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34/ 영국1 - 영국 여왕 이야기
지구촌 여행/ 국가별34/ 영국1 - 영국 여왕 이야기
■ 영국 United Kingdom ,
英國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영국연합왕국, United Kingdom
▲국기
유럽 북서쪽에 놓인 섬나라로 가장 큰 섬은 그레이트브리튼이고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섬의 북부에 위치한다. 그 외 수많은 작은 섬들과 3,080㎢에 달하는 내륙 수자원을 포함한다. 최대 인종 집단은 잉글랜드인이고 공용어는 영어이며 종교는 영국국교회와 그리스도교가 우세하다. 화폐단위는 파운드(pound/£)이다. 양원제를 채택한 입헌군주제이며 국가원수는 국왕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 엘리자베스 1세 대영제국의 심장 Elizabeth I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국왕, 유럽 변방의 조그마한 섬나라 잉글랜드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초를 다진 통치자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는 비정상적인 수준의 천재였다. 특히 어학과 문학 부문에서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모두 일곱 개의 언어를 구사했는데, 모두 열 살 전후에 마스터한 것들이다. 엘리자베스는 만약에 통치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시인이나 저술가로도 이름을 날렸을만한 사람이었다.
나는 애통해하지만 감히 불평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I grieve and dare not show my discontent,)
나는 사랑하지만 아직도 미워하는 척하려고 합니다.
(I love, and yet am forced to seem to hate,)
나는 아직도 내 마음을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I do, yet dare not say I ever meant,)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속으로는 끝없이 재잘거립니다.
(I seem stark mute but inwardly do prate.)
나는 나면서도 아니고, 얼어붙었으면서도 아직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I am and not, I freeze and yet am burned,)
내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자신에게로 돌아서기 때문입니다.
(Since from myself another self I turned.)
이 시는 엘리자베스가 남긴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임은 떠나는데(On Monsieur's Departure)〉라는 시의 첫 번째 연이다. 그녀의 문학계 데뷔작은 프랑스 르네상스의 어머니인 나바르의 마르그리트가 지은 시집 《사랑 낚시꾼의 거울(Miroir de l'Ame Pércheresse)》을 영문으로 번역한 것이었는데, 이 책을 '엘리자베스 튜더'라는 이름으로 출판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이러한 문학적인 소양은 후일 그녀의 통치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연설문을 직접 작성하거나 사전에 미리 작성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연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단히 감동적인 연설로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결전을 앞두고 해군 장병들에게 한 연설이다. 이것은 먼 후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열여덟 살의 '웨일스의 공주(Princess of Wales)' 신분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가 인용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진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내가 연약하고 가냘픈 여인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왕의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잉글랜드 국왕의 심장 말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유년기
여자들 중에는 어릴 적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가 성장하면서 그 모습을 완전히 잃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이 바로 이 케이스에 속했다. 여왕 시절에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눈에 띄는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열두 살 때 그려진 초상화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에서는 양쪽 볼에 젖살이 통통하게 붙어 후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총명함과 함께 대단히 귀여운 용모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세 살이 되기 전에 어머니인 앤 불린이 처형되었으며, 그 이후 그녀의 삶은 순탄할 리 없었다. 그녀는 열 살 무렵부터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가 자신의 친딸처럼 돌보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가정의 행복을 맛보게 되었다. 열세 살 때 아버지 헨리가 죽자 캐서린 파는 엘리자베스를 계속 돌보기로 했다. 캐서린 파는 곧바로 토머스 시모어와 재혼해 엘리자베스, 제인 그레이와 함께 첼시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무척 행복했지만, 첼시에서 곧 평생 잊지 못할 쓰디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캐서린 파의 새 남편 토머스 시모어는 해군에서 출세를 한 사람으로 헨리 8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의 남동생이자 소년 왕 에드워드의 후견인인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토머스는 마흔 나이의 독신이었는데, 여자들을 농락하는 데에는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고 성적인 취향도 아주 특이했던 사람이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더욱이 그는 아주 위험하고 음흉한 야심가이기도 했다. 결혼한 캐서린 파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이었지만, 음흉한 야심가였던 토머스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귀엽고 똑똑한 열세 살의 소녀 엘리자베스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시기의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성장 과정상 당연하지만 정서적으로는 그리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토머스는 이러한 틈새를 파고들어 엘리자베스를 성적으로 농락하는데 성공했다.
토머스와 엘리자베스의 육체적인 관계가 어느 선까지 진척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토머스는 한밤중이나 새벽에 잠옷 차림으로 엘리자베스의 침실에 들락거렸으며, 후일 사람들은 그가 유희삼아 엘리자베스를 무릎에 엎어 놓고 엉덩이를 때렸다고 증언했다. 엘리자베스를 껴안은 채 성 행위와 유사한 동작을 하도록 명령하는 장면도 증언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캐서린 파는 엘리자베스를 믿을만한 추밀원 의원의 집으로 보냈다.
캐서린 파는 엘리자베스의 명예에 손상이 끼칠까 우려해서 성적인 관계가 없었다는 토머스의 변명을 인정하고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넘어갔다. 다음해에 캐서린 파가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딸 메리를 낳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토머스는 다시 한 번 엘리자베스에 대한 욕정과 허무맹랑한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고 나서 에드워드를 제거하고 그녀를 국왕으로 만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정보는 에드워드의 추밀원에 포착되었으며, 공범자가 먼저 체포되자 그의 무모한 계획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토머스 시모어는 반역죄에 관련되어 서른세 개의 항목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참수되었다. 당시 엘리자베스도 조사를 받았지만 토머스와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계획에 관련될만한 소지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토머스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는 굳게 입을 다물었으며, 토머스가 처형되는 날에도 별다른 감흥 없이 자신의 일기장에다 냉정하게 단 한 줄만 기록해 놓았을 뿐이었다.
오늘 상당히 재치는 많았지만 판단력은 많지 않았던 사람이 죽었다.
(Today died a man with much wit and not much judgment.)
에드워드의 통치 시절은 냉랭한 관계였던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왕실 가족들이 그런대로 화목하게 어울리던 시기였다. 메리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런던의 볼리유 궁과 에드워드가 선물한 서포크의 프랭링험 성을 오가면서 가끔 하프시코드 연주와 노래로 형제들을 즐겁게 했으며, 엘리자베스는 시를 쓰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서적들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제인 그레이가 메리 대신 국왕으로 추대되었을 때에도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관계가 다시 긴장 관계로 전환된 계기는 와이어트의 반란이었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런던 탑에 감금되었으며, 엘리자베스의 생사는 오직 메리에게 달려 있었다. 그곳은 그녀의 어머니 앤 불린과 앤 하워드, 그리고 한 달 전에는 십 대 시절에 친자매처럼 지내던 제인 그레이가 참수형을 당한 곳이었다.
충분히 공포에 질릴 만도 한 상황이었는데 엘리자베스는 대단히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가택연금을 당했던 시기에 그녀는 우드스톡의 왕실 사유지에 있는 다락집 창문 유리에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이용해서 유명한 낙서를 새겨 놓았다.
의심이야 많이 하겠지.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을 걸. - 죄수 엘리자베스가 씀.
이 시기부터 이미 엘리자베스는 국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런던 탑에서 석방되어 연금장소인 우드스톡으로 향할 때 많은 군중들이 길가로 나와서 그녀를 격려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스캔들
그녀가 1558년 11월 17일 잉글랜드의 여왕이자 아일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했을 때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었다.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될 젊은 여왕이었으니 정식으로 즉위하기 이전부터 그녀의 결혼 문제는 국내외에서 핫이슈였던 것이 당연했다.
그녀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사람은 메리의 남편인 펠리페 2세였다. 엘리자베스는 거절했다. 문제는 펠리페만 거절한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었다는 점이었다.
결혼한 여왕으로 사느니 차라리 독신인 거지로 살겠다.
이 말은 물론 엘리자베스의 개인적인 기록이고, 공식적인 입장은 이 솔직한 심정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이미 남편에게 봉사하고 있으니 그분은 잉글랜드 왕국입니다(I am already bound unto a husband, which is the kingdom of England)."
그녀의 재위기간 중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에게 하는 청원 형식으로 그녀의 결혼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그때 그녀의 답변이 역사에 남은 유명한 명언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근본적으로 독신주의자였다. 그렇다고 남자를 멀리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독신을 고집했던 이유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철없던 시절에 토머스 시모어에게 육체적으로 농락당했던 경험이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원래 불임이었고 그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엘리자베스가 결혼 의사를 암시했던 경우는 오로지 외교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했던 몇 번의 전략적인 선택뿐이었다. 이 카드는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여러 번 사용했는데, 가장 마지막에 걸려든 인물은 프랑스의 국왕 앙리 2세(Henri II)와 '검은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치(Catherina de Medici)의 막내아들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Hercule François, Duke of Anjou and Alençon)였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마흔여섯 살이었고 프랑수아 공작은 스물두 살이나 연하였다. 1579년에 이들의 로맨스가 시작되자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에서 모두 벌집을 쑤신 듯 아우성이 터져 나왔지만, 엘리자베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약혼식을 올리겠다며 프랑수아를 석 달이나 붙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소동은 엘리자베스가 각본을 짠 고도의 정치적인 연극으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였다.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이 지속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모색하겠다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결혼을 혐오하거나 기피한다고 해서 이성을 멀리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엘리자베스는 남자들의 유혹에 잘 넘어가는 편이었다. 그녀의 첫사랑은 소꿉친구였던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였다. 로버트는 제인 그레이 사건을 일으켰던 노섬벌랜드 공작의 둘째 아들이자 제인 그레이의 남편인 기포드(Guilford Dudley)의 형이다. 비슷한 또래인 엘리자베스와 로버트는 어릴 적에 무척 친하게 지내다 헨리가 죽으면서 헤어진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이들이 재회한 장소는 런던 탑이었다.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로버트와 그의 형제들은 모두 제인 그레이와 함께 런던 탑에 수감되었는데, 로버트가 수감되고 1년쯤 되었을 때 엘리자베스도 와이어트의 반란으로 인해서 이곳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로버트는 이미 이웃한 영주의 딸인 에이미(Amy Robsart)와 열일곱 살에 결혼한 몸이었다. 런던 탑이라는 장소와 각자가 처한 상황이 로맨스에 어울리지는 않았겠지만 어린 시절의 친밀감을 되살리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무사히 런던 탑을 빠져나간 다음부터 친구로 만나 우정을 쌓기 시작하다 이것이 점차 본격적인 사랑으로 발전했다. 이들의 사랑은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된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의 긴밀한 관계가 점차 드러나면서 여왕의 스캔들로 비화되었을 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로버트 더들리
1560년에 로버트의 아내 에이미가 시골의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그녀는 이층으로 가는 계단 아래에서 목이 부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다. 계단에서 실족해서 아래로 구른 사고사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당시 그녀는 현대의학에서 유방암으로 추정하는 병에 걸려 있었고, 여기에 남편과 여왕의 관계가 불거지자 처지를 비관해서 자살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죽던 날 이상하게도 하녀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시장에 보냈다고 한다. 또한 음모론자들은 로버트나 엘리자베스가 청부살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이 사고로 엘리자베스와 로버트 더들리의 연인 관계는 끝장이 났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돈독한 우정은 로버트가 1588년에 사망할 때까지 30년 넘게 지속되었다. 로버트 더들리는 얼마 후 추밀원의 멤버로 들어가면서 레스터 백작(1st Earl of Leicester)에 봉해졌다. 그 이후로 엘리자베스는 정치·외교적인 목적 이외에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1566년 잉글랜드 하원은 여왕이 결혼을 하거나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으면 그녀가 제출한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분노에 가득 찬 조롱뿐이었다.
온화하고 재치 있는 독단
헨리 8세뿐 아니라 메리나 소년 왕 에드워드에 이르기까지 튜더 가의 통치자들은 자의식이 굉장히 강했다. 때문에 어떤 정책을 추진하건 항상 반대의견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경향이 있었다. 헨리 8세의 세 자녀 중에서 엘리자베스만이 아버지의 맑고 옅은 푸른색의 눈동자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모든 일의 결과를 놓고 평가하자면 기질적으로도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전형적인 튜더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튜더 가의 다른 통치자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인내심과 상냥한 태도였다.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에게 항상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했다. 그녀는 유쾌하고 유머를 즐기는 사람이라 엘리자베스 시대의 왕궁은 그녀의 어머니 앤 불린의 시절처럼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재현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세게 반발하는 의회나 추밀원 멤버들을 상대하면서 호통을 치거나 분노를 터뜨리기보다는 재치로 상대방을 골리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몹시 화가 났을 때의 표현도 그녀다웠다.
"나는 당신의 머리만큼 당신의 키를 줄여 줄 수도 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군주였으며 독단적으로 일처리를 했다는 사실은 전임자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사를 따르도록 강요한 것이 아니라 교묘한 술수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드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즉위했을 때 가장 크게 대두되었던 문제는 메리 1세 시절에 시대를 역행했던 조치들이었다. 잉글랜드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두 진영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통치자 엘리자베스가 천명한 입장은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이 세상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뿐이며, 믿음도 단 하나뿐이며 그 외의 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에 대한 부질없는 논쟁이다."
그녀는 상황을 이용하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오랫동안 양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에 그동안 주교직에 공석이 많이 생겼는데, 엘리자베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어느 쪽도 명확하게 선택하지 않은 가운데 주교 선출작업에 들어갔다. 엘리자베스가 주교는 선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헨리 8세 시절의 교회령을 충실하게 지키자, 당연히 다수파인 프로테스탄트들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560년 잉글랜드 교회는 엘리자베스에게 교회의 수장을 맡아달라는 공식 요청을 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수장(Supreme Head) 대신 수석 관리자(Supreme Governor) 직을 수락해 핵심적인 교리 논란을 살짝 피해갔다. 또한 그동안 비난의 대상이기만 했던 이단령이 폐기되어 종교 재판이 사라졌고, 잉글랜드 교회가 토머스 크랜머의 《일반 신도를 위한 기도서》의 개정판을 공식적인 기도서로 채택한 데 이어 의회를 통과한 교회통합령(Act of Unity)에 따라 성공회로 통일된 교회 참석이 의무화되었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불참에 대한 처벌은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
"나는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위해 창문을 열지는 않겠습니다."
이 말은 그녀의 측근들 중에서 은밀하게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인사들을 조사해서 처벌하라는 급진적인 개혁론자들의 청원을 거절하면서 그녀가 한 말이었다.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온건한 입장은 엘리자베스를 지속적으로 그들이 꾸미는 쿠데타 음모에 시달리게 하는 후유증을 낳기는 했지만,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비록 느린 페이스이긴하지만 확실하게 방향을 잡고 나아가 결국은 가톨릭 신앙을 불법화하는 최종단계까지 이르렀다.
▲화려한 옷차림의 엘리자베스 1세
이런 식으로 목표는 확실하게 잡지만 그 과정은 무리 없이 단계별로 진행하는 방식이 엘리자베스의 통치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권모술수의 대가, 마키아벨리즘의 화신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는 사람이다. 이 비난에는 당연히 일리가 있다. 그녀는 사실 현대적인 홍보 전략의 개척자였다. 그녀는 당시에는 첨단기술이었던 금속활자 인쇄술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책을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렸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인쇄매체를 통해서 정치적인 선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일반 민중들이 여왕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열광한다는 사실을 최대로 이용했다. 보석을 줄줄이 박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민초들의 열망에 부응했다. 힘 있는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다녔다. 자기자랑에도 열심이어서 지금까지 불리는 그녀의 애칭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나 '착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 영광스러운 여인이라는 의미인 '글로리아나(Gloriana)' 등은 모두 스스로가 직접 붙인 별명들이다.
약간은 엉뚱하면서도 유쾌한 성품은 엘리자베스의 빛나는 통치를 이루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그녀는 능력만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나 과거 경력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더욱이 한번 신임하면 권한을 대폭 위임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중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측근들에게 버릇처럼 라틴어로 "video et taceo."라고 말하곤 했다. 영어로는 "See and not say."가 되는데, 우리말로 직역하면 뉘앙스가 많이 달라진다. 내막은 모두 알고 있지만 하는 일에 간섭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독특한 개성에 걸맞게 경력은 기묘하지만 능력은 뛰어났던 인물들이 그녀의 신하로 활약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윌리엄 세실 경(William Cecil, 1st Baron of Burghley)은 평민 출신의 부잣집 외동아들로 뛰어난 처세술 덕분에 험난한 시절에 살아남은 그 시대의 거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1543년 하원의원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했던 그가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에드워드 시절의 실력자였던 서머싯 공작 시모어의 휘하에서 핑키 클루 전투(Battle of Pinkie Cleugh)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윌리엄 세실
그는 서머싯 공작과 에드워드 6세에 의해서 중용되었으나 공작이 몰락하면서 그도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그렇지만 재빨리 다음 차례의 실력자인 더들리 백작의 휘하로 옮겨 타서 서머싯 공작이 처형되었을 때에 무사할 수 있었다. 더들리 백작은 곧바로 권력을 장악해서 노섬벌랜드 공작이 되었으며, 세실은 단 두 명만 임명되는 에드워드 국왕의 고문(Secretaries of State)으로 출세했다.
더들리는 제인 그레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세실 역시 메리 1세가 아닌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정한 에드워드의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메리가 즉위했을 때 세실은 더들리 공작에 대한 취조에 참여하면서 다시 한 번 위기에서 벗어났다. 젊은 시절 메리와 그녀의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사실을 메리가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리는 그에게 망명 중이던 레지날드 폴 추기경을 모셔 오라는 임무를 부여해 이탈리아로 보냄으로써 그를 처벌에 대한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프랜시스 월싱엄
윌리엄 세실은 메리가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재빨리 엘리자베스에게 접근했다. 그는 24년간 엘리자베스의 정치고문으로, 그 이후 26년간 재무상으로 봉사했으며, 그의 아들 로버트 세실(Robert Cecil, 1st Earl of Salisbury)도 대를 이어 여왕의 측근으로 봉사했다. 그는 젊은 여왕에게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항상 '중도적인 입장(via Media)'을 유지하도록 충고했는데, 결과는 대단히 효과적이어서 엘리자베스의 통치 스타일이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랜시스 월싱엄 경(Sir francis Walsingham)은 근대적인 첩보전의 창안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생 시절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가 되어 당시 칼뱅주의의 중심지인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다졌다. 메리 1세 시절에는 외국으로 망명해 이탈리아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윌리엄 세실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그의 지원을 받아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1569년부터 71년까지 예수회 교단의 군사조직인 '그리스도의 병사들(Soldiers for Christ, Order of Jesus/Jesuit)'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세력의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 음모를 사전에 탐지해서 분쇄한 것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바티칸과 스페인을 포함한 전 유럽에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첩보망을 구축했기 때문에, 후일 잉글랜드는 스페인과의 전쟁 때 스페인 아르마다의 움직임을 스페인 해군 지휘관들보다도 먼저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이 두 사람 이외에도 명성이 높았던 많은 전문가들이 엘리자베스를 위해서 일했으며, 그녀의 말년에는 근대 철학의 기원으로 꼽히는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경(Sir Francis Bacon, 1st Viscount St. Alban)도 수석법관으로 그녀에게 봉사했다.
아르마다 대회전
엘리자베스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군사적인 승리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뛰어난 통치자였던 엘리자베스가 유독 재능을 보이지 못했던 분야가 바로 군사 분야였다. 그녀 전후 한 세기 동안 유럽 역사를 모두 뒤져 봐도 당시의 잉글랜드군만큼 자주 패배를 당했던 군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몇 번의 예외적인 승리를 제외하고는 네덜란드, 아일랜드, 프랑스의 전쟁에 개입할 때마다 지리멸렬하면서 치욕적인 패퇴를 거듭했다.
잉글랜드의 왕립해군과 스페인의 아르마다가 충돌한 대규모 해전은 역사에서 잉글랜드-스페인 전쟁(Anglo-Spanish War) 혹은 영서 전쟁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전투 중 일부이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싸움이 일어난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충돌했는데, 주 무대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후기에는 아일랜드였다. 그런데 무려 20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이상하게도 잉글랜드나 스페인에서는 공식적으로 선언된 적이 없는 전쟁이었다.
잉글랜드가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해외의 전쟁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바티칸과의 긴장 관계에 기인한 종교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당시 독일의 루터파 영주들은 가톨릭 세력과 타협한 상태였고, 바티칸과 대립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은 잉글랜드를 제외한다면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일부뿐이었다. 프랑스에서도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위그노[9] 들은 통상 전체 프랑스 인구의 5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일곱 개 주가 공화국(Republic of Seven United Province)을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합스부르크 가에 대한 투쟁을 시작한 해가 1579년이다. 귀족 출신으로 '침묵하는 윌리엄(William, the Silent)'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오라녜 공 윌리엄(William I, Prince of Orange) 은 새로이 탄생한 공화국에 가담해 막강한 스페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기선을 제압하면서 저항 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 시기부터 네덜란드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약 80년간의 무력투쟁에 들어가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적극적으로 네덜란드에 대한 지원에 나섰으며, 잉글랜드는 신생 공화국인 네덜란드에게 있어 유일한 동맹국이었다. 그러자 1585년에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식스토 5세(Sixtus V)가 잉글랜드에 대한 공격을 십자군 원정으로 선언했다. 엘리자베스는 1570년에 이미 당시의 교황 비오 5세(Pius V)로부터 파문을 당한 상태였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은 교황 식스토 5세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되어 1604년에 펠리페 2세와 갓 출범한 대영제국의 제임스 6세가 체결한 런던 조약으로 마무리됐다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이 전쟁은 명분만 종교를 앞세웠을 뿐이며 실제로는 경제적 요인에서 발발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국제전으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양 대륙에 대한 교역로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도 언니인 메리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의 미래가 새롭게 열릴 바다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두 자매의 접근방법은 전혀 달랐다.
정책의 차이는 두 사람의 개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메리 1세는 엄격한 윤리 기준을 지키는 모범생 스타일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정당한 목적은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메리는 어떤 식으로든 스페인과 협력해서 잉글랜드의 교역량을 증대시키려고 했지만, 자신의 사촌과 조카이자 남편이기도 한 탐욕스러운 스페인의 두 통치자를 상대로 한 실험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엘리자베스는 좌절만 안겨준 메리의 정책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언니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통상적인 윤리 기준쯤은 쉽게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즉위 초기부터 사략함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스페인의 독점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녀는 공공연한 약탈행위를 사업으로 승화시킨 인물이었다.
탐욕과 모험심에 가득 찬 사략함대의 선장들은 처음에는 스페인이 개척한 아메리카의 정착지에서 밀수로 수익을 올렸지만, 스페인 함대와 접전을 벌이면서 점차 담대해져 전문적인 약탈함대로 변모하고 나아가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런던의 투자가들은 이 사략함대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으며, 유능한 선장들은 목숨을 걸고 스페인의 교역선을 요격하면서 높은 위험에 따른 높은 수익을 보장했다.
이에 따라 엘리자베스의 시대에 후일 낭만적인 해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전설적인 인물들이 등장했다.
존 호킨스 경(Sir John Hawkins)은 엘리자베스와 동갑 아니면 한두 살 정도 위인 인물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항해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독립한 후 첫 항해에서 포르투갈의 노예선을 나포해서 그 노예들을 서인도 제도에 팔아 큰 수익을 올렸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그의 두 번째 항해에 700톤 급의 대형선박을 임대해 주는 형식으로 투자를 했다.
사실 즉위 초기의 엘리자베스는 상비군조차 운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정이 빈약했다. 잉글랜드는 아직도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재원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인지라 엘리자베스로서는 현금 대신 배를 투자하는 형식으로 지분을 확보했던 것이다. 존 호킨스는 약 1년 반 정도 걸린 노예 무역으로 투자자들에게 60퍼센트 이상의 수익을 돌려주었다.
그는 아프리카-서인도 제도의 스페인 식민지-플로리다의 프랑스 식민지를 잇는 삼각 무역을 창안해서 후배 노예 무역상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아프리카에서 전문 사냥꾼들에게 잡힌 흑인 노예들을 선적하여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 공급했고, 그곳에서는 설탕을 선적해서 플로리다에 수송하면, 플로리다에서는 그 설탕으로 럼주를 생산했다. 호킨스는 자신의 설탕으로 생산한 럼주를 싣고 다시 아프리카로 항해했다.
▲존 호킨스
그는 구입한 노예들에 대한 대금을 현금 대신 플로리다산 럼주로 지급하고 다시 노예를 실어 서인도 제도에 공급했다. 그러면서 세 군데 어디에서나 이익을 남겼다. 그는 잉글랜드 최초, 그리고 최대의 노예 무역상이라는 악명을 얻었지만 이것은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기인한 것이지 실질적인 실적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그가 항해사나 선장으로서 무능해서가 아니라 마흔 전후에 잉글랜드 왕립해군에 스카우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사략선의 선장이 아니라 조선 전문가로 활약했으며, 그 시대에 군용 선박의 혁신을 주도했다. 그가 해군의 조선 책임자로 일하면서 잉글랜드 해군은 크고 육중한 스페인의 갤리온 선 스타일을 벗어나 작지만 훨씬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난 프리기트 함과 같은 전투용 선박들을 보유하기 시작했다.이러한 선박들의 전투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은 그리 머지않아 입증되었다.
존 호킨스는 보수적인 신앙인이어서 예수회 소속의 극단주의자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의 암살 음모를 계획하면서 존 호킨스가 당연히 찬성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음모에 끌어들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호킨스가 바티칸에 대한 그것보다 여왕에 대한 충성심이 훨씬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암살 음모에 가담하는 척하면서 추밀원에 모든 정보를 넘겨 사전에 음모를 차단할 수 있도록 기여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의 해적 혹은 사략선장들 중에서 존 호킨스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이다. 존 호킨스가 기발한 삼각 무역으로 부와 명성을 쌓았다면,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순수한 전투와 모험으로 이름을 날려 일찌감치 신화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보다 일곱 살 아래로 엘리자베스의 '황금시대' 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존 호킨스의 함대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는데, 스물세 살 때 스페인의 함정에 빠져 선원들을 대부분 잃고 자신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그 이후로 스페인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드레이크를 '엘 드라크(El Draque)'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두려워했다. '드라크'는 용(dragon)을 의미하는 라틴어 'Draco'에서 파생된 말이었다. 펠리페 2세는 그의 목에 현재의 화폐로 환산해서 약 8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나의 해적(My Pirate)'이라고 부르며 총애했다.
그는 해적행위뿐 아니라 거창한 모험을 통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577년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 선장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반대편인 태평양 연안을 개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드레이크는 기함인 펠리컨 호를 포함해서 모두 다섯 척의 배로 함대를 구성한 다음 현재의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출발했다. 그는 다음해 봄에 아메리카 대륙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여 북상하면서 스페인의 선박들을 약탈했다. 그중에는 페루에서 약탈한 황금을 가득 실은 배도 한 척 있었다. 현재의 가치로 약 700만 달러에 해당하는 노다지였다. 그렇지만 드레이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그는 스페인의 보물선 카가푸에고 호가 항해에 나섰다는 정보를 접하자 '황금 사슴(Golden Hind)'으로 개명한 자신의 기함만으로 이 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태평양에서 카가푸에고를 따라잡아 나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 포물선에는 36킬로그램의 금, 26톤의 은, 갖가지 보석류 등 모두 합쳐서 현재 시가로 1,700만 달러 상당의 화물을 싣고 있었다. 그는 마닐라와 희망봉을 거쳐 세계일주 항해를 완료하고, 1580년에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드레이크는 투자자들에게 1파운드 당 47파운드의 배당을 했다. 3년 만에 4,700퍼센트의 고수익을 올린 셈이다. 투자자들 중에서 지분이 가장 컸던 사람은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이 전설적인 항해로 인해서 사략함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약탈행위를 했던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다음해인 1581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사략함대의 눈부신 활약에 고무되어 1583년에 시인이자 군인이었던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에게 프랑스가 이미 자리 잡은 플로리다 위쪽으로 잉글랜드의 식민지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현재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메인 주에 이르는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을 탐험하고, 이 지역에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의 땅'을 의미하는 '버지니아(Virginia)'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자 스페인의 속이 편할 리 없었다.
"바다와 하늘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라도 있는 것입니다. 대양이 한 민족이나 개인에게 속할 수 없는 것은 그 누구도 대자연이나 유구한 전통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이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가 '스페인 국왕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항의 방문한 스페인 대사에게 시인다운 말로 멋지게 답변했다.
▲월터 롤리
그동안 스페인이 지배하던 대서양 항로에 거세게 도전하던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이 터지면서 일단 경쟁에서 밀려난 상태였고, 포르투갈까지 병합하는 데 성공한 펠리페 2세는 교황 식스토 5세가 잉글랜드에 대한 전쟁을 십자군으로 선언하자, 마지막 경쟁자인 잉글랜드를 타도하고 대양과 신세계를 독점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로 판단했다.
펠리페는 그동안 반역자들의 근거지였던 네덜란드와 신세계의 스페인 영토에서 계속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던 잉글랜드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스페인의 계획은 엄청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잉글랜드에서도 훤히 알고 있었다. 이 거창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동안 펠리페 2세에게는 불길한 조짐이 연달아 일어났다.
스페인 함대의 사령관으로 내정된 사람은 산타크루즈 후작 알바로 데 바잔(Álvaro de Bázan, Marqués de Santa Cruz de Mudela)으로 유럽 최고의 해군 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산타크루즈 후작이 침공 준비를 하던 도중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새로운 함대 사령관에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알롱소 데 구즈만(Alonso de Guzmán el Bueno, Duque de Medina Sidonia)이 임명되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유럽 전체에서 존경받고 있던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모두 육지에서 얻은 것으로 해군을 지휘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또한 1587년에는 잉글랜드의 선제공격으로 침공이 1년이나 미루어지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스페인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서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을 출동시켰다. 그는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신대륙 교역의 중심 항구 카디스 항을 기습해서, 침공을 위해 항구에 대기 중이던 선박 서른일곱 척을 불태웠다. 침공을 완전히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잉글랜드에게 가장 소중했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의 최고 하이라이트인 '아르마다 대회전(Armada Encounter)'[16] 은 1588년 4월 25일 스페인 아르마다의 함대에 교황 식스토 5세가 축성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펠리페 2세는 22척의 갤리온 급 전함과 대형 무장상선 108척을 동원했는데, 이 함대를 움직이기 위한 선원들만 8천 명이 필요했다. 함대가 무장한 함포의 숫자는 모두 2,500문이었으며, 스페인에서 탑승한 전투 병력은 1만 8천 명이었다.
이 병력과는 별도로 당시 합스부르크 가가 지배하고 있던 플랑드르의 덩케르크에는 파르마 공작 알레한드로 파르네시오(Alejandro Farnesio, Duque de Parma)가 지휘하는 1만 6천 명 최정예 스페인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스페인 함대는 좁은 도버 해협을 통과해 플랑드르에 도착해 그곳에 대기 중이던 침공군을 호위할 계획이었다. 당연히 그 항로에는 잉글랜드 해군의 요격이 예상되고 있었다.
잉글랜드가 동원한 아르마다도 그 규모가 대단했다. 선박의 숫자는 200척에 육박했다. 잉글랜드로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선박을 전부 동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립해군 소속의 전함만 34척, 징발된 무장상선이 163척이었다. 여기에 동맹국인 네덜란드의 경전투함 30척이 가세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전력은 스페인 아르마다와 비슷했다. 스페인 함대는 주로 대양을 항해하는 대형선박들로 구성되어 있던 반면 잉글랜드 함대에서 200톤이 넘는 전함은 30척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아르마다
잉글랜드 함대의 제독은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Charles Howard, Earl of Nottingham)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 불린의 사촌 동생이었으며, 이 전투 전까지 해전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기로는 스페인의 아르마다와 사정이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엘리자베스는 함대 부사령관(Vice Admiral)으로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임명해 실질적인 야전사령관직을 수행하도록 했으며, 존 호킨스에게도 부제독(Rear Admiral)이라는 직책으로 함대에 대한 지원을 맡겼다. 해전 경험이 풍부한 선원들을 보유한 드레이크와 호킨스의 사략함대도 모두 전투에 동원되었다.
5월 28일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에서 출정한 스페인 아르마다는 6월 19일 잉글랜드 해역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산발적으로 포격전이 벌어졌지만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스페인은 두 척의 선박을 포기했으며 잉글랜드 역시 상당한 사상자를 기록했다. 일주일간의 서전을 통해 스페인의 대형선박들은 잉글랜드의 포격에는 잘 견디지만 도버 해협의 얕은 바다에서는 기동성에 크게 제한을 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스페인 아르마다는 수심이 깊은 칼레 항으로 물러나 배들을 서로 묶어 단단한 밀집대형을 형성한 채 닻을 내리고 별 모양의 방어대형을 형성했다. 파르마 공작의 침공군이 대기하고 있는 덩케르크와는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그런데 바로 이곳 칼레에서 스페인 아르마다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그날 밤 바람을 이용해서 네 척의 화공선을 띄워 밀집대형으로 모여 있는 스페인 선박들을 향해 돌진시켰다.
일반적으로 화공선은 쓸모없는 배에 화약과 인화물질을 가득 실어 흘려보내는 것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대담하게 멀쩡한 대형전함을 화공선으로 희생시켰다. 화공선 중 두 척은 중간에서 요격되었으나 두 척은 화약을 가득 실은 채 밀집되어 있던 선박들에 접근해 폭발했다. 이 화공으로 불에 탄 선박은 없었다. 그렇지만 큰 문제는 방어대형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사실이었다. 주력 부대인 스페인 해군 소속의 선박들은 그런대로 대형을 잘 유지했지만, 화물선을 개조한 무장상선들은 화공선을 피하느라고 뿔뿔이 흩어졌다.
결정적인 전투는 다음날 플랑드르의 작은 항구 그레블린에서 벌어졌다. 스페인 아르마다는 일단 이곳까지는 후퇴했지만, 아직 대형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네 방향에서 달려드는 잉글랜드의 아르마다와 얽히며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스페인 해군의 특기는 배를 붙이고 상대의 배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는 갑판전이었다. 그렇지만 잉글랜드 아르마다는 뛰어난 기동성을 바탕으로 포격전으로 일관하면서 좀처럼 갑판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두꺼운 오크나무로 만들어진 스페인의 갤리온은 잉글랜드 함포의 포격에 놀라울 정도로 잘 견뎠지만, 한 척이 여러 척의 잉글랜드 선박을 상대하면서 점차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거의 모든 선박은 깊은 상처를 입었으며 최소한 다섯 척의 선박을 포기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후퇴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의 선박들은 황급히 뱃머리를 북으로 돌려 스코틀랜드 방향으로 패퇴했다. 이 전투로 파르마 공작의 부대를 잉글랜드에 상륙시키려던 펠리페 2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잉글랜드의 선박들은 패퇴하는 스페인 아르마다를 멀리까지 추격했다. 사실 당시 잉글랜드 포함들의 화약은 거의 바닥이 나 있던 상태였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일단 스페인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하고 스코틀랜드 북단으로 올라갔다 아일랜드를 우회해서 남하하는 항로를 택했다. 그러나 그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페인 아르마다는 아일랜드 동쪽 바다에서 거센 폭풍을 만나 잉글랜드에게 당한 피해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으로 귀환했을 때 아르마다에는 30척이 조금 넘는 선박과 일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병력만 남아 있었다.
영광과 상처
엘리자베스는 아르마다 대회전의 승리로 큰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실질적인 성과보다는 심리적인 성과를 가져다 준 데 의의가 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잉글랜드에게 대서양의 지배권을 보장해 주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스페인을 포르투갈에서 축출하기 위해 그 다음해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합동으로 벌인 일련의 해전에서는 거센 폭풍이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함대를 덮쳐 막대한 인명과 엄청난 국고의 손실만 초래했다.
잉글랜드가 대서양에서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여러 세기가 걸렸다. 스페인은 잉글랜드 해군의 선박들을 참고로 개량된 신형 갤리온 선을 건조하기 시작했으며, 아르마다도 훨씬 효율적인 호위체제를 갖추어 운영되기 시작했다. 비로소 바다에서 공정한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경쟁은 모든 부문으로 확대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열망했던 북아메리카 식민지 건설 계획도 좌절되어 결국 그녀의 시대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양국의 막강한 해상 무력은 서로의 무역을 견제하는 데 힘을 낭비했으며, 이 때문에 두 나라의 무역은 실질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재정수입은 수직으로 급감했다. 펠리페 2세는 두 번이나 스페인 정부의 부채에 대한 지급유예(Moratorium)를 선언해야 했다. 잉글랜드의 상황도 이와 유사했다. 엘리자베스의 말년에 잉글랜드 정부는 일 년 예산의 열두 배가 넘는 규모의 국채를 발행하였다.
아르마다 회전의 참패는 펠리페를 크게 자극했다. 그는 가톨릭 세력이 절대 다수인 아일랜드 사람들이 무장 투쟁을 시작하자 여기에 막대한 자금을 대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든든한 자금을 배경으로 싸우는 아일랜드의 고집스럽고 강인한 투사들 때문에 잉글랜드는 1595년부터 거의 10년 동안 지겨운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전쟁에 투입된 막대한 비용은 엘리자베스 통치의 마지막 기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로버트 데브루
엘리자베스 여왕의 마지막 10년은 잉글랜드인에게 힘든 만큼 여왕 개인에게도 무척 어려운 시기였다. 그녀의 영원한 연인이자 좋은 친구이며 훌륭한 신하였던 로버트 더들리 백작은 아르마다 회전을 치른 다음해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또 다른 친구이자 충실한 신하이며 항상 조언자 역할을 했던 윌리엄 세실 경은 더들리 백작보다 10년 정도 더 살았지만 일찌감치 왕궁에서의 업무를 접고 재무성 업무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빈자리는 세실 경의 둘째 아들 로버드 세실(Robert Cecil)과 미주 대륙의 개척자 월터 롤리(Walter Raleigh)와 같은 젊은 귀족 청년들이 채웠는데, 이들과 여왕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 중 더들리의 의붓아들 로버트 데브루(Robert Devereux)는 말년의 엘리자베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는 스페인의 카디스 항을 점령해서 당시 잉글랜드에게 그리 흔하지 않은 승리를 안겨 준 전쟁 영웅으로 엘리자베스의 총애를 받았다.
그렇지만 여왕의 총애를 빌미로 오만불손해지자 점차 왕궁에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군사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아일랜드로의 원정을 자청했다. 데브루 백작은 1588년에 기세 좋게 대병력을 지휘해서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도 아니고 서전에서 아일랜드의 켈트 부족들이 연합한 부대에게 대패하자 자신의 부대를 내팽개친 채 도망쳤다. 그는 1599년 9월에는 아예 런던으로 귀국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해명할 기회를 애타게 요청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그는 한밤중에 무단으로 여왕의 침실로 난입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지만, 아무리 여왕과 은밀한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한계를 넘어선 행동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여왕의 총애를 완전히 잃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에식스 백작의 특권이었던 수입 포도주의 독점권도 잃었다.
로버트 세실이 득세하면서 여왕과의 접근을 차단당한 데브루 백작은 요크에 있는 자신의 집에 칩거하고 있다 다음해에 갑자기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런던에 나타났다. 그는 군중들 앞에 나서서 반정부 선동을 기도했다. 그의 목표는 여왕이 아니라 로버트 세실이었고, 총애를 잃은 젊은이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반역죄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1601년 2월에 엘리자베스는 마지막 연인이었던 제2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브루를 처형했다.
영국 문화의 황금기를 열다
원래 엘리자베스 여왕의 성품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그보다는 즉위 초기부터 꾸준히 가꾸어 왔던 '착한 여왕 베스'라는 이미지가 그녀의 의도대로 형성되어 그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반기에는 어려워진 국가 재정과 경제난으로 인해서 그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아일랜드에서의 전쟁도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은 더욱 교묘하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통치자 엘리자베스는 이 시기에 조작된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벌써 엘리자베스는 신화적인 존재에 비유되곤 했는데, 가장 적절하게 사용된 이미지는 그리스 신화에서 정의를 담당하는 여신 아스트라이아(Astraea) 였다. 그녀는 유토피아적인 '황금시대'부터 인간이 완전히 타락한 지금의 '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래도록 인간과 함께 생활했던 여신이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서사 시인 에드문드 스펜서(Edmund Spenser)는 여왕을 시집 《페어리 여왕(The Faerie Queene)》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요정 여전사로 묘사했다.
비록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먼 훗날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에 그려지듯이 황금시대가 아니었고, 스페인에 대한 승리나 신대륙 진출에 관한 업적이 과장되었다고 해도 엘리자베스가 영국 역사의 그 어떤 통치자보다 높게 평가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녀는 영국 문화의 황금기를 연 통치자였다. 그녀의 시대는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시대였다. 엘리자베스의 즉위부터 올리버 크롬웰의 반동 정치까지의 기간을 역사에서는 '영국 르네상스 연극(English Renaissance Theatre)'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우리가 현대에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극장들이 영국 전역에 세워졌고, 이곳에서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당대 빛나는 극작가들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당시 영국 사람들은 우리가 다양한 영화나 연극 중 좋은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즐기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많은 대가들의 연극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이후 떠돌이 음유시인들에 의해 가까스로 명맥이 이어지던 대중문화가 유럽에서 다시 부활하는 효시가 된 셈이다.
1602년 가을 엘리자베스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는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고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여왕의 나이는 일흔 살로 접어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의 곁을 지킨 사람은 로버트 세실 경이었다. 1603년 2월 엘리자베스는 잠을 자는 도중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엘리자베스를 처단하는 일을 일생 최대의 과업으로 삼았던 교황 식스토 5세는 그녀에 대해서 이러한 평가를 남겼다.
그녀는 일개 아녀자이고 작은 섬의 겨우 절반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지만 스페인을 공포에 떨게 하고 프랑스를 공포에 떨게 했으며 이 (신성로마) 제국과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본명 Elizabeth Alexandra Mary. 1926년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윈저왕가의 조지 6세의 장녀이다.
1947년 에든버러공(公) 필립과 결혼하여, 이듬해 11월 큰아들 찰스(Charles Phillip Arthur George)를 낳았다. 1952년 2월 뉴질랜드 방문 중 아버지 조지 6세의 급서로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1953년 6월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는데, 연합왕국의 왕이자 자치령 각국의 왕이며 나아가 구제국에 속한 독립국들의 결합체인 코먼웰스(Common Wealth)의 수장(首長)으로서 대관한 최초의 왕이 되었다.
이후 영국 국왕으로서의 다망한 정무를 처리하는 한편, 수많은 외국방문으로 세계 각국과의 우의를 다졌다.
슬하에 황태자인 찰스와 차남 앤드류(1960∼), 3남 에드워드(1964∼)와 장녀 앤(1950~) 등 3남 1녀를 두었다.
2002년 2월 6일 즉위 50주년 축하행사로 황금마차 퍼레이드, 기념주화 및 축하복권 발행, 여왕부부의 영연방 국가 순방 등을 가졌으며, 역대 왕 중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에 이어 영국민에게 신뢰와 인기도가 높다
◇1981년 런던에서 말을 타고 군기 행렬식에 나선 엘리자베스 2세.
◆ 2015-09-09 ‘최장 재위 영국 군주’ 역사 다시 쓰여졌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일 영국 사상 최장수 재위한 군주가 됐다. 기존의 기록 보유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은 재위 기간이 63년 15일, 정확히 시간으로 따지면 2만3226일 16시간23분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올해 89세로 내년 4월 21일이면 만 90세가 된다. 그는 이미 많은 기록을 갖고 있다. 8년 전 ‘최장수 영국 군주’에 올랐고 ‘가장 많은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영국뿐만 아니라 영연방(British Commonwealth) 45개국 화폐에 얼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가장 많은 나라에서 여왕으로 재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여왕은 영국에 더해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소속 15개 독립국, 1억4000만명의 군주다. 현재 영연방은 53개국,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3억 인구를 갖고 있다. 이 전체 영연방의 수장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국은 아직도 세계 외교가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 중심에 여왕이 있다.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은 아내인 여왕을 “영연방의 물리치료사”라고 평한다. 연방 국가들의 역사와 민족성, 문화에 대한 지식이 워낙 깊고 특히 연방국 정치인과 부드럽게 소통하며 문제를 잘 해결한다는 의미다.
지난 60년 동안 여왕은 12명의 영국 총리를 비롯해 자신이 여왕으로 있는 16개국 140명의 총리와 일을 같이 했다.(왕정국가들은 거의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어 대통령이 아니라 총리가 행정부의 수반이 된다.) 여왕의 재위 기간 동안 12명의 미국 대통령이 거쳐갔다.
여왕이 최장 재위 기록을 깨는 올해 9월9일 영국에는 아무런 축하행사가 없다. 여왕은 매년 하던 대로 런던 버킹엄궁을 비우고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황무지 중간에 있는 발모랄성에서 휴가를 계속 즐기고 있을 터이다.(여왕은 매년 8, 9월은 스코틀랜드에서 지낸다. 이때 버킹엄궁을 개방한다. 1992년 화재가 일어난 윈저성 수리비 3650만파운드를 충당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조지 3세 왕의 기록을 깨고 최장 재임을 기록하던 날, 영국 전역의 교회는 종을 쳤고 봉화대나 언덕에서는 봉화를 올리며 축하를 했다. 본차이나 접시를 비롯해 별별 기념품이 다 제작되어 팔리는 등 아주 대단한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올해 9월 9일은 여왕의 뜻에 따라 별다른 이벤트 없이 조용하게 지나갈 예정이다.
버킹엄궁의 표현대로 ‘평상시처럼(business as usual)’ 지나갈 계획이다. 어차피 내년 여왕 90세 공식 생일(6월 중 한 토요일을 정해 축하행사를 하는 것이 관례다) 때 전국적인 축하행사가 있을 예정이기도 하지만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여왕에게 빅토리아 여왕은 고조모가 된다.
고조모보다 더 오래 산다는 일은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고조모가 더 일찍 돌아간 것을 축하하는 일인 것 같아 별로 축하하고 싶지 않다는 여왕의 뜻 때문”이라고 버킹엄궁의 여왕 측근이 한 말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가장 오래 산 영국 군주라 하지만 왕족으로서 최장수 기록을 깨려면 아직도 한참 더 살아야 한다. 여왕 본인의 어머니이자 직전 왕비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101살7개월을 살았다. 여왕의 남편 필립 공도 지난 6월 10일, 94살을 축하했다.
영국 남자 왕족 중 가장 오래 산 기록이다. 여왕 부부 모두 최장수 기록을 깬 셈이다. 오는 11월 14일이 되면 찰스 왕세자도 66살이 되어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왕좌를 기다리는 왕자’가 된다. 만일 여왕이 자신의 어머니 나이까지 산다면 찰스 왕세자 나이가 77살이 된다.
‘가장 늙은 나이에 왕이 된 왕!’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이 나올 판이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는 크게 걱정을 안 해도 될 듯하다. 워낙 장수집안이라 77살에 왕이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20~30년은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여왕은 4명의 자녀와 5명의 손자손녀 등 도합 14명의 직계가족을 거느린 행복한 할머니다. 계속되는 이혼 등으로 말썽을 부리던 자식들도 이제는 모두 조용해졌고 국민도 여왕을 존경해 왕가에는 좋은 일만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영국인은 여왕 이외의 군주는 본 적이 없다. 자신이 태어날 때 지금의 여왕이 있었고 그 여왕과 평생을 같이 살았다.
언제나 곁에 있는 존재처럼 되어 버려 영국인은 여왕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본다. 영국인은 여왕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듯하다. 여왕의 2012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기념주화의 명문이 그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국민의 사랑이 여왕의 보호막이다.(Amor populi preasidium reg.)’
엘리자베스 2세가 영국의 군주가 된 것은 일종의 ‘사고’였다. 여왕의 아버지는 원래 왕세자가 아니고 둘째 아들이었고 여왕은 런던 시내 외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났다. 여왕은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은 유일한 영국 군주이다. 여왕이 10살 때 여왕의 삼촌이었던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이혼녀 심슨 부인과의 결혼 문제로 사퇴하는 바람에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이 즉위, 조지 6세가 되었다.
조지 6세가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다. 에드워드 8세와 동생 조지 6세 사이의 양위에 관한 이야기는 영국 명배우 콜린 퍼스가 열연을 해서 아카데미상 4개를 받은 영화 ‘킹스 스피치’에 잠깐 나온다. 에드워드 8세의 양위를, 사랑을 위해 왕위도 내려놓은 ‘세기의 사랑’으로 로맨틱하게 포장했다.
하지만 1990년 후반부터 공개되어온 영국 정부 문서에 의하면 심슨 부인은 독일의 스파이였고 에드워드 8세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심정적인 동조문제로 도저히 왕위를 유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게 양위를 한 진짜 이유라는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6살에 즉위했다. 1947년 남편 필립 공과 결혼해서 맏아들 찰스와 딸 앤을 두고 있었다.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왕자였던 필립 공은 여왕과는 덴마크 왕 크리스찬 4세와 연결하면 7촌 사이(second cousin once removed)이고 고조모 빅토리아 여왕 쪽으로 치면 8촌(Third Cousin)이 되는 사이다.
여왕이 1939년 7월 동생 마거릿 공주와 함께 왕립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교 측은 필립이 왕자이자 여왕의 친척이고 그전에도 둘이 두 번(1934·1937년)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안내를 맡겼다. 당시 필립 공은 해군 복무를 갓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때 여왕은 필립 공에게 반해 버렸다. 여왕의 나이는 13살밖에 안 되었다.
그 이후 여왕은 편지를 쓰면서 따라다녔다. 여왕은 19살이 되던 해 아버지 조지 6세에게 결혼하게 해 달라고 졸랐지만 왕은 “나중에 보자”고 했다. 여왕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졸랐다. 왕은 2년을 버티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허락을 하고 약혼을 발표했다. 그때 여왕의 나이가 21살이었다.(1947년 7월)
조지왕이 딸의 결혼 허락을 망설인 이유는 필립 공이 왕자라고는 하지만 당시 그리스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이 되어버린 바람에 정말 이름만 왕자였지 빈털터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필립 공의 나치 독일과의 연관이다. 필립공의 여동생 4명 중 3명이 독일 귀족과 결혼을 했는데 그들 모두가 나치 독일의 고위직에 있었다. 특히 막내 여동생의 남편은 악명 높은 나치 선전상 괴링의 비밀정보부대장이었다.
어찌되었건 여왕의 건강과 군주로서의 성공 뒤에는 필립 공이 있다는 세간의 평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필립 공은 여왕의 ‘힘과 안정(strength and stay)의 원천이다’라고 여왕 측근들은 말한다. 측근들은 만일 5살 많은 필립 공에게 문제가 생기면 여왕이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걱정을 한다.
여왕은 필립 공에게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필립 공의 성격이 겉으로는 상당히 너그럽고 좋아 보이지만 실제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빈정거리고 자주 비꼰다. 아주 썰렁한 농담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기로 유명해서 별명이 ‘왕실의 실언쟁이(Royal Slip of the Tongue)’다. 필립 공은 젊을 때 폭주를 해서 여왕을 놀라게 했었다. 여왕이 천천히 가자고 하면 “입을 다물라”고 하든지 “차에서 내리라”고 하며 실제 차를 길가에 세우기도 했다. 결국 여왕은 필립 공에게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지혜를 배웠다.
여왕 측근들에 의하면 여왕은 거의 화를 내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측근이 아무리 심한 실수를 해도 감정이 실리지 않은 듯한 눈초리로 잠깐 쳐다보고는 지나쳐 버릴 정도다. 단 한 사람에게만은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는데 그게 남편 필립 공이었다. 여왕의 극소수 사적 친구의 말에 의하면, 한 번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피크닉을 가기로 했었는데 필립 공이 어딘가 갔다가 늦게 돌아왔다.
그러자 여왕이 목소리를 높여서 “도대체 이게 뭐야? 어디를 갔다 왔어? 왜 이런 짓을 하는데?”라고 필립을 매몰차게 야단치면서 몰아붙였다. 물론 소동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목격자는 남편을 야단치는 아낙네의 모습이 놀라우면서도 귀엽고 인간적이어서 좋았다고 했다.
여왕이 “귀엽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던 때가 2012년 올림픽 개막식이었다. 여왕이 007 영화의 가장 나이 많은 본드걸이 되어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와 같이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부터 여왕의 복장을 한 대역이 헬리콥터를 타고 올림픽 주경기장 개막식에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 오는 장면 등 시치미를 뚝 떼고 세계를 상대로 장난을 친 사랑스러운 할머니를 영국인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여왕을 옆에서 지켜주는 존재는 필립 공 말고도 있다. 코르기종 애견들이다. 올림픽 007 장면에도 나왔다. 여왕과 다니엘 크레이그가 복도를 걸어나올 때 여왕을 쫄쫄 따라나오던 애견 말이다. 여왕의 애견과 말에 대한 애정은 유명하다. 어릴 때부터 코르기종을 좋아해서 대를 이어서 코르기를 키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코르기마저도 여왕은 자신의 성격대로 엄격한 규칙을 지키게 만들었다. 먹이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을 주어야 하고 나이 순서대로 먹이를 준다. 이름을 부르면 와서 받아먹게 할 정도다.
여왕의 이런 성격은 자식들에게도 적용된다. 전기 작가들의 글에 의하면 여왕은 자식들에게도 방에 들어올 때 인사를 하고 들어오라는 예절을 요구한다. 작가들은 그 이유를 자식과 ‘거리를 유지하기(keep distance) 위한 심려’라고 한다. 자신은 그들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국가의 여왕이라는 인식을 자식들도 분명히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왕은 자식들과도 평생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사는 셈이다. 여왕의 유일한 딸 앤 공주마저도 여왕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자신도 모르게 자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는다고 했다.
여왕이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집어 드는 신문은 경마신문 ‘레이싱 포스트’다. 여왕의 말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사랑이다. 처음 말에 올라탄 이후 지금까지 취미를 넘어서 말에 대해 애정을 쏟고 있다. 90살 가까운 지금도 머리칼이 날리지 말라고 스카프를 쓰고 말을 탄다. 여왕이 승마를 좋아한다는 건 동시에 건강하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워낙 바빠서 일 년에 열 번 이상 경마 경기에 가기 힘들지만 저녁에 TV를 통해 그날의 결과를 놓치지 않는다. 경기장에 가는 날은 대개 자신이나 가족 소유의 경주마가 출전하는 날이다. 여왕도 자신의 경주마가 다른 말을 따라잡거나 혹은 뒤처지거나 하면 웃다가 슬퍼하기도 하고 결승점에 도착할 때쯤이면 고함을 지르면서 일어나서 소리도 지른다. 그런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세상을 놀라게 한다. 정말 드물게 인간다운 희로애락을 보이는 날이다.
여왕이 오는 날 경마장은 난리가 난다. 특히 히드로공항 근처의 로열 아스코트 경마장에 여왕이 오는 날은 ‘레이디스 데이(Lady’s Day)’라고 해서 모두가 정장을 하고 경마를 관람하러 온다. 특히 여왕의 자리가 있는 ‘로열 엔클로저(Royal Enclosure)’ 구역에 들어가는 관객은 남녀 모두가 정장을 해야 한다.
신사는 그냥 정장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 정도가 아니고 보통 중산모(中山帽)라고 하는 높은 모자(top hat)와 뒤에 꼬리가 달린 흑색이나 회색의 연미복(燕尾服)을 갖춰 입어야 한다.(입장권 복장규정(dress code)에 ‘top hat and tails(black or grey morning dress)’라고 표시가 되어 있으면 바로 이 복장을 의미한다.) 숙녀는 제대로 된 이브닝드레스에 모자를 써야 한다. 보통의 모자가 아니라 특이하고 아주 별난 모자를 골라 써야 한다.
2014년에 여왕은 정부로부터 3610만파운드의 왕실유지비(Sovereign Grant)를 받았다. 이 금액은 원래 왕가 소유이나 현재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왕실재산(Crown Estate)에서 들어 오는 수입의 15%에 불과하다. 그나마 전년도에 비해 190만파운드가 늘어난 금액이다. 영국 왕실재산은 금융자산을 비롯해 유동자산이 81억파운드, 도시 부동산 40억파운드, 지방 부동산 1조490억파운드를 합쳐서 1조611억파운드다. 여기서 연간 2억4020만파운드의 수입이 들어온다. 여왕은 자신의 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을 국가에 전액 바치고 그중에서 눈치 보면서 아주 일부를 다시 타 쓰는 셈이다.
그런데 정부로부터 받은 왕실 유지비와 왕실 지출내역을 살펴보면 계산이 안 나온다. 왕실 유지비보다 지출액이 더 많기 때문이다. 직원 월급 1820만파운드, 월급이나 고용 내역을 밝히지 않는 ‘지밀한 측근직원(other staff)들 월급 130만파운드, 궁궐 보수·수리 유지비 1330만파운드, 여행경비 420만파운드, 광열비 등 각종 공과금 330만파운드 등이 지출 내역이다.
합계 4030만파운드여서 정부에서 주는 왕실유지비보다 무려 420만파운드나 많다. 결국 이 모자란 금액은 여왕 개인 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에서 메워야 한다. 얼마 전 영국 신문에 왕실 직원 모집 광고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기사 내용은 ‘왕실에서 일한다는 모양새에 비해 너무 월급이 적고 격무’라는 것이었다. 월급이 영국 일반 직장인의 평균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왕실 직원 월급은 일반 직장보다 적다.
그러나 왕실 근무를 끝내고 나가면 왕실에서 일했었다는 경력이 큰 도움이 된다. 이 때문에 박봉과 격무에도 불구하고 직원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언론 기사는 지적했다. 결국 정부에서 예산을 적게 주니 그렇게밖에 할 수 없지만 ‘참 영국답다’는 생각을 기사를 보고 했다.
마지막으로 영국인이 왕위제도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 이유를 위에서 얘기한 ‘막연한 사랑과 존경’ 말고 영국인다운 계산법으로 한번 따져 보자. 여왕이 영국 경제에 주는 도움을 금액으로 계산하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 예를 들어보자. 다이아몬드 주빌리 때 영국 소매산업이 올린 매출액은 기념품 구매 1억9600만파운드, 관광객 지출 4125만파운드 등 모두 5억890만파운드다.
또 런던 고급 쇼핑의 중심인 본드 스트리트, 리젠트 스트리트,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상점 600개가 만든 조합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당시 런던 내의 상점, 호텔, 식당들은 평소보다 1억2000만파운드나 더 벌어들였다.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보러 100여개 국가에서 온 200만명의 관광객이 쓴 돈 덕분이었다.
왕실 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은 차치하고라도 영국 정부에서 왕실 유지비로 주었다는 3610만파운드와 위의 금액을 한번 비교해 보라. 결국 영국은 여왕이 있어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지 절대 손해는 안 보고 있다는 뜻이다. 영국인이 왕위제도 존치를 반대하지 않는 이유를 알 만하지 않은가. 하긴 셈이 밝기로 유명한 영국인이 손해나는 장사를 할 리가 없다.
출처 | 주간조선 2372호 글 |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2015.09.09 역사속 여왕의 남자들… 저마다 기구한 사연들
역대 영국 여왕의 남자들은 누구였을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열었던 빅토리아 여왕 곁에는 애처가로 유명한 알버트 공이 있었다. 독일 왕족 출신인 알버트는 빅토리아와 동갑내기 외사촌 지간이다. 둘은 스물한 살에 결혼해 9남매를 뒀다. 알버트가 40대 초반에 병으로 죽자 빅토리아는 평생 그를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지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쌓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평생 독신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집권 후 "짐은 영국과 결혼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궁정 연애' 염문설을 몰고 다녔는데, 대표적인 상대가 총애하는 신하였던 레스터 지방의 백작 로버트 더들리 경이다.
신교도들을 잔인하게 처형해 '피의 메리'로 불리는 메리 1세 여왕은 구교(舊敎) 수호국인 스페인의 황제 펠리페 2세와 정략 결혼했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펠리페 2세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갔는데, 열한 살 연상이었던 아내의 실물을 보고 실망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제인 그레이 여왕은 '결혼이 곧 무덤'이 된 사례다. 제인 그레이는 열다섯에 야심 찬 세력가의 아들 길버트 더들리를 남편으로 맞은 뒤 시아버지의 반역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메리 1세를 원하는 민심에 밀려 즉위한 지 9일 만에 반역죄로 폐위됐다.
이슬비 기자
◆엘리자베스 여왕 일대기 - 화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영국의 최장수 통치 군주로 등극할 날을 이틀 앞둔 7일(현지시간), 세계적인 밀랍 인형 박물관 체인 마담 투소 런던 박물관에서 여왕 모습의 밀랍인형이 새 단장을 받고 있다. /AP뉴시스
입력 : 2015.09.08 10:47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영국의 최장수 통치 군주로 등극할 날을 앞두고 있다. 사진은 1953년 런던에서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필립왕자, 에딘버러 공작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있는 모습. /AP뉴시스
▲ 사진은 1953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에서 왕좌에 앉아 주교들의 충성을 받고 있는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54년 5월 15일 연방국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앤 공주, 찰스 왕세자, 에딘버러 공작의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61년 6월 5일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존 F.케네디 대통령이 만찬을 가지고 있는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65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39번째 생일을 축하를 위해 참석한 에드워즈 왕자(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앤 공주, 앤드류 왕자, 찰스 왕세자와 에딘버러 공작의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66년 3월 4일 자메리카 킹스턴 연대를 방문해 한 장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66년 4월 21일 영국의 상원에서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40번째 생일을 기념하고 있는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73년 5월 12일 필립 왕자의 유럽 드라이빙 챔피언쉽 참가를 관람하러 온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애완견들과 함께 앉아 있는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82년 6월 8일 잉글랜드 윈저성에서 승마를 하고 있는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의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84년 12월 21일 런던에서 열린 해리 왕자의 세례식 후 촬영한 엘리자베스2세 여왕(왼쪽에서 두번째) 가족사진의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86년 10월 14일 중국 만리장성을 방문한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필립 왕자의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87년 8월 4일 클래런스 하우스 밖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모습. /AP뉴시스
▲사진은 1993년 7월 9일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육군 소총협회 100주년 행사에 참석해 중령 조지 하비와 함께 소총으로 사격을 하고 있는 모습. /AP뉴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오는 9일 오후 5시 30분(현지시간)을 기점으로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기간은 2만 3226일 16시간 23분을 넘기게 된다. 여왕은 이날 떠들썩한 기념식 대신 현지에서 열리는 증기 열차 개통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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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Elisabeth Morphing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E8nJhG1xE5o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vt50r0JRhFs - 여왕 군기분열식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kzctIZreoWQ - 왕실 근위대
◇이미지
▲제복 입은 영국여왕 엘비자베스 2세
▲엘리자베스 여왕과 경호병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영국 근위기병대원들과 담소중 12.11.26.
▲거창한 만찬장 - 12.11.27. 영국 런던 윈저성에서 영국 여왕이 알사드 쿠웨이트 국왕을 위한 연회장
▲런던의 캔싱턴 궁전= 약 214억원을 들여 보수공사하였다.
▲황태자 결혼식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 테임즈강 해머스미쓰 브리지에 영국 여왕즉위 60주년을 맞아 축제에 참가한 1000여척의 세계 각국 소형 배
▲런던타워 브리지에서 여왕 즉위 60주년 불꽃놀이
▲여왕이 탄 바지선
▲군기분열식 - 13. 6. 15. 런던에서 캐서린 영국 왕세손비가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촬스 2세때 시작하여 1748년 공식행사로 지정
▲세계 최장 재위 -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 2017.4.21 현재 9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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