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3/ <21회> “서로 못 믿는 중국과 러시아... - <30> “문혁의 광기는 개인 숭배가 원인”...기록하는 자가 역사의 승자
송재윤의 슬픈 중국3/ 대륙의 자유인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조선일보
<21회> “서로 못 믿는 중국과 러시아...두 나라는 결코 동맹국이 될 수 없다”

▲그림 <“화궈펑 주석과 리부주석의 차를 막고 서신을 전달한 게 “현행 반혁명”인가? 두 차례나 불법적으로 현행 반혁명분자로 규정해서 아직도 나를 핍박하는 베이징 공안국을 강렬히 고발한다!“ 베이징 시단 민주장의 대자보. 아직 덩샤오핑이 최고영도자로 추대되기 전인 1978년 추정>
미국서 활동하는 중국인 망명객 웨이정성 “인류 상식에 반하는 중·러 정부”
2022년 2월 22일,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배치되고, 미국, 영국, 독일이 대(對)러시아 제재를 발표한 직후였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 대한민국의 여당 대권 후보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나라에서 전쟁이 났는데 우리 주가만 떨어진다”는 문제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바로 그때 25년 째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 중국인 망명 정객(政客)이 “시진핑과 푸틴은 맹우(盟友)인가?”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지금도 해외 중국인들 사이에선 중국의 시진핑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틈타 타이완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한 우려에 대해 이 망명 정객은 중국과 러시아는 뿌리 깊은 상호 불신 때문에 절대로 동맹 관계를 체결할 수 없으며, 만의 하나 서로 동맹이 된다 해도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각종 사교(邪敎)의 공동 특징은 인류의 상식, 중국의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천리(天理)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만 절대 진리라고 맹신한다. 그 교리를 거부하면 하등 인류로 취급을 해서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고 속일 때는 어떠한 심리적 부담도 없다···. 중국과 러시아 양국은 어떤 정부인가? 중국은 전제 정권이며, 러시아는 준(準)전제적 위권(威權, 권위주의) 정권이다. 전제와 위권(威權)은 공존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같은 산에는 두 마리 호랑이가 있을 수 없다. 이 두 나라는 이웃이 아니다. 싸움만 안 일어나면 다행이다.”
현재 중·러 양국의 정부를 공히 사교 집단이라 단언하는 이 망명 정객의 이름은 웨이징성(魏京生, 1950- ), 1978-1979년 “베이징의 봄” 시단(西單) 민주장(民主墻, 민주의 벽) 운동의 아이콘이다.
1978년 ‘베이징의 봄’ 주역...32년간 정치범 복역 후 미국으로 망명
1979년 3월 체포된 이후 웨이징성은 18년의 세월을 “반혁명”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93년 잠시 풀려난 웨이징성은 미국의 기자들과 만나 열악한 중국의 인권 상황을 고발했고, 1994년 4월 다시 체포되어 14년 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웨이징성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 인권단체의 압박과 미국 클린턴(William J. Clinton, 1946- ) 전 대통령의 요청에 못 이겨 장쩌민(江澤民, 1926- ) 총서기는 그의 가석방과 미국행을 허락했다. 1997년 11월 뉴욕에 도착한 웨이징성은 이후 수도 워싱턴으로 옮겨가서 “웨이징성 기금회”를 조직했다. 그후 25년의 세월 동안 그는 중국공산당에 맞서서 “민주장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1년 9월 미국에서 중국공산당의 코비드 19 정책을 비판하는 웨이징성의 모습. 사진/Alex Wong/komas.com>
“진정 민주(民主)란 무엇인가? 인민이 직접 뽑은 대리인이 인민의 의지에 따라 인민의 이익에 복무해야만 민주라 할 수 있다. 또한 인민은 반드시 수시로 그 대리인을 파면하고 교체할 수 있는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대리인이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기만하고 압제할 수가 없다. 과연 가능한가? 구미(歐美) 각국의 인민이 누리는 민주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 인민은 ‘위대한 조타수’ ‘역사 상 절대 다시 없을’ 이미 죽어버린 마오쩌둥에 대해서 몇 마디만 해도 감옥에 끌려가서 갖은 수난을 겪어야만 한다. 비교해 보라! 사회주의 ‘민주집중제’와 ‘착취계급’의 민주는 진정 하늘과 땅 차이다!”
1978년 12월 5일, 베이징 도심의 시단 민주장에 붙은 “제5의 현대화: 민주 및 그 외”라는 제목의 대자보에 기재 내용이다. 익명의 수많은 글들과는 달리 이 대자보의 하단엔 저자의 실명이 적혀 있었다. 웨이징성(魏京生), 당시 베이징 동물원의 전기공으로 일하던 29세의 노동자였다.
1964년 이래 중공중앙은 국가발전의 계획으로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 분야에서 이른바 “4대 현대화”를 추진해왔다.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공중앙의 개혁파가 “개혁개방”의 기치를 흔들던 시점, 웨이징성은 “4대 현대화”에 덧붙여 “제5의 현대화”로 “민주”를 요구했다. 1950-60년대 마오쩌둥 역시 입만 열면 “민주”를 외쳤지만, 웨이징성이 말하는 “민주”는 구체적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실행되는 “선거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중국도 직접 국민선거를 통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을 “인민의 대리인”으로 선출하자는 파격적인 체제변혁에의 요구였다.

▲<1978년 베이징 민주장 운동. 사진/공공부문>
이 한 편의 대자보는 1978년 12월 민주장 운동의 성명서가 되었다. “선거로 주석을 새로 뽑자는 대자보가 붙었다면서?” 민주장에 운집한 군중은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길게 뺀 채로,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힘차게 휘갈린 웨이징성의 대자보를 읽고 또 읽었다. 대자보의 내용은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의 수첩에 적혀, 문건으로 등사되어 순식간에 들불처럼 베이징의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전해졌다. 중국의 인민은 직선제로 인민의 대표를 뽑은 적은 없었지만, 직선제의 의미는 잘 알고 있었다. 웨이징성이 말하듯, “민주”란 본래 쉽고, 자연스럽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다. 인민이 직접 선거로 대리인을 뽑고, 무능하거나 부패하면 갈아치우는 것!
순식간에 웨이징성은 광장의 영웅으로 급부상했지만, 바로 이듬 해 봄 그 잔인한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친청(秦城) 감옥에 갇혀서 18년 긴 세월 동안 영어(囹圄)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었나? 아니, 그보다는 웨이징성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그 대자보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의 현실에서 누구든 대자보에 실명을 들어 마오쩌둥을 비판하고, 나아가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를 주장한 자는 결코 무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중국도 인민이 직접 주석을 선출하자” 직선제 권력 교체 주장
1978년 12월 초 직선제 권력교체를 주장한 웨이징성은 누구인가? 그는 1950년 베이징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중국공산당 고급간부였다. 덕분에 그는 유년 시절 소위 “홍색 귀족”의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의 뒷얘기를 주워들으며 자랐다. 1966년 문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만 16세였다. “수도 홍위병 연합행동위원회”에 가입한 후, 웨이징성은 “대천련(大串聯)”의 혁명 운동에 동참했다. 기차를 타고 대륙의 남북을 오르내리고, 신장(新彊)의 오지까지 찾아갔다. 그는 직접 비참한 인민의 생활고를 목도한 후, 정부의 선전선동이 모두 거짓임을 깨닫고 절망했다. 이후 그는 홍위병 합창단원이 되었는데, 그 합창단원들이 광저우로 내려간 후 홍콩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 그 모의 사실이 누설되면서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
웨이징성은 몰래 부친의 고향 안후이(安徽) 진자이(金寨)로 피신했는데, 이미 그곳은 대기근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어죽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참혹한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웨이징성은 울분을 삼킬 수 없었다. 그 모든 책임이 마오쩌둥에 있음은 명백해 보였다. 마오쩌둥이 제창한 “인민민주독재”에서 민주와 독재는 상호 모순된다는 점도 자명해 보였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지만, 연약한 일개인으로서 문혁의 광풍을 피하는 길은 군입대밖에 없었다. 1969년 군대에 들어가서 4년간 복역을 마친 웨이징성은 1973년 베이징 동물원에 전기공으로 배치되었다. 그후 5년이 지나서 1978년 12월 초, 그는 바로 그 한 장의 대자보로 일약 민주장(民主墻)의 영웅이 되었다. 그 한 장의 대자보에는 한 청년이 깨달은 “자유”와 “민주”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풋내기 지식인이 앵무새처럼 되뇌는 “외래의 민주”가 아니라 한 전기공이 중국의 현실에서 터득한 “자생의 민주”였다. 이후 그는 뜻이 맞는 민주투사들과 함께 <<탐색>>이라는 시사저널을 창간한 후, 본격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닦기 시작했다.

▲<1995년 베이징 인민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웨이징성의 모습. 사진/AP>
민주 운동 고무했던 덩샤오핑, 탄압으로 선회
베이징 시단의 민주장은 중난하이(中南海) 중공 본부에서 불과 1.7km, 톈안먼 광장에서도 2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시단벽에 붙은 주요 대자보들은 날마다 거의 실시간으로 중공중앙에 보고되고 있었다. 당시 덩샤오핑과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은 화궈펑(華國鋒, 1921-2008) 영도 하의 “보수파”에 맞서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덩샤오핑은 스스로 민주를 외치며 “민주장운동”을 고무했지만, 그가 갈수록 확산되는 민주운동을 그대로 방치할 리 없었다.
1979년 3월, 미국을 다녀와서 베트남과의 전쟁을 개시한 후, 덩샤오핑은 마침내 민주장운동을 조준했다. 덩샤오핑은 문혁 시절 주자파(走資派) 수정주의의 영수로 몰렸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4인방은 구속되고 문혁은 끝이 났지만, “수정주의”의 낙인을 벗기 위해서라도 덩샤오핑은 민주운동을 신속하게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3월 16일,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기본원칙에 반하는 대자보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임박한 정치 탄압의 조짐을 감지한 <<탐색>>지 동인들은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1979년 3월 25일, 웨이징성은 “민주냐, 새로운 독재냐”란 제목의 대자보를 다시 써서 민주장에 붙였다.
“사람들은 덩샤오핑이 독재자로 변했음을 알아야만 한다. 1975년 덩샤오핑이 정계 복귀했을 때 그는 인민의 이익을 중시하는 듯했다. 그때 인민 대중은 열렬히 그의 정책을 지지하고, 피로써 그를 지지하려 했다······. 이제 그는 민주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인민의 민주운동을 진압하려 한다. 성(省) 정부가 반민주적 정책을 취하도록 묵인하고, 독재를 행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인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인민의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침해하는 자는 인민의 적이다!”
민주운동을 탄압하는 덩샤오핑을 독재자로, 나아가 인민의 권리를 짓밟는 인민의 적이라 선언하는 강력한 규탄의 성명서였다. 격분한 덩샤오핑은 신속하게 민주장운동을 짓밟았다. 나흘 후인 3월 29일 웨이징성은 공안국에 체포되었고, 이후 며칠에 걸쳐 민주장 운동의 주역들이 연달아 구속되었다. 중공중앙의 기관지 <<홍기(紅旗)>>는 “인권의 구호는 부르주아의 슬로건”이라는 사설이 실렸다. 4월 5일자 인민일보는 “사회주의 기본원칙”을 벗어나면 반혁명이라는 메시지가 실렸다.

▲<1979년 1월 1일자 미국 “타임Time”지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 덩샤오핑.>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은 신속하게 민주장 운동을 진압하고 이른바 “4항 기본원칙”을 공표했다.
1) 사회주의 기본노선을 반드시 견지한다.
2) 무산계급독재를 반드시 견지한다.
3) 중국공산당의 영도력을 반드시 견지한다.
4)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반드시 견지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군중의 민주장운동과 더불어 시작했지만, 불과 석 달만에 강경한 사회주의 노선으로 회귀했다. 그 결과는 “개혁개방”과 “마오쩌둥 사상”이 기묘한 결합이었다. 그해 가을 10월 16일, 웨이징성은 베이징 인민법정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저항을 이어가던 민주세력도 일단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는데 ······.<계속>

▲<웨이징성의 옥중 서신 및 시론집, “혼자 맞서는 용기,” 1998년 미국 펜귄 출판사 출판>
<22회>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고 ‘인민’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

<1989년 6월 톈안먼 광장의 민주화 운동. 사진/공공부문>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이 투표 통해 정권을 만들고 교체하는 선거 민주주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한민국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삭제되고 대신 “민주주의”가 삽입됐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알레르기적 반감이 작용한 듯한데, 이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 생겨난 무익하고 부조리한 논란일 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화자(話者)의 의도, 정치적 목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여러 의미로 혼용되어온 다의적 개념이다. 상식적으로 중·고생 교과서에 정확하고 구체적인 개념 대신 불명료하고 애매한 개념을 사용할 수는 없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삭제하자는 주장은 북한의 역사 교과서에서 “인민민주주의공화국”를 삭제하고 “민주주의공화국”만 쓰자는 주장만큼이나 어불성설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개인의 기본권, 정부의 권력분립, 대의제 민주주의의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정교한 이론 체계이다. 자유주의 헌법에 따라 운영되는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입헌 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라고도 불리는데,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등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물론 국가 간섭을 최소화한 자유방임주의 국가까지도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에 들어간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는 참정권을 부여받은 국민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고, 또 그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선거 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를 채택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성립될 때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체제라는 사실만큼이나 명확한 팩트(fact)다. 중국현대사를 기술할 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삭제할 수 없듯,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술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절대로 삭제될 수 없는 용어다. 중·고교 교과서라면 더더욱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적 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을 정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교과서는 위헌적 불량품이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는 ‘인민’이 ‘인민의 적’에게 독재하는 체제...자유민주주의와 양립 불가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상극(相克)의 체제다. 1940년 1월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이라는 글에서 세 가지 민주주의를 논했다. 그는 구미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주의는 자산계급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구(舊)민주주의”라고 혹평했다. 반면 구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미 발달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민주주의라고 극찬했지만, 당시 중국이 일본과 국민당이 분할 점령하고 있는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에 소련식 사회주의 공화국이 바로 성립될 순 없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은 제3의 길로서 노동자, 농민, 좌파 지식인, 및 소자산자의 계급적 연대에 기초한 “신(新)민주주의”를 제창했다. 1940년대 10년 동안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은 중국식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적 청사진이 되었다.
1940년 당시 마오쩌둥은 앞으로 건립할 사회주의 공화국의 이름을 “중화민주공화국”이라 했다. 9년 후 중화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중국공산당은 새 나라의 국명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개칭했다. 공화국 속에 이미 민주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학자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당시 마오쩌둥이 이미 “인민민주독재”의 이론을 정립했다.

<1949년 7월 1일, 인민일보 제1면에 게재된 마오쩌둥은 “인민민주전정을 논함”>
마오쩌둥에 따르면, “인민민주주의”는 중국공산당 영도 아래서 “인민” 계급이 “인민의 적”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는 전제적 시스템이다. “인민민주독재” 아래선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지난 70여년 간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요지부동의 기본 전제로 삼아왔다. 시진핑 역시 집권 초기부터 중국의 인민을 향해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유혹을 물리치라고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가령 2019년 3월 시진핑은 중공중앙의 기관지 <구시(求是)>지에 실린 글에서 “서구식 헌정(憲政), 삼권분립, 사법독립”의 길을 갈 수는 없음을 강조했다. 중국식 “인민민주주의”가 구미식 “자유민주주의”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29세 전기공 웨이징성, 선거 민주주의 담은 대자보 내걸고 15년형 받아
1978년 12월 5일 베이징 동물원의 전기공 웨이징성(魏京生, 1950-)은 베이징 시단(西單) 민주장(民主墻, 민주의 벽)에 “제5의 현대화: 민주와 그 외”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웨이징성이 말한 “제5의 현대화”란 다름 아닌 “민주화”를 의미했다. 196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은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 네 분야에서 이른바 “4대 현대화”를 내걸어왔다. 이에 맞서 웨이징성은 “민주화”야 말로 현대화의 급선무라 주장했다.
지난 주 살펴 봤듯, 웨이징성은 18년의 세월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친청(秦城) 감옥에서 정치범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베이징시 제1중급 인민법원”은 왜 왜 일개 전기공에 불과한 스물아홉 살 청년이 기껏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반혁명죄”를 걸어 15년 형을 언도해야 했을까? 바로 웨이징성이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를 부르짖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명료하고 강력한 문장으로 인민이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를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구미식 선거 민주주의의 도입을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이 그러한 “과격한”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리 만무했다.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각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중국 통일의 주체였다. 중국공산당이 막강한 군사력을 견지하고 있는 한, 그 어떤 조직도 정권교체를 꿈꿀 수 없다. 1949년 중화대륙을 통일한 중국공산당은 “인민민주독재”의 이념을 통해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의 길을 완벽하게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1979년 추정, 법정 진술하는 웨이징성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시진핑이 말하는 민주란? 독재권력의 대민 지배를 전제...민주의 주체는 중국공산당
놀랍게도 35년 지난 2013년 이래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제5의 현대화”라는 과거 웨이징성이 외쳤던 구호를 그대로 차용해서 쓰고 있다. 웨이징성에게 “제5의 현대화”는 “민주화”였지만, 시진핑이 부르짖는 “제5의 현대화”는 “국가 치리(治理) 체계와 치리 능력의 현대화”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흔히 거버넌스(governance)라 번역되는 치리의 본뜻은 “다스리다,” “질서를 바로 잡다” 정도의 의미다. 최고권력자가 “정치범”의 표현을 표절하면서 “제5의 현대화”의 원의를 “민주”에서 “압제”로 바꿔치기 했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을 보면, 그 함의가 어렵잖게 파악된다. 바로 QR코드, 바이오 메트릭스, 홍채인식,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최첨단의 디지털 감시체제를 이용한 대민(對民) 통제의 강화라 할 수 있다.
물론 시진핑도 틈만 나면 “민주(民主)”를 강조한다. 시진핑 정권에서 강조해온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12가지 중에서 “민주”는 “부강(富强)”에 이어 제2의 가치이다. 과연 어떻게 공산당 일당독재의 나라 중국의 최고권력자가 “민주”를 외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독재자치고 “민주” 팔이를 안 한 사례가 별로 없다. 레닌,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좌우파 독재자는 모두 “민주”를 강력한 장기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페리(Elizabeth J. Perry)의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에서 “민주”는 흔히 “인민주의적(populist)”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진핑 집권 초기 중국의 사회의식 조사를 보면, 85%의 중국인들은 “민주”가 “정부의 지도자들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때의 “민주”란 유권자가 직접, 비밀, 보통 선거를 통해 권력을 창출하고 교체하는 근대 구미 사회의 선거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계몽주의 이후 입헌 민주주의는 경쟁적 선거, 다수결주의, 국가권력 제한을 명시한 자유주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populist democracy)”는 21세기 현대 민주주주의 국가의 “선거 민주주의”와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독재 권력의 하향적 대민(對民) 지배를 전제하지만, 후자는 국민 참여에 따른 상향적 민주 권력의 창출과 교체를 핵심으로 삼는다. 결국 중국공산당이 부르짖는 “민주”란 “백성을 어엿비 여기고 백성을 위하는” 전통시대 군주의 위민(爲民) 통치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의 주체는 중국 인민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다.
그렇다고 모든 중국인들이 “인민주의적 민주” 개념에 포박당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위의 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15%의 중국인들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한 국가 지도자의 선출”을 “민주”의 본뜻이라 생각하고 있다. 2013년 조사에 따르면, “중국이 선거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61%는 부정적 답변을 했다. 적어도 39%는 미국식 “선거 민주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언제든 제2의 웨이징성이 다시 나와서 민주적 직선제를 통한 정권 교체를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1978-1979, 베이징의 민주장(民主墻) 운동. 사진/공공부문>
톈안먼 민주 운동과 구소련 붕괴로 이어진 웨이징성의 민주장 운동
1979년 3월 덩샤오핑을 정조준해서 “민주”의 직격탄을 쏜 웨이징성과 <<탐색>>지 동인들의 결정은 기름통을 들고 불길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40년이 지나 웨이징성은 그날 자신이 써붙였던 “민주냐, 새로운 독재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평했다.
“예상대로 우리들이 모두 체포되자 커다란 풍파가 일어났다. 덩샤오핑은 부득불 잠시 민주화 체포를 잠시 정지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민주장은 1년 간 더 지속됐다. 우리들의 체포가 변곡점이 되어 민주장에선 큰 변화가 일어났다. 민간 간행물 편집위원 류칭(劉靑, 1946?- )과 저명한 시인 베이다오(北島, 1949- )를 위시한 운동가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내 각급의 개혁적 간부들이 덩샤오핑의 정치적 탄압을 비판했다. 그 결과 당내에는 덩샤오핑 독재를 비판하는 반대파가 결집되었다.
웨이징성은 베이징 민주장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1979년 민주장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중국 밖 여러 나라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새롭게 일어났다. 타이완, 파리, 프라하, 바르샤바, 모스크바 등지로 민주의 열풍이 번져갔다.”
1979년 12월 10일 타이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이 발생했다. 웨이징성의 지적대로 “베이징의 봄”은 타이완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타이완 민주진보당 전 주석 스밍더(施明德, 1941- )는 스스로 베이징 민주장운동에 자극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덩샤오핑의 강경 진압으로 민주장운동은 중단되었지만, 민주를 향한 중국 인민의 열망을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1986년 봄 다시 민주의 싹이 돋아나 그해 말 대학가에선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3년 후엔 1989년 4-6월 톈안먼 민주운동으로 만개했다. 톈안먼 민주운동은 비록 탱크 부대에 짓밟혀 무지몽매한 대학살극이 벌어졌지만, 베이징의 봄은 결국 구소련과 동구 공산당 체제를 붕괴를 예고했다. 웨이징성은 말하듯, “베이징 민주운동은 전 지구적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킨 위대한 공헌을 했다.” <계속>

<1989년 6월 5일, 당시 19세였던 “탱크맨” 왕웨이린(王維林)이 온몸으로 탱크부대를 막아서고 있다. 왕웨이린의 이후 행방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사진/공공부문>
<23회> 국민 통합, 누구나 똑같이 ‘법의 지배’ 받을 때 가능하다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 풍경. “대(大)비판, 대연합의 모법을 세우자!” 반혁명 세력에 대한 일대의 비판을 통해서 무산계급의 대연합을 이룬다는 발상. 사진/공공부문>
분열 조장하다 이제 “국민통합” 외쳐
...통합과 반통합 세력으로 갈라치는 수법?
분열 정치로 전 국민을 두 진영으로 갈라치기 해온 정치인들이 느닷없이 “국민 통합”을 외치고 나섰다. “적폐청산”의 깃발을 날카로운 창처럼 흔들며 “국민 분열”을 조장하다가 스스로 적폐가 되자 대뜸 “국민 통합”의 구호를 견고한 방패처럼 내밀고 있다. 국민을 또다시 “통합 세력”과 “반(反)통합 세력”으로 양분하려는 속셈인가?
다원화된 현대국가에서 “국민 통합”은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가장 효율적인 통합의 방도는 무엇일까? 걸출한 지도자가 카리스마를 발휘해서 전 국민을 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면 통합이 이뤄질 수 있을까? 공교육으로 애국심을 고취하고 공적 매체로 민족의식을 선양하면 국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을까? 과거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화해”의 캠페인을 벌이면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대동(大同)을 실현할까?
그 모든 방법이 일시적 효과를 발휘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는 없다.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은 빈부 격차, 지역 갈등, 종교 마찰, 인종 차별, 신념 충돌, 세대 차이, 젠더 문제 등으로 이미 사분오열되어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미 사회를 돌보면, 수많은 정치가, 종교인, 학자, 활동가들이 모두 나서서 찢기고 구겨진 “사회의 직물(social fabric)”을 깁고 잇고 다림질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분열의 골은 갈수록 더 깊어지는 추세다. 두 갈래 정치(bifurcated politics), 분열 정치(divisive politics), 쟁론 정치(contentious politics), 부족 정치(tribal politics) 등등 “타협 불가의 권력 투쟁” “화해 불능의 민주주의”를 조롱하고 한탄하는 학계의 신조어가 넘쳐난다.

▲<분열 정치를 풍자한 19세기 미국의 삽화. 그림/ Universal History Archive>
법이 공정하면 반대자도 공적 질서 인정...권력형 비리 처벌은 정치보복 아냐
결국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국민 통합”의 방법은 오로지 단 하나, “법의 지배(rule of law)”를 확립하는 길밖에 없다. 법이 공정하지 않으면 국민은 분열된다. 반면 법이 공정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 사분오열된 국민이라 해도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적 질서를 존중한다. 아무리 싫은 반대편의 정부라 해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무정부의 혼란보다는 덜 위태롭기 때문이다.
“국민 분열”을 조장해 온 정치인들은 “국민 통합”을 외칠 자격이 없다. 진정 “국민 통합”을 바란다면 쉬운 말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법의 지배”를 확립해야 한다. 특히 권력자의 직권남용, 행정가의 정책 실패, 공직자의 부정부패, 정치인의 비위(非違) 행위는 추상같은 법의 잣대로 냉철하고 수사하고 엄정(嚴正)하게 처벌해야만 한다.
법치의 시스템에 따라 권력형 비리를 일소하는 작업은 “정치보복”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이다. 동서고금 어디를 봐도 “법의 지배” 없는 “국민 통합”이란 사상누각일 뿐이다. 기껏해야 정치 선동에 의한 여론몰이이거나 독재정권의 대민(對民) 동원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문혁 이후 갈가리 찢어진 인민을 재결속하기 위해 덩샤오핑이 행했던 발란(撥亂, 혼란 수습)과 반정(反正, 정상 회복)의 정치도 예외가 아니었다.
분열 정치의 대가 마오쩌둥...대중을 인민과 인민의 적으로 양분
마오쩌둥은 분열 정치의 마스터였다.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매국면마다 비슷한 패턴의 전술을 구사했다. 계급철폐, 인민해방,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 등 고원한 이상을 제시한 후, 대중을 인민과 적인(敵人, 인민의 적), 혁명분자와 반혁명분자, 사회주의자와 수정주의자 등으로 양분하는 수법이었다.
문화혁명(1966-1976) “10년의 대동란(大動亂)” 동안 마오쩌둥의 분열 정치는 절정에 달했다. 마오쩌둥이 “조반유리(造反有理)”를 외치며 “수정주의 당권파를 제거하라!” 명령하자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열광적으로 일어나 집단린치를 가하고, “계급천민(階級賤民)”을 학살하고, 전국을 들쑤시며 증오와 파괴의 광열을 퍼뜨렸다. 홍위병에 자극받은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혁명의 대오를 결성하고 지방 정부를 무력화시키는 탈권(奪權, 권력탈취) 투쟁을 전개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군중조직들이 생겨나선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군대를 투입해서 “혁명적 좌파 군중을 지원하라!” 명령했고, 군대를 통해서 중화기로 무장한 군중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실제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군중을 분열시켜 “천하대란(天下大亂)”을 조장한 마오쩌둥은 성공적으로 정적들을 축출한 후에는 “천하대치(天下大治)”를 내걸고 인민을 탄압했다.

▲<1966년 9월 12일, 하얼빈 거리에서 비투(批鬪)를 당하는 세 사람. 그들의 목에는 각각 흑방(黑幇)분자, 토황제(土皇帝), 반혁명분자(反革命份子)의 팻말이 걸려 있다. 사진/李振盛, “紅色新聞兵>
1984년 중공중앙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문혁 10년 동안 “1억 1천 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고, 172만 명이 비자연적으로 사망했고, 13만 5천여 명이 “현행 반혁명”의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민간의 무장투쟁으로 23만 7천여 명이 사망했으며, 703만 명이 상해를 입고, 7만여 호의 가정이 초토화됐다. 사회주의 마오쩌둥이 일으킨 분열 정치의 참상이었다.
덩샤오핑, 문혁의 혼란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 “발란반정(撥亂反正)”
1978년 12월 최고영도자로 선출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새 시대의 의제(議題)로 채택했다. 여기서 “개혁”이란, 중공중앙의 정치체제, 중국의 경제구조, 사회의 기본 제도 및 인민 개개인의 문화·의식적 대전환을 의미한다. 곧 총체적인 변혁에의 요구였다. 덩샤오핑은 성공적인 개혁개방을 위해선 무엇보다 진상 규명, 희생자 복권, 피해 보상이 절실함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영도 아래서 1978년 4분기부터 1982년 말까지 수백만 건의 원안(寃案, 억울한 사건)들을 모두 찾아내서 평반(平反, 오류 정정)하는 전국 규모의 “발란반정(撥亂反正)” 운동이 일어났다 .<<춘추(春秋)>><공양전(公羊傳)>에서 연원한 “발란반정”이란 성어(成語)는 혼란 국면을 정돈하고 정상 질서를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문혁 시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덩샤오핑의 의지가 감지된다.
1980년 1월 16일, 덩샤오핑은 중공중앙 간부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강화했다.
“최근 3년, 특히 지난 한 해 동안 중앙 및 전국 각지에서는 원죄(冤罪, 억울한 죄) 및 오심(誤審) 사건들이 정정(訂定)되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이미 정정되어 복권된 인원이 295만에 달한다. 재판 없이 부당하게 처벌되었다가 명예를 회복한 사람들은 그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 수정주의, 주자파(走資派), 반혁명분자로 몰린 중공중앙의 영도자들을 조롱한 문혁 시절의 군추도(群醜圖). 그림 속에서 조롱당한 모든 이들은 문혁 이후 복권되었다.>
이때는 이미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펑전(彭眞, 1902-1997), 시중쉰(習仲勛, 1898-2002), 루딩이(陸定一, 1906-1996), 보이보(薄一波, 1908-2007), 양상쿤(楊尙昆, 1907-1998) 등 문혁 기간 고초를 겪고 지방에 유폐되었던 중공중앙의 영도자들도 모두 사면·복권된 후였다. 오로지 비운(悲運)의 전(前)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만이 아직 복권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달인 1980년 2월 덩샤오핑은 중공중앙 전체회의에서 “류샤오치 동지의 복권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했다. 덕분에 “반역자, 배신자, 수정주의자, 반혁명분자”의 오명을 쓴 채 감금 상태에서 의료 방치로 목숨을 잃었던 류샤오치는 죽은 지 11년 만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 부활할 수 있었다.
중공중앙의 영도자급 인물 중에서 류샤오치의 명예회복이 가장 늦어졌던 이유는 자명하다. 류샤오치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마오쩌둥으로 귀결될 수 없다. 덩샤오핑으로선 류샤오치를 부활시키기 위해 마오쩌둥의 무덤을 파헤칠 수는 없었다. 그는 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을 다 함께 살릴 수 있는 묘책이 필요했다.

▲<문혁 시절에 발생했던 “억울하고 거짓되고 그릇된 사안들(冤假錯案)”을 모두 바로 잡는 1978-1982년 평반(平反) 운동의 총설계자 덩샤오핑. 사진/ 공공부문>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동시에 살리는 묘책, 마오의 성취 칭송하고 과오에 면죄부
중공중앙은 1980년 3월부터 1981년 6월에 걸쳐서 중국현대사에 관한 당의 공식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힌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이하 역사 결의)”를 작성했다. 1980년 3월 19일 덩샤오핑은 이 결의문의 작성 요령에 관해 다음 세 가지 견해를 밝혔다.
1) 마오쩌둥의 역사적 지위를 확립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하고 발전시킨다. 2) 건국 이래 30년의 역사에 대해선 실사구시의 분석을 통해 잘잘못을 가리되 간략하게 큰 그림만을 그린다. 3) 지난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과거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덩샤오핑의 제안에 따라 “역사 결의”는 실제로 과거사의 디테일을 파헤치기보다는 굵직굵직한 큰 사건을 짚어가면서 30년간의 성과만을 간략하게 묘사한다. 결의문은 1)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한 최초의 7년 (1949-1956), 2) 전면적 사회주의 건설의 10년 (1956-1965), 3) 문혁 10년 (1966-1976), 4) 위대한 역사적 전환기(1977-1981)의 네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결의”에서 중공중앙은 지난 30년의 역사적 성취를 극구 칭송하는 반면, 중공중앙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역사적 과오에 대해선 소략히 언급할 뿐이다. 가령 55만여 명을 박해한 반우파(反右派) 운동(1957-1959), 최대 4천 5백만 명을 아사시킨 대약진(大躍進) 운동(1958-1961)의 실정과 착오에 대해서도 반성이나 비판이 거의 없다. 오로지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만 마오쩌둥의 책임을 추궁하는데······.
“1965년 5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이어진 ‘문화대혁명’은 당과 국가와 인민이 건국 이래 겪은 가장 엄중한 좌절이자 손실이었다. 이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끌었다.”
“역사 결의”는 이어서 마오쩌둥이 문혁을 일으킨 동기를 파헤친다. 그 설명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반혁명적 수정주의자들이 이미 당, 정부, 군대 및 문화 영역에 침투해서 “자산계급 사령부”를 구축했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군중의 총궐기를 통해서만 “주자파(走資派)가 찬탈한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그는 문혁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하는 진정한 정치 혁명이며, 영구 지속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결국 “역사 결의”는 문화혁명의 광기와 마오쩌둥 사상을 분리시킴으로써 마오쩌둥에 면죄부를 부여한다.
“1) 문화대혁명을 발동시킨 마오쩌둥 동지의 이러한 그릇된 좌경적 논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원리와 중국혁명의 실천을 상호 결합한 마오쩌둥 사상의 궤도를 명백하게 벗어난다. 2) 이러한 그릇된 좌경적 논점은 반드시 마오쩌둥 사상과 철저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3) 마오쩌둥 동지가 중용한 린뱌오(林彪, 1907-1971), 장칭(江靑, 1914-1991) 등은 최고 권력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품고 두 개의 반혁명 집단을 구성한 후, 마오쩌둥 동지의 착오를 이용하여, 그를 등에 업고서 나라를 망치고 인민을 구렁텅에 몰아넣는 죄악을 저질렀다.” (번호 필자 추가)

▲<1980년 5월 13일,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가 비행기를 타고 11년 전 류샤오치가 감금된 채 사망한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의 지방정부 건물에서 남편의 유골을 전해 받는 장면. 사진/공공부문>
만년 마오의 “좌경적 논점”을 “마오쩌둥 사상”과 구분하고, 문혁의 오류를 린뱌오와 4인방 등에 전가하는 마오쩌둥을 위한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정치적 효력은 자못 컸다. 덩샤오핑은 문혁에 대한 마오쩌둥의 책임을 묻지만, 마오쩌둥 사상은 그대로 견지한 채로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갔다.
문혁 10년 간 갈가리 찢긴 인민을 다시 통합하기 위해서 덩샤오핑은 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을 모두 살리는 적당한 미봉책을 택했다. 돌이켜 보면, 덩의 노선은 “법의 지배”에 기초한 “국민 통합”의 치술(治術)이 아니라 마오쩌둥 사상에 근거한 “인민 통제”의 정술(政術)일 뿐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중국은 시장경제와 마오쩌둥 사상이 어색하게 결합된 공산당 일당독재의 권위주의 국가로 남아 있다. <계속>
<24회>권력 교체기 신·구 정권의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의 결과는?
▲<199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50주년을 맞아 사후 2년 된 덩샤오핑의 초상화를 실은 트럭이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린 톈안먼 앞을 지나고 있다. 사진/Robyn Beck >
신권력과 구권력의 대립...법의 칼날은 어디로?
권력 교체기 신·구정권의 정치투쟁은 세계정치사에 흔한 현상이다. 내전 끝에 군사적으로 집권한 경우는 물론,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될 때도 신·구정권이 격렬하게 대립하고 충돌한다. 정치인들은 거대 명분을 들먹이지만, 투쟁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적나라한 권력욕일 경우가 허다하다.
구정권 실세들은 권력의 맛에 취해 있다가 물러나는 자들이다. 신정권의 실세들은 잃었던 권력을 되찾았거나 권력 맛을 처음 본 자들이다. 모두 강렬한 권력욕을 갖고 있기에 양자의 싸움은 “죽느냐, 죽이느냐”의 서바이벌 게임이 된다. 평범한 사람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위험한 싸움에 날아드는 부나방이 왜 그리도 많을까?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 )는 “권력이 궁극의 최음제”라 말한 바 있다. 진정 인간에게 권력은 섹스 이상의 쾌감을 주고, 그 중독성은 마약보다 강한가? 바이킹의 속담처럼 “권력은 최악의 인간을 유혹하고, 최고의 인격체도 타락시킨다.”
권력에 취해 있던 자들은 권력을 잃게 되면 썩은 칼자루 붙들 듯 권병(權柄)을 쥐고 허망하게 휘둘러댄다. 그 모습이 자못 위협적이지만, 패배한 권력 집단의 병적인 집착은 추레하고 덧없다. 바로 그들이 전 정권을 파괴할 때 사용했던 법의 칼날이 이제 그들의 심장으로 향하고 있다. 권력의 생리상 신권력은 구권력의 잘못을 파헤치고 처벌할 수밖에 없다. 구정권의 부패상이 드러날수록 신정권의 정당성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한비자(韓非子)는 군왕에게 “초법엄형(峭法嚴刑)”을 간했다. “현명한 군주는 법을 준엄하게 하고 형벌을 엄하게 할 뿐,” 정치적 계산으로 비리를 덮거나 얄팍한 거래로 범죄를 묵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정권교체기 신·구권력의 정치투쟁은 불가피할뿐더러 바람직하다. 신정권은 구정권의 부정과 비리를 철저하게 수사하고 엄중하게 단죄해야만 스스로 부패의 늪지대를 비껴갈 수 있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가 간파했듯, 오로지 권력만이 권력을 억제한다.
▲<1980년 재판 중인 마오쩌둥의 부인, 4인방의 영수 장칭(江靑, 1914-1991). 사진/공공부문>
이탈리아 공산주의 이론가 그람시의 문화 패권과 진지전
19세기 중반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계급 갈등이 첨예화되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예언했다. 20세기 초반 구미의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르크스의 호언장담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1926년 이탈리아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정권에 체포된 36세의 공산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감옥의 철창 안에서 당시 서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계급혁명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했다.
고민 끝에 그람시는 부르주아지가 교육제도, 종교기관, 문화예술, 언론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무산계급의 상식(常識, common sense)까지 강력하게 지배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간파했다. 그람시의 관찰에 따르면, 당시 구미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 군·경의 폭력 대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대중매체를 활용해 무산계급의 동의를 얻는 고도화된 지배 단계에 들어섰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 당시 부르주아 계급은 문화 패권(覇權, 헤게모니)을 장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노동자·농민들이 부르주아지에 이념적으로 동화된 상태였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 노트” 사진/wikiwand>
그람시에 따르면, 구미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미 군사적 기동전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한 상태였고, 유일한 혁명의 전략은 지배계급의 문화 패권을 잠식하는 장기적인 진지전(war of position)의 지속적 확산이었다. 권력은 이미 교육, 문화·예술, 사회 각계 각 분야의 수많은 진지(陣地)들에 폭넓게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거시적 맥락에서 계급혁명의 필연성을 강조했지만,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문화, 사상, 가치관, 세계관, 종교 관념까지 파고드는 이념 투쟁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의 전초전이라 여겼다.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동력을 “물적 토대”에서 찾았지만, 그람시는 계급혁명의 도화선이 “상부구조”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좌·우파 어느 쪽이든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려면 그람시의 혁명 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론대로 현대국가의 정치권력은 군·경이 독점한 폭력보다 다수 군중을 동원하고 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문화 패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해도 문화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면, 결국 절대로 권력을 유지할 수가 없다. 문화 패권의 장악을 위해선 전 사회 각계각층에 퍼져 있는 수많은 진지를 하나씩 접수해야만 한다. 물러나는 구정권이 마지막 순간까지 같은 편의 이념적 동지들을 정부 기관의 요직에 심어놓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잃었다 해도 문화 패권의 진지를 견지하는 한 사회 권력의 전면적 이동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문화의 정치적 파괴력 인식...사상 개조 문화혁명 추진
그람시보다 2년 늦게 태어난 마오쩌둥이 직접적으로 그람시의 이론에 탐닉했던 증거는 없다. 마오쩌둥이 중공의 영도자로 부상하던 1930년대 내내 그람시는 감방에서 30여 권의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신의 혁명 이론을 집필하고 있었다. 상호교류가 없었음에도 두 사람은 동시에 교조적인 마르크시즘을 탈피해서 인간 의식의 자립성과 사상·문화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람시는 중국의 현실을 깊이 탐구하지 않았지만, 그람시의 진지전은 중국의 현실에도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국민당과의 투쟁에서 군사적 열세에 몰려 있었던 중국공산당은 다수 대중, 특히 젊은 지식분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선전·선동전에서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그람시와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은 분명히 문화의 정치적 파괴력을 잘 알고 있었다. 1940년대 옌안 시절부터 마오쩌둥은 30년의 세월 동안 대중의 사상을 개조하는 문화혁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1981년 6월 27일 중공 중앙위원회는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의 정치적 동기를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 테제로 정리해서 설명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1) 일군의 자산계급의 대표적 인물들과 반혁명적 수정주의 분자들이 이미 당과 정부와 군과 문화 영역의 각 분야에 섞여들었다. 2) 그 결과 상당히 큰 규모의 다수 단위의 주도권이 이미 마르크스주의자 및 인민 군중의 손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다. 3) 이미 당 내부에는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가 중앙에 자산계급의 사령부를 형성해 놓았다. 4) 이들은 수정주의 정부 노선과 조직노선을 결성하고, 각 성, 시, 자치구와 중앙의 각 부문에 그들의 대리인을 심어놓았다. 5) 과거의 각종 투쟁은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6) 오직 문화대혁명을 실행하여서 공개적으로, 전면적으로, 아래로부터 광대한 군중이 이 어두운 면을 폭로해야만 비로소 주자파가 찬탈한 권력을 되찾아올 수 있다. 7) 이는 실질적으로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뒤엎는 정치 대혁명이다. 8) 이후에도 이러한 정치 대혁명은 여러 차례 계속되어야만 한다.” (번호는 필자가 추가)
▲<“마오 주석의 혁명 문예 노선을 따라서 승리하고 전진하자!” 문화혁명 당시의 포스터. 공공부문>
중공 중앙위원회의 이러한 분석은 문혁 초기 반포됐던 강령성 문건에 분명하게 명시돼 있던 내용이었다. 1960년대 중반 중국의 상황을 돌아보면, 외견상 중국공산당은 전국에 촘촘한 네트워크의 정부 시스템을 구축하고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마오쩌둥은 히스테릭하게도 중앙과 지방의 정부 조직이 이미 “자산계급과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정부 내 핵심 진지들을 빼앗겼다 해도 그람시가 말한 문화 패권은 온전히 마오쩌둥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9년 건국 후 17년의 세월 동안 그는 놀라운 이념적 마력을 발휘하여 젊은 세대의 마음을 완벽하게 훔쳤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한 마디로 전국에서 일사불란하게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실로 광폭한 대중 동원력을 발휘했다. 요컨대 마오쩌둥은 그람시가 말했던 “문화 패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기에 “문화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반면 일시적으로 국가의 행정력을 장악했던 중공 중앙의 당권파들은 “문화 패권”을 갖지 못했기에 추풍낙엽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문화 패권을 갖지 못한 덩샤오핑, 상충되는 목표를 절충하고 봉합
1978년에서 1980년 사이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과오(過誤)를 지적하고, 정부 내의 과도한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 덩샤오핑은 그러나 마오쩌둥의 권위를 넘어서는 문화 패권을 갖고 있진 못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한 당내의 보수파들은 틈만 나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문화혁명이 종언을 고한지 불과 3~4년 지난 시점에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권위를 파괴하는 정치적 스턴트를 할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도 문화 패권은 여전히 죽은 마오쩌둥의 쥐고 있었다.
1979년 3월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墻) 운동”을 짓밟은 덩샤오핑은 “4항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의 길,” “무산계급 독재,” “중국공산당의 영도,” “마르스크-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등 네 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한다는 중공중앙의 공식 노선으로 정립되었다. 상식적으로 “개혁개방”과 “4항 기본원칙”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민간의 기업활동을 허용하는 제도의 개혁이 “사회주의의 길”일 수는 없다. “무산계급독재”가 부르주아 기업가의 등장을 용인할 수도 없다. 개혁개방은 실질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무력화하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혁이었다. 그럼에도 덩샤오핑은 상이한 원칙을 두리뭉실 “절충”하고 상충되는 목표를 적당히 “봉합”하는 특유의 모순어법으로 개혁개방의 물꼬를 텄다.
▲<1984년 덩샤오핑 (중앙), 후야오방 (오른쪽), 자오쯔양 (왼쪽). 사진/공공부문>
2년 동안 당내 보수파와의 권력투쟁을 거쳐 1978년 12월 최고영도자로 선출된 덩샤오핑은 당내의 개혁파를 규합하여 개혁개방의 시대를 열었다. 1980년 2월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에 선임되었고, 중앙서기처의 총서기를 겸직했다. 중앙서기처는 국가 기밀과 주요 정보가 집결되는 중공중앙의 핵심기관이다. 본래 1966년까지 덩샤오핑이 중앙서기처의 총서기로 활약했는데, 마오쩌둥은 중앙권력의 독점을 위해 덩샤오핑을 축출한 후 중앙서기처를 해체했다.
1980년 덩샤오핑은 14년 만에 중앙서기처를 복원시킨 후, 후야오방을 수장으로 앉히는 한편, “정치 스타”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을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발탁해서 곧 국무원 총리로 임명했다. 1982년부터 후야오방은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어 당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1980년대 개혁개방의 구심점이 된 덩-후-자오 체제가 갖춰지게 되었다. <계속>
<25회>푸틴과 시진핑의 ‘브로맨스’를 권력 집중 비판했던 덩샤오핑이 본다면
▲<대만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2022년 3월. 사진/ Mattis Liu>
우크라이나 침공 20일 전 중·러 “두 나라의 협력엔 금지된 영역이 없다” 공동 성명
지난 2월 24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행한 후, 중국 시진핑 주석의 행보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정황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중국과의 치밀한 사전 조율 하에서 일어난 군사도발로 보이기 때문이다. 2022년 2월 4일, 푸틴과 시진핑은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12장이 넘는 장문의 중·러 공동성명서에는 “평화, 발전, 평등, 정의, 민주주의와 자유” 등 아름다운 말이 가득하지만, 중·러 양국의 반민주적, 반자유적, 반인권적 독재를 정당화하는 독소 조항이 곳곳에 지뢰처럼 깔려 있다.
가령 “각 나라는 그 나라 고유의 정치·사회적 체제에 가장 잘 맞는 민주주의의 실행 방법과 형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구절이나 “모든 국가는 특유의 민족적 특성, 역사, 문화, 사회 체제, 사회·경제적 발전 정도를 갖기에 인권의 보편성은 각 나라가 처한 실제 상황의 프리즘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는 구절 등은 닳디 닳은 권위주의 정권의 독재 합리화 논리다. 평화, 발전, 협력, 부유, 인류 공동 운동체 등 중국공산당의 상투적인 선전 구호가 넘쳐나지만, 핵심을 파고들면 그 밑바탕엔 중·러 양국의 군사 패권주의가 깔려 있다.
공동성명서에서 러시아는 대만이 중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인정하고, 중국은 러시아와 더불어서 나토의 확장 중단을 촉구한다. 국명이 명기되지 않아도 문맥상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음이 번연히 드러난다. 게다가 이례적으로 “중·러 두 나라의 우정엔 한계가 없으며, 협력에는 금지된 영역이 없다”는 문구까지 들어가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예정되어 있었고, 중국은 러시아를 뒤에서 밀어주기로 합의한 정황이 읽힌다. 바로 그날부터 16일에 걸쳐 베이징 올림픽이 치러졌고, 나흘 후인 2월 24일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다.
▲<2022년 2월 4일 베이징에서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 사진/ Sputnik/Aleksey Druzhinin/Kremlin via Reuters>
푸틴 시진핑 공통점...영토 야욕 숨기지않는 민족주의자, 종신집권 길 닦은 절대군주
푸틴과 시진핑은 공통점이 많다. 첫째, 푸틴은 1952년 10월생이고, 시진핑은 1953년 6월생으로 불과 8개월 차이로 세상에 태어나서 냉전 시기 각각 소련과 중국에서 유년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둘째, 두 사람은 전 세계에서 공산권이 줄도산하던 1980년-90년대 소련과 중국의 정부에서 정계에 입문하고, 장시간에 걸친 정무 경험을 쌓아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올랐다. 셋째, 두 사람 모두 영토 야욕을 숨기지 않는 강렬한 민족주의자들로 군사적 위기를 고조시켜 대내적 지배력을 강화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넷째, 두 사람 모두 재임 중 헌법 개정으로 임기 제한 규정을 없애고 종신 집권의 길을 닦은 반민주적 절대군주다. 푸틴은 제정러시아 차르의 권위, 시진핑은 전통 시대 중국 황제의 지위를 연장하는 시대착오를 보인다.
또한 두 사람은 20세기 공산주의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긍정한다. 푸틴은 공개적으로 레닌을 칭송하며, 시진핑은 공공연히 마오쩌둥 사상을 되살리고 있다. 단적인 예로 지난 2월 21일 푸틴은 “레닌이 우크라이나의 설계자”라 주장하며, 레닌을 기리는 기념물들을 파괴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감사할 줄 모르는 후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탈(脫)공산화를 원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을 향해서 “진짜 탈공산화가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겠다고 위협했다. 냉전 시대 구소련을 향한 그의 동경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시진핑 역시 마오쩌둥 시대의 어두운 기억을 조직적으로 삭제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되살려서 중국인들을 결속하는 이념적 구심으로 삼으려 한다.
요컨대 푸틴과 시진핑은 공히 구소련 붕괴 이후 등장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신냉전 시대의 전제군주(專制君主, autocrat)들이다.
대만과 통일 부르짖는 시진핑, 과연 공격할까? 러의 우크라 침공 전개를 주시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사회는 푸틴과의 “브로맨스”에 빠져 있던 시진핑을 향해 중국의 외교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은 2008년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했을 때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러시아와의 적정 거리를 유지해오던 중국이 지난 2월 러시아와의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다. 러시아를 끌어안은 시진핑의 근본 동기는 그가 추진해 온 “하나의 중국” 정책으로 보인다.
지난 9년의 세월 시진핑 주석은 틈만 나면 대만과의 통일을 공공연히 부르짖어 왔다. 2020년 4월에는 중공 중앙은 대만을 향해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지 말라(勿謂言之不豫)!”는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 마오쩌둥이 1940년 1월 “신민주주의론”이란 논설에서 썼던 표현인데, 중국외교사에선 선전포고에 준하는 엄중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1962년 중·인 국경분쟁,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중·월 전쟁 때, <<인민일보>>가 두 차례, <<신화사>>가 한 차례 바로 이 표현을 쓴 바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둘러싸고 국제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토론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제제재가 시진핑의 모험주의적 행동을 막는 억지력을 발휘한다는 분석도 있지만, 중국은 서방식 경제제재의 허실을 면밀하게 따져서 대만 침공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는 전망도 있다. 다만 시진핑이 제3기로 들어서는 2022년 말까지는 중국의 대만 침공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문제는 종신 집권에 나선 시진핑으로선 장기 집권의 거대명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대중적 지지를 확충하기 위해서 시진핑은 얼마든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며 대만 침공을 감행할 수도 있다.
▲<2016년 대만 타이베이의 반중시위. “대만은 대만이다, 중국이 아니다!” https://www.asianwarrior.com/2018/07/taiwan-the-question-of-one-china-part-ii.html>
결국 오늘날 중국의 가장 큰 위험은 부조리한 정치 시스템에 있다. 푸틴의 군사 모험이 증명하듯 권력 집중은 일인(一人) 지배로 귀결되며, 견제받지 않는 일인 지배는 파멸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1980년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덩샤오핑은 권력 집중의 위험과 일인 지배의 모순을 냉철히 꿰뚫어 보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덩샤오핑 “권력 집중은 정권 부패와 실패의 원인... 그래서 참혹한 문혁 겪었다”
덩샤오핑은 1979년 3월 민주장(民主牆) 운동을 진압하고 웨이징성(魏京生, 1950- ) 등 자유주의 민주투사들을 구속했지만, 중국공산당이 다시금 마오쩌둥 시대의 전제적 1인 지배로 복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80년 8월 18일, 덩샤오핑은 중공 중앙 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당과 국가의 영도제도(지도 체제) 개혁”이라는 제목의 기념비적 강화(講話)를 했다. 이 강화문에는 파격적이고도 근본적인 정치 개혁의 청사진이 담겨 있었다. 강화문에서 덩샤오핑은 중공 중앙의 핵심 요직에서 구시대의 인물들을 밀어내고 다수의 신진들로 대체하는 대규모 인사개혁을 감행한 후,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권력은 과도하게 집중되어선 아니 된다.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면, 사회주의적 민주제도와 당의 민주집중제의 실행과 사회주의 건설의 발전에 저해가 되며, 집체적 지혜의 발휘를 막을뿐더러 일개인의 전횡과 독단을 조장하고, 집단적 지도력을 파괴한다. 또한 새로운 조건 하에서 관료주의를 일으키는 중요 원인이 된다.”
▲<1979년 백악관에서 카터 대통령과 닉슨 전 대통령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덩샤오핑의 모습. https://www.nixonfoundation.org/2017/07/rn-deng-personal-letter-solely-china/>
마오쩌둥 시대의 어둠을 직접 몸으로 경험한 덩샤오핑은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정권 부패와 정권 실패의 근본 원인이라 제시했다. 나아가 덩샤오핑은 “우리가 권력 집중의 폐해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10년간 참혹한 문혁을 겪어야만 했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는 소수가 중앙 권력을 독점하면서 생겨나는 겸직(兼職)과 부직(副職)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둘째, 겸직, 부직이 지나치게 많아서는 아니 된다. 일개인의 지식, 경험, 정력은 한계가 있다. 좌우상하 겸직이 너무 많게 되면 어떤 일이든 깊이 들어가기 어렵다. 특히 더 많은 동지가 더 적합한 곳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부직(副職)이 과도하게 많아지면, 효율성이 떨어지고, 관료주의와 형식주의가 퍼지기 쉽다.”
나아가 덩샤오핑은 당정(黨政) 분리까지 주장한다. “의행(議行, 의회와 행정부) 합일”을 강조하는 2020년대 중국공산당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권력분립의 논리다.
“셋째, 당(黨)과 정(政)이 구분되지 않고, 당이 정을 대신하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중앙의 일부 영도 동지들은 정부의 직무를 겸임하지 않기에 당을 관리하고, 나아가 노선, 방침, 정책을 관장하는 일에 힘을 모을 수 있다.”
덩샤오핑의 이 세 가지 주장은 이후 중공 중앙의 집단지도 체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원리로 작동했다. 덩샤오핑은 “영도 체제의 일원화”는 결국 “1인 지배”로 이어져서 “민주적 절차, 집단지도, 민주집중제, 분업과 책임” 등의 원리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다. 당내 보수파의 반발로 덩샤오핑의 이 강화문은 1983년까지 공표되지 못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 주요 내용은 입을 타고 전해져서 1980년부터 본격적인 정치 민주화 논쟁을 일으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2년 전 덩샤오핑의 강화문을 읽다 보면, 마치 그가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서 2022년 현재 중국의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덩샤오핑과 정반대로 시진핑은 오늘도 공산당의 전일적(全一的) 영도력이 치국(治國)의 요체라고 부르짖고 있다. 2019년 2월 중공 기관지 “구시(求是)”에 실린 강화문에서 시진핑은 “당의 영도력이 사회주의 법치의 가장 근본적인 보증”이라며 중국은 절대로 “헌정(憲政)”, “삼권분립”, “사법 독립”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개혁개방 40년이 지나 시진핑은 권력 독점을 비판했던 덩샤오핑의 유훈(遺訓)을 정면으로 배반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시진핑의 종신 집권은 일시적 권력 일탈인가, 반영구적 궤도이탈인가? 견제받지 않는 시진핑의 권력은 중국을 넘어 전 세계에 과연 어떤 결과를 몰고 올까? <계속>
<26회>인구 2600만 상하이 봉쇄…수십만 아사한 1948년 창춘의 기억

▲<1958년 베이징에서 정부 시책에 따라서 참새 사냥을 하는 아이들. 사진/공공부문>
봉쇄와 박멸...1948년 창춘 봉쇄, 1958년 20억마리 참새 대학살 떠올라
지난 4월 5일 국제 금융 허브 상하이 지역의 전면 봉쇄가 무기한 연기되면서 세계의 촉각이 다시금 중국에 쏠리고 있다. 세계 주요국들은 이미 “위드(with) 코비드” 정책으로 돌아섰는데, 중국은 “제로(zero) 코비드”를 외치며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다수 국가에선 의학적 상식에 따라 결국 바이러스와의 불편한 공존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중국은 강력한 봉쇄 작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과 상하이 지역에서 2600만에 달하는 거주민들이 모두 집안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보이지 않는 인민의 적 “코비드-19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세계 최대의 대도시를 통째로 봉쇄하는 중국공산당의 전격 방역 작전은 중국 현대사의 두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국공내전(1946-1949)이 절정이던 1948년 5월부터 5개월간 지린성 창춘(長春)시를 완벽하게 봉쇄해서 10만의 국민당군을 굴복시키고 수십만 양민까지 아사시켰던 공산당군 사령관 린뱌오(林彪, 1906-1971)의 현대판 공성전(攻城戰)과 1958년 중국 전역에서 전 인민을 동원해서 20억 마리의 참새를 박멸했다는 “참새 대학살 촌극”이다. (송재윤, <<슬픈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참고)
중공 중앙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진정 전 중국을 무균지대로 만들겠다는 발상인가? 설사 중국 전역이 일시적으로 무균지대가 된다 한들 과연 며칠, 아니 몇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대체 이 활달한 전(全) 지구화의 시대에 중국은 국제사회를 향한 “개혁개방”의 문호를 다시 걸어 잠글 수 있나? 이후 신종 바이러스가 엄습할 때마다 대규모 봉쇄령을 내릴 작정인가? 상식적으로 방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역시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950년대 이래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시진핑 “코로나와 투쟁은 인민 전쟁 총체전”...관제 언론, 연일 방역 칭송
1949년 건국 이래 중국공산당은 끊임없이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색출해 박멸하는 정치운동이나 대규모 국책 사업에 전(全) 인민을 불러내는 총동원령을 발동시켜왔다. 인민 총동원령의 최고조는 최대 450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대약진운동(1958-1962)과 “1억1천 3백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는 문화대혁명(1966-1976)으로 표출되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1950-60년대와 같은 인민 총동원의 정치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에도, 중공 중앙은 틈만 나면 다양한 형식의 정치운동을 쉴 새 없이 벌여왔다.
2020년 이래 시진핑 총서기는 코비드-19와의 투쟁을 “인민 전쟁 총체전”이라 부르고 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인민 전쟁”이란 전면적 위기의 타개책으로 전 인민을 일사불란하게 총동원하는 전시의 비상 전략을 의미한다. 시진핑 정권은 바이러스에 대항한 “인민 전쟁”의 대의(大義)를 내걸고 “동태청령(動態淸零)”의 전술을 취해왔다. “동태청령”이란 역동적으로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검사하고,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격리자를 격리하는 방법으로 깨끗이 박멸하고 청소해서 급기야 제로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다.

▲<봉쇄된 상하이, 2022년 3월 28일 풍경. 사진/ AFP photo>
지난 2년 동안 중국공산당 기관지들은 날마다 “동태청령”의 정책이 놀라운 성과를 냈다며 중국식 방역 성공을 칭송해왔다. 중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코비드-19 확진자의 누적 집계는 30만 명도 못 미치며, 그중 사망자의 총수는 4638명에 그친다. 물론 중국 측의 수치는 객관적으로 국제적 공신력이 없을뿐더러 대규모 봉쇄에 따르는 사회·경제적 피해와 인권 침해는 전면 배제된 정치선전용 통계에 불과하다.
단적인 예로 2021년 중국의 사망률은 1천 명당 7.18명으로 2000년 이래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2020년에 비해 2021년 16만 명이 더 많이 사망했다.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봉쇄령 때문에 기저질환자의 병원 내방이 어려워지고, 응급 치료의 실패나 의료 방치의 사례도 늘어난 결과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인민 전쟁”이 설혹 바이러스의 확산세를 둔화시켰다 해도, 그 부작용 또한 적지 않음을 보여 준다.
중앙정부서 지방 농촌까지 486만개 공산당 기층조직을 가진 나라
제로-코비드 방역은 오직 중국과 같은 강력한 전체주의적 일당독재의 국가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전면 통제(total control)의 극단적 방법이다. 현재 세계에서 그 어떤 나라도 제로-코비드 방역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단 한 마디의 행정명령으로 수천만의 시민들을 가택 연금 상태로 묶어놓은 후 군사작전 펼치듯 순식간에 감염자를 색출해내는 ‘빅브라더’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이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갖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략 일곱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공산당이 중앙정부에서 지방의 농촌 마을에 이르기까지 무려 486만여 개의 공산당 기층조직을 잘 갖춘 탄탄한 레닌주의 국가라는 점이다.
둘째, 전체의 이익과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집단주의 문화가 중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셋째, 대다수 중국 인민은 이미 70여 년 동안 당과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습되어 왔기 때문이다.
넷째, 정보기술 혁명의 결과 중국공산당은 최첨단의 디지털 장치를 활용하여 대민 감시와 통제의 능력을 극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중국은 오늘도 강력한 법적제재를 통해 반대자를 억압하고 비판세력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정부가 공적 매체를 독점한 결과 비판적 언론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오늘날 중국의 헌법 체계가 이상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의 통치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다 근원적으로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권력을 설명하기 위해선 1978년 민주장(民主牆) 운동에서 1989년 톈안먼 대학살까지 “개혁개방” 초기 10년의 세월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시절 민주화 운동의 처참한 실패가 오늘날의 중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주는 중국의 기본 체제”...1980년 짧지만 강렬했던 사상의 해빙기
이미 살펴봤듯 덩샤오핑은 1980년 8월 18일 강화문 “당과 국가의 영도제도(지도 체제) 개혁”에서 과감하게 권력 집중을 비판하면서 당정 분리의 당위를 설파했다. 덩샤오핑이 화두를 던지자 중공 중앙의 이론가들은 본격적으로 민주 담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중앙당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1980년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전면에 나섰다. 1980년 10월 14일 연설에서 후야오방은 “민주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며, 우리나라의 기본 체제”라는 과감한 테제를 던졌다.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 사진/공공부문>
개혁개방 초기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주석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9월에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후 그는 중공 중앙의 보수파들에 맞서서 시장경제의 과감한 도입과 정치 개혁을 주도했고, 그 결과 1987년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배후로 지목되어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서거한 후, 4월 22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5만여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요컨대 후야오방은 1980년대 중국 민주화 운동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개혁파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의 화두를 받아서 민주 담론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 중공중앙의 이론가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그들 중 다수는 1950년대부터 중공중앙의 사상·문화·이념을 담당했던 이론가들이었다. 표면상 그들은 마르크시즘을 깊이 연구한 사회주의자들이었지만, 개혁개방의 정국에서 해빙의 시기가 왔을 땐 기다렸다는 듯 열성적으로 자유와 권리, 권력분립, 민주의 가치 등을 논하기 시작했다.
1980년 10월 말, 중공 중앙 당사(黨史) 연구실 부주임 류가이룽(廖盖隆, 1918-2001)은 공개적으로 언론의 자유, 개인의 기본권, 입법부의 독립, 정부 내 견제와 균형, 노동조합의 독립성까지 강조했다. 또한 지금까지도 중공중앙 정치국의 시녀에 불과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양원제의 입법기구로 재편하는 파격적인 개혁안도 제출했다.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답습하기보다는 문혁의 극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민주의 가치를 역설했던 자생적 민주주의자였다.

▲<1980년 2월, 산시(山西)성 한 농촌 마을에서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사진/Wang Yue>
이때쯤 중공 중앙의 학술지에 민주 관련 논문들이 게재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최고의 가치로 선양했던 레닌의 “민주집중제”를 비판하는 논문도 있었다. 가령 1980년 10월 <<철학연구>>에 실린 논문 “민주는 수단이며 목적이다”에서 후즈차오(卢之超, 1933- )는 레닌의 “민주집중제”는 민주주의를 권력 집중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 전제주의로 귀결되고 만다는 파격적인 논변을 개진했다.
만주족 출신의 탁월한 헌법학자 위하오청(于浩成, 1925-2015)은 문혁 시절 친청 감옥에 수감되어 3년 넘게 독방에서 혹사당했던 반골의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1978년에야 사면·복권되었고, 이후 군중출판사의 편집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이미 1950년대부터 마오쩌둥의 전제적 통치와 중국공산당의 반민주성에 비판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20년 훨씬 지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적 장치에 관해 논할 수 있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독립 언론의 창간을 요구했다. 그는 주요 언론이 모두 당에 장악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독점이 종식되지 않고선 자유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후 그는 1989년 톈안먼 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당적을 박탈당했다.
이들 외에도 톈안먼 대학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서 투쟁을 이어갔던 난징대학 교수 출신의 궈뤄지(郭羅基, 1932- )와 언론인이자 철학자 왕뤄쉐이(王若水, 1926-2002) 역시 1980년 이래 맹활약을 펼쳐지는데, 이 두 사람의 빛나는 투쟁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다루기로 한다.
1980년 짧지만 강렬했던 사상의 해빙기에 민주, 언론 독립, 자유와 권리, 삼권분립, 입헌주의를 주장했던 중공중앙의 이론가들은 이후 10년의 세월을 거쳐 목숨을 건 저항과 투쟁의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오늘날 중국을 지배하는 일당독재의 레닌주의 국가는 바로 그들의 육성을 억누르고 굴러가는 반민주적 일당독재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이다. <계속>

▲<1989년 5월 톈안먼 광장의 시위. 사진/AP photo>
<27회> 대륙의 자유인들
전 인민을 생포한 최고 존엄의 정치 방역

▲<봉쇄된 상하이에서는 거주민 전체에 대한 코비드 검사가 연일 반복하고 있다. 트위터에는 봉쇄 22일 동안 16차례나 검사를 받았다는 증언 등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사진/twitter.com>
웬만한 국가보다 더 큰 2600만 인구의 도시가 봉쇄당했다
현재 진행 중인 중국식 제로-코비드 방역 독재가 세계시민의 경악과 공분을 사고 있다. 상하이는 중국 GDP의 3분의 1을 담당하는 2600만 인구의 세계 최대 규모의 글로벌 도시다. 20세기 초반부터 오리엔트의 파리라 불리던 동북아의 경제 허브 상하이가 20일 가까이 봉쇄 상태에 놓여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극단적 봉쇄 정책에도 불구하고 오미크론 변이의 확산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중공 중앙은 봉쇄 정책을 전국의 대도시로 확대해가는 추세다. 일본인 은행가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 전역의 23개 도시에서 현재 2억 명 이상이 봉쇄 상태에 놓여 있다.
중국 밖의 사람들은 상하이 인구 2600만 명의 규모를 쉽게 체감하지 못한다. 2600만 명은 호주, 북한, 카메룬 등 국가 전체의 인구와 맞먹고, 대한민국 수도권 인구와 엇비슷하고, 대만의 총인구수보다는 200만을 웃도는 숫자다.
만약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2600만 인구의 수도권 전 지역을 전격 봉쇄한 후, 전 주민에게 똑같은 음식을 배급하면서 반복적으로 PCR 검사를 강요하고, 조사 결과 양성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조건 범죄자 체포하듯 붙잡아 방역복을 입힌 채로 샤워 시설도 없는 열악한 조건의 격리 시설에 수용한다면, 과연 오늘날 한국인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순식간에 반독재 시민 연대가 결성되어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근거로 정부의 무리한 방역을 위헌으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대정부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까?

▲<봉쇄되어 텅 비어버린 상하이의 차도>
안타깝게도 중국의 인민은 한국의 국민처럼 강력한 정치적 투쟁을 벌일 수가 없다. 9000만 당원, 486만개 기층조직을 갖춘 중국공산당 정부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저항적 시민사회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부당한 방역 독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고, 소규모 시민들이 뭉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현재로선 방역 독재에 맞서기엔 그 역량이 미약하기 그지없다. 다만 방역 독재의 불합리와 모순을 직접 체감한 상하이 시민들 사이에서 베이징 중앙정부에 대한 원망과 비판의식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도시 전체를 일시에 봉쇄하는 무지막지한 방역 정책은 극심한 인권유린과 2차 피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방역 독재의 2차 피해...주민들, 매일 검역소에 불려나가 검사받아
현재 상하이에서 진행 중인 제로-코비드 방역은 수많은 2차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봉쇄령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활기차게 돌아가던 도시 생태계의 순환고리가 막혀버릴 때 발생하는 2차 피해의 규모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상하이의 주민들은 격리 상태에서 거의 매일 동네 인근에 설치된 간이 검역소에 불려 나가 검사를 받아야만 한다. 상하이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4월 13일 하루에만 2만7000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는데, 그중에서 불과 1190명(4.52%)만 증상을 보이는 실정이다. 핵산 검사 등으로 색출해내는 확진자들은 대다수가 무증상임에도 집을 떠나 격리 시절에 감금당해야만 한다. 검사는 거의 날마다 조직적으로 시행된다. 일례로 지난 4월 10일, 격리 중인 상하이 어느 법률회사의 대표 변호사 넬슨(Jared T. Nelson)과 그의 가족은 16번째 검사 결과를 받았다.

▲<변호사 넬슨의 트위터. “우리는 지난 밤 조사 결과를 온종일 기다렸고, 몇 분 전 밤 11시에야 음성 판정을 받고 매우 안심되었습니다. 이 봉쇄가 시작된 후 16번 차례 계속된 음성 결과입니다. twitter.com>
누구든 검사를 받고 나면 혹시나 양성 판정이 나올까 떨 수밖에 없다. 가족의 품을 떠나 열악한 조건에서 격리 수용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역의 명분 아래서 상하이의 가족들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있을 권리조차 박탈당한 셈이다. 가족의 기본원리를 무너뜨리는 처참한 인권유린이 아닐 수 없다.
방역 독재는 수많은 불의의 피해자를 낳는다. 코비드-19와 상관없이 통원이나 입원 치료가 절실한 독거노인, 위중증 환자, 응급환자들은 전 도시가 봉쇄된 상태에선 생명이 위급할 수밖에 없다. 2006년도 상하이시의 통계에 따르면, 상하이에선 하루 평균 32만 명의 응급환자가 발생했고, 8만 명이 입원 상태였으며, 1560명이 수술대에 올랐다. 오늘날엔 그 수치가 분명 더 높을 텐데, 오미크론 변이를 박멸한다는 명분 아래 시진핑 정부는 오히려 더 많은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 규모를 생각해보면 진정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게다가 전면적 도시 봉쇄는 시민들의 정신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장시간 집안에만 갇혀 있다 보면 멀쩡한 사람들도 압박을 견디지 못해 집안에서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광기에 휩싸일 수 있다. 결국 고층 아파트에 갇혀 있다가 격분한 시민들은 일제히 창문을 열고 허공을 향해 고성을 지르며 방역 독재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다. 장시간 격리에 따르는 고통과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집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거나 고층 건물에서 투신해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2600만 명을 집안에 가두고 일제히 똑같은 음식을 배급해서 연명하게 하는 시스템은 개개인의 식생활 습관을 파괴하는 무지막지한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모든 집의 부엌을 다 없애고 전 인민이 공동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도록 했던 대약진운동(1958-1962) 시대의 광란을 연상시킨다. 대체 상하이처럼 국제적인 최첨단의 글로벌 도시에서 어떻게 정부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식량을 배급하는 발상을 할 수가 있는가? 아니나다를까 배급망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아 음식 부족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나오는가 하면 대량의 음식이 쌓여서 썩어가는 상황도 다수 발생하고 있다.

▲<3월 28일 상하이의 동부의 펑센(奉賢)구에서 이웃에게 배급된 음식물을 나눠주는 동네의 지원자들. 지역에 따라 음식이 제때 잘 배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음식이 심각하게 부족한 경우도 빈발한다. 또한 다량의 음식은 유통 과정에서 변질되어 폐기되기도 한다. 사진/ AP>
양성 결과 받으면 증상 유무 관계 없이 강제 격리소에 감금
SNS를 타고 전 세계로 이어지는 상하이의 비극적 일상이 지구촌 네티즌들을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 얼마 전 상하이에서 전신 방역복을 입은 어린이가 큰 소리로 윽박지르는 검역관들 틈에서 겁에 질려 방역 버스에 오르는 동영상이 트위터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누구든 양성 결과를 받으면 증상 유무와 상관없이 강제 격리소에 감금되어야 한다. 그 결과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야 하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국가가 인민 건강을 위해 핵가족의 인륜적 질서를 교란할 수 있다는 발상인데, 그 밑바탕에는 개체로서의 인간은 전체로서의 인민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집단주의가 깔려 있다.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은 즉각적으로 구속되듯 집단 격리소로 송치되기 때문에 집안에서 키우던 애완동물은 버려지고 만다. 바로 그 동물들이 병균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일부 검역관들은 직접 애완동물을 학살하고 있다. 고양이 떼를 그물에 넣어 길거리에 방치해 놓은 동영상이나 검역관들 여러 명이 개 한 마리를 작대기로 패 죽이는 동영상은 가히 충격적이다.
https://twitter.com/i/status/1513614166917066757
상하이 주민들의 원성이 증폭되면서 전면 통제를 다소 완화하는 분위기도 감지되지만, 제로-코비드라는 중공중앙의 완강한 정책 기조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다. 오히려 시진핑 총서기 및 중공 중앙의 방역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강력한 제로-코비드 정책의 강화를 외치고 있다. 일례로 칭화대학 교수 출신으로 현재 중국의 방역을 총괄하는 역학(疫學) 전문가 량완녠(梁萬年) 은 최근 “역동적 제로-코비드 정책은 중국의 인민을 우선시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중국 정부가 최소 비용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혜택을 보장하는 정책”이라고 다시금 역설했다.
반면 무리한 방역 정책이 재난을 만들고 있다며 정부의 제로 코비드 정책을 비판한 한 법학 교수의 인터넷 격문은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제로-코비드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선 중공중앙은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야만 한다. 중국 밖의 분석가들은 시진핑이 연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리한 “정치 방역”을 하고 있다며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전신 방역복을 입은 작은 어린이에게 방역관들이 큰 소리로 호통을 치고 있다. 사진/트위터 동영상 캡쳐 https://twitter.com/JamesMelville/status/1512704404557860867 >
1980년대 중국 민주화의 심벌 후핑(胡平), 시진핑 방역 독재를 비판하다
“중공 당국도 제로-코비드가 지속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며, 서방의 백신을 대량으로 수입해야만 점진적으로 개방으로 가고 과도기를 지나 위드-코비드로 갈 수 있음도 모르지 않을 듯하다. 다만 현재 중국의 모든 사안은 시진핑이 혼자서 결정하고 있다. [모든 사안이] 일존(一尊, 일인의 존엄)에 의해 결정된다. 중국의 방역 노선은 시진핑이 친히 지휘하고 관리해왔다. 반년 지나 올해 가을 20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거행되기에 현재 상황에서 당국은 역동적 제로-코비드 정책을 견지할 수밖에 없고, 소위 정치 방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의 착안점은 무엇보다 정치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진핑은 자신의 권력만을 생각하고 있다.”
상하이 봉쇄가 최고조에 달하던 지난 4월 5일 뉴욕에 체류하는 70대 중반의 한 중국인 망명 정객이 미국 정부 소유의 국제 라디오 채널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의 대담 프로에 출연해서 남긴 말이다. 4월 12일 그는 다시 그 프로에 출연해서 더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왜 이 상황에서도 제로-코비드를 못 바꾸는가? 한 번 바꾸면 일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존 결정의 원칙을 그가 스스로 제정했기 때문이다. 일존이 사라지면, 그 역시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친청(秦城) 감옥으로 가든지 심지어는 더 비참해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급의 관원들도 모두 오로지 일존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반(反)중공 자유화 투쟁에 전념하고 있는 이 노회한 망명 정객의 이름은 후핑(胡平, 1947- ), 1980년대 중국 민주화운동의 신화적 인물이다. 1979년 민주장(民主牆)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후핑은 1980년 11월 말 베이징 하이딩(海淀) 지구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베이징 대학 학생 대표로 선발되었다. 당시 베이징 대학 철학과 석사과정생이었던 후핑은 6096명(총유권자의 91.2%)이 투표에 참여해서 3,467(총유권자의 52%)표를 얻어 과반수 이상을 확보한 유일한 후보자였다.
이 선거는 1979년 개정 헌법에 따라 다수 경쟁자가 입후보하고 청중 앞에서 공개적 유세를 통해 경쟁적으로 투명하게 치러진 중국 헌정사 최초의 진정한 민주적 선거라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선거 유세에서 후핑은 “표현의 자유, 특히 언론의 자유를 가장 기본적인 공민의 기본권”이라고 주장해서 열광적인 성원을 얻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고 모든 것을 얻을 순 없지만, 표현의 자유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980년 11월 말 베이징 대학에서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어서 별의 순간을 잡고 민주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후핑, 이후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중국공산당의 해체를 부르짖는 반중공 자유화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을까? <계속>

▲<1980년 11월 17일, 저녁, 후핑이 참가한 경선. 단상의 후핑은 자신이 발표한 시론 “언론자유을 논함”을 주제로 답변회를 갖고 있다. 사진/huping.net>
<28> 중국식 ‘정치적 능력주의’가 선거 민주주의의 대안이라는 사람들

▲<1989년 톈안먼 광장에서 “Liberty”의 구호를 들고 시위하는 청년. 사진/공공부문>
‘정치적 능력주의’ 표방하는 중국 모델이 선거 민주주의보다 낫다고?
며칠 전 “슬픈 중국” 시리즈를 열독한다는 한국의 한 대학생이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 학생은 “홍위병의 잔재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퍼져 있다”며,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헐뜯고 무시하는 현상이 난무한다”고 했다. 특히 “네거티브 정치의 극을 보여준 지난 대선”에선 “배우자에 대한 끝없는 비방전”과 “내로남불의 난타전”만 연출되었다며 한탄했다. 이 학생은 한국 정치의 근본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라 생각하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제도적 대안은 과연 무엇이냐 물어왔다.
국가의 헌정 체제는 한 사회의 명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지만, 정치 제도가 바뀐다 해서 정치 개혁이 절로 이뤄질 리는 없다. 대통령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꾼들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가 일시에 해소될 까닭도 없다. 인간이 만든 제도는 언제든 인간에 의해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제든 내각책임제든 경륜, 능력, 도덕성을 겸비한 인재들이 없이는 좋은 정치가 실현될 수 없지만, 출중한 인물이라고 반드시 정치를 잘한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선거민주주의란 삼엄한 감시와 철저한 검증을 통해서만 어렵게 유지될 수 있는 위태롭고 불완전한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그동안 실시됐던 모든 정치 형태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치 형태이다.”
10년쯤 전부터 중국 안팎에선 선거민주주의의 약점과 한계를 지적하며 “중국 모델”의 정치적 능력주의(political meritocracy)를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거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되는 민주 국가의 정치적 기린아들과는 달리 중국공산당 영도자들은 장시간 관료제의 실무를 익히고 엄정한 평가를 거쳐 피라미드의 정점까지 올라간 전문 행정가들이다. 또한 이들은 눈앞에 지지율만 따지며 차기 선거에만 몰두하는 민주제의 지도자들과 달리 중국의 지도자들은 중장기 계획에 따라 국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통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중국식 능력주의가 서구식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주장하는 극단론자들도 있다. 일례로 2016년 한국의 어느 종편 방송에 고정 출연한 한 유명인은 중국의 통치제도를 수박 겉핥기로 미화한 후 “다당제보다 일당제가 더 민주적일 수도 있다”는 허황된 논변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한 주장들은 한 꺼풀만 벗겨보면 플라톤 이래 지속돼온 “철인통치”와 “이상(理想)국가론”의 21세기적 변종임이 드러난다.

▲2021년 1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치국이 19기 6차 전회를 개최하고 있다. 사진/xinhua
탁월한 능력 갖춘 불세출의 영웅? 전체주의적 엘리트 독재의 논리일뿐
중국공산당 영도자들이 그토록 “탁월한 능력을 갖춘 불세출의 영웅”이라면 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국민 신임을 묻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가? 대체 왜 언론의 자유를 그토록 억압하고, 반대당의 결성까지 불법화하는가? 이러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대답은 기껏 “민주집중제”라는 레닌의 조직이론, “공산당은 무오류”라는 스탈린식 전제주의, “인민은 당을 따라야 한다”는 마오쩌둥식 대중동원의 논리로 귀결되고 만다.
만약 한국의 언론처럼 중국의 언론이 중공 지도층의 부정부패를 들춰낸다면, 중국식 능력주의의 허상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중국 혁명지도자 “8대 원로”의 103명 직계 자식들의 총자산 규모를 폭로한 2012년 12월 26일 블룸버그 통신의 기사에 따르면, 103명 중 3명은 중국 국내 총생산량의 20%를 점하는 국영기업체를 경영했으며, 26명은 국영기업체의 최고위직을 맡고 있었고, 43명은 민간기업체를 운영하거나 경영진에 포함돼 있었다.
시진핑의 누나, 조카 등 직계 가족의 총자산 규모는 미화 1억 달러를 넘는다. 덩샤오핑, 원자바오, 후진타오, 장쩌민, 주룽지의 자식들 역시 거부의 반열에 올라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목숨 걸고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참여한 대가인가? 그 자손은 막대한 부와 정치권력을 누리는 태자당(太子黨)의 귀족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중국 모델의 정치적 능력주의란 전체주의적 엘리트 독재의 논리일 뿐이다. 한국이나 대만에선 이미 1960-80년대 경험했던 권위주의 개발독재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전국 단위 직접선거 치른 적 없는 중국...1980년 베이징대학 인민대표 선거
물론 중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국 단위의 직접선거를 치러 본 경험이 없다. 1949년 건국 이후 중국은 소련식 선거를 도입하여 마을 단위에선 대표를 선발하는 직접선거가 시행됐지만, 언제나 1인 후보의 단독출마에 대한 승인 절차에 불과했다. 마을 단위에서도 다수가 입후보해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진정한 의미의 선거는 용인되지 않았다. 1960-70년대 정치적 혼란 속에서는 단독 후보의 형식적인 선거도 치러지지 않았다. “개혁개방” 초창기인 1979년 7월에 입안된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서 1980년 최초로 각 단위의 지명을 받은 다수 후보가 경쟁할 수 있는 직접선거가 농촌 및 도시의 상급 단위에서 실시되었다.
1980년 11월 베이징 대학은 인민대표를 선발하는 선거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캠퍼스 건물 빈 벽마다 빼곡하게 대자보가 붙었고, 그 앞에 어깨를 맞대고 겹겹이 늘어선 학생들이 노트에 깨알같이 메모하며 글귀를 정독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학교의 공터, 식당, 강당에선 날마다 최초의 직접선거에서 정견과 정책을 발표하는 후보들의 연설회가 이어졌다. 연설회에는 수백 명의 청중이 들끓었고, 11월 28일에는 1천 명이 넘는 인파가 큰 관심을 보이며 모여들었다. 당시 현장에서 중국의 새로운 민주 선거를 취재한 미국 ABC방송 기자의 동영상을 보면, 그 현장의 열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당시 베이징 하이뎬(海淀)구 인민대표대회에는 학생대표의 의석 2자리를 놓고 거의 29명이 공식적으로 입후보했다. 1978년, 1979년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牆)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이름을 알렸던 후보자들도 다수 있었다. 그 29명 중에서 철학과 석사과정에 재학하던 후핑(胡平, 1947- ), 1976년 톈안먼 광장에서 맹활약했던 왕쥔타오(王軍濤, 1958- ), 문혁 시기 억압당했던 여성적 아름다움을 강조한 문학전공의 여성 후보 장만링(張曼菱, 1948- ), “사회주의=공공재산+민주주의”라는 구호를 들고나온 팡즈위안(房志遠, ?- ), “문화혁명은 봉건주의로의 후퇴였다”는 구호를 들고 나온 양바이쿠이(楊百揆), 지식인과 노동자·농민의 연대를 강조한 장웨이(張煒, ?- )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2월 3일 치러진 예선에서 후핑, 왕쥔타오, 장웨이가 최다 득표를 해서 12월 11일 결선이 치러졌다. 본선에선 6096명(총유권자의 91.2%)이 투표에 참여했고, 후핑은 3467(총유권자의 52%)의 득표로 대표에 선출되었다. 나머지 두 명은 일주일 후 다시 결선을 치렀지만, 참여율 저조로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해 안타깝게 의석을 차지할 수 없었다.

▲<1980년 11월 베이징 대학 경선 운동. 사진/공공부문>
이 선거에서 후핑이 내건 슬로건은 바로 “표현의 자유였다.”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고 모든 것을 얻을 순 없지만, 표현의 자유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그의 한 마디는 광장에 운집한 청년 대학생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후핑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게 되었을까?
홍위병 참여 후핑, 마오쩌둥 사상 오류 자각....“표현의 자유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후핑의 부친은 본래 국민당의 군인이었으나 1949년 “해방” 직전 가까스로 공산당에 가입했다. 어렵게 신분을 세탁했지만, 그의 부친은 1952년 “반혁명분자”의 낙인을 받고 처형되었다. 전형적인 “계급천민”의 집안에서 고달프게 자란 후핑은 극심한 신분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다. 특히 문화혁명 시기에는 혁명가 집안 출신을 우대하는 “혈통론(血統論)”이 널리 퍼져 있어서 때문에 후핑은 더 큰 핍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문혁 초기 마오쩌둥은 당내의 주자파 수정주의 세력을 축출하라며 홍위병에 총궐기를 촉구했을 때, 후펑은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열광적으로 홍위병 운동에 참여했다. 1968년 이후 5년간 산간벽지에 하방(下放)되어 고된 노동을 하면서 후핑은 스스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오류를 자각하고, 자유와 민주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해 깊은 사색을 이어갔다. 후핑의 자유주의는 문혁 시절 직접 그가 겪었던 “광적인 폭력성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후펑은 여전히 4인방의 기세가 등등하던 1975년 처음으로 골방에 숨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팸플릿을 썼다. 이후 다섯 번의 수정을 거쳐서 완성된 이 자유의 선언문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여러 형태로 출판되어 널리 배포되었다. 1975년부터 “표현의 자유”를 화두 삼아서 정교한 사색을 이어왔었기에 후핑은 1980년 11월, 12월 베이징 대학의 선거에서 과감하게 “표현의 자유가 없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구호를 외칠 수 있었다.

▲<1980년 11월 베이징 대학에서 경선에 참가한 후보자들을 일목요연하게 비교한 대자보. 사진/공공부문>
1980년 후핑은 베이징 대학의 인민대표로 선출되었지만, 중국공산당은 이 민주적 선거를 사후적으로 무효화하는 극한 조치를 취했다. 중국헌정사 최초로 시도됐던 1980년의 지방선거는 그렇게 용두사미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됐던 후핑은 물론 큰 희망을 품고 투표했던 모든 사람은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75년 헌법 개정으로 마오쩌둥은 이른바 “4대 자유(四大自由)”를 허락했다. 이른바 대명(大鳴), 대방(大放), 대변론(大辯論), 대자보(大字報)인데, 의미를 풀어보면 “정치 시위에 참여하고, 파업을 일으키고, 공개적으로 변론을 전개하거나 대자보를 붙일 수 있는” 공민의 자유를 이른다. 물론 마오쩌둥이 이 4대 자유를 허락했을 때는 홍위병을 격동시켜 반대 세력을 제거한다는 정략이 깔려 있었다. 문혁 시절 군중 폭력에 무방비로 희생되었던 혁명원로들은 1980년 공식적으로 “공민의 4대 자유”를 철회했다. 문혁 시절의 집단광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였지만, 개혁개방 초기부터 공민의 자유는 심각하게 제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생적 자유주의자 후핑,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 민주화운동단체 회장으로
후핑은 1987년 1월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아 도미했다. 1988년 1월, 그는 뉴욕시의 중국 민주화 운동 단체 중국민련(中國民聯)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중국민련은 “민주중국전선(民主中國戰線)”과 더불어 해외 중국 민주화 운동의 양대 조직이었다. 이후 후핑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철학적 근거를 모색하는 중후한 정치평론을 직접 창간한 <<베이징의 봄>>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면서 민주화 이론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 후 지금까지 후핑은 해외 중국어 매체에 왕성하게 기고하면서 강력하게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과오와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망명 정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후핑은 문혁 시절 스스로 깨달은 자유의 깊은 의미를 중국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근대 서구의 자유주의가 종교적·정치적 박해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해서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국가권력을 제약하는 이론으로 발전했다. 후핑은 중국의 자유주의도 공포에서 생겨난 공민의 집체적 자각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혁 시절 중국의 인민은 극단의 공포를 겪으면서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을 자각했고, 그러한 중국인의 자발적인 실존적 자각이야말로 중국식 자유주의의 씨앗이라는 주장이다. 후핑의 주장은 자유주의가 서구에서 유입된 외래사상이라서 중국의 현실에 맞지 않다고 비판하는 중국공산당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요컨대 후핑은 문혁의 극한 체험을 통해 스스로 거듭난 중국의 자생적 자유주의자다. <계속>

▲<1989년 5월 13일,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투쟁에 나선 학생들. 사진/공공부문>
<29회>‘검수완박’ 의회 독주... 중국식 인민 독재와 닮은 꼴

▲<2013년 3월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의 경비대. 사진/rfa.com >
공수처의 신설부터 “검수완박”까지 대한민국 헌정사 70여 년의 형사·사법 체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제 곧 물러나는 정권의 여당이 공직자, 선거, 방위사업, 대형참사, 나아가 결국에는 부패, 경제까지 이른바 6대 중대 범죄에 대한 검찰의 수사권을 모두 박탈하겠다는 발상은 기막힌 자가당착이자 우스꽝스러운 행위 모순이다. 지난 5년간 대한민국의 집권 세력은 왜 그토록 무도한 방식으로 무리한 법안을 밀어붙이는가? 그 밑바탕에는 혹시 집권 여당의 뿌리 깊은 서구식 입헌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깔려 있지 않나? 대통령이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라 칭송한 중국에 대한 맹목적 동경은 없는가? 불길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권력분립과 견제와 균형을 파괴하는 반민주적 의회 독재는 중국식 인민민주독재를 빼닮았기 때문이다.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다 박탈해서 경찰에게 모두 몰아주고 나면, 경찰의 수사권은 누가 어떻게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나? 여당 대표의 노골적인 발언처럼 “사법고시 합격한 검찰보다 경찰이 권력을 더 잘 따른다”고 한다면, 경찰을 수족처럼 부리는 그 상부의 권력자는 대체 누가, 무슨 수단으로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나?
어떤 이는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처”(공수처)가 권력형 부패를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호기롭게 출범한 후 1년여 동안 244건을 수사하고도 기껏 1건밖에 기소하지 못한 공수처는 이미 무용론과 폐지론에 휩싸여 있다. 국가권력의 핵심부 청와대에 대한 강제 수사는 꿈조차 못 꾸면서 오로지 정권과 각을 세운 검찰을 향해서만 무딘 칼날을 휘둘러 대고 있다. 야당이 공수처를 “정권 호위처”라고 폄훼해도 반박도 제대로 못 하는 실정이다.
공수처 신설과 검수완박... 견제와 균형 무너진다
인류사에서 검찰의 탄생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인권을 유린하던 경찰국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 프랑스 대혁명 이후 도입된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후 대부분의 문명국에선 검찰이 직접 수사권을 갖고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왔다. 검찰이 범죄 사실을 확정하고 범죄인을 기소하기 위해선 반드시 직접 수사권을 가져야만 한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검찰의 기소권은 본질적으로 수사권을 수반한다. 수사 없는 기소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단적인 예로 헌법 제12조 3항과 헌법 16조에 보장된 검사의 “영장청구권”은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와 “주거에 대한 압수나 수색을 할 때”를 전제로 한다. 상식적으로 직접 수사 없이 검사는 범죄의 진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만약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정확한 기소 자체가 이뤄질 수 없다. 검사는 무지의 장막에 갇히고, 범죄자는 법의 칼날을 피해 잠적할 수 있다.
둘째, 검·경이 동시에 수사권을 가져야만 양자 사이의 교차검증과 상호 견제가 가능해진다. 권력형 부정부패의 경우 경찰은 임면권자의 영향 아래 놓이므로 그 수사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경찰의 수사권을 감시하고 보완하기 위해선 반드시 검찰이 수사권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비근한 예로 미국의 연방검사, 주 검사, 지방 검사는 제한 없이 모든 범죄를 수사할 수 있고, 또 수사를 개시할 수도 있다.
셋째, 자유민주주의가 전체주의보다 우월한 이유는 마치 직접 메스를 들고 제 몸의 환부를 도려내는 집도의처럼 정부 스스로 “살아있는 권력”의 부패를 자발적으로 척결할 수 있는 입헌주의적 자정 능력에 있다. 검찰은 정부의 부정부패와 관원의 비위 행각을 면밀하게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직이다. 권력형 비리에 관한 검찰의 칼날 같은 수사가 없이는 정부의 자정 기능이 소멸된다.
물론 검찰 권력의 비대화도 막아야만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무부는 검찰에 대한 조언, 감사, 견제, 문책의 권한을 갖는다. 검찰과 경찰 사이의 교차검증, 법무부와 검찰 사이의 상호감시, 청와대와 검찰 사이의 상호긴장이 없이는 권력의 집중과 전횡을 막을 수가 없다. 교과서에 적혀 있듯, 근대 입헌주의는 정부 각 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생명으로 한다.
극히 예외적으로 중국의 교과서만 정부 내 권력분립을 부정하고 국가 기관 사이 견제와 균형을 경계한다. 중국은 의회(議會)와 행정부의 전일적 합일을 추구하는 강력한 레닌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검찰은 살아있는 권력을 감시하고 규찰하지만, 레닌주의 국가에서 입법·행정·사법부의 모든 기관은 공산당 중앙정부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는 하위 조직에 불과하다.
국가의 전권 독점한 중국공산당의 형사·사법 독재
2021년도 부패체감지수에 따르면, 중국은 전 세계 180개국 중에서 66위 정도이다. 2015년 168개국 중에서 83위였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시진핑 정부의 부패와의 전쟁이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부패와의 전쟁이 과도한 인권유린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공산당은 국가의 전권을 독점할뿐더러 전국의 당 조직과 당원들에 대한 막강한 감시, 수사, 처벌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특히 중앙기율검사위원회(中國共産黨中央紀律檢査委員會, 이하 ‘중기위’)는 중공중앙의 지휘 아래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다. 중기위는 덩샤오핑이 최고영도자로 추대되고 개혁개방이 국가의 기본노선으로 채택되던 1978년 12월 중공 11기 3차 전회(全會)에서 창설된 중공 중앙의 직속 감찰 기관이다. 1992년 이후 강력한 감찰기구로 급부상했으며, 2012년 12월 시진핑 정권 출범 후에는 반부패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강화되었다.

▲<중국 베이징의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건물. 사진/wikipedia>
중기위만으로는 역부족이었는지 중공 중앙은 2018년 3월 11일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의결을 통해서 국가감찰위원회(國家鑑察委員會, 이하 국감위)를 신설했다. 중기위와 국감위는 별개 조직이지만, 이 두 조직은 “부서를 통합해서 업무를 처리한다”는 이른바 “합서판공(合署辦公)”의 원칙에 입각해 있다. 그 결과 이 두 위원회는 공안(公安), 각급 경찰, 검찰 위에 군림한다.
시진핑 정부의 부패와의 전쟁은 전국 공산당원들의 기강 확립과 비위행위 적발의 명목으로 전개되었다. 2021년 현재 9천 5백만 명이 넘는 공산당원이 감찰과 교정(矯正)의 대상이지만, 그 가족, 친지와 지인도 언제든 연루될 수 있으므로 실제로 중기위의 칼날은 전 인민을 향하고 있다.
1920년대 창당 초기부터 중국공산당은 조직 내부의 단속과 정비를 위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원들을 감시하고 처벌해 왔다. 1940년대 옌안의 정풍(整風)운동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스탈린식 공포정치의 기술을 이용해서 1만 명 이상을 처형했다. 1950-60년대 중국공산당은 더 촘촘한 감시망을 확충해서 대민지배력을 강화했다. 문화혁명 과정에는 정상적인 기율 검사의 기구는 무력화되고, 대신 광범위한 정적 숙청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 사후 2년여 만에 중국공산당은 문혁의 광기를 청산하고 개혁개방의 신작로로 나아갔지만, 채 10년이 못 된 1980년대 후반 중국의 관료사회는 부패의 늪에 빠졌다. 정부 기관 곳곳에 광범위하게 만연했던 관료부패는 결국 대규모의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의 비극을 낳았다. 1992년 민심 이반을 막고 경제 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중공 중앙은 부패와의 전쟁을 최고의 의제로 내걸었다. 그 과정에서 중기위는 강력한 권력 기구가 되었다. 본래 중기위는 피의자 구류, 압수수색 등의 강제력을 갖지 못했으나 1994년 이후 중기위의 권력은 극적으로 강화되었다.
중앙기율검사위, 이중 규정 “쌍규(雙規)” 통해 조직적 인권유린
가령 1994년도 수정 법안 제28조에 따르면, 중기위는 자의적으로 정부 문서, 은행 계좌, 회의록, 업무일지 등의 광범위한 자료를 조사하고 복사할 수 있으며, 피의자의 개인정보를 사찰하고, 은행 계좌를 추적하거나 동결할 수도 있고, 회계장부, 영수증 등 관련 증거를 압수·수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기위는 피의자를 즉각 임의로 구속해서 취조하는 무시무시한 “쌍규(雙規)”의 권한을 갖는다.
여기서 쌍규란 말 그대로 이중(二重) 규정이란 의미인데, 일단 표면적으로 당의 기강과 규율을 위배했다고 여겨지는 부패 혐의자는 중기위가 임의로 정한 “시간과 장소”에 반드시 무조건 출두해야 한다는 강력한 명령을 이른다. 쌍규에 따라 변명의 기회도 없이 전격적으로 구속된 피의자들은 변호인 접견, 가족 면회 등 최소한의 법적 권리도 박탈당한 채로 장시간 혹독한 심문에 시달리며, 가혹행위와 고문을 당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당원들도 적지 않다. 요컨대 쌍규는 중국의 정규 형사사법 체계를 벗어나는 중기위의 초법적 권한이다.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의 심층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에만 전체 구속자의 10-20%에 달하는 33,000명에서 66,000명 정도가 쌍규에 의해 구속되었는데, 이는 최소한의 추산일 뿐이다.

▲<“부패 반대! 재산 공개!” 2014년 경 반부패운동에 동참하는 중국의 시민들. 사진/rfa.org>
중공중앙 직속의 기구인 중기위 아래로 각 지방 단위의 당 위원회에는 기율검사위원회(이하 ‘기검위’)가 설치되어 있다. 각 지방 정부마다 따로 그 지방의 기검위가 조직되어 있는 셈이다. 시진핑 정부는 중기위의 권한을 대폭 확장하면서 지방의 기검위에 대한 수직적인 지배력도 강화했다. 그 결과 중공 중앙은 중기위를 통해서 전국 모든 지역에서 반부패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지방의 기검위는 “부패와의 전쟁”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하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 결과 지방 각지에서도 쌍규를 이용한 인권유린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쌍규에 의해 구속됐던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부패와 상관없이 정치적 보복이 가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는 피의자의 가족까지 잡혀가서 한 달까지 구금된 사례도 있다. 피의자에 대한 수면박탈, 무차별 구타, 기합 주기, 자백 강요, 독방 감금, 인신공격, 인격모독, 24시간 감시가 일상적으로 가해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의 고문이 자행된다. 심지어는 고문치사의 사례도 드물지 않다.
“호랑이와 파리떼 모두 색출” 무제한 권력 휘두르는 경찰국가
중기위는 이처럼 “부패와의 전쟁”에서 이른바 “호랑이와 파리떼”를 모두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무제한의 권력을 마구 휘두른다. 중국의 검찰은 무소불위로 치닫는 중기위의 권력을 감시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중기위의 권력은 중국공산당 최고영도자의 직접적 통제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중기위의 모든 결정에는 중공중앙 정치국 상임위원회가 직접적으로 간섭한다. 마찬가지로 지방의 기검위의 모든 결정에는 지방의 당위원회가 직접 간여한다. 중앙에서 지방까지 수직적 위계질서가 엄격하게 갖춰져 있기에 지방의 기검위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도 실제로는 중공중앙의 의지가 발현된 결과라고 불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중기위는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복무하는 중공 중앙 직속의 부패 감찰기구로서 최고 영도자의 의지를 실현할 뿐이다. 중국과 같은 레닌주의 국가에서 권력분립과 견제와 균형은 원천적으로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기위, 국감위, 기검위 등 당내의 감찰기구는 물론 공안부, 경찰, 검찰 역시 전일적인 일당독재의 하위 기구로 전락하고 만다. 검찰과 경찰의 교차검증, 검찰과 법무부의 상호 견제, 검찰에 의한 최고 권력의 감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이와 반대로 자유민주주의의 검찰은 “공공의 변호사(public attorney)” 혹은 “공익의 대표자로서”(검찰청법 제4조)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까지 철저히 수사하고 기소할 수가 있으며, 또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어야만 한다. 레닌주의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근본적 차이가 바로 그 점에 있다. 진정 중국식 경찰국가의 출현을 원하는가?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다 박탈하면, 바로 그때 경찰국가의 지옥문이 활짝 열린다. <계속>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쌍규” 체제에 관한 뉴욕 주재 인권감시단(Human Rights Watch)의 보고서 “특별 조치들(Special Measures)”의 표지.>
<30> “문혁의 광기는 개인 숭배가 원인”...기록하는 자가 역사의 승자

▲<“자유롭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노라! 칭화 건축학원” 1989년 베이징 톈안먼의 시위대>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주체는 절대다수의 동시대인들
사람들은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말하지만, 오직 기록하는 자만이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있다. 권력자가 제아무리 문서를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해도 역사의 평가를 제멋대로 바꾸기란 쉽지 않다. 기록의 주체는 통치자가 아니라 절대다수의 동시대인들이기 때문이다.
먼 훗날에야 비로소 역사의 진실이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은 근거가 희박한 막연한 믿음일 뿐이다. 어느 시대에 관해서든 역사 탐구의 출발점은 그 시대를 직접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훗날의 역사적 평가는 오늘날 우리가 남긴 기록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시대의 세상에 대해선 바로 우리가 산 증인이다,
역사 기록은 단순한 사실 나열을 넘어 중대사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창의적 해석을 요구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나를 파악하는데 머물지 말고, 나아가 “왜” 하필 그렇게 했나를 궁구하고 설명해야만 한다. 잠시 지난 10여 년 동안 긴박했던 한국 정치의 상황을 돌아보자. 솟구치는 의문을 누를 길 없다.
지난 정권은 왜 탈원전을 추진하고 검수완박 꼼수를 쓴 걸까?
급작스러운 탄핵 정국에서 “촛불 군중”의 지지로 집권한 지난 정권은 왜 그토록 무리한 정책을 무도한 방법으로 강행해야만 했을까? 그들은 왜 전문가의 경고를 다 무시한 채 탈원전을 추진하고, 무엇 때문에 인근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4대강의 보를 허물려 하고, 무엇을 바라고 갖은 꼼수와 악수를 다 써가며 70여 년의 형사사법제도를 급박하게 파괴하려 할까?

▲<2022년 5월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검수완박 법안을 규탄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DB, 국회사진기자단>
정권이 바뀌면 지난 정권의 실정과 착오를 바로 잡는 정치 공방과 법정 투쟁이 개시된다. 아울러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기록 투쟁이 일어난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선 당대(當代)의 지성들이 가까운 과거의 가장 민감한 정치·사회적 현안을 파헤치는 정밀한 당대사(當代史)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사건의 나열에 그치지 말고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정교한 분석이라면 더 좋다. 우리 시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훗날의 역사적 평가로 이어지는 결정적 증언이기 때문이다.
문혁의 참상을 체험담으로 고백한 ‘상흔문학’이 유일한 출구
1978년 이후 덩샤오핑과 후야오봉(胡耀邦, 1915-1989)의 지도력 아래서 “과거의 혼란을 정돈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이른바 “발란반정(撥亂反正)”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정국의 변화는 문혁의 희생자들에게 직접 겪었던 폭력과 부조리를 증언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수많은 중국 인민은 고난의 체험자로서 그동안 몰래 숨어서 깨알같이 일기장에 적어온 당대사의 어두운 기록을 문예지와 언론매체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1978년 8월 <<문회보(文匯報)>>에 발표된 루신화(盧新華, 1954- )의 단편소설 <상흔(傷痕)>이 포문을 열었다.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힌 어머니가 9년 만에 병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오지에 하방(下放)되어 있던 딸과 극적으로 재회하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이 전국 “우수단편소설상”을 받으면서 이른바 “상흔문학”이라는 새로운 문예 장르가 생겨났다. 문혁의 참상을 온전히 자유롭게 고발할 수 없었던 시기, “상흔 문학”은 많은 이들에게 가슴에 억눌러 온 체험담을 표현하는 예술적 출로(出路)였다.
이어지는 1979년에서 1981년 사이 정부 규제가 완화되면서 장시간 억눌려왔던 문인들에게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그때까지 30년 넘게 문인들은 그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라 인민의 계급의식을 강화하고 혁명정신을 고취하는 선동대원일 뿐이었다. 1979년 이후 “상흔 문학”을 이끌었던 작가들은 인간의 현실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의 예술가였다. 그들 중 다수는 1949년 이후 태어나서 문혁 시기 성인이 된 30대, 40대의 작가들이었다.

▲<문혁 시절 “계급천민” 가족의 참혹한 모습을 그린 포스터 화가 청총린(程叢林, 1954- )의 작품>
이들은 다양한 형식의 소설과 시를 써서 사회·경제적 부조리, 관료제의 부패와 모순, 문혁 시절의 집단 폭력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고발했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한 세대 이상 전 중국인의 의식을 지배했던 마오쩌둥 사상에 관한 근본적 회의와 비판이 깔려 있었다. 상흔 문학이 각광을 받으면서 대중들 사이에선 문혁 시절의 정치범죄와 인권유린을 고발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력한 정치적 요구가 생겨났다.
중공중앙 “문혁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책임은 마오에 있다”
급기야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이하 ‘중공중앙’)가 직접 나서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이며, 그 최종적 책임은 마오쩌둥에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마오쩌둥 사망 후 4년 10개월 만이었다. 중공중앙은 그러나 그해 겨울부터 다시 검열과 삭제의 칼날을 빼들고 “상흔 문학”의 작가들을 탄압했다. 실제로 상흔 문학의 작품들을 읽어보면, 작품을 검열할 수밖에 없었던 중공중앙의 당혹감이 감지된다.
가령 살아서 2100여 수의 시를 쓰고 요절한 “몽롱시(朦朧詩)”의 대표적 시인 구청(顧城, 1956-1993)의 짧은 시 “일대인(一代人)”을 음미해보자.
“검은 밤은 내게 한 쌍의 검은 눈을 주었다네,
난 그러나 그것으로 밝은 빛을 찾아다니네.
(黑夜給了我一雙黑色的眼睛, 我却用它來尋找光明)”
이 짧은 한 편의 시에는 진정 문혁 10년의 대동란 속에서 할퀴고 찢긴 한 세대의 상처가 통째로 핏빛 선연히 담겨 있는 듯하다.

▲<1970-80년대 몽롱시의 대가 구청(顧城, 1956-1993)의 모습>
옌자치, 가오가오 부부의 ‘문화대혁명 10년사’...인격 숭배 비판
1981년 중공중앙이 마오쩌둥에 문혁의 책임을 물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파악된다. 우선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공중앙 영도자들의 다수가 문혁 시절 수정주의 주자파로 몰려서 극심한 정치적 박해에 시달렸다던 문혁의 피해자들이었다. 또한 개혁론자들에게 문혁 비판은 과거의 케케묵은 마녀사냥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이념적 방패와도 같았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 사망 이후 문혁의 참상을 고발하는 지식인들의 역사 투쟁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1986년 9월 1일 톈진 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문화대혁명” 10년사>>을 뽑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옌자치(嚴家其, 1942- )와 그의 부인 가오가오(高皐)였다. 문화혁명의 전 과정을 통시적으로 서술하고 그 발생 원인을 구명한 이 기념비적 역사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 양심적 지식인의 본격적인 역사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옌자치와 가오가오의 투쟁은 마오쩌둥 사후 정확히 10년 되던 해 열매를 맺었다. 이후 이 책은 영어와 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문혁의 참상을 알리는 교과서가 되었다.

▲<왼쪽, 옌자치와 가오가오 공저, “문화대혁명: 10년사,” 1986년 출찬. 오른쪽, 1996년대 미국에서 출판된 영역본>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문혁 시기 주요 사건을 나열하는 연대기에 그치지 않고, 문혁이라는 “중국 역사에 전례 없는 10년 대동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심리학적 원인을 심층적으로 추적했다는 점에 있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문혁 10년의 대동란은 인격 숭배의 풍조를 만연시킨 사회주의 중국의 독특한 정치문화와 정적을 제거하려는 마오쩌둥 개인의 권력 야욕이 만나서 빚어진 결과였다. 인격 숭배에 대한 옌자치의 비판은 그의 실제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문혁 시절 옌자치는 홍위병 집회에 끌려 나가서 얼굴에 검은 먹칠을 당하는 인격 살해의 모욕을 견뎌야만 했다. 그 험한 고난을 겪으면서 그는 홍위병의 집단광기가 맹목적인 인격 숭배의 문화에서 기인함을 증험(證驗)했다.
1959년 중국과학기술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공부한 후 중국철학원에서 철학을 연구한 옌자치는 1970-80년대 왕성한 저술 활동으로 중국 정치체제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근본적 대안을 모색했던 최상급의 정치철학가였다. 1980년대 중국사회과학원 정치학연구소 소장직을 역임했던 옌자치는 1986-1987년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이 이끄는 “정치개혁 판공실”에서 활약했다. 1989년 6월 중공중앙은 민주화 운동에 지지를 표명했던 옌자치 등에게 전국적인 수배령을 내렸다. 옌자오치와 가오가오는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급히 탈출했고, 1994년부터 미국 뉴욕시에 체류하면서 중국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 살고 있는 옌자치와 가오가오의 모습. 사진/scmp.com>
옌자치, “문혁의 광기는 개인 숭배가 원인...종신제 폐지” 제안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옌자치가 집필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살펴보면, 그가 문혁의 역사를 쓰면서 인격 숭배에 착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뼈아픈 체험을 통해 문혁의 집단주의적 광기가 인격 숭배의 광열에서 기인함을 깨달았다. 정치이론가로서 그는 중국 역사에 다시는 제2의 마오쩌둥이 나올 수 없도록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이징의 시단의 민주장(民主牆) 운동 절정으로 치닫던 1979년 2월, 후야오방이 주재하는 “이론 무허회(務虛會, 대토론회)”에 참여한 옌자치는 “간부 및 영도자 직무의 종신제의 폐지”라는 파격적인 법안을 제안했다. 문혁의 광기를 직접 경험했던 중공중앙의 영도자들은 옌자치의 취지에 크게 공감했다. 결국 1980년 8월 18일 덩샤오핑은 권력의 과도한 집중과 관료주의를 비판하면서 옌자치가 제안한 종신제 폐지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이후 장쩌민(江澤民, 1926- )를 거쳐 후진타오(胡錦濤, 1942- ) 총서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 중국의 정치체제는 영도자의 임기가 최장 10년으로 제한되는 합리적인 집단지도체제를 지향했다.
종신제 폐지 2018년 헌법서 삭제...시진핑, 마오쩌둥 될 길 열어
적어도 2018년 3월 11일 전국 인민대표대회가 99.8%의 찬성률로 헌법에 규정된 최고지도자의 임기 제한을 삭제할 때까지 옌자치가 1979년 최초로 입안했던 “종신제 폐지”의 규정은 중국 헌법 속에 명문화되어 있었다. 임기 제한을 폐지함으로써 시진핑은 스스로 마오쩌둥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89년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 학생들과 함께 있는 옌자치의 모습.>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역사의 수레바퀴가 후퇴할 수 있는가? 역사책은 한갓 권력자의 뜻대로 기술되는 정치선전물인가? 비관적 전망이 없지 않지만, 자명한 두 개의 사실 때문에 역사는 승자만의 기록이 되기는 어렵다. 첫째 그 누구도 영원히 권력을 누릴 수 없는 점, 둘째 많은 인간이 강렬한 진실 규명의 열망을 갖는다는 점이다. 권력자가 제아무리 “승자의 기록”을 독점하려 해도 오래잖아 그 역시 언젠가는 역사의 형틀 위에 발가벗고 설 수밖에 없다.
험난한 망명 생활 속에서 그는 마음속 양심의 소리가 곧 신의 음성임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역사의 신을 믿기에 중국의 민주화를 향한 81세 옌자치의 투쟁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이에 그의 육성에 귀 기울여 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