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식품 이야기12/ 황광해의 우리가 몰랐던 한식/ 01-11 행위예술 같은 비빔밥 - 06-21 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라고?

상림은내고향 2022. 3. 8. 16:55

식품 이야기12/ 황광해의 우리가 몰랐던 한식 - 동아일보

01-11  행위예술 같은 비빔밥

2009 12, 느닷없는 ‘비빔밥, 양두구육’ 논쟁이 있었다. 미국 뉴욕타임스에 비빔밥 광고가 실렸는데, 곧이어 일본 언론인 구로다 가쓰히로가 “한국 비빔밥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음식”이라고 말한 것이다. 구로다는 당시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었다. 한국과의 인연도 30년이 넘었다. 그는 일본의 우익이자 지한파다. 1980년대 중반 이미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베스트셀러도 출간했다. 한국을 웬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한파 구로다’도 한국문화, 음식, 비빔밥은 정확히 몰랐다. 그는 비빔밥을 두고 여러 가지 나물들로 예쁜 모양새(양의 머리)를 만든 다음, 먹기 전 마구 뒤섞어, 엉망진창(개고기)으로 만든다고 했다. 왜 먹기 전 예쁜 모양새를 다 허물어뜨리고 비비는지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비빔밥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비빔밥 정신이 바로 멀티미디어입니다. 한국인은 복잡한 상황을 적당히 말아서 잘 지탱하는 법을 알아요. 그 복잡한 상황이 비빔밥이지요. 비빔밥은 참여예술입니다. 다른 요리와 다르게 손수 섞어 먹는 것이 특색이니까요. 

 백남준은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비빔밥은 밥과 여러 채소, 각종 장이 섞여 있다. 멀티미디어 음식이다. 비빔밥은 부엌에서 완성돼 나오는 음식이 아니다. 비빔밥은 먹는 이가 완성하는 음식이다. 여러 재료를 내놓으면 먹는 이가 직접 섞어서 먹는다. 먹는 이가 참여해서 완성하는 음식이다. 비빔밥이 개방, 공유, 참여의 웹 2.0과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구로다는 ‘닫힌 가마메시(솥밥)의 눈’으로 ‘열린 비빔밥’을 봤다. 그가 악의적으로 비빔밥을 폄하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의 ‘비빔밥 양두구육’ 이야기는 악의가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빔밥의 밥알이 깨진다고 젓가락으로 휘적거리는 이들도 있다. 잘못이다. 비빔밥은 숟가락으로 쓱쓱 비벼야 제맛이 난다. 그릇 안에서 밥 알갱이, 나물, 각종 장이 뒤섞여야 한다. 여러 식재료가 마찰, 충돌하고 마침내는 융합하여 복잡한 맛을 낼 때 제대로 된 비빔밥이 된다. 섞임, 충돌, 융합이 비빔밥의 핵심이다 

 백남준은 ‘전자와 예술과 비빔밥’이라는 수필도 남겼다. “하나의 그릇 안에서 동양과 서양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것이 백남준의 예술”이라고 했다. 이른바 비빔밥 예술이다.


 비빔밥의 기원을 두고 궁중에서 시작됐다, 병영에서 시작됐다, 기방(妓房)에서 시작됐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의미 없는 말이다. 비빔밥을 언제,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오래전부터 있었고 우리 핏속에 DNA로 남았다. 비빔밥 비비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잘 비빈다. 우리는 자연스럽지만 외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음식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일본은 가방형 문화, 한국은 보자기형 문화”라고 했다. 가방은 정해진 공간에 정해진 물건을 넣어야 한다. 보자기는 웬만한 물건은 다 받아들인다. 보자기는 어떤 모양의 물건이든 담을 수 있다. 보자기는 싸는 사람마다 모두 다른 모양의 꾸러미를 가진다. 비빔밥도 그러하다. 열 명이 비비면 열 종류의 비빔밥이 나온다 

 최근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가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와 인터뷰를 했다. 그가 비빔밥에 대해 “비빔밥에 관한 한 남과 북은 비슷하다. 제일 맛있는 음식은 비빔밥”이라고 말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평양 채소비빔밥이 명품이라고 했다. 태 전 공사가 평양에서 먹었던 비빔밥이 이규경의 평양 채소비빔밥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01-25  제사음식

 

명절 무렵이면 제사 음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는다. “바나나도 제사상에 올릴 수 있느냐”는 애교 섞인 물음도 있다. 바나나를 제사상에 올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돌아가신 조상이 바나나를 좋아하셨으면 바나나 사용이 흉은 아닐 것이다. 수박, 참외 등은 없었던 과일이다. 그러나 제사상에 수박, 참외를 사용한다고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과는 꾸준한 품종 개량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나타난 사과도 쓰는 판에 바나나를 피할 이유는 없다.


 제일 자주 받는 질문이 “제사 음식은 어떤 걸로, 어느 정도 차리면 좋으냐”는 것이다.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다”고 눙친다. 제사상은 각자 형편 따라 차릴 일이다. 집안 문제다. 남이 참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엉터리 이론도 있다.

제사상에 오르는 과일 순서를 ‘조율이시(棗栗梨枾)’라고 표현한다. 언제, 누가 제안한 것인지 근거는 없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없는 표현이다. ‘가정의례준칙’(1969)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조율이시는 대추, , , 감이다. 모두 조선시대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과일이다. 대추도 과일인지 의문은 든다. 만약 조율이시의 순서로 과일을 놓는다면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참외, 수박, 사과, 귤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홍동백서(紅東白西)도 근거 없는 표현이다. 붉은 과일은 제사상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둔다는 뜻이다. 녹색의 수박, 노란색 참외, 붉거나 푸른 사과, 노란 귤은 어디에 둘 것인가. 의미 없는 표현이다. 제사는 정성이다. 형식만 따지고 정작 중요한 의미는 잃어버린 것이 문제다. ()은 고인의 신분에 맞추고, 제사는 후손들의 신분에 맞춘다는 표현이 있다. 제사는 후손들의 경제적 정도에 맞춰야 한다. 정성이 으뜸이다.

 

 제사가 화려해진 것은 신분제도의 붕괴와 관련이 깊다.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양반 수가 급격히 늘었다. 갑오개혁(1894)으로 신분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반상에 대한 의식은 남아 있었다. 여전히 “우리 집안은…”이라고 뻐기는 이가 많았다. 결혼식, 초상, 제사 등을 통해 자신들의 부와 신분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들의 화려한 행태를 따라갔다. 제사 음식이 화려해진 이유다.

 

 좌포우해(左脯右해)는 기록에 남아 있다. 좌포우해와 우포좌해(右脯左해) 중 어느 쪽이 정확한지 묻는 내용이다. 좌포우해는 왼쪽에 고기 포를, 오른쪽에 육장(肉醬·젓갈)을 둔다는 뜻이다. 육장은 고기 장조림과 비슷하지만 다른 음식이다. (해·육장 등 젓갈)와 음료 식혜(食醯)를 혼동하기도 한다. ‘오른쪽에 식혜를 둔다’는 표현도 있다. 엉터리다. 식혜는 단술(감주)이다. 


 유교 사회에서 귀하게 여기는 제사 형식은 모두 네 가지다. 천신(薦新)은 새로 난 작물들을 조상에게 먼저 올리는 것이다. 궁궐의 종묘(宗廟)천신과 가정의 가묘(家廟)천신이 있었다. 천신은 거의 사라졌다. 사시제(四時祭)는 사계절에 한 번씩 지내는 제사다. 제사와 비슷한 상차림을 마련했다. 역시 사라졌다. 오늘날 사시제를 모시는 경우는 드물다.


 차례와 제사는 남아 있다. 차례를 ‘명절 제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틀린 표현이다. 명절에는 제사가 아니라 차례다. 차례는 새해 첫날을 알리는 신고식 정도다. 차례상은 매년 돌아가시는 날 모시는 제사상보다 소박한 것이다. 조선은 농경 기반의 유교사회였다. 이제는 농경, 유교국가가 아니다. 유교, 농경국가의 제사를 그대로 되살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름다운 전통은 형식이 아니라 정성에서 찾아야 한다.

 

02-08  전호나물

 

이달 초, 지인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제 나오기 시작합니다. 바다 날씨가 좋으면 10일 경이면 서울에서도 받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뜸 전호나물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연락했다. 나물 먹는 모임이다. 민어, 전어 먹는 모임은 있는데 나물 먹는 모임이 없을 이유는 없다. 전호나물은 묘한 녀석이다. 10월경에 싹을 틔우고 입을 내뻗는다. 다른 식물들이 모두 잎을 거둘 시기다. 차가운 겨울, 잎을 달고 지낸다. 계절을 거꾸로 산다. ‘눈 속에서 자라고, 눈 속에서 채취하는 나물’이라 귀하게 여긴다. 향이 아주 좋다. 아직은 울릉도 자생이 흔한 편이다 

좋았던 나물, 귀하게 여겼던 나물 반찬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1670년경 편찬된 ‘음식디미방’에 흔하게 나타났던 동아는 거의 사라졌다. 피마자 이파리도 귀하다. 가정에서 피마자 나물을 먹는 경우는 더 귀하다. 화살나무 새순이 홑잎나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다. 꾀꼬리버섯도 보기 힘들다. 꾀꼬리버섯은 외(오이)꽃버섯이라는 예쁜 별명도 가지고 있다. 먹을 수 있는 취나물이 20여 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다. 참취, 곰취, 수리취 등만 흔하게 볼 수 있다. ‘봄 냉이는 향으로, 가을 냉이는 맛으로 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젠 “가을에도 냉이를 먹어요?”라고 묻는 이들이 더 많다

우리는 나물에 관한 한 대단한 능력을 지닌 민족이다. 콩을 먹는 민족은 많지만 싹을 틔워 콩나물로 먹는 민족은 드물다. 파독 광부, 간호사들은 고사리를 먹지 않는 독일의 산속에서 고사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흔히 가난했기 때문에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살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산나물, 들나물을 먹었다고 말한다. 틀렸다. 중세 유럽도 가난했다. 숱하게 굶고 또 죽었다.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한꺼번에 수백만 명이 죽기도 했다. 일본도 우리보다 더 오랜 기간 대기근을 겪었다. 덴메이 대기근 시기(17821788)에는 식인도 서슴지 않았다. 모두 어려웠지만 유독 우리만 나물 문화를 잇고 발전시켰다.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먹을거리에 대한 호기심이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에서 일했던 언론인 홍승면(19271983)의 말이다.


“나물 문화는 우리 핏속에 녹아 있다. 일제강점기, 북간도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다.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 사람들 그리고 주변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그중 조선 사람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른 봄, 나물바구니를 끼고 산에 오르는 이들은 모두 조선 사람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조선 사람들은 봄만 되면 산과 들로 나물을 캐러 다녔다. 

‘가난했기 때문에 나물을 먹었다’는 엉터리 주장이 소중한 나물 문화를 무너뜨렸다. 나물은 귀한 식재료가 아니라 싸구려, 천한 식재료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조금씩 나아지니 ‘싸구려 식재료인 나물’을 멀리한다

‘나물의 약효’를 주장하는 이들도 나물 문화를 무너뜨렸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무슨 풀 하나로 병이 낫는다는 주장이 그 나물, 먹을거리를 망가뜨린다. 우르르 몰렸다가 어느 순간 관심이 식고 그 나물이 사라진다. 고혈압에 좋은 나물이 있다면 약국에서 팔 일이다. 시력 회복에 좋다면 안과 의사가 권해야 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함부로 시력 회복 ‘약’을 팔 일은 아니다

1611년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쓴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맛 칼럼니스트다. ‘도문대작’ 첫머리는 허균이 어린 시절 외가 강릉에서 먹었던 방풍나물죽 이야기다. 방풍나물이 고혈압 예방에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부분의 끝은 ‘사기그릇에 담아서 먹었던 방풍나물죽의 향기가 2, 3일 입안에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물 향이 며칠씩 입에 남는다고 말하는 민족이다. 

 

02-22  ‘한 상 차림’과 한정식

 

우리 밥상은 ‘한 상 차림’이다. 한 상에 모두 차려 놓고 골고루 섞어 먹는다. 우리는 한 상 차림 밥상을 받고 당황하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당황한다. 갑자기 여러 가지 반찬, , 국이 한꺼번에 놓인 밥상을 받으면 당황한다. 어느 것부터,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묻는다. 한 상 차림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일괄 타개’ 협상 방식을 좋아한다. 한 상에 모두 차려 놓고 한꺼번에 해치우는 것이다. 섞어 보니 손해와 이익이 균형을 이룬다

한식은 평()의 음식이다. 밥과 국, 반찬을 골고루 섞어 평으로 먹는다. 먹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짜면 싱거운 것을 섞고, 매우면 심심한 것을 더한다. 평이다. 음과 양을 섞어 평을 향한다. 1795년 봄, 수원 화성에서 혜경궁 홍 씨의 환갑날 밥상이 마련되었다. 조선시대 가장 화려한 밥상. 음이 8(), 양이 8, 평이었다. 한식에 보양식은 없다. 한식은 음양이 조화를 이룬 평의 음식이다

한정식(韓定式)은 ‘한식+코스 요리’다. 한식이라는 몸에 서양식 코스를 입혔다. 한정식은 한식의 변종이다. 불과 40. 한정식이 우리 음식이 될는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외식업체의 고급 밥상은 한정식인데 가정의 밥상은 여전히 한 상 차림이다. 바탕이 한 상 차림인 나라에서 뿌리 없는 코스 요리가 얼마나 버틸까. 음식의 생명력은 핏속에 DNA로 새겨진다. 정권 차원에서 진행하는 한식 세계화는 한정식이다. 수백 년 이어 온 한 상 차림 밥상이 해외 행사 몇 번으로 한정식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한정식은 슬프다. 억지 춘향이다. 죽과 의미 없는 샐러드, 여러 요리를 쭉 나열하고 마지막에 한 상 차림 백반을 내놓는다. 그 이전의 화려한 음식은 무엇일까. 술안주다. 음식 값을 높이기 위한 쇼다. ‘한식 디저트’는 코미디다. 억지 춘향으로 단맛을 내놓는다. 지나친 단맛으로 평준화하는 사회는 후진적이다. 코스 음식, 서양식 코스 요리는 마지막의 단맛 디저트로 앞의 모든 음식을 부정한다. 숭늉의 구수함이 차라리 고급스럽다

한 상 차림 한식을 ‘기생집 술상’이라고 폄훼하는 이도 있다. 시작은 ‘궁중 요리’다. 존재하지도 않는 궁중의 요리를 ‘명월관’(1903년 설립)의 안순환이 팔았다. 밥집이 아니라 술집이었다. 궁중에서만 먹었던, 궁중에서만 사용한 조리 기법으로 만든 궁중 요리는 하나도 없다. 고종이 커피를 마셨다고 커피가 궁중 음식은 아니다. 당뇨 환자로 추정되는 고종이 배가 많이 들어간, 다디단 냉면을 먹었다고 고종의 냉면이 궁중 냉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안순환이 내놓았던 명월관의 궁중 요리는 한 상 차림이었다. 화려한 한 상 차림이 기생집 술상이라면 그 음식들을 하나씩 흩어 코스대로 내놓아도 마찬가지, 술상의 안주일 뿐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만났다. 노학자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음식에 대해서도 명쾌했다. 


“한식은 한 상 차림이다. 

밥과 국, 나물 반찬과 각종 젓갈, 생선, 고기가 한 밥상에 자리한다. 조촐한 밥상일지라도 먹는 순서에 따라 숱한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한 상 차림 한식은 먹는 이가 고르고, 섞는다. 한 상 차림의 수저는 한 벌이다. 숟가락 하나로 밥도 뜨고 국도 뜬다. 한 벌의 젓가락은 수많은 반찬을 오간다. 밥과 국, 반찬이 뒤섞인다

섞지 않는 서양 코스 요리는 8벌의 포크와 나이프를 내놓기도 한다. 서양 음식은 단절이다. 앞 음식의 찌꺼기가 묻은 나이프, 포크는 사라진다. 새로운 음식에는 새로운 나이프, 포크가 필요하다. 마지막 디저트는 단맛으로 모든 것을 뒤덮는다. 식사 후 디저트의 단맛만 기억한다. 서양 음식은 섞임, 충돌, 융합을 싫어한다. 앞의 음식은 뒤를 짐작하지 못하고 뒤의 음식은 앞을 알지 못한다 

한식의 바탕은 한 상 차림이다. 한 상 차림의 여러 요소가 입안에서 충돌, 화합, 융합한다. 한 상 차림이 한식의 기본인 까닭이다. 

 

03-08  한식은 국물이다

 

겨우 열 살 남짓이었다. 타의로 ‘물에 만 밥’을 자주 먹었다. ‘물에 만 밥’의 의미를 미처 몰랐을 때다

학교까지는 6km. 초여름이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는 할머니만 계셨다. 부모님은 모두 들로 일을 나갔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의 늦은 점심을 챙겼다. 부엌 천장에 달아두었던 바구니의 보리밥을 챙겼다. 목이 메면 짜디짠 된장찌개를 입에 넣었다. 할머니는 불쑥 우물물을 보리밥에 부었다. “목이 멘다. 말아서 어여(어서) 먹어라. 

그게 싫었다. 할머니는 묻지도 않고 무턱대고 보리밥에 물을 부었다. “훌훌 먹어라”는 말을 덧붙이시면서. 우물물이 국물 대신이며, ‘물에 만 밥’이 한식밥상의 특질임을 몰랐다

한식은 탕반음식이다. 한식밥상의 주인은 탕(湯·국)과 반(飯·밥)이다. 밥과 국이 밥상의 중심에 앉는다. 반찬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이다. 우리는 평생 국물을 먹는다.

‘국물도 없다’는 표현이 있다. 국물도 없는 관계는 단절이다. 상대에게 베풀 최소한의 호의도 없다는 뜻이다. 국이 없는 한식밥상은 없다. 시래깃국, 김칫국, 쇠고깃국, 콩나물국, 미역국 등 어떤 국이라도 있어야 밥을 먹는다. 우리는 시금치, 아욱, 근대 등 모든 채소와 생선으로 국을 만든다. 된장국도 여러 가지고, 달걀과 두부도 국으로 끓인다.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가 라면을 먹지만,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민족은 드물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했다. 우리는 떡을 먹을 때도 국물을 먹는다. 일본에도 채소절임 음식인 쓰케모노(漬物)가 있지만 동치미, 열무김치처럼 국물 있는 절임음식은 없다. 우리는 배추김치도 국물이 자작하게 해서 먹는다

예나 지금이나 출산하면 미역국을 먹는다. “너 같은 걸 낳고 미역국을 먹었느냐?”는 말은 참기 힘든 최악의 욕이다. 제사상은 한술 더 뜬다. 국이 있고 탕이 있다. 국도 여러 가지를 사용하고 더러는 맹물도 놓는다. 국이 없는 제사상은 없다

흔히 음식을 나라별로 나눈다. 나라별 고유음식이다. 음식은 지구의 남방, 북방으로도 나눈다. 남방의 농경문화 음식과 북방의 유목문화 음식이다

북방유목민족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침식사를 한 곳과 점심 먹는 곳이 다르다. 사는 곳도 일정치 않다. 번듯한 집이 있을 리 없다. 국물 음식을 마련하기도 어렵고 먹기도 번거롭다. 북방유목민족의 음식은 건식(乾食)이다. 식재료는 사냥, 목축을 통한 고기와 동물의 젖이다. 남방의 농경민족은 한곳에 정착한다. 집을 짓고 산다. 이동하지 않는다. 국물 있는 음식을 먹는다. 우리는 남방형 농경민족 문화다. 한국, 일본, 중국의 남부지역에서는 숟가락을 사용했다. 숟가락은 국물 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도구다

숟가락은 기원전 5000년 중국에서 처음 나왔다고 알려졌다. 세 나라 모두 숟가락을 사용했지만 한국에만 숟가락 문화가 남았다. 중국과 일본의 숟가락 사용은 한정적이다. 국물음식도 한식에만 짙게 남았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한식밥상처럼 식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국물을 마시지 않는다

숟가락과 국물. 마치 닭과 달걀처럼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한반도에만 숟가락과 국물이 남은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식의 국물 문화가 숟가락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국물 없이 밥만 먹으면 목이 멘다. 슬픈 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입에 밥만 꾸역꾸역 넣는다”고 말한다. 국물 없이 밥만 먹는다고 표현한다. 국물이 없는 밥은 먹기가 힘들다. 국물을 한 숟가락 더하면 밥이 술술 넘어간다. 밥을 먹다 보면 더러 간이 맞지 않을 때도 있다. 맨밥에 국물을 더해 간을 높인다. 반찬이 너무 짜면 상대적으로 싱거운 국물을 더한다. 반찬의 짠맛을 국물로 희석시킨다. 국물은 밥 옆에 앉아 밥상을 조정한다. 국은 밥상의 조정자다. 국물은 한식의 특질이다. 

03-22  과메기가 포항 특산물이라고?

 

향토 특산물은 없다. 대부분의 지자체가 향토 특산물을 내세우는데 향토 특산물이 없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다. 계절마다, 지방마다 숱하게 축제가 열린다. 지방 축제마다 향토 특산물이 쏟아진다. 한국은 ‘향토 특산물 공화국’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옆 동네 축제에서 봤던 특산물이 이번엔 이 동네 특산물로 둔갑해서 나타난다. 모두 고만고만하다

향토 특산물은 우리 시대가 만든 허상이다. 실체가 없다. 지리적 구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과 비슷한 지방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전국을 도, , , , 현으로 나누다가 갑오개혁 당시 전국을 23 337군으로 개편했다. 지리적 구분이 뒤섞였다. 지역 구분은 지금도 변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별 통폐합이 활발하다. 좁은 땅덩어리다. 작은 개울 하나로 지자체가 나뉜다. ‘우리 고장의 특산물’은 허상이다. 이리저리 갈렸다 합치고, 또 갈라지고 통합한다. 특정 지역 특산물은 없다. 

과메기는 포항의 특산물일까. 아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 한겨울이면 청어가 영남 울산에서 잡히기 시작한다. 관목어(貫目魚·과메기)는 청어를 말린 것이다. 조선시대 관목어는 울산에서 시작된다. 포항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가 편찬된 19세기 중반, 포항은 바닷가의 작은 포구였다. 불과 150년 전, 과메기 주산지였던 울산에는 과메기가 없다.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포항에서 과메기가 지천으로 나온다. 향토 특산물 과메기는 포항 것일까, 울산 것일까.

1949 4, 정부 관리들이 싱가포르와 대만 등으로 출장을 다녀온다. 수산물 시장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이들이 외국에서 보고 온 내용을 발표한다. ‘약진한국수산좌담회’다(1949 5 1일 경향신문). 꼬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기사에 따르면 10여 년 전인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전남 여자만에 꼬막(灰貝·회패) 양식장을 큰 규모로 설치했다. 그 이전에는 일본 오카야마(岡山)에 꼬막 양식장이 있었다. 여자만의 꼬막은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인들의 양식장에서 시작된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꼬막은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널리 잡혔다. ‘여자만의 꼬막’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맛 좋은 꼬막이 ‘지금’ 많이 생산된다고 말해야 한다. 

 

비닐하우스가 전국에 지천이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각종 농축산물이 쏟아지고 있다. 기후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대구 특산물 사과는 사라졌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대구에서는 사과가 잘 자라지 않는다 


향토 특산물을 찾는 것은 일본인들의 방식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지방분권형의 국가였다. 중앙의 막부(幕府)와 지방의 번()은 독립적이다. 막번(幕藩) 체제다. 항은 독자적인 경제, 정치, 문화 체제를 가진다. 지방분권적 막부 체제에서는 지역마다 향토 음식 혹은 향토 특산물이 가능하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중앙집권제의 나라였다. 지방 선비들이 중앙관리가 되고 다른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한다. 전국 팔도의 사람들이 뒤섞인다. 중앙정부는 각 지역의 세금을 받아 중앙에서 사용하고 각 지역에 재분배한다. 분권적인 일본과는 전혀 다르다. 민어는 서해안 전역에서 잡혔다. 교산 허균도 ‘도문대작’에서 “민어는 서해안 전역에 너무 흔하니 별도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했다. 위어(葦魚)는 궁중 진상품이다. 행주산성 언저리의 위어는 소중하게 여겼다. 특산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서빙고의 얼음을 이용하여 궁궐까지 싱싱하게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어는 서해안 전역에서 널리 잡혔다. 먼 곳의 위어는 젓갈로, 가까운 곳의 것은 구이용, 횟감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특산품 위어’는 없었다.

한우를 향토 특산물, 명품이라고 주장하는 지자체가 많다. 일본식이다. 그 덕분에 오랫동안 기름의 분포로 고기를 가르는 일본만의 쇠고기 등급제를 따라 했다. 먹어 본 특산물 쇠고기만 20가지를 넘긴다. 명품 쇠고기를 내놓지 않는 지자체가 드물다. 한반도의 명품 쇠고기도 허상이다. 

 

04-05  잡채에는 당면이 없었다

 

전통 잡채인 ‘디미방 잡채’. 각종 채소와 꿩고기 등을 섞어 먹었다. 잡채에 당면이 들어간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다.

 

병원 장례식장치고는 육개장이 괜찮았다.


아버지를 보내고 홀로 되신 어머니는 늘 남편 장례식장의 육개장을 곱씹었다. 평소 조문을 다녀오시면 상가 음식을 마뜩잖아 하셨다. “무슨 육개장이 멀건 게 아무 맛도 없더라”고 하셨다. 오랫동안 육개장을 끓여 온 어머니는 육개장에 관한 한 대단한 미식가다

어머니는 두태(豆太) 기름을 썼다. 두태는 소 콩팥이다. 콩팥에 붙어 있는 기름에 고춧가루를 넣고 고추기름을 만들었다. 이제 두태 기름은 사라지고 있다. 모르는 이도 많다. 두태 기름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소비자들이 동물성 기름을 꺼린다. 매번 콩팥 기름을 구하기도 번거롭다. 육개장 고추기름의 붉은색이 귀신을 쫓는다는 이야기는 엉터리다. 초상은 돌아가신 분의 혼령을 모셔서 편하게 보내 드리는 행사다. 혼령을 부르는 초상집에서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니, 귀신도 곡할 노릇이다. 조상의 혼령은 육개장의 붉은색으로 물리칠 대상이 아니다. 이래저래 육개장은 뒤틀렸다. 말린 고사리, 말린 토란대, 숙주나물 등을 넣은 맛있는 육개장은 사라졌다. “육개장에 황소고기를 썼다”고 하면 “질겨서 어떻게 먹어요?”라고 되묻는다. 예전에 그 많았던 ‘질긴 황소고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잡채(雜菜)도 망가졌다. 잡채는 단어 뜻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 모둠’이다. 채소 모둠에 엉뚱하게 당면(唐麵)이 끼어들었다. 당면이 잡채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면은 한일 강제병합(1910) 이후 한반도에 등장한다. 중국인들의 당면 기술을 한국인, 일본인이 배우고 평안도 일대에 공장을 세웠다. 나라가 망한 이후에 등장한 당면을 넣고 ‘궁중잡채’라고 우기면 당황스럽다 

당면 잡채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당면이 잡채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이, 우리의 채소 음식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음식디미방’(장계향·1670년 무렵 기술)의 잡채는 꿩고기와 열 종류의 채소가 자리하는 ‘여러 채소 모둠 쟁반’이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오신반(五辛盤), 오신채(五辛菜), 오훈채(五훈菜)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오신채는 이른 봄에 나오는 움파, 산갓, 당귀 싹, 미나리 싹, 무 싹 등을 모은 채소 모둠이다. 향이 강하니 오훈채라고도 불렀다. 오신채를 담은 쟁반이 오신반이다. 우리 선조들은 입춘 무렵 오신반을 나눠 먹었다. 이제 잡채도 오신반도 잃었다. 아름다웠던 채소 음식은 사라졌다. 왜간장으로 색깔을 낸, ‘당면이 주인공인 잡채’를 먹고 있다 

연포탕(軟泡湯)도 마찬가지. 거품을 의미하는 ‘포()’는 두부를 뜻한다. 연포는 연두부, 부드러운 두부다. 조선시대 조포사(造泡寺)는 왕릉 인근에서 두부를 비롯하여 각종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사찰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연포탕이라 부르는 음식은 ‘낙지탕’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어떤 경로로 연두부탕에 낙지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두부는 빠지고 낙지만 덩그렇다. 우리는 ‘두부 없는 두부탕’을 먹고 있다. 낙지연포탕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두부탕에서 두부가 빠졌으니 설명하기 모호한 음식이 되었다. 더하여 다산 정약용이 기록한 네모나게 썬 두부를 꿰서 넣고, 닭고기와 닭고기 국물이 들어간 ‘프리미엄 두부탕’도 잊었다

코미디 한 토막. 남해안 어느 지자체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밥상을 재현했다. 밥상에 연포탕이 등장했다. 두부 없는 낙지탕이었다. ‘난중일기’ 1597년 음력 6 22일 기록에 ‘진짜 연포탕’이 나온다. 백의종군한 이순신 장군에게 초계(경남 합천) 군수가 이른 아침 연포탕을 가지고 나타난다. 전직 삼도수군통제사지만 현재는 갓끈 떨어진 신세다. 접대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을 것이다. ‘연포탕을 들고 온 초계 군수의 얼굴에 오만한 기색이 가득했다’고 적었다. 적어도 이순신 장군의 밥상에는 연부에 새우젓갈을 넣은 연포탕이 있어야 한다.


이름은 사물을 규정한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음식 이름에 연연하는 것은 한식이 더 이상 우리만의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식 세계화도 마찬가지다. 먼저 한식의 정체성부터 찾아야 한다. 제대로 된 이름부터 정해야 한다. 스토리텔링, 식품 산업화, 한식 세계화는 그 다음 일이다. 

04-19  ‘코스식 절밥’이 사찰음식이라고?

▲경기도의 어느 사찰음식전문점 음식

 

복숭아, 살구꽃이 흐드러진 봄날이었다. 가족, 친지들과 동네 가까운 절에 갔다. 시오리 산길이 마치 소풍 같았다. 그릇도 부족하던 시절이다. 크고 작은 그릇을 하나씩 챙겨서 밥을 덜고 나물을 얹었다. 늦은 점심으로 나물비빔밥을 먹었다. ‘절밥’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가족, 친지들 중 몇몇은 개종(改宗)을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절에 가지 않았다. 절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날의 ‘절밥’만 오랫동안 입에 오르내렸다. 내용은 같았다.

 

“아무런 반찬도 없이 그저 나물만 넣고 비볐는데 그 밥이 어찌 그리 맛있었을까?” 누구는 “된장이 좋아서”라고 해석했고 누구는 “참기름이 좋아서”라고 주장했다. 보리가 적당히 섞인 밥이 좋았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먼 산길을 걸은 후에 먹은 늦은 점심이니 뭐든 맛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우리는 ‘절밥’을 딱 한 번 먹었지만 오랫동안 그 ‘절밥’을 되새김질했다.

사찰음식은 스님들이 먹는 음식이다. 사찰을 찾아온 신도, 관광객들도 먹는다. 사찰음식이 바깥으로 나왔다. 식당의 음식이 되었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사찰음식 전문점이 많이 생겼다 

더러 사찰음식 전문점에 간다.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먹었던 그 절밥이 남아 있다. 불행히도 그때의 그 절밥과 닮은 사찰음식은 드물다. “사찰음식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육류와 오신채(五辛菜)를 사용하지 않고 만든 음식이라고 말한다

오신채는 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다. 흥거는 추측이 분분하다. 무릇이라고 하거나 인도 중동에 자생하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식물이라고 한다. 제각각이다. 근거도 부족하다. 존재하더라도, 보기 힘든 식재료를 굳이 금하다니 참 아리송하다. 조선시대에는 오신채의 의미가 달랐다. 오신채는 움파(총아·총芽 혹은 총백·蔥白), 산갓, 당귀 싹(신감초·辛甘草 혹은 승검초), 미나리 싹, 무 싹이다. 겨울이 채 가지 않았을 때 눈을 뚫고 나온 새싹들이다. 이 나물들을 입춘 무렵에 귀하게 먹었다

오신채에 대한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정조대왕이 신하들과 나눈 이야기 중 “당나라 의종이 불교를 믿어 오계(五戒)를 받았으며 오계 중에 ‘술과 오신채를 금한다’는 계율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불교와 오신채를 연관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제 오신채는 당황스럽다. 파와 마늘은 품종이 달라지고 가짓수도 많아졌다. 대파, 쪽파, 양파가 있다. “조선시대 오신채 이후 들어온 대파와 양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대답이 옹색해진다. “향과 맛이 강한 생강이 왜 오신채에서 빠졌을까?”에 대한 대답도 보기 힘들다. 임진왜란 이후 들어와서 조선 말기에 퍼지기 시작한 고추(고초·苦椒)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산초(山椒)는 가능하고 후추(호초·胡椒)는 금할 것인가? 


애당초 오신채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신채를 정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쳐다보는 짓이다. 오신채 금지는, 입맛을 위한 별난 음식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음식의 맛을 줄이고 양을 최소화하라는 의미다. 맛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 입맛의 욕심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한정식처럼 코스로 나오는 사찰음식은 절밥과 다르다. 숱하게 절밥을 얻어먹었지만 코스 식 절밥은 없었다. 발우공양이 한국 사찰의 일상적인 음식이라면 발우공양을 사찰음식으로 내세워야 한다. 청수물로 마지막 작은 한 톨까지도 버리지 않고 아끼는 것이 사찰음식이다 

사찰에서 먹지도 않는 사찰음식을 내세우는 것은, 철없는 아이의 뽐내는 행위와 다름 없다. 장뇌삼, 송이버섯을 내놓는 것이 과연 사찰음식인지 되짚어 봐야 한다. 사찰음식은 화려한 밥상이 아니다. 사찰음식은 한국 불교와 사찰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으니 색깔도 아름답게, 접시 담음새도 신경 쓴다”는 말은 허망하다. 외국 관광객에게 보여주려고 스님들의 먹물빛 가사장삼을 예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05-10  왕의 밥상

 

왕의 밥상’은 허구다. 먹고 싶은 대로, 한 상 가득 차리고 ‘왕의 밥상’이라 부른다. 호화로운 식재료와 산해진미. 그런 왕의 밥상은 없었다

518, 27명의 국왕이 조선을 다스렸다. 27명의 국왕 중 호화롭게, 자기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었던 이는 연산군 한 명이었다. 귀한 과일을 수입하고, 전국의 모든 귀한 식재료를 강제로 모으고 먹었다. 폭군이고 결국 왕좌에서 쫓겨났다

광해군도 반정으로 쫓겨났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 즉위했다. ‘잡채상서(雜菜尙書)’ ‘사삼각노(沙蔘閣老)’ ‘김치정승(沈菜政丞·침채정승)’ 등은 광해군 무렵 등장하는 표현이다. 간신들이 잡채, 더덕, 김치 등을 바치고 높은 벼슬을 얻었다는 뜻이다. 광해군은 덕수궁에서 즉위했다. 덕수궁은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 집이었다. 덕수궁에서 선조가 살았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김치, 더덕, 잡채는 예나 지금이나 산해진미는 아니다. 사저에서 즉위하고 신하들이 주는 김치, 더덕, 잡채를 얻어먹었다


조선을 다스린 것은 경국대전이다. 경국대전은 조선의 헌법이고 기본은 유교적 통치이념이다. 조선의 국왕은 경국대전과 선왕들의 행적을 따라 통치했다. 고종(18521919)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즉위 첫해(1863), 어린 왕에게 노신하들이 강론한다. (공자는) 밥은 깨끗한 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회는 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食不厭淨 膾不厭細·사불염정 회불염세)”고 했다. 신하들이 설명한다. “깨끗한 밥과 가는 회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게 여기나 꼭 이와 같이 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좋게 여김’은 이치고 ‘꼭 이와 같이 하고자 함’은 욕심입니다. 꼭 하고자 하면 바로 구복(口腹)의 욕심입니다.” ‘구복’은 입과 배, 즉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는 것을 뜻한다. 굳이 맛있는 것 많이 먹겠다고 욕심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군왕은 ‘맛있게, 많이’가 아니라 율법에 따라 바르게 먹어야 한다


태종과 영조는 강력한 왕이었다. 태종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즉위 13(1413) 7, 가뭄이 들었다. 당연히 금주(禁酒). 신하들이 ‘가뭄 대비책’으로 올린 상소 중에 ‘태종의 술’이 등장한다. 에둘러서 ‘임금부터 금주를 엄격히 금하라’는 내용이다. 태종은 “내가 술 많이 마시고, 좋은 안주 먹는다고 하는데, 궁중 주방 조리사한테 물어보면 별것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변명한다

 

영조는 금주령을 강력하게 지켰다. 국가 행사 중 제일 중요한 종묘 제사와 중국 사신 접대에도 술 대신 단술을 사용케 했다. 신하들이 “(금주령은 국내 사정인데) 외국 사신에게 술 대신 단술을 주는 것은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고 하자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제사에도 단술을 사용한다고 하라”고 자른다

 

영조가 일흔다섯 살 되던 해(재위 44년·1768) 7, 노대신 김양택과 나눈 대화가 남아 있다. 영조가 “송이버섯, 생전복, 어린 꿩, 고추장, 이 네 가지가 맛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내 입맛이 아주 늙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송이버섯이나 전복은 고급 식재료다. 김양택이 “생전복을 별도로 올리라 할까요”라고 묻는다. 영조가 답한다. “생전복 채취가 쉽지 않다. 지금 생전복을 올리라는 것은 민폐다. 어찌 내 입맛을 위해서 생전복을 올리라 하겠는가.  

존재하지 않았던 ‘왕의 밥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제국 시기를 거친 로마, 유럽, 중국, 일본 어디에도 제왕의 화려한 밥상은 없다. 왜 하필 우리만 왕의 밥상을 이야기할까. 결론은 슬픈 식민시대의 잔재다. 그들에게는 무너진 왕조의 식민시대가 없었다

궁중에서 하급관리로 일했던 안순환은 궁중요리를 내세우며 1903년 ‘명월관’을 세웠다. 이게 궁중요리의 시작이다. 명월관은 식당이 아니라 고급 술집이었다. 밥상이 아니라 터무니없이 비싼 술상을 내놓았다. 장사를 위해 엉뚱하게 화려한 술상을 만들고 ‘궁중요리’라고 이름 붙였다. 일상의 음식이 아니라 궁중행사 때나 볼 수 있었던 음식들이다. 이걸 ‘왕의 밥상’에 뒤섞었다. 여기에 ‘왕이 데리고 놀던 기생’까지 얹었다. ‘왕이 기생을 끼고 흥청망청 먹었던 궁중요리’라고 내세우고 팔았다. 왕이 데리고 놀던 기생은 없었다. ‘왕의 밥상’도 없었다. 

 

05-24  나는 왜 ‘막’국수인가

 

내 이름은 ‘막국수’다. 들을 때마다 속상하고 억울하다. 하필이면 ‘막’국수일까? ‘막’은 하찮다는 뜻이다. ‘막노동’ ‘막돼먹은’ ‘막회’ 등의 ‘막’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험하고 법도 없는, 마구잡이라는 뜻이다. ‘막 내려서, 막 먹는 국수’라서 막국수라고? 막 내려 막 먹는 게 어디 막국수뿐일까. 냉면도 막 내려서 바로 먹는다. 그래도 ‘막냉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하필이면 나만 ‘막’인가

나는 메밀로 만든다. 메밀은 점도가 약하다. 반죽을 오래 쳐대야 겨우 점성이 생긴다. 반죽을 좁은 구멍으로 눌러 내린다. 뜨거운 물에 바로 삶아야 겨우 국수 꼴을 갖춘다. 냉면, 막국수 모두 막 내려서 막 먹어야 한다. 왜 평양냉면이라는 근사한 이름과 달리 내 이름에만 ‘막’을 붙이는가.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그렇지 않다. 메밀 100% 냉면은 대부분 1만 원 이상이다. 막국수는 아무리 용을 써도 1만 원 이하다. 이름 한 번 잘못 짓는 바람에 나는 싸구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1960, 70년대에 생겼다. 그 이전에는 막국수가 없었냐고? 그렇지는 않다. 오래전부터 나는 강원도 산골에 있었다. 다만 이름이 국수 혹은 냉면이었다. “에이, 설마?”라는 이도 있겠다. 더러 “어딜 감히 네까짓 게 냉면이라고?”라며 눈 흘기는 이도 있겠다. 그래서 더 억울하다. 멀쩡한 이름을 싸구려로 바꾼 것이다


강원도에서도 국수는 만들어 먹었다. 화전민이 있던 시절이다. 깊은 산골, 전기가 없으니 제분소, 정미소도 없었다. 국수 한 번 만들어 먹자고 먼 읍내까지 나갈 일은 아니다. 그까짓 번거로운 국수 안 먹으면 그만이다. 문제는 행사다. 가난한 산골 마을에도 혼사는 있다. 혼사에는 국수가 있어야 한다. 하객들에게 대접할 음식도 마땅치 않다. 메밀로 만든 국수는 잔치 필수 음식이었다.

국수를 만들려면 우선 ‘망돌’(맷돌)로 메밀을 ‘타개야’(갈아야) 한다. 타갠 메밀을 체로 치면 고운 가루는 아래로 빠지고 거친 ‘무거리’(껍질 등 찌꺼기)는 위에 남는다. 무거리를 다시 망돌에 넣고 곱게 간다. 다시 체로 친다. 국수 만들 가루는 이렇게 얻었다. 왜 메밀이냐고? 산골에는 감자, 메밀, 옥수수밖에 없다. 옥수수로 국수를 만들면 올챙이국수다. 툭툭 끊어져 국수라 부르기엔 조금 미안하다. 감자녹말로 국수를 만들면 함경도식 ‘농마’국수다. 농마국수는 남쪽으로 내려와 함흥냉면이 되었다. 더 분통이 터진다. 왜 감자로 만든 농마국수는 냉면이 되고 나는 막국수인가.

 

‘분틀(면자기·麵4)’은 메밀국수 뽑는 기계다. 1980년대 유압식 국수 기계가 보급되기 전, 나는 늘 분틀에서 태어났다. 분틀은 위에서 굵은 작대기로 내려 누르는 힘으로 국수를 뽑는다. 분틀 막대기가 앞니를 쳐서 ‘국수 뽑는 사람 중에 앞니 성한 사람 없다’는 말도 있었다. 냉면도 역시 분틀로 뽑았다. 조선 말, 기산 김준근(생몰 미상)이 그린 그림 이름도 ‘국수 내리는 모양’이다. 사내가 벽에 발을 디디고 낑낑거리며 분틀 막대기를 내리 누르고 있다. 어디에도 막국수나 냉면이라는 이름은 없다. 그저 국수다. 냉면이나 국수, 막국수 모두 같은 기계로 뽑았다. 왜 나만 ‘막’인가


‘냉면과 막국수는 육수가 다르다’는 이들도 있다. 평양냉면은 원래 꿩고기 육수와 꿩 단자 고명을 쓴다는 내용도 있다. 가소롭다. ‘꿩 대신 닭’은 ‘맛있는 꿩고기 대신 맛없는 닭고기’가 아니다. 꿩은 공짜고 닭은 길러야 한다. 산에서 잡을 수만 있다면 꿩은 공짜다. 닭은 모이를 먹는다. 공짜 꿩을 못 구하니 어쩔 수 없이 귀한 닭을 쓴다는 뜻이다

꿩이 어디 평양에만 있었으랴? 꿩고기 고명은 강원도에도 흔했다. 1970년대, 꿩잡이 전문포수가 춘천의 국수 파는 집에 상주했다. 불행히도 꿩은 별 먹을 게 없다. 털 벗기면 병아리만 하다. 뼈와 살을 일일이 발라내기도 힘들다. 잔뼈는 칼로 다진다. 꿩 단자를 먹다 보면 다진 뼈가 씹힌다. 야생 꿩은 누린내도 심하다. 꿩고기 육수는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쉽게 얻을 수 있는 고기였다

평양냉면 동치미 육수는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했다고? 어디 평양만 추웠으랴? 강원도 산골도 춥다. 겨울철이면 한반도 어디나 메밀이 흔하다. 육수는 어디나 동치미밖에 없다. 재료, 만드는 방식, 육수 내용, 고명 모두 같다. 내 이름은 ‘강원냉면’ ‘춘천냉면’쯤 되어야 한다. ‘막’국수?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06-07  삼계탕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섯 살 무렵이라고 들었다. 어머니가 전하는 이야기다. 시골집,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아버지는 우물가에서 닭을 손질(?)하고 있다. “닭 잡는 거 굳이 안 봐도 되는데 꼭 옆에 지키고 서서 쳐다보면서 계속 ‘꼬꼬야 아야 한다’라고 울더라고. 그런데 막상 닭죽을 끓여 놓으면 언제 울었는지 잊어버리고 잘만 퍼먹더라.” 여섯 식구였다. 닭 한 마리를 잡아서 온 가족이 두 끼쯤 닭죽을 먹었다

1970년대 후반, 서울로 유학을 왔다. 어느 날 희한한 말을 들었다. “○○대학 기숙사 식당에서는 일요일 점심 때 삼계탕을 준다더라.” 기숙사 삼계탕? 아무려면 그 귀한 삼계탕을 기숙사 식당에서 막 내놓으랴. 그런데 진짜란다. 마침 그 기숙사에 친구가 있었다. 대학 마크가 새겨진 친구의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를 빌려 입고 그 대학 학생으로 위장했다. 닭 한 마리를 반으로 자른 ‘반계탕(半鷄湯)’이었다. 

반계탕은 얼마간 길거리 식당에서 팔더니 어느 순간 어물쩍 자취를 감췄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내놓는 삼계탕만 남았다. 닭 한 마리니 양이 넉넉할까? 그렇진 않다. 지금의 삼계탕 닭 한 마리는 기숙사 식당의 반계탕보다 훨씬 작다

삼계탕은 우리 시대에 등장한 음식이다. 조선 후기 혹은 일제강점기, 닭 국물에 건삼(乾蔘)을 갈아 넣은 삼계탕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억지스럽다. 조선 후기까지도 인삼은 자연산 산삼이었다. 인삼을 인위적으로 재배한 것은 18세기 후반 무렵이다. 1797 6월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정조가 재배 인삼을 가짜 인삼, 즉 가삼(假蔘)이라 부르며 화를 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19세기부터는 홍삼을 재배한 인삼으로 만들었다.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활동 시기는 19세기 초중반이다. 이때도 산삼뿐만 아니라 홍삼조차도 귀했다 

19세기 초반, 귀양살이를 마치고 귀향한 다산 정약용이 먹었다는 닭국은 ‘닭고기 국물에 주사위처럼 네모나게 썬 두부와 닭고기를 넣고 끓인’ 프리미엄 연포탕(軟泡湯)이었다. 연포탕은, 연두부를 끓인 다음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것이다. 연포탕에 닭고기와 닭고기 국물까지 더했다면 당시로서는 프리미엄급 국물이었을 것이다. 인삼과 닭고기를 넣고 끓인 음식은 보기 힘들었다

 

수삼(水蔘)은 유통이 어렵다. 여름철에는 좀이 슬기도 한다. 닭고기도 마찬가지다. 여름철에는 쉽게 상한다. 1960년대 초반 신문에 삼계탕이 등장하는 것은 이 무렵부터 냉장, 냉동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계탕의 시작은 백숙(白熟)이다. 백숙은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고 푹 곤 것’이다. 연계증(軟鷄蒸), 즉 영계찜이다. 영계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오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등장하는 영계(英鷄)는 닭 이야기가 아니다. 석영(石英) 모이를 먹은 닭()이 낳은 달걀 이야기다. 영계가 낳은 달걀이 몸보신에 좋다는 내용이다. 중국 ‘본초강목’의 닭 이야기다. 영계는 원래 없었던 표현이다.

영계는 연계(軟鷄)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조 24(1800) 5, 예조판서 서용보의 보고문이다. “생계(生鷄) 세 종류는, 여러 해 자란 진계(陳鷄)와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계(軟鷄), 진계도 연계도 아닌 활계(活鷄)입니다.(일성록) 이 보고의 끝에 오래 묵은 진계 한 마리를 활계 두 마리로 셈한다는 내용도 있다. 연계는 당연히 활계보다 가격이 낮았을 것이다 

부드러운 ‘영계백숙’을 먹고자 하는 것은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나 혼자 먹겠다’는 우리 시대의 탐욕일 뿐이다. 하여, 우리는 부화한 지 30일이 채 되지 않은, 케이지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사료 먹고 자란 550g의 병아리로 헛보신을 하고 있다. 삼계탕 그릇까지 ‘550g 병아리’에 맞춰서 나온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통일된 음식이다. 25일 자란 닭은 병아리도 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보신이 될 리는 만무하고, 고기 맛도 나지 않는다. 시중 삼계탕에 들깨, , 수입 견과류 등을 넣는 이유다. 어린 시절 먹었던 닭죽, ‘추리닝’으로 위장하고 먹었던 반계탕이 오히려 그립다.

 

06-21  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라고?

 

냉면이 뜨겁다. ‘평뽕’이란 표현도 있다. 평양냉면 중독자, 마니아라는 속어다. ‘냉면 성애자’라고도 한다. 가위 평양냉면의 뜨거운 열기다. “평양냉면은 세 번을 먹어봐야 그 맛을 안다”고 한다. 세 번을 먹으면 그 맛을 알고 중독된다는 뜻이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이라는 표현도 유행이다. 대략 심심한 맛으로 짐작한다. 어떤 맛이 심심한 맛일까


대부분의 평양냉면 전문점은 고기 육수를 사용한다. , 돼지, , 닭 등이다. 닭발로 육수를 내기도 하고 더러 동치미 국물을 섞기도 한다. 여러 고기 국물을 섞어 쓰는 경우도 있다. 어떤 고기든 고기 국물 맛은 구수하다. 심심한 고기 국물 맛? 어쩐지 어색하다. 심심한 맛은 채소 국물 맛이다

인공조미료 아지노모토의 세례를 가장 먼저 받은 것도 냉면이다. “조미료를 더한 냉면은 한 번에 다섯 그릇을 먹는다”는 1930년대 신문광고 문구도 남아 있다. 대부분의 냉면 전문점은 많거나 적게 조미료를 쓴다. 아지노모토는 1920, 30년대부터 한반도 전역을 휩쓴다. 그 선두에 평양 일대 냉면집들의 모임인 ‘면미회(麵味會)’가 있었다. 조미료는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이기도 했다. 냉면집은 조미료 확산의 주인공이다.

여러 종류의 고기 국물에 조미료까지 더하면서 심심한 맛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색하다. 소금도 문제다. 냉면 국물을 다 마시면 염화나트륨 섭취도 만만치 않다. 고기 육수, 조미료, 소금. 냉면은 결코 심심한 맛이 아니다

냉면의 심심한 맛은 동치미, 백김치라야 가능하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 백김치가 등장한다. 다산은 벼슬살이 중 황해도 해주에 과거시험 감독관으로 간 적이 있다. 이때 서흥도호부에서 냉면을 먹는다. 시기는 음력 10월이다. 추운 계절이다. 육수(?)는 배추 백김치 국물이다. “냉면 가락이 가지런하고 배추김치는 푸르다(숭菹碧·숭저벽)”고 했다. 조미료는 없었다. 고기 국물 이야기도 없다. 심심한 국물이다.

 

‘냉면의 계절은 겨울’이라는 표현도 어폐가 있다. 냉면은 차가운 국수다. 음식을 차갑게 만드는 것은 얼음이다. 얼음은 귀했다. 겨울냉면이 각별히 맛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무더운 여름, 얼음 구하기가 어려우니 차가운 국수는 어렵다. 겨울냉면은 울며 겨자 먹기다. 


얼음이 비교적 흔해지면서 여름냉면은 나타난다. 하재 지규식은 공인(貢人) 출신으로 분원(分院)을 운영한 자영업자다. 지규식은 ‘하재일기’(18911910년 기록)에서 지금의 서울 종로통에서 여러 차례 냉면을 사먹었다고 했다. 냉면은 여름철 음식이 되었다. 얼음만 구할 수 있다면 냉면은 여름 음식이다. 이제 냉장고도 흔해졌다. 굳이 한겨울에 냉면을 먹어야 ‘냉면 맛을 아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난센스다. 겨울냉면은 연세 든 실향민들의 ‘소울 푸드’다. 

조선 후기 문신 이인행은 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생활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메밀)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저·침저) 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 더운 계절인 음력 6월의 일기에서 “한겨울 냉면 국물이 시원하다”고 적은 것이 이채롭다.

“원형 평양냉면은 메밀에 감자전분을 섞은 것”이라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 전분이 고구마, 옥수수 등으로 바뀌었다는 기록도 마찬가지. 전분 함량으로 원형, 전통, 정통을 따질 일은 아니다. 일본 니하치(二八)면을 예로 들면서 메밀 대 전분(혹은 밀가루) 비율 8 2의 면이 맛있다는 주장은 우습다. 제분기술과 면 뽑는 기계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다. 일본에도 주와리(十割) 건면(乾면)이 있다. 가위로 국수를 자르지 않고, 입술로 툭툭 끊어지는 부드러운 면발은 막 뽑아낸 메밀 100% 생면이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한다. 100% 메밀국수도 그리 어렵지 않다. 예전 방식의 전분이나 밀가루 섞은 면을 전통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우습다. 입술로 툭툭 끊어지는 면을 먹고 ‘쫄깃한 면발’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더 우습다.◎


황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