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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13/ 미국1/ 미국 이야기 - 역대 대통령과 교황

상림은내고향 2022. 4. 23. 19:42

지구촌 여행/ 국가별13/ 미국1

■ 미국 America , 美國

국기

 

정식 명칭은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며, 약칭은 U.S.A.이다. 50주와 1수도구(컬럼비아구: Washington,D.C.)로 이루어진 본토 외에 해외속령(海外屬領)으로 푸에르토리코·사모아제도·웨이크섬·괌섬과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령인 마샬제도·메리아나제도·캐롤라인제도 등을 보유한다.

 

면적은 982만 6675㎢이며, 인구는 3억 2136만 8864명(2015년 현재)이다. 세계 각국의 이민들과, 노예로 이입된 아프리카 흑인 및 원래의 토착 인디언들로 이루어진 복합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분포를 나타낸다.

 

그러나 백인종이 77.4%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흑인종은 13.2%, 아시아계 5.4%, 원주민은 1.4%, 기타가 2.6%이다.

 

종교는 개신교(46.5%), 가톨릭(20.8%), 유대교(2%) 순으로 주종을 이루며 무수히 많은 종교들이 소수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언어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기후는 대부분 온대 또는 냉대에 속하지만, 지역에 따라 열대사바나기후·몬순기후·서안해양성기후·냉대습윤기후·지중해성기후·스텝기후·사막기후·고산기후의 8개 기후구로 나누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경제부국으로, 국민총생산·지하자원 등의 면에서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며, 자본주의경제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여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서독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의 경제부흥이 진전됨에 따라 제2차세계대전 이전과 같은 미국경제의 압도적 지배력은 약화되고, 1958년 이후 국제수지가 적자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1973년 1월 유럽과 일본의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의 투매가 일어나 마침내 달러화의 평가절하가 이루어져 전후 세계통화의 기준으로 되어 있던 달러화의 신화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처럼 국제경제사회에서의 상대적 지위가 저하되었다고는 하나 미국이 여전히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국가임에는 변함이 없다.

 

1997년 국민총생산액은 7조 1880억만 달러로 2위 이하의 자본주의 주요 선진국(서독·일본·프랑스·영국·이탈리아·캐나다)의 합계보다도 많았다.

 

1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도 1979년에는 1만 630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하나였으며, 1997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7607달러로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2014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7조 419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5만 4629달러이다.

 

산업별 취업인구비율은 농림·수산업 4.3%, 광업 0.7%, 제조업 25.1%, 건설업 6.5%, 운수·통신업 6.6%, 도·소매업 25.3%, 공공서비스업 31.5%로, 농림·수산업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공공서비스업의 인구가 많아 그만큼 도시적 산업에 집중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1492년 콜럼버스(Columbus,C.)의 신대륙 발견 이래, 아메리카대륙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개척경쟁의 대상이었다. 16세기에 들어 퀘벡에 프랑스령 식민지가 건설된 것을 필두로 하여, 현재의 뉴욕에 근거지를 마련한 네덜란드, 그리고 국내의 복잡한 문제를 식민지건설로써 어느 정도 해결해 보려 한 영국 등이 북미대륙을 무대로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1606년 유럽 열강 가운데서 최초로 영국이 버지니아 일대에 이주민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대륙에서의 식민지건설은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620년 종교박해를 피하여 네덜란드에 가 있던 청교도 일파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지금의 매사추세츠주에 상륙하여 플리머스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1733년까지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렇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기존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 영국의 식민지, 그리고 18세기에 건설된 프랑스의 식민지 등 3파의 항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이 싸움에서 영국이 승리를 거두자, 북미대륙의 지배권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국과 식민지인과의 대립과 알력이 본격화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각종 조세부과를 둘러싸고 “대표 없는 과세 없다.”라는 식민지인들의 주장과, “사실상의 대표”라는 영국 정부의 의견이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1773년 ‘보스턴 차당사건(The Boston Tea Party事件)’을 계기로 영국 정부가 강력한 응징조치를 취하자, 북미대륙의 영국식민지들 사이에서는 공동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제1차 대륙회의를 개최하였다.

 

1775년 4월 영국군과 식민지인 사이에 유혈충돌이 벌어졌고 이로써 아메리카혁명의 막이 올랐다. 1776년 1월의 대륙회의에서는 처음으로 독립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미대륙의 13개 영국식민지는 개별적으로 독립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가 대륙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영국으로부터의 미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이었던 동시에, 식민지 내부에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혁명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독립은 1783년 파리조약에 의하여 승인되었으며, 미국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회의를 열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이후 미국은 프랑스·스페인·멕시코 등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여 1848년경 거의 현재와 같은 대륙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미국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나름대로 발전시켰고 개척지의 확장과 더불어 산업혁명과 교통혁명이 진행되었다.

 

원래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식민지건설 당시부터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북부는 그 건설단계에서 북유럽 및 서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받아들여 산업자본가들이 많았으나, 남부는 여전히 보수적이며 흑인노예제에 기초한 농업자본가들이 우세하였다.

 

1861년에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은 명분상으로는 주권론(州權論)을 주장하는 남부와, 합중국론(合衆國論)을 주장하는 북부와의 헌법상의 해석문제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종결되자, 미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확고한 기반을 확보하여 마침내 1870년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되어 노예제도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의 약 25년 동안, 미국사회는 급속도의 경제혁명을 경험하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대기업과 산업주의의 원리가 국민생활 속에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1865년부터 1900년까지의 이른바 산업주의시대가 활짝 꽃피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첫째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의 기업가와 상인들은 자신들의 경제활동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었고, 둘째 풍부한 천연자원과 넓은 국내시장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은 열강들의 식민지쟁탈 경쟁에 휘말리지 않고 국내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고, 셋째 유럽으로부터 끊임없는 이민의 물결을 흡수하여 노동력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넷째 기업에 대한 정부의 후원과 법원의 친기업가적 법률제정 등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팽창과 풍요의 이면에는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극심한 빈곤과 부패, 그리고 계급갈등이 내재하여 있었다.

 

즉, 극심한 빈곤과 소득 불균등, 그리고 경제력의 집중에 의한 독점현상은 미국 국민 전체의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팽배해지는 가운데, 사회정의운동과 정치개혁운동을 공통분모로 하는 이른바 혁신주의운동(Progressive Movement)이 일어났다.

 

한편,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열강들은 전세계에 걸쳐 영토와 이권을 확대해 가는 제국주의시대를 열고 있었다. 미국도 뒤늦게나마 이와 같은 시대적인 조류를 타기 시작하였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계기로 제국주의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끼여든 미국은, 중국에서의 세력분할 경쟁에서 한발 뒤진 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선언하고 나섰다.

 

반면에 미국은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 선언 이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는 특수한 이해관계를 내세워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영국과 독일 등과의 경제적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대통령 윌슨(Wilson,T.W.)은 러시아혁명의 발발 등으로 연합국의 전열에 차질이 생기자 결국 1917년 4월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1920년대는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면서 기업적 가치관과 물질주의가 우세해져 사회가 정신적인 획일화의 방향으로 치달았던 이른바 대중사회의 시대였다.

 

곧이어 미국을 강타한 것은 1929년의 대공황이었다. 그렇지만 1933년 루스벨트(Roosevelt,F.D.)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뉴딜정책(New Deal Policy)을 추진,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한편, 194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도 수많은 논란 끝에 참전주의자가 선거에서 승리,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개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은 이제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체제 수호의 선봉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과의 체제경쟁이 가속화되어 가는 가운데 이른바 냉전의 논리도 정착화되어 미국은 세계적인 규모로 자본주의의 지원자·옹호자의 구실을 도맡게 되었지만, 유럽과 일본의 부흥에 따라 일등국가의 위치는 약화되어 갔다.

 

미국은 그 국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주(州, State)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권력분립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다. 권력분립은 구체적으로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과 연방정부·주정부로 분립된 두 개의 지주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건국 이후 19세기 말까지는 국가적 기능의 중요성이 아직 낮았고 주의 힘이 강력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대내적으로는 독점산업자본의 거대화와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경쟁이 극심해진 데다가, 더욱이 제2차세계대전 후 세계의 지도국가로서의 비중이 커지는 등 정세의 변화에 따라, 중앙정부의 권력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따라서, 형식상으로는 권력의 분립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행정부, 특히 대통령에의 권력집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미국독립 당시의 유럽은 프랑스혁명 뒤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미국은 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중립주의를 취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먼로주의라고 하는 비개입고립주의로 미국외교의 기본자세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국내의 자본주의체제가 정돈되고 개척지가 메워지자 태평양으로 적극 진출하였으며, 제1·2차세계대전 때는 먼로주의를 관철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제2차세계대전 뒤, 전쟁 중에 지대한 구실을 수행하였던 미국은 유럽의 피폐,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대두 등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외교정책을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연합에의 참가, 마샬플랜에 의한 유럽의 부흥원조, 중국의 공산화, 더욱이 소련과의 냉전격화 등의 상황변화에 따라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에서 ‘반격정책’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신흥 제국에 대한 경제·군사적 원조를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소련과 냉전구조인 양극체제를 유지하면서 1960년대 평화공존과 1970년대의 데탕트라는 화해시대, 1980년대의 탈냉전시대를 도모해 왔다.

 

1989년 몰타에서의 미·소 마지막 정상회담을 계기로 탈이념과 탈냉전을 선언하고, 1990년부터 시작된 공산사회주의 사회의 붕괴로 소련이라는 국명이 사라지면서 미국 단독의 힘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되었다.

- 다음백과

 

■ 미국 이야기

2015.02.12 하와이 王政의 몰락

하와이 왕조는 왜 몰락했고 하와이는 어떻게 미국 영토가 됐을까.

하와이의 카메하메하 추장은 1795년 카우아이 섬과 니하이 섬을 제외한 모든 섬을 통합하고 하와이 왕조 초대(初代) 국왕에 올랐다. 그는 하와이 제도를 처음 밟은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쿡과 교류하며 쿡에게서 서양식 무기 사용법을 배웠다. 1810년엔 하와이 섬 전체를 통합했다. 번성하던 왕조는 1874 6() 국왕이 미국인들의 대규모 이주를 허용한 이후 미국 자본력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해 8대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사탕수수 농장 국유화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지만, 미국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1893년 여왕을 폐위시켰다. 이로써 98년간 국왕 8명을 배출한 하와이 왕조는 몰락했다.

이후 반란 주도자인 샌포드 돌이 임시 대통령을 맡아 하와이 공화국이 설립됐고, 공화국은 1897년 미국과 합병 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 지배를 받게 됐다. 1959년엔 정식으로 미국의 50번째 주가 됐다.

과거 왕조의 적통은 끊겼다. 5대 국왕에게 후손이 없어 6·7대 국왕은 의회가 왕족 혈통 가운데서 투표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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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6 오바마 美대통령 친할아버지의 고환을 짖이겨 거세시킨 영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 사진출처=조선DB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Brexit) 시도와 관련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두 가지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23 BBC방송 인터뷰에서는 “영국이 EU를 탈퇴하면 미국과의 무역협상에 최대 10년까지 걸릴 수 있다. EU보다 앞서서 미국과 협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의 발언이 나오자 영국 내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여론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는 6월 실시될 국민투표에서 EU 탈퇴에 찬성하겠다는 여론도 30%대에서 10%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오바마의 발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은 영국의 EU 탈퇴를 주장한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 그는 영국 신문인 ‘선’ 기고문을 통해 오바마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케냐인 혈통이어서 반영감정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영국 내에서도 인종차별적인 어리석은 주장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존슨 시장의 이 발언으로 영국 식민지 케냐 시절 오바마 집안에 관심이 쏟아졌다. 오바마의 아버지가 하와이 유학 도중 백인 여성 스탠일 던햄(Stanley Dunham)과 결혼한 케냐인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 그런데 그의 아버지, 즉 오바마 대통령의 친할아버지가 영국 제국주의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친할아버지의 이름은 후세인 오바마(Hussein Onyango Obama, 1895~1979). 할아버지 오바마는 케냐가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에 영국군에 근무하고 2차대전에도 참전했다. 전후에는 케냐에 사는 영국인 집안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그런데 케냐에서 영국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빈발하자 영국은 집단적 징벌이라는 방식으로 케냐인들에 대하여 무차별적으로 고통을 가했다. 영국 식민당국은 수십만 명의 케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붙잡아 수용소에 감금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역사학자인 캐더린 엘킨스 교수는 이를 ‘영국의 강제수용소(Britans gulag)’이라고 지칭했다. 영국은 강제수용소에 감금한 사람들에게 모진 고문을 가해 무려 2 5천명이 사망했다.

 

할아버지 오바마는 영국 식민당국에 붙잡혀 강제 수용소에 6개월 동안 수용돼 갖은 고문을 당했다. 특히 영국 식민당국은 소를 거세할 때 사용하는 도구로 할아버지 오바마의 고환을 짖이겨 거세시켰다.

 

오바마 대통령의 친할머니인 하비마 아쿠무가 오바마 대통령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 안고 있는 모습. 고문당한 후세인 오바마의 둘째 부인인 아쿠무는 오바마 대통령의 친할머니이다. / 사진출처=Familypedia

 

오바마 대통령도 회고록에서 고문당하고 풀려난 할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가족들에게 전해들은 내용을 근거로 “할아버지는 아주 마르고 더러운 모습을 하고 집에 돌아오셨다. 잘 걷지도 못하셨고 머리에는 이가 들끓었다”고 기술했다. 할아버지 오바마는 너무나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한동안은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항상 고통을 호소하고 부축을 받아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할머니인 하비마 아쿠무(Habiba Akumu Obama)는 손자인 오바마에게 “그날 이후로 그는 늙은이였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차 대전 동안 영국군에 근무했던 할아버지 오바마는 완전히 반영주의자가 되었고 종교도 가톨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러한 사실은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도 살아 있던 오바마의 할머니 입을 통해 영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오바마의 할머니를 인터뷰한 영국 언론들은 영국 식민당국의 가혹행위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이 영국을 미워할 가능성이 있다며 매우 우려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재임 중 할아버지가 고문당했다는 데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며, 미국과 영국관계는 조금도 틀어지지 않았다. 오바마가 대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한가지 사례.

 

오히려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 같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영국이나 오바마 모두에게 아픈 상처를 들춰낸 것이다.

 

참고로 영국이 식민지 케냐에 가한 고통에 대한 배상문제는 여전히 영국 법원에서 진행중이지만, 영국은 흔쾌히 자신들의 과거 만행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

 

2018.01.25 미국의 세계 유일초강대국 지위, 앞으로도 100년은 흔들리지 않을 이유는?

 

▲ 미국 텍사스 미들랜드카운티의 석유 굴착 시설. photo 뉴시스

 

횡재(橫財)라는 뜻밖에 엄청난 재물을 얻게 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가 있다. 우리들은 누구라도 횡재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꿈꾼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로또 복권을 사들고 허망한 꿈을 꾸곤 한다. 그러나 그런 꿈들은 거의 잘 맞지 않는다. 미국의 여성 방송앵커가 수억달러에 해당하는 로또가 맞을 확률은 상어에 물렸는데 번개를 맞아 죽을 확률이라고 조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상어에 물릴 확률도 수백만 분의 1이 안 될 터이고 번개에 맞을 확률도 수백만 분의 1이 안 될 터인데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날 확률은 거의 0(zero)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국가들이 로또에 해당하는 횡재를 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지난해 12월 하순 미국을 방문했던 어느 날 서점에서 미국이 횡재를 했다는 책을 발견하고 그 책을 정말 흥미 있게 읽었다. 이 글은 횡재라는 책의 내용을 필자가 그동안 연구하던 미국의 국제정치적 위상, 미국 패권의 지속성 여부라는 국제정치학적 이슈로서 해설하고 소개하는 글이다.
   
   
하버드대학 케네디 행정대학원 교수인 여류 정치학자 메간 오설리반(Meghan OSullivan) 박사의 원서명은 ‘Windfall: How the new Energy Abundance Upends Global Politics and Strengthens American Power’이니 우리말로 번역하면 ‘횡재: 새로운 에너지의 풍요로움은 지구 정치를 어떻게 뒤집어놓았고 미국을 강력하게 만들었나?’이다. 미국이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함으로써 횡재 수준의 덕을 보게 되었고, 이는 미국의 힘을 강력하게 만들었으며 세계 정치를 완전히 뒤바꾸게 되었다는 내용의 책이다. 비슷한 내용을 다룬 책이 이미 한두 권이 아니지만 석유에너지가 미국에 ‘횡재’ 수준의 이득이 되고 국제정치를 통째로 바꾸어놓게 되었다는 강한 제목의 책은 오설리반 박사의 책이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2014년 하반기 이후 여러 편의 논문과 다수의 강연을 통해 미국의 에너지혁명이 미국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세계 유일 패권국으로 남게 할 것이며, 우리나라 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중국이 곧 세계 패권국이 되리라는 믿음은 그 근거가 척박한 것일 뿐 아니라 반미주의자, 그리고 반미주의자들의 대부분일 것이 분명한 친중 주의자들의 허망한 이념적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말해왔었다.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 2012 1~2월호는 시대별로 국제정치적으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주제들이 변하기 마련이라고 말하면서 10여년 전에 가장 많이 이야기되던 주제는 ‘반테러전쟁(Anti-Terror Warfare), 그 다음으로 2000년대 초반 10년 동안 가장 많이 이야기된 이슈는 ‘중국의 부상(Rise of China)’이었는데 앞으로 국제정치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미국의 에너지붐(American Energy Boom)’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미 미국의 에너지붐이 국제정치의 최대 화두가 된 지도 7년이 지났고 2014년 여름 이후 포린폴리시의 예측이 실제로 국제정치 현상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국제정치적 화두가 ‘중국의 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고 답답하다. 특히 국제정치에 의해 국가의 운명이 압도적으로 영향을 받는 한국 사람들이 국제정치의 변화를 빨리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안타깝고 답답한 일일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로서 미국은 확실히 재수가 좋은 나라인 것 같다. 개인으로 치면 로또에 해당하는 경험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당하고 있는 나라이니 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미국은 1803년 프랑스로부터 거의 헐값에 당시 미국 영토 넓이만큼 광대한 영토를 구입했다. 루이지애나 매입이라고 불리는 이 로또와 같은 사건은 미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2147000㎢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달러에 사들였던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했던 구매’ 중 하나다. 미국이 구입한 루이지애나 영토는 남북한의 약 10배에 해당하는 땅이었고 2016년 달러화로 계산하면 25000만달러에 해당하는 돈이다. 2018년도 미국 국방예산이 7000억달러니까 그 방대한 영토를 구입하는 데 지불한 돈은 미국이 2018년 기준 약 3시간8분 동안 사용하는 국방비에 불과한 돈이다.
   
   
아마도 미국이 당첨된 두 번째 로또는 1867년의 알래스카 구입일 것이다. 그해 3 30일 당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윌리엄 시워드 국무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구입하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많은 미국 정치가들이 이 사건을 시워드의 멍청한 짓(Sewards Folly)이라고 말하지만 멍청한 것들은 시워드가 아니라 ‘거대한 냉장고를 뭣하러 사느냐’며 난리쳤던 정치가들이다. 알래스카는 약 152만㎢로 남북한 전체면적의 거의 7배에 이르는 땅이며 오늘 미국 영토의 약 7분의 1에 이르는 광대한 땅이다. 그 땅값이 당시 돈으로 720만달러, 2016년 화폐 가치기준 18억달러라 하니 결국 2018년도 미국 국방비 22시간30분어치 정도 된다. 현재 가치로 단 하루치 국방비도 안 되는 돈으로 미국은 거대한 냉장고를 한 대 샀고, 그것은 엄청난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미국이 또다시 횡재를 맞이했다. 이미 세계 1위의 패권국으로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 풍요한 삶을 살고 있는 미국이 또다시 횡재를 당한 것은 2014년 이후 그 분명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 셰일석유와 셰일가스 채굴을 통해서이다. 에너지는 그동안 수많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을 정도로 국가들의 사활을 가늠하는 변수다. 1차 대전, 2차 대전 등 대규모 세계대전 모두가 에너지 장악을 위한 강대국들의 혈투였다. 1970년대 초반 이후 미국이 가장 큰 신경을 쓴 지역이 중동이었다. 중동지역의 석유가 미국에 적대적인 세력에 의해 장악되는 경우 그것은 미국의 생명마저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다.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유약한 대통령 중 하나로 인식되는 카터조차 중동의 석유가 어느 일국에 장악되어 그 흐름이 원활치 못하게 되는 것은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침해당하는 것이며 이 같은 상황의 도래를 막기 위해 미국은 언제라도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정책을 천명했다. 소위 카터 독트린은 이후 미국이 중동에서 치른 모든 전쟁의 개전사유(開戰事由)가 되었다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한국은 중동으로부터 울산 혹은 광양만에 이르는 긴 해로를 유조선들이 꼬리를 물고 오가면서 석유를 끊임없이 날라다주지 않으면 그날로 죽어버릴 운명에 있다. 일본도 중국도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국제정치학자들은 석유를 수입해 오는 바닷길을 생명선(Life Line)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에너지혁명은 미국이 더 이상 에너지 걱정을 하고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도래케 했다.
   
   
한국인은 잘 모르지만 2004년 텍사스의 중소기업 석유회사 회장인 조지 미첼(George Mitchell)에 의해 개발된 프래킹(Fracking) 공법은 미국 본토 전역에 거의 무진장 널려 있는 셰일가스 혹은 셰일석유를 중동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훨씬 싼값에 채굴할 수 있게 하였다. 지질학자인 아들의 반대도 물리치고 추구했던 집요한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미국 전역 상당 부분이 5억년 전에는 바다였다. 바다였던 곳은 지금 미국 지표면에서 약 3000m 정도 깊은 곳이 두께는 얇지만 그 넓이가 방대한 암반층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암반을 셰일(Shale)이라 부른다. 한국어로는 혈암 또는 이판암이라고 한다. 5억년 전 바다였던 그 바위 속에는 분명히 물고기 등 수많은 동물의 시체가 화학변화를 일으켜 석유화되어 있으리라는 사실을 지질학자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캐낼 기술이 있느냐의 여부였고, 캐내더라도 중동석유를 사오는 것과 비교해서 채산성이 맞느냐의 여부였다.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젤리에노플의 셰일가스 굴착기. photo 뉴시스

 

   “횡재가 아니라 기업가 정신” 

   오설리반 박사는 미국의 석유혁명을 횡재라고 칭하고 있지만 미국의 석유업자들 또는 경영분석가, 정치학자 등등 미국의 셰일혁명을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이를 ‘횡재’가 아니라 ‘미국 기업가 정신(American Entrepreneurship)’의 승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기업가 정신의 승리는 횡재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를 너무 많이 포함하고 있다. 미국 전역에 방대하게 분포된 셰일이 모든 나라에 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셰일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얼마나 많기에 횡재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인가? 아직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조차 모르는데 또 다른 석유 전문가인 스티븐 무어(Stephen Moore)와 케이틀린 화이트(Kathleen H. White)는 “미국은 지구 어느 나라보다 훨씬 많은 ‘채굴 가능’한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러시아, 중국, 그리고 OPEC 국가들 모두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유명한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Joseph Nye) 교수가 했던 말로 다시 인용한다면 “미국은 앞으로 적어도 200년을 쓸 수 있는 석유와 100년을 쓸 수 있는 천연가스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조달러 정도 된다고 하니 2018년 미국 국방비 기준 715개월치가 된다. 루이지애나 구입비가 국방비 3시간8분어치, 알래스카 구입비가 올해 미국 국방비 하루치가 채 못 된다고 계산했던 것에 비하면 경악할 만한 로또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언젠가 미국 사람들에게 석유 이야기를 하며 “당신네들은 재수도 좋다”고 말했더니 미국 사람들 대답은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것인데 그러느냐”였다. 이번 석유혁명은 미국의 석유업자들의 일면 허망한 꿈의 집요한 추구 결과 이룩된 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오설리반 박사의 부제처럼 미국의 석유혁명은 지구정치(Global Politics)를 뒤집어놓았다. 그리고 미국을 다시 막강하게 만들었다. 식량과 에너지 두 가지를 다 자급할 수 있는 최초의 대제국이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몇 년 전 육군대장 출신이자 경제학 박사인 웨슬리 클라크(Wesley Clark) 2014년 가을 간행된 ‘다음 전쟁은 없다’라는 책에서 미국은 에너지 혁명(자급)을 통해 너무나 앞서 나가기 때문에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나라가 없으며 그렇기에 다음번 전쟁을 기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잠재적 도전국은 중국인데, 그리고 2008년 월가에서 발생한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몰락할 것이 분명하고 차세대 패권국은 중국이라는 설에 가슴 부풀었던 나라가 중국이었는데 미국의 석유혁명은 이 모든 것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미국의 셰일혁명이 대박을 터뜨린 곳은 노스다코타주의 베켄(Bakken)셰일인데 베켄셰일을 처음 시추한 날이 바로 월가가 붕괴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 베켄셰일을 시추한 미국의 프래커(셰일석유 시추꾼들을 프래커라고 부른다)들은 뉴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고 자기들의 시추가 대박을 불러올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세월이 지난 후 미국 사람들은 “(월스트리트가) 망하는 그날 바로 미국은 (베켄셰일에서) 부흥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노스다코타 지하의 베켄셰일은 넓이가 26000㎢에 이르는, 즉 대한민국 면적의 4분의 1이 넘는 것으로 미국 경제는 물론 노스다코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10%로 만든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 말기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 초기 미국의 경제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잘나가고 있다. 오바마도 트럼프도 모두 자신이 잘해서라고 말하지만 미국 경제가 대단히 양호한 배경에는 셰일혁명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다만 환경문제 등으로 셰일석유 개발에 어깃장을 놓았던 오바마보다는 셰일석유 채굴을 지지했던 트럼프가 그 공을 가지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르겠다.   


   
미국의 석유혁명과 국제정치

      석유가 충분해진 미국은 석유로 인한 국제정치적 이익을 톡톡히 보기 시작했다. 중동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은 지난 30년 이상 항공모함 두 척을 중동에 상시 배치하는 등 매년 약 3000억달러에 이르는 돈을 석유 확보에 쏟아부었다. 석유를 지키기 위한 돈 3000억달러에 석유를 사오는 데 드는 돈도 수천억달러가 되었다. 셰일석유 혁명은 미국이 석유 때문에 내던 적자를 일거에 해결해주게 되었다.
   
   
미국은 그동안 만약에 대비한다며 중동에서 석유를 사다가 루이지애나와 텍사스의 동굴 속에 비축해 두던 나라다. 소위 전략비축유란 것인데 석유가 모자라서 애를 태우던 수많은 나라들로부터 손가락질받던 행동이었다. 이제 미국은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이제 미군들은 더 이상 땀띠 돋는 중동에 가서 전쟁을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러니 중동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다. 그래서 미국은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자제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용감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해 12월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선언한 것이 그 한 예일 뿐이다.
   
   
미국의 석유혁명 때문에 애가 타는 나라들은 석유 값으로 지구정치를 좌우했던 나라들이다. 미국의 석유혁명 때문에 망조가 든 대표적인 나라는 러시아와 베네수엘라이다. 미국은 냉전시대 소련을 붕괴시키기 위해 국제유가를 가지고 장난질을 쳤었다. 석유 가격이 오를 때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다그쳐서 석유 증산을 독려했고, 그 결과 석유가격의 하락을 초래하게 했고 그럼으로써 소련의 수입을 줄이도록 했었다. 석유가 모자랄 때도 그런 일을 감행했던 미국이 이제 석유를 벌컥벌컥 마셔야 하는 중국을 가지고 놀기는 얼마나 쉬운 일일까?
   
   
기왕의 지구정치가 뒤바뀌는(upend) 상황이 성큼 도래했다. 우리는 아직도 국제정치의 최대 화두가 ‘중국의 부상’인 줄 알고 있는데 미국의 에너지붐이 국제정치의 최대 화두가 되었고 그것이 노골적으로 현실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미국은 21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패권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기본 자료들을 확보해버렸다. 게다가 21세기 패권의 인공적인 요소인 4차 혁명을 주도하는 것도 미국이다.
   
   
우리나라는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수입하는 파이프라인 건설 운운하며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통해 원자력발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의를 벌이고 있다. 미국도 곧 천연가스를 수출할 나라가 될 터인데, 일본은 미국의 천연가스를 수입한다고 한다. 어떤 편이 더 합리적인 결정인지를 잘 생각해 보자. 국제정치의 변화에 둔감했을 때마다 나라가 흔들거리며 무너질 뻔했던 우리가 이번에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2011년 국제정치의 최대 화두가 미국의 에너지붐이 될 것을 예측했던 포린폴리시의 올해 1 8일자 인터넷판에 올라 있는 논문 중 하나의 제목은 유명한 전략가 러트 왁 박사가 작성한 것으로 ‘Its Time to Bomb North Korea(북한을 폭격해야 할 때)’로 되어 있다.

출처주간조선 2492   이춘근 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2018.02.18  ‘왕따’ 신세 미 국무부 수장

트럼프는 면박, 외국선 무시, 조직은 뒤숭숭 … 틸러슨 굴욕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지난해 12 18(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국무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과의 오찬 회담 뒤 기습 질문을 받았다. 한 기자가 “내년 1월로 유효한 사표를 이미 제출했는가”라고 묻자 “어처구니없다(ridiculous)”고 말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틸러슨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러면서 다시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고 중얼거렸다. 17일 전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방미 중인 파예즈 사라지 리비아 총리와의 회담 직전에 한 기자가 “백악관 일부 인사가 당신이 사임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틸러슨은 두 번이나 “터무니없다(laughable)”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외국의 정상과 카운터파트를 안방으로 불러들인 미 외교 수장의 일대 수모다. 11월 말 틸러슨 경질설이 돌면서 빚어진 일들이다
  

북한정세 급박한데 존재감 약한 장관
고위직 100명 떠나고 대사 51곳 비어
관리 능력 도마에 올라 한때 경질설
틀어진 트럼프와 ‘인내 싸움’ 벌일 듯

 

여기에 국무부도 바람 잘 날이 없다. 예산 삭감과 틸러슨의 조직 재편(redesign)으로 직원들의 이직·이반이 심하다. 트럼프의 일방주의 노선에 대한 반발도 강하다. 지난 1일에는 국무부 서열 3위인 토머스 섀넌 정무차관이 사의를 표명했다. 섀넌은 34년간 근무한 베테랑 직업 외교관이다. 틸러슨은 “그가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는 점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미국 최대 석유화학기업 엑손모빌의 최고경영자(CEO) 출신으로 외교 경험이 일천한 틸러슨에게 섀넌은 보물 같은 존재였다. 가뜩이나 차관은 여섯 석 가운데 네 석이 공석이다. 1월에는 주한대사로 내정된 빅터 차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가 낙마했다. 존 필리 파나마 대사도 사직서를 냈다. 각각 트럼프의 대북 정책과 이민 규제 정책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는 보도다
  

펜스 부통령, 매티스 국방 발언에 무게

미 국무부가 기능 부전에 빠졌다. 해체되고 있다는 자조조차 나온다. 당면 과제인 대북 정책에서 틸러슨의 존재감은 엷다. 트럼프의 트윗에 휘둘리기 일쑤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나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언급이 풍향계일 때가 더 많다. 국가안보회의(NSC) 멤버인 세 사람 간 노선 대립이나 영역 싸움 때문이 아니다. 틸러슨과 국무부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좌표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정책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트럼프가 아시아 순방 당시 밝힌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은 국무부 작품이 아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년 전 중국의 해양 진출과 일대일로(一帶一路)를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구상을 백악관이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국무부의 굴욕이다. 2차 세계대전 후 해리 트루먼 행정부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지구촌에 자유 민주주의·무역 체제 구축에 나선 이래 국무부와 국무장관이 이렇게 왜소해진 적은 없었다
  
틸러슨 국무부의 난맥상은 외부 정세 때문이 아니다. 내부에서 비롯됐다. 첫째는 트럼프·틸러슨과의 관계다. 틸러슨은 취임 전 트럼프를 알지 못했다. 입각의 계기는 보이스카우트 커넥션이었다. 보이스카우트 출신인 틸러슨은 2010~12년 미국 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를 지냈다. 당시 연맹 이사인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이 트럼프 당선 후 틸러슨을 국무장관으로 추천했다. 당초 트럼프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인 존 볼턴 전 유엔 대사나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미 시사주간지 뉴요커). 트럼프·틸러슨 관계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인사·정책·개인적 감정이 얽히고설켰다. 틸러슨의 첫 좌절은 인사에서 시작됐다. 취임 직후 엘리엇 에이브럼스 전 국무부 차관보를 부장관으로 택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에이브럼스가 대선 기간 트럼프를 비난하는 칼럼을 썼다는 이유였다
  
NBC
방송이 10월에 뒤늦게 폭로한 7월 상황은 차라리 한편의 코미디다. 틸러슨이 그달 20일 국방부 안보관계회의 후 사적 대화에서 트럼프를 멍청이(moron)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틸러슨은 그 나흘 후 트럼프의 보이스카우트 잼버리 대회 연설에도 격노했다. 트럼프는 청소년들 앞에서 워싱턴 정가와 주류 언론, 야당을 비난했다. 틸러슨에게 보이스카우트는 오늘날의 자신을 만든 원점이다. 트럼프 연설 당시 아들 결혼식 참석차 고향인 텍사스에 머물던 틸러슨은 워싱턴으로 복귀하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펜스·매티스의 만류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때 두 사람 간 감정의 골이 결정적으로 깊어졌다고 한다
  

안보관계회의서 “트럼프는 멍청이”

10월은 둘 간에 긴장의 나날이었다. 대북 정책을 둘러싼 파열음도 흘러나왔다. 트럼프는 1일 트위터 글에서 “‘리틀 로켓맨(김정은)’과 협상을 시도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틸러슨을 비꼬았다. 전날 중국을 방문한 틸러슨이 “북한과 대화할 수 있고 대화한다”고 한 직후였다. 대통령의 공개 면박으로 틸러슨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됐다. 12월에도 같은 상황이 재연됐다. 틸러슨은 12일 “전제조건 없이 기꺼이 북한과 첫 만남을 하겠다”고 말했다. 백악관은 곧바로 “북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견해는 바뀌지 않았다”고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다음날 백악관 입장을 부연했다. “북한에 압력을 최대한 높이는 것을 포함해 미·일 정상 간 생각은 100% 일치한다”고 했다. 동맹국 정부 대변인이 상대 외교 수장을 투명인간으로 취급한 셈이다
  
여기에는 틸러슨의 관리형 업무 스타일이 한몫한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책이 아닌 조직 재편에 두고 있다. 그는 9월 “국무부를 보다 효율적인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재임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조직 슬림화는 불가피하다. 2018년 회계연도(2017 10~2018 9) 국무부 예산은 전년 대비 31% 삭감됐다. 틸러슨은 올 10월까지 국무부 직원 2000명을 감축할 계획이다. 그렇다 해도 본연의 외교가 뒷전으로 밀린데 대한 미국 조야의 비판은 거세다. 18세기 말 토마스 제퍼슨 초대 국무장관 이래 국무부는 미 외교 안보의 중심축이었다. 틸러슨은 주요 외교정책 연설을 한 적도 없다. 지난해 9월에는 이란 핵 합의 당사국 외무장관 회의 도중 향후 이란과의 관계에 대해 “나는 모른다. 나는 외교관이 아니다”고 해 구설에 올랐다. 지난해 10월까지 틸러슨의 해외 순방은 같은 기간 오바마 행정부의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국무장관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틸러슨의 관리 능력이 평가받는 것도 아니다. 조직 재편 과정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직원들의 이직은 위험 수준이다. 지난해 10월까지 고위 외교관 100명이 국무부를 떠났다. 국방부로 치면 4성 장군 60%가 전역한 비율이라 한다. “틸러슨이 미 역사상 최악의 가장 파괴적인 국무장관”이라는 전직 국무부 직원의 혹평이 나왔다. 반면 주요 직책은 채워지지 않고 있다. 지난 13일 현재 국제기구를 포함한 대사직 183(대사 교환하지 않는 5개국 제외) 가운데 35곳이 공석이다(미 외교협회). 16곳은 지명은 했지만, 상원 인준을 받아야 한다. 정권 출범 1년이 넘었는데도 51개 대사직이 비었다. 북핵 정책 라인은 주한대사를 새로 지명해야 한다. 군축·국제안보 담당 차관과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후보가 지명됐지만, 인준 절차가 남아 있다. 23개 차관보도 공석이나 대행 체제가 적잖다. 고위직 공석은 업무 공백을 부르고 있다. 전례 없는 악순환이다
  

러시아와 내통 의혹 트럼프, 경질은 부담

향후 관심은 틸러슨이 언제까지 자리를 지킬지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올 2~3월 경질에 무게가 실렸다. 후임으론 마이크 폼페오 중앙정보국(CIA) 국장, 니키 헤일리 유엔대사가 거명됐다. 일본서도 그런 관측이 강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사임을 밀어붙이지 않고 있다. 대선 기간 러시아와의 내통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에 국무장관 경질은 큰 부담이다. 틸러슨도 스스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로 알려진 그는 자존심이 강하다. 창피는 겪을 대로 겪었다.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당분간 ‘인내 싸움’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적잖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새해 들어 기류가 바뀌었다. 틸러슨 경질설은 잦아들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미국 NSC 내 역학 관계는 곧 국제 정치다. 누가 대통령의 귀를 잡을지, 정책을 주도할지는 초미의 관심사다. 2003년 아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개전 과정은 좋은 사례다.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의 강경파 네오콘이 현실주의 노선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압도했다. 지금 국무부는 만신창이이고, 장관은 NSC의 아웃사이더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반석(磐石)이고, 현역 육군 중장인 허버트 맥매스터 안보보좌관의 입김은 커지는 추세다. 예측 불능은 트럼프의 DNA. 평창올림픽 와중에 미국의 대북 정책이 어떻게 가닥을 잡을지 NSC 내부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주목된다.

오영환   군사안보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hwasan@joongang.co.kr 

 

■ 조덕현 칼럼니스트의 미국 이야기

경북 영덕 출생. 해군사관학교(공학사), 고려대학교 사학과(문학사), 고려대학교대학원 서양사학과(문학석사), 美오하이오주립대 역사학과(문학박사, 군사사 전공)

해군사관학교교수로서 해전사와 전쟁사를, 美해군사관학교 교환교수로서 미국해군사(American Naval History), 한국사(Korean History)를 강의했으며, 교환교수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유공훈장을 수상하였다

 

□ 2015-06-08  알래스카 이야기

링컨과 스워드라는 이름의 거울

The Mirror Named as Lincoln and Seward

▲미국 역사상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진정한 파트너십을 발휘한 두 정치인 링컨과 스워드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자신의 얼굴을 육안으로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있다구요? 어떻게? 

 

우리가 지금까지 본 자신의 얼굴은 거울을 통해서 반사되어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울 속에 비쳐있는 얼굴을 우리 눈으로 보아 온 셈이지요. 자신의 육안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신체의 부위는 자신의 팔과 신체의 앞부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돌린다면 뒷부분을 일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얼굴은 육안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눈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상대방의 모습이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150년 전을 살았던 미국의 두 정치인의 삶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을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알래스카를 여행하면서 가끔 눈에 띄는 단어는 ‘스워드(Seward)’입니다. ‘스워드’라는 이름의 항구도시가 있고, ‘스워드 하이웨이(Seward Highway)’라는 고속도로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알래스카 주 사람들은 스워드라는 이름에 고개를 숙이고 그 이름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나아가 후손들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을까요? 알래스카는 미국 정부가 1867년 3월 30일 제정 러시아로부터 720만 달러를 주고 사들인 땅입니다. 1에이커에 2센트를 주었으니, 우리가 사용하는 평수로 환산한다면 1,200평에 2원을 준 셈입니다. 그러나 148년 전의 달러가치로 환산했을 때, 이 돈은 미국정부가 부담하기에는 적지 않은 액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정치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알래스카 매입을 주도한 사람은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였습니다. 당시에는 미국이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65) 직후에 남부의 산업화와 서부 개발이 우선 순위에서 먼저였기 때문에 거액을 지불하고 알래스카를 구입하겠다는 스워드의 제의에 대해 미국 의회와 언론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먼 미래를 내다보며 알래스카의 전략적 가치를 예견했던 스워드 장관은 사면초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구입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결국 스워드 장관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구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 의회와 언론은 스워드가 사들인 알래스카를 ‘스워드의 무용지물(Sewards Folly)이라고 조롱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앤드류 존슨의 이름을 따서 ‘앤드류 존슨의 북극 별장(Andrew Johnsons Polar Bear Garden)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자원을 공급하는 원료 공급기지로 부각되면서 미국 국민들은 알래스카가 단순한 미국의 영토를 넘어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알래스카를 구입할 당시 스워드 장관은 핵무기나 핵잠수함 시대를 예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알래스카를 매입한 덕분에 1세기가 지난 후 미국은 태평양을 누비며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에 바탕을 둔 세계전략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래스카 사람들은 스워드 국무장관의 혜안이 없었더라면, 알래스카는 러시아의 영토로 남아 냉전시대에 수천 기의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해 배치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알래스카 사람들에게 스워드는 미국 역사상 한 인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본토에서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든다면 워싱턴, 링컨, 케네디, 레이건 대통령을 꼽지만, 알래스카에서는 스워드 장관이 1위에 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냉전시대에 러시아는 선조들의 무지로 인해 1867년 3월 30일에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 일을 두고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바보짓을 한 것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영토가 워낙 넓어 자기 땅도 관리를 다 하기 힘든 상황인데, 바다 건너에 있는 땅을 팔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러시아 사람들은 상식적인 판단을 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러시아 사람들의 무지보다는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던 스워드 한 사람의 역사의식과 혜안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

 

한 가정에서 가장이 역사의식이 없으면 그 가정만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사회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한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역사의식 없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면 그 국가 전체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스워드 국무장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인구 2,700명의 항구 도시 스워드 

 

이제 알래스카를 상징하는 깃발에 얽힌 이야기를 해 볼까요? 알래스카의 주 깃발은 1927년, 당시 알래스카 주에서 7~1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이디어를 공모하여 7학년 벤손(Benny Benson)이 만든 것이 선정되었습니다. 주 정부에서는 벤손에게 상금 1,000 달러와 함께 워싱턴 D.C.까지 여행할 수 있는 왕복 항공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항구 도시 스워드 근처에 1.4 마일에 이르는 벤손 기념도로(Benny Benson Memorial)를 만들었습니다.

 

알래스카 주의 깃발은 북두칠성과 북극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두칠성은 미국 본토를 의미하며 북극성은 알래스카 주를 뜻하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본토로부터 먼 거리에 떨어져 있지만, 언젠가 알래스카가 미국의 주에 정식으로 편입되기를 바라는 벤손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벤손이 만든 깃발은 1927년 7월 9일에 정식으로 알래스카 주 깃발로 채택되었습니다.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구입한 때가 1867년이었는데, 미국의 정식 주에 편입된 것은 벤손이 깃발을 만든 지 32년이 지난 후인 1959년이었습니다. 알래스카가 드디어 미국의 49번째 주가 된 것이지요.

 

미국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주는 어느 주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텍사스 주로 알고 계실 것입니다. 텍사스 주는 미국 전체 면적(9,826,675km²)의 7%(696,241km²)에 해당하는 넓은 주입니다. 하지만 알래스카 주는 전체 면적의 17.5%(1,717,856km²)에 해당하는 면적이 가장 넓은 주입니다. 인구는 2014년 12월 기준으로 736,732명입니다. 

 

▲벤손이 1927년도에 제작하여 알래스카 주 깃발 공모에 당선된 작품

 

▲1927 7 9일에 공식적으로 채택한 알래스카 주 깃발 

 

▲항구도시 스워드 근처에 위치한 벤손 기념도로

 

▲미국 전체 면적에서 알래스카 주는 17.5%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자, 이 정도 되면 스워드라는 인물의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스워드는 앤드류 존슨 대통령 당시 국무장관으로서 알래스카 매입을 추진했지만, 그를 처음으로 국무장관에 임명한 사람은 바로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스워드와 링컨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경쟁자였습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당연히 링컨이 이겼지요.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으니까요. 스워드는 사실 링컨보다 훨씬 화려한 경력을 지닌 정치인이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뉴욕 주지사와 연방 상원의원에 각각 두 번씩이나 당선되었으며, 젊은 변호사 시절부터 급진적일만큼 흑인인권 보호에 적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지명도에서 앞서 있던 스워드에게 시골 출신의 링컨이 도전장을 던졌던 것입니다. 당시 여론은 스워드가 쉽게 경선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스워드는 링컨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승리를 장담했던 스워드가 패배했을 당시 느꼈을 상실감과 자괴감은 굳이 스워드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선에서 패한 스워드는 패배를 깨끗하게 시인하고 링컨의 당선을 축하한 후, 다음 날부터 미국 전역을 돌며 경쟁 상대였던 링컨 지원 유세에 앞장섰습니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링컨은 스워드를 국무장관에 임명하였습니다.

 

스워드는 국무장관으로서 링컨 정부의 남북전쟁 수행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대통령으로 손색이 없었던 두 정치인이 서로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진정한 파트너십을 발휘하여 혼란기의 내각을 이끌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워드와 링컨 두 정치인이 후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는 자신보다 화려한 정치적 경력을 지닌 경쟁자를 국무장관으로 발탁할 수 있었던 링컨의 포용력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포용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국무장관으로서 충실하게 봉사했던 스워드의 겸손한 자세와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penetrating eye)’ 때문일 것입니다.

 

패배를 깨끗하게 시인하고 승자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준 후, 다음 날부터 경쟁자였던 링컨을 지지하기 위한 연설을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7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이런 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찾은 답은 미국에서 어릴 적부터 강조하는 스포츠가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스포츠를 통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스포츠맨십입니다. 심판의 판정이 경우에 따라서는 불만이 있더라도 승복하며 패자를 위로해 주고 승자를 축하할 수 있는 마음이 어릴 적부터 기반을 다져 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박지성 선수가 국가 간의 대항 경기인 A매치 경기에서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우리가 진 경기가 있었습니다. 이때 모든 언론에서는 심판을 질타하였습니다. 그런데 박지성 선수가 소속팀인 맨유로 떠나면서 의미있는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Bad calls are also a part of the game.)

 

▲랜돌프 로저스가(Randolph Rogers) 1876년에 완성하여 New York 시에 세운 스워드 동상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0년대에는 우리나라에 ‘서구화(westernization)’의 물결이 서구로부터 흘러들어 왔습니다. 당시 주변 강대국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였습니다. 100년이 지난 2015년 현재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물결이 거세게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흥미있는 점은 주변 열강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고 있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안보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우리만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시간만 나면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만약 북한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3군 중에서 해군이 가장 먼저 나가서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불바다도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우습게 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우리의 선조들이 오늘 나타나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대하는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많~~이 놀라실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우리만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적 자원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던 나라. 인구는 2,500만 명에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 밖에 되지 않았던 나라. 아시아 최빈국은 물론 배부름보다는 굶주림이 일상이었던 나라. 희망보다는 절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던 나라. 국가 재건은 커녕 외국 원조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나라. 이 불행했던 나라가 바로 한국전쟁 직후의 대한민국이었습니다. 하지만 6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놀랄만한 일을 해냈습니다. 인구 5,100만 명에 1인당 국민소득은 28,000달러이니 인구가 2배 늘어날 동안 국민소득은 350배 이상 증가한 셈입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나라로 변모한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하지만 요즘, 저는 전쟁사와 전략을 전공한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며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일을 예측하기 힘든 국제정세나 안보상황이 마치 화마(火魔)가 바람을 타고 달려와 시간이 지나면 집을 삼켜 버릴 것 같은 위기의 상황인데, 집안에서 서로 누가 잘못했는지를 두고 싸우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의 정치 현실이 그렇습니다. 눈앞에 있는 보궐선거나 총선, 대선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 아니라, 링컨과 스워드처럼 눈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할 줄 아는, 100년을 내다볼 줄 아는 큰 정치인이 우리 시대에는 정녕 없다는 말입니까?

 

경제는 발전했지만 아직까지 여러 분야에서 미숙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 우리에게 링컨과 스워드 두 사람의 삶은 많은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한 문장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은 누군가를 따른다.(Everyone follows someone.)”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여러분은 누구를 따르며 살아오셨습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을 따르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따라 미국의 위기 상황을 지혜롭게 이끌어 온 두 정치인의 삶이 무게 있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은 링컨과 스워드라는 이름의 거울을 통해 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 2016.01.07 "배를 포기하지 말라(Don't give up the ship)"의 진정한 의미는?

Dont give up the ship

▲F/A-18 Hornet 기가 핵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 함(USS Ronald Reagon CVN-76)으로부터 힘차게 이륙하고 있다.

 

2016병신년(丙申年새해아침이 밝았습니다어제 떠 오른 해와 오늘 떠 오른 해가 같은데 왜 어제는 2015 12 31다음 날은 2016 1 1일로 부를까요우리가 살아가면서 초--시간--년이라는 시간의 구분이 없다면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지 못하고 무미건조하게 살 것입니다이렇게 시간을 구분해 놓은 것은 그때마다 지나 온 시간을 정리하며 새로운 해를 맞이하라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오늘은 지금으로부터 203년 전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한 전투를 통해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1813 6 1보스턴 항에서 미국해군과 영국해군 간의 전투가 있었습니다이때는 범선시대였기 때문에 함정과 함정 간의 1:1 전투라고 할 수 있지요함포를 주고받다가 치명타를 입게 된 함정이 침몰하면 전투가 끝나곤 했습니다이때 미국해군 체서피크 함(USS Chesapeake)과 영국해군 셰넌 함(HMS Shannon)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USS HMS가 무엇인지 궁금하시죠해군함정은 그 나라 항구를 떠나는 순간 그 국가를 대표하기 때문에 미국해군의 의미인 USN(US Navy)이 아니라미국의 함정(United States Ship)이란 의미에서 USS라고 표기합니다그리고 HMS는 로 영국해군의 함정이 아니라영국왕의 배(His/Her Majestys Ship)란 의미입니다.

 

체서피크 함의 함장은 제임스 로렌스(James Lawrence) 대령이었습니다. 203년 전의 전투인데 놀랍게도 발사탄수 기록을 남겨 두었습니다미국함정이 362영국함정이 268발을 맞았는데결국 체서피크 함이 침몰하기 전에 로렌스 함장이 부하들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마지막 명령을 내렸습니다.

 

 Dont give up the ship. Fight her till she sinks.(배를 포기하지 말라침몰할 때까지 싸우라.)

 

 이 전투 후에 로렌스 대령의 친구이자 전우였던 페리(Oliver Hazard Perry) 대령은 푸른색 바탕에 흰색으로 Dont give up the ship을 새겨 기함이었던 그의 배에 게양하여1813 9, Lake Erie 전투에서 영국해군과 싸워 승리하였습니다미국해군에서는 침몰하면서도 배를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싸웠던 로렌스 대령을 포함한 체서피크 함 장병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페리 대령이 전투 중에 사용하였던 깃발은 美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하고축소한 모형은 생도사 2층에 깃발 형태로 전시해 두고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해전 당시 체서피크 함의 함장이었던 제임스 로렌스 대령은 31세였다.

 

▲함포를 주고받으며 필사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체서피크 함(좌)과 셰넌 함(우).  

 

▲美해군사관학교 생도사 2층에 전시된 ‘Don't give up the ship’. 안내자가 방문객들에게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저는 생도들에게 미국해군사(American Naval History) 강의를 시대별 상황에 맞추어 준비하면서 당시의 전투 상황을 어떻게 하면 생도들에게 더 의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생각한 끝에 나무에 직접 새겨서 강의 시간에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새겼습니다.

 

 저는 강의 시간에 보여주며 여러분이 매일 보고 있는 이 문구에서 ship이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더니어떤 생도는 배 외에 다른 의미가 또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제가 생각하기에 해군장교에게는 해군함정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병원의 의사들에게는 환자가 될 수도 있겠지요그리고 교장님이나 교수님들에게는 생도 여러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앞으로 여러분은 이 문구를 보면서 ship의 다른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라고 제출할 필요는 없는 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생도들에게 강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필자가 포퓰러 나무에 새긴 ‘Don’t give up the ship’

 

그리고 두 번째 학기부터는 생도들에게 기말고사 2주 전에 보너스 문제를 제시하였습니다. “‘DGUTS 약자가 Dont give up the ship외에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What does DGUTS stand for except Dont give up the ship?)라고생도들은 모두들 다양한 답을 제시하였습니다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Do good under the sun.(해 아래서 착한 일을 하라.)

Do give us traffic score.(점수 잘 주세요.)

Dont give us terrible score.(나쁜 점수는 주지 마세요.)

Doughnuts give us thinking skills.(도너츠가 사고의 틀을 다양하게 해 준다.)

Dasies grow under the shade.(데이지는 음지에서 자란다데이지의 꽃말이 평화인데결국 “‘평화라는 꽃은 음지에서 자란다.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긴 표현입니다.)

Do GIANT understand the small?(거인이 소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거인은 소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재치 있는 의미입니다.)

Duk gave us the stars.(조 교수님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주셨습니다저의 이름이Duk이었습니다약간은 아부성이 있는 답이긴 했지만저는 기분이 좋아서 101점과 함께 A+를 주었습니다이 생도는 제 강의시간에 공부를 제일 열심히잘하는 생도였습니다.)

Diversity gives us the strength.(다양성이 곧 힘이다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생도들의 다양한 답들을 보면서 제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저는 생도들이 쓴 답을 역사학과 교수님들께 회람해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답을 1번부터 10번까지 순위를 정해 달라고 해서 의견을 수렴한 결과 가장 많은 점수를 받은 생도에게 DGUTS를 새겨서 강의 시간에 선물로 전달하였습니다그래서 저는 저를 포함한9명으로 구성된 DGUTS CLUB을 결성하였습니다저는 8명의 회원들에게 올 한해를 지나면서 DGUTS가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매년 12월 중순까지 그 의미를 메일로 보내면 제가 생각한 것을 포함해서 9명의 생각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나름대로 의미있는 클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승조원들에게 잘 해주라.’는 의미의 답을 쓴 Inglis 생도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있는 필자. ‘thy’는 소유격 ‘your’의 고어이다.

 

이제 편지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2016년 새해를 열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덕담은 바로 Dont give up the ship입니다로렌스 대령은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2년 동안 美해사 생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한 것은 생도들이 생활을 하면서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에게 스스로 Dont give up the ship을 되새기며 극복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의 삶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저는 편지 서두에서 ship의 의미를 해군장교에게는 함정의 의미가 있지만의사들에게는 환자들, 교수님들에게는 생도들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분은 많은 계획들을 세웠을 것입니다계획을 세우는데 그치지 말고 하나씩 실천함으로써 보다 더 성숙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2016.03.17 세월이 지나서 나무가 먹어버린 자전거

조금 안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A little knowledge is a dangerous thing
 

 

신기한 사진입니다. 아마도 환경을 사랑하는 분들이 이 사진을 보셨다면 “아니, 어떤 사람이 나무가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도록 자전거를 방치한거야?, 자전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보았다면 “자전거가 너무 아프겠어. 어른들은 나빠!”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을 본 소감이 어떠하셨습니까

이 나무와 자전거는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배션 섬(Vashon Island)에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나무가 먹어버린 자전거(Bicycle Eaten by Tree)’로 부르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아빠가 아들이 전쟁이 끝나도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되자 사랑하는 아들이 어릴 적에 타고 놀았던 자전거를 나무 곁에 세워 두었는데 세월이 지나 마치 나무가 자전거를 먹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워싱턴 주 King County에 위치한 배션 섬(Bashon Island). 시애틀에서 유람선으로 22분 거리에 있다.

 

▲매년 열리는 배션 섬 딸기축제(Bashon Island Strawberry Festival)에서 참가자와 관광객들이 축제 분위기에 흠뻑 빠져 있다.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 당시 북군 사령관이었던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은 "나는 평화를 위한 수단 외에는 전쟁을 옹호한 적이 없다.(I have never advocated war except as a means of peace.)"라고 하여 전쟁의 목적은 '평화 유지'임을 역설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삶의 방식과 태도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전공이 군사사이다 보니 이 부분을 더 실감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2016 3 17일 현재, 우리나라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라고 할 수 있지요. 아마도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부모님은 하루도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종이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실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자전거의 주인공 아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빠는 자전거를 볼 때마다 아들의 어렸을 적 모습을 기억해냈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자전거가 있는데 왜 이 아빠는 낡고 보잘 것 없는 이 자전거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자전거에는 사랑하는 아들과의 추억이 서려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이제 위 쪽의 사진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이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느낌이 다르지요? 그래서 저는 “조금 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A little knowledge is a dangerous thing)”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실제의 상황이나 모습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주관적으로 단정하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다시 생각하면 자신이 얼마나 성급하게 판단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성급한 판단을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바로 말하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하나--셋’을 세신 다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어떨까요?

 

아마도 짧은 3초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endurance)......

우리가 살아가면서 듣기에 가장 부담스럽고 실천하기 힘든 덕목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몸에 좋은 약일수록 입에 쓰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 덕 현 Dream

■ 미국 대통령 조각상

L.A.(미국)=뉴시스】김운영 편집위원 = 지난 5일 네이버데이(노동절) 연휴에 미국의 정신을 상징하는 위대한 대통령 4명의 얼굴 조각과 인디언의 영웅 조각이 있는 South Dakota, Black Hills 일대에는 미국도처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코로라도주 인근 덴버 공항은 모든 항공편이 만원이었고 공항청사도 몹시 붐볐다.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South Dakota주 남쪽 고원 지대 Black Hills 에는 미국 건국대통령 조지 워싱턴(초대)과 토머스 제퍼슨(3) 아브라함 링컨(16) 시어도어 루스벨트(26) 4명의 대통령 얼굴 조각이 있는 Mt. Rushmore 가 있다. 이 곳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각을 보기 위해 1년 내내 모여 든다. 대통령들의 얼굴 상은 1927년에 시작 1941년에 완공되었다.

조각이 있는 러시모어 정상은 해발 1,717m 화강암 암봉이고 조각된 얼굴 크기는 18m, 코가 6m, 눈은 3m. 조각가 거츤 보글럼(Gutzon Borglum 18671941)과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17년의 공사 끝에 완공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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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모어국립공원 - 사우스다코타 주와 와이오밍 주에 걸쳐 있는  Black Hills 산악군 속의 러시모어산에는 미국 4명의 대통령 조각상이 있다

 

▲다코다의 침략자

 

 

▲조각상이 있는 블랙 힐스 입구

 

 

▲인디언 추장 크레이 홀스 조각상

 

 

 

▲부시 부자의 동상 - 13. 4.25. 댈러스

 

□ 미국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

 

□ 역대 대통령과 교황

▲1959 12.6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요하네스 23세

 

▲1963.7.2 바티칸 제35대 존 F케네디 - 바오로6세

 

▲1965.10.4 뉴욕 제36대 린든 존슨- 바오로 6세

 

▲1970.9.28 바티칸 제 37대 리처드 닉슨 - 바오로 6세

 

▲1979. 10.6  워싱턴 제39대 지미 카터 - 요한 바오로 2세

 

▲1993. 8.12 미국 제42대 빌 클린턴 -  바오로 2세

 

▲2008.6.13 바티칸 제43대 조지W부시 - 베네딕토16세

 

▲2009.바티칸 버락 오바마 - 베네딕토 1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