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2-03/ 03-01(화) 푸틴의 核 위협 - 03-31(목) 한국인의 신체 지수
횡설수설(동아일보) 2022-03/
03-01(화) 푸틴의 核 위협

사탄(악마) 2’라고 불리는 러시아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있다. 프랑스 크기 정도의 국가는 한 방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사탄이라는 무시무시한 코드명을 붙였다. 러시아에서는 ‘RS-28 사르마트’라고 불린다. 블라디미르함은 스텔스 전략핵잠수함으로 수중발사 ICBM 20기를 싣고 수심 400m까지 내려가 잠항할 수 있다. 장거리 전략핵폭격기 투폴레프-160은 이륙 중량이 270t으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항공기이면서 가장 빨리 나는 전폭기로 통한다.‘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 해체 이후 상호 합의로 전략무기를 감축해 왔다. 1991년 최초로 전략무기감축협정을 체결했다. 2010년에는 신(新)전략무기감축협정을 체결했고 지난해 5년 재연장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략무기의 수를 줄이는 대신 전략무기를 현대화하는 방식으로 협정을 우회했다. 2018년에도 최신형 전략무기 6종류를 공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사탄 2’이다. 극초음속 미사일로 지상발사용인 아방가르드와 공중발사용인 킨잘도 그때 공개한 전략무기다.
▷‘사탄 2’와 같은 전략핵무기는 실제 사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억지력으로 존재한다. 그나마 사용 가능성이 거론되는 건 전술핵무기다. 전술핵무기는 보통 20kt 이하의 폭발력을 가진 소형 핵무기를 말한다. 소형이라고 하지만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각각 15kt과 21kt이었으니 전술핵무기라도 위력은 엄청나다. 러시아의 전술핵무기를 실어 나르는 대표적 신형 발사체가 이스칸데르-M 미사일이다. 불규칙 기동이 특징으로 북한도 비슷한 것을 개발했다.
▷소련 해체 이후의 러시아는 체첸이나 조지아를 침공할 때 재래식 군사력으로 싸우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유사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전술핵무기 사용이 가능한 쪽으로 군사작전계획의 수정을 거듭해왔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재래식 군사력만으로 신속한 점령에 난항을 겪자 핵무기 운용 부대에 ‘특별 경계’ 태세 돌입을 명령했다.
▷작계가 어떠하든 푸틴이 말짱한 정신이라면 함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푸틴의 정신상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원래 마초적인 데다 20년 넘게 장기집권하면서 권력이 무소불위 수준으로 커지자 자아도취와 과대망상에 빠져 판단력이 떨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참모들이 견제할 수 있으면 다행이나 독재자 곁에는 늘 독재자를 거스르지 않는 참모들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3-02 우크라이나 소녀의 죽음

“아이를 어서 옮겨! 살릴 수 있어!” 의료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구급차를 울렸을 때 소녀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몇 번의 심폐소생술도 소용없었다. 옆에 있던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두 손을 떨면서 흐느꼈다. 끝내 숨을 거둔 6세 소녀의 몸을 덮어줄 것은 피로 얼룩진 그의 분홍색 재킷뿐. 철제 간이침대 위에 드러난 두 발은 너무 작았다.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 소녀의 죽음이 전 세계를 분노와 슬픔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소녀의 마지막을 지켜본 외신의 보도와 사진들은 실시간으로 타전됐다. 울분에 찬 의사들이 “이 사진을, 이 아이의 눈빛을 푸틴에게 보여주시오”라고 비장하게 쏘아붙인 내용까지. 유니콘이 그려진 파자마 차림의 소녀는 엄마 아빠와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유엔의 고위 당국자는 이 사진들을 보고 “위장이 뒤집힌다”고 했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 민간인 102명 중 어린이 희생자는 16명. 수도 키예프에서는 러시아군이 쏜 총에 맞아 10세 여학생이 숨졌다. 어린이 부상자는 45명으로 집계됐지만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키예프 북동부 지역에서는 유치원 근처에 집속탄이 떨어졌다. 100개 넘는 국가가 집속탄금지협약까지 만들어 금지한 치명적 살상무기가 어린이와 민간인의 목숨을 위협한 것이다.
▷무고한 희생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힘은 강력하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는 ‘유니콘 파자마 소녀’의 사진과 함께 “푸틴은 살인자” “전쟁범죄로 처벌하라”는 글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 세계 곳곳의 반전 시위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2015년 시리아 내전 당시에는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알란 쿠르디의 사진 한 장이 지구촌의 심장에 불을 붙였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 장악한 카불공항에 홀로 남겨진 채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기의 사진이 여론을 움직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내 아이, 내 가족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며 총을 집어 들고 있다. 피란길에 오른 한 소년이 울음을 꾹 참으며 “아빠는 군인 영웅들을 돕기 위해 혼자 남았다”고 말하는 인터뷰는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결사항전에 나선 이들의 비장한 표정은 문득 100여 년 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우리의 장삼이사들과도 겹친다. “고통받는 만큼 이겨낸다”며 일제에 맞섰던 17세 소년, 27세 이발사의 결기가 다르지 않다. 3·1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던 이들은 평범한 일반인과 어린 학생들이었다. 전쟁과 침략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슬프고도 위대한 아이러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3-03 ‘바람의 나라’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는 고구려 초기 대무신왕을 소재로 한 만화를 게임으로 만든 것이다. 넥슨이 1996년 세계 최초로 내놓은 ‘다중접속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인데, PC 통신으로 접속한 다수 참가자들이 함께 즐기는 새로운 차원의 게임이었다. ‘바람의 나라’는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며 뒤이어 나온 엔씨소프트의 ‘리니지’와 함께 한국 게임산업 도약의 디딤돌이 됐다.
▷며칠 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김정주 넥슨 창업자에 대한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고인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뒤 KAIST에서 박사과정을 밟다 6개월 만에 그만두고 1994년 자본금 6000만 원으로 넥슨을 창업했다. 국내 기업들이 생소한 온라인게임 사업계획서를 거들떠도 안 보던 시절이었지만, 네트워크 게임의 가능성을 확신한 그는 테헤란로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끈질기게 게임을 만들었다. 이후 퀴즈퀴즈 카트라이더 메이플스토리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온라인 게임 전성기를 이끌었다.
▷고인은 일찌감치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1998년 미국에서 영문판 ‘바람의 나라’ 상용서비스를 시작했고 일본 미국 유럽에 잇달아 법인을 세웠다. 2011년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한 것도 게임 종주국 일본을 잡아야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아키하바라 전자상가에서 사람들이 닌텐도 게임기를 사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이 늘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중국과 미국 등 후발주자들이 추격하자 고인은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이 때문에 연구개발에 매달리는 업계의 건전한 발전을 흐린다는 비판도 받았다.
▷고인은 지난해 국내 부호 3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게임회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채 전 세계를 돌며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내는 데 몰두했다. 게임산업 신성장 트렌드로 자리 잡은 블록체인에도 일찌감치 뛰어들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암호화폐 거래소 비트스탬프, 한국 최초의 암호화폐 거래소 코빗을 인수했다. 금융거래 플랫폼 개발에도 나섰다.
▷사업 방식과 관련해 논란도 있었지만 1세대 벤처기업인인 그의 성공이 많은 청년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이공계 인재들이 제2의 김정주를 꿈꾸며 벤처 업계에 뛰어들었고 고인은 맏형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기업 경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큰 딜을 한다는 게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두려워요. 늘. 그런데 제가 깡통 차는 건 전혀 두렵지 않아요. 원래 맨몸으로 태어났는데 돌아간다 해도 뭐 어때요”라고 했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3-04 GNI 3만5천$ 이후의 한국

작년 1인당 국민소득(GNI)이 처음 3만5000달러를 돌파했다. 6·25전쟁 직후인 1953년 67달러에서 68년 만에 무려 525배로 커졌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속 성장이다. 한국은행은 몇 년 내 4만 달러 달성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에서 “20년 뒤 한국에 1인당 국내총생산이 2배 이상 뒤처질 것이며 G7 회원국 자리가 한국으로 바뀌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경제학자의 경고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국은 1994년 처음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일본이 4년, 홍콩과 싱가포르가 5년 만에 넘었던 ‘2만 달러 벽’은 12년이 지난 2006년에야 간신히 넘었다. 외환위기를 시작으로 닷컴 버블 붕괴, 신용카드 대란이 줄줄이 발목을 잡았다. 선진국 대접을 받는 3만 달러 돌파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진퇴를 거듭하다 2018년에야 가능했다.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 중 3만 달러를 넘긴 곳은 일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6개국뿐이다.
▷그런데 내 호주머니 사정은 왜 이러냐는 불만이 나올 법하다. 국민소득은 개인뿐 아니라 기업과 정부가 벌어들인 소득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이들 몫을 빼고 개인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은 1인당 가계총처분가능소득(PGDI)을 봐야 한다. 재작년 PGDI는 1인당 국민소득의 56% 수준이니 3만5000달러 중 개인이 실제 손에 쥐는 돈은 1만9600달러다. 1인당 국민소득은 평균값이어서 소득불평등도 반영 못 한다. 자영업자와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 소득은 더 차이 날 수밖에 없다.
▷달러 표시 국민소득은 국가 위상의 바로미터이기도 하지만, 정책 목표가 되는 순간 외환위기로 돌아오기도 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임기 끝까지 1만 달러 달성을 유지하려 원화 강세 정책을 썼는데 당시 한은은 환율을 유지하려 사상 처음 선물환까지 투입했다. 수출 기업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정부는 ‘뼈를 깎는 노력’을 주문했고, 적자가 커진 기업들이 들여온 단기 외채는 외환위기의 빌미가 됐다. 그런데도 이후 대선 후보들은 거의 빠짐없이 국민소득 목표를 정책 공약으로 내걸었다.
▷한은은 4만 달러 달성 낙관론을 폈지만 기대보다 우려가 많다. 잠재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데다 나랏빚 급증과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로 차기 정부의 재정·금융정책 손발은 사실상 다 묶여 있다. 남은 길은 노동개혁과 규제혁파, 첨단인재 양성으로 기업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길인데 정치권은 거꾸로 입법 경쟁에 혈안이다. 일본은 3만 달러를 돌파한 1992년이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이었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3-05 푸틴의 돈줄 올리가르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00년 집권하자 러시아의 지배계층이 교체된다는 전망이 무성했다. 전임자인 보리스 옐의 ‘돈줄’ 올리가르히(신흥재벌)는 가고 이들의 사설 경호로 근근이 살아가던 실로비키(제복 입은 남자들)가 뜬다는 예측이었다. 푸틴 스스로가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 출신인 실로비키다. 실제로 푸틴은 임기 초반 ‘적폐 세력’ 올리가르히 숙청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멤버만 바뀌었을 뿐 올리가르히는 지금도 건재하다.
▷올리가르히는 1991년 소련 해체 후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탄생했다. 노점상 창문닦이 기계공으로 일하던 20, 30대 중 극소수가 발 빠르게 국유재산을 헐값에 사들이면서 금융 석유 언론 항공업계를 좌우하는 갑부가 됐다. 세계 주요 도시에 저택을 두고 비싼 미술품과 초호화 요트를 수집하는 이들 신귀족은 빈부격차가 심한 러시아에선 “고아원 앞에서 재미 삼아 돈뭉치 태우는 집단”으로 미움 받는다.
▷푸틴의 숙청에도 소수의 올리가르히는 살아남았는데 대표적 인물이 로만 아브라모비치다. 그는 무명의 푸틴을 총리로 발탁할 정도로 권력이 있었지만 푸틴이 대통령이 된 후로는 영국 첼시의 구단주가 돼 정치와 거리를 뒀다. 이번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비난 여론에 못 이겨 첼시 매각을 공언한 인물이다. 그처럼 경제 권력에 만족해 숙청을 피한 1세대와 실로비키 출신 2세대 올리가르히 110명이 푸틴의 충성스러운 돈줄 역할을 하며 러시아 부의 35%를 거머쥐고 있다.
▷올리가르히는 정치적 숙청에 대비해 자산을 해외로 빼돌려 놓는다. 대표적인 선호 지역이 러시아와 관계가 냉랭해 범죄자 인도 요청이 먹히지 않는 영국 런던으로 ‘런던그라드’로도 불린다. 그런데 이런 자산 관리 방식이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압박하는 수단이 됐다. 미국 영국 독일을 비롯한 서구 주요 국가들이 올리가르히를 푸틴의 전쟁 자금줄로 보고 이들의 자산을 동결하거나 압류하고 나섰다. 이미 러시아 상위 20대 부자들의 총자산 중 3분의 1인 800억 달러(약 97조 원)가 증발했다고 한다.
▷푸틴이 얼마나 타격을 입을지는 미지수다. 올리가르히의 자산이 대부분 지인의 명의로 돼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영국의 경우 이들의 자금 동결로 영국 경제도 피해를 입는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리가르히의 잦은 송사로 재미 본 로펌들이 벌써 방어막을 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최대의 올리가르히는 푸틴이다. 자산 규모가 세계 최고 부자 일론 머스크(260조 원)에 버금가는 240조 원으로 추정된다. 그의 자산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7(월) 러 디폴트 위기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는 1991년 구소련에 대규모 경제협력 차관을 제공했다. 구소련 해체 후 러시아가 채무를 승계했지만 1998년 모라토리엄(지불유예) 선언으로 돈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아시아 외환위기 여파로 러시아 외환보유액도 바닥났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한때 150%의 고금리를 유지하며 국가부도를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세월이 지나 한국은 원금 일부를 무기와 헬리콥터로 받아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24년 만에 다시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다. 미국 등 서방이 러시아 은행을 국제은행결제망에서 퇴출하고 경제제재를 쏟아내면서 루블화 가치가 급락했다. 러시아는 미리 외환보유액을 쌓아 놓고 위안화, 금 등으로 보유 자산을 다각화했지만 역부족이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러시아 신용등급을 한 단계 낮춘 데 이어 지난주 다시 8단계 강등했다. 무디스와 피치도 한꺼번에 6단계나 낮췄다. 피치의 신용등급 6단계 강등 조치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에 적용한 이후 처음이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은 신흥시장 지수에서 러시아 증시를 제외했다.
▷24년 전과 달라진 점은 국가부도를 대하는 러시아의 태도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 맞서 고의로 부도를 내는 ‘디폴트’(채무 불이행) 선언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혼자 죽지 않겠다는 물귀신 작전이다. 물론 이미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러시아 경제는 파국을 맞게 된다. JP모건은 올해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7% 둔화할 것으로 봤다. 국가부도가 난 1998년과 2008년 금융위기에 맞먹는 수준이다.
▷죽어나는 것은 러시아 국민이다. 루블화가 폭락하고 물품 수입이 막히면서 초인플레이션과 고금리로 인한 고통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자구책으로 암호화폐를 사들이고 있다. 루블화를 통한 비트코인 거래량은 작년 5월 이후 최대치다. 하지만 주요 7개국(G7)과 유럽연합은 러시아 개인과 기업의 암호화폐 거래도 차단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2000년 5월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후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장기 집권의 초석을 닦았다. 비결은 고유가였다. 오일머니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중산층이 두꺼워졌고 국방력과 외교력을 강화했다. 이번에도 그가 믿는 구석은 원유와 가스다. 유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생명줄인 에너지 제재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누가 오래 버티느냐는 치킨 게임이 벌어지는 이유다. 당장 달러가 없으면 에너지 수입이 막히는 한국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러시아의 배짱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3-08 러시아의 ‘보도 블랙아웃’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지만 러시아 내에선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지율이 70%로 오히려 6%포인트 올랐다. 침몰 직전의 러시아를 세계 초강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강한 리더로서 굳건한 지지를 받아온 데다 정부의 보도 통제로 명분 없는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러시아인들이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의 보도지침에 따르면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나치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특수 작전’이고, 민간인의 희생은 우크라이나가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이용하는 탓이다. 러시아 정부는 ‘특수 작전’ 대신 ‘전쟁’이라고 보도한 민영 방송의 송출을 금지하고, 서구 언론과 소셜미디어의 접속도 차단했다. 보도지침을 따르지 않는 기자는 ‘가짜뉴스’를 보도한 것으로 간주해 최대 15년의 징역형에 처하는 형법 규정도 5일 발효됐다. 지난 29년간 기자 6명이 살해당하면서도 권력을 비판해 온 ‘노바야 가제타’마저 정간을 피하기 위해 전쟁 보도를 중단하기로 했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편집장으로 있는 신문이다.
▷눈과 귀가 가려진 채 국영방송의 선전보도에 노출된 러시아인들이 전황을 제대로 알 리 없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러시아에 사는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놀란다. 수화기 너머 도심에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족들은 “너를 해방시켜 줄 것” “시민들은 건드리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 반전 시위로 1만3000명 넘게 체포된 사실도 모른다. 포로로 잡힌 러시아 병사들마저 “해방군으로 환영받을 줄 알았다” “민간인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러시아 정부에 차단당한 서구 언론은 “정확하고 독립된 정보에 접근할 권리는 러시아인들도 누려야 할 인권”이라며 특수한 앱과 가상사설망(VPN) 등으로 러시아 정부의 검열을 피해 가고 있다. 2010년대 ‘아랍의 봄’ 당시에도 유용하게 활용됐던 우회로들이다. 영국 BBC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 선전전에서 활약했던 단파 라디오를 통해 러시아 일부 지역에 하루 4시간씩 전황을 알리고 있다.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인 푸틴은 영어와 독일어 신문까지 탐독하는 ‘뉴스광’으로 누구보다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안다. 취임 후 국영 언론사를 늘리고 민영 언론사에도 완력으로 ‘애국주의적 가치관’을 강요해 온 이유다. 하지만 국영방송의 시청률은 떨어지고 있고, 검열의 방화벽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진상을 완벽히 막아주기도 어렵다. 진실로는 자국민조차 설득할 자신이 없는 정부가 전쟁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9 선거 테러

서울 신촌에서 유세 중이던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를 7일 둔기로 가격한 표모 씨는 진보좌파 성향 유튜버로 활동해왔다. 송 대표 피습 직후 표 씨는 “한미 군사훈련을 반대한다”고 외쳤다. 평소 한미 군사훈련에 반대해 왔는데 송 대표가 한미훈련 연기가 어렵다고 하자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경찰은 이 같은 범행 동기에 주목하고 보강 수사 중이다. 봉합 수술을 마친 송 대표는 어제 서울 여의도역에서 선거운동을 재개했다. 부상이 이 정도에 그쳤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2006년 5월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도 신촌에서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 도중 커터 칼 테러를 당했다. 얼굴 상처가 깊어서 긴급 수술을 받고 4주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박 전 대통령에게 상처를 입힌 지모 씨는 경찰 조사에서 “장기간 교도소 생활 등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 큰 사건을 저지르기로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5개월 전엔 한나라당 K 의원의 멱살을 잡았으나 별다른 처벌 없이 풀려나 더 큰 사건이 필요했다고 했다. 그래서 박 전 대통령을 표적으로 삼았지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고 한다. ‘화풀이 테러’였던 셈이다.
▷권위주의 시절엔 주로 집권 세력이 정치 테러의 가해자로 등장했다. 대부분 야당 지도자들을 겨냥했다.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일본에서 납치해 오거나,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초산 테러를 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대낮에 야당의 지구당 대회를 무산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원시적인 폭력으로 야당을 겁박하기 위한 의도가 뚜렷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엔 정권 차원에서 자행하는 테러는 모습을 감췄다.
▷해외에서는 선거 테러의 양상이 훨씬 과격하다. 2017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선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벌인 총격 테러가 발생했다. 1차 대선을 사흘 앞두고 벌어진 이 테러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 전체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 1차 대선 투표에선 반(反)이민정책을 내건 국민전선 후보가 당초 예상을 깨고 결선투표까지 갈 수 있었다. IS 테러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면서 국민전선이 반사이익을 챙긴 것이다.
▷이번 선거는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과 공격이 난무하는 네거티브전의 양상을 강하게 띠었다. 인공지능(AI)의 알고리즘이 이용자가 보고 싶어 하는 영상만 찾아서 보여주는 유튜브 같은 매체의 확산도 ‘확증 편향’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표 씨와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또 있지 말란 법이 없다. 선거 당일은 물론 선거 이후에도 한동안은 테러나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늦춰선 안 된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3-10 대선 투표율

역병도 막지 못한 선거 열기다. 코로나 이후 첫 선거였던 2020년 총선 투표율은 66.2%로 28년 만에 최고치였다. 지난해 4·7재·보궐선거는 평일임에도 서울과 부산의 투표율이 광역단체장 재·보선으로는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코로나가 최악으로 치닫는 시기에 치러진 이번 20대 대선도 77.1%로 2000년 이후 실시된 대선 중 역대 2위를 기록했다. 1위인 2017년 대선(77.2%)과는 0.1%포인트 차다. 총 투표자 수는 역대 최대인 3400만 명. 만 18세도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직접선거로 치러진 대선은 1952년 2대부터 올해 대선까지 모두 14회. 이 중 투표율이 가장 높았던 대선은 6·25전쟁 이후 실시된 1956년 선거다. 정전협정에 따라 한국에 편입된 경기 연천군과 강원 철원군 등 수복지구 주민을 포함해 총 유권자의 94.4%가 참여했다. 2위는 유신 이후 첫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으로 89.2%였다.
▷이후 대선 투표율은 하향세를 그리며 2007년에는 63%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당시엔 이명박-정동영 후보의 본선 대결보다 이명박-박근혜 후보 간 당내 경선이 관심사였다. 민주화 이후 지난번 대선까지 7번의 대선에서 득표율 1위는 박근혜 전 대통령(51.55%)으로 유일하게 절반을 넘겼다. 2위는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48.91%)이었다. 1, 2위 간 표차가 가장 적었던 승부는 1997년 김대중-이회창 후보 대결로 39만557표 차였다.
▷역대 대선 투표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광주다. 민주화 이후 실시된 대선 가운데 2007년을 제외한 모든 선거에서 전국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 당시엔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유력했던 때문인지 광주 지역 투표율은 6위였고 경북이 68.5%로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번 대선에서도 광주 지역은 81.5%로 1위를 차지했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의 참여 열기가 뜨거웠던 배경엔 세대와 이념에 따른 심각한 분열상이 있다. 투표율이 반등한 시기도 진영 간 대결이 본격화했던 2012년 대선이다. 2020년 총선은 ‘친조국’과 ‘반조국’으로 갈라져 치렀다. ‘이러다간 나라 망한다’는 절박감이 투표율을 끌어올렸다는 해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기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2020년 대선 투표율이 66.8%로 최고 기록을 세운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1875년 프랑스는 단 1표 차로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1표의 힘을 믿는 유권자들의 통합과 진보를 염원하는 간절함이 역대급 투표율에 담겨 있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11 ‘샤이 이재명’

근래 우리나라 여론조사에서는 ‘샤이 보수’보다는 ‘샤이 진보’가 조사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20대 총선(2016년)에서는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야권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나뉘어 여당이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이 압승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결과는 크게 빗나갔다. 민주당(123석)이 새누리당(122석)에 간발의 차이로 이겼다.
▷이듬해 19대 대선(2017년)은 탄핵 직후의 선거로 ‘샤이 진보’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5년 뒤인 이번 대선에서는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에 실시돼 본투표 직후 공개된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적게는 3.1%포인트, 많게는 7.6%포인트까지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투표 결과는 0.73%포인트 차의 신승(辛勝)이었다. 여론조사 공표금지 며칠 동안 윤 후보에 대한 여론을 불리한 쪽으로 크게 바꿀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샤이 진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선이나 총선 국면에서 수백 번의 여론조사가 이뤄진다. 전국 단위에서 몇몇 후보를 대상으로 하는 대선 여론조사는 많은 지역구의 많은 후보를 대상으로 하는 총선 여론조사보다 정확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번 대선 여론조사는 그렇지 못했다. 공표금지 기간 직전 실시된 17개 여론조사에서 윤 후보는 막판 단일화 전 안철수 후보가 포함된 대결임에도 15개에서 이 후보를 앞섰고 그중 4개에서는 오차 범위 밖에서 앞섰다.
▷20대 총선에서 여론조사의 부정확성이 쟁점이 된 후 21대 총선(2020년)부터는 휴대전화 안심번호의 이용이 가능해졌다. 그 때문에 21대 총선 여론조사는 20대 총선보다 정확해졌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과연 그런지는 더 검토가 필요하다. 당시 여론조사는 어느 지역구에서는 더 정확했고 어느 지역구에서는 더 부정확했다. 전국 단위의 몇몇 후보에게 조사가 집중되는 이번 대선 국면에서 그 정확성이 다시 입증돼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여론조사는 현대 정치 활동의 기초 자료다.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치 토론이 이뤄지고 정부와 정당은 그 결과에 맞춰 정책을 수정하기도 한다. 안심번호가 이용 가능해져 휴대전화 등장 이후 발생한 샘플링의 난점은 어느 정도 극복됐다. 다만 응답을 거부하는 샤이한 유권자가 있으면 샘플링을 잘해도 체계적인 왜곡이 발생한다. 샤이한 유권자의 응답을 끌어내려면 조사비를 많이 쓰는 수밖에 없다. 싸구려로 막 하는 여론조사는 여론조사가 아니라 여론조작이다. 여론조사의 질을 높일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민심(民心)의 방향을 잘못 읽는 후진적 정치 활동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3-12 경제정책 작명

Y노믹스, 윤노믹스, SY노믹스, 윤석열노믹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20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가 추진할 경제정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아직 차기 정부 정책의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나지 않아 공식화된 이름도 없지만 세간에선 예전 작명법에 준해 다양한 이름을 만들어 붙이기 시작했다.
▷국가 수장의 성(姓), 이니셜에 이코노믹스(경제학)를 결합한 ‘∼노믹스’의 원조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레이건 정부는 2차 오일쇼크로 침체에 빠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정부 역할을 축소하고, 세금을 낮추는 레이거노믹스를 1980년대에 추진했다. 조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제품을 자국 내에서 생산하도록 유도하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대폭 늘리는 바이드노믹스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일본에선 아베 신조 총리 때 아베노믹스부터 총리 이름을 경제정책 작명에 쓰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강조하며 사용한 DJ노믹스가 처음이다. 노무현 정부는 7% 성장론, 균형발전 등이 담긴 노(盧)노믹스, 이명박 정부는 세금 인하와 규제 완화를 핵심으로 한 MB노믹스를 추진했다. 지하경제 양성화 및 재정·세제 구조조정을 통한 복지 확대를 추진한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근혜노믹스 또는 박근혜노믹스로 불렸다. 하지만 출범 이듬해 세월호 참사 후 경기가 가라앉자 최경환 경제부총리 주도의 종합 경기부양책이 나왔고, 그때부터 초이노믹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임기 초 J노믹스로 명명됐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확대 등으로 근로자 소득을 높여 경제를 키운다는 소득주도성장이 핵심이다. J노믹스란 이름은 현 정부 첫 대통령경제보좌관을 지낸 김현철 서울대 국제경제학부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J’는 대통령 이름 첫 자의 이니셜일 뿐 아니라 글자 모양처럼 처음엔 잠깐 경제가 주저앉더라도 잠시 뒤 빠르게 우상향하며 살아날 것이란 기대가 담긴 작명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 당선인은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꼽을 만큼 자유시장 경제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그의 공약 대부분은 실패한 현 정부 부동산, 일자리, 탈원전 정책에 대한 반작용 성격이 강하다. 경쟁적으로 쏟아낸 포퓰리즘 공약까지 뒤섞여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과 비전이 아직 뚜렷하지 않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걸러낼 건 걸러내고, 더할 건 더해 전체 그림을 완성한 뒤 작명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3-14(월) KORUS FTA 10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영문 명칭인 ‘코러스(KORUS) FTA’는 코리아와 USA의 첫음절을 조합한 것이다. 우리는 한국이 앞에 오는 이 명칭을 반겼지만 미국은 썩 내켜하지 않았다. 협상 초반인 2006년 3월, 미국이 처음 아이디어로 내놓은 것은 아메리카를 앞에, 코리아를 뒤에 둔 ‘암코(AmKo) FTA’였다. 논의 끝에 어감이 좋은 코러스가 채택됐지만 당시 로버트 포트먼 미 무역대표부 대표는 미국이 뒤로 밀린 명칭을 찜찜해했다.
▷코러스는 ‘조화(Chorus)’를 뜻하지만 실제 협상 과정은 불협화음의 연속이었다. 양국은 협상 내내 자동차 교역 기준, 쇠고기 검역 조건 등으로 부딪치며 수차례 결렬 위기를 겪었다. 특히 협상 타결 이후 한 달 만에 미국 측은 자국의 ‘신통상정책’을 협정에 반영해야 한다며 추가 협의를 요구해 관철시켰다. 한국은 미국 측에 “앞으로 절대 재협상은 없다”며 약속까지 받아냈지만 트럼프 행정부 들어 이 약속은 휴지조각이 됐다.
▷국익을 우선시하는 무역협정의 특성상 한미 FTA가 예측 불가의 돌밭길이 되리라는 건 애초 예고된 것이었다. 한미 FTA 타결 이틀 전인 2007년 3월 말, 미국이 중국의 코팅지 업체에 정부 보조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최고 21%의 상계관세를 부과한 것이 상징적인 예다. 이때 한국도 같이 관세폭탄을 맞는 국가 리스트에 묶여 있었다. 한쪽에서는 자유무역을 위해 장벽을 낮추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해 장벽을 쌓는 ‘미국의 두 얼굴’이 드러났다.
▷이해관계자들의 반발로 한미 FTA는 협정 타결로부터 5년이 흐른 2012년 3월 15일에야 발효됐다. 이후 10년 동안 양국의 ‘경제 영토’는 크게 확장됐다. 예상대로 한국은 자동차 반도체를 미국에 많이 수출했고, 미국은 에너지와 육류 부문에서 한국보다 우위를 보였다. 다만 미국산 자동차 교역 실적은 예상과 달랐다. 연비가 낮아 한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지만 FTA 이후 미국차 수입 규모는 5배로 늘었다. 급변하는 무역전쟁터에서 10년 전의 손익계산서가 꼭 들어맞긴 어렵다.
▷경제적 성과가 크다고 한미 FTA가 영원불변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은 미중 갈등이 심화하고 지정학적 이슈로 글로벌 공급망이 깨지고 재편되는 격변기다. 이미 바이든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복원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제조업의 쇠락을 상징하는 ‘러스트벨트’의 비중이 커질수록 미국의 자유무역주의는 힘을 잃게 된다. 당장의 성적표에 안주하다가는 또다시 트럼프식 청구서를 받게 될 수 있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3-15 한은 총재 지명

독립된 중앙은행은 수많은 호황과 불황을 겪은 자본주의 체제가 경기 급등락을 줄이기 위해 고안한 발명품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흔히 낮은 금리를 통해 경기를 더 띄우고 싶어 하지만 ‘파티의 흥을 깨는 사람’에 비유되는 중앙은행은 물가 인상 가능성이 보이면 금리를 올릴 준비부터 하기 때문에 긴장관계가 불가피하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파격적 금리 인하를 기대하고 임명한 ‘비둘기파’지만 조 바이든 정부에선 인플레이션에 맞서 긴축을 추진하는 ‘매파’로 변신하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70) 임기가 이달 31일 끝난다. 이 총재는 코로나19 사태 발생 직후인 재작년 3월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5%포인트 내려 경기 하강 속도를 늦추고, 미국 금리 인상에 앞서 작년 8월부터 금리를 올려 상황에 대처해 왔다. 한은 설립 이후 최장기(43년) 근속자, 박근혜 정부 때 취임해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된 44년 만의 8년 연임 총재 기록도 세웠다. 다만 급등한 집값을 잡는 데 금리라는 ‘소 잡는 칼’을 지원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총재는 올해 말까지 기준금리가 1.75∼2.00%로 오를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에 무게를 실으며 향후 2, 3번 정도 금리를 더 올릴 것이라고 예고한 상태다. 하지만 차기 총재가 임명된 뒤 이 같은 예고가 그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급등하는 물가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은 불가피하지만 고유가 고환율에 우크라이나 사태가 겹친 복합 위기를 감안하면 통화당국은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정권 교체와 맞물려 통화정책 수장 자리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차기 한은 총재 4년 임기 대부분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겹친다. 문 정부가 지명권을 고집할 경우 마찰이 발생해 차기 총재 인선과 취임이 크게 늦어질 수 있다. 다행히 윤 당선인이 후보를 제안하고, 현 청와대가 인사 검증과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를 대행해 문 대통령이 지명하는 식으로 공백을 최대한 줄이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긴박한 경제 안팎 사정을 고려할 때 차기 한은 총재에겐 어느 때보다 탁월한 식견과 실력이 요구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무역수지, 성장률 전망이 흔들리고, 미국 금리 인상을 앞두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등 대외 환경과 국내 경제가 긴밀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작년 말 종료된 한미 통화스와프를 재개하려면 탄탄한 국제 네트워크도 필요하고, 정부의 포퓰리즘 요구를 견제할 강단도 필요하다. 현 정부든, 차기 정부든 ‘자기 사람 챙기기’ 같은 사심(私心)을 끼워 넣으면 곤란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3-16 보복적 해외여행

“5월에 유럽 가려는데 긴팔 챙겨야 하나요.”
“신혼여행 모리셔스로 가려고요. PCR 검사 결과서 안 내도 된대요.”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었다. 정부가 해외 나들이의 걸림돌이었던 입국자 자가 격리를 면제한다고 발표하면서 2년 넘게 억눌려온 여행 욕구가 ‘보복적 해외여행’으로 분출하고 있다.
▷인터파크투어는 해외 입국자 자가 격리 면제가 발표된 11일부터 3일간 해외항공권 예약 건수가 전년 동 기간보다 873% 폭증했다고 밝혔다. 하와이 괌 사이판 같은 가까운 휴양지와 현지에서 격리를 면제해주는 스페인 스위스 등이 인기다. 국내 여행을 하려다 해외 여행지로 갈아타는 신혼부부, 목요일인 5월 5일 어린이날 전후로 짧은 여행을 계획하는 직장인, 항공권 가격이 오르기 전 여름휴가용 예매를 서두르는 발 빠른 여행객들의 문의 전화가 폭주하고 있다고 한다.
▷자가 격리 면제 대상은 접종 완료자다. 2차 접종 후 180일이 지나지 않았거나 3차 접종자, 2차 접종 후 코로나에 걸려 완치된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접종 의무가 없는 12세 미만 소아·청소년과 의학적 사유로 백신을 맞지 못한 사람은 지금처럼 입국 후 7일간 격리해야 한다. 만 6세 미만 어린이는 동반 입국자가 접종한 경우 격리 면제다. 다음 달 1일부터는 해외 입국자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코로나 이전과는 여행 방식도 달라졌다. 백신 접종 영문 증명서, 유전자증폭(PCR) 검사 음성 확인서, 건강신고서 등 목적지에 따라 챙겨야 할 서류가 많다. 감염의 우려 탓에 현지에선 현금 대신 카드만 받는다. 여행객들은 패키지나 단체여행보다는 소규모 여행, 유명 관광지에서의 문화 체험보다는 외진 곳에서의 야외 활동을 선호한다. 지금까지 자가 격리 7일을 감수하고 다녀온 사람들은 현지에서 확진될 경우 든든한 의료시설이 있는지 따져보라고 조언한다.
▷코로나 이전엔 한 해 2871만 명이 해외여행을 떠났는데 지난해는 122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해외 여행길이 막힌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지 상공을 한 바퀴 돌고 면세품을 사서 돌아오는 ‘무착륙 해외여행’, 편의점에서 파는 기내식 도시락 사먹기, 구글어스의 ‘스트리트 뷰’를 활용한 ‘랜선 여행’으로 욕구를 달래 왔다. 비자카드의 최근 조사에서는 10명 중 3명이 “1년 안에 해외여행을 떠나겠다”고 답했다. 다음 달이면 세계보건기구가 전 세계에 발령했던 코로나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종료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로만 동경해온 풍경을 파란 하늘 아래에서 안전하게 확인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17 금값 된 연어

메뉴판에서 연어 요리를 빼는 음식점이 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여파다. 국내 유통 연어의 98%는 노르웨이산 북대서양 연어다. 생연어를 36시간 이내에 항공 직송해 왔는데, 러시아 영공 폐쇄로 우회하면서 항공 운임이 치솟았다. 노량진수산물도매시장에서 노르웨이산 생연어 도매가는 3주 전보다 90% 폭등했다. 러시아산 수입 물량이 많은 명태와 킹크랩, 대게 가격도 뛰고 있다. 메뉴 단가를 맞출 수 없게 됐다.
▷연어는 ‘회춘 비타민’ ‘바다의 쇠고기’로 불리며 인기를 끌고 있다. 과거에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대중화 계기가 됐다. 방사능 오염수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노르웨이 등 먼 곳에서 수입한 수산물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다. 사람들의 식습관도 서구화됐다. 1997년 2000t이던 연어 수입 물량은 지난해 20배인 4만 t을 넘어섰다. 어느새 ‘국민 횟감’ 광어가 1위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연어 자급 노력을 계속해 왔다. 1968년부터 매년 새끼 연어를 방류해 왔는데 회귀율이 1%도 안 됐다. 대안으로 양식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미 60조 원에 이르는 세계 연어시장의 80%가 양식이다. 연어는 생육 수온이 17도 이하인데, 여름철 동해바다 수온이 올라 양식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고안한 게 부침식 가두리다. 새끼 연어를 먼바다 가두리에 투입한 뒤 더워지면 최대 수심 25m까지 내려 수온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2027년까지 연어를 국내산으로 대체한다는 계획이다.
▷연어 값이 뛰면 당분간 다른 생선을 먹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품목이 더 많다. 어제 전국 휘발유 가격은 9년 5개월 만에 L당 2000원을 돌파했다. 미국이 러시아 원유 수입을 금지하면서다. 광물 가격도 급등했다. 반도체 핵심 소재인 네온가스가 작년의 갑절로, 알루미늄과 니켈은 약 40% 치솟았다. 곡물 대란 걱정도 커지고 있다. 밀과 보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산이 세계 수출량의 3분의 1이다.
▷이번 사태는 냉전 해체 이후 정치적 고려보다 원가와 효율성을 따져 구축한 글로벌 조달 체계의 미래에 숙제를 던지고 있다. 현 체계가 국가 간의 의존도를 높여 전쟁의 위험을 줄이는 순기능도 하지만, 유사시에는 오히려 위험을 증폭시키고 있어서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이미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 내에서의 공급망 재편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자원이 없어 수출입 모두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점점 험난해지는 국제 환경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3-18 흔들리는 엔화

1970∼80년대는 ‘가전·자동차·반도체 왕국’ 일본의 최전성기였다. 미 하버드대 에즈라 보걸 교수는 1979년 ‘재팬 애즈 넘버원’이라는 책에서 일본 경제가 곧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벌어들인 돈으로 아시아를 석권했다. 아시아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엔화 대출과 투자에 의존했다. 필리핀에 있는 아시아개발은행(ADB)도 사실상 엔화로 운영됐다.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30년이 닥쳤지만 엔화 파워는 여전했다. 글로벌 위기가 터질 때마다 엔화는 ‘안전자산’으로 불리며 가치가 오히려 올라갔다. 쌓아 놓은 부(富)가 많아 부도날 우려가 없었다. 일본은 30년 연속 세계 최대 순채권국이다. 해외 자산에서 대외 부채를 뺀 순자산이 3700조 원으로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의 6배다. 외환보유액도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갑작스레 ‘엔화=안전자산’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 엊그제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가치는 한때 5년여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 경제 버팀목이던 경상수지 흑자 기조가 흔들리고 있어서다.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 화력발전 비중을 크게 높였는데 원유 가격이 급등했다. 반면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 수출은 줄었다. ‘와타나베 부인’으로 불리는 투자자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 효과도 사라졌다. 예전에는 싼 엔화를 빌려 다른 나라에 투자했다가 위기 때 이를 청산해 엔화를 사들였다. 코로나 사태 이후 모든 나라가 제로금리에 나서자 투자 유인이 사라졌다.
▷달러화 유로화와 함께 3대 기축통화로 꼽히던 엔화 위상은 중국 위안화에도 밀려난다. 작년 12월 기축통화 지급금액 순위에서 위안화는 엔화를 제치고 달러화 유로화 파운드화에 이은 4위였다. 위안화 영향력은 계속 커진다. 일대일로 정책에 따라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뤄지는 대규모 철도 및 인프라 투자가 위안화로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 화난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부 원유에 대해 사상 처음 위안화 결제를 검토하고 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58%로 베네수엘라에 이어 세계 2위다. 이자를 내려 빚을 내야 하는 천문학적인 규모다. 그런데도 문제가 없었던 건 다른 나라와 달리 국채의 90% 이상을 자국민이 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상수지 적자가 쌓이고 엔화는 안전자산이라는 믿음이 깨지면 더 이상 빚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일본이 연 500개의 해외진출 기업을 자국으로 불러들이며 제조업 재건을 서두르는 이유다. 결국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국부의 근본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3-19 현대차 중고차 판매 허용

미국 온라인 중고차 판매업체 카바나는 2015년 11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5층 빌딩 크기의 ‘자동차 자판기’를 공개했다. 인터넷에서 중고차의 3차원 영상, 수리 내용 등을 보고 차를 고른 고객은 이곳에 찾아와 자기 이름이 새겨진 동전을 발급받는다. 동전을 투입구에 넣으면 투명 빌딩 안에 주차된 차를 로봇 팔이 꺼내준다. 7일 이내 반품도 가능하다. 코로나19로 중고차를 살 때도 대면거래를 꺼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카바나는 ‘중고차 업계의 아마존’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렇게 중고차를 온라인으로 사고팔려면 판매자를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 소비자들의 중고차 시장에 대한 신뢰는 낮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최근 중고자동차판매업을 ‘생계형 적합 업종’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현대자동차, 기아, 한국지엠, 르노코리아, 쌍용차 등 완성차 업체들의 중고차 시장 진입 기회가 열린 것이다. 업체 대부분이 6개월 안에 ‘인증 중고차’ 사업에 나설 예정이다.
▷벤츠 BMW 테슬라 등 수입차 업체들은 이미 국내에서 인증 중고차 사업을 벌여 왔다. 신차 구매 고객이 이전에 타던 자사 중고차를 적절한 가격에 보상해 주고, 중고차는 수리해 보증을 붙여 판매한다. 신차 고객은 부담이 줄어 좋고, 중고 수입차를 원하는 고객은 안전한 차를 탈 수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중고차 업계의 반발에 밀려 역차별을 받아 왔다.
▷소비자단체들은 완성차업체의 중고차 시장 참여를 환영하고 있다. 일부 양심적이지 못한 중소업체들이 미끼, 허위 매물을 인터넷에 올려놓고 이를 보고 찾아온 고객에게 비싸고, 품질 낮은 중고차를 파는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 5월에는 중고차 매매 사기단에 속아 할부로 트럭을 샀다가 빚을 감당하지 못한 60대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도 있었다.
▷현대차는 첫 구입 후 5년, 주행거리 10만 km 미만이면서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자사 차량만 거래하고, 중소업체와의 상생을 위해 시장점유율도 2024년까지 전체의 5.1%를 넘기지 않을 방침이다. 작년 한국의 중고차 거래 대수는 387만2000대로 신차 판매 대수의 2.2배다. 완성차 업체의 진입으로 소비자의 신뢰가 높아지면 시장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다.
▷3년 전 나왔어야 할 정부의 결정이 늦어지면서 중고차 시장 발전이 지체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기업에 밀려 고사할 것이란 중고차업계의 주장에 정부가 너무 눈치를 봤다는 것이다. 상생만큼 중요한 게 소비자의 편익이다. 카바나처럼 새로운 아이디어, 판매방식으로 도전하는 ‘중고차 벤처’의 등장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3-21(월) 알랭 들롱의 안락사 결정

40대 이상은 알랭 들롱을 ‘아랑 드롱’이라고 불렀다. 그레고리 펙이니 리처드 버턴이니 하는 미국 할리우드 미남 배우들의 이름은 몰라도 이 프랑스 배우의 이름은 알았다. 지금 60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를 개봉 영화관이 아니라 TV 영화를 통해 봤을 뿐인데도 그렇다. 한국인에게 미남 배우의 대명사는 알랭 들롱이다.
▷들롱의 첫 히트작은 주제음악으로도 유명한 ‘태양은 가득히’(1960년)다. 자신이 한 거짓말을 사실처럼 믿는 병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영화에서 들롱이 맡은 리플리 역에서 나왔다. 하지만 들롱 하면 역시 ‘누아르(범죄)’ 영화에서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우고 중절모를 푹 눌러쓴 냉혹한 범죄자 연기다. 장폴 벨몽도와 같이 나온 ‘볼사리노’(1970년), 장 가뱅과 함께한 ‘암흑가의 두 사람’(1973년)이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들롱은 젊었을 때 독일 미녀 배우인 로미 슈나이더, 록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객원 멤버인 니코와 염문을 뿌리고 70대에도 20대 여성 모델과 동거했지만 결혼은 1964∼69년 여배우 나탈리 들롱과 한 것이 유일하다.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앙토니다. 지난해 나탈리가 췌장암에 걸렸을 때 안락사를 시도했다. 그때 이 아들이 어머니를 끝까지 모셨다. 아들은 19일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죽게 되면 안락사를 택할 텐데 그때 끝까지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러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들롱은 1999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해 이후 스위스에 살고 있다. 스위스는 안락사가 가능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그의 이주는 프랑스의 많은 부자들처럼 ‘부유세’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가긴 갔으나 안락사가 맘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들롱은 나탈리가 죽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누구나 어느 나이가 되면 병원을 거치지 않고 수술 자국 없이 조용히 사라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들롱의 나이 올해 87세다. 그는 2019년 뇌졸중을 겪었지만 아직 건강하니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유명인의 안락사 결심이 하나둘 늘고 있는 초고령사회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016년 일본 인기 TV 드라마 ‘오싱’의 작가 하시다 스가코(橋田壽賀子)가 한 월간지에 “안락사로 죽고 싶다”는 글을 게재해 우리나라에서까지 화제를 모았다. 안락사를 뜻하는 에우타나시아(euthanasia)를 그리스 어원으로 직역하면 아름다운 죽음이란 뜻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름답지 않은 죽음을 피하려는 욕구는 조금씩 커져가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3-22 선출직 자격시험

국민의힘이 6·1지방선거 비례대표 출마자들을 대상으로 공직후보자 역량강화시험(PPAT)을 실시한다. 대상은 광역·기초의원 비례대표 후보자들이다. 9등급으로 나눠서 상대평가를 하는데 기초의원 비례대표는 3등급(상위 35%), 광역의원 비례대표는 2등급(상위 15%) 이상 성적을 각각 받아야 한다. 정해진 기준에 미달되면 공천 신청조차 할 수 없도록 할 예정이다. 성적이 좋으면 가산점도 준다고 한다.
▷선거로 심판받는 선출직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자격시험은 정당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국민의힘은 당 차원에서 ‘공직후보자 역량강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지원자들에게 미리 학습 콘텐츠를 제공해 왔다. 1월에 ‘당헌·당규’ 관련 첫 강좌가 나갔고 공직선거법, 대북정책, 외교·안보정책, 안전과 사회 등 총 6개 강좌가 이어졌다.
▷유튜브 강의 내용 중 연습문제 풀이를 보면 시험의 난이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민의힘 정강 정책을 잘못 해석한 답으로 ‘보수라면 산업화 내용만 긍정해야지, 민주화 같은 진보진영 헤게모니에 좌우되면 안 돼’ ‘항상 무조건적인 자유만이 옳아’ 등이 꼽혔다. 대부분 극단적 보수에 비판적인 내용이 정답이었다. 출제도 모두 객관식이라고 한다. 이 정도 난이도라면 굳이 별도로 과외를 받지 않아도 될 듯하다.
▷PPAT는 지난해 전당대회에서 이준석 대표의 핵심 공약이었다. 이 대표가 취임하자마자 제도 시행을 밀어붙이자 일부 최고위원들은 “선출직은 시험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직접 뽑도록 만든 제도”라고 반박했다. 반발이 거세지자 이 대표는 구체적 방안 마련을 위한 당내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타협안을 냈다. 명칭도 ‘자격시험’에서 ‘역량강화시험’으로 바꿨다. 시험대상도 기초단체장 후보자까지 넓혀 보겠다는 생각을 접고, 지방의회 비례대표 후보자로 축소했다고 한다. 지방의회 비례대표 공천이 돈에 휘둘리는 등 폐해가 심각하다는 점을 고려해 우선 실시 대상으로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예비 출마자들 사이에서는 PPAT를 놓고 찬반양론이 엇갈린다. 유튜브 강좌를 접한 일부 예비 출마자는 “운전면허시험을 보더라도 수험서적은 한 번 정도 읽어보지 않느냐”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공당의 후보자라면 유튜브 강좌 내용 정도는 ‘기본 정치상식’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방의회 현실을 모른다는 반론도 나온다. 지방선거에서 해묵은 ‘돈 공천’을 근절하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그 해법이 꼭 자격시험일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다. PPAT의 성패가 이 대표의 향후 행보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3-23 ‘침묵의 살인자’ 오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발작적 기침, 호흡 곤란, 어지럼증. 매년 초여름이 되면 국내 주요 병원의 응급실에는 이런 증세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밀려 들어온다. 대기 중 오존 농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시기다. 오존의 독성이 천식이나 만성기관지염 같은 호흡기질환 환자들의 약해진 폐 세포를 공격하는 것이다. 호흡 곤란에 심장마비까지 오면서 그대로 숨을 거두는 안타까운 상황도 발생한다.
▷최근 10년간 오존 노출에 따른 국내 초과사망이 2배로 늘어났다는 분석이 나왔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오존 농도의 상승으로 인한 초과사망자는 2010년 1248명에서 2019년 2890명으로 증가했다. ‘초과사망’은 특정 기간에 통상적으로 예상되는 수를 넘어서는 사망을 뜻한다. 통계적 개념이다. 오존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예상 평균치보다 훨씬 더 늘어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국내 오존 농도는 평균 35.8ppb에서 45ppb로 높아졌다.
▷산소 원자 3개가 결합한 오존은 강력한 독성 때문에 ‘침묵의 살인자’ 혹은 ‘보이지 않는 킬러’로 불린다. 폐뿐 아니라 뇌 같은 다른 장기에도 병을 일으키고, 선천성 기형 발생 위험도를 높이는 오염물질이다. 지난해 영국이 주도한 국제공동팀의 연구에서는 오존 농도가 0.2% 상승할 때마다 연간 6000명이 넘는 추가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오존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 위협한다. 오존 농도가 높은 지역에 사는 청소년들은 우울증을 겪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우리나라는 오존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가장 빨리 늘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사망자 수는 100만 명당 15.9명으로 아직 낮은 수준이지만, 증가율은 OECD 35개국 중 가장 높다. 오존은 질소산화물 같은 오염물질이 햇빛과 만나 광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생성된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많은 대도시의 오존 농도가 높다 보니 서울, 부산 같은 도시에서는 수시로 ‘오존 비상령’이 떨어진다. 해외에서도 도시 거주자 5명 중 4명이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을 넘어서는 농도의 오존에 노출돼 있다고 한다.
▷이제 곧 햇볕이 강해지는 계절이 온다. 오존 농도를 알려주는 전광판이 새빨개지는 날이 많아질 것이다. 마스크로도 못 막는 오존의 공격은 폭염과 함께 몰려오니 더 괴롭다. 오존주의보 체크, 야외 활동 및 과격한 운동 자제, 수분 보충 같은 대처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오존을 발생시키는 오염물질을 줄이는 게 해법일 것이다. 대기오염을 악화시키는 기후변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내 목숨을 위해서라도 환경론자가 되라는 게 지구의 호소이자 경고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3.24 대통령 취임식

1∼3대 이승만 대통령과 5∼7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은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지금은 철거되고 사라졌지만 당시 중앙청은 행정부 청사 건물이었다. 4·19혁명으로 물러난 이 승만의 뒤를 이은 윤보선 대통령의 취임식은 지금의 서울시의회에서 거행됐다. 서울시의회 건물은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다. 새 대통령이 중시하는 정치적 기반을 상징하는 곳에서 취임식을 한 것 같다.
▷유신 선포로 직선제가 간선제로 바뀌면서 ‘체육관 선거, 체육관 취임식’ 시대가 열렸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8대 대통령 취임식을 한 장충체육관이 단골 무대였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장소는 잠실체육관이었다. 여의도 국회에서 취임식이 열린 것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였다. 민주화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인 만큼 취임식도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하자는 의견을 따랐다고 한다. 윤석열 당선인도 관례대로 국회 광장에서 취임식을 한다.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은 워싱턴 의회 앞에서 열리지만 예외도 있었다. 17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친구 집에서, 33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취임식을 했다. 모두 부통령이었다가 대통령의 유고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경우였다. 36대 린든 존슨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 안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당일이었다.
▷취임식 초청 인사들을 보면 새 정부의 국정 기조를 엿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반전(反戰) 평화운동에 열심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으로 평화 무드를 조성했다. ‘경제 대통령’을 내건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엔 “제발 경제를 살려 달라”고 호소했던 ‘시장 아지매’가 초청받았다.
▷취임식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대통령 취임사일 것이다. 취임사에 새 정부의 국정 방향이 담기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5년 전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취임사에서 했던 다짐이 퇴색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윤 당선인 측은 “취임사는 공정과 상식, 통합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 정부도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대 대통령 취임식 총감독은 공연기획 전문가인 이도훈 홍익대 교수가 맡는다. 성대한 무대가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떠나는 대통령의 퇴임식은 없다. 이번에도 청와대 비서진과 간단한 인사만 나누는 정도가 될 것이다. 신구(新舊) 권력교체기의 그림자가 씁쓸하기만 하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3-25 올브라이트 별세

“김정은은 진성(true) 파시스트의 전형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2018년 발간한 책 ‘파시즘’에서 내놓은 평가다. 북한을 “세속적인 IS(이슬람국가)”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신격화된 김씨 일가가 독재정권을 세습하며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지는 것을 비판하는 취지다. 그런데 그는 2000년 미 장관으로선 처음 북한을 방문했고, 김정일을 “지적인 인물”이라고 호평했었다. 그 사이에 북한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진 것일까.
▷북-미 간에 화해무드가 무르익던 시기에 찾아온 올브라이트에게 김정일은 적극적이었다. 함께 집단체조를 관람하던 중 미사일 발사 장면이 등장하자 김정일은 “첫 번째 쏘는 것이자 마지막으로 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민감하게 여기는 올브라이트를 배려한 발언이었다. 그도 김일성의 묘를 참배하며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서전에서 “외교상으로 필수적인 듯했으므로 묘를 찾았지만 어떤 경의도 바칠 수 없었다”고 썼다. 내심까지 북한을 존중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23일 타계한 올브라이트는 뼛속까지 외교관이었다. 1978년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일한 것을 시작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미국 외교의 핵심인 유엔대사와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의 양심”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해외 인권침해 문제에 적극 개입하면서도 국익 중심의 외교에 무게를 뒀다. 올브라이트는 브로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는 ‘브로치 외교’로도 유명하다. 김정일을 만날 때에는 성조기,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할 때는 햇살 모양 브로치를 달았다.
▷체코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힘겨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조부모를 비롯한 친인척 26명이 목숨을 잃었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영국으로 피신했다 돌아오니 이번엔 체코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외교관이던 아버지가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되자 가족 모두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후 스스로의 힘으로 유리천장을 깨고 여성 최초로 미 행정부의 3인자인 국무장관까지 올랐다.
▷“나는 ‘은퇴’라는 단어를 혐오한다”고 그는 말하곤 했다. 64세에 장관에서 물러난 뒤 학계와 싱크탱크에서 활동했고, 숨지기 전까지 국제문제 컨설팅업체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의 회장을 지냈다. 2020년에는 책 ‘지옥과 다른 목적지들’을 펴냈다. 방북 당시 그를 수행했던 웬디 셔먼은 국무부 부장관이 됐고, 조지타운대에서 그에게 배운 네드 프라이스는 국무부 대변인으로 활동 중이다. 거장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과 인맥은 미 외교가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26 두 번 서러운 문과생

“미적분 하냐?” 수학 좀 한다는 중학생들이 서로의 선행학습 진도를 확인할 때 으스대듯 묻는 질문이다.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불렀다는 미적분은 수학 레벨이 높아졌음을 확인하는 대표 과목으로 여겨진다. 반면 수학을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고등수학의 문턱이기도 하다. 문·이과 통합형 수학능력시험에서는 문과생들을 기죽이는 선택 과목 중 하나다.
▷올해 수능도 문·이과 통합형으로 치러진다. 융합형 인재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지난해에 처음 실시한 이후 2년째 이어지는 것. 문·이과 구분 없이 실시한 지난해 시험에서는 수학을 잘하는 이과생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이과생들이 주로 선택하는 ‘기하’나 ‘미적분’의 표준점수가 문과생들이 응시하는 ‘확률과 통계’보다 높았다. 수학 조정점수를 높게 받은 이과생이 상위권 대학의 인문계 학과를 교차지원하면서 문과생을 밀어내는 ‘문과 침공’ 현상이 두드러졌다.
▷교육당국은 이런 문·이과 유불리 현상에 대해 “완전히 극복되긴 어렵다”고 했다. 올해도 ‘문과 침공’이 반복될 가능성을 막을 길이 없다는 말이다. 문과생들은 울상이다. 가뜩이나 ‘문송’(문과여서 죄송합니다) 분위기를 절감하고 있는데 이제는 취업에 앞서 입시에서까지 이중의 설움을 겪게 됐다. 정치학자를 꿈꾸던 문과 우등생이 막판에 이과로 갈아타는 등 진로를 바꿨다는 소식에 교사들은 한숨을 쉰다. “수학만이 살길”이라는 학생과 학부모의 수요에 맞춰 신도시에는 줄줄이 새 학원들이 들어서고 있다.
▷문과생들은 “한쪽에만 유리하도록 돼 있는 입시제도는 부당한 특혜”라며 반발하고 있다. 수학 등 선택과목의 조정점수 산출 공식이 잘못됐다며 소송 절차를 알아보는 학부모들도 나왔다. ‘문과 침공’이 이과생들에게도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학 간판을 높여서 다는 대신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 공부를 감내해야 한다. 자연계열로 전과하거나 반수를 결심한 대학생들은 결국 올해 하반기부터 다시 재수학원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공계 침공자들에게 밀려 이미 재수의 길을 걷고 있는 문과생들이 있는 그곳이다. 양쪽 모두에게 낭비다.
▷과학·기술·엔지니어링·수학을 뜻하는 이른바 스템(STEM) 분야의 육성이 이미 몇 년 전부터 지속돼온 세계적 흐름인 것은 맞다.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첨단기술 개발 경쟁은 수학적인 사고와 과학 역량을 요구한다. 이런 판 위에서 인문학을 읊조리고 있는 게 한가한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수학, 과학 점수만 능력인가. 창의적 사고와 문학적 감성,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문계의 강자들은 정보기술(IT)기업에도 똑같이 필요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3-28(월) 세계화 30년, 이젠 막 내리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이달 초 850개 러시아 매장을 폐쇄한 맥도널드의 조치는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맥도널드 체인점의 로고인 M자형 ‘골든 아치’가 들어선 나라들 사이에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론 때문이다. 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이 1999년 출간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프리드먼은 2005년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책에서 세계화로 인한 지구촌 번영도 예측했다. 지금 프리드먼의 주장은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거치면서 ‘탈(脫)세계화’ 역풍이 거세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는 지난주 주주 서한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우리가 30년 동안 경험했던 세계화 흐름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단언했다. 뉴욕타임스도 탈세계화 시대를 전망했다. 여러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세계적으로 이민자 수도 줄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소련 해체를 기점으로 본격화해 그동안 지구촌의 번영을 이끌어왔다. 선진국들은 값싼 인건비를 찾아 공장을 옮기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후발국들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부와 기술을 축적했다. 러시아는 1991년 소련 붕괴 후 세계 금융시스템에 편입됐고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세계대전의 위협은 줄었고 글로벌 시장은 커졌다. 과속하다 외환위기를 맞았지만 한국에도 황금시대였다.
▷하지만 세계화는 이미 거센 도전을 받고 있었다. 선진국일수록 일자리가 사라지고 중산층이 무너졌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미국의 실업률이 다른 제조업 강국에 비해 나빠지자 오바마 정부는 해외 이전 기업을 다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 정책을 본격화했다. 트럼프와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공급망 대란을 겪자 가속페달을 밟았다. 동시에 세계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무기화하려는 움직임도 커졌다. 원자재 수출 규제와 이번에 러시아를 국제금융결제망(SWIFT)에서 배제한 사례가 대표적으로, 이른바 ‘상호의존의 무기화(Weaponized interdependence)’ 흐름이다.
▷신냉전이 격화할수록 세계화 역주행은 빨라질 것이다. 다만 프리드먼의 주장이 모두 틀렸다고 하기엔 이른 것 같다. 모스크바의 맥도널드 매장이 문 닫기 몇 시간 전 러시아의 한 남성은 매장 문에 스스로 몸을 묶고 폐쇄를 막으려 했다. 손님들은 맥도널드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러시아 정부의 정보 통제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반전 시위도 거세다. 30여 년간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작은 희망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3-29 상하이 봉쇄

단 한 명의 확진도 용납 않는 중국의 ‘제로 코로나’ 방역은 기술과 인해전술의 합작품이다. 전 국민의 활동 반경은 QR코드가 결정하고, 거리의 카메라들이 마스크 착용 여부를 감시한다. 확진자 한 명이 나오면 역학조사관 100명이 출동하는데 반경 800m 안에 있던 사람은 무조건 밀접 접촉자다. 성인 인구 250명당 한 명꼴인 450만 방역요원은 공안 및 통신사와 개인정보를 공유하며 담당 구역 출입자들의 방역수칙 준수 여부를 감시한다.
▷확진자가 많이 나오면 해당 지역 공무원은 해임될 수 있다. 재택 격리자를 감시하기 위해 가정 내 전력 사용량을 점검하거나 가가호호 센서를 달아 출입문이 열리는지 확인하는 등 방역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건물, 마을, 넓게는 도시 전체를 봉쇄하기도 하는데 바이러스의 전파력에 비례해 봉쇄 규모도 커지고 있다. 2020년 1월엔 인구 1100만 도시 우한이, 지난해 12월엔 1300만의 시안이, 어제부터는 인구 2500만의 중국 경제 수도 상하이가 전격 봉쇄됐다.
▷상하이는 26일 확진자 수가 처음으로 2000명을 넘어서자 봉쇄 결정을 내렸다. 황푸강 동쪽 지역은 28일부터, 서쪽은 다음 달 1일부터 4일간이다. 상하이 시민들은 집 밖 출입을 할 수 없고 모두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되고 공장 가동도 멈추거나 원격으로 운영된다. 시내 주요 쇼핑몰과 상하이 디즈니랜드 같은 다중이용시설은 이전부터 임시 폐쇄된 상태다.
▷제로 코로나 덕분에 중국은 인구 100만 명당 사망자 3.3명으로 선방한 편이다. 미국은 2600명이다. 2020년엔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에 성공했다. 하지만 전파력이 강한 오미크론과 중국산 ‘물백신’ 탓에 뒤늦게 감염이 확산되자 중국 경제는 물론이고 글로벌 공급망까지 흔들리고 있다. 선전 봉쇄로 애플 부품 공급사 폭스콘 공장, 창춘 봉쇄로 도요타자동차 등 5개 자동차 생산 공장, 상하이 봉쇄로 테슬라 공장이 조업을 중단했다. 공장과 물류 시설마다 기숙사를 운영하며 직원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있지만 오미크론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경제적 피해가 막심하고 민심도 사나워지자 방역이 완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지만 상하이 봉쇄로 제로 코로나 고수 방침이 확인됐다. 올가을 당 대회에서 3연임을 노리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환자 폭증과 의료 붕괴를 감수할 리 없다. ‘무질서한 민주주의’보다 ‘질서 있고 안전한 사회주의’의 체제 우월성을 주장하고 디지털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팬데믹 국면을 십분 활용해온 터다. 방역이 정치에 휘둘리는 만큼 중국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30 아카데미, 폭행과 手語

세계 최고로 쳐주는 영화상인 아카데미 시상식은 대략 3시간 반가량 이어진다. 시상식 시청률은 비스포츠 생방송 중계 프로그램 중엔 가장 높다지만 최근 몇 년간 급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상식 시간을 줄이거나 주목도가 덜한 시상을 생중계 전에 배치하기도 했지만 하락 추세는 막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94번째 시상식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중계사인 ABC방송의 잠정치에 따르면 시상식을 지켜본 미국 시청자는 1536만 명. 최악이던 작년의 985만 명보다 56% 늘었다. 그 현장에서 벌어진 초유의 폭행 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우 윌 스미스가 자기 아내의 탈모 증상을 농담의 소재로 삼는 코미디언 시상자에게 격분해 무대로 뛰어 올라가 뺨을 후려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가족의 아픔을 건드린 것에 자제력을 잃었다지만 폭력 행사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기 어렵다. 스미스는 당국의 처벌과 남우주연상 박탈 위기에 처했다. 이번 사건을 두고 끝없이 추락하던 아카데미가 드디어 이제 갈 데까지 갔다는 혹독한 평가들이 줄을 잇는다. 한편으로 올해 시상식이 그 어떤 작품이나 배우, 감독이 아니라 ‘역대 가장 추악한 오스카의 순간’으로 기억될지 모른다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아카데미상은 몇 년 전까지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비판받았다. 그런 따가운 시선에 아카데미도 변하기 시작했다. 재작년 한국 영화 ‘기생충’의 4관왕, 작년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도 그런 변화의 산물이었으리라. 아카데미는 올해 여성과 비백인, 성소수자, 장애인을 모두 무대에 불러올렸다. 특히 청각장애 부모를 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코다(CODA)’는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3관왕을 차지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TV플러스를 통해 출시된 작품이다. 감독상을 받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파워 오브 도그’와 함께 스트리밍 서비스의 대세화, 할리우드가 지배하던 극장영화의 쇠락을 보여준다.
▷과거 할리우드는 장애인을 연기하는 비장애인에게 상을 줬지만 이번엔 달랐다. 청각장애인 트로이 코처의 남우조연상 수상은 그래서 빛났고, 그 시상자로 나선 윤여정의 수어(手語)는 더 큰 감동을 줬다. 윤여정은 수상자 호명에 앞서 수어로 “축하한다”고 표현했고, 관객들도 박수 대신 양손을 반짝반짝 흔들며 축하했다. 윤여정은 코처가 수어로 소감을 밝히는 동안 대신 트로피를 들고 곁을 지켰다. 누군가의 고통을 희화화한 코미디언, 분노에 찬 폭력을 행사한 할리우드 스타가 전 세계 시청자를 충격에 빠뜨렸다면 수렁에 빠진 아카데미를 살린 것은 윤여정의 진심이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3-31(목) 한국인의 신체 지수

지난해 20세 이상 한국인의 평균 키는 남성 172.5cm, 여성 159.6cm로 조사됐다고 국가기술표준원이 30일 밝혔다. 40년 전보다 남성은 6.4cm, 여성은 5.3cm 커졌다. 특히 키에서 하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이른바 ‘서구형 롱다리’로 신체 구조가 바뀌는 추세다. 20∼40대 남성은 키가 커지는 것보다 살이 찌는 속도가 더 빨랐다. 복부비만의 지표가 되는 허리둘레가 40년 전보다 연령대별로 적게는 10.8cm, 많게는 13.9cm 늘었다. 여성은 20대를 제외한 모든 연령에서 허리둘레가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란 책에서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고 적었다. 동시대 한일 양국의 유골을 분석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한국 남성의 키가 평균 161cm로 일본 남성보다 6cm가량 컸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한일 양쪽의 키가 비슷해졌고, 한국의 산업화 이후 한국인의 키가 일본인을 다시 앞질렀다. 산업화로 인한 식습관 변화가 신체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868년 일본 메이지유신은 ‘요리유신’ ‘음식혁명’으로도 불린다. 당시 일왕은 소와 닭 등을 죽이지도 먹지도 말라는 육식금지령을 1200년 만에 해제했다. 육식으로 체형을 서구처럼 크게 바꾸는 것이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서구화의 지름길이라고 본 것이다. 육식 장려 등으로 이후 일본인의 신체 구조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화됐다.
▷한국 남성의 키는 일본 남성보다 1∼2cm 정도 커 우열을 논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이에 비해 북한 남성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북한 남성의 평균 키는 158cm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 남성보다 무려 15cm 정도가 작다. 특히 1990년대 대기근을 겪은 북한은 영양실조 등으로 젊은층의 신체 성장이 더뎌졌다. 군 입대 신장 하한선이 그 이전 150cm였다가 현재는 137cm까지 내렸다고 한다.
▷세계 최장신 국가는 남성 기준으로 키가 182cm가 넘는 네덜란드다. 네덜란드에 가면 옷 치수와 생활용품의 크기가 한국과 너무 달라서 불편을 겪은 사례가 많다. 국가기술표준원이 40년 동안 신체 지수를 꾸준히 측정해 온 이유는 한국인의 몸에 맞는 제품 설계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데이터를 반영해 45년째 그대로이던 지하철의 좌석 크기를 5년 전 키운 적도 있다. 그런데 다른 인종인 네덜란드와 한국의 신체 지수 격차보다 동족인 남북간 격차가 더 벌어졌다. 산업화 이전의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것과 같은 북한의 허약한 신체 지수를 지켜보는 것은 씁쓸하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