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2-05/ 05.02(월) 횡령 - 05.31(화) 교육감 선거
분수대 2022-05/ 중앙일보
05.02(월) 횡령
2006년 4월 국내 금융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조흥은행 자금결제실에 근무하던 A대리가 412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전년 11월부터 5개월에 걸쳐 은행의 ‘기타 차입금’ 계정에서 30억~60억원씩 16번에 걸쳐 누나(2명) 명의 계좌로 이체했다. 차입금 상환 서류 위조, 허위 출금 전표 작성 같은 방법을 동원했다.
2022년 4월 국내 금융업계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우리은행 기업개선부 소속 B차장이 2012~2018년 세 번에 걸쳐 614억원을 횡령했다고 자수했다. B차장이 빼돌린 돈은 한국 정부가 이란에 돌려줘야 하는 공적인 자금이다. 2010년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을 추진하며 이란 다야니 가문에서 받은 계약금을 우리은행이 관리(공탁)했다. 계약이 파기되며 계약금 반환 소송이 진행됐고 반환 결정이 났다. 이후 송금을 위해 해당 계좌를 살피다 횡령 사실이 드러났다.
국내 금융권에서 17년 만에 닮은꼴인 대형 횡령 사건이 발생했다. 10년 남짓 근무한 일반 직원이 여러 번에 걸쳐 수백억 원을 빼돌렸다. 국내 최고 수준의 보안·감시 시스템을 자랑하던 은행들은 수개월에서 수년이 지나서야 이를 알아챘다.
횡령을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보기엔 애꿎은 피해자가 너무 많다. 올해만 해도 오스템임플란트(2215억원), 계양전기(245억원) 등 4개 업체에서 횡령 혐의가 드러나며 소액주주 5만8000여 명이 투자한 1조3000억여 원 거래가 묶였다. 횡령으로 인한 주식 거래 정지는 2016년 8곳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33곳으로 늘었다.
특히 공공재 성격이 강한 은행은 더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600억원이 넘는 횡령이 일어난 시기 우리은행 대주주는 정부였다. 외환위기(IMF) 당시 공적자금 3조여원을 투입해 국영화해서다. 국민 세금으로 심폐소생을 하고 있을 때 내부에선 대형 횡령이 일어났다.
내부통제도, 외부감사도 허울이었다. 내부감사위원회, 내부통제관리위원회는 10년간 거액의 횡령을 눈치채지 못했다. 회계감사를 맡았던 안진·삼일회계법인의 감사 결과는 ‘적정의견’이었다. 금융감독원도 지난해 말 종합검사를 벌였지만, 횡령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B차장은 횡령금을 “다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횡령금은 고스란히 대손충당금이 되고 손해는 소액주주 등의 몫이다. 이미 너무 자주, 많은 소를 잃었다. 이번엔 외양간을 제대로 고치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5.03 외국인 어린이 제외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외국인 어린이 제외’ 세 단어로 곤욕을 치렀다. 어린이날 동반 보호자 2명 무료입장을 안내하는 표에 ‘외국인 어린이 제외’ 단서를 달아서다. 다문화 가정 어린이 등을 차별할 수 있다는 비난 여론이 일자 어린이날 전면 무료 개방으로 재빠르게 정책을 바꿨다.
경복궁·창덕궁 등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궁능은 원래 만 24세 이하 내국인은 무료입장이다. 외국인 어린이는 만 6세 이하까지만 무료다. 해외 관광명소에서도 내·외국인 입장료에 차등을 두는 예는 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내국인 50루피(약 830원), 외국인 1100루피(약 18160원)로 관람료가 20배 이상 차이 난다. 단, 타지마할도 15세 이하 어린이는 국적 구분 없이 무료다.
태국도 영어로 적은 입장료는 태국어로 쓴 입장료에 비해 몇 배 부풀리는 식의 바가지요금으로 악명 높다. 이러한 실태를 고발하는 ‘이중 가격 태국(Two Price Thailand)’이라는 SNS와 홈페이지도 있다. 여기 모여드는 이들은 해외 관광객이 아니라 태국에 일하고 살며 세금을 내는 거주 외국인이다. 코로나19로 해외 관광객이 급감하자 거주 외국인에 대한 가격 차별은 더욱 도드라지는 논란거리가 됐다.
한술 더 떠 한국의 어린이는 단순히 내·외국인으로 나뉘지 않는다.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려서부터 한국에 살았어도 출생신고조차 못 한 ‘무국적 어린이’가 약 2만 명에 달하리라 추정된다. 태어난 지역이 아니라 혈연관계로 국적을 정하는 ‘속인주의’ 국적법의 영향이다. 우리나라는 출생신고 대상을 대한민국 국적자로 한정하고 있다. 법무부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외국인 아동에게도 출생등록번호를 부여해 학습권을 보장하는 ‘외국인 아동 출생등록제’를 추진 중이지만 아직 시행 시점은 확정되지 않았다.
출생등록제가 시행되더라도 아이들은 여전히 건강보험 대상이 아니며,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아무 연고도 없는 부모의 ‘본국’으로 강제추방될 처지다. 한국에서 자라 한국밖에 모르는 아이들을 내국인으로 품지 않는 나라가 한국인 여성의 낮은 출산율만 탓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난센스다. 부모의 혈통과 상관없이 한국의 어린이라서 기쁜 어린이날이 되길 바란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5.04 연장전
스포츠 세계에서 연장전은 정규 시간이 끝나도 승부가 나지 않을 때 승패를 가리기 위해 치러진다. 무승부는 없다는 냉정한 게임의 룰이다. 월드컵·올림픽 등 단판 승부 토너먼트 대회에서 자주 등장한다. 연장전을 치르는 방식은 종목이나 시기별로 조금씩 다르다.
한국 국민의 뇌리에 깊게 남은 연장전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다. 1대1 동점으로 맞은 연장전에서 안정환이 극적인 헤딩골을 성공시킨 직후, 2대1 한국의 승리로 경기는 끝났다. 연장전에서 골을 넣으면 그 즉시 게임이 종료되는 ‘골든골’ 룰 덕분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1993년 다목적 포석으로 골든골 제도를 도입했다. 경기를 빨리 끝내 선수들의 체력소모를 줄일 수 있고, ‘한 골만 넣으면 된다’는 마음에 각 팀이 공격적인 경기를 할 거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골만 실점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수비적 흐름의 연장전이 속출했다. 2006년 월드컵부터 골든골 제도는 폐지됐다.
야구에는 승부치기라는 연장전 승부 기법이 있다. 최근 사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다. 10회 말까지 승부가 나지 않으면 11회부터 주자 2명을 1루·2루에 보낸 상태에서 공격을 진행하도록 했다. 주자 2명을 2·3번 타자로 지정한 뒤 공격은 4번 타자부터 공격하도록 타자 순번도 조정할 수 있다. 경기를 빨리 끝낼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낯설지만 격투 종목에도 연장전이 있다. 유도는 양쪽 모두 동점일 경우 절반이나 한판을 따내거나 한쪽이 지도패(지도 3회)를 받을 때까지 경기를 진행한다. 시간제한은 없다. 씨름은 승부가 나지 않으면 30초짜리 연장전을 벌인다. 여기서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엔 현장에서 몸무게를 측정해 체중이 가벼운 쪽이 이긴다.
6·1 지방선거를 두고 대선의 연장전이란 분석이 나온다. 새 정부 출범 후 약 20일 만에 치러지는, 역대 최단기간 선거라서다. 더욱이 지난 대선은 0.7%포인트 초박빙으로 끝났다.
지방선거 의제마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등 전국 정치이슈가 압도하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지방선거를 치르는 이념적 근거가 된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신은 어느새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후보들이 지금이라도 주변과 이웃의 문제에 더 집중해줬으면 한다. 지방선거는 대선의 연장전이 아니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5.05 무궁화대훈장
훈장(勳章)의 사전적 정의는 ‘나라와 사회에 크게 공헌한 사람에게 국가 원수가 수여하는 휘장’이다. 상훈법에 따르면 한국의 훈장은 무궁화대훈장·건국훈장·국민훈장·무공훈장·근정훈장·보국훈장·수교훈장·산업훈장·새마을훈장·문화훈장·체육훈장·과학기술훈장 등 12개로 나뉜다.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한 11개는 각각 다시 5개 등급으로 나눠진다.
등급이 따로 없는 무궁화대훈장은 수여 대상이 딱 정해져 있다. 대통령과 배우자, 전·현직 우방국 원수와 배우자만 받을 수 있다.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는데, 이게 한국의 1호 훈장이다. 이후 한국의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관례를 깼다. ‘5년간의 공적과 노고에 대해 치하받는 의미에서 퇴임 때 받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유로 임기 말에 스스로 훈장을 수여하고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같은 방식을 따랐다.
퇴임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3일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무궁화 대훈장 영예수여안을 의결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한국조폐공사에 의뢰해 훈장 두 세트를 1억3600만원을 들여 제작했다. 금, 은, 루비 등으로 치장된 훈장은 한 세트 제작에 6800만원이 든다. 역대 무궁화대훈장의 제작비도 매번 수천만원이 들었다. 꼭 값진 보석으로 치장해야만 훈장의 가치가 높아지는지를 두고,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끊임없이 일어왔다.
무궁화대훈장의 ‘셀프수여’ 관례도 부자연스럽다. 대통령 공적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내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매번 현직 대통령이 무궁화대훈장을 셀프수여할 때마다 야당에서는 “잘한 일이 뭐 있다고 훈장을 받느냐”며 비판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지난 3월 페이스북에 “문 대통령이 훈장을 스스로 요청해 받는 것 같이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며 “상훈법 제10조의 법률을 집행하는 것뿐”이라고 밝혔다.
공과를 떠나 5년의 노고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훈장 수여 자체를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다. 법률이 정한 적법한 절차에 따랐다는 주장도 억지는 아니다. 그러나 정권 말마다 훈장 하나로 셀프수여 논란을 반복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퇴임 후 적절한 논의를 통해 훈장을 수여하는 방식을 고민해볼 때가 됐다. 이번엔 못했지만….
장주영 사회에디터
05.06(금) 서른, 아홉
30대를 주제로 한 드라마의 원조는 ‘내 이름은 김삼순(2005)’이다. 노처녀 역할로 설정된 삼순이가 결혼정보업체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중년 남자 직원은 ‘파니핑크(1995)’란 영화를 인용해 극중 나이 30세인 김삼순에게 면박을 준다. “영화 보면 이런 대사가 있다. ‘여자 나이 서른에 연인을 만나기란 길 가다 원자폭탄을 맞는거보다 어렵다’고. 이거나 보세요. 결혼할 생각 꿈도 꾸지 말고.” 가만 있을 삼순이가 아니다. “이 영화를 지금 리메이크하면, 아마 서른을 마흔으로 고쳤을걸요? 요즘 서른이 옛날 스물이나 마찬가지라는걸 아셔야지 이 양반아.”
삼순이 얘기를 꺼낸 건 최근 마흔을 앞둔 미혼 여성들을 다룬 드라마 ‘서른, 아홉’을 보게되서다. 고교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온 39세 동갑내기 여자 주인공 셋이 나온다. 주인공들의 멜로 전선보다 ‘워맨스(woman romance)’에 집중하는 드라마다. ‘내 이름은 김삼순’때 와 접근 방식이 다른데도 남녀 가릴것 없이 폭풍 공감을 일으켰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결혼했네, 왜 못했네”를 따지지 않았다. 대신 “고교 때부터 저렇게 20년 동안 동고동락한 친구가 나한테도 있었던가” 되물었다.
서른과 아홉이 결합된 것도 흥미롭다. 옛말에 9가 들어간 수를 아홉수라고 해서 결혼이나 이사, 이직 등 큰 일을 꺼리곤 했다. 드라마는 30대와 아홉수에 대한 편견을 우정의 명대사로 뛰어넘는다. 아예 아홉수를 주제로 한 웹툰 ‘아홉수 우리들’은 곧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나이하면 공자(孔子)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남긴 말의 무게에 짓눌릴 때가 있다. “열다섯(志學)에 학문을 뜻을 두었고, 서른 살(而立)에 자립했으며, 마흔 살(不惑)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知天命)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耳順)에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듣고, 일흔 살(從心)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구절이다.
알고 보니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 평균 수명은 40세 이하였다고 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불혹까지 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서른, 아홉수, 불혹… 나이가 주는 부담에서 좀더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5.09(월) 마스크
바람·새·달은 나무의 친구다. 바람은 마음 내킬 때 찾아와 기분에 따라 살랑거리기도, 세차게 몰아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새도 제멋대로 찾아와 둥지를 틀고 머물다 어느새 말도 없이 획 날아가 버린다. 달은 한결같이 정해진 때 찾아와 고독한 밤을 함께 지내고 간다. 달이 의리 있는 친구라면 바람·새는 감탄고토(甘呑苦吐) 친구다. 조선 후기 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집필한 속담집인 『이담속찬』에 등장하는 감탄고토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이다. 이익에 따라 교묘하게 태도를 바꾸는 이기적인 행태를 꼬집는다.
2년여 만에 마스크를 벗었다. 아직 실외만이지만, 실내 의무 착용 해제도 코 앞이다. 전 국민이 탈 마스크를 반기지만, 속이 타들어 가는 이들이 있다. 마스크 생산 업체다. 2년 전 이맘때 마스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부터 내 몸을 보호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 발생(2020년 1월) 후 개당 1000원 수준이었던 보건용 마스크값은 1만원까지 치솟았고 그나마도 없어서 못 샀다. ‘마스크 대란’이었다. 정부는 그해 3월 ‘공적 마스크 제도’를 도입했다. 마스크를 공공재로 선언하고 직접 생산·공급 관리에 나섰다. ‘마스크 5부제’를 도입, 정해진 날짜·장소·수량을 정해서 판매했다. 생산도 독려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기도 평택의 한 마스크 공장을 찾아 “제가 분명히 약속드리겠다”며 “나중을 걱정하지 말고 충분히 생산량을 늘려 달라”고 당부했다. “수요가 줄어도 남는 물량을 정부가 구매해 비축하겠다”고 격려했다.
업체들은 생산 설비를 늘리고 직원을 더 뽑아 밤낮으로 마스크를 만들었다. 공적 마스크 제도 시행 5개월간 7억개가 넘는 마스크를 쏟아냈다. 이후 돌아온 것은 경영 악화다. 남는 물량을 비축용으로 사겠다던 정부는 딴청이고, 약속했던 해외 판로 지원은 흐지부지다. 137곳(2020년 1월)에서 1595곳까지 늘어난 업체 중 실제 운영 중인 곳은 480여 곳에 불과하다. 마스크값은 생산 원가의 절반 수준인 개당 100원까지 떨어졌다.
이익을 노렸든, 억지로 움직였든 이들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마스크 수급 안정화에 기여했다. 그런데 약속 이행은커녕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발생한 부작용을 모르쇠로 발뺌한다면 ‘제2의 마스크 대란’이 벌어졌을 때 누구의 협조를 받을 수 있을까.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5.10 약탈적 저널
‘약탈적(predatory) 저널’이란 돈만 내면 심사 과정 없이 논문을 게재해줘 연구 생태계를 어지럽히는 학술지를 가리킨다. 그런 저널에 논문을 실었다는 것만으로도 연구자는 명성에 타격을 입는다. 일단 출판된 논문은 다시 정상적인 학술지에 투고할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투고자의 돈과 시간·명성을 약탈해간다. 한국연구재단의 ‘약탈적 학술지와 학회 예방 가이드’에 따르면 엉터리 학술지인 줄 모르고 속아서 투고하는 순진한 피해자도 있지만 알면서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승진·채용 등에 필요한 논문 성과를 채우거나, 학계 검증을 통과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이론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약탈적 저널에 투고하는 것이다. 이를 활용하는 고교생도 있다.
강태영 언더스코어 대표와 강동현(미국 시카고대 박사과정)씨는 2001~2021년 해외학술지에 등재된 213개 주요 고등학교(국제학교 제외) 학생 논문 558건을 찾아냈는데, 그중 72건이 의심스럽거나 약탈적인 학술지에 실렸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대학 입시에 논문 활용 금지를 강화해나간 교육부 정책과 관계없이 증가세를 나타냈다. 가령 2020년에 나온 논문 16건 중 6건이 엉터리 저널에 실렸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국제학교 재학 중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이 논문을 출판한 곳도 모두 약탈적 학술지다.
교육부는 전국 대학이 조사한 2007~2018년 미성년 공저자 논문은 총 1033건이고, 그중 미성년자 82명이 부당 저자로 확인됐다고 지난달 밝혔다. 국내 대입에 논문을 활용한 10명 중 5명이 입학 취소됐다. 외국대학에 진학한 부당 저자 36명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교육부 보도자료 캡처
아빠·엄마 찬스로 국내 연구진의 논문에 이름을 올리거나 약탈적 저널에 투고하는 일 모두 이제는 국내 대학보다 해외 대학을 노린 비윤리적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해외 대입용 금수저 스펙 만들기는 마치 딴 세상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씨USA 등 재미 한인 커뮤니티는 한 후보자 딸의 이슈로 들썩이는 듯하다. 한국 고교생들이 가짜 스펙으로 미국 대학을 속이는 바람에 정직하게 입시를 준비한 아이들도 동급으로 묶일까 봐서다. 비윤리적이어야 좋은 대학 가고 사회지도층 된다고 가르치는 나라가 국제 사회의 신뢰인들 얻을 수 있을까.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5.11 반지성주의
만삭의 산모가 산통으로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에는 의사가 없다. 대신 10대 학생들이 “의사들은 반동 학술권위자로 타도 당해 감옥에 갔다”며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 지식이 없는 학생들은 산모가 갑자기 출혈이 심해지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산모는 결국 사망한다. 중국 근현대사를 그린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기막힌 장면이다. 반지성주의로 점철된 문화대혁명의 어두운 모습을 실감 나게 그렸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1963년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출판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반공의 광기로 몰아갔던 매카시즘에 주목한 책이다. 집단의 정체성을 내세워 지성을 배제하고, 반대 세력은 악마화하는 반지성주의가 종국에는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역사적으로 반지성주의는 독재정치 체제에서 이견을 압살하기 위해 동원됐다. 나치 독일이 체제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나약한 엘리트’로 규정해 정치적 탄압을 가한 게 대표적 사례다. 유대인에 대한 탄압 역시 반지성의 소산이다. 폴 포트가 이끌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가 마오주의에 입각한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겠다며 지식인 계급을 학살한 것도 반지성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편 가르기식 감정이 이성을 압도해 반지성주의를 부추기는 경우도 있다. 2005년 황우석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 당시 문제를 제기했던 이들은 황 박사 지지층으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아야 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도 위험이 과장됐다고 주장했던 전문가들 역시 조리돌림의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닫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취임식에서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한 것도 과거 사례를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크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 당시 윤 대통령이 여권과 지지층으로부터 전방위 압박을 받았던 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반지성주의가 활개 칠 수 있는 가능성은 과거보다 더 커졌다. ‘두 개의 대한민국’이라 불릴 정도로 진영 논리에 따라 나라가 두 동강 난 상황이다. 임기를 시작한 윤 대통령이 진영 정치의 늪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 그래야 반지성주의도 극복할 수 있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5.12 엘롯기
꼭 프로야구팬이 아니더라도 ‘엘롯기’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표현이다.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KIA 타이거즈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세팀은 2000년대 프로야구에서 나란히 하위권을 떠돌았다. 실제로 롯데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KIA는 2005년과 2007년, LG는 2006년과 2008년에 각각 꼴찌로 시즌을 마쳤다. 엘롯기 3구단이 프로야구 10개 구단 중 가장 뜨거운 팬덤을 가진 구단이라는 점도 닮았다.
엘롯기 구단의 부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우선 극렬한 팬덤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지적이 있다. 성적을 못 내도 팬들이 떠나지 않고 의리를 지켜주니, 구단과 선수 모두 절박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즌 초반 반짝 성적을 내다가 중반 이후 내려앉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선수단 전체가 하반기에 힘이 빠지는 집단 징크스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스포츠가 과학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 시대에도, 징크스라는 비과학이 여전히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는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엘롯기 출신 전직 선수들이 직접 분석을 내놓았다. 개그맨 김구라가 진행하는 ‘구라철’에 출연한 이대형(LG), 최준석(롯데), 장성호(KIA) 등 전직 선수의 의견은 대체로 하나로 모였다. 선수들의 역량 문제도 분명히 있지만, 구단의 선수단 관리 능력 역시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구단이 의리를 지키고 다른 팀으로 떠나지 않은 선수를 박하게 대했다”라거나 “애들도 아닌데 선수단을 지나치게 감시하려고 들었다”고 비판했다.
이제 막 닻을 올린 윤석열 정부가 엘롯기 사례를 한 번쯤 참고하면 어떨까 싶다. 국민은 정권교체를 택했고, 그 적임자로 윤석열 대통령을 새로운 리더로 내세웠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난 성별이나 세대 간의 극명한 갈등은 큰 숙제를 남겼다. 통합과 화합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순간이다. 윤 대통령이 가야 할 길도 그 길이다. 분열된 팀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처럼, 쪼개진 국민은 국정 실패의 씨앗이 된다.
최근 엘롯기 3구단은 시즌 초반 상위권과 중위권에 포진하면서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예전 같은 구단의 선수단 감시나 노골적 차별도 해소됐다고 한다. 엘롯기도 변하고 있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5.13(금) 청와대 개방
청와대가 74년 만에 전면 개방됐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2명의 대통령이 거쳐 갔다. 백악산 아래 자리 잡아 자연과 어우러진다는 점이 여느 외국의 대통령 집무실과 차별화되는 곳이다. 청와대 경내 어디에나 나무가 심겨 있고, 꽃이 피어 있고, 새가 날아든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청와대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철마다 꽃과 새에 대한 교육을 받고 공부를 했다. VIP(대통령)나 청와대를 방문한 외빈이 ‘이건 무슨 꽃이냐’ ‘이건 무슨 새 소리냐’라고 물어볼 때 바로바로 대답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윗선과 함께 있을 때 이름 모르는 꽃이 보이면 살포시 지르밟고, 낯이 익지 않은 새소리가 들리면 돌을 던져 쫓아 보냈다는 에피소드가 우스갯소리처럼 전해진다.
꽃뿐만 아니라 나무의 수령도 알아야 했다. 청와대 경내에는 180여 종의 나무 5만여 그루가 심겨 있다. 수궁터에 있는 740여년 된 주목(朱木) 나무가 최고참 나무다. 나이가 들수록 껍질도 붉고 심재도 붉어져서 ‘붉을 주’자를 쓴다. 청와대 직원들은 주목 나무에 대해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고 한다. 생명력이 끈질기고 쓰임새가 다양하다는 뜻이다. 어떤 나무는 하루에 수령이 수백살씩 깎이기도 했다. 상관이 VIP에게 수령을 제대로 보고 못한 것이다
청와대 온실에서 철마다 바꿔 심을 꽃과 분재를 가꿨다. 온실은 처음엔 녹지원과 가까이 있었다. 녹지원은 청와대에서 가장 넓은 정원이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온실터에 비서동이 들어서면서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녹지원의 잔디밭 둘레를 따라 조깅을 즐겼다. 가을이면 춘추관과 가까운 녹지원 초입에 코스모스가 핀다. 코스모스를 좋아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심어놓은 것이다.
청와대가 산자락에 자리 잡아 대통령만 남몰래 즐기던 취미생활도 있었다. 청와대 관저에서 백악산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평평한 바위가 나타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티샷을 하던 바위다. 티샷이 떨어질 만한 거리에 군부대가 있어 골프공을 회수했다. 속칭 ‘G(golf)장’으로 불렸던 청와대 경내 골프장이다.
청와대에 간다면 꽃과 나무·새소리에 주목하자. 매발톱과 꿩의비름이 어여쁜 얼굴을 드러내고 직박구리와 개똥지빠귀·멧새가 멋진 울음소리를 들려줄거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5.16(월) 방탄출마
의회 제도가 일찍 발달한 영국에서 왕과 귀족 사이에 가장 큰 마찰은 세금이었다. 1215년 6월 귀족에게 밀린 존 왕은 ‘영국 헌법의 성경’으로 불리는 ‘마그나카르타’(대헌장)에 도장을 찍었다. 귀족 전체 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특별보조세 같은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국법에 따른 과세의 초석이다.
이후 왕들은 이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마찰은 여전했다. 절대 왕권의 상징인 엘리자베스1세가 1603년 미혼으로 숨을 거둔 후 먼 친척인 제임스 왕이 등극했다. 귀족들은 정통성을 빌미로 그를 무시했다. 제임스 왕은 다양한 이유로 귀족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는 방법으로 맞섰고, 귀족들은 이에 강력히 저항해 ‘의회특권법’을 제정했다. 왕이 자의적으로 귀족(의원)을 체포·구금할 수 없다는 법이다. 불체포특권의 시초다.
한국에선 1948년 제헌국회부터 불체포특권이 이어졌다. 헌법 44조에 ‘국회의원은 현행범인인 경우를 제외하고 회기(개회일~폐회일) 중에 국회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다’고 명시됐다. 이 법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는 야당 의원의 국회 활동을 보장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런데 이 법을 ‘범죄특권’으로 악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단 당선돼 당장 처벌을 피하고 시간이 지나 수사가 유야무야하길 기다리는 식이다.
이재명 민주당 상임고문이 ‘방탄출마’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대선 패배 이후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역대 후보와 달리 대선 58일 만에 연고가 없는 지역의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경찰이 ‘성남 FC 후원금’ 관련해 성남시청을 압수수색한 지 4일 만이기도 하다. 이 고문 관련 의혹은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법인카드 유용’ 등도 있다.
여당은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하라”고 압박하고 야당은 “이재명 죽이기”라고 맞서고 있다. 불체포특권을 포기해야 할 대상이 비단 이 고문만은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온갖 의혹이 난무하지만, 불체포특권 뒤로 피해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불거진 의혹에 대해 일반 국민처럼 수사를 받으라는 주장에 그들이 펄쩍 뛰는 모양새는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수사가 진행되면 안 될 이유가 있는 걸까.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5.17 떼창
이달 초 열린 가수 싸이의 성균관대 축제 공연 영상이 화제다. 오랜 거리두기의 한을 토해내듯, 관객들이 지축을 울리며 ‘떼창’을 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2020년 3월 이후 2년여 만에 코로나19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되고 떼창 금지 조치가 사라지면서 가능해진 풍경이다.
떼창은 관객들이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는 행위를 가리킨다. 한 성부를 다 같이 부르는 ‘제창(齊唱)’과 사전적 의미는 같다. 그러나 제창은 이제 애국가 제창,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등 공식 행사에서 쓰이는 용어가 된 듯하다. 빅카인즈 기사 아카이브에서 검색되는 가장 오래된 떼창의 정의는 1992년 5월 12일자 문화일보의 가수 이정선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다. “가수들을 여럿 불러놓고 화려한 패션쇼를 방불케 한다든지 떼창(가수들이 합창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을 시키는 곳에는 단호하게 출연 거부합니다.”
지금처럼 청중이 떼 지어 함께 부른다는 뜻으로 언론에 등장한 건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등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쯤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은 여러 해외 뮤지션의 개런티를 감당해 록 페스티벌을 열 만큼 티켓 파워가 센 나라가 아니었다. 골수 음악팬들은 항공·숙박료까지 들여 일본 등 해외 페스티벌을 찾아가야 했다. 그러다 기라성같은 해외 뮤지션의 공연을 무대만 조금씩 옮겨가며 모두 볼 수 있는 록 페스티벌이 내 나라에서 열리니 감격스러울 수밖에…. 한국 관객은 유난스러운 떼창으로 화답했다.
코로나 시대, 클래식·뮤지컬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대중음악 공연은 금지됐다. 떼창 때문에 침방울이 튀어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공연 업계의 원성이 커지자 방역 당국은 지난해 6월 4000명 이내, 떼창 금지 등의 조건을 달고 허가해줬다. 그러나 한 달여 만에 코로나 재확산을 이유로 비수도권의 등록 공연장 이외의 장소에서 개최되는 실내외 공연을 도로 금지했다. 주로 경기장 등에서 이뤄지는 대중음악 콘서트를 금지한 것과 다름없었다. 가수 나훈아의 부산 콘서트가 자동으로 취소된 그 날, 전국 일일 신규 확진자 수는 1838명이었다. 나훈아 전국 투어가 재개됐다. 떼창이 돌아왔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인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5.18 하르키우
우크라이나 북동부에 있는 제2의 도시 하르키우는 한국인에게 낯선 도시다. 유서 깊은 수도 키이우와 직항로가 연결돼 있지 않았던 만큼, 넘버 투 도시가 생소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와 아무 관계 없는 지구 반대편 나라”라고 했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는 한국과 인연이 전혀 없는 곳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유일의 고려인 학교가 이곳에 있다.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총 3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이들과 그들의 후손이다. 하르키우가 6·25 전쟁 초기 국군을 패닉으로 몰아넣었던 ‘T-34’ 전차의 주요 생산기지였다는 점에서 악연도 있던 곳이다.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삶만큼이나 하르키우란 도시도 근·현대사에서 부침이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과 나치독일은 이 도시에서만 네 차례나 대규모 공방전을 벌였다. 규모가 컸던 건 1942년과 1943년 전투다. 1942년 소련은 쾌속 진격하던 독일군을 막아내기 위해 하르키우에서 선공했지만, 결국 독일군의 역습에 무너졌다. 하르키우를 빼앗긴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까지 밀렸다.
1943년에는 소련이 공격에 나섰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 40만 명을 포로로 잡은 소련이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소련이 하르키우까지 진격해 오길 기다렸다가 역습에 나섰다. 소련의 진격은 늦춰졌다. 여러 차례 공방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하르키우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하르키우는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다. 2014년 유로마이단(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요구한 시위) 당시 혼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하르키우는 친러파와 친서방파의 대결 정국에서 친러 정치인 야누코비치의 지지 기반이기도 했다. 러시아 국경까지 불과 50㎞밖에 떨어져있지 않아 러시아계 시민도 다수 거주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하르키우는 또 한 번 화마에 휩싸였다. 전쟁 초기부터 하르키우 대학교와 시청사 등이 러시아군의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 석 달째 치열한 전투 끝에 우크라이나 당국이 하르키우에서 러시아군을 완전히 몰아냈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국경까지 도달한 군인들이 “우리가 해냈다”는 메시지도 보냈다. 하르키우가 평화를 찾길 기원한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5.19 소통령
대통령이 아님에도 그에 버금가는 권력을 갖고 있거나 행사하는 인물을 비유적으로 소통령이라고 일컫는다. ‘대한민국 소통령’으로 불리는 서울시장은 1000만 시민의 행정을 총괄하며 국방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 정책을 직접 챙긴다. ‘교육 소통령’으로 불리는 교육감은 교육청 소속 기관장과 교원 인사권뿐 아니라 수조원의 예산 편성·집행까지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정권의 실세를 비판하기 위해서도 소통령이란 말을 쓴다. 실제로 17일 취임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일컬어 야권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소통령’이라고 평가한다. 야당의 극렬한 반대에도 임명될 만큼,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표적 복심으로 꼽힌다. 그는 특수통 검사로 문재인 정부에서 적폐수사를 통해 승승장구하다가 조국 전 장관 수사 이후 연달아 좌천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법무부 수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한 장관의 취임사에는 흔들림 없는 법치주의 원칙이 담겼다. 그는 “검찰의 일은 국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검찰을 두려워할 사람은 오직 범죄자뿐”이라고 강조했다. 특유의 직설적 화법이 취임사에 고스란히 담겨 약간은 낯설지만, 이 법치주의 원칙에 동의하지 않을 국민은 없다. 그는 추미애 전 장관이 없앤 증권범죄합동수사단도 다시 출범시키겠다고 선언했다. 합수단 폐지로 대형 증권범죄가 확산했다는 법조계의 지적에 따른 것이다.
특수통 검사로서 탁월한 수사능력을 보였던 한 장관이지만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검찰 내부에선 ‘윤석열 사단’ 특수통 검사들이 대거 중용되는 편향 인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걱정이 있다. 법무부가 민정수석실이 맡았던 공직자 인사 검증까지 넘겨받으면서 한 장관이 더욱 막강한 권한을 손에 쥐게 됐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의 임명을 두고 야당에선 ‘인사 막장 드라마’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강단이나 뚝심, 추진력이나 결단력 같은 덕목은 ‘검사 한동훈’을 빛나게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은 그런 꼿꼿함만 필요한 자리가 아니다. 설득하고 토론하고, 때론 양보하거나 굽힐 줄 아는 유연함도 필요하다. 소통령이 아니라 내각의 일원으로 소통(疏通)하는 장관이 되길 기대한다. ‘장관 한동훈’의 성공도 거기에 달렸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5.20(금) 케미스트리
‘케미’. 영어 단어 케미스트리(chemistry)를 줄인 말이다. 화학이라는 뜻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학 작용, 즉 ‘끌리는 정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영어로 “We have very good chemistry”라고 하면 “서로 잘 통한다” 또는 “죽이 잘 맞는다”는 의미다.
한·미 정상만큼 ‘케미’를 따지는 조합도 없다. 한국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해외 순방길은 줄곧 미국 방문이었다. 북핵 문제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미국은 핵심 안보·경제 동맹국이다. 양국 정상 간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톱다운’ 방식의 정상외교에선 여러 현안이 담판 지어지기도 한다. 첫 만남이라면 더욱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8년 4월 첫 방미에 나섰을 때다. 이 전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미 대통령 전용별장인 메릴랜드주 캠프 데이비드에 초청받았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이 골프 카트 운전대를 잡고 조수석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앉은 장면이 화제가 됐다. 그러나 정작 양 정상의 케미가 통한 순간은 따로 있었다. 만찬장에 앉아 양 정상 내외가 손을 잡고 기도를 드리던 순간이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부시는 기도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고 떠올렸다. 부시 대통령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 전 대통령은 방미길에 영문 기도문을 따로 준비해갔다.
윤석열(62) 대통령과 조 바이든(80) 미 대통령이 21일 정상회담을 갖는다. 윤 대통령의 정상외교 데뷔전이다. 양 정상 모두 학창 시절 법학을 전공했다는 점을 제외하곤 공통점이 거의 없다. 윤 대통령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의 길을 걷다가 정치 참여를 선언한 지 9개월 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만 29세의 나이로 최연소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돼 6선 의원과 부통령을 지냈다.
윤 대통령이 제42회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의 모티브를 따왔다는 연설에 주목한다. 1963년 6월 독일 베를린을 방문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의 연설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같은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 대통령의 당선을 지켜보면서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양 정상 간 케미를 터뜨리려는 복선이었을까.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5.23(월) 민간외교
기승전 ‘경제’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시작부터 끝까지 반도체·전기차·배터리 같은 경제 이슈로 꽉 찼다. 바이든 대통령은 2박 3일간 방한 일정의 포문을 경기도 평택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방문으로 열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땡큐, 삼성”을 연발했다.
둘째 날 윤석열 대통령과 회담 후 삼성·SK·현대차 등 5대 그룹 총수 등이 참여한 만찬에서 ‘기술 동맹’ ‘경제 안보’를 강조했다. 셋째 날은 정의선 현대차 회장과 독대 후 현대차의 105억 달러(약 13조원) 미국 투자 발표 계획을 선물로 안고 방한 일정을 마쳤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이례적이다. 그간 양국 대통령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은 미국에서 열렸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첫 방문국도 일본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윤 대통령 취임 10일 만에 먼저 한국을 찾았고, 아시아 첫 방문국으로 한국을 택했다. 외국의 수장이 방한 일정 내내 기업 현장이나 기업인과 접촉한 것도 전례 없던 일이다.
그의 이런 이례적인 행보 뒤에는 ‘민간외교’가 숨어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 ‘반도체 공급망 대책’ 회의를 열 때마다 삼성전자를 초청, 조언을 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대란’ 속에서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인 삼성전자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의미다. 더구나 삼성전자(약 21조원)와 현대차를 비롯해 SK·LG 등 국내 4대 그룹이 50조여원을 투자해 미국에 반도체·배터리·전기차 공장 등을 지을 계획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에서 얻은 경제적 성과는 오는 11월 치를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할 테다.
그간 올림픽·엑스포·월드컵부터 코로나19 백신 확보까지 국가적으로 큰일이 있을 때마다 민간외교는 힘을 발휘했다. 한국 기업들이 세계 각국에서 사업을 진행하며 쌓은 인맥은 곧 한국의 자산이다. 각국 정부 간에 풀 수 없는 외교 문제가 한국 기업의 투자 유치 약속으로 풀리는 경우도 적잖다.
새 정부는 6대 국정 목표 중 하나로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 경제’를 내세웠다. 코로나19로 깊게 생채기 난 민생은 어느 때보다 역동적 경제에 대한 갈망이 크다. 민간은 끌 준비가 됐다. 이제 정부 차례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5.24 무투표 선거구
6·1 지방선거에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교육감 등 4125명을 선출한다. 이미 당선이 확정된 무투표 선거구가 20일 기준 321개 선거구 509명이다. 후보자 수가 해당 선거구의 의원정수를 넘지 않으면 투표 없이 선거일에 당선인을 확정한다. 무투표 선거구는 투표용지를 교부하지 않으며 선거공보도 발송하지 않는다. 유권자가 검증할 기회는 없다. 순전히 공천 여부를 판단하는 정당의 검증에 달려있다.
무투표 선거구 후보 509명 중 소속 정당을 두지 않는 교육의원 1명을 제외하곤 모두 양대 정당 소속이다. 더불어민주당 282명, 국민의힘 226명이 무혈입성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개한 후보자 정보에 따르면 무투표 선거구 후보 중 전과자는 30.1%, 전과 수를 모두 합하면 1인당 평균 전과 0.45범에 달한다. 박창석 경북 군위군의회 국민의힘 후보는 전과 7범이다. 최근 5년간 세금 체납액 5219만원을 신고했다. 건축법·옥외광고물관리법 위반, 횡령·음주운전·무면허운전·뺑소니 등 다채롭다. 박성만 경북 영주시의원 국민의힘 후보는 전과 5범, 경남 창원시 성산구의회 백승규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전과 4범이다. 최근 5년 내 세금 체납 기록이 있는 후보는 69명(13.6%)이었다. 설경민 전북 군산시의회 후보가 6225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후보자의 도덕적 자질이 유권자의 투표 선택에 미치는 영향’(윤지성·송병권, 2019)에 따르면 2018 지방선거에서 전과나 체납 여부는 거의 당락을 가르지 못했다. 양대 정당도 그걸 잘 아는 듯하다. 국민의식도 희미해지고 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법·규칙 준수의 중요성’ 인식은 조사가 시작된 2013년 6.2점에서 2020년 6.0점을 거쳐 2021년 5.7점으로 떨어졌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촘촘한 법과 규제에 지친 탓일까. 법·규칙 준수가 ‘매우 중요(7점 만점에 7점)’하다고 답한 비율은 2013년 50.5%에서 2020년 39.9%를 거쳐 지난해엔 26.9%로 급강하해 반 토막 났다.
지방선거 당선자는 생활밀착형 조례와 규제를 만들고 세금으로 살림한다. 우리에겐 아직 투표로 뽑을 3616명이 남아있다. 유권자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선거가 되길 바란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5.25 노무현 정신
지난 23일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13주기 추도식 참석자들은 ‘노무현 정신’을 기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은 “사람 사는 세상의 꿈,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의 꿈을 잊지 않고 이어가겠다”고 했다. 민주당에서는 “노무현 정신이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는데도 윤석열 정부는 검찰 공화국을 향해 속도를 내고 있다”(조오섭 대변인)며 여권을 향한 경고도 나왔다.
반면 여권에서는 ‘노무현의 꿈’으로 민주당을 공격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총리였던 한덕수 국무총리는 “민주주의가 잘 되려면 통합과 상생이 돼야 한다”며 이를 “노 전 대통령의 철학”이라 못박았다. 국민의힘에선 “노무현의 꿈을 망치는 자들이 노무현의 꿈을 잇겠다고 하니 통탄스러울 뿐”(김용태 청년 최고위원)이라고 했다.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추도식 메시지를 통해 민주당은 진영 결집을, 국민의힘은 중도 확장을 노린 것이라는 시각이 정치권에서는 지배적이다. 처한 입장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다르게 소비한다는 얘기다. 특히 노무현 정부 출신 인사 일부가 여권에 합류하며 ‘노무현 정신’의 해석을 둘러싼 충돌 가능성은 과거보다 커졌다.
여권 내에서 노무현 정신에 대한 초점이 이동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대선을 앞둔 지난해 5월에는 민주당 주자들 사이에서 강조점이 달랐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지역 균형발전’에, 정세균 전 총리는 ‘정치검찰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노무현 정신은 부동산 문제도 정공법”이라며 다주택자들에 대한 증세를 주장했다.
민주당이 21대 총선에서 압승한 직후인 2020년 11주기 추도식 때는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표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노무현 없는 노무현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추도사를 했다. 이 전 대표는 “대통령님이 주창하셨던 깨어있는 시민, 권위주의 청산, 국가균형발전, 거대 수구언론 타파가 실현되고 있다”며 지지층을 북돋기도 했다.
노무현재단 측은 2019년 10주기를 기점으로 “이제는 ‘탈상(脫喪)’할 때가 됐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눈물을 거둬들이고 노 전 대통령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가 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노무현 정신’에 대한 정치권의 해석 논쟁을 지켜보면 객관적 평가는 요원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5.26 손흥민 존
지난 23일 한국 축구사가 새로 쓰였다. 손흥민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골든부트(득점왕)의 주인이 됐다. 토트넘과 노리치시티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 출전한 손흥민은 22·23호 골을 연달아 넣으며 모하메드 살라(리버풀)와 함께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 선수 최초의 EPL 득점왕이다. 유럽 5대 축구리그에서 득점왕에 오른 아시아 선수 역시 손흥민뿐이다.
득점왕을 결정지은 마지막 슛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후반 30분, 페널티 라인 왼쪽 외곽에 있던 손흥민에게 공이 넘어왔다. 달걀 다루듯 섬세하게 공을 받아낸 손흥민은 상대 수비 1명을 따돌린 후 과감히 슛했다. 그의 발을 떠난 공은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골대 우측 상단으로 빨려 들어간 후 골망을 흔들었다. 원정팀 득점에 야유와 욕설이 난무하는 EPL 경기장이지만, 너무도 완벽한 득점에 홈팀 노리치의 응원석은 한숨 소리만 나왔다.
어디서 자주 본듯한 이 장면. 이른바 ‘손흥민 존(zone)’에서 터져 나온 득점이었다. 손흥민은 유독 페널티 라인 좌·우측 외곽에서 뛰어난 결정력을 보여준다. 왼발과 오른발도 가리지 않는다. 득점왕을 차지한 올 시즌 첫 득점과 마지막 득점 역시 모두 이 손흥민 존에서 나왔다. 영국 신문 이브닝 스탠더드는 23호 골에 대해 “잘 감긴 슈팅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손흥민 존에서 과감히 슛을 시도하는 선수는 많지 않다. 상대도 ‘설마 여기서?’라는 생각에 대부분 뒷걸음질 치며 수비한다. 거리가 멀고 성공률이 낮아서다. 그렇다면 손흥민의 비법은 뭘까. 허무하게도 ‘피나는 노력’이었다. 본인이 딱 그렇게 표현했다. 그는 지난해 1월 JTBC와의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그 위치에서 슈팅을 잘하지는 않았다”며 “거기서 훈련을 정말 많이 했다. 다른 거 없이 피나는 노력인 것 같다”고 말했다.
손흥민의 활약에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코로나와 취업난에 힘들어하는 젊은 세대가 특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 더, 깊은 울림의 메시지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타고난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노력 없인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기 어렵다는 단순한 진리를, 손흥민은 증명하고 있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5.27(금) 경찰청장
경찰 인사에 이변이 일어났다. 치안정감 중에서 차기 경찰청장(치안총감)을 내정한 뒤 후속 인사를 해온 전례가 깨졌다. 경찰청장은 경찰공무원법에 따라 바로 아래 계급인 치안정감에서 임명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24일 치안감 5명을 치안정감으로 승진시키는 인사를 발표했다. 정부 출범 14일 만이다. 5명 중에서 경찰청장을 임명할 게 아니라면 승진 인사부터 할 이유가 없다는 게 내부 관측이다.
검찰에서는 이미 5년 전에 일어났던 이변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중앙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에 지명되기까지 예고된 파격의 연속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정부 출범 9일 만에 당시 윤석열 대전고검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에 승진 임명하는 검찰 인사를 발표했다. 고검장급인 서울중앙지검장을 검사장급으로 격하시키면서까지다. 누가 봐도 윤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하고 싶어하는 속내가 읽혔다.
윤 지검장은 원래 문재인 정부의 초대 검찰총장으로도 검토됐다고 한다. 그러나 기수와 직급을 뛰어넘어 평검사를 바로 검찰총장으로 앉히는 건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2년 뒤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검찰총장으로 윤 지검장이 지명된다. 역시 고검장을 거치지 않고 검사장급에서 바로 검찰총장이 된 첫 사례다. 1988년 검찰청법을 개정해 총장 임기제가 도입된 이후로는 모두 고검장을 거쳐 검찰총장이 됐다. 윤 대통령이 누구보다 이번 경찰 인사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유다.
그래서 중요한 건 5명 중에 누구를 경찰청장으로 임명할지다. 이제부터는 역대 정부의 뻔한 레퍼토리가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바로 누구의 학연·지연·일연이 더 세느냐는 거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인사에 따르면 인사추천위원회를 열어 최종 후보군에 오르는 인물들은 객관적인 실력이 엇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눈에 들어오는 게 인사권자와의 학연·지연·일연이다. ‘우리 편’이라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어서다. 어느 정부에서나 코드 인사 논란이 반복됐던 이유다.
5명 중에 차기 경찰청장이 나와도, 나오지 않아도 불편하다. 실제로 임명한다면 길들이기식 인사 같고, 아니라면 압박하는 인사 같아서다. 경찰에서도 윤 대통령의 선례를 따른 파격이 연출될지 주목된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5.30(월) 부자세
태생부터 논란이 컸다. 소유한 주택에 대한 보유세인 재산세를 이미 지방자치단체에 내고 있었다. 지방세다. 그런데 또 다른 이름의 보유세를 중앙정부(국세청)에 또 내라고 했다. 국세다. 받는 주머니는 달라도 내는 입장에선 같은 명목의 세금을 두 번 내라는 거다. 세금 위에 같은 세금을 또 얹는다는 ‘옥상옥’ 지적이 일었다. 2005년 6월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종합부동산세 얘기다. 당시 정부는 “보유 부동산에 대한 조세 부과 형평성을 제고하고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켜 지방 재정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는 목적을 내걸었다.
당연히 반발이 컸지만, 사실 ‘가진 것 많은 부자는 세금을 좀 많이 내도 된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종부세 대상이 고가주택이라서다. 도입 당시 과세 대상은 공시가격 9억원 초과 주택이었다. 서울 평균 아파트값이 3.3㎡당 1725만원(현재 4653만원)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공시가격 시세반영률을 적용해 보면 15억원 이상 아파트가 대상이었다. 서울 전용 84㎡(옛 34평) 아파트 세 채 값이었다. 종부세가 ‘부자세’로 불리는 이유다.
종부세 도입 배경엔 정부와 지자체 간 신경전도 작용했다. 당시 정부는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폭풍 규제’를 쏟아내며 재산세를 조였다. 그런데 당시 집값 폭등의 근원지로 꼽히던 강남구가 지자체 권한인 재산세율을 50% 감면한다고 나섰다. 정부 기조에 정면 반발하고 나선 셈이다. 재정 형평성 문제도 끼어 있다. 비싼 주택이 많은 지자체는 세수가 넘치지만, 반대인 곳도 적지 않았다.
새 정부 들어 첫 지방선거이자 종부세 과세 기준일(다음 달 1일)을 앞두고 종부세가 ‘뜨거운 감자’다. 여야 모두 종부세 폐지, 기준 완화 등 표심을 좇는 완화책을 내놓고 있다. 종부세를 완화하든, 유지하든 장단점은 분명하다. 다만 여야 모두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누가’ 종부세를 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종부세 도입 17년이 지난 새 집값은 2~3배 뛰었다. 그런데 과세 기준은 되레 강화됐다. 2017년 1조7000억원이던 종부세가 지난해 6조1000억원으로, 3배 늘어난 이유다. 종부세 도입 당시 부자들이 소유했던 15억원짜리 아파트는 이제 서울 평균 아파트값 수준이다. 부자들이나 내던 종부세를 내는 서민이 늘고 있고 그만큼 반발도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부자세는 가진 것 많은 부자에게만 받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5.31(화) 교육감 선거
지방선거는 참으로 어렵다. 1인당 최고 8장까지 투표용지를 채워야 한다. 그중 최고난도는 교육감 선거다. 학령기 자녀를 둔 부모, 교육계 종사자가 아니고선 시시각각 변화하는 교육 이슈를 따라잡기 어렵다. 교육감 선거에 대한 관심은 다른 선거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투표용지도 다르다. 정당명이나 기호가 없고 후보자의 성명만 왼쪽부터 오른쪽 순으로 나열된다.
교육감 용지 표기 방식은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약칭 '교육자치법')에 근거한다. 이에 따르면 정당은 교육감 선거에 후보자를 추천할 수 없다. 정당의 선거 관여는 금지돼 있다. 후보 역시 특정 정당을 지지·반대하거나 특정 정당으로부터 지지·추천받고 있음을 표방해서는 안 된다. 모두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교육의 자주성·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헌법(제31조 4항)으로 보장한다. 교육행정은 일반행정으로부터 독립해 중립성을 보장받아야 하며, 교육 내용 역시 특정 종파나 당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교육감 선거에서 정치적 중립성은 ‘눈 가리고 아웅’ 같다. 진보성향인지 보수성향인지 후보 스스로 밝히기 때문이다. 특정 정당 성향임을 상징색 등으로 암시하는 경우도 많다. 전교조를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 여부로도 정치색을 나타낸다. 전국 10개 지역 교육감 후보 중 10명은 지난 17일 ‘중도·보수 교육감 후보연대 출범식’을 열고 ‘반 지성교육 OUT(아웃), 반 자유교육 OUT, 전교조 OUT’ 슬로건을 내걸었다. 전교조는 '전교조 아웃'이란 구호가 조합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선동하는 것이라면서 후보 10명을 명예훼손(또는 모욕) 및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부산 교육감은 양자 대결임에도 두 후보 간 진행 중인 고소·고발은 20건이 넘는다. 이처럼 전국 18개 교육감 선거에서 고소·고발이나 흑색선전이 없는 곳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정당이 선거에 개입할 수 없어 후보가 걸러지지 않고 난립해 혼란을 초래하기는 측면도 있다. 서울 교육감 선거에선 단일화에 실패한 보수 성향 후보들이 상호 비방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2007년 교육감 직선제 도입 이후 징역형을 받은 교육감이 6명이나 된다. 교육감 선거에서 보고 배울 게 없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