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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23/ 바베이도스 - 버하마 - 발칸3국(보스니아,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발트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상림은내고향 2022. 5. 16. 18:28

지구촌 여행/ 국가별23/ 

■ 바베이도스 Barbados

 

카리브 해 섬들 가운데 동쪽 끝에 있는 서인도제도의 독립 섬 국가. 수도는 브리지타운이며 국민의 90%가 흑인이다. 17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66년 영연방 국가로 독립하여 영국 여왕을 군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시행해 왔으나, 2021년 11월 30일 공화국으로 전환하여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바베이도스의 경제는 주로 관광과 설탕 생산 및 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문맹률이 낮으며 16세까지의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역사

바베이도스의 초기 역사는 분명하지 않지만 남아메리카에서 온 아라와크 인디언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518년경 스페인인이 상륙했다는 몇 가지 증거가 남아 있으며, 1536년 무렵 이 섬에는 인디언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1624년 또는 1625년초에 존 포웰이 이 섬을 탐험했으며, 1627년에는 그의 동생 헨리 포웰 선장이 영국인 거주자 한 무리를 이끌고 왔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려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1834년 대영제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고 1838년 바베이도스의 노예가 해방된 후 경제적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할 정도는 아니었다. 1937∼38년 바베이도스와 영국령 서인도제도에서는 급속한 인구성장, 이주통로 봉쇄 및 경제침체 등으로 촉발된 대규모 폭동과 소요가 일어났다.

 

그뒤 영국식민복지개발기구가 잇달아 설립되어 바베이도스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에 많은 돈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흑인 개혁가들의 정치참여도 활발해졌다. 1958년 바베이도스는 서인도연방에 가입했고 바베이도스 섬을 통치하던 그랜틀리 애덤스 경(卿)이 연방의 첫번째 총리가 되었다. 1962년 서인도연방이 와해되자 바베이도스는 1966년 영연방 내에서 독립을 획득하게 되었다.

 

첫번째 선거에서 DLP가 하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했으며 이 당의 지도자인 에롤 배로가 최초의 총리가 되었다. BLP와 DLP 양 당은 모두 온건사회주의 철학을 따랐기 때문에 사회적·정치적 목표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약 50년에 걸쳐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시행했던 바베이도스는 2021년 11월 30일 공화국으로 전환하여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샌드라 메이슨 전 총독이, 실질적으로 행정 수반을 맡는 총리에는 미아 모틀리가 취임했다.

다음백과

 

□풍경

▲브리지 타운(Bridgetown)

 

▲코드링턴(Codrington) 대학

 

 

 

 

 

 

 

 

 

 

■ 바하마 The Bahamas

▲국기

 

서인도제도 북서부 끝에 있는 국가. 약 700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도는 나소이다. 국민의 85%가 흑인이며 화폐는 바하마 달러이다. 주로 관광과 국제재정보조금에 의존하며 시장경제체제이다. 1인당 GNP는 다른 선진국과 비슷하다. 14세까지 무상의무교육을 제공하고 있으며 의료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역사

바하마의 원주민은 루카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라와크 인디언이다. 이들은 원래 남아메리카대륙에 살던 종족이었으나 일부가 카리브 인디언들 때문에 북쪽 카리브 해 쪽으로 쫓겨오면서 이곳에 정착했다. 이웃에 사는 카리브인들과는 달리 대부분 온건했으며, 농업보다는 주로 어업에 종사했고 식인풍습도 없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상륙한 곳은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와틀링 섬이 라고도 함)이나 사마나 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스페인인들은 바하마에 정착하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평화롭게 사는 아라와크 인디언들을 급습하여 노예로 삼았고 이에 따라 원주민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영국인이 왔을 때 이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1629년 영국의 찰스 1세가 바하마 제도를 국무장관 1명에게 하사했지만 이주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648년 윌리엄 사일은 영국인 청교도들을 이끌고 버뮤다 섬에서 일류서러 섬으로 건너갔다. 이 개척은 너무나 힘든 어려움에 부딪혀서 성공하지 못했으나 다른 버뮤다 이주민들이 계속 이곳으로 왔다. 뉴프로비던스섬에는 1656년 정착이 이루어졌다.

 

1670년경 바하마 제도는 앨버말 고아작과 5명의 귀족영주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관심이 없었고, 정착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해적행위를 하며 생활했다. 1717년 다시 왕권에 귀속된 후 영국 왕실은 해적행위를 없애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국왕이 보낸 초대총독인 W. 로저스가 해적행위를 막는 데 성공했으나, 자신의 희생도 컸다. 영국에서 재정·군사 지원이 거의 없었으므로 빈곤한 상태에 있었고 스페인의 공격을 받기 쉬웠다.

 

1776년 미국 해군이 며칠 동안 점령했고 1782년부터 거의 1년 동안 스페인이 장악했다가, 1783년 영국으로 넘어갔다. 왕실 신하들과 이들이 소유한 노예들로 인구가 늘어났으나,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자 노예들은 미국으로 도망갔다. 한때 목화농장이 성공해 번영했으나 토양이 고갈되고 1834년 노예가 해방되자, 고질적인 가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후 미국의 남북전쟁중 바하마에 밀항자들이 몰려들었던 1861∼65년과, 미국에서 금주법을 시행하던 때 바하마에서 밀조주 사업을 한 1920∼33년의 2차례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관광업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지속적으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정치적 대표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에 따라 결성된 PLP가 1967년 정부를 구성했다. PLP는 인종차별을 종식시키고 바하마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1973년 독립을 이룩했다. 독립 후 바하마 정부는 아우트 섬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마약거래와 수많은 아이티 난민의 불법입국문제 등에 직면해 있다. - 다음백과

 

□ 풍경

▲나소(Nassau)

 

▲총독 관저(Government House)

 

▲중카누(Junkanoo celebration)

 

▲바하마(영국 연방국)  깨끗한 바다 새파란 하늘 카리브해의 파라다이스

 

★발칸 반도 Balkans

북쪽은 도나우 강 하류와 사바 강, 동쪽은 흑해, 남동쪽은 에게 해, 남쪽은 지중해, 남서쪽은 이오니아 해, 서쪽은 아드리아 해 등에 의해 경계가 이루어진다.


발칸 반도는 대부분이 산악지대이다. 주민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인 등의 남부 슬라브족이 가장 많으며, 주로 반도의 중서부와 중동부에 살고 있다. 반도 북동부에는 루마니아인, 남동부에는 터키인, 남서부에는 알바니아인, 남부에는 그리스인이 산다. 집시와 유대인은 소수민족이다.


발칸 반도의 산맥 및 산기슭 구릉들은 비교적 거친 토양이기 때문에 많은 지역에서 밭농사보다 가축사육을 주로 하고 있다. 주요산업은 섬유·식품·포도주·농기구·화학제품·석유제품·선박 및 기타 기계류 제조업 등이다.


발칸 반도는 동부와 중부 유럽과 중동을 잇는 관문이다.

 

■ 보스니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중세 유럽으로의 낭만적 시간여행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곽에서 내려다 본 구 시가지 전경. 수공업으로 만든 붉은 기와 지붕이 에메랄드빛 아드리아해와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1개의 국가, 2개의 문자, 3개의 종교, 4개의 언어, 5개의 민족, 6개의 공화국. 옛 유고연방은 이렇게 6개의 숫자로 설명된다. 티토 사후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마저 해체되고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에 따른 종교·민족 갈등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시작된 유고 내전은 흔히 ‘보스니아 내전’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건축물과 쪽빛 바다의 절묘한 조화 ... 지상낙원, 동화 같은 여행지 등 극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 남한 국토의 절반이 조금 넘는 보스니아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온 비운의 땅이다. 1463년부터 400여 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서 이곳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 이슬람 국가가 탄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통치(1878~1918) 기간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사건은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1992년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해 UN에 가입,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공식 인정받은 것도 잠시. 독립을 원치 않는 세르비아계가 무슬림과 가톨릭계를 공격하면서 보스니아는 내전에 휩싸인다.


세르비아 민병대의 보스니아 마을 공격으로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1992~1995) NATO의 개입과 미국의 중재로 3 9개월 만에 끝났지만 97000명이 사망하고 인구의 40%에 가까운 180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보스니아 내전의 격전지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모스타르(Mostar)를 방문했다. 전쟁은 끝났어도 건물 군데군데 남아 있는 총탄 자국과 폐허가 된 건물 잔해가 당시의 처참함을 알려준다. 모스타르의 성 프란치스코 주교좌 성당 주차장에서 내려 ‘스타리모스트’ 다리로 향했다.


‘오래된 다리’라는 뜻의 스타리모스트는 1566년 오스만제국 쉴레이만대제의 명을 받아 천재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건설한 길이 30, 5, 높이 24m의 아치형 다리다. 네레트바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뉜 가톨릭계 크로아티아인과 이슬람계 보스니아인 마을을 연결해주는 이 다리는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며 교류하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내전이 한창이던 1993 11, 다리는 폭격으로 파괴됐고 이웃이었던 두 공동체도 원수가 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전쟁이 끝난 후 이 다리는 유네스코의 후원으로 재건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강에서 건져 올린 석재 파편 1088개를 사용해 2004 7월 복구됐다. 2005년 모스타르 구시가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 다리는 폭이 좁고 경사가 진데다 바닥에 반들반들한 자갈돌이 깔려 걷기가 쉽지 않았다. 관광객들에게서 돈을 받고 다이빙을 하려고 다리 위를 어슬렁거리는 젊은이들에게서 오늘날 보스니아가 처한 경제적 어려움이 읽힌다. 다리 건너는 옛 이슬람 상가인 쿠윤질룩 거리다. 이슬람 특유의 공예품과 수예품, 탄피로 만든 기념품 등을 팔고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의 중심부 가톨릭 마을과 이슬람 마을을 연결하는 스타리모스트 다리. 16세기에 건설돼 보스니아 내전 때 파괴됐다가 복원돼 민족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 됐다.

 

보스니아에서 아쉬웠던 점은 일정이 지연돼 메주고리에를 가지 못한 것이었다. 모스타르에서 28km 떨어졌지만 도로 사정이 열악해 대형 버스로는 접근이 쉽지 않다고 했다.


해발 200m의 언덕에 자리잡은 인구 4300명의 작은 마을인 이곳은 1981 6월 여섯 아이들이 마을 외곽의 언덕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한 이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수천만 명이 다녀간 세계적인 관광지다. 하지만 로마교황청은 공식적으로 이곳을 성모 발현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크로아티아: 인구 428만 명이지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7, 무형 문화유산 10개를 바탕으로 연간 1000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관광대국이다. 국내총생산(GDP) 20%가 관광수입. 1인당 GDP 1 8000달러로 발칸유럽에서 슬로베니아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다.


2013
년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인구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다. ‘꽃보다 누나’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아시아에서는 한국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고 중국 관광객이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두브로브니크는 잠시 베네치아 왕국의 통치를 받기도 했으나 14세기부터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멸망할 때까지 500여년 간 아드리아해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였던 라구사(Ragusa) 공화국의 수도였다.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구 시가지는 11~16세기에 쌓아올린 높이 25m, 길이 2km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다에 떠있는 성채도시의 독특한 풍광 덕분에 세계 10대 성곽도시로 꼽힌다.


성벽을 따라 걷노라면 100만여 개의 수제 기와로 덮인 건물의 붉은 지붕과 넘실대는 에메랄드빛 아드리아해가 대비를 이루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중세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되는 관문은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의 조각상이 새겨진 필레 게이트다. 문을 지나면 1448년에 세워진 붉은 돔형 지붕 아래 16면체 기둥의 각 면마다 물이 흘러나오는 오노프리오 분수가 나타난다. 1448년에 세워진 이 분수는 20km 떨어진 물 저장고에서 물을 끌어와 이 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 역할을 했다.


14~16
세기 세관과 조폐국, 은행 등으로 사용됐던 스폰자궁전은 1층의 아케이드와 2층의 아치형 창문, 3층의 정방형 창문 등 르네상스와 후기 고딕건축 양식이 혼합된 절충형 건물로 중세 해상무역 왕국 시절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스트라둔 도로를 따라 걷노라면 천사나 어릿광대 복장을 한 거리의 예술가들이 어슬렁거리고 시간 맞춰 전통 의상을 입은 의장대가 연주를 하기도 한다. 300m가량 이어진 스트라둔 도로의 끝은 플로체 선착장이다.


11
세기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는 로크룸섬으로 가는 페리선부터 날렵한 쾌속선과 요트, 해안 주변을 도는 유람선 등 어디론가 떠나려는 배들이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지상낙원을 보고 싶다면 두브로브니크로 오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드리아해에 면한 달마티아 지방의 오레비츠에서 수상택시로 15분 쯤 가면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생가가 있다는 코르출라섬이 나타난다. 해안이 아름다운 달마티아 지방은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 나오는 점박이 강아지의 원산지다.


코르출라섬은 평균 폭 7.8km에 길이가 46.8km로 기다란 고구마처럼 생겼는데 16000여 명의 주민 대부분이 마르코 폴로와 관련된 관광업에 종사한다.


코르출라 사람들은 베네치아 상인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두 번 동방 여행을 한 후, 여행기를 출판해 유명해진 마르코 폴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의 출생지가 이탈리아로 돼 있는 건 당시 코르출라섬이 베네치아공국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란다.

 

▲코르출라 사람들은 베네치아 상인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두 번 동방 여행을 한 후, 여행기를 출판해 유명해진 마르코 폴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기자기한 중세의 건축물, 붉은 지붕과 쪽빛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동화 같은 풍경이 두브로브니크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듯하다. 다른 게 있다면 두브로브니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한적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고려해 청어뼈 모양으로 거리를 배치했다는 정도다. 코르출라 성안 골목길을 ‘사고(思考)의 거리’라고 부른다.


두어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계단으로 돼 있어 길을 걸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면 굴러 떨어지기 쉬워서다. 부두에서 성의 남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 1301년부터 짓기 시작해 1806년에 완공된 성 마르코성당에 이른다. 고딕양식과 르네상스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인데 파사드의 기둥 위 나체로 쪼그려 앉은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성당 앞 광장에서 왼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작은 종이 매달린 마르코폴로탑이 나오고, 오른쪽 골목으로 돌면 마르코 폴로 박물관과 마르코 폴로 생가, 마르코 폴로 기념품 가게 등이 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 경로를 표시한 중세의 지도와 그의 흉상, 여러 나라 언어로 된 동방견문록 등을 볼 수 있다.


그 후 ‘바다가 연주하는 오르간’으로 유명한 자다르에서 버스로 2시간 반, 150km 떨어진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두브로브니크, 코르출라, 스플리트 등이 인간의 손끝에서 탄생한 문화유적이었다면 이곳은 자연이 빚어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1949
년 크로아티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며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너도밤나무, 전나무, 삼나무 등으로 이뤄진 울창한 숲과 수천 년 간 물이 흐르며 쌓인 석회암과 백운암의 자연 댐이 장관을 이루며 흰빛 비예라강과 검은 빛 크로나강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물이 계단식으로 이어진 16개의 호수와 9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비경을 이룬다.


주변 삼림까지 합하면 3만㏊가 넘는 플리트비체에는 상징동물인 갈색곰을 비롯해 늑대·여우 등 50여 종의 포유동물, 청둥오리·왜가리 등 157종의 조류, 300여 종의 나비, 1200여 종의 희귀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30여 개의 동굴에는 20여 종의 박쥐가 살고 있다. 자연경관 보존을 위해 내부의 모든 산책로, 쓰레기통, 안내 표지판 등을 나무로 만들었다.


나무로 만든 18km 길이의 인도교를 따라 걷다보면 빛의 굴절과 물에 포함된 광물에 따라 청록색·회색·하늘색·파란색으로 바뀌는 호수의 색상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하류의 마지막 호수에 떨어지는 벨리키 슬랍 폭포는 높이와 수량 면에서 으뜸이다.


떨어지는 물은 푸르른 하늘이 그대로 지상에 내려와 호수에 잠긴 듯 아름답고 78m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위용을 보고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듯하다.


슬로베니아: 알프스산지의 동쪽 산록에 자리잡고 있는 고산국가로 한반도의 11분의 1 크기에 200만 명이 살고 있다. 동유럽의 스위스라는 애칭이 있을 만큼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유럽에서는 핀란드·스웨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숲으로 이뤄진 곳이다. 2004 NATO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한 데 이어 2007년부터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2000달러로 발칸유럽 최고의 부국이다.

 

▲두브로브니크·코르출라·자다르·스플리트·플리트비체를 거쳐 오파티야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크로아티아와 작별을 고하고 슬로베니아의 포스토이나 야마(동굴)에 도착했다. 200만 년에 걸쳐 형성된 카르스트 석회동굴로 길이가 21km나 된다.


전체 동굴 가운데 5.3km 구간이 일반인에게 공개돼 있다. 길이로는 세계에서 두 번 째, 관람코스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1986년 유네스코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


이 동굴은 1818년 동네 주민이 발견했고, 1819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1872년 동굴에 철로가 놓였고 전기가 들어온 것은 1883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철도(노량진~제물포)가 놓인 게 1899년이니 이보다 27년이나 앞선다.


지난 200년 동안 약 3500만 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동굴 내부 기온은 사시사철 영상 8~10도로 여름철에는 입구에서 수도사 스타일의 국방색 후드망토를 빌려준다. 입구에서부터 2km는 동굴열차를 타고 들어간 후 가이드를 따라 가장 경치가 좋은 구간 1km를 걸어서 관람한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형형색색 석순과 종유석, 석주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위대한 산, 러시아 다리, 사막의 낙타, 스파게티홀, 백색의 방, 붉은 방 등 석순과 종유석의 형태와 색상에 따라 그럴 듯한 이름을 붙여놓았다. 100년에 1cm씩 자란다고 하니 수백만 년의 세월이 응축된 대자연의 보물창고에 들어온 느낌이다.


영국의 유명한 조각가 헨리 무어는 동굴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경이적인 자연미술관’이라며 격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압권은 넓이 50m, 길이 120m, 높이 35m 1만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다는 출구 근처의 콘서트홀.


음향공명 효과가 뛰어나 이곳에서 토스카니니가 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20세기 초 테너의 거장 엔리코 카루소도 콘서트를 열었다고 한다. 150종의 동굴 생물 중에서 반투명한 백색 피부에 눈이 퇴화된 동굴도롱뇽 ‘올름’을 전시하고 있다.


다음은 블레드성. 수심 30m, 알프스 만년설이 흘러내려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에메랄드빛 호수와 호수 한가운데 그림처럼 떠있는 섬, 130m 높이 절벽 위에 우뚝 솟은 성()이 빚어내는 풍경이 말 그대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지상낙원이다.


블레드호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블레드성은 1011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2세가 남티롤의 주교 브릭센에게 헌정한 성이다. 나폴레옹에게 침략당하기 전까지 800년 동안 남티롤주교의 관리 아래 왕가의 여름별장으로 사용됐다.


건너편에는 과거 티토 유고연방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됐고 2004년부터는 일반 호텔로 개조된 ‘빌라 블레드’가 있다.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를 주창했던 티토 대통령이 김일성을 비롯한 비동맹그룹 지도자들을 초청했는데, 블레드의 경치에 반한 김일성이 공식 일정을 미룬 채 2주간 묵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전통 나룻배 ‘플레트나’를 타고 들어가는 블레드섬은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결혼식 장소로 유명하다. 신랑은 신부를 안고 99개의 계단을 올라 결혼식장인 성당으로 들어가야 하며 식을 마친 신혼부부는 성당 내부에 드리워진 긴 밧줄을 잡아당겨 ‘행복의 종’을 울리면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일반인들은 밧줄을 당겨 세 번 만에 종을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성모마리아 승천성당이 세워진 장소는 원래 9~11세기 슬라브 거주민들이 사랑과 풍요의 신인 지바여신을 모시는 신전이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1142년 바로크양식의 성당이 세워졌다.


1886
년부터 운행된 플레트나는 당시 합스부르크가문이 블레드호수의 평화적인 분위기를 보존하기 위해 23척만 허용했고 뱃사공도 이곳 주민 중에서 경험자를 지정했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23척만 운행되고 있으며 뱃사공도 그때부터 뱃사공 가문의 남자 자손들이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블레드를 둘러보고 나면 이곳이 왜 ‘세계의 동화 같은 여행지 톱 10’의 하나로 꼽혔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세원 가톨릭대 교수

 

□발칸1

■ 보스니아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Bosna I Hercegovina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

▲국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유럽 동남부와 발칸반도 서부에 위치하며,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국민 구성은 이슬람교도(48%), 세르비아인(37%), 크로아티아인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종교 또한 이슬람교(40%), 세르비아정교(31%), 로마가톨릭이다. 동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경계를 이루며, 3면을 크로아티아가 둘러싸고 있다.

 

주요 도시 모스타르를 비롯해 남단의 삼각형 모양의 지역을 차지하는 남부와 남서부의 헤르체고비나와 사라예보를 비롯해 넓은 중·북부 지역을 차지하는 보스니아로 이루어져 있다. 헤르체고비나는 역사상 대부분 보스니아에 종속되었다.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동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서쪽·남쪽 등 3면을 크로아티아가 둘러싸고 있다. 헤르체고비나는 좁은 회랑을 통해 아드리아 해의 네레트바 해협에 있는 네웅에서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이 회랑이 크로아티아 달마치야 해안 가운데 두브로브니크 북서쪽 약 40km 가량의 지역을 크로아티아 본토로부터 갈라놓았다. 면적 51,209㎢, 인구 3,835,000(2009 추계).

 

이 지역은 오랫동안 지역 지배권을 둘러싸고 경쟁해왔던 강력한 지역세력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러한 영향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유달리 풍부한 인종적·문화적 혼합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슬람교·동방정교·로마가톨릭교가 공존하고, 이 3개 신앙들은 3가지 주요한 인종 그룹인 보스니아 이슬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에 각각 상응한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역사적·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민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오랫동안 민족주의의 영토 확장 열망에 불붙기 쉽게 만들었다.

 

1918년 새롭게 건국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통합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분리 이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독립을 얻었다. 하지만 나라는 바로 더욱 확대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 다음백과

 

□ 풍경

 

 

 

▲보스니아 120년만의 최악 홍수 14.5.19

 

 

▲어린이 구조

 

 

□발칸2

■ 슬로베니아 Slovenia

슬로베니아 공화국, Republic of Sloveni

▲국기

 

발칸 반도 북서부에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 수도는 류블랴나이고 화폐는 유로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슬로베니아인이며 이들은 거의 가톨릭교도이다. 서안해양성기후로 대부분 산악지대와 산림지대로 이루어져있다. 경제는 거의 제조업에 의존하고 있다.

 

슬로베니아인들은 6세기에 지금의 슬로베니아와 그 북쪽으로 들어와 그들보다 먼저 정착한 아바르족의 충성을 받았다. 627년 사모의 지도하에 슬라브 왕국이 성립했으며, 이 왕국은 사바 강 유역에서 북쪽으로 라이프치히까지를 영토로 삼았다.

 

748년 이 지역은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제국에 합병되었으며, 9세기 프랑크 제국이 분할될 때 독일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독일인들은 슬로베니아인들을 농노의 신분으로 격하시키고 드라바 강 북쪽에 있는 대부분의 슬로베니아인 정착촌을 게르만화했다. 슬로베니아인들이 수세기에 걸친 독일인의 지배하에서도 주체성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이 지역 출신의 로마 가톨릭교 사제들이 실시한 열렬한 교육활동 때문이었다.

 

슬로베니아 영토에 대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家)의 종주권은 13세기말부터 점차 확립되었다. 15∼16세기에는 농민봉기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농민들의 토지소유 상황은 18세기 합스부르크 황후 마리아 테레사와 아들 요제프 2세가 포고한 개혁조치로 많이 개선되었다. 프랑스 나폴레옹의 짧은 통치기간(1809∼14)이 끝난 후 다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지배권을 차지했다. 1848년 슬로베니아 최초의 전국적인 정치제도가 구성되었는데, 그것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는 통합된 슬로베니아 주를 설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1870년대에 남슬라브족(슬로베니아인·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들로 구성된 정치적 연맹을 창설하려는 염원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1890년대에 슬로베니아 최초의 정당들이 결성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슬로베니아의 정치 지도자들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1929년 유고슬라비아로 개명)을 세우는 데에 협조했다. 그러나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동맹국들은 슬로베니아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고리치아(고리차)와 그 인접지역을 이탈리아에 할양했다.

 

제2차 세계대전초 슬로베니아는 주변의 열강들에 의해 분할되어 이탈리아가 남서지역을, 독일이 북동지역을, 헝가리는 보다 작은 지역을 각각 차지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슬로베니아인들의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끈 해방전선이었다. 1945년 연합국이 승리한 후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구성공화국이 되었다. 공산정권하에서 슬로베니아는 정치적으로는 베오그라드에 집중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연맹에 종속되었지만 경제·문화 분야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독립을 누렸다.

 

1980년대말 슬로베니아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슬로베니아 공화국에 다당제를 수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중앙 공산당과 반목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90년 4월 슬로베니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처음으로 경합적인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는 유고슬라비아를 구속력이 약한 공화국 연방으로 전환해 최종적으로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될 것을 주장하는 중도 우익 연합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연방에서 탈퇴했다. 1992년 슬로베니아는 유럽공동체(EC)의 인준으로 경제·사회 구조를 서유럽 체제에 맞춰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 다음백과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드래곤 다리

 

▲동화 속 풍경 -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 한 가운데있는 불레드 아일랜드

 

▲호수마을의 붉은 석양

 

□발칸3

■ 크로아티아 Croatia

 

발칸 반도 중서부에 있는 국가.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던 공화국이었으나, 1980년대말 개혁의 흐름 속에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수도는 자그레브, 화폐는 쿠나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크로아티아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했다.

 

▲국기

 

크로아티아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온 것은 7세기였다.

 

북부 달마치야에서 판노니아까지 진출했던 크로아티아의 부족들은 느슨한 동맹을 이루고 있다가 803년에 샤를마뉴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곧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후 크로아티아인들의 로마 가톨릭교에 대한 충성심은 정교회를 믿는 이웃 세르비아와의 관계에 계속 영향을 끼쳐왔다. 10세기에 크로아티아 왕국이 수립되었고 1091년에 헝가리의 라슬로 1세가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크로아티아는 8세기 동안 헝가리에 합병되어 있었다.

 

헝가리와의 합병 기간 동안에도 크로아티아는 자체의 의회인 사보르를 유지했으며, 법률상으로는 독립 왕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526년 헝가리가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패배하면서 크로아티아의 대부분 지역이 투르크로 넘어가 1699년까지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나머지 지역은 뚜렷한 통치자 없이 남겨져 있다가 1527년 사보르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를 왕으로 선출했다. 오스트리아는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지역들을 군사적인 국경지대로 삼았으며, 터키와의 전쟁 때 국경 주민으로 징발돼간 세르비아인들을 식민지화했다. 1809∼13년에 일리리아 지방의 일부로서 나폴레옹의 통치를 받았다.

 

1867년 이중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워진 후, 달마치야와 이스트라는 비엔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1849년에 오스트리아의 한 주가 되었다가 1868년에는 헝가리의 자치주이자 이름뿐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으로 전환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한 후 크로아티아는 다른 남슬라브족 영토와 함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1929년에 유고슬라비아로 개칭)을 이루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군주들 간의 관계는 결코 원만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중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들에게 점령·분할당하자 1941년 4월 10일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가 독립국가임을 선포했고, 4일 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승인을 받았다.

 

이 신생국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달마치야의 일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하고 있었다. 새 국가는 파시스트 테러 조직인 우스타샤의 우두머리 안테 파벨리치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는 극도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독재정치를 펼쳤다.

 

파벨리치는 소위 '인종정화'를 내세워 수십 만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 반파시스트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공산세력이 이끄는 파르티잔(유격대원)들이 통치권을 확보한 지역에 지역위원회를 조직했고 그밖의 지역에서는 민족해방평의회를 결성했다. 1945년 파르티잔들이 자그레브를 점령한 후 이 평의회는 인민정부로 전환되었고, 크로아티아는 인민공화국으로서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크로아티아는 처음에는 유례없는 발전을 이룩했지만 연방 내에서 자치권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가 붕괴하자 선거를 통해 비공산주의계 정부가 탄생했으며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자극을 받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세르비아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군의 도움으로 크로아티아 내의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다음백과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로 여행할 사람들을 위한 역사 가이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는 빨간 지붕과 하얀 건물 색이 파란 바다와 어우러진 외관(外觀), 이탈리아 반도의 동해안 북쪽 도시 베니스와 많이 닮았다. 두 해양 도시는 역사에서도 닮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두 도시 국가는 13세기부터 약600년 간 아드리아 해의 무역과 제해권(制海權)을 놓고 경쟁한 라이벌 사이였다. 상업에 밝고 해군력도 강한 상무(商武)국가였는데 공화국이었다는 점에서도 같다. 두브로브니크의 옛날 이름은 라구사인데, 귀족중심의 공화정을 운영할 때도 베니스의 제도를 참고하였다.

 

바다로 돌출한 두브로브니크(옛이름은 라구사)는 해안 절벽을 따라 쌓은 성벽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다. 성벽 길이가 약2km, 너비가 600m쯤이다. 이렇게 작은 나라, 라구사가 16세기 말엔 보유 선박 규모가 유럽의 유수한 해양강국 베니스와 거의 맞먹었다. 라구사의 해양인, 즉 선원들과 무역상 및 외교관들은 세계 도처를 돌아다니면서 돈을 벌고 국익(國益)을 도모하였다.

 

16세기 초 인도(무갈 제국)에 진출한 한 라구사 사람은 이슬람 교도로 개종, 포르투갈의 공격에 저항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다른 라구사 사람은 스페인 함대의 지휘관이 되어 리스본을 출항하고 있었다. 페루의 은광(銀鑛)에서 돈을 버는 라구사 사람도 있었다. 라구사(지금의 두브로브니크) 상인들은 발칸 반도를 휩쓸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다뉴브 유역,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거점을 만든 데 이어 영국에까지 진출하였다. 라구사 사람들은 해외 유학을 많이 했다. 스페인의 살라망카 대학과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 출신들이 출세의 雙璧(쌍벽)이었다. 유럽의 외교가에선 라구사를 ‘일곱 국기(國旗)를 가진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變化無常(변화무상)한 외교술을 폈다.

 

 

물론 매년 라구사의 귀족들이 보물들을 싣고 이스탄불로 가서 오스만 터키에 朝貢(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이는 일종의 보험료였다. 라구사는 달마티아(지금의 크로아티아 동쪽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영향력이 큰 베니스, 헝가리, 오스만 터키 가운데 터키 제국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 보호를 받았지만 한 번도 독립성을 빼앗긴 적이 없다. 터키도 라구사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다.

 

라구사는 중세에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리스 정교, 가톨릭, 신교도, 이슬람, 유태교의 예배당까지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러다가 보니 내정(內政)도 많이 開明(개명)되었다. 세계를 아는, 교양 있는 귀족들이 지배층을 이뤄, 노예무역과 拷問(고문)을 일찍부터 금지시켰다. 1347년에는 양로원이 만들어졌다. 외국인을 관료로 채용하였다. 불합격한 사람 중엔 피렌체의 마키아벨리도 있었다.

 

그들은 개방적 자주에 성공한 이들이다. 라구사 사람들은 슬라브 족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선진(先進)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였다. 늘 베니스와 라이벌이었고 가끔 충돌도 있었지만 전쟁은 하지 않았다. 1699년 라구사는 주위에 있는 베니스 식민지와 離隔(이격)하기 위하여 주변 영토 일부를 오스만 터키에게 넘겨주는 편법까지 썼다.


이때 넘겨준 영토는 지금 보스니아의 유일한 항구 네움으로 변했다. 두브로브니크는 네움에 의하여 단절되어 크로아티아와는 陸續(육속)되지 않는다.

 

 

 

 

그들은 베니스처럼 해외에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분수를 지키면서 확장을 꺼렸다. 두브로브니크를 둘러싼 성벽 위를 걸어보면, 외부 세계와 자유롭게 통상하지만 우리 것은 단단히 지키겠다는 의지(意志)를 느끼게 해준다. 아름답지만 육중하기도 한 도시이다. 문화와 군사가 공존하며 번영과 규율이 균형을 이룬 도시이다. 이 도시의 600년에 걸친 평화와 자유와 번영을 보장해준 것은 선의(善意)가 아니라 성벽과 군함들이었다.

 

베니스가 게르만 족의 침입을 피해 해안지대로 피신한 사람들이 만든 도시이듯이 두브로브니크도 7세기 무렵 몽골 계통 아바르 족의 공격을 피하여 해안 절벽 지대로 피란(避亂) 온 이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도시이다. 라우스로 불렸는데, 절벽이나 심연(深淵)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라우스가 나중엔 라구스로 바뀐다. 피란민들은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 크로아티아 사람들도 근처에서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도시는 두브로브니크로 불렸다. 두 도시는 나중에 하나로 결합된다. 두 도시 사이에 있던 해협을 메웠는데 두브로보니크의 중앙로에 해당하는 플라카(스트라둔)이다. 베니스의 聖 마르코 광장처럼 붐비는 곳이다.

 

12세기에 라구사 사람들은 렉터(Rector)라고 불리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공화정을 채택하였다. 라구사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다가, 1205년 베니스가 라구사를 공격, 점령했다. 1358년 라구사 사람들은 베니스를 거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지배를 선택했다. 베니스와는 달리 새로운 지배자들은 內政엔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왕에 직속한 자유도시의 자격을 주었다. 달마티아 지방을 둘러싼 각축전으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종주권은 자주 바뀌다가 나중엔 오스만 터키에 넘어갔다. 터키도 자율권을 보장하였다.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은 세 계층으로 분류되었는데 잘 공존하였다. 정치권력은 자산가들이 잡았다. 16세기 중반 이 계층은 약1500명이었다. 그 일곱 배의 시민들을 다스렸다고 하니 인구는 1만 명 정도였다는 이야기이다. 18세가 된 지배층에 속하는 남자들은 공화국 총회 회원이 되고 이 회의가 의회, 소위원회, 그리고 지도자를 선출했다. 지도자의 임기는 한 달. 그 기간에 그는 사무실에서 살아야 했다.

 

서기 1272년부터 1808년 나폴레옹 군대에 정복될 때까지 두브로브니크는 시조례(市條例)에 의한 통치가 이뤄졌다. 500년 이상 중단 없는 법치국가였던 셈이다. 두브로브니크의 경제는 무역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상인들은, 소금, 소금에 절인 물고기, 도기(陶器), 섬유 등을 싣고 해안 산맥을 넘어 내륙의 보스니아 세르비아로 들어갔다. 여기서 여러 가지 광물, 은 구리 燐() 납 등을 구할 수 있었고, 이를 배에 실어 유럽으로 수출하였다. 특히 중동 지역에서 비단을 수입, 이를 가공, 고급 섬유로 만들어 비싸게 팔아 돈을 벌었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9세기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 16세기엔 180척의 배와 5000명이 넘는 선원을 보유하였다. 인구 대비로는 세계 최강의 해양국이 된 것이다. 최성기(最盛期)엔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시민 중 여덟 명에 한 명꼴로 해외무역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1670년대 네덜란드가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고 있을 때 두브로브니크는 70만 금화(金貨)의 가치가 있는 36000개의 마차 분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180척의 배를 움직이며 지중해, 영국, 아프리카, 인도까지 돌아다녔다. 이 나라는 간단한 디자인의 튼튼한 배를 만드는 조선(造船) 기술이 뛰어나 여러 가지 배를 띄웠다. 18세기에 들어가면 두브로브니크는 세계 80개 도시에 영사관을 두었다. 당시 두브로브니크에 적을 둔 선박은 어선을 포함, 650, 그중 200척은 대양 항해용이었다.

 

 

 

 

무역으로 축적된 富와 정치적 안정은 문화 예술, 그리고 보건 분야의 발전을 뒷받침하였다. 1317년 프란시스코 수도원 안에서 약국이 생겼다. 영업중인 약국으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1377년엔 세계 최초의 검역소를 세웠다. 여러 나라 사람들과 물건들이 오고가니 전염병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쓰레기는 건물 뒤에 난 쓰레기 집적 라인으로 버리게 했다.

 

두브로브니크는 14, 15, 16세기 유럽에서 핍박 받는 유태인들을 받아주었다. 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고, 의사로 일했다. 종교적 탄압도 받지 않았다. 그때의 시나고그가 지금도 문을 열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많은 영웅이 아니라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였다.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는 영웅적 지도자가 없어도 법치(法治)에 의한 통치로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한다. 베니스도 그런 경우였다.

 

1667 46일 대지진으로 두브로브니크는 폐허로 변했다. 8000 명의 시민중 5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정박중이던 배도 많이 부서졌다.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다. 성당, 수도원, 교회, 정부 청사도 무너지고 수많은 문서들이 불탔다. 회복하는 데 오래 걸렸다. 지금 관광객들이 보는 건물들은 거의가 재건(再建)된 로마식 바로크 건물들이다. 외교와 정치를 잘한 두브로브니크는 전쟁으로 도시가 부서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지진은 막을 수 없었다.

 

대지진 이후 內治도 어려워졌다. 사회 분열의 증상도 보였다. 결정타는 나폴레옹의 등장이었다. 1808년 나폴레옹 군대가 이 찬란한 도시국가의 600년간 이어져온 독립을 끝장냈다. 워털루에서 프랑스 군이 패전한 1814년 이후엔 오스트리아 제국 領 달마티아 왕국의 지배로 넘어갔다.

 

1차 세계대전이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두브로브니크가 속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세르비아는 유고 왕국으로 연합, 독립하였다. 라구사에서 두브로브니크로 이름이 바뀐 것도 이때였다. 크로아티아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군에 점령당해, 괴뢰정권이 들어섰으나 이 나라 출신 티토의 게릴라 전이 성공, 自力으로 해방을 이루고, 소련의 간섭도 물리친 공산국가 유고연방의 일원으로 재기하였다. 티토의 사망과 공산권 붕괴를 틈타 슬로베니이와 크로아티아가 1991년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 연방에서 탈퇴, 이를 막으려는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를 주축으로 하는 유고 연방군과 독립전쟁이 터졌다. 1991 12월 두브로브니크는 세르비아인이 주력인 유고연방군의 포격을 받아 수백 명이 죽고 많이 부서졌다. 이 포격은 세르비아 세력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독립전쟁에서 이긴 크로아티아는 유럽연합 국가의 일원이 되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면적이 남한의 약55%이고, 인구는 400만 명을 간신히 넘고,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반 정도이다. 인종적으론 슬라브, 역사적으론 그리스-로마-이탈리아-베니스 문명권에 속해 40여년 간의 공산주의 지배 前歷에도 불구하고  文明 국가의 분위기가 완연하다. 지금은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에 가는 가장 큰 이유가 두브로브니크 구경이다.

 

베니스처럼 관광객으로 밤낮 없이 붐비는 두브로브니크 구경의 핵심은 성벽 위 산책이다. 산의 능선을 따라 걷는 기분인데, 높은 데서 내려다 보는 빨간 지붕의 석조(石造) 건물과 바다는 그림 같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보면 이것을 가능하게 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상무(尙武), 실용정신을 놓치게 된다. 自主를 유지하였기에 자유를 누린 도시이다

 

두브로브니크를 포함한 달마티아 지방(아드리아해의 동해안=발칸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디나르 산맥 주변 사람들은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축에 든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사람들인데, 최장신국(最長身國)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와 맞먹거나 더 크게 보인다. 남자의 경우 평균 184cm 전후이다. 男女 신장 차이가 크지 않은 듯하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 풍경

 

▲두부로브니크 -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도시

 

 

 

 

 

 

 

 

 

 

▲아드라아 항구

 

 

▲근위병 교대식

 

▲눈 기둥으로 변한 가로등 12. 1. 7.

 

▲부활절 달걀

 

▲브라크의 환상적인 섬

 

 

★발트 3국 Baltic states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3국은 주변 강대국들으로부터에게 1917~18년부터 독립했으나 1940년 소련에 귀속되었다. 라트비아인과 리투아니아인은 인도유럽어족의 발트어파에 속하는 언어를 쓰며, 에스토니아인은 리보니아인과 함께 핀우고르족에 속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후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독일군과 소련군을 몰아내고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1940년에 소련에 합병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구성했다.


발트 3국은 소련의 정치경제체제에 통합되긴 했지만 소련 내에서 가장 유럽적이면서 가장 번영한 지역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말 고르바초프에 의해 실행된 소련 정부의 자유화 정책으로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고 러시아인들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새로워졌으며, 그결과 1991년 소련의 쿠데타 실패 후 발트 3국은 주권을 선언하고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나 독립국가연합(CIS)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3국은 수세기 동안 주변 강대국들에게 지배당하다가 1917~18년부터 독립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0년 소련에 귀속되었다. 라트비아인과 리투아니아인은 인도유럽어족의 발트어파에 속하는 언어를 쓰며, 에스토니아인은 리보니아인과 함께 핀우고르족에 속한다.

 

발트 해 주변지역에 처음에는 에스토니아인·리보니아인·라트비아인·리투아니아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정착했다. 13세기에 에스토니아 북부가 덴마크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늘날의 라트비아와 달리 에스토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리보니아가 독일계 검의 형제기사단(나중에 튜튼 기사단과 통합)에게 정복당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리투아니아는 이웃 나라들과 달리 강력한 통일국가로 발전해 14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발트 해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드네프르 강 너머와 남쪽으로 흑해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1386년 리투아니아를 다스리던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왕가 간에 비공식적인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차로 폴란드가 리투아니아를 지배하게 되어 1569년 양국은 공식 연방이 되었다. 16세기에 튜튼 기사단이 몰락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각국은 리보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으며 결국 18세기말경에 러시아가 발트 영토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후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독일군과 소련군을 몰아내고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후 발트 3국은 의회민주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정치구조와 경제를 근대화하기 위해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정부들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독재주의 세력이 리투아니아(1926)·에스토니아(1934)·라트비아(1934)에서 각각 정권을 잡았으며, 1940년에 소련에 합병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구성했다. 발트 3국은 소련의 정치경제체제에 통합되긴 했지만 소련 내에서 가장 유럽적이면서 가장 번영한 지역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실행된 소련 정부의 자유화 정책으로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고 러시아인들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새로워졌으며, 그 결과 1991년 소련의 쿠데타 실패 후 발트 3국은 주권을 선언하고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나 독립국가연합(CIS)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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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3국 여행기

2018.04.24 주간조선 2504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 

(1) 아름다운 건축물에 숨은 저항의 역사

발트3국은 발트해에 면하여 나란히 이웃하고 있는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3개국을 말한다. 이 나라들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독립국가들로 국제사회에 새롭게 등장했다. 이들은 면적이나 인구 수에서 작은 나라들이다. 각 나라의 면적과 인구는 리투아니아가 65300㎢에 287만명, 라트비아는 65000㎢에 200만명, 에스토니아는 45000㎢에 120만명 수준이다. 유로화 사용국과 나토 가맹국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들이다. 하지만 소련 시절 억눌렸던 자유로운 도시국가적 전통이 되살아나면서 힘차게 번영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수도들은 모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하여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발트3국은 또 러시아·독일·스웨덴 등 주위 강대국들에 지배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에게는 동질감도 선사한다.    

 

   번영의 역사, 리투아니아  

   발트3국 가운데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는 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14세기에는 현재의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까지 지배했던 강대국이었다. 그리고 1569년에는 폴란드와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을 구성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은 국왕선출제 등의 민주적 제도를 비롯 초등학교 의무교육제까지 실천하며 번영했던 선구적인 자유주의 전통의 나라였다.
   
   
수도 빌뉴스의 구시가에 가면 그러한 번영의 흔적을 잘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가톨릭 성당인 베드로와 바울 성당을 통해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신앙심과 미적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다. 1701년 건축된 이 성당은 밖에서 보면 소박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바로크양식의 정밀하고 사실적인 조각들과 부조들로 가득하다. 다른 유럽국가들 성당의 경우 성경의 내용을 프레스코화로 나타낸 경우는 많다. 그러나 빌뉴스의 베드로와 바울 성당처럼 성경의 내용과 천국의 모습을 순백의 부조로 입체화시켜 표현한 성당은 드물다.
   
   
성안나성당은 가톨릭 성당치고는 드물게 붉은 벽돌로 건축된 고딕양식의 건물이다. 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철군할 때 건물의 아름다움에 반해 프랑스로 가져가고 싶다고 했을 정도이다. 이 나라 사람들의 가톨릭 신앙은 뿌리 깊고 경건하다. 필자가 찾았던 4월 초의 주일에도 빌뉴스의 모든 성당은 미사를 드리는 남녀노소 신도들로 가득했다. 2차대전 후 재건한 대성당에서 중심가인 게디미나스 거리까지는 구시가가 이어진다. 골목 담벼락에는 작은 예술작품들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다.
   
   
리투아니아는 서쪽으로 프로이센, 동쪽으로 러시아가 강성해지면서 18세기에 분할점령되어 나라를 잃게 되었다. 1차대전 직후 독립했지만 소련의 침공을 받아 강력하게 저항했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침공해오자 소련에 저항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협력했지만 나치 독일은 유대인은 물론 리투아니아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당시 나치를 피해 리투아니아를 탈출한 유대인의 후손들 가운데에는 유명 인사들이 아주 많다. 현재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비롯 영화 ‘아이언맨’의 스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지난해 사망한 캐나다의 가수 레너드 코언 등이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의 후손들이다.
   
   
유대인 거주지역이었던 구역에는 현재 예술가들이 모여 ‘우주피스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건국절은 매년 4 1일 만우절이다. 3대 국시(國是)는 ‘싸우지 말라! 승리하지 말라! 항복하지 말라!’이다. 공화국 중심에는 뿔나팔을 부는 천사상이 세워져 있다. 우주피스공화국 골목길을 산책하면 예술가들의 현대적인 작품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나치에 학살된 유대인의 영혼들이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리투아니아는 2차대전 이후 소련에 점령되었지만 끝까지 저항했다. 청년들은 숲속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게릴라 투쟁을 벌였으며, 도시에서는 시민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미국의 작가 톰 클랜시 원작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붉은 10월호’라는 영화가 있다. 핵잠수함 ‘붉은 10월호’를 이끌고 소련을 탈출하려는 라미루스 함장 역을 숀 코네리가 맡아 열연하였다. 라미루스 함장이 바로 리투아니아 출신이다.
   
   
리투아니아의 두 번째 도시인 카우나스는 반소련 저항의 중심지였다. 카우나스는 20세기 초 리틀 파리(little Paris)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구 시청사 광장 가장자리에는 지금도 아름다운 모습의 카페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다. 카우나스의 반소련 항쟁의 중심지는 대성당이었다. 반소련 항쟁의 가장 극적인 사태는 1972년 국립음악극장 앞 공원에서 19세 노동자 로무스 칼란타가 반소련 독립국가 건설을 외치며 분신자살한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1972년 한 해에만 13명이 분신으로 칼란타의 뒤를 따랐다. 현재 국립극장 앞 공원의 분신 현장에는 그를 추모하는 기념물이 설치되어 있다. 철로 만든 화염이 리투아니아 대지를 영원히 불태우는 듯한 처절함이 느껴지는 기념물이다.
   
   
리투아니아가 심혈을 기울여 복원한 트라카이성()은 지금은 박물관이다. 갈베호수의 섬에 위치한 트라카이성은 천혜의 요새이다. 원래는 1409년 리투아니아의 국부인 비타우타스 대공(1350~1430)이 건설하였다. 잇단 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19세기부터 복원하여 지금은 거의 완공되었다. 붉은색 원뿔 지붕을 얹은 탑과 높은 장벽이 아름답고도 강인한 인상을 준다. 빌뉴스 시민들의 자부심이자 휴양시설이기도 한 트라카이성을 바라보며 리투아니아의 영광과 저항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  

 

    저항의 역사, 라트비아   

라트비아에 유럽 문화가 도달하게 된 것은 십자군 덕분이다. 12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황은 이교도 지역이던 라트비아에 중동에서 귀환한 십자군을 보냈다. 주로 독일 기사단이 이곳에 가톨릭을 전파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독일 루터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현재의 수도로 쓰이는 도시 리가는 1201년에 독일 브레멘 출신의 알버트 주교(1165~1229)가 독일 상인들과 함께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리가의 대성당에는 알버트 주교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리가는 유럽의 다른 어떤 중세 도시들 못지않은 아름다운 건물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중 아르누보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은 거리는 알버트 거리로 명명되어 있다. 아르누보란 19세기 말부터 유행했던 장식이 아름다운 건축양식이다. 현재 리가에는 53채의 아르누보 건물이 있다고 한다.
   
   
리가는 중세부터 교역을 이끌었던 독일 상인들의 조직 한자동맹에 속했던 도시이다. 독일 상인 길드가 만든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브레멘의 동물음악대 조각. 평생토록 주인을 위하여 일하다 늙어서 쓸모없다고 버려진 뒤 음악대를 조직한 당나귀, , 고양이, 수탉의 조각상이다. 리가에서 활동했던 브레멘 상인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브레멘시에서 기증했다고 한다
   
   
리가 구도심에서 의미 깊은 3형제 건물을 만나게 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00년의 터울을 두고 16, 17, 18세기에 각각 지어진 건물 세 채가 나란히 붙어 있다. 4층 건물이지만 외관상 5층이다. 새로 지은 것일수록 바닥면적이 좁아진다. 갈수록 부동산값이 비싸졌다는 이야기일 듯하다. 조금 가다 보면 스웨덴문이 나타난다. 문 양옆으로 대포 포신이 거꾸로 박혀 있다. 문 위에 스웨덴을 상징하는 사자의 얼굴도 어리벙벙하다. 1698년 스웨덴이 불침을 선언한 징표라고 한다.
   
   
길드 건물 구역에 가면 푸른 지붕 꼭대기에 고양이상을 설치한 노란색 4층 건물이 나온다. 대상인들의 건물 구역 앞에 소상인 길드가 지은 건물이다. 그런데 대상인 길드가 이들을 무시하자 건물 꼭대기에 고양이상을 설치하고 조롱의 의미로 엉덩이를 대길드 구역으로 향하게 하였다. 결국 시당국에서 개입하여 고양이 엉덩이를 180도 회전시켜 엉덩이가 아닌 얼굴을 대길드 구역으로 향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이다.
   
   
구시가에서 가장 화려한 길드 건물은 검은머리형제단의 건물. 16세기에 건축된 것이었다. 검은머리형제단은 리가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의 독신 남자 상인들의 길드였다. 검은머리형제단 길드 건물은 2차대전으로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소련군은 이 건물을 독일인들이 세웠다는 이유로 완전히 부숴버렸다. 현재의 모습은 20세기 초에 남아 있던 사진을 근거로 라트비아 독립 이후에 재건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건물 바로 오른편에 소련의 가혹한 점령기간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점령박물관이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소련점령박물관은 컨테이너 형태의 검은색 구조물이다. 화려한 검은머리형제단 길드 건물에 비해 무의미하고 비정해 보인다.
   
   
구시가 인근 자유의 거리에는 라트비아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라트비아가 소련, 독일 등을 상대로 싸운 라트비아 독립전쟁 중에 사망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35년 세워졌다. 원래 있던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은 철거되었다. 소련은 자유의 여신상을 철거하려 하였지만 주민들의 반발을 의식하여 포기했다고 한다. 소련에 저항하던 시민들의 시위가 빈발했던 곳이다. 라트비아 국민에게는 성역화된 장소이다
.


   IT
최강국,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가에서 에스토니아 탈린까지의 거리는 약 400㎞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정도이지만 고속도로가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서울~부산을 달릴 때보다 시간은 더 걸린다. 탈린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쯤 들러 보는 곳이 합살루이다. 합살루는 발트해의 온천도시이자 휴양도시이다.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앉아서 쉬었다는 벤치가 있다. 현재 합살루역은 철도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16세기 주교가 통치하던 성이 위치해 있다. 현재 이 성은 복원 중이다. 탈린에 도착하면 발트3국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만나게 된다.
   
   
에스토니아는 국제적으로도 IT 최강국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 최초로 온라인 투표를 실시하고, 온라인 시민권도 부여한다. 수도 탈린은 유럽에서도 많은 창업이 이루어지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통신업체인 스카이프도 탈린에서 창업했다. 와이파이도 가장 잘 터지는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대형 선박터미널도 4곳이나 있다. 겨울에도 바닷물이 잘 얼지 않는 부동항이다. 바닷길로 핀란드 헬싱키와는 80,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350㎞ 거리이다.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나라들과 늘 대형 유람선이 오간다. 터미널에는 대형 유람선이 한두 대씩 정박해 있다. 여름 시즌에는 구시가에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에스토니아의 빠른 발전의 원인으로 과감한 IT정책을 꼽지만, 발트해 물류의 중심지라는 점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발트3국 가운데 전쟁의 참화를 가장 크게 입은 나라가 리투아니아라면, 가장 피해가 적었던 나라는 에스토니아다. 탈린의 구시가는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탈린도 역시 한자동맹에 속한 상업도시였다.
   
   
구시가는 발트해를 바라보는 ‘뚱뚱한 마거릿 포탑(砲塔)’에서 꼭대기의 툼페아언덕까지 경사면을 타고 형성되어 있다. 16세기 초에 건설된 지름 25m, 높이 20m 크기의 ‘뚱뚱한 마거릿 포탑’은 지금은 해양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눈여겨볼 것은 그 앞에 설치된 추모비 ‘브로큰 라인(The Broken Line). 1994 9 29일 발트해에서 발생한 에스토니아호 침몰사고로 인한 852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세운 조형물이다.
   
   
‘뚱뚱한 마거릿 포탑’과 성문을 지나면 높이가 123m에 달하는 성 올라프 교회가 나온다. 그 다음 시청 건물이 나오는데, 지붕 꼭대기에는 탈린 경비병이던 토마스 아저씨 모습을 한 풍향계가 설치되어 있다. 시청 앞에는 1422년 문을 연 약국이 있다. 이곳에서 툼페아언덕까지 가는 길은 아름다운 중세 건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마침내 툼페아 언덕에 다다르면 19세기 말에 건설된 러시아정교회 성당이 있다.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당이다. 그런데 이 성당은 외관이나 내부 벽화 등의 수준이 좀 떨어진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이 성당 철거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툼페아언덕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탈린의 구시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발트3국은 주위 강대국들에 핍박받고 저항하는 역사를 거듭해왔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에게는 동질감을 선사하는 것 같다. 이 세 나라를 여행할 때에는 이러한 피지배와 저항의 역사가 담긴 기념물과 건축물들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2)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의 아름답고 유서깊은 성당들

유럽국가들을 관광할 때마다 성당을 들르게 된다. 유럽의 중세 이후 근대문명이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었다. 유럽의 어느 나라든 성당들마다에는 당시 문명과 예술의 정수가 간직되어 있다

 

리투아니아를 여행할 때에도 성당들은 빼놓아서는 안되는 투어 코스이다. 리투아니아는 로마 카톨릭 국가이다. 소련 공산당에 대한 저항의 중심도 가톨릭교회였다. 독립 이후에도 리투아니아 국민들은 주일마다 성당 미사에 참석하여 번영과 평화를 간절하게 기도드린다.

수도 빌니우스에는 유서깊은 많은 성당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 어느 성당들도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을 소개해본다 

 

1 베드로와 바울 성당

‘리투아니아의 보석’이라고도 불리는 베드로와 바울 성당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시절 건축된 성당 가운데 가장 빼어난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평가된다. 16세기에 처음 목조로 지어졌다. 1701년 전란으로 파괴된 자리에 현재의 모습으로 세워졌다.

 

▲리투아니아의 보석 이라고도 불리는 베트로와 바울 성당

 

베드로와 바울 성당 내부의 천장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왜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이 성당을 ‘리투아니아의 보석’이라고 부르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성당 내부에는 2,000점에 이르는 정밀하고 아름다운 부조와 조각들로 가득하다. 대부분 이탈리아의 명인들이 설계하고 제작한 것들이다. 다른 유럽국가들 성당의 경우 성경의 내용을 프레스코화로 나타낸 경우는 많다. 그러나 빌뉴스의 베드로와 바울 성당처럼 성경의 내용과 천국의 모습을 순백의 부조로 입체화시켜 표현한 성당은 드물다. 보면 볼수록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2 성 안나 성당

▲성 안나 성당 전면

 

성안나성당은 15세기 말에 처음 지어진 가톨릭 성당이다. 리투아니아의 국부격인 비타우타스 대공의 첫 부인 안나의 이름을 땄다. 가톨릭 성당치고는 드물게 붉은 벽돌로 건축된 고딕양식의 건물이다. 성당 전면부의 모습이 압권이다. 붉은 벽돌로 구성한 첨탑같은 모습이 대칭을 이루어 더욱 화려하다.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철군할 때 건물의 아름다움에 반해 손바닥에 올려놓고 프랑스로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 빌니우스 대성당

▲빌니우스 대성당과 종탑

 

15세기에 처음 건축되었다. 전란으로 인한 파괴와 복구를 거듭하였다. 리투아니아가 소련으 지배를 받던 동안에는 물류창고로 쓰였다고 한다. 이 성당에서 가톨릭 미사를 다시 드리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이다.

 

이 성당에서 꼭 봐야할 곳은 리투아니아의 호국성인인 카지미르 성인의 석관이 안치된 기도실. 카지미르 성인(1458~1484) 25세의 젊은 나이에 숨진. 리투아니아 대공의 왕자. 카지미르 성인은 살아 있을 때에는 깊은 신앙심과 뛰어난 지식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폐병으로 일찍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빌니우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518년 러시아 군대와 전쟁을 벌이던 리투아니아 군대 앞에 현현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현재 리투아니아의 호국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카지미르 성인의 형상을 나타낸 이콘. 자세히 보면 왼쪽 끝에 손이 하나 더 보인다.

 

대성당 내부에 있는 카지미르 성인의 기도실에는 그의 석관이 지상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담긴 성상을 자세히 보면 손이 두 개가 아닌 세 개다. 마지막 한 개는 그림과 액자가 완성된 다음에 저절로 나타나는 기적을 보인 것이라고 한다.

 

4 성 카지미르 성당

▲성 카지미르 성당

 

▲성 카지미르 성당의 왕관 첨탑

 

빌니우스에서 구시가를 산책하다 대통령궁을 지나서 내려가다보면 성 카지미르 성당이 나온다. 이 성당은 1618년 완공되었다. 빌니우스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 건물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18세기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둥근 지붕을 얹었다. 1942년에 꼭대기에 세운 왕관 형태의 탑이 매우 이채롭다. 아마도 독립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리투아니아의 왕관을 설치한 것은 아닐까.

 

(3) 리투아니아 빌니우스 구시가와 우주피스공화국

 빌니우스의 구시가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아름다운 건물들로 가득하다. 빌니우스는 13세기부터 리투아니아 공국의 수도였다. 그러므로 구시가에는 당시 리투아니아 공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바로크 양식이 많지만 성 안나 성당 같은 고딕식들도 풍부하다. 구 시가의 대표적인 건물들 가운데에는 성당들이 많다. 중요한 성당 건물들에 대해서는 빌트3국 기행(2)에서 기술하였다.

 

빌니우스 대성당에서 시작하여 새벽의 문까지 걸거가면 구 시가의 주요 부분을 볼 수 있다. 구 시가는 걸어가면서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다 명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는 시간이 얼마나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대표적인 장소를 꼽아본다. 

 

1. 새벽의 문

▲새벽의 문

 

새벽의 문은 빌니우스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던 10개의 성문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성문이다. 나머지 9개의 성문들은 1799년 빌니우스를 침략한 러시아 제국군대가 모두 파괴하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군대가 이 새벽의 문을 파괴하지 않은 이유는 내부에 설치된 성모마리아 이콘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지금까지 이곳의 성모 마리아 이콘은 환자를 치유하는 등 기적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성모 마리아 이콘은 새벽이 문 위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 내부에 있다. 17세기 작품으로 전해진다. 이 성모 마리아 이콘의 특징은 아기 예수를 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성모 마리아만 홀로 그려진 이러한 형태의 이콘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케이스이다. 바깥 거리에서도 2층에 위치한 성상을 바라보며 미사를 드리기도 한다.

 

2. 작은 부조의 거리

▲담벼락에 부조가 가득한 작은 골목

 

성 안나 성당에서 빌니우스 대성당으로 가는 좁은 골목의 양쪽 건물 담벼락에 작은 조각품들이 촘촘히 부착되어 있다. 특별히 저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재미있는 장소이다. 

 

3 독립선언 서명 건물

▲독립선언 서명의 집

 

1918 216일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20인이 모여 리투아니아 독립헌장에 서명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17세기에 2층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19세기에 화재가 발생하자 보수하는 과정에서 3층으로 재건축 되었다. 상류사회의 사교를 위한 카페로 쓰이던 곳이다. 1918 216 3층의 한 방에서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20인이 독립선언에 서명하였다. 리투아니아 독립 이후에는 박물관이 되었다. 

 

4 러시아가 남긴 유물들

▲시청 앞 광장에 위치한 성 니콜라스 러시아 정교회 성당

 

리투아니아 국민들은 러시아를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가령 러시아어로 뭘 물어보면 즉각 영어로 답이 돌아온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나 소련의 지배나 두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이 나라의 안보는 나토와 미국에 의지한다. 하지만 리투아니아는 오랜 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러시아가 남긴 유물도 상당히 많다. 소련의 지배를 대표하는 국가보안위원회(KGB)박물관에는 소련의 무자비한 탄압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물들이 간직되어 있다.

 

구 시가의 많은 러시아 정교회 성당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상징하는 건물들이다. 대표적인 곳은 시청앞 광장에위치한 성 니콜라스 성당.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이 건설한 성당 중의 하나로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상징한다. 

 

5 대통령궁

▲리투아니아 대통령궁. 중세 갑옷을 입은 경비병 2명이 보초를 선다.

 

구시가를 지나면 대통령궁에 도착한다. 대통령궁이 위치한 곳은 다우칸타스 광장이다. 다우칸타스는 리투아니아어로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처음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을 때에는 대통령궁은 러시아 황제를 위한 거소로 이용되었다. 소련 시절에는 댄스홀로 격하되었다. 리투아니아 독립 이후인 1997년에 대통령궁이 되었다. 대통령궁 앞에서는 14세기 갑옷을 입은 병사 2명이 경비를 서기도 한다.

 

<우주피스 공화국>

▲우주피스의 노천에 전시된 조각들

 

빌니우스에서 요즘 관광객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는 우주피스 지역이다. 우즈피스는 리투아니아어로 강 건너라는 의미이다. 빌니아 강 건너 공동묘지에 인접한 지역으로 구 시가에서 그리 멀지 않다. 과거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유대인이 학살당하고 추방당한 이후에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들어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독립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창건일은 만우절인 41일이다. 헌법, 국가수반, 대사도 있다. 헌법의 주요 내용은 싸우지 말라, 승리하지 말라, 항복하지 말라 등 3대 구호이다

 

▲왼쪽 위부터 우주피스 공화국 빌냐 강가의 인어조각상나팔부는 천사상, 우주피스 공화국의 문양인 구멍뚫린 손바닥

 

관광객들에게는 나팔을 부는 가브레엘 천사 동상이 잘 알려져 있다. 우주피스 구역에 가면 어디서나 대담한 설치 미술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4) 리투아니아의 트라카이성(), 두번째 도시 카우나스의 5대 명소

리투아니아에서 수도 빌니우스 다음으로 큰 도시는 카우나스이다. 빌니우스에서 서쪽에 위치한 카우나스는 빌니우스 못지 않게 유서갚은 도시이다. 빌니우스에서 카우나스로 가는 길에 중간에 반드시 들러봐야 하는 곳이 트라카이 성()이다. 칼베 호수에 있는 섬에 세워진 이 트라카이 성은 14세기 초에는 리투아니아 공국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트라카이 성>

 리투아니아 공국은 초기에 이 성을 거점으로 독일 기사단의 침공을 막아냈다. 당시 전쟁을 지휘한 인물은 비타우타스 대공(1350~1430)이다. 비타우타스 대공을 중심으로 독일기사단의 침공을 막아냄으로써 리투아니아는 비로서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지도력, 포용력, 무공이 뛰어났던 인물로 전해진다. 현대에도 리투아니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아들들에게 비타우타스라는 이름은 많이 지어준다. 그만큼 인기가 높다. 그는 트라카이 성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보낸 리투아니아 왕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사망하였다.

 

▲사진 순서대로 트라키아 성   트라키아 성 내부

 

트라카이 성은 14세기에 건설되었는데, 17세기에 러시아와의 거듭된 전쟁으로 폐허로 변했다. 근대 이후 리투아니아 인들은 국가정체성을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복원작업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복구가 거의 끝나 박물관으로 단장하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트라카이 성은 호수의 섬 위에 건설된 성으로는 동유럽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붉은 벽돌로 높다란 벽을 쌓고, 원뿔형으로 높게 솟아오른 고딕식 첨탑이 인상적이다. 내부로 들어가면 요새와 궁전, 그리고 교회 등 종합적인 기능을 띄고 있다.

 

<카우나스>

▲카우나스 구시가 전경

 

리투아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카우나스는 20세기 초 리틀 파리(little Paris)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카우나스에서 손쉽게 찾아볼만한 명소들은 다음과 같다.

 

1. 카우나스 성

▲카우나스 성

 

카우나스는 네무나스 강과 네리스 강 등 두 강이 만나는 두물 머리에 자리잡은 요새도시이기도 하다. 14세기에는 이 카우나스 성이 독일기사단의 빌니우스 침공을 저지하는 최전선이었다. 카우나스에 도착하면 카우나스 성이 사람들을 맞는다. 트라카이성에서 본 원뿔탑과 흡사한 첨탑이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성벽 등 대부분은 세월의 침식으로 사라졌다.

 

2. 카우나스 시청사

▲카우나스의 백조로 불리는 구시가 시청사

 

카우나스의 백조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은 흰색 건물이다. 16세기에 건축됐다. 러시아를 침공했던 나폴레옹도 찾았던 건물이다. 시청 광장은 중세부터 시장으로 사용된 시민생활의 중심지이다. 요즘도 시청광장 주변에는 아름다운 카페들이 줄지어 자리잡고 있다. 

 

3. 천둥신의 집

▲천둥신의 집 전면부

 

구 시가에 위치한 붉은 벽돌로 지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고딕식 건물. 15세기에 한자 동맹에 속한 부유한 상인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16세기에 예수회에 팔려 예배당으로, 나중에는 학교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818년 보수공사를 하던 중에 건물 벽에서 원시종교의 천둥신(Perkūnas) 벽화가 발견되어 천둥신의 건물로 불린다. 

 

4. 성 미카엘 대성당

▲성미카엘 대성당

 

카우나스 시내 한가운데를 동서로 관통하는 거리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거대한 성당건물이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 시절에 건설된 대성당이다. 러시아 군대를 위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이었지만, 지금은 로마가톨릭 교회 성당이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상징하듯 거대한 크기의 비잔틴양식 건물이다. 그런데 건축적인 가치는 별로 인정받지 못해 지금도 철거논란이 일고 있다. 현재 내부에는 나토 깃발이 간직되어 있다.

 

5. 도심의 세 동상과 기념물들

▲사진 위쪽부터 비타우타스 대공 동상 요나스 빌레이시스(1872~1942)의 동상 로마스 칼란타 기념물

 

성 미카엘 대성당에서 서쪽방향으로 중심가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카우나스 사청사와 국립음악당 건물 근처에서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세 사람의 기념물을 만나게 된다. 이 세 기념물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한자리에 가까이 모여 있다.

 

첫 번째는 리투아니아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높은 전사이자 군주인 비타우타스 대공 동상.

 

두 번째는 리투아니아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카우나스 시장을 역임했던 요나스 빌레이시스(1872~1942)의 동상. 리투아니아 독립을 위해 노력한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그는 1921년부터 10년간 카우나스 시장을 역임하면서 근대적인 상수도, 버스, 도시계획 체제 등을 도입하였다.

 

세 번째는 국림음악당 앞 공원에 설치된 반소련 독립투쟁을 외치며 분신자살은 로마스 칼란타 기념물. 1972년 국립음악극장 앞 공원에서 19세 노동자 로무스 칼란타가 반소련 독립국가 건설을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이 사건 이후 1972년 한 해에만 13명이 분신으로 칼란타의 뒤를 따랐다. 그를 추모하는 기념물은 동상이 아니라 땅바닥에 붙어 있다. 철로 만든 화염이 리투아니아 대지를 영원히 불태우는 듯한 처절함이 느껴지는 기념물이다.

 

▲로마스 칼란타 / 사진출처=위키피디아

 

(5) 라트비아 수도 리가 구시가의 10 대명소, 그리고 룬달레 궁전

라트비아에 유럽 문화가 도달하게 된 것은 십자군 덕분이다. 당시 라트비아 지역의 명칭은 리보니아였다. 12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황은 이교도 지역이던 라트비아에 기독교 개종을 위한 십자군을 보냈다. 주로 독일 기사단이 이곳에 가톨릭을 전파했다.

 

독일 기사단과 함께 이곳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독일 상인들이었다. 현재의 수도로 쓰이는 도시 리가는 1201년에 독일 브레멘 출신의 알버트 주교(1165~1229)가 독일 상인들과 함께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리가의 대성당에는 알버트 주교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리가는 도시로 자리잡은지 800년여 년이나 되는 유서깊은 도시이다.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이다.

 

수도 리가는 예나 지금이나 라트비아 국민총생산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리가가 번영한 이유는 다우가바 강 때문이다. 다우가바 강은 수도 리가뿐만 아니라 라트비아의 젖줄이다. 독일 출신 상인들은 리가에 접한 다우가바 강을 통해 러시아 및 흑해 지역과 교역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축적된 부로 리가를 화려하게 건설하였다. 라트비아를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리가의 구시가에 있는 화려한 건축물들을 보러 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가 구 시가의 볼만한 명소들을 소개해 본다,

 

1. 리가 대성당

 

리가 대성당은 리가의 역사만큼 유서깊은 건축물이다. 리가에 터를 잡은 알버트 주교가 1211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건물에는 고딕, 로마네스크, 바로크 그리고 20세기의 아르누보 양식까지 첨가되었다. 성당 내부도 아름답다. 

 

2. 화약탑

▲화약탑

 

리가를 둘러싼 방어용 성벽에 세워졌던 건축물이다. 중세에 화약을 저장했다고 한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원뿔형 첨탑건물이다. 지금은 전쟁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3. 스웨덴문

스웨덴문
 

1698년 도시 방어를 위하여 세워진 시설이다. 도심과 도시 외곽에 배치된 병력을 연결하는 통로였다고 한다. 리가는 러시아 스웨덴의 침입을 여러 차례 받았다. 스웨덴문 양 옆으로 대포 포신이 거꾸로 박혀 있다. 문 위에 스웨덴을 상징하는 사자의 얼굴 표정도 어리벙벙하다. 이는 스웨덴이 불침을 선언한 징표라고 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스웨덴은 여러 차례 침략했다고 한다. 

 

4, 삼형제건물

▲삼형제 건물

 

리가 구도심에서 의미 깊은 3형제 건물을 만나게 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00년의 터울을 두고 16, 17, 18세기에 각각 지어진 건물 세 채가 나란히 붙어 있다. 4층 건물이지만 외관상 5층이다. 새로 지은 것일수록 바닥면적이 좁아진다. 갈수록 땅값이 비싸졌다는 이야기일 듯하다. 

 

5. 베드로 성당

▲베드로 성당

 

1209년 착공된 성당이다. 베드로 성인에게 헌정된 기톨릭 성당이었지만 나중에 루터교회로 변경되었다. 독일 루터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리가에는 이처럼 독일 루터교의 영향을 받고 가톨릭 성당에서 루터교 교회로 변경된 교회 건축물들이 많다.

 

6. 알버트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들

▲알베트 거리의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

리가는 20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이 유행하였다. 건물 전면부를 화려하고 창의적으로 장식하는 아르누보 양식은 부의 상징이었다. 당시 번영하던 리가에는 800여 채의 아르누보 양식 건물들이 건축되었다. 이중 관광객들에게 특별히 권유할만한 것은 알버트 주교의 이름을 딴 알버트 거리의 아르누보 건물들이다. 이곳의 화려하고 멋진 건물들은 모두 미하일 아이젠슈타인이라는 한 사람의 건축가가 설계하였다.

 

7. 고양이 첨탑 건물

▲고양이' 첨탑 길드 건물

 

길드 건물 구역에 가면 푸른 지붕 꼭대기에 고양이 상을 설치한 노란색 4층 건물이 나온다. 대상인들의 건물 구역 앞에 소상인 길드가 지은 건물이다. 그런데 대상인 길드가 이들을 무시하자 건물 꼭대기에 고양이상을 설치하고 조롱의 의미로 엉덩이를 대길드 구역으로 향하게 하였다. 결국 시당국에서 개입하여 고양이 엉덩이를 180도 회전시켜 엉덩이가 아닌 얼굴을 대길드 구역으로 향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이다.

 

8. 브레멘의 동물음악대 동상

▲브레멘의 동물음악대 동상

 

리가는 중세부터 교역을 이끌었던 독일 상인들의 조직 한자동맹에 속했던 도시이다. 독일 상인 길드가 만든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브레멘의 동물음악대 조각. 평생토록 주인을 위하여 일하다 늙어서 쓸모없다고 버려진 뒤 음악대를 조직하여 나중에 대박을 터트린 당나귀, , 고양이, 수탉의 조각상이다. 리가에서 활동했던 브레멘 상인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브레멘 시에서 기증했다고 한다. 

 

9. 검은머리 형제단 길드 건물

▲검은머리형재단 길드 건물

구시가에서 가장 화려한 길드 건물은 검은머리형제단의 건물. 16세기에 건축된 것이었다. 검은머리형제단은 리가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의 독신 남자 상인들의 길드였다. 검은머리형제단 길드 건물은 2차대전으로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소련군은 이 건물을 독일인들이 세웠다는 이유로 완전히 부숴버렸다. 현재의 모습은 20세기 초에 남아 있던 사진을 근거로 라트비아 독립 이후에 재건한 것이다. 

 

10. 자유의 여신상

▲자유의 여신상

 

▲인간띠 기점

 

구시가 인근 자유의 거리에는 라트비아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라트비아가 소련, 독일 등을 상대로 싸운 라트비아 독립전쟁 중에 사망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35년 세워졌다. 원래 있던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은 철거되었다. 소련은 자유의 여신상을 철거하려 하였지만 주민들의 반발을 의식하여 포기했다고 한다. 소련에 저항하던 시민들의 시위가 빈발했던 곳이다. 라트비아 국민에게는 성역화된 장소이다.

 

이곳에 가면 바닥에 발바닥이 새겨진 동판이 부착되어 있다. 1989년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라트비아의 리가에스토니아의 탈린 등 발트 3국 국민들이 모두 손을 잡고 수도를 잇는 행사를 벌였다.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며 손을 잡고 줄을 이었던 인간 띠 잇기를 행사를 펼쳤던 것이다. 당시 인간 띠의 한 가운데 지점을 표시한 것이다.

  

<룬달레 궁전>

▲룬달레 궁전

 

▲사진 순서대로 1 룬달레궁 접견실. 그리고 붙어있는 중국 도자기의 방 2 성주부인의 침실3 성주의 침실

 

라트비아를 가면 반드시 찾아야 할 명소 중의 하나가 바로 바우스카스 지방에 위치한 룬달레 궁전이다. 러시아 제국에서 큰 돈을 번 폰 비론 이라는 귀족이 지었다. ‘발트의 베르사이유 궁전’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화려하다. 실제로 모습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겨울궁전과 비슷하다. 건축가가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1700~1771)이다. 여름에는 특히 장미 정원이 아름답다.

 

(6)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구시가 12개 명소와 합살루의 명소

▲ 툼페아 언덕에서 내려다본 탈린 구시가 전경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 도착하면 발트3국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이 나라 국민들의 밝은 표정을 만나게 된다에스토니아는 국제적으로도 IT 최강국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세계 최초로 온라인 투표를 실시하고온라인 시민권도 부여한다수도 탈린은 유럽에서도 많은 창업이 이루어지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통신업체인 스카이프도 탈린에서 창업했다와이파이도 가장 잘 터지는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대형 선박터미널도 4곳이나 있다겨울에도 바닷물이 잘 얼지 않는 부동항이다바닷길로 핀란드 헬싱키와는 80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350 거리이다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나라들과 늘 대형 유람선이 오간다터미널에는 대형 유람선이 한두 대씩 정박해 있다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가 탈린이다여름 시즌에는 구시가에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에스토니아의 빠른 발전의 원인으로 과감한 IT정책을 꼽지만발트해 물류의 중심지라는 점도 못지않게 중요하다탈린의 시민들도 대단히 개방적이다현재 탈린 시민의 연평균 개인소득은 4만달러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되곤 한다.

 

탈린의 구시가는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탈린은 처음에는 덴마크가 정복하였으나나중에 독일의 튜턴 기사단에게 양도 하였다이후 한자동맹에 들어가면서 독일과 러시아 및 동방을 잇는 물류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하였다사람들이 탈린을 즐겨 찾는 이유는 주로 아름다운 구시가를 보기 위해서이다구시가 관광 명소들을 12개소를 소개한다. 

 

1. 툼페아 언덕

 탈린의 구시가를 관광할 때 빠뜨려서는 안되는 일정이 바로 툼페아 언덕에서 구 시가를 내려다보기이다탈린을 소개하는 각종 안내서 등에 거의 빠지지않고 등장하는 광경이다파란 하늘 아래 중세 건물들의 붉은 지붕들교회의 뾰족한 첨탑들그리고 저 멀리 발트해가 어우러지는 광경이 일품이다.

 

구시가에는 덴마크 정복 이전인 12세기에 건축된 성 올라프 교회에서부터 덴마크 주도로 건설된 성벽그리고 독일 출신 상인들이 주도적으로 건설한 아름다운 중세의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다특히 탈린의 구시가는 건물들의 크기가 아담하고 색깔도 밝아서 마치 동화 속의 나라를 이루고 있는 느낌을 준다.

 

2. 툼페아 성의 에스토니아 국회의사당

▲에스토니아 국회의사당

 

에스토니아의 국회의사당은 툼페아 언덕에 지은 툼페아 성()에 자리잡고 있다. 20세기 초에 지은 이 건물은 구 시가에 많은 중세풍의 건축물들과는 전혀 다른 양식이다. 1922년부터 에스토니아 국회 건물로 사용되었다소련 점령 시절에는 에스토니아 의회는 해산되었다에스토니아가 독립한 1년 후인 1992년부터 다시 의회가 들어섰다.

 

3. 러시아정교회 넵스키성당

▲넵스키 성당

 

툼페아 언덕에는 에스토니아가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받던 1900년에 완공된 러시아정교회 성당이 있다알렉산드르 넵스키 성당이다러시아 제국이 에스토니아의 러시아화를 강요할 때 건설되었다크기도 큰데다 지붕도 흑색이어서인지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사실 러시아에 있는 많은 러시아정교회 성당들에 비해서도 디자인이나 내부 이콘화 등이 별로이다에스토니아 독립 이후인 1924년에 이 성당 철거를 시도했지만 돈이 없어서 못했다고 한다지금도 철거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하지만 많은 러시아인들이 찾는 러시아정교회 성당이다.

 

4. 성 니콜라스 교회

▲성나콜라스 교회

 

성 니콜라스 교회는 어부들과 선원들의 수호성인인 니콜라스 성인에 헌정된 교회이다. 13세기에 독일 상인들이 세웠다중세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처음에는 요새로서의 기능도 있었지만 탈린 시 전체에 성벽이 설치된 14세기 이후에는 교회로만 사용되었다현재는 박물관이다.

 

5. 역사박물관이 된 대()길드 건물

▲역사박물관

 

툼페아 언덕에서 구시가의 중심인 시청광장까지 좁은 길을 따라 걸어내려오며 아름다운 중세건물들을 감상하는 것이 탈린 구시가 관광의 묘미이다좌우에 있는 건물들이 다 유서깊은 건물이지만 역사박물관이 된 대길드 건물은 반드시 한번쯤 기념사진을 찍을만한 곳.

 

1410년에 완공된 건물로 20세기 초까지 길드 상인과 기술자들의 건물로 사용되었다탈린 구시가의 중세 고딕 양식 건축물들을 대표하는 건물이다전면부에 유리창이 없는 창문형태의 아치 문양이 인상적이다.

 

소련 점령 시절에는 소련에 저항하여 투쟁을 벌인 전설적인 반공산 무장 게릴라조직인 ‘숲속의 형제들’의 거점이었다지금은 에스토니아 역사박물관이 자리잡은 유서깊은 건물이다.

 

6. 성령 교회

▲성령교회

 

13세기 초에 세워진 교회이다교회 담벼락에는 조각가이자 시계공인 크리스틴안 아커만이 17세기 말에 제작한 아름다운 기계 시계가 지금도 잘 가고 있다.

 

7. ‘달콤한 입술’ 카페

▲달콤한 입술 카페가 들어선 건물

 

성령 교회 맞은 편에 노란 색의 아름다운 3층 건물이 있다 1층에 1806년 문을 연 카페 ‘달콤한 입술’이 들어서 있다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이며지금도 카페로 운영된다소련 점령 시절에는 국유화된 상태에서도 카페가 운영되었다에스토니아 독립 이후에는 사유화되었다.

 

8. 시청 건물과 풍향계의 토마스 할아버지

▲시청 건물

 

틸린 구시가의 시청 청사는 지은지 600 년이 지난 유서깊은 건물이다. 14세기 초에 탈린 광장에 건설되었다탈린 시청 광장은 발트3국은 물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통틀어서 가장 오래된 시청광장이라고 한다.

 

높이가 64m에 이르는 첨탑꼭대기에 매달린 토마스 할아버지는 탈린의 상징이다토마스는 어린 시절 독일인들이 개최한 석궁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명사수였다고 한다그러나 출생신분 때문에 우승자가 되지 못했다이를 불쌍히 여긴 탈린 시장이 그에게 탈린 경비대원에 임명하였다는 전설이 있다풍향계의 토마스는 1530년부터 할아버지 나이가 훨씬 지난 1944년까지 풍향계를 부여잡고 탈린 시를 경비하다가 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다나중에 수리가 진행되면서 다시 토마스 할아버지를 있던 자리에 다시 그대로 부착하였다. 

 

9. 가장 오래된 약국

▲오른쪽이 약국건물

 

1415 년에 화학자들이 모여 처음 문을 연 약국인데지금도 약국으로 운영되고 있다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 중의 하나이다헝가리 출신의 부르크하르트 가문이 인수하여 20세기 초까지 약 4백년 간 운영하였다에스토니아 탈린에서는 가장 오래된 약국이자 기업이기도 하다지금은 현대 의약품을 판매하고 있다박물관으로도 활용된다.

 

10. 올라프 교회

▲올라프 교회

 

덴마크가 탈린을 점령하기 이전인 12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교회이다노르웨이의 올라프 국왕에게 헌정된 교회이다지금의 모습은 물론 오랜 동안 보수를 거친 것이다첨탑까지의 높이가 123m에 달한다이 때문에 소련 점령 시절에는 라디오 방송 송신탑으로 활용되었다지금은 다시 교회 기능이 회복되었다.

 

11. 뚱뚱한 마가레트 포탑(砲塔)과 비루게이트

▲뚱뚱한 마가레트 포탑

 

탈린의 구시가는 발트해를 바라보는 ‘뚱뚱한 마거릿 포탑(砲塔)’에서 꼭대기의 툼페아언덕까지 경사면을 타고 형성되어 있다. 13세기 초에 덴마크의 마가레트 왕비의 지시로 탈린 구시가 주위에 성벽이 건설되었다. 16세기 초에 이 성벽에 건설된 지름 25m, 높이 20m 크기의 커다란 포탑을 설치하였는데이를 지금 사람들은 ‘뚱뚱한 마거릿 포탑’이라고 부른다. ‘뚱뚱한(fat)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두께가 1.5m나 되는 크기 때문이다이 포탑에서 포가 발사된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탈린의 주민들이 발트해를 통해 도착한 상인들에게 위엄을 과시할 목적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지금은 해양박물관으로 쓰인다.

 

▲비루게이트

 

비루게이트는 구시가로 들어가는 문이다. 

 

12. 에스토니아 호 추모 조형물, ‘끊어진 항로’

▲추모 조형물 '끊어진 항로'

 

1994 9 29일 발트해에서 발생한 유람선 에스토니아호 침몰사고로 852명이 사망하였다한국에서 발생한 세월호 사고와 자주 비교되곤 하던 해양사고이다에스토니아 당국은 그러나 한국과는 달리 침몰한 선박을 인양하지 않았다그 대신 사고 현장인 발트해와 가까운 뚱뚱한 마가레트 포탑 앞 한적한 공원에 ‘끊어진 항로(The Broken Line)’라는 이름의 단순한 추모 조형물을 설치하였다.

 

<합살루>

 라트비아 리가에서 에스토니아 탈린까지의 거리는 약 400㎞이다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정도이지만 고속도로가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서울~부산을 달릴 때보다 시간은 더 걸린다탈린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쯤 들러 보는 곳이 합살루이다합살루는 발트해의 온천도시이자 휴양도시이다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앉아서 쉬었다는 벤치가 있다현재 합살루역은 철도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16세기 주교가 통치하던 성이 위치해 있다현재 이 성은 복원 중이다.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합살루의 성

 

발트1

■ 라트비아 Latvia , Latvija라트비아 공화국, Republic of Latvia

 

 유럽 북동부에 있는 국가. 발트 해와 리가 만 연안을 끼고 있으며, 에스토니아(북쪽), 러시아(동쪽), 리투아니아(남쪽)와 경계를 이룬다. 수도는 리가이며 화폐는 유로이다. 공업화가 완전히 진행된 나라로 기계제작과 금속주조 공업이 발달했다. 초등·중등교육은 무상의무교육으로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 두 언어를 같이 교육한다. 의료시설이 잘 되어있으며 의사 1인당 인구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국기

 

역사

라트비아에는 원래 발트인이라고 하는 고대 인종집단이 살았다. 이들은 9세기 이후 바이킹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12세기와 13세기에 라트비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면서 접근한 서쪽의 게르만족 세력에게 넘어가 오랫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1237년 독일의 튜튼기사단과 함께 출현한 검의 형제기사단이 1230년경 라트비아 전역을 정복했으며 그후 3세기 동안 게르만족 대군주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고 게르만의 지주계급이 라트비아 농촌을 장악했다.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초까지 폴란드와 스웨덴 영토로 갈라져 있다가 18세기말 무렵 러시아의 확장정책에 따라 영토 전체가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게르만족 지주들은 라트비아에서 세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20세기초에 이르러 라트비아 민족주의의 급속한 성장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언했으며 격전의 혼란기를 겪은 후 1920년 소련과 독일로부터 신생독립국으로 승인을 받았다.

 

독립 후 1934년 독재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민주연합세력의 통치를 받았다. 1939년 소련에게 자국 영토 내에 군사기지를 내주었고 1940년 소련군이 라트비아에 진주했으며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소련에 합병되었다. 1941∼44년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었다가 1944년에 다시 소련군의 손에 넘어갔다.

 

라트비아의 농토는 1949년 강제로 집단농장으로 개편되었으며 소련 경제에 흡수되었다. 소련에서 가장 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번창했으나 라트비아 주민들은 20년 동안의 짧은 독립기간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간직했다. 1980년대말 고르바초프가 자유화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민족주의 정서가 되살아나면서 모스크바의 간섭을 벗어나 좀더 독자적으로 국내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91년 소련해체와 더불어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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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트비아 이야기

주변 5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소원입니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의  술집에서 만난 20 청년의 얘기다. 기자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자 함께 있던 이곳 정부 관계자는 라트비아인에게 언제 행복하냐 물으면 십중팔구는 주변에 아무도 없을 라고 대답한다소개했다. 곱씹어 보면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라트비아인들의 심정엔 수백 년간 강대국들 틈바구니 수난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내년이면 라트비아는 독립 100주년을 맞는다. 그리고 수도 리가는  중심에서 천천히 변화의 싹을 피우고 있다.     


200 명의 인간  독립의 염원을 이루다  

 

▲1989 탈린과 리가, 빌뉴스로 이어지는 발트 3 시민 200 명이 만든 발틱의 

  
라트비아는 유럽 대륙 북쪽 끄트머리에 있다. 발트해를 나란히 접하고 있는 발트 3  하나다. 북쪽으로는 에스토니아, 남으로 리투아니아,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정식 국가명은 라트비아 공화국(LatvijasRepublika).   
  
발트 3국은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있다. 그중에서도 라트비아는 발트 3국의 중심에 있다.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라트비아는 오랜 기간 스웨덴ㆍ폴란드ㆍ독일ㆍ러시아  주변 강국들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라트비아는 제정 러시아(1918) 소련연방(1991)으로부터 모두   독립했다. 1918 11 18 1 세계대전 직후 시민혁명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날이다. 라트비아 정부는 이날을 독립 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라트비아는 2 세계대전 중인 1940 소련에 병합됐고 지도에서 사라졌다
  
강대국의 압제 속에서도 라트비아인은  번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1989 소련의 부당한 지배를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발트 3 국민들이 손에 손을 맞잡았다. 소련이 발트 3국을 병합하는  실마리를 제공한 독ㆍ소 불가침 조약 50주년을 앞둔 때였다. 발트 3국에 이르는 620㎞를 200 명이 손을 잡고 인간 띠를 만들었다. 이들은 국가를 부르며 자유를 외쳤다.  모습이  세계로 중계됐고 마침내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자유를 갈망하는 발트의  독립을 위한 비폭력투쟁의 상징이 됐고, 이들이 함께 부른 노래는 200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수도 리가, 고도를 천천히 걷다    

▲검은머리 형제단 길드 전당

  
인천에서 출발해 핀란드 헬싱키를 경유한 비행기는 13시간 만에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내렸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인접해 있고, 물가가 상대적으로  이곳에 짐을 풀면 주변국을 여행하기 편하다.   
  
리가는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라트비아어로 구부러진 하천 뜻한다. 짙은 푸른빛을 반사한 건물 유리창,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파스텔톤 건물들은 섬세한 장식 문양과 색감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리가는 독일의 대주교였던 알베르트가 십자군을 이끌고 강어귀에 상륙한 1201년에 만들어졌다. 13세기 독일의 검은 머리 형제 길드(상공업 조합) 선교사들이 리가로 이주하면서 도시가 형성됐다. 리가는 중세 독일 도시들의 상업동맹인 한자동맹 아래에서 번영을 누렸다. 도시 곳곳엔 당시의 영화를 보여주는 건물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도시 건물들은 아픈 역사의 흔적을 숨기지 못했다. ‘검은 머리 전당부터 그렇다
  
무역상들이 남긴 검은 머리 전당 리가의 대표 건물로 구시가 여행의 시작점이다. 1334 지어진 건물은 2 세계대전 독일군에 의해 80% 파괴됐다. 전쟁  소련은 독일의 잔재라며 건물을 흔적도 없이 철거했다. 2001 리가 탄생 800년을 기념해 재건했지만 실제로는 상처를 품은 10여년  건물이다. 건물  박물관에는 당시 파괴된 건물 일부만이 남아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돔성당. 성당 꼭대기 닭은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리는 척도였다. 다우가바  때문에 홍수가 자주 일어나 성당 주변을 높이면서 지대가 높아지고 성당이 낮아졌다.

  
울퉁불퉁  돌길을 따라 300m 정도 걸으면  성당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성당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은 한때 유럽 최대의 크기를 자랑했다. 이곳은 알베르트 대주교가 자신의 집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1991 라트비아의 독립이 선포됐던 곳이기도 하다.     

▲발잠을 판매하는 상점. 라트비아에서  맛봐야  술로는 발잠( Balsam)’ 있다. 24가지 재료를 넣고 한약처럼 끓여 만든 라트비아 전통주다. 라트비아인들은 술보다는 약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 감기에 걸렸을 경우나 배가 아픈 경우에 특효약이라 믿고 있다.

 

성당   광장 노천카페에 앉아 라트비아 국민맥주 알다리스(aldaris) 맛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를 더한다. 라트비아는 독일 한자동맹의 영향으로 맥주의 역사가 깊다. 맥주는  병에 3유로( 3800) 정도다. 라트비아는 주변국에 비해 맥줏값이 싸서 이웃 나라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국경을 넘어 맥주 쇼핑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현지 가이드는 말했다.   

 

▲구시가지에 있는  베드로 성당은  성당과 함께 눈길을 끄는 랜드마크  하나다.

  
구시가지에 있는 베드로 성당은  성당과 함께 눈길을 끄는 랜드마크  하나다. 1209 건설됐다. 123m 높이의 교회 첨탑에는 전망대가 있어 리가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있다. 1994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구시가에서 베드로 성당은 유일한 고층건물이다

 

▲‘삼형제의 건물 각각 15~18세기 양식 건물 3채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광장에서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리가에서 가장 오래된 중세 건물인 ‘3형제 건물 나온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각기 다른 양식으로 만들어진   채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오른쪽이 가장 맏형으로 왼편으로 갈수록  세기씩 젊어진다. 꼭대기 작은 창문들이 눈에 띄는데 당시에는 창문 크기로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창을 이처럼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시민들이 공원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리가 시내에만 모두 17개의 공원이 있다. 유럽에서 가장 공원이 많은 도시로 라트비아가 꼽힌다. 물가가 싸고 자연환경이 좋아 부동산 투자이민도 활발하게 유치 중이다. 현지 가이드는 “15 유로( 2억원) 부동산에 투자하면 1 단기 영주권이 나온다  매년 갱신이 가능하고 유럽연합(EU) 회원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있다 말했다. 중국인들은 이미 적극적으로 투자해 곳곳에 차이나타운을 이루고 있다고 귀띔했다.   
  
지난 9 마주한 리가의 하늘은 눈이 시릴 듯한 청색을 띠고 있었다. 한껏 들이킨 도시의 공기는 냉수를 마신  머리를 맑게 했다.     
  
라트비아는 1991 한국과 수교를 맺고, 2015 발트 3  최초로 한국에 주한 라트리바 대사관을 개설했다.  라트비아대사관에 따르면 현재 거주 중인 한국인은 60  정도다. 상사 주재원과 가족, 교환학생을 제외하면 영주 교민은 11명이 전부다.     
  
하지만 라트비아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예상외로 높다. 라트비아 대학교는 2013 한국어 학과를 만들어 올해 다섯 번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난해에는 리가 공대에 세종학당을 개원해 누구나 한국어를 배울  있다. 리가에서만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80 정도로 우리 교민 수보다 많다.     
  
라트비아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학과 선택의 이유를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했었다는 사티나는 한국은 친절하고 활기 넘치는 나라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살면서 라트비아에 부족한 한국 문화 정보를 보충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말했다.     
  
라트비아에서도 한류 열기는 뜨꺼웠다.  중심에는 K팝이 있었다. 라비드는 리가에서 유명한 K  선생이다. 그는 댄스 학원을 열고 한국 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그에게 춤을 배우는 학생만 50명이 넘는다. 그는 “10대들 사이에서 가장  관심사는 K이라며 모여서 가장 많이 나누는 이야기 주제이기도 하다 말했다. 실제로 거리를 걷다 보면 그룹 엑소의 노래를 어디서나 들을  있고, 방탄소년단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청소년들을 쉽게 만날  있다.     


독립 100주년 준비에 분주한 라트비아  

▲라이몬즈 베요니스 라트비아 대통령

  
라트비아 정부는 담당 조직을 신설하고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한창이다. 지난 5 라트비아 국경 주변을 따라 전나무 100그루를 심는 라트비아를 껴안다(Embrace Latvia).’라는 개막식으로 100주년 기념행사의  삽을 떴다. 조직위는 국민이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경험할  있도록 전통의상 축제, 100주년 영화제,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00주년 행사의 백미는 내년 7월에 열리는 노래와 춤의 축제. 발트지역 국가들이 개최하는 대규모 행사로 라트비아에서는 5년마다 열린다. 마침 100주년을 맞는 해에 축제가 열려 분위기는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축제에는 라트비아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전국 수백 개의 합창단과 무용단 등이 참여한다. 리가 야외극장에 모인 수만 명의 참가자가 선사하는 노래와 춤은 며칠간 이어질 예정이다.   
  
베요니스 라트비아 대통령도 독립 100주년 행사를 통해 한국과의 우호 증진을 다짐했다. 베요니스 대통령은 내년 평창 겨울 올림픽에 우리나라 인사들을 초대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독립 100주년의 해에 열리는 국제 스포츠 행사에 초청받은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우리 독립 100주년 행사에  한국 인사들을 초청해 우호를 다질 이라고 말했다.   
  

베요니스 라트비아 대통령도 독립 100주년 행사를 통해 한국과의 우호 증진을 다짐했다. 베요니스 대통령은 내년 평창 겨울 올림픽에 우리나라 인사들을 초대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독립 100주년의 해에 열리는 국제 스포츠 행사에 초청받은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우리 독립 100주년 행사에  한국 인사들을 초청해 우호를 다질 이라고 말했다.     
리가=배재성 기자 hongdoya@joongang.co.kr 

 

발트2

■ 리투아니아 Lithuania 리투아니아 공화국, Republic of Lithuania

▲국기 

 

북유럽 발트 해 연안에 위치한 공화국. 라트비아, 벨로루시, 러시아,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수도는 빌뉴스이다. 14~16세기에 동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제국이었으나,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가 1944년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고, 1990년 3월에 독립했다.

 

13세기 중엽에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시켰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공작 신분으로 통일 리투아니아를 통치했으며 이들 가운데 게디미나스가 14~16세기에 동유럽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확장시켰다.


리투아니아를 지배하던 대공작은 1386년 폴란드도 지배하게 되어 이 두 국가는 400년 동안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에서 실제적으로 종속적 위치에 있다가 폴란드의 제3차 분할(1795) 때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64~1905년에 있었던 집요한 러시아화 운동에 굴복하기도 했으나 20세기초에 들어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독일이 지배하던 1918년 스스로의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폴란드, 리투아니아 사이에 수많은 전투가 있은 뒤 소련은 1920년 새로 독립한 리투아니아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1926년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의회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말살하기 전까지 리투아니아에는 민주적으로 구성된 연립내각이 있었다. 1939년 소련 군대가 강제로 주둔하게 되었으며, 소련군이 점령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1940년에 소련으로 편입되었다.

 

1941년부터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1944년 소련군이 들어옴으로써 해방을 맞았다. 몇 년 후 리투아니아 경제는 집단화되고 소련 경제에 강제통합되었다. 그러나 독립국가로 있었던 지난 20년을 기억하는 리투아니아 국민들은 1980년대 중반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개방화정책을 실시하자 내정에 있어서 소련 정부로부터 더 많은 독립을 요구하면서 민족주의 정신을 되살렸다.


1990년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1991년 완전독립을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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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트리카이성

 

▲리투아니아 서쪽 트리카이시에 있는 호수가 한반도 지형과 같다

 

▲십자가 언덕=리투아니아 관광명소로 작은 십자가 55000여개가 있다

 

발트3

■ 에스토니아 Estonia ,

Eesti 에스토니아 공화국, Republic ofEstonia

▲국기

 

 

 

□에스토니아의 역사

에스토니아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Germania〉(1세기)에 나온다. 9세기에 바이킹이 침략해온 이후 덴마크·스웨덴·러시아의 침략을 받았으나 13세기까지는 대체로 외세의 공격을 견뎌냈다. 1346년 덴마크 왕실이 발트 해의 섬들과 에스토니아 북부에 대한 주권을 이미 리보니아(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를 차지하고 있던 튜튼 기사단에게 팔아버림으로써 이 지역은 완전히 게르만족의 소유가 되었다.

 

16세기 중엽 튜튼 기사단이 해체되면서 에스토니아는 또다시 양분되어 북부는 스웨덴에 항복하고 리보니아는 폴란드에 의해 장악되었다(→ 검의 형제기사단). 알트마르크 휴전협정(1629)에 따라 폴란드는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스웨덴에 양도했다. 18세기초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의 카를 12세에게 승리를 거둔 뒤 리보니아를 장악하여 에스토니아·리보니아·쿠를란디아로 분리했다.

 

19세기에는 사유재산제에 대한 개혁이 단행되고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가 왕위에 오르자(1881) 에스토니아는 엄격한 러시아화의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매우 혼란했던 20세기초에는 몇 차례나 독립을 쟁취했으나 다시 잃곤했다. 1940년 소련에 합병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잠시 독일에 점령되었으나 1944년 다시 소련에 넘어가면서 소련을 이루는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독립움직임을 본격화하여 1990년 3월 30일 독립을 선언했으며 1991년 8월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

 

1992년 6월 새 헌법이 채택된 후 그해 9월에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으며, 민족주의 연합정당인 이사마연합(Isamaa는 '조국'이라는 뜻)의 렌나르트 메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에스토니아는 독립 후 러시아 이민자들 때문에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에 놓였었다. 1940년 이후 에스토니아로 이민 온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에게 에스토니아 시민권을 주기 위해서는 언어 습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선결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독립 후에도 주둔해 문제가 되었던 러시아 군대는 1994년 8월 에스토니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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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탈린 올드 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