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38/ 예멘 - 오만 - 오스트리아
지구촌 여행/ 국가별38/ 예멘 - 오만 - 오스트리아
■ 예멘 Yemen
al-Yaman예멘 공화국, Republic of Yemen

▲국기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수도는 사나이며 화폐는 예멘 리얄이다. 국영과 민간 부문이 혼합된 경제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으로 국민총생산(GNP)이 인구성장률보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지만 1인당 GNP는 중동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의료시설이 미비하며 초·중등교육이 무상으로 실시되나 성인 인구의 문맹률은 아직 상당히 높다.
1990년 남·북 예멘이 통일되어 단일국가로 성립되었다. 수도는 사나이다. 남북방향으로 565km가량 펼쳐져 있으며 너비는 가장 넓은 곳이 1,100km이다.
북쪽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동쪽으로 오만과 경계를 이룬다. 남서쪽에는 아덴 만을 사이에 두고 지부티와 소말리아가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의 홍해 건너편에는 에티오피아가 있다. 남서부 해안 전체는 아라비아 해에 속한다.
아덴 바로 동쪽 965km 지점에 있는 인도양의 소코트라 섬, 소코트라 섬 근처에 있는 작은 도서군인 브라더 제도,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 사이의 바브엘만데브 해협에 위치한 페림(바림) 섬, 홍해에 속한 카마란 섬을 포함한다.
역사
북예멘이라고도 통칭되던 예멘 아랍 공화국은 현재 예멘의 홍해를 끼고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국가로서, 수도는 사나였다.
예멘 민주인민공화국, 곧 남예멘은 아라비아 해에 속한 아덴 만을 따라 북예멘의 동쪽 편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수도는 아덴이었다. 이 두 지역은 20세기 대부분의 시기에 토착세력과 외국세력 모두를 통틀어 각기 다른 통치권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때문에 계속해서 별도의 정치구역으로 갈라진 상태로 존속해왔다.
북예멘 지역에 있던 미네아(마인) 왕국은 일찍이 BC 4세기 무렵 이집트와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전에는 바빌로니아와 거래를 한 흔적이 엿보일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왕국으로서, 유향·후추 등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소비되던 농산물 재배 및 수출을 통해 큰 번영을 누렸다. 미네아 왕국 남동쪽에는 사바 왕국이 번성했다. 마리브에 설치한 댐을 통해 넓은 지역에 효과적으로 물을 공급한 관개시설로 유명한 사바 왕국은 한때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BC 1세기 이후, 육로를 통해 이루어지던 향료교역이 수로 쪽으로 거점을 옮기고 마리브 댐이 황폐해지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한편 고대의 남예멘은 카타반 왕국과 하드라마우트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BC 1000). 이들 왕국은 유향과 몰약 거래로 큰 이윤을 남겼으며, 넓은 지역에 걸쳐 관개시설을 설치하여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등 오랫동안 남예멘 지역에서 번성했다.
그러나 카타반 왕국은 BC 5세기말경 사바 왕국에게 멸망되었다.
그후 남(南)아라비아 전체는 히미아르 왕국(BC 100경~AD 525)의 영토가 되었고, 한동안 사나가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살기도 했다. 4세기 중반경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개종하면서 로마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찾아들었으나, 히미아르 왕국은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했고 이때문에 현재의 에티오피아에 있던 그리스도교 왕국 아비시니아에게 525년 멸망당하고 말았다.
575년에는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7세기 중엽 이후 이 지역 주민들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칼리프에게 복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남예멘에서는 현지를 다스리던 통치자와 군사지도자들 사이에 패권다툼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북예멘 지역에서도 이슬람 세력권에 편입된 시기의 초반부터 분쟁이 있었다.
632년 반란이 일어났고, 9세기 후반쯤 시아파의 이맘 알 하디가 알리드 자이드 왕조를 세웠다. 이 왕가의 일족들은 1962년까지 북예멘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1173~1229년에는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가 예멘 지역을 통치했으며, 그후 1229~1451년에는 아이유브 왕조의 속국이던 라술 왕조에게 관할권이 넘어갔다. 라술 왕조가 통치하던 시기에 과학·농경·문학·건축 등 여러 방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면서 황금기를 누리다가, 북예멘에 근거를 둔 부족으로서 남예멘 지역 상당 부분까지 세력을 넓혔던 타히르 왕조의 통치권 아래 들어갔다.
16세기초에 접어들면서 예멘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남예멘을 제외한 북예멘 지역이 맘루크 왕조에게 점령된 상태로 있다가 1517년 예멘 전체가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갔다. 1635년 북예멘의 자이드 왕조가 투르크 세력을 몰아내고 남예멘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왕조는 1735년이 지나면서 남예멘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남예멘 지역은 대립하는 부족 우두머리들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세력권으로 분리된 상태에 있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중반 개혁주의적 움직임을 보이던 와하비야 왕조의 세력과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가 추진하던 제국주의적 기도 등으로부터 아라비아 반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다시 예멘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1872년이 되어서야 사나를 차지했는데, 그동안 무하마드 알리의 움직임이 영국을 끌어들여 1839년 영국이 아덴을 점령하는 상황으로 연결되었다.
아덴은 영국령 봄베이 주 관할 아래 있다가 1937년 영국 정부의 직할식민지 및 보호령이 되었다. 1914년 영국-투르크 사이의 협정에 따라 북예멘과 영국령 아덴 보호구 사이에 경계를 확정지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 문제는 1934년이 되어서야 해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투르크가 패전한 후 북예멘은 독립을 획득했다. 자이드 왕조가 아덴과 영국보호령을 포함한 예멘 지역 전체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으나, 1962년 북예멘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몰락하고 예멘 아랍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북예멘 정부는 기본적으로 부족적·종교적 색채가 강하고 친(親)서방 경향을 띠고 있었지만 소련에서 원조를 받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덴 시는 1963년 창설된 남(南)아라비아 연맹에 속해 있었다.
발기인 역할을 맡고 있던 영국은 이 연맹에게 1968년까지 독립할 수 있게 한다는 약속에 따라 서서히 이 지역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철수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던 1967년 마르크스주의 색채를 띤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이 약화되고 있던 연맹을 장악하고, 같은 해 남예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1970년에 예멘 민주인민공화국으로 개칭한 남예멘은 비(非)종교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로서 북예멘과 계속 긴장상태로 대치했고, 1970, 1980년대에 걸친 기간에 여러 차례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남예멘은 북예멘에 비해 정치불안의 정도가 심각한 편으로, 여러 번의 쿠데타를 경험했으며, 1986년에는 짧은 기간 지속된 내란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는 참상을 겪기도 했다. 북예멘이 친(親)서방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던 반면, 남예멘 정부는 당시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89년 남예멘과 북예멘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다는 합의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각각의 의회가 이를 승인함에 따라 북예멘과 남예멘은 1990년 5월 22일 예멘, 또는 예멘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통일된 국가로 새롭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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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트라 섬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 본토에서 남쪽으로 약 380㎞, 동아프리카 소말리아로부터 약 80㎞ 떨어진 예멘의 소코트라 섬에는 희귀 식물들이 자생하고있다 이 섬은 오랫동안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폐쇄적인 생태계를 유지한 덕에 많은 고유종 식물과 조류가 자생해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소코트라 섬 = 아라비아반도 예멘본토에서 약 380KM떨어진 이 섬에는 희귀식물이 많다






◆일상
▲예멘 시나 구 시가지 모습
▲수도 시나의 구시가지 뒤로 알 살레흐 사원이 보인다
▲시위자
▲소처럼 밭가는 낙타
▲소처럼 밭가는 당나귀
▲민주화 혁명 2주년 축제에 참가한 한 소녀 얼굴에 예멘 국기의 색으로 페인팅 13.1.15.
▲물통 옮기는 여인
▲13. 4. 15. 영양실조에 걸린 어이
▲하라즈 산의 알 하자라 마을
▲물 긷는 예멘 소녀들 - 14.3.9. 사나 이브 외곽지역 빈민가
▲폭우 - 13. 3. 20
▲죽어가는 예멘 2017.8.23.사우디의 공습으로 폐허기 된 예멘, 사망60여 명
■ 오만 Oman
오만 왕국, Sultanate of Oman

▲국기
아라비아 반도 남동부 해안에 있는 나라. 수도는 무스카트이며 화폐는 오만 리얄이다. 군주제 국가이며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함께 존재하는 혼합경제체제를 유지하는 개발도상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수출품은 대부분 원유이며 대개 수입을 초과한다. 보건환경이 미약하며 국민들의 문화생활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는 이슬람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오만은 독립 이슬람 왕국으로 절대권력을 지닌 군주 1명이 자신이 직접 뽑은 내각과 직접 지명한 사람들로 구성된 자문회의(1981∼)의 도움을 받아 통치한다. 헌법이나 선거로 구성된 입법부나 합법적인 정당이 없다.
법체계는 〈코란〉의 율법과 마호메트의 교시로 이루어진 샤리아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정부세력으로 오만 해방인민전선(PFLO)이 있는데, 이들은 오만 남부의 도파르 주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며 유격전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1970년대에 보건의 질과 적용범위를 크게 향상·확대시켰으며, 그결과 상당히 높았던 결핵·과립성결막염·백일해 등의 발병률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보건환경이 아직도 미약해 수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와 전염성이 있는 세균성이질을 앓고 있으며, 유아사망률도 높은 편이다. 이러한 보건상태 때문에 평균수명은 55세로 비교적 낮은 편이다. 정부는 초급학교의 수를 1970년의 3개에서 300개 이상으로 늘였고,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무스카트에는 1985년에 설립된 술탄카부스대학교가 있다. 국민들의 문화생활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는 이슬람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카부스 이븐 사이드(Qabus ibn Said) 오만의 술탄
오만의 내륙 부족들은 종종 술탄보다는 선출된 이바디 이맘을 계속 후원함으로써 지배왕조와 충돌했다. 이로 인한 정치적 분쟁이 지속되다가 1959년 마지막 이바디 이맘이 오만에서 쫓겨남으로써 평화가 정착되었다. 오만이 완전히 국제적인 승인을 얻은 것은 1970년 카부스 이븐 사이드가 자신의 아버지인 술탄 사이드를 몰아내고 정부 자유화를 시작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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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오만제국의 이스탄불 정복 558주년 기념식
◆오만(Oman)ㅡ바트, 알쿠틈, 알아윈 고고 유적지
아라비아반도 남동부에 있는 나라로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입지한다. 일찍이 진출하여 150여 년간 지배해온 포르투갈인(人)을 1650년 추방하였다. 1891년 영국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의존이 높아져 사실상 피보호국이 되었고, 1951년 영국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완전 독립국이 되었다.
■ 오스트리아 Austria
오스트리아 공화국, Republic of Austria
수도는 빈이며,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로마카톨릭교가 우세를 보인다. 혼합 자유시장경제와 국영경제가 발달했으며 제조업이 GNP의 약 34%를 담당한다. 음악분야에서 문화적 공헌을 했으며 이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
▲국기
문화예술
오스트리아의 현대 문화환경은 풍부한 유산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유산은 건축과 시에서는 중세부터, 의학과 과학에서는 18, 19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마찬가지로 빈 화랑들은 많은 옛 대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편이다.
오스트리아는 음악분야에서 가장 높이 인정되는 문화적 공헌을 했으며 이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곡가로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가(家) 등이 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폰 베버른 등은 현대음악의 창시자에 속한다.
문학에서는 종종 독일어 문화의 정체지역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19세기 고전기 이후의 프란츠 그릴파르처, 요한 네스트로이, 페르디난트 라이문트 등과 20세기 초기의 후고 폰 호프만슈탈, 아르투르 슈니츨러 같은 작가들은 독특한 오스트리아의 특성을 보여주었다. 20세기 후반에 국제적 명성을 얻은 작가로 슈테판 츠바이크, 로베르트 무질, 페터 한트케 등이 있다. 오스카르 코코슈카와 알프레트 쿠빈은 오스트리아 현대미술의 최초의 창조자에 속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완전히 재조직된 빈 국립 오페라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와 함부르크와 뮌헨의 오페라와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빈 교향악단은 세계의 음악도시에서 연주했다.
▲오스트리아 모차르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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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23일 修交 125주년 맞은 오스트리아의 매력
신동익 駐오스트리아 대사
오늘 6월 23일은 과거 대한제국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 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지 125주년이 되는 날이다. 많은 한국 사람은 오스트리아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요하네스 브람스의 고전음악,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그리고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건축 등의 나라로 알고 있다. 좀 더 역사적인 인연을 따지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지난 6일 수도 빈에서 한·오 수교(修交) 125주년 행사로 ‘마리안느와 마가레트’라는 영화가 상영돼 많은 사람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마리안느 슈퇴거와 마가레트 피사레크는 1962년 이름도 낯선 소록도를 찾아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오스트리아 간호사들이다. 이들을 보낸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는 점심을 금식하여 모은 돈으로 소록도의 의료·복지·교육을 지원했다.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높이 평가해 한국 정부는 지난해에 마리안느와 마가레트에게 명예 시민증을 수여했다.
우리 경제발전의 기틀이 된 포항제철 설립 때에도 오스트리아의 푀스트 알피네사가 기술, 자금을 지원했고, 지난 3월 세계적 자동차 파워트레인 회사인 AVL사의 리스트 회장(한국 명예영사)은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스페셜 동계올림픽에 참여한 우리 선수단에 따뜻한 지원을 했다.
오스트리아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1955년에야 주권을 회복했지만, 정치적 안정을 위해 우파와 좌파가 협력하는 대연정의 정치 문화 속에 경제발전을 추구해 왔다. 또한, 과거 유럽 외교의 중심지였던 전통을 계승,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국제원자력기구(IAEA),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20여 개의 국제기구를 유치해 국제사회의 다자외교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와 관련해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CTBTO에서 가장 먼저 핵실험을 탐지·분석하게 되며, 6자회담과 같은 정치적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 시설을 검증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IAEA 사찰관들이 북한에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면적이 8만4000㎢가 채 안되지만 과학·의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17명이나 배출한 나라이자 히든챔피언 기업을 116개나 보유한 경제 강소국이다. 오스트리아는 전체 기업의 99.65%(32만 개)가 종업원 250인 미만의 중소기업이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비율이 3.0%로 기술 혁신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지난 4월 27일 빈에서 개최된 ‘한·오 정보·기술(IT) 포럼’에서는 양국의 IT 중소기업들이 혁신 기술 협력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정치·경제적 환경 속에 1950년대부터 자리 잡기 시작한 우리 동포 사회는 오스트리아 주류 사회와 잘 융합하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빈 도나우 공원 안에 연 1유로의 임차료를 내고 빌린 장소에 2012년 5월 동포 사회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한인문화회관을 건립한 일은 그 단적인 예화가 될 것이다.
1999년 설립된 한-오스트리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내년에 20회 공연을 하게 되며, 2016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르크너 페스티벌의 파트너 국가로서 우리의 음악 수준을 널리 알린 바 있다. 지난해에만 3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오스트리아를 다녀가는 등 문화적·인적 교류 측면에서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수교 125주년을 맞아 문화·예술·경제 등 각 분야에서 착실히 쌓아 온 협력의 기반 위에 양국 관계는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다.
문화일보
◆찰스부르크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카푸치너 수도원 언덕에서 구도심 쪽을 바라본 모습. 우뚝 선 호엔잘츠부르크성 아래로 바로크 양식의 중세 건축물들이 펼쳐져 있다. 빼어난 조망이 펼쳐지는 자리마다 포옹하는 연인들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도시가 가진 낭만적인 분위기 때문인 듯했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좁게는 도시 이름이기도 하고, 넓게는 하나의 주(州)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잘츠부르크에서 ‘잘츠(Salz)’는 소금이고, ‘부르크(Burg)’는 성(城)입니다. 잘츠부르크는 오랜 세월 동안 ‘소금으로 지은 성’이었습니다. 도시 잘츠부르크 언덕 위에 올라서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호엔잘츠부르크성도, 구도심의 우아한 성당과 수도원도, 광장과 분수도 모두 이 도시가 이룬 ‘소금의 부(富)’를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잘츠부르크를 든든하게 세운 기둥이 소금이라면, 이 도시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하는 건 바로 ‘음표’입니다. 이 도시에서 모차르트가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도 잘츠부르크는 기념비적인 도시가 됐습니다. 불멸의 이름 모차르트는 초콜릿에도, 빵에도, 심지어 소시지에도 새겨졌으며, 도시 안에서는 1년 내내 그를 기리는 음악회가 열립니다.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광지에서 만난 한 주민은 “잘츠부르크 사람 3명 중 2명이 어떤 식으로든지 모차르트와 관계있는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잘츠부르크에는 1965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경쾌한 음표도 떠다닙니다. 개봉된 지 50년이 넘은 이 영화의 주인공 줄리 앤드루스는 이제 팔순의 노인이 됐고, 폰트랩가(家)의 막내였던 여섯 살 막내 킴 캐러스는 어느덧 쉰일곱의 중년 여성이 됐음에도, 영화 속의 잘츠부르크의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아 참, 잘츠부르크를 찾은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의 인기가 뜨거웠지만, 정작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는 건 의외였습니다.
바로크 양식의 우아함 위에 로코코 양식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새겨진 도시의 건축 위로 잘자흐 강물과 함께 모차르트 음악의 음표가 흘러넘치니 이 도시가 어찌 ‘연인들의 것’이 아닐 수 있을까요. 호엔잘츠부르크 성 뒤쪽으로 해가 넘어갈 무렵 도시 곳곳에서는 연인들의 포옹이 자연스러웠던 건 이 때문이었습니다.
도시 잘츠부르크가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라면,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잘츠부르게란트’라고 부르는 ‘잘츠부르크주’ 곳곳에서 만난 경관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일흔여섯 개의 호수를 품고 있다는 ‘잘츠감머구트’ 지역의 경관이 액자 속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알프스의 고산 준봉이 흘러내린 가슈타인 계곡에서는 두려움이 느껴질 만큼 웅장한 설산의 풍경이 남아 있었습니다.
도시 잘츠부르크와 잘츠부르크주. 어디서부터 그림을 펼쳐 보여야 할지 고심하다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곳’부터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다녀온 여정의 순서와는 상관없이 잘츠부르크주에서 시작해 도시 외곽의 잘츠감머구트, 그리고 도시 잘츠부르크로 한 발짝씩 다가가며 거기서 만났던 매혹의 시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압도적인 자연의 겨울 풍광부터 섬세한 호수와 목초지의 경관, 그리고 역사와 낭만의 도시까지…. 우리가 여행에서 매료되는 거의 모든 순간이 그 길 위에 있었습니다.
▲ 오스트리아 중부 알프스 자락의 휴양지 바트 가슈타인의 도심을 흘러내리는 폭포. 알프스의 눈이 녹아 가슈타인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서 크고 작은 마을이 들어서 있다. 설산 아래 초록의 초지 위에 들어선 가슈타인 계곡의 마을은 파스텔 색감의 건물들로 동화적인 분위기를 빚어낸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남쪽으로 1시간쯤 차로 달리면 알프스 산지 사이에 협곡을 이룬 ‘가슈타인 계곡’이 있다. 오스트리아 9개 주 중의 하나인 잘츠부르크주에 속한 땅.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곳이지만, 이곳 가슈타인 계곡은 잘츠부르크주에서, 아니 오스트리아를 통틀어 최고의 휴양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가슈타인 계곡에는 지금 겨울과 봄, 두 계절이 공존하고 있다. 계곡 아랫마을에는 초록 호밀밭 사이로 개나리며 벚꽃이 만개했지만, 마을을 포위하듯 우뚝 솟은 알프스의 산록은 눈이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겨울의 설산이다. 계곡 아래 초록의 화사한 시간과 순백의 설산이 그려내는 장엄한 시간이 동시에 머물고 있다.
이곳 가슈타인 계곡은 겨울에는 스키로, 여름철에는 트레킹과 다양한 레포츠로, 또 사계절 즐길 수 있는 라듐 성분의 온천으로 이름이 났다. 계곡에서 올려다보면 곳곳에 스키 슬로프와 트레킹 코스인데, 그 규모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어림짐작이라도 해볼까 싶어 관광청 직원에게 슬로프와 트레킹 코스 숫자를 물었는데, 돌아온 답은 ‘모른다’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 여기서는 슬로프와 트레킹 코스는 ‘개수’가 아닌 ‘길이의 합’으로 재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키 슬로프와 트레킹 코스가 산정에서부터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데다, 저마다 정해진 길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만들며 질주했다. 그러니 슬로프의 숫자를 묻는 질문은 곧, 한 도시의 모든 길의 수를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불분명하고 부질없는 일이었다.
질문을 숫자에서 길이로 고쳐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스키 슬로프의 총연장은 250㎞이고, 트레킹 코스는 350㎞ 정도인데, 이 숫자도 정확한 건 아니다.” 스키 슬로프가 자그마치 서울에서 강릉까지의 거리이고, 트레킹 코스는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라는 얘기였다. 긴 거리만큼 놀라웠던 건 거의 모든 슬로프와 트레킹 코스가 탄성이 한숨처럼 나오는 알프스의 경관 사이를 지난다는 것이었다. 이런 길이라면 몸보다 마음이 한발 앞서서 이끌고 갈 것 같았다.
# 빼어난 경관이 느긋한 시간을 충만하게 채워주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가슈타인 계곡 아래 세 개의 마을이 들어서 있다. 가장 큰 마을이 바트 가슈타인이었다. 가슈타인 앞에 붙은 독일어 ‘바트’는 영어의 ‘배드(Bad)’와 철자가 같아 무심코 ‘배드 가슈타인’이라고 읽게 되지만, 독일어 ‘바트’는 영어의 ‘배스(Bath:목욕이나 목욕탕)’와 뜻이 같다. 지명 뒤에 붙는 ‘가슈타인(Gastein)’은 광물을 의미하니 붙여서 읽으면 ‘광물 목욕탕’, 즉 광천 온천탕을 이르는 말이 된다.
바트 가슈타인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온천이 있는데, 여기서 46도의 온천수가 하루 5만ℓ씩 솟아난다. 류머티즘 질환이나 알레르기, 호흡기 질환에 치유효능이 좋다는 라듐이 함유된 온천수다. 바트 가슈타인의 명성은 600년 전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휴양차 이곳을 들르면서 시작됐다. 그 뒤에 온천이 솟는 곳마다 스파와 호텔이 들어섰고, 훗날 스키장이며 트레킹 코스까지 개발돼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휴양의 명소가 된 것이다.
가슈타인 계곡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두 곳이 있으니, 그중 하나가 곤돌라를 타고 오른 크레우즈 코겔 산 정상에서의 경관이었고, 다른 하나가 중세 때의 금광을 개조해 만든 라돈 테라피 시설 ‘슈테이너 헤일스톨렌’이었다. 스키 곤돌라를 바꿔 타고 해발 2686m의 크레우즈 코겔 산정에 오르자 3000m를 오르내리는 설산의 능선이 그려낸 장쾌한 풍경이 펼쳐졌다. 알프스의 장엄한 벼랑에 아슬아슬 발을 딛고 선 기분은, 마치 무한의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넋을 놓고 서 있는 내내 머릿속에는 아무런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광산을 개조해 만든 테라피 시설인 슈테이너 헤일스톨렌은 우리의 찜질방 같은 곳이었는데, 광산의 갱도를 따라 열차를 타고 들어가서 40도가 넘는 자연 지열과 높은 습도 속에서 찜질을 하고 나오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어두운 갱도의 지열과 습도 그리고 라돈 성분이 건강에 좋다고 했지만, 그곳에서 줄곧 떠올린 것은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 속에서 중세 때 금을 캤을 사람들이었다.
가슈타인 계곡에서 이틀 동안 머물며 녹은 눈이 협곡으로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았고, 진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뾰족하게 깎은 연필 모양의 성당 첨탑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호밀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게으른 속도로 굴러가는 관광용 마차를 타보기도 했다. 해는 늦게 떴고 또 일찍 졌지만, 그곳에서는 누구도 바쁘지 않았고,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더딘 시간 속에서 짧은 일정의 여행자가 갖는 조바심이 발동하지 않았던 건, 주위의 빼어난 경관들이 빈 시간을 충만하게 채워주었기 때문이었다.
▲바트 가슈타인 계곡의 가장 깊은 쪽에서 스키 곤돌라를 타면 해발 2686m의 크레우즈 코겔 산 정상에 닿는다. 여기에 서면 해발 3000m를 오르내리는 알프스 설산의 준봉 사이로 구름이 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숨이 턱 막히는 장관이다
# 잘츠감머구트가 그려낸 낭만의 풍경
가슈타인 계곡에서 잘츠부르크로 한 발 더 다가선다. 잘츠부르크 외곽에는 ‘잘츠감머구트’가 있다.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일흔여섯 개의 호수가 있는 곳. 잘츠(Salz)는 ‘소금’을, 감머(Kammer)는 ‘창고’를, 그리고 구트(Gut)는 ‘좋다’는 걸 뜻하니 풀이하면 ‘좋은 소금 창고’쯤이 되는데, 도시 잘츠부르크 외곽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가진 옛 소금광산 일대를 묶어 이렇게 부른다.
잘츠부르크 인근은 한때 바다였다가 융기한 땅이라 산에서 소금이 난다. 이른바 ‘암염(岩鹽)’이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소금은 보석처럼 귀한 것이었으니, 여기야말로 소금을 처음 캐냈던 철기시대부터 귀하고 소중한 땅이었으리라. 소금이야 흔전만전인 지금 잘츠감머구트 일대를 보석처럼 빛나게 하는 건 호수를 끼고 있는 마을의 낭만적인 경관이다. 초록의 호밀밭과 맑은 물빛의 호수, 파스텔 톤의 우아한 고성과 성당의 첨탑이 어우러지는 잘츠감머구트 일대는 너무 이국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잘츠감머구트의 중심은 일찌감치 오스트리아 황제의 여름별장이 들어선 바트 이슐이지만, 그보다 더 이름난 곳이 자그마한 호반 마을 할슈타트다. 마을 전체가 마치 경관만을 고려해 세워진 세트장처럼 느껴지는 곳. ‘이발소 그림’ 같은 이상향의 풍경이 할슈타트에 있다.
할슈타트와 맞붙어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 곳이 볼프강 호수 일대와 샤프베르그 산이다. 샤프베르그 산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몬드 호수와 아터 호수를 비롯해 잘츠감머구트 일대의 산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 서서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유럽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왜 이곳 잘츠감머구트까지 들어와 여름별장을 지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샤프베르그 산이 풍경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보는 즐거움을 준다면, 볼프강 호수를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인 장크트 길겐이나 장크트 볼프강 같은 마을을 소요하는 건 이국적인 그림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보는 경험이다. 잠깐 걸음을 멈춰 차가운 호수에 손을 담그거나 들판에 피어난 봄꽃의 향기를 맡아보았던 건, 이곳이 상상이 아니라 실재의 공간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였다.
▲잘츠감머구트에서 가장 유명한 호반 마을인 할슈타트. 작은 마을이지만 빼어난 경관으로 늘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 잘츠부르크, 소금으로 쌓은 도시
이제 도시 잘츠부르크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호엔잘츠부르크성이다. 가파른 절벽 위에 요새로 서 있는 성은 도시 어디에서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잘츠부르크의 상징과도 같은 호엔잘츠부르크성이야말로 도시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소금의 채굴로 도시가 번성하자, 중세시대 로마는 잘츠부르크를 식민지로 삼아 주교를 파견해 다스리도록 했다. 대주교의 파견은 소금무역의 전권을 갖기 위한 것이었다. 잘츠부르크에 부임한 대주교는 종교적 지도자이자, 신성로마제국 제후의 신분을 받아 ‘제후 겸 대주교’라는 파격적인 지위를 누렸다.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대신, 잘츠부르크에서 소금무역을 독점하며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절대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주교는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돈으로 곳곳에 교회와 궁전을 세웠다. 지금 잘츠부르크 구도심에 남아있는 교회와 궁전 대부분이 당시 대주교의 부로 쌓아올린 것이었다. 호엔잘츠부르크성도 그렇고 성 아래 구도심의 대성당과 성페터 성당, 레지덴츠궁도 대주교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지어진 것이었고, 강 건너 헬브룬 궁전과 미라벨 궁전과 정원 역시 대주교의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대주교 중에서도 특히 교황청이 가장 타락했을 당시 잘츠부르크를 지배했던 대주교 볼프 디트리히 재임 시 이 도시에 가장 호화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없는 신분임에도 연인과 열다섯의 아들을 두었던 그는 잘츠부르크를 ‘북쪽의 로마’로 만들고자 미라벨 궁전 등 호화로운 건축물을 세웠다. 결국 그는 소금무역에 대한 분쟁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잘츠부르크성에 감금돼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만든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은 여태 남아 중세와 바로크 양식의 조화로운 통일감을 이루며 도시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잘츠부르크 시내의 건축물과 광장이 크고 웅장하며 길이 잘 정돈돼 있는 것에서도 바로 이런 ‘권력의 건축’의 모습이 엿보인다.
이쯤에서 잘츠부르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대 히트 상품인 모차르트 얘기, 자그마치 54억 유로의 경제적 가치를 지녔다는 모차르트의 자취는 이 도시 곳곳에 있다. 일단 모차르트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보고, ‘모차르트 쿠겔’이란 초콜릿을 구입하는 것까지가 기본 중의 기본. 모차르트의 체취를 더 느끼고 싶다면 디너 콘서트가 답이 된다. 모차르트 광장의 콘서트 홀과 호엔잘츠부르크성 등에서 조금씩 다른 디너 콘서트가 열리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모차르트 광장의 디너 콘서트. 여기다가 잘츠부르크에서 올로케이션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됐던 미라벨 궁전과 헬브룬 궁전을 찾아가는 투어를 함께 보탠다면 중세의 잘츠부르크와 그 도시 속 음표를 찾아가는 여정은 완성된다.
잘츠부르크주(오스트리아)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6년 4월 12일 수요일
◆왈츠의 도시 비엔나
다뉴브강 연안에 있는 빈(Wien/ 비엔나)은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1세기에 로마제국의 군영지가 축조된 이래 20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합스부르크 왕가'의 650 년에 걸친 영광의 도읍지다. 과거의 화려한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 오페라극장, 대학 등의 웅장한 건물을 간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행정, 금융, 상업의 중심지다. 총면적 414 평방km에 인구는 약 16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음악의 도시다. 언어는 독일어지만 영어가 널리 쓰여지며 60%의 시민이 크리스천이다.
▲스트라우스의 금상金像
▲'아름다운 샘'이란 의미의 화려한 쉔브룬 궁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매우 화려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1612년 마티스황제가 사냥 도중 발견한 "아름다운(Schoen) 샘(Brunn)"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언덕 위의 글로리에테에서 바라본 화려한 궁전과 정원, 비엔나시
▲외부 건물은 크림색이며 화려한 내부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1441 개의 방 가운데
45 개의 방만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집한
동양의 자기와 칠기, 페르시아의 세밀화 등으로 우아하고 호화롭게 로코코식으로 구며져 있다.
▲쉔브룬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사용되었으나 1805년, 1809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나폴레옹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스 신전 양식의 글로리에테
▲궁전 집사들의 거처
▲<궁전 정원> 비엔나의 중심지 '케른트너'거리 비엔나 관광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다.
▲빈의 상징 - 슈테판 성당 137m에 달하는 첨탑이 있는 거대한 사원으로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이다. 빈의 상징인 이 성당은 65 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359년에 완성되었다.
▲사원의 내부는 석조 부조의 설교대가 있으며,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1450년에 만들어진 지하묘지에는 흑사병으로 죽은 2000 구의 유골과 합스부르크 왕가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이 보관된 항아리와 백골이 쌓여 있는 '카타콤파'가 있다.
▲슈테판 성당은 비엔나의 가장 번화한 거리인 '케른트너 거리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모짜르트의 결혼식이 바로 이 곳에서 있었기에 더욱 유명하다. 성당앞에는 오페라 호객꾼들과 다양한 퍼포먼스들이 진행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있다.
▲비엔나 전통의 왈츠음악회
▲비엔나 시청
▲13.2.7.빈에서 열린 오페라 볼 에서 무용수들이 왈츠를 추고 있다
▲오페라 볼 - 오스트리아 최고의 사교 댄스로 약 5천명이 참석 입장료는 최저 유로 250 약 37만원으로 좋은 자리는 비용 약 2711만원까지 올라 간다
▲비엔나 쉘브론 궁전과 정원
▲쉘브룬 궁과 이를 200분의1로 축소한 모형물
▲밀레니움 시티 쇼핑물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
▲비엔나의 벼룩시장 16.01.06
▲오블라 공원
▲창공에 새 한마리
◆할슈타트
▲아름다운 마을 할슈타트
◆풍경
▲오스트리아의 겨울 - 14.12.3
▲짤츠부르크 '짤츠캄머굿'
▲알프스 - 고도 3100m에서 바라 본 세상은 온통 백색이다
▲카린티아주 베르퇴제 호수의 무지개
▲포랄베르크 베슐링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아침 풍경
▲비엔나 도나우 강에서 촬영한 이미지
▲도심을 흐르는 짤스브르크 강
▲천연 얼음 궁전
▲세계 최대 얼음 동굴
▲오스트리아 입삼 마을 설산
▲그로스글로코너 = 신비로운 산 위의 풍경 - 오스트리아 최고봉, 3천8백 미터에서 촬영
▲그리밍 산 =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닮은 산 - 알프스 산맥의 슈타이어마르크주 그리밍 산
▲다흐슈타인 산(2885m)
▲알프스
▲크리믈 폭포 - 세계에서 8번째 큰 폭포
▲호수의 열쇠구멍 - 호수와 바다의 수면이 육지보다 높기 때문에 시설이 가능
◆일상
▲동화 속 마을
▲몬트제교회
▲바덴공원
▲슈와제네거 동상
▲알프스 산맥
▲알프호른 축제 12.9.16.
▲인스부르크의 봄 나들이
▲한파 고드럼 - 12.1.6.
▲대폭설
▲서부 알프스 지역에 폭설
▲홍수 도미노 - 13. 6.5 운터로이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