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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조선일보) 2022-05/ 05.02(월) 마스크 벗는 심정 - 05.31(화) 별명과 왕따

상림은내고향 2022. 6. 1. 20:36

만물상 2022-05  조선일보

05.02(월)  마스크 벗는 심정

▲4월 27일 오후 대구 달서구 계명문화대 본관 앞 분수광장에서 공연음악학부 재학생들이 행복문화인 프로젝트 '버스킹-봄을 노래하다' 야외공연으로 뮤지컬 위키드(WICKED)를 선보이고 있다./뉴스1]

 

1년쯤 됐다. 출근길에 회사 건물 앞까지 와서야 마스크를 쓰지 않은 걸 깨달았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지하철 두 노선을 45분 타야 한다. 그 긴 시간 마스크가 없었다. 원래 정신을 여기저기 두고 다니는 편이지만, 낭패감에 입맛이 씁쓸했다. 놀라웠던 건 지하철 승객 중 뭐라고 말을 건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상대방 불편하지 말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그 뒤 한동안 현관 문에 ‘마스크’라고 쓴 메모를 붙여놨다.

 

▶미세 먼지로 마스크를 쓸 때는 바깥 오염물질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코로나는 좀 다르다. 남의 바이러스를 막는다는 뜻도 있지만, 내가 갖고 있을지 모르는 바이러스가 남을 해치지 못하게 한다는 생각도 강하다. 코로나는 무증상 단계의 전파가 44%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자기가 감염된 걸 모르면서 바이러스를 뿌리고 다닐 수 있다. 그래서 마스크엔 ‘사회적 책임’의 의미가 강하다.

 

 

▶손흥민의 영국 프리미어리그 방영 때 보면 축구장 영국인들은 마스크도 안 쓰고 있는 힘껏 고함을 질러댄다. 무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바탕엔 제국주의 시절의 우월 심리도 있다고 한다. 유럽은 사스, 에볼라, 신종플루 같은 바이러스에 당해본 일이 없다. 그런 병은 제3세계에서나 있는 전염병으로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그랬던 유럽이 코로나에 혼쭐이 났다. 영국 총리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 들어갔었다. 한편으론 코로나 걸리든 말든 마스크 없이 스트레스를 몽땅 날려버리는 영국인들이 부럽기도 하다.

 

▶오늘부터 야외에선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지하철 안에선 꼭 써야 한다). 염려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야외 마스크 해제가 코로나 종식처럼 받아들여질 경우 문제라는 것이다. 전파력이 오미크론보다 더 막강하고 면역 회피 능력을 갖췄으면서 중증을 더 유발할 수 있는 변이가 나올 수도 있다. 더구나 백신 또는 감염으로 얻는 면역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진다. 이웃 중국에선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점도 불안을 더해준다.

 

▶작년, 백화점 엘리베이터에서 두 살 아이 손을 잡고 탄 젊은 엄마와 짧은 대화를 했다.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집 밖에 나올 때는 꼭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마스크 없는 바깥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짠했다. 이제 세 살이 됐을 그 아이가 마스크 없이 집 밖으로 나오는 장면을 한번 떠올려 본다. 더구나 봄 아닌가. 온 세상 꽃 천지인데 그 아이 마음도 울긋불긋 환하게 피어날 것 같다.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05.03  “느그가 롯데가?”

 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는 미국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광팬인 남자 교사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매년 레드삭스의 162경기를 다 챙겨보느라 연애에 번번이 실패하고, ‘운명의 여자’를 만났는데도 야구 때문에 헤어질 위기에 처한다. 보다 못한 어린 제자가 묻는다. “선생님은 레드삭스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돌려받은 적이 있나요?”

 

 

▶응원하는 야구팀이 부진해도 지독하게 짝사랑하는 팬들을 ‘야빠’라 부른다. 미국에선 보스턴 레드삭스와 시카고 컵스 팬들이 양대 야빠로 군림하다 각각 86년과 108년을 견뎌 짝사랑을 보답받았다. 일본에선 한신 타이거스 팬들이 유명한 야빠다. 한신은 일본 시리즈를 1985년 단 한 차례 우승했고, 이후 총리가 19명이나 바뀌는 동안 우승이 없는데 팬들은 한결같다. 일본 의학계엔 ‘난치병을 앓는 한신 팬이 우승을 상상하며 재활한 방법’ ‘한신 팬은 패배한 경기를 봐도 심박수가 떨어지는 이유’ 등의 논문이 있다.

 

▶한국의 야빠는 단연 롯데다. 삼성과 더불어 유이(2)하게 41년 역사를 자랑하는 KBO리그 원년 멤버인데 삼성이 8번이나 우승하는 동안 롯데는 꼴찌를 맴돌아 ‘꼴데’로 불렸다. 정규시즌 1위는 해본 적 없고, 한국시리즈 우승은 1992년이 마지막이다. 현 KBO리그 10개 구단 중 우승을 가장 오래 못해봤다. ‘무적 LG’와 ‘최강 한화’ 팬들도 알아주는 야빠이지만 이들은 각각 1994년, 1999년에 우승해서 롯데 팬보다 설움이 덜하다.

 

▶야구 팬들은 스페인 프로축구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가 맞붙는 ‘엘 클라시코’에 견줘 LG와 롯데의 대결을 ‘엘 꼴(찌)라시코’로 부른다. 롯데는 엘 꼴라시코에서 늘 열세였는데 지난 주말 LG와 3연전을 싹쓸이하며 리그 2위를 지켰다. LG전 싹쓸이는 2012년 6월 이후 10년 만이다. 주자가 나가면 병살타를 치고, 투수는 볼넷만 던지고, 수비진은 ‘알까기’를 일삼는 꼴데 야구가 아니라 선발은 호투하고 타자는 타점 뽑고 야수는 호수비를 펼치는 ‘롯데 자2언츠’(요즘 2위라고 붙은 별명)의 야구에 팬들이 “느그가 롯데가?”라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전설적인 야구 기자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했다. 과학은 불확실성이 없지만, 예술은 의지와 능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화가 고야처럼 어둡고 ‘괴이’하던 롯데의 야구가 올봄엔 마티스처럼 밝고 생생하다. 올 시즌 은퇴를 선언한 이대호는 우승 반지를 끼고 팬들과 작별할 수 있을까.

양지혜 기자

 

05.04  내 방으로 출근

“지난 금요일, 아침 10시에 사무실 나가서 밤 11시까지 있었다.” 흔한 요즘 샐러리맨 일상 같지만 이는 18세기 말 영국 동인도회사에 근무했던 17세 직원 찰스 램의 기록이다. 1729년 근대적 사무실의 효시인 동인도 회사 건물이 런던에 세워진 이래 200여 년간 현대인의 삶은 사무실이란 공간 때문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어떨 땐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사무실에서 직장 동료와 보내는 게 현대인의 삶이 됐다.

 

 

▶‘출근 전에 고단백 식사를 하고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라. 눈을 감고 코로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2초간 숨을 참았다 천천히 내뱉는 심호흡을 10번 반복하라.” 미국의 온라인 건강 잡지에 실린 ‘출근길 분노를 줄여줄 8가지 팁’의 일부다. 코로나 이전, 매일 1억5000만명 이상이 자동차로 출퇴근하고, 760만명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미국에서는 출근 스트레스 연구 결과가 다양하게 나와 있다.

 

▶직장인들을 출근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줄 원격 근무(telecommuting) 개념은 반 세기 전 등장했다. 1972년 미국의 로켓 과학자였던 잭 닐즈가 대학 연구팀을 맡아 9개월간 보험회사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LA의 악명 높은 교통 체증과 대기 오염을 타개할 대안으로 원격 근무 실험을 한 것이다. 원격 근무자의 생산성은 높아졌고, 출퇴근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아 건강은 좋아졌으며, 사무실 비용도 절감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정작 이 회사는 원격 근무를 도입하지 않았다. 사무실 출근이 생산성을 높여준다는 깊은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더디게 확산되던 원격 근무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에 친숙한 근무 형태가 됐다. 한번 재택 근무를 경험한 젊은 직장인들이 과거로 돌아가는 데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인재 이탈을 막기 위해 상당수 기업들은 출근과 재택을 섞은 하이브리드(혼성) 근무 시스템으로 속속 바꾸고 있다. 숙박 공유 업체 에어비앤비 같은 곳은 집 말고 휴가지나 다른 나라에 가서도 일하라며 ‘워케이션(work+vacation)’ 개념까지 도입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감소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도 완화되면서 일상이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가지만 ‘사무실 전원 출근’만큼은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있다. 지옥철에 시달리는 출퇴근, 야근 및 회식 스트레스 등에서 해방된 삶을 경험한 코로나 세대에게는 ‘재택 근무가 곧 복지’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른바 ‘내 방 출근족(族)’이 보편화된 세상이 왔다. 좋은 직장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강경희 논설위원

 

05.05  삼성양자, LG양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먼은 1983년 “세상 모든 물질은 양자역학(量子力學)에 따라 움직이는 만큼 이 원리로 새로운 차원의 계산 도구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2015년 구글과 나사가 “기존 컴퓨터보다 1억배 빠른 양자 컴퓨터가 탄생했다”고 발표했다. 수퍼컴퓨터로 3년 2개월 걸리는 계산을 단 1초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기념비적 도약”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양자가 뭔지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정확한 말은 아니지만 빛을 구성하는 광자나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 등이 양자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미시 세계의 양자에는 거시 세계와는 전혀 다른 물리 법칙이 적용된다. 양자는 한 번에 두 가지 상태를 동시에 갖기도 하는데, 양자 중첩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시 세계는 정확히 관측할 수 없고 확률로만 예측할 수 있다. 이게 양자역학이다. 아인슈타인은 한때 “신은 주사위 놀이(확률)를 하지 않는다”고 양자역학 이론을 비판했지만 오판이었다.

 

▶현재의 컴퓨터는 0과 1로 이뤄진 정보 단위인 ‘비트’가 기본이 돼 작동한다. ‘비트’는 아무리 늘어나도 한 번에 한 정보만 표현할 수 있다. 반면 양자 컴퓨터의 정보 단위인 큐비트는 양자 중첩을 이용해 00, 01, 10, 11 같은 네 가지 정보를 동시에 표현한다. 비트의 정보량이 비례로 늘어난다면, 큐비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양자 컴퓨터는 소인수 분해나 최단 이동 경로를 찾는 이른바 ‘조합 최적화’ 문제에서 최고 능력을 발휘한다. 다른 연산 능력은 수퍼컴퓨터와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떨어진다. 그런데 조합 최적화 문제가 바로 암호학이나 사이버 보안, 방위산업, 인공지능의 핵심이다. 2011년 양자 컴퓨터를 가장 먼저 도입한 곳도 방위산업체 록히트마틴이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어제 ‘국가 양자 이니셔티브 위원회’를 백악관에 설치하기로 했다. 양자 컴퓨터와 양자 암호 부문에서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중국을 겨냥한 조치다. 과학자들은 10년 뒤면 양자 컴퓨터가 오늘날의 모든 암호를 풀어낼 것으로 본다. 지금의 군사 암호가 무력해지는 것이다. 양자 컴퓨터가 풀지 못하는 유일한 암호가 양자 암호다. 양자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이 달렸다. 일본과 유럽도 양자 연구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가 대표하는 전자(電子)의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곧 열릴 양자 시대에도 삼성전자를 이은 삼성양자, LG전자를 이은 LG양자 같은 기업이 나와야 한다.

박건형 기자

 

05.06  100번째 어린이날

“자래로 조선의 어린이들은 어른의 밑에 있어 ‘자유’라는 것을 절대로 얻지 못하고 자라났으므로 (중략)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1923년 4월 21일 자 조선일보는 어린이날 제정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어린이’라는 표현조차 낯선 시절이었다.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는 당시 어린이날 구호가 참혹했던 그 시절 아동 인권과 복지 실태를 엿보게 한다.

 

 

▶식민지 선각자들은 어린이날에 민족 독립의 염원도 담았다. 소파 방정환이 1929년 5월, 서울 지역 유치원 7곳 원아들을 장충단 공원에 초청해 잔치를 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소설가 심훈은 같은 달 7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축시 ‘어린이날에’에서 어린이들이 훗날 독립국가 시민으로 살게 되기를 소망했다.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나립니다/(중략)/ 몇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 우거진 벌판에도 봄이 오면은(하략).’ 방정환도 이듬해 한 기고문에서 “적게는 우리 가정에, 크게는 우리 민족 전체에, 더 크게는 인류 전체에 새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제(日帝)는 그런 어린이날을 탄압했다. 축하 행렬조차 불허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반목하며 어린이날 행사마저 각자 따로 여는 사태를 빚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어린이날을 비롯한 모든 집회가 금지됐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첫 일요일, 어린이날 행사가 재개되자 많은 사람이 감격했다. 마침 그날이 5일이어서 이후 5월 5일로 고정됐다.

 

▶어제가 100번째 어린이날이었다. 세계 최빈국에서 1인당 소득 3만달러 나라로 도약하는 사이, 어린이날은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다. 신생 대한민국은 어린이날을 서울운동장에서 대통령이 참관하는 대규모 축하 행사로 치렀다. 1975년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국가 행사 의미는 축소되고 ‘국민 나들이 날’로 탈바꿈했다. 가난을 벗어났지만 여행이 보편화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다들 어린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동물원이 있던 창경원(창경궁)엔 그날 하루 수십만명이 몰렸고 미아 사태가 속출했다.

 

▶지난 2년, 코로나로 어린이날도 크게 위축됐었다. 다행히 올해 거리 두기가 해제되며 모처럼 가족 나들이가 재개됐다 전국의 유원지·테마파크며 김포공항 주차장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개방되는 청와대가 내년 어린이날엔 어떤 모습으로 어린이들을 맞게 될지도 궁금하다. 100번째 어린이날을 맞기까지 흘린 땀이 후손에게 풍요를 선사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김태훈 논설위원

 

05.07(토)  다시 트럼프?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공화당 장악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22대 대통령 클리블랜드가 1888년 재선에 도전했지만 공화당 해리슨 후보에게 졌다. 전체 득표에선 앞서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밀렸다. 4년 와신상담하는 동안 미국 경제가 곤두박질쳐 해리슨을 꺾고 백악관에 재입성했다. 연임(連任)에는 실패했으나 중임(重任)에는 성공했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다. 미 헌법은 연임은 2번으로 제한하지만 간격을 두고 대통령을 두 번 하는 중임은 허용한다.

 

▶1900년 이후 재선에 실패한 미 대통령은 6명이다. 태프트, 후버, 포드, 카터, 부시(아버지), 트럼프다. 대부분 경제 부진 때문에 떨어졌다. 트럼프는 코로나 방역도 실패했다. 전문가 조언을 무시했다가 본인이 코로나에 걸리기도 했다. 4년 내내 분열과 거짓말, 인종주의, 규범 파괴, 동맹 무시로 문제를 일으켰다. 분열된 미국 사회를 두 동강 냈다. 대선 불복으로 미국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 직전 “(패하면) 아마 나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할 것”이라고 했다. 당시 미국 검찰은 트럼프 일가의 탈세·사기 혐의, 대통령직을 이용한 사익 추구 혐의를 조사하고 있었다. 지금도 수사 중이다. 작년 1월 대선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 의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자, 연방 검찰은 트럼프를 내란 선동 혐의로 기소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영장 청구만 수십 건이라고 한다. 어느 하나만 유죄를 받아도 감옥에 갈 수 있다.

 

▶그런데 오는 11월 미 중간선거를 위한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가 공개 지지한 후보 22명 전원이 당선됐다고 한다. 오하이오주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뽑힌 밴스는 2016년 트럼프를 ‘미국의 히틀러’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작년 7월 “좋은 대통령”이라고 태도를 바꿔 트럼프 지지를 받았다. ‘미 의회 폭동 책임자는 트럼프’라고 하던 공화당 의원들도 줄줄이 투항하고 있다. 2024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바이든 대통령을 이길 것이란 여론조사가 나온 이후 공화당은 ‘트럼프당’이 됐다는 말도 나온다.

 

▶지금 트럼프 지지층은 2016년 당선 때처럼 저소득 백인과 낙후 지역 주민이다. 이들의 지지는 맹목적이다. 40년 만에 최악이라는 미국 인플레이션도 이들을 결집시킨다. 검찰 수사를 막는 방법도 ‘대통령’이란 방탄복을 입는 것이다. 지금 미국 정치와 사회는 우리가 알던 그 미국과는 다르다. 130년 전 클리블랜드는 정직하고 도덕적인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았다. ‘정직’ ‘도덕’과는 담을 쌓은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은 지금보다 더 달라질 것 같다.

안용현 논설위원

 

05.09(월)  영화배우 강수연

이문열에 빠져 살던 대학 시절, 영화로 제작된 장편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보러 극장에 갔다.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도 그를 한사코 밀쳐내야 했던 여주인공 윤주의 내면을 강수연이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했다.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다. 파티장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강수연은 붉은 웃옷을 벗어 던지고 춤추며 미친 듯 웃었다. 연인을 떠나 여러 남자를 전전하던 윤주의 좌절을 그렇게 표현했다. 연인이 쏜 총에 최후를 맞는 순간보다 그 장면이 더 슬펐다.

 

 

▶강수연은 자타 공인 국민배우다. 연기 잘하고 인기 많은 배우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많은 이에게 삶을 함께한 배우다. 세 살에 데뷔한 강수연은 “내가 길거리 캐스팅의 원조”라고 말하곤 했다. 내 기억 속 가장 오래된 배우도 강수연이었다. 초등학생이던 1970년대 TBC 아동극 ‘소년 홍길동’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청소년 시절엔 청춘 드라마 ‘고교생 일기’를 보며 가슴 뛰었다. 20대 땐 ‘추락하는…’에, 30대 땐 사극 ‘여인천하’에 매료됐다.

 

▶많은 아역 스타가 받아들인 단명의 한계를 강수연은 거부했다. 물불 가리지 않는 연기로 아역의 저주를 극복하며 ‘깡수연’으로 불렸다. 스물한 살이던 1987년, 임권택 감독 영화 ‘씨받이’에서 출산 장면 하나를 4박5일 걸쳐 찍었다. “나는 이렇게 처절하게 연기한다”고 외치는 듯했다. 2년 뒤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선 “비구니 역이니 머리 깎는 것은 당연하다”며 아무렇지 않게 삭발을 단행했다. 파르스름한 민머리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싶었다. ‘고래사냥2′에선 대역 쓰자는 권유를 물리치고 원효대교에서 한강에 뛰어드는 장면을 직접 찍었다. ‘고래사냥 1′의 여주인공 이미숙만 못하다는 평가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수연 연기는 세계 영화인과 팬들의 시선도 사로잡았다. 영화 제작자 이태원, 감독 임권택과 함께 세계로 나갔다. ‘씨받이’와 ‘아제 아제…’로 베네치아와 모스크바에서 잇달아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한류의 씨앗을 뿌렸다. 영화인들 가슴에 “우리도 가능하다”는 웅지를 심었다. 강수연 키즈들이 그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제대로 못 해내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절벽 끝에 서 있는 마음으로 연기한다”던 그녀가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났다. 올 연말쯤 공개될 넷플릭스 영화 ‘정이’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내 최종 목표는 연기 잘하는 할머니 되는 것”이란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아쉬움 속에 그녀를 보낸다. 영면을 빈다.

김태훈 논설위원

 

05.10  시인 김지하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김지하가 옥중에서 시 ‘타는 목마름으로’(1975)를 발표했다. 7년 뒤 창비에서 동명의 시집을 내자 당국은 다음 날 금서(禁書) 조치를 내렸다. 서점들은 리어카에 시집을 싣고 대학에 들어가 파는 것으로 맞섰다. 그 시절 시인 김지하는 민주화 장정의 선봉에 선 투사였다. 청년들은 김지하의 ‘오적(五賊)’과 ‘타는 목마름으로’를 기도문처럼 외웠다.

 

 

▶그랬던 김지하가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의 사망과 이어진 분신 사태를 계기로 동지들과 갈라섰다. 진보 진영은 언론에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를 기고한 그를 변절자로 몰았다. 당시 대학 도서관 벽에 연일 나붙었던 대자보는 화법이 묘했다. 앞쪽엔 더는 죽지 말라 썼지만, 뒤에선 분신한 이들을 열사라 칭송했다. 어느 쪽이 진심인지 묻고 싶었다.

 

▶김지하는 훗날 “사형수로 6년 가까이 복역했지만 민주 투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술회했다. 감옥 안에서 그는 생명 사상을 잉태하고 숙성시켰다. 유신에 대한 저항도, 죽음의 굿판을 향한 분노도 뿌리는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을 향한 비원이었다. 세상을 편 갈라 보는 이들 눈에 그런 김지하는 이해 못 할 사람이었다. 옥중에서 박정희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잘 가시오”라 한 것도, 2012년 대선 때 독재자의 딸을 지지한 것도 배신으로 비쳤을 뿐이다.

 

▶김지하는 평생 시의 힘을 빌려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다. ‘시란 어둠을/ 어둠대로 쓰면서 어둠을/ 수정하는 것// 쓰면서/ 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속3′ 일부)이라고 했다.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가 깊은 내상을 입어 쓰러지고 힘겹게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동지라 믿었던 이들의 비난에 충격받아 정신병원에 12번 입원했고 평생 두통에 시달렸다.

 

▶김지하가 미국을 둘러보고 돌아와 2007년 여행기를 냈을 때 그와 따로 만난 적이 있다. 처음엔 “탁 트인 애리조나 사막을 달렸더니 끔찍했던 두통이 사라졌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공항에 몰려와 왜 미국 갔느냐고 비난하면 어쩌나 걱정돼 귀국 비행기 안에서 두통이 도졌어. 그런데 입국장에 아무도 없더라고. 마음이 얼마나 놓이던지, 아픈 게 싹 가셨지.” 김지하는 여린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저항시 쓰고 사형수 되고 한때 동지였던 이들에게 변절자 소리까지 들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싶었다. 시인 김지하가 그제 영면에 들었다. 편 가르기도, 다툼도 없는 곳으로 떠났다. 이제 편안하기를 빈다.

김태훈 논설위원

 

05.11  러시아 전승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 열병식을 참관하고 있다. /연합뉴스

히틀러가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독·소 전쟁이 시작됐다. 허를 찔린 소련군은 개전 초에만 80만명을 잃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선 10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그 전투에 투입된 소련군 신병의 평균 생존 시간은 24시간에 그쳤다고 한다. 히틀러 군대는 소련 민간인도 학살하고 성폭행했다. 당시 희생된 소련인이 2900만명이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가 없어진 것이다. 2차 대전 세계 사망자를 다 합쳐도 소련보다 작다. 2차 대전은 미⋅영과 독일이 싸운 것이 아니라 소련과 독일이 싸운 것이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사수를 계기로 반격에 나섰다. 그에게 병사는 ‘자원’일 뿐이었다. 전사·포로·행방불명이 1100만여 명이다. 6⋅25 때 국군 피해의 100배에 달한다. 독일로 진격한 소련군은 ‘피의 복수’를 했다. 학살하고 성폭행했다. 나중에 독일군은 미·영 연합군을 보면 항복하고 소련군을 보면 죽기살기로 싸웠다. 독일군 전사자 320만명 중 280만명이 소련과의 전투에서 나왔다.

 

 

▶5월 8일 독일군 참모장이 프랑스 랭스에서 미⋅영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그래서 서방국가들은 8일을 2차 대전 종전일로 본다. 그런데 스탈린은 소련이 빠진 항복에 분노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말이 되지 않았다. 소련군 총사령관 주코프가 베를린 근교로 독일군 총사령관을 불러 항복 문서에 다시 서명하게 했다. 그 시간이 모스크바 시각으로 5월 9일 0시 43분이었다. 5월 9일이 소련의 전승절이 된 이유다.

 

▶러시아 푸틴이 그제 전승절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불가피하고 올바른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서방 언론은 전쟁 장기화를 우려한다. 2005년 전승절 60주년 때는 푸틴의 초청에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주석 등이 전부 응했다. 그런데 올해는 세계가 러시아와 푸틴에게 분노하고 있다. 폴란드 주재 러시아 대사는 전몰 용사의 묘에 헌화하려다 붉은 물감을 뒤집어쓰고 “살인자들”이란 비난을 들었다.

 

▶러시아는 독일의 침공으로 형언할 수 없는 인명 피해를 당했다. 그런 나라가 21세기에 침략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러시아 전승절에 울려 퍼지는 군가 ‘성스러운 전쟁’에는 ‘파시스트 강간범들’을 저주하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군이 강간을 무기로 쓰고 있다. 스탈린은 침공당한 직후 “히틀러는 저지른 죄악의 무게로 인해 붕괴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푸틴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안용현 논설위원

 

05.12  황당 개그 청문회

2000년 6월 총리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헌정 사상 첫 청문회라 국민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여당 의원들은 “학문이면 학문, 예술이면 예술 모두 뛰어나다” “정치하면서 구설수 하나 없다”고 추켜세웠다. 땅 투기 의혹에 후보자는 “어떻게 그걸 다 찾아내셨네” “이번에 모르는 재산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넘어갔다. 결국 방송사들은 생중계를 중단했다.

 

▲지난 9일 국회에서 열린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민주당의 강경파 초선 의원들이 실수를 남발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이수진(왼쪽) 의원은 질의하면서 여러 차례 고성을 질러 친민주당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까지 “술 취한 줄 알았다”는 질타를 받았다. 김남국(가운데) 의원은 ‘이모(某) 교수’를 한 후보자 딸의 이모로 착각하고 질의했다. 최강욱 의원은 ‘한국쓰리엠’의 익명 표기(한**)를 한 후보자의 딸 이름으로 잘못 유추하고 공격했다. /TV조선·국회사진기자단

 

▶과거 어느 환경부 장관 후보자는 농지 투기 의혹에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 상관없다”고 했다. 40건의 부동산을 가진 여성부 장관 후보자는 “유방암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와서 남편이 오피스텔을 선물했다”고 했다. 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딸이 수석 입학한 스트레스 때문에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고 했다.

 

▶대통령이 ‘모래 속 진주’라고 한 장관 후보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청문회에서 기본적 질문에조차 연신 “모르겠다” “잊어버렸다” “장관 되면 공부하겠다”고 했다. 나중엔 답 대신 킥킥거리며 웃었다. 몇 년 전 장관 후보자 한 사람은 한 달 생활비가 60만원이라고 했고, 식비는 명절 선물로 해결했다고 했다. 과기부 장관 후보자가 제자 논문을 베껴 남편 이름까지 저자로 올린 것이 드러나자 여당 의원들은 “퀴리 부인도 남편과 함께 연구했다”고 감쌌다.

 

 

▶지금까지 인사청문회에서 황당 발언은 주로 장관 후보자가 했는데 이번엔 의원들이 그 주인공이 됐다. 한동훈 법무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민주당 의원이 “한 후보자 딸이 이모와 논문을 썼느냐”고 물어 웃음거리가 됐다. ‘이모(李某) 교수’를 ‘이모(姨母)’로 오인한 것이다. 네티즌들은 “조모 교수였으면 할머니, 장모 교수면 장모라고 할 거냐”고 했다. 백모(큰어머니), 주모(술집 여주인), 성모(聖母), 양모(양어머니), 계모(의붓어머니), 유모(乳母)에 호모(동성애자)까지 등장했다. 다른 민주당 의원은 ‘한00’이 학교에 컴퓨터를 기부한 것을 한 후보자 딸이 했다고 주장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쓰리엠이었다. 그러자 한국쓰리엠은 청주 한씨 무슨 파냐는 우스개도 나왔다. 별 이유 없이 계속 고성을 질러 “술주정하느냐”는 비판을 받은 의원도 있었다.

 

▶인사청문회는 공직 후보자의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하는 자리다. 그런데 민주당은 특정인은 무조건 안 된다고 낙인찍은 뒤 공격하는 자리로 이용했다. 그러려면 준비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이모, 한국쓰리엠 수준이었다. 개그콘서트도 이보다 수준이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 검증을 받아야 할 사람은 이 의원들 아닌가.

배성규 논설위원

 

05.13  북한 코로나

 ▲조선중앙TV가 조선인민혁명군(항일유격대) 창설 90주년인 지난 25일 저녁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열병식을 26일 오후 녹화 중계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북한은 이날 열병식에서 방역전선 일선에 있는 비상방역종대를 내세우기도 했다. 사진은 열병식에 등장한 비상방역종대.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북한은 지난해 2월 주중 대사에 내각 부총리를 지낸 리용남을 임명했다. 리 대사가 베이징에 도착해 신임장을 제정했지만 전임 지재룡 대사는 1년 넘도록 아직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코로나 봉쇄 때문이다. 북한은 국제올림픽위원회 206개 회원국 중 코로나를 이유로 지난해 도쿄 올림픽에 불참한 유일한 나라였다. 북한의 코로나 봉쇄는 세계에서 가장 지독했다.

 

▶북한이 이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지 2년 3개월 만에 결국 코로나에 뚫렸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12일 김정은 참석하에 정치국 회의를 열고 “우리의 비상 방역 전선에 파공이 생기는 국가 최중대 비상 사건이 발생했다”고 실토한 것이다. 김정은도 처음으로 마스크를 쓰고 이 회의에 등장했다. 북한은 그동안 코로나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북한은 ‘제로 코로나’ 정책을 고수해온 중국과도 다르다. 중국은 효과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자체 개발한 백신을 국민들에게 접종했다. 2차 접종까지 마친 비율이 87%다. 그동안 확진자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동안 국제기구 코백스(COVAX)가 주겠다는 백신조차 수용을 거부했다. 전 세계에서 코로나 백신 접종을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나라는 북한과 아프리카 에리트레아 2곳뿐이다.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의 북한’으로 불리는 독재국가다.

 

▶북한은 환자 검체를 분석한 결과 오미크론 변이 BA.2, 이른바 스텔스 오미크론이라고 했다. 이 바이러스는 중증도가 낮다고 하지만 백신 접종과 집단감염이 어느 정도 됐을 때 얘기다. 북한처럼 면역 수준이 제로에 가깝다면 스텔스 오미크론도 치명적일 수 있다. 더구나 북한처럼 의료 시설이 최악이고 주민 영양 상태도 안 좋은 상황에서 유행하면 더 파국적인 상황이 올 수도 있다. 2019년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들어오자 북한의 양돈 산업은 거의 씨가 마를 정도로 타격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북한은 2015년 메르스, 2003년 사스, 심지어 2014년 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발생했을 때도 국경 폐쇄로 대응했다.

 

▶북한이 ‘코로나 발생’을 공개한 것은 국제사회에 백신과 약을 달라는 신호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방역 지원을 요청했을 때 백신을 주기도 힘들다. 화이자·모더나 등 mRNA 백신은 영하 20도 콜드 체인을 갖추어야 하는데 수시로 전기가 나가는 북한에서 쓸 수 없다. 그런 냉장고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알약 치료제를 주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 폭정에다 코로나까지 덮쳐 신음할 북한 주민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겁다.

김민철 논설위원

 

05.14(토)  핀란드 나토 가입 사건

▲22일 노르웨이에서 진행된 나토 연합 훈련에 비회원국인 핀란드와 스웨덴 군도 참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1939년 11월 소련이 핀란드를 3배 병력, 30배 전투기, 100배 전차로 침공했다. 유명한 ‘겨울 전쟁’이다. 스탈린은 발트 3국 합병에 이어 1917년 러시아에서 독립한 핀란드도 탐냈다. 이 전쟁에서 소련 승리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핀란드군의 반격이 무서웠다. 저격수 해위해는 혼자서 소련군 542명을 사살했다. 세계최고기록일 것이다. 하루 25명을 저격한 적도 있다. 눈밭에 잠복한 그는 ‘하얀 사신(死神)’ 소리를 들었다. 빛 반사를 막으려고 조준경도 쓰지 않았고, 입김을 없애려고 눈덩이를 입에 물었다.

 

▶소련군 전차는 화염병 공격을 받았다. 핀란드는 자체 개발한 기관단총으로 전차병을 먼저 쏘고 화염병을 후방 엔진으로 던졌다. 핀란드 스키병은 눈에 빠진 소련군을 기습하고 사라졌다. 쐐기를 박아 통나무를 쪼개듯 소련군 대부대 행렬을 쪼개 각각 분쇄하는 ‘쐐기 전법’도 위력을 발휘했다. 소련군 전사자는 핀란드군의 5배가 넘었다. 당시 핀란드군은 전투에서 이기고 있었지만 정부가 항복해버렸다. 영토 11%를 소련에 빼앗겼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복수를 위해 히틀러와 손잡았다. 빼앗긴 땅을 잠시 되찾았으나 독일 패전이 분명해지자 한발 먼저 소련에 항복하고 핀란드 내 독일군을 소탕했다. 이후 핀란드는 철저하게 소련에 엎드렸다. 미국 주도 안보 기구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은 물론 경제 지원책인 마셜 플랜도 거부했다. 반(反)소련 서적과 영화를 금지했고, 소련에 대한 언론 비판은 자체 검열했다. 소련의 내정간섭까지 묵인하자 오스트리아 외교장관이 경멸조로 ‘핀란드화’라는 용어를 썼다. 이웃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주권 이익을 점점 더 내주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런 핀란드가 “즉시 나토 가입을 신청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럽 역사에서 큰 사건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핀란드 국민의 나토 가입 찬성률은 20%대였지만 지금은 80%에 육박한다. 지난달 핀란드군은 나토군 연합 훈련에도 참가했다. 러시아의 무모함에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러시아는 핀란드에 “군사 보복 조치”를 위협했다. 핀란드의 나토 가입이 새로운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런데도 핀란드가 속도를 내는 건 러시아 같은 나라에 굴종해서는 주권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러시아와 1300km가 넘는 국경을 맞대고 수백 년간 러시아의 핍박을 받았다. 핀란드의 고난과 ‘핀란드화’ 굴종, 이에 대한 반성 등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안용현 논설위원

 

05.16(월)  대통령의 ‘일상’과 ‘쇼’ 사이

▲윤석열 대통령이 14일 서울 강남구 신세계 백화점 한 매장에서 신발을 신어보고 있다. /독자 제공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취임 닷새째인 주말에 쇼핑을 했다. 매출 규모가 전국 으뜸이라는 한 백화점에 갔다가 종로 전통 시장에 들른 다음 남산골 한옥마을을 산책했다. 오후 3시쯤 시작됐는데 기자들도 몰랐다. 사진은 우연히 대통령 일행과 마주친 시민들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언론사들에 제공했다. 대통령이 신체 사이즈를 드러내는 신발을 신어보는 장면까지 찍혔다. 새 대통령이 앞으로도 보통 시민의 평범한 일상을 계속 보여줄지 관심이 갔다.

 

▶사실 앞선 대통령들도 물리도록 비슷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내외는 명절을 앞두고 전통 시장을 찾았다. 차례상 제수용품을 샀는데 때론 29만원어치라고 액수까지 공개됐다. 아내가 현금을 꺼내 결제하면 남편은 물건을 들고 곁에 서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 9월까지 네 차례나 수도권 전통 시장을 방문했다. 대구 서문시장, 구미 시장도 자주 들렀다. 지지율이 흔들릴 때 힘 얻으러 간다고들 했다. 과거 대통령 때는 비서실이 이런 장면을 찍어 언론에 홍보 자료로 돌렸지만, 윤 대통령은 비공개로 했다는 점이 달랐다.

 

 

▶오바마는 현직 대통령 때 바이든 부통령과 햄버거 가게에서 6달러 95센트짜리 점심을 사 먹은 적이 있다. 색깔 치즈를 얹은 스위스 치즈버거, 할라피뇨 고추, 머시룸 버거, 매운 겨자를 주문했다. 오바마는 5달러를 팁 박스에 넣었다. 이날 오바마의 ‘보통 사람 점심’에는 차량 20여 대가 주변 길을 통제하며 함께 움직였다. 프랑스 외무장관이 샹젤리제 거리의 노천 카페에서 회담을 하는 장면도 봤는데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장 보는 모습은 많이 다르다. 베를린의 한 수퍼마켓은 그녀가 수십 년 전부터 매주 들르는 단골 가게다. 퇴근 후 수퍼 앞에 총리 승용차가 서면 단발머리 메르켈이 구겨진 장바구니를 들고 뒷좌석에서 내렸다. 직접 1유로 동전을 넣어 카트를 꺼냈고, 평범한 물건을 구입했다. 양배추 껍질을 떼어내고, 루콜라가 싱싱한지 살폈다. 종이에 적어온 쇼핑 목록을 꺼내봤고, 계산대에 줄을 섰다.

 

▶베를린 시민들은 메르켈의 장보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지만 우리 대통령의 주말 나들이는 보통스럽기 어렵다. 사람이 몰려오고 사진도 찍는다. 좀 소란해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벤트는 하지 않겠다”면서 시장에 안 갔다. 대통령의 쇼핑 외출은 대개 선발대가 동선을 살피고, 사람이 붐비는 시각, 우호적인 상인을 고른다. 시장에 가면 사랑받고 있다는 환각 효과라도 있는 것일까. 이런 대통령 모습은 얼마만큼 진정한 것일까. 결국 국정 운영의 성과로 평가받을 것 같다.

/김광일 논설위원

 

05.17  버드나무 우린 물

▲북한 전역에서 15일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관련 신규 유열자(발열자)가 총 39만2920여명 새로 발생했으며 8명이 사망했다고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6일 보도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중국 투유유 교수는 잡초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특효 성분인 ‘아르테미시닌’을 뽑아내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3세기쯤 동진 시대 의학서에서 힌트를 얻어 연구를 거듭한 끝에 얻은 결과였다. 중국 언론들은 수상 당시 “지난 10년간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했다. 그러나 개똥쑥 효과는 생약이 아니라 추출물에서 오는 것이다. 개똥쑥 자체로는 아르테미시닌 함량이 매우 낮아 효과를 보기 어렵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5일 ‘코로나 환자가 집에서 자체로 몸을 돌보는 방법’ 기사에서 일종의 자가치료 방법들을 소개했다. 그중 “금은화(花)를 한 번에 3~4g씩 또는 버드나무 잎을 한 번에 4~5g씩 더운 물에 우려서 하루에 3번 먹는다”도 있다. 금은화는 한반도에 흔한 인동덩굴을 일부에서 부르는 말이다.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하는 꽃이 아름다워 서울 청계천에도 많이 심어 놓았다. 우리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도 꽃봉오리 말린 것이 해열에 효과가 있다고 나와 있다.

 

 

▶진통해열제 아스피린의 핵심 성분인 살리실산은 원래 버드나무에서 추출한 물질이다. 살리실산이라는 이름이 버드나무 속명 살릭스(Salix)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복용했을 때 구토 등 부작용이 있었다. 독일 약리학자가 조팝나무에서 부작용이 없는 살리실산 성분을 찾아냈다. 독일 제약사 바이엘이 1899년 이 추출물을 정제해 알약 형태로 상품화한 것이 아스피린이다. 그런데 노동신문은 그냥 버드나무 잎을 우려 먹으라고 한다. 의미 있는 효과가 있을 리 없다. 뜬금없이 우황청심환을 하루 2~3번 더운 물에 타 먹으라는 소개도 있다. 코로나와 청심환이 무슨 관계인가. 아스피린이 없을 정도로 열악한 북한 보건의료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북한 발표 중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약물 과다 복용’이다. 북한 발표를 믿기는 어렵지만, 코로나 사망자 42명 중 거의 절반인 17명이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의약품이 절대 부족하니 주민들이 검증되지 않은 약을 마구 먹고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이 코로나 통계를 공개한 지 사흘 만에 발열자 규모가 100만명을 넘었다. 무섭게 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북한 당국이 외부에 지원을 공식 요청했다는 소식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북한에 백신을 포함한 의약품, 의료기구, 보건 인력 등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북한 정권에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적극적으로 외부 지원을 받아 주민을 살려 놓고 봐야 할 것이다.

김민철 논설위원

 

05.18  언스테이블 코인(unstable coin)

일론 머스크는 지난해 3월 테슬라 차를 살 때 비트코인으로 결제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발표하곤 두 달 뒤 슬그머니 철회했다. 그는 “비트코인 채굴에 화석연료가 많이 소비되기 때문’이란 핑계를 댔지만 실제 이유는 달랐다. 비트코인 가격이 3만~8만달러 선을 오르내리며 연일 춤을 추니 도저히 결제 수단으로 쓸 수 없었다.

 

 ▲13일 서초구 빗썸 고객센터에서 한 고객이 최근 비트코인 차트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가상화폐의 약점인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등장한 것이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이다. 대개 달러를 준비금으로 쌓고 1대1 교환을 약속하고 발행한다. 보유한 금(金)만큼 화폐를 발행하는 금본위제와 비슷하다. 2019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크버그가 “스테이블 코인 리브라(Libra)를 발행하겠다”고 발표해 세계 금융가를 뒤집어 놨다. 페이스북 사용자 23억명이 달러 대신 리브라를 쓸 경우 달러 헤게모니가 무너질 수도 있다. 곧바로 미 재무부가 ‘리브라 금지법’을 거론하며 제동을 걸었다. 저커버그의 ‘코인 반란’은 그렇게 제압됐다.

 

▶이후 스테이블 코인 시장은 절대 강자 없는 춘추전국 시대가 됐다. 달러뿐 아니라 비트코인 가치에 연동한 스테이블 코인도 잇따라 등장했다. 아무 담보 없이 화폐 공급·수요량을 조절해 가격을 유지한다는 알고리즘 방식 코인도 등장했다. 이번에 가격 폭락 사태를 빚은 한국산 스테이블 코인 테라(terra)도 알고리즘 방식이다. 하지만 알고리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자 땅(terra)처럼 굳건할 것이라던 코인 가치는 하루아침에 99% 폭락했다.

 

 

▶'리브라 반란’을 제압한 뒤 국제결제은행(BIS)은 “스테이블 코인 발행자의 신뢰도가 떨어지면 대규모 환매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우려가 현실이 됐다. 국제금융기구(FSB)는 “사용자가 많은 빅테크 기업이 코인을 발행하면 글로벌 금융 시스템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현재 세계 1위 스테이블 코인은 달러와 1대1로 연동된 테더(USDT)이다. 발행량이 800억개가 넘는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달러 준비금을 800억달러어치 갖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공개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 가상화폐 시장에선 테더가 주요 결제 수단 역할을 한다. 지난달 전 세계 비트코인 거래의 67%가 테더 결제로 이뤄졌다. 그런데 테라 사태 이후 테더의 ‘1달러 방어선’도 자주 무너지고 있다. 가상화폐 시장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미 의회가 스테이블 코인 발행 기관을 은행으로 한정하는 규제 법안을 서두르는 사정이 이해가 된다.

김홍수 논설위원

 

05.19  브랜드 ‘머슴’에서 ‘주인’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1970년대 부산 전포동, 당감동 일대는 세계 신발 산업의 메카였다. 나이키,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 운동화의 70~80%를 삼화고무, 동양고무, 태화고무 같은 토종 기업들이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생산했다. 나이키의 무리한 납품가 인하 요구에 화가 난 기업들이 프로스펙스, 르까프, 월드컵, 슈퍼카미트 같은 토종 브랜드로 딴살림을 차렸다. 프로스펙스, 르까프가 잠깐 국내 시장 점유율 1~2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결국 브랜드 파워에서 밀렸다.

 
 

▶세계 최초 편의점 세븐일레븐의 뿌리는 미국 텍사스주 얼음 제조사였다. 빵, 우유 같은 식료품도 함께 팔면서 수퍼마켓처럼 진화했다. 이를 눈여겨본 일본 유통 기업이 1974년 일본에 세븐일레븐 1호점을 열었다. 대박이 났다. 점포수가 2만개를 넘고 매출이 모기업을 넘어서면서 미국 모기업을 인수해버렸다. 이후 세븐일레븐은 세계 17국에 7만개 점포를 가진 일본계 편의점 제국이 됐다.

 

▶국내에서도 세븐일레븐처럼 외국 모기업을 인수하는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 현지법인으로 출발한 스포츠 의류업체 휠라 코리아가 2007년 100년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휠라 본사를 인수했다. 이후 휠라는 2011년 미래에셋그룹과 손을 잡고 세계 최대 골프용품 브랜드 타이틀리스트를 인수했다. 작년엔 국내 의류업체 F&F가 토종 펀드와 손을 잡고 세계 3대 골프용품 업체 테일러메이드를 인수했다. 패션 분야에선 성주그룹이 독일 명품 브랜드 MCM을 인수해 몸집을 크게 키웠다.

 

▶화장품 업계의 숨은 강자 한국콜마가 원조 기업 미국콜마로부터 콜마(Kolmar) 브랜드를 사들여 콜마 상표의 주인이 됐다. 한국콜마는 제품 생산만 맡는 OEM 방식이 아니라 제품 연구·개발·생산까지 다 책임지고 주문 업체 상표를 붙여 공급하는 ODM(주문자 개발·생산)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K뷰티 산업의 엔진 역할을 하며 세계 600여 개 화장품 회사에 제품을 납품하고 있다. 특유의 ‘노 브랜드’ 전략이 고성장 비결이었는데 앞으로 ‘콜마’ 브랜드를 어떻게 활용할지 궁금하다.

 

▶한국 기업들의 브랜드 전략은 창의성을 더해가고 있다. 패션업체 F&F는 의류와 아무 상관이 없는 MLB, 디스커버리 브랜드를 도입해 패션 브랜드로 재창조하는 혁신적인 마케팅 기법을 선보였다. 타 업종에서도 갤럭시폰(삼성), 제네시스(현대차), 스타일러(LG) 등 세상에 없던 K 브랜드가 속속 자리 잡아 간다. 기술로는 세계 1위 경쟁력을 가진 운동화에서도 토종 브랜드의 재기를 보고 싶다.

김홍수 논설위원

 

05.20  개딸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나오는 여고생 시원은 아이돌 그룹 H.O.T에 빠져 살다가 성적이 꼴찌로 추락한다. 아빠가 딸 방에 가득한 H.O.T 사진을 찢어버리며 홧김에 “부녀의 연을 끊자”고 고함치자 딸은 곧바로 대든다. “아저씨, 누군데요?” 아빠는 기가 막혔는지 “네 성격이 개 같다”며 시원을 ‘개딸’이라 부른다. 시원은 그러나 아빠의 건강을 염려하는 딸이기도 하다. 다만 그럴 때조차 거친 부산 사투리로 “아빠, 건강 갖고 까불면 안 되는 것 모르나?”라며 나무란다. 드라마 속 개딸엔 이처럼 겉으론 거칠어도 가슴엔 무조건적 아빠 사랑을 품은 딸이란 의미가 중첩돼 있다.

 

 

 ▶우리말 접두어 ‘개’는 쓰임새가 많은 어휘다. ‘개살구’나 ‘개떡’의 ‘개’는 ‘질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개꿈’ ‘개죽음’처럼 헛되거나 쓸모없다는 뜻도 있다. ‘개’가 붙었다고 형편없다는 뜻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개망초는 하얀 꽃이 피고 향기도 은은하다. 정작 망초는 꽃이 볼품없고 피는 둥 마는 둥 시든다.

 

▶소중한 것을 일부러 낮춰 부를 때도 ‘개’를 쓴다. 우리 조상은 귀한 자식일수록 평범하게 키워야 무병장수한다고 믿었고, 그런 마음을 ‘개’가 들어간 아명(兒名)에 담곤 했다. 조선 고종의 아명도 ‘개똥’이다. 요즘 청년들은 ‘개’를 붙여 못 만드는 말이 없다. 아주 예쁠 때 ‘개예쁘다’ 하고 매우 좋을 때는 ‘개좋다’고 한다. ‘개웃김’ ‘개이득’도 자주 쓴다 .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는 답이 없다는 의미로 ‘개노답’이라 한다.

 

▶'개’엔 ‘정도가 심하다’는 뜻도 있다. 언제부턴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표현할 때 쓴다. 몇 해 전 조국 전 법무장관을 지지하는 서울 서초동 촛불 집회를 주도한 개혁국민운동본부는 원래 이름이 ‘개싸움국민운동본부’였다. ‘조국을 위해 개처럼 싸운다’는 뜻이라 했다. 최근엔 이재명 전 경기지사를 지지하는 2030 여성들이 개딸을 자처하며 “아빠, 사랑해요”를 외친다.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것을 아빠와 딸 관계라고 부르며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팬덤화(化)한 지지가 정치인의 양심과 양식을 마비시키고, 편 가르기와 내로남불 등 온갖 반(反)지성적 행태를 양산했다. 지난 5년간 지겹도록 확인한 사실이다. 민주당 복당을 추진하던 양향자 의원이 엊그제 “개딸에 환호하는 민주당은 슈퍼챗에 춤추는 유튜버같다”고 한 것도 ‘개딸’ 현상에 깃든 맹목적 지지의 위험을 경고한 것으로 봐야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5.21(토)  한동훈 현상

한동훈 법무 장관의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과 설전을 벌이는 영상은 조회 수가 하루 만에 250만 회를 넘었다. 재미없어서 아무도 안 본다는 취임식 장면도 130여 만 회다. 법정에 출두하며 유시민씨를 비판하는 영상도 200만 회에 육박한다. 한 장관의 주요 어록과 수사 목록은 인터넷에서 회자된다. 한 장관의 옷·신발·스카프·넥타이·가방 등 패션도 화제다. 가격과 브랜드 정보가 실시간으로 뜨고 ‘한동훈 안경테’ ‘한동훈 마스크’도 불티나게 팔린다. ‘비주얼 깡패’ ‘완판남’이란 별명이 붙고 각종 사이트엔 2030 중심의 팬덤까지 생겼다.

 

 

▶정치권에선 ‘한동훈 현상’이라고 부른다. 깔끔한 외모와 논리 정연한 말솜씨, 남다른 패션 감각, 권력과 맞선 이미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는 재즈광이다. 페이스북엔 반려묘 사진 등을 수시로 올린다. 최신 휴대폰이 나오면 곧바로 바꾼다. 트렌드와 이슈에 민감하다. 이런 모습도 젊은 층에게 어필한 것 같다.

 

▶하지만 진짜 눈길을 끈 것은 그의 메시지일 것이다. 한 장관은 “검찰을 두려워할 사람은 범죄자뿐” “강자든 약자든 죄가 있으면 수사한다” “검찰을 사냥개 만든 정권” 등 돌직구 발언을 날리고 있다. 네티즌들은 “차분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시원시원하다”고 손뼉을 친다. 그가 검찰에서 보여준 수사 능력도 돋보였을 것이다. 그는 잘 때도 수사하는 꿈을 꾸곤 했다고 한다. 주변에선 ‘조선제일검’ ‘한집요’라고 했다.

 

▶과거 한 장관의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았다. 그의 수사망에 걸린 피의자들은 먼지 털기 수사에 몸서리친다. 첫째 혐의가 무죄 나면 별건 수사로 형량을 높인다고 악명이 높기도 했다. 이런 한 장관을 반전 이미지로 현상화해준 건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다. 한 장관이 조국 전 장관과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등을 수사하자 문 정권은 그를 네 차례나 좌천시켰다. 있지도 않은 검언 유착 혐의를 씌워 2년 넘게 수사했다. 후배 검사에게 폭행까지 당했다. ‘권력에 핍박받은 검사’ 이미지를 정권이 만들어준 것이다.

 

▶이런 팬덤 현상은 이전에도 있었다. 안철수 전 대표, 조국 전 장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더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실력과 도덕성 기반이 없는 팬덤은 꺼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법무 장관이 대중 정치인처럼 행동하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팬덤은 언제든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배성규 논설위원

 

05.23(월)  바이든 “우린 땡잡았소(married up)”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조상들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아끼는 일은 있어도 거꾸로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치-’는 ‘위를 향하여’, ‘위로 올려’를 뜻하는 접두사다. 비슷하게 ‘치혼사(婚事)’라는 단어가 있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 자주 나온다. 가령 “옛말에도 딸은 치혼사 하고 며누리는 내리혼사 한답니다. 애당초 안 할 혼사 한 기라요” 같은 구절이다.

 

 

▶신랑에 견주었을 때 신부가 미모도 뛰어나고, 나이도 한참 어리고, 처갓댁 재력도 넉넉하면 ‘치혼사’가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대개 신랑 쪽이 좀 더 괜찮은 경우가 많아서 박경리도 “딸은 으레 치혼사 한다”고 한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반대로 되면 그때 신랑은 “땡 잡았다” “수지맞았다” “대박 났다” 같은 소리를 듣는다. 짓궂은 신랑 친구들은 “네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 “도둑놈 장가간다”면서 농담 섞인 시샘을 한다.

 

▶그제 바이든 미 대통령이 공식 만찬을 하기 앞서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인사하며 조크를 했다. “미국에는 이런 말이 있는데, 윤 대통령과 저는 매리드 업(married up)한 남자들입니다.” 우리말로 치면 ‘치혼사’를 했다는 뜻이다. 결혼과 관련된 서양 조크를 200개쯤 찾아보니 신부 쪽을 꼬집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크 생산자가 주로 남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은 자신을 포함한 두 남편을 낮추면서 김건희 여사를 추켜세웠다.

 

▶몇 년 전 미네소타 대학이 37개 문화권의 1만명을 조사했더니, 여성은 자신보다 우월한 조건을 가진 남성을 고르려 했다. 여성 넷 중 셋은 평균을 웃도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신랑을 원했다. 이걸 ‘하이퍼가미’라고 한다. 카스트 제도가 있는 인도에서 두드러졌다. 연구들을 모아보면 짝을 고를 때 여성이 남성보다 더 까다롭고 신중했다. 그런데 바이든은 이걸 뒤집어서 “윤 대통령, 당신과 내가 수지맞았소”라고 한 것이다.

 

▶한쪽이 확연하게 기우는 혼사가 있을 때면 앙혼(仰婚)과 낙혼(落婚)이란 말을 짝을 이뤄 썼다. ‘토지’에서 하인 길상은 앙혼, 최참판댁 서희는 낙혼을 한 셈이다. 고구려의 바보 온달도 평강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매리드 업’한 대표 케이스다. 김 여사가 자리를 뜬 뒤에도 바이든이 김 여사 얘기를 하며 연거푸 “뷰티풀”이라 했다 한다. 바이든이 김 여사의 외모를 높게 평가하고, 또 부부의 나이 차가 꽤 있음을 미리 알았던 것 같다.

/김광일 논설위원

 

05.24  득점왕 쏘니

박지성이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며 한국인 최초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 진출한 이래 지금껏 14명의 한국인 선수가 EPL 무대를 누볐다. 이들은 살인 태클보다 무서운 인종차별에 한결같이 시달렸다. 박지성의 응원가는 일명 ‘개고기 송’으로 현지 팬들은 “박~ 너희 나라는 개를 먹는다지” 따위의 노래를 응원이랍시고 불렀다.

 

 ▲영국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 홋스퍼의 손흥민이 22일(현지시간) 노리치의 캐로 로드에서 열린 노리치 시티와의 최종 38라운드 경기에서 팀의 5번째 골을 터뜨린 뒤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기성용이 드리블하면 관중석에서 원숭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김보경은 감독에게서 “빌어먹을 동양인” 소리를 들었다. 일본 선수에겐 “후쿠시마”를 연호하는 관중도 있었다. 아시아가 지구 육지의 30%를 차지하며 세계 인구의 약 60%(47억명)가 사는 가장 큰 대륙이지만, 세계 축구계에 남긴 족적은 미미했던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손흥민(토트넘)이 아시아 선수 최초로 EPL 득점왕(23골)에 등극했다. 세계 축구 역사를 다시 쓴 쾌거다. 유럽 5대 리그(EPL, 스페인 라리가,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프랑스 리그1) 통틀어 아시아 출신 득점왕은 손흥민이 최초이고, 아시아 선수가 한 시즌 20골을 넘긴 것도 그가 처음이다. 그는 최종전에서 동료들의 전폭적인 패스 지원을 받으며 후반 두 골을 몰아쳤다. 전반 무득점으로 풀이 죽은 그에게 동료들은 “쏘니, 너는 득점왕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명심해” 등의 격려를 아낌없이 해주며 ‘득점왕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축구는 11명이 함께 뛰는 팀 경기다. 패스를 못 받으면 골 기회가 없다. 손흥민의 이번 업적이 혼자 잘하면 1등 하는 개인 종목에서의 성취와 차원이 다른 이유다. 토트넘에서 손흥민은 호날두·음바페 등 각 팀의 간판스타가 차지하는 ‘7번’을 달았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장 해리 케인과 ‘축구장 부부’로 불리는 입지를 다졌다. 톰 홀랜드·에마 라두카누 등 영국의 유명 인사들이 그의 열혈 팬이다.

 

▶이 배경엔 축구 실력과 더불어 뛰어난 영어 구사 능력이 있다. 사실상 독일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손흥민은 영어도 독일어 발음이 섞인 것처럼 말한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기에 팀 안팎에서 쉽게 어울리고 동화될 수 있었다. 그렇게 ‘원팀’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면 득점왕 자리에 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 앞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했다는 사람이 많다. 이미 외국어는 ‘도구’가 아니라 ‘필수’라고 하지만 이제 점점 더 그런 시대로 가는 것 같다.

양지혜 기자

 

05.25  무릎 꿇은 미 대통령

▲일본을 방문 중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3일 도쿄 영빈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의 가족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교도/로이터 연합뉴스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 대화하는 것은 ‘당신을 존중하고 당신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키가 작은 어린이만이 아니라 장애인이나 노인, 부상자를 대할 때 이런 행위로 존경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일본 납북 피해자 가족 면담 때 자식을 북한에 빼앗긴 고령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세상을 떠난 장남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면서 “아이를 잃은 당신의 고통을 안다”고도 했다. 바이든은 병과 사고로 자녀 2명을 잃었다.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사과한 때가 2002년이다. 그 후 미 대통령 4명 모두 일본인 납북 피해 가족을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4년 단임이었지만 2번 이들을 만났다. 납치 문제의 상징적 존재인 요코타 메구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땐 애도 편지를 보냈다. 그가 남들보다 정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미국과 일본 언론은 ‘브로맨스’ 외교 파트너였던 일본 아베 총리에 대한 외교적 배려라고 해석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는 1980년대 초부터 알려졌지만 일본 외교의 핵심 이슈가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아직 40대였던 국회의원 아베가 깃발을 들었고 납북자 5명과 가족을 북한에서 데려오는 성과도 올렸다. 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기본에 충실했다. 우리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가 많아도 일본 국민이 그를 인정하는 이유다. 이후 납치 문제는 대북 외교의 ‘모든 것’이 됐다. 미 대통령의 납북 피해자 면담은 일본의 대미 외교를 가늠하는 척도로 자리 잡았다.

 

▶이 문제에 인색했던 미 대통령은 의외로 오바마다. 방일 당일까지 면담 요청에 확답하지 않았다. 겨우 성사된 면담조차 10분 만에 끝냈다. 같은 민주당이기 때문에 바이든도 그러지 않을까 하고 일본 정부가 우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대를 훨씬 넘어섰다. 30분 면담 동안 피해자 가족 11명 모두에게 일일이 말을 걸었다. 피해자들은 “미 대통령의 진심이 느껴졌다”고 했다.

 

▶일본인 납북자는 17명이다. 한국의 전쟁 이후 납북자는 516명에 달한다. 6·25전쟁 당시 납북자까지 합치면 8만명이 넘는다. 문재인 정권 당시 납북 피해자는 국민 취급도 못 받았다. 민주당 의원은 북한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납북자의 법적 이름을 ‘실종자’로 바꾸자는 법안까지 냈다. 정권 교체 이후 변화가 느껴진다. 대통령 취임식에 납북자 가족과 탈북 국군 포로가 특별 초청 대상자로 참석했다. 무릎 꿇은 미 대통령을 보면서 국가의 기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선우정 논설위원

 

05.26  80평짜리 청와대 침실

1998년부터 20년간 청와대에서 요리사로 근무한 천상현씨가 최근 개방된 청와대를 방문해 관저를 보면서 “대통령님 침실이 한 80평 되는데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 엄청 무섭다”고 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등 총 다섯 대통령 내외의 식사를 담당했다. 관저에는 청와대 직원 중에서도 정해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요리사들도 관저에 오기까지 네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고 했다.

 

 

▶80평이면 ‘국민평형’이라 불리는 32평 아파트 3개를 합친 것에 가까운 면적이다. 10인 이상의 가족이 여유롭게 거주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 내외는 이런 방에 침대 하나 달랑 놓고 지냈다고 한다. 과연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부간 대화도 소리가 울려서 침실에선 제대로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주변에서 지켜보기에 ‘무섭다’는 말이 나올 만한 장소다.

 

▶청와대 관저는 1991년 건립됐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체 규모는 약 1800평(6093㎡)이다. 대통령과 가족이 쓰는 사적 공간인 내실은 200평 정도 된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 당시에는 내실에 참모들도 꽤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매일 아침 침실에서 의무실장과 간호부장의 건강 체크를 거친 뒤에 8시쯤 거실로 나왔다. 그러면 공보수석 등이 대기하고 있다가 조간신문 내용을 중심으로 당일 여론과 이슈를 정리해 보고했다고 한다.

 

▶청와대 본관의 대통령 집무실 규모도 엄청났다. 51평(168㎡)으로 백악관 오벌 오피스(23평)의 2배가 넘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처음 집무실에 들어서면서 “테니스를 쳐도 되겠다”고 농담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적막강산에 홀로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공간이 너무 넓어 한기를 느꼈다고 한다. 집무실 출입문부터 대통령 책상까지 약 15m로 상당한 거리였다. 보고를 마치고 뒷걸음으로 나오다 넘어지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어떤 장관들은 대통령에게 인사한 뒤 등을 돌리고 퇴장하다 중간쯤 다시 돌아서 인사하고 출입문에서 밖으로 나가면서 또 고개를 숙이는 ‘3중 인사’를 할 정도였다.

 

▶청와대는 건국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해왔던 ‘제왕적 대통령제’의 공간적 상징이다. 마지막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관저도 26일부터 시민들이 관람하게 됐다. 대통령을 왕처럼 떠받들고 그 사생활은 입에 담기조차 불경스럽게 여기던 기이한 한국식 정치 관행도 이 기회에 바뀌었으면 한다.

최승현 논설위원

 

05.27  96세 CEO 연임

일본 요미우리신문 대표이사인 와타나베 쓰네오는 언론계의 독재자, 막후의 쇼군(정계 최고 실력자), 프로야구의 제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일본 현대사의 상징적이면서 문제적 인물이다. 그에겐 ‘최고령 CEO’ 타이틀도 붙어 있다. 그제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연임에 무난히 성공했다. 96세. 기자로 입사해 1991년부터 사장, 회장, 대표이사 등 이름만 바꾸면서 31년째 경영권을 쥐고 있다. 편집과 논설의 사령탑인 주필도 37년째 하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주필./ NHK방송

▶96세 CEO는 일본에서 특별한 경우이지만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조사에 응한 5000여 일본 기업 중 80세를 넘긴 대표이사는 64명. 이 중 5명이 90세를 넘겼다. 와타나베 말고도 96세 CEO가 한 명 더 있다. 일본은 고령화가 심각한 나라다.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1990년 54세였던 사장의 평균 연령이 작년 62.5세로 올라갔다. 건강 수명 연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기업의 노쇠화인지 논란이다.

 

▶비판자들은 노욕(老慾), 노해(老害), 치매 경영이라고 한다. 사장이 나이 들수록 기업의 성장세가 둔화된다는 지표도 제시한다. 하지만 다른 사실을 알려주는 지표도 많다. 니혼게이자이가 상장회사 실적을 조사했더니 사장이 나이가 많을수록 흑자를 내는 기업이 많았다. 특히 80세 이상 초고령 사장이 이끄는 기업의 실적이 가장 좋았다. 주가도 가장 높았다. 역동성은 없을지 몰라도 탄탄하다는 것이다.

 

 

▶능력이 없는 경영자는 대부분 50대, 60대에 도태된다. 대주주라도 특별한 생명력이나 경험의 밀도, 지혜가 없으면 실제로 경영을 총괄하는 대표이사를 유지하기 어렵다. ‘노인 천국’이라는 일본에서도 능력과 실적이 특별하지 않으면 일흔을 못 넘기고 은퇴한다. 경영 분석가 후지노 히데토는 이를 “잔존자(殘存者) 효과’라고 했다. 남들이 은퇴할 나이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오래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와타나베는 ‘잔존자’의 전형이다. 나카소네 총리, 야구 스타 나가시마 등 그와 현대사를 함께한 동반자들과 달리 건강을 유지하면서 계속 일했다. 2년 전 94세 나이에 NHK에 장시간 출연해 전성기 못지않은 기억력과 논리력으로 일본 현대 정치사를 회고하는 모습은 많은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정치와 유착됐다는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도 현역 정치인과 부지런히 소통한다. 여전히 요미우리신문에서 가장 정보가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몸 건강하고 정신 멀쩡하고 회사 잘 돌아가면 백 살 CEO도 가능할 것이다.

선우정 논설위원

 

05.28(토)  ‘대통령 사저’ 컬렉션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 ‘향수’의 주인공 장-바티스트는 수집욕에 빠진 연쇄 살인마다. 여성의 ‘좋은 체취’를 모아 최고의 향수를 만들겠다며 체취 수집에 나선다. 마침내 향수를 만들어 몸에 뿌리지만, 향에 매혹된 사람들에게 몸을 뜯어먹혀 목숨을 잃는다. 많은 컬렉터가 장-바티스트처럼 수집욕에 사로잡혀 산다. 돈과 시간, 열정을 아낌없이 쏟는다. 때론 자기 삶이 망가지는 것조차 감내한다.

 

 

▶영국 왕 조지 5세는 우표 수집에 온 정성을 쏟았다. 자동차 수집가로 유명한 브루나이 국왕 하사날 볼키아는 7000대의 자동차 컬렉션을 자랑한다. 롤스로이스, 페라리, 벤틀리만 1500대 넘는다. 값지고 희귀해야만 수집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국내 굴지 화장품 회사 대표는 “젊은 직원들과 대화 자리를 마련했더니 앉은 자리에서 운동화 수집 얘기만 하더라”고 했다. 몇 해 전 아이돌 그룹 지드래곤 생일을 기념해 나이키가 출시한 21만원짜리 한정판 스니커즈가 컬렉터들 사이에서 수천만원에 거래됐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더 놀랐을 것이다.

 

▶수집은 개인의 취미를 넘어 문화를 풍성하게 가꾸는 자양분도 된다. 고대 지중해의 해상 교통 요지에 설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헬레니즘 세계 전역에서 서적을 모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열정이 이룬 결실이었다. 지중해 곳곳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입항하는 모든 선박에서 책을 빼앗듯이 빌려다 필사했다. 다만, 원본은 도서관에 보관하고 필사본을 돌려줬다. 수천년 전에도 ‘원본 확보’는 컬렉터들의 수집 원칙이었다는 뜻이다.

 

▶수집보국(蒐集報國)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서예가이자 수집가인 고(故) 손재형은 태평양전쟁 말기 도쿄의 한 수집가가 소장한 ‘세한도’를 입수하기 위해 공습으로 불바다가 된 도쿄를 찾아갔다. 100일 넘게 설득한 끝에 세한도를 손에 넣고 돌아왔다. 그 뒤 도쿄 수집가의 수장고에 포탄이 떨어졌다니 손재형이 없었다면 세한도는 한 줌 재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소장품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도 있었다. 두 작품은 훗날 또 다른 걸출한 컬렉터인 삼성가(家)로 자리를 옮겼고, 이 중 인왕제색도는 국가의 컬렉션이 됐다.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를 매입한 이가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이라고 한다. 앞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도 그가 사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직 대통령 사저 수집 아니냐’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매입 목적을 밝히지 않았지만 선의의 용도로 쓰였으면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5.30(월)  ‘연기의 神’ 송강호

 부산 청년 송강호는 제대 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극단 문을 두드렸지만 연거푸 세 번 퇴짜를 맞았다. 네 번째 상경에서야 비로소 “연락처를 남기고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 후 걸려온 첫 전화는 행사가 끝난 무대 철거를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다 무대에 섰고, “이게 마지막이 되어선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마침 단역 맡길 배우를 찾던 이창동 감독 눈에 뜨였다.

 

▲배우 송강호가 28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5회 칸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영화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트로피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이후 송강호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괴물’ ‘기생충’ 등 천만 관객 영화를 네 편 찍은 배우는 송강호가 유일하다. 그가 주연한 영화에 든 누적 관객도 1억명에 이른다. 송강호를 영화팬 뇌리에 처음 각인시킨 작품은 이창동 감독의 1997년 영화 ‘초록 물고기’다. 남자 옷을 홀딱 벗기고 라이터로 상대 배우의 체모를 태우며 괴롭히는 깡패 역할이었다. 유튜브에 그 장면이 지금도 돌아다닌다. 제목이 ‘이게 깡패 연기자야? 진짜 깡패야?’다. 송강호는 그때 이미 연기의 신(神)이었다.

 

▶송강호를 대중의 기억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한 것은 같은 해 나온 ‘넘버3′의 여관방 장면이다. 졸개들 무릎을 꿇리고 “라면만 먹고 금메달 딴 현정화처럼 헝그리 정신을 가지라”고 일장연설 했다가 ‘현정화가 아니라 임춘애’라고 지적당한 그 장면이다. 분노로 목소리를 떨고 말까지 더듬는 연기는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그가 외친 “내가 현정화라고 하면 현정화야!”는 그해 영화계 최고 유행어가 됐다.

 

 

▶송강호가 칸에서 최우수 남자 배우 상을 거머쥐었다. 같은 작품에 황금종려상과 배우상을 동시에 주지 않는 칸은 ‘기생충’에 황금종려상을 줄 당시, 그 작품에 출연한 송강호에게 배우상을 줄지를 두고 고민했었다. 1984년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가 칸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선정되기 전까지 한국 영화는 변방 신세였다. 영화의 중심을 향한 장정은 여배우들이 먼저 시작했다. 강수연과 전도연이 베네치아와 칸의 여주인공이 됐고, 지난해엔 윤여정이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았다.

 

▶아카데미를 석권하고, 칸에서 감독·배우 상을 동시에 배출하는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영화 1류 국가다. 세계 영화인들이 우리와 함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송강호에게 주연상을 안긴 영화 ‘브로커’만 해도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들었고,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선 중국 출신 탕웨이가 열연했다. 이탈리아 감독이 만든 영화에 독일·프랑스 배우가 출연하는 유럽 세트장 풍경이 어느덧 우리 모습이 됐다.

김태훈 논설위원

 

05.31(화)  별명과 왕따

윌리엄 골딩의 장편 ‘파리대왕’은 아이들만 태운 비행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한 뒤 섬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다룬다. 모든 소년이 서로 이름을 부르지만, 뚱뚱하고 행동 굼뜬 한 소년만은 돼지라는 뜻의 별명 ‘피기’로 불린다. 이 별명이 사악한 힘을 발휘한다. 별명 부르기가 거듭될수록 소년들은 피기가 자기들과 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잊어간다. 왕따가 된 피기는 무리 밖으로 내쳐져 죽는다. 1950년대 소설이지만, 왕따가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내다본 작품이다.

 

 

▶별명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고 보는 전통 유교 사회에선 타인을 존중하는 뜻으로 별칭인 자(字)와 호(號)를 썼다. 유교 성인식인 관례 때 받아 평생 쓰는 자(字)보다는 성격, 취미 등을 반영해 스스로 짓거나 지인이 지어주는 호(號)가 오늘날 별명에 더 가깝다. 친구면 “여보게, 율곡”, 후학이면 “율곡 선생님” 했다. 사임당 신씨처럼 거처 이름인 당호(堂號)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인터넷 아이디(ID)도 현대판 당호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 기틀을 다진 카이사르가 별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를 무찌른 카이사르의 조상이 코끼리라는 뜻의 카르타고어인 ‘카이사이’를 별명으로 얻은 게 성(姓)이 됐다고 한다. 별명이 본명보다 유명한 사례도 있다. 야구왕 베이브 루스의 본명은 조지 허먼 루스, 농구 스타 매직 존슨 본명은 어빙 존슨이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별명을 정적 조롱하는 데 썼다. 연로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슬리피 조’, 단신인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은 ‘미니 마이크’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별명을 금지하고 이름 뒤에 우리의 씨(氏)에 해당하는 상(さん)을 붙여 부르게 하는 초등학교가 늘고 있다. 교토 공립 초등학교 160곳 중 절반 넘게 ‘상’을 의무화했다고 한다. 별명이 친구를 놀리는 데 쓰여 왕따를 초래한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직장에서 경직된 상하 관계를 허물자며 ‘상무’ ‘부장’ 등 직책이 아닌 ‘상’으로 통일했는데, 이를 학교에서 왕따 퇴치용으로 도입했다고 한다.

 

▶왕따의 폐해가 심각하다. 사회적으로 파문당한 것과 같은 왕따는 스트레스 대응 능력이 미숙한 청소년에게 감당 못할 충격이 된다. 가해자를 엄벌하는 게 능사도 아니다.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이 어린 시절 친구를 괴롭혔던 일로 활동을 접는 것도 안타깝다. 어려서부터 서로 존중하는 언어 습관을 갖도록 유도해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