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조선일보) 2022-04/ 04.01(금) 축구장 레이저 - 04.30(토) 10년간 횡령
만물상 2022-04/ 조선일보
04.01(금) 축구장 레이저
1917년 아인슈타인은 높은 에너지를 가진 원자에 빛 에너지를 가하면 더 강한 빛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유도 방출 이론’을 발표했다. 미국 휴즈 항공사의 연구원 시어도어 메이먼은 1960년 이 원리를 이용해 태양 표면에서 방출되는 빛보다 4배 강한 붉은 색 빛을 쏠 수 있는 발진 장치를 개발했다. ‘복사 유도 방출에 의한 광증폭’인데, 이의 영어 약자가 바로 레이저(LASER)이다. 퍼지지 않고 먼 거리를 똑바로 진행할 수 있는 새로운 빛의 등장에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신도 가지지 못한 빛’ 등 찬사가 쏟아졌다. 지금까지 레이저 관련 연구에서만 노벨상 9개가 나왔다.

▶레이저 발진 장치 발표장에서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은 “레이저는 죽음의 빛인가”였다. 사람들은 레이저로 비행기도 쉽게 격추하는 무기가 곧 등장할 것으로 믿었다. SF소설과 만화에서는 어김없이 레이저 무기가 등장했다. 스릴러 소설가 톰 클랜시는 ‘공포의 총합’ ‘크레믈린의 추기경’ 같은 대표작에서 레이저를 활용한 인공위성 요격, 함대 방어 시스템을 선보였다.
▶1983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대항할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우주에 레이저를 설치해 미사일을 요격한다는 이른바 스타워즈 구상이었다. 스타워즈는 취소됐지만 이에 놀란 소련은 얼마 뒤 무너졌다. 사실 달에는 이미 레이저 장치가 있다. 1969년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은 고요의 바다에 레이저 반사경을 설치했다. 이 반사경에 레이저를 쏜 뒤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달까지의 거리를 잰다. 오차는 2cm에 불과하다.
▶각국은 레이저 무기 개발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미군은 전투기와 구축함에 레이저 무기를 활용하고 있고 러시아와 중국은 위성 요격용 레이저 포의 실전 배치를 준비하고 있다. 레이저 무기의 가장 큰 장점은 한번 발사 비용이 매우 싸다는 것이다. 수억~수십억 원씩 하는 미사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제성이다. 한국도 올해 레이저 무기 원천 기술 개발에 나선다.
▶그 레이저가 축구장에까지 등장했다. ‘이집트 왕자’로 불리는 축구 선수 무함마드 살라흐의 얼굴이 초록색으로 물든 사진이 세계적인 논란이 되고 있다. 카타르 월드컵 아프리카 최종 예선 이집트와 세네갈 경기에서 그가 승부차기에 나서자 세네갈 관중들이 레이저 포인터를 집중적으로 쏘았다. 결국 살라흐는 실축했고 이집트의 월드컵 티켓도 날아갔다. 아인슈타인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을 것 같다.
04.02(토) 가평 가스라이팅

▲일본 록그룹 엑스 재팬. 가운데가 1997년 돌연 그룹을 탈퇴한 보컬 토시다. 사진 속 작은 사진이 그가 아내와 아내의 내연남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을 때 전국을 돌면서 앵벌이 공연하던 모습.
한국에도 많은 팬을 가진 일본 록밴드 엑스 재팬이 인기 절정일 때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다. 보컬을 맡은 토시가 돌연 탈퇴했기 때문이다. 빠른 스피드와 초고음이 특징인 엑스 재팬의 명곡들은 토시의 폭발적 성량(聲量)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미친 보컬”이라고 했다. 여기에 강렬한 화장과 화려한 분장까지 더해 그는 팬들에게 카리스마를 지닌 괴력의 남자로 통했다.
▶탈퇴 후 토시는 정반대로 변했다. 수수한 차림에 통기타를 들고 전국을 돌면서 힐링 음악을 연주했다. 종교 단체가 만든 물건도 팔았다. 일본 최고의 괴력남 톱스타의 극적 변화였다. 그 뒤엔 아이돌 여가수 출신 아내와, 아내의 내연남인 종교단체 교주가 있었다. 엑스 재팬의 노래를 “악마의 음악”이라고 하고 내연남이 만든 힐링 음악을 부르게 했다. 못하면 때렸다. 재산도 탈탈 털었다. 10여 년 후 그는 거의 걸인이 돼 밴드에 복귀했다.

▶3년 전 일어난 가평 계곡 익사 사건이 관심을 모으는 것도 의외성 때문이다. 명문대 출신 대기업 연구원이 황당하게 당했다. 그를 지배한 아내는 11살 연하에 외모를 갖췄을 뿐 가난했고 결혼 전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일을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저축을 몽땅 날리고 거액의 빚까지 떠안았다. 집도 내주고 홀로 반지하 방에서 살면서 아내에게 “만원만 달라”고 했다. 아내와 내연남 농간에 목숨을 잃기 직전 돈에 쪼들려 장기까지 팔려고 했다.
▶스릴러 영화 ‘가스등’에서 비롯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정신을 지배해 타인을 노예처럼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신뢰 관계를 만든 다음 상대의 판단을 무시해 스스로 의심하고 부정하도록 유도한다. 그 공백을 파고들어 자신의 판단만 따르게 한 뒤 학대하고 약탈한다. 대개 강자가 약자를 가해하지만 엑스 재팬이나 가평 사건의 경우처럼 우월해 보이는 쪽이 약해 보이는 쪽의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다. 겉모습과 상관없이 정서적으로 고립된 사람이 표적이 된다고 한다.
▶가스라이팅 범죄는 사이비 종교만이 아니라 연인, 친구, 가족, 상사와 부하, 군대 등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한다. 국가에서도 일어난다. 자유, 민주주의, 평화 등 집단 신념을 부정하고 지배, 굴종, 혐오, 적대감을 심어 국민을 그릇된 길로 동원한다. 국가 권력의 가스라이팅은 개인 사이의 가스라이팅과 과정이 다를 바 없다.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마오의 중국이 그랬지만 역사상 가장 길게 이어지는 집단 가스라이팅 사례는 북한일 것이다.
04.04(월) 야외 노마스크 기대감

▲오는 4일부터 2주간 사적 모임 최대 인원은 8명에서 10명으로 확대되고, 식당·카페 등의 영업시간은 오후 11시에서 자정까지로 늘어난다. 정부는 2주간 코로나19 유행이 확연히 감소세로 전환하고, 위중증 환자와 의료 체계가 안정적으로 관리된다면 '실내 마스크 착용' 등 핵심 수칙을 제외한 모든 조치 해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1일 서울 용산역 앞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역 당국이 지난 1일 새로운 거리 두기 개편안 등을 발표할 때 가장 솔깃한 것은 야외 노마스크 가능성이었다. “(4일부터) 2주간 유행이 확연히 감소하고 위중증 환자와 의료 체계가 안정적이면, 실내 마스크 착용 등을 제외한 모든 조치 해제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했다. 조건을 충족하면 이르면 18일부터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국내 화장품 관련 기업들 주가가 일제히 상승했다.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으면 우선 화장품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특히 마스크를 쓴 이후 매출이 크게 줄어든 색조 화장품 관련 기업들의 강세가 뚜렷했다.

▶지금도 규정상으로는 실외에서 타인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면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 그러나 명확한 지침이 없고 2년여 마스크 착용에 익숙해져 대부분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제 마스크를 벗으면 어색하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홈쇼핑 채널에서 색깔도 다양한 여성용 마스크를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스크가 방역 수단을 넘어 패션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실내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반면 붐비지 않는 야외에서까지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는 논란이 많았다. 미 보건 당국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야외에서 코로나 감염 위험은 실내에 비해 20분의 1에 불과했다. 등산로 등 탁 트인 야외에서는 오히려 마스크를 벗고 활동하는 것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좋다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7월 잠시 백신을 1회라도 맞으면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을 수 있도록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중증도가 높은 델타 변이가 유행하자 곧바로 조치를 철회했고, 전파력이 높은 오미크론 변이가 대유행하면서 과학적인 효과와 무관하게 논란 자체가 쏙 들어갔다.
▶오미크론 대유행 정점을 지난 미국·영국 등 다수의 국가에서는 이미 야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싱가포르도 최근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중단했다. 야외에서도 마스크를 쓰도록 하는 나라는 일본·대만 등 동북아 국가 정도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야외에서 마스크를 잘 쓰다가 실내 식당·카페 등에 들어가면 오히려 마스크를 벗는 것은 모순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2주 후부터 야외에서나마 마스크를 벗으면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일 것 같다. 물론 새로운 변이가 출현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04.05 아, 마리우폴
러시아군 폭격이 집중되는 우크라이나 동남부 도시 마리우폴은 비극의 현장이다. 도시의 90%가 폐허로 변했다. 대부분 전쟁과 상관없는 민간 시설이다. 폭탄이 떨어진 산부인과 병원에서 실려 나온 만삭 여성은 며칠 후 사망했다. ‘어린이’ 표지를 큼지막하게 쓴 극장에도 폭탄이 떨어져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늘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러시아가 완전히 폐허로 만든 체첸 수도 그로즈니와 똑같다. 21세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 믿기지 않는다.

▶2차 대전 때는 적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며 민간 지역을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그런 폭격으로 민간인 수십만명을 죽였지만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 후 전쟁 중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은 국제법으로 금지됐다. 민간 거주 지역에 지뢰를 묻는 것도 전쟁범죄다. 병원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기반 시설도 공격해선 안 된다. 주민을 감금·고문·살해하고 강간하는 등 인도주의에 위반하는 가혹 행위, 제노사이드(집단 살해)도 국제형사재판소(ICC) 처벌 대상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마리우폴을 거점으로 활동해 온 아조우(Azov) 연대를 신(新)나치로 규정한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들의 테러로부터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작전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해도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전면 침략의 억지 명분일 뿐이다. 지금 러시아군은 생포하거나 사살한 우크라이나인 옷을 벗겨 나치 문신을 찾느라 혈안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가 지난 주말 수도 키이우 인근 마을들을 탈환하면서 러시아군이 저지른 전쟁범죄 참상이 드러나고 있다. 도로를 달리던 차에 총탄 세례를 퍼붓고, 차 밖으로 나온 민간인을 사살하는 장면도 있다. 증거인멸을 위해 러시아군이 불태운 차 안에선 여성이 숯이 된 채 발견됐다. 키이우 인근에서 암매장된 민간인 시신 400여 구가 나왔다. 손이 뒤로 결박된 시신도 있었다. 유고 내전 당시의 끔찍한 학살을 보는 것 같다. 러시아군에 강간당한 여성들 사례도 보고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학교 400여 곳, 병원 110여 개, 주거지 1000여 동이 파괴됐고 민간인 1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푸틴 한 사람의 망상이 빚은 비극이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전쟁범죄 증거 수집에 나섰지만 푸틴을 법정에 세우기는 쉽지 않다. 러시아는 2016년 ICC를 탈퇴했다. 그러나 수십년이 걸린다고 해도 푸틴을 인류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 그가 발 뻗고 편히 잠들 수 있다면 세계 누구도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이다.
04.06 공직 대기소 ‘로펌’
대형 로펌(법률회사)이 교도소와 구치소에 오래 근무한 교도관을 수억원대 연봉을 주고 스카우트한 적이 있다. 그는 몸값 이상 역할을 했다고 한다. 로펌이 아무리 변론을 잘해도 결국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클라이언트(고객)도 있다. 이때 교도관 출신이 나서 독방 배정, 운동과 샤워, 가족 면회 등 편의를 봐줄 수 있다는 것이다. 로펌 관계자는 “옥바라지까지 잘하는 로펌으로 소문 나면 사건을 많이 수임할 수 있다”고 했다.

▶대형 로펌은 ‘종합 서비스센터’로도 불린다. 민형사 사건은 전체 업무 중 일부에 불과하다. 주요 고객인 기업이나 단체의 이해 관계를 입법이나 행정에 반영하는 대관(對官) 업무 수요가 크다고 한다. 그래서 청와대나 국회 출신들이 로펌 영입 대상 1순위로 꼽힌다. 공정위, 국세청, 금융위, 금감원, 복지부, 환경부 등 규제·감독 기관 출신도 로펌들이 서로 모셔가려 한다. 군 장성이나 국정원 간부 출신들도 로펌이 데려간다. 대형 로펌의 구성원만 보면 ‘작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고위 공직자가 퇴직한 뒤 로펌 고문으로 가는 것은 취업 제한을 피하는 방법이다. 공직자윤리법은 퇴직 후 3년간 자본금 10억원 이상 등인 민간 업체 취업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로펌은 규모가 크더라도 연매출이 100억원 미만이면 취업이 허용된다. 거래소 이사장 출신은 “사실상 국내 상장기업 전체가 취업 제한 대상이라 로펌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정부 고위직이 로펌에 취업하면 공직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고액 연봉을 받을 수 있다. 검찰 출신은 한 달 월급이 1억원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첫 달 월급을 확인한 아내가 “로펌은 첫 달에 1년 연봉을 주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관급은 연봉 6억원 수준이라고 한다. 고액 연봉은 공직에 돌아가려 할 때 발목을 잡기도 한다. 국민 정서법에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로펌에 있는 공직자 출신의 가족은 “다시 공직 제안을 받더라도 절대 나서지 말라”며 말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새 정부 첫 총리로 지명된 한덕수 후보자도 대형 로펌에서 4년 4개월간 고문으로 일하며 18억원을 받았다고 한다. 한 후보자 외에 총리로 유력하게 거명됐던 사람도 로펌 소속이다. 현재 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 중에도 로펌 소속이 여러 명이다. 로펌에 있다 총리·장관이 되는 사람이 워낙 많아 로펌이 ‘공직 대기소’가 됐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를 일부 공직자들의 ‘꿩 먹고 알 먹고’로 보는 국민도 있을 것 같다.
04.07 40년만의 인플레이션 공포
경제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몰락 원인을 인플레이션에서 찾는다. 로마 제국은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필요한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금화·은화를 대량 발행했다. 금, 은이 부족해지자 동(銅)을 잔뜩 섞어 악화(惡貨)를 만들었다. 화폐 가치가 폭락하며 물가가 폭등했다. 병사들이 주화 월급을 거부하고, 시민들은 물물교환으로 대응했다. 화폐 질서가 무너지면서 제국도 쓰러졌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이호승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 2월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 시작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는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인플레이션 확산 등 경제와 안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현안을 더욱 치밀하게 점검하고자 신설된 장관급 협의체다./연합뉴스
▶이후에도 수백년 지속된 금 본위제는 대공황과 세계 대전 탓에 위기에 봉착한다. 미국은 대공황 원인을 수요 부족에서 찾은 경제학자 케인스의 조언에 따라, 재정 보따리를 풀었다. 게다가 세계 대전 전쟁 비용을 조달해야 했기에 금 본위제 사수가 어려웠다. 물가가 불안해졌다. 유럽에선 1차 대전 패전국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마구 찍다 연 물가상승률이 1100%를 웃도는 초(超)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980년대 초 오일쇼크 여파로 미국 물가가 13%를 웃돌았다. 레이건 대통령이 발탁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인플레이션 파이터(Inflation fighter)’를 자임했다. 기준금리를 22%까지 끌어올렸다. 경기 침체가 촉발돼 실업률이 치솟았지만 물가는 3%대로 떨어졌다. 당시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김재익 경제수석 콤비가 있었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며 전권을 위임받은 김 수석은 예산 동결, 근로자 임금 동결 등 초긴축 정책으로 28%까지 치솟았던 물가를 3%대로 끌어내렸다.

▶1990년대 이후 사회주의 몰락, 세계화와 맞물리며 ‘고성장·저물가’ 황금시대가 펼쳐졌다. 일본에선 인구 감소, 고령화 탓에 물가가 뒷걸음질하는 디플레이션 문제가 부각됐다. 일본은행 간부들은 10년째 제자리걸음인 편의점 삼각김밥 가격 탓에 잠을 설쳐야 했다. 경제학자들이 세계 경제의 일본화를 걱정할 지경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가 돈을 푼 데다, 글로벌 공급망도 붕괴됐다.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겹치며 원자재발 물가 폭등이 시작됐다. MZ세대에겐 인플레이션 자체가 낯선 현상인데, 40년 만에 세계 경제의 골칫거리로 귀환했다. 미국은 공격적 금리인상으로 잠재우려 한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사정이나 1800조원 가계부채가 시한폭탄이다. 인플레는 실질 소득을 줄여 ‘소리 없는 세금’이라 불린다. 반면 채무 부담을 줄여 주는 측면도 있다. 물가도 잡고 가계부채도 연착륙시키는 묘수가 절실하다. 아웅산 사태로 희생된 ‘천재 관료’, 김재익 수석이 살아 돌아오면 어떤 처방을 내놓을까.
04.08 기부금 비즈니스
온라인에서 ‘택배견 기부금’ 때문에 왁자지껄하다. 두 반려견 이름을 따 ‘경태희아부지’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던 택배기사가 “강아지들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고 호소해 병원비 수천만원을 모금한 뒤 계정을 닫아버린 것. 이 택배기사는 입양한 유기견을 택배 차량에 태우고 다녀 유명해졌다. 두 강아지는 ‘명예 택배기사’로 선정될 정도로 사랑받았다. 의혹이 제기되자 경찰이 사기 등의 혐의로 수사에 나섰다.

▶2년 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세계적 호응을 얻었다. 백인 경찰에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애도하면서 확산된 운동에 기부금도 800억원 넘게 모였다. 이 운동을 주도한 단체가 600만달러(약 73억원)짜리 호화 저택을 몰래 구입한 사실이 최근에 드러나 논란을 빚고 있다. 이들의 기부금 유용 의혹은 처음도 아니다. 지난해엔 공동 창립자가 5년간 집 4채를 구매한 사실이 알려졌다.
▶기부 천국 미국에서도 기부금 횡령 사례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2015년 미국 연방거래위원회와 50개 주정부 법무장관이 공동으로 4개 암 기금 모금단체를 사기 혐의로 제소했다. 이 4개 단체는 제임스 레이놀즈라는 인물이 아들, 며느리, 전처, 친구들까지 동원해 문어발 확장을 한 ‘족벌 자선단체’였다. 레이놀즈는 유서 깊은 미국암학회를 본떠 1984년 ‘짝퉁’ 암 기금 모금 단체를 만든 뒤 30년간 온갖 수법으로 키웠다. 하지만 암 환자에게 돌아간 돈은 모금액의 3%도 안 됐다. 개인 비용으로 유용한 돈이 2000억원이 넘는다.
▶2017년 국내에도 비슷한 기부금 사기 행각이 터져 기부 문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결손아동 구호단체인 새희망씨앗이 5만명에게서 모금한 128억원 가운데 2억원만 불우 아동에 쓰고 나머지는 아파트 구매, 해외 골프 여행, 외제차 구입 등에 쓴 사실이 드러나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해에 여중생 딸의 친구를 살해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건도 터졌다. 어금니 아빠는 방송에서 극진한 부성애를 호소해 딸의 치료비 명목으로 기부금 12억원을 챙긴 뒤 차량 구매, 문신 비용으로 썼고 끔찍한 범죄까지 저질러 무기 징역 중이다.
▶선행을 빙자해 기부금을 빼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개인의 정치적 영달에까지 활용한 윤미향씨 사례도 있다. 이용수 할머니가 “재주는 곰이 넘고”라고 폭로한 지 2년이 다 돼가는데도 윤씨는 여전히 금배지 달고 세비를 받고 있다. 위안부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동업해 온 정권의 든든한 비호 덕분이다.
04.09(토) ‘청와대 알프스’
‘서대문 알프스’란 말이 있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영남 알프스, 충북 알프스처럼 등산인들이 붙인 산행 코스의 애칭이다. “서대문 콘크리트 천지에서 무슨 알프스 타령이냐”는 사람들이 있다. 안 가보고 하는 소리다. 서울 서대문 백련산에서 시작해 안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까지 왼쪽엔 준봉, 오른쪽엔 마천루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만만한 산행이 아니다. 북한산 정상을 목표로 하면 능숙한 등산인도 10시간 이상 걸린다.

▶서울은 산악 국립공원이 메트로폴리스와 공존하는 대단한 공간이다. 도시의 반복적 일상에서 떠나겠다고 굳이 먼 자연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광화문 네거리만 나가면 싱거울 정도로 쉽게 대자연을 만날 수 있다. 북악산을 넘어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 등 등산인들이 ‘불수사도북’이라고 부르는 고강도 종주 코스가 끝없이 이어진다. 세상에 이런 도시가 없다.
▶닫힌 북악산은 얼마 전까지 도심과 대자연을 단절하는 철책과 같았다. 남쪽 땅에 궁궐을 만들 때부터 그랬을 것이다. 도심에서 손에 닿을 듯 보이는 북한산의 대표적 등산로가 진관동, 우이동 등 서울 외곽에 자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북악산이 자연의 본질을 되찾기 시작한 건 10여 년 전 성곽 능선 길이 열린 다음이다. 김신조 루트라는 북쪽 길이 몇 년 전 정비돼 북한산과 이어졌다. ‘북악하늘길’이란 멋진 이름이 붙었다. 지난 6일엔 청와대로 내려가는 북악산 남쪽 길이 열렸다.
▶이제 청와대까지 개방된다고 한다. 대통령이 공간적 고립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는 정치적 의미가 크다고 하지만 하기 나름일 것이다. 시민에게 더 큰 의미는 그곳이 도심과 대자연을 이어주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넓은 공원이 도심에 생기는 데 머물지 않는다. 가로로 북악산~인왕산~안산을, 세로로 북악산~북한산을 연결하는 도심 기점의 ‘청와대 알프스’ 코스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등산인 입장에서 청와대 개방은 대도시와 대자연의 연결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대통령의 용산 시대를 주로 말한다. 하지만 시민의 광화문 시대가 더 중요하다. 서울 도심엔 휴식 공간이 많지만 사실 많은 부분이 조선 왕궁의 담장 안에 갇혀 있다. 왕이 살지 않는 드넓은 왕궁을 저렇게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반면 시민이 언제든 비용 부담 없이 휴식하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은 넓지 않다. 날씨 좋은 요즘 청개천 산책로는 신도림역처럼 북적인다. 이번 기회에 서울 도심까지 시민을 위해 재편했으면 한다.
04.11(월) 팜파탈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콜키스 왕국의 공주 메데이아는 희대의 악녀다. 아버지의 황금 양피를 훔치러 온 이아손에게 반해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다가 뒤쫓아 온 동생들을 죽인다. 남편이 코린토스 공주 글라우케와 다시 결혼하자 무서운 복수극을 벌인다. 글라우케를 불태워 죽인 것만도 잔인한데, 자기가 낳은 자녀까지 이아손의 씨라며 모조리 살해했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잔인한 어머니가 사악하게 복수했다”고 썼다.

▶악행을 저지르는 데 남녀가 따로 있지 않다. ‘자식을 살해하는 어머니’ 신화도 고대부터 여성에 의한 잔혹 범죄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파멸적인 여성’이란 뜻의 프랑스어 ‘팜파탈’(femme fatale)이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다만, 여성은 모성애를 지녔고 남자보다 완력이 약하다는 점에서 여성의 강력 범죄는 의외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폭력적 남자 못지않게 ‘위험한 여자’에 대한 두려움은 문학과 영화의 단골 테마다. 영화로도 제작된 스티븐 킹 소설 ‘미저리’는 친절한 미소와 잔인한 폭력을 동전의 양면처럼 지닌 캐릭터를 등장시켜 여성의 스토킹 범죄를 다룬다. ‘나를 찾아줘’ ‘위험한 정사’ ‘원초적 본능’ 같은 흥행 영화에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며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성이 저지르는 잔혹 범죄 상당수가 보험 관련 범죄다. 일본인 스미다 미요코는 친척과 친구들 재산과 보험금을 노리고 접근하는 수법으로 20년에 걸쳐 연쇄 살인극을 벌였다. 범행 뒤에도 태연히 피해자들 집에서 산 것으로 드러나 세상을 경악케 했다. 한국에선 남편과 시모를 살해한 ‘엄 여인’ 사건이 대표적이다.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핀으로 눈을 찔러 멀게 하고, 남편 얼굴에 뜨거운 기름을 붓거나 복부를 흉기로 찌르는 등 여러 차례 살해 시도 끝에 목적을 달성했다. 재혼한 남편도 같은 수법으로 죽였다. 친정 엄마와 오빠까지 보험금 탈 목적으로 눈을 멀게 했다.
▶김민희가 주연한 영화 ‘화차’는 여성이 저지르는 범죄의 배경으로 가정폭력, 저학력, 경제적 무능 등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겪는 고단한 현실을 드러내 주목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전 남편 시신을 토막 내 바다에 버린 고유정,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편에게 복어 독을 먹이고 실패하자 물에 빠뜨려 죽게 한 이은해의 범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과 헌신으로 가족을 보살피는 세상 모든 어머니와 아내들을 돌아보며 새삼 고개 숙여 감사하게 된다.
04.12 이제야 없애는 한국식 나이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무사법행정분과 이용호 간사(왼쪽)와 박순애 인수위원이 11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인수위 공동기자회견장에서 법적, 사회적 나이 계산법 통일에 관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인수위사진기자단
프랑스대혁명이 구(舊)체제 혁파를 기치로 내걸자 여성들이 반색하며 “여자에게도 바지를 허용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혁명 정부는 반대했다. “여자는 치마 입는 전통을 따라야 한다”며 바지를 입을 경우 경찰 허가를 받으라는 법을 만들었다. 1800년 11월 만들어진 이 법은 사문화된 후에도 끈질기게 남아 있다가 2013년에야 공식 폐지됐다. 인습을 고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사례다.
▶알바니아 소설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전통이 시대 변화에 따라 바뀌지 않고 인습으로 굳어지면 인간 영혼마저 갉아먹는다고 경고했다. 그런 생각을 소설 ‘부서진 사월’에 담았다. 알바니아엔 가족이 흘린 피를 피로 갚는 복수 관습이 있다. 이 인습에 빠진 소설 속 마을은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해체 위기를 겪는다. 이 지역에서 이런 인습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중남미 아즈텍인들은 16세기까지 인신 공양을 지속했다. ‘꽃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주변 부족에게 쳐들어가 포로를 잡아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친 뒤 잡아먹었다.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가 신대륙에 없던 식용 돼지를 유럽에서 들여온 후에야 이 악습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전통을 고수한다는 미명 아래 지금 세상에서도 문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여성 학습권을 빼앗고, 산부인과 여의사가 아이를 받을 때조차 부르카를 뒤집어쓰게 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 눈에는 한국이 세계에 없는 희한한 나이 셈법을 고집하는 것도 이런 인습 중 하나로 보이는 모양이다. 새해 첫날 소셜미디어엔 “한국인 여러분, 생일 축하합니다”란 조롱성 인사가 뜬다. 5200만명이 한날한시에 한 살을 더 먹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12월 31일에 태어난 아이는 하루 만에 두 살이 된다. 그래도 이 비합리를 고치지 않고 고집해왔다. 한국민이 일상생활에선 언제나 양력만 쓰면서 ‘1월 1일’만은 굳이 음력으로 따지는 것도 이상하다고 한다.
▶대통령 직인수위가 나이 계산법을 만 나이로 통일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어제 밝혔다. 임금 피크제 기준이 56세인 기업에서 기준 나이가 만 나이인지 한국식 세는 나이인지를 두고 최근 노사 간 법적 다툼이 벌어졌다. 이런 일이 많아 혼란을 줄이고 비효율을 걷어내자는 취지라고 한다. 나이는 사람이 태어난 뒤 흐른 시간을 뜻하는 것이다. 태어난 지 몇 년 몇 달 됐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루 만에 두 살 되는 비합리 하나를 고치는 일에 대통령직 인수위까지 나서야 하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인습 고집도 대단하다.
04.13 대통령 호칭
조선 시대 궁궐엔 건물에도 품계가 있었다. 왕이 업무를 보던 전(殿), 왕족이나 정승이 쓰던 합(閤), 판서급이 쓰던 각(閣) 등이다. 임금이 묵던 전과 ‘그 아래 엎드려 아뢴다(下)’는 말을 합쳐 ‘전하(殿下)’라고 불렀다. 황제를 뜻하는 ‘폐하(陛下)’는 궁전 ‘섬돌(陛)’ 층계 아래에서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합하(閤下)’는 왕족이나 정승을, ‘각하(閣下)’는 판서 이상 대신을 지칭했다.

▶일본 메이지 시대엔 고위급 군 장성을 각하라고 했다. 일제 때는 총독을 ‘갓카’라고 불렀다. 이승만 정부에선 대통령을 각하로 부르도록 했다. 한때 부통령, 총리, 고위 장성까지 각하로 불러 각하 호칭 폐지론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 들어 각하는 대통령만의 고유 존칭이 됐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할 때도 “각하”라고 불렀다.
▶'보통 사람’을 강조한 노태우 정부는 각하를 가급적 쓰지 않도록 했다. 김영삼 정부는 공식 석상에서 금지했다. 그래도 청와대 내에서 자신들끼리는 모두 ‘각하’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님’으로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경호처장 등은 여전히 각하라고 불렀고, 박근혜 정부 총리 후보자는 공식 행사에서 ‘각하’를 세 차례 썼다. 시중에선 ‘가카’란 말로 비하하기도 했다. 1990년대 언론은 대통령 당선인을 ‘김영삼·김대중씨’라고 칭했다. 하지만 2002년 이후 ‘씨’는 사라지고 ‘당선인’으로 굳어졌다. 높임말인 ‘씨’가 시중에선 동료·부하를 부를 때 쓰인다는 이유에서다.
▶대통령 가족의 호칭도 변했다. 영부인(令夫人)은 원래 남의 아내를 높인 말이지만, 대통령 부인의 존칭이 됐다. 권위주의 논란이 일자 이명박·문재인 정부는 영부인 대신 ‘여사’로 불러달라고 했다. 일부 언론이 문 대통령 부인을 ‘김정숙씨’라고 했지만 지지층의 비판에 결국 여사로 바꿨다. 1990년대까지 대통령 아들과 딸도 ‘영식(令息)’ ‘영애(令愛)’라고 존칭했다. ‘영식님’이라고 불린 대통령 아들도 있었다.
▶MBC가 방송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박근혜씨’라고 불러 논란을 빚었다. 그러자 MBC 3노조가 내부 비판을 하기도 했다. 문 정부 청와대 수석도 작년 한때 ‘박근혜씨’라고 했었다. 탄핵 당했으니 예우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전 대통령’은 ‘각하’나 ‘영부인’ 같은 특별한 존칭이나 예우가 아니다. 굳이 ‘씨’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깎아내리려는 의도일 것이다. 야박해 국민 정서에도 맞지 않을 것 같다.
04.14 코로나 재감염

▲3월 25일 오전 광주 북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신속항원검사소에서 보건소 의료진이 자가진단키트 결과를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동안 “코로나 완치자는 수퍼 면역자”라는 말이 있었다. 백신 접종과 자연 감염 이중으로 항체가 형성됐으니 코로나에 걸릴 가능성이 아주 낮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하이브리드 면역자’라고도 불렀다. 주로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을 위로할 때 쓰였다. “이제 가족이나 동료가 걸려도 격리 안 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농담처럼 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면 맞지 않는 말들이다. 백신 접종 후 코로나에 한 번 걸렸다고 재감염을 완벽하게 예방하진 못한다는 것이 수치로 드러났다.
▶국내에서 코로나에 두 차례 이상 걸린 ‘재감염자’가 확진자 1000명 중 약 3명(0.284%)꼴인 것으로 나타났다. 방역 당국이 지난 3월 19일까지 우리나라 누적 확진자를 전수 조사한 결과, 2만6239명이 재감염 추정 사례였다. 이 중 3회 감염자도 37명이나 있었다. 3회 감염자 절반가량인 18명이 0~17세라는 점도 특이했다. 재감염 기준은 최초 확진일 이후 45일이 지난 다음 또 걸린 경우다.

▶재감염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변이의 등장이다. 새로운 변이는 바이러스의 스파이크(돌기)가 많이 바뀌기 때문에 한 번 걸려 항체가 생겨도 새로운 변이가 등장하면 방어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알파 변이에 이어 델타 변이에 걸리거나 델타 변이에 걸린 후 오미크론 변이에 걸리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백신 접종은 물론 자연 감염의 효과도 점차 감소하기 때문이다. 오미크론 변이의 경우 2차, 3차 접종 후 3~4개월 지나면 감염 예방 효과가 50% 이하로 떨어졌다. 코로나에 걸린 사람의 감염 예방 효과도 4~6개월 지속하는 데 그친다는 것이 그동안 연구 결과다.
▶우리나라는 아직 외국에 비해 재감염 비율이 낮은 편이다. 프랑스는 3%, 영국은 10% 정도의 재감염률을 보이고 있다. 우리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조사 시점까지 1차 감염자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1월 중순 이후 오미크론이 대유행하면서 1차 감염자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앞으로 3%가량까지 재감염률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보건 당국의 전망이다.
▶코로나에 걸렸다 나아서 한숨 돌렸는데 또 걸린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다. 증상은 1차 감염이나 재감염이나 비슷하다고 한다. 또 재감염 중증화율(0.10%)과 사망률(0.06%)은 전체 확진자의 중증화율(0.27%), 치명률(0.12%)에 비해 낮은 편이었지만, 결코 만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코로나 완치자든 아니든 방역 수칙을 잘 지키고 백신을 제때에 맞는 수밖에 없다.
04.15 국회가 보여준 한국의 밑바닥

▲위에서부터. 1954년 연설을 듣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맞이하는 미 의회(자료 자신), 젤렌스키 대통령의 화상 연설에 기립 박수를 치는 영국 의회(BBC 사진),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을 경청하는 일본 의회(서일본신문 사진). 맨 아래가 같은 상황의 한국 국회(국회사진기자단).
50대500. 이 숫자가 요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연설 자리에 모인 한국과 일본 국회의원 수를 비교한 것이다. 졸고 딴짓하는 의원이 속출한 한국과 달리 일본에선 국회의장은 물론 총리, 장관들까지 참석해 경청했고 자리가 모자라 서서 듣는 사람들도 많았다. 기립 박수도 나왔다. 사실 일본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한국 이전에 연설이 이뤄진 23국 국회 장면을 둘러보니 경제 규모 104위, 인구 120만명의 키프로스조차 한국만큼 썰렁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미국 의회에서 첫 연설을 했을 때 한국은 전쟁을 갓 끝낸 초라한 나라였다. 이런 나라 대통령 연설에 양원 의원, 장관, 대법관이 의사당을 가득 채우고 기립 박수를 포함해 33번 박수를 보냈다. 자국 청년들이 피를 흘려 지킨 나라인 데다 이 대통령 개인의 외교 역량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미국 정치인들의 자유에 대한 신념과 의지, 열정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의 그런 품격이 70여 년 전 한국을 살렸다.

▶며칠 전 한 외교관에게 젤렌스키의 한국 연설 장면이 서울 외교가에서 화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클 만큼 커진 나라가 손실이 두려워 러시아 눈치를 살피는 모습, 자유 세계의 연대와 희생으로 기사회생한 나라가 막상 도울 때가 닥치자 몸을 사리는 모습에 혀를 찬다는 얘기일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6·25 참전국 외교관 눈에 한국 국회의 저런 모습이 얼마나 저열하게 보일까 싶었다. 부끄러웠고 할 말이 없었다.
▶한국 정치인들이 요즘 자주 입에 올리는 단어가 ‘선진국’이다. 외형만 보면 틀리는 말이 아니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 수출 규모 7위, 군사력 6위, 세계적인 한류 문화 등 어디로 보나 빠지지 않는다. G20 구성원이고 G7에 초청받는다. 글로벌 초일류 기업들도 많다. 그러나 ‘선진국’은 이런 외형만으로 되지 않는다.
▶삼성 반도체가 세계 최고라고, 현대차가 혼다에 앞섰다고,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탔다고, 한국 음악이 빌보드 차트를 휩쓸었다고, 세계인이 한류 스타에게 열광한다고 선진국 대접을 받는 게 아니다. 나흘 전 한국 국회의원들이 훤히 드러낸 수준은 ‘아직 멀었다’고 말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21세기의 대사건이다. 이 사건의 의미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변방 의식’을 가진 나라가 선진국일 수는 없다. 국회가 이대로면 세계 무대에서 한국은 깊이 없고 품위 없는 ‘졸부’일 뿐이다.
04.16(토) 모스크바함 침몰 쇼크
1967년 10월 이스라엘 구축함 ‘에일라트’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북쪽 포트사이드항 근처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4개월 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둬 이집트 해군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집트 해군 고속정에서 쏜 스틱스 대함 미사일 4발이 에일라트를 명중, 배가 침몰하면서 이스라엘 해군 47명이 전사했다. 고작 60t급 고속정이 1730t짜리 구축함을 잡으면서 대함 미사일 시대가 열렸다.

▶15일 러시아 흑해 함대의 기함(旗艦)이자 러시아 해군의 자존심 소리를 들어온 모스크바함이 침몰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세계적 파장이 일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는 탄약고 폭발 사고가 원인이라지만 우크라이나는 “지대함 미사일로 모스크바함을 격침했다”고 한다. 모스크바함은 길이 186m, 만재 배수량 1만1500t에 이르는 대형 함정이다. 쿠즈네초프 항공모함과 키로프급 원자력 추진 순양함에 이은 ‘넘버3′ 함정이다.
▶모스크바함은 서방 전문가들이 “과도하다”고 평가할 만큼 중무장을 자랑해왔다. 사거리 700㎞에 이르는 ‘불칸’ 대함 미사일 16발을 비롯, 각종 대공·대잠수함 미사일과 헬기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바다 위로 낮게 날아오는 적 대함 미사일도 요격할 수 있는 30mm AK-630 기관포 6문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군의 소형 대함 미사일에 당했다.
▶러시아 주장대로 탄약고 사고로 침몰했다고 하더라도 큰 망신이다. 일부 해외 언론은 모스크바함 내에 탄약이 여기저기 굴러다닐 정도로 탄약 관리가 엉망이었다고 보도했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모스크바함 침몰에 대해 “이 사안은 둘 중 하나다. 러시아군이 무능하거나, 그들이 공격받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둘 다일 가능성이 있다. 미 국방부 관계자는 “이것은 틀림없이 미사일에 당한 결과”라며 우크라이나 주장에 힘을 보탰다.
▶2차대전 때 세계 최대 전함이었던 일본 야마토함, 독일의 자존심이었던 비스마르크함의 격침은 양국 군대는 물론 국민의 사기에도 큰 악영향을 끼쳤다. 영국 프린스 오브 웨일스함의 침몰은 영국 국민을 깊은 우울에 빠지게 만들었다. 러시아 수도 이름을 딴 모스크바함의 침몰은 러시아군은 물론 국민에게도 큰 충격과 타격을 줄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러시아 탱크 수백 대가 파괴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절대적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력과 창의적 전술 개발로 러시아를 궁지에 몰고 있는 우크라이나군과 국민들이 놀라울 따름이다.
04.18(월) 돌아온 円低 시대

▲엔화 가치가 가파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사진은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 보관된 엔화 지폐.
일본 우파 언론이 때가 되면 반복해 보도하는 기사가 ‘쓰시마(對馬·대마도) 위기론’이다. 한국 자본과 관광객이 밀려들어와 쓰시마가 팔려나갈 위기라고 한다. 과장이 분명하지만 엔저(円低·엔화 약세) 시대에 쓰시마 거리를 걸으면 실제로 한국 관광객이 너무 많아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요즘처럼 엔화가 약세를 보인 2018년 한 해 동안 쓰시마를 방문한 한국인 수가 쓰시마 주민의 14배에 달했다.
▶대일 무역수지처럼 적자가 만성이 돼 가는 분야가 대일 여행수지다. 2005년 이후 2020년까지 16년 중 11년이 대일 여행수지 적자였다. 2018년엔 적자 규모가 37억달러까지 올라갔다. 한국 관광객이 홋카이도 최북단까지 올라가 엔화를 썼다. 그런데 이럴 때 기다렸다는 듯이 정반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엔화를 쓰는 대신 사들여 차곡차곡 저축하는 사람들이다.

▶2009년 3월 도쿄 신주쿠 한인타운 환전소에 긴 줄이 생겼다. 글로벌 경제 위기 때문에 원엔 환율이 크게 올랐다. 2007년 800원대에서 단숨에 1600원대로 뛰었다. 그동안 통장에 모아둔 엔화를 원화로 바꿔 본국으로 송금하려는 일본 주재 한국인들이 몰린 것이다. 환차익이 엄청났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때가 오면 ‘엔 테크’를 한다. 엔저 때 엔화를 사고 엔고(円高) 때 내다팔아 차익을 챙긴다. 기다리면 안정적인 차익을 거뒀다. 환율 안정에 도움도 준다.
▶통화를 뒷받침하는 일본 경제의 기초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엔화에 대한 국제적 신뢰는 간단치 않다. 엔저는 영원하지 않다는 믿음이다. 실제로 일본 엔화는 현존하는 국제 통화 가운데 장기적으로 미국 달러를 싸구려로 만든 대표적인 통화다. 1970년 달러당 360엔이었던 엔화가 지금 120엔대다. 장기적으로 가치가 이렇게 오른 통화가 없다. 같은 기간 달러당 310원에서 1200원이 된 한국 원화와 비교하면 외환 투자자들이 왜 엔화를 선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그동안 물가도 크게 오르지 않았다. 상품과 서비스 질이 떨어졌다는 얘기도 없다. 일본 언론은 ‘싸구려 일본’이라고 개탄하지만 ‘바겐세일 일본’ ‘가성비 일본’이 객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코로나로 닫혔던 문이 열릴 때 일본 쇼핑에 나설 한국의 대기 수요가 상당하다고 한다. 한 일본 외교관은 “요즘 한국 경제인을 만나면 한일 관계보다 저렴한 일본 골프장 얘기를 더 자주 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엔저 시대는 ‘바가지 한국’을 되돌아보는 기회도 될 수 있다.
04.19 보험 범죄 전성시대
투자 고수 워런 버핏의 초창기 자금줄은 보험사였다. 그는 보험료를 먼저 받고 보험금 지급 시점까지 이자 한 푼 안내고 고객 돈을 활용할 수 있는 보험사의 재무구조에 주목했다. 보험사의 ‘잠자는 돈’을 기업사냥 종잣돈으로 활용한 것이다. 보험사의 ‘눈먼 돈’은 사기꾼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몇 달간 쥐꼬리 보험료를 내고 수백 배 보험금을 타내면 로또 같은 횡재가 된다.

▶가평 계곡 살인 사건 용의자 이은해도 ‘로또 보험금’을 주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보험사의 보험금 지급 거절 탓에 계획이 꼬였다. 사망보험금 지급 거절에 화가 난 이씨가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냈다. 그것이 통하지 않자 방송사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 ‘보험사의 횡포’를 제보했다가 살인 사건 용의자 신세가 됐다.
▶보험은 선의에 기반해 다수의 십시일반으로 고통을 분담하는 제도다. 하지만 악용에 취약하다. 도덕적 해이를 뜻하는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도 보험 용어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사기 범죄율 세계 1위다. 보험에도 숱한 범죄 사례가 있다. 1975년 언니, 형부, 조카를 방화로 살해하고 시동생마저 우유로 독살한 박분례 사건은 보험금을 노린 첫 살인 사건이다. 2000년대 초 남편 2명, 어머니, 오빠를 실명케 하고 살해해 보험금 5억8800만원을 타낸 전직 보험설계사 엄씨 사건은 역대 최악의 보험범죄로 분류된다.
▶보험사가 부실한 상품 설계로 모럴 해저드를 자초하기도 한다. 1990년대 말 삼성생명은 여성 요실금 보험을 내놨다가 2조원대 손실을 봤다. 중년 여성 사이에 ‘돈도 벌고 남편 사랑도 받는 일석이조 보험’이라고 소문나면서 200만명이 가입해 이른바 이쁜이 수술을 받았다. 요즘엔 2700만명이 가입한 실손보험이 보험사의 골칫거리다. 보험료를 매년 13%씩 올려도 보험금 지급액이 더 커 10년간 100조원대 적자를 떠안아야 할 판이다.
▶취업난 탓인지 20대 청년들의 보험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작년에 붙잡힌 보험사기꾼 5명 중 1명이 20대였다. 1년 새 33% 급증했다. 10%대 낮은 적발률이 보험사기를 더 부추기는 요인이라는데 강력한 방패가 부상하고 있다. 전직 경찰 수백명이 하던 일을 인공지능(AI)이 떠맡았다. 사고 이력 수천만 건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보험금 청구자들의 사회적 관계망을 분석해 사기 용의자를 색출해 낸다. 이런 시스템이 진작에 개발됐다면 이은해 사건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04.20 청와대 새 이름
로마의 중심부 팔라티노 언덕에는 로마 황제들이 500년간 통치했던 팔라티노 황궁이 있다. 황궁엔 새 이름이 자주 붙었다. 도미티아누스와 세베루스는 자기 이름을 붙인 황궁을 새로 지었다. 네로는 황금 궁전을 세우고 나서 ‘도무스 아우레아’라고 부르게 했다.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섬 334m 절벽에 황궁을 짓고 ‘빌라 요비스(제우스의 집)’라고 불렀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집무실 이전을 준비중인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뉴시스
▶미국 백악관(White House)은 원래 ‘대통령의 집(President’s House)’이라 불렸다. 미·영 전쟁 때 영국군이 불을 질러 시커멓게 탄 외벽을 백색 석회 도료(백악)로 단장하면서 이름이 이렇게 바뀌었다. 프랑스 대통령 집무실인 ‘엘리제(Élysée)궁’은 샹젤리제 거리와 가까워 이 이름이 붙었다. 엘리제는 그리스 신과 영웅이 죽은 뒤 가는 천국을 뜻하기도 한다. 영국 총리 집무실 ‘다우닝가 10번지’는 거리 명을 그대로 땄다. 일본과 독일 총리 집무실은 ‘관저’ ‘연방총리청’이라고 불린다.

▶이승만 대통령 때 집무실인 경무대(景武臺)는 경복궁(景福宮)과 그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서 한 글자씩을 따왔다고 한다.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의 파란 지붕에 착안해 청와대(靑瓦臺)로 개칭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기로 하면서 새 집무실 명칭이 무엇일지 화제다. 인수위 사람들은 용산(龍山)과 청와대(Blue House)를 합성해 ‘DH’(Dragon House)나 ‘용와대’라 부른다고 한다. “BH에서 DH로~”라는 건배사도 있다.
▶인수위는 대통령 집무실의 새 이름을 공모하고 있다. 친숙하면서 의미도 담기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지금까진 집무실을 단순히 ‘청(靑)’이라 표기했다. 짧고 쉬웠다. 그런데 앞으로 ‘용(龍)’이라고 하기는 이상하고, ‘대(大 또는 臺)’나 영문 ‘DH’도 어색한 것 같다.
04.21 4차 접종 맞아야 하나

▲20일 코로나19 예방접종대응추진단에 따르면 이날 0시 기준 4차 접종자는 5만5261명 늘어 누적 54만8319명이다. 이는 전체 인구 대비 1.1%, 60세 이상 고령자 기준으로는 3.3%다. /뉴시스
모기가 전파하는 감염병 황열은 백신을 한 번만 맞으면 된다. 한 번만 맞아도 평생 98%의 예방 효과를 유지한다. 이 백신은 인류가 개발한 가장 효과적 백신 중 하나로 꼽힌다. 홍역은 백신을 두 번, B형간염은 세 번만 맞으면 평생 예방 효과가 있고, 파상풍 백신은 10년 간격으로 맞는다. 반면 인플루엔자 백신은 매년 맞아야 한다.
▶코로나 백신은 이미 세 차례나 맞았는데 고령층을 대상으로 4차 접종이 진행 중이다. 3차 접종 후 4개월이 지난 60세 이상이 대상이다. 25일부터 본격 접종을 하기 위해 예약받고 있고 당일 접종은 지난 14일부터 가능했는데 반응이 별로다. 20일 기준 4차 접종률은 3.3%, 예약률(19일 기준)도 7.8%에 그치고 있다. 예약이 힘들 정도로 빨리 맞으려고 했던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정부는 현재 일상으로 돌아가자며 방역을 대폭 풀고, 5월말부터는 코로나에 걸려도 격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60세 이상은 4차 백신을 맞자고 하니 꼭 맞아야 하는지 헷갈리는 것이다. 오미크론 대응 백신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화이자와 모더나는 올가을에야 오미크론 최적화 백신을 내놓을 전망이다.
▶결국 데이터와 해외 사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60세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세계 처음 4차 접종을 했는데, 접종 후 감염 위험은 2분의 1, 중증화 위험은 3.5분의 1이 됐다. 맞는 것이 나은 것이다. 이 결과를 근거로 미국은 50세 이상에 4차 접종을 허용했다. 프랑스는 60세, 호주는 65세, 독일은 70세, 영국은 75세 이상에게 4차 접종을 허용했고,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ECDC)는 80세 이상에게 4차 접종을 권고했다.
▶대한백신학회장인 김우주 고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60세 이상은 주로 지난해 11~12월 3차 접종을 해 지금 백신 효과가 거의 사라졌을 것”이라며 당장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4차 접종이 시급하다고 했다. 신규 확진자의 20%, 사망자의 94% 전후가 60세 이상인 데다 방역이 풀리면서 확진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4차 접종을 꼭 하라는 것이다. 미국 백악관 코로나 대응 조정관도 이스라엘 데이터를 근거로 “60세 이상이라면 4차 접종을 맞는 게 매우 합리적”이라며 “내 부모에게도 그렇게 권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좋겠다.
04.22 예능과 정치
1997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TV 예능에 출연했다. 노타이 차림으로 나와 “나는 알부남(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이 아니고 본부남(본래 부드러운 남자)”이라 했다. 부인 이희호 여사가 전화로 연결되자 “당신, 사랑해요”라고도 했다. 사별한 첫 부인 차용애 여사를 언급할 땐 “고생만 시켜 굉장히 가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예능 출연 효과는 컸다. 단숨에 지지율이 3~4%p 올랐다. 정치인 예능 출연이 그때 본격화됐다고 한다.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겐 정치 등용문이 예능이었다. 2009년 ‘무릎팍도사’ 출연을 계기로 벤처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이던 2003년 ‘느낌표’에 출연해 청소년이 읽을 책을 권했다. 재직 중 예능에 나온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힐링캠프’에서도 맞붙었다.
▶정치인들은 예능 출연의 효과로 인지도 확산과 이미지 제고를 꼽는다. 이재명 전 경기지사가 성남시장이던 2017년 ‘동상이몽’에 고정 멤버로 11회나 출연하자 특혜 시비가 일었다. 이낙연·박원순·오세훈·원희룡·홍준표·나경원·박영선 등 정치인들도 예능 출연 경력을 갖고 있다. 각종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지난 대선에선 후보들이 유튜브 예능에서 개인기 대결을 펼쳤다. 시청률 오른다고 방송들도 정치 예능을 좋아한다. 박근혜·문재인 후보가 출연한 예능은 동 시간대 1위를 찍었다.
▶윤석열 당선인이 20일 역대 당선인 신분으론 처음으로 예능에 출연했다. “숙면이 안 된다”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토로했다. 시청률은 높지 않았다고 한다. 후보 시절 예능에 나왔을 때는 ‘계란말이’ 특기가 히트를 쳤지만 이번엔 그런 대박 상품은 없었다는 평가다.
▶윤 당선인 예능 방송이 나가자 돌연 문재인 청와대가 “지난해 문 대통령의 예능 출연을 해당 방송에 문의했다가 거절당했다. 제작진 의사를 존중해 더 이상 요청하지 않았다”고 끼어들었다. 자신들도 예능에 나가고 싶었지만 밀어붙이진 않았다는 것이다. 문 정권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5년 내내 방송을 정권 응원단으로 만들었다. 그 방송을 통해 국정을 TV 쇼로 만들었다. ‘대통령과 국민 간 대화’는 각본에 따른 예능이나 다를 게 없었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탄소 중립을 선언할 때는 공영방송에 컬러 화면 아닌 흑백 화면을 내보내게 했다. 예능 좋아하던 문 대통령이 임기 말에 다른 사람의 예능을 보고 심사가 편치 않았던 것일까.
04.23(토) 러시아 제재의 역설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참패한 뒤 영국과의 무역을 막는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세계 1위 면직물 수출국 영국에선 재고가 폭증하고 생필품 값이 폭등했다. 무역업자 로스차일드 가문이 해결사로 나섰다. 네덜란드, 덴마크 해안 갯벌을 활용한 밀무역 경로를 뚫었다. 헐값이 된 면직물을 매집해 대륙으로 밀수출하고 생필품을 밀수입해 떼돈을 벌었다. 훗날 이 밀수 경로로 웰링턴 장군에게 군자금을 전달해 워털루 전투 승리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다. 러시아를 달러 결제망에서 축출하고, 원유·천연가스 수입 금지, 해외 자산 동결 등 러시아 경제를 옥죄고 있다. 맥도널드, 이케아 등 글로벌 기업 400여 곳도 철수, 영업 중단 등으로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효과가 신통치 않다. 며칠 전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올 1분기 경상수지 흑자가 사상 최대인 580억달러를 기록했다”고 자랑했다. 주 이유는 러시아산 원유·천연가스가 ‘상표 바꿔치기’ 수법을 통해 여전히 활발하게 수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유조선이 라트비아 항구로 원유를 싣고 오면 다국적 정유사들이 다른 나라 원유에 러시아 원유 49.9%를 섞은 다음 ‘라트비안 블렌드(Latvian Blend)’란 상표를 붙여 유럽 각국으로 판다. 러시아산 비중이 50% 미만이라 제재 대상에서 빠진다. 게다가 인도와 중국은 러시아 원유를 쓸어담다시피 사들이고 있다. 국제 유가 폭등 덕에 올해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액은 작년보다 30% 이상 늘어난 3200억달러(390조원)에 달하고, 경상수지 흑자도 2400억달러를 웃돌 전망이다. 이 덕에 폭락했던 루블화 가치도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글로벌 기업이 철수한 자리는 러시아 토종 기업들이 재빨리 메우고 있다. 1위 가구업체 호프(Hoff)가 매장을 늘려 이케아의 공백을 채우고, 도도 피자(Dodo Pizza), 테레모크(Teremok·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기업들이 맥도널드 직원들에게 새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한 싱크탱크가 1차 세계대전 이후 170건의 경제 제재 효과를 분석한 결과, 성공한 경우는 4%에 불과했다. 1990년대 인종차별국 남아공에 대한 제재 정도가 성공 사례에 속한다. 북한 제재는 실패 사례다. 경제 제재는 해당국 국민들을 오히려 결집시키고 독재자의 권력 강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푸틴에 학살당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은 “신(神)은 어디에?”라고 물어야 할 판이다.
04.25(월) 상하이의 절규

▲상하이 봉쇄로 고통받는 상하이 시민의 목소리를 담은 '4월의 목소리' 동영상 장면. /유튜브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한 베이징은 공포와 혼돈의 도시였다. 사람들이 기침과 고열로 죽어나가는데 공산당 지도부는 “곧 통제된다”는 말만 반복하며 우왕좌왕했다. 외국인 엑소더스(대탈출)까지 벌어지자 하이난성 서기로 내려갔던 왕치산을 ‘구원 투수’로 불러올렸다. 베이징 시장이 된 왕치산은 군경을 동원해 환자가 발생한 지역을 완전 봉쇄하고 물과 음식을 배급했다. 격리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베이징에서 2434명이 감염돼 147명이 사망했지만 사스는 잡혔다.
▶공을 세운 왕치산은 2012년 중국 최고지도부(상무위원)에 입성해 시진핑 주석의 최측근이 됐다. 2013년 조류 인플루엔자 유행 때도 도시 봉쇄로 불길을 잡았다. 시진핑 포함 최고 지도부는 ‘봉쇄 방역’에 대한 성공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시진핑은 코로나 초기 대응에 실패해 “역사의 죄인”이란 비난을 들었다. 그러자 민주주의 국가에선 상상도 못 할 도시 봉쇄를 강행했다. 서울보다 인구가 많은 도시들의 사람·물자 이동을 틀어막고 현관문에 못질까지 했다. 대도시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2020년 가을 중국 내 신규 확진자가 20일쯤 나오지 않자 방역 공로자에게 훈장을 주며 “공산당은 코로나 전쟁에서 중대한 성과를 거뒀다”고 자축했다. ‘봉쇄하면 이긴다’는 확신을 굳혔을 것이다.
▶상하이가 지난 1일 봉쇄됐다. 텅 빈 2500만 도시를 드론으로 찍은 영상을 배경으로 상하이 시민의 육성 절규를 담은 ‘4월의 목소리(四月之聲)’란 동영상이 공개돼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아파트 단지에선 “물자를 보내달라” “바이러스가 아니라 굶어서 죽겠다”고 외친다. 구호 물자를 싣고 온 트럭 기사는 “(전달 못 한) 채소가 전부 썩겠다”고 탄식한다. 위급한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기지 못한 아들은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고 울부짖는다. 자원봉사자는 “봉쇄 표시를 더는 못 붙이겠다”고 당국 지시를 거부하고, 지역 공무원은 “(무기력한) 제가 더 슬프다”며 한숨 짓는다. 공산당은 이런 ‘목소리’ 확산을 막고 있다.
▶코로나 독성이 떨어지면서 전 세계가 ‘위드 코로나’로 가고 있다. 그런데 중국만 무자비한 봉쇄를 고집하는 건 과거 성공 모델에 집착하는 지도부의 굳은 사고와 관련 있을 것이다. 올가을 시진핑의 공산당 총서기 3연임을 앞두고 중국식 봉쇄 방역이 성공했다고 선전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봉쇄 부작용이 계속 커지면 어느 날 갑자기 ‘치료제 자체 개발’을 발표하며 방역 승리를 선언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죽어나는 건 일반 국민들 뿐이다.
04.26 돌아온 팝콘
영화 ‘웰컴투동막골’에 옥수수 곳간으로 굴러간 수류탄이 터지며 튀겨진 옥수수가 팝콘이 되어 눈처럼 쏟아지는 장면이 있다. 옥수수 낟알에 열을 가하면 단단한 껍데기가 수분과 유분을 증기 상태로 가둬 압력이 오른다. 온도와 내부 압력이 한계에 이르면 폭발하듯 터지며 안에서 끓고 있던 전분과 단백질이 거품처럼 쏟아져나와 굳은 게 팝콘이다. 영화와 달리 한국 옥수수는 외피가 무르고 부드러워 쪄서 먹지 팝콘으로 안 만든다. 팝콘용으론 껍데기가 단단한 미국산을 쓴다.

▶옥수수 원산지는 아메리카 대륙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적어도 2500년 전부터 팝콘을 만들어 먹었는데, 옥수수를 가열하면 그 안에 있던 정령이 화를 내고 분노가 임계점을 넘으면 폭발해 팝콘이 된다고 믿었다. 1620년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북미 대륙에 상륙했다. 그해 가을 매사추세츠에서 열린 첫 추수감사절 때 인디언 이웃들이 튀긴 옥수수를 들고 나타나 대접한 것이 유럽인이 처음 맛본 팝콘이었다.
▶팝콘이 미국 땅에 본격적으로 퍼진 것은 1885년 시카고에 사는 찰스 크레터라는 이가 팝콘을 대량으로 튀기는 기계를 발명하면서부터다. 이어 1914년 설립된 아메리칸 팝콘 컴퍼니가 팝콘을 깡통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먹을 때 큰 소리가 나지 않는 팝콘은 영화관 주전부리로 제격이었다. 1947년엔 미국 극장의 85%가 팝콘을 팔았다. 미국인은 영화 산업을 ‘팝콘 비즈니스’라 부른다. 영화·드라마 평가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는 관객의 평가를 팝콘 박스 이모티콘으로 표시한다. 팝콘이 가득 찬 박스 옆에 관객이 매긴 점수를 백분율로 나타낸다.
▶어제(25일) 0시부터 영화관에서 팝콘을 다시 먹을 수 있게 됐다. 삶의 작은 재미였는데 2년 넘게 빼앗겼었다. 많은 사람이 팝콘 한 통에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낀다는 반응이다. 기차에 김밥과 계란이 다시 등장했고, 노래방·실내 공연장과 경기장에선 치맥을 즐길 수 있다. 마트와 백화점에선 시식과 취식도 가능하다. 코로나19도 이날부터 감염병 1급에서 2급으로 완화됐다.
▶이번 조치가 섣부르다는 우려도 있다. 같은 감염병 2급인 수두나 홍역과 달리 코로나 확진자는 여전히 격리 대상이다. 지금도 매일 수만명이 코로나에 걸리고 200명 안팎이 사망한다. “현 정권이 코로나 사태를 해결했다”고 선전하기 위해 너무 급하게 거리 두기를 완화하고 있다는 걱정이 많다. 돌아온 일상을 즐기되 손씻기와 마스크 쓰기를 제대로 하고 환기를 잘 하는 수밖에 없다.
04.27 난공불락 요새

▲2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아조우스탈(아조프스탈) 제철소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이날 러시아군은 마리우폴 내 우크라이나군의 항전 거점인 이 제철소에 있는 민간인이 대피할 수 있도록 전투를 일시 중단하고 인도주의 통로를 개설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양국 간 합의가 없다면서 이를 부인했다. /연합뉴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전투기와 폭격기 1200대가 사흘간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를 폭격했다. 도시 점령은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그런데 소련군 야코프 파블로프 하사는 파괴된 아파트 건물을 엄폐물 삼아 단 25명의 병력으로 58일을 버텼다. 이 건물 지하실 주민들이 식수를 공급하는 등 전투를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중에 발견된 독일군 작전 지도에는 이 자그마한 건물을 적의 ‘요새’로 기록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마사다 요새는 예루살렘 남쪽 사해 부근 광야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다. 기원후 70년쯤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900여 명의 유대인 저항군은 이곳에 들어가 3년간 항전했다. 빗물을 모아 저장해 식수로 이용했다. 로마군이 절벽 한쪽에 인공 경사로를 만들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자 항복 대신 전원 자살을 택했다. 한동안 이스라엘 신병들은 훈련을 마치고 이곳에 들러 군인 정신을 다졌다.

▶물론 제 역할을 못한 요새도 많았다. 벨기에는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독일군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다. 프랑스로 가려면 벨기에 지역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벨기에는 에방에말 지하에 대규모 요새를 구축하고 난공불락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1940년 독일군 공수부대 기습에 36시간 만에 점령당했다. 사방을 다 경계했지만 공중 침투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프랑스는 1936년 독일 접경에 350㎞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보급 없이도 수개월 방어할 수 있어서 난공불락이라 믿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마지노선을 우회해 공격하면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러시아가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제외한 마리우폴 전 지역을 장악했다”며 제철소 지하에 있는 병력 2000명과 민간인 1000명에게 투항하라고 최후 통첩했다. 하지만 일주일째 항전이 이어지고 있다. 냉전 시대 소련은 핵공격 등에 견딜 수 있도록 이 제철소 지하 곳곳에 터널과 벙커를 건설했다. 깊이가 최대 30m, 길이는 20㎞가 넘는다. 우크라이나군이 구소련이 건설한 냉전 시대의 산물을 요새 삼아 버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물 등 식량과 물자 보급이다. 지하 모습을 공개한 유튜브 동영상에는 물과 음식이 부족하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과 아이들 모습이 나온다.
▶역사를 보면 난공불락의 요새는 사실상 없었다. 3중 성벽으로 20여 차례 외침을 견뎌낸 콘스탄티노플 성벽도 1453년 술탄 메메트 2세의 포격에 무너졌다. 어쩌면 외형적 방비보다 인간 정신이 더 강한 요새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아조우스탈 제철소의 전사들과 민간인들에게 햇빛이 들기를 바란다.
04.28 꽃가루 알레르기

▲봄에 유독 콧물·재채기·코막힘이 심하다면 알레르기 비염을 의심해야 한다. 원인은 다양한데, 봄철에는 꽃가루가 주요 원인이다.
이상하게도 초봄 제주도 여행을 갔더니 눈이 가렵고 콧물·재채기가 심해져 고생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제주도에 많은 삼나무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삼나무는 남부 수종이라 내륙에는 드물고 제주도와 남해안에 많다. 삼나무 꽃가루는 알레르기 유발성이 매우 강하다. 삼나무는 일본 원산인데, 일본은 국토의 70%에 삼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꽃가루 알레르기 피해가 극심해 꽃가루가 날릴 때 휴교하는 학교까지 있다. 삼나무는 목재로도 경쟁력이 떨어졌다. 일본은 삼나무를 전 국토에 대거 심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꽃가루는 우리 몸에 잠시 들어와도 해롭지 않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 몸은 꽃가루를 세균처럼 매우 해롭고 위험한 물질로 오해하고 면역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이 과정에서 염증이 생기는 것이 꽃가루 알레르기다. 꽃가루가 눈을 자극하면 결막염이, 코를 자극하면 알레르기 비염이 생긴다. 우리나라 성인의 18.7%, 여성의 22.8%가 알레르기 비염을 앓는다. 요즘엔 코로나 증상과 비슷해 가슴 졸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알레르기 환자를 발생시키는 것은 신갈나무 등 참나무 꽃가루다. 소나무 꽃가루가 가장 많이 날리지만 알레르기를 잘 일으키지 않는다. 참나무 꽃가루는 우리나라 내륙을 기준으로 4월 초순부터 시작해 5월 하순까지 날린다. 오리나무·개암나무·단풍나무 꽃가루도 봄철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꽃가루다. 여름엔 잔디, 가을엔 쑥·환삼덩굴·돼지풀 등 잡초 꽃가루가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주원인이다.
▶우리나라에선 꽃가루 알레르기를 앓은 적이 없는데, 미국·유럽에 갔더니 기침·재채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렸다는 사람도 있다. 의료진에게 문의하니 우리나라엔 드문 나무 꽃가루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유전적으로 어떤 꽃가루에 반응하는 체질인데 그 꽃가루가 없는 곳에서 있는 곳으로 가면 반응이 나타난다. 미국과 유럽에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나무는 자작나무다. 추운 곳에서 잘 자라는 나무여서 남한엔 자생지가 없지만 최근 조경수 등으로 많이 심고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꽃가루 알레르기를 피하려면 노출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특히 꽃가루가 많이 날리는 오전에 외출을 자제해야 한다. 청소, 마스크 착용, 외출 후 샤워나 실내 공기청정기 가동 등도 좋은 방법이다.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면 증상을 완화할 수 있고, 면역 치료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찬란한 봄인데 황사·미세먼지에 이어 꽃가루까지 불청객들도 기승이다.
04.29 대성리
대학 들어가 입대 전까지 봄·가을 한 번씩 경기도 가평의 대성리로 엠티를 떠났다. 경춘선 기차 타고 가며 보는 주변 풍경은 그때도 지금처럼 아름다웠다. 가는 내내 기타 반주로 운동권 가요부터 강변·대학가요제 수상곡까지 메들리로 불렀다. 이상은의 ‘담다디’, 높은음자리의 ‘바다에 누워’ 등이 인기였다. 간간이 섞여 있던 어른들은 학생들 고성방가를 웃으며 눈감아줬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는 엠티 간 학생들이 넓은 방에 빙 둘러앉아 선배의 강권으로 사발주를 들이켜는 장면이 나온다. 커다란 냄비 가득 든 술을 폭탄주처럼 돌렸다. 대학 엠티에 율동과 레크리에이션이 포함됐지만 실상은 술 파티였다. 오죽하면 ‘엠티는 마시고(m) 토하기(t)의 줄임말’이란 우스개까지 있었을까. 술로 인한 크고 작은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대성리는 대한민국 엠티 1번지로 통한다. 청량리에서 한 시간 안에 갈 수 있고, 무엇보다 북한강 자락이어서 놀 거리가 많았다. 1999년 한국 철도 100주년을 기념해 역 100곳이 기념 스탬프를 제작했는데, 대성리역 스탬프는 청춘 남녀가 탄 나룻배에서 남자가 노 젓는 도안이었다. 이 도안처럼 둘만 따로 타는 나룻배 안에서 무수한 고백과 승낙, 거절의 사연이 탄생했다. ‘나룻배 커플’도 심심찮게 나왔다. 그중 몇몇은 평생 해로하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과(科) 커플만 나온 것도 아니었다. 남자뿐인 공대 학생들은 여대와 함께 ‘조인트’ 엠티를 갔다.
▶대학생 엠티로 먹고사는 대성리엔 코로나 피해가 더 혹독했다. 최고 2300명 넘던 대성리역 하루 평균 이용자 수가 지난해 900명대까지 추락했다. 최근 거리 두기가 풀리면서 엠티도 다시 시작됐다. 2020년 코로나 사태와 함께 입학한 이른바 ‘코로나 학번’ 학생은 학교 교정조차 익숙하지 않다. 하물며 엠티 경험 있는 학생은 극소수다. 올해 처음으로 엠티를 다녀온 학생들은 “말로만 듣던 대성리 엠티” “이제야 대학 생활을 하는 기분”이라고 들떠 말했다. 코로나가 그동안 우리 젊은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을 빼앗았다.
▶몇 해 전 대학 동창회에서 입학 30년 기념 문집을 만들어 보내줬다. 열어보니 대성리 한 민박집에서 찍은 동기생 단체 사진이 들어 있었다. 옆자리 동료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나도 있다”며 스마트폰을 열었다. 대성리 가던 기차와 숙소에서 찍은 사진들이 나왔다. 많은 사람이 스무 살 시절 추억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우리 청년들이 이제라도 좋은 추억 부지런히 쌓기 바란다. 단, 과음하지는 말고.
04.30(토) 10년간 횡령
몇 년 전 한 시중은행에서 고객 돈 수억원을 빼돌린 전산부 직원이 적발됐다. 은행의 이자 계산 프로그램을 몰래 고쳐, 예금주들에게 지급하는 이자 중 원 단위 이하는 자기 개인 계좌로 이체되도록 조작했다. 고객이 푼돈까지 신경 쓰지는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티끌 모아 태산’ 범죄를 설계한 것이다. 완전 범죄가 될 수도 있었지만 원 단위까지 들여다본 꼼꼼한 고객의 항의로 덜미가 잡혔다.
▶중국의 횡령 범죄는 스케일부터 광대하다. 중국은행의 지점장 쉬차오판은 부하 직원 둘까지 끌어들여 10년에 걸쳐 미국과 홍콩으로 5700억원 넘는 돈을 빼돌렸다. 유령 기업에 대출해주는 식이었다. 발각될 경우에 대비해 아내와 이혼한 뒤 미국인과 거짓 결혼식을 올려 미국 영주권까지 취득해뒀다. 2001년 횡령 사실이 들통나자 미국으로 달아났다가 2년 만에 체포됐고 복역 중에 2018년 중국으로 송환됐다. 범죄 영화를 보는 듯했다.
▶2014년 개봉된 일본 영화 ‘종이달’은 유부녀 은행원이 연하남과 사랑에 빠져 은행 돈에 손댄 횡령 사건을 다뤘다. 처음엔 고객 돈 1만엔을 슬쩍했다 들키지 않자 점점 액수를 키워 연하 애인에게 집을 얻어주고 차까지 사줬다. 평범한 사람이 어느 순간 돈의 유혹에 빠져드는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0년 전 삼성전자 재무팀의 30대 엘리트 사원이 회삿돈 165억원을 횡령해 도박으로 탕진했다가 쇠고랑을 찼다. 법정에서 ‘충동 조절 장애’라며 심신 미약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은행 본점에서 40대 은행원이 2012년부터 600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돼 긴급 체포됐다. 신용이 생명인 은행에서 어떻게 무려 10년 동안이나 발각되지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내부 통제 시스템이 무너진 셈이다. 정상 유통되는 돈을 훼손된 지폐로 둔갑시켜 13억원 넘는 돈을 캐리어에 챙겨 담아 달아나다 잡힌 은행원도 있었다. 4년여 동안 국내 은행에서 발생한 금융 사고가 182건, 1600억원이 넘는다. 고양이에게 생선 맡겨 놓은 격이다.
▶횡령 범죄자들은 빼돌린 돈을 주식·선물 투자 등으로 굴린 뒤 다시 메워 넣을 요량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도 사치, 도박 등에 빠지면 자제력을 잃고 판단력이 마비된다. 작년 한 해 동안 벌어진 횡령 사건만 5만386건, 금액으로는 6조8000억원에 이른다. 기업, 관공서, 금융기관 가릴 것 없이 하루 138건꼴로 횡령이 벌어진 셈이다. 빼돌린 돈으로 투자에 성공한 뒤 공금을 메워 넣으면 드러나지도 않는다. 이런 ‘완전 범죄자’들은 그 몇 배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