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이야기01/ 문체반정으로 정조에 팽당한 이옥의 ‘상추쌈 먹는 법 - 음식의 유래 - 짜장면 짬뽕 라면 치킨 여러가지 - 소주 이야기
식품 이야기01
■ 2015.07.20 [우리 역사 속 미식가]
문체반정으로 정조에 팽당한 이옥의 ‘상추쌈 먹는 법’
▲고기를 올린 상추쌈. 동아일보DB
“마치 성이 난 큰 소가 섶과 꼴을 지고 사립문으로 돌진하다 문지도리에 걸려 멈추는 것과 같다. 눈을 부릅떠서 화가 난 듯하고, 뺨이 볼록하여 종기가 생긴 듯하고, 입술은 꼭 다물어 꿰맨 듯하고, 이(齒)가 빠르게 움직이니 무언가를 쪼개는 듯하다.”
도대체 어떤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을 쓴 사람은 조선시대 정조에 의해 팽을 당한 이옥(李鈺·1760∼1815)이다. 1792년 10월 17일 정조는 성균관의 유생이 쓴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유생 이옥의 응제(應製)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으니 요사이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정조실록) ‘순정고문(醇正古文)’만이 제대로 된 문장이라고 여겼던 정조가 보기에 이옥의 글은 ‘패관소품(稗官小品)’과 ‘순용소설(純用小說)’이었다.
이옥은 성균관에서 쫓겨나 경상도 합천 삼가현까지 가서 양반에게 면제됐던 군복무의 벌을 받았다. 그 후 고향 남양(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돌아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문체로 세상 사는 이야기를 썼다. 앞서 소개한 글 역시 남양에서 쓴 ‘백운필(白雲筆)’ 하편 ‘담채편(談菜篇)’에 나온다. 글의 제목은 ‘와거(와거)’, 곧 상추다.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상추쌈밥 먹는 모습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한 사람은 단연 이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상추쌈 먹기 좋은 때로 한여름에 단비가 처음 내린 후를 꼽았다. 비를 흠뻑 맞은 밭에는 마치 푸른 비단 치마처럼 상추가 솟아오른다. 잘 자라라고 인분을 잔득 뿌렸기 때문에 물을 채운 큰 동이에 오랫동안 담갔다가 깨끗하게 씻어내야 한다. 이옥은 상추쌈 먹는 법을 이렇게 묘사한다.
“왼손을 크게 벌려 구리쟁반처럼 들고, 오른손으로 두텁고 큰 상추를 골라 두 장을 뒤집어 손바닥에 펴놓는다. 흰 밥을 큰 숟가락으로 퍼서 거위 알처럼 둥글게 만들어 잎 위에 놓는다. 윗부분을 조금 평평하게 한 다음 젓가락으로 얇게 뜬 밴댕이회를 집어 노란 겨자장에 한 자밤 찍어 밥 위에 얹는다. 미나리와 어린 시금치를 많지도 적지도 않게 밴댕이회와 나란히 놓는다. 가는 파와 날 갓 서너 줄기는 그 위에 눌러 얹는다. 여기에 방금 볶아낸 붉은 고추장을 조금 바른다. 오른손으로 상추 잎 양쪽을 말아 단단히 오므리는데 마치 연밥처럼 둥글게 한다. 이제 입을 크게 벌리는데, 잇몸을 드러내고 입술을 활처럼 펼쳐야 한다. 오른손으로 쌈을 입으로 밀어 넣으면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친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는 “이런 모양으로 느긋하게 씹다가 천천히 삼키면 달고 상큼하여 정말로 맛이 좋아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반드시 밴댕이회와 겨자장, 그리고 볶은 고추장을 곁들일 필요는 없단다. 서해 근처에 살았던 이옥은 황석어·굴·청어도 즐겨 먹었다. 겨자·생강·고추와 같은 매운맛을 좋아하는 자신의 식성을 ‘천성(天性)’이라고도 했다. 성균관 유생 때 술집에서 연거푸 서너 잔의 술을 마시고서 시렁 위의 붉은 고추를 집어서 씨를 빼내고 된장에 찍어 씹어 먹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옥을 탐식가로 보면 오해다. 농부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밭에서 채소를 가꿀 정도로 미식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꿰뚫고 있었다. 미식이 난리법석인 요사이 이옥의 이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식(耳食·귀로 먹는다)을 많이 한다. 이런 탓에 명성에 기댈 뿐 맛을 잘 알지 못한다.” <끝>
동아일보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우리가 즐겨먹는 음식의 유래
■짜장면 귀화 '110주년'…철가방의 원조는 '木 가방'
2015-10-15 조선일보
■ 짬뽕의 역사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짬뽕’하리라
짬뽕은 일본에서 개발된 중화요리로 메뉴명은 일본, 조리법은 중국식임을 찾아볼 수 있다. 채소와 해물을 볶다가 육수를 넣고 면을 첨가하는 조리법은 중국 조리기구인 웍(wok)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짬뽕에서 맛볼 수 있는 불맛은 바로 이런 조리방법을 통해 짬뽕에 스며든다고 할 수 있다.
짬뽕은 1899년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나가사키는 일본 최초의 개항지로 해외문물을 들여오는 창구 역할을 했다. 당시 이 항구에는 중국에서 온 유학생과 일하던 노동자 등 중국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천핑순이라는 화교가 <시카이로>라는 중화요리점을 운영했다. 그는 푸젠성 출신으로 음식도 당연히 고향 음식을 선보였는데 그곳에서 즐겨먹던 탕육사면에서 고안해 고기 육수에 해산물, 자투리 고기, 양배추 등을 넣어 국수를 만들었다. 이 메뉴는 싸고 맛있을 뿐더러 양 또한 푸짐해 소문이 나면서 화교뿐 아니라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가사키짬뽕의 시작이다.
한국에는 일제시대 때 서로 교류하면서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한국식 짬뽕은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제물포의 중국인들이 리어카에 화로를 싣고 다니면서 채소를 즉석에서 볶아 국물을 넣어 만든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짬뽕’이라는 말을 서로 다른 것을 뒤섞는다는 새로운 뜻으로 사용하게된 것도 짬뽕에 여러 가지 식재료가 한데 섞여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짬뽕의 어원에 대한 유래도 흥미롭다. 맨 처음 일본 나가사키 짬뽕을 선보인 천핑순은 당시 끼니가 최고의 화두였기 때문에 첫인사로‘밥 먹었니?’라는 뜻의 중국어인‘츠판’을 고향인 푸젠성 말로‘샤뽕(吃飯)’이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 뜻을 알 리 없는 일본사람들은 이 말이 메뉴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짬뽕은 육해공이 어우러져 있는 형태인데 일본 마츠리에서 징과 북으로 연주하는 소리가‘잔폰 폰잔’으로 들려 징과 북의 소리가 마구 섞여있는 것에 빗대어‘잔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잔폰은 일본에서 뒤섞이거나 번갈아 하는 일을 지칭하는 형용사로 쓰인다. 결국 발음도 한국인스러운 짬뽕은 잔폰에서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짬뽕은 한·중·일의 메뉴가 기막히게 뒤섞여 탄생한 음식이다. 각자의 식성과 입맛에 맞게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최근 서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각국의 짬뽕을 세 나라가 모두 맛있게 즐기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이쯤 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짬뽕했다’고.
▲(좌로부터)가야성 짬뽕, 복성루 짬뽕, 초마 짬뽕 (아래) 홍화연 짬뽕
짬뽕도 세월을 비켜갈 순 없다!
메뉴의 퓨전화는 어느 종류의 음식할 것 없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짬뽕도 예외는 아니다.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퓨전 짬뽕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한 곳은 크림 짬뽕, 맑은 짬뽕 등 신개념 짬뽕을 피자와 함께 메뉴로 구성하고 있다.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이지만 오묘하게 시너지 효과를 유발하며 젊은 고객층의 선호를 받고 있다. 보통 짬뽕은 뜨끈해서 매운 맛을 상승시켜주지만 발상의 전환을 달리해 차가운 얼음을 동동 띄운 일명 짬뽕 냉면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또한 한국인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매운 맛인데 짬뽕에 매운 맛의 단계를 조절해 고객에게 색다른 경험을 주는 곳들도 많다. 빈 속, 임산부, 노약자, 고혈압, 위염, 컨디션이 안 좋은 사람은 매운 짬뽕을 주문하지 말라며 책임지지 않겠다는 문구도 걸어 놓고서 말이다. 얼마나 매운지‘완뽕(짬뽕한그릇을완전히다먹은것)’한 사람을 그 가게 명예의 전당에 사진을 찍어 올려두는 곳도 있을 정도.
웰빙 트렌드가 한국 사회 전반에 스며들면서 짬뽕에도 건강 요소를 더하기도 한다. 뽕, 우리밀 등 면에 차별화를 둬 맛은 물론 웰빙을 지향하는 고객의 니즈에 소구한다. 또한 빨간 국물의 짬뽕이 보편화되어 있는 짬뽕 시장에 백짬뽕이 등장해 획일화되어 있던 짬뽕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도 했다.
라면업계에서도 짬뽕은 히트 아이템이다. 일본 짬뽕을 한국인에 맞게 레시피를 변화해 판매 고공행진을 하고 있기도 하고 한국 짬뽕도 해산물의 시원한 맛을 살려 간편하면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제품들이 현재 시장에 나와 있다. 오랜 시간 들이지 않고 컵라면으로도 꽤 만족할만한 짬뽕을 즐길 수 있으니 소비자들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짬뽕이 중국에서 일본, 한국으로 조금씩 각국의 입맛에 맞게 변화를 거듭해온 것처럼 한국 안에서도 현재 입맛에 맞춰 변신하고 있다. 짬뽕은 우리에게 먹는 재미와 즐거운 상황을 연출해주고 있다. 앞으로 짬뽕이 어떻게‘짬뽕’되어 어떤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지 기대된다.
글·사진 제공 : 월간외식경영 2012-05-14
■ 라면 이야기
1963년 한국에 등장… 면은 기름에 튀겨 만들죠
▲ 라면 면발에는 기름에 튀기는 동안 수분이 증발하면서 생긴 미세한 구멍들이 있어요. 라면을 물에 넣고 끓이면 이 구멍으로 물이 스며들면서 면이 쉽게 불게 됩니다. /Getty Images Bank
라면은 많은 분이 참 좋아하는 음식이죠? 입맛이 없을 때 매운 라면을 끓인 후 잘게 썬 파를 넣고 잘 익은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어요. 인스턴트 라면을 처음 발명한 나라는 일본이지만, 전 세계에 라면 열풍을 일으킨 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라면은 밀반죽을 양쪽으로 당기고 늘여 여러 가닥으로 만든 중국의 납면(拉麵)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납면은 중국 란저우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즐겨 먹던 국수 중 하나인데, '납면'을 중국어로 발음하면 '라미엔'이라고 들려요. 1870년대 일본 개항장에서 중국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납면을 팔았는데, 이것이 일본식 라면 '라멘'으로 발전하였어요.
인스턴트 라면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 처음 발명되었습니다. 일본 닛신식품의 안도 모모후쿠 사장은 술집에서 튀김을 보고 국수를 기름에 튀기면 마른국수로 보관할 수 있고, 이를 다시 물에 끓이면 고소한 맛의 국수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후 국수를 여러 차례 기름에 튀기는 실험을 거쳐 1958년 최초의 라면을 개발하였지요.
라면을 만들 때는 밀가루 반죽으로 면발을 만들어 기름에 튀깁니다. 이때 면발에 든 물이 증발하면서 미세한 구멍이 생기고, 수분이 제거된 마른국수 형태가 되어요. 이를 다시 물에 넣고 끓이면 미세한 구멍으로 물이 들어가면서 면이 쉽게 불고, 밀 전분이 먹기 좋은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1963년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공급되었어요. 삼양라면이 일본의 라면 제조기술을 도입하여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지요.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족한 쌀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혼·분식을 장려하며 밀가루 소비를 촉진했는데, 이때 라면도 대중화되어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식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어요.
매콤한 맛이 나는 한국식 라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는 일화가 있어요. 박 전 대통령은 간식으로 종종 끓인 라면을 먹었는데, 라면 회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라면 맛이 싱거우니 라면 수프에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고 맵게 만들어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등장한 한국식 매운 라면은 밋밋한 일본식 라면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요.
우리나라 라면 수프는 한국의 탕 문화를 기본으로 고춧가루, 마늘, 후추 등이 들어가 색깔이 붉고 얼큰한 맛을 냅니다. 일본식 라면은 일본 간장과 된장, 돼지 뼈 육수를 바탕으로 짭짤하면서 담백한 맛이 나지요.
한국은 라면에 달걀, 파, 콩나물, 해물 등을 고명으로 넣지만 일본은 돼지고기 편육이나 죽순, 숙주 등을 넣습니다. 한국 라면은 김치와 잘 어울리고, 일본에서는 생강 초절임을 라면과 즐겨 먹어요.
박현진 고려대 교수(식품공학과) 2017-04-18
■ 라면 2만1594種… 한국 1인당 72개 소비 ‘세계 1위’
- ‘구황 음식’서 ‘지구촌 간식’으로
1958년 日 ‘치킨라면’이 원조
기름에 튀겨 만드는 유탕면과
열풍에 말리는 非유탕면 구분
전세계 年판매 1000억개 눈앞
작년 국내 시장규모 2조16억
100여 국가에 2445억원 수출
남극·히말라야 산맥서도 팔려
다소 거칠어 보이면서, 빠른 속도로 젓가락을 놀리며 후루룩 흡입하면 쫄깃한 면발이 콧등이라도 때릴 듯하다. 군침이 꿀꺽 도는, 라면을 먹는 장면은 때론 상쾌하기까지 하다. 1963년 국내에 처음 들어온 지 53년, 가장 대중적인 인스턴트 식품으로 우리의 식생활에 깊숙이 들어온 라면은 시심(詩心)까지 여지없이 자극했다. ‘~신문지를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함민복, ‘라면을 먹는 아침’)거나, ‘순식간에 만조가 되면 삼 분만에 펼쳐지는 즉석 바다, 분말 스프가 노을빛으로 퍼진다’(안시아, ‘새우탕’), ‘~권력도 부(富)도 라면 한 개의 포만감보다 못한 것을’(정구찬, ‘라면을 끓이면서’) 등 라면을 다룬 작품이 적지 않다.
세계라면협회 집계를 보면, 국내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지난해 팔린 라면은 자그마치 977억 개. 1000억 개를 넘을 날도 머지않았다. ‘지구인의 간식’이 된 라면은 최근 미국 교도소 재소자들 사이에 담배를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 됐다거나, 교도소 안에서 라면을 끓일 수 있는 각종 조리 ‘비법’을 담은 책까지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화제를 모았다.
21일 농심, 오뚜기, 삼양, 팔도 등 라면 업계에 따르면, 입맛이 떨어지면 어린아이들조차 쉽게 찾고 조리하는 라면의 발상지는 일본으로 1958년에 탄생했다. 닛산식품 창업자인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1910~2007)는 우연히 들른 술집에서 면을 기름에 튀기는 것을 보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수분이 달아나 오래 보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치킨 라면’을 선보였다. 이 라면은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고 전 세계인의 식생활 판도까지 바꾸었다. 생을 마칠 때까지 매일 하루 한 번 라면을 먹었다고 밝힌 그는 ‘라면의 아버지’로 불린다.
라면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오뚜기 관계자는 “제조방법, 조리방법, 맛에 따라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팔린 라면 종류만 해도 2만1594가지가 넘는다. 라면 제조방법은 크게 기름에 튀긴 유탕면과 튀기지 않고 뜨거운 열풍에 말린 비유탕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건면은 기름에 튀기지 않아 열량이 낮다는 장점이 있어 다이어트 대용식으로도 찾는 이가 많다.
조리방법도 국물 타입, 비빔 타입, 볶음 타입으로 나뉜다. 맛은 그 나라의 대표 입맛에 따라 좌우된다. 일본의 ‘쇼유’ ‘시오’ ‘미소라면’, 한국의 매운맛, 인도네시아의 미고랭 맛, 베트남의 레몬그라스 향을 꼽을 수 있다.
라면 소비량은 인구 대국 순이다. 중국은 매콤한 소고기 국물 홍샤오(紅燒)맛, 매운 시앙라(香辣)맛, 시큼한 쑤안차이(酸菜)맛 등 유탕 라면이 전체의 99%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난해 404억 개를 소비했다. 이어 인도네시아(132억 개), 일본(55억 개), 베트남(48억 개), 미국(42억 개), 한국(36억5000만 개) 순이다. 눈여겨볼 점은 1인당 라면 소비량. 한국이 72.8개로 1위다. 2위인 인도네시아, 베트남(각 51.9개)과 20개 이상 차이가 날 정도로, 라면 사랑이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여느 집 주방을 슬그머니 열어 봐도 라면은 빠지지 않고 있다.
이에 맞춰 국내 라면의 경쟁력 역시 괄목할 수준에 올라왔다. 국내시장 규모는 1998년 1조 원, 라면이 소개된 지 50년 만인 2013년에는 연간 2조 원 규모를 넘어섰다. 지난해 시장 규모는 2조16억 원. 그동안 라면 제품의 트렌드도 닭고기 육수, 짜장 라면, 컵라면으로 불리는 용기 면의 등장, 재료의 고급화에 맞춘 순면·웰빙면, 하얀 국물 라면의 등장과 퇴조, 전통의 빨간 국물 라면의 인기 회복, 굵은 면발에서 올해 하반기에는 부대찌개까지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한때 쇠기름(우지) 파동(1989년)으로 업계 전체가 큰 타격을 받기도 했다.
해외 진출도 1960년대 말 월남전 파병 국군 장병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처음 공급했던 때를 떠올리면 이젠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1969년 삼양식품이 삼양라면을 일본에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농심, 오뚜기, 팔도 등이 앞다퉈 수출에 나섰다. 미국, 중국, 동남아시아, 유럽 등 100여 개국에 수출되는데 지난해 기준으로 2445억 원을 기록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맵고 얼큰한, 강한 맛이 입맛을 잡은 비결로 꼽힌다.
심규철 농심 면 마케팅팀장은 “1986년 출시 후 누적매출 10조 원을 넘어선 ‘신라면’은 세계 최대 항공사인 미국 아메리칸 항공에 기내식으로도 제공되고 있다”며 “해발 4000m가 넘는 스위스 융프라우, 히말라야산맥, 지구 최남단으로 남극의 관문인 칠레 마젤란 해협의 푼타아레나스에서도 팔리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오뚜기 측은 “1988년 1월 ‘진라면’으로 라면 시장에 진입한 후 2위에 올라섰다”며 “라면 개발 연구 때면 전국 인기 면요리 집을 모두 찾아 맛을 분석하고 조리, 맛, 면을 연구한 후 실제 음식 맛과 같게 재현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데 이런 점이 국내외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라면은 모두가 굶주렸던 1960년대, 값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구황 음식’으로 출발했다. 이후 외환위기, 경기침체기에 오히려 성장하며 서민의 동반자로 깊숙이 자리 잡았고 지금은 맛과 품질이 업그레이드되며 꾸준히 인기를 얻어 향후 제2의 도약 여부가 주목된다. 업계 관계자는 “2조 원대 시장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서기 위한 업계의 신제품 개발 노력이 치열한 만큼 성과를 지켜볼 만하다”고 말했다.
이민종 기자 horizon@munhwa.com
■ 치킨의 역사
‘치코노미’ 50년… 1960년대 명동영양센터 통닭 첫 등장
《 만약에 치킨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식탁은 얼마나 쓸쓸했을까요. 서민경제의 애환을 고스란히 반영해온 치킨 산업 50년을 되돌아 봤습니다. 》
50년 전만 해도 그냥 하얀 맨몸이었다. 상자에 담긴 닭 한 마리는 이제 다양한 옷을 입는다. 노란색 ‘튀김옷’을 입은 고소한 프라이드치킨부터 빨간색의 매콤한 양념치킨, 진한 갈색의 짭짤한 간장치킨, 파를 액세서리처럼 두른 담백한 ‘파닭’까지. 1만 원 내외의 닭 요리는 반세기 역사가 지나면서 시장 규모 3조1000억 원(2011년 말 기준)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4만 개에 이르는 전국 치킨집 사장님은 오늘도 닭을 튀기며 꿈을 키우고 있다.
○ 백숙에서 파닭까지… 치킨 산업 50년
우리나라에 치킨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60년대 닭 요리 전문점인 ‘명동영양센터’(서울 중구 충무로1가)가 전기구이 통닭을 만들면서부터다. 그전까지 닭 요리는 주로 삶아서 조리한 백숙이나 삼계탕이 대부분이었다.
치킨을 기름에 튀기는 ‘프라이드’ 형태가 나타난 것은 해표 식용유(1971년)가 등장한 1970년대부터다. 1977년 서울 중구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 지하에 생긴 ‘림스치킨’은 ‘통닭’(프라이드치킨) 시대를 처음으로 연 브랜드이자 치킨 프랜차이즈 산업의 효시로 여겨진다.
치킨산업은 1980년대 ‘페리카나’와 ‘처갓집양념통닭’ 등 양념치킨을 앞세운 브랜드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1982년 프로야구 출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으로 스포츠 붐이 일고 레저 활동을 즐기는 인구가 크게 늘면서 간식으로 치킨을 먹는 사람이 늘어났다. 페리카나가 개그맨 최양락을, 처갓집양념통닭이 ‘쓰리랑부부’(김미화 김한국) 등 유명 연예인을 앞세워 광고를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는 “치킨은 한국 사회에서 맥주와 곁들여 먹는 술안주, 가족 단위 사회에서 집에서 ‘시켜 먹는’ 배달 음식, 간편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한국인을 위한 간식 등으로 자리매김했다”며 “그만큼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여러 가지 요소와 맞는 부분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교촌치킨(1991년)과 BBQ(1995년) 등 1990년대 이후 생겨난 브랜드들은 본격적으로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핑클’ ‘신화’ 등 아이돌 가수들을 앞세운 스타 마케팅 시스템을 도입했고 간장치킨이나 올리브유치킨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했다.
2000년대 들어 참살이(웰빙) 열풍 등으로 치킨을 멀리하는 분위기가 일자 튀기지 않고 오븐에 구워 낸 ‘굽네치킨’(2005년)이나 ‘구이치킨’(2008년), 파를 넣은 ‘파닭’ 등 건강 관련 요소를 넣은 치킨들이 생겨났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는 ‘할인 치킨’이 주목을 받았다. 2010년 롯데마트가 내놓은 한 마리 5000원짜리 ‘통큰 치킨’이나 두 마리를 한 마리 값에 파는 ‘두 마리 치킨’ 등이 대표적이다.
○ 프랜차이즈 산업의 꽃이 됐지만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 직장을 나온 가장들이 치킨집을 잇달아 창업한 것은 치킨산업이 양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프랜차이즈 치킨 전문점은 2002년 말 9000개에서 2011년 말 2만5000개로 3배 가까이로 늘었다. 하지만 문을 닫는 점포도 많다. 지난 10년 동안 휴업을 하거나 폐업한 점포수도 5만 개나 되고 이 중 41%인 2만 개가 최근 3년 내에 휴업 또는 폐업을 했다.
많은 사람이 치킨 전문점이 포화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조동민 한국프랜차이즈협회장은 “1인당 한 해 닭고기 소비량(2011년 말)을 보면 미국은 48kg, 일본이 26kg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12kg밖에 되지 않는다”며 “1인당 소비 측면에서 보면 치킨 시장은 여전히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치킨 신흥도시로 떠오른 제주
국내의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은 2000년 6.9kg에서 2011년 11.4kg으로 늘었다. 이러는 사이 치킨을 소비하는 데도 지역별 특색이 나타나게 됐다. 본보는 국내 치킨 프랜차이즈 1위 업체인 ‘제너시스BBQ’와 함께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 동안 △1인당 치킨 소비량 및 치킨 매출 △치킨 타입 선호도 △주류 매출 등을 지역별로 통계를 뽑아 분석해봤다.
그 결과 지난해 1인당 치킨 소비액이 가장 많은 곳은 제주도로 1년에 1인당 5560원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서울(5543원)이나 경기(5472원), 부산(4624원) 등 대도시보다 높은 수치다. 주상집 제너시스BBQ그룹 세계식문화과학기술원 원장은 “전통적으로 흑돼지, 말고기 등 타 지역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다양한 종류의 육류를 섭취하는 문화가 발달했고 이것이 치킨에 대한 관심 및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며 “특히 최근 제주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을 중심으로 치킨 소비가 늘어 제주가 새로운 치킨 소비 도시가 됐다”고 말했다.
프라이드치킨과 양념치킨 등 치킨 타입 선호도도 지역마다 달랐다. 프라이드치킨을 상대적으로 많이 먹는 곳은 전북, 양념치킨을 더 많이 먹는 곳은 제주, ‘반반 메뉴’를 선호하는 곳은 경남으로 나타났다. 치킨을 주문할 때 맥주를 함께 주문하는 빈도에서는 가족 단위 휴양지가 많은 강원 지역이 1위로 나타났다. 주 원장은 “전국 공통 메뉴를 내놓았던 프랜차이즈 업체들도 이제는 각 지역에 맞는 메뉴를 내놓는 등 현지화 전략으로 차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범석·황수현 기자 bsism@donga.com
■ 소주 이야기
‘자도주→저도주→지방주’ 반전의 반전
#1. ‘지글지글’ 끓는 김치찌개와 ‘칙칙칙칙’ 익어가는 삼겹살 한 점. 밥 한 공기 가득 담아 앞에 놓고, 상추 쌈도 푸짐하게 얹었다. 뭔가 허전하다. 그렇다. 요놈 없으면 서운하지. ‘똘똘똘똘’ 소주 한 잔을 가득 채워 따른다. 크게 쌈 하나 싸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가 두 손가락으로 곱게 잡아 소주를 톡 털어 넣는다. 마저 씹고 나서 찌개 국물 한 숟갈. 누구도 부럽지 않다. 세상사가 버거워도, 울분을 토할 벗이 없어도 지금 이 순간은 괜찮다.
#2. ‘일하다가 배고픕니다, 소주 마십니다. 외롭습니다, 소주 마십니다. 힘듭니다, 소주 마십니다. 일이 남았는데 잠 쏟아집니다, 소주 마십니다. 다칩니다, 소주로 씻어내고 소주 마십니다. 선장이 지랄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 저도 마십니다. 동료와 시비 붙습니다, 소주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그러다 다시 싸우고 또 소주 마십니다. 여자 생각 간절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잘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안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항구로 돌아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한창훈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아니면 그냥. 어떤 이유든 소주는 사람을 달랜다. 가격도 싸다. 많이 안 마셔도 금방 취한다. 소주가 서민의 술이 된 이유는 꽤 명확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해 동안 마시는 총 주류 소비량의 40%는 소주다. 비중은 맥주가 더 크지만 한 번에 마시는 양이 소주보다 많다는 걸 고려하면 서민의 진짜 친구는 소주라고 봐야 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한 명이 한 해 동안 약 60병의 소주를 마신다.
사실 소주가 우리네 삶과 밀착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이 주로 먹던 술은 탁주(濁酒)와 청주(淸酒) 두 가지였다. 천년 가까이 이어진 탁주(濁酒)와 청주(淸酒)와 대결엔 승자가 없었다. 부(富)와 빈(貧)이 있었을 뿐이다. 누룩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탁주는 서민의 술이었다. 곡식이 귀하던 시절, 멥쌀(또는 찹쌀) 한두 되면 탁주 한 동이가 금방 만들어졌다. 한 대접 크게 들이키면 취기가 돌고, 포만감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 덕에 뙤약볕 밑 벼 베기도 거뜬했다. 지방마다, 집집마다 맛을 내는 방법이 달라 ‘김가네 술이 최고요, 박가네 술은 덜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왕이나 귀족은 멥쌀로 만든 청주를 마시고, 백성들은 이렇게 좋은 술은 못 마시고 맛이 짙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고려도경). 청주는 귀했다. ‘술독 한 항아리에서 얻는 맑은 술은 고작 너댓 병’(동국이상국집)에 불과했다. 술독 위에 맑게 뜨는 액체만 건져낸 것이니 당연했다. 왕이나 양반이 변변찮게 백성이 먹는 술을 마실 수 있나. 예나 지금이나 귀하게 걸러낸 술은 가진 자의 몫이었다. 지방마다 정성껏 만든 청주를 한양의 임금께 진상했으니 요즘 전통주라고 불리는 술의 출발점이다.
이런 양강구도를 흔들 술 제조법이 고려 말에 등장했으니, 한반도에 진출한 몽골이 전수한 소주(燒酒)였다. 소주는 글자(燒)에서 알 수 있듯 끓여서 만드는 술이다. 증류해 이슬처럼 받는다 해서 노주(露酒), 색깔이 없다 해서 백주(白酒)로도 불렸다. 몽골의 침략 당시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안동에서 만들어낸 소주가 바로 지금도 유명한 ‘안동소주’다. 지금도 이런 증류식 소주를 팔지만 대개는 비싸다. 우리가 흔히 먹는 소주는 희석식 소주다. 쌀이나 보리, 고구마 등으로 당밀을 만들고, 이를 연속식 증류기에 넣어 나온 에탄올(주정)에 물을 타 만든다. 여기에 각종 첨가물(감미료)을 섞어 맛을 내고 주정과 물의 비율로 도수를 조절한다.
희석식 소주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965년. 정부가 식량 부족을 이유로 양곡을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 생산을 금지한 때다. 서울은 ‘진로’ 대구는 ‘참’ 광주엔 ‘보해’와 같은 지역별 소주 브랜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쯤이다. 그러다 25도 소주가 출시된 1974년부터 수퍼에서 간단히 사다 먹는 술로 빠르게 대중화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탁주(약주 포함)의 비중이 78.9%에 달했지만, 1980년대 들어 탁주 소비량은 급격히 줄고, 소주는 대중주로 자리를 잡았다. 불과 40년 만에 서민과 가장 가까운 술이 된 셈이다.
[소주 전쟁 1라운드] ‘자도주 보호’ 업고 지역별 영토 다툼
소주의 대중화가 시작된 1970년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소주 업계에선 치열한 영토 다툼이 전개됐다. 그 중심엔 ‘자도주의무구매’란 특이한 보호 규정이 있었다. 1976년 정부는 일부 업체의 시장 독점을 방지하고, 지방 소주 업체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자도주 보호 규정을 신설했다. 시도별로 1개의 업체만 소주를 생산하고, 생산량의 50%를 해당 시도에서 소비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규정 때문에 1970년 254개에 달했던 희석식 소주 제조 업체는 10년 뒤 11개로 크게 줄었다. 대신 살아남은 기업에겐 확실한 먹거리가 보장됐다. 수도권에선 진로가 이름을 날렸고, 부산은 대선, 경남은 무학, 전남은 보해가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이 규정은 1989년 한 차례 40%로 완화됐다가 1992년 완전히 폐지됐다. 그러나 3년 뒤 다시 부활했고, 1996년 헌법재판소가 ‘자도주를 50% 이상 구입하도록 한 주 세법은 자유경쟁원칙에 위배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린 뒤에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도주 보호법 폐지를 계기로 1위 진로는 본격적으로 전국 진출에 나섰다. 1960년대까지 삼학과 치열한 선두다툼을 했던 진로는 삼학의 도산 이후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95년 당시 진로의 시장점유율은 49%에 달했지만 그중 75%는 진로의 텃밭인 서울과 수도권에서 거둔 것이었다. 진로로서는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지방 소주 업체를 공략하는 게 필수 과제였다. 반대로 지역 소주 업체들은 든든한 안방을 바탕으로 수도권 진출에 나섰다.
치열한 점유율 전쟁이 예상됐지만 승부는 예상외로 쉽게 끝났다. 진로는 전국 확장에 성공한 반면 지방 업체들은 수도권 공습에 실패했다. 2000년대 초 진로가 부산·경남·전남·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1위로 올라섰지만 수도권에서 진로의 아성을 무너뜨린 소주 업체는 없었다. 강원도 자도주였던 경월이 1994년 출시한 그린소주로 수도권 점유율 30%선에 올라선 게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공습에 실패했다. 2000년대 초 진로가 부산·경남·전남·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1위로 올라섰지만 수도권에서 진로의 아성을 무너뜨린 소주 업체는 없었다. 강원도 자도주였던 경월이 1994년 출시한 그린소주로 수도권 점유율 30%선에 올라선 게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
1993년 두산에 인수된 경월은 이후 롯데주류로 주인이 바뀌었다. 롯데주류가 2006년 내놓은 ‘처음처럼’은 지금도 진로 ‘참이슬’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전국구 소주다. 소주의 맛 경쟁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대부분의 제조사가 ‘우리 소주는 다르다’는 콘셉트를 내세워 앞다퉈 신제품을 내놨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전후로 수출용 또는 관광업소용 소주가 출시됐고, 1989년 진로가 종이팩 소주를 발매하는 등 용기와 병 디자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소주 전쟁 2라운드] ‘반격의 서막’ 치열한 저도주 경쟁
순조롭게 영역을 넓히게 된 진로가 패권을 장악하는 듯했지만 변수가 생겼다. 소주 시장에 저도주 열풍이 분 것. 1990년 중반 시작돼 2000년대 본격화된 저도주 경쟁은 진로의 주력 제품 ‘참이슬’의 최대 라이벌인 ‘처음처럼’이 등장하는 배경이 됐고, 다른 군소 주류 업체에게도 반격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소주 시장의 저도주 바람은 1980년대부터 감지됐다. 1985년 대선주조가 20도의 ‘순한 선’으로 저도주화를 시도한 적은 있지만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고, 25도가 일반적인 소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해양조와 무학이 1992년과 1993년 알코올 도수를 파격적으로 낮춘 ‘보해 라이트’(15도), ‘무학 화이트’(15도)를 각각 출시하면서 시장의 반응을 살폈다.
1994년에는 두산경월이 ‘그린(Green)’을 선보였다. 그린은 엄밀한 의미에서 저도주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주류 업체에 긴장감을 줬다는 점에서 저도주 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제품은 당시 투명했던 기존 소주병의 색깔을 녹색으로 바꾸고 ‘대관령 청정수’를 사용해 ‘부드러운 술’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거친 향과 쓴 맛이라는 소주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것이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출시 7개월 만에 1억병이 팔려나갔다. 두산경월이 진로의 아성인 수도권 시장을 넘보기 시작한 것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린의 성장은 시장의 절대강자 진로를 움직이게 했다. 진로는 저도주의 등장에도 처음엔 다소 느슨하게 방어를 했다. 그러나 두산경월이 자사의 수도권 점유율까지 넘보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도수를 21도로 낮춘 ‘나이스’를 출시해 대항마로 내세웠다. 소주 원래의 맛을 좋아하는 기존 고객을 지키면서도 순한 술인 나이스로 두산경월의 공세를 막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중소 업체의 저도주 공세는 계속됐다. 1996년 대선주조가 부산 지역 소비자를 겨냥해 내놓은 ‘시원’이 성공을 거뒀고, 무학과 금복주·하이트주조도 차례로 ‘NEW화이트’, ‘참소주 스페셜’(이상 23도), ‘보배 20도’(20도)를 출시하며 본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서, 잃었던 자도 시장의 일부분을 찾기도 했다.
저도주 경쟁 지켜보던 진로의 역습 ‘참이슬’
당시의 저도주 바람은 ‘웰빙 열풍’과 관련이 깊다. 경제 성장으로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마시고 취하는 독한 술에서, 즐길 수 있는 순한 술을 찾기 시작한 것. 다만, 엄밀히 말하면 순한 술 경쟁이라기보다 ‘좋은 술’ 경쟁이라고 보는 게 맞다. 실제로 당시 보해양조의 ‘김삿갓’과 ‘곰바우’, 금복주의 ‘독도’, 두산경월의 ‘청산리 벽계수’와 ‘청색시대’, 진로의 ‘참나무통 맑은 소주’ 등 이른바 프리미엄 소주가 연이어 출시됐다. 각종 기능성 첨가물을 포함시키고 첨단 여과공법을 적용한 소주가 등장했다. 프리미엄 소주의 식당 가격은 4000원으로 일반 소주(2000원)보다 비쌌지만 경기가 호황인 덕에 꽤 잘 팔렸다. 당시의 웰빙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주류 업체 입장에서도 자도주 보호 규정이 사라져 무한경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위해 저도주, 프리미엄 소주의 개발이 절실했다.
그러나 프리미엄 소주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 말 들이닥친 외환위기 때문이다. 이때 저도주 경쟁도 잠시 멈췄다. 주류 업체가 순한 소주, 프리미엄 소주 등 신제품을 공격적으로 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경기 호황이란 배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자 주류 업체도 주력 제품에 집중하는 ‘원 브랜드’ 전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때까지도 25도 이하 소주는 주력 제품이 아니었다. 각 업체의 핵심 브랜드는 25도로 유지한 채 저도주 상품을 별도로 만들어 팔았다. 업체 입장에선 순한 술을 원하는 ‘일부’ 소비자를 위한 생산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한 마케팅 비용도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중소 주류 업체의 실험적인 저도주는 마케팅과 유통 측면에서 대형 업체에 비해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1998년 그동안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진로는 저도주 경쟁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듯이 새 브랜드 ‘참이슬’을 선보였다. 도수를 23도로 내린 저도주를 주력 제품으로 내세운 것이다. 출시한 이후 맹렬한 기세로 판촉전을 벌였다. 판매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국내 소주 사상 최단 기간, 최다 판매량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25도 이하 소주는 1997년 말 전체 소주시장의 17.8%에 머물렀으나 참이슬이 출시된 1998년 말에는 34.7%, 그 이듬해에는 과반을 넘어섰다. 그만큼 참이슬의 영향이 컸다. 덕분에 주춤했던 진로의 전국 시장점유율이 다시 절반을 넘어선 51.4%(2001년)에 이르렀다.
이는 진로의 성공이기도 했지만 다른 주류 업체에게도 ‘순한 술이 잘 팔린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더구나 값이 비싼 프리미엄 제품은 내리막이지만 웰빙 트렌드는 여전했다. 또 외환위기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었고, 마케팅 차원에서 여심(女心) 공략도 중요해졌다.
이 틈을 저도주가 채워갔다. 지방 소주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저도주를 주력 제품으로 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진로는 맞불 작전으로 시장을 지켰다. 경쟁 업체가 22도 소주를 출시하면 참이슬도 리뉴얼을 통해 22도로 낮추는 식이다. 이로 인해 소주의 저도주화는 계속돼 참이슬은 2001년 2월 22도로, 2004년 2월에는 21도로 낮아졌다. 각 주류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순한 술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참이슬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그렇게 2000년대 초반 진로의 독주 체제가 이어졌다.
16도 이하 참이슬·처음처럼 나올 수도
2006년 복병이 등장했다. 두산주류에서 출시한 ‘처음처럼’이다. 과거 저도주 경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경월그린의 후손 격이다. 처음처럼은 세계 최초로 알칼리 환원수를 쓰고 알코올 도수를 20도 이하로 낮췄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한 술을 저어하는 여심을 파고들었다. 참이슬도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처음처럼 출시 이튿날 바로 20.1도짜리 제품을 내놔 맞대응했다. 그러나 처음처럼의 공세는 예상보다 날카로웠다. 가격정책을 병행한 때문이다.
당시 두산은 처음처럼의 공장 출고가를 730원으로 고지했다. 종래 21도였을 때 유지됐던 800원에서 무려 70원(8.75%)이 낮아진 수준이다. 영업이익의 희생을 감수한 전략이었다. 반면 참이슬 기존 21도 제품과 같은 800원을 유지했다. 이를 통해 처음처럼은 출시 당시 전국 5.2%, 수도권 7%였던 시장 점유율을 2006년 말 전국 13.7%, 수도권 22.1%로 크게 끌어올렸다.
처음처럼의 기세에 놀란 하이트진로는 같은 해 9월 19.8도짜리 ‘참이슬 후레쉬’를 출시했다. 업계에서 마지노선이라 여겨지던 20도 벽을 깬 것이다. 참이슬 후레쉬는 날카로운 처음처럼의 예봉을 꺾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미 처음처럼이 진로의 철옹성에 균열을 낸 후였다. 언제부턴가 식당에서 “소주 한 병 주세요”라고 하면 “어떤 걸로 드릴까요?”하고 되묻게 된 것이 균열의 단적인 증거다.
이후 처음처럼과 참이슬은 장군멍군 식으로 알코올 도수를 낮추고 있다. 20도로 출시된 처음처럼은 2007년 19.5도, 2012년 19도, 2014년 2월 18도로 낮춘 데 이어 지난해 11월부터 17.5도로 생산하고 있다. 참이슬 후레쉬 역시 2007년 8월 19.5도, 2012년 19도, 2014년 2월 18.5도로 낮춘 뒤 지난해 11월 17.8도로 맞췄다. 한 주류 업계 관계자는 “지방에서 16도 대인 ‘좋은데이’와 같은 소주가 잘 팔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이슬과 처음처럼도 16도 이하로 내려갈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전망했다.
중앙일보 글=함승민, 장원석 이코노미스트 기자
■ 소주의 역사
우리나라에 증류식 소주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고려 말이다. 곡식이 많이 필요하고 만드는 방법이 까다로워 일부 양반가에서만 마실 수 있는 귀한 술대접을 받았다. 소주가 대중화되는 데는 일제시대에 세수 증대를 위한 조치로 공장식 소주를 대량 생산하게 되면서부터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희석식' 소주로,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섞어 만든 것이다. ‘35도에서 16도까지’ 낮아지는 저도주의 인기를 시작으로, 여성 고객을 공략한 과일소주, 탄산주까지 나오는 등 변화를 맞고 있다.
■ 증류식 소주 vs. 희석식 소주의 차이
소주는 증류방법에 따라 증류식과 희석식 소주로 구분한다. 증류식은 단식증류기를 사용해 알코올 농도가 45% 내외인 반면, 희석식 소주는 연속식증류기를 이용해 95% 이상의 고농도 알코올인 주정을 만든다. 95% 가량 되는 알코올 도수를 물과 첨가물을 넣어 20∼35%로 희석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소주의 대부분이다
■ 전국 소주 기행(紀行)
국내 여행의 재미 중 하나는, 바로 그 지역만의 특색이 담긴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의 묘미를 느끼며 그 지역의 음식을 즐길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바로 그 지역에서 즐기면 더욱 맛있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지역별 소주다.
지역별 소주가 생긴 이유
정부는 1973년 지방 소주 업체를 육성한다며 1도(道) 1사(社) 규정을 만들었다. 이 규정 때문에 1970년까지만 해도 200여 개였던 소주 업체는 통폐합을 통해 10년 뒤 10여 개로 대폭 줄었다. 1976년에는 주류 도매상들이 사들이는 소주의 50% 이상을 자기 지역 소주회사에서 사도록 하는 '자도주(自道酒) 의무구입제도'도 마련했다. 이 자도주 보호규정은 1996년 헌법재판소의 "자유경쟁원칙에 위배된다"는 위헌 결정에 따라 폐지됐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해당 지역 소주 제조업체의 지역 정서 호소 활동 등으로 각 지역에서 생산된 소주가 선호됐다.
1998년 10월 19일 하이트진로가 알코올 도수 23도의 '참이슬'을 출시하기 전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25도였다. 기존 도수보다 2도 낮춘 '참이슬' 출시 2년 만에 하이트진로는 전국 시장 점유율 50%대라는 안정적인 기반을 갖게 된다. 2조 원으로 추정되는 국내 소주 시장에서 업계 1위 지위를 단단하게 다졌다. 출시 당시 23도 제품으로 출발한 '참眞이슬露'은 리뉴얼 과정을 통해 현재는 20.1도로 도수가 낮아졌으며(現 참이슬 클래식) 17.8도 참이슬 후레쉬와 함께 국내 소주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불판 위의 중용, 고기 맛으로 먹는 서울식불고기
밤을 지킨 이들이 모여드는 삼겹살집
최강육질 암퇘지에 파김치와 갈치속젓은 환상 궁합
우리는 삼겹살이 식상하다고 한 적 없다
▲인기 소주 안주들 - (왼쪽 위부터)쭈꾸미 숙회, 닭발, 돼지껍데기, 오돌뼈, 대창, 골뱅이, 삼겹살, 감자탕, 홍합탕 /방송캡처, 조선 DB
두산주류는 2006년 알코올 도수 20도의 '처음처럼'으로 참이슬에 반격을 시도했다. 두산주류는 1993년 강원도 소주 업체인 경월소주를 인수했고, 이후 2009년 롯데주류에 인수됐다. '처음처럼'은 출시 17일 만에 1천만 병, 6개월도 안 돼 1억 병이 판매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렸다. 소주 원료의 80%가량을 차지하는 물을 '알칼리 환원수'로 바꾸고, '물 입자가 작아 목 넘김이 부드러운 소주', '세계 최초 알칼리 환원수 소주'임을 강조해왔다.
동해바다 겨울 별미, 속초항 양미리와 도루묵
동해안의 겨울 별미 삼총사, 대진항 도치·장치·곰치
오징어 순대 만들기… 술 안주로도 제격
15년간 잠복해왔다… 몰라주면 '섭'(홍합) 하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도루묵·양미리 구이, 오징어 순대, 도치알탕, 장치찜 /조선 DB
충북의 대표적 향토기업인 ㈜충북소주의 '시원한 청풍'은 일라이트(illite)* 정제공법을 도입해, 부드럽고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청풍명월의 본향인 제천시 청풍면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일라이트(illite): 육각수를 만드는 음이온을 다량으로 발생시키는 견운모의 일종으로 수중에서 다량의 용존산소를 발산하고 물분자를 활성화시키는 성분으로 알려져있다.
금강이 선사하는 여름 보양식, 영동 도리뱅뱅이 '어죽'
내륙에서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충북 진천 '향토음식'
▲(왼쪽부터) 도리뱅뱅이, 붕어찜, 어죽 /조선 DB
대전·충남 지역의 대표 소주인 맥키스컴퍼니의 'O2린'은 청정산소를 3단계에 걸쳐 주입해 용존 산소량을 3배로 높였다며, 부드럽고 산뜻한 소주의 맛을 강조하고 있다.
한 겨울 진미, 굴… 찝찔한 짠내 배인 돌의 속살을 맛보다
충청도에 놀러갔다면 마늘탕수육과 생선국수 먹어야죠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굴 구이, 물잠뱅이탕, 간재미 회 무침, 굴전, 굴 보쌈, 생선국수 /월간산, 조선 DB
'참이슬'로 전국 소주 시장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하이트진로는 2013년에 지방 소주 회사 '보배'와 합병했다. 1957년에 설립된 보배는 전북지역의 대표적 소주 회사로 1997년 하이트진로 계열에 편입됐다. 현재 하이트진로의 '하이트'는 전북 지역의 대표 소주로 참이슬과 함께 하이트진로의 1위 굳히기에 일조하고 있다.
'맛 좋고, 몸에 좋은' 향토음식 찾아 떠난 전북 식도락 여행
▲ 왼쪽 위부터) 풍천 장어, 백합죽, 애저찜 /조선 DB
보해양조의 주력 제품인 '잎새주'는 광주·전남 지역의 대표 소주다. 보해양조는 작년, 잎새주 리뉴얼을 통해 8년 만에 디자인을 바꿨고, 라벨 상단에 캐나다산 메이플 로고를 넣어 '메이플 소주'임을 강조했다. 천연 감미료인 캐나다 청정 단풍나무 수액 함량을 높였다고 한다. 잎새주의 고향인 남도 음식과의 궁합과 소비자 트렌드를 반영해 알코올 도수를 18.5도로 기존 제품 대비 0.5도 낮췄다.
빌빌 꼬아 먹어도, 탕탕 썰어 먹어도 맛좋은 낙지
구워먹고 삶아먹고, 요래조래 다 맛있는 겨울 조개
꽃피는 봄엔 탁 쏘는 홍어 한 접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꼬막 무침, 꼬막탕, 홍어 삼합, 낙지, 해물탕, 민어찜, 민어 부레 /월간산, 조선 DB
금복주의 '맛있는 참' 소주는 대구와 경북 지경의 자도주로 52.9%로 과반을 점하고 있다.(2015년 3월 기준)
영남 내륙에서 만난 진부령 황태
포항~영덕 일출 찾아 떠난 겨울바다 별미 여행
동장군이 날 데리러 오거든 과메기 한 점에 취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술 안주만으론 아까운… 영양만점 제철 이 음식
▲(왼쪽 위부터) 황태해장국, 황태찜, 과메기, 대게, 고래고기, 물회, 참문어, 장바우감자탕, 갱시기 /월간산, 조선 DB
좋은데이
무학이 2006년 출시한 소주 '좋은데이'는 '~데이'라는 부산 사투리에 '좋은'이 더해져 탄생했다. '좋다'와 'Good day'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친근감 있는 명칭으로 부산·경남을 대표하는 소주로 자리매김했으며, 청정 샘물을 사용한 16.9도의 초 저도(低度) 소주로 인기를 얻고 있다. 2015년에는 '좋은데이 컬러시리즈'를 출시하여 수도권에도 돌풍을 일으켰지만, 차차 과일 맛 소주 인기가 떨어지면서 무학의 수도권 소주 시장 점유율이 낮아졌다.
C1
부산 소주 시원(C1)으로 잘 알려진 대선주조㈜는 올해로 86년 사업 경력을 자랑하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향토기업이다. 2014년 출시한 '시원블루'는 '2015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대상을 받고, 세계 3대 국제주류품평회 IWSC와 몽드셀렉션에서 각각 동상과 은상을 받는 등 국내외로 맛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2015년 말에는 '순한시원'을 내놓아 부산의 저도 소주 시장에 새로운 출사표를 던졌다.
화이트
화이트는 무학이 지난 1995년 1월 '자연을 그대로 담은 소주'를 컨셉으로 선보인 소주다. 화이트 소주는 이후 여러 번의 리뉴얼을 거쳐 현재 19도에 이르렀으며, 좋은데이와 함께 무학을 대표하는 소주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옥석 갈린 지방소주… 무학, 2위 넘볼 만큼 약진
오향장육과 만두에 '부산 소주' 한 잔
탕반민족에서 탄생한 부산 돼지국밥
직화작렬, 매력 만점 부산 양곱창구이
▲(왼쪽 위부터) 오향장육, 돼지국밥, 만두, 양곱창
제주도의 술로 가장 널리 알려진 건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한라산' 소주다. 술 좀 마신다는 제주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하얀 병 노지 것'을 즐겨 찾는다. ('노지 것'은 냉장고 밖 상온에 둔 소주를 말한다.) 21도의 꽤 높은 도수를 자랑하는 한라산 소주를 미적지근하게 해 더 독하게 마시는 것이다. 제주도의 식당에서 한라산 소주를 주문했을 때 "어떤 걸로 드려요?"라고 묻는다면 차가운 것과 노지 것, 이 옵션을 기억하면 좋다.
진한 노지 한라산 소주를 즐겨 마시는 애주가들이 여전히 많지만, 부드러운 술을 선호하는 트렌드에 따라 계속해서 도수를 낮춘 초록색 병의 '한라산 올래'도 출시 됐다.
'한라산 소주' 해외서도 잘 나가네!
"삼다도 제주에는 먹을거리도 多多"
한라산도 식후경
제주 토박이 추천 별미 4선
▲(왼쪽 위부터) 제주 흑돼지, 고기국수, 전복 삼합, 생선회, 고사리 고기 지짐, 몸국 /조선 DB
■ 전국에서 가장 독한 소주는?
조선일보 큐레이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