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雄 朴正熙11/ 2018.04.19(월간조선 05월호) 김상현 - 박정희 전두환 등 정치 비하인드 - 박정희 어록
英雄 朴正熙11
2018.04.19(월간조선 05월호) 김상현 - 박정희 전두환 등 정치 비하인드
김상현과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의 중 김대중 총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김상현 의원. 두 사람은 만남과 결별을 되풀이 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 6선 의원을 지낸 원로정치인 김상현 전 의원이 4월 18일 저녁 타계했다. 향년 83세.
기자는 2001년과 2012년 김상현 전 의원을 인터뷰했었다. 첫 번째 만났을 때에는 스트레스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취재지원하고 있던 이동욱 기자가 동석(同席)했다. 기자의 취재가 끝난 후 김 전 의원은 이동욱 기자에게 1968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어찌나 재미있게 이야기하던지 마치 내가 두 사람이 만나는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만남이 끝날 무렵 기자는 그에게 "지역감정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책임이 더 크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2012년 11월 1일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 그의 이야기를 싣기 위해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호텔에서 김상현 전 의원을 다시 만났을 때, 기자는 깜짝 놀랐다. 발을 끌면서 들어오는 모습, 작고 기운 없는 목소리…. 전에 만났던 김 전 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고 퇴원한 직후였다. 그래도 그는 성심껏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두 번째 만남은 12월 3일이었다. 김상현 전 의원은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목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DJ에게 누가 될 만한 얘기는 삼갔다. “DJ에게 서운한 건 없느냐?”고 물으면 “이젠 그런 얘기 할 나이는 아니지 않소”라며 말을 돌렸다. 다만 민추협이나 2·12총선 당시의 이야기를 할 때, 중간중간 서운함이 느껴졌다. 자신과 DJ와의 관계를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나는 개인적으로는 DJ를 형님으로 모셨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등한 동반자였다. DJ를 맹종(盲從)한 동교동 가신들과는 다르다’하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식(舊式)정치인, 그러나 상쾌한 구식정치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그렇게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일관되게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주장해 왔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우리 정치풍토에서는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 ‘사꾸라’라고 하는데, 그런 시련 속에서도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신념을 놓지 않은 그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왕사꾸라’였다. 그리고 그가 우리 정치판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사꾸라’가 활짝 피었다면, 오늘날 우리 정치는 이토록 삭막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 소개했던 이야기 가운데 고인과 박정희-김대중-김영삼-전두환 전 대통령과 관련된 몇 장면을 소개한다.
#1. 박정희와의 만남
- 박정희, 정국경색 풀기 위해 대화 제의하자 바로 청와대로 불러
1967년 6월 8일 치러진 제7대 총선에서 정부와 여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공화당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129석을 차지했다. 야당 의석은 신민당 45석, 사회대중당 1석을 합쳐 46석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이 이렇게 무리수를 둔 것은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신민당의 부정선거 규탄 투쟁으로 정국은 얼어붙었다. 1968년에 접어들면서는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이 발생한다.
나는 안팎의 위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여야(與野) 영수(領袖)회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야당 안에서는 정권과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 ‘사꾸라’로 몰리는 풍조가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3월 6일 유진오 당수를 만나 영수회담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 당수는 “내가 영수회담을 제안한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받아주겠느냐?”면서 회의적(懷疑的)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럼 제가 먼저 국회의원 입장에서 박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유진오 당수의 비서인 박찬세씨를 통해 이후락(李厚洛) 청와대비서실장에게 대통령 면담신청을 넣었다.
다음 날 나는 서울시청 인근 뉴서울호텔 커피숍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전 11시경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 내 앞으로 연락이 온 것이 없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그 시절에는 그런 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전화를 받은 아내는 “청와대에서 이후락 실장이 아침부터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빨리 연결시켜 달라고 재촉이 심했다”고 말했다. 아내가 불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이후락 실장이 직접 받았다.
“아이고, 김 의원님. 왜 이렇게 통화가 어렵습니까? 각하께서 김 의원님의 면담신청을 받고 바로 만나자고 하십니다. 2시까지 들어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청와대로 갔더니 이후락 실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나를 안내했다. 집무실로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확대경으로 무슨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김 의원, 이거 좀 보시오. 김신조가 얘기한 비행장 시설을 고공(高空)촬영한 것이오. 비행장 시설 하나는 참 잘해 놓지 않았소?”
잠시 후 박 대통령은 자리에 앉았다. 이후 나는 박 대통령과 정치 현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석유세법 통과 등 정부정책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여야 관계의 경색 등에 대해 박 대통령이 여당이나 정보기관으로부터 일방적인 보고만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을 박 대통령에게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김 의원을 만나고 있는 것 아니오? 오늘 오전 시민회관에서 전국 도지사 회의에 참석하고 나오는데 이 실장이 김 의원의 면담신청에 대해 말하기에, 12시부터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지금 나에게 면담신청을 해놓은 여당 의원이 62명이오. 그걸 제쳐놓고 김 의원을 만나기로 한 겁니다.”
이때다 싶어 나는 여야 영수회담 얘기를 꺼냈다.
“이런 어려울 때일수록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여야 영수회담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박 대통령은 흔쾌히 응낙했다.
“좋습니다. 어떤 형식을 취할지는 야당 편한 대로 하세요. 내 쪽에서 회담을 먼저 제의하는 형식으로 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하고, 유 당수 쪽에서 먼저 제의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장소도 꼭 청와대가 아니라 우이동 같은 데도 좋습니다.”
옆에서 이후락 비서실장이 거들었다.
“각하. 김상현 의원이 각하께 면담신청을 한 것은 오늘날 야당 분위기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칫 사꾸라로 몰려서 정치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대통령은 “김 의원 입장이 그렇다면, 오늘 김 의원이 오신 건 비밀로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내 임기가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았소. 만약 앞으로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하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을 하시오.”
“만에 하나라도 그런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각하와의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헤어지기 전 박 대통령은 말했다. “김 의원이라면 문을 열고 기다릴 테니 언제든지 연락하시오.”
박 대통령은 이후락 실장에게 뭐라고 귀엣말을 하고 난 후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 실장은 잠깐 자기 방에 들렀다 가라며, 2층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이 실장은 “각하께서 드리는 것”이라면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받으면 내가 여기 온 뜻이 없어진다”며 사양했다.
내가 정계에 입문할 때, 민주당 원로인 이상철 전 국회부의장이 “정치를 하자면 돈이 필요한데, 정치자금을 받을 때는 생선 먹듯 하라”고 한 적이 있다. 가시 있는 생선을 먹으면 목에 걸리고, 부패한 생선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 나중에 탈이 날 수 있는 돈은 받지 말라는 얘기였다.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이 나와 박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발표하자 난리가 났다. 이발을 하다 말고 달려온 유진오 당수에게 나는 “이번은 첫 영수회담이니만큼 무엇을 한번에 얻겠다고 하기보다는 시국 전반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했다.
그런데 다음 날 유진오 당수 댁으로 갔더니, 그의 안색이 안 좋았다. 그는 “다 틀렸소, 다 틀렸소”라며 탄식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 중진들이, 만약 영수회담을 하면 사꾸라로 몰려 내 정치생명이 죽는 것은 물론, 우리 신민당까지 큰일 난다고 합디다.”
나는 모처럼 열린 박정희 정권과의 대화 창구가 막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이후 보름 동안 유진오 당수 댁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영수회담 수용을 권했다. 하지만 유 당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당내에서는 “김상현이 지가 뭔데 대통령과 면담을 하느냐?”는 성토의 소리가 나오더니, 급기야 중앙당 부·차장단에서 내 화형식까지 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김상현이가 체구는 작지만, 화형식에 사용할 허수아비만큼은 좀 큰 것으로 해달라”고 전했다. 화형식은 유야무야됐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과 유진오 당수의 영수회담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이런 야당을 보면서 ‘저런 야당에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 2. 김대중의 71년 대선 출마
- 대선 출마 제안하자 "내가 하나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3선 개헌을 막지 못한 야당은 무력감(無力感)에 빠져들었다
이를 깨고 나온 사람이 김영삼(金泳三) 원내총무였다. 그는 1969년 11월 8일,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40대 기수론(旗手論)’의 막이 오른 것이다. 김영삼 의원의 출마선언은 광복 이후 60대 장로(長老)들이 지배해 온 야당 풍토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뉴서울호텔에서 김대중 의원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김영삼 의원이 대선출마 선언을 했는데, 형님도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하십시오.”
김대중 의원은 깜짝 놀랐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하나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출마선언을 한단 말인가?”
김대중 의원은 그때까지 출마를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사실 1953년 3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민중당·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한 김영삼 의원과는 달리, 김대중 의원은 의정(議政) 능력을 인정받고는 있었지만 대변인 이외에는 별다른 당직을 맡지 못했었다. 내가 말했다.
“출마선언이 곧 준비의 신호탄 아니겠습니까? 출마선언을 하면 사람도 모이게 마련입니다. 이번에 출마선언을 하지 못하면, 영원히 못하게 됩니다.”
“생각해 볼 테니, 하루만 시간을 주소.”
다음 날 우리는 뉴서울호텔 인근 한식집 풍림에서 만났다. 김대중 의원은 대선에 나서겠다고 했다. 김대중 의원은 1969년 11월 18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듬해 2월 12일에는 이철승(李哲承)씨가 출마 의사를 피력했다.
결국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박정희 후보는 634만2828표(득표율 53.2%)를, 김대중 후보는 539만5900표(득표율 45.2%)를 얻었다.
선거 결과가 나온 후 나는 김대중 후보에게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성명을 내고 박 대통령에게 축하화분을 보내주라고 권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그런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화를 벌컥 냈다.
“이 사람아, 자네 말을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라며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치는데, 박정희의 당선을 인정하면 어떻게 하나?”
“부정선거를 못 막은 것도 우리의 능력 부족입니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합시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대통령 취임식은 꼭 참석하라고 권했다. 김대중씨도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7월 1일 아침, 동교동으로 전화를 걸자 김대중씨가 전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아니 취임식에 안 가고 왜 형님이 전화를 받으십니까?”
김대중씨는 불쾌한 목소리로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큰일 났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박 대통령과 김대중씨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중씨의 앞날이 걱정됐다. 나는 택시를 타고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사가 끝나려는 참이었다. 공화당의 길재호, 김성곤씨가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아이쿠, 김 의원이라도 와줘서 정말 고맙소.”
#3. 전두환, 권총으로 자기 가슴 겨누며 “나는 아무 야심이 없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79년 11월 24일, 재야인사들은 서울 명동 YWCA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유신헌법 철폐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최규하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것이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다. 나는 이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됐다. 보안사 요원들은 이름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내가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어 깨운 후 다시 팼다. 보안사에서는 DJ를 YWCA 사건의 배후조종자, 나를 조직책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잡혀 들어가, 제일 많이 얻어맞았다. 그때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왼쪽 시력에 이상이 왔다. ‘타박성 백내장’이었다. 옆방에서 박종태 전 의원이 매를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YWCA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연행된 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더 이상 매를 맞지 않았다. 연행된 지 6일째 되는 날,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李鶴捧, 민정수석비서관·안기부2차장·13대 국회의원) 대령이 찾아왔다.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보시겠습니까?”
“못 만날 것 없지요.”
하도 맞아서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나를 좌우에서 두 사람이 부축해서 이학봉 수사국장의 방으로 데려갔다. 점퍼 차림의 전두환 사령관은 조니 워커와 오징어 등 마른안주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 의원께서 약주를 좋아하신다기에, 술이나 한 잔 하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장군이 말했다.
“조사를 해보니, 윤보선씨가 이번 사건을 주동했더군요. 즉각 연행해서 철저히 조사를 할 생각입니다.”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그때 윤보선씨가 김지하 시인에게 자금을 대준 것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검사가 그때 안국동 윤보선씨 댁으로 가서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갖춰 조사했지, 수사기관으로 연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아, 그랬습니까? 알겠습니다.”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두환 장군은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점퍼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권총을 뽑더니, 자기 가슴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보안사령관을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오늘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게는 다른 야심이 없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아, 이 사람은 야심이 있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전 장군은 내게 시국수습방안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밤 9시20분쯤 시작된 대화는 3시간 정도 계속됐다. 나는 최규하 정권을 강화시키고, 각계각층의 대타협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해야 하며, 군부의 정치개입은 안 된다고 역설했다.
다음 날 이학봉 수사국장이 찾아와 어제 전두환 사령관과 나눈 이야기를 문서로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연행된 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20여 일쯤 지났을까. 이학봉 국장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연락해 왔다. 1차 술자리를 마치고 2차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국장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 김대중씨와 손을 끊으세요. 그래야 형님이 삽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누구와 손을 끊는다는 게 세수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인 줄 아나?”
#4. 민추협과 YS와 DJ
- DJ, 신한민주당 창당 당시 "신당 창당을 중지하라.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절교한다"
1982년 8월, 나는 2년3개월 만에 출감했다. 이듬해 5월 18일, YS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23일간 계속된 그의 단식은, 1980년 5·17비상계엄확대 이후 숨죽이고 있던 민주화운동세력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계기가 됐다.
그해 6월부터 옛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조연하·김록영·박성철(김대중 후보 경호실장)·예춘호·박종태·양순직·박종률·김창환(金昌煥, 8대 국회의원)·최영근(崔泳瑾, 5·6·13대 국회의원)씨 등이었다. 우리가 모임을 가질 때면 안기부나 경찰에서 나와 감시를 했다.
나는 “후광(後廣·DJ)이 없는 이상, 거산(巨山·YS)과 대화를 해서, 거산을 간판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심하게 반대했다. YS가 1979년 5·30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총재가 된 후 동교동계를 소외시켰던 일, 1980년 5·17조치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한동안 침묵했던 일 등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YS는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민주국민회의라는 것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회장은 이민우(李敏雨, 4·5·7~10·12대 국회의원, 신한민주당 총재) 전 국회부의장, 대변인은 김덕룡(金德龍, 13~17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였다. 나와 조연하·김록영씨도 이사로 되어 있었다. 나는 김 전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항의했다.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는데, 민주국민회의 이사라뇨? 동교동과 상도동이 힘을 합쳐 민주화운동을 하려면 신뢰가 회복되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민주국민회의부터 해체하십시오.”
내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YS는 민주국민회의를 해체하겠다고 했다. 이때부터 동교동과 상도동 사이에 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 논의가 시작됐다. 동교동에서는 나와 조연하·김록영·예춘호씨가, 상도동에서는 YS·이민우·최형우·김동영(金東英, 9·10·13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가 나왔다.
1984년 5월 18일 출범을 선언한 민추협은 그해 7월 12일 민추협 사무실 개소식을 열었다.
YS는 정치인과 재야가 연합하는 국민연합 같은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인들만으로 조직을 꾸리자고 주장했다. 재야와 정치인의 조직이 일원화(一元化)되면 투쟁방법에 경직성을 가져오게 된다, 정치인과 혁명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때 이미 재야 일각에서는 남북교류나 통일, 주한미군 문제 등에 대해 급진적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었는데, 정치인과 재야가 연합할 경우, 이런 문제에 대한 이견(異見)으로 조직이 표류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이러한 걱정은 후일 전통 야당이 재야세력을 대거 영입하면서 현실화됐다.
조직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도 논란이 있었다. 나는 ‘민주화추진간담회’를 주장했다. YS는 ‘민주구국투쟁동지회’라는 명칭을 주장했다. “투쟁을 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간담회가 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과거에 구호만 과감하고 거창했지 행동이 따르지 못해 국민들을 실망시키곤 했잖습니까? 명칭이야 온건하더라도 투쟁을 과감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YS는 ‘구국’과 ‘투쟁’이라는 단어에 집착했다. 나는 타협안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내놓았다. YS도 동의했다. ‘민추협’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제 지도부를 구성할 차례였다. 나는 YS를 찾아가 김대중 위원장-김영삼 부위원장 체제를 제안했다. “김대중 선생은 미국에 계시지만 투쟁은 국내에서 하는 것입니다. 김 총재(YS)께서는 부위원장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위원장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대승적 견지에서 큰 바둑을 두십시오.”
하지만 YS는 난색을 표명했다. 그는 김영삼-김대중 공동의장 체제를 제안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DJ를 공동의장으로 할 경우,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일일이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DJ를 고문, YS를 공동의장으로 하되, 동교동에서 공동의장을 내기로 했다.
동교동계에서는 누구를 공동의장으로 하느냐를 놓고 논의 끝에 조연하 전 의원이 나를 추천했다. 김록영·박종률 전 의원도 찬성했다.
동교동계에서도 나이가 어린 축이었던 내가 공동의장으로 추천되자 상도동에서는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DJ가 아닌 동교동 인사가 공동의장을 맡는 것은 YS의 격(格)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공동의장제에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나는 공동의장이 아니라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다음 날 YS는 ‘공동의장 권한대행’도 곤란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럼 민추협을 깨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동의장-공동의장 권한대행으로 낙착을 봤다.
1984년 5월 18일,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민추협 출범식이 열렸다. 정보기관원들과 전투경찰들이 회의장 주변을 에워쌌다. 민추협에 참여하기로 했다가, 기관의 협박을 받고 그만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모 회사에서 한 달에 얼마씩 받고 있어서 참여하는 것은 어렵겠다”고 말한 모씨의 경우는 그나마 양심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가석방 중이던 내게도 다시 수감하겠다고 위협했다.
민추협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50대 50으로 만든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도, YS가 한 번 하면, 다음에는 내가 한 번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내가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YS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저런 놈하고 같이 공동의장이 되었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꼭 이렇게 발표했다.
“고문 김대중, 공동의장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씨가 돌아오면 공동의장을 맡기기로 하고, 공동의장 권한대행 김상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김 총재(YS)께서 사회도, 기자회견도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교동계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조연하·김록영·박종률·박성철 씨 등이 “왜 김영삼이 혼자서 회의를 진행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형님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쪽 사람들이 모두 팍 찌그러진 인상들인데, 이거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소화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김 총재보고 다 하라고 했소.”
나는 민추협을 하는 동안, 한번도 내가 YS와 동렬(同列)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공식회의 석상이 아니면, 뒷자리로 물러나 앉았다.
민추협을 만들면서 나는 미국의 DJ에게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공작이 끼어들 수도 있어, 일이 잘못될 경우, 그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DJ도 나의 진정을 알아줄 것으로 믿었다. 그와 30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나는 늘 그런 생각으로,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민추협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교동계는 소극적이었다. 미국에 있는 DJ도 ‘김영삼씨와 함께하는 민추협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그래서 민추협은 ‘정치인들의 조직’이라는 원칙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교동 가신(家臣)들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동교동계 정치인들 중에서도 박영록·박종태·양순직·최영근 전 의원 등은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이 참여한 것은 1985년 DJ 귀국 이후였다. 전반적으로 DJ나 동교동계는 내가 강하게 밀고 나가니까 어쩔 수 없이 민추협 활동에 끌려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정치적·인간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김상현이가 김대중 선생과는 관계없는 사조직(私組織)을 만들고 있다”, “김대중 계보를 김영삼에게 팔아먹었다”는 얘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정보기관 돈을 받고 하는 짓이다”라느니 “전두환의 지시를 받고 하는, 전두환 앞잡이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재야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총선에 참가하는 것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총선을 보이코트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관제(官製)야당인 민한당(민주한국당)을 대신하는 선명야당을 만들어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후자(後者) 쪽이었다.
조연하 전 의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신당(新黨)을 만들어 만석(晩石·조윤형)을 당수로 밀자”고 했다. 나도 기꺼이 동의했다.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아들로 7·8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윤형 전 의원은 유신선포 직후 보안사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3년 가까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던 민주투사였다.
당시 조윤형 전 의원은 민한당 입당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얘기를 듣고 난 후 그는 민한당 입당을 재고(再考)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에게 민한당 입당을 강하게 권한 사람은 DJ였다. 이때 민한당행(行)을 택한 조 전 의원은 2·12총선 후 잠깐 민한당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이후 민한당이 신민당에 흡수된 뒤 정치적으로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199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미국에 있던 DJ가 미국에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 활동을 하고 있던 심기섭씨를 보내왔다. 평창동 북악파크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DJ의 장남 김홍일씨가 동석했다. DJ의 메시지는 강경했다.
“김대중 선생은 신당 창당을 중지하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절교한다’고 통지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번에도’라는 것은 DJ의 소극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민추협 결성을 밀어붙인 것을 말했다. 나는 “‘국내 정세를 감안해서 대처하고 있으니, 그 점은 내게 맡겨달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DJ의 방침에 따라 권노갑씨 등 동교동 가신들은 2·12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DJ는 조윤형·정대철씨 등의 민한당 입당에 주안점을 두면서, 나를 통한 신당 추진, 민주헌정연구회 등을 통한 재야활동 등 3트랙(track) 전술을 썼던 게 아닌가 싶다.
#5. 에피소드-김상현과 YS와 DJ
정치권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
<1987년 대선을 앞두고 DJ가 통일민주당에서 탈당,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자 김상현 전 의원은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노태우 정권 초기, 한번은 DJ가 YS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국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DJ가 말했다.
"거기 후농(김상현)이 있지요? 그 사람, 이름 석자만 빼고는 다 거짓말인 사람이니 조심하시오."
YS는 짓궃게도 이 이야기를 김상현 전 의원에게 했다. 그러자 김상현 전 의원은 바로 받아쳤다.
"DJ는 이름 석 자도 거짓말인 사람입니다!">
정계원로인 P 전 의원을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그거 맞는 얘기요"라고 했다. "그 현장에 내가 있었거든. 후농(김상현 전 의원)과 함께 YS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 올라갔는데, 마침 YS가 DJ와 통화하면서 그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내가 직접 들었지."
김상현 전 의원을 만났을 때,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김 전 의원은 "에이, 그런 일 없어요"라고 부인했다. 정계도 은퇴한 마당에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 느껴졌다.
글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9.04.15 "朴正熙, 경제성장으로 중산층 형성… 자신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선택"
'매국노 이완용 사례'로 본 인간 이해의 착잡함… 김병익 前 문학과지성사 대표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인 김병익(81)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만난 것은 계간지 '본질과 현상'에 실린 그의 글을 보고 나서였다. '인간 이해의 착잡함'이라는 10쪽 분량의 글인데 매국노 이완용의 사례로 시작했다.
〈이완용은 육영공원(고종 때 세운 최초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으며 주미 공사관의 첫 외교관으로 근무한 친미파(親美派)의 수령급이었다. 또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독립공원 건설을 추진했다. 반일(反日) 정책을 표방했던 그가 친일파로 돌아서 을사늑약(1905년)과 한일 병합에 앞장섰다. 나는 '친일파'라는 한마디 낙인으로 한 시대의 거물을 단색적으로 색칠하며 그의 전면을 단정 짓는 것에 대해 동요를 느꼈다…〉

▲김병익 선생은 "우리 사회가 오직 남의 약점을 들춰내는 '혐오 사회'로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그가 이런 동요를 느끼게 된 계기는 3·1운동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과 이완용 사이에 있었던 일화(逸話)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손병희 선생이 이완용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했다는 것이나, 이완용이 '매국적(賣國賊ㆍ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라는 이름을 이미 들은 나는 그런 운동에 참여할 수 없소. 이번 운동이 성공하여 내가 그렇게(맞아죽게) 되면 다행한 일이겠소'라며 사양한 것도 놀라웠다. 그러면서 이완용이 이 비밀 거사를 알면서도 일본 경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도…〉
자칫 '매국노 이완용'을 변호하는 것처럼 비칠 경우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기 때문에, 그는 '이완용이 친일 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회의나 이의를 갖는 것은 아니다. 독립선언 운동의 낌새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용서받을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단서를 달아놓았다.
그는 통화에서 "나는 현업에서 완전히 물러난 사람인데 괜한 소음을 일으킬까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며칠 뒤 우리는 광화문에서 만났다.
"한 세기 너머 전의 이완용이 내게 달려들어 인간 이해의 방법에 대한 회의를 안겨줬습니다. 어떤 악한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아무리 성자적인 생애를 살았던 사람도 범용한 인간다움을 가지게 마련이며,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론적인 한계가 있는 겁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친일인명사전' 집필에도 참여한 윤덕한(경향신문 기자 출신)이라는 분이 몇 년 전 '이완용 평전'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면서 '매국노 이완용'과는 다른 모습의 이완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친일파 단죄'에 앞장섰던 그는 자칫 이완용 변호가 될까봐 책 쓰는 걸 중도에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알게 된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무자비한 일차원적 사유로 인간을 난도질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습니다. 이완용이란 당대 최고의 거물을 '친일파'란 단 한마디 말로 몰아 그 인격적 존재 전체를 단정할 수 있을까. 저는 이런 점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회장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고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서 독립문 상단의 '獨立門(독립문)' 글자를 썼지만 역사학자들조차 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당혹스럽기 때문입니다. 1897년 독립신문 사설에는 '이완용이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외세에 저항했다'는 구절도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한마디 말로 그의 전 생애(生涯), 그의 모든 존재성을 한 색깔로 색칠해 버립니다. 저는 이완용의 행적을 보면서 인간 이해가 간단치 않다는 걸 느낍니다. 그의 '친일 논리'도 나라의 절망적인 파탄기에 그 희생을 조금 줄일 방법으로 고위 지도적 인사나 지식인들이 고민한 의제 중 하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의 친일 매국 행위가 변명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당시 고종(高宗)은 무력했고, 민비와 대원군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외세와 결탁했으며, 조정 대신들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던 나라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악역을 이완용이 맡았던 셈입니다. 그런 이완용에게 망국(亡國)의 책임을 모두 떠넘겨 버리면 우리가 역사에서 얻을 교훈은 없어지는 것이지요.
"저는 역사적 인물 평가의 단편성에 대해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최근 공중파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선언문을 누가 썼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육당 최남선을 말하는 겁니까?
"육당이 친일(親日)을 했다고 그 이름은 지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합니다. 그는 당당한 애국자였고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뒷날 변절한 부분에 대해서만 비판하면 됩니다. 요즘 몇몇 전통 있는 학교에서 작곡가가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교가(校歌)를 교체한다는 뉴스도 봤습니다. 서정주의 시(詩)가 교과서에서 빠졌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전체주의처럼 '친일파'라는 기준만으로 그 인물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친일파' 문제는 현 정권에서 쟁점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오늘의 기준에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친일파' 낙인을 찍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따져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거 정권 시절 '빨갱이' 낙인도 그렇습니다. 40여 년 전 저는 남산에 며칠 연행된 적 있었는데 어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앞집 부인이 내게 '빨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살아온 인생이 그 한마디로 모두 부정됩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그는 한국기자협회장을 맡으면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1975년 신문사는 그를 해직했다.
"늙어서도 현장을 뛰는 기자로 남는 게 꿈이었는데 10년 만에 직장을 잃었지요. 그 뒤 문학평론가 김현 등과 함께 '문학과지성사'를 설립했지요. 하지만 제가 정말 좋아했던 기자 일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주진 못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겠군요.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떠했습니까?
"독재자가 장기 집권을 하려면 가난하고 무식하게 만드는 빈민 정책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을 이뤄 중산층이 형성됐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배반당할 선택을 한 겁니다. 그의 서거 소식을 들은 날 '민주주의는 중산층에 의해 이뤄진다.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가 중산층을 형성해 이들이 민주주의 주체가 되면 박정희는 재평가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독재자가 죽었으니 자유를 찾았다'가 아니고, 박정희 재평가를 내다봤다는 겁니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5공 정권에서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중산층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박정희 정권에서 행해진 탄압과 분열 정책의 후유증은 오래갈 것으로 봤습니다.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후유증이 더 악화된 측면이 있었지요."
―그때 문학과지성사가 강제 폐간됐지요?
"1980년 7월인데 창간 10주년 기념호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발행 목적 위배로 등록 취소한다는 공문을 받았지요. 창간 10주년 기념호는 교정쇄(校正刷) 상태로 50부 복사해 가까운 사람들끼리 돌려봤습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도 원한이 있겠군요?
"개인적으로 피해를 봤지만 5공 정권에도 공과가 있다고 봅니다. 해방된 뒤로 으레 있는 걸로 알았던 '통금(通禁)'이 그 정권에서 풀렸어요. 이는 일상적 삶의 해제가 아니라 우리 의식의 해방을 가져왔습니다. 컬러TV, 프로야구, 반도체, 광대역통신망 사업이 5공에서 시작됐습니다. 물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5공 정권은 우리 국민이 경제적으로 가장 호황을 누렸던 시기였지요. 하지만 전두환은 '5·18 낙인'이 찍혀 어느 누구로부터도 변호받지 못하는 '절대악'처럼 됐지요.
"선입견 없이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하는데 아직은 시대 상황, 민심, 여론에 구속될 수밖에 없지요. 전두환의 경제수석이었던 김재익씨 평전을 읽고 있는데, '정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라면 누구 밑에서도 일하겠다. 경제성장이 되면 그 나라는 저절로 민주주의가 정착된다'라고 나옵니다. 그가 5공에 합류할 때 손가락질했는데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실 역대 대통령 중 재평가돼야 할 분은 노태우 같습니다."
―노태우는 언급 자체가 안 되는 잊힌 대통령이지요..
"군부의 보수성을 지닌 노태우 정권이 중국과 소련과 국교를 맺었습니다. 신도시를 만들어 주택 문제를 해결했고요. 민주화를 가장 많이 누렸던 시기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민간 정부로의 정권 이양을 연착륙시켰지요."
―일제 식민지와 6·25를 겪은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경제와 민주화 양면에서 놀라운 진전을 이뤄냈습니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성공 사례입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과거의 어두운 면에 더 많이 붙들려 있습니다.
"압축성장의 대가를 계속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쪽으로 치우쳤던 시계추가 반대편으로 갔다가 평형을 유지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겁니다."
―문제는 어떤 세력이나 집단이 정치적 의도를 위해 군중의 분노와 적개심을 부추기는 데 있습니다.
"정치나 언론이 그런 정서 속에 놓여있고 대중은 휩쓸리고 있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정의'나 '적폐 청산'의 명분으로 과거를 정죄(定罪)합니다. 어떨 때는 우리 사회가 오직 남의 약점을 들춰내는 '혐오 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 정권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 우위에 서 있다는 착각을 해왔습니다. 그게 얼마나 허황됐는지 이미 드러났습니다만.
"저는 문재인 대통령 개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정의나 올바름에 대한 정념이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관용이나 사랑이 빠진 정의는 위험합니다. 그런 정의는 단지 정적(政敵)에 대한 보복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저는 '역사의 관용'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2019.07.29 "박정희가 밀어붙이고 정주영이 돈키호테처럼 도전… '中東 신화' 만들어
초대형 사업 '주바일 항만 공사'를 어떻게 따냈나… 홍순길 前 사우디 주재 건설관
정말 위대한 일이 벌어졌지만 역사가 제대로 평가를 못 하는 경우가 있다. 홍순길(89) 선생은 '45년 전의 사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 유양수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정주영 회장 등 당시 직접 관계된 인물은 다 돌아가셨다. 주위에서 제게 책으로 남기라고 권유했지만 게으르고 글 솜씨가 없어 그걸 못했다"며 입을 열었다.
1974년 그는 월남 대사관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서 건설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상대로라면 전쟁 중인 월남에서 4년 근무를 마친 그는 귀국해서 본부 국장을 맡아야 했다. 그런 그에게 사우디 대사관으로 전보 발령이 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동 건설 시장 개척을 위해 중량급 건설 공무원을 배치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초대형 사업 '주바일 항만 공사'를 어떻게 따냈나… 홍순길 前 사우디 주재 건설관
정말 위대한 일이 벌어졌지만 역사가 제대로 평가를 못 하는 경우가 있다. 홍순길(89) 선생은 '45년 전의 사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 유양수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정주영 회장 등 당시 직접 관계된 인물은 다 돌아가셨다. 주위에서 제게 책으로 남기라고 권유했지만 게으르고 글 솜씨가 없어 그걸 못했다"며 입을 열었다.
1974년 그는 월남 대사관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서 건설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상대로라면 전쟁 중인 월남에서 4년 근무를 마친 그는 귀국해서 본부 국장을 맡아야 했다. 그런 그에게 사우디 대사관으로 전보 발령이 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동 건설 시장 개척을 위해 중량급 건설 공무원을 배치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홍순길 선생은 "사우디 정부의 차관이 현대건설 사람도 아닌 내게 입찰 초청장을 줬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중동 진출이 막 시작될 때였어요. 어느 날 사우디에 출장 온 정주영 회장을 집으로 초대했어요. 제 나름대로 한식을 준비했으나 정 회장은 찬물에 밥 말아 오이지로만 식사했어요. 식사 내내 시시껄렁한 여성 편력 얘기를 늘어놓다가, 끝날 때쯤 '우리나라는 유가(油價) 인상으로 재정 형편이 어려워 부도 직전이고 부총리와 재무장관은 외채를 빌리러 다닌다. 왜 그런 구걸 행각을 해야 하느냐. 사우디 정부는 이번 공사 수주 업체에 공사비 10억달러의 25%를 선수금으로 주겠다고 한다. 그걸 받으면 1억달러는 외환은행에 예치해주고 1억5000달러만 공사 준비에 사용하겠다'고 했어요."
1973년과 74년 중동발(發) '오일 쇼크'가 터졌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이 석유 1배럴당 2달러80센트를 18달러로 전격 인상했다. 사우디로부터 60만배럴씩 수입해온 우리나라는 급등한 원유 대금을 지불하기 어려웠다. 국제 경기 침체에 수출까지 줄면서 최악의 외환 위기를 맞았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우리 외환은행 수표가 부도 처리되는 일이 발생했다. 정부 관리들이 뉴욕 금융시장을 돌면서 100만달러, 200만달러씩 긁어모으는 구제 금융을 교섭하고 다녔다.
"우리나라가 부도나느냐 마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산유국들은 넘쳐나는 '오일 머니'로 도로, 항만, 공항 건설 등에 대대적으로 투자했어요.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맞아 한국 정부는 원유 대금을 지급하기 위해 중동으로 빠져나간 달러를 건설 시장에 진출해 되찾아 오자는 역발상을 했습니다. 당시 국내 건설 회사들은 대형 공사를 수주하기에는 재정과 기술 능력이 뒤처져 있었는데,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중동 진출'을 밀어붙였습니다."
―미국과 유럽 업체들이 이미 진출해 공사를 독점하는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것이지요?
"다른 길이 없었으니까요. 박 대통령이 정부 승인을 받은 해외 진출 건설업체에 국내 주거래은행이 무조건 지불 보증을 해주도록 '해외건설촉진법'을 제정하라고 했어요. 남덕우 부총리와 김용환 재무장관이 '그러다가 그 업체들이 부도나면 나라가 정말 어려워진다'며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건설업체가 맡은 공사를 성실하게만 하면 돈을 벌어 올 수 있다'며 밀어붙였어요. 보증 한도를 늘릴 수 있게 이 업체들이 함께 '해외건설주식회사'를 만들도록 했어요. 중동 거점인 사우디와 이란에 직통 텔렉스를 설치하고 출국 절차도 간소화하게 했습니다."
그 무렵 사우디 정부는 아랍만(灣)에 인접한 도시 주바일의 초대형 항만 건설을 입찰에 부쳤다. 해상에 철제 구조물의 부두를 만들어 30만t급 대형 유조선 두 대가 동시 접안할 수 있게 하는 사업이었다. 사업비는 당시 한국 세수 총액의 5분의 1에 해당됐다.
"정주영 회장이 이 공사 입찰 참여를 밝혔지만 실적 미흡으로 불가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현대조선소도 있고 항만 건설의 경험과 실적이 풍부한데 단지 작은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입찰 참여를 막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반발했지요. 그날 우리 집에서 정 회장은 '오늘의 현대를 만들면서 무수한 난관과 시련을 극복했는데 나는 어려운 고비마다 아버지 꿈을 꾼다. 이번에 사우디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아버지 꿈을 꿨다. 정부가 외교 교섭으로 현대가 입찰할 자격만 받도록 해주면 나는 공사 입찰을 따낼 자신이 있다'고 했어요."
―정부가 나서서 입찰에 응할 자격을 딸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건가요?
"그렇지요. 외교적으로 푸시해달라는 것이었죠. 그는 '귀국하면 박 대통령을 만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는 자신만만하게 얘기했지만 우리는 가당치 않게 여겼어요. 당시 현대건설이 미국·유럽 업체와 경쟁하기에는 한참 뒤떨어졌으니까요. 게다가 기업인이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가 귀국해서 박 대통령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얼마 안 돼 '모든 경제 각료와 사우디 대사는 현대건설이 10억달러 주바일 항만 공사 입찰에 참가할 수 있도록 사우디 정부와 교섭을 다하라'는 이례적인 훈령이 떨어졌으니까요. 부총리와 건설부 장관이 사우디까지 날아와서 사우디 정부와 교섭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입찰 자격 기준 미달이라 설득이 안 됐습니다."

▲주바일 항만 공사 현장의 정주영 회장(오른쪽). /조선일보DB
―정부가 나서서 특정 민간 기업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합니까?
"현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오늘의 현대는 우리 국민과 정부에 많은 빚이 있는 겁니다. 저도 한낱 건설관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뛰었어요. 월남 근무 시절 저와 친했던 미국의 마틴 대사가 먼저 사우디 주재 대사로 와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사우디의 담당 장관을 소개받았지요."
사우디 장관이 '회교를 믿느냐? 회교를 믿으면 도와주겠다'고 하자, 그는 즉시 '믿겠다'고 답했다. 이는 빈말이 됐지만, 어쨌든 장관은 미국 대사와 친분 있는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저는 장관에게 '비록 미국과 유럽 업체들이 먼저 진출해 있지만 한국은 월남전에서 미국식 공사 수행 방식을 익혔다. 훨씬 낮은 단가로 똑같은 기준과 품질의 공사를 해낼 수 있다'고 설득했지요. 그를 한국으로 초청해 새마을 사업 현장과 여의도 아파트 단지 등을 보여줬습니다. 깊은 인상을 줬던 모양입니다. 그 뒤로 사우디 왕자와 다른 장관들도 한국에 다녀갔어요. 몇 달 전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일행의 방한(訪韓)도 따지고 보면 1970년대 맺어진 관계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지요."
여섯 달 동안 거의 매주 한 번꼴로 그는 담당 장관을 만났다. 대사관이 있는 제다에서 비행기로 수도인 리야드로 날아가야 했다. 본국에서는 텔렉스로 '홍순길이 장관을 만나 무슨 말을 나눴느냐? 사우디 쪽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는 식의 전문이 내려왔다.
"시간이 갈수록 본국에서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제게 매달렸어요. 어느 날 장관이 제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이번 입찰에 응한 미국 브라운루트사가 몇 년 전 부산항 확장 공사를 맡았을 때 하청받은 현대건설이 트럭 두 대로 돌을 실어 나르는 장면이다. 어떻게 이런 회사가 대형 공사 입찰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몇 차례 회의를 했지만 다들 부정적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어요."
최후 불가 통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본국에 '더 이상 할 수가 없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본국에서는 '장관실에 가서 드러눕더라도 꼭 해야 한다'는 식으로 지시가 내려왔다.
―현지 사정을 모르는 상부의 지시에 불만이 있었겠군요.
"박 대통령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럴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대통령이 주재하는 경제장관회의에서 그분이 말없이 연필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건설부 주택과장이었던 저는 경제기획원 물가과장과 함께 말석으로 회의에 참석해왔습니다. 당시 경제 측정 지표가 물가 동향과 주택 허가 면적 추이였기 때문이었지요. 경제 개발은 해야 하는데 돈은 없으니 대통령의 고심이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연필로 톡톡 두드리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최후통첩을 받고도 다시 찾아갔다는 뜻이군요.
"다시 찾아가니 경비원이 아예 출입을 막았어요. 때마침 청사에 들어오는 장관이 이 장면을 보고 안쓰러웠는지 같이 들어가자고 했어요. 그는 사무실로 차관을 부른 뒤 '어차피 능력이 안 돼 떨어질 건데 입찰 자격까지 못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어요. 며칠 뒤 차관이 사무실로 불러 현대건설 사람도 아닌 내게 입찰 초청장을 줬습니다. 10개 업체가 입찰에 초청됐는데 제일 끝에 현대가 들어 있었습니다. 현대건설 사우디 지사장에게 이를 전해주면서 함께 만세를 불렀어요."
공사 입찰에서 모든 예상을 깨고 현대건설이 우선협상자가 됐다. 외국 업체들은 사업비로 13억달러를 써냈는데, 현대만 9억3600만달러를 적었던 것이다.
"문제는 해저 40m에서 용접과 콘크리트를 해서 철제 구조물을 설치해야 하는데 현대는 그런 기술이 없었어요. 정 회장은 입찰에서 탈락한 미국 브라운루트사를 찾아가 기술자들을 돈 주고 사왔어요. 놀라운 역발상이었지요. 당시 네덜란드 회사가 아랍만(灣)에 1200t 크레인을 세워놓고 조명을 비추며 자랑했는데, 현대는 더 큰 1500t 크레인을 끌고 와 똑같이 했습니다."
현대는 이 초대형 공사를 따내면서 국내 재벌 1위로 뛰어올랐다. 본격적인 중동 진출도 이뤄졌다. 최악의 경 제 위기에 몰렸던 한국은 1977년에는 수출 100억달러 돌파와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1975과 1980년 사이 우리가 벌어들인 달러의 85%가 중동 건설에서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밀어붙이고 정주영 회장이 돈키호테처럼 도전한 것이 '중동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시점에 제가 건설관으로 근무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묘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2020. 07.28 朴통 재떨이, ‘COREA’ 골프백 곧 본다…개관 앞둔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셍전 사진. [중앙포토]
경북 구미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진 가칭 '박정희 역사 자료관'이 '박정희 대통령 역사 자료관'이라는 정식 간판을 걸고 곧 개관한다. 지난 15일 10명으로 꾸려진 역사 자료관 전담팀 인사 발령이 났고, 학예사 모집, 관장 공모 절차에도 착수했다.
15일 자료관 전담팀 인사발령
학예사, 관장 공모 절차 시작
연말 전 준비 마치고 개관키로
'박정희 대통령 역사 자료관'으로

▲박정희 대통령 역사 자료관. 건물은 다 지어져 있다. [사진 구미시]

▲박정희 대통령 역사 자료관 조감도. [사진 구미시 제공]
구미시 관계자는 21일 "박정희 전 대통령 자료관 내부 꾸밈을 조만간 마치고 연말 전 정식 개관한다. 현재 조례상으로는 유료 운영이 예정된 상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준공한 역사 자료관은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생가 옆에 있다. 연면적은 4358㎡. 지하 1층은 수장고, 지상 1층과 2층은 전시실과 사무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상당수의 전시 콘텐트는 박 전 대통령 유품들로 채워진다. 구미에는 5670점의 유품이 있다. 이들 유품은 구미시 선산읍에 있는 시청 선산출장소 3층 이른바 '박통 방'에 보관돼 있다. 이 방은 박 전 대통령 유품으로 가득 차 '박통 방'으로 불린다.

▲경북 구미시 선산출장소에 보관 중인 기어가 장착된 고급 자전거. [사진제공=독자]

▲경북 구미시 선산출장소에 보관 중인 육영수 여사가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노란색 패브릭 소파. [사진제공=독자]

▲경북 구미시 선산출장소에 보관 중인 1964년 도쿄 올림픽 기념 지포(Zippo) 라이터. [사진제공=독자]
방에는 박 전 대통령이 외국 정상이나 국내외 기관 등에서 받은 선물, 개인적으로 소장한 기념품·미술품·공예품·생활용품·사무용품·가구류·기록물 등이 상당수 보관돼 있다.
붉은빛을 띠는 가죽 슬리퍼, 국내 생산 시가, ‘COREA’라고 쓰인 가죽 골프가방, 여행용 가죽 가방 세트 등이다. 고 육영수 여사가 앉았다는 노란 패브릭 소파도 있다.

▲경북 구미시 선산출장소에 보관 중인 시계. [사진제공=독자]
한국(삼성)과 일본(산요) 전자 회사가 함께 만든 TV, 1964년 도쿄 올림픽 기념 지포(Zippo) 라이터(사진), 나무 전축, 기어가 달린 고급 자전거도 보관 중이다. 1969년 7월 20일 발행된 달착륙 기념 메달도 있다.
애연가로 알려진 박 전 대통령의 유품엔 담배와 관련된 흔적이 유독 많다. 재떨이와 지포 라이터, 담배 파이프만 수십 점이다. 대통령 재임 당시 행사 기념품으로 재떨이를 많이 제작했다고 한다. 1962년 5월 열린 한·미군 친선골프대회, 1962년 12월 호남비료 나주공장 준공 때 기념 재떨이를 만들어 박 전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경북 구미시 선산출장소에 보관 중인 봉황과 무궁화가 새겨진 은제 담배 케이스와 재떨이. [사진제공=독자]
수천여점의 유품이 보관된 곳은 부서명이 쓰여 있지 않은 각 60㎡ 크기의 사무실 3곳이다. 도난·훼손 등에 대비해 직원 중에서도 인가된 일부만 출입이 가능한 공간이다. 박통 방은 2004년 처음 생겼다고 한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측에서 생가가 있는 구미시에 유품 수천 점을 맡기면서다.
구미시 측은 5000여점 모두를 역사 자료관 내에 전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는 수장고에 보관할 예정이다. 또 역사 자료관에는 구미 공단의 발전상 등을 보여주는 구미시 관련 다양한 기념 자료도 전시할 계획이다.
중앙일보 김윤호 기자
월간조선 08월 호
다시 읽는 ‘朴正熙-김호남 부부의 큰딸 朴在玉씨의 수기’
‘미안하다’며 어깨를 두드리시던 아버지
⊙ 6·25 직전 부모 이혼… 친척집에 얹혀살아
⊙ 중학교 때 JP의 신당동 집으로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매를 맞고 살아도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었다”
⊙ 박정희 대통령의 부관 한병기씨와 결혼… 5·16 후 10년간 외국 생활
⊙ 박정희 대통령, “누구에게 함부로 손 벌리지 말아라. 그러면 네가 다친다”
※편집자 註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큰딸 박재옥(朴在玉)씨가 지난 7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부인 김호남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보다 열네 살 위이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 가운데 절반 이상을 고인은 남편 한병기(韓丙起·2017년 작고)씨와 함께 해외에서 생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관(副官) 출신인 한병기씨는 1958년 고인과 결혼해 제8대 국회의원, 주(駐)칠레·유엔·캐나다 대사 등을 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고인의 존재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월간조선》 1995년 12월호에 실린 수기(정리=강인선)에서 고인은 어린 시절 겪은 부모의 이혼과 힘들었던 사춘기, 대통령인 아버지를 두고서도 ‘없는 존재’처럼 살아야 했던 시절 등에 대해 담담하게 술회했다. 고인의 수기를 발췌·정리해서 소개한다.
집에 돌아오면 책만 읽던 아버지
할머니(박정희 대통령의 모친 백남의-편집자 주)는 나를 끔찍하게 보살피셨다.
“불쌍한 내 새끼, 사촌 형제들 사이에서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활발하고 씩씩한 사촌 형제들 사이에서 축 처진 내 모습을 보실 때마다 할머니는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셨다. 할머니의 속바지 주머니에는 늘 무엇인가 먹을 것이 들어 있었다. 무엇이든 바지 주머니에 감추어 두었다가 사촌들이 볼세라 내 입에 슬쩍 넣어주셨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나를 찾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늘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가 최고라고 칭찬하셨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괴롭고 외로우셨을 것이다. 대가족의 살림을 챙기느라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다. 남편도 없고 아이가 더 있는 것도 아니니 어머니의 사랑은 온통 내게 쏠렸다.
아버지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고향집에 돌아오시곤 했다. 늘 말이 없고 무뚝뚝했지만 내게는 인심이 후한 아버지였다. 담배 한 갑 사오라고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쥐여주시면 담뱃값이 얼마든 관계없이 잔돈은 늘 내 차지였다. 철없던 나는 그저 잔돈이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는 것이 기뻐서 좋아 날뛰었다.
고향집에 돌아오시면 아버지는 하루 종일 책을 읽으셨다. 어떤 날은 아침상을 물리고 나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 하루에 한 권을 다 읽으시는 날도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 책이 다 내 머릿속에 있다. 자, 물어봐라. 다 알고 있으니까”라면서 책을 건네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산 날은 훗날 서울에서 산 것까지 합해도 몇 년 되지 않는다. 만났다 헤어지고 또 만났다 헤어지고….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시간은 짧고 집을 떠나 계시는 기간은 길었다.
‘아버지는 왜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6·25 직전의 일이니까 내가 열 살이 좀 넘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오랜만에 상모리 집에 오셨다. 아버지가 집안 어른들과 뭔가 심각하게 의논을 하셨는데 아마도 이때 이혼을 하기로 결정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어쩔 줄을 모르셨다.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남편도 없는 집에서 막내 며느리라고 일만 죽어라고 한 게 10년이 넘었는데 그 대가가 이혼이라니. 어머니가 날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셨다.
“너의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서울에 딴 여자가 있는 것 같구나. 어쩐지 내가 이 집 식구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아….”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꼬리를 흐리셨다. 어린 마음에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혼을 한다는 거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엄마, 이혼이 뭐예요?”
“이제 너의 집에서 못 살고 쫓겨나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때 “절대 내 손으로는 이혼 안 해줄 거야. 내가 이렇게 속을 썩었으니 자기도 좀 당해봐야 돼”라고 말씀하셨다.
내 가슴 속에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이 충격과 함께 자리 잡았다.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왜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내가 보기엔 우리 엄마가 최고인데… 엄마는 예쁘고 날씬하고 나에게도 그렇게 잘해주는데….’
아버지의 재혼 소식

▲《월간조선》 1995년 12월호에 실린 박재옥씨의 수기. 왼쪽에 보이는 사진은 1958년 박재옥·한병기씨의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다.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한 후 상모리를 떠났다. 대구로 삶의 터전을 옮긴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만나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싫었던 나는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열네 살 때 “내겐 우리 식구가 있고 아버지가 계신데 여기 있을 수는 없어요. 나는 아버지에게로 갈 거야”라면서 어머니 곁을 떠났다. 이후 나는 외할머니댁, 구미의 사촌 오빠 집 등을 전전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나는 아버지에게 원망에 찬 편지를 쓰곤 했다.
“아버지, 제게는 부모님이 모두 계신데 저는 왜 이렇게 남의 집에 얹혀살아야 합니까. 사촌 오빠가 나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성가시겠어요. 저는 또 얼마나 미안한지 아세요. 오빠도 고생스럽고 나도 힘들고….”
내가 투정 섞인 편지를 보내면 아버지는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니 열심히 살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곤 했다.
아버지와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재혼 소식을 들은 것은 근혜도 태어난 후였으니 1952년쯤이었을 것이다. 집안 어른들이 내게 그 소식을 전해주셨다.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재혼하신 후에도 용돈과 학비를 꾸준히 보내주셨으므로 내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던 영옥이 언니(박영옥·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가 서울에 와서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왔다. 나는 좋아라 따라나섰다.
영옥이 언니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인데다가 나에게 워낙 잘해주었으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제기동의 언니 집에 살면서 동덕여고에 다녔다. 언니는 내게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해주었다.
어머니가 간절히 필요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육 여사를 만난 적이 없었다. 친척들은 육 여사가 나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누구도 나에 관한 이야기를 육 여사에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다들 나를 없는 것으로 치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제기동 언니 집으로 육영수 여사가 불쑥 찾아왔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지만,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하기에 나는 두말하지 않고 육 여사를 따라나섰다. 훗날 안 일이지만 친척들이 그렇게 쉬쉬한 나의 존재를 육 여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결혼 초에 이야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결혼을 하신 후에 알렸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왜 갑자기 육 여사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결심을 했는지 그 이유도 아직 모르겠다. 이유는 아무래도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첫 만남이었으나 육 여사의 인상은 아주 좋았다. 깔끔한 한복 차림에 조용한 분인 것 같았다. 내가 이날 아무 미련 없이 육 여사를 따라나서는 것을 보고 영옥 언니는 아마 몹시 섭섭했을 것이다. 그렇게 잘해준 것도 소용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쨌든 아버지 집으로 가고 싶었다. 매를 맞고 살아도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었다.
육 여사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나는 기쁘고 감사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나중에는 계모든, 서모든, 아픈 어머니이든, 미친 어머니이든 내게는 어머니란 존재가 필요하다고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육 여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하신 후에 만나 결혼하신 분이니 나로서는 육 여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나는 노량진의 아버지 집으로 가면서 혼자서 몇 번이고 다짐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 때문에 아버지와 육 여사가 싸우는 일은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자는 야무진 결심이었다.
두 분과 함께 사는 동안 두 분이 크게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육 여사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왜 육 여사의 얼굴이 그렇게 어두웠는지 그 의문이 풀린 것은 내가 결혼한 후였다. 아버지의 부관이었던 남편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의 여자 문제 때문에 당시 육 여사는 늘 수심에 잠겨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집에서 나와 마주치면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는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한 일이지만, 그때마다 나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아버지를 대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육 여사와 친하게 지낼 수 있게 하려고 여러 모로 애를 쓰셨다. 나를 따로 불러 용돈을 주시는 일도 없었고, 아버지와 내가 단 둘이 얘기하는 기회도 만들지 않았다. 내가 용돈을 달라거나 의논이라도 할라치면 아버지는 늘 “어머니와 상의하라”고 하셨다. 내가 육 여사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서였다.
육 여사와 나는 열두 살 차이였다. 나는 ‘어머니’라는 호칭이 쉽사리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을 때에만 어렵사리 그 호칭을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당시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육 여사가 나의 친어머니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결혼
내가 결혼을 한 때는 우리 가족이 신당동에 살고 있던 1958년이었다. 남편은 아버지의 부관으로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부터 안면을 익히기 시작해 결혼에까지 이른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대에 진학한 후 나는 빨리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남편의 청혼을 받고 나는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결혼할 거면 일찍 해버리자’는 결심이 서서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버지 월급으로 어렵게 꾸려나가는 집안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데다가 육 여사가 임신 중이어서 몸도 편치 않은데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께 우리가 쓸 이부자리만 한 채 해주시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웨딩드레스도 낭비인 것 같아 흰색 한복을 한 벌 지었다. 흰색 한복 한 벌이면 나중에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 것 같아 실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나는 결혼을 위해 아무것도 새로 마련하지 않고 시집을 갔다. 옷장은커녕 새 옷 한 벌 장만하지 못했다. 그래도 결혼반지만큼은 백금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이었다.
남편은 내게 결혼반지를 구리반지로 하자고 그랬다. 좋은 반지를 하면 살림이 어려울 때 팔아버릴 우려가 있지만 구리반지라면 절대로 팔게 될 리가 없으니 진짜 영원한 결혼반지가 될 수 있으리란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철이 덜 들었는지 그것만큼은 싫다고 우겨서 결국 백금반지를 마련했다.
결혼식은 지금은 없어진 서울 종로의 동원예식장에서 했다. 주례는 원용덕(元容德) 장군이었는데 이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도 어쩐지 착잡하신 것 같았다.
지척에 살면서 서로 몰랐던 아버지와 어머니
대구에서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게 된 때는 결혼 후였다. 나는 다시 외갓집에 연락해서 어머니가 부산 어딘가에 있는 절에 살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남편과 함께 부산의 그 절로 어머니를 뵈러 갔다. 절에서, 재혼한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키우며 살고 계시던 어머니는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깜짝 놀라 나를 붙들고 무척 많이 우셨다.
나는 어머니께 “이제부터는 내가 모실 테니 우리와 함께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셨다.
“나는 세상이 귀찮으니 그냥 절에 있겠다. 나는 사가(私家)에 살면 잡념이 생기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업보(業報)이니 내가 여기서 기도하며 살 수 있도록 나를 그대로 둬라.”
결국은 우리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 후에는 어머니가 가끔씩 우리 집에 찾아오시곤 했으므로 나는 한결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부산의 절을 찾아갔다가 기절할 만큼 놀랐는데 어머니가 머무시던 절이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계시던 당시 아버지의 관사 지척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두 분 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지만 도대체 무슨 인연인지 어머니 계신 절에서 아버지의 숙소가 내려다보이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때는 1962년 4월이었다. 5·16이 난 지 1년도 채 안 되어서였다. 우리는 곧 여기가 우리가 있어서는 안 될 자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별의별 소문이 다 퍼져나갔다. 시아버지 위패(位牌)를 모신 대구의 한 절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친어머니를 찾아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한번은 남편의 동기들이 당시 정보부장이던 김재춘(金在春)씨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남편 친구들이 우리 이야기를 하자 김재춘씨는 “앞으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마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리를 두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고 우리는 고립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불안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 있으면 아버지께 누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결국 미국행을 택한 것이다. 결심을 굳힌 남편은 김종필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우리 가족은 곧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한병기씨가 駐칠레대사로 있던 1974년 대사관저에서 찍은 가족 사진.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신 후에 내가 얼마나 미묘한 입장에 서게 되었는지를 일일이 설명하기는 힘들다. 내가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어떤 특혜를 받고 있다는 말이 나올까 두려웠고, 내 행동이 내 의도와는 달리 아버지와 육 여사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던 상모리의 대가족들이 아버지에게 갖는 불만도 컸다. 집안에 대통령이 났는데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친척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냉랭한 태도에 속이 상한 친척들은 나만 보면 참았던 이야기들을 퍼부어댔다. 아버지에게 가서 이런 얘기를 해봐라, 저런 부탁을 해봐라, 나에게 쏟아지는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탓에 나는 그런 것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 하지 못했다. 나는 친척들에게 아예 “저도 청와대에 못 들어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친척들은 “딸도 못 들어오게 한다더냐”며 화를 내곤 했다.
나는 아버지와 친척들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지금도 친척들은 “나는 청와대에 가서 물 한 잔도 못 얻어먹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아버지가 청와대에 계실 때 나는 육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아버지를 뵙고 싶어요”라고 말씀드리면 육 여사는 먼저 “급한 일이냐”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하면 “저녁때 와서 식사나 같이 하자”거나 “몇 시쯤 들르라”고 말씀해주시곤 했다. 육 여사가 돌아가신 후에는 늘 근혜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아버지와 직접 통화한 일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내게 용돈을 주신 적도 있다. 그때마다 내게 “어디 가서 남이 주는 돈 함부로 받지 마라. 누구에게 함부로 손 벌리지 말아라. 그러면 네가 다친다”는 이야기를 꼭 하셨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버지에게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던 내가 꼭 한 번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울어버린 일이 있다. 1967년의 일이다. 우리는 남편이 공화당의 공천(公薦)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 영옥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명단에 남편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청와대로 찾아갔다. 육 여사에게 한참 하소연하고 나서 돌아서려는데 육 여사가 “아버지 뵙고 가야지” 하시기에 아버지 집무실을 찾아갔다.
나는 “아버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됐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요”라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나를 달래셨다.
“정치를 해봐라. 그건 결코 행복한 게 아니다. 이제 네가 코흘리개 시절의 이야기까지 낱낱이 들추어지고 별별 이야기를 다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지 않으냐. 남편이 정치를 한다는 건 여러 가지 면에서 너에게 불행이 되면 됐지 좋은 일은 아니다. 남편이 출세한다고 여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야.”
나는 화가 나서 “그것도 아버지 생각이지요. 그래도 하려던 일인데…”라고 말하다가 울면서 그대로 그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육 여사는 아버지와 똑같은 이야기로 나를 설득하려 하셨다.
“여자들이 남편 성공시키려고 하지만 그런다고 여자가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남편 출세해 봐야 그 부인은 남편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어지는데 여자들이 그걸 몰라서 그렇게 설치는 거야.”
백번 옳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재혼은 하지 않겠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산 기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한때는 그토록 원망한 아버지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어머니를 이해했듯 아버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도 커져만 갔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내게 이상형의 남성상이었다. 늘 말이 없고 조용하신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셨을 때는 늘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고 계셨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시는 저녁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 주무시곤 하셨다.
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 나는 ‘이 아이를 잘 키워 육사(陸士)에 보내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큰아이가 시력이 좋지 않아 육사는커녕 군대에도 못 가게 됐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을 아버지처럼 만들 수 없게 된 것이 그렇게 속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건 1978년 봄, 공관장 회의가 있어 서울에 왔을 때였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청와대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별말을 안 하셨다. 여러 번을 만나도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것이 고작 “언제 왔나?” “언제 가나?” 정도였고, 그날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때 그것은 늘 남편과 아버지 사이의 화제였다.
아버지가 혼자서 동생들을 데리고 사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장례식이 끝나고 난 후 아버지와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나는 재혼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일이 워낙 바쁘시니까 외로움쯤이야 잊고 사시려니 생각한 것이 불찰이었다.
凶夢
1978년 봄 이후에는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와의 통로가 꽉 막혀버린 것만 같았다. 직간접으로 듣는 한국의 정정(政情)은 누가 보아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에서 날아드는 갖가지 소식과 풍문은 이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특히 남편은 온갖 외신들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나에게는 충분한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혼자서 무슨 속을 그렇게 끓이는지 꼬챙이처럼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카리브해 연안의 작은 섬나라 도미니카공화국에서였다. 남편은 당시 캐나다대사로서 카리브해 연안의 몇몇 섬나라 대사도 겸임하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아 축하 사절로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캐나다대사관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며,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어코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전날,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나는 꿈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꿈속에서 나는 이전에 남편이 대사로 있던 칠레에 가 있었다. 무슨 큰 행사가 열렸는지 피노체트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커다란 검은색 자동차가 사람들이 모여 있던 건물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그 차에서 역시 검은색 옷차림의 아버지와 육영수 여사가 내렸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다가 내 앞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피노체트 대통령이 아버지를 붙들고 “당신 딸이 여기 있다”고 나를 소개했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모른 체하고 그냥 획 돌아서 가셨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검은색 옷을 입은 꿈은 좋지 않은 징조라던데….
캐나다대사관에 급히 연락을 취했더니 ‘유고(有故)’라는 대답이 왔다. ‘유고’라니 ‘사고가 있다’는 뜻인 모양인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한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허리케인으로 엉망이 된 도미니카의 공항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당일로 서울에 갈 방법이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미국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잡아탔다. 뉴욕에 가니 남편 친구들이 서울에는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아무래도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 같다. 한국의 정정이 이토록 불안한데 지금 가서 어쩌겠다는 거냐. 여기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가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 가족도 위험할지 몰라.”
아버지 死後에 얻은 자유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國葬에 참석한 유족과 친지들. 앞줄 왼쪽
부터 상주 박지만, 큰 영애 박근혜, 작은 영애 박근영, 뒷줄 왼쪽부터 김종필前 총리와 장녀 예리씨, 육인수 공화당 중앙위 의장 부부, 한병기 駐캐나다대사와 박재옥씨. 사진=조선DB
그러나 남편과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 뉴욕을 떠나 도쿄에 도착하니 당시 주일대사관 공보관이던 이원홍(李元洪)씨가 나와 있었다. 이원홍씨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비로소 세상을 떠나셨음을 알았고, 서울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달려왔지만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월 29일 저녁, 입관(入棺)이 끝난 상태였다. 사람들은 내게 마지막 인사니 아버지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싫다고 했다.
“됐어.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모습은 보지 않을 거야. 그냥 살아 계실 때 모습만 기억하면서 아버지가 늘 그렇게 살아 계시겠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살 거야.”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나는 10년을 외국에서 살았다. 미국과 칠레, 캐나다에서 조용히 지냈다. 숨어 살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어쨌든 남 앞에 나서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녀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 박정희 어록
'북한정권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면 오산(誤算)이다.'
1972년 8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돌아온 남측 대표 이범석(李範錫)씨 일행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북한 당국을 상대할 때의 지침을 내렸다. 박근혜씨와 비대위를 위하여 써놓은 글 같다.
<남북적십자 본회담시(時) 지침
1.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공식·비공식을 막론하고 모두 보고해야 한다.2.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할 때는 사전에 전략을 세워놓고 해야 한다.3. 북한 위정자들과 우리가 핏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誤算)이다.4. 우리 적십자사는 인도적 사업이라고 보나 북한은 정치적 사업으로 본다.5. 북한 요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정치적이다.6.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7. 술을 마실 때도 상대방이 공산당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8. 북한 사람들과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마라.9. 북한이 남한 언론을 비판하면 자문위원들은 즉각 반박하라.10. 대표단과 자문위원 사이는 긴밀한 협의를 하되 매일 저녁 결산토록 하라>
'北의 평화공세는 미군 철수 주장을 위한 것.'
1979년 1월29일, 박정희 대통령이 남북조절위 예비회담 대표에게 써준 메모는 이렇다.
북괴(北傀)의 함정(陷井)
1. 남한 정부 부인(不認): 북괴 외곽단체(北傀 外廓團體)와 동일 격하(同一 格下)
2. 조절위(調節委) 기능 무력화(技能 無力化)
3. '대민족회의(大民族會義)'로써 통일전선전략(統一戰線戰略) 시도(試圖)
*외군 철수 논의(外軍 撤收 論議)
*연방제(連邦制) 지지논의
4. 아측(我側) 전력증강계획(戰力增强計劃) 중단(中斷), 현상 동결(現狀 凍結), 장비도입(裝備導入) 금지(禁止)
5. DMZ內 공사 중지(工事 中止): 남침(南侵) 땅굴 방해(防害) 없이 공사(工事)해 내려오자는 것
6. 평화공세(平和攻勢)로 미군철수(美軍撤收) 촉진(促進)
7. 앞으로 중단 시(中斷 時) 책임 전가(責任 轉稼)
이 메모를 읽어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 김일성의 노림수를 정확히 읽고 있었고 이를 한 장의 메모지에 더도 덜도 없이 깔끔하게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메모를 해설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 이런 함정을 파놓고 이런 전략으로 나올 것이다.
첫째 그들은 한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정부를 그들 외곽단체의 하나쯤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둘째, 그들은 조절위원회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려고 획책할 것이다.
셋째, 그들은 남북간의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대민족(大民族) 회의를 열자고 주장하여 통일전선(戰線) 전략을 밀고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회의에서 외군철수 및 연방제 지지를 논의하자고 덤빌 것이다.
넷째, 그들은 한국군의 전력 증강(增强) 계획을 중단하고 현상태로 동결하도록 요구하고 장비 도입도 하지 말라고 억지를 부릴 것이다.
다섯째, 비무장지대 안에서 공사를 하지 말도록 요구함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들이 남침용 땅굴을 파는 것을 방해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여섯째, 평화공세로 주한미군 철수 분위기를 띄울 것이다.
일곱째, 회담이 중단될 때 그 책임을 우리쪽에 전가하기 위한 함정을 팔 것이다'
이상의 북한측 대남(對南) 전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통일은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 낼 것.'
1976년1월24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국방부를 연두순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준비된 원고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한 것을 녹음 테이프에서 풀어보면 이런 내용이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한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년간 통일이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죽이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무력으로 쳐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 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 소, 중, 일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라고 했는데, 지금 북한 정권은 핵미사일 實戰 배치 단계에 이르렀다. 이런 객관적 여건은 북한 주도의 통일에 유리하다. 핵무기를 가진 쪽이 없는 쪽을 흡수, 통일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현실성이 있다. 북한의 핵무장을 無力化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여건을 박근혜 대통령이 만들 수 있는가? 이게 문제의 본질이다.
4. 우리는 자유의 파도가 되어야 한다.
朴正熙 대통령은 북한정권을 민족사의 이단으로 규정, 이 집단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그가 말한 평화란 평화공존을 가장한 분단 고착화가 아니라 자유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란 뜻이었다. 그는 1966년 12월17일 기자회견에서 『두 개의 한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 아무리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식 통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남북한간의 대결은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누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쟁취하는가의 싸움이며, 그 정통성을 확보한 쪽만이 1민족 1국가의 월계관을 써야 한다는 역사관에 투철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7년 4월23일 대구 유세(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렇게 강조했다.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우리는 공산식으로 통일은 못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통일이 된 연후에 북한 땅에다가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민주적인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니까 시간이 걸리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의 실력의 배양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자유의 파도'란 말을 만들기도 했다.
'혹자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해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1966년 2월15일 대만 방문시 장개석 총통 주최 만찬회 인사에서).

▲육영수 여사와 박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