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호 5/ 151.소년 척후대 - 170.한국인 첫 프로골퍼/ 대한민국 여성 제1호 / <1>여상 출신 삼성전자 첫 임원 양향자 상무 - <14·끝>첫 내부승진 박경순 국민건강보험공단 징수상임이사
대한민국 제1호 5/ 조선일보
151.소년 척후대
군인 같은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나 부인이 위험한 일을 당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를 볼 때 속히 가서 그것을 구제하고 그 밖에도 무슨 일이든 사회의 유익한 일이면 하도록 주선해 주는 것입니다."
이만큼 '보이스카우트'를 쉽게 설명한 글이 또 있을까? 일제시대 YMCA 소년부 간사를 맡고 있던 정성채(鄭聖采·1899~?) 선생이 1923년 1월 5일자 조선일보기사에서 말한 내용이다.
정 선생은 일제시대 청소년 운동가다. 1899년 4월 서울 종로구 권농동에서 기독교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 경신학교에 다녔다. 야구를 좋아하고 하모니카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곤 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한 게 문제가 되어 학교를 그만뒀다.
▲ 일제시대 YMCA 소년부 간사를 맡고 있던 정성채(鄭聖采·1899~?)선생(사진 오른쪽).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조철호(1890~1941)(사진 왼쪽).
해외의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정 선생은 1921년 YMCA 소년부 간사로 발령받은 뒤 본격적으로 창설 준비에 나서 이듬해인 1922년 청소년 17명을 이끌고 한국 최초의 스카우트인 '소년척후대'를 창설했다.
같은 해 10월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조철호(1890~1941)선생도 학생 8명으로 '조선소년군'을 만들었다.
1924년 3월 두 단체가 힘을 합쳐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이 출범했다.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초대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단체 운영을 둘러싸고 두 지도자 사이에 노선 차이가 생겨 1년여 만에 원래대로 갈라섰다. 현재 한국스카우트연맹은 소년척후대와 조선소년군을 둘 다 '한국스카우트의 원조'로 인정하고 있다. 정 선생과 조 선생 모두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방편'으로 청소년 운동을 펼쳐 일제 말기 일본 경찰에게 수시로 곤욕을 치렀다.
해방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정 선생은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치된 뒤 소식이 끊겼다. 창설자를 잃은 뒤에도 한국스카우트는 풍파를 헤치며 회원 36만명을 거느린 단체로 성장했다. 1991년 전 세계 스카우트들의 '올림픽'으로 꼽히는 세계잼버리대회를 치르고, 2002년에는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단체 이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에서 '보이(boy·소년)'를 떼어냈다. 단, 한국걸스카우트연맹은 한국스카우트연맹과는 완전히 다른 단체다.
정 선생의 부인과 장남은 1993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정 선생도 고인이 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는 26일 서울 수송교회에서 첫 추모예배를 갖기로 했다.
152.중국인 귀화자
1957년 2월 8일 발간된 관보(官報) 제1720호는 이호 당시 법무부 장관의 고시(告示)로 시작한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귀화를 허가했다는 내용이다.
대한민국 귀화 제1호는 중국 출신의 손일승(당시 45세)씨. 당시 관보는 손씨의 본적을 중화민국 산동성으로 적고 있다.
1933년 배 편으로 서해를 건너온 손씨는 강원도에서 탄광을 운영하는 등 사업을 제법 크게 벌였다고 한다. 그는 평소 "한국이 좋다"고 말했고, 사업을 위해서라도 한국인으로 사는 게 낫다고 여겨 귀화를 신청했다고 전해진다. 손씨는 정부 수립 이후 첫 번째일 뿐, 학계 일각에선 고려시대 광종에게 건의해 과거제도를 도입한 중국 후주 출신 쌍기(雙冀)를 역사상 '귀화 1호'로 꼽는다.
조선시대에는 첫 서양인 귀화자도 나왔다. 1628년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 해안으로 떠밀려 왔던 네덜란드인 얀 야네스 벨테브레다. 그는 '박연'으로 개명하고 훈련도감에서 무기 기술자로 일했다.
▲ (왼쪽부터)러시아 출신 축구 선수 신의손(49·발레리 사리체프)씨, 중국 출신 탁구선수 당예서, 일본 출신 귀화 한국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정부 수립 이후 귀화자는 화교 외에는 드물었고, 숫자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2000년 러시아 출신 축구 선수 신의손(49·발레리 사리체프)씨가 한국 국적을 택하면서부터 귀화 외국인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파란 눈의 한국인이 된 지 10년째를 맞은 그는 올 초 청소년 대표팀 골키퍼 코치로 뽑혀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후 이성남(데니스)·이싸빅(싸빅)·마니산(마니치) 등 귀화 축구선수가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은 흔한 광경이 됐다. 중국 출신 탁구선수 당예서는 지난해 모국에서 열린 베이징올림픽에 한국 선수로 출전했다.
전문직종의 외국인도 속속 귀화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영상 디스플레이 분야의 권위자인 블라디미르 사벨리예프 박사(러시아)가 지난해 한국인이 됐다. 그는 한국 불교에 심취, 법명(法名)도 받았다.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오른 이참씨와 부산 사투리의 미국 변호사 하일(로버트 할리)씨는 '독일 이씨' '영도 하씨'의 시조다.
일본 출신이면서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강조하는 귀화 한국인도 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도쿄대를 졸업한 일본의 엘리트지만 우연히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알게 된 후 친한(親韓)파 한·일 관계전문가가 됐고, 지난 2003년 한국 국적을 얻었다.
다른 나라로 귀화한 한국인도 최근 10년간 약 17만명에 달한다. 우리나라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아 교포·이민2세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정부가 제한적인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어 머지않아 두 개의 국적을 갖고 살아가는 한국인들도 나올 듯하다.
153.올림픽 첫 금메달, 마라톤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 경기가 열린 1992년 8월 9일. 출발선에 선 22세의 신출내기 황영조를 주목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고작 1년 전에 마라톤에 데뷔한 황영조는 아직 세계적 수준이 아니었고 올림픽 챔피언 감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황영조는 올림픽사에 남을 명승부로 '몬주익의 영웅'이 된다. 초반부터 선두권을 달리던 황영조는 결승선을 3㎞ 정도 남긴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일본)와 양자 대결을 벌인 끝에 내리막길에서 폭발적으로 스피드를 끌어올리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대한민국 제1호이자 유일한 육상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도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황영조가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었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가 됐다.
▲ 황영조(사진 왼쪽), 고 손기정(사진 오른쪽)
황영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수가 아니었다. 그의 탄생 뒤에는 한국 마라톤의 유장(悠長)한 전통이 흐르고 있었다. 한국 마라톤의 영광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고 손기정 선수의 우승에서 시작됐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한 망국(亡國)의 마라토너는 우승 후 조선일보와의 국제전화 인터뷰에서 "네, 손기정이오…" 하는 한마디를 전한 뒤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전 종목을 통틀어 한국인이 올림픽에서 기록한 첫 우승이었다. 이후 한국 마라톤은 1947년 서윤복, 1950년 함기용이 유서 깊은 보스턴 마라톤을 잇달아 정복하며 세계적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해외 언론에서 "한국선수들이 잘 달리는 것은 김치를 먹기 때문"이라는 분석 기사를 내놓던 시절이었다.
황영조로부터 배턴을 이어받은 선수는 동갑내기 이봉주(39)였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낸 그는 2000년 2시간7분20초의 현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고, 2001년엔 보스턴 마라톤을 정복하며 함기용 이후 51년 만에 다시 월계관을 가져왔다. 육상의 황무지인 한국이지만 마라톤만큼은 세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봉주의 보스턴 정복을 끝으로 한국 마라톤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국 육상계는 황영조와 이봉주의 후예를 길러내는 데 실패했다. 이봉주의 한국기록은 9년째 그대로이며, 권은주의 여자마라톤 기록(2시간26분12초·1997년 춘천마라톤)도 12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2011년 대구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를 2년 남기고 이렇다 할 기대주 한명도 꼽기 어려운 현실이다. 한국 마라톤의 몰락은 한국 육상의 침몰이기도 하다.
154.첫 대외원조
1948년 건국 이후 외국 원조만 받던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돕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교부 당국자는 "1965년 정부가 우리 자금으로 개발도상국 연수생을 초청·교육한 사업을 '대외원조 1호'로 꼽는다"고 밝혔다. 1963년 미국 국제개발처(AID) 자금을 받아 개발도상국 연수생을 훈련시킨 적이 있지만 "재원(財源)이 미국이라서 첫 공적원조 사업은 1965년으로 본다"는 설명이다. 1967년부터는 국내 전문가를 개도국으로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를 도울 만한 경제적 여력은 없었다. 1969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10달러에 불과했다. 오히려 해외 원조를 받는 주요 수혜국이었다. 그러나 북한과의 외교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면 '대외 원조'는 필수적이었다. 외교부 관계자는 "1960년대 우리나라 공적원조는 아프리카에 집중됐다"며 "당시 이 지역의 외교 경쟁에서 북한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6·25전쟁 때의 원조
1970년대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면서 본격적인 무상원조가 진행된다. 정부는 1977년 당시로선 꽤 큰돈인 9억원어치의 국산 기자재를 개도국에 지원했다. 이 사업은 국산 기자재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고, 북한과의 외교 경쟁에서도 우위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상원조 사업은 1987년 300억원의 대외경제협력기금을 조성하면서 본궤도에 올랐다. 이 기금은 개도국의 경제 발전을 돕는 차관(借款)으로 사용됐다. 정부 당국자는 "80년대부터는 북한과의 국력 차가 확연해져 한국 경제와 원조 프로그램을 연계시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91년에는 무상원조 전담기관으로 외교부 산하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설립했다. 우리나라의 대외 원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꾸준히 증가해 2005년엔 국민총소득(GNI)의 0.1%인 7억5200만달러에 달했다. 작년에는 GNI의 0.09%인 9억400만달러로 집계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25위권이다.
그러나 6·25전쟁 때의 원조를 포함하여 1945년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원조받은 액수와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지금의 대외원조 규모가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1945~1999년 한국에 지원된 공적·사적 원조의 총 규모는 139억7600만달러에 이른다. 그중 약 70억달러가 무상원조다. 또 1964~1999년 개발 차관으로 312억달러를 받았다. 우리나라는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지만 올해 유엔 분담금 2억달러 중 1억3000만달러를 체납 중이다.
155.남북간 첫 공식회담,1971년 적십자회담
1971년 8월 20일 정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남북 적십자사 요원 4명(남북 2명씩)이 총을 들지 않고 악수를 나눴다. 우리측에선 이창렬·윤여훈, 북측에선 서성철·염종련이 첫 남북 적십자회담 개최를 위한 1차 파견원 접촉에 나섰다. 1948년 분단국이 된 이후 남북 대화 테이블에 마주 앉은 첫 주인공이 된 것이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관계자는 "이창렬·윤여훈씨는 대한적십자사 요원으로 나갔지만 실은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다"고 했다.
남북은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20년 넘게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화는커녕 1968년 1월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노린 '김신조 일당 무장공비 침투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1970년 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남북이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평화통일 구상을 밝히면서 남북관계는 전기를 맞는다.
▲ 1971년 8월 20일 정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남북 적십자사 요원 4명(남북 2명씩)이 총을 들지 않고 악수를 나눴다.
이 맥락에서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는 특별성명을 통해 남북 이산가족의 인간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적십자회담 개최를 북측에 제의했다. 이틀 뒤인 8월 14일 조선적십자사 손성필 중앙위원장은 평양방송에서 최두선 총재 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발표, 우리측 제의를 수용하면서 "가족만이 아니라 친척·친우까지 포함한 자유 왕래를 실현시키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1971년 8월 20일의 첫 남북 회담이 열리게 됐다. 이후 남북은 1972년 8월 11일까지 5회의 파견원 접촉과 25회의 예비회담을 갖고 본회담 장소·일시·의제에 합의했다. 1차 남북 적십자회담은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열렸다.
1972년 5월 김일성 당시 수상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간의 '평양 극비 회동'도 적십자 접촉을 계기로 성사됐다. 정부 관계자는 "1971년 8월 첫 회담 이후 남북은 다른 채널을 통해 비밀 접촉을 계속했다"며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4월 26일 그간의 접촉 결과를 보고받고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특수지역(북한) 출장에 관한 친필 훈령을 내렸다"고 했다. 분단 이후 통일에 대한 첫 남북 합의인 7·4공동성명도 '김일성·이후락 회동'에서 조율됐다.
물론 1971년 8월 이전에도 남북 당국자가 얼굴을 마주친 적은 있다. 1954년 4월 한반도 통일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정치회담에 우리측 변영태 외무장관과 북측 남일 외무상이 참가했지만 "공식적인 남북 접촉이나 회담으로 보지 않는다"(통일부 당국자)는 설명이다. 지난 8월 28일 끝난 적십자회담까지 남북은 모두 595차례의 공식 회담을 기록 중이다.
156.단일 품목1억달러 수출1호는 선박
1964년 12월 2일 김정렴 당시 상공부 차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기자들 앞에 섰다.
"우리가 염원하던 자립 경제의 확립과 경제 발전의 역사적 기점이 마련됐습니다."
이틀 전인 11월 30일 한국의 수출액이 사상 처음 1억달러를 돌파했다. '무역의 날'은 이날을 기념해 제정됐다. 정부는 수출 목표(1964년 1억2000만달러)를 달성하기 위해 일요일에도 세관 직원들을 출근시켜 배에 수출품을 실었다. 당시 수송선에 실린 제품은 철광석·주석·오징어·가발·의류였고, 품목별 수출금액은 수십만달러 내외였다.
단일 품목으로 처음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한 상품은 선박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1977년 선박 수출액은 5억1200만달러. 무역협회 이상준 과장은 "77년부터 품목별 자료를 집계하기 시작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선박 수출이 1억달러를 넘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1974년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무역협회와 업계의 자료에 의하면 1964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가 바지선 30척을 베트남에 수출한 것이 한국의 선박 수출 1호로 기록돼 있지만 수출금액은 남아 있지 않다.
선박에 이어 반도체(1970년대 중반), 합성수지(1981년), 자동차(1983년)가 차례차례 수출 1억달러를 돌파하면서 대한민국의 수출 규모를 키웠다. 선박은 1981년 13억9000만달러를 수출하며 10억달러 벽도 가장 먼저 넘어섰다.
하지만 100억달러 수출 고지는 반도체가 먼저 뚫었다. 반도체 수출은 1987년 선박을 제친 뒤 1995년 167억3500만달러를 기록했다. 삼성, LG 등 국내 대기업의 과감한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로 반도체는 2007년까지 수출액 1위 자리를 지키다가 지난해 선박에 1위를 내줬다.
거래액이 큰 선박·반도체의 활약에 힘입어 우리나라 수출액은 1977년 100억달러, 1995년 1000억달러, 2004년 2000억달러를 돌파했다. 1992년 6억달러를 첫 수출한 휴대전화는 작년 334억달러어치를 팔았고, 1976년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해 물꼬를 튼 자동차 수출은 작년 313억달러를 기록하며 성장세를 뒷받침했다.
'제1회 수출의 날'이 열린 1964년 당시 한국은 세계 90위의 수출국이었다. 지난해에는 수출 4000억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12위로 올라섰다. 지난해 경제위기로 수출 상위 15개국은 수출 감소액이 평균 30.7%였던 반면, 한국은 22.7% 감소로 '선방(善防)'했다. 정부는 올해 우리나라의 총수출이 사상 처음 세계 10위권 안에 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57.국산기술 첫 현대적 댐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을 관통해 흐르는 달천강(남한강 지류)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강 한가운데 제법 큼지막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터를 잡고 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기술로 지은 댐 중 가장 오래된 '괴산댐'이다. '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삼국시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저수지였던 '벽골제'를 최고령 댐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우리 기술로 발전기능까지 갖춰 만든 최초의 댐은 괴산댐이다.
괴산댐 건설 공사 계획이 수립된 것은 1951년. 6·25 전쟁 과정에서 전력설비가 파괴돼 전력 사정이 최악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발전소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먹고살기조차 힘든 시절, 당시로선 초대형 토목공사였던 댐 건설이 쉽지는 않았다. 설계를 마친 후 1952년 11월 공사가 시작됐지만 화폐 개혁, 예산 부족, 시멘트 부족, 물가 급등 등의 이유로 공사가 3번이나 중단됐다. 1957년 4월 댐 준공식은 이승만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와 행사를 참관했을 정도로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행사였다.
▲ 해방 이후 대한민국 기술로 지은 댐 중 가장 오래된 '괴산댐'.
토목공사와 수문(水門)공사는 대동공업㈜, 조선중기㈜라는 우리 기업이 담당했지만 발전설비 등 주요 부품은 미국과 서독에서 수입했다. 댐의 높이는 28m, 길이는 171m, 저수량은 1532만t. 댐을 관리하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 수력팀 정헌철 차장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소형댐이지만 자금력, 기술력이 열악한 해방 직후 이 정도의 댐을 건설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직원 15명이 상주하고 있고 연간 1083㎾h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 6일 북한이 임진강 상류의 황강댐을 무단방류해 민간인 6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댐은 안보·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해방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댐은 일제가 한반도의 식량을 수탈하려고 1935년 전남 보성군에 지은 '보성댐'이다. 일제는 남해안 득량만에 방조제를 만들어 대규모 농지를 조성했는데 이곳에 농업용수를 대려고 보성댐을 지었다.
1937년 일제가 압록강 하구 신의주 북동쪽에 짓기 시작해 1943년 완공한 '수풍댐'은 대륙침략을 위해 건설했다. 길이 900m, 높이 106m로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다. 지금도 발전용량 기준으로 볼 때 70만㎾를 생산하는 수풍댐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규모다. 휴전선 이남에서 가장 큰 댐은 1973년 10월 완공된 강원도 춘천의 소양강댐으로 높이 123m, 제방 길이 530m에 이른다
158.1983년 첫 간염백신
1983년 6월 23일, '간 박사'로 유명한 전(前) 서울대 의대 내과 김정용 교수와 제약회사 녹십자 연구진은 대한민국 백신 제1호를 들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순수 국내 기술과 시설로 국내 최초 B형 간염백신 '헤파박스B'가 탄생한 것이다. 미국 제약회사 MSD사와 프랑스 파스퇴르사에 이은 세계 3번째이다. 백신 황무지 나라에서 10여년에 걸친 집념 끝에 얻어낸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인구의 10~13%가 간염 환자인 '간염 왕국'이었다. 40대에 간암이나 간경화로 요절하는 국민들이 속출하던 때였다. 김정용 박사는 연구실에 붓글씨로 쓴 '구인의국(救人醫國)',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라는 좌우명을 걸어놓고 B형 간염백신 개발에 매달렸다. 1970년 초반 미국 하버드대에서 간염 바이러스 분리·정제 기술을 익히고 귀국한 직후였다.
▲ 김정용 박사
당시 일본 제약회사 미도리주지사(社)는 'C.Y. Kim'이라는 이름의 한국인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간염 바이러스 관련 국제학술지 논문을 보고 저자인 하버드대 연구원 'C.Y. Kim'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김정용 박사의 영문 이니셜이다. 국내 녹십자사가 미도리주지사의 의뢰를 받고 김 박사를 찾아내자, 사장단이 서울대병원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김 박사는 일본 방식의 백신 개발을 고집하던 미도리주지사와 결별하고 녹십자와 함께 고군분투를 해야 했다.
그때는 피를 팔고 사는 매혈(賣血)이 가능했다. 연구를 위해 간염 환자의 피가 필요했던 김 박사는 병원에 피 팔러 온 사람들에게 특이한 제안을 했다. 주사를 맞고 매달 한 번씩 5cc의 피를 뽑아주면 헌혈한 값의 돈을 주겠다고 했다. 김 박사는 "그런 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연구를 잘할 수 있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백신 사용 승인 허가를 받아야 하나 보건당국은 백신 심사 기준조차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간염백신이 나온 후에야 이를 보고 기준을 만들어 승인이 떨어졌다. 당시 김 박사와 녹십자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B형 간염백신 시제품을 만들어 놓고도 세계 1호를 놓친 아쉬운 대목이다.
현재 198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의 B형 간염 보균자는 1%가 채 안 된다. 싼값에 국산 백신이 보급된 덕이다. 이후 헤파박스는 아시아 전역에 수출되어 지금까지 5억 도즈(1회 접종 단위)가 넘게 접종됐다. 국산 단일 의약품으로는 최대 수출액을 기록했다.
요즘 신종플루가 유행하면서 백신 확보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녹십자가 유일하게 인플루엔자 백신 제조 기술과 생산 시설을 갖고 있으나 국내 수요량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다시 한번 '구인의국'의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159.여성장관 임영신
"내 비록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싸웠고,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 누는 사람 못지않게 뛰어다녔다. 그런 나에게 결재받으러 오기 싫은 사람은 당장 보따리를 싸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된 고(故) 임영신(1899∼1977)이 장관직에 올라 출근을 시작한 직후 이런 말을 했다. 그녀의 이 '오줌론(論)'은 남성보다 더 남성 같은 그녀의 장쾌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성중심사회 한가운데에 지휘권자로 진출한 여성이 얼마나 혹독한 어려움에 처했는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장관이자 최초 여성 국회의원 타이틀을 보유한 임영신은 충남 금산에서 12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전주 기전여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나 1930년 캘리포니아주의 USC를 졸업하고 1931년 중앙보육(中央保育)학교 교장에 취임하면서 여성 교육자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된 고(故) 임영신(1899∼1977)(사진 오른쪽)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을 받기도 했고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면서 정치세계에 발을 내디딘다. 1945년 한국 최초의 여성 정당인 '대한여자국민당'을 세웠고 48년엔 초대 정부 상공부 장관, 이듬해엔 보궐선거를 통해 첫 여성 제헌국회의원에 선출됐다.
60여년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여성 정당'이 창설된 선진적인 정치 문화를 보였던 대한민국이었다. '장관'이라는 관문이 여성에게도 개방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과연 얼마나 많은 여성이 이 자리를 거쳐 갔을까.
한데 결과는 마치 뱅뱅 도는 쳇바퀴를 보는 듯하다. 이승만 정권에만 3명이었던 여성 장관이 이번 정권 들어서도 여전히 3명(전재희·변도윤, 백희영 내정자)이다. 최규하·전두환 정권 당시 각각 1명이었던 장관이 노태우 정권 4명을 거쳐 김영삼 정권엔 8명, 김대중 정권에선 9명의 여성이 장관직에 올랐었다. 노무현 정권 출범 당시 강금실(법무부)·김화중(보건복지부)·지은희(여성부)·한명숙(환경부) 등 4명이 동시에 장관에 기용되는 '파격'을 보였고 한명숙 장관이 여성 첫 총리직에 오르는 등 과감한 인사가 있었지만, 이후로는 여성 중용 바람이 시들해지면서 결국 정권 5년 동안 5명의 여성 장관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이명박 정부에선 여성의 진출이 더욱 미미하다는 게 여성계의 지적.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08년 글로벌 성(性)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30개국 중 하위권인 108위다.
160. 1947년산 발랫비누 무궁화
대한민국 1호 비누는 1947년 5월 25일, 서울 서소문동 '무궁화' 공장에서 탄생했다.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로 손세정용 물비누가 인기를 끄는 등 지금이야 용도도 다양하고 향(香)도 다양한 수십 가지 비누가 생산되고 있지만, 대한민국 1호 비누는 개인의 미용 목적이 아닌 세탁용 '빨랫비누'였다.
'무궁화 세탁비누'라 이름 붙여진 이 비누는, 고르지 못한 누런색을 띠었고 표면이 다소 울퉁불퉁한 벽돌 형태였다. 크기도 요즘 세탁비누(보통 230g)의 두 배 크기인 500g이었다.
▲ 1956년 애경유지공업(현 ㈜애경)이 개발한 '미향'비누다.
무궁화의 우춘광(66) 공장장은 "비누는 지방산과 글리세린으로 이뤄진 우지(牛脂)나 돈지(豚脂)에서 글리세린을 빼낸 뒤, 양잿물을 넣어 끓인 후 굳혀 만드는데, 글리세린을 완벽하게 빼내는 기술과 양잿물의 혼합 비율이 관건이었다"고 말했다. 수십 차례 시도 끝에 적절한 굳기와 세정력을 가진 비누가 탄생했다.
당시 대다수의 서민들은 빨래를 삶을 때 양잿물을 넣거나, 미강유(쌀겨에서 추출한 기름)를 이용해 집에서 시커먼 색의 비누를 만들어 썼다.
무궁화 세탁비누는 큰 인기를 끌었다. 지방에서는 구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우 공장장은 "회사 선배들은 생필품상들이 비누를 사려고 새벽 2~3시부터 공장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추억한다"고 했다.
이 비누의 가격은 설렁탕 한 그릇 값이었다. 현재 세탁비누가 1500원 선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서민들까지 비누를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무궁화 비누는 1980년대에는 월평균 7000t 이상 생산됐고, 1990년대에는 한달에 2만t까지 팔려나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세탁기 보급 이후 세탁기용 가루비누 시장이 커졌고, 현재는 한달에 2000t 정도를 생산한다.
최초의 미용비누는 빨랫비누보다 9년 뒤에 나왔다. 1956년 애경유지공업(현 ㈜애경)이 개발한 '미향'비누다. 다소 거친 촉감에 시큼한 냄새가 나는 빨랫비누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에게 매끈한 형태와 사용 후 은은한 향기까지 남는 미향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애경유지 공장이 있던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는 화물차량의 대부분이 애경유지의 비누를 나르는 차량이라고 할 정도로 미향은 큰 인기를 끌었다. 1958년엔 미향비누 단일 제품이 월 100만개가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1960년 남한 전체 인구가 2500만명(약 430만 가구)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네 집에 한 집꼴로 이 비누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그해 11월 사단법인 국산장려회에서 주최한 정부수립 10주년 기념 우량국산품 인기투표에서 미향비누가 최고 득점을 받았다.
161.첫 tv드라마 pd
▲ 최창봉(崔彰鳳·84) 한국방송인회 이사장.
"당시 우리나라엔 TV 연출을 어떻게 하느냐를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어요. 동료들과 '텔레비전 프로덕션'이라는 외국책을 공동으로 번역해가면서 연출이 뭔지 공부하던 시기였죠."
최창봉(崔彰鳳·84) 한국방송인회 이사장의 말이다. 최 이사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드라마 PD다. 군 방송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일하면서 방송과 인연을 맺었던 그는 1956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방송국 KORCAD(HLKZ-TV)의 개국 프로듀서로 합격했다. 같은 해 5월 12일 첫 전파를 발사한 이 방송국에서 그는 연출과장으로 발탁돼 텔레비전 방송 창설 주역을 담당했다.
처음 연출했던 프로그램은 개국식 실황. 그 후 그가 연출한 방송이 우리나라 최초의 TV 드라마 '천국의 문'이란 30분짜리 생방송 작품이었다. 드라마 '사형수'를 최초의 TV 드라마라고 기록해 놓은 자료가 꽤 많은데, 최 이사장은 "'천국의 문'이 몇 달 먼저 나온 작품"이라고 정정했다. '사형수'는 1시간 30분짜리 드라마였다. 김경옥·오사량·최상현 등 제작극회 배우들이 출연한 이 드라마는 카메라 두 대로 연출해 생방송으로 전파를 탔다. "욕심이 많아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었는데 기술적으로 한계가 많아서 쉽지가 않았어요. 기술감독이 미국인이었는데 내가 욕심 내면 옆에서 말리고…그래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죠."
▲ 1시간 30분짜리 드라마 '사형수'.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드라마 PD의 위상과 역할은 엄청나게 변화했다.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었던 PD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인력을 '관리·운용하는 사람'으로 그 책임이 보다 커졌다. 연출자 외에도 조연출자, 방송작가, 조명, 소품, 분장, 의상, 진행 등의 전문인력이 다양해지면서 프로듀서가 연출자이면서 관리자로 1인2역을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드라마 규모도 엄청나게 달라졌다. 4~5명의 배우로 한 달 동안 연습해 드라마 한 편을 생방송으로 찍던 때와 달리 이젠 드라마 한 편에 수백명의 인력과 편당 최소한 1억~2억원이 들어간다.
방송사 내부 직원이었던 드라마 PD 중 상당수가 '프리랜서'로 독립하거나 독립제작사로 옮겨가는 일도 잦아졌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원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하는 PD들이 늘어난 데다 '의무외주제작비율'을 따로 정하는 방송관련 규정도 이같은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전문 PD'의 출현도 시대가 만든 변화다. 대중이 '멜로드라마=윤석호 PD', '시트콤=김병욱 PD' 같은 식의 공식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지할 만큼 PD들의 색깔과 개성이 부각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162.해방 후 첫 상장주식
경기가 살아나면서 서울 여의도 주식 시장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3월의 급등세는 완만한 상승세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훈풍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 상장된 주식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거래됐나. 그때에도 주식 투기가 있었나.
건국 이후 상장 주식이 본격적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거래소의 전신인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되면서부터다. 1956년 3월 3일, 대한증권거래소 출범과 함께 12개 회사의 주식이 거래소에 상장됐다. 조흥은행·저축은행·상업은행·흥업은행 등 4개 은행과, 대한해운공사·대한조선공사·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운수·경성방직 등 6개 기업, 그리고 증시 활성화를 위해 정책적으로 상장됐던 대한증권거래소와 한국연합증권금융 등 증권 유관기관 2곳이었다. 일제 치하였던 1932년에 일본인에 의해 증권거래소인 조선취인소가 설치돼 한성은행·상업은행·경성방직 같은 일부 국내 주식의 거래가 이뤄지긴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꽃인 주식 거래가 본격화한 것은 건국 이후 대한증권거래소 설립이 계기가 됐다.
▲ 초기의 주식 거래는 '격탁(擊柝)매매' 방식을 통해 이뤄졌다.
1953년에 첫 상장된 12개 주식 가운데 현재까지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종목은 없다. 경성방직은 1970년 경방으로 회사명을 바꿔 국내 최고(最古) 상장기업으로 증시에 아직 남아 있다. 대한해운공사와 대한조선공사는 모두 한진그룹에 인수돼 각각 한진해운·한진중공업이란 이름으로 현재도 거래되고 있다. 그러나 조흥은행은 신한금융의 자회사가 되면서 2004년 7월 상장폐지 됐다. 나머지 기업들도 대부분 다른 회사에 통합되면서 상장폐지의 길을 걸었다.
초기의 주식 거래는 '격탁(擊柝)매매' 방식을 통해 이뤄졌다. 격탁은 마주치면 딱딱 소리가 나는 나무토막을 말한다. 주식을 사고팔려는 사람들이 거래소에 모여 각각 매수·매도 가격을 부르면 가격과 수량이 일치할 때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치듯 중개인이 격탁을 쳐서 매매 체결을 알렸다.
초기의 주식 거래대금 지급 방식은 지금의 선물거래와 비슷했다. 계약이 이뤄지면 매수대금의 일부만 증거금으로 내고 보통 2개월 뒤에 현금과 실물(주식)을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매매 당사자 간에 합의하면 결제 시기가 돌아왔을 때 연기료를 지불하고 결제를 연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거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적은 금액으로도 투자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었는데, 투기수요를 부추기고 결제일에 결제대금이 부족해 결제가 이뤄지지 않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163.춘천 호반의 도시
흔히 춘천을 ‘호반의 도시’라 한다. 북한강과 소양강의 물줄기에 만들어진 춘천호·의암호·소양호가 도시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얻은 애칭이리라. 도시를 뒤덮은 몽환적인 물안개는 1970~1980년대 이곳을 찾아왔던 청춘들에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건만, 21세기인 요즘에도 수많은 청춘이 이 아름다운 도시를 찾아와 물안개를 헤집고 다니며 추억을 쌓아가고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경춘가도는 언제나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되돌아갈 걱정 때문이었을까. 안개의 도시 춘천을 편한 마음으로 둘러보긴 조금 어려웠다. 그런데 지난 7월 15일 드디어 서울춘천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다.
▲ ‘호반의 도시’ 춘천을 휘감아 도는 소양강에 저녁노을이 지고 있다.
춘천은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니다. 따라서 서울춘천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춘천까지 접근하는 데 1시간 안팎으로 걸리는 수도권에서는 1박2일 정도면 춘천의 명소를 어느 정도 돌아볼 수 있게 됐다.
첫날은 춘천시내와 소양호 주변을 돌아보고, 잠자리는 의암호에 떠 있는 중도유원지에서 해결하자. 넓은 캠프장과 펜션형 통나무집이 갖춰져 있어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춘천시내의 야경을 꼭 봐야 한다면 의암호 주변에 숙소를 구하는 것도 괜찮다. 어쨌거나 물안개 자욱한 이른 아침의 호숫가 산책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의암호 주변을 드라이브한 뒤 강촌을 포함한 남부 지역을 둘러보면 흐뭇한 1박2일의 여정이 된다.
만약 춘천 여행을 2박3일로 계획했다면 두 번의 잠자리 중 하루는 산기슭, 나머지 하루는 호숫가에서 해결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하면 춘천의 산내음과 물내음을 모두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소양대교 근처에 세워져 있는 ‘소양강 처녀’ 동상. 한때 대한민국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그 표정으로 오늘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2009년의 서울춘천고속도로 건설은 조금 늦은 감이 있다. 그 동안 우리나라 도청소재지 중 고속도로가 지나지 않는 곳은 강원도청이 들어서 있는 춘천이 유일했다. 이제 드디어 그 오랜 숙원이 해소된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으로 보면 서울춘천고속도로가 춘천의 경제에 득이 될지, 아니면 ‘빨대효과(Straw Effect)’로 오히려 독이 될지는 전문가마다 견해가 조금씩 다르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외지인들이 춘천의 매력에 빠져들 기회는 훨씬 더 많아졌고 무척 수월해졌다는 사실이다.
서울 강동의 하일동에서 춘천 동산의 조양리까지 이어지는 서울춘천고속도로의 전체 길이는 61.4km. 이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춘천까지 보통 1시간30분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것이 무려 40분대로 가까워진다. 게다가 주말이면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시달리던 경춘가도(46번 국도)도 여건이 좋아지면서 춘천을 찾는 여행자들은 노선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맥국의 도읍지였던 춘천
한반도 중부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강원도는 산이 매우 높고 험한 남한 최고의 산악 지방이다. 그렇지만 내륙 강줄기와 동해안 주변의 비옥한 농토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강원도에 터를 잡은 최초의 부족국가는 예맥국. 예국은 양양·강릉 등 동해안 지역, 맥국은 춘천·원주·철원 등 내륙 지역에 부족국가를 세웠다. 이 때문에 강원도를 ‘예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춘천은 맥국의 도읍지다.
지리적으로 춘천은 두 개의 커다란 강줄기를 끼고 있다. 하나는 북녘 땅 금강산에서 발원해 휴전선을 넘어온 북한강이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북한강의 가장 큰 지류로서 북녘 땅 무산 부근에서 발원한 소양강이 그것이다. 여기에 1965년 춘천댐, 1967년 의암댐이 북한강 본류에 세워지고, 1973년엔 소양강 물줄기에 소양댐이 들어섬으로써 춘천은 비로소 ‘호반의 도시’라는 애칭을 얻게 됐다. ‘희망이 강물처럼 흐르는 도시 춘천’. 춘천시청 홈페이지에 나오는 이 구호는 강으로 에워싸인 춘천의 지리적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춘천시내를 한눈에 담는 구봉산 전망대
서울춘천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이어 달린 뒤 춘천 나들목으로 나서면 곧바로 46번 국도와 연결된다. 소양댐으로 가기 전에 반드시 구봉산 전망대에서 춘천 시내를 조망하는 일. 춘천 여행의 필수 사항이다.
▲ 오봉산 전망대에서 춘천시내 야경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 이곳은 춘천시내를 조망하기 가장 좋은 포인트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고려정원인 영지. 구성폭포에서부터 오봉산 정상의 식암에 이르기까지 3km 정도의 산자락이 모두 정원이었다.
호반의 도시를 한눈에 담으려면 이만한 조망처도 없을 성싶다. 물론 양구에서 춘천으로 넘어오다 보면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46번 국도의 배후령 고갯길, 중앙고속도로 원창고개에 위치한 춘천휴게소 등이 춘천시내 조망처로 꼽히지만, 그래도 소양강과 북한강이 휘감고 흐르는 도시의 전체적인 균형미를 감상하는 데는 이곳 구봉산 전망대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평가다. 특히 밤에 내려다보는 광경은 춘천8경 중 하나에 속할 정도로 빼어나다.
그래서 이곳은 예전부터 춘천 시민은 물론이요, 관광 온 외지인들에게도 제법 인기 있는 장소였다. 당시엔 공터에 비치파라솔 몇 개, 편의점 한 군데, 카페 한두 군데가 전부였다. 요즘엔 규모가 큰 레스토랑도 여럿 자리하고 있어 아무래도 일반인들의 발길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인기는 여전하다.
▲ 신숭겸 장군 묘역 가는 길. 왕건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충절을 상징하듯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대견하다.
앞으로 돌아다닐 춘천시내 풍광을 가슴에 꼭꼭 담았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길을 나서보자. 계속 46번 국도를 따라 소양댐으로 달리는데, 춘천옥이 옷깃을 붙잡는다. 그렇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동면 월곡리의 옥광산을 빼뜨릴 수 없다. 춘천옥은 국내에서 유일한 옥광산이면서, 동시에 세계 유일의 백옥(연옥) 광산으로서 연간 200~300t의 백옥을 캐내고 있다. 아직도 약 30만t이 땅속에 묻혀 있다 하니 앞으로도 1000년 이상 채굴하는 것도 거뜬하겠다.
원래 이곳은 곱돌(납석)광산으로 운영되던 곳인데, 1968년 우연히 옥이 발견된 후 1974년 대일광업(주)이 설립되면서 옥광산으로 변화했다. 이후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꾸준히 인기를 얻었고, 1999년 춘천옥 제품이 춘천시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금과 더불어 부귀영화의 상징이던 옥. 몸에 지니고 있으면 옥에서 나오는 기(氣)로 인해 인체의 리듬이 안정되고 피로 회복과 숙면을 취하는 데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는 신비한 광물이다. 게다가 춘천옥은 인체에 필요한 세 가지 광물, 즉 칼슘·철분·마그네슘을 포함해 20여 종의 원소를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혈액순환과 신진대사를 촉진시키며 고혈압·두통·불면증이나 목·관절·어깨·허리 통증이 가시고 부인병에도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건강에 좋은 춘천옥의 기운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도 많다. 옥을 채굴하던 150m 길이의 동굴 양편으로 옥 조각들이 긴 터널을 이루고 있는데 그 끝엔 옥마루가 깔려 있다. 그리고 옥정수 한 모금. 지하 420m 옥벽에서 흘러나오는 옥정수는 미네랄이 풍부한 천연 알칼리수로 인체 면역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 소화를 원활히 도와주고 피부 미용에도 좋다고 소문나 있어 특히 여성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맛은 달짝지근하다. 관리인은 “옥정수를 마시고 찜질하면 몸에서 원적외선이 나와 몸이 상쾌해진다”고 자랑한다.
164.첫 대현상선 팬코리아
1972년 5월 16일 부산 영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조선소에서 한 행사가 열렸다. 부산항 내 모든 선박이 뱃고동을 울리고 바다 위에 떠 있는 소방정에서는 5색으로 물들인 물을 쏘아 올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1만t급 이상 대형 상선(商船) '팬 코리아호' 진수식(進水式·조선소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배를 바닷물로 띄워 보내는 행사)이었다.
이전까지 국내 조선소는 중소형 어선을 겨우 만들어내는 수준이었다. 세계 조선·해운업계에서 선박이 대형화되는 추세를 보이던 당시, 1만8000t급 팬 코리아호 건조를 시작으로 국내에서도 대형 선박 생산 시대가 열렸다.
이 배는 곡물·광물 등을 나르는 화물선으로 범양상선(현 STX팬오션)이 1971년 1월 발주했다. 1972년 당시 소련의 대흉작으로 곡물 운임이 2배 가까이 폭등하면서 팬 코리아호는 운항 1년 만에 선박 건조비 이상의 돈을 벌어들였다.
▲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1만t급 이상 대형 상선(商船) '팬 코리아호' 진수식.
1972년은 한국 조선산업의 일대 전환기였다. 그해 3월 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울산시민 등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대중공업 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영국 금융회사 사장들에게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우리는 수백년 전에 이런 배를 만들었다"며 조선소 건립 자금을 빌린 일화도 탄생했다. 삼성이 1977년 조선업에 뛰어들면서 한국의 조선업계는 '규모의 경제'를 갖춰갔다.
한국 조선업계는 과감한 투자와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 획기적인 생산 방식 도입 등으로 2000년대 이후 확고한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한국 조선업계는 지난해 선박 수주량, 인도량, 수주잔량(주문을 받아놓은 일감) 등 3개 부문에서 6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세계 10대 조선소 가운데 7곳이 한국 업체다.
조선업은 세계 경기 침체기에 한국 경제의 버팀목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1월 무역 적자를 기록하며 위기감에 휩싸였던 우리나라는 2월 흑자(28억2000만달러)로 돌아서면서 힘을 내기 시작했다. 2월 전체 수출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18.3% 줄었지만 선박 수출이 47.3% 늘어난 게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조선업은 지난해 단일 품목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수출 400억달러를 돌파(432억달러)하며 수출 품목 1위에 올랐다.
현대중공업의 FPSO(부유식 원유 생산·저장설비)와 삼성중공업의 드릴십(수심이 깊거나 파도가 심한 해상에서 원유·가스를 시추하는 선박 형태 설비)은 대당 가격이 1조원이 넘는 고부가가치 품목으로, 기술이 뒤떨어지는 다른 나라에서는 흉내조차 못 내고 있다. 조용준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국은 IT 기술을 활용해 경쟁력을 높이고 있기 때문에 중국도 쉽게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65.첫 복제 동물 영롱이
▲ 대한민국 최초의 복제 동물인 복제 젖소 '영롱이'.
지난 1일 조선일보에는 서울대가 세계 최초로 복제한 늑대 암컷 한 마리가 최근 평균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숨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같은 날 제주대 박세필 교수 연구진이 멸종위기에 처한 제주 흑우(黑牛)를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사도 실렸다. 하루에 복제 동물의 운명이 엇갈린 것이다. 이날 대한민국 최초의 복제 동물인 복제 젖소 '영롱이'는 하늘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영롱이는 1999년 2월 12일 오후 5시30분 경기도 화성시의 한 목장에서 태어났다. 당시 복제를 주도한 서울대 황우석 교수는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영롱(young-long)이'란 이름을 붙였다.
영롱이는 1996년 태어난 최초의 복제 동물 돌리와 같은 방법으로 태어났다. 넓게 보아 영롱이의 어미는 3마리다. 우선 우유를 많이 생산한 우량 암소에서 자궁 세포를 얻었다. 다음엔 다른 암소에서 난자를 채취해, 유전물질이 든 핵을 제거했다. 자궁 세포를 '비어 있는' 난자에 집어넣고 전기충격으로 융합시켰다.
이렇게 해서 자궁 세포의 유전자를 가진 수정란이 만들어졌다. 수정란은 시험관에서 며칠 자란 후 또 다른 암소의 자궁에 이식됐으며, 275일 후 영롱이가 태어났다. 영국(양)·일본(소)·뉴질랜드(소)·미국(쥐)에 이어 세계 5번째의 복제 동물이 탄생한 것이다. 젖소로는 세계 최초였다. 두달 뒤 황 교수는 복제 한우도 탄생시켰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영롱이는 건강하게 자라 새끼도 많이 낳아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1년 4월 당시 과학기술부 김영환 장관은 "복제 소 20마리를 북한에 보내겠다"고 발표했지만, 결국 말 잔치로 끝났다. 과학을 정치에 이용했다고 영롱이까지 도매금으로 욕을 먹은 것이다.
결정적인 시련은 2005년 말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불거진 복제 진위(眞僞) 논란이었다. 황 박사는 영롱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복제 여부를 입증할 자료도 사라지고 없었다. 유전자를 제공한 어미는 이미 죽은 지 오래돼 DNA 검사도 할 수 없었다. 논란이 일면서 복제 소는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최근 황 박사의 측근은 두 소가 2~3년 전 자연 폐사했다고 밝혔다.
제주대 박세필 교수는 영롱이의 진위에 대해 "당시 진행되던 황 교수의 연구로 볼 때 영롱이는 실제로 복제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모든 복제 동물이 논문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복제 방법이 이미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2003년 경상대 김진회 교수의 돼지 순종 복제나 2005년 서울대의 세계 최초 복제 개 '스너피'처럼 특별한 경우에나 논문으로 인정받는다는 것.
영롱이가 태어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선 세계 최초로 애완견 복제사업이 시작됐다. 장기이식용 미니돼지 복제도 봇물이 터지고 있다. 축산과학원은 거세된 우량 수소를 복제해 인공수정용 '씨'를 보존하고 있다. 제주대는 우량 흑우 암소도 복제해 이번에 복제한 씨수소와 자연교배시킬 계획이다.
166.한국 뮤지컬 1호 살짜기 옵서예
"무선 마이크가 다 뭐예요. 일반 마이크도 귀하던 시절이에요. 전파사들 돌아다니면서 선거 때 쓰던 마이크 100여개를 구해다 뮤지컬 공연을 했습니다."
1966년 10월 예그린 악단이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창작 가무극 '살짜기 옵서예' (김영수 작·최창권 작곡·임영웅 연출)를 공연할 때 기획을 맡았던 박만규(72)씨는 이렇게 술회했다. 서양 뮤지컬 형식을 모방한 음악극 '살짜기 옵서예'는 한국 뮤지컬 1호로 통한다.
1961년 창단한 예그린 악단은 한국적 음악극을 태동시킨 단체다. 한국적 전통을 소재로 국민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합집산을 거듭한 예그린은 서울시립가무단을 거쳐 현재 서울시뮤지컬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 창작 가무극 '살짜기 옵서예'./박만규씨 제공
'살짜기 옵서예'를 한국 뮤지컬 1호로 보는 까닭은 그 규모와 형식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와 무용단·합창단·배우를 합쳐 출연진만 100명이 넘었다. 연출가 임영웅은 "뮤지컬이라는 말을 그전에도 썼지만 전속 오케스트라와 많은 장면전환, 다양한 무용 장면을 들여온 것은 '살짜기 옵서예'가 최초였다"고 했다. 그래서 뮤지컬협회는 '살짜기 옵서예'가 초연된 10월 26일을 뮤지컬의 날로 지정했다.
고전소설인 배비장전을 각색한 '살짜기 옵서예'는 주제가가 대중가요로 불릴 만큼 인기를 누렸다. 제주도로 간 배비장이 기생 애랑에게 빠져 망신당한다는 이야기로, 제목은 '살금살금 오세요'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초연 무대의 여주인공 애랑은 미국에서 막 돌아온 가수 패티김이 맡았다.
'살짜기 옵서예' 초연은 나흘간 밤낮으로 총 8회 공연했고 "임영웅의 연출 스케일을 파악하게 했다. 무대를 휘어잡을 수 있었다"(이상만) "화려한 춤과 노래로 즐거움을 주고 민족 흥취를 느끼게 해주었다"(곽복록) 같은 평을 받았다. 양악기와 재즈 리듬에 담은 한국적 가락, 발레 기법을 응용한 무용(안무 임성남)도 사랑받았고, 이런 성공에 힘입어 여러 번 재공연도 했다.
요즘 관객을 모으는 뮤지컬은 대부분 수입산이다. 서양에서 히트한 뮤지컬이 대본과 음악을 사오는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거쳐 국내에 들어온 것은 1990년대 중반 '브로드웨이 42번가'가 처음이었다.
167.박정희와 통음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가끔 늦은 밤에 서울 혜화동 김학렬(1923~1972)의 집을 찾았다. 두 사람은 콩나물국에 동동주를 마시며 경제를 논했다. 취하면 '황성옛터' 합창이 터졌다. 김학렬의 부인이 눈총을 주면 박 대통령은 "이봐요. 자네 바깥양반은 내 과외 선생이야. 내가 경제를 배우러 과외 선생 집에 오는데 뭐가 잘못됐어"라며 웃었다('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에서 인용). 사람들은 "정치는 이후락, 경제는 김학렬"이라 했다.
김학렬은 1968년 말 청와대 경제 제1수석으로 임명됐다. 교통·보사 등을 담당하는 경제2수석은 신동식이 맡았다. 청와대에 경제수석이 생긴 건 그때가 처음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에는 비서가 10명도 안 됐다. 경제담당이라 할 만한 비서가 따로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경제 관료들은 대한민국 경제수석 1호로 김학렬을 꼽는다. 김학렬은 재무부 장관에 이어 청와대에서 정부 정책을 총괄하는 정무수석으로 3년 일한 뒤 경제1수석으로 옮겼다. 경제 개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지가 그만큼 컸다. 김학렬은 1969년 6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영전했고, 박태준 박정희 김학렬 세 사람이 포항 1기 고로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학렬에게서 바통을 받아 4년 동안 경제수석으로 일한 정소영(77)씨는 "그는 정말 머리가 비상한 분이었다"고 했다. 1950년 제1회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행정고시 넘버원'으로 불린 사람이 김학렬이다.
▲ 김학렬은 1969년 6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영전했고, 박태준 박정희 김학렬 세 사람〈사진·왼쪽부터〉이 포항 1기 고로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1970년대엔 경제수석을 1·2·3까지 세명을 둔 적도 있다. 경제1수석은 상공·교통·체신·농림·건설·재경을, 경제2수석은 과학기술·중화학공업을, 경제3수석은 관광진흥을 담당했다. 1971년부터 1979년까지 경제2수석을 지낸 오원철(81)씨는 "당시는 청와대에서 정책 기획부터 집행까지 철저하게 완수하는 책임을 졌다"고 했다. 그만큼 청와대 경제수석이 일선 경제부처와 현실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런 경제수석의 힘은 박정희 시대 이후 갈수록 줄어들었다.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들었던 김재익, 노태우 대통령 시절 이미 금융실명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문희갑, 추진력과 고집으로 정평이 났던 김종인 정도가 '센 수석'으로 꼽혔다.
8월 31일 청와대 개편에서 윤진식 경제수석이 정책실장을 겸하게 됐다. 윤 수석은 2003년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으나 작년 6월 차관급인 경제수석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제계에서는 그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후임이 될 것이라는 말들이 벌써부터 나온다. 그렇게 되면 윤 실장은 김학렬의 궤적을 잇게 된다. 다만, 윤 실장과 이 대통령이 김학렬과 박 대통령처럼 서로 '통음'하는 사이인지는 모르겠다.
168.첫 인공위성 "우리별"개발자 박성동
민간 인공위성 제작업체를 창업한 박성동(43·쎄트렉아이 대표)씨. 그는 한국에서 인공위성과 관련된 최초 기록을 갖고 있다. KAIST 인공위성센터 연구원 시절인 1992년 8월 11일 한국 최초의 위성 '우리별' 1호를 제작, 우주에 태극마크를 심는 데 성공한 주인공이다. 당시 26세였다.
그는 KAIST 4학년이었던 1989년에 영국 서리(Surrey) 대학으로 '인공위성 제작 유학생'을 뽑는다는 공고에 지원하면서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제작자가 됐다. 대학원생이 2년여 만에 국가 첫 인공위성을 제작해 귀국한다는 것이 지금 보면 무모한 발상이었지만 그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박성동은 "나뿐 아니라 같이 떠났던 4명도 우리의 미래를 두고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았다"며 "당시만 해도 사회 분위기가 도전을 격려하는 시기였다"고 말했다. 박성동·장현석·최경일·김형신·김성헌 연구원은 서리 대학에서 우리별 1호를 제작, 우주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어 우리별 2, 3호의 개발에 연거푸 성공했다. 우주과학 영재들은 대한민국을 인공위성 개발 국가로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1999년 박성동은 기쁨과 좌절을 동시에 맛봤다. 우리별 3호 개발에 성공했지만 몸담고 있던 KAIST 인공위성센터가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의 통합 논의로 어수선했다. 통합은 불발에 그쳤지만, 박성동을 비롯한 고참 연구원들이 그 여파로 인공위성센터를 떠나야 했다. 박성동은 수능 시험을 다시 치르고 의사로 직업을 바꾸는 것까지 생각했다. 그는 "위성 제작 기술이 내 것이 아니라 국가 소유라는 생각이 들어 관련 일을 계속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위성 제작을 지속하려면 창업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국내의 좁은 시장을 생각하면 고객은 국제 사회다. 하지만 우주 후진국인 한국이 대당 200억원에 달하는 인공위성을 만들어 팔겠다는 것은 영국 유학을 떠났던 때보다 더 무모한 도전이었다.
박성동은 "중·소형 인공위성만큼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를 비롯한 우리별 개발진은 국내 최초의 민간 인공위성 제작 회사인 '쎄트렉아이'를 설립했다. 2001년에는 말레이시아가, 2006년에는 두바이에서 인공위성 제작을 이 회사에 맡겼다. 지난 7월에는 말레이시아의 '라작샛(RazakSAT)'과 두바이의 '두바이샛(DubaiSat-1)' 모두를 무사히 우주에 안착시켰다. 한국에 인공위성 수출시대가 열린 것이다.
올해 한국은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를 발사했다. 비록 불발에 그쳤지만 박성동을 비롯한 어린 영재들을 유학 보냈던 지난 1989년에 이어 20년 만에 대한민국이 우주개발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169.양심까지 가리는 자동차 번호판 가리개
버튼만 누르면 차량 번호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자동차 번호판 가리개가 최근 유행처럼 팔리고 있다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과속 단속 카메라가 설치돼 있는 구간을 달리던 승용차 번호판이 버튼 한 번에 갑자기 검게 변하며 번호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단속 구간을 지나가자 번호판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신기한 신종 기술’이었다.
비결은 검정색 번호판 가리개. 이 가리개를 번호판 앞에 설치한 뒤 운전자가 버튼만 누르면 검정 필름이 내려왔다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불법 주정차를 막기 위해 설치한 무인단속 카메라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고, 속도위반이나 신호위반 등을 단속하기 위해 설치한 단속 카메라도 무력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위반 차량이 촬영되더라도 차량번호를 알 수 없어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번호판을 감추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그러나 자동차용품 판매점에서는 20만원대에 거래되는 이 번호판 가리개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어떤 점포는 올해 1000개도 넘게 팔았다고 하기도 했다. 한때 속도위반 단속카메라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며 불티나게 팔렸던 속도감지 GPS가 네비게이션 보급으로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불법을 저지르는 장치가 나타났다.
이는 얌체운전자가 범람하는 대한민국의 사정을 보여준다. 속도위반, 신호위반, 주정차위반 등 비 정상적이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도로에서 운전을 하는 것도 모자라 그에 대한 처벌을 면하기 위하여 차량번호판까지 감추니 말이다.
자동차번호판을 가리는 행위는 현행 자동차관리법 제82조 제1호(제10조 제5항)에 의거 1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결국 속도위반 3만∼9만원, 신호위반 6만원, 주·정차위반 4만원의 범칙금을 아끼려다 최대 100만원의 벌금을 납부해야 하고 흔히 ‘빨간줄’로 불리는 전과자가 되는 셈이다.
자신이 급히 갈 일이 있다면 미리 충분한 시간을 두고 출발하면 속도를 위반해 가면서 운전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교차로상의 교통신호에 걸리면 다음 신호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한다고 해도 늦어도 2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여유를 가지고 운전하면 잠재적 위험은 물론, 벌금 피해도 줄일 수 있다.
요즘 대로변 상가들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주차장을 확보하지 못해 부득이 불법 주정차를 하는 차량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일을 보아야 한다면 주변에 있는 주차장을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주정차위반 범칙금과 견인비를 포함한 수만원의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 자동차번호판을 가리는 장치 구입비 20만원과 과속으로 인하여 소모되는 기름값 등을 생각해보자. 정속주행으로 소비되는 연료와 주차장에 들어가는 주차비용 등을 합산한 것보다 적게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불법을 불법으로 가린다고 해서 그것이 합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8.15 사면으로 음주·무면허운전, 기타 교통법규 위반 및 사고로 인하여 운전면허가 취소·정지되거나 벌점이 부과되어 누적이 있던 150만 명이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도로교통법을 위반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나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며, 핸들을 잡을 때는 조그마한 여유를 갖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교통사고·사망사고 없는 나라, 막히지 않고 안전한 도로, 큰소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양보하며 사과할 줄 아는 미덕을 가진 운전자, 신호가 없어도 보행자를 챙겨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가득한 성숙하고 멋진 민주시민사회가 하루빨리 정착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족집게 수사관 고영민 경장은?
2002년 경찰에 투신 인천부평경찰서 수사과에서 사이버범죄, 지능범죄 등을 수사했다. 2005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보험사기범 등 200명을 검거해 1계급 특진했으며 2006~2007년 연속으로 보험 사기범 단속 유공 경찰관으로 선발됐다.
170.한국인 첫 프로골퍼
▲ 국내대회 1호 챔피언이 됐고 1968년 KPGA(한국프로골프협회) 출범을 주도해 '한국 골프의 산 증인'으로 불렸던 연덕춘이 영국 골프월드컵에 참가, 티샷을 날리는 사진.
양용은(37)이 이달 중순 PGA(미국프로골프협회) 투어 챔피언십에서 타이거 우즈를 꺾고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대회 정상에 올랐을 때, '대한민국 프로골퍼 1호'인 연덕춘(2004년 별세)도 만세를 부르며 환하게 웃었을 것만 같다. 1916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연덕춘은 1935년 한국인 최초로 프로골퍼 자격을 얻었다.
1958년 국내에서 열린 첫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서 우승하며 국내대회 1호 챔피언이 됐고 1968년 KPGA(한국프로골프협회) 출범을 주도해 '한국 골프의 산 증인'으로 불렸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56년 그는 이미 영국 골프월드컵에 참가, 티샷을 날리고 있었다.
연덕춘이 골프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4세 때 집 근처 골프장(경성CC)에서 캐디 보조로 일하면서부터다. 일본인 프로골퍼가 준 클럽 1개를 들고 연습을 하며 프로의 꿈을 키웠고 1년 만에 파 플레이(정해진 타수로 경기를 마치는 것)에 가까운 실력을 갖췄다고 한다. 연덕춘은 경성골프클럽이 뽑은 '제1호 조선인 프로 후보'가 되면서 일본 유학 기회를 얻었고 1935년 2월 일본에서 프로 자격증을 획득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연덕춘은 일제 치하인 1941년 일본오픈골프선수권에서 4라운드 합계 290타로 우승, 한국인 최초로 일본오픈을 제패하는 쾌거도 이룬다.
불모지였던 한국골프를 개척한 연덕춘은 '불운아'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내엔 변변한 골프장이 없어 대회조차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덕춘은 해외로 눈을 돌렸고 1956년 필리핀 오픈에서 6위, 같은 해 출전한 영국 골프월드컵에선 개인전 24위를 기록했다.
이후 한국골프는 세계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1972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한장상(69) KPGA 고문이 1973년 한국인 최초로 PGA 마스터스 무대를 밟았다. 같은 해 김승학(62) 전 KPGA 회장은 브리티시오픈 공동 64위로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컷 통과 기록을 세웠다.
PGA에 최초 진출한 한국인은 최경주(39)다. 최경주는 2000년 PGA에 데뷔했고, 2002년 5월 컴팩클래식 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인 1호 PGA 대회 우승'의 결실을 보았다.
한국 여자 골퍼들은 남자보다 앞서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메이저 대회의 정상을 밟았다. 박세리(32)가 LPGA 데뷔 첫해인 1998년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한국 여성 최초로 LPGA 메이저대회 정상에 올랐다. 박세리 우승 이후 LPGA의 문은 전 세계의 시새움을 사며 한국 여자 골퍼들에게 활짝 열렸다.
조선일보
■ 대한민국 여성 제1호
2015-08-02 동아일보
<1>여상 출신 삼성전자 첫 임원 양향자 상무
지난해 12월 발표된 삼성그룹 임원 승진 인사에서 유독 빛나는 이름이 있었다. 양향자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상무.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출신으로 광주여상을 졸업해 삼성그룹 설립 이래 최초로 여상 출신 임원이 된 인물이다.
세간의 관심에도 나서기를 꺼렸던 양 상무가 14일 오후 대전 충남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 상무는 이날 ‘삼성 드림클래스’ 겨울캠프에 참가한 중학생들의 멘토가 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 오르기 전 대기실에서 만난 양 상무는 “강연 요청을 받고 이틀 밤을 지새우며 인생을 되돌아봤다”고 했다. 남들에겐 평범한 강연일지 몰라도 자신에겐 누구보다 절실했고, 그래서 치열하게 살았던 날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이날 초대된 중학생들은 모두 지방 중소도시나 산골, 섬 등에 사는 저소득층 아이들. 그는 30년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더 고민했다고 했다.
“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제 고향은 전남 화순군 쌍봉리예요. 혹시 아세요?” 양 상무는 그렇게 산골소녀 시절의 향자로 돌아가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꺼냈다.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는 봉우리가 두 개인 산자락에 양씨와 정씨 200여 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누나, 아부지가 얼른 안방으로 건너오란다.” 남동생이 불렀다. 폐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평생을 안방 이부자리에 누워만 계셨다.
“향자야, 이제 나는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더 기력이 없었다. 퀭한 눈 때문에 별명이 ‘소 눈’이었던 아버지는 큰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동생들 잘 부탁한다.”
농사짓는 할아버지, 할머니, 광주 시내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두 명의 오빠와 두 명의 남동생을 챙기는 건 어릴 적부터 나의 몫이었다. “아부지. 제가 알아서 할게.” 1982년 겨울 어느 날, 아버지와 했던 나의 첫 번째 약속이었다. 열다섯 살 때 일이다.
아버지를 떠올린 양 상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따 무대 위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기자님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 해본 적 있죠? 보통 사춘기 때는 선생님 잔소리 피하려고, 부모님한테 짜증이 날 때 하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이 말이 내 인생, 그리고 우리 가족을 책임지겠다는 무거운 약속이었어요.”
한때 대학교수가 돼 강단에 오르는 꿈을 꿨던 소녀 향자는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없이 일주일 전 꼬박꼬박 눌러쓴 인문계고 입학 원서를 반으로 접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다음 날 광주여상 입학원서를 새로 썼다.
특별할 것 없었던 여상 시절이 지나갔고 1985년 겨울 또 한 번의 갈림길에 섰다. 대학을 갈 것인가, 취업을 할 것인가. 사실 대학에 정말 가고 싶었다. 가서 제대로 영어도 공부하고 싶었고 그토록 되고 싶었던 교수라는 사람들도 직접 보고 싶었다. 현실은 취업뿐이었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겠다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경기 기흥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메모리설계팀에 입사했다. 대졸 연구원들의 업무를 돕는 보조, 이른바 ‘시다바리’였다. 매일 오전 7시 출근해 복사 일부터 연구원이 던져주는 반도체 회로를 도면에 그려내는 단순 업무를 반복했다. 손은 주어진 대로 움직였지만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욕망했다. ‘회로를 왜 저렇게 그리는지 알아야겠다. 더 배워야겠다, 더 공부해야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이 반도체 업계 1위였다. 회사에는 일본 선진업체들이 일본어로 출판한 기술서적이 많았다. 기술을 알려면 일본어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세 말단 직원은 겁도 없이 사내(社內) 일본어 학습반에 들어갔다. “고졸인 네가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는 강사의 비아냥거림과 대졸 연구원들의 텃세를 견뎌가며 매일 3시간씩 공부했다. 주말에도 기숙사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공부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가장 먼저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
‘일본어를 기가 막히게 하는 여사원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연구원들이 번역이 필요한 일본 서적을 들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기술 자료를 밤새워 번역하다 보니 반도체 설계 업무에 대한 이해는 덤으로 따라왔다. 어느덧 반도체 설계 업무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1990년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임신했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의 첫 임신부였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회사 관두지 않느냐’는 말도 수시로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그리고 나 스스로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내가 알아서 잘하자.’
아이를 낳고 나니 바람은 더 커졌다. 부산 시댁에 맡겨놓고 한 달에 한 번밖에 보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훗날 부끄럽지 않을 엄마가 돼야 했다.
1993년 인사팀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사내 기술대학 반도체공학과 입학원서였다. 여상을 졸업할 때 그토록 써보고 싶었던 대학 원서였다. “여사원은 사규상 뽑을 수 없다”는 인사팀 과장에게 ‘시험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이었기에 매일 오후 4시 퇴근 직후부터 오후 9시까지 수업을 들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 3년 뒤엔 함께 입학한 남자 직원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입사 22년 만인 2007년 메모리사업부 D램 설계팀 수석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성균관대에서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도 땄다. 대학도 못 갈 줄 알았던 내가 석사라니…. 양 상무는 조직의 일부를 책임지는 수석 자리에 오른 후 여성 리더로서의 장점을 본격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회사에서 후배들 사이 그의 별명은 ‘이모’. 든든한 이모처럼 후배들의 뒤를 지켜준다는 의미에서다. ‘열혈 부장’ 시절 그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중국 우한(武漢)에서 결혼하는 중국인 직원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휴가를 내고 비행기에 오른 것.
“중국 사람이니 당연히 외동아들일 거 아녜요. 이왕 간 김에 돌아가신 직원 아버님을 대신해서 축사도 직접 읽었어요. 축사 준비하면서 덤으로 중국어 자격증도 땄으니 일석이조죠.”
그리고 부장 6년차이던 지난해 12월 5일, 아버지 30주기 제삿날이었던 그날 아침 그는 당시 상사였던 전동수 삼성전자 사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양 상무, 축하해.”
30년 전 아버지가 하늘의 별이 됐던 그날, 그는 삼성의 별이 됐다. 그는 삼성그룹 역사상 최초의 여상 출신 임원이다.
별을 달던 순간 아버지 얼굴부터 떠올랐다고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려고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 세월을 보상받은 거겠죠?” 아버지가 당부했던 대로 양 상무는 두 동생도 자랑스럽게 잘 키워냈다. 막냇동생은 누나를 따라 입사해 삼성맨이 됐다.
가족은 양 상무가 ‘지키기 위해’ 애써 온 존재이자, 입사 후 28년간 그의 삶에서 필요한 순간 가장 먼저 손길을 내어 준 은인들이다. “승진하고 나서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드렸어요. 이미 양씨 문중에서 고향에 플래카드를 걸었더라고요. 열혈 시부모님 생각도 났어요. 아이 둘 대신 키워 주시느라 부산에서 결국 제 회사 옆인 수원으로 짐 싸들고 올라와 주셨거든요.” 떨리는 목소리로 무대에 올랐던 양 상무는 이날 강연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제가 여러분의 30년 후 미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제가 미리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의 30년 후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저는 여러분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리라 믿습니다.”
2000명의 학생이 보내는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우자 양 상무 눈에서는 끝내 참았던 눈물이 또 한 번 터져 버렸다.
▼ 양향자 상무가 걸어온 길 ▼
―1967년 출생
―1983년 인문계 진학 포기 후 광주여상 입학
―1985년 대학 진학 포기 후 삼성반도체통신 입사
―1990년 결혼 후 일과 가정일 병행
―1991년 출산 전날까지 근무하고 첫딸 출산
―1993년 메모리사업부 S램 설계팀 과장 승진
―1995년 삼성전자기술대 반도체공학 학사 취득
―2005년 한국디지털대 인문학 학사 취득
―2007년 메모리사업부 D램 설계팀 부장 승진
―2008년 성균관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취득
―2013년 입사 28년 만에 상무 승진
대전=김지현 기자 jhk85@donga.co - 동아닷컴
<2>권선주 IBK기업은행장
2014-01-23
▲서울 중구 을지로 본점에서 만난 권선주 IBK기업은행장은 “이제 여자 후배들에게도 은행장의 꿈을 심어줄 수 있게 돼 보람이 크다”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새해 업무가 시작된 이달 2일. 권선주 IBK기업은행장이 서울 종로4가 한복판에 섰다. 몇 년 만인가. 누구에게나 어수룩했던 시절이 있다. 때론 그리움으로 다가오지만 때론 기억하기도 싫은 아득함…. 권 행장에게는 1978년이 그랬다. 그가 한 곳을 바라봤다. 풋풋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기업은행 동대문지점. 설레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권 행장이 은행 문을 당겼다.
1978년 동대문지점으로 첫 발령을 받은 권선주. 객장 안에 들어서자 수십 개의 눈이 그에게 쏠렸다. 권선주는 지점의 첫 대졸 여성 행원이었다. 직원들의 시선에는 호기심이 잔뜩 들어 있었다. 권선주는 창구 맨 앞줄에 배치됐다.
은행은 광장시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직물, △△주단…. 다닥다닥 붙은 점포 위로 줄지어 매달린 백열등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 아래에서 형형색색의 옷감이 반짝였다. 시장이 활황을 누리던 시기였다. 권선주는 그런 시장을 무대로 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시장 상인들이 검은 봉지에 돈을 둘둘 싸 들고 찾아왔다. 일일이 돈을 세어 통장에 직접 숫자를 적어 넣던 시절이었다. 권선주는 열심히 주판알을 튕겨 가며 이자를 계산해 통장에 적었다. 주판이 손에 익지 않았다. 글씨까지 예쁘게 써지지 않아 속상했다.
하루를 마감할 무렵이었다. 이제 긴장을 풀려는 찰나 창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통장 개수가 안 맞는단다. 권선주는 안절부절못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곤 선배들에게 다가가 통장 3개를 쑥 내밀었다. 버리려던 통장들.
“저기… 제가 글씨를 잘못 써서 버리려고….”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다. 꾸지람이 이어졌다. 그렇게 권선주는 출근 첫날부터 사고를 쳤다. 통장 하나라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곧 일에 익숙해졌다. 포목점 아저씨, ‘미싱집’ 아주머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를 찾아왔다. “좋은 옷감이 들어왔네.” “막내아들이 또 속을 썩이네.” 그들은 그날 장사로 번 돈을 꼬박꼬박 예금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인생사는 또 다른 공부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왜 나는 창구에만 앉아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입사한 남자 동기들은 외환 업무도 보고 여신 업무도 보고 본사에서 기획을 맡기도 했다. ‘똑같이 시험 보고 들어왔는데….’
그는 은행에 들어올 때 꿈이 있었다. ‘권선주’라는 이름 석 자로 인정받고 싶다는 꿈. 그런데 창구에서 예·적금만 받아서는 그 꿈이 요원할 것만 같았다. 지점장을 찾아갔다.
“저도 외환 업무를 하고 싶어요.”
지점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돌한 여직원의 제안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러더니 툭 한마디 던졌다.
“(외환은) 여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네.”
권선주는 여성 대졸 공채 1기로 입사했지만, 조직은 여전히 그를 ‘여행원’으로 봤다. 그때까지 은행은 고졸 출신만을 여행원이란 이름으로 뽑았다가 결혼과 동시에 퇴직시키곤 했다.
‘능력으로 보여 주자.’ 휴일도 없이 일에 매달렸다. 여전히 창구 업무를 맡았지만 마음가짐이 예전과 달랐다. ‘고객 관리’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고객의 이름부터 직업, 예금액, 소득, 가족관계까지 의식적으로 외웠다. 나중에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고객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통장 잔액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고객들의 하소연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조그만 가게에서 어떻게 매출을 올리고 수완을 발휘하는지 그들의 말 한마디에 사업 성공 노하우가 녹아 있었다. 고객에게 귀 기울이니 세상이 보였다.
▲17일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협의회에서 김중수 한은총재(오른쪽)와 악수하는 권선주 행장. 동아일보DB
기업은행 첫 여성 행장이 된 그가 2일 시무식을 마치고 처음 찾은 곳이 바로 이 동대문지점이었다. 첫 출근을 했을 때의 초심으로 은행을 이끌어 가겠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권 행장은 은행원으로 지낸 36년 중 25년을 영업점에서 보냈다. 다들 본사 근무를 선호할 때 영업점을 고집했다. 현장의 중요성을 첫 발령지인 동대문지점에서 배운 것이다. 친정 같은 그곳에서 권 행장은 그 옛날의 고객도 다시 만났다.
“당시 고객들 이름을 지금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 대부분 개인 고객이었고, 그중 자동차 부품 관련 공장을 했던 고객을 찾아 차 한잔을 나눴어요. 아직 기업은행과 거래를 하시더라고요.”
권 행장은 기업은행에서 여성 최초 1급, 여성 최초 지역본부장, 여성 최초 부행장 등 ‘여성 최초’의 역사를 써 나갔다. 그 가운데 가장 소중한 타이틀은 ‘첫 여성 외환 책임자’였다. 1985년 서울 광화문 지점에 있을 때였다.
“말로 표현이 안 되는 뿌듯함이 밀려왔어요. 당시 업무를 맡기던 지점장님의 따듯한 눈길도 생생히 기억하지요.”
외환업무는 1970, 80년대 은행원들에겐 한마디로 ‘꿈’ 이었다. 해외 여행도 자유롭지 않던 때 외국환을 다루는 것 자체가 특별했다. 수출 역군이라는 자부심도 느끼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외국 은행과의 거래에서는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에 역량 있는 직원들에게만 이 업무를 맡겼다. 외환 책임자가 됐다는 건 조직이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금융연수원의 통신 연수로 전문 지식을 늘렸다. 이미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었지만 집안일을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그 덕분에 6개월 과정의 외환 실무 과정도 좋은 성적으로 마쳤다. 지점장은 “미리 준비하는 직원은 처음 본다”고 그를 격려하기도 했다.
“하루 30분, 1시간 자투리 시간이 모이니 적지 않은 시간이 된 거죠.”
위기도 있었다. 1991년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지점에서 차장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결혼한 직장 여성들이 으레 맞닥뜨리는 ‘일’과 ‘가정’ 양자택일의 순간이 그에게도 닥쳤다.
“남편이 해외 발령을 받았어요. 시댁에서는 당연히 아내가 따라가 남편을 내조해 주길 바랐죠. 두 아이가 외국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요.”
‘은행을 그만둬야 하나.’ 처음으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남편만 홀로 중국으로 떠나보내고 아이 둘과 함께 남았다. ‘권선주’라는 이름을 지키고 싶었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닌, 권선주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경제활동을 하려면 일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1998년 방이역지점장으로 부임했을 때 주위에선 ‘여자가 지점장이니 마케팅에 약할 것’이라고 했다. 권 행장은 개의치 않았다.
“건물마다 안내도가 있잖아요. 각 층에 무슨 회사가 있는지 알 수 있죠. 상가와 건물을 모두 다니며 회사 이름을 조사해 우리 고객인지 아닌지 찾아보고 고객이 아닌 회사는 직접 찾아가 맞춤식 마케팅을 했어요.”
당시 그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직원회의를 마치고는 9시부터 점심때까지 인근 회사를 돌았다. 복귀해 오후 업무를 처리하고는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또 고객을 찾아 나섰다. 그 덕분에 외환 거래가 적었던 방이역지점에 연간 거래액이 1억 달러(약 1063억 원)나 되는 고객이 찾아올 정도가 됐다.
2001년 역삼1동지점장으로 부임했을 때도 뚝심을 발휘했다. 역삼1동지점은 대로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해 실적이 형편없었다. 본사에서 폐점 얘기가 오갔다. 권 행장은 부임한 즉시 소형 점포 인상을 주는 지점 명칭부터 ‘역삼중앙지점’으로 바꿨다. 그러곤 방이역지점 때처럼 발로 뛰었다.
“신나게 다녔어요. 역삼동뿐만 아니라 양재동, 포이동까지 직접 다녔으니까요.”
부임 1년 만에 지점 폐쇄 얘기가 쏙 들어갔다. 역삼중앙지점에는 권 행장 때문에 거래한다는 고객이 아직도 많다.
첫 여성 은행장이라는 파격적 인선에 큰 잡음이 없었던 건 권 행장이 이렇게 현장에서 쌓아 온 전문성 덕분이다. 국책은행장 자리는 으레 관료 출신의 남성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차지하곤 했다. 내부 승진의 의미도 크다. 권 행장은 여성과 내부 승진이라는 두 장의 유리천장을 깬 셈이다.
기자가 권 행장을 만난 건 이달 7일이었다. 공고해 보였던 이중창을 깬 권 행장은 의외로 투사형 리더가 아니었다. 권 행장은 “항상 내가 부족한 점을 생각하고 채우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후배들에게는 “힘든 시간을 견뎌 내는 사람이 돼 줄 것”을 당부했다.
인터뷰 내내 권 행장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기자의 질문에 귀 기울였다. 취임 소감을 묻는 질문에도 나긋한 목소리로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많은 분들에게서 조언을 듣고 있다”고 했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3>檢 역사상 첫 여성 검사장 조희진 서울고검 차장
2014-02-06
▲검찰 역사상 최초의 여성 검사장인 조희진 서울고검 차장검사가 서울고검 14층에 걸린 역대 고검장들의 사진 앞에서 자신 외에 여검사가 한 명도 없었던 초임 검사 시절을 이야기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989년 사법연수원생 조희진은 서울동부지청으로 검사 실무수습을 나갔다. 조용히 법전을 보고 강의를 듣던 그에게 검찰은 별세계였다. 검사실은 한 시간에도 몇 개씩 지시가 쏟아질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수의를 입고 포승에 묶인 피의자들이 계속 들락거렸다. 비교적 간단한 사건은 직접 조사하기도 했다. 직장 상사인 여인을 사랑해 집에 불을 지르려다 붙잡힌 직장인, 사소한 시비로 폭행사건에 휘말려 구속된 피의자 등 저마다의 사연을 조사하면서 세상의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 들었다. ‘검사’라는 직업의 매력이 가슴에 새겨졌다.
무슨 직책을 맡든 검찰 내 ‘여성 1호’
여검사로는 처음으로 ‘검찰의 꽃’이 된 조희진 서울고검 차장검사(52·사법연수원 19기)는 초임 검사 시절로 돌아간 듯 설레는 표정으로 25년 전을 돌이켰다.
대한민국에 검찰 조직이 창설된 1948년 이후 지난해 12월 19일자로 65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검사장이 탄생했다. 대한민국 검사 약 1900명 가운데 49명뿐인 검사장은 ‘검찰의 꽃’으로 불린다. 2003년 처음으로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 재판관)이 취임했고 첫 여성 법무부 장관(강금실 장관)이 탄생했다. 이듬해 법원에서는 첫 여성 대법관(김영란 대법관)이 배출됐다. 그동안 검찰에서는 고위직 여성을 찾을 수 없었다.
조 검사장이 실무수습 후 검사를 지망했던 1990년대에는 검찰 조직에 여성 검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조배숙 변호사(사법연수원 12기) 임숙경 변호사(사법연수원 12기) 같은 선배 여성 검사들이 있었지만 검찰에 잠시 근무하다 법원으로 옮겼다.
선후배들은 ‘잘 어울린다’며 응원했지만 ‘여자가 검찰에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진로를 두고 고민을 털어놓자 사법연수원 교수님들은 “여자라서 검사가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반면 여자라서 받는 특혜도 없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현 대통령비서실장)이 사법연수원에 와서 “검찰에 여성이 기여할 부분이 많다”고 강의한 것도 힘이 됐다.
당시 검찰 지원자 82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던 조 검사장은 1990년 서울지검으로 발령을 받았다. 28세 여성 사법연수원생의 검사 임관은 당시 큰 화젯거리였다. “주변에서 힘든 길을 택한다고 걱정이 많지만 여성으로서 미개척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필요로 하고 적합한 분야가 있을 것입니다.” 조 검사장이 임관 당시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당당히 말한 목표였다.
“처음 검사실을 배치받아 갔을 때 간부들이 고민해 배려한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검사실 수사관도 실력 있는 분들로 엄선하고 연배도 고려했다는 느낌이었어요. 당시 저희 검사실 수사관들은 ‘(여자)검사님 잘 모시고 있느냐’란 놀림 아닌 놀림도 받았지요.”
지금은 법정에서 여성 검사를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법조계 여풍(女風)이 거세지면서 변호사는 물론이고 법대 위 판사까지 여성인 경우도 있어 ‘법정의 남자는 피고인뿐’이라는 우스개까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성 검사는 공판에 내보내지 않는 암묵적인 장벽이 있었다. “여성 검사가 공개된 법정에서 잘할 수 있을까,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 때문에 여성 검사는 공판부에 보내지 않았지요.”
처음엔 남자 선배들도 배려 고심
결국 조 검사장은 남자 동기들보다 6개월 늦게 ‘첫 여성 공판검사’로 발령받았다. 공판부에 가고 싶다고 지원한 끝에, 단기 유학을 간 선배 검사가 후임자로 추천해서 겨우 얻은 자리였다. 이후 법무부 여성정책담당관(1998년), 부장검사(2004년), 사법연수원 교수(2005년), 지청장(2010년)까지 조희진이 가는 자리에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최초’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여성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가 된다는 부담이 컸다. 평생 보람이자 부담이 된 이 수식어는 조희진이 20년 넘게 검찰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됐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건을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정책을 제안했다.
2001년 동부지청에서 근무할 때 필리핀 여성 근로자 성폭행 사건이 배당됐다. 한국인 사장이 필리핀 여성을 성폭행해 고소당한 사건이었다. 경찰은 사건 당시 함께 있었다며 사장의 알리바이를 입증해준 친구의 말을 듣고 무혐의 처리해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서 여성 특유의 직감으로 피해 여성의 진술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 발신 추적 결과 사장과 친구가 사건 발생 시점에 서로 동떨어진 장소에 있었다는 걸 밝혀내자 그때서야 사장은 자백했다.
2005년에는 후배 여검사들과 함께 여성폭력 범죄에 대한 자료집인 ‘여성과 법’을 펴냈고, 법무연수원 근무 시절에는 법무·검찰 차원으로는 처음으로 인신매매 범죄의 처벌과 피해 방지 관련 세미나를 기획하고 논문을 펴냈다.
일보다 가정 때문에 검찰을 떠날 뻔한 위기가 있었다. 임관 후 얼마 안 돼 아들을 낳고 건강이 갑자기 나빠진 것.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면서 얼굴이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건강이 우선이니 일을 그만두고 몸을 챙기라”는 주변의 조언에 마음이 흔들렸다.
“딱 2년만 제대로 검사 생활을 해보고 그만두고 싶다고 속으로 기도를 했었어요. 그 기도 때문인지 그 후로 20년 넘게 검사생활을 하고 있네요.”
사표를 써야 할까 고민될 때마다 마음을 잡아준 것은 남편(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 국장)과 친정어머니였다. 남편은 출산 후 몸이 아플 때 아이를 힘든 내색 없이 돌봐줬다. 미국 뉴욕문화원으로 발령받아 갈 때도 조 검사장이 함께 갈 수 없어 남편 혼자 아들을 돌봤다. 또 친정어머니는 집안일과 육아를 도왔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진작 검찰을 떠났을지 모른다.
25년간 검찰에 있게 된 건 행운
“몸이 아프거나 로스쿨에서 좋은 제안을 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첫 여성 검사로) 과분한 혜택을 받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받은 기대와 검찰 후배들, 검사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그때마다 마음을 돌렸어요.”
또 한 번의 고비는 지난해 검사장 승진을 앞두고 찾아왔다. 전체 검사 중 여성의 비율이 25%에 달했고 아동·여성 사건뿐만 아니라 특수 공안 강력 사건으로도 활동 범위가 넓어졌지만 검사장은 한 명도 없었다. 여성 검사장이 나와야 한다는 여론이 검찰 안팎에 형성됐지만 지난해 4월 발표된 검사장 승진 대상자 이름에 ‘조희진’은 없었다. 먼저 승진한 연수원 동기들은 재작년 이미 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제 정말 그만둘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후배들이 만류했다. “어디든 검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논리였다.
늘 과분한 혜택 받고 산 것 같아
특히 검찰 조직에 멘토가 될 여성 선배가 있다는 것에 용기를 얻는 후배들도 있었다. 조 검사장의 후배인 한 여성 검사는 “연차가 쌓이면서 선배 여성 검사들이 개척한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며 “여성이라 구색 맞추기로 발탁됐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등 여성계 인사들과 법조계 선후배들도 힘을 보탰다.
여성 검사장이 탄생한 후 지난달 발표된 검찰인사위원회 결정 내용 중에 눈에 띄는 내용이 담겼다. 대검찰청에 여성 검사가 7명이나 발령을 받았다. 일선 검찰청의 차장과 지청장으로 나간 경우도 꽤 있었다. 조 검사장은 후배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제는 여성끼리도 경쟁하는 시대가 됐어요. 여성 비율이 높아지면서 서로 고민을 나눌 상대도 많아졌지만 경쟁도 치열해진 겁니다.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전문 분야를 키워야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서울고검 14층 회의실 오른쪽 벽에는 역대 서울고검장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현재 재임 중인 국민수 고검장까지 벽에 걸린 역대 고검장 45명은 모두 남자다. 국 고검장 사진 옆에는 차기 고검장을 위한 빈 액자가 걸려 있다. 조 검사장에게 역대 고검장들 사진 앞에서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조 검사장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여성 후배가 늘어나면서 언젠가는 빈 액자에 최초의 여성 고검장 사진이 담길 날도 올 것이다. 조 검사장이 빈 액자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약력
1981년 서울 성신여고 졸업
1985년 고려대 법학과 졸업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 합격
1990년 사법연수원 수료(19기), 서울지검 검사 임관
1998년 법무부 여성정책담당관
2004년 의정부지검 형사4부장
2005년 사법연수원 교수(검찰실무, 국제형사법 연구)
2008년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장
2009년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차장
2010년 대전지검 천안지청장
2013년 검사장 승진, 서울고검 차장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4>한국석유공사 이성숙 탐사기술처장
2014-02-13
▲각국의 에너지 전쟁이 심화되면서 자원을 찾아내는 탐사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성숙 한국석유공사 탐사기술처장은 국내 탐사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그가 석유시추선 모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안양=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여기를 파면 나올 줄 알았는데….’
2013년 3월 어느 날. 이성숙 한국석유공사 석유지질팀장(53)이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벽에는 지진파를 이용해 지질 구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탄성파 단면도’가 붙어 있었다. 이 팀장은 이어 물리검층 그래프도 다시 체크했다.
‘시추할 때 물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건, 분명 근처에 석유가 있다는 소리인데….’
답답한 마음에 괜스레 입안이 말라갔다. 벌써 6개월째였다.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넓이인 이라크 쿠르드 지역의 하울러 광구 작업이 좀처럼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 팀장은 데미르다그, 아인알사프라, 제이가우라, 바난 등 4곳에서 시추 중 우물처럼 땅을 아래로, 아래로 뚫어 석유가 나오기를 목 놓아 기다리고 있었다.
석유公 35년 역사상 첫 여성 처장
이 팀장의 도전 자체가 무모했다는 수군거림도 주변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미 외국의 유명한 회사들이 쿠르드 지역에 야심 차게 들어왔다가 허탕만 치고 철수한 터였다. 치안도 불안해 무장한 보디가드 없이는 지질 조사를 다니기도 힘들었다.
띠리리.
갑자기 이 팀장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지는 하울러 광구 시추현장. 그곳은 새벽일 텐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혹시? 이 팀장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현장 직원의 달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1차 탐사정 플레어링(flaring) 성공했습니다! 불이 붙습니다! 찾았어요!”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한꺼번에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경기 안양시 한국석유공사 본부 사람들은 더덩실 춤을 췄다. “와! 나왔다! 나왔어!”
처음 석유가 펑펑 쏟아진 곳은 이라크 데미르다그였다. 그곳에서는 원유산출시험을 통해 하루 1만 배럴의 석유가 나왔다. 이어 10월과 12월에는 나머지 2곳에서도 원유가 발견됐다. 총 4곳에서 3곳 성공. 보통 1억 배럴이 넘으면 대형 유전이라고 한다. 데미르다그에서 발견된 잠재 자원량은 5억5000만 배럴에 달한다. 그야말로 초대형 유전인 셈.
이 팀장은 이 프로젝트를 이끈 실무 팀장이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올 1월 탐사기술처장으로 승진했다. 한국석유공사에는 25개의 처·실이 있는데, 35년 역사상 여성이 처장을 맡은 적은 처음이다. 그녀는 4개팀을 이끄는 수장이다.
10일 공사 본부 사무실에서 이 처장을 만났다. 당시 소감을 물었다. 그가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쑥스러운 표현이긴 한데…. 솔직히 말할까요? 제 마음속에는 ‘대박’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 우리 독자 기술로 동해 대륙붕 가스유전 발굴
이 처장이 석유탐사에 발을 딛게 된 것은 1992년. 당시 그는 지질학 박사학위를 딴 후 지질자원연구원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던 것일까. 마침 석유공사에서 국내 동해 대륙붕 시추와 관련된 자료 분석 업무를 연구원에 의뢰했다. 평소 국내 대륙붕을 꾸준히 연구해 왔던 그가 적임자로 지목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국내 석유자원을 개발할 기술과 정보가 없었다. 동해 광구의 경우에도 외국 에너지 회사들에 탐사와 시추를 모두 맡겼다.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돌아갔다.
중동전쟁을 시발로 1973년과 1979년 ‘석유파동(오일쇼크)’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급등한 석유 가격 때문에 한국에서도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이 이듬해인 1974년 24.8%로 수직 상승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자원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1979년 공사(당시 이름은 한국석유개발공사)를 설립한 것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이후 국내 석유탐사 작업은 계속 이어져 왔으나 성과가 없었다. 외국 회사들도 모두 철수했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 지질 전문가들은 “동해 대륙붕에 엄청난 자원이 묻혀 있다”라는 주장을 계속 제기했다. 어딘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 지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이 처장이 당시 맡은 업무가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동해 대륙붕서 독자기술로 발굴
그는 외국 회사들의 탐사 실패 원인에 대해 정밀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이어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법을 적용해 새로 분석했다. 6년간 그는 공사와 일을 같이했다. 이제 그의 연구 노하우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산이 됐다. 1998년 4월, 공사는 프로젝트 연구원이었던 그를 아예 과장직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3개월 후인 1998년 7월, 울산 남동쪽 58km 지점에서 천연가스층(동해-1 가스전)이 발견됐다. 석유공사가 국내 독자 기술로 ‘대업’을 이뤄낸 것이다. 동해-1 가스전은 2000년 상업화 선언 이후 본격 개발에 들어가 모든 개발은 2008년 11월 완료됐다. 현재 하루 평균 생산량은 천연가스 5000만 ft³, 원유는 1000배럴에 달한다. 원유 1000배럴(15만9000L)은 자동차 2만 대를 하루 동안 운행할 수 있는 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석유가 그렇게 많이 나온다고요?” 기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이 처장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95번째 산유국이에요. 언젠가 방송을 보는데 남자 아나운서가 에너지 관련 소식을 전하며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에서 더욱 아껴서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냥 웃었어요.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 석유탐사 성패가 개발 성공 좌우한다
석유 탐사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여기다’ 싶은 곳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것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이란다. 이 처장은 벽에 붙어 있는 빨간색 선, 파란색 선, 굵은 선과 가는 선, 흰색 표시들이 가득한 탄성파 도면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탄성파 단면도’라는 거예요. X선 사진 같죠? 틀리진 않아요. 땅의 X선이라 할까? 우리 몸 안에 뭐가 있는지 영상촬영장치로 쭉 훑듯이 땅을 스캐닝하는 거죠. 이걸 보면 5000m 밑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단면도에 있는 굵은 푸른색 선과 흐릿한 선은 지하 지층에 무엇인가 있다는 뜻. 산봉우리처럼 볼록 올라간 곳은 가스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곳을 찾아 파면 석유가 나오기도 한다. 이런 분석 작업은 석유탐사에서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이 과정이 면밀하고 정확하게 이뤄져야 시간과 돈, 모두를 줄일 수 있다.
사실 원유를 찾아내 생산까지 하는 과정은 매우 길고 복잡하다. 탄성파 도면을 분석하는 데만 8개월, 나머지 자료 분석하는 데 1년, 시추 기간 6개월…. 이후 산출 시험과 매장량 평가 등을 하면 최소한 3년 이상 소요되며 생산까지는 10년이 필요하다.
원유가 발견되면 미리 맺은 ‘생산물 분배 계약’에 따라 90%는 자원보유국의 몫이 된다. 개발한 회사는 10%를 가져간다. 외국 유명 석유회사들의 탐사성공률이 10% 정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10번 중 9번은 빈손으로 철수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초기 자료 분석을 치밀하게 해 석유가 있을 만한 곳에만 구멍을 뚫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지혜가 돋보인 사례 하나.
“분명 입찰할 때 가능성이 큰 지역인데, 막상 들어가 보니 아무리 애를 써도 석유를 못 찾을 때 좌절감은 아주 커요. 하지만 외국 메이저 회사들까지 포기한 곳을 우리가 성공했을 때는 ‘우리도 경쟁력이 있구나’란 생각에 기쁨이 배가 돼요. 베트남 15-1광구가 그런 사례였어요.”
○ ‘지방대’ ‘여자 이공계’란 틀을 깨라
참으로 억척스러운 직업. 16년간 이 처장은 탐사 조사를 하기 위해 별의별 국가를 다 다녀봤다.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나이지리아와 콩고민주공화국, 수단, 아프리카의 오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도 강행군
“2006년 아프리카 국가들을 방문할 때 에볼라 바이러스가 발병해 몸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외교부에서는 빨리 귀국하라고 하는데, 이곳에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냥 강행군을 했죠.”
그때만 해도 이 처장처럼 ‘고생하는’ 여직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성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시추 현장으로 장기간 파견 나가는 일도 흔해졌다. 현재 한국석유공사의 직원 1296명 중 229명이 여성이다.
그는 지방대 출신이다. 여성에 지방대 출신…. 이중 차별에 시달리지는 않았을까. 할 말이 있단다. “지방대라는 이유로 스스로 ‘나는 안 돼’라고 위축돼서는 안 돼요. 요즘에야 이공계에 여성들이 많이 간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여자가 지질학이나 자원공학 배우는 경우도 적었어요. 그런 전공을 선택한 제게, 부모님은 격려를 해주셨죠.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고요. ‘지방대’에, 그것도 ‘이공계 여자’가 어때서요? 스스로 가두지 말고 좀 더 자신감과 열정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외국의 에너지 자원을 더 많이 끌어오는 게 꿈이라는 이 사람. 다음 목표는 심해(深海)라고 했다. 수심이 1000m를 넘는 곳, 아직 속살을 보여 본 적이 없는 북극의 저 깊은 곳. 그의 탐사 열정은 아직도 목이 마르다.
▽프로필
― 1980년 2월 대전여자고등학교 졸업
― 1984년 2월 충남대 해양학과 졸업
― 1992년 8월 충남대 지질학 박사 과정 졸업
― 1998년 4월 한국석유공사 입사
― 2006∼2007년 기술지원실 기술평가팀장
― 2010∼2012년 석유탐사실 석유지질팀 담당역
― 2013년 탐사기술처 석유지질팀장
― 2014년 1월∼ 탐사기술처장
<5>인터컨티넨탈호텔 김연선 상무
2014-02-20
▲김연선 상무는 “프런트데스크를 지키던 말단직원 시절, ‘인터컨티넨탈호텔 최초의 한국인 총지배인이 되고싶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는데 정말 꿈을 이뤘다”며 환하게 웃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와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치른 호텔. 2012년에는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려 50개국 정상이 찾았다. 매년 12만여 명이 이 호텔에 묵고 그중 10만 명이 해외 비즈니스맨들이다. 지금도 연간 1000억 원대의 매출을 기록하는 이곳은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다. 이 호텔은 GS건설 계열사인 파르나스호텔㈜이 운영한다. 김연선 파르나스호텔㈜ 상무(54)가 실질적인 ‘지휘자’다. 그는 지난해 10월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의 총지배인이 됐다. 이 호텔에서 한국인이, 그것도 여자가 총지배인이 된 건 호텔 문을 연 지 25년 만에 처음이다.
김 상무는 한마디로 자신의 성공에 대해 “꿈같은 일”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높고 화려한 자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어릴 때에는 이름 대신 언년이(계집아이라는 속어)로 불렸을 정도였다. “가난했고 배운 것도 없었다”는 그녀가 서울을 대표하는 호텔의 총지배인이 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소설감이라 여겨질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그녀가 태어난 달은 5월이었다. 하지만 동네 훈장이었던 할아버지는 손녀의 출생신고를 한없이 미뤘다. 그의 친정어머니가 애원을 해도 “계집애를 무슨…”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7개월이 흘렀다. 해가 막 바뀌려는 찰나인 12월 23일. 할아버지도 더이상 해를 넘기기가 그랬는지 그제야 호적에 손녀딸 이름을 올렸다. 12월 23일이 김 상무의 공식 생일이 된 사연이다.
그 시절 딸들이라면 엄마를 대신해 새벽 밥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밤낮으로 삯바느질을 하는 엄마를 도와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던 일곱 살 때부터 연탄불에 밥을 짓기 시작했다.
나를 키운 힘은 8할이 ‘결핍’
아들들 공부시키기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중3 때는 학급 반장까지 맡았지만 아버지는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고 반대했다. 엄마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고등학교에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형편에 대학은 언감생심. 아버지는 취직을 하라고 했다.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대학 예비고사를 치렀다. 그리고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2년제 전문대 전자계산학과를 택했다. 장학금을 받았으니 대학 진학을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첫마디는 이랬다. “차비며 밥값은 돈 아니냐?” 그녀는 주말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허전했다.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여전히 목이 말랐다.
어른이 될 때까지만 해도 ‘결핍의 유년기’는 늘 잊고 싶은 과거였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때의 경험이 자신을 채찍질한다는 것을 느꼈다. 현실을 탓하지 않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겼다.
그는 영어를 선택했다. 학원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도 주한미군 방송을 들으면 되지 않는가. 취업도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다. 밤낮으로 공부했다. 마침내 작은 결실을 맺었다. 여행사와 무역회사를 다니다 나중에는 미8군 내 교육센터에서 일하게 됐다. 1980년대만 해도 부러움을 받던 직장이었다.
호텔에서 평생직장을 꿈꾸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시내에 대형 호텔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대기업이 운영한다는 매력에 끌려 인터컨티넨탈호텔 공채에 원서를 들이밀었다. 열심히 공부했던 영어가 큰 도움이 됐다. 면접관들은 그녀의 영어 실력을 인정하며 GRO(Guest Relations Office)로 가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GRO는 VIP 고객을 전담하는 부서로 ‘호텔의 꽃’으로 불리는 곳이지만 그때는 몰랐다. “GRO를 ‘지하(地下)로’로 들었어요. 순간 내가 영어를 잘하는데 지하에서 일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에 면접관에게 강하게 얘기했죠. 프런트데스크로 가고 싶습니다. 하하하.”
결국 그는 프런트로 배치됐다. 나이 스물여덟. 호텔리어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일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 8, 9시간을 서 있어야 했다. 체크인 고객들을 응대하고 체크아웃 정산을 했다. 동료 18명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고 유일하게 호텔 근무 경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들다고 징징거리지도 않았고, 1원의 계산도 틀리지 않았다. 삿대질을 하는 손님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도 없었다. 몇 달 후 상사가 “너처럼 독한 애는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3년 뒤 그는 객실부장 비서로 발령받았다. GRO에서 매니저(주임)가 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엔 실망했다. 하지만 이내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객실부장은 로비와 프런트, GRO 등을 총괄하고 예산까지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그 밑에 있으니 호텔 업무 전반을 배울 수 있었다. VIP 전용공간인 클럽라운지를 직접 기획하는 행운까지 누렸다. 이어 입사 6년 만에 클럽라운지를 담당하는 GRO 매니저가 됐다.
“클럽라운지를 만들 때 정말 열심히 했어요. 구두 굽을 매일 새로 갈아야 할 정도로 뛰어다녔으니까요. 새 카펫, 새 가구 때문에 알레르기가 생겨 얼굴에 화장도 못할 정도로 피부가 나빠졌어요. 그래도 신이 났어요.”
승진 누락으로 겪은 슬럼프
‘영원한 에너자이저’일 것 같은 그녀에게도 슬럼프가 왔다. 입사 10년 차, 대리 승진에서 미끄러진 직후였다. 주위에서는 “될 거다”란 말을 해주었는데 막상 인사 뚜껑이 열리고 나니 남자 동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상실감은 컸다. 전문대 졸이라는 학벌 탓일까, 아니면 여자인 탓일까. 이런 상황이라면 미래가 없는 것 아닌가,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달려온 인생의 전환기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포기 대신 ‘공부’였다. 그녀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으며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국내 대학원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9년엔 교육 매니저 발령을 받았다. 그녀가 일하고 있던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테헤란로) 인근에 새로 문을 여는 인터컨티넨탈 코엑스(봉은사로)의 신입사원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신입 직원 300명을 6명씩 그룹으로 나눠 서비스 교육을 시키는 데 두 달 만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탈진이 됐다.
열정은 확실히 보상받기 마련인가.
2004년 마침내 그는 인터컨티넨탈 코엑스의 객실팀장이 됐다. 국내 특급호텔에서 여성이 객실 총책임자가 된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영국 인터컨티넨탈호텔스그룹(IHG)이 운영권을 갖고 있어 주요 보직은 모두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호텔경영학 박사학위도 그 무렵 땄다.
병마 이기고 현장 최고책임자로
긍정에너지로 앞만 보고 달려온 그녀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2006년 유방암 1기 진단을 받은 것.
“멍했죠. 울진 않았어요. 전 잘 안 울거든요.”
그녀는 수술대에 오르면서도 “예쁘게 꿰매 달라”고 농을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항암치료 기간이 길어지면서 긍정 에너지도 바닥을 보였다.
“서너 달이면 복귀할 줄 알았는데, 회복이 생각보다 더뎠어요. 자리를 오래 비우는 부담이 커져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죠.”
하지만 회사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녀가 병을 완치하고 돌아오자 코엑스점보다 규모가 큰 그랜드점 객실팀장을 맡겼다. 그리고 5년 뒤인 2013년 10월 ‘최초의 한국인 총지배인’이자 여성 1호 총지배인이 됐다.
“총지배인은 객실·식음·조리를 모두 통솔하는 현장의 최고 지휘자라고 할 수 있지요. 신입 직원 한 명 한 명을 제 손으로 키웠는데 이제 이들과 함께 호텔 전 직원 500여 명이 혼연일체가 돼 ‘집처럼 편안한 호텔’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겁니다.”
가난과 여성이라는 차별, 거기에 병마까지 이겨낸 그녀와의 인터뷰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그것은 어느 한 분야에서 한눈팔지 않고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여유처럼 보였다.
▽약력
― 1988년 호텔 인터컨티넨탈 서울 입사
― 1994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GRO 매니저
― 1999년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서울 교육 매니저
― 2004년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서울 객실팀장
― 2005년 경기대 호텔경영학 박사 졸업
― 2008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객실팀장
― 2013년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총지배인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6>소재향 세계은행 트러스트펀드 담당 국장
2014-03-06
▲소재향 세계은행 국장 사무실은 세계은행의 각종 지원 프로그램 포스터와 집기들로 가득하다. 인도와 유럽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국장 승진 소식을 들었다는 그는 “지금까지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내가 국장이 될 수 있을까요”(소재향 당시 매니저) “
그건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원하지 않으면 (국장이 될) 가능성은 제로이고 지원하면 조그만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경영 코치)
한국 국적 최초… 4번째 고위직
지난해 말 소재향 세계은행 수자원·위생 담당 매니저(52)는 경영 코치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세계은행은 매니저급 이상 간부에게 의무적으로 경영 코치를 붙여준다. 1년에 10∼20시간 코치와 대화를 나누며 조직운영 기술을 배우고 향후 진로에 대해 자문한다. 그는 ‘조그만 가능성’을 믿고 트러스트펀드(양허성 자금) 담당 국장직 내부 공모에 원서를 냈고 지난달 초 보기 좋게 그 자리를 따냈다.
소 국장은 나중에 부하 직원들이 인사국에 제출한 그에 대한 평가서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휘하에 있는 직원 140명 중 100명은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사무소에 퍼져 있고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직원도 많았다. 그들은 소 국장의 능력을 묻는 평가서에 99%의 답변율을 보인 것은 물론이고 소 국장을 진심으로 칭찬하는 내용을 적었다. ‘제이(소 국장의 영어 애칭)는 팀장이지만 팀원처럼 일한다’ ‘전략을 짜는 데 능하다’ ‘부하의 능력을 꿰뚫어 본다’ 등 세계은행에 들어와 22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한 것을 부하와 동료들이 인정해준 답변이었다.
지난달 28일 워싱턴에 있는 세계은행 본부로 그를 찾아갔을 때 소 국장은 새 사무실로 이사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새로운 국장 업무는 10일부터 시작한다. 그가 오른 국장직은 세계은행에서 한국 국적자가 오른 관리직 중 가장 높은 자리이다. 물론 여성은 처음이다.
소 국장은 38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영문 명함에는 ‘소재향’이라는 한국 이름이 찍혀 있고 인터뷰도 유창한 한국말로 했다. 그는 “나는 영락없는 한국사람”이라며 “이번 소치 올림픽 때도 한국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를 열심히 응원했고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회원국 출연금 30조원 감독
어떻게 미국생활을 시작하게 됐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소 국장은 책상 서랍을 열더니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거기에는 앳된 소녀가 서 있었다. 서울 인왕초등학교 1학년 때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그는 기자에게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문화촌에 살았는데 요즘은 그런 동네 이름은 없어졌죠?”라고 되물으며 한국 얘기를 시작했다.
“당시 모두가 힘들게 살던 시절 아니었나. 우리 집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수세식 화장실을 가진 친구가 가장 부러웠다.”
지구촌에서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된 한국에서 태어난 그와 세계은행의 인연은 무엇보다 각별하다. 그는 한국이 세계은행 원조 차관을 받던 첫해인 1962년생이다. 그런 한국이 이제는 세계은행에 자금을 지원하고 개도국 성장모델로 부각되고 그 수장으로 한국계 김용 총재까지 나왔으니 한국인 직원으로 갖는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소 국장이 맡은 일은 세계은행이 회원국으로부터 출연받은 290억 달러(약 30조 원) 트러스트펀드를 감독하는 일이다.
소 국장의 외국 생활은 8세 때 시작됐다. 부친 소문섭 씨는 1970년대 중반 유엔개발계획(UNDP) 대표보로 활동했다. 아버지가 국제기구에서 일한 덕에 가족은 외국 이곳저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선진국과는 거리가 먼 곳들이었다. 인도 네팔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각각 2, 3년씩 살았다.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을 돕는 것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그도 국제기구에서 일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외국을 옮겨 다니며 사느라 교육 문제가 힘들어지자 부모님은 그를 14세 때 미국으로 보냈다. 한국에는 친척이 없어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스탠퍼드대 경제학과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한 소 국장은 컨설팅회사인 모니터그룹에 들어갔다. 영주권도 그때 받았다. 컨설턴트가 최고로 각광받던 시절 그는 모니터그룹에서 일하며 큰돈을 벌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겠다’는 어린 시절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92년 30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세계은행 ‘영 프로페셔널’ 공채 프로그램에 지원해 합격했다.
“가난한 사람 돕자” 어릴적 약속
지금도 업무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에 간다는 그는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국제기구 근무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화려한 외국생활에 대한 환상을 접고 힘들고 어려운 일에 뛰어들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개도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현장을 익혀라”라는 충고를 했다.
소 국장의 삶 역시 ‘버림과 봉사의 삶’이었다. 세계은행 입행 시절 초기에는 못사는 나라들을 방문해 악취가 풍기는 하수도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하수 시설 개선 보고서를 써내야 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고객과 대화를 나누던 컨설턴트 시절 생각이 절로 났지만 자신이 오랫동안 꿈꾸고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후회는 없었다고 한다. 국장으로 승진한 지금도 출장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비행기를 탄다. 일 년에 100일 정도는 외국에 머문다. 그가 출장을 가는 곳은 지구상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가난하고 조그만 나라가 많다. 출장 명령을 받은 후 사무실에서 지도를 찾아보고서야 알 정도다.
세계은행 국장은 총재, 사무총장, 부총재에 이어 4번째로 높은 자리다. 1만 명의 직원 중 50명 정도만이 오르는 고위급 직책이다. 소 국장에게 “스스로 어떤 리더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터프한 리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말이다.
“부하 직원들로부터 ‘일을 많이 시키고 꼼꼼히 챙기는 상관’으로 통한다. 하지만 함께 일한 부하들로부터 ‘보람 있었다’는 얘기를 자주 듣곤 한다.” 비결을 묻자 “동기 부여를 해주고 업무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컨설팅회사에 다닌 것이 지금 조직을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도 했다.
“신입 직원이 보고서를 만들어오면 함께 자리에 앉아 ‘이렇게 써봐라’ ‘저렇게 바꿔봐라’ 하고 일일이 코멘트를 달아가며 피드백을 해준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그런 일들은 직원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터프한 리더
상사로부터 그렇게 훈련받은 직원은 다음부터 혼자 보고서를 잘 쓸 수 있게 되고 소 국장도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세계은행에서 일하지 않았으면 아마 선생님이 됐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2012년 ‘세계은행 우수 매니저 상’을 받으며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소 국장은 “세계은행은 출장이 많고 일도 힘들지만 여성에게 제약에 없는 직장”이라며 “많은 여성이 와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세계은행의 여성 직원 비율은 45%로 절반에 가깝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일하는 곳이기에 직장 내 차별을 최소화하는 조치들이 잘 발달돼 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소 국장은 출장이나 야근 업무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결혼한 여성 직원들도 일과 가정을 양립시킬 수 있는 커리어를 개발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준다. 여성 직원을 위한 전담 커리어 코치도 있다. 세계은행은 워싱턴의 10개 건물에 분산돼 있는데 2개 건물에 초대형 보육시설이 있다. 직원들은 아침에 이곳에 자녀들을 맡기고 저녁에 함께 퇴근한다. 소 국장의 말이다.
“이곳은 재택근무, 탄력근무 등 유연한 업무 제도를 갖추고 있다. 나는 매일 1시간을 늘려 9시간씩 일하고 2주일마다 하루를 쉬는 대체근무 제도를 이용하고 있다.”
소 국장은 “일과 가정을 양립해야 하는 부하 여성 직원들이 유연 근무 제도를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고 있다”며 웃었다. 그는 “직원들이 재택근무 지원서를 낼 때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다”며 “컴퓨터 기술 발달로 집에서도 충분히 생산성 높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 국장은 현재 위치까지 오르게 된 데 대해 “운도 따랐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시절 세계은행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박사 학위가 없어 단념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옛 소련의 붕괴와 함께 국제기구들이 MBA 등 다양한 분야의 인력을 필요로 해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운도 따랐지만 운을 기다리며 살지는 않았다”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실력을 갖춰 나가는 사람에게만 기회는 찾아온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편한 미래가 보장된 삶을 버리고 지구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에게 지구촌 나눔 강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이 겹쳐졌다.
: : 약력 : :
△1962년 서울 출생
△1970∼76년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네팔 인도네시아 거주
△1977년 미국 이주.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및 경영대학원(MBA) 졸업
△1988년 컨설팅사 모니터그룹
△1992년 세계은행 입사. 동아시아 개발부 스페셜리스트. 에너지부 선임 스페셜리스트, 사무총장 및 부총재 보좌관
△2008년 세계은행 수자원·위생담당 매니저
△2014년 2월 세계은행 트러스트펀드담당 국장 선임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7>특급호텔 일식당 첫 여성 책임주방장 김선미 신라호텔 셰프
▲김선미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께’ 책임주방장은 음식에 냄새가 밸까 평소 얼굴에 스킨조차 바르지 않는다. 사진 촬영 당일도 마찬가지. 그가 민낯으로 활짝 웃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제 막 주방 출입을 허락받았던 1993년이었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오전 8시. 22세의 여자가 도마 앞에 섰다. 칼을 잡은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곤약을 쥔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곤약 끝을 노려봤다. ‘창호지처럼 잘라야해. 잘라놓은 조각을 놓으면 접시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하지만 무심한 곤약은 다시 두껍게 썰렸다. 1mm. 이 정도 갖고는 어림도 없다.
구근식물로 만든 가공식품인 곤약은 200g에 1000원도 안될 만큼 싸다. 그러나 그 감촉은 kg당 4만 원이 넘는 비싼 복어와 같다. 복어회의 맛은 얼마나 얇게 써느냐가 좌우한다. 조금만 두껍게 썰어도 질겨서 맛이 안 느껴진다. 김선미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께’ 책임주방장(43)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맡은 첫 일은 주방 하수구와 천장 청소였어요. 정해진 출근시간에 나가면, 제 일을 하느라 다른 선배들의 기술을 배울 틈이 없었어요. 정식 출근시간인 오전 10시보다 훨씬 먼저 출근하는 게 해결책이었지요. 제 일을 다 한 뒤에는 선배들 일하는 것 지켜보는 것이 허락됐으니까요.”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자투리 채소와 단무지는 그녀에게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버려진 호박을 붙잡고 이리 썰어보고 저리 썰어보기를 반복했다.
처음부터 일식조리사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고교시절이던 1988년, 서울올림픽을 보면서 ‘앞으로 한국이 국제화되면 외국 손님이 많이 올 터이고 그러면 호텔과 관련된 일이 유망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꿈을 꾸었다. 전문대 졸업을 앞둔 1991년 말 신라호텔에 입사했다. 호텔에 입사해서도 자신에게 맞는 직종을 정하려고 여러 업무를 고민했다. 연회예약 같은 사무실 근무는 적성에 안 맞았다. 문득 ‘평소 생선 맛있게 잘 먹는데 일식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때 횟집을 했던 친정 엄마의 영향도 있었다.
내내 무시했던 선배 “이젠 인정”
배우면 배울수록 일식은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요리, 자연을 따라가는 맛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리 수련은 쉽지 않았다.
“텃세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요. 유독 제게 쓴소리를 하는 주방장이 한 분 있었는데 ‘여자는 끈기가 없어서 끝까지 못 배운다’고 무시하기 일쑤셨지요.”
주방 내 차별 외에 또 다른 벽이 그녀를 가로막았으니 다름 아닌 손님들이었다.
“한 정치인 손님은 저를 보더니 ‘여자가 만든 일식은 먹고 싶지 않다’고 대놓고 이야기했을 정도니까요. 그렇다고 좌절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기회지요.”
고급 일식에 도전하는 여성 자체가 드물다 보니 여자는 손이 따뜻해서 스시를 못 만든다는 세간의 편견을 믿는 사람도 많았다.
“남자고 여자고 요리하는 사람은 손이 따뜻할 수가 없어요. 위생 때문에 일단 손을 자주 씻습니다. 생선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손질하기 전 얼음물에 손을 계속 담그게 되거든요.”
그는 생선비늘 손질부터 생선 포 뜨는 기술을 착실히 배워나갔다. 그러나 왼손잡이인 것이 요리사로는 큰 결함이 됐다. 왼손잡이용 칼이 있기는 했지만 좁은 공간에서 일하는 주방장들이 줄을 맞춰서 조리하는 일이 많은 만큼 혼자만 왼손으로 칼질을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했다. 급하게 칼질하다 요리사들끼리 손 방향이 달라 손을 베이기도 할 정도였다. 그는 결국 오른손도 왼손만큼 쓸 수 있을 만큼 연습을 거듭했다.
‘얼마나 갈까’ 시큰둥하던 선배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실수에도 더 엄해지고 시시콜콜 잔소리가 뒤따랐다. 그건 미워서가 아니었다. 마침내 그녀를 훌륭한 일식요리사로 만들기 위한 진심이 담긴 교육이었다. 여자라고 무시했던 한 선배는 퇴직을 앞두고 김선미 셰프를 불렀다. 그러고 이렇게 말했다. “넌 내가 인정한다.”
음식에 향 밸까봐 화장품도 안발라
김 셰프는 2008년 신라호텔 ‘아리아께’ 책임주방장으로 승진했다. 신라호텔 외국 음식 레스토랑에서 여성이 ‘수장’을 맡은 적은 처음이었다. 신라호텔 외에 다른 특급호텔 내 일식당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는 18명의 남자 셰프를 통솔한다.
자부심이 강한 집단을 어떻게 통솔했을까. 기자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갑자기 “야-아-아. 집중해! 집중!” 하며 주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식당을 가르는 서늘한 목소리에 순간 기자의 몸이 움찔할 정도였다.
“제가 군대는 안 갔다 왔지만 군대 갔다 온 남자들 말이 주방 일 배우는 일이 군대 훈련보다 더하다고들 해요. 음식은 흐름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막내가 단무지를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서 고춧가루 하나가 단무지 그릇에 묻어 나갔다고 합시다. 메인요리를 맛보기도 전에 손님 기분이 먼저 상합니다. 그릇에 먼지가 묻어 있을 경우 그 다음 사람이 그 위에 사시미를 담으면 그때부터 요리가 망쳐집니다. 음식에 사소한 과정이란 없습니다.”
그는 오전에 업무를 준비할 때 후배들을 모아놓고 “요리와 서비스에 혼을 담자”라고 구호를 외치며 박수를 세 번 짝짝짝 치면서 집중력을 가다듬는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주방 내 긴장감은 더욱 높아진다. 주문이 몰리는 한두 시간 내에 코스요리가 빠짐없이 나가야 한다. 한 사람이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협업해 완성해야 하는 만큼 누군가의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김 셰프는 회사에서는 휴대전화도 꺼놓는다. 집에 전화를 거는 일도 없고, 집에서도 일절 전화를 걸지 않는다. 손에 핸드크림도 바르지 않고 얼굴에 파운데이션 한번 발라 본 적이 없다. 음식에 화장품 냄새가 밸까 봐서다. 스무살 이후로는 머리를 길러본 적도 없다. 항상 남자처럼 짧은 커트머리다.
나에게 요리는 고통
그가 이렇게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배경에는 가족들의 헌신이 있었다고 한다.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키워 주기 위해, 지방에 사는 시부모님은 14년 전 아예 서울로 와 육아를 도맡아 줬다. 출퇴근을 위해 집도 직장 바로 앞으로 이사했다. 경기 화성에서 피자가게를 하는 남편이 최고의 일식요리사를 꿈꾸는 아내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해 가능했던 일이다.
그의 요리철학은 무엇일까. 약간 당황스러운 답이 나왔다. “요리한 지 20년이 되니까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아주 ‘쬐끔’ 감이 생겼어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때는 제 요리에 자신감이 느낄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너무 어려워요. 초긴장하지 않으면 요리가 안 되고, 또 혼자 잘한다고 해서 잘 나오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10년간 실력을 더 쌓고, 이후 30년차가 됐을 때 조금이라도 제 색깔을 낼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어요.”
고객들은 냉정하다고 했다.
“이거 맛있는데 또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을 들은 날은 뛸 듯이 기분이 좋다고 한다. 반면 자주 오는 고객들의 쓴소리는 비수처럼 가슴을 판다. 다른 때와 똑같은 레시피(조리법)로 똑같은 재료를 써서 지리(맑은 탕)를 끓였는데도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있는 그대로 고객들의 평을 받아들인다. 그 대신 왜 맛이 없었는지 분석해보고 메모장에 여러 가지 예상 원인을 기록해 둔다. 점심과 저녁 사이에 주어지는 휴식시간은 그에게는 쉬는 시간이 아니다. 요리에 도움이 되는 책을 보거나 자료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인터뷰 내내 생글생글 웃던 그의 얼굴은, 요리 이야기를 할 때는 무척 어두워졌다. 심지어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음식은 그에게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게 하는 먹거리만의 의미는 아닌 듯했다.
“60세 넘은 요리사를 만났는데 열정이 20대보다 더 뜨거웠어요. 그분은 웃으면서 요리를 만들더라고요. 진정 즐기는 것 같았어요. 저는 아직 안돼요. 제게 요리는 고통이네요.”
▽약력
― 1992년 진주전문대 관광과 졸업(現 한국국제대) (주) 호텔신라 입사
― 1993년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께 근무
― 1996년 일본 오쿠라호텔 및 호리가와 스시 전문점 연수
― 2001년 서울국제요리대회 건강부문 금상
― 2006년 경기대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졸업
― 2008년 책임주방장 승진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2014-03-13
<8>스턴트우먼 조주현 씨
2014-03-27
《 “야, 태국 애들 다 잘리고 네가 온 건데 잘해야지.” 동료 스턴트맨의 한마디에 다시 한 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아올랐다. 오른쪽 다리가 욱신욱신 쑤셨다. 텀블링과 발차기가 연결된 동작이었다. 관객이 재미가 있으려면 동작이 느리면 안 된다. 액션 장면이 빨리빨리 전환되면서, 컷 사이로 ‘진짜 주연’들 얼굴이 들어가야 관객들이 손에 땀을 쥐며 보게 된다. 스턴트우먼 조주현 씨(44)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동선이 그려졌다. ‘발차기 다음에 왼쪽 40도 방향으로 텀블링, 또 텀블링, 그리고 발차기 마무리다!’ 조 씨가 지난해 11월 일본 영화 ‘루팡 3세’를 찍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다 바지를 걷어 올렸다(‘루팡 3세’는 일본 톱스타 오구리 슌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국내에서도 올해 개봉할 예정이다). 종아리 곳곳에 짙은 핏빛 상처가 남아 있었다. “다리 근육 모세혈관이 다 터진 거예요. 병원 가겠다고 하면 촬영에 큰 지장을 줄 상황이어서 아픈 것도 참았어요.” 》
당시 일본 영화제작사에서 태국 스턴트우먼을 미리 섭외했지만 고난도 장면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조 씨를 포함해 한국무술팀 6명이 태국으로 가게 된 것. 스턴트우먼인 조 씨는 여자배우 두 명의 액션 장면을 찍었는데 영화제작사는 흡족해했다고 한다. 조 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우, 그래도 그림이 잘 나왔어요. 천천히 발 각도를 높여서 차니까, (맞는 역할을 맡은) 남자 스턴트맨 후배가 ‘누나! 맞는 게 착 달라붙었어’라고 하더라고요. 하하하. 둘이 손잡고 좋아했어요.”
김치 국물에 밥 먹으며 배운 기계체조
조 씨가 처음부터 스턴트우먼은 아니었다. 고교 졸업 후 에어로빅 강사로 활동했는데, 다리를 양옆으로 쫙 찢거나 발을 위로 쭉쭉 뻗어 올리는 고난도 동작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지인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영화촬영 현장에 소개했다. 첫 작품은 1993년 어린이 액션영화 ‘용호의 권’. 그녀의 현란하면서도 유연한 액션 장면을 본 제작진이 스턴트우먼으로 일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운명이 바뀐다.
당시에는 스턴트우먼이란 직업 자체가 생소했고 보수도 적었다. 일자리도 불규칙적이다 보니 늘 가난했다. 차비가 없어서 촬영장과 집, 학원(기계체조)을 걸어 다니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배고픔. 김치 국물을 반찬 삼아 끼니를 때울 정도였다. 시골(전남 나주시)에 계신 부모님은 속도 모르고 “배우 한다더니 언제 얼굴이 나오느냐”고 자꾸 물었다. 겉으로는 “나는 얼굴이 안 나오는 직업”이라고 씩씩한 척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시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진짜같이 리얼하게 계단에서 구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궁리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구르면서 신발이 벗겨지도록 해달라는 감독의 주문이 있으면, 구르기 시작할 때 신발을 툭툭 허공으로 뿌리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 것. 이제는 아예 촬영 전에 “가방이 어느 지점에 떨어지게 구를까요”라고 물을 정도다.
교통사고 장면을 찍을 때 대역이 많이 동원되는 만큼 그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머릿속으로 ‘연구’를 했다. ‘승용차 범퍼 높이가 이 정도니까, 내가 다리를 오른쪽으로 들면…이때 차 위로 올라가면서 몸을 창문 위로…조명과 카메라가 오면 내 얼굴이 보이지 않게 이쪽으로 굴러보면….’
드디어 1998년 ‘투캅스3’에서 주연배우 권민중을 대신해 남자 범인을 한 방에 제압하는 장면을 소화하면서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올랐다.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알린 것은 2003년 드라마 ‘다모’를 찍으면서부터다. 주연배우 하지원의 대역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며 시원한 액션 장면을 선보였다.
현재 대중이 기억하는 대다수 영화·드라마의 여성 액션 장면은 그가 다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중천’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김태희,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어둠을 가르고 날아올라 상대의 쇄골을 가격하는 ‘니킥’도 그의 무술연기가 쓰였다. TV드라마 ‘시티헌터’에서는 여자경호원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스턴트우먼이 없던 시절에는 체구가 작은 남자들이 여자 역할을 대신했다. 생머리 가발을 뒤집어쓰고 하이힐을 신고 찍은 것. 하지만 조 씨가 작품활동 범위를 넓혀갈수록 시청자들도 선이 부드러운 여성의 액션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작품에 대한 몰입도도 당연히 높아진다.
내 나이 44세… 아직은 현역 자신있어
▲주원과 설리 주연의 영화 ‘패션왕’ 촬영에서 조주현씨가 와이어 장면을 소화하고 있다. NEW 제공
국내에서 스턴트 배우를 하는 사람은 200명 정도다. 이 중 여자는 10명 안팎이지만 꾸준히 작품을 찍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이다. 조 씨가 스턴트우먼 1호다.
“과거 여자 배역은 다 제가 했는데 이제 후배들도 제법 있어요. 요즘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누나,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아프면 안 되니까 쉬어’라고 농담처럼 말하는데 그 말이 그렇게 서글프더라고요. 전 아직 잘할 수 있거든요.”
어느 날 ‘나이도 먹었는데 그만하지’라는 누군가의 말에 조 씨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자 분장 중이던 배우 하지원이 옆에서 천금같은 한마디를 던졌다고 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가 앞으로도 계속 다 해. 언니가 대역을 해줘야 화면이 산단 말이야.” 조 씨는 ‘폰’ ‘다모’ ‘더 킹 투 하츠’ ‘기황후’ ‘조선미녀 삼총사’에 이르기까지 하지원의 출연 작품에서 고난도 액션 장면을 대신했다.
모든 여배우가 스턴트우먼을 배려하는 건 아니다. 소모품으로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배우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하늘하늘하거나 착 달라붙는 시스루룩을 입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그 다음에 탈출신이나 추격 장면을 찍는 경우다. 어떤 여배우는 촬영장에 10cm 하이힐을 신고 하얀색 얇은 치마를 입고 나왔다. 다음 장면이 달리는 차문을 열고 탈주하는 장면이었다. 보통은 스턴트우먼이 같은 의상을 입고 촬영하는데 협찬 받은 의상 때문에 종종 문제가 생긴다. 여배우와 담당 코디네이터는 “200만 원짜리다. 그대로 돌려줘야 하니 절대 손상이 없어야 한다”며 옷을 상하지 않고 액션 연기하기를 거듭 강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얀 옷을 더럽히지 않고 차에서 뛰어내릴 재간이 없었다. 결국 의상실로 달려가 간호사 옷을 갖고 나왔다. 같은 흰색이어서 길이를 비슷하게 수선해 입고 찍었다.
꿈은 중국 무대의 최고 무술감독
힘들게 작품을 찍어도 얼굴이 없는 그. 주연 배우에게만 공이 돌아가는 것이 싫진 않았을까. 그의 말이다.'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합니다. 땀범벅이 되어도 내 얼굴은 어차피 안 나오니까 오히려 더 열심히 액션 장면에 몰입해 찍을 수 있지요. 얼굴이 나오는 정극 연기도 해봤는데 제 길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도 자신이 주연인 영화를 찍었다. 2011년 배우들이 액션까지 다 소화한 ‘패는 여자’를 찍었는데, 김춘식 감독에게 구박을 받았다. 김 감독은 그녀의 남편이기도 하다. 조 씨는 “하도 냉정하게 연기 지적을 해서 ‘이 영화만 끝나면 당장 이혼한다’고 벼르기까지 했다”며 웃었다.
스턴트 배우라고 해서 몸만 쓰는 것은 절대 아니다. 대본을 철저하게 숙지해야 한다. 스토리와 역할에 따라 배우의 액션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 여러 작품을 동시에 찍을 때는 밤새도록 대본 3개를 읽은 적도 있다. 이런 실력들이 쌓여 영화 ‘자칼이 온다’에서는 무술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줬다.
그의 꿈은 ‘편집을 잘하는’ 무술감독이다. 요즘은 편집을 방송국이나 영화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술감독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일본과 중국, 대만에서 한국무술팀에 대한 수요도 많아졌다. 계기는 영화 ‘올드 보이’ 덕분이다. 군만두만 먹으며 학대받던 최민식이 탈출 뒤 악당들을 처치하며 앞으로 나가는 롱 테이크 장면이 있는데, 조 씨의 사부인 양길영 무술감독이 지휘했다. ‘올드 보이’를 본 후 외국 영화사들의 액션 연기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한 것.
조 씨는 “한중일 액션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일본은 사무라이 영화 위주여서 칼싸움 신이 많고, 중국 액션은 좀 과장되어 있다. 한국 액션이 가장 현실에서 싸우는 장면처럼 보인다고들 한다. 그는 영화시장이 넓은 중국에서 무술감독으로 성공하고 싶다”고 말했다.요즘에는 스턴트우먼을 꿈꾸는 여성이 늘었다고 한다. 물론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사실 영화 현장에서 여자 스턴트 배우라고 해서 차별은 별로 없었어요. 떨어져서 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느낄 뿐이죠. 다만 스턴트우먼을 하고 싶다면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넘어지는 대역 수준만 하면 되겠지’란 마음가짐으론 안 됩니다. 말도 타고, 다치마와리(격투 액션), 낙법도 할 줄 알아야 해요. 몸도 마음도 강인한 프로가 돼야 합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9>최수향 유네스코 국장
2014-04-10
“돌다리 두드리며 건넜다면 여기까지 못왔다
작은 기회라도 모든것 걸면 더 큰 기회 온다”
▲한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최수향 박사에게 요즘 많은 20, 30대 젊은이들이 찾아온다. 그는 “국제기구 근무가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헌신과 봉사의 정신이 없으면 안 된다”며 “60%의 가능성만 보이면 40%의 불안함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그 길을 가라”고 조언한다. 파리=전승훈 특파원raphy@donga.com
그의 사무실은 깔끔했다. 책꽂이엔 서류 뭉치도 별로 없었다. “기마 민족처럼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마음 자세로 지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인 최수향 박사(54)는 한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파리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본부 국장에 오른 국제교육 전문가다. 그는 현재 평화교육, 글로벌시민교육, 지속가능개발교육을 총괄하는 부서를 맡고 있다.
성차별이 없는 유네스코에서도 고위직에는 여성이 부족한 ‘유리 천장’ 현상이 존재한다. 유네스코 전체 884명의 전문직 직원 중에 최 국장과 같은 국장급(D1) 여성 임원은 14명에 불과하다. ‘여성 1호를 만나다’ 시리즈로 인터뷰를 하자는 전화를 걸었을 때 최 국장은 손사래를 쳤다. “무슨 여성이냐. 그냥 인간이지. 여성이라는 사실을 크게 의식하고 살아오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그는 여성으로서가 아닌, 국제기구 공무원으로서 걸어온 길에 대해서 취재하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인터뷰를 허락했다.
60%의 법칙… “그래, 한번 가보자”
대학 졸업 후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1982년 가을 어느 날. 저녁을 먹고 TV를 보던 수향에게 당시 중앙대 교수였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수향아, 너 유학 가라.”
밑도 끝도 없이, 한마디 상의도 없던 제안이었다. 1980년대 초엔 대학 졸업한 여자가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유학을 가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인생이 180도 바뀔 수 있는 결정인데, 수향은 선뜻 대답했다. “그래 보지요, 뭐.”
나이 서른 살.
캐나다 앨버타대에서 7년간의 공부 끝에 아동교육 심리학 박사학위를 땄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위 취득 후 캐나다 밴쿠버에서 일자리를 찾던 그에게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계약직 연구원 제안이 들어왔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귀국인 데다 임시직 자리였다. 불안한 미래였지만 그는 주어진 기회에 모든 것을 던지기로 했다. “그래, 일단 해보자!”
이처럼 최 국장은 인생의 갈림길에 늘 60%의 가능성이 있으면, 과감히 기회를 잡았다. 40%의 불확실한 위험이 보여도 ‘일단,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교육개발원 경력은 유네스코 파견으로 이어졌고, 유네스코 정규 과장직 도전으로 이어졌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파키스탄 현장사무소 파견 권유를 받았을 때도 그는 불과 2초 만에 “예스”라고 대답했다. 파키스탄에서 얻은 6개월간의 현장 경험은 그 후 짐바브웨 현장사무소에서 국장급으로 승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최 국장은 “100% 가능성까지 다 두들겨 보고 안전한 길만 택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회를 잡아 능력을 보여주면, 또다시 새로운 기회가 오곤 했다”고 말했다.
요즘처럼 국제협력에 큰 관심이 없던 시절. 그는 “한국 여성으로서 국제기구 임원이 되기까지는 주위의 수많은 디딤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더 높이 날 수 있을 거야”
그에게 첫 번째 디딤돌을 놔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해외에서 일하는 데 가장 필요한 언어능력을 키워준 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맏딸 수향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주한미군 영어방송(AFKN)을 들으며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딸 방에 커다란 안테나가 달린 군용 라디오를 사줄 정도였다.
1993년에 한국교육개발원에 임시계약직으로 들어간 후 정규직이 된 결정적인 계기도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그는 4년간 국제협력 담당자로 일하던 중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젊은 전문가 파견 프로그램 공고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전공이었던 영유아교육 분야 전문가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견을 보내는 기관에서 월급과 체재비를 다 대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는 상사를 찾아가 “이거 꼭 가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사였던 성경희 박사가 해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최 박사, 내가 보니까 당신은 날개만 달아주면 더 높이 날 수 있는 사람이야.”
최 국장은 앞날을 내다보는 선배의 배려로 1997년 9월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로 파견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파리에 정착한 지 한두 달이나 지났을까.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한국에서 송금해 오는 돈은 점점 휴지 조각이 됐다. 상황은 악화돼 6개월도 못 돼 돌아가야 할 위기에 처했다.
탈출구는 뜻밖의 곳에서 열렸다. 당시 유네스코 상사였던 영유아가정교육과 과장이 “12월에 퇴직한다”는 것이었다. 태스크포스에서 함께 일했던 유네스코 임원이 최 국장의 일솜씨를 눈여겨보고 과장직에 지원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회의에서 복잡하고 장황한 토론을 한두 마디 핵심사항으로 정리해 내는 최 국장의 능력이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최 국장은 유네스코에서 새로운 디딤돌을 만나 10개월 만에 파견직 신분에서 유네스코 본부의 정식 과장이 됐다. 최 국장은 “그동안 내가 받은 게 많다 보니, 나도 매니저가 된 후 가능성 있는 후배를 키워주는 일에서 보람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국장은 최근 기쁜 소식을 들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현장사무소에서 일할 때 자신이 기회를 줬던 현지 직원이 유네스코 인터내셔널 정식 스태프가 됐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그 직원은 워낙 일솜씨가 똑 부러졌다. 그가 없으면 현장사무소의 행정이 마비될 정도였는데도, 최 국장은 그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좋은 파견 기회를 주선해줬다. 그리고 그 직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는 날개만 달아주면, 높이 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도 내 상사가 날개를 달아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단다.”
불이익이 온다 해도 ‘직언’하라
최 국장의 어릴 적 별명은 ‘독일병정’이었다고 한다. 어떤 상황이 와도 감정 표시를 잘 안 하고,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생활습관이 규칙적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이다. 최 국장은 “어릴 적부터 규칙을 지키는 데서 무한한 자유와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생활태도는 국제기구 임원으로서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원칙은 ‘공정함’이었다. 최 국장은 “리더는 인기를 얻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아랫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공정하지 않다는 평가는 내겐 큰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는 조직 내에서 상사에게도 틀린 점이 있으면 직언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런 최 국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사익을 추구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심지어 유네스코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부서가 비효율적이라고 해체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목을 내놓고 한 직언은 조직 내 그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현장사무소에서 소장으로 근무할 때도 그는 구조개혁 작업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직원을 해고해야 할 일도 생기고, 협박도 받게 됐다. 이상한 것은 협박을 받을 때마다 집에 가면 밤에 두 발 뻗고 잠을 잘 잤다는 것이다.
“협박을 받으니까 가슴은 좀 떨렸죠. 그런데 잠을 푹 잔 건 내 속마음에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만일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비겁하게 굴었다면 남이 손가락질 안 해도 거울에 비춰 보면 다 나와요. 그렇게 괴로운 게 없죠.”
그의 담백한 내면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 국장은 어릴 적 아버지가 마루에 걸어놨던 글귀를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다고 했다. ‘부쟁이선승(不爭而善勝)’, 즉 ‘선(善)은 싸우지 않아도 이긴다’는 말이었다.
국제기구에서 주목받는 한국의 경험
최 국장이 17년 전 유네스코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국인 직원은 4∼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턴까지 합치면 수십 명을 헤아린다. 최 국장은 “한국 직원들은 언어능력도 훌륭하지만, 요점을 정리할 줄 아는 개념적 사고가 좋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한국 교육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밖에서 보면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단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실시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성적이 우수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최 국장은 “한국은 고등학교 교육만 받아도 누구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는 전반적인 교육 성취도가 높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원조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한국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최 국장을 신나게 만든다.
한국은 2009년에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멤버가 됐지만, 서구 국가에 비교하면 여전히 마이너리그다. 그러나 어떤 선진국도 줄 수 없는 것이 단 하나 있다. 그것은 돈이 아니다. 최 국장은 “아프리카 많은 저개발 국가들은 한국의 돈보다도 전쟁의 폐허에서 짧은 시간에 일어난 독특한 개발 경험을 원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시찰을 갔다 온 아프리카의 한 장관을 만났어요. 그 사람이 한국에서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수없이 견학했지만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뭔 줄 아느냐고 제게 묻더군요. 뭐냐고 물었더니 1주일간 한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니 벌써 회의 때 요청했던 답변 자료가 놓여 있던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신속한 일처리가 한국이 이룬 기적의 원동력임을 실감했다고 했어요.”
▽약력
△1960년 서울 출생
△1982년 중앙대 심리학과 졸업
△1990년 캐나다 앨버타대 교육심리학 철학박사
△1997년 파리 유네스코 본부 파견
△1998∼2006년 유네스코 본부 영유아교육, 중등교육, 직업교육, 현장지원과 과장
△2007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현장사무소 부소장격 파견
△2008년 아프리카 짐바브웨 하라레 현장사무소 소장
△2010년 유네스코 본부 현장지원국 부국장
△2012년∼현재 유네스코 본부 평화·지속성장개발 교육국장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10>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 편보라 소령
2014-04-17
▲합동참모본부 소속이지만 유지비행을 위해 3일 경남 사천의 훈련비행단을 찾은 편보라 공군 소령. 편 소령은 “조종사가 천직”이라며 훈련기에 올랐다. 사천=서영수 전문기자kuki@donga.com
이달 3일. 공군 제3훈련비행단이 있는 경남 사천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국방색 비행복을 입은 편보라 소령(35)이 비행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빨간 마후라’를 상징한 빨간 티셔츠 깃이 도드라졌다. 헬멧을 옆구리에 낀 위풍당당 품새에서 ‘나는 대한민국 전투기 조종사다’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최초의 여성 공군사관생도이자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인 편 소령은 처음으로 전투기를 몰고, 사격대회에서 최우수 조종사가 되고, 영관장교가 될 때마다 주목을 받았다.
예비 훈련에서 느낀 군인정신
1996년 12월 22일, 충북 청원군 공군사관학교 보라매길에 들어서던 날을 최 소령은 잊을 수 없다. 입학 전 진행하는 5주 훈련의 첫날이었다. 육해공을 통틀어 사관학교 최초로 여학생 20명이 입교하던 날이라 전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방송사와 신문사 카메라가 즐비했고, 선배 사관생도들이 길 좌우로 도열해 그들을 반겼다. 군중의 환호성 속에서 남자 생도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편보라!”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무리들 속에서 “에이∼” 실망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름만큼 얼굴도 예쁠 거라 한껏 기대했다가 실망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선배들에게 들었다. 놀림을 당했다는 느낌에 첫날부터 기분이 상했다. 예비생도 숙소에 들어서자 이번엔 절망감이 엄습했다. 조그만 창문의 내무반이 감옥처럼 답답해 보였던 것. 이어 전투복에 명찰을 꿰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바느질까지 해야 돼?’ 투덜대며 명찰을 꿰매는데, 생활지도 선배가 오더니 쭉 찢으며 말했다. “바느질 간격이 안 맞습니다.”
다음 날부터 훈련이 시작됐다.
“오전 6시에 집합시키곤 선배가 외쳤죠. ‘삼보 이상은 구보다!’ 무조건 뛰게 하는 거예요. 연병장에서 30분을 뛰고 식당으로 향하는데 가파른 언덕길이 나왔어요. 선배가 ‘악이다∼’를 외치며 내달렸어요. 예비생도들도 ‘깡이다∼’ 받아치며 뛰어야 했죠. 훈련기간 내내 뛰었어요. 맨손으로 뛰다 총을 들고 뛰고 나중엔 10kg 군장을 메고 뛰었죠. 전 몸이 무거워 늘 뒤처졌어요.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
힘들게 훈련을 받고 잠이 든 어느 날, 사이렌이 울렸다. 북한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무장한 선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예비생도들은 선배들을 뒤따랐다.
“모의 훈련이란 걸 나중에 알았어요. 정말 무서웠죠. 그런데 도망치진 않았어요.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고, 내가 군인의 길에 들어섰구나, 어렴풋하게나마 느꼈어요.”
‘편대 편씨’ 칭찬에 날개 달다
사관학교의 생도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여느 대학생활의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2km 아침 구보로 하루를 시작해 8교시 빡빡한 수업을 소화해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0km 구보를 했고, 내무검사를 받았다. 옷장 속 속옷까지 ‘각’ 잡아 정리하고, 총은 항상 반질반질해야 했다. 청소상태를 점검하는 내무반장의 흰 장갑에 먼지라도 묻는 날이면 ‘얼차려’가 떨어졌다. 기숙사를 나설 때마다 선배들에게 복장과 자세를 지적받았고 수시로 얼차려를 받았다.
이런 와중에도 여생도들은 쏟아지는 취재 요청에 순번을 정해 응했다. 관심과 지원을 받는 만큼 질시와 질타도 갑절로 돌아왔다. 남녀 생도가 함께 훈련을 받을 때도 여생도의 실수는 도드라졌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편 소령이 조종석에 처음 앉은 건 졸업 직전이었다. 조수석에서 교관의 조종을 지켜보는 ‘관숙(慣熟)’ 비행을 했다. “무서운 교관도 많았는데, 시집(詩集)을 낼 정도로 감성적인 ‘시인 교수님’이 제 담당이셨어요. 그 분이 ‘편 생도, 구름이 솜사탕 같지 않나?’ 말씀하시는데, 순간 아름다운 하늘이 눈에 들어왔어요. 막연한 동경에서 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확신을 굳혔죠.”
하지만 졸업 뒤 이어진 2년간의 조종 훈련은 또 다른 ‘지옥 훈련’이었다. 목숨과 직결된 탓에 학교 때보다 더 엄격했고 외워야 할 조종수칙만 해도 1000가지가 넘었다. 항공역학 같은 비행이론을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좌절하기를 여러 차례, 중간에 그는 교관에게 ‘콜’을 청했다. ‘콜’은 기상·행정·교육 같은 다른 특기로 전향하겠다는, 한마디로 조종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훈련을 버티지 못해 ‘콜’을 외치는 훈련생들이 적지 않았다. 테스트에서 탈락해 떨어지기도 했다.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상황이었다.
“숨 막히는 경쟁 압박감으로 친한 동기들끼리도 서먹해질 정도였어요. 두렵고 숨고 싶은 마음이었죠.”
당시 교관은 그런 그를 몰아세우기보다 다독여줬다. 불러다 따뜻한 밥을 해먹이기도 했다. 그러다 비행기 두 대가 함께 비행하는 편대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한 몸처럼 비행하는 편대비행에서 그가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편보라 너, ‘편대 편씨’였구나.” 교관의 칭찬은 그를 날게 했다.
최우수 사격수의 후폭풍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고등훈련을 마칠 때 그의 비행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수송기와 전투기 중 전투기를 배정받았다. 그의 공사 동기 200여 명 중 전투기 조종사는 70여 명. 2003년 그는 ‘공군의 꽃’인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원주 전투비행대대로 부임한 그는 신인 공중사격수로 떠올랐다.
2004년 가을 강원도 공군전술사격장에 전시태세가 갖춰졌다. 공격기들이 5000피트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험준한 산세 사이로 적진에 폭탄을 투하해야 했다. 그의 A37 공격기도 목표지점 상공을 맴돌았다. 목표물을 발견한 순간, 그는 고도를 낮췄다. 협곡 사이로 돌풍이 일었다. 기수를 돌려 바람을 탔다. 바람도 멈춘 듯한 고요 속, “레디, 나우(Ready, now).” 폭탄이 발사됐다. 명중.
공군 전 대대가 참가해 최고의 전투조종사를 가리는 최대 행사 ‘보라매 공중사격대회’에서 그는 ‘저고도 사격부문 최우수 조종사’로 선발됐다.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최우수 조종사라는 타이틀을 더하자 그는 스타가 됐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서 그를 찾자 동료들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단지 ‘여자라서’ 주목받는 상황에 거부감을 내비쳤다. 주눅이 들었고, 비행도, 사격도 엉망이 됐다. 졸지에 ‘바람 든 조종사’가 됐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쓴소리하는 선배도 있었다.
“‘그렇게’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난 예전대로 하는 것 같은데 평판은 나빠지고, 비행은 안 되고. 근데 그때 또 결혼을 했어요. 결혼을 하니까 남자 동료들하고 서먹해지더라고요. 남편은 민간인이라 주말에만 잠깐씩 보고. 고립감을 느꼈어요. 한동안 슬럼프가 심했죠.”
시간이 약이었다. 그는 관심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갔다. 그러던 2007년 사천 비행단 훈련교관이 됐다. ‘편대 편씨’로 불린 추억이 있던 사천에서 그는 평온을 되찾았다. 가르치는 입장이 되자 초심으로 돌아갔다. 매일 오전 오후 두 번씩 훈련기에 훈련생을 태우고 하늘을 날았다. 그렇게 3년 동안 8명을 가르쳐 수료시켰다.
비행시간 1430시간
사천은 그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여섯 살 아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기자와 만난 3일은 비행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유지비행에 나선 날이었다. 그는 현재 합동참모본부에서 공중전 연습모의를 담당하고 있다.
“아직도 군인이자 엄마로 고민이 많아요. 비행 때문에 아들은 돌이 지난 후로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헤어져 지냈어요. 서울에서 근무하는 요즘에야 같이 살고 있죠. 언제 또 원주로, 사천으로 발령받을지 모르죠. 여군은 특히 가족에게 희생을 요구해야 해요.”
심각해진 그의 낯빛이 훈련기 조정석에 앉자 이내 밝아졌다. 그는 “그래, 이 느낌이야”를 외쳤다. 그녀를 대한민국 공군으로 살게 하는 힘은 뭘까.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자긍심이죠. 자긍심이 점점 커져요. 특히 합참은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본부라 우리 주권, 영토를 지킨다는 실체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돼요.”
그는 여군이란 말이 싫다고 했다. “같은 일을 하면서 여군이라는 이유로 주목받는 상황은 이제 더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남자와 똑같은 역할을 하라고 여자를 뽑는 건 아닐 거예요. 여성만의 장점을 발휘해야 하는데, 어떻게 기여할지는 제 숙제이기도 하죠.”
조종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조종사는 체력과 정신이 수레바퀴처럼 균형을 이뤄야 해요.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비행을 할 수가 없어요. 여자는 체력이 약점이지만 정신을 단단히 무장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계속 노력해야죠.”
그가 조종석에 앉고 캐노피가 덮였다. 프로펠러가 굉음을 내며 돌고 그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1430시간째 비행이었다.
사천=강혜승 기자
<11>첫 국-공립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성시연 경기필 예술단장
여성 1호 타이틀 아닌 나 자신의 음악이 뭘까 고민했던 시간들…
이 땅의 아버지들 위로하는 음악 만들고 싶어
▲국공립 오케스트라 첫 여성 수장인 성시연 경기필 예술단장. 성 단장은 “콘서트홀 바로 그자리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에 관객이 감동하고 즐거워할 때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콘서트홀에서 의외의 순간과 마주할 때가 있다. 명성 높은 오케스트라의 무성의한 연주. 덜 이름난 국내 교향악단이지만 진심과 노력이 전해지는 그런 연주. 성시연(38)이 이끄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다음 연주회를 더 기대하게 만드는 악단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성시연은 올 1월 경기필 예술단장에 취임했다. 경기필은 지난해 6월 전임 단장이 단원들과의 갈등으로 사임한 뒤 성 단장이 오기까지 연주 공백이 길었다. 3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성 단장 취임 연주회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무대였다.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이 끝나자 객석에서 환호성과 함께 기립 박수가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근래 어떤 유명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도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한 경기필 단원은 “10년이 넘게 경기필에서 연주해 왔는데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은 처음”이라고 했다. 4월 교향악축제에서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층 객석과 합창석까지 관객이 빼곡히 들어찼다.
금녀의 벽 높은 지휘자들의 세계
“3월 첫 연주회는 쉽지 않은 무대였는데도 단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연주를 했어요. 편견 없이 경기필 자체를 봐준 관객께 감사했습니다. 좋은 음반도 많고 국내 여러 오케스트라와도 비교될 만한 자리여서 부담이 컸거든요. 여러 길이 엇갈리는 교차로에 선 것 같았는데 이제 목적지를 정하고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려고요.”
성시연은 경기필 수장을 맡으면서 국공립 오케스트라 사상 첫 여성 예술단장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수많은 여성 연주자들이 음악계에서 활약하지만 지휘 분야에서만큼은 ‘금녀(禁女)의 벽’이 유독 높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렇다. 지난해 12월 영국 여성 지휘자 제인 글로버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메트)에서 데뷔했는데, 133년 메트 역사상 세 번째 여성 지휘자에 불과했다.
지휘자로서 성시연은 어딜 가나 ‘여성 1호’로 길을 만들었다. 제임스 러바인이 음악감독을 맡은 미국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도 137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라는 기록을 남겼고,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도 첫 여성 부지휘자였다.
원래 성시연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열세 살에 첫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고 1994년 서울예고를 졸업한 뒤 스위스 취리히음대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1996년에는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로 옮겨 시몬 라슬로, 에리히 안드레아스 교수를 사사했다. 그러다 2001년 돌연 베를린 한스아이슬러음대 지휘과에 입학한다.
음악이 전부였고 피아노는 매력적이었지만 무대에서 건반에 손을 얹으면 불안이 엄습했다. 스승인 안드레아스 교수가 “피아노 외에 다른 분야 음악도 다양하게 즐겨보라”고 조언했다. 푸르트벵글러가 런던에서 베를린필을 지휘하는 브람스 교향곡 4번 영상이 그의 방향 전환을 이끌었다. 지휘자와 단원의 혼연일체, 극한의 몰입. 지휘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올랐다.
독학하다시피 공부해서 한스아이슬러음대 롤프 로이터 교수의 첫 여성 제자가 됐다. 하루에 3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악보를 파고들며 지휘봉을 다잡는 시절이었다. 파티는 물론이고 소소한 일상조차 사치라고 여겼다.
로이터 교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떠오르는 태양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태양같이 세상을 비춰라.’ 2007년 4월 성시연은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한 뒤 9월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데뷔 연주가 잡혀 있었다. 연주회 전날 병석에 누운 스승을 만나려고 베를린으로 달려갔다. 스승이 가장 좋아하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병실에서 지휘했다. 스승이 말했다. “4악장이 정말 아름답구나. 좀 더 살아서 네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튿날 새벽 스승은 세상을 떠났고 성시연은 스승을 기리며 데뷔 무대에서 지휘를 했다. 지휘자로서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음악이 두려워 칩거한 3년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여성이자 동양인으로 지휘자의 삶을 사는 일이 순탄했을 리 없다.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지만 정식 지휘자로 진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 해외 오케스트라는 성시연을 객원 지휘자로 세워보라는 추천인에게 이런 답을 돌려줬다. “여성을 객원 지휘자로 초청할 수 있는 횟수가 해마다 정해져 있어서요.” 이 소식을 전하면서 추천인은 “유대인 지휘자 몇 회, 흑인 지휘자 몇 회, 이런 식으로 하지 그러느냐”고 노발대발했다.
“여성 1호라는 타이틀에 관심이 없었어요. 졸링겐 여성 지휘자 콩쿠르 우승자에게는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부지휘자로 일할 수 있는 부상을 줘요. 거절했어요. 세계무대에서 남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결해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보스턴 심포니에 있을 때 여성이 객원 지휘한 게 단 4번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홍보부 직원이 ‘당신이 온 다음에 여성 지휘자가 더 자주 서더라’고 그래요. 1호가 탄생하고 길을 터야 2호, 3호가 생길 수 있겠구나,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보스턴 심포니를 거쳐 서울시향 부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근래 3년 가까이 깊고 긴 슬럼프에 빠졌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는 “국내와 해외의 환경 차이를 빨리 극복하지 못해 길을 잃고 허우적거렸다”고 했다.
“3개월간 집 밖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어요. 연주가 있을 때만 짐 싸서 나갔다가 다시 틀어박히고. 무대가 두려웠어요. 나 자신의 계발과 발전이 없었죠. 악보를 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악보가 예전처럼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아요. 나는 음악을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더이상 음악이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내가 음악에게 얘기하지 않으니… 죽은 세월이었죠.”
3년. 지휘자로서 그간 쌓아온 커리어가 망가질 수도 있는,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다”고 했다. 서서히 늪에서 빠져나오면서 자신이 왜 음악을 해야 하고 음악을 하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투 비 유어셀프(To be yourself·너 자신이 돼라)’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깨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무대 위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더라
“무대에 선 사람은 100%의 사랑을 얻을 수 없어요. 무대 위의 완전체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 욕심을 버릴 수 있었어요. 무대에 서기 전까지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지만 지휘대에 선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강해질 수 있었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모른 채로 지휘가 마냥 쉬웠다면 단순히 여성 지휘자 1호라는 문자로만 남을 뿐이겠지요.”
몇 년 전부터 보아온 성시연은 자기 자랑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경기필 예술단장을 맡은 뒤로는 일간지부터 여성지, 기업 사보까지 경기필 홍보팀이 미안해할 정도로 수많은 인터뷰 일정을 적극적으로 소화한다.
“나 자신의 영득을 위해 나를 PR(홍보)해 보라고 하면 여전히 어려워요. 지휘자라는 게 끊임없는 자기 PR, 자기 과시를 해야 하는 직업인데 여성 지휘자는 남자들과 달리 이런 일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랬고요. 신기한 게 경기필이 좋은 환경에서 연주할 수 있게 하는 일이라면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세요’ 이런 말이 어디서든 절로 나와요.”
요즘 성시연의 머릿속에는 아이디어가 수시로 꽃핀다. 7월과 11월에는 시니어를 위한 콘서트를 해보려고 한다. 양복 입고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아버지들의 애잔한 뒷모습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단다. 10월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에 경기필을 이끌고 참가할 예정이다.
성시연은 스위스 유학 시절 갑자기 팔에 통증이 찾아와서 한동안 피아노를 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아프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게 무슨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일기장에 썼다. ‘꼬마 성시연에게. 지금처럼 연습하면 안 돼. 그리고 너는 아마 음악 없이는 살 수 없을 거야.’
2014년의 성시연에게 다시 물었다. 몇 년 전 우울하던 성시연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냐고. ‘성시연, 넌 너무 완벽하려고 하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 100% 확실하지 않을 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버려. 상관없어, 너 자신을 다 드러내도 돼. 좀 더 떳떳해져. 그러면 사는 게 조금은 쉬워지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야.’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2014-05-15
<12>국립수목원 첫 수장 이유미 원장
2014-05-29
▲이유미 국립수목원장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하고 묵묵히 일한 끝에 사상 첫 여성 국립수목원장이 됐다. 이 원장이 경기 포천시 광릉로 수목원의 울창한 숲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경기 포천에 있는 국립수목원은 천 가지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 산들바람이 일렁이는 봄에는 연둣빛 새순으로 물들고, 햇살이 따가운 여름에는 초록의 향연이 절정에 이른다. 비가 오면 신비로운 시크릿가든(비밀정원)으로, 눈이 내리면 설국(雪國)으로 변신한다.
이곳은 500여 년의 시간이 쌓인 공간이기도 하다. 1468년 조선시대 세조 능림(陵林)으로 지정된 이후 잘 보존되어 2010년 유네스코로부터 생물권보존지역으로 등재됐다. 이런 수목원에서 일하면 ‘궁극의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다.
1년에 절반은 외박하는 여대생
‘산림생물 자원의 보고(寶庫)’로도 불리는 수목원은 기후 변화와 도시화 등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을 복원하고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누군가는 1년 중 절반 이상을 오지에서 탐사 활동을 벌이면서 생물주권을 지키는 전사(戰士)가 되어야 한다. 아무 곳에서나 먹고 자고, 씻는 것도 사치일 때가 적지 않다. 그래서 여성이 드물었다.
이런 수목원에서 올해 4월 첫 여성 수장이 탄생했다. 주인공은 이유미 수목원장(52). 그는 산림청 47년 역사상 첫 여성 고위공무원이기도 하다. 올해로 수목원에서 일한 지 20년이 된 이 원장은 대부분 고시 출신이 꿰찼던 수목원장 자리를 연구사로는 이례적으로 맡게 됐다. 연구사는 고시가 아닌 특채로 뽑는다. 그에게 ‘1호 수목원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봤다.
81학번인 이 원장이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여학생들 사이에서 전공 선택의 불문율이 있었다. 문과는 영문학, 이과는 식품영양학이나 가정학을 전공하는 것. 하지만 그는 임학과(현 산림자원학)를 택했다.
“남들이 다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개척하는 재미가 없잖아요. 꽃을 좋아하는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정원에서 식물을 가꿨어요. 시장에서 씨앗을 함께 사다가 직접 심는 일이 즐거웠지요. 사촌오빠가 국립공원을 설계하는 직업도 있다고 귀띔해 줬어요.”
서울대 임학과 동기(45명) 중 여성은 이 원장 혼자였다. 임학과 60여 년 역사상 6번째 여학생이었다. 한라산부터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탐사해야 하는 특성상 여학생들이 꺼렸다. 1년에 절반은 집 밖에 있었다. 밤을 지새우는 게 다반사였고 10kg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떠나는 등산도 잦았지만 그는 ‘날쌘돌이’로 통했다.
“산에 올라갈 때 뒤처지면 폐를 끼치잖아요. 체력을 길렀지요. 간혹 남학생들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주거나 챙겨주려고 했지만 ‘내 일은 내가 한다’는 원칙을 지켰어요.”
예컨대 식물을 찍는 카메라 렌즈가 클수록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들 수 있는 무게만큼 배낭에 넣었다. 산을 다니는 것이 힘들 법도 했지만 식물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그는 식물분류학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소위 ‘뜨는 분야’는 분자분류학이었다. 식물의 DNA를 추출해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자. 반드시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선진국에서는 실험실 위주의 연구가 일반화됐지만 이는 식물 표본을 제대로 확보하는 등 기초가 탄탄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거죠. 한국은 식물 현황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은데 마냥 선진국처럼 연구할 수는 없었지요.”
오지에서 말 타고 희귀식물 캐온 근성
식물분류학은 식물에 이름을 붙여주고 식물 간 ‘핏줄’이 얼마나 가까운지 분석해 ‘원(元)족보’를 만드는 일이었다. 기초 지도에 해당하는 식물 표본도 만들었다. 식물은 관상용은 물론이고 바이오산업의 원료 등으로도 쓰여 잠재력이 크다. 그는 이런 생각에서 1992년 식물분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4년 임업연구사로 산림청에 들어왔다.
이 원장은 공무원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식물도감에서 봤던 희귀식물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졌고, 희귀식물 복원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장 수목원에 어떤 식물이 있는지 분포 현황을 조사하고 사라져 가는 걸 찾아내는 게 시급했습니다. 식물을 수목원에 옮겨서 증식하거나 현지에 보존하는 등 조치를 취하는 일을 서둘러야 했죠.”
그는 10여 년간 입소문을 추적하고 문헌을 뒤적이면서 희귀식물을 찾아 헤맸다. 이른바 ‘숨은 식물 찾기’였다. 어떤 식물이 ‘30여 년 전에 설악산 골짜기에 있었다’는 말만 듣고 찾아 나서면서 길을 잃는 등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표적인 게 매화마름. 도감에 따르면 매화꽃처럼 생겼는데 물가에 사는 잡초인 매화마름이 멸종됐다고 했다. 하지만 해안가 인근 주민들에게 묻고 고문헌을 뒤적인 결과 해안가의 논에 서식하는 물풀을 찾아냈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네가 여기 있었구나, 사람들이 너를 못 알아봤구나, 반갑다’라고 인사했지요. 식물은 산에 있다는 상식에 따라 식물을 찾으러 깊은 산에만 갔지, 바닷가 근처로 갈 생각을 못했던 거죠. 바닷가 논은 예상 밖이었어요. 물부추 등 비슷한 물풀도 줄줄이 찾아냈어요.”
해외에서 희귀식물을 캐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물사리와 검은낭아초 등을 ‘동토의 땅’으로 유명한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 채집하러 갔을 때다. 이 식물이 있다는 산에 도착해보니 산불이 나 있었다. 허망했다. 대신 맞은편 큰 산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원은 ‘도로가 없기 때문에 교통수단은 없지만, 주민들이 종종 말을 타고 간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말을 구해달라고 했고, 탐사단 모두 각각 말을 타고 달린 끝에 식물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 원장은 ‘식물 전문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5년차 연구사였을 때 대통령이 수목원을 방문하면 직접 수목원의 식물들을 안내하는 등 식물에 대한 해설은 이 원장이 도맡았다. 특히 그는 희귀식물을 복원하면서 식물표본을 확보하는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식물표본은 생물주권과 직결되는 ‘보물’과도 같은 기록인데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기존에는 대학마다 표본실이 있었는데 기초 학문이 약화되면서 줄어들었죠.”
수목원은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전환하면서 당시 2만여 점에 그쳤던 식물표본을 2020년까지 미국의 국립수목원 수준(60만여 점)으로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현재 식물표본을 80만여 점이나 확보했을 정도로 빨리 목표를 달성했다. 또 그는 식물뿐 아니라 곤충 등 생물까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표본을 확보해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www.nature.co.kr)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은 현재 세계생물다양성정보기구(GBIF)에 등재된 정보의 70% 이상을 제공한다.
이 원장은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우리나무 백 가지’, ‘광릉숲에서 보내는 편지’, ‘내 마음의 야생화 여행’ 등을 펴내면서 식물 지식을 대중화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학생들은 생물 과목을 따분하게 생각하지요. ‘종속과목강문계’만 달달 외웁니다. 하지만 식물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생물체로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저에게도 식물은 ‘애증의 대상’이었지만 책을 쓰면서 식물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지요.”
그가 책을 펴낸 건 지금은 폐간된 잡지인 ‘샘이 깊은 물’에서 식물에 대한 원고 청탁을 해온 게 계기가 됐다. 식물 한 개당 원고지 40매를 쓰는 일이었다. 자료가 많지 않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 이 원장은 탐사 갔을 때를 떠올리면서 식물에 대해 온전히 사유했다. 이후 강연을 통해 식물과 숲과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는지 등을 알렸다.
스토리텔링으로 식물학 대중화
“계절이 바뀌면 설악산 자락 어딘가에 펴 있을 꽃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마음이 두근거려요. 자연은 무궁무진합니다. 20년째 수목원에 출근하면서 한 번도 똑같은 느낌을 지닌 적이 없어요.”
이 원장에게 숲과 식물은 인생 그 자체다. 남편은 서울대 임학과 81학번 동기인 서민환 박사(52)로 환경부 산하 국립생물자원관 생물자원연구부장(고위공무원)이다. 서 박사는 산림생태학을 공부해 이들은 ‘부부 숲 박사’로도 통한다. 남편이 숲 전체를 연구했다면, 이 원장은 나무나 식물 하나하나를 공부한 셈이다.
석사 과정 때 이 원장의 지도교수가 내준 과제가 부부의 연을 맺어줬다. ‘아까시나무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꿀의 생산량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연구하라.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등 하루 4차례씩 아까시 꿀을 채취해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밤중에도 말없이 산행을 함께 해준 게 서 박사였다. 이후 이들은 데이트도 산에서 했고 신혼여행 때도 숲을 둘러봤으며 이 원장이 임신 9개월일 때까지 함께 식물 탐사를 했다. 또 ‘쉽게 찾는 우리 나무’라는 책을 부부가 같이 펴내기도 했다.
이 원장은 “수목원을 식물 산업과 기초 생물학의 연구 플랫폼으로 만드는 동시에 각박하게 사는 사람들이 위안을 받거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수목원 입장은 예약제로 가능한데, 몇 달을 통째로 예약해 주기적으로 오는 부부가 있어요. 하루는 전나무 숲만 거닐며 바람을 맞을 수 있고, 또 하루는 연못 앞 벤치에 앉아 수생식물과 새들만 지켜보는 거죠. 수목원이 천 가지의 표정을 지녔다면 수목원을 즐길 수 있는 방법 역시 천 가지예요. 멈춰 서서 식물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포천=김유영 기자 abc@donga.com
<13>최초 여자 기수(騎手) 이금주 씨
입력 2014-06-12
“女기수는 사양” 馬主 설득이 제일 힘들어
엄마 마음으로 보살피니 문제馬가 명마로
▲4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랍에미리트 주최 국제여성기수 초청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금주 씨. 대회에서 돌아와 경기 과천 마방 앞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말 ‘파워시티’와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한국마사회 제공
3월, 경기를 앞두고 말 ‘파워시티’를 마방(馬房)에서 데리고 나올 때였다. 이금주 기수(38)는 말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경기에 못 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징조가 느껴졌다. 이 기수가 ‘파워시티’에게 말을 걸었다.
“많이 아프면, 나가지 말자. 하지만 뛸 수 있으면 1등을 해줬으면 좋겠어.”
말이 대답을 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뭔가 ‘찌릿’한 느낌이 전달돼 왔다.
12마리의 말이 렛츠런파크 서울경기장 출발선에 섰다. 말들이 놀랄까 봐 출발 시 총을 쏘지는 않는다. 게이트(문)가 열리면 그게 출발 신호다.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장내가 조용해졌다.
드디어 게이트가 열렸다. 출발 100m까지는 채찍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기수는 ‘끌끌끌’ 하며 소리 신호를 주거나 체중을 말 앞쪽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말을 출발시킨다. 100m를 넘기자 기수들이 말을 재촉했다. 쇼트트랙과 흡사한 풍경. 기수들이 코너 안쪽으로 유리한 위치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리 부상에도 나를 위해 달려
4코너를 돌아 400m를 지났을 때였다. ‘파워시티’가 오른쪽 앞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보니 계속 왼쪽 다리로만 뛰고 있었다. 원래 경주마들은 한쪽 다리에 힘을 실어 몇 번 질주하다 반대쪽 다리로 체중을 옮겨 달린다. 이 기수는 채찍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한쪽 다리로 불편하게 달리는 말에게 채찍을 내려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승자는 파워시티였다. 결승선을 1등으로 통과한 것이다. 이 기수는 승리의 기쁨보다 사력을 다해 달린 말 생각에 그저 울기만 했다. 경기가 끝나고 보니 오른쪽 앞다리를 제대로 디디지 못할 정도로 부상 정도가 심했다. ‘경기 전에 내가 아프더라도 달려서 1등 하자고 해서 무작정 달린 건가. 괜히 내가 욕심을 부려서….’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경주마로서는 쓸모가 없어진다.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기수가 파워시티를 만난 건 지난해 12월, 파워시티는 거칠고 사람 말을 잘 안 듣는 ‘문제마’였다. 굴레를 씌우려면 도망을 다니고, 실력도 신통치 않아 보인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우승은커녕 경기에 제대로 나갈지조차 의문시됐다.
하지만 이 기수는 엄마의 마음으로 파워시티를 돌봤다. 매일 쓰다듬고 직접 목욕시켜 주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차츰 말의 성품도 변해갔다. 마침내 1월 데뷔전에서 첫 승을 거둔 후 3월 2승을 거머쥔 것이다.
평소 ‘동물과의 교감’에 대해 시큰둥했던 기자였지만 파워시티와 이 기수가 마음을 나눈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자식 자랑이라도 하듯 이 기수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말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었다. 다행히 3월 경기에서 입은 부상은 크지 않았다. 치료를 받으며 틈틈이 이달 말 열리는 경기에 대비하고 있다.
馬房에 여자왔다고 소금 뿌리던 시절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 기수가 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관동대 사회체육학과 2학년 시절, 승마 수업을 처음 받을 때였다. 코치가 “처음 타는 사람치고 너무 잘 탄다. 기수가 될 잠재력이 엿보이지만 아직까지 여자 기수는 안 뽑는다”고 말했다. 그도 처음부터 기수가 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졸업할 때인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불어닥쳤다. 다른 전공자들과 마찬가지로 체육 전공자들도 취업이 안 됐다. 그때 한국마사회에서 처음으로 여자 기수를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그는 1999년 시험을 통과해 후보생으로 입소했다. 여자 5명, 남자 20명이 군대 같은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점호를 하고, 구보를 마치면 마방에서 말똥을 치우고 하루 종일 말을 탔다. 말의 생태를 배우고, 승마와 관련된 각종 법규와 지식도 익혔다. 외박은 1주일에 한 번 가능했다. 훈련이 너무 고되다 보니 도중에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 2년간의 후보생 연수 후 남은 여자 기수는 이금주, 이신영, 이애리 씨 등 3명. 이 중 이금주, 이신영 기수가 2001년 7월 데뷔를 함께 했고 이애리 기수는 이듬해 데뷔했다. 이신영 기수는 현역 은퇴 후 2011년부터 조교사로 활동하고 있어 현재 현역으로 뛰는 최고령 여성은 이금주 기수다.
여자 기수를 뽑기는 했지만 여자를 기피하는 문화는 여전했다. 말들이 기거하는 마방에 여자가 들어오는 것 자체를 마필관리사, 조교사가 싫어했다. 부정 탄다는 이유에서다. 이 기수가 지나갈 때 ‘야 얼른 소금 뿌려라’라는 말이 뒤에서 들리기도 했다. 경기가 끝나면 말을 목욕시키면서 남자들도 옷을 몽땅 벗고 같이 씻는 문화가 있었는데 ‘여자들이 있으니까 불편하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말 주인들도 여자 기수를 꺼렸다. 토요일은 10회, 일요일은 11회 경주가 열리는데, 말은 한 달에 보통 한 경주만 뛸 수 있기 때문에 기수는 매번 다른 말을 타야 한다. 한 경주 2분만 달려도 450kg짜리 말의 체중이 10kg 이상 빠질 정도로 숨을 헐떡인다. 마주(馬主)들은 쉽게 말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 기수는 “‘난 여자 기수 안 쓴다, 말 못 준다’는 마주를 설득하는 게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굳이 기수가 하지 않아도 되는 말 목욕이라든지 말똥 치우기 같은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이 기수의 모습을 본 마필관리사와 마주들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여자 기수가 있는 마방이 분위기도 좋고 팀워크도 좋다”는 칭찬까지 나왔다. 현재 현역 기수 63명 중에서 여성 기수는 7명이나 된다.
공감 능력이 제일 큰 능력
경마에는 보통 10∼14마리의 말이 출전한다. 우선은 말의 능력이 중요하지만 그 다음으로는 기수의 능력이 중요한다. 관람객들은 어떤 기수가 타는지도 확인해 베팅을 한다.
경마는 성(性) 구분이 없는 국내 유일한 프로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남자 기수와 여자 기수가 함께 경기하기 때문이다.
이 기수가 데뷔한 지 3개월 후, 단거리 1000m(트랙 반 바퀴) 경주에 나갔을 때 그에게 베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긴 우승후보도 아닌 말을 이끄는, 경력도 얼마 안 된 여자 기수에게 누가 기대를 하겠는가. 그런데 처음에는 뒤처졌던 이 기수가 다른 말들을 하나둘씩 제치더니 결국 1등으로 결승선에 들어섰다.
“경마에서 기수의 힘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힘만 갖고 하는 건 아니에요. 여자 기수의 장점은 섬세하고, 말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남자 기수들보다 유연성이 좋은 만큼 게이트가 열렸을 때 스타트가 빠른 편이죠.”
그 역시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다. 2004년 훈련 중 말이 머리를 갑자기 뒤로 확 젖히는 바람에 왼쪽 눈두덩이 함몰될 정도로 심하게 부상을 당한 것. 3시간 넘게 수술을 받는 큰 부상이었다. 그때 여파로 시력이 약간 떨어졌다.
“어두운 병실에서 ‘무섭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마로 세상을 떠난 선배들 얼굴도 떠올랐다. 퇴원하면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2개월 뒤 퇴원을 했는데, 갑자기 말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 마방에 들어섰다.”
그는 “사람들이 ‘내게 말 귀신이 씌었다’고 농담처럼 말하는데 살아있는 동물과 교감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심정을 알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올해 4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랍에미리트(UAE) 주최 국제여성기수 초청경주에서 다른 12개국 기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경마 최초로 여성 기수가 국제경마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이 기수는 “7세 아들이 모로코에서 우승한 것을 보고 ‘우리 엄마, 정말 멋있고 자랑스럽다’고 말해줘서 기뻤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과 임신으로 2007∼2009년 공백 기간을 가진 것 외에 10년 넘게 꾸준히 현역생활을 이어왔다. 처음에는 시댁 어른들의 걱정도 많았다. 경마는 한번에 큰돈을 따보려는 중년 남자들이 주말에 경마장에 모여 벌이는 사행성 산업이 아니냐는 편견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말 경기 때 시어머니와 남편이 경기장에서 응원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여성 기수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경마 문화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가족 단위로, 커플 데이트로 부담 없이 찾는 사람들이 는 것. 한국마사회가 2004∼2013년 마권 구매자의 성향을 분석해 봤더니 최고 베팅 금액인 10만 원권이 2004년 6.6%에서 2013년 3.1%로 크게 줄어든 대신 1만 원권 이하 구매 건수는 62.2%에서 71.2%로 늘어났다. 그만큼 건전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체육학 석·박사 학위까지 딴 그는 현재 대학 5군데에서 사회체육학과 강사로 학생들에게 승마를 가르치고 있다. 이 기수는 “여자 기수들을 더 많이 배출시키는 것이 꿈이다. 승마의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새벽훈련을 마치고 다시 훈련을 위해 마방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휴게실에 앉아있던 여자 후배 이아나 기수(25)가 말했다.
“체중 관리를 위해 점심도 안 먹어요. 그냥 여자 선배인 줄 알았는데 자기 관리 철저하게 하고,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 보면 ‘우아’라는 탄성밖에 안 나와요. 우리 후배 여자 기수들에겐 든든한 롤 모델이에요.”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14·끝>첫 내부승진 박경순 국민건강보험공단 징수상임이사
▲박경순 국민건강보험공단 징수상임이사는 여성이라도 현장을 중히 여기면 성공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더 많은 분야에서 여성 1호와 2호, 3호가 쏟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국민건강보험공단 박경순 징수상임이사(58)와 마주 앉았다. 말단 직원으로 출발해 35년 만인 지난해 7월, 이사로 승진한 인물. 그동안 공단에서 외부 여성 인사가 이사로 영입된 적은 있지만 평사원으로 이사직에 오른 것은 박 씨가 처음이다. 공단에는 총 5명의 이사가 있다. 징수이사는 보험료를 징수하고, 자격을 관리하는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자그마한 체구에 소박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동료들은 그를 ‘여걸’이라 부른다. 어떤 질문에도 시원시원하게 답변하는 스타일. 기자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 뭔가요? 형식적인 답변 말고, 진짜로 본인이 생각하는 비결.”
곧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역시 막힘이 없는 스타일 같았다.
“우연찮게 들었어요. (윗선으로부터) 제가 일을 성의 있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대요.”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싱거운 답변. 하긴, 최선을 다하는 거야말로 이 시대 모든 직장인의 승진 비결이 아니겠는가. 기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박 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충 설명을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단 한 번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자라는 시선과 싸웠어요. 뒤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런 모습이 성의 있게 보였나 봐요.”
현장의 가치를 깨닫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5년. 고교를 갓 졸업한 박 이사는 9급 공무원 시험을 통과했다. 첫 근무지는 경북 구미의 한 면사무소.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손에 든 임용장이 조금은 자랑스러웠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법한 덩치의 면장이 그를 맞았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쩌렁쩌렁한 목소리. 면장은 허공에 대고 대뜸 화부터 냈다.
“남자를 달라고 했는데 왜 또 여자야?”
잘못한 일도 없는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면장은 그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군청으로 전화를 걸고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또 여자를 보내주면 어떡합니까? 현장에 할 일이 산더미인데, 당장 남자로 바꿔주든지, 데려가든지 하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면장은 한참을 씩씩거렸다. 여자 공무원은 호적등본 발급과 같은 업무만 해야 한다는 게 면장의 생각이었다. 이미 호적계에 여직원이 있었으니 더이상의 여직원은 불필요하다는 거였다. 반대로 현장엔 새마을운동이니, 모내기 독려니, 벼 파종 독려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농부, 인부들과 어울려야 할 남자 공무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였다.
여자는 ‘현장’에 있으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 40여 년 전,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걸 스스럼없이 말했다. “여자가 뭘…. 그냥 방구석에나 틀어박혀 있지.”
박 이사는 도로를 넓히는 ‘취로사업’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현장 업무다. 면장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람이 모자라니 어쩔 수 없었다.
첫날, 현장에 가자마자 인부 인원부터 체크했다. 점심과 퇴근 무렵 다시 인원을 체크했다. 지출된 비용에 대해서도 영수증 하나까지 모두 챙겼다. 원칙을 지켰을 뿐인데, 인부를 동원하는 나이 든 마을 이장은 투덜거렸다.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팍팍하게 굴어? 도무지 융통성이 없어. 지금껏 다른 직원들은 나한테 맡기고 볼일 보던데….”
사소한 것에도 ‘이권’과 ‘떡고물’이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노회한 이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잘 알았다. 하지만 원칙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전략을 수정했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현장에서 살아남겠다고.
그 후로, 회의가 열릴 때마다 박 이사는 마당까지 뛰어나가 이장들을 맞았다. 사업에 필요한 장비들은 이장이 얘기하기 전에 미리 제공했다. 복잡한 서류 작업은 물론이고 눈코 뜰 새 없는 농번기에는 이장이나 마을 사람들의 농협이나 우체국 업무도 대신 해 줬다.
진심은 통하는 법. 철모르는 젊은 여자가 날뛴다던 이장들이 마음을 열었다. 여직원은 호적등본이나 떼주어야 한다던 면장도 생각을 바꿨다. 이구동성. “웬만한 남자보다 낫구먼.”
박 씨는 3년 3개월간 공무원 생활에서 현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 후 그는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까지도 제 철학의 첫 번째 항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게 바로 현장입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부딪쳐야 합니다. 현장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지사 순례는 지금도 계속
박 이사는 1979년부터 2009년까지 줄곧 대구, 경남과 부산 일대의 지사에서 근무했다. 그 사이에 차장, 부장, 지사장으로 차례차례 승진했다. 거의 매번 ‘여성 행정직 최초 승진’이란 기록을 남겼다.
2009년 3월 서울 본사의 고객지원실장으로 발령받았다.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당시 공단의 공공기관 고객만족도는 ‘미흡’ 수준이었다. 이를 ‘우수’로 끌어올려야 했다.
“뭐가 문제인지부터 알아야 고칠 거 아닙니까? 고객과 직접 접촉하는 현장의 창구부터 확인했어요. 역시 문제가 있었어요. 답은 늘 그렇듯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창구에서는 이른바 ‘민원 병목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류 발급이나 보험 확인, 보험카드 발급 등 여러 업무가 뒤엉켜 있어 하나만 늦어지면 나머지까지 모두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비스 현장이 이러니 고객들이 피부로 느끼는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박 이사는 이 점부터 고치도록 했다.
고객의 의견에 즉각 피드백을 보내는 ‘VOC(Voice Of Customer)’ 시스템도 개발했고, 홈페이지도 개편했다. 그 덕분에 공단의 고객만족도는 이듬해 ‘보통’, 2011년 ‘양호’ 수준으로 향상됐다.(현재는 ‘우수’ 점수를 받고 있다.)
2011년 7월 대구지역본부장으로 발령받았다. 다시 야전사령관으로 돌아가는 길. 지사장은 자신의 지사만 챙기면 되지만 본부장은 지사 모두를 다독여 성과를 내게 해야 한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막상 취임하자 마음은 편해졌다. 그랬다. 이미 해법은 나와 있었다. 바로 지사를 ‘순례’하는 것. 한 달 이내에 총 31개의 지사와 출장소를 방문해 현장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취임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이 계획은 24일 만에 달성했다.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사실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정작 현장에선 높으신 분의 ‘행차’로만 여길 수도 있는 노릇.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지사를 방문할 때면 항상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경청했다. 처음에는 입을 여는 직원이 별로 없었다. 박 이사는 가능하면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줬다. 그러자 지사 직원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성주에는 참외, 고령에는 수박이 많이 납니다. 제가 현장을 돌면서 알게 된 지식이죠. 시찰로는 현장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지사에 갈 때마다 애로사항과 사옥 상태, 운영 현황 등을 물었고, 그걸 책자로 만들어 첫 본부장 회의 때 제출했습니다. 반응이 아주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현장 챙기기는 그가 대구지역본부장으로 있던 1년 6개월간 지속됐다. 이 기간 그는 지사별로 평균 3회 이상 방문했다. 이사가 된 지금도 지사 순례는 계속하고 있다.
여성 차별, 모두가 나서야 깨져
임원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직장생활 초년병 시절의 설움은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
“처음 공단에 취직했을 때 민원창구에서 일을 했어요. 당시 여자라면 당연한 코스였어요. 남자 직원들은 중요 부서에 배치됐지만 여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여성 직원에게는 늘 ‘보조’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가 오랜 시간 지방을 돌며 지사에서 근무한 것도 차별 때문이다. 여러 차례 본사 근무를 희망했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본사에 여자가 근무할 자리가 없다”였다.
인사철이 되면 속이 터졌다. 제아무리 성과를 내도 평가 점수는 늘 꼴찌였다. 가장 좋은 점수는 나이 많고 남자인 직원들이 받아갔다. 물론 승진도 남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나이 든 남자 선배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데, 여자가 양보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강했어요. 공정하지 않다고 항의하면 이상한 여자 취급 당했죠. 억울하더라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요. 그 때문에 남자 동료들보다 승진이 한참이나 늦어졌어요.”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공단에도 여성 부장과 실장이 흔해졌다. 그래도 작은 바람이 있단다. 7월에 공단에서 인사가 나는데, 이번에는 업무부서가 아닌 핵심부서에서 여성 실장을 배출하기를 간곡히 청한다나.
동아일보의 ‘여성 1호를 만나다’ 시리즈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더불어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루기 위한 방법도 물었다.
“아직 봄이 오지는 않았어요. 멀리 산을 보면 꼭대기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어요. 그 눈을 치우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각 분야에서 여성 1호가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여성 1호가 나왔다면 2호, 3호가 계속 쏟아져야죠.”◎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2014-06-26
출처 ; 동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