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3국
발트1
■ 라트비아 Latvia , Latvija라트비아 공화국, Republic of Latvia
유럽 북동부에 있는 국가. 발트 해와 리가 만 연안을 끼고 있으며, 에스토니아(북쪽), 러시아(동쪽), 리투아니아(남쪽)와 경계를 이룬다. 수도는 리가이며 화폐는 유로이다. 공업화가 완전히 진행된 나라로 기계제작과 금속주조 공업이 발달했다. 초등·중등교육은 무상의무교육으로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 두 언어를 같이 교육한다. 의료시설이 잘 되어있으며 의사 1인당 인구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국기
역사
라트비아에는 원래 발트인이라고 하는 고대 인종집단이 살았다. 이들은 9세기 이후 바이킹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12세기와 13세기에 라트비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면서 접근한 서쪽의 게르만족 세력에게 넘어가 오랫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1237년 독일의 튜튼기사단과 함께 출현한 검의 형제기사단이 1230년경 라트비아 전역을 정복했으며 그후 3세기 동안 게르만족 대군주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고 게르만의 지주계급이 라트비아 농촌을 장악했다.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초까지 폴란드와 스웨덴 영토로 갈라져 있다가 18세기말 무렵 러시아의 확장정책에 따라 영토 전체가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게르만족 지주들은 라트비아에서 세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20세기초에 이르러 라트비아 민족주의의 급속한 성장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언했으며 격전의 혼란기를 겪은 후 1920년 소련과 독일로부터 신생독립국으로 승인을 받았다.
독립 후 1934년 독재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민주연합세력의 통치를 받았다. 1939년 소련에게 자국 영토 내에 군사기지를 내주었고 1940년 소련군이 라트비아에 진주했으며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소련에 합병되었다. 1941∼44년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었다가 1944년에 다시 소련군의 손에 넘어갔다.
라트비아의 농토는 1949년 강제로 집단농장으로 개편되었으며 소련 경제에 흡수되었다. 소련에서 가장 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번창했으나 라트비아 주민들은 20년 동안의 짧은 독립기간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간직했다. 1980년대말 고르바초프가 자유화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민족주의 정서가 되살아나면서 모스크바의 간섭을 벗어나 좀더 독자적으로 국내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91년 소련해체와 더불어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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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트비아 이야기
“주변 5㎞ 내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게 소원입니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의 한 술집에서 만난 20대 청년의 얘기다. 기자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자 함께 있던 이곳 정부 관계자는 “라트비아인에게 ‘언제 행복하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라고 대답한다”소개했다. 곱씹어 보면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라트비아인들의 심정엔 수백 년간 강대국들 틈바구니 수난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내년이면 라트비아는 독립 100주년을 맞는다. 그리고 수도 리가는 그 중심에서 천천히 변화의 싹을 피우고 있다.
200만 명의 ‘인간 띠’ 독립의 염원을 이루다
▲1989년 탈린과 리가, 빌뉴스로 이어지는 발트 3국 시민 200만 명이 만든 ‘발틱의 길’
라트비아는 유럽 대륙 북쪽 끄트머리에 있다. 발트해를 나란히 접하고 있는 발트 3국 중 하나다. 북쪽으로는 에스토니아, 남으로 리투아니아,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정식 국가명은 라트비아 공화국(LatvijasRepublika).
발트 3국은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있다. 그중에서도 라트비아는 발트 3국의 중심에 있다.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라트비아는 오랜 기간 스웨덴ㆍ폴란드ㆍ독일ㆍ러시아 등 주변 강국들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라트비아는 제정 러시아(1918년)와 소련연방(1991년)으로부터 모두 두 번 독립했다. 1918년 11월 18일 1차 세계대전 직후 시민혁명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날이다. 라트비아 정부는 이날을 독립 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라트비아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소련에 병합됐고 지도에서 사라졌다.
강대국의 압제 속에서도 라트비아인은 한 번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1989년 소련의 부당한 지배를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발트 3국 국민들이 손에 손을 맞잡았다. 소련이 발트 3국을 병합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 독ㆍ소 불가침 조약 50주년을 앞둔 때였다. 발트 3국에 이르는 620㎞를 200만 명이 손을 잡고 인간 띠를 만들었다. 이들은 국가를 부르며 자유를 외쳤다. 이 모습이 전 세계로 중계됐고 마침내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자유를 갈망하는 ‘발트의 길’은 독립을 위한 비폭력투쟁의 상징이 됐고, 이들이 함께 부른 노래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수도 리가, 고도를 천천히 걷다
▲검은머리 형제단 길드 전당
인천에서 출발해 핀란드 헬싱키를 경유한 비행기는 13시간 만에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내렸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인접해 있고, 물가가 상대적으로 싸 이곳에 짐을 풀면 주변국을 여행하기 편하다.
리가는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라트비아어로 ‘구부러진 하천’을 뜻한다. 짙은 푸른빛을 반사한 건물 유리창,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파스텔톤 건물들은 섬세한 장식 문양과 색감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리가는 독일의 대주교였던 알베르트가 십자군을 이끌고 강어귀에 상륙한 1201년에 만들어졌다. 13세기 독일의 검은 머리 형제 길드(상공업 조합)와 선교사들이 리가로 이주하면서 도시가 형성됐다. 리가는 중세 독일 도시들의 상업동맹인 한자동맹 아래에서 번영을 누렸다. 도시 곳곳엔 당시의 영화를 보여주는 건물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도시 건물들은 아픈 역사의 흔적을 숨기지 못했다. ‘검은 머리 전당’부터 그렇다.
무역상들이 남긴 ‘검은 머리 전당’은 리가의 대표 건물로 구시가 여행의 시작점이다. 1334년 지어진 건물은 2차 세계대전 독일군에 의해 80%가 파괴됐다. 전쟁 후 소련은 독일의 잔재라며 건물을 흔적도 없이 철거했다. 2001년 리가 탄생 800년을 기념해 재건했지만 실제로는 상처를 품은 10여년 된 건물이다. 건물 안 박물관에는 당시 파괴된 건물 일부만이 남아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돔성당. 성당 꼭대기 닭은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리는 척도였다. 다우가바 강 때문에 홍수가 자주 일어나 성당 주변을 높이면서 지대가 높아지고 성당이 낮아졌다.
울퉁불퉁 난 돌길을 따라 300여m 정도 걸으면 돔 성당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성당 안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은 한때 유럽 최대의 크기를 자랑했다. 이곳은 알베르트 대주교가 자신의 집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1991년 라트비아의 독립이 선포됐던 곳이기도 하다.
▲발잠을 판매하는 상점. 라트비아에서 꼭 맛봐야 할 술로는 ‘발잠( Balsam)’이 있다. 24가지 재료를 넣고 한약처럼 끓여 만든 라트비아 전통주다. 라트비아인들은 술보다는 약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 감기에 걸렸을 경우나 배가 아픈 경우에 특효약이라 믿고 있다.
성당 앞 돔 광장 노천카페에 앉아 라트비아 ‘국민맥주’ 알다리스(aldaris)를 맛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를 더한다. 라트비아는 독일 한자동맹의 영향으로 맥주의 역사가 깊다. 맥주는 한 병에 3유로(약 3800원) 정도다. 라트비아는 주변국에 비해 맥줏값이 싸서 이웃 나라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국경을 넘어 맥주 쇼핑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현지 가이드는 말했다.
▲구시가지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은 돔 성당과 함께 눈길을 끄는 랜드마크 중 하나다.
구시가지에 있는 베드로 성당은 돔 성당과 함께 눈길을 끄는 랜드마크 중 하나다. 1209년 건설됐다. 123m 높이의 교회 첨탑에는 전망대가 있어 리가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구시가에서 베드로 성당은 유일한 고층건물이다
▲‘삼형제의 건물’ 각각 15~18세기 양식 건물 3채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돔 광장에서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리가에서 가장 오래된 중세 건물인 ‘3형제 건물’이 나온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각기 다른 양식으로 만들어진 집 세 채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오른쪽이 가장 맏형으로 왼편으로 갈수록 한 세기씩 젊어진다. 꼭대기 작은 창문들이 눈에 띄는데 당시에는 창문 크기로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창을 이처럼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시민들이 공원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리가 시내에만 모두 17개의 공원이 있다. 유럽에서 가장 공원이 많은 도시로 라트비아가 꼽힌다. 물가가 싸고 자연환경이 좋아 부동산 투자이민도 활발하게 유치 중이다. 현지 가이드는 “15만 유로(약 2억원)를 부동산에 투자하면 1년 단기 영주권이 나온다” 며 “매년 갱신이 가능하고 유럽연합(EU) 회원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이미 적극적으로 투자해 곳곳에 차이나타운을 이루고 있다고 귀띔했다.
지난 9월 마주한 리가의 하늘은 눈이 시릴 듯한 청색을 띠고 있었다. 한껏 들이킨 도시의 공기는 냉수를 마신 듯 머리를 맑게 했다.
라트비아는 1991년 한국과 수교를 맺고, 2015년 발트 3국 중 최초로 한국에 주한 라트리바 대사관을 개설했다. 주 라트비아대사관에 따르면 현재 거주 중인 한국인은 60여 명 정도다. 상사 주재원과 가족, 교환학생을 제외하면 영주 교민은 11명이 전부다.
하지만 라트비아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예상외로 높다. 라트비아 대학교는 2013년 한국어 학과를 만들어 올해 다섯 번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또 지난해에는 리가 공대에 세종학당을 개원해 누구나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 리가에서만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80명 정도로 우리 교민 수보다 많다.
라트비아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학과 선택의 이유를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했었다는 사티나는 “한국은 친절하고 활기 넘치는 나라”며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살면서 라트비아에 부족한 한국 문화 정보를 보충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라트비아에서도 한류 열기는 뜨꺼웠다. 그 중심에는 K팝이 있었다. 라비드는 리가에서 유명한 K팝 춤 선생이다. 그는 댄스 학원을 열고 한국 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그에게 춤을 배우는 학생만 50명이 넘는다. 그는 “10대들 사이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K팝”이라며 “모여서 가장 많이 나누는 이야기 주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거리를 걷다 보면 그룹 엑소의 노래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고, 방탄소년단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청소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독립 100주년 준비에 분주한 라트비아
▲라이몬즈 베요니스 라트비아 대통령
라트비아 정부는 담당 조직을 신설하고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등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한창이다. 지난 5월 라트비아 국경 주변을 따라 전나무 100그루를 심는 ‘라트비아를 껴안다(Embrace Latvia).’라는 개막식으로 100주년 기념행사의 첫 삽을 떴다. 조직위는 국민이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전통의상 축제, 100주년 영화제,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00주년 행사의 백미는 내년 7월에 열리는 ‘노래와 춤의 축제’다. 발트지역 국가들이 개최하는 대규모 행사로 라트비아에서는 5년마다 열린다. 마침 100주년을 맞는 해에 축제가 열려 분위기는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축제에는 라트비아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전국 수백 개의 합창단과 무용단 등이 참여한다. 리가 야외극장에 모인 수만 명의 참가자가 선사하는 노래와 춤은 며칠간 이어질 예정이다.
베요니스 라트비아 대통령도 독립 100주년 행사를 통해 한국과의 우호 증진을 다짐했다. 베요니스 대통령은 “내년 평창 겨울 올림픽에 우리나라 인사들을 초대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독립 100주년의 해에 열리는 국제 스포츠 행사에 초청받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우리 독립 100주년 행사에 꼭 한국 인사들을 초청해 우호를 다질 것”이라고 말했다.
베요니스 라트비아 대통령도 독립 100주년 행사를 통해 한국과의 우호 증진을 다짐했다. 베요니스 대통령은 “내년 평창 겨울 올림픽에 우리나라 인사들을 초대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독립 100주년의 해에 열리는 국제 스포츠 행사에 초청받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우리 독립 100주년 행사에 꼭 한국 인사들을 초청해 우호를 다질 것”이라고 말했다.
리가=배재성 기자 hongdoya@joongang.co.kr
발트2
■ 리투아니아 Lithuania 리투아니아 공화국, Republic of Lithuania
▲국기
북유럽 발트 해 연안에 위치한 공화국. 라트비아, 벨로루시, 러시아,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수도는 빌뉴스이다. 14~16세기에 동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제국이었으나,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가 1944년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고, 1990년 3월에 독립했다.
13세기 중엽에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시켰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공작 신분으로 통일 리투아니아를 통치했으며 이들 가운데 게디미나스가 14~16세기에 동유럽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확장시켰다.
리투아니아를 지배하던 대공작은 1386년 폴란드도 지배하게 되어 이 두 국가는 400년 동안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에서 실제적으로 종속적 위치에 있다가 폴란드의 제3차 분할(1795) 때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64~1905년에 있었던 집요한 러시아화 운동에 굴복하기도 했으나 20세기초에 들어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독일이 지배하던 1918년 스스로의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폴란드, 리투아니아 사이에 수많은 전투가 있은 뒤 소련은 1920년 새로 독립한 리투아니아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1926년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의회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말살하기 전까지 리투아니아에는 민주적으로 구성된 연립내각이 있었다. 1939년 소련 군대가 강제로 주둔하게 되었으며, 소련군이 점령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1940년에 소련으로 편입되었다.
1941년부터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1944년 소련군이 들어옴으로써 해방을 맞았다. 몇 년 후 리투아니아 경제는 집단화되고 소련 경제에 강제통합되었다. 그러나 독립국가로 있었던 지난 20년을 기억하는 리투아니아 국민들은 1980년대 중반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개방화정책을 실시하자 내정에 있어서 소련 정부로부터 더 많은 독립을 요구하면서 민족주의 정신을 되살렸다.
1990년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1991년 완전독립을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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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트리카이성
▲리투아니아 서쪽 트리카이시에 있는 호수가 한반도 지형과 같다
▲십자가 언덕=리투아니아 관광명소로 작은 십자가 55000여개가 있다
발트3
■ 에스토니아 Estonia ,
Eesti 에스토니아 공화국, Republic ofEstonia
▲국기
□에스토니아의 역사
에스토니아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Germania〉(1세기)에 나온다. 9세기에 바이킹이 침략해온 이후 덴마크·스웨덴·러시아의 침략을 받았으나 13세기까지는 대체로 외세의 공격을 견뎌냈다. 1346년 덴마크 왕실이 발트 해의 섬들과 에스토니아 북부에 대한 주권을 이미 리보니아(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를 차지하고 있던 튜튼 기사단에게 팔아버림으로써 이 지역은 완전히 게르만족의 소유가 되었다.
16세기 중엽 튜튼 기사단이 해체되면서 에스토니아는 또다시 양분되어 북부는 스웨덴에 항복하고 리보니아는 폴란드에 의해 장악되었다(→ 검의 형제기사단). 알트마르크 휴전협정(1629)에 따라 폴란드는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스웨덴에 양도했다. 18세기초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의 카를 12세에게 승리를 거둔 뒤 리보니아를 장악하여 에스토니아·리보니아·쿠를란디아로 분리했다.
19세기에는 사유재산제에 대한 개혁이 단행되고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가 왕위에 오르자(1881) 에스토니아는 엄격한 러시아화의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매우 혼란했던 20세기초에는 몇 차례나 독립을 쟁취했으나 다시 잃곤했다. 1940년 소련에 합병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잠시 독일에 점령되었으나 1944년 다시 소련에 넘어가면서 소련을 이루는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독립움직임을 본격화하여 1990년 3월 30일 독립을 선언했으며 1991년 8월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
1992년 6월 새 헌법이 채택된 후 그해 9월에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으며, 민족주의 연합정당인 이사마연합(Isamaa는 '조국'이라는 뜻)의 렌나르트 메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에스토니아는 독립 후 러시아 이민자들 때문에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에 놓였었다. 1940년 이후 에스토니아로 이민 온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에게 에스토니아 시민권을 주기 위해서는 언어 습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선결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독립 후에도 주둔해 문제가 되었던 러시아 군대는 1994년 8월 에스토니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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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탈린 올드 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