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32/ 아랍에미리트 - 아르헨티나 - 아이슬란드 - 아일랜드
지구촌 여행/ 국가별32/ 아랍에미리트 - 아르헨티나 - 아이슬란드 - 아일랜드
■ 아랍에미리트
United Arab Emirates
아랍에미리트 연합국, The United Arab Emirates, 아랍 토후국 연합
▲국기
석유가 풍부한 아라비아 반도 동부 연안에 있는 7개 에미리트(아랍 토후국)의 연합국. 수도는 아부다비. 민족은 남아시아인(50%), 아랍인(23%), 에미리아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종교는 이슬람교가 다수를 차지한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며, 화폐단위는 아랍에미리트 디르함(Dirham)이다.
아랍에미리트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는 아부다비를 비롯해 두바이·아지만·앗샤리카·움알카이와인·라스알카이마·알푸자이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는 아부다비 시이다. 남북으로 약 110km, 동서로 약 600km에 이르는 규모로 북서쪽은 카타르, 서쪽과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 남동쪽과 북동쪽은 오만과 경계를 이룬다. 북쪽의 페르시아 만, 동쪽의 오만 만 건너편에는 이란이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원주민은 수니파·시아파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이며 남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인도인·파키스탄인·방글라데시인·이란인 등도 많이 거주한다. 정부에서는 계속 늘어나는 이주민 비율을 억제하기 위해 국민들의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공식 언어는 아랍어이며 영어·페르시아어·우르두어·힌디어가 함께 사용된다.
석유산업과 건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유입되어 남성이 인구의 2/3 정도를 차지한다. 해외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여 1980년대에는 연간 인구증가율이 중동에서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출생률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평균에 속하나 사망률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인구는 아부다비 토후국이 가장 많고 두바이와 앗샤리카가 각각 그뒤를 잇는다. 인구의 대부분이 아부다비 시와 아랍에미리트 최대도시인 두바이 시, 앗샤리카 시를 비롯한 반도의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2022년 추계인구는 1,020만 6,508명이며, 전체 인구의 86%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또한 15세 이하 인구의 비율은 14%이다(2017). 평균기대수명은 남성 77세, 여성 79세이다(2020).
각 토후국마다 채광(採鑛)·과세·경찰력에 대한 1차적 권한을 가지며 세습군주가 있어 이들에 의해 통치된다. 1971년 채택되고 1976, 1981년에 개정된 임시 헌법에 따라 7개 토후국 군주들로 이루어진 '최고군주회의'가 연방 최고의 권한을 행사한다.
모든 사안에 대한 결정은 가장 큰 토후국들인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군주를 포함한 다섯 군주 이상의 찬성을 거쳐 이루어지며, 토후국 군주들 가운데서 결정되는 대통령과 부통령도 군주회의에서 선출한다. 대통령은 국가의 행정을 담당할 수상과 연방각료 회의의 각료들을 임명한다. 연방의회는 7명의 군주들이 임명한 40명의 의원들로 이루어지는 임기 2년의 자문기관으로서 발의된 법률을 심의하는 권한을 가진다. 국가의 최고 사법권은 연방의 모든 문제에 대한 재판권을 지닌 연방대법원에 있다.
연방정부는 아랍에미리트 전지역에서 병원 치료와 의료 혜택을 무료로 제공하며 석유세입 가운데 막대한 부분을 병원과 농촌 진료소, 이동보건진료소를 세우는 데 투자하고 있다. 의사들이 상당수 있으나 내국인 의사의 부족으로 해외에서 모집해온 외국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6∼12세 의무교육을 실시하며 토후국마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가 있다. 내국인 교사가 부족하여 지금까지 다른 아랍국 출신 교사들을 교원으로 임용해왔다. 교육비 전액은 국가에서 부담하며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으로 1977년 설립된 아랍에미리트대학교가 있다. 공공연한 검열은 없지만 언론에서는 정부를 비판하는 일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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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두바이의 어제와 오늘
▲두바이의 교통체증
▲새벽안개에 쌓인 두바이의 모습은 마치 공상세계나 동화 속에 나오는 도시같다. 19일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안개에 파묻힌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고층빌딩의 놀라운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버즈 칼리파(828m)’를 비롯한 그 주변 고층건물의 풍경을 담고 있다. 안개가 낀 도심을 내려다보는 것은 마치 바다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안개 위로 솟아오른 건물은 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 같다. 특히 건물의 허리에 깔린 안개는 도심을 밝히는 형형색색의 조명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야경을 보여준다. 인공 건축물과 자연현상이 만들어낸 한 폭의 ‘그림’ 같다.
▲이 사진은 독일 사진작가 세반스찬 오피즈(34)가 두바이 마리나의 85층에서 찍은 것이다.
▲두바이의 아름다운 풍경을 촬영한 세바스찬은 “안개 시즌동안 난 매일 밤 날씨를 확인하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날에는 새벽 4시부터 기다렸다”면서 “운이 좋으면 오전 9시 안개가 증발하면서 이런 장면을 찍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유일한 문제는 보안 직원의 이해 부족이었다며 “그들은 전문적인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면서 “그것이 나를 매우 실망스럽게 했다”고 덧붙였다.
http://www.youtube.com/watch?v=urTFY-824Po&feature=player_embedded - 외계 도시 두바이
▲하늘 아래 첫 국가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 건물
▲고층건물인 828m 163층에서 본 경치
▲건물 아래 도시풍경
◇사막
▲아부다비(아랍 토후국) 사막에서 샷대결 - 루크 도날드
◆일상
▲두바이 버즈 칼리파 앞에 이탈리아 스포츠카 페라리와 람보르기니 경찰차량 13. 6. 4
▲두바이 라시드 항구와 부르즈 할리파의 모습 할리파는 높이 828m의 세계 최고층 인공 구조물
■ 아르헨티나 Argentina
아르헨티나 공화국, Argentine Republic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거대한 국가.
공식 이름은 아르헨티나 공화국.
남쪽과 서쪽은 칠레, 북쪽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북동쪽과 동쪽은 브라질과 우루과이에 접한다.
남동쪽에는 대서양 해안이, 서쪽과 남서쪽에는 안데스 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국기
국민은 주로 유럽계 백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은 스페인·이탈리아·독일·프랑스·영국계가 대부분이다. 인디언과 메스티소(인디언과 백인의 혼혈)는 거의 동화되었으며, 지금은 인구의 2%에 지나지 않는다.
곳곳에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독일계 주민들은 독일어와 스페인어를 함께 사용한다. 비교적 소수인 유대인들은 대부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고 있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지만 바스크어·시실리어에서부터 웨일스어·우크라이나어에 이르기까지 많은 외국어와 방언들이 사용된다. 국민의 대부분은 국교인 로마 가톨릭교도이나 개신교도도 상당수 있다.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비교적 낮은 편이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로서는 출생률과 사망률도 꽤 낮은 편이다. 전국 인구밀도는 16명/㎢이지만 그란차코·안데스·파타고니아 지역에서는 대개 2명/㎢ 이하이다. 전체인구의 4/5 이상이 도시지역에 살고 있다. 인구의 30%가량이 15세 미만인 반면, 약 9%가 65세 이상이며 평균수명은 남자가 67세, 여자가 7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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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이야기
2015-03-13 손혜현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 초빙연구원
◇탱고의 발상지 아르헨티나의 라보까(La Boca)’
▲ 라보까를 만든 주역인 베니또 낀껠라의 동상.
우리는 흔히 다양한 민족이 섞여서 살고 있는 다민족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인종의 용광로’ 혹은 ‘멜팅팟(melting pot)’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인종의 용광로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녹여 하나의 문화와 정체성을 가진다는 뜻이다. 여러 인종과 민족을 사회로 통합하기 위한 미국의 이민자 동화정책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되 각각의 고유한 특징은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샐러드볼(salad bowl)’ 혹은 ‘모자이크(mosaic)’라는 용어가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중남미 국가들은 1492년 콜럼버스가 첫발을 내 디딘 이래, 원래부터 이 땅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 유럽의 정복자들과 이민자들의 후손들, 유럽인들에 의해 농장의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 그리고 최근에는 아시아계 이민자들까지 다양한 인종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됐다. 한편에서는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물라또, 원주민과 흑인의 혼혈족인 삼보가 만들어지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고유의 혈족이 유지되면서 중남미는 인종적으로 가장 다양하고 풍부한 지역이 됐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부둣가 마을
섞이고 또 버티기를 반복한지 5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어느 한쪽에 빙점(섭씨 0도)을 찍어 이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만큼, 이 지역에 오면 데자뷔처럼 다른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친숙하고, 새로운 것 같으면서도 왠지 오래된 익숙함이 느껴지는 창조적이면서도 고유한 문화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멜팅팟 속에 빠진 샐러드볼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특징을 지닌 가장 대표적인 지역 중 한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의 라보까(La Boca)라는 지역이다.
스페인어로 ‘입’이라는 뜻을 가진 라보까는 리아추엘로(Riachuelo) 강물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리오 데 라 쁠라따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발전은 리아추엘로 강 입구에 항구가 번성하면서 시작됐다. 1970년대 유소년기를 보낸 40대들이라면 누구라도 당시 최고 인기를 누렸던 애니메이션 ‘엄마 찾아 삼만리’를 기억할 것이다. 라보까 지역은 바로 이탈리아에 살던 주인공 마르코가 돈을 벌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떠난 엄마를 찾아 헤매던 항구마을이었다.
비만 오면 쉽게 범람하던 지역이라 사람이 살기에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항구를 중심으로 관련 산업들이 많이 생겨났고, 배의 이동이 많아지면서 항구 주변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항만 노동자들이 공동주택에서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라보까는 제노바의 색채가 짙은 뱃사람 마을이 됐다. 라보까는 비록 수면이 얕아서 큰 배가 진입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항상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천연의 항구였고 19세기 말까지 가장 중요한 항구로 기능했다.
이탈리아인들이 모여서 살게 되면서, 라보까는 이탈리아인들 고유의 특성과 문화로 채워졌다. 1860년대 세계경제에 통합된 아르헨티나는 대량이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토지소유에 대한 보장을 하지 않음으로써, 애초 정치 지도자들이 희망했던 서부와 북부유럽 이민자들을 유치하고자 했던 이민정책은 실패했다. 대신 삶의 질이 낮았던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자기 소유의 땅을 한 평이라도 갖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민자들은 아르헨티나에 가면 당장이라도 지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토지는 소수에게 집중된 터라 이민자들이 지주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들은 농장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이어가거나 도시의 단순노동자로 일을 해야만 했다. 이들에게 아르헨티나의 지주는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땅을 뺀 아르헨티나 사회는 유럽보다 시시한 곳이었다. 그래서 유럽이민자들은 아르헨티나 사회로 동화되기를 꺼려했다. 그들은 유럽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미니 이탈리아’ 그리고 ‘미니 스페인’을 만들었다. 자국의 언어와 지방언어를 사용했다. 교민 구호단체, 신문, 스포츠와 문화 클럽, 학교, 교회 등을 세웠다. 예술적 감성이 풍부했던 이탈리아인들은 이 지역을 노래, 음악, 시 그리고 미술과 조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또 나무와 양철 조각으로 만든 공동주택과 원색의 페인트로 칠한 형형색색 독특한 집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 집들은 주기적인 홍수에 대응하기 위해 쉽게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 라보까의 상징인 까미니또의 거리 풍경
가난에서 피어난 색채 예술
라보까의 집들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얇은 판자들이나 양철로 지어졌으며, 벽과 지붕 모두 강렬한 원색으로 칠해져 있다. 성의 없이 아무렇게나 칠한 듯하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 마치 색채 마술사의 손이 지나간 듯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집들의 색깔이 알록달록 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슬픈 속사정이 있다. 이 지역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낙후된 지역이었다. 돈이 없어 자재를 살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배에서 쓰고 남은 나무와 양철 그리고 페인트를 가져와 집을 짓고 치장했다. 그러나 쓰다 남은 재료들을 사용하다보니 재료가 넉넉할 리 없었고 그 덕분에 집들은 나무판자와 양철로 얼키설키 이어서 만들었다. 페인트도 집 전체를 한 가지 색으로 칠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은 분량만큼만 칠을 하게 됐고, 그 결과 라보까의 명물이 된 화려한 색채의 집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라보까는 화려한 색깔의 집들만큼이나 탱고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돈을 벌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고향을 떠나왔던 이민자들의 일상은 고단했고, 생각했던 것만큼 많은 돈을 벌지도 못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밀롱가(선술집)에 모인 가난한 항구의 유럽노동자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리듬을 혼용해 만든 음악과 춤이 바로 탱고다. 그래서 탱고음악을 듣고 있으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반도네온(작은 아코디언과 같은 악기)의 처절하고 구슬픈 멜로디가 쓸쓸하고 고독하게 느껴진다.
탱고는 춤이라기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연극에 가깝다. 라보까의 지저분하고 어두침침한 거리를 배경으로 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여자의 배신과 여자를 뺏어간 친구,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열심히 살아보고자 했지만 결국 사창가의 창녀로 전락한 여자의 슬픔 등. 탱고는 이렇듯 사랑과 슬픔 그리고 고독이 드라마틱하게 노래되고 있다. 가난하고 지저분한 라보까 태생이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그리고 교태스러운 몸짓의 ‘풍기문란 죄’로 한때 탱고는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철저하게 외면됐고 드러내서는 안 될 수치로 외면당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 버림받고 전 세계를 떠돌던 탱고는 프랑스의 사교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다시 아르헨티나 상류층에 의해서 역수입됐다. 교태와 풍기문란이라는 죄목은 예술적 관능미 그리고 자유와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았고, 아르헨티나의 문화를 상징하는 명물이 됐다. 탱고의 발상지답게 라보까 지역을 거닐다보면 탕게로(탱고무용수)들의 서로 주고받는 에로틱한 눈빛과 빠르게 엇갈리고 섞이는 현란한 다리동작, 한 다리를 높게 들어 올리고 나머지 한 다리로만 지탱한 터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탕게라(여자무희)를 한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남자 무용수, 흐느끼듯 애절한 반도네온 연주와 성악가의 멋진 탱고 노래를 노천카페에서는 물론 거리와 공원에서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 라보까의 집들은 아무렇게나 칠한 듯하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룬 색채가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노상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문화예술지역
가난한 사람들이 울긋불긋 제멋대로 칠해 놓은, 자칫 도시의 흉물이 될 수도 있었던 이 마을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표적인 예술과 문화 그리고 관광지역이 됐다. 이는 이 지역 출신 화가 베니또 낀라(Benito Quinquela)가 불어넣었던 예술적 영혼과 생명력 때문이었다. 그는 부두, 선박, 선원 등 라보까의 일상을 화폭에 담았으며, 최초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모습을 화폭에 담은 화가 중 한 명이다.
낀라는 1950년대 방치돼 범죄와 악취가 풍겼던 이 지역을 청소하고 단장해서 ‘까미니또(작은 길이라는 뜻으로 탱고곡에서 유래)’라는 작은 동네를 만들어 노상박물관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예술가들의 조형 작품과 그림으로 거리를 채웠다. 까미니또 주변으로 많은 화실들이 들어서 있으며, 가난한 화가들이 그림을 내놓고 파는 노점상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길은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낡고 오래된 것은 새롭고 현대적인 것으로 바꾸고야 마는 요즘의 도시 미학과는 사뭇 다른 거리의 풍경이 큰 감동을 준다. 라보까는 보헤미안, 화가, 조각가, 음악가, 가수 그리고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샐러드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까미니또 동네를 걷다보면 알록달록한 건물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오래된 반도네온의 구슬픈 멜로디, 가난 속에서도 저버리지 않았던 삶에 대한 희망, 이민자들의 고향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공동주택의 중앙에 위치한 마당에 들어서면 당장이라도 커피 한 잔 하고 가라며 손짓하는 그 시절의 이민자를 만날 것만 같기도 하다.
이 지역의 명물로 남아 있는 공동주택은 이제 기념품과 예술작품을 파는 쇼핑몰로 변신해 있다. 하지만 손잡이 하나까지도 옛날 그 정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마당의 공동우물과 벤치도 그 옛날의 소박함을 그대로 담고 있다. 높은 담벼락에는 예술가들의 영혼이 깃든 벽화가 그려져 있고, 발콘에는 이 나라의 명물인 마라도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그리고 최근에는 프란시스코 교황이 손을 흔들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라보까를 돌아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꼭 현대적이고 세련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비록 낙후되고 후진적이라도 스토리가 있다면, 그리고 문화가 함께 한다면 얼마든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음산하고 어두운 지역에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 스토리를 만들고 색깔을 입혀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최고의 명소로 만든 이들의 역발상은 낡고 오래된 것은 허물어내고 최첨단의 기술과 세련됨으로 단장하고야 마는 우리 방식에 적지 않은 교훈을 준다. 음악과 탱고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열정이 넘쳐나는 라보까 지역은 문화와 인종이 섞이고 어우러져 새로운 창조적 문화를 만들어내면서도, 그 안에서 본질적인 특성을 간직한 멜팅팟 속의 샐러드 볼이다.
▲(위에서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첫 번째 항구였던 라보까항구. / 가난한 화가들이 그림을 내놓고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길은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 라보까를 거닐다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탕게로(탱고무용수).
◇물의 나라 '이구아수'로의 여행-①②
라틴아메리카는 ‘세계의 물과 산소의 공장’이라는 표현이 과장되지 않을 만큼 전 세계 깨끗한 물의 30% 그리고 산소의 20%를 생산하는 지역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라틴아메리카의 초록빛 대지는 미처 땅에 발을 내딛기 전부터 싱그러운 세계로 빠져 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이러한 마력 때문일까. 한국에서 26시간을 꼬박 날아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 매번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하면서도 여행의 고단함을 뒤로 하고 또 오게 되는 곳이다.
에콰도르의 적도로부터 아르헨티나의 남단 남극에 이르기까지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강렬한 태양빛의 여름부터 얼음산으로 뒤덮인 겨울까지 동시에 모든 기후대를 가로 지르고 있다. 이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의 자연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느님이 천지창조를 할 때 유독 라틴아메리카에 갖은 정성과 많은 공을 들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다. 이토록 라틴아메리카는 정말 많은 걸 가졌고 그것 때문에 슬픈 역사를 지닌 대륙이기도 하다.
수많은 자연경관 중에서도 특히 세계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찬사와 감탄을 받는 곳을 꼽으라면 두말없이 이구아수 폭포일 것이다. 연간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는 세계적 명소인 이구아수 폭포는 1541년 유럽의 탐험가 알바르 누녜스에 의해서 처음 유럽에 알려졌다.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2011년에는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더불어 세계 7대 경관 중 한 곳으로 뽑혔다. ‘이구아수’는 이 지역 원주민인 과라니족의 언어로 ‘큰물’을 의미한다. 물의 나라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물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이구아수 폭포는 275개의 크고 작은 폭포로 이뤄져 있다. 너비가 4.5㎞, 평균낙차는 70m에 달한다.
북미의 나이아가라 폭포 그리고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를 합친 것보다도 더 크다고 하니 그 규모가 상상이 갈 것이다. 이구아수 폭포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그리고 파라과이 등 3개국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폭포의 70% 그리고 브라질이 30%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파라과이 쪽에서는 폭포를 감상할 수 없다.
필자가 이구아수 폭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 본 영화 ‘미션’을 통해서였다. 영화 첫 장면부터 거대한 폭포가 십자가를 짊어진 선교사를 집어 삼키는 장면과 함께 엄청나게 큰 물소리는 처음부터 영화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펼쳐졌던 웅장하고 경이로운 자연경관을 본 순간부터 이구아수 폭포는 나의 첫 번째 여행목적지가 됐다. 이후 20년이 지났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이구아수 폭포는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고 황홀했다. 마치 거인이 입에서 물을 토해내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엄청난 굉음을 내며 끊임없이 쏟아지는 커다란 물줄기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기보다는 경외심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르헨티나 쪽에서는 가까이에서 이구아수 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이코노미조선
연간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명소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듯 폭포 역시도 어느 국가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생김새와 느낌이 달라진다. 따라서 폭포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브라질 쪽에서도 바라봐야 하고 아르헨티나 쪽에서도 봐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구아수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틀은 필요하다. 필자는 먼저 코스가 짧은 브라질 쪽부터 시작했다. 물론 숙소를 브라질 쪽에 잡은 이유도 있었지만 오후에 도착한 터라 하루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브라질 쪽에서는 폭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지만, 멀리서 웅장하고 신성한 자태가 한눈에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매표소에서 폭포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짧고 산책로도 잘 갖춰서 있어서 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제주도의 정방폭포가 전부였던 나에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위용을 뽐내는 브라질의 이구아수 폭포는 놀라움이자 충격이었다. 브라질 쪽에서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매점에서 우비(雨備)를 구입해서 입고 물 위에 놓인 좁은 다리를 걸어가야 한다. 폭포수가 떨어질 때 부서지며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들로 금세 온몸이 젖었지만 절경이 주는 황홀함에 빠져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가이드가 다가와 아르헨티나 쪽 폭포수가 남았다며,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해주었다.
<②편에 계속>
이구아수 폭포의 절정 '악마의 목구멍'②
<①편에서 계속>
아르헨티나쪽 폭포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한다. 275개나 되는 크고 작은 폭포수들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산책로를 따라 트레킹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질 쪽은 코스도 짧지만 멀리서 바라보기 때문에 잘 포장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되니 크게 힘이 들지 않지만, 아르헨티나 쪽은 폭포를 가까이서 보기 때문에 등산을 하듯 좁고 가파른 돌길을 오르고 비포장된 흙길을 걸어야 해 체력이 필요하다. 중간 중간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트레킹을 하기도 하지만 오프로드차를 타고 이구아수국립공원의 자연과 경치를 느끼는 방법도 있다. 이동하면서 만나는 꽃과 나무, 나비와 새들 그리고 원숭이와 코아티 등 공원 안의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설명도 이구아수 폭포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다. 오프로드차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보트를 타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폭포를 볼 수 있으며 보트 운전수의 짓궂은 장난에 폭포수를 흠뻑 뒤집어쓰기도 한다. 브라질 쪽에서 맞은 폭포수가 가랑비라면 아르헨티나 쪽에서 맞은 폭포수는 장대비와도 같다. 승객의 박수와 호응 정도에 따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폭포수를 맞을 수 있다. 보트를 타고 폭포 속으로 들어가면 멀리서 폭포를 눈으로만 감상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동으로 폭포를 느낄 수 있다.
1. 브라질 쪽에서 바라본 폭포의 웅장한 모습 2. 숲 속에서 놀고 있는 원주민 마을공동체의 아이들 3. 강 위에 놓인 다리를 따라 걸으며 폭포의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4. 이구아수 폭포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코노미조선
공동체 방문해 원주민 생활도 체험
뭐니 뭐니 해도 이구아수 폭포의 절정은 ‘악마의 목구멍’이다. 미니기차를 타고 악마의 목구멍역에서 하차해 30분 정도 강 위에 놓인 다리를 따라 걸으면 목적지가 가까워지면서 악마의 울부짖음 같은 굉음이 점점 크게 느껴진다. 옆 사람과의 대화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커다란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 다다르면 쏟아지는 80m의 물기둥에 자칫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잠깐의 황홀감만 느끼고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환경피해를 최소화해서 놓았다는 다리 위에서 바라보면 세상은 하늘과 맞닿은 물뿐이며 인간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로 느껴진다. ‘큰물’ 이구아수를 보고 싶다면 악마의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물의 양이 초당 약 1만3000㎥의 양이 쏟아져 내리는 우기(雨期)인 11월부터 3월까지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구아수 여행의 진수는 물론 이구아수 폭포지만, 이곳 원주민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원주민 공동체 방문은 보고 즐기는 시각 중심적 여행에서 문명과 환경 그리고 삶의 방식에 대해서 성찰해보는 인식여행으로 전환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구아수 폭포 근처에는 100여 개 이상의 원주민 공동체가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관광객들에게 마을공동체를 공개한다. 필자가 방문했던 공동체는 ‘브아과라니’라는 부족이었고 마을 앞에 다다르자 젊은 청년이 나와 마을을 안내해준다. 자신들의 삶의 방식, 서구문명에 대한 생각,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생활의 지혜, 사냥방식 등을 얘기해 주었다. 문자가 없기 때문에 역사를 기록하지 않지만 할아버지로부터 역사와 삶의 지혜를 배우고 다시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주면서 자연과 더불어 산다고 한다. 시간의 노예가 되기 싫기 때문에 서구문명보다는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이들. 자연 속에서 노는 것을 제한할 때 가장 슬퍼한다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천진한 미소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구아수 폭포를 여행하면 자연의 범접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의 선물인 그 자연을 보물로 만드느냐 아니면 재앙으로 만드느냐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이구아수 폭포의 도시, 푸에르토 이구아수 시내에는 ‘구아라오가’라는 야생동물 보호소가 있다. 생태질서를 파괴한 인간들의 양심과 같은 곳이다. 인간과 문명으로부터 상처받고 버림받은 야생동물들을 치료하고 보호하고 재활시켜서 자연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곳으로, 동물원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이구아수 폭포수를 본 후 자연에 대한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문명과 인간에게 상처받고 구아라오가까지 오게 된 동물들의 사연을 들으니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거대한 물의 나라 이구아수에서 필자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자연, 자연과 조화된 원주민 공동체의 삶,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려는 문명화된 인간의 노력을 만났다.
▶손혜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중앙대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이화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1년 재직 중이던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 연구교수직을 그만두고 아르헨티나 유학길에 올라 현재 아르헨티나 토르꾸아토 디 텔라 대학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 초빙연구원으로 있다.
◆ 2015년 08월 26일 아르헨티노-코레아노의 꿈
추종연 / 駐아르헨티나 대사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역사는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13세대 78명의 한인 이민자를 태운 네덜란드 화물선 보이스벤(Voissvein)호는 부산항을 출발해 2개월여 기나긴 항해 끝에 1965년 10월 14일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했다. 이들은 다시 기차로 남쪽으로 1100㎞를 달려 바람의 마을 라마르케 허허벌판에 내렸다. 비와 바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은 고된 몸으로 천막을 치고 흙벽돌집을 지었으며 땅을 개간하기도 하고 날품팔이도 했다. 당시 방풍림으로 심은 포플러가 지금은 무성하게 자라 이민자들의 애환을 머금고 있다.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시 변두리 빈민가로 이주한 이민자들은 편물이나 봉제 삯일, 구두수선 등 막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다. 그 흙벽돌집이나 빈민가 판잣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면 올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됐을 것이다. 반세기 이민 세월 고생의 무게를 딛고 아르헨티나 한인사회는 모국의 경제 성장만큼 성장을 거듭했고 유대인에 이어 아르헨티나 현지사회가 주목하는 대상이 됐다. 지금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의류산업 중심지인 아베야네다 상가의 2분의 1을 한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의 연간 매출액은 20억 달러가 넘는다.
지금 아르헨티나에 거주 중인 우리 동포는 3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간 현지 경제 사정에 따라 그 수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했다. 현지인들은 한인사회 규모가 30만 명은 족히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며 한국 사람들이 늘 부지런하고 활동범위가 넓어서 그렇게 느껴진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동포사회는 타 지역 한국이민사회와 비교해 탁월한 모습이 하나 있다. 고단한 이민생활 가운데서도 격조 높은 예술의 멋과 맛을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화가, 조각가, 시인, 수필가, 도예가, 서예가, 영화감독, 영화배우 및 탤런트, 방송인 등 재사(才士)가 많이 활동하고 있다. 지금 아르헨티나 한인사회는 다양한 이민 50주년 행사로 분주하다. 지난 3월 라마르케 토마토축제 참석을 시작으로 한국음식 페스티벌, 한국 단편문학 및 시선집 스페인어 번역본 발간, 중남미 K-팝 경연대회, 동포 예술가 합동 전시회, 중남미 한상대회, 한국학 세미나, 백건우 피아니스트와 부에노스아이레스 필하모니 협연, 한국영화제 등 다양한 행사가 연이어 개최되고 있어 현지인들의 이목이 한인사회에 집중되고 있다. 특히, 이민 50주년 행사의 백미는 9월 20일 차카부코 공원에서 개최될 ‘한국의 날’ 행사로, 아마도 수만 명의 우리 동포와 아르헨티나인들이 참가해 화합의 하모니가 연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인회와 이민 50주년 준비위원회는 크게 세 가지를 모토로 5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하나는 한인사회의 존재를 현지사회에 부각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그간 우리 동포들을 받아주고 또 지원해준 아르헨티나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를 표명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앞으로 한인 2∼3세대들에게 한인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그러했지만 아르헨티나 이민자들도 이 먼 땅 아르헨티나에 와서도 지난 50년간 앞만 보고 달려왔다. 지금 아르헨티나 한인사회는 이민 반세기를 맞아 지나온 여정을 반추해 보면서 또 다른 도약을 위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본래 이민자의 땅이다. 지금 이 땅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사람들도 우리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이민자들이다. 우리 한인들도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난 반세기 맨주먹으로 난관을 극복해 낸 한인 1세대들의 경험과 그 후손의 지혜와 창의성이 합쳐진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한 꿈을 이뤄낼 사람이 바로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한국인, 아르헨티노-코레아노(Argentino Coreano)들이다.
◇추종연(55)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외무고시 16기 △중미과장 △주유엔대표부 참사관 △주아르헨티나공사 참사관 △국회사무처(통외통위)파견 △중남미 국장 △주콜롬비아 대사 △현재 주아르헨티나 대사
문화일보
◆볼거리
▲하늘의 달과 헤일로(후광)
▲자연이 만든 피라미드 - 북서부 칠레 접경 지역에 있는 거대한 소금 평원에 용암을 분출하거나 크레이터를 만들지 못한 소형 화산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굳어져 122미터의 코노 데 아리타 라 불리는 피라미드가 생성됨
▲아르헨티나의 장엄한 얼음조각
▲빙하의 눈물 12.3.4 모레노 빙하에서 떨어져 나오는 빙하들
▲아치 모양의 빙하 - 아르헨티나 로스글레시아레스 국립공원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
▲붕괴되는 빙하
▲얼음 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붕괴된 얼음
http://www.youtube.com/watch?v=Sh271FAVZ0o&feature=player_embedded - '뒤집히는 빙산'
▲파타고니아(patagonia 아르헨티나 남부 반건조성 고원), 가운데 세 봉우리는 세로토레, 오른쪽은 피츠로이
▲파타고니아산군 - 오른쪽 피츠로이 왼쪽 세로토레 - fitzroy(파타고니아 엘찰튼 마을에 있는 산, 아르헨티나 칠레 국경에 있다
▲세레토레 - cerre torre 파타고니아에 있는 토레스텔파이네 국립공원의 비경
▲파이네국립공원
▲칠레의 토레델 파이네
http://www.youtube.com/watch?v=fNzsebGc3mw&feature=player_embedded - 폭포의 폭이 3km에 달하는 모코나 폭포 - 아르헨티나 미시오네스주 우루과이강
▲아르헨티나 코파우에 화산이 13. 5. 27. 화산재를 뿜어내고 있다
◆일상
▲아르헨티나 대통령
▲페르난데즈 대통령 14.5.7. 기념촬영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시위대 모습 12.11.8.
▲가스폭발사고 13. 8.6.
▲폭우 피해 현장 - 13. 4. 2.
▲부에노스아이레스 에서 발생한 산불 13. 7. 31.
▲폭우가 스친 흔적 = 부에노스아이레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75km떨어진 루한시를 관통하는 루한강이 홍수로 범람 루한대성당 일대가 물바다
■ 아이슬란드 Iceland
아이슬란드공화국, Republic of Iceland
▲국기
노르웨이와 그린란드 사이에 있는 북대서양의 섬나라. 수도는 레이캬비크이며 국민은 아이슬란드인이다. 국어로 아이슬란드어를 사용하며 국민의 대다수가 복음루터교를 종교로 가진다. 화폐는 아이슬란드 크로나이다. 특히 중요한 어업을 비롯하여 산업 국유화가 점차 늘고 있기는 하나 자유시장경제가 우세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의 거의 모든 교육이 무상이며 16세까지의 의무교육이 실시된다.
아이슬란드의 국민은 매우 동질적인 집단이다. 그들의 정확한 기원과 민족적 구성에 대해서는 역사가들마다 주장이 다르지만 60∼80%가 원래 북방혈통으로 대부분 노르웨이에서 왔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켈트족 혈통이다. 사람들이 정주하던 9∼10세기의 지배적 언어는 고대 노르웨이어였는데, 이것이 지금 통용되는 현대 아이슬란드어로 점차 발달했다. 16세기 중엽 이래 루터교가 지배적 종교여서 오늘날 거의 모든 국민이 국교인 복음주의 루터 교회에 속해 있다.
다른 서구의 선진국들과 비슷하게 비교적 낮은 자연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인구증가율은 0%대에서 2% 미만을 유지하고 있다. 평균기대수명은 남자 81세, 여자 84세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다.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이주가 많이 발생하고 있으며, 전체인구 중 도시인구는 1900년의 약 10%에서 오늘날 90% 이상으로 증가했다(2017). 인구의 반 이상이 레이캬비크와 그 주변지역에 살고 있고 섬 중앙부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2022년 기준 인구는 39만 명이다.
◆풍경
◇대 자연이 그린 명화
아이스랜드는 독특한 이름 만큼이나 자연 환경도 매우 특이한 나라인듯 합니다.
자연 환경뿐만 아니라 건물들도 심플한 디자인과 함께 정갈한 느낌을 줍니다.
몇일전 비행기에서 찍은 아이스랜드 사진을 보았는데 마치 외계에서 찍은 사진인듯한 인상을 주네요… 여러분과 나누기위해 올려 봅니다.
아래 사진은 안드레이 어모라브 (Andrey Ermolaev) 라는 러시아인이 세스나 경비행기를 타고 찍은 사진입니다.
▲아이슬랜드 상공에서 찍은 그림같은 사진
▲강, 바다, 육지…
▲겨울 강줄기… 그런데 아이스랜드는 이름처럼 그렇게 추운곳은 아닙니다… 겨울날씨도 한국보다 따스합니다.
▲화산이 많고 요즘도 가끔 한번씩 화산이 터집니다. 검은 화산재와 눈과 얼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작품을 만들었네요.
▲글래시어 – 56세의 사진작가 안드레이씨는 저공으로 천천히 비행하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강줄기마다 제각기 독특한 패턴과 디자인을 선 보여주네요.
▲러시아 사진작아, 안드레이 어모레브.
▲사진찍기 위해 사용된 경비행기
▲아이슬란드 흐베라벨리르에서 촬영한 ‘블루 홀’ 이 지역은 온천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아이슬란드 자연 풍광의 신비한 분위기
▲몽환적인 아이슬란드의 미바튼 호수 풍경
▲아이슬란드 해넘이 풍경, ‘태양에게 인사하는 남자’
▲위 사진들은 비행기에서 촬영한 것이다. 열린 창문을 통해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촬영했다. 사진을 공개한 프랑스의 사진작가는 아이슬란드의 산과 들이 사람이 그린 그림처럼 펼쳐져 놀랐다고 한다
▲아이슬란드
▲몽환적인 풍경 - 아이슬란드 미바튼 호수
▲조각품 같은 빙하 호수
▲아름다운 빙하와 강물
▲신기한 바다 분화구
▲설경과 폭포, 밤하늘의 별과 오로라, 아이슬란드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
▲아름다운 오로라
▲골든 폭포
▲교회
▲그림 같은 아이슬랜드의 산과 들 자연 풍경을 프랑스 사진작가가 비행기에서 퐐영
▲대표적인 관광명소 굴포스
▲블라푤 자연공원내 트리노카기구 화산, 관광지로 개발
▲빙산속의 굴
▲간헐천 11.4.24.
▲얼음 동굴
▲용암 동굴 - 1360미터 얼어붙은 동굴에 채광창 처럼 뚫린 구멍을 통해 오로라가 마술처럼 동굴과 얼어붙은 눈과 조화를 이룬다
▲스카프타엘 얼음 동굴
▲땅속으로 떨어지는 황금폭포 = 아이슬란드 굴소의 호비타 강
▲걸포스폭포의 장엄함
▲땅을 가른 폭포 - 걸포스폭포
▲셀라란드스폭포 - 60m 높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대형 폭포
▲신의 폭포
▲브루아폭포
▲뜨거운 호수
▲2010.4.14
▲아이슬란드 한 작은 마을에서 발생한 화산 2010.5.22
▲화산석
■ 아일랜드 Ireland
▲국기
영국 본토 서쪽의 섬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 수도는 더블린으로 화폐는 유로이다. 켈트족과 영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민 대다수의 종교는 로마가톨릭교이다. 대체로 농업·화학공업·서비스업에 기반을 둔 혼합시장경제 체제로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이웃한 서유럽 국가들보다 낮으나 대체로 선진국 수준이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의회민주주의 국가이다. 1937년 국민투표로 채택된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국가의 수반이며 1등 국민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국민이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재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은 일반적으로 총리가 이끄는 15명으로 구성된 내각의 조언에 따라 정치활동을 하며 특정한 업무를 행할 때는 자문기구인 국가평의회와 의논하여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
총리의 권고가 있을 때 대통령은 의회를 소집·해산시킬 수 있으며, 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도록 제출할 수도 있다. 의회는 하원(Dáil)과 상원(Seanad)으로 양원제로 운영된다. 하원 의원수는 166명이며 최소한 5년마다 치르는 비밀투표에서 유권자가 선출한다. 상원 의원수는 60명이며 그중 11명을 총리가 뽑고 나머지는 직업적·경제적·문화적으로 다양한 유권자들이 선출한다. 하원은 법령의 제안이 가능하나 상원은 단지 그것을 지연시킬 수 있다. 피어나팔당, 통일 아일랜드당·노동당 등 3개의 주요정당이 있다.
임금연계 사회보험제도는 미망인·고아 연금, 실직·장애 수당,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들을 위한 수당, 노인 연금 등을 뒷받침한다. 공공의료 서비스 비용은 소득 수준에 따라 다르다. 보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여 1인당 의사와 병상수가 많고 영아 사망률은 낮으며 평균수명은 73세로 비교적 높다. 6∼15세의 아동은 무상 의무교육을 받는다.
초등교육은 6년으로 졸업자는 중등학교에 등록하여 15, 16세에 중간 졸업증서(Intermediate Certificate)를, 17, 18세에 학습증서(Learning Certificate)를 받는다. 중등학교는 사립이며 초·중등학교는 거의 전적으로 종교 단체들이 설립한다. 고등교육기관 중 더블린대학교가 특히 유명한데 트리니티 칼리지라고도 한다. 언론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으나 로마 가톨릭교의 도덕성을 해치는 내용의 출판은 출판검열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역사
BC 6000년경 동해안에 사냥꾼과 어부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아일랜드에 정착지가 생기게 되었다.
켈트족은 BC 300년경 철기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켈트족이 살던 때에는 다수의 소왕국들이 느슨하게 결합하여 5개의 보다 더 큰 왕국 얼스터·미스·렌스터·먼스터·코노트를 이루었고 이 왕국들은 서력기원이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다(투아하, 쿠이그 쿠이기). 5세기에 성 파트리키우스가 도착하여 이 나라 전역을 그리스도교화했다(로마 가톨릭교). 아일랜드 교회를 형성시킨 수도 생활이 대대적으로 발달했으며 선교사들이 유럽 전역에 파견되었다.
795년 고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침입하여 아나가산·더블린·워터퍼드·리머릭 등까지 지배했으나 1014년 아일랜드의 왕 브라이언 보루와의 전투에서 패하여 이들의 통치가 종식되었다.
11∼12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교회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아 교구에 의한 교회 운영이 확립되었는데 교구의 경계선은 대체로 기존 왕국들의 경계선과 일치했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가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고무를 받아 1171년 이 나라를 침략하여 자신을 섬 전체의 대군주로 선언하고,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이 사실을 인정받았다.
이로써 독립적이던 켈트족 아일랜드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앵글로노르만족 정착민들은 켈트족 아일랜드 문화에 동화되어 갔으며 15세기에는 더블린 주위의 작은 지역인 팔레에서만 잉글랜드 왕실에 충성을 지켰다. 이 당시 아일랜드의 실제 지배자는 킬데어의 백작들로 이들은 공식적으로 잉글랜드의 대리 군주였다.
이런 상태는 16세기에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압력 때문에 아일랜드가 의회의 교회법을 따르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50년 동안이나 군인과 성직자를 대륙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로 수출했으며 동시에 가톨릭 난민들이 빠져나가 비게 된 땅에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이주자들이 들어왔다. 1691년 퇴위한 왕 제임스 2세가 보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신교도가 완전히 우세해졌다(신교 우세). 인구의 약 1/10에 불과한 영국성공회파 신도들이 국토와 정치에 대한 지배권을 가졌으며 가톨릭교도·장로파·비국교도 등에게는 기본적 시민권도 부여되지 않았다.
18세기에 아일랜드의 신교도가 잉글랜드의 지배를 완화하는 것에 찬성하는 선동을 시작하면서 가톨릭교도에게도 약간의 시민권이 주어졌다. 1798년에 반란이 일어나 마침내 영국이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1801년 1월 1일에 대영제국과 아일랜드의 연합왕국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이 연합은 아일랜드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가톨릭교도와 신교도간의 불화만 심화시켰다. 1846∼51년에 엄청난 기근이 발생하자 이 연합 때문에 침체된 경제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당시 200만 명 이상이 아일랜드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이 기근 후에 피니언주의로 알려진 혁명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의회 개혁이 약간 이루어졌다.
혁명운동은 계속되었으나 몇몇 내정자치 조치는 실패했다. 1912년 또다른 내정자치 조치가 거의 통과될 즈음에 얼스터의 아일랜드 자치에 반대한 통일단원들이 내전을 준비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폭동이 일어났으며 아일랜드 1916년에 임시정부가 선포되었다.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이 채택되어 남·북 아일랜드가 성립되었고, 1921년 남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었다.
1937년 비준된 신헌법에 의해 왕권정치가 막을 내리고 국가명도 에이레로 변경되었다.
◆자연의 걸작품
아일랜드 북쪽 해안을 따라서 벌집 모양으로 모여있는 이 돌들은 4만개 이상의 기둥모양으로 생긴 현무암(직경 30~90Cm)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은 6천만년 전 쯤에 발생한 화산 폭발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지금은 명승사적 보호단체가 관리하고 있다. 윌리엄 새커리는 이렇게 적었다.
"이곳은 아무도없는 혼돈 상태에서 세상이 만들어졌을 당시 그대로 방치된 부분이었음에 틀림없다. 즉 혼돈의 잔여물인 것이다.
▲아일랜드 = 발렌시아 섬 호수에서 무지개 속으로 빨간색 배가 화룡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