕(昌王)편에도 유구국 관련 기록이 있다.
〈유구국 중산왕 찰도(察度)가 옥지(玉之)를 파견하여 글을 올려 신하로 자칭하였다. 그리고 왜적에게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귀환시키고 그 지방의 산물인 유황 300근, 소목(蘇木·약재로 쓸 수 있는 다목의 붉은 속살) 600근, 호초(胡椒·후추나무 열매의 껍질 가루로 만든 것) 300근, 갑옷 20벌을 바쳤다. 이에 앞서서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유구국 국왕이 우리나라에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보내 온 사신이 순천부(順天府)에 도착하였다고 보고하였을 때 도당(都堂·의정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전대(前代)부터 오지 않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사신 접대에 난색을 보였다. 그런데 창왕이 말하기를 “먼 곳에서 조공하러 온 사람을 박대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은가? 서울로 오라 하여 위로한 후에 보내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였다. 그래서 전판서(前判書) 진의귀(陳義貴)를 영접사로 임명하였다.〉
고려 창왕 때 기사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전객령(典客令·사신을 영접하는 관청의 수장 벼슬) 김윤후(金允厚), 부령(副令) 김인용(金仁用)을 유구국에 답례사로 보냈다. 여기에 회답한 글에 “고려의 권서국왕(權署國王·국왕의 권한을 가졌다는 표현) 창(昌)은 삼가 유구국 중산왕에게 답서를 보내는바, 우리나라와 귀국과의 사이에는 넓은 바다가 가로막혀 있어서 일찍이 왕래를 못하였으나 말은 들었고 생각을 한지 오래였다. 이번에 일부러 사신을 파견하여 글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귀한 물건까지 보내 주었으니 또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송환하여 주니 고맙고 기쁜 심정인 것을 이루 말로 다하기 어렵다. 다만 귀국의 사신을 만족하게 접대치 못하여 매우 섭섭하게 되었다. 이제 전객령 김윤후 등을 파견하여 약간의 물건을 보냄으로써 본인의 뜻을 표하니 받아 주기 바란다.〉
‘포로가 된 고려인’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가 바다에서 항해 중 표류한 사람이나, 왜구에게 붙잡혀 간 고려인을 말하는 것이다.
유구국이 소왕국으로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일본 본토 서남단 지역의 해상이다. 중국으로 오가는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표류한 사람들이 유구국에 닿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유구국의 배가 중국으로 갈 때 역시 표류해서 제주도 근해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사》에는 김윤후가 유구국으로 가서 돌아올 때 고려인 37명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도 있었다. 고려나 조선에서는 유구국왕을 중산왕(中山王)이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표류자 서로 돌려보내
조선 영조 때 예조정랑(禮曹正郞·국가의식과 외교관계를 맡은 관청인 예조의 정5품) 이맹휴(李盟休)가 편찬한 《춘관지(春官志)》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인조 무진년(戊辰年·재위 6년)에 유구국 중산왕 상풍(尙豊)이 우리나라에서 북경에 가는 사신 편을 이용하여 자문(咨文)과 예폐(禮幣)를 보내 왔으니 그 자문에 대(代)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는 말을 하고 또 그 나라에서 표류해 온 사람 임자정(林子政) 등을 돌려보내 준 것을 사례하였다.〉
예폐는 고마움과 공경하는 뜻으로 보낸 예물을 말한다. 《춘관지》에는 또 이런 기사가 있다.
〈인조 말년에 유구국의 태자(太子)가 표류되어 제주도에 왔는데 그곳을 지키고 있던 관리에게 살해를 당하니 그 뒤부터 왕래가 끊어졌다.〉
유구국과의 교린은 이 사건에서 끝난 듯, 이후 유구국에 관한 기사들은 사라진다.
유구국은 몇 개의 부족집단이 뭉쳐서 1429년에 통일왕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다가 1609년 일본 사쓰마번(薩摩蕃)의 침략을 받아 일본의 영향하에 들어갔다. 메이지유신 후인 1879년 강제로 일본의 오키나와현(縣)으로 편입되었다. 유구국은 중국 명(明)나라의 문물제도를 따르며 계속 사대교린(事大交隣)을 해 왔다. 또 조선과 돈독한 우호를 유지했다. 일본의 동정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삼국시대부터 한반도를 침략했던 일본 본토나 구주(九州), 대마도(對馬島)의 왜인들과는 달랐다.
우리의 역사 기록에 보면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왜국의 침략이 많았다. 조선 숙종 때 유수원(柳壽垣)이 쓴 《우서(迂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왜인이 우리나라에 근심이 된 것은 신라·고려 때부터 벌써 그러했는데 고려 말기에 와서 더욱 심하였으니 대개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들이었다. 조선에 와 태조가 재위에서 왜인들로부터 근심이 별안간 없어졌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는데 300여 년 만에 단지 명종(明宗) 때 삼포(三浦)의 난리와 선조 때 수길(秀吉)의 임진년(壬辰年) 난리가 있었을 뿐이다. 임진년 뒤에 왜국은 원씨(源氏)가 지금까지 다스리자 난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 나라에서 난리를 일으키는 자가 없어서 도망 다니는 왜인도 없고 하여 우리나라에 침범해 오지 않았으니 근고(近古)에 없었던 일이다. 왜놈들의 성질이 불똥이 튀는 것 같아서 100년 동안이나 아무 일 없이 지낼 턱이 없는데 이렇듯 오래도록 태평하게 지내니 이런 왜인들을 보면 우리 조선이 하늘의 도움을 받은 바가 되었으니 왜국 침입을 자주 받은 신라와 고려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센카쿠 혹은 댜오위다오
일본은 걸핏하면 지금의 경남 지역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있었다면서, 우리의 삼한시대 이전의 변진(弁辰)에 왜국의 세력이 한반도에 진출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일본인들이 그들의 본토와 가까운 여러 섬들을 그냥두었을 리는 만무하였다. 유구국이 일본에 합병된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다.
오늘날 오키나와, 즉 유구열도(流球列島)에서 보다 더 남쪽 아래 있는 섬들이 일본어로 센카쿠(尖閣)열도, 중국어로 댜오위다오(釣魚島)다. 이 섬을 두고 중국과 일본이 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독도도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영유권 주장은 지독하게 끈질기다. 이는 그들의 선대(先代)부터 이어져 온 침략근성의 발로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 당국은 오히려 맞대응을 자제한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영토로 독도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독도에다 입도(入島)센터를 건립하려다가 잠시 동안인지 영구인지 중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일본은 중국이 센카쿠 상공에 항공기를 띄우자 지체 없이 전투기를 급발진시켰다. 일본의 이러한 강력 대응에서 그들 선대의 근성이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은 중국에 비해 작은 나라다. 그렇지만 맞대응하는 정도의 강한 면이 있다. 이런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나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 ‘이웃나라보다 우리 국가가 우선’이라 하는 국가관(國家觀)이 확립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고려와 조선의 역사에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하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독도를 넘보는 일본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라면, 우리 스스로가 약소국가(弱小國家)임을 자인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의 우경화(右傾化)나 혐한(嫌韓) 행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말을 못해서는 안 된다.
삼국시대 신라도 작은 나라였다.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동맹국 당(唐)나라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자, 이에 맞서 싸워 그들을 몰아냈다. 그러한 신라의 지혜와 용기를 우리도 배워야 할 것이다.
출처 | 월간조선 1월호 글 | 김정현 역사저술가
◆훗카이도의 원주민 '아이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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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가이도 오타루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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