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2-05/ 05-02(월) 나쁜 엔低, 나쁜 원低 - 05-31(화) 日초등생 별명 금지
횡설수설 2022-05/ 동아일보
05-02(월) 나쁜 엔低, 나쁜 원低

한국과 일본의 화폐 가치가 요즘 경쟁하듯 하락하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255.9원으로 2년여 만의 최고 수준이었다. 같은 날 도쿄 외환시장의 엔-달러 환율은 20년 만의 최고인 131엔으로 상승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이달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란 전망에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원화, 엔화 가치가 나란히 시험대에 올랐다.
▷지금의 ‘엔저’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의 연장선에 있다. 2013년 아베 전 총리의 지명을 받아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디플레이션 극복을 명분으로 마이너스 금리, 무제한 돈 풀기 정책을 10년째 유지하고 있다. 낮은 엔화 가치로 일본 수출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경제를 살리는 게 목적이다.
▷문제는 일본의 생산시설이 이미 해외로 대거 빠져나갔다는 점이다. 일본 자동차 기업 차량의 3분의 2가 해외에서 생산된다. 엔저의 수출 확대 효과가 크게 줄었다. 반면 천연가스, 원자재 등 수입 가격 인상 부담은 엔저로 배가되고 있다. 기대한 효과 대신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고, 수입품 값이 올라 일본 소비자만 가난해진다는 게 ‘나쁜 엔저’ 논란의 핵심이다.
▷엔저와 달리 ‘원저’는 한국 정부가 의도한 게 아니다. 달러 강세와 중국의 성장률 하락이 겹치면서 위안화를 따라 원화가 급락했다. 원저를 이용한 수출 확대로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했을 정도로 과거엔 원저가 수출에 호재였다. 지금은 경쟁국인 중국 대만 일본의 화폐 가치가 동시 하락해 수출 증대 효과가 희석되고 있다. 증시에서도 환차손을 피하려는 외국인들의 ‘셀 코리아’가 나타나고 있다.
▷원유,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3, 4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가 나면서 한국도 ‘나쁜 원저’를 고민해야 할 처지다. 작년 100대 기업의 해외법인 매출이 국내 매출과 맞먹을 정도로 한국 기업의 생산시설도 이미 해외로 많이 이전돼 수출 증대 효과가 줄었다. 미국, 유럽연합(EU)이 ‘자국 내 생산’을 강조하면서 반도체, 배터리 분야 신규 투자도 대부분 해외에서 이뤄진다.
▷일본은행은 최근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방향을 바꾸기도 어렵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로 금리를 올리면 정부 이자 부담이 폭증해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질 수 있다. 재정 사정이 일본보다 나은 한국은 금리를 올려 원화 가치를 지킬 수 있지만 막대한 가계부채 탓에 경기 침체가 우려된다. 서둘러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도 일본의 뒤를 이어 더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03 바이든의 스탠딩 개그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서 하는 국정연설 못지않게 신경 쓰는 것이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주최하는 만찬 연설이다. 거물급 정치인과 기업인, 연예인 등 2000여 명 앞에서 하는 20분 분량의 ‘스탠딩 개그’다. 대통령은 누구든 풍자할 수 있는 ‘모두까기’ 권한을 부여받지만 가장 큰 박수가 터져 나오는 대목은 ‘자학 개그’를 할 때다.
▷지난달 30일 만찬에 참석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오늘 밤 나보다 지지율이 낮은 유일한 미국인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는 조크로 말문을 열었다. 자신의 저조한 지지율과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인 언론을 모두 유머 소재로 삼은 것. 79세의 초고령으로 건강 이상설이 끊이지 않는 약점은 이렇게 꼬집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자 ‘미국의 새로운 아버지’라고 하더라. 내 사람이 되고 싶은가.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쓰면 된다.”
▷임기 말 연설일수록 ‘자학’의 정도도 심해진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언급하며 “매케인 의원은 오늘 안 왔다. (인기 없는) 나와 거리를 두고 싶을 것”이라고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집무실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보면 모두 힐러리를 찾는 전화라고 했다. 각종 스캔들에 대해선 “8년간 기자 여러분에게 20년 분량의 기삿거리를 제공했다”고 눙쳤다. ‘코미디 최고사령관’으로 불렸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주 만난 영국 조지 왕자는 샤워가운을 입고 나왔다. 외교의전을 무시하다니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라고 말해 폭소를 끌어냈다.
▷백악관 기자단 연설은 국정연설처럼 한 달 전부터 연설 담당 보좌관들이 준비한다. 100개의 유머 아이디어를 수집해 20개를 추려내는데, 원칙이 있다. 첫째, 자화자찬은 금물. 전혀 웃기지 않다. 둘째, 국가 안보나 남의 외모를 소재로 삼지 않는다. 셋째, 자학 개그가 중요하다. 그래야 남도 깔 수 있다. 유명 방송인을 초대해 대통령 면전에서 대통령을 풍자하기도 하는데 올해는 코미디언이 참석해 물가 급등과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을 신랄하게 꼬집었고 바이든도 박장대소했다. “여기는 러시아가 아니다. 대통령을 비판해도 감옥 가지 않는다.”
▷백악관 기자단 만찬은 1924년 시작된 연례행사로 “언론은 국민의 적”이라 했던 도널드 트럼프를 제외한 역대 모든 대통령이 참석했다. 최고 권력에 대한 뼈 있는 농담으로 모두가 즐거운 만찬은 대통령과 언론 자유를 위한 건배로 끝나기 마련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목숨 걸고 취재하는 언론인들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자유로운 언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좋은 언론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04 엔데믹 블루

코로나 사태 초기엔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극단적 선택은 오히려 줄었다. 이젠 팬데믹이 끝나고 엔데믹(풍토병)으로 접어들었으니 다 괜찮은 걸까. 아니다. 팬데믹 블루보다 위험한 게 ‘엔데믹 블루’, 재난이 끝날 무렵 덮쳐오는 우울감이다. 전문가들은 정신건강의 위기가 오고 있다고 경고하는데 이는 재난에 반응하는 단계와 관계가 있다.
▷전쟁이나 감염병 같은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합심해서 대처하느라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 ‘영웅 반응’ 단계다. 의료진은 재난 현장으로 달려가고 사람들은 헌혈 대열에 동참한다. 이후 ‘허니문 반응’ 단계로 이행하는데, 혹독한 거리 두기와 백신 접종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자신감과 안도감이 충만한 시기다. 하지만 곧 ‘희망의 좌절’을 겪게 된다. 간신히 살아남았으되 살아갈 날이 암담하고 정부가 약속한 보상과 지원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때가 위험하다. 미국 9·11테러와 동일본 대지진 모두 재난 발생 첫해엔 줄어든 극단적 선택이 2년 후부터 증가하는 패턴을 보였다.
▷요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스크 벗는데 난 더 우울하다’며 엔데믹 블루를 호소한다. 동아일보가 설문 플랫폼 업체와 10∼60대 남녀 1268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61%가 코로나 확산 초기보다 요즘 우울감이 더 심해졌다고 답했다. 재난 상황에선 다 같이 힘들다는 생각으로 버텼는데 위기가 끝나니 나만 뒤처져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더 우울해진다고 한다. ‘나의 미래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고 답한 비율은 18%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엔데믹 블루 취약 집단으로 20대 청년들과 자영업자들을 꼽는다. 20대는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코로나를 맞아 고립된 채 자립의 기회를 잃어버린 세대다. 정부의 우울 위험군 조사에서 정신건강이 가장 악화한 것으로 확인된 연령대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가 직장인과 금융인들에게 혹독했듯 코로나 위기에선 자영업자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빚으로 버티고 버텼지만 1년 내 파산할 위험이 있는 자영업자가 27만 명이다(한국은행).
▷재난 대응 마지막 단계인 ‘희망의 좌절’ 극복에는 정신적 재정적 자원이 필요하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의 우울증 발병 위험이 일반인보다 1.8배 높다. 하지만 코로나 2년을 간신히 버텨온 취약 계층에 개인적 자원이 남아 있을 리 없다. 한국은 사회적 고립도가 선진국 최고 수준이다. 10명 중 3, 4명이 어려울 때 도움 받을 곳이 없다고 한다. 결국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 코로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챙기고 경제적 재기를 돕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의 주요 과제가 돼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05 美 낙태전쟁 재점화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낙태 금지는 독재적 시스템으로 가는 첫 단계다.”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지난해 12월 언론 인터뷰에서 낙태 금지를 비판하며 한 말이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되는 임신 6주부터 낙태를 금지한 텍사스주의 ‘심장박동법’ 시행을 막아달라는 소송을 연방대법원이 기각한 직후였다.
▷점점 보수화되는 대법원과 달리 미국의 여론은 낙태 허용을 지지하는 쪽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답변은 54%로 뒤집어야 한다(28%)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 선고 후 50년 가까이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해 온 최후의 보루였다. 그런데 이 판결마저 곧 폐기된다니 미국이 발칵 뒤집힐 만하다.
▷낙태는 미국의 보수와 진보가 가장 치열하게 맞붙어 온 논쟁거리다. 보건, 의료 정책을 뛰어넘는 정치적 문화적 이슈다. 2일 유출돼 버린 대법원의 낙태 판결 초안은 당장 11월 중간선거를 뒤흔들 판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낙태권 사수 혹은 폐기를 위한 캠페인에 선거자금을 쏟아부을 것이라고 한다. 대법원장이 “최종 결정이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맹폭한 결정이 바뀌기는 어려워 보인다. 118개의 주석이 달린 98쪽짜리 판결문 초안에 이미 9명의 대법관 중 5명이 동의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이미 예고돼 왔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지명했을 때 가장 관심을 모은 것도 이 판결의 번복 여부였다. 스스로를 ‘생명 찬성(pro-life)론자’라 부르는 기독교 복음주의자와 가톨릭 신자들의 낙태 반대 목소리가 다시 커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백악관 브리핑에서는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왜 낙태를 지지하느냐”고 묻는 기자와 “(남성인 당신은) 임신해 본 적도, 선택의 기로에 서 본 적도 없지 않냐”는 대변인 간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르면 다음 주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선고되자마자 50개주 가운데 최소 26개주는 즉시 낙태 금지를 강화하는 법 개정에 나설 것이라고 미 언론들은 전한다. 이에 맞서 온몸에 ‘당신 것이 아니다(not your body)’라고 써 붙인 여성과 낙태 찬성론자들은 또다시 거리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최악 수준인 정치 양극화와 사회 분열이 더 심화될 것이라는 탄식이 나온다. 그 충돌의 파장이 3년째 낙태죄 관련 입법 공백이 지속되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5-06 놀 권리

초등학생 우민이(가명)는 부모가 모두 의사인데 교육열이 남다르다. 두 돌이 지나면서 영어학원 스포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저녁엔 가정교사가 동화책 읽어주고 영어 비디오를 보여줬다. 퇴근한 부모는 아들이 그날 공부한 내용을 점검한 후 잠자리에 들게 했다. 주말이나 방학 땐 리조트로 가족 여행을 다녔는데, 그때도 수영이나 점토 교사에게 무언가를 배우며 지냈다. 우민이는 어떻게 컸을까.
▷우민이는 학원 친구들과 싸우거나 교사에게 혼나는 일이 잦아졌고, 초등학생이 된 후로는 못 말리는 문제아가 됐다. 검사 결과 우민이는 지능은 높은데 정서와 사회성 발달은 더딘 것으로 나왔다. 교육부가 ‘놀이, 아이 성장의 무한 공간’이라는 연구서에서 ‘놀 권리’를 잃고 불행해진 아이의 대표 사례로 소개한 내용이다. 정부는 내년 아동의 놀 권리를 명시한 아동기본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뇌와 신체를 발달시키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한국에서 ‘놀 권리’는 ‘공부할 의무’에 밀려난 지 오래다. 초등학생의 일평균 학습 시간은 6시간 49분, 여가 시간은 49분이다(2018년 아동종합실태조사). 동아일보가 한국과 미국의 평범한 초6 학생의 방과 후 일과를 비교한 적이 있다. 한국 학생은 오후 3시 수업이 끝나면 5시까지 공부방-저녁 먹고 영어학원-주 3회 2시간씩 수학 과외-밤 12시 잠자리에 드는 시간표다. 반면 미국 학생은 오후 3시 반 하교-체육활동-밴드활동-저녁식사 후 1시간 숙제-2시간 놀기-밤 10시 취침이다.
▷놀이의 질은 더 심각하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보고 게임하고 채팅한다. 운동 시간이 늘면 자아존중감과 생활만족도가 높아지지만 미디어 이용 시간이 길면 우울감과 공격성만 강해진다. 놀이의 양과 질 모두 부실한 한국 어린이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다. 5∼14세 우울증 환자도 2020년 9621명으로 3년 새 49.8% 늘었다. 같은 기간 전 연령대 우울증 환자 증가폭은 23.2%다.
▷아동의 놀 권리란 어떻게 놀지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놀이의 기회는 균등하며, 놀이의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놀이 시간과 내용을 강요하지 않고, 정부는 취약계층 아이에게도 놀 기회를 보장하며, 피아노는 수행평가 때문에, 농구는 키 크라고 시키는 등 놀이를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아이에겐 ‘놀이가 밥’이라고 했다. 커서 여유 있는 삶을 살게 하려고 “그만 놀고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건 아이의 몸과 마음을 살찌울 밥을 뺏는 것만큼 무지하고 잔인한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gng.com
05-07(토) 게이츠와 머스크

빌 게이츠(67)가 20세기 후반의 혁신가라면 일론 머스크(51)는 21세기 초반의 혁신가다. 게이츠는 도스와 윈도 등 범용 운영체제(OS) 개발로 정보기술(IT) 혁명을 주도했고 머스크는 전기차, 재활용 우주선 등의 개발로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IT를 자동차, 로켓 등 전통 산업에 접목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머스크는 모범생적인 게이츠와 달리 기계 산업 종사자 특유의 활달하면서도 거친 면이 있다.
▷게이츠는 미국 출신으로 하버드대를 다니다 자퇴했다.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외가 쪽 고향인 캐나다 국적을 취득해 퀸스대를 다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로 옮겨 공부했다. 이후 스탠퍼드대 박사 과정에 합격했으나 이틀 만에 자퇴했다. 머스크는 리버럴(민주당 지지) 일색인 미국 IT 업계에서 특이하게 공화당 친화적인 성향을 보여 왔는데 그가 미국 밖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것과 무관치 않다.
▷게이츠는 머스크가 지난달 트위터를 인수하면서 트위터를 ‘표현의 자유’가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만들겠다고 한 데 대해 우려 섞인 반응을 내놓았다. 게이츠는 “소셜미디어는 허위 정보 확산을 막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며 “백신이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라고 물었다. 트위터광(狂)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가짜 뉴스를 유포하고 폭력을 선동해 계정이 삭제됐다. 사업가이기도 한 트럼프는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이라는 새 SNS를 출범시키며 이에 반발했다.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의 배후에 트럼프가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머스크가 운영하는 3대 업체인 우주선 스페이스X, 전기차 테슬라, 태양광 솔라시티만 해도 사업의 내적 연관성이 있다. 스페이스X로 화성에 사람을 실어 나르고, 솔라시티 기술로 태양광을 활용해 화성에 기지를 건설하고, 태양광을 전기에너지로 전환해 테슬라를 구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업 구도에서 보면 트위터 인수는 맥락에서 벗어난다.
▷트위터가 트럼프의 계정을 삭제했을 때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는 트위터의 조치가 ‘표현의 자유’에 반한다고 비판했다. 게이츠 자신은 코로나19 사태 초기 그가 고의로 바이러스를 만들어 퍼뜨렸다는 음모론에 시달렸다. SNS라고 해서 가짜 뉴스를 방치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기존 언론처럼 가짜 뉴스를 골라내 차단하는 것이 옳은지 세계적으로 논란이 있다. 이 논란에 일도 열심히 하지만 책 또한 많이 읽기로 소문난 두 구루(guru)가 끼어들었다. 그 결론이 자못 궁금해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5-09(월) 너무 앞서간 강수연

여섯 개 보조개로 웃던 배우 강수연. 향년 56세로 7일 별세한 강수연은 아역 배우 출신이다. 모든 아역 배우들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연기 변신을 시도할 때가 왔고, 스무 살이던 1986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서 19금 연기에 도전한다. 이듬해 개봉하자 국내에선 ‘수위’에 관한 논란만 시끄러웠는데 뜻밖에 해외에서 뜨거운 반응이 전해졌다. 한국 최초의 ‘월드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강수연은 1987년 아시아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씨받이’의 옥녀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주요 영화제 수상은 한국영화 68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신예 여배우 투톱은 동갑내기 동명여고 출신인 조용원과 강수연. 임 감독은 옥녀 역할에 영화 ‘땡볕’으로 앞서 스타덤에 오른 조용원을 먼저 떠올렸지만 ‘암팡진 조선 미인’ 강수연을 선택했다. 그는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1989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월드 스타 지위를 굳혔다.
▷강수연이 해외에서 연거푸 수상하던 시기는 경제 문화적으로 약진하던 동아시아 국가의 영화계가 작가주의 감독과 스타성 있는 여배우를 앞세워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던 때다. 중국 5세대 감독 장이머우에게 궁리, 홍콩 뉴웨이브 감독 왕자웨이에게 장만위가 있듯 임 감독의 페르소나는 강수연이었다. 강수연이 연기한 임 감독 특유의 한 서린 에로티시즘에서 서구 영화계는 이국적 미학을 발견했고, 둘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문화적 자산이 됐다.
▷민주화 이후 새로운 영화 실험에 나서는 코리안뉴웨이브 감독들이 등장하는데 강수연은 이들 작품에서 전통적인 수동적 여성상을 벗고 현대 여성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 박광수의 ‘베를린 리포트’, 이명세의 ‘지독한 사랑’, 임상수의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이 시기 대표작들이다. 국내에선 호평받았지만 해외 평단은 냉담했다. 2000년대 이후 강수연은 ‘배우’보다는 ‘영화인’으로 바쁜 삶을 살게 된다.
▷영화계에선 그가 스물하나 너무 어린 나이에 월드 스타가 된 것이 배우로서는 독이 됐다고 아쉬워한다. 강수연에 이어 두 번째 해외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2007년 칸영화제 ‘밀양’의 전도연)가 나오기까지 20년이 걸렸으니 고인이 얼마나 앞서간 배우였는지 알 수 있다. 임 감독은 “요즘 같은 배우 관리 시스템만 있었다면 더 큰 배우가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돈 때문에 ‘가오’를 버리는 법 없었던 영화배우 강수연의 눈부시게 아름답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 앞서간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10 마르코스 가문의 부활

아버지는 고문과 숙청, 살인을 일삼던 독재자. 어머니는 부패한 ‘사치의 여왕’.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의 집안 내력은 그의 정치 인생을 가로막을 거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잘 몰라도 부인 이멜다의 방에서 발견됐다는 3000켤레의 구두 이야기는 안 들어본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가 9일 필리핀 대선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봉봉’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마르코스 주니어는 대선 캠페인에서 줄곧 선두를 달려왔다. 60% 가까운 지지율을 확보하며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과의 격차를 두 배 이상 벌렸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인 사라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삼아 ‘현재와 미래 권력의 결합’을 과시했다. 당선이 공식 확정되면 인권탄압과 독재로 쫓겨났던 마르코스 일가가 36년 만에 다시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 중 사망했지만, 올해 93세 이멜다는 아들과 함께 대통령궁에 복귀하게 된다.
▷혜성처럼 갑작스러운 등장도 아니었다. 1986년 부모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던 봉봉 마르코스는 5년 만에 필리핀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35세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주지사, 상원의원을 거치며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부모의 죄에 대해 “당시 너무 어렸고 상황을 몰랐다”며 책임을 부인해왔다. 틱톡 같은 소셜미디어에는 마르코스 일가의 범죄가 정적에 의해 부풀려진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과거 흑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층 표심을 겨냥한 것들이다.
▷명망가 집안을 유독 선호하는 필리핀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도 이번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7600개 섬으로 이뤄진, 80개가 넘는 언어가 사용되는 나라에서 정치는 늘 소수 족벌 엘리트 정치가문들의 전유물이었다.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 땅을 얻어 부를 축적한 400여 개의 크고 작은 가문이 그들이다. 정치적 결속력을 갖기 어려운 필리핀인들을 향해 선거 때면 이른바 ‘3G(Guns, Goons, Gold)’가 동원된 적도 많았다. 총, 깡패, 황금의 세 가지로 표심을 위협하거나 매수한다는 의미다.
▷36년 전 마르코스 일가를 몰아냈던 필리핀의 ‘피플 파워’ 혁명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반(反)독재 시위 도미노에도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랜 경기침체와 빈곤, 정치 혼란에 필리핀인들도 지쳐가는 걸까. ‘스트롱맨’으로 포장된 권위주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가 정치판에 스며들고, 민주화의 성과는 그에 밀려 빛이 바래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5-11 취임 만찬 초대받은 총수들

이른바 진보 정권에서 기업들이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반대라고 이야기하는 기업인들도 적지 않다. 오히려 반전과 파격을 보여준 경우도 있다. 출범 초부터 ‘재벌개혁’ 구호를 요란하게 내걸었던 노무현 정권의 경우도 시종일관 ‘반(反)기업’ 정책만 폈던 것은 아니다. 2006년 수도권 규제를 과감히 풀어 경기 파주에 LG디스플레이 공장을 짓게 한 게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또 용산 미군기지 이전을 계기로 평택이 반도체 메카로 발돋움하는 기반도 만들었다.
▷외환위기 한복판에 집권한 김대중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대기업 빅딜을 주도하게 했다. 일련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바탕으로 외환위기를 헤쳐 나갔다. 또 거품 논란도 만만치 않지만, 정보기술(IT) 강국의 자양분이 된 벤처 붐을 일으킨 것도 그였다.
▷역설적으로 친기업일 것 같은 보수 정권에서 더 힘들었다는 기업인이 많다. 김영삼 정권 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베이징 방문에서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다가 정권의 미움을 샀다. 뿌리 깊은 사농공상(士農工商) 풍토에서 ‘어디 감히’라는 괘씸죄까지 얹혀졌다. 기업인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중반 지지율이 떨어지자 오히려 대기업 때리기에 나서 재계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박근혜 정권은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에 대기업들을 동원했다가 총수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문재인 정권은 기업규제 3법 등 반기업 정책을 숱하게 쏟아냈다. 그나마 기업인들의 기를 살린 것은 투자 유치에 목을 맨 미국 대통령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7년 당선 직후 트위터에 ‘생큐 삼성’이라고 쓰면서 국내 재계에 손짓했다. 2019년 방한했을 때는 대기업 총수들을 따로 불러 대미 투자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달 20일 방한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4대 그룹 총수와 만나 미국 내 신규 투자를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어제 취임 만찬에 국내 5대그룹 총수를 초청했다. 대통령 취임 만찬에 총수들을 초청한 것은 처음이다. 민간 주도 경제를 이끌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취임 직후에는 경제단체장들을 만나 핫라인 구축을 약속했다. 재계는 환영하면서도 의구심을 떨치지는 못하는 분위기다. 검찰 출신이 다수 포진한 정권에서, 지지율이 떨어지면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걱정과 달리 윤 정권에서 사농공상 풍토가 바뀐다면 그야말로 반전과 파격으로 기록될 것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5-12 트럼프 참모의 회고록

마크 에스퍼 전 미국 국방장관은 “예스퍼(Yes와 Esper의 합성어)”라고 불릴 정도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충직했다. 하지만 인종차별 항의 시위 당시 연방군을 투입하려 했던 트럼프에 맞서면서 미운털이 박혔고, 결국 옷을 벗었다. 그는 최근 출간한 회고록 ‘성스러운 맹세’에서 트럼프에 대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 ‘분노의 포로’라고 혹평했다. 퇴임 이후 회고록을 통해 트럼프의 등에 비수를 꽂은 전직 참모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에스퍼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미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진행되던 2020년 트럼프는 참모들에게 여러 차례 주한미군 철수 필요성을 언급했다. 북핵 위기가 고조됐던 2018년에는 주한미군 가족 전원 철수를 결정했다가 막판에 번복했다. 트럼프는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을 미사일로 공격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검토했다. 에스퍼는 “군사력 사용에 대한 트럼프의 생각은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했다”고 썼다. 다른 국가의 안보를 뒤흔들 사안을 이처럼 가볍게 여기는 미국 대통령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새삼 오싹해진다.
▷트럼프에게 가장 골치 아픈 회고록을 쓴 사람은 한때 ‘트럼프의 책사’로 불렸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다. 그는 트럼프가 2019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내가 반드시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썼다. 트럼프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얘기다. 또 트럼프는 영국이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무식했다는 사실 등도 전했다. 훗날 트럼프는 “코로나가 볼턴을 데려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분노했다고 한다.
▷이들 외에도 스테퍼니 그리셤 전 백악관 대변인, 클리프 심스 전 백악관 보좌관, 오마로사 매니골트 뉴먼 전 백악관 대외협력국장,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 등이 줄줄이 회고록을 냈다. 트럼프의 경박한 성품, 사람을 경시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리셤은 트럼프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그리셤과의 잠자리는 어떤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트럼프가 대통령 전용 태닝 침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원을 해고한 적도 있다고 뉴먼은 전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4년 동안 장관을 14명 바꿨고, 백악관 핵심 참모의 92%를 교체했다. 첫 임기에 장관을 3명만 바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과 비교된다. 충성심이 의심되는 참모는 가차 없이 경질하는 트럼프의 인사 스타일이 반영된 결과다. 코미 전 국장은 회고록에 “트럼프에게 충성을 거부하자 해임됐다”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지도자를 끝까지 따를 참모는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트럼프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5-13 피투성이 60대 지나친 53명

1964년 뉴욕에 사는 여성 키티 제노비스가 새벽에 귀가하던 도중 주택가 노상에서 흉기를 든 강도를 만났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30분 넘게 저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2주 뒤 뉴욕타임스가 ‘살인을 목격한 38명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미국에서 논란이 됐다.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가 이 사건을 계기로 생겼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이 분산되어 오히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덜 돕게 된다는 뜻이다.
▷11일 오전 6시경 서울의 한 아파트 입구에서 60대 남성이 필로폰 성분을 투약한 40대 중국 국적의 남성에게 1분 만에 ‘묻지 마 살인’을 당했다. 가해자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피해자에게 갑자기 발길질을 하더니, 도로 경계석으로 피해자 얼굴을 내리쳤다. 피가 분출하는 등 출혈이 심했지만 목격자들은 아무도 가해자를 말리지도, 피해자를 구조하지도 않았다. 한국판 ‘제노비스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아파트 입구 맞은편 가게에 있는 폐쇄회로(CC)TV에 찍힌 목격자만 53명이었다. 인력알선업체 등으로 출근을 서두르거나 산책을 나온 주민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중국 국적 거주자가 많은 이 지역은 평소에도 새벽에 누워 있는 취객이 많았다고 한다. 오전 6시 7분경 거동이 불편한 남성이 “누군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는 첫 신고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60대 남성은 숨을 쉬고 있었는데, 경찰과 소방이 현장에 도착한 10분 뒤에는 숨진 채 발견됐다.
▷2016년 대전에서 택시기사가 운전 중 심장마비 증세로 쓰러졌다. 항공편에 맞추기 위해 택시 승객들은 구호 조치를 하지 않고, 다른 택시를 갈아타고 현장을 떠나버렸다. 승객들이 119 신고만 일찍 했더라도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이른바 ‘나쁜 사마리아인 법’ 도입 논의가 국회에서 있었다. 하지만 해외에서도 기소 사례가 많지 않고, 사회적 공감대가 낮다는 이유로 유보됐다.
▷53명에게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보통사람이라면 가해자를 제지하다가 되레 피해를 입거나 보복 범죄를 당하지 않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과 달랐을 것이라고 100%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도 의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는 것은 최악이다. 이런 씁쓸한 세태를 개선하기 위해 시민의식을 끌어올리면서, 가능하면 개개인이 그처럼 곤란한 상황에 부딪히지 않도록 치안과 응급구조의 허점도 메워야 한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g@donga.com
05-14(토) 여성 정구대회 100돌

인기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의 성공 비결은 여자들의 축구 도전기라는 의외성에 있다. 응원석에나 앉아 있던 여자들이 발톱 빠져가며 달리는 모습에서 ‘여자가 무슨 축구냐’는 편견이 깨지는 놀라움과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도 공 차는 여자 보고 신기해하는데 100년 전 공 때리는 여성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골때녀’ 이전에 ‘공때녀’가 있었다.
▷1923년 동아일보가 소녀들만의 정구대회를 열겠다고 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정구는 말랑한 공을 쓰는 소프트테니스. ‘방 안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 허약한 조선 여자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당시는 여성이 쓰개치마로 얼굴 가리고 다니던 시절이다. 이화학당의 체조 수업을 보고 “여자가 어찌 운동을” “이화학당 출신은 며느리로 들이지 않겠다”는 양반도 있었다. 결국 남자 관중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남성들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껏 기량을 펼치라는 배려도 작용했다.
▷그해 6월 정동 제1고등여학교에서 열린 1회 조선여자정구대회는 대성공이었다. 경성의 숙명 정신 동덕 배화 진명 경성과 개성의 호수돈, 공주의 영명까지 8개 여고(현재 중학교에 해당)에서 100명이 참가했는데 관중이 3만 명이나 몰려들었다. 경성 인구가 30만 명이던 시절이다. 긴치마에 댕기머리 휘날리며 공 때리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남자들이 학교 담장 위로 올라가 대회장 옆의 보성초등학교 담벼락이 무너지고 배추밭이 망가졌다. 점잖은 백구두 차림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떼쓰는 신사들도 있었다. 초대 우승팀은 진명여고였다.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명맥을 이어온 대회는 전국소프트테니스(정구)대회로 이름이 바뀌어 올해로 100회를 맞았다. 단일 종목 스포츠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회다. 정구 종주국인 일본에도 이보다 역사가 긴 대회는 없다. 1회 대회는 8개 팀 100명이 참가했는데 경북 문경국제정구장에서 막을 올린 올해 대회에는 122개 팀 1000명이 기량을 겨루고 있다.
▷스포츠를 통한 여성 지위 향상을 목표로 시작된 동아일보 정구대회는 2006년부터는 남녀가 모두 즐기는 대회로 성장했지만 스포츠 성 격차는 여전하다. 초등6∼고3 학생들에게 ‘최근 한 달간 스포츠 활동에 참여한 횟수’를 물었더니 남학생은 11회, 여학생은 8회라고 답했다(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3월 발표). 한국 여학생의 운동량은 세계 꼴찌 수준이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운동 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2016년 학교체육진흥법이 바뀌어 여학생들의 체육 활동 지원은 정부의 의무가 됐다. 골때녀, 공때녀들이 많아지도록 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16(월) ‘김치 코인’의 몰락

‘김치 코인’으로 불리며 세계의 주목을 받던 자매 코인, 테라와 루나 거래 가격이 폭락해 상장 폐지가 이어지고 있다. 루나는 일주일새 99.99%, 테라는 80% 넘게 급락했다. 가상화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전 재산을 잃었다”며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듯한 글이 이어져 경찰이 순찰을 강화했다. 코인을 발행한 테라폼랩스 권도형 대표(30) 자택을 찾아 초인종을 누르고 달아났던 남성은 20억 원을 날렸다며 경찰에 자수했다.
▷테라는 코인당 가치가 1달러로 유지되도록 설계한 스테이블코인의 한 종류다. 1테라가 1달러보다 싸지면 자매 코인인 루나를 팔아 테라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가격을 유지한다. 반대일 땐 테라를 팔고 루나를 사들인다. 이번에도 테라 가격이 떨어지자 루나를 팔고 테라를 사들였지만 매물이 쏟아지면서 가격 조정에 실패했다. 이에 루나를 대규모로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려 했다. 하지만 신뢰를 잃은 투자자들이 루나 투매에 나서면서 테라도 급락하는 ‘죽음의 소용돌이(Death Spiral)’에 빠져들었다.
▷업계에선 예전부터 다단계 사기 수법인 ‘폰지 사기’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다른 스테이블코인들은 준비 자산으로 달러나 금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테라와 루나는 실물자산 담보 없이 ‘알고리즘 방식’으로 코인 돌려 막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상승장에선 문제가 없지만 이번처럼 하락장에선 대규모 인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 CNN은 이번 사건을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한 리먼 브러더스 사태에 견줬다.
▷테라와 루나를 만든 권 대표는 ‘한국판 일론 머스크’로 불렸다. 국내 외국어고를 나와 미 스탠퍼드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엔지니어로 일했다. 2018년 회사를 설립해 가상화폐 거물이 됐다. 하지만 이제 피 몇 방울로 온갖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했던 실리콘밸리 최대 사기극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홈스와 동급에 올랐다. 그는 코인 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바퀴벌레”라는 식으로 대응하곤 했다. 작년 7월 영국 경제학자가 실패 가능성을 지적하자 “난 가난한 사람과 토론하지 않는다”고 했다.
▷폰지 사기 의혹에도 루나는 한때 시가총액이 50조 원에 달해 시총 45조 원인 네이버를 능가했다. 테라 시총도 23조 원을 웃돌았다. 흔히 가상화폐를 ‘디지털 금’에 비유하는 이도 많지만, 이번 사태는 가상화폐와 금은 변동성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줬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의회에서 가상화폐 시장의 규제 필요성을 언급하고 나섰다. 어떤 투자든 위험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 새길 때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5-17 키오스크 공포

“안녕하세요”라며 주문을 받는 직원 대신 ‘Self Order’라고 쓰인 키오스크가 서 있는 식당들. 노인들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위축된다. 글씨도 작은 화면을 더듬더듬 누르다 보면 실수하기 일쑤다.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소셜미디어에는 “엄마가 키오스크 사용할 줄 몰라서 한 시간 만에 주문했다는 얘기를 듣고 울었다” “아빠가 햄버거 좋아하시는데 키오스크로 바뀐 뒤 한 번도 못 드셨다”는 글이 올라온다.
▷식당이나 마트, 영화관, 병원, 관공서까지 키오스크가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키오스크는 원래 음료나 신문을 파는 간이매점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정보통신에서는 터치스크린 방식의 무인단말기를 뜻하는 ‘일렉트로닉(Electronic) 키오스크’나 ‘디지털(Digital) 키오스크’를 줄여서 키오스크로 부른다. 특히 요식업계에 도입된 키오스크 숫자는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 비해 지난해에 4배가량 늘었다. 업주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디지털재단의 설문조사 결과 서울에 거주하는 55세 이상 시민 가운데 키오스크를 이용해 봤다는 응답자는 절반이 되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는 이유로는 ‘사용 방법을 모르거나 어려워서’라는 답이 약 3분의 1로 가장 많았고, ‘뒷사람 눈치가 보여서’(18%)라는 응답도 상당했다. 노인이 직원이나 다른 손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것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대해서 포기했다는 얘기도 종종 들린다. 이러니 키오스크에 대한 노인들의 공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고령층에게는 프로그램이나 앱을 설치하는 것부터 인터넷을 연결하고 쇼핑을 하는 것까지, 디지털 문화 전반이 낯설고 어렵다. 고령층의 디지털 사용 능력은 전체 평균의 3분의 2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연령에 따른 디지털 디바이드 현상이다. 젊은이들이 인터넷으로 손쉽게 출력하는 주민등록등·초본을 떼기 위해 고령층은 주민센터를 방문해야 하고, 아파트 청약도 대부분 인터넷으로 이뤄져 난감하다. 고령층이 많은 지역에서 한 은행이 유인 지점을 폐쇄한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반대 시위를 여는 일까지 벌어졌다.
▷요즘 중시되는 웰에이징(well-aging)의 주요 요소로 건강, 직업 등과 함께 디지털 능력이 꼽힌다. 디지털과 현실이 융합돼 가는 세상에서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정부와 시민단체의 적극적인 교육과 함께 세대 간의 공존을 위한 젊은층의 노력이 필요하다. 키오스크 앞에서 진땀을 흘리는 노인들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작은 호의가 그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5-18 음악교과서 국악 퇴출 번복'

‘덩∼기덕 쿵 더러러러.’ 초등학교 3∼4학년용 음악 교과서에는 전통 민요인 ‘천안삼거리’와 함께 굿거리장단 소개가 나온다. 무릎장단을 칠 때 ‘더러러러’ 부분은 손바닥 전체가 아닌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볍게 치라는 그림설명도 친절하다. 학생들은 초중고를 거치면서 오돌또기나 몽금포타령 같은 민요부터 판소리, 풍물놀이, 단소, 대취타 같은 한국 전통음악을 조금씩 배워간다. 교과서에서 국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30%가량이다.
▷국악 수업의 비중이 앞으로 줄어들게 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국악계가 단단히 뿔이 났다. 교육부의 2022년 개정 교육과정 시안 중 음악 교과 성취기준에 국악이 빠진 것. “국악을 홀대한다”는 비판 속에 국악인 출신 가수 송가인과 소리꾼 이자람, 신영희 명창 등이 한목소리로 변경 요구에 나섰다. 화들짝 놀란 교육부가 국악 관련 내용을 기존대로 원위치 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되레 성토가 거세지는 분위기다. 늘려주지는 못할망정 마지못해 되돌리는 식의 조치로 국악인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국악이 따분하고 고루한 옛 음악이라는 인식은 그 자체로 고루하다. 국악을 재즈, 힙합 같은 다양한 장르와 융합시킨 퓨전 국악은 젊은층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K소리’, ‘조선팝’ 등으로 이름 붙인 다양한 변주 시도가 활발하다.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가요로 편곡해 부른 여가수는 애절한 국악 창법으로 발라드 느낌의 신곡을 재탄생시켰다. 해금과 가야금을 사용한 K팝 그룹 킹덤의 ‘승천’은 미국 아마존 뮤직의 5개 차트 1위를 휩쓸었다. 수궁가가 원전인 ‘범 내려온다’를 사용한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동영상은 해외 조회 수가 2억6000만 뷰를 넘었다.
▷이런 크로스오버 음악의 재창조도 결국 정통 국악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고 국악인들은 말한다. 국악의 12음률과 민요 아리랑의 가락, 장구의 리듬을 배우는 것은 최소한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정부의 공교육 지침에서 국악 관련 부분이 삭제돼 버리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온 국악 교육이 설 데가 없다고 이들은 하소연한다. 서양음악 전공자가 대다수인 교육 현장에서 “글로벌 시대에 왜 국악을 가르치느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것도 국악인들의 불안을 부추기고 있다.
▷해외 교육 현장에서 오히려 국악의 소중함을 느낀다는 사람이 적잖다. 미국이나 유럽의 초등학교 ‘인터내셔널 데이’에는 한국 학생들이 몇 달씩 연습한 사물놀이 공연이 자주 무대에 오른다. 신명나는 소리가 폭풍 같은 박수를 이끌어낸다. ‘한국적인 것’의 경쟁력이다. 우리 것은 우리 스스로 지키고 키워가야 한다. 교실에서부터 잘 가르치려는 노력이 그 시작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
05-19 마리우폴 함락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이 17일 러시아에 함락됐다. 마리우폴은 돈바스 지역 최남단에 위치해 크림반도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다. 러시아는 자국에서 돈바스 지역을 거쳐 크림반도로 이어지는 육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오데사와 몰도바 내 친러시아계 지역으로의 진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러시아로서는 침공 이후 가장 큰 승리이고 우크라이나로서는 뼈아픈 패배다.
▷러시아로서는 승리이긴 하지만 너무 늦은 승리다. 러시아는 이미 한 달 전 마리우폴을 장악하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마리우폴의 우크라이나군은 소련 시대 때부터 거의 요새화된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에 자리 잡고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결국 항복하긴 했지만 개전 이후 80여 일간 러시아군의 주요 전력을 이곳에 붙잡아뒀고 그것이 다른 곳의 우크라이나군이 선전한 한 원인이 됐다.
▷마리우폴 우크라이나군의 핵심 전력은 아조우연대다. 2014년 돈바스에서 친러시아 반군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민병대지만 정규군보다 전투력이 더 강하다고 알려졌다. 아조우연대와 친러시아 반군은 서로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깊은 원한이 쌓였다. 아조우연대는 창설 당시 신나치 성향의 부대원들이 일부 있었으나 극단주의 성향은 현재 많이 희석됐다는 것이 서방 언론의 보도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나치를 쫓아내기 위한 특별 군사작전 ‘Z’를 수행한다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 쪽에서는 아조우스탈에 있다가 항복한 군인 중에 미군 특수전 사령관을 지낸 에릭 올슨 예비역 대장을 비롯해 서방 국가 군 고위 장교들이 있다는 소문을 흘리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군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알려진 인터넷 사진 속 인물은 올슨이 아닌 것으로 팩트체크 사이트에서 확인됐다. 전쟁 보도는 선전 활동과 섞여 있기 때문에 가려들어야 한다.
▷러시아 의회는 아조우연대는 테러리스트이며 테러리스트를 포로 교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명분이 나치 테러리스트 퇴치이므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포로 교환에 응한다면 거짓 명분을 내세운 것이 되고 포로 교환에 응하지 않으면 자국 군 포로 가족들이 분노할 것이다.
▷러시아는 마리우폴 장악에 만족하고 우크라이나와 새 협상을 시작할 것인가. 우크라이나는 마리우폴을 수복하기 위한 시도를 포기하고 협상에 응할 것인가. 핀란드와 스웨덴은 마리우폴 함락과 거의 동시에 나토 가입 신청을 했다. 러시아로서는 마리우폴을 얻은 대신 핀란드 쪽 국경의 안보가 취약해졌다. 미국과 유럽연합(EU)도 장기전으로 가는 건 부담스럽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5-20 ‘검사 유배지’ 법무연수원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검찰총장 공백 상태에서 첫 검찰 간부 인사가 났다. 박근혜 정부 때 우병우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과 가까웠던 고검장 1명과 검사장 3명을 일선 검찰청에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내보냈다. 당시 법무부는 “검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과거 중요 사건의 부적정 처리 등 문제가 제기되었던 검사들을 수사지휘 보직에서 배제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적폐 검사’를 좌천시킨 것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임명 다음 날인 18일 검찰총장 부재중에 윤석열 정부의 첫 검찰 간부 인사가 단행됐다. 이성윤 고검장과 이정수 심재철 이정현 이종근 검사장이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전보 조치됐다. 모두 추미애 박범계 전 법무부 장관 재임 때 잘나가던 검찰 간부들이다. 이들은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재직 때 징계를 주도했거나 가족 관련 수사를 지휘한 악연이 있다. 좌천 대상만 바뀌었을 뿐 5년 전 인사가 데칼코마니처럼 되풀이된 것이다.
▷법무연수원이 좌천 검사들의 집합소가 된 건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7월부터였다.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우 전 수석 등 사법연수원 19기 검사 6명을 이례적으로 연구위원으로 발령 냈다. 동기 중 최선두라고 생각하던 우 전 수석은 당시 자신의 처지를 ‘상처받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호랑이’에 빗댄 적이 있다. 이 인사의 실무를 검찰과 검사였던 한 장관이 담당했다. 조국 전 장관 수사 이후 4차례 좌천된 한 장관은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발령받자 “보복을 견디는 것도 검사의 일”이라는 입장을 냈다.
▷처음부터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이 한직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 때 ‘검찰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전 의원은 검사들도 없는 서울지검 특수부장이라는 보직을 갖고 2, 3년 청와대로 출근했다. 1986년 11월 박 전 의원은 4단계를 건너뛰면서 혼자 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는데, 인사 직전 법무연수원에 검사장급 연구위원직이 급조됐다. 정권 실세를 챙겨주기 위한 전형적인 위인설관(爲人設官)인 셈이다. 그는 연구위원 발령을 받고도 국가안전기획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나중에 사표를 냈다.
▷관용차가 나오는 일선 검찰청과 달리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발령받으면 고위 간부들은 자가용으로 첫 출근을 할 때부터 척박한 환경을 실감한다고 한다. 이런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내는 일도 많다. 정권 교체 이후 연구위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좌천 인사를 하는 건 결국 검찰 인사가 정치적 외풍에 따라 이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인사를 남발하지 말고, 연구위원의 직책에 맞는 검사에게 보직을 맡겨야 진짜 검찰 인사의 정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5-21(토) 일회용 컵 보증금제 반발

과로사회인 때문일까. 한국인은 커피를 많이 마신다. 성인 1인당 소비량이 연간 353잔으로 세계 평균의 2.7배다(2018년 기준). 일회용 컵 사용량도 연간 25억∼28억 개나 된다. 정부가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세계 최초로 일회용 컵에 보증금을 매기는 제도를 법제화한 배경이다. 그런데 시행을 3주 남겨놓고 갑자기 시행 시기를 12월로 미뤘다. 카페 주인들의 반발 때문이다.
▷다음 달 10일 시행 예정이던 이 제도는 일회용 컵에 담긴 음료를 살 때 보증금 300원을 내고 반납할 때 현금이나 계좌로 돌려받는 제도. 스타벅스 파리바게뜨 롯데리아 등 3만8000개 매장이 적용 대상이다. 컵에는 재활용 라벨을 붙이고 회수한 컵은 재활용업체에 보내야 하는데 이 모든 비용이 점주 부담이다. 하루에 일회용 컵 300개를 쓸 경우 한 달이면 10만∼15만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일회용 컵을 씻어서 보관하는 것도 점주의 일이다.
▷20년 전에도 비슷한 제도를 시행한 적이 있다. 그땐 보증금이 50∼100원이었다. 자율 규제인 데다 보증금 액수가 적어 회수율이 37%에 그쳤다. 일부 업체가 미환불금을 홍보비로 쓰는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2008년 제도가 폐지됐고 10년 후 일회용 컵 회수율은 5%로 떨어졌다. 정부는 실패한 제도를 부활시키면서 강제 규정으로 바꾸고 보증금도 올렸다. 다른 브랜드 매장에서도 컵을 반납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점주들의 반발에서 보듯 회수와 반납 인프라가 여전히 부실하다. 소비자로서는 커피값 인상도 마뜩지 않고 300원을 환급받기 위해 컵을 들고 매장을 찾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일회용 컵 쓰레기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 환경부는 일회용 컵을 재활용하면 소각했을 때에 비해 온실가스를 66% 줄일 수 있고, 연간 445억 원의 편익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한다. 업자와 소비자가 편리함을 누리면서 그 부담은 공공에 떠넘기는 것도 부당하다. 종이팩 금속캔 유리병 형광등은 생산자들이 재활용 비용을 일부 부담한다.
▷환경부는 매장 부담을 덜어주는 대책을 곧 내놓기로 했다. 매장 밖에 무인 회수기를 설치하는 등 소비자들이 쉽게 컵을 반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다회용 컵 활용 혜택도 늘릴 필요가 있다. 환경부는 2년 전에도 포장재 쓰레기를 줄인다면서 ‘1+1’ ‘2+1’ 묶음상품 할인 판매를 못하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려다 백지화한 적이 있다. 환경 정책은 취지가 좋아도 기업과 소비자 입장에서는 규제이고 불편함이다. 세심한 정책 설계와 충분한 설득 없이 밀어붙이다 뒷걸음질치는 일이 반복되면 정부 신뢰도는 뭐가 되나.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23(월) 호주 첫 비영국계 총리

호주인들은 2019년 말∼2020년 초를 ‘검은 여름’이라고 부른다. 호주 전역을 휩쓴 대형 산불로 짙은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 면적의 400배에 해당하는 산림이 불탔고, 호주인들에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산불이 급속도로 번지던 시점에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비밀리에 가족들과 함께 하와이로 휴가를 떠나버렸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 그는 두고두고 기후변화와 민생에 무관심한 총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21일 실시된 호주 총선을 앞두고 모리슨 총리가 이끄는 보수 성향의 자유국민연합은 중국과 안보에 캠페인의 초점을 맞췄다. 모리슨 총리는 야당 노동당의 앤서니 앨버니즈 대표를 ‘중국의 꼭두각시’라고 비판하며 색깔론을 제기했다. 한 보수단체는 트럭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을 걸고 다니며 ‘중국은 노동당을 원한다’고 선전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군사·경제적으로 강경한 반중 노선을 걸었던 모리슨 정부의 정책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호주 ABC방송이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가장 큰 관심사로 기후변화(29%)를 꼽았고 이어 생계비 문제(13%) 등 순이었다. 국방·안보라고 답한 국민은 4%에 불과했다. 기후변화 문제는 호주인들에게 미래가 아닌 현실이었고, 치솟는 물가와 경제적 어려움이 주 관심사였다는 얘기다. 결국 온실가스 43% 감축 등을 내세운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앨버니즈 대표가 새 총리로 내정됐다. 2013년 이후 8년여 만에 이뤄진 정권 교체다.
▷호주 언론들은 이번 총선 결과를 ‘다문화사회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788년 영국인들이 호주에 정착한 이후 줄곧 영국계가 호주 사회의 주류였고, 역대 30명의 총리 역시 모두 영국계였다. 하지만 호주는 이제 인구의 49%가 해외에서 태어났거나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해외 출신인 다문화사회가 됐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이탈리아계인 앨버니즈 대표가 121년 만에 첫 비영국계 총리에 오르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모리슨 총리가 사회 통합을 외면하고 우경화 정책을 고집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라고 분석했다. 스스로 “나는 불도저 같은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 모리슨 총리의 권위적 통치 스타일도 유권자들의 반감을 샀다. 반면 앨버니즈 대표는 “혁명이 아닌 개선”을 외치며 안정적 변화를 원하는 표심에 호응했다. 빈민촌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역경을 극복하며 정치인으로 성장한 그의 인간 스토리도 승리에 한몫했다. 민심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는 사실을 호주 총선이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5-24 EPL 득점왕 손흥민

“월계관을 쓴 살아있는 축구 전설을 보면 아시아인은 자부심을 느낀다.” 중국 인터넷 매체 왕이는 23일 손흥민의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 확정을 자국 경사처럼 전했다. 일본 포털사이트도 관련 소식을 메인 뉴스로 전했다. 손흥민의 대기록이 아시아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심어줬다는 것이다. EPL은 유럽 5대 리그 중에서도 최정상이다.
▷이번 시즌 손흥민은 말 그대로 기록 제조기였다. 필드골로만 23골을 넣으며 차범근 전 감독이 1985∼1986시즌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세웠던 한국 선수 유럽 축구리그 시즌 최다 골(17골) 기록을 넘어섰다. 종전 아시아인 유럽 1부 리그 최다골(21골) 기록도 경신했다. 손흥민이 고교 1년을 중퇴하고 유럽으로 간 지 14년 만이다. 경기장 안에선 ‘축구 못하는 동네에서 온 녀석’이란 편견에 패스도 안 하던 동료들을 실력으로 돌려세웠고, 경기장 밖에선 문화 차이와 언어 장벽을 극복해낸 피땀의 결실이었다.
▷손흥민이 득점왕에 이른 과정도 개인주의가 강한 유럽 축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경기 때마다 개인 기록보다 팀 성적을 우선시했다. 시즌 막판 숨 막히는 득점왕 경쟁을 하면서도 팀 승리를 위해 PK 찬스를 흔쾌히 양보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선 언제나 공(功)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손흥민이 앞장서 EPL에서 보기 힘든 팀 문화를 만들었고, 23일 최종 경기에서 동료들은 한마음으로 득점을 돕고 나섰다.
▷손흥민의 뒤에는 늘 아버지 손웅정 씨가 있었다. 어린 자식에게 7년 동안 기본기만 단련시켰고,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도록 하루에 1000개의 슈팅을 시켰다. 자신은 기술이 부족한 삼류 선수였다며 “나처럼 축구하면 안 되겠다 싶어 아들에겐 정반대로 가르쳤다”고 했다. 어린 아들이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성공은 선불”이라고 다독였다. 아들이 2010년 유럽무대 첫 골을 넣자, 인터넷을 보고 자만할까봐 노트북을 치워 버렸다. 최근까지도 그는 “아들은 절대 월드클래스가 아니다”라며 몸을 낮춘다.
▷과거 한국 축구 전설은 차범근과 박지성이었다. 누가 최고냐는 논쟁에 차 전 감독은 작년 한 방송에서 “지금 손흥민이 이루고 있는 업적은 우리 둘이 못 따라간다”며 자신을 꼴찌로 꼽았다. 물론 후배들은 선배를 앞세웠다. 마지막 경기에서 승점 1점 차이로 EPL 우승컵을 놓친 위르겐 클로프 리버풀 감독은 아쉬워하면서도 “2위는 내 인생 이야기다”라며 결과를 받아들였다. 실력과 겸손함을 갖춘 월드 스타들의 진면목이다. 인생살이 덕목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5-25 “대만은 미국이 지킨다”

2020년 8월 미 국방부에서 진행된 미중 간 시뮬레이션 전쟁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가정된 상황은 대만해협에서의 무력 충돌. 펜타곤과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군사작전 전문가들로 구성된 미국 쪽 ‘블루팀’은 중국 쪽 ‘레드팀’에 참패했다. 역내 가용 전함과 전투기, 잠수함, 지상병력을 모두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존 하이튼 미 합참차장은 이후 한 행사에서 이 결과를 “비참한 실패”라고 불렀다.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은 미국이 가장 심각하게 인식하는 인도태평양 지역 내 안보 위협이다. 펜타곤의 고위 장성들은 2027년이 되기 전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해왔다. 미국이 대만 지원에 나선다고 해도 격퇴를 장담하기 어렵다. 중국∼대만의 거리는 불과 145km. 워게임 결과에 따르면 대만 공군은 몇 분 만에 전멸해 버린다.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 등 무서운 속도로 군사력을 증강해온 중국이다. 섣불리 나섰다간 중국과의 전면전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것도 미국에는 부담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의 대만 침공 시 군사 개입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매번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고, 화들짝 놀란 백악관 대변인실과 펜타곤이 부랴부랴 진화에 나서는 패턴도 반복되고 있다. 첫 발언 때만 해도 “고령의 바이든 대통령이 말실수를 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이쯤 되면 의도가 담겼다고 보는 게 맞다. 호시탐탐 대만 공격 기회를 엿보는 중국을 향해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막상 대중 견제를 위해 출범시킨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는 대만을 끼워주지 않았다. 중국 눈치를 보던 아세안(ASEAN) 10개 회원국 정상들은 백악관까지 불러 참여를 설득하면서 참가를 원했던 대만은 배제시켰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유지하는 미국이 중국과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내린 결정일 것이다. 쓰린 속을 달래고 있을 대만을 향해 바이든 대통령이 말실수 형식을 통해서나마 ‘든든한 뒷배’ 역할을 자임한 것은 아닐까.
▷미국은 대만에 ‘MQ-9 리퍼’ 같은 최신무기 판매를 허용하고, 대만군의 훈련을 도우면서 대만관계법에 따라 가능한 군사적 지원도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구축에 빠져서는 안 되는 핵심 파트너 국가의 안보 위협을 두고만 보지 않겠다는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런 지원을 이끌어내는 힘은 대만이 보유한 첨단 반도체 기술력과 TSMC 같은 대만 기업들이다. 국력을 결집해 키워낸 ‘실리콘 방패’의 힘이 전투기와 탱크 못지않음을 대만이 보여주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5-26 법무부 ‘차이니스 월’

“법무부 내에 분명한 ‘차이니스 월(Chinese Wall)’을 쳐서 인사검증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일이 결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 법무부는 25일 공직자 검증 업무를 담당할 인사정보관리단의 운영 방향에 대해 이같이 강조했다. 장관은 결과만 보고받고, 장관을 포함한 법무부의 누구도 검증 과정의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게 지침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검증 정보를 수사 첩보로 재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차이니스 월은 원래 금융권 용어다. 중국 만리장성이 유목 지역과 농경 지역을 갈라놓듯 금융회사의 부서 간 또는 계열사 간 미공개 정보의 교류를 차단하는 것을 뜻한다. 1960년대 후반 미국 메릴린치에서 처음 도입했고, 1980년대에 내부자 거래를 통한 금융스캔들을 막기 위한 법률로 격상됐다. 미국 금융 기법에 대한 수사 경험이 있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금융권 용어로 비판 여론에 ‘방어 장벽’을 친 셈이다.
▷법률상 모든 공직 후보자의 정보 관리는 인사혁신처장의 권한이다. 대통령 임명직에 한해 인사혁신처장은 대통령비서실장에게 검증 업무를 위탁한다. 옛 민정수석실이 검증을 했던 근거다. 법무부 장관도 검증 업무를 위탁받게 대통령령을 고치면 된다는 것이 법무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비서실장과 달리 법무부 장관은 정부조직법상 검증 권한이 없다. 민정수석실 검증을 국정 협조 차원에서 법무부, 경찰이 도왔던 것도 위법 시비가 있었다. 법무부 지침만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직자는 1만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검증 대상은 주로 공무원이지만 민간인도 포함된다. 통상 3∼5배수 검증을 하면 최대 5만 명의 개인정보가 수집된다. 부동산과 납세, 금융, 수사 자료에 국가정보원의 존안(存案), 경찰의 세평(世評) 파일까지 추가된다. 법무부 검증은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어서 음지의 업무를 양지로 끌어낸 것이라고 법무부는 주장한다. 하지만 운영 과정에서 민간인 사찰 논란과 같은 불행한 일이 재발할 위험이 있다.
▷법무부가 행정부 내 검증의 유일한 축이 되면 교차 검증이 불가능해진다. 국회에서 ‘인사검증법’ 제정 논의가 있었을 때도 정부 부처 한 곳이 일괄적으로 검증 자료를 수집, 정리, 분석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반대 의견이 많았다. 여러 부처의 공무원을 파견 받는 종합 업무의 성격이 강하고, 기밀 유지를 위해 사무실도 제3의 장소에 둔다는데 굳이 국무총리가 아닌 법무부 장관 직속이어야 하나. 검찰 출신인 ‘인사비서관→법무부 장관→공직기강비서관’으로 이어지는 검증을 위한 제도 개편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5-27 美 10대의 총기 난사

미국 공화당의 거물 정치인인 밋 롬니 상원의원은 최근 텍사스주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가 역풍을 맞았다. 마지막에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한마디 덧붙인 것이 빌미가 됐다. 총기 소유 옹호론자들이 “배은망덕하다” “겁쟁이” 같은 비난을 쏟아내며 집중포화에 나선 것. 이들은 롬니 의원이 전미총기협회(NRA)에서 지금까지 1300만 달러(약 165억 원)의 후원금을 받은 사실까지 공개했다. NRA는 총기 규제에 반대해온 미국 내 최대 총기 옹호 단체다.
▷19명의 초등학생 희생자를 낸 이번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미국 사회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범인이 18세 청소년이라는 사실도 미국인을 경악시켰다. 얼마나 총기 규제가 느슨하면 10대 청소년까지 총을 손에 넣어 범죄에 사용하느냐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텍사스주에서는 21세 이상이면 전과나 법적 제한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권총을 소지할 수 있다. 라이플총의 경우 허가증 없이도 구매가 가능하다.
▷총기 규제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다시 들끓고 있지만 실제 전망은 어둡다. 20명의 어린이 희생자를 낸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지금까지 수차례의 총기 규제 시도가 이어졌지만 성과는 없었다. NRA가 로비력을 총동원해 의회의 총기 규제 관련 입법을 막아온 것은 이미 악명이 높다. NRA의 자금력이 최대 무기다.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에게 지원한 선거 자금만 70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NRA만 탓하기도 어렵다. 미국에서 총기 소유는 개인의 자유이자 권리로 여겨진다. 이를 규제하는 것은 ‘무기 소유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규정한 수정헌법 2조 위반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총기 난사 사건으로 규제 여론이 높아질 때마다 NRA로 되레 후원금이 몰리는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상당수 교외지역에서는 아직도 야생동물의 위협이 상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인적이 드문 시골에서는 경찰 공권력이 닿기를 기다릴 틈 없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주민들은 주장한다.
▷그러는 사이 미국은 사람보다 총이 더 많은 나라가 됐다. 인구 100명당 총기 수가 120.5개로 전 세계 1위다. FBI에 따르면 인구밀집지역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은 지난해에만 61건. 2020년에는 교통사고가 아닌 총기 관련 사건사고가 10대와 어린이 사망 원인 1위가 됐다. 그래도 정치권은 “정신병 환자 관리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식의 해법으로 변죽만 울리고 있다. 로비 자금에 파묻힌 워싱턴 정치의 한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5-28(토) ‘대통령 사저’ 컬렉터

문재인 전 대통령은 올 2월 17일 취임 전에 살던 경남 양산시 매곡동 사저를 26억1700만 원에 팔았다. 중개업자를 통하지 않은 직거래였고, 소유권 이전이 미뤄져 90일 넘게 사저 매입자가 누군지 베일에 가려 있었다. 25일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통해 매입자가 처음 드러났는데,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67)이었다.
▷홍 회장은 지난해 11월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저를 111억 원에 공매로 낙찰 받았다. MB가 1978년부터 40년 넘게 살던 곳이다. 2017년 4월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강남구 삼성동 사저를 67억 원에 사들였다. 박 전 대통령은 1990년부터 23년간 이 사저에 머물렀다. 생존 중인 전직 대통령 3명이 청와대로 가기 전까지 살던 사저 3곳을 홍 회장이 총 205억 원에 모두 수집한 것이다. ‘대통령 사저 컬렉터’라 할 만하다.
▷1980년 구로공단에서 200만 원을 갖고 의류 사업을 시작한 홍 회장은 2001년 마리오아울렛을 열면서 지금은 연매출 3000억 원으로 사업을 키웠다. 전직 대통령과의 구체적인 친분 관계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업계에선 사저를 매입한 이유를 부동산 비즈니스로 추정한다. 박 전 대통령 사저를 매입했을 때 홍 회장이 “값이 싸게 나오고, 위치가 좋아서 샀다”고 해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 씨 소유의 경기 연천 허브빌리지를 118억 원에 매입하면서 부동산 리조트 사업에도 진출했다. 업계에선 “사업성이 낮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것 같다”는 분석도 한다.
▷미납 추징금 납부를 위해 검찰이 매각한 MB 사저를 제외하면 박 전 대통령과 문 전 대통령은 당선 전에 살던 사저가 경호 문제로 퇴임 후에는 머물기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사저를 신축해야 했다. 막대한 토지 매입과 건축 비용을 대기 위해 기존 사저를 매각했다. 퇴임 대통령의 사저 문제는 정치적 논란을 불렀고, 수사로 이어지는 불행한 일도 있었다.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미국은 현직 대통령이 고향에 ‘퇴임 후 집무실’로 쓸 수 있는 기념도서관을 지을 수 있는 법안이 1955년 의회에서 통과됐다. 부족한 건축 비용을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을 통해 충당하고, 건물이 완공되면 연방정부가 기증받아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화장,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당동 가옥 등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다른 대통령들의 사저도 앞으로 문화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어느 시점에든 이를 위한 논의가 시작된다면 미국의 사례를 참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5-30(월) 日 적군파 ‘마녀’의 사죄문

“혁명의 정의나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전술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계속 싸웠다. (살상에 대한) 자각조차 없었다.” 28일 20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일본적군파’ 간부 시게노부 후사코(76)가 당일 공개한 수기 내용이다. ‘적군파 여제’로 불렸던 시게노부의 반성에도 일본 신문은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마녀의 사죄문”이라고 썼다. 현재도 해외로 간 일본적군파 회원 7명은 국제 지명수배 중이다.
▷일본적군파는 1969년 발족해 1970년대에 활동한 일본의 좌파 테러단체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을 계기로 일본 대학가에는 학생운동 열풍이 몰아쳤다. 1968년 도쿄대 야스다강당이 불타는 점거 투쟁 이후 학생들이 외면하자 기존 체제를 파괴하려는 폭력제일주의 파벌이 부상했다. 적군파 9명은 1970년 승객 등 129명을 태우고 도쿄를 출발해 후쿠오카로 가던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해 세계에 알려졌다. 도중에 김포공항을 평양으로 속여 승객들을 구출했지만 이들은 대신 인질로 잡힌 일본 운수성 차관을 태우고 평양으로 망명했다. 현재 4명이 살아남아 평양에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적군파는 새로운 혁명 거점으로 중동을 선택했다. 1971년 적군파 중앙위원 겸 조직부국장이던 시게노부 등 19명이 레바논으로 날아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산하 무장단체와 연대했다. 텔아비브공항 습격 사건부터 헤이그 프랑스대사관 습격 사건, 말레이시아 미대사관 습격 사건 등 1970년대 국제사회를 발칵 뒤집었던 테러를 배후 조종했다.
▷일본 국내에 남은 적군파는 1972년 2월 아사마산장 사건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경찰에 쫓겨 산악지대를 떠돌던 적군파 일부가 산장에 난입해 인질을 잡고 열흘간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검거됐다. 그 뒤 경찰 조사에서 20대인 이들이 산중에 도피하던 중 적응을 못하는 동료들에게 자아비판을 시킨 뒤 린치를 가해 29명 중 14명이 숨진 사건이 드러나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사망자 중에는 8개월 된 임신부도 있었고 동생에게 맞아 숨진 형도 있었다.
▷시게노부는 2000년 검거된 지 몇 달 만에 ‘사과나무 밑에서 너를 낳으려 결심했다’는 옥중수기를 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회원과의 사이에 낳은 딸에게 일본 국적을 얻어주려 쓴 탄원서를 모은 것이었다. 석방 당일에도 딸의 부축을 받으며 출소했다. 시게노부는 출소하면서 기자들에게 “50년 전에 인질극을 벌이는 등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다”며 사죄했다. 젊은 날 이념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한 여성의 씁쓸한 참회록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5-31(화) 日초등생 별명 금지

학창 시절 별명 하나 갖지 않은 이는 찾기 어렵다. 키가 작으면 ‘땅꼬마’, 얼굴이 사각형이면 ‘도시락’, 얼굴이 까무잡잡하면 ‘시커먼스’ 같은 별명이 따라붙었다. 장점을 추켜세우는 것보다는 외모 특징이나 신체적 약점을 잡아서 놀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문제의식이 약했던 과거에는 장난처럼 넘어갔지만 요즘은 학교폭력으로 처벌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대구에서는 동급생을 ‘진지충’, ‘설명충’이라고 불렀던 중학생이 법정에까지 섰다.
▷최근 일본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끼리 별명을 부르는 것을 금지하고, 성 뒤에 존칭인 ‘상(さん)’을 붙여 부르도록 교칙을 바꾸는 사례가 늘고 있다. 뉘앙스가 다르긴 하지만 한국식으로 하자면 초등학생들끼리 서로 ‘○○ 씨’에 가까운 존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학생들이 별명을 부르는 게 ‘이지메’(집단 따돌림)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에 따르면 2020년 전국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42만여 건의 ‘이지메’ 사례 중 60%가 ‘친구들의 놀림’이었다.
▷별명 금지 교칙을 놓고 일본 내에서는 찬반 논란이 한창이다. 상대에게 모욕이나 상처를 줘서는 안 되겠지만, 별명 자체가 사라지면 학교가 너무 삭막해지는 게 아니냐는 항변이 나온다. 금지를 명문화해 놓으면 아이들이 오히려 더 별명을 부르고 싶어지는 역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하는 교사들도 있다. 학교 밖에서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지난해 일본의 한 리서치 회사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는 별명 금지 조치에 반대하는 의견이 27.4%로 찬성(18.5%)보다 많았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일본은 과거부터 집단 따돌림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돼 왔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소수자에 대한 배척 현상이 두드러진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감염자가 나온 학교를 상대로 “불 질러 버리겠다” 같은 공격이 이어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사이버 따돌림 등으로 일본 초중학생의 자살 건수는 역대 최고치까지 늘어났다.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상’ 존칭을 붙이도록 한 데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교육당국의 절박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지난해부터 다시 증가 추세인 학교 사이버폭력 중 언어폭력은 42.7%로 가장 많다. ‘이백충’(부모 월수입이 200만 원)처럼 가정형편을 가지고 놀리는 저급한 별명까지 생겨났다. 거주하는 아파트 종류나 평수를 조롱하는 별명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사용되는 게 현실이다. 일본의 별명 금지 교칙을 수입해야 할 판이다. 꼭 ‘님’이나 ‘씨’ 같은 존칭을 붙일 필요도 없다. 상대의 소중한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불러주는 게 존중과 존경의 시작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