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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이야기05/ 푸드 칼럼2/ 김성윤 의 맛 세상2/
2015.01.07 국수 맛 좌우하는 한끗, 삶기
자비 1억 들여 국수책 낸 김원일… 韓·中·日·伊 면요리 300개 수록
분당에 있는 '쯔루가메(鶴龜)'는 일본 본토 최고급 식당과 견줘도 손색없다는 평을 받는 일식집이다. 이 식당 오너 셰프(주인 겸 주방장) 김원일(58)씨가 국수 요리책을 냈다. 보내온 요리책이 하도 무거워서 저울에 달아봤다. 무려 2.6㎏, 소고기 4근이 넘는 무게다. 무게만큼 내용도 방대하다. 한국과 일본, 중국, 이탈리아 면 요리 300가지를 수록했다.
요리책을 자비 출간한 게 이번이 32권째일 만큼 김씨는 괴짜 요리사다. "이번 책 내느라 1억원 넘게 썼다"고 했다. "우리나라 면 요리가 너무 엉망이잖아요. 똑바로 보고 똑바로 하라고 냈지요."
▲요리사 김원일씨가 갓 삶아 얼음물에 씻은 소면을 건져 올렸다. 그는 “면 요리에서 제일 중요한 건 국수 삶기”라고 했다. /오종찬 기자
부산이 고향인 김원일씨는 원래 국수를 싫어했다. "어릴 때 국시와 칼국시, 수제비를 입에 물릴 정도로 먹고 자랐어요. 전쟁 끝나고 밀가루 배급 받았잖아요. 시끄무리한 데다 모래가 질겅질겅 씹히는 칼국시, 수제비가 너무 싫었어요. '두 번 다시 안 먹어야지' 하면서도 저녁 끼니 때가 되면 또 어쩔 수 없이 먹었지요."
김씨는 1980년대 일본으로 요리 유학을 갔다가 국수의 참맛을 발견했다. "우동면 한 가지만으로 70가지가 넘는 요리 만드는 걸 보고 탄복을 금치 못했어요. 국수에 대한 입맛이 살아났죠." 이후로 맛있다는 국숫집이 있으면 찾아가 먹어볼 정도로 마니아가 됐다.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파고드는 성격답게 국수 맛은 물론이고 식당 분위기, 서비스 방식, 그릇 사용법, 실내장식, 화장실까지 스케치해 노트에 기록했다.
국수를 맛있게 요리하는 제1 비법으로 김원일씨는 '삶기'를 꼽았다. "물을 넉넉하게 잡아야 해요. 2인분을 삶는다 하면 물이 최소한 6~7ℓ는 돼야 합니다. 비등점(물 끓는 온도)을 높이기 위해 소금을 조금만 넣어요. 국수가 끓어오를 때 찬물 50㏄를 빨리 넣어주면 물 온도를 낮춰주면서 국수가 퍼지는 걸 막아주지요. 이걸 3번 연속 합니다. 그런 다음 건져서 얼음물에 씻어야지 아주 쫄깃합니다."
그는 "수제비 반죽은 생각보다 어렵다"고 했다. "잘못하면 텁텁한 맛이 나거든요. 밀가루에 올리브기름 같은 식용유를 한 숟갈 정도 넣고 반죽한 다음 미리 만들어놓은 소금물을 더해 치대면 아주 차지고 쫀득쫀득한 수제비가 됩니다."
그가 소개한 300가지 국수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동치미무 비빔국수'였다. "부산 남포동 원산냉면 골목에서 피란 내려와 천막 치고 장사하던 할매집 국시인데 집사람과 데이트할 때 1000원씩 주고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나네요. 간단한데 조합이 기가 막혔어요."
[Recipe] 동치미무 비빔국수
소면 800g(약 4인분), 동치미무 1개, 참기름·고춧가루·다진마늘·소금·설탕·식초·양념김채 적당량, 대파 한 뿌리, 참깨 약간
1. 동치미무는 두께 4~5㎜, 길이 5~6㎝로 채썬다. 대파는 잘게 다진다. 동치미무에 소금, 설탕, 식초, 마늘, 고춧가루를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다진 대파를 넣고 다시 무친다.
2. 소면을 삶는다. 소쿠리에 건져 수분을 빼둔다.
3. 그릇에 소면을 적당히 담고 준비해둔 동치미 무채를 수북이 올린다. 참기름을 듬뿍 뿌리고 고춧가루를 취향에 따라 1~2큰술 뿌린다. 양념김채, 통깨를 뿌려 비벼 먹는다.
2015.01.15 유명 셰프(chef·주방장)의 '월드 투어' 시대 열렸다
덴마크 노마(Noma)와 영국 팻덕(Fat Duck)은 그 이름만으로도 세계 미식가들의 침샘을 자극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레스토랑들이다. 패션에 비교하자면 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처럼 여성이라면 (거의)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싶어하는 명품 브랜드랄까. 세계 외식업계 종사자와 전문가들이 선정하는 '세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1·2위를 다투는 선의의 경쟁자들이자, 프랑스 레스토랑 가이드 미슐랭으로부터 별 셋(팻덕)을 받았거나 곧 받을 곳(노마)이라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식당들이다.
이 스타 레스토랑 둘이 동시에 '월드 투어'에 나선 소식이 미식가들 사이에서 화제다. 르네 레드제피(Redzepi)가 오너셰프로 있는 노마는 지난 9일부터 다음 달 14일까지 일본 도쿄로 이주해 1개월 동안, 외판원 출신 천재 요리사 헤스턴 블루멘탈(Blumenthal)이 지휘하는 팻덕은 2월 3일부터 6개월 동안 호주 멜버른에서 6개월간 영업한다.
유명 요리사가 해외에서 자신의 음식을 선보이는 갈라디너 따위 행사를 하거나 지점을 내는 건 흔한 일이다. 유명 셰프가 다른 나라에 가서 음식 행사를 할 때는 혼자 또는 최소한의 주방 인력만을 데리고 일주일 정도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게 일반적이다. 지점을 낼 때는 본점에서 자신과 수년 동안 일하며 훈련한 요리사를 파견한다.
노마와 팻덕은 행사 기간 지점이 아닌 외국에 '본점'으로 옮겨간다는 점에서 행사를 하거나 지점을 내던 과거 방식과 다르다. 덴마크와 영국에 원래 갖고 있던 식당은 영업하지 않는다. 노마가 도쿄에서 운영되는 1개월 동안 덴마크 코펜하겐 식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총주방장 레드제피는 물론 주방 요리사와 홀 종업원 전원이 도쿄로 온다. 팻덕은 인력은 물론이고 식당 문과 간판까지 떼다가 멜버른에 내걸 예정이다.
식당은 통째로 이주하는 반면 음식은 원래 식당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음식을 낸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점 '프렌치론드리(French Laundry)'와 '퍼세(Per Se)'의 오너셰프 토머스 켈러가 2012년 서울 신라호텔에서 갈라디너를 진행한 적이 있다. 켈러는 소고기·치즈·와인·버터 등 자신의 식당에서 사용하는 식재료를 모조리 가져다 똑같은 음식을 선보였다. 인터뷰에서 그는 "갈라디너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미국에 있는 내 식당 음식을 그대로 맛보고 싶어하는 분들"이라며 "본 식당과 똑같은 요리를 내는 것이 손님들에 대한 최고의 서비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반면 '도쿄 노마'는 일본 식재료만을 사용해 요리한다. 노마는 식당이 위치한 북유럽 재료만 사용하는 식당으로 이름났다. 서양 요리의 기본 식재료랄 수 있는 올리브오일을 노마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올리브오일이 남유럽 지중해 연안에서 생산되지 북유럽에서는 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북유럽 툰드라 지역에서 나는 풀이나 그 풀을 뜯어 먹는 순록의 고기를 사용한 요리를 냈다. 이른바 '로컬 푸드'를 지향한다.
지난해 11월 한국을 방문한 레드제피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노마의 식재료 구매 담당 직원이 몇 개월 전부터 일본에 와서 어떤 재료가 어디서 나는지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본지 2014년 11월 20일자〉. 그때 노마가 도쿄로 이동하기 1년 전부터 철저하게 일본 식재료를 조사해 어떻게 요리에 활용할지를 연구했단 소리다. 팻덕을 멜버른으로 가져가는 블루멘탈은 레드제피만큼은 아니지만 소고기 등 호주 식재료를 철저히 활용할 계획이다. '노마 버전 일식'과 '팻덕 버전 호주 음식'이 탄생한다는 점에서 미식가들 관심은 훨씬 커진다.
레드제피와 블루멘탈이 식당을 한시적으로 다른 나라, 도시로 옮겨 운영하는 이유는 여럿이겠으나 우선은 돈이다. 노마나 팻덕에서 식사해보고 싶지만 너무 멀어 오기 힘들었던 아시아와 호주 미식가들이 도쿄와 멜버른에 오픈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예약 전화와 이메일을 퍼부어 식당 전화와 인터넷 홈페이지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한국의 많은 미식가와 요리사들도 벌써 예약을 마치고 노마의 음식을 맛볼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요리사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다. 세계 정상급 요리사들은 새로운 맛과 요리 테크닉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폭식' 수준이다. 레드제피는 일본 문화와 음식의 엄청난 팬이다. 또 발효 음식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김치와 된장, 고추장, 간장 등 한국 발효 음식에 대한 지식은 웬만한 한국인을 능가한다. 영국 가디언지 인터뷰에서 그는 "젊은 요리사들처럼 일본이나 한국 식당에서 (무보수) 인턴으로라도 일하며 발효를 배우고 싶지만 두 아이 아빠인 데다 식당 직원들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라 그럴 수 없다"며 이번 도쿄 이주는 일본 식문화를 배울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세계 외식 트렌드를 선도하는 두 식당이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미식 체험을 시도했으니, 이제 다른 요리사들도 비슷한 활동에 나설 듯하다. 유명 요리사가 연예인 뺨치는 스타로 대접받은 건 이미 오래됐다. 유명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가 미술·공연 관람에 버금가는 문화 활동이나 엔터테인먼트가 됐다. 소문난 식당 요리를 사진 찍어 SNS에 올리는 건 값비싼 명품백만큼 자랑이고 부러움의 대상으로 올라섰다. 시장은 무르익었다는 소리다. 요리사들이 유명 뮤지션처럼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 하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르겠다.
2015.01.21 "반찬 많은 韓食엔 화이트와인이 제격입니다"
한국계 최초 마스터소믈리에 윤 하… 쉬운 말로 와인 설명해 인기
미슐랭 최고 등급인 별 셋을 받으려면 음식은 물론 와인 서비스까지 완벽해야 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누(Benu)'가 개업한 지 불과 4년 만인 지난해 별 3개를 획득한 데는 이곳 수석 소믈리에 윤 하(한국명 하윤식·46)씨의 탁월한 와인 서비스가 한몫했다. 베누는 총주방장 코리 리씨는 물론 수석 소믈리에 하씨까지 한국계로 주목받은 식당이다.
하씨는 지난 2013년 미국 음식 전문지 '푸드&와인'으로부터 '올해의 소믈리에'로 선정됐고, 2012년에는 영국에 본부를 둔 '마스터소믈리에협회(CMS)' 회원이 됐다. 한국계로는 유일하다.
▲마스터 소믈리에 윤 하(Yoon Ha)씨가 와인 향을 맡고 있다. 그는 “와인만큼 폭넓고 음식의 맛을 끌어올려 주는 음료는 없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일곱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하씨는 "집에서 우리말만 사용해야 하는 전형적인 한국 가정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동네 유일한 아시아계였어요. '김치 냄새가 난다'고 놀림 받는 게 부끄러웠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김치통을 우유병 뒤 냉장고 뒤편 깊숙이 숨겼어요. 집에선 와인을 맛본 적 없죠." 와인을 처음 접한 건 마스터 소믈리에치고는 매우 늦은 대학 때였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할 때였어요. 1978년산 프랑스 부르고뉴 'DRC 라 타슈'를 맛본 뒤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었죠."
일간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윤 하)의 와인페어링(wine pairing·어울리는 와인과 음식 짝 맞추기)은 거장답다. 그보다 더 와인페어링을 잘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없다"고 극찬했다. 그가 더욱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쉽고 일상적인 말로 와인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와인업계에서는 와인 맛을 표현할 때 '밸런스'란 표현을 흔히 사용하죠. 와인을 처음 접한 분들은 밸런스라고 하면 뭔지 몰라요. 저는 레몬과 설탕으로 설명해요. '유리잔에 물을 붓고 레몬을 쥐어짜 레몬즙을 섞는다. 설탕을 조금씩 더하면 차츰 달아지면서 신맛이 줄어든다. 시지도 달지도 않은, 균형이 딱 맞는 상태를 밸런스가 좋다고 한다'라는 식이죠."
많은 와인 애호가가 '한식과 와인은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하씨는 "한식은 반찬이 여럿 나오고 다양한 식재료가 한 상에서 섞이기 때문에 이를 맞출 와인을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화이트와인이 한식과 두루 어울리는 편입니다. 최근 맛본 오스트리아산(産) 그뤼너펠트리너(Gruner Veltliner) 품종 화이트와인이 한식에 좋더라고요. 레드와인 중에서는 '샤토뇌프뒤파프' 등 프랑스 남부 론(Rhone) 지역 와인이 불고기·갈비 같은 고기 요리와 어울리고요."
하씨는 "소믈리에에게 제일 중요한 건 와인 지식이 아닌 '피플 스킬', 즉 손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라고 했다. "손님의 성향을 파악할 단서는 테이블에 널려 있지요. 서비스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단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최악의 손님은 다른 소믈리에들"이라며 "와인에 대해 다 아니까, 아니 다 안다고 착각하니까"라며 웃었다.
2015.03.25 느끼하면 탈락, 고슬하게 볶아야 합격
[中食 고수 둥위전에게 배우는 볶음밥의 元祖 '양주볶음밥']
새우·관자 등 재료만 최소 10가지
달걀은 실처럼 가늘게 볶아 넣고 끝에 간장·굴소스로 '불맛' 살려
중국 음식에서 볶음밥은 한식의 비빔밥과 비슷한 위상이다. 볶음밥과 비빔밥은 각각 중식과 한식을 대표하며 가장 널리 사랑받는 음식이다. 한국의 비빔밥을 대표하는 전주비빔밥이 있듯, 중국의 수백수천 가지 볶음밥 중에서 강소성 양주에서 탄생한 '양주볶음밥(揚州炒飯)'이 원조로 유명하다.
◇수나라 양제도 먹던 양주볶음밥?
양주는 북경·사천·광동 요리와 함께 중국 4대 지역 요리 중 하나로 꼽히는 회양(淮揚) 요리의 본거지. 회양 요리는 강소성 일대 음식으로, 과거 이 지역 중심 도시가 회안(淮安)·양주였기에 회양 요리라고 흔히 불린다. 오는 28일까지 서울 신라호텔에서 회양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방한한 둥위전(董玉桭) 심천 샹그릴라호텔 중식 총주방장은 2005년 중국창조요리대회 금상을 수상한 회양 요리 대표 요리사다. 양주가 고향인 둥 총주방장은 "양주볶음밥은 재료가 다양하게 들어가 풍부한 맛을 낸다"며 "달걀, 새우, 중국햄, 해삼, 관자 등 재료가 최소 10가지는 돼야 양주볶음밥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둥 총주방장은 "양주볶음밥의 가장 큰 특징은 실처럼 가느다랗게 볶은 달걀이 들어간다는 점"이라며 "양주볶음밥의 역사는 고대 수(隋)나라까지 올라간다"고 말했다. "수나라 사풍(謝諷)이 쓴 '식경(食經)'을 보면 '재상 양소(楊素)가 쇄금반(碎金飯)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부술 쇄(碎), 금 금(金), 밥 반(飯)자를 써서 달걀이 들어간 밥이 마치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반짝 빛난다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중식 전문가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는 "쇄금반이 달걀을 넣은 밥인 건 맞지만, 어떻게 조리했는지는 식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12~13세기 남송시대 중국 강남의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일상이 바빠졌지요. 빨리 요리해 식사할 필요가 생겼고, 이로 인해 볶음 요리법이 중요 요리법으로 확립됐습니다. 볶음밥은 남송 이후 등장했을 겁니다. 그러니 쇄금반을 양주볶음밥의 기원으로 보긴 어렵지요."
◇마지막에 간장 살짝 '불맛' 살려
둥 총주방장은 "잘 만든 볶음밥은 밥알 하나하나가 기름으로 얇게 코팅돼 뭉치지 않고 고슬고슬하면서 기름지거나 느끼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볶음밥을 맛있게 만들려면 무엇보다 먼저 밥을 알맞게 지어야 한다. "쌀을 완전히 익히지 말고 80% 정도만 익힙니다. 건조하다 싶을 만큼 된밥이 좋아요."
▲둥위전 총주방장이 자신의 고향인 양주 대표 음식 양주볶음밥 제대로 만드는 법을 보여줬다. 둥 총주방장은 “밥을 넣기 전 나머지 재료를 충분히 볶아 향을 내는 것도 맛있는 볶음밥을 만드는 노하우”라고 말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쌀은 흔히 안남미라고 하는 찰기 없는 종류가 좋다. 둥 총주방장은 "한국 쌀로 지은 밥은 냉동시켰다가 해동하면 찰기가 사라져 볶음밥 하기 적당해진다"고 말했다. 다른 재료는 물기가 너무 많지만 않다면 어떤 것이건 상관없다. 간장을 살짝 넣어 마무리하는 것도 맛있는 볶음밥 노하우다. "간장이 살짝 타면서 '불맛'이 볶음밥에 배어 한층 맛있어지지요. 굴 소스를 조금 넣는 요리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둥 총주방장은 "볶음밥을 짜장에 비벼 먹으면 안 된다. 그러면 볶음밥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고 했다.
[Recipe] 정통 양주볶음밥
쌀(안남미) 20g, 작은 새우 40g, 오리가슴살 20g, 중국햄 20g, 닭다리살 20g, 해삼 20g, 마른 관자 5g, 당근 20g, 아스파라거스 20g, 불린 표고버섯 20g, 양송이버섯 20g, 대파 50g, 달걀 100g, 소금 20g, 간장(순한 간장) 10g, 식용유 50g
1. 쌀을 씻어 찜통에 찐다. 상온에 식힌다.
2. 작은새우와 오리가슴살, 중국햄, 닭다리살, 해삼, 마른 관자, 당근, 아스파라거스, 표고버섯, 양송이버섯을 각각 끓는물에 익혀 가로·세로 1㎝ 크기로 자른다. 대파도 같은 크기로 자른다.
3. 달걀을 푼다. 프라이팬을 가열한 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섭씨 70~80도로 맞춘다. 달걀물을 가늘게 기름에 흘려넣는다. 실처럼 익은 달걀을 건져 종이타월에 올려 기름기를 제거한 다음 짧게 자른다.
4. 프라이팬을 뜨겁게 달구고 식용유를 두른다. 2의 재료를 센불에 향이 나도록 재빨리 볶는다. 쌀과 달걀을 더해 계속 볶다가 소금과 간장으로 간한다.
2015.04.01 섹시한 음식은 맛이 별로다
잘나가는 음식점에서 식사할 때 지켜야 할 새로운 에티켓이 최근 등장했다. '테이블에 나온 음식에 바로 손대면 안 된다'이다. 음식 사진을 찍어서 자신의 SNS에 올리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의 촬영을 위해 크고 무거운 전문가급 DSLR 카메라는 물론 삼각대와 플래시까지 핸드백에 챙겨 다니는 젊은 여성들도 있다. 그러니 자신이 주문한 음식일지라도 함께 식사하는 일행에게 "찍겠느냐"라고 묻고, 먹음직스러운 사진을 촬영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배려해주는 게 기본 매너다. 더 잘 찍도록 "(접시를 카메라 방향으로) 돌려 드릴까요?"라고 덧붙인다면 최고의 '배려남(녀)'으로 등극할 수 있다. 비록 음식이 식어서 제대로 맛보진 못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손님들이 식당에서 음식 맛보기보다 사진 찍기에 몰두하는 건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프랑스에선 이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며 음식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레스토랑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는 요리사들은 "사진 찍느라 음식이 식는 줄도 모르는 것은 우리에 대한 모욕"이라며 '푸드 포르노(food porno)'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며 분노한다. 프랑스 요리사들은 왜 이토록 음식 사진 찍는 데 반감을 갖는 걸까.
요즘 국내에서도 심심찮게 듣게 된 '푸드 포르노'는 음식을 뜻하는 '푸드'와 '포르노그래피'가 합쳐진 신조어다. 1984년 미국 여성학자 로잘린 카워드(Coward)가 자신의 책에서 처음 사용한 푸드 포르노라는 말은 2005년 미국 잡지 하퍼스바자(Harper's Bazaar)에 실린 '데비, 샐러드를 하다: 포르노그래피의 선봉에 선 푸드네트워크(음식 전문 케이블채널)'라는 기사를 통해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음식 사진 또는 영상은 푸드 포르노라고 부르는 게 과장이 아닐 정도로 포르노그래피와 비슷한 점이 많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바삭한 페이스트리 위로 흘러내리는 뜨겁고 찐득한 초콜릿 시럽이랄지,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잘랐을 때 발갛게 드러나는 속살 등 특정 부위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극단적으로 확대하는 등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하는 다양한 테크닉을 포르노그래피로부터 음식 산업이 배워왔다고 말한다.
포르노그래피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성(性)을 대상화한다는 게 문제다. 보는 사람을 성적으로 흥분시키기 위해 실제 행위보다 훨씬 시각적으로 자극적이다. 강력한 중독성이 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존 그레이 박사는 "공짜 포르노 사이트를 보는 건 헤로인을 흡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포르노에 중독된 남성은 정상적인 성관계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실제 성생활을 그르치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음식 사진도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음식을 대상화한다면 문제다. 음식을 실제로 맛보고 즐기기보다 SNS에서 과시하기 위한 음식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촬영하는 행위가 우선시된다면 음식 사진은 푸드 포르노가 된다.
음식 담당 기자로 일하며 음식 사진을 수없이 촬영해봤다. '섹시하게' 찍히는 음식은 실제 맛과는 별 상관이 없다. 촬영용 음식은 먹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동안 음식은 쉽게 마르고 윤기를 잃는다. 이를 가리기 위해 촬영할 음식에는 식용유를 잔뜩 바른다. 채소를 제대로 익히면 금세 숨이 죽기 때문에 거의 익히지 않은 채로 찍는다. 사진 촬영이 끝나면 음식은 더는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이런 음식은 피사체 혹은 촬영 소품일 뿐 진정한 의미의 음식은 아니다. 프랑스 요리사들이 깍듯이 모셔야 할 손님의 자유를 제한해가며 자신의 식당에서 음식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건 자신이 만든 요리가 인간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맛과 영양으로서 정당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자극과 흥분을 위한 이미지로서만 소비되는 것이 요리사로서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에 본사를 둔 시장조사기관 GfK가 최근 세계 22개국의 15세 이상 2만7000여 명을 대상으로 음식과 요리에 대해 얼마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을 요리에 소비하는지 알아봤다. 전 세계적으로 일주일에 평균 6시간 30분을 요리에 소비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은 평균 3.7시간으로 세계 최저였다. '요리에 대해 훌륭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와 '요리에 대해 열정이 있다'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도 각각 13%로 가장 낮았다. 한국에서 그렇게 음식이 유행이지만 우리의 식생활이 더 건강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TV를 켜건 휴대전화로 SNS에 접속하건 언제 어디서나 음식 정보와 이미지를 접하게 됐다. 인터넷 TV에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른바 '먹방 BJ'를 수십만 명이 돈까지 내가며 지켜본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열광이 더 나은 식생활로 연결되지 못하면 포르노 중독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2015.05.07 음식, 잘 포용한 나라가 '소유권' 갖는다
지난 1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막한 세계 박람회 '2015 밀라노 엑스포'에서 스위스관은 가장 눈에 띄는 국가관 중 하나다. 세계 박람회는 1851년 런던 만국 박람회로 시작해 각국의 산업화를 자랑하기 위한 공산품 전시 행사였지만 이제는 인류가 당면한 이슈를 주제로 전 세계에서 지혜를 모으는 축제이자 참가국의 문화 전반을 선보이는 '문화 올림픽'이다.
이번 엑스포의 주제는 '음식'이다. '인류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제공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각 참가국이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해 관람객에게 선보이는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가 자국 파빌리온(Pavillion· 국가관)에서 내세운 음식 중 하나는 커피였다. 스위스관에서 관람객을 안내하던 가이드는 "커피는 스위스가 가장 많이 수출하는 식품"이라고 말했다.
단 한 톨의 커피 원두도 생산하지 못하는 스위스가 주요 커피 수출국이라니? 물론 인스턴트 커피를 세계 최초로 대량생산한 나라가 스위스다. 인스턴트 커피는 1901년 일본계 미국인 과학자 가토 사토리가 발명했지만 생산 원리를 찾아낸 데 불과했다. 이후 1938년 커피 과잉생산으로 허덕이던 브라질 정부는 스위스 다국적기업 네슬레(Nestle)에 "커피 재고를 처리할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네슬레는 인스턴트 커피 '네스카페'를 개발해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인스턴트 커피가 전 세계에 빠르게 보급된 계기였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캡슐 커피의 원조 '네스프레소' 역시 네슬레가 개발했다.
그래도 의아해서 자료를 찾아봤다. 국제무역센터(ITC)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스위스는 4만7908t의 로스트 커피를 수출했다. 물량으로 보면 독일·이탈리아·미국·폴란드에 이어 세계 5위였다. 하지만 가치로 따지면 19억8000만달러로 1위였다. 스위스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엄청난 커피 수출국인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커피 원두를 생산하지 못하지만 세계 커피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로는 이탈리아도 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커피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따라서 커피 원두를 아라비아반도나 남아메리카, 북아프리카의 커피 생산국에서 100% 수입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이탈리아 커피'라고 말했을 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스위스 커피' '이탈리아 커피'라고 했을 때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커피는 원자재인 커피 원두가 어디서 생산됐느냐만큼이나 어느 나라에서 로스팅(roasting), 즉 가공됐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커피 원두를 수확해 바로 먹으면 별다른 맛이 없다. 원두를 뜨거운 불에 볶는 로스팅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씁쓸하면서도 구수한 커피 특유의 맛과 향을 갖게 된다.
커피를 얼마나 로스팅하느냐는 로스팅이 이뤄지는 나라 국민의 입맛이나 커피를 즐기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뜨거운 물을 많이 부어 양이 많고 부드러운 커피를 선호하는 북유럽에서는 로스팅을 연하게 한다. 그래서 스위스나 독일·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에서 로스팅한 커피는 상대적으로 옅은 갈색이다. 반면 이탈리아는 적지만 강렬하고 진한 커피를 선호한다. 그래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개발했고, 에스프레소에 최적화된 강하게 로스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일리(illy), 라바차(Lavazza) 등 이탈리아 커피회사의 커피 원두가 검정에 가까운 짙은 갈색을 띠는 이유이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는 에스프레소에 우유나 우유거품을 더한 카푸치노, 라테 등 다양한 커피 음료를 개발했다. 이탈리아식(式) 커피 문화가 스타벅스라는 미국 기업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탈리아 커피'라고 했을 때 이상하게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커피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음식은 식재료의 원산지가 어디냐보다는 누가 더 잘 받아들여 자기만의 문화로 창조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고추만 해도 원래 한반도에서 자생한 식물이 아니라 남미대륙에서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전해졌지만 그 어느 나라보다 훌륭하게 한식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고추의 매운맛' 하면 한국이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나라가 됐다.
식재료뿐 아니라 음식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보다는 누가 더 훌륭한 문화로 발전시키는지에 따라 '소유권'이 판가름 날 수 있다. 세계 요리업계 전문가들이 선정하는 '세계 50대 식당'에서 지난해 1위를 차지한 덴마크 코펜하겐 '노마' 레스토랑의 오너셰프(주방장 겸 주인) 르네 레드제피(Redzepi)를 최근 만났을 때 그는 "한국 김치는 유럽 피클처럼 단순 절임이 아니라 젖산발효를 거친 복합적이고 훌륭한 발효음식"이라고 했다. 이 덴마크 셰프가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김치에 대해 더 잘 아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만큼 세계적인 셰프들이 한국 발효 음식을 주목하고 연구하고 있다. 그들이 한국 음식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면 그들의 음식이지 더 이상 한식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정통 한식이니 퓨전이니 따지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외국 음식을 받아들여 우리만의 것으로 소화해 새로운 한식을 계속 창조해 나가야 한다. 고추를 기꺼이 받아들여 한식의 일부로 만든 우리 조상들처럼.
2015.05.20 뒷마당 이름모를 잡초… 내게 와 요리가 되었다
['잡초 레시피' 개발한 권포근·고진하 부부]
개망초·환삼덩굴·토끼풀… 스파게티·월남쌈에 활용
소화 돕는 등 藥性 뛰어나
도심 공원 잡초는 피해야 "식초에 5분 담갔다 드세요"
장독대 뒤에 난 토끼풀을 권포근(56)씨가 뜯기 시작했다. 토끼풀과 토끼풀꽃만 줄기에서 똑똑 따내 대바구니에 조심스레 담았다. 그는 토끼풀 옆에 수북이 자란 다른 잡초들도 뜯어 담았다. 잡초를 하나씩 집어주며 "맛보라"고 권했다. 토끼풀 잎은 아삭아삭 씹는 맛이 상쾌했고, 뽑아도 뽑아도 또 나서 농부들이 아주 싫어한다는 환삼덩굴은 달큰했다. 개갓냉이라는 풀은 겨자처럼 맵싸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값비싼 허브 못지않다. 권씨는 "여름이면 먹을 수 있는 잡초가 20가지 이상 올라온다"면서 "버릴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강원도 원주 시골 낡은 한옥에 사는 권씨는 시인이자 목사인 남편 고진하(62)씨와 함께 '잡초 레시피'(웜홀)라는 요리책을 최근 냈다. 나물과 비빔밥부터 샐러드·스파게티·샌드위치·김밥·월남쌈·빙수까지, 권씨가 잡초를 활용해 개발한 요리 수십가지를 소개한다.
▲권포근씨가 만든‘토끼풀꽃 튀김’.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폭신한 맛이 일품이다. 위 작은 사진은 잡초 비빔밥. /이진한 기자
권씨 부부는 원래 원주 시내에서 유기농 음식점을 운영했다. 6년 전 식당을 접고 낡은 한옥으로 이사했다. '불편당(不便堂)'이라 명명한 집 마당에 잡초가 무성했다. "한집에 살면서 이름도 모르고 지낸다는 게 예의는 아닌 것 같았어요. 잡초를 공부하기 시작한 계기였죠." 그해 심한 가뭄이 들었고, 천정부지로 뛴 채소 값은 부부를 더욱 잡초에 주목하게 했다.
권씨는 논밭두렁에서 개망초, 민들레, 비름 따위를 뜯어와 겉절이도 하고 김치도 담갔다. 남편과 딸에게 잡초 요리를 시식시켰다. '생체실험' 대상자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먹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맛있었다. 수퍼에서 파는 채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맛과 향이 강렬했다.
부부는 "약성(藥性)도 놀랍다"고 했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생명력 덕분이죠. 잡초를 먹고 난 뒤부터 소화가 잘되고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돼지고기나 막걸리를 먹으면 소변이 탁해지는데, 잡초와 같이 먹으면 무척 맑은 거예요."
부부는 매일 한 끼는 잡초 비빔밥을 꼭 먹을 정도로 '중독'이다. 겨울이면 '잡초 절편'과 '잡초 가래떡'을 만든다. 권씨는 "잡초를 뜯어 먹는 건 우리 선조가 원래 하던 일"이라고 했다. 먹을 게 없어 굶주리던 시절 구황식물로 잡초를 먹었다는 것이다.
잡초의 맛과 효능 되찾기는 세계적 미식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다. 르네 레드제피, 벤 슈리 등 세계 일류 요리사들은 요즘 '포리지(forage)' 또는 '포리징(foraging)'에 빠져 있다. 포리지를 직역하면 '먹이를 찾다'이지만 '채집(採集)'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이 셰프들은 시간 날 때마다 식당 주변 숲과 들을 다니며 각종 식물을 뜯는다. 채집 전문가를 고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채집한 풀은 샐러드 등 각종 요리로 변신해 비싸게 팔린다. 그들이 '잡초'에 주목하는 건 다른 어떤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채소이기 때문이다. 다른 요리사들이 갖지 못한 식재료는 요리사가 확보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그러나 권씨 부부는 "독성이 있는 잡초도 있으니 반드시 자기가 아는 것만 채취하고 먹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농약을 치는 논밭두렁에서 자라는 잡초는 안 돼요. 도시는 공해가 심하니 공원에서 자라는 잡초라도 위험하죠. 서울은 북한산 정도가 괜찮은데, 그래도 식초에 5분 정도 담갔다가 먹어야 합니다."
2015.05.27 中 고급요리 샥스핀, 서태후 이전엔 먹지 않았다
[베이징 청나라 황실요리 전문점 '리자차이' 오너 리샤오린]
황실 식사 담당한 관료 후손
"건륭제가 싫어했던 샥스핀, 선례따라 황제들도 안 먹어
재료·맛 순수성 엄격히 따져… 끼니마다 130개씩 요리 올려"
"황실요리는 중용(中庸)을 추구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너무 맵지도 짜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중용의 맛이야말로 천하의 중심인 황제에게 부합한다고 믿었죠."
중국 베이징 '리자차이(厲家菜·Family Li Imperial Cuisine)' 레스토랑 주인 리샤오린(厲曉麟)씨는 황실요리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리씨의 증조할아버지는 청(淸)나라 지배층 만주족(滿洲族)으로 서태후(西太后)와 황제, 황후의 식사를 책임지던 내무부(內務府) 도총(都總)이란 고위 관직을 지낸 정2품 대신(大臣)이었다. 은퇴 후 그는 황실 음식을 기록으로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1985년 그의 후손들이 황실요리 전문식당을 열었다. 리씨는 28~29일 서울 JW메리어트호텔에서 황실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방한했다.
▲중국 황실요리 전문 식당‘리자차이’주인 리샤오린씨가 26일 서울 JW메리어트호텔 중식당 만호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중용을 중시한 황실요리에서는 불도 너무 센 불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황실 식사를 담당한 어선방(御膳房)은 내무부 직속이었다. 어선방은 환관들이 장악했지만, 이 환관들을 관리한 건 리씨의 증조할아버지 같은 내무부 관료들이었다.
리씨는 "황제와 황태후의 상에는 120~130가지 음식이 올랐다"고 말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여러 가지가 올라갔어요. 환관들이 매번 황제가 무엇을 많이 먹고 무엇은 손대지 않았는지 살피며 취향을 파악했습니다. 건륭제(乾隆帝)는 오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끼니마다 오리요리가 10여 가지씩 나왔죠. 새로운 요리도 끊임없이 개발해 올렸지요. 모든 요리는 기록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보관했습니다."
리씨는 "궁중 요리는 식재료와 음식 맛의 순수성을 엄격하게 따졌다"고 말했다. "성격이 다른 재료를 무분별하게 함께 쓰지 못하도록 금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비집으로 탕(湯)을 끓일 때는 닭의 껍질과 뼈는 제거하고 순살코기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음식 주재료가 지닌 맛을 가리거나 다른 재료로 바꾸면 절대 안 됩니다."
어떤 식자재를 사용해야 하는지 철저한 규정도 마련됐다. "돼지는 25㎏짜리만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요리사들이 수없이 요리하고 시식한 결과 가장 맛있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즘은 돼지 품종도, 사육방식도 달라 그대로 따르긴 어렵지요."
▲①우유에 청주와 식초를 더해 살짝 발효시킨 만주족 요리. 리샤오린씨는“수렵생활을 했던 만주족은 유제품을 즐겨 먹었다”고 말했다. ②제비집에 녹두젤리와 아카시아꽃, 감미료를 더해 달콤한 맛과 향을 낸 요리.
③양념해 구운 돼지고기에 쌀가루와 밀가루로 만든 전병을 얹었다. 서태후가 좋아했다는 음식이다. /JW메리어트호텔서울 제공
상어지느러미(샥스핀)는 중국요리를 대표하는 최고급 식재료로 알려졌다. 하지만 리씨는 "서태후 이전까지 황제들은 상어지느러미를 잘 먹지 않았다"고 했다. "건륭제가 상어지느러미를 싫어했기 때문이지요. 황실에선 선례(先例)를 중시했습니다. 위대한 건륭제가 꺼린 음식을 후대 황제들이 감히 먹지 못했죠." 이러한 관습은 서태후 때 와서 뒤집혔다고 한다. "서태후가 상어지느러미를 진짜 좋아했다기보다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먹은 것 같습니다."
중국 황제의 요리라고 하면 만한전석(滿漢全席)이 먼저 떠오른다.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의 음식을 한데 모았다는 상차림이다. 리씨는 "황제가 평소 만한전석을 먹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연회석상에 만석과 한석이 따로 있었죠. 만한전석은 청나라가 사라지고 난 다음 생겨난 말입니다."
그는 "황실요리를 재현할 뿐 새롭게 창조하려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기록에는 1000가지쯤 되는 요리가 있습니다. 이 중 3~4개월마다 교체하며 130여 가지를 내놓습니다. 곰발바닥이나 호랑이고기처럼 구할 수 없거나 금지돼 재현 못하는 요리도 있습니다. 그 밖에는 가능한 한 과거의 맛을 충실히 재현하려 합니다. 너무나 많은 황실 요리가 변형되었고, 그 과정에서 원래의 맛을 잃었습니다."
2015.05.27 특급호텔 주방장들이 알려주는 '간장게장' 담그는 비법
①양조간장:물=1:4
②꽃게, 얼려서 써라
③등껍데기는 아래로
▲/롯데호텔서울 제공
꽃게가 제철이다. 살이 꽉 찬 꽃게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역시 간장게장. 꽃게 특유의 감칠맛은 살리되 짜지 않게 담그는 것이 포인트다.
올봄 간장게장 점심 세트를 내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한식당 '무궁화'의 천덕상 과장은 "간장과 물을 1대4 비율로 맞춘" 것이 첫째 비법이라고 했다. "보통 1대1로 하잖아요? 그러면 너무 짜요. 간장을 확 줄이는 대신 뒤포리(국물용 마른 밴댕이)와 멸치, 건새우 등 감칠맛을 더해주는 부재료를 간장과 물에 넣고 같이 끓입니다. 단맛을 위해 물엿, 매실청, 사과, 양파, 대추도 넣고 통후추, 월계수잎도 넣습니다."
흔히 사용하는 마늘이나 인삼은 쓰지 않는다. 천 조리장은 "마늘과 인삼은 맛과 향이 강해 게장 본연의 맛을 가린다"고 했다. 조선간장은 너무 짜서 양조간장을 사용한다. 센불에서 끓이다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중불로 줄여 뭉근하게 30분 더 끓인 다음 완전히 식힌다.
둘째 비법은 "싱싱한 꽃게를 얼려 사용하라"이다. "살아 있는 꽃게를 간장물에 그냥 넣으면 게살이 삭아 탱탱한 식감이 떨어집니다. 꽃게를 냉동실에 넣어 완전히 얼린 다음 간장물에 담가야죠." 꽃게는 등이 아래로 가도록 뒤집어 간장물에 담근다. "등껍데기가 위로 가면 간장물이 꽃게살 전체에 고루 배지 않아서"다. 36시간 숙성시킨 다음 간장물을 따라낸다. 40분 끓여 식힌 다음 다시 꽃게에 부어 36시간 동안 2차 숙성시킨다. 무궁화에서는 이 간장게장에 송송 썬 미나리와 김가루, 참기름을 곁들여 낸다.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 한식당 '온달'은 말린 차조기잎을 뜻하는 자소엽을 넣은 '자소엽 간장게장'으로 이름났다. 서병호 조리장은 "자소엽은 짠맛을 부드럽게 해줄 뿐 아니라 해독 작용과 식중독 예방 등의 효능도 있어 간장게장에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간장게장 소스를 따로 끓인 다음 자소엽을 넣고 그대로 식히는 방식으로, 나흘간 숙성시킨다.
2015.06.03 셀·프·氷·水
[한 끼 식사보다 비싼 빙수, 집에서 즐기는 방법]
우유팩째 얼렸다가 흔들면 샤베트 같은 얼음 만들어져… 과일주스·커피도 활용 가능
커피빙수엔 쿠키·계핏가루… 와인빙수, 허브를 토핑으로
빙수(氷水)는 무더위를 쫓아주는 한여름 차가운 기쁨이다. 갈수록 고급화하니 한 끼 식사보다 비싼 빙수도 수두룩하다. 한 호텔에서는 샴페인으로 만든 얼음에 금박으로 장식한 무려 7만5000원짜리 초(超)고가 빙수를 내놨다. 값비싼 빙수, 집에서 해먹는 방법은 없을까?
◇우유를 얼려서 흔들면 '눈꽃빙수'
'수퍼레시피' 테스트키친팀 배정은씨는 "빙수기 없이도 맛있는 눈꽃빙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일단 우유를 팩(200mL 기준)에 든 채로 그대로 냉동실에 1시간 넣었다가 꺼낸다. 우유는 표면이 살얼음으로 살짝 언 상태. 이 우유팩을 손에 쥐고 사정없이 흔든 다음, 다시 냉동실에 얼렸다가 1시간 뒤 흔들어주기를 3차례 반복한다. "이렇게 하면 우유가 사각사각 샤베트 같은 우유얼음 상태가 돼요. 빙수 전문점에서 파는, 혀끝에서 폭신하면서도 사라락 녹아 사라지는 눈꽃빙수와 식감이 비슷하죠."
▲빙수기를 쓰지 않고 팩에 든 우유와 멜론맛 우유를 냉동고에 얼려 만든 멜론 빙수. 맛과 색이 그럴듯하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팩에 든 우유를 1시간마다 흔들어가며 3시간 동안 얼려 만든 우유 얼음.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흰 우유 대신 딸기 우유를 사용하면 딸기 빙수, 바나나맛 우유를 사용하면 바나나맛 빙수가 쉽게 만들어진다. 우유에 연유를 조금 더하면 얼음이 녹아도 맛이 옅어지지 않아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과일 빙수를 만드는 법도 어렵지 않다. "커다란 그릇에 오렌지·포도·석류 등 주스를 담아 냉동고에 얼리세요. 1시간마다 꺼내서 포크로 살짝 언 주스를 전체적으로 긁어줍니다. 3차례 정도 반복하면 과일 빙수가 되죠." 커피를 활용해 커피 빙수를 만들어도 훌륭하다. 단 포크로 긁어도 상처 나거나 부서지지 않는 두껍고 단단한 유리 용기가 과일 빙수 만들기에 알맞다.
◇얼음에 이슬 맺히면 빙수기에 갈아요
물론 빙수기나 믹서를 사용하면 힘들이지 않고 빙수를 만들 수 있다. 배씨는 "요즘 가정용 빙수기는 최저 1만원대(약 1만9000원)부터 수십만원대까지 다양하게 나와있다"고 말했다. 빙삭기는 얼음을 면도하듯 깎는 방식으로, 회전날로 으깨 부수는 방식인 믹서보다 빙질(氷質)이 섬세하다. 가정용 빙삭기는 커다란 통얼음용과 작은 각얼음용 2종류가 있다. '빙수'(그린쿡)를 펴낸 자칭 '빙덕후(빙수 마니아)' 조영후씨는 "통얼음 빙삭기가 훨씬 빙질이 좋다"며 "얼음을 빙삭기에 넣기 전 미리 꺼내 표면에 이슬이 맺힐 정도로 놔뒀다가 갈면 더 좋은 빙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토핑(고명)을 곁들이는 것도 빙수 먹는 재미다. 배정은씨는 "커피 빙수는 잘게 부순 초코칩쿠키·초콜릿시럽·계핏가루와, 과일 빙수는 연유, 와인 빙수는 애플민트처럼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나는 허브와 어울린다"고 추천했다.
['별미 빙수' 직접 만들어 보세요]
-자료·사진=수퍼레시피 super-recipe.co.kr
●토마토 빙수
우유 1컵, 레몬 껍질 1개분(생략 가능), 바질(또는 민트) 5장
토마토졸임: 토마토 1개+설탕 1/3컵+레몬즙 2큰술(2~3인분)
1. 레몬은 굵은 소금으로 껍질을 문질러 씻는다. 필러로 노란색 껍질을 벗겨 잘게 다진다. 레몬은 반으로 잘라 즙을 낸다. 바질은 잘게 다진다.
2. 우유와 레몬 껍질, 바질을 넣고 2~3번 섞어 5분간 둔 다음 얼음물에 담아 냉동실에 3시간 이상 얼린다.
3. 토마토를 사방 0.5㎝ 크기로 다진다. 냄비에 토마토·설탕·레몬즙을 넣고 센불에서 끓어오르면 저어가며 5분, 중간불로 줄여 5분 끓인 뒤 완전히 식힌다.
4. 2의 우유 얼음을 빙수기에 넣고 간 다음 그릇 2개에 나눠 담는다. 3의 토마토졸임을 올린다.
●과일 빙수
토마토 1개, 수박 과육
과일 토핑: 토마토 1/2개+수박(2~3인분)
1. 토마토는 껍질을 벗기고, 수박 과육은 씨를 제거한다. 믹서에 곱게 갈아 냉동실에 3시간 이상 얼린다.
2. 과일 토핑 재료 중 토마토는 씨를 발라내고 사방 0.5㎝ 크기로 썬다. 수박은 껍질째 0.5~1㎝ 두께로 썬다.
3. 1의 과일 얼음을 빙수기에 간다. 그릇에 담고 토마토와 수박을 곁들인다.
●와인 빙수
레드와인(또는 화이트와인) 3컵, 포도 5~6알, 와인젤리 1/2컵(생략 가능)
와인시럽: 레드와인 1/3컵(또는 화이트와인), 설탕 1큰술, 물엿(또는 올리고당) 1큰술
1. 냄비에 레드와인을 넣고 끓으면 약한불로 줄여 10분 끓여 알코올을 날린다. 식힌 다음 냉동실에서 6시간 이상 얼린다.
2. 냄비에 와인시럽 재료를 넣고 중간불에서 끓어오르면 약한불로 줄여 저어가며 2~3분 졸여 식힌다. 포도는 4등분한다.
3. 1의 와인 얼음을 빙수기에 곱게 간다. 그릇에 나눠 담고 와인젤리, 포도, 2의 와인시럽을 올려 낸다.
2015.07.15 배합 비율 지켰더니 '엄마손맛' 나오네
박지은(63·사진)씨가 음식에 들어가는 각종 양념의 비율(比率)을 수학 공식처럼 정리하기 시작한 건 13년 전, 딸이 결혼하면서다.
"결혼하면서 남편 따라 충주로 갔다가 서울로 이사했는데, 끼니때만 되면 전화가 걸려와요. '엄마, 돼지갈비 양념은?' '상추 겉절이는 어떻게 만들어?' 하면서요. 대충 양념하는 법을 일러주면 '몇 그램(g)에 몇 큰술이냐'고 되묻더라고요. '적당하게' '알맞게' 같은 두루뭉술한 설명이 와닿지 않은 거죠. 제 손맛은 세월 속에서 익혀졌지만, 딸아이는 요리 경험이 짧으니 더 상세한 레시피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비율'이다. 계량해서 일일이 분량으로 알려주는 것보다 비율로 설명했더니 딸이 훨씬 쉽게 이해하고 더 오래 기억하더란다. "계량을 하더라도 먹는 사람 숫자가 바뀌면 다시 재고 조정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비율을 알면 조건이나 상황이 바뀌더라도 정확한 맛을 낼 수 있습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요리했고, 지금은 팔공산 자락에서 식당까지 운영하는 그에게도 음식 양념을 비율로 공식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수십 번 실험 끝에 간장, 고추장, 된장 등 한식 전통 장에 양념을 추가해 짠맛과 단맛을 조절하고 산미와 감칠맛을 더했다. 무침·볶음·조림·찜·구이·국물 등 온갖 요리에 들어가는 양념장을 만들 때 들어가는 재료의 비율도 정리했다.
▲박지은씨가 자신의 강정 소스(오른손 옆)로 만든 장어 강정과 닭 강정, 마늘 강정을 선보였다. 박씨는 토마토 소스, 겨자 소스 등 한 번 만들어놓고 여러 요리에 두루 활용할 수 있는 ‘만능 양념장’을 최근 펴낸 ‘고마워! 엄마 양념’에 소개했다.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수학 공식을 외우면 어떤 응용 문제도 풀 수 있듯, 양념장 비율만 외워두면 각종 반찬을 뚝딱 만들 수 있다. 박씨가 찾은 최적의 간장 무침 양념 비율은 간장 둘에 설탕과 식초 하나씩. 숙주더덕무침, 부추양파무침, 오이도라지생채 등 간장을 기본으로 한 무침 요리 양념으로 사용한다. 된장 셋에 고춧가루 하나, 국간장 하나를 섞으면 열무된장무침·냉이무침·곤드레볶음 같은 무침이나 볶음 요리에 사용할 양념이 된다. 고추장·고춧가루·청주·양조간장·올리고당 각각 하나에 설탕을 절반 넣으면 꽁치나 황태를 구울 때 바르는 양념장이 된다.
박씨는 딸처럼 요리를 아직 어려워하는 여성들을 위해 최근 '고마워! 엄마 양념'(레시피팩토리)이란 책을 펴냈다. 백종원씨의 '만능 양념'이 손쉬운 식당 밥이라면, 박씨의 양념 비율은 '집밥 공식'인 셈이다.
●만능 강정 소스
강정 소스는 설탕 8큰술+물 1컵(200mL)+양조간장 8큰술+청주 8큰술+고추장 4큰술+토마토케첩 4큰술+올리고당 8큰술을 냄비에 모두 넣고 센 불에서 끓어오르면 중약불로 줄여 6분 저어가며 졸인다.
●장어강정
손질된 장어 2마리, 마늘 3쪽, 생강 3톨, 풋고추 1/2개, 홍고추 1/2개, 식용유 4컵, 감자 전분 4큰술, 강정 소스 5~6큰술
1. 장어는 키친타월로 감싸 핏물을 제거하고 껍질을 칼로 긁어 점액을 제거한 뒤 2등분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은 채 장어 껍질이 아래를 향하게 놓고 센 불에서 앞뒤로 뒤집어가며 2분 굽는다.
2. 장어를 한입 크기로 썰어 감자 전분을 묻혀 10분 둔다. 마늘은 얇게 편 썰고, 생강은 채 썬다. 풋고추, 홍고추는 잘게 다진다.
3. 냄비에 식용유를 붓고 섭씨 180도로 달군다. 마늘을 약한 불에서 1~2분 튀긴다. 장어는 중간 불에서 6분 튀긴다.
4. 프라이팬에 강정 소스를 넣고 센 불에서 끓어오르면 장어, 생강, 풋고추, 홍고추를 넣고 볶은 뒤 튀긴 마늘, 생강 채를 곁들여낸다.
●닭강정
닭다리살 6쪽, 양파 1/4개, 피망 1/2개, 청양고추 1개, 고추기름 2작은술, 다진 마늘 1큰술, 강정 소스 7큰술, 물 2큰술, 감자 전분 1/2컵, 식용유 3컵, 다진 땅콩 2큰술
밑간: 청주 1큰술, 다진 생강 1/2작은술, 후춧가루 약간
1. 닭다리살을 십(十)자로 4등분한 뒤 밑간해 10분 둔다.
2. 양파, 피망, 청양고추는 다진다.
3. 위생팩에 감자 전분을 닭다리살과 함께 넣고 꾹꾹 눌러 묻힌 뒤 10분 둔다.
4. 냄비에 식용유를 붓고 센 불에서 섭씨 180도로 끓인다. 닭다리살을 넣고 중약불로 줄여 7~8분 노릇하게 튀긴 뒤 기름기를 뺀다.
5. 프라이팬에 고추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과 2의 재료를 넣고 센 불에서 1분, 물을 넣고 1분 저어가며 끓인다. 강정 소스와 닭다리살을 넣고 소스가 거의 없어질 때까지 30~40초 저어가며 섞는다. 불을 끄고 다진 땅콩을 뿌린다.
2015.07.16 '슈거보이'가 '집밥 선생'이면 안 되는 이유
'먹방(음식 먹는 방송)'에 이어 '쿡방(요리하는 방송)'이 뜨면서 최고의 '예능 대세(大勢)'로 등극한 이를 꼽으라면 외식 사업가 백종원씨일 것이다. 그가 험난한 방송 예능계를 평정할 수 있었던 비장의 무기는 '쉽고 간단한 조리법'이다. 그의 손만 거치면 이때껏 주방 근처도 얼씬하지 않았던 중년 남성도 쉽게 따라 하는, 그러면서도 맛있는 요리로 변신한다.
쉽고 맛있는 그의 레시피는 설탕이 듬뿍 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죽하면 시청자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슈거보이(Sugar Boy)'다. 생선조림이나 양념치킨은 물론이고 닭볶음탕, 김치찌개, 콩국수, 심지어 된장찌개에도 설탕을 넣는다. 지금은 값싼 재료지만 원래 설탕은 귀하고 비쌌다. 집들이 선물로 설탕 포대를 들고가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설탕이 흔하고 값싼 물건이 된 건 비교적 최근 현상이다.
인간이 설탕을 식용(食用)한 역사는 2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인도 땅에 살던 누군가가 사탕수수즙을 추출해 설탕으로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인도 요리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짙은 갈색 덩어리 설탕 '구르(gur)'가 설탕의 초기 형태다.
유럽 사람들이 설탕을 처음 맛본 건 이보다 한참 늦은 11세기였다. 이슬람으로부터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며 팔레스타인에 상륙한 십자군(十字軍)은 다디단 설탕 맛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가 설탕을 수입해 유럽에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입되는 양도 적고 가격도 엄청나게 비싸서 백종원씨처럼 펑펑 쓰진 못했다. 요리에 향신료로 조금 넣거나 귀한 약재(藥材)로 다뤘다.
설탕이 대중화된 계기는 유럽 국가들이 서인도 제도와 인도양의 섬 식민지에 대형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하고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노예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 설탕을 대량 생산하면서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3년 두 번째 항해 때 오늘날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에 사탕수수를 전했다. 이후 50년이 조금 지난 1550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카리브 해·서아프리카·브라질·멕시코 등지에서 설탕 생산에 이미 한창이었고, 영국·프랑스·네덜란드가 뒤를 바싹 쫓았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18세기에 접어들자 설탕은 어렵잖게 먹을 수 있는 대중 식품이 됐다. 당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설탕은 공장 노동자들의 식생활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식품으로 여겨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설탕만큼 싸면서 고열량인 식품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음식저술가 해럴드 맥기(McGee)는 "홍차와 잼에 넣은 대량의 설탕은 노동계급에 (일하는 데 필요한) 연료를 공급했다"고 말한다. 영국 국민 1인당 연간 설탕 섭취량은 1700년 2㎏에서 1780년 5㎏으로 배 이상으로 폭등했다.
한반도에는 삼국시대에 설탕이 수입됐다고 짐작되지만 기록은 없다. 문헌상 최초 기록은 고려 명종 때 이인로가 쓴 '파한집(破閑集)'이니까 12세기 말에는 확실히 설탕을 먹은 듯하다. 고려 때 설탕은 중국 송나라에서 들여오는 값비싼 수입품이라서 부자들이나 아주 가끔 맛볼 수 있었다.
설탕이 우리나라에서 대중식품으로 보급된 건 1950년대 중반 제당공장이 설립되면서였다. 식품영양학자인 정혜경 호서대 교수는 "설탕을 한식에 두루 넣게 된 건 소득수준이 올라간 1980년대부터"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그 전까지 설탕은 한식에 거의 쓰이지 않았고 꿀이나 조청이 조금 들어가는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한식에 설탕이 대량 사용된 건 외식업계에서 비롯됐다고 음식 전문가들은 본다. 비용이나 노력을 크게 들이지 않으면서 음식 맛이 좋다고 느끼게 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 설탕을 넣는 것이다. 단맛은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맛이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도 본능적으로 단맛을 찾는다. 일본의 미각 연구가 스즈키 류이치는 최근 국내 발간된 '미각력(味覺力)'에서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성분을 추구하는 성질이 있다"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당분이나 지방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설탕을 과다 섭취하면 몸에 이롭지 않다는 건 설명이 필요 없다. 밥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인 대부분이 필요 이상의 당분을 이미 섭취하고 있다. 게다가 자극적인 음식은 먹을수록 그 맛에 무뎌진다. 달게 먹을수록 더 단맛을, 짜게 먹을수록 더 짠맛을 찾게 된다. 스즈키는 이를 '미각 장애(障礙)'로 규정하면서 "값싸고 간편한 음식을 먹은 대가로 정상적인 미각을 내놓으면 모처럼 건강에 좋은 요리를 먹어도 맛있게 느끼지 못하고, 당분이나 염분을 과도하게 섭취하게 된다. 가능하면 이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이른 단계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중식당에서는 제한된 예산에서 맛을 내기 위해 설탕이나 인공조미료(MSG)를 쓸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설탕과 인공조미료는 몸에 해로운 물질은 아니다. 사먹는 손님이 선택할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쉽고 맛있어도 가족의 식사를 책임지는 엄마(또는 아빠)라면 그럴 수 없다. 음식에 설탕을 듬뿍 넣는 슈거보이 백종원씨가 훌륭한 '식당밥 백선생'일 수는 있어도 '집밥 백선생'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2015.07.22 고기엔 기름장? 부위별 '단짝소스' 따로 있다
[캠핑장 구이요리에 이런 소스 만들어보세요]
부드러운 고기는 산뜻하게 - 꽃등심·살치살+간장·사과
씹는맛 있는 고기는 진하게 - 토시살·늑간살+당근·액젓
휴가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캠핑장을 가든 펜션을 가든 피서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음식, 그중에서도 구이 요리다. 야외에서 불판이나 석쇠에 지글지글 고기 구워 먹는 맛을 따라올 음식이 있을까.
고기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지만 부위별로 어울리는 소스를 찍어 먹으면 그 맛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음식 궁합을 맞추는 기본 원칙은 '맛의 농도'를 같게 하는 것! 즉 맛이 강한 음식은 강한 음식과, 부드러운 음식은 부드러운 음식과 함께 먹는 식이다. 요리연구가 메이씨는 "맛과 맛이 만나 서로 밀어올리는 상승 작용을 노리는 것"이라며 "균형이 맞지 않으면 강한 맛만 느껴지고 약한 쪽은 맛볼 수 없어 전체적으로 풍성한 맛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고기 특성에 따라 소스를 달리하면 맛이 더욱 살아난다. 요리연구가 메이씨가 소고기 부위별 맛을 고려해 개발한 ①당근소스 ②콩소스 ③사과소스 ④허브소금 ⑤폰즈소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를 고기와 소스에 적용하면 연하고 부드러운 맛의 고기에는 가볍고 산뜻한 소스가, 육향이 진하고 씹는 맛이 좋은 고기에는 맛과 향이 진한 소스가 제격이다. 구이용 소고기는 우선 마블링이 좋아 씹을 틈도 없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듯한 부위가 있다. 꽃등심살·본갈비살·살치살이 대표적이다〈표 참조〉. 이런 부위를 구워 먹을 때는 너무 강하거나 진하지 않은 소스가 어울린다. 메이씨는 간장에 청주나 맛술을 더해 너무 짜지 않게 만든 소스를 소개했다.
반면 '고기는 씹는 맛'이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씹을수록 고기 맛이 살아나는 아롱사태·늑간살·황제늑간살 등이 더 맛있을 듯하다. 안창살·토시살·치마살처럼 독특한 맛과 향이 진한 부위도 있다. 이런 부위에는 소스도 맛과 향이 짙고 강해서 고기에 밀리지 않아야 한다. 메이씨는 "당근은 특유의 휘발향이 있는데 풍미가 짙은 고기와 잘 어우러진다"고 설명했다. 액젓은 생선을 발효시켜 만들어진 진한 감칠맛이 아롱사태의 씹는 맛에 밀리지 않는다.
삼겹살로 대표되는 돼지고기는 소고기와 비교하면 모든 부위의 맛과 향이 부드럽고 육질이 연하며, 지방 함량이 높아 기름진 편이다. 이러한 돼지 부위는 소 꽃등심·본갈비살·살치살과 마찬가지로 강하거나 진하지 않은 소스와 궁합이 맞는다.
식초나 레몬즙이 들어가 지방의 느끼함을 씻어주는 소스는 질리지 않고 고기를 먹게 해준다.
돼지고기라도 소고기처럼 색이 짙고 육즙도 풍부한 등심덧살(가브릿살)이나 고깃결이 거칠지만 가장 돼지고기다운 맛을 지닌 목심살, 골수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맛이 일품인 등갈비살, 쫄깃한 식감이 매력적인 토시살 등의 부위는 진한 소스에 찍어 먹으면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석대로만 가면 재미없는 법. 메이씨는 "독특한 풍미나 씹는 맛을 지닌 부위는 진한 소스 대신 소금만 찍거나 가벼운 소스를 곁들여 고기의 개성을 느껴보는, 정반대 접근법도 시도해볼 만하다"고 권했다. 허구한 날 찍어 먹는, 참기름에 소금 섞은 기름장을 벗어나보자.
●식감별 소고기 부위 ㅡ자료=미국육류수출협회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느낌의 부위: 꽃갈비살·갈비본살·살치살
맛과 향이 진한 부위: 안창살·토시살·아롱사태·치마살
씹는 맛이 있는 부위: 늑간살·황제늑간살·아롱사태
●모든 부위에 두루 어울리는 기본 소스 ㅡ자료=요리연구가 메이
허브소금: 소금 1/4컵, 허브 가루(바질 가루, 오레가노 등) 2~3종류 1큰술, 후춧가루 1/2작은술을 섞는다.
●부드럽고 마블링 잘된 부위
콩소스: 볶은 콩가루 1/2컵, 귤·오렌지 껍질 가루(귤·오렌지 껍질 벗겨서 말린 후 가루 낸 것) 1큰술을 섞는다.
사과소스: 사과 간 것·올리브오일 1/2컵씩, 식초·맛술 1큰술씩, 소금 1작은술을 섞는다.
폰즈소스: 간장 1/2컵, 맛술·청주·식초 1/4컵씩, 설탕 1/2큰술을 넣고 한소끔 끓인 후 완전히 식힌 다음 레몬 1조각과 쪽파 약간을 넣는다.
간장양념: 간장 1/3컵, 청주 3큰술, 설탕 2큰술, 참기름·다진 파 1큰술씩, 후춧가루 1작은술, 다진 마늘 1/2큰술을 섞는다.
●맛과 향이 진한 부위
당근소스: 당근 간 것 5큰술, 양파 간 것 1작은술, 식초·간장·올리브오일 3큰술씩, 맛술 1큰술, 참기름·다진 마늘 1작은술씩, 후춧가루 약간을 섞는다.
●씹는 맛 좋은 부위
액젓양념: 물·멸치액젓 3큰술씩, 설탕·다진 고추 2큰술씩, 청주·다진 마늘 1큰술씩 섞는다.
2015.08.19 소박해서 더 값진 陶藝家의 시골 밥상
이른 아침 빗질한 자국이 정갈한 흙길 한편 꽃달개비 파란 꽃잎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장닭이 푸더덕거리며 나타나 부지런히 모이를 쪼았다. 산비탈 아래 상추며 고추 따위를 심은 푸성귀밭이 있었고, 그 뒤로 나무 울타리만 두른 닭장에서 암탉 네댓 마리가 새끼들을 살뜰히 보살폈다. 경기도 곤지암에 있는 도예가 김기철(82)의 보원요(窯)는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처럼 푸근하고 자연스러웠다.
보원요를 찾아간 건 음식이 훌륭하단 소문 때문이었다. 김기철은 자신의 작업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데, 맛있는 걸 넘어 감동스럽기까지 하다는 게 소문의 핵심이었다. 과거 그의 책을 펴낸 출판기획자는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생명력을 먹는다는 느낌"이라고 감탄했다. 그래서 그에게 소개받아 그 감동스럽다는 밥상을 맛보러 보원요를 찾았다.
도예가의 아내가 정성스럽게 차린 점심상을 받았다. 언뜻 봐서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밥상이었다. 하지만 채소 맛이 완전히 달랐다. 상추는 잎이 질기다고 할 정도로 두꺼웠고 쌉쌀한 맛이 진했다. 식탁에 내놓고 조금 지나면 풀 죽어 시들시들한 여느 상추와는 종(種)이 다르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여름이라 하루에 서너 알밖에 얻지 못한다는 토종닭의 달걀로 만든 달걀찜은 진하고 선명한 노란빛을 띠었다. 지난 가을 담갔다는 김장김치는 여전히 싱싱하고 아삭했다.
맛의 차이는 재배 방법에서 비롯됐다. 상추는 물론이고 김치를 담근 배추, 들깨 국물에 무친 머윗대며 고추장에 박아 장아찌로 만든 씀바귀, 섬쑥부쟁이, 왕고들빼기, 비름나물, 가죽나물 등 각종 나물은 물론 빈대떡에 들어간 녹두까지 모두 보원요 식구들이 직접 재배하거나 가마 주변 땅에서 채취한 것들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법정 스님 등 눈 밝은 이들에게 귀하게 대접받았던 그의 백자(白磁)지만 그는 도예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자연스럽다'를 최고의 경지로 여긴다"는 김기철은 도예가의 길도 자연스럽게 밟게 됐다. 혹자는 운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40대 중반이었나,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일사 김봉룡 옹의 '나전칠기전(展)'을 우연히 관람했어요. 너무 감탄했고 충격받았어요. 누구는 이렇게 창작하며 사는데 난 뭐 했나.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얼마 후 그는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3개월을 드러누워야 했다. "집사람 친구가 '심심한데 이 흙 가지고 장난이나 해보세요'라며 청자흙 한 덩어리를 갖다줬어요. 그저 주병 따위를 만들어 거실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더니 보는 사람마다 재주가 좋다고 칭찬하더라고요."
여기저기 도자기 배울 곳을 찾다가 이천의 한 도요(陶窯)에서 실습하게 됐다. 여기서 만난 한 도공과 1978년 오늘날 보원요가 있는 곤지암 터에 도자기 가마를 세웠다. 가마를 시작하고 1년쯤 되었을 때 우연히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게 성공을 거뒀다. 물레를 쓰지 않고 손으로 빚은 작품이 낯설면서도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었다. 당시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그에게 공간대상 도예상을 줬다. 전시 성공에 고무된 김기철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백자를 구운 것이다. "다양한 색감과 문양이 나타나더라고요. 기름칠한 것처럼 반들반들 윤기도 나고."
김기철이 곤지암에 가마를 만들고 나서 도자기 굽는 일보다 더 관심을 가진 건 농사였다. "고등학교 때 6·25 사변이 터져서 고향인 충북 괴산의 큰집으로 3년을 피난 가 있었어요. 가는 날부터 지게질을 했는데 6·25가 끝나고도 서울로 안 나오겠다고 했어요. 농사일이 힘들지만 재미가 있었어요. 제일 나쁜 논을 일구라고 받았는데 제일 수확을 많이 했어요."
그는 가마 주변 3000여 평 논밭에서 쌀은 물론 배추며 상추·녹두 등 각종 채소와 곡물을 직접 재배한다. 농사를 지을 때도 자연의 방식에 순응하고 전통 방식을 따른다. 비료나 살충제를 치지 않는 건 당연하고, 비닐로 하우스를 만들지도 않는다.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농작물 주변 땅에 검정 비닐을 치는 '멀칭'도 하지 않는다.
"식물이 자라면서 잎사귀와 뿌리를 통해 땅과 공기로부터 무수한 성분을 빨아들여야 하는데 멀칭을 하면 빨아들이질 못해요. 비료를 치고 하우스 재배하면 뜨겁고 수분이 많아지니 식물이 뻥튀기같이 되지요. 그래서 요즘 채소나 과일은 향이 없어요. 냉장고에 며칠만 두어도 흐물흐물 물렁 팥죽이 되지요."
자연에 순응하는 전통 방식으로 키운 재료에 정성이 더해지니 맛이 없을 수 없다. 김기철 자신은 '소박하고 촌스러운 밥상'이라지만 요즘 찾아보기 힘든 진짜 시골식 밥상이니 이보다 더 호사스럽고 귀한 밥상일 수 없다.
"옛날 시골 농사꾼들이 해먹던 소박하고 촌스러운 밥상이 주는 감동이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흔히 떠들어 붙이는 가짜 유기농이 아니라 순수한 재래식 재료이기 때문에 채소 한 잎을 씹어도 그 향취와 질감이 다르다고 찬사를 해댑니다. 손님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이 나 또한 얼마나 흐뭇하고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김기철은 "된장찌개, 김치 한 가지라도 따끈따끈한 밥 한 그릇과 정성스레 차려줄 때 우리의 영혼은 살이 찐다"고 했다. 영혼에 한껏 살이 오른 채 서울로 돌아왔다.
2015.09.23 極과 極은 통한다
음식전문기자라고 하면 "맛난 것만 잔뜩 먹고 다니겠군"이라며 다들 부러워한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찾으려면 그만큼 맛없는 음식도 많이 먹어야 하는 것이 이 직업의 애로사항이며, 그로 인한 과체중·비만은 산업재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이면서 맛없는 식당은 미리 감지해 들어가지도 않는 확률이 높아지기는 했다.
맛있는 걸 찾다가 어쩔 수 없이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일부러 맛없는 음식을 찾아서 먹는 인물이 쓴 책을 흥미롭게 펼쳐들었다. 도쿄농업대학에서 오래 강의했으며 발효학자인 고이즈미 다케오(小泉武夫)씨가 쓴 '맛없어?'(사과나무)란 책이다. 맛없는 음식을 시식하는 자신의 변태적(?) 취미에 대해 고이즈미씨는 "결코 흥미를 끌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며 "여러 맛없는 음식과의 대결을 통해서 그 본질이 대체 어디에 깃들어 있는지, 또 원인과 요인은 무엇인지를 앎으로 해서 '맛이란 무엇인가'라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살펴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책 서문에서 당당히 밝히고 있다.
고이즈미씨가 책에서 가장 먼저 소개한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음식은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surstrømming)이다. 세계 최고의 악취(惡臭) 음식을 꼽을 때 언제나 1위를 차지한다. 냄새가 도대체 얼마나 심하길래? 냄새의 강도를 측정하는 앨러배스터(Alabaster)라는 정밀 기계가 있다. 이 기계로 측정한 냄새의 수치를 표시하는 단위를 AU라고 한다. 물론 숫자가 높을수록 냄새가 강하다. 수르스트뢰밍은 무려 8070AU이다. 참고로 하루 종일 신고 다니다 갓 벗은 남성 구두 냄새가 187AU, 경기를 마친 야구선수의 운동 양말이 420AU이다.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수르스트뢰밍은 쉽게 말해서 청어 통조림이다. 청어에 소금을 약간 첨가해 커다란 용기에 1차 발효시킨다. 발효가 한창 진행될 때 통조림에 옮겨 담는다. 보통 통조림은 밀봉한 뒤 가열 살균해 캔 안의 미생물을 사멸시킨다. 수르스트뢰밍은 가열 살균을 하지 않는다. 깡통 안에 살아있는 발효 미생물이 활동을 계속하면서 2차 발효가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탄산가스의 압력 때문에 깡통은 팽팽하게 팽창해 기이하게 둥그런 형태를 띠게 된다.
음식전문기자이지만 부끄럽게도 수르스트뢰밍을 맛보진 못했다. 대부분 국가에서 수입이 금지됐고, 스웨덴에 아직 가지 못했다. 가열 살균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생상 문제가 있을 수 있는 데다 언제든 터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칫 폭발하면 지독한 악취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옷에 튀면 아무리 빨아도 냄새가 빠지지 않아 버리는 편이 낫다고 한다.
고이즈미씨는 물론 수르스트뢰밍을 먹어봤고, 그 맛을 이렇게 묘사한다. "은행알을 밟아 짓뭉갰을 때의 냄새에다 말린 고등어 즙을 뿌리고 똥냄새를 더한다. 또한 거기에 강렬한 생선 젓갈 냄새를 뒤섞은 듯한 냄새다. 맛은 생선 젓갈 같은데 거기에다가 탄산수를 섞은 것 같은, 참으로 괴상한 맛이다."
그는 세계 최고의 악취 음식 2위로 한국 홍어를 소개했다. 앨러배스터 수치가 6230AU였다. 고이즈미씨는 홍어를 맛보러 일부러 전남 목포를 세 번이나 찾았다고 한다. "입에 넣고 씹는 순간 격렬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쿡!! 하고 찌르더니 머리에도 쿵!! 하고 충격이 왔다. …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나는 항상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던 만능 페이퍼(pH) 리트머스시험지 한 조각을 꺼내 그것을 콧구멍 앞에 놓고 콧김을 흥! 하고 내뿜어보았다. 그 결과를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 놀랍게도 그 만능 페이퍼 시험지가 순식간에 짙은 파란색으로 변해버렸던 것. … 그렇게 강렬한 암모니아가 콧구멍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호기심이 발동해 인터넷을 뒤져보니 '세계 5대 악취 음식' 리스트란 게 있었다. 1위는 수르스트뢰밍, 2위는 홍어, 3위는 뉴질랜드의 에피큐어 치즈 통조림(1870AU), 4위는 바다표범 배 속에 바다제비·북극뇌조 등을 넣고 발효시킨 에스키모 음식 키비악(kiviak·1370AU), 5위는 생선을 소금에 절였다가 발효시킨 일본 전통 음식 구사야(1267AU)였다.
세상에서 가장 냄새가 심하다는 다섯 가지 음식을 살펴보니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생선·우유·날짐승 등 동물성 단백질을 원재료로 하며, 둘째는 발효 식품이란 점이다. 셋째는 싫어하는 사람이 아주 많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좋아하는 마니아적 애호가 역시 존재해서 호불호(好不好)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음식들이다. 그리고 일단 맛을 들이게 되면 '중독'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즐기고 찾게 된다.
수르스트뢰밍은 스웨덴에서도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는 사람이 많지만 좋아하는 이들은 너무나 좋아해서 매년 여름 수르스트뢰밍 축제가 열릴 정도다. 홍어 역시 입에 대지도 못하는 한국 사람도 있지만 홍어가 빠지면 잔치가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열렬한 사랑을 호남에서 받고 있다. 기자도 사회생활을 하기 전까지 홍어를 맛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매달 홍어 먹는 모임을 가질 정도로 홍어 맛에 중독됐다.
세계 최악의 음식을 살펴보고 얻은 결론은? 당신에게 최악의 음식일지라도 타인에게는 최고의 음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극(極)과 극은 통한달까. 맛없다고 미리 단정하지 말고 맛부터 보자. 참고 씹어보자.
2015.09.23 '어디서 먹어 본 음식…'이란 반응 제일 끔찍해
[코릿 선정 '한국 대표 레스토랑 1위' '밍글스' 오너셰프 31세 강민구씨]
내 이름과 닮고 '융합' 뜻도 있는 가게名 '밍글스' 고교 때 지어둬
한·양식 결합한 '모던 한식' 승부… 새롭고 맛있는 음식 창조가 관건
"저보다 훨씬 오래 요리하신 선배들도 계신데 1위라니, 부끄럽습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올해 서른한 살의 강민구씨는 서울 청담동에 있는 레스토랑 '밍글스'의 오너셰프(주인 겸 주방장)다. 밍글스는 지난주 '코릿(KorEat)'이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레스토랑 1위에 올랐다. 코릿은 한국 대표 식당을 가리는 서베이 겸 페스티벌이다. 조선일보와 웰콤퍼블리시스가 공동 기획하고,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관광공사가 후원하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아멕스)와 중국 최대 온라인 여행사 씨트립 등이 참여한다.
▲31세 강민구씨는“선배들도 많이 계시는데 제가 1위라니 부끄럽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고교 시절 이미 식당 이름까지 지어놓은‘준비된 요리사’이다. /코릿조직위원회
외식업계 전문가 100명이 꼽은 톱50 중 1위에 선정된 밍글스는 한식과 양식의 식재료와 요리 기법을 창조적으로 결합한 '모던 한식'을 선보이는 식당. 강 셰프는 "제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맛없다'보다 '어디서 (먹어) 본 음식인데…'"라며 "새로우면서도 맛도 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게 제일 큰 스트레스"라고 했다.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새로운 맛을 선보이고 싶다는 그가 선택한 '무기'는 뻔하고 진부한 듯 보이는 한식이었다. 코릿 톱50 선정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한국의 전통장과 제철 식재료가 조화를 이룬 맛은 외국인도 한식을 사랑하게 만든다"(임선영 푸들 대표) "한식과 양식의 조합도 진부한 지금 이곳에선 음식이 모든 국경을 넘나들기 시작했다"(양정우 '라보사 블로거)며 밍글스 음식을 극찬했다.
밍글스 대표 메뉴인 '숯불 양갈비'는 양갈비에 된장을 발라 24시간 숙성시켜 숯불에 굽는다. 외국에서 들어온 양갈비, 하지만 그 맛은 어딘가 한국적이다. 프랑스 대표 디저트인 크렘브륄레(cr�me brulee)는 된장이 더해져 깊고 기품 있는 단맛으로 재탄생한다.
그가 한식을 활용해 자신만의 맛을 만들어내겠다고 결심한 건 국내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연수를 할 때다. "미국 플로리다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였는데, 그쪽에서는 한국 음식에 대해 굉장히 무지했어요. 제가 국제 무대에서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 한식을 접목하면 나만의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강 셰프는 "한식은 다양한 양념을 섞어 쓴다는 점이 다른 나라 요리와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했다. 그는 "중독성이 있다고 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음식들은 여러 양념을 복합적으로 사용해 풍성한 맛을 낸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한식을 외국인들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선보인다면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소금보다 훨씬 풍부한 맛을 낸다"며 된장을 두루 활용하는 것도 강 셰프만의 특징이다. 된장을 말려서 곱게 빻은 '된장 가루'를 소금 대신 생선과 고기, 채소에 뿌려 간을 한다. 된장에 서양 재료를 섞어 갖은 양념의 범주를 넓힌다. "된장·간장 등 장류를 치즈·크림 같은 유제품과 섞으면 더욱 복합적이고 풍부한 맛을 내요. 된장 가루를 이탈리아 파르미자노(파마잔) 치즈와 섞어 양념으로 사용합니다."
식당 이름인 밍글(mingle)은 영어로 '섞다, 어우러지다'는 뜻이다. 강 셰프는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처음 배운 단어인데 제 이름과 비슷하기도 하고, 저희 음식 스타일과 어울려 식당 이름으로 정했다"고 했다. 고교 시절 이미 요리사로 진로를 결정하고 식당 이름까지 지어뒀을 만큼 치밀하고 성실한 강민구의 손끝에서 모던 한식은 더욱 정교하고 섬세하게 완성도를 높여가는 중이다.
2015.10.28 '진짜 맛집'은 레시피를 숨기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식당은 어디인지 알아보려고 '코릿(KorEat) 서베이'를 시작했다. 요리사와 식당 주인, 레스토랑 컨설턴트, 특급호텔 식음기획자, 요리 연구가, 음식 칼럼니스트 등 음식·외식업계에서 현재 활동 중인 전문가 100명에게 최고의 식당을 추천받아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외식업소 50곳을 공개했다.〈본지 9월 17일자 기사 참조〉
50개 쟁쟁한 식당 중에서도 톱10에 선정된 가장 오래된 곳은 평양냉면 명가 우래옥(又來屋)이다. 1946년 개업했으니 대한민국보다도 두 살 더 많다. 우래옥에는 가게 역사만큼 오래된 지배인이 있다. 김지억 전무다. 올해 여든셋이지만 매일 오전 11시 30분이면 1층 카운터 앞을 바위처럼 굳건하게 지키며 손님을 맞는다.
김 전무는 "조달청에서 일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화폐개혁을 실시한 1962년 우래옥에 입사했다"니까 올해로 53년째 근무 중이다.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씨는 "53년째 월급을 받고 있는 김 전무는 국내 최장(最長) 납세자일 것"이라며 "국세청에서 표창장을 줘야 한다"고 종종 농담한다.
우래옥을 취재하기 위해 만난 김 전무는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이 답했다. 다른 식당이라면 "며느리도 모른다" "영업 비밀"이라며 숨길만 한 내용도 대수롭잖다는 듯 알려줬다. 이런 식이다.
"냉면 면발의 메밀과 전분 비율이 어떻게 되나요?" "7대3이야!" "육수는 뭐로 끓이나요?" "소고기 딱 하나야. 전에는 돼지고기도 넣었어. 이북에선 돼지고기도 많이 넣었다고. 그런데 어느 날 손님이 '냉면 값은 제일 비싸게 받으면서 싸구려 돼지고기를 넣느냐'고 욕하기에 그날로 빼버렸어."
"이렇게 다 알려줘도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비법은 없다"고 했다. "냉면이 그저 육수와 면의 조합 아니오. 숨길 게 있나. 좋은 고기 잘 삶고 좋은 메밀로 면 내리면 되지 뭐."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곰탕 명가 하동관(河東館)도 톱50에 선정됐다. 1939년 문 열었으니 올해로 76주년을 맞은 또 다른 노포(老鋪)다. 하동관을 이어받은 4대 장승연(38)씨는 패션모델 뺨치게 키 크고 세련된 여성이다. 장씨와 그의 어머니 김희영(77·3대)씨도 인터뷰에서 감추는 게 없었다. 들은 대로 따라 하면 문외한도 최고의 곰탕을 끓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온갖 노하우를, 물어봐 줘서 고맙다는 듯 신이 나서 설명했다.
하동관 모녀는 "이렇게 다 알려줘도 괜찮으냐?"는 질문에 "알려줘도 그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곰탕에 들어가는 고기는 손으로 썰어야 해요. 고기마다 육질이 다르고, 한 고깃덩이조차 부분마다 결이 달라요. 고기의 육질에 맞게 칼질을 해야 씹을 때 고기가 쫄깃해요. 힘과 시간이 여간 드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대부분 곰탕집이 기계로 썰죠. 기계로 썬 고기는 푸석하고 국물에 들어가면 바스러져요. 우리가 손 칼질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다들 믿지 않기에 강남점 오픈할 때 주방에 창을 내 칼질하는 거 보여줬어요."
맛집은 남들이 모르는 엄청난 비법을 숨겨놓고 있는 게 아니라, 음식 만드는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는 데 있는 것 같았다. 누구나 알지만 힘들다고, 이윤이 적다고, 비효율적이라고 꺼리는 정도(正道)를 묵묵히 걷는 이들이 바로 유서 깊은 맛집의 계승자들 아닐까.
세계 미식(美食) 트렌드를 선도하는 외국 식당들도 마찬가지다. 현재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덴마크 노마(Noma)는 요리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한다.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면 바로 업데이트해 볼 수 있게 한다. 요리책도 주기적으로 펴낸다. 노마뿐 아니라 해외 이름난 식당은 대부분 자신의 대표 요리 레시피를 공개한다.
프랑스 파리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라스트랑스(L'Astrance)의 오너셰프 파스칼 바르보가 몇 년 전 한국에 왔을 때 그를 한 불교 사찰에 데려가 사찰 음식을 맛보게 했다. 사찰로 가는 차 안에서 그에게 물었다. "왜 요리법을 다 공개하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감추려 해도 어차피 다 밝혀지게 돼 있어요. 모든 요리사는 다른 요리사의 음식을 맛보고 거기서 영향을 받아요. 그대로 따라 하면 '카피'지만, 자신만의 요리로 새롭게 탄생시킨다면 '창작'이죠.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창조하고 영감을 주고 영향을 주는 것, 그게 최고 요리사의 역할 같아요."
옛 맛을 고집스레 지키는 유서 깊은 식당이건 새로운 맛과 음식을 끊임없이 창조해내는 첨단 레스토랑이건, 정상에 선 이들에겐 노력이 있을 뿐 비밀은 없는 듯하다.
2015.12.09 '철가방'의 환골탈태… "저희 중식당엔 짜장면 없습니다"
#1. 서울 서교동에 있는 중식당 '진진'은 짜장면·짬뽕·탕수육 등 중국집 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아예 팔지 않는다. "늘 먹는 짜장면·짬뽕·탕수육 말고 흔히 접하지 못하는 정통 중국 요리를 즐겨보라는 뜻에서 뺐어요." 이 식당 대표 겸 총주방장인 화교 왕육성씨가 말했다. 왕씨는 코리아나호텔 중식당 '대상해'를 26년간 운영했던 화교 요리사계의 원로다.
#2. 서울 연남동 '대만야시장' '송가' '띵하우' '편의방'은 '중식 포차(포장마차)'라 불린다. 우리가 아는 평범한 중국 음식 대신 피가 두툼하고 새우가 들어간 물만두, 소스를 뿌리지 않는 대만식 탕수육같이 중국과 대만의 현지 음식을 술안주처럼 판다.
흔히 '철가방 배달 음식'으로 여겨지는 중국 음식이 환골탈태(換骨奪胎)하고 있다. 화려한 중국식 문양의 그릇이나 실내 장식 대신 카페 같은 분위기로 단장하고, 중국 요리의 상징인 짜장면을 팔지 않는 가게까지 등장했다. 허름한 동네 '짜장면집'과 고급스럽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고급 호텔 중식당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식당이 '모던 차이니즈'로 대중의 맛과 멋을 공략하고 있다.
서울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파미에스테이션에 있는 중식당 '모던눌랑'은 꽃무늬 새겨진 비취색 접시에 음식을 조금씩 담아낸다. 화려한 중국식 문양으로 뒤덮인 무겁고 큰 접시에 잔뜩 담겨 나오는 여느 '중국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 식당은 1930년대 중국 상하이를 테마로 카페처럼 세련된 분위기로 실내 장식을 했다.
전국 17개 지점을 둔 싱가포르계 중식당 프랜차이즈 '크리스탈 제이드'의 대표 메뉴는 고추와 땅콩으로 만든 맵고 고소한 소스에 버무려 먹는 사천(四川)식 국수 '딴딴면'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생소한 중국 요리였지만 지난 10월 이 식당의 면 요리 가운데 매출 1위였다. 이 식당 관계자는 "딴딴면이 짜장면과 짬뽕을 제쳐 우리도 놀랐다"고 했다.
이들 '신(新)중식당'의 공통된 특징은 중국 본토 맛에 충실하다는 것. '크리스탈 제이드' 관계자는 "중국·홍콩·대만 등 중화권 여행이 증가하면서 정통 중식을 경험한 소비자들이 현지 맛을 구현하는 중식당을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30년대 중국 상하이를 테마로 한 레스토랑 겸 바 ‘모던눌랑’. 카페처럼 세련된 인테리어와 예쁘게 조금씩 담겨 나오는 음식이 중식당 같지 않다. /썬앳푸드 제공
식당 분위기가 달라지자 여성 손님의 비중도 증가했다. '모던눌랑' 관계자는 "주 고객층의 70%가 여성"이라며 "기존 중식당 손님은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과 비교해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음식은 기존 중식당처럼 많이 담아주지 않고 둘이서 나눠 먹기 알맞을 정도의 양이다. 미국 프랜차이즈 중식당 'PF창'도 패밀리 레스토랑을 능가하는 세련된 인테리어에 중식과 어울리는 다양한 칵테일을 내놓으면서 젊은 여성들이 즐겨 찾고 있다.
중식의 부활은 방송으로도 연결되고 있다. 지난 10월부터 SBS플러스에서 방영 중인 '강호 대결 중화대반점'은 중식에 대한 관심을 실감케 한다. 옥근태 SBS플러스 CP는 "시청자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뜨겁다"며 "시식단 경쟁률이 초반 70대1에서 500대1로 껑충 뛰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중식이 뜨는 건 누구나 중식에 대한 추억이 있기도 하지만 중식이야말로 미식의 궁극(窮極)이자 종착역이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했다.
음식칼럼니스트 강지영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고급 외식시장은 프랑스 레스토랑에, 대중 외식은 피자·스파게티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요리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며 "최근 서양 요리에 질린 대중이 다시 중식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2015.12.10 크리스마스의 충격적 미각 경험
몇년 전 크리스마스날 매우 충격적인 미각(味覺) 경험을 했다. 소개받아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과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당시 새로 오픈한 가장 '핫'하다는 프랑스 레스토랑에 어렵게 테이블을 예약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설 때였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음식을 맛보고 그 맛을 글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일이라서만은 아니다. 워낙 음식을 즐기는 집안에서 태어난지라 어릴 때부터 가족끼리 집에서 밥 먹으면서도 음식 품평을 했다. 어머니가 저녁에 끓여주신 새우젓 찌개 앞에서 "오늘은 좀 짜네요? 평소 엄마 솜씨가 아니네." 이런 식이다. 친구들도 유유상종. 워낙 잘 먹는 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에 뭘 먹을지, 어제 다녀온 식당은 어땠고 내일 갈 식당은 어디인지 따위를 떠들면서 먹었다.
그러니 방금 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이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놀라움이었다. 쉽게 말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럴 정도로 상대방에 몰입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현재의 아내다.
음식을 먹고 식사를 경험하는 과정에는 많은 요소가 개입하고 영향을 준다. 음식을 맛보는 기관은 물론 입과 혀다. 혀와 입 안쪽 벽, 인두, 후두개에는 맛을 감지하는 미뢰(taste bud)가 1만여개 존재한다. 작은 돌기 모양인 미뢰에는 미각 세포 50~150개가 모여 있다. 음식을 입에 넣고 씹으면 음식과 침이 섞이면서 즙이 나와 음식에 든 화학물질이 미뢰에 감지되기 쉬운 상태가 된다.
미뢰는 맛을 감지할 뿐이다. 맛을 인지하는 기관은 뇌다. 미뢰에서 맛을 감지해 뉴런으로 화학 신호를 보내면 신경 반응이 일어나 두뇌가 정보를 받아들여 맛을 인지한다. 인간은 입이 아니라 뇌로 음식을 먹는 셈이다.
두뇌가 음식을 '먹을' 때는 단순히 미뢰가 보내준 정보에만 의지해 판단하지 않는다. 음식 사학자인 마시모 몬타나리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교수는 "뇌는 대를 이어 전수된 가치 기준을 따르는 문화적으로 결정된 기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특정 음식을 맛있다 또는 맛없다고 느끼는 건 음식의 맛 그 자체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환경과 문화와 경험에 영향받는다는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음식의 맛을 결정짓는 요인으로는 분위기와 서비스도 있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레스토랑 가이드 미슐랭(Michelin) 최고 등급인 별 3(★★★)을 받으려면 음식이 완벽한 건 물론이고 음식을 내는 종업원의 서비스도 탁월해야 한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요리사 미셸 루(Roux)는 "형편없는 음식 맛에 너그러운 손님도 형편없는 서비스는 용서 못 한다"고 말했다. 식당에서의 한 끼라는 총체적 경험에 미치는 영향은 어쩌면 서비스가 음식 맛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어떤 분위기 즉 상황에서 음식을 먹느냐도 맛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이 생각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안도 의주로 몽진(피란)했다. 전쟁 중에도 한 백성이 생선을 임금에게 올렸다. 배고팠던 선조는 그 생선이 매우 맛있었나 보다. 왕이 "이 생선이 무엇이냐" 묻자 백성은 "묵"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을 고작 묵이라 부르다니, 당치 않다. 앞으로 은어(銀魚)라 부르라."
전쟁이 끝나고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피란 중 맛본 은어가 자꾸 생각났다. 은어를 진상케 해 먹었다. 맛이 없었다. 선조는 "은어라는 이름을 취소하고 예전대로 도로 묵이라고 하라"고 명령했다. 도루묵이란 생선 이름의 유래로 알려진 일화다.
무엇보다 맛을 판단하는 가장 큰 잣대는 추억이 아닐까. 외식업자들은 한식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 한식은 전 국민 5000만명이 모두 전문가다. 이 '전문가'들의 평가 기준은 추억이다. "우리 엄마가 만들어주던 음식은 이런 맛이 아니다"란 거다. 문제는 엄마마다 손맛이 다르고, 솔직히 요리 솜씨가 영 별로인 엄마도 있다. 하지만 자식은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에 길들여진다.
엄마 손맛을 기준으로 불평하면 요리사는 난감하다. 외국 음식에는 이런 추억이 없다. 그래서 웬만큼 만들어도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단다.
올 크리스마스에 그때 그 프랑스 음식점에 다시 찾아가면 어떤 맛일까. 아내와의 첫 크리스마스 추억이 떠올라 뭘 먹어도 맛있을까. 아니면 천방지축 날뛰는 어린 두 아들이 사고 치지 못하게 뒤쫓아 다니느라 혼이 빠져 또다시 뭘 먹었는지도 모른 채 식당을 나오게 될까. 아쉽게도 그 식당은 얼마 전 폐업했다. 많은 이들의 소중한 추억을 위해서라도 식당들이 문 닫지 말고 오래 유지됐으면 한다. 물론 유쾌하지 않은 추억을 남기는 맛없고 서비스 나쁜 식당은 제외다.
2016.01.21 내 식당에서 고기 메뉴 다 빼!" 파리 스타 셰프의 실험
알랭 뒤카스(Alain Ducasse)가 혁신적인 아니 혁명적인 실험을 시작했다. 뒤카스는 '미식의 나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요리사다. 프랑스와 미국, 일본, 카타르 등 일곱 나라에 레스토랑 24개를 거느린 '외식 제국(帝國)'을 지배한다. 부유세(wealth tax)를 피하기 위해 2008년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고 모나코 국적을 취득했다.
뒤카스가 이 음식점들을 통해 레스토랑 가이드 미슐랭에서 획득한 별(스타)을 모두 더하면 무려 21개. 이 많은 레스토랑 중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꼽으라면 역시 파리 최고급 호텔 플라자 아테네(Plaza Athenee)에 있는 '알랭 뒤카스 오 플라자 아테네(au Plaza Athenee·3스타)'일 듯하다.
뒤카스는 호텔 리노베이션에 맞춰 수개월간 문 닫았던 이 레스토랑을 최근 다시 열면서 육류와 가금류 그러니까 소·돼지·양 따위 고기와 닭·오리·비둘기 등 조류를 메뉴에서 완전히 빼버렸다. 그는 "생선-채소-곡물 3부작(trilogy)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한 음식을 선보이겠다"면서 이 새로운 시도를 "자연스러운 요리(Naturalness cuisine)"라고 명명했다.
세계 어떤 나라나 문화건 고기는 식문화의 최상위층을 차지한다. 서양·유럽 문화권에서는 특히 그렇다. 14세기 프랑스 왕실 전속 셰프 기욤 티렐(Tirel)이 쓴 '타유방(Taillevent)의 요리서'가 있다. 기욤은 타유방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그가 쓴 요리책의 원제목은 '비앙디에(Le Viandier)'이다. 프랑스어로 고기를 뜻하는 비앙드(viande)에서 유래했다고 추측된다. 17세기까지 비앙드는 고기뿐 아니라 음식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였다. 한국에서 밥이 식사 전체를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고기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양 식문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책 '신화학'에서 '스테이크는(…) 프랑스인의 정열이다.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인에게 스테이크는 전혀 어색함이 없는 음식이다. 외국에서 고생할 때 프랑스인은 스테이크에 대한 진한 향수를 느낀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니 프랑스를 대표하는 요리사가 자신의 대표 식당 메뉴에서 고기를 삭제해버렸다는 건 미식계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뒤카스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는 두 가지 야심 어린 목표를 제시했다. 첫째, 오트 퀴진(haute cuisine)을 재해석해 업데이트할 때가 됐다는 거다. 오트 퀴진이란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고급 요리를 말한다. 고기로 대표되는 값비싼 식재료에 가려 조연 역할만 맡아온 채소와 곡물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리고 저렴한 재료로도 얼마나 섬세한 오트 퀴진을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생선도 참치나 연어 같은 비싼 생선 대신, 꽁치나 정어리처럼 고급 음식점에서 외면해 온 값싼 생선을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둘째, 갈수록 심각해지는 건강·환경 문제에 대해 셰프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뒤카스는 음식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요리사다. 그는 "자연과 더 조화롭고 건강하며 환경 친화적인 식문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고기를 중심으로 한 육류 생산을 늘리기 위해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열대우림이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되고, 이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미국·호주 목장 지대가 급속히 사막화되는 주원인으로 꼽힌다.
곡물 생산은 늘었지만, 가축이 먹어 치워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다. 반면 부유한 나라에서는 육류 과잉 섭취로 심장 발작, 암, 당뇨 등 '풍요의 질병'이 급증했다. '육식의 종말'을 쓴 제러미 리프킨은 '날로 증가하는 소와 소고기 소비 문제가 미래 지구와 인류 행복에 가장 큰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뒤카스가 세계 외식업계에 가진 영향력은 매우 크다. 그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동참할 요리사가 많을 듯하다. 하지만 일반 대중의 식습관에도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수십 수백 년 이어져 온 식생활이 뒤집힐 수 있을까. 역사를 되돌아보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인도는 누구나 다 아는 채식주의 국가다.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 계급인 브라만은 특히나 철저한 채식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원래 브라만은 소를 희생(犧牲)해 신에게 바치고 대중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맡았던 사제로, 그들 자신도 육식을 매우 즐겼다.
고대 인도 인구가 급증하고 자연이 황폐화하면서 농사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소 즉 농가당 밭을 갈 황소 두 마리와, 새끼를 낳고 우유를 제공할 암소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키울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브라만과 지배 계급은 여전히 많은 소고기를 먹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층이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브라만과 지배층은 동물 희생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뒤집는다. 소 도살을 금지하는 건 물론이고 소를 신성화했다. 브라만처럼 완벽한 채식주의자로 거듭날 필요야 없겠지만, 인류의 미래가 위협당하지 않으려면 육식 위주 식단의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2016.02.10 명절 마지막 날… 남편이 아내 대신 밥하는 날
요리 초보도 쉽게 만들 수 있다, 명절에 지친 아내 위한 요리
긴 설 연휴도 마지막 날이다.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파김치 됐을 아내를 위해 연휴 마지막 날만이라도 밥상을 차려주는 건 어떨까.
떡국, 나물 근처에도 가기 싫다는 아내를 위해 요리 젬병 남편도 따라 할 수 있는 요리를 전문가들에게 추천받았다. 샐러드는 명절 음식으로 느끼해진 속을 달래주면서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다. 요리연구가 박현신씨는 '스페인식 오렌지 샐러드'를 추천했다. 오렌지 껍질을 벗겨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뒤 굵게 다진 피스타치오와 소금 약간, 넉넉한 향의 올리브 오일을 뿌려주면 끝! 박씨가 세계 최대 올리브 산지인 스페인 하엔(Jaen) 지방에 갔을 때 배운 샐러드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즐기는 멋진 브런치 중에서도 도전할 만한 게 있다. 요리연구가 지은경씨는 브런치 카페 메뉴에 자주 등장하는 이탈리아 오믈렛 '프리타타(frittata)'를 만들어 보라고 했다. 토마토, 피망, 양파, 컬리플라워, 소시지 등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두꺼운 프라이팬을 달궈 기름을 두르고 중간 불에 볶다가 달걀 물을 붓고 약한 불에서 뚜껑을 덮은 채 8~10분 익히기만 하면 된다. 일반 오믈렛보다 훨씬 쉽다. 채소나 고기는 재료에 구애받지 말고 냉장고를 열어서 뭐든 있는 걸로 하면 된다. 요리하면서 냉장고 청소도 할 수 있으니 아내에게 더욱 사랑받을 요리다.
▲태국 대표 음식 ‘팟타이’를 쌀국수 대신 라면으로 대체한 ‘라면 팟타이’. 구하기 쉽고 익숙한 재료인 라면을 이용해 요리 초보인 남편이 도전하기에도 부담이 덜하다. /수퍼레시피 제공
매콤 새콤 달콤한 태국 음식은 여성들이 특히 좋아한다. 요리 잡지 '수퍼레시피' 박성주 편집장은 태국 대표 요리인 '팟타이'를 응용한 '라면 팟타이'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라면을 끓는 물에 1분 30초 삶아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뺀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냉동 새우를 볶는다. 라면 수프·멸치액젓(또는 까나리액젓)·물·후춧가루를 섞어 만든 소스를 뿌리고 2분쯤 젓가락으로 고루 섞어가며 볶으면 완성. 레몬즙과 다진 땅콩을 뿌려주면 금상첨화다. "농심 너구리처럼 면발이 통통한 라면을 사용해야 더 맛있다"고 한다.
남기선 풀무원 식문화연구원 식생활연구실 실장은 "명절 두둑해진 뱃살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GL(Glycemic Load) 지수가 낮은 식품을 먹어야 한다"며 '땡초비빔밥'을 추천했다. GL이란 '식품 섭취 후 혈당 변화량'을 말한다. GL 지수가 높을수록 식품에 함유된 탄수화물이 빠르게, 낮을수록 천천히 소화·흡수된다. 당류·전분·백미·밀가루 등 정제된 탄수화물보다 현미·통밀·보리 등 통곡식으로 된 양질의 탄수화물이 GL 지수가 낮다. 여기에 콩·생선·달걀·살코기 등으로 포화지방이 적은 단백질을 충분히 공급하고, 채소를 많이 섭취하고, 견과류나 식물성 유지로 필수지방산과 불포화지방을 보충하면 좋다.
땡초비빔밥은 현미에 숙주를 넣고 지은 밥에 청양고추 절임과 다진 소고기 볶음을 비벼 먹는다. 칼칼하니 개운하면서도 GL 지수(GL 9·흰 쌀밥 1공기는 약 55GL)와 열량(423㎉)은 매우 낮다. 설 연휴 직접 만들어봤다. "이거 먹으면 뱃살 빠진대." 아내에게 한마디 건네는 여유도 잊지 마시길.
▲/샐러드다 제공
■ 스페인식 오렌지 샐러드
오렌지 3개를 껍질 벗겨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피스타치오 1줌을 굵게 다진다. 그릇에 오렌지를 담고 피스타치오를 뿌린다. 약간의 소금으로 간한 다음 올리브오일을 넉넉히 뿌려 낸다.
▲/샌드위치가 필요한 모든 순간 나만의 브런치가 완성되는 순간 제공
■ 프리타타
달걀 3개에 소금을 약간 넣고 잘 푼다. 방울토마토 3개는 반으로 썰고, 피망 1/5개·양파 1/7개는 가늘게, 컬리플라워 1/8송이는 한입 크기로, 소시지는 길게 어슷 썬다. 프라이팬을 달궈 식용유를 두르고 중간 불에서 준비한 채소와 소시지를 볶다가 달걀물을 붓고 약한 불에서 8~10분 익힌다. 파르마산 치즈를 뿌리면 더 맛있다.
▲/뱃살 잡는 Low GL 다이어트 요리책 제공
■ 땡초비빔밥
숙주밥: 내열용기에 현미밥 60g·숙주 2줌·소금 약간을 넣고 고루 섞는다. 뚜껑을 덮어 전자레인지에서 3분 익힌다.
다진 소고기 100g에 청주 2작은술·간장 2작은술·매실청 1작은술을 넣고 버무려 10분 재웠다가 프라이팬에서 중간 불에서 2분 볶는다. 프라이팬을 달궈 식용유를 두른다. 다진 양파 1/4개를 중간 불에서 1분 볶는다. 청양고추 1개·오이 1/4개·식초 2작은술·올리고당 1작은술·소금 약간을 잘 섞어서 프라이팬에 더해 섞는다. 그릇에 숙주밥을 담고 소고기, 청양고추 절임을 올린다. 으깬 통깨 1작은술을 뿌리고 참기름 1작은술을 곁들여 낸다.
■ 라면 팟타이
라면수프 1작은술·멸치액젓 2작은술·물 1/2컵·후춧가루 약간을 잘 섞어 양념을 만든다. 라면을 센 불에서 1분30초 삶는다. 프라이팬을 달궈 식용유를 두르고 채 썬 양파 1개·피망 1/2개를 중간 불에서 2분, 냉동 새우살과 청주 1큰술을 넣고 센 불에서 1분 볶는다. 삶은 라면과 숙주 3줌, 양념을 넣고 섞어가며 2분 볶는다. 불을 끄고 레몬즙·다진 땅콩을 넣고 섞는다.
2016.03.26 "파일럿은 포기, 한때 폭주족… 요리사가 天職"
- 방한한 일본 스타 셰프 사사키
미식가들 몰리는 '미쉐린 2스타'… 1년 전 예약해야 할 만큼 인기
"佛 진출해 제대로 평가받고 싶어"
일본 교토에 있는 '기온 사사키'는 손님 입장에서 불편하고 불쾌한 식당일 수 있다. 휴대전화는 사용 금지다. 식사는 점심은 정오, 저녁은 오후 6시 30분에 모든 손님이 함께 시작한다. 30분까지는 늦어도 봐주지만 이를 넘기면 못 먹는다.
그런데도 '교토에서 예약하기 가장 힘든 식당'이다. 원하는 날짜에 식사하려면 1년 전에는 예약해야 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교토에 많은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이 있지만) 미식가들이 가장 몰리는 건 2스타인 기온 사사키"라고 소개했다.
▲사사키 히로시가 서울 조선호텔 일식당 스시조에서 자신의 생선회 요리를 보여줬다. 그는 생선회를 색다르게 즐길 수 있도록 간장을 찍어 먹는 대신 붓으로 발라 먹도록 내놨다. /고운호 객원기자
서울 조선호텔에서 24~25일 자신의 음식을 선보이기 위해 방한한 기온 사사키 오너셰프 사사키 히로시(佐 木浩·55)는 "저도 참 괴롭고 죄송하다"고 했다. "매년 11월 20일부터 열흘 동안 이듬해 예약을 잡습니다. 단골들로 전체 34석 중 70%를 채운 다음 나머지 30%는 전화·팩스·이메일을 통해 들어온 예약을 배정합니다. 그런데 하루에 전화만 100통씩 옵니다." 그가 밝힌 요리 철학은 '맛있고 즐겁게(delicious and fun)'다. 여기서 즐거움은 '손님이 예상 못 한 재미'이다. "우리 식사는 9코스로 구성되는데, 이 중 하나는 두고두고 손님이 기억할 정도로 인상적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한다. 그는 미코시(神輿)를 본떠 만든 그릇에 장어 요리를 담아 낸다. 미코시는 일본 마쓰리(축제)나 제례(祭禮) 때 신체(神體)나 신위(神位)를 모시는 가마다. 식당 한복판에는 피자 오븐이 설치돼 있다. 갑포 가이세키로는 이례적이다. 갑포 가이세키는 초밥집처럼 카운터(갑포)에서 가이세키(전통 일본식 코스 요리)를 내는 식당을 말한다. "피자 오븐은 일본식 화덕보다 식재료를 더 빨리 구워낼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합니다. 맛이 훨씬 좋고 영양 손실도 적지요."
식사를 동시에 시작하는 건 요리사나 접객원들도 즐거워야 맛있는 음식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업원이 행복해야 손님도 행복합니다. 손님이 늦게 오면 식사가 늦어지고 길어집니다. 그러면 종업원들은 즐겁지 않지요. 음식은 손님과 요리사·직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합니다. 의사소통이 얼마나 잘 되느냐에 따라 음식 만족도는 훨씬 올라갑니다."
사사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여덟 살에 요리사의 길로 들어섰다. 이르면 중학교 때부터 요리를 배우는 일본에선 늦은 나이다. "비행기 파일럿이 되고 싶었지만 머리가 나빠서 포기했어요.(웃음) 고등학생 때 폭주족과 어울려 다니며 오토바이를 탔어요. 이 친구들한테 밥을 해줬더니 맛있다는 거예요. 부모님도 그렇고 친척 중에도 요리하는 분들이 많아 어릴 때부터 간단한 요리는 해봤죠. '나 같은 사람도 남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구나' 기뻤어요."
프랑스 파리에 가게를 내는 꿈을 가지고 있다. "미쉐린으로부터 별 2개를 받았는데, 프로레슬링에 빗대면 일본은 홈그라운드니까 '일본 선수'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프랑스 선수'와 동등한 링에서 붙어보고 싶어요."
2016.04.07 미쉐린 스타 꿈꾸는 요리사에게
한식을 취재하러 서울에 온 오스트리아 일간지 음식 기자를 한 식당에 데려갔다. 식당 측 대접이 융숭했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 발간 기자회견장에서 관계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한국인이 외국인과 동행하면 눈여겨 보세요. 그 외국인, 미쉐린 인스펙터(inspector·평가원)일지도 몰라요."
소문만 떠돌던 '미쉐린 가이드(Michelin Guide)' 서울편 발간이 확정됐다. 미쉐린코리아는 지난달 기자회견을 열고 미쉐린 가이드 2017년 서울편이 올해 말 발간될 계획이며, 가이드에 실릴 식당들을 검증할 전문 평가원들이 서울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미쉐린 가이드는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슐랭이 116년 전 처음 내놓은 레스토랑 평가·안내서. '미식가의 성서(聖書)'로 불릴 정도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다. 한국은 전 세계 27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홍콩&마카오·싱가포르(2016년 하반기 발간 예정)에 이어 4번째 미쉐린 가이드 발간 국가가 된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미슐랭' 가이드라고 불렀지만, 미쉐린코리아 측은 프랑스어가 아닌, 그렇다고 정확하게 영어식 발음도 아닌 미쉐린으로 표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미쉐린 가이드는 식당의 음식을 별점(★)으로 평가한다. 최고 등급인 별 3개는 '맛보러 일부러 찾아갈 만한 식당'을, 2개는 '멀리 찾아갈 만한 식당', 1개는 '음식이 훌륭한 식당'을 뜻한다. 별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합리적인 가격으로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은 '빕 그루망(Bib Gourmand)'이라고 해서 미쉐린 타이어의 마스코트인 비벤덤(Bibendum) 픽토그램이 붙는다.
미쉐린으로부터 별을 받는다는 건 요리사에게 커다란 영광이다.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을 수 있다. 반대로 그동안 유명 요리사로 알려졌지만 별을 받지 못한다면 치욕일 수 있다. 경제적 효과도 대단하다. 별을 받은 식당의 매출이 급상승하는 것은 물론 한국 외식산업이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과장은 아니다.
▲/이철원 기자
미쉐린 서울편 발간이 확정되면서 미쉐린으로부터 별을 받을 만하다고 자평하는 식당의 요리사들은 한껏 흥분한 동시에 긴장한 상태이다. 서울 청담동의 한 프랑스 레스토랑 오너셰프(주인 겸 총주방장)는 4000만원을 투자해 식기와 테이블 장식을 교체하고 인테리어를 다시 했다고 알려졌다.
지난달 기자회견장에서 심사 기준을 들어보니, 별만 받기 위해서라면 이 오너셰프는 쓸데없는 투자를 한 듯하다. 미쉐린그룹 베르나르 델마스 부사장은 "서비스나 분위기는 별점 평가 항목이 아니다"면서 "분위기나 서비스는 숟가락과 포크가 X자로 겹쳐진 모양의 픽토그램 1~5개로 표시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일본 도쿄에서는 건물 지하상가에 있으며 공용 화장실을 써야 하는 초밥집 '지로'에 별 셋을 주었으며, 홍콩에서는 맛은 뛰어나지만 인테리어·기물이 분식집 수준인 딤섬집 '팀호완'에 별 하나를 줌으로써 놀라움과 함께 유럽 요리사들의 공분을 샀다.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은 최근 자리를 옮기면서 새로운 메뉴를 내놨는데, 된장·간장 등 한국 토종 식재료를 예전보다 더 폭넓게 요리에 활용한 게 눈에 띄었다. "한식이 별을 받기에 유리하다"는 말이 돌던데, 그래서 그런 것인가 싶었다. 지방에 있는 식당이 서울로 이전하거나 분점을 검토하는 움직임도 있다. 미쉐린의 평가 대상이 '서울 내 음식점'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음식 맛이 아무리 훌륭해도 지방에 있으면 별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급 호텔과 대기업 소속 외식업체들도 미쉐린 스타를 따려고 애쓴다. 미쉐린 평가원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평가원은 신분을 밝히지 않으며, 평가는 비밀리에 이뤄지는 게 원칙이다. 한 호텔 홍보 담당자는 "호텔 대표로부터 미쉐린 가이드에 호텔 내 식당이 하나라도 들어가지 못하면 책임을 묻겠다는 말을 들었다"며 "별점을 받는 비결이 뭐냐"고 필자에게 묻기도 했다.
딱히 비결은 없지만 참고할 만한 영화가 있다. 3스타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셰프의 도전을 다룬 '더 셰프'에는 지배인이 스태프들에게 미쉐린 암행 평가원 색출 노하우를 전수하는 장면이 있다. "중년 남성 둘이 오는 팀은 일단 의심해라. 한 명이 미리 와서 바에서 음료를 마시고 다른 남성을 기다리며 식당 내부를 훑어보면 주의해라. 하나는 코스 요리를, 하나는 단품 요리를 주문하면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포크를 바닥에 살짝 내려놓는다면 당장 셰프와 지배인에게 경고하라. 서비스 수준을 보기 위한 시험이다. 평가원일 가능성 100%다."
서울에선 '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오면 서비스 잘해라'가 추가돼야 할까. 당분간 좋은 식당 갈 땐 외국 친구를 데려가야겠다.
2016.05.12 인공지능은 요리를 프린트한다, 맛있게…
세계 최강 바둑 고수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에 완패한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특히 어린 자식을 둔 부모들에게 인공지능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알파고(高)가 대체 어디 있는 고등학교냐"며 엄마들이 수소문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 지금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면 현존하는 직업의 65%가 없어지고 변호사·의사·회계사도 인공지능에 밀려 사라진다니, 대체 우리 아이한테 뭘 가르쳐야 할지 걱정 또 걱정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정교한 감각과 손맛, 창의성을 요구하는 요리는 인간의 몫으로 온전히 남으리라 믿는 이가 많다. 하지만 요리사도 인공지능의 도전으로부터 안전한 직업은 아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요리를 시작했다. 인공지능 요리사의 이름은 '셰프 왓슨(Chef Watson)'. 왓슨은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수퍼컴퓨터다. 구글 알파고처럼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지녔다. 입력받은 수많은 데이터에서 공통점이나 규칙을 찾아내고 이를 스스로 분류해 학습하는 딥러닝(Deep-Learning)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기 한참 전인 2011년 미국 퀴즈쇼 제퍼디(Jeopardy)에서 인간 챔피언을 꺾고 우승했다.
셰프 왓슨은 수많은 레시피를 검색해 새로운 요리를 개발해낸다. 미국과 일본에는 셰프 왓슨이 만들어낸 레시피대로 조리한 음식을 내놓는 식당도 있다. IBM은 셰프 왓슨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애플리케이션(앱·ibmchefwatson.com)으로 내놨다. 셰프 왓슨이 어떻게 요리하나 궁금해 찾아들어가봤다. 주재료를 선택하면 빅데이터를 분석해 주재료에 최적화된, 그러니까 가장 어울리는 부재료와 양념 3가지를 찾아준다. 시험 삼아 소고기(beef)를 입력했더니 올리브, 땅콩, 서양 부추인 차이브(chive)가 어울린다고 추천했다. 부재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재료 옆 X를 클릭하면 다른 식재료를 추천해준다.
화면 한가운데 있는 파란색 동그라미를 클릭하니 어떤 근거·논리로 이런 조합을 셰프 왓슨이 추천했는지 설명이 떴다. 셰프 왓슨은 어떤 음식과 식재료들이 서로 어울리는지 향(香)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이철원 기자
인간이 인지하는 맛은 정확하게는 혀로 감지하는 맛(taste)과 코로 맡는 풍미(flavor)로 양분된다. 맛은 단맛·신맛·짠맛·쓴맛·우마미(감칠맛) 다섯 가지뿐이지만, 향은 수백수천 가지이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맛은 대부분 향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어울리는 향끼리 궁합을 맞춰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얼마 전 인터뷰했던 벨기에 과학자도 "맛의 80%는 실제로는 향"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셰프 왓슨이 제안하는 재료들을 조합해 새로운 요리를 만드는 데 참고할 수 있다. 직접 만들기 귀찮거나 그럴 능력이 안 되면 이 재료들을 활용해 만든 추천 요리가 주르륵 뜬다. 미국 음식 전문지 보나페티(Bon Appetit)가 셰프 왓슨에게 제공하는 방대한 레시피 컬렉션에서 뽑아내거나 약간 수정한 요리들이다. 소고기의 경우에는 소고기를 살짝 구워 올리브·땅콩·차이브를 넣은 샐러드 등 네댓 가지 추천 요리를 소개했다.
셰프 왓슨은 아직 로봇팔을 휘두르며 요리를 한다거나 하는 단계는 아니어서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직접 요리하는 날도 멀지 않았다. 음식과 과학기술이 결합한 '푸드테크'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3D 푸드 프린터에 셰프 왓슨을 연결하면 지금이라도 음식을 만들어낼 태세다. 3D 푸드 프린터는 글을 종이에 인쇄하듯 음식을 찍어내는 첨단 기기다. 미국 3D시스템스는 설탕을 매우 정교한 모양의 사탕으로 만들어내는 '셰프젯(Chefjet)'이란 프린터를 개발해 판매 중이다. 국내에는 로킷이란 기업이 출시한 '초코스케치'가 있다. 프린터와 함께 밀크·다크·화이트 세 가지 맛의 초콜릿 카트리지가 제공되는데, 카트리지 교체가 자유로워 여러 맛이 혼합된 초콜릿도 '출력'할 수 있다. 초콜릿을 오래 공부한 쇼콜라티에(초콜릿 전문가)가 아니어도 내가 원하는 맛과 형태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초콜릿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다.
새롭고 낯선 음식이나 기술에 대한 두려움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먼 옛날 돌멩이처럼 시꺼멓고 딱딱한 껍데기 안에 들어 있는 굴을 맛보는 데 도전한 조상이 없었다면, 그 황홀하게 상쾌하고 찝찔하고 달착지근한 굴 맛을 우리는 모르고 살았을지 모른다. 감자가 처음 소개됐을 때 유럽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은 음식이어서 두려워하며 먹으려 하지 않았다. 독일 프리드리히 왕이나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가 감자를 두려워하는 농민들에게 강제로 심게 했을 정도다. 하지만 감자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기근을 견뎌내고 생존할 수 있었다. 인공지능도 이용하기에 따라 새로운 맛의 세계로 인류를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2016.08.04. 1100만원에 낙찰된 어느 레스토랑의 낡은 재떨이
뉴욕의 한 식당이 오랫동안 영업해온 자리를 떠나게 됐다. 식당 주인은 식탁 의자 소파 심지어 재떨이까지 식당에서 쓰던 물건들을 경매 부치기로 했다. 지난주 열린 '중고 식당 기물(器物) 경매'는 놀랍게도 410만달러(45억5000만원)나 벌어들였다.
물론 평범한 식당은 아니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포시즌스(The Four Seasons) 레스토랑이다. 힘깨나 쓴다는 명사들이 1959년 문 연 이 식당 단골이다. 빌·힐러리 클린턴 부부와 조지 부시 부자, 헨리 키신저, 오프라 윈프리, 워런 버핏,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랠프 로런, 마사 스튜어트, 바버라 월터스, 엘튼 존, 안나 윈투어 등이 식사했다. 이곳에 드나든다는 건 자기 분야에서 정상에 올랐고, 가장 좋은 테이블에 앉는 건 '최고 중 최고'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뉴욕의 랜드마크이기에 57년 동안 세들어 있던 시그램 빌딩을 떠나리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상도 못 할 일이 현실이 됐다. 2000년 시그램을 사들인 부동산 개발업자 애비 로젠(Rozen)이 "포시즌스는 과거의 유물"이라며 임대계약 연장을 거부했다.
포시즌스의 공동 소유주인 줄리안 니콜리니(Niccolini)와 알렉스 폰 비더(Von Bidder)는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 1년 뒤 식당을 다시 열기로 결정했다. 지난달 16일 저녁 서비스를 끝으로 영업을 잠정 중단했다. 식당 기물 일부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경매에 부쳤다.
지난달 26일 열린 경매를 앞두고 경매회사는 133만달러(약 15억원)를 벌어들일 거라고 내다봤다. 결과는 예상가의 4배 가까운 410만달러(46억원)였다. 가장 비싸게 팔린 건 역시 상호(商號)가 새겨진 명판(名板)이었다. 당초 5000~7000달러가 예상됐지만 약 20배 더 높은 9만6000달러(1억7000만원)에 낙찰됐다. 바에 놓여 있던 스툴(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높은 의자) 1세트(2개)는 1만3000~1만8000달러(1400만~2000만원)에, 라운지에 놓여 있던 의자 1쌍은 3250~5500달러(360만~610만원)에 낙찰됐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포시즌스의 테이블이나 의자, 스툴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건축가·예술가들이 디자인한 '작품'들이다. 그만한 가격에 낙찰된다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수십 년 사용한 재떨이나 여기저기 흠집 난 설탕 그릇까지 높은 가격에 경매가 이뤄졌다. 포시즌스 로고가 새겨진 낡은 재떨이는 4개 1세트가 5500~1만달러(610만~1100만원)에 팔렸다. 예상가(500~700달러)보다 대략 20배나 더 비싼 금액으로, 스툴 세트와 비슷하다. 커피를 주문하면 딸려 나가는 설탕과 크림을 담아 내던 은(銀)그릇 세트도 예상액의 5배인 1400~3000달러(160만~3300만원)에 경매됐다.
세계적 광고회사 사치앤사치 CEO 케빈 로버츠(Roberts)는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브랜드를 '러브마크(lovemark)'라고 명명했다. 이 브랜드들의 가장 큰 특징은 소비자와 감성적으로 연결됐다는 점이다. 합리를 뛰어넘은 열렬한 지지와 애정, 존경이 러브마크의 특징이라고 했다. 포시즌스는 외식업계의 '러브마크'였고, 그렇기에 단골들은 낡은 재떨이까지도 큰돈을 거리낌 없이 지불하며 소유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포시즌스는 손님들과 애착 관계 형성 능력이 탁월했다. 한 단골은 포시즌스와 얽힌 자신의 추억을 뉴욕타임스에 털어놨다. 그는 포시즌스를 찾은 20여년 전 어느 날 주인이자 지배인인 니콜리니에게 "내일부터 4주 동안 해외출장 간다"고 말했다. 그러자 니콜리니는 "그럼 한 달이나 (포시즌스를 오지 못하니) 맛있는 음식을 못 먹겠군요"라고 농담을 했다. 다음 날 공항으로 떠나기 15분 전, 포시즌스에서 보낸 퀵서비스 배달원이 애피타이저·메인·디저트가 2인분씩 담긴 터퍼웨어 플라스틱 용기와 와인 2병을 들고 왔다. 이 단골은 이코노미칸 끝 좌석에 앉아 포시즌스 음식을 먹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포시즌스 단골 중에는 이런 추억을 가진 이가 무수히 많다.
유명 인사들이 포시즌스를 찾는 이유를 니콜리니는 "연속성"이라고 답했다. 식당의 연속성에는 음식과 서비스뿐 아니라 위치·인테리어·테이블·의자·포크·나이프·재떨이까지 포함된다. 이 연속성이 57년 만에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다. 인터뷰에서 니콜리니는 "포시즌스는 끊임없이 혁신하고 있다"고도 했다. 2000년대 초 닷컴 열풍 때는 수트·넥타이 드레스코드를 없앴고, 2008년 금융 위기 이후로는 값비싼 식재료 대신 맛은 좋지만 비싸지 않은 것으로 대체해 음식값을 낮췄다. 새로운 장소에서 문 여는 포시즌스가 연속성을 잃고 몰락할지, 혁신을 통해 재도약할지 궁금하다.
2016.10.05 선인장까지 김치로 담가먹는 한민족의 본능
['김치 디아스포라' 세미나]
세계로 흩어진 한민족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음식 김치를 어떻게 만들어 먹고 있을까. 거주 국가 환경에 따라 김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오는 13~14일 세계김치연구소 주최로 열리는 '김치학 심포지엄'에서 '김치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 세미나가 열린다. 중앙아시아, 중국, 중남미 동포들이 어떻게 김치를 소비하고 있으며 이들의 정체성과 김치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현지에서 연구를 진행한 전문가들이 발표한다.
▲중국 옌볜에서 김치를 저장하는 움. /세계김치연구소
동포들의 김치 소비 형태 연구
중앙亞는 후추, 中은 고수 넣어
"이민자, 차별성 갖고 김치 계승"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밥·국·김치라는 민족적 전통은 보존하면서도 현지인이 즐겨 먹는 상채(향채·고수) 가루나 후추를 김치 양념으로 사용하는 등 선택적 문화 접변 현상이 나타났다. 백태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인문대 교수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대표적 민속 음식인 '짐치'는 김치와 뿌리가 같지만, 김치와는 다른 차별성과 정체성을 지닌 채 계승·진화돼 왔다"고 말했다. 짐치는 한국 고추와 달리 단맛이 없고 맵기만 한 현지 고추, 한국 천일염과 달리 짠맛과 쓴맛이 강한 암염(巖鹽)을 사용한다. 구하기 힘든 젓갈은 넣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쓴다. 그래서 짐치는 한국 김치보다 더 짜고 신맛이 강하며 단맛과 깊은 맛은 적다.
백 교수는 "한국에 호감이 큰 신세대 고려인들은 김치는 김치대로, 짐치는 짐치대로 맛있다고 말한다"며 "어느 것이 더 낫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음식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짐치를 고려인의 음식이자 정체성의 일부로 여기며 자부심을 느낀다는 해석이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수퍼마켓에서 판매하는 짐치. /세계김치연구소
재미 극작가이자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사' 저자인 이자경씨는 미국과 국경지대에 있는 멕시코 도시 티후아나에서 만난 이민 3세대 막달레나 리 김씨 사례를 발표한다. 막달레나씨는 나박김치, 오이김치, 실란트로(향채·고수)를 넣은 깍두기는 물론이고, 래디시(빨갛고 뿌리가 동그란 무)로도 김치를 담가 먹는다. "밥과 김치만 있으면 뭐가 더 필요한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은 배추나 무 대신 선인장을 활용하거나 양념에 타바스코 소스를 써서라도 김치를 담가 먹는다. 이자경씨는 이런 애착을 "자기 정체성의 빈칸을 채우려는 본능"으로 해석했다.
중국 옌볜의 김치 문화도 현지 영향을 받아 김치 속에 젠치(향채·고수) 씨를 갈아 넣는다. 젓갈은 구하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젓갈을 넣은 김치는 빨리 쉬기 때문에 냉장 시설이 부족하고 저장성을 중시했던 옌볜 동포들이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김치가 단맛, 구수한 맛, 깊은 맛을 중시하는 반면 연변 김치는 쨍한 맛, 톡 쏘는 맛, 아삭아삭한 맛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차이점이다. 최민호 중국 옌볜대 인문사회과학원 교수는 "한국과 교류가 급증하면서 옌볜에서는 한국 김치도 아니고 옌볜 김치도 아닌 정체불명의 김치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2016.10.27 청탁금지법이 '저녁 접대'를 '미팅 런치'로 바꿔놓을까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법(김영란법) 발효 한 달여가 지났다. 외식 업계는 이 법 시행 전부터 대책 마련으로 분주했다. 가장 바빴던 건 아무래도 접대 자리가 많은 한식·일식 쪽이었다.
서울 정동에 있는 한식당 '콩두'는 청탁금지법이 발효된 9월 28일 '928'이라는 새로운 점심 코스 메뉴를 내놨다. 3코스로 구성되며 1인분 2만9800원으로, 이 법이 규정한 식사 접대 상한액 3만원에서 200원 빠진다. 그동안 이 식당이 선보인 코스 메뉴 중 가장 싸다. 마포 '목포낙지'는 민어·참돔·광어 등 제철 생선 3~4가지를 모음회로 내고 탕이 딸려 나오는 '영란세트'를 선보였다. 7만원으로 3~4명이 먹을 만한 양이다. 넷이 먹는다 치면 1인당 1만7500원으로, 술을 곁들이더라도 3만원 이내로 먹을 수 있다. 서울 서초동 일식당 '아카사카'는 10명 이상 사전 예약 주문을 조건으로 2만9000원짜리 메뉴를 판매하기로 했다. 일본 유학파 요리사가 운영하는 이곳은 최고급 풀코스 저녁식사가 1인분에 15만원, 가장 저렴한 정식도 5만5000원이었다.
프랑스·이탈리아 등 서양 음식점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는 분위기다. 점심 4만5000~6만5000원, 저녁 9만8000 ~12만8000원인 서울 청담동 이탈리아 음식점 '리스토란테 에오'는 새 메뉴를 내놓지 않고 기존 메뉴를 그대로 내고 있다. 이 식당 어윤권 오너셰프(주인 겸 주방장)는 "현재 가격도 겨우 손해나지 않는 정도"라며 "어차피 우리 식당은 음식 때문에 오는 손님이 대부분이라 (청탁금지법 시행 후에도) 법 적용 대상이 되지 않는 분들이 이용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올해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에서 15위에 오른 모던한식 레스토랑 '밍글스' 강민구 오너셰프는 "접대 손님이 원래 많지 않다"고 했다.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특급호텔 중에서도 27일부터 타파스(가벼운 안주 거리) 뷔페를 매일 오후 5시 30분~10시 39분 사이에 3만원에 내놓은 그랜드하얏트서울을 제외하면 청탁금지법 관련 새 메뉴를 내놓은 곳이 드물다. 한 호텔 관계자는 "호텔 외식업장은 일반 식당보다 많은 인력을 투입해 인건비 부담이 높아 3만원 이하로 식사비를 맞추기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호텔 관계자는 "여러 대책을 고민하고 있지만 단순히 가격을 낮추는 게 해결책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3만원 이하 '청탁금지법 메뉴'는 대부분 점심용이다. 식당 주인들은 "저녁에 3만원 이하 코스 메뉴를 팔면 이윤은커녕 임대료 내기도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따라 저녁에 주로 이뤄지던 접대가 점심 시간대로 이동하면서 '파워 런치(power lunch)'가 국내에도 정착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식사 접대비가 20~25달러로 엄격한 미국에선 대부분 접대가 점심때 이뤄지는데, 이러한 업무상 미팅 성격을 겸한 점심을 파워 런치라고 한다.
파워 런치라는 말은 1979년 만들어졌다. 작가이면서 1970~1980년대 미국 남성지 '에스콰이어' 편집장을 역임한 리 아이젠버그(Eisenberg)는 힘깨나 쓴다는 이들이 매일 점심 뉴욕 유명 레스토랑 '포시즌스'에 모여 사업 상담을 하고 인맥을 구축하는 광경을 주목했다. 그리고 이를 1979년 에스콰이어에 '미국의 가장 파워풀한 점심(America's Most Powerful Lunch)'이란 제목으로 기고했다.
파워 런치란 표현은 37년 전 만들어졌지만 파워 런치 자체의 역사는 길다. 출발이 18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27년부터 지금까지 영업 중인 '델모니코스'는 지금도 그렇지만 개업 당시에도 뉴욕의 실력자들이 즐겨 찾는 고급 음식점이었다. 파워 런치는 금융·법률·출판·광고·영화·출판업계에 종사하는 파워 엘리트들 사이에서 주로 이뤄졌지만 비즈니스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정보 교환과 네트워킹의 장(場)으로 범위가 확장됐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선 저녁은 가족과 함께하는 문화라 파워 런치가 만들어지고 정착했지만, 한국처럼 접대가 저녁이나 밤에 이뤄졌다면 '파워 디너'가 됐을지 모른다.
한국의 오랜 밤 접대 문화가 낮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청탁금지법 시행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가족을 중시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흐름이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 한우전문점 '한육감' 이준수 대표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점심 세트 메뉴를 내놓은 이후 직장인의 점심 회식 예약이 늘었다"고 했다. 필자도 전에는 부서 회식 때 노래방이 필수 2차 코스였지만, 요즘은 가지 않는 경우가 더 잦다. 문화나 관습은 의외의 계기로 갑자기 바뀔 수 있다.
2016.12.08 미쉐린 서울편 발간 한 달
미쉐린 가이드(약칭 미쉐린) 서울편이 지난 11월 7일 발간됐으니 꼭 한 달이 됐지만 여전히 화제이고 논란이다. 음식에 관심 있다면 잘 알 테지만, 미쉐린은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식당 평가·소개서. 프랑스 타이어회사 미쉐린이 1900년부터 발간해왔다. 국내에서는 그동안 프랑스어 발음인 '미슐랭'으로 알려졌으나, 미쉐린코리아는 영어 발음으로 표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번 미쉐린 가이드에는 서울의 식당 147개가 수록됐고 이 중 24곳의 별점 합이 31개다. 미쉐린 가이드는 식당의 음식을 별(스타)로 평가한다. 최고 등급인 별 3개는 '맛보러 일부러 여행을 떠날 만한 식당', 2개는 '멀리 있어도 찾아갈 만한 식당', 1개는 '음식이 훌륭한 식당'을 뜻한다.
지난 2008년 발간된 일본 도쿄편 150개 레스토랑(별 190개)에는 한참 뒤지나, 지난 9월 발간된 중국 상하이편 레스토랑 26곳(별 35개)과 비슷한 수준이다. 별을 받은 서울의 식당 24곳 중에서는 한식당이 14곳으로 가장 많다. 특히 '가온'과 '라연'이 3스타, '곳간'과 '권숙수'가 2스타, '밍글스' '정식당' '이십사절기'가 1스타를 받는 등 한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내놓은 모던 한식 계열이 10곳으로 강세를 보였다.
선정 결과를 놓고 외식업계에서는 "대체로 별을 받을 만한 데가 받긴 했는데 냉면으로 이름난 '우래옥'이나 곰탕 명가 '하동관', 국내 최고 품질의 소고기를 내는 '벽제갈비' 등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포함시켰을 유명 맛집이 빠졌다"며 "한국 외식업계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평가가 잘못됐다기보다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란 느낌이다.
미쉐린은 출발부터가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였다. 미쉐린이 발간된 1900년대 프랑스는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고 식당이나 숙소 등의 정보가 부족했다. 타이어를 생산하던 미쉐린 창업자들은 도로 여행자들의 어려움을 잘 알았고, 이들을 돕기 위해 여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가 담긴 무료 안내서를 발간한 것이 미쉐린의 출발이다. 물론 사람들이 자동차 여행을 많이 할수록 타이어를 많이 팔 수 있을 거란 계산도 깔렸었을 듯하다.
/이철원 기자
유럽을 여행하는 이들이 출발할 때는 '현지 맛집을 찾아가 전통 음식을 꼭 맛보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에는 맥도날드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낯선 나라·도시에서 익숙지 않은 음식을 주문해 먹기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처음 본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부터 용기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음식이 맛없거나, 이상하거나, 예상과 다를 경우 돈을 날릴 수 있다는 불안도 크다.
고민하던 여행자는 결국 맥도날드에 간다. 맥도날드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어서는 물론 아니다. 아무리 맥도날드라도 전 세계 모든 지점의 음식 맛이 동일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익숙한 음식이다. 또 내가 예상하고 기대하는 범위에서 그렇게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맛이기 때문이다.
미쉐린은 미식의 절대 기준은 아니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레스토랑 가이드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음식에 관심 많은 여행자에게 미쉐린은 맥도날드처럼 신뢰할 만한 기준이 된다. 낯선 서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그래도 미쉐린에 실린 식당이면 괜찮겠지' 안도할 수 있다. 미쉐린의 평가가 절대 오차 없이 엄정해서는 아니다. 1900년부터 100년 넘게 유지해온 역사에서 신뢰를 하는 것이다. 어떤 레스토랑 안내서도 미쉐린만 한 시간의 축적은 하지 못했다.
'외국인이 과연 한식의 맛을 제대로 이해했겠는가'에 대한 의심도 있다. 필자는 이탈리아에서 1년 연수를 했는데 그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외국인은 파스타 맛을 이해 못 한다"고 말한다. 과연 한국인은 파스타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가.
물론 한국의 홍어나, 프랑스의 치즈처럼 오랜 세월 그 문화 속에서 혀가 길들지 않으면 즐기기 힘든 음식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음식은 유난히 강렬한 맛과 향을 가진 일부일 뿐이다. 홍어는 한국인 중에서도 싫어하고 먹지 못하는 이가 상당수다. 블루치즈처럼 향이 너무 강한 치즈를 싫어하는 프랑스 사람도 많다.
최근 한국을 찾은 프랑스의 유명 셰프 야닉 알레노를 만났다. 그는 "음식 맛은 보편적"이라며 "그렇지 않고선 일본인이나 한국인 중에서 뛰어난 프랑스 요리사가 나오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맛있는 음식은 누구에게나 맛있고, 맛없는 음식은 누구에게나 맛없다.
2017.02.09 완벽한 달걀 프라이를 찾아서
싸고 흔해서 고마움 몰랐지만 AI 여파로 비싸진 달걀 귀한 존재감 발휘해
구이·찜·볶음·절임 등 어떤 요리도 가능하지만 최고는 '완벽한 달걀 프라이'
"이번 AI(조류인플루엔자) 덕분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달걀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얼마 전 함께 점심 먹던 여성이 이렇게 말했다. 사상 최악이라는 AI 여파로 달걀 가격이 폭등하다 못해 품귀 사태가 빚어졌었다. 너무나 싸고 흔해서 잊혔던 달걀이 비싸고 귀해지자 그 존재감이 되살아났다는 것이었다. 하긴, 미국에서 비행기로 공수해올 만큼 귀하신 몸 아닌가.
미식(美食)에 관심깨나 있다는 이들은 '맛있어서 비싼 걸까, 아니면 비싸서 맛있는 걸까'를 놓고 싱거운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한다. 이번 달걀 파동을 놓고 보면 비싸고 귀한 음식이 맛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듯하다.
달걀 식용(食用)의 역사는 길다. 닭은 본래 남(南)아시아 정글에 살던 야생의 새다. 서아시아에서 적어도 기원전 7500년부터 인간이 달걀 획득을 주목적으로 닭을 사육하기 시작했고,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기원전 1500년쯤 수메르와 이집트로, 기원전 800년쯤에는 그리스로 건너갔다. 한반도에서도 오래전부터 달걀을 먹어왔다.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 유물함에서 토기에 담긴 달걀 20여 개가 출토됐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달걀은 닭의 알이다. 세상에 식용 가능한 알은 달걀 말고도 많다. 닭이 그리스로 전해진 무렵 이미 메추리 알을 먹고 있었다. 오리 알이나 거위 알은 물론이고 타조, 꿩 심지어 악어 알을 먹었다. 로마에서는 공작 알을, 고대 중국에선 비둘기 알을 먹었다. 갈매기 알은 영국과 노르웨이에서 별미로 쳤다.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는 뿔닭(guineafowl) 알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알 중에서 달걀이 인간의 식탁을 제패한 건 닭의 알 낳기 습관 때문이다. 일부 새들은 연중 특정 기간에만 알을 낳는다. 그리고 한 번 낳으면 더는 낳지 않는다. 하지만 닭을 포함해 어떤 새들은 둥지 속 알이 특정 개수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낳는다. 누군가 달걀을 훔쳐가면 또 낳아서 그 숫자를 채우려 한다. 인간은 닭의 이러한 습관을 알게 되었고, 이를 이용해 단백질(알)을 편리하게 획득하려고 닭을 길들인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달걀은 다양한 요리가 가능하다. 인류 최초의 알 요리는 선사시대 야생에서 채집한 알을 장작불에 구운 알구이일 것이라고 인류고고학자들은 추측한다. 이 밖에도 삶거나 찌거나 데치거나 튀기거나 볶거나 절이는 등 어떤 요리법도 가능하다. 이 중 가장 간단한 요리법을 꼽으라면 달걀프라이 아닐까. 달걀을 깨뜨려 프라이팬에 익히면 끝. 라면보다 쉽다. 그런데 해보면 알지만 달걀 프라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니, 제대로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하여 세계 최고의 요리사들이 '완벽한 달걀 프라이' 만들기에 나섰다. 이들 중 하나가 '현대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설적 셰프 페르낭 푸앙(Fernand Point·1897~1955)이었다.
푸앙이 완벽한 달걀 프라이를 위해 개발한 요리법은 아주 약한 불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버터를 녹인 다음 녹은 버터기름 속에 달걀을 넣고 삶듯이 오랫동안 천천히 익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푸앙이 말한 "흰자는 완벽하게 익었으되 크림에 가깝게 부드럽고, 노른자는 열이 가해져 뜨겁지만 액체 상태를 유지한" 섬세하고 세련된 달걀 프라이가 만들어진다. 그는 이렇게 조리한 달걀 프라이에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리고 따로 녹여놓은 따뜻한 버터를 뿌려서 미쉐린 3스타인 자신의 레스토랑 라 피라미드(La Pyramide)에서 냈다.
미국 유명 요리사 데이비드 로젠가르텐(Rosengarten·67)의 완벽한 달걀 프라이는 푸앙의 그것과 대척점에 있다. 부드러운 식감보다는 풍부한 맛과 씹는 맛을 추구했다. 로젠가르텐의 달걀 프라이는 튀김에 가깝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들이붓고 뜨겁게 달군 다음 달걀을 조심스럽게 깨 넣는다. 그러고는 달궈진 기름을 스푼으로 떠서 달걀 위에 끼얹기를 흰자에 기포가 생기며 거의 갈색이 되도록 부풀어 오를 때까지 반복한다. 흰자는 바삭하면서 노른자는 주르륵 흘러내리는 달걀 프라이가 완성된다. 부산 중국집에선 간짜장을 시키면 가장자리를 태우듯 바삭하게 익힌 달걀 프라이를 올려주는데, 이것이 로젠가르텐의 완벽한 달걀 프라이와 가까울지 모른다.
당신에겐 어느 쪽이 완벽한 달걀 프라이인가. '완벽한 달걀 프라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유명 요리사는 물론 일반 요리 애호가들이 올린 비법이 수없이 많다. 다행히도 모든 비법을 시도해볼 수 있을 만큼 달걀값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
03.16 셰프들이여, 세상을 요리하라
유명하고 영향력 커진 셰프들
접시닦이 직원에게 持分 주고 가난한 아이들 자활 돕기 위해 요리 학교 만들어 운영도
"말은 적게 행동은 더" 외치며 '더 좋은 세상 만들기'에 나서
덴마크 레스토랑 노마(Noma) 주방에서 일하는 알리 손코(Sonko·62)는 지난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접시닦이'가 됐다. 노마는 세계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식당. 요리업계 전문가들이 선정하는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4차례 1위에 올랐고, 식당 평가·안내서 미쉐린가이드로부터 별 2개를 받았다.
마지막 영업일이던 지난달 24일, 이 식당 오너셰프(주방장 겸 주인)인 르네 레드제피(Redzepi)는 깜짝 발표를 했다. 손코를 포함해 식당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직원 3명에게 새로 설립하는 지주회사의 지분 10%를 나눠주기로 한 것. 아프리카 감비아 출신 이민자인 손코는 14년간 노마 주방에서 접시를 닦았다. 새로 설립되는 지주회사는 재개점할 노마를 포함해 여러 외식 관련 사업을 총괄할 곳으로, 회사 규모가 200만달러(약 23억원)쯤 될 것으로 예상된다. 손코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가장 돈 많은 접시닦이도 되는 셈이다.
2년 전 필자와 만났을 때 레드제피는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어떻게 적절히 보상해줄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저는 지금 이대로 만족스러워요. 하지만 직원들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려면 더 많은 봉급을 받아야 해요. 그러려면 노마를 현재의 단일 레스토랑보다 큰 규모의 사업체로 확장해야만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확장해야 직원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 중이에요."
사람들이 점점 더 음식과 요리사에 열광하며 관심을 갖는다. 레스토랑은 과거 미술관처럼 어떤 도시를 방문할 때 반드시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됐고, 유명 요리사는 연예인 못잖은 인기와 영향력을 갖게 됐다. 주방 접시닦이 전담 직원에게 회사 지분을 주기로 한 레드제피의 결정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워싱턴포스트는 "접시닦이가 그다지 존경받는다고 할 수 없는 미국에서 특히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도 공감했고,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며 일하는 이들의 처우 개선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이철원 기자
레드제피가 외식업계의 처우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실천을 통해 해결책을 제안했다면, 페루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 가스톤 아쿠리오(Acurio)는 요리를 통해 저소득층 아이들이 가난을 탈출할 수 있는 사다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나섰다. 법대를 나온 아쿠리오는 프랑스 코르동블루에서 음식을 공부해 요리사가 됐다. 페루는 잉카 문명을 꽃피운 인디오 원주민과 유럽·아시아 이민자들의 문화가 뒤섞여 다채롭고 독특한 식문화를 꽃피웠지만, 나라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아쿠리오는 전통 페루 음식에 첨단 요리법을 접목해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페루 음식을 전 세계에서 맛보게 되고, 지난해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에 리마에 있는 '센트랄(Central·4위)'과 '마이도(Maido·13위)', 아쿠리오가 문을 연 아스트리드&가스톤(Astrid&Gaston·30위) 등 포함 페루 레스토랑이 세 곳이나 포함된 건 그의 공이라고 페루인들은 누구나 인정한다.
아쿠리오는 페루는 물론 남미 전역과 미국·유럽에 수십개의 식당·카페·바 등을 운영하는 거대 외식 기업의 주인이 됐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즐기지만 않고 공익(公益)에 활용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요리학교를 설립해 삶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덕분에 그는 페루에서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사랑과 존경까지 받는 요리사가 되었다. 페루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를 하면 아쿠리오가 1순위로 꼽힌다.
최근 만난 아르헨티나 요리사 나르다 레페스(Lepes)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TV 요리 프로를 진행하는 레페스는 한마디로 '아르헨티나 백종원'이다. 그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며 해당 농수산물로 만드는 다양한 요리법을 자신의 방송과 웹사이트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거나, 농어민에게서 대량 구매해 도시 소비자에게 직판하는 장터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정기적으로 연다. 농수산물 가격 폭락으로 생산자가 파산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레페스는 "우리 요리사들이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준 이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내 유명세를 적극 활용하려고 한다"고 했다.
아쿠리오는 요리사들에게 "말은 덜 하고, 행동은 더 하자(talk less, act more)"고 자주 말한다. "방송에 출연하고, 사진 찍히는 일에 관심을 덜 가집시다. 외식업계 종사자들의 근무 환경 개선이나, 가난한 농부들,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도움 될 실질적인 행동은 더 많이 합시다." 명성과 영향력을 자기 자신뿐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쓰자고 그는 주장한다. 셰프가 세상을 요리하는 시대다.
04.27 병 주고 약 주는 쓴맛
쓴맛은 毒 있는 음식 피하는 장치
쓴맛 예민하면 식성 까다롭지만 위험한 음식으로부터 목숨 지켜줘
쓴 것 잘 먹으면 나쁜 음식에 노출, 그래도 새 먹을거리 찾는 덴 유리
모두 인류 생존하는 데 기여해 와
아들만 둘인 우리 집은 식사 시간마다 '전쟁'이 벌어진다. 아내와 두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올해 네 살인 첫째 아들과는 '어떻게 하면 더 먹일까'를 두고 한바탕 격전이 치러진다. 녀석은 입이 짧다. 워낙 잘 먹지도 않지만, 새롭거나 낯선 음식은 아예 입에 대려고도 하지 않는다. 두 살인 둘째는 정반대다. '어떻게 하면 덜 먹일까'가 고민이다. 첫째가 '싫어' '안 먹어'를 달고 사는 반면, 둘째는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밥 줘'와 '또 줘'일 정도로 먹성을 타고났다. 가리는 음식도, 못 먹는 음식도 없다. 이유식은 진작에 떼었고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무조건 달라고 떼쓰며 달려든다. 같은 부모에게 태어난 형제가 맞나 싶을 만큼 서로 다르다. 둘을 섞어서 반으로 나누면 딱 좋을 텐데. 선배 부모들은 하나같이 "그런 아이는 없다"고 말한다.
한동안 첫째 아들은 먹는 걸 싫어하고, 둘째는 미식가 혹은 대식가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인간의 미각(味覺)을 공부하다 보니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는 모두 미각의 민감도가 다르다. 혀에는 맛을 감지하는 세포인 미뢰(味蕾·taste bud)가 있다. 맛봉오리라고도 부르는 미뢰는 신생아일 때 가장 많다. 혀의 앞면은 물론 옆면과 입천장, 목구멍 등 입안 전체가 미뢰로 뒤덮여 있다시피 하다.
유아용 분유를 먹어보면 묽고 밍밍하지만 아기들은 맛있게 먹는다. 성인보다 맛을 훨씬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미뢰는 열 살 때부터 차츰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른이 되면 평균적으로 1㎠당 200개의 미뢰가 혀에 존재한다. 둔감한 사람은 100개, 민감한 사람은 400개 정도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맛봉오리가 남들보다 많은 민감자라고 해서 모든 맛에 민감하지는 않다. 쓴맛에만 유독 예민하다. 쓴맛은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미국 언론인 존 매퀘이드는 '미각의 비밀(Tasty)'에서 "쓴맛은 몸에 독소가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한 생물학적 경보 시스템으로 시작됐다"고 말한다. 식물은 감염성 미생물로부터 자신을 지키거나 다른 동·식물에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독소를 사용하는 호신책을 발전시켰다. 이 독이 바로 쓴맛이다.
연약한 유아가 생존하려면 독의 유무를 감지하는 능력이 성인보다 훨씬 더 절실하고,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미뢰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진화학자들은 설명한다. 꺼리는 음식이 많은 내 첫째 아들이 오히려 민감한 미각의 소유자이고,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둘째는 미뢰가 상대적으로 적은 둔감자일 수 있는 것이다.
쓴맛에 민감할수록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유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쓴맛에 둔감한 것도 장점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쓴맛에 둔감한 유전자 형질은 모두 사라지고, 민감한 이들만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여기서 미국 음식 작가 마이클 폴란이 말한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등장한다.
동물은 대부분 편식한다. 육식동물은 고기만, 채식동물은 식물만을 먹는다. 잡식동물은 동식물을 가리지 않는다. 잡식동물 중에서도 인간은 유난하다. 인간처럼 다양한 음식을 섭취하는 동물은 없다. 다른 잡식동물은 제한적 범위의 잡식을 한다. 인간은 독이 있는 식물조차 그 독을 없애거나 중화하는 방법을 찾아내 먹고야 만다.
인간은 이 극단적인 잡식 성향 때문에 새로운 식품과 마주했을 때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다른 동물보다 훨씬 자주 고민하게 된다. 새로운 먹을거리를 먹느냐 마느냐, 양쪽 모두 장·단점이 있다. 새로운 음식을 섭취하기로 선택할 경우, 미처 알지 못했던 독성에 의해 병에 걸리거나 죽을 위험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식량원을 확보함으로써 기존의 식량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생존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이다.
새로운 먹을거리를 외면하면 병이나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기존 식량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굶어 죽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새로운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다.
매퀘이드는 말한다. "인류가 지구 곳곳에 정착해 살아가면서 쓴맛에 민감한 사람들은 독소를 탐지함으로써 집단이 살아남는 데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 반면에 쓴맛에 둔감한 사람들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더 많이 맛봄으로써 잠재력 있는 먹을거리를 발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입 짧고 새로운 음식에 소극적인 내 큰아들은 예민한 미각으로 인류 생존에 도움을 준 인류를 대표하며, 무엇이건 적극적으로 집어 먹는 둘째 아들은 둔감한 미각으로 먹을거리의 폭을 넓혀준 나머지 인류를 대표하는 걸까.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우리 집 식탁에 펼쳐져 있다. 다가오는 어린이날 밥상이 기대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06.08 곤충, 바삭함을 사랑한 인류 최초의 스낵
'딱딱하면서 쉽게 녹고 바삭한' 식감을 좋아하도록 진화해
스낵 같은 곤충의 맛 즐기도록 인간 DNA에 기록돼 있어
동물보다 사육 비용 적어 미래 代案 먹거리로 각광받아
스낵 과자는 바삭한 식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음식이다. 입안에서 바삭바삭 기분 좋게 부서지는 과자를 개발하기 위해 제과업체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 최근 '꼬북칩'이라는 새 제품을 출시하면서 오리온이 바삭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활용한 기술은 '겹치기'이다. 얇은 칩을 네 겹 포갰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따지면 바삭한 식감이 4배 증가한다. 이제까지 국내에는 두 겹짜리 스낵만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다섯 겹은 없다. 스낵계의 최첨단 제품인 셈이다.
바삭하다고 끝이 아니다. 바삭하되 딱딱하지 않아야 한다. 씹다 보면 어느새 과자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부드러움과 가벼움도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 씹어먹어도 이가 아프지 않다. 그러니까 잘 설계된 스낵 과자란 딱딱하면서 부드럽고 바삭하면서 가벼운, 모순된 식감을 아울러야 한다는 뜻이다. 스낵 회사에서 이러한 식감을 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건 당연히 소비자들이 이런 식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식품공학자 최낙언씨는 저서 '맛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가장 공통적으로 선호하는 식품의 물성(物性)으로 '약간 딱딱하되 사르르 녹거나 바삭바삭 쉽게 부서지는 물성'이라고 꼽았다.
인간은 왜 이런 식감을 좋아할까.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진화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 DNA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최낙언씨는 그 경험적 지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정말 귀했고 액체인 것은 영양이 없었다. 딱딱한 건더기 물체가 뭔가 영양분이 있었는데 씹어도 계속 딱딱한 것은 소화 흡수가 되지 않는 것이므로 뱉어버리는 것이 현명했다. 반면 잘 부서지거나 녹는 것은 몸에 잘 흡수되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약간 딱딱하지만 입에서 사르르 잘 녹는 음식은 항상 사랑받았다."
/이철원 기자
천연 음식 중에서 스낵 과자와 가장 비슷한 식감을 지닌 것이 곤충이다. 곤충은 단단한 껍데기를 씹으면 바삭한데 속은 부드럽다. 인류가 바삭한 음식을 좋아하는 이유로 오래전 곤충을 식량원으로 활용하던 습관을 꼽기도 한다. 고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벌레를 식용하는 인구가 20억명이나 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번데기를 술안주와 간식으로 즐긴다.
곤충은 미래의 대안(代案) 먹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쉽게 말해서 '가성비'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몸무게 1㎏을 늘리려면 소는 10㎏, 돼지는 5㎏, 닭은 2.5㎏의 사료를 먹어야 한다. 반면 귀뚜라미는 1.7㎏이면 충분하다. 사료뿐 아니라 마시는 물과 사육 공간도 훨씬 적게 드니 생산성이 높고 경제적이다. 온실가스 배출도 적다.
문제는 곤충 식용에 대한 혐오감이다. 하지만 이것도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 모른다. 미국 프로야구팀 시애틀 매리너스는 멕시코 사람들이 즐겨 먹는 메뚜기볶음 차풀리네스(chapulines)를 올 시즌 처음 홈구장인 세이프코필드에서 선보였는데 뜻밖에 히트를 쳤다. 메뚜기를 마늘, 라임즙, 아가베(agave·용설란) 벌레 추출물이 섞인 소금과 함께 볶아 만드는 차풀리네스는 멕시코에서도 미식(美食)으로 이름난 오악사카(Oaxaca) 지역에서 즐겨 먹는 간식이다. 차풀리네스가 인기를 끈 건 메뚜기가 '무(無)글루텐(gluten-free)'의 건강식임을 내세웠고, 뻔한 핫도그나 팝콘과는 다른 별미 혹은 미식 스낵으로 음식에 관심 많은 이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낯설거나 혐오스럽기까지 한 음식이라도 경제적이라거나 건강에 좋다거나 맛으로 어필한다면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차풀리네스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곤충 입장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세계 최정상 요리사들이 곤충을 음식에 활용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 있는 노마(Noma)가 대표적이다. 세계 최고 레스토랑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이 레스토랑에서는 샐러드에 레몬즙을 뿌리는 대신 붉은 개미를 올려 신맛을 낸다. 오너셰프(주인 겸 주방장) 르네 레드제피는 "지중해에서 비행기로 오랜 시간이 걸려 배송된 레몬보다 코펜하겐 인근 흙에서 잡은 개미에서 더 좋은 신맛이 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레드제피는 메뚜기로 가룸(garum)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가룸은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서 고등어·참치 등 생선을 발효한 액젓의 일종이다. 최근 이 가룸을 되살리려는 요리사들이 서양에 꽤 있다. 레드제피는 "가룸을 똑같이 되살리면 너무 비리고 짜서 현대인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전통 가룸 제조법을 사용하되 메뚜기를 재료로 써서 실험하고 있다"고 했다.
몇 해 전 노마를 방문했을 때 이 메뚜기 가룸을 맛봤다. 짙은 적갈색을 띤 메뚜기 가룸은 멸치액젓보다 짙고 구수한 맛이 소고기·돼지고기 등 고기로 담그는 육장(肉醬)과 비슷했다. 우리의 먼 조상처럼 벌레를 상식(常食)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08.03 땀 흘리며 비운 민어탕 한 그릇… 온몸엔 시원함이
여름이 제철인 민어 커야 제맛… 뱃살은 기름지고 등살은 담백
대가리와 뼈 온 종일 끓여서 우려낸 기름 민어 영양의 핵심
뜨겁고 구수한 민어탕 한 그릇 싹 비우면 이열치열의 시원함이
해마다 한여름이면 어머니는 민어탕을 끓인다. 대대로 서울에 살아온 외가에서는 복달임을 민어로 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여름이 다가오면 외삼촌들은 어머니에게 "올여름에는 언제 먹느냐"며 민어탕을 끓이라는 압력을 은근하게 넣는다. 40도에 육박하는 찜통더위에 수십 명이 먹을 매운탕을 끓이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다. 힘들 텐데 싫진 않은지, 어머니는 복날이 다가오면 수산 시장 단골집에 전화해 "큰 놈 들어왔느냐"고 수소문한다. 민어는 커야 맛있다. "10㎏은 돼야 제맛이 난다"고도 한다.
민어는 여름이 제철이다. 8월 산란기를 앞두고 몸집도 커지고 기름도 가장 오른다. 대개 동물성 식재료는 암컷을 더 쳐주나, 민어는 그렇지도 않다. 서울의 대표적 호남식 한정식집 '해남천일관' 이화영 대표는 "큰 민어가 워낙 귀해서 암컷 수컷 가려 받을 수 없는 입장"이라며 "손님에게 낼 수 있는 살은 적고 팔 수 없는 알만 많으니 식당 입장에선 암컷이 걸리면 손해"라고 했다. 알로 영양이 쏠려 살에서 기름기가 빠져 퍽퍽해진다고도 한다.
식당에서는 민어를 주문하면 회·전·탕으로 낸다. 큰 민어는 회를 뜨면 참치처럼 부위별로 맛이 다르다. 분홍빛이 감도는 뽀얀 흰색의 민어 뱃살은 기름지면서 부드럽다. 등살은 담백하고 차지다. 뱃살과 등살 사이 중뱃살은 뱃살과 등살을 섞은 듯한 맛이다. 운동량이 많은 꼬리·지느러미 부근은 탄력이 강하고, 한가운데는 부드럽다. 탄탄하면서도 말랑말랑 부드러운 식감. 비린내도 거의 없어 인절미를 씹는 듯하다.
"민어는 회보다 전으로 먹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생선"이라고 말하는 식도락가들도 있다. 흰 살 생선이지만 기름이 충분히 올라 퍽퍽하지 않고 포슬포슬 촉촉하게 입안에서 바스러진다. 민어 마니아들은 부레(아가미)와 껍질을 최고로 친다. 부레는 두부처럼 부드러운 부분과 질긴 부분이 붙어 있다. 부드러운 부분은 입에 넣으면 체온만으로도 살살 녹는다. 질긴 부분은 씹으면 젖은 한지를 뭉쳐 놓은 듯한데, 씹을수록 고소하다. 끓는 물로 살짝 데친 껍질은 쫄깃쫄깃 씹는 맛이 별나다.
괜찮은 민어가 구해질 듯하면 어머니는 날을 잡고 민어탕 끓일 준비를 한다. 집에서는 민어를 탕으로만 먹는다. 비싼 민어를 온 가족이 나눠 먹으려면 회, 전 등 각종 요리로 즐기는 사치가 힘들다. 어머니는 당신의 민어탕이 외할머니에게서 전수받은 정통 서울식이라고 했다. 국물을 민어 대가리와 뼈로만 내지 않고 소고기 사태 육수와 섞는 게 핵심 포인트. 소고기 국물에 민어 살을 넣고 끓이는 민어감정과 매운탕의 혼합 절충형일지도 모르겠다.
/이철원 기자
마침내 민어 먹는 날이 되면 외가 온 가족이 모인다. 그 전날 종일 끓인 국물에 고춧가루와 된장, 다진 마늘 따위 양념을 푼다. 국물이 펄펄 끓으면 큼직하게 토막 친 민어 살과 부레를 넣는다. 어머니는 "국물 낼 때부터 함께 끓이면 부드러운 민어 살이 다 풀어지기 때문에 따로 뒀다가 마지막 먹기 전 익힌다"고 했다. 민어탕이 완성되면 배분 작업이 시작된다. 커다란 사발에 민어 한 토막, 잘게 썬 부레 서너 점을 담고 국물을 붓는다. 민어 살과 뼈에서 흥건하게 우러난 기름이 반드시 같이 담겨야 한다. "민어 영양의 핵심이 바로 이 기름"이란다.
민어탕을 받아들면 '그렇잖아도 더워 죽겠는데 이 뜨거운 민어탕을 그 고생해가며 끓이고 먹어야 하나'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땀을 뻘뻘 흘려가며 뜨겁고 칼칼하고 구수한 민어탕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에어컨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시원함이 온몸에 감돈다. 그야말로 이열치열의 맛이다. 무더위를 무탈하게 견뎌낼 힘을 얻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민어가 꽤 잡혔지만 남획으로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과거 민어는 서울 토박이나 호남 출신들이나 먹었다. 하지만 이제 전 국민의 보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잖아도 물량이 부족한데, 수요가 증가하니 가격이 폭등했다. 백성 민(民) 자가 이름에 들어가는 게 무색할 정도로 일반 서민은 맛보기조차 어려운 값비싼 생선이 돼 버렸다. 이화영 대표는 "복날이 낀 주에는 민어 가격이 1㎏당 10만원까지 나가기도 한다"며 "너무 비싸서 손님에게 내기조차 힘들 정도"라고 했다.
다행히도 남해의 한 양식장에서 최근 민어 양식에 성공했다. 얼마 전까지 민어는 양식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졌었다. 종묘 배양이 극히 어려운 데다 양식 시간이 최하 3년으로 다른 어종보다 길어서 채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양식을 통한 대량 생산에 성공하면서 대형 마트에서 판매까지 시작했다. 덕분에 민어를 그나마 너무 비싸지 않은 가격에 맛보게 됐다. 양식 민어 맛이 어떤지는 아직 확인 못 했다.
올해는 아직 어머니의 민어탕을 못 먹었다. 어머니는 "올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워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한다. 입술이 쩍쩍 들러붙는 기름진 국물이 자꾸 생각 난다. 압력과 설득과 회유를 살살 해봐야겠다.
09.13 화끈한 낙지볶음에 진한 레드와인 한 잔?
한국인, 맵고 자극적인 韓食에 강한 레드와인 곁들이기 선호
"입안에서 타는 듯한 느낌 좋아"
▲아귀찜과 레드와인. 매운 한국 음식과 레드와인은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니술냉 가이드
매운맛과 레드와인은 최악의 궁합이라는 게 세계 와인업계 상식이다. 하지만 고추와 소주로 입맛을 단련한 한국인은, 서양인들은 질색하는 이 조합을 즐기는 독특한 민족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최근 국제학술지 '베버리지스(Bevera ges)'에 실린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씨 논문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낙지볶음 등 매운 음식과 레드와인을 페어링(pairi ng·음식 간 궁합 맞추기)함으로써 입안에서 타는 듯한 느낌을 즐긴다"고 했다. 이 논문은 김씨가 4년 전 영국 옥스퍼드 브룩스 대학 석사 논문으로 쓴 '한국 음식과 와인 페어링 기준 개발을 위한 연구'다.
와인, 특히 레드와인에는 타닌(tannin) 성분이 상당량 함유됐다. 타닌의 쓰고 떫은 맛은 매운맛을 더욱 강조한다. 서양 사람들은 이 느낌을 "입안에 불이 난 것 같다"며 싫어한다. 한식에는 매운맛뿐 아니라 김치·된장·고추장·액젓·젓갈 등 다양한 발효 음식과 탕·찌개·국처럼 뜨거운 국물 음식이 많다. 모두 와인을 제대로 맛보기 힘들게 하는 음식들이다. 일부 서양인이 한식을 '와인 킬러(wine killer)'라고 부르는 이유다.
김씨는 일정 수준의 와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일정량의 와인을 꾸준히 마시는 한국인 남녀 13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김씨는 단맛·신맛·짠맛·쓴맛·매운맛이 나는 한식을 제시하고, 이 음식들과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하도록 했다. 조사 결과, 단맛·신맛·짠맛·쓴맛의 경우 서양 소비자들과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매운맛에선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서양에서는 매운 음식에는 화이트와인, 스파클링와인 등 타닌이 상대적으로 적고 시원하게 마시는 와인으로 매운맛을 완화하려 한다. 하지만 한국인 설문 대상자들은 제육볶음과 레드와인을 곁들이겠다는 대답이 97명(70.3%)이었으며, 이 중 87명은 타닌 함량이 중간 이상급인 레드와인을 선택했다. 낙지볶음과 레드와인을 곁들이겠다는 대답은 58명(42%), 떡볶이와 레드와인을 곁들이겠다는 대답은 42명(30.4%)이었다.
김씨는 이러한 조사 결과를 "한국인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페어링"이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매운 음식에 레드와인을 선택하는 비율이 현격하게 높다는 것. 그는 "한국인은 매운맛을 와인 페어링의 심각한 장애로 여기지 않는다"면서 "매운 음식과 레드와인을 함께 먹었을 때 입안이 타는 듯한 느낌을 즐기는 한국인 소비자들이 존재함을 입증한다" 고 분석했다.
한국인은 왜 입안이 타는 듯한 느낌을 좋아할까. 김씨는 "자극적인 음식(안주)과 소주를 마시는 데 익숙한 이들이 와인을 마실 때도 소주처럼 강한 느낌을 기대한다"고 추론했다. 그는 또 "아시아인은 타닌이 다량 함유돼 쓴맛이 있는 차(茶)류를 즐겨 마시고 씁쓸한 채소를 많이 먹기 때문에 타닌을 서양인보다 더 잘 견디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09.28 우리 집 명절 음식 에 담긴 맛있는 사연
황해도 봉산 출신 친가에서 명절이면 꼭 먹는 만둣국
도톰한 피로 크지 않게 빚고 닭육수, 식초 쓰는 중국式 비슷
만주 오갔던 조부 덕분일까? 代 이어온 집안의 손맛에 중독
황해도 봉산 출신인 우리 친가의 명절·잔치 음식 삼위일체(三位一體)는 만둣국·삼겹살·빈대떡이다.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섭섭하지만, 가장 중요한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만둣국이다. 설날 떡국 대신 만둣국이 올라오는 건 물론이고 추석에도 만둣국이 올라와야 명절 상차림다운 느낌이다.
만두를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해 먹느냐면, 얼마 전 돌아가신 큰아버지 댁에는 만두 전용 '짤순이'가 부엌 뒤편에 있었다. 모르는 독자를 위해 부연하자면, '짤순이'는 빨래 넣고 물기를 제거하는 기계이다. 큰아버지 댁 짤순이는 세탁물 물기 제거용이 아니었다. 오로지 두부며 김치며 숙주 따위 만두소 재료의 물기를 짜내기 위한 짤순이였다.
만두는 미리 빚어두지 않았다. 먹기 바로 전 만들어 삶아야 맛있기 때문이다. 만두를 짧은 시간 대량 생산하려면 온 가족이 달라붙어 만들어야 했다. 추석이나 설날 식사 두세 시간 앞두고 집 안은 만두 공방(工房)으로 변했다.
우리 집에서 만두를 빚는 건 남자들의 일이었다. 여자들은 다른 명절 음식 준비하느라 바빴다. 큰아버지·아버지·작은아버지·사촌 형·동생들과 거실에 널찍한 목판과 밀대, 밀가루 통을 들고 자리 잡으면 큰어머니·엄마·고모들이 커다란 양푼 두 개를 내왔다. 양푼 하나에는 밀가루 반죽, 다른 양푼에는 만두소가 잔뜩 담겨 있었다.
나와 사촌 등 '아랫것'들이 힘든 만두피 밀기를 맡았다. 얇게 민 밀가루 반죽을 주전자 뚜껑으로 눌러 동그랗게 만두피를 오려내면 조금 덜 힘들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이런 '편법'은 안 된다. 만두피가 입안에서 노는 감촉이 다르단다. 오로지 밀대로 밀어서 만두피를 펴야 한다. 송편처럼 두꺼워서는 물론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얇아서 씹는 맛이 죽어도 안 된다. 만두라면 입맛이 귀신들이다.
만두 빚기는 아버지와 큰아버지·작은아버지 등 어른들의 작업이었다. 모두 잘 빚으시지만, 큰아버지는 속도나 기교가 발군이셨다. 큰아버지는 "6·25 터지고 부산으로 피란 갔을 때 화교가 하는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만두 빚기를 배웠다"고 했다. 한 손바닥에 만두피를 놓고 소를 얹고 양손을 살짝 어긋나게 맞잡으면 만두 하나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작은아버지는 만두피를 완전히 밀봉하지 않고 양 끝 귀가 살짝 열리게 했다. "이렇게 해야 끓일 때 육수가 스며들어 더 맛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큰아버지는 그러나 "국물이 탁해진다"며 반대하셨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보통 이북 만두는 큼직하다. 우리 집은 중국집 군만두 정도 크기다. 만두소에 넣는 김치는 물로 고춧가루를 씻어낸다. "벌거면 상스럽다"고 했다. 만두용으로 고춧가루 넣지 않은 배추김치를 따로 담그기도 했다. 배추김치와 데친 숙주, 두부를 꼭 짜서 간 돼지고기와 섞어 소를 만든다. 국물은 소고기가 아니라 닭고기로 낸다. 큼직한 닭으로 육수를 낸다. 닭은 건져 살을 쪽쪽 찢고 파·마늘·고춧가루에 무쳐 꾸미를 만들어둔다. 육수가 식으면 동동 뜬 닭 기름은 깨끗하게 건져낸다. 만두가 다 빚어지면 육수를 다시 불에 올린다. 팔팔 끓으면 만두를 넣는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냄비 바닥에 가라앉은 만두가 떠오르면 다 익은 것"이라고 끓일 때마다 말씀하셨다.
만두가 익으면 대접에 국물과 함께 담고 준비해둔 닭고기 꾸미를 얹어 상에 낸다. 상에는 고춧가루·마늘·파를 섞은 다진 양념과 함께 식초가 놓인다. 식초를 살짝 두르면 맑은 닭 육수 속에 감춰져 있던 감칠맛이 화사하게 드러난다. 만두가 한두 알 남았을 때, 국물에 밥을 자작하게 말아 먹으면 그 맛이 또 기막히다.
만두를 약간 도톰한 피로 크지 않게 빚고, 닭 육수에 끓이고, 식초로 간을 맞추는 건 일반적인 이북 만두와 다른 우리 집 만두만의 특징이다. 만둣국을 왜 이렇게 끓이고 먹게 됐는지는 잘 모른다. 여러 지역과 집안 만두를 취재하기도 하고 문헌도 찾아봤지만 똑 부러지는 설명은 얻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집 만두는 크기라든가, 닭 육수를 쓰고 식초를 친다든가 하는 점에서 중국의 만두 문화와 비슷하다. 할머니는 "너희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평안도 신의주에서 사업하면서 만주(滿洲)를 다니셨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그때 중국에서 드신 경험이 영향을 준 걸까, 아니면 큰아버지가 부산 화교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습득한 노하우가 녹아든 걸까. 어쨌건 만둣국에는 우리 집안만의 식문화가 담겨 있다.
올해는 아버지 생신이 추석 연휴에 끼어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다른 선물 필요 없으니 생일날 만두 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내게 "그날 좀 일찍 오라"고 했다. 만두피 밀 생각을 하니 벌써 팔이 아프다. 하지만 야들야들한 만두피와 따끈한 닭 육수의 그 황홀한 조합을 떠올리며 '그래, 힘들어도 빚어 먹어야지' 되뇐다. 나도 아버지처럼 우리 집 만둣국에 중독된 모양이다.
11.23 술 약한 한국인, 해장국 발달시켰다
세계 각국 속풀이 음식 다양… 英, 베이컨 같은 기름진 음식
美는 햄버거·피자 주로 먹어… 홍콩은 육수에 묽게 쑨 쌀죽
알코올 분해 잘 못하는 한국인, 다양한 해장국으로 숙취 해소
와인 취재를 위해 호주에 와 있다. 영국·미국·일본·홍콩 등 세계 각국 음식·술 담당 기자들과 종일 와인을 맛보며 호주를 돌고 있다. 한국에서는 송년회, 일본에선 망년회, 서양에선 크리스마스 등 술 마실 자리가 잦은 연말이 코앞. 술이라면 누구보다 해박한 이 전문가들과 자연스레 각국의 술 문화와 '행오버 푸드(hangover food)' 즉 해장 음식에 대해 이야기 나누게 됐다.
세계 각국 속풀이 음식은 다양했다. 영국과 미국,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두 나라는 기름진 단백질류 음식으로 해장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영국 음식·와인 담당 기자 루시는 "베이컨과 소시지, 달걀 프라이 등 기름진 아침 식사로 주로 해장한다"고 했다. 미국 와인 전문 기자 제임스는 "햄버거나 피자를 먹는다"고 말했다.
와인 전문 홍콩 기자 넬리는 "닭 육수나 말린 광어 등 건어물을 우린 국물에 묽게 쑨 쌀죽, 송화단(까맣게 발효시킨 오리 알)을 얹어 먹는다"고 했고, 일본 와인 전문지 기자 아야는 "딱히 해장 음식이 따로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미소시루(일본 된장국)를 먹는 것 같다"고 말했다. "라멘(생라면)은? 한국에선 술 마신 다음 날 라면으로 해장하는데" 하고 묻자 "라멘은 늦은 밤 술에 취해 출출할 때 먹지, 다음 날 아침 괴로운 속을 달래려 먹지는 않는다"고 했다.
숙취와 해장은 인류가 술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한 이래로 끊임없이 고민해온 주제다. 고대 그리스인도 숙취로 고생한 모양이다. 숙취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알고스(algos)'는 어원이 고통이다. 고대 로마 제국 정치가·군인이자 '박물지(博物誌)'를 쓴 학자였던 플리니우스(Plinius)는 올빼미 알을 날로 먹거나 카나리아를 튀겨 먹으면 숙취 해소에 효과가 있다고 추천했다.
아일랜드 대(大)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는 '프레이리 오이스터(prairie oyster)'라는 해장식이 나온다. 직역하면 '대초원의 굴'이니 말이 안 된다. 유리잔에 날 달걀노른자 두어 개를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담는다. 여기에 찝찔한 우스터셔 소스, 매운 타바코 소스, 소금, 후추를 뿌린다. 언뜻 보면 굴 같지만, 바다가 아닌 뭍에서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93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도 "해장에 특효"라며 전시됐을 정도로 당시에는 효과를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고급 호텔의 대명사인 프랑스 파리 '리츠칼튼'에서는 1938년 코카콜라와 우유를 섞은 해장 음료를 손님에게 제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코카콜라는 1886년 미국 애틀랜타의 약사 존 펨버턴이 모르핀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약으로 개발했다는 게 정설이나, 숙취 해소제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노인과 바다'를 쓴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술고래로 유명했는데, 쓰린 속을 달래려고 토마토 주스나 맥주를 즐겨 마셨다.
세계 각국마다 해장 음식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처럼 아예 이름부터 '해장국'이라 붙은 음식이 확고한 존재감을 갖는 나라는 드물다. 전 세계 술 담당 기자들도 "한국에 해장국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면서도 해장국은 물론 콩나물국, 북엇국, 라면, 짬뽕 등 다양한 국물 음식이 해장을 위해 매일 아침 대량 소비된다는 사실에는 놀라워했다.
왜 한국에선 해장국이 이토록 발달했을까. 술을 유독 즐기는 민족이라서일까. 타고난 유전인자 때문일 수 있다.
루시는 "아시안 플러시(Asian Flush)란 표현을 아느냐"고 했다. 우리는 술 마시면 얼굴이 불콰해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서양에서는 아닌 모양이다. 처음 들었다고 했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숙취의 주요 원인은 에탄올(알코올)이 분해되면서 발생하는 독성 물질인 아세트알데하이드라고. 그런데 동아시아인 인구의 절반은 아세트알데하이드를 유난히 빨리 분해하는 반면 배출은 느린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그래서 술 마시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홍조 현상이 다른 지역보다 유독 많아. 아시안 플러시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지."
한마디로 한국인은 술에 약한 체질을 타고났다는 거다. 하지만 마시는 술의 양은 어느 민족보다 많다. 술병으로 고생할 수밖에 없고, 쓰린 속을 달랠 해장국이 다양하게 발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루시는 "술이 약하다고 다 나쁜 건 아니다"고 했다. "영국에 알코올중독자가 많은 건, 술 마시고 나서 그리 괴롭지 않아서라고 해. 한국은 알코올중독이 서양처럼 심각하진 않잖아?" 숙취로 고생하는 대신 알코올중독은 덜 고민하게 됐으니, 인생 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다. 기자들은 "내일 아침 한국 해장국 맛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입맛을 다셨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