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2022-04/ 04.01(금) 파란 리본 - 04.29(금) 임기 말 특별사면
분수대 2022-04 중앙일보
04.01(금) 파란 리본
지난달 27일(현지시각)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남우조연상 시상자로 등장한 배우 윤여정. 그의 왼쪽 어깨에 달린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얼핏 ‘훈장’처럼 비쳤다. #WithRefugees(난민과 함께)라는 문구가 적힌 리본이었다. 미국 배우 제이미 리 커티스는 이 리본을 왼손 약지에 달아서 ‘반지’처럼 연출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제공한 리본으로, 러시아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UNHCR에 따르면 지금까지 국경을 넘은 우크라이나 피란민은 약 380만 명으로 추산된다. 파란색은 유엔을 상징하면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구성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이날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들의 드레스와 수트에 달린 파란 리본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반짝였다.
리본이 사회적 캠페인의 소재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미국에서부터다. 1973년 미국의 팝 뮤직 그룹인 토니 올란도&돈(Tony Orlando&Dawn)이 ‘노란 리본을 묶어주오(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란 노래를 발표한다. 3년의 형기를 마친 재소자가 연인에게 ‘아직도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다면 오래된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 놓으라’는 내용이다. 당시 월남전 포로들의 귀환과 맞물려 이 노래는 크게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1979년 이란에서 미국 외교관들이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미국에 남아있던 한 외교관의 아내가 노란 리본을 집 앞 떡갈나무에 달아 놓은 장면이 매스컴을 탔다. 남편은 다행히 2년 뒤 억류에서 풀려났고, 부부는 나무에 묶여있던 노란 리본을 함께 풀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했을 때 실종자들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는 리본 캠페인의 색깔이 ‘노란색’이 된 배경이다.
‘핑크 리본’은 유방암에 대한 예방 의식을 높이기 위한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에블린 로더 여사가 1992년 150만 개의 유방암 자가진단키트와 함께 핑크 리본을 나눠준 캠페인이 가장 유명하다. 화장품 회사인 ‘에스티 로더’ 창업주의 맏며느리였던 그는 유방암 생존자였다.
리본은 연약한 소재로 만들어지지만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전쟁과 질병에 맞서 싸우기 위한 ‘전투복’은 리본 한 벌이면 충분하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4.04(월) 자금조달계획서
‘주택 취득자금 조달 및 입주계획서’(자금조달계획서)는 2017년 8월 도입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3개월 만에 내놓은 두 번째 부동산 대책(8·2대책)에서다. 집을 살 때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작성하라는 것이다. 당시 정부는 ‘투기적 주택 수요에 대한 조사 체계 강화로, 투명한 부동산 거래 유도’가 목적이라고 밝혔다. 서울 강남 등 투기과열지구 내 3억원 이상 주택이 대상이었다.
그런데 적용 대상은 점차 확대됐고 현재는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 내 모든 주택(나머지 지역 6억원 이상) 구매 시 거래 금액과 무관하게 제출해야 한다. 서울·수도권 대부분 지역, 대전·대구·세종·청주 등 사실상 전국 주요 도시의 모든 주택이 대상이다. 잠재적으로 집을 사는 모든 사람을 ‘투기적 주택 수요’로 보고 조사하겠다는 의미다.
자금계획서는 도입 초기부터 개인 재산권이나 개인정보보호법 침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주택 구매 후 30일 안에 제출해야 하는데 본인 명의 예·적금 통장 잔고부터 주식·채권 보유 상황, 보유하고 있던 금이나 패물을 팔았다는 영수증까지 증빙이 필요하다. 가족이나 제3자에게 빌린 돈은 계좌 이체 내역과 차용증을 첨부해야 한다.
자금계획서 도입 5년이 지난 현재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편법·불법 의혹 없이 집 샀다는 사실만으로 내 결백을 증명하고 정부에 허락받아야 하냐” “집 사려다 경찰서에서 조서 쓰는 느낌” “개인 재산을 관리·감독하는 게 영락없는 공산주의” 같은 글이 올라오는 이유다.
지난 2월 문 대통령이 옛 사저를 매각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시끌시끌하다. 경북 양산시 평산동에 있는 새 사저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김정숙 여사는 지난해 ‘누군가’에게 11억원을 빌렸고 지난 2월 매곡동에 있는 옛 사저를 ‘누군가’에게 팔아 그 빚을 갚았다고 한다. 매곡동 사저를 구매한 ‘누군가’는 26억여 원을 주고 집을 사고도 40여 일이 지나도록 등기를 하지 않아 이 집의 소유권은 여전히 문 대통령에게 있다.
국민이 1억원짜리 집을 사면서도 자금계획서를 쓰고 증빙서류 10여 장을 준비하는 것은 바보라서가 아니다. 번거롭고 불편하지만, 투명한 부동산 거래가 옳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제도를 만든 대한민국 수장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을 테다. 뒷모습이 투명한 수장을 기대해도 될까.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4.05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선출직 공무원과 4급 이상 공무원 등 고위공직자의 재산변동사항은 매년 3월 말 공개된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는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첫해 핵심 개혁 과제로 전격 시행됐다. 이전까지 신고는 하되 비공개로 뒀던 것을 국민에게 공개한 것이다. 정경유착과 금권선거를 막고, 재임 기간 재산을 부당하게 불리지 말라는 취지였다.
재산공개 제도는 조금씩 변화했다. 주택 취득가격 기준으로 신고하던 걸 공시지가 기준으로 바꾸고, 액면가로 신고하던 비상장주식의 시가 평가 기준을 제시하는 등 실제 재산 규모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다지 바뀌지 않은 건 기계적 분석이 불가능한 PDF 파일을 기관별로 자체 관보나 공보에 올리는 공개 방식이다. 이번에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재산공개 파일만 81개, 국회·대법원·헌법재판소·중앙선거관리위원회·기초의회 등은 각 관할 공직자윤리위원회에서 따로 공개한다. 이런 환경에선 기자들도 보도자료에 언급된 내용 위주로 보도할 뿐, 제대로 검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나라 대부분 언론사에는 데이터 전문기자도 없는 실정이다.
국회의원의 재산은 그나마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다. 정보공개센터가 2016년부터 매년 국회공보 PDF에서 데이터를 추출해 변환한 뒤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공유하고 있어서다. 그 자료를 분석해보면 가령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 있다.▶국회의원 298명의 부동산 자산총액 약 5400억원 중 서울 비중이 63%(3371억원)를 차지한다. ▶청와대 이전설로 관심이 쏠리는 서울 용산에선 김희재·박진·이용호·조수진 의원이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으나, 가장 비싼 집에서 살고 있는 이는 한남동 나인원 전세 65억원을 신고한 한무경 의원이다. ▶박주민 의원의 별명은 '거지갑'이지만 처음 당선됐던 2016년 재산은 5억여원이었고, 지금은 14억원이 넘었다. 박 의원이 보유한 서울 신당동 아파트 평가액이 4억7600만원 올랐고, 나머지 4억2000여만원은 알뜰히 모은 덕이다.
정보공개센터가 올린 자료도 데이터 정제를 하려면 손이 많이 간다. 그래도 내용을 살피기가 한결 수월하다.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0명이 지난해 5월 '재산공개는 기계 판독이 가능한 형태로 해야 한다'는 조항을 추가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처리되지 않고 있다. 국회 외 다른 기관의 정보에도 시민들이 손쉽게 접근하도록 국회가 힘을 내주길 바란다.

▲정보공개센터가 변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한 국회의원 부동산 자산 분포. 서울과 경기를 합하면 75.6%가 수도권에 몰려있다. 소유권과 전세권을 포함해 분석했다.
이경희 기자
04.06 전쟁범죄
전쟁범죄는 100년이 채 되지 않은 개념이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민간인·포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게 핵심인데, 전쟁 포로의 대우에 대한 제3차 제네바협약은 1929년에야 채택됐다. 사실상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을 통해 전쟁범죄의 개념이 확립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전시 민간인 처우를 규정한 제4차 제네바협약도 전쟁 이후인 1949년에야 채택됐다.
한국인 사이에서도 전쟁범죄는 주로 2차 세계대전의 기억형으로 존재한다. 일본 정치인들이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을 일으킬 때 자주 거론된다. 전후 극동군사재판소는 ▶평화에 대한 죄(A급) ▶통례의 전쟁 범죄(B급) ▶비인도적 범죄(C급) 등으로 분류해 일제 전범을 단죄했다. 주로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각료와 고위 군사 지휘관들이 A급 전범이 됐다.
현대에 전쟁범죄로 처벌받은 이들은 주로 제3세계 독재자가 많다.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에서 학살을 주도해 악명을 떨친 라도반 카라지치가 대표적이다. 2002년에는 집단 학살, 반인도적 범죄, 침략 범죄, 전쟁 범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형사 처벌하기 위해 첫 상설 국제재판소인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만들어졌다.
서방에서는 전쟁 명분이 국내·외에서 전쟁범죄 논란을 일으켰다. 2003년 이라크전쟁 참전 진상을 조사해 2016년 공개된 영국의 ‘칠콧보고서’에는 “평화적 방법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참전 유족들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행동이 이뤄지진 않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명분의 취약성 외에 비인도적 행위로도 공분을 사고 있다. 키이우 외곽에서 발견된 민간인 시신이 현재까지 410구에 이른다고 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여성을 집단 성폭행했다는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유엔 인권사무소는 어린이 292명을 포함 민간인 사상자가 3455명 발생한 것으로 최근 집계했다.
러시아 당국이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는 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푸틴 대통령이) 전범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발언도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길 바란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4.07 올빼미버스
서울시 심야버스인 ‘올빼미버스’는 2013년 4월 시범운행을 시작했다. 2개 노선으로 시작됐으며, 그해 9월부터 9개 노선으로 확대됐다. 운영 첫해 하루 평균 6000여 명이 이용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저마다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늦은 시각에 이동하는 사람들은 올빼미버스 덕분에, 잘 잡히지 않는 택시를 비싼 돈을 내고 타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됐다. 2013년 서울시가 추진한 33개 주요 정책 가운데 시민이 선정한 ‘올해의 서울시 10대 뉴스’ 중 1위로 올빼미버스가 뽑히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버스 운행은 한때 줄었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이후부터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맞춰 평일 오후 10시 이후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 대한 20% 감축 운행에 들어갔다. 3월 중순 이후 거리두기 완화에 맞춰서 대중교통 운행은 정상화됐다. 여기에 최근 확진자 감소세로 정부가 이달 중순부터 실내마스크 착용을 제외한 방역조치를 해제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면서, 서울시는 올빼미버스를 종전보다 확대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시는 기존 9개 노선, 72대로 운행하던 올빼미버스를 14개 노선, 100대 규모로 대폭 늘린다는 계획이다. 올빼미버스의 하루 평균 이용객은 2019년 1만3000명에 달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6000명대까지 줄었다. 그러나 단계적 일상회복이 시작된 지난해 11월에는 다시 1만 명 수준을 회복한 상태다. 올빼미버스 운영 확대로 하루 수송 가능 인원은 기존 1만5000명에서 2만 명으로 5000명가량 늘어난다. 향후 이용자들의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붐비는 노선 조정도 이뤄질 전망이다.
올빼미버스는 단순히 심야 이동의 편의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교통수단이다. 2018년 7월 방영된 KBS의 ‘다큐멘터리 3일’에서는 ‘당신이 잠든 사이-올빼미버스 72시간’편에는 올빼미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정부터 아침까지 일하는 투잡 대리운전 기사, 새벽시장에 물건을 떼러 가는 자영업자, 인력시장에 나가는 일용직 노동자까지 연령도 직업도 사연도 다양하다. 코로나로 이들의 삶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늘어난 올빼미버스만큼, 이들의 희망과 도약의 기회도 많아졌으면 한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4.08(금) 공개수배
“띠띠띠띠 띠띠리띠띠 띠띠띠띠”
KBS ‘공개수배 사건 25시’(1998~2001)가 사건사고 용의자의 인상착의를 띄울 때 흘러나오던 음악이다. 이 프로그램은 재연과 함께 주요 용의자의 연령대와 키, 얼굴형, 말투 등을 적시해 공개수배를 했다. 용의자를 공개수배할 때 깔리는 배경음악 때문에 범죄의 심각성이 더 부각됐다. 실제 사진이 아닌 몽타주로 용의자의 얼굴이 보일 때 인상은 더 험상궂게 다가왔다. 경찰에 따르면 160회가 방송되는 동안 498명의 용의자를 수배해 250명을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방송이 곧 수배 전단 역할을 하던 때다.
프로그램 방영 당시 용의자의 인상착의 못지않게 눈에 띄었던 건 현상금이다. 공개수배에는 신고보상금이 뒤따른다. 2014년 5월 22일 검찰은 ‘세월호 실소유주 비리’와 관련,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과 장남 대균씨의 수배 전단을 만들어 공개수배했다. 유 전 회장에 대해 5억원, 대균씨에게 1억원을 걸었다. 그런데 유 전 회장의 시신을 발견해 신고했던 사람은 정작 현상금을 받지 못했다. 신고 당시에는 유 전 회장인지 알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균씨는 석 달 뒤 경찰의 추적으로 조력자와 함께 검거됐다.
원래 공개수배라는 건 경찰서나 관공서 게시판에 붙어있던 전단지 속 얼굴로 익숙하다. 경찰에 따르면 지금도 종합 공개수배가 전단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1년에 6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공개수배위원회를 열어 20명을 추리는 절차다. 공개수배위원회 없이도 경찰관서장 재량으로 긴급 공개수배를 하기도 한다.
경찰의 ‘스마트제보’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공개수배범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강도살인(1명), 살인(6명), 성폭력(2명), 마약(1명), 사기(9명), 도박공간 개설(1명) 혐의를 받는 20명의 얼굴이 올라와 있다. 공개수배로 범인이 검거되는 경우가 있느냐고? 있다. 수사기관에서 추적은 하지만 어디 숨었는지 정말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때 국민 관심을 촉구해 용의자의 소재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살인 및 보험사기미수 혐의를 받는 이은해(31)와 공범 조현수(30) 행방이 4개월째 오리무중이다. 검찰과 경찰이 이씨와 조씨의 조속한 검거를 위해 합동팀을 꾸렸다고 한다. 지금이야말로 네티즌 수사대는 물론이고 전 국민의 집단지성이 힘을 발휘할 때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4.11(월) 일회용품
일회용품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차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기술이 발전하면서다. 내구성이 낮지만 단가는 저렴한 일회용품 생산이 크게 늘었고, 그 편리함에 소비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문제는 일회용품의 원료다. 플라스틱·비닐은 물론 종이로 만들었어도 코팅(비닐)을 하면 재활용할 수 없고 썩지도 않는다. 한번 사용한 일회용품은 고스란히 쓰레기로 쌓였고 태우면 대기 오염을, 묻으면 토지 오염을 일으켰다. 이로 인한 환경오염은 인간에게 질병 등 다양한 문제를 만들고 있다.
환경부가 지난 1일부터 카페·음식점 등에서 일회용품 사용을 금지했다. 6월부터는 대형 카페 브랜드(매장 100개 이상)를 대상으로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를 시행한다. 커피·음료를 사면서 일회용 컵에 받으려면 보증금 300원을 냈다가 반납하면서 다시 돌려받는다.
일회용품 근절에 대한 국민 참여 의지는 단단하다.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8명은 ‘환경을 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겠다’고 답했다. 아쉬운 것은 실현 방식이다. 37년 전과 똑 닮은 컵 보증제가 대표적이다. 1985년에도 소주·맥주 담았던 유리병을 반납하면 병당 20~100원을 돌려받았다. ‘공병 보증금 반환 제도’다. 유리병의 반복 사용을 위해 판매가격에 병값을 포함했다가 공병을 반납하면 보증금을 환불했다. 요즘도 병당 70~350원을 돌려받지만, 집 앞 슈퍼에 빈 병을 들고 가는 광경은 보기 힘들다. 예컨대 1400원은 ‘소주+병값’이 아니라 그냥 ‘소줏값’이라 인식해서다. 컵 보증제가 결국 커피값 인상이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하다.
카페 주인들도 “왜 하필 지금”이라고 토로한다. 코로나19가 팬데믹(전염병)에서 엔데믹(풍토병)으로 접어드는 시점이지만, 아직 추스르지 못한 상황에서 일회용품 규제에 시달려야 할 판이다. 컵 보증금을 일일이 돌려줘야 하고 회수한 컵은 세척해서 재활용업체에 보내야 한다. 형평성 논란도 있다. 테이크아웃이나 배달용 포장 용기는 금지 대상이 아니라서다.
벌금처럼 보증금을 받을 게 아니라 개인 컵을 가져오면 커피값을 깎아주고 그 비용을 정부가 지원했으면 어땠을까. 컵 회수기 설치 비용, 컵 세척에 필요한 세제·물·인력 낭비, 카페 주인과 고객의 불편은 없지 않았을까. 환경 보호를 위해 꼭 누군가 불편할 필요는 없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4.12 고딩엄빠
'고딩엄빠'는 고등학생인 엄마 아빠의 육아 현실을 보여주는 종합편성채널 MBN의 관찰 예능이다. 10대의 임신을 사회문제로 다룰 때 흔히 보이던 모자이크나 음성변조는 없다. 어린 엄마들은 교복을 입고 스튜디오에 나와 아이를 낳게 된 사연, 가족사 등을 털어놓는다. 만삭의 아내를 살뜰히 살피는 어린 아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사연 많은 어린 엄마, 양가의 지지를 받는 청소년 부부 등 다양한 사례가 나온다.
이런 프로그램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인상을 주지만 통계상으론 그렇지도 않다. 우리나라 산모가 첫 아이를 낳는 중위 연령은 32.3세(2020년 기준)다. OECD 국가 중 가장 나이가 많다. 통계 집계를 시작한 1993년엔 26.2세로, 관련 통계가 있던 14개국 중 중간(8위)이었으나 2009년부터 고연령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혼외 출산 비율도 극단적인 꼴찌다. 2020년 혼외 출산으로 태어난 아기가 6876명(2.5%)인데, 해당 통계가 처음 나온 1981년의 9844명(1.1%)에 비해 그리 달라진 게 없다. 참고로 OECD 평균 혼외출생률은 41%다.
즉, 결혼은 경제적으로 기반을 다질 나이에 하고 아이는 갖지 않거나 최대한 미루는 게 한국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다. 보편적인 '혼인'의 틀 밖에서 아이를 낳으면 곱지 않게 보는 시선까지 감내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10대가 엄마 혹은 아빠가 된다는 건 ‘문제아’로 낙인 찍히기 쉬운 무모한 도전이다. 방송 게시판에는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애쓰는 어린 엄마와 아빠들을 응원하는 목소리와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오른다. 자칫하면 방송 출연이 이들에게 또 다른 낙인찍기가 될 수도 있다.
정부가 지난해 말 내놓은 '청소년 부모 양육 및 자립 지원 강화 방안'에 따르면 청소년 산모는 본인과 아이 의료비를 최대 120만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산모도 의료비 바우처 100만원을 지원받으므로 그보다 20% 더 얹어준 정도다. 임대주택 지원 대상도 245세대에 그쳐 모수(만24세 미만, 전국 8000여 가구)에 비해 미미하다. 모든 게 준비된 완벽한 부모만 아이를 낳고 기르라는 법은 없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결심한 어린 부모를 좀 더 따뜻하게 돌봐주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4.13 반부패수사부
미국 드라마 ‘빌리언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득을 취하는 헤지펀드 창업자 바비 액슬로드와 이를 수사하는 뉴욕 남부지검장 척 로즈의 대결을 그린 화이트칼라 범죄물이다. 2013년 헤지펀드 운용사 SAC 캐피털의 창업자 스티브 코헨을 내부자거래 혐의로 수사·기소했던 프릿 바라라 전 뉴욕 남부지검장이 모티브가 됐다. 바라라 전 지검장은 2012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월스트리트의 부패를 파괴하는 남자’라고 표제를 달 정도로 강골이었다.
한국에선 대형 경제범죄 수사를 검찰 반부패수사부(옛 특수부)가 담당해왔다. 검찰의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 수사권을 박탈하겠다는 ‘검수완박’ 법안이 겨냥하는 것도 사실상 반부패수사부다. ‘조국 사태’(공직자)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경제) ‘세월호 침몰’(대형참사) 수사 등을 반부패수사부가 담당했다.
반부패수사부의 외형은 지속해서 축소돼왔다. 수사권 남용, 표적 사정 시비 등을 불러일으키며 ‘정치 검찰’ 논란의 중심에 서는 일이 잦았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반부패수사의 정점에 있던 대검 중수부를 폐지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2019년 10월 검찰이 서울중앙지검 등 3곳을 제외한 모든 검찰청의 특수부를 폐지하고, 명칭을 반부패수사부로 바꾸는 자체 개혁안을 내놨다.
민주당은 검수완박 법안 통과를 위해 검찰과 전면전도 불사할 태세지만, 역설적이게도 검찰 반부패수사부의 전성기는 문재인 정부 초기였다. 2017년 25명에 불과했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는 2018년 43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을 데리고 이른바 ‘적폐 청산’ 수사를 지휘한 게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라는 점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여권과 검찰 특수부의 밀월 관계를 끝장낸 건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였다.
민주당은 검수완박의 근거로 ‘수사·기소 분리가 글로벌 스탠더드’란 점을 제시하고 있다. 수사·기소권을 다 가진 검찰을 견제할 수 없으니, 수사권이라도 박탈해야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단 논리다. 그러나 민주당이 지난해 탄생시킨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수사·기소권을 다 가진 데다, 검·경이 수사 중인 사건을 강제이첩할 권한까지 갖고 있다. 이런 모순에 대한 설명 없이 법안을 강행 처리하는 걸 국민이 납득할지 의문이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4.14 공기살인
대학병원 교수인 정태훈의 가족에게 어느 날 비극이 찾아온다. 6살 아들이 폐가 굳어버리는 원인 불명의 급성 간질성 폐질환 진단을 받은 것. 아들을 간호하던 아내마저 갑자기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하면서 의문이 증폭된다. 태훈은 가족들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원인을 찾아나선다. 22일 개봉하는 영화 ‘공기살인’의 내용이다. 이 영화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다루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국내 환경 보건 분야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1994년부터 17년간 1000만 병가량이 팔린 가습기 살균제에 포함된 독성물질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건강을 앗아갔다. 기업들은 유해성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일부 기업은 유해성을 알고도 묵인했다. 얄팍한 상술이 만들어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2020년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는 피해자만 95만 명, 사망자는 2만 명으로 추산했다.
최근엔 11년 만에 나온 피해 구제 조정안마저 사실상 무산됐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 조정위원회는 지난달 말 피해자 유족에 2억~4억원을 지급하고, 최중증 피해자에게 연령에 따라 최대 5억원을 지원하는 내용의 최종 조정안을 공개했다. 하지만 조정에 참여한 9개 기업 중 애경산업과 옥시레킷벤키저 등 2개 기업이 반대하고 나섰다. 두 기업은 최대 9240억원인 조정액의 60% 이상을 부담한다.
조정안 무산의 책임을 두고 두 기업은 물론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기업·피해자 간 협의라는 사적 조정 원칙을 이유로 뒤로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조정위 안팎에서는 “정부가 자잘한 간섭은 하면서, 막상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면 발을 뺀다”는 불만이 나온다고 한다. 정치권 역시 피해자들 앞에서만 요란을 떨 뿐, 정작 조정안 무산 이후에는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거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8일 ‘공기살인’ 시사회에서 주연 배우 김상경은 이 영화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공기살인’ 시나리오를 받고 하늘에서 나에게 주는 소임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정부는 그리고 정치인들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피해 복구를 위한 노력을 충분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그들의 소임이었다. 멀리서 ‘원만한 합의’만 응원했다면, 공기살인을 묵인한 것과 다르지 않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4.15(금) 검이불루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백제본기에서 온조왕 15년(BC 4년) 지어진 궁궐의 자태에 대해 남긴 말이라고 한다.
유홍준 교수에 따르면 ‘검이불루’의 정신은 조선의 궁궐까지 이어진다.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궁궐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성리학이 조선의 국가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검소함을 숭상하는 풍조가 궁궐 건축의 미학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종묘와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를 예로 들어보자. 종묘의 정전은 19칸이 옆으로 이어진 한국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이다. 단정한 형태의 맞배지붕을 올려 차분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2012년 한국을 방문해 종묘를 둘러본 뒤 “심플하고 스트롱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얀 눈이 쌓인 종묘는 검이불루의 정신을 체감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낙선재는 궁궐 전각이지만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대신 격자무늬, 만자무늬, 능화무늬, 사방연속무늬 등의 창살을 두루 사용했다. 소박하지만 격조 있는 치장이 돋보인다. 낙선재의 건축 미학을 표현하기에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다.
집을 지을 때뿐이겠는가. 옷을 짓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는 서민들이 주로 입던 무명옷을 입고 생활했다. 자신이 무명옷을 입는 이유에 대해 정조는 일득록(日得錄)에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라고 설명했다. 정결하되 궁색하지 않은 의복의 예를 갖춘 것이다.
사실 격조 있게 검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무릇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집을 새로 짓든, 고쳐 살든. 옷을 비단으로 짓든 무명으로 해 입든. 지도자의 행실이 국가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의 미를 명심했으면 한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4.18(월) 수첩 인사
청문회(聽聞會)는 주요 안건에 대해 증인 등을 출석시켜 질의응답을 하는 자리다. 대개 국가기관에서 입법이나 행정상 결정에 앞서 청문회를 여는데 입법·조사·인사청문회로 나뉜다.
인사청문회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6월 처음 열렸다. 민주주의가 성장하며 각 정권의 주요 공직 후보에 대한 자격 논란이 커지자 대통령이 지명하는 고위 공직 후보를 국회가 견제하고 검증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적 장치다.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공직은 60여 개다. 국무총리·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 등은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 정부가 해당 공직 후보의 임명동의안을 제출하면 인사청문회를 거쳐 20일 안에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친다. 검찰총장·경찰청장·국무위원(각 부처 장관) 등은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대통령이 해당 후보를 공직에 앉힐 수 있다. 때문에 ‘모르쇠 임명’을 강행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34명, 박근혜 정부 10명, 이명박 정부 17명, 노무현 정부 3명으로 추산한다.
모르쇠 임명은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에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수많은 자격 논란에도 임명을 강행하자 그의 사퇴를 촉구하는 촛불시위까지 벌어졌다. 결국 조 전 장관은 35일 만에 옷을 벗었다. 김대중 정부 땐 김태정 전 법무부 장관이 취임 14일 만에, 김영삼 정부 땐 박희태 전 법무부 장관이 8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각각 부인과 딸의 ‘옷 로비’ ‘대학 편법 입학’ 논란이 도화선이 됐다.
새 정부가 거쳐야 할 첫 관문인 인사청문회가 코 앞이다. 그런데 벌써 ‘수첩 인사’ 비난이 고개를 들었다. 객관적이고 공적인 시스템이 아닌 대통령 개인의 감과 직관에 의존하는 인사를 지적하는 말이다. 역대 정권들은 입맛에 맞는 인물을 공직에 앉히는 ‘코드 인사’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캠·코·더’(대선 캠프·좌 편향 코드·더불어민주당), 박근혜 정부는 ‘수첩 인사’, 이명박 정부는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논란에 휩싸였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운 새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아주 높다. 그 시작은 인사다. 국민은 내 입맛에 맞춘 ‘고무줄 잣대’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적용되는 ‘공정한 잣대’를 보고 싶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4.19 임금명세서
조선시대 관료는 국가에 봉사한 대가로 녹봉(祿俸)을 받았다. 녹봉의 품목은 쌀·보리·콩·포목 등이었다. 『조선경국전』에 따르면 “1품부터 9품까지 18과로 나누어 내리되, 삼사(三司)에서 녹패를 분급해 광흥창에서 지급하도록 한다”고 돼 있었다. 녹패는 녹봉 지급증서다. 녹패에는 발급 날짜와 몇품 몇과에 해당하는지 녹과(祿科·녹봉등급)를 적었다. 하단에는 지급한 녹봉의 양, 광흥창 및 감찰의 수결(서명)을 남겼다.
그러나 정조 이전까지 광흥창은 녹봉 지급 대상자 명단도 확보하지 못했다. 이를 악용해 녹패를 위조하는 등의 방법으로 녹봉을 착복하는 사례가 많았다. 정조 17년(1793년) 녹봉 지급 규정을 개정한 이후 이를 보완하기 위해 녹표(지급증)를 추가 도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녹표에는 녹과에 근거해 받을 곡식의 양까지 정확히 적었다. 녹패와 녹표는 오늘날의 연봉계약서와 임금명세서 겸 출세의 증표이기도 했다.
근대화 이후에도 임금명세서는 아무나 받는 게 아니었다. 지난해까지도 5인 미만 사업장은 예외였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개정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면서 고용 형태나 업종, 사업장 규모와 관계없이 사용자는 반드시 임금명세서를 교부하도록 의무화됐다. 대기업부터 구멍가게에 농장까지, 정규직·계약직·일용직 가리지 않고 임금명세서를 줘야 한다. 사실상 근로를 제공하는 누구나 임금명세서를 받도록 바뀐 것이다. 근로일수와 각종 수당, 공제 내역 등 임금 대장에 들어갈 상세 항목 십수개도 근로기준법 시행령에 명시해놨다.
만약 고용계약서나 취업규칙에 수당 등에 대한 규정을 두지 않았다면 임금명세서에 각각의 항목에 대한 계산 근거도 밝혀야 한다. 사업주가 이를 어기면 근로자 1인당 20만~30만원, 여러 차례 위반하면 최대 500만원까지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인당 과태료가 나오므로 영세 사업장은 물론 중소사업장에도 적잖은 부담이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임금명세서 작성 프로그램을 배포했다. 임금명세서 교부가 의무화됐는지 모르는 사업장도 많은 실정이라서다. 아직은 계도 기간이라 위반 사항을 적발해도 25일가량 시정 기간을 준다. 근로기준법 위반은 대개 근로자가 신고해야 단속기관이 인지할 수 있다. 우리 회사는 임금명세서를 잘 주고 있나, 확인해 보자.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4.20 제명
제명(除名)은 구성원 명단에서 이름을 빼 자격을 박탈하는 행위다. 학교에서는 퇴학, 직장·종교에선 해고·파문에 준하는 심각한 징계다.
제명이란 단어가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건 스포츠계다. 고환암을 극복하고 ‘투르 드 프랑스’를 7연패했던 랜스 암스트롱은 2012년 금지 약물을 상습 복용했다는 사실이 적발돼 국제사이클연맹(UCI)에서 영구제명됐다. 한국에선 국가대표까지 지낸 최성국(축구)·강동희(농구)가 승부 조작에 연루돼 협회에서 영구제명된 기록이 있다.
제명에 준하는 종교적 파문 사례로 유명한 건 일명 ‘카노사의 굴욕’이다. 107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주교 서임권을 황권 아래에 두려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당해 카노사성 앞에서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싹싹 빌었다. 그는 결국 파문을 철회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1979년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에 의해 의원직에서 제명당했다.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제어해줄 것”을 요구한 뉴욕타임스 인터뷰가 구실이 됐다. 의원직 제명 뒤 YS는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고 했고, 여파는 부마민주항쟁으로까지 번졌다.
제명이 정략적으로 악용된 경우도 있었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은 비례위성정당의 기호 순번을 끌어올리기 위해 의원들을 파견 보냈다.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은 조훈현 의원 등 8명을, 민주당은 정은혜 의원 등 3명을 각각 당에서 제명했다. 이들이 비례대표로 탈당하면 의원직을 잃기 때문에 고안해 낸 일종의 편법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같은 해 바른미래당 분당 사태 때는 비당권파 의원들이 단독으로 의원총회를 열고 비례대표 9명을 셀프제명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제명된 한 의원은 라디오에서 “드디어 제명됐다. 대망의 제명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권은희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제명을 공개 요구하고 있다. “기득권 양당과의 합당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그 역시 제명당하면 의원직을 지킨다. 당의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탈당하는 게 순리라는 주장을 하는 이는 찾아보기도 어렵다. 정치권의 상습적인 편법 제명 앞에 모두가 무뎌진 걸까. 이런 풍경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지 한숨이 나온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4.21 아버지 허재
예능인 허재(57) 전 감독은 ‘농구 대통령’으로 불린다. 그를 빼고 한국 농구의 역사를 온전히 설명하기가 버겁다. 한 경기 최다 득점(75점) 기록 보유자면서, 실업과 프로에서 숱한 우승을 맛봤다. 1997~98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선 준우승팀 선수로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프로농구 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음주운전 등 성숙하지 못한 모습도 보였지만, 실력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은퇴 후 감독으로는 10년간 KCC를 맡아, 2차례 우승을 이끌었다.
2014년 프로농구연맹(KBL)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허 감독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허 감독의 아들인 연세대 3학년 허웅이 드래프트에 나왔다. 상위 지명이 유력한 검증된 선수였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3순위까지 지명을 받지 못했다. 4순위 지명권을 가진 KCC의 허 감독이 아들을 호명하면 같은 팀에서 감독과 선수로 만나는 상황. 그러나 허 감독은 아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다른 선수의 이름을 불렀다. 5순위였던 동부가, 허웅을 호명한 것은 물론이다.
허 감독은 훗날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혼당할 뻔했다”며 당시 상황을 아찔하게 기억했다. 아내의 상심이 컸던 탓이다. 허웅도 서운함에 “농구를 그만두겠다”고 전화했다고 한다. 그때 가족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상상이 된다. 허 감독은 “아들과 다른 선수 중에 선택해야 하는데 미치겠더라, 결국 다른 선수 이름을 불렀다”고 당시의 고뇌를 털어놨다.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아빠 찬스’ 논란이 뜨겁다. 정 후보자가 병원장·부원장 시절에 각각 딸과 아들이 경북대 의대에 편입한 걸 두고서다. 지역인재 특별 전형 확대와 의전원 폐지에 따른 한시적 편입 등 기회의 문이 유독 활짝 열렸던 것도 의구심을 키운다. 정 후보자는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아버지가 학교에 있다고 해서 아들, 딸을 꼭 다른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헤아려주시기 바란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기어코 자식을 외면하는 비정(?)한 아비도 세상엔 엄연히 존재한다. 국민이 장관 후보자에게 원하는 도덕적 수준이기도 하다. 참고로 허웅(29)은 동부 소속으로 줄곧 뛰면서 지난 시즌 프로농구 인기상과 베스트5를 동시 수상했다. 인기와 실력을 스스로 입증했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4.22(금) 대통령의 친구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선에서 패배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을 지새웠다. 경희대 법학과 72학번 동기동창인 박종환 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와 함께였다. 경찰 출신인 박 전 총재는 문 대통령의 40년 지기다. 경희대 법대생 중엔 자퇴하고 다시 시험을 쳐서 서울대나 고려대 법대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경희대에 남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 대선에서 당선됐다. 박 전 총재는 1년 뒤인 2018년 4월 자유총연맹 제17대 총재로 취임했다. 350만 회원을 둔 자유총연맹은 행정안전부 예산을 지원받는 관변단체다. 역대 정부에서도 청와대와 가까운 군·경찰 출신, 정치권 인사가 총재에 오르곤 했다. 전임 지도부는 총재 선출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의 인사 외압이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물러났다.
박 전 총재가 친구와 자신의 행보를 상의했는지 여부 못지않게 궁금한 것은 19대 대선 이후에도 두 사람이 종종 술잔을 기울였는지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평일엔 공용 휴대전화를 썼다. 취임 전에 쓰던 개인 휴대전화는 주말에 열어보곤 했다.
대통령이 됐다고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대통령과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절친’ 꼬리표는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 잘해도 ‘측근’이라는 소리를 듣고, 못 하면 ‘정실인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누구보다 폭넓은 인맥과 학맥을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79학번 친구들의 선택에 주목한다. 정호영 전 경북대병원장은 내각에 입후보했다. 윤 당선인과 서울 대광초, 서울대 법대를 함께 다닌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에게 “5년 뒤 만나자”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역시 서울대 법대 동기인 배진한 변호사는 “친구들 몇이서 당선인과 소통하는 ‘쓴소리 방’을 만들까 한다”고 말했다.
윤 당선인은 지난 20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대통령 자리는 고독한 자리”라며 “당선되고 나서부터는 숙면이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불면의 날이 많을지 모른다. 당선인 친구들의 진짜 우정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친구 윤석열과 대통령 윤석열 사이의 선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당선인 근처에 가지 않는 게 옳을 것이다. 그게 고독한 대통령을 돕는 길이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4.25(월) 집통령
집(家)의 사전적 의미는 ‘추위·더위·비바람을 막고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집은 ‘사는 곳’(Living)일 뿐 아니라 ‘사는 것’(Buying)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보금자리이면서 전 재산이자 주요 재테크 수단이라서다. 국내 가구 평균 보유자산 79.9%가 부동산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부동산 정책에 가장 공을 들이는 이유기도 하다.
대표적인 ‘집통령’(집+대통령)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손꼽힌다. 집권 4년 만에 분당·일산 등 수도권 1기 신도시를 중심으로 214만호를 지었다. 당시 전국 주택 수(640만호)의 30%를 단기간에 쏟아낸 공급 폭탄의 부작용은 만만찮았다. 건설자재 품귀는 부실공사로 이어졌고, 엉성한 도시계획은 출·퇴근 교통 대란을 낳았다.
외환위기(IMF)를 극복해야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규제 완화 카드를 빼 들었다. 양도세 한시 면제, 분양권 전매 허용, 분양가 자율화 등 풀 수 있는 규제는 다 풀었다. 유례없는 암흑기를 겪던 주택 시장은 기운을 차렸지만, 투기 바람이 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폭풍 규제’를 했다. 분양권과 재건축 조합원 지분 전매를 금지했고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종합부동산세 등을 모두 강화했다. 규제 강화는 되레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집권 5년간 전국 아파트값(국민은행)은 33%, 서울은 55% 뛰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빚내서 집 살 환경’을 조성했다. LTV(70%)·DTI(60%) 상향해 3000만원만 있으면 1억짜리 집을 살 수 있었다. 당시 뛰는 전셋값은 잡았지만, 하우스푸어를 만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규제 폭탄’을 퍼부었다. 집을 사도, 보유해도, 팔아도 무거운 세금을 내야 했다. 26번의 부동산 대책을 통해 핀셋 규제에 나섰고 그때마다 규제를 피한 지역의 집값이 급등하며 ‘누더기 규제’라는 오명을 받았다. 현 정권 들어 전국 아파트값은 37%, 서울은 61% 올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신규주택 250만호, 재개발·재건축 완화 같은 굵직한 부동산 공약이 많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부동산 정책 발표 시점 연기가 되레 반가운 것은 잦은 규제로 인한 피로도와 ‘제대로 된’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크기 때문일 테다. 어떤 집통령이 될지 결정은 당선인의 몫이다. 반면교사 삼을 선배 대통령은 많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4.26 고교생 논문저자
강태영 언더스코어 대표와 강동현(미국 시카고대 박사과정)씨가 최근 ‘논문을 쓰는 고등학생들에 대해 알아봅시다’라는 연구 결과를 온라인에 발표해 화제다. 이들은 2001~2021년 해외학술지에 등재된 213개 고등학교 학생의 논문 데이터를 전수 조사했다.
영재학교·과학고·자율고·외국어고 및 서울대 진학 랭킹 상위 50개 일반고 재학생을 찾아낸 결과 980명, 논문 558건이 추려졌다. 학생 저자 67%는 논문 출간 이력이 한 번, 13%는 두 번에 그쳤다. 연구 능력이 뛰어나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한 사람보다 대입 일회용으로 논문을 활용한 이들이 훨씬 많으리라 추정되는 이유다.
자율고·외고·일반고에서 컴퓨터공학(27.4%)과 의학(13.6%) 논문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것도 의심스러운 포인트다. 2014년과 2018년 논문 기재 규제에 따라 자율고·외고·일반고의 논문 등재 건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사라지다시피한 것도 추론을 뒷받침한다. 교육부는 2014년 생활기록부에 논문 기록을 금지했다. 2015학년도 대입부터 입학사정관제를 폐지하고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바꿨다. 자기소개서에 논문을 기재하는 꼼수는 남아있었으나 2018년엔 그마저 금지했다. 단, 과학고나 영재학교의 논문 편수는 대입 제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조민씨는 2009년 외국어고 재학 시절 고교생임을 밝히지 않고 해외 의학 학술지에 논문 제1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강 대표는 "이 경우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 한 알 방법이 없다. 데이터로 드러나지 않는 사례가 훨씬 많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강씨 등이 이번 조사에 들인 시간은 딱 4일이다. 이들은 게재료만 내면 논문을 실어주는 '약탈적 저널' 여부를 구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KCI 국내논문을 대상으로 한 추가 분석도 이르면 이번 주 중 끝낼 계획이다.
교육부는 2019년 10월, 2년간 진행한 미성년 공저자 논문 감사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교육부는 그로부터 2년 반이 흐른 지난 25일에야 최종 결과를 공개했다. 총 82명의 미성년자가 부당하게 저자로 등재됐으며, 10명이 대입에 활용했고 5명이 입학취소됐다.
'아빠 찬스'에 분노하는 여론에 편승해 이미 바뀐 대입 제도만 뒤흔드는 건 변죽을 울리는 일이다. 연구 윤리를 바로잡는 데 필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의지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4.27 직업윤리
2009년 1월 15일. US 에어웨이스 1549편은 뉴욕에서 이륙한 직후 새떼와 충돌했다. 엔진 2개가 모두 꺼졌다. 체슬리 설렌버거 기장은 회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허드슨강에 동체 착륙했다. 기내에 강물이 차오르는 상황에서 설렌버거는 비행기 안을 두 번이나 살폈다. 승객이 모두 나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승객 150명 전원은 무사히 구조됐다.
직업윤리에 헌신했던 설렌버거의 영웅담은 2016년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을 통해 소개됐다. 설렌버거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던 건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였다. 설렌버거가 이미 영웅 대접을 받고 있음에도, NTSB 조사관들은 허드슨강 착륙이 오판일 가능성을 파고들었다. 사고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NTSB 역시 직업윤리에 최선을 다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반대로 직업윤리가 마비된 사례다. 침몰 징후가 명백해지자 이준석 선장은 승객들을 배에 머무르도록 한 뒤 탈출했다. 그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선장의 의무를 방기해 승객들을 결과적으로 죽게 한 죄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두고도 은행의 직업윤리 실종을 탓하는 이들이 많다. 재산·소득을 검증하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줘 부실채권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정부 구제금융으로 생존한 은행들은 파산 위기에도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최근 ‘검수완박’ 논쟁 과정에서도 직업윤리가 거론됐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입법 저지’ 표현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굉장히 부적절하다”고 비판하면서다. 한 후보자는 “침묵하는 것은 직업윤리와 양심의 문제”라며 반박에 나섰다. 그는 조국 전 장관 일가 수사에 대해서도 “그냥 할 일이니까 한 것. 직업윤리”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직업윤리가 존재하는 건 모든 직업에 크든 작든 타인의 삶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그렇듯, 직업윤리는 그래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내면의 다짐에 가까운 모습을 띤다. 정치인들에게는 전문성·공공성, 의사결정의 투명성 등 지켜야 할 윤리적 덕목이 많다. 한 후보자뿐 아니라 새 정부 각료들이 직업윤리를 입으로 외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길 기대한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4.28 예능정치
정치인들은 ‘예능 정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선거 같은 중요한 이벤트를 앞두고는 버라이어티쇼나 인터뷰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에 경쟁적으로 출연한다. 딱딱한 이미지를 벗고 인지도를 넓히는 데 예능 프로그램만 한 게 없다는 판단에서다. 정치인의 예능 출연이 작위적 이미지 연출이라는 비판도 나오지만, 친근하게 소통하려는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유퀴즈)’ 출연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유퀴즈’ 측이 당선인의 출연에는 적극적이었던 반면,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경우에는 과거 출연 의사를 타진했음에도 제작진에서 거부했다는 의혹이다. 의혹 제기자는 청와대와 경기도의 전·현직 비서관들이다. 이들은 정파성을 이유로 ‘유퀴즈’ 측을 비판하고 나섰다.
정치권뿐 아니라 언론시민단체도 거들고 나섰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이번 사태가 검사 출신 CJ ENM 대표이사와 윤석열 당선자의 친분에서 비롯됐을 것이라는 시청자들의 의심은 검사 인맥을 매개로 한 권력과 언론미디어 유착이 새 정부에서 노골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사로이 넘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인의 출연이 많지 않았던 ‘유퀴즈’에 윤석열 당선인이 출연하게 된 배경이 대표이사와 당선인의 인연 덕분이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유퀴즈’가 아니라도 정치인이 얼굴을 내민 예능 프로그램은 여럿이다. 특히 지난 대선 국면에선 각 방송사의 주말 예능프로그램이 경쟁하듯 각 정당의 후보를 번갈아가며 출연시켰다. 모든 후보가 아니라 유력 후보만 나왔다. 이때도 배제된 일부 후보는 “무슨 기준으로 출연자를 꼽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화제성이나 당선 가능성 등 제작진 나름의 기준이 있었겠으나, 누군가에겐 ‘정치적’으로 비칠 수 있는 셈이다.
‘유퀴즈’가 당선인의 출연을 결정한 배경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 많은 국민은 그 내막이 궁금하지도 않다. 그러니 제작진의 의도를 따지겠다며, 정치권이 굳이 핏대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누군 나오고 누군 못 나왔네” 따지면서 예능 정치에 열을 올릴 시간에, 더 건설적인 고민을 해주면 좋겠다. 어차피 편파 방송의 냄새는 시청자들이 먼저 귀신같이 맡는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4.29(금) 임기 말 특별사면
‘사면’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면 ‘임기 말 특별사면’은 사면 중에서도 ‘끝판왕’이다. 사면(赦免)은 죄를 용서해서 놓아준다는 뜻이다. 헌법 제79조에 의해 대통령에게 사면권이 부여된다. 형의 집행을 면제하거나 경감 또는 상실된 자격을 회복(복권)시켜주는 식이다.
사면법에 따르면 사면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이다. 일반사면은 대통령령으로 사면대상이 되는 범죄의 종류를 지정해서 집행한다. 특별사면은 형을 선고받은 특정인에 대한 사면이다. 일반사면처럼 국회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사면 숫자는 적지만 유력인사들이 포함되기 마련이어서 주목을 받는다. ‘특사(特赦)’라고 줄여 부를 때가 많다. 퇴임이 임박한 임기 말엔 형 확정을 받기 위해 상고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임기 말 특별사면은 원래 국민 통합을 이뤄내기 위한 신구(新舊) 권력의 정치적 결단이란 의미가 강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7년 말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태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사면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겪은 뒤론 ‘경제 살리기’란 취지에서 대기업 총수가 특별사면 명단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차기 대선이 끝난 직후인 2002년 말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을 사면했다.
노무현 정부 이후 임기 말 특별사면에선 비리를 저지른 대통령 측근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말 실시한 임기 중 마지막 특별사면에는 ‘노 전 대통령 집사’로 불렸던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포함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2013년 1월 ‘정치적 멘토’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고려대 61학번 동기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등에 대한 설 특별사면을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다음 달 8일 석가탄신일을 맞아 임기 말 마지막 특별사면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문 대통령 임기를 하루 남겨둔 시점이다. 이번엔 전직 대통령, 기업인, 측근을 망라한 명단이 거론된다. 특별사면은 헌법이 엄연히 보장하고 있는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남발하면 법치주의 훼손이란 비판이 뒤따른다. 퇴임을 하루 앞둔 대통령의 마지막 통치행위가 특별사면이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