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10/ 마다가스카르 - 말레이시아 - 말리 - 멕시코 - 모나코 - 모로코 - 모리셔스 - 몬테네그로 - 몰디브 - 몰도버 - 몰타
지구촌 여행/ 국가별10/
■ 마다가스카르 Madagascar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Repoblikan'i Madagasikara
▲국기
아프리카 대륙 남동 해안 앞바다에 있는 인도양 남서부의 섬나라. 수도는 안타나나리보이며 화폐는 말라가시 아리아리이다. 오랫동안 지켜온 시장경제에 대해 최근 중앙계획경제를 실시하고 있다. 농업이 주요산업이나 급속한 인구증가로 주요식량의 대부분을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80년대 중반부터 점차 줄어들어 현재 세계 최하위권에 속한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마다가스카르 섬과 주변의 작은 섬들을 모두 포함하며, 남위 12∼26°, 동경 43∼51°에 위치하므로 대부분 열대지역에 속한다(남서쪽 끝에서 북동쪽 끝까지의 길이는 1,570km이고 동서의 최대너비는 571km임). 수도는 안타나나리보이다.
마다가스카르 섬과 아프리카 해안 사이에 너비 800km의 모잠비크 해협이 있으며, 이 섬의 해안선길이는 3,990km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 의회에 대의원을 보내는 프랑스 공화국의 해외영토가 되었다. 1958년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자치를 허용, 그해 10월 14일 말라가시 자치공화국이 태어났다. 필리베르트 치라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60년 말라가시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1970년대에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프랑스와 교류를 끊고 경제의 상당 부분을 국유화했다. 안정기반을 가진 메리나족 중산계층은 이런 정책에 반대했지만 좌익 정당인 '혁명수호를 위한 국민전선'은 1977년 정부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그뒤 정치상황은 안정을 되찾았으나 계속되는 사회불안과 심각한 경제문제로 시달리고 있다.
마다가스카르인은 말레이인도네시아인과 아프리카아랍인의 혼혈 인종으로, 인도네시아 사람이 기원후 1,000년의 기간 동안 아프리카 해안을 거쳐 이곳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1500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디오고 디아스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섬을 찾아왔으며, 17세기말과 18세기초에는 이곳에 해적이 많이 들끓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여러 왕국은 무기와 노예를 거래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비록 좁은 지역들에 국한되긴 했으나 17세기초까지 안테모로족·안테사카족·베칠레오족·메리나족이 세운 나라들이 주요왕국으로 활동했다.
안드리아남포이니메리나 대왕(1787∼1810)이 메리나족을 통합하여 막강한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인 라다마 1세(1810∼28)는 모리셔스에서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마다가스카르의 상당 부분을 통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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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아름다운 마다가스카르 모론다바
▲모론다바의 바오밥 나무와 붉은 노을
▲모론다바 해안 마을
▲마다가스 수도 안타나나리보
▲무서운 메뚜기 떼 - 아프리카 동부 섬나라 13. 3. 27
▲나이즈강의 고요한 밤풍경 - 아프리카 서북부를 흐르는 4천 km 이상의 강으로 동식물에게는 생명의 젖줄
▲고목의 뿌리 같은 마다가스카르의 붉은 강 베체보카 강
▲청나일 폭포 연기가 나는 물
▲바오밥 나무 거리 - 마다가스카르 모론다바
■ 말레이시아 Malaysia
말레이 반도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서말레이시아는 길이 약 800km, 폭 325km이며 북쪽은 타이, 남쪽은 싱가포르, 서쪽은 말라카 해협, 동쪽은 남중국해를 경계로 한다. 보르네오 섬 북서부를 차지하는 동말레이시아는 길이 약 1,075km, 폭 384km로 사라와크 주와 사바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서쪽은 남중국해, 동쪽은 셀레베스 해, 남쪽은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 섬과 접한다. 사라와크 주의 영토 안에는 영국 보호령이던 이슬람 왕국 브루나이가 있다. 수도는 콸라룸푸르이다.
말레이시아는 세계 주요 항로 중 하나인 말라카 해협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인종 분포를 보인다. 말레이인과 중국인들이 가장 큰 인종집단을 형성하며, 두드러진 소수 종족으로는 여러 부족의 토착민들과 남아시아계가 있다. 공용어는 말레이어이고 중국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가 사용된다. 국교는 이슬람교이고 불교, 그리스도교, 힌두교 및 몇몇 지역 종교들이 있다. 화폐단위는 링깃(ringgit)이다.
말레이 반도는 주로 산악 지형이다. 동말레이시아에는 해안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이 평야는 언덕 쪽으로 높아지다가 산악지형의 중심에 다다른다. 말레이시아는 대부분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수목작물, 특히 고무와 야자유는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이다. 쌀도 주요한 산물이다. 석유 채굴 및 생산과 주석 채굴은 제1의 외화 획득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시멘트와 전자·고무·철강제품을 생산하는 제조업 역시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정치체제는 양원제를 운영하는 입헌군주제이다. 국가원수는 국왕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말레이 반도에는 적어도 6,000년 동안 사람들이 계속 거주해왔다. 2~3세기경에 작은 말레이 왕국들이 있었으며 그때 인도의 모험가들이 이 지역에 들어왔다. 1400년경 수마트라 추방자들이 도시국가 말라카를 세웠다. 이 도시국가는 1511년 포르투갈인들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교역과 이슬람교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맞았다. 1641년 네덜란드가 말라카를 점령했다. 1819년 영국은 싱가포르 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1867년 해협식민지(말라카, 싱가포르, 페낭 섬)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중국인들이 말레이 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41년에는 일본이 말라야를 침공하고 1942년에는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영국의 지배 정책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1946년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48년 페낭 섬이 말레이 반도에 합류했다. 말레야는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말레야·싱가포르 및 영국의 이전 식민지들이면서 보르네오 섬에 위치한 사라와크와 사바가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합류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중·후반 지역적 경제 침체를 겪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회복되었다.
2018년 5월 총선에서 말레이시아 야권연합(PH)이 61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 간 말레이시아를 집권했던 마하티르 전 총리가 15년 만에 총리직으로 복귀했다
▲말레이시아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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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
▲왕궁
▲말레이시아 연방 국왕에 오른 켈란탄 주의 술탄 무하마드 5세
□ 2018.05.10 93세 세계 최고령 총리 당선, 말레이시아 마하티르는 누구?
93세 세계 최고령 총리 당선, 말레이시아 마하티르는 누구?
'말레이시아의 박정희', 근대화의 아버지 VS 독재자 평가 엇갈려
▲마하티르 PH 총리후보가 총선 승리를 보고받고 지지자들과 환호하고 있다.
9일 치러진 말레이시아 총선 결과 야권연합이 승리해 야권연합의 총리 후보였던 93세의 마하티르 무함마드 전 총리가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이 경우 세계 최고령 국가정상으로, 현재 현직인 국가정상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은 튀니지의 베지 카이드 에셉시(92) 대통령이다.
10일 BBC 등 외신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 결과 이날 새벽까지 신야권연합 희망연대(PH)와 사바 지역 정당인 와리산 당이 하원 222석의 과반인 112석을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나집 라작 현 총리가 이끄는 통일말레이국민기구(UMNO)를 주축으로 한 집권여당연합 국민전선(BN)은 76석을 얻는데 그쳤다.
이로써 1957년 말레이시아가 영국에서 독립한 뒤 쭉 집권해온 BN이 처음으로 야당으로 밀려나 61년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PH의 승리로 마하티르(93) 전 총리는 15년 만에 총리직에 복귀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는 BN 소속으로서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간 최장기 총리를 지냈다.
마하티르 당선자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 간 최장기 총리를 지냈다. 한때 나집 총리와 BN을 키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번 총선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당선된 국가 지도자가 됐다.
농업국가였던 말레이시아를 제조업 강국으로 이끌어 근대화를 이끈 ‘국부(國父)’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독재자’라는 평도 있다. 국내에서는 '말레이시아의 박정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25년 영국 식민 치하의 말레이 반도에서 태어나 의사가 된 그는 1957년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각 부 장관과 부총리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1981년 후세인 온 당시 총리가 건강 악화로 사임하자 총리직을 승계했고, 이후 2003년까지 무려 22년간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이 기간 그는 경제성장을 먼저 이뤄낸 한국과 일본의 사례를 배워야 한다는 ’룩이스트(Look East)‘ 정책과, 말레이시아를 2020년까지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겠다는 ’와와산 2020‘ 등을 주창하며 강력한 국가주도 경제발전 정책을 펼쳤다.
마하티르는 통치 과정에서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사법부를 정부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등 독재와 인권탄압을 자행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는 나집 라작 총리의 부패와 경제악화 등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국민들의 마하티르에 대한 기대가 다시 높아졌다. 나집 총리는 국영기업에서 수조원을 횡령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때 나집 총리의 후견인이었던 마하티르는 비자금 스캔들을 계기로 총리 축출 운동을 벌이다가 실패하자 야권지도자로 변신했고, 작년 말 신야권연합 희망연대(PH)의 총리 후보로 추대됐다.
글=월간조선 뉴스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의회의사당 앞 의장대 16.12.13
□ 볼거리
▲불타는듯 밤하늘의 은하수가 빛나는 보르네오
▲금빛 구름의 하늘
▲랑카위 섬 = 말레이 반도의 북서쪽 말라카 해협의 랑카위제도의 주도
▲랑카위 99개 섬중에는 신발을 닮은 섬도 있다
▲전설의 섬 랑카위
▲천국의 계단같은 케이블카
▲하늘 아래 첫 전망대
▲최고봉 카나발루 산에서 누드 사진
▲셀렌고어강
▲백색의 물결 - 13. 5. 3. 이슬람당 당원들의 특별 기도회
▲숨막히는 무아르 시 13. 6. 23. 인도네시아의 산불로 유발된 자욱한 연기
▲보트 낙하산
▲쿠알라룸푸르 쌍둥이 빌딩
▲비구름 속의 페트로나스 타워 - 13. 12. 5.
■ 말리
정식 명칭은 말리 공화국(Republic of Mali)이다. 모리타니·니제르·세네갈 등 7개국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내륙국으로, 면적은 124만 192㎢, 인구는 1695만 5536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바마코(Bamaco)이다. 인구구성은 아프리카 원주민이 99%를 차지하며, 밤바라족(Bambara)이 50%, 뻘족(Peul)이 17%를 점유하고 있다. 종교는 국민의 90%가 수니파 회교도이고, 약 9%는 토착신앙, 1%는 기독교를 믿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로 지정되어 있으나 국민의 약 60% 정도가 밤바라어를 사용하고 있고, 아랍어도 일부 통용되고 있다.
기온은 20∼34℃의 열대성기후로서 노동인구의 75%가 농업에 종사하며, 면화·땅콩 등 주요 농산물이 국민총생산의 42%를 점하고 있다. 주요 광물자원으로 인광석·금·철광·우라늄 등이 매장되어 있고, 농업개혁을 경제중점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다.
2014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20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705달러 수준이다.
이 나라는 임기 5년의 대통령 중심제 공화제로서,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147석)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말리민주화동맹(ADEMA), 반대연합당(COPPO), 국민부흥당(Parena), 민주발전당(UDD) 등이 있다
중세에는 이 지역에 말리제국이 있었으나 1590년 모로코의 침입으로 여러 나라로 분할되었다. 그 뒤 1895년 프랑스 보호령으로 편입되었다가 1958년 프랑스공동체 내 자치국이 되었고, 1960년 6월 20일에 신생독립국으로 등장했다.
1968년 군부의 무혈쿠데타가 발생하였고, 1974년 헌법을 제정하여 1979년 유일한 합법정당인 말리인민민주연합(UDPM)이 창당되어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후 1992년 1월 신헌법을 제정하고, 6월에는 최초의 민선정부가 출범하였다.
독립과 동시에 1960년 유엔에 가입한 이후 여러 전문기구에도 가입하고 있고, 1961년에는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여 친공산 좌경노선을 추구하였으나, 현재는 우경중립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밖에 지역경제협력기구에도 관심을 가져 세네갈강유역개발기구·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CEAO)·아프리카국경제공동체(ECOWAS)에 가입했다.
▲말리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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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거리
▲말리의 모스크 마을
▲수수 수확하는 여성들 13.1.24.
▲일상 풍경 13.1.28
▲니제르 강의 빨래터 13.2.11.
▲다목적 트럭
▲검문을 하는 프랑스 군 13.2.14.
▲말리는 현재 피난중 13.2.18
□ 2015.11.21 말리 호텔, 인질극 종료 테러리스트 2명 포함 21명 사망
▲호텔 진입한 특수부대 - 20일(현지 시각) 인질극이 벌어진 말리 수도 바마코의 래디슨블루 호텔에 진입한 말리 정부군과 해외 지원군이 호텔 내부를 수색하는 모습이 말리 현지 방송국 ORTM에 방송됐다. 말리 정부군은 이날 프랑스군, 유엔 평화유지군 등과 함께 인질 구출 작전을 펼쳤다. /AP 뉴시스
20일(현지 시각) 아프리카 말리의 수도 바마코의 한 특급호텔에서 벌어진 이슬람 무장단체의 인질극으로 인질 19명과 테러범 2명 등 총 21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알 무라비툰’이 이번 인질극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브라힘 부바카르 케이타 말리 대통령은 이날 인질극 종료를 발표하면서 “사망자가 총 21명”이라고 밝혔다고 BBC 방송 등이 보도했다.
이날 오전 말리의 수도 바마코에서 이슬람 무장단체 소속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서방 외국인들이 머무는 고급 호텔에 들이닥쳐 약 170명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다. AFP통신은 "오전 7시쯤 바마코 도심의 래디슨블루 호텔에 괴한들이 자동소총을 난사하며 습격했다 "고 보도했다. 인질은 프랑스인과 터키인·중국인·인도인 등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 목격자들은 "약 10명의 무장 괴한이 호텔에 도착한 후 경비원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며 "아랍어로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다"고 전했다. 인질극은 8시간여가 지난 이날 오후 3시 30분쯤 끝났다.
▲조선일보DB
인질극이 발생한 래디슨블루 호텔은 전체 객실 190개의 5성급 호텔이다. 말리 주재 외교관들의 거주 지역과 가깝고, 에어프랑스 승무원 등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방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말리는 즉각 군인과 경찰을 투입해 호텔 주변을 봉쇄하고, 오후 2시쯤 특수부대를 투입해 진압 작전에 나섰다. 진압 도중 테러범 3명이 사살됐다고 BBC방송은 보도했다. 이곳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군과 유엔 평화유지군도 진압 작전에 합류했다. AFP통신은 "테러범들은 코란(이슬람 경전)을 암송하는 인질을 중간에 풀어줬다"고 보도했다.
이날 서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알 무라비툰’은 이번 인질극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알 무라비툰이 지난 5월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충성을 선언한 단체로, 알 카에다 연계 단체로 있다가 2년 전 분리를 선언했다.
알 무라비툰은 이날 아랍방송 알자지라에 보낸 성명에서 "알카에다 북아프리카지부(AQIM)와 연계해 이번 공격을 실시했다"고 전했다. 또한 "바마코 감옥에 감금 돼 있는 '무자헤딘(이슬람 전사)'를 석방하기 위해 인질극을 벌였다"면서 "말리 정부와 프랑스군은 말리 북부지역에서 말리인을 억압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말리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으며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이 활동 중이다. 프랑스는 이 반군을 제압하기 위해 2013년 1월 병력을 투입했다. 현재도 프랑스 군인 약 1000명이 주둔 중이다.
■ 멕시코 Mexico
정식 명칭은 멕시코 합중국(United Mexican States)으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안선의 길이가 9330㎞에 달한다. 면적은 196만 4375㎢, 인구는 1억 2173만 6809명(2015년 현재), 수도는 멕시코 시티(Mexico city)이다.
▲멕시코 국기
종족은 원주민 29%, 메스티조 55%, 백인 15%, 기타 1%로 구성되어 있으며, 언어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나 원주민은 고유언어를 쓰고 있다. 종교는 92%가 가톨릭교를 신봉하며, 개신교가 6%를 점유한다
기원전부터 조직적인 문화권을 형성한 멕시코의 원주민은 16세기 초 스페인에 정복될 때까지 마야(Maya)·톨테카(Tolteca)·아즈테카(Azteca)의 발달된 문명을 보유하였다.
원주민 사회를 정복한 스페인은 원주민 사회를 온존시킨 채, 스페인왕이 파견하는 부왕(副王, Viceroy)을 정점으로 하는 식민사회로 재편하였다. 식민사회는 스페인에서 파견된 식민관료, 멕시코에서 출생한 백인(Criollo),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Mestizo), 그리고 원주민으로 이어지는 엄정한 계급사회였다. 식민관료가 멕시코 사회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크리올료는 대토지소유제에 기반을 둔 경제력을 향유하였고, 메스티조와 원주민은 대농장(hacienda)에서 혹사당하는 노예(peon)로 전락해갔다.
1810년 9월 16일 신분해방을 원하는 메스티조와 정치권력을 원하는 크리올료가 결합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일으켜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독립전쟁을 이끈 이뚜르비데(Iturbide, A.)의 왕정은 3년 만에 종식되고 1824년 공화제 헌법이 반포되었다. 독립과 더불어 노예의 형식적 해방이 선언되었으나 그 뒤 1세기 동안 대토지소유제는 해체되지 않았으며 노예제도는 오히려 광범위하게 자리잡았다.
멕시코의 정치는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지방분권주의자와 보수주의적인 중앙집권주의자 사이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19세기 전반에 멕시코는 캘리포니아·텍사스 등 국토의 절반을 미국에 빼앗기거나 할양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멕시코는 디아스(Diaz) 체제라고 불리는 독재체제하에서 광범위한 외국자본의 침투와 사회적 모순으로 고통을 받았고, 1910년 마데로·까란사·오브레곤·사파타·판초 빌라 등이 각기 이끄는 정치세력들에 의하여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야기하면서 7년이나 지속되었고, 1917년 2월 5일 신헌법(Carta Magna)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1934년 혁명세력을 결집한 멕시코혁명당이 결성되었으며 1946년 제도혁명당으로 바뀌었다.
그 뒤 매 6년마다 평화적인 권력 이양이 이루어지고 있고 중앙집권제의 확립, 군부의 축소 및 중립화, 정교분리가 촉진되어 중남미 국가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사회를 이루고 있다.
대외정책은 중도우익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내정불간섭, 민족자결,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제3세계 경제질서의 확립을 기조로 삼고 있다.
■볼거리
▲멕시코 로스 카보스의 빛나는 바닷가
▲멕시코의 한없는 작은 집들 - 멕시코시티 외곽 파블로 로페스 루스의 작품
▲바닷 속에서 흐르는 강
▲바다와 유람선
▲별이 빛나는 바닷가
▲붉게 물든 하늘 12.12.27
▲알록달록 마을
□ 동굴
▲나이카 광산 - 수정 동굴
▲멕시코 무에보 레온 주 가르시아 시티의 가르시아 동굴 1843 발견
▲히든비치 - 마리에타 섬은 무인도였으나 멕시코 정부의 폭발 실험등으로 천장 구멍이 형성 해양 생물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국립공원으로 지정 생태계 보전
▲세계 최대 크리스탈 동굴 = 멕시코 사막 300m지하에서 발견
▲아름다운 천연풀장 유카탄 반도
□ 화산
▲멕시코시티에서 100키로 떨어진 푸애불라의 화산11.6.3.
▲포포카테페 화산에서 12.4.17.연기가 피어 오르는등 화산 폭발 움직임 포착
▲포포카테페 12. 4.22. 화산재를 뿜어내고 있다
▲포포카테페틀 화산 폭발 12.5.2.
▲시틀랄테페틀 화산
▲폭발하는 포포카테페틀 화산 13. 5. 12.
▲5,450m 화산 활동 시작
▲화산 폭발 - 13. 5. 23.푸에블라 포포카테페틀 화산
▲포포카테페틀 화산 폭발 13. 6. 25.
▲포포카테페틀 화산의 용암과 화산재 분출 13. 7. 4.
▲눈덮힌 Popocatepetl 7.9.
▲콜리마 화산 분출 15.2.26
▲콜리마 화산 폭발 해발 3960m 17.1.23
□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3ATDHCtaMBs&feature=player_embedded - 멕시코 포토카테페틀산 5,456m 화산 폭발
http://www.youtube.com/watch?v=3ATDHCtaMBs&feature=player_embedded - 멕시코 포토카테페틀산 5,456m 화산 폭발
□ 멕시코의 일상
▲멕시코식 국기에 대한 경례
▲국민행동당 대선 후보가 지지자들에게 연설 12. 6.23
▲초칠족 인디오들의 시위 - 12.12.22.
▲전통 병사복장
▲고가 다리에 매달린 시신들'
▲불타는 대마초
▲좀비 흉내
□재해
▲홍수 2011.9.5.
▲물폭탄 맞다 11.9.5.
▲강력한 허리케인 오딜이 14.9.14 멕시코 휴양지 카보스 인근 해상으로 접근
▲지진에 엿 가락 처럼 휘어진 선로
▲멕시코시티에서 강진으로 최소 210명 사망 2017.09.19
▲규모 7.1 강진
■ 도시
□ 멕시코시티
▲멕시코시티 대성당
▲멕시코시티
▲멕시코시티에 세워진 도시 조형물 '빛의 기둥'12. 2. 27. 촬영
▲멕시코 인디언 - 13. 6. 6. 멕시코 남부 시진평을 기다리며
■ 모나코 Monaco
프랑스 남동부의 지중해 연안에 자리한 모나코는 입헌 군주제 국가이며, 바티칸 시국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독립국이지만 국방권과 외교권, 공작 임명권도 프랑스 대통령이 가지고 있고, 언어와 화폐가 프랑스와 같기 때문에 프랑스의 부유한 도시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풍족한 카지노 수입만으로도 국가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민에게 세금을 받지 않고 병역의 의무 또한 없다. 외국 기업에게도 세금을 면제해 주고 있어서 유럽의 부호들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모나코로 몰리기도 하니, 모나코는 그야 말로 조세 천국이다. 매년 5월에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모나코 서킷과 그랑 카지노가 있는 몬테 카를로 지구는 모나코 관광의 핵심이다.
▲국기
인구 대부분 프랑스인이며 15%만이 모나코 원주민이다. 주민 대부분이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보통선거로 선출된 국민회의가 정치주체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정권에 의해 합병된 후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현재도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다.
면적이 매우 작지만 보기 드문 특징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관광휴양지로 손꼽히게 되었으며 나라 크기를 훨씬 능가하는 명성을 얻었다.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연평균기온이 16℃이고 1년에 60일 정도만 비가 내린다. 월평균기온은 9월의 10℃에서 8월의 24℃에 이르는 분포를 보인다.
모나코의 석기시대 취락유적이 선사인류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고대에는 페니키아·그리스·카르타고·로마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1191년 제노바인이 점령했다. 1297년 그리말디가(家)에 의한 오랜 통치가 시작되었는데 그리말디가는 스페인의 보호 밑에 있던 1524~1641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정권이 그리말디가를 추방하고 모나코를 프랑스에 합병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 1세의 몰락과 함께 그리말디가는 복귀했고 빈 회의(1815)에 따라 모나코는 사르데냐 왕국의 보호하에 놓였다.
1848년 영토를 프랑스에 잃음으로써 크기가 축소되었으나 1861년에 체결된 프랑스-모나코 조약으로 독립을 되찾았으며 1865년에는 양국간에 관세동맹이 맺어졌다. 1918년 프랑스와 체결한 또다른 조약은 그리말디 왕가의 대가 끊길 경우, 모나코가 프랑스 보호 밑에서 자치국가가 될 것이라는 조항을 포함했다.
모나코에는 1911년부터 헌법이 있었으나 1959년 대공인 레니에 3세가 헌법 일부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국민회의를 해산시켰으며, 대신 1961년에 국회를 임명·구성했다.
1962년 프랑스와 관계가 악화되자 그는 다시 국민회의를 부활시키고 새로운 자유주의 헌법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국민회의는 보통선거에 의해 5년 임기로 선출되는 18명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행정은 프랑스 시민권을 지닌 국무장관 1명과 3명의 국가자문위원들이 맡는데, 이들은 공식적인 모나코 수반인 대공의 권한 밑에 있다.
입법권은 대공과 국회가 함께 갖는다. 1819년부터 모나코의 사법체계는 프랑스 사법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2명의 파리 판사로 구성된 상소법원이 있다.
모나코가 자국 거주민과 국내에 본부를 설치한 국제기업들에 대해 소득세 부과를 거부함으로써 1962년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에 양국간에 타협을 한 결과, 거주 기간이 5년 이내인 국내 프랑스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는 프랑스 세율이 적용되고 사업활동의 25% 이상을 국외에서 하는 모나코 회사들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다.
오늘날 국가의 수입총액 가운데 상당 부분은 무역거래에 부과되는 세금에서 얻어지며 추가적인 수입은 라디오·텔레비전·카지노 독점판매권, 담배·우표 국영독점산업, 판매세, 1962년 이래 부과된 각종 세금 등에서 나온다. 모나코는 주요산업이 관광업이며 시설이 매우 잘 되어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휴양지로 손꼽힌다. 한때 겨울 명소였으나 지금은 이곳 해변과 확장된 정박시설을 찾아 여름에도 관광객이 몰려든다. 몬테카를로의 사교계는 카지노 궁(Place du Casino) 주변에서 형성된다.
1861년에 세워진 이 카지노는 1967년 영업권이 국가로 넘어갔다. 관광업을 육성하는 국가답게 인구의 소수를 차지하는 모나코 원주민에게는 도박 행위가 금지되어 있으나 이들은 세금을 면제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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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도 유명한 모나코의 왕가
▲할아버지 레니에 3세
할머니 그레이스 켈리
작은 나라, 하지만 가장 부자인 나라 모나코는 지중해를 굽어보는 구릉지대에 위치한 독립공국. 동쪽으로 8㎞ 되는 곳에 이탈리아 국경이 있다. 면적이 매우 작지만 보기 드문 특징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관광휴양지로 손꼽히게 되었으며 나라 크기를 훨씬 능가하는 명성을 얻었다.
모나코의 특산물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관광수입과 카지노수입만으로 운영되는 나라이다. 50년대초반 '하이눈'이란 영화로 일약 세계적 여배우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1956년 모나코의 왕 레니에 3세와 결혼을 함으로써 더욱유명해진나라
모나코는 매년 5월이면 자동차 F1 경주가 열려 열광하는 곳인데 그레이스 켈리 왕비의 유명세를 발판으로 유치한 대회이다, 면적 : 1.95㎢, 인구 32,520 (2003 추계).
□ 볼거리
▲왕궁
▲모나코 리르보토 해변
▲동화 속의 몬테카를로 카지노
■ 모로코
▲모로코 국기
정식 명칭은 모로코왕국(Kingdom of Morocco)이다. 국토 북서단의 해안선 길이가 1835㎞에 달하며, 면적은 44만 6550㎢, 인구는 3332만 2699명(2015년 현재)이다. 수도는 라바트(Rabat)이며, 행정구역은 9개 도로 이루어져 있다. 아랍족이 인구의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원주민인 베르베르족이 35%이고 나머지는 흑인·유럽인·유태인 등이다.
종교는 수니파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기독교·유태교도 믿는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나 베르베르어·프랑스어도 통용된다.
인구의 57.3%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생산물은 밀·보리·올리브유 등이다. 인광석·석탄·철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세계 제1의 인광석 수출국이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020억 달러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3,045달러이다.
모로코는 8세기에 최초의 회교왕조를 건설한 이후 12세기에 이르러 알제리·리비아·스페인 남부지역에까지 세력을 확장한 적이 있었으나, 19세기부터 프랑스 등 유럽열강의 침략을 받아 1912년에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56년 3월 2일 독립하였다.
1961년 2월 국왕 하산 2세(Hassan Ⅱ)가 즉위하여 1962년 12월 입헌군주국을 선포하였다. 1972년 3월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여 시행한 이후 국왕이 삼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사하라전쟁의 장기화와 열세로 인하여 야당의 불만이 누적된 데다가 1981년 5월과 1984년 1월에는 식료품가격 폭등과 노사분규 등이 겹쳐 대규모 유혈폭동을 겪기도 하였다.
1975년 11월 스페인이 서부사하라에서 철수하자 모로코는 서부사하라를 점령하였고, 그 뒤에 서부사하라 독립단체인 폴리사리오와 전쟁을 계속하였다.
아프리카단결기구(OAU)와 국제연합은 1983년 모로코와 폴리사리오간의 직접교섭과 서부사하라에서의 휴전 및 국민투표실시를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했으나, 모로코는 이에 응하지 않고 서부사하라문제의 군사적 해결에 집착함으로써 외교적 고립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한편, 폴리사리오를 승인하는 국가 수도 점차 증가하여 1984년 11월 아프리카단결기구 제20차 정상회의에는 폴리사리오가 정식으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에 항의하여 모로코는 이 기구로부터 탈퇴하였다.
모로코는 폴리사리오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알제리와 1976년 외교관계를 단절하였고, 1979년 3월에 이디오피아와, 4월에는 이집트와도 단교하였으나, 1989년 2월 알제리·튀니지·리비아·모리타니와 아랍-아그레브연합(AMU)을 결성하고, 1991년 9월 폴리사리오와의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등 분쟁종식에 주력하고 있다.
모로코는 1956년 유엔에, 1961년에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으며, 대외적으로 우경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마그레브연방의 건설, 아랍 및 아프리카의 단결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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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거리
▲황금빛 사막
▲모로코 왕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하산탑 입구
▲백마를 탄 기병이 정문을 지키고 있다
▲12세기에 짓다가 중단된 하산탑 주위에 돌기둥이 300여개 남아 있다.
▲모하메드 5세 묘(Mausolee Mohammed V)
국왕 모하메드 6세의 부친인 하산 2세(1961년 즉위)와 조부인 모하메드 5세 국왕의 묘.
1912년 이래 술탄 벤 유세프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의 선두에서 싸우고, 1956년 3월 독립을 성취하자, 왕위에 올라 모하메드 5세가 되었다.
그 후 근대국가 건설에 힘쓰다가 1961년에 서거하였는데, 이 묘는 1971년에 준공되었다. 묘 속에 석관이 안치되어 있으며, 실내장식이 매우 훌륭하다.
▲왕능의 화려한 외관
▲젊은 부부가 아기를 안고 구경 나왔다.
▲하산탑 오른쪽에 있는 건축물 유적
▲셀라(Chellah)
라밧 신시가지의 남동쪽에 있는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입구의 문과 그 양쪽에 세워진 탑의 중후한 구도에 놀라게 된다. 로마시대에는 영예를 누렸지만, 로마제국이 쇠퇴한 후 14세기에는 메리니드 왕조의 묘지가 되었다. 성벽 안에는 로마시대의 목욕탕과 저택의 터를 비롯하여, 메리니드 왕조의 검은 술탄이라고 불린 아부 알 하산과 그 일족의 묘가 있다.
▲모로코의 오래된 도시에는 구시가지에 '메디나'라고 하는성곽이 있는데, 구도시라는 주거지의 의미도 있고 전통시장이라는 의미도 어우러져 있다.
■ 모리셔스
인도양 남서부에 있는 섬나라
▲국기
모리셔스 공화국(영어: Republic of Mauritius, 프랑스어: République de Maurice 레퓌블리크 드 모리스[*], 모리스얀어: Repiblik Moris 레피블리크 모리스)은 아프리카의 동부, 인도양 남서부에 있는 섬나라이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약 900 km, 인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3,943 km 떨어져 있다. 모리셔스는 본섬 이외에 카르가도스 카라호스 제도, 로드리게스 섬, 아갈레가 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모리셔스섬은 남서쪽으로 200km정도 떨어진 프랑스의 섬 레위니옹, 북동쪽으로 570km정도 떨어진 로드리게스 섬과 함께 마스카렌 제도에 속해있다. 면적은 2040 km²이며 수도는 포트루이스이다.
모리셔스는 의원 내각제 국가이며,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 동남아프리카 공동시장, 아프리카 연합, 프랑코포니, 영연방의 회원국이다. 주 언어는 모리스얀어, 영어, 프랑스어이다. 영어가 유일한 공용어이나, 링구아 프랑카는 모리스얀어이며, 보통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은 프랑스어로 나온다. 소수언어로 로드리게스 크리올이 있으며 국가의 일부지역에서 쓰인다. 인도계, 아프리카계, 중국계, 프랑스계를 비롯한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도중 영국의 식민지가 된 모리셔스는 196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후 높은 실업률과 그로 인한 민족갈등의 문제가 대두하였으나, 초대 총리인 시우사구르 람굴람(Seewoosagur Ramgoolam)이 섬유산업을 중심으로 공업화를 추진하여 이들을 해결하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영국령이던 때부터 완전한 보통선거 등의 선진적인 정치체제를 도입한 모리셔스는 현재 민주주의 지수상 최상위의 국가 중 하나이다.
처음 유럽인들이 이 섬을 발견했을 당시 이 섬은 무인도였다. 이 섬은 조류 도도가 서식했던 유일한 지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도도는 몸무게가 무겁고 날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들이 식량으로 삼기가 쉬웠고, 결국 유럽인들이 처음 온 이후 80년도 안되어 멸종하고 말았다. 원래는 무인도였으나 1598년에 네덜란드가 식민지로 만든 이후 프랑스령을 거쳐 1810년부터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68년에 영 연방 내의 입헌 군주국으로 독립하였으며, 초대 총리인 람굴람의 산업 정책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이후 1992년에 바뀐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가 성립되었다.
□ 볼거리
▲모리셔스 = 수중폭포
■몬테네그로
Montenegro몬테네그로 공화국
▲국기
몬테네그로는 발칸유럽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유럽 내에서도 매우 작은 국가이다. 과거 몬테네그로 공화국은 세르비아 공화국과 함께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연방’, 그리고 이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합’을 구성하였으나, 2006년 5월 21일 치러진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결정되었고, 이후 동년 6월 대내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게 되면서 현재 독립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몬테네그로 정부의 공식 자료에 따르자면 몬테네그로 인구는 64만 7073명(2015년 현재)이며, 인구 비율로 보자면 몬테네그로인이 61.9%(380,466명), 세르비아인이 9.3% (약 57,454명), 무슬림이 14.6%(약 89,615명), 알바니아인이 6.6%(약 40,415명), 기타 인구가 7.6%를 차지한다. 이외에도 약 20만명이 세르비아를 비롯한 인근 국가에 거주하고 있다.
몬테네그로 공화국은 헌법상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 완전한 국민 평등권을 제공하고 있으며, 국제 기준에 부합한 소수민족의 권리 또한 보장하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정교도(몬테네그로인, 세르비아인 포함)이고, 그 뒤를 이어 이슬람교도 그리고 소수의 로마 가톨릭 교도, 유대교도 등이 있다.
세르비아인의 한 일파로 분류되어 지는 몬테네그로인들은 6세기 이후 남슬라브족들의 이주와 더불어 현재의 아드리아 연안을 중심으로 부족 국가를 형성하였다. 로마인들로부터 기독교(콘스탄티노플 교회: 후에 정교로 발전)를 받아들인 몬테네그로인들은 9세기 두클랴(Duklja) 공국을 수립한 이후 계속된 성장을 이루다가, 1077년 마침내 로마교황 그레고리 7세(Gregory Ⅶ)로부터 독립 왕국을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1094년 세르비아 중세 왕국의 시조인 스테판 네마냐(Stefan Nemanja) 가 이끄는 라쉬카(Raška) 공국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제1대 몬테네그로 중세 왕국은 그 끝을 맺게 된다.
세르비아 최대 전성기를 이룬 두샨(Stefan Uroš Dušan)왕이 사망한 이후,1356년 제2대 몬테네그로 중세 왕국의 발쉬치(Balšić) 왕조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오스만 터키의 발칸 원정과 베니스 공국과의 전투에서의 패배로 국력이 약해진 몬테네그로는 제3대 왕조가 출현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쯔르노예비치 왕조쯔르노예비치(Crnojević)왕조이다. 이때 이후로 몬테네그로는 현재의 국명인 쯔르나 고라(Crna Gora)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이후 오토만 터키의 계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몬테네그로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활용해 근대까지 독립을 유지하게 된다.
근대 시절 몬테네그로는 오토만 터키의 강력한 견제와 나폴레옹 하 프랑스의 간섭 속에서도 니에고쉬(Peter II Petrović Njegoš: 1830∼1851) 시기에 들어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어 1878년 러·터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지원속에 독립국가로 인정받은 몬테네그로는 수도 쩨티녜(Cetinje)를 중심으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군의 무력에 의해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수립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하로 편입되면서 독립권을 상실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엔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내 구성 공화국 중 하나로 편입되게 된다. 이후, 몬테네그로 공화국은 1980년 5월티토의 사망과 1991년부터 격화된 연방 붕괴과정에서 1992년 4월세르비아와 함께 신(新)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새롭게 구성하였다.
하지만 일련의 내전을 거치면서,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같은 연방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국제 사회로부터 오랜 동안 경제 금수조치를 받아야 했고, 연방 내에서조차 정치적 소외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 결과 1999년 8월 이후 몬테네그로의 밀로 쥬카노비치(Milo Ðukanović) 대통령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독립 논의가 시작되게 된다. 그 결과 2003년 3월, 향후 3년 동안 세르비아와 연방을 계속 존속한 후 몬테네그로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 그리고 국명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합’으로 변경할 것 등이 결정되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몬테네그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을 계속 추진해 나갔고, 그 결과 마침내 2006년 6월 독립을 이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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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몬테네그로의 자연이 그린 멋진 가을 그림 - 유럽 발칸반도 남서부
■ 몰디브 Maldives
이 군도에는 일찍이 BC 5세기부터 실론과 인도 남부에서 온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순회설교하던 이슬람교 성인이 1153년에 이곳 주민들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포르투갈인들은 1558년부터 1573년 추방되기 전까지 말레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17세기에 이 제도는 실론을 지배하던 네덜란드인의 보호를 받는 술탄 군주의 영토였으며, 1796년 영국이 실론을 점령한 뒤 영국의 보호령이 되고, 그것은 1887년의 협정으로 공식화되었다(→ 대영제국). 행정권은 대부분 술탄이나 술탄의 왕비에게 있었으며 1932년 처음으로 민주헌법이 선포되었으나 통치권은 여전히 술탄에게 있었다.
1953년 공화국으로 선포되었으나 그해에 다시 이슬람교 군주국으로 복귀되었다. 1965년 정치적으로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으며, 1968년 새로운 공화국이 선포되고 이전의 이슬람교 군주제도는 폐지되었다. 이슬람교는 계속 국교로 남았다. 1976년 3월 29일 마지막 영국 군대가 철수한 뒤 이 날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 풍경
▲몰디브 = 썬 아일랜드 리조트
▲꿈의 휴양지 몰디브 - 빌딩으로 덮다'
▲말다이브섬 - 인도양에 인공으로 만들어진 섬
■ 몰도바 Moldova
몰도바 공화국 (Republic of Moldova)
몰도바가 위치한 지역은 역사적으로 베사라비아라고 불리던 곳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이곳은 1812년 러시아에 병합되었다가 1918년 루마니아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드네스트르 강 서쪽의 소련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곳을 놓고 양국간에 분쟁이 일어났고, 결국 1924년 소련은 드네스트르 강 동쪽의 대상형의 좁은 땅에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수립했다.
독·소 불가침조약(1939)에 따라 소련이 몰도바의 반환을 요구하자 루마니아가 이를 받아들여 1940년 8월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1941∼44년 루마니아가 다시 점령했으나 1944년 소련군이 탈환했다. 1990년 6월 23일 주권을 선언했으며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1991년 8월 27일 몰도바 국회가 소련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선언한 후 같은 해 12월 독립국가연합(CIS)에 참여했다.
한국과는 1992년 1월 31일 공식적인 수교가 이루어졌
몰모바공화국은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중 가장 작은 공화국이며 면적 33,843㎢, 인구 450만명, 1인당GNP 950불 수도는 키시뇨프(인구:11만)이다. 포도·과일·채소·특용작물 등을 주로 재배하는데 특히 포도는 가장 중요한 산업용 작물이다.
이밖에도 겨울밀과 옥수수를 재배한다. 낙농과 목축은 전체 농산물 생산량의 약 1/3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양돈이다. 키시뇨프는 몰도바 최대의 공업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이곳은 1812년 러시아에 병합되었다가 1918년 루마니아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결국 1924년 드네스트르 강 동쪽의 대상형(帶狀形)의 좁은 땅에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수립했다. 1991년 8월 27일 몰도바 국회가 소련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선언한 후 같은 해 12월 독립국가연합(CIS)에 참여했다. 한국과는 1992년 1월 31일 공식적인 수교가 이루어졌다
■ 몰타 Malta
▲몰타 국기
몰타는 사람이 살고 있는 3개의 몰타·고초·코미노 섬과 4개의 작은 무인도로 이루어진 국가로서 시칠리아 남쪽으로 9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전략적으로 중요해서 지중해 지배권을 둘러싼 투쟁이 계속되었으며 북아프리카·중동의 고대문화와 부상하는 유럽 간의 상호작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수도는 발레타이다.
몰타에 남아 있는 가장 초기의 고고학적 유적은 그 기원이 BC 38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페니키아인(人) 취락의 증거로 여겨졌던 거석 유적들은 현대 고고학계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밝혀져서 사실상 지중해지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BC 8세기 또는 7세기초에 카르타고인이 이 섬에 상륙한 증거가 있으며, 이들은 섬 주민을 가혹하게 지배하면서 많은 공물을 징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BC 218년에 로마 지배 밑으로 들어간 뒤 자치도시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AD 60년에 사도 바울로가 난파당했던 만(灣)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섬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395년 로마 제국이 분열하면서 동로마 제국에 할당되었으며, 그후 870년 아랍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1091년 당시 시칠리아 백작이었던 노르만 귀족 루제로 1세가 소규모의 일행과 함께 몰타에 상륙하여 아랍인들을 물리쳤다. 이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배권이 재수립되고 주교들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점차 강화되는 봉건적인 관례로 몰타는 16세기 초반까지 봉건영주들이 계속 지배하게 되었다. 1530년에 몰타는 구호기사단에 양도되었다. 16~18세기에 투르크의 무역을 집요하게 방해한 이들 기사단은 몰타 섬 원주민과는 관계가 소원하여 별다른 사회적·경제적인 접촉이 없었다. 이들에 의한 통치는 1798년 6월 나폴레옹이 몰타 군도를 점령했을 때 끝났다.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몰타 군도는 구호기사단에게 반환되었으나 몰타인들은 이에 저항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유지되고 '몰타인의 권리선언'이 존중된다는 조건으로 대영제국의 국왕을 몰타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이 조건들은 1814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에 의해 수용·승인되었다. 영국 지배 밑에서 몰타의 정치적 지위는 계속 헌법이 허용·정지·폐지되는 일련의 변천을 겪었다. 경제는 이곳 군사시설에 대한 영국의 필요성에 따라 좌우되었고 유명한 조선소가 발달해서 경제적 대들보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몰타는 지역 수비대를 구성했고 많은 해군을 차출했다. 영국이 몰타의 장관들과 함께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긴 했지만 몰타는 1921년에 자치정부를 이루었다가, 1936년에 다시 식민지 정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가 참전한 뒤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폭격기들로부터 심한 공중 폭격을 받았다.
1942년 4월 15일 조지 6세는 몰타 군도에 영국 최고 시민훈장인 조지 십자훈장을 수여했는데 이 훈장이 영연방에 속한 지역에 수여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1964년 9월 21일 영연방에서 독립한 몰타는 197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1979년 영국과의 동맹관계가 끝나자 몰타는 다른 나라들과의 협정을 통해 중립을 보장받으려고 애썼다. 1981년 10월 소련이 몰타의 중립적 지위를 지지한다는 협정에 서명했으며, 미국과의 협정체결도 계속 모색되었다.
▲몰타의 염전 = 몰타,고초,코미노로 이루어진 섬나라. 1964.9.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4. 공화국
▲애주어 윈도(하늘색 창문)가 17.3.8 강풍에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지중해 몰타의 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