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4/ 네덜란드 - 네팔
지구촌 여행/ 국가별4/ 네덜란드
■ 네덜란드
정식 명칭은 네덜란드 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이며, 일명 Holland·화란(和蘭)이라고도 한다.
서쪽과 북쪽이 북해와 접하며, 해안선은 약 451㎞에 달한다. 속령으로 카리브해에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5개 섬으로 구성)와 아루마 섬이 있으며, 한때 인도네시아도 300년간 식민지로 있었으나 1950년 독립하였다.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 행정부 소재지는 헤이그(Hague, 네덜란드어 Dan Haag)이며, 행정구역은 12개 주(provincie)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4만 1543㎢, 인구는 1694만 7904명(2015년 현재)이다. 주요 인종은 게르만족 계통의 네덜란드족이다. 공식언어는 네덜란드어이며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이 통용된다. 종교는 가톨릭교회가 32%, 네덜란드 개신교가 17%이며, 특히 왕실의 종교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이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면보다 낮아 전통적으로 간척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활발하고, 국토의 70%가 농목지로서 낙농과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서기전 1세기 중엽 로마의 시저(Caesar, J.)가 게르만족이 거주하던 현재의 네덜란드 영토를 점거했으며, 그 뒤 400년경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따라 로마인은 물러가고, 남부에는 프랑크족, 동부에는 색슨족이 침입하였다. 6세기에는 대프랑크 왕국이 세워졌고, 9세기경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수개의 공국(公國)이 생겨났다.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家)의 필립선공(善公)이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하였고, 1515년부터는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았다.
그 뒤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하자, 오렌지가 윌리엄공의 지휘하에 독립투쟁을 전개하여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17세기경 해양 및 식민지 경영국가로서 국세가 융성하여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에 진출하였고,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현재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도 했다.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패망시까지 점령당했으며, 1814년 윌리엄 1세의 통치하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간의 통일왕국이 건설되었다.
1831년 벨기에가 독립한 뒤, 네덜란드는 윌리엄 2세의 자유헌법 제정과 50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중앙집권체제 확립 등으로 근대 산업국가로 등장하였다. 1867년에는 룩셈부르크가 독립했으며, 제1·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정책을 택했으나, 독일군에 침략당하여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마샬(Marshall)의 원조에 힘입어 전후 복구했으며, 이후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서유럽연합(W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서방 진영에 가담하였으며, 1945년 12월 유엔에 가입하였다. 전쟁 중인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을 창설하고, 1957년에는 유럽공동체(EC, 현 EU)에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였다.
1990년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는 유고 내전과 아프리카의 내전, 기근 등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 들어와 반외국인 감정이 커지게 되었고, 이러한 감정은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증폭되었고, 2002년 마침내 네덜란드 사회를 뒤흔드는 폭풍으로 폭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2002년 의회에서 통과된 난민 추방 중단 결의안은 난민에 대한 대규모 사면과 영주권 부여의 길을 터놓은 셈이며, 정부의 강경 정책에 의회가 제동을 건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1948년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율리아나(Julianace)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율리아나 여왕은 1980년 4월 현 베아트릭스(Beatrix) 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왕은 상징적 존재로서 모든 국사에 형식적·의례적 권한을 행사하며, 법령 또는 중용 국정관계 문서에 대한 서명권이 있으나 관계 각료의 부서(副署)가 있어야만 효력을 발생하므로 국왕은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국기 = 다음백과
●네덜란드 경제를 일으킨 돈고기(Stock fish) 청어 이야기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람의 조선소 모습.
돈고기(Stock fish)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중세 유럽에서 말린 청어와 말린 대구는 양식이자 화폐와도 같았다. 생선의 크기와 모양을 똑같이 하여 말린 후 곡식, 옷, 도구 등 온갖 물건으로 교환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유통 생선이 귀하게 대접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가운데서도 네덜란드를 부강하게 만든 청어이야기는 흥미롭다.
우리가 겨울철에 말려서 과메기로 먹는 생선이 원래는 청어다. 기름지고 맛이 좋은데 말리면 독특한 풍미가 살아난다. 유럽에서도 청어 인기가 좋았다. 1425년 해류가 변하면서 발트해에서 잡히던 청어가 네덜란드 앞바다 북해로 몰려들었다. 이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청어잡이에 나서서 매년 여름 약 1만 톤의 청어를 잡았다. 네덜란드의 인구 100만 명 중 30만 명이나 청어잡이에 종사했던 걸 보면, 청어는 그야말로 네덜란드 전 국민의 밥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처럼 청어잡이에 목을 맨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네덜란드 국토 대부분은 저지대로 바다 보다 낮은 늪지에서는 목축업은 물론 농사도 어려워 먹을 것이 귀했다. 오죽하면 함께 모여 식사를 해도 자신이 먹은 분량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더치페이(Dutch pay)’가 발달했겠는가.
너무 빨리 상하는 청어, 해결책은?
▲빌렘 벤켈소어
이렇게 중요한 청어잡이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청어가 맛은 좋았지만 빨리 상하는 것이 문제였다. 어부들은 생선이 변할까봐 조업 중에도 급히 회항하곤 했다. 회항을 하다 보니 배를 먼 곳까지 끌고 갔다 오는 기름 값만 많이 들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문제를 진즉에 해결한 한 어부가 있었다.
1358년 ‘빌렘 벤켈소어’라는 한 어민이 작은 칼을 개발하여 그런 문제를 해결했다. 생선을 잡는 즉시 작은 칼로 한 번에 스윽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머리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엔 소금에 절여 통에 담아 보관했다. 이와 같은 선상 염장법을 개발한 덕분에 더 이상 생선이 상할 것을 우려해 급하게 회항할 필요가 없어졌다.
네덜란드 어선들은 몇날며칠이고 느긋하게 조업을 하면서 배마다 청어를 가득 실어올 수 있었다. 청어는 육지에 돌아와 소금에 한 번 더 절여졌다. 그 덕에 보관기간을 1년 이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작은 칼 한 자루 덕분에 생선을 오랜 기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식량이 부족하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보관기간을 획기적으로 연장시켜준 절임청어는 전 유럽에서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년에 140일이 넘는 기독교 육류 금식기간에도 생선은 먹을 수 있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 수백 명이 매일 아침 소금에 절인 청어를 유럽 전역으로 가져가 돈을 벌었다.
유대인, 소금 수입으로 절임청어 산업 장악
무엇보다 이 절임청어를 만드는데 소금은 너무나 중요했다. 당시 소금은 대부분 독일이나 폴란드 암염을 한자동맹(Hanseatic League: 중세 독일 북부연안과 발트해 연안 도시들에서 결성된 상업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았다.
이 같은 환경 중에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네덜란드로 건너간 유대인들이 암염 대신 값싸고 질 좋은 이베리아 반도 천일염을 수입하면서 암염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는 네덜란드를 소금 중개무역 중심지로 만들어준 중요한 시초였다. 그리하여 유대인은 소금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암염에 비해 낮게 형성하면서 소금 유통의 독과점체제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절임청어는 네덜란드 해군과 상선들에게도 필수품이었다. 유대인은 이들을 대상으로 절임청어를 공급하는 한편, 이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전 유럽에 판매했다.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절임청어, ‘더치 헤링(dutch herring)’을 즐겨먹는다. 주로 꼬리를 잡고 통째로 먹기도 하고, 양파를 곁들여서 샌드위치로 먹기도 한다. 청어의 비릿한 향과 양파가 조화를 이루면서 은근히 입맛을 당기는 묘한 매력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유대인, 한자동맹을 물리치고 상권을 장악하다
그 무렵 유대인과의 소금 유통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 도시들의 북해 주도권은 여기서 끝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큼 소금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채굴하기도 어렵고 운반도 힘든 암염 대신 유대인들은 양질의 바다소금을 정제하여 대량으로 들여와 한자동맹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소금이 경제권역 간의 주도권을 바꾼 것이다.
당시 한자동맹이 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은 유대 상인들이 발행하는 환어음을 거부했다. 현지 화폐만 받고 상품을 팔았다. 그러니 당시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상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 상인과는 상업이 연계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금의 독점적 공급이 깨지고 판매가 줄면서 금융이 꽉 막힌 그들에게 유동성이 줄어들자 급격히 쇠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청어를 절이고 남는 천일염과 정제소금을 인근국들에 싼값에 팔아 소금 유통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유대인은 소금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암염에 비해 낮추어 생산지-유통-소비지 일체를 지배하는 독과점체제를 이루었다. 유대인들은 유통시킬 국내자원이 부족하자 이렇게 경쟁력 있는 원자재나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재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키워나갔다. 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청어산업, 분업을 낳다
유대인은 청어를 처리하는데도 일대의 혁신을 이루었다. 바로 ‘분업화’를 도입한 것이다. 고기 잡는 사람, 내장 발라내는 사람, 소금에 절여서 통에 넣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서 작업을 진행했다. 숙련공은 1시간에 약 2천 마리의 청어 내장을 발라낼 수 있었고 절임청어의 생산량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그렇게 청어절임은 포획부터 처리와 가공, 그리고 수출까지 일괄 공정으로 기업화되면서 본격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청어산업으로 경쟁력을 확보한 네덜란드
이후 유대인은 네덜란드에서 오늘날 수협과도 같은 ‘어업위원회’를 만들었다. 의회로부터 법적 권리를 부여받아 청어산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이다. 어업위원회는 품질관리를 위해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 그물코의 크기를 정했고, 가공품의 중량과 포장 규격 등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 품질 유지에 힘썼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네덜란드 청어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유럽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관 공정체계의 완성과 유통의 장악 그리고 공급의 조절 곧 ‘독과점 전략’은 원래 유대인들의 장기였다.
게다가 1596년 네덜란드 항해가 빌렘바렌츠가 북극해의 스발바르제도를 발견했다. 당시 포를 이용한 고래잡이 기술을 발명한 네덜란드인들은 그곳을 장악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고래잡이 분야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대량의 고래기름과 고래수염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고래기름은 오랫동안 밤거리 가로등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게다가 고래고기는 찬 음식으로 분류되어 육식이 금지된 금식일에도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선으로 오랜 기간 서구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경선단은 1610~1840년 북극해 일대의 고래 무리를 거의 멸종 단계로 몰아넣었다.
162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선박 수는 2천척이 넘었는데 대부분이 70톤에서 100톤에 이르는 청어잡이 어선이었다. 1669년에는 청어잡이와 가공처리, 통 제작, 망, 어선 건조 등 관련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만 합쳐도 그 수가 약 45만 명에 달했다. 당시 네덜란드 노동인구의 태반이 청어와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 정도라면 네덜란드 경제를 일으킨 것이 청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업 발전이 네덜란드의 중상주의를 활짝 꽃 피워
청어잡이가 호황을 누리다보니 고기잡이배들이 많이 필요했다. 이는 자연스레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또 조선업이 발전하다보니 고기잡이배 뿐 아니라 화물선 제작능력이 좋아졌다. 네덜란드 산업은 이처럼 수산업에서 시작하여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6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 선박은 유대인 주도로 ‘경량화’와 ‘표준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 빨리 달릴 수 있고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기초로 배의 크기를 키워 화물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경쟁국인 영국의 배들이 중무장한 채 사람을 많이 태울 목적으로 튼튼하게 건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네덜란드 선박들은 최소의 선원으로 최대의 경제효과를 얻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네덜란드에서는 가볍고 표준화 된 ‘보급품 수송함’의 대량 건조기술이 1570년에 개발되었다.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대단한 기술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이전에 만들어진 배에 비해 5분의 1 정도 인원만으로 운행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표준화로 건조비용이 영국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곧 화물유통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이로써 네덜란드 조선업은 당대의 최고산업이 되었다.
영국도 이에 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네덜란드 유대인들의 과감한 모험정신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무렵 다른 나라 바다를 지나려면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통행세 부과기준이 갑판의 넓이였다. 당시는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하여 대부분의 배에는 양 옆으로 많은 수의 대포를 장착하고 다녔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굵은 목재를 써서 갑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대포를 장착하지 않거나 12~15문 정도의 대포만 설치하여 무장을 최소화 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값싼 나무로 화물칸을 배불뚝이로 만들고 갑판은 좁게 만들어, 제작경비와 함께 통행세도 절감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박은 양 옆은 통통하고 둥글지만, 갑판은 매우 좁았다. 그런데 대포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가벼워 해적선으로부터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인은 “바다의 마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세계 해운업계 평정
▲플류트선
이 배를 ‘플류트(Fluyt)선’이라 불렀다. 오늘날의 컨테이너선인 셈이다. 이 배는 갑판이 좁고 긴 대신 선창이 넓어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돛이 매우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선박이 가벼워 속도도 빨랐다. 플류트선의 설계는 초기 갤리온선의 설계와 유사해 그리 크지 않았다. 보통 플류트선 한 척의 적재용량은 약 250t ~ 500t에 길이는 25미터 내외였다. 게다가 배불뚝이 저중심 설계라 출발과 정지가 쉽고 폭풍우 같은 악천후에도 잘 견뎠다. 선박 건조비도 싸게 먹혔다. 영국에서 제작할 경우 1300파운드에 이를 경비가 네덜란드에서는 800파운드로 족했다.
이런 이점 이외에도 대단한 경쟁력이 있었다. 곧 발트 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1번 왕복할 동안, 플류트선은 2번 왕복할 수 있었다. 승선인원이 보통 9~10명으로 영국의 동급선박 30명에 비해 저렴하게 운행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화물운송비를 1/3까지 낮추었다. 이로써 네덜란드가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했다.
유대인들은 해상운송 물량이 폭증하자 이런 장점을 가진 배를 대량 건조했다. 이를 위해 조선소의 설비와 자재, 계측장비 등을 표준화했다. ‘표준화’ 또한 유대인 장기였다. 청어산업에 이은 표준화가 조선업에서도 위력을 발했다. 이로써 배를 저렴하고 빠르게 건조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중엽에 이미 북방무역의 70%를 장악했다. 보유상선 숫자도 나머지 전 유럽의 상선수보다도 많은 1800척이나 되었다.
자본주의 싹들이 피어나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그 뒤 해운업의 발전은 네덜란드를 물류산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후 물류산업 발달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를 중계무역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 무역업의 발전은 이를 지원하는 금융업과 보험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싹들이 네덜란드에서 피어났다. 유대인들이 주도해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고, 그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증권거래소’가 세워졌다. 그 무렵 네덜란드가 세계 물류의 중심이자 중계무역 기지다보니 유통되는 화폐의 종류만 수 백 가지가 넘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태어난 게 화폐를 통일을 목적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중앙은행 모태격인 암스테르담 은행이었다.
이렇게 자본주의 맹아인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중앙은행의 모태’가 차례로 네덜란드에서 탄생했다.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과 자본주의 중심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결과적으로 청어가 네덜란드 경제와 해운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중상주의를 활짝 꽃피웠다. (출처; 세상을 바꾼 음식이야기, 세종서적)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볼거리
▲겨울 12.1.5.
▲파란 하늘 아래 붉은 튤립 꽃밭
▲화산 분화구에 있는 에메랄드 호수
▲평화로운 풍차 마을
▲암스테르담 광장
▲폐달 서쿨버스
▲수중 주택
▲바다나무=2014년 완공 예정인 동물전용 건물로 네덜란드에서 설계 시공중임
▲썰매 13.1.26
▲튤립
▲정면 충돌한 열차 12. 4. 21. 이 사고로 125명이 부상
▲홍수에도 여유만만 - 13. 6. 6 겐트 캠핑장
○안네의 일기
▲항구도시인 암스테르담은 40여 개의 운하와 1000개가 넘는 다리가 있다
▲안네의 집앞 프리젠 운하
▲베스테르케르크 교회 - 안네의 일기장에 나오는 시계탑 종소리는 지금도 15분마다 울린다
▲암스테르담 광장
▲네덜란드의 명물 풍차
▲안네 프랑크의 집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프리젠 운하 옆 - 안네의 가족은 2년 넘게 이곳에 숨겨진 뒷집과 다락방에서 숨어 살았다
▲안네의 어린시절
▲안네의 일기
▲나무 책장을 옆으로 치우면 좁은 문과 안에 가족이 살았던 뒷집이 나타난다
▲안네의 밤 - 벽면에는 여배우와 왕족의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1947년 처음 출간된 안네의 일기는 각국어로 번역 읽히고 있다
▲안네의 동상 - 그녀는 16세에 죽었다
▲유대인을 소각하던 화장터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들
▲강제 수용소
■ 네팔
Nepal네팔연방민주공화국, Kingdom of Nepal, Nepal Adhirajya
네팔이라는 국명의 기원은 네팔의 수호신인 'ने'(Ne)와 보호라는 의미의 'पाल'(pal)을 사용하여 직역하면 '신의 보호'라 한다.
네팔은 9세기∼14세기까지 인도의 지배를 받았으며, 1769년 구르카(Gurka) 왕조가 카트만두 계곡을 정복하고 통일왕국을 건설하였다.
1814년 영국에 지배당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해 왔다. 1846년 이후 100년 동안은 영국의 지원을 받은 라나가(家)의 독재정치가 실시되었으며, 1951년 2월 18일 왕정이 복고되면서 입헌군주제가 확립되고 독립을 이루었다.
의회는 1960년 12월 국왕에 의하여 해산되었고 촌락의 장로가 중심이 되는 국가 판차야트(Rastriya Panchayat)가 1962년 입법기관으로 설치되었으며 정당은 배제되었다. 1967년 제1차 헌법개정이 이뤄지고, 1972년 1월 현재의 비렌드라 국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1979년 각 단계의 가이드라인 아래에서만 활동을 허락하는 판차야트 제도는 국가적인 저항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1980년 판차야트 정치체제 존속과 정당정치 부활 중 양자택일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자의 54.8%가 판차야트 존속을 지지함에 따라 제3차 헌법개정이 이뤄졌다.
이후 계속적인 무장 테러에도 불구하고 1986년 4월 선거 결과 국왕에 대한 지지도가 1981년보다 더 높아지자 정치집단들은 지하활동을 시작하여 결국 ‘네팔연합 마르크스 좌익주의자’라는 공산당의 형태로 나타났다.
지속적인 국내의 반대와 시위대에 대한 네팔 당국의 과잉 진압은 국제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비렌드라 국왕은 1990년 4월 6일 범민주주의 운동에 굴복하여 헌법개정위원회 발족 동의, 복수정당제 부활 약속 등 핀차야트 제도는 결국 여러 분야의 압력으로 붕괴되었다.
1990년 11월 9일 비렌드라 국왕은 주권재민, 서구형 입헌군주제, 기본적인 인권 보장, 다당제 민주주의를 공포하였다. 1991년 5월 2일 정당 참가에 의한 32년 만의 총선거에서 네팔의회당(NC)이 과반수 이상을 획득하였으며, 네팔공산당(CPN-UML)이 두번째로 많은 의석을 차지하여 행정부를 견제하는 제1야당이 되었다.
NC의 사무총장 코이랄라가 수상으로 임명되었으며, 선거 후 60명의 의회 의원은 새 헌법에 따라 국왕이 임명한 10명과 함께 하원을 구성하였다. 아울러 지방선거를 실시하여 민주주의 안정화를 꾀하였으며, 인도를 비롯한 이웃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1994년 7월 의회에서 NC 내 반(反) 카이라라파 의원 불참으로 차기 회계연도 정부사업 계획이 부결되자 코이랄라 수상은 의회 해산 및 수상직 사임을 국왕에게 건의하였고 국왕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 실시가 결정되었다.
총선 결과 제1야당이던 네팔공산당이 전체 하원의석 205석 중에서 88석을 차지하여 네팔의회당, 국민당(RPP)을 누르고 승리하여 아디카리 수상의 네팔공산당 소수 단독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네팔의회당측은 공산당 정부에 대한 지지 철회 및 국민당과의 연정 구성을 모색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아디카리 수상은 1995년 6월 9일 비렌드라 국왕에게 국회해산을 건의, 국왕은 국회 해산(6월 13일) 및 조기 총선(11월 23일) 실시를 결정하였다. 선거 결과 국민당의 타파(Surya Bahadur Thapa) 수상의 연립정부가 출범되었다.
한편, 2001년 6월에는 네팔의 왕세자가 국왕 등 왕족 8명을 총으로 사살하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에도 네팔에는 민주화 요구 시위와 총파업이 계속되었고, 뒤 이어 즉위한 갸넨트라 국왕은 이에 굴복하여 2002년에 해산된 의회를 복원한다고 발표하였다. 2006년 11월에는 네팔 정부가 반란진영 마오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11년간의 내전이 공식 종료되었다.
마침내 2008년 7월 21일 네팔은 왕국에서 대통령이 통치하는 공화국으로 바뀌었고, 국민에 의한 선거를 통하여 람 바란 야다브(Ram Baran Yadav)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며, 실권자 기리자 프라시드 코이랄라(Girija Prasad Koirala) 총리가 내각을 이끌었다.
네팔은 전통적인 중도중립의 비동맹국가로서 1955년 유엔에, 1961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국기 = 다음백과
●고대왕국 '로'가 번영한 은둔의 땅
어퍼 무스탕은 네팔의 중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카그베니부터 티베트 국경지대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고대왕국 ‘로’가 번영을 누리던 은둔의 땅으로 원형에 가까운 티베트 문화와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 은둔의 땅 무스탕. 잿빛 절벽 기슭에 첼레(3,050m)의 삶이 이어지고 있다.
▲ 탕베마을의 부엌에서 수유차를 만들고 있는 여인.
일행은 나 외에 트레커 2명과 셰르파, 포터, 쿡까지 24명. 식품, 의약품, 발전기, 카메라, 야영장비 등 짐이 800kg에 가까워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여기 버스는 지붕에 짐을 실어 주는데 웬만한 짐은 운전사가 눈감아 준다.
승객들도 차마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이곳의 길은 비포장에 요철이 심한 데다 워낙 좁아 교행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길옆은 낭떠러지라 창밖을 내다보면 오금이 저린다. 때때로 차가 마주치면 운전사들은 클랙슨으로 서로 신호를 해 조금 넓은 곳에서 교행해야 한다.
▲ 베니에서 따또파니로 가는 길. 옆에 보이는 칼리 칸다키강을 따라 돌산을 깎아 만든 험한 길이다
경사가 너무 심해 차가 힘에 부치면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길 위로 폭포가 떨어지는 경우까지 있는데 노련한 운전사는 그 세찬 폭포를 뚫고 잘도 달린다. 운전사도 승객도 강심장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길이다.
중간 기착지인 가사에 도착하자 안도감과 함께 시장기가 몰려온다. 버스가 워낙 널을 뛴 탓이다. 짜파티로 요기를 하고,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 좀솜행 버스로 바꿔 탔다. 타이어 펑크로 예정보다 늦었단다. 이제부터는 길이 비교적 좋아 다행이다 싶은데 얼마 후 다시 펑크가 나서 차가 멈춘다. 이럴 때 짜증을 내면 안 된다. 그러려니 해야 한다. 네팔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늦은 오후 무렵 좀솜에 도착했다. 그동안 여러 번 방문했던 곳이다. 전보다 오가는 차가 많아진 느낌을 받았다. 노점에서는 사과와 말린 사과, 사과즙, 시벅차 등을 팔고 있다. 좀솜의 특산물이 바로 사과다. 우리네 홍옥과 색깔과 크기가 비슷하며 맛은 새콤달콤하다.
피로회복을 위해 시장에서 시벅차를 두 병 샀다. 시벅은 네팔 특산 열매로 우리의 보리수 열매 비슷한 모양이다. 노란색이며 맛은 시큼하지만 비타민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로지에서 뜨거운 시벅차를 마시며 오늘을 회상해 본다. 험한 길을 달려온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세상에서 받았던 고뇌와 피로감마저 꿈결처럼 느껴진다. 대신 무스탕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점점 높아져간다.
▲ 첼레마을의 양 우리. 칼리 칸다키강이 내려다 보인다. 양 등에는 표식으로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아픈 이들에게 의약품과 인정 베풀며 트레킹
13일. 일행 중 한 명이 탈이 났다. 미열에 설사를 동반하는 증세다. 물이나 음식이 맞지 않았나보다. 이곳에는 제대로 된 의료시설이나 약국이 없기에 이런 경우를 대비해 각종 상비약을 사전에 꼼꼼히 준비해야 한다. 지사제, 소화제, 항생제 등의 내복약과 파스, 연고제 같은 외용약, 그리고 외상에 대비한 지혈제, 붕대 등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넉넉히 준비하는 게 좋다.
근처의 곰파(절)를 찾아 여행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고산 오지 트레킹은 위험인자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돌발변수가 많다. 종교를 떠나 겸손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버스를 타고 탕베로 향한다. 칼리 칸다키강을 끼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풍광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이따금 오가는 짐 실은 말들을 보면 얼른 내려서 보폭을 맞추고 싶은 충동마저 생겨난다.
버스가 에크레 바티마을에 잠시 정차하기에 10여 년 전에 묵었던 로지를 찾았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던 아가씨는 없고, 대신 오빠가 로지를 지키고 있다. 기관지가 좋지 않아 바람이 찬 무스탕을 떠나 따뜻한 곳에 살고 싶어 했었다. 왠지 섭섭하다.
카그베니의 ACAP 체크포스트에서 트레킹 허가서에 체크인을 했다. 여기부터가 진정한 어퍼 무스탕이다. 탕베에 도착하니 먼저 트랙터에 짐을 싣고 출발했던 스태프들이 사과나무 밭에 캠프를 치고 기다리고 있다.
탕베마을을 방문했다. 100여 호의 티베트식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 골목이 마치 미로처럼 느껴진다. 강한 바람을 피하기 위한 지혜다. 이 지역은 오전 10시가 넘으면 피부가 따가울 만큼 세찬 바람이 분다. 일명 무스탕 바람이다.
▲ 가사 근처 길가에 있는 물레방아에서 옥수수를 갈고 있는 현지 여인들
티베트식 가옥은 이층 구조로 돌벽을 쌓고, 그 틈을 개흙으로 단단하게 메운 형태다. 이층은 널빤지를 길게 걸쳐놓고 개흙으로 마감해 놓았다. 일층은 주로 가축이 살고, 이층은 사람이 거주하며, 옥상은 곡물을 말리는 장소다. 이층은 원룸형으로 침실과 부엌이 같이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는 사람이 앉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그 위에 두툼한 양털 카펫을 깔아 놓았다. 부엌에는 취사와 난방을 겸하는 철제난로와 간단한 취사도구가 전부다. 소박한 살림살이지만 그래도 인정은 넘쳐난다.
한 집을 방문했더니 수유차와 사과를 연신 내어준다. 아들이 관절이 안 좋아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기에 한국에서 가져간 약을 선물했더니 고마워한다. 네팔 오지는 약을 먹으면 금방 나을 병인데도 약이 없어서 병을 키우는 사람이 많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약을 많이 준비하는 또 다른 이유다.
14일. 사과 내음은 좋았지만 엊저녁부터 세차게 내린 비가 아침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여우들까지 사납게 괴성을 질러대서 그만 잠을 설쳤다. 수유차 생각이 점점 간절해져서 새벽 6시경 눅눅한 슬리핑백을 박차고 일어났다.
비가 오는 새벽에도 일하러 나서는 현지인들이 보인다. 염치불구하고 어제 방문했던 집을 다시 찾았다. 안주인이 대접하는 수유차를 마시자 그제야 몸이 풀린다. 그 집 아들이 관절염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카트만두로 데려오면 치료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돌포 트레킹 당시 아파서 죽어가던 2명의 어린이를 보고도 도와주지 못한 우울한 기억이 나를 행동으로 나서게 했다.
빗속에서 아침을 먹고 각자 짐을 분배했다. 이제부터는 걸어야 한다. 비에 젖지 않도록 하나하나 비닐로 싸느라 제법 시간이 걸린다. 짐이 많아 일부는 탕베에 남겨두었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다시 가져가기로 했다.
사마르를 목표로 길을 떠나 30분쯤 지났을까, 어제부터 내린 비로 길이 끊어져 급류를 이루고 있다. 길에 붙은 100m 높이의 직벽에서는 돌무더기가 계속 떨어지고, 그 돌이 급류에 휩쓸려 우당탕퉁탕 떠내려가는지라 도저히 건널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돌아설 수는 없다.
가장자리에 박힌 돌을 징검다리 삼아 겨우겨우 건너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낙석은 간간이 이어진다. 이 절벽을 멀리서 보면 깊은 골이 세로로 많이 파여 있다. 마치 빨래판을 가로로 놓은 모양이다. 그 골이 모두 낙석의 흔적이다.
추상에 도착했다. 추상마을 길도 이미 개울로 변해 통과하는 데 애를 먹었다. 추상마을을 지나 철제다리가 놓인 큰 개울을 건너자 더 큰 난관이 앞을 막아선다. 길에 붙은 까마득한 절벽으로부터 사람 머리통만 한 낙석이 간헐적으로 길 위로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바로 눈앞에서 그런 광경을 목도하면 겁이 안 날 수 없다. 문제는 낙석이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고, 이런 낙석지대가 수십 m나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돌아설 수도 없고, 가자니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다. 어쩌겠는가, 곰파에 참배도 했으니 이젠 신의 가호를 믿어야만 한다. 먼저 포터들이 무거운 배낭을 머리에 이고 한 사람씩 달려간다. 돌에 맞더라도 죽음은 면하자는 방책이다. 머리를 보호할 배낭이 없는 트레커들은 그저 신의 가호를 빌며 달려갔다. 앞서가던 포터의 1m 앞에 큰 돌이 떨어져 아찔했지만 다행히 전원 무사통과했다. 히말의 신에게 다시금 깊은 감사를 전한다.
▲ 가미마을의 한 집에서 집안의 안녕을 위해 불사 중인 라마승들. 라마승들은 북과 나팔을 이용해 기도를 한다.
변화의 격랑 앞에 서 있는 네팔의 산간 오지
15일. 어제 사마르까지 가려고 했지만 계획을 변경해서 첼레에서 숙박했다. 비에 젖은 짐을 정리하고, 탕베에 두고 온 짐도 가져와야 했다. 노련한 포터들은 그 험한 길을 다시 되돌아가 무사히 짐을 가져왔다. 고마울 뿐이다.
샨보체를 향해 출발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새벽에 그쳤다. 비가 온 후라 먼지가 없어 공기는 산뜻하지만 길이 엉망이다. 절벽 길을 다시 만났다. 자라 본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낙석의 위험을 걱정했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낙석이 전혀 없다.
고도가 높아지자 슬슬 다리가 무거워지고 몸 여기저기가 결린다. 굳었거나 쓰지 않던 근육들이 하나하나 풀어지고, 몸에 배어 있던 독소가 배출되는 과정이다. 그저 묵묵히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다 보면 해결된다. 산행은 고통마저도 즐겨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산행은 수행과 닮았다.
사마르에 도착했다. 가옥은 10채 정도로 버스와 지프차가 보인다. 로만탕까지 운행한다고 한다. 10여 년 전 방문했을 때에는 물동량을 전부 노새나 말에 의지했었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 현지인들도 촬영을 하면 너나없이 돈을 요구한다. 네팔의 산간 오지는 이제 변화의 격랑 앞에 서 있다.
사마르를 떠나 샨보체로 향한다. 고도가 3,800m를 넘나들다 보니 숨이 턱에 찬다. 트레커뿐만 아니라 고도에 익숙한 포터들도 힘들어 한다. 특히 어제 탕베에 갔다 왔던 5명의 포터들이 고전을 했다.
샨보체에 도착해 보니 그동안 집이 세 채나 늘어 있다. 지친 스태프들은 럭시를 마시며 피로를 푼다. 허리와 다리 관절이 아프고, 목감기 기운이 있는 스태프가 많아 일일이 약을 챙겨줘야 했다.
사마루에서 만났던 검정말을 다시 만났다. 물건을 등에 지고 산간 오지를 다니는 노역마로 트레킹으로 따지면 베테랑이다. 녀석은 나를 알아보고 줄레줄레 다가와 아는 체한다. 트레커끼리 인사나 나누자는 표정이다.
사마루 지역은 1970년대 초까지 티베트 저항군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1959년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하자 티베트인 일부는 이곳에 터를 잡고 중국에 대항해 무장항쟁을 했다. 그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대준 건 미국이었다. 밤에 불을 밝히면 비행기로 보급품을 낙하했다고 한다. 하지만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미국과 중국은 화해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결국 보급은 끊어지고 저항군은 와해됐다고 한다.
▲ 1 길링 위쪽에 있는 큰 초르덴. 샨보체에서 가미 가는 방향에 길링을 안 거치는 길옆에 있다. 2 사마르마을에서 로만탕까지 운행하는 버스와 지프차. 이제는 로만탕도 차로 쉽게 갈 수 있다. 3 무스탕에서 추위를 피해 따뜻한 포카라로 내려가는 여인.
●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
https://www.youtube.com/watch?v=_r1KZGgkRnM&feature=player_detailpage
★볼거리
○히말라야 7대 명봉 - BBC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I3GyqHhjx-4
○히말라야 14봉
○히말리야 14좌
히말라야 14좌라 함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14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좌(座)라 함은 주교(bishop)가 앉는 자리를 뜻하는 것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는 뜻이 될 것 같습니다.
이 14좌에 8,000 미터가 넘으면서도 주봉과 산줄기가 같다고 해서 제외된 얄룽캉(8,505 m)과 로체샤르(8,400 m)를 더해 16좌라고도 일컷습니다. 이 16좌는 세계 산악계에서는 크게 주목받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모두 오른 최초의 산악인은 우리나라의 엄홍길 대장입니다.
1. 에베레스트(Everest 8,848m)
높 이 : 8,848m 위 치 : 네팔과 중국 국경, 쿰부 히말라야
네팔명은 '사가르마타', 중국에서는 '초모랑마'로 불리우며 에베레스트는 발견자인 영국의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초등은 1953년 영국의 존 헌트가 이끄는 영국 원정대에 의해 에드먼드 힐러리(뉴질랜드인)와 셰르파 노르게이 텐징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세계 최고봉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고 고상돈 산악인이 1977년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2. 케이 투 (K-2)
높 이 : 8,611m 위 치 : 파키스탄 카라코람 발토르 산군
K2는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중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등반 성공률이 50% 정도로 지극히 낮아서 가장 오르기 어려운 8,000m봉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부르는 K2의 이름은 '초고리'입니다. 초등은 1954년 A. 데지오가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대가
7월 31일 아브루찌 릉을 통하여 시도를 해서 L. 라체델리와 A. 콤파뇨니가 초등을 이룩했습니다.
1977년에는 일본이 42명의 등반가를 동원하여 정상등정에 성공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986년 김병준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가 아부루찌 릉을 통해 정상에 올랐습니다.
3. 칸첸중가 (Kangchenjunga)
높 이 : 8,586m 위 치 : 네팔 히말라야 동부 칸첸중가 산군
칸첸중가는 8,586m로 세계 3위의 고봉입니다. 칸첸중가는 티벳어로 '5개의 큰 눈의 보고'라는 뜻이며 네팔인들에게는 최고의 성역으로 간주되는 산입니다. 따라서 현지인들은 꼭대기에 올라서는 것을 극히 꺼린다고 합니다.
주봉은 1955년 찰스 에반스가 이끄는 영국 원정대에 의해서 초등이 되었는데 등정자인 조지 밴드와 브라운은 성역을 밟지 말아달라는 현지인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정상을 몇 걸음 앞둔 지점에서 등반을 멈추었습니다.
성역으로 간주되는 칸첸중가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은 영국 원정대의 이같은 신사적인 행동은 알피니즘의 구현으로 히말라야 등반사의 한장을 장식하며 등반대의 성가를 더욱 드높였습니다.
한국에서는 87-88 동계 칸첸중가 원정대(부산 대륙산악회)가 캐러번 도중 대원 1명이 사망하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등정에 성공하였습니다.
4. 로 체 (Lhotse)
높 이 : 8,516m 위 치 : 네팔 히말라야 쿰부 산군의 중북부
로체는 에베레스트의 위성봉으로 인식이 되어서인지 다른 8,000미터 봉에 비해 등반이 자주 이뤄지지는 않으나 성공률이 매우 낮은 험준한 봉우리입니다.
초등은 1956년 에글러가 지휘하는 스위스 원정대에 의해 5월 18일 이루어졌는데 루이징거와 라이스가 서벽을 경유해서 정상에 도달했습니다.
현재 히말라야의 고봉의 벽중에서 가장 등반이 어려운 곳의 하나로 로체 남벽이 꼽히는데 라인홀트 메스너에 이어 8000미터급 14봉을 모두 오른 폴란드의 예지 쿠크츠카도 이 곳 로체 남벽을 오르던 중 추락사했습니다.
로체는 에베레스트와 인접한 관계로 로체봉 단독 등반보다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연결하는 종주등반으로 등정이 시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5. 마칼루 (Makalu)
높 이 : 8,463m 위 치 : 네팔과 중국 국경, 쿰부 산군 동부
마칼루는 그 모양으로 인해 '검은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마칼루팽이라고도 불리웁니다.
네팔 히말라야에 위치한 마칼루는 오래전부터 여러 원정대가 관찰과 촬영을 거듭했으나 195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등반이 시도되었습니다.
처음 등정을 시도한 미국 원정대(원정대장 시리)는 7,056미터지점에서 후퇴하였고, 다시 몬순기에 불란서의 프랑코 원정대가 북릉으로 7,880미터 지점까지 도달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1955년 봄 다시 J. 프랑코는 9명의 전대원을 3개팀으로 나뉘어 5월 15, 16, 17일에 아무런 사고 없이 연속으로 정상에 도달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2년 가을 한국산악회의 허영호씨가 단독으로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6. 초오유 (Cho Oyu)
높 이 : 8,201m 위 치 : 네팔 쿰부 지역과 티베트 자치구
초오유는 '여신이 거처하는 곳'이란 이름을 가진 우아한 산입니다. 네팔쪽의 남면은 상당한 급경사에 장장 2km에 달하는 넓고 긴 벽을 형성하고 있으며 북면은 비교적 완만한 사면으로 형성되었습니다.
1954년 오스트리아의 티치가 이끄는 등반대에 의해 초등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이들은 네팔과 티벳간의 교역로이자 남체 바잘에서 가까운 난파라(Nanpa La, 5716m)를 넘어 북서릉을 통해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7. 다울라기리 1 (Dhaulagiri 1)
높 이 : 8,167m 위 치 : 네팔 중부, 다울라기리 산군 최고봉
1949년 최초의 항공사진 촬영 이후 1950년에서 1959년 사이에 프랑스, 스위스,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가 교대로 일곱 번에 걸쳐 원정을 했으나 모두 8,000미터선 아래서 실패했습니다. 1960년에는 막스 아이젤린이 조직한 스위스 원정대가 북동릉을 경유하여 5월 13일에 초등에 성공했습니다.
다울라기리는 잦은 악천후에 따른 급격한 기후 변화로 위험한 산으로 악명이 높은데, 특히 남벽은 1977년 라인홀트 메스너의 실패 이후 아직도 미답봉으로 남아 있는 극도로 위험한 벽으로 등반인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부산합동대에 의해 가을에 등정에 성공하였습니다.
8. 마나슬루 (Manaslu)
높 이 : 8,156m 위 치 : 네팔중부,마나슬루 히말라야 주봉
1950년-55년 사이에 영국 원정대가 최초로 정찰한 후 일본 원정대가 4회에 걸쳐 마나슬루 등반 루트를 찾아냈습니다. 1956년 5월 9일 마키대장이 이끄는 일본 원정대의 이마니시와 셰르파 걀첸 노르부가 정상등정에 성공했습니다.
마나슬루는 한국 산악인에게는 비극의 산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1972년에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한국 원정대가 노말 루트로 등반을 하던중, 6,950미터 지점에서 눈사태로 4명의 한국대원과 1명의 일본인, 그리고 10명의 셰르파가 사망하는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악의 사고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1976년 봄 대한산악연맹이 등정을 시도했으나 다시 실패하고, 1980년 봄에 이르러서야 동국대 산악회에 의해 세계에서 8번째로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9. 낭가 파르밧 (Nanga Parbat)
높 이 : 8,126m 위 치 : 파키스탄, 펀잡 히말라야
산중의 왕으로 불리는 낭가파르밧은 히말라야산맥의 8,000m 이상 고봉중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다른 거봉들과 떨어져 있어 정상 부위의 바람과 눈보라는 다른 어떤 봉우리보다도 강합니다.
낭가파르밧의 대표적인 벽은 디아미르벽과 루팔벽으로 나눠져 있으며 세계최초로 8,000m이상의 14봉을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도 이곳에서 동생을 잃었습니다. 특히 남동벽의 루팔벽은 수직 4,500m의 거대한 직벽으로 등반인들에게 그 위용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의 여성 산악인 고미영씨(41)가 하산중 실족하여 사망한 곳이기도 합니다.
10. 안나푸르나 (Annapurna)
높 이 : 8,091m 위 치 : 네팔 히말라야 중부, 안나푸르나산군
안나푸르나는 등반 역사상 최초로 등정된 8,000m봉입니다. 1950년 이전까지 안나푸르나는 거의 탐사된 일이 없었는데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가 본래 공격목표였던 다울라기리의 등반로를 정찰하기 위해 안나푸르나로 진입했다가 등반 가능성을 발견하고 목표를 변경, 부적절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등반을 감행, 6월3일에 정상정복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짜릿한 성공과 달리 하산 때 여러 어려운 상황을 겪었는데 당시 흥분제를 과다복용해 자기통제에 실패한 에르조그와 그의 파트너 라슈날이 크레바스에 떨어지며 눈사태에 휩쓸리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하산 중 많은 대원들이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해야만 했습니다.
11. 가셔브룸 1 (Gasherbrum 1)
높 이 : 8,080m 위 치 : 파키스탄과 중국의 국경
카라코감 발토르 산맥의 가셔브룸 산군 가셔브룸 1봉은 히든피크 라고도 불립니다.
1861과 1887년에 고드윈 오스틴 소령과 영 허즈밴드 소령에 의해 처음으로 가셔브룸 1봉에 대한 정보가 알려졌으며 K5 라는 측량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히든피크는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된 최초의 8,000미터봉입니다. 1975년 베이스캠프까지 불과 12명의 포터만 동원한 2인조 원정대 라인홀트 메스너와 패트 하벨러는 8월 10일 가셔브룸 1봉의 북벽을 경유하여 등정했는데 이 등정은 최초로 무산소 등정으로 이루어진 알파인 방식입니다.지금은 가셔브룸 1봉에 대여섯 개 이상의 독립된 루트와 변형루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충남산악연맹의 박혁상 대원이 등정에 처음으로 성공했습니다.
12. 브로드 피크 (Broad peak )
높 이 : 8,047 위 치 : 파키스탄 그레이트 카라코람 발토르 산맥의 브로드 피크 산군
팔첸 캉리로도 불리우는 브로드 피크는 1892년 콘웨이가 이끄는 영국탐험대의 정찰 때지금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1957년 슈무크의 지휘 아래 헤르만 불, 슈무크, 디엠 베르거, 빈터슈텔러 4인조가 최초로 정상에 올랐는데 이들은 고소포터와 산소기구를 사용하지 않은채 장비를 3개의고소캠프에 운반하기 위해 6,950미터 높이를 여러번 오르내렸습니다.
브로드피크는 우리나라 산악인이 가장 늦게 오른 봉우리로 1995년에 스페인 바스크 원정대와 합동으로 등반한 엄홍길과 전남 광주의 빛고을 원정대가 몇시간 차이로 정상에 섰습니다.
13. 가셔브룸 2 (Gasherbrum 2)
높 이 : 8,035m 위 치 : 파키스탄·중국 국경, 카라코람 발토르 산맥의 가셔브룸 산군
가셔브룸 2봉은 가장 쉬운 8,000미터 봉으로 꼽힙니다. 1956년에 1934년의 정찰을 토대로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모라벡의 지휘 아래 남서릉을 경유하여 가셔브룸 2봉의 초등에 성공했습니다.
가셔브룸 2봉에는 5개의 독립된 루트가 있는데 모두 가셔브룸 계곡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1년 여름에 성균관 대학교 산악회와 울산 합동대에 의해 초등되었습니다.
14. 시샤팡마 (Sisha pangma)
높 이 : 8,027m 위 치 : 중국 티베트 자치구 남서부 시샤팡마 산군
시샤팡마란 티벳어로 '일기변화가 극심한 산'을 의미합니다. 8,000m 이상의 고봉 중 유일하게 중국측에 속해 있어서 가장 늦게 등정이 이뤄졌습니다. 중국원정대는 대륙이 공산화된 후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1961년, 1962년, 1963년 3회의 정찰 끝에 1964년 등정을 시도해 현재의 주접근로인 북면 야북캉가길라 빙하를 넘어 정상정복에 성공했습니다.
시샤팡마 등반때 가장 어려운 점은 극심한 기상변동에 따른 강풍인데, 10월부터 시작되는 티벳고원의 폭풍은 평야지대 위에 우뚝 선 시샤팡마로 곧장 불어와 바람을 피할곳조차 없는 등반가들에게 큰 고통을 줍니다.
등정의 또 다른 난관은 7,700m 부근에서 2회에 걸쳐 나타나는 경사 50도의 설벽입니다. 이 벽을 넘어서면 20도 정도의 완만한 경사를 지나 순탄하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15. 갸충캉(Gyachung Kang)산.
높이 7952m. 8000m에서 8m가 모자라는 산입니다.
14좌와는 별개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15곳을 지목할때 마지막에 오르는 산입니다.
에베레스트 북서 21.5km, 국경선상에 있고, 티벳 쪽에는 갸충 빙하, 네팔 쪽에는 고줌바 빙하가 흐릅니다.
산 이름은 「작은 범위의 빙하(설산)」이란 뜻입니다.
※ 8000미터 봉우리 14좌를 모두 오른 사람
순서 | 이름 | 년도 | 국적 |
1 | 라인홀트 메스너 | 1970-1986 | 이탈리아 |
2 | 예지 쿠쿠츠카 | 1979-1987 | 폴란드 |
3 | 에라르 로레탕 | 1982-1995 | 스위스 |
4 | 카를로스 카르솔리오 | 1985-1996 | 멕시코 |
5 | 크리스토프 비엘리키 | 1980-1996 | 폴란드 |
6 | 훠니또 오이야르자발 | 1985-1999 | 스페인 |
7 | 세르지오 마르티니 | 1976-2000 | 이탈리아 |
8 | 엄홍길 | 1988-2000 | 대한민국 |
9 | 박영석 | 1993-2001 | 대한민국 |
10 | 알베르토 이누라테기 | 1991-2002 | 스페인 |
11 | 한왕용 | 1994-2003 | 대한민국 |
12 | 에드 비에스터 | 1989-2005 | 미국 |
13 | 앨런 힝크스 | 1987-2005 | 영국 |
14 | 실비오 몬디넬리 | 1993-2007 | 이탈리아 |
○14좌 이미지
○한국 영화로 보는 히말라야
1. 8천 미터 14좌
▲이미지=영화<히말라야> ⓒCJ 엔터테인먼트
히말라야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뜻하는 ‘히마’와 집을 뜻하는 ‘알라야’가 합쳐진 말로, ‘눈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에서 비롯되어 히말라야 산맥을 ‘세상의 지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산맥에는 해발 고도 8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열네 곳이 있는데, 이들을 ‘14좌’라고 한다.
가장 높은 8,848m 짜리 봉우리는 ‘에베레스트’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진 ‘초모랑마’이다. 초모랑마는 티베트어로 ‘세상의 어머니 신’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높은(8,611m) 봉우리는 카람 코란 산맥의 제2봉이라는 이름의 K2이다. 칸첸중가(8,586m)는 ‘눈으로 덮인 다섯 개의 보물’, 로체(8,516m)는 초모랑마의 ‘남쪽’ 산이라는 뜻이다. 그 밖에도 마칼루(8,463m), 초오유(8,201m), 다울라기리(8,167m), 마나슬루(8,163m), 낭가파르바트(8,125m), 안나푸르나(8,091m), 가셔 브룸 1봉(8,068m)과 2봉(8,035m), 브로드피크(8,047m), 시샤팡마(8,027m) 등이 14좌에 포함된다.
여기에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382)까지 포함하여 16좌라고 하는데, 이들은 각각 칸첸중가와 로체의 위성봉으로, 주봉과의 높이 차이가 작아 독립된 봉우리로 보지 않는다. <히말라야>의 주인공인 엄홍길 대장은 지난 2001년,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 8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2004년 얄룽캉에 성공적으로 오른 뒤, 2007년에는 네 번째 도전 만에 로체샤르 등정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로 16좌 완등에 성공한 산악인이 되었다. 그 밖에도 에베레스트 남봉, 칸첸중가 남봉, 칸첸중가 중봉, 로체 중봉, 안나푸르나 중봉, 안나푸르나 동봉, 브로드피크 중봉, 시샤팡마 중봉 등이 8천 미터가 넘는 위성봉들이다.
2. 세상의 어머니
초모랑마는 히말라야의 최고봉, 아시아의 최고봉이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초모랑마는 티베트어이고, 네팔 어로는 시가르마타(하늘의 이마)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초모랑마라는 이름을 한자로 써서 주무랑마봉(珠穆朗瑪峰)이라고 한다. 에베레스트는 근대식 측량법으로 초모랑마의 높이를 측량했던 영국인 측량사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중국 정부가 2005년에 발표한 초모랑마의 높이 측량 값은 8.844.43m인데, 이는 바위의 최고점까지의 높이이고, 그 위에 덮인 얼음과 눈은 계산하지 않은 값이다. 1998년 미국 탐사대가 산꼭대기에 설치한 GPS 장비에 따르면 2008년 기준 8,850m. 해수면 기준의 높이가 아니라 산의 전체 높이를 따지면 바닥이 해수면 아래에 있는 하와이 마우나케아 산(해발 4,206m)이 10,203m로 더 높고, 지구 중심부터 따지면 지구에서 가장 불룩한 지점인 적도 인근 안데스 산맥의 침보라소 산(해발 6,268m)이 더 높다. 이 높이는 대륙붕의 이동으로 인해 1년에 5cm씩 더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3. 초모랑마 관련 기록1924년 영국의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은 인류 최초로 초모랑마 정상 등정에 도전했다. 그들은 정상을 200여 미터 남긴 곳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으나 결국 사망했다. 이들이 등정에 성공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지금까지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초모랑마 등정에 최초로 성공한 사람은 1953년 5월 29일 영국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찍은 사진의 주인공은 힐러리가 아닌 텐징이었다. 텐징이 카메라를 다뤄본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1977년 9월 5일 고상돈이 최초로 등정에 성공했다. 이때 베이스캠프와의 무전을 통해 남긴 말은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였다. 이로써 한국은 여덟 번째 초모랑마 등정국이 되었다.
세계 최고봉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히말라야의 14좌 중에서는 등정 난도가 높은 편이 아니어서 찾는 사람이 많다. 장비가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90년대 이전에는 10명이 도전하면 그중 4명 정도가 사망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1990년 이후로는 기상 예측 기술과 등반 장비가 발전하고, 철저한 준비를 하고 오는 상업 등반대가 늘어나 등반 중 사망률이 7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다. 통계에 따르면 2014년 2월까지 4,042명이 6,871회 초모랑마 정상을 밟았다고 한다.
4. 박무택과 백준호
2004년 5월.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 에베레스트 등반대가 초모랑마 등정에 나섰다. 등반대장 박무택과 후배 장민은 5월 18일에 초모랑마 정상을 밟고 하산하던 중 겨우 100m 정도를 내려오다가 조난했다. 박무택은 설맹으로 길을 찾을 수가 없었고, 장민은 그를 부축하다가 탈진하고 말았다. 박무택은 장민을 먼저 내려보내고 자신은 비박을 하기로 했다. 날이 저물고 날씨도 나쁜 8,750미터 고도에서 비박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저녁 7시. 이 등반대의 부대장이자 박무택과 절친한 선배인 백준호는 캠프 5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구조에 나섰다. 함께 출발한 셰르파 두 명은 날이 저물고 날씨도 나빠지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10시경 다시 캠프로 하산했다. 백준호는 포기하지 않고 올라가 결국 다음날(19일) 오후 3시에 박무택을 찾았다고 무선을 보냈다. 백준호가 베이스캠프와 무전으로 주고받은 마지막 말은 이랬다. “무택이가 밤새 무산소에 노출돼 손과 코에 동상이 심합니다. 나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구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백준호에게서도 소식이 끊겼다. 20일 낮, 초모랑마를 단독 등반하던 오은선이 8750m 지점에 숨져있는 박무택의 시신을 발견했다. 실종됐던 백준호와 장민은 중국인 등반대에 의해 8,450m 지점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등반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심산은 동료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밤새 혼자서 눈보라를 뚫고 올라간 백준호에 대해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등반가라고 평가했다.
5. 휴먼원정대-1엄홍길 대장은 16좌 중 열다섯 번째 봉우리에 도전했던 얄룽캉 등정에 막 성공한 직후에 박무택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그와 박무택은 함께 칸첸중가, K2, 시샤팡마, 초모랑마를 함께 등장한 사이였다.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의 시신을 가족의 품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신 수습을 위한 등반대를 꾸리기 시작했다. 정상에 도전하지 않는 초모랑마 등반, 게다가 얼어붙은 시신을 수습해서 하산해야 하는 위험한 미션으로 사람들을 모으기는 쉽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엄홍길의 진심은 여러 산악인에게 전해졌고, 많은 이들이 관심과 격려의 뜻을 보내왔다. 세계 등반 역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8천 미터 이상 고지에서의 시신 수습을 위한 원정이었다. 언론사의 다큐멘터리 팀까지 꾸려지며 대규모 원정대가 조직될 수 있었다. 상업적 의도나 개인적 성취욕 없이 ‘인도주의적’ 목적으로 떠나는 원정대라는 의미로 ‘휴먼 원정대’라고 이름 붙인 이 원정대는 2005년 3월 히말라야로 떠났다.
6. 휴먼원정대-2이들은 4월 초에 초모랑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지만, 시신 수습에 적합한 날씨를 기다리느라 일정이 계속 늦춰졌다. 8,300m 지점의 임시캠프까지 갔다가 포기하고 내려오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모두 지쳐갔다. 드디어 5월 29일, 5시간의 행군 끝에 박무택의 시신을 만날 수 있었다. 3시간 30분이나 걸려 얼음에서 떼어낸 박무택의 시신은 무거웠다. 엄홍길은 200kg도 넘었을 것으로 회상한다. 이 시신을 데리고 100m를 하산하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눈 폭풍에 앞을 분간하기도 힘들고, 예정보다 훨씬 길어진 원정과 악천후로 대원들의 체력에도 문제가 많았다. 게다가 다음 코스는 50m 높이의 절벽 구간인 ‘세컨드 스텝’이었다. 계획은 시신을 베이스캠프까지 운반해 화장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강행하면 원정대의 목숨도 보장 못 할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은 아쉽게도 절벽 위에 돌무덤을 만들어 박무택을 매장해주고 내려왔다. 이날(2005년 5월 29일), 제주도에서는 한국인 최초 초모랑마 등정에 성공한 고(故) 고상돈씨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또 이날은 텐징 노르게이와 에드먼드 힐러리가 인류 최초로 초모랑마 정상에 오른 지 5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인류와 초모랑마의 인연에 큰 의미가 있는 이 날 박무택은, 엄홍길 대장의 표현에 따르면, “영원한 8천 미터”가 되었다.
7. 산의 허락박무택은 초모랑마 정상에서 하산하던 도중 설맹(雪盲)으로 시력을 잃었다. 설맹(雪盲, snow blindness)은 설안염이라고도 하는데, 눈이나 빙판에 반사된 태양광을 장시간 보았을 때 망막이 손상되어 일어나는 시력 장애를 말한다. 보통 흙이나 아스팔트 등은 자외선의 90%를 흡수하고 10% 정도만 반사한다. 그런데 눈과 빙판은 무려 80%를 반사한다. 이는 여름철 자외선보다도 네 배나 높은 수치다. 게다가, 고도가 1,000m 상승할 때마다 자외선에 대한 노출 위험도는 16%씩 증가한다. 박무택이 왜 고글을 쓰고 있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8,850m 고도의 만년설 위에서 닥친 설맹은 결국 사망 사고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산소 결핍에 의한 고산증은 2,400m 이상만 되도 발생할 수 있는데, 8천 미터 이상에서의 산소 농도는 해수면 고도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8천 미터 고산 등반에 최적인 시기는 겨울이 끝나고 우기가 오기 전인 봄이다. 이 기간에 산 정상 부근의 기온은 섭씨 마이너스 40도, 텐트 안의 기온도 마이너스 25도라고 한다. 고산 등반은 그야말로 ‘극한’의 자연과 맞서는 것이다.
엄홍길은 16좌 완등을 하기까지 22년간 열여덟 번의 실패를 겪었고,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산을 정복한다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산이 인간에게 잠시 정상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하며, 산에 대한 경외감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품고 산다. 프랑스의 산악인이자 작가인 가스통 데뷔파는 이런 말을 했다. “히말라야는 신비의 왕국이다. 이곳에 들어가는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다.”
○이미지
안나푸르나 1봉
▼히말라야 산맥 - 아시아 인도 대륙과 티베트 고원사이에 있으며 에베레스트를 비롯 14개의 8천미터 고봉이 모두 이곳에 있다
▲카루만두 폭포
▲페와 호수
▲해발5300미터의 에베레스트산 부근의 호수에서 수영
○좀솜~체레마을~로만탕~야라마을 사진여행
▲삼중마을(4,000m)전경.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좀솜(2,720m)은 안나푸르나 라운드의 주요 거점 도시로 무스탕, 돌포, 다울라기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좀솜에서 카그베니를 거쳐 무스탕과 무티나트까지 차량이 다니고, 베시샤하르에서 마낭까지도 도로가 뚫려 있다. 요컨대 안나푸르나 라운드에서 토룽라(5,416m)을 제외하고는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모두 비포장길이다. 돌포 지역은 여전히 도보로만 여행이 가능하다.
네팔의 산간 마을 사람들은 신심이 두텁다. 순박하고 친절하며, 특히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이방인에 대해서도 적대감이나 경계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무스탕 가미마을(3,520m)위쪽에 있는 달라이 라마 저항군캠프지의 퇴락한 모습.
▲무스탕 가미마을 달라이라마 저항군캠프지 위쪽에 있는 초르덴.
▲삼중마을에 있는 죽은 고목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
▲로만탕(3,810m)에서 마니차를 돌리고 있는 현지 노인.
▲삼중마을 입구에 마니스톤이 많이 있다
▲로만탕에서 한가히 햇빛을 즐기고 있는 현지 노인.
▲삼중마을 입구에 있는 오래된 초르텐과 기묘한 풍경
▲삼중마을 가는길에 고개를 숙이는 스태프들.
▲남도마을(4,160m) 위쪽에는 큰 초르텐이 여러개 있다.
▲삼중마을 가는 길가에 있는 무너진 큰 초르텐.
▲로만탕을 향해 가파른 고개를 오르는 말과 스태프들.
▲옷감을 짜고 있는 삼중마을 여인
○네팔 오지 - 카그베니마을 월간산 5월호
○카트만두
▲쓰레기장에서 일하는 소년 13. 6. 27.
▲대중교통 풍경
○파탄더르바
○종교
▲이슬람
▲힌두교 - 살아있는 신 쿠마리 = 힌두교와 불교신자들로 부터 살아있는 여신으로 추앙받는 쿠마리는 일년에 약12번만 종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신전 밖으로 나온다
▲파슈파티나스 힌두교 사원
▲불교
▲부다나스 불교사원의 거대한 스투파
▲스와암부 불교사원의 스투파
○일상
▲네팔에서 만난 뱃사공
농촌
▲물지게 진 남자
▲바그마티 강가에서 리시 판차미 축제에 참가한 여성들
▲화장장
▲바그타미 강변 화장장
▲릭샤 12.9.10
○2015년 04월 27일 통곡의 땅이 된 神들의 땅
▲ 오열 네팔 카트만두 두바흐 광장에서 25일 먼지를 뒤집어쓴 여성이 남성에게 안겨 흐느껴 울고 있다. 이날 규모 7.8의 강진이 강타한 데 이어 26일 수십 차례의 여진이 이어지면서 카트만두 시민 수십만 명이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 폐허 네팔 강진으로 수도 카트만두를 대표하는 건축물 빔센(다라하라)타워가 26일 완전히 무너져 있다. 1832년 건립된 이 건축물은 1934년 대지진으로 한 차례 무너져 재건됐다가 이번에 다시 붕괴됐다. AP연합뉴스
▲ 두 동강 26일 네팔 카트만두 인근 박타푸르 지역에서 주민들이 강진으로 갈라진 도로 위를 걷고 있다. UPI연합뉴스
에베레스트 등반객도 수백명 고립…희생자 5000명 달할 수도
지금까지 한국인 인명피해 없는 것으로 파악…국제사회 구호 이어져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사망자가 2천500명을 넘어서는 등 인명 피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네팔 재해대책본부는 26일 오후 6시(현지시간) 현재 사망자가 2천430명, 부상자는 6천 명 이상이라고 밝혔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다.
지진이 인구 밀집지역을 강타하면서 수도 카트만두에서만 적어도 721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AP 통신은 전했다.
외신에 따르면 지금까지 네팔에 인접한 인도에서 67명, 중국 티베트 자치구에서는 18명, 방글라데시에서도 3명이 숨졌다.
전날 발생한 규모 7.8의 이 지진으로 낡은 건물들이 무너지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는 바람에 네팔에서만 660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유엔은 추산했다.
네팔 당국은 열악한 현지 사정으로 곡괭이와 맨손으로 잔해를 치워가며 이틀째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사상자와 실종자가 건물 잔해 속에 갇혀 있어 구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날 규모 6.7의 강력한 여진이 카트만두 동북쪽에서 발생하는 등 이틀째 규모 4.0~6.7의 여진이 수십 차례 이어지고 있어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미렌드라 리잘 네팔 정보장관은 강진에 따른 사망자가 4천500명에 달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놨으며, 국방부는 5천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진앙에 가까운 북서쪽 지방과 시골 마을은 도로와 통신망이 붕괴해 구조대원의 진입이 여의치 않은 데다 피해 규모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인 사망자는 아직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부상자는 카트만두 북쪽 70㎞에 있는 어퍼 트리슐리 지역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건설업체 직원 1명과 카트만두 북쪽 샤브로베시를 여행 중이던 50대 부부 등 모두 3명으로 집계됐다. 여행객 남편은 중상을 입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또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인근에서 지진에 의해 발생한 눈사태로 다쳤다가 구조된 사람 중 한국인이 1명 포함돼 있다고 AP통신이 보도했으나, 사실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주네팔 한국대사관과 외교 당국은 네팔에 체류 중인 우리 국민이 650여명이고, 다수 여행객이 있는 만큼 피해 여부를 계속 확인하고 있다.
이번 지진은 5월 히말라야 등반 시즌을 코앞에 두고 발생해 관광객 피해도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에베레스트에서 지진 여파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해 적어도 19명이 숨지고, 61명이 다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지난해 4월 에베레스트 눈사태로 네팔인 가이드(셰르파) 16명이 사망한 것을 뛰어넘은 역대 최악의 참사다.
dpa는 에베레스트 등반 관계자를 인용해 사망자 중에는 호주인과 미국인, 중국인이 한 명씩 포함됐다고 전했다.
지진 당시 에베레스트 주변 3개 캠프에는 등반객과 셰르파가 1천 명이 있었으며, 수백 명이 여전히 산에 갇혀 있다.
부상으로 하산한 셰르파 젤루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사망자가 늘어날 것”이라며 “(산사태로) 천막이 다 날아가 버렸다”고 전했다.
산타 비르 라마 네팔등산협회 부회장은 해발 6천400m의 베이스캠프에 있던 100~150명이 연락이 끊긴 상태라며 대부분이 눈 밑에 파묻혔을 가능성이 크다고 걱정했다.
네팔 관광청은 베이스캠프에 있던 52명을 구조했으며, 이중 35명을 카트만두로 공수했다고 발표했다. 카트만두로 옮겨진 이들 중 위독 환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광청의 툴시 가우탐은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도보로 산에서 내려가고 있으며 나머지는 항공기로 대피시키는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 네팔에는 히말라야를 오르거나 트레킹을 하려던 외국인 관광객이 3만여 명이 방문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대한산악연맹에 따르면 한국인 전문 산악인들의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일반 여행객의 피해 현황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여진으로 추가 산사태가 발생하는 등 피해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네팔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헬리콥터로도 수색에 나섰다.
피해의 심각성을 인식한 주변국들의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 100만 달러(약 10억여원) 규모의 긴급 지원을 제공키로 했고, 미국은 초기 구호자금으로 역시 100만 달러를 보내기로 했다.
이웃 국가인 인도는 재난구호대원 285명과 의약품과 식량, 텐트 등 구호물자 43t을 실은 군용기 13대를 급파했고, 유엔 역시 구호팀과 비상식량 등을 이날 오전 네팔로 실어 보냈다.
중국은 구조대 62명을 신속하게 카트만두에 보냈으며 파키스탄도 4대의 수송기를 통해 30병상의 야전병원을 군의관, 외과의사, 전문의와 함께 네팔로 파견하기로 했다.
파키스탄은 또 지하투시레이더와 콘크리트 절단기, 탐지견으로 장비한 구조대를 보냈고 2천명분의 즉석식량과 식수, 텐트 200개, 담요 500장 등 생필품을 공수 중이다.
유럽연합(EU)과 독일, 스페인, 프랑스, 러시아, 이스라엘, 일본 등의 세계 각국도 지원을 약속했다.
적십자, 옥스팜, 국경 없는 의사회, 크리스천 에이드 등 국제 자선단체 또한 네팔로 대원들을 급파하고 있다.
그러나 가옥 붕괴와 여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재민 다수가 노숙을 하고, 병상이 모자라 병원 주차장에 천막을 치고 야외에서 부상자 치료를 하는 가운데 비가 계속 내릴 것으로 예보돼 구호작업에 차질을 빚을 것으로 우려된다.
국제 사회의 애도 표명도 잇따르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번 지진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대체 불가능한 문화 유적의 손상이 있었다”며 깊은 유감을 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황청 국무원장인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의 이름으로 네팔 가톨릭에 보낸 전보를 통해 강력한 지진으로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규모 7.8에 달하는 이번 지진은 작년 4월 칠레 북부 해안 인근 태평양에서 발생한 지진(규모 8.2) 이후 가장 강력하다.
특히 네팔에서는 1934년 대지진 이후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다.
네팔에서는 지난 1934년 카트만두 동부를 강타한 규모 8.0 이상 최악의 강진으로 1만700명의 사망자가 났으며 1988년에도 동부 지역에서 규모 6.5의 지진이 발생해 720명이 숨졌다.
<연합뉴스>
▲지진 - 15.4.25 카트만두 7.8 규모 강진 발생, 현재 사망 2336명 부상자 4674명 발생
○네팔 홍수로 40 여명 사망 2017.08.13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