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2-04/ 04-01(금) 후지산 대폭발 우려 - 04-30(토) ‘前警예우’
횡설수설(동아일보) 2022-04/
04-01(금) 후지산 대폭발 우려

일본에서 가장 높은 후지산은 해발 3776m로 맑은 날이면 100km 이상 떨어진 도쿄 도심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눈 덮인 산마루가 구름 위로 우뚝 솟아 옛날부터 일본 예술의 원천이자 신앙의 대상이었다. 후지산을 배경으로 세 척의 배를 삼킬 듯한 거친 파도를 표현한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높은 파도 아래’는 19세기 우키요에(목판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원근법을 무시한 구도와 과감한 시선 처리로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교향곡 ‘바다’를 완성했다.
▷일본의 상징인 후지산이 올해 당장 폭발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후지산 주변에서 지진 등 징조가 잇따르고 있다는 건데 “무조건 달아나는 게 살길”이라는 조언까지 나왔다. 후지산은 지난 1200년 동안 11번, 100년에 한 번꼴로 폭발했다. 마지막 폭발은 1707년으로 300년이 넘었다. 이 때문에 오랜 기간 내부에 응축된 힘이 대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일본에는 전 세계 활화산의 7%에 해당하는 110개의 활화산이 있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이후 지진과 분화가 잇따르고 있다. 2014년에는 일본 본토 온타케산에서 대규모 수증기 폭발이 발생해 사망 57명, 실종 6명이라는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낳았다. 가고시마현 사쿠라지마에서는 2013년 분연 높이가 5000m에 이르는 분화가 발생했다. 같은 해 도쿄 먼바다 오가사와라 제도에서는 해저 화산 폭발로 직경 200m, 해발 20m의 섬이 새로 생겼다.
▷후지산 대폭발이 일어나면 일본 수도권은 즉각 기능 마비 상태에 빠진다. 일본 정부 점검 결과 화산재는 대폭발 3시간 만에 도쿄 도심과 주변 도시들을 덮는다. 철도, 자동차 등 교통망과 물류가 마비되고 대규모 정전과 통신설비 장애도 예상된다. 태양광이 차단돼 기온이 떨어지고 농작물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호흡기를 자극해 인체에도 치명적이다. 후지산 인근에서 즉각 피난해야 하는 주민만 80만 명 이상이다.
▷한반도는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직접적인 피해는 크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그렇다고 화산 안전지대는 아니다. 1925년 마지막으로 분화한 백두산은 여전히 활화산이다. 고려 때인 946년 분화했을 때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16만 개가 한꺼번에 터진 에너지와 맞먹는 규모였다. 당시 뿜어져 나온 화산재는 동해를 건너 일본 쿠릴열도까지 날아갔다. 그런데도 북한은 핵실험으로 백두산을 계속 자극하고 있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4-02(토) 문서 파기 논란

민주화 이후 정권 교체가 가능해지면서 문서 파기를 둘러싼 신구 정부 간의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 여야 간 첫 수평적 정권교체가 된 김대중 정부 출범 직전이 가장 정도가 심했다. 당시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새 대통령 취임 전 2, 3개월 동안 문제가 될 만한 서류를 태우느라 국정원 청사 주변 하늘이 새까만 연기에 뒤덮였다는 풍문이 나돌기까지 했다.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달 29일 “전자·종이 문서와 보고서 등을 무단으로 파기하지 말라”는 취지의 공문을 국정원과 각 정부 부처, 위원회 등에 보냈다. 업무용 컴퓨터나 하드 교체, 자료 무단 삭제도 금지했고,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 온 정책과 관련한 방침 자료마저 지우지 말라고 했다. 인수위는 “적폐청산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전형적인 점령군의 태도”라고 반발하고 있다.
▷요즘 정부 부처는 거의 100% 전자문서로 결재한다. 문서 파일과 작성 주체, 보고 라인, 파기 여부 등도 서버에 남는다. 그렇다고 문서 삭제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조기 폐쇄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앞둔 2019년 12월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청와대(BH) 보고 문건을 덮어쓰기 형태로 삭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버를 통째로 바꾸거나 하드디스크를 교체하는 것도 전자문서를 파기하는 방법 중 하나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국정원 내부에선 정권교체 전에 내부 서버를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국정원장이 결재를 하지 않아 이 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일주일 뒤인 같은 해 5월 16일 당시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국정원 등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문서 무단 파쇄나 유출, 삭제 금지’를 지시했다. 곧 외부 인사가 참여한 국정원 적폐청산TF는 내부 서버에 있는 문서를 근거로 감찰을 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작성한 문서를 캐비닛에서 찾았다며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대통령기록물법이 제정돼 대통령의 정책 결정 과정을 알 수 있는 주요 기록물에 대한 공식 이관 절차가 생겼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노 정부가 남긴 자료 중에 쓸 만한 게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가져간 이지원(e-知園)을 회수해 갔고, 거기에 남아있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내용을 놓고 신구 권력이 충돌했다. 후진적인 문서 파기 논란을 이제는 끝낼 때가 됐다. 어차피 복원될 문서를 어설프게 삭제하는 공무원이 더 나와선 안 될 것이다. 새 정부도 필요 이상으로 현 정부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4-04(월) 公試 경쟁률 30년 만의 최저

‘왕복 버스와 시험장 인근 리조트 숙박, 식사가 포함된 10만 원 상당의 1박 2일 패키지.’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한창이던 2010년대 초반 원정 시험을 치르는 지방 수험생을 위한 이런 서비스가 성업했다. 평소 주말엔 오전 6시 25분에 출발하는 부산발 서울행 KTX 열차가 시험 당일엔 오전 4시 50분으로 앞당겨졌다. KTX를 이용하기 불편한 곳에선 시험 당일 새벽에 출발하는 전용 심야버스도 생겼다. 공무원시험 열기가 만든 진풍경인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2일 실시된 올해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29.2 대 1로 집계됐다. 응시율은 77%로 실질 경쟁률은 22.5 대 1이었다. 1992년의 19 대 1 이후 30년 만의 최저 경쟁률이다. 9급 공무원시험 경쟁률은 1990년대 중반까진 40 대 1 정도였다. 경제 위기마다 경쟁률이 치솟았다가 이후 하락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80 대 1, 글로벌 경제위기 직후인 2011년엔 역대 최대인 93 대 1이었다. 지금보다 3배 정도 경쟁률이 높았다.
▷시험을 주관하는 인사혁신처는 공무원연금 개혁과 시험 과목 변경 등을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 공무원연금제도가 바뀌면서 2016년 이후 입직한 공무원은 국민연금과 비교해 납부액 대비 수령액에서 이점이 사라졌다. 이후 전체 퇴직 공무원 중 5년 이하 재직한 젊은 공무원의 퇴직 비율이 급증했다. 직무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고교 과목을 줄이고 그 대신 행정법 같은 직렬별 전공과목을 추가하는 쪽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시험이 어려워지면서 ‘허수 지원자’가 감소해 경쟁률 거품이 꺼졌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인식 변화로 장기적으로 공무원에 대한 인기가 더 시들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3∼34세가 가장 근무하고 싶은 직장은 대기업이었다. 공무원이 1위 자리를 내준 것은 2006년 이후 15년 만이다. 행정안전부가 1980∼2000년생 주니어 공무원을 대상으로 2년 전 설문조사를 한 결과 10명 중 6명이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보고서만 적어 내라는 조직문화, 성과가 아닌 서열 위주의 보상체계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과거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취업준비생 10명 중 3명은 여전히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족(公試族)이다. 이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시험 준비를 함으로써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연간 17조 원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젊은층이 좀 더 창의적인 분야에서 일할 수 있도록 민간 일자리를 늘리고 공직사회 채용 구조를 시대에 맞게 바꾸는 일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4-05 “전염력 더 센 XE 변이”

‘지금까지 우리가 본 그 어떤 코로나19보다 전염성이 강할 가능성이 있는 변이 바이러스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달 말 보고서에서 코로나19의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 ‘XE’에 대해 이런 분석과 함께 경보를 발령했다. 스텔스 오미크론보다도 전파력이 10%가량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만간 코로나19가 종식될 것이라는 일각의 전망에 찬물을 끼얹는 순간이었다.
▷1월 중순 영국에서 처음 발견된 XE 변이는 ‘오미크론’ 변이와 그 하위 변이인 ‘스텔스 오미크론’이 합쳐진 혼합형 변이다. 영국에서 630여 건이 보고된 데 이어 대만, 태국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속속 사례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머지않아 XE 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오미크론의 경우 지난해 11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처음 발병한 지 닷새 만에 한국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
▷이런 변이가 어쩌다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바이러스는 지금도 스파이크 단백질의 염기서열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키고 있다. 코로나19의 경우 이론적으로 가능한 변이 개수가 무려 80경 개. 2020년 1월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그리스어 알파벳 순서로 이름 붙인 알파(α), 베타(β), 감마(γ), 델타(δ)를 거쳐 오미크론(ο)까지 변이가 거듭돼 왔다. 전파력과 치명률, 중증도가 높아 따로 모니터링 대상으로 분류된 변이들이다. 에타(η), 카파(κ) 등 우세종이 되지 못한 채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가버린 변이들도 있었다.
▷바이러스의 구조학적 특성이 바뀌지 않는 하위 변이의 조합들은 셀 수도 없다. 유럽에서는 XE 외에 델타와 오미크론 변이가 합쳐진 XD와 XF, 일명 ‘델타크론’도 번지기 시작했다. XE의 경우 치명률이나 중증도가 오미크론과 비슷하게 낮다지만, 강력한 전파 위력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정부는 “방역 전략이 달라질 정도의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감소세로 돌아선 듯했던 확진자가 다시 늘어나는 ‘쌍봉형’ 그래프 전개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변이는 바이러스가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온 힘이다. 모습을 바꿔가며 인간의 면역력을 회피하게 해온 생존이자 진화의 방식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변이를 설명하는 웹사이트 페이지에 ‘변이는 일어난다’는 제목을 붙여 놨다. 피해갈 수 없는 상수(常數)라는 의미다. 코로나19도 얼마나 더 많은 변이가 나올지 알 수 없다. 올해 여름쯤 오미크론 다음인 ‘파이(π)’가 출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마지막 알파벳인 ‘오메가(ω)’까지 안 가면 다행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4-06 푸틴 전범재판대 세우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는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향후 전쟁 행위부터 따지자며 ‘정치적 처리’를 주장했지만 중국 호주 폴란드 등은 형사처벌을 요구했다. 결국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범죄를 다루는 임시 국제전범재판소가 일본 도쿄와 독일 뉘른베르크에 설치돼 전범들을 단죄했다.
▷당시엔 전범을 다룰 근거법이 없어 사후 입법에 해당하는 도쿄헌장과 뉘른베르크헌장의 규정에 근거해 판결이 이뤄졌다. 대륙법계를 따르는 독일과 일본은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는 소급처벌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을 주도한 나라는 불문법의 전통을 가진 영미계였다. 이런 ‘승자의 재판’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2002년 로마규정에 따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된 상설 조직이 국제형사재판소(ICC)다. 전쟁범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기소하고 재판하는 곳인데, 최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ICC 법정에 세우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 외곽 도시 부차 등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증거가 드러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4일 푸틴을 ‘전범’으로 규정하며 재판에 회부하자고 주장했다. 미국은 40여 개 국가와 증거 수집을 하고 있다. ICC도 지난달 2일 우크라이나 내 민간인 사상자가 1400명을 넘어서자 123개 회원국 중 39개국의 요청에 따라 전쟁범죄 증거 수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푸틴을 헤이그 법정에 세우기는 매우 어렵다. ICC는 자체 경찰력이 없어 체포영장이 발부돼도 해당 국가의 도움 없이는 집행할 수 없다. ICC는 회원국에 한해 재판권을 갖는데 러시아는 2016년 탈퇴했다. 비회원국은 유엔 안보리가 수사를 요구하면 되지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다. ICC도 힘의 논리에 좌우된다. 지금까지 ICC가 기소한 45명은 대개 아프리카 인사들이었다. ICC는 미국의 아프간 전쟁범죄 수사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미국은 ICC 회원국이 아닐뿐더러 미군의 ICC 소추 면책을 보장하는 미군보호법까지 두고 있다. 푸틴을 단죄하자는 서구 사회 움직임에 ‘도덕적 자위행위’라는 자조가 나오는 이유다.
▷ICC가 ‘살아 있는 권력’을 기소한 사례는 수단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와 리비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둘뿐이다. 그래서 푸틴이 실각할 때까지 길게 보자는 얘기가 나온다. ‘다르푸르 학살’의 주범 알바시르는 2009년 전범으로 기소되고도 10년간 권좌를 지켰지만 2019년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 그를 ICC에 넘기기로 했다. 전쟁범죄엔 시효가 없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07 영리병원

20년 전 김대중 정부는 각종 규제를 대폭 풀어주는 경제자유구역을 지정하고, 이곳에 외국인이 투자하는 ‘영리병원’의 설립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의료법은 의사 개인과 비영리 법인만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경제자유구역 등에는 해외자본이 50% 이상 투자해 수익을 내는 병원을 세울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인 등 외국인 환자, 해외 의료쇼핑을 다니는 한국의 고소득층이 이곳에서 돈을 쓰게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의사 단체의 반발에 부딪혔다.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공공 의료체계가 무너지고 서민 의료비 부담이 커진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반대 때문에 10년이 지난 뒤에야 세부 시행규칙이 정비되고 공식 명칭도 ‘투자개방형 병원’으로 바뀌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한국 건강보험은 적용이 안 되지만 내국인을 치료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없다”고 했다.
▷2017년 중국계 뤼디(綠地)그룹이 설립허가를 신청한 제주 서귀포시 녹지국제병원은 ‘국내 1호 영리병원’이 될 예정이었다. 지역 여론의 반대가 있었지만 제주도는 국제 관광지로서의 위상 등을 고려해 ‘외국인만 진료한다’는 조건을 걸어 승인했다. 원래 계획과 달리 한국인 환자를 못 받게 된 병원 측은 이런 제한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며 개원을 늦췄다. 석 달이 지나도 병원이 문을 열지 않자 제주도는 2019년 허가를 취소했다.
▷제주지방법원이 이달 5일 내국인 진료 제한 취소소송 1심 판결을 내놨는데 병원 측이 이겼다. “진료 대상을 제한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따로 제기된 병원 허가취소 무효화 소송도 올해 1월 병원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다만 모든 소송을 병원 측이 이겨도 영리병원이 문을 열긴 어렵다. 이미 지분 대부분을 한국 기업에 팔았기 때문이다. ‘1호 영리병원’ 등장까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최초 작명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동네의원, 종합병원도 돈 버는 건 마찬가진데 ‘영리’라는 말 때문에 ‘의료를 돈벌이 수단으로 본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 많은 사람만 좋은 치료를 받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정서도 걸림돌이다.
▷대다수 선진국에선 값이 싸지만 서비스 수준이 낮은 공공의료와 별도로 비싼 비용을 내야 하지만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리병원이 공존한다. 병원에 대한 투자가 늘면 의사의 보수가 올라 낮은 건강보험 수가 때문에 나타나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 기피 현상을 줄일 수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의사와 자본이 연결되면 ‘아시아 의료허브’의 실현이나 고급 일자리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문제가 아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4-08 애물단지 된 백신

지난해 말 나이지리아의 한 대형 쓰레기처리장. 대형 덤프트럭이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구덩이 속으로 박스 수백 개를 쏟아부었다. 터져 버린 박스 속에는 코로나19 백신이 가득했다. 선진국에서 공여는 받았는데 유통기한이 지나 못 쓰게 된 100여만 회 분량이었다. 사람을 살린다는 백신들이 한순간에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는 장면은 씁쓸하고도 충격적이었다. 백신 접종률이 고작 5%대에도 못 미치는 저개발 국가로서는 더더욱 분통 터지는 매몰 현장이었을 것이다.
▷이유나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폐기되는 백신이 급증하고 있다. 현재까지 누적 폐기량이 233만 회를 넘어섰다. 1회당 대략 20달러로 계산하면 550억 원이 넘는 분량이다. 앞으로 폐기될 처지에 놓인 백신 예약 물량은 더 많다. 올해 국내에 도입될 분량은 1억2600만 회. 쌓여 있는 재고까지 합치면 1억4000만 회분이 넘는데 맞을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불과 7, 8개월여 전 백신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최소잔여형(LDS) 주사기를 구하고, 너도나도 접종 예약 ‘광클릭’을 해댔던 때와 비교하면 때 이른 격세지감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하기에는 변수도 적지 않았다. 치명률은 낮고 전파력은 높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팬데믹 국면을 바꿔 놓을 것으로 예상하기 어려웠다고 당국자들은 항변한다. 기존의 백신으로는 계속 진화하는 변이 바이러스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스라엘에서 최근 나온 연구에 따르면 60세 이상에 대한 4차 접종 효과는 불과 8주에 그친다. 백신 부작용 우려도 예상보다 컸다. 그 탓에 5∼11세 접종률은 0.7%에 머물고 있다.
▷그래도 정부가 더 정교하게 수급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팬데믹 초기 백신을 제때 구하지 못해 혼쭐이 난 정부가 뒤늦게 계약에 나서면서 예상 물량을 지나치게 잡아버린 측면이 있다. 확진자 폭증 시점에 방역 지침을 되레 완화한 것도 백신을 애물단지로 만들어 버린 셈이 됐다. 항체가 생긴 1470만 명의 확진자들은 이제 추가 접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국내에서는 처치 곤란 신세가 됐지만 그렇다고 백신의 가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는 백신 접종률이 20% 미만인 저개발국이 44개국에 이른다. 백신 저장 시설과 운송, 의료인력 부족 문제가 있긴 하지만, 공여 백신의 유통기한이 두 달 반 정도만 돼도 접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들 국가에 국내 예약 분량을 공여하는 방안을 찾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타이밍을 놓쳤다간 소중한 생명을 위해 백신을 나누는 일이 ‘쓸모없어지니 떠넘긴다’는 식으로 폄훼될지 모른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4-09(토) 장관급 경찰청장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올 2월 퇴직 경찰 모임인 경우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대통령이 되면 경찰청장의 직급 상향을 반드시 하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경찰청은 차관급인 경찰청장의 직급을 장관급으로 올리는 방안을 보고했다. 대통령령에 정해진 경찰청장 보수규정만 바꾸면 되기 때문에 방향만 정해지면 쉽게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 경찰청의 설명이다. 하지만 경찰청장이 지금의 직위를 갖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와 역사가 있다.
▷제헌의회가 헌법 제정에 이어 통과시킨 ‘1호 법률’은 정부조직법이다. 내무부 산하 치안국이 경찰 업무를 맡는 것이 원안이었다. 그런데 제헌의원 198명 중 40명이 내무부와 별도로 치안부를 두고, 치안부장을 장관급으로 하자는 수정안을 냈다. 격론 끝에 원안이 채택됐다. 광복 직후 일부 경찰의 횡포에 대한 반감이 컸는데, 경찰의 위상을 키우면 자칫 ‘경찰국가’가 될지 모른다는 경계론이 의원들에게 있었다.
▷미군정 3년 동안 경찰총수는 경무부장이었다. 현재 법무부 장관이 사법부장이었다는 점과 비교한다면 사실상 장관급이었다. 정부 수립과 함께 경찰총수의 지위가 이사관급인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내려갔다. 유신 때인 1974년 치안국장을 치안본부장으로 승격시키면서 경찰총수는 차관급이 됐다. 1991년 경찰청 설립 때 야당은 경찰청장을 국회 인준을 받아 임명하되 직급을 장관급으로 높이자고 제안했지만 여당이 거부했다.
▷이승만 정부 때 경찰총수 아래 경무관 총경 경감 경위 경사 순경 등 6개의 계급이 있었다. 당시 순경에서 경무관으로 진급한 곽영주는 ‘부부통령’이라고 불릴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69년엔 경찰총수의 계급이 치안총감으로 바뀌고, 치안감과 경정, 경장이 신설됐다. 1980년 치안정감이 추가되면서 현재와 같은 11계급 구조가 만들어졌다. 군사 독재 시절 권력에 충성한 경찰은 그 반대급부로 5000명이던 경찰 조직을 현재 13만 명으로 늘렸다.
▷전체 경찰의 85%인 비간부는 3계급, 15%인 간부는 8계급 구조다. 경찰청장 직급을 올리면 간부가 9계급이 된다. 과거 경감과 총경 보직이던 경찰서장은 현재 경정과 총경, 경무관 등 3계급이 맡을 수 있다. 이런 기형적인 구조부터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경찰청장의 직급을 올리면 차관급 제복조직의 수장인 소방청장, 해양경찰청장과의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 경찰은 수사권 조정으로 장관급인 검찰총장과의 대등한 관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 6명 중 1명 정도만 수사 업무를 맡고 있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은 수사기관장이지만 차관급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4-11(월) 몸집 불리는 인수위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하는 인원이 300명 안팎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인수위는 지난달 184명으로 출발했다. 김대중 당선인(208명), 노무현 당선인(246명) 때보다 적고 이명박 당선인(183명) 때와 비슷한 규모다. 박근혜 당선인(150명) 때보다는 많다. 그랬던 인수위 참여 인원이 불과 3주 만에 100명가량 불어난 것이다.
▷인수위 인원이 급증한 것은 각종 위원회가 예상보다 대규모로 꾸려지고 별동대 성격의 태스크포스(TF)가 줄줄이 신설된 탓이다. 원희룡 기획위원장이 이끄는 기획위원회는 31명이 참여하면서 기획조정분과와 외교안보분과를 합친 인원과 비슷해졌다. 국민통합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위, 코로나비상대응특위도 모두 두 자릿수로 인원을 보강했다. 부동산TF는 첫 인수위원 중에 부동산 전문가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자 만들어졌다. 이어 디지털플랫폼정부, 부산엑스포유치 등 TF가 계속 설치되고 있다.
▷인수위 인원 증가는 다양한 분야에서 정부 출범을 준비하다 보니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꾸리겠다”는 당선인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 인수위 참여 인원이 늘면 나중에 챙길 빚도 늘어난다. 어제 발표된 부총리와 장관급 후보자도 6명이 인수위 인사였다. 당선인은 대선 전 유세 때 “저는 정치 신인이지만 누구에게도 빚진 게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었다.
▷더 큰 문제는 인수위 참여 인사들이 ‘이너 서클’을 구축해 밀어주고 끌어주는 정실 인사가 벌어지는 사태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5·31지방선거 전날 밤, 이종석 당시 통일부 장관이 인수위 출신 인사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인수위 멤버는 내가 챙긴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져 논란이 됐다. 친여 성향 인터넷 매체가 보도했는데, 이 장관은 즉각 부인하고 법적 대응 경고를 했지만 참석 멤버들의 승진 인사와 맞물려 뒷말이 무성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인사수석 자리를 처음 만들며 인사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첫 수석으로 정찬용 당시 광주YMCA 사무총장을 선임했는데, 정치권에 빚이 없다는 점이 발탁 이유였다. 그런데도 코드 인사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의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박근혜 정부의 성시경(성균관대, 고시, 경기고), 문재인 정부의 캠코더(캠프, 코드, 더불어민주당) 인사로 이어지며 좌우 정권 가릴 것 없이 인사 논란이 잇따랐다. 진영 논리에 갇혀 끼리끼리 ‘정실 인사’와 ‘보은 인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급증하는 인수위 인원이 새 정부 인사 실패의 진원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3-12 한국식 나이·만 나이

“한국에 오면 2년 늙고, 돌아가면 2년 젊어진다.” 외국인들이 가장 헷갈려하는 한국 문화가 나이 셈법이다. ‘만 나이’만 쓰는 그들에게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되고 새해 첫날 한 살씩 먹는 한국식 나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대사관 홈페이지는 ‘코리안 에이지=올해 연도+1―출생 연도’라는 공식도 안내한다. 새 정부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만 나이로 통일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나이 셈법은 한국식 ‘세는 나이’ ‘만 나이’ ‘연 나이’ 세 가지다. 일상에선 ‘세는 나이’를 쓰지만 민사와 행정 분야에선 ‘만 나이’를, 병역법과 청소년보호법은 행정 편의를 위해 현재 연도에서 출생 연도를 빼는 ‘연 나이’를 적용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민법과 행정기본법에 ‘만 나이’ 표기 규정을 마련한 후 ‘연 나이’를 쓰는 개별법을 정비하기로 했다.
▷세 가지 나이 셈법이 혼용되면서 혼란도 작지 않다. 정부가 ‘12∼17세 방역패스 적용’을 발표하면 만 10, 11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우리 애도 해당되느냐”는 문의 전화를 돌리기 바쁘다. 1월 출생아 수는 12월생보다 1.3배 많은데, 자녀의 세는 나이를 줄이려고 출생신고를 미루기 때문이다. 모 기업 노사는 단체협약상 ‘56세부터 임금피크제 적용’의 나이 셈법을 놓고 법정다툼을 벌인 끝에 ‘만 55세’라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낸 일도 있다. 새 정부는 ‘만 나이’로 표준화하면 이런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동아시아 전통인 세는 나이의 유래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태아 존중 사상의 발로라거나, 고대 아시아에 숫자 ‘0’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낙태는 오랫동안 죄가 아니었고, ‘0’ 개념의 인식도 중국이 유럽보다 빨랐다. 달력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유럽은 양력, 동아시아는 음력 문화권이었다. 양력과 달리 자연의 주기에 맞추는 음력은 변동이 심해 매년 새 달력을 반포했는데, 매년 달력이 바뀌다 보니 생일보다는 새해 첫날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일본은 1950년부터, 중국에선 문화혁명을 기점으로, 북한은 1980년대 이후 만 나이만 쓰고 있다. 세는 나이를 지금껏 쓰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10명 중 6∼8명은 만 나이 통일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하지만 1896년 양력이 도입된 후로도 지금껏 음력설을 지낸다. 일제가 양력 명절을 강요한 탓에 음력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고 한다. 법적 나이가 만 나이로 통일되더라도 세는 나이로 형 동생 정하는 일상의 시간관념까지 바뀔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13 프랑스 결선투표

10일 치러진 대선 1차 투표 결과 중도파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극우파 마린 르펜이 각각 27.8%, 23.1%를 얻어 2주 뒤인 24일 2차 결선투표에서 맞붙게 됐다. 프랑스는 두 번 선거를 치러 대통령을 뽑는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1, 2위 후보가 양자 대결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두 사람은 2017년 대선에 이어 재대결이다. 당시는 마크롱이 르펜을 따돌렸다.
▷극좌파 장뤼크 멜랑숑은 21.9%로 3위를 차지했다. 결국 멜랑숑의 지지자들이 결선투표에서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대선의 향방이 달렸다. 멜랑숑 자신은 르펜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멜랑숑의 지지자들의 의견은 마크롱, 르펜, 지지 후보 없음 사이에서 갈리고 있다. 언론인 출신인 에리크 제무르는 7.0%의 득표로 4위를 차지했다. 제무르는 극우 성향으로 출마 초 큰 관심을 끌었으나 르펜의 아성을 뚫지 못해 르펜의 대체재가 되지 못함이 입증됐다.
▷프랑스의 전통적 우파인 공화당과 전통적 좌파인 사회당은 이번 대선에서 완전히 몰락했다. 공화당은 5년 전에만 해도 19.9%의 득표로 3위를 차지했으나 이번에는 고작 4.7%를 얻었다. 5% 미만인 정당은 최대 800만 유로(약 108억 원)까지 환급받는 선거비용도 돌려받지 못한다. 5년 전 이미 몰락을 경험한 사회당은 이번에는 1.7%를 얻어 꼴찌에 가까웠다. 공화당을 세운 샤를 드골과 사회당을 세운 프랑수아 미테랑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이번 대선 1차 투표는 공화당이 몰락한 자리에 극우파 르펜의 ‘국민전선’, 사회당이 몰락한 자리에 극좌파 멜랑숑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가 들어서는 것으로 프랑스 정치판의 재편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5년 전 중도파 정당인 ‘전진’을 창당한 마크롱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르펜 대 멜랑숑, 즉 극우파 대 극좌파의 결선투표를 막은 것만으로 이미 큰일을 했다.
▷프랑스 결선투표는 다당제 상황에서 극단적 성향의 후보가 뽑히는 걸 막아왔다. 20년 전 마린 르펜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과 공화당 자크 시라크가 맞붙은 결선투표에서는 극우파에 도저히 표를 던질 수 없는 유권자들도 상대적으로 온건한 시라크를 찍었다. 5년 전에는 마크롱을 찍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보는 예상이 우세하다. 극우파와 달리 극좌파는 한 번도 결선투표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번에 멜랑숑이 조금만 더 지지를 얻었다면 르펜을 따돌리고 결선투표에 진출할 뻔했다. 극우파든 극좌파든 어느 쪽이 결선에 올라와도 결선투표는 정치의 극단화를 막는 기능을 꽤 잘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4-14 정무장관

2010년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가 낙마하자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이재오 특임장관을 급히 불렀다. 후임 총리 후보자를 물색해야 하는데 야당의 ‘동의’를 받아오라는 특명이었다. 난감해진 이재오는 야당 원내대표 박지원을 찾았다. ‘이재오-박지원’ 채널이 본격 가동됐다.
▷야당은 호남 출신인 김황식 감사원장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황식 총리 카드로 인사청문회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후임 국방부 장관도 야당이 추천한 호남 출신 김관진을 선택했다. 야당 요구를 수용하면서 이명박 정부는 임기 후반기에 비교적 순항할 수 있었다. 대통령과 야당 지도부를 잇는 ‘핫라인’ 역할을 한 특임장관의 역할이 돋보였다는 평가다.
▷특임장관은 ‘작은 정부’를 내건 김대중 정부에서 폐지된 정무장관을 되살린 것이다. 과거 ‘무임소(無任所) 장관’이었는데 전두환∼김영삼 정부에서 정무장관으로 불렸다. 정무장관의 역할은 대통령의 메시지를 갖고 여야와 소통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알아야 하니 역대 정무장관은 ‘실세’들의 몫이었다. 전두환 정부에서 노태우, 노태우 정부에서 김윤환, 김영삼 정부에선 민주계 김덕룡, 서청원이 정무장관을 했다.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 2인자로 불렸다.
▷정무장관과 비슷한 역할을 한 직책이 청와대 정무수석이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은 정무수석과 만나는 것을 꺼렸다. 대통령 직속 참모라는 성격이 강해서다. 대신 동료 의원으로 지냈던 정무장관을 상대하는 것이 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무장관은 야당 의원들의 ‘민원’ 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역구 예산부터 인사 부탁, 더 은밀한 제안도 오갔다는 후문이다. 자연스럽게 ‘정무장관은 야당, 정무수석은 여당’으로 역할이 분담됐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정무장관 부활 논의가 있었다. 2년 전 4·15총선 직후 문 대통령이 여야 원내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다. 당시 야당 원내대표 주호영은 “이명박 정부 특임장관으로 일할 당시, 법안의 국회 통과율이 4배나 올라갔다”며 정무장관 신설을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즉시 정무장관 신설 검토를 지시했다. 나중에 주호영은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은 아니다”라고 물러섰고, 청와대도 정무장관직 논의를 진전시키지 않았다. 거대 여당이 됐으니 야당 협조가 주무인 정무장관 역할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석열 새 정부에서 정무장관 신설을 검토한다고 한다. 청와대 정무수석을 없앤다면 그 역할을 대신할 정무장관직을 부활하는 방향은 맞다. 하지만 장관직 검토에 앞서 야당과의 협치 의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자칫 정무장관 신설이 장관 자리 하나 더 늘리는 위인설관(爲人設官)의 편법으로 변질되어선 안 될 일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4-15 허울뿐인 日 재산공개

최근 공개된 일본 중의원(하원) 의원 재산 공개 내역이 화제다. 전체 465명 중 77명이 재산을 ‘0엔’으로 신고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작년 총리 취임 후 자신과 부인 명의로 2억868만 엔을 신고했는데 이번에는 4983만 엔만 신고했다. 일본은 가족 신고 의무가 없고 신고 내역을 입증할 필요도 없다. 공개 대상도 구멍투성이로 보통예금은 제외된다. 허위 신고에 대한 처벌 규정도 없다. 이날 공개된 중의원 의원 재산 평균은 2924만 엔에 불과했다. 일본 언론도 납득 못 한 금액이다.
▷더 황당한 것은 공개 방법이다. 인터넷이 아니라 종이 보고서 방식이다. 그나마 보고서를 보려면 도쿄 국회의사당 지하 1층의 좁은 열람 공간을 직접 찾아야 한다. 카메라 촬영과 복사도 금지된다. 의원들이 재산 내역을 의회 사무국에 신고할 때도 종이로 된 서류로만 해야 한다. PC로 입력한 파일 자료는 출력해 도장을 찍어 제출해야 한다. 일부 의원은 손으로 메모한 보고서를 제출한다.
▷일본은 1992년 ‘국회의원 자산공개법’이 제정됐다. 1988∼1989년 전후 최대의 부정부패 사건으로 꼽히며 일본 열도를 뒤흔든 ‘리크루트 사건’이 계기였다. 리크루트가 자회사 비상장 주식을 정관계 고위 인사들에게 싸게 뿌려 거액을 챙기게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등 실력자들이 물러났다. 정치개혁 바람이 불어 선거제도가 바뀌고 의원들의 재산도 공개하게 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산공개법은 유명무실한 것으로 드러났고, 쫓겨났던 정치인들은 문제없이 복귀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정치 구조 탓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지만 지배 체제가 뒤집힌 적이 없다. 에도 시대부터 내려온 지역 영주(다이묘) 시스템이 ‘세습 정치’로 이름만 바뀌어 이어지고 있다. 작년 10월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 당선자 3명 중 1명은 세습 정치인이었다. 많이 줄어든 게 이 정도다. 보수 성향이 강한 국민들도 이들을 선호한다. 투표용지에 후보자 이름을 직접 써내는 방식도 이름이 익숙한 세습 후보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이런 정치는 국민 삶과 동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6억1417만 엔을 써내 재산 1위를 차지한 아소 다로 전 부총리. 그는 몇 년 전부터 ‘초당파 골프 의원연맹’ 회장을 맡아 의원들과 이해 관계자 간 골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 윤리규정 삭제 요구에 나섰다. 한국 같으면 당장 낙선 운동이 벌어졌겠지만 세습 정치인인 그의 입지는 건재하다. 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일본의 정치 풍토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4-16(토) 사외이사 회전문

새 정부 ‘경제 원팀’ 멤버인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 내정자,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후보자는 관료 출신일 뿐 아니라 대기업 사외이사를 지낸 공통점도 있다. 행정안전부의 이상민, 환경부의 한화진 등 사회부처 장관 후보자 역시 사외이사를 지냈다. 초대 내각 수장 후보 4명 중 1명꼴로 공직 생활 후 사외이사를 하다가 다시 공직으로 들어오는 ‘회전문’을 거치게 됐다.
▷사외이사 회전문 인사로 이해충돌 문제가 빈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이들이 민간에서 적지 않은 금전적 보상을 받았던 만큼 공익과 사익이 부딪히는 이슈가 생길 때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 후보자는 “사외이사와 장관의 역할은 다른 영역”이라고 항변했지만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다. 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63%는 전관의 사외이사 재직 관행에 대해 ‘부적절하다’고 답했다. 관료들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국민들은 회전문 인사에서 관경유착(官經癒着)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
▷전관들이 후배 공무원들을 만난다고 반드시 노골적인 민원을 하는 건 아니다. 식사자리에서 근황을 묻고 나중에 운동이나 한 번 하자는 잡담이 대부분이지만 그 간단한 만남으로도 충분한 로비가 된다. 선배 공무원이 민간에서 터를 잘 닦아두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면 후배 공무원이 퇴임 후를 생각해 서로 돕는 공생관계가 하루 이틀 된 게 아니다. 공직자윤리법을 아무리 강화해도 ‘관피아’의 단단한 연결고리를 끊기에는 역부족이다.
▷최고위직만 보면 사외이사 회전문이 심각해 보이지만 전체 공무원 사외이사 비중은 오히려 줄고 있다. 경제개혁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대기업 상장회사의 사외이사 중 공무원 비중은 2020년 기준 18.7%로 11년 만에 최저였다. 부처별로 경제, 금융, 조세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은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기업들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전관들만 골라 영입하는 추세다. 일부 관료는 표시가 잘 나지 않는 중소기업 사외이사를 하며 경력을 관리하기도 한다.
▷전직 관료들이 민간에 재취업해 경험을 공유하는 것 자체를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고위직을 지낸 뒤 기업에서 많은 돈을 벌고 다시 장차관으로 돌아오는 회전문 인사가 당연시될 때 생긴다.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도 희생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에만 급급한 고위 공직자가 한국 사회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도 저서 ‘특혜와 책임’에서 돈을 벌려고 관리가 된 사람은 예외 없이 자리를 탐하면서 돈도 그리워한다고 비판했다. 이런 불신 상태로는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는 새 정부의 약속도 지켜내기 어렵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4-18(월) 둔촌주공 공사 중단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아파트의 오래된 별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재건축’, ‘서울 분양시장 최대어’였다. 여기에는 조합원 수만 6100명에다 조 단위의 공사비가 드는 미니신도시급 단지에 대한 기대감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요즘 ‘재건축 분쟁의 종합 백화점’이라는 유쾌하지 못한 별명이 추가됐다. 2019년 1급 발암물질인 석면 부실 제거, 2020년 분양가 규제에 따른 일반분양 지연 논란에 이어 최근 초유의 공사 중단, 입주 지연 사태까지 벌어진 탓이다.
▷1980년 준공된 둔촌주공은 원래 서민들에게 싼값에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기회로 통했다. 하지만 2006년 정비구역 지정 이후 몇 안 남은 서울 노른자위 재건축이라는 가치가 부각되면서 서민아파트 이미지는 자취를 감췄다. 착공 직전인 2019년 말 둔촌주공 전용 99m² 규모 아파트 값은 18억 원대에 이르렀다. 분양가가 3.3m²당 3500만 원을 넘을 가능성이 적지 않고 대출도 어렵지만 무주택자라면 누구나 인생 역전을 꿈꾸는 ‘로또 단지’가 됐다.
▷재건축 기대감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힘에 따라 조합과 시공사 간 갈등도 덩달아 커졌다. 갈등의 원인은 2020년 6월 과거 조합과 시공사가 체결한 공사비 증액계약이다. 현 조합 측은 이 계약에 절차적 문제가 있어 무효라고 주장하는 반면 시공사업단 측은 적법한 계약이라고 맞서고 있다. 양측이 평행선을 달리다 시공사가 15일 공사를 중단한 데 이어 16일에는 재건축 조합이 과거 총회에서 의결한 공사비계약 건을 취소하기로 했다.
▷지금 둔촌주공 재건축은 모두가 ‘지는 게임’으로 전락하고 있다. 조합은 이주비와 사업비를 대기 위해 금융권에서 2조 원에 가까운 돈을 빌렸다. 사업 지연으로 생기는 연간 이자 부담만 800억 원 규모다. 시공사는 시공사대로 지체 보상금이라는 불씨를 안고 있다. 조합원들은 1인당 3억 원 정도인 이주비 대출 이자가 눈덩이처럼 커질 뿐 아니라 임시로 살고 있는 전월세 계약을 얼마나 연장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둔촌주공 공사 중단은 일개 재건축 단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단지의 공급물량 1만2000채는 올 서울 공급예정물량의 4분의 1에 달한다. 입주가 지연되면 매매와 임대차시장에 연쇄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다. 서울시는 둔촌주공에 코디네이터를 보내 중재 역할을 하려 했지만 읍소에 가까운 구두권고로는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재건축 규제 완화로 공급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크지만 불신이 가득한 조합과 시공사에만 맡겨두는 현행 방식으로는 어렵다. 민간을 통한 공급 확대라는 새 정부 주택정책이 시험대에 올랐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4-19 보험사의 금리 이중잣대

한국은행이 2020년 3월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5%포인트 내리는 ‘빅 컷’에 나서자 생명보험사들은 즉각 보험료를 인상했다. 당시 보험료를 올린 근거는 금리 인하 때문에 생보사가 보험료를 채권에 투자해 얻을 수 있는 기대수익, 즉 예정이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일부 생보사는 보험료가 곧 오를 테니 서둘러 보험에 들라는 ‘절판 마케팅’까지 했다. 생보사 입장에서 2년 전 저금리는 가입자도 늘리고, 보험료도 올린 일석이조의 기회였다.
▷2020년 상반기 기준금리가 0.75%포인트 떨어진 뒤 생보사별 보험료는 5∼10% 올랐다. 반면 올 들어 기준금리가 0.5%포인트 오른 뒤에는 보험료에 별 변화가 없다. 금리와 보험료의 관계를 돌이켜보면 금리 인상기에는 기대수익이 오르는 만큼 보험료를 내리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대다수 생보사는 금리가 오른 것만 보고 보험료를 인하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보험사들이 그때그때 다른 기준으로 금리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다.
▷금리 관련 보험사들의 이중잣대는 은행들이 금리 인상기 예금금리를 찔끔 올리고 대출금리를 대폭 올리는 행태와 비슷하다. 다만 은행권의 예대마진 영업은 이미 널리 알려져 당국의 집중 모니터링 대상이 되는 반면 보험사의 예정이율 조정은 사각지대에 있어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생보사들은 재무 상태 악화, 내년 새 회계기준 도입 등 보험료를 동결해야 하는 갖가지 논리를 만들고 있다. 실적 잔치 때만 해도 장밋빛이었던 보험사의 미래가 보험료 인하 압박에 잿빛으로 변한 듯하다.
▷생보사들과 달리 손해보험사들은 최근 보험료 인하 경쟁에 불이 붙었다. 손보사가 생보사보다 더 소비자 친화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린이보험, 암보험, 치아보험 등을 박리다매로 팔아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게 더 유리하다고 봤을 뿐이다. 반면 생보사들은 장기 저축성보험, 종신보험처럼 만기가 긴 상품을 많이 취급하고 있어 사정이 다르다고 본다. 보험료를 일괄적으로 내릴 경우 고객 수가 늘어서 생기는 이득보다 건당 보험료 수입이 줄면서 생기는 위험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당국은 “생보사의 자본 확충이 시급하며 가격은 기업의 자율에 맡길 영역”이라며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보험료 동결의 명분인 새 회계기준은 이미 2017년부터 예고된 제도다. 지금 생보업계와 당국의 태도는 5년 동안 상품 구조조정에 손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소비자더러 부담을 떠안으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금리 등락에 대해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보험사, 이들을 감싸고도는 금융당국 모두 소비자가 빠진 한국판 관치금융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4-20 드래건힐

주한 미군들은 한국어 지명을 발음하기 쉽게 영어식으로 자주 바꾼다. 미 보병 2사단 부대가 있던 동두천(Tong Du Cheon)은 이니셜만 따서 TDC라고 한다. 용산(龍山)은 지명의 뜻을 영어로 옮겨 ‘드래건힐(Dragon Hill)’로 부른다. 남산은 산(mountain)보다 언덕(hill)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산 미군 기지의 사우스포스트엔 드래건힐 호텔이 있다. 한국에 배속된 미군이 자대에 배치되기 직전 머무는 곳이어서 미군은 드래건힐이라는 지명에 꽤 익숙하다.
▷다음 달 10일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겨간다. 드래건힐 호텔에서 직선거리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측은 기존 청와대(Blue House)의 약칭인 ‘BH’를 대신해 요즘 ‘DH’라는 말을 자주 쓴다고 한다. 용산 시대를 상징하는 임시 용어인 셈이다. 인수위 측은 다음 달 15일까지 공모를 거쳐 올 6월 초쯤에 대통령실의 공식 명칭을 발표할 예정이다. 영어 약칭도 발표할 수 있다.
▷용산 대통령실의 모델은 미국 백악관이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취임 2년 뒤인 1792년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의 사후인 1800년에 완공됐다. 공식 명칭은 ‘대통령의 집(President‘s House)’이었다. 이름처럼 대통령 집무실 겸 숙소였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 때 하얀 건물이 새까맣게 불에 탄 적이 있는데, 그해 신문에서 백악관(White House)이라는 말을 처음 썼다. 1901년 리모델링을 끝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백악관을 공식 명칭으로 채택했다.
▷청와대 경내에는 숙소동과 집무동이 모두 있지만 용산 대통령실엔 집무동만 있다. 미군 기지가 추가로 반환되면 집무동 인근에 관저를 신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 시점을 예상하기 어렵다. 당분간은 차로 3∼5분 거리인 한남동 합참의장 공관이 대통령 숙소가 된다. 일본은 총리가 집무를 보는 관저(官邸)와 숙소인 공저(公邸)가 각각 있다.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 프랑스의 엘리제궁 등 유럽은 대부분 관저와 집무실이 한곳에 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에서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로 옮겼을 때 1층은 집무실, 2층은 숙소였다. 용산 시대는 74년 만에 대통령이 일하는 곳이 곧 대통령의 집인 시대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권위주의 시절을 거치며 청와대에는 구중궁궐 속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생겼고, 민주화 이후 대통령은 집무실 이전을 시도했다. 찬반 논란 속에 용산 이전을 고집한 윤 당선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용산 시대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4-21 마스크 벗어도 되나요

“마스크 의무화 조치가 해제됐습니다. 원한다면 지금 곧바로 벗으십시오.” 미국 알래스카에어 여객기에서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가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승객들은 마스크를 흔들거나 머리 위로 던지면서 환호했다. 승무원이 “마스크를∼ 벗어∼버려요”라고 노래하며 좌석마다 마스크를 수거한 비행기도 있었다. 18일 정부의 대중교통 마스크 착용 의무화 조치를 무효화하는 플로리다주 연방법원의 판결과 이에 따른 교통안전청(TSA)의 후속 조치가 나온 직후였다.
▷마스크는 코로나19 방역의 핵심이자 최후의 보루로 여겨진다. 미국의 경우 이미 대부분의 장소에서 실내외 마스크 착용 지침이 완화돼 있는데도 이번 판결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환영과 찬성만큼 반대와 우려도 쏟아졌다. 59페이지에 이르는 판결문에서부터 판사의 신상과 얼굴 사진까지 인터넷에 도배가 됐다. 그만큼 마스크가 갖는 상징성이 크다는 의미다. 한국은 5월 초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대한 정부 결정이 나올 예정. 정부는 곧 전문가 의견수렴을 시작한다.
▷바이러스가 소멸돼서 마스크를 벗는 건 아니다. 마스크 규정이 풀리면 확진자가 다시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스위스와 영국에서는 항공사의 기내 마스크 의무화 폐지 후 승무원과 조종사들의 잇단 확진으로 모두 600여 편의 항공편이 취소됐다. 오스트리아는 지난달 마스크 규정을 해제했다가 18일 만에 “시기상조였다”며 결정을 뒤집기도 했다. 전파력이 큰 XE 변이 바이러스에 이어 XL, XM 등이 계속 출몰하고 있다. 마스크 의무화 해제 판결이 나온 미국조차 뉴욕 등지에서는 오미크론 재확산 추세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항소를 검토 중이다.
▷그래도 이제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내에 많아지는 듯하다. 한 인터넷 투표에서는 ‘실외 마스크 의무화를 해제해야 한다’는 답변이 78%였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마스크를 벗게 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색조 화장품 시장이 들썩거리고 피부과와 성형외과 예약이 늘어나는 등 ‘노 마스크’ 일상을 준비하는 움직임도 벌써부터 분주하다.
▷전문가들은 마스크 의무화 해제에는 아직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쪽이다. 인수위원회도 어제 코로나19 브리핑을 열고 “섣불리 방역을 해제하지 않도록 정부에 당부드린다”고 했다. 마스크 의무화의 해제 여부와 시점은 철저히 보건의료와 국민 안전의 관점에서 과학이 결정할 일이다. 규정과는 별개로 스스로 마스크 착용을 지속하는 것은 그보다도 한 차원 높은 결정일 터다. 나와 이웃을 코로나19에서 지키는 것은 물론 감기, 독감 등 다른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데에도 마스크는 유용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4-22 곤충겟돈

세계적인 쇠고기 수출국 호주에서 소는 외화를 벌어주는 소중한 동물이지만 한때는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소 배설물이 고스란히 땅에 쌓여 굳으면서 매년 서울 면적의 3배가 넘는 초지가 쓸모없는 땅으로 변해갔다. 소는 18세기 말 남아프리카에서 호주로 들어온 외래종이어서 호주에는 소의 배설물을 분해할 수 있는 곤충이 없었기 때문. 과학자들이 연구 끝에 쇠똥구리를 대량으로 풀어놓으면서 이 문제가 해결됐다.
▷사람들은 흔히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곤충학자들은 ‘지구는 곤충의 행성’이라고 부른다. 곤충은 지구에 존재한 지가 4억 년이 넘었고 알려진 종류만 100만 종가량에 이른다. 곤충을 ‘벌레’라고 비하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인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식물의 80% 이상이 곤충의 수분(受粉) 활동 덕분에 열매를 맺는다. 쓰레기를 분해하고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것도 곤충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곤충의 숫자가 최근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고강도 농업으로 서식지가 줄고, 급격한 기후변화가 일어난 지역에서는 최근 20년 새 곤충 개체 수가 49% 감소했다. 곤충 종류 가운데 40%가량은 개체 수가 줄고 있고, 이 중 3분의 1은 멸종위기라는 연구도 있다. 곤충의 감소가 지구에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뜻에서 곤충과 아마겟돈을 합성한 곤충겟돈(Insectageddon)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한국에선 ‘꿀벌 실종 사건’이 벌어지면서 곤충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국내에서 약 100억 마리의 꿀벌이 죽거나 사라졌다. 초겨울 고온현상으로 꿀벌들이 겨울잠에서 일찍 깨어나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추워지면서 벌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폐사한 것, 과다한 살충제 사용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꿀벌은 곤충 중에서도 수분에 기여하는 바가 압도적으로 크다. 전국의 양봉농가와 과수농가에 비상이 걸렸고, 식량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곤충 연구자들은 ‘걱정된다’는 표현 대신 ‘공포스럽다’고 말한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해충인 모기도 새와 민물고기에게는 소중한 먹이가 되듯이 생태계에선 모든 곤충이 꼭 필요한 존재다. 노르웨이 곤충학자 안네 스베르드루프튀게손은 책 ‘세상에 나쁜 곤충은 없다’에서 “곤충은 이 세계가 돌아가게 해주는 자연의 작은 톱니바퀴”라고 했다. 그 톱니바퀴가 빠지면 생태계가 흔들리고, 인간의 삶도 위협받게 된다. 곤충 감소가 인류에 보내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4-23(토) 김정은의 14번째 편지

짙은 남색의 파일 위에 찍힌 금색의 북한 국무위원장 휘장.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첫 친서의 포장은 고급스러웠다. 2018년 2월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문 대통령에게 직접 건넨 친서를 당시 청와대는 공개하지 않았다. 비밀문서라는 김 위원장의 친서는 막상 미국이 먼저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같은 해 7월 트위터에 원문을 올리면서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로 시작하는 친서의 내용과 형식이 알려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남북한 정상 간 친서 교환은 끊길 듯 끊이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21일 보낸 친서는 14번째이자 문 대통령의 퇴임 전 마지막 편지가 된다. 조선중앙통신은 “깊은 신뢰심의 표시”라고 했다. 북한이 최근까지도 남한을 향해 전술핵 사용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느닷없는 살가움의 표시다. 문 대통령을 향해 ‘삶은 소대가리’, ‘겁먹은 개’ 등의 표현을 써가며 비난했던 북한이지만 마무리는 잘하고 싶었던 것일까.
▷직접 쓴 편지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강하다. 정상 간의 ‘친서 외교’는 말할 것도 없다. 김 위원장은 대외활동에 친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문 대통령뿐 아니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도 수차례 편지를 썼다. 트럼프는 김 위원장의 편지를 “아름다운 예술품”이라고 불렀다.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친서를 꺼내드는가 하면, 오벌오피스를 찾는 손님이 있을 때면 봐달라는 듯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놨다.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임에도 퇴임 이후 27통의 ‘러브 레터’를 사저로 옮겨 보관하려 했다.
▷김 위원장의 친서는 북-미, 남북 관계가 악화하고 있는 시점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정상 간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끈은 놓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브로맨스’를 과시했던 트럼프에게 공을 많이 들였다. 해리 해리스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북측으로부터 친서를 받으러 비밀리에 판문점까지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나 친서 전달 20번째가 넘어가면서는 백악관 팀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실질적 내용 없이 사탕발림이나 아부성 수사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아첨의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친서들은 쌓였지만 북한이 협상장에 나오거나 비핵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올해만 이미 13차례 미사일을 발사했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레드라인까지 넘어버렸다. 풍계리 핵실험장에서는 7차 핵실험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정상 간 친분이 실질적인 진전으로 연결된 것은 끝내 없었다. 사적인 관계 과시에 그치는 친서는 영혼 없는 안부 편지처럼 공허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4-25(월) 창신동 모자의 죽음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낡은 한옥은 한모 씨(82)가 남편을 여의고 혼자 아들(51)을 키워온 집이다. 병든 모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집이 있다는 이유로 복지 혜택을 받지 못했다. 모자는 지은 지 90년 된 쓰러져 가는 집에서 20일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됐다. 약 한 달 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병을 앓던 아들은 직업이 없었다. 어머니 한 씨가 청소 일을 하다 3년 전 그만뒀다고 한다. 모자는 지난해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두 차례 신청했는데 거절당했다. 모자의 소득과 재산은 집을 포함해 1억7000만 원. 기초급여 지급 기준인 소득인정액으로 환산하면 316만 원으로 2인 가구 기준인 97만 원의 3배가 넘었다. 2020년 집을 내놨는데 팔리지 않았다. 2014년 서울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을 계기로 ‘송파 세 모녀법’이 만들어져 지원 기준이 완화됐지만 창신동 모자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 주지 못했다.
▷정보기술(IT) 강국 한국의 자랑인 ‘복지 사각지대 발굴관리 시스템’도 구멍을 드러냈다. 이 역시 송파 세 모녀 사건을 계기로 구축됐다. 전기료 가스비 수도요금 등 14개 기관 29가지 정보를 종합해 위기 가구를 예측해 내면 사회복지사가 현장 확인 후 지원을 결정한다. 창신동 모자의 집에는 6개월 치 전기요금 26만 원을 내지 못해 ‘전기 공급을 제한한다’는 통지문이 붙어 있었으나 시스템이 걸러내지 못했다.
▷2020년 서울 ‘방배동 모자 사건’에서도 시스템이 허점을 보인 적이 있다. 발달장애인 아들과 살던 어머니가 숨진 지 5개월 만에 발견된 사건인데, 모자는 각종 공과금 수개월 치가 밀렸지만 24만∼28만 원의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받고 있어 긴급복지 우선 지원 대상에서 밀려났다. 2019년 서울 관악구에서 아사한 탈북자 모자는 재개발 임대아파트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모니터링 망에서 빠졌다. 이 시스템은 임대주택 중 영구임대 국민임대 매입임대만 관리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가난하고 돌봐줄 가족이 없으니 도와 달라’며 직접 신청하는 방법밖에 없다. 국내엔 기초생활보장 외에도 기초연금 장애인복지 한부모가족 지원 등 다양한 사회보장급여가 있는데도 지원 대상자 10명 중 4, 5명은 신청하지 않는다. 사회취약계층이어서 이런 제도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고 신청 절차가 복잡한 탓도 있다. 송파 세 모녀 사건 후 지방자치단체마다 ‘찾아가는 복지’를 다짐했지만 복지망은 여전히 성글다. 그사이 ‘성북구 네 모녀’ ‘대전시 삼부자’들이 빈곤에 시달리다 언제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죽음을 맞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26 프랑스 ‘비호감 대선’

마크롱이 이긴 게 아니라 르펜이 진 선거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중도 성향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45)을 찍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마크롱이 좋아서가 아니라 마린 르펜 국민연합 대표가 싫어서”라고 한다. 마크롱도 당선 연설에서 “나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극우를 막기 위해 투표한 것 알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는 대통령의 연임을 축하하기보다 “극우를 막아냈다”는 데 안도하는 분위기다.
▷이번 대선은 ‘싫은 후보’와 ‘두려운 후보’가 경쟁하는 비호감 선거였다. 마크롱은 ‘싫은 후보’다. 2017년 정치 신인으로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돼 파란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젊은 꼰대’ 이미지가 강하다. 노동과 연금 개혁을 추진하고 감세 정책으로 기업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성과가 있었지만 ‘부자들만의 대통령’이라는 반대 여론도 컸다.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노란조끼’ 시위대를 강경 진압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의사 부부 아들로 태어나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데다 ‘노동개혁 반대자는 게으름뱅이’라는 실언들이 반복되면서 오만한 엘리트 이미지가 굳어졌다.
▷극우파 르펜은 ‘두려운 후보’다. 대표 공약이 불법 이주민 강제 추방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 금지, 일자리 주거 복지 정책에서 이주민 차별하기다. 생활 물가 안정과 사회보장 확대 등 친서민 공약으로 농촌과 블루칼라 민심도 잡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푸틴을 존경한다”는 과거 발언이 알려지고 소속 정당이 러시아 군수업체에서 160억 원을 빌린 사실이 드러나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는 결선투표제를 두고 있어 극단적 인물이 당선되기 어렵다. 1차 투표에선 마크롱과 르펜 간 표차가 미미했지만 결선에선 58.5% 대 41.5%로 17%포인트 벌어졌다. 르펜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도 딸보다 더한 인종주의자였는데 20년 전 결선에서 자크 시라크에 패배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극우를 막기 위해 투표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고 한다. 이번 선거에서 마크롱과 르펜의 표 차는 5년 전(32.2%포인트)에 비하면 반 토막이 났다.
▷르펜이 얻은 41.5%는 프랑스 역사상 극우 후보가 기록한 최고 득표율이다. 그만큼 프랑스가 우경화하고 있다. 프랑스는 서유럽 국가 중 무슬림 인구 비율이 8.8%로 가장 높다. 30년 후엔 20%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퓨리서치센터). 극우파가 진화하면서 극단적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서민층을 파고드는 점도 우려된다. 사회 분열을 치유하고 정치 불신을 해소하는 대책 없이는 ‘싫은 후보’와 ‘두려운 후보’ 중 덜 나쁜 쪽을 고르는 선거는 반복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27 미성년자 논문 공저

학계에는 “교수 집 강아지나 고양이도 논문 저자로 등재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누구를 저자로 올릴지는 전적으로 지도교수에게 달렸다는 얘기다. 그렇다 보니 논문에 적힌 저자가 적절한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고등학생이 저자로 이름을 올린 논문들을 놓고는 ‘이 학생이 정말 연구에 기여한 것이 맞느냐’는 의문이 많았다. 실제 교육부가 조사해 보니 저자 자격이 없는 미성년자들이 논문에 등재된 경우가 다수 적발됐다.
▷교육부가 2007∼2018년 발표된 논문 가운데 대학 교원과 고등학생 이하의 미성년자가 공저자로 등재된 사례를 조사한 결과 미성년자 82명이 부당하게 저자로 등재된 사실이 확인됐다. 하지만 입학이 취소된 학생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등 5명뿐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논문 실적을 대입에 활용하지 않았거나 입시 자료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학적을 유지했다. 이들의 이름을 논문에 올려준 교원 69명 중에서도 징계를 받은 사람은 1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 징계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학문적 동기로 논문 작성에 참여한 고교생들도 있지만 ‘스펙’을 위해 이름을 올린 학생도 많았던 게 현실이다. 최근 발표된 한 연구물에 따르면 영어로 논문을 쓴 한국 고교생들을 조사해 보니 이들 중 3분의 2가 논문을 딱 1편만 쓴 것으로 나타났다. 입시를 위해 단발성으로 쓴 경우가 많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학생생활기록부에 논문 기재를 금지한 2014년 이후 고교생 논문 건수가 급감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심지어 학원 강사에게 돈을 주고 대필한 논문을 입시에 이용한 학생들이 재판에 넘겨진 사례도 있다.
▷더욱이 교수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논문 저자의 이름을 바꿔치거나 가로채는 사례까지 벌어지고 있다. 서울의 한 약대 교수는 연구실 대학원생들을 동원해 동물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도록 하고서는 이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단독저자로 올렸다가 구속됐다. 제자가 쓴 논문을 교수가 표절하거나 아예 본인이 쓴 것처럼 저자를 바꿔서 발표했다가 물의를 빚은 경우도 있다.
▷국제의학학술지편집인위원회(ICMJE)는 학술적 개념과 계획 또는 자료의 수집·분석·해석에 상당한 공헌을 할 것 등 저자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굳이 이런 기준을 따지지 않더라도 누가 저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는 지도하고 심사하는 교수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사실대로 적어주기만 하면 연구자들은 피땀 흘려 연구한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다. 다른 욕심 때문에 그것조차 지키지 않는 교수들은 강력하게 처벌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4-28 풀브라이트 장학금

“미국이 실행한 대외 정책 가운데 가장 훌륭한 프로그램이다.” 안병만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금을 두고 했던 말이다. 그 자신이 풀브라이트 장학생이었던 안 전 장관은 재임 시 ‘한국형 풀브라이트 사업’을 추진할 정도로 이를 높이 평가했다. 한국에서는 한승수 전 총리와 조순 권오기 이기준 김동연 전 부총리,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 정정길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100여 명의 주요 인사 이름이 ‘동문 저명인사’ 명단에 올라 있다.
▷김인철 교육부총리 후보자가 본인뿐 아니라 부인과 아들, 딸까지 가족 4명이 전부 이 장학금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풀브라이트’라는 이름은 갑자기 동네북 신세가 되는 분위기다. 선발 과정의 공정성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김 후보자 측의 거짓 해명까지 문제가 되면서 그를 향한 사퇴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의 명성과 신뢰까지 금이 가게 될 판이다.
▷엉겹결에 한국의 정치 검증판에 소환됐지만, 풀브라이트는 로즈 장학금과 함께 글로벌 장학금의 양대 축으로 불리는 권위 있는 장학 프로그램이다. 1946년 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 미 상원의원이 창립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건을 위한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외국에 공매한 대금을 문화, 교육 교류에 쓸 수 있도록 하는 ‘풀브라이트법’을 만들어 재원을 조달했다. 장학생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 61명과 퓰리처상 수상자 89명, 총리 혹은 대통령 40명이 배출됐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은 재정, 운영에 미국 국무부 공공외교과가 관여한다. 미국에 대한 이해와 호감을 높이는 외교 프로그램으로서의 성격도 있다는 의미다. 이런 취지에 맞게 미국에 가본 적이 없거나 미국 문화에 노출되지 않았던 학생이 선발 우선권을 갖는다. 미국 생활 경험이 있는 경우, 심지어 20년 전 유아기 시절의 경험이라도 있는 지원자는 후순위로 밀리기 십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2, 3차례 미국 생활을 한 김 후보자의 아들과 딸은 장학금을 따냈다. 미 측 인사들도 뒤늦게 이 결과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들이 2년간 지원받는 학비와 생활비는 합쳐서 최대 15만 달러 가까이 된다. 가정 형편이 실력보다 앞설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능력이 비슷하다면 더 절실하고, 더 필요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가는 게 장학금이다. 김 후보자의 가족과 측근들의 ‘끼리끼리’ 나눠 먹기로 인해 유학을 꿈꾸던 어느 가난한 청년의 날개가 꺾였던 것은 아닐까. 사회 지도층의 절제를 찾아보기 어려우니 국내는 물론 전 세계 160개국의 풀브라이트 장학생들 앞에서도 참 민망한 일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4-29 단순 노무직 찾는 청년들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나가쿠보 도루(長久保徹)가 1985년 자신의 노래에 사용한 ‘프리아르바이터(free+arbeiter)’란 말은 “취직의 틀에서 벗어났어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2년 뒤 취업정보업체 리크루트가 이 말을 줄인 ‘프리터’를 ‘원할 때 필요한 만큼 일하는 청년’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의 버블이 한창이어서 짧게 일하고도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 분석에 따르면 작년 한국의 15∼29세 청년 취업자 중 배달 판매 경비 등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는 청년의 수가 41만3000명이었다. 40만 명이 넘은 건 처음이고 전년 대비 증가율도 11.3%로 전체 청년 취업자 증가율 3.0%보다 훨씬 높았다. 양질의 일자리 취업이 어려워 비숙련 단기 일자리에 머물러 있는 프리터족(族)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같은 단순 노무직이라도 용돈 벌려고 일하는 것과 생계를 유지하려고 일하는 건 다르다. 일본의 프리터도 경기가 좋던 시절 취직을 거부하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높은 임금을 챙긴 1980년대 ‘거품기(期) 프리터’와 버블이 꺼진 1990년대 이후 취업이 안 돼 저임금을 받으며 생활비를 번 ‘빙하기 프리터’로 나뉜다. 지금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는 한국 청년들은 마음에 차는 직장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경향이 강하다.
▷청년의 단순 노무직 증가는 코로나19 이후 음식배달, 택배 등 배달 일거리가 급증한 영향이 크다. 유통, 배달업체들이 적자까지 봐가며 배달 속도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배달비가 건당 최대 1만 원까지 치솟아 배달 일만 해도 돈을 웬만큼 버는 청년이 늘어났다. 문재인 정부 5년간 41.6%나 오른 최저임금도 한몫했다.
▷대학진학률 70%가 넘는 한국 청년들의 ‘하향 취업’은 생산연령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 큰 손실이다. 20, 30대에 전문성과 숙련도를 높일 기회를 놓치면 나이 들어 청년층, 외국인 노동자와 질 낮은 일자리를 놓고 다투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일본에선 청년기에 프리터로 살다가 40, 50대에 부모 연금에 의지하는 ‘기생형 싱글’이 사회 문제다.
▷다행히 전문 기술을 쌓기 위해 전문대에 ‘유턴 입학’하는 대학 졸업자들이 늘고, 미취업 청년 대상으로 삼성이 진행하는 소프트웨어 교육에도 지원자가 몰린다. “평생 알바 하며 사는 게 낫지 않나”라는 청년들의 말은 아직까지 취업난에 지쳐서 하는 푸념에 가깝다. 이들이 탈진하기 전에 괜찮은 일자리를 더 만들고, 교육 과정도 손봐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4-30(토) ‘前警예우’

“경찰 단계에서 끝내야 합니다.” 한 중소규모 로펌이 홈페이지 첫 화면에 내건 문구다. 로펌들이 성공 사례를 홍보하는 글에서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 상대방의 증거를 적극 반박했다” “경찰 단계에서 수사기관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며 논증을 펼쳐 나갔다” 같은 내용이 종종 눈에 띈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부쩍 커진 경찰의 권한에 맞춰 변호사업계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 것. 이렇다 보니 경찰 출신을 찾는 로펌들이 많아졌고, 전직 경찰관들의 몸값도 올라가고 있다.
▷올해 들어 3월까지 로펌에 채용된 전직 경찰은 총 16명이다. 김앤장, 태평양, 세종 같은 대형 로펌들도 전직 경찰 영입에 동참했다. 로펌에 취업한 전직 경찰이 2020년 5명에서 지난해에는 48명으로 확 늘었는데, 지금 추세대로라면 올해는 더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한 중견 변호사는 “로펌에 사건을 문의할 때 ‘경찰과 연락이 닿을 만한 변호사가 있느냐’고 묻는 의뢰인들이 제법 있다”고 전했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 경찰 출신들의 전관예우를 활용하는 ‘전경(前警)예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1월 이뤄진 검경 수사권 조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이전까지는 경찰이 수사를 하더라도 어떻게 처분할지는 검찰이 결정했다. 그래서 경찰 단계에서는 변호사를 쓰지 않고 검찰로 넘어갔을 때 선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경찰은 ‘수사종결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 경찰이 수사한 뒤 불송치(혐의 없음) 결정을 하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사건은 그대로 끝난다. 경찰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찰 출신들이 활약할 공간이 대폭 넓어진 셈이다.
▷로펌에 취업하는 전직 경찰들의 직급은 다양하지만 보통 총경, 경정급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일선 경찰서의 서장, 과장에 해당하는데, 법률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은 물론 실무 경험과 인맥도 풍부하다. 또 일부 로펌에선 변호사 자격이 없는 고위직 출신 경찰을 고문으로, 초급 간부 출신을 전문위원이나 위원으로 영입하고 있다. 이들이 직접 변호를 맡을 수는 없지만 경력을 활용해 간접적으로라도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기를 바랄 것이다.
▷앞으로 ‘검수완박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일반 사건에서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제한되는 등 경찰의 권한은 더 커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전관예우의 주무대가 검찰에서 경찰로 옮겨가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경찰 출신 변호사와 현직 경찰관의 사적 접촉 시 사전 신고 의무를 강화하는 등의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전경예우가 현장에서 뿌리를 내리기 전에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