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2-03/ 03.01(화) 몰로토프 칵테일 - 03.31(목) 언더도그마
분수대(중앙일보) 2022-03/
03.01(화) 몰로토프 칵테일
화염병은 해외에선 '몰로토프 칵테일' 혹은 ‘가난한 자의 수류탄’이라고 불린다. 휘발유·알코올 등 연료와 유리병, 불을 붙일 심지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어 약자의 무기이자 폭동 도구로 쓰인다. 드물지만 정식 전쟁 무기로 사용한 사례도 있다.
1939년 겨울, 옛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겨울전쟁’이 시작됐다. 전력이 절대 우위였던 소련군은 민간 지역을 공습해 숱한 사상자를 냈다. 비난 여론이 일자 소련 외상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굶주린 핀란드 인민을 위해 빵 바구니를 떨어뜨렸다”고 둘러댔다. 핀란드군은 화염병으로 화답하면서 이를 ‘몰로토프 칵테일’이라 칭했다. 국영 주류회사가 술 대신 화염병 45만병을 제조하고, 민간에서도 손을 보태 소련 전차에 맞선 것이다. 핀란드군의 게릴라식 항전과 몰로토프 칵테일의 위력은 만만찮았다. 석 달간 소련군 12만6800여 명이 전사했고 전차의 3분의 1인 2260여 대가 파괴됐다. 핀란드군 전사자는 2만6600여 명에 그쳤다. 사실상 핀란드의 압승이었다. 소련은 서둘러 평화협정을 맺었다.
러시아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부도 시민들에게 "몰로토프 칵테일을 준비하라"고 독려했다. 우크라이나 전 총리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몰로토프 칵테일 제조법을 설명하는 영상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식 몰로토프 칵테일에는 잘게 부순 스티로폼이 첨가된다. 화염이 목표물에 더 잘 들러붙게 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다. 러시아군은 겨울전쟁 때와는 달리 화염병 공격에 강한 신형 전차로 무장했고, 우크라이나인은 미미하게나마 업그레이드한 칵테일로 맞서는 것이다. 몰로토프 칵테일은 대통령부터 앞장서 수도를 지키며 결사 항전하는 그들의 결기를 상징하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화염병은 독재에 맞서는 민주 시민의 무기였으나 민주화 이후엔 근절 대상이 됐다. 1989년 제정된 ‘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약칭 화염병처벌법)’은 점차 강화됐다. 화염병을 사용하면 3년 이하 징역 혹은 300만원 이하 벌금형이던 것이 1991년에 5년 이하 징역 혹은 500만원 이하 벌금형으로 올랐다.
2019년엔 벌금 상한액이 500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한국에서 화염병은 불법 무기이자 돈 없으면 못 던지는 ‘부자의 수류탄’이 됐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3.02 사전투표
사전투표 제도가 도입된 건 2013년 4월 재·보궐선거다. 전국단위 선거로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처음 실시됐다. 2020년 실시된 21대 총선 사전투표율은 26.69%로 전체투표율의 3분의 1을 넘었다. 19대(54.2%) 이후 20대(54.2%)·21대(66.2%) 총선을 거치며 꾸준히 높아진 투표율은, 투표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사전투표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패배한 쪽에선 사전투표가 음모론의 대상이다. 보수 지지층 일각에선 21대 총선 대패 이후 전자 장비를 동원해 투표 결과를 조작한다는 ‘해킹설’, 관련 장비들이 중국산이고 개표 사무원들 중 중국인이 많아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중국 개입설’ 등 부정선거론이 등장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사전투표 도입 이전인 18대 대선 패배 이후 ‘K값 조작설’ 등 개표조작 음모론이 퍼진 적이 있다.
광범위한 사전투표 음모론은 한국에서 관찰되는 진풍경이다. 스웨덴은 선거일 18일 전부터 장기간에 걸쳐 사전투표를 실시한다. 심지어 사전투표를 했더라도 선거 당일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바꿀 수도 있다. 스위스에서는 우편부재자 투표가 가능하다. 대도시에서는 참여율이 60~90%에 이른다. 한국보다 훨씬 개방적인 사전투표제를 갖고 있지만 투·개표 부정을 둘러싼 논란이 거의 없다.
이는 제도·시스템에 대한 국민 신뢰가 세계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연구소가 발표한 ‘2021 레가툼 번영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사회자본 부분에서 167개국 중 147위를 기록했다. 교육(2위)·건강(3위)·경제(9위) 등 다른 지표가 상위권을 차지한 것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개방적 제도에도 사전투표 논란이 없는 스웨덴(6위)·스위스(9위)는 물론, 앙골라(146위)·베네수엘라(144위)에도 순위가 뒤졌다. 순위가 더 낮은 나라는 아프가니스탄(167위)·시리아(166위) 등 최근 전쟁을 겪은 곳이 다수다.
대선 막바지 국민의힘은 지지층의 사전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음모론 확산 차단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민주당 역시 사전투표율 제고 캠페인 중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음모론 해소의 근본 해법이 될지는 의문이다. 저신뢰의 끝에 정신적 내전 상태라고 할 정도로 극심한 진영 갈등이 자리잡고 있어서다. 무너진 신뢰를 복원할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3.03 진공폭탄
살상무기는 모두 잔인하기 마련이지만, 진공폭탄(Vcuum Bomb)의 잔인함은 더욱 도드라진다. 폭발과 함께 충격파와 고온을 만들어내고 대기를 흡수해버린다. 산소를 빨아들이면서 주변을 일시적 진공 상태로 만들어 폭발 인근 지점의 생명을 지워버리는 셈이다. 이러다 보니 군사 전문가 사이에서는 핵폭탄을 제외한 폭탄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무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최근 진공폭탄을 사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옥사나 마르카로바 미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이 제네바 협약에서 금지하고 있는 진공폭탄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 중 인도적 대우에 관한 기준을 정한 국제법이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민간인은 물론 부상 중인 군인과 포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진공폭탄은 상대 병력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무차별적 피해를 줄 수 있다.
러시아가 실제로 진공폭탄을 사용했는지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황은 있다. 지난달 27일 미국의 CNN은 우크라이나 북동부 접경도시 하르키우 인근에서 진공폭탄 투하 작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로켓 발사대가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진공폭탄 사용이 사실이라면 전쟁범죄”라면서 국제사회의 조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조사를 예고한 상태다.
비극을 멈추기 위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협상은 현재 진행 중이다. 지난달 28일 1차 면담에서 양측은 이렇다 할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등을 둘러싼 양측의 첨예한 입장과 이해관계를 한 번에 정리하긴 어렵기에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불필요한 희생과 비극을 막기 위해서, ‘적어도 더 이상의 무력사용은 없다’는 약속을 러시아가 이른 시일 내에 내놓아야 한다.
전쟁을 고집한다면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러시아도 비극으로 빠져든다. 국제사회는 물론 러시아 내 시위대 역시 ‘반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에 이어 중립국 스위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상태다. 진공폭탄은 폭발지점 인근만 일시적으로 마비시키지만, 러시아의 고집은 국가 전체를 거대한 진공 공간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3.04 하이브리드 전쟁
미하일로 페도로프(31) 우크라이나 부총리 겸 디지털혁신부 장관의 트위터는 ‘사이버전장터’를 방불케 한다. 그는 지난달 26일(이하 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는 IT 군대를 만들고 있다. 디지털 인재가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러시아의 전면 침공 개시 며칠 전 우크라이나 정부와 금융기관은 대규모 분산서비스거부(디도스·DDoS) 공격을 받았다. 우크라이나는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이틀 뒤 러시아 외무부와 모스크바 증권거래소의 웹사이트가 마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재 27만 5000여명이 우크라이나 정부가 만든 ‘IT ARMY of Ukraine’이란 텔레그램 채널을 구독하고 있다.
현대전은 이처럼 재래식 전력뿐만 아니라 사이버 공격, 심리전 등을 동원하는 복합전술이 특징이다.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이란 개념이다. 러시아는 하이브리드전의 최강국으로 꼽힌다. 2008년 조지아 침공과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때도 군사작전과 심리전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전술을 구사했다. 냉전 시대 이후 미국의 독보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따라잡을 수 없어 사이버전, 정보전으로 눈을 돌렸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자국 해커들로 구성된 정예 사이버전 전담부대도 창설할 계획이다. 이들은 사이버상에서 첩보활동을 펼칠 뿐만 아니라 발전소와 상수도 시설 등 인프라시설 방어 임무 등을 맡는다. 왜 상수도 시설인가. 지난해 2월 미국 플로리다주 피넬라스 카운티에서 상수도 시스템 해킹 사건이 일어났다. 해커는 ‘양잿물’로 불리는 수산화나트륨(NaOH) 투입 비율을 기존보다 100배 넘게 증가시키려 했다. 수산화나트륨은 수도관 부식방지에 쓰이지만 기준치를 넘어서면 인체에 해롭다.
사이버전만큼이나 치열한 심리전의 우크라이나 선봉장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달 26일 수도 키이우 거리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나는 여기 있다”고 말하는 셀피 영상을 SNS에 올려 도피설을 일축했다. 키이우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다음 날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의사소통력이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고 결집시킨다는 평가다. 러시아의 앞선 두 차례 하이브리드전은 성공했지만, 세 번째 시도는 ‘드네프르(우크라이나를 동서로 가르는 강)의 기적’ 앞에서 꺾이는 모양새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3.07(월) 선한 노쇼
예약하고 연락 없이 예약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행위를 ‘노쇼’(No-Show)라고 한다. 일종의 예약 부도다. 국내에서 노쇼가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진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국내 외식업계에 고급스러운 음식·서비스를 지향하는 파인다이닝(Fine Dining) 문화가 확산하면서다. 예약 중심으로 운영하는 음식점이 늘면서 노쇼 피해도 커졌다.
현대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국내 주요 서비스 업종(음식점·미용실·병원·공연장·고속버스)의 노쇼 피해 손실액은 연간 4조5000억원이다. 연관 업체 손실까지 합치면 8조2700억원으로, 이로 인한 고용 손실만 10만8170명에 이른다. 평균 노쇼 비율은 10~20%다. 음식점(20%) 피해가 가장 큰데, 예약 인원에 맞춰 식재료를 준비하고 서빙 등 인력을 충원했다 노쇼가 발생하면 고스란히 손실로 이어져서다.
노쇼는 의료업계에서도 골치다. 2016~2017년 14개 국립대병원의 노쇼 비율은 13.4%다. 병원 경영 손실뿐 아니라 다른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문제까지 생긴다. 고의적 노쇼도 있다. 비행기를 타는 아이돌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팬들이 항공권을 샀다가 이륙 직전에 환불하기도 했다.
반대인 경우도 있다. 2019년 7월 세계적인 축구 선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친선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당시 주최 측은 ‘호날두 45분 이상 출전’이라고 사전 홍보를 했고, 호날두를 보기 위해 최대 40만원의 관람 티켓을 샀던 팬들은 분노했다. 노쇼 문제가 불거지자 매월 회비를 지불하면 노쇼로 인한 피해액을 보상해주는 업체나 노쇼 피해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변호사도 등장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1일째, 때아닌 에어비앤비 노쇼가 화제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하고 가지는 않는 노쇼가 늘고 있어서다. 다른 점은 숙박비를 결제한다는 점이다. 전쟁으로 아비규환인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직접 기부인 셈이다. 우크라이나의 물가는 한국의 30% 수준이다. 지하철 이용요금이 500원 남짓이다. 일주일의 여행을 포기하고 기부한 숙박비가 그들의 한 달 식비가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남의 일’ 같지 않은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숙박비 결제라는 ‘선한 노쇼’를 경험해본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3.08 선거 쓰레기
길을 오가다 보면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 현수막이나 벽보와 마주치곤 한다. 법으로 보장된 공식 홍보물이지만 며칠 뒤면 쓰레기가 될 것들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전국 8만4884곳에 게시한 이번 대선 벽보(가로 10m, 세로 0.8m)를 한데 모으면 서울 월드컵경기장 면적의 11배에 이른다고 밝혔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현수막이다. 재활용이 어렵고 매립하거나 소각할 때 유해물질이 발생해 환경오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법은 거꾸로 갔다. 2018년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게시 가능한 현수막 수가 ‘읍면동마다 1개씩’에서 ‘읍면동 수의 2배 이내’로 늘었다.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내걸린 현수막은 3만580장에 달했다. 중앙선관위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투표소 안내용을 제외한 정책 홍보 현수막(2020년 기준 16종 1만9500여매) 게시를 중단한 게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었다.
이번 대선에 각 세대로 보낸 선거공보는 책자형 2억9000만부, 점자형 97만부, 전단형 1억850만부를 포함해 총 4억부에 달한다. 전단형 공보물은 필수가 아니지만, 책자형 공보물은 모든 후보가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선 명함 크기 갱지에 깨알 글씨로 적은 공보물도 있었다. 친절하진 않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친환경적이었다. 선거 당일엔 투표용지 외에도 새로운 쓰레기가 추가된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일회용 비닐장갑과 확진자 투표 관리를 위해 착용할 보호장구 등이다.
선관위는 이번 선거비용이 선거관리 2662억원, 정당 선거보조금 465억원, 후보자 보전비용 1083억원가량을 포함해 4200억원을 초과하리라 예상한다. 우편 대신 알림톡이나 문자, e메일 등으로 선거공보물을 받을 수 있다면 비용은 상당 부분 절감될 것이다. 그러려면 선거법을 먼저 개정해야 한다.
터치스크린 방식의 전자투표 혹은 모바일 선거를 도입하면 투·개표 비용과 쓰레기를 확 줄일 수 있다. 안철수 후보의 막판 사퇴로 불거진 재외국민 무효표 논란도 막을 수 있다. 재외국민 투표와 시차를 둘 필요가 없어서다. 유권자들의 시간, 이동 비용을 아끼는 건 물론이다. 코로나 장기화로 모바일 인증 등에 익숙해진 환경, 블록체인 기반의 위변조 방지 기술의 발전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 전자투표 도입도 다시 논의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3.09 10년 주기설
K리그 울산 현대를 이끄는 홍명보 감독이 연초 기자회견에서 ‘10년 주기설’을 꺼냈다. 그는 1992년 프로 무대 데뷔,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등 10년 간격으로 큰 성과를 냈다. 2022년에는 리그 우승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는 게 항간의 설이다.
10년 주기설은 다른 분야에서도 언급된다. 경제위기 10년 주기설이 대표적이다. 1987년 미국의 블랙먼데이, 1997년 신흥국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 등 10년 간격으로 세계 경제가 발작을 일으키면서 한때 인구에 자주 회자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 이후 금융시장의 급격한 흔들림이 나타나지 않자 관심에서 다소 멀어졌다.
경제위기 주기설과 무관하지 않지만, 부동산 업계에도 10년 주기설이 풍문처럼 떠돈다. 1980년대 이후 상승·하락장이 10년 간격으로 반복됐다는 경험을 이유로 든다. 가격 급등 이후 정부가 공급을 결심해도 4~5년은 걸리는 재화라는 점 역시 10년 주기설의 근거로 활용된다.
10년 주기설은 합리적 분석일까. 대답은 엇갈린다. 호모 포르마페텐스(Homo formapetens, 패턴형 인간)란 말이 있듯, 규칙적 질서를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에 따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만든 게 10년 주기설이란 주장이 있다. 세상일이 질서정연하게 발생하기 어려운 우연과 불규칙성의 연속이기에, 10년 주기설은 논리적으로 허구에 가깝다는 얘기다. 반면 10년 또는 그에 준하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우연·불규칙성에 의한 변화의 에너지가 축적된다는 긍정론도 있다.
정치 분야에도 10년 주기설이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7번의 대선에서 10년 간격으로 정권 교체가 일어나서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순으로 총 3번의 정권 교체가 있었다. 10년 주기설은 9일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면 지켜지고,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면 깨진다.
자신의 삶에 대한 10년 주기설에 대해 홍명보 감독은 “맞아떨어지면 좋겠다”면서도 “노력하지 않으면 (주기설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속설은 속설일 뿐 결과를 예단할 수 없다는 얘기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 최선을 다한 후보들과 지지자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유권자들의 판단을 차분히 받아들일 시점이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3.10 금강송
한국인과 가장 친숙한 나무를 꼽으라면 단연 소나무다. 조상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생솔가지를 꽂은 금줄을 쳤고, 소나무로 만든 가구나 도구를 사용했으며 죽어서도 소나무로 만든 관에 묻혔다. 수많은 문학과 미술 작품, 전설 등에도 소나무가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의 모습은 올곧은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기도 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애국가에도 등장한다.
한국의 소나무 중에서도 금강송(金剛松)은 균열이 적으며 아름다워서 최고급 목재로 여겨진다. 금강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을 따라 강원도 강릉·삼척, 경북 울진·봉화·영덕 등에 자생하고 있다.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붙었으며 지역에 따라 춘양목·황장목·안목송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최고급 목재로 여겨진 만큼 조선시대부터 국가가 직접 관리했으며, 궁궐이나 관청 등을 짓거나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만 벌목했다.
경북 울진 금강송면 소광리는 국내 최대의 금강송 군락지다. 500년이 넘은 보호수 2그루와 수령 350년으로 곧게 뻗은 미인송 등 1000만 그루 이상의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조선 숙종 때는 금강송을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봉산(封山)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1959년 정부는 이곳을 육종보호림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금지했다. 82년에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했고, 현재는 제한적으로만 입산을 허용하고 있다.
이렇듯 귀중한 금강송 군락지가 하마터면 잿더미가 될 뻔했다. 지난 4일 시작된 울진 화재가 군락지 경계까지 번지면서다. 산림 당국은 군락지 인근에 저지선을 쳤지만, 8일엔 작은 불똥이 끊임없이 바람에 날리며 군락지를 위협했다. 가까스로 저지선을 지켜내면서 군락지로 옮겨붙는 불길을 막았지만, 자칫하면 수백 년 자리를 지켜온 금강송을 잃을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대통령 당선인은 5월부터 임기를 시작한다. 집값 안정, 남북 긴장 완화, 코로나 방역은 물론 세대·젠더 갈등까지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하다. 작은 불똥이 수백 년 뿌리 내린 금강송을 위협했듯, 사소한 실수가 큰 혼란을 부를 수 있는 난제들이다. 정교하고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국민만 위하겠다’는 당선인의 초심을 임기 내내 지켜야 한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장주영 사회에디터
03.11 인수위원회
2012년 이후 10년 만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다시 꾸려진다. 새 대통령 당선인이 정권 인수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인수위는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구성된다. 이 법은 대통령 당선인에게만 적용된다. 대통령의 궐위 등에 따른 선거를 통해 당선되면 바로 ‘대통령’ 신분이어서 인수위법을 적용받지 못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인수위가 없었던 이유다.
한국에서 인수위가 처음 만들어진 건 13대 대선이 치러진 1987년 노태우 당선인 시절부터다. 그때부터 인수위 사무실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 금융연수원 건물에 차려졌다. 청와대·정부서울청사 등과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인수위의 활동 기한은 새 대통령의 임기 개시일 이후 30일 까지다. 정권 재창출보다 정권교체 때 더 일찍 출범해 더 오래 활동했다. 당선인은 인수위를 통해 정부 조직과 기능, 예산 등을 파악한다. 당선인의 차기 정국 구상이 인수위 활동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한시적인 조직이지만 인수위를 주목해야 하는 건 차기 정부의 각료와 청와대 참모진이 줄줄이 탄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수위가 조각(組閣) 논의를 하는 곳이기도 하고, 인수위원장이나 인수위원 본인이 내각에 발탁되는 경우도 있다. 인수위법은 당선인이 임기 시작 전에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후보자를 지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장 인수위원장에 누가 인선될지가 관심사다. 인수위는 위원장과 부위원장 각 1명씩 그리고 24인의 위원으로 짜인다. 때로는 인수위에 합류한 당선인 측근끼리 파워게임을 벌이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인수위 역할을 대신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 장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여럿 배출됐다. 권력의 속성이 이렇다. 인수위라는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같은 편’이란 동지애가 자라나고, 이 동지애가 서로를 청와대로, 내각으로 부른다. 엇비슷한 실력의 후보군이라면 이왕이면 ‘우리 편’이 낫지 않겠냐면서다.
흔히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한다. 알맞은 인재를 적절한 자리에 등용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뜻이다. ‘우리 편이 능사(能事)도 아니다’는 마음가짐으로 새 당선인이 첫 단추를 잘 끼우길 기대한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3.14(월) 공약
공약(公約)의 사전적 의미는 공적인 약속이다. 대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시장 등을 선출할 때 후보자가 당선된 후 임기 내에 실행할 일을 국민에게 내세우는 약속을 뜻한다. 한국에서 공약은 공약(空約)이 된 지 오래다. 말 그대로 빈 약속, 헛된 약속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공약부터 그렇다. 역대 대통령의 공약이행률은 평균 30% 선이다. 후보 시절 국민에게 내세웠던 약속 3개 중 2개는 어겼다는 의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집권 4년 차 공약이행률은 41%, 이명박 전 대통령은 39%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39%), 고 노무현 전 대통령(43%), 고 김대중 전 대통령(18%)도 절반을 넘기지 못했다. 아직 임기가 남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행률은 공개 전이지만, 현 정부의 대선공약 체크사이트인 ‘문재인미터’는 17%로 본다. 주요 공약이었던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청사 이전, 고위 공직자 임용 기준 강화 등은 대표적인 파기 공약으로 꼽힌다. 대통령 집무실은 여전히 청와대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용 논란은 촛불 집회로 이어졌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0.73%라는 근소한 차이로 당선 여부가 갈릴 만큼 치열했다. 치열한 만큼 표심을 모으기 위해 남발한 공약도 적지 않을 테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주요 공약을 살펴보면 우선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로 옮기겠다고 했다. 소상공인(자영업자) 330만 표를 위해 소상공인에게 최대 1000만원을 지원한다는 공약도 내세웠다. 여성가족부 폐지(양성평등가족부 신설), 250만 가구(수도권 150만) 공급 등도 있다. 모두 쉽지 않아 보이는 약속이다. 누군가에겐 당선을 위해 쏟아낸 공약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오매불망 기다리는 약속일 수 있다. 각 공약 실행 여부에 대한 국민 개개인의 의견은 다르겠지만, 윤 당선인의 공약집 제목인 ‘공정과 상식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국민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약속 지키는 대통령’을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3.15 단비
육당 최남선은 1955년 자유신문에 발표한 시 ‘감우(甘雨)’에서 ‘이 비의 한 방울이 한 알 곡식 될가하매/ 우리들 벌써부터 배부르지 아니한가/ 울가망 어제까지 일 꿈이런가 하노라’고 노래했다. 감우는 순우리말로 ‘단비’다. 농경사회에서는 ‘가물에 단비’가 생사를 가르는 고마운 존재다. 이제 우리나라 농업 인구는 230여만 명에 그치지만 여전히 단비를 기다리는 이는 많다.
강릉·동해·삼척·울진 등 광범위한 지역을 휩쓴 동해안 산불이 12일부터 내린 단비 덕분에 마침표를 찍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13일 오전 동해안 산불 지역 ‘재난 사태’를 해제했다. 이번 동해안 산불은 관련 기록이 있는 1986년 이후 가장 피해 면적이 넓다. 추정 피해 면적이 무려 2만4840ha. 서울 면적의 10분의 4에 이른다. 이전까지 최악의 산불로 남아있던 2000년 4월 7일 발생한 동해안 산불의 피해 규모 2만3794ha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동해안 산불은 한반도에선 꾸준히 반복된 재해다. 관련 연구(김동현 외, 2011)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조선 시대 역사서에 기록된 산불 63건 중 동해안 권역에서 발생한 산불이 38건으로 약 60%를 차지한다. 순조 4년(1804)에 발생한 동해안 산불이 가장 규모가 컸다. 민가 2600호와 사찰 6곳이 소실됐고 사망자는 61명에 달했다. 인명 피해로만 봤을 때 가장 심각했던 건 사망자 65명을 기록한 현종 13년(1672) 동해안 산불이다. 낙산사 관음전이 피해를 보았던 성종 20년(1489)의 산불은 낙산사 동종을 완전히 녹여버린 2005년 산불의 기억과 겹친다.
이번 산불은 2000년 동해안 산불과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2000년에도 오랜 겨울 가뭄 끝에 불이 났고, 일주일 넘게 이어지다가 단비가 내리면서 잡혔다. 당시 산불 기간엔 제16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고, 이번 동해안 산불은 제20대 대선과 나란히 갔다. 고 김대중 대통령 재임 중 벌어졌던 16대 총선에선 제1야당이었던 한나라당(‘국민의 힘’의 전신)이 133석으로 제1당을 차지해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었다. 20대 대선 결과,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집권당이 바뀐 여소야대 정국이 이어질 예정이다.
달라진 건 인명피해다. 2000년 산불엔 사망자 2명에 부상자가 15명이었으나 이번 산불에선 아직 인명 피해가 확인된 바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고쳐나간 덕분일 것이다. 사투를 벌인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3.16 콘크리트
콘크리트의 요체는 배합이다. 모래·자갈 같은 골재와 시멘트, 강도를 높이기 위한 혼화재를 물과 함께 적절하게 배합해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모래나 자갈 등의 골재가 용적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시멘트 비율은 30% 정도라고 한다. 비가 오면 쓸려나가기에 십상인 모래와 자갈이 다른 재료들과 적절히 섞이면서 바위처럼 단단해지는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콘크리트가 사용된 건 고대 로마부터다. 석회·모래 등을 물에 섞어 만든 일종의 모르타르 형태로, 주로 석재나 벽돌을 연결하는 접착재로 사용됐다. 근본적으로는 벽돌을 쌓고 사이사이에 콘크리트로 접착하는 공법이다 보니 건물을 4~5층 이상 올리기는 어려웠다.
혁명이 일어난 건 19세기 들어서다. 콘크리트는 당기거나 비트는 힘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인장강도가 강한 철망·철근이 이를 보강해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철근콘크리트’ 공법이 탄생했다. 철근 역시 불과 같은 고온에 약하고, 쉽게 산화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콘크리트 외벽이 이를 보완해줬다. 서로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부각해주는 황금 조합이었다.
철근콘크리트 혁명에 힘입어 20세기 초 세계 곳곳에는 랜드마크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1931년 뉴욕에 들어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 한국은행 본점(1912년), 서울역(1925년), 서울시청(1926년) 등 이전에 보지 못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100년 가까운 세월에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인의 대표 주거지인 아파트 역시 같은 철근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어진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기는커녕, 공사 중인 건물이 붕괴하는 참사가 1월 광주에서 벌어졌다. 국토교통부 사고조사위원회는 ‘물을 섞는 방법으로 불량 콘크리트를 쓰는 등 총체적 부실에 따른 것’이라고 지난 14일 발표했다. 이번 사고에선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파트에 철근을 설계보다 적게 시공했다는 논란도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단골 뉴스다.
250만호 주택공급 공약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핵심 공약이다. 관련자 처벌 등 사후 약방문도 중요하지만, 예방이 더 중요한 이유다. 구조적 원인을 해소하지 못하면 250만호 공사 중 ‘불량 콘크리트’가 또 문제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3.17 톰 브래디
“은퇴하겠다”던 노장 선수가 40일 만에 자신의 말을 확 뒤집고 복귀를 선언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환영과 응원의 인사를 건넨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말을 바꿨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을 법도 했다. 어쩌면 이 사나이니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식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톰 브래디(45)의 이야기다.
미식축구(NFL) 사상 최고 선수로 꼽히는 브래디는 지난달 2일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쓰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제는 해야 한다”면서 은퇴 결심을 밝혔다. 하지만 40일 만인 지난 14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필드”라며 은퇴를 번복했다. 23번째 시즌 경력을 이어갈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의 변심에 소속팀과 팬들은 물론 매체들까지 나서 전설의 귀환을 기뻐했다.
브래디는 지금까지 22년간 슈퍼볼 우승 7회, 최우수선수(MVP) 3회, 슈퍼볼 MVP 5회 등을 차지한 역대 최고의 쿼터백이다. 은퇴한 페이튼·일라이 매닝 형제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그의 라이벌로 거론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점점 흐릿해졌다. 반면 브래디는 점점 또렷해졌다. 누구보다 오래 현역 생활을 이어오며 차곡차곡 대기록을 쌓았고, 이제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게 됐다. 은퇴 번복으로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롱런의 비결은 타고난 재능 덕분이었을까. 브래디는 아버지와 세 아들이 모두 NFL 선수로 활약한 매닝 가(家)처럼 명문 미식축구 집안의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무명으로 출발했다.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99순위로 뉴잉글랜드에 입단했다. 하지만 ‘훈련 중독자’라고 불릴 만큼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을 끌어올렸다. 커피와 술은 물론 설탕과 조미료도 먹지 않는 철저한 식단관리도 병행한다. 불혹을 훌쩍 넘긴 그가 피 끓는 20대들과 나란히 경쟁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브래디의 포지션인 쿼터백은 팀의 사령관이자 리더다. 그의 손끝에서 전술이 시작되고, 완성된다. 그만큼 책임이 무거운 자리다. 브래디처럼 철저한 자기관리와 피나는 노력으로 조직을 살리는 리더들이 우리 사회에도 많아지길 기대한다. “이제 그만하겠다”고 무대를 내려가려 할 때 은퇴를 번복시키고 싶을 만큼 훌륭한, 그런 리더가 보고 싶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3.18 대통령 집무실
청와대 내에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나눠진 것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다. 노 대통령이 1989년 청와대를 신축하면서 본관과 관저를 분리했다. 그전엔 2층짜리 구 본관 건물을 1층은 집무실, 2층은 생활공간인 관저로 사용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린 시절 살았던 청와대는 집무실과 관저가 같은 건물에 있었다.
1991년 지금의 청와대 본관이 준공되면서 관저(1990년 준공)와 집무실 간 ‘출퇴근’ 개념이 자리 잡았다. 새 대통령 집무실은 본관 2층에 마련됐다. 본관 로비만 들어서도 3m에 달하는 높은 층고와 정면에 보이는 중앙 계단이 주는 웅장함에 압도된다. 붉은색 카펫을 밟고 2층 계단을 올라 대통령 집무실로 향하면서 긴장하지 않는 국무위원과 참모진은 드물 것이다.
본관 집무실은 다른 한편으론 청와대 참모들이 근무하는 비서동과 거리가 멀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여민관(與民館)’으로 불리는 비서동 3개는 1관이 2004년, 2관은 1969년, 3관은 1972년 지어졌다. 비서동에서 본관까지 거리는 500m인데 차로는 5분, 걸어서는 15분이 걸린다. 노무현 정부에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여민1관 3층에 집무실을 마련했다. 크기는 168.59㎡(51평)인 본관 집무실의 절반 정도인 87.27㎡(26.4평).
역대 대통령 후보들이 집무실 이전을 공약할 때마다 모범 사례로 앞세우는 게 미국 백악관의 웨스트윙(West Wing·서쪽 건물)과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Oval Office)’다. 오벌 오피스 좌우로는 부통령과 비서실장, 국가안보보좌관, 대변인 등의 사무실이 같은 1층에 들어서 있다. 타원형에 4개의 문이 나 있는 오벌 오피스의 면적은 75.8m²(약 23평) 규모다. 곡면의 벽체는 직사각형 구조보다 서로를 품어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하니 대화도 잘될 것 같다. 3개의 남향 창문 너머로는 백악관 정원인 로즈가든도 내다보인다.
새 대통령 당선인의 집무실은 ‘구중궁궐’로 불렸던 청와대 밖을 나온다고 한다. 집무실 내부는 물론이고 참모진 사무실을 재배치하는 작업이 예상된다. 집무실을 어디에 두느냐보다 대통령과 참모가 언제든 서로 방문을 밀고 들어가 소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에 대한 고민이 먼저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3.21(월) 용산
‘한성부 용산방’(1896년).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행정구역상 첫 이름이다.
1231년 고려를 침공한 몽고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병참 기지를 용산에 세웠다.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용산은 한강을 접해 수로를 통해 상륙한 후 남산·북한산을 넘어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을 공략하기 유리했다.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파병 온 청나라 군대와 1910년 시작된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군이 주둔한 곳도 용산이다. 1945년 해방 후 2017년까지 미군도 머물렀다.
군사요충지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1970년대 들어 부촌으로 주목받았다.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당시 육군본부가 있던 한남동 일대가 권력의 중심지로 부상하자 재력가들이 몰렸다. 풍수지리상 최고 명당으로 부르는 배산임수 입지도 이유다. 북한산에서 남산을 거쳐 내려온 땅의 기운이 물(한강)을 만나 흘러가지 못해 복이 넘친다는 것이다.
2007년 서울시가 ‘단군 이래 최대 개발’로 불리던 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비 30조원)을 추진한 적도 있다. 620m 초고층 빌딩을 포함해 66개 빌딩 등을 짓는다는 계획이었는데 보상 문제로 반발하던 철거민이 불에 타 사망하는 참사도 있었다. 결국 개발은 무산됐다.
대통령 집무실이 74년 만에 종로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첫 공약 이행이다. 그런데 이전 장소를 바꿔 잡음이 많다.
용산 주민은 곳곳에서 진행 중인 개발 규제 강화와 교통 체증, 잦은 시위로 인한 혼잡을 우려한다. 국방부 이전 과정에서 생길 국가 안보 위협, 집무실 이전 비용이 낭비라는 지적에 무속 논란까지 있다. 풍수지리 때문에 이전 장소를 바꿨다는 것이다. 후보시절 윤 당선인과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가 무속·역술에 의존한다며 도사·스님·법사·무당 등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탓이다.
고립된 구조의 청와대를 벗어나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의지는 긍정적이다. 다만 임기 시작 전인 50일 안에 이전하겠다고 서두를 필요가 있나 싶다. 일반 가정집도 이사를 하려면 적어도 3개월 전엔 새집을 알아보고 이사 계획을 세운다. 하물며 국가지대사다. 논란과 우려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대비가 우선이다. 그래야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제왕적 권력을 내려놓기 위한 이전이 ‘밀어붙이기식’ 강행이라면 그 취지가 퇴색한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3.22 안락사
안락사의 뜻을 풀면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이다. 가망 없는 중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약물을 주입해 사망하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주로 가리킨다. 약물과 음식물 투입 등의 처치를 하지 않는 건 ‘소극적 안락사’, 불필요한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는 건 ‘존엄사’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는 조건이 까다롭기는 하나 합법이다. 2018년 2월부터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되면서다. 회생 가능성이 없고 임종이 가깝다고 의료진이 판단한 상태에서 본인이나 가족 의사에 따라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약한 사람은 지난 4년간 총 121만953명. 실제로 연명 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한 사례도 20만 건이 넘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작성해 무료로 등록할 수 있다.
‘세기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86)이 안락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는 건강이 더 악화하면 안락사를 택하기로 하고 아들의 동의도 구했다.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 시민권도 갖고 있다. 그가 선택한 안락사는 정확히 말하면 ‘조력자살’이다.
네덜란드·벨기에·캐나다·룩셈부르크·콜롬비아·뉴질랜드 등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들은 대부분 ‘의학적으로 개선의 여지가 없는 참을 수 없는 고통’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반면 스위스에선 나이나 통증 여부와 관계없이 유산 상속 등 ‘이기적 동기’가 없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자살할 수 있다. 안락사를 원하는 이와 병원을 연결해주는 조력자살 업체도 있다. 『오래된 유럽』의 저자 김진경은 안락사나 조력자살이 ‘좋은 죽음’인지 아니면 ‘좋은 삶’의 실패인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스위스에선 “고통 완화 치료나 호스피스 케어에는 거의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다.
들롱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죽는 거라도 행복하게 죽고 싶다”며 안락사를 갈망하는 댓글이 숱하게 달렸다. 고독사 후 뒤늦게 발견돼 가족이나 시민사회에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건 ‘안락’이라 할 수 없다. 안락사 논의는 피할 수 없겠지만, 안락한 삶을 먼저 걱정해야겠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3.23 인공섬
1636년 일본 나가사키에 ‘데지마’라고 하는 인공섬이 만들어졌다. 기독교의 포교 금지를 목적으로 만든 축구장 두 개 규모의 부채꼴 모양 격리 구역이었다. 포르투갈인을 몰아넣어 쉽게 관리하려는 목적이 컸다. 그러나 1637년 기독교인이 대규모 민란을 일으킨 뒤 포르투갈인은 인공섬에서 추방됐다.
1639년 인공섬에는 네덜란드 무역상사들이 새로 자리를 잡았다. 에도 막부는 1641년 네덜란드에 독점무역권까지 허용했다. 대신 ‘데지마에만 체류할 것. 정기적으로 세계정세를 보고할 것’ 등의 조건을 붙었다.
1854년 미국이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키기 전까지 데지마는 서구와의 유일한 무역·교류 장소였다. 손바닥만한 인공섬이 쇄국의 숨구멍 역할을 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화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데지마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홍콩·마카오처럼 가용 토지자원이 제한된 곳에서도 인공섬 건설이 활발했다. 마카오는 타이파·콜로안 두 섬 사이를 매립해 코타이 지역을 만들고 카지노를 이 일대에 몰아넣었다. 홍콩에서는 란타우섬 남동쪽 바다에 축구장 1300개 너비의 세계 최대의 인공섬 건설을 추진 중이다. 110만 명을 거주 가능케 해 주택난을 해결할 목적이라고 한다.
망망대해 암초를 콘크리트로 메워 인공섬을 만들기도 한다. 섬으로 인정되면 주변 12해리 내 바다가 영해가 되고, 200해리 내 바다는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서다. 일본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1740㎞ 떨어져 있는 환초 오키노토리 암초에 콘크리트를 들이 부어 인공섬을 만들었다. 2016년에는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대만 어선을 나포해 분쟁이 극대화했다.
중국은 2014년부터 남중국해 일대에 인공섬을 꾸준히 조성 중이다. 최근에는 일대를 군사 요새화하고 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존 애퀼리노 미 인도태평양사령관은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군도)의 인공섬 3곳을 콕 집어 군사화 작업이 완료됐다고 언론에 공개 언급했다. 미사일 무기고, 항공기 격납고, 막사까지 갖춰진 군사기지 수준이라는 주장이다.
남중국해 인공섬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면 한국 역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중동에서 수입하는 원유 100%가 남중국해를 거친다. 한국 외교 당국도 신냉전 구도 속 대비책 마련에 만전을 기해야 할 때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3.24 삼일장
‘장삿날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망한 날부터 3일이 되는 날로 한다.’ 1999년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제12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가정의례에 대한 허례허식을 없앨 목적으로 만든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에 따라 만들어진 조항이다. 결혼 식순이나 제례 절차까지 국가가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과도한 규제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건전가정의례준칙은 권고 성격이어서 삼일장을 꼭 지킬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삼일장은 오랜 세월 보편적 장례 문화로 여겨졌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민속대백과사전은 “전통적으로 고려시대에 삼일장이 드물게 있었으나, 유교식 상례가 문화적 전통으로 정착된 조선시대에는 삼일장이 없었다”며 “일제강점기부터 의례 간소화 정책과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5일 이내의 장기(葬期)를 강요했고, 1973년부터 삼일장으로 한정됐다”고 적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장례 간소화 바람이 불면서 사망 다음 날 발인하는 이일장도 확산하긴 했다. 반대로 고인을 기억하는 조문객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사일장이나 오일장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렇듯 장기가 장례마다 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망자와 유족의 뜻에 따라 이별하는 방법과 절차를 저마다 다르게 결정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로 이런 선택권이 박탈됐다. 누적 확진자 1000만 명, 사망자 1만3000명을 넘어서면서 화장장 포화현상이 지속하고 있다. 전국의 3일차 화장률은 1월 82.6%에서 2월 77.9%로 내려왔고, 이달 들어선 지난 19일 기준 34%로 뚝 떨어졌다. 삼일장을 치르고 싶어도 사일장, 오일장 또는 육일장까지 치러야 하는 형국이다. 유족들로선 이별의 슬픔에 더해, 고인을 차가운 안치시설에 장기간 모신다는 죄스러움까지 느끼게 됐다.
정부는 수도권 및 광역시의 화장장에서만 적용되던 ‘화장로 1기당 7회 운영’을 전국 60개 모든 화장시설로 확대하기로 했다. 화장시설 가동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새삼스럽지만, 사망자와 확진자를 줄이는 게 핵심이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어수선한 시기지만, 방역에 관해선 진영 없이 긴밀히 협조하고 소통해야 한다. 이런 시기, 불통은 인간 존엄을 위협한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3.25 안데르센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뉘하운(Nyhavn)에 간다. 뉘하운은 1673년 개통한 ‘새로운 항구’란 뜻의 운하다. 물길 양옆으로 들어선 알록달록한 건물이 동화 속 분위기를 자아낸다.
뉘하운에선 빨간 집, 노란 집을 찾기 바쁘다. 이곳에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이 살았던 집이 있어서다. 안데르센은 20번지, 67번지, 18번지를 옮겨 다니며 뉘하운에서 18년을 살았다. 뉘하운의 알록달록한 집들은 어두운 밤에 어부들이 손쉽게 자기 집을 찾기 위해서 칠했다고 한다.
1805년 덴마크 제3의 도시 오덴세(Odense)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안데르센.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떨어져 있는 오덴세 지명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최고신 ‘오딘(Odin)’에서 유래했다. 그는 열네 살이던 1819년 연극배우의 꿈을 품고 처음 코펜하겐에 왔다. 1828년 코펜하겐대에 입학해 몇 편의 희곡과 소설을 쓰면서 작가적 재능을 드러냈다.
안데르센은 뉘하운 20번지에 살면서 서른 살이 된 1835년 첫 번째 동화집인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완성했다. 2년 뒤 발표한 ‘인어공주’를 시작으로 ‘미운 오리 새끼’ ‘벌거벗은 임금님’ ‘백조왕자’ ‘눈의 여왕’ ‘성냥팔이 소녀(1845년)’ 등 1872년까지 총 160여 편을 내놓았다.
뉘하운 다음으로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좇는 곳은 코펜하겐 시청사다. 이곳에 안데르센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동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공교롭다. 전 세계 놀이공원의 원조라고 불리는 티볼리 공원을 바라보고 있다. 티볼리 공원은 안데르센과의 친구였던 게오르그 카르스텐센이 1843년 왕가 소유의 정원을 개조해 만들었다.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랜드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몇 차례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21일(현지시각) ‘아동문학계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한국의 이수지 작가(일러스트레이터 부문)가 수상했다. 1956년 제정된 상으로 2년마다 아동문학 발전에 공헌한 글·그림작가를 한 명씩 선정해 시상한다. 이 작가는 글 대신 최대한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글 없는 그림책’이다. 안데르센이 살았던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동화의 영역을 확장하는 그의 참신함이 놀랍다. 응원을 보낸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3.28(월) 바통 터치
요즘은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학창시절 운동회는 손꼽아 기다리던 행사였다. 특히 육상 릴레이 경주는 ‘운동회의 꽃’이었다. 주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때마다 운동장은 환호와 탄식으로 메아리쳤다.
릴레이는 4명의 주자가 한 팀이다. 국제육상경기연맹에서 공인하는 종목은 100m, 200m, 400m, 500m, 800m, 1500m다. 릴레이에서 배턴 패스(Baton Pass)는 아주 중요하다. 국내에선 흔히 바통 터치(Baton Touch)로 불린다. 먼저 뛴 주자가 다음 순서 주자에게 긴 막대기 모양의 배턴을 넘겨주는데, 대기선에서 20m 안 배턴 존(Baton Zone)에서 이뤄져야 한다.
각 주자가 아무리 빨리 뛰어도 배턴 패스에 따라 경기 기록이 달라진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400m 릴레이(남자)에 참여한 일본팀은 개별 주자의 100m 기록이 평균 9초대인 다른 국가팀들보다 기량이 떨어진다
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일본팀은 배턴을 아래에서 위로 건네는 ‘언더핸드 패스’ 기술을 선보이며 아시아 최초로 동메달을 땄고 ‘배턴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반면 지난해 홈그라운드에서 열린 도쿄올림픽에선 배턴 존을 벗어난 배턴 패스로 실격 처리당하며 ‘배턴의 저주’라는 빈축을 샀다.
400m 릴레이 세계 최고기록(남자)은 자메이카 대표팀(2012년) 보유한 36초84다. 각 주자가 100m를 평균 9초21에 달렸다. ‘인간 탄환’으로 불리는 우사인 볼트의 세계기록(9초58)보다 빠르다. 비결은 배턴 패스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면서 배턴을 주고받는 순간 주자들이 팔을 쭉 뻗으면서 거리상 이점이 생겨 개인 기록보다 좋은 결과가 나온다.
앞으로 43일 후면 제20대 대통령이 제19대 대통령에게 배턴을 넘겨받는다. 그런데 두 주자는 배턴 패스 전략을 세우기는커녕 다음 주자가 정해진 지 19일이 지나서야 처음 얼굴을 본다. 한국은행·감사원·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주요 인사 임명, 대통령 집무실 이전 등을 두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코로나19가 깊게 할퀸 민생은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지쳐있다. 그만큼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일상 회복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 어느 때보다 국민의 대표 주자들이 팀워크를 발휘하고 치밀한 배턴 패스 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배턴의 기적이 필요하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3.29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propaganda·선전)는 의도를 갖고 여론을 조작해 사람들의 판단이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원래는 신앙을 보급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체제 선전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로 바뀌었다.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 괴벨스(1897~1945)는 프로파간다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대중을 현혹하는 웅변, 거창한 행사, 신문·음악·라디오·영화 등을 영리하게 동원해 독일 국민을 반유대 나치즘의 광신도로 몰고 갔다.
북한이 지난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을 쏘아 올렸다. 미사일과 이동식 발사대(TEL) 기술의 발전 그 자체보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15분여 분량의 ICBM 선전 영상이 온라인에선 더 화제인 듯하다.
뮤직비디오 스타일로 제작한 영상의 주인공은 미사일이 아니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다. 그는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슬로 모션으로 등장하더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체크하고, 선글라스를 벗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드론을 동원한 촬영, 현란한 교차편집 등 기존 발사 장면과 확연히 다르다.
국내외 네티즌들은 영상에 “김정은에게 오스카상을 줘라” “김정은이 유머를 아는 것 같다”는 등의 댓글을 달았다. 북한이 ‘절대 존엄’을 우습게 그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남한과 서방의 네티즌에겐 북한의 도발과 위협이 다소 누그러져 전달되는 효과가 있었을 듯하다. 북한은 외세의 핵 위협에 맞서기 위해 ICBM을 실험한다는 대내외 명분도 이 ‘병맛’ 비디오를 통해 여과 없이 전달했다.
우리에겐 유치해 보이는 연출이지만 대외 정보가 차단된 북한 인민들이 보기엔 입이 떡 벌어지는 세련된 영상일 수도 있다. 북한은 남한의 영상물을 유통하거나 보는 걸 반사회주의적 중범죄로 여긴다. 북한 인권단체 ‘전환기 정의 워킹 그룹’은 지난해 말 '김정은 시기의 처형 매핑' 보고서를 공개했다. 문서에 따르면 탈북민 인터뷰로 수집한 김정은 집권(2011년 12월) 이후 공개처형 사례 27건 중 7건이 남한 영상 관련 죄목이었다. 마약(5건)이나 살인·살인미수(3건)보다 많았다. 프로파간다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우리 정부가 눈 감고 있는 북한의 인권문제 등 연출되지 않은 실상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3.30 두 번째 만찬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당선인 간 만찬에 참석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말인 2007년 12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자격으로 노 전 대통령, 임호선 청와대 대변인과 함께 청와대 백악실에서 2시간 10분가량 이명박 당선인을 만났다.
14년 3개월 뒤인 지난 28일 문 대통령은 이번엔 대통령 자격으로 윤석열 당선인을 만났다. 회동 시간은 41분 길어졌지만, 야당 당선인과 만찬장에서 조우했다는 큰 틀은 2007년과 닮았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은 두 차례 정권을 내놨는데, 문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청와대에서 두 상황을 맞이한 유일한 사례가 됐다.
만남 이후 브리핑이 ‘화기애애’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도 15년 터울의 두 차례 만찬이 닮았다. 2007년 회동에서 “내 마음엔 당선인이 더 윗분”(노무현) “제가 선임자로 우대하겠다”(이명박)는 덕담이 오갔다. “한·미 FTA를 임기 중 비준해 달라”는 당선인 측 요구에 노 전 대통령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이번 만찬을 두고도 “갈등 이런 것들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눴다.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를 나눴다”(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는 설명이 뒤따랐다. 민감한 현안인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과 관련해서도 문 대통령은 “예산을 면밀히 살펴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5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점, 2007년에는 청와대·당선인 측 모두 브리핑을 했지만 이번에는 당선인 측만 설명에 나섰다는 게 차이점이다.
15년 전 첫 회동에서 좋았던 분위기는 2008년 2월 청와대 관저에서 열린 두 번째 회동에서 180도 달라졌다. 이명박 당선인 측이 통일부·여성가족부·과학기술부·해양수산부 폐지를 골자로 한 정부조직법 개편안 공포를 요구한 데 이어, 노 전 대통령의 기록물 이관 등을 문제 삼으며 양측의 갈등이 폭발했다.
이번 회동에 대해 “흉금을 털어놨다”는 설명에도 마음 한쪽이 불안한 건 15년 전의 기억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엔 신·구 권력이 인사 문제 등을 놓고 회동 전 충돌한 이력까지 있다. “제 경험을 활용해 달라. 돕겠다”고 한 문 대통령, “잘된 정책은 계승하겠다”는 윤 당선인의 말에 답이 있는지도 모른다. 40여일 남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더 이상의 정면충돌은 보고 싶지 않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3.31(목) 언더도그마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믿는 것을 언더도그마라고 한다. 약자를 뜻하는 언더독(underdog)과 독단적 신념을 뜻하는 도그마(dogma)의 합성어다. 미국의 작가 마이클 프렐이 쓴 『언더도그마』(2012)에서 처음 사용했다. 프렐은 자신의 강경 보수 성향을 기반으로 언더도그마 현상을 비판했지만, 현재 이 용어는 강약과 선악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설명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이동권을 내세운 장애인 단체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연일 비판을 쏟아내면서 언더도그마를 언급했다. 이 대표는 지난 26일 “소수자 정치의 가장 큰 위험성은 성역을 만들고 그에 대한 단 하나의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게 틀어막는다는 것에 있다”며 언더도그마 이야기를 꺼냈다. 28일 당 최고위원회에서는 “최대 다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해야 주장이 관철된다는 비문명적 관점으로 불법 시위를 지속하고 있다”며 수위를 높였다.
이 대표의 비판이 논란이 되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29일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측과 만났다. “소통을 통해 해결책을 찾아 나가겠다”면서다. 이후 전장연은 “출근길 시위를 중단하고 삭발투쟁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시각장애인인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은 “헤아리지 못해서, 공감하지 못해서, 적절한 단어로 소통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다”며 무릎을 꿇었다.
전장연의 목소리에도 일리가 있다. 지하철 역사 내에 엘리베이터를 100% 설치한다는 약속은 20년째 지켜지지 않고 있다. 현재 설치율은 94%에 달하지만, 6%의 공백은 여전히 장애인에게 큰 벽이다. 다만 출근 시간 수십분간 지하철을 멈춰 세운 시위 방식이 정당했다거나, 불가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대표도 이 문제를 지적할 때 굳이 ‘비문명적’이나 ‘언더도그마’ 등의 자극적인 표현을 동원하지 않았어야 했다.
시위로 인해 시민들은 큰 불편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시민 다수는 침묵했다. ‘약자는 선하다’는 언더도그마에 빠졌다거나, 시위 방식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시민들이 불편함과 짜증을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삼킨 것은, 그것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배려가 사라질수록 우리는 문명에서 멀어진다.◎
장주영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