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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28/ 사모아 - 사우디 -세르비아 - 세이셀 - 소말리아 -수단 - 스리랑카

상림은내고향 2022. 5. 22. 17:57

지구촌 여행/ 국가별28/ 사모아 - 사우디 -세르비아 - 세이셀 - 소말리아 -수단 - 스리랑카

■ 사모아 Samoa

사모아독립국, Independent State of Samoa

▲국기

 

태평양 중남부의 여러 섬으로 구성된 입헌군주국으로 우폴루와 사바이 등 2개의 주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옛 이름은 서사모아(∼1997. 7)이며 수도는 아피아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폴리네시아계 사모아인이며 폴리네시아와 영국의 전통을 혼합한 헌법을 사용하고 있다. 문맹률은 아주 낮으며 대부분의 국민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해외이민으로 인해 연평균인구성장률은 낮다.

 

사모아 제도에 속해 있는 사모아는 우폴루(1,119㎢)와 사바이(1,707㎢) 등 2개의 주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섬은 높은 화산섬이며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고 사바이 섬의 최고봉은 실리실리 산(1,859m)이다.

 

화산활동은 서쪽으로 진행되어왔는데, 지형적으로 사바이가 가장 최근에 생성된 섬이며 1905∼10년 마타바누의 화산, 1902년 무 산, 1690년경 아피 산이 화산폭발을 했다. 사모아에는 7개의 작은 섬이 있는데, 이중 아폴리마 섬과 마노노 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다. 사바이의 중앙 화산들은 용암고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 용암고원은 구릉지대와 해안평야로 계속 이어져 있다. 우폴루의 중앙 화산지대는 해발 1,097m의 피토 산에서부터 구릉지대와 해안 평야지대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들 두 섬에는 폭포와 물살이 빠른 강이 여러 개 있다.

 

우폴루의 북부 해안에 있는 아피아는 연강우량 3,000㎜로 이 빗물이 분화구의 수원이 된다. 이 섬들의 내륙지방에서는 연강우량 7,000㎜를 기록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것은 아니다. 남동무역풍이 부는 5∼11월에는 기온이 22℃를 기록하며 11∼3월의 우기에는 36℃까지 올라간다. 1∼3월에는 강한 태풍이 불어오는데, 1889, 1966, 1968년에는 최악의 태풍이 이 섬들을 강타했다. 이 섬들의 화산토양은 비옥하지만 투과성이라 쉽게 마른다.

 

산이 많은 섬 중앙부에는 키 큰 상록우림, 코코스야자, 바링토니아속 식물, 판다누스가 숲을 이루고 있다. 지대가 낮은 습지는 홍수림으로 덮여 있으며 포도나무·양치나무 등이 많다. 동물상이 매우 희박하여 이 섬에서만 볼 수 있는 몇 종류의 도마뱀, 2종(種)의 왕뱀과 함께 큰 박쥐와 작은 박쥐들만이 서식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50여 종의 새가 서식하고 있는데 이중 아주 희귀한 디둥쿨루스 스트리기로스트리스 비둘기를 비롯한 16종의 조류들은 이 섬 고유의 새들이다.

 

담수 새우와 뭍게 종류들도 발견된다. 사상충증을 옮기는 모기, 독성이 약한 지네류와 전갈류들이 있으며, 1911년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서 우연히 유입된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남방장수풍뎅이와 같은 곤충들이 있다. 폴리네시아의 쥐·야생짐승·돼지는 사람들에 의해 섬으로 유입되었다. 사모아에는 광물자원이 없으나 수력발전의 가능성은 매우 높다.

 

라피타 도기를 만든 폴리네시아인들은 BC 1000년 사모아 제도에 처음 정착했다.

 

사모아어의 특성을 보면 정착민들이 통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200년경 도기제조가 중단되었고 그때까지는 사모아가 중심지였지만 사모아를 출발점으로 하여 폴리네시아 동부의 많은 지역에 정착이 이루어졌다. 하와이키(사모아어:사바이)는 다른 섬 사람들의 전통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떠나온 고향과 매우 유사했다. BC 300년경 사모아에는 상당한 숫자의 정착촌이 있었으나 응집력이 없었다. 이 정착촌에는 가정집, 제사용 고분, 농업용의 계단식 대지들이 있었으며 특히 고분에는 독특한 별 모양의 고분들과 함께 풀레멜레이·팔라울리 지역 및 사바이 섬 등의 남태평양 도서에 현존하는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고분들도 있었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잠시 동안 최고 지도자가 있는 계층화된 사회와 요새화된 정착촌들이 나타났다(폴리네시아 지리적 인종). 1722년 네덜란드의 항해가 야코프 로헤벤이 이 섬들을 발견했고 1768년 프랑스의 탐험가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이 섬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사모아인들의 카누 다루는 솜씨를 보고 이 제도를 네비게이토 제도라고 명명했다. 1787년 라 페루스 백작인 장 프랑수아 드 갈로가 이 섬들을 측량했다.

 

런던 선교회 회원 2명은 1830년 사바이에 정착한 뒤 1834년경 사모아어를 글로 기록했다(선교). 사모아의 지도자는 1838년 영국 선박 콘웨이호의 베선 선장, 1839년 미국 측량대 대장 찰스 윌크스와 각각 상업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근거해서 사모아는 유럽·미국과의 대외관계를 전개했다. 1847년 대영제국, 1853년 미국, 1861년 독일은 각각 사모아에 영사를 임명했고, 유럽 이주민들과 상사 대리점이 1800년대 중반까지 아피아 부근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국인의 지원을 받은 사모아의 최고 지도자들은 이 나라의 절대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1848∼73년에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미국의 특수요원 A.B. 스타인버거 대령의 중재로 평화협상(1873)을 체결함으로써 종결되었다.

 

1875년 스타인버거는 유럽식의 헌법 초안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1876년 영국군에 체포되어 국외추방을 당할 때까지 이 나라의 실질적인 독재자 노릇을 했다. 당파간의 교전상태가 다시 시작되자, 1879년 영국은 영국이 지배하는 지방자치체를 설치했다. 지도자간의 계속되는 분쟁과 아피아에 대한 영향력을 쟁취하기 위한 영국·독일·미국 간의 경쟁은 1889년 3월 16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은 독일 군함 3척과 미국 군함 3척이 태풍을 피하여 아피아 항에 정박해 있던 중 해변으로 밀려나오거나 침몰함으로써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독일·미국 3국은 1889년 사모아의 독립과 중립에 합의하는 베를린 조약을 체결했다. 사모아 국왕과 지도자 간의 분쟁이 다시 시작되자 1899년 재소집된 강대국 3국은 1889년의 조약을 무효로 하고 사모아 제도를 병합했다. 이때 독일이 경도 171°를 기준으로 서쪽 섬들에 대한 우선권을, 미국이 동쪽 섬들에 대한 우선권을 인정받았다(대영제국).

 

독일 통치하에서 고통을 받던 사모아인들은 1908년 사바이에 근거지를 둔 마우 아 풀레 저항운동을 결성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뉴질랜드가 사모아를 점령했고 군부통치하에서 유행성 독감으로 총인구의 1/5이 넘는 8,500명의 사모아인들이 죽었다. 1920년 국제연맹은 가맹국인 뉴질랜드에 사모아의 위임통치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계속되던 마우 아 풀레 저항운동은 1929년의 총격전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1936년부터 뉴질랜드 정부는 화해정책을 추진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단되었다. 미군이 우폴루에 공항과 도로를 건설한 것이 경제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질랜드가 통치하는 UN의 신탁통치령이 되었으나, 국가위원회 및 포노의 결성(1947)과 함께 사모아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1961년 헌법초안이 승인되었고, 뒤이어 실시된 UN 감시하의 국민투표에서 독립결의안과 함께 헌법초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비준되었다.

 

마침내 사모아는 1962년 1월 1일 독립이 되었고 그해 말경에 뉴질랜드와 우방조약이 체결되어, 뉴질랜드는 사모아의 요청이 있을 때에 한해 사모아의 대리국으로 외교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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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아(남태평양 입헌군주국) = 천연풀장

 

■ 사우디아라비아 Saudi Arabia

사우디아라비아왕국, Kingdom of Saudi Arabia

 

아랍족의 발생지는 중앙 아라비아와 북아라비아로 추측된다. 이슬람 이전 시대의 중요한 아라비아 부족으로는 홍해 연안 헤자즈 지방 북부에 자리잡고 살던 타무드족과, 데단과 그 주위에 살던 리히아니트족을 꼽을 수 있다. 아라비아 반도 외부의 아랍 민족들은 고대부터 아라비아를 지배하고 영향을 끼쳤다.

 

트란스요르단으로 알려진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라흠 왕조는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한 최초의 왕국으로 남아라비아의 국경지대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중앙 아라비아 서부의 킨다 국이 4세기와 5세기에 라흠 왕조로부터 중앙 아라비아 대부분의 지배권을 강제로 빼앗았으나 528년에 다시 밀려났다.

 

622년 메카에 거주하는 쿠라이시가(家)의 마호메트가 알라 신(神)을 유일신으로 설교하면서 메디나로 이주하여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로써 서구세계의 3대 일신교 가운데 가장 늦게 이슬람교가 성립되었다. 마호메트는 메디나에서 더욱 많은 신도를 얻었으며 메카로 돌아와 이곳을 점령하고 메카·메디나 두 곳을 자신이 창시한 새 종교의 성지로 삼았다. 그러나 661년 이슬람 왕조 우마이야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아 건국함으로써 이슬람교의 정치 중심지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다마스쿠스로 넘어갔다.

 

중세 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의 지배권을 차지하려는 내부·외부의 지배자들 간에 끊임없는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들 대부분은 칼리프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자치를 보장받았으며 사실상 독립되어 있었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정권을 인수하기 전까지는 아라비아에서 카르마트파(派), 파티마조(朝), 셀주크 왕조, 아이유브조, 맘루크조 등 여러 세력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아라비아의 현대사는 오스만 통치에 대한 반감이 증대되고 18세기초에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1745년 무하마드 이븐 아브드 알 와하브가 이슬람의 외적 형식주의와 근대주의를 탈피하고 〈코란〉에 밀착하는 교리 엄수주의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디리야의 무하마드 이븐 사우드 왕의 지지를 받았고, 그결과 와하브주의 운동이 아라비아 반도에 널리 퍼져나갔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의 저항으로 난관에 부딪혔으나 싸움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1904년까지는 이븐 사우드(아브드 알 아지즈 2세) 왕에 의해 중앙 아라비아(나지드 지방)의 원래 사우디의 영토 모두를 되찾았다. 1915년 이후 사우디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27년 헤자즈와 나지드 왕국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받았다. 두 왕국은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의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지지하고 미국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81년 사우디아라비아는 페르시아 만 연안의 여러 나라를 포함하는 하나의 지역 경제·방위 협정인 페르시아 만 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GCC)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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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왕실의 권력다툼 <1>

아내 22, 아들 45사우디 왕실 비극의 씨앗

유럽 왕실의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20 세상을 떠난 다이애나비에 여전히 열광하고, 젊은 왕자·공주의 연애를 궁금해합니다. 동화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왕실이 이렇지는 않습니다. ‘잔혹 동화 쓰고 있는 왕실도 있는 거죠. 대표적인 사례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로열패밀리입니다.  


세계 유가(油價) 좌지우지하는 중동의 패권국 사우디아라비아의 통치자는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비민주적 절대 왕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어느 왕실보다 호화롭지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름답지도 않고요.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세계뉴스] 이번엔 최근 번의왕실 쿠데타 왕세자를 갈아치운 사우디의 왕실 이야기입니다.  


 
조카 대신 아들 선택한왕실 쿠데타

지난 6 사우디 왕실은 왕세자 교체를 전격 발표했습니다. 살만 국왕의 조카인 무함마드 빈나예프(58)에서 국왕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살만(32)으로 왕위계승 1순위를 교체한 거죠.


조카 대신 아들을 선택한 국왕의 결정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난데없는 권력 재편의 내막이 무엇인지 세계의 이목이 사우디 왕실에 집중됐습니다. 절대왕정 국가에서 왕은 국가니까요

 

▲지난 6 살만 왕자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는 자리에 모인 사우디 왕가의 왕자들. [EPA=연합뉴스]

 

▲자신에게 왕세자 자리를 넘긴 나예프 왕자의 손에 맞추는 빈살만 왕세자.(왼쪽 사진) 아버지인 살만 국왕에게 예를 표하는 빈살만 왕세자. [AP·EPA=연합뉴스]

 

정통한 관계자들을 취재한 뉴욕타임스(NYT) 따르면 왕세자 교체는 이른바왕실 쿠데타였습니다.  

권력에서 밀린 빈나예프 왕세자는 발표 하루 전날왕궁으로 오라 전갈을 받았고, 영문을 모른 소환됩니다. 감금된 상태에서 그는자리를 넘기라 압박을 받습니다. 밤새 버텼지만 백기를 들고 맙니다. 자신을 밀어낸 사촌 동생에게 축복을 비는 동영상도 찍어야 했죠. 잡음 없이 왕세자를 갈아치우기 위해 사우디 왕실이 치밀한 시나리오를 준비해 뒀던 셈입니다.  


이후 빈나예프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수도에서 1000 떨어진 제다에서 가택연금 중입니다. 왕세자가 기반을 다질 때까지 죽이고 있으라는 의미겠죠.
 
권력의 속성이라지만 참으로 비정합니다. 왕세자였던 자를 단칼에 쳐낸 것도 모자라 멀리 유배까지 시켰으니 말이죠. 하지만 사우디를 통치하는 알사우드 가문의 과거를 되돌아본다면, 이번 왕세자 교체는 평화롭습니다. 누구의 손에도 피가 묻지 않았으니까요.      


아내 22, 아들 36피튀기는 형제간 다툼  

사우디는 왕위를 형제가 세습합니다. 1953 사망한 초대 국왕 이븐 사우드가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준 지금까지 형제들이 사우디를 통치해 거죠.  


22
명의 아내를 뒀던 이븐 사우드 국왕은 아들만 45명을 낳았습니다. 살아남은 아들이 36. 지금까지 6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2
사우드(2), 3 파이살(4), 4 칼리드(7), 5 파드(11), 6 압둘라(13), 7 살만(32) 국왕이 그들입니다


어머니가 제각각인 이복형제들 사이에 왕권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이 없었을 리가 만무하죠.  


 

53 처음 왕권을 물려받은 사우드는 이븐 사우드의 번째 아내 소생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왕관과 석유를 물려받으면서 막대한 빚도 받았습니다. 즉위한 빚은 곱절이 됐고요. 그런데도 호화로운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었죠.  

즉위 직후부터 권력 다툼을 벌였던 이복동생 파이살이 그를 몰아낸 겁니다. 파이살은 형이 치료를 위해 해외에 체류 중일 측근들을 처치하고 형을 퇴위시켰습니다. 사우드는 그리스로 망명했고 사망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갈 있었습니다.  
 


망명·복수·피살·참수권력 앞에 가족 없다

형을 몰아내고 왕권을 쟁취한 3 국왕 파이살은 석유 생산을 늘려 재정을 안정화하고, 사우디를 현대적으로 개혁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인기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끝은 비극이었습니다. 즉위 10년만인 1975 조카인 파이살 무사이드 왕자에게 피살된 겁니다. 정확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설로 거론되는 것은복수입니다. 왕자가 파이살이 쫓아낸 사우드 국왕의 딸과 결혼할 예정이었다는 거죠. 어쨌든 왕자는 광장에서 공개 참수됐고 국왕 암살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이어 즉위한 칼리드 국왕은 6년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1982 파드 국왕이 집권합니다. 그는 사우디 왕실의 핵심수다이리 세븐 맏아들입니다. ‘수다이리 세븐 초대 국왕의 번째 아내인 하산 수다이리가 낳은 아들 7형제를 말합니다


배다른 왕자가 너무 많은 왕실에서어느 왕비의 아들이냐 파벌을 나누는 핵심 요인이 됐습니다. 다른 아내들보다 많은 아들을 낳았으며, 왕의 총애를 받았던 수다이리 왕비의 핏줄이 강력한 파벌을 형성할 있었고요.  
 
파드 국왕은 물론 국왕인 살만도 수다이리의 아들입니다. 튀기는 권력 다툼 속에서 어머니가 같은 아들이 씩이나 왕좌에 올랐다니. ‘수다이리 세븐 얼마나 특별한지 있습니다.  


수다이리 세븐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게 됐고, 나머지 왕자들과 대결하게 됩니다.  
 
사우디 왕실 잔혹사 번째 이야기에선 수다이리 7형제와 이들을 견제하려는 세력의 권력 다툼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오일머니 독식사우디 왕가의 초호화 라이프

사우디아라비아를 통치하는사우드 가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으로 손꼽힙니다. 초대 국왕 재임 시절 발견된 석유 덕분이죠.  


국부(國富) 왕가의 재산인 까닭에 사우디 국왕은 사우드 주식회사 최고경영자(CEO) 불리기도 합니다.
 
살만 국왕의 재산은 170 달러( 19 2500억원). 파리 에펠탑과 세느강변에 위치한 여러 채의 아파트, 프랑스 남동부 휴양지인 코트다쥐르의 고성, 스페인 휴양지 마벨라의 궁전 등이 포함됩니다.  


사우디 국왕은 재산에 걸맞는 호화 생활로도 유명한데요. 움직일 때마다 동원되는 수백 명의 수행원과 수백 대의 검은 리무진은 기본입니다. 여름에 머물곤 하는 홍해 휴양지의 궁궐엔 국왕만을 위한 의료진이 대기 중이고, 프랑스에서 공수한 캐비어·트러플 등을 요리하는 최고의 셰프가 상주하고 있죠.

 

▲지난 3 일본을 방문한 살만 사우디 국왕이 황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용기에서 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3월의 아시아 순방이 최근의 사례입니다. 당시 보도엔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국왕이 황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용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인도네시아 방문 459t 무게의 짐과 메르세데스 리무진 2개를 공수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체류 방문한 모스크에 국왕만을 위한 화장실을 따로 마련됐고, 의회 건물에도 국왕을 위한 맞춤 왕좌가 특별 제작·설치됐습니다. 신선한 낙타젖을 마시기 위해 낙타를 데리고 다닌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국왕이라고 사우드 가문에서 최고 부자인 아닙니다. 사우디 아니라 아랍 왕족 중에서도 가장 부자인 사람은 왈리드 탈랄 왕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초대 국왕의 열두 번째 아들인 탈랄 왕자.  


지난 5 포브스 기준 그의 자산 평가액은 178 달러( 20 1000억원)였습니다. 300 달러( 30조원) 넘겼던 때도 있었고요.  
 
20
전까지 그는 부동산으로 돈을 아랍 왕족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90년대 파산 위기에 몰렸던 미국 시티은행 투자로 글로벌 무대에 데뷔했고, 시티은행이 경기 호전에 따라 주가를 회복하면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투자 금액 5 5000 달러( 6200억원) 10억달러( 1 1000억원) 불어난 것이죠. 그는사우디 아라비아의 워렌 버핏으로 불리며 인정받게 됐습니다. 이후 킹덤 홀딩스를 운용하면서, 애플·아마존·코카콜라·이베이·AOL·포시즌호텔&리조트 등에 투자해 왔습니다.
 
저유가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왕족에게 부가 집중된 대한 지적이 일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가난해졌는데, 수천 명에 이르는 왕족들은 여전히 호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거죠.  


왕족들은 이런 지적에 아랑곳 않습니다. 뉴욕타임스(NYT) 프랑스의 부동산 업자를 인용 보도한 따르면, 사우디의 왕자·공주들은 지난 해에도 파리의 값비싼 부동산을 여럿 사들였습니다. 왕자는 3000 달러( 339억원) 넘는 1021 넒이의 호화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합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그래픽=신아영 인턴기자 

 

<2> 왕과 2 결혼한 미모의 왕비와 아들 7형제

이븐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초대 국왕이 22명의 부인에게서 아들 45명을 얻은 지난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세계뉴스] 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번째 부인 수다이리 왕비의 일곱 아들, ‘수다이리 세븐 세력이 강했다는 것도요.  


이번알쓸신세에선 수다이리 7형제의 권력과 그들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국왕 , 왕세제 막강수다이리 7형제

형제 세습은 형제들이 나이 순서대로 왕위를 물려받는 원칙으로 합니다


아무리 국왕의 총애를 받았다 해도 번째 부인인 수다이리 왕비의 아들들에게 왕위가 돌아올 때까지는 적지 않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들이 권력에 처음 다가간 칼리드 국왕(1975~1982 재임) 시절입니다. ‘수다이리 세븐 장남인 파드가 왕세제에 오르고 나머지 형제들도 요직을 차지하면서죠.

 

 

칼리드 국왕이 즉위 6 만에 사망한 1982 파드가 5 국왕에 즉위합니다. 이미 60세가 넘은 나이였지만 그는 2005년까지 무려 23년을 집권하면서 수다이리 권력의 철옹성을 쌓습니다. 형제들은 국방·내무장관 요직을 맡으며 권력의 핵심을 차지합니다
 
뒤이은 6 국왕 압둘라는 수다이리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즉위한 외신엔수다이리의 힘이 빠졌다 보도가 이어지기도 했죠. 왕국에서 왕의 자리를 내어줬으니 이런 보도가 나올 만도 했던 거죠. 하지만 이미 탄탄하게 다져진 수다이리파의 권력은 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압둘라를 이을 승계 순위 1위가 또다시 수다이리의 아들이었으니까요. 술탄 왕세제입니다. 그는 2011 국왕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왕위에 오르지는 못합니다.  
 
술탄을 이어 왕세제가 이도 수다이리의 아들 나예프였습니다. 그는 수다이리의 넷째 아들입니다. 셋째 아들인 압둘 라흐만이 있지만, 그는 후계자 인선을 담당하는충성위원회구성에 홀로 반대했다가 미운털이 박혀 승계 서열에서 제외됐습니다.   


 형을 제치고 왕세제가 나예프도 책봉 이듬해 사망합니다. 국왕인 형이 사망한 뒤에야 왕권을 물려받을 있는데, 압둘라 국왕이 예상보다 오래 사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거죠. 이처럼 형보다 먼저 사망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제는 사우디에 여럿입니다.


나예프가 사망한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 다섯 투르키를 건너 뛰고, 수다이리의 여섯 살만이 왕세제가 됩니다. 국왕이 살만입니다.  


아들 7 국왕이 자가 , 왕세제였던 자가 . ‘수다이리 세븐 위력이 짐작되고 남습니다

 

▲1945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난 이븐 사우드 사우디 초대 국왕.[AP=연합뉴스]

 

▲1980 사우디를 방문한 최규하 대통령이 칼리드국왕과 회당 중이다. [중앙포토]


예상 깨고 장수한 압둘라수다이리 핏줄 견제   

수다이리의 소생이 아니었던 6대 압둘라 국왕은 원래 세력이 미미했습니다. 즉위할 때 이미 나이가 여든을 넘었고요. 아마 수다이리파는 압둘라 국왕을 잠시 거쳐가는 과도기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압둘라 국왕은 10년을 재위합니다. 그 새 수다이리 세븐의 두 왕세제가 먼저 사망한 거고요.  
 
압둘라 국왕은 왕위를 지키는 동안 수다이리파를 견제할만큼 힘을 키웁니다. 말년엔 자신의 아들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고요. 살만 왕세제를 축출하기 위한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2015 서거 직전엔 이복동생인 무크린 왕자를 부왕세제에 지명했습니다. 지명을 번복할 없다는 칙령까지 선포합니다


압둘라가 이렇게까지 부왕세제를 못박은 왕세제인 살만이 아닌 무크린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당시 사우디엔 살만이 치매를 앓고 있으며 얼마 살지 못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런 살만을 제치고 무크린을 왕좌에 앉혀 ‘수다이리파 뿌리뽑고 싶었던 거죠.
 
그러데 말입니다. 2015 7 국왕에 오른 살만은 멀쩡했습니다. 즉위 초엔 치매설, 궁정 쿠데타설이 돌면서 왕권을 흔들려는 움직임이 이어졌지만, 살만은 굳건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뒤를 잇기로 정해진 무크린을 퇴위시킵니다. 대신 조카인 빈나예프를 왕세자로 책봉합니다. ‘수다이리 세븐 넷째로, 앞서 왕세제 신분으로 세상을 나예프 왕자의 아들입니다. 지난 6 물러난 바로 빈나예프이기도 합니다.  
 
당시 결정은수다이리의 핏줄 다시 권력을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마침내 아들에서 손자 세대로, 사우디 왕실이 세대 교체를 선언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지난 4 사우디아라비아의 거리에서 촬영된 대형 입간판. 당시 왕세자였던 빈나예프 왕자(왼쪽), 살만 국왕(가운데), 새로 왕세자에 책봉된 빈살만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수다이리 왕비의 핏줄이다.[AP=연합뉴스]


부자 세습으로 전환권력 장악한 수다이리파

이후 살만 국왕은 자신이 오랫동안 그려온 구상을 실천에 옮깁니다. 빈나예프를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 빈살만에 책봉한 겁니다. 형제 세습에서 부자 세습으로 일대 전환을 이룬 거지요.    
 
사우디 국왕의 재위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았습니다나이 순서에 따라 형제가 왕위를 물려받다 보니 한참 나이 들어서야 왕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5 국왕인 파드 국왕이 이레적으로 23 재위했지만, 2·3·4·6 국왕의 재위 기간은 1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사우디 왕실의 세대 교체는 이런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싶은 살만 국왕의사심 물론 컸겠지만, 젊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있는 왕에 대한 필요성도 느꼈겠죠.  
 
왕세자 교체 직후인 지난 7 로이터 통신은살만 국왕이 생전에 아들에게 왕권을 이양할 있다 보도했습니다. “이미 양위 선언문을 녹음해뒀다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실제 국왕의 퇴위가 이뤄질지 여부는 없습니다. 다만 쇄신하겠다며 세대 교체를 선언한 사우디가 앞으로 달라질 있을지, 변화가 중동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세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국왕과 2 결혼한 수다이리 왕비

하사 빈트 아메드 수다이리는 이븐 사우드 국왕의 번째 부인이자 가장 사랑받은 아내입니다
미모가 출중하고, 현명하며 강인했던 그는 가장 많은 자녀까지 낳아 사랑을 독차지했죠. ‘수다이리 세븐으로 불리는 일곱 아들 아니라 딸도 넷을 뒀습니다.    


수다이리는 아라비아 반도 나즈드 지방의 토호, 수다이리 가문 출신입니다. 사우디 건국 사상의 토대인 와하비즘의 발원지가 수다이리의 고향이죠. 주요 지역의 유력 집안 출신이라는 수다이리의 배경은 훗날수다이리 세븐 나머지 왕자들과의 세력 다툼에서 승리하는 영향을 미쳤을 터입니다.  

 

▲지난 6 사우디의 왕세자에 책봉된 살만 국왕의 아들 빈살만(가운데) 수백 명을 넘는 사우디 왕자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는 행사에 참석한 모습. 현재 사우디는 수아디리 왕비의 아들인 살만 국왕, 손자인 빈살만 왕세자가 권력을 쥐고 있다. [EPA=연합뉴스]

 

수다이리는 13세일 38세인 국왕의 8번째 부인이 됩니다. 국왕과의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은 이내 깨지고, 수다이리는 국왕의 이복 형제와 재혼을 합니다. 아들도 낳았고요. 하지만 수다이리를 잊지 못했던 왕은 이복동생을 이혼시키고 수다이리와 재혼 합니다. 10번째 부인으로 다시 맞은 겁니다.  


1969
수다이리는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가 낳은 아들들은 사우디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아들인 살만이 국왕, 손자인 빈살만은 왕세자입니다. 수다이리의 핏줄이 마침내 권력을 독점하게 거죠.


사우디는 죽은 왕비 수다이리의 나라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겠죠

중앙일보

 

◇성지순례

▲사우디의 메카

 

▲하지 - 이슬람승지순례 아라비아메카에 200만이상 ,아라파트 언덕은 모하메트가 최후의 설교를 한

 

 

 

 

▲랜드 사원에 모인 수만병의 이슬람 순례객들-사우디아라미아의 하지 행사

 

 

 

 

 

 

 

 

 

 

 

▲엄청난 이슬람 교도들,11.10.31. 사우디 카바신전앞

 

 

▲무슬림들의 금요기도 - 사우디 그랜드 모스크 12. 3.30.

 

 

 

 

▲성지순례 사우디 2017.08.30 아라파트 산

 

 

 

 

 

◇일상

▲모래폭풍

▲타부크 사막에 눈이 내렸다 13.2.1.

 

 

▲홍수 13.1.30.

 

 

 

■ 세르비아 Serbia

세르비아 공화국, Republic of Serbia

▲국기

 

세르비아는 북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서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남서쪽으로는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남쪽으로는 마케도니아, 동쪽으로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북쪽으로는 헝가리와 경계를 이룬다. 이전에 자치주였던 보이보디나와 코소보가 각각 북쪽과 남쪽을 차지하고 있다. 수도는 베오그라드이다.

 

중·남부 지역은 산지로, 서쪽에는 디나르알프스, 남쪽에는 샤르 산맥과 북알바니아 알프스(프로클레티예), 동쪽에는 발칸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이 있다. 이 지역에 있는 많은 봉우리들이 해발 1,800m를 넘는다. 세르비아의 가장 높은 곳은 남부의 코소보 지역을 포함하는 코소보 분지와 메토히야 분지의 산간지대이다.

 

중부에는 슈마디야('수목으로 뒤덮인 지역'이라는 뜻)라는 구릉지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도나우 강이 2개의 중요한 지류인 티소·사바 강과 합류하는 보이보디나 지역에는 낮은 평원이 있다. 도나우 강은 헝가리로부터 보이보디나로 들어가 남동쪽으로 흐르며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의 경계 중 일부를 이룬다. 중·남부 세르비아에는 북쪽으로 모라바 강이 흐르는데 베오그라드 동쪽의 도나우 강과 만난다.

 

세르비아의 기후는 대륙성으로, 춥고 건조한 겨울과 따뜻하고 습한 여름을 보인다. 보이보디나의 7월 평균기온은 22℃이며, 1월 평균기온은 영하 2℃에서 0℃에 이른다. 강수량은 560∼1,900㎜ 정도로 고도와 방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세르비아는 주변의 나라들과 구별되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세르비아어는 발음과 단어가 구별되기는 하지만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몬테네그로어와 본질적으로 같은 언어이다. 언어학적으로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라고 일컬어지는 이 언어는 각 나라에 따라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또는 몬테네그로어라고 불려진다.

 

세르비아인은 라틴문자 대신 키릴문자를 사용하고 동방정교회를 믿는다. 크로아티아인은 로마 가톨릭교를, 보스니아인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는다. 세르비아인의 약 1/4이 세르비아 이외 지역에 살고 있으며, 대다수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에 거주한다.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지역을 제외한 세르비아 본토에서는 세르비아인이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한다.

 

1990년대 많은 세르비아인이 코소보 지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알바니아인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인구를 차지하고 있다. 알바니아인의 높은 출생률과 민족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일부분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세르비아 측과 알바니아인 사이에 갈등을 빚고 있다.

 

북·중부 세르비아와 보이보디나 지역이 세르비아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인 반면 코소보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한다. 보이보디나의 비옥한 평원에서 국내 곡물·담배·사탕무의 대부분을 생산한다. 중부 구릉지대에서는 낙농제품·과일 등을 생산하며 가축을 기른다. 하지만 광업과 제조업이 세르비아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금속제품·전자기기·기계류·직물·식료품 등이 생산되고 있다.


코소보에는 납과 아연이, 중부 세르비아와 코소보에는 석탄이 매장되어 있으며 동부 세르비아에는 구리가, 보이보디나에는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 대부분의 철도망은 보이보디나에 있다.

 

남(南)슬라브족에 속하는 세르비아인들은 7세기에 발칸 반도에 도달했다. 〈프랑크 연감 Frankish Annals〉(822)에 처음 이름이 오른 세르비아라는 말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루사티아(지금의 헝가리)에 살던 슬라브족들이 자신들을 세르비아와 비슷하게 소르브라고 불렀다. 처음에 이들은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대신 같은 씨족들끼리 집단을 형성해서 정치·군사적 지도자격인 '주판'이 통치하는 지역에 거주했다. '주판' 무티미르는 879년경에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세르비아는 1331∼55년에 스테판 두샨의 통치하에서 번영을 누렸다.

 

한편 스테판 두샨은 1346년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들의 차르(황제)라는 칭호를 받고 알바니아·에피로스·아이톨리아·테살리아를 다스렸다. 1355년 그가 죽은 후 차르 우로슈(1355∼71 재위)하에서 세르비아는 쇠퇴해갔다. 1389년 6월 28일(구력 6. 15) 세르비아는 코소보 전투에서 투르크에게 대참패를 당했으며 군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생포되어 참수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세르비아인들은 항복보다는 죽음을 택했는데 이것은 세르비아인들에게 민족의식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1459년 이후 세르비아는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세르비아의 모든 영토는 술탄의 재산이 되었고 세르비아인들은 그 영토에 묶인 노예로 전락했다. 그들의 민족적 동질성은 1557년 페치를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 총대주교구가 복구되고 나서야 비로소 회복되었다. 1716∼18년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은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끝났으며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바나트 지방, 베오그라드, 슈마디야라고 알려진 도나우 강과 사바 강 남부의 세르비아 인근 지역까지를 얻었다. 그러나 투르크의 국경지역은 1739년에 회복되었다.

 

세르비아의 독립운동은 카라게오르게(1804∼13)와 밀로슈 오브레노비치 1세(1828∼29)가 이끈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 전쟁(1828∼29) 이후 세르비아는 투르크의 속국이면서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자치공국임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78) 당시 세르비아는 러시아편에서 싸웠다. 1878년 7월 베를린 회의에서 세르비아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몇 개의 작은 지역들이 추가되었다. 세르비아는 1882년 3월 6일 왕국임을 선포했다.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세르비아는 발칸 동맹을 결성했다.

 

1912년 10월 세르비아·불가리아·몬테네그로·그리스는 함께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 결과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 북부를 얻어 영토가 2배로 커졌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 전쟁으로 인해 세르비아 인구의 23%가 희생되었다.

 

1918년 세르비아는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된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 왕국은 1929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다(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1946년에 제정된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따라 세르비아 연방공화국의 영토는 1918∼29년의 세르비아보다 작아졌으며 동시에 몬테네그로와 과거 세르비아 영토였던 마케도니아도 세르비아와는 별개의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그후 40년 동안 세르비아 공산주의자들이 유고슬라비아의 정치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계획경제제도와 세르비아 사회주의당의 주도적인 역할을 고수하려한 것이 결국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유고슬라비아는 1980년대에 국내 경제가 악화되면서 해체되기 시작했다.

 

1991년 슬로베니아가 독립한 후, 위기감을 느낀 유고슬라비아 군대 내의 세르비아 군인들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동부와 북부에서 이슬람교도 및 크로아티아인을 몰아내는 데 가담했다. 결국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해체되었고,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와 함께 신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구성했다. 그 후로도 그치지 않던 이 지역의 분쟁은 결국 1995년 데이턴 협정(Dayton Peace Agreement)으로 겨우 진정되었다.

 

세르비아에서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20세기 말 내내 권력을 장악했는데, 여기에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이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1998~99년에, 싸움은 또 다른 국면으로 들어섰다. 이 지역의 폭력사태가 극한으로 치닫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공습으로 대응했고, 1999년 6월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2000년 후반 유고슬라비아는 정권이 교체되면서 국제연합(UN)에 재가입했다. 2003년, 몬테네그로 정부가 독립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결국 두 나라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라는 이름으로 연방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연방을 유지하면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 요구는 계속되었다.

 

몬테네그로는 2006년 5월 21일 실시된 연방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독립 찬성표가 55.4%로 나와 EU가 정한 독립가결기준인 55%를 초과했다. 6월 3일 몬테네그로 의회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에서 분리독립을 결정한 국민투표 결과를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독립을 공식 선언했다.

 

몬테네그로가 연방에서 독립함으로써 세르비아·몬테네그로·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마케도니아·슬로베니아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됐던 옛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해체되었다.

다음백과

 

◆일상

▲난민 = 세르비아와 헝가리 국경통과로 봉쇄

 

▲헝가리 경찰의 물대포 발사 15.9.16

 

 

▲사바강의 겨울

 

▲세르비아 폭포

 

▲세르비아를 비롯 발칸반도에 120년만의 대홍수 - 14.5.18 베오그라드

 

 

 

 

 

■ 세이셸 Seychelles

세이쉘 공화국, Republic of Seychelles

▲국기

 

세이셸 공화국을 구성하는 섬들은 크게 두 제도로 나뉜다. 공화국 중앙부에 위치한 40개의 산악성의 화강암 섬들은 첫번째 제도로 마헤 제도라 불리며, 공화국 외곽에 위치한 70개 이상의 평탄한 산호섬들이 그 나머지 제도이다.

 

마헤 제도는 전형적인 바위섬들로, 협장한 해안저지와 중앙의 구릉지대로 되어 있다. 열대식물이 무성한 이 섬들은 은빛 모래사장과 맑은 석호 위로 우뚝 솟은 공중정원을 연상하게 한다. 해발고도가 몇 피트밖에 되지 않는 산호섬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생성·융기된 산호초들로 이루어진 평탄한 섬들이다. 이 섬들은 대체로 물이 나지 않으며 사람이 거주하는 곳도 거의 없다.

 

열대해양성기후로, 연평균기온은 해수면 기준 21∼32℃이다. 강우량은 섬마다 격차가 심하며, 마헤 제도에 속한 섬들의 연강우량은 해수면에서 2,300㎜, 산등성이에서 3,560㎜를 나타내고 있다. 습도는 항상 높지만, 이 섬들에 종종 불어오는 남동무역풍을 맞는 지역의 습도는 다소 낮다. 야생동물로는 황소거북과 바다거북 등이 있으며 벌레는 거의 없다. 이 섬 안에는 위험한 동물이 없지만 주변 바다에는 상어가 많다.

 

세이셸에 처음 도착한 것으로 기록된 사람들은 영국동인도회사의 탐험대였다(1609). 그후 이 제도는 1742, 1744년에 프랑스인 라자르 피콜에 의해 답사되었으며, 1756년 프랑스에 공식 합병되었다.

 

이 제도는 세셸로 불렸으나, 훗날 영국에 의해 세이셸로 바뀌었다. 1810년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 결과 세이셸 제도는 영국의 점령하에 들어갔고, 1814년 파리 조약에 의해 정식으로 영국에 양도되었다. 1903년 세이셸은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1948년에는 투표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입법회의가 생겨났다. 1970년 세이셸은 새로운 헌법과 성인 보통선거, 다수당 의원으로 구성된 통치보좌기관을 설치했다.

 

1975년에는 자치정부가 허용되었으며, 1976년에는 영연방 내의 독립국이 되었다. 1975년에는 제임스 R. 맨첨을 대통령으로 하고 프랑스 알베르 르네를 국무총리로 하는 연립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77년 르네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다. 1979년 르네는 헌법을 개정하고, 파리 조약에 의거해 트로멜린 섬(영국의 양해 아래 1954년 이래 프랑스가 소유했음)에 대한 세이셸의 권리를 주장했다. 세이셸의 국내정치는 지금까지 불안한 상태이다. - 다음백과

 

◆풍경

▲세이셸 마헤 섬

 

▲세이셸 빅토리아 이룰 미후 나바삭띠 비나야가르 사원

 

▲세이셀 라디그 섬의 앙스 수스 다정 해변

 

▲파이어빛 바다

 

▲세이셀 라디그섬 그랑앙스 해변

 

■ 소말리아 Somalia

소말리아 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Somalia

 

아프리카의 뿔'에 해당하는 대륙 최동단의 돌출부에 위치하는 아프리카 북동부의 국가. 수도는 모가디슈(무크디쇼)이며 화폐는 소말리아실링이다. 민족은 소말리족 85%, 반투족 15%으로 구성되어 있고, 언어는 소말리어와 아랍어를 혼용하며, 종교는 수니파 이슬람교이다. 소말리아 인구의 2/3 이상이 유목민이거나 반유목민인데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통한다.

 

소말리아의 북부와 동부 해안은, 고대 이집트의 문헌에 의하면 푼트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10세기에 이슬람교도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 이민들이 아덴 만과 인도양 연안의 곳곳에 무역 거점을 형성했다. 10세기에 이르러 아덴 만에서 들어간 내륙지방은 소말리아 유목민들이, 그리고 남부 및 서부는 전원생활을 하는 여러 집단의 갈라족이 차지했다. 이무렵 모가디슈·메르카·브라바·제일라·베르베라 등의 무역 중심지에서는 이슬람교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 나라에 대한 유럽의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된 것은 1839년 영국이 아덴 만 일대를 차지했을 때부터이다.

 

영국은 1884년 소말리아 북부 지역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한편 이탈리아는 1889년에 소말리아 북동쪽 모서리에 2개의 보호령을 만들고, 1905년에 소말리아 해안 남부 지역에 또다른 식민지를 건설했다. 1900년대 초반 소말리아 자치령에 대한 영국의 지배는 사이이드 모하메드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당시 사이이드 모하메드는 전국 이슬람교도들을 결속하여 영국 식민주의자들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에서는 이탈리아인 이주가 더욱 증가하여, 1936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0년 이탈리아는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침공했으며, 1년 후 영국군은 이 지역을 재탈환하고 전지역을 1950년까지 영국 통치하에 두었다.

 

1950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이탈리아에 의해 통치되는 UN의 신탁통치지역이 되었다. 이 지역은 1960년 과거의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과 하나로 합쳐져 독립 소말리아 공화국이 되었다. 1967년 아브디라시드 알리 셰르마르케가 대통령에, 그리고 무하마드 하지 이브라힘 에갈이 총리에 선출되었다.

 

셰르마르케는 1969년에 암살되었고, 에갈 총리의 정부는 무하마드 시야드 바레 소장이 주도한 군사혁명으로 붕괴되었다. 시야드 바레는 의회제도에 기초한 정권 대신 군장교들로 구성된 최고혁명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소련과 강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77년 소말리아는 영토합병을 목적으로 주민 대부분이 소말리아계 사람인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을 침공했으나, 이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오가덴 전쟁 당시 소련은 에티오피아를 지원했고, 소말리아는 소련과의 관계를 끊고 미국을 동맹국으로 삼았다. 1980년에 오가덴 지역에서 게릴라전이 발생하여 이 지역으로부터 여자와 어린이들이 대대적으로 탈출하자, 바레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국가비상사태는 소말리아가 유럽 국가들 및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기 시작하면서 1981년 말에 해제되었다.

 

바레 대통령은 1984년 12월 자신이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직과 총리직을 겸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1990년까지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바레는 부족에 기초한 반정부 집단 연합체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소말리아는 부족 또는 부족연합체가 관장하는 여러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지역간의 무력충돌이 발발하면서, 이미 오랜 가뭄으로 나빠진 식량사정이 더욱 악화되어 약 1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소말리아인 들이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1992년 12월 미국의 주도하에 다국적군이 안정적 식량보급을 비롯한 구호 및 내전 종식을 위한 소말리아 내 평화유지활동에 들어갔다. 1993년 1월과 3월 15개 파벌 대표들이 아디스아바바에 모여 평화 및 무장해제를 위한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해 6월 평화 무드는 깨졌으며, 파견군대의 인명피해 속출에 부담을 느낀 미국·유럽 등은 1994년 3월까지 소말리아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국제연합(UN)군은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연합군을 단계적으로 축소했으며, 내전을 촉발시킨 부족에 기초한 파벌간의 대립과 긴장은 미해결 상태로 남게 되었다.

다음백과

 

◆일상

▲홍수 -13. 5. 13.

 

 

 

 

 

 

 

■ 수단 Sudan

수단 공화국, Republic of the Sudan

수단이라는 이름은 아랍어로 '흑인들의 땅'이라는 뜻의 '빌라드 앗수단'에서 유래했다. 북쪽은 사하라 사막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서아프리카 삼림지대 및 콩고 강 유역까지 뻗어 있다.


주요 강으로는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세네갈 강과 나이저 강 등이 있다. 주민은 대부분 흑인이며, 이들은 주로 반투어를 사용한다. 주민들 중에는 이슬람교도가 많고, 인구밀도는 대체로 낮은 편이다. 가축사육이 주요 경제활동이다.


프랑스와 영국 등의 유럽 국가들이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했는데,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기 독립국이 등장하기 시작할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후에 이집트가 이 지역을 침공했고, 1899년에는 영국-이집트의 공동 통치체제가 수립되었다. 1956년 수단이 독립을 선포했다.

수단이라는 이름은 아랍어로 '흑인들의 땅'이라는 뜻의 '빌라드 앗수단'(bilād as-sūdān)에서 유래한 것으로, 적어도 12세기부터 사용되어온 지명이다.

 

북부는 사헬이라고 알려진 강우량이 적고 증발이 심한 반건조성 지역에 해당한다. 수단 평원은 북위 8~16°에 걸쳐 있으며, 대서양 쪽으로는 카보 베르데로부터 에티오피아의 고원지대 및 홍해에 이르기까지 5,500㎞ 이상 뻗어 있다. 또 북쪽은 사하라 사막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서아프리카 삼림지대 및 콩고 강 유역까지 뻗어 있다.

 

BC 30000∼20000년에 니그로이드 수렵채취인들이 누비아 문화의 토대를 이룩했다.

 

그들은 BC 3000년경 이미 야생동물들을 길들였다. BC 2181년 이후 얼마 동안은 리비아에서 온 이주민들이 이 지역에 모습을 나타냈으며, 나중에는 누비아 지역 대부분을 이집트가 강점하여 누비아 문화에 이집트풍을 가미시켰다. BC 11세기부터 AD 4세기까지 이곳은 쿠시 왕국의 일부분이 되었는데, 이집트화된 누비아인의 나라인 쿠시 왕국은 BC 713∼671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이집트를 지배했다.

 

AD 6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수단에 이주해온 뒤 그 지역의 왕국 셋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후 이들 흑인 그리스도교 왕국들은 수세기에 걸쳐 이집트에 있는 자신들의 이웃 이슬람교도 아랍인들과 공존공생했다. 그러나 13∼15세기에 점점 더 많은 아랍 유목민들이 이집트로부터 수단 북부지역으로 남하하여 그 지역 일대의 그리스도교 왕국들을 붕괴시켰다.

 

1500년경 아랍 연맹군은 수단 남단에 있는 그리스도교 왕국인 알와 왕국을 무너뜨렸고, 이후 수단의 북반부는 대부분 이슬람교도 아랍인인 혼혈종의 거주지가 되었다.

 

19세기초 이집트의 위정자들은 수단을 나일 강 유역 전체를 포함하는 1개의 주(州)로 통합하려 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집트는 1821년부터 수단에 대한 계속적인 군사원정을 감행했고, 1874년 수단 전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수단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집트의 총독 이스마일 파샤(1863∼79 재위)는 야심에 찬 자신의 계획에 유럽인들의 재정적 지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영국의 찰스 조지 고든 장군을 포함한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로 하여금 수단 서부와 남서부 지역에 성행하던 노예무역을 근절시키게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고든 장군의 의욕이 지나쳐 이슬람교도들의 반발을 초래했으며, 무하마드 아흐마드(알 마디)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1885년 하르툼이 점령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후 반란군은 수단에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고 1898년까지 그 명맥을 이어갔으나 그해 후반 아흐마드의 군대가 옴두르만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괴멸되었다.

 

1882년에 이집트를 침공하여 영구 점령한 영국은 1898년 수단을 인수하여 이집트와 공동통치했다.

영국은 수단 경제를 개발하려 노력했으며, 나일 강 유역에 최초로 목화를 심어 결국 면화를 수단의 주요수출상품으로 만들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를 통해 수단에서는 민족주의가 성장했다. 1951년 이집트는 영국과의 협약을 파기하고, 자국이 수단의 유일한 지배자임을 선포했다. 이후 1953년 영국과 이집트는 수단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협약에 서명했다. 그해 실시된 수단 의회 선거에서 국가통일당(National Unionist Party/NUP)이 다수당이 되었고, 1956년에는 수단 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되었다.

 

독립 이후 수단의 역사는 몇 번의 짧고 비효율적인 의회통치기간(1956∼58, 1965∼69, 1986∼89)과 보다 긴 군사통치기간으로 요약된다. 더군다나 수단의 이슬람교도 다수파가 애니미즘 신봉자와 그리스도교 신자가 대부분인 수단 남부지역 주민들에게 중앙 정부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분쟁의 위험이 항상 잠재해 있었다. 이런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수단 남부인들은 1963∼71년과 1980년대 중반 이래 중앙 정부에 대항해 격렬한 반란을 일으켰다.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수단의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남북간의 충돌로 인해 번번이 좌절되었고, 그결과 남부지역 일부에서는 1980∼90년에 극심한 기근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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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수단 학생들의 코란수업

 

▲무슬림들의 금요기도

 

▲남부수단 193번째 신생국가 탄생

 

▲수단의 수도 하르툼은 청나일과 백나일이 만나는 지점

 

▲수단의 사막지역

 

■ 스리랑카 Sri Lanka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 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

▲국기

 

인도양에 있는 섬 나라이며 옛 이름은 실론(Ceylon)이다. 팔크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인도 반도의 남동 해안과 마주보고 있으며 수도는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이다. 화폐는 스리랑카 루피다. 낮은 출생률로 인구성장률이 낮으나 인구밀도는 매우 높으며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유아사망률과 전체사망률이 낮은 편이다. 문맹률이 낮아 국민의 약 85%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스리랑카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아시아 남부지역에서 이주해온 원시 오스트랄로이드 종족에 속한 원주민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BC 5세기 무렵 인도 북부 지역에서 들어와 싱할라족으로 발전한 인도유럽어족에 흡수되었다. 타밀족은 그후 기원 초기부터 1200년경에 이르는 기간에 드라비다족이 지배적이던 인도에서 이주해온 이주민인 것으로 보인다.

 

BC 3세기에 불교가 들어왔으며 중요한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로 아누라다푸라 시가 세워졌다. 불교가 퍼져나가면서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실론(스리랑카의 옛 이름)을 지배하게 되었다(BC 200경∼AD 1000경). 싱할라족은 993∼1070년 촐라족(인도 남부지역에서 온 침략자들)에게 실론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겼으나 폴론나루바 시대(1070∼1200경)에 다시 지배권을 확립했다. 1200∼1505년에는 스리랑카 남서부지역까지 싱할라족의 지배가 확대되는 한편 인도 남부지역의 한 왕조가 실론 북부지역을 지배하면서 14세기에 타밀 왕국을 세웠다.

 

13, 14, 15세기에 각각 인도·중국·말라야의 침략이 있었다. 1505년 포르투갈 함대가 실론에 도착해 1518년에 요새를 세우고 교역허가권을 얻어냈다. 이들은 왕국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불화를 이용해서 현지 왕들과 여러 가지 동맹을 맺었으며, 가능한 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왕위에 앉히고자 했다. 1619년 적극적인 침략과 행동을 통해 포르투갈인들이 섬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캔디 왕국은 포르투갈인들을 내쫓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을 끌어들였다. 이로 인해 실론은 영국으로 지배권이 넘어가기 전(1796)까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1802년에 영국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1830년부터는 잎마름병으로 농장이 황폐해질 때까지 커피 산업의 눈부신 성장을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했다. 1880년대에 차 재배실험에 성공한 후 곧 차가 농장재배작물이 되었다.

 

20세기초 실론 민족주의가 종교·사회·교육 부문에서 일기 시작했다. 1919년 실론 국민의회를 통해 싱할라족과 타밀족이 연합했으며, 영국은 이들의 민족주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1920년 잇따라 여러 가지 헌법을 공포하고 1948년에는 주권국으로서의 지위를 식민지 스리랑카에 돌려주었다. 국민연합당(UNP)이 1956년까지 정권을 잡고 있다가 싱할라족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애쓴 스리랑카 자유당(SLFP)에게 패배했다.

 

타밀족은 이 시기의 싱할라 민족주의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1965년에는 UNP가 다시 정권을 잡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 SLFP는 여러 마르크스주의 정파들과 연합함으로써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SLFP 정권은 1970년대초에서 중반까지 여러 가지 경제·사회 개혁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1972년 헌법을 통해 실론을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77년 UNP가 다시 정권을 잡았으며 헌법을 완전히 개혁하여 대통령제를 수립했다.

 

스리랑카 공화국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총리이자 UNP 지도자인 J.R. 자야와르데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싱할라족과 타밀족 사이에서 되풀이되어온 민족간 긴장이 폭발해 1981년 폭동이 일어났으며, 타밀족 지도자들은 타밀족 영토의 분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타밀족 공동체의 여러 분파들은 스리랑카의 북부와 동부 지역에 타밀족 자치국가를 세우기 위해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 폭력사태는 1990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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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 코끼리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

스리랑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코끼리들이 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코끼리와 인간의 관계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죽고 죽이는, 그 악업의 고리를 끊을 해결책은 아직도 막막하다.

 

▲ 스리랑카에는 현재 약 6,000마리의 야생코끼리가 살고 있다

 

 

▲ 스리랑카 인구의 70%가 불교를 믿는다. 스리랑카의 오래된 불교사원들은 지금도 신도들로 붐빈다

 

▲ 스리랑카에서 축제 행렬의 선두는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코끼리의 차지다

 

실론티와 불교
그리고 코끼리의 나라

90년대 초, '실론티'라는 제품이 국내에 처음 나왔다. 약간 쓰고 떫은맛의 홍차를 단숨에 좋아하게 만들었던 음료였다. 뚜껑을 따면 독특한 차 향기가 코를 자극하고, 기분 좋게 씁쓸하고 달콤한 맛이 혀를 즐겁게 했다. 액체를 마시면서 '실론'이 도대체 어디일까 궁금해 찾아본 기억이 난다.

실론은 지금은 '스리랑카' 라고 불리는 섬나라의 옛 이름이다. 15세기부터 전 세계의 바다로 진출한 포르투갈이 1505년 이 섬에 도착해 실론Ceilao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1815년 영국이 실론을 지배하게 되면서 1867년부터 내륙 산악지대에서 차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차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지형에서 생산된 실론티는 고급차의 대명사가 됐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차 산업은 부침을 겪었지만 스리랑카는 지금도 세계 4위의 차 생산국이다.

사람들은 스리랑카를 '인도양의 진주', '인도 대륙이 흘린 눈물방울'로 비유한다. 남한의 3분의 2 면적에 2,000만 인구가 사는 이 나라는 차 외에 다른 두 가지로도 유명하다. 바로 소승불교와 코끼리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로부터 전파된 불교는 지금까지도 스리랑카의 주류 종교다. 인구의 70%가 불교 신도다. 10세기 이후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득세한 반면, 스리랑카는 소승불교의 진수를 면면히 보존하고 있는 종주국이다. 오래전부터 스리랑카 승려들은 태국, 미얀마, 라오스 등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불교의 전통을 전파했다. 오늘날 인도의 고대 불교 사원들은 폐허가 되어 관광객과 순례자들만 찾아가는 쓸쓸한 곳으로 남았지만, 스리랑카의 오래된 불교 사원들은 아직도 신도들로 붐빈다. 매일 승려들이 주재하는 종교 의식이 열린다. 사원을 찾아 꽃과 음식을 정성스럽게 바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신도들의 모습은 진지하고 숭고하다.

스리랑카는 코끼리의 나라이기도 하다. 불교는 코끼리를 신성시한다. 석가모니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여러 전생을 거쳤는데, 그중 하나가 코끼리였다.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싯다르타석가모니의 속명를 낳기 전 자궁 속으로 흰 코끼리가 들어오는 태몽을 꾸기도 했다. 코끼리는 불교 사원과 부처의 수호신이면서, 스리랑카 건축과 미술의 가장 흔한 소재이다. 종교 행사의 맨 앞장에 서는 동물도 코끼리다. 해마다 지역별로 열리는 페라헤라Perahera 축제 행렬의 선두는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점잖게 걷는 코끼리의 차지다.

그토록 사랑받는 동물이라 그런지 스리랑카의 단위 면적당 코끼리 밀도는 어느 국가보다도 높다. 현재 약 6,000마리의 야생코끼리가 국립공원과 민가 주변의 숲에서 노닐고 있다. 같은 소승불교를 믿는 라오스나 미얀마에선 좀 다르다. 코끼리를 일꾼으로 부린다. 그곳의 코끼리들은 산악 벌목 현장에서 베어낸 통나무를 끌고 내려오는 고된 일을 해야 한다. 반면 스리랑카의 코끼리는 유유자적, 먹이를 먹으며 숲과 들판을 어슬렁거린다.

 

▲ 민가 옆 숲에서 발견한 코끼리 가족. 스리랑카 내륙 지방에선 야생코끼리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 사원에서 키우고 관리하는 코끼리가 전용 풀장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 밤에 숲이 우거진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나들이 나온 코끼리 가족을 만나곤 한다

 

개발에서 시작된 비극

다큐멘터리 제작차 스리랑카의 내륙을 지나던 중 도로에서 50m쯤 떨어진 들판에서 코끼리 3마리가 나뭇가지를 훑으며 이파리를 먹는 모습을 보았다. 늦은 밤 숲을 관통하는 도로에선 길을 건너는 코끼리 가족을 여러 번 마주쳤다. 그럴 때면 스리랑카 운전사는 자동차를 멈추고 거대한 동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새끼를 거느린 어미를 자극할까 봐서다. 자동차에 위협을 느낀 어미나 성난 수컷 코끼리가 자동차를 공격하고 짓밟아서 탑승자가 사망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고 한다.

코끼리의 습격은 민가나 경작지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스리랑카에선 매년 코끼리에 밟혀 죽는 사람이 60~70여 명에 달한다. 밭에서 일하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코끼리와 잘못 마주쳐 변을 당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 가장 비참하게 죽는 일이 호랑이한테 잡혀 먹히는 호환虎患이었다면, 21세기 스리랑카에선 상환象患이 가장 끔찍한 죽음이다.

코끼리는 인가를 습격해 집을 부수기도 한다. 취재팀이 방문한 지방의 양곡상 주인은 집에 설치해 둔 CCTV에 찍힌 코끼리를 보여 줬다. 대낮에 열어 놓은 대문으로 코끼리 한 마리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 침입자는 주인이 소리를 지르자 뒷마당으로 가서 짖어대는 개의 집을 부셔 버리고 내뺐다.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 양곡상 주인은 인근에 국제공항이 들어선 이후부터 코끼리의 침입이 잦아졌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엔 몇년 전부터 개발붐이 일고 있다. 코끼리 서식지인 정글을 밀어 버리고 그 자리에 공항과 크리켓 경기장, 신규 주택지를 조성했다. 살 곳과 먹이를 잃은 코끼리들은 경작지와 민가를 습격했다. 코코넛야자나무를 머리로 박아 쓰러뜨린 뒤 잎을 훑어 먹고, 논밭을 짓밟고 다니며 벼와 토마토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식성이 좋은 코끼리는 하루 200kg의 식물을 먹는다. 코끼리 한두 마리가 경작지를 휩쓸고 지나가면 몇 달 농사를 한순간에 망쳐 버리는 셈이다. 내가 만난 코끼리 피해지역 농부들은 농사를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농민들도 반격에 나섰다. 코끼리를 쫓기 위해 함정을 파고, 고압 전기선을 설치했다. 가장 잔인한 퇴치법은 호박폭탄이다. 코끼리가 좋아하는 둥근 호박의 윗부분을 칼로 오려내고 속에다 폭발물을 집어넣는다. 그걸 농민들이 밭에 뿌려 두면 코끼리는 폭탄이 든 줄도 모르고 큰 호박을 코로 집어 한 입에 우적 씹는다. 그 순간 폭탄이 터지면서 턱과 입이 찢겨 나간다. 당장 죽지 않은 코끼리는 쓰러져서 며칠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다가 숨이 끊어진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매년 100마리 이상의 야생코끼리가 죽어 간다. 정글을 없애고 개발이 계속되는 한 코끼리와 인간이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의 악순환은 끊이지 않을 테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 생긴 그 악업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지, 해결책은 아직 막막한 실정이다.

 

▲ 스리랑카 정부가 운영하는 피네왈라 코끼리 고아원은 60여 마리의 코끼리를 돌보고 있다. 여기서 아기 코끼리 우유 먹이기 체험을 할 수 있다

 

▲ 농민들은 밭에 침입하는 코끼리를 막기 위해 전기 울타리를 설치하고 호박 폭탄을 설치한다. 최근 스리랑카에선 이런 방식으로 매년 100마리 정도의 코끼리가 죽임을 당한다 

 

오늘도 버려지고 죽어 가는 코끼리

스리랑카에는 코끼리 고아원과 임시보호 센터가 몇 곳 있다. 고아원은 말 그대로 어미를 잃은 새끼 코끼리를 거둬 키우는 곳이다. 임시보호 센터는 고아 코끼리가 국립공원이나 밀림으로 돌려보내질 때까지 야생에 적응하도록 돌봐 주는 곳이다. 인간과의 갈등으로 희생되는 코끼리가 많아질수록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어린 짐승도 늘어난다.

고아 코끼리가 가장 많은 곳이 스리랑카 정부가 운영하는 피네왈라Pinnewala 고아원이다. 이곳엔 약 60마리의 코끼리가 살고 있다. 코끼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어린 새끼에게 우유를 주고 먹이를 먹이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어미의 젖을 먹고 자라지 못한 아기 코끼리들은 관광객이 든 우유병을 순식간에 비우고 더 달라고 보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른 녀석들은 다른 새끼의 등 위에 올라타고 장난을 친다.

코끼리와 인간의 분쟁을 취재하던 중, 어느 마을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달려가 보니 야자나무 옆에 어린 코끼리 한 마리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 자라지 않았는데도 누워 있는 몸집은 커다란 바위처럼 육중했다. 허공으로 뻗은 네 다리는 단단한 기둥 같았다. 새벽에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전기선에 감전된 것 같다고 주민들이 알려 줬다. 코끼리의 사체를 처음 봤기에 가슴이 저렸다. 코끼리의 감은 눈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밤새 맺힌 이슬인지, 아니면 고통스럽게 죽어 가며 흘린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냄새를 맡은 독수리와 까마귀들이 하늘을 까맣게 덮은 채 맴돌고 있었다.

에디터 고서령 기자  글·사진 손현철 KBS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글·사진 제공 : 트래비 (www.travie.com)

 

◇2016.06.26 ‘남방불교’의 본산 스리랑카를 가다

부처의 치아사리 보관한 불치사는 스리랑카 70% 불교인들이 평생에 꼭 한번 참배하는 곳… ‘구전(口傳) 불교’를 나뭇잎에 처음 기록한 패엽경(貝葉經) 제작해 불경(佛經)의 맹아 싹 틔우기도

 

▲스리랑카 최대 규모의 제타바나 스투바.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대형 탑이다. 싱할라 왕조의 첫 수도인 아누라다프라 동쪽에 있다. 윗부분이 일부 파손돼 높이가 83m인 현재의 모습도 참배객을 압도하는 크기인데, 4세기 중엽 조성 당시에는 120m가 넘었다고 한다.

 

스리랑카 콜롬보 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시각으로 4월 14일 오전 4시 30분. 한국에서라면 오전 8시이니까 활동하기에 큰 무리가 없는 시간이다. 그래도 아직 동트기 전의 시간이라 움직임이 어째 어색하다. 공항을 빠져 나오자 뜨거운 공기가 후끈 얼굴을 때린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는 다소 쌀쌀한 날씨였기에 기온 차가 더 크게 느껴졌다. 대낮 온도가 32도를 넘는 데다 하필 이날부터 우기(雨期)가 시작될 수 있다고 안내원이 귀띔한다. 지난 겨우 내내 대장염으로 고생한 터라 답사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컨디션 조절에 실패할까 봐 내심 걱정했지만 기우(杞憂)였다. 6일간의 여정 내내 빗방울은커녕 온종일 뜨거운 햇볕이 작열했다. 우리 일행은 틈만 나면 그늘을 찾아다녔다.

 

자비의 종교가 뿌리내린 신밧드가 찾던 보석의

비는 스리랑카를 떠나오는 날 내렸다. 공항 가는 길에 여독을 씻어주듯이 비가 내렸다. 8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순례 온 정성을 갸륵하게 여기신 부처님의 가피인가. 일어나지도 않을 앞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며 사는지를 새삼 되새김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알고 보면 불필요한 것이 너무도 많다. 쓸데없는 탐심(貪心)과 성냄, 그리고 분별하는 마음…. 스리랑카 불교문화 답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번 답사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중앙선데이>와 공동 기획한 ‘해양 실크로드 문명 대탐사’ 연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주강현 원장이 동행했다. 해양 실크로드와 불교 기사를 <중앙선데이>에 실었지만, 답사 중 보았던 수많은 스리랑카 불교문화에 관한 다채로운 내용을 <월간중앙> 지면을 빌어 소개한다.


인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섬나라 스리랑카. 기록이 전하는 2500년간의 결코 순탄하지 않은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인도양의 석양이 아름다운 이 나라는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국토는 6만5610㎢로 대한민국(남한 9만9720㎢)의 3분의2에 못 미치고, 거기에 2000만 명이 조금 넘는 인구(2014년 7월 기준 2186만6445명)이 산다.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인도양의 한복판에 위치해 예로부터 ‘해양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으로 ‘인도양의 진주’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마음을 녹여주는 스리랑카인들의연꽃 미소

▲스리랑카는 입으로 암송해 전해지던 부처님 말씀이 최초로 문자화돼 집대성된 나라다. ‘팔리어 삼장’으로 불리는 경전이다. 패다라수(貝多羅樹) 나뭇잎에 기록했다고 하여 패엽경(具葉經)으로 불린다.

 

이 나라는 실제 블루 사파이어를 비롯한 각종 보석 산지로도 유명하다. <신밧드의 모험>에서 신밧드가 보석을 찾아 떠난 섬 세렌디브가 바로 이곳 스리랑카다. 이 나라의 가치를 유럽인들보다 앞서 발견한 아랍인들은 ‘보석의 섬’으로 불렀다. 유럽인들은 이 섬에서 생산되는 후추, 계피, 차 같은 향료에 매료됐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폴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극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필자가 이번 여정에서 찾은 스리랑카의 진정한 보석은 불교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전래되는데, 인도보다 더 불교의 꽃을 화려하게 피워내어 세계로 확산되는 길을 열었다. 현재 스리랑카 인구의 약 70%가 불교도다. 불교 유적지에서 만난 스리랑카인들은 이방인에게 소박하면서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연히 눈빛이 마주쳐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옷깃만 스쳐도 그 인연이 작지 않음을 뼛속 깊이 아는 듯했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나라이지만 거리 곳곳에서 깨끗한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도로 포장이 잘 안돼 있어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들의 잔잔한 미소 속에 담긴 여유로움이 그런 불편함을 녹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스리랑카의 미소는 오랜 식민지 경험과 내전(內戰)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꽃이라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 우리의 역사와도 겹치는 대목이 적지 않아 보인다. 스리랑카의 역사 초기에는 인도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근대 이후에는 서구열강의 침략과 지배가 이어졌다.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으로 이어지는 릴레이 식민 통치를 448년간이나 받았다. 갈레 지역에 조성된 네덜란드 식민 시절의 유적지에서 만난 쉬랑가(Shirnga·35) 씨가 “식민지 시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매우 잔인했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1948년 독립 이후에는 30년간 내전이 이어졌다. 인도 남부에서 유래한 타밀족과의 갈등은 고대부터 최근까지 스리랑카 역사 내내 지속됐다. 이 같은 고난의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불교라는 점에서 연꽃의 미소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자긍심의 근원에 불교가 자리한다. 스리랑카의 보물인 패엽경(貝葉經) 보존사찰 알루비하라 사원의 난다라타나 주지스님은 “식민 통치를 받던 448년간 스님들에게 계를 주는 의식까지 사라졌을 정도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며 스리랑카 사람들 개개인과 가정 속에 전해지는 불교까지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스리랑카 불교문화를 연구해온 정기선(동아시아 불교의례문화연구소 연구위원)씨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불교는 종교 이상의 의미다. 종교를 넘어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고 했다.

스리랑카는 불교를 믿는 싱할라족의 왕조가 2000년 이상 이어온 나라다. 싱할라 왕조의 첫 수도가 아누라다푸라이고, 두 번째 수도가 폴론나루와이며, 마지막 수도는 캔디다.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 고대 불교문화의 출발지이고, 폴론나루와는 중세 불교문화 유적의 보고다. 두 곳 모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답사는 이 같은 싱할라 왕조의 수도 이전 코스를 따라 진행됐다.

이번 답사 코스는 스리랑카의 성보(聖寶)인 ‘불치(佛齒)’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는 길이다. 부처님의 치아(佛齒) 사리가 봉안돼 있어서 ‘불치사’로 이름이 붙여진 사원이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인 캔디에 있다. 영어로는 ‘Tooth Relic Temple’, 싱할라어로는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Sri Dalada Maligawa)’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에게 캔디는 스리랑카의 정신적 고향으로 통하고, 불치사는 일생에 꼭 한 번은 참배해야 할 성소로 여겨진다.


불치는 본래 아누라다푸라에 있었다가 폴론나루와를 거쳐 캔디로 옮겨졌다. 불치가 왜 수도 이전과 함께 옮겨 다녀야 했을까? 불치가 왕권의 상징으로 인식된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종교가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일은 많이 볼 수 있다. ‘왕실 불교’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한국의 신라와 고려와 마찬가지다. 스리랑카의 경우 20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왕권을 이어가는 데 불치가 핵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불치(佛齒) 흔적을 따라서

▲싱할라 왕조 마지막 수도인 스리랑카 중부 캔디 지역에 위치한 불치사.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스리랑카 최고의 성스러운 보배다. 불치 사리를 찾는 순례객이 끊이지 않는다.

 

왕권의 변화에 따라 수도 이전과 함께 불치사의 위치도 바뀌었다. 첫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도 불치사가 있었고, 두 번째 수도인 폴론나루와에도 불치사가 있었다.

아누라다푸라 도성 내에 ‘달라다게’ 혹은 ‘달라다 말리가와’라고 불리는 유적지에 불치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는 아누라다푸라의 불치사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캔디 지역의 불치사 모습이 아누라다푸라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건축 방식을 본뜬 것이라 하니 미뤄 짐작할 뿐이다.


기원전 250년에 처음 스리랑카에 전해진 불교가 뿌리내린 곳이 바로 아누라다푸라다. 부처님 열반 후 200년이 지났을 무렵으로 당시 인도 대륙을 통일한 아쇼카왕의 아들이자 승려였던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에 불법(佛法)을 전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아쇼카왕은 무참한 살육 전쟁을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한 후 모두 9개국으로 전법사를 파견했는데 스리랑카에는 아들을 직접 보냈을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팔리어로 쓰인 스리랑카 고대 왕조 연대기인 <마하완사(大王統史)>에 따르면, 마힌다 장로와 싱할라 왕국 데와남비야팃사왕과의 첫 만남이 아누라다푸라에서 동쪽으로 8마일가량 떨어진 미힌탈레에서 이뤄졌다. 미힌탈레에는 마힌다 장로가 머물던 커다란 바위와 당시 스님들이 집회와 식당으로 활용했던 유적들이 남아 있다. 데와남비야팃사왕은 불교에 귀의한 후 승단의 설립과 사원 건립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후 싱할라 왕조는 19세기 영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왕조를 유지했다. 전란을 피해 수차례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로 고난의 세월을 보냈지만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랜 기간 왕조를 유지한 배경에는 불교가 있었다.


난다라타나 스님에 따르면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에 온 후 비구니 스님이 없는 것을 보고 아쇼카왕에게 비구니 스님과 함께 보리수 나무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후 야쇼카왕의 딸 샹가미타 스님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보리수를 스리랑카에 가져왔다. 스리랑카 불교의 또 하나의 자긍심으로 여겨지는 그 보리수가 아누라 다푸라의 스리 마하보디 사원에서 2000년이 넘는 세월의 기억을 간직한 채 지금도 은은한 향기로 참배객을 맞아준다.


난다라타나 스님에 따르면, 이 보리수 나무가 왕실 불교의 성격을 넘어 불교가 일반 서민에게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그 이전에도 스리랑카에는 나무를 숭배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를 본 마힌다 장로가 불교를 확산시키기 위해 보리수 나무를 가져오게 했고, 그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스리 마하보디 사원에 도착했을 때 그 역사적 보리수 나무는 우리 답사 일행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보리수를 친견하기 위한 행렬이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뜨거운 태양 아래 달궈진 사원의 돌바닥을 맨발로 걸으면서 깡총깡총 뛸 수밖에 없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첫날부터 맨발로 그렇게 뜨거운 돌을 디디고 다녀서 그런지 체력을 유지하는데 좋은 작용을 한 것 같다.

아누라다푸라 동쪽에 위치한 스리랑카 최대 규모의 제타바나 스투바는 참배객의 기운을 압도했다.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대형 탑이다. 현재는 윗부분이 일부 파손돼 높이가 83m인데, 4세기 중엽 조성 당시엔 120m가 넘는 규모였다고 한다. 이 정도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스리랑카의 저력을 다시 바라보게 했다. 이와 함께 스리랑카 첫 사찰인 이수루무니아 사원도 아누라다푸라의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인데 일명 ‘록 템플(Rock Temple)’이란 별칭답게 큰 바위와 함께 오랜 세월의 흔적을 지금까지도 잘 간직하고 있다.

 

어디서도 없는 팔짱 입불(立佛)

▲스리랑카 두 번째 수도인 폴론나루와 지역의 바위 사원(갈 비하라)에 있는 불상. 거대한 화강암에 조각한 4종의 불상 중 하나다. 부처님의 제자 아난존자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9세기 중반 이후 싱할라 왕국은 전쟁과 혼란을 피해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긴다. 폴론나루와는 중세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아누라다푸라에서와 달리 폴론나루와 지역에 건립되었던 불치사의 흔적은 지금도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돌 기둥이 사찰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을 입증한다. 돌 기둥들 안에 세워놓은 불상들은 파괴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화려했던 불교문화의 자태를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이곳의 달라다 말루와 유적군 안에는 아누라다푸라에 이어 새로운 불치사로 기능했던 사원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왕궁과 사원이 나란히 함께 인접해 있던 ‘왕실 불교’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타다게, 와타다게, 하타다게 사원 유적에 불치가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모두 1층의 석조 구조물과 함께 불상 조각의 유적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와타다게 유적은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원형의 사원 중앙에 작은 불탑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좌불을 각기 배치했다.

 

폴론나루와 지역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갈 비하라(Gal Vihara)다. 갈은 바위를 뜻하고, 비하라는 사원을 뜻하니 ‘바위 사원’이다. 거대한 천연 화강암 위에 네 기의 불상이 조각돼 있다. 그런데 스리랑카 역사서 <출라밤사>에는 이곳 바위벽에 본래 세 분의 불상이 조각됐다고 전한다. 바위를 동굴처럼 파고 들어가서 조각한 좌불(坐佛), 바위 표면에 조각한 좌불, 그리고 고요히 열반에 드신 와불(臥佛)이다. 그런데 현재는 세 불상 외에 입불(立佛)이 하나 더 조각되어 있다. 후대에 따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성 연대 등 구체적 기록이 없다고 한다. 스승 붓다를 잃은 제자 아난다의 슬퍼하는 모습이라는 설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 입불의 형태다. 팔짱을 낀 불상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 입불 같은 형상을 다른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화려한 불교문화와 더불어 스리랑카 불교의 창의성을 보는 듯했다. 과연 그 입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불치는 이 나라의 성보(聖寶)로 통한다. 현재 불치사가 있는 캔디 지역이 스리랑카의 정신적 고향으로 간주되는 이유다. 스리랑카 국민들에게 불치사는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참배해야 할 성소로 여겨진다. 우리 일행이 캔디의 불치사에 도착한 것은 그림자가 꽤 길어진 오후 4시가 넘어서였다. 그럼에도 불치사 치아 사리함에 꽃을 올리고 기도하는 참배객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모두가 진지한 표정이다. 살아있는 부처님을 모시는 것처럼 온 정신을 집중해 예불과 공양을 올린다. 불치사 내부에는 사리함 이외의 불상이 따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5월 조계종 초청으로 한국에 온 적 있는 불치사 주지 웬다루웨 스님에 따르면, 불치 사리함 앞에서 부처님이 현신하신 것처럼 매일 의례가 행해진다. 또 매년 8월이면 불치를 주제로 한 스리랑카 최대의 축제 ‘페라헤라(Perahera·佛齒祭)’가 열린다. 불치가 불치사 밖으로 나와 거리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난다라타나 스님은 지금도 1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불치제에 참여한다고 했다. 각종 민속 공연도 함께 펼쳐진다. 올해는 8월 8~18일 일정으로 불치제가 열릴 예정이다.

불치 전래의 역사는 1700년 전으로 올라간다.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 이후 나온 사리는 8개국으로 분과되었다. 이때 치아 사리 4과 중 하나가 인도 칼링가 왕국에 이운되었다. 이 칼링가 왕국의 치아 사리가 다시 4세기 초 스리랑카에 전해지게 된다. 즉 AD 310년 이교도의 침공으로 국가 존망이 위태롭게 된 칼링가 국왕 구하시바가 사위 단타와 헤마말라 공주에게 명을 내려 불치를 모시고 스리랑카로 건너가 아누라다푸라 왕조의 메가완나왕에게 전하게 했다. 메가완나왕은 불치를 성대하게 공양한 이후 매년 불치를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는 축제를 계획하는데, 이 행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불치제의 기원이다. 코끼리 위에 모셔진 불치는 악단의 음악과 춤 공양을 앞세우고 행진을 한 후 다시 법당에 봉안됐다. 역대 왕은 이 전통을 이어받아 매년 도성을 순회하는 행사를 계속했다. 불치사의 전 주지 티부투와웨 스님에 따르면, 페라헤라를 행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민중들의 불심 고취와 왕권의 정통성 확보다. 둘째는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비가 잘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 목적이 있었다.(정기선, ‘스리랑카 불치사의 공양의례 일고’, <淨土學硏究> 24집, 2015년 12월)


구전(口傳) 불교, 패엽경(貝葉經)으로 거듭나다

▲아누라다푸라 지역에 있는 또 다른 보물인 보리수. 스리랑카에 불법을 처음 전해준 이는 아쇼카 대왕의 아들이자 승려인 마힌다 장로이고, 보리수를 가져온 이는 아쇼카 대왕의 딸인 샹가미타 스님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전해질 때만 해도 부처님의 말씀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암송의 천재들에 의한구전(口傳) 불교였던 것이다. 구전 불교를 오늘 우리가 보는 문서 형태로 처음 문자화한 곳은 스리랑카로 알려졌다. 캔디에서 가까운 마탤리 지역의 알루비하라 사원에서다. 이곳에서 최초로 문자화된 불경이팔리어 삼장(三藏)’이다. 알루비하라 사원에 500명의 승려가 모여 패다라수(貝多羅樹) 나뭇잎에 기록했다고 하여 패엽경(貝葉經)으로 부른다. 초기의 나뭇잎 불경 제작 기법이 지금까지 보존돼 전해진다. 스리랑카가 남방불교의 본산으로 간주되는 배경에 최초의 경전 편찬을 빼놓고 이야기할 없다. 불기 2560년을 맞는 오늘 우리가 경전을 읽으면서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되새길 있는 것은 이들의 공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밖에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와 캔디의 삼각형 중간에 위치한 담불라 지역의 석굴사원도 스리랑카 불교문화의 깊이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불치 사리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스리랑카에 가서 2년을 머문 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중국 스님이 있다. 동진(東晉) 법현(法顯, 337~420) 스님이다. 그가 남긴 <불국기(佛國記)>[혹은 <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 불치사와 관련된 기록이 전한다. AD 399 일행 10 명과 함께 수도 장안(長安) 출발한 법현 스님은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인도로 먼저 들어가 8년간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산스크리트어를 수학했다. 이후 409 사자국(獅子國: 스리랑카의 이름)으로 건너가 2년간 체류했다. 이어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지역을 거쳐 해로(海路) 통해 중국 산둥반도로 돌아왔다.

답사 형식은 크게 변화했을지라도 1600 법현 스님이 순례한 구법(求法) 발자취는 후학들이 걸어가야 길을 밝혀준다. 법현 스님처럼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서역으로 향한 동아시아 구법승이 적지 않았다. 구법승의 순례가 3세기부터 11세기 말까지 이어졌는데 그중 이름이 알려진 이들만 140 명에 이른다. 하지만 기록을 남긴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서유기> 주인공으로 유명한 현장(玄裝, 602? ~664) 스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신라인 혜초(慧超, 704~787)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등이 전해질 뿐이다.

인도를 순례한 이들 가운데 스리랑카에도 적지 않은 스님들이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종합적인 여행기를 남긴 이로는 법현 스님이 유일하다. 법현 스님은 당시 남인도 다마리제국(多摩梨帝國)에서 상인들의 배를 타고 14 만에 사자국(스리랑카) 도착했다. 법현 스님은 당시 사자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인 아누라다푸라의 아바야기리 사원(無畏精舍)에서 2 동안 머물면서, 불치와 페라헤라 관련 기록도 남겼다. 당시 가운데에 불치사가 있었는데 모두 칠보로 만들어졌으며, 불치는 매년 3 중에 열린 불치제 왕실의 불치사에서 무외정사로 옮겨져서 공양되었다고 했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공유하는 우리도 법현 스님의 <불국기> 존재 자체를 아는 이가 많지 않을 텐데, 이미 1836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아벨 레뮤자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해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에 기반해 영어 번역본도 5종이 잇따라 나왔다. 영국의 동양학자 새뮤얼 빌이 1869 펴낸 <법현과 송운의 여행기>, 허버트 앨런 자일스가 1877 펴낸 <법현의 여행 또는 불교도 왕국들의 기록>, 제임스 레게가 1886 펴낸 <불교왕국들의 기록> 등이다. (참조: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엮음, <고승법현전>, 아연출판부, 2013)


제국주의는 이중적이다. 제국은 불교 전통을 탄압했지만 불교가 유럽에 널리 알려진 것도 제국주의 시대였다. 19세기 서양에서 <불국기> 같은 책이 정도로 소개되고 있는데도, 당시 조선은 1800년의 정조대왕 서거 이후 망국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동아시아권에서 <불국기> 번역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이뤄지는데 일본이 가장 앞섰다. 한국에서는 1998 이재창의 <고승법현전>, 2013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의 <고승법현전> 등이 출간됐다.

 

스리랑카 근대불교의 중흥 이끈 다르마팔라

▲캔디 지역 불치사 안 사리함 앞에 모여 기도하는 참배객들. 불치사에서는 매년 불치를 주제로 한 페라헤라(불치제)가 열린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우리가 서양보다 불교를 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제국의 식민 지배를 위해 저들은 식민지 문화를 연구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화와 문명은 흘러가게 마련이고 또 거기서 새 싹이 돋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폰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문명의 문을 열어젖힌 스티브 잡스가 젊어서부터 동양문화에 심취했다. 특히 불교와 힌두교는 그의 독창적 직관력의 근원이다. 법현의 인도·스리랑카 순례기의 서양어 번역과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폴론나루와 지역의 갈 비하라에서 보았던 팔짱 낀 입상은 답사 기간 내내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캔디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 의문의 실마리가 일부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불치사 건물 옆에 세워진 동상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누구일까? 인자한 모습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폴론나루와 갈비하라의 입불이 생각났다. 불치사 옆에 세워놓은 동상의 주인공은 스리랑카 근대불교 부흥운동의 핵심 인물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 스님이다. 1873년 있었던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논쟁이 불교 측 대변자였던 구나난다 스님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데, 파나두라에서 열린 이 논쟁의 결과는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그는 식민지 시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제국주의의 불교 탄압에 맞서 스리랑카 불교를 지켜낸 것은 다르마팔라가 제창한 불교민족주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동상이 불치사와 나란히 세워져 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만큼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폴론나루와에서 본 팔짱 낀 입불의 형태와 다르마팔라 동상이 그대로 오버랩됐다.


불교를 일종의 미신으로 몰아가는 서양 제국주의의 불교 탄압에 맞선 다르마팔라의 불교민족주의 선언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사찰 소유 토지 몰수령을 만들고, 사찰에서의 주민 교육을 금지하고, 사찰 내에서 일반인들이 생활하게 하며 사찰을 파괴했던 제국의 야만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난다라타나 스님에 따르면, 식민지 시대에 스님에게 계를 주는 의식의 맥까지 끊기는 바람에 스리랑카가 과거에 불교를 전해준 태국과 미얀마의 스님을 초청해서 스리랑카 불교의 맥을 다시 이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식민지 시대가 아닌 독립한 스리랑카 시대에는 어떤가? 불교민족주의와 불교의 사회적 역할 강조는 시대를 초월해 보편적으로 적용 타당한 것인가? 1946년 일부 승려들이 정치 참여를 선언한 이래 스리랑카에선 독립 이후에도 불교와 정치가 밀접히 연결된 모습을 보였다. 정기선 연구위원이 언급했듯이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봐야 하는가, 그래서 불교의 정치 참여도 다른 나라의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관행과는 좀 다르게 봐야 하는 것인가?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던 스리랑카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 불명예의 원인은 오랜 내전 탓이다. 앞으로는 달라질 것으로 보이지만, 풍부한 자연자원과 불교유적을 기반으로 관광 특수를 좀 더 풍성하게 일궈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불행하게도 내전의 한 축은 불교였다. 내전은 민족분쟁이자 종교분쟁이었다.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불교를 믿는 싱할라족과 전체 인구의 18%를 차지하며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다. 이 내전은 2009년 싱할라족 불교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내전이 부른 혼란과 상처는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 상처의 한 단면이 2015년 프랑스 칸영화제 대상을 받은 영화 <디판>에도 그려졌다. 불살생(不殺生)과 자비를 바탕으로 하여 갈등을 포용하는 종교인 불교가 갈등의 한복판에 놓여 있어야 하는가?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스리랑카 불교문화 답사의 또 다른 생각거리다.

 

정치갈등 포용할 불교의 역할

▲캔디 지역 불치사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동상. 주인공은 스리랑카 근대불교 부흥운동의 핵심 인물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스님이다. 제국주의의 불교 탄압에 맞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인물이다.

 

개인이 됐든 승가가 됐든 원한을 원한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아니던가! 갈등과 원한의 해결을 개인의 자각과 참회에서부터 풀어가는 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모두 진정한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얘기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 타밀족과의 갈등은 스리랑카 역사 속에서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반복됐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지켜온 공덕이 무량해 보인다. 그럼에도 타밀족과의 갈등을 불교적 평화의 방식으로 해소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는 다만 스리랑카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현실과 역사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 남북간 전쟁까지 치렀다. 또 밖으로 중국이나 일본과의 갈등이 있고, 안으로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된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한국의 불교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를 푸는 불교적 해법은 과연 무엇인가?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내 탓이오’를 제창한 일이 생각난다. 불교의 길을 천주교에서 선점해 보여줬다. 그것은 본래 불교의 길이었다. 문제를 ‘내 탓이오’에서 풀어가는 사례는 불교에 무수히 존재한다. 너와 나 개개인이 모두 그 점을 자각할 때 우리 시대의 질곡을 헤쳐나갈 길이 보이리라.

- 스리랑카=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일상

▲베삭 데이 - 스리랑카에서 부처의 탄생과 열반을 기리는 날

 

▲바위산 벽화

 

▲콜롬보의 파라다이스 해변 13. 5. 28.

 

▲아름다운 산 애덤스 파크, 성경 속 아담이 지상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곳

 

▲스리랑카 호우로 35명이 사망 300여명이 실종 - 16.5.18 수도 콜롬보

 

 

 

 

 

 

 

 

 

▲스리랑카 대홍수 159명 사망 108명 실종 2017.5.28

 

 

 

 

 

 

 

 

▲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