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2/ 가이아나 협동공화국 - 과테말라 - 그루아지아 - 그리스
지구촌 여행/ 국가별2/
■ 가이아나 협동공화국 Guyana
남아메리카 북동부에 있는 공화국으로 수도는 조지타운이다. 북쪽은 대서양, 동쪽은 수리남과 각각 면해 있고, 남쪽 및 남서쪽은 브라질, 서쪽은 베네수엘라와 각각 경계를 이룬다. 열대성기후이며 내륙지방에 다양한 천연야생동물들이 많이 서식한다. 광물자원인 보크사이트가 새계에서 손꼽힐 만큼 다량 매장되어 있으나 수출보다 수입의 비중이 커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14세까지의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되며 언론매체는 정부가 통제한다
▲가이아나(Guyana) 국기
자연환경
대서양 연안을 따라 내륙쪽으로 16km에 이르는 좁은 평야가 뻗어 있다. 이 평야에는 제방시설과 배수로를 갖춘 간척지가 많이 있다. 연안에서 약 64km 떨어진 내륙에는 국토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열대밀림이 있다.
연안평야의 남쪽에는 활엽수림이 빽빽이 들어선 흰 모래토양의 구릉(잰더리라고 부름)이 밀림지역 안에 있다. 밀림지역의 서부에 있는 파카라이마 산맥은 서쪽으로 오리노코 강 유역을 가이아나와 가른다. 마자루니 강과 에세퀴보 강의 상류가 이 산맥에서 시작한다. 국토의 남단에 있는 루푸누니 대초원을 비롯한 열대 대초원이 국토의 약 1/10을 차지한다. 코런타인·버비스·에세퀴보·데메라라 등 가이아나의 주요강은 모두 남쪽에서 흘러들어와 대서양으로 빠져나간다. 이 강들의 남쪽 고지대에는 여러 개의 급류와 폭포가 있다.
연평균기온은 26.6°C이다. 연안지역에서는 두 차례의 우기에 걸쳐 비가 내리고 남서부에서는 한 차례의 우기 동안 비가 내린다. 연평균강우량은 연안지역이 2,290㎜이고 내륙지방은 1,780㎜에 달한다. 개미핥기·카피바라·맥·왕수달·나무늘보·재규어·북아메리카산(産) 해우 등 다양한 천연야생동물들이 많이 서식한다.
가이아나의 최대 광물자원인 보크사이트는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대량 매장되어 있다. 그밖의 주요 광물자원으로 망간·다이아몬드·금·구리·철광석·몰리브덴·니켈 등이 있다.
▲카이에테우르(Kaieteur) 폭포 , 에세쿠이보에 위치
정치와 사회
1980년에 제정된 헌법에 의거하면 가이아나는 대통령을 국가 수반으로 한다. 단원제인 국회는 성인의 보통선거로 선출된 53명, 지방의회에서 뽑힌 10명, 지역민주기구 전국회의에서 뽑힌 2명으로 구성된다. 내각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총리는 국회에서 선출한다. 주요정당으로는 여당인 인민민족회의파(PNC)를 비롯하여 인민진보당(PPP), 연합세력파, 노동자동맹당(1970 설립) 등이 있다.
가이아나의 보건상태는 좋은 편이었으나 1966년 독립이후 악화되었다.
가장 널리 유행하는 질병으로는 말라리아·각기·감기·홍역 등이 있다. 평균수명은 남자가 67세, 여자가 71세이며 유아사망률은 매우 높은 편이다.
교육은 6∼14세의 어린이들에게 무상 의무교육으로 실시되며 학령기의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에 다닌다. 조지타운에는 1963년에 세워진 가이아나대학교가 있다. 언론매체는 전적으로 정부가 통제한다.
▲성 조지 성당(St George's cathedral) 조지타운에 위치
문화
해안가에는 화려한 색상의 옷과 음악 및 춤을 특색으로 하는 흑인·동인도인·크리올 문화가 발달해왔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종교 축제도 열리는데 유명한 예비 사순절 카니발에는 다채로운 색상의 화려하고 복잡한 의상을 입고 노래와 춤을 즐긴다. 인디언 문화도 두드러진다.
흑인과 동인도인 공동체 사이에 팽배한 긴장은 동인도인이 주축인 PPP와 크리올과 흑인이 주축인 PNC 사이의 적대감에 잘 나타난다. 20세기 후반부터 흑인·동인도인·물라토인의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가이아나의 조지아타운
역사
아메리카 인디언은 유럽인이 정착하기 전에 가이아나에 살았지만 이들 원주민에 대해서는 가이아나라는 현재 국명이 유래한 기아나('물의 나라')라는 원주민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17세기초까지는 네덜란드 식민지가 세력을 떨쳤으나 나폴레옹 전쟁 동안 영국이 이곳을 점령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한 후 영국은 데메라라·버비스·에세퀴보를 구입했다.
노예무역은 1807년에 폐지되었으나 당시 가이아나에는 이미 약 10만 명에 달하는 노예가 있었다. 노예해방은 1838년에야 이루어졌다. 1831년에 3군데 식민지는 영국령 기아나로 통합되었다(→ 대영제국).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해방된 노예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를 거부하여 동인도인과 중국인을 연기(年期)계약고용의 노동자로 수입해 오기 시작했다. 1917년까지 약 24만 명의 동인도인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영국령 기아나는 1928년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고 1953년에 내각자치제,성인의 보통참정권, 민선 입법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이 채택되었다. 정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동인도인이 주축을 이루는 인민진보당(PPP)과 흑인이 주축이 된 인민민족의회파(PNC)로 발전했다. PNC는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1966년 가이아나라는 이름으로 독립하는 데 앞장섰다.
1970년 가이아나는 영연방공화국이 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레이먼드 아서 청이 뽑혔고 총리로 포브스 버넘이 선출되었다.
1970년대에 걸쳐 가이아나의 정치와 행정은 버넘과 PNC가 지배했다. 버넘 정부에 대한 주요저항운동은 체디 제이건이 지도하는 PPP가 이끌었다. PNC의 일당독재가 격화되고 PPP가 이에 맞서 3년 동안 의회의 등원을 거부하자 버남은 1980년 새 헌법을 공포했다. 이어서 선거를 실시했으나 대부분 정당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PNC가 승리했지만 국제감시단들로부터 확증을 얻은 제이건 등의 반대파들은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 버넘을 고발했다.
버넘은 1985년에 사망했고 휴 데스먼드 호이테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1980년대말 호이테는 1980년대 동안 크게 악화된 경제를 살릴 방책으로 대규모 외국인투자 허용책을 실시했다.
▲포브스 버넘(Forbes Burnham), 가이아나 전 총리이자 대통령
국민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동인도인이고 그밖의 주요 인종으로 흑인인 아프리카계 가이아나인이 있다. 물라토·크리올이 주요 소수민족이며 보다 작은 그룹으로 인디언·중국인·포르투갈인·레바논인 등이 있다.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크리올어 방언도 통용된다. 몇몇 소수 공동체에서는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쓰기도 한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교도이며 1/3이 힌두교도, 1/10가량이 이슬람교도이다. 인구의 대부분이 대서양 연안과 조지타운 주변에 집중되어 있으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다음 백과사전
★ 볼거리
폭포 = 남아메리카 북부 - 카이레테우르 폭포 226미
■ 과테말라
아티틀란 호수와 카페로코
이운호 駐과테말라 대사
멕시코 바로 아래에 위치한 중미 과테말라에는 3000m급 화산들로 둘러싸인, 바다처럼 넓은 아티틀란(Atitlan) 호수가 있다. 과테말라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자랑하는 아티틀란 호수는 마야문명 유적인 티칼(Tikal), 스페인 총독청이 있었던 중세풍 도시 안티과(Antigua)와 함께 과테말라를 대표하는 관광명소이다. 혁명가 체 게바라가 이 호수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혁명을 잊고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1960년대 이후 아티틀란 호수 주변에는 현대 물질문명에 반기를 든 히피족들이 몰려들어 한때 3000명이 넘는 히피의 천국이 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현재에도 호수 주변 일부 마을에서 많은 수의 히피가 느긋한 삶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아티틀란 호수는 아직까지 한국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고 이곳을 찾는 우리 국민은 멕시코 및 중미지역에 거주하는 교포들이나 모험적인 개인 여행자들 정도이다. 관광을 위해 과테말라를 찾는 우리 국민이 많지 않은 데다, 과테말라시티에서도 3시간이나 떨어진 오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주민의 90% 이상이 마야 인디언이고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옷차림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오지 아티틀란 호수 주변 파나하첼(Panajachel)이라는 도시에 한국 청년들이 운영하는 카페로코(Cafe Loco)라는 커피숍이 있다. 커피를 좇아 이곳까지 온 바리스타 청년과 어학연수차 과테말라에 왔던 청년이 의기투합해 2013년에 창업한 카페로코는 세계적인 여행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Trip Advisor)에서 우수매장 인증을 받고, 구글 리뷰 5/5점, 페이스북 리뷰 4.9/5점을 받아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티틀란 호수의 명소이다.
지난해 3월 말쯤 이 호수를 찾았다가 우연히 카페로코를 발견한 필자는 왼쪽 어깨에 선명한 태극마크를 달고 신나게 일하고 있는 우리 청년들이 너무나 반갑고 대견스러웠다. 다섯 젊은이의 맏형인 김진영 씨는 왜 이 오지까지 와서 커피숍을 차렸느냐는 질문에 이 땅의 주인인 현지인들도 부담 없는 가격에 수준 높은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면서, 현지인들과의 격의 없는 소통을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이 커피숍은 아티틀란 호수를 찾는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유명하지만 전체 고객의 80% 정도가 현지인들일 정도로 철저히 현지화되어 있다. 또한, 과테말라의 4대 커피 생산지 가운데 하나인 이 호수 주변 농장에서 갓 수확한 신선한 커피를 선별해 전문 바리스타의 솜씨로 직접 로스팅하고 추출하여 판매하니 이곳 커피의 맛과 향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지금 국내에서는 질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많은 청년이 계약직이나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하고 있다. 또 너무 많은 젊은이가 안정성만을 추구하며 공무원시험이나 각종 전문자격 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경쟁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꿈을 좇아 지구 반대편 낯선 곳에서 과감한 도전을 하고 있는 이들 청년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해외 취업이나 창업이 힘든 도전이고 국내에서의 성공보다 훨씬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청년들의 넘치는 열정과 창의력, 우리 민족의 타고난 근면함이라면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별다른 준비 없이 소문이나 지인의 소개, 막연한 기대로 시도하는 무모한 해외 도전은 금물이다. 현지 사정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준비가 필요하고, 카페로코의 친구들처럼 과감한 현지화 전략도 필요하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이민정책이 강화되고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점점 좁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세계는 넓고 우리 청년들을 기다리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조금 더 힘든 곳도 마다하지 않고 현지인들과 기꺼이 어울리겠다는 용기만 있다면. 몇 해 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었다. 필자는 청년들에게 ‘꿈이 있고 도전하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운호(55) △제28회 행정고시 △산업자원부 정보화담당관 △주영국대사관 산업자원관 △산업자원부 지역산업팀장 △무역위원회 무역구제정책팀장 △우정사업본부 예금위험관리팀장 △국가경쟁력강화위 산업경쟁력국장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정책관 △무역위원회 상임위원 △주과테말라 대사
□ 2018.06.03 과테말라 델푸에고 화산 폭발로 인근 마을 재에 뒤덮여
□ 과테말라 화산 실종자 332명,사망자는 113명 - 2018.07.04
▼과테말라 = 부챗살 빛
■ 그루아지아
▲그루아지아에 레이건 동상이
▲10만 순교자의 날 - 12.11.13.
■ 그리스
2015.07.06 '선진국 중 첫 국가부도' 그리스가 망한 다섯가지 이유
그리스의 몰락 과정에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원인이 중첩적으로 작용했다. 뿌리 깊은 고질병이 워낙 복잡하게 얽힌 탓에 누구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자신 있게 제시하지 못할 정도다. 이 때문에 설령 그리스가 채권단과 극적 합의를 이뤄 3차 구제금융을 받고 유로존에 잔류하더라도 그리스 위기는 언제든 재발(再發)할 수 있다는 전망이 많다. 반대로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해 독자 생존을 모색하더라도 바닥으로 추락한 국가 경쟁력을 회복할 길은 난망하다. 그리스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①올리브 수출해 올리브 가공품 수입… 기형적 산업구조 '그리스의 비극'
제조업 5.7% vs 서비스업 90%
많은 그리스인은 "유로존이 그리스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원망하지만, 사실 2000년대 초·중반 그리스인들은 유로존의 우산 아래서 좋은 시절을 보냈다.
유로존 가입을 전후해 다른 유로 국가에서 투자가 밀려들면서 그리스의 자금 조달 비용은 급격히 낮아졌다. 이런 값싼 자금 덕분에 그리스 경제는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유로존 평균을 웃도는 연평균 4%의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 그리스 앞날 어찌될까요 - 채권단의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여 연금 대폭 삭감 등을 감수할 것인가, 극심한 경제적 혼란이 뒤따르겠지만 채권단의 요구를 거부할 것인가를 두고 그리스에서 5일(현지 시각)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3일 수도 아테네에서“반대(Oxi)표를 던지자”고 주장하는 시민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AP 뉴시스
하지만 이 시기 그리스인들은 산업과 경제의 구조 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기보다는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렸다. 이 때문에 경제는 성장하지만 고용은 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이 이어졌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는 경제에서 공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GDP의 50%로, 매우 높다. 또 산업구조를 보면 제조업 비중이 5.7%로 매우 낮고, 관광·해운업으로 대표되는 서비스업 비중이 90%로 지나치게 높다. 그 결과 임금 근로자보다 자영업자 비중이 큰 경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나마 존재하는 제조업은 담배 제조, 식료품 가공 등에 불과해 자동차, 가전제품, 대부분의 소비재 등은 외국에서 수입해 쓴다. 그 결과 수출보다 수입이 훨씬 많은 무역수지 적자 구조다.
2000년대 호황은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을 황금기였지만, 개혁이 미진한 바람에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고 말았다.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 경쟁력 순위에서 그리스는 2001년 36위에서 2014년에는 81위로 떨어졌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장관은 "그리스는 세계 최고 해운업 국가인데도 정작 조선업은 없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올리브 생산국이면서도 그걸 가공할 인프라가 없어 올리브 열매를 수출해서 가공 올리브를 수입하는 기형적인 구조"라며 "결국은 제조업이 자본주의의 꽃인데 이걸 너무 소홀히 하다 보니 나라 경제가 정상으로 굴러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②유로존 초기 통화절상에 '부자' 착시… 쌍둥이 적자도 심화
유로 단일통화 '양날의 칼'
유로존 가입 초기에 통화 가치가 자연스럽게 절상되면서 자산 가격과 소득이 올라가는 착시 효과가 발생했다. 그리스인들은 이 효과를 만끽하면서 부자가 됐다는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유로존 다른 나라와 경쟁력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단일 통화의 부작용이 점차 드러났다. 그리스의 GDP 대비 경상수지 적자는 2000년 3.6%에서 2008년 14.9%로 확대됐다. 보통 국가라면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할 때 자국 통화 가치가 하락해 적자가 자연스럽게 감소하지만, 단일 통화에 묶인 그리스는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리스 정부는 싼값에 국채를 발행해 경상수지 적자와 정부 지출을 충당했고, 그 결과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라는 '쌍둥이 적자'가 심화됐다.
유로화는 '올림픽의 저주'에도 한몫 거들었다. 그리스 정부는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며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유치하고 경기장 건설 등 인프라 투자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다. 이를 통해 관광객 수입을 크게 늘리겠다는 계산이었지만 유로존 가입 후 물가가 오르는 바람에 관광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고, 올림픽 시설들은 쓸모없는 애물단지가 됐다.
상황이 이런데도 다른 유로 국가와 글로벌 투자자들은 '유로존'의 힘을 과신해 그리스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봤다. 글로벌 금융 위기 전까지 그리스 국채와 독일 국채는 금리 차이가 거의 없었다. 결국 한 나라 경제의 이상 징후를 알리는 체온계 역할을 하는 '환율'과 '금리' 어느 쪽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이다.
③대학 못간 고교생 국비 해외유학 등 퍼주기식 복지 남발
복지만 북유럽 따라하기
전문가들은 그리스에 망조가 들기 시작한 해로 1981년을 꼽는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내줄 것"이라고 약속한 사회당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취임한 해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정부 지출을 늘려 의료보험 혜택을 전 계층으로 확대하고 평균임금 및 최저임금을 대폭 끌어올렸다. 직원을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도록 노동법을 개정했다. 대학을 가지 못한 고교 졸업생은 국비로 해외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다.
국민이 퍼주기식 복지에 맛을 들이자 다시 바꾸긴 어려웠다. 우파든 좌파든 집권을 위해 더 많은 복지를 남발했다. 그 결과 그리스는 유로존 국가 중 가장 후한 연금 제도를 구축했다. 위기 직전까지도 국가총생산(GDP)은 독일의 10분의 1에 못 미쳤지만 GDP 대비 연금 지출은 독일(12%대)보다 높은 17.5%였다. 연금 수령액은 은퇴 직전 소득의 95%에 달해 독일(42%), 프랑스(50%)를 훨씬 웃돌았다.
④정치인·관료·노조, 조폭처럼 서로 뒤봐주기… 연금·임금인상과 지지표 맞교환
정치인·공무원 부패 최악
그리스 정치인들은 북유럽 수준의 복지 국가를 유지할 능력은 전혀 없었다. 정치인·관료 계층은 노조와 지역 이권 집단을 설득해 정책과 표를 맞교환하는 식으로 자리를 유지했다. 마치 두목과 부하가 서로의 뒤를 봐주듯 하는 '후견주의(clientelism)'가 발달한 것이다. '파켈라키(fakelaki·촌지)'와 '루스페티(rousfeti·정치적 특혜)'는 그리스 위기를 설명하는 두 단어다.
공무원 집단과 대형 노조는 정치인들로부터 임금 인상과 연금을 보장받는 대신 지지를 약속했다. 공공 부문은 점점 비대해져 2000년대 노동인구 4명 중 1명(85만명)이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은 대개 아침 8시 반에 출근해서 오후 2시 반이면 퇴근했다.
후견주의는 탈세와 착복이 난무하는 지하경제를 양성했다. 유로존 위기 전 그리스의 지하경제는 GDP의 25%를 넘었다. 그리스 조세 당국은 그동안 국민 실질소득의 30%밖에 세금을 매기지 못했다. 2009년 그리스의 탈세액은 약 2000억~3000억유로로, 그해 재정 적자의 3분의 2에 달했다. 2010년 국제투명성기구는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이어 그리스가 유럽연합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라고 평가했다.
⑤1821년 독립후 총 5번 디폴트… "국제사회가 알아서 해주겠지" 국민들 나몰라라
간 큰 채무자들
디폴트에 관한 한 그리스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세기 초 오스만제국에서 독립한 이후 그리스는 이번까지 총 다섯 번의 디폴트를 경험했다. 직전의 디폴트는 대공황 때인 1932년이었다. 1821년 독립 후 200년이 안 되는 기간의 약 절반을 디폴트 아래에서 보냈을 만큼 그리스 정치 지도자들에게 국가 부도 선언은 낯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2010~ 2011년 그리스 디폴트 위기 당시 국제사회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스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것도 그리스 국민들은 알고 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통해 그리스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간 큰' 채무자가 됐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은 "IMF(국제통화기금)나 ECB(유럽중앙은행)가 그리스에 대해서는 서구 문명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봐주고 있는 측면이 있다"며 "유로존 단일 통화로 묶인 상태에서는 성장을 일으킬 수 없는 만큼, 그리스로서는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결코 나쁜 선택인 것만도 아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최규민 기자 박승혁 기자
2015.07.09 경제와 안보가 뒤엉켜 있는 그리스 사태
그리스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빌린 채무 15억유로를 변제하지 못해 사실상 디폴트 상태에 돌입했다. 유로존과 유럽연합(EU)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 그리스 사태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은 독일·프랑스 등 유럽연합 채권국 국민의 세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유럽 주요 국가들이 연쇄 부도에 처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문제다.
그리스는 1821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5번이나 국가부도 사태를 당했지만 채무자이면서도 배짱이 두둑한 나라다. 그리스가 이런 상황까지 이른 것은 서비스 산업이 90%인 비정상적 산업 구조와 무역수지 적자 구조, 사회 전반에 만연된 부패, 25%를 넘는 지하경제, 비대한 공공 부문, 사회당 정부의 과도한 복지 지출 등에 기인한다. 하지만 그리스는 2010년 첫 구제금융을 받은 이래로 지난 5년간 긴축 프로그램을 이행했는데도 경제 사정이 나아지기는 고사하고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이 줄었으며 청년실업률은 50%에 달한다고 아우성이다.
그리스와 최대 채권국인 독일의 관계는 한·일 관계 못지않게 역사적 앙금이 있다. 그리스는 2차대전 당시인 1941년 1월부터 약 3년간 독일과 이탈리아에 점령됐다. 나치 정권하에서 그리스 국민이 강제 징용으로 희생됐고, 고대 유물들이 독일에 약탈당했다. 그런 독일이 앞장서서 채무 상환 압박을 가하자 그리스 정부와 국민이 반감을 품은 것이다.
2차대전 후 그리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해 미국의 우방이 됐다. 공산 세력의 확산 위협에 처한 그리스를 지원하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3월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마셜플랜'으로 명명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미국은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아있도록 유럽 주요국 지도자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 사태는 경제 문제로만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중요한 정치·안보 문제다. 미국은 그리스가 유로존을 이탈하는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다. 그리스의 이탈은 NATO 남동유럽 방어선의 붕괴를 의미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유럽연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와 그리스가 가까워지는 것은 미국의 유럽 전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스와 러시아는 정교(正敎)를 믿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은 국제통화기금을 통해 그리스를 지원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를 통해 독일을 설득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와 유럽연합 국가들은 함께 그리스 사태 해결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는 7월 2일자 국제통화기금 보고서가 권고한 것처럼 긴축 정책을 실시하고, 반(反)부패 정책을 추진하며, 지하경제를 줄이기 위해 세제를 개혁하고,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유럽연합 채권국들은 그리스의 채무 기한 연장 및 일부 채무 탕감 조치를 검토하고, 2008년 금융위기 때 만들어진 '유럽안정메커니즘(ESM)'을 활용하여 그리스를 지원하며, 위기와 책임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유로본드' 도입 등을 통해 유로존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 모두에게 자제력과 현명한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신성원 국립외교원 경제통상연구부장
2015-07-14 [그리스 3차 구제금융 타결] - 충격 휩싸인 그리스인들 “이럴거면 국민투표 왜 했나”
[그리스 3차 구제금융 타결]
초강력 긴축안 수용한 정부 비판
보조금 혜택 사라진 서민 민심 악화… “獨재무, 인간 아니다” 분노 표출
ECB, 긴급유동성지원 증액 등… 금융지원으로 경제 숨통 트일 듯
▲연금 인출 기다리는 노인들 13일 그리스 아테네의 국립은행 한 지점 앞에서 휠체어에 의지한 중년 남성이 다른 연금 수급자들과 함께 주당 최대 120유로(약 15만 원)의 돈을 인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아테네=AP 뉴시스
“우리는 어그리크먼트(aGreekment)에 이르렀다. 이제 잠자리에 들 수 있다.”
13일 오전(현지 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 국가) 정상회의장에서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트위터에 올린 이 소식에 세계 증시는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이탈)를 피하게 됐다”며 반겼다. 반면 혹독한 개혁 리스트를 받아든 그리스 민심은 심각한 충격에 빠졌다고 외신들은 일제히 전했다. 그리스 국민은 5일 국민투표에서 62%의 압도적인 지지로 긴축안에 반대하며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에게 힘을 실어 줬으나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치프라스 정부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외국계 회사 직원인 페터 파파스 씨는 “이번 국민투표처럼 이상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러려면 돈과 시간을 들여 국민투표는 왜 한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어장애 치료사인 마리오스 로지스 씨(23)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긴축안 반대에 모두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은 국민투표를 왜 했는지 모르는 황당한 상황으로 변했다”며 말했다. 바실리스 시카 씨(20)도 “치프라스 총리가 마지막에 내놓은 개혁안은 표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반발했다.
부가가치세 우대와 보조금 혜택을 받은 도서 지역의 민심은 더욱 술렁였다. 새로운 긴축안을 적용하면 도서 지역의 부가가치세 우대와 보조금이 철폐돼 서민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파로스 섬의 마로코스 코베오스 시장은 “주민의 생활비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다. 관광업에도 타격을 준다. 인근 터키 몰타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스페인과 비교할 때 경쟁력을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트위터에선 갑작스럽게 ‘#이것은 쿠데타다(#ThisIsACoup)’라는 해시태그를 붙인 메시지의 전송량이 급증했다. 이번 구제금융 협상을 비난하는 여론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리스와 독일에서 1위를 기록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해시태그는 특정 단어 앞에 ‘#’ 기호를 붙여 특정 주제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나타내는 누리꾼들의 표현 방법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저명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도 뉴욕타임스 블로그에 “(채권단의 요구는) 가혹을 넘어 보복과 주권 말살을 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독일에 대한 분노도 표출됐다. 테살로니키에 거주하는 파나지오티스 알렉시아디스 씨는 그리스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일관한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을 겨냥해 “그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가 게으르다고 하는데 9세부터 67세인 지금까지 줄곧 일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유럽의회 부의장으로 그리스 집권 시리자(급진좌파연합) 소속 의원인 디미트리오스 파파디물리스 씨는 방송에 출연해 “독일은 그리스와 그리스 국민을 굴욕당하게 하거나 치프라스 정부를 전복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시리자 소속 디미트리 세바차키스 의원도 “독일 등이 제안한 것은 징벌적이다. 일종의 복수”라고 규탄했다. 12일 오후 9시에는 그리스 의회 앞 신타그마(그리스어로 헌법) 광장에 100여 명이 모여 독일 정부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좌파 정당인 ‘안타르시아’는 13일 저녁 아테네 의사당 앞에서 개혁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일단 그렉시트 불안이 해소된 데 대해서는 안도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CNN은 “앞으로 증세와 연금 지출 삭감 등 개혁 조치들로 생활이 더 어려워지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는 체념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무원인 40대 스텔라 길바니 씨(여)는 “이렇게 될 걸로 믿고 있었다. 비록 우리에겐 힘든 길이 되겠지만 다른 길이 없는 것 아니냐”며 “유로존이 아무리 그리스를 탈퇴시키려 해도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이런 결정밖에는 못 내렸을 것”이라고 했다.
어떻든 이번 협상 타결로 그리스 경제는 일단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날 협상 타결과 동시에 그리스에 대한 긴급유동성지원(ELA) 증액을 결정해 빈사 상태에 허덕이던 은행들이 살아날 가능성이 생겼다. 요르고스 스타타키스 그리스 경제장관은 11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ELA 증액이 결정되면 은행이 일주일 내로 영업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종 pen@donga.com
2015-07-10 그리스 몰락의 원인은 탈세와 부패
“사진 속 울고 있는 그리스 노인. 77세의 카지포티아디스 씨. 병을 앓고 있는 부인을 위해 이날 은행 3군데를 돌아다녔는데 연금을 찾지 못했음. 그리고 4번째 은행에서도 인출 실패 그래서 울음을.”
7월 4일 @ried******님이 올린 이 트윗은 8일 현재 5359회 리트윗됐다. 그리스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이다. 이 같은 상황 묘사가 다소 과장됐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리스 상황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내몰린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집권 시리자당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유로존 채권단의 요구를 거부하고 국민투표에 붙여 60%가 넘는 압도적인 반대를 이끌어 냈다. 당초 박빙 혹은 찬성 결과를 기대했던 채권국 정상들은 패닉에 빠졌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총리는 애써 “그리스 국민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했지만 실질적인 디폴트(채무 불이행) 상황을 맞은 그리스 재정문제 해법이 그리 쉽게 찾아질 것 같지는 않다.
1일부터 8일까지 트위터, 블로그 등에서 그리스를 언급한 문서는 모두 8만7065건이 검색됐다. 1일 1만9735건으로 고점을 찍은 그리스 키워드 언급량은 국민투표가 부결된 5일 1만4680건, 6일 1만6929건으로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그만큼 한국의 누리꾼들도 그리스 사태가 미칠 경제적 파장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사태를 한국 상황에 빗대 표현한 글들이 많은 인기를 누린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시간당 최저 임금 5580원, 생활비도 못 버는 알바들의 쓰레기봉투 시위, 영수증 처리도 하지 않는 청와대 직원들 특별활동비는 1인당 2700만 원. 몰락의 그리스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말한 @nesu******님의 트윗은 3097회 퍼져 나갔다.
그리스와 함께 언급된 전체 연관어 1위는 1만2567건을 기록한 국민투표가 차지했다. 국민투표 결과가 그리스 문제 해결의 분수령이었다는 뜻이다. 2위에는 1만2348건의 복지가 올랐는데 이는 그리스 재정악화가 과도한 복지 때문이라는 항간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이 많이 생산됐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세균 의원은 트위터에 “디폴트 위기에 빠진 그리스를 두고 그리스가 과도한 복지 때문에 국민들이 나태해져서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하는데요. 남 얘기라고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OECD 주요국 중 노동시간 2위가 한국, 3위가 그리스입니다”라는 글을 올려 1306회의 리트윗을 기록했다. 한편 “그리스에서 수영장이 있으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층에 속하는데, 수영장에 세금을 매기려고 수영장 있는 사람 신고하라고 했더니 아테네에서 300명 신고했다고 함. 공무원이 구글 어스 돌리니까 1만7000개가 걸렸다고ㅋㅋ 무려 부유층의 98%가 탈세하고 있었음”이라고 적시한 @gumd***님의 트윗은 2023회 리트윗됐다. 과도한 복지 때문이 아니라 부유층의 탈세가 재정악화의 주범이라는 지적이다.
3위는 디폴트가 차지했고(1만1427건), 4위는 유로존(EU 포함해 1만587건), 5위는 8476건의 돈이 차지했다. 뱅크런을 우려한 치프라스 정부가 현금인출기(ATM)에서 하루 인출 한도를 60유로로 제한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돈이 연관어 상위권에 올랐다. 6위부터 10위까지는 은행, 연금, 독일, 대한민국, 망하다 등이 올라 그리스 사태와 채권국, 우리나라의 관련성을 언급한 글이 많은 호응을 얻었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채권단의 요구를 거절한 그리스 국민 앞에는 더 큰 시련이 남아 있다. 치프라스 총리는 늦어도 12일까지 자구안을 내놓아야 한다. 채권국 정상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협상을 위해 채권자들의 눈 밖에 난 야니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은 “그들은 나를 만장일치로 증오한다, 나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한다”는 루스벨트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면서 즉각 사임했다. 협상에 성공하면 유로존에 잔류해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고 협상에 실패하면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이른바 ‘그렉시트’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가 국제 금융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인류가 전 세계적으로 맞고 있는 위기에서 구해 줄 해결의 실마리를 줄 것”이라는 치프라스 총리의 호언은 어디까지 유효할까. 그리스는 여전히 살얼음판이고 온 세계가 그의 다음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 볼거리
● 그리스 신화의 올림포스 12신(도데카데온)
그리스 신화에는 BC 6세기부터 신들의 우두머리인 12신(도데카데온)들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동안은 12신의 명단이 유동적이어서 통일성이 없었다. 그러다가 헤스티아(Hestia)가 디오니소스(Dionysos)로 교체 되면서 12신의 명단이 확정되었다. 이들이 그리스에서 제일 높고 가장 신성한 올림포스산 정상에서 산다고 믿어서 올림포스 도데카데온(12신) 이라고 부른다.
1. Ares(아레스)
▲아레스는 '전사(戰士)'라는 뜻으로 전쟁의 신이다.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다.
아레스는 행동과 결정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하고 공포와 테러의 신이기도 하다. 그는 증오와 공포로 모든 전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자기 아들까지 죽임으로 그와 반목하던 헤라클레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아레스는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다. 그러나 제우스 혼자 아테나를 낳은 데 화가 난 헤라가 혼자서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를 낳았다는 출생설화도 있다.
2.Artemis(아르테미스)
달의 여신이자 사냥(수렵)의 여신으로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동생이다. 수렵과 궁술을 맡아보고 또 야생동물, 어린이, 약한 자들을 수호하는 여신이다. 그리스 고전문학에서는 젊은 처녀신으로 묘사되어, 정결의 상징이며 처녀성과 순결을 지키는 여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원래는 처녀신이 아니라, 선주(先住)민족의 지모신(地母神)이나 에페소스에서 숭배되고 있던 많은 유방을 가진 여신과도 관계가 있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다산과 출산과 신생아를 비호하는 여신이 되기도 한 듯하다.
로마 신화의 디아나(Diana)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3.Apollon(아폴론)
'미남 청년'이라는 뜻.
태양의 신이자 궁술(弓術)과 예언ㆍ의료ㆍ음악 및 시의 신이기도 하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달의 여신이며 사냥의 신인 아르테미스가 쌍둥이 누이이다. 로마신화의 아폴로(Apollo)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아폴론은 헤르메스가 발명해 선물로 준 현악기 리라를 다루는 데 명수였다
4.Aphrodite(아프로디테)
'거품에서 태어났다'라는 뜻.
성애(性愛)와 미(美)의 여신으로 로마신화의 베누스(Venus)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아프로디테는 처음에는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무서운 힘으로 생각되었다. 그녀는 여성의 생식력을 표현하는 무서운 신이며 그러므로 또 자연의 번식력을 표현하는 다산의 여신이기도 하다.
아프로디테는 케스토스라고 하는 자수를 놓은 띠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띠는 애정을 일으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총애한 새는 백조와 비둘기고, 그녀에게 바쳐지는 식물은 장미와 도금양이다.
5. Athena(아테나)
'하늘의 여왕'을 뜻하는 수메르어 아나타(anatha)에서 유래.
제우스가 혼자 낳은 딸로서 제우스의 머리에서 무장한 채로 태어난 처녀신으로 로마신화의 미네르바(Minerva)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전쟁과 여러가지 기예(技藝)의 수호신이며 도시의 수호신이기도 하여, 그리스의 여러 주요 도시에 아테나의 신전이 있었다.
처녀신이었으나, 같은 처녀신인 아르테미스와는 달리 남성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적인 행동을 즐겼으며, 싸움터에 가는 용사들을 응원했다. 그녀의 성조(聖鳥)는 지혜를 나타내는 올빼미였고, 그녀에게 바쳐진 식물은 올리브였다
6. 데메테르(Demeter)
'곡식의 어머니'라는 뜻.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로 대신(大神) 제우스의 부인이자 누이로서 로마신화의 케레스(Ceres)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데메테르는 대지의 생산력, 특히 곡식을 생육하는 곡식의 여신이며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딸 페르세포네(Persepone)를 낳았다
7.Dionysos(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는 '불완전한 신'이라는 뜻이다.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그는 술과 황홀경의 신이다. 제우스와 카드모스( 테베 시의 창설자)의 딸 세멜레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신화의 박커스(Bacchus)에 해당하며 포도나무와 포도주를 관장하해서 그를 묘사하는 작품에는 항상 포도가 등장한다. 그는 술에 취하게 하는 힘을 상징하며 모든 속박으로 부터의 해방자, 문명의 촉진자, 입법자, 그리고 평화의 애호자로 신봉되고있다
8. 포세이돈(Poseidon)
'땅의 주(主)'라는 뜻.
제우스(Zeus)의 형제이자 신중에 2인자로서 바다와 물의 신으로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풍요의 여신 레아의 아들이다. 로마신화의 넵투누스(Neptunus)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바다를 뒤흔드는 자'로 그의 무기인 삼지창 트라이아나(Triaina)를 휘둘러 암석을 분쇄하고, 폭풍우를 일으키고, 해안을 흔드는 지진의 신이다. 또한, 말(馬)을 창조한 경마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평소에 그는 파도 위를 흰 말이 끄는 황금 갈퀴와 놋쇠 바퀴의 수레를 타고 해령(海靈)을 데리고 바다를 달렸으므로 마신(馬神)이라고도 일컬었다. 제우스를 도와 티탄족을 정복한 뒤 바다를 지배하게 되었다.
9. 헤라(Hera)
'보호자'라는 뜻.
신들의 여왕으로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이며 제우스의 정실부인이자 누이로써 로마신화의 주노(Juno)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여성의 보호신이며 결혼과 출산을 관장했고, 질투의 여신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릴 정도로 질투가 심하여 제우스의 연인들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심하게 박해하였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를 시녀로 거느리며 성수(聖獸)는 암소, 후에는 공작새가 성조(聖鳥)로 되었다.
10. 헤르메스(Hermes)
'돌무더기'라는 뜻.
전령(傳令)의 신이며 나그네의 수호신으로 제우스와 마이아(아틀라스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로마신화의 머큐리(Mercury)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그는 제우스의 전령이자 죽은 자를 지하세계의 왕인 하데스에게 인도하는 안내자 이며 부와 행운의 신으로서 상업, 도박, 격투를 비롯한 그 밖의 경기, 심지어는 도둑질에 이르기까지 숙련과 기민성을 요하는 분야를 주관한다. 또 그는 통행인과 여행자의 수호신으로 길에 깔린 돌을 치워 도로를 정비한다고 일컬어졌다. 이 때문에 돌에 헤르메스의 얼굴을 그린 이정표가 여기저기에 기념비로 세워져 있다.
그는 부친 제우스의 사자(使者)로서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샌들을 신고, 모습을 감춰주는 투구를 쓴 채 바람처럼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또 손에는 두 마리의 뱀이 몸을 감고 있는 '케뤼케이온'이라는 전령의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
11. 헤파이스토스(Hephaistos)
'낮을 빛내는 사람'이란 뜻.
화산(火山)의 신이자 대장장이 신으로 로마신화의 불칸(Vulcan)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올림푸스의 명공(名工)인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 태어난 추남에 절름발이 아들(또 다른 설로는 제우스가 혼자 아테나를 낳은 데 화가 난 헤라가 혼자 낳은 두 아들 중 하나, 또 한명은 아레스)로 신들의 무기와 신들의 궁전 등 모두 그가 만들었다.
12.제우스(Zeus)/
'찬란한 하늘'이라는 뜻.
올림푸스(Olympus) 최고의 신으로 천상(天上)을 지배하는 천공(天空)ㆍ뇌정(雷霆)의 신인 동시에 인간사회의 정치ㆍ법률ㆍ도덕 등 모든 생활을 지배하였다. 로마신화의 주피터(Jupiter)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지배자이자 수호자)이고 벼락이 제우스의 무기이며 아들 헤파이토스(Hephaistos, 대장장이 신)가 만들어준 아이기스라는 방패를 몸에 지니고 있다. 독수리를 신조로 총애하여 벼락을 독수리에게 맡겼다.
○제우스
하늘·기후 신으로 로마 신의 주피터 에 해당한다. 천둥·번개·비·바람을 보내는 신으로 간주되었고 그의 전통적인 무기는 벼락이었다. 신과 인간의 아버지(지배자이자 수호자)라고 불렸다. 후에 그리스 신화로 흡수된 크레타 신화에 따르면, 티탄족 왕인 크로노스는 자식 중의 1명이 그를 권좌에서 밀어낼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잡아먹었다. 그러나 아내 레아는 제우스가 태어나자 배내옷에 돌을 싸서 대신 삼키게 하고 제우스를 크레타의 한 동굴에 숨겨놓았다. 그 동굴에서 제우스는 요정(또는 암염소) 아말테이아의 손에 키워졌으며 쿠레테(젊은 전사)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쿠레테들은 창검을 부딪치는 소리를 내어 제우스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어른이 되자 제우스는 형제들인 하데스와 포세이돈의 도움을 받아 티탄족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크로노스를 권좌에서 몰아냈으며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형제들과 나누어가졌다.
하늘의 지배자인 제우스는 신들을 이끌고 기간테스족(가이아와 타르타로스의 후손)을 격퇴했으며, 동료 신들의 도움을 받아 그에 대항하는 여러 반란자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따라서 기후의 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 생각되었던 올림포스 산의 최정상에 하늘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른 신들도 그곳에서 제우스와 함께 살았으며 제우스의 뜻에 복종했다. 제우스는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 앉아 전지(全知)의 힘으로 인간의 모든 일을 관찰하고 모든 것을 통치하며 선행은 상주고 악은 벌한다고 생각되었다. 제우스는 정의를 실행할 뿐 아니라 도시·가정·재산·여행자·손님·탄원자 등의 수호자였다.
제우스는 바람둥이로 유명했고 이때문에 아내 헤라와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여신이나 여인들과 수많은 정사를 가졌으며,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물의 모습을 취하곤 했는데, 예를 들면 헤라를 범할 때에는 뻐꾸기로, 레다를 범할 때는 백조로, 그리고 에우로파를 범할 때에는 황소로 변신했다. 자녀로는 티탄족 여신 레토와의 사이에 쌍둥이 남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스파르타의 레다와의 사이에 헬레네와 디오스쿠오리, 여신 데메테르와의 사이에 페르세포네가 각각 태어났고, 티탄족의 메티스를 삼킨 제우스의 머리에서 아테나가 태어났다. 또한 아내 헤라와의 사이에 헤파이스토스·헤베·아레스·에일레이티이아, 여신 세멜레와의 사이에 디오니소스가 태어났으며, 그밖에도 여러 아들과 딸이 있다.
그리스의 종교학자들은 제우스를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으로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아테나나 헤라 등의 강력한 지방신들과 비교할 때 제우스의 보편성은 오히려 그를 덜 중요한 신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제우스 헤르케이오스(집의 수호자) 상과 제우스 크세니오스(손님 접대자)의 제단이 각 집의 앞마당을 장식하고 있고 산꼭대기에 위치한 그의 제단에 순례자들이 참배하기는 했지만, BC 6세기말까지 아테네에는 제우스의 신전이 없었다.
● 그리스의 미케네 외
그리스의 미케네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두 개의 봉우리가 미케네성을 완벽하게 천혜의 요새로 에워싸고 있다. 왼쪽은 프로피티스 일리아스(Prophitis LLias 또는 아스피스)이고 오른쪽은 사라(Sara)산이다. 중간 계곡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한 요새 같은 석성은 적들이 도저히 침범할 수 없어 보인다. 아크로폴리스 성벽 둘레가 1㎞나 될 정도다. 성문은 서양에서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지는 사자 두 마리가 마주보며 지키고 있다. 미케네성 안에 들어가는 입구. 성 입구 문 위에 두 마리의 사자상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성 안에는 귀족들이 거주하며 목욕시설까지 구비한 완벽한 시설을 자랑했다. 이러한 시설이 BC 17~16세기에 건립됐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600~3700년 전이다. 비밀 수로를 만들어 외부에서 물을 끌어다 깊은 우물까지 만들어 저장했다. 외부에서는 찾을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설이다. 수심이 18m나 된다고 한다. 한 마디로 감동이고,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목욕시설과 주거 흔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미케네성 안의 모습.
건물뿐이 아니다.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동양학자 조용헌 박사는 운을 뗀다. “이런 지형을 군신동조열이라고 합니다. 신하의 예를 최대한 받들어 왕을 모시는 그런 명당터입니다. 아크로폴리스 외부 북서쪽에는 ‘아트레우스의 보물(Treasury of Atreus)’이라 불리는 무덤은 트로이원정의 총지휘관으로 출전한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 것으로 전합니다. 이 무덤은 마치 아버지가 자손들이 있는 미케네성을 입구에서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신라의 문무대왕이 바다에 묻혀 왜적이 침입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한국의 풍수 이상으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배치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아가멤논의 황금마스크.
‘아트레우스의 보물’은 ‘아가멤논의 무덤(Tomb of Agamemnon)’이라고도 부른다. 무덤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의 왕릉보다 훨씬 더 크고 견고하다. 처음 발굴했을 때 이미 완전히 도굴돼 남은 유물들은 없었다고 한다.
우리의 불국사 석굴암 내부보다 더 크게 보인다. 구조는 비슷하다. 아가멤논이 그의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제대로 축성했다. 1999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을 지정됐다. 기원전 16세기에 만들어진 그 유명한 황금마스크가 바로 ‘아가멤논의 마스크(Mask of Agamemnon)’다. 이 황금마스크 하나만으로도 3,600~3700년 전의 문화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말 감동의 연속이다. 우리 문화와 똑 같지는 않지만 가는 유적지마다 눈에 익은 듯한 모습이다.
▲아가멤논의 무덤에 들어가는 입구. 많은 학생들과 방문객들로 항상 넘쳐난다.
▲아가멤논 무덤의 내부 천장.
우리의 석굴암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부에 있던 장식물과 각종 부속물들은 이미 도굴 당한 뒤라고 한다.
곧이어 방문한 요즘 시설로 치면 국립요양원 같은 유적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담한 숲속에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정중앙에 원형극장이 있다. 정신요양원과 원형극장, 무슨 상관이 있을까? 숲 속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말을 통해 쌓인 앙금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는 현대식 치료법을 수천 년 전에 그리스에서는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곳에도 예외 없이 신전(Temple of the god)과 원형신전 토로스(Tholos)가 있다. BC 300년대 건립된 것으로 지금은 잔재만 남아 있다. 출입통제 상태다.
▲요즘으로 치면 국립요양원 같은 건물인 에피다우로스에 있는 원형극장.
요양하면서 심리치료를 병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조 박사가 말을 이었다. “서양에서는 말 잘하는 훈련을 어렸을 때부터 받아, 토론문화가 정착할 수 있었다고 보입니다. 반면 동양에서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선비들이 과묵한 이유죠. 국립요양원인 이곳도 명당입니다. 마치 압력밥솥 같이 응집된 기를 받을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한 며칠 묵었다 가면 좋을 듯합니다. 아마 이곳에서 물의 위치는 저 앞쪽에 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앞쪽엔 샘이 있었다. 정말 절묘하다. ‘이렇게 똑 같을 수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며 소름이 송골송골 돋는 기분이다.
미케네의 이 시설물은 그나마 흔적이 뚜렷한 편이다. 원형극장의 앞쪽은 북향이다. 조 박사의 설명이 바로 이어진다. “아마 공연은 주로 여름에 했을 터이고, 여름은 북향이 시원합니다. 숲 속의 시원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쌓인 앙금을 극장에서 말을 하며 풀면 어느 정신병자도 다 고칠 수 있었을 겁니다.”
두 개의 봉우리 사이를 방패삼아, 왼쪽 봉우리 위에 미케네성을 쌓았다. 봉우리 사이 계곡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협곡이었다. 원형극장은 초장기엔 6200여명이 관람할 수 있었고, 그 이후 규모를 더 키워 1만2,000여명까지 수용가능 했다고 한다. 지금 봐도 1만 여명은 앉을 수 있는 대형 극장이다. 모든 공연의 시작과 끝은 신이 등장한다. 신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의미였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이것은 마치 신이 운명과도 같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 순간 자연에 순종하고 하늘의 뜻에 맡기며 살아온 한국인의 DNA가 머리에 스치며 지나가는 건 왜일까? 그리스 유적지를 확인할수록 뒷머리가 솟는 느낌이다. 이렇게 똑같을 수 있나
▲원형극장 들어가는 입구.
원형극장의 핵심시설은 나선형의 공연장에 있었다. 1만여 명이 둥글게 모여 공연을 지켜볼 때 공연하는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해도 수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자연 에코시설이 돼 있었다. 실제로 공연장에서 작은 목소리는 제일 끝자리에 앉아 있어도 들릴 정도로 울려 퍼졌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조 박사의 설명은 또 이어진다.
공연장 중간에서 나직히 말해도 관중석 끝에서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시설을 만들었다. “나선형으로 된 모형은 우주의 중심으로 나를 이끌어 병을 치유케 한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부의 핵심건축은 나선형, 극장도 나선형은 다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나선형 건축은 내향적 심리치유를 의미하고, 나선형 극장과 같은 시설은 외향적 치료를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이 일대 건축물 입안자는 분명 이런 구상을 하고 건축했을 겁니다.” 한국의 대표적 동양학자 답게 가는 곳마다 족집게 같이 콕콕 집어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귀를 솔깃하며 들었다. 절묘한 시설과 건축물이 과연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이 나왔고, 히포크라테스 같은 의학의 시조가 충분히 나올 만한 느낌이었다.
그리스에는 수에즈․파나마운하와 함께 세계 3대 운하로 꼽히는 코린트운하(Gulf of Corinth)가 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에 동서로 길게 운하를 만들어 배가 지나도록 만들었다. 길이가 6.3㎞에 달하고 너비가 25m에 이른다. 수심은 7m. 프랑스 자본으로 1882~1893년까지 공사했다. 이 운하가 완공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에프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사이의 항로를 320㎞ 단축했다. 예로부터 이 운하를 만들 계획을 수차 시도했으며, 로마 황제 네로도 6,000여명의 유대인을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3대 운하로 꼽히는 코린트운하(Gulf of Corinth)는 너비가 25m에 이른다.큰 배가 갈 때는 동력을 이용하지 않고 앞에서 작은 배가 끌고 간다. 운하 맨 꼭대기에 콩알만한 작은 배가 자기보다 훨씬 큰 배를 끌고 운하를 지나고 있다.
운하에서 번지점프를 한다고 광고하고 있으나 실제로 번지점프 하는 사람은 볼 수 없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기 때문이다.
▲앞에 작은 배가 자기 크기의 몇 배에 달하는 큰 배를 끌고 가고 있다. 그 콩알만한 배를 급히 차로 달려서 하류에서 겨우 촬영할 수 있었다.
배가 지나는 운하는 다리를 수중 밑으로 놓아 배가 지나가면 기계로 다시 들어올려 차량들이 지나게 한다. 보기만 해도 신기하다. 물 밑에서 올라오고 있는 장면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 중에서 기둥 7개가 현재까지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는 신전 중의 하나가 코린트의 아폴론신전이다. 코린트가 어떤 도시인가. 코린트는 BC 6세기 중반까지 아테네 못지않게 상업과 무역도시로서 매우 번성했다.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스 전 지역에서도 3번째로 꼽는 도시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헬라스의 별’로 일컬을 정도였다. BC 146년쯤 로마에 의해 코린도는 철저히 파괴된다. 다시 재건하지만 529년쯤 지진과 1858년 지진으로 파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경 신약성서에 나오는 코린도전서가 코린도에 있었던 일들을 일부 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한 주 무대가 이 도시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 중에서 기둥 7개가 현재까지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는 신전 중의 하나가 코린트의 아폴론신전이다
▲아폴론 신전 옆에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우물이 있다. 왼쪽 폐허가 된 건물이 우물이 있던 자리다.
가이드는 고대 코린트 고고학박물관부터 안내한다. 코린트에서 어떤 유물들이 나왔고, 형태가 어떠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바로 옆에 코린트의 아폴론신전이 있다. 과거 영화를 대변하듯 웅장한 기둥이 신전에 세워져 있다. 가이드는 “기독교인들이 처음 그리스에 왔을 때 다신을 믿었던 그리스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신전에 있는 신들의 조각상에서 코를 깨버리거나 두상만 잘라내는 작업을 했다”고 설명한다. 코를 깨거나 두상을 없애는 행위는 유일신인 기독교에서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저지르는 행위였다고 덧붙였다.
바위산 아크로코린트 위에는 아직 성벽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우리의 산성 같이 쌓아져 있다. 그 위에서 아프로디테 신전에 소속된 미모의 사제들이 매춘을 했다고 전해진다.
코린도는 상업․무역도시로 번성한 만큼 매춘도 극성이었다고 전한다. 보통 여자들도 매춘을 했지만 여 사제(女司祭)들도 매춘에 종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미(美)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에 소속된 뛰어난 미모의 여사제들이 매춘을 한다니…. 아마 아프로디테 신전에 갖다 바칠 제물을 구입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여사제들이 공식적으로 매춘을 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코린트 신전은 처음에는 지진으로, 나중에는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무참히 파괴된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코린트 신전의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다. 현대 들어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코린도의 아폴론신전 기둥은 우리나라의 절에 있는 배흘림기둥과 모양이 비슷하다. 가운데가 제일 뚱뚱하게 균형감과 안정감을 주는 기둥이다. 신전 바로 옆에 우물이 있다. 조 박사는 “어디든지 신성한 곳 바로 옆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물이 없는 곳에는 신전과 같은 신성한 제단은 절대 없습니다”고 설명했다.
▲지진으로 내려앉은 고대 그리스 주민들이 살던 곳. 아크로폴리스와 생활시설 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 땅은 풍수적으로 재물이 모이는 명당입니다. 본토와 반도를 이어주는 지협(地峽)지점일 뿐 아니라 사람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도시가 번창할 수밖에 없는 위치입니다. 저 위에 산을 보십시오. 지기(地氣)가 강하게 올라오는 전형적 바위산(아크로코린트)입니다. 신전 옆에도 우물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광장에도 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은 지금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지기와 수기(水氣)가 조화를 이룬 터에 신전이 있고 거주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불교 사찰터와 비슷합니다”고 강조했다.
▲건물 잔재들을 주워서 한 곳에 모아두고 있다.
● 아테네에 있는 ‘서양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가 독배 마시고 죽었던 그 감옥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불리는 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플라톤은 그의 수제자였다. 기원전 469~399년까지 살았으며,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는 그가 태어난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원전 399년에 고소돼 사형을 당했다.
아버지는 조각가 소프로니코스였고, 어머니는산파 파이나레테였다. 부인은 악처로 유명한 크산티페. 늦은 나이에 철학적 사고관을 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리스토파네스와 아메이프시아스 등의 희곡에서 주인공으로도 등장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500인회에서 활동했다.
거리의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철학적 대화를 많이 했다. 그는 확정된 진리를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대화를 했으며, 이를 통하여 듣는 사람은 스스로 무지를 깨닫게 했다.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고 한다. 이처럼 무지를 깨달음으로써 철학의 참뜻에 다가가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대화하는 자세였으며,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산파술이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하며, 그 이유는 자신만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처했다.
그를 추종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자 소크라테스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결국 아니토스에 의해 불경죄로 고발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독배를 마셔 사망했다. 기소 이유는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었다. 그의 변론과정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잘 드러나 있다. 흔히 소크라테스의 말로 알려져 있는 ‘악법도 법이다.’는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며, ‘너 자신을 알라’는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던 말이었다.
▲한 서양 방문객이 소크라테스 감옥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기까지의 법정 변론 과정을 잘 묘사한 책이 <플라톤(Platon)>이다. 소크라테스 처형 후 몇 년에 걸쳐 씌어진 책으로 보여진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자기의 고발자들에는 두 부류가 있음을 진술한다. 즉 예전부터의 고발자는 불특정 다수인데,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하늘과 땅속의 것을 추구하고 근거 박약한 논리를 고집하는 등 필요없는 짓을 하며,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치고 있다고 중상한다. 그리고 새 고발자는 아뉴토스 일파에게 교사받은 멜레토스인데, 그는 소크라테스가 청년에게 해로운 영향을 주며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예전부터의 고발자에 대해선 자기는 허황된 자연학(自然學)을 연구한 적도 없으며, 다른 궤변론자들과 같이 많은 보수를 받고 교육한 적도 없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미움받은 이유로서 델피의 신탁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무지의 자각’을 확실히 하는 것이 ‘신의 뜻에 따르는 것’임을 믿게 된 경위를 말한다. 그리고 새 고발자 멜레토스에 대해서는 대화를 통해 그의 무지와 모순을 지적한 후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할 것이다. 즉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지(知)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감옥은 자연동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에서 철창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30표라는 근소한 차로 유죄로 결정된다. 유죄 결정 후 형량을 결정하기 위해서 다시 피고인 소크라테스의 진술이 전개된다. 제2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애걸하기는커녕 자기는 국가적 귀인으로 대접 받아야 마땅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형량을 표결에 부친 결과 그에게 사형이 언도된다. 여기부터 제3부에 들어가는데, 소크라테스는 유죄 투표를 한 사람들을 향하여 “여러분은 나의 죽음을 결정했지만, 내가 죽은 후 곧 당신들에게 징벌이 내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소크라테스 동상
그러고서 무죄 투표를 한 사람들을 향해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반성하면서, 죽음의 의미에 관해 “선한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이나 죽은 후에나 악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확신을 이야기한다. 본서는 단편이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의 치열하고도 경건한 철학 정신이 잘 묘사되어 있는 대화편으로서 객관적 삶의 태도와 정신의 일치가 철학함의 진정한 전형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True knowledge exists in knowing that you know nothing.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
The only good is knowledge and the only evil is ignorance.
유일한 선은 앎이요, 유일한 악은 무지이다.
Death may be the greatest of all human blessings.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축복 중 최고의 축복이다.
He is richest who is content with the least.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 기원전 4세기 에게 海의 작은 섬- 고대 유적지 델로스를 찾아서
▲해안가 항만지구 유적지 낚시 등 물놀이가 금지된 이곳 유적지에 낚시꾼이 나타났다.
BC 3000년부터 초기 그리스도 시대까지 문명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 델로스(Delos) 섬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 신이 태어난 땅이다. 섬은 아폴로 숭배지로서 고대 그리스인의 정신적 중심지로 BC 1000년경부터 아폴로 신앙을 확립하고 해마다 이오니아인들이 신에 바치는 제의(祭儀)를 거행했다.
1699개의 섬이 있는 에게 해(海) 키클라데스 제도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델로스 섬은 남북 5km, 동서 1.3km에 지나지 않는 바위투성이의 작은 섬이다.
▲외국 신전 지구에 있는 시리아 신들을 위한 성소, 이시스 신전.
기원전 166년 로마로부터 자유무역항으로 인정을 받은 델로스 섬은 국제 중개 무역항으로 크게 번창했다. 기원전 2세기에서 3세기 중엽에는 하루에 500여 명의 노예를 거래할 정도로 융성했다.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델로스는 BC 88년과 BC 69년 로마의 학정(虐政)에 대항하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휘말리면서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섬은 1873년부터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시작하면서 그리스 전역에서 발굴된 것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유적지로 알려졌다. 도리아식(式) 신전으로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건설된 아폴로 신전과 기원전 2세기의 신전 터나 주택 터, 극장 터도 발견됐다. 현재 아폴로 신전은 벽 일부와 도리아식 원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낙소스인의 집 마룻바닥 모자이크.
당시 항구가 있던 섬 북서쪽에서 아폴로 신역으로 통하는 성스러운 길 오른쪽에는 아폴론이 태어난 ‘성스러운 호수(Sacred Lake)’로 가는 길을 따라 기원전 7세기 말에 낙소스인들이 바친 사자 석상이 10개 넘게 세워졌었다. 지금은 5개만 남아 있다.
2세기 그리스 역사가로 《그리스기(記)》 10권을 남긴 파우사니아스가 델로스 섬을 방문했을 때 델로스 섬은 이미 폐허가 되어 신전 관리인만이 사는 섬이었다고 한다.
▲아폴로 신전 경내의 아고라.
델로스 섬은 그리스 미코노스(Mykonos) 섬에서 배를 타고 45분쯤 들어간다. 4km쯤 떨어져 있다.
1990년 델로스 섬 전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해가 저물고 관광객들이 돌아가고 나면 아폴론의 섬은 적막에 싸인다. 섬에는 고고 유적의 관리인 몇 명만이 상주를 하고 있다.⊙
▲델로스 고고학박물관에 진열된 BC 1~2세기에 만든 길이 5.15m, 폭 4.40m의 보석 상가 마룻바닥 모자이크, 갑옷을 입은 아테네인과 앉아 있는 여인상, 날개 달린 샌들을 신고 긴 장대를 짚고 서 있는 헤르메스 상. 테두리에는 황소 머리와 전형적인 고대 코미디언의 모습도 있다. 박물관에서는 이곳에서 발굴한 대리석 조각상들도 전시하고 있다.
▲바다 건너 저 멀리 그리스 고대 유적지인 델로스 섬이 보인다.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델로스 항구의 식수원으로, 아폴로 신이 탄생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신성한 호수’ 그 자리에 무화과나무들과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신성한 호수’를 지키고 있는 이웃 낙소스 섬의 낙소스인들이 만들어 세운 대리석 사자상. 10개가 있었으나 현재 5개만 남았다고 한다. 진품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곳곳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전들이 산재해 있다.
이오봉 월간조선 객원사진 기자
● 聖과 俗의 경계... 그리스 메테오라
▲ 메테오라 높은 바위 산에서 내려다본 ‘루사누 누네리 수녀원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약 350㎞에 자리한 메테오라는 은둔의 땅이다. ‘메테오라’는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의 그리스어. 지금은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을 지칭하는 말이자, 공중 수도원들이 모인 지역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메테오라는 엄격한 규율을 중시하던 그리스정교회의 전통과 이슬람 세력을 피해서 산으로 산으로 피신해야 했던 그리스의 슬픈 역사가 녹아 있다. 11세기 이후, 그리스 전역을 장악한 페르시아제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리스정교회는 접근 불가능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수도사들은 처음엔 바위동굴로 숨어들었다가 바위 절벽 위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하나둘 늘어난 절벽 위 수도원은 14세기에 들어 20여개까지 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불안정한 지반 때문에 점점 무너져내렸고, 현재는 6개만 남아 있다.
바위 수도원의 평균 높이는 암벽 포함 300m. 무려 80층짜리 건물의 높이다. 가장 높은 수도원은 550여m에 달한다. 수도원을 지을 당시에는 외부 세력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계단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밧줄과 사다리로만 왕래했다. 수백 년 동안 봉쇄수도원으로서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문이 여행객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 바위 주변에 나선형으로 만들어놓은 돌계단을 따라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수도원들은 매주 1회 문을 닫는데, 문을 닫는 요일은 수도원별로 다르다. 우리가 방문한 일요일은 운 좋게도 6곳 모두 개방된 날이었다.
▲ 수녀원을 반대편에서 본 모습
메테오라는 칼람바카 마을과 카스트라키 마을에 걸쳐 있다. 카스트라키 마을의 숙소를 예약한 우리는 밤늦게 도착했다. 카스트라키 마을의 밤은 정말 새까맣다. 그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졸린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이 있었던가. 줄잡아 천 개는 돼 보이는 별들이 쏟아져내릴 듯 빛나고 있었다. 인적 드문 마을 곳곳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들과 별밤이 빚어내는 향연은 신비로웠다. 하도 낯설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문을 열어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숙소 바로 앞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숙소에서 불과 30m 거리에 서 있는 바위였다. 시야를 돌려보니 마을 전체가 검회색 바위산 천국이었다. 메테오라 본격 여행에 나서기 전, 숙소 매니저로부터 세 개의 수도원을 추천받았다. 가장 큰 규모의 그레이트 메테오라, 그 시절 도르레가 여전히 작동하는 발람 수도원, 마을 초입에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는 성 스테파노 수녀원. 우리는 앞의 두 곳과 성 스테파노 대신 또 다른 수녀원인 루사누 누네리 수녀원 이렇게 세 곳을 가기로 했다. 매니저는 여섯 곳의 계단 수를 하나하나 적어줬다. 가장 계단이 많은 곳은 그레이트 메테오라로 300개, 가장 적은 곳은 성 스테파노로 70개였다.
카스트라키 마을을 출발하면서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수직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회색 바위들은 저마다 표정이 있었다. 중간중간엔 구멍이 숭숭 뚫렸고, 구멍에서는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천 년 풍화작용을 겪어온 유기물들의 흔적이었다. 바위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는 생명체로 보였다.
바위들에 감탄하는 사이, 사진으로만 보던 바로 그 수도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먼저 보인 곳은 성 니콜라스 아나파프사스 수도원.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수도원이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바위 산에 딱 붙어 있는 수도원이 눈에 띈다. 바위색과 비슷해 수도원마저 자연의 일부로 착각하게 했다. 성 니콜라스 수도원이었다. 바위산 위에 거짓말처럼 얹혀 있는 수도원은 그저 경이로웠다. 그리스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 깎아지른 듯한 바위 위에 수도원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 수도원 건립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스며 있는 것일까?
▲ 영화 007의 배경으로 등장한 ‘트리니티 수도원’. 여섯 곳의 수도원 중 접근이 가장 어려운 곳으로 꼽힌다.
누네리 수녀원의 화가 수녀
자동차로 꼬불거리는 산등성이를 10여분 달리자 루사누 누네리 수녀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규모가 작아 인기가 많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 깊었던 수도원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190개의 계단을 오르자 수도원 입구가 나타난다. 발코니처럼 돼 있는 공간에 서니 저 멀리 발람 수도원도 보였다. 작지만 공중으로 불쑥 솟은 좁은 바위 위의 수도원이라 어느 방향으로든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다. 땅을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이 손톱보다 작게 보인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절대로 못 올 곳이 바로 이 메테오라다.
몇 계단 더 올라 수도원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수녀가 “헤이” 하고 불렀다. 입장료 내는 곳을 지나친 때문이다. 입장료는 3유로. 상당수 여행객들은 여기에서 그냥 돌아섰다. 이 3유로가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기준점이다. 까만 두건을 두른 수녀는 3유로를 받고 속세인들을 성스러운 공간으로의 진입을 허락했다. 그 성과 속의 묘한 경계에서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600~700년 전 철저하게 세상과 단절하기 위해 이 깊숙한 곳에 숨어든 수녀들, 그 엄격한 수행을 위해 봉쇄수도원을 만든 이들과 현재의 수녀들이 대비되면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내부로 들어서자 의외로 넓은 공간이 펼쳐졌고, 벽 곳곳에 성화(聖畵)들이 걸려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수녀원 내부에서 흰돌멩이에 메테오라 그림을 그려넣는 수녀였다. 맨들맨들한 작은 돌에 섬세한 손놀림으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림을 하나하나 그려넣는 수녀. 나는 붓질이 채 마르지 않은 그 돌멩이 하나를 사버렸다. 내부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돼 있다. 이곳뿐 아니라 다른 수도원도 내부 촬영은 금지다. 그때 정적을 깨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를 파악 못 한 한 여행객의 실수였다. 마침 카리스마 있는 수녀 한 분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봤다. 수녀는 “당신 거기서 뭐하는 거야?”라며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엄격한 규율로 다스려야 하는 그 고행의 여정이 짐작이 갔다.
두 번째로 간 곳은 발람 수도원. 거대한 바위산들이 운집한 한가운데 있어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으로 꼽히는 곳이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여성의 복장 제한이 있다. 스커트를 입지 않은 여성은 입구에 구비된 치마를 둘러야 한다. 이곳뿐 아니라 다른 남자 수도사들이 있는 수도원들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이 수도원에 들어서자 스피커에서 남자 수도사들의 송가(頌歌)가 경건하게 울려퍼졌다.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는 지금도 여전히 작동되는 도르레다. 도르레가 있는 곳은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쇠줄에 발라놓은 기름 냄새를 따라 가면 자연스레 도르레방에 가 닿는다. 쇠줄 도르레는 물건을 나를 때 지금도 사용되고, 수백 년 전에 사용하던 나무 도르레는 쇠줄 도르레 옆에 그 형태 그대로 보존돼 있다.
▲ ‘그레이트 메테오라’ 내부 중앙에 있는 널찍한 정원.
300개의 계단 그레이트 메테오라
마지막으로 그레이트 메테오라. 이름 그대로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다. 관광객 규모도 엄청나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대형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계단만 300개에 이른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까마득한 계단도 그렇거니와 바위 꼭대기에 펼쳐진 수도원의 규모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충 둘러보는 데에만 족히 두 시간은 걸린다. 이미 두 개의 수도원에서 기력을 소진한 터라 계단에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도원 입구 앞에서 ‘외관만 보고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다. 계단 여기저기에서 다리가 아파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전의(戰意)를 잃었고, 앞의 두 수도원 내부가 유사한 것이 한 번 잃은 전의에 명분을 더했다. ‘수도원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 하는 마음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가족들이 협조를 안 해준 탓에 터덜터덜 오르기 시작했다. 300개의 계단은 생각보다 많았다. 심지어 계단 중간에 동굴까지 나타났다. 그 동굴 천장에는 새 둥지가 있어, 수시로 새떼들이 여행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곳 역시 발람 수도원처럼 여성은 치마를 둘러야 입장 가능하다. 그레이트 메테오라는 그 명성에 걸맞게 볼거리가 많았다. 곳곳에 주변 산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고 목수 공방, 수도원 박물관, 예배당, 기념품 상점 등의 시설이 있다. 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부엌도 있었다. 이 자체로 하나의 작은 공동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놓치면 안 되는 곳이 있다. 바로 해골의 방이다. 이곳을 지키던 수도사들의 해골이다.
메테오라 주변엔 음식점이 없다. 수도원 세 곳을 돌며 발견한 유일한 음식점이라곤 그레이트 메테오라 앞에 서 있는 푸드트럭이 전부였다. 1.5유로짜리 샌드위치가 식사대용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메뉴. 그레이트 메테오라를 왼쪽으로 끼고, 발람 수도원을 뒤로하고 길가에 앉아 점심으로 그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재료라곤 치즈 한 조각, 햄 한 조각이 전부였지만 이상하리만큼 맛있었다.
방문하지 못한 나머지 세 곳 중 트리니티 수도원은 내내 아쉬움이 남는다. 007영화 ‘포 유어 아이즈 온리’ 편에 등장한 바로 그 수도원이다. 영화 속에서 이 수도원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궁극의 은둔지로 그려진다. 속세와 절연하고 싶은 한 사람이 숨을 수 있는 지구의 가장 깊숙한 곳.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본 외관도 그러했다. 원통형으로 우뚝 솟은 바위 위에 덩그러니 얹혀 있는 트리니티 수도원은 그 어떤 수도원보다 단절의 의지가 강해 보였다. 실제로 메테오라에 있는 수도원 중 가장 접근이 어려운 곳으로 꼽히는데, 이곳 역시 개방돼 있다.
메테오라는 메테오라다. 지구상 그 어떤 곳도 메테오라와 비슷한 곳이 없다. 메테오라를 첫 일정으로 그리스 여행이 계속 이어졌지만 메테오라의 그 장엄한 경이가 워낙 강해 다른 곳의 감흥이 덜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도, 아고라 광장의 그 거룩한 신전의 터도, 미로 속에 갇힌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전설이 살아 있는 크노소스 유적지에서도 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거대한 합작품인 메테오라. 그곳에 가야만 느껴지는 그 경이로움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 ‘그레이트 메테오라’를 지키던 수도사들의 해골을 안치한 ‘해골의 방’.
출처 | 주간조선 2406호
글 | 김민희 주간조선 기자
● 그리스 문명 기행
▲파르나소스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델피신전에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답사하고 있다.
동양에서 샤머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수나 사주, 한의학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풍수나 사주, 한의학을 통달한 샤먼들은 이를 고대사회 이래로 백성을 통치하는 주요 수단으로 삼았고, 하늘과 통하면서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해왔다.
그러면 서양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나 로마, 이집트, 터키 등을 동양학의 시각으로 보면 어떠할까? 아니 그리스신화를 동양학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과연 동양학으로 본 고대 문명은 동서양 어떤 차이가 날까? 서양문명의 발원지로 불리는 그리스를 직접 답사하며 풍수와 신화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자.
그리스문명의 발원지는 올림푸스 산이다. 올림푸스 산에서 모든 신이 나오고, 올림푸스 산에는 무수히 많은 신들의 궁전이 있다. 무수히 많은 궁전 한 가운데 큰 길이 하나 툭 터져 있다. 이 길은 밤 중에도 인간의 눈에 보인다. 이 길의 이름이 바로 ‘비아 락테아(Via Lactea)’, 즉 젖의 길이다. 비아 락테아는 영어로 ‘밀키웨이(Milky Way)’이며 우리말로 ‘은하수’가 된다. 은하수는 순우리말로 미르이며, 미르는 또한 신화적 동물인 용과 관련돼 있다. 신비스럽고 신화적인 부분에서 한국과 그리스, 아니 동서양의 유사점이 느껴진다.
올림푸스는 그 많은 신들로 인해 ‘천성(天城)’이라고도 불린다. 하늘의 성이라는 뜻이다. 올림푸스의 가장 큰 신인 제우스가 소집하면 모든 신들은 제우스신의 천궁에 모여야 한다. 올림푸스에 살고 있는 신들은 물론이고, 땅 위, 물 밑 신들까지 일제히 모였다. 애초의 그리스는 모든 것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 신화도 태백산에서 시작된다. 곰에서 환생한 인간이 환웅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이고, 그 단군이 1000여 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한다. 태백산은 지금도 성산으로 받들어져 많은 무속인들이 찾는다. 그 태백산이 지금의 태백산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여하튼 산에서 비롯된다.
▲파르나소스 중턱 아래 앞산 봉우리의 높이와 비슷하게 델피신전이 자리 잡고 있다.
고대 신화의 유사성, 아니 그리스와 한국의 출발신화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대 사회의 샤머니즘적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이 가게 한다. 샤머니즘은 기본적으로 만신(萬神)사상이다. 모든 자연적 현상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신화의 출발점이 샤머니즘이고, 신화에 나오는 인간과 구분이 없는 수많은 신들은 그리스적으로 환생했다고 볼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태백산에서 인간으로 환생한 곰과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 단군이 1000여 년 간 나라를 지배한 것은 한국적 신화에 해당하는 것이다.
애당초 그리스인들은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현상의 원인이 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산․숲․나무․강․풀을 지배하는 수많은 신들과 지방신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인의 신관(神觀)은 신인동태론(Anthropomorphism)에 근거해 있다. 이는 신과 인간은 외형과 속성에 있어서 전혀 차이가 없으나 다만 신은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과 다를 뿐이다. 신이 인간인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낳은 인간은 신이 되는 등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관계가 맺어진다. 신화에 묘사된 신들은 난폭하거나 잔인하며 교활하거나 방탕하기도 한다. ‘이게 신인가’ 할 정도로 신들이 추악한 모험과 불성실한 행동조차도 서슴치 않는다. 예를 들면 헤르메스는 도적의 신이고, 아프로디테는 농염한 교태를 부리고, 아레스는 잔인한 행동을 한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신의 모습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 신화를 바라보면 훨씬 더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스 첫 답사지는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이다. 아마 그리스 유적을 시대별로 한 번 살펴보고 가라는 의미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책에서나 보던 대리석으로 된 그리스 유물들이 B.C 7,000년 전후 선사시대부터 청동기, 철기를 거쳐 고대에 이르기까지 휘황찬란하게 방문객을 맞이한다. 어느 것 하나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장면들이 전부 대리석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남자가 추파를 던지며 남녀가 뒤엉켜 노는 듯한 형상, 신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는 장면, 산자 사이에 죽은 자가 앉아 울거나 같이 있고 싶어 하는 표정 등 우리와는 다른 듯하면서 전혀 낯설지 않은 장면들의 조각들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가이드는 “산자 속에 죽은 자가 있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산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받기 위한 수단으로 죽은 자를 산자 같이 등장시키고 있다”고 설명한다.
산자의 허무감, 무상감, 슬픔감에 대한 표출을 대리석 조각에 그대로 남긴 것같아 보인다. 이러한 인식이 그리스인들의 생활 속으로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리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지 않고 반드시 매장을 한다. 그것도 마을 바로 옆에 공동묘지를 둔다. 혐오시설이 아닌 놀이시설 같은 친근한 장소로 여기는 듯했다. 기독교가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그리스에서는 ‘부활’을 믿고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마을 옆 공동묘지에 묻힌 시신은 3년 뒤에 꺼내서 유골함에 넣어 영구보존하는 관습을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병사들은 반드시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박물관에 있는 고대 그리스 병사의 대리석 조각상을 유심히 한 번 보자.
“왜 병사가 왼발을 먼저 앞으로 내디디고 있습니까?” 질문을 던지자 가이드가 말을 머뭇거린다.
“북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면 해가 떠오르는 동쪽이 왼쪽입니다. 왼쪽은 양(陽)입니다. 양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귀신은 음(陰)입니다. 그리스는 양기가 넘쳐나는 곳이라는 느낌을 곳곳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대리석과 석회석으로 된 악산(岳山)으로부터 영발(靈發)을 받고 바로 옆 지중해로부터 수기(水氣)를 받아, 불교로 치면 해수관음도량 성지 같은 곳입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여수나 통영에 해당한다고나 할까요. 병사가 왼발을 먼저 내디디고 있는 것은 태양을 향하는 양기운을 의식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동작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문명에 대한 원천적 의문을 하나씩 풀어보자. 정답은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그리스는 터가 전부 양명(陽明)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낙천적이고 표정도 밝습니다.”
정말 사람들이 급하게 서두르는 법이 없다. 한국의 동양학으로 서양문명의 기원인 그리스에 와서 현지문화를 꼼꼼이 살피는 중이다. “그리스는 전부 다 명당”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한국의 샤먼들을 전부 그리스로 데려와서 답사시켜도 전부 푹 빠질 것 같은 분위기다”며 “마치 영발의 메카처럼 느껴진다.”
첫 감동을 뒤로 한 채 수에즈․파나마운하와 함께 세계 3대 운하로 꼽히는 코린트운하(Gulf of Corinth)로 향한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에 동서로 길게 운하를 만들어 배가 지나도록 만들었다. 길이가 6.3㎞에 달하고 너비가 25m에 이른다. 수심은 7m. 프랑스 자본으로 1882~1893년까지 공사했다. 이 운하가 완공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에프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사이의 항로를 320㎞ 단축했다. 예로부터 이 운하를 만들 계획을 수차 시도했으며, 로마 황제 네로도 6,000여명의 유대인을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크로코린트 언덕 아래 코린트 도시가 번성했으며, 그 중심에 코린트신전과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아크로코린트 언덕 위에는 BC 3,000년경에 쌓았던 요새가 지금까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 중에서 기둥 7개가 현재까지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는 신전 중의 하나가 코린트의 아폴론신전이다. 코린트가 어떤 도시인가. 코린트는 B.C 6세기 중반까지 아테네 못지않게 상업과 무역도시로서 매우 번성했다.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스 전 지역에서도 3번째로 꼽는 도시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헬라스의 별’로 일컬을 정도였다. B.C 146년쯤 로마에 의해 코린도는 철저히 파괴된다. 다시 재건하지만 529년쯤 지진과 1858년 지진으로 파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경 신약성서에 나오는 코린도전서가 코린도에 있었던 일들을 일부 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한 주 무대가 이 도시였다.
가이드는 고대 코린트 고고학박물관부터 안내한다. 코린트에서 어떤 유물들이 나왔고, 형태가 어떠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바로 옆에 코린트의 아폴론신전이 있다. 과거 영화를 대변하듯 웅장한 기둥이 신전에 세워져 있다. 가이드는 “기독교인들이 처음 그리스에 왔을 때 다신(多神)을 믿었던 그리스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신전에 있는 신들의 조각상에서 코를 깨버리거나 두상만 잘라내는 작업을 했다”고 설명한다. 코를 깨거나 두상을 없애는 행위는 유일신인 기독교에서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저지르는 행위였다고 덧붙였다.
코린도는 상업․무역도시로 번성한 만큼 매춘도 극성이었다고 전한다. 보통 여자들도 매춘을 했지만 여 사제(女司祭)들도 매춘에 종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미(美)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에 소속된 뛰어난 미모의 여사제들이 매춘을 한다니…. 아마 아프로디테 신전에 갖다 바칠 제물을 구입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여사제들이 공식적으로 매춘을 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코린도의 아폴론신전 기둥은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배흘림기둥과 모양이 비슷하다. 가운데가 제일 뚱뚱하게 균형감과 안정감을 주는 기둥이다. 신전 바로 옆에 우물이 있다.
“어디든지 신성한 곳 바로 옆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물이 없는 곳에는 신전과 같은 신성한 제단은 절대 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계속 이어간다.
“이 땅은 풍수적으로 재물이 모이는 명당입니다. 본토와 반도를 이어주는 지협(地峽)지점일 뿐 아니라 사람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도시가 번창할 수밖에 없는 위치입니다. 저 위에 산을 보십시오. 지기(地氣)가 강하게 올라오는 전형적 바위산(아크로코린트)입니다. 신전 옆에도 우물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광장에도 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은 지금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지기와 수기(水氣)가 조화를 이룬 터에 신전이 있고 거주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불교 사찰터와 비슷합니다.”
▲로마군의 파괴와 지진으로 폐허가 된 코린트 도시가 잔해만 남아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아폴론신전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크로코린트 언덕엔 아직도 요새 같은 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위산 정상에 세워놓은 산성이자 신전터이다. 전형적인 한국의 산성 모습이었다. 아크로코린트는 코린트 도시 일대에 기운를 공급해주는 영산(靈山)역할을 했다. 이곳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살았다고 전한다. 미의 여신이 있어 미모의 여사제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코린트의 아크로폴리스는 지진으로 파괴됐지만 과거의 영화를 엿볼 수 있는 자취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복원했다. 정말, 이런 건축물이 수천 년 전에 있었는가 할 정도로 완벽하다. 거주지에, 감옥에, 원형극장에, 광장에, 공동 우물에, 공동 화장실에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은 공동체다.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전부 구비돼 있다. 이 완벽한 도시가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지진에 붕괴됐으니 아쉬울 뿐이다. 코린트의 잔잔한 감동이 여운을 남긴다. 다음 목적지 미케네(Mycenae)로 향한다.
미케네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두 개의 봉우리가 미케네성을 완벽하게 천혜의 요새로 에워싸고 있다. 왼쪽은 프로피티스 일리아스(Prophitis LLias 또는 아스피스)이고 오른쪽은 사라(Sara)산이다. 중간 계곡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한 요새 같은 석성은 적들이 도저히 침범할 수 없어 보인다. 아크로폴리스 성벽 둘레가 1㎞나 될 정도다. 성문은 서양에서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지는 사자 두 마리가 마주보며 지키고 있다. 성 안에는 귀족들이 거주하며 목욕시설까지 구비한 완벽한 시설을 자랑했다. 이러한 시설이 BC 17~16세기에 건립됐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600~3700년 전이다. 비밀 수로를 만들어 외부에서 물을 끌어다 깊은 우물까지 만들어 저장했다. 외부에서는 찾을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설이다. 수심이 18m나 된다고 한다. 한 마디로 감동이고,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건물뿐이 아니다. ‘천하의 명당자리’다.
“이런 지형을 군신동조열(君臣同調列)입니다. 신하의 예를 최대한 받들어 왕을 모시는 그런 명당터입니다. 아크로폴리스 외부 북서쪽에는 ‘아트레우스의 보물(Treasury of Atreus)’이라 불리는 무덤은 트로이원정의 총지휘관으로 출전한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 것으로 전합니다. 이 무덤은 마치 아버지가 자손들이 있는 미케네성을 입구에서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신라의 문무대왕이 바다에 묻혀 왜적이 침입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한국의 풍수 이상으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배치입니다.”
▲미케네의 성은 양쪽 봉우리를 방패삼아 바로 그 아래 천연요새 같이 자리 잡고 있다.
‘아트레우스의 보물’은 ‘아가멤논의 무덤(Tomb of Agamemnon)’이라고도 부른다. 무덤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의 왕릉보다 훨씬 더 크고 견고하다. 처음 발굴했을 때 이미 완전히 도굴돼 남은 유물들은 없었다고 한다. 우리의 불국사 석굴암 내부보다 더 크게 보인다. 구조는 비슷하다. 아가멤논이 그의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제대로 축성했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기원전 16세기에 만들어진 그 유명한 황금마스크가 바로 ‘아가멤논의 마스크(Mask of agamemnon)’다. 이 황금마스크 하나만으로도 3,600~3700년 전의 문화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감동의 연속이다. 우리 문화와 똑 같지는 않지만 가는 유적지마다 눈에 익은 듯한 모습이다. 기억에 뚜렷이 각색된다.
이어 방문한 그 옛날 국립요양원 같은 유적지에 도착했다. 아담한 숲속에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정중앙에 원형극장이 있다. 정신요양원과 원형극장, 무슨 상관이 있을까? 숲 속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말을 통해 쌓인 앙금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는 현대식 치료법을 수천 년 전에 그리스에서는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곳에도 예외 없이 신전(Temple of the god)과 원형신전 토로스(Tholos)가 있다. B.C 300년대 건립된 것으로, 지금은 잔재만 남아 있다. 출입통제 상태다.
▲아트라우스의 보물 또는 아가멤논의 무덤으로 불리는 입구에서 많은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서양에서는 말 잘하는 훈련을 어렸을 때부터 받아, 토론문화가 정착할 수 있었다고 보입니다. 반면 동양에서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선비들이 과묵한 이유죠. 국립요양원인 이곳도 명당입니다. 마치 압력밥솥 같이 응집된 기(氣)를 받을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한 며칠 묵었다 가면 좋을 듯합니다. 아마 이곳에서 물의 위치는 저 앞쪽에 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앞쪽엔 샘이 있었다고 가이드가 말한다. 정말 절묘하다. ‘어떻게 고대 동서양은 이렇게 똑 같을 수가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원형극장의 앞쪽은 북향이다.
“아마 공연은 주로 여름에 했을 터이고, 여름은 북향이 시원합니다. 숲 속의 시원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쌓인 앙금을 극장에서 말을 하며 풀면 어느 정신병자도 다 고칠 수 있었을 겁니다.
▲아가멤논의 무덤 안의 천장 모습. 마치 우리나라의 석굴암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원형극장은 초장기엔 6200여명이 관람할 수 있었고, 그 이후 규모를 더 키워 1만2,000여명까지 수용가능 했다고 한다. 지금 봐도 1만 여명은 앉을 수 있는 대형 극장이다. 모든 공연의 시작과 끝은 신이 등장한다. 신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의미였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이것은 마치 신이 운명과도 같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 순간 자연에 순종하고 하늘의 뜻에 맡기며 살아온 한국인의 DNA가 머리에 스치며 지나가는 건 왜일까? 그리스 유적지를 확인할수록 뒷머리가 솟는 느낌이다. 이렇게 똑같을 수 있나 싶다.
원형극장의 핵심시설은 나선형의 공연장에 있었다. 1만여 명이 둥글게 모여 공연을 지켜볼 때 공연하는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해도 수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자연 에코시설이 돼 있었다. 실제로 공연장에서 작은 목소리는 제일 끝자리에 앉아 있어도 들릴 정도로 울려 퍼졌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선형으로 된 모형은 우주의 중심으로 나를 이끌어 병을 치유케 한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부의 핵심건축은 나선형, 극장도 나선형은 다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나선형 건축은 내향적 심리치유를 의미하고, 나선형 극장과 같은 시설은 외향적 치료를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이 일대 건축물 입안자는 분명 이런 구상을 하고 건축했을 겁니다.”
절묘한 시설과 건축물이 과연 의술의 신(神) ‘아스클레피오스’가 나왔고, 히포크라테스 같은 의학의 시조가 충분히 나올 만한 느낌이었다. 그리스 유적지 일부를 돌아보면서 두 가지 사실을 크게 느꼈다. 첫째, BC 3,000년경에 어떻게 이런 놀라운 건축물과 문화를 이룩했는지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둘째, 가는 유적지마다 낯설지 않은,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 고대사회는 정말 동서양의 문화가 차이가 없었구나 하는 느낌이다.
끝으로 현재의 고유명칭인 그리스와 그리스인들이 그들을 부르는 헬라스라는 고유명사는 어디서 왔고,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리스 현지에 가면 그리스라는 글자는 없고 대부분 헬라스(Hellas)라고 쓰여 있다. 도대체 그리스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더욱 궁금했다.
그리스라는 말의 어원은 그라이아(Graia)다. 이는 그리스인이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그리스인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B.C 1,000년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여러 지역으로 식민시를 건설했다. 그 중 남부 이탈리아의 키메에 식민시를 건설한 사람들이 그리스 보이오티아에서 온 그라이아인들이었다. 최초로 그라이아인을 만난 로마인들은 다른 그리스인들을 싸잡아 그라이아인으로 불렀다. 이 과정에서 그레이시아(Greicia), 즉 그라이아인들의 나라라는 라틴어 표현이 나왔다. 남부 이탈리아에 그라이안인들이 퍼져 살던 지역을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icia, 대그리스)라고 부르게 됐다.
▲요즘으로 치면 국립요양원 같은 건물인 에피다우로스에 있는 원형극장. 요양하면서 심리치료를 병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처럼 그리스라는 말은 이탈리아 남부에 식민시를 건설한 그라이아인들을 부르던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용어였던 것이다. 오늘날 영어가 국제어라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라틴어가 국제어였다. 결국 그리스라는 이름은 고대 국제어인 라틴어에서 현대의 국제어인 영어로 이어진 강력한 제국의 산물인 셈이다. 주도적인 문명은 모든 개념을 자신의 언어로 바꿔버린다. 고대사회에도 오늘날에도 그리스라는 말에는 제국주의의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헬라스는 또 무슨 말인가? 그리스인들 스스로는 헬레네스(Hellenes, 단수는 Hellene)라고 불렀다. 그것은 헬렌(Hellen)의 후손이란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헬렌은 태고의 대홍수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들인 데우칼리온(Deucalion)과 피라(Pyrrha)의 맏아들이었다. 헬렌은 산의 님프인 오르세이스와 결혼하여 세 아들 아이올로스, 크수토스, 도로스를 낳았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리스인의 세 종족인 아이올리스인, 이오니아인, 아카이아인의 시조다. 따라서 헬레네스는 그리스인, 헬레네는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 이전의 고유명사다.
▲그리스의 성산 파르나소스 산 아래 신전의 모습.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본토와 에게해의 섬들, 나아가 지중해 전 지역에 진출하여 폴리스라는 작은 도시국가들을 세웠다. 이들 그리스인들이 모여 사는 곳을 헬라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다. 그들이 동방에 퍼트린 문화를 헬레니즘이라고 부른다.
▲델피신전은 그리스신화에 올림푸스산만큼 자주 등장하는 파르나소스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앞산과 뒷산의 위치가 한국의 풍수에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 현장서 다시 생각해 본 아테네·스파르타
안영집 駐그리스 대사
지난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마지막 해외 순방의 일환으로 그리스를 찾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와 그리스 국민에 대한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라는 고귀한 제도가 태동한 현장을 꼭 방문하고자 했던 어릴 적 희망이 이뤄졌다며 감격을 피력했다. 물론 초창기의 아테네 민주주의는 여성과 노예의 참여가 배제된 불완전한 제도였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적한 대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는 구체적인 내용에서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와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높은 수준의 철학, 문학, 예술, 창의적 사고 등이 아테네에서 발아됐기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열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테네에 대한 찬사를 되새기면서 오히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스파르타를 생각해 본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거쳐 신흥 강국으로 부상했다면 스파르타는 전 그리스의 수호자라는 의식하에 전통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심지어 그리스-페르시아 간 전쟁에서도 스파르타는 동맹도시들을 이끌고 할리우드 영화 300에서 묘사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옥쇄와 플라테이아 최종전에서의 중심적 역할을 통해 아테네 못지않은 기여를 한 바 있다.
▲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내 파르테논 신전과 그 아래 있는 이로디온 극장 야경.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후 아테네는 동맹도시에 세금과 선박을 적극 징발하고 세금을 내지 않는 도시는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계속 세력을 키워나갔다. 오히려 스파르타는 동맹 도시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으며 동맹국의 요청이 있을 땐 군사를 파병해 주는 등 일종의 기존 패권 세력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계속된 부상은 역사학자 투키디데스의 지적처럼 필연적으로 스파르타에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해 무려 28년간의 싸움 끝에 스파르타의 승리로 종결된다. 최근 중국의 부상을 당시와 비교해 투키디데스적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자주 제기되는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아테네가 패배한 이유는 스파르타의 무력이 강했기 때문도 있었으나 약탈적 관계를 갖던 동맹 도시들의 계속된 반란과 중우정의 영향으로 전쟁의 고비마다 합리적인 정책 결정이 이뤄지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상당수 지식인은 과두정을 기반으로 기율이 분명히 서 있는 스파르타적 체제가 아테네가 갖지 못한 장점을 많이 가졌다고 평가했다. 철학자 플라톤과 크세노폰,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크 역시 이러한 인식을 가졌던 인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아테네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이 과두정, 귀족정 체제보다 반드시 우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를 방문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은 왜 아테네와 항상 함께 거론되는 스파르타에는 관광 프로그램이 없는지를 문의하곤 한다. 이유는 옛 거주지와 원형극장 터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유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테네보다 더 오랜 역사를 유지했고 오랫동안 그리스를 호령했던 스파르타지만 체제 유지를 위한 무력 연마와 소박한 삶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후세에 감동을 줄 만한 기념비적 유산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정신적 유산의 한 예만 들더라도 매년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아테네에서는 대중을 설득하는 기술인 수사학이 매우 발달했다. 그 결과 페리클레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를 위한 장례식 연설과 같이 오늘날에도 심금을 울리는 명연설이 많이 남아 있다. 반면 과두 지도자가 세습되던 스파르타에서는 비록 민회 등의 선거가 있었으나 오히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미덕이었다.(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스파르타에 대해 ‘만일 내가 라코니아(스파르타가 속한 지역)로 들어가게 되면 너희를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을 때 스파르타의 답신은 단 한마디 ‘만일에’였다는 일화는 그들의 체제와 문화적 특성을 잘 나타내준다.)
스파르타는 비록 일시적 체제 경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장구한 인류 역사를 통한 경쟁에서는 결국 아테네에 완패함으로써 후세인들은 또 한 번의 반전을 경험한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에서 스파르타는 황폐화하면 남는 것이 없을 테니 후세 사람들은 스파르타가 얼마나 강대한 국가였는지를 모를 것이며, 아테네는 풍부한 유산으로 인해 실제보다 두 배 이상 강한 국가로 인식될 것이라고 설파한 예지력이 정말 놀랍다.
문화일보
● 그리스 각 도시마다 수호신들은 왜 다를까?
▲신탁으로 유명한 델피는 파르나소스 산 사면을 깎아 조성한 도시다. 파르나소스의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암벽 아래 뽕긋한 바위가 최초의 신탁을 한 바위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역사와 신화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산에서 시작한다. 천신의 아들 환인이 환웅을 태백산으로 내려 보내 곰에서 인간으로 화한 웅녀를 만나 낳은 아들이 단군이다. 단군은 신시로 내려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인간세상을 다스렸다고 단군신화는 전한다.
그리스신화가 시작되는 올림푸스산(Olympus 2,917m)은 그리스 반도의 북쪽에 있고, 그곳이 모든 신들의 거처였다. 올림푸스산 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그 남쪽의 파르나소스산(Parnassos․2,200m)에 있는 델피신전은 하늘의 뜻을 받드는 신탁(神託‧oracle)의 장소였다. 신탁은 제사장이었던 샤먼이 했고, 주변 모든 도시국가에서 신탁을 받기 위해 델피로 모여들었다. 당시 델피는 상업과 무역이 번성한 도시였고, ‘세계의 중심’이었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수평적 세계관과 인간은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 역시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반도국가이면서 지형적으로도 산악국가로서 도시국가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면적은 13만2,000㎢이며, 이 중 약 6만㎢가 산지다. 전 국토의 50% 남짓 산으로 이뤄져 있다. 그나마 평지도 복잡한 지형구조를 보여 사람이 경작 짓고 살만한 땅은 그리 많지 않다. 사람이 살만한 평야는 산간분지와 주요 하천의 하류부에 주로 위치해 있다. 따라서 그리스는 지형적으로 도시국가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도시국가는 분산된 산간분지와 작은 평야지대를 차지해서 발달했다. 고대 한반도에도 많은 부족국가들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지형적 조건과 상황과 비슷하다.
그리스는 산악지형으로 도시국가의 발달과 함께 각 도시마다 수호신을 숭배하고 있다. 일부 중복되는 신을 모시기도 한다. 한반도에서 각각의 산에서 개별적인 산신을 모시는 것과 마찬가지 형태로 볼 수 있다. 각 지역의 수호신은 지역적 특징과 지형조건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먼저, 각 지역의 수호신을 한 번 살펴보자.
▲아크로폴리스 옆 헤로데스아티쿠스 음악당은 고대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조수미가 이곳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벽에서 올려다본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 같아 보인다. 지금 한창 공사 중인 신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인 파르테논신전.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가 행해진 아테네에서는 B.C 5세기에 건립된 파르테논신전이 도시의 중앙에 우뚝 솟아 단연 돋보인다.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로고의 상징물이기도 한 신전이다. 이 신전에는 최고의 신 제우스가 아니라 전쟁과 지혜의 신이자 수호신이기도 한 ‘아테나 여신’을 모셨다. 수도 아테네의 지명도 아테나 여신에서 유래했다. 여신상은 제국주의 시대에 영국이 약탈해 가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제우스신전은 아크로폴리스 아래 평지에 있으며, 파르테논신전이 아크로폴리스 정중앙에 아테네를 감시하고 지배하는 듯한 모습이다.
고대 도시 고린도에는 아폴론신전이 있다. 고린도의 황금기인 B.C 6세기에 태양의 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건립했다. 그리스 신전 중에 올림피아의 헤라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이다. 고린도 북쪽으로 아크로고린도스(Acrogorinthos‧575m)라는 산이 우뚝 솟아 있고, 사방은 성을 쌓아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산성이다. 아크로고린도스엔 아프로디테신전이 있다.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를 모셨으며, 사제와 무녀들은 외국 상인들을 상대로 창녀와 남창을 하면서 부를 축적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린도는 지하의 고대도시부터 지상의 유적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뒤에 보이는 우뚝 솟은 아크로고린도스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린도의 아폴론신전이 중앙에 있고, 주변 지형은 평평한 토체의 산 형체를 보여준다.
고대 올림픽이 열린 올림피아엔 최고의 신 제우스를 모신 제우스신전이 있으며, 그 외에 헤라신전과 펠롭스 신전 등도 있다. 델피가 형성되기 이전인 B.C 1000년경에 대지신((大地神)의 신탁소로 알려져 있다. 제우스의 신역으로 전하는 곳은 헤라클레스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서 4년 마다 올림픽 경기가 치러졌다. 일종의 축제였지만 사실은 축제기간 만큼은 도시국가 간 전쟁을 하지말자는 합의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최고의 신 제우스가 중재를 해야 했다. 제우스가 수호신으로 모셔진 이유이기도 하다.
아테네 옆에 있는 해안도시인 수니온곶은 예로부터 군사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상요충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모시는 포세이돈신전이 있다.
아테네와 경쟁도시로 유명한 스파르타는 아르테미스신전에 달의 여신이자 사냥의 여신, 야생동물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아르테미스를 모신다. 아르테미스는 출산의 여신이며, 사람과 짐승에 풍요함을 가져다주는 여신이다. 스파르타에서 아르테미스는 아르테미스 오르티아(Artemis Orthia)로 숭배한다. 고고학적으로 오르티아는 도리아인이 숭배하던 여신이었다. B.C 1200년경 그리스로 이주해온 도리아인은 자신들의 여신 오르티아와 아르테미스를 합쳐서 숭배했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인류 최초의 의사로 평가받는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인 코스섬의 아스클레피온신전에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시고 있다. 신전 유적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쪽의 에피다우로스에도 있다. 에피다우로스엔 실제로 많은 병자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치료를 받고 휴양을 했다. 아늑하고 조용한 전형적인 휴양도시다.
사모스 섬 헤레온(Hereon)마을에 있는 헤라신전에 신성한 결혼의 여신 ‘헤라’를 모신다. 남편 제우스의 바람기 때문에 질투하며 속이 상한 헤라는 제우스가 상대한 여신과 여자들을 괴롭히는 내용으로 신화에 많이 등장한다. 헤라는 제우스와 동침한 다음 날 아침에 카나토스샘에서 몸을 씻는다. 카나토스샘에서 몸을 씻은 여성은 다시 처녀로 거듭나게 해주는 마법의 샘이다. 제우스는 항상 처녀와 동침하는 셈인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는 사모스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전한다.
▲델피의 세계의 배꼽으로 불리는 옴파로스 바위와 그 뒤에 신전의 창고와 신전을 파르나소스 산이 위협하듯 감싸고 있다.
델피는 아폴론 신전이 있으며, 태양의 신 아폴론을 모신다. 그리스인들은 델피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최고의 신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을 향해서 동쪽과 서쪽으로 두 마리의 독수리를 날려 보냈더니, 독수리가 날아와 만난 장소가 델피라고 전한다. 그 장소가 바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하는 ‘옴파로스’다. 도시국가의 왕들은 신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자를 보내 상업, 무역적으로 매우 성업한 곳이었다.
이와 같이 각 도시엔 개별 수호신을 각각 모시고 있었다. 그 수호신은 그 지역의 성격과 지형적 조건과 딱 맞아떨어졌다.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자. 이 중에서 아테네와 고린도, 델피를 보면서 도시의 입지적 조건과 신전에 어떤 신을 모셨는지 등에 대해 둘러본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섰다. 그리스어 아크로(akros)는 ‘높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곳에 있는 도시란 의미다. 곧 성채이자 수호신들이 거주하는 국가의 성소인 셈이다. 또 시민들의 정신적 위안소이자 마지막 피난처이기도 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는 사방이 한 눈에 확 들어온다. 세 방향은 평평한 산들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고, 나머지 한 방향은 바다를 향하고 있다. 그 중앙에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외벽을 성벽으로 쌓아 철옹성을 구축했다.
▲아테네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11개의 언덕과 산은 전부 평평한 토체의 산의 형체를 띤다.
아테네 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모두 11개다. 4개의 산과 7개의 언덕이라고 현지인은 말한다. 그 4개의 산은 이미토스, 밴델리, 파르니사, 애갈래오다. 7개의 언덕은 아크로폴리스, 필라파포스, 피닉스, 아리오파고스, 리카피토스, 투르크푼야, 아르비토스 등이다. 11개의 야트막한 산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아테네는 전형적인 분지다. 11개의 산 안에 거대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산들은 전부 평평하다. 높낮이도 없이 평평한 산이 도시 외곽을 비슷한 높이로 에워싸고 있다. 전형적인 토체(土體)의 산이다. 동양의 음양오행사상에서 토체의 산은 왕(王)이 나올 형세다. 옛날 왕이 아닌 사람이 토체의 산에 묘를 쓰면 역모를 꾸민다고 해서 처형당하기도 했다. 남아공의 테이블마운틴은 대표적인 토체의 산이다. 여기서 만델라가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풍수학자도 있다. 토체의 산은 또한 대단히 균형 잡힌 산이다. 왕의 권력은 균형에서 나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뿌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모두가 평등한 산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 민주주의의 뿌리는 토체의 산에서 나왔고, 그 토체의 산의 구체화된 형태는 신전의 기둥이라고 말한다. 신전의 기둥은 모두 같은 높이, 같은 형태로 지붕을 떠받친다. 이집트의 피라밋이 삼각형 수직으로 된 권력구조라면 그리스의 신전 기둥은 둥글고 평평한 수평구조로서 민주주의의 원천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어쨌든 아테네 외곽의 산들은 평평하다. 풍수적으로는 평평한 산 중심에 우뚝 솟은 산은 단연코 중심의 산이고, 왕의 산으로 해석한다. 지금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꼭 그 형태다. 이를 군신봉조형이라고도 한다. 여러 군신들이 중심에 있는 하나의 왕을 향해서 예(禮)를 다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중간에 가끔 아크로폴리스보다 낮게 솟은 봉우리는 호위무사형이다. 왕을 지키면서 주변을 살핀다는 의미다.
▲아테네 파르테논신전을 마주보고 있는 신전.
아크로폴리스엔 파르테논신전이 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페르시아전쟁의 승리를 기념해서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여신에게 바치기 위해 BC 447~432년까지 15년간에 걸쳐 건립했다. 파르테논은 그리스어로 ‘처녀의 집’이다. 여신이 아테나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그리스적이라 말한다. 그리스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상징이자 아테네 민주주의의 발상지이자 상징이기도 한 곳이다.
파르테논신전에는 최고의 신 제우스를 모신 게 아니라 전쟁의 신이자 지혜의 신이며, 수호신이기도 한 아테나신을 모시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옆 평지에 제우스신전이 있다. 도대체 궁금했다. 어찌 최고의 신이며 신 중의 신을 평지로 밀어내고 그의 딸로 알려진 아테나신이 아크로폴리스 정중앙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그리스 현지 가이드는 “제우스신전은 파르테논신전이 조성되기 몇 백 년 전에 이미 평지에 세워져서 아크로폴리스로 옮길 수 없어 그냥 따로 모시게 됐다”고 설명한다. 정말 편한 해석 같이 들렸다. 아마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 의례적인 답을 했을 성싶다. 제우스는 알다시피 최고의 신이다. 신들의 거처 올림푸스산과 고대 올림픽 개최지인 올림피아를 지배하는 신이다.
이에 반해 도시국가 아테네는 최고의 신보다는 현실적으로 지형과 상황에 맞는 신을 선택한 결과로 보인다. 당시 각 도시국가는 전쟁을 치르면서 때로는 연합을 꾀하기도 했다. 도시 간 전쟁 때는 휴전을 위해 올림픽을 개최했고, 페르시아와 수십 년 간 전쟁을 할 때는 연합을 했다. 아테네는 전쟁의 신과 전쟁에 이길 지혜와 전략을 갖춘 신이 현실적으로 더 절실했다. 당연히 아테나신이다. 그 아테나신이 아테네의 가장 높은 곳 아크로폴리스 정 중앙에 세워졌음은 어찌 보면 아네테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 같다.
아크로폴리스를 올려다보는 옆에 조그만 광장이 있다. 이른바 아고라. 이곳에서 재판과 처형과 온갖 세속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그래서 위로는 아크로폴리스의 성(聖)의 땅이고, 아래로는 아고라의 속(俗)의 땅이라고까지 한다. 성과 속이 따로 있는 듯 옆에 있고, 구분되는 듯 공존하는 느낌이다.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유명한 자킨토스 섬의 부서진 배와 해변. 파도가 높아 접근하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촬영하고 있다.
▲세계 3대 운하에 꼽히는 고린도운하가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는 고린도로 간다. 아테네에서 고린도까지는 약 87㎞ 떨어져 버스로 2시간 내외 걸린다. 그리스반도에서 떨어져 나온 펠로폰네소스반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고린도운하를 개설하면서부터 반도가 아닌 섬으로 돼 버렸다. 고린도운하(Corinth Canal)는 로마시대부터 운하를 뚫으려고 했던 곳이다. 몇 천 년에 걸친 수차례의 시도 끝에 1893년에 결국 완공한다. 총 길이 6.34㎞에 수심은 8m, 폭 25m로 파마나‧수에즈운하와 함께 세계 3대 운하 중에 하나다.
고린도운하를 건너 고대도시 고린도로 들어서는 순간 우뚝 솟은 봉우리로 눈길이 집중된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비슷하게 도시에 우뚝 솟은 형국이다. 이 산의 이름이 아크로고린도스(Akrokorinthos‧575m). 아크로고린도스 사방은 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밑에서 올려다본 성벽은 정말 난공불락 철옹성 같아 보인다.
▲아크로고린도스에 있는 성벽이 철옹성 같아 보인다. 주변 지형도 대체적으로 토체의 산의 형세를 보이지만 야트막한 봉우리들이 마치 왕을 호위하듯이 살짝 살짝 솟아있다.
▲고린도의 유적 밑에 있는 지하도시 유적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지하도시 밑에 시지프스신화에 나오는 왕국의 도시가 있다고 한다.
고린도는 B.C 6세기 중반까지 아테네 못지않게 상업과 무역도시로서 매우 번성했다. 이오니아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당시 그리스 전 지역에서 3번째로 꼽는 도시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헬라스의 별’로 일컬을 정도였다. 프랑스의 노벨상 소설가 까뮈의 ‘시지프스신화’에 나오는 그 곳이 바로 고린도다.
현지 가이드도 “고린도의 지하엔 B.C 7000년경에 건설한 고대 시지프스왕의 왕국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게 신화냐, 역사냐?”고 물었다. 가이드도 씨익 웃으며 “매우 좋은 질문이다”고 말한다. 되레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되묻는다. 신화인지 역사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역사적 상황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한편으로는 허구같이 들리고 다른 한편으로 역사 같이 들린다. 신화의 구체적인 유적을 찾는 순간 어느 순간 역사로 변한다. 현재 폐허가 된 유적지, 고린도의 지하엔 고대에 형성된 도시 유적의 한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529년 지진과 1858년 지진으로 내려앉은 모습 그대로다. 시지프스 왕국은 그 지하도시보다 한층 더 아래 있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후대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에게 발굴을 기대해보자. 그리고 기독교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린도를 방문한 기록이 ‘고린도전서’에 남아 있다. 역사‧신화적으로 매우 의미 있고 유서 깊은 도시다.
고린도엔 아폴론신전이 있다. 아직 기둥 7개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태양의 신 아폴론을 모신 신전이다. 왜 태양의 신을 모셨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아폴론은 아르테미스와 쌍둥이형제로 알려져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은 터키의 에페소스. 바로 고대 7대 불가사의 건축물로 꼽히는 그 신전이다. 아르테미스는 인간의 양육자, 여성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여성전사 아마존이 아르테미스신전을 세우고 숭배했다고 전한다. 그 대립적 개념으로 고린도에 태양의 신 아폴론을 모신 걸로 추정한다. 당시 고린도는 매우 번성한 도시로서, 태양과 같이 번성하라는 신의 역할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파르나소스 산 아래 아폴론신전이 있지만 신전의 기둥만 남아 과거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반면 남쪽 우뚝 솟은 아크로고린도스엔 아프로디테신전이 있다. 사랑의 신이다. 태양의 신 아폴론과도 대립되는 신일 수도 있다. 아프로디테신전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젊은 여사제들은 종교적 행위를 빙자하여 지역주민과 외국 상인을 상대로 매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남자들이 아크로고린도스에 가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한다. 아크로고린도스 성벽 안에는 밤마다 괴성이 울려, 세속의 극치를 보였다고 전한다. 성경 고린도전서에서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상업 이외 고린도의 주요 수입원이 됐다. 거대한 상업중심지로서 희귀한 사치품들이 끊임없이 공급돼, 도시의 화려함과 사치는 극에 달했다고 한다. ‘고린도’라는 명칭은 헬라어로 ‘방탕함’ ‘사치스러움’ ‘성적인 문란함’과 같은 말의 어원이 될 정도였다.
고린도 아폴론신전과 남쪽에 있는 아크로고린도스 입지적 조건으로는 완벽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아크로고린도스에 올라서면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로 접근하는 모든 배들을 감시할 수 있다. 그리고 맞은편 게라니아(Gerania‧1300m)산이 앞산으로 안성맞춤이다.
풍수적으로 고린도는 재물과 사람이 모이는 명당에 속한다. 본토와 반도를 연결하는 지협(地峽)지점으로 번창할 수밖에 없는 위치다. 남쪽에 있는 아크로고린도스는 통바위 같은 암벽으로 기운이 넘친다. 지기(地氣)가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올라온다. 각각의 신전 옆에는 우물이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바다가 있다. 지기와 수기가 조화를 이룬 터다. 아래는 태양의 신으로 양이 넘치고, 위는 여성 신으로 음이 넘쳐난다. 남성과 여성, 양기와 음기, 수기와 지기, 이 얼마나 완벽한 조화인가. 그 땅이 고린도다. 한 마디로 명당이다.
폐허가 된 유적지엔 거주지, 감옥, 원형극장, 광장, 공동 우물, 공동화장실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은 공동체였다. 지상도 그렇고, 지하에 드러난 한 단면도 화려한 과거의 영광을 대변하는 듯했다.
고린도 고고학박물관엔 코와 머리가 잘려나간 석상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현지 가이드는 “기독교인들이 처음 그리스에 왔을 때 다신을 믿었던 그리스에서 제일 먼저 한 작업은 신들의 조각상에서 코를 깨거나 두상만 잘라내는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작업은 유일신인 기독교에서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행위라고 덧붙였다.
▲델피마을의 시계탑. 이곳에서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촬영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Ora's rock(오라스 록)’란 표시가 있어 옛날 신탁을 하던 장소로 알리고 있다.
▲델피 마을 중앙에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에 오라스 록 신탁바위가 있다.
델피는 고린도와 아테네와는 조금 다르다. 델피 가는 길목에 조그만 그림 같은 마을이 하나 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나온 마을이다. 마을 이곳저곳 둘러보며 드라마에 나온 장소와 비교해 본다. 눈에 띄는 바위가 하나 있다. 산 능선 사면을 따라 기운이 흐르다 바위에서 응집되어 솟아오른 ‘결국(結局)’의 형국이다.
우뚝 솟은 바위에 교회탑을 만들어 시계를 세워놓았다. ‘송송커플’이 키스한 장소라고 현지 가이드는 소개한다. 그곳으로 간다. 입구에 ‘Ora's rock(오라스 록)’이라는 표시가 있다. 이곳이 바로 신탁을 받던 장소인 그 바위 표시다. 무심코 지나치다 놓칠 뻔 했다. 안내 그대로 하늘의 뜻을 받던 ‘신탁바위’라고 해도 될 만큼 기운이 응집돼 있다. 이곳에서 불과 몇 분 거리에 세계의 중심 델피가 있다.
▲델피는 산 사면을 깎아 도시를 조성했지만 제일 위에 원형경기장, 그 밑에 원형극장, 그 밑에 신전, 그 밑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구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델피는 산 사면을 깎아 도시를 건설했다. 제일 밑이 사람이 사는 장소고, 그 위에 신전, 그 위에 극장, 제일 위에는 원형경기장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도시를 가던 신전과 극장, 원형경기장은 필수적으로 건립돼 있다. 이 구조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일종의 고리역할을 하는 듯했다. 신전은 신과 통하는 장소고, 극장은 연극이나 노래 등 예술을 통해 정신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하고, 원형경기장에서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를 강건하게 단련시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신과 인간의 정신과 육체, 이 삼위일체는 고대문명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지 싶다.
신과 통하는 장소는 단연 델피다. 당시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신탁을 위해 모여들었다. 세계의 배꼽이라는 옴파로스를 상징하는 달걀 같은 바위가 있고, 바로 그 위에 최초에 신탁을 했던 장소라고 표시된 바위가 있다. 아폴론신전은 그 뒤에 있다. 파르나소스(Parnassos․2,200m)산이 병풍처럼 신전을 감싼다. 파르나소스산은 그리스에서 올림푸스산만큼이나 자주 등장하고 유명하다. 올림푸스산이 신들의 거쳐였다면 파르나소스산은 신의 계시를 사제를 통해서 받는 곳이다. 신탁은 델피의 아폴론신전에 인간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맡겨놓았다는 의미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 음악의 신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운명을 점치는 예언의 신이기도 했다.
▲산 사면을 깎아 조성한 신탁의 도시 델피를 감싸는 파르나소스 산과 맞은 편 키르페산과의 사이에 플레이토스강의 깊은 협곡을 볼 수 있다.
델피의 아폴론신전 수호신은 아폴론이다. 아폴론은 시‧음악‧광명‧예언 등에 능통했다. 예술의 여신인 뮤즈도 그의 밑에 있다. 파르나소스 정상은 파이드리아데스(Phaidriades). 파이드리아데스는 두 개의 타워링 같은 봉우리로 나눠져 반짝이고 있다. 일명 빛나는 바위다. 아폴론신전을 보호하는 듯 위협하는 듯 웅장한 위태를 뽐낸다. 플레이토스강의 높은 협곡(the high valley of the River Pleistos)이 두 산을 나누고 있다. 파르나소스의 앞산은 키르페(Mt Kirphe)산이다. 앞산엔 안성맞춤 높이로 자리 잡고 있다. 더욱이 키르페산에는 예술의 여신 9자매가 살았던 것으로 전한다. 주산과 앞산이 맞장구를 치듯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수호신이 아폴론이 될 수밖에 없는 지형적 구조다. 아테네와 고린도와는 또 다른 지형이다. 아테네와 고린도가 군신봉조형에 가깝다면 델피는 독불장군형이다. 홀로 우뚝 솟아 신과 통하기도 아주 좋다. 더욱이 깊은 협곡에 양쪽으로 갈라진 봉우리의 한 사면을 잘라 조성한 도시 델피는 기운이 넘쳐흐른다. 그 맞은편 앞산은 전형적 육산으로 파르나소스의 기운을 잘 받아주는 형국이다. 그리고 아폴론의 광명과 예술, 예지력을 보충해주는 듯하다.
그런데 델피가 왜 신탁을 받는 성스러운 장소가 됐는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험한 지형에 암벽 산을 깎아 힘들게 도시를 조성하고 신전을 건립했을까와 연결되는 의문이다. 신화에 따르면 사제(일종의 예언녀)는 아폴론신전의 ‘갈라진 틈’으로 올라오는 가스(프네우마라고 한다)를 흡입하고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예지해주었다고 전한다. 지금 그 흔적도 없고 고고학자들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단지 신화적 허구성이라고 취급했다.
하지만 그 이후 20세기 들어서 중요한 단서를 찾아냈다. 델피의 아폴론신전은 당시 온천지형이라고 한다. 지표면으로 올라오는 가스가 물과 만나 기포가 잘 생성하도록 배수와 도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가스가 올라오는 틈을 보호하기 위해 신전의 중심을 벗어난 남동쪽 지하에 신탁장소를 배치하여 가스를 흡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가스를 마신 사제는 몽롱한 상태에서 정신적 심리적 집중력을 높여 신과 영적으로 교감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사제는 매달 7일 신탁일에 적정한 농도의 가스를 흡입하고 신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결국 이 가스 때문에 현재의 위치에 델피를 건립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신탁장소 옆에는 어떻게 암벽 사이에서 그 많은 물이 흘러나오는지 신기할 뿐이다. 사제가 신탁을 하기 전에 목욕재계를 하던 곳인 성수 ‘카스탈냐’가 바로 그곳에 있다. 기운이 넘쳐나는 통바위 높은 산, 물과 가스, 그리고 사제, 신과 통하기엔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신탁의 장소다. 아폴론은 태양과 예술의 신이기도 했지만 예언의 신으로서, 델피의 수호신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과도 맞아떨어진다. 수호신과 입지적 조건, 두 가지가 한 세트 같이 여겨진다. 단지 델피는 풍수적으로는 그리 좋은 지형은 아니지만 산 사면을 깎아 만든 지형치고는 최대한 풍수를 맞추려고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글·사진 | 박정원 월간산 부장대우
●유적
▲암피폴리스에서 2300년 전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고대 무덤 입구에 2.1m높이의 여성 조각상이 있었고 조각상들은 플랫폼 샌들을 신은 모습이었다
▲에파이다브로스의 고대극장
▲신과 인간이 만난 땅
▲크레타 섬의 붉은 햇살
▲나바지오 해변
▲비환상적인 바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코르프 섬이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짜증만 나는 관광지로 변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호수가의 풍경 - 쿠르나스 호수
● ‘신화와 전설의 산’, 코카서스
‘신화와 전설의 산’, 코카서스
알프스 개척자의 새로운 대상으로 등반역사 시작
고대 그리스인들은 코카서스(Caucasus, 일명 카프카즈)산맥이 이 세상 끝의 경계선이라고 간주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 속에서는 코카서스산맥이 신화와 전설의 발생 현장으로 등장한다.
한 전설에 의하면 반신반인(半神半人, demi-gods), 즉 타이탄(Titan)인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속임수를 써서 하늘나라에서 불을 훔쳐 인류에게 전달한 범행의 대가로,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Zeus)의 분노를 샀다. 이후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의 카즈벡(5,047m)봉으로 추방되고, 그 산의 암벽에 쇠사슬로 묶인 채 독수리들이 날마다 그의 간을 파먹는 형벌의 고통을 겪었다. 훼손된 간은 매일 자라나 원상복구되는 바람에 프로메테우스는 반복되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헤르쿨레스(Hercules, 제우스의 아들)가 프로메테우스를 장기간의 쓰라린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콜키스(Kolkhis, Colchis)라는 고대국가에서 이아손(Jason)이 ‘황금으로 된 양털(Golden Fleece)’을 발견했다 하고, 스키타이(Scythia)에는 전설상의 용맹한 여인족, 아마존(Amazon)들이 거주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푸슈킨이 코카서스의 황금 봉우리에서 시적(詩的) 영감을 얻기 위해 이곳까지 여행한 적이 있고,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와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작품 속에도 코카서스가 등장한다.
중부 코카서스에는 4,270m 넘는 고봉 20개가 장관
코카서스의 거대한 산맥은 알프스보다 평균 고도가 900여 m 더 높고, 유럽의 흑해(黑海, the Black Sea)에서 시작되어 카스피해(the Caspian Sea)까지 장장 960km 길이로 뻗어 유럽대륙과 아시아대륙 간의 경계선을 형성한다.
코카서스는 서부 코카서스, 중부 코카서스, 동부 코카서스 3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서부 코카서스는 흑해에서 클룩코르패스까지이고, 돔바이 울겐(4,040m)이 최고봉이다. 동부 코카서스는 게오르기 하이웨이에서 카스피까지인데, 샨(Shan·4,551m)이 최고봉이다. 중부 코카서스에 5,000m급 봉우리들이 무명봉을 포함해 14개 솟아 있다. 서봉(5,633m)과 동봉(5,621m) 쌍둥이 봉우리로 구성된, 유럽대륙 최고봉 엘브루즈(Elbrus)를 비롯, 2위 고봉 슈카라(Shkhara·5,200m), 3위 디치타우(Dych-tau·5,198m), 4위 코슈탄타우(Koshtan-tau·5,150m)가 있고, 그밖에 5,000m급 봉우리들로는 푸슈킨(Pushkin·5,100m), 슈카라 웨스트(Shkhra West·5,057m), 양기타우(Jangi-tau·5,051m), 카즈벡(Kazbek·5,047m) 등이 있다. 이 중부 코카서스에는 몽블랑(Mont Blanc·4,807m)보다 더 높은 봉우리들이 12개나 솟아 있고, 높이 4,270m 이상의 봉우리 20개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코카서스 고봉들이 알프스의 수려한 고봉과 닮은꼴이라는 사실이 발견되기도 했다. 코카서스 2위 고봉 슈카라는 ‘코카서스의 몬테로자’로 불렸고,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의 산 카즈벡은 ‘코카서스의 융프라우’, 우슈바(Ushba·4,710m)는 ‘코카서스의 마터호른’, 양기타우는 ‘코카서스의 브라이트호른’, 코슈탄타우는 ‘코카서스의 쉬렉호른’, 디치타우는 ‘코카서스의 핀스터아르호른’이라는 별칭으로 통했다.
1865년 알프스에서 마터호른 등정을 끝으로, 황금시대가 막을 고하자, 알프스의 개척자들은 코카서스산맥과 힌두쿠시(Hindu Kush, 최고봉 Tirich Mir)산맥에서 다른 등반대상지를 물색했다. 코카서스가 히말라야보다 가깝고, 고도가 낮아서 고소적응이 수월하고, 가파르고 기나긴 능선과 스퍼(Spur, 돌출부)가 훌륭한 암빙 루트를 제공해 준다는 이점 때문에 이 산맥이 영국 산악인들이 선호하는 등반 대상지로 부각되었다.
19세기 후반인 1868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생 더글라스 윌리암 프레시필드 탐험대는 코카서스 등반의 효시를 이룩했다. 그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와 독일 산악인들이 주도했던 20세기 초반의 벽 등반 시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동서 냉전기에 코카서스에서 서양 산악인들이 자취를 감추자, 코카서스는 러시아 산악인들의 등반 독무대로 활용되었다.
코카서스의 뛰어난 등반이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등반 업적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잃고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사실이었다. 영국의 여류등반사가(登攀史家) 오드리 설켈드(Audrey Salkeld) 여사와 베르무테즈는 코카서스 등반기 <ON THE EDGE OF EUROPE: MOUNTAINEERING IN THE CAUCASUS>를 간행했다. 그들은 이 책 속에서 영국 탐험가 프레시필드가 저술한 <중부 코카서스의 탐험기와 등반일지>와 <코카서스의 탐험기>를 포함, 알프레드 머메리의 <디치타우 초등기>, 롱스태프와 래번의 <코카서스 등반기>, 젠킨스의 <테트눌드 북벽 초등기>, 에베레스트 초등대장 헌트와 캉첸중가 초등자 조지 밴드와 파울러의 <코카서스 등반기>를 총망라했다.
영국의 프레시필드는 이튼과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고, 큰 재산가여서 부담 없이 탐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862년 17세 때 알프스 몽블랑을 등정했고, 이탈리아 롬바르드 알프스의 프레자넬라(3,556m)와 몽블랑산군의 투르 롱드(Toor Ronde·3,792m), 그리고 피츠 베르니나를 비롯한 여러 봉우리들을 초등하며 알프스에서 5년간 하계등반을 했다. 그러나 그는 때로는 가이드들이 로프로 끌어 올려 등정했다. 다시 말해 가이드들의 짐짝 노릇을 하며 등정했기에 자신은 노련한 등산가라기보다는 탐험가로 인정받기를 희망했다.
프레시필드는 대학에서 고전 문학과 시를 전공 중에 코카서스산맥에 매료되었고, 1868년 23세 때 동료 터커(Tucker)와 샤모니 가이드 요셉 데부수드와 함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극동의 마운트 아라랏(Mount Ararat) 등정을 시도했다. 프레시필드가 고산병에 걸려 일찍이 등반을 포기했고, 터커도 만년설 위로 몽블랑 높이만큼 단독 등정을 시도하다가 퇴각한 후 코카서스산맥의 남쪽에서 등반을 시작해 ‘코카서스의 융프라우’라고 불리던 아름다운 산, 테트눌드(Tetnuld·4,974m)의 피라미드 경관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영국의 유명한 알프스 개척자 무어(Moore)와 합류한 후 러시아와 독일 측량사들을 만나 코카서스산맥의 지형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7월 1일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시련을 겪었다고 전해지는 사화산(死火山) 카즈벡을 남벽으로 초등했다(후에 모리츠 바그너가 1844년 이 봉우리를 초등했다는 반론이 제기됨). 그들은 공포 속에서 가파른 북벽으로 하산하던 중 터커가 빙벽에 스텝을 깎다가 추락했으나 프레시필드와 무어의 자일 확보로 무사했다.
그들은 오세티안마을에 도달했을 때, 떼강도를 만났으나 아이스 액스를 휘둘러 쫓아버렸고, 높고 가파른 쌍둥이 봉우리 우슈바의 아름다운 산경을 바라보고 넋이 나갈 정도로 매료되었다. 이 봉우리는 마치 알프스의 마터호른을 겹쳐 놓은 듯해 ‘코카서스의 마터호른’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유럽 대륙 최고봉 엘브루즈 밑에 도달했다. 1829년 러시아의 엠마뉴엘 장군이 이끄는 코카서스 측량대가 엘브루즈 초등자에게 400루블의 상금을 내걸었을 때, 과학자 칼라(Kallar)는 안개 속에서 그 봉우리를 단독으로 등정해 그 상금을 수령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영국 산악인들은 이 초등을 증거 불충분으로 믿지 않았다. 당시는 코카서스의 정확한 측량이 이룩되기 이전이어서 산 정상의 고도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프레시필드 일행은 고도가 엘브루즈 서봉보다 조금 낮은 동봉을 최고봉으로 착각하고 등반하기 시작했다. 동봉의 정상 피라미드, 원뿔 모양은 뒤집어 놓은 찻잔을 방불케 했다. 그들은 단 한 차례의 비박 끝에 정상을 밟고, 자신들이 엘브루즈의 진정한 초등자들이라고 자부했다. 어떤 산이건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지만, 엘브루즈는 사화산으로 높이만 조금 더 높을 뿐이지 산경은 다른 봉우리들의 아름다움에 못미쳤다. 중부 코카서스에 늘어선 설봉들의 산경이 알프스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봉우리들이 더 뾰족하고 그 사이 계곡이 더욱 깊어 보였다.
그들이 엘브루즈 정상에서 바라본 코슈탄타우와 슈카라, 디치타우, 그리고 카즈벡까지 늘어선 고봉들의 아름다운 파노라마는, 그들이 정상에서 겪은 혹한의 고통을 보상해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알프스 몽블랑 정상에서 페닌알프스를 바라본 광경이, 그 파노라마의 축소판과 흡사했다. 프레시필드는 코카서스의 2위 고봉 슈카라를 ‘코카서스의 제왕’으로, 그리고 제4위 고봉, 코슈탄타우를 ‘코카서스의 여왕’이라 평가했다
▲중부 코카서스의 아름다운 연봉들.
왜소한 난쟁이들이 불안에 떨며 기고 헤매는 형국
1874년 영국의 무어(A.W. Moore)가 이끈 제2차 코카서스 원정대에는 알프스 개척자 호레이스 워커, 가디너, 그로브, 가이드 크누벨이 참가했다. 워커는 1965년 무어와 알프스의 난코스 브렌바 스퍼(Brenva Spur)를 초등했고, 1868년 그랑드조라스 북벽의 워커 스퍼와 에크랭을 초등했다. 가디너는 알프스에서 가이드 없는 등반의 선구자로 활동했으며 에크랭과 메이지(Meije)를 초등한 경력이 있었다. 그로브는 알프스의 당데랑, 치날 로트호른, 에귀 드 비오나사이 초등자였다.
그들은 먼저 엘브루즈산군의 줄트란콜-바시(3,806m)를 초등했다. 무어를 제외하고 그들은 엘브루즈 동봉보다 조금 더 높지만, 난이도는 동봉에 미치지 못하는 서봉을 등정, 엘브루즈 초등을 비로소 완성시켰다. 무어는 정상 부근에서 두 명의 러시아 친구들을 기다리다가 등정 기회를 놓쳤고, 다음날 등정을 시도했지만 폭풍을 만나 퇴각했다.
그들은 베친기빙하를 올라 말굽(horseshoe, 편자)형 베친기벽(Bezingi Wall) 밑까지 접근했는데, 이 능선에는 코카서스의 높이 5,000m 이상의 봉우리들 14개 중에서 11개 봉우리가 늘어서 있다. 슈카라, 디치타우, 양기타우, 게스톨라(Gestola, 4,860m)는 코카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고, 또한 이 벽들의 종주는 코카서스에서 최대 난코스 중 하나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난코스의 등반을 위험성 때문에 외면했다.
1884년 헝가리 산악인 모리스 드 데치(Maurice de Dechy)가 가이드 부르게너와 루펜과 함께 엘브루즈 서봉을 재등정하고 마미솜 코크를 초등했다. 1886년 코카서스의 또 다른 개척자 클린턴 덴트(알프스의 드류 초등자)는 돈킨, 가이드 부르게너, 안덴마텐과 함께 코카서스의 북쪽에 위치한 베친기계곡을 탐험했다. 그들은 3,048m 지점에 캠프를 구축했으나, 원주민들이 그곳까지 짐 운반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이드 부르게너 혼자 짐 운반을 도맡았다.
테트눌드빙하의 거대한 크레바스의 빙벽들이 등로를 가로 막아, 그들은 그 장애물을 어렵사리 돌파했다. 그들은 울퉁불퉁한 암릉을 지나고 작은 돌멩이 들이 뒤덮인 사면을 지나자 만년설이 나타났다. 그들은 거벽을 오르고, 아디네 콜(Adine Col)에 도달했다. 동쪽에 슈카라봉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등반 대상지인 게스톨라가 슈카라와 아름다운 테트눌드 사이에 있었다.
가이드들이 선등을 교대하며 루트를 개척했다. 푸른 빙벽에 얇은 눈 껍질이 덮여 있었다. 그들은 설벽에 스텝을 깎으며 전진했고, 커니스(눈 처마)를 돌파해 능선 꼭대기에 올라선 다음 빙벽에 스텝을 깎으며 횡단해 테트눌드 콜(Col)에 도달했다. 게스톨라 정상은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코카서스의 거대한 빙벽에서 그들의 처녀 등반은 왜소한 난쟁이들이 반신반의, 즉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에 떨며 포복하며 헤매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들이 위쪽으로 한 발자국 전진하면 등정의 성공이 확실히 예감되었고, 한 발자국 미끄러져 내리면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들이 스텝을 깎는 동안 등반이 지체되는 순간은 견디기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나타나고 악천후라도 시작되면, 그들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방에서 천둥소리가 메아리 치고, 검은 뇌운(雷雲)이 아래 계곡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드디어 게스톨라를 서릉으로 등정했고, 디치타우 산군의 일부를 탐험하고 하산했다.
영국 산악인 덴트는 중부 코카서스의 고산지대를 ‘유럽 대륙의 가장 웅대한 얼음 산맥’이라고 극찬했는데,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1887년 프레시필드는 3명의 샤모니 가이드 데부아수드, 데부아수드의 동생 미쉘과 미쉘의 조카 데잴루드(Desailloud)를 고용하고, 헝가리 산악인 데치(Dechy)와 코카서스를 다시 방문했다.
프레시필드는 두 명의 가이드와 함께 우슈바를 정찰했다. 그들이 능선에 도달했을 때 우슈바의 두 정상 사이에 있는 얼음 걸리가 바라보였다. 두 정상 사이에는 거대한 눈 사다리가 이어져 있었다. 절벽 위로 눈사태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며, 불의에 적의 습격을 받은 뱀처럼 쉿 소리를 연발했다. 반대쪽 거대한 암벽에서는 돌사태가 유황 냄새를 풍기며 쏟아져 내려 장대한 얼음 곡선을 이루고 있는 메스티아(Mestia)빙하의 남쪽 분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우슈바의 발판, 3,811m 지점까지 진출하고 악천후로 퇴각했다.
그들은 달밤에 등반을 시작해 ‘코카서스의 융프라우’라고 불리던 테트눌드 남서릉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베르크슈룬트(Bergschrund, 가로지른 크레바스)를 넘고 능선의 4,572m 지점에 도달했다. 기나긴 능선이 정상으로 이어졌는데, 능선 상에 솟아오른 가파른 설벽들이 정상의 모습을 감추고 쉽사리 보여 주지 않았다. 선등자가 교대로 계속 바뀌었다. 그들이 안부를 출발한 지 4시간 후 정상을 밟아 초등했다. 그들 앞에 덴트와 돈킨이 초등한 봉우리, 게스톨라가 바라보였다. 슈카라, 코슈탄타우, 디치타우, 디안가 봉들도 바라보였다. 그들은 우키우(Ukiu, 4,350m)를 남동릉으로 초등했고, 쇼다(Shoda·3,408m)와 굴바(3,790m)도 등정했다.
▲유럽의 최고봉 엘브루즈의 동봉(3)과 서봉(4). 서봉이 동봉보다 더 높지만, 보이는 각도 때문에 낮게 보임.
동구조룬 동봉 초등 후 고슈탄타우 등반 중 4명 실종
프레시필드는 1896년 유명한 이탈리아 사진가 비토리오 젤라(Vittorio Sella)의 코카서스 사진들을 곁들인 <코카서스의 탐험기(Exploration of the Caucasus)>를 저술했다. 이 책은 코카서스의 ‘로제타석(Rosetta Stone,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의 단서를 제공한 비석)’으로 평가될 정도로 코카서스의 복잡한 산맥의 여러 등반루트를 상세하게 서술했다.
1888년 7월 24일 영국의 알프레드 머메리와 가이드 하인리히 추르풀루, 2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등반 팀이 코카서스 3위 봉 디치타우를 남서릉으로 등정했다. 타타르(Tartar)인 사냥꾼을 짐꾼으로 삼고 그들은 등반을 시작했다. 그들은 텐트 속에서 얼음을 녹여 뜨거운 차를 끓이고 비스킷으로 식사를 했다. 그들은 가파른 얼음 쿨와르로 등반을 시작, 추르풀루는 얼음 걸리에 스텝을 깎아 얼음 계단을 만드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그가 깎은 스텝 사이 간격이 1.2m였기에 머메리는 중간 스텝을 더 깎는 수고를 했다.
그들은 걸리를 벗어나 미쉬르기 타우로 뻗어 있는 레지와 걸리로 등반을 계속했고, 좌측 암벽의 거대한 슬랩을 작은 바위 주름을 이용해 트래버스하고 칼날 리지에 도달했다. 그들은 게스톨라, 테트눌드, 양가봉 정상보다 더 높이 올랐다. 슈카라의 눈처마 능선도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사나운 돌풍이 구름 조각들을 능선의 여기저기로 휘몰아쳤다. 경사 60도의 암벽이 나타났다. 머메리는 선등자 추르풀루가 내려보낸 로프를 잡고 절벽을 올랐다. 크랙이 나타나자 한쪽 벽에 팔꿈치와 등을 대고 다른 쪽 벽에 무릎을 대며 기어 올랐다.
한 개의 촉스톤(Choke stone)이 크랙에 끼어 등로를 막자 추르풀루가 촉스톤의 뒤쪽 좁은 틈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꿈틀거리며 비집고 통과했다. 그들은 베친기빙하에서 정상까지 이어진 남서 버트레스, 즉 하늘 사다리로 상당한 거리를 기술 등반 급의 암벽등반을 실행하며 요즘도 2, 3일 걸리는 남서릉의 등정과 하산을 하룻밤 비박하고 11시간 만에 이룩했다. 머메리의 통찰력과 추르풀루가 알프스에서 연마한 노련한 등반기술, 즉 적당한 레지와 크랙을 찾아내어 등로를 개척한 힘의 합작품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코슈탄타우를 초등했다고 착각했다. 이 디치타우 남서릉은 코카서스의 고전 루트 중 하나로 유명하다. 머메리 일행은 이틀 밤 비박하고 코슈탄타우(5,150m)를, 하룻밤 비박 끝에 게스톨라를 등정했다. 머메리 일행은 여러 산 고개를 패스했고, 세메노브스키(Semenowski·4,054m)를 초등했다.
며칠 후 영국의 헨리 홀더, 헤르만 울리, 존 코킨은 스위스 가이드 울리히 알머와 크리스천 로트와 디치타우를 북릉으로 재등했다. 그들은 정상에서 머메리 일행의 가이드 추르풀루가 쌓아놓은 케언(cairn, 원추형 돌무더기)을 발견하고, 케언 대신 정어리통조림통을 남겨 두었다.
며칠 후 홀더, 울리, 알머, 로트는 카틴타우(Katyn-Tau·4,970m)를 등정했다. 코킨과 두 명의 가이드들은 슈카라를 등정했는데, 가이드들이 6시간 동안 스텝 커팅을 한 공로 덕분이었다. 그들은 양기타우의 동봉을 등정 후, 우슈바의 쌍둥이 정상으로 이어지는 쿨와르를 이용해 남쪽에서 우슈바의 남봉보다 14m 낮은 우슈바의 북봉을 초등했다.
돈킨과 폭스는 스위스 가이드 2명과 동구조룬(4,442m) 동봉을 초등한 후, 코슈탄타우를 등반 중에 4명이 실종되었다. 이 산악 사고는 1865년 마터호른 초등시의 4명이 추락한 등반사고 이후 고산에서 발생한 최대의 비극이었다.
다음해에 울리는 돈킨과 폭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수색대에 참가해 동료와 함께 미슈기르 동봉(4,918m)을 등정했고, 남릉으로 코슈탄타우, 북동릉으로 아일라마(4,547m)를 초등했다. 이탈리아의 유명 사진가 젤라(Sella) 일행은 엘브루즈를 등정한 후 울루아우츠 바시(4,670m) 남동릉과 라일라 중앙봉(4,084m)을 초등했다.
1890년 코킨과 홀더는 유명한 가이드 알머와 함께 우일파타(4,410m), 브르드슐라(4,368m), 치츠바르가(Zichnwarga·4,138m)를 초등했다.
1895년 덴트와 울리 일행은 치델리(4,277m)를 초등했다. 1896년 코킨, 울리, 홀더는 가이드 없이 이디르수바시(4,370m)를 북릉으로 초등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1903년 슐츠 일행이 ‘코카서스의 마터호른’이라는 별칭의 우슈바 남봉(4,710m)을 초등했다. 그는 12명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스위스 합동 등반대를 이끌고, 기나긴 7주일 동안 메스티아타우(4,130m), 슈켈다(Shkhelda·4,320m), 양기타우(Jangi-tau·5,051m), 리얄베르(Lyalver· 4,360m) 등 30개 봉우리들과 고개(Passes)를 등정했는데, 그 절반 이상은 초등이었다.
영국의 유명 산악인 롱스태프 일행, 5개봉 초등
영국의 유명 산악인 롱스태프(T. G. Longstaff)와 롤레스톤은 29일 동안, 비와 눈, 우박을 맞으며 라일라(Laila·4,084m)를 비롯한 여러 개의 봉우리를 등정했다. 그들은 코카서스에서 가장 장대한 산, 쌍둥이 봉우리 우슈바를 바라보았는데 얼음이 덮인 절벽 위에 또 다른 절벽이 연이어 솟아올라 있었다. 롱스태프는 이 봉우리가 가르왈 히말라야의 아름다운 산, 쌍둥이 봉우리들, 즉 인도히말라야의 난다데비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그들은 라크라(Lakra·3,714m), 바실타우(4,200m)를 등정했다. 두 사람은 우박을 동반한 폭풍속에서 동벽으로 티크틴겐(4,610m)의 등반을 시작했다. 롱스태프는 암벽 등반 중에 두 개의 핸드홀드가 무너지며 추락해 자일에 매달렸다. 롤레스톤이 가파른 빙벽에 한 시간 동안 핸드홀드와 풋홀드를 깎아서 V자형의 갈라진 틈에 도달했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곧 등정에 성공하고 캠프로 귀환했다.
밤새 강풍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과 비가 쏟아졌다. 그들은 테트눌드의 거대한 피라미드에 도전할 작정이었다. 프레시필드는 이 봉우리가 코카서스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남서릉으로 이 산을 등정했다. 그들은 울루타우챠나(4,203m)를 남서릉으로 등정했다.
코카서스의 제2고봉 슈카라(5,200m, 1888년 코킨과 울리히 알머, 로트가 초등함)의 남벽은 알프스 몬테로자의 마퀴그나가(Macugnaga) 벽을 닮았다. 슈카라 서봉(5,057m)은 미답봉이었다. 롱스태프와 롤레스톤은 낙석과 낙빙의 통로인 계곡을 오르고, 슬랩과 눈 덮인 암벽을 지나 칼날 능선에 붙었다. 두 사람은 알프스 브렌바의 유명한 얼음 능선을 오르듯이, 이 칼날 능선에 걸터앉아 돌파했다. 그들은 독수리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 위로 선회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를 연상했다. 정상 아래 바위 선반에서 롱스태프가 얼음 덮인 핑거 홀드를 움켜잡을 때 롤레스톤이 아이스 액스로 그의 궁둥이를 밀어 올렸다. 그들은 거대한 눈 처마인 정상에 도달해 케언을 쌓았다. 그들이 연속 등정한 7개봉 중 5개봉은 초등이었다.
다른 독일 팀, 판 일행은 여섯 번 비박하며 우슈바의 남봉(4,710m)과 북봉(4,696m)을 최초로 트래버스하는 데 성공했다.
1909년 여성 산악인 쿤츠는 가이드 2명을 대동하고 나카즈비타(Nakhasbita) 남봉(4,300m)과 북봉(4,393m), 치츠가르티촌(Zichgartichon·4,136m), 주간타우(Sugantau·4,490m)를 연속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1910년 오스트리아 산악인 피셔 박사 일행은 수아티시코(4,473m), 차리아티코(4,060m), 칼트베르(4,409m)를 차례로 등정했다. 하그와 램 두 대원들은 나크라타우(4,277m)를 북서릉으로 등정한 후, 동구조룬 3개봉, 즉 서봉(4,437m), 주봉(4,452m), 동봉(4,442m) 트래버스에 성공했다.
1912년 빙클러 일행은 야일리크(Jailik·4,535m)와 켄트차트(Kentchat·4,170m)를 등정했다. 1914년 영국 산악인 래번 일행은 코카서스의 카라곰코 동봉(4,515m)을 비롯한 4,000m급 4개봉을 등정했다. 1928년 독일의 바우어 일행은 카틴타우를 노스 버트레스로 등정한 후, 능선으로 등반을 이어가며 아디시타우, 게스톨라(4,860m), 리얄베르를 두 번 비박하며 연속 등정, 코카서스에서 장거리 트래버스의 효시를 이룩했다.
1929년 독일의 메르클(훗날 낭가파르바트에서 조난당함) 일행은 나베리아니타우(4,130m)의 등정에 이어 토트타우(4,000m), 스칼라 보두르쿠(4,182m), 쿨라크타우(4,062m)를 등정했다.
1930년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토마제크와 뮐러는 슈카라(5,200m) 노스 립(North rib)을 등정하고, 북동릉으로 하산했는데, 높이 4,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6일 밤씩이나 비박하는 고초를 감내했다. 그들은 또한 바슈카아우츠(4,460m)의 ‘하늘 능선,’ 즉 북릉을 등정했다.
오스트리아 콜프 일행은 푸트나르긴(4,100m)을 초등한 후 누암쿠암을 트래버스했다. 오스트리아 하일링거 일행은 남동릉 걸리로 코슈탄타우를 등정하고 북동릉으로 하산했다.
1931년 게르모게노프 일행은 미세스타우(4,320m)를 남릉으로 초등했다. 스위스 산악인 2명과 러시아 산악인 2명이 미세스타우 남동봉을 등반 중에 실종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포핑거, 프랑크, 몰단, 신틀마이스터 4인은 북동릉으로 리얄베르를 등정하고, 게스톨라를 트래버스한 후, 테트눌드 북동릉을 초등했다. 또한 이 4인의 등반 팀은 노스 버트레스로 카틴타우를 등정한 후, 아디슈타우를 넘어 다시 게스톨라, 리얄베르를 트래버스하고, 차네르 패스(Channer Pass)와 미세스코시에 도달했다.
이어 프랑크를 제외한 포핑거, 몰단, 신들마이스터 3인은 말굽형 트래버스, 즉 일명 ‘베친기(Bezingi)’라 불리는 ‘베친기벽(Bezingi Wall) 트래버스’ 루트를 개척했다. 이 등반 루트는 코카서스에서 가장 유명한 루트 중의 하나이다. 총 길이가 17km로 루트의 80%가 가파른 빙설 루트이고, 20%가 암벽 루트이다. 이 트래버스에는 여러 개의 5,000m급 봉우리들의 트래버스가 포함된다. 그들은 먼저 슈카라의 봉우리들을 트래버스하며 3개의 무명봉, 즉 5017m봉, 5010m봉, 5130m봉을 초등했다. 그들은 다음으로 양기 동봉과 서봉을 트래버스하고, 카틴타우, 게스톨라, 리얄베르를 트래버스했는데, 강풍 때문에 텐트 설치가 불가능해 설동이나 얼음 동굴에서 여섯 번 비박하고 이 위대한 등반을 성취했다.
1934년 포포프 일행이 울루카라(4,302m)를 등정했다. 스위스 산악인 잘라딘 일행은 미슈르기타우(4,926m)를 초등했고, 1935년 러시아의 산악인 구사크는 독일 산악인들과 함께 엘브루즈 서봉을 동계 초등했다. 러시아의 산악인 키에셀은 동료와 함께 북릉으로 우슈바 북봉을 등정했다. 메트레펠리와 그의 동료들은 브체두크(4,271m)를 초등했다.
오스트리아 산악인 슈바르츠그루버 일행은 양기타우 주봉의 최대 난코스, 북동 필라를 초등했는데, 이 루트가 바로 코카서스의 가장 유명한 루트 중의 하나인 ‘슈바르츠그루버 립(Schwarzgruber Rib)’이다. 독일 산악인 괴트너 일행은 콜로타 타우(4,167m), 테플리타우(4,425m), 아르콘타우(4,150m)를 초등했다.
1936년 슈바르츠그루버 등반대는 여러 개의 장거리 트래버스 루트, 즉 티크덴겐 트래버스, 슈카라-양기 트래버스, 게스톨라-리얄베르 트래버스, 디치타우-미스르기타우 트래버스, 그룸콜바시-코슈탄타우 트래버스, 마지막으로 키킨타우-아디시타우 트래버스 루트들을 연속해서 개척해 유명 산악인이 되었다.
1937년 영국 산악인 젠킨스가 동료들과 테트눌드 북벽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1957년 영국의 여성 산악인 던시드가 러시아 산악인들과 엘브루즈를 친선 등정했고, 다음해 에베레스트 초등대의 헌트 대장과 캉첸중가 초등자 조지 밴드를 포함한 8명의 영국 산악인들이 러시아 산악회의 초청으로 코카서스를 방문했다. 조지 밴드와 해리스가 디치타우 동봉의 사우스 버트레스를 초등했다.
동서 냉전 시대에 러시아 산악인들이 코카서스에서 기술등반을 실행해 벽등반을 시작했다. 그들은 미시르기 동봉의 노스립(North Rib), 디치타우 북동벽의 중앙 필라, 코슈탄타우 북벽, 푸슈킨 남벽, 슈카라 서봉의 남벽, 우슈바 남봉의 서벽과 북벽 등에 여러 개의 신 루트를 개척해 코카서스 등반의 금자탑을 이룩했다.
1959년 게스톨라의 가파른 북벽, 우슈바 남벽의 동쪽 립, 디치타우 사우스 스퍼, 이스파니 피크(4,200m) 동벽이 등정되었다. 1960년 우슈바 북벽(4,696m)의 북동벽, 미시기리 동봉(4,918m)이 등정되었다. 1961년 4명의 러시아 산악인들이 코슈탄타우 북벽의 난코스, 거대한 우측 필라를 등정했다.
스코틀랜드의 매킨스(MacInnes)와 리취가 러시아의 투르와 반다로프스키와 함께 슈켈다의 3개봉(4,299m, 4,295m, 4,320m)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트래버스하다가 폭풍을 만나 12일간 사투를 벌이고 생환했다.
동부와 서부 코카서스에 각 40개 넘는 루트 개척
1962년 6명의 러시아 산악인들이 우슈바 남봉의 북서벽에 위치한 기나긴 북서 립을 폭풍에 시달리며 8일 만에 등정했다. 1964년 5명의 산악인들이 피크 프레시필드(4,050m)의 사우스 필라를 초등했다. 1965년 클루바네크가 이끄는 슬로바키아 산악인들이 악조건 속에서 코카서스의 제2고봉 슈카라 북서벽을 초등했다.
오스트리아 산악인 바니스 일행 3명은 고도가 5,000m급이고, 총길이가 17km에 달하는 말굽형 벽, 즉 베친기벽의 트래버스를 9번째로 감행했다. 이 루트는 중부 코카서스에서 가장 중요한 루트 중의 하나로서, 능선 14km가 빙설 루트이고, 나머지 3km가 암벽 루트다. 블라드미르 샤타에프를 비롯한 3명의 러시아 산악인들이 우슈바 동계 초등을 이룩했다. 가레프스키 일행이 푸슈킨 남벽을 등정했다.
1969년 그루지아 산악인 4명이 코카서스의 제2고봉 슈카라 남벽을 등정했다.
이듬해 1970년 스코틀랜드의 매킨스 외 7명의 산악인들이 피크 슈로프스키의 북벽을 3일 만에 등정했다. 그루지아 산악인 바바셀리 일행이 슈카라 남벽의 수직벽 1,500m에서 5일간 비박하며 180개의 피톤을 설치하고 등정했다.
1973년 7명의 러시아 산악인들이 우슈바 남벽에 직등 루트를 개척했다. 1978년 5명의 그루지아 산악인들이 슈카라 서벽의 남서벽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1979년 독일의 남부 바이에른 산악인 3명이 슈카라 북동릉을 등반 중에 조난당했다.
1981년 체코의 스미트가 단독으로 울리타우의 경사도 80도의 가파른 북벽에 신 루트를 개척했고, 2명의 여성 산악인들이 이 루트를 재등했다. 1982년 5명의 러시아 산악인들이 테트눌드 북벽의 중앙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5명의 러시아 산악인들이 우슈바 남봉의 북서벽에 위치한 빙폭을 돌파했다. 1984년 동계에 5명의 폴란드 산악인들이 슈켈다 중앙봉(4,295m) 북벽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가질로프 외 3명이 디치타우 남서벽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스코틀랜드의 산악인 루벤스와 브로드헤드가 짙은 안개와 눈보라 속에서 연속 등반으로 동구조룬과 나카라를 트래버스하고, 우슈바 북릉을 경량급으로 등정하고, 울루카라 북벽의 빙벽을 등정한 후 엘브루즈를 등정했다. 1990년 5명의 러시아 산악인들이 우슈바 남봉의 남서벽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동부 코카서스에서는 1884년부터 1992년까지 마미존(4,358m) 등정을 비롯한 40개 이상의 신 루트가 개척되었고, 서부 코카서스에는 1901년부터 1990년까지 돔바이(4,040m) 등정을 비롯해 역시 40개 이상의 신 루트가 개척되었다.
출처 | 월간산 557호 글 | 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
▲아테네의 눈덮인 파나카이코 산의 먹구름
●메테오라, 대 메테오론 수도원(Megalo Meteoron)
● 산토리니섬
▲동화나라 - 그리스 산토리니 섬
● 아테네
▲먹구름에 뒤덮인 그리스 아테네 국회의사당 13.1.24
▲화염병에 불타는 그리스 경찰관 2011.10.19.
▲불타는 아테네 12.2.12
▲놀라운 수로
▲아테네의 크리스마스
▲해지는 아크로폴리스 2011.10.19.
● 재해
▲아테네 13.2.22. 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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