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25/ 베트남2/ 하롱베이 - 호치민
지구촌 여행/ 국가별25/ 베트남2/ 하롱베이 - 호치민
◆볼거리
◆하롱베이 - 용이 내뿜은 보석이 바위가 됐다는… 세계 7대 절경
▲세계 7대 절경으로 꼽히는 베트남 하롱베이. 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서면 3000개가 넘는 섬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마다 솟은 크고 작은 기암괴석들이 자태를 뽐낸다. / 우고운 기자
노을을 품은 바위가 따스하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까악거리는 새소리만이 귓가를 스친다.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인다. 꿈처럼 가만히 눈을 감아도 되는 곳. 베트남 '하롱베이'다.
하롱베이는 베트남 최고의 관광지다. 세계 7대 절경, 동양의 3대 절경으로 꼽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선정됐다. 삼삼오오 보트를 타고 두둥실 바다를 가르면 3000개가 넘는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마다 솟은 크고 작은 기암괴석들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담담하다.
'하(Ha)'는 '내려온다(下)', '롱(Long)'은 '용(龍)'이란 뜻이다. 즉, 하늘에서 용이 내려온 '만(灣·Bay)'이란 의미다. 지명 유래를 듣고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 바다 건너 침략자를 막기 위해 입에서 내뿜은 보석이 바위가 됐다는 전설이다. 잔잔히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신비로움을 더한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동쪽에 있는 하롱베이는 석회암 지대가 3억 년 이상 진행된 침식 작용과 해수면의 변화에 의해 생겨난 카르스트 지형이다. 1553㎞에 걸쳐 수천 개 바위섬들이 환상적인 매력을 뽐낸다. 이곳을 찾는 전 세계 관광객은 한 해 약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바위에서 바위로 이동하다 보면 선상 가옥을 볼 수 있다. 인적이 없는 선상 가옥은 기묘한 느낌마저 든다. 세월을 낚는 듯한 어부만이 종종 눈에 띈다. 곳곳에 인공 진주 양식장도 있다. 보트에 올라 시끌벅적했던 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말이 없어진다.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만이 쉼 없이 울린다. 1~2시간가량 유유히 떠다니다 보면 세상 시름이 잊힌다.
하롱베이는 진기한 석회암 동굴로도 유명하다. '승솟 동굴(Hang Sung Sot)'은 하롱베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이다. 관광객들이 몰려 늘 붐빈다. 동굴에 가려면 선착장에 내려 입장권을 산 뒤 좁고 가파른 돌계단을 30~40분간 줄지어 이동한다. 40도 이상의 경사를 올라야 해 간편한 복장과 운동화는 필수다.
인내심을 갖고 오르다 보면 어느새 웅장한 동굴 내부가 드러난다. 형형색색 조명으로 꾸며진 동굴 안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종유석이 만들어낸 자연산 '돌커튼'과 작은 연못들이 나타난다. 130m에 달하는 동굴을 따라 걸으면 마치 야간 개장 놀이동산에 놀러 온 느낌이다.
6~11월은 날씨가 화창해 하롱베이의 비경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시기다. 좀 더 오래 둘러보려면 1박 2일 크루즈 투어도 좋다. 하노이나 하롱베이 여행사를 통해 예약 가능하다. 크루즈 안에서 신선한 해산물을 먹고 카약과 낚시, 마사지 등을 즐길 수 있다. 침실에서 철썩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다. 1박에 대략 10만~30만원대 상품이 많다.
인천공항에서 하롱베이까지는 대략 8시간 이상 걸린다. 대부분 항공사가 인천~하노이 구간을 취항하는데, 4시간 정도 소요된다.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는 차로 4시간 정도 더 가야 한다.
베트남 국적항공사 베트남항공은 인천공항과 하노이·호찌민·다낭을 잇는 3개 노선을 운항 중이다. 10월에는 인천~하노이 간 최신예 중대형기(에어버스 A350-900X WB)를 새롭게 취항했다. 현재 총 2대의 A350을 운항 중인데, 2020년까지 12대를 추가로 운항할 예정이다. 베트남항공은 A350 취항을 기념해 이달까지 티켓을 특가에 판매한다. 106만원대 비즈니스 좌석을 약 30% 할인해 70만원에 판다. 이코노미는 63만원대를 40% 깎아 37만원에 판다.
조선일보 하롱베이(베트남)=우고운 기자
▲하롱베이
◆2015-09-27 베트남 다낭, 호이한
베트남중부.북부
▲다낭 전경
- (베트남전이 아니라 American War) 항공기는 홍콩시각 새벽 1시 15분 홍콩공항에 도착한다. 환승대기 구역에서 지루한 7시간을 기다려 다낭행 Dragon Air 항공기에 오른다. 홍콩을 경유하는 것은 유효기간이 다가온 캐세이패시픽 항공 마일리지를 소진하기 위해서다. 홍콩 출발 한 시간 40분만에 다낭에 도착한다. 다낭국제공항은 현재 하노이, 호치민과 함께 베트남의 세 개 국제공항 중 하나다. 베트남전(베트남 사람들은 이 전쟁을 American War라고 부른다) 당시 가장 중요한 공군비행장으로서 하루 수천회 출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전쟁의 흔적... 들판 한 가운데 방치된 미군 헬리콥터 격납고
- (자랑스러운 역사) 베트남은 국토면적 33만 평방킬로미터(남한의 3.5배), 인구 9천3백만으로서 투쟁과 독립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천년넘은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938년 독립했지만 1862년부터 1954년까지 96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베트남이 승리함에 따라 제네바협정(Geneva Accord)에 따라 북위 17도를 가운데 놓고 남북이 갈라졌다. 1965년에는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하여 개입을 본격화했으나 지리멸렬한 전과와 자국내 여론 악화로 1973년 철수했다. 이후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이 사이공(현재 호치민시)을 함락함으로써 베트남은 자력 통일을 이루었다. 1979년에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불만 표시로 중국이 국경을 침입하여 잠시 유린하기도 했으나 이 또한 패퇴시켰다. 파란만장하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다.
▲다낭 해안선
(전쟁의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40년전 전쟁의 흔적은 거의 다 사라졌으나 다낭 공항 활주로옆 공터에 남아있는 수십개의 항공기 격납고가 당시를 말해 준다. 남중국해의 곧은 해안선을 따라 이국적 정취를 물씬 풍기는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널찍한 도로와 예쁜 건물들이 인상적인 도시는 한강(Han River)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뻗어가고 있다.
- 다낭은 호치민, 하노이에 이어 베트남 3대 도시이다. 일찍부터 서구인들이 찾아와 1535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1856년에는 선교사 박해를 구실삼아 프랑스가 침입하여 1862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병합했다. 하노이 759km, 호치민까지는 960km로 남북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물의 도시 다낭
(스쿠터 시동 걸고) 호텔에 체크인하고 곧장 시내 탐방에 나선다. 인구 100만의 대도시이고 도시 면적이 꽤 넓어서 이동이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살인적인 더위에 걸어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하루 14만동(한화 약 7천원)에 스쿠터를 렌트하여 이동 문제를 해결한다. 다낭은 도로가 넓게 잘 뚫려있어서 스쿠터 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먼저 시내 가까운 해변을 찾는다. 깊숙이 들어온 다낭만(Da Nang Bay)을 따라 넓고 고운 백사장이 펼쳐진다. 해변 도로를 따라 식당, 호텔, 게스트하우스, 카페들이 이어진다. 저마다 손님들의 눈길을 끌기 위하여 멋을 내어 지었다. 그냥 알룩달룩하게 페인트를 칠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건물 모양과 디자인, 색감으로 멋진 거리를 연출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베트남 장인들은 여기에 베트남 고유의 멋을 넣어 독특한 건물 양식을 만들었다.
▲더위에서 구해 준 모터 바이크
▲잔뜩 멋을 낸 건물들
(수변 도시 다낭) 린웅(Linh Ung) 사원 가는 길, 손트라(Son Tra) 반도의 해안 절벽 도로를 달린다. 전망좋은 곳마다 바이크를 멈춰 도시를 조망한다. 남중국해의 장관 너머로 아스라이 도시의 모습이 들어온다. 바다에 둘러싸이고 강이 도시를 관통하는 다낭은 베네치아처럼 바다위에 떠있는 도시처럼 보인다. 숨막히는 비경을 보며 여러 구비를 돌다 보니 67m 높이의 하얀 거대 여불상이 나타난다. 이 그윽하게 아름다운 땅에 도대체 언제 전쟁의 참화가 스치고 지나갔는지 믿기지 않는다.
▲린웅사원 여불상
▲해신각(海神閣)
(다낭에도 한강이) 시내로 돌아오는 길, 스콜이 쏟아져 무더위를 잠시 식혀준다. 참박물관(Cham Museum)에 들른다. 아담한 작은 박물관이지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패넌트가 자랑스럽게 나부낀다.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베트남 중부지역의 대부분을 통치했던 참파왕국의 조각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사암을 가지고 조각했는데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다.
- 다낭시내를 관통하여 다낭만으로 흘러드는 한강(Han River)이 도도하다. 강위에는 네 개의 다리가 놓여있는데 모두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멋을 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Dragon Bridge(Cau Rong)다. 황금색으로 칠한 용을 새겨넣은 구조물은 밤이면 더욱 화려해진다.
▲Dragon Bridge
(분주한 베트남의 아침) 아침 7시 조금 넘은 시각. 호텔 부근 산책에 나선다. 이미 32도. 오늘 낮은 38도를 예상한다. 어제와 차이가 없다. 벌써 이렇게 몇 달 째 지내고 있는 베트남인들의 더위에 대한 내성은 놀라운 것이다. 에어컨이 있을 리 만무하고 냉장고도 또한 풍부하지 않다. 자판기에서 마음대로 꺼내먹은 청량음료도 만날 수 없다. 아마도 이 도시에서 에어컨 달린 방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호텔에 머무르는 관광객 몇 사람 정도 아닐까 싶다. 가파른 경제성장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국민소득 1,500 달러 수준인 베트남에서는 이 모든 것이 호사스럽다.
- (더위에 강한 베트남인들) 그래도 시민들은 벌써 분주히 아침을 연다. 곳곳에 열린 거리 좌판식당은 먹음직스런 쌀국수와 죽을 내놓고 있다. 그래봐야 한국돈 1천원 남짓이다. 과일가게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난생 처음 보는 열대과일들을 진열해 놓았고, 냉장고도 없이 돼지고기를 다듬는 정육점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이런 날씨에 수천년 살아 DNA 깊숙이까지 더위에 적응된 사람들을 상대로 미국이 벌인 베트남전은 날씨로만 따져도 미국이 고전할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몇 발자국 움직여도 온몸이 땀에 젖는 더위에 이제 내몸에는 베트남 냄새가 땀과 함께 촉촉이 배어가고 있는 듯 하다. 한국의 더위를 떠나왔지만 그것보다 훨씬 지독한 더위를 만나고 있으니 ‘이열치열’이란 바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추울 정도로 시원한 내 차, 한국의 지하철, 버스가 그립다.
▲호이안 거리
-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으로 되살아난 호이안) 오늘은 스쿠터를 타고 호이안(Hoi An)에 다녀올 계획이다. 다낭 남쪽 28km, 인구 12만의 호이안은 1535년 포르투갈인들의 내항 이후 남중국해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으로 부상하여 참파왕국의 무역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왕국의 쇠락과 함께 프랑스의 다낭 입성에 따라 다낭에 중심적 무역항의 위치를 내주고 호이안은 잊혀진 항구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호이안 올드타운은 15-19세기 동남아시아 무역항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이유로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이제는 관광도시로 변모하여 다시 성장하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베트남에서 보존이 잘 되었다는 것 자체가 특이한 현상이기는 하다.
▲손트라 반도
(호이안 가는 낭만의 해변길) 호이안 가는 멋진 해변길은 미케(Mikhe) 해변을 왼쪽에 두고 달리는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다. 끝없는 백사장은 미군들이 차이나비치(China Beach)라고 불렀다. 멀리 손트라(Son Tra) 반도의 험준한 산들이 바다로 길게 드리워져있는 낭만적인 풍경이다. 해변을 따라 고급 리조트들이 이어진다. 길 건너편에는 해산물 음식점들이 저마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손님들을 부른다. 도시가 끝나자 열대 평원이 이어지고 들판에는 헬리콥터 격납고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전쟁의 추억이고 미군의 흔적이다.
▲미케 헤변 (차이나 비치)
▲다낭 해안의 고급 리조트들
(마블 마운틴) 도시를 벗어날 무렵 평원에 난데없이 산들이 솟는다. 마블마운틴(Marble Mountains)이다. 높이 200m 정도 되는 산들이 화, 수, 목, 금, 토, 즉 화산, 수산, 목산, 금산, 토산... 이렇게 다섯 봉우리가 솟아있다. 그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토산(Thuy Son)에 오른다. 겉으로는 나무로 덮혀있지만 산의 속살이 드러난 곳에 가면 글자그대로 대리석 덩어리임을 알게 된다. 대리석이 흔한 이곳에서는 절지붕의 추녀와 장식 같은 것들을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산 곳곳에 있는 많은 동굴은 순례객들의 보금자리였다. 그중에서 암푸동굴(Am Phu Cave)에 들어가 밖으로 난 구멍을 뚫고 나오니 정상이다. 땀으로 목욕을 했지만 남중국해의 푸른 바다를 눈시리게 바라보는 보상을 얻는다.
▲마블 마운틴
▲마블 마운틴 정상에서
(스쿠터가 가져다 준 자유) 스쿠터를 달리는 동안 곳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짧은 대화나마 나눌 기회가 생긴다. 순수한 사람들이다. 40년전 우리도 그랬다. 이 나라가 잘 살게 되더라도 순수한 모습은 잃지 말기를 바란다. 호이안 가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불과 30km도 안되는 거리이지만 편리한 이동수단 덕분에 가고 싶을 때 가고 쉬고 싶을 때 쉬며, 이 들판 저 들판, 이 해변 저 해변에 들리는 자유를 만끽했기 때문이다.
▲호이안 가는 길
(꽃의 도시) 드디어 호이안이다. 호이안의 거리는 절반은 서양인들로 채워졌다. 중국과 서양의 영향에 베트남 고유의 분위기가 가미되어 나타난 호이안식 도시는 참으로 절묘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집집마다 여름꽃들이 만발했으니 여기가 곧 꽃의 도시 피렌체 아닌가? 다만 아쉬운 것은 잘 보존된 옛집들이 모두 상점으로 획일화되었고 물가가 턱없이 높아 세계 유명 관광지 수준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호이안 거리
도시를 배회하다가 페리를 타고 공연히 강건너 마을에 다녀온다. 페리라고 해봤자 동력이 있는 나룻배 수준이지만 낭만은 만점이다. 호이안은 저녁 이후가 더 매력적이다. 일몰 이후 밤 9시 30분까지 랜턴과 각종 조명기구로 도시를 밝힌다고 한다. 정취 가득한 호이안의 저녁을 즐기고 싶지만 스쿠터로 밤길을 달릴 수는 없으니 아쉬움 속에 호이안 탐방을 마무리한다. 도시 자체의 넘치는 매력에 유네스코의 검증까지 거쳤으니 도시는 방문자들로 번잡하다. 서양인들 이외에 일본인들이 많다는 점도 특이하다. 16세기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며 무역에 종사했다는 인연이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모양이다.
▲호이안 중앙시장
▲페리
따갑게 쏘는 여름해를 곧바로 안으며 서북쪽으로 달려 무사히 다낭에 닿는다. 길도 어둡고 스쿠터 조작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무사히 호이완 왕복을 끝낸 것에 스스로 박수를 보낸다. 다낭시에 들어와서 호텔을 찾느라고 30분을 허비한다. 호텔을 곁에 두고서 인근을 몇 바퀴 배회한 것이다. 어제도 잘 찾아왔던 길인데 말이다. 방향 감각이 전보다 무디어진 나 자신을 발견하며 놀란다. 나홀로 세계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왔음을 직감한다.
▲다낭의 롯데마트... 이것도 한류라면 한류
▶베트남 중부.북부 2
▲후옹강
(슬리퍼 버스) 9시 오픈투어버스에 오른다. 베트남의 장거리 버스는 대부분 슬리퍼 버스이다. 슬리퍼버스는 좌우 3열 2층 구조에 35석을 가진다. 효율적인 실내 좌석배치가 인상적이다. 승객은 백인 여행자들이 대부분이다. 사람들 착하고 물가 착한 베트남은 유럽인들의 매력적인 방문지일 것이다. 버스는 세 시간을 달려 정오 조금 지난 시각 후에(Hue)에 도착한다. 후끈한 공기가 먼저 반긴다. 여기 또한 날씨가 만만치 않다.
▲슬리퍼 버스
▲슬리퍼 버스
(시련 많았던 도시) 후에는 1802년부터 1945년까지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Nguyen) 왕조의 수도였다. 베트남 중부와 남부 대부분을 통치했던 왕조는 프랑스 통치하에 들어가서는 명목상 군주의 지위를 유지했고 2차대전 후에는 프랑스 세력과 손잡고 왕정복고 시도를 하기도 했다. 과거 DMZ가 있었던 북위 17도가 가까워(70km) 후에는 전쟁의 상처를 많이 입었다. 1968 구정 대공세때는 베트콩에 의해서 도시 전체가 24일간 점령당했고, 도시를 탈환하는 과정에서는 연합군에 의한 포격으로 역사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다. 또한 퇴각하는 베트콩에 의해서 양민 3천명이 학살되기도 했다.
▲요새
▲후에 거리
(베트남 사회주의 양식) 일단 호텔을 찾아들어가 체크인 한다. 이제부터는 이동이 문제다. 도시가 작아서 걸어 다닐 수 있다고 하지만 날씨 때문에 쉽지 않다. 또 내일은 도시 외곽에 있는 왕릉들을 방문해야 하므로 여기서도 정답은 스쿠터였다. 일일이 택시를 타는 것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저렴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동서로 흐르는 후옹강(香江, Perfume River)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진다. 북쪽은 왕궁과 요새, 남쪽은 강변을 따라 멋진 수변공원이 길게 이어지고 호텔과 유흥시설이 모여있다. 베트남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콜로니얼 양식이 베트남 양식과 결합한 우아한 건축물들이 많다. 관공서 등 공공건물은 대개 노란 칠을 한 이른바 ‘베트남 사회주의 양식’을 채택한 경우가 많다.
▲요새
▲왕궁
(금단의 도시) 탐방은 왕궁에서 시작한다. 응우엔 왕조의 궁궐이 있던 곳으로 높은 성곽과 해자로 분리된 요새 너머에 있는 금단의 도시(Forbidden City)에는 황족과 첩, 근신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고 무단침입하면 사형에 처해졌다. 바로 이와 같은 봉건왕조 이미지 때문에 베트남전이 끝난 후에도 후에의 유적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9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이후 관광지로서의 위상과 함께 옛 영화를 되찾고 있다.
▲왕궁
▲왕궁
거대한 요새와 제각기 모습을 달리하는 동서남북 각 방향에 흩어져 있는 십여 개의 출입문, 장대한 성벽... 미얀마 만달레이의 왕궁과 모양, 규모까지 흡사하다. 여러 게이트 중에서 남쪽 성벽 중앙에 있는 응오몬(Ngo Mon)이 가장 규모가 큰 메인게이트이다. 응오몬을 지나면 타이호아궁이 나타나고 그 뒤로 금단의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왕궁을 비롯한 궁궐들은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 1968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와 미군의 탈환작전 등 전화로 철저히 파괴된 것을 복구했거나 아직 복구중이다.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나라에서 온 여행자는 바로 한 세대전 이 나라가 겪은 아픔의 크기에 공감하고도 남는다.
▲후옹강
(베트남의 한류) 궁궐 지역을 벗어나 강변에서 휴식을 취한다. 스쿠터가 있기에 도시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더 빨리 이 도시와 친해질 수 있으니 좋다. 호텔 부근 강변 가로공원에 도달하니 해가 지고 날이 제법 선선해졌다. 젊은 베트남 여성 여럿이 다가와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이라도 했더니 제대로 맞추었다고 몹시 즐거워한다. TV를 보며, 음악을 들으며 동경해 왔던 한국의 국민을 직접 만나는 것이 즐거운지 이것저것 자꾸 물어본다. 베트남에서 한류는 절대적이다. 다낭에는 초대형 롯데마트가 섰고, 롯데 홈쇼핑 채널이 있는가 하면, 맥도날드 대신 롯데리아가 있을 정도로 한국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왕릉 가는 길) 스쿠터 시동으로 도시 외곽 왕릉 탐방길에 오른다. 지도가 불량하고 도로 안내판이 없는 베트남에서는 목적지를 찾아가다가 길을 잃어 방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티엔무(Thien Mu) 탑으로 먼저 간다. 후옹강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언덕에 세워진 아담한 7층 전탑으로서 후에시의 공식 로고로 사용되기도 한다. 중국 시안이나 운남성 대리에서 본 것에 비하면 훨씬 작지만 균형잡힌 모습이 언덕 아래 강과 조화를 이룬다. 강에 떠있는 유람선에서는 흥겨운 노랫가락 흘러나오고 그 옆으로는 모래실은 바지선이 오르내린다. 멀리 강을 에워싼 높은 산들까지 합하면 한 폭의 산수화다.
▲티엔무 탑
이번에는 뚜둑(Tu Duc) 왕릉으로 스쿠터를 몬다. 후에 시내 요새와 왕궁뿐 아니라 도시 외곽에 흩어져 있는 왕릉군(群)까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왕릉 이외에도 정자, 사원 등 한때 50여개의 건축물이 가득했다는 왕릉은 매우 넓다. 정문을 지난 후 여러 개의 작은 해자를 모두 건너 부지 가장 뒷 편 석실에 왕릉이 있다. 프랑스 지배 시절 응우엔 왕조의 실권없는 꼭두각시 왕들은 사후 지낼 곳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뚜둑왕릉
▲뚜둑왕릉 2
▲뚜둑왕릉3
▲뚜둑왕릉4
▲민망릉 가는 길
▲식당 주인의 모자 ... 틀림없이 한국인이다
▲민망릉 가는 길
(민망왕릉의 여름날 오후) 민망왕릉은 후에 주변 여러 왕릉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곳이다. 주변 경관과 왕릉의 부속 건축물들의 조형미와 균형미가 압권이기 때문이다. 정문을 지나면 여러 개의 작은 호수와 정원들을 건너 마지막에 왕릉을 만나게 되지만 왕릉은 일년에 한번 왕의 생일에 공개하므로 들어가 관람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왕릉 자체보다는 주변 경관과 분위기가 탁월하여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은 하고도 남는다. 볕이 가장 뜨거운 오후 2시, 왕릉 그늘진 곳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어디선가 바람또한 불어주니 에어컨이 따로 없다. 자연속에 숨은 듯 자리잡고 있는 왕궁은 쉴 곳 또한 많다. 마침 몇 무리 단체관광객이 떠난 후 왕릉은 적막강산으로 변한다. 낮잠을 자기에 더없이 좋은 분위기다.
▲민망릉
▲민망릉
시내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한다. 스쿠터를 반납하기 전에 기독교도가 많은 이 도시의 교회와 성당 몇 군데를 둘러 본다. 그중 대표적으로 푸캄(Phu Cam) 교회, 노트르담(Notre Dame) 성당 등 도시의 종교 명소에 들른다. 무사히 스쿠터를 돌려주니 발이 묶여버리는 느낌이다. 스쿠터로 누빈 베트남의 산과 들, 해변과 강, 가로수가 무성하게 자란 시골길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내 몸에는 땀과 함께 베트남 냄새가 짙게 배었다.
▲푸캄교회
▲노트르담 성당
(물가 착한 베트남) 저녁이 되기를 기다려 근처 식당에서 해산물로 푸짐하게 식사를 한다. 베트남 여행의 좋은 점은 물가가 싸다는 것이다. 쌀국수는 3만동(한화 1,500원), 저녁식사로 먹은 해산물 요리는 한 접시에 4만-10만동(2천-5천원)이다. 맥주를 곁들여 두세 가지 요리를 시켜도 만원 남짓이다. 강변에 나가 바람을 쐰다. 더운 낮을 참고 견뎌 시원한 저녁을 맞이한 시민들로 붐빈다. 하늘이 시커멓더니 곧 비가 쏟아진다.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발코니에 앉아 비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내일 새벽 하노이행 열차를 타야 하므로 일찍 잠자리에 든다.
▲후에-하노이 열차
(깔끔한 베트남 사람들) 베트남 사람들은 깔끔하다. 열차에서 내릴 때 뒷자리를 깨끗이 해놓는다든지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든지 하는 모습이 그렇다. 중국에서 열차를 여러번 타본 경험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베트남 사람들은 정직하고, 자존감있고, 우월한 민족임이 분명하다.
-(통일호 열차) 열차 출발 세 시간, 북위 17도 부근 동호이(Dong Hoi)를 지난다. 과거 DMZ 지역을 열차는 거침없이 건너 북상을 계속한다. 열차명은 Reunification, 통일호다. 이들에게 통일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가? 그것도 순전히 자신들 힘으로 이룩하지 않았는가? 과거 남북 베트남을 갈랐던 북위 17도 부근은 산악이자 이 나라 국토가 동서로 가장 좁아지는(50km) 지역이기도 하다.
▲후에-하노이 열차
▲하노이-라오까이 열차
(폭염에서 해방) 낡은 객차는 밤새도록 삐그덕거리며 산길을 달려 새벽 6시 조금 넘은 시각 라오까이에 닿는다. 하노이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380km 지점이다. 드넓은 논은 사라지고 대신 밭이나 계단식 논으로 바뀐 풍경이 산악지대에 왔음을 알린다. 날씨또한 선선해져 있으니 지난 한 주일동안 시달렸던 폭염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중국없는 중국 국경) 여기서 바로 국경 건너는 중국 운남성 허커우(河口)지만 라오까이에서 중국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1979년 중국의 침공과 국경지역 일시점령 이외에도 최근에는 서사(西沙, 중국어로는 시사)군도 분쟁까지 두 나라의 관계가 순탄치 않음을 말해 준다. 이 도시에도 큰 강이 흐르고 있으니 분명 베트남은 강으로 축복받은 나라임이 분명하다.
(사파가는 길) 라오까이에서 사파까지는 숨막히게 아름다운 산길로 40km를 들어간다. 그렇게 한 시간 20분만에 사파에 도착했다. 선선한 공기가 지난 한주일 더위에 찌들었던 몸에 생기가 돌게 한다. 멀리는 해발 3,145m의 판시판(Fansipan)산이 구름속에 가려져 있다. 히말라야 산맥이 끝나는 동쪽 끝에 마지막 큰 산을 하나 남겨 놓은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당연히 가장 높은 산이다.
▲사파
▲사파 시내
(흠몽족 마을) 도시는 평균 해발고도 1,500m, 마침 가는 비가 내리니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3만 6천명 인구중 절반이 흠몽(Hmong)족이고 나머지 35%가 기타 고산족이니 베트남인들은 차라리 소수민족이다. 라오까이에서 도착하는 버스를 기다리던 고산족 여성 십수명이 하차하는 승객들 주변에 몰려든다. 고산족 마을 트레킹 가이드를 구하는 관광객을 만나기 위해서다
▲깟깟 마을
시내로 돌아오니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모두 밖으로 나온 듯 마을 가운데 작은 광장이 붐빈다. 작은 교회당, 공원, 시청사가 소담하게 어우러진 산중도시의 저녁은 로맨틱하다. 사파의 밤, 베트남 여행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 하며 혼자서 까페에 들러 하노이 맥주로 자축한다. 호텔로 돌아와 TV를 켜니 한 채널 건너 한국 드라마가 나오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동경해 온 한국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어떤 나라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탁박폭포
(떠나는 아쉬움) 오늘은 오후에 하노이행 버스에 오르는 것 말고는 일정이 없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마지막 남은 무더위와 분주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이 기막힌 여름 낙원을 더 느끼기 위해서 공원도 거닐어 보고 일없이 거리도 배회해 본다. 찾아오기 쉽지 않은 곳, 마음 같아서는 매년 여름 찾아오고 싶지만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기대라는 것 또한 잘 안다. 도시를 떠나는 아쉬운 마음이 여기처럼 컸던 곳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시내 광장, 방금 라오까이에서 넘어온 버스는 나처럼 호기심과 기대에 가득찬 방문자들을 쏟아 놓는다.
▲사파 노트르담 성당
(하노이 공항 풍경) 하노이행 사파 익스프레스버스(www.sapaexpress.com)는 오후 4시 정각에 떠난다. 하노이가는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이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 버스회사 홈페이지에서 직접 결제하여 오늘 승차권을 확보하였다. 우등고속버스 두 대가 모두 만석이 되어 동시에 출발한다. 버스는 밤 9시반 하노이 국제공항에 나를 내려 준다. 오래전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서있던 낡은 공항터미널 건물은 사라지고 웅대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밤늦은 시각이지만 공항은 사람들로 붐빈다. 승객보다 몇 배 더많은 송영객 때문일 것이다. 출국과 귀국은 아직 이 나라에서는 큰 이벤트다. 온 가족과 친구들이 나와 이별의 아쉬움 또는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장면을 곳곳에서 본다. 사실 30여년전 나의 미국 유학길도 당시 김포국제공항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또다시 아시아 동쪽 끝에) 한국 인천이나 부산행 항공기들은 밤에 집중적으로 떠난다. 줄잡아 매일밤 5-7편의 항공기들이 한국으로 향한다. 베트남과 한국 사이의 교류의 규모를 말해 준다. 네 시간 넘게 더 기다려 한국행 Vietjet 항공기에 오른다. 네 시간 좀더 날아서 도착한 아시아 동쪽 끝에는 많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찬란한 문명이 하나 우뚝 서있다. 밤 비행기를 타고와 고단한 몸이지만 개학을 앞두고 쌓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집대신 학교행 버스에 오름으로써 7박 8일의 베트남 중북부 여행이 막을 내린다.
- 끝 -
글 | 김현주 광운대 교수
◆수상마을
◆동굴
▲향손둥.동굴(베트남 안남산맥에있는 길이4천미터,높이240미터,폭100미터인 세계최대의 어마어마한동굴)
◆베트남 상류층의 피서지 '바나산'
호이안과 다낭, 후에는 베트남 중에서도 최근에서야 한국에 소개된 관광지역이다. 우리나라에서 다낭 국제공항으로 가는 직항이 생긴 것도 최근의 일인데 지금은 주 10회의 직항 노선이 생길 만큼 성장하고 있는 관광지이다. 어떤 매력이 다낭과 호이안, 후에를 각광받는 관광지로 만들었을까?
옛 무역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호이안
호이안은 15세기부터 베트남의 주요 무역도시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쇠퇴의 길을 걸었는데 무역의 발달로 커진 배들을 수용할 무역항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베트남에서 치러진 큰 전쟁들이 호이안을 피해 갔고 옛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특히 호이안의 고도시는 거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꽤 긴 거리이지만 옛 무역도시의 정취와 곳곳의 아기자기한 가게들 덕분에 지루하지 않다. 그중에서도 1953년 일본인들이 세운 '내원교'와 중국의 복건성 출신들의 모임장소였던 '복건 회관', 중국 교포들의 향우회 장소이며 현재도 제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광조 회관'이 가장 유명하다.
▲거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호이안 고도시
▲사진을 찍거나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는 '내원교'
▲'복건 회관'의 화려한 입구 모습
▲현재도 제단으로 이용되고 있는'광조 회관'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유물! 후에
후에는 통일베트남의 수도이자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본거지로 1993년 베트남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여러 유적지 중 가장 먼저 응우옌 왕조의 후에 왕궁을 방문했다. 응우옌 왕조 유물의 정점일 것이라 기대하며 방문했지만 안타깝게도 복원 중인 곳이 많아 마지막 왕조의 자취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후에 왕궁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에 한국의 잘 정돈되어 있는 궁을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금색과 용으로 치장된 후에 왕궁
▲베트남 건축의 정점을 보여주는 카이딘 왕릉 내부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의 유물 외에도 꼭 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 틱꽝득 스님이 성불하시기 전까지 머물렀던 티엔무 사원이다. 틱꽝득 스님은 정부의 부패와 불교탄압에 대항하여 사이공 시내 한복판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소신공양을 했다. 이 장면은 베트남 종군기자로 유명한 말콤 브라운에게 포착되었고 그는 틱꽝득 스님의 마지막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게 된다. 티엔무 사원에는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과 아직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틱꽝득 스님의 타다 남은 심장 사진을 볼 수 있다.
▲틱꽝득 스님이 소신공양을 하기 위해 사이공으로 달려갈 때 사용한 자동차, 티엔무 사원에 보관 중이다.
다양한 종교가 모였다! 다낭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종교에 있어서는 매우 자유로운 나라이다. 특히 다낭에서는 다양한 종교의 모습을 한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먼저 산 전체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블마운틴(오행산)은 산 입구부터 수많은 불상이 관광객을 반긴다. 수많은 불상 중에서도 산 중턱의 동굴 속 벽에 모셔진 불상(아래 사진)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블 마운틴에 있는 불상 중 하나.
다낭 대성당에서는 베트남 가톨릭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살구빛의 예쁜 겉모습과는 달리 가톨릭 탄압과 전쟁의 기나긴 풍파를 거친 다낭의 상징물이라고 한다. 성당 안쪽 벽에는 베트남 순교자들의 동상과 베트남 가톨릭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베트남어 창제자의 사진이다. 베트남어는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알파벳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중국어보다도 복잡한 6성조 체계를 갖고 있어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 세계의 수많은 언어들 중 한글처럼 창제자가 명확한 언어는 드물다고 하는데 다낭 대성당에서는 베트남어의 창제자를 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다.
다낭 대성당에서는 베트남 가톨릭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살구빛의 예쁜 겉모습과는 달리 가톨릭 탄압과 전쟁의 기나긴 풍파를 거친 다낭의 상징물이라고 한다. 성당 안쪽 벽에는 베트남 순교자들의 동상과 베트남 가톨릭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베트남어 창제자의 사진이다. 베트남어는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알파벳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중국어보다도 복잡한 6성조 체계를 갖고 있어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 세계의 수많은 언어들 중 한글처럼 창제자가 명확한 언어는 드물다고 하는데 다낭 대성당에서는 베트남어의 창제자를 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다.
▲살구빛 외관의 다낭 대성당
베트남에만 있는 매우 독특한 종교도 있다.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이념에 따라 예수, 부처, 마호메드, 공자 등의 성인을 한 곳에 모시는 까오다이교가 바로 그것이다. 조금 생경하게 느껴지는 종교이지만 한때는 수백만 명의 신자가 있었을 정도로 융성했다고 한다. 현재도 신자들이 매일 모여드는 엄연한 종교로서 존재하는 까오다이교는 하나의 눈과 모든 색으로 바뀔 수 있는 흰색을 상징으로 사용한다
▲다낭 까오다이 사원 외관
▲5개의 종교를 모은 까오다이교
베트남 상류층의 피서지, 다낭 바나산 국립공원
다낭의 바나산 국립공원에 가면 베트남 상류층의 피서를 경험해볼 수 있다. 해발 1,500m를 케이블카로 편안히 오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베트남 어느 지역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쾌적하고 시원한 날씨 속에 최고급 호텔과 놀이동산이 숨어 있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실제로 바나산은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 프랑스인들의 별장 겸 와인창고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상류층의 인기 피서지라고 한다. 베트남의 더위에 지쳤던 몸과 마음이 바나산 국립공원의 쾌청한 날씨에 씻겨 내려간다.
▲해발 1,500m의 바나산을 약 20분 만에 오를 수 있는 케이블카
▲바나산 국립공원에 조성된 휴양 단지 모습
바나산 국립공원을 마지막으로 3박 5일의 베트남 여행을 마무리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곧 가을 옷을 꺼내 입는다는 날씨임에도 걸어야 하는 코스가 많기 때문에 덥고 습한 날씨가 여행의 즐거움을 방해했다. 또 아직은 경제성장의 수혜를 많이 입은 지역이 아닐뿐더러 소수 지역을 제외하고는 영어 간판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관광지로서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처럼 축 처진 몸으로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에는 꼭 한 번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다. 후에 왕궁의 복원 후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좀 더 느긋하게 바나산 국립공원에서 피서를 즐겨 보고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80년대만큼이나 고속성장하고 있다는 베트남이 호이안과 다낭, 후에를 어떤 모습으로 바꿔 놓을지! 1년만 지나도 사춘기 소녀처럼 달라진 모습으로 나를 반길 것 같다.
<사진으로 만나는 베트남>
▲깔끔한 맛의 베트남 커피, 연유로 만드는 사이공식 밀크커피가 맛있다.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6대 해변, 다낭 해변
▲구름이 내려다 보이는 바나산 국립공원 풍경 파노라마
◆풍경
▲운하강
▲신비로운 구름 속 풍경 - 3100 피트 상공에서 촬영
▲호이안 야경
□ 2015.11.11 중국 다음은 베트남? 향후 35년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 예상되는 까닭은...
▲출근길 오토바이 행렬로 가득찬 베트남 하노이 시내 풍경. 젊은 양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베트남이 급부상하고 있다. 사진=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Good Morning, Vietnam!〉 베트남 전쟁을 그린 미국 영화의 제목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미(美) 공군 방송병(放送兵)인 DJ의 눈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DJ 역할을 맡은 배우 로빈 윌리엄스는 항상 ‘굿모닝 베트남!’이라는 멘트를 하면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윌리엄스는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얼마나 멋진 세상인가)’라는 곡을 틀면서 전쟁으로 찌든 베트남의 모습을 반어적(反語的)으로 표현한다.
이 노래의 제목처럼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난 현재 베트남이 새로운 기회와 도전의 땅이 되고 있다. 전(全) 세계적인 경기둔화로 각국이 고전(苦戰) 중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경제는 호황(好況)을 보이고 있다.
2015년 상반기 베트남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6.2%로 지난 7년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올해 아시아 주요국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지만, 베트남의 GDP성장률 전망치는 6.5%로 종전 전망치 6.1%보다 높게 제시했다. 이는 인도(7.4%), 중국(6.8%)에 이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수치이다. ADB는 내년에는 당초 전망치 6.2%를 웃도는 6.6%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2013년 5.4%, 2014년 6.0%였던 베트남의 연간 GDP성장률은 갈수록 상승하고 있다.
중국발 경기둔화 쇼크와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신흥국들이 맥을 못 추고 있지만 베트남은 오히려 신바람이 났다. 지난 1~8월 산업생산지수(IIP)는 전년 동기보다 9.9% 상승하고 소매·서비스 매출은 10.1% 급증하는 등 실물경제지표도 좋아졌다. 수출은 1063억 달러(125조원)로 9%나 늘었다. 1988년 3억7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베트남의 해외직접투자(FDI)는 2014년 202억3000만 달러로 50배 넘게 불어났다. 경제성장률은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0년간 연평균 7.5%대를 기록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법인 프라이스 워터 하우스 쿠퍼스(PwC)는 최근 ‘2050년 세계 전망’ 보고서를 통해 2014~2050년 사이 베트남의 1인당 연평균 실질 GDP 성장률을 5.0%로 예측했다. 이 전망대로라면 베트남은 앞으로 35년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 속도를 구가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해 온 중국은 같은 기간 연평균 3.4%의 성장률을 보이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신흥시장의 그린필드 투자 중심지
전쟁으로 각인된 나라 베트남이 급성장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외국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와 제조업의 발전 덕분이다. ‘포스트 차이나(post China)’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 베트남은 최근 들어 외국 기업들이 대거 공장 등을 건설하면서 글로벌 생산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올해 1~8월 베트남의 외국인 직접투자(FDI) 유치액은 133억3000만 달러를 기록해 전년 동기(同期) 대비 30.4%나 증가했다.
특히 베트남은 신흥시장의 그린필드(greenfield) 투자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린필드 투자는 FDI 가운데 외국 자본이 직접 부지를 확보해 공장 등을 짓는 투자를 말한다. 베트남의 그린필드 투자 규모는 중국을 비롯한 주요 신흥국들 가운데 가장 컸다. 영국의 유력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해 14개 주요 신흥국에 유입된 그린필드 투자를 분석한 결과, 베트남의 지수가 8.14로 가장 높았다.
2위인 루마니아(3.91)와 3위인 헝가리(3.80)보다 훨씬 높았다. 중국은 0.56에 그쳤다. 지수가 1이면 전 세계 그린필드 투자에서 한 나라가 차지한 비중이 이 나라의 GDP가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한 비중과 똑같다는 의미다. 지수가 1을 넘으면 경제규모에 비해 더 많은 투자를 받았다는 뜻이 된다. 베트남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한 몫에 비해 8.14배 많은 투자를 받은 셈이다. 실제로 각국의 대기업들이 대거 베트남으로 진출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나라의 삼성전자를 들 수 있다. 베트남 생산기지는 삼성전자 전체 스마트폰 생산량(약 5억대)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핵심 요충지다. 갤럭시S6와 S6엣지 등 최신 스마트폰 역시 대부분 이곳에서 만들고 있다.
특히 베트남 북부 박닌성(옌퐁공장)과 타이응우옌성(옌빙공장) 두 곳에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30억 달러(3조5000억원) 규모의 추가 투자 승인을 받아 내기도 했다. 삼성전자 베트남법인은 매출이나 자산규모 면에서 베트남 최대 기업 페트로베트남을 위협하고 있다. 응우옌 떤 중 베트남 총리가 삼성전자 생산설비 유치를 최대 업적으로 꼽을 정도다.
LG전자도 지난 3월 북부 항구도시 하이퐁에서 ‘하이퐁 캠퍼스(생산단지)’ 1차 준공식을 가졌다. LG전자는 2028년까지 생산시설을 확충해 스마트폰, TV, 자동차 부품 등을 제조하는 종합 생산단지로 육성할 계획이다. 공장 부지는 80만m² 규모로 15억 달러(1조6500억원)를 투자한다.
양질의 젊은 노동력이 강점
▲갤럭시 S6를 생산하는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절반 이상을 베트남에서 만든다
베트남 외국인투자청(FIA)에 따르면 올해 1~8월 각국별로 투자한 내역을 보면 우리나라가 52억6000만 달러로 전체의 39.5%를 차지, 55개국 가운데 1위를 기록했다. 영국(12억5000만 달러), 버진아일랜드(9억7000만 달러), 홍콩(8억7000만 달러) 등이 우리나라의 뒤를 이었다.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은 4000여 개에 달한다. 지난해 베트남의 FDI 승인금액을 보더라도 우리나라가 77억 달러로 1위를 차지했고, 홍콩(30억 달러)·싱가포르(29억 달러)·일본(23억 달러)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이 대거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중국의 노동자 임금이 대폭 올랐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명 컨설팅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조사를 보면 중국에서 생산성과 물가를 감안한 노동자 임금은 최근 10년 새 3배나 올랐다. 2004년 시간당 임금은 4.35달러였는데 2014년에는 12.47달러로 3배 가까이 상승했다. 반면 베트남의 최저임금(월급 기준)은 2015년 현재 145달러(연간 평균 환율 적용)로, 중국 280달러의 50% 수준이다.
베트남의 최저임금은 2012년 98달러, 2013년 114달러, 2014년 128달러, 2015년 145달러로 상승세지만 중국과는 일정한 격차가 유지되고 있다. 중국의 최저임금은 2012년 200달러, 2013년 229달러, 2014년 255달러, 2015년 280달러인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경제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에 따르면 오는 2019년 중국의 시간당 제조업 노동비용은 베트남의 177%에 이를 것으로 집계돼 지난 2012년의 147%보다 더욱 간극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베트남의 노동인구는 젊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체인구 중 40%가 25세 미만으로 구성돼 있다. 또 베트남은 교육열과 인적자원의 질이 높고 문맹률이 낮다. 현재 60세 이상 인구는 불과 9%로, 13%에 이르는 중국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다. 풍부한 경제활동인구와 양질의 노동력은 향후 베트남 경제성장의 바탕이 될 것이 분명하다.
글로벌 제조업 공장으로서의 베트남의 역량은 최근 발표된 수치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영국은행 HSBC가 매월 측정하는 베트남의 제조업 구매자관리지수(PMI)는 지난 2013년 9월부터 지난 3월까지 19개월 연속 ‘경기확장’을 의미하는 50을 웃돌았다. 지난해 베트남의 대미 수출은 주변 아세안 국가를 모두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세계은행의 베트남 담당자인 빅토리아 콰콰는 “베트남은 농업으로부터 제조업으로 경제구조를 탈바꿈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적화통일 후 10년간 마이너스 성장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반도 동쪽에 있는 국가이다. 북쪽은 중국, 서쪽은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남중국해와 면해 있다. 남북으로 해안선은 무려 3444km에 달한다. 세계 14위 규모의 인구(9200만)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토 면적(33만1210km²)은 우리나라의 3배가 넘는다.
해상운송로로서의 지정학적 이점과 더불어 젊은 노동인구 및 저임금 비용, 제조업으로의 산업지형 변화 등 매력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베트남이 아시아의 새로운 용(龍)으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미국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비크람 네루 동남아시아 담당 연구원은 “베트남이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렵게 살아 온 베트남의 현대사를 볼 때 현재의 발전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월남) 정권의 항복으로 통일이 된 후, 베트남 공산정권은 대규모 숙청을 벌였다. 남베트남 출신의 하사관 이상 군인 수백만 명을 집단농장에 강제수용, 공산주의에 순응하도록 사상개조 교육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가 사망했다. 또 미국 등 서방과 협력한 남베트남 정부의 전직 관리들과 기업인들을 대부분 숙청했다.
당시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해 희생자는 최소 30만명에서 최대 20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수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살기 위해 배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하는 이른바 ‘보트 피플’이 양산됐다. 1976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 지역으로 탈출한 베트남 난민들의 수는 총 79만명이나 됐다.
이처럼 강압적인 통치 때문에 베트남은 통일 이후 10년간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는 등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다. 특히 베트남 공산정권은 시장경제 체제를 완전히 부정했다. 이 기간의 경제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쌀 생산이다. 베트남은 태국과 함께 세계 쌀 수출에서 상위를 차지해 왔지만, 통일 이후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당시 베트남 공산정권은 모든 농경지를 국가 소유인 집단농장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농촌은 완전히 파괴됐다. 베트남은 쌀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실제로 1986년 베트남의 1인당 GDP는 84달러로 805달러였던 북한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도이 머이 정책의 明暗
당시 베트남 공산정권은 경제위기를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민심(民心)이반으로 정권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지도부에서 나왔다. 결국 베트남 공산당은 1986년 12월 제6차 전당대회에서 ‘도이 머이(Doi Moi)’라는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도이 머이’는 베트남 말로 ‘바꾼다’는 뜻의 ‘도이(Doi)’와 ‘새로운’이라는 의미의 ‘머이(Moi)’를 합친 말이다 ‘새롭게 한다’ 또는 ‘쇄신’을 뜻한다. 당시 회의에서 응우옌 반 린 서기장은 인플레가 587.2%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공산주의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되 시장경제 체제를 추진할 것을 선언했다.
‘도이 머이’ 정책 도입 이후 가장 혁명적인 조치는 농업개혁이다. 베트남 공산정권은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가 갖되 농민 개개인에게 장기 사용권을 부여함으로써 생산력 향상을 유도하는 토지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쌀 수입국으로 전락했던 베트남은 다시 쌀 수출국이 됐다. 외국인 투자법을 제정해 외국 자본을 대거 유치했다. 또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이 없는 국영기업들을 도태시키는 등 경쟁력도 강화했다. 토지상속권과 담보권, 사용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토지법을 개정했으며, 파산법, 외국인투자법, 기업법 등도 도입했다.
대외(對外)개방 상황에서 베트남의 풍부한 노동력과 자원이 부각되면서 외국인 투자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국가들이 베트남에 적극 진출했다. 외국 기업들은 섬유, 봉제, 신발, 가구 등 노동집약형 경공업에 주로 투자하다가 관광과 호텔 등 서비스업종과 가전·건설·기계 등으로 대상을 확대해 갔다.
‘도이 머이’ 정책이 날개를 달게 된 것은 1998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가입과 2000년 미국과의 무역협정 체결이다. 또 2006년 11월 세계무역기구(WTO)에 15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이후 베트남 경제는 1997~1999년 아시아 전역을 강타한 외환위기를 제외하고 높은 성장률을 보여 왔다.
하지만 도이 머이 정책으로 상당한 부작용도 발생했다. 특히 공산당 간부를 비롯해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심각할 정도이다. 부정부패 때문에 베트남 경제가 발전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왔다. 공산당 간부들과 공무원들은 부동산 투기 등으로 막대한 부(富)를 축적했다. 또 이들과 결탁한 일부 기업인들도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실제로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TI)의 부패 지수를 보면 베트남은 187개국 가운데 119위에 그칠 정도로 부패 수준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베트남 정부와 공산당은 앞으로 더욱 도약하기 위해 ‘제2의 도이 머이’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베트남 공산당은 내년 초 열릴 전당대회에서 2016~2020년 평균 GDP 성장률 6.5~7%, 1인당 국민소득 3200~3500달러(2014년 2052달러)를 목표로 제시할 방침이다.
베트남 공산당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보다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을 통치하는 유일한 세력은 공산당이다. 440만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는 공산당은 헌법상 국가와 사회를 영도하며 정부, 국회의 활동을 지도하는 최고의 권력기관이다.
때문에 공무원들은 물론 국가 주요 공기업의 간부들은 공산당 엘리트 출신들이다. 공산당은 당원들을 젊은 시절부터 철저하게 교육하고 각종 직책과 경험을 쌓도록 해 미래의 지도자로 만들어 왔다. 공산당은 집단주의 지도체제의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 과정을 1930년 창설 이래 지금까지 지켜 왔다. 특히 전당대회는 당의 중요한 정책의 인준, 정책노선의 결정, 새로운 당 규약 등을 결정한다.
공산당의 세대교체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은 작년 10월 방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현재 베트남 권력구조는 공산당 서기장, 국가주석,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데, 당 서기장이 최고 실권자이다. 국가주석은 군사와 외교를, 총리는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장한다.
응우옌 푸 쫑 당 서기장은 대표적인 사회주의 이론가로 합리적이고 온건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들어 왔다. 응우옌 서기장은 공산당 기관지 편집장과 교수 출신으로 2011년 1월 제11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권력 서열 1위에 올랐다.
1944년 북부 수도 하노이에서 태어난 응우옌 서기장은 1967년 하노이종합대학(현 하노이인문사회대)을 졸업하고, 공산당 기관지와 당 이념 관련부서 등에서 일했다. 1981년 구소련의 사회과학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공산당 기관지 편집국장을 지내다 1994년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돼 1996년 하노이시당(市黨) 부서기에 올랐다.
1997년 당 정치국원(중앙위원회 교육문화 담당)과 2003년에는 하노이시 당 서기, 2006년 국회의장을 각각 역임했다. 응우옌 서기장은 국영기업이 구심체가 돼 경제발전을 견인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Socialist-oritented market economy)’라는 개념과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응우옌 서기장은 2006년 제10차 전당대회에서 65세 이상 지도자들은 스스로 은퇴한다는 결정에 따라 차기 전당대회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
쯔엉 떤 상 국가주석도 퇴임할 것으로 보인다. 1949년 남부 롱안성에서 태어난 쯔엉 주석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통일 이후인 1983년 호찌민시 신경제지구 개발국장을 맡으면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92년 호찌민시 당 위원장, 1996년 정치국원을 맡았다. 공산당 중앙당 경제위원장 시절엔 시장경제 요소를 적극 도입, 베트남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초석을 마련했다.
‘부패와의 전쟁’
▲베트남의 國父 호찌민.
베트남 공산당의 특징은 국부인 호찌민(1890~1969년) 주석의 유지를 받들어 한 개인의 절대적 권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 호 주석은 검소와 청렴으로 유명하다. 전쟁 당시 정글에서 몸에 밴 검소한 생활은 북베트남의 주석 자리에 오른 뒤에도 여전했다. 그의 거처는 조그만 오두막이었고 늘 같은 옷에 고무 샌들을 신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그는 30여 년간 망명과 투옥으로 가족들과 헤어져 서로 소식조차 모르고 살았다. 주석이 된 뒤 누이를 딱 한 번 만났을 뿐 그 뒤 죽을 때까지 인연을 끊고 지냈다고 한다.
항상 나라의 일을 먼저 걱정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복을 즐긴다는 신조를 철저히 실천한 것이다. 베트남 국민들은 권력을 통해 어떤 부귀도 누리지 않았던 그를 절대적으로 존경했지만 우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호(胡)아저씨로 부르며 친근하게 여겼을 뿐이다. 베트남의 실용주의자들이 공산당 지도부의 반열에 올라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호 주석의 유지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 공산당은 내년 초 제12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부패와의 전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공개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에 나설 방침이다. 베트남 공산당은 지난 9월 15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정치보고서 초안을 통해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보고서는 부패가 베트남 정권 생존에 대한 큰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면서 뇌물수수 등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한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부정·부패 연루 사건들이 재판을 받고 있으나, 법과 정책 개혁을 비롯한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오는 2020년까지 베트남이 산업국가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그동안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원이 선출하는 중앙위원회 위원 정족수를 160명에서 200명으로 확대하고, 여성·소수민족·젊은층 등 상대적인 약자층의 당내 영입을 대폭 추진하고, 자본가들에 대한 선별적인 입당을 허용하는 등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해 왔다.
EU와 FTA 체결
▲베트남에 있는 한국 의류업체에서 일하는 베트남 노동자들. TPP 체결로 베트남은 최대의 수혜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베트남은 경제발전을 위해 대외개방에 적극적이다. 지난 8월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합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은 싱가포르에 이어 EU와 FTA를 맺는 두 번째 동남아 국가가 됐다. 베트남은 10년 안에 99% 이상 품목의 관세를 철폐하고 EU는 7년 안에 같은 품목의 관세를 철폐할 계획이다.
양측은 법률작업 등을 마친 뒤 올해 말까지는 FTA 협상을 최종 타결할 예정이다. 양측의 FTA 협정은 2017년 말이나 2018년 초 발효될 것으로 보인다. EU는 베트남의 2위 교역 파트너이며 베트남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 회원국 중 EU의 4번째 교역 대상국이다. 지난해 양측의 무역규모는 280억 유로를 기록했다.
베트남은 지난 5월엔 유라시아경제연합(EEU)과 FTA를 체결했다. EEU는 러시아를 비롯해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 등 옛 소련 5개국이 지난 1월 출범시킨 경제공동체이다. 베트남은 그동안 러시아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어 왔다. 베트남은 지난해 12월 우리나라와도 FTA를 체결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의 수출에서 중국, 미국, 홍콩에 이어 4위 국가다. 지난해 6위였지만 올 들어 8월까지 수출실적이 일본과 싱가포르를 제치고 4위로 껑충 뛰어오른 것이다. 그만큼 베트남과의 교역 비중은 커지고 있다. 양국의 FTA가 국회 비준 절차를 거쳐 공식 발효되면 앞으로 교역 규모는 더욱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베트남이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의 타결로 상당한 이득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투자전문지 배런스는 TPP 타결로 12개 참여국 중 베트남이 최대 수혜국이라고 평가했다. 이 매체는 베트남의 제조업이 수혜를 볼 것이라며 베트남이 TPP 가입국 중 유일한 중하위 소득(lower middle income)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세계은행의 분류 기준에 따르면 TPP에 참여한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칠레, 싱가포르, 브루나이는 고소득(high income) 국가이고 말레이시아, 페루, 멕시코는 중상위소득(upper middle income) 국가이다.
AIIB도 가입
유라시아그룹도 보고서에서 베트남은 TPP 타결로 GDP 규모가 2025년까지 11%, 수출 규모는 28%가 증가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예측했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IE)도 TPP가 발효되면 베트남의 수출이 2025년까지 29%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베트남의 주력 수출 상품은 IT 부품과 가전제품, 의류 및 신발 등이다.
특히 섬유·의류 산업은 가격경쟁력과 TPP 내 ‘원사(原絲) 기준’ 덕에 수혜를 입을 전망이다. 원사 기준도 베트남 섬유·의류 업계에 유리한 조건 중 하나다. 미국은 그동안 FTA 등 무역협정에서 중국산 원사·원단을 사용한 의류제품에 관세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원사 기준을 ‘원산지 기준’으로 채택해 왔다.
TPP에서도 원산지 기준으로 원사 기준이 채택됐기 때문에 관세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역내 국가에서 원사부터 봉제까지 의류 생산의 모든 과정을 수행해야만 한다. 미국 의류·섬유 수입시장에서 베트남의 점유율은 중국(36.7%)에 이어 11.1%를 차지하고 있다.
베트남경제정책연구소(VERP)는 TPP로 축산업 등 일부 업종의 경쟁력은 떨어지겠지만 섬유·의류, 신발, 건설 등의 분야에서는 외국인 투자가 확대되고 수출이 증가해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했다.
싼 임금과 풍부한 노동력을 앞세운 베트남은 TPP 타결로 앞으로 더욱 제조업 생산기지로서 각광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외국 기업들은 TPP 회원국에 수출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더욱 많이 공장을 옮길 것이 분명하다. 이 경우 베트남이 중국에 이어 ‘두 번째 세계의 공장’ 지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 베트남은 또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상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도 가입했다.
實利 외교
베트남은 그동안 국익을 위해 철저하게 실리외교를 추진해 왔다. 특히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때문에 미국·일본과의 전략적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도 중국과도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응우옌 서기장은 지난 9월 도쿄를 방문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남중국해에서 안보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아베 총리는 남중국해에서 활용 가능한 고성능 순시선과 순시정 등 경비용 선박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응우옌 서기장은 일본의 안보법과 집단자위권 행사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다.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대규모 간척을 통해 인공 섬을 건설하는 것은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베트남은 전쟁을 벌였던 미국과의 관계 강화도 공고히 해 왔다. 올해는 미국과 베트남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수교한 지 20주년이 된다. 응우옌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은 지난 7월 6일부터 10일까지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을 방문한 것은 수교 이후 처음이다. 응우옌 서기장은 백악관을 방문해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났다. 오벌 오피스는 상대국 정상이 상당히 친숙한 인물이거나 예우를 갖출 때 회담장으로 사용하는 장소다. 두 정상은 경제와 군사협력 문제 등을 논의했으며, 양국의 우호협력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로 합의했다.
베트남 기업들은 중국보다는 기술이전을 통해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미국의 다국적기업들과의 생산협력을 선호하고 있다. 최근 들어 미국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교역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양국 교역 규모는 2004년 62억 달러에서 지난해 377억 달러로 10년간 6배 이상 늘었다.
베트남은 또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보고 있다. 미국도 중국의 해군력 증강을 견제하고 남중국해를 비롯해 동남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베트남과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런 전략적 이해관계를 볼 때 양국의 우호협력 관계는 앞으로 밀월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은 오는 11월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베트남을 방문할 계획이다.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은 2000년 11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이어 15년 만이다.
시진핑, 11월 베트남 방문 예정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오는 11월 베트남을 방문해 응우옌 서기장과 양국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중국 최고 지도자인 국가주석이 베트남을 방문하는 것은 2006년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 이래 9년 만이다.
베트남이 시 주석의 방문 요청을 수용한 것은 역시 실리적인 외교정책 때문이다. 베트남은 과거부터 중국과는 앙숙이었다. 베트남은 지난 1000여 년간 중국 역대 왕조와의 전쟁에서 패배, 조공(朝貢)을 바치는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복종하지 않고 정체성(正體性)을 지켜 왔다.
양국은 1979년 2월 17일부터 약 한 달간 국경 지역에서 전쟁까지 벌였다. 당시 베트남은 이웃 나라인 캄보디아를 침공해 친중(親中) 성향의 크메르 루주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에 화가 난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보복으로 국경 지역을 공격했다. 하지만 중국은 베트남의 강력한 저항으로 결국 철군했다. 사실상 베트남의 승리였다.
역사적으로 보나 전쟁했던 관계로 보나 베트남은 현재 아세안 10개 회원국들 중 가장 반중 정서가 강한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국은 현재 남중국해에 있는 난사군도(베트남명 쯔엉사)와 시사군도(호앙사)를 놓고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현재 시사군도의 모든 섬을, 난사군도에선 8개 섬을 실효 지배하고 있다.
반면 베트남은 난사군도에 있는 29개 섬을 실효 지배하고 있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시사군도에서 3개 섬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1974년 중국과의 해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이 섬들을 빼앗겼다.
하지만 베트남은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군사적으로 볼 때 다윗인 베트남은 골리앗인 중국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고 있다. 이처럼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관계이지만 베트남으로선 중국을 외면할 수는 없다. 베트남에 중국은 최대 교역 상대국이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기준 중국과의 교역 규모는 319억 달러에 달한다. 베트남은 중국 윈난성·광시좡족 자치구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베트남과 중국은 3개의 국제도로와 26개 국도로 연결돼 있다. 양국 국경에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베트남이 중국과도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책을 유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세안의 盟主’ 꿈꾸는 베트남
▲베트남 하노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국 휴대폰 상점. 사진=조인원 조선일보 기자
베트남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베트남 최초의 중앙집권 체제 독립국가인 리(李) 왕조(1009~1226) 때문이다. 리 왕조의 시조인 태조 리 꽁 우언(李公蘊)은 1010년 하노이를 첫 도읍으로 정했다. 리 왕조 시대의 국호는 ‘다이 비엣(Dai Viet·大越)’이었으며, 중국은 안남국(安南國)이라고 불렀다. 리 왕조는 8대에서 내란으로 멸망했으며, 당시 마지막 왕손이었던 리 롱 뜨엉(李龍祥)이 화를 피하기 위해 베트남을 탈출해 바다를 표류하다 고려 땅에 도착했다. 고려 고종은 그에게 황해도 옹진 화산에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했으며, 그는 화산이씨(花山李氏)의 시조가 됐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1992년 수교하고 2009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한 이래 협력을 강화해 왔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6만여 명의 베트남 신부들도 있다. 양국은 혹독한 식민지 시대를 거쳤고, 외세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는 쓰라린 아픔도 겪었다.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치르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경험했다. 우리나라의 대중문화인 한류(韓流)가 가장 인기가 있는 곳도 베트남이다.
베트남의 꿈은 앞으로 아세안의 맹주(盟主)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다른 아세안 회원국들과 비교할 때 베트남은 GDP 측면에서 아직 상당히 낮은 수준이지만 근면과 끈기라는 민족성과 실리주의를 통해 꿈을 실현할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 | 월간조선 11월호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 일상
▲베트남 건국 시조-훙왕
▲주렁주렁 무거운 옷을 입은 참전용사
▲참족의 유적지
▲폭우
▲ 2017.10.11 폭우로 77명 사망 주택 1만7천 채 피해
▲호이안 마을 태풍 담레이 강타 2017.11.6
▶하노이
▲랜드마크 72= 하노이 수도 1000년 기념으로 한국의 경남 기업이 11억2천만 달라를 들여 건축한 346m의 72층 빌딩
▲하노이 전경
▶호치민
▲따뜻한 남쪽 나라 = 호치민 시
▲호치민 담센공원
▲담센공원 접시와 숟가락으로 만든 새
■ 호찌민의 일생
50주기 맞은 베트남 국부 호찌민, 21살 때 무일푼으로 프랑스 유학 떠난 이유
9월 2일은 현대 베트남을 세운 호찌민(胡志明·1890년 5월 19일~1969년 9월 2일)의 50주기다. 호찌민을 거론하지 않고 현대 베트남을 말할 수 없다. 그는 1945년 9월 2일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베트남 북부에 동남아시아 최초의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을 세우고 초대 주석을 맡아 종신 재직했다.
과거 급제한 아버지 아들 이름으로 ‘성공’ 붙여
프랑스 식민지 되자 유교 대신 프랑스어에 무게
여객선에서 배삯 대신 주방보조 일하며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 이어 공산주의자로 활동
런던 호텔에서 일하다 세계적 요리사 제자 될 뻔
파리강화회담장 가서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 청원
모스크바서 공산혁명가 교육 받고 중국으로 파견
북베트남 세우고 종신 주석 재직하며 전쟁 지휘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보리센코 공원 공장에 지난 7월 5일 설치된 베트남 초대 주석 호찌민의 동상. 올해 9월 2일로 호 주석의 50주기를 맞았다. 타스=연합뉴스]
북베트남 세우고 프랑스·미국에 맞서 전쟁
호 주석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 19일~1954년 8월 1일)을 치르고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 3월 13일~5월 7일)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 식민주의 세력을 몰아냈다. 베트남은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협상에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호 주석은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에 맞서 베트남 전쟁(1955년 11월 1일~1975년 4월 40일)을 벌였다. 한국도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964년 9월 11일~1973년 3월 23일에 걸쳐 연인원 32만5517명이 파병돼 5099명이 목숨을 잃고 1만1232명이 부상했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초대주석의 영묘.. 50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달 31일의 모습이다. [EPA=연합뉴스]
한국 지렛대로 경제개발 나선 베트남
북베트남은 호 주석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점령했다. 남북 베트남은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통합을 이뤘다. 과거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은 호찌민으로 이름을 바꿨다. 국부(國父) 호찌민을 기리기 위해서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개혁개방정책)’를 시작하며 나라의 문을 열어젖힌 베트남은 1992년 한국과 수교하며 경제개발의 시동을 걸었다. 김영삼 대통령 이래 모든 한국의 대통령이 반드시 찾는 주요 국가로 자리 잡았다. 한국은 베트남에 4대 교역 국가이며, 베트남에 한국은 3대 교역 국가이자 제1의 투자국가다. 베트남은 한국을 지렛대로 경제개발에 나선 셈이다.
베트남은 오랜 전쟁 탓에 전 세계에 정글·베트콩·게릴라전의 이미지로 남았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선 결혼·취업 등으로 이주 베트남인이 늘면서 성실하고 생활력과 가족애가 강한 국민이라는 인상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었다가 공산화 이후 이름을 호찌민으로 바꾼 호찌민시의 스카이라인. 남북 통합 뒤 경제수도로 자리 잡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Vinhomes Central Park and Landmark 81, Vietnam's tallest building are seen from the Saigon river in Ho Chi Minh city, Vietnam June 6, 2019. REUTERS/Yen Duong/2019-06-07 01:30:15/ <저작권자 ⓒ 1980-201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유교 문화 뿌리 깊은 베트남
사실 베트남은 인도와 중국 문명이 서로 만나는 동남아시아에서 유교 문화가 더욱 강했던 드문 나라다. 유교 문화는 청년 호 주석의 삶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베트남은 당시의 조선처럼 유교 세상이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로 후에를 수도로 삼았던 응우옌 왕조(阮朝·1802~1945년)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청년들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공자와 맹자를 논하며 유학을 공부한 뒤 과거에 급제해야 관리로 출세할 수 있었다.
▲1921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프랑스 공산당 전당대회에 인도차이나 대표로 참석한 호찌민. [사진 위키피디아]
아들 이름을 ‘공손’ ‘성공’으로 붙인 아버지
호 주석의 아버지 응우옌신삭(阮生色·1862~1929년)도 과거에 급제해 진사에 해당하는 포방(副榜)이 됐다. 그는 지방관리가 됐으나 세금을 거두려고 곤장을 치던 지역 유지가 비명횡사하면서 책임을 지고 면직돼 시골 훈장으로 살았다.
그는 1890년에 태어난 아들에게 응우옌신쿵(玩生恭)이란 아명을 붙였다. 공손한 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0살이 되자 성공이 예정된 인물이라는 뜻의 응우옌땃따잉(玩必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부모의 기대가 엿보인다. 이 아들이 바로 미래의 호찌민이다.
그 뒤 왕조 내부의 혼란을 틈타 군대를 보낸 프랑스는 1883년 후에 조약을 통해 베트남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세력 아래에선 더는 과거처럼 유학으로 출세하기가 힘들게 됐다. 프랑스 보호령에서 출세하려면 프랑스어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서당에 다니던 아들을 프랑스어 학교에 보냈다. 나중에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을 지낸 고딘디엠의 아버지가 세운 학교였다. 하지만 아들은 프랑스 선생님에게 대들다 퇴학당했다.
▲1946년 무렵의 호찌민.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어 잘해야 출세” 증기선 태워 보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아예 프랑스에 보내 공부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아들이 프랑스 증기선에 승선해 일할 수 있도록 했다. 무일푼이어도 비싼 뱃삯을 부담하지 않고 배에서 일하며 프랑스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호 주석은 프랑스인 선장에게 면접을 본 뒤 주방 보조로 승선할 수 있었다. 덩치가 작아 고된 잡역을 하는 대신 주방으로 가게 됐다. 1911년 21살의 아들은 응우옌바라는 가명으로 국제여객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견습 조리사가 되어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에 도착한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프랑스어 남성 존칭인 ‘므슈’로 불렸다. 이를 통해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본토에서 베트남에서보다 훨씬 공손하게 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베트남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차별과 식민지 모순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 호찌민의 삶은 아버지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호찌민이 세계적인 요리사 에스코피에로부터 제자되기를 제안 받았던 런던 칼튼 호텔 자리에 붙은 블루플라크.[사진 오픈 블루플라크]
미국 GM 공장과 런던 호텔에서 일했던 호찌민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던 호찌민은 다시 배에 승선해 프랑스는 물론 알제리·콩고 여러 곳을 다녔다. 미국에도 가서 뉴욕과 보스턴 등에서 살았으며 GM 공장 등에서 일했다. 1913년 영국에 건너가 런던 칼튼 호텔에서 주방 보조로 일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에드윈 키스터 주니어는 자신의 저서인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전(황소자리)』에서 이 호텔과 호 주석과 관련한 일화를 소개한다. 미식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 셰프인 오거스트 에스코피에가 부지런히 일하는 이 베트남 청년이 마음에 들어 이 같은 제안을 했다고 한다. 남은 음식을 걸인에게 나눠주는 ‘자선 습관’만 버리면 요리를 가르쳐주겠다고 말이다. 제자로 삼겠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호찌민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 근처에 있던 칸튼 호텔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폭격으로 무너져 전후 새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현장을 찾았더니 그가 이곳에서 일했다는 내용의 블루플라크(역사적인 유적이나 유명인이 살거나 일했던 곳에 이를 알리려고 붙이는 공식 안내판)가 남아있었다.
호찌민은 1919년 파리에 가서 사회당원을 거쳐 공산당원이 됐으며 1921년 마르세유에서 열린 프랑스 공산당 전당대회에 인도차이나 대표로 참석해 연설했다. 1923년에는 소련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공산혁명에 뛰어들었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파리강화회담장으로
1919년 호찌민이 파리로 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 18일부터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파리 강화회담이 그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던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인에게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당시 서명에 쓴 이름이 응우옌아이꾸옥(玩愛國)이다. 한자 그대로 애국이라는 뜻이다. 이 청원 편지는 비서에게 전달됐지만, 윌슨 대통령이 봤는지는 알 수 없다.
▲공산주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이 소련 모스크바에서 해외 혁명가 양성을 위해 운영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학생들의 모습. 한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베트남을 세운 호찌민(뒷줄 맨왼쪽)이 보인다.[중앙포토]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선 한인과 접촉도
그 뒤 공산당원이 된 호찌민은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이 식민지 혁명가를 양성하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시 그곳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와도 만난 사진이 남아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유명 변호사 허헌(나중에 북한의 초대 총리)의 딸 허정숙(나중에 북한 최고재판소장)도 호찌민과 같은 해 이 대학에 입학했다.
그 뒤 호찌민은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리떠이(李瑞)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호찌민(胡志明)은 1945년 이후 건국 작업을 지휘할 때 처음 사용했다. ‘남을 깨우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친근하고 소박하며 유연한 이미지 덕분에 ‘호 아저씨’라는 뜻의 박호(伯胡)로도 불렸다. 호 주석은 생전에 160개 이상의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굴곡진 베트남 현대사와 궤적을 나란히 한 호 주석의 삶은 그가 사용했던 수많은 이름과 별명 속에 녹아있다. ◎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