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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雜事(한국사) 2022-1/ 01.05 공민왕 스승 나옹 선사… - 03월 30일 조선시대엔 물류 거점, 외세침략땐 외국군 주둔지…‘영욕의 땅’

상림은내고향 2022. 4. 6. 20:58

역사 속의 雜事(한국사) 2022-1

◆01.05 공민왕 스승 나옹 선사…“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풍경1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이 한시를 쓴 사람은 나옹(懶翁, 1320~76) 선사입니다.
우리는 “나옹 선사”하면 “청산은 나를 보고…”를 쓴
고려시대 스님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옹 선사는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上) 공민왕의 스승은 나옹 선사였다

▲나옹 선사는 고려뿐 아니라 중국에도 이름을 드날렸던 인물이다. 중국 황제가 그에게 절을 맡기기도 했다. [중앙포토] 

 

나옹 선사는 고려 말 공민왕의 스승이었습니다.
또 무학 대사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무학 대사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왕사(王師)였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나옹 선사는 인도의 붓다, 중국의 선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깨달음을 우리말로 풀어냈던 사람입니다.
내면에 확고한 견처(見處ㆍ깨달음의 자리)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나옹 선사를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정도로만
기억하는 건 너무 아쉬운 일입니다.
당시 나옹 선사는 고려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이름을 드날렸던 고승이었습니다.

 

#풍경2

나옹 선사는 출생부터 험난했습니다.
고향은 경북 영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방의 하급관리였고, 집안 형편은 어려웠습니다.
세금을 내지 못해 관가로 끌려가던 만삭의 어머니가
길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나옹 선사입니다.
그러니 날 때부터 생사를 넘나든 셈입니다.

스무 살 때였습니다.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죽어버렸습니다.
젊은 나이에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
그는 주위 어른들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사람은 왜 죽습니까.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사람은 왜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옹은 절망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숨을 거두어야만 하는 인간의 생이
그는 너무 절망스러웠겠지요.

 

 ▲나옹 선사가 출가해서 머리를 깎았던 경북 문경의 묘적암이다. [중앙포토]

 

나옹은 결국 경북 문경의 묘적암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습니다.
삶과 죽음은 그에게 거대한 물음표였습니다.
그걸 풀기 위해 그는 출가자가 됐습니다.

사실 부처님의 출가 이유도 그랬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생사(生死),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부처님도 출가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풀어야 할 ‘첫 번째 단추’였으니까요.

 

#풍경3

나옹은 묘적암을 거쳐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로 갔습니다.
거기서 마음을 모으고 수행한 끝에 4년 만에 눈이 열렸습니다.

나옹은 자신의 깨달음을 짚어보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중국땅은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고려와는 갈등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원나라의 수도 옌징(燕京, 지금의 베이징)에는
인도 마가다국 왕자 출신인 지공(指空) 선사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가섭으로부터 내려오는 부처님 법맥을 잇는
108대(代) 조사(祖師)라 하여 “서천국108조(西天國百八祖)”라고 불렀습니다.

 

 ▲나옹 선사의 스승인 지공 선사. [중앙포토]

 

나옹 스님은 지공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지공 선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로 왔나, 육지로 왔나, 신통력으로 왔나?”
“신통력으로 왔습니다.”
“신통력을 한 번 보여보라”

 

나옹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지공 선사에게 다가가
두 손을 맞잡고 서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오거나 육지로 걸어오는 건 몸이 오는 겁니다.
불가(佛家)의 깨달음은 그 몸이 본래 공(空)함을 깨치는 겁니다.
그때 진리가 드러나고, 진리와 통하게 됩니다.
나옹 선사는 그게 바로 ‘신통(神通)’임을 보여줍니다.

신기한 기적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마술이 신통이 아닙니다.
나옹에게는 떠들든, 침묵하든, 밥을 먹든, 잠을 자든 모두가 신통입니다.
내가 아니라 진리가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공 선사에게 다가가 가만히 손을 잡았습니다.
그 자체가 신통이니까요.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는 지공 선사와 나옹 선사,그리고 무학 대사의 유적이 남아 있다. [중앙포토]

 

지공 선사를 처음 만났을 때,
나옹 스님은 이미 상당한 경지였습니다.
마음 밖에서 신(神)을 찾는 게 아니라
마음 안에서 찾은 신을 몸소 보여주니까요.

이런 나옹에게 지공 선사는
“선에는 안이 없고 법은 밖이 없다(禪無堂內法無外)…”는 말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는 깨달음에 대한 인가(印可)의 징표인 가사(袈裟)까지 전수했습니다.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제자 가섭을 통해 내려오던 선맥(禪脈)이
108대 조사 지공 선사를 거쳐 나옹에게 전해졌습니다.
나옹 선사의 선맥은 다시 무학 대사로 이어지고,
조선 선(禪)불교의 든든한 토대가 됐습니다.

 

#풍경4

깨달음에 대한 인가는
스승이 마음으로 도장을 “꽝!” 찍어주는 겁니다.
나옹 스님은 지공 선사의 도장만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친링 산맥과 화이허(淮河)강을 기준으로
강북(江北)과 강남(江南)으로 나뉩니다.
당시 중국의 강북에는 조동종(曹洞宗)이 중심이었고,
강남에는 임제종(臨濟宗)이 중심이었습니다.
조동종의 가르침이 부드럽고 자상하다면,
임제종의 가르침은 거칠고 용감했습니다.

 

 ▲고려말 공민왕과 노국 공주. 나옹 선사는 공민왕의 스승이기도 했다. [중앙포토]

 

나옹 스님은 옌징을 떠나 중국 땅을 주유했습니다.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점검을 했습니다.
강남땅으로 간 나옹 스님은 임제종의 선맥을 잇는 평산(平山) 선사에게서도
마음의 도장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평산은 나옹에게 가사와 **을 전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놀라운 대목입니다.
중국인 중에도 숱한 출가자와 수도자가 있었을 테니까요.
나옹은 그중에서도 ‘군계일학’의 존재였던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공 선사나 평산 선사가
머나먼 고려에서 온 나옹에게 굳이 가사를 전할 리는 없으니까요.

나옹 선사는 인도의 선맥과 중국의 선맥,
양쪽에서 모두 마음의 도장을 받았습니다.
그런 인물이 우리 역사에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참 뿌듯합니다.

나옹 선사는
당시 원나라 수도에 머물던
숱한 고려인들의 자부심이었다고 합니다.

 

 ▲왼쪽부터 무학 대사, 지공 선사, 나옹 선사. 지공은 나옹의 스승이었고, 나옹은 무학의 스승이었다. [중앙포토]

 

나옹 선사는 꼬박 10년간 중국땅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려로 돌아왔습니다.
고려에서 법문을 할 때도 나옹 선사는
인도 불교의 어법과 중국 불교의 어법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체화된 깨달음을 자신의 말로, 고려의 언어로
쉽게 풀어서 대중에게 전했습니다.

 

#풍경5

고려 시대에는 한글이 없었습니다.
나옹 선사의 법문도 한자로만 기록돼 있습니다.
참 아쉬운 대목입니다.
우리말 그대로, 나옹 선사가 드러냈던 어투를
그대로 들을 수 없다는 건 애석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나옹 선사의 한시 속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고유한 정서는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살라하네”

3ㆍ4ㆍ3ㆍ4의 음절이
마치 우리 몸속에 흐르는
아리랑 가락이 다시 살아나는 듯합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 경내에 있는 나옹 선사의 부도와 석등. [중앙포토]

 

청산의 법문과
창공의 법문을 들으며
나옹 선사는 깨달음의 법을 펼쳤습니다.

중국에서 고려로 돌아왔을 때
나옹 선사는 불과 37세였습니다.

 

01.12  中 무시에 나옹 선사 "고려에서 해 떠야 중국 산 붉어진다"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풍경1

중국에서 고려로 돌아왔을 때
나옹 선사는 37세였습니다.
지금 나이로 치면
젊디젊은 나이입니다.
나이에 비해 나옹의 내공은 전혀 달랐습니다.

 

 

(下) 중국인이 무시하자 나옹 선사 “고려에서 해가 떠야 중국의 산과 바다가 붉어진다”

 

나옹이 중국에 머물 때였습니다.
스승인 지공 선사는 원나라 수도였던 옌징(지금의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스님이었습니다.
지공 선사 밑에는 숱한 중국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선방에서 참선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선승(禪僧)이었습니다.
지공 선사는 그 많은 스님들을 제치고
고려 땅에서 온 나옹에게 ‘판수(板首)’를 맡겼습니다.

중국에서는 과거 시험에서 첫째로 합격한 사람을
‘판수(板首)’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장원급제’쯤 되겠지요.
당시 중국의 선종 사찰에서는 수행하는 스님들 중에서
가장 윗스님을 ‘판수(板首)’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총림(叢林, 강원ㆍ선원ㆍ율원을 모두 갖춘 큰 사찰)에서
최고 지도자인 방장 아래 이인자를 ‘수좌(首座)’라고 부릅니다.

 

▲나옹 선사가 직접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지는 금강산 마하연의 마애불인 묘길상. [중앙포토]

 

 

나옹 스님은 중국에서 10년간 머물렀습니다.
당시 나이는 27세~37세였습니다.
그런데도 지공 선사는 나옹에게 판수를 맡겼습니다.
나이는 비록 젊지만 깨달음의 안목이 달랐던 겁니다.
다른 스님들을 능히 일깨우고 가르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사실 지공 선사와 나옹 스님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서로의 소리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서로의 ‘지음(知音)’이었습니다.
산에 부는 푸른 바람과 강 위에 뜬 달을 담아내는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오직 친구였던 종자기만 알아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옹화상어록』에는 지공 선사와 나옹 스님이 주고받는
둘 만의 거문고 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의 월정사에서 말사인 상원사로 가는 길에 단풍이 우거져 있다. 나옹 선사는 상원사 북대 미륵암에서 머물기도 했다. [중앙포토]

 

#풍경2

하루는 나옹 스님이 시를 지어 지공 선사에게 드렸습니다.

“이 마음 어두우면
산은 산, 물은 물인데
이 맘 밝아지면
티끌 티끌이 한몸이네.
어둠이랑 밝음이랑 함께
거두어 버리니,
닭은 꼬끼오, 새벽마다
꼬끼오.”

이 시에는 나옹의 눈이 담겨 있습니다.
어두웠던 눈이 밝아지자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 보이는지,
시적인 표현과 깊은 울림으로
나옹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어두울 때는 ‘산 따로 물 따로’ 입니다.
그래서 “산은 산, 물은 물”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는 분리의 강물이 흐릅니다.
둘은 하나가 되질 못합니다.

마음이 밝아지자 달라집니다.
산도 비었고, 물도 비었음을 깨닫습니다.
이제는 ‘산 따로 물 따로’가 아니라
산과 물이 서로 통합니다.

 

▲나옹의 스승인 지공 선사는 인도 출신이었다. [중앙포토]

 

그뿐만 아닙니다.
산과 물만 비어 있는 게 아닙니다.
나를 괴롭히는 온갖 번뇌도
본래 비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 마음에 쌓이는 띠끌을
닦고 쓸고 치우려고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이제는 띠끌을 치울 필요가 없습니다.
띠끌은 그대로 있지만,
띠끌 자체가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옹 선사는
“띠끌 띠끌이 한몸이네”라고 노래합니다.
나옹의 깨달음이
어둠과 밝음을 나누는 이분법적 나눔을
거두어 버립니다.

바로 그때 닭이 웁니다.
“꼬~끼~오!”

새벽마다 웁니다.
“꼬~끼~오!”

그건 누가 우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세상이 몸을 비울 때 비로소 들리는
부처의 소리입니다.

나옹 스님의 시를 읽고서
지공 선사는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나도 아침마다 징소리를 듣는다네.”

 

▲금강산 내금강에 있는 마하연 묘길상은 아주 큰 규모의 마애불이다. 고려 나옹 선사가 직접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마애불의 얼굴이 고려인의 얼굴이다. [중앙포토]

 

 

나옹의 거문고 소리,
나옹의 닭울음 소리를
지공 선사는 빠짐없이 알아듣고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둘의 소리는 그렇게 통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지음(知音)’이었습니다.

 

#풍경3

몽고 제국은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원나라는 그런 몽고족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몽고에 의해 강남으로 밀려난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랜 세월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무리 절집이지만
동방의 고려땅에서 온 나옹 스님을 무시하는 일이 없었을까요.
실제 그런 일화도 있었습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있는 나옹 선사의 부도와 석등. 나옹이 출가하기 전에 고려를 찾은 적이 있던 지공 선사도 회암사에 머문 적이 있다. [중앙포토]

 

나옹 스님이 중국 절강성 항현 남병산에 있는 절을 찾았습니다.거기서 나이 드신 스님이 물었습니다.

“스님 나라에도 참선법이 있는가?”

 

나옹이 고려 출신임을 알고 무시하는 발언이었습니다.물론 그 밑에는 중국인 특유의 중화사상이 깔려 있었겠지요.

 

이에 나옹 스님은 게송(절집에서 스님들이 짓는 시)으로 답을 했습니다.

“해 뜨는 우리나라에서 해가 떠야강남 땅 산과 바다는함께 붉어집니다.그런 말씀 마시지요,우리는 우리너는 너라고,신령한 빛이야언제나그 빛이지요.”

 

멋지고 통쾌하지 않습니까.대륙의 동쪽 끝이라 우리나라는 예부터 ‘동국(東國)’이라 불리었습니다.그런데 동쪽 끝에 있는 고려에서 해가 떠야비로소 중국 대륙의 강남과 강북에도 빛이 들어오는 법입니다.그래서 함께 붉어지는 겁니다.

 

▲고려인이라 무시하는 중국인 노스님에게 나옹 선사는 "고려에서 해가 떠야 중국의 산과 바다가 붉어진다"고 대답했다. [중앙포토]

 

나옹의 지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너는 너라고 나누고 분별하는
그 마음을 돌리라고 일갈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신령한 빛은
동과 서를 나누지 않고,
남과 북을 가르지 않는,
언제나 신령한 그 빛이기 때문입니다.

나옹은 깨달음의 눈으로
반박과 지적과 가르침을
동시에 전한 셈입니다.

그 노스님은 아무런 말도 못했습니다.

이 일화만 봐도 나옹 선사가
왜 당시 중국에 살던 고려 유민의 자부심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나옹 선사가 스무 살 때 출가해서 머리를 깎았던 경북 문경의 묘적암. [중앙포토]

 

풍경4

나옹 선사가 중국에서 고려로 돌아왔을 때는
공민왕 7년이었습니다.

당시 공민왕은 반원(反元) 노선을 천명하며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깃발을 올렸습니다.

나옹은 고려로 돌아온지 4년 만에 공민왕을 만났습니다.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나옹 선사에게
나라에서 세운 절인 신광사의 주지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나옹이 한사코 사양하자
공민왕은 “저도 불법(佛法)에서 물러나겠습니다”라며 배수진을 쳤습니다.
결국 나옹 선사는 신광사 주지를 맡았습니다.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나옹 선사에게 나라에서 세운 절 신광사의 주지를 맡아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중앙포토]

 

나옹이 신광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북녘땅에서 홍건적이 고려로 쳐들어 왔습니다.
대륙에서 원나라와 싸우다 쫓기던 홍건적이
고려를 향해 남하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굉장한 난리였습니다.
임금은 물론이고 도성의 백성도 모두 피난을 갔습니다.
이때 공민왕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을 떠나
경북 안동까지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주위 스님들은 나옹 선사에게도 몸을 피할 것을 청했습니다.
나옹은 거절했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살 것입니다. 홍건적인들 어찌하겠습니까?”
나옹 선사는 텅 빈 도성에서 그렇게 신광사를 지켰습니다.

삶과 죽음에 초연한 나옹 선사의 모습에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나옹 선사를 찾아온 홍건족의 우두머리는
깊은 감화를 받고서 침향(沈香) 한 조각을 스님께 올렸다고 합니다.

 

#풍경5

홍건적이 물러가자 나옹 선사는
신광사를 떠나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오대산 상원사 북대에는
나옹 선사가 좌선을 했다는 ‘나옹대’가 남아 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의 북대 미륵암에는 나옹 선사가 머물며 좌선을 했다는 나옹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중앙포토]

 

또 북한의 금강산에는 나옹 선사가 직접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지는

마애불인 ‘묘길상’이 있습니다.

예전에 금강산 내금강에 갔을 때
묘길상 앞에 선 적이 있습니다.
둥그런 얼굴에 온화한 미소,
묘길상 마애불은 고려인의 얼굴이었습니다.

조각 하나하나에
나옹 선사의 손길이 직접 닿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뭉클했던 생각이 납니다.

37세에 고려로 돌아온 나옹은
20년 뒤인 57세에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에서 입적했습니다.
그때가 1376년 5월 보름날이었습니다.

나옹 선사가 입적하자
중국은 사람을 보내 스님의 사리를 가져가고
일본에서는 스님의 영정을 모셔갔습니다.
나옹의 명성은 동북아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불리던
고려말의 충신 목은 이색은 나옹 선사의 빗돌(비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평생 세속의 문자를 익히지 않으셨으나
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붓을 들어 그 자리에서 써주셨는데,
아무런 힘들임 없이 짓는데도
그 이치와 멋이 깊고 그윽했다.”

 

▲나옹선사

 

나옹 선사는 공민왕의 스승이었고,
무학 대사의 스승이었습니다.
무학 대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습니다.
고려와 조선을 잇는 건널목에
‘나옹’이라는 걸출한 선사가 있어
이땅에 ‘살아 숨 쉬는 불교’가 가능하게 했습니다.

700년 세월이 흘렀지만
나옹 선사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적십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노여움도 내려놓고 아쉬움도 내려놓고 (聊無怒而無惜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01.22  ‘김우중·김종성 합작’ 40년 지킨 남산 힐튼, 정녕 부수는게 답일까

김우중·김종성 합작한 랜드마크
부동산회사 팔려 곧 헐릴 운명
한류에 들떠 의기양양하면서
우리 유산은 못 보는 ‘문화 졸부’

 

1982년 공사 중인 남산 힐튼 호텔(왼쪽 높은 빌딩). /서울역사아카이브

 

1982년 서울대 건축학과 대학원 수업 시간. 당시 강사는 미국에서 온 건축가 김종성이었다. 조국에 번듯한 호텔 하나 지어보자는 대우 김우중 회장의 제안에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귀국한 인물이었다. 그가 하루는 수업에 특별 연사를 초청했다. 김수근과 함께 한국 건축을 이끈 쌍두마차 김중업(1922~1988)이었다.

 

기념사진 하나 없지만, 이날 수업은 한국 건축사에서 진귀한 장면이 됐다. 두 사람은 ‘20세기 근대 건축의 3대 거장’에게 직접 배운 딱 두 명의 한국인이다.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 김종성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제자다. 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세계 건축의 중심을 두드린 호기로운 청년들이었다. 두 거장의 대리전을 보기 위해 몰려온 학생들로 이날 강의실은 미어터졌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작년 두 건축가의 대표작이 엇갈린 운명에 처했다. 김중업의 청계천변 삼일빌딩(1970년 완공)과 김종성의 남산 힐튼 호텔(1983년)이다. 삼일빌딩은 건축가 최욱이 김중업의 설계안을 최대한 살려 정교하게 리모델링했다. 반면 남산 힐튼 호텔은 부동산개발회사에 팔려 철거를 앞두고 있다. 새 소유주는 호텔을 헐고 대규모 상업 시설을 지을 계획이다. 호텔은 올 연말 문 닫는다.

 

40년간 남산 자락을 지킨 랜드마크를 싹 밀어버리겠다는 발상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남산 힐튼은 고도 성장 시대 우후죽순 빌딩이 올라갈 시절, 동시대 세계 건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김우중이 전폭적으로 밀어준 덕에 김종성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에게 배운 기량을 맘껏 펼쳤다. 무엇보다 반세기 가까이 남산과 서울역 곁에서 서울의 산업화를 굽어보고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선사한 건물이다.

 

한류로 문화 강국 반열에 올랐다고 의기양양하면서, 돈 주고도 못 사는 우리 안의 문화유산은 제 발로 걷어찬다. 전형적인 ‘문화 졸부’의 모습이다. 김승회 서울대 교수는 기자에게 “신라 범종을 녹여 가마솥 만들겠다는 처사”라며 “수익성만 따져 멀쩡한 보물을 부수는 건 ‘개발 탈레반’”이라고 목청 높였다. 당사자는 오죽하랴. 얼마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분신이 찢겨 나가는 아픔을 토로했던 미수(米壽)의 건축가는 요즘도 눈만 뜨면 관련 뉴스를 확인한다. 머리 맞대면 흔적을 남기면서 개발하는 방안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앞으로 ‘제2의 힐튼’이 쏟아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개발 연대에 지은 많은 건물이 노후화돼 철거냐 리모델링이냐 갈림길에 서있다. 힐튼 사태는 우리가 먼 과거의 문화 유산에 비해 비교적 가까운 30~50년 전 근현대 유산을 도외시했다는 점을 일깨운다. 가까운 과거도 결국 먼 과거가 된다.

 

모든 건물을 보존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진짜 가치 있는 건물을 지킬 장치가 필요하다. 현행 등록문화재 제도는 예외 규정은 있지만 원칙적으로 50년 이상 된 건물을 대상으로 해 이 중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을 정한다. 반면 역사가 짧은 미국 같은 경우는 더 적극적이다. 예컨대 ‘뉴욕시 랜드마크 보존위원회’는 30년 이상 된 건물을 대상으로 랜드마크를 지정한다. 삼일빌딩의 모델이자 김종성의 스승 미스 반데어로에 대표작인 뉴욕 ‘시그램 빌딩’도, 이 제도 덕에 완공된 지 30년 만인 1989년 랜드마크로 지정돼 과거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개발 논리 앞에 그간 우리는 무자비하게 추억을 지웠다. 단성사도, 피맛골도 잃었다. 또 없애고 나서 후회해선 안 된다. 윈스턴 처칠은 1943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 의회의사당을 다시 짓겠다면서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 다 부수고 나면 훗날 무엇이 우리를 만들 것인가.

조선일보  김미리 기자

 

월간조선 03월 호

 3·15 부정선거 주도자 최인규의 《최인규 옥중 자서전》

부정선거 저지르면 본인도, 정권도 죽는다!

⊙ 공무원 및 그 가족들에게 이승만 지지 지시 ▲경찰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상대로 부정선거 모의 ▲자유당으로부터 부정선거 실행 자금 수령 ▲3·15 선거 당일 투표 조작 지휘 등의 죄목으로 死刑 선고 받아
⊙ 조봉암이 1956년 5·15 대선 때 216만여 표 득표하자 충격… ‘대한민국이 선거라는 방법을 통하여 공산당에 넘어갈 수도 있겠다’ 고민
⊙ 4·19 일어난 후 밀항 권유받자 “남자가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마당에 어디로 도망가느냐?”
⊙ 5·16 혁명재판소에서 死刑 선고 받은 후 중앙정보부 권유로 獄中 자서전 쓰다가 20일 후 처형돼
⊙ 우리 국민은 62년 전에 부정선거에 맞서 피 흘리며 싸웠고, 부정선거 책임자를 교수대에 세웠던 국민

#부정선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개표

 
 

제20대 대선(大選)이 20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부정선거’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20년 제21대 총선(總選)이 부정선거였다는 주장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 ‘대통령의 친구’를 울산시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 비서관들과 경찰이 개입했던 사건은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아마 대통령과 그의 친구의 임기가 다 끝나고서야 재판이 마무리될 것 같다).

민주공화국이 수립된 지 74년, 그리고 부정선거에 항의해 학생들이 들고일어난 지 62년이 지났다. 언필칭 민주화가 된 지 35년, 소위 문민(文民)정부가 들어선 지 29년, 여야(與野)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지도 24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명색이 OECD에 가입한 선진국이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나라에서 아직도 ‘부정선거’에 대한 논란이 나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38년 전에 나온 《최인규 옥중 자서전》(1984년, 중앙일보사 펴냄)을 꺼내 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최인규(崔仁圭· 1919~1961년)는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부정선거를 총지휘해 4·19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민주당 정권 아래서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5·16 군사혁명 후에는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다시 동법(同法) 및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21일 처형됐다. 처형을 앞두고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관계자가 최인규에게 옥중 자서전을 쓰도록 권유했다. 최인규는 20여 일간 혼신의 힘을 다해 옥중 자서전을 집필했으나, 내무부 장관에 취임했을 무렵의 일을 서술하기 시작할 즈음 형(刑)이 집행되었다. 부인 강인화씨가 이 원고를 간직하고 있다가 1983년 한 잡지에 자신의 한(恨) 많은 인생에 대한 수기를 발표했다. 이 수기가 반향을 얻자 이듬해 남편의 옥중 자서전과 자신의 수기, 그리고 최인규의 재판기록 등을 하나로 엮어 펴냈는데, 그것이 이 책이다.


‘善惡 간에 철저하고 과격한 성격’

5·16 후 혁명재판소에 선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 오른쪽부터 최인규 전 내무장관, 이성우 전 내무차관, 이강학 전 내무부 치안국장, 최병환 전 내무부 지방국장. 사진=조선DB

 

‘자서전’이기 때문에 최인규가 이 책에서 자기합리화를 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다 보면 상당히 담백하게 자신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인규는 1919년 경기도 광주(廣州)군 동부면 미사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강남 동생 하남’ 소리를 듣는 경기도 하남시다. 그런 곳을 ‘깡촌’으로 묘사한 것이나, 지금의 서울 강남 중심부를 ‘언주면’이라고 기술(記述)한 것을 보면 ‘62년 전에는 이랬구나’ 싶어서 슬그머니 미소를 짓게 된다.

최인규는 그럭저럭 먹고사는 자작농(自作農)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 집과 농지가 유실되면서 한동안 극빈(極貧)하게 살았다. 마을에 교회를 다섯 개나 세운 여장부였던 할머니 밑에서 최인규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최인규는 “선악(善惡) 간에 철저하고 과격한 성격, 타협할 줄 모르는 굳은 신념, 나라를 사랑하면 목숨을 바쳐서까지 하고 개인을 숭배하면 생사(生死)를 초월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백만 인이 반대하여도 무섭지 않은 등등의 성격이 모두 우리 조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술회했다. 참 긍정적일 수도 있는 성품이지만, ‘이러한 성품이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갔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그는 보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李
承晩만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

해방 후 최인규는 미군과 조우, 잠시 미군 통역으로 일하다가 미군정 물가행정처에서 근무했다. 그가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숭배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승만 박사가 좌익이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했을 때 이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신념 있는 지도자요, 정의와 원칙의 사람이요,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반공(反共)지도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의 회고이다.

하지만 최인규는 해방 후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정치의 격랑에 몸을 담그지는 않았다. 그는 연희대(현 연세대) 총장을 지낸 언더우드 박사 등의 도움으로 1947년 8월 14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함께한 이들은 모두 33명으로 이들이 해방 후 첫 도미(渡美) 유학생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전성천(鄭聖天) 전 공보실장, 윤일선(尹日善) 전 서울대 총장, 현영학(玄永學) 전 이화여대 교수 등 쟁쟁한 인물들이 다수 있었다.

 

최인규는 서른을 전후한 나이에 미국에서 고학(苦學)을 하면서 2년 만에 뉴욕대학교를 졸업했다. 주로 공부한 것은 국제무역과 재정·금융 등이었다.

미국에서 최인규는 미국 헌정(憲政)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는데, 한국의 민주주의 지도자는 두 가지 난점(難點)을 안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절제(節制) 있는 자유(Liberty)’가 필요한 한국 현실에 반하여 국민은 ‘절제 없는 자유(Freedom)’를 갈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지도자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민주주의와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민주주의와의 현격한 차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결론적으로 한국의 민주지도자 되시는 분은 누구나 ‘민주주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험로를 달려야 할 운명에 처하였다고 본다”고 했다.


敵治下의 맹세

귀국 후 최인규는 대한교역공사에 영업부장 대리로 입사(入社)했다. 상공부 산하 국영무역회사였다. 이 책에는 당시 자신이 조사한 수출 가능 품목들이 열거되어 있다.

▲광산물: 중석(重石·텅스텐), 형석(螢石), 흑연, 수연(水鉛·몰리브덴), 창연(蒼鉛·비스무트), 전기동(電氣銅), 무연탄, 바라이트, 광석, 질광석

▲수산물: 오징어, 멸치, 김, 마른 새우, 한천, 불가사리, 마른 전복, 상어 지느러미, 갈치 비늘, 생어(生魚), 활어(活魚)

▲농산물: 쌀, 생사(生絲), 사과, 오배자(五倍子), 굴참나무껍질, 우골(牛骨), 돈모(豚毛)

▲제품: 면직물, 성냥, 비누, 운동화, 자전거 타이어 및 튜브

당시 지지리도 가난하던 나라의 형편이 그려진다. 이런 군색한 상품들을 내다 팔 길을 열어보겠다고 최인규는 1950년 4~6월 무역사절단의 일원으로 동남아시아를 순방하고 돌아왔다. 귀국한 지 며칠 후 6·25가 터졌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하고 적치하(敵治下)에서 3개월을 숨어 살면서 최인규는 이렇게 다짐했다.

“죽지 않고 다시 대한민국 치하에서 살날이 있다면,

첫째, 정부나 대통령이나 국군이나 경찰에 대하여 불평을 참고 살 것.

둘째,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을 청산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및 그 헌법을 수호할 수 있는 강력한 대통령과 정부, 국방군(國防軍)을 가진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목숨 내놓고 투쟁할 것.

셋째, 공산당에 맞서 타협 없는 투쟁을 할 것.”

 

이승만, “유 디드 베리 웰”

최인규가 정치에 투신한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을 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1954년 제3대 총선(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했다. 광주는 국회의장을 역임한 야당의 거물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의 아성(牙城)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익희에 맞설 대항마를 찾지 못하고 있던 자유당은 최인규가 출마하자 그를 서둘러 영입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익희 2만4000여 표 대(對) 최인규 1만8000여 표. 6000여 표 차이의 참패(慘敗)였다. 경찰과 공무원 조직들이 그를 도왔지만, ‘새파란 애송이가 어디 감히 해공 선생에 맞서 나오느냐?’는 여론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패인(敗因)이었다.

하지만 이기붕(李起鵬)을 비롯한 자유당 지도부는 ‘거물 신익희’를 상대로 당찬 도전을 한 이 정치 신인(新人)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기붕의 추천으로 UNKRA(유엔한국재건단) 뉴욕사무소 주재관으로 파견되었다. UNKRA 자금으로 하는 물자 구매를 협의, 상담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최인규가 그토록 존경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UNKRA 주재관으로 임명되기 전 경무대를 찾았을 때였다.

최인규는 뉴욕에 주재하는 동안 매주 현지 신문에 보도된 국제정세 변동, 미국의 대외정책, 미국 내 여론 등에 대한 기사를 분석, 정리해서 외교 파우치 편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귀관의 보고는 잘 분석, 조직되고, 매우 견문을 넓히는 유익한 보고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귀관 이외는 나의 관심을 환시시켜준 사람이 없었다”고 칭찬하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왔다.

최인규가 귀국해서 1956년 1월 1일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올리러 경무대를 예방했을 때, 비서가 그를 소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오, 미스터 최. 유 디드 베리 웰(Oh, Mr. Choi, you did very well).”

이승만 대통령은 최인규와 악수를 나눈 후 다시 “유 디드 베리 웰”를 되다. 최인규는 이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외자청장 거쳐 교통부 장관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칭찬으로만 끝내지 않았다. 그해 1월 4일 최인규를 제2대 외자청장(外資廳長)으로 임명한 것이다. 외국의 원조로 국가 재정을 충당하고 경제가 돌아가던 시절에 외자를 구매, 관리, 처분하는 외자청장 자리는 경제 요직(要職) 중 하나였다.

최인규가 외자청장이 될 무렵, 외자청에 새로운 임무가 부과되었다. 비료 도입, 배급, 관리 업무였다. 당시 전 국민의 70%가 농민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비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전에는 금융조합에서 이 비료 업무를 담당했지만, 적기(適期)에 도입하지 못하거나 배분 과정에서의 비리(非理)로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비료 업무를 외자청이 책임지라고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비료에 대하여 농민으로부터 불평이 있든지, 한 가마니라도 없어지면, 나는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자네를 옥에 가두겠네.”

최인규는 외자청 직원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엄한 말씀을 전하면서 이렇게 훈시했다.

“이 도입 비료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수입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현 단계에 있어서 원조를 받지 않고는 자립할 수 없는 형편이다.… 원조를 주는 사람도 있는데, 받아서 나누어 먹을 줄도 모르는 국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는 안 나오는 얘기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언제까지 미국이 사다 주는 비료에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가?”라면서 미국의 원조자금의 일부를 돌려 비료공장 등을 짓자고 나섰다. 미국은 “한국은 목전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면서 반대했지만, 이 대통령은 ‘앞으로 먹고살 거리에 투자해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1959년에 착공, 1961년에 완공된 충주비료공장(1비)이었다. 비료 문제는 호남비료공장(2비), 영남화학(3비), 진해화학(4비) 등이 완공된 박정희 정권 시절에야 해결되었다.

최인규는 UNKRA 및 국회와 마찰을 빚어가면서도 비료의 적기 공급에 성공했다. 또 체불(滯拂)되기 일쑤였던 부두 노동자들의 임금 문제도 잘 해결했다.

외자청장이라는 ‘힘 있는 자리’에 있는 동안 최인규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의 여러 민원을 해결해주면서 지역 기반을 다졌다. 오늘날 같으면 구설에 오를 일들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것들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때였다. 최인규는 1958년 5·2 선거에 출마, 신익희의 아들 신하균에게 압승하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물론 경찰이나 공무원 조직들이 그를 도왔는데, 그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별 가책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국회의원이 된 최인규는 그해 9월 9일 개각(改閣) 때에는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入閣)했다. 교통부 장관 재직 시절 최인규는 업무 중 죽거나 다친 철도노동자들을 위한 재해보상금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언론들은 “한국에서 처음 실시하는 사회보장제도”라면서 이를 대서특필했다. 최인규는 교통부 장관 재직 중 철도 현대화, 산업 철도 신설 등도 추진했다. 자랑 섞인 회고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경력을 쌓아나갔다면 최인규는 경제관료로 대성(大成)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의 꿈은 재무부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교통부 장관 임명 6개월 만인 1959년 3월 크게 요동친다. 내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내무부 장관

1959년 3월 개각 때 입각한 각료들. 맨 오른쪽이 최인규 내무장관.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현확 부흥부 장관. 사진=조선DB

 

당시 내무부 장관은 지금의 행정안전부 장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요직이었다. 외무부 장관에 이어 내각 서열 2위였다(당시에는 국무총리제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국의 지방행정과 경찰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고, 선거 주무(主務)장관이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 자유당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서는 1년 앞으로 다가온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무부 장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暗鬪)가 치열했다. 결국 자유당을 이끌던 이기붕은 강경파와 온건파 모두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사람을 찾다가 최인규를 내무부 장관으로 낙점(落點)했다.

1959년 3월 20일 최인규는 후일 국무총리까지 오르는 신현확(申鉉確) 부흥부 장관 등과 함께 장관 임명장을 받았다. 신현확 등도 4·19 후 자유당 정권의 각료였다는 이유로 옥고(獄苦)를 치르기는 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최인규만이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부 장관으로 부정선거를 기획, 실행했다는 죄로 처형됐다.

이미 자유당 정권의 황혼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을까? 최인규는 “외자청장과 교통부 장관에 임명될 때 경험하지 못한 막연한 불안감을 금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최인규의 부인 강인화는 장관이 된 후 최인규는 자주 통성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나님, 저에게 내무장관직을 주셨습니다. 과연 제가 감당해나갈 수 있는 직분인지 아닌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제 목숨을 뺏어서라도 이 직분을 버리게 해주십시오.”

 

취임 일성으로 “李 대통령에게 충성” 강조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민주당 후보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인기를 모았으나 선거 유세 중 급서했다. 사진=조선DB

 

 하지만 일단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하자 최인규는 1960년 3·15 선거 대비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공무원들에게 “우리나라의 원수(元首)이신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고, 그 어른 밑에서 굳게 단결할 것을 요청한다”면서 “공산당이나 야당이 무슨 선동을 하여도 이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길이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길인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고 역설했다.

최인규에게는 하나의 정치적 트라우마가 있었다. 바로 1956년에 있었던 제3대 정·부통령 선거(5·15 정·부통령 선거)였다. 옥중 회고록에서 최인규는 이에 대해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다. 이 대목은 선거와 민주주의에 대한 최인규의 인식, 그리고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된 최인규의 심리적 기저(基底)를 잘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5·15 정·부통령 선거는, 당시 민주당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세를 올렸으나, 선거 유세 도중인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이 3선에 성공했고, 부통령으로는 민주당의 장면(張勉) 후보가 당선된 선거다.

최인규는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 대해 ‘대한민국 선거사 중 가장 중대하고 위험하였고 비극적인 선거’라고 단언했는데, 그의 지적을 보면 네거티브 공세, 보수 후보의 분열, 언론의 편파 보도 등 이후에도 되풀이되는 우리 선거의 고질(痼疾)이 적지 않다.


‘선거를 통해 나라를 공산당에 넘겨줄 수도…’

조봉암 진보당 당수. 사진=조선DB

 

5·15 정·부통령 선거와 관련해서 최인규가 가장 고민한 문제는 ‘선거를 통한 체제 전복(顚覆)’ 가능성이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546만6870표를, ‘전(前) 공산당원’인 조봉암(曺奉岩) 진보당 후보는 216만3808표를 얻었다. 그리고 신익희 추모표가 185만6818표가 나왔다.

최인규는 6·25전쟁이 끝난 지 3년밖에 안 되었는데, ‘공산당’인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싸움은 같은 반공보수 진영의 당파싸움이었다. 그러나 조봉암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성질이 다르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은 국군과 유엔군이 피 흘려 찾은 나라다. 이것을 선거라는 방법을 통하여 공산당에 넘겨줄 수 있는가?”라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논리는 거칠지만, 이것은 사실 심각한 문제 제기다.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나치 독일을 체험했던 전후(戰後) 독일(서독)에서 고민했던 문제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이 ‘방어적 민주주의’ 혹은 ‘전투적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자유의 적(敵)에게는 자유를 줄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기본법(헌법)은 위헌정당 해산제도, 기본권 실효(失效)제도 등을 두고 있다.

독일뿐이 아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 터키,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권들이 ‘자유를 삭제한 민주주의’, 즉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이름의 권위주의로 체제를 둔갑시키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민주정권’을 자처하는 정권이 몇 번 들어서는 사이에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이 엄청나게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최인규는 대통령-부통령 러닝메이트제를 채택하지 않아 대통령과 부통령이 다른 정당에서 나오고 반목하는 현실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장면 부통령 시절을 “대통령은 부통령을 상대도 안 하고, 부통령은 노(老)대통령이 속히 돌아가셔서 자기가 대통령 되기만을 기다리는 불안한 4년”이라고 표현하면서 대통령과 부통령은 절대로 같은 정당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회고했다.


反共과 민주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전국적 시위는 자유당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사진=조선DB

 

 문제는 최인규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이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는 데 있다. 최인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지 못하는 자가 내무장관 자리에 앉았으면 나라는 망할 것이다. 아니 그러한 자는 내무장관의 자격이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평소에 이에 대한 철저한 각오가 없는 자가 불의에 이런 일이 닥치면 손발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5·15 당시 한 걸음 더 나가서 다음과 같은 가상을 하여 보았다. 선거 도중 신익희씨뿐만 아니라 이 박사께서도 서거하시고 조봉암이 단독 후보가 되는 경우, 내가 내무장관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선거법대로 투표하고 개표하여 그가 당선되었다고 발표할 것인가, 내가 법에 의하여 벌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투표함을 없애버리고 선거를 다시 하도록 할 것인가?”

여기서 3·15 부정선거로 가는 길이 열린 셈이다. 최인규도 “이 박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으면 한국은 공산화될 수밖에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3·15 선거에 임한 것이 결과적으로 국가와 민족에게 비극을 안겨주게 되었다”고 인정했다.

최인규는 국회에서 서범석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물론 반공과 민주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반공과 민주가 동일 보조를 취하기 어려울 때 나는 반공이 우선하여야 된다고 믿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영·미·불 같은 민주국가에서도 전시(戰時)국방을 위하여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한을 하는 것이 이런 이유다.”

최인규의 옥중 회고록은 그 뒤 1959년 6월 5일 있었던 인제와 영덕군 재선거에 대해 서술하다가 갑자기 끝나버린다. 그에게 옥중 회고록을 쓰라고 권했던 군사정부가 갑자기 그를 처형해버렸기 때문이다.

최인규의 부인 강인화는 “그해 12월 21일 그 자서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3·15 선거의 내막이 밝혀질 대목에서 남편은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면서 “3·15 부정선거의 제일 중요한 핵심인 4할 사전투표, 9인조·3인조 공개투표, 참관인 매수 등의 부정선거 방법을 창안, 지시했다는 죄명의 대목은 형 집행으로 인하여 그 내용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채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다만 최인규 본인은 옥중 회고록에서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 당시의 군수·서장이 모두 생존하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런 지령을 받은 자는 현상모집을 하여도 없을 것이다”라며 자신에게 부과된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책임

옥중 회고록에서 미처 쓰지 못한 부분은 부인 강인화의 회고와 법원의 재판기록을 통해 복원하는 수밖에 없다.

최인규는 1960년 3·15 선거가 끝난 후, 전부터 결심했던 대로 사표를 냈다. 그는 장관직을 벗어던지고 국회의원으로서 자기 소신대로 일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지다가 급기야 서울에서도 4·19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최인규 밑에서 일했던 이성우 전 내무차관과 이강학 전 치안국장이 집으로 찾아와 부인 강인화에게 “동해안 쪽으로 배를 하나 준비해가지고 해외로 가시도록 말씀드려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강인화가 조심스럽게 이 말을 전하자 최인규는 별안간 아내의 뺨을 때렸다. 최인규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가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마당에 어디로 도망가느냐?”

시위대가 장충동의 자택 앞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최인규는 그들 앞에 나가서 자신의 과오와 소신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맞아 죽겠다고 했다. 아내와 누이는 그를 억지로 지프에 태워 집을 떠났다. 10분 후 시위대가 들이닥쳐 그의 집을 불태웠다.

 

5월 초 최인규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자진 출두했다. 재판의 근거가 된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은 4·19 참여자 및 그 유가족들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소급법(遡及法)이었다. 재판정에서 최인규는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5·16으로 들어선 군사정부의 혁명재판소도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강인화는 최인규를 존경하는 형무관(교도관)의 도움을 받아 남편을 탈옥(脫獄)시키려는 계획을 꾸몄다. 그러고 최인규를 면회하는 자리에서 그 내용을 적은 쪽지를 비밀리에 전했다. 다음 날 아내와 만난 자리에서 최인규는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다.

“왜 당신은 나의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바보스러운 일을 하느냐? 나는 이 세상에서 당신만은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줄 것으로 믿고 마음 든든히 생각하고 있는데, 이제 내 얼굴에 똥칠을 할 셈이냐?”

이후 최인규는 앞에서 말한 대로 중앙정보부 간부의 권유에 따라 옥중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다가 1961년 12월 21일 처형당했다.


공무원 및 그 가족 상대 선거운동도 불법

4·19를 야기한 3·15 부정선거 수괴(首魁)의 옥중 회고록은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권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괴물이 아니라 아내에게 다정하고, 신앙심 깊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고, 애국심 강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젊은 공직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최인규를 부정선거의 수괴로 처단한 혁명재판소의 판결문이 첨부되어 있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최인규와 3·15 부정선거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혁명재판소 판결문에 나타난 최인규의 부정선거 행태는 ▲공무원 및 그 가족들에게 이승만 지지 지시 ▲경찰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상대로 부정선거 모의 ▲자유당으로부터 부정선거 실행 자금 수령 ▲3·15 선거 당일 투표 조작 지휘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판결문에 의하면, 1959년 3월 21일 내무부 장관 취임 연설에서 내무부 전체 공무원을 향하여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 있어서는 자유당 후보자가 기필코 당선토록 선거운동을 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한 최인규는 이를 위해 먼저 내무부 산하 공무원들에 대한 ‘정신교육’에 들어갔다.

최인규는 1959년 4월~1960년 3월 월초(月初)에 1회씩 거행되는 내무부 월례(月例)조회 석상에서 내무부 전체 공무원에게 앞과 동일한 내용의 지시를 되풀이했다.

최인규는 또 1959년 6월경~11월경 서울, 인천, 수원, 광주, 대전, 청주, 춘천, 인제, 전주, 광주(光州), 담양, 대구, 부산, 진주, 산청, 함양, 제주 등지를 순회하면서 각 시·도·군청 회의실 또는 공설운동장 및 극장 등에서 각기 군·시 공무원 50명 내지 6000명을 집합시켜놓고 30분~1시간30분에 걸쳐 앞과 동일한 내용의 지시를 했다.

더 나아가 최인규는 동료 국무위원들과 모의, 공무원친목회 및 공무원가족친목회를 만들어 공무원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자유당을 위한 선거운동에 동원하려 획책했다. 판결문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59년 3월 말 내지 4월 초경 오전 중 중앙청 내 국무회의 석상에서 당시 국무위원인 법무부 장관 홍진기, 농림부 장관 이근직, 국방부 장관 김정렬, 체신부 장관 곽의영, 교통부 장관 김일환 및 내무부 장관인 피고인(최인규-기자 주) 등 6인으로 구성되었던 소위 6인 위원회에 전체 공무원 및 그 가족들을 선거에 동원할 것을 제의하여 동인(同人) 등의 합의를 얻은 후 같은 장소에서 개최된 전체 국무회의에서 최종적인 합의를 얻어 국무위원 전원과 공동으로 전국적으로 각 동·시·읍·면 단위로 같은 해 4, 5월 중에 공무원친목회를, 같은 해 10월경에 공무원가족친목회를 조직게 하여 매월 1회씩 회합도록 하고, 각 관할 경찰서 사찰계(지금의 정보계-기자 주) 형사 및 동·시·읍·면장 등이 주동이 되어 전국 각지의 각급 공무원 10여만 명 및 그 가족에 대하여 자유당 입후보자의 당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게 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공무원 이외의 유권자에 대하여 각종 방법으로 자유당 입후보자를 위한 선거운동을 하게 하고…>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는다”

3·15 선거가 다가오면서 최인규는 전국 경찰 간부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직접 장관실로 불러 부정선거를 독려했다. 판결문을 보자.

<1959년 11월 28일경부터 같은 해 12월 20일경까지, 1960년 1월 초순경부터 같은 해 2월 하순경까지 사이에 거의 매일같이 오전 8시경부터 오전 11시경까지 전국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과장, 경찰서장 및 군수·시장·구청장 등을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30, 40회에 걸쳐 매일 10명 내지 20명 정도씩 내무부에 소환하여 동일 군(시 또는 구) 내의 경찰서장과 군수(시장 또는 구청장)를 동시에 2명씩 또는 당일 소환된 전원을 일시에 내무부 장관실에 초치하여 대체로 피고인 이성우(내무부 차관-기자 주), 이강학(치안국장), 최병환(지방국장) 및 당시의 특정(特情)과장 이상국 입회하에 “여하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대업 수행을 위하여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전제한 다음 (가) 전출자(轉出者)·자연 기권자·매수(買收) 기권자들의 표(票)의 활용 (나) 3인조·9인조를 이용한 공개투표 (다) 완장부대의 동원 (라) 민주당 참관인의 매수 등 부정선거의 기본요강을 지시한 다음, 그 방법의 세부에 대하여서는 치안국장 및 지방국장의 지시를 받으라고 명하고…>

최인규는 이와 함께 경찰 간부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확실하게 장악해 부정선거에 동원하기 위해 이들에게 미리 사표를 받았다.

<전기(前記) 지령의 실행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정선거 지령을 계획대로 실천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할 목적으로 앞의 지령을 할 때에 각 도 지사·경찰국장·군수·시장·구청장·경찰서장·사찰과장 등에게 사표를 제출할 것을 명하고, 그 명에 의하여 이성우(내무차관)·이강학(치안국장)·최병환(지방국장)은 앞의 지위에 있는 자들로부터 사표를 받음으로써 앞의 지위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부정선거 지령을 이천(履踐·실천)하게 하고…>


3·15 선거 당일 투표 조작 지휘

부정선거에는 돈이 필요했다. 이 돈은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이 산업은행을 동원해 마련했다. 판결문에 의하면 최인규는 1960년 2월 24일 이강학 치안국장과 함께 자유당 총무위원장 박용익과 만나 전국 경찰서를 자유당 입후보자의 선거운동에 이용할 목적으로 선거자금 11억1000만환(?)을 경찰에 교부하기로 합의했다. 다음 날 내무차관 이성우와 치안국장 이강학은 김영찬 산업은행 총재로부터 해당 자금을 받아 전국 경찰에 나눠줬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3·15 부정선거 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기상천외한 부정을 저질렀다. 그 결과 판결문에 의하면, 중간개표 결과 야도(野都)로 유명하던 경북 대구(당시는 대구가 경북에 속해 있었음)의 한 개표구(開票區)에서는 자유당 후보 이기붕이 5000표를 얻은 반면, 민주당 후보 장면은 32표밖에 나오지 않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그와 같은 득표율로 자유당 입후보자가 승리하게 될 경우 부정선거가 감행됐다는 것을 국내외에 폭로하는 결과가 될 것’을 우려한 자유당은 부랴부랴 자당(自黨) 후보자의 ‘득표율 삭감’에 나섰다.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 한희석으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은 최인규는 경비전화로 직접 경북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유당 입후보자의 득표율을 이승만 80%,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삭감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렸다. 이강학 치안국장, 최병환 지방국장도 최인규로부터 지시를 받아 다른 지역에 하달했다.


역사의 준엄한 경고

 1961년 7월 열린 최인규 등의 재판에는 이를 지켜보려는 방청인들이 몰려들었다. 사진=조선DB

 

판결문의 내용을 보면, 최인규의 범죄 사실은 분명하다. ‘민주적 선거에 의해 체제가 전복될 수도 있다’는 그의 고민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선택한 부정선거라는 방법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일이었다. 최인규는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때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은 것이 ‘반공국가로서의 체면’을 손상케 했다고 개탄했지만, 3·15 부정선거와 그 이후의 유혈사태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국가로서의 체면’은 말할 수 없이 손상당했다. 부정선거의 후과(後果)로 건국 대통령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망명 아닌 망명길에 올라 이역(異域) 땅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4·19 후에도 군사혁명과 쿠데타,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反)정부운동이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반정부 세력은 반체제 세력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반공민주정당이었던 민주당의 맥을 이은 야당에 똬리를 튼 그들은 세 차례 집권하면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속에서부터 허물어뜨리고 있다. 최인규가 그토록 고민했던 문제가 결국 현실화된 것이다.

결국 최인규의 충성은 그의 본심이야 어떻든 국가에 두고두고 해악(害惡)을 가져온 ‘잘못된 충성’이었던 셈이다. 이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내무부에 선거관리를 맡겼다가 3·15 부정선거와 4·19라는 사변(事變)을 겪은 후 헌법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규정했다. 선관위는 4·19의 자식인 셈이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은 그 중앙선관위를 자기들의 수족 역할을 할 사람을 보내서 장악했다. 선관위가 그동안 저질러 온 코미디 같은 편파 행정은 여기서 굳이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문재인 정권은 임기를 다한 상임위원을 변칙적인 방법으로 비상임위원으로 임명, 계속해서 선관위를 장악하려고 획책했다. 다행히 선관위 조직 전체가 들고일어나 저항하는 바람에 그런 시도는 무산(霧散)되고 말았다. 그즈음 선관위 내부에서 터져 나온 “선관위가 과연 헌법기관으로 존재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 신뢰 잃으면 개헌 때 행안부 선거관리과와 지자체로 찢어질 것”이라는 목소리는 더이상 정권의 주구(走狗) 노릇을 할 수 없다는 선관위 구성원들의 절박감을 잘 보여준다. 선관위가 그런 결기를 잃지 말고 이번 대선을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관리해주기를 기원할 뿐이다.

최인규를 죽음으로 몰고 간 부정선거의 여러 행태, 특히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위반, 경찰의 부정선거 개입, 국공영 기업체를 통한 선거자금 염출 등은 모양만 조금씩 달리할 뿐 아직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이미 62년 전에 부정선거에 맞서 피 흘리며 싸웠고, 부정선거의 책임자를 교수대(絞首臺)에 세웠던 국민이다. 최인규의 비극은 부정선거를 저지를 경우, 그 당사자도 정권도 무사할 수 없고, 그로 인한 후과는 두고두고 국가에 큰 후유증을 남긴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는 집권 세력이나 선거관리에 임하는 이들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준엄한 경고이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03월 호  

한국 중공업 건설의 숨은 주역 김재관 박사

⊙ 1호 유치 해외 과학자… 철강·조선·자동차 산업 건설 과정에서 활약
⊙ 포철(포스코) 건설 당시 ‘高爐 방식에 의한 10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주장해 관철시켜
⊙ ‘한국형 고유 모델 자동차’ 주창해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기틀 마련

1972년 5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달의 수출품으로 선정된 자동차 부품에 대해 설명하는 김재관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1964년 12월 13일 일요일 오전 9시. 뮌헨의 피어 야레스자이텐 캠핀스키 호텔 1층 소연회실에서는 독일을 방문 중이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재독(在獨) 유학생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우리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공부하는 과학자들이 참석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심정으로 한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과 공업의 발전을 위해서 애쓰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나라를 잘사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가지고 계신 전문 과학지식을 우리 국가를 위해 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 길지 않은 연설을 마친 후 박 대통령은 좌중을 돌아보면서 “혹시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때 한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뮌헨공대에서 금속재료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세계 유수의 철강회사이던 데마그(DEMAG) 종합기획실에서 근무하던 김재관(金在官·1933~2017년) 박사였다.


대통령에게 〈철강산업육성방안〉 올린 유학생

김재관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이 준비한 세 권의 책자를 올렸다. 그중 하나가 〈한국의 철강공업육성방안〉이었다. 김 박사가 말했다.

“각하, 철강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이고 기반입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입니다. 제가 쓴 기획안입니다. 혹시라도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안 그래도 철강 산업 건설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대통령은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 돌아가서 꼭 제대로 된 철강회사를 만들겠습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이날 김재관이 박 대통령에게 산업화 관련 문건들을 올린 것은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당시 독일 교민들 가운데서도 ‘군사정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된 독일 유학생 모임 퇴수회(退修會) 회원들은 “적어도 우리는 발전적인 의견이나 제안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고 그 역할이 김재관 박사에게 떨어진 것이었다. 마침 김 박사도 오래전부터 〈한국의 철강공업육성방안〉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한 것은 ‘라인강의 기적’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함보른탄광 강당에 모인 파독(派獨)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눈물을 쏟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박정희 대통령도 지쳤다. 이럴 때 얼큰한 김치찌개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비서들은 교민들에게 무엇이든 좋으니 한국 음식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뮌헨에 살던 양혜숙 박사가 급히 잡채를 만들어가지고 호텔로 달려갔다. 육영수 여사는 “정말 고맙다”면서 교민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준비해온 침대보를 답례로 주었다. 육 여사도, 박 대통령도 당시에는 몰랐지만, 양혜숙 여사는 바로 김재관 박사의 부인이었다.


‘준비된 일꾼’

포항제철 착공식에 참석한 김재관 박사(뒷줄 왼쪽). 앞줄 가운데가 박태준 사장.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었다. 초대(初代) 연구소장인 최형섭(崔亨燮·전 과학기술처 장관) 박사는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 유치(誘致)에 나섰다. 당시 대한민국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우, 최고의 연구 환경을 약속했지만, 이미 선진국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그들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당장 월급만 해도 몇 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도 18명의 과학자가 기꺼이 거기에 응했다. 그들은 돈보다 가난한 조국을 잘살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기회를 얻은 것을 더 귀하게 여긴 사람들이었다.

18명의 첫 번째 해외 유치 과학자 가운데 17명은 최형섭 박사가 미국 전역을 돌면서 스카우트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바로 김재관 박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그를 지명하고 불러들인 것이다. 박 대통령은 2년 전 자신에게 〈철강산업육성방안〉을 올렸던 그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관 박사는 ‘준비된 일꾼’이었다. 1호 유치 과학자 중 한 명인 윤여경 박사의 회고다

“그 당시 참여한 사람 중 김재관 박사는 달랐어요. 김재관 박사는 이미 귀국 전부터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준비하고 온 사람이었어요. 이미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계획과 꿈을 가슴속 깊이 담고 있던 분이었지요. 한국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67년 귀국길에 오른 김재관 박사는 이후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서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일관제철소 건설 주장

사실 김재관 박사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의 ‘벼슬’은 상공부 중공업차관보에 그쳤다. KIST 제1연구부장·특수기재연구실장, 초대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국방과학연구소(ADD) 부소장, 초대 한국표준연구소장 등을 거쳐 인천대 교수로 이어지는 그의 이력도 그렇게 화려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김재관 박사는 겉으로 보이는 이력서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낸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산업들의 산파역(産婆役)이었다. 포항종합제철을 만들 때, 그는 고로(高爐) 방식에 의한 10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설을 주장해 성사시켰다. 건설자금을 대는 일본 측에서는 한국의 역량이나 경제 수준으로 보아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인 데마그에서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정연하게 주장을 전개하는 김재관 박사에게는 일본 측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자동차 및 선박용 후판(厚板) 생산설비를 미리 갖추어놓아야 한다고 주장, 이를 관철시켰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이 자동차 산업과 조선(造船) 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덕에 먹고살 수 있는 것은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형 고유 모델 자동차’ 개발 주창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

 

대한민국 경제가 김재관 박사의 통찰력에 빚진 부분은 또 있다. 바로 ‘자동차 기술 독립’이다. 한마디로 ‘한국형 고유 모델’의 자동차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건설의 건설자로 널리 알려진 오원철(吳源哲) 경제2수석비서관은 여기에 반대했다. 자동차 산업은 당초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에서도 빠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공부 중공업차관보였던 김재관 박사는 상공부 차관과 장관, 오원철 수석을 뛰어넘어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獨對)했다. 그는 “고유 기술 없는 자동차 산업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면서 고유 모델 자동차 정책 추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고민 끝에 그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결국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자동차 산업 정책은 ‘외국 모델 기반의 부품 국산화’에서 ‘톱다운 고유 모델 확보 및 수출·양산화’로 방향을 전환했다.

하지만 ‘고유 모델 확보’라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가려는 자동차 회사는 없었다. 당시 그만한 역량이 있던 회사는 아세아자동차, GM코리아였지만, 이들은 ‘외국 모델’을 베껴다가 국내 시장에 판매하는 데 안주하려 했다. 삼륜차를 만들다가 자동차 산업 진입 기회를 노리던 기아산업도 말할 나위 없었다.

김재관 박사는 당시만 해도 자동차 업계의 후발(後發)주자였던 현대자동차의 정세영(鄭世永) 사장을 불러들여 간곡히 설득했다. 최초의 한국 고유 모델 자동차 ‘포니’는 그렇게 탄생했다.

1997년 IMF사태 후 외국 자동차 기업에 매각된 르노삼성이나 한국GM은 오늘날 본사(本社)에서 배당하는 모델과 물량에 목을 매고 있다. 만일 김재관 박사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은 선진국 업체의 하청공장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포니’도, 오늘날 세계 5위의 자동차 기업 현대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관료 시스템의 생리상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자기 의지를 관철시킨 관료가 버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홍하상 지음, 백년동안 펴냄)에서는 ‘이를 계기로 김재관과 오원철은 멀어지게 된다’는 정도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김재관 박사가 1975년 초대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장으로 나가게 된 것은 아마 오원철 경제2수석과의 그런 마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재관 박사는 5년간 표준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국가표준의 확립’에 진력(盡力)했다. 모든 산업 발전의 기초가 되는 것이 표준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나노미터급 낸드플래시 메모리 분야의 최강자(最强者)로 군림할 수 있는 것도, 자동차·조선·철강 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한국표준과학원의 뒷받침 덕분이다.
 

 

戰時에도 인재를 키운 李承晩

대통령에게 당돌하게 〈철강공업육성방안〉을 내민 젊은이를 중용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지만, 그 젊은이를 키운 것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었다. 6·25가 일어난 1950년 서울대 기계공업과에 입학한 김재관은 전란(戰亂) 중에도 전장(戰場)으로 나가지 않고 전시(戰時)연합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 덕분이었다. “못 배운 핫바지들만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란 말이냐!”는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이후 국가를 일으키려면 우수한 인재들을 살려내고 가르쳐야 한다고 확신했다.

김재관 박사가 그 가난했던 1950년대에 독일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이승만 대통령 덕분이었다. 김 박사는 독일 유학 시험에 붙을 무렵 산업은행 입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산업은행은 변변한 직장이 없던 당시 국내 최고의 직장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독일 유학시험 합격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구용서(具鎔書) 산은 총재는 그가 유학을 가 있는 동안 월급을 지급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덕분에 김 박사는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덜고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구용서 총재가 실제 근무하지도 않는 신입 직원에게 월급까지 주면서 유학을 도운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재 양성 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학을 간 젊은이는 죽어라 하고 공부했다. 그리고 가난한 조국으로 돌아와 철강·자동차·조선 산업을 일으키고, 반도체 산업의 기반을 닦았다. 전쟁통에도 인재를 길렀던 노(老) 대통령, 그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젊은 공학도, 그 젊은 공학도를 알아본 40대 군인 출신 대통령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역사는 청산하고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다.

아쉽게도 ‘김재관’이라는 이름은 박태준(朴泰俊), 오원철, 정주영(鄭周永), 정세영, 최형섭 같은 개발연대(開發年代)의 스타들에게 묻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 시대에 활약했던 원로(元老) 과학기술자들이나 그의 이름과 업적을 기억할 뿐이었다. 다행히 최근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평전이 나왔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제대로 알리려는 이런 노력이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해본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03월 호

탄생 120주년 시인 백기만의 생애

시집 한 권 없이 잊힌 抗日 민족시인

 

⊙ 신문학 초창기 《금성》(1923) 창간… 不逞鮮人의 저항시인
⊙ 경북영화협회(1945)·경북문학협회(1956) 창립… 신문사 주필, 사회당 경북도당위원장 활동

박상봉
1958년생. 1981년 동인지 《국시》 활동, 1990년 현암사가 발간한 《오늘의 시》 선정 / 시집으로 《카페 물땡땡》 《불탄 나무의 속삭임》. 현재 문화산업 기획자이자 중소기업 성장 컨설턴트로 활동 중

 

▲백기만 시인. 사진=박상봉 제공

 

[편집자 註]

《조선일보》 1969년 8월 20일 자 1면 ‘만물상’ 코너에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 짧게 실렸다. “씨는 시인보다도 차라리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서의 기골로 그 면목이 더 그리운 고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시계를 되돌려 《조선일보》 1925년 4월 20일 자 3면에 백기만의 시 ‘갈매기 날던 저녁 하늘이’, 같은 해 5월 21일 자 3면에 시 ‘갈매기’가 실렸다. 소네트 형식의 시를 소개하면 이렇다. ‘바다를 그리는 것은/ 갈매기!/ 당신을 그리는 것은/ 나의 맘// 오- 님이여 나는/ 당신의 바다 같은 가슴이 그리워/ 애달프게 떠돌며 감돌아드는/ 이름 없는 한 마리의 갈매기외다.’

《조선일보》 1934년 7월 11일 자 7면에 실린 당대 문인들의 〈한글 철자법 시비에 관한 성명서〉에 김동인·이광수·채만식·염상섭·이은상·임화·백철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 77명의 이름과 함께 백기만의 이름도 확인된다.

백기만은 대구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 민족지사이자 초창기 한국 근대문학을 일군 개척자였다. 한국 근대문학의 요람인 《금성(金星)》(1923)을 창간했고, 당대 이상화(李相和·1901~1943년), 현진건(玄鎭健·1900~1943년), 이상백(李相佰·1904~1966년) 등과 교유하며 프린트판 동인집을 펴내기도 했다. 이상화가 죽은 뒤에는 대구 달성공원 내 상화시비 건립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해방 후 대구 지역 언론사 주필, 논설위원으로 활약했고 4·19 후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뒤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1969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백기만 탄생 120주년을 앞두고 김용락·박상봉 시인 등이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마음시회)을 펴내는 등 한국문화분권연구소를 중심으로 시인 백기만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대구 지역에서 백기만 시인의 재조명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최근 발간한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마음시회 간).

 

1902년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백기만은 대구고보(大邱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대구고보 시절 이상화·현진건·이상백 등과 교우관계를 가지면서 그들과 함께 문예 동인지 《거화(炬火)》(1917)를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시적 재능을 드러냈다.

그런가 하면 3·1운동 당시 이상화·이곤희(李崑熙)·허범(許範)·하윤실(河允實)·김수천(金洙千) 등과 함께 대구지방 만세시위를 모의·주동하여 항일 민족시인으로서의 실천적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백기만은 《상화와 고월》(청구출판사·1951)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대사건을 대구에서는 2일 저녁에야 알게 되었다. (중략) 3일 아침 일찍이 상화를 찾았다. 나는 ‘파리 만국회의에서 민족자결이 결정된 까닭에 서울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데 대구에서도 호응하여 성세(聲勢)를 올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걱정하였다. 상화는 ‘호응해야지 호기를 놓쳐서야 될 말인가. 그러나 독립운동은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인데 학생들이 일어나지 않고는 가능성이 없는 일일세’ 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 생각하다가 ‘자네가 고보학생의 동원을 책임지겠다면 계성은 내가 연락할 수 있겠는데’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상화한테서 기대하였던 말이 나오는 것이 반가워서 감격한 어조로 ‘책임지지! 고마우네’ 하고는 덥석 상화의 손을 잡아 부서져라 힘껏 쥐었다.〉(146~149쪽)


대구 3·1만세운동 이야기

▲대구고보 시절의 백기만. 그는 대구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렇게 해서 백기만은 4학년 허범을 찾아가 동의를 얻어내고는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연락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2학년의 하윤실(河允實)과 1학년의 김수천(金洙千)에게도 상의하여 동참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런 중에 6일 오후 이만집(李萬集) 목사가 상화의 사랑으로 사람을 보내어 8일이 큰 장날이니 그날 오후 1시 정각에 큰 장 복판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행진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문의해왔고 상화 등이 이에 찬성하였다. 7일에는 상화가 선전문의 등사를 혼자 맡아서 하였고 백기만은 이곤희·허범·하윤실·김수천 등과 함께 300매의 태극기를 박아내었다. 이때 만든 태극기를 백기만은 8일 아침 보자기에 싸서 등교하였다. 그러곤 4학년 교단 밑에 숨겨두었다가 나눠줄 생각이었다는데 그날의 거사를 짐작한 학교 당국의 감시 때문에 끄집어낼 기회가 없어 시위장소로 출발할 때에는 그대로 버려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훗날 확인한 ‘3·1운동 판결문’을 보면 백기만은 당시 대구고보 3년생으로 1년 징역을 선고받았다가 2심(복심법원)에서 3년 집행유예로 출소(5월 31일)하게 되었다. 전도가 창창한 18세 학생이라는 점이 참작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소는 하였으나 그는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행동에 심한 제약이 따랐다. 그래서 1919년 8월 상경하여 한때 백운산(白雲山)으로 이름을 바꾸어 행동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쟁쟁한 명사들을 사귀게 되어 이돈화(李敦化)·정우영(鄭又影)·현진건·권애라(權愛羅) 등과 함께 웅변회를 조직하고 웅변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에 입학하여 불문학을 지망하였다. 여기서 양주동(梁柱東)·손진태(孫晋泰)·유엽(柳葉) 등과 어울려 등사판의 회람잡지 《알》을 펴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곧이어 우리 근대문학사에 나타난 최초의 본격적 시 전문지였던 《금성》을 창간하는 준비작업인 셈이었다.

1923년 11월 10일자로 동인지 《금성》이 창간되자 문단은 이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비록 대학 예과 과정 또는 학부 저학년에 재적 중이기는 했으나 《금성》 동인들에게는 선구적인 위치에서 문학을 전공 중이라는 생각이 빚어낸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은 그들에게 선행(先行)한 유파, 집단보다 그들이 우위에 서 있다는 긍지와 함께 자신들이 진행하는 일들이 탁월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정열·의욕 등을 낳게 했다. 말하자면 이런 점에서 한때 기세를 떨친 《백조(白潮)》 동인의 물결이 퇴조한 직후 정체된 문단 일각에 환기를 불어넣을 수가 있었다.


선행한 유파보다 우위에 있다는 긍지

《금성》 동인들은 아주 개성적인 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금성》 이전의 문예 동인지들을 보면 그 구성원들 사이에 적지 않은 교류 및 이동 현상이 나타난 데 비해 《금성》 동인의 경우 독자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통권 3호가 간행되는 동안 비교적 수준이 고른 작품들을 수록하였다.

《금성》 창간호에 백기만은 ‘꿈의 예찬(禮讚)’ ‘새사람’이라는 시와 전래동화를 작품화한 동요시 ‘청개고리’를 수록하는 한편 타고르의 시를 번역, 소개하였다.

모든 물체와 모든 현상을 있게 하신 창조자여!
나는 지금 인생의 환이고 또 꿈에서 깨어 그 꿈을 그리며
내 인명을 받은 후 처음 경호한 마음으로 당신을 대합니다.
그리고 내 영은 끝도 모르고 한도 없는 그의 춤추는 놀이터로
고요히 격동치는 한밤의 그윽한 곡조를 따라 눈물에 흘러갑니다.

-백기만의 ‘꿈의 예찬’ 중 일부

시의 행간은 비애에 깊이 젖어 있다. 이때 비애는 일제 치하에서의 피압박 민족이 겪는 당시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현실을 떠나 이상의 세계로 가려는 낭만주의적인 정신을 보이고 있지만, 그 낭만주의적인 주조 속에는 유토피아적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창간호는 50쪽에 불과했지만 110쪽으로 늘어나 발행된 《금성》 제2호는 다음 해 정월달에 나왔다. 백기만은 ‘구름과 물결’ ‘적고 큰 사람’이라는 창작시와 타고르의 ‘신월에서’라는 번역 시를 수록하였다.

백기만의 번역 시는 나중에 김억(金億)의 번역과 비교되어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번역이 어색한 직역투였다는 점에서의 난점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금성》 동인의 해외 시 수입, 소개의 태도는 원문에 충실하고 이중번역, 삼중번역이 아니라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국내 최초의 시인 選集 발간

 ▲백기만 시인이 펴낸 여러 간행도서.

 

 《금성》 동인으로 참가해오던 백기만은 1923년 서울 통신중학관에서 《조선통신 중학강의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압박받는 민족에게 긍지를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후진들의 교육에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산촌모경’(1924), ‘은행나무 그늘’(1925) 등을 발표하였고 월간지 《여명》(주간 김승묵)의 문예부를 담당(1925)하는 한편 《조선시인선집》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조선시인선집》(1926)은 신시 운동의 기점이 되는 1919년 이래로 활동한 국내 시인 28인의 작품을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인선집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시인은 이광수·김억·주요한·황석우·오상순·남궁벽·조영희·변영로·홍사용·노자영·박종화·양주동·이일·백기만·오천석·김형원·박영희·이상화·이장희·김동환·김명순·김기진·유춘섭·이은상·김여수·박팔양·손진태·윤도순·조운 등이었다.

3·1운동의 주모자로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이후로 줄곧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일경(日警)의 감시를 받았던 그는 걸핏하면 가택수색을 당하였고 하는 일마다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듯한 직장 하나 제대로 마련할 수조차 없었던 그에게 경북 김천에 ‘금릉학원(金陵學院)’이 설립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금릉학원’은 김천 일원에서 민족주의자로 덕망을 얻고 있던 고덕환(高德煥) 선생이 설립한 학교로 백기만과 같은 항일정신이 투철하고 민족적 긍지를 지닌 사람을 교사로 초빙하여 쓰고자 하였다.

 

백기만 交遊錄

 만주 시절의 백기만 시인(가운데). 사진=박상봉 제공

 

 ‘금릉학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백기만은 동료 교사 부인의 중매로 결혼도 하게 되었고 안정된 생활을 마련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을 뿐 일제는 민족주의 교육을 하는 등 불온하다는 이유를 들어 ‘금릉학원’을 폐쇄(1928)해버렸다.

‘금릉학원’이 폐쇄된 직후 향리인 대구에 내려와 지내던 그는 그해 여름 이장희(李章熙·1900~1929년)의 음독자살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의 놀라움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충격을 달래기 위해 그는 1929년 10월 이상화·오상순·서동진을 비롯한 여러 향우와 대구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 3일간 ‘고월(古月) 이장희 유고시화전’을 열었다. 전람회의 마지막 날에는 같은 장소에서 추모회를 하여 유족과 참석한 이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백기만은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각별하였다. 이상화·현진건·이장희 등과 자주 어울렸고 서울에서 하숙할 때는 이장희 등이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 오곤 하였다.

그는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이상화·박종화·김기진 등과 어울려 종로 뒷골목 다방골 홍등가를 헤맨 일이 한두 번 정도는 있었으나 술에 약했기 때문에 되도록 그런 자리는 피하려 하였다. 그의 성격은 청렴 담백하였고 항시 용모를 깔끔하게 하였다. 양복을 입을 때엔 나비넥타이를 즐겨 매었다고 한다. 절친했던 향우 이장희를 잃은 후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공백기를 가졌는데 이 기간에는 작품 발표도 전혀 없으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한때 만주로 가서 농장을 경영하며 그곳에 이주해 사는 농민들을 위해 야학에서 가르치고 운동기구 등을 보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문화·예술 및 정치적인 활동

 《조선일보》 5월 21일 자 3면에 실린 백기만의 시 ‘갈매기’.

 

 1945년 마침내 해방되어 그는 비로소 젊은 시절에 꿈꾸었던 포부를 펼치고자 하였다. 장인환(張仁煥)·최화수(崔華秀)·김용상(金容尙)·이원식(李元式)·김해생(金海生) 등과 ‘경북영화협회(慶北映畫協會)’를 창립(1945)하는 한편 근로인민당 경북도당위원장(1947)이 되어 문화·예술 및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사회적인 혼란은 끊이지 않는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 그의 개인적인 고뇌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그런 중에도 작고 시인의 회고록 《상화와 고월》을 출간(1951)하는 한편 《대구시보(大邱時報)》 출판국장 및 논설위원, 《대구일보》 상무이사, 《영남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예술 행정에서도 역량을 발휘하였는데, 자생적인 단체 ‘경북문학협회’를 창립(1956), 관료적인 일에는 소극적이기 마련인 문학적 풍토를 쇄신하고 예술행사를 위해 섭외를 하는 일에 앞장서 대부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예컨대 ‘8·15 기념문학의 밤’(1945.8.19), ‘경북출신작고예술가추도회’(1957.12.21), 《문학계》(경북문학협회 기관지 제1집) 발간(1958), 《씨뿌린 사람들》(경북작고예술가평전) 편찬(1959), ‘시민교양강좌’ 개최, ‘8·15기념문화제전’(1959) 등을 꼽을 수 있다.

백기만은 인생 여정이 파란만장하였던 만큼 다재다능한 천재성을 나타낸 사람이었다. 그와 어울렸던 사람들이 모두 타고난 인물들이었으니, 현진건·이상화·이장희·이육사 등이 그러하고 《금성》 동인이었던 양주동·김동환 등과 박종화·오상순 등이 또한 그러하다. “천재는 천재가 알아보고 천재와 어울린다”는 말에 근거를 두고 얘기하자면 그 또한 천재가 아닌가.


우울한 천재… 흔한 ‘문화상’ 하나 수상하지 못해

 1963년 10월 백기만 시인이 ‘대구시민문화상’을 수상하며 오열하고 있다.

 

 그는 1960년 4·19 후 사회대중당의 공천으로 참의원에 출마(1960)하였다가 낙선한 이후로는 사회당 경북도당위원장(1961)으로 잠시 지냈을 뿐 병고에 시달리며 우울한 여생을 보냈다. 5·16 후 혁신계열이라 하여 혁명재판에 회부된 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뇌졸중으로 두문불출하였다.

전 생애를 문화·예술에 바쳐 살아온 그가 그 흔한 문화상 하나 수상하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를 존경하는 후배 시인들이 모여 ‘금성 동인 회고 시화전’을 대구 동설로 은다방에서 열었던 적이 있었다(1961년 10월 11~25일). 시화전이 끝난 25일 오후 7시 시화 판매 이익금으로 “연차적 행사인 경북문화상마저 외면당한 시집 한 권 없는 항일 민족시인 목우에게”라고 적힌 금메달과 백미 한 가마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것이 세칭 ‘대구시민문화상’ 시상식이었다.

그는 중풍으로 5년 동안 고생하다가 1969년 8월 7일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후 53년에 이르는 오늘날까지도 유고 시집 한 권조차 엮이지 않고 있으며,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과 헌신에 관해 본격적인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글 : 박상봉 시인

 

03-24  한성감옥 옥중도서관서… 구한말 개혁파들, 근대 민주국가 꿈꿨다

월남 이상재 95주기… 후손이 기증한 ‘한성감옥 도서대출 장부’ 공개
1903년 1월… 1904년 8월 대출 기록
1902년 옥중도서관 만든 이승만과 ‘독립협회 활동’ 인사들 이름 담겨
美 독립운동사-프랑스 혁명 등… 서구 정치체제-사상 담은 책 눈길

1903년 한성감옥에 수감된 당시 죄수복을 입은 28세의 우남(왼쪽)과 53세의 월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독립기념관·이승만기념관 제공 

 

‘서대문감옥(옛 한성감옥)에는 진귀한 보물이 있다.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동지들과 같이 투옥됐을 때 옥중 도서관을 만들어 죄수들에게 나라 구하는 길을 가르쳤다. 나는 이곳에서 그의 손때와 눈물자국이 얼룩진 책을 보았다.’

백범 김구(1876∼1949)가 1911년을 회고하며 백범일지에 쓴 글이다. 당시 그가 투옥된 서대문감옥의 종로구치감은 구한말 한성감옥의 후신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개혁운동을 벌이다 한성감옥에 갇힌 우남 이승만(1875∼1965)을 포함한 지식인들은 옥중 도서관을 세우고 밤새 책을 읽었다.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선 이들은 감옥에서 어떤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을까.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월남 이상재(1850∼1927) 서거 95주기를 맞아 그의 후손인 이진구 씨가 올 초 기증한 ‘한성감옥 도서대출 장부’를 공개했다. 1903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수감자와 간수의 책 대출내역이 기록된 143쪽짜리 장부에는 우남, 월남 등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이름도 담겼다.

 

 1903, 1904년 한성감옥 옥중도서관의 도서대출 장부.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우남 이승만이 대출한 ‘천로역정’ 등이고 푸른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월남 이상재가 빌린 ‘태서신사’ 등이다. 독립기념관·이승만기념관 제공

 

 대출목록에는 근대국가 정치체제와 사상을 담은 책들이 눈에 많이 띈다. 1903, 1904년 대출순위 1위(45회)에 오른 ‘유몽천자(유蒙千字)’는 미국 독립운동사를 소개한 책이다.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쓴 이 책은 우남과 백범, 월남 모두 읽었다. 2위는 프랑스 혁명 등 19세기 근대국가를 형성한 유럽사를 다룬 ‘태서신사(泰西新史)’.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의회정치 체제가 확립된 과정을 그린 저자 불명의 이 책도 우남과 백범, 월남이 탐독했다. 백범은 백범일지에 “태서신사를 읽을 때마다 이승만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한 느낌이 일었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월남은 서구 관점에서 유학(儒學)을 비판한 ‘경학불염정(經學不厭精)’을 수차례 읽었다. 이 책은 독일인 선교사 에른스트 파버가 썼다.

서구 근대국가의 정치체제를 소개한 ‘자서조동’(自西조東·에른스트 파버 지음)은 이동녕이 1903년 출옥하며 따로 챙겨갈 정도로 즐겨 읽은 책이다. 훗날 이동녕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의장으로 ‘대한민국의 정체는 민주공화정’임을 선포하며 “우리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군주제를 부활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요, 국민이 국가가 되는 민주제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1899년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돼 한성감옥에 투옥된 20대 청년 이승만은 1902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250여 권을 소장한 옥중 도서관을 만들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수감시설로 바뀐 한성감옥에 ‘수감자 중 서적 보는 것을 청한 자가 있으면 필요한 것만 허락한다’는 규칙이 신설된 데 따른 것. 1902년 6월 투옥된 월남은 도서관 서기가 됐다. 임정 초대의장 이동녕,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종일도 장부에 이름을 올렸다. 한성감옥이 근대개혁 정신을 싹틔운 배움의 장이 된 것이다.

 

윤소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당대 지식인들은 감옥에서 서구 근대사상을 탐닉하며 건국의 뼈대를 구상했다”며 “한성감옥은 구한말 근대국가 수립을 모색하던 지식인들의 지적 탐구의 장이자, 독립운동가의 배출 통로로 기능했다”고 말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03월 30일 조선시대엔 물류 거점, 외세침략땐 외국군 주둔지…‘영욕의 땅’

 ▲ 1906년에 건립된 용산역, 일제강점기 용산 일본군 병영, 용산총독관저(위 사진 왼쪽부터).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 제공

 

■ What - 대통령 집무실 이전장소 거론 龍山 의 역사

조선 한성 ~ 전국 이어준 결절점이자 경강상인 본거지… 1900년 1월 서계동 ~ 청파동 ~ 원효로 전차 개통되며 근대문물 최전선 지역 돼

한강 접하고 남산 가까워 전략 요충… 임진왜란 왜군·임오군란 청군 눌러앉고 일제땐 일본군 사령부·광복후엔 미군기지 들어서


‘용산(龍山)’ 하면 많은 이들이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자리 잡은 미군 기지와 이태원, 전자상가 등을 떠올린다. 최근엔 국방부 인근 ‘용리단길’이 노포(老鋪)와 신생 맛집이 함께 어우러져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20일 대통령 집무실을 국방부 신청사로 이전한다고 발표하면서 ‘영욕의 역사’를 간직한 용산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외국군 주둔 기지로 ‘수난의 역사’ 점철 = 서울기록원과 용산구청 등에 따르면 용산은 조선의 수도인 한성과 전국을 이어주는 주요 결절점으로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자 물류의 중심지였다. 한강과 인접해 전국의 세곡(稅穀) 등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漕運船)과 상인들이 몰려들며 큰 포구로 발전했으며, 한강에서 활약한 경강상인의 본거지였다. 1888년 8월 한강에 증기선이 뜨고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이자 양옥건물인 ‘용산신학교’가 설립됐으며, 1900년 1월 서계동∼청파동∼원효로 구간에 전차가 개통되면서 근대 문물을 먼저 접한 지역이기도 하다.

용산은 그러나 외국군들이 주둔했던 군사기지로서 ‘수난의 역사’가 도드라진 곳이었다. 한강과 접해 있고 남산과도 가까워 역사적으로 군사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크게 패한 왜군이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용산에 진지를 구축한 게 외국군 주둔의 시작이었다. 근대 들어 용산에 다시 군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이 계기였다. 조선 정부는 1881년에 창설한 별기군에 특혜를 준 반면, 구식 군대를 푸대접했다. 이에 멸시받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 군대가 임오군란 진압을 빌미로 용산에 주둔하며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 당시 청군과 조선군의 전투는 현재의 경리단 인근에서 벌어졌다. 흥선대원군이 군란 배후로 지목돼 청에 납치된 곳도 용산이었다.

◇일본의 한반도 통치와 대륙 침략의 거점 =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용산 일대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중에 반강제적으로 한일의정서(1904년)가 체결됐고, 일본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시 수용할 수 있다’는 한일의정서 제4조에 따라 용산 일대를 군용지로 수용했다. 1905년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그해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뒤 용산과 신의주를 잇는 철도(경의선)를 개통하는 등 철도기지 건설에 속도를 냈다. 일제는 1908년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를 용산으로 이전하고, 이를 발판 삼아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다. 남영동(南營洞)이라는 지명도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 남쪽에 병영이 있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일본군의 주둔으로 용산엔 일본 군인과 그 가족들이 살던 집단 거주지가 생겼다. 현재의 남영동과 후암동·청파동·용산2가동·원효로 일대로, 당시 지어진 적산가옥 등을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용산은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6년 효창공원에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셨고 1948년에는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했다. 1949년 우익 테러로 살해된 김구 선생도 효창공원에 묻혔다.

 

 ▲ 빌딩 숲으로 변모한 용산역 인근 한강대로(아래 왼쪽)와 국제업무지구로 조성될 용산정비창 부지. 용산구청 제공

 

 ◇광복 이후에도 외세의 땅으로 남은 용산기지 = 조선 총독은 1945년 9월 9일, 미군 제24군단에 정식으로 항복했다. 제17방면군사령부가 용산을 떠나면서 일본군의 용산기지 역사는 마무리된다. 대신 용산기지를 접수한 미군은 이곳을 ‘캠프 서빙고(Camp Seobinggo)’라 명명했다. 용산의 군사 기지 색채는 냉전 체제의 심화로 더욱 짙어졌다.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호조약이 맺어지며 용산 일대 미군 주둔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4년 뒤인 1957년 일본 도쿄(東京)에 주둔했던 유엔군사령부(UNC)가 용산기지로 이동해 주한미군사령부(USFK)를 창설했다. 1978년에는 한미연합사령부(CFC)가 창설되면서 용산기지는 한·미 군사동맹의 상징적인 장소로 변모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가 용산에 자리 잡았으며, 1989년 계룡대로 이전하기 전에는 육군본부도 용산에 있었다.

용산엔 미군 주둔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다. 1957년 미 8군 병사들의 외출이 허용되면서 이태원에 위락시설이 속속 들어섰다. 삼각지 화랑(畵廊)거리도 전쟁 이후 가난한 화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나 명화를 모작·판매하면서 생겼다. 용산기지 내 미 8군 클럽은 한국 록 음악의 대부인 신중현을 비롯해 공전의 히트곡을 낸 패티킴(‘그대 없이는 못살아’), 한명숙(‘노란 샤쓰의 사나이’) 등이 활동한 한국 대중음악의 성지이기도 하다.

◇용산 지역사 전문 박물관 탄생 = 용산의 이 같은 역사성과 문화적 다양성은 지역사 전문 박물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용산구는 1928년에 지어진 옛 용산철도병원 본관 건물을 용산역사박물관(한강대로14길 35-29)으로 탈바꿈시키고 지난 23일 문을 열었다. 등록문화재 제42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철도기지로 개발된 용산을 상징한다. 용산철도병원은 철도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을 치료하는 곳이었다. 1984년부터는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운영되다 2011년 병원이 이전했다. 이후 용산구는 용산의 근현대사를 소개할 박물관 조성 계획을 세우고 유물을 수집해왔다. 전시된 유물은 기증받은 것을 포함, 4000여 점에 이른다. 붉은색 외벽을 유지하면서 철도병원으로 쓰였던 당시 내부 흔적과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존했다.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을 지낸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은 “용산은 구한말부터 외세의 군사기지로 수난의 역사를 거듭했지만 용산공원 조성이 말해주듯 이제 미래지향적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라며 “다가올 새 정부 출범으로 용산이 재편될 기회가 온 만큼 과거만 되돌아보지 말고 한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핵심 공간으로 성장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도연 기자 kdy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