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11/ 몽골1/ 칭기즈칸의 길 - 무갈제국 이야기 -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1
지구촌 여행/ 국가별11/ 몽골1/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1
■ 몽골 Mongolia
▲국기
▲징기스 칸
몽골족은 13세기 칭기즈칸의 통솔 아래 그 세력을 뻗쳤으나, 끊임없는 내부의 상쟁과 청나라의 교묘한 대몽정책으로 민족적 정기를 잃고 쇠약해졌다.
1911년의 중국 신해혁명에 자극받은 몽골지도자들은 제정러시아(지금의 러시아)의 원조 하에 같은 해 12월 우르가(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제1차 혁명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청조와의 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은 실리없는 선언에 그쳤다.
1920년몽골 인민혁명당이 창설되어 적군(赤軍)의 원조 아래 백위군(白衛軍) 점령하의 우르가를 점거함으로써 제2차 혁명에 성공, 1924년 11월 26일 몽골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34년 소련과 상호원조에 관한 신사협정을 체결하였고, 1946년 인민투표에 의하여 중화민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1956년 체덴발이 인민혁명당의 당서기가 된 뒤 친중국파를 숙청하였다. 1961년UN에 가입하고, 1962년 중국과 국경협정을 체결하였으나 관계는 미묘하였다.
1989년 소련(지금의 러시아) 및 동구의 변혁의 물결이 파급,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1991년 집권당인 인민혁명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 포기를 선언하였고, 국명에서 인민공화국을 삭제하였다.
그 뒤 1993년 대통령 직접선거 실시로 인민혁명당의 오칠바트가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나, 1996년 총선에서 야당인 민주연합이 압승함으로써, 인민혁명당의 75년 통치가 종식되었다.
1990년 3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90년 6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북한과는 1948년 10월 수교를 합의한 직후부터 상호 상주공관을 두고있으며 우편물 및 소포교환협정(1955.9.), 경제 및 문화협조협정(1956.11.), 과학기술협정(1960.1.), 철도협정(1985.2.), 국경무역협정(1985.11.), 친선협조조약(1986.11.) 등을 맺어왔다.
면적 156만 4116㎢. 예로부터 외몽골이라 불리던 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며 수도는 울란바토르(Ularnbaatar)이다.
인구는 299만 2908명(2015년 현재)으로 할하몽골족(Khalkha Mongols) 75%, 기타몽골족 8%, 카자흐족 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몽골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고, 종교는 라마교를 신봉한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이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15억 7000만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781달러이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몽골 수출액은 2억 4600만 달러이고, 수입액은 4600만 달러이다.
다음백과
■ 칭기즈칸의 길①/ 유라시아 원정로 대탐사
1997-04-01 1만 5㎞ 대장정 - 동아일보
<<동아일보사는 대우가족의 협찬, MBC와의 공동기획으로 「칭기즈칸 원정로 대탐사」에 나서 창간 77주년인 오늘부터 주1회씩 이를 연재한다. 이번 탐사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의 원정로를 따라 유라시아 14개국(몽골 중국 러시아 키르기스 카자흐 우즈베크 투르크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폴란드)1만5천㎞를 이동하는 대장정이다.
지난 1월부터 오는 7월까지 계속되는 탐사는 한―몽골 합동조사단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조사단에는 몽골측에서 과학아카데미 오치르 역사연구소장과 몽골한국학회 체빈도르지 회장 등이, 한국측에서 김호동(김호동·서울대 부교수·동양사학) 류원수(유원수·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몽골학) 이개석(이개석·경북대 부교수·동양사학) 최한우(최한우·호서대 조교수·해외개발학) 김지인(김지인·서울대 대학원생·고고미술사학)씨 등 젊은 연구가와 취재기자들이 참가했다.>>
세계적인 시사주간 「타임」지는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했다.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예수나 석가모니도 칭기즈칸에게는 밀렸다.
칭기즈칸 이후 몽골은 그때까지 초원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조그만 부족의 이름에서 대제국의 건설자로 인류사에 굵은 획을 긋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변화된 것은 몽골 자신만이 아니었다. 인류역사도 더이상 과거와 같은 것일 수 없었다. 유럽은 유럽대로, 중동은 중동대로, 동아시아는 동아시아대로 새로운 시대 즉 하나의 정치경제적 헤게모니 아래에 통합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시대를 맞이했다.
칭기즈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많은 도시와 문명을 파괴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좁은 지역세계의 울타리를 허물었고 다른 세계에 대한 무지와 미망도 날려버렸다. 이 시대에 중국을 다녀간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유럽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킨 사실은 유럽이 그동안 외부세계로부터 얼마나 차단돼 있었으며 그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목말라했는지를 입증한다.
또한 이란의 몽골궁정에서 재상을 지낸 라시드 웃 딘이 저술한 「집사」(集史)라는 책은 유라시아의 거의 모든 민족들의 역사를 망라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최초의 세계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제국의 탄생은 세계사의 새로운 탄생이었고 출발이었다.
몽골인은 자기들이 「탱그리(하늘)의 명령을 받고 태어난」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예라고 생각했고 칭기즈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이 탱그리의 축복을 받아 세계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외국의 군주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하며 편지를 보낼 때도 항상 탱그리의 명령을 근거로 삼았다. 그 좋은 예가 고려에 보낸 서한이다.
이 글은 「天底氣力 天道將來底言語 所得不秋底人 有眼할了 有手沒了 有脚子了」로 시작하는데 이제까지는 정확한 의미를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수년전에 타계한 몽골어의 대가 클리브스 교수는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교정하고 뜻을 해석했다. 「天底氣力裏 道將來底言語 所得不投底人 有眼할了 有手沒了 有脚子了」, 즉 「하늘의 힘에 (기대어) 내가 하는 말. (우리는)투항하지 않는 사람을 잡아 눈이 있는 자라면 멀게했고 손이 있는 자라면 없앴으며 다리가 있는 자라면 분질러 버렸다」.
무시무시한 내용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지구 끝까지 정복하고 말겠다는 그들의 의지, 저항하는 어떠한 적도 용서치 않겠다는 그들의 결의를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세계사에서 풀기 힘든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몽골초원에 흩어져서로 죽기 살기로 전쟁만하던 유목민들을 그가 통일한 것은 1206년. 이때 그의 휘하에 들어온 몽골 유목전사들의 숫자는 모두 합해도 10만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수의 몽골군은 그보다 수백배가 넘는 중국을 정복했다. 그들의 말발굽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알타이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을 완전한 페허로 만들었고 러시아와 유럽의 기사단들도 그들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난생처음 밟는 땅에서 전쟁을 했지만 군대의 배치 진격 귀환은 모두 시계바늘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됐다. 상세한 작전지도가 있을리 만무했던 그 당시에 이러한 정보는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
더구나 칭기즈칸이 시작한 몽골의 세계정복전은 그의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손자에 이를 때까지 계속돼 동유럽에서 만주까지, 시베리아에서 인더스강까지, 사실상 인도와 서유럽을 제외한 유라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것은 역사가 일찍이 보지못했던 거대한 제국의 탄생이었다. 이 제국은 14세기 중반 이곳 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금이 가기 시작할 때까지 위엄을 지켰고 러시아 같은 나라는 16세기 들어서야 겨우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몽골제국을 이처럼 지속케 했던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손쉬운 해답은 없다. 만약 그러한 해답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몽골제국에 대해 쓰여진 수많은 책과 학자들의 땀은 얼마나 무익한 것이었겠는가.
그 해답이 어디에 있든, 일단은 칭기즈칸 출현 당시 몽골초원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는 거기서 어떻게 지도자의 자질을 연마했는가, 몽골기마군대의 위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들과 맞서 싸웠던 다른 나라들은 어떠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에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의문은 책상머리의 상상과 추측만으로는 풀릴 수 없다. 춥고 황막한 몽골초원을 직접 보고, 몽골사람들의 순박하고 강인한 체취를 느끼며, 그들이 말을 달려 정복했던 지역들을 하나하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이 가져온 「세계사의 새로운 탄생」이 던져주는 수수께끼를 풀어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柳元秀 <한국외국어대 연구원>
05-22 몽골-몽골인 척박한 땅… 지혜로 극복
지금 전세계에 7백만명이 채 안될 몽골인 가운데 5백만명 이상은 러시아연방 부리야트공화국 몽골국 중국내몽고자치구에 소속돼 있다.
테무친을 칭기즈칸(1162∼1227)으로 추대, 대몽골국을 세우고 유라시아 대륙에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인의 후예 대부분은 지금도 그때처럼 북으로 바이칼호수에서 남으로 만리장성, 동으로 홍안령산맥에서 서로는 알타이산맥에 이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몽골인들의 자주독립국은 몽골국 뿐이다. 고비남쪽 중국령 내몽고(內蒙古)는 1636년 청(淸)에 먼저 복속되면서 1691년에 복속된 고비북쪽 몽골인들에 대한 상대적 법적 개념으로 내몽고로 분류되다가 곡절을 거쳐 1947년 5월1일부터 중국 내몽고자치구가 됐다.
몽골인들은 청조와 중국의 관점에서 보는 내 외몽고라는 말 대신 각각 우브르 몽골(남몽골)아르 몽골(북몽골)이라는 말을 쓰며 아르 몽골은 할하 몽골(할하 연맹 몽골)이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한다. 내몽고자치구에는 몽골국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3백만 몽골인이 있다. 19세기초까지만 해도 근소한 차이로나마 몽골인이 내몽고 최대민족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1천8백만명이나 돼버린 한족들 속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 몽골국 북쪽 바이칼호 주변에 사는 40만 몽골인을 부리야트 몽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1727년 청국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캬흐타 협정에 따라 러시아령이 됐고 주민들은 이제 러시아 연방내 부리야트공화국 공민으로서 자기네보다 3배는 많을 러시아인들과 섞여 산다. 부리야트 몽골인의 87% 가량은 몽골어를 사용한다.
몽골국은 전에 우리가 외몽고 또는 몽골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칭기즈칸이 태어난 헨티아이막도 이 몽골국의 18개 아이막 가운데 하나다.
몽골은 춥고 건조하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연평균 기온이 서울보다 15도 가량 낮은 영하 2.9도, 1월 평균기온이 영하 26.1도, 7월 평균기온도 17도다. 연중 강수량도 서울보다 1천㎜이상 적은 2백33㎜에 불과하다. 국토의 평균 해발고도가 1,580m나 되는 높은 곳이다.
강력한 고기압대의 중심지역이며 강수량이 증발량의 몇분의 1에 불과하다. 4월은 사람에게나 가축에게나 연중 가장 힘든 때다. 한낮의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세찬 흙바람이 불어 겨우내 추위에 시달린 사람과 가축, 특히 갓 태어난 새끼와 막 새끼를 낳은 어미를 5월까지 괴롭힌다.
그러나 6월부터 8월까지는 싱싱한 풀을 먹은 가축들이 힘을 차려 어미의 젖이 사람을 먹여 살릴 만큼 풍부해지고 사람들도 늠름한 모습을 되찾는다. 그리고 10월부터는 몹시 춥고 긴 겨울이 시작된다. 이 지역 사람들은 6천년전인 신석기 중기 시대부터 짐승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4천∼3천년전인 청동기∼철기 초기시대에는 계절의 변화와 물, 풀의 형편에 따라 가족과 함께 양 염소 소 말 낙타 같은 가축을 수십에서 수백마리씩 끌고 한번에 몇㎞에서 몇십㎞씩, 1년에도 몇차례에서 몇십차례씩 옮겨다니는 유목이 기간산업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산업이 다양해지는 지금도 몽골국 경제활동인구의 절반 가까운 40만 유목민이 3천만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기른다.
95년의 경우 국민들은 유목의 산물인 가축의 젖과 고기를 1인당 각각 1백25.5㎏과 96.7㎏씩 소비했고 곡식과 채소 감자는 모두 합쳐 1백13.5㎏씩을 먹었을 뿐이다.
남북한 면적의 7배를 넘는 넓은 몽골국에는 2백40만명 남짓한 사람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2백20만명 가량이 몽골인이다.
몽골의 인구가 이렇게 적은 것은 첫째로 「흉노 순유시대부터 내 조상들의 고향, 내가 태어난 몽골의 아름다운 땅」이라고 노래한 몽골의 윤동주, 나착도르지(1906∼1937)처럼 몽골인들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랑하는 몽골의 기후 토양 지형 생태가 곡식과 채소 농사 뿐만 아니라 사람이 늘어 나는데도 적당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흉노 돌궐 위구르 패망후 이 사람들의 주력이 몽골을 빠져 나갔고 7백∼8백년전 칭기즈칸의 아들들 손자들 대에 많은 몽골인이 원정군으로 점령군으로 유라시아 각지로 퍼져 나갔다가 그 고장 사람이 돼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몽골인들은 인구의 증가가 나라발전과 민족번영의 필수요건이라고 믿는다. 그런 몽골인들에게는 「몽골링 우르스 맛시 올롱 볼토가이」(몽골의 후손들이 아주 많아지기를)라는 국민적 염원이 있다.
평균적 몽골인은 강한 해와 거칠것 없는 바람에 피부색이 더 진해진 것 말고는 체격과 외모가 우리와 비슷하고 엉덩이에 푸른 반점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
오늘날 몽골인의 주된 걱정거리는 오르는 물가, 늘어나는 범죄, 그리고 자녀교육문제다. 평균적 몽골인은 티베트 겔룩 바파(속칭 노랑 모자파)불교의 교리와 몽골의 토속신앙이 통합된 몽골불교의 그다지 열렬하지 않은 신도다.
신강성에서 일어난 폭동의 여파를 피해 1864년부터 알타이산맥을 넘어온 카자흐 사람들은 몽골이 청조의 지배에서 벗어남에 따라 1917년 3월23일 정규 몽골국민이 됐다.
외모와 체격은 몽골인과 차이가 없으나 투르크계 언어인 카자흐어를 사용한다. 대개 순니 이슬람교도들이며 남자들은 몽골인들이 그저 카자흐 모자라고만 하는 차양없는 모자를 쓰고 다닌다. 15만 남짓한 몽골의 카자흐인들은 소수민족으로서 유형무형의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다.
柳元秀 <한국외국어대 연구원>
06-12 8백년을 함께한 민족의 대영웅
칭기즈칸의 중신 쿠쿠초스는 통일 전 몽골의 어지러운 상황을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사람들은 제 이불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모든 부족은 밤낮 없이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통일로 약탈과 살육과 보복의 악순환이 몽골고원에서 종지부를 찍었고 몽골은 몽골인들의 땅으로 영구확정됐다.
오논강 상류일대에서 유목하던 일개 부족의 이름 몽골은 그가 통일한 고원의 주민 모두와 그 주민들이 1206년 대칸으로 추대한 칭기즈칸이 함께 세운 위대한 나라의 이름이 됐다.
이때부터 모든 몽골인은 칭기즈칸의 영욕과 몽골의 흥망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게 됐다. 칭기즈칸은 몽골인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민족단결의 구심점이 됐다.
원(元)패망후 몽골 고원으로 돌아와서도 그들은 칭기즈칸의 직계후손만을 대칸으로 인정했다.
청(淸)에 복속돼 있을 때나 1920년대 이후 70년간 몽골국의 모든 것이 소련의 간섭을 받던 질곡의 시절, 1910년대 독립운동기나 1990년대 민주화운동기 같은 격변기에는 항상 칭기즈칸이 몽골인과 함께하며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었다.
소련 영향권내의 모든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추잡한 범죄 취급을 받던 불행한 시대에도 칭기즈칸은 변함없이 몽골민족의 최고영웅이었다.
1962년 봄 몽골 티베트 중국 사료를 두루 상고한 역사학자들과 몽골불교의 중심 간단 테그친링(완벽한 기쁨)사 별자리 연구가들이 칭기즈칸의 탄생을 1162년5월31일 오전 6시경으로 추정했다. 이에 따라 탄신 8백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5월31일에는 탄생지로 알려진 델리운 볼닥에서 남으로 3㎞ 떨어진 몽골국 헨티아이막 다달솜(아이막, 솜은 우리의 도 군에 상당) 고르반 노르휴양소에서 12m 높이의 기념비가 제막됐다. 기념비 앞면에는 칭기즈칸의 초상과 몽골인들의 술드(수호 영령의 표상) 그리고 「한길 내 몸이 잘못되면 되었지 내 나라가 잘못될 수는 없다」는 그의 유언이, 뒷면에는 「몽골을 건국한 칭기즈칸의 탄신 8백주년을 기념한다」는 글이 새겨졌다.
이같은 모든 일은 몽골인민혁명당 정치국원이며 당중앙위원회 서기인 투무르오치르가 총괄했고 이는 1962년2월 당 정치국에서 결정된 일이었다. 칭기즈칸 사당이 있는 중국 내몽고 오르도스의 에젠호로(주군의 뜰)에서도 탄생 8백주년 기념행사가 중국공산당 내몽고자치구 제1서기 올란후 주재로 대대적으로 거행됐다.
그러나 당시 몽골인민공화국(1924∼1992년)은 몽골인민혁명당이 독재하고 있었고 그 당은 소련공산당이 조종했기 때문에 칭기즈칸 추모행사로 인해 몽골인들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1962년9월8일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투무르오치르는 개인숭배자 민족주의자 반당행위자로 비판받고 수도 울란바토르 거주가 금지됐다. 기념우표도 회수됐다. 같은해 11월1일자 소련 프라우다지는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공개했다고 한다.
1963년7월에는 그의 당원자격이 박탈됐다. 당에서 지정한 고장을 떠돌며 살던 투무르오치르는 병든 몸을 치료받기 위해 울란바토르 이주허가를 청원했으나 1985년 집에서 혼자 의문의 죽음을 당할 때까지도 허가는 나오지 않았다.
몽골에서는 바트문흐가 대통령이 돼 있었고 소련에서는 1984년 몽골의 최고실력자 체덴발을 실각시키고 대신 바트문흐를 내세우는 일을 직접 지휘한 고르바초프가 실력자가 돼있는 때였는데도.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동요와 함께 몽골에서도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
몽골인민혁명당의 일당독재를 거부하고 소련의 정치 경제 문화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열에 칭기즈칸의 대형초상화가 등장했다. 칭기즈칸이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으로 등장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90년은 마침 칭기즈칸과 그 시대에 대한 기록으로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상세하고 가장 오래된 「몽골비사」를 쓴지 7백50년이 되는 해였다. 책을 쓴 곳으로 추정되는 헨티아이막 델게르한솜 아라샨 옥하라는 벌판 가운데 칭기즈칸의 초상과 칭기즈칸의 대몽골국 건국에 참여한 각 씨족의 문장(낙인), 「몽골비사」의 마지막 구절을 새긴 높이 5.2m, 한면의 폭이 각 70㎝인 사면비를 지름 12㎝인 둥근 돌 바탕 위에 세웠다. 그리고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씨름 말달리기 활쏘기로 구성되는 나아담(축제)이 대대적으로 거행됐다.
투무르오치르의 수난이래 30년 동안 몽골인들이 감추어 두었던 칭기즈칸에 대한 존경과 몽골인이라는 자부가 글로 말로 노래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자르갈사이항의 「칭기즈칸」 「칭기즈의 영웅들」이라는 노래는 몽골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대 이름을 말하기가 두려웠습니다/그대 모습을 그려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당신의 죄와 덕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당신에 대한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조국 몽골을 위하여라고 한 대칸의 잘못입니까/조국의 역사를 위하여라고 한 당신과 우리의 잘못입니까…」(자르갈사이항의 「칭기즈칸」). 새로 나오는 지폐마다 칭기즈칸의 초상이 사용됐다. 몽골에서 생산되는 가장 좋은 술도, 외국과 합작으로 세운 최고급 호텔도 칭기즈칸이라 이름지었다.
1996년2월2일 오치르바트 대통령은 이날을 몽골국 수립 7백90년이 되는 날로 선포했다. 특별사면도 있었다. 몽골국의 역사는 1921년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모든 몽골인들이 칭기즈칸과 함께 국가를 건설한 1206년부터 시작됐다는 천명이었다. 「아아, 나의 몽골의 운명/불속에 빠져버린 경이의 운명/물에 타버린 진리의 운명/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나의 너의 우리모두의 몽골의 운명…」(자르갈사이항의 「칭기즈의 영웅들」).
柳元秀 <한국외국어대 연구원>
08-04 헨티아이막 『영웅의 후예는 살아있다』
칭기즈칸의 탄생지 델리운 볼닥은 광활한 초원으로 뻗은 자동차길만 따라가면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6백㎞가 채 안된다. 울란바토르에서 동남쪽으로 2백30㎞쯤 달려 투브아이막(아이막은 우리의 도)을 막 벗어나면 아득한 옛날부터 몽골땅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거의 다 목격한 헤를렝강(1,090㎞)이 나온다. 그 강을 건너면 헨티아이막 쳉케르만달솜(솜은 우리의 군) 오스틴 덴지다.
93년7월 손보기교수가 이끄는 한몽공동학술조사단은 다리 건너 5㎞북쪽 오스틴 암(동경108도29분, 북위47도44분)의 네모진 무덤들 가운데 하나를 발굴했다.
2천3백년전(±70년) 전장에서 허리가 잘려죽은 키 1백60㎝ 되는 스물 안팎의 남자와 포로로 잡혀와 산채로 묻힌 것으로 보이는 1백70㎝쯤 되는 마흔 안팎의 건장한 남자의 유골, 함께 묻은 청동 화살촉 등을 찾아내 네모진 무덤의 연대가 청동기시대라는 것을 확정지었다.
칭기즈칸의 고향 헨티아이막은 크고 작은 나아담(축제)에서 우승하는 명마들로 이름난 고장이다. 몽골의 말달리기 시합은 트랙을 따라 1∼2㎞를 뛰는 정착국가의 경마와는 달리 초원길 10∼25㎞를 달려 승부를 가린다. 출전마들은 두살 미만, 세살 미만, 네살 미만, 다섯살 미만, 여섯살 이상, 종마로 분류된다.
96년7월11∼12일 몽골 수립 7백90주년과 인민혁명 75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나아담에서 11.25㎞를 뛴 1∼2살배기 4백마리 가운데서는 헨티아이막 쳉케르만달솜의 도가르 수렝의 회색 망아지가 우승했다. 24.6㎞를 뛴 종마 6백30마리 가운데서도 울란바토르 사업가 바트후가 헨티아이막 바얀호탁솜 담단잡에게서 사들인 옅은 갈색말이 33분28초만에 반환점을 돌아와 우승했다.
몽골의 말은 사람으로 치면 마라톤선수 겸 역도선수다. 이렇게 힘세고 참을성 있는 몽골말이 있었기에 칭기즈칸의 세계제국 창업도 가능했을 것이다.
몽골에는 직업기수가 따로 없기 때문에 말달리기 대회의 선수는 대개 10세 전후의 아이들이다. 말은 기수가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쳐 달리며 반환점을 돌고나면 숨이차서 죽기도 한다. 죽은 말의 어린 기수가 애통해 하는 모습은 마치 동생을 잃고 슬퍼하는 어린 누나처럼 애처롭다.
예로부터 헨티아이막은 유명한 장사 역사들이 배출되는 고장이다. 96년 전국 나아담의 씨름에서 우승한 바트에르덴도 헨티아이막 사람이다. 전국 나아담에서 씨름은 5백12명의 장사가 출전, 토너먼트 방식으로 단판 승부로 겨룬다. 그래서 2백56명→1백28명→64명→32명 하는 식으로 사람이 줄다가 맨 마지막에 2명이 남아 승부를 가리며 여기서 이기면 전국최고 장사로서 고향 박물관에는 늠름한 모습의 전신그림이 영구전시된다.
몽골 씨름꾼들도 체격이 크고 힘이 세지만 배는 거의 나오지 않아 8백여년전 칭기즈칸의 용사들이 저랬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런 체격은 경기방식과 관련있는 것 같다.
몽골 씨름은 샅바없이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시작되며 체급도 없다. 경기장이 큰 것은 축구장만해 금 밖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며 승부와도 관계가 없다. 힘이 셀 뿐 아니라 몸놀림도 빨라야 상대방에게 공격기술을 걸어볼 수 있다.
96년 나아담에서 결승전은 4시간이 지나서야 승부가 났다. 칭기즈칸의 세계제국 창업은 이렇게 참을성 많은 몽골의 용사들과 함께 이루어 낸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아우 카사르와 카사르의 아들 이숭게는 모두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숭게는 1225년 보카 소치카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시합에서 5백36m를 쏘아 우승했다고 하니 그때는 멀리쏘기로 겨루었던 듯하다.
당시 몽골 병사가 휴대했던 평균적인 활도 70㎏정도의 힘으로 끌어당겨 화살이 1백80m를 날아가도록 제작됐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몽골병들의 활과 화살은 적 병사 개개인을 명중시키는 것보다는 소부대 기동을 제압하는데 주안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요즈음 나아담에서는 여자부는 56m, 남자부는 72m거리의 과녁을 한번에 4발씩 9회를 쏘아 쓰러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겨룬다.
96년 전국 나아담에서 남자부 우승자는 34발을, 여자부 우승자는 32발을, 며칠뒤 국회의장이 된 곤칙도르지 의원은 4발을 쏘아 3발, 오치르바트 당시대통령도 한발을 명중시켰다.
테무친이 태어난 델리운 볼닥이라고 주장되는 곳은 대략 예닐곱이나 된다. 그러나 헨티아이막 운드르항에서 북으로 2백60㎞를 달려 다달솜에 이르고 다시 북으로 5㎞쯤 더 가면 오농강과 발지강 사이에 자리한 소의 지라 모양을 한 야트막한 소나무 동산에 다다른다. 그 곳이 절대다수의 전공학자들과 몽골인들이 칭기즈칸의 탄생지로 지목하는 「몽골비사」의 델리운 볼닥이다. 다만 몽골과학아카데미와 일본 요미우리신문사가 장기간의 현지조사 끝에 94년 일본에서 낸 공동보고서에는 빈데르솜 소재지에서 멀지 않은 람이잉 옥하(동경110도38분, 북위48도35분)가 델리운 볼닥으로 올라 있다.
오랜 서하(西夏)원정을 마치고 귀환에 오른 칭기즈칸은 1227년 음력7월12일 오늘의 중국땅 감숙성(甘肅省) 청수현(淸水縣)의 육반산(六盤山)에서 66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 무덤의 소재지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헨티아이막 어디쯤이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다.
유원수 (한국외국어대 연구원) ▼ 몽골스님과 결혼한 한국여성 김선정씨 ▼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 간단사(寺). 몽골 불교(라마교)의 최대사원인 이곳에 몽골스님과 결혼한 한국인 여자가 산다. 간단사 승가대 미술과장 푸루밧 스님(34)의 부인 金宣靜(김선정·36)씨. 김씨도 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김씨는 지난 89년 불교미술의 원류인 밀교미술을 배우기 위해 티베트로 갔다.
그후 달라이라마가 망명해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푸루밧 스님을 만났고 94년에 몽골로 함께 이주, 간단사 승가대에 미술대를 설립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앙크하나(4)도 태어났다.
『몽골문화는 불교문화입니다. 티베트미술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아름다우며 특히 자나바자르의 작품들은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어떤 작품들보다 인체를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간단사 미술대 불교문화원에는 이들 부부와 45명의 학승들이 만든 대형 입체만다라를 비롯, 가축에 찍는 낙인(탐가) 등 전통문양을 복원한 작품들이 빼곡이 쌓여 있다. 이들은 이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교과서(18권)로 편찬하고 티베트어로 돼 있는 미술관련 경전 56권을 현대 몽골어로 번역할 계획이다.
〈울란바토르〓전승훈기자〉
09-29 『초원의 패자 가리자』금과 5년 대혈전
▼ 「골리앗」금 정벌 ▼ 중국여정에서 만리장성을 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게다.
칭기즈칸의 몽골군대가 처음 이곳을 들이쳤을 때 오늘날과 같은 장성의 모습은 없었다. 거용관(居庸關)이 몽골군의 진입을 저지했다. 팔달령(八達嶺)에 이르기 전에 차도 왼편에서 관객을 맞는 아치형 동문(洞門)을 볼 수 있다. 위로 탑(과가탑·過街塔·일명 운대·雲臺)을 받치고 아래로 사람이 통행했던 이 동문은 원(元)대에 지은 것이다.
1211년2월 칭기즈칸은 높은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영원한 하늘(長生天)의 권능으로 금(金)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도록 도와줄 것을 빌었다.
고려인의 후예 아구타가 세운 여진족의 나라 금(1115∼1234)은 그동안 정기적으로 군대를 보내 몽골족의 장정을 제거(減丁)해왔고 칭기즈칸의 선조 암바가이 칸을 나무 노새에 못박아 처형했다.
금은 칭기즈칸까지도 붙잡아 죽이려 했다. 금을 도와 타타르부를 격파한 공로로 조공무역권을 획득한 칭기즈칸이 1208년 새로 즉위한 황제의 조서를 받으러 정주(淨州)에 갔을 때 공물(貢物)을 접수하던 위소왕(衛紹王)이 새 황제로 즉위한 것을 알고 『이 따위 용렬하고 나약한 자도 황제가 된단 말인가. 어찌 그로부터 조(詔)를 받겠는가』라며 북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칭기즈칸의 금 정벌은 묵은 원한도 개재돼 있었지만 신흥 몽골국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금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몽골초원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또 서방의 강적인 호레즘 샤와 싸워 초원의 패자가 되려면 먼저 금을 굴복시켜 후고(後顧)의여지를없애야했다. 케룰렌 하반에는 1만명의 케식(겁설)군과 탐마치(탐마적)군 외에도 몽골부족군 12만명이 모였다.
칭기즈칸은 4만명의 우익군을 주치 차가타이 워게데이에게 주어 토르강에서 옹구트부 지역으로 남하하게 하고, 7만명은 다시 중군과 좌익으로 나누어 자신은 무카리와 함께 중군을 이끌고 제베 수부데이 주치카사르와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맡긴 좌익과 함께 케룰렌 강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갔다.
당시 금의 정규군 맹안모극군(猛安謀克軍)은 27만명이고 이민족으로 이뤄진 규 군과 지방군인 화모군이 따로 있었지만 몽골을 얕본 새 황제는 주력을 남송과의 경계에 배치하고 있었다.
반면 칭기즈칸은 음산산맥 대청산(大靑山)북방의 몽골부족 옹구트부를 통일 전부터 끌어들였고 난하 상류에 근거를 가진 거란호족 야율아해 독화 형제도 오래 전부터 칭기즈칸의 막하에 투신해 금나라 북방을 지키는 거란족 장군과 이미 기맥이 닿아 있었다.
동생 오지킨에게 뒤를 부탁하고 먼저 난하 상류에 도착한 칭기즈칸은 옹구트 부장 아랄쿠시(阿刺忽失)의 향도로 대청산을 넘은 우익군을 기다려 공격을 시작했다. 야율아해가 선도한 우익군은 서경(西京·다퉁·大同)방면으로 공격하고, 야율독화가 안내한 좌익군은 네이멍구(內蒙古) 고원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요충 야호령(野狐嶺)을 향해 진격했다. 뒤늦게 급보를 받은 금의 주력은 야호령근처 오사보(烏沙堡)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제베가 이끈 몽골 좌익군이 우회해 이를 격파했다. 금군을 추격해 야호령을 내려간 제베의 군대는 거용관을 지키는 수비군을 유인해 격파했고 단숨에 수도인 중도(中都)까지 진격해 포위했다. 그러나 중도성의 방어는 견고했고 구원군이 왔기 때문에 제베군은 일단 장성 이북으로 물러갔다.
그래도 몽골군의 1차 공격은 큰 소득이 있었다. 거란족 군단이 전투다운 전투 없이 몽골에 투항했고 우익군도 네이멍구 자치구 수도 후허호트 서쪽의 초원(운내주·雲內州)에서 40만(일설 1백만)마리의 군목감(軍牧監) 군마를 빼앗아 금군의 기동력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힌 의외의 전과를 올린 것이다. 네이멍구 초원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212년제2차침공에 이어 1213년 가을 다시 야호령을 넘어 거침없이 진격하던 몽골군은 전과 달리 거용관 북구에서 진격을 멈췄다. 거용관에 철제 관문을 달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을 따라 샛길로 서쪽의 비호령을 넘은 뒤 자형관(紫荊關)을 통해 진입한 제베의 부대가 거용관 남구의 금군 본영을 기습함으로써 결국 거용관을 손에 넣긴 했지만 몽골군은 바로 중도로 진격하지 않았다. 화북과 요동 각지를 공격해 중도를 고립시킨 다음에 1214년 중도를 포위했다.
그 사이 정변으로 즉위한 선종은 항복 권고를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결국 굴복, 1214년 칭기즈칸에게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岐國公主)와 금백(金帛), 동남녀(童男女)5백명, 비단옷 3천벌, 말 3천필을 보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시링골 초원에 도착했을 때 선종은 몽골군의 위협이 덜한 황하 남쪽 남경(南京·변경·현재의 카이펑·開封)으로 천도했다. 이를 화약의 파기로 간주한 칭기즈칸은 가을에 다시 징벌군을 보냈고 1215년5월 결국 중도를 함락했다. 하지만 금조에 대한 뒷일은 국왕 무카리에게 맡기고 화약무기 진천뢰 등이 포함된 막대한 전리품만 가지고 몽골로 철수했다.
그런데 왜 5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공격한 금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군대를 돌린 것일까. 군마를 빼앗겨 기동력을 상실한 금군은 이제 종이 호랑이였고 서방의 정세 역시 갑자기 악화됐다. 또 몽골로 돌아간 칭기즈칸이 곧 서정(西征)에 나섰으므로 철군이유는 자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칭기즈칸은 농경민의 황제를 꿈꾼 적이 없었고, 초원의 유목민 튀르크족과 페르시아인의 카간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는 점이다.
이개석<경북대교수·사학>
10-13 중앙아시아 통일 이슬람에 복수의 공세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은 칭기즈칸 침입 이전에 서위구르, 카라키타이(西遼), 호레즘 등 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투르크계 왕조 서위구르는 톈산산맥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에, 카라키타이는 탈라스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호레즘은 이란화된 투르크계 왕조로서 서투르키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카라키타이는 중국의 요나라가 1125년 멸망한 후 거란족의 지도층이 서진, 톈산북로를 통과하여 돌궐계 카라한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에게 멸망당한 나이만족의 왕자 퀴츨뤽은 칭기즈칸에게 쫓기자 카라키타이에 접근, 군주 귀르한의 호의를 산 후 카라키타이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호레즘의 군주 술탄 무하마드와 결탁해 카라키타이를 멸망시켰다.
카라키타이의 서부는 호레즘이, 동부는 퀴츨뤽이 차지했다. 그러자 칭기즈칸은 1218년 퀴츨뤽이 머물고 있던 카슈가르에 2만명의 몽골군을 파견했고 이에 힘을 얻은 무슬림 토착민들이 봉기해 퀴츨뤽을 처형했다.
이제 아시아내륙은 동부의 몽골, 서부의 호레즘 두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호레즘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이란 전역과 이라크 일부, 남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하였으며, 카라키타이를 멸망시킨 후 우르겐치와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실크로드의 중심부 등 방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해뜨는 곳의 군주이고, 술탄은 해지는 곳의 군주였다. 몽골과 호레즘은 친선을 다짐했지만 둘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술탄은 전형적인 이슬람왕조의 통치자이며 매우 야심찬 알라신의 사도였다. 그는 자신을 한 왕조의 통치자로서보다는 이슬람세계의 통치자요, 수호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술탄이 알라의 통치권을 전세계에 구축하라는 알라신의 법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칭기즈칸은 이기는 동물만이 살아남는 야생의 생태, 즉 초원의 법에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존 스미스가 지적한 것처럼 초원의 전사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었다.
1218년 칭기즈칸은 5백마리의 낙타에 동방의 온갖 진귀한 물품을 실은 커다란 캐러밴을 편성, 4백50명의 사절단을 호레즘왕에게 보냈다. 사절단이 호레즘의 첫번째 성 오트라르에 도착하였을 때 성주 이날측이 이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모두 죽이고 물건들을 빼앗아버렸다. 낙타몰이꾼 한 사람만이 탈출, 필사의 도주 끝에 몽골에 도착해 이 사실을 알렸다.
칭기즈칸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 격노하여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나 당시 칭기즈칸은 즉각적으로 호레즘과의 전쟁을 개시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특별히 귀족으로 구성된 사신을 호레즘의 술탄에게 보내 이날측의 도발에 항의했으나 술탄은 오히려 사신 한명을 처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수염을 깎아 돌려보냈다. 수염이 권위의 상징인 무슬림 사이에서는 이것은 더할 나위없는 모욕이었다. 이슬람 학자 나사위는 『이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슬림의 피가 흘렀는가』하고 탄식하였다. 이 사건은 중앙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고 말았다.
칭기즈칸은 술탄의 행위에 대해 듣고 언덕에 올라 모자를 벗고 하늘을 향해 사흘 낮과 밤 동안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한다. 『이같은 고난을 일으킨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에게 복수할 힘을 주십시오』 칭기즈칸에게 있어서 복수는 도덕적 의무였고, 하늘의 뜻이었다.
호레즘 정벌에 나선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1219년 이르티슈강에 도착하였다. 몽골군은 여기서 도하전투훈련을 벌였다.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등 거대한 강으로 둘러싸인 호레즘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몽골군은 그해 가을 호레즘 변방도시 오트라르에 접근했다. 칭기즈칸이 즐겨쓰는 책략이 호레즘 공격에도 적용되었다.
첫째, 심리전을 사용한다. 공격에 앞서 자신이 신에 의해 선택된 통치자임을 천명하고 적국의 군중에게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방침을 공포하고 점령후에는 그대로 시행한다.
둘째, 적국에 대한 연구와 첩보를 강화하여 그 정보에 기초하여 적국의 내적 취약성을 폭로하고 교란작전을 펴서 적국 지도층 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조장한다.
셋째, 모든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장하여 종교적 핍박을 두려워하는 현지주민의 지지를 끌어낸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평소 호의적으로 대해온 대상들을 이용해 호레즘의 지리적 특징, 군대배치도, 군인들의 사기, 주민동정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몽골의 군주가 하늘이 정한 온세계의 군주라는 말과 몽골군이 과거 전쟁에서 저항한 자를 어떻게 처형했는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게 해 호레즘 백성들의 대항의지를 꺾고 심리적으로 무력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칭기즈칸은 1220년 2월 오트라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전투는 6개월간 지속되었으나 오트라르는 결국 몽골군에 함락되어 이날측과 주민 모두가 학살되었고 도시는 그후 다시 재건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몽골군은 다음 공격목표인 부하라를 손쉽게 함락하고 풍요롭게 번창하던 실크로드의 진주 사마르칸트로 향했다. 사마르칸트 공격은 칭기즈칸에게 호의적인 이 도시의 대상들과 무슬림지도자들이 항거를 하지 않음으로써 쉽게 끝났다. 성에서 대항하던 투르크군 3만여명은 도시민 대표들이 투항한 다음날 항복했으나 모두 무참히 처형당했다. 칭기즈칸은 호레즘을 무너뜨리고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심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고 결국 세계의 제국을 건설해 동서양의 군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최한우(호서대교수)
10-13 古都 사마르칸트 탑-사원의 도시
청아한 하늘색 돔과 섬세한 모자이크 무늬가 아로새겨진 레기스탄 광장의 건물들, 비비하님 사원, 귀르에미르(티무르의 묘)….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최대의 도시였던 우즈베크의 사마르칸트. 「동방의 에덴」으로 불리던 이곳은 수많은 모스크(사원)와 미나렛(탑)들이 마치 동화 속의 나라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사마르칸트는 원래 소그드인들이 대상으로 국제무역을 하며 번영을 누리던 곳. 그러나 이 오아시스의 도시는 기마유목민들의 침입을 수없이 당했고, 특히 12세기에 이곳을 침입한 칭기즈칸은 이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 아프라시압 박물관 마수드관장은 『칭기즈칸 군대는 사마르칸트에 던져진 핵폭탄이었다』고 설명했다.
지금 남아 있는 건축물들은 14세기에 이곳에서 제국을 일으킨 티무르가 도시를 새로 건설하며 세운 것들이다. 구소련 고고학자들이 30년대부터 옛 사마르칸트의 도성이 있던 아프라시압 폐허를 발굴, BC 2∼3세기경 박트리아왕국의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동전에서부터 중국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7세기경 소그드 아흐르만왕의 궁전 벽화에는 유럽 중국 아랍, 심지어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아시아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사절단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사마르칸트의 과거 위상을 실감케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마르칸트에서 그 옛날의 영화를 되찾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사마르칸트〓전승훈기자〉
10-27 세계지배와 역사적 의미
몽골제국이 출현하기 전에도 유라시아의 초원을 무대로 등장했던 여러 유목국가들이 있었지만 중동이나 유럽을 직접 침략했던 예는 그리 흔치 않다. 과거 스키타이인들이 중동으로 들어가 아시리아제국을 무너뜨렸고, 아틸라의 훈족이 센강을 건너 로마―고트 연합군을 대파하고 이탈리아로 들어가 로마를 포위한 일이 있었지만 그들이 그곳에 국가를 건설하지는 않았었다.
몽골인들의 정복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의 건설자인 칭기즈칸이 북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이 지역들을 자기 제국의 일부로 삼아 직접 지배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유목민의 아들이었고 그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초원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의 원정은 「정복」이 아니라 「응징」을 위해서 실행된 것이었다.
중동과 러시아에 대한 몽골의 지배는 칭기즈칸 사후에 실현되었다. 그 배경에는 이 두 지역에서 전개된 상황과 몽골 내부의 사정이 있었다. 중동에서는 험준한 요새를 근거지로 삼는 소위 「암살자단」이 골칫거리로 등장했고, 러시아에서는 킵착, 불가르와 같은 유목민들의 활동이 몽골제국의 외곽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에 이러한 반몽골세력을 분쇄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한편 몽골의 군사귀족들도 가축만 풍성한 초원이나 칸의 직할지인 북중국과 중앙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영역을 정복하고 그 과실을 향유하기를 원했다. 결국 이러한 사정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정복이 추진되었고, 그것은 칭기즈칸의 경우와는 달리 「정복」과 「지배」로 이어졌던 것이다.
몽골군의 러시아 원정은 1235년에 단행되었다. 원정군은 모두 12만명에 이르렀다. 칭기즈칸의 장손 바투가 총사령관이자 우익군을 맡고 오고데이칸의 장자 구육이 좌익군을 담당하여 1236년부터 볼가강을 건너 작전이 시작되었다.
1237년 킵착과 불가르를 경략하고, 그 다음 해에는 모스크바를 비롯한 도시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1240년 수도 키예프를 잿더미로 만든 몽골연합군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들어갔다.
1241년 4월9일 저 유명한 리그니츠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몽골군에 맞섰던 2만명의 폴란드―게르만 연합군은 괴멸되고 말았다.
그해 겨울 몽골군은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크로아티아로 들어갔다. 헝가리 국왕은 이미 도망친 지 오래였고 이교도 몽골군에 대한 「십자군」의 소집을 외치는 교황 그레고리9세의 호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야말로 유럽의 기독교세계는 몽골군의 말발굽을 저지할 아무런 힘도 없었다.
이때 몽골군은 갑자기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몽골 초원에서 오고데이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몽골 장군들에게는 유럽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보다 누가 다음 칸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그들의 운명에 더 중요했기 때문에 한가롭게 기독교도들과 전투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투는 몽골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관계가 나쁜 구육이 칸에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남러시아 초원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고 이것이 킵착한국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이로부터 거의 3백년 동안 「타타르의 멍에」에 매여 살았고 그 상처는 지금도 러시아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중동 정복은 이보다 약 10년 뒤에 시작되었다.
쿠빌라이칸이 즉위한 뒤 자기 동생 훌레구를 보내 「암살자단」과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없애도록 한 것이다. 이슬람과 기독교 지도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암살자단도, 이미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칼리프의 바그다드도 몽골인들에게 그다지 힘든 상대가 아니었다. 훌레구의 군대는 1258년 1월29일 바그다드를 포위했고 2월10일 마지막 칼리프가 항복했다.
몽골인들은 칼리프를 교외의 벌판으로 끌고 가 카펫에 만 뒤 말발굽으로 짓밟아 죽였다. 칼리프는 아무리 유명무실했을지라도 기독교권의 교황과 같이 이슬람권의 단일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칼리프의 죽음과 칼리프체제의 소멸은 모슬렘들에게 커다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칼리프 대신 이교도 몽골인이 다스리는 일한국이 들어섰고 이로써 이슬람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들은 태평양에서 지중해, 시베리아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골인들이 파괴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더러 최초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도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서히 과거의 번영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여러 지역과 문명이 하나의 정치체제 안에서 통합되면서 경제적 문화적 교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동방에 대한 서구인들의 무지는 마르코 폴로의 글이 보여주듯이 보다 정확한 지식으로 대체되었고, 중앙아시아나 이탈리아 출신의 국제상인들은 초원과 사막과 바다를 누비면서 경제에 활력을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몽골제국이 인류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유라시아」라는 하나의 통합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김호동 (서울대 교수)
10-27 공포의 「암살단」근거지 「알라무트」성채
칭기즈칸의 손자 훌레구는 1256년 본격적인 서방원정을 위해 이슬람세계의 수도 바그다드로 향하던 도중 오늘날의 이란 땅에서 「암살자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다. 이슬람 시아파인 이스마일을 추종하던 암살자단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중동 제국의 요인을 암살하는 테러로 중동 전역을 근 2백년간 공포로 몰아넣던 집단.
1092년에는 셀주크조의 재상 니잠 알 물크가, 1191년에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건설한 라틴왕국의 콘라드국왕이 암살되었다.
암살자단의 주 성채 「알라무트」는 엘부르즈산맥 깊숙한 곳에 있었다. 테헤란에서 서북쪽으로 약 1백40㎞ 떨어진 카즈빈시에서 다시 1백㎞ 가량 첩첩산중의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니 거대한 바위산이 나타났다. 「독수리 요새」로 불렸던 이 성채는 앞은 경사가 60도 가량 되는 가파른 바위산인데다 뒷면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정상에서는 사방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정상에는 성채를 쌓았던 벽돌 무더기들이 남아있고 바위틈에 대형 우물도 있어 오랫동안 포위되어도 견딜 수 있는 「천험의 요새」였음을 짐작케 했다.
1273년 페르시아지방을 지나간 마르코 폴로는 이곳에서 전해져 오던 암살자단과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산상(山上)의 노인」 하산 벤 사바에 관한 이야기를 동방견문록에 소개했다.
노인은 이 산 계곡에 포도주와 꿀과 우유가 흐르고 아리따운 여인들이 있는 궁전과 정원을 만들어놓고 젊은이들을 「하시시」라는 대마초를 먹여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것. 이곳에서 즐겁게 지낸 청년들은 적국의 요인을 암살하고 돌아오면 다시 「천상의 낙원」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노인의 꾐에 빠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명령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훌레구는 암살자교단 내부의 갈등을 이용한 회유책으로 이 험한 성채도 함락, 철저히 파괴한다. 성채를 버리고 몽골군에 투항한 수령 루큰 웃딘은 몽골로 가던 길에 쿠빌라이칸의 지시에 의해 암살된다.
1979년 이슬람원리주의를 내건 호메이니의 혁명으로 시아파가 지배하는 이슬람공화국이 된 이란이 강경한 대외정책으로 중동에 긴장을 지속시키고 미국과 유럽 여러나라로부터 많은 테러의 배후로 지목받아온 것은 이러한 과거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전승훈기자〉
11-06 「정복로」 이젠 한국기업『물결』
『칭기즈칸의 정복로를 따라 한국인이 몰려온다』 유라시아대륙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기회의 땅」 중 하나. 7백여년전 칭기즈칸이 바람처럼 휘몰아쳤던 이 대륙에 21세기에는 한국인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인가. 구소련 붕괴후 새로 독립한 카자흐 우즈베크 키르기스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거대한 땅덩어리에는 광대한 밀밭과 초원, 그리고 지하에는 석유 천연가스와 구리 철광 우라늄 등 「원소기호에 있는 모든 자원」이 무궁무진하게 묻힌 채 개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땅에 대우 LG 삼성 현대 등 한국 대기업들의 간판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자동차 전자 건설 통신에서부터 구리광산 채굴 등 자원개발,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까지 한국 기업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드물다. 우즈베크 안디잔주에 자리잡고 있는 우즈―대우 자동차공장. 이곳 아사카시(市)는 두집중 한집 꼴로 대우직원들이 살고 있다.
공장에는 3천2백명의 우즈베크인 근로자들이 한국인 직원들의 통솔하에 티코 다마스 씨에로 등을 연간 20만대 생산하고 있다. 카자흐의 대우알렘, 이란의 케르만 자동차공장, 폴란드의 대우―FSO 등 전자 통신 자동차 등을 앞세운 한국 기업들의 서진(西進)을 보며 서구인들은 크게 경계하고 있다. 특유의 친화력과 추진력으로 현지인들과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극복해가며 무서운 속도로 진출해오는 한국인들의 모습에서 칭기즈칸의 기억을 떠올리기 때문일까. 유라시아대륙에는 또 60년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40여만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고 소규모 무역업을 하는 「개미군단」 사업가들도 광범위하게 진출해 있다. 카자흐의 수도 알마티에서 만난 사업가 손동진씨는 『북한이 철도를 개방하여 유라시아대륙을 연결하는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할 수 있게만 된다면 이 대륙은 우리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11-06 개방된 제국 팍스 몽골리카
▲몽골 오논강
유라시아대륙 북방 초원의 조그마한 부족 이름에 불과했던 몽골. 그러나 「푸른 이리와 늑대의 후손」인 테무진이 「바다의 왕」 칭기즈칸이 된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수천년간 응축돼왔던 기마민족의 힘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초원의 바람처럼 대륙을 휘몰아쳐 갔다. 『해가 뜨는 곳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하늘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정복하리라』
1245년에 교황의 친서를 들고 온 사절 프라노 카르피니에게 칭기즈칸의 손자 구유크칸이 답한 유명한 「세계정복선언」.
칭기즈칸의 세계정복은 그의 손자대까지 이어진다. 몽골군대가 이렇듯 세계를 제패하고 경영할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왔는가. 몽골군대의 기마병은 10만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적은 수로 현대 미국도 하기 힘든 중국과 중동―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윈윈(Win & Win)」전략을 수행한 것은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는 몽골의 군사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동에 편한 가벼운 그물갑옷, 도망가면서도 뒤로 화살을 쏘아대는 전술, 가족 가축과 함께 이동해 보급로가 따로 필요없는 전선 형성 등 독특한 전술운영을 했던 몽골군은 당시로서는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갖추었었다. 칭기즈칸 군대는 또 공포를 이용한 심리전과 정보전을 자주 활용하였다.
호레즘왕국의 변방 오트라르에서 몽골 상인들이 학살당했을 때 칭기즈칸은 『그들의 머리에 달려 있는 머리카락 숫자만큼 보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시도했던 사마르칸드 닛샤푸르 메르브 우르겐치 등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러한 무시무시한 학살의 소문은 다른 전투에서 적의 군사들로 하여금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게 만들었다.
바그다드를 칠 때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기독교도를 이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술을 사용하는 등 직접 싸우지 않고 이기는 다양한 병법도 십분 활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력의 특성만으로는 몽골이 유라시아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근 1백50년간 경영한 사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몽골비사(秘史)는 칭기즈칸의 총신 야율초재(耶律楚材)도 「말(馬)로써 세상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드넓은 초원에서 정처없이 흩어져 살던 유목민들의 내부 힘을 한데 모아 폭발시켜 「팍스 몽골리카」(몽골 아래의 평화)를 이뤄낸 것은 칭기즈칸의 탁월한 지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칭기즈칸이 이전의 유수한 정복자와 달랐던 것은 모든 민족과 종교를 인정하는 개방적인 리더십을 갖춘 점이었다. 요즘 말로 「세계화」의 시각을 갖춘 리더십이었던 것.
둘째, 칭기즈칸의 「자유무역주의」정책은 파괴됐던 실크로드 도시를 다시 번성하게 했고 몽골제국에 엄청난 부의 축적을 가져왔다. 14세기 초의 원(元)제국과 베네치아공화국의 상인 보호에 대한 통상조약을 보면 「캐러밴(낙타대상)의 도난에 대해선 원이 변상한다. 세금은 일률적인 매상세 3.3%만 내고 관세는 물리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셋째, 칭기즈칸이 세운 「역참(驛站)제도」라는 독특한 통신망은 광대한 제국의 통치를 매우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역참제도는 대칸의 명령과 각종 정보가 빨리 전해질 수 있도록 40㎞마다 「참」이라는 역을 두고 숙박시설 식료 말을 구비해 놓은 것. 전령들은 릴레이식으로 하루에 5백㎞씩 주파, 카라코룸에서 유럽까지 보름이면 도착했다고 한다. 이 통신로는 20세기 초까지 가장 빠른 길이었고 그 후 유라시아 횡단철도가 건설되어 군사로 겸 통상로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데이가 죽은 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면서 몽골제국은 차츰 몇개의 한국(汗國)으로 분열되어갔다. 특히 1259년 일한국의 카잔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자 종교를 두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일한국에서는 기독교도들이 몰살당했고 쿠빌라이칸은 이슬람신도들을 탄압, 중국에서 추방해 버렸다.
종교에 관용하라던 칭기즈칸의 충고를 듣지 않은 몽골인들은 분열했고 잇단 경제 정치적인 갈등으로 결국은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다. 또 전쟁을 통해 건설된 몽골제국은 정복이 끝나고 전리품의 유입이 중지되자 정복된 정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고 말았다.
몽골은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세계에서 두번째의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2백50여년간 몽골인에게 지배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인들은 칭기즈칸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게 하는 등 민족주의를 철저히 탄압, 영웅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러나 구소련 붕괴 후 자주성을 되찾은 몽골은「칭기즈칸의 부활」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세우는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칭기즈칸의 신화」가 강요된 오랜 침묵을 깨고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다시 「모든 것을 세울」 수 있게 될까. 〈전승훈기자〉
12-10 「대장정」마무리]장쾌한 드라마 117일
작열하는 태양. 숨쉬기조차 힘들다. 도로에 온도계를 대봤더니 섭씨 72도를 웃돌고 나무 그늘에서도 40도가 넘는다. 자동차 타이어가 부풀어 올라 금세라도 터질 것 같고 이글거리는 복사열 속에 낙타들이 물위를 걷는 듯이 보인다. 1백17일만에 횡단한 유라시아 대륙 1만7천여㎞. 초원과 사막, 거대한 내해(內海)를 건너는 대장정은 기마민족의 끊임없는 생존투쟁의 역사만큼이나 장쾌하고 드라마틱했다.
동아일보사와 MBC가 공동 기획하고 ㈜대우가 협찬한 「칭기즈칸 원정로 탐사대」는 5월3일 7백여년전 칭기즈칸이 말을 타고 달렸던 길을 따라 유라시아대륙을 국산 승용차로 횡단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출발했다. 첫 구간인 몽골의 대초원에서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흙먼지만 날리는 초원에서는 마치 바다에 던져진 것처럼 방향감각조차 없다. 고비사막과 알타이산맥을 넘을 땐 주유소는 물론 물조차 찾을 수 없어 대형트럭에 물과 휘발유를 가득 싣고 다녀야만 했다. 돌멩이와 모래구덩이를 피해가느라 시속 15∼20㎞로 거북운행을 하다보니 말이나 낙타를 타고 가는 현지인들이 차라리 우리보다 빨랐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운 나라」 몽골은 나그네를 대하는 소박한 인정이 흘러넘치는 곳. 밤 10시경 초원의 지평선 아래로 해가 져 야영을 하기 위해 텐트를 치면 어디서 왔는지 말을 탄 유목민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잉바인 오(안녕하세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한 뒤 집안에 있던 카펫까지 끌어내 텐트 바닥에 깔아줬다. 그리고 자신의 집인 게르(몽골 전통의 천막식 가옥)로 초대, 양 한마리를 통째로 잡거나 소젖 말젖 낙타젖 등을 발효시켜 만든 갖가지 차강이데(유제품)와 양고기를 넣은 만두 「보오츠」 등으로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 사막 실크로드의 주요 길목에서 영욕의 세월을 겪어온 사마르칸트 부하라와 톈산산맥 이시쿨호수 등을 지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나라 이란 국경에 도착하자 험난한 자연의 장애 못지않은 또다른 장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란 종교경찰은 국법상 통과할 수 없는 음란서적, 비디오테이프가 없는지 살피느라 탐사팀의 모든 짐을 샅샅이 뒤지고 노트북 컴퓨터부터 촬영용 빈 테이프의 내용까지 일일이 조사했다. 그들이 이틀 동안 탐사대의 짐을 뒤지던 모습은 차라리 야단이었다. 탐사대의 유일한 여성대원인 김지인씨(28·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는 『귀와 엉덩이를 보이지 말라』는 종교경찰의 지적을 받고 이란구간 내내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검은 망토와 머리수건인 헤잡, 차도르를 쓰고 다녀야 했다.
분쟁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카프카스산맥 이남의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에서는 전쟁과 마피아의 위험이 곳곳에서 취재팀을 가로막았다. 그 장애들을 하나 하나 넘기며 전진하다 내전지역인 그루지야 북쪽 압하스 국경을 넘기 직전, 결국 그루지야군의 총부리와 탱크에 저지당했다. 『당신들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니 돌아가라』 탐사대는 할 수 없이 흑해 동안을 따라 북상하려던 계획을 변경, 남쪽 해안도로를 따라 예정에 없는 터키로 들어간 후 배로 흑해를 건너 우크라이나로 들어가야만 했다.
탐사대원과 차량 2대를 실은 전장 1백42m, 1만1천t의 아제르바이잔 국적의 메르쿠리Ⅱ호는 꼬박 30시간만에 흑해를 건넜다. 탐사대가 「칭기즈칸 제국」의 발자취를 따라 자동차로 횡단한 나라는 몽골 러시아 카자흐 키르기스 우즈베크 투르크멘 이란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터키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총 12개국.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 수비대의 검문과 철조망에 막혀 1주일을 기다리기도 하고 수천㎞를 돌아가기도 했다. 드넓은 유라시아대륙에 민족도 종교도 국경도 비자도 여권도 필요없는 「하나의 세계」를 건설했던 칭기즈칸의 위대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전승훈기자〉
■ 2012-12-20 “몽골은 한국과 4촌 … 고구려 첫 도읍도 몽골에 있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성산인 자이슨 자락. 현지인의 존경을 받는 한 한국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이다. 몽골에서 신의(神醫)로 불렸던 의사 이태준(1883~1921)을 기리는 곳이다. 이태준은 1911년 세브란스의학전문(연세대의 전신) 제2회 졸업생 여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재학 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박사의 권유로 1914년 몽골로 들어갔다. 그는 몽골 환자들을 치료하며 독립운동을 돕는다. 그러던 중 1921년 몽골을 삼키려던 일본군과 손잡은 백러시아군에 체포돼 38세로 자이슨 자락에서 생애를 마친다.
묻혀 있던 이태준 열사의 존재를 찾아내고 이런 기념공원을 만든 주역 중 한 명이 최기호(70) 울란바타르대학 총장이다. 최 총장은 “오지의 병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이라며 “동시대에 활약한 성자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의인”이라고 말했다. 이태준의 별명이 ‘몽골의 슈바이처’다. 최 총장은 “몽골의 비밀 기록을 확인해 그의 존재와 활약상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몽골 정부가 제공한 땅에 연세대가 비용을 대 2000년 7월 묘비 제막식을 했다. 당시 기념공원 일대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도시의 팽창과 함께 노른자위 땅이 됐다. 한때 땅을 돌려달라는 요구가 몽골 당국에서 나왔다. 최 총장은 “도시에는 공원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설득했더니 더 이상 그런 말이 안 나온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약 2000㎞ 떨어진 몽골. 하지만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던 나라다. 냉전과 남북 분단 때문이다. 남한 땅은 섬 모양을 하고 있다. 북으로는 갈 수 없고 동·서·남 3면의 바다를 통해서만 외부와 교류하는 나라가 됐다. 최 총장에게도 몽골은 먼 땅이었다. 그는 “90년 몽골에 처음 갔을 때 홍콩과 베이징을 경유해 3일 넘게 걸렸다”며 “중국 항공사의 비행기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최 총장이 몽골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한국어와 만주어·몽골어·일본어 등 주변 언어 간 관계를 연구하면서다. 30년 전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몽골학과를 수료했다. 하지만 냉전의 벽은 적성국가 몽골을 가볼 수 없는 땅으로 만들었다. 길이 뚫린 것은 한·몽 수교가 이뤄진 90년이다. 지금은 직항로가 열리고 4만여 명의 몽골인이 한국에 살고 있다. 한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몽골인만 2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약 300만 명)의 10% 가까운 몽골인이 한국 생활을 체험했다는 말이 된다.
최 총장은 학문적으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왔다. 고려시대 ‘청산별곡’에서 그는 몽골의 흔적을 읽는다.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동원한 고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태를 고려인 원감국사(圓監國師)가 표현한 작품이란 주장이다. 특히 후렴구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를 몽골어로 해석해 보여줬다. 그 뜻은 ‘이기자 이기자 이긴다 이기리라 이겨’다.
우리말에는 많은 몽골어 잔재가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부산의 자갈치 시장. 과거 이 곳이 자갈밭이어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도 있지만 최 총장의 해석은 다르다. 물고기를 뜻하는 몽골어 ‘자가스’에 직업을 뜻하는 몽골어 ‘치’가 합성된 단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갈치 시장은 ‘물고기를 파는(잡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쯤 된다. 최 총장은 ‘한참을 가다’는 말의 어원도 몽골의 역참제도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몽골제국이 정비한 역참제도에서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약 40㎞)가 ‘한 참’이다. 이게 먼 거리여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변했다.
몽골이 말을 키웠던 제주도의 지명에서 몽골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제주도는 1273년 삼별초가 평정된 뒤 몽골 관부가 설치된 곳이다. 1276년 8월 몽골 말 160마리를 제주도로 가져와 수산평(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방목했다. 제주도의 ‘조랑말’ 명칭은 상하의 진동 없이 매끄럽게 달리는 ‘조로모로’ 주법이란 몽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몽골학회 박원길 회장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말에게 가장 치명적인 설사병 치료제로 몽골 초원에서 지천으로 자라는 약용식물도 가져왔다. 수산평 근처에서 자라는 피뿌리풀이다.
최 총장은 “제주도 지명에 많은 ‘오름’은 몽골어로 ‘산’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산굼부리’ 역시 ‘가운데가 아름답게 깊이 파인 비탈산’이라는 몽골어에 유래했다고 본다. ‘비바리’는 ‘작다(비)’와 ‘며느리(바리)’가 결합한 몽골어다. 제주도에서는 이 말이 처녀를 뜻한다. 한라산도 몽골어로는 ‘큰 호수가 있는 산’쯤으로 풀이된다.
최 총장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첫 도읍이 동(東)몽골 땅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마리는 올해로 서거한 지 1600년이 된 광개토대왕의 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의 광개토대왕비는 아들 장수왕이 대왕 서거 2년 뒤인 414년에 세웠다. 비문의 첫 머리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시조 추모왕(동명성왕)의 행적으로 시작한다. 연구 초점은 바로 추모왕이다. 12세기 중엽 편찬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주몽(朱蒙)’과 같은 인물이다. 13세기 말의 삼국유사에서도 추모왕은 주몽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의 역사책에는 주몽·추몽·중모·도모 등으로 다양하게 나온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최 총장은 고구려인이 직접 기록한 ‘추모’가 당연히 가장 정확하고, 나머지는 이를 다른 한자로 옮긴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추모’는 무슨 뜻인가. 최 총장은 추모왕의 시호가 동명성왕인 데 착안해 ‘샛별(동명성·금성)’이란 뜻의 몽골계 단어인 ‘촐몽’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본다.
최 총장이 다음으로 주목하는 것은 추모왕이 남하하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지나게 됐다는 비문 대목이다. 추모왕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부여의 대소로부터 도망쳐 후일을 도모하라는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따른다. 엄리대수는 삼국사기에서 ‘엄사수’, 삼국유사에선 ‘엄수(淹水)’다. 최 총장은 ‘엄리’가 강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의 어근이고, ‘대수’가 ‘큰 강물’이란 뜻이므로 엄니는 ‘아무르(아무+르)’라는 강 이름이라고 풀이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추모왕이 엄리대수를 건넌 뒤 비류곡 홀본(忽本)에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37년의 일이다. 중국사서인 위서는 홀본이 아니라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기록했다. 사서들은 비류곡을 ‘모둔곡(毛屯谷)’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지형으로 묘사했다. 몽골어나 여진어로 ‘모드’가 ‘나무’이므로 모둔곡은 바로 ‘나무가 많은 골짜기’를 의미한다는 것이 최 총장의 주장이다. 동몽골 부이르노르 할힌골에는 끝없는 초원이 끝나는 지점에 높은 산이 있다. 최 총장은 이 할힌골이 홀승골이라고 본다. 그는 92년부터 수차례 할힌골 부이르노르와 다리강가 일대를 답사했다. 한국의 시골 주거지역에서 자라는 비름나물을 비롯해 초원에서 보기 어려운 풀들이 자라고 있는 지역이었다. 조개묻이 세 곳도 골짜기에서 발견됐다. 유목민이 먹지 않는 조개를 잡아먹는 사람들의 흔적이다. 성터나 석인상도 확인됐다. 또 몽골 여인과 고구려 여인이 초원에서 만나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는 전승설화가 채취됐다. 최 총장이 펴는 주장에 이론이 없을 수 없다. 초기 고구려의 위치를 놓고 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가 동몽골 땅에서 나라를 열었고, 지금도 언어·인류학적으로 몽골이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확신한다. 그는 “일본이 한국과 8촌쯤 된다면 몽골은 4촌뻘”이라고 말했다.
그가 2년 전부터 총장을 맡고 있는 울란바타르대학에는 몽골인 3500여 명이 공부하고 있다. 지난 8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한국어과도 설치돼 있다. 학생들은 몽골어와 어순이 같은 한국어를 비교적 쉽게 익힌다고 한다. 최 총장은 “한·몽 교류와 협력, 몽골의 발전에 이바지할 몽골 청년들을 키운다는 보람으로 즐겁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몽고 vs 몽골=몽고(蒙古)와 몽골(Mongol)은 한국인에게는 그게 그거 같다. 하지만 몽골인에게 몽고는 치욕의 단어다. 중국인이 몽골을 비하해 붙인 나라 이름이기 때문이다. 글자대로 풀면 ‘몽매하고 고루하다’는 뜻이다. 지금도 이런 의미 차이를 모르는 많은 한국인이 몽골과 몽골인을 몽고와 몽고인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네이멍구(내몽고)’처럼 여전히 몽골을 몽고로 부른다. 고려는 몽골 치하에서 독자적인 왕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제국의 간섭은 많았으되 외형상 독립국의 지위는 잃지 않았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과 이를 잇는 대한제국의 말로와는 대조를 이룬다.
■ 2015.01.28 칭기즈칸 무덤의 800년 미스터리 곧 풀리나
▲중국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있는 칭기즈칸릉. 시신 대신 유물을 모아 조성한 '의관총'이다.
칭기즈칸이 무덤에서 깨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9일 중국의 과학기술매체인 텅쉰과기는 “2010년부터 칭기즈칸의 무덤을 추적해온 린위민(林宇民·앨버트 린) 박사가 최근 칭기즈칸의 매장지를 55곳으로 압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티아고 분교 소속의 중국계 미국인 연구원인 린위민 박사는 “칭기즈칸의 후손”을 자처하며 칭기즈칸의 매장지로 추정되는 6000㎢가 넘는 지역을 인공위성과 무인기 등을 동원해 추적해 왔다.
이를 통해 촬영한 8만4000여장에 달하는 위성사진 등을 바탕으로 도로와 하류를 비롯한 대규모 매장 흔적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해 왔다. 이 과정에는 린위민 박사를 비롯해 1만명이 넘는 연구지원자가 함께 참여했다. 그 결과 칭기즈칸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지를 55곳으로 압축해 낸 것.
린위민 박사는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는 ‘대칸(칭기즈칸)의 계곡’이란 국제 프로젝트의 주축 인물이기도 하다. 그간 린위민 박사가 소속된 미국 캘리포니아대를 비롯 몽골과학원, 국제몽골연구협회, 전미지리학회 등은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아왔다. 린위민 박사 측에 따르면, 곧 압축된 55개 지점에 대한 몽골 현지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계획대로라면 지난 800년간 인류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혀온 칭기즈칸의 무덤이 중국계 미국인의 손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셈이다.
동서양을 통틀어 세계 최대 정복자인 칭기즈칸 테무진이 사망한 것은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자신이 사망한 뒤 밀장(密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1만여필의 말을 동원해 시신을 묻었던 곳을 철저하게 말발굽으로 다지는 식으로 평장(平葬)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일설에 의하면 매장에 참여했던 과정에 마주쳤던 모든 사람을 죽이고, 호송 인원과 말들을 함께 순장(殉葬)시킨 것으로도 전한다. 도굴 등에 의한 무덤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 인해 칭기즈칸의 사망 이후부터 8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칭기즈칸이 매장된 곳의 정확한 위치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역사상 세계 최대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의 무덤은 전 세계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도굴꾼들에게도 늘 관심거리였다. “세계 최대 제국을 세운 만큼 칭기즈칸의 시신과 함께 막대한 부장품이 묻혀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몽골을 점령했던 권력자들 역시 칭기즈칸의 무덤에 줄곧 지대한 관심을 표해왔다. 특히 만몽(滿蒙) 연합정권인 청(淸)나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일대를 정벌하고 칭기즈칸의 ‘대원전국(大元傳國)’ 옥새를 수중에 넣은 직후 황제를 자처했다. 또 청나라 옹정제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칭기즈칸의 유물을 모은 ‘의관총(衣冠冢)’을 조성해 칭기즈칸을 신성시해 왔다.
내몽골 일대를 다스렸던 장제스(蔣介石) 역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칭기즈칸의 의관총을 칭하이(靑海)의 타얼스(塔爾寺)로 피신시켰다. 반대로 일제는 중일전쟁 때 내몽골 일대를 점령한 뒤 ‘몽강국(蒙疆國)’이란 괴뢰정권을 세워 칭기즈칸 무덤 발굴에 나섰다. “칭기즈칸이 미나모토 요시쓰네(源義經)”라는 전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미나모토 요시쓰네는 일본에서 추앙받는 헤이안 말기의 무장으로, 칭기즈칸과 활동 시기가 비슷하다. 이에 상당수 일본인들은 “미나모토 요시쓰네가 곧 칭기즈칸”이라고 믿고 있다. 일본은 1990년대에도 몽골과 함께 칭기즈칸 무덤 공동탐사를 진행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에 있는 칭기즈칸의 초대형 기마상.
반면 지금까지 칭기즈칸의 무덤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몽골족 원(元)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원사(元史)’에 나와 있는 ‘장기련곡(葬起輦谷)’이란 네 글자가 전부였다. ‘기련곡에 묻었다’는 뜻으로, 후대의 학자들은 기련곡의 위치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게다가 칭기즈칸이 동서양에 걸친 워낙 넓은 대제국을 세운 까닭에 ‘기련곡’의 위치 역시 중국, 몽골, 러시아 등지로 의견이 팽팽히 엇갈렸다.
현재로서 칭기즈칸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련곡’으로 가장 유력한 곳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동북쪽에 있는 컨티산맥 일대다. ‘몽골비사’에 등장하는 부르한산(不兒罕山·부르칸 칼둔산)이 바로 이곳이다. 칭기즈칸이 태어나 청년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성산(聖山)이다. 이에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은 칭기즈칸이 있다면 컨티산맥의 부르한산 어딘가쯤에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반면 중국의 상당수 학자들은 닝샤(寧夏)회족자치구의 류판산(六盤山) 일대를 매장지로 추정하고 있다. 칭기즈칸은 서하(西夏) 원정을 벌이던 1227년 8월, 류판산 인근에서 66세의 일기로 병사했다. 회족자치구인 닝샤는 옛 서하국의 영역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부패하기 마련인데, 죽은 시신을 들고 몽골 초원까지 가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란 것이 류판산설을 주장하는 근거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 때 원나라를 방문했던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는 “칭기즈칸이 알타이산에 묻혀 있다”고 주장했다. 알타이산은 현재 몽골과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사이에 있는 산맥이다. 반면 일부 러시아 학자들은 “칭기즈칸이 바이칼호수에 수장(水葬)돼 있을 것”이란 주장을 펴기도 했다.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바이칼호수는 몽골의 북쪽 국경 너머에 있어 수장 가능성도 없지 않다.
칭기즈칸의 무덤이 중국계 미국인의 손에 의해 발견되면 몽골 출신 칭기즈칸의 중국인화(化)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현재 “칭기즈칸이 각 민족 통합에 지대한 공을 기록했다”며 우상화하고 있다. 또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이 세운 원나라를 자신들의 정사(24사)에 편입시켜 가르치고 있다. 1954년에는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칭기즈칸 의관총을 대대적으로 중수한 뒤 ‘5A급’(최고급) 국가문물로 지정해 짭짤한 관광수입마저 올리고 있다. 2004년에는 몽골족 배우 바썬(巴森)을 주연으로 한 30부작 대하드라마를 제작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중국화에 맞서 몽골에서도 2008년 울란바토르 동쪽 외곽에 40m 높이의 칭기즈칸 초대형 기마상을 조성해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곳은 칭기즈칸의 황금 채찍이 발견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무덤 발굴 등 고고학 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중국은 1974년 중국 시안에서 진(秦)시황의 병마용을 발굴해낸 이후부터 이미 세계 정상 수준이다. 그 결과 2009년에는 ‘삼국지’ 위(魏)나라 무왕 조조(曹操)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 또 2013년에는 ‘대운하’로 잘 알려진 수(隨)나라 양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하는 등 매년 굵직굵직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 조갑제의 무갈제국 이야기
2015-02-13 인도를 다스린 무갈제국
매년 네덜란드만한 인구가 늘고 10년마다 멕시코 규모의 인구가 더해지는 나라,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자이나교 시크교가 공존하는 세계 최대의 민주국가 인도.
가이드는 "알함브라 같은 궁전은 400개나 있다"고 말한다. 스케일과 정교함, 다양성과 깊이, 세속과 정신이 융화된 인도는 대리석과 사암(砂岩)의 건축문화 대국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탈리아가 세계문화유산 최다보유국이지만 종국엔 인도가 1등이 될 것이다. 수십년 안에 인도는 중국을 젖히고 인구 1등이 된다. 젊은 인구가 많고 학생이 6억이나 되어 생산성이 높은 인구구조이다. 인도는 수학 종교 철학의 나라이다. 생각을 많이 깊게 히는 습관이 붙었다. IT의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인도인이 앞서 가는 이유이다
▲인도 올차에 있는 무갈시대의 분델라 왕국 궁전. 자항길 궁전으로 불린다. 1600년대에 건축되었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6층 건물이다.페르샤식, 이슬람식, 힌두식이 혼합된 무갈건축은 장중하면서도 풍성한 느낌을 준다
▲인도 기차역의 짐꾼
▲인도 올차 무갈시대 궁전의 창문장식. 돌을 깎은 것이다
▲인도 카주라호의 힌두교 사원.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11세기 작품. 모래돌로 만들었다. 에로틱한 조각으로 둘렀다. 이런 사원이 수십 개다.
▲아그라의 호텔 옥상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17세기 무갈 건축의 걸작이자 최고의 호화분묘이다
▲구걸하는 가족
▲인도인의 정신적 고향 바라나시의 아침. 갠지스 강가. 생명과 죽음의 공존
▲인도는 건물 사람 역사가 colorful
▲인파가 몰린 타지마할
▲인도 서부 라자스탄 풍경, 인도의 건물은 황색이 많은데 사암이 자재로 쓰인 덕분이다
▲궁전 산성 내부 장식.
이 거대하고 다양한 인도를 이슬람을 믿는 몽골계(系)가 어떻게 다스렸나?
무갈제국의 창설자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부계(父系)로는 티무르 대제(大帝)의 5代孫, 어머니 쪽 혈통으로는 칭기즈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전시(戰時)에도 詩를 지었으며 감동적인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족(族)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 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2000명의 기병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구축한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실지(失地)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는 고향 페르가나를 못 잊어 하였다. 땅이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는 곳이다.
1512년 북진(北進)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방향을 돌렸다. 지금의 파키스탄, 인도 쪽으로 남진(南進)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남정(南征)의 피날레는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왕조(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시켜 10만 병력의 적(敵)을 섬멸했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계(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무갈은 이란어로 몽골이란 뜻이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 식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재현(再現), 스스로를 달랬다.
이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교양 있는 영웅이었다. 47세에 죽은 그가 남긴 회고록은 솔직하고 정확하며 문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겨울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하들과 눈보라 속을 헤쳐 나가다가 동굴을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동굴은 너무 작았다. 나는 동굴 입구에서 삽으로 눈을 파고 앉았다. 몇 사람이 나만 동굴에 들어가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내 부하들이 눈보라를 맞고 있는데 나만 동굴에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남자답지도, 동지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페르샤의 속담이 생각났다. '친구와 함께 하는 죽음은 축제이다.' 눈보라는 계속되었고 나의 등과 귀는 눈에 덮였다. 귀는 동상(凍傷)에 걸렸다. 이때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부하가 소리쳤다. '동굴이 아주 큽니다. 모두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눈을 털고 부하 전사(戰士)들을 불러 모아 굴 속으로 들어갔다. 40-50명이 편하게 앉을 만한 넓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식량과 휴대품을 갖고 들어왔다. 심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을 발견하다니!>
바부르(호랑이란 뜻)는 아들 후마윤이 중병(重病)으로 사경(死境)을 헤매자 매일 그 병상(病床)을 돌면서 알라 신에게 “아들의 병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소원대로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고 아들은 나았다고 한다. 2대 황제 후마윤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다 잃어버리고 한때는 페르시아 왕의 보호 속에서 연명(延命)하기도 했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가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약 320만 평방킬로미터를 정복, 너그럽게 다스렸다. 전성기인 1700년 무갈제국의 인구는 약 1억5000만 명으로서 중국(당시 청, 1억2000만)보다 많았다. 국력(國力)과 인구 면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무갈제국의 판도를 지금에 대입하면 인구가 16억쯤 되어 역시 중국보다 많다. 무갈제국을 세운 사람들은 투르크-몽골족(族)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었으나 이 제국을 다스린 세력은 페르샤 관료들과 이슬람 문화(文化)였다. 수니파(派) 이슬람에 속했던 무갈의 왕들은 힌두교 등 타(他) 종교를 존중하고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정착시켜 수많은 종족들을 잘 다스리면서 다양성이 풍부하고 활력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무갈제국의 전성기는 아크바르 대왕(大王) 시절부터 약 150년간이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만든 샤자한은 4대 왕이다. 그는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세 번째 부인을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호화판 무덤인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 흰 대리석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건물이다. 눈부신 돔은 지름 35m, 높이 35m이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공된(1653년) 직후 아들에 의하여 폐위(廢位)되어 2.5km 떨어진 아그라 요새의 한 건물에 유폐(幽閉)되었다. 발코니에서, 사랑한 왕비(王妃)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어 왕비 옆에 안장되었다.
파키스탄의 고도(古都) 라호르에도 무갈제국의 성(城) 안에 궁전과 모스크가 있다. 궁전은 동시대의 베르사유에 못지않은 규모이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건설한 바드샤히 모스크도 장대하다. 주황색 사암(砂岩)으로 만든 이 모스크는 1678년에 완공되었다. 정원은 170×170m의 정사각형으로서 10만 명의 수용능력을 가졌다. 1986년까지 313년 동안 세계 최대의 모스크였다. 지금은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파이잘 모스크가 가장 크다.
인도의 타지마할과 파키스탄의 라호르성(城)이란 2대 볼거리를 만든 나라의 이름이 몽골(무갈)제국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17세기 세계 6대 강국은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몽골계 북방 기마민족이 건설한 오스만 터키, 청(淸), 무갈제국이었다. 몽골계 기마(騎馬)군단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소총이 발명되고 함선(艦船)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해양세력의 대표인 영국이 19세기 중반 무갈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다. 그때부터 중국, 인도가 100년 이상 서양 제국주의의 동진(東進)으로 온갖 수모를 겪는다. 이제 30억 인구를 가진 두 거대(巨大) 국가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말을 잘 타던 민족이 세계를 정복한 뒤엔 배를 잘 모는 이들이 나타나 바다를 장악, 육지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지금은 하늘을 지배하는 시대를 거쳐 사이버 세상이 각축장이다.
무갈제국은 이슬람을 믿는 몽골-투르크족(族)의 군사집단이 토착국가를 점령하고 인도에 건설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에서도 무갈제국(帝國)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인도 사람들은 많지만 몽골(무갈)의 식민지였던 시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인도인은 만날 수가 없었다. 이교도(異敎徒)의, 이민족(異民族)의 지배를 왜 그리워하고 자랑하는가.
인도 뉴델리 시내 네루대학의 무갈제국 전공 역사학자 하즈반스 무키아 교수를 만나 물어보았다.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의 창건자 바부르는 '원래 우리 할아버지 티무르대제(大帝)가 인도를 점령했었는데 그 뒤를 이어받아 내가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제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3대 아크바르 황제는 정복이 아닌 문화적인 기반에 제국의 정통성을 뿌리박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정의, 화목, 평화가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원래 무갈제국의 지배층은 57%의 몽골-투르크 족(族)과 나머지는 이란 인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아크바르는 지배층을 확대 개편하면서 어떤 종족도 4분의 1이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슬람을 힌두교도에게 강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힌두교의 문화와 관습을 궁정에서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인도를 통치했던 이전의 왕조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현지화(現地化)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통합과 폭넓은 참여 위에서 문화가 꽃피게 되었습니다.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시인이자 작곡가로, 또 작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명문입니다. 그를 이은 무갈제국의 황제들도 문학-학술-그림-건축에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교양인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경쟁적으로 건축한 놀라운 모스크, 정원, 기념물들이 지금도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런 문화적(文化的) 건설이 또한 무갈제국의 정통성을 강화시켰습니다. 영국통치 시절인 19세기에 인도에서 반영(反英)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정신적인 지주는 무갈왕조(王祖)였습니다. 그때는 허수아비가 돼 있었지만…"
2016.06.21 773년 전 크로아티아를 뒤집어놓은 몽골騎馬군단 이야기
▲아드리아海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풍경./조갑제닷컴
요사이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 가는 곳이 크로아티아이다. 아드리아海를 끼고 이탈리아와 對面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그리스, 로마, 베니스, 헝가리, 오스만 터키, 오스트리아 문명권에 속했다. 달마티아 지방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지난 週 이 지역을 여행하다가 1240년 러시아 남쪽에서 發進한 징기스칸 손자 바투의 몽골 기마군단이 아드리아해의 크로아티아 지역까지 쳐들어와 초토화시킨 이야기들을, 현지인들로부터 많이 들었다. 몽골인들에 대한 공포심과 외경심은 지금까지도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 비슷하게 생긴 韓中日 관광객이 이 지역을 뒤덮고 있다. 다른 모습의 몽골 침략인 셈이다.
▲징기스 칸의 손자 바투 칸.
1241년 봄 몽골군에 의하여 헝가리 군대가 전멸당하자 왕 벨라 4세는 아드리아 해안으로 도망 갔다. 당시 크로아티아 왕국은 헝가리 왕국과 연합국 개념의 동맹 관계였다. 바투가 2만 명의 별동대를 크로아티아로 보낸 것은 정복이 아니라 벨라 4세 체포였다.
몽골군단은 아드리아 해안 지역인 달마티아(가장 유명한 도시가 두브로브니크)를 쓸고 다니면서 왕을 찾았다. 이곳 귀족들이 왕을 숨겨주었다.
이틀 전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로 갔더니 여자 가이드가 몽골군이 그곳을 파괴한 이야기를 했다. 약 800년 전 눈이 작게 찢어진 몽골군이 몰려와 성당을 불태우고 성곽을 부순 뒤 자그레브가 재건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사건이 도시의 번영을 가져오는 轉禍爲福의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벨라 4세는 도시 再建을 위하여 자그레브 시민들에게 勅令을 내려 '왕실 직할 도시'로 지정, 많은 자치권을 주었던 것이다.
몽골군이 자그레브나 헝가리 쪽에서 아드리아해로 넘어오려면 디나르 산맥을 지나야 한다. 해발 2000m급의 험준한 山嶽이다. 여기서 크로아티아군으로부터 매복 공격을 받아 고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차 대전 때는 크로아티아 출신 티토가 이 산악 지대를 무대로, 게릴라 부대를 지휘, 나치 점령군과 싸웠다. 2차 대전의 가장 성공적인 게릴라전이었다. 티토는 그런 힘으로 스탈린을 거역하고, 세르비아 사람들을 누르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지도, 自主노선을 걸을 수 있었다. 냉전 후 유고연방이 붕괴되고 內戰이 일어난 한 이유는 티토와 같은 카리스마 강한 지도자가 사라진 때문이다.
몽골군대는 1260년대엔 이집트의 맘루크 왕국이 다스리던 시리아, 이스라엘까지 진격하는데, 몽골군의 서양 원정은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最長의 작전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러시아 원정보다도 몽골에서 시작, 아드리아해와 갈릴리 호수까지 간 원정의 범위가 더 넓다. 말과 활, 그리고 野性과 조직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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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무히 決戰場에서
기자는 1996년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으로 유명한 戰跡地(전적지)인 무히까지 자동차 편으로 달려 본 적이 있다. 부다페스트를 빠져나가자마자 大平原(대평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 보리밭 과수원 草原은 기자가 거쳐온 몽골 벨트 지역에서 이미 눈에 익은 장면이었다. 헝가리는 몽골-투르크族의 캔버스인 유라시아 草原의 서쪽 끝이다. 동쪽 끝은 만주-한반도이다.
1241년 겨울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는 20년 전에 러시아 원정을 한 적이 있는 老將(노장) 스부데이를 사령관으로 삼아 우크라이나 서쪽에 10만 기마군단을 집결시켰다. 영국 戰史학자 리델 하트에 따르면 이 원정의 목표는 헝가리였다. 당시 헝가리 지배층은 몽골-투르크族 계통의 마자르族이었고, 몽골 제국에선 헝가리를 자신들의 통치권 바깥에 있는 유일한 同族(동족) 집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결전장 무히까지 3시간 동안 달리면서 기자는 몽골 군대가 비록 유라시아 草原의 동쪽 끝에서 왔다고 해도 헝가리 草原에서 크게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초원은 바다와 같아서 어디를 가나 비슷한 분위기와 생활 양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다를 지배하여 제국을 건설할 수는 있어도 바다에 제국을 세울 수는 없는 것과 꼭같이 이 북방 초원은 문명과 종교와 상품과 과학과 기술이 매개되는, 또 권력과 국가가 만들어지는 무대이자 産室(산실)이었지 어떤 국가나 이념의 틀에 속박 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15세기부터 大항해 시대가 시작되어 비로소 大洋(대양)이 제국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기 전까지 세계사에는 두 개의 진정한 바다가 있었으니 하나는 지중해요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 草原이었다. 지중해가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상징되는 서양사의 무대였다면 유라시아 草原은 몽골-투르크 기마군단으로 상징되는 군사력, 권력, 파괴와 창조, 그리고 무역과 문화의 교류로 상징되는 동서양 통합의 무대였다.
먹물 먹은 지식인이 독점하고 있는 역사 기술은 필연적으로 지식, 즉 문명과 예술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더구나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이 서양에서 개발된 관계도 있고 해서 세계사는 일방적으로 서양 중심으로 써졌다. 훈, 투르크, 몽골族의 西進(서진)에 의한 피해를 많이 보아온 西歐(서구)학자들에게 객관적 기술을 기대할 수도 없는 일. 이렇게 되어 몽골-투르크族은 야만족 취급을 받아 과소평가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사를 자동차에 비교한다면 유라시아 초원은 그것을 움직이는 트랜스미션이었고 몽골-투르크族은 트랜스미션을 돌리는 엔진이었다. 이 엔진으로 해서 세계사는 빨라졌고 넓어졌으며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무히에 도착했다. 풀밭 가운데 작은 동산이 있고 나무 십자가가 수십 개 꽂혀 있었다. 무히 大會戰(대회전) 750주년을 맞은 1991년에 세운 「무히 전투 기념물」이다. 패전을 기념하는 건축물답게 참담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몽골族에 대한 원한처럼 느껴졌다. 사조 강변(江邊)에 자리잡은 이 무히 전투에 대하여 기념관에선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타타르(몽골族을 지칭)는 헝가리 군대 집결지를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타타르의 화살은 멀리서 날아오는데 헝가리의 활은 짧게 날아 敵陣에 이르지 못하니 절망, 무력감, 그리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도망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이 기념물에 또 이런 비명이 새겨져 있다.
<헝가리와 다른 나라에서 참전한 기사들은 헝가리 왕과 함께 야만族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여기에서 목숨을 바쳤다.>
바투와 스부데이에 의한 헝가리 정복전쟁은 20세기의 기갑부대에 의한 大기동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와 속도로 진행되었다. 몽골軍은 4개 군단으로 갈라진 다음 부챗살처럼 서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출발한 것은 진행 방향으로 봐서 맨 오른쪽인 北軍(북군)이었다. 이 군단은 主力軍(주력군)이 되는 나머지 3개 군단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1241년 3월 폴란드로 쳐들어간 北軍은 비스롤라江을 건너 스지들로우에서 폴란드 군대를 격파하였다. 4월에는 리그니츠에서 폴란드-독일 연합군을 大破(대파)했다.
한 달 만에 北軍은 두 번의 결정적 승리를 통해서 폴란드와 지금의 체코 지역을 정복했다. 약 600km를 한 달만에 주파한 北軍은 主力軍의 헝가리 정복전을 안전하게 감싸안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3개 군단으로 구성된 주력군은 左軍(좌군)과 右軍(우군)이 원호를 그리면서 먼저 뻗어나가고 그 방어선의 한 가운데로 중앙군이 직선으로 질주하는 작전을 폈다. 이 3개 군단은 4월4일 부다페스트 부근 다뉴브 강변에 집결했다. 중앙군의 선봉은 3일 만에 눈덮인 敵國(적국) 지역을 300km나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바투와 스부데이는 여기서 전략적 후퇴를 하게 된다. 다뉴브강을 건너서 헝가리 군대와 결전하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몽골 기마군단의 長技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약 8만의 몽골군이 6일간에 걸쳐 천천히 후퇴를 하니 헝가리군은 추격해 왔다. 도시와 강이란 천연의 방어선을 포기한 채 몽골군의 長技(장기)인 유인책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4월10일 몽골군은 야간에 좁은 사조江을 건너 헝가리군을 기습하였다. 우회, 유인, 기습은 기동력에 자신을 가진 몽골군의 전형적인 전술이었다. 이 3중주에 걸려든 헝가리군은 이날 섬멸되었다. 7만의 戰死者를 냈다. 헝가리 왕은 아드리아海쪽으로 달아났다. 몽골 군대는 벨라 4세를 추격하여 지금의 발칸지방에 이르니 왕은 지중해의 한 섬으로 달아났다. 이때 몽골군대 사령부에 오고데이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투는, 철군을 명령했다. 유럽을 살려준 명령이었다.
기자는 1996년에 몽골에서 헝가리까지 유라시아의 몽골 벨트 지역 15개국을 약 60일에 걸쳐 취재한 적이 있었다.13세기 초 징기스칸의 몽골 기마군단이 高麗(고려)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문명세계의 거의 전부를 정복했을 때 몽골 본토의 인구는 1백만에 불과했으나 점령지의 인구는 약 1억이었다. 이런 '1당 백'의 정복과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느냐 하는 데 대해서 서양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1927년에 영국의 전략사상가 리델 하트가 쓴 '위대한 지휘관들을 벗긴다(Great Captains Unveiled)'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그 첫 장이 징기스칸과 그의 휘하 장군 스부데이를 다루고 있었다. 스부데이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를 모시고 러시아와 유럽을 원정했던 勇將(용장)이다.
이 章(장)의 결론에서 著者(저자)는 몽골 기마 군단 조직의 간편성(Simplicity)을 승리의 근본으로 꼽았다. 몽골 군단은 보급부대가 따로 없는 전원 기병이었다. 기병 한 사람이 말을 4∼5마리씩 몰고 다니면서 짐을 나르는 데뿐 아니라 비상식량이나 물통(사막을 건너갈 때는 말의 피를 빨아마셨다)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느린 보급부대가 따라 다니지 않으면 전투부대의 이동속도는 엄청 빨라진다. 나폴레옹의 유명한 공식에 따르면 <전투력=무장력x기동성>이다. 몽골군단은 全員(전원)기병체제 덕분에 농경민족 군대보다 4∼5배나 빨랐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몽골군단은 갑옷도 가볍게 만들었다.
몽골 군단은 지금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을 두 개 갖고 있다. 그들은 1237∼1238년 겨울, 그리고 1240∼1241년 겨울 두 차례 러시아로 쳐들어가 겨울 작전을 성공시켰다. 수 백년 뒤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굴복시켰던 러시아의 冬(동)장군도 몽골 기마군단의 지구력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기마군단은 1241년 초에는 헝가리 정복전에서 하루 평균 1백km를 주파했다. 이 속도는 2차세계대전에서 기록된 독일 기갑군단의 돌파속도보다 더 빠른 것이었다.
세계사를 바꾼 간편성의 전략사상
당시 유럽의 騎馬(기마)전법은 중무장이었을 뿐 아니라 보병과 연계된 조직이었다. 성격이 다른 이런 두 조직을 지휘하는 것은 기병 單一(단일) 조직보다도 복잡하다. 인간이든 조직이든 복잡하면 기동성이 떨어지게 돼 있다. 기자가 헝가리에 가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중세 유럽 기사들의 갑옷 무게는 약 40kg이었고 말에 덮어씌운 甲胄(갑주)까지 보태면 100kg을 넘었다. 이런 말은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영화에선 근사하게 보이지만 이런 로보캅 같은 중무장은 결국 죽기 싫다는 방어적인 심리를 반영한다. 이는 복잡한 규정을 많이 만들어 철갑처럼 자신을 둘러싸고는 무사안일을 추구하는 관료조직에 비유할 수 있다. 유럽 기사들은 창과 칼을 主(주)무기로 썼다.
그들은 활이 비겁한 무기라 하여 법으로 금지시키기도 했고 하층민의 무기로 제한했다. 세종대왕이 野人(야인)들에 대한 간첩작전을 지시하니까 '오랑캐를 상대로 어찌 속임수를 쓸 수 있겠습니까'하고 들고 일어났던 주자학 선비들의 僞善(위선)을 연상시킨다. 도덕을 아무 데나 갖다대면 결과는 가끔 非도덕으로 나타난다.
중무장한 유럽기사들에 대하여 몽골기만군단의 고전적 戰法(전법)은 200∼300m쯤의 거리를 두고 활로써 집중사격을 하여 혼란에 빠트린 다음 돌격하여 요절을 내는 것이었다. 몽골 군단은 또 퇴각을 위장하여 유럽기병들을 유도, 분산시킨 다음 삽시간에 재집결하여 분산된 敵(적)을 각개 격파하는 戰法(전법)도 즐겼다. 이것은 기동성에서 앞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리델 하트는 몽골군단의 全員기병제를 참고하여 영국도 步兵(보병)에서 독립된 순수한 기갑군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 책을 통해서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것은 히틀러의 장군들이었다. 독일 기갑군단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데리안은 '나는 리델 하트의 제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드골 대령도 독립기갑군단의 창설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2차 세계 대전의 초장에서 독일이 전격전으로써 연전연승한 것은 탱크들을 보병사단에 분산시켜 놓지 않고 단일한 기갑군단 조직으로 집중시킨 덕분이었다. 편 손가락이 아닌 불끈 쥔 주먹을 만들었다는 얘기이다. 이 발상의 근본이 간편성(Simplicity)인 것이다. 리델 하트에 따르면 기동성은 간편성에서 나오고 기동성은 중무장보다도 더 안전한 방법이란 것이다. 즉, 빠르면 산다는 뜻이다.
간편성은 자신감에서
놀랍게도 미국의 가장 성공한 최고경영자 잭 웰치가 몽골 기마군단의 성공 원리와 꼭 같은 내용을 경영의 원리로 삼고 있다. 그는 GE의 회장일 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신속하려면 (조직이나 경영지침이) 간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複(복)문장의 脚注(각주)가 붙은 경영지침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간편하지 않으면 빨라질 수 없고 빨라지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엔지니어에게 간편성이란 간결하면서도 기능이 우수한 디자인을 뜻합니다. 영업인들에게는 이 간편성의 원칙이 투명한 거래를 의미합니다. 생산현장에서는 모든 작업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상식적인 작업과정을,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쉽게 말하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또 '자신 없는 경영자들일수록 복잡한 것을 만들어낸다'면서 '겁이 많고 불안한 관리자들은 뚜꺼운 계획서와 슬라이드가 있어야 안심을 하는데 그 내용은 하나마나한 것들뿐이다'고 했다. 잭 웰치는 그러면서 '신속성(Speed)은 간편성(Simplicity)에서 우러나오지만 이 간편성은 자신감(Self-Confidence)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런 자신감은 관료주의의 충복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다. 직위가 아니라 진정한 성취에서 보람을 찾으려 하는 사람, 정보를 공유하고 자신의 주변, 上下(상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다음 대담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조직과 인간관계의) 간편성을 창조하는 자신있는 사람들이다.'
몽골인종의 오기
그러면 웰치는 이런 성공의 3S 조건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직경영에 적용하는가.
<능력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과중한 업무를 맡은 경영진은 가장 능률적이다. 자질구레한 데 신경 쓰고 참견하여 부하들을 귀찮게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 근무자는 현장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현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는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향해야지 거꾸로가 돼서는 안된다. 우리는 옛날에는 몇년 걸리던 투자결정을 이제는 며칠만에 해치우고 있다>
자신감(Self-Confidence)-간편성(Simplicity)-신속성(Speed)의 3S 공식에서 몽골인종과 자신감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기자가 하버드 옌칭 도서관의 어두컴컴한 書庫(서고)에서 찾아낸 '위험한 변경(The Perilous Frontier)'이 그 해답을 안고 있었다. 북방 유목민족 전문학자 토마스 J.바필드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기마유목민족들은 가장 발달된 정착문명인 중국과 인접하여 살면서도 중화적 문화와 이념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속으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경멸했다. 돔의 천장 같은 광활한 하늘 아래에서 말젖과 말고기를 먹으면서 천막에서 나고 죽고 전쟁과 모험을 동경하는 자신들의 삶이 농경민족보다도 더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목축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고 이에 기초한 기만군단의 우세도 계속될 수 있었다>
高麗史(고려사)에는 몽골장군 흔도가 고려 장군 金方慶(김방경)에게 한 이런 말이 실려 있다.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漢族(한족)과 유사한데 매양 우리를 멸시하면서 '몽골 사람들은 살육만 일삼으니 하늘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에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골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이다>
먹물 먹은 사람들에 대한 武士(무사)들의 경멸과 '우리 식'에 대한 자부심을 담고 있는 흔도의 이 오기서린 일갈은 몽골기마군단의 파괴력이 자라난 정신적 토양을 보여주고 있다.
기자는 해외 여행을 여러 번 한 뒤에 이런 원리를 발견했다. '선진국은 제도와 사람이 간편한 곳이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예컨대 선진국 사람들은 넥타이를 안 매는 경우가 많다. 기자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여행했을 때 종일 돌아다녀도 넥타이 맨 사람을 세 사람 보았을 뿐이다. 이 나라는 국왕도 공식석상에 나와 넥타이를 풀어버린다고 한다. 제도가 간편하고 사람들이 소박하면 살기가 편리한 것이다.
이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간편하게 살 것인가. 간편해지려면 일과표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야 하므로 이것은 결단이다. 冠婚喪祭(관혼상제)의 문제, 소비성향, 인간관계, 복장, 話法(화법), 예절,회의, 업무처리 방식 등 많은 부분에서 무엇을 줄이고 없애야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도로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하루에 해야 하는 일들의 가짓수를 줄이는 대신에 좁은 주제를 붙들고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것인가. 천재와 영웅은 집중하는 사람이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 2015년 08월 12일 몽골 나담축제, 세계 10대 축제 중 하나
오송 / 駐몽골 대사
매년 7월 중순이면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7월 11일부터 몽골 최대의 축제인 ‘나담(Naadam) 축제’가 개최되기 때문이다. 나담은 몽골어로 놀이라는 뜻으로, 매년 7월 한 달 동안 21개의 아이막(우리의 도에 해당)별로 날짜를 달리해 개최되지만, 울란바토르에서 개최되는 나담 축제가 최대 규모이다.
비록 나담 축제가 공식적으로는 7월 11일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나담 축제 개회식 및 나담 경기 티켓이 판매되는 7월 6일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 티켓을 사기 위해 판매소 앞에는 그 전날부터 긴 줄이 만들어진다. 티켓이 매진되면 암표상이 극성을 부린다. 정상 가격이 1만6000투그리크인 티켓이 12만 투그리크 이상까지 올라간다.
이 축제기간을 전후해서 울란바토르 시내에 숫자들로 가득한 플래카드들이 나부끼는데, 올해 숫자들은 몽골 민족 기원 2224주년, 칭기즈칸의 대몽골제국 건국 809주년, 몽골 독립혁명 94주년임을 나타낸다. 나담 축제가 몽골의 독립과 주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와 민속놀이를 계승하는 축제이고, 동시에 몽골 민족으로서 일체감을 공유하는 국가 주요 행사임을 의미한다.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 나담 축제의 정식 명칭은 ‘남성 3종 경기’라는 뜻의 ‘에링 고르방 나담(Eriin Gurvan Naadam)’이다. 그 이름답게 말달리기, 활쏘기, 씨름의 3가지 경기가 진행된다. 나담 축제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들이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로 통합돼 일원화된 것은 1921년 몽골 독립 이후라고 한다.
나담 축제는 7월 11일 개회식에서 9개의 흰색 깃발이 게양된 이후 대통령의 개회사와 함께 시작된다. 9개의 흰색 깃발은 평소에는 정부청사에 보관되다가 나라의 큰 행사인 나담 축제나 중요한 국가 의례 때에 국민 가운데 옮겨 놓는 전통을 지켜 나가고 있다. 개막식 직전에 정부청사에서 나담 중앙경기장으로 옮겨져서 나담 축제기간 내내 게양되며, 폐회식 후에는 다시 정부청사에 보관된다.
개회식과 씨름, 활쏘기가 개최되는 나담 중앙경기장 주변에는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데, 호쇼르(튀김만두)와 셔를럭(고기 꼬치구이)을 파는 매장들이 단연 인기이다. 한국에서 설날에 떡국을 먹고, 추석에 송편을 먹는 것처럼 몽골인들은 설날인 차강사르에는 보츠(찐만두)를 먹고, 나담 축제 때는 호쇼르를 먹는다.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은 말달리기이다. 말달리기는 말의 나이에 따라 6종류로 나뉘는데, 올해는 전국에서 1200마리 이상의 말이 참가했다. 말타기를 즐기는 몽골인들은 말의 땀을 손에 문지르면 행운이 온다는 믿음이 있어 우승한 말이 결승선을 통과하면 이 말의 땀을 닦으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활쏘기는 남녀 모두 참가가 가능한 경기인데 남자는 75m, 여자는 65m 거리에서 각각 40발을 쏴서 과녁을 맞히게 된다. 올해는 부부 궁사가 각각 남자부와 여자부 시합에서 우승해서 화제가 되었다. 과거에 여자들은 활쏘기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10여 년 전부터 참가가 가능해졌는데, 올해는 90명의 여자 선수가 참가했다.
한국, 일본과는 달리 몽골 씨름 선수들은 가죽이나 헝겊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가죽 장화를 신고, 서서 경기를 한다. 손을 제외한 신체 부위가 먼저 땅에 닿으면 패배하게 된다. 승자는 손을 벌리고 춤을 추며, 패자는 승자의 팔 밑으로 한 바퀴 돌아 복종을 표시한다. 전국에서 512명이 참가해 토너먼트로 시합을 해서 9번을 승리한 선수가 그 해의 우승자가 된다. 올해 우승자는 22세였는데, 사상 2번째로 어린 선수여서 많은 몽골인의 환호를 받았다.
나담 경기는 몽골인들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수렵과 목축을 하면서 살았던 몽골인의 삶에서 말타기와 활쏘기는 가장 중요한 생산 수단이었다. 씨름도 마찬가지다. 혹독한 자연환경은 그 자체로 몽골인들에게 시련이었다. 여기서는 강인한 정신력과 튼튼한 체력을 갖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담 경기는 이처럼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놀이문화로 정착된 것이다.
특히 올해 나담 축제는 우리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더했다. 한·몽 수교 25주년을 맞이해 유라시아 친선특급 원정대가 7월 16일 울란바토르를 방문하여 초원에서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 등 미니 나담 축제를 체험하면서 문화교류 행사를 가졌다. 이를 통해 양국이 오랜 역사를 공유하면서 서로 흡사한 민속놀이를 발전시키고 즐겼으며, 정서적으로도 특별한 유대를 바탕으로 한 형제의 나라임을 재차 실감할 수 있었다.
필자는 나담 축제 개회식에 참석해 약 2000명의 몽골인이 보여주는 갖가지 공연을 관람하면서 나담 축제의 뜨거운 열기를 느꼈으며, 또한 유라시아 친선특급 원정대에 합류하여 몽골인들과 한데 어울려 양국 간 문화적 유사성도 체험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이 더욱 정겹게 느껴지면서, 2016년 7월 11일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 오송(53) △서울대 외교학과 졸 △제19회 외무고시 △주인도네시아 공사참사관 △동북아역사재단 파견(정책기획실장) △주캐나다 공사 △주몽골 대사
문화일보
■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
2015-08-04 전원철 박사 인터뷰 조선일보 이상흔 조선pub 기자
(1)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월간조선> 6월호에는 북방민족사학자 주몽예씨의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王家)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다소 '도발적인' 기고문이 한편 실렸다. 주몽예씨는 칭기스 칸 연구를 위해 29개국 언어로 된 사서를 읽고 이를 전부 비교대조한 결과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고문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주몽예씨의 본명은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을 펴낸 전원철 박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pub>은 그가 칭기스 칸 연구에 뛰어든 계기와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직접 만나 보았다. 인터뷰 분량이 길어 3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칭기스 칸은 발해 왕가의 후손"
▲'세계 정복자' 칭기스 칸.
2015년 6월호 <월간조선>에는 아주 흥미 있는 기고문 하나가 실렸다. 주몽예라는 북방민족사학자가 쓴 <칭기스 칸은 고구려-발해(渤海) 왕가(王家)의 후손이다!>이라는 장문의 기고문이 그것이다.
이 기고문에서 필자는 우리가 그 동안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12세기에 아시아-중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영웅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주몽예씨의 기고문을 보면, 막연히 ‘몽골과 우리는 서로 관련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칭기스 칸은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제19대손이라는 것을 칭기스 칸의 ‘족보’ 계보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역사언어학적 고증을 통해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인 테무진은, 그가 강인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가리키는 ‘철인’ 이라는 일반적인 풀이와는 달리,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또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도 일반적으로 ‘왕중의 왕’ 이라는 일반적 풀이와는 달리, 대조영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에서 나온 것으로, 곧 ‘발해국왕’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월간조선> 기고문을 <조선pub> 사이트를 통해 소개하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가 칭기스 칸을 연구하게 된 배경과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몽예씨를 직접 만났다.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제국(諸國)-청나라가 한 가계
▲북방민족사학자 전원철 박사.
사실 ‘주몽예’는 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전원철이며, 주몽예는 ‘주몽의 후예’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 (비봉출판사)을 펴냈다. 책에 소개된 그의 약력을 살펴보니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외무부 유엔국 유네스코담당자문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을 거쳐, 미국에서 법학박사를 딴 후, 미국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고 되어 있다.
2권으로 이루어진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은 <월간조선> 기고문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를 추적한 광범위한 연구결과를 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단지 ‘세계정복자’로 알려진 몽골의 위대한 인물 칭기스 칸의 선조가 우리의 고구려-발해 왕가임을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왔던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찾아내 보여준다.
《몽골비사》 등에는 칭기스 칸의 선조계보가 나오는데, 학자들은 그것이 칭기스 칸에서 3~4대를 제외하고는 허구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왔다. 또 학자들은 그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시대나 그들이 살던 장소, 그들이 행한 일들의 실체도 전혀 이해하거나 규명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전 박사는 이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 하나가 실존인물이며, 그들이 살던 시기, 심지어 연도까지 규명해내고, 그들이 살던 곳이 막연히 ‘몽골의 그 어디쯤’이라는 식이 아니라, 우리 땅 어디 어디라고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지명까지를 알려주고 그들이 살면서 이룬 일들을 입증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보면, 그는 ‘고구려는 우리, 말갈(발해)은 퉁구스족’이라는 주류학설을 뒤엎고 발해를 세운 칭기스 칸의 선조인 대(大)씨 가문은 고구려왕가의 서자(庶子) 집안이며, 고구려와 발해는 한 가계에서 나온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또 발해가 망하는 시점 직전에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신라의 개성호족’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발해 왕가의 외손임을 밝힌다.
구체적으로 왕건은 금(金)나라 시조 함보(函普)의 아버지 금행(今幸)의 외증손이라고 밝힌다.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리자, 격노하면서 예물로 보내온 낙타들을 만부교 다리 아래에서 굶어 죽게 하면서, 거란과의 국교수립을 거부했다. 이 때 그는 “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라는 말을 하면서, 망명해 온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자신의 왕씨 종적(宗籍, 족보)에 올리는데, 그 이유는 한 집안 종씨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이 몸소 보인 그 미스터리한 선언(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과 행동(발해 세자를 자신의 족보에 올린 것)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926년 발해가 무너진 우리 북한 땅에서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서기 948년 고려 정종 3년(定宗 三年)때부터 이미 여진(女眞)이 들어섰는데, 이는 발해의 계승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금 시조 함보는 이때에서 약 3세대 전에 장차 ‘여진’으로 불리게 될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갔는데, 발해가 망한 뒤 4세대 후에 함보의 4대손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웠다.
이와 관련, 최근 수년간 몇몇 학자들이 신문, 방송 인터넷, 논문 등에서 주장하여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가계가 신라 왕족이라고 하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전원철 박사는 책에서 이 견해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의 7대조 함보(函普)와 그 아버지 금행(今幸)은 남국 신라가 망할 때 936년대의 인물이 아니라, 북국 발해가 엄연히 존재할 때인 840~50년대의 발해 왕족들로 각각 대야발의 5대와 4대손이라고 밝힌다.
또 그는 신라 왕가의 후손이라고 우리 학자들이 믿어온 청나라의 시조 아이신교로(愛新覺羅:애신각라) 누르하치 역시 고구려-발해-고려와 한 가문인 금나라 황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결국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제국-청나라가 한 가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그들 왕조를 창조한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징기스칸>의 한장면.
한낱 소수의 양치기 야만 유목인이 세계정복?
우리는 그동안 칭기스 칸에 대해 몽골 초원의 여러 유목민을 통일한 ‘좀 더 힘 있는’ 야만적 유목민 부족 출신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천 년 간 초원에서 양이나 치던 민족이 갑자기 부족 통일을 이루고, 여러 문명 세계를 정복한 동기와 힘의 원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인 전원철 박사의 말대로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칭기스 칸과 그의 원정대는 더 이상 ‘말을 탄 야만 유목인’이 아니며, 그가 벌인 정복활동도 그저 영토 확장이나 재물 약탈, 혹은 ‘그저 별다른 이유 없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게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전원철 박사는 “그 이전에는 세계지도에 없는 땅에서 느닷없이 전 세계를 떨게 한 ‘세계 정복자’가 탄생했다”며 “아무런 문화, 전통, 기술, 조직력의 배경이 없던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한낱 양치기 유목민 무리 따위가 자기보다 인구면에서 1000배가 더 되고, 또 당시의 온 세상을 지배하던 여러 개의 문명세계를 그렇게 단시일 내에 정복하는 일을 과연 이룰 수 있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결국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 칸의 몽골족은 뛰어난 무기 제조술과 오랫동안 집적된 문화와 정보전달체계, 그리고 윤리와 도덕을 겸비하여, 더불어 잘 정비된 사회조직을 가진 고구려-발해-후고구려의 유민들이었기 때문에, 또 여기에다가 그들이 유목민의 말 타는 기술을 잘 조합했기에 그런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주장이다.
그동안 주몽예라는 필명을 사용해 온 이유에 대해서 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근 11~2년 전 제가 ‘지나(China)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중국’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그 나라의 관보인 <광명일보>가 ‘고구려역사는 중국변방의 역사이다’라는 제목으로 이른 바 ‘동북공정’을 발포하는 충격적인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 ‘중국이 우리 고대사를 통째로 빼앗으려 한다’며 온 나라가 수년째 격노하며 들끓었고, 두 나라 간의 심각한 외교문제가 되었던 것을 모두 기억할 것입니다. 저는 당시 미국에 있을 시절이었는데, 저도 그 소식을 전해듣고 그 충격적인 글을 찾아 읽어 보고 분노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 글을 썼는지를 원문을 통해 찾아보니, 그 글의 저자가 ‘변방의 무리’라는 뜻인 ‘변중(邊衆)’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중국(中國)이라는 왕조는 역사상 존재한 적 없어"
▲전원철 박사가 최근 펴낸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 2》.
전 박사는 이를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변방의 무리(邊衆)’따위가 어찌 ‘주몽의 후예’에게 조상을 훔쳐갈 음모를 꾸미는가, 비록 땅은 빼앗겼지만, 조상까지 빼앗길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주몽의 후예이다‘라는 뜻으로 ‘주몽예’를 저의 호를 삼기로 했습니다.”
나아가 전 박사는 “우리가 중국을 일반적으로 ‘중국(中國)’이라고 부르는데 이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중국’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의 정식 명칭은 영어로는 ‘Peoples’ Republic of China, 곧 ‘지나(차이나) 인민공화국’이고, 정식국명도 ‘중화인민공화국’이므로 ‘중공국’ 또는 ‘지나국’이라고 약칭하여 부를 수는 있어도 ‘중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니면 좀 귀찮아도 정식국명을 써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부르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중국(中國)’이라는 이름을 국명으로 쓴 이른 바 ‘중국왕조’는 전혀 없으며, 원국, 명국, 청국으로 썼을뿐이고, 이 왕조의 외교무대에서 간혹 ‘중국(中國)’이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이 칭호는 단지 외국을 속국으로 간주하고 자기를 종주국이라고 간주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외국인들에게 대해 스스로를 높여 쓰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걸 따라서 그렇게 칭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 박사는 “우리가 스스로 ‘지나국’을 ‘중국’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속국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에 펴낸 저서에서도 ‘주몽예’라는 호를 계속 쓸 것을 고집했으나, 소설도 아니고 중요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 작업인 만큼 본명을 밝혀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를 마침내 수락하여 진짜 이름으로 책을 냈다고 밝혔다.
“칭기스 칸의 집안은 자기 조상이 패배한 전쟁의 기록을 후손이 절대 잊지 않도록 기록하였고, 마침내 승리의 기록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과거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비록 발해와 후고구려가 망해 이 땅을 떠났지만 우리 피붙이로 났던 그들이 나중에 전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 그 역사의 발굴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똑바로 알고, 또 우리의 미래 비전이 제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습니다.”
▲전 박사의 서가 책꽂이에는 온갖 언어로 쓰여진 고대 사서의 원서가 잔뜩 있었다. 몽골, 투르크, 페르시아, 부랴트,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에 관한 책들. 손 옆의 두꺼운 책은 페르시아어 본 《승리의 서( 書 )》.
29개 언어로 된 고대 사서를 전부 독파
그는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연구하고, 《칭기스 칸》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혼자 29개 언어로 된 사서들을 전부 독파했다고 했다.
서양에서 옛날에 발간된 라틴어 기록들을 비롯하여, 중세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사서는 물론, 동방의 《몽골비사》 등 중세 몽골문, 청대 만주어 본,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및 우리의 《삼국사기》, 《고려사》 등 각 사서들의 내용을 교차 체크하여, 인명 및 지명을 각 시대별 언어의 변천과정을 통해 면밀히 분석하였다는 것이다.
“저는 《몽골비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등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shejare, 족보)’를 동방 및 우리 사서들과 교차 체크하여 그 인물들의 이름 소리만 대충 맞추어 나가는 식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곳의 지명, 그들의 활동시기와 연도, 행적, 족보상의 계보까지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우리 사서에서 확인하여 칭기스 칸의 계보를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사서들의 내용이 서로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이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십수개 민족어로 쓰인 중요 원본사서의 해독만 하더라도 전문역사가나 전공자조차도 엄두를 내기 어려울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이들 원서의 해독뿐 아니라 그 내용을 대조, 비교, 교차확인까지 해내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연구·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언어를 이해하는 여러 동서양 역사학자들 여럿이 모여 함께 해야 할 연구를 혼자 해낸 셈입니다. 그 결과 1162년 칭기스 칸 탄생 이래 853년간 숨겨진 비밀, 아니, 그 선조로부터 치면 고구려 멸망 후 1300년 동안 숨겨진 세계사적인 대비밀이 드러났다고 자부합니다.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한 학자는 제가 이룬 연구 성과를 보고 ‘세계사 1000년 간을 다시 써야 할 대발견’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결국 <월간조선>에 기고한 그 ‘담대한’ 기고문은 자신이 수년간 연구한 결과를 사학계의 전문학자가 아닌 일반독자도 비교적 알기 쉽게 정리한 그 책의 일부를 요약한 내용이었던 셈이다.
'몽골'은 칭기스 칸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즉 ‘말 고을’에서 온 말
소위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가지고, 무리없는 생활을 누리던 그는 왜 모든 일을 제쳐두고 갑자기 칭기스 칸 가계 연구에 뛰어든 것일까? 전 박사는 우선 몽골과 칭기스 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90년 우리나라가 몽골과 국교를 맺었는데, 당시는 저는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갈까 취직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한국에 유학온 몽골학생을 알게 된 계기로 몽골어에 관심이 생겨 공부를 하였고, 그를 통해 몽골어판 《몽골비사》를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몽골비사》를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는데, 왜 《몽골비사》는 <몽골사>나 <칭기스 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까 하는 것 하나와, 칭기스 칸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보통 학자들이 부르테 치노를 몽골어로 ‘잿빛 푸른 이리(蒼狼)’라고 푸는데, 몽골인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이 ‘푸른 이리의 자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고, 항상 부르테 치노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적했고, 그 결과 몽골족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는 그 동안 학계와 항간에 알려진 전설적 ‘푸른 이리’와는 전혀 다른 말로, 고구려-말갈어인 ‘부여대씨랑’(夫餘大氏郞: 부려-테치-농)이라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치노’(氏郞: 씨랑)라는 말은 오늘날 ‘씨족의 종친회장’ 격으로 고구려-원나라-북원을 거쳐 몽골어로 ‘지농’이라는 말로 계승되었다는 것.
“‘몽골’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칭기스 칸이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명칭이었는데, 이후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테무진 이전에는 테무진이 통일한 지역은 이름조차 없던 땅이며, 종족의 이름도 메르키드, 케레이트, 타타르, 나이만 족 등 여러 종족이 살고 있어서 하나로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몽골은 칭기스 칸은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즉 ‘말 고을’의 옛 소리인 ‘몰-고을’, 곧 ‘몰(말, 馬)-고을(邑, 城)’에서 생긴 말입니다. 고구려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과 ‘일곱 개의 말 골(말갈)’로 이루어져 커진(高) 나라 ‘커구려(고구려)’였고, 결국 ‘말갈’, 곧 옛소리로 “몰골”이 몽골의 어원입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칸은 몽골리아 땅의 여러 종족들을 통일한 뒤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고구려-말갈’ 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며, “그 이유는 자신의 선조가 바로 말갈(발해) 왕족이었고, 또 그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 동쪽에서는 자신과 같은 선조에서 나와 혈통을 나누는 왕건의 ‘고려(고구려)’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라는 국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몰골(말갈)’의 전음인 ‘몽골’을 자기 국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집사》 페르시아어 본의 도분 바얀과 알란 코와기 . 책에 연필 글씨는 전 박사가 독서 중 참고하기 위해 표기해 놓은 것이다.
▲《몽골비사》 불어판 주석서. 전 박사가 부르테 치노, 고와 마랄, 보카 등 칭기스 칸 선조의 이름을 불어로 푸른늑대, 흰암사슴, 숫소, 등으로 모두 잘 못 번역해 두었으나, 불어권에서는 가장 유명하다고 지적하는 책.
칭기스 칸 계보에 등장하는 '투르크어 고어'는 우리 옛말
-우선 <월간조선> 기고문을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정리를 한번 해주시죠. 어디에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까?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우선 중세 몽골어로 쓴 《몽골비사》를 비롯하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칭기서의 서》 등 페르시아, 중세 투르크어, 타타르어 된 서방사서와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부랴트어로 쓰인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서의 원문을 모두 비교 대조하고, 텍스트의 행간을 해독하여 우리 《삼국사기》, 《고려사》와 《신·구당서》 등 동방사서를 교차 대조하여, 칭기스 칸 선조의 실체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 책에 기록이 있다면, 왜 그 많은 서양의 칭기스 칸 연구가, 동양의 학자들이 그 동안 그런 사실을 밝혀내지 못한 것인지요.
“역사학자들이 당대의 언어를 모르면 모든 시대의 역사 연구가 그렇듯이, 위에 열거된 책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에 관한 사서는 중세 페르시아, 투르크어, 몽골어, 타타르어, 한문 등 여러가지 옛 언어로 되어있습니다. 이 여러 나라 언어를 우선 이해해야 그 사서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서들이 특히 각 언어들의 중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어려움도 있죠.
또 단지 언어를 이해한다고만 해서 이 사서들의 비밀을 알 수는 없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는 동방과 서방이라는 엄청난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기록되었지만, 서로 매우 일관되게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 계보 속의 선조들이 살았던 정확한 지방과, 민족, 그 언어, 그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 사서들의 비밀을 절대 캘 수가 없습니다.”
전 박사는 “예컨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로 된 사서는 그 언어를 쓰는 민족의 학자들이 읽으면, 외국어로 배워야 하는 우리보다는 비교적 쉽게 읽을 수는 있겠지만, 막상 그 언어를 쓰는 학자들도 그 사서의 진정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 사서들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이 투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어휘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연히 그 뜻을 알 수가 없죠. 그들은 우리말과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그 이름들을 그 무슨 ‘투르크어 고어’ 라는 식으로 풀이했는데, 그들은 막상 그 투르크어 고어휘의 소리나 뜻이 무엇인지를 전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그 ‘투르크어 고어’는 사실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죠. 몽골인들이 왜 하필 투르크어를 썼겠습니까? 또 서방 학자들은 칭기스 칸의 선조들이 오늘날의 몽골리아가 아니라 우리 땅에서 살았다는 점을 몰랐고, 우리 역사도 몰랐기에 그 역사적 진실을 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을 풀지 못한 이유
-우리나라 학자들이나, 박사님께서 ‘지나국’이라고 부르는 중국, 몽골 학자들은 왜 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까.
“우리 역사학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 타타르어, 몽골어, 만주어, 부랴트어 및 티베트어 등 그런 외국어로 적힌 사서를 읽을 어학적 지식이 없습니다. 대개는 한문이나 이 연구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일어, 영어 정도만 이해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더러 이 언어들을 일부 이해하더라도 그 사서들에 적힌 내용이 우리 땅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한 거죠. 다른 나라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칭기스 칸 관해서 수많은 책이 출판되었지만, 박사님과 비슷한 주장이라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기존 대부분의 몽골 학자들은 서방 학자들이 완전히 오역하거나 잘못된 학설을 내놓은 것을 그 무슨 ‘선구적 업적’이라고 이야기 하며, 서방 학자들이 오류 위에 세운 지식체계에 대한 권위를 맹종하면서 안일하게 답습해온 이유도 큽니다. 쉽게 말해 독자적 연구와 고민 없이 그저 프랑스의 어느 학자가, 독일학자 누구누구가, 러시아의 어느 전문가 누구누구가, 몽골의 어느 교수 누구누구가 이렇게 말한다는 정도의 지식으로 칭기스 칸을 연구해 왔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요즘 학자들은 그렇다 쳐도 중국 본토 학자들의 연구는 어떤지요.
“이미 칭기스 칸 당시부터 송나라 사신 등이나 역사가들이 잘못 알고 기록한 사실이 많습니다. 칭기스칸은 지금부터 약 852년 전에 탄생했지만, 그의 선조 이야기는 고구려가 망한 668년, 곧 지금부터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칭기스 칸과 그 선조들이 활동했던 지역의 지명과 인명, 직책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우리말인 말갈어(고구려-발해어)에 뿌리를 둡니다.
그렇지만, 그 낱말들이 몽골어, 지나의 한어(漢語), 만주의 퉁구스어,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투르크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에 이르는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반도의 아랍어, 그리고 유럽의 라틴어와 이태리 토스카나 방언 등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변화를 거칩니다. 이 때문에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를 적은 그 사서들이 기록된 해당 시대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 사서들 속의 비밀은 결코 풀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전원철 박사는 “고대와 중세, 근세에 걸쳐 기록된 동서방의 어렵고도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사서를 하나씩 해독하면서, 거기에 기록된 선조들의 이름과 그 뜻, 그들이 산 시기와 한 행적 등을 동방사서와 대조하여 확인하면서 칭기스 칸의 뿌리를 찾아 들어갔다”며 “결국 칭기스 칸 선조가 기록된 책에 등장하는 인명과 언어, 지명이 모두 고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을 연구했지만, 칭기스 칸의 뿌리인 우리 고대사와 우리 옛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리 연구를 해봐야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코드가 풀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지명과 인명, 관직이 현재 몽골이나 투르크어에서 비슷한 단어에 연결시켜 해석하거나, 예전의 학자들이 궁여지책으로 풀어놓은 뜻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2편에서 이어짐)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2) 칭기스 칸의 선조, 영원히 이 땅을 떠나다
▲페르시아어판 칭기스 칸의 계보도 영인본.
(1편에서 이어짐)
칸의 특명으로 집필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
-앞서 말씀하신 《집사》나 《사국사》 같은 사서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집사》는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가 다스린 일칸국(곧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자기 황제의 엄명을 받고 1310년경에 지은 역사책입니다. 가잔 칸이 그에게 ‘나의 선조인 칭기스 칸의 선조에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쓰라’라고 엄명을 내린 겁니다.
라시드 웃딘은 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당시 4칸국의 종주국이던 원(元)나라에서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와 역사에 관해 정통한 원로대신 볼라드 칭상(승상)과 여러 학자들, 그리고 《황금의 책》이라고 라시드가 부르는 책, 곧 ‘족보’를 비롯하여 막대한 분량의 기록물을 수레에 싣고 오도록 하여 그들의 설명과 해석 아래 그 사서를 집필했습니다.”
전 박사는 “이 사서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모골(몽골) 종족의 기원 이야기’로 칭기스 칸의 선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뒤에 쓰였으나, 라시드가 말한 그 《황금의 책》을 더욱 충실히 반영한 《사국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준다고 한다.
《사국사》에 대한 전 박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국사》는 티무르 왕조의 4대 칸이자, 역시 칭기스 칸의 후손이었던 울룩벡(1394~1449)이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집사》속의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보다 훨씬 앞선 칭키스칸의 선조 계보로 《집사》가 생략한 부분까지 적고 있다.
울룩벡은 제2의 칭기스 칸으로 전 유럽과 아랍지역을 덜덜 떨게 했던 아미르 티무르(1336~1405)가 세운 왕조의 칸인데, 그의 할아버지인 아무르 티무르 역시 부계의 모계로 칭기스 칸의 후손이면서 부계가 칭기스 칸의 선조대에서 갈라져 나온 몽골 바를라스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인 《황금의 책》 자체는 오늘날에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 박사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그 자신도 이것을 꼼꼼히 참조하고 글을 썼고, 그 족보의 골자는 방금 말한 다른 사서들에도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중세 서방의 사서와 함께 《몽골비사》등 동방의 책을 비교 대조하며 이면에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만 칭기스 칸 선조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설명이다.
《집사》에 기록된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비밀
-위 사서를 쓴 사람들은 세계를 정복한 자랑스러운 칭기스 칸의 조상을 이야기하는데 왜 굳이 그 이면의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 알 수 있도록 기술해 놓았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시 사서들은 당연히 칭기스 칸 가문에 내려오는 족보를 본대로 들은 대로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 10대 혹은 20대 선조의 이야기이다 보니까 원래의 고대 말갈어(우리말)로 된 인명과 고대의 지명이 몽골어나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또는 한자어화되면서 원음과 많이 달라졌고, 또 그마저도 오늘날의 언어들이 아니라, 중세기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페르시아어와 몽골어 등 그 외국어 본문 속에 있는 인명 지명들은 본문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말갈어로 된 말입니다. 이 때문에 단번에 그 의미를 해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 사서를 교차 대조하고, 칭기스 칸이나 그 이전 선조들이 살았던 당대의 언어 고증을 통해 이런 인명과 지명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이들 몇 가지 사서는 원래 《황금의 책》 곧 ‘족보’에 기반하여 그 선조들의 생전의 활동기록인 행장(行狀)을 곁들인 글들입니다. 그 《황금의 책》 족보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말하듯이 황제의 재고에 비밀스럽게 간수되어, 황족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대아미르들이 항상 지키고 있던 책입니다. 곧 이 책은 비밀스러운 황족의 뿌리를 적은 책인데, 그 내용을 올바로 풀이하지 않으면 그것에 바탕을 둔 사서들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칭기스 칸 선조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분화되었습니까.
“《사국사》에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이 전쟁은 우리에게 보통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략’으로 알려진 싸움이 시발이 된 발해와 당나라 간의 전쟁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래 약 한 세대 29년 뒤인 69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는데, 이는 곧 고구려를 재건한 겁니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를 재건 한 지 34년 만에 또다시 대전쟁이 터졌습니다. 당나라가 다시 일어선 고구려, 곧 발해를 보면서 과거의 고구려가 다시 나타난 악몽에 겁을 먹고 발해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부립니다.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떼어 내려고 획책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개략적으로만 적은 것이 《사국사》가 말하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 간의 대전쟁’입니다.
여기서 ‘모골’은 곧 ‘말갈’, 곧 ‘발해’입니다.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말갈, 곧 발해가 패하면서 칭기스 칸 선조들은 그들이 원래 살던 터전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고, 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 박사는 이후 이야기를 《집사》의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모골(말갈) 군이 전멸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이름이 ‘키얀’과 ‘네쿠즈’다. 이 둘은 마침 갓 혼인한 그들 각자의 아내들, 그리고 몇 명의 시종과 함께 마침 전쟁에서 주인을 잃는 말들을 잡아타고 야간의 어스름을 이용하여 포위를 뚫고 심심산골의 계곡 속으로 도망쳤다.
그 계곡은 오직 한 필의 말과 한 명의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험준한 곳으로 거기를 넘자 마치 하늘이 만든 천국 같은 벌판과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쿤’이다.
오늘날에도 터키인들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이곳을 자기네들 모든 투르크 종족의 선조와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동방아시아의 그 어느 곳이라고 막연히는 알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다고들 말하곤 한다. 터키에서는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의 전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테헤란에서 발간된 《집사》 페르시아어의 한 본(좌)과 《집사》 아랍어 본(우).
‘아르가나 콘’으로 피신한 칭기스 칸의 시조들
전 박사는 이 전쟁에 나오는 ‘키안’은 라시드가 ‘모골어(몽골어)’로 ‘산골 사이를 세차게 흐르는 물’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이름은 사실은 말갈인들이 한자말로 표현한 ‘산골 물 간(澗)’이고 ‘니쿠즈’는 말갈말로 ‘님금’이란 말이 모양을 바꾼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라시드가 말한 ‘모골어’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말 방언인 ‘말갈어’였고, 또 ‘니쿠즈’는 발해 제 2대왕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로, ‘님금’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또 ‘에르게네 쿤’은 예전 《집사》에서는 ‘아르카나 쿤’, 《사국사》는 ‘아르카나 콘’으로 쓰는데 이는 발해서경(渤海西京)이라는 별칭을 가진 발해의 수도급 행정구인 ‘압록강네 郡(군)’(압록강 나의 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발해어 행정구 이름이 734년경에서 《집사》가 편찬되는 1310년경까지 근 58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 또 고구려/말갈어(발해어)→몽골어→투르크어→페르시아어를 거치면서 ‘압록강 나의 군’→아로강나 군→아르가나 콘이라는 투르크/몽골어로 음가 변화를 거쳤다는 것이다.
“이때 아르가나 콘으로 도망간 칭기스 칸의 전설적 시조인 키얀과 네쿠즈 중에 키얀은 바로,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손자 ‘간(澗)’입니다. 또 두 번째 인물 네쿠즈는 ‘님금’이란 이름을 페르시아어로 ‘링쿰(Linqum)’이라고 적고 한자로는 ‘닛곰(捏昆, 날곤)’으로 적은 이름의 변화형입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그는 바로 그 전설적 전쟁의 주역이었던 발해 제2대왕 무왕 대무예의 아들 발해왕자 도리행(都利行)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대도리행은 흑수말갈을 정벌하라는 형 무왕의 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한 숙부 대문예를 발해로 귀환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독살당한 차기 왕감이었죠. 그 ‘도리행(都利行)’이 바로 《집사》가 ‘다를라킨(Darlaqin)’이라고 기록한 인물인데, 님금, 곧 ‘니쿠즈’는 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죠.”
콩그라트 지파가 아르가나 콘을 빠져 나온 이야기
전 박사는 “그 전설적인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한 두 가계에서 나중에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무리의 숫자가 불어나서 그들이 여러 종족, 곧 지파로 갈라졌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그 계곡이 좁아져 거기를 빠져나와 더 넓은 터전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과정이 700년 전 쓴 《집사》에 ‘아르가나 콘 탈출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탈출한 발해 왕가의 일족이 칭기스 칸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오늘날 여러 종족으로 분화되는데 그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모골족의 아르가나 콘 탈출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나온 종족은 ‘콩크라트’ 종족의 시조인 ‘황금항아리’가 이끄는 부류가 ‘다른 종족과 상의도 없이 다른 종족의 쇠를 녹여 연장을 만드는 용광로지를 짓밟고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이때는 탈출이 아니라 발해 10대 왕 선왕(宣王)의 밀지를 받고, 압록강네 군을 빠져 나와 그 전설적인 ‘타타르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 곧 ‘발해-당·신라전’에서 잃어버린 발해의 남쪽 땅과 북쪽의 흑수 땅 등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흑수 등 말갈 고을들을 치러 출정한 것입니다.
발해의 남쪽 땅이라고 제가 표현한 땅은 평양의 대동강에서 한강 이북 땅을 말하고, 원래 고구려 땅이자 발해 초기의 땅입니다. 이 땅을 되찾기 위해서 콩그라트 종족이 뛰쳐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 공격에서 발해가 이겼던 것이 확실합니다. 동방사서 《통감》 등 당나라 측의 사정을 적은 사서들은 ‘선왕이 바다 북쪽의 말갈 등을 쳐서 땅을 크게 넓혔다’고 합니다. 또 신라 측 기록도 발해와 신라 국경이 한강 이북의 경기도 땅으로 바뀌었음을 기록합니다. 또 이때부터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콩크라트 종족의 시조라는 ‘황금항아리’는 또 누구인지요.
“놀랍게도 이분은 우리 《고려사》가 <우리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함보)가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 선조가 되었다>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콩그라트 종족이 아르가나 콘을 떨쳐 일어나 발해의 남쪽 주군을 회복한 이 황금항아리 즉 금행은 황해도 평주를 수복했습니다. 곧 그들은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증조부 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이 때문에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은 <고려사>의 서문 격으로 왕건의 선조를 기록한 <고려세계(高麗世系)>에서는 왕건의 외증조부로’ ‘서해용왕(西海龍王)’으로 기록되었고, 이 칭호를 쓰며 그곳을 다스립니다.”
전원철 박사는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은 ‘서해’, 곧 ‘발해’ 바다를 말하고 ‘용왕(龍王)’은 그가 정말 ‘구렝이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는 우리말의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발해-고려식 향찰(鄕札)로 적힌 칭호라고 한다.
곧 ‘용왕(龍王)’의 ‘용(龍)-’은 우리말로 ‘고렝이/고레이’라고 하는데, 이 소리가 ‘고려’의 옛소리인 ‘고라이’와 같아, 그 고려를 ‘용’에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이는 왕건의 즉위를 예고하는 도참설(圖讖說)의 비문(秘文, 비밀코드)에서도 사용한 당시의 표현방식이라고 한다. 결국 왕건의 외증조가 ‘서해용왕(西海龍王)’이라고 쓴 것은 그가 ‘발해(서해)-고려왕’(고레이, 고렝이, 구렁이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남(내)몽골 다구르 족 에르덴타이와 아르다잡 선생 주해의 《몽골비사》 위구르 몽문판(좌). 《황금사강》이라고 번역되는 《알탄 톱치》. 티베트-몽골계 사서로 칭기스 칸의 9대조 보잔자르(보돈차르)의 부계의 계보를 비밀코드로 기록한 사서(우).
여진(女眞)은 조선(朝鮮)·숙신(肅愼)과 같은 소리값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
한편 신라는 당시 금행이 회복하여 다스리던 땅을 다시 빼앗기 위해 자주 침공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발해의 내지인 반안군(盤安郡)에서도 부락이 두 개의 종족(지파)으로 서로 나뉘어 싸우는 혼란스런 일이 있어났다. 이어지는 전 박사의 설명.
“신라의 침공을 받자 할 수 없이 금행과 그 맏아들, 《금사》에서 아고래(阿古迺), 곧 그 소리가 ‘고구려’와 같은 ‘카고라이’로 기록된 인물은 고향 평주에 남고, 둘째와 셋째 아들인 함보(函普)와 보활리가 ‘복간수(僕幹水)의 물가’와 ‘야라(耶懶)’로 각각 들어갑니다. 이 지역은 약 250년 뒤 고려 예종 때인 1113년경에는 《고려사》에서는 ‘여진(女眞)’으로 적히고, 《금사》에는 ‘완안부(完顔部)’로 불리게 되는 지방입니다.
형인 함보가 들어간 《금사》의 ‘복간수(僕幹水)의 물가 땅(涯)’에서 ‘복간수(僕幹水)’는 ‘보카리’ 곧 ‘모구리(고구려, 무쿠리) 물’이라는 강 이름이고, 그 물가의 땅은 《고려사》가 오늘날의 소리로 ‘여진 아지거촌(女眞 阿之居村)’이라고 기록한 곳입니다. 아우 보활리가 들어간 ‘야라(耶懶)’는 당시 ‘갸라이(고려)’라는 소리를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이 지명은 또 옛소리로는 ‘코라이 땅’, 오늘날의 소리로는 ‘고려땅’이라는 지명입니다. 여진 및 고려식 이두로 적은 ‘갈라전(曷懶甸)’이 바로 그것이고, 원나라 때 몽골어 소리를 한자로 적은 ‘코랄라(合蘭路, 합란로)’가 같은 땅입니다. 이 둘은 조선시대 대학자 정약용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각각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와 함경남도 함흥지방입니다.”
-당시에 여진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여진(女眞)은 옛 한자 방언소리를 아직도 간직한 오늘날 일본어(日本語) 한자 소리로 ‘죠신’인 것과 같이, 예전에 그 소리가 ‘조신’이라는 소리인데, 이는 ‘조선(朝鮮)’과 ‘숙신(肅愼)’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입니다. 이 말들을 두고 우리 학자들 대부분과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은 서로 다르다고 보는데, 그것은 우리 역사를 뺏으려고 하는 이들의 잘못이죠. 그들이 누구인지는 이미 아셨겠지만요.”
전 박사는 “여진이라고 하니까 우리와 상관없는 별다른 종족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며 여진에 대해 보완설명을 이어갔다.
“옛 조선, 곧 고조선에서 나온 고구려의 가닥족속인 발해왕족 대조영의 가계를 숙신의 후예라고 하는 《금사》의 기록을 보세요. 고구려와 발해가 한 집안이고 고구려는 옛 조선(朝鮮)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조선’과 ‘숙신’은 한 가지 같은 것을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이 말을 후대에 와서 당시에 같은 소리 값을 가졌던 ‘조신(女眞)’으로 쓴 것입니다.
이 조신(女眞)을 여직(女直), 여정(女貞), 여진(慮眞), 주신(珠申)등으로도 쓰는데, 이는 모두 옛 조선(朝鮮)=숙신(肅愼)이라는 말입니다. 중세 몽골어로 이를 ‘조르친(Jurchen)’이라고 하고 만주어로는 ‘주션(Jushen)’이라고 하는 것도 다 같은 말이죠.
오늘날 우리는 남방 한어(漢語) 방언소리를 받아들여 이를 ‘여진’이라고 합니다. 단, 당시의 소리로 읽어야 제대로 그 뜻 ‘조선(朝鮮)’이 나오는 것이죠. 그 ‘조신(女眞)’ 땅인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의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간 이 함보의 7대손이 바로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입니다. 발해가 망한지 약 190년 후이죠.”
조상의 영지인 발해 반안군으로 돌아간 칭기스칸 선조
전 박사는 바로 ‘반안군(盤安郡)’이 곧 칭기스 칸의 19대 조부인 대야발(大野勃)의 영지라고 말했다.
“대야발 자신이 ‘돌궐’ 땅, 곧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카자흐스탄 땅에까지 가서 사서를 구해 지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저자서문에는 자신의 칭호를 분명히 반안군왕(盤安郡王)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요사》 등에는 분명히 발해의 한 행정구를 ‘반안군(盤安郡)’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함보 형제는 함보 형제→금행→키얀의 아들→키얀→일하→야발으로 올라가는 계보에서 그들의 5대 선조인 대야발의 영지로 들어간 거지요.”
-우리 학자들은 함보를 발해가 아닌 신라 사람이라고 주장하는데요.
“분명하게 잘못된 견해입니다. 우리 학자들 중에는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 사람들이 신라가 망하는 936년 이후에 신라 왕족이나 유민이 그곳으로 간 사람들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함보 형제는 이보다 근 80년 앞서 857년경 발해시대에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가 아니라, 발해(渤海) 시대의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함보는 왕건보다 할아버지뻘입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이 왕건의 외증조부이고 그 아들이 함보니까요. 이 물음을 좀 차분하게 잠시만 봅시다. 아골타와 같은 시대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때이고 왕건과 같은 항렬의 시대가 《금사》의 발해(拔海), 곧 함보의 손자 때입니다. 그런데 왕건 조차도 이미 나이가 늙은 시절인 936년경에 신라 말대왕 김부가 그에게 귀부하여 옵니다. 고려는 이 덕택에 이른 바 후삼국 통일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왕건보다 2~3대 전에 어찌 신라왕의 아들 마의태자나, 그 유민들이 강원도도 아니고 발해의 내지인 함경도로 들어갔겠습니까?”
-사서에 함보가 신라인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지 않나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대금국지(大金國志)》나 《송막기문》 등에는 그가 ‘신라인(新羅人)’이라고 적어두었고, 《금사》에서는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이 때 나이는 이미 60 몇 살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그가 신라 사람이거나 왕건의 고려 사람이라고 잘못된 풀이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오해한 우리 학계나 재야 사학자들의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전 박사는 “함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과 동시대인이라며 이는 곧 발해와 신라가 남북국으로 대치하던 시대(함보 출생년도 대략 ?~849년)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함보의 아버지인 《고려사》의 금행은 <고려사 고려세계>가 비밀코드로 기록한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의 장인이므로 곧 금행은 작제건의 아버지뻘이고, 그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그 금행에게 8대 외손이 되는 이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1079~1122년)인데, 아골타와 예종은 동시대 사람이고, 왕건과 그 외증조부 금행의 가계와 친족 계보 상 같은 항렬입니다.
결국 왕건의 할아버지 항렬이 함보이고 증조부 항렬이 금행입니다. 왕건시대 사람일 수가 없죠. 더구나 금행과 함보의 시대에 북에는 ‘발해’, 남에는 ‘신라’, 그 사이에는 궁예의 ‘(후)고구려’, 또 서남쪽에는 ‘(후)백제’가 엄연히 병존하던 시대입니다
▲영국 동인도회사 출신의 마일스 대령이 1838년 번역한 <투르크와 타타르의 계보>.
고구려 건국에 참여하는 금행의 후손들
전 박사는 “또 《금사》에서 아골타가 발해인 양복을 통해 발해 유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라고 했다”며 “그가 ‘여진인과 신라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여진인 아골타 자신과 발해 왕족은 같은 집안이니, 발해인들은 발해왕족 출신인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말이지요. 아골타가 신라인 김행(金幸), 곧 권행(權幸)의 후손이었다면 그는 북국 발해의 ‘적국’인 남국 신라인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을 듣고 적국의 왕손에게 발해 유민이 들러붙겠습니까?”
-그렇군요. 오늘날 학자들이 잘못 알게 된 데에는 그들의 연구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처음부터 여러 기록이 좀 두서없이 기록된 이유도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더라도 학자라면 사실 관계를 고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풍토 중에 하나가 사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시대나 인물의 정체를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주장이라도 교수나 학계의 학자들의 입을 통하면 마치 사실인양 받아들여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백의종군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교수나 제도권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학문적 풍토이자 사회 현실입니다.
제 책의 본문에 실어 둔 것처럼, 두 집안의 계보에 기반하여 간단한 세대 비교도표 하나만 만들면 이미 답이 나오는데, 게으른 학자들은 이것조차 하지 않고 마음대로 글을 써서 논문 발표회이다, 언론이다, 방송에 나와서 대중을 헛된 지식으로 이끈 결과라고 봅니다.”
-박사님 말씀을 요약하면 결국 함보는 시기적으로 신라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군요. 아무튼, 고향에 남았다는 금행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금행의 맏아들인 아고래, 곧 ‘카고라이’(고구려)의 손자로 난 ‘아지태(阿志泰)’ 와 역시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로 태어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 때에 와서 궁예가 신라를 치고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이 때 ‘아지태(阿志泰)’와 ‘발해 대상 랑’도 남하하여 궁예의 정권에 참가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합니다.”
-아고래가 어떻게 고구려라는 뜻인지요.
“칭기스 칸 선조들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름들에 관해 설명할 필이 필요하겠네요. 제가 금행의 맏아로 밝힌 아고래(阿古迺)는 그 옛소리가 ‘카고라이’, 곧 ‘고구려’라는 소리입니다. 그의 손자 <금사>에는 적히지 않았고, 서방사서 《행운의 정원》이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칼지타이 칸(Qaljiday Khan)’이라고 적었지요.
그런데 그의 이름이《고려사》에 ‘아지태(阿志泰)’로 적혔습니다. 이 이름의 오늘날의 소리와는 달리 당시의 한자소리는 ‘카지타이’입니다. ‘아지태(阿志泰)’라는 이름에는 <행운의 정원>이 기록한 그 “칼지다이 칸”에서 다만 존칭인 ‘-칸’이 빠진 이름이죠. 물론 소리문자로 적은 <행운의 정원> 속의 “칼지다이 칸”은 오늘날 우리말 ‘클씨씨 왕(乞氏氏 王)’이라는 우리말 소리에 아주 가까이 적혔죠.
또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집사》 등 여러 사서에서 ‘투스부다우’로 적혔는데, 이는 ‘대씨부 대/두(大. 頭)’, 곧 ‘대씨부의 수령’이라는 이름입니다. 그의 손자로 《사국사》가 ‘율두즈 콘(조선씨 왕)’이라고 하고, 《셀렝게 부랴트인들의 역사》 등이 ‘바르가 타이상 노욘’이라고 기록한 이가 있습니다. 말갈어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라는 이름이죠. 여기서 칼지다이 칸은 칭기스 칸의 부인인 부르테의 선조입니다. 바르가 타이상 노욘은 칭기스 카의 직계선조로 《집사》에서는 ‘미사르 울룩’이라는 사람입니다.”
궁예와 장보고는 고구려 보장왕 핏줄
전 박사는 “이 칼지다이 칸 ‘아지태’와 ‘바르가 타이상 노욘’, 곧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 섬긴 궁예는 스스로가 ‘신라에 나라를 잃은 고구려인’이라는 자각을 가진 혁명가였다”고 말했다.
“제가 족보를 면밀히 조사해보니 궁예의 외할아버지가 궁파(弓巴), 달리 궁복(弓福)인데 이 궁파는 바로 함보의 이름과도 같은 것으로 ‘큰 바’, 곧 ‘큰 가(대씨, 고씨)’를 이두로 적은 이름입니다. 함보의 이름은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는 칸보(鐶浦, 환포), 청대에는 캄부(堪布, 감포)로도 적혔죠. 이 궁파(弓巴)가 바로 해상왕으로 알려진 장보고(張保皐)의 다른 이름, 아니 사실은 고구려-말갈식 ‘성씨’를 이름처럼 쓴 것입니다.”
-장보고의 성씨는 장씨인데 무슨 근거로 그가 궁씨라고 연결지을 수가 있는지요.
“장보고의 한문식 성은 ‘활 당길 장(張)’ 자를 써서 ‘활’ 곧 “궁(弓)”으로 하고, 활의 옛소리인 ‘코리’(弓)로 한 성씨입니다. 이는 ‘고려’를 말하는 겹뜻말(중첩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또 몽골어로도 “덮개 달린 화살통(dabčitu qor)을 “코르(qor)”라고 합니다. 이는 《몽골비사》 리게티(Ligeti)본을 확인해 보면 아실 것입니다만.
또 장보고의 성씨 “장”을 뺀 그의 이름은 ‘고구려’를 말하는 ‘무구리/무쿠리/보코리’인데, 이를 한자로 ‘보코리(保皐)’로 쓴 겁니다. 맨 끝의 ‘-리’ 소리는 오늘날에도 말할 때에는 ‘-ㄹ’소리를 내면서도 글자로 적을 때에는 안 쓰는 이른 바 북경화(北京話)의 ‘얼화(兒話)’와 같이 당시에도 안 쓴 겁니다.
곧 ‘고려-무쿠리’ 장보고는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곧 고장(高藏)의 아들로 신라에 항복한 고구려 왕족 안승의 증손입니다. 보장왕에서 치면 4대손이죠. 궁예는 그 이름이 기록 안 되었지만 사서가 말하기로 궁예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다고 하므로 어머니 ‘궁씨녀’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6대 외손이죠.”
-이런 내용도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찾은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군요.
“맞습니다. 이 때문에 궁예가 신라왕궁에서 버림을 당하자, 성씨를 외가성 궁파(弓巴), 곧 ‘궁가(弓哥)’로 쓰고 이름을 ‘예(裔)’로 한 것입니다. ‘궁(弓=高)씨의 후예(裔)’, 곧 고구려 왕가의 서자가계의 후손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큰(大)=궁(弓)=높은(高)씨의 후예(裔)’라는 뜻이죠.”
-칭기스 칸 선조 이야기가 결국 이야기가 왕건의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네요. 우리 역사와 이렇게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궁예를 도운 발해대상랑, 곧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가 결국 고구려-마진-태봉 창건의 주역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처음에는 그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궁예를 도운 왕건이 나중에는 오히려 주군인 궁예를 제거하고 자기가 새 왕이 되죠. 그런데 이 왕건은 아까 말한 대로 서해용왕(금행)의 외증손입니다. 발해대상랑과는 재종외아저씨와 조카 사이이죠. 이들은 때로 신라 땅이 된 곳에 살면서도 스스로 고구려인이라고 자부한 인물들입니다.”
▲KBS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모습./ KBS
왕건의 궁정혁명에 밀려 후고구려를 떠난 발해대상랑
-말씀하셨듯이 결국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잖습니까.
“궁정혁명을 일으킨 것이죠. 궁예가 왕건 자신의 선대의 외가쪽인 아내 강(康)씨와 두 아들을 죽이고, 개성 호족을 억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또 궁예는 신라와 후백제를 치고, 갓 세운 나라를 굳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지나쳤습니다. 아직은 나라의 기반이 약했죠. 후백제가 발호하고, 신라가 건재했으니까요.
북쪽에 발해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그런 터에 그 지지세력을 당시 민간에 널리 유행한 불교에서 찾고, 미륵불 신앙을 지나치게 믿었죠. 또 반역을 예방하기 위해 신하들과 백성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觀心法)에 심취하면서 아예 전제적인 폭군으로 변해갔습니다.
이 때문에 근신들이 점점 그로부터 멀어져 갔고, 또 고구려 왕가의 외손인 왕건을 덕 있는 군주감으로 생각한 그 무리의 도움으로 결국 왕건이 정권을 빼앗아 나라 이름을 처음의 ‘고려’ 즉 ‘고구려’로 되돌렸습니다.”
-그것이 칭기스 칸 선조가 우리 역사에서 분파하게 된 계기와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건지요.
“문제는 918년의 궁정혁명이 났을 때입니다. 금행의 후손인 발해대상랑이 하필이면 패자인 자기 군주 궁예 편에 섰다는 겁니다. 궁예는 왕건의 궁정혁명군에 밀려 자기의 궁성인 철원에서 머지않은 강원도 부양으로 도망했다가 미복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곡식 이삭을 따다가 백성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죠.
이때 죽은 궁예의 시신을 수많은 승려가 호위하여, 고려를 떠나 오늘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서 장사 지낼 때 발해대상랑도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장례가 끝나고 그의 일행은 다시 그들 자신의 선조 간(키얀)과 님금(니쿠즈)이 들어갔던 전설적인 그 땅 발해서경인 아르카나 콘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쫓겨왔지만, 다행히 거기서 동족을 모으고 도리행 후손 지파의 하나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케) 종족과 합칩니다.”
-후삼국이 분열하고, 왕건이 후고구려, 즉 고려를 건국할 때까지 발해가 건재했었네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다행도 잠시였습니다. 그 918년에서 8년 뒤 926년 발해는 불행히도 발해 왕가의 한 집안 지파가 7세기의 수와 당나라 시대에 통치했던 거란 땅에서 새로이 일어난 추장 야율아보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발해대상랑과 그 일행은 말갈의 고향인 백두산의 압록수원에 있는 별해진(別海津) 주변, 곧 강계와 삼수, 갑산 땅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별해진은 당시 소리로는 ‘바르카이-진’이고 ‘발해-진(渤海-鎭)’을 다른 한자로 쓴 지명입니다. 부랴트어와 몽골어로는 이 소리가 조금 변해 ‘바르고(발해)-진’ 또는 ‘바르가(발해)-잔’이라고 불립니다.”
영원히 이 땅을 떠난 칭기스 칸의 선조
전 박사는 “하지만 그 뒤 몇 대 후손의 시절, 그러니까 918년과 926년에서 완안 아골타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의 시절입니다. 그들이 영원히 이 땅을 떠나게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게 무슨 전쟁이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사실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쓰기로 하고 이번에 펴낸 제 책에서는 깊은 설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전쟁은 바로 지난 세기의 1950년대에 우리 땅에서 일어난 남북한 전쟁을 방불케하는 전쟁이 북쪽의 조신(女眞)과 남쪽의 고려 사이에 일어 난 것입니다.
바로 고려 윤관 장군이 무려 17~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신(女眞)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동원된 숫자는 엄청난 수의 군사입니다. 그로부터 약 490년 후인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에도 조선은 단 10만의 군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인구가 약 열 배는 늘어난 오늘날로 치자면 20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에서 북의 함경도로 쳐들어간 전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측 고려가 북측 조신(女眞)으로 쳐들어간 전쟁이죠.”
-이 전쟁을 계기로 드디어 칭기스 칸의 선조들은 우리 땅으로부터 멀리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군요.
“네, 그 때가 시기적으로는 아골타의 청년시대였습니다. 이 때 함경도에 살던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와 그의 숙부 ‘나친’, 곧 제가 볼 때 오늘날 함북 나진(羅津)을 관향이자 자기 이름으로 쓰던 이들의 시대에 그들은 이 땅 함경도를 떠납니다. 그들은 옛 발해 수도 동모산을 지나는 속말수(송화강)의 지류를 따라 흑수(흑룡강)의 윗물줄기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오늘날 남(내)몽골의 훌룬-부이르호를 거쳐서 더 서북으로 나아가 오늘날 몽골리아 동북부 러시아령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칼’은 몽골어로 ‘바이-갈’이라고 합니다. 이 못 이름의 뜻은 제가 보기에 이는 원래 말갈어로 ‘부여-골리(부여-고려)’ 호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 전쟁의 여파로 잘라이르(야라, 곧 함흥) 종족이 쫓기다가 카이도 8형제를 참살한 사건이 있은 후 카이도와 종숙부 나친이 오늘날의 바르고진으로 갔다고 《집사》는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금항아리의 세 아들이 지파, 즉 종족으로 분화되었는데 그 지파의 후손들이 전쟁을 계기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원래 고향땅에 남거나 혹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이동)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단,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전 박사는 결국 “또 다시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며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칸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3편에서 이어짐)◎
-이상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