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3/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2/ [16] 누가 왕의 목을 치는가① - [31]인도兵, 영제국의 ‘전략적 중추’로 섰다(끝)
세계사3/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2
[16] 누가 왕의 목을 치는가①
며칠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다이아몬드 팔찌 한 쌍이 746만 스위스 프랑, 우리 돈으로 약 97억원에 낙찰됐습니다. 각각 1~4캐럿 짜리 다이아몬드 56개가 달린 이 팔찌의 경매 소식이 외신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보석의 화려함이나 비싼 가격 때문이 아니라 팔찌의 주인이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였기 때문입니다. 이 팔찌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한 지 6년, 왕비가 된 지 2년이 되던 1776년에 구매한 것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기 3년 전이네요. 팔찌의 당초 낙찰 예상가는 200만~400만 달러(24억~49억)였는데 실제 경매에선 2~4배 비싼 가격에 팔렸다고 합니다.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태어나 15세 때 한 살 많은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만 38세 생일을 불과 2주일 앞두고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 기요틴(단두대)에 목이 잘린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1793년 10월 16일이었습니다. 그의 남편 루이 16세도 9개월 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참수형을 당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과 왕비의 참수는 프랑스 대혁명의 하이라이트 같은 장면입니다. 프랑스는 혁명 발발 이후, 루이 16세의 폐위와 제1공화정 수립(1792), 왕과 왕비 참수(1793), 나폴레옹의 등장(1795), 제1제정(1804), 왕정복귀(1815년), 제2공화정(1848), 제2제정(1852), 제3공화정(1870~1940)으로 이어집니다. 대혁명에서 제3공화정에 이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결국 왕이 없는 나라를 만들게 됩니다.
영국에서도 혁명 세력에 의해 왕이 참수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세상을 떠난 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1603~1625)로 즉위, 스튜어트 왕가 시대가 열립니다. 그 다음 왕이 찰스 1세(1625~1649)인데, 그가 바로 청교도 혁명 때 참수형을 당한 왕입니다. 왕의 목이 잘리는 시기만 놓고 보면 영국이 144년 앞선 것입니다. 혁명 세력이 권력을 잡고 왕의 목을 치는 것은 비슷한데 그 혁명 세력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이후 역사는 어떻게 흘렀는지는 두 나라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루이 16세와 삼부회,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상이군인회관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프랑스 대혁명의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여러가지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7년 전쟁(1756~1763)의 패배로 해외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크게 뒤처지게 됐습니다. 와신상담하며 복수할 기회를 기다리다 1775년 발발한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했는데, 엄청난 전비(戰費) 지출로 국가 재정은 더욱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프랑스는 1780년대까지 세수의 절반 이상을 국채 이자를 갚는데 써야 했습니다.
1787년과 1788년에는 끔찍한 흉년이 덮쳤습니다. 빵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고, 시민들은 배고픔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1789년 7월 중순 빵 가격은 18세기 중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모순은 폭발 직전에 도달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세상에 분노한 민중들의 폭동과 시위가 잇따르자 루이 16세는 1787년 제 1신분과 제2 신분, 즉 귀족과 성직자 144명으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했습니다. 하지만 면세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던 이들이 세제 개혁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제3신분(평민)을 포함한 삼부회를 개최하라는 요구가 빗발쳤고, 결국 1789년 5월 5일 175년 만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열리게 됩니다. 참석자는 성직자 290명, 귀족 270명, 평민 585명이었습니다.
혁명에 에너지를 주고 투쟁을 이끌어갈 이념과 혁명 주역들도 이미 충분히 성숙했습니다. 근대 이후 물질문명은 빠르게 발전했고, 산업혁명은 폭발적인 생산력 발전과 함께 변혁을 주도할 새로운 계급, 부르주아를 탄생시켰습니다. 영국의 여러 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켜보면서 자유와 평등, 인권, 박애, 재산권, 국가 주권 등에 눈을 크게 됐습니다.
삼부회에 참여한 제3 신분, 즉 평민 대표는 빠르게 권력 중심으로 다가갔습니다.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1789년 6월 17일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합니다. 이들은 대혁명이 터지자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헌법 제정에도 착수합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파멸로 빠져들었습니다. 1791년 6월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 망명을 시도하다 붙잡혀 파리 탕플탑에 갇히게 됩니다. 이 사건은 또 한번 프랑스 국민들을 분노와 충격에 빠뜨렸고, 왕에 대한 실망과 함께 공화정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1792년 보통선거로 뽑힌 국민공회는 9월 21일 첫 회의 때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포합니다. 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태양왕’ 루이14세(1643~1715)가 구축한 절대왕정이 80년이 못 돼 붕괴한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와 기요틴
루이 16세는 새로 생긴 혁명 정부로부터 국가반역죄로 기소돼 1793년 1월 19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이틀 뒤 콩코드 광장에서 공개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단두대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 군중들을 향해 “프랑스인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조르주 당통과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왼쪽부터)의 초상화
재판에서 왕에 대한 참수를 결정적으로 이끌어낸 주인공은 로베스피에르였습니다. 삼부회 소집 때 ‘제3신분’ 대표로 참석한 그는 급진적인 자코뱅당의 일원이 됩니다. 왕의 재판에서 로베스 피에르는 “왕은 무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무죄가 되는 순간 혁명이 유죄가 된다. 이에 와서 혁명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을 죽여야 한다. 혁명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전쟁 내각인 ‘공안위원회’를 접수, 1974년 7월까지 공포정치를 실시합니다. 로베스 피에르와 그가 이끄는 산악파(자코뱅당 내 빈민과 노동자, 급진적 지식인들로 구성된 좌익 파벌)는 ‘상퀼로트’라는 세력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상퀼로트는 반바지(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 즉 긴바지를 입은 근로자라는 뜻으로 귀족 또는 부유한 시민이 아닌 노동자나 무산계급 등 급진적 민중들을 가리켰습니다. 공포정치 기간 중 약 30만명이 체포되고, 1만5000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됐습니다. 왕과 왕비는 물론, 혁명 동지였던 조르주 당통도 그의 단두대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 본인도 결국 단두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찰스 1세와 권리청원, 그리고 청교도
이제 장소와 시간을 1640년대 영국으로 옮겨보겠습니다. 스튜어트 왕가가 시작될 무렵, 영국에선 종교 문제가 나라를 뒤흔드는 빅 이슈로 등장합니다. 영국 교회는 헨리 8세(1509~1547)가 국교회를 설립한 이후, 가톨릭과 국교회, 퓨리턴 등으로 세력이 나뉩니다. 특히 칼뱅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퓨리턴은 엘리자베스 1세 때인 1570년대에 처음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지방 젠트리와 런던 등 도시 시민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들이 퓨리터니즘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엔 수면 아래 잠재했던 종교적 갈등은 제임스 1세 등장과 함께 본격적인 불꽃이 튀게 됩니다.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청교도' 공연 모습. 제1막 피날레에서 소프라노 안나 네트렘코가 광란의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제임스 1세는 교회 개혁안을 놓고 퓨리턴과 격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가톨릭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1604년 소집된 첫 의회가 가톨릭에 적대적 성향을 보이자 왕도 가톨릭에 대한 억압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가톨릭 신자들이 왕과 의회 모두를 폭약으로 날려버리려 꾸몄던 계획이 ‘폭약 음모 사건(1605)’입니다. 계획은 미수로 끝났지만 이 때 체포돼 처형된 ‘가이 포크스’는 이후 저항의 상징이 됐고, 매년 11월 5일이 되면 영국 전역에서 화려하게 열리는 불꽃놀이 ‘가이 포크스 데이’의 기원이 됩니다. 폭약 음모 사건으로 영국은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더욱 강해졌고, 개신교의 중심지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1618년 유럽 대륙에서 ‘30년 전쟁’이 터지고, 영국도 전쟁의 포화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됩니다. 개신교도인 제임스 1세의 사위 프리드리히(팔츠의 선제후)가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되고, 영국인들이 프리드리히 지원에 나서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쟁 속으로 휘말리게 됩니다. 이 전쟁의 파장과 후유증은 찰스 1세 때에 본격화됩니다.
팔츠를 구원하기 위해 파병된 영국 군대는 찰스 1세 때 질병과 굶주림으로 괴멸 수준의 참패를 당했습니다. 가톨릭의 종주국을 자부하는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필요한 전비(戰費)를 놓고 왕과 의회는 갈등을 거듭했습니다. 1627년에는 프랑스와도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전쟁과 종교, 왕과 의회의 대립은 다가올 혁명의 전조였습니다.
1628년 3월 세번째 소집된 의회는 찰스 1세에게 ‘권리청원’을 내밀었습니다. 의회 승인 없이는 세금과 기부금 등을 걷을 수 없고, 자유인은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는 구속할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이 권리청원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1215) 등과 함께 영국 헌정의 빛나는 금자탑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하지만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영국은 본격적인 내전과 혁명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17] 누가 왕의 목을 치는가②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바베이도스는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죽기 전에 꼭 여행을 가봐야 할 50곳’ 중 하나입니다. 국토 면적은 약 440 ㎢로 남한의 229 분의 1 밖에 안되고, 인구도 28만7800여명에 불과합니다.
이 작은 나라가 최근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영국 언론들이 유난히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유는 바베이도스가 4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20일 바베이도스 의회는 샌드라 메이슨 총독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는 오는 30일 취임식을 갖고, 바베이도스 역사상 첫 대통령에 오를 예정입니다.
◇바베이도스와 여왕의 건강, 그리고 영연방
바베이도스는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가 포기한 후, 17세기부터 영국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제임스 1세 때인 1625년 영국 배가 도착해 영국 땅이라고 선포했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627년에는 영국 정착민이 터를 잡았습니다. 1966년 11월 30일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그 이후에도 영연방 일원으로 남았습니다. 지난 55년 동안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이 나라의 국가수반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취임하게 되면 바베이도스는 입헌군주국이 아닌 공화국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윈저성에서 직접 운전하는 모습이 포착됐다./가디언
영국에서 6300km 이상 떨어진 작은 섬나라의 행보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이것이 영연방의 미래와 관련해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 엘리자베스 여왕이 건강상 이유로 공식 일정을 취소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앞으로 영연방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바베이도스가 초대 대통령을 추대한 날, 엘리자베스 여왕은 예정됐던 북아일랜드 방문을 돌연 취소하고 런던의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버킹엄궁은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의 ‘사전 검진’을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여왕의 건강은 영국과 영연방의 최대 이슈 중 하나로 급부상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후에도 3 차례 공식 일정을 취소했습니다. 지난 14일에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세너타프(Cenotaph·전몰장병추모비)에서 열리는 영령기념일(우리의 현충일) 추도 예배도 막판에 참석을 취소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행사를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BBC에 따르면 1953년에 즉위해 69년째 재임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 행사를 건너 뛴 건 단 6차례라고 합니다. 4번은 해외순방 때문에, 2번은 출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7번째가 됐네요.
만약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면, 영연방은 어떻게 될까.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도, 상상도 어렵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보다 더 큰 충격파가 영국을 강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선, 국내적으로는 군주제에 대한 폐지 논쟁이 격렬해질 수 있습니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지난 5월 영국인 48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이 이제 “군주가 아닌 선거로 뽑힌 국가원수를 가져야 할 때”라고 응답한 사람이 41%에 달했다고 합니다.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응답은 31%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음 왕위를 물려받게 될 찰스 왕세자의 인기가 신통치 않은 것도 골치입니다. 영국에서는 차라리 찰스를 건너뛰고 곧바로 윌리엄 왕세손으로 넘어가자는 여론이 꽤 높습니다. 지난 8월 유고브 조사에서 응답자의 80%가 “윌리엄 왕세손을 지지한다”고 답한 반면, 찰스 지지율은 58%에 머물렀습니다.
이 또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윌리엄이 왕위를 물려받는다해도 엘리자베스 여왕만큼 영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영국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베이도스의 바다 풍경.
영국 밖 영연방 앞에 놓인 미래의 날씨도 ‘흐림’ 또는 ‘매우 흐림’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번 바베이도스 움직임에서 볼 수 있듯이 영연방에 속한 국가들 사이에서 “우리도 독자적인 국가수반을 가질 때가 됐다”는 분위기가 빠르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현재 영국 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나라는 15국입니다.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자메이카 등입니다. 이들 나라에서 영국 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현 체제를 바꾸자는 여론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지난 2월 여론조사업체 입소스가 캐나다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여왕이 국가수반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호주 등에서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영국인들에게 ‘왕이 없는 영국’은 과연 상상이 가능한 모습일까요.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앵글로색슨이 영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5세기 중반 이후 현재까지 그들에게 왕이 없었던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경험이 ‘전무(全無)’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공화정을 가졌을 때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17세기 중반 때입니다.
◇공화정, 단 한 번의 경험
유럽 대륙이 30년 전쟁의 종반기에 접어든 1640년대 전후, 영국에선 혁명의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습니다.
왕권신수설을 창도한 아버지 제임스 1세에 이어 아들 찰스 1세 또한 왕의 절대적 권한을 믿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튜어트 왕가가 잘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선 이미 의회가 만만치 않은 존재로 성장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 국민들을 상대로 가혹하게 징수되는 세금, 여기에 빠르게 세력을 확장한 청교도가 맞물리면서 왕과 의회는 전쟁을 피할 수 없는 단계로 다가가게 됩니다.
우선 찰스 1세는 결혼과 신하 등용에서 의회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왕녀를 부인으로 맞은데다, 가톨릭 의식을 장려하고 청교도를 억압한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해 잉글랜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의 불신과 분노를 샀습니다.
1628년 3월 소집된 세번째 의회와 ‘권리청원’에 합의했지만, 찰스 1세는 의회와 잘 지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왕과 의회는 턴세·파운드세 징수 문제, 종교 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충돌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의회 없는 통치를 선택했습니다. 1629년 의회를 해산하고 이후 11년간 의회는 열지 않은 것이지요.
1640년 의회가 다시 소집된 건 찰스 1세가 전쟁에 쓸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637년 장로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요하는 정책을 도입하자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려던 찰스 1세의 계획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돈이 궁해진 왕이 다시 의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일단 의회가 소집되자 왕의 대권에 대한 의회의 반발이 폭발적으로 분출됐습니다. 왕의 각종 권한을 대폭 줄이고, 왕이 총애했던 신하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의회 내에 분열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종교 문제를 놓고 생각이 크게 갈라졌습니다. 주교제 폐지 등 급진적 주장을 하는 ‘뿌리와 가지’파 등의 과격파와 옛 제도의 폐단은 없애더라도 기존 제도는 유지하자는 온건 퓨리턴 등이 대립했습니다. 양측은 왕권에 대한 입장도 갈리면서 결국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게 됩니다.
1641년 말 아일랜드 봉기 진압 문제와 관련, 의회가 군대 지휘관을 임명하는 법안이 제출되자 왕과 의회의 대결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이듬해인 1442년 8월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군대를 일으키게 됩니다.
왕당파는 능력있는 지휘관과 실전 경험이 있는 기병대를 중심으로 전투를 이끌어 갔습니다. 반면, 의회파는 인구 50만명이 넘는 유럽 최대 도시 런던과 결속력이 강한 해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초반 전세는 왕당파에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이런 불리한 전세를 뒤집으며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올리버 크롬웰 입니다. 잉글랜드 동부 헌팅턴의 젠트리 출신인 크롬웰은 내전이 시작되자 고향으로 가서 60명의 기병대를 조직해 의회군에 합류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
크롬웰은 오합지졸의 시민군과는 달리 엄격한 규율과 투철한 신념을 가진 기병대, 즉 철기병(the Ironsides)를 앞세워 왕의 군대를 격파해 나갔습니다. 크롬웰은 철기병을 토대로 신형군(New Model Army)를 편성했고, 이 군대는 1645년 6월 네이즈비에서 국왕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습니다. 승기를 잡은 의회군은 여세를 몰아 계속 승전보를 올렸고, 1646년 5월 찰스 1세는 의회파와 손을 잡은 스코틀랜군에 투항하게 됩니다. 이듬해 1월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를 잉글랜드 의회에 넘겨버립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의회파는 또 다시 분열했습니다. 전쟁 승리 이후 어떤 정부와 개혁 교회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장로파와 독립파로 갈라졌는데, 최종적으로 의회를 장악한 건 군을 기반으로 한 독립파였습니다. 찰스 1세의 처형을 결정한 것도 독립파가 장악한 의회였습니다.
1648년 12월 토머스 프라이드 대령이 이끄는 군 병력이 의회에 진입, 장로파 의원들 입장을 막고 독립파 의원들을 들여보냈습니다. ‘둔부 의회’ 또는 ‘잔여 의회’라고 불리는 이 의회는 찰스를 재판하는 특별 법정을 설치했습니다.
찰스 1세는 재판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아니, 국왕은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법정도 국왕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 왕의 통치권은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649년 1월 27일 특별법정은 찰스 1세에 대해 ‘이 나라의 선량한 백성에 대한 압제자요 배반자요 살인자이자 공적’이라며 사형을 선고했고, 3일 후인 1월 30일 찰스 1세는 화이트홀 궁전에 마련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됩니다.
당시 의회를 쥐락펴락했던 크롬웰도 처음엔 찰스 1세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찰스 1세가 왕비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편지에는 “지금은 크롬웰을 비롯한 의회파에게 사로잡혀 있어 좋은 말로 속이고 있다. 나중에는 남김없이 (이들의) 목을 칠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찰스 1세는 참수 당일 오전에 셔츠를 두 벌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날씨가 너무 추워 내가 몸을 떨 수 있다. 그러면 국민들이 내가 두려움에 떠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내가 그런 비아냥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영국 역사에 따르면 집행인은 단 한 번 도끼를 휘둘러 찰스 1세의 목을 잘랐다고 합니다.
왕을 제거한 의회는 이제 영국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정치 실험에 돌입합니다. 아예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것이지요. 영국은 처음이자 지금까지 마지막인 ‘왕 없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영국이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 건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660년의 일입니다.
[18] 왕, 교황 그늘에서 벗어나다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자손을 보지 못하리라.”
30대 중후반에 접어든 헨리 8세는 이 성서 구절이 몹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들을 얻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이것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고, 갈수록 걱정이 커졌습니다. 6세 연상인 에스파냐 출신의 왕비 캐서린은 원래 형 아서의 부인이었습니다. 아서가 결혼한지 반 년도 안돼 사망하는 바람에 동생인 헨리(후에 헨리 8세)가 캐서린과 다시 결혼한 것입니다. 모두 아버지 헨리 7세가 밀어붙인 정략결혼이었지요. 헨리 8세는 40대가 된 왕비와의 사이에 결혼 7년 만에 얻은 딸(후에 메리 1세) 하나만을 두고 있었습니다. 메리 이외 자식은 생길 때마다 사산하거나 유아 때 사망했습니다.
이 무렵 헨리 8세는 왕비의 시녀로 왕궁에 들어와 있던 앤 불린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20대인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프랑스에서 익힌 교양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어려운 자리에서도 할 말은 하는 당돌함은 왕을 더욱 안달나게 했습니다. 왕에게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만약 장애물이 나타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버리면 될 일이었습니다. 영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대서사는 이렇게 막이 올랐습니다.
◇천일의 앤
런던 버킹엄궁에서 템즈강을 따라 동쪽으로 약 4.5km 거리에 있는 런던탑은 제겐 개인적으로 앤 불린과 동의어로 느껴집니다. 어렸을 때 TV로 본 ‘천일의 앤’이라는 영화의 감동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아련한 여운이 남아있는데, 그 앤이 참수형을 당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2007년 여름 처음 런던탑에 갔을 때, “이곳에서 앤이 목이 잘렸구나”하는 생각에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납니다.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초상화. 앤은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으나 밝은 성격과 우아한 행동거지, 당찬 성격으로 왕을 사로잡았다.
세상 모든 걸 태워버릴 듯 왕과 불같은 사랑을 했고 왕비에까지 오르지만, 결국 왕자를 낳지 못한 앤은 간통과 근친상간 등의 혐의로 런던탑에 갇힌 뒤, 참수형을 당합니다. 앤은 마법으로 왕을 유혹했다는 혐의도 받았습니다. 앤은 화형 판결을 받았지만 남편 헨리 8세가 참수로 감형했습니다. 형이 확정되자 앤은 시녀에게 “내 목이 가늘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수는 당시 흔히 사용되던 도끼 대신 칼을 쓰기로 했고, 프랑스에서 칼을 잘 쓰는 사람을 데려와 형을 집행했다고 합니다. 비련의 주인공 앤은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딸 때문에 더욱 극적으로 역사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 딸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입니다.
◇튜더 혁명의 시작
영국과 영국인들에게 튜더 왕조는 영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한 왕조로 꼽힐 듯 합니다. 역사 연구와 책, 영화 등 튜더 왕조를 소재로 수많은 연구와 창작이 이뤄졌습니다. 장미전쟁을 종식시킨 헨리 7세, 앤 불린과의 사랑을 계기로 영국의 종교개혁을 촉발시키고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근대적인 변혁을 이끈 헨리 8세, 엄마가 참수되고 배 다른 언니(메리 1세) 통치 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영국을 유럽의 강자로 이끈 엘리자베스 1세….
역사에서 ‘튜더 혁명’이라고 불리는 각종 개혁과 변화를 이끈 이 왕조는 헨리 7세의 등장과 함께 막을 올립니다.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가 1485년 8월 보즈워스 전투에서 요크 가문 출신의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승리, 왕조에 오릅니다. 장미전쟁의 마지막 페이지는 결혼으로 장식됩니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 랭커스터와 요크 가문을 통합했습니다. 백년전쟁(1337~1453), 장미전쟁(1455~1485)을 뒤로 하고, 이제 영국은 근대로 성큼 발을 내딛게 됩니다.
튜더 왕조는 헨리 7세 → 헨리 8세(1509~1547) → 에드워드 6세(1547~1553) → 메리 1세(1553~1558) →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로 이어집니다.
18세에 왕이 된 헨리 8세는 머리가 좋았고, 여러 방면에서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라틴어, 프랑스어, 에스파냐어를 알았고, 석학들과 천문학과 신학·수학을 논했으며, 승마와 사냥, 활쏘기, 마상 창시합에도 능했다고 합니다. 화려하고 방탕한 삶을 즐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략결혼과 자신의 왕위를 이을 왕자를 얻는 문제가 그의 인생과 통치에 먹구름을 드리웠습니다. 이와 함께 영국 역사도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백년전쟁 이후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에스파냐는 동맹을 추진했습니다. 두 나라는 헨리 7세 때인1489년 ‘메디나 델 캄포’ 조약을 맺었는데 함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고, 두 왕가의 결혼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501년 당시 16세인 에스파냐 캐서린 공주가 영국으로 건너와 헨리 7세의 맏아들 아서(15세)와 결혼을 했습니다. 병약했던 아서가 사망하자 동맹을 깨고 싶지 않았던 헨리 7세는 차남인 헨리를 캐서린과 다시 결혼시켰습니다.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헨리 8세는 1527년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겠다는 뜻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캐서린은 원래 형수였기에 자신과의 결혼 자체가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이혼을 주장한 진짜 이유는 앤 불린 때문이었습니다. 캐서린과 헤어진 뒤 왕자를 낳아줄 것이 틀림없는 앤을 왕비로 삼으려 했던 것이지요.
계획은 나라 안팎에서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우선, 캐서린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캐서린은 “전 남편 아서와 결혼은 했지만, 실제 잠자리는 하지 않았다”면서 자신이 처녀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법적으로 이혼은 불가하다고 맞섰습니다.
헨리 8세의 이혼을 가로막는 진짜 적은 나라 밖에 있었습니다. 교황과 에스파냐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였습니다. 헨리 8세가 이혼하려면 교황의 승인이 있어야 했는데 교황은 이혼에 반대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교황의 뒤에는 카를 5세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 대륙에선 카를 5세가 강자로 군림했는데, 1527년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을 손에 넣은 이후 교황은 카를 5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카를 5세는 캐서린과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캐서린은 카를 5세 어머니의 여동생, 즉 이모였던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캐서린과 이혼하겠다는 헨리 8세의 의도는 관철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헨리 8세는 아예 로마 교황과의 결별을 결심하게 됩니다.
유럽 대륙에서 진행된 종교 개혁과 영국의 종교 개혁은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대륙에선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시작됩니다. 대륙의 종교 개혁이 영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영국에선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이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열렬한 종교개혁파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는 루터의 초상화(왼쪽)를 그린 것은 물론 루터의 저서에 강렬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오른쪽 그림은 1523년 크라나흐가 제작한 소책자 ‘교황나귀’의 표지 그림. 기형적인 나귀의 모습은 타락한 교황권을 상징한다. 21세기북스
헨리 8세는 새롭게 등장한 개신교와 의회라는 두 개의 무기를 양손에 들고 로마 교황과 기존 가톨릭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합니다. 영국 사회 분위기도 반성직주의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재미있는 건, 헨리 8세가 루터파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지만 루터를 좋아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교황과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는 자신이 “루터의 적”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 정통 가톨릭 신자를 자부했던 헨리 8세는 루터를 논박하는 논문을 써서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루터도 헨리 8세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헨리 8세를 향해 “악당이자 광대, 적스리스도의 도구” “지독히 부패한, 벌레 같은 존재”라고 험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감정이나 대립은 정치 세계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의회는 헨리 8세에 적극 협력했습니다. 의회에 진출한 젠트리들은 대륙에서 넘어온 새로운 교리에 빠져들었고, 기존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공격에서 선봉에 서게 됩니다. 1529년 소집된 의회는 1536년까지 ‘왕의 입맛에 맞게’ 정말 중요한 법들을 통과시킵니다. 이 때의 의회를 ‘종교개혁의회’라고 부릅니다.
1532년 헨리 8세는 이른바 ‘성직자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고, 의회는 1533년 3월에는 로마에 상소하는 것을 막는 ‘상소제한법’을, 1534년 초에는 ‘왕위계승법’을, 그해 말에는 영국 종교 개혁의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수장법’을 제정합니다. 이로써 영국 왕은 10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교황과의 공생 관계를 끊어내고, 영국 땅에서 정치적인 의미는 물론,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최고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영국은 이제 어떤 외부 세력의 간섭도 받지 않은 완전한 주권국가가 됩니다. 교황으로부터도 말이지요.
이 과정에서 헨리 8세는 1533년 1월에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을 하고, 3개월 후에는 앤을 여왕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그해 9월에는 엘리자베스 1세가 태어나게 됩니다.
◇수도원 해산과 젠트리의 성장
헨리 8세의 개혁은 정치와 종교 뿐 아니라 사회·경제 분야에서도 혁명 수준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수도원 해산입니다. 당시 수도원은 잉글랜드 전체 토지의 거의 3분을 1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왕과 의회가 이 수도원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1536년에는 연수입 2000파운드 이하의 작은 수도원 300여곳을 해산했고, 이후 규모가 큰 수도원 500여곳을 없애버렸습니다.
수도원 해산은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우선, 영국 사회가 기존 가톨릭에서 벗어나 개신교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더욱 큰 사회적 변화는 영국의 사회 계층에 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해산된 수도원의 땅과 재산은 일단 국왕에 귀속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매각됩니다. 이 매각 토지·재산은 기존 젠트리나 부유농인 요우먼 등에게 돌아갔는데, 더욱 부유해지고 사회적 신분이 상승한 요우먼들이 대거 젠트리에 합류함으로써 영국 개혁의 중심 세력인 젠트리 계층은 수가 크게 늘어나고 탄탄해지게 됩니다. 이들은 다음 세기에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을 주도하게 될 터입니다.
[19] 해적의 나라, 신사의 나라
“드레이크의 목을 자르겠다.”
황금 검을 쥐고 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입에서 뜻 밖의 말이 나왔습니다. 주변에 있던 외국 사신과 신하들, 국민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는 여왕의 진심이 아닌 농담이었습니다.
여왕은 곧 칼을 옆에 있던 프랑스 사신에게 넘겨주더니 영광스러운 ‘기사 작위’ 수여식을 거행해달라고 했습니다. 사신은 영국·프랑스가 함께 에스파냐에 맞서는 동맹을 추진하기 위해 주군인 프랑스 앙주공과 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 문제를 협상하러온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협상을 위해 온 프랑스 사신이 영국 여왕의 부탁을 받고, 에스파냐를 상대로 한 해적질로 유명한 영국 선장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이는 당시 영국 해적들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던 에스파냐에겐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왕이 결혼을 한 것도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처녀로 살았으니까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스페인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엘리자베스 1세의 초 상화. 그녀의 오른쪽 어깨 뒤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향해 돌진하 는 영국 함대가 그려져 있다. 여왕의 오른손 아래 놓인 지구의가 미래에 다가올 대영제국의 세계 지배를 예언하는 듯하다. 당시 궁정 화가였던 조지 가워(George Gower)의 작품
왕위에 오른지 벌써 23년.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 감각·능력을 가진 왕 중 한 명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 여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대륙의 수 많은 시선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전쟁의 역사’라는 책에서 이 장면에 대해 “아마도 에스파냐 왕에게 직접적인 모욕을 주는 한편,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반목시키려고 한 행위였을 것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또,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국’이라는 책은 “그녀의 이 행동은 펠리페(에스파냐의 왕)에겐 또 다른 도전장이었다”라고 했습니다.
1581년 4월 4일 런던 남동부 템스강 기슭 데트퍼드(Deptford). 부두에 정박해 있던 300t급 갤리언 ‘골든 하인드(Golden Hind)’에서 열린 드레이크 기사작위 수여식은 이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2년 10개월 동안 세계를 한 바퀴 돌고 귀국한 프랜시스 드레이크…. 60년 전 마젤란 탐험대에 이어 두번째로 세계일주를 달성해 영국을 영광스럽게 만들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탈 능력으로 엄청난 재물을 획득해 여왕께 바친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드레이크 경(Sir)’이라고 불리게 될 터입니다. 여왕은 그를 ‘우리의 황금 기사’라고 불렀습니다.
무엇보다 이 날의 의미는 여왕이 해적을 국가의 공신으로 정식 인정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7년 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것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5세기 중엽 앵글로색슨이 처음 잉글랜드 땅을 밟은 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영국 역사에서 손에 꼽는 명장면들이 있습니다. 바이킹 침입으로 거의 모든 영토를 잃은 알프레드 대왕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애설니섬에서 재기하는 장면, 시몽 드 몽포르가 ‘최초 의회’를 소집하는 장면, 헨리 8세가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나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장면, 청교도 혁명 때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참수하는 장면, 입헌군주제를 수립한 명예혁명 등 …. 여기에 개인적으로 드레이크의 작위 수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해적, 기사가 되다
잉글랜드 남서부 데본의 타비스톡에서 프로테스탄트 농부의 맏아들(12형제 중)로 태어난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탐험가이자 선장, 해적, 해군 장교, 정치인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드레이크 선장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는 장면.(왼쪽) 영국 남부 항구도시 플리머스에 세워진 드레이크 동상(오른쪽)
어릴 때부터 뱃일을 했고, 20대에는 약탈과 노예무역으로 떼돈을 번 사촌 존 호킨스의 선단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15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비즈니스’에 뛰어들었습니다. 특히 노략질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보다 항해술을 더 잘 알지 못한다”고 자랑했습니다.
1572년 파나마 지역의 스페인령 마을과 선박 등을 습격해 짭짤한 수익을 얻은 드레이크는 이듬해 다시 파나마 약탈에 나서 20톤의 금과 은을 노획하는 ‘대박’을 터뜨립니다. 플리머스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스페인에선 ‘해적’으로 낙인찍였지만 말이죠.
파나마 지역 약탈로 이름을 날린 그에게 여왕도 큰 호감을 보였습니다. 1577년 여왕은 그에게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과 태평양 지역 원정에 나서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끄는 선단은 그해 12월 영국을 출발했습니다.
세계를 도는 동안 그가 탐험만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페루의 리마 인근 해역에서 스페인의 배 한 척을 나포했는데, 그 배에서 금 36kg과 은 2만6000kg, 금으로 된 십자가상, 각종 보석이 쏟아졌습니다. 1580년 9월 드레이크가 플리머스항에 닻을 내리자 런던은 온통 그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런던 주재 에스파냐 대사는 그를 “미지 세계의 도둑 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드레이크의 세계일주로 제일 이득을 본 사람은 여왕이었습니다. 전리품(40만 파운드어치) 중 절반이 여왕 몫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당시 여왕의 일년치 수입보다 많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드레이크는 1만 파운드를 받았다고 합니다.
튜더 왕조 시대 귀족 바로 아래 계급인 젠트리는 6000명 남짓(영국의 역사, 상, 나종일·송규범)이었다고 합니다. 젠트리는 다시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데, 제일 상층에 젠트리의 1%도 안되는 기사(knight)가 있고, 이어 에스콰이어(esquire)와 젠틀먼(gentleman)등이 있었습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해적왕이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탁월한 약탈 능력을 발휘한 드레이크는 이제 ‘기사’가 됐고, ‘경’이라 불리기 시작합니다. 해적은 신사가 됐고, ‘해외 비즈니스’의 길을 여는 주역이 됐으며, 대영제국 해군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제국은 이렇게 시작됐다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열었을 때 그 선두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415년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모로코 지역의 세우타를 점령, 해외 영토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은 해양 탐험의 선구자인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주도로 아프리카 서안을 돌아 인도로 항해하는 바닷길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유럽인들이 이전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속속 진출했습니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했고,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 인도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카스티야(이사벨 여왕)와 아라곤(페르난도 2세)의 통합으로 탄생한 에스파냐도 15세기 후반 본격적인 해외 개척에 돌입합니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고, 포르투갈 태생의 에스파냐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끈 탐험대는 1519년 8월 세비야를 출발, 세계를 한 바퀴 돈 뒤 1522년 9월에 세비야로 다시 돌아옵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은 대부분 스페인 차지였습니다. 포르투갈이 ‘무역’쪽에 관심이 컸던 반면, 에스파냐는 정복에 무게를 뒀습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9년 아즈텍 제국(멕시코)을 멸망시켰고, 1531년엔 코르테스와 친척간인 프란치스코 피사로가 180명의 군인과 말 27마리를 데리고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에스파냐는 이곳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획득하게 됩니다.
아메리카와 인도, 동남아, 아프리카 등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후추와 계피 등 향신료, 금·은을 비롯한 귀금속, 노에 등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부가 넘쳐났습니다. 유럽은 부러운 눈으로 이 두 나라를 바라봤지요.
영국의 해양·무역 관련 활동은 튜더 왕조 시대에 기지개를 폅니다.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는 보조금까지 주면서 조선 산업을 육성했습니다. 최초로 보조금을 받은 캐닌지즈 조선소는 100여명의 목수·노동자를 고용해 총 3000톤의 선박을 만들었습니다. 1485년 의회는 처음으로 항해법을 제정했습니다. 헨리 8세는 유럽 최초로 왕실 소속의 상설 함대를 창설하고, 이를 관할하는 상설 부서를 만들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 때는 런던 상인들이 모로코와 기니아 등으로 무역로 개척에 나섰습니다.
남동생 에드워드 6세(재위기간 6년)와 언니 메리 1세(5년)에 이어 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이르러 해외 진출은 본격화됩니다. 젠트리 출신인 험프리 길버트와 월터 롤리, 리처드 그렌빌 등이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했습니다. 특히 롤리는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 도착, 이 땅을 처녀(virgin) 여왕에게 바치며 버지니아(virginia)라고 명명했습니다.
나중에 대박을 터뜨리는 식민지 개척보다 이 당시에 훨씬 활발하고 수지 남는 활동은 약탈과 노예무역이었습니다. 1560년대에 존 호킨스와 1570년대엔 드레이크가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습니다. 특히 드레이크의 활약은 에스파냐에겐 적잖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신교와 카톨릭으로 갈라져 커져가던 영국과 에스파냐의 대립은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영국 왕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이들 해적들을 사략선(적선을 나포하는 면허를 가진 민간 무장선)의 선원으로 인가해 그들의 활동을 합법화했습니다. 물론 수익의 일정 부분도 받았구요.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였던 1585년에서 1604년까지 카리브해에서 에스파냐 선박들을 공격하기 위해 영국에서 출항한 배는 일년에 100~200척에 달했고, 이들이 가져온 부(富)는 한해 2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은 영국의 해적 활동을 대영제국의 맹아 또는 첫발로 평가합니다. 니얼 퍼거슨은 ‘제국’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영국인들은 최초의 제국 건설자들이 아니라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 제국들의 찌꺼기를 찾아다니는 해적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영제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즉 해상 폭력과 도둑질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다.”
◇무적함대의 허무한 참패
영국과 에스파냐의 격돌은 피할 수 없는 단계가 됩니다. 영국 해적의 약탈에 분노하고 있던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1585년 네덜란드(당시 스페인령)에서 일어난 개신교 반란을 지원하자 더 이상 영국을 그대로 놔둬선 안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던 차 국내외 카톨릭의 후원을 등에 입고 호시탐탐 영국 왕위를 노리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메리 스튜어트(헨리 7세의 외증손녀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고종사촌의 딸)가 반역을 꾀하다 참수를 당합니다. 가톨릭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에스파냐의 영국 공격 결심은 굳어졌습니다.
▲칼레 해전
양쪽은 긴박하게 움직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로 네덜란드 남부를 평정한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병력 3만명을 영국에 실어날라 엘리자베스 1세를 무너뜨리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영국은 에스파냐 동태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1587년 4월 여왕의 명령을 받은 드레이크가 에스파냐 카디스항을 기습, 스페인 선박 30척을 박살냈습니다. 이때문에 무적함대 출항은 1년 이상 늦춰졌지요. 드레이크는 이때 “에스파냐 왕의 수염을 살짝 그슬린” 것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588년 여름 영국해협 일대에서 벌어진 칼레 해전은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위풍당당하게 출항했던 130척 중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배는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1만4000여명의 병사와 선원을 잃었고 생존자는 1만명 미만이었습니다. 반면, 영국의 손실은 배 7척, 사망자 100여명, 부상자 400여명에 그쳤습니다. 불과 17년 전인 레판토 해전(1571)에서 로마 교황의 연합 함대 일원으로 참전해 오스만 투르크 함대를 궤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무적함대의 명성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사실, 무적함대가 입은 손해 중 대부분은 전투 중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교전에서 잃은 배는 몇 척에 불과합니다. 대신 칼레 해전에서 패한 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크게 돌아 도망치는 과정에서 영국인들이 ‘개신교의 신풍(神風)’이라고 부르는 폭풍우 등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중요한 건 전투 자체에서도 무적함대는 이미 영국 함대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우선 대포 성능에 차이가 컸습니다. 16세기 초반 헨리 8세는 “지옥이라도 정복할 만큼 많은” 대포를 갖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어 역사상 처음으로 무쇠 대포를 만들었습니다. 제작비는 무쇠 대포가 기존 청동 대포의 5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그 결과 칼레 해전에서 에스파냐 대포가 한 발을 쏠 때, 영국 대포는 세 발을 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총 사령관에 자신의 사촌인 하워드 경을, 부사령관에 해적 출신의 드레이크와 호킨스를 임명했습니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영국 함대의 전술과 항해 능력은 상대를 압도했습니다. 영국의 배들은 속도가 빨랐고, 움직임도 민첩했습니다. 선원들은 매우 유능했습니다. 영국 함선들은 빠르게 움직이며 무적함대를 공격했지만,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37세의 귀족 출신 사령관이 지휘하는 무적함대는 느릿느릿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당시 하워드 경은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세상 어디서도 영국 해군보다 위대한 함대는 없을 것이다. 에스파냐 왕의 함대가 수백 척이라도 우리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능히 농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엘리자베스 1세 첫번째 이야기였습니다.
[20] “죽을 때까지 처녀였노라” 여왕은 이 묘비명을 원했다
여왕은 회색 말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하얀색 벨벳 드레스 위로 철제 갑옷을 입었고, 머리엔 깃털장식 투구를 썼습니다. 손에는 지휘봉이 들었습니다.
수행원은 단 6명. 오르몬드 백작이 군 통수권을 상징하는 ‘국가의 검(Sword of State)’을 쳐들고 앞장섰고, 말고삐를 잡은 시동과 여왕의 투구를 올려놓는 쿠션을 든 수행원, 여왕을 태운 말이 뒤를 이었습니다. 말 옆구리쪽으로 비스듬히 앉은 여왕의 오른쪽엔 레스터 백작이, 왼쪽엔 에식스 백작이 걸었고, 맨 뒤엔 여왕의 모든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존 노리스 경이 따랐습니다.
◇ 틸버리 연설
1588년 8월 9일 잉글랜드 남동부 에식스의 틸버리항 인근. 만 55세의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 침략에 대비해 소집된 4500여명의 민병대 앞에서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만든 연설을 하려 합니다. 바로 ‘틸버리 연설’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틸버리 연설
틸버리는 템스강 하류쪽에 있는 항으로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가 건설했으며, 런던 시내에서 직선 거리로 약 3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 이 연설 내용을 떠올릴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 마치 활화산 용암처럼 뜨겁게 감동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이 여왕을 존경하고 좋아하게 됐고, 이런 군주를 가졌던 영국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연설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힘없고 연약한 여자의 몸을 가졌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겐 왕으로서의, 잉글랜드 왕으로서의 심장과 용기가 있다(I know I have the body of a weak, feeble woman. But I have the heart and stomach of a king, and of a king of England too).”
“사랑하는 나의 백성들이여”로 시작하는 이 연설 곳곳에는 이외에도 나라를 이끄는 군주는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해답을 주는 ‘별처럼 반짝이는’ 말들이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대들이 눈으로 보듯이 나는 이곳에 왔노라. 오락이나 장난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투가 벌어지는 한가운데서 그대들과 함께 살고, 그대들과 함께 죽기로 결심하고서.”
“나의 하나님과 나의 왕국, 나의 백성과 명예, 피를 위해 쓰러지겠노라. 비록 그곳이 먼지 속일지라도.”
“(평생) 불명예와 함께 살기보다 무기를 들 것이다. 내가 그대들의 장군이자 심판자, 이 전장에서 그대들이 보여준 모든 미덕에 대한 보상자가 되리라.”
여왕이 연설을 한 날은 잉글랜드 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직후입니다. 적 해군은 물리쳤지만, 도버 해협 건너 덩케르크 지역엔 여전히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에스파냐 대군이 있었습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땅으로 실어나르려 했던 그 군대였지요. 여왕은 적이 언제라도 잉글랜드를 침략할 수 있기에 방심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친히 군영(軍營)을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틸버리에 모였던 군대는 곧 해산합니다. 파르마 공작의 군대가 잉글랜드 땅을 밟지 못했으니까요.
◇ “나는 잉글랜드와 결혼했다”
영국에는 여왕이 여러명 있습니다. 첫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의 언니 메리 1세(1553~1558), 그 다음이 엘리자베스 1세, 명예혁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메리 2세(1689~1694),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앤 여왕(1702~1714), 대영제국의 황금기였던 빅토리아 여왕(1837~1901), 현재 왕인 엘리자베스 2세(1952~현재) 등입니다. 이 중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유일한 여왕이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그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요. 정확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양한 추측들이 나올 뿐입니다.
이와 관련 엘리자베스 1세를 또 한번 역사가 주목하게 만든 명장면이 있습니다. 여왕이 즉위한 다음해, 즉 1559년 2월 10일 의회가 열렸습니다. 여왕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의회로부터 결혼할 것을, 그리고 만약 그가 상속자를 낳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미래 왕위 계승자를 지명하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의회에 참석한 여왕은 자신은 결혼하지 않겠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이미 남편과 혼인 서약을 했소. 바로 잉글랜드 왕국이라는 남편과.”
이때 여왕은 의원들에게 손을 내밀며 즉위식 때 낀 반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러면서 “그대들은 내가 잉글랜드와 맺었던 그 서약을 잊지 않았을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왕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결혼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버트 더들리입니다. 그는 여왕의 어릴 적 친구인데, 여왕 즉위와 함께 여왕의 말 관리인으로 임명됐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된지 얼마 안돼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 대사는 “여왕이 밤낮으로 더들리의 침실을 방문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총 45년의 재임 기간 동안 딱 14명을 귀족으로 임명했고, 그가 죽을 때 작위 귀족 수는 60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들리가 1564년 레스터 백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여왕의 총애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1562년 여왕은 천연두에 걸려 거의 죽을 뻔 했는데, 의식이 돌아온 순간 자신이 죽으면 더들리를 왕국의 섭정관으로 세우고, 그에게 연 2만 파운드의 엄청난 연봉을 주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와 로버트 더들리
그렇다고 여왕이 더들리와 성적 관계를 갖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여왕은 “하나님이 증인”이라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부적절한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죽을 때까지 더들리를 마음에 둔 것으로 보이는데, 여왕이 죽었을 때 침실에서 발견된 작은 상자에는 더들리가 1588년 9월 죽기 직전 여왕에게 쓴 편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편지에는 여왕이 직접 “그의 마지막 편지”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더들리는 말라리아와 위암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들리와의 사랑은 끝내 맺어지지 못했습니다. 더들리가 이미 기혼자였고, 윌리엄 세실 국무상 등 충신들이 극구 말렸기 때문입니다.
외국 왕과 귀족들의 구애도 많았습니다. 언니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메리 1세가 죽자 펠리페 2세는 그 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프랑스에 맞서 잉글랜드-에스파냐 동맹을 맺기 위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가톨릭 종주국을 자임하는 에스파냐의 왕과 개신교 중심으로 떠오른 잉글랜드 여왕의 결혼은 불가능에 가까웠지요. 언니 메리 1세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와 결혼을 강행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이 청혼은 ‘언감생심’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나중에 여왕과 펠리페 2세는 극한 대립을 거듭했고, 1588년 칼레 해전으로 세기의 전투를 벌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여왕은 즉위 전에는 스웨덴의 왕 에릭 14세, 덴마크의 아돌프 공작과 프레드릭 2세 등과 혼담이 있었고, 즉위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샤를 대공, 앙주 공작이었던 앙리와 그의 동생 프랑수아 등과도 결혼 얘기가 오갔습니다. 하지만 종국에 모든 혼담은 없던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만약 결혼을 했다면 그건 정치적 이유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유럽의 지정학적 상황을 판단했을 때 어떤 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 최선인지 판단했을 것이고 둘째, 왕권 유지와 국내 안정을 위해 누구와 결혼하는게 유리한지 가늠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여왕이 결혼을 포기한 건 그 또한 정치적인 이유였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결혼을 포기했다고 판단하는 게 가장 합당하겠지요. 어찌됐건 1570년대 이후로는 의회도 여왕에게 결혼을 압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앞서 얘기한 1559년 의회에서 여왕은 이런 말로 연설을 끝맺었습니다.
“나의 비석엔 이렇게 새겨질 것이오. ‘그 시대를 다스렸던 여왕은 처녀로 살았고, 처녀로 죽었다’. 그거면 나는 족하오.”
◇ 처녀 여왕의 부국강병
잉글랜드는 유럽의 최강 중 하나로 꼽기엔 부족함이 적잖은 나라였습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그의 책 ‘전쟁의 역사’에서 16세기 상황에 대해 “잉글랜드는 비교적 낙후된 나라였고, 인구도 모두 합쳐 400만명에 불과했다. 반면 에스파냐의 인구는 700만명, 프랑스는 1000만명이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만든 신세계’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600년 당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인구는 420만명이었고, 네덜란드 인구는 150만명이었던 반면, 에스파냐는 810만명, 프랑스는 2000만명이었다. 게다가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 비해 훨씬 부자였다.”
당시 잉글랜드의 인구는 자료나 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잉글랜드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인구도 적고, 나라의 부(富)도 뒤처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와 경쟁하거나 전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방법은 ①백성들에게서 세금을 많이 걷거나 ②자신이 재정을 알뜰하게 운영하거나 ③농업과 상공업 등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등 셋 중 하나이거나 그들의 조합이었을 겁니다. 역사에서 대부분의 왕들은 주로 ①번을 선호했지요. 여왕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점에서도 성군(聖君)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여왕은 45년 치세 동안 의회를 총 10번(회기 기준 13번) 소집했습니다. 회기의 지속 기간은 평균 2개월 정도였다고 합니다. 의회의 발전 과정에서 살펴봤듯이 잉글랜드 의회는 세금 징수와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의회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에선 의회가 발전하면서 아주 중요한 원칙 하나가 정립됐습니다. 평상시 국왕은 자신의 수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전쟁 등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만 의회에 예산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돈이 필요할 때면 의회를 소집해 어떤 세금을 얼마나 부과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0번의 의회 중 여왕이 세금을 요청하지 않은 의회는 딱 한번에 불과했습니다.
여왕이 의회를 많이 소집하지 않은 이유는 한마디로 건전한 재정 운용으로 돈이 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연 평균 수입은 에스파냐 펠리페 2세의 10분의 1 수준밖에 안됐지만, 여왕은 아껴쓰고 절약해서 나라 재정은 계속 흑자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국가 운영은 할아버지를 닮은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돈을 펑펑 쓰는 스타일이었던 반면, 할아버지 헨리 7세는 내실있는 국정 운영으로 나라 곳간을 채우는 식으로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당시 여왕은 돈을 너무 아껴서 ‘구두쇠’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는데요. 그런 면모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다른 강국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발판을 만든 것입니다. 여왕의 치세 때 잉글랜드의 재정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꺼리던 여왕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이 흑자 덕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왕이 네덜란드 지역의 개신교 반란을 지원하기 직전, 즉 1584년 잉글랜드의 재정은 약 30만 파운드의 누적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왕은 전쟁을 준비할 때조차도 되도록이면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자신이 힘 닿는 데까지 자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왕은 즉위 초 스코틀랜드 개신교를 지원했을 때, 무적함대와 싸웠을 때, 1590년대 아일랜드 지역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왕실 토지를 대량으로 처분했다고 합니다. 1581년부터 여왕이 사망한 1603년까지 잉글랜드가 쓴 전쟁 비용은 총 35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이중 180만 파운드는 의회가 거둔 조세 등으로 마련했고, 나머지는 평소 쌓아놓은 재정 흑자와 왕령지 매각으로 조달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화페개혁과 상공업 진흥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금융 시장에는 불량화폐들이 넘쳤습니다. 순도가 낮은 은으로 만든 화폐, 가장자리를 깎아낸 화폐 등이 대량 유통됐습니다. 여왕은 이런 불량 화폐를 거둬들이고 실제 함유된 은이 화폐 가치와 일치하는 경화를 발행했습니다. 금융시장과 실물시장이 안정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여왕 시대에 제철업을 비롯한 금속 공업도 크게 발전했고, 난방과 각종 산업에서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석탄 산업은 괄목할만큼 성장했습니다.
대륙에서 탄압받던 개신교도들을 받아들인 것도 신의 한수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여왕은 이들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네덜란드 지역(저지대) 등에서 칼뱅파와 위그노 등 개신교도들이 잉글랜드로 건너왔습니다. 이들은 단지 사람이 건너왔다는 의미를 넘어 기술과 지식, 자본 등을 함께 가져왔습니다. 이들이 잉글랜드 경제와 산업 발전에 기여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요. 예를 들어, 프랑스 칼뱅교도인 위그노들은 엘리자베스 1세 때 처음 유입됐는데, 이 중에는 기업가와 금융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또 신직물을 짜는 직조 기술은 박해를 피해 온 네덜란드의 칼뱅교도들이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플랑드르 등 스페인 지배하에 살던 저지대 지역 프로테스탄트 6000여명이 노리치 지역에 많이 정착을 했는데, 그들은 1만 6000여명으로까지 불어났습니다. 이 지역은 런던에 이어 잉글랜드에서 둘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21]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政敵, 여왕은 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드디어 걸렸다.”
1586년 여름. 국무상인 프랜시스 월싱엄의 책상위에 편지 한 장이 놓였습니다. 18년 전 스코틀랜드 왕좌에서 쫓겨나 영국에 도망와 있던 메리 스튜어트가 안토니 바빙톤이라는 사람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앞서 바빙톤이 먼저 메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서신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바빙톤은 동료 13명과 함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할 것이며, 계획이 성공하면 메리가 여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리는 답장에서 계획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외국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역모는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 스파이를 심어놓고 있는 월싱엄이 모든 움직임을 처음부터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호시탐탐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를 노렸던 메리는 이번만은 살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메리는 그 동안 여러번 반란과 역모에 관련됐고 그때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넘어가곤 했는데,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해 10월 말 귀족과 고문관, 판사들로 이뤄진 특별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여왕 살해 교사’ 혐의를 적용, 메리의 처형을 요구했습니다. 몇 달 동안 사형 집행장 서명을 미루던 여왕이 결국 월싱엄 등의 설득으로 이듬해 2월 1일 서명을 하게 됩니다. 메리는 7일 후 마지막 거처였던 포더링헤이 성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바빙톤 음모 사건’은 여왕과 잉글랜드에겐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여왕은 지난 20년간 자신의 왕위를 노렸던 정적을 마침내 제거했고, 왕권은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처형은 가톨릭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양국 갈등은 군사적 격돌로 빠져들게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재위 1485~1509)는 앙숙 관계인 스코틀랜드와 평화를 위해 맏딸 마가렛을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마가렛은 헨리 8세(1509~1547)의 두 살 위 누나였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큰 고모였습니다. 그 마가렛의 아들(제임스 5세)이 낳은 딸이 메리 스튜어트입니다. 촌수로 따지면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는 5촌지간입니다. 아홉살 많은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에겐 아줌마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최대의 위험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왼쪽)과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메리는 만 16세 때 프랑스 왕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재위 1년 반도 안돼 사망하자 곧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5세 때부터 프랑스에서 살았던 젊고 매력적인 여왕은 곧 여러 남성과 사랑을 나눴습니다. 우선 헨리 7세의 외증손자이자 자신의 사촌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복잡한 치정에 얽히게 되고 단리 경은 메리의 정부(情夫) 보스웰 백 제임스 헵번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후 메리는 보스웰 백과 결혼을 했는데, 그녀의 도를 넘는 애정행각에 분노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메리를 폐위하고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는 복위를 꿈꾸며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1568년 가까스로 잉글랜드로 도망쳐 엘리자베스 1세의 보호 아래 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왕권은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에게 넘겨졌습니다.
불행은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언젠가는 자신이 그 왕좌에 않고 말겠다는 야심을 품은 데서 시작됐습니다. 사실 메리의 주장이 완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메리가 헨리 7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 문제는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 계승 자격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봤듯이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은 잠깐 헨리 8세의 둘째 부인이 됐고 왕비 자리에 올랐지만 곧 폐위되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가톨릭 진영에서는 애초부터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고 해도 앤 불린이 나중에 폐위가 됐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왕권을 계승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메리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리가 잉글랜드로 망명을 해 오자, 국내 가톨릭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위협은 메리의 망명 이듬해인 1569년 일어난 ‘백작들의 반란’이었습니다. 일부 귀족들이 잉글랜드 최고의 귀족이자 유일한 공작인 노퍼크 공과 메리를 결혼시킨 뒤, 엘리자베스 1세를 축출하고 메리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잉글랜드를 가톨릭의 나라로 만들려 했지요. 모의가 들통이 나자 거사를 도모했던 노섬벌런드 백과 웨스트모얼런드 백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왕의 군대에 참패한 뒤 스코틀랜드로 도망쳤습니다.
다음해에는 교황이 반란을 선동했습니다. 교황 피우스 5세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에 처하고 폐위를 선언하는 교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가톨릭 세력이 준동을 했지요. 런던에 있던 피렌체 은행가 로베르토 리돌피가 다시 노퍼크 공과 메리의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때를 맞춰 국내 가톨릭 세력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에스파냐 군이 침공해 엘리자베스 1세를 몰아낸다는 시나리오도 마련했습니다. 교황과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지지를 받은 이 계획도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의회는 메리의 처형을 주장했지만 여왕이 승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퍼크 공을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한 동안 잠잠했던 역모 움직임은 10여년 후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1583년 국제적인 음모가 적발됐습니다. 그해 11월 메리와 긴밀히 연락하던 가톨릭 교도 스록모턴이 검거됐는데,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계획을 실토했습니다. 그는 이 반란 계획이 메리의 아이디어로 시작됐으며, 잉글랜드 주재 에스파냐 대사인 베르나르디노 데 멘도사 등이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국내에서 가톨릭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에스파냐가 군대를 파병해 돕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목표는 물론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고 메리를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지요. 이 역모 역시 사전에 발각돼 에스파냐 대사가 국외로 추방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왕은 메리의 사형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586년 또 다시 메리가 관련된 역모가 발각됐고, 메리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운이 좋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여왕을 노렸던 상대가 능력과 자질이 부족했던 걸까요. 그보단 엘리자베스 1세가 나라를 운영하는 능력, 그 중에서도 적재적소에 능력있는 인재를 등용해 그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도록 한 용병술이 뛰어났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뒤엔 첩보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랜시스 월싱엄이 있었습니다.
◇프랜시스 월싱엄
월싱엄은 키가 작고 얼굴이 검었다고 합니다. 여왕은 그를 ‘무어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왕보다 한 살 많은 월싱엄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였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기도 했던 그는 강경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1553~1558)가 왕이 되자 잉글랜드를 떠나 스위스와 프랑스 등을 전전했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되자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이후 정계에 입문해 승승장구 출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가운데)과 윌리엄 세실(왼쪽), 프랜시스 월싱엄(오른쪽)
1572년 8월 발생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그에게 가톨릭은 절대 공존을 허락해서는 안될 세력이라는 믿음을 각인시켰습니다. 예수의 12사도 중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 축일을 계기로 로마 가톨릭 교회 추종자들이 프랑스의 칼뱅교도, 즉 위그노에 대한 학살극을 벌였는데, 약 3개월 동안 희생된 사람이 3만~7만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월싱엄은 프랑스 주재 잉글랜드 대사로 근무했는데, 가톨릭이 개신교에 얼마나 적대적인지, 가톨릭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1559년 콘월 지역에서 처음 하원의원이 된 그는 프랑스에서 귀국한 다음해인 1573년 국무상에 올랐습니다. 이후 1590년 사망할 때까지 여왕을 보필하게 됩니다. 이 기간 엘리자베스 1세의 모든 국정에 그가 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외 무역과 식민지 개척 지원, 드레이크의 세계일주 지원, 네덜란드 신교 세력 지원, 여왕과 외국 왕·귀족과의 결혼 협상, 에스파냐 무적함대와의 격돌 등. 여왕은 때론 월싱엄의 직설적인 조언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편지에 “저 무어인은 자신의 피부색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월싱엄은 여왕이 싫은 기색을 보여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면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월싱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임무가 바로 ‘여왕 지키기’였습니다.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여왕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지요. 그는 국고 비자금을 들여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모아 비밀첩보망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그의 정보원들은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유럽과 지중해까지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암호 해독가까지 고용했다고 합니다.
그가 절대 눈을 떼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사람이 바로 메리였습니다. 월싱엄은 “먼저 하나임의 영광을, 그리고 다음엔 여왕의 안전을 희망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악마 같은 여인 메리가 살아 있는 한” 여왕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월싱엄은 메리가 주고받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 내용을 모두 파악한 뒤 전달했습니다. 메리가 암호로 적은 편지들은 메리와 월싱엄 양쪽에서 돈을 받은 양조업자가 맥주통 속에 몰래 숨겨 밖으로 전달하곤 했는데, 양조업자는 그 밀서를 월싱엄의 첩보원에게 넘기는 식이었습니다. 메리에게 전달되는 편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왕에게 월싱엄이라는 신하가 있었다는 것이 메리에겐 운명적 불행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월싱엄은 국무상이 된 이후 14년 동안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결국 메리의 참수를 이끌어냈습니다.
영국의 근대를 열었던 튜더 왕조 때 등장한 월싱엄의 조직은 현대 첩보 조직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20세기 이후 가장 인기있는 첩보물 중 하나인 ‘007 시리즈’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는 영국의 해외 정보 전담 정보기관인 ‘Mi6′ 소속인데 이 MI6의 뿌리가 바로 월싱엄의 첩보 조직이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월싱엄의 좌우명은 오늘날에도 나라를 이끄는 분들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워하는 편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
◇정적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여왕이 영국에 남긴 족적은 크고 선명합니다. 에스파냐와의 대결로 유럽의 변방 섬나라였던 잉글랜드는 이제 누구도 무시 못할 강국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아직 제국으로 성장하려면 먼 길을 가야하지만 말입니다.
▲16세기 잉글랜드 사회를 묘사한 그림
국내적으로도 질적 변화와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 중 하나는 구빈법입니다. 구빈법은 아버지 헨리 8세 때 처음 만들어졌지만 그 동안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엔클로저 등의 확산과 자본의 성장, 빈부격차의 확대, 인플레이션, 1590년대의 극심한 기근 등 사회 문제가 불거지자 여왕은 치세 말기인 1597년 구빈법을 새로 제정했습니다. 이전까지 빈민 구제는 교회가 맡아왔는데 앞으로는 국가가 이를 책임진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각 교구에 책임자를 임명해 빈민들에게 주거와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 재원 마련을 위해 구빈세를 도입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때 제정된 구빈법은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250여년간 영국 빈민 정책의 골격이 됐습니다.
언니 메리 1세 때 가톨릭으로 되돌아갔던 잉글랜드 교회를 개신교 쪽으로 돌려놓은 것도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즉위하자마자 첫 의회에서 수장법을 다시 제정했습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제정했지만 언니 때 폐지했던 그 법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잉글랜드 모든 교회에 적용하는 새 기도서를 만들었고, 1563년 개최된 성직자 회의에서는 39개조 신앙조항을 채택했는데, 칼뱅교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이 신앙조항은 1571년 성공회의 교리로 제정되었습니다. 이 교리는 오늘날까지 영국 교회의 기본 교리로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유산으로 왕위 계승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녀로 살다 죽은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습니다. 여왕의 사후, 잉글랜드의 왕권은 당시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6세가 물려받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를 죽이고 자신이 왕에 오르려 끝없이 시도했던 여왕의 일생일대 숙적 메리의 아들입니다.
왕위 계승에는 국무상인 로버트 세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세실은 제임스 6세에게 접근, 엘리자베스 1세의 비위를 잘 맞춰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이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제임스 6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에 대해 역사학자 존 어니스트 니얼은 “베일에 가려진 문구지만, 여왕은 그들에게 도저히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없도록 자신의 바람을 제임스에게 표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엘리자베스 1세가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뜻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1603년 여왕은 눈을 감았고,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 명의 왕이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 나라의 완전 통합은 제임스 1세의 증손녀인 앤 여왕 때 완성됩니다. 1707년 그레이트 브리튼 통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의 탄생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마지막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22] 누구도 법 위에 존재할 수 없다. 그가 비록 왕일지라도.
“크리스마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들에게는 견디기 힘들 수 있습니다. 특히 올해 저는 그 이유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Christmas can be hard for those who have lost loved ones. This year especially I understand why.)”
◇ “나의 사랑하는 필립”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런던 서쪽 교외 템스강변에 있는 윈저성에서 촬영된 총 9분짜리 이 동영상에는 코로나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국민들에 대한 위로와 미래에 대한 희망, 지난 4월 사별한 남편 필립공을 향한 여왕의 그리움과 애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BBC> 엘리자베스 2세와 남편 필립공이 신혼 여행 때 찍은 사진. 여왕은 사파이어 브로치를 착용하고 있다.
여왕은 남편을 ‘사랑하는 필립’이라고 부르며 “마지막 순간의 그 장난기 어리고 호기심 가득찬 반짝이는 눈빛은 내가 그에게 처음 눈길을 줬던 그때 그대로였다”면서 “하지만 인생이란 처음 만남이 있는 것처럼 마지막 헤어짐도 있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나와 가족이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도 우리가 행복한 성탄전을 보내기를 바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영상에 등장한 여왕은 빨간색 옷을 입고 진주목걸이를 했는데, BBC는 특히 오른쪽 가슴에 찬 국화꽃 모양의 사파이어 브로치에 주목했습니다. 이 브로치는 1947년 여왕이 필립공과 신혼여행을 갔을 때 착용했던 그 브로치라고 합니다. 또, 여왕은 이날 책상에 앉아 성탄절 메시지를 읽었는데, 그 책상 위에 지난 2007년 여왕과 필립공의 결혼 60주년 회혼식 때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진 속 여왕도 이 사파이어 브로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왕에게 올해 성탄절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우선 남편 필립공이 곁에 없었고,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50여명이 참석하는 왕실 가족 식사를 취소했습니다. 또, 작년에 이어 올해도 샌드링엄 왕령지에 가지 못했습니다. 노퍽주에 있는 이 왕령지는 런던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약 15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BBC에 따르면 여왕은 코로나가 터지기 이전, 즉 2019년까지 32년 동안 성탄절을 샌드링엄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은 여왕이 샌드링엄에 있는 성당에 가는 모습을 보고, 여왕의 메시지를 들으며 성탄절을 맞았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샌드링엄 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여왕을 보려고 전국에서 수 천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올해 이런 장면은 볼 수 없었습니다. 영국인들에게 ‘정상적인’ 성탄절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지요.
▲<YONHAP PHOTO-0993> 성탄절 메시지 녹화하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윈저 AP=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수도 런던 인근 윈저성에서 성탄절 메시지를 녹화하는 모습을 찍어 23일(현지시간) 발행된 사진. 촬영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왕은 매년 크리스마스 당일에 BBC방송 등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여왕 옆에는 지난 4월 사별한 필립공과 2007년 결혼기념일에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2021.12.24 sungok@yna.co.kr/2021-12-24 08:08:52/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여왕의 성탄절 메시지와 관련, 또 하나 눈에 띈 것은 니콜라스 위첼이라는 BBC 왕실 출입기자의 분석 기사였습니다. 그는 “여왕의 메시지가 다음 세대에 ‘바통을 넘기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했습니다. 95세의 여왕이 자신의 건강 문제가 불거진 해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여왕이 성탄절 메시지에서 왕위 계승과 관련,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 필립공이 언제나 다음 세대를 생각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필립공이 1956년 국제적 청소년 자기성장 프로그램인 ‘듀크오브에든버러 어워드(The Duke of Edinburgh’s Award)’를 설립했다고 말했습니다. 필립공이 살았을 때 했던 업적을 기린 것입니다. 그런데. 왕실 출입기자는 ‘바통 물려주기(passing the baton)’란 말에 주목해 마치 여왕이 내년에 특별한 이벤트가 만들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 것입니다. 1926년에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에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내년은 왕이 된지 만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 長壽 국왕, 短命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록은 말 그대로 신기록 그 자체입니다. 과거 어떤 왕도 이만큼 긴 길을 걸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 왕좌에 앉게 될 어떤 후손도 이에 필적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 왕을 하려면 본인의 능력과 자질, 품성은 물론 천운(天運)이 따라야 합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고, 큰 병 없이 오래 살아야 합니다. 국내적으로 반란이나 역모를 차단 또는 진압해야 하고, 국외적으로 외세 침입을 막고 외국과의 전쟁을 이겨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내년에 맞게 될 재위 만 70년은 5세기 중엽 앵글로색슨이 잉글랜드에 들어온 이후 처음 있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일입니다. 그를 이어 장수 국왕 2위는 대영제국 절정기를 누렸던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간 왕좌에 있었습니다. 3위는 조지 3세(1760~1820)로 60년, 4위는 헨리 3세(1216~1272) 56년, 5위는 에드워드 3세(1327~1377) 50년입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45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반면, 단명했던 국왕들도 있었습니다. 정복왕 윌리엄(1066~1087) 이후 자연사나 병사, 전사 등이 아닌 이유로 왕좌에서 쫓겨나거나 물러난 사람은 모두 8명입니다. 기준을 윌리엄으로 한 건 그 이전과 이후의 잉글랜드(영국)가 크게 달라진 모습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선 왕권이 대단히 굳건해집니다. 그리고 알프레드 대왕으로 대표되는 웨식스 왕가의 혈통이 완전히 끊어지고, 윌리엄의 혈통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후 지금까지 모든 왕은 부계(父系)나 모계(母系) 쪽으로 어떻게든 윌리엄과 연결된다는 뜻이지요.
왕좌에서 쫓겨난 왕들 중 재위 기간이 5년이 채 되지 않는 경우는 단 4명입니다. 에드워드 5세(2개월), 에드워드 8세(11개월), 리처드 3세(2년 2개월), 제임스 2세(3년 10개월) 등입니다.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3세는 장미전쟁(1455~1485) 때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왕권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싸우던 때 잠시 왕이 됐던 인물들입니다.
▲에드워드 5세와 동생 요크공의 죽음
백년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왕국을 안정시킨 에드워드 4세(1461~1483)에 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에드워드 5세(1483)는 만 13세가 안된 소년이었습니다. 이 꼬마 왕에게 최대 위협은 선왕의 동생, 즉 작은 삼촌인 글로스터 경 리처드였습니다. 선왕은 동생 리처드를 왕과 왕국의 보호자로 지명하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를 빌미로 런던에 입성한 리처드는 조카 주변에 있는 유력자들을 모두 제거한 뒤 결국 스스로 왕좌에 올라 리처드 3세(1483~1485)가 됐습니다. 리처드는 그해 7월 대관식을 가졌는데, 그 다음 달 에드워드 5세와 동생 요크의 리처드는 런던탑에서 질식사했다고 합니다. 암살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재밌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 즉 조선에도 ‘데칼코마니’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 2년 후 조카인 단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의 7대 왕 세조입니다.
리처드 3세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튜더 왕조의 시조(始祖) 헨리 튜더가 1485년 8월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했습니다. 전투는 초반부터 헨리 튜더쪽으로 기울었지만 리처드 3세는 도망가지 않고 왕관을 쓴 채 끝까지 싸우다 쓰러졌다고 합니다. 이후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대관하게 됩니다.
단명 순위 둘째에 오른 에드워드 8세(1936)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걷어찬 인물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안된 상황에서 2번째 이혼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미국인 심프슨과의 결혼을 국민들이 반대하자 아예 국왕 자리를 버렸습니다. 어쨌든 그 덕에 동생인 조지 6세가 왕 자리에 올랐고, 조지 6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2세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재위 기간이 넷째로 짧은 제임스 2세(1685~1688)는 영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좋은 뜻이 아니라 나쁜 뜻에서입니다. 그는 국민과의 계약을 어기고, 법에 의한 지배를 거부해 혁명을 초래한 장본인입니다. 청교도혁명 때 참수를 당한 아버지 찰스 1세(1625~1649)와 함께 국민(의회)에 의해 쫓겨난 두 명의 왕 중 한 명입니다. 영국의 근대 이후 의회민주주의는 이 두 사람의 통치를 극복하면서 성취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 법의 지배를 거부한 왕의 패배
사실 제임스 2세는 어느 왕 부럽지 않게 좋은 조건에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나라 곳간은 넉넉했고, 2만명에 가까운 상비군을 두고 있어 안위에 대한 걱정도 없었습니다. 왕에 대한 국민들의 충성심은 높았고,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의회는 약하고 순종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가 법치를 무시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심사율과 관용령이 계속 충돌을 했습니다. 제임스 2세의 형이자 직전 왕인 찰스 2세(1660~1685)는 1672년 가톨릭 교도에게 좀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령을 공포했습니다. 하지만 의회는 이를 법의 지배에 대한, 그리고 의회의 입법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무산시킨 뒤 한 발 더 나아가 가톨릭이 공직을 가질 수 없도록 규정한 심사율을 제정했습니다.
▲윌리엄공의 군대를 피해 도망치면서 국새를 템스강에 버리는 제임스 2세를 묘사한 1690년 무렵의 판화. /게티이미지코리아
형에 이어 왕권을 잡은 제임스 2세는 심사율 폐지를 의회에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의회는 거절했고, 왕은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왕은 이어 궁정과 군대, 국교회 주교, 각 지방 주요 직위에 가톨릭 교도를 대거 앉혔습니다. 그러면서 심사율 효력을 정지시키고, 새 관용령을 선포했습니다. 제임스 2세의 행위는 ‘법에 의한 지배’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또 군대를 런던 근교에 주둔시켜 의회 세력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688년 터진 두 개의 ‘사건’이 급속히 위기로 발전했습니다. 왕비의 왕자 출산과 일곱 주교들의 항거였습니다.
지난 열두번째 편지 때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제임스 2세의 두번째 왕비 모데나가 결혼 15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제임스 2세는 첫째 왕비와 사이에 8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6명이 숨지고 딸 2명 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중 큰 딸이 오렌지공 윌리엄과 결혼한 뒤,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메리 2세(1689~1694)이고, 작은 딸은 언니의 뒤를 이어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왕이 된 앤(1702~1714) 여왕입니다.
어쨌든 왕자의 탄생은 잉글랜드를 통째로 뒤흔들었습니다. 잉글랜드 국민과 의회는 제임스 2세가 물러나면 개신교도인 큰 딸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꾹 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현재 왕에 이어, 역시 가톨릭 신자인 왕비 영향을 받고 자랄 왕자가 또 다시 잉글랜드를 가톨릭의 나라로 만들려 한다면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캔터베리 대주교와 6명의 주교 등 일곱명이 국왕의 가톨릭 정책에 반발한 것인데, 왕은 이들을 런던탑에 가뒀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이들 7인의 주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이들이 석방되는 날 국민들은 불을 밝히고 총을 쏘고, 종을 울리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정세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잉글랜드 의회의 종교 지도자들이 오렌지공 윌리엄에게 영국으로 와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 우리가 익히 아는 명예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임스 2세는 딸과 사위의 군대에 맞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프랑스로 망명하게 됩니다.
◇ 존 로크
새로 소집된 의회는 1689년 초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추대하고,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s)과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잇따라 승인받았습니다. 권리장전은 권리선언에 다음 왕위 계승 순서 등을 추가해 법률로 만든 것입니다.
권리장전은 제임스 2세의 불법행위를 12가지로 열거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의 통치에 관한 기본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권이 의회의 동의없이 법 집행을 유보하거나 면제하는 것은 불법이다. ▶의회 허락없이 세금을 걷는 것은 불법이다. ▶왕에게 탄원하는 것은 신민의 권리이며, 탄원을 이유로 기소하는 것은 불법이다. ▶의회 동의없이 평시에 상비군을 유지하는것은 법에 위배된다. ▶의원을 뽑는 선거는 자유로워야 한다. ▶유죄 판결 이전에 벌금이나 몰수를 약속하는 것은 불법이고 무효이다.
의회는 제임스 2세가 법의 지배를 부정하고 국민과의 가장 기본적인 계약을 파기했고, 나라를 탈출해 왕위를 버렸다고 규정했습니다. 또한 국왕이라도 국가의 기본법을 침해·파괴할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원칙을 세웠습니다.
현실 정치 세계의 변화와 발전은 철학과 정치사상의 발전과 손발을 맞췄습니다. 존 로크 등 위대한 철학자가 등장해 세상의 변화에 대한 해석과 정당성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사실상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로크는 명예혁명을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국의 경험주의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거쳐 로크에 이르러 체계화되었고, 정치철학쪽으로 로크는 토머스 홉스와 함께 사회계약설을 확립했습니다. 그는 명예혁명과 거의 때를 같이 해 ‘통치론(1690)’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런 저술을 통해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 생명과 자유, 재산에 대한 기본적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부의 역할은 이 자연법적 기본권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 그쳐야 하며, 만약 정부(또는 왕)이 그 범위를 벗어나 권력을 휘두른다면 국민은 이에 저항하고 위임했던 권한을 회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제임스 2세의 통치와 명예혁명을 생각한다면, 결론은 하나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누구도 법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비록 왕일지라도.”
[23] “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인가”
“1700년에 프랑스는 경제 규모에서 영국의 두 배, 인구 수로는 세 배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자신의 책 ‘제국’에서 18세기에 접어들 무렵, 프랑스와 영국은 객관적 국력(國力) 면에서 이 정도 격차가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퍼거슨이 언급한 당시 영국의 인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친 것으로 보입니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당시 프랑스 인구는 2100만명, 잉글랜드는 520만명이었습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 인구가 약 100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앵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앤(1702~1714) 여왕 통치 때인 1707년 하나로 합쳐져 ‘브레이트 브리튼 통합 왕국’을 출범시키게 됩니다.
명예혁명(1688)이 일어난 지 6개월 밖에 안된 1689년 5월,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바로 한 달 전 부인 메리 2세(1689~1694)와 함께 잉글랜드 공동 왕으로 대관식을 치른 오렌지 공 윌리엄 3세(1689~1702)가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전쟁(또는 9년 전쟁, 1688~1697)에 참전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전쟁은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많은 유럽의 전쟁 중 하나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큰 의미가 있는 전쟁입니다.
▲의회 승인으로 왕좌에… 영국 윌리엄 3세 대관식 - 1689년 4월 11일 영국 상원(House of Lords)에서 잉글랜드의‘공동왕’으로 즉위하는 윌리엄 3세 왕과 메리 2세 여왕 대관식. 신교도였던 딸 메리와 달리 가톨릭 구교도였던 아버지 제임스 2세는 절대왕정과 보호주의 무역으로 영국을 위협하던 프랑스 가톨릭왕 루이 14세 편에 섰고, 영국 귀족들은 메리와 윌리엄 공의 군대를 영국으로 불러들였다. 민심을 잃은 제임스 2세는 결국 프랑스로 패주했다. 왕이 의회와 타협하며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를 연‘명예혁명’이었다. 네덜란드 후기 바로크 예술가 호메인 데 후게는 성대한 대관식을 새 왕과 여왕의 마차 행렬, 템스강 불꽃놀이 등 판화 9개 장면으로 기록했다. 중앙부 대관식 장면(부분), 네덜란드 왕립도서관 소장. /위키피디아
근대국가의 틀을 갖춰나가는 과정에서 잉글랜드는 종교적 이유 또는 무역 이익을 위해 주변국과 마찰을 빚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상대가 프랑스인 경우도 있었고,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와도 전쟁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17세기 후반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3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는데 이 충돌은 상업적인 동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장과 무역을 둘러싼 경쟁을 벌인 것이지요. 이런 전쟁은 대부분 일시적인 것이었고, 단기간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내일은 반대 상황이 되는 등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그런 충돌이었습니다.
하지만 명예혁명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잉글랜드(영국)와 프랑스는 유럽을 넘어 전 세계 주도권을 놓고 세기의 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한 잉글랜드의 전쟁 선포는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 세기 이상이나 계속된 이른바 제2차 백년전쟁의 시작(영국의 역사, 하, 나종일·송규범)”이었던 것입니다.
퍼거슨은 이를 두고 “프랑스와 벌인 전쟁은 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과연 누가 이기게 될까요.
◇ 프랑스를 막아라
모든 전쟁이 그렇듯 그 밑바닥에는 여러 동인(動因)과 복선이 복잡하게 깔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전쟁도 그랬습니다. 1688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전격적으로 팔츠 침공에 나섰습니다. 그가 내건 명분은 팔츠 선제후의 남자 혈통이 끊겼고, 자신의 동생의 아내, 즉 제수가 팔츠 선제후의 딸이므로 프랑스 왕가가 팔츠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나라의 이해 관계가 이리저리 얽혀있는 유럽 정치 지형에서 이런 주장은 강자가 완력으로 주변 약소국을 압박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레판토 해전도. 메시나를 출발한 신성동맹 해군은 오스만 튀르크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지중해 전체가 이슬람 세력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냈다.
사실 루이 14세의 머릿속엔 다른 셈법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초기엔 오스만투르크의 기세가 등등했지만 유럽 각국이 신성동맹을 결성해 반격에 나섰습니다. 궁지에 몰린 오스만투르크는 유럽국 중 유일한 동맹인 프랑스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주판알을 튕겼을 겁니다. 오스만이 완패해 발칸반도마저 라이벌인 합스부르크가(家) 손에 들어간다면 자신이 열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합스부르크와 오스만이 싸우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라인강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프랑스에게 다른 나라들도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 스웨덴, 바이에른, 작센 등이 아우크스부르크동맹을 결성해 루이 14세에 맞섰습니다.
잉글랜드의 참전은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루이 14세가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에게 병력과 자금을 지원했고, 제임스 2세는 아일랜드에 상륙해 왕위 탈환을 위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여왕 입장에서 보면, 왕관을 쓴 지 한 달 밖에 안됐는데 왕권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묵과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이 전쟁은 잉글랜드에게는 ‘왕위 계승 전쟁’의 성격을 갖게 됐습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반대편, 즉 아우크스부르크동맹에 합류하게 됩니다.
전쟁은 프랑스에게 별로 신통한 결과를 안겨주지 못했습니다. 바다에선 한때 비치헤드 해전(1690)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곧 노르망디 해안의 라오그 해전(1692)에서 프랑스 함대가 참패를 하게 됩니다. 대륙 전투에서도 초기엔 프랑스가 우세했지만, 1695년 연합군이 나무르 요새에서 루이 14세에게 참패를 안겨줬습니다. 결국, 양측은 1697년 라이스봐이크 조약을 체결하는데, 루이 14세는 1678년 이후 점령한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윌리엄 3세의 잉글랜드 왕위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 태양왕
루이 14세는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왕 중 한 명입니다. 역사는 그를 ‘태양왕’이라고 부릅니다.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 그가 한 말, “짐은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 되었지요. 볼테르는 그의 시대를 고대 그리스 황금기에 뒤지지 않는다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절대 권력의 상징인 프랑스 루이 14세.하지만 엘리아스의 분석에 따르면,루이 14세도 궁정 예법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던 개인에 불과했다.
선왕인 루이 13세 부부가 23년 만에 본 아들이기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신의 선물’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만 다섯 살 밖에 안된 그는 아직 나라를 통치할 수 없었고, 국정은 재상인 마자랭이 맡았습니다. 두 차례 ‘프롱드 난’을 겪는 등 위기도 있었지만 결국 이겨낸 뒤 마자랭 사후 1661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루이 14세가 직접 국정을 관장하면서 프랑스의 국력은 승승장구를 거듭했습니다. 특히 그에겐 유능한 신하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장 바티스트 콜베르 재무총감이었습니다. 콜베르는 프랑스 중상주의를 대표하는 정치가인데, 무역과 산업을 장려해 국부를 증가시키고, 재정·세제 등을 개혁했습니다. 콜베르는 해군력 강화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661년 20척이던 해군 전함을 1690년 270척 이상으로 늘렸습니다. 그가 키운 프랑스 함대가 비치헤드 해전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함대를 격파한 것이지요. 또 콩데와 튀렌 등 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은 당대를 호령하는 인물들이었고, 보방은 공성술과 방어요새 건축으로 이름을 날린 군사공학자였습니다.
루이 14세는 튼튼한 재정과 막강한 군사력, 뛰어난 인재들을 자산으로 삼아 본격적인 영향력 확장에 나서게 됩니다. 그가 1715년 사망할 때까지 일으킨 대규모 전쟁만 네 차례에 달했습니다. 에스파냐 일부 영토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일으킨 권리 이전 전쟁(1667~1678), 네덜란드 전쟁(1672~1678), 아우쿠스부르크동맹 전쟁(1688~1697),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1701~1713) 등이었습니다. 루이 14세의 목표는 프랑스와 자신의 영광과 부귀, 라인강과 알프스 산맥 및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천연 국경선’까지의 영토 확장, 합스부르크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파괴 등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 내내 유럽은 루이 14세의 공격적 성향 때문에 속앓이를 했습니다. 그의 야욕을 꺾을 만한 힘이 다른 나라에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1700년을 전후해 루이 14세와 맞붙어보겠다고 하는 나라가 등장한 것이지요. 바로 잉글랜드였습니다.
사실, 잉글랜드는 17세기 중반만 해도 유럽의 열강으로 대우를 받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청교도혁명 이후 왕정복고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1660~1685)는 1670년에 루이 14세와 ‘도버협약’이라는 비밀협약을 맺습니다. 프랑스가 네덜란드와 전쟁을 할 때 잉글랜드가 병력 6000명을 지원해주고, 찰스 2세는 조만간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다는 내용과 함께, 찰스 2세가 루이 14세로부터 매년 23만 파운드의 현금을 받는다는 내용도 들어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서 지원금을 받는 처지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명예혁명을 거쳐 오렌지 공 윌리엄 3세를 통해 네덜란드와 한 나라가 된 잉글랜드는 무시못할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나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프랑스에게 도전장을 던질 정도로요.
◇ 돈, 돈, 돈
15세기 말엽 이탈리아 원정으로 유럽을 깜짝 놀라게 만든 샤를 8세에 이어 프랑스 왕이 된 루이 12세는 1499년 밀라노 침공을 감행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습니다. 그의 보좌관 답변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첫째도 돈이요, 둘째도 돈이요, 셋째도 돈입니다.”
이 말은 인류가 지금까지 치른 전쟁을 고찰할 때,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고, 첨단(그 시대 기준으로 볼때) 무기가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로는 특히 그러하다고 봅니다. 군비를 누가 얼마나 많이 효율적으로 마련하느냐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정권과 왕조의 흥망을 결정짓는 요소로도 작용을 하게 됩니다.
제가 매주 보내드리고 있는 뉴스레터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 문제의식은 바로 “영국은 어떻게 프랑스를 이겼는가”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인구 측면에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프랑스를 넘어선 적이 없습니다. 국토의 면적도 작습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주요한 전쟁에서 영국은 어떻게 프랑스를 이겼던 것일까요.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몇 가지의 이유와 원인, 배경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재정입니다. 전쟁과 연결시킨다면 군비(軍費) 또는 전비(戰費)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국의 역사(하)’에 따르면 스튜어트 왕조 후반기인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 통치기 때 평소 정부 지출은 연간 약 200만 파운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 때엔 정부 지출이 급증하게 됩니다. 윌리엄 3세 시대가 되면 전비 지출 등으로 이 액수가 600만 파운드에 달하게 됩니다. 18세기에 접어들면 잉글랜드의 1년 정부 지출은 900만 파운드까지 치솟게 되고 이후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사정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콜베르 사후 루이 14세는 심각한 재정 악화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막대한 전비 지출 때문이었습니다.
핵심은 이 재정이라는 면에 있어서 잉글랜드(영국)가 프랑스를 압도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1세기 후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해 대영제국을 세우는 갈림길도 여기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오렌지 공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 왕에 오르면서 양국은 ‘한 지붕 두 나라’ 즉 동군연합(同君聯合)으로 묶이게 됩니다. 이후 런던에는 네덜란드로부터 사람과 돈이 몰려들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금융과 재정은 당시엔 선진국이었던 네덜란드로부터 많은 전문 인력과 노하우,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공채(公債)와 중앙은행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영란은행 본부 건물.
잉글랜드 의회는 1693년 공채 발행을 승인했습니다. 이 공채는 정부가 차입한 원금을 돌려주지 않지만 평생 일정액의 이자를 지급하는 ‘영구 공채’였습니다. 이자는 정부가 국민에게 걷는 물품세를 재원으로 삼아 지급했습니다. 의회가 법률로 100% 확실하게 이자 지급을 보증하는 채권은 당연히 투자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았습니다.
이듬해인 1694년에는 영란은행을 설립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비치헤드 해전에서 프랑스에게 대패한 뒤 강력한 해군 육성에 대한 요구가 높았습니다. 정부는 큰 돈이 필요했는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윌리엄 3세 정부가 추진한 것이 영란은행 설립이었습니다. 영국 최초의 주식회사 은행인 영란은행은 주식을 발행해 마련한 자본금 120만 파운드 전액을 정부에 빌려주고, 연 8%의 이자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돈 중 절반이 잉글랜드 해군 육성에 사용됐구요.
◇영구 공채
재미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근대국가의 재정혁명 II(윤은주)’라는 논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788년 영국 정부의 차입금은 국내총생산(GNP)의 181.8%에 달했지만, 프랑스는 55%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세수입에서 원리금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영국이 56.1%, 프랑스는 61.9% 였습니다. 즉, 당시 영국 정부가 프랑스 보다 3배 이상 많은 부채를 지고 있는데도, 부채를 갚는 데 사용하는 돈의 비중은 프랑스가 더 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비결은 어떤 채권을 발행했느냐에 있습니다. 1720년 이후 영국에서는 영구 공채가 전체 정부 자금 조달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전체 원리금 변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85%에 달했습니다. 이 채권은 이자율이 낮았습니다. 1717년에 이미 5%까지 떨어졌고, 1730년대엔 3%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전쟁 때 급하게 발행했던 단기 채권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영구 공채으로 전환됐습니다. 예를 들어 1763년 367만 파운드에 달하는 전쟁 채권이 모두 이자 4%의 영구 공채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전쟁을 하는 상대방에겐 엄청난 부담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정치가인 네케르는 이를 두고 “영국은 지금도 여전히 3억 파운드를 더 빌릴 여력이 있다. 그것도 3%의 연 이자로 말이다. 영국의 부와 인구로는 불가능할 정도의 능력과 힘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리의 채권 발행이 가능했던 것은 채권을 갚을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인데요.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관세와 물품세 등 간접세를 중심으로 세수 확대를 이끌었습니다. 간접세는 세금을 올리기도 쉽고, 저항도 적었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직접세에 치중했는데, 세금을 걷기도 쉽지 않았고 저항도 많았으며, 결국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채권을 발행하는데도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는 직접세가 전체 세입의 절반 정도에 달했고, 이는 영국의 2배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발행한 채권도 이자가 높은 경우가 많아 이를 갚는데 큰 고통이 따랐고, 결국 프랑스 정부는 3번이나 파산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영국(잉글랜드)는 인구도 적고, 땅도 작았지만 경쟁자인 프랑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동원할 수 있었고, 전쟁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재정 혁명을 달성함으로써 영국은 군사 대국이 됐고, 대영제국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제군주정이었던 프랑스와 달리 영국이 입헌군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4] 절체절명의 순간, 나라를 이끈 지도자… 처칠 이전에 그가 있었다
“영국은 캐나다와 그냥 똑같네요.”
5년 전 쯤 런던에서 유럽특파원으로 근무할 당시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은 큰누나의 딸 내외가 캐나다에서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조카 사위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성장한 교포인데, 며칠 동안 이곳저곳 다니더니 돌아갈 무렵 이 한 마디를 하더군요. 런던을 둘러봤더니 사회가 움직이는 시스템이 두 나라가 거의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 말이 꽤 신선하게 들렸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제국 건설 경쟁에서 승리해 북미(미국과 캐나다)를 손아귀에 넣었지만,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떨어져 나가면서 캐나다만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남았습니다. 이후 캐나다는 1867년 자치령이 됐고, 1951년에는 정식 국명(國名)이 캐나다자치령에서 캐나다로 바뀝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자치를 획득한 것이 150년 전 일이고 본국이 대서양 건너편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캐나다는 영국보다 미국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카 사위 말을 듣고 무릎을 칠 뻔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영국이 건설했던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구나.” 물론, 대영제국 시절과는 다르겠지만 말이죠.
▲2015년 6월 13일 영국 엘리자베스(가운데 흰 옷) 2세 여왕의 생일을 맞아 영국 왕실 가족들이 버킹엄궁 발코니에 모였다. 여왕과 남편 필립(여왕 오른쪽으로 둘째)공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현재 영연방에는 세계 54국이 가입해 있습니다. 북미와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지구촌 모든 대륙에 회원국이 퍼져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대영제국이 식민지로 거느렸던 나라들입니다. 물론 회원국들이 지금도 영국의 통치나 지배, 지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계산기 두드리고 머리 굴려가며 이해 관계를 따져본 결과, 영연방으로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연방 회원국이라고 다 같은 회원국은 아닐 것입니다. 그 중 유독 친밀하고, 국제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하나로 뭉치는 나라는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입니다. 이들 4국은 미국과 함께 군사·정보 동맹체인 ‘파이브 아이스(Five Eyes)’를 구성하고 있지요. 최근에 중국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해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한 나라들도 이들입니다. 이들 나라는 앵글로색슨이라는 인종적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과 영국, 호주가 ‘오커스’라고 하는 또 다른 군사동맹을 출범시킨 것도 “우리는 언제까지 진정한 원팀”이라는 의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사실 캐나다에 먼저 진출한 건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1608년부터 세인트로렌스강(江) 중심으로 퀘벡·몬트리올 등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영국은 20년 정도 늦은 1628년 프랑스 식민지의 남동쪽, 대서양에 접한 노바스코샤 지역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로부터 약 150년 후, 세계의 패권을 놓고 대결을 펼친 끝에 영국이 승리했고, 21세기에 제 조카 사위가 “영국과 캐나다는 정말 똑같은 것 같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세계 역사의 흐름을,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운명을 바꿔놓은 18세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여겨 볼 것은 여러 전쟁이 있었고, 전쟁을 벌이는 양쪽 멤버들은 계속 바뀌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항상 적(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전쟁의 시대
18세기의 전쟁은 이전과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동시에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나라들이 뒤엉켜 싸우는 세계 전쟁의 성격을 띄게 됐다는 점입니다.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럽에는 대형 전쟁들이 잇따라 터졌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전쟁(또는 9년 전쟁, 1688~1697)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1701~1714),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 7년 전쟁(1756~1763), 나폴레옹 전쟁(1793~1815) 등입니다. 중세와 근대 초기 전쟁들은 주로 개별 국가간에 벌어지거나 소수 국가들이 참여하는데 그쳤고, 전장(戰場)도 일부 지역에 국한됐는데, 18세기를 거치면서 참전국도 크게 늘고, 전투도 유럽을 넘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개막전 같았던 것이 아우크스부르크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을 통해 유럽 패권을 장악하려다 실패한 프랑스 루이 14세는 18세기가 문을 열자 곧바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 합스부르크가(家) 출신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그의 유언에 따라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에게 넘어갔습니다. 루이 14세의 입장에서 보면 손자가 에스파냐 왕이 되면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자신의 부르봉 왕가가 유럽의 최강이자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고, 유럽 패권 장악이라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꿈이었지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를 눈뜨고 지켜볼 일은 없었습니다.
이제 짝짓기가 활발해집니다. 프랑스와 에스퍄냐 쪽엔 나폴리와 시칠리아, 헝가리, 바이에른, 쾰른 등이 동참했습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에스파냐 지배를 받는 왕국이었고,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에서 분리·독립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바이에른·쾰른 등은 합스부르크가 강해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다른 편에선 잉글랜드(영국)가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고, 여기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와 네덜란드, 사보니아(사르데냐) 등이 합류했습니다. 에스파냐와 사이가 나쁜 포르투갈,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려는 카탈루냐 등도 이 편에 섰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전세는 엎치락뒤치락했고,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1713)과 라슈타트·바덴 조약(1714)으로 종결됩니다. 결과는 영국과 오스트리아쪽 승리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는 펠리프 5세로 에스파냐 왕에 오르지만, 프랑스 왕위는 물려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루이 14세의 꿈이 좌절된 것입니다. 독일 하노버 왕조의 후예인 앤 여왕은 영국 왕위를 공식 인정받게 됐습니다. 영국은 또 프랑스로부터 허드슨만과 아케디아 등 미국 식민지 일부를 할애받고, 에스파냐에서 지브롤터·미노르카섬을 얻었습니다. 프로이센도 땅을 일부 얻었고, 네덜란드는 상업적 특권을 승인받았습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대한 식민지 특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땅을 칠 노릇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존 처칠, 1대 말버러공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 때 영국에 특출난 전쟁 영웅이 한 명 등장했습니다. 말버러 공 존 처칠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윈스턴 처칠 수상의 먼 조상입니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데, 그럴만도 한 것이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서 그는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2차 대전의 영웅 몽고메리 장군은 그에 대해 “대단한 외교적 수완을 가진 군사적 천재였다. 나는 영국군이 유럽 최고의 군대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 것은 다름 아닌 말버러 덕분이라고 늘 생각해왔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유럽의 전쟁을 주도했던 프랑스 루이 14세는 죽기 직전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유언처럼 되지는 않았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1740년 유럽에 다시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계기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문제였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6세는 사망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를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물려줬는데, 바이에른 등이 “여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내용의 관습법 ‘살리카법’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참고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두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요. 그 중 한 명이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꾸준히 군사력을 키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의 알짜배기 땅 슐레지엔을 집어삼키면서 유럽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됐습니다. 이번에 팀 구성은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쪽에 프랑스와 스페인, 제노바, 모데나, 스웨덴이 붙었습니다. 반대쪽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진영엔 영국과 하노버, 네덜란드, 러시아 등이 함께 했습니다.
1748년 엑스라샤펠(또는 아헨)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는데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얻어 최대 승자가 됐고, 마리아 테레지아도 합스부르크 가문 계승을 인정받아 오스트리아는 물론, 헝가리와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등의 왕에 올랐습니다. 그녀의 남편 프란츠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때 얻은 땅을 서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영국은 캐나다 루이스버그 요새를 프랑스에 돌려줬고, 프랑스는 인도 마드라스를 영국에 반환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슐레지엔을 잃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와신상담 복수의 칼을 갈았고,8년 후 잃었던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도 최후의 승자를 가릴 결정적 한판을 준비했습니다.
◇제국, 위용을 갖추다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복수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얽힌 당사자들이 많았습니다. 기본적인 대립 구도는 프로이센 대 오스트리아, 프랑스 대 영국이었습니다. 전쟁은 크게 세 곳에서 전개됐습니다. 유럽 대륙과 북미, 인도 등입니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참전하고, 해외 식민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까닭에 영국의 처칠 수상이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부른 이 전쟁은 결론적으로 영국·프로이센 편이 이겼습니다. 양측은 1763년 파리 조약을 맺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1759년 세계 곳곳에서 승전보를 울렸는데, 그 이후 전투는 ‘소탕 작전’ 수준이었습니다.
①유럽 대륙 (포메라니아 전쟁)
마리아 테레지아는 200여년간 합스부르크의 숙적이었던 프랑스를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프로이센을 반드시 꺾겠다는 집념의 발로였습니다. 이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라이벌인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요. 전쟁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섬을 공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프로이센은 작센을 순식간에 점령했지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전쟁 중 프로이센은 한때 참패 수준까지 몰렸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연전연패했고, 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표트르 3세가 뒤를 이은 러시아가 갑자기 전쟁을 중단하고 이탈하는 바람에 전황이 확 바뀌었습니다. 자살 생각까지 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기력을 회복하고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프랑스군도 영국·하노버 연합군에 대패하면서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전후 조약에 따라 참전국들은 유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로 했지만,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령은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②북미 (프렌치-인디언 전쟁)
7년 전쟁 개시 1년 전 북미에선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7년 전쟁과 맞물렸고 1763년 함께 끝났습니다. 프랑스·영국 대결은 필연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이민자들은 북미 인디언들을 상대로 모피 교역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했고, 영국 이민자들은 정착촌을 확대하면서 영역을 넓혔지요. 두 세력은 오하이오강 유역에서 맞부딪쳤습니다.
초기에 프랑스가 우세했습니다. 세인트로렌스와 오하이오 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계속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1758년 8월부터 전세가 바꾸었습니다. 영국은 그해 8월 노바스코샤의 루이스버그에서, 이듬해에는 크라운포인트(현재의 뉴욕주)와 타이콘데로가 요새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승부를 가른 결정적 대결은 1759년 9월 프랑스군의 핵심 거점인 퀘벡 요새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32세의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영국군이 몽캄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했습니다. 이날 전투는 영국군이 ‘일제 사격’으로 프랑스군을 한방에 무너뜨린 유명한 전투입니다. 울프 명령에 따라 영국군 5000여명은 적이 코 앞에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적이 40야드(약 37미터) 안으로 들어오자 일제 사격을 실시했고, 프랑스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이것으로 전투는 끝났습니다. 전투다운 전투는 15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망자는 영국군 650명, 프랑스군 1500명 수준이었습니다. 짧고 강렬한 작은 교전이었지만 전투 결과 캐나다의 지배권은 영국으로 넘어갔고, 그런 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울프와 몽캄 모두 치명적 부상을 입고 전사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조국에서 영웅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이듬해 영국은 몬트리올에서도 프랑스를 몰아냈습니다. 프랑스가 완전히 쫓겨난 북미는 이제 대영제국의 품에 들어가게 됩니다.
③인도
프랑스와 영국은 1600년대에 인도와 교역을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인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했고, 프랑스는 1664년에 세웠습니다. 두 나라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도 인도의 지배권을 놓고 맞붙었습니다.
1756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벵골의 태수 시라지-웃-다울라가 병력 5만명을 이끌고 캘커타의 영국인들을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의 서기에서 군대 지휘관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로버트 클라이브가 승부를 뒤집었습니다. 그는 1757년 캘커타를 되찾은 데 이어 그해 6월 최대 승부처였던 플라시 전투에서 시라지-웃-다울라 군대를 격파, 결정적 승리를 거뒀습니다. 1761년에는 퐁디셰리까지 점령함으로써 영국은 인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인도는 거의 200년 동안 대영제국의 거대한 시장이며, 군사·경제·문화의 보고가 될 것입니다.
④그외
영국군은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식민지도 공격했습니다. 프랑스의 풍요로운 설탕섬들, 즉 과달루페와 마르티니크, 도미니카를 정복했습니다. 에스파냐령 쿠바를 손에 넣었고, 필리핀 마닐라를 공격해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포르투갈 근해와 프랑스 서부 연안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모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윌리엄 피트
7년 전쟁에 임하는 영국의 핵심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프로이센을 지원해 프랑스와 동맹국들을 유럽 대륙에 묶어 놓는다. 그사이 영국은 전 세계 식민지에서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관건은 이런 전략을 뒷받침할 우세한 해군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였습니다. 해군이 강해야 상대방 병력 이동을 바다에서 차단해 적을 분산·약화시키고, 아군 전력을 집중해 완승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았던 걸까요.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영국에는 전략을 짜고 실행에 옮기며 나라를 이끌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채텀 백작인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칠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영국을 이끌었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틀을 만들어냈습니다.
▲윌리엄 피트, 1대 채텀백
우선, 1755년 12월 하원에 출석한 그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우리는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가능한 한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인원이 배치된 해군을 양성해야 합니다.”
피트는 의회에서 5만5000명의 해군 육성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영국 해군의 선박 보유량은 7년 전쟁 시작 초기 25만톤이었는데 종전 무렵 34만톤으로 늘었습니다. 프랑스는 최대 보유량이 14만7000톤에 불과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절반 수준이었던 것이죠. 최신예 전투함인 전열함은 프랑스가 70척, 영국은 105척을 보유했습니다.
피트를 향한 영국인들의 찬사는 대단합니다. 몽고메리 장군은 “그는 정치가이자 탁월한 전쟁 지도자로서 영국 역사상 암흑기에 집권했고, 처칠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웅변으로 영국인들을 이끌어 단결시켰다”고 평가했습니다.
피트는 ‘위대한 하원의원’으로 불렸습니다. 7년 전쟁 당시 그는 총리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국왕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직책은 지금으로 따지면 여당 원내 대표와 내무장관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회와 내각, 영국을 이끄는 실질적 리더였습니다. 그는 전쟁 직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그일을 ….”
피트의 막강한 영향력은 탁월한 연설 능력과 국민들의 직접적인 지지에서 나왔습니다. 역사학자 바질 윌리암스는 “영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의 지명이나 의회의 선택이 아닌, 국민들의 목소리에 의해 최고 권력에 오른 사람은 피트가 처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어떤 정치인도 피트만큼 단시간에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한꺼번에 받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런던은 사상 처음 ‘명예 런던시 자유상’을 그에게 수여했습니다. 이런 상을 주는 도시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체스터, 우스터, 노리치, 베드포드, 솔즈베리, 스털링, 야머스, 튜크스베리, 뉴캐슬….
그는 청렴으로도 국민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튼칼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그는 만 27세 때 하원에 입성했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46년 재무성 육군 담당 회계 총괄 책임자를 역임했습니다. 당시 이 직책을 맡는 사람은 운용 자금의 이자를 챙기고, 외국으로 가는 보조금의 0.5%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피트는 단 한 푼도 이런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동료 의원들과 내각, 국민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했지요.
피트는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봤고, 미래를 위한 전략에 탁월했습니다. 당시 영국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히틀러와 협상하고 양보했던 챔벌레인 총리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뉴캐슬 공작인 토머스 펠햄 홀스 총리였습니다. 그는 유럽 대륙에 있는 영국 동맹국들에 자금을 지원하는 조약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면 그 동맹국들이 나서서 프랑스가 영국을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주화론(主和論)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피트는 프랑스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756년 초 피트는 홀스 총리가 미노르카 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고, 이는 곧 프랑스의 침공을 부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해 6월 미노르카는 프랑스군 기습을 받아 함락되었습니다. 이 일로 홀스 총리를 자리에서 물러났고, 피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이제 정권을 좌우하게 된 피트는 1758년부터 자신의 전략을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고, 초기에 곳곳에서 프랑스군에 밀리던 영국군은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습니다.
피트는 1761년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미 7년 전쟁의 판세를 영국의 승리로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즉 1766년 총리에 올라 2년간 재직했습니다. 당시 영국 의회는 북미 식민지에 대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려했는데, 피트틑 이에 반대했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25] 세상을 놓고 영웅들의 승부가 시작됐다
“로디 전투를 치른 어느 날 저녁 문득 나는 내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위대한 일을 수행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 서쪽 기슭에서 1900km 떨어진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 워털루 전투(1815)에서 패해 이곳에 유배를 당한 나폴레옹은 과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로디 전투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 나폴레옹이 1796년 5월 10일 밀라노 남동쪽 31km 지점에 있는 아다 강의 로디 다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패퇴시킨 전투입니다.
조제핀과 결혼한 지 이틀만에 원정에 오른 27세의 사령관 나폴레옹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이탈리아를 휩쓸었습니다. 출정 당시 프랑스군은 3만8000명, 오스트리아-사르데냐군은 4만7000명으로 숫적 열세였지만 나폴레옹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르데냐를 한 달만에 항복시키고, 오스트리아군 거점 만토바를 포위했습니다. 이듬해 2월 만토바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12개월 동안 열두번이나 승리를 거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두 손 들고 휴전을 제의하게 됩니다. 이로써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93년에 결성된 제1차 대불동맹은 붕괴됐습니다.
▲베로나 인근 아르콜에서 벌어진 나폴레옹의 승전을 묘사한 프랑스 화가 오라스 베르네의 그림‘아르콜 다리 너머로 군대를 이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부분). /위키피디아
로디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 때 치른 3번째 전투였습니다. 전투 초반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리를 건너 돌격하다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400여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이 때 나폴레옹이 직접 깃발을 들고 선두로 치고 나갔고, 이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일제히 돌격했습니다. 동시에 강 상류와 수심이 낮은 곳으로 강을 건넌 프랑스 병사들이 협공에 나서자 오스트리아군은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대포 12문, 박격포 2문을 잃었습니다. 프랑스군 사상자는 50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대담하고 용기있는 행동에 감명받은 병사들은 그를 ‘꼬마 하사관’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등장
1769년 지중해 북부 프랑스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178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포병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는 장 자크 루소의 책을 탐독했고, 급진적인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그가 처음 이름을 알린 건 1793년 프랑스 프랑스 남부 툴롱 전투였습니다.
1789년 7월 14일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주변국들에겐 큰 위협이 됐습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1792년 초 동맹을 체결했고, 프랑스 혁명 정부는 대외 전쟁을 결정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그해 4월 오스트리아에, 7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1793년 초 프랑스 혁명 정부가 루이 16세의 사형을 집행하고,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네덜란드 등이 제1차 대불동맹을 결성했습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극좌파인 자코뱅파가 온건파인 지롱드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리옹과 마르세유 등에서 반발이 터져나왔습니다. 혼란을 틈타 남부 항구도시 툴롱에서도 왕당파가 혁명세력을 쫓아내고 영국군 등 외세를 불러들였습니다. 이 때 왕당파를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는 포병 병과 출신 답게 포병을 적극 활용해 영국군을 몰아내고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9월 대위 계급으로 전투에 참가한 나폴레옹은 고속 승진을 거듭해 12월에는 준장이 됐습니다. 그의 나이 만 24세였습니다.
나폴레옹이 군과 정계에서 주요 인물로 크게 부상한 건 2년 후인 1795년 왕당파의 파리 반란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역사에서는 10월 5일 일어난 이 사건을 ‘방데미에르 13일의 반란’ ‘포도달 13일의 폭동’ 등으로 부릅니다. 극도의 공포정치를 펼치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1년여 만에 자코뱅파가 몰락한 이후, 프랑스에선 새로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는데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선거제도가 바뀐 것을 알게 된 왕당파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시위대는 크게 불어났습니다. 혁명 정부가 전복될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 나폴레옹이 사태를 평정했습니다. 그는 대포 40문을 파리 시내에 배치하고 시위대를 향해 ‘포도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시위대는 3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해산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중장으로 진급을 했고, 이듬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이후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도중이던 1799년 조국이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받고 자신의 국내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자 급거 귀국,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세 명의 통령이 국정을 공동 운영하는 형식이었지만 나폴레옹이 임기 10년의 제1 통령에 올라 실권자가 됐습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802년 종신 통령 자리에 오르더니 1804년 황제가 됐습니다. 툴롱 전투에 참가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지 11년, 이탈리아 로디 전투 때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야심을 갖게 된 지 8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때 35세였습니다.
▲스스로 왕관을 집어들어 교황보다 황제가 우위에 있음을 천명한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모습을 그린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 1세 황제와 조제핀 황후의 대관식’(부분). 루브르 박물관 소장. 관을 들고 선 나폴레옹 뒤편(그림에서 오른쪽)의 교황 등 참석자들의 초상도 명확히 그려졌다. /위키피디아
당시 그가 황제가 되어도 좋은지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는데, 찬성률이 99.9%였다고 합니다. 역대 프랑스 왕들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 것과 달리 나폴레옹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잇는 군주가 아니라 위대한 샤를마뉴 대왕의 후계자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황제관도 직접 썼다고 합니다.
전투에 관한 한 나폴레옹은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누가 뭐라든 그와 비견될 사람은 없으며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략의 달인이었고, 전투 현장에선 항상 공격적이었습니다. 유리한 때와 장소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천재적 안목과 역량을 가졌습니다. 적은 상상도 못할 부대 이동과 작전을 구사하곤 했습니다. 그는 “전투의 승패는 단 한 수에 달려있다.” “교전시 아주 작은 작전 행동이 결정적 승리를 가져다 주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릇의 물을 넘치게 하는 것은 한 방울의 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신분이 아니라 재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자신이 최고 자리에 올랐던 것처럼 “재능있는 사람에게 길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등용한 원수 26명 가운데 귀족 출신은 단 2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부하 장병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리더십은 어딜 가든 부하들의 자발적 존경과 충성을 이끌어냈습니다. 장병들은 기꺼이 그와 함께 전장에 뛰어들었고, 영웅심에 불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격했습니다. 한 프랑스 병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여러가지 고통을 웃어넘겼다. 우리의 장교들은 등에 잔뜩 짐을 짊어졌으며, 우리와 함께 변변찮은 급식을 나누어 먹었다.”
◇바다에 막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전(海戰) 중 하나인 트라팔가르 해전(1805)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전쟁 영웅 허레이쇼 넬슨 제독이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상대로 완승을 거둔 전투입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이 해전은 사실 한 차례의 결정적 대승이나 넬슨 제독의 개인 영웅담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즉, 그때까지 영국 해군이 일궈온 수 많은 노력과 성취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총체적 결과였던 것입니다.
우선 해전의 전개 상황을 보면 이렇습니다. 1805년 10월 21일 전열함 27척으로 구성된 넬슨의 함대가 트라팔가르곶 앞바다에서 프랑스-에스파냐 함대의 전열함 33척과 마주쳤습니다. 지중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대서양으로 나오면 바로 나타나는 해역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위해 프랑스 북서안 불로뉴항에 수십만 대군을 집결시켰지만 강력한 영국 해상 봉쇄에 막혀 꼼짝도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에스파냐 카디스 항에 있던 연합함대에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고, 원정군을 영국에 상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폴레옹은 “6시간 정도만 영국해협을 장악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최소한 6일 정도는 필요했을 것이라고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후 상황이 바뀌어 나폴레옹은 대륙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등과 격전을 치르기 위해 불로뉴에 있던 원정군을 라인 강 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연합함대에겐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카디스 항을 떠난 연합함대는 지중해쪽으로 가다 넬슨 함대를 만났습니다. 넬슨은 함대 군함들에게 깃발 신호로 “영국은 제군들이 각자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포츠머스 왕립 해군 박물관에 전시된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호의 당당한 위용. 운명의 날이었던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넬슨 제독은 이 배 위에서 나폴레옹의 야망을 침몰시키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당시 해상 전투는 양쪽 군함들이 11자형으로 평행하게 항행하면서 상대 함정을 향해 일제히 함포를 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함대는 완전히 다른 전술을 들고 나왔습니다. 앞뒤로 줄지어 항행하는 연합함대의 옆구리를 향해 2개조로 나뉜 영국 함대가 직각으로 치고 들어갔습니다. 한마디로 ‘옆구리에서 대열 깨기’ 작전입니다.
사실 이 전술은 아주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열함은 2~4단 갑판을 만들고 옆구리쪽에 대포를 수십문 설치해 놓은 함정입니다. 앞이나 뒤에는 대포가 없기 때문에 영국 함정은 상대방 함대 중간에 끼어들 때까지는 함포를 쏠 수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얻어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상대방 대열에 들어가면 상황은 역전됩니다. 영국 함정이 좌우로 적선을 향해 함포를 쏘게 되고, 상대방은 영국 함정을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에스파냐 함대는 1척이 침몰하고 21척이 나포당하는 괴멸적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로 영국은 완벽하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됐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19세기 내내 말이죠. 나폴레옹은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륙 점령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을 고립시키겠다며 대륙봉쇄(베를린 칙령, 1806년 10월)를 추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결국 그의 자충수가 되고 말지요. 이처럼 트라팔가르 해전은 나폴레옹 전쟁의 물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국 함대는 어떻게 이런 과감한 작전 수행과 대승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이제 11년 전으로 돌아가 볼 시간입니다.
◇넬슨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된 이후, 최초의 해전은 1794년 6월 1일 벌어진 ‘6월의 영광스런 첫날’ 해전입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브레스트 함대에게 미국에서 오는 대규모 곡물 수송선단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대서양으로 나간 프랑스 함대는 하우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와 마주치게 됩니다. 프랑스 함대는 전열함 26척, 영국 함대는 25척이었습니다.
이때 하우 제독이 구사한 전술이 바로 ‘옆구리에서 대열 깨기’였습니다. 트라팔가르 해전보다 11년 앞서 이미 영국 함대는 이 전술을 실전에서 구사했던 것입니다. ‘6월의 영광스런 첫날’ 해전에서 영국은 프랑스 전열함 1척을 침몰시키고, 6척을 나포했습니다. 반면, 영국이 잃은 배는 한 척에 불과했습니다. 영국은 이 해전 승리로 바다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고, 프랑스와 동맹군 함대는 항구에 정박해 방어에 치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옆구리에서 대열 깨기’는 영국 함대의 핵심 전투 전술로 자리를 잡게 되고, 이후 중요한 해전에서 영국에게 승리를 안겨주게 됩니다.
전술과 함대 기동 못지 않게 주목을 해야 할 점은 장병들의 전투력이었습니다. 여러 전쟁 관련 서적을 보면, 당시 영국 해군은 어느 나라 해군보다 압도적인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능력있는 장교와 수병들이 탄 영국 함정은 상대보다 빠르고 공격력도 우세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함포는 1분에 1발을 쐈지만, 프랑스 함정은 2분에 1발 정도를 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에스파냐 해군은 3~4분에 1발을 쏘는 정도 였다고 합니다. 같은 시간 동안 영국은 상대방보다 적게는 2배, 많게는 3~4배 많은 포탄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초기 여러 해전의 승리로 영국 함대가 바다에서 더 오래 많이 활동했고, 반대로 상대방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렇게 양쪽 실력 차이는 갈수록 벌어졌습니다. 영국 수병들이 해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선박 조종술과 포술은 더욱 향상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영국 함대는 함정간 신호 체계에서도 앞서 나갔습니다. 바다에서 아군 함정들이 일사분란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면 승리 가능성은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당시 함정간 신호 체계를 완전히 바꾸고 개선한 사람이 ‘6월의 영광스런 첫날’ 해전을 승리로 이끈 하우 제독이었습니다.
반면, 프랑스 해군의 사기와 전투력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대혁명 발생 이후, 대규모 숙청으로 유능한 지휘관들이 대거 제거됐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월급이 지급되지 않아 많은 수병들이 군을 떠나거나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러니 제대로 된 훈련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프랑스 해군은 배를 제대로 다룰 능력도 포를 빠르고 정확히 쏠 실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함대에는 새로 모집한 신병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실전에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는 걸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에 또 한 명의 영웅,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넬슨입니다. 그는 첫 전투인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1797)’에서 두각을 나타낸 데 이어 ‘나일강 아부키르만 해전(1798)’ ‘코펜하겐 해전(1801)’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트라팔가르 해전(1805)’에서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탁월한 공적을 상징하는 훈장으로 가득한 넬슨 제독의 초상화.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넬슨은 12세 때 해군 사관후보생으로 해군에 입문했습니다. 그는 상하를 막론하고 주변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능력면에서 독보적이었다고 합니다. 해군 지휘관이 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전투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뛰어난 상황 판단, 과감한 작전, 솔선수범하는 지휘력 등입니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797년 초 에스파냐 제독 돈 호세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전열함 27척이 프랑스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카디스 항을 출항했습니다. 존 저비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전열함이 15척에 불과했지만, 포르투갈 남서쪽 끝단 세인트 빈센트 곶 앞바다에서 에스파냐 함대와 정면으로 맞붙었습니다.
여기서도 영국 함대는 ‘옆구리에서 대열 깨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단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영국 함대는 에스파냐 함대의 측면을 뚫고 들어가 상대방 진영을 둘로 분리시킨 뒤, 다시 돌아와 막강 함포 실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에스파냐 함대를 뚫는데는 성공했는데, 길게 늘어선 영국 함대가 방향을 틀어 다시 돌아오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에스파냐의 일부 함정이 현장을 벗어나 도망가려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넬슨이 탄 캡틴호는 영국 함대 대열에서 이탈, 에스파냐 함정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넬슨의 행동은 심각한 규율 위반이 될 수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한발 빠른 대응으로 영국 함대는 큰 소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파냐 함대는 많은 사상자를 냈고, 전열함 4척을 영국에 빼앗겼습니다.
코펜하겐 전투도 넬슨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얘깃거리입니다. 1801년 4월 영국 해군의 하이드 파커 제독과 넬슨 부사령관은 코펜하겐 부두에 있는 덴마크 함대를 공격했습니다. 양쪽 함대간 치열한 함포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상대방이 예상보다 강력하게 저항하고, 아군 피해가 늘자 파커 제독은 넬슨에게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넬슨은 이를 무시하고 전투를 계속했고, 영국 함대는 3시간 정도의 포격전 끝에 덴마크 함정 17척을 나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넬슨은 자신의 기선을 지휘하는 토머스 폴리 함장에게 “나는 눈이 하나 밖에 없어서 오른쪽 일들을 종종 놓치곤 한다네. 난 정말이지 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부상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했는데, 이 말을 하면서 망원경을 오른쪽 눈에 갖다 댔다고 합니다. 전투 현장에서 그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상관의 말도 무시해 버린 것이지요.
나폴레옹 전쟁 시기 해전(海戰)을 좌지우지했던 영국 해군 승리의 상징이자 영웅이었던 넬슨 제독은 지금도 영국인들에게는 자랑인 것 같습니다. 지난 2005년 트라팔가르 해전 200주년을 기념해 BBC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역사를 통틀어 영국을 빛낸 위인 100인 중 10위 안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평가에는 그가 영화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장렬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전 편지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듯이 그는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적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되는데요. 총알이 폐를 관통해 척추 깊숙이 박힌 이후에도 4시간 동안이나 전투를 지휘했고, 승리를 확인한 뒤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죽는 순간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제 임무를 다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편, 넬슨 제독에 의해 영국 정복과 바다 진출이 막힌 나폴레옹은 어떻게 됐을까요. 비록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타격을 입긴 했지만 대륙에서는 연전연승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성기는 이제 막이 올랐다고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명장 웰링턴과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26] 황제의 시대가 절정을 달리던 때, 몰락의 씨앗이 뿌려졌다
전투가 시작된 지 45분쯤 지났을까. 나폴레옹이 부하 술트 장군에게 물었습니다. “적 중앙이 있는 고지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겠는가.” 술트는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20분이면 충분합니다.” 나폴레옹은 더 과감한 돌격을 원했습니다. “그러면 15분을 주겠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던집니다. “단 한 번 날카로운 공격으로 전쟁은 끝날 것이네.”
1805년 12월 2일 체코 남동부 모라바 지역 아우스터리츠(현재 슬라브코프우브르나). 체코에서 둘째로 큰 도시 브루노에서 남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이 거둔 많은 승리 중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히고 있습니다. ‘전술상의 걸작’이라는 평가도 받습니다. 마침 이 날은 나폴레옹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에 오른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자신의 황제 즉위 1주년을 대승으로 자축한 셈이지요.
프랑스의 나폴레옹,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등 3명의 황제가 맞붙었다고 해서 이른바 삼제회전(三帝會戰)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병력 2만7000명과 대포 180문을 잃은 반면, 프랑스군 병력 손실은 7000명에 그쳤습니다. 나폴레옹은 고국에 있는 아내 조제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두 황제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했소. 나는 조금 피곤하오. 지금 당장 당신을 껴안고 싶소.” 반면 나폴레옹을 적으로 맞아 싸워야 했던 불운의 러시아 황제는 절망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거인의 손 안에 있는 난장이들이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5~1807년은 나폴레옹의 절정기였습니다.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강국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시대가 절정을 달리는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몰락을 가져올 씨앗들이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랑드 아르메
1805년 전쟁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은 것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제2차 대불동맹(1798~1802) 이후 아미앵 조약으로 잠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지만 누구도 이 상태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프랑스에 되돌려 준 것에 화가 났고, 프랑스는 영국군이 몰타 섬에서 왜 철수하지 않느냐며 분노했습니다. 1803년 5월 영국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고, 이듬해 영국과 스웨덴이 협정을 맺은데 이어, 1805년 4월 영국과 러시아가 동맹(제3차 대불동맹)에 합의했습니다. 물론 오스트리아도 곧 동맹에 합류합니다.
나폴레옹이 영국 원정을 위해 프랑스 해안 불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다가 대륙쪽 전투를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고,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대파한 일까지는 지난 편지에서 다뤘습니다. 이제 대륙으로 눈을 돌린 나폴레옹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랑드 아르메(대육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나폴레옹 군대는 적이 전혀 예상치 못하는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1805년 8월 말 불로뉴에서 출발한 그랑드 아르메는 한 달만에 600km가 넘는 거리를 행군한 끝에 9월 하순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州) 울름에 도착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이곳에 마크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 7만2000명을 배치해 놓고 있었지만, 기습을 단행한 그랑드 아르메에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프랑스군은 울름을 완전 포위했고, 달아난 일부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추격으로 많은 병사를 잃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10여일 만에 항복을 했는데 그 수가 무려 3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진군을 거듭, 뮌헨과 린츠를 거쳐 3주일여만인 11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에 입성하게 됩니다.
울름 전투는 나폴레옹에겐 몸풀기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랑드 아르메의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습니다. 100여km 떨어진 아우스터리츠가 목표였습니다. 그 곳엔 오스트리아를 도우러 온 러시아군이 주력을 형성하고 있는 연합군이 병력을 계속 증강하고 있었습니다. 상대 병력은 이미 수 만명에 달하는데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더 많은 지원군이 몰려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위키피디아> Napoleon at the Battle of Austerlitz, by François Gérard 1805. The Battle of Austerlitz, also known as the Battle of the Three Emperors, was one of Napoleon's many victories, where the French Empire defeated the Third Coalition.
병력은 연합군이 약간 우세했습니다. 러시아-오스트리아군은 8만5000명 정도였는데, 이중 3분의 2 이상이 쿠투조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이었습니다. 연합군의 최고 지휘관은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였습니다. 이에 맞서는 프랑스군은 7만3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전투는 나폴레옹이 짜 놓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습니다. 상대방은 나폴레옹이 파놓은 유인 전술 함정에 완벽하게 걸려들었고, 참패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투 직전 부하들을 데리고 전투가 벌어질 장소를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이 지형을 잘 살펴보시오. 이 땅이 전장이 될 것이고, 그대들은 이곳을 무대로 전투를 벌일 것이오.” 그는 전투가 벌어질 곳을 미리 다 분석해 놓고 있었고, 그에 맞는 전술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승패의 결과는 냉혹했습니다. 제3차 대불동맹은 와해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바덴 등 영토를 프랑스에 넘기고 전쟁 보상금으로 4000만 프랑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특히 1806년 8월 프란츠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서 퇴위, 1000여년 이어져 내려왔던 신성로마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나폴리 국왕에,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국왕에 앉혔습니다. 또, 독일의 작은 국가들을 묶어 자신의 꼭두각시인 ‘라인동맹’을 창설했습니다. 독일 중부가 나폴레옹의 지배권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겐 아직 가야할 길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항복을 받으려 할 참입니다.
◇유럽, 황제에 무릎을 꿇다
1806년 하반기 프로이센은 제4차 대불동맹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에서라기보다 나폴레옹에 대한 두려움과 당시 판세·전투력 등에 대한 판단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라인동맹 지역에 프랑스군 20만명을 주둔시켰는데, 이런 대규모의 그랑드 아르메는 프로이센에겐 큰 위협이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왕비와 왕자는 빌헬름 3세에게 전쟁을 하자고 독촉했습니다.
그해 7월 프로이센은 영국, 러시아, 작센 공국, 스웨덴 등과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고, 8월말에는 프랑스에 라인동맹에 주둔한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고, 이는 프로이센의 엄청난 실수였음이 곧 드러났습니다.
전투는 10월 중순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두 곳에서 벌어졌는데 단 하루만에 끝나버렸습니다. 독일 전역 패권을 놓고 벌인 승부치고는 너무 허무하게도 말입니다. 10월 14일 독일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약 220km 떨어진 예나.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그랑드 아르메는 오전 6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병력 3만3000명에 120문의 포를 보유했지만 이날 오후쯤에는 이미 궤멸 상태였습니다. 오후 2시쯤 1만3000여명의 지원군이 도착했지만 전세를 바꾸진 못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2만5000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합니다.
승리를 쟁취한 나폴레옹은 예나에 의기양양 입성했는데요. 그를 맞이한 대중 속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헤겔이었습니다. 그는 칸트와 피히테, 쉘링과 함께 독일 관념론을 인류 지성 한가운데 자리매김하게 한 철학자였으며, ‘정반합(正反合)’으로 대표되는 변증법을 체계화한 인물입니다. 당시 예나대학 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헤겔은 나폴레옹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계 정신이 말에 올라타 통과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Napoleon reviewing the Imperial Guard before the Battle of Jena
예나 전투가 끝난 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격파한 것으로 알고 크게 기뻐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날 프로이센군 주력은 예나에서 약 20km 북쪽에 있는 아우어슈테트 지역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그를 맞아 싸운 것은 다부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그랑드 아르메 제3군단이었습니다.
오전 7시쯤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은 교전에 들어갔습니다. 예나와 마찬가지로 주변엔 온통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기에 양측은 상대방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느 방향으로 진격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적이 보이니 총을 쏘는 그런 ‘깜깜이 전투’가 계속됐습니다. 프랑스군은 전투 초반 사로잡은 프로이센군 병사를 통해 전방에 있는 군대가 프로이센의 주력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제 양측 군대가 전면전에 돌입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병력은 2만7000명, 프로이센군은 6만300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가 많아도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오후 1시쯤 전세는 결정이 났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병력 1만3000명을 잃었고, 빌헬름 3세는 퇴각을 명령했습니다. 핵무기나 스텔스 전투기, 항공모함 등 전세를 한번에 뒤집을 수 있는 첨단 무기나 장비가 없던 시절, 기껏해야 대포와 총, 인간의 용맹과 지휘관의 전술이 전투의 승패를 갈랐던 시절, 이 정도의 병력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기록한 전투는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의 대승이었습니다.
이 전투와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다부 원수는 부하를 시켜 나폴레옹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이 보고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귀관의 원수(다부)는 물체가 2개로 보이는가 보군”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부 원수는 극도의 근시였는데, 이를 빗대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보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면서 엄청난 찬사와 선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다음날 발행된 그랑드 아르메 홍보 제5호에는 이 전투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 군의 우익을 맡은 다부 원수가 기적을 만들었다… 그는 무인(武人)의 제1 소질인 탁월한 용맹과 견실한 성격을 발휘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다부 원수에게 아우어슈테트 공작의 칭호를 하사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결과, 독일 전역이 나폴레옹 영향권에 떨어지게 됐습니다. 나폴레옹은 10월 25일 베를린에 입성했습니다. 독일의 심장에 첫째로 들어가는 영광은 다부 원수에게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달 후 나폴레옹이 이곳에서 발표한 ‘베를린 칙령’은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을 가져오는 결정적 동기가 되고 맙니다.
전후 협상은 프로이센 왕비 루이제가 맡았습니다.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 등 영토를 잃게 됐고, 1억2000만 프랑의 배상금을 물기로 했습니다. 육군 인원도 4만명으로 제한됐습니다. 가혹한 협상 내용에 프로이센은 분노했고, 언젠간 되갚겠다며 복수의 칼을 갈게 됩니다. 한편, 전투에서 패한 빌헬름 3세는 가까스로 도망친 뒤 재기를 위해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제 러시아가 등장할 차례 입니다. 이미 전에도 패한 적이 있던 러시아도 프랑스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전선은 북동 유럽으로 옮겨졌습니다.
1807년 2월 프랑스와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남쪽으로 37km 떨어진 아일라우에서 맞붙었습니다. 혹독한 북유럽의 겨울 날씨 속에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첫째 날에는 양측 모두 4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승부를 보지 못했습니다. 둘째 날 나폴레옹이 4만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6만3000명의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진행된 공방 속에서 하마터면 나폴레옹군이 격파당할 위기까지 겪었습니다. 모라 장군의 기병대가 러시아군 공격을 막아내는 바람에 패배를 면했고, 그날 밤 러시아군은 후퇴하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물러났지만 나폴레옹으로선 결코 승리라고 할 수 없는 전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4개월 후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철저하게 유린하게 됩니다.
▲<위키피디아> Napoleon at the Battle of Friedland (1807). The Emperor is depicted giving instructions to General Nicolas Oudinot. Between them is depicted General Etienne de Nansouty and behind the Emperor, on his right is Marshal Michel Ney.
6월 14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그랑드 아르메가 러시아군과 다시 싸우게 된 곳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동남쪽으로 40여km 떨어진 프리틀란트였습니다. 프랑스쪽 병력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네덜란드 이탈리아 라인동맹 등을 포함해서 8만명, 러시아쪽은 프로이센 지원군(2만5000명)을 합쳐 8만3000명이었습니다.
새벽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은 프랑스의 란 장군은 1대 2의 불리한 싸움에서도 9시간을 버텼고, 오후 5시쯤 나폴레옹이 6만5000명의 병력으로 대공세를 시작하자 전세는 급속히 프랑스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적을 프리틀란트 마을로 몰아넣었고, 이곳에 대대적인 대포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결국 러시아군은 2만여명의 병력을 잃고 도망쳤고, 나폴레옹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게 됩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틸지트 조약에 서명했는데요. 이 조약에는 “러시아는 프랑스가 유럽을 통치하는 것을 지지하고, 프랑스 방침에 따라 대륙봉쇄령에 참가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은 모든 서부 유럽의 지배자가 됐습니다. 1805년 오스트리아, 1806년 프로이센, 1807년 러시아를 차례로 굴복시킨 결과입니다. 그의 제국은 에스파냐의 남부 세비야에서 폴란드 바르샤바까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발트해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국민은 4400만명에 달했습니다.
◇베를린 칙령, 그리고 저항의 시작
나폴레옹이 1805년 10월 울름 전투를 이기고 아우스터리츠로 향하던 때, 그에게 뼈아픈 패전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바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에스파냐 함대가 영국 해군에 참패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해전의 패배는 당시 육지에서 승승장구하는 나폴레옹에겐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영국을 그대로 나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806년 초겨울 프로이센을 완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전격적으로 대륙봉쇄령을 발표하게 됩니다. 베를린에서 발령했기에 ‘베를린 칙령’으로도 불립니다. 영국과의 모든 통상을 금지하며, 영국 선박은 유럽 대륙의 어떤 항구에도 출입할 수 없다, 이를 위반할 경우 선박을 몰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에 대한 군사적 공략을 포기하는 대신 경제적으로 봉쇄시켜 항복을 받아내려는 일종의 ‘경제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영국과의 경제적 단절이 유럽 여러 나라에게도 고통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항이 곳곳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경제력이 일취월장하던 영국과의 무역이 막히자 유럽에선 생필품 부족 현상이 벌어졌고 밀무역이 성행했습니다.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것은 포르투갈이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무역과 자신의 식민지인 브라질에서 오는 생산품 등에 대부분의 경제를 의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807년 당시 영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전체의 50%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포르투갈에겐 “굶어죽으라”는 말과 같았을 것입니다. 결국 포르투갈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 선박들의 리스본 항구 출입을 허용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7년 11월 앙도슈 쥐노 장군에게 병력 3만명을 주면서 포르투갈 점령을 명령했습니다. 쥐노는 쉽게 리스본을 함락했습니다.
▲<위키피디아> 조제프 보나파르트, 스페인 왕, 나폴레옹의 형
나폴레옹은 내침 김에 포르투갈 공격에 협조했던 에스파냐도 지배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에스파냐는 왕권을 둘러싸고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는데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로 하여금 모두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고,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마드리드가 아닌 바욘에서 대관식을 치른 조제프는 호세 1세라는 이름으로 1808년 7월 20일 마드리드에 들어오게 됩니다. 참고로 그는 나중에 프랑스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는 1813년 폐위됩니다.
나폴레옹이 형을 에스파냐 왕으로 옹립한 일은 최악의 악수 중에 하나였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에스파냐 국민들이 항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스페인은 너무나 풍요롭고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푹푹 찌는 무더위, 뜨거운 태양에 타버린 척박한 땅. 여기에 집요한 게릴라들의 저항이 프랑스군을 괴롭혔습니다. 에스파냐 게릴라들은 “매일 100명 가량의 프랑스 병사를 살상했다”고 합니다. 2차 대전의 영웅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오래전 프랑스 왕이 에스파냐에 대해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곳에서 소규모 군대는 패배하고, 대규모 군대는 굶어 죽기 십상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은 악전고투를 거듭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최대 숙적 웰링턴이 드디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미 인도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둔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이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도 대륙봉쇄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가 체면을 구기는 것을 본 러시아는 1810년 대륙봉쇄령을 파기하고 영국과 무역을 재개했습니다. 황제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철저하게 손보고 이를 전 유럽에 본보기로 삼겠다는 생각으로 러시아 원정(1812)을 단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황제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27] “죽음의 신은 내가 침대가 아닌 전쟁터에서 죽기를 바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러시아 침략을 받은 지 2주일째가 됐지만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예프)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개전 1~2일 만에 함락될 것이란 예측을 깨버렸습니다.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의 친러 반군 무장 봉기 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횡포를 눈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굴욕적이었지만 우크라이나는 자신을 지켜낼 힘이 없었고, 러시아 정규군이 아닌 반군조차 제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군대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멈춰선 64㎞ 러軍 차량 행렬… WP “연료부족 탓인 듯” -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미국 민간위성업체 맥사 테크놀로지의 위성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북쪽에 있는 도시 체르니히우를 향해 남하하고 있는 러시아군 차량 행렬을 촬영했다. 전체 길이가 64㎞에 달하는 이 행렬은 키이우 도심에서 약 27㎞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으나 2일 현재 속도를 내지 못하고 거의 멈춰 선 상태를 보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 등 주요 외신은 미 국방부 관계자를 인용, 이 행렬의 정체 이유에 대해 “연료 및 식량 보급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AFP 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출신의 올레나 쉐겔(41) 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 교수를 인터뷰 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을 개시한 날입니다. 오전 11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오후 2시쯤 끝났는데 그때서야 러시아의 공격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외신을 접하자마자 쉐겔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다 전화를 끊었습니다.
인터뷰 때 쉐겔 교수가 말한 바에 따르면 지난 2010년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제5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의 꼭두각시’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재임 기간 군대를 무력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병력을 크게 줄이고, 복무기간을 2년 반→2년→1년반→1년으로 줄였고 막판에는 6개월로 단축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의 친러·반유럽 행각에 분노한 시민들이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그를 축출했지만, 러시아가 즉각 크림반도 합병 등 무력 행사에 나섰지요.
그 이후 우크라이나는 좀 더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합니다. 쉐겔 교수는 그런 결과 우크라이나가 8년 전처럼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지난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첫 헌법에 자신들이 중립국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지역의 반란을 계기로 나토(NATO) 가입을 추진한다는 내용을 헌법에 넣었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추진했기 때문에 ‘정당방위’ 차원에서 공격을 단행했다는 푸틴의 말은 앞뒤 인과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새빨간 거짓말인 셈이지요.
◇ 전쟁은 보급이다
며칠 새 가장 눈길을 끄는 외신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 북방 벨라루스 쪽에서 남하하고 있는 러시아군 행렬의 ‘달팽이 속도’입니다. 선두는 키이우 북방 25km 지점까지 왔는데(지난 3일 현재) 후미가 60km 이상 후방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동 속도가 하루 평균 2km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지난달 28일부터 위성에 포착된 이 행렬은 탱크와 장갑차, 자주포, 연료와 식량 등을 나르는 보급 차량 등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만약 이 무기와 장비들이 계획된 일정에 따라 전진하고 최전선에 배치됐다면 지금쯤 키이우는 러시아군 손에 들어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 BBC 등 외신들은 이런 상황을 거의 미스테리 수준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해석은 분분합니다.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은 병참 문제입니다. 연료 등이 전체 행렬에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일부 러시아 장병들이 참전을 꺼려 차량 등에 고장을 내거나 바퀴에 구멍을 내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원인이 무엇이든간에 미군이 이라크전 등에서 보여줬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라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습니다.
병참은 인류가 전쟁을 시작한 이후,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나폴레옹의 몰락에 마침표를 찍은 워털루 전투의 영웅, 웰링턴도 바로 이 병참 분야의 귀재였습니다. 웰링턴의 본명은 아서 웰즐리인데, 1809년 상원의원 임명과 함께 웰링턴 자작에 서임됐고, 1812년에 웰링턴 백작·후작에 잇따라 서임된 데 이어 1814년 웰링턴 공작에 오르게 됩니다.
◇ 동갑내기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둘 다 1769년에 태어났습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두 전쟁 영웅은 46세가 될 때까지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곤일척 한판 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을 석권하는 등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가던 때 웰링턴은 향후 대영제국이 가장 애지중지한 식민지 인도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리면서 명성과 군사적 역량을 쌓았습니다.
▲이튼 칼리지
웰링턴은 아일랜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튼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수학과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15세에 학교를 졸업한 뒤 1787년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워털루 전투에 앞서 이런 유명한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 학교의 운동장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국가의 인재를 길러내는 영국 사립학교의 우수성을 알리는 대표적인 말로 널리 퍼졌는데, 실제로 웰링턴이 이 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이튼 재학 시절 외톨이 성격을 가졌던 웰링턴은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이튼에는 운동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위관급 장교 시절 웰링턴은 그리 잘 나가는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영국 육군 장교들 중에선 집안 배경 등을 이용해 입대하고 고속 진급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웰링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티를 좋아했고, 사교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다 1793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사건’이 발생합니다. 웰링턴이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의 집안에서 그의 청혼을 딱 잘라 거절해 버린 것입니다. 연인의 오빠인 롱포드 백작은 웰링턴에 대해 “빚도 많은 주제에 장래도 형편 없는 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마추어 바이올린니스트’ 웰링턴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바이올린을 불태운 뒤 ‘전력을 다해’ 군 경력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 기회의 땅, 인도
웰링턴은 무엇보다 군 장병을 보살피고 훈련시키는 일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전투를 위해 조달과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자금과 수송, 군수품 보급은 웰링턴의 유능한 병참감 케네디가 맡았는데, 그는 옷과 음식, 막사, 담요, 장화와 급여 등을 항상 충분하게 조달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과 달리 영국군은 군수품 참고 시스템을 활용했고, 지방 생산품을 돈을 주고 조달했습니다. 이런 체계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는데, 심지어 그가 1814년 프랑스 남부 지역에 진출했을 때는 프랑스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웰링턴은 또 장병들의 과음을 엄격하게 다스렸고, 병사들이 탈선을 하지 않도록 기강을 강하게 세웠다고 합니다.
▲Joseph Constantine Stadler - National Army Museum, London 아사예 전투를 지휘하는 웰링턴
웰링턴은 적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일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내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상당 부분, ‘언덕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늘 연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대단히 유능한 정보 조직을 구축했고, 그의 정보원들은 그물처럼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깔렸습니다.
그런 그에게 인도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는 1796년 인도에 도착했는데 그를 이어 형 리처드 웰즐리가 인도의 네번째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이들 웰즐리 형제는 대영제국이 인도 대부분을 손에 넣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인도는 무굴 제국이 쇠퇴하면서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었고, 전국 곳곳에 신생 국가가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그 중 인도 중북부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마라타 동맹과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은 대영제국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영국은 마이소르를 첫번째 타깃으로 삼았습니다. 마이소르의 이슬람 통치자 티푸 술탄은 자신을 ‘타이거 왕자’라고 불렀는데, 그는 영국인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그의 군대에는 프랑스 고문단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이소르 타도에 웰링턴이 선봉에 섰습니다. 이제 대령이 된 웰링턴은 영국의 동맹국인 하이데라바드의 군대와 함께 티푸의 기병대와 보병을 공격해 격퇴했습니다. 이 공로로 웰링턴은 마이소르의 총독이 되고, 상금으로 4000파운드를 받았습니다. 다시 영국 사병은 7파운드를 받았다고 합니다.
마라타 동맹은 절대 쉽지 않은 상대였습니다. 마라타는 인구 4000만명을 지배하는 5개 힌두족의 연합체였습니다. 당시 인도에서 세력이 가장 크고 막강했습니다. 준장으로 진급한 웰링턴 지휘 아래 1803년 군대가 조직되었습니다. 그해 8월 양측간 전투가 시작됐고, 9월 23일에 벌어진 아사예 전투는 각종 전쟁사에 등장하는, 그리고 인도의 운명을 결정한 전쟁이었습니다. 결과는 영국군의 승리. 아사예 전투는 웰링턴이 수행한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두 번의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워털루 전투이고요. 이 전투의 승리로 웰즐리 형제들은 인도에서 대영제국의 크기를 4배로 확장시켰습니다. 이들의 성취에 영국은 환호했습니다. 웰링턴은 기사 작위를 받게 됩니다. 인도에서 9년을 보낸 뒤 웰링턴은 1805년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존재감이 커진 웰링턴이 이베리아 반도에 투입된 건 1808년 입니다. 그해 8월 웰링턴은 병력 1만3000명을 거느리고 포르투갈에 상륙했습니다. 비메이로에서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이듬해에는 사망한 존 무어 경의 뒤를 이어 이베리아 반도의 총 사령관에 임명됐습니다. 그의 휘하에는 2만1000명의 장병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8만병까지로 불어나게 됩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영국군은 한 때 나폴레옹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서는 바람에 크게 위축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이 돌아간 뒤에는 다시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프랑스군과의 대결은 전적으로 웰링턴이 이끌게 됩니다.
1810년 9월 웰링턴은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갖게 됩니다. 7만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는 프랑스 마세나 장군에 맞서 후퇴 작전을 벌이다, 부사쿠 인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이듬해까지 양측은 대치했는데 영국군은 군수품이 충분했지만, 프랑스군은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사기가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1811년 봄 마세나가 퇴각하자 웰링턴은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와 이듬해 알메이다 요새, 시우다드로드리고, 바다호스 국경 지역을 탈환했고, 1812년에는 마드리드 서북부 살라망카 전투, 1813년에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 비토리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게 됩니다. 웰링턴은 내친김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1814년 4월 툴루즈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 러시아의 소모전
나폴레옹은 인생을 통틀어 주요 전쟁에서 세 번 졌습니다. 러시아 대원정(1812)과 라이프치히 전투(1813), 워털루 전투(1815) 등입니다. 웰링턴이 맹활약한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프랑스군은 군사적으로 실패했지만 이는 부하들의 패배였고, 당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를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베리아에서의 패배를 사소하고 지엽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나선 건 그가 6년 전(1806년) 내린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 때문이었습니다. 이 칙령 때문에 온 유럽이 고통을 겪었는데, 남보다 앞서 반기를 든 것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러시아 등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특히 러시아를 정면으로 겨냥했습니다. 나폴레옹 눈에 프랑스의 최대 적은 영국인데, 그 영국은 러시아를 무릎꿇리면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쪽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나면 에스파냐는 즉시 몰락할 것이오.”
나폴레옹은 모든 유럽 대륙의 군사를 소집했습니다. 독일 드레스덴으로 가서 독일의 모든 왕족을 소집했습니다. 장인인 오스트리아 프란츠 황제까지 불러들였습니다. (참고로 나폴레옹은 애를 낳지 못한 조강지처 조제핀과 이혼한 뒤 1810년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루이즈와 재혼했습니다.) 프로이센 왕은 늦게 왔는데, 러시아와 영국이 말렸지만 나폴레옹의 소집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총 70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모였습니다. 오스트리아가 3만명, 프로이센이 2만명을 내놓은 것을 비롯해 이탈리아와 바이에른, 작센, 폴란드 등도 지원에 나섰습니다. 유럽 각국 징집군이 32만명, 프랑스군이 35만6000명이었습니다.
▲Napoleon watching the fire of Moscow in September 1812, by Adam Albrecht (1841)
원정은 그해 여름 시작됐습니다. 폴란드와 러시아 국경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 원정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쟁 천재 나폴레옹은 곧 당황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불꽃같은 전투를 원했는데 러시아군은 간혹 시시한 싸움을 걸어올 뿐 계속 물러나기만 했습니다. 러시아 민간인들은 도망을 치면서 식량을 모두 가져가거나 남는 건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9월 15일 모스크바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텅빈 유령 도시 같았습니다. 나폴레옹은 크렘린에서 알렉산드르 황제의 항복 사절을 기다렸지만 상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16일에는 모스크바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러시아의 작전은 한마디로 초토화 작전이었습니다. 게릴라전으로 원정군의 힘을 빼고 계속 뒤로 빠지면서 상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소모전을 펼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나폴레옹에건 악몽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원정군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여름에 출발한 원정군은 러시아의 추위를 이겨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먹을 것도 다 떨어졌습니다.
10월 19일 나폴레옹은 15일분의 식량만 가지고 모스크바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수 많은 병사들이 병이나 굶주림, 추위에 사망했습니다. 곳곳에서 러시아 복병을 만나 전사자가 속출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자랑스런 ‘그랑드 아르메’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나폴레옹은 1812년 12월 18일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아우어슈타트까지는 썰매로, 그 다음은 마차를 탔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책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스크바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점만 빼고요.
◇ 라이프치히
이제 유럽은 나폴레옹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습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 불패(不敗)를 자랑하는 전쟁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주요국들은 6차 대불동맹으로 다시 뭉쳤습니다. 영국은 여전히 재정 지원을 담당했습니다. 스페인도 새로 가담했습니다. 나폴레옹도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1813년 들어 5개월 만에 24만명의 병력을 모았습니다.
제국민전쟁으로 불리는 라이프치히 전투는 10월 15일 시작됐습니다. 프랑스의 총 병력은 19만명 정도였고, 연합군은 거의 33만명에 달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연합군의 전열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격전 끝에 궁지에 몰리게 됐습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전혀 발휘되지 못했습니다.
18일 저녁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퇴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두번째 참패를 겪게 됐습니다.
연합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 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맹렬하게 방어전을 이끌었습니다. 1814년 1월 브리엔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쳤습니다. 2월에는 샹포베르에서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을 공격했습니다. 5일간 격전 끝에 적군을 모두 분산시켜버렸습니다. 이어 2월 18일에는 몽트로에서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큰 흐름은 뒤집지 못했습니다. 3월말 파리에서 15km 남쪽 쥐비지에 있던 나폴레옹은 파리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자 “비겁하게 항복이라니! 내가 4시간만 일찍 도착했어도 모두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결국 4월 6일 프랑스 황제에서 물러난다는 선언문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당시엔 패장에 대한 너그러움이 존재했나 봅니다. 동맹국은 나폴레옹을 엘바 섬의 영주로 임명한 뒤 프랑스 정부로부터 매년 200만 프랑의 연금을 받을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4월 12일 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목표가 없는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로 했습니다. 러시아 원정에서 후퇴할 때 외과의사 이반에게서 독약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독약을 마셨습니다. 새벽 3시 그는 심한 구역질을 했습니다. 극도의 고통이 지나간 후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났습니다. 오전 11시쯤에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중얼거렸습니다. “내 침대에 누운 채 죽기도 힘드는구나. 삶과 전쟁 사이에 별 차이도 없는 마당에.”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죽음의 신은 내가 침대에서 죽는 것보다 전쟁터에서 죽기를 더 바라므로 살아야겠다.” 하지만 이제 그에겐 단 한번 타오를 마지막 불꽃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28] 마지막 ‘군사 천재’로 불린 사나이의 쓸쓸한 퇴장…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1815년 3월 7일 이제르강과 드라크강이 합류하는 알프스 기슭의 프랑스 남동부 도시 그르노블에 돌연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남쪽에서 한 무리의 무장 세력이 도시를 향해 거침없이 행군해 오고 있었고, 이를 막으려는 듯 프랑스 제5연대가 외곽에 전투대형을 갖췄습니다.
한 남자가 말에서 내리더니 제5연대 병사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모든 사람들 눈길이 이 남자에게 쏠렸습니다. 그는 이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라도 지금 방아쇠를 당긴다면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의 황제를 죽여라. 너희가 원한다면.”
그 순간 울려퍼진 것은 총소리가 아닌 병사들의 환호성이었습니다. “황제 만세!” “황제 만세!” 병사들은 달려가 그의 옷을 만지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 100일 천하
나폴레옹,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한 뒤 프랑스 황제에서 물러나 지중해 엘바섬에 유배됐던 그는 이렇게 유럽에 자신의 귀환을 알렸습니다. 열흘 전인 2월 26일 탈출에 성공, 이틀 뒤 프랑스 남부 해안에 상륙했고 파죽지세로 파리를 향해 북진했습니다. 3월 10일에 리옹에 도착했고, 20일에는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100일 천하의 시작이었습니다.
▲Napoleon's Return from Elba, by Charles de Steuben, 1818
돌아온 황제의 마차가 도착한다는 소문이 파리에 퍼지자 튈르리 궁 앞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곧 다시 병력을 소집했습니다. 6월 초엔 병력 규모가 20만명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문제는 지휘관과 참모들이었습니다. 그에겐 더 이상 능력있는 부하 지휘관들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치명적 약점은 최후의 전투인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됩니다. 전투가 그의 뜻대로 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도 발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영국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은 3월 17일 각각 군인 15만명을 동원해 나폴레옹에 맞서기로 결의했습니다. 웰링턴은 벨기에에서 영국군과 네덜란드군, 벨기에군 등을 모아 군대를 정비했습니다. 프로이센도 움직였고, 오스트리아도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처음엔 싸울 생각이 없었던 듯 합니다. 그는 유럽 각국에 평화와 공존을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폴레옹을 겪을대로 겪은 유럽은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이제 양측의 대결은 ‘필연’으로 치달았습니다. 두 달여만에 군대를 재편한 나폴레옹은 곧 전투가 벌어질 것임을 공개적으로 알렸습니다. 6월 11일 그는 하원 의원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오늘 밤 나는 선발대로 떠납니다. 적의 움직임을 보건대 내가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국을 지키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는 모든 병력을 데리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왕당파 등 국내 반란이나 소요에도 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워털루… 나폴레옹의 잇따른 실수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나폴레옹은 병력 규모에서 열세였습니다. 나폴레옹군은 보병 5만명, 기마병 1만5000명 등을 포함해 모두 7만2000여명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연합군은 약 12만명이었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하노버 등에서 온 병력을 지휘하는 웰링턴 휘하에 6만8000명이 있었고, 프로이센의 블뤼허는 5만명을 이끌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 부대 25만명이 라인강 중류에 집결해 있었고, 라인 강 상류에는 2만5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이 대기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렸습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간단하고 명확했습니다. 웰링턴 부대와 블뤼허 부대 사이로 치고 들어가 두 부대를 갈라놓은 후 각개격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기려면 일사분란하고 빠르고 정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이 된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그의 부대가 보여준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몇 번의 결정적 순간에 나폴레옹은 되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잇따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운명이 나를 버렸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결정적인 성공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과감히 시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적절한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①첫번째 실수 : 브뤼셀 무도회 때 기습 기회 놓쳐
6월 15일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은 부대를 주둔시킨 뒤 저녁 때 리슈몽 공작부인이 개최한 무도회에 참가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철의 공작’ 웰링턴은 사교계 일을 아주 중요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날 밤 그의 군대는 전투 준비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이미 벨기에 국경을 넘은 상황이었습니다.
완벽한 기습 공격의 기회를 잡은 것이죠. 만약 나폴레옹이 웰링턴을 기습했다면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웰링턴 부대는 일부 프랑스군과 조우했지만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채 대격전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②두번째 실수 : 전초전 승리 후 프로이센군 추격 안해
16일 전초전 성격의 전투가 리니에서 벌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날 프로이센의 블뤼허 부대를 만났습니다. 블뤼허에겐 악몽같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영국군과 합류하기 전에 나폴레옹 군대를 만났으니까요. 반면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을 따로 따로 상대하겠다는 나폴레옹으로선 쾌재를 부를만 했습니다. 결과는 역시 예측 그대로였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완승. 심지어 프로이센의 사령관 블뤼허는 허벅지에 부상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다음 순간에 발생했습니다. 패주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해 완전히 격멸했어야 했는데 나폴레옹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프로이센군이 전의를 상실해 전장(戰場)에서 물러날 것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이 부분을 나폴레옹의 가장 뼈아픈 실책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후배 몽고메리 장군은 “나폴레옹은 리니 전투 후 전군을 이끌고 프로이센군을 추격해 한동안 효과적인 전투력을 지니고 전장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블뤼허 군대를 섬멸해버렸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라면 불과 이틀 후에 블뤼허가 워털루로 돌아와 웰링턴과 합세, 나폴레옹을 참패로 몰아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까요.
③세번째 실수 : 병력 분산
나폴레옹은 주력을 이끌고 본인이 직접 블뤼허를 추격하진 않았지만, 뒤늦게 그루쉬 원수에게 병력 3만명을 주며 블뤼허를 쫓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오판이었습니다. 총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40% 가까운 전력을 떼어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본 게임인 워털루 전투 때 나폴레옹에게 이 병력이 있었다면 웰링턴은 절대로 나폴레옹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루쉬는 결국 이틀 동안 들판만 헤매다 나폴레옹이 전투에서 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④네번째 실수 : 망설임, 또 망설임
6월 18일. 밤새 많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땅이 온통 질퍽거렸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이 늦춰졌습니다. 원래는 새벽에 작전을 개시한다고 했는데, 오전 9시로 연기됐습니다. 장병과 대포가 진창 속에 빠질 것을 우려해 해가 나고 땅이 좀 더 굳어질 때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9시가 돼도 공격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오전 11시 30분이 돼서야 드디어 공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초 계획보다 5~6시간 이상 늦춰진 것이었습니다. 이 ‘잃어버린 시간’은 나폴레옹에겐 큰 아쉬움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격을 연기함으로써 블뤼허가 도착할 시간을 벌어준 꼴이 됐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한번 결정한 작전은 절대 변경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날은 왜 그랬을까요.
▲The Battle of Waterloo, 1815
전투는 치열한 공방을 거듭했습니다. 중간에 나폴레옹이 승기를 잡은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나폴레옹은 핵심 부대 투입을 망설였습니다. 사실 웰링턴은 나폴레옹 만큼 풍부하고 과감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항상 확실한 방어망을 구축해 아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전한 뒤 적 전투력이 떨어진 때를 노려 공격을 가하는 식이었습니다. 워털루 전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공격을, 워털루는 수비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후 3시쯤 몸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네 원수가 약간의 승기가 보이자 전체 기병대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고, 이 기병대가 포병과 육군 지원없이 돌격하는 바람에 역공을 당해 궤멸하고 말았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프랑스군은 웰링턴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마침 워털루에 도착한 프로이센군이 연합 공격에 나섬에 따라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됩니다. 밤10시쯤 웰링턴과 블뤼허가 만나 향후 추격전은 지친 영국군 대신 체력이 충분한 프로이센군이 맡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워털루 전투는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정말 운좋게 승리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계속되는 여러 실수 중 단 하나만이라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날의 승패는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전투에 대해 연합군이 “간발의 차로 간신히” 이겼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전투에서 이겼어야 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반면 승리한 웰링턴은 “나폴레옹은… 구식으로, 종대 대형으로 진격했고, 구식으로 패주했다”고 평가했습니다.
◇ 세인트헬레나
1815년 8월 7일 나폴레옹은 “내 운명을 완성하겠다”며 영국의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0월 15일 아프리카 대륙에서 1870km 떨어진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섬 생활에 대해선 많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820년 7월 들어 나폴레옹의 병세가 완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위암이었다는 말도 있고, 간염의 일종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10월 4일에는 이웃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거의 실신에 가까운 상태로 돌아왔고 며칠 후에는 뜨거운 욕조에서 나오다 의식을 잃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는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침대가 내게 아주 달콤한 공간이 되었소. 이 세상의 어떤 보물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오.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가. 내가 얼마나 쇠락했는지.”
1821년 4월 13일 그는 긴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그는 옛 병사들까지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저축한 2억 프랑을 남기겠다고 했습니다. 이 돈은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5월 4일 밤부터 맥박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는 혼수 상태에 빠졌고 오전 5시 그의 호흡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Napoleon on Saint Helena, watercolor by Franz Josef Sandmann, c. 1820
세인트헬레나에서 인생을 되돌아본 나폴레옹. 그는 워털루 전투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요. 그는 “패자의 명예도 타격받지 않았고, 승자의 명예도 드높아지지 않은 이상한 승리였다. 패자는 그 파괴를 뛰어넘어 기억될 것이고, 승자는 어쩌면 잊힐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나폴레옹의 예측이100% 맞아 떨어진 건 아닙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이긴 덕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그는 계속 정치에 몸담고 있다가 1828~1830년 영국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웰링턴은 그저 대영제국 건설에 기여한 영국의 한 장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나폴레옹은 웰링턴이 없었어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이는 나폴레옹 사후 세상이 보인 반응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연구나 평전, 에세이는 무려 60만 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후배 군인들은 거의 존경과 흠모 수준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영국의 2차 대전 영웅인 몽고메리 장군은 “그렇게 뛰어난 한 명의 군사적 천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세상에는 그러한 천재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상에 군인이 존재하는 한 그는 가장 뛰어난 장군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걸 미리 예견했던 것일까요. 그는 세인트헬레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 그리곤 자신의 삶에 대해 한마디 던졌지요.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29] ‘왕관의 첫째 보석’ 인도, 제국의 손길이 그곳에 뻗치다
1600년 12월 31일은 인도에겐 통한의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동인도에 대한 15년짜리 무역 독점권을 ‘동인도와 무역하는 런던 상인들의 회사’에 부여했습니다. 대영제국 전 역사를 통틀어 영국이 가장 애지중지했던 최고의 보물인 인도를 손에 얻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동인도회사’가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독점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상품을 몰수해 국왕과 동인도회사가 반반씩 나눠갖기로 했습니다. 이 무역독점은 1813년까지 계속됐습니다.
4번째 편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영국 여왕의 왕관에는 105.6 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습니다. 코이누르(Koh-i-Noor, 페르시아어로 ‘빛의 산’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이 인도산 다이아몬드는 대영제국의 빛나는 영광을 보여주는 동시에 수백년간 외세의 식민지로 살아야했던 인도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Coronation portrait of Elizabeth II with Philip, 1953
◇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사실 동양에 대한 호기심, 더 나아가 개척에 가장 먼저 나선 선구자는 포르투갈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영국보다 100년이나 앞서 동양에 진출했습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 루트를 연 이후 포르투갈은 무역과 정복을 위해 아시아에 적극 진출했습니다.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의 고아를 점령, 최초의 상관을 설치했습니다. 이어 말라카(1511)와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1515) 등에 요새를 구축하는 등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소팔라와 일본의 나가사키 사이에 40개 이상의 요새와 거류지를 구축했습니다. 이런 거점을 바탕으로 동양의 향료를 유럽에 팔아 ‘떼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기본적으로 국력이 센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인구가 150만명 안팎에 불과한 작은 나라였으니까요. 후발 주자인 네덜란드와 영국에게 추격을 허용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네덜란드의 경우 동인도회사 설립은 영국보다 2년 늦었지만(1602년) 본격적인 동양 진출은 오히려 영국을 앞섰습니다. 질과 양에서도 우세했습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이미 1598년에 22척 이상의 상선을 동양으로 보냈습니다. 이 배들은 동양의 향료를 가득싣고 귀국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발족 당시 자본금이 54만 파운드로 영국 동인도회사(3만 파운드)를 압도했습니다. 1610년까지 출항한 배는 네덜란드가 60척, 영국은 17척이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자바와 수마트라, 몰루카 제도 등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이곳에 먼저 진출해있던 포르투갈로부터 항구와 거류지 등을 잇따라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인도를 제외한 지역에서 포르투갈이 세력을 그나마 유지한 곳은 중국의 마카오와 인도네시아의 순다 제도 정도였습니다. 포르투갈은 이후 브라질 쪽으로 눈을 돌렸고, 브라질은 포르투갈 최대의 식민지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모습.
영국도 네덜란드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은 몰루카 제도의 향료 거래에 끼고 싶었지만 다른 세력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네덜란드의 완력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두 나라는 협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1613년 런던, 1615년 헤이그에서 협상을 했고, 이어 1619년에는 타협안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자바의 후추는 반반씩 나누고, 반다 제도와 암보이나, 몰루카 제도 등의 정향과 육두구는 네덜란드가 3분의 2, 영국이 3분의 1을 갖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1623년 암보이나 학살 사건이 발생, 네덜란드가 재판없이 영국인 10명, 일본인 9명, 포르투갈 1명 등을 공개 처형했습니다. 영국은 분노했지만 당시엔 동남아 지역에서 네덜란드를 보복을 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동남아의 향료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했고, 영국은 자바와 몰루카 등에서 손을 떼게 됐습니다. 17세기엔 향료가 당시 유럽의 최대의 수익 상품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요. 동남아에서 물러난 영국이 그 대안으로 인도에 눈을 돌려 온 힘을 쏟기 시작했고, 이것이 대영제국의 가장 큰 기둥이 될 줄 말이죠.
◇ 드레이크와 무적함대
포르투갈을 무척 부러워했던 영국은 해외 개척(또는 국가 공인 해적질)의 최대 후원자이자 벤처 투자가였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먼바다 너머’에 대한 탐험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1577년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여왕의 명에 따라 해외 원정에 나섰습니다. 당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게만 알려져 있던 ‘그곳’을 찾아 나선 드레이크는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태평양을 건너 마침내 향료의 본고장 동남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향료의 섬들’로 알려진 ‘몰루카 제도’에서 리넨과 금·은을 주고 향료를 대량으로 구입, 귀국했는데요. 드레이크의 탐험에 돈을 댔던 투자자들은 무려 5000%나 되는 수익을 거뒀다고 합니다. 이 소식에 영국인들이 얼마나 열광했을지 상상이 가네요.
역설적인 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도 영국의 동인도 개척에 적잖은 공을 세웠다는 점입니다.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는 ‘칼레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하는데요. 이때 영국이 노획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배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화물들이 영국의 동양 진출에 요긴하게 사용됐다고 합니다.
1592년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인 월터 롤리 경 등이 포획한 포르투갈의 무장 상선 또한 보물단지였습니다. 이 배는 당시 영국에선 한번도 보지 못한 대형 선박이었는데 그 안에서 각종 보석, 향료와 함께 인도·중국·일본과의 무역에 대한 정보가 담긴 ‘소중한’ 책자가 발견됐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해외 진출을 원하는 런던 상인들의 욕구는 화산처럼 폭발했습니다. 그들은 모임을 갖고 투자금을 모으는 한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해외 원정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호소했습니다. 1599년 1차 해외 개척 청원에 실패한 런던 상인들은 결국 그해 말 여왕에게서 동인도 무역에 대한 특허를 획득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 3대 공장
영국 동인도회사가 1차 항해단을 출발시킨 것은 무역독점권을 획득한지 2개월 만인 1601년 2월이었습니다. 4척으로 구성된 항해단은 4개월 항해 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아체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수마트라와 자바 등에서 향료를 사들인 뒤 귀국했는데 항해는 성공했지만 비즈니스는 변변찮은 수준이었습니다. 후추가 빨리 팔리지 않아 출자자들도 현물 배당을 받았다고 합니다. 2차 항해단은 1604년 3월에 출발했는데, 이번에는 자바섬과 몰루카 제도 등에서 사들인 향료 판매가 성공해 투자자들이 출자금 이외에 95%의 수익을 챙겼다고 합니다.
▲Ships in Bombay Harbour, c. 1731
영국이 인도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1608년이었습니다. 3차 항해단의 헥터호가 그해 8월 24일 인도 동쪽 뭄바이(옛 봄베이) 위쪽에 있는 수라트 앞바다에 닻을 내렸습니다. 이 배의 선장 호킨스는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라에 도착해 자한기르 황제를 알현하고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의 친서를 봉정했습니다. 이후 17세기 내내 영국은 프로투갈의 방해를 뚫고 인도의 곳곳에 무역 거점을 마련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포르투갈은 1610년대에 인도의 고아와 수라트 지역에서 영국의 인도 진입을 무력으로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613년 동인도회사는 수라트에 첫 상관을 설치했습니다. 인근 지역 상관까지 통괄하면서 최초의 프레지던시(프레지던트가 있는 곳)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대기근이 휩쓸고, 무굴제국의 강력한 대항 세력인 마라타족이 잇따라 침입하면서 수라트 상관은 쇠퇴하게 됩니다.
수라트에 이어 3곳의 무역 중심지가 융성하게 됩니다. 영국인들은 요새화된 상관이 있고 프레지덴시로 성장한 이곳을 ‘공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첫째 공장은 인도 남동 해안의 코로만델 해안에 세워진 ‘성 조지’ 요새였습니다. 동인도회사가 1630년에 획득한 부지 위에 건설된 이 요새는 나중에 첸나이(옛 마드라스)로 성장하게 됩니다.
둘째는 인도 서부의 중심도시 뭄바이 입니다. 이 곳은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정략 결혼으로 얻은 곳입니다. 찰스 2세는 1661년 포르투갈 알폰소 6세의 딸 캐서린과 정략결혼을 했는데요. 이때 포르투갈이 캐서린의 지참금 명목으로 뭄바이를 찰스 2세에게 선물했습니다. 찰스 2세는 1668년 동인도회사로부터 5만 파운드의 융자와 매년 5파운드의 지대를 받는 조건으로 뭄바이를 동인도 회사에 양도합니다. 이후 뭄바이는 쇠퇴한 수라트의 바통을 이어 받아 1687년 프레지던시로 승격하게 됩니다.
셋째는 1990년 인도 북동쪽 벵골 지역 후글리 강 기슭에 세운 수타누티에 요새입니다. 이 요새는 나중에 다른 두 촌락과 합쳐져 콜카타라고 불리는데, 1699년 콜카타 상관은 프레지던시로 격상됩니다. 원래 벵골 지역은 무굴제국의 영향력이 커서 외국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가 뿌리를 내린 뒤 빠르게 성장했고, 특히 면포와 명주, 쪽, 초석 등 특산품이 많아 곧 인도무역의 최대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 후발주자 프랑스
프랑스는 아시아 무역에 뒤늦게 뛰어들었습니다. 루이 14세 때인 1664년 콜베르가 자본금 60만 파운드짜리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1666년 수라트에 상관을 세운 뒤, 인도 동부 해안에 있는 마술리파탐(1669), 퐁디셰리(1673), 샹데르나고르(1674) 등에 상관을 세웠습니다. 특히 퐁디셰리는 현지인 4만명을 모아 면직물 공업을 발전시키는 등 인도 내 최대 프랑스 영역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곳은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로 일컬어질 정도였으며, 지금도 프랑스 색채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프랑스가 빠르게 여러 상관을 만들 수 있었던 건 당시 인도 황제인 아우랑제브가 영국을 싫어해 경쟁자인 프랑스에 특혜를 준 점도 작용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한때 자금난으로 수라트, 마술리파탐 등의 상관을 포기했다가 1720년대 들어 다시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아시아 무역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인도와의 무역이 중심이었습니다. 무역량은 1720년대 영국의 절반 정도였는데, 1740년대 초에 이르면 영국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은 불가피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플라시 전투(1757년 6월)
1700년대 중반까지 동인도회사는 주로 무역에만 올인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적으로 바꾼 전환점이 바로 1757년 6월 발생한 플라시 전투입니다.
당시 전 세계는 7년 전쟁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유럽에서는 포메라니아 전쟁이, 북미에선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인도에선 영국이 벵골의 호족과 프랑스 연합 세력을 상대로 한판 승부를 벌였습니다.
▲플라시 전투의 클라이브
벵골의 태수 시라지-웃-다울라는 영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영국 거류지에 잘 초대하지 않고, 영국이 프랑스만큼 훌륭한 선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고 합니다.
프랑스와 손을 잡은 시라지-웃-다울라는 1756년 6월 전격적으로 콜카타를 공략해 영국인들을 몰아냈습니다. 그가 승리의 기분을 다 느끼기도 전에 영국이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10월 첸나이에서 동인도회사의 부대가 출병을 했습니다. 포트 세인트 데이비드의 부지사인 로버트 클라이브가 병력 2400여명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고, 어렵지 않게 콜카타를 수복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여세를 몰아 시라지-웃-다울라를 압박했습니다. 최후의 전투는 이듬해인 1757년 6월 콜카타 북쪽 80마일 지점에 있는 플라시에서 벌어졌습니다.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군은 3000명, 태수쪽 병력은 5만명에 달했습니다. 엄청난 전투가 예상됐지만 실제로는 아주 시시하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시라지-웃-다울라는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완패를 당했습니다. 전사자도 영국이 7명, 태수측이 16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시라지-웃-다울라는 포로가 된 뒤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사실 영국군의 승리는 태수쪽 부대의 내부 분열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안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클라이브는 태수쪽 군대의 부장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매수했고, 실제로 전투가 시작되자 태수쪽 군인들이 갑자기 퇴각하면서 전투는 그대로 종결되고 말았습니다.
클라이브는 이런 상대쪽 상황을 이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764년 본국에 있는 동인도회사 이사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이 풍요롭고 번성하는 왕국을 유럽인 2000명 정도의 아주 작은 병력으로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인도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태하고 사치스럽고 무지하며 겁이 많다. 그들은 모든 것을 군대보다는 배반을 통해 얻으려고 한다.”
누가 인도의 주인이 될 것인가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경쟁도 이 전쟁으로 판가름이 나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 3차례 맞붙었는데, 마지막 싸움이 바로 7년 전쟁 때였습니다. 벵골 태수를 굴복시킨 동인도회사는 1760년 왕디와슈 전투에서 라리 백작의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이듬해인 1761년에는 프랑스의 최대 거점인 퐁디셰리 함락에 성공합니다. 퐁디셰리의 함락은 인도에서 프랑스 식민지의 종언을 뜻했습니다. 한편으론 영국의 인도 진출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합니다.
◇ 벵골의 지배자
플라시 전투의 영웅 클라이브는 잠시 귀국했다가 1758년 벵골 지사로 인도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제 껍데기만 남은 무굴제국의 황제 샤 알람 2세를 만나 ‘알라하바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동인도회사가 벵골과 인근의 비하르·오리사 등 지역에 대한 징세권을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징세권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해당 지역의 실질적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역회사였던 동인도회사가 이제 벵골의 지배자가 됐습니다. 동시에 “17세기 이래 회사의 존재를 지배해 온 상업 원칙이 무너졌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세금을 걷는 것이 직물 거래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지가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입 덕분에 유럽인들이 지휘하고 인도인들로 병력을 구성하는 한편, 고국에서 직접 파견한 육군 연대로 보완하는 ‘제국의 군대’ 형태가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한때는 해적이었고, 그 다음 상인이었던 영국인들은 이제 해외에서 수백만 사람들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30] 영국軍 승리를 이끈 치명적인 비밀 병기는 그들의 ‘군기’였다
개전 한 달이 지난 우크라이나 전쟁이 결정적인 기류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어쩌면 러시아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실질적인’ 패배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종전과 평화까지는 갈 길이 멀긴 하겠지만 “러시아군이 어떤 식으로든 종국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함락시킬 것”이란 예상이 깨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진격은 곳곳에서 막히고 있고, 일부 지역에선 우크라이나군이 점령당했던 요충지들을 탈환하고 있다는 외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를 함락시킬 가능성은 현재로선 많이 낮아진 듯 합니다. 러시아의 키이우 공략은 북서쪽과 북동쪽, 두 축선에서 진행됐습니다. 이 양쪽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YONHAP PHOTO-1771> 우크라 수도 외곽에 널브러진 러시아군 탱크 (키이우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병사가 27일(현지시간) 수도 키이우(키예프) 북서쪽 외곽 길가에 널브러진 러시아군 탱크 잔해 곁을 걸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 대변인은 키이우 주변 지역에서 러시아군 일부를 35∼70㎞ 이상 몰아냈다고 밝혔다. 2022.3.28 sungok@yna.co.kr/2022-03-28 07:31:31/ <저작권자 ⓒ 1980-202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 첨단무기라는 함정
북서쪽 전선의 경우, 러시아군은 개전 초기 이르핀·부차·호스토멜 지역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키이우 도심에서 20~25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러시아군은 키이우를 바로 코 앞에 둔 이곳에서 몇 주째 거의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군이 이르핀의 대부분 마을을 되찾았고, 안토노프 국제공항이 있는 호스토멜쪽으로 러시아군을 밀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50km 거리에 있는 마카리우도 우크라이나군이 수복했다고 하는데, 이럴 경우 이르핀·부차·호스토멜 지역에 있는 러시아 주력군이 포위 공격을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됩니다.
북동쪽 전선에서도 러시아군이 뒷걸음질치는 상황입니다. 키이우 전방 20~30km까지 진격했던 러시아군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뒤로 25~35km나 후퇴했다는 소식입니다. 북동쪽 전선의 경우 구체적인 도시나 마을은 외신에 잘 나오지 않고 있지만, 미국의 CNN과 영국의 BBC·가디언 등이 자국 고위 정부 또는 군 관계자를 인용해 러시아군의 후퇴 상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북동부와 남부 등 다른 지역에서도 우크라이나군의 환호성이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이 가장 먼저 점령했던 남부 해안도시 헤르손에선 최근 양측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시청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다시 걸리는가 하면, 공항에 주둔했던 러시아 헬기가 철수했다고 합니다. 우크리아나의 제2 도시인 북동부 하르키우에서도 러시아군은 도심쪽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러시아 국경에서 30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이죠.
이와 함께 남동 해안 지역의 최대 전장(戰場)인 마리우폴에서도 우크라이나군의 저항이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친러 반군이 장악한 돈바스 지역과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 중간에 있는 곳인데, 러시아는 돈바스와 크림반도를 연결하기 위해서 이 곳을 필사적으로 점령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곳 인근에서 탱크 등 러시아군 무기와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군함이 우크라이나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우폴의 경우 결국에는 러시아군에 함락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과 분리돼 완전 봉쇄된 채 몇주째 러시아군의 집중 포위공격을 받아 도시의 90% 가까이가 폐허가 됐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도시는 러시아군의 점령 위기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다만, 마리우폴은 조만간 함락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러시아도 이런 상황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5일 러시아의 고위 군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첫번째 작전 단계는 끝났다. 이젠 동남부 돈바스 지역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러시아군 작전이 대부분 지역에서 실패했고, 그나마 점령 가능성이 있는 마리우폴 등 동남부 지역 전선에 집중하겠다는 변명처럼 들립니다.
한편, 러시아의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쇼이구가 최근 2주간 자취를 감췄다가 이에 대한 의문이 커지자 방송 화면에 몇 초간 등장했었는데요. 우크라이나와 외신들은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초기 작전 실패 때문에 푸틴이 그를 엄청나게 질책했고, 이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무려 1250발 이상의 미사일을 쐈다고 합니다. 러시아 공군은 매일 300회 이상 출격, 우크라이나 곳곳에 폭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실전에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최첨단 무기인 ‘킨잘’ 극초음속 미사일도 쏘고, 대량살상무기인 ‘열압력탄(진공폭탄)’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도 전쟁을 이기지 못하고 있네요.
병력 규모나 첨단 무기 수준, 국가 경제력 등 그 어떤 면을 봐서도 러시아의 압도적 완승으로 이미 결론났어야 할 전쟁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첨단 무기가 지배하는 현대전에서도 군인 수와 무기가 전쟁의 승리를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과거 역사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무굴제국과 마라타 동맹
무굴제국(1526~1857)은 이슬람 종교를 받아들인 몽고의 후예, 바부르가 델리에 세운 나라입니다. 무굴은 아라비아어로 몽고를 뜻한다고 합니다. 3대 악바르(재위 1556~1605년) 황제가 세력을 크게 넓혔고, 6대 황제 아우랑제브(1658~1707) 때는 인도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 원정 도중 사망하자 후계자들이 왕위를 놓고 갈등을 빚으면서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18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무굴은 이름만 남은 껍데기에 불과한 신세가 되고, 대신 중북부엔 마라타 동맹, 중남부엔 하이데라바드 왕국, 남부엔 마이소르 왕국 등이 들어서 군웅할거 시대를 맞게 됩니다. 벵골 등에도 지방 권력이 활개를 쳤습니다. 이중 벵골 지역은 지난주 편지에서 설명했듯이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1757년 플라시 전투를 통해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지배자로 등극했습니다.
▲1800년 당시 인도.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영국 동인도회사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
무굴에 이어 인도의 주도권을 쥔 세력은 마라타 동맹(1674~1818)입니다. 무굴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점점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화함에 따라 인도 중서부 마하라슈트라 서해안 지역에 살던 힌두교 세력의 반발이 거세졌습니다. ‘마라티어’를 말하는 이들 세력은 1674년 지역 토후였던 시바지 본슬레를 군주(차트라파티)로 세우고 마라타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무굴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위세를 떨치던 시대였기 때문에 마라타는 크게 기를 펴지는 못했습니다.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제국이 내분에 휩싸이고 세력이 약화되면서 마라타는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서게 됩니다. 18세기 중반이 되면 마라타는 무굴제국의 보호자를 자처할 정도가 됩니다.
한편, 웰링턴 장군의 지휘로 1799년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을 무너뜨린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제 인도 최대 세력인 마라타 동맹을 겨냥하게 됩니다. 벵골의 지배자를 넘어, 인도의 지배자로 올라서려 하는 참입니다. 당시 마라타 동맹은 인도의 75%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인도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세력이었습니다. 당시 마라타 동맹은 5대 세력의 동맹체였습니다.
◇ 아사예 전투 (1803)
영국과 마라타 동맹은 모두 3 차례 맞붙었습니다.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1775~1782)은 마라타 동맹 내 권력 다툼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얽혀들면서 발발했습니다. 당시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지도자라는 뜻)’라고 불리는 대재상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요. 이 페슈와 자리를 놓고 삼촌과 조카 집안이 살육전을 벌였습니다. 즉, 페슈와가 죽고 그 형이 후임이 됐는데 삼촌이 후임이 된 큰 조카를 살해하고 스스로 페슈와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큰 조카의 유복자가 태어나면서 주요 마라타 세력들이 그 아이를 옹립했고, 쫓겨난 삼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영토 일부를 떼주면서 군사 지원을 받는 ‘슈라트 조약(1775)’을 체결했습니다. 전투는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영국군 부대가 전멸하기도 하고, 마라타 부대가 패배하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무승부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1803~1805) 때에는 전쟁사에도 곧잘 등장하는 아사예 전투가 하이라이트입니다. 오늘은 군사 역사학자인 맥스 부트가 쓴 책 ‘전쟁이 만든 신세계(Made in War)’라는 책을 중심으로 아사예 전투를 들여다볼까 합니다. 아사예 전투를 시작으로 3년간 지속된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도 제1차 때와 마찬가지로 마라타 동맹 내 갈등과 분열이 원인이었습니다.
19세기 초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세력 이외에 홀카르, 신디아, 베라르, 가에크와드 등 모두 5대 세력이 주도했습니다. 이중 홀카르와 신디아가 가장 강력했고, 둘은 격하게 대립했습니다. 결국, 1802년 전투에서 ‘홀카르’가 ‘신디아’와 당시 페슈와인 바지 라오 2세 연합군을 패퇴시켰습니다. 그러자 바지 라오 2세가 영국의 동인도회사측에 자신이 페슈와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영국의 웰즐리 총독은 지금이 인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기 위해 마지막 장애물인 마라타 동맹을 무릎 꿇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웰즐리 총독은 당시 소장이 돼 있던 동생 아서 웰즐리(후에 웰링턴 공)에게 군사작전에 대한 전권을 부여했습니다. 웰링턴은 바지 라오 2세를 복귀시키기 위해 마라타 동맹의 수도 푸네로 진격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웰링턴은 아무런 저항없이 푸네를 점령했고, 바지 라오 2세는 페슈와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다른 마라타 세력이 반발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신디아와 베라르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투는 지금의 뭄바이에서 내륙으로 약 200km 떨어진 아사예에서 벌어졌습니다.
▲아사예 전투. 1803년
전투 때 영국측 병력은 9500명이었습니다. 2개 보병연대와 1개 기병연대를 중심으로 한 순수 영국군이 4500명, 마이소르 왕국의 인도병 5000명이었습니다. 대포는 17문이었습니다. 반면, 마라타측은 신디아와 베라르의 연합군으로 총 병력이 최소 5만명에 달했습니다. 이중 핵심은 유럽인들이 지휘관을 맡고 있는 1만명 규모의 보병이었습니다. 그 뒤에는 1만~2만명의 비정규 보병과 3만~4만명 정도의 비정규 기병이 있었습니다. 대포는 100문 이상이었습니다.
당초 웰링턴은 부하인 제임스 스티븐슨 대령과 각기 독자적인 작전을 벌이다 9월 24일 병력을 합쳐 총공격을 가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직전 예상보다 적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스티븐슨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독자적인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그는 영국군이 공격당할까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적이 후퇴해서 일전을 벌일 기회를 놓칠까봐 걱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날 전투는 실질적으론 영국군 4500명과 신디아·베라르군 1만명간의 대결이었습니다. 오후 3시 스코틀랜드 병사들로 구성된 제78보병연대가 “(영국군의) 취약한 대열에 죽음을 토해낸” 마라타군의 100여문 야전포를 향해 곧장 진격을 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막이 올랐습니다. 영국군은 규정대로 1분에 75보로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정지, 준비, 어깨총, 발사” “탕탕탕” “착검” 영국군의 진격에는 추호의 망설임이나 전열의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다른 쪽에선 영국군 피해가 컸습니다. 오른쪽 전선 최전선에 있던 중대 절반 규모의 선발대가 수천 발의 머스킷 총알과 수십 발의 포탄 집중 공격을 받아 전멸했습니다. 그러자 마라타군이 여세를 몰아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습니다. 급박한 상황이 되자 제74보병연대 병력이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해 마라타군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여기에 세포이(인도병) 부대도 합류하면서 마라타의 공세를 주춤해졌고, 곧 전세가 역전됐습니다. 이렇게 마라타의 1만명 주력은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다른 마라타 병력들은 왠일인지 전투에 거의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영국군 입장에서 보면 마라타의 싸움 방식은 이해 불가였습니다. 한 영국 장교는 “만약 그 수 많은 (주변에 있던 마라타) 기병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더라면 (이 전투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웰링턴은 나중에 “나의 모든 친구들을 잃었으니 사실 나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사예 전투는 대영제국과 인도의 운명을 좌우한 결정적인 장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후 3개월 동안 웰링턴은 마라타 군대의 패잔병을 쫓았고, 아르가움에서 또 한번 마라타 군대를 격퇴하고 가윌구르 요새를 점령하게 됩니다. 또 북쪽에서도 제럴드 레이크 장군이 지휘하는 또 다른 영국군이 마라타 군대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결국, 1803년 말 마라타 동맹은 엄청난 영토를 동인도회사에 넘기고 그 관리를 영국인에게 맡기는 조약에 사인을 하게 됩니다.
이후, 동인도회사 지배에 불만을 품은 마라타 동맹이 영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1817~1818)에 나서지만 결국 패함에 따라 마라타 동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대영제국은 인도의 거의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됩니다.
◇ 영국軍의 비밀 병기
아사예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자기들이 갖고 있던 것(17문)보다 훨씬 많은 100여문의 대포를 획득했습니다. 웰링턴은 이 대포들을 보면서 “우리가 써도 좋을 만큼 훌륭한” 대포였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마라타 정예병력은 한때 영국군에 복무했던 독일군 장교와 프랑스 출신 용병이 지휘를 맡았습니다. 이 정예병력은 유럽인들처럼 제복을 입었고, 최신 소총으로 무장을 했습니다. 또, 유럽인 지휘에 따라 현대식 훈련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아사예 전투 결과 영국군은 428명이 전사하고 1138명이 부상, 18명이 행방불명됐습니다. 이에 반해 마라타군은 사망 1200명을 포함해 최소 6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합니다.
마라타는 왜 졌을까요. 대포도 많고, 영국군처럼 소총도 보유했고, 병력도 많았는데 말이죠. 우선, 대표적인 이유로는 내분을 들 수 있습니다. 1차 전쟁 때도, 2차 전쟁 때도 마라타 동맹은 권력을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싸웠습니다. 그리고 외세(동인도회사)를 끌어들였습니다. 힘은 분산되고 여론은 분열됐습니다.
▲마라타 동맹의 실질적 통치자 '페슈와'였던 바지 라오 2세
영국측에는 인도인들로 구성된 병사들(세포이)도 많았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자기 나라를 빼앗기게 된 전투가 발생했는데, 그 전투에 자기들이 참전한 셈이지요. 아사예 전투에서도 영국측에 합류한 인도병이 전체(9500명)의 절반이 넘는 5000명에 달했습니다.
영국군이 소총을 더 많이 가졌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마라타군 중에선 소총을 갖춘 경우도 있었지만, 여전히 활과 화살 등으로 무장한 군인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장교와 하사관 수도 영국군이 우세했습니다. 영국군에는 장교가 27명 있었는데, 마라타군에는 유럽 장교 2명과 포르투갈 포수 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국군의 가장 큰 무기, 비밀병기는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영국군 자체였습니다. 영국군은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전술을 갖추고 있었고, 웰링턴을 중심으로 한 현대식 지휘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군인들은 마라타군보다 훨씬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맥스 부트는 ‘전쟁이 만든 신세계’에서 “아사예에서 영국 병사들은 무모할 정도로 싸웠던 반면, 마라타 정규군은 대포를 빼앗기자 힘없이 무너졌다”고 말했습니다. 마라타 군인들은 ‘능숙한 개인들의 집단’으로 싸울 뿐이지,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는 ‘응집된 부대’로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볼까요. 그렇다면 영국군처럼 현대적인 군대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국군 같은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마라타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맥스 부트는 “유럽 스타일로 전투를 하려면 유럽인이 되어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부대 구성과 무기, 훈련 만으로는 현대화된 군대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군대를 만들기 위해선 사회 전체를, 국민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일본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등 후발국의 지도자들은 이런 진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서구에 견줄만한 군사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단지 군대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2022.04.05
[31]인도兵, 영제국의 ‘전략적 중추’로 섰다
1863년 10월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에서 영국인 인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테오도르 2세 황제가 영국인 선교사 헨리 스턴 일행을 심하게 구타한 뒤 쇠사슬에 묶어 감옥에 가뒀습니다. 명목상으론 스턴이 아비시니아에 대해 쓴 책이 모욕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이유를 댔지만, 그 저변엔 테오도르 황제가 자국 내에서 여러 세력에게 도전을 받고 있는데도 영국이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다는 분노가 깔려 있었습니다. 테오도르 황제는 스턴 석방을 위해 영국이 1864년 파견한 대표단도 투옥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실수였음이 곧 밝혀지게 됩니다. 절정기를 향해 달리고 있던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인질 구출 작전을 명했습니다. 명령은 콜카타·첸나이 등과 함께 영국 동인도회사의 3대 프레지덴시 중 하나인 뭄바이에 하달됐습니다. 전 세계를 주름잡는 대영제국의 ‘신속대응군’이 출동할 차례입니다.

▲The Abyssinian Campaign, Ethiopia, 1868 Military camp at Zoula showing stores and horse lines in the foreground.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된 육군 중장 로버트 네이피어는 1867년 8월 작전에 필요한 부대 규모 관련 명세서를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인도) 원주민 기병 4개 연대, 원주민 보병 10개 연대, 영국 기병 1개 대대, 야전 및 기마 포병 3개 중대, 산악 기차 한 대, 140mm 박격포 1개 중대, 이중 가능하면 2문은 200mm로.”
이듬해 1월 홍해 연안에 도착한 원정군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영국과 인도 병사 1만 3000명, 운반과 잡노동에 투입될 민간인 부역자 2만6000명, 노새와 조랑말 1만3000마리, 낙타와 수소 7000마리, 당나귀 1000마리, 코끼리 44마리 …. 영국의 기술과 자본, 설계, 조직에 인도의 노동력이 결합한 병참의 ‘대영제국식’ 모델이었습니다.
테오도르 황제는 외부에서 오는 군대가 640km나 되는 척박하고 험난한 길을 뚫고 아비시니아의 수도 막달라까지 올 수 있을거라 생각도 못했지만, 영국·인도 부대는 어느새 코 앞까지 진격해 왔습니다.
1868년 5월 9일 불과 2시간 밖에 걸리지 않은 전투에서 대영제국의 군대는 상대를 완전히 박살냈습니다. 아비시니아군은 7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반면, 원정군 인명피해는 20명 부상이 전부였습니다. (이중 2명은 나중에 사망) 원정군은 여세를 몰아 나흘 뒤 아비시니아의 수도 막달라를 포위 공격했고, 테오도르 황제는 생포보다는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이 원정은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불과 9년 전 인도에서 영국 지배에 반대하는 거대한 항쟁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 의미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됩니다.
◇ 세포이
인도인 병사, 즉 세포이(sepoy)는 페르시아 말로 병사를 뜻하는 ‘시파이(sipahi)’에서 유래했습니다. 무굴제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 포르투갈 상관들이 고용한 병사들을 모두 세포이라고 불렀습니다. 흔히 세포이라고 하면 영국 동인도회사를 떠올리는데요.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전역을 통치하는 ‘지배자’에 등극했고, 동인도회사에 복무하는 세포이가 무척 많았기에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A Mughal sepoy, under the command of Mirza Najaf Khan.
동인도회사가 인도 곳곳에 공격적인 진출을 거듭하면서 첸나이, 뭄바이, 콜카타 등 대형 상관들은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춘 요새로 변신했습니다. 포르투갈, 프랑스 등 유럽 경쟁자들과도 싸워야 했고, 무굴제국이 쇠약해지면서 인도 각 지방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호족 세력과도 겨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인들만으로 군대를 편성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유럽과 북미 등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대영제국 입장에서 인도에만 대규모 병력을 보낼 수 없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동인도 회사는 고육지책으로 인도 대륙의 전사 계급, 즉 남부의 텔루구족 농민들, 서부의 쿤비스족, 중부 갠지스강 유역의 라지푸트족과 브라만 계급 등에서 자체 병력을 모집했습니다. 출신 종족들도 다양했고, 이들의 종교도 다양했습니다. 힌두교도 있었고, 이슬람교도 있었으며, 시크교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영국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세포이를 현대식으로 훈련시키고, 제복을 입히고, 머스킷 소총을 지급했습니다. 물론 장교와 지휘관은 영국인들로 했습니다.
세포이는 곧 인도 주둔 영국군의 중추로 자리잡았습니다. 1881년 인도에 주둔한 영국 육군은 영국인 병력 6만9647명과 원주민(세포이) 병력 12만5000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영국 본토에서는 영국인 군대와 아일랜드 군대가 각각 6만5809명, 2만5353명이었다고 합니다. 즉, 당시 대영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총 병력 28만5809명 중 인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이 19만4647명으로 전체의 68%를 차지한 것입니다. 특히 세포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4%에 달했습니다.
세포이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십니다. 7년 전쟁(1756~1763)의 일부이면서 프랑스와 영국 중 누가 인도의 주인이 될 것인지를 결정짓게 한 플라시 전투(1757년) 때 영국인 군인은 750명이었던 데 비해 세포이는 2100명에 달했습니다. 전체 전투원 중 3분의 2 이상이 세포이였던 것입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의 지배자’에서 ‘인도의 지배자’로 올라서는 전환점이 된 아사예 전투(1803) 때도 웰링턴의 부대엔 상당히 많은 세포이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세포이는 영국이 인도 전역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세포이는 밖으로도 대영제국의 확장과 유지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습니다. 앞서 언급한 아비시니아 원정처럼 말이지요.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싸워야 했을 때(1820년대 미얀마에서, 1843년 신드에서, 1840년대 펀자브에서) 인도 군대는 좀처럼 패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반세기 동안에 인도의 병력은 중국에서 우간다까지 12회 이상 제국의 군사 행동에 공헌했다”고 말했습니다.
인도는 대영제국의 아시아 전초 기지였습니다. 이곳을 기반으로 중앙아시아와 동남아, 중국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영국령 인도가 최대한 팽창했을 때 그 범위는 페르시아 남부와 네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를 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도는 “대영제국의 전략적 중추”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1857년 항쟁
세포이들의 최초 반란은 탄약 종이에 동물 기름, 특히 소와 돼지의 기름이 칠해져 있다는 소문이 발단이 됐습니다. 힌두교도에 소는 신성한 동물이고, 이슬람교도에게 돼지는 절대 입에 대면 안되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당시 소총에 화약을 넣기 위해서는 입으로 탄약 종이(화약 탄포)를 물어뜯어 내야 했습니다. 그게 소기름이라면 힌두교 세포이들에게, 돼지기름이라면 이슬람 세포이에게 신성모독이었던 것입니다.
1857년 2월 26일 벵골의 제19보병대 병사들이 새로 보급된 탄약의 수령을 거부했습니다. 이어 3월 29일에는 동인도회사의 벵골군 세포이가 지휘관의 말을 쏘는 하극상이 벌어졌습니다. 급여와 진급에 대한 불만까지 더해지면서 반항의 불꽃은 들불처럼 퍼져나갔습니다. 이 항쟁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은 ‘종교전’였습니다. 세포이들은 이 항쟁을 ‘종교를 위한 전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실제로 인도 북부 메루트에서 반란 세포이들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형제들,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이여. 서둘러 우리와 합류하라. 우리는 종교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델리에서 “잉글랜드인들은 우리를 기독교도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한 뒤, 무굴제국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옹립하며 무굴제국의 통치의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소작농민들까지 합류하면서 항쟁은 독립운동 성격까지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영국의 반격은 매서웠습니다. 서아시아와 중국 등 주변에 포진해 있던 영국군을 끌어들여 진압 작전에 나섰습니다. 당대 최강의 군사력 앞에 세포이는 무력했습니다.
항쟁에 일부 세포이만 참여한 것도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첸나이(마드라스)의 부대는 주로 타밀족 세포이가 많았는데, 이들은 불교도들이 많아 화약 탄포에 무슨 기름이 사용됐는지 등은 전혀 관심도 없었습니다. 첸나이 부대는 영국을 지지하며 항쟁의 중심이었던 벵골군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뭄바이 부대도 거의 동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벵골군의 경우 75개 연대 중 44개 연대가 항쟁에 참여했는데 뭄바이쪽에선 겨우 3개 연대만 동조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밖에 시크교도들도 ‘무굴제국의 부흥’이라는 슬로건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포이 항쟁은 4개월만에 기세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해 9월 영국군은 델리를 정복하고 무굴 황제를 체포했습니다. 영국은 기독교인 살해와 내란 선동 등 5개 죄목을 씌워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하고 그를 미얀마로 추방했습니다. 이로써 무굴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 인도 황제 빅토리아
대영제국은 인도 통치에 대한 대수술에 나섰습니다. 본국 정부는 더 이상 인도를 동인도회사에 맡겨둬선 안된다고 판단했습니다. 1858년 8월 2일 영국 의회는 ‘인도정부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골자는 영국 정부가 군 병력을 포함한 모든 동인도회사의 소유물과 행정권 등을 넘겨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인도회사는 청산 절차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국 정부의 직접 통치는 인도가 대영제국에서 독립하는 1947년까지 계속됩니다.
▲Marriage of Victoria and Albert, painted by George Hayter
빅토리아 여왕은 1858년 11월 포고문에서 인도 국민들에게 2가지를 약속했습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인도의 종교 문화에 대해 더 이상 간섭은 없을 것이란 점이었습니다. 세포이 항쟁으로 깜짝 놀란 대영제국의 반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모든 관직에서 영국인과 원주민이 차별없이 완전히 평등할 것이라는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약속은 현실에서 철저하게 지켜질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배하는 자(대영제국)와 지배를 받는 자(인도)는 그 지배가 끝날 때까지 계속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참 재밌는 포인트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인도는 대영제국의 핵심 축으로 남아있었다는 점입니다. 대영제국 통치 말기가 되면 인도의 총 인구는 무려 4억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858년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 본국의 인도성 장관에게 서약을 하는 ‘서약직 공무원’은 대부분 100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핵심은 영국인들은 인도의 통치자들을 지배했고, 인도 국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는 대부분 인도 위정자들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퍼거슨 교수가 책 ‘제국’에서 소개한 내용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봉건적 인도의 윤곽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른바 ‘토후국들’이 인도 전역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거기에서는 영국인 비서관(다른 동방 제국들에서 ‘총리’라는 직함 아래 수행되는 역할)의 말똥말똥한 눈초리 아래서이지만, 전통적인 토후국의 왕들이 명목상 여전히 지배를 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직접 통치하는 영역에서도, 시골 지역의 대부분은 귀족적인 인도 지주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커즌의 눈에는 인도의 천부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지금까지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를 애독해 주시고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