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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이야기10/ 황광해의 역사 속 한식1/ 2015-10-06 잡채상서와 김치정승 - 2016-04-27 추어탕

상림은내고향 2022. 3. 7. 19:48

식품 이야기10/ 황광해의 역사 속 한식 1

《 음식평론가 황광해 씨의 글을 연재한다. 황 씨는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고 한식의 장()에 관심이 깊다. 채널A ‘착한식당’, KBS ‘한국인의 밥상’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맛집 579’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 동아일보

 

2015-10-06 잡채상서와 김치정승

 

임진왜란이 막 끝났다. 광해군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가난한 나라의 임금이다. 도성 내 모든 궁궐이 무너졌다. 임금의 거처도 마땅치 않다. 겨우겨우 전세살이로 들어간 곳이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살 곳이 마땅치 않은 판에 먹을거리라고 넉넉했을까?

‘잡채상서(雜菜尙書)’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임금에게 잡채를 올리고 높은 벼슬을 얻었다는 뜻이다. 잡채만 있었으랴? ‘김치정승(沈菜政丞·침채정승), ‘사삼각노(沙蔘閣老)’도 있었다. ‘사삼’은 더덕이다. 김치, 더덕 반찬을 바치고 높은 벼슬을 얻었다는 뜻이다. ‘사삼각노’는 광해군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한효순이고 ‘잡채상서’는 호조판서를 지낸 이충(李沖)이다. 고위직들이다. 

이충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다. 우선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 할아버지 이양(李樑)은 이른바 권간(權奸)으로 명종 시절 탄핵받았던 인물이다. 간신의 자손이니 벼슬길이 힘들다. 그런데도 호조판서까지 하고 사후 우의정으로 추존되었다. 벼슬길 내내 말이 많았다. 할아버지 이양과 이충은 안티세력이 많았다. 명종 선조 광해군 시대의 기록을 보면 군데군데 이충과 조부 이양이 “속이 좁은 소인배이며, 권문세가에 줄을 대고, 지방관리로 있을 때 탐학했다”는 탄핵이 줄을 잇는다. 이충에 대해서 안티세력들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잡채상서’였다. 실력도 없으면서 잡채 바치고 벼슬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잡채상서 이충’에 대해서는 ‘상촌집’이나 ‘연려실기술’ 등에도 그 내용이 나온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조선 중·후기에는 이 이야기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은 이충의 집안에서 반찬 등 음식이 오지 않으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먹을 것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충 집안의 음식 솜씨가 좋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물 김치 더덕 등 흔한 재료를 사용했음을 보면 진기한 재료보다는 음식 솜씨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잡채(雜菜)’는 1670년경 저술된 안동 장씨 할머니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상세한 레시피가 나온다. 오이채 무 참버섯 석이버섯 표고버섯 송이버섯 숙주나물 도라지 마른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시금치 동아 가지 등이 재료다. 고기는 꿩고기를 사용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레시피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모든 식재료들은 반드시 가지가지 것을 다 쓰라는 말이 아니고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있는 대로 하여라”라고 적었다.

잡채는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 모둠’이다. 딱 정해진 재료는 없다. 구할 수 있는 여러 채소를 구해서 만들면 잡채다. 

잡채는 일제강점기 초기 환골탈태한다. 당면(唐麵)은 녹말가루로 만든 국수다. 우리는 중국을 ‘호()’ 또는 ‘당()’으로 불렀다. ‘호’는 청나라, 오랑캐 등 부정적인 면이 강하고 ‘당’은 긍정적인 냄새가 강하다. 호빵, 호떡은 오랑캐, 청나라산이라는 느낌이 강하고 당면은 긍정적인 ‘중국산’이라는 느낌을 준다. 

당면은 1910년대 중국에서 건너왔다. 중국인, 일본인들이 당면 공장을 운영하다가 어느 순간 사리원의 한국인들이 당면 공장을 세웠고 업계의 선두자리를 차지했다.

 

동아일보 1933 10 1일자 기사에는 ‘사리원 동리의 당면창고(주인 양재하)가 전소했다. 화재 원인은 별관에 머물던 종업원들의 실화, 손해액은 1천 원 상당’이라는 내용이 있다. 1935 2월의 기사에는 ‘한반도의 당면 생산량이 60만 근인데 대부분 일본 도쿄, 오사카 등으로 수출한다. 우리 당면이 중국산보다 질이 좋다’는 내용도 있다. 광복 후인 1946 3 18일자에는 ‘서울풍국제면소의 당면이 대용식량으로 공급된다’는 내용도 있다.

당면은 일본인들이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간장과 더불어 잡채에 스며든다. ‘당면잡채’다. 궁중음식도, 우리 음식도 아니다. 나라가 망하고 난 후에 들어온 식재료, 당면이 주인 노릇을 하는 당면잡채는 한식의 아름다움을 살린 음식은 아니다. 채소 맛으로 먹어야 할 잡채가 당면과 조미료, 감미료 범벅의 간장 맛으로 먹는 음식이 되었다. 이제 만나기 힘든 ‘채소 모둠 잡채’는 경북 영양군의 ‘음식디미방 기념관’에서 예약하고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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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3  불고기, 전골 그리고 신선로

▲신선로. 황광해 씨 제공

 

조선은 ‘3()’의 나라다. 금송(禁松), 금육(禁肉), 금주(禁酒). 소나무 베지 마라, 쇠고기 먹지 마라, 술 마시지 마라는 뜻이다. 모두 농사를 잘 짓게 하고 곡식을 아끼기 위해서 만든 원칙이었다. 먹고사는 것은 농사에 달려 있다. 소는 농사에 필수적이다. 식용이 아니다. 개인의 도축은 원칙적으로 금했다. 궁중 제사나 외국 사신 접대 등에만 제한적으로 쇠고기를 사용했다. 소의 밀도살은 중죄였다. 초범이라도 곤장 100대에 징역 3년의 벌을 받았다. 밀도살로 발각되면 온 가족이 천민이 되어 역참(驛站)에 노비로 배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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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이후 영조,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와 민간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드디어 국왕(정조)이 신하들과 ‘쇠고기 파티’를 벌이고 민간에서도 고기를 먹는 일이 시작된다. 조선의 상층부에서는 중국의 ‘쇠고기 먹는 풍습’을 이야기한다. “중국에서는 음력 10월 초에 쇠고기를 구워 먹는다. 난란회(煖暖會). 이 풍습은 송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중국에서도 먹는다면서 오랑캐의 청나라 풍습을 따른다고 하기는 조금 멋쩍다. 송나라 때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드디어 고기를 먹기 시작한다. 홍석모도 ‘동국세시기’에서 ‘쇠고기 구워 먹는 풍속’을 이야기한다.

단원 김홍도의 8폭 병풍 ‘사계풍속도’ 중 ‘설후야연(雪後野宴)’이 있다. ‘눈 온 다음에 연 파티’라는 뜻이다. 남자가 다섯, 여자가 둘이다. 여자는 옷차림이나 분위기가 기생이다. 그림 중간에 불판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중간의 고기 불판에 쏠린다. 정조도 “신하들과 난로회(煖爐會)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1745년생으로 정조 시대를 살았던 김홍도도 민간의 쇠고기 굽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림 중 불판을 보면 중간에 홈이 있고 테두리에서 고기를 굽는다. 중간의 움푹한 홈에는 채소와 장()을 넣고 끓인다. 고기를 구운 다음, 중간의 홈에 있는 채소와 장의 물기에 찍어 먹는다. 어느 순간 움푹한 중간 부분이 커진다. 테두리에 고기를 굽는 대신 움푹한 부분에 고기, 채소, 장을 모두 넣고 끓인다. 그릇 모양은 마치 조선시대 군졸들의 벙거지 같다. 벙거지는 전립투(氈笠套). 여기에 섞는다는 뜻의 ‘골()’을 붙이면 ‘전립투골’이 된다. 둥글고 움푹한 그릇에 쇠고기, 각종 채소, 장을 섞은 다음 끓인다. 오늘날의 전골이다. ‘전골’은 ‘전립투골’에서 비롯된 말이다. 

전골 그릇은 중간이 움푹하고 테두리가 짧다. 이 그릇을 뒤집으면 오늘날 ‘서울식 불고기 판’이 된다. 중간은 불룩하게 솟아오르고 테두리에는 짧고 얕은 홈이 있다. 불룩한 부분에 작은 구멍을 여러 개 뚫는다. 이 구멍을 통하여 불기는 올라오고 국물은 떨어지지 않는다. 불기에 직접 닿은 고기에서는 ‘불 맛’이 난다. 석쇠를 만드는 가는 철사가 귀하던 시절, 직화(直火)구이 대신 불 맛을 느끼며 고기를 먹는 방식이었다. 어린 시절 불고기를 먹어본 사람들은 고기 군데군데 가뭇하게 탄 흔적을 기억한다. 가장자리 얕은 부분의 국물에 밥을 비벼 먹어본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불 맛과 더불어 달짝지근한 맛을 잊지 못한다. 

 

불고기 판의 둥근 부분 중간에 큰 불구멍을 만들고 테두리 부분을 깊고 넓게 하면 신선로 그릇이 된다. 신선로는 ‘신선(神仙)’과는 관계가 없다. 중국에서 건너온 ‘새로운 형태의 그릇(新設爐·신설로)’에서 비롯된 표현이라는 주장이 정확하다. 쇠고기 먹는 일이 잦아지면서 중국에서 새롭게 받아들인 그릇이 바로 신선로(新設爐) 그릇이다.

 

‘궁중 신선로’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다. 신선로는 궁중에서만 먹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 전통 음식도 아니다. 비슷한 음식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승기악탕(勝技樂湯)’도 있다. “기생보다 더 즐거움이 큰 음식”이라는 뜻이다. 고기 대신 도미 등 생선을 쓰기도 한다. 음식은 비슷하다.

‘분당새댁’ 탕웨이가 출연한 중국 영화 ‘무협’(2011년·천커신 감독) 1900년 언저리의 중국 내륙 산악지방이 무대다. 탕웨이, 전쯔단, 진청우가 깊은 산속의 움막에서 식사하는 장면에 낡고 보잘것없는 신선로 그릇이 보인다. 싱가포르, 홍콩 등지의 리어카 음식점(호커·HAWKER)에서 볼 수 있는 ‘스팀보트(STEAMBOAT)’가 바로 신선로 그릇이다. 설마 정조 시대의 신선로 그릇이 중국으로 건너가 산골 음식의 빈한한 그릇이 되었을까
?

 

2015-10-20  타락죽과 수유치

▲타락죽. 동아일보DB

 

조선시대에도 버터, 치즈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년의 기록에 ‘수유치(소油赤)’가 등장한다. ‘수유’는 버터 혹은 치즈다. ‘치()’는 몽골식 표현이다. 장사치, 벼슬아치의 ‘치’다. ‘수유치’는 버터, 치즈 등을 만드는 사람이다. 수유치가 등장하는 것은 엉뚱하게도 병역 문제 때문이었다.

세종 3년에는 상왕(上王) 태종이 국방 외교 병권 등을 쥐고 있었다. 수유치는 ‘상왕 태종의 어전회의’에서 거론된다. 당시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수유치 거주 마을이 있었다. 기록에는 ‘스스로 달단((,))의 유종(遺種)이라 하면서 도재(屠宰)로써 직업을 삼고 있었다’라고 했다. ‘달단’은 ‘타르타르(Tartar)’ 혹은 ‘타타르(Tatar)’로 몽골 혹은 몽골인이다. 북방 유목민족으로 고기, 우유를 다루는 데 능했다. 변방에 머물면서 도축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쳇말로 ‘공익요원’으로 군역 등 부역을 면제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유는 실로 얻기 어려우므로 혹은 한 호()에서 몇 해를 지나도 한 정()을 바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혹은 몇 호에서 공동으로 한 정을 바치는 사람이 있게 되니’ 문제가 되었다. 더하여 멀쩡한 조선의 장정들까지 이 부락에 숨어들어 병역을 면제받았다. ‘서흥군에는 한 집에 건장한 남자 21명이 있었다’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병역 문제는 늘 골칫거리다. 

태종이 수유치 마을에 살고 있는 ‘병역 이탈자’를 찾아내 군역을 부과하라고 한다. 참의 윤회가 반대한다. ‘수유는 어용(御用)의 약()에 소용되며 또 때때로 늙어 병든 여러 신하들에게 내리기도 하니 이를 폐지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수유는 국왕과 노신들의 보양식이었다. 태종은 한마디로 이 부분을 정리한다. ‘그대의 알 바가 아니다.’ 결국 수백 호의 수유치 집들이 폐지됐다. 

고려시대 기록에도 수유는 나타난다. ‘고려사’ 충렬왕 27(1301) 기록에 ‘병인 초하루에 사재 윤정량(司宰 尹鄭良)을 원에 보내 수유를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 원나라에 수유를 조공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우유, 유제품 등이 있었지만 쇠고기, 우유, 유제품 등은 고려 후기 몽골의 한반도 침략을 통해 전래, 확산됐다. 고려 왕실은 우유소(牛乳所)를 통해 우유, 유제품 등을 관리했다. 우유소는 지금의 서울 대학로 부근의 낙산에 목장을 만들고 소를 길렀다. 젖소가 없던 시절이니 새끼 딸린 암소를 데려다 우유를 얻었다. 낙산의 소목장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우유 혹은 유제품을 유(油 혹은 乳), (), 타락(駝酪), 수유(소油), 유락(乳酪) 등으로 표기했고 우유, 요구르트, 타락죽, 버터, 치즈 등이 포함됐다. 우유와 유제품은 고위층 반가에서도 사용했다. 명종 20(1565)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가 죽었다. 문정왕후 윤 씨의 남동생인 영의정 윤원형도 실각했다. 평소 윤원형은 각종 비리 악행으로 악명이 높았다. 탄핵안이 바로 터져 나왔다. 탄핵 내용 중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타락죽 남용죄’다. 궁궐에서 타락죽을 만드는 이는 낙부(酪夫). 윤원형은 궁중 낙부와 타락죽 기구를 자기 집에 배치하고 타락죽을 만들어 먹었다. 더하여 자기 집의 ‘자녀와 첩까지도 배불리’ 먹였다. 엄중한 탄핵감이다. 

타락죽은 쌀(찹쌀)을 불려서 곱게 갈고 우유를 더한 다음 뜨겁지 않게 끓인 죽이다. 식성에 따라 꿀 등을 더해 먹는다. ‘타락’이란 이름은 건조우유를 뜻하는 몽골어 토락(TORAK)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편을 보면 ‘대비전에 타락죽을 비롯해 몇 가지 죽을 올렸으나 병환에 차도가 없다’는 내용도 나온다. 타락죽은 궁중에서 사용했지만 궁중음식은 아니다. 민간에서도 사용했다. 1540년경 유학자 김유가 기술한 ‘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정과, 다식 편에서도 타락을 언급한다.

귀한 음식이었으니 궁중, 반가 모두 귀한 약처럼 사용했다. 정조 시절, 관리들이 ‘이제 10(음력)이니 관례에 따라 타락죽을 올리게 하시라’고 권한다. 정조가 답한다. “아직 날이 차지 않으니 타락죽을 올릴 필요가 없다. 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 역시 한식의 바탕은 절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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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만두

제갈공명이 만두를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다. 출처인 ‘삼국지연의’는 말 그대로 ‘연의(演義)’ 즉 ‘소설’이다. 작가 나관중은 오랫동안 구전된 이야기를 소설로 정리하면서 14세기의 중국 만두를 제갈공명의 이야기에 슬쩍 끼워 넣었다. 남만정벌 자체가 과장이다. 정사(正史)에는 만두를 빚었다는 ‘노수대제(瀘水大祭)’는 없다. 만두도 없다.


고려 가요 ‘쌍화점’의 첫머리에는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쌍화’는 만두다. ‘상화’라고도 한다. ‘쌍화점’은 만두전문점이다. 곡물가루를 찜통에 넣어서 찌면 하얀 김이 서리처럼 피어오르거나 맺힌다. 하얀 김이 서리는 모습이 서리꽃, ‘상화(霜花)’다. ‘회회아비’는 위구르족, 투르크족 등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다. 만두는 고려 후기,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에 의해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고려 수도 개경(개성의 옛 이름)에는 몽골족을 비롯해 위구르, 아랍계 등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다. 


만두는 ‘유목민족의 휴대음식’에서 시작되었다. 곡물가루를 날것으로 반죽하거나 혹은 발효, 숙성시킨 다음 작은 덩어리로 보관하다가 물에 넣고 끓이면 바로 먹을 수 있다. 유목민족의 편리한 휴대용 인스턴트 음식이다. 곡물의 피에 고기나 채소 등의 속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춥고 건조한 지방이니 보관은 어렵지 않다. 어디에서든 끓는 물에 넣고 한소끔 끓이면 바로 먹을 수 있다. 곡물을 통째로 익히는 것보다 한결 편리하다. 중국 남방의 송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거란족 요나라의 벽화에도 만두는 등장한다. 만두 찜통을 묘사한 그림들도 있다. 우리의 만두는 거란의 요나라, 몽골의 원나라 등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나 조선 모두 밀가루는 귀했다. 중국 화베이 지방에서 수입한 밀가루는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밀을 소량 재배했으나 대부분 술을 만드는 누룩으로 썼다. 밀가루가 흔해진 것은 6·25전쟁 이후다. 1955년 미국 공법 480조에 따라 잉여농산물이 한반도로 들어왔다. 그 이전에는 무엇으로 만두를 빚었을까? 메밀가루다. 교맥(蕎麥), 즉 메밀가루를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다. 


한반도의 만두 문화는 꾸준히 진화했다. 궁중, 고위 관리, 반가, 상민들로 퍼졌다. 고려 충혜왕 때는 ‘궁궐에서 만두를 훔쳐 먹었다가 사형당한 도둑’이 등장한다. “단순한 음식물 도둑이 아니라 ‘만두 도둑’이라고 적시한 점, 사형이라는 중형을 내린 점” 등을 두고 만두가 그만큼 귀한 음식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궁궐에서 귀하게 여긴 만두를 손댄 중죄인 셈이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은 관악산 신방사 스님으로부터 만두를 접대받는다. “승려가 속인에게 눈처럼 하얗게 쪄낸 만두를 접대하다니 놀라 자빠질 일”이라고 적었다. 승려, 고위 문관 사이의 접대용이니 귀한 음식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4(1422) 5 17일의 기록은 태종의 수륙재에 대한 내용이다.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 () ()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절 금단하소서”라는 내용이 있다. 국왕, 부처, 승려의 밥상 이외에는 사치스러운 음식, 만두를 내놓지 말라는 뜻이다.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은 ‘사가집’에서 만두를 선물로 받은 후, “붉은 통을 열어 보니 만두가 서릿빛처럼 희다”는 시를 남긴다. 붉은 통과 흰 만두가 대비된다. 만두는 선물로도 요긴했다. 
 

‘독극물 만두 살인사건’도 있었다. 조선 중종 때 일이다. 창덕궁에 근무하던 가위장(假衛將) 이곤이 만두를 먹고 죽었다. 같이 만두를 먹었던 사람들도 토하거나 정신을 잃었다. ‘가위장’은 국왕이 거처하지 않는 빈 궁궐을 지키는 책임자로, 고위직 관리다. 한성부에서 독극물 투입 여부를 확인한다. 범인은 이곤 집안에서 부리던 종이었다. 만두는 귀하지만 민간으로도 널리 퍼졌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우리나라 의주 사람들이 중국의 대만두(大饅頭)를 잘 만든다”고 했다. 대만두는 큰 만두 피에 작은 만두를 여러 개 넣은 것이다. ‘해동역사’에서는 고려, 조선 초의 풍속을 전하며 대만두로 추정되는 만두 이야기를 실었다. “큰 만두의 껍질을 갈랐더니 그 안에는 작은 만두가 가득 들어 있었다. 크기가 호도(胡桃·호두)만 하여 먹기에 아주 좋았다”고 했다. 허균의 대만두와 비슷하다. 대만두는 이제는 사라진 음식이다.

 

2015-11-03 설렁탕

설렁탕과 곰탕의 구별법은 간단하다. 설렁탕은 사골 등 뼈를 곤 국물이다. 곰탕은 고기 곤 국물이다. 설렁탕에는 허드레 고기가 들어간다. 곰탕은 정육(精肉)을 사용한다. 설렁탕은 흰색, 유백색이고 곰탕은 노란 기름기가 동동 뜨는 투명한 국물이다.

곰탕은 반가(班家)의 음식이다. ‘고음(膏飮)’ ‘곰’이란 이름으로 조선시대 음식 책에도 등장한다. 고기 국물이니 ‘육즙(肉汁)’이다. 제사에 사용하는 탕국이나 진주(晉州) 비빔밥의 ‘보탕국’ 등은 곰탕과 닮은 면이 있다. 모두 고기 국물이다.

설렁탕이 선농단(先農壇)의 행사에서 유래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는 ‘주장’일 뿐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성종편에 선농단, 설렁탕이 등장한다는 말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 표현은 없다. 선농단 행사 때 의례적으로 먹었다거나 국왕의 행렬이 비를 만나서, 구경하던 백성들과 끓여 먹었다는 표현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동화다. 국왕이 비를 만나면 빨리 환궁하는 것이 원칙이다. 왕조실록에는 “선농단 행사를 마친 후, 고기(生肉)를 대비전에 올렸다”는 기록은 있다. 고기는 귀했고 제사에 사용한 고기는 더더욱 귀하게 여겼다.

설렁탕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고기, 정육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궁궐이나 지방 관아다. 이곳에는 고기를 납품하는 이들이 있었다. 백정(白丁)들이다. 조선 초기에는 달단족((,)) 등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들이 도축을 도맡았다. 일정 부분의 고기를 도축, 납품하면 부산물이 남는다. 뼈 내장 꼬리 머리 피 등이다. 냉장시설이 없었으니 솥에 두루 넣고 푹 고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언론인 고 홍승면 씨는 “설렁탕 집 옆을 지나가다가 하얗게 탈골한 소머리를 보고 질겁한 후 오랫동안 설렁탕을 먹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에도 설렁탕에 소머리뼈를 넣었음을 알 수 있다. 

형평사(衡平社)는 ‘백정의 신분차별 철폐’ 등을 내걸고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 조직이다. 진주 형평사의 간부 출신이 서울에 와서 오늘날 종로통에서 설렁탕 집을 열었다. 문제는 아이들의 진학이다. 신분제도는 이미 갑오경장 때 철폐되었으나 여전히 상민(常民)들은 “우리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반대한다”며 항의한다.  

 

동아일보 1930 11 12일의 기사에는 여러 가지 음식이 등장한다. 조합의 자율적인(?) 결정으로, 냉면, 장국밥, 떡국, 대구탕반 등 7가지 음식의 가격은 원래 20전에서 15전으로 내린다. 문제는 설렁탕 값이다. 기사에는 “설렁탕은 13전으로 내리기로 결정했으나 관할 종로서에서 10전으로 내릴 것을 종용하고 있으며 아마 10전으로 내릴 것”이란 내용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값을 행정관청에서 ‘지도’하는 것도 재미있다. 설렁탕은 다른 음식보다 싸다. 같은 길거리 음식인데 장국밥이나 대구탕반보다 싸다. 고기가 아니라 뼈가 위주고 그나마 고기도 내장 등 부산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실제 “설렁탕을 주문한 후 5전을 더 주면 고기를 후하게 얹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연히 그 고기는 내장이나 머리고기 등일 것이다. 

가격이 싸고 영양가는 풍부하니 설렁탕은 ‘길거리 서민 음식’으로 자리매김한다. 1930년대 설렁탕은 주요한 ‘배달음식’이 된다. 설렁탕 값을 내놓으라는 배달꾼과 ‘주인이 오면 주겠다’는 사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주먹다짐으로 발전한다. 가해자인 설렁탕 배달꾼이 종로서에서 “우리 뒤에는 300명이 있다”고 한 내용을 보면 당시 경성(서울)에는 상당수의 설렁탕 배달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의 소설에 “설렁탕 그릇의 탑을 둘러멘 ‘뽀이’의 자전차가 사람들 사이의 물결을 바느질한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당시의 잡지 ‘별건곤’에는 ‘신식 부부는 하루에 설렁탕 두 그릇’이라는 내용이 있다. 부모로부터 유산을 제법 받은 젊은 부부가 신혼 초에는 흥청망청하다가 슬슬 돈이 떨어진다. 결국 하루 두 끼, 가격이 싼 설렁탕이다. 느지막이 일어나니 밥을 지을 염이 나지 않는다. 오전에 설렁탕을 배달해 먹고, 오후에도 차려입고 산책이나 하다가 저녁에도 설렁탕을 먹는다는 뜻이다.

반가 출신의 ‘양반인 양’하는 이들은 여전히 설렁탕을 피했다. 정히 먹고 싶으면 배달이다. 상민이나 천민 등과 더불어 설렁탕을 먹는 것도 싫고 식탁에 파 소금 등이 있는 것도 못마땅하다. 곰탕은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설렁탕은 소금 간이 제격이다. 이것도 설렁탕과 곰탕의 차이점이다. 

 

2015-11-10 김치

 

김치가 우리의 ‘전통 음식’이라는 표현은 맞다. 하지만 우리 ‘고유(固有)’의 음식은 아니다. 우리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김치 혹은 김치류의 음식은 중국과 일본에도 있었고 지금도 남아 있다.

김치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2600년 전의 기록인 ‘시경’이다. “밭둑에 오이가 열렸다. 오이를 깎아 저()를 담그자”라는 내용이다. ‘저()’는 김치다. 오이김치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공자가 저를 먹느라 콧등을 찌푸렸다. 3년을 먹고 나니 적응이 되어서 수월했다”는 기록도 있다. 공자의 멘토는 주나라 문공(文公)이다. 주나라 문공이 저를 먹었으니 공자도 따라했다. 주나라 문공은 지금으로부터 2700년 전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의 벼슬살이는 짧았다. 불과 10년 남짓, 1789년에서 1800년 사이다. 다산은 황해도 해주에서 과거 고시관 노릇을 했다. 이때 남긴 시가 ‘다산시문집’(3)에 남아 있다. ‘장난삼아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주는 시’에 “납조냉면에 숭저가 푸르다(拉條冷면숭菹碧)”는 구절이 있다. ‘숭()’은 배추, ()는 김치다. ‘숭저’는 배추김치다. 다산의 시대에는 오늘날의 봄동 혹은 얼갈이배추 같은 품종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잎이 푸르니 “배추김치가 푸르다”고 표현했다. 시경과 공자의 저와 다산시문집의 저는 같다.

우리 기록에는 김치를 ‘지()’ 혹은 저로 표현했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지로 표현하다가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저라고 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김치 담그는 것을 ‘염지(鹽漬)’라고 했다. (채소 등을) 소금물에 담근다는 뜻이다. 엄격하게 나누자면 지와 저는 다르다. 지는 채소 등을 소금, , 향신료를 넣어서 삭힌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김치다. 저는 시간을 두고 삭힌 것이 아니라 식초 등을 넣고 비교적 빨리 삭힌 것이다. 서양의 피클과 비슷하다. 사용하는 식초는 초산이다. ‘원형 한반도형 김치’는 지다. 저와는 다르다. 

지 대신 저로 표기한 것은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이리라 짐작한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의 관리, 학자들이 우리 고유의 지 대신 중국식 표기인 저로 표현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겉절이’ 혹은 ‘겉절이 김치’라고 표현하는 음식부터 서양식 피클, 초절임 음식들이 저다. 우리의 지와는 다르다.  

 

조선 중기 문인 김장생의 ‘사계전서’ 제41권 ‘시제(時祭)’에는 “이른바 세 가지 소채(蔬菜· 채소)라는 것은 침채(沈菜)와 숙채(熟菜)와 초채(醋菜) 따위가 그 속에 포함되는 것이니”라고 했다. ‘초채’는 ‘초+채소’로 초절임 음식이다. ‘침채’ 즉 김치가 지라면 초채는 저다. 16세기 무렵에 ‘초절임 채소=저’와 ‘김치=지’를 다르게 표현했다.

김치의 주요 요소인 배추 무 고추는 모두 외부에서 전래된 것이다. 다산은 ‘죽란물명고(竹欄物名考)’에서 “숭채(숭菜)는 방언으로 배초(拜草)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백채(白菜)의 와전이며, 내복(萊복)은 방언으로 무우채(蕪尤菜)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후채(武侯菜)의 와전”이라고 했다. ‘무후채’는 ‘촉의 무후’ 제갈공명이 즐겨 먹었다고 붙인 이름이다.

중국에는 ‘중국 김치’라고 부르는 ‘자차이(+)’가 있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여러 종류의 ‘쓰케모노(漬物)’를 먹는다. 모두 채소 발효식품으로 김치와 비슷하다. 일본 ‘쇼소인(正倉院)문서’에 “한반도에서 김치가 전래되었다”고 했다거나 중국에서 배추, 결구배추, 무가 한반도로 전래되었다는 내용은 의미가 없다. 한반도의 김치는 지속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했고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김치의 ‘힘’은 끊임없는 변화, 발전에 있다.  

 

채소에 젓갈을 더하기도 하고 더러는 고기 삶은 국물을 더하기도 한다. 생선을 통째로 넣기도 하고 곡물을 갈아 넣고 날고기를 썰어 넣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1670년경의 ‘음식디미방’에는 오늘날에도 만나기 힘든 ‘꿩고기짠지’가 나타난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에서 “감기에다 기침, 콧물까지 겹치어 견딜 수가 없으며, 게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 마치 파김치처럼 늘어지는구려”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축 처지면 ‘파김치’라고 했던 것도 재미있다. 김치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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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7 두부

 

1597 6 22(음력). 임진왜란 중이다. 숱한 승전에도 불구하고 모함으로 이순신 장군의 벼슬길은 끊어졌다. 목숨이라도 구한 것이 다행이다. 백의종군. 권율 장군이 있던 경남 합천으로 향했다. 그날 아침 ‘난중일기’ 기록이다. (합천) 초계 군수가 연포()를 마련하여 찾아와서 권했다. 얼굴에 오만한 기색이 완연했다.


‘연포탕(軟泡湯)’의 ‘포()’는 거품이다. ‘연포’는 연두부다. 두부를 만들 때 거품이 인다. 두부를 ‘포’라고 불렀다. 초계군수 입장도 난처했으리라. 벼슬이 끊어진 백의종군 신세지만 전직 삼도수군통제사다. 대접할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귀한 연포탕을 준비했지만 얼굴은 떨떠름하다. 


두부의 이름은 여러 가지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두부의 이름은 본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라 했고 또 다른 이름은 숙유(菽乳)”라고 밝혔다. ‘숙()’은 콩이다. 숙유는 ‘콩 우유’ 즉, 두유다. 두유로 두부를 만드니 숙유라고 불렀음 직하다. 두부는 ‘두포(豆泡)’라고도 했다. 역시 콩, 거품의 의미다.


“전생에 지은 죄가 커 금생에 두부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두부를 만들기 힘들다는 뜻이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주로 사찰에서 두부를 만들었다. 사찰은 힘든 일을 해낼 인력이 있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도 사찰의 승려를 통해 두부를 만난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왕릉의 제사에 두부를 공급하는 사찰, 조포사(造泡寺)가 있었다. ‘승정원일기’ 인조 3(1625) 4월의 기록에는 “중국 사신이 오면 한양 인근 사찰에 곡식을 주고 두부를 맡기자”는 제안도 나온다. 영조 9(1733) 3월에는 남원에서 ‘백복사(百福寺) 흉서 사건’이 터진다. 범인으로 지목된 노이겸은 “백복사에서 연포(軟泡)를 설비하였다는 일은 이제 처음 들었습니다”며 공범들을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역시 사찰의 두부다.


두부는 연포탕을 통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발전한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은 두붓국과 지진 두부를 먹었다. 단순하다. 이색은 ‘목은시고’ 제33권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두부가 마치 갓 썰어낸 비계 같고, 성긴 이로 먹기에도 그저 그만”이라고 했고, 9권에서는 ‘두부와 토란을 섞은 반찬’을 이야기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도 ‘사가집’에서 “서리 빛보다 흰 두부를 잘게 썰어 국을 끓이니 부드럽고 향기롭다”고 했다. 두부를 넣은 평범한 국이다.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두부를 잘게 썰어 서너 개씩 꿴 다음, 흰 새우젓갈을 섞은 물에 넣고 끓이되 굴(石花)을 더한다고 했다. 새우젓갈, 굴이 있으나 고기는 없다. 추사 김정희의 ‘대팽두부(大烹豆腐)’에도 “가장 맛있는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라고만 했다. 차별화된 두부 맛은 말하지 않는다.
 

두부는 진화한다. ‘프리미엄 연포탕’은 닭고기와 기름에 지진 두부를 닭고기 국물에 넣고 끓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7)-절에서 밤에 두붓국을 끓이다’에서 “다섯 집에서 닭을 한 마리씩 추렴하고, 주사위처럼 썬 두부를 띠 풀에 꿰어 준비한다”고 했다. 닭고기가 들어간 프리미엄 연포탕이다. 숙종 7(1681) 6월에는 ‘암행어사의 연포탕’이 문제가 된다. 영의정 김수항의 탄핵에 따르면 “암행어사 목임일은 (평안도) 찰방, 적객(謫客) 등과 어울려 산사로 돌아다녔고 연포회를 베풀었다.” ‘적객’은 귀양살이 온 사람이다. 암행어사가 공무원(찰방), 적객과 ‘프리미엄 연포탕’을 즐겼으니 중죄다. 조선 후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1849)에는 시월의 음식으로 연포탕을 꼽는다. 두부를 잘게 썰어 꼬챙이에 꿰서 지진 다음 닭고기와 함께 끓인 것이다.


우리는 맛있는 두부를 먹었던 민족이다. 허균은 ‘도문대작’(1611)에서 “창의문(자하문) 밖의 두부가 맛있다”고 차별화했다. 세종 때는 중국으로부터 “두부와 반찬 잘 만드는 여인들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일본의 고급 두부, ‘당인두부(唐人豆腐)’는 경주 출신 박호인이 만들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이제 맛있는 두부를 잃어버렸다. 중국에는 ‘취두부(臭豆腐)’ ‘모두부(毛豆腐)’ 등 발효두부가 남아 있다. 일본의 두부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우리만 ‘물에 담아 포장한 두부’로 찌개를 끓이거나 지져 먹는다. 고려 말의 두부 수준이다.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두부 먹다가 이 빠진다(豆腐喫 齒或落)”고 했다. 두부를 쉽게 여기다가 좋은 두부를 다 잃었다.

 

2015-11-24  조선시대의 회 문화

▲위어회

 

손님이 오기로 했다. 평범한 손님이 아니다. 정조대왕의 사위이자 순조의 매제다. 고귀한 권문세가가 궁벽한 시골까지 오는 이유가 엉뚱하다. ‘농어((,)魚·노어)를 보기 위하여’다. 1830년 무렵의 일이다. 영명위(永明尉) 홍현주가 다산 정약용을 만나러 광주 마재(馬峴·마현)까지 왔다. 다산은 18년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 마재로 돌아와서 여러 해를 보냈다. 고희의 나이. “농어가 잡힌다”고 하니 정조의 사위 홍현주가 왔다. 오는 날이 장날이다. 하필이면 농어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어렵게 농어 한 마리를 건졌다. 귀한 손님을 초대하고 농어를 제대로 구하지 못했던 이날의 광경을 다산은 ‘다산시문집’에 남겼다.

조선시대 내내 사대부들의 머릿속에는 늘 농어회가 살아 있었다. 그들은 ‘순갱노회(蓴羹(,))’를 그리워했다. ‘순갱노회’의 주인공은 장한이다. ()나라에서 벼슬살이(동조연)를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순채국(蓴羹·순갱)과 농어회((,)魚膾·노어회)가 그립다”고 고향인 강동 오군(吳郡)으로 돌아갔다. 세속의 영화로움 대신 순채국과 농어회를 택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장한의 농어회’를 그리워한다. ‘농어회’는 그들에게 ‘핫 아이템’이자 ‘스테디셀러’였다. 

조선 중기의 양명학자 계곡 장유는 “외로운 학 울음소리에 나그네 꿈 깨고 보니, 주방에서 큰 농어로 회를 뜬다네. 평생토록 장한의 흥취를 그리워했으니 지금 곧장 노 저어 동오(東吳)로 갈거나”라고 했다. ‘오군 출신 장한의 농어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현실적으로 이루지 못할 꿈을 시를 통해 펼쳤다. 

회는 시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상민부터 궁중까지 두루 회를 접했다. 먼 바다의 큰 생선은 구하기 힘들었으니 민물고기나 근해의 바다생선들이 횟감으로 널리 쓰였다. 오히려 구중궁궐에서 싱싱한 물고기를 만나는 것은 힘들었다. 궁중은 사옹원 관리 아래 위어소(葦魚所), 소어소(蘇魚所)를 두었다. 소어는 밴댕이, 위어는 웅어라고도 불리는 생선이다. 예나지금이나 밴댕이 소갈딱지다. 쉬 상한다. 결국 싱싱한 회는 위어다. 위어는 강화도, 고양, 행주산성 언저리 등 서해안 일대에서 많이 잡혔다. 한양 도성과 멀지 않으니 얼음을 이용하여 궁궐까지 직송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위어소가 사용하는 얼음의 관리, 위어소 근무자들 급료, 병역, 세금 문제 등이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중종 11(1516) 6월에는 ‘난지포의 위어 등 생선을 잡을 권리’를 두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상소를 올린 이는 중종 옹립 반정 공신 박원종의 처 윤씨다. “난지포에서 위어를 잡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유 없이 궁중 사옹원에서 그 권리를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사옹원에서 반론한다. “난지포 일대 생선을 잡을 권리는 성종 당시 월산대군에게 주었다. 그 후 박원종에게 권리가 넘어갔으나 지금은 월산대군, 박원종 모두 세상을 떠났다. 궁중에서 돌려받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었다. 중종은 윤씨의 손을 들어준다. “궁중에서 필요한 위어는 김포, 통진, 교하, 양천 일대에서 구할 수 있는데 굳이 개인이 취하고 있는 권리를 빼앗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었다. 위어는 소중한 생선이었다.

 

나이든 사람들은 질긴 음식 대신 부드러운 생선회를 좋아했다. 상당수의 ‘효자’들이 잉어회, 붕어회 등을 마련하고 효자로 인정받았다. 

단천 사는 김택기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김택기는 낚시, 그물질을 통하여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버지에게 황어회를 올린다(일성록·정조 13). 강릉의 벼슬아치 이성무의 노모는 79세였다. 이성무의 형제들이 잉어회를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강가의 얼음을 깼더니 잉어 한 마리가 스스로 뛰어나왔다(세종실록 13 6). 조선시대에는 붕어, 피라미부터 고래까지 다양한 회를 먹었다. 고래는 국내에서도 먹었고 일본에 갔던 사신들도 먹었다. 회는 민간부터 궁궐까지 모두 먹었다. 궁중 제사상에도 어회, 육회, 전복회 등이 등장한다.

 

문인들에게 회는 시의 좋은 재료였다. ‘금제작회(金제斫膾)’는 로맨틱하다. ‘금빛으로 버무린 회’다. 금빛은 귀한 귤이나 가을의 국화잎이다. 재료는 농어. 서리가 내린 후의 석 자 미만 농어에 꽃잎을 잘게 썰어 묻혀 먹었다. 계곡 장유는 “문득 생각나는 금강(錦江)의 별미, 붉은 싹이 고운 금제작회”라고 노래했다.

음식은 맛과 더불어 멋으로도 먹는다.


2015-12-01 냉면

▲황광해 씨 제공

 

열한 살의 어린 국왕이다. 깊은 밤,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다. 주방의 남자 숙수(熟手)들은 모두 퇴근했다. 냉면은 어차피 별미다. 궁궐 밖의 냉면을 사다 먹기로 했다. 마침내 냉면을 사왔는데 곁에 시립한 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 돼지고기다. 수육이었을 것이다. 순조가 말한다. “그이는 먹을 것이 따로 있으니 냉면을 줄 필요가 없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른바 ‘순조의 냉면과 돼지고기’다. 순조 원년(1800)의 일이다. 이유원은 1814년생이다. 어린 시절, ‘순조의 냉면’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유원은 돼지고기 수육을 숨긴 신하에게 냉면을 주지 말라고 한 순조가 “속이 좁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겨우 열한 살의 어린아이다. 오히려 이유원의 속이 좁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재미있는 것은 1800년 무렵의, 참 평화로운 ‘냉면 테이크아웃’이다. 군왕이 독살 염려도 없이 궁궐 밖 음식을 테이크아웃한 것은 흐뭇하다. 

냉면에 대해서 가장 먼저 언급한 이는 조선 중기의 문인 계곡 장유(15871638). 문집에 ‘자장냉면(紫漿冷면)’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가루가 마치 눈꽃처럼 내렸다”고 했다. 자줏빛 육수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옥가루같이 흰 국수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노을처럼 영롱한 자줏빛 육수의 냉면’이라고 표현했다. 

냉면을 만든 재료는 메밀가루였다. 메밀은 글루텐 성분이 부족하다. 면으로 만들기 힘들다. 녹말을 넣고 힘겹게 면발을 만들었다. 메밀은 교맥(蕎麥)으로 표기했다.

정조 시절 현감을 지냈던 문신 이인행은 순조 2(1802)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과정과 유배지의 삶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저·침저)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했다.

이인행과 교분이 깊었던 다산 정약용도 18세기 말, 황해도에서 먹었던 냉면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산시문집’에 나타나는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면숭菹碧)’이라는 문구다. 냉면과 배추김치(숭저)가 등장한다. 냉면의 육수가 배추김치 국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순조를 난처하게 한 돼지고기 수육은 비슷한 시대의 실학자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도 나타난다. 음력 4월의 평양 풍경을 이야기하면서 “냉면과 돼지수육의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고 했다. 18세기 전후하여 냉면과 더불어 돼지고기 수육, 배추김치 혹은 김치(동치미)국물을 더불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냉면은 귀하면서도 비교적 흔한 별미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유주목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매월 초하룻날, 최 승지 집에 가서 냉면을 선물로 드렸다”고 기록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미 냉면이 선물 품목이기도 했다.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무렵에는 냉면이 별미이면서 길거리 식당들의 주요 메뉴로 등장한다. 도공 출신으로 분원(盆院)을 운영했던 하재 지규식은 “종로에서 냉면을 사먹었고 냉면값이 1냥”이라고 명기했다. 지규식은 한 달에 여러 차례 냉면을 사먹었던 기록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의 신문에는 냉면에 관한 기사가 자주 오르내린다. 상당수는 냉면배달부의 파업에 관한 것이었다. 경성(서울)과 평양을 가리지 않고 냉면배달부의 파업은 속을 썩였다. 평양에서는 냉면배달부가 파업, 참다못한 시민들이 항의를 한다. 경찰서장이 냉면집 주인과 배달부 사이에서 파업을 중재한다. 동아일보 1938 12 1일의 기사는 퍽 드라마틱하다. 파업 주체는 ‘평양면업노동조합(平壤麵業勞動組合). 냉면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모임이다. 240명이 파업을 시작한다. 요구 조건은 11 18일까지 임금 90전을 1원으로 올려줄 것. 냉면집 주인들은 “12 1일 자로 임금을 올려주겠다”고 대안을 제시했다가 날짜를 12 10일로 미룬다. 상황은 더 시끄러워진다. 이 기사 중에는 ‘냉면당(冷면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냉면 마니아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냉면 마니아들이 있었다.

냉면은 전국적으로 널리 유행했다. 소설가 이무영은 ‘영남주간기(동아일보 1935 5)’에서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 했다. 경성, 평양뿐만 아니라 남쪽의 지방도시에도 ‘한밤중 냉면배달’은 흔했다. 


2015-12-08 술과 술꾼

연말이다. 송년회는 대부분 술로 시작하여 술로 끝난다. 조선시대 술꾼들이 부러워할 이야기다

예전에도 ‘험난하게’ 술을 마셨던 술꾼들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백 번 금주령이 내려진다. 대부분 곡식을 아끼고자 시행되었다. “한 사람이 술을 마시면 열 사람이 굶는다”는 이야기다. 상당수의 금주령은 상징적인 조처였다. 국상이 나거나 가뭄 등 천재지변이 심할 때 국가에서는 금주령을 내렸다. 형식적일 때도 있었다. 엄할 때도 있었다

술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영조는 술꾼들을 찾아내려고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아무리 막아도 술을 마실 방법은 있다. 금주령을 무릅쓰고 명성을 휘날린 술꾼들도 적잖다. 

성종 때 문신 손순효는 ‘술잔 늘이기’로 유명하다. 늘 만취에 사고뭉치였지만 그의 재주를 아낀 성종이 특별히 술잔을 내려주며 “이 술잔으로 하루 세 잔만 마시라”고 했다. 어느 날 또 그가 만취상태로 나타났다. 성종이 “왜 술을 정해준 것보다 많이 마시고 나타났느냐?”고 꾸짖었더니 얇고 크게 편 술잔을 보여주며 “전하가 주신 잔에 조금도 더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나. 

숙종 때 대제학 오도일은 술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여러 번 ‘음주사고’를 쳤지만 숙종은 술꾼 오도일에게 관대했다. 작은 사고를 묵인하면 대형사고가 터진다. 기우제에서 술을 올리는 작주관을 맡았던 오도일이 술에 취해 음복주를 발로 걷어차서 쏟았다. 오도일은 전라도 장성으로 유배 갔고 6년 뒤 유배지에서 죽었다. 

‘호주가 오도일’의 이름은 그로부터 몇 대를 건너서 다시 나타난다. 정조 때 오도일의 손자인 태증이 성균관 제술 시험에 합격해 창덕궁 희정당에서 정조를 만난다. 합격자들을 위한 질펀한 술자리다. 정조의 술자리 ‘룰’은 “취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는다” 즉, ‘불취무귀(不醉無歸)’였다. 

피가 술보다 진한지, 술이 피보다 진한지는 알 수 없다. 손자 태증의 술도 할아버지를 닮았다. 기록에는 “오태증의 집안이 대대로 술을 잘 마셨다. 태증이 이미 5잔을 마셨는데 전혀 취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정조는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잔을 더 권하라”고 한다. 끝내 오태증이 술을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자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손자인 태증이 취하여 쓰러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별감이 업고 나가라”고 명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6 3 2일의 기록이다. 

영조시대는 ‘술꾼들의 암흑기’였다. 중국 사신의 접대나 종묘 제사에도 술 대신 단술(감주)을 내놓게 했다. 금주령을 어긴 사람에게 “조상의 제사에는 감주를 사용하고 너는 술을 퍼 마시느냐?”고 질책했다. 남병사 윤구연은 숙소에 두었던 술독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금주령을 어긴 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영조는 윤구연의 처형장인 남대문에 직접 나타난다. 영의정 신만을 비롯하여 삼정승이 윤구연을 구명하려다 동시에 파면된다. 윤구연에 대한 벌이 과하다고 했던 이들도 좌천되거나 벼슬을 잃었다. 

금주령이 느슨해진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는 술 마시는 이야기를 시로 썼다(‘청장관전서’). 그는 시에서 술꾼들의 과장된 꿈을 제대로 보여준다. 제목부터 대단하다. “백년, 삼만 육천일, 반드시, 매일 3백 잔을 기울이다”다. 이 시의 마지막은 더 대단하다. “백천만겁 동안 그릇 굽는 곳의 흙이 되어, 영원히 술잔, 술병, 옹기가 되리라”고 했다.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술잔, 술병, 옹기처럼 일평생 술을 품고 살 수는 없다.


군신 간의 술을 둘러싼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다. 문신 이석은 효종 때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다. 효종과 늦은 밤 술자리를 가진 이석은 한잔, 두잔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 취했다. 효종은 젊은 별감을 시켜 이석을 부축하게 하고 해정주(解정酒) 한 병을 따로 보냈다. 이석의 비석에 적힌 내용이다. 해정주는 ‘술 깨는 술’이다.

조선시대 술꾼들의 로망은 ‘주덕송(酒德頌)’을 지은 진()나라 유영(劉伶)이다. 그는 늘 술병을 가지고 다니며 하인에게 삽을 메고 뒤따르게 했다. ‘내가 술을 마시다 죽으면 바로 땅에 묻어 달라’는 뜻이었다. 유영은 “한꺼번에 한 섬의 술을 마시고 다섯 말로 ‘해정(解정)’을 한다”고 했다. 역시 ‘해정’은 “술을 깨게 한다”는 뜻이다. 한 섬은 두 가마니다. 그 많은 술을 마시고도 부족하여 다시 해장술로 다섯 말을 마신다니 가히 술꾼들의 로망이 될 만하다. 


2015-12-15 해장국

▲콩나물해장국. 동아일보DB

 

‘해장국’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나타난다. 술꾼들은 깜짝 놀랄 이야기지만 고려, 조선시대에는 ‘해장국’이 없었다. 해장국은 ‘해정+장국’이다. ‘해정(解정)’은 ‘술을 깨우다’는 뜻이다. 장국은 ‘장갱(醬羹), 즉 된장 등으로 끓인 국이다. ‘술 깨우는, 된장 넣은 국물’이 해장국이다. 

해장국의 기원(?)을 고려시대 ‘성주탕(醒酒湯)’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 않다. 통역관 교과서 격인 ‘노걸대’에 ‘새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얼굴 씻고, ‘성주탕’을 먹고, 점심 한 후에 떡 만들고 고기 볶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내용을 보면 성주탕은 해장국이라기보다 ‘약’이다. ‘탕()’은 국물이 아니고 약일 때가 많다. 국물은 ‘갱()’으로 표현했다.

1499
년 발간된 우리 고유의 의서 ‘구급이해방’에는 술병(酒病) 치료법이 있다. 과음으로 구토, 손발 떨림, 정신 어지러움, 소변 불편이 나타나면 갈화해정탕을 권한다. ‘갈화(葛花)’는 칡꽃이다. 칡꽃, 인삼, 귤껍질 등 여러 약재를 넣고 달인 물을 먹으면 술병이 낫는다고 했다. 이 치료법의 끝부분은 술꾼들이 새길 만한 내용이다. ‘갈화해정탕은 다 부득이해서 쓰는 것이지, 어찌 이것만을 믿고서 매일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우리 선조들은 해장국을 먹어야 할 정도의 음주는 ‘병’이라 여겼다. 병은 탕()으로 다스렸다.

술을 깨게 한다는 ‘성주’는 조선시대 기록에도 자주 나타나지만 해장국, 성주탕이란 표현은 없다. 조선시대까지도 해장국은 없었다. 최영년(18561935)의 ‘해동죽지’(1925)에 나오는 ‘효종갱(曉鐘羹)’을 해장국으로 여기는 것도 틀렸다. 효종갱은, 이른 새벽, 파루 칠 때 남한산성 언저리에서 4대문 안으로 날랐다. ‘프리미엄 국물’이지 해장국은 아니다. 그나마 효종갱은 일제강점기에 나타난다. 

혜원 신윤복(1758?)의 풍속도 ‘주사거배(酒肆擧杯)’에 자그마한 가마솥이 두 개 보인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국물은 해장국이 아니라 술국이었을 것이다. 술국은 술을 마실 때 한두 숟가락 가볍게 마시는 것이다. 된장 푼 물에 마른 멸치, 우거지 등을 넣고 푹 끓인다. 탁주 한두 잔 정도는 신 김치와 술국으로 마시는 게 보편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창업한 해장국집들도 마찬가지. ‘이른 새벽 동소문 밖에서 땔감, 나물 등을 가지고 온 이들이 요기를 했다’고 말한다. 밥상 한 귀퉁이에 술국과 막걸리 한 잔도 곁들였을 것이다.

 

2015-12-22  돼지고기

 

우리도 돼지고기를 오래전부터 사용했다. 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에서도 돼지, 양 등을 먹지만 귀하다. 왕이나 귀족들만 먹는다. 고기 도축하는 것도 서투르다”고 했다. 기구한 운명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청나라와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일방적인 침략. 두 번째 전쟁, 병자호란은 짧았다. 불과 두 달. 상처는 더 깊었다. 왕이 땅에 머리를 찧었고 잡혀간 사람들만 50만 명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개월, 청의 사신이 왔다. 인조 15(1637) 음력 8 28일의 기록(승정원일기)은 참담하다. 영접도감에서 아뢴다.

“전날, 임금께서 ‘왜 돼지고기 대신 쇠고기를 마련했는가? 미리 준비한 돼지고기를 모두 연회에 사용할 것인지?’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쇠고기를 좋아합니다. 게다가 이번 칙사는 추운 계절에 왔으므로 생선도 구하기가 힘듭니다. 연회가 많으니 돼지고기를 사용하는 일이 잦습니다. 혹시 준비한 돼지고기 두 근이 부족할까 하여 쇠고기를 한 근 더 준비했습니다. 혹시 돼지고기를 찾으면 돼지고기를 올리겠습니다.

쇠고기 한 근. 임금의 대답이 궁색하다. “소를 쓸데없이 도살하는 일은 애석하다. 그리고 음식을 더 내놓는 것도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늘 하던 대로 하라.” 하라 할 수도, 하지 마라 할 수도 없는 참담한 심정이 엿보인다. “주긴 하되 많이 주지는 말고, 원래 주던 대로 내놓으라”는 애매한 태도다. 

돼지고기는 ‘낮춰 보는’ 식재료였다. 조선시대 내내 자기 자식을 부르는 호칭은 ‘돈아(豚兒)’였다. ‘돼지같이 미욱한 내 자식’이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도 “돼지 같다”고 했다. 좋은 뜻이 널리 퍼졌다고 표현할 때 “돈어(豚魚)도 알아들었다”고 했다. 돼지와 물고기를 가장 미욱한 생물로 여겼다. 

제사에서도 돼지고기는 천시했다. 중국에서도 돼지고기는 천대받는 제사 음식이었다. “흉년이 들면 제사 음식에 하생(下牲)을 쓴다”고 했다. ‘하생’은 제사 음식의 등급을 낮추는 것이다. “소, , 돼지 대신 양과 돼지를, , 돼지 대신 송아지를 쓴다. 평소 송아지를 쓰던 이는 새끼돼지를 쓴다”고 했다. 숙종 12(1686) 11월 궁중에 올라온 상소문이다. 흉년으로 기근이 들었다. ‘하생’이다. 돼지는 늘 제일 뒤차지다. 


고려 말기에도 여전히 농경의 주요 도구인 소는 귀하다. 문제는 종묘사직의 제사와 중국 사신 접대다. 사신이 왕래하는 평안도 일대는 늘 고기가 필요하다. 고기를 구하기 위해 농번기에도 농민들을 사냥에 내몬다. 상소문은,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여 소의 도축을 엄금하고, 그 대신 양계장, 양돈장을 만들어서 고기를 공급하자고 주장한다. 양돈장은 조선시대에도 나타난다. 

세종 7(1425) 4, 호조의 상소다. “전구서에 암퇘지 508마리가 있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으니 300마리만 남기고 나머지 200마리는 시세대로 팔아서 민가에서 두루 번식하게 하자”는 내용이다. 

단종 1(1453) 4월에는 ‘돼지 사육을 잘하는 탐관오리’의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별좌 이흥덕이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헌부에서 정한 벌은 곤장 100대에 3000리 밖 유배, 벼슬길 금지다. 의정부는 ‘곤장 80, 벌금, 파직하되 벼슬길은 열어준다’는 걸로 강도가 무르다. 이유가 재미있다. “이흥덕은 중국을 드나들면서 양돈을 배웠고 세종대왕이 예빈시에서 일하도록 했다. 돼지 기르는 일에 힘썼고 공적도 있다”는 것이다.

세조 8(1462) 6월에도 돼지 사육을 권장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닭, 돼지, 개 기르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손님 접대와 제사가 늘 넉넉하지 못하다. 한양 도성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 수령이 직접 관리하라. 매년 그 숫자를 보고하고 양돈 성적에 따라 상벌을 적용하라”는 내용이다. 

돼지고기는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안동 장씨의 ‘음식디미방’(1670년경)에도 돼지고기 요리법은 딸랑 두 개, ‘가제육(家저肉)’과 ‘야제육(野저肉)’뿐이다. 개고기 요리법은 10가지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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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부터 돼지고기는 비교적 흔해진다. 순조가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할 때도 돼지고기는 등장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에도 “냉면과 돼지수육 값이 올라간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돼지고기가 흔해지고 저잣거리로 나온 것이다.

 

2015-12-29  귤

 

재미있다고 하기엔 심각하고, 심각하다고 말하기엔 귀엽다. 제주에서 황감()이 진상되면 궁궐에서는 과거를 치렀다. 황감제다. 정조 3(1779) 12월의 황감제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감귤을 나눠 줄 적에 매우 혼잡스러웠다”고 단순하게 기록했지만 단순하지 않다. 과거 보러 온 선비들이 서로 귤을 받겠다고 분탕질을 쳤다. 처음도 아니다. 숙종 25(1699)에도 ‘과거장 황감 탈취 사건’이 있었다. “감귤을 나눠 줄 때 유생들이 앞다투어 탈취했기 때문에 분란이 일었다. 이번에는 전일보다 더 극심하다. 명색이 선비들인데 임금의 하사품이 중한 줄 모르니 괴이하고 한심하다.” 황감제에서 점잖은 선비들이 귤을 더 받겠다고 분탕질 친 일이 매우 잦았음을 알 수 있다. 처벌은 엄했다. 중죄로 다스렸다. 정조 때는 성균관 대사성과 과거장 담당 승지가 파직된다. 귤 때문에 국립대 총장급(성균관 대사성)이 파직된 것이다. 분탕질을 친 과거 응시자들은 ‘과거 응시 제한 조치’를 받았다

귤은 귀한 과일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이미 쓰시마 섬, 제주도의 귤이 개성으로 올라온다. 고려 선종 2(1085) 2월에 “쓰시마에서 감귤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동사강목). 조선 태종 18(1418)에는 일본 쓰시마 좌위문대랑이 황감(柑子·감자) 320개를 바쳤다는 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벼슬 이름(좌위문대랑)과 감귤의 수까지 정확하게 기록했다.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귤의 종류를 금귤, 감귤, 청귤, 유감, 감자, 유자 등으로 상세하게 나누고 그 맛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귀한 과일이니 귀하게 사용했다. 고려 말 도은 이숭인(13471392)은 팔관회에 참석해 “자줏빛 술을 귤배(橘杯)에 부어 마시니, 그 향기가 자리에 가득하다”(도은집 3)라고 노래했다. 귤배는 귤을 반으로 가른 껍질이었을 것이다. 귤 껍질로 술잔을 만들어 그 향기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문신 성현은 시에서 “(귤 껍질은) 고기와 같아서 씹으면 단맛이 나고, 꿀에 재워 음료로, 술로 빚어서 마셔도 향과 맛이 뛰어나다”라고 노래했다. 마른 귤 껍질(陳皮·진피)을 이용한 차는 조선시대 내내 주요한 약재로 사용되었다. 궁중에서도 귤 껍질에 인삼을 더한 삼귤차(蔘橘茶)와 생강을 더한 강귤다(薑橘茶) 등을 늘 가까이 두었다.

조선시대 귤은 임금의 은혜와 효도의 상징이었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육적이 여섯 살 때 원술을 만나 귤을 얻었다.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소매에 담았던 귤이 떨어졌다. “왜 귤을 숨기는가?”라는 질문에 “어머님께 가져다 드리려 한다”고 대답했다. ‘육적회귤(陸績懷橘)’의 고사다. 이후 귤은 효도의 상징이 된다 

성종은 늦은 밤, 홍문관에 있던 문신 성희안에게 술과 귤을 하사한다. 성희안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고, 소매 안의 귤이 떨어진다. 다음 날, 성종이 성희안을 불러 귤을 한 쟁반 내린다. “어젯밤 그대 소매 속의 귤은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것이리라. 그 때문에 다시 주는 것이다.(해동잡록 4) 


정작 귤의 산지인 제주도는 고통이 심했다. 세종 9(1427) 6, 제주도 찰방 김위민이 상소를 올린다. 귤 관련 제주 관청의 악행이다. “귤나무를 일일이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맺을 만하면 열매 수를 기록한다. 그 집 주인이 귤을 따면 절도죄로 몬다”라고 했다. 세조 역시 “민가의 귤 하나하나에 표지를 달고, 손실이 나면 다른 물품으로 세금을 걷는다. 너무 힘드니 민가에서 귤나무를 뽑아 버리는 일도 있다”(세조 1년·1455)라고 했다. 견디다 못 한 제주 사람들이 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나무를 죽이는 일도 잦았다.


궁중에서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태종 12(1412)에는 조정 관리를 제주로 보내 감귤나무를 전라도 순천 등 바닷가 마을에 옮겨 심게 했고 이듬해에도 감귤나무 수백 그루를 전라도 바닷가에 옮겨 심었다. 그러나 실패. 20여 년 후인 세종 20(1438)에는 ‘강화도로 옮긴 귤나무’ 이야기가 등장한다. 추운 지방이니 보온이 필요했다. 높이가 10척이 넘는 나무를 구해서 집을 지었다.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 귤나무를 보호했다. 이듬해 봄에는 또 이 집을 허물었다. 귤나무는 제대로 자라지 않고 민간의 근심거리만 늘어나니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귤은 향기롭지만 귤을 얻는 방법은 힘들었다. 귤을 운반하던 관리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오키나와로 가거나 심지어는 중국으로 표류해 쑤저우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5개월이나 늦었으니 공물 청귤은 다 상했다(왕조실록 정조 2년·1778 8 5).


2016.01.05  굴(석화)

▲동아일보DB

 

사달은 1499 1월에 시작되었다. 사간원 정언 윤언보가 유자광을 탄핵한다.

“유자광이 함경도에 갔을 때 무리하게 전복과 굴(石花·석화)을 챙겼다. 불법으로 역마를 차출했다. 사적으로 임금에게 전복, 굴을 상납했다. 불법이다. 국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뇌물을 받은 이는 연산군이다. 즉위 5년 차,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다른 탄핵 건도 있지만 굴, 전복 불법 상납이 또렷이 나타난다.

연산군의 대답은 담담하다.

“유자광이 어찌 다른 생각을 했겠느냐? 그저 좋은 걸 보고 나한테 가져다주고 싶었겠지” 정도다. 이날의 상소는 시작에 불과했다. 사간원, 사헌부 전체가 나선다. 그해 2 23일 결국 연산군은 유자광을 도총관의 자리에서 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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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후인 1501(연산군 7) 11월에는 한치형이 ‘역상소’를 올린다. 사간원 등의 “굴, 전복 관련 상소가 잘못되었다”는 내용이다. 한치형은 자기의 자리를 걸고 사직 의사를 밝히지만 연산군은 사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굴, 전복 사건’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6년 후인 1505(연산군 11) 2, 연산군의 반격이 시작된다. 사간원, 사헌부의 “유자광의 굴, 전복 관련 탄핵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이다. 연산군은 “사간원 정언 윤은보와 사헌부 지평 권세형이 탄핵한 ‘유자광의 굴, 전복 상납’은 죄가 아니다. 그게 무슨 아첨이며 죄이겠는가? 이렇게 말할 때는 반드시 윤은보와 권세형에게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을 바른대로 말할 때까지 고문하라”고 지시한다. 연산군의 ‘주장’은 “유자광은 이미 나이가 많다. 나이 든 유자광이 굴 따위를 진상하여 무슨 나의 은총을 기대하겠는가? 내가 보기엔 탄핵 상소를 올린 사람들은 권력자 집안 출신들이고 유자광은 천한 집안 출신이다. 그래서 업신여긴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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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의 ‘굴 상납 관련 상소문’을 문제 삼은 것이다. 두 달 뒤 의금부의 ‘판결’이 나온다. 탄핵에 앞장선 안윤덕은 곤장 80, 처음 문제 삼았던 윤은보는 곤장 70대다.

‘유자광의 굴 상납 사건’은 정권이 바뀌면서도 계속 이어진다. 1507 4, 중종 즉위 2년 차. 사간원에서 다시 ‘유자광의 굴, 전복 불법 상납’을 문제 삼는다. 탄핵 내용 중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타난다. ‘호미(狐媚), ‘여우 눈썹’이다. 사람을 홀린다, 아첨하여 혼을 빼놓는다는 뜻이다. 사간원에서 “생복과 굴을 드려 임금을 호미했다”고 탄핵한다.

중종은 “이미 유자광이 벌을 받았으니 더 이상 재론치 말라”는 입장이고, 신하들은 강경하다. “그가 받았던 각종 상을 모두 삭제하고 중형에 처해야 한다. 자손들 역시 멀리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종은 거부한다. 결국 8년 만에 ‘유자광의 굴, 전복 상납 사건’은 마무리된다. 

조선시대에는 굴을 석화로 불렀다. 굴의 모습이 마치 돌에 꽃무늬를 새긴 것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더러는 ‘石華(석화)’로 표기하기도 했다. 역시 돌에 새긴 화려한 꽃무늬라는 뜻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도 굴을 꽃 같다고 했다. “무정한 물건이 정이 있는 꽃을 피웠다. 껍질의 빛깔이 피지 않은 꽃 같다”고 했다.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굴은 고원(함남)과 문천(강원도)에서 나는 것이 크다. 맛은 서해에서 나는 작은 것이 낫다. ‘윤화(輪花)’는 동해에서 나는데 석화와 같다. 큰 것이 맛있다”고 했다. 충청도 해미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 정약용도 굴을 소재로 시를 남겼다. “이제 신선한 석화가 성연(서산지방)에 도착했다. 갯가 보리가 누를 때 그 맛이 뛰어나다.  

굴은 식용 혹은 약용으로도 썼다. 인조는 석화탕(石花湯)으로 목의 통증을 가라앉혔고, 선조 때의 유희춘은 “석화는 해롭지 않으나 그 성질이 차갑고 미끄럽다. 삶은 것이라도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다”는 기록을 남겼다. ‘산림경제’의 ‘굴김치’는 오늘날의 김치 못지않다. 굴에 소금을 치고 무, 파 흰 줄기를 가늘게 썰어 넣는다. 합친 다음 간이 배면 국물을 쏟아내 끓인다. 국물이 미지근해지면 건더기를 넣어서 따뜻한 곳에 둔 다음 하룻밤이 지나면 먹는다.


굴은 동양 삼국이 모두 좋아했던 식재료였다. 풍랑을 만나서 일본 쪽으로 표류했던 이들도 굴을 따 먹고 생명을 유지했다. 중국 사신들도 한반도의 굴을 찾았다. 중종 32(1537) 3월 조선에 온 중국 사신은 “오는 길에 늘 (맛있는) 굴을 접대하기에 한양 도성에 오면 마음껏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어찌 한양에서는 굴을 주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2016-01-12  닭고기

 

꿩 대신 닭이 아니다. 소 대신 닭이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은 중국 고전을 인용, “소 잡아 제사 모시는 것보다 살아계실 때 닭고기, 돼지고기로 봉양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사가시집’). 

한반도 닭의 역사는 길다. 김알지, 김수로왕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신라와 경주를 계림(鷄林)으로 부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양계장이 있었다. 우리는 닭을 오래전부터 가까이했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도구로 금육의 대상이다. 돼지는 하는 일 없이 곡물을 먹는다. 만만한 게 닭이다. 산과 들에서 벌레와 잡초 씨앗을 먹는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궁중과 민간 모두 만만하게 닭을 대했다. 

조선시대 ‘태종의 닭고기’는 가슴 아프게 한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비롯하여 충녕대군(세종대왕) 등 모두 4명의 아들을 두었다. 막내 성녕대군은 열네 살에 죽었다. 귀한 늦둥이였다. 태종 18(1418) 5 9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태종이 먼저 이야기한다. “성녕이 평소 쇠고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소를 가볍게 도축할 수는 없다. 중국 사신이 오거나 종묘 제사 때 도축하면 그때 사용하겠다. 제사에 닭을 사용하는 것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가?” 신하들이 대답한다. “제사 음식으로 닭을 쓰는 것은 오래전부터 예법에 있었습니다.” 태종이 말한다. “성녕이 닭고기 또한 좋아했다. 닷새에 한 마리씩 닭을 상에 올리라.

비참한 닭고기 이야기도 있다. 인조는 청나라의 침입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미리 준비한 피란이 아니다. 극도로 궁핍했다. 국왕의 밥상이라고 나을 것도 없다. “임금이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못한 채 잠에 들고, 밥상에 닭다리 하나를 올려놓았다”고 했다. 인조가 말한다. “처음 산성에 들어왔을 때는 새벽에 닭 울음소리가 많이 들렸다. 지금은 닭 울음소리가 어쩌다 겨우 들리니 아마 닭을 나에게 바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닭고기를 쓰지 마라”(‘연려실기술’). 

중종 20(1525) 10, 궁중에서 ‘독극물로 의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자궁에게 말린 고기(脯肉·포육)와 닭고기를 올렸다. 신하들이 이 음식을 하사받아 먹었다가 몇 명이 배탈이 나고 드러누웠다. 세자를 겨냥한 독극물 투입 가능성도 있었다. 사건을 추적하는 동안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닭고기를 지네가 씹어놓으면 독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지네를 다스리는 약으로 치료했더니 전부 닭고기를 토하고서 소생하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이 사건은 닭 때문인지, 말린 고기 때문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말린 고기에 ‘생산자 표시’를 해서 조심하자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글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닭고기’는 ‘닭과 기장밥’ 그리고 우정에 대한 것이다. 중국 후한 때 범식과 장소는 태학에서 같이 공부하며 깊은 우정을 나눈다. 범식은 장소와 헤어지면서 “2년 뒤 9 15일 그대 집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한다. 마침내 그날, 장소는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었다. 장소의 부모는 “범식의 고향이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인데, 어찌 그가 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장소는 “범식은 신의가 있는 선비이니,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식이 도착하였다. ()과 기장()밥에 얽힌 약속(), 즉 계서약(鷄黍約)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닭과 기장밥’의 우정을 부러워했다. 친구가 찾아오면 ‘계서’를 준비한다는 표현도 흔하게 나타난다.

조선시대 가장 흔했던 닭요리는 ‘백숙(白熟)’이다. 백숙이 닭고기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조미도 하지 않고 쪄낸 모든 고기 음식이 백숙이다. 오늘날의 백숙은 조선시대의 ‘연계증(軟鷄蒸)’이다. 닭고기를 부드럽게 쪄낸 것이다. 연계증은 ‘연계백숙(軟鷄白熟)’ 혹은 물로 쪘다고 수증계(水蒸鷄)라고도 했다(‘음식디미방’). 1795 6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생신날 밥상에도 연계증을 올려놓았고,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별미로 연계증이 거론된다

재미있는 닭 음식도 있다. ‘계주(鷄酒)’는 삶은 닭 속에 술을 머금은 솜을 넣은 것이다. 여행용 닭고기다. ‘계고(鷄膏)’는 진하게 졸인 닭곰탕이다. 닭 살코기만 담은 옹기를 가마솥에 넣고 오랫동안 중탕한 것이다. 닭고기는 맛이 없어지고 진액은 식욕부진으로 해석되는 비허증(脾虛症)에 좋다고 했다(‘성호사설’). 

 

2016-01-19  전복

 

‘전복(鰒魚) 상납’에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현종 5(1664) 11, 대사간 남구만이 탄핵상소를 올린다. 대상은 당대 실권자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16191675). 보통 권력자가 아니다. 현직 임금의 장인, 왕비의 친정아버지다. 나중 이야기지만 외손자가 숙종이다 

통제사 김시성이 김우명의 집에 전복을 보냈다. 김우명은 이 전복을 궁궐에 보낸다. 문제는 후임 통제사 정부현이 이 일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이다. 남구만이 탄핵한다. “이런 사사로운 진상이 한 번 시작되면 뒤 폐단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전복 상납은 국가 체모상 방치할 수 없습니다.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추고하소서.” 임금 장인의 잘못을 잘 따져보라는 것이다. 현종은 탄핵을 받아들인다. 김시성은 파직된다(‘조선왕조실록’).

전복은 충청, 호남, 제주, 경상 전 해역에서 생산되었지만 전복을 구하는 것은 힘들었다. ‘하루 종일 물속에서 일을 해도 전복 한두 마리 구하는 게 고작’일 정도라는 기록도 있다. 전복 공물로 인한 폐해도 많았다. 중앙에서 전복 매입 대금을 지방으로 내려보내면 중간에 공금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전복 값을 제대로 주지 않으니 결국 민간에 폐가 되었다. 큰 전복을 따러 외진 바다로 나갔다가 왜구를 만나 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귀하게 구한 것이니 귀하게 사용했다. 1452 5, 즉위 2년 차의 문종이 세상을 떠났다. 이날의 왕조실록은 문종을 애도하면서 아버지 세종에 대한 문종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기록한다. ‘세종이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문종이) 친히 복어(鰒魚)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이 맛보게 되었으므로 문종이 기뻐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문종이 아버지 세종에게 올린 ‘복어’나 상납사건의 ‘복어’는 모두 전복(全鰒)이다. 생선 복어는 ‘하돈(河豚)’이고 복() 혹은 복어(鰒魚)는 전복이다

 

전복은 탈도 많았다. 상한 전복을 공물로 진상했다가 해당 지역의 관리가 징계를 받고, 궁중에서 ‘전복 도난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명종 1(1546) 5, 참찬관 송세형이 ‘사옹원에서 전복 도둑맞은 일’과 그에 따른 군사들의 형벌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사옹원의 주요 임무는 궁중의 식재료 관리다. 송세형은 사옹원 전복 도난사건으로 56년간 근무했던 입직군사들이 세 번이나 형벌을 받았는데, 그 과정이 뭔가 의심쩍다고 주장한다. ‘전복 도난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기록이 없으니 상세한 내용은 알기 힘들다

전복 종류도 다양했다. 껍데기가 붙어 있는 ‘유갑생복(有甲生鰒), 건조한 ‘건복’, 반쯤 말린 ‘반건전복(半乾全鰒), 살아 있는 ‘생복(生鰒), 익힌 ‘숙복(熟鰒), 그리고 염장한 전복도 있었다. 전복 조림인 전복초(全鰒炒)와 전복죽, 전복만두를 비롯해 요리법도 다양했다. 허균은 “제주에서 생산되는 ‘큰 전복(大鰒魚)’이 가장 크다. 맛은 작은 것보다는 못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매우 귀히 여긴다. 경북 해안 사람들은 전복을 꽃 모양으로 썰어서 상을 장식하는데 이를 화복(花鰒)이라 한다. (전복) 큰 것은 얇게 썰어 만두를 만드는데, 역시 좋다”고 했다(‘성소부부고’).  

민간에서도 전복을 귀하게 사용했다. 조선 후기 유학자 갈암 이현일은 유학자 하홍도의 삶을 기록하면서 “(하홍도의 아버지께서) 병이 위중할 적에 복어(鰒魚)를 먹고 싶어 했는데, 미처 맛보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하홍도는) 이를 지극한 한으로 여겨 평생토록 이 음식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복은 효도의 상징이기도 했다.

제주에서 관리를 지낸 기건(奇虔)은 “백성들이 전복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전복껍데기인 석결명(石決明)은 약재로도 사용했다(‘해동역사’). ‘결명’은 두 종류다. 초결명(草決明)은 식물 결명자 씨앗이다. 안질 등에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돌같이 생긴 결명’이 바로 석결명, 전복껍데기다. 눈을 밝게 하고 혈압을 낮춘다고 믿었다.

 

2016-02-16  국왕의 고기반찬

 

임금이 입에 넣었던 음식을 뱉었다? 영조 47(1771) 6 29(음력) 아침의 일이다. “오늘은 선의왕후의 제사다. 아침상에 육찬(肉饌)이 있었는데, 눈이 침침해서 분간하지 못하고 집어먹었다가 깨닫고서 토했다.” 영조의 나이 78, 돌아가시기 5년 전이다. 선의왕후는 이복형 경종의 비(). 영조에게는 이복형수. 간단한 내용인데 의미가 깊다.

선의왕후 어 씨는 1730(영조 6),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영조와 선의왕후는 좋은 관계일 수가 없었다. 영조는 집권 내내 이복형 경종의 독살설에 시달렸다. 선의왕후는 영조의 즉위를 반대했고, ‘영조 암살미수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런데 제삿날은 지극히 감성적이다. 왜일까? 영조의 ‘보여주기 쇼’일 가능성이 있다

육선(肉饍), 육찬은 고기반찬, 좋은 반찬이다. 조선의 국왕들은 가뭄 홍수 장마 추위 등 자연재해나 왕실의 초상, 제사가 있을 경우 좋은 반찬인 육선을 피했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는 국왕의 부덕 탓”이다. 왕실의 어른이 돌아가셔도 ‘잘 모시지 못한 죄인’이다. 영조가 죽은 형수를 그리워하며(?) ‘고기반찬을 뱉은 것’은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위한 ‘쇼’일 수 있다 

이보다 앞선 성종 즉위년(1469) 12 28일에는 할머니 대왕대비(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 씨)의 육선을 두고 소동이 일어난다. 예종이 죽은 지 한 달 되는 날. 신숙주 한명회를 비롯한 원로대신들이 대왕대비의 육선을 권한다. 대비 윤 씨의 대답은 “불가”였다. 대신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성종도 부추긴다. 서너 번 이야기가 오가다가 마침내 대비 윤 씨가 ‘폭탄선언’을 한다. 

“육선 강요를 그치지 않는다면 나는 짧은 머리털마저 깎고 정업원(淨業院)으로 물러가겠다.(‘성종실록’) 정업원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가 단종 사후 살던 곳이다. 왕실 여인들은 이곳을 사찰처럼 여겼다. 유학자들에게 ‘대비의 사찰행’은 끔찍한 일이다. 더하여 정희왕후는 단종을 죽인 세조의 비다 


이 기록의 끝부분에는 ‘신숙주 등이 그제야 물러갔다’고 전한다. 그러나 끝은 아니다. 다음 날 29일 성종이 원로대신들에게 “왜 대왕대비전에 육선 드시기를 연달아 청하지 않는가”라고 재촉한다. 30일에는 신숙주 등이 먼저 대왕대비전에 육선을 권하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이번엔 성종이 “간곡히 청해도 윤허를 얻을 수 없으니 번거롭게 다시 아뢰지 말라”고 말린다. 며칠 후인 1470 1 5일에는 신숙주 등이 “(육선을 금하는 일이) 이미 예법의 한계도 지나쳤다”고 지적(?)한다. 대왕대비의 대답은 여전히 불가. “비록 내가 예법을 지나쳤더라도 뒷날 누가 나를 따라하겠는가? 염려하지 마라”는 것이다. 드디어 같은 달 18일 대왕대비전과 소혜왕후(인수대비)에게 육선을 올렸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성종도 즉위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예종의 아들과 친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국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궁중 원로와 어른들이 많았다. 할머니 정희왕후, 친모 소혜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가 모두 살아 있었다. 게다가 즉위 초기는 정희왕후와 소혜왕후의 대리청정 체제였다. 궁중 안팎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했다. 처신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의 고기반찬 금지, 감선(減膳)은 차라리 신선하다. 세종 4(1422) 5 10,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6개월 후인 11 1,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의 감선을 두고 긴 대화가 오간다. 기록을 보면 실제 세종의 건강 상태는 심각했다. 오랫동안 감선을 하니 ‘허손병(虛損病)’이 왔다고 한다. 허손병은 ‘허로’라고도 하는데 ‘기가 허하다’는 뜻이다. 폐결핵으로 보는 이도 있다. 영양실조 상태의 세종이 감선을 고집하자 신하들이 결정타를 날린다. 태종의 유언이다. “주상(세종)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 ‘권도’란 ‘적당히’ ‘알아서’ ‘유연성 있게’라는 뜻이다. ‘효자 세종’은 고기반찬 올리는 일을 허락한다. 

 

2016-02-20  쇠고기

 

성종 5(1474) 12 7(음력). 사헌부 이형원(李亨元)이 상소를 올린다. 내용이 대단하다. ‘동양정 이서(東陽正 李徐)가 소를 밀도살했다’는 것이다. 실제 소를 도축한 사람은 기술자인 거골장(去骨匠) 김산이다. 현장을 관리하고 진행한 이는 종(奴·노) 난동이다. 문제는 현장이다. 이서의 집이다. 이서는 태종의 증손자다. 왕족이다. 종친의 집이니 몰래 소를 도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 밀도살은 중죄다. 더하여 이서는, 단속차 찾은 관리들을 종을 시켜 협박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라고 한 것이다. 명백한 공무집행방해다. 종 난동의 신분도 문제다. 개인이 거느린 노비가 아니다. 국가에서 종친에게 공식적으로 내려준 노비인 ‘구사(丘史)’다. 문제가 심각하다

성종은 “구사들을 거두라”고 명한다. 이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상민(常民)이 밀도살을 했을 경우, 초범인 경우도 ‘곤장 100대에 귀양 3년’이다. 아무리 왕족이지만 고작 “구사를 거두라”는 건 너무 약한 벌이라는 주장이 쏟아진다. 불과 나흘 뒤인 12 11, 이번엔 원로대신 한명회와 대사간 정괄까지 나선다. 이쯤 되면 국왕이라도 어쩔 수 없다. 이날 성종은 “이서의 직첩을 거두라”고 명한다. 왕족이 평민의 신분으로 떨어진 것이다. 큰 벌이다.

상소문 중에 ‘세종대왕 당시 수도정 이덕생(守道正 李德生)의 처벌을 참고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다. 이덕생은 정종의 서자(庶子). 세종과는 사촌지간. 역시 왕족이다. 한때 승려가 되려고 삭발했으나 세종이 만류하여 머리를 기르고 한양 도성에 살았다. 그랬던 그가 ‘소 밀도살’ 건으로 걸려들었다. 수사 과정에서 도축한 소의 상당수가 민간에서 훔친 것이라는 내용도 드러났다. 이때도 압수수색 중에 마찰이 일어난다. 마당에서 소, 말 머리뼈 40여 개와 숱한 잡뼈가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세종도 사촌의 죄를 유야무야 덮으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결국 전남 담양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이번엔 ‘너무 편한 곳으로 유배 보냈다’는 상소가 줄을 잇는다. 결국 추운 북쪽으로 유배지를 옮기던 중, 경기도 용인에서 죽었다

성종은 “이서의 죄는 이덕생과 다르다”고 말한다. 소를 훔친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중벌인 ‘직첩 회수’를 명한다 

 

소 밀도살은 중죄다. 소가 경작의 주요 도구이기 때문이다. 고려가 불교 국가라서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고려 말에도 금살도감(禁殺都監)이 있었다. 소의 도축을 막고 그 대신 돼지, 닭을 키우자는 것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라면 모든 생명체의 도축을 금하는 것이 맞다. 금살도감은 살생이 아니라 소의 불법 도축을 막기 위한 기관이다.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에도 금살도감은 자주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도 공식적인 쇠고기 공급은 있었다. 도축서(屠畜署), 사축서(司畜署), 전생서(典牲署)에서 쇠고기를 공급했다. 쇠고기가 반드시 필요한 곳은 종묘 제사와 중국 사신 접대다. 효종 9(1658) 12 17, 이조판서 송시열은 “전생서는 제향(祭享)을 전담하고 사축서는 객사(客使)의 수요를 전담하는 곳”이라고 말한다(‘조선왕조실록’). ‘제향’은 종묘 등의 제사다. ‘객사’는 중국 사신이다 

왕실과 사대부들은 필요한 고기를 신청한 후 허가를 얻어서 구했다. 공식적인 공급이 원활할 리는 없다. 제때, 원하는 양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밀도살, 불법거래가 일어난다. 조선 후기, “명절이 되면 갑자기 절름발이 소가 늘어난다”는 풍자가 떠돈다. 농사 못 짓는 소는 도축해도 괜찮으니 갑자기 절뚝거리는 소가 늘어난 것이다


쇠고기 때문에 두고두고 망신을 산 벼슬아치도 있었다. 15세기 표연말(表沿沫)은 조선 전기의 문신, 문장가다. 집안도 명문가고 본인도 대제학을 지냈다. 성종 3(1472) 과거에 급제해 삼사 중의 하나인 예문관 관리가 되었다. 전도양양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금육’ 사건에 말려든다. 밀도살도 아니고 쇠고기를 개인적으로 거래한 것도 아니다. 당시의 관례(?)대로 홍문관 관리들의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하필이면 상에 쇠고기가 있었다. 파직당하고 고향에 간 다음 쇠고기가 놓인 자리에 가면 “차마 다시 국법을 범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 후다. 조선시대 기록문 여기저기에 ‘표연말이 금육 먹고 파직당한 이야기’가 실린다. 그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2016-02-23  인삼

 

“인삼(人蔘)은 늘 조선에서 오는데, 조선에 어찌 그리 인삼이 많습니까? 조선에서 오는 홍삼(紅蔘)은 심홍색으로 밝고, 윤이 나는데 산삼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1855
(철종 6) 12월 초. 베이징에 간 조선 사신단의 종사관 서경순이 만난 중국 문인 주당(周棠)의 질문이다. 주당은 난초화로도 유명했다. 서경순이 답한다

“예전에는 조선에 산삼이 많았으나 이제는 거의 없고 이름만 남았습니다. 산삼이나 종삼(種蔘)이나 빛깔이 희고 모양도 같습니다. 중국에 오는 인삼도 밭에 심는 것으로 여러 차례 찌고 말리면 빛깔이 저절로 붉고 윤택해집니다. 홍삼의 약효는 백삼(白蔘)보다 못하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백삼을 사용하는데, 중국은 백삼 대신 홍삼을 취하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몽경당일사’ 제3 

서경순의 대답은 조선시대 인삼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19세기 중반에는 대부분의 인삼이 재배한 것들이었다. 홍삼은 수출용이었고, 국내에서는 여전히 백삼을 사용했다. 산삼은 거의 사라졌다. 이 무렵 개성에서 인삼 재배가 활발했다. 개성은 한양과 중국 국경을 잇는 중간 도시다. 개성에서 재배한 인삼을 홍삼으로 만들어 무역품으로 이용했다. 개성 인삼의 시작이다. 

인삼은 고려시대에도 귀하게 여겼다. 송나라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어디나 인삼이 있으나 춘주(春州·춘천지역) 것이 가장 좋다. 생삼(生蔘)과 숙삼(熟蔘) 두 가지가 있는데 생삼은 빛이 희고 무르다. 약에 넣으면 그 맛이 온전하나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는다. 보관용으로는 숙삼이 낫다. 모양이 평평한 것은 돌로 눌러 즙을 짜내고 삶기 때문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찐 삼의 뿌리를 포개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 인삼의 주요 소비처였으나 인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말린 삼이 납작한 것을 두고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조선 사람들이 삼의 진액을 다 뽑아먹고 겉껍질만 말렸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서경순이 베이징에 간 19세기 중반에는 이미 자연산 산삼이 귀했다. 대부분이 재배인삼을 쪄서 말린 홍삼이었다. 드물게 만나는 인삼이었으니 중국인들은 산삼 말린 백삼과 재배인삼을 쪄서 말린 홍삼을 구별하기도 힘들었다. 홍삼은 색깔이 붉고 광택이 있으니 더 고급스러웠다. 

원래 인삼은 대부분 자연산을 채취한 산삼이었다. 산삼 가공품에는 한 차례 찐 증삼(蒸蔘), 껍질을 벗겨 말린 건삼(乾蔘), 익혀서 색깔이 흰 백삼도 있었다. ‘고려도경’에서는 춘천 일대 삼이 좋다고 했지만 경상도 나삼(羅蔘)을 진품으로 치기도 했고 조선시대에는 두만강, 백두산 일대의 강삼(江蔘)을 최고로 여겼다. 강원도 인제 일대의 기삼(麒蔘)이나 함경도, 평안도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나오는 북삼(北蔘)도 유명했다. 모두 산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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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무렵 인삼 재배와 홍삼이 시작된다. 홍삼은 인삼을 인공 재배하면서 생긴 것이다. 대량생산된 인삼을 전문적인 증포소에서 찐 것이 바로 홍삼이다. 기존의 산삼 가공품과는 다르니 오해도 많았다 

홍삼은 정조 21(1797) 6 25일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정조가 말한다. “지금 홍삼이라는 ‘가삼(假蔘)’을 조작하여 외국에 파는 일이 잦다. 삼의 빛깔은 누르고 흰데 지금 붉다고 하는 것은 가짜로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삼을 조작한 무뢰배가 있을 터인데 궁중에서도 모른 체하고 있다. 장차 외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삼假蔘’은 ‘가짜 삼’이다. 정조는 “홍삼은 가짜 삼”이라고 화를 냈지만 불과 50년 후 조선 최대의 홍삼무역상 임상옥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재배인삼이 등장하기 전, 인삼(산삼)은 더 귀하고 소중한 약재였다. 인삼 밀매매, 밀무역은 사형으로 다스렸다. 숙종 26(1700)에는 왜인들과 인삼을 밀무역했던 동래 상인 김자원을 사형시켰다. 숙종 23(1697)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강계부사 신건의 ‘인삼 뇌물 사건’으로 궁중이 어수선했다. 좌의정 윤지선을 비롯한 상당수의 중신이 뇌물사건에 연루되었다. 탄핵이 줄을 잇고 “평소의 원한으로 지나치게 탄핵한다”는 역탄핵도 등장한다. “저도 뇌물을 받지는 않았지만 ‘5냥의 인삼 선물 제안’을 받았기에 조사를 할 수 없다”는 이조판서 이세백의 ‘양심선언(?)’도 나왔다

 

2016-03-01 복어

 

복어는 에로틱하다. ‘서시유(西施乳).’ 서시는 월나라 미인이다. 복어가 서시의 젖가슴 같다고 했으니 에로틱하다. 와전이다. ‘서시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복어고 또 다른 하나는 문방사우 중 백자연적(白磁硯滴)이다. 백자연적의 둥글고 흰빛이 서시의 젖가슴을 닮았다는 뜻이다. 빙허각 이씨(17591824)는 ‘규합총서’에서 “이리(白卵)는 옛날에 ‘서시유’라 했다. 이리를 생선 배에 넣고 실로 동여 뭉근한 불로 두어 시간 끓여 먹어라”고 했다. 복어 수컷의 정소(이리)가 터지면 국물이 뿌예진다. 그게 마치 서시유, ‘액체 젓’ 같다는 뜻이다. ‘가슴’과는 관계가 없다

조선시대 내내, 복어는 탈도 많고, 말도 많았다. 문제는 독()이다.

성종 24(1493) 4, 경상도 관찰사 이계남이 보고한다. 웅천(진해) 사는 공약명 등 24명이 굴과 생미역을 먹고 죽었다. 관찰사는 해물 채취를 전면 금지하겠다고 보고한다. 성종의 판단은 다르다. “굴과 생미역을 먹고 죽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복어(河豚)를 먹었을 것이다. 해물 채취를 전면 금지하면 당장 바닷가 백성들이 굶을 것이다.” 우승지 한사문이 답한다. “복어가 굴에 알을 낳기 때문입니다. 이걸 먹었을 겁니다. 해물 채취를 금할 수는 없습니다. 

세종 6(1424) 12월에는 복어 독을 이용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전라도 정읍에서 별장 벼슬을 했던 정을손이 딸 대장, 후처 소사, 사위 정도가 음란한 행실이 있다고 구타했다. 사위가 정을손의 국에 복어 독을 타서 죽였다. 딸과 후처는 이 상황을 알고도 말리지 않았다. 사위는 옥사했고 딸과 후처는 능지처사의 벌을 받았다

복어가 정쟁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숙종 조의 영의정 최석정(16461715)은 소론 지도자로 8번이나 정승 자리를 오르락내리락할 만큼 당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그는 ‘예기유편(禮記類編)’을 지었는데 ‘상례(喪禮)’ 등으로 시끄러웠던 시절이니 이게 화근이 되었다. 노론들은 “엉터리 내용인 ‘예기유편’을 불태우고 판본을 부수자”고 나섰다. 이 와중에 최석정이 복어 독에 중독되었다. ‘숙종실록’에는 같은 소론인 남구만(16291711)의 안타까운 코멘트가 남아 있다. “세상에 쓸 책도 많은데 하필이면 ‘예기유편’이고, 세상에 먹을 것도 참 많은데 하필이면 복어인가?  

 

조선시대 기록에는 복어 독을 피하는 방법도 더러 나와 있지만, 과학적으로 복어 독에는 해독약이 없다. 조금씩 연습 삼아 먹으면 적응(?)이 된다는 말도 거짓이다. 아무리 연습해도 면역력은 나아지지 않는다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한강에서 나는 것이 맛이 좋은데 독이 있어 사람이 많이 죽는다. 영동(嶺東) 지방의 복어는 맛이 조금 떨어지지만 독은 없다’고 했다. 동해안산은 독이 없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복어, 복어 독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복어는 강과 바다에 사는 두 종류가 있다. 이름이 많다. ‘돈(7)’ ‘하돈(7)’ ‘해돈(海豚), 속어로는 ‘물가치(勿家治)’ 혹은 ‘복()’이라 부른다. 눈이 가늘고 작다. 알에 독이 많은데 먹으면 죽는다. 예전부터 서시유에 비할 정도로 진미다.” 정식 명칭은 하돈(河豚)이고 복, 복어는 속명이었다. 

복어 맛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이는 북송의 문장가 소동파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과 맞먹는 맛”이라고 했다. 조선후기 문신 서영보(17591816)는 ‘죽석관유집’에서 ‘복사꽃이 무수한 계절에 미나리, 참깨 맛이 그리워라. 이제 복어 계절을 또 보낸다’고 아쉬워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 여러 곳에서 복어 식용을 말린다. 심지어 ‘어쩌자고 독물을 삼켜서, 가슴에다 창칼을 묻으려 하는가’라고 했다. 이덕무의 할아버지 강계부사 이필익의 유훈도 재미있다. “백운대(白雲臺)에 오르지 말고, 하돈탕(河豚湯)을 먹지 마라.” 위험한 곳, 음식을 피하라는 뜻이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해답은 ‘규합총서’에 있다. ‘비늘 없고, 배가 팽팽하며, 이를 갈고, 눈 감았으며, 소리를 내는 생선은 독이 있다. 복어는 이 다섯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 진미이니 먹지 않을 수는 없다. 복어 배 속에 가로, 세로 핏줄이 많다. 일일이 제거하고 몇 번을 빨아서 핏물을 없앤다. 기름을 많이 붓고 간장과 미나리를 넣어 끓인다. 곤쟁이젓갈도 복어 독을 푼다. 

 

2016-03-08  명태

 

참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동아일보 1921 8 30일의 기사다. ‘북관명산(北關名産)의 명태는 명천의 어부 태()씨의 어획이 그 시초되었음으로, 그를 기념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함경도) 명천에 사는 태씨 어부의 명태’는 고종 시절 영의정을 지냈던 문신 이유원의 ‘임하필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책 제27권 ‘춘명일사’ 편에 명태가 소개된다. 명천에 사는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낚시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았다. 고을 아전이 도백(道伯)에게 올렸는데 도백이 이 물고기를 맛있게 먹고 이름을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도백이 “명천 사는 태 어부가 잡은 물고기니 명태라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명태’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이 이야기의 뒷부분에는 명태가 많이 잡혀서 팔도에 퍼졌고, 이름이 ‘북어’라는 점과 노봉 민정중(16281692)의 예언(?)이 실려 있다. 300년 뒤에는 이 고기가 지금보다 귀해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유원은 ‘원산을 지나는데 명태가 마치 오강(五江·한강 일대)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적었다. 

민정중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명천에 온 도백’이 물고기 이름을 지었다는 ‘동화’는 가능성이 있다. 관찰사는 ‘도백’이다. 민정중은 한때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민정중이 처음 이름을 지었을 수도 있다 

명태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처음 나타나는 것은 효종 3(1652) 9월의 ‘승정원일기’ 기록이다. ‘강원도에서 대구알젓 대신 명태알젓이 왔으니 해당 관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음 달인 10월에도 과일과 생선이 상했고, 역시 대구알젓 대신 명란이 올라왔으니 담당 관리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사옹원 제조가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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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는 명태가 자주 등장한다. 시골에 사는 노인에게 구호물자로 곡식, 장과 더불어 ‘명태 한 마리’를 주었으니 인색한 지방 관리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도 나타난다. 희한하게도 조선 초기 기록에는 명태나 북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해류의 온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잡히지 않았거나, 흔하게 먹지 않았거나 혹은 먹으면서도 이름을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효종과 민정중의 17세기를 지나면서 명태는 자주 등장한다.

민정중보다 160년 후 사람인 오주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북어’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우리나라 동북 해안에 있는 물고기다. 폭이 좁고 길이가 1(30cm) 이상으로 길다. 머릿속에 오이 같은 타원형의 뼈가 있다. () 이름은 북어인데 속칭 명태라고 부른다. 봄에 잡은 것은 춘태, 겨울에 잡으면 동태(冬太). 동지 무렵 시장에 나오는 것은 동명태(凍明太). () 흔해서 천하지만 귀하게 먹는다. 늘 먹으면서도 그 이름을 모른다.

‘북어(北魚)’라는 이름은 ‘북쪽 해안의 물고기’라는 뜻이다. 명천을 포함한 함경도 해안이다. 북어는 민정중의 예언대로 300년 후인 20세기 중반에는 귀해졌고 우리 시대에는 거의 사라졌다. 한때는 1인당 매년 20마리씩 먹었던 생선이다 

일제강점기에도 가끔 명태 어획량이 줄어들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6 6 1일의 기사에는 ‘조선 명태가 일본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그 대신 멸치가 많이 잡힌다. 명태의 주요 산지는 함북 청진, 경성군, 명천군 양화 등’이라는 내용이 있다. 역시 동북 해안이다 

언론인 고 홍승면 씨가 공개한 ‘북어대가리 사용법’을 전한다. ‘북어대가리를 의뭉한 불에 바싹 굽는다. 태우지 말아야 한다. 이걸 유리잔에 넣고 뜨겁게 덥힌 청주를 붓는다. 접시로 잠시 덮어두었다가 불을 붙인다. 푸른색 불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일식집에서 흔히 보는 복어 지느러미 대용품임을 알 수 있다. 이름이 낭만적이다. 이른바 ‘북어두주(北魚頭酒)’다

참 흔한 물고기지만 귀하게 썼다. 살은 탕으로 끓였다. 얇게 썰어 전으로, 말린 다음 제사에 쓰거나 혹은 탕으로 먹었다. 아가미와 알, 내장으로 젓갈을 담갔다.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명태순대’는 함경도의 별미다. 명태 속에 나물과 곡물을 넣고 익힌 것이다.

 

2016-03-15  미나리

 

죄는 사소해 보였다. 궁궐 세자궁 연못의 미나리가 거칠고 나빴다. 벌은 엄했다. 사옹방(司饔房)과 침장고(沈藏庫)의 벼슬아치들이 대거 중벌을 받았다. 사옹방은 국왕과 왕실의 음식을 챙기는 곳이고 침장고는 채소를 기르고 챙기는 곳이다. ‘세조실록’ 11(1465) 5월의 기록이다. 침장고 벼슬아치 세 명이 장 70대와 100대를 맞았다. 침장고 별좌, 사옹별좌 세 명이 파직되고, 환관 한 명은 군대에 배속되었다.

세조는, “처음에 세자궁 앞에 미나리()를 심은 것이 심히 아름다워서 바치게 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엉망이었다”고 질책한다. 승정원에서 실무자는 중벌에 처하고, 관리책임자인 사옹, 침장고 제조까지 책임을 물었다. 내용 중에, 질 나쁜 미나리를 바치는 것은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미나리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채소다.

요즘 드라마에 반촌(泮村)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성균관 주변에서, 학생들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성균관은 작은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균관의 주요 건물은 공자를 모신 사당, 대성전(大成殿)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조선을 지탱하는 소중한 이들이었다. 성균관은 물(반수·泮水)로 둘러싼 궁전, ‘반궁(泮宮)’이다. 중국의 태학을 본뜬 것이다. 성균관 주변의 연못에는 반드시 미나리를 심었다. 미나리는 충성과 겸양의 상징이다. 성균관을 미나리 궁전, ‘근궁(芹宮)’이라고도 불렀다.

중국 기록에도 미나리가 등장한다. 미나리를 바치는, 헌근(獻芹)의 고사다. ‘어떤 시골 사람이 자신이 먹어본 미나리 맛을 좋게 여기고는, 이것을 임금님에게 바쳤다’는 내용이다. 하찮고 소박하지만 자신이 좋게 여긴 것을 굳이 윗사람에게 바친 깊은 정성과 겸양을 뜻한다. 신라 말기 최치원의 ‘계원필경’에도 ‘미나리를 바치는 깊은 정성(헌근지성·獻芹之誠)’이 등장한다. 우리도 오래전부터 미나리를 가까이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의 문신 가정 이곡(12981351)은 “미나리와 마름풀이 반수에 넘친다”고 노래했고 아들 목은 이색(13281396) 역시 ‘목은시고’에서 ‘미나리 먹고 햇볕 쬐던 늙은 시골 농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미나리는 배추보다 더 흔하게 사용한 채소였다.


이웃 일본도 마찬가지. 세종 29(1447) 6, 일본 이키(一岐)의 사신이 조선을 찾는데 그의 문서에도 미나리가 나온다. 미나리는 한중일 모두 흔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미나리가 성균관의 ‘아이콘’이었다. ‘미나리를 캔다(채근·采芹)’는 표현은 성균관에서 공부한다는 뜻이다. 순조 26(1826) 1월의 기록에는 ‘근당(芹堂)’ ‘반궁(泮宮)’ ‘반장(泮長)’이 등장한다. 근당은 명륜당을, 반장은 성균관의 책임자인 대사성(大司成)을 뜻한다. 임금에게 올린 정책집을 ‘헌근록(獻芹錄)’이라 부르기도 했다(‘미암집’).

미나리는 흔하지만 귀하게 사용했다. 제사에도 미나리김치(근저·芹菹)를 사용했고 종묘에 올리는 음식에도 미나리가 있다. 정조 10(1786) 5, 의빈 성씨 소생의 문효세자가 다섯 살에 죽었다. 제사 음식에 김치와 익힌 나물(숙채·熟菜)과 더불어 미나리생나물(수근생채·水芹生菜)이 있다. 중국 측 기록에는 당나라의 명재상 위징(魏徵·580643)이 ‘미나리초무침’을 좋아해서 한꺼번에 세 접시를 먹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복엇국을 먹을 때 반드시 미나리를 곁들였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은 ‘사가집’에서 ‘아침에 푸른 골짜기의 향기로운 미나리를 캐다가 국을 끓인다’고 했다. 

미나리는 경제작물이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왕골과 미나리를 심었을 경우 그 이익을 벼와 비교하면 두어 갑절 된다. 그러므로 1등 세율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다산은 스스로 미나리를 길렀다. ‘다산시문집 제5권’에 ‘금년에 처음 미나리 심는 법을 배워/성 안에서 채소 사는 돈이 들지 않는다네’라고 노래했고 조선 중기의 문신 동계 정온도 ‘동계집’에서 ‘자그마한 창문 앞 좁은 땅을 얕게 파고/웅덩이에 물 가두고 미나리를 심었다’고 했다.


2016-03-22  물밥(水飯)

 

효종 5(1654) 2 10, 정언 이상진이 영의정 정태화와 병조판서 원두표를 탄핵한다. 병조판서가 술상과 기생, 음악을 준비하여 상급자인 영의정의 집에서 한바탕 놀았다는 것이다. 상소문 중에 세종대왕 당시 영의정 황희와 호조판서 김종서의 ‘물에 만 밥’, 수반(水飯) 접대가 등장한다. 김종서가 황희에게 물에 만 밥을 준비하여 접대(?)하려 했더니, 황희가 김종서를 뜰아래 세워놓고 “아첨하려 한다”고 꾸짖었다는 내용이다

‘수반’은 밥상 차리기 귀찮을 때, 밥 먹기 번거로울 때 후루룩 먹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물밥’은 정식식사는 아니다. 간편식이다. 간단한 음식이지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반은 때로는 정치적인 음식이다. 성종 1(1470) 5 29일 ‘조선왕조실록’에 수반이 나타난다. 성종이 “가뭄이 심하니 낮수라를 수반으로만 올리라”고 명한 내용이다. 조선왕조 때에는 가뭄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있을 경우 국왕이 음식을 줄였다. 이틀 후인 6 1일 원로대신들이 수반을 멈출 것을 청한다. 내용이 상당히 길다. “근래 가뭄으로 인하여 감선(減膳)한 지가 오래되었다. 낮에 또 수반을 올리게 하시니 예전에도 이렇게 한 적은 없었다.” 성종이 답한다. “세종대왕 때에는 풍년이라도 수반을 올리게 했다. 지금 수반을 먹는 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노()대신들도 지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비위(脾胃)는 찬 것을 싫어하므로, 수반이 비위를 상할까 염려된다. 보통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지존(至尊)이겠습니까?” 성종이 까칠하게 응답한다. “경()의 말과 같다면 늘 건식(乾食·마른 음식)을 올려야 하겠는가? 

한 달 남짓 후인 7 8일에도 또 수반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노대신과 승지가 “요즘 비가 흡족해서 곡식이 잘 익으니 식사를 제대로 하셔야 한다”고 아뢴다. 재미있는 것은 성종의 태도다. 끝까지 수반을 고집한다. “감선하는 것은 가뭄 때문이 아니다. 낮에 수반을 먹는 것은 더운 날씨 때문이다. 

성종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올랐다. 예상치 못했던 왕위계승이었다. 왕은 어렸고 대신들은 노회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공이 큰 대신들도 많았다. 노대신들이 국가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왕은 원상회의의 결과를 확인하는 역할만 맡았다. 성종의 즉위를 주도한 이들도 바로 원상들이었다. 게다가 수렴청정 체제였다. 어린 왕은 스트레스가 심했다. 입맛이 없으면 늘 수반을 찾았다. 성종의 수반은 정치적인 투정, 저항일 수도 있다. 한의사들은 성종이 스트레스가 심해서 몸속에 열이 많았고 따라서 수반, 물에 만 밥을 찾았다고 말한다

 

광해군 역시 울화병으로 수반을 먹었던 경우다. 인조는 반정으로 실각한 광해군을 강화도로 보냈다. 인조 6(1628) 2, 광해군에 대한 근황이다. “삼시 끼니에 물에 만 밥을 한두 숟가락 뜨는 데 불과할 뿐이고 기력이 쇠진하여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지경이다.” 물에 만 밥은 속이 타는 사람들이 먹었던 것이다 

인조 역시 몸이 아플 때 수반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9(1631) 1월의 ‘승정원일기’에는 인조가 인후염 등으로 고생하는 내용이 자주 나타난다. 30일에는 신하들의 낮 문안을 받고 “(몸 상태가) 아침과 같다. 수반을 조금 먹었다”고 말한다

정조에게 수반은 효도의 상징이다. 수원 화성 언저리(지금의 화성시)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모셨던 정조는 묘에 다녀오던 날 시를 남겼다. ‘비석 뒤에서 수반을 먹고 더디 더디 출발한다’고. 아버지를 떠나기 아쉬워하는 아들의 효성이 엿보인다

수반은 곤궁함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선 중기 문신 성이성은 1645, 청나라 사행(使行)에 서장관으로 참석한다.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길, 사신단은 퍽 힘들었다. ‘새벽 5시에 길을 떠난다. 강가 벌판에서 아침을 먹었다. 병이 있어 며칠째 식사를 못하는 이들이 많다. 조기를 몇 마리 사서 수반을 차린다’는 내용이다.

 

2016-03-29  사슴 꼬리(鹿尾)

짐작하지 못할 식재료는 아니다. 짐작은 하지만, ‘글쎄? 그게 어떤 맛일까?’라는 궁금증은 든다. 사슴꼬리, 녹미(鹿尾) 이야기다

연산군 10(1504) 10월의 ‘조선왕조실록’이다. 사슴꼬리 때문에 애꿎은 관찰사의 목이 떨어질 판이다. 연산군, 누구나 알듯이 해괴한 짓 많이 했다. 그중 하나다. 연산군이 사옹원에 명한다. “녹미는 모름지기 꼬리가 있는 것으로 올리라. 관찰사도 부엌의 반찬을 보고 좋고 나쁨을 따진다. 하물며 궁중에 올리는 물건이야 말하면 무엇하랴? 앞으로 사옹원에서는 관찰사가 올리는 녹미의 색깔과 맛을 살펴보고, 나쁜 것이 있으면 조사하라. 이조에서는 장부에 기록하라. 6개월에 3번 이상 질 나쁜 녹미를 올리는 관찰사가 있으면 비록 근무성적이 최고라 하더라도 파면하라.  

입이 짧기로 소문난 영조도 녹미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많이 남겼다. 영조 40(1764) 4월 “사슴꼬리나 메추라기고기도 내가 전에 즐겼던 것들이나 올리지 말라고 했다. 역시 민폐가 될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했다. 이쯤 되면 사슴꼬리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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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후인 영조 45 8월의 기사에는 “사슴꼬리가 60()면 사슴 또한 60필이다. (제주도에서) 1년에 두 번 올리면 사슴이 자그마치 120필이다. 예전엔 그렇게 올렸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진공(進貢)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사슴꼬리가 또 등장했다

영조 48 11월에도 “오늘 젓가락을 댄 것은 오직 녹미뿐이다. 맛있다고 해서 어찌 어질지 못한 짓을 계속하겠는가. 앞으로는 녹미를 봉진하지 말라”고 했다. 영조 51 8월에 또 ‘사슴꼬리 봉진 금지’가 등장한다. “내가 일찍이 녹미를 즐겼으므로 어영청에서 먼저 구해서 바쳤다. 다른 영문에서도 장차 이와 같이 할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녹미를) 구하지 말라. 하여, 내가 녹미를 구하는 뜻이 없음을 보여주라.” 어영청은 5영문 중 하나다. 어영청에서 시작하면 훈련도감 등 다른 영문들도 따라할 것은 뻔하다 

 

영조는 10여 년간 계속 ‘녹미 봉진 금지’를 이야기한다. 뒤집어 보면 영조는 사슴꼬리로 만든 음식을 좋아했고 역설적으로 계속 녹미를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집권 말기, 여든 살 무렵 영조의 변덕도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사슴꼬리 음식’을 쉽게 만날 수 없으니 얼마나 맛있는 고기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산군이나 영조 외에도 녹미를 좋아하는 이들은 많았다. 일반인도 녹미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녹미를 둘러싼 잡음도 많았다 

중종 3 4월의 기록에는 ‘중신 채윤문이 경상도 수사로 있을 때 녹미, 녹설(鹿舌)을 많이 거두어 장사를 해서 이익을 취했으니, 이렇게 더러운 사람으로 장수를 삼을 수 없다’는 사간원의 탄핵 내용도 있다. 1712년 베이징(北京)에 사신으로 갔던 조선 후기 문인 김창업(16581721)은 베이징에서 “주방에서 사슴꼬리를 들여보냈는데 구웠더니 별로 맛이 없었다. 오래되어 변한 듯하다”고 했다. 귀하지만 일상적으로 먹었던 음식임을 알 수 있다

녹미의 봉진을 둘러싼 다른 잡음들도 있었다. 진상용 녹미를 구하지 못한 지방에서는 엉뚱하게도 한양으로 녹미를 구하러 보낸다. 지방관리가 면포를 가지고 한양에서 녹미를 구하여 진상하는 일도 있었다. 중종 12(1517) 8월의 기록에는 ‘한양에서 녹미를 구하다니 도대체 한양 어디에서 녹미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사옹원 등에서 퇴짜 맞은 물건들이 떠돌아다니는 것 아니겠는가’라는 참찬관 조방언의 진언도 남아 있다.

황해도 감사였던 율곡 이이도 “녹미는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황해도 내에서 사슴이 많이 나지 않으므로 결국 베와 재화를 가지고 한양에서 바꾼다. 그 값도 (원래에 비하여) 지나치게 높다”며 제도를 바꿀 것을 제안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녹미에 대한 관심은 깊었다.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녹미는 전북 부안에서 그늘에 말린 것이 가장 좋고 제주도 것이 그 다음’이라고 밝혔다. 오주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녹미 절임법’을 상세히 설명한다. ‘칼로 사슴꼬리의 뿌리 부분 털을 잘 깎아낸다. 뼈를 발라내고 소금 1()과 무이(蕪荑) 5(반전)을 꼬리 속에 넣는다. 긴 막대에 끼워서 바람 부는 곳에서 말린다.’ 무이는 왕느릅나무(열매)로 추정한다.

 

2016-04-06  소주

▲소주를 고아내는 증류기인 소주고리.

 

태종 17(1417) 5 4일의 기록. 수원부사 박강생과 전 과천현감 윤돈을 사헌부가 고발한다. 두 사람은 결국 파직되었다. 죄목이 엉뚱하다. ‘두 사람이 금천현감 김문에게 소주를 많이 권하여 죽게 했다’는 것이다. 윤돈이 과천현감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인근 고을 관리들이 전별연을 가졌다. 소주도 제법 기울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자리에서 김문이 소주에 상하여 갑자기 죽었다’고 기록했다. 사헌부에서 박강생과 윤돈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태종의 대답은 합리적이다. “설마 사람을 죽이려고 술을 권했겠는가? 인근 고을의 관리를 보내면서 전별하는 것도 흔한 일 아닌가? 파직만 시키라”고 했다 

태종 4 7월에는 조정에서 경상도로 보낸 경차관(敬差官) 김단이 옥주(沃州·지금의 옥천)에서 급작스럽게 죽는다. 역시 소주가 문제였다. 한양을 출발해 경상도로 향하다가 청주를 지나면서 소주를 과하게 마셨다. 결국 청주에서 멀지 않은 옥천에서 ‘과다 음주’로 사망했다. 중앙관리가 출장을 가면 지방 관리들은 필요한 물품, 음식 등을 마련하여 접대한다. ‘지응(支應)’이라는 공식적인 행사다. 김단 역시 지응 자리에서 소주를 과하게 마신 것이다.

세종대왕도 소주로 골치를 썩인다. 알려진 대로 양녕대군은 천하의 술꾼. 더하여 자기만 마시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음주를 권하는 것도 문제였다. 세종 4(1422) 11, 사헌부에서 양녕대군을 탄핵한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돌로 집을 꾸미는데 소주를 지나치게 먹여서 인명을 상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양녕대군 소주 사건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이듬해인 세종 5, 이번엔 문무관 2품 이상이 연대하여 양녕대군을 탄핵한다. 이 탄핵에는 ‘소주를 먹여서 한 사람을 죽게 했다’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래도 양녕대군은 꾸준히 소주를 마셨다. 세종 14(1432) 7월의 기록에는 세종이 양녕대군에게 좋은 안주와 소주를 내렸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세종대왕의 백부 진안대군 이방우 역시 술꾼이었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했던 진안대군은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스스로 몸을 숨긴다. 그는 오래지 않아 사망한다. ‘태조실록’에는 ‘진안군이 술을 좋아했다. 날마다 마시더니 결국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했다. 

세종 15 3월의 기록에는 세종대왕의 술에 대한 ‘속마음’이 나온다.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로 목숨을 잃는 이도 흔하니 술을 과하게 마시지 못하게 법을 세우자”고 건의한다. 세종이 간단하게 대답한다. “비록 굳게 금하더라도 그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조가 물러서지 않고 “그래도 법을 세우자”고 하니 마지못해 대답한다. “술을 경계하는 ‘주고(酒誥)’를 내리겠다.  

 

고려시대 김진은 소주 때문에 전쟁에서 패하고 유배를 갔다. 우왕 2(1376) 12, 왜구가 합포(지금의 마산 일대)를 침범했다. 평소 원수 김진은 예쁜 기생, 측근들과 밤낮으로 소주를 마셨다. 주변 사람들이 이들을 두고 ‘소주도(燒酒徒)’라고 불렀다. ‘소주 마시는 패거리’란 뜻이다. 마침내 왜구가 침입했는데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고 “소주도에게 공격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결국 김진은 패전했다. 조정에서는 김진을 서민으로 강등하고 가덕도로 귀양 보냈다.(‘동사강목’)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소주는 원나라 때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견도 있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소주가 원나라 때 전해졌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송나라 사람 전석이 이미 섬라주는 소주를 두 차례 내린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두 차례 내리는 환소주가 있으니 섬라주와 같다. 오키나와와 사쓰마의 소주는 포성주(泡盛酒)라 한다‘고 했다.

‘섬라’는 태국으로 추정한다. ‘포성주’는 지금도 남아 있다. 소주는 기원전 3000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시작되었다. 원나라 시절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이덕무의 주장도 무시할 바는 아니다.

 

2016-04-13  후추

 

선조 20(1587) 9 1일의 기사(‘선조수정실록’)는 처연하다. 일본에서 다치바나(橘康廣)가 사신으로 왔다. 전례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예조판서를 앞세워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다치바나가 고의로 후추를 흩어 놓았다. 기생과 악공들이 앞다투어 후추를 줍느라, 연회장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다치바나가 객관으로 돌아가 역관에게 말한다. “조선의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결국 망할 것이다.” 사신의 주요 임무는 조선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5년 후 임진왜란이 터졌다. 다치바나의 예언대로 조선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후추는 호초(胡椒)라고 불렀다. ‘초()’는 산초가루 등 매운맛의 향신료를 의미한다

후추는 약으로도 사용했다. 조선 말기의 하재 지규식(1851?)은 ‘아내가 밤새 기침을 하며 숨이 차, 후추(호초) 가루에 꿀을 타 떡을 만들어 수시로 먹게 했다’고 ‘하재일기’에 적었다. ‘산림경제’에서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습한 곳에서는 후추 두세 알을 물고 이와 혀로 문지르면 매운 기운이 오장에 들어가서 나쁜 기운을 막는다’고 했다. 급작스러운 복통에도 ‘후추 달인 물’을 사용했다. 영조는 여름철 찬 음식을 먹고 설사를 만났다. ‘영조실록’에는 ‘후추차()를 마시고 조금 멎었다’고 했다. ‘구급이해방’에서는 지네, 전갈 등 벌레에 물렸을 때 후추를 갈아서 문지른다고 했다 

후추는 향신료로 널리 쓰였다. 다산 정약용은 ‘석이버섯에 후추를 넣어 향기롭게 무친다’고 적었다(‘다산시문선’). 휴대용 향신료도 있었다. 후추, 마른 생강, 산초, 마근(馬芹·커민) 등을 가루로 낸 다음, 물에 반죽하여 환을 만들어 말린다. 사용할 때는 부숴서 다시 가루로 만든다. 후추는 수입품이었으니 귀했지만, 향신료로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호초는 ‘북쪽 오랑캐 땅에서 나는 매운맛의 향신료’라는 뜻이지만 실제 생산지는 따뜻한 남만(南蠻)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쓰시마 섬이나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 일대) 등에서 오는 사신들이 한반도에 전했다. 형식은 조공이지만 실제로는 무역품이었다. 그들은 후추를 가지고 와서 쌀이나 잡곡, , 때로는 불교 경전 등과 바꾸었다. 조선 말기까지 후추는 남쪽에서 공급되었다 


조선 조정의 고민은 쓰시마나 류큐와 외교적 단절이 있을 경우였다. 이 경우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하는 후추를 구하기 어렵다. 후추 모종(胡椒種)이나 재배할 수 있는 후추 씨앗을 구해야 한다
 
후추 모종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집착을 보인 이는 성종이다. 성종 12(1481) 8월 성종이 말한다. “후추는 약을 조제할 때 필요하니 그 종자를 왜인에게 구하면 좋겠다.” 신하가 답하기를 “후추는 왜인이 많이 가지고 와서 창고에 가득하니, 종자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종의 생각은 다르다. “만일 왜인들과 틈이 생기면 앞으로는 구할 수 없다.” 모종을 구하여 직접 재배하자는 뜻이다. 이듬해에도 후추 모종이 거론된다. 예조의 보고다. “일본국 사신에게 후추 모종을 말했더니, ‘후추는 남만에서 생산된다. 유구국도 남만에서 사서 일본에 전한다. 종자를 얻기는 어렵다’고 한다.” 남만은 섬라(태국의 샴 제국), 안남(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일대를 의미한다 

이듬해, 쓰시마에서 온 사신이 후추 모종을 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구체적으로 요구한다. “남만에 사신을 보내어 후추 씨를 구하고자 하는데, 거리가 멀어 3년이 걸린다. 식량으로 무거운 쌀을 싣고 갈 수는 없다. 동전 2만 꿰미를 내려 달라.” 성종은 거부한다. 후추 모종은 두고두고 속을 썩인다. 후추 씨를 구해줄 테니 불교 경전을 구해 달라는 일본 측의 기록도 나온다. ‘남만에서 생산된다’는 말을 믿고 중국 측에 남만의 후추 모종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성종 16 11, 드디어 일본 측의 솔직한 대답을 듣는다. “올해 윤 2, 3월 사신을 남만에 보냈으니 내년 봄에는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남만 사람들이 후추를 팔 때 그 종자를 삶아 버립니다. 후추 종자를 구하더라도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삶은 씨앗으로 싹을 틔우기는 불가능하다. 설혹 제대로 된 모종을 구했더라도 기후 때문에 재배가 어려웠을 것이다. 후추 모종을 구해서 재배하는 일은 무망한 짓이었다.

 

2016-04-20  귀한 얼음, 西氷庫 방화 사건 

▲조선 후기 때 지어진 경주 석빙고. 동아일보DB

 

인조 2(1624) 12 22, 한양 도성의 외곽, 한강변 백성들이 서빙고를 불태웠다. 방화다. ‘인조실록’에는 ‘광해군 시절 서빙고에서 일하던 주민들이 이를 기회로 곡식을 훔쳐 먹었다. 인조 즉위 후, 곡식 훔치는 일을 막자 이를 원망하여 서빙고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인조반정 2년 후이니 광해군 지지파가 남아 있던 시절이다. 정치적 연관성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불만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빙고에서 일하면서 곡식을 구하고 끼니를 이었던 이들이 어떤 ‘조처’로 불만을 가졌고 불을 질렀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에 얼음이 얼면 그 얼음을 떠서 얼음 창고인 ‘빙고(氷庫)’에 보관했다. 얼음 창고는 ‘장빙고(藏氷庫)’다. 얼음을 떠서 옮기는 이들은 ‘빙부(氷夫)’다. 한강변 인근의 서민들이 부역으로 얼음을 깨고, 창고에 넣는 일을 했다. 부족한 인력은 노비, 군인으로 보충했다. 지방에서는 승려들까지 얼음 부역에 동원됐다. 힘든 얼음 부역을 피하려 하는 이도 많았다 


이현보(14671555)의 ‘얼음 깨는 노래’(농암집)는 얼음 부역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 ‘깎아낸 두꺼운 얼음 설산 같은데/쌓인 추위는 뼛속까지 파고든다/아침이면 얼음 지고 능음(얼음 창고)에 들어가고 밤이면 망치 들고 강 복판에 모인다.


정강이가 드러나는 짧은 옷을 입고 짚신도 없으니 동상이 걸릴 판이다. 실제 동상이 걸린 이야기도 숱하게 나온다 

조정에서도 얼음 관련 부역이 힘든 줄 알고 있었다. 빙부들에게 술과 곡식을 내렸고 경작할 논밭(빙부전)을 주기도 했다. 영조 때는 부역으로 궁중에 바치는 얼음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사게 했다. 당시 1년간 필요한 얼음이 4만여 정이고 백성들의 부역을 통하여 구하는 얼음이 3만여 정이었다. ‘정’은 얼음 덩어리를 말하는데 그 두께가 4( 12cm) 정도였다(만기요람). 

 

얼음을 캐는 일도 힘들지만 보관도 쉽지 않았다. 얼음 창고를 개보수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영조 45(1769) 12월의 기사는 석빙고(石氷庫)에 대한 것이다. 영의정 홍봉한이 “빙고(氷庫)에 들어가는 나무의 허비가 너무 많다. 돌로 빙고를 만들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빙고의 서까래와 짚도 갈아야 했다. 자주 점검하지만 불이 나는 일도 있었다. 감독 소홀로 감독관이 벌을 받는 일도 잦았다 

 

겨울에 얼음을 창고에 보관했다가 여름에 사용하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안정복(17211791)은 ‘동사강목’에서 신라 지증왕 6(505)에 이미 얼음을 저장했다고 적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3대 왕인 유리왕(?57) 때 이미 장빙고를 만들었다고 하나 자신은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했다는 ‘설’을 믿는다고 했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을 비롯하여 평양 등지에 얼음 창고를 만들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지방 관청에서도 별도의 얼음 창고를 운영했다. ‘고려사절요’에는 고려 고종 3(1243)에 ‘무신 최이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내 얼음 창고에 저장하려고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했다. 조선 후기 문신 심상규(17661838)도 ‘만기요람’에서 조선의 장빙고가 고려의 제도를 물려받았음을 정확히 밝힌다. 동빙고는 두모포(서울 옥수동)에 있고 서빙고는 한강변(용산 서빙고동 일대)에 있다고 했다. 동빙고와 서빙고를 합쳐 외빙고(外氷庫)라 불렀다. 궁궐 내에는 내빙고(內氷庫)가 있었다. 궁중에서는 필요한 얼음을 외빙고에서 옮겨 와 내빙고에 보관해 사용했다. 동빙고의 얼음은 궁중의 제사에,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동빙고는 규모가 작았고 서빙고는 훨씬 컸다. 서빙고의 얼음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 신하들이나 각 부서에 나눠 주기도 했다. 얼음을 나눠 주는 일이 ‘반빙(頒氷)’이다


장빙고는 매년 12월경(음력) 얼음을 채우고 이듬해 춘분 무렵 문을 열었다. 얼음을 채울 때나 장빙고의 문을 열 때 모시는 제사가 사한제(司寒祭). 겨울이 따뜻하여 얼음을 구하지 못할 때가 있으니 추위를 기원했다. 얼음에 공을 들인 이유는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얼음은 음양의 부조화를 고르게 하는 데도 관계가 있다.’ 얼음은 주로 음식의 부패를 막는 데 사용했지만, 한편으로 ‘양의 여름’과 ‘음의 얼음’이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다.

 

2016-04-27  추어탕

 

미꾸라지는 미끄럽다. 다산 정약용은 아들들에게 주는 글에서 ‘재물(財物)은 더욱 단단히 잡으려 하면 더욱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것이니 재화야말로 미꾸라지 같은 것’이라고 했다.(‘다산시문집’

미꾸라지는 천하다. 영조 때 형조참의 벼슬을 했던 문신 유관현(16921764)은 높은 관직에 있을 때 대단한 음식상을 받고, “시골의 미꾸라지찜만 못하다”고 했다(‘목민심서’). 조선시대 여러 기록에서도 미꾸라지를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혼탁한 시대를 두고 “깊은 산 호랑이가 떠나면 여우가 활개를 치고, 깊은 연못의 용이 떠나면 미꾸라지가 판을 친다”고 했다. 여우와 미꾸라지가 날치는 시대는 천박하다 

미꾸라지를 먹던 이들은 가난한 서민, 하층민들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미꾸라지를 먹는 이들을 ‘세민(細民)’이라고 했다. 가난한 빈민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양과 돼지고기는 왕공이나 귀인이 먹고, 가난한 백성은 미꾸라지, 전복, 조개, 다시마 등을 먹는다’고 했다. 모두 11종류의 해산물을 기록했는데 그 첫머리에 미꾸라지가 등장한다. 10종류는 바다에서 나오는 것들이고 미꾸라지만 민물에서 잡는 것이었다

미꾸라지는 추어(鰍魚), 추어(추魚) 혹은 이추(泥鰍)라고 불렀다. ‘이()’는 진흙이다. 진흙에 사는 미꾸라지는 천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미꾸라지의 모습은 늘 천하다. 영조 즉위 원년(1724) 12월의 정국은 어수선했다. 노론과 소론이 뒤섞여 싸웠다. 소론의 거두 이광좌가 “속담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시냇물을 흐리게 한다’라고 하였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승정원일기’). 이런 미꾸라지를 왕실이나 왕실의 제사에 사용했을 리는 없다.

고려 시대부터 우리는 꾸준히 미꾸라지를 먹었다. 다만 미꾸라지로 만든 공식적인 음식이 없었을 뿐이다. 19세기부터 미꾸라지는 음식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추어탕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밋구리탕과 추두부탕(鰍豆腐湯)이다. 밋구리탕은 서유구(17641845)의 ‘난호어목지’에, 추두부탕은 오주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타난다


미꾸라지탕을 퍽 상세하게 기록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추두부탕 내용이다.

‘진흙, 모래가 있는 곳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독에 넣는다. 하루 3회 물을 갈아주면서 5, 6일을 두면 진흙을 다 내뿜는다. 두부를 크게 잘라 솥에 넣고 미꾸라지 5060마리를 넣은 다음 불을 지핀다. 뜨거운 열기를 피해서 미꾸라지는 두부 속으로 들어간다. 다 익은 다음, 두부를 썰면 미꾸라지가 두부 속에 박혀 있다. 이것을 기름으로 지져서 솥에 넣고 메밀가루, 계란 부침개를 넣고 끓인다.’ 글의 끝부분에는 ‘그 맛이 매우 뛰어나고 이 탕을 도성의 반인(泮人)들이 즐겨 먹는다’고 했다. ‘반인’은 성균관에서 일하던 노비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청소, 식사 준비 등 성균관 유생들의 일상생활을 도우면서 조선 후기에 소의 도축과 쇠고기 유통도 맡았다. 비교적 넉넉한 살림이었지만 계급은 하층민이었다. 미꾸라지는 하층민, 세민 등이 먹었던 식재료였다 

‘난호어목지’에는 미꾸라지, 밋구리를 설명하면서 ‘시골 사람들이 국을 끓여 먹는데 특이한 맛’이라고 했다. 여기서의 시골은 농촌이다. 밋구리탕은 미꾸라지 살을 곱게 만든 다음, 된장 푼 물에 넣고 끓이는 농촌지역 추어탕의 원형으로 추정한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에는 미꾸라지탕, 추탕이 정식 음식으로 등장한다. 소설가 김상용의 연재소설 ‘무하선생방랑기’에는 ‘동대문 밖 추탕’이 등장한다(동아일보 1934 11 16). 지금도 남아 있는 서울의 추어탕 전문점들도 이 무렵 문을 열었다.

가정에서 추탕을 끓이는 법도 소개됐다. 한식연구가 조자호(19121976)는 칼럼(동아일보 1938 7 22)에서 ‘주부의 자랑이 되는 여름철 조선요리, 경제적이고 만드는 법도 간단하다’고 했다. 재료는 미꾸라지, 계란, 두부, 통고추, , 마늘, 생강, 표고버섯, 석이버섯, 깨소금, 간장, 참기름 등이다. 지금의 이른바 ‘서울식 추탕’ 재료와 흡사하다. ‘미꾸라지를 푹 곤다. 뼈를 추려낸 뒤, 살을 국물에 넣고 두부를 부쳐 채 썰어 사용한다. 여름철에 좋고 특히 허약한 사람들에게 좋을 듯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여름철 보양식으로 추탕을 추천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