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호 4/ 101 이병철 DNA - 149.스카우트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대한민국 제1호 4/ 조선일보
101 이병철 DNA
연말 연초가 되면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는 고(故)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는 하루 평균 1000여 명의 인파가 몰리는 명소가 된다. 2007년 11월 호암 타계 20주기에 맞춰 일반인들에게 생가를 개방한 후, '큰돈을 벌거나 성공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품고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작년 말까지 생가를 다녀간 방문객만 16만명이 넘는다.
많은 사람들은 2010년이 '한일(韓日)합방에 의한 망국(亡國) 100년'이란 정치적 의미에 주목한다. 망국 후 100년 동안 나라를 되찾고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른 아픔과 극복의 역사를 토대로 이제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 나가자는 각오를 다진다. 하지만 지난 100년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일이 또 하나 있다. 호암 이병철이 다음달로 태어난 지 100년이 된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와 운명을 같이한 그는 1938년, 단돈 3만원으로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성상회'를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기업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대한민국 제1호' 기록은 여럿이다.
공채 방식 사원 최초 모집, 가장 먼저 비서실 설치, 민간 차관 1호 기업 출범, 종합상사 최초 설립,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기업 연수원 운영…. 80년대 초에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 진두지휘, 작년 초 현재 대한민국 총수출의 19%,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23%를 차지하는 '글로벌 삼성'의 초석을 놓았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둡고 그늘진 부분도 일부 있었지만, 호암이 한국 자본주의 발전사에서 전례없이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엔 이의가 별로 없다.
이런 호암의 성공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비결은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는 상상을 초월한 철저한 연구와 조사이다. 그는 삼성상회 창업에 앞서 사업 품목과 경영전략 수립을 위해 부산에서 서울·평양·신의주·흥남은 물론 중국 창춘·선양을 거쳐 베이징·칭다오·상하이까지 2개월 동안 조사여행을 했다. 완벽을 지향하는 이런 습관은 반도체와 조선 산업·호텔 같은 신규 사업에 진출 할 때마다 세계 최고 사례연구와 전문가 면담, 최신 자료 섭렵 등으로 이어졌다.
둘째는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긍정적 사고이다. 호암 역시 한국전쟁으로 삼성물산공사가 망하고, 사카린 밀수파동 등으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는 등 쓰라린 시련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는 '능력과 한계를 지키며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한다'는 각오 아래 좌절하지 않고 새 사업에 뛰어드는 패기를 보였다.
"성공한 한국인의 공통점은 '자기 긍정'과 '성취 열정'인데, 이병철은 이런 요소가 특히 강했다"(백기복 국민대 교수)는 것이다.
마지막은 부단한 자기 각성의 자세다. 호암은 20대 초반과 30대에 무위도식과 연락(宴樂)에 빠졌지만 그때마다 다시 털고 일어나 사업에의 꿈과 의지를 단련했다. 이미 30대에 평생 먹고살 만한 부를 모은 그는 "독립국가 한국의 기업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문제의식 아래 숱한 도전을 시도했다. 수원 삼성전자 홍보관에 게시돼 있는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렇다.
"삼성은 나라의 기업이다. 부디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에 이로운 방향으로 삼성을 이끌어다오."
요약하자면 정경 유착 논란 같은 일부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 호암에 대한 추모와 학습 열기가 날로 높아지는 것은 뼈를 깎는 노력과 수양을 바탕으로 한 '이병철 DNA'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로벌 경제전쟁과 경쟁의 파고가 한층 높아지는 경인년 새해에 성공과 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되새겨 봄 직한 준칙이지 않을까.
102 새나라 새국민이 되려면(신년사)
1948년 8월 15일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1949년 1월 1일 대통령으로서 첫 신년사를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1면에 '반세기 굴욕 전감(前鑑) 삼아 국가수호를 맹서하자'라는 제목으로 '이 대통령 신년담화'를 4단 크기로 보도했다.
대한민국 출범 이후 첫 새해를 맞아 이승만 대통령이 화두로 던진 말은 '새 나라 새 국민'이었다. "잃었던 나라를 찾았으며 죽었던 민족이 살아났으니 새해부터는 우리가 보다 새 백성이 되어 새 나라를 만들어 새로운 복(福)을 누리도록 합시다."
이 대통령은 새로운 백성,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새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누구나 새 사람이 될려면 새 마음을 가져야 되나니 동포를 해롭게 하고 나 혼자만 잘 되려는 것, 나라를 결딴내고라도 자기의 이익만 도모하는 것, 모든 더럽고 부패하고 또 부끄러운 것은 하나라도 하지 않도록 작정할 것"을 말하면서 "광명정대(光明正大)하고 애국애족(愛國愛族)하는, 이롭고 정다운 말과 일로 서로 도와주며 피차(彼此)에 구제(救濟)하는 정신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또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던 지난 과거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4천여년 내려오던 조상의 신성한 유업(遺業)인 반도강산(半島江山)을 남에게 잃어버리고 거의 반백년(半百年) 동안 피가 끓고 이가 갈리도록 욕스러운 세상을 지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서 이후로는 몸이 열번 죽어도 나라와 민족에 해될 일은 각각 자기(自己)도 아니하며 남도 못하게 해서 다시는 남의 노예백성이 아니 되도록 하자"고 다짐했다.
광복 직후 전쟁을 치른 대한민국의 1인당국민소득은 67달러(1953년 통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60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식민지를 겪은 나라 중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하고, 세계의 경제와 정치를 주도하는 그룹인 'G20 의장국'이 되는 등 세계사에 유례없는 모범국가로 성장했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첫 신년사 이후 61년이 지난 2010년 대통령 신년사는 그동안 대한민국이 이룬 놀라운 성취를 반영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1일 신년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에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2009년 우리가 얻은 것은 자신감입니다. 2010년 우리가 갈 길은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입니다. 저와 정부는 '한마음으로 함께 노력하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다'는 '일로영일(一勞永逸)'의 자세로 선진 일류국가로 가는 초석을 확실히 다지겠습니다."
103 1950년대 첫 한전 유학생들
1958년 문교부 원자력과장을 맡고 있던 윤세원 박사(전 선문대 총장)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의 호출을 받았다. 외환의 경우 단돈 10달러를 쓸 때도 이승만 대통령의 결재를 받던 시절, 한 해 수천달러가 들어가는 원자력 연구자들의 해외체류 예산안이 비서실에서 거절당하자 다시 올린 게 화근이었다.
비서실장이 "누굴 놀리는 거냐"고 면박을 줬지만 비서실장보다 직급이 한참 아래인 윤 박사는 "공부 대충시키다 들어오게 하면 국가적 손실"이라고 버텼다. 실랑이 끝에 결재안은 이 대통령에게 올라갔고, 비서실의 걱정과 달리 그대로 통과됐다. 원자력에 대한 이 대통령의 기대가 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 박사는 우리나라 원자력 유학 1호다. '물리학회 50년사'에 따르면 윤 박사는 김희규 등과 함께 1956년 4월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국제원자력학교에 첫 국비 원자력 연구요원으로 파견된다. 국제원자력학교에서 유학한 이창건 박사는 "연수생들은 대부분 서울대 등에서 수재로 불리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원자력에 대한 기술을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밤잠도 자지 않고 새벽까지 공부했었다"고 말했다.
아르곤국립연구소의 1인당 학비는 10개월 연수기간을 통틀어 6000달러로 비쌌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미국 국제협력처에서 지원받은 돈으로 유학자금을 댔다. 1기 유학생 이후 4년간 8차에 걸쳐 150여명이 원자력 유학길에 올랐다.
이 원전(原電) 유학생들은 1959년 정부가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세울 때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1기 유학생인 윤세원 박사는 1957년 1월 귀국해 원자력과장·원자력연구소 원자로부장을 맡았다. 이들은 1959년 7월 원자력연구소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전인 '트리가 마크 Ⅱ' 건설을 이끌며 한국의 원자력 시대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이승만 대통령도 직접 원자력연구소 건설부지를 제안하고 공사현장을 수시로 둘러보며 연구자들을 격려했다.
이런 노력으로 1978년 한국은 첫 상업용 원전인 고리1호기를 완성, 가동을 시작했다. 비록 핵심 기술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에서 들여왔지만, 미국에서 원자력 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지 20년도 채 안 돼 전 세계를 통틀어 21번째 원전 보유국이 된 것이다.
당시 원전 유학생들이 주축이던 원자력연구소는 KNE(현재 KOPEC)라는 자회사를 설립, 미국 벡텔사를 도와 원전 설계 분야에 참여하며 기술을 축적했고 이는 1995년 한국형 원전을 개발하는 기틀이 됐다.
이후 한국의 원전 기술은 계속 발전, 2011년 냉각장치 등 일부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원전 핵심 기술까지 완전히 국산화할 예정이다. 첫 원전 유학길에 오른 지 50여년, 고리1호기를 가동한 지 20여년 만이다.
104 1948년 동계올림픽 도전
한국의 올림픽 도전은 하계보다 동계가 먼저였다. 1948년 1월 30일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개막한 제5회 동계올림픽.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이지만 'KOREA'라고 적힌 단복을 맞춰 입은 5명의 초미니 선수단이 태극기를 앞세워 개막식에 참가했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미국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월터 정(한국명 정월택)이 본부임원을 맡았고 최용진 감독과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3명(이효창·이종국·문동성)이 출전했다.
1944년 전일본선수권대회 종합우승, 1946년 춘천에서 열린 제1회 한국빙상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효창이 한국의 간판이었다. 물론 당시의 한국은 참가에 의미를 둔 나라였고, 대회 성적도 노메달이었다. 그러나 미니 선수단은 세계에 코리아를 알리며 나라를 되찾은 기쁨을 만끽했다. 하계 올림픽 참가는 같은 해 7월의 런던올림픽이 처음이었다.
▲ 제5회 동계올림픽
한국은 6·25전쟁 와중에 열린 1952년 오슬로올림픽엔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대회부터는 빠지지 않고 동계올림픽에 나섰다. 그때까지는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뿐이었지만 1960년 대회(미국 스퀘밸리)부터는 알파인 스키와 크로스컨트리 스키에도 출전했다. 이후 출전 종목도 다양해졌고, 출전 선수의 수도 늘었다. 그러나 한국은 동계올림픽의 '들러리'였고 '노메달 행진'도 계속 이어졌다.
첫 메달 소식은 쇼트트랙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알베르빌올림픽에서 나왔다. 김기훈은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우승하면서 한국인 1호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동계올림픽 데뷔 44년 만의 쾌거였다. 당시 한국은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에서도 금메달을 보탰고, 스피드스케이팅의 김윤만(은메달), 쇼트트랙 이준호(동메달)가 메달을 따내면서 종합 10위(금2·은1·동1)에 올랐다.
이후 한국의 동계올림픽 순위는 쇼트트랙 성적에 좌지우지됐다. 쇼트트랙은 말 그대로 한국의 '메달밭'이었다. 쇼트트랙 대표팀은 1994년 릴레함메르부터 2006년 토리노까지 금메달만 15개(은7·동4)를 따냈다. 안현수와 진선유는 토리노올림픽 남녀 쇼트트랙에서 3관왕에 오르며 한국 올림픽 역사를 새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쇼트트랙에만 편중된 '메달 편식'은 한국 동계 스포츠의 숙제로 남아 있다. 내년 2월 개막하는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이 아닌 종목에서 첫 금메달리스트가 나올 수 있을까.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 출전하는 '피겨 여왕' 김연아,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의 이규혁과 이강석이 유력한 후보다.
105.중동산 원유 35만배럴 64년 첫 수입
1964년 1월 22일 중동산 원유 33만배럴이 울산항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처음으로 들여온 원유였다. 조선일보 1964년 1월 23일자는 "22일 하오 4만5000톤급의 걸프 이타리아나호 유조선에 실려온 이 원유는 중동의 쿠웨이트 산이며, 연이어 오는 10일에는 다시 약30만바렐(배럴의 당시 표기)이 수송되어 올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쿠웨이트 산 원유는 박정희 정부가 울산에 세운 대한석유공사 울산 공장의 시운전용이었다. 울산 공장은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세워진 원유 정제 공장으로, 1963년 12월 14일 준공됐다. 1일 정제 능력 3만5000배럴 규모였다. 울산 공장은 원유가 들어온 뒤 시범 가동을 거쳐 4월 1일 준공식을 가졌다.
▲ 박정희 정부가 울산에 세운 대한석유공사 울산 공장
최초의 원유 수입 가격은 정확하지 않다. 조선일보는 당시 국제 시세가 배럴당 1.78달러라고 전하고, 석유공사가 수입가에 대해 "국제시장 가격보다 싸나 상도의(商道義)상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때의 첫 수입 이후 1964년 한 해 수입된 원유는 모두 583만5000배럴이었고, 모두 쿠웨이트 산이라고 한국석유공사가 발행한 책자 '2009 석유산업의 이해'는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 석유 공장이 처음 세워진 것은 일제(日帝) 강점기인 1935년이다. 일제는 함경남도 원산에 연산 30만톤(1일 600배럴) 생산 능력의 조선석유주식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원유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2공화국까지는 원유가 수입되지 않았다. 국내에 원유 정제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에는 휘발유 등 완제품만 국내에 수입됐다. 대한석유공사 울산공장은 정부와 미국 석유메이저인 '걸프'가 50대 50으로 지분을 공동 투자해 세운 회사였다. 대한석유공사는 이후 1980년 선경그룹에 인수됐고, 현재의 이름은 SK에너지다.
정부가 아닌, 민간이 원유를 처음으로 수입한 것은 1969년 호남정유이다. GS칼텍스의 전신인 호남정유는 국내 최초의 민간 정유업체로 그해 3월 12일 여천공장 가동을 사흘 앞두고 사우디아라비아 산 원유 36만배럴을 수입했다. 이보다 앞선 1961년 7월 20일 부산에서는 국내 최초의 원유 도입이라며 축하 퍼레이드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오늘날 현대오일뱅크의 전신인 극동정유공업이 미국에서 수입한 500톤의 조유(粗油)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유는 정확히 하면 원유가 아니며 원유에서 가스와 나프타분을 제거한 원료유였다.
현재도 중동산 원유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는 절대적이다. 2008년의 경우, 수입 물량 8억6487만2000배럴(약 828억7011만달러) 중 86.3%인 7억4645만5800배럴(714억5339만달러 상당)이 중동 산이었다.
106.1970년대 금액표시 상품권 본격화
대한민국 상업사(史)에서 상품권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1년 12월 27일, 정부가 대량 소비 촉진책의 하나로 '상품권법'을 제정하면서부터다. 초기의 상품권은 대부분 지정된 물품만 살 수 있는 '물품표시 상품권'이었다.
상품권 전면에 '백미 10㎏'과 같은 식으로 표기돼 있었다. 물품 표시 상품권으로는 설탕·조미료 등 당시 품귀현상을 빚던 생필품류 상품권이 인기가 높았다.
지금과 같은 개념의 '금액 표시 상품권'(백화점 상품권)이 본격화한 것은 정부가 1971년 8개 업체를 지정해 이들 업체만 상품권을 유통할 수 있도록 하면서부터다. 8개 업체는 신세계·미도파·화신·신신·시대·에스콰이어·한일관광·국제관광공사 등이었다.
표기금액 한도는 5000원이었지만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상품권법이 개정되면서 한도도 10만원까지 올라갔다.
당시 국내 최초이자 최대 백화점이었던 신세계백화점의 상품권은 시중에서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추석과 연말에는 상품권 매출액이 총 매출액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 1970년대 신세계백화점 상품권.
하지만 소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던 금액표시 상품권은 1975년 12월 시장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정부가 재무부장관 행정명령을 통해 상품권 발행을 전면 금지한 것이다. 사치를 조장하고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합법적인 상품권 발행이 금지되자 시장에서는 할부구매 전표, 현금보관증, 영수증 등을 이용한 편법 상품권이 성행하기도 했다.
역사에서 사라졌던 상품권은, 경제 여건이 변화하고, 음성적 상품권 거래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988년 부활 논의가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1990년 정부가 도서상품권과 양곡상품권을 허용하자, 백화점 업계는 형평성 문제를 들어 상품권 부활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1993년 12월 상품권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듬해 시행규칙이 확정 공포되면서, 백화점 상품권은 다시 시장에 등장했다. 롯데·현대·신세계 등 주요 백화점들이 일제히 상품권을 만들기 시작했고, 백화점 상품권은 부활과 동시에 각 백화점 선물 판매 순위 1위로 올라갔다.
정부는 이후 위탁판매를 허용하는 등 상품권법 시행령을 조금씩 수정해 나가다가 1999년 마침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상품권법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상품권법의 폐지는 상품권의 활성화에 도움을 주었지만, 한동안 군소업체들이 발행하는 '휴지 상품권'이 난립하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상품권 신용카드가 허용되고, 전자상품권, 선불카드, 모바일 상품권 등이 잇따라 선보이면서 상품권 전성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현재 국내 상품권 시장은 5조원 규모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백화점 상품권 시장은 약 3조원 규모다.
107.해방후 첫 고액 기부,경주 최부잣집
여러 학자들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첫 고액기부자는 '경주(慶州) 최부자' 집안의 마지막 최부자로 기록된 최준(崔浚·1884~ 1970) 선생으로 기억되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로 불렸던 경주 최부잣집은 300년간 만석꾼을 지내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 독립운동을 후원해 큰 존경을 받았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문의 지침과, 어려운 사람들이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만큼 쌀을 가져가도록 구멍을 뚫어 놓은 '구멍 뒤주'는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고위층의 사회적 책임)' 정신을 대표하는 일화이다.
광복 후 최준 선생은 그때까지 남은 전 재산을 처분해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웠고(1947년), 이 두 학교가 합쳐져 현재의 영남대학교가 됐다.
예종석 한양대 교수는 "최준 선생과 더불어 1970년대엔 유일한(柳一韓) 선생이 사회고위층의 책임의식을 보여준 모범 사례로 귀감이 됐다"며 "그러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기부자도 여럿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1895~1971) 선생은 1970년 개인주식 8만3000여주(현 시가로 311억원 상당)를 사회에 환원했는데, 이는 손녀딸의 유학자금 일부 등을 제외한 전 재산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 기금으로 유한재단이 설립됐고, 현재까지 교육 장학사업 등을 이끌어 오고 있다.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1991년 선생의 외동딸 유재라 여사도 전 재산(시가 200억원 상당)을 유한재단에 기증했다.
강철희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기업에 속한 재단이 아니라 자산으로 운영되는 '독립재단 1호'로 중부재단(이사장 이혜원)을 꼽았다. 그는 "중부재단이 현대적 의미의 기부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의 남편인 김항덕 중부도시가스 회장이 자산 30억원을 출연해 어려운 이웃과 사회복지기관을 지원하는 중부재단을 세웠고, 부부는 매년 회사 수익금 등 10억원 상당을 재단에 내놓고 있다. 강 교수는 "꾸준히 자기 자산에서 얼마간을 떼어내 기부해온 중부재단은 '중간 부자들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라고 말했다.
최근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민간 기부기관이 속속 등장하고, 기업체에서 사회적 공헌을 중시하면서 연간 수백억대의 기부를 하는 기업도 많아졌다. 이런 '초고액 기부'의 시발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삼성으로 기억한다. 김효진 공동모금회 홍보실장은 "1999년 12월 삼성그룹에서 100억원을 기부했는데, 당시엔 공동모금회의 연간 모금액 목표가 213억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 민간협력과 윤희성 사무관은 "최근엔 기부자들의 선행이 잘 알려지고 있지만,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여러 독지가의 기부는 개인적으로 이뤄져 역사 속으로 묻힌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08 북한 공작원 1958년 민간 여객기 납치
1958년 2월 16일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대한민국항공사(KNA) 소속 여객기 '창랑호(滄浪號)'가 경기도 평택 상공에서 무장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돼 평양 순안공항에 강제 착륙했다. 당시 북한 공작원들은 총기로 조종사를 위협해 승객·승무원 34명이 탄 KNA기를 공중 납치했다. 우리나라 항공 역사상 첫 여객기 피랍(被拉) 사건이 발생한 순간이었다.
우리 정부는 2월 20일 북한 공작원 김택선 등 3명을 납치범으로 발표했고, 25일에는 사건 배후로 기덕영 등 3명을 체포했다. 북한은 "KNA기가 '의거 월북'했다"고 선전했지만, 유엔 군사정전위원회는 2월 24일 북측에 승객·승무원과 기체를 즉시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우리 국회는 2월 22일 북한 만행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16개 6·25 참전국에 보냈다.
당시 북한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의 방북을 앞두고 '남한 비행기가 자진 월북했다'는 체제 선전을 위해 납치극을 꾸몄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3월 6일 탑승자 26명을 돌려보냈다. 납치범 등은 송환되지 않았다. 통일부 관계자는 "창랑호 피랍은 워낙 오래전 사건이고 대다수 탑승자들이 돌아와 현재 납북 사건으로 관리하고 있지 않다"며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납치범을 제외한 일부가 북에 남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대한민국항공사(KNA) 소속 여객기 '창랑호(滄浪號)'.
반면 1969년 12월 11일 북한이 공중 납치한 대한항공(KAL) YS-11 여객기는 '강제 납북 사건'으로 관리된다. 당시 KAL기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을 태우고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가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돼 원산으로 기수를 돌렸다. 북한 방송은 창랑호 피랍 때처럼 "자진 입북했다"고 보도했다.
우리 정부는 탑승자들의 과거 행적을 근거로 "고정간첩 조창희가 여객기를 납치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의 진상이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셈이다.
당시는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청와대 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같은 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남북이 극도의 긴장 상태였던 때였다. 북한은 납치 66일 만인 1970년 2월 14일 탑승자 중 승객 39명만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다. 그러나 승무원·승객 12명(납치범 포함)의 송환은 지금까지 거부하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송환자 증언에 따르면 억류된 탑승자들은 북한 출신이거나 북한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억류자 중 여승무원인 성경희씨는 2001년 2월 3차 이산가족 상봉 때 남한에 있는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109.대한민국 얼굴,김연아
"김연아 홍보대사를 잡아라"
초등 3년 딸 아이가 며칠전 크리스마스 씰(Seal)을 샀다. 대한결핵협회에서 매년 발행하는 크리스마스 씰이다. 그런데 예년에는 제 돈 아끼려고 엄마를 졸라 사곤 했는데, 올해는 웬일인지 천금같은 제 돈으로 샀다.
이유를 물었더니 김연아 때문이란다. 올해 크리스마스 씰의 주인공은 피겨퀸 김연아였다.
작은 것 10장. 큰 것 1장이 붙은 씰이었다. 학교에서 팔았는데, 혹시나 없어 못 살까봐 엄마에게 물을 여유도 없이, 즉석에서 결정하고는 제돈으로 덜컥 샀다. 그리고는 대만족이었다.
진짜 요정 다웠다. 2개의 동작을 함께 처리해 입체감이 느껴지고, 또 청소년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김연아 파이팅 이모티콘'을 넣어 신선한 느낌이었다.
김연아,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이다. 스포츠와 연예 불문, 남녀불문 '최고=김연아'로 압축된다.
최근 푸드앤카페의 설문에서 한식 세계화를 위한 여자 홍보대사로 단연 김연아를 꼽았다. 이곳 뿐만이 아니라 크든작든 김연아를 '국민대사'로 삼자는 설문결과가 꼬리를 문다.
그런데 김연아는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홍보대사로 맹활약하고 있다. 김연아는 지난 2005년 8월 2014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홍보대사로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 주니어그랑프리대회에서 종합우승후 15세 피겨요정으로 우뚝설 때였다. 당시 성악가 조수미, 프로골퍼 최경주와 박세리, 디자이너 앙드레 김 등과 나란히 했다.
김연아는 올 4월 또 한번 동계올림픽 홍보대사로 이름을 올렸다. 2018평창 동계올림픽 제1호 홍보대사이다. 김연아는 위촉사에서 "국내선 동계올림픽이 한번도 열린 적이 없는데, 2018년엔 꼭 평창에서 열리기를 바란다"며 세번 실패는 없다는 각오를 새겼다. 2018동계올림픽은 독일 뮌헨과 격돌이 예상된다. 독일은 왕년의 피겨요정 카타리나 비트를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김연아는 "내년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평창을 가장 효과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지름길"이라며 맞받아쳤다.
김연아는 군포시 도장중, 수리고 출신이다. 당연히 군포시 홍보대사(2007년 위촉)와 경기도 홍보대사(2006년)로 지자체 알리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또 허리디스크 치료받은 것을 계기로 청소년 척추건강지킴이(2007년)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씰에서 보듯 김연아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 홍보대사(2007년)로도 활동한다.
수영의 박태환과 함께 국민오누이로 통하던 지난 2007년 김연아는 국정홍보처의 '다이내믹 코리아'의 홍보대사로도 이름을 떨쳤다. 당시 2014동계올림픽유치 때 인연을 맺은 앙드레 김이 직접 제작한 드레스를 입고 성숙미를 과시하기도 했다.
올해를 끝으로 다이내믹 코리아 홍보대사를 마친 김연아는 이번엔 2010~2012년 한국방문의해 대한민국홍보대사로 위촉을 받았다. 2008년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인재상 수상을 계기로 대통령 부부와 연을 맺었는데, 이듬해인 지난 4월 한국방문의해 명예위원장인 대통령 영부인 김윤옥 여사로부터 3년간 한국방문의해 홍보에 앞장서 달라는 덕담과 함께 위촉패를 받았다.
김연아는 올해 3월 인천국제공항 명예홍보대사, 올 6월부터는 2012디지털방송전환 홍보대사로도 활동한다.
'김연아 대사'를 잡아라! 2022년 월드컵유치를 선언한 축구는 물론, 한국쌀, 한우, 한식 등 해외 알리기에 앞장선 지자체나 각종 국내외 행사 업체의 새해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111.국가단위 대입 자격시험, 1954년 첫 도입
1954년 8월 3일부터 5일 사이 전국 5개 도시에서 치러진 대학입학자격고사가 건국 이래 치러진 최초의 국가 단위 대학 입학시험으로 기록된다. 공식 명칭은 대학입학국가연합고사. 시험 과목은 국어·영어·수학·사회생활 등 4과목이 필수이고, 선택 과목을 하나 뒀는데 당시엔 대부분 실업 과목이었다고 한다. 대학 입학 정원의 140%를 뽑는 일종의 검정고시(자격시험)였고, 대학은 이 시험의 합격생을 대상으로 별도 시험을 또 치러 선발했다. 여학생과 군 제대자에게는 자격고사를 면제해준 것이 이채롭다. 앞서 광복 직후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는 대학별 고사로 치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대학생에 대해 징·소집을 보류한 데 대해 특혜 시비가 일고 일부 대학에서 부정 입학문제가 발생하자 국가 관리체제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 시험은 딱 한 해만 치러지고 폐지된 뒤 다시 대학별 시험으로 돌아갔다. 대학 입시 이중 부담 논란에다 자격시험을 통해 대학 진학의 기회를 빼앗는 것은 교육의 기회 균등원칙에 위배된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더욱이 시행 첫해의 관리 부실로 인해 대학 정원의 140%인 1만7000명보다 훨씬 많은 2만5000명을 뽑은 데다 이마저도 일부 사회 저명 인사의 자녀들이 줄줄이 떨어지면서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결국 그해 대학 입학은 대학별 본고사로 대부분 결정돼 시험은 치러졌지만 실효성은 전혀 없이 사라진 셈이다.
우리나라의 대학 입학 시험제도는 광복 이후 지금까지 큰 줄기만 놓고 보면 11번 정도 바뀌었다. 선진국의 통상적인 대입제도인 대학별 단독 시험제가 우리나라에서는 부실한 학사 관리문제로 인해 국가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 때문에 국가가 예비고사, 학력고사, 수능 등의 이름으로 관리해왔다. 우리에게 익숙한 예비고사는 1969년 도입됐다.
처음엔 대학 본고사 응시자격을 주는 수준으로 시행됐지만 73년부터는 예비고사 성적을 대학별 전형에 30% 반영하게 했다. 그러나 대학별 본고사가 당락을 좌우하면서 '망국병(亡國病)'이라고 지적될 정도로 과외 열풍을 부추겼고, 고액 과외의 경우 빈부 격차에 따른 위화감 조성이란 사회적 비난이 들끓게 했다.
1982년엔 학력고사제도로 다시 한번 변신한다. 학력고사 성적 50%와 고교 내신 30% 이상으로 대학에 진학하게 했는데, 이번엔 대학의 자율적인 선발기능 약화, 고교 내신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불거졌다. 이를 보완하려고 논술고사 강화 등의 방법을 쓰다가 1994년부터 지금의 수학능력시험 형태로 바뀌었다.
112.역사는 결코 속일 수 없다
▲ 신용철·경희대 명예교수
12월 2일자 A33면 '대한민국 제1호-공산당이 싫어요, 진실게임 종지부' 기사는 지난 1968년 12월 9일 '무장공비의 이승복 일가 참살사건'이 일어난 41년 전으로 돌아가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날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참사에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의 초등학교 2학년이던 이승복(9)군과 그의 동생 승수(7), 승자(4)와 어머니 주씨가 무참히 살해됐고, 형 학관(15)은 부상으로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는, 어린아이가 대답할 수 없는 위협적인 조건을 단 무장공비의 질문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우회적이지만 핵심적으로 대답한 이승복군이 입이 찢겨 무참히 살해된 사건에 대해 온 국민들은 매우 분노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24년이 지난 1992년에 '조작 날조의 오보'라는 때아닌 논란에 휩싸이게 됐다. 미디어오늘 前 편집장 김종배씨가 "조선일보의 기자가 현장에 없었고, 승복군 형을 만나지 않았다"며 "조선일보의 보도는 추측과 문장력으로 쓴 작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언론개혁시민연대는 1998년 '오보전시회'를 열고 조선일보가 반공구호를 만들기 위해 소설을 썼다는 허위 주장을 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억지 주장은 2006년 형사재판 최종심에서 "조선일보의 보도가 사실"임이 인정되어 김주언씨의 유죄를 확정하고, 2009년 2월 민사재판에서도 김씨는 조선일보에 500만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불과 41년 전에 일어났던 '이승복 사건의 진위 논쟁'을 보면서 우리는 지난 세기 41년간(1904~1945)의 역사인물 평가 중 '친일파사전' 왜곡논쟁의 심한 비판과 파동을 생각한다. 이승복 사건을 말살하려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친일파사전의 잘못된 역사인물 평가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역사를 지키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것은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는 정신으로 왜곡을 감시하고 바로잡으려는 확고하고 부단한 노력으로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승복 사건'은 1960년대 북한 도발의 산 역사인 동시에, 역사적 사실을 왜곡 말살하려는 세력들에 대한 경고로서의 교훈임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9일 진부면 이승복기념관에서 열리는 추모식에는 1968년 무장공비의 한 사람인 김모씨가 79세의 노인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이는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김씨와 그 시대를 생각하는 우리 모두에게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이것은 역사를 조작하거나 말살 왜곡하려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결코 속일 수 없으며, 그 결과는 역사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113.외환은행 1978년 신용카드 첫 발급
요즘은 택시요금까지 카드로 결제하는 세상이지만 30년 전만 해도 신용카드는 일부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1978년 4월 10일, 외환은행이 전세계 가맹점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비자(VISA)인터내셔널과 제휴해 국내 최초의 신용카드를 발급했다. 이 카드는 해외 사용이 목적이었다. 외국 출장이 잦은 외교관, 수출기업 및 공사 임원, 대학교수 등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발급받았고, 일반 해외 여행객이 가지려면 한국은행 총재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국내 가맹점은 거의 없어 소수의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 등에서만 쓸 수 있었다.
당시 외환은행 조선호텔지점에 근무했던 최태룡 외환은행 카드운영센터장은 "해외여행조차 쉽지 않던 시절에 신용카드는 사회적 신분과 권위의 상징이었다"며 "종종 카드를 발급해달라는 외부 '민원'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발급 첫해 회원은 200여명이었지만, 개별 회원 정보는 남아 있지 않다.
이보다 앞서 1969년 7월 1일 신세계백화점이 국내 최초로 백화점카드를 발급했다. 일본 도쿄에서 플라스틱 재질의 카드 378장을 들여와 삼성그룹 간부들에게 발급했다. 사인만으로 물건을 외상구매하고 월말에 대금을 갚는 등 신용카드의 면모를 갖췄으나, 발급 대상과 사용처가 제한돼 외환비자카드를 최초의 신용카드로 보는 견해가 많다.
1980년엔 전국 최대 점포망(164개)을 갖고 있던 국민은행이 카드 발급을 시작하면서 일반인도 카드를 발급받아 1회 10만원, 한 달에 15만원까지 쓸 수 있게 됐다. 이어 1982년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신탁은행 등 5개 은행이 비씨카드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신용카드 시대의 막이 올랐다. 가맹점이 다양해졌으며, 사용 지역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지로 확산됐다.
이후 카드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 1990년 1038만장이던 신용카드 수가 1996년에는 4111만장으로 4배 늘었고, 가맹점수도 이 기간 6배 늘었다. 2000년대 들어 탈세 방지와 경기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신용카드 규제를 소홀히 하면서 2003년 카드사태로 신용불량자가 양산되기도 했다.
9월말 현재 국내 신용카드 발급장수는 1억271만장으로, 경제활동인구 한 명당 4장꼴로 카드를 갖고 있다. 하루 평균 1422만건, 1조3000억원어치가 신용카드로 결제된다.
세계 최초의 신용카드는 1950년 미국 시카고의 사업가 프랭크 맥나마라가 친구인 변호사 랄프 슈나이더와 함께 만든 '다이너스 클럽 카드'로, 초기 가맹점은 뉴욕의 14개 식당이었다
114.임정 비행장교 1호
독립전쟁 참가를 목표로 美 비행학교서 자격 획득
임정 참위로 임관했지만 훈련중 추락 후유증에 요절
'박희성(朴熙成)으로 육군 비행병 참위(參尉)를 임(任)함.' (1921년 7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임시정부 '비행장교 1호'인 박희성(1896~1937)이 역사적 재조명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박희성은 임정이 이용근과 함께 비행분야에서 오늘날 소위 계급에 해당하는 '참위'에 처음 임관한 인물이다.
전 광복회장인 김우전 한국광복군동지회 고문은 최근 "박희성의 독립유공 공적을 심사해 달라"며 그에 대한 독립유공자포상신청서를 보훈처에 제출했다. 김 고문은 "박희성은 41세에 미혼으로 사망, 직계 유족도 없다"면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이런 분도 잊혀지지 않고 역사에 기록돼야 한다"고 말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비행장교로 공식 임관한 고(故) 박희성의 조종사 자격증 사진 (왼쪽 사진). 미국 LA ‘에버그린’묘지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SON OF KOREA(한 국의 아들)’라고 적혀 있다(오른쪽 사진)./김상경 재미 프리랜서 사진기자 제공
황해도 해주 출생인 박희성은 연희전문에 다니다가, "학교 다닐 때가 아니다. 미국에 가서 비행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라"는 형 박희도(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의 조언에 따라 학교를 중퇴,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2년간 정비사로 일하다 1920년 2월 임시정부 군무총장(현 국방장관) 노백린이 주축이 돼 캘리포니아 북부 윌로스(Willows)에 설립한 윌로스 비행학교에 입교했다. 이 학교는 임정이 '독립군 공군 양성'의 꿈을 키우던 곳이다. 노백린은 1920년 3월 1일자 윌로스데일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비행학교는 3·1운동 연장선에 있으며 조종사를 양성해 궁극적으로 대일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며 "중국 여러 곳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이미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비행학교의 상급기관이자 후원기관인 비행가양성사의 '장정(章程)'엔 출범 취지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비행가를 양성하는 데 있다'고 돼 있다. 이 비행학교는 독립운동가이자 쌀 농사로 백만장자가 된 김종림이 재정적 후원을 했다. 김종림은 당시 재미 동포 중 가장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내는 사람이었고, 임정은 그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박희성의 우수한 조종술은 당시 한인 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도산 안창호가 창간한 '신한민보'는 1921년 3월 31일자에 '우리 비행학생 성적, 박희성씨가 가장 능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촉망받던 그였지만 1921년 4월 조종사 자격시험을 치르다 비행기가 추락, 중상을 입었다. 여기서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부상을 치료할 겨를도 없이 한 달 만에 시험에 나서 결국 합격했다. 그가 7월 7일 날짜로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조종사 자격증을 받자, 임정은 10여일 만에 그를 비행병 참위로 임관했다. 하지만 박희성은 독립전쟁 참전이라는 꿈을 펴 보지도 못한 채 비행기 추락사고 때 입은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 1937년 사망했다.
광복 후에도 수십년간 역사에 파묻혀 있던 박희성은 올해 초 한 재미 언론인의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고 김영옥 대령의 '전도사'로 알려져 있는 한우성(52)씨가 임시정부의 윌로스 비행학교를 다룬 기획기사를 쓰면서, 박희성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한씨는 박희성의 묘가 미국 LA의 한 묘지에 방치돼 있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그는 "'에버그린'이라는 이 묘지는 1950년대 초반 일본 왕세자 아키히토가 방문, 위령탑을 세우고 기념식수를 했던 곳"이라며 "그 위령탑과 불과 10여m 거리에 박희성이 묻혀 있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
박희성의 묘비에는 'SON OF KOREA(한국의 아들)'라는 글과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그 밑에 그의 미국이름(HOWARD S. PARK)과 한국이름(박희셩)이 적혀 있다.
한씨는 "박희성의 방계 유족에 따르면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독립전쟁에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되뇌곤 했다고 한다"며 "그가 참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해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1호 비행장교라는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115.조남철 1950년 프로 바둑시대 열어
한국인 최초의 프로 바둑기사는 고 조남철(趙南哲) 선생이다. 송원(松垣·조 九단 아호)의 일생은 곧 한국 바둑 여명기의 역사였다. 그는 14세 때 일본에 유학, 기타니(木谷實) 문하에서 현대 바둑을 익혀 1941년 만 18세 때 일본 기원 프로 등용문인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바둑이 사랑방 선비들의 도락에 머물던 그 시절 송원은 선진 문물을 익힌 유일한 유학파 엘리트였다.
1943년 송원이 6년간의 도일(渡日) 수업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한국 바둑계는 프로제도가 없는 불모지였다. 조남철은 프로기사 자격증을 따낸 최초의 한국인이지만 아직 '대한민국 프로기사 1호'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1945년 11월 창설한 한성기원을 근거지로 선진 바둑 보급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1948년 9월 전국위기(圍棋·바둑)선수권대회란 대규모 행사를 개최한다.
우리 바둑계에 처음 프로제도를 싹 틔운 행사는 1950년에 벌어진 제3회 전국위기선수권대회였다. 나이 새파란 '개혁의 기수'였던 조남철은 일정 자격을 갖춘 고수(高手)들만 그 대회에 초청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프로 초단을 주되 대회 풀리그 성적이 평균 75점을 넘는 기사에게 二단, 80점 이상이면 三단을 인정한다고 공표했다.
▲ 한국인 최초의 프로 바둑기사고 조남철(趙南哲·사진 맨 왼쪽) 선생 주도 아래 한·일 프로기사들 간의 교류전도 몇 차례 열렸다.
고수들이 국수(國手), 국기(國棋), 도기(道棋)로 통칭되던 시절이어서 단위 도입은 프로화의 뜻깊은 출발점이었다. 노(老)기객들로선 기사 개개인의 우열을 드러내는 숫자(단위)로의 호칭 변경이 마땅치 않았으나 개혁의 대세를 거부할 수 없었다. 대회는 무사히 끝났고 조남철 혼자 三단을, 그리고 윤주병 민중식 등 13명이 초단을 받았다. 대한민국 첫 프로기사 14명이 동시에 탄생한 것이다. 전국위기선수권대회를 한국 바둑 프로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이유는 단위제 확립 외에 한 가지 더 있다. 그 대회 대국보를 연재한 연합신문이 사상 처음 원고료를 지급했고, 그 일부가 해당 기사에게 전달됐다. 보잘것없는 액수였지만 대국의 반대급부로 '보수'를 받는 진정한 '프로화'가 이뤄진 것이다.
종로구 낙원동서 열렸던 제3회 위기선수권대회의 거행 시점도 주목할 만하다. 1950년 6월 20일부터 27일까지 6·25 개전(開戰)의 정중앙에서 치러졌다. 38선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으면서도 "저 정도의 대포 소리는 종종 듣던 것"이라며 대회를 강행한 것이다. 이후 조남철의 주도 아래 한·일 프로기사들 간의 교류전도 몇 차례 열렸다.
송원이 창설한 한성기원이 조선기원, 대한기원을 거쳐 1954년 한국기원으로 바뀌기까지의 '간판 변천사'는 바로 한국 바둑 굴곡의 역사였다. 개척자 조남철은 2006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했지만 한국 바둑은 10여년째 변함없이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 중이다.
116.공산당이 싫어요,진실게임 종지부
난 공산당이 싫어요."
북한 무장공비는 '북한이 좋니, 남한이 좋니'라고 물었고, 총명하기로 소문난 아홉 살짜리 초등학교 2학년생 이승복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순간 무장공비는 소리를 지르며 승복의 멱살을 잡아 올렸고, 다른 공비는 대검을 꺼내 승복의 입을 찢으며 살해했다.
1968년 12월 9일, 6·25 종전 후 북한 공비가 민간인 어린이를 잔인하게 학살한 첫 사건(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박사)인 '이승복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날 오후 7시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계방산 기슭 이석우씨 집. 저녁식사를 마친 가족들은 평온한 일상에 젖어있었다. 아버지 이씨는 이웃 이삿짐을 나르러 집을 나섰고, 어머니 주대하씨는 윗방에서 메주를 쑤고 있었다. 쪽문으로 연결된 아랫방에선 큰형 학관(15)이 옥수수를 다듬었고 그 옆에서 둘째 승복은 숙제를 하고 있었다. 두 동생 승수(7)·승자(4)는 잠에 빠져 있었다.
집 밖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총을 든 낯선 남자 5명이 불쑥 방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그해 10월부터 전국을 공포에 떨게 한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으로 남파된 북한 무장공비 120명의 잔당이었다.
이날 밤 공비들은 승복에 이어 승수와 승자를 벽에 내동댕이쳐 살해했고, 어머니 주씨도 공비 대검에 여러 차례 찔려 숨졌다. 큰형 학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이틀 후인 12월 11일 조선일보에 '잔비(殘匪), 일가 4명 참살.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 입 찢어'라는 기사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하지만 이 기사는 1990년대 들어, 일부 안티조선 세력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렸다. 1992년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장이 '저널리즘'이란 잡지에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 없었고 승복군 형을 만나지 않았다"며 "조선일보 보도는 추측과 문장력으로 쓴 작문"이라고 주장했다.
저널리즘 편집인이었던 김주언씨는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는 언론개혁시민연대 추진위원장을 맡아 1998년 8~9월 서울시청 앞 보도와 부산역 광장에서 '오보전시회'를 열어, 조선일보가 반공구호를 만들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허위 주장을 했다.
이들의 억지 주장은 10년여에 걸친 법정공방 끝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법원은 2006년 11월 '형사재판' 최종심에서 "이승복 기사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현장을 취재해 작성한 사실보도"라며 김주언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확정했다. 또 지난 2월 대법원 2부는 조선일보가 김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최종심에서 "김씨는 조선일보에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 '이승복 보도'가 진실이었음을 재확인했다.
117.한국은행 1950년부터 금 매입
최근 국제 금 가격이 급등하면서 금을 많이 보유한 외국의 중앙은행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 한은도 마찬가지이다. 한은이 보유하고 있는 금은 10월 말 현재 14.4t. 한은 장부엔 7800만달러라고 적혀 있지만, 국제 금 시세로 4억8000만달러(약 5500억원)어치가 된다. 장부가로 계산하면 외환보유액(2642억달러) 중 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0.03%로 세계 56위이다. 한은이 지금까지 금을 판 적은 없다.
1950년 6월12일 설립된 한국은행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화폐 발행이었다. 국내 금광에서 캐낸 금(金)을 사들이는 것도 주 업무 중 하나였다. 금은 국제시장에서 달러처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0년에 발간된 '한국은행 10년사(史)'에 따르면 설립 초, 한은은 1g당 30원에 금을 사들였다. 6·25전쟁 와중이었던 1950년 한 해 동안 사들였던 금은 6.3㎏. 1953년부터는 금을 1g당 1달러 5센트로 쳐서 달러로 바꿔주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금 생산이 줄면서 1967년부터는 국내에서 금을 사들이지 않고 있다. 1950년 이후 18년간 한은이 사들인 금은 3t 정도다. 관세청이 몰수한 밀수 금 1.5t도 매입해서 보관했다. 금은 2004년까지 서울 본점과 대구, 부산 등의 한은 지점 지하창고를 옮겨가며 보관했다. 한은은 2004년 금을 직사각판형 초콜릿 형태의 '골드바'로 만들어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 1998년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모인 금반지·금팔찌 등 3t의 금도 '골드바'로 만들어 영란은행 금고에 보냈다.
한은은 1978년 국제 금 시장에서 금 1.2t을 샀고, 같은 해 IMF(국제통화기금)에서 2.1t을 매입했다. 해외시장에서 구입한 금은 미국 뉴욕 연방은행, 스위스 중앙은행의 금고에 맡겼다가 1989년 모두 영란은행에 보관하고 있다.
런던이 런던·뉴욕·취리히 등 3대 국제 금시장에서 가장 거래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1989년부터 한은은 금을 해외 투자은행 등에 빌려 주고 연 1% 미만의 이자를 받고 있다. 이자는 금으로 받는데, 20년간 받은 금 이자는 1.5t에 달한다. 그러나 최근 2년간 평균 금 이자 수입은 이자율로 따지면 연 0.53%로 매우 낮다.
최근 금 보유 비중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은 금 보유 비중이 외환보유액의 60~70%에 달한다. 한은은 추가 금 매입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이다. 금 가격은 변동이 심해서 '주식투자'와 같이 위험하고, 급하게 달러가 필요할 때 바로 현금화하기 힘들다는 이유다.
118.1966년 태국 해외건설 시장 첫 진출
1966년 1월 태국의 남쪽 끝에 자리 잡은 도시 빠따니의 도로건설 현장. 이곳에 작업복 차림에 제법 덩치가 큰 사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공사 지시를 하고 있었다. 옆에는 경리장부를 든 20대 사내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훗날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이 된 이명박 현대건설 사원(왼쪽이 당시 현장 직원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우리나라 건설업체가 외국에서 최초로 공사를 수주한 것은 태국의 빠따니와 나리타왓을 연결하는 총연장 98㎞의 고속도로 건설 공사였다. 태국정부가 IBRD차관을 받아 1965년 발주한 공사다. 1966년 1월 공사를 시작해 1968년 3월 준공됐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네덜란드 등 16개국 29개 업체가 입찰에 참여해 현대건설이 공사를 따냈다.
▲ 빠따니의 도로건설 현장.
당시 현대건설은 구닥다리 국내 건설 장비를 태국으로 갖고 가 공사를 했다. 신식 장비가 있었지만, 기술자들이 사용법을 몰라 무용지물이었다. 국제 규격 공사가 뭔지도 현장에서 배웠다. 당시 현대건설에는 아스콘(도로포장재) 제조 기술자가 없어 서울시가 중곡동에서 운영하던 아스콘 공장의 유일한 기술자를 현지로 데려갔다. 하지만 태국의 후텁지근한 날씨를 고려하지 못하고 아스콘을 배합해 공사를 끝낸 아스팔트가 녹아내리기 일쑤였다.
공사 수주 금액은 522만달러(60억원). 당시로선 큰 금액이었지만 첫 해외공사의 결과는 암담했다. 고생 끝에 공사를 끝냈지만 공사 금액의 절반이 넘는 300만달러(34억원)에 달하는 손해가 났다.
▲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이 된 이명박 현대건설 사원, 왼쪽이 당시 현장 직원이었던 이명박 대통령.
그러나 정 회장은 태국 고속도로 공사에 대해 "비록 금전적으로는 거액의 손해로 끝났지만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공사를 끝내 천금을 주고서도 사지 못할 신뢰를 격전의 훈장처럼 받았다"고 회고했다. 정 회장은 한 달에 열흘은 태국에서 살았다.
이후 대한민국 해외건설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1960년대에는 전쟁터였던 베트남 밀림에서 공사를 수주했고, 1970년대 중동 붐 이후에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 한가운데 수로를 깔았다. 이곳에서 벌어온 돈으로 한국은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다.
올해 우리 건설업체들의 해외 건설 수주액(11월 현재 452억달러)은 사상 최고치였던 지난해 기록(476억달러)을 넘어설 전망이다. 30~40년 전에는 고속도로를 깔고, 수로를 매설하는 토목공사 위주였지만 지금은 부가가치가 높은 플랜트 공사와 초고층 빌딩이 주력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해외건설 현장에서 피·땀을 쏟았던 건설인들에게 조금씩 빚을 지고 있다.
119.첫 외국인 단체관광,1972년 일본 수학여행단
1972년 10월 6일 부산 '부관(釜関)훼리터미널'. 까만 교복의 일본 학생들이 배에서 내렸다. 일본 시마네현 마쓰에(松江) 부속고교 3학년생 59명, 대한민국을 찾은 첫 외국인 수학여행단이다. 이들은 부산·광주를 구경하고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묵은 후 나흘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첫 대규모 단체관광객 입국이다.
2주 후 일본 오오미교다이샤(近江兄弟社) 부속고교생 98명이 4박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70년대, 일본 사립 중·고교의 한국 수학여행은 꾸준히 늘어갔다. 당시 배로 한국에 오는 5박6일 수학여행 비용은 2만4000엔 정도로 그 전까지 일본 해외 수학여행지 1순위였던 하와이의 반값 수준이었다. 1973년 조선일보 기사는 당시의 고무된 분위기를 드러낸다.
▲ 70년대, 일본 사립 중·고교의 한국 수학여행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경주·부여가 일본 중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 최적지로 선정됨으로써 올 7월부터 약 200만 명의 학생이 경주에 들르게 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일본의 450여 개 중고등학교 학생 200만 명의 여론조사 결과 최상위인 68만 명이 한국여행을 희망하고 있고….'(조선일보 1973년 5월 13일자)
72년 200명 정도였던 일본인 수학여행객은 79년 5579명까지 늘었고, 84년 고쿠라(小倉)상고를 시작으로 한국 수학여행은 일본 공립학교까지 확대된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일본 수학여행객은 2만7224명에 달한다. 관광업계 종사자들은 1970년대 일본 수학여행단이 '관광지 한국'의 물꼬를 텄다고 본다. 위험한 분쟁국, 한국의 이미지를 '고등학생을 단체로 여행 보낼 수 있는 안전한 나라'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후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국 관광은 팽창을 거듭한다. 2009년 현재, 각종 관광 수치는 고무적이다. 50년대 말 39개였던 호텔 수는 약 60년 사이 815개(2008년 말 기준)로 늘었다. 50년 전 한국의 '하늘길'은 시애틀―도쿄―서울, 타이베이―도쿄―서울 등 두 개 뿐이었지만 지금은 매일 약 540편의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신종플루, 고유가 등 여러 악조건 속에 올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가 23일 700만 명을 돌파했다. 78년 100만 명 돌파 이후 약 30년 만의 쾌거다.
'한국 방문의 해'가 시작되는 2010년 관광객 목표치는 850만 명. 그러나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올해 700만 돌파의 최우선 성공 요인이 '엔화 강세'임을 감안할 때 한국 관광은 아직 내공보다 외부 호재에 기대는 실정이다. 일본인 관광객이 전체의 약 40%를 차지해, 시장 다변화 노력도 절실하다.
121."녹향"살리기에 쏠린 뜨거운 정성
5일 동안 전석 매진… 수익금 333만원 전액 전달키로
대한민국 제1호 클래식 전문 음악감상실 '녹향'을 살리기 위한 행사가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다.
이번 행사는 17일부터 21일까지 5일간 곽승 대구시향 상임지휘자 등 5명의 마에스트로가 무료로 나서 음악을 들려주며 해설을 맡아 진행됐다.
티켓 예매를 맡은 그랜드심포니에 따르면 티켓 판매율 100% 매진 기록을 세웠다. 전체 70석 중 스태프 자리 등을 제외한 60석 정도의 좌석이 모두 판매돼 5일간의 수익금은 300만원을 넘어섰다.
▲ 마지막 날인 21일 진행을 맡은 곽승 대구시향 상임지휘자(오른쪽)가 이창수 녹향 대표(왼쪽)와 다정하게 섰다./그랜드심포니 제공
옛 향수를 잊지 못해 찾아든 사람들은 물론 '녹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음악애호가 등이 멀리 서울과 부산에서까지 음악을 듣고자 찾아왔다고 한다. 행사를 앞둔 지난 15일에는 막노동판에서 일하시는 70대 노인이 자신의 아픈 몸을 보살펴 준 모 병원장에게 성의를 표하려고 티켓 2장을 구입하고 2만원을 내놓는 등 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사흘째인 19일에는 다리가 불편해 부축을 받고 무대에 올라온 '녹향'의 이창수(88) 대표가 '옛날은 가고 없어도'를 열창했다. 이 대표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관객 절반 이상이 기립해 박수로 열광했다. 티켓 예매를 담당했던 그랜드심포니측은 이번 행사로 얻은 수익금 333만원 전액을 곧 '녹향'에 전달할 계획이다.
122. 1.21사태이후 1968년 주민등록증.
대한민국 국민이 주민등록증을 갖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68년 말부터다. 그해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1호 주민등록증이 전달됐고, 이후 국민들에게 발급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나눠준 건 그해 초 일어난 1·21 사태가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 있다. 북한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이 사건을 겪은 뒤 정부는 전국민에게 단일 형태의 신분증을 나눠줘, 필요할 때 신원을 정확히 확인하려 한 것이다.
주민등록증 이전에도 신분증은 있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도입된 호패가 이 땅의 첫 신분증이었다. 16세 이상이 소지했던 신분증명서로, 호구를 정확히 해 민정(民丁) 수를 파악하고 직업과 신분을 명확히 하며, 군역과 요역(노동력 징발)의 기준을 밝히기 위한 목적에서 도입됐다.
▲ 1·21 사태
대한민국 건국 이후엔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만들어진 시·도 규칙에 따라 18세 이상 국민들에게 시민증·도민증이 발급됐다. 시·도민증은 본적· 출생지·주소는 물론, 직업·신장·체중·특징·혈액형까지 적게 돼 있어, 그야말로 신상명세서나 다름 없었다. 또 시·도별로 모양이 다 달랐고, 수록 사항도 조금씩 달랐다.
1962년에는 기류법(寄留法, 시·군에 거주하는 주민을 등록하게 하는 법)이 제정돼 국민들에게 주민등록 신고를 하게 했고, 그해 5월 주민등록증법이 제정돼 시·도민증을 국가신분증으로 제도화했다. 1968년 10월 말부터는 전국민에게 12자리의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했고, 11월 21일부터 18세 이상 국민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줬다. 당시 주민등록증은 지금과 같은 가로 형태가 아니라 세로 모양이었다. 주민등록번호 앞 여섯 자리는 시·구·동을 의미했다. 110608-100373이란 주민등록번호의 경우 맨 처음 11은 서울, 06은 서대문구, 08은 충정로3가동이란 뜻이다. 뒷부분 숫자는 등록한 사람의 순서로, 373번째로 등록했다는 의미다.
1975년엔 주민등록증 1차 갱신이 이뤄졌다. 주민등록번호가 12자리에서 13자리로 바뀌었고, 앞 일련번호에는 각 개인의 생년월일을 넣었다. 또 그해부터 주민등록증 발급 대상자 연령을 민방위대 및 전시(戰時)동원 대상자 연령과 일치시키기 위해 18세에서 17세로 낮췄다. 1996년엔 정부가 IC칩이 부착된 전자주민카드로 바꿔 발급하려 했으나, 개인 사생활 침해 논란이 일어 유보했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은 1999년 9월에 탄생했다. 홀로그램을 넣는 등 첨단기술이 가미돼 위·변조가 어렵게 만들어졌다
123. 6.25전쟁 터지자 징병제 실시
광복과 함께 국내에는 군사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미(美) 군정이 1946년 군정법령 제28호에 근거해 모든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렸을 때, 국내엔 조선임시군사위원회와 학병단, 조선국군준비대, 조선학병동맹 등 30여개의 우파·좌파 군사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합법적인 군사조직의 창설은 '뱀부계획(Bamboo Plan)'으로 시작됐다. 2만5000명 규모의 필리핀식 경찰예비대 창설 계획에 따라 1946년 1월 태릉에서 제1연대가 창설됐다. 미 군정은 이를 '조선경찰예비대'라고 불렀고, 한국측은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될 것을 감안해 '남조선국방경비대'라고 호칭했다. 그해 4월까지 8개 연대가 창설됐고, 제주도가 도(道)로 승격되자, 11월에 9연대가 깃발을 올렸다.
징병제가 도입된 것은 1949년이다. 그해 8월 제정된 최초 병역법의 제1조는 '대한민국 국민 된 남자는 병역에 복무하는 의무를 진다'고 했다. 하지만, 6·25 전쟁까지 상비군은 소규모인 데다 법 시행 전 입대한 지원병은 전역을 하지 않아 징병제는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다.
▲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전쟁 이후 군대에 병력이 대거 충원됐다. 지원병도 많았지만, 가두징집 등 강제 징집도 이뤄졌다. 이에 1951년 5월 병역법을 개정해 소집절차를 마련했고, 1952년 만 19~28세를 대상으로 징병신체검사를 실시했다. 그중 만 20~22세 대상자를 추려 1952년 말까지 육군 7만6160명, 해군(해병대) 865명을 징집했다.
군 병력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5만490명, 6·25 전쟁 직전 10만5752명이었으나 전쟁 직후엔 70만명을 웃돌았다.
군 복무기간은 최초 병역법엔 '현역 2년'이었지만 유명무실했다. 그러다 1953년에 복무기간(육군)은 36개월이 됐고, 이후 33개월→30개월로 줄어들다 1·21사태 이후 다시 36개월이 됐다. 1970년대 후반 33개월로 줄더니, 30개월(1984년)→26개월(1993년)→24개월(2003년)로 단축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병의 복무기간을 6개월 더 줄이기로 해 2014년 7월 입대자부터는 18개월이 된다. 이는 군 병력을 2020년까지 51만명으로 줄이는 것과 맞물려 우리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우려다.
지난 12일 군 당국은 "여성을 지원병 형태로 입대시키는 '여성 지원병제' 도입을 2011년부터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병역자원 부족 현상 때문이다. 우리 병력 규모와 유지에 대한 장기적·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때이다.
124.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1945년 해군 창설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
1945년 8월 21일 손원일은 민병증과 함께 서울 거리에 이런 벽보를 붙이다 정긍모를 만났다. 정긍모도 비슷한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있었다. 그날 한갑수가 합류하면서 이들은 의기투합, '해사대(海事隊)'를 결성했다. 손원일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했던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다. 그는 해사대를 조선해사보국단과 통합해 '조선해사협회'로 개칭한 뒤, 11월 11일 11시 서울 관훈동 옛 표훈전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립했다. 이 조직을 미 군정청은 '해안경비대(Coast Guard)'라고 불렀고,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가 됐다. 해군은 신사여야 한다고 믿는 손원일은 한자 '十一'을 세로로 쓰면 '士(선비 사)'자가 된다는 점에 착안, 창설일을 '士'자 2개가 계속되는 11월 11일로 정했다.
▲ 해방병단 창설식 사진(큰 사진), 손원일 제독(작은 사진).
1993년 6월 209급(1200t급) 잠수함 '장보고함'이 취역함에 따라 한국해군은 잠수함 시대를 열었다. 이어 2007년 12월 28일 수중(水中) 작전영역을 한반도 일대에서 필리핀과 중국 하이난섬(海南島)까지 넓힌 것으로 평가받는 214급(1800t급) 잠수함이 취역했다. 214급 잠수함 1번함 이름이 '손원일함'이다. 해군 관계자는 "해군 창설의 주역이자 해군 초대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내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故) 손원일 제독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손원일급은 일본의 주력 오야시오·하루시오급, 중국의 송·명급 등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전투력은 오히려 뛰어나, 미국·러시아·중국의 대형 핵잠수함을 제외한 재래식 잠수함에선 최정상으로 꼽힌다.
창설 당시 해방병단은 70명에 불과했다. 이제 해군은 병력 6만8000여명에 전투함정 120여척, 상륙함정 10여척, 잠수함정 10여척, 기뢰전함정 10여척, 지원함정 20여척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형구축함 사업은 1998년 국산 구축함 1호 3500t급 광개토대왕함을 탄생시켰고, 이어 4500t급 구축함도 내놓았다. 2007년 5월 진수한 한국 최초 이지스함 '세종대왕함'은 한국을 세계에서 7000t급 이지스함을 보유한 세 번째 국가에 올려놨다. 1995년부터 세계 16번째 해상초계기 보유국이 됐고, 1998년 봄 중어뢰 '백상어' 운용시험 성공으로 미국·영국·독일에 이어 세계에서 8번째 어뢰 독자 개발국이 됐다.
2005년 7월 진수한 1만4000t급 독도함은 해병대 1개 대대 병력과 전차 10여대, 차량 최대 200여대, UH-60 등 헬기 15대, 고속 공기부양정 2척을 실을 수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대형수송함(LPH)이다. 엄청난 변화이다.
125.1988년 전화 1000만대..
국내에서 유선전화가 대중화된 것은 1986년 정부가 국내 기술로 개발한 교환기를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전화국에 보급하면서부터였다. 이로 인해 1988년 가입자가 1000만명을 넘어서면서 국내에서도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까지 유선전화는 투기의 대상까지 될 만큼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상품이었다. 국내에 전화 개통을 위한 교환기가 워낙 부족해 전화 개통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미국·스웨덴 등에서 교환기를 잇따라 들여왔지만, 소득 증가에 따라 급증하는 수요에는 미치기 어려웠다.
전화 신청을 해 놓고도 개통까지 몇 년씩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였고, 대기자들 사이에선 서로 먼저 개통해 달라며 '로비'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0년 무렵 서울 시내에서 명의 이전이 가능한 유선전화(일명 백색전화)에는 200만원이 넘는 웃돈이 붙기도 했다.
▲ 1988년 유선전화 가입자가 1000만명을 넘어서면서 국내에서도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반전된 건 정부가 1986년 국내 최초의 전화 교환기 개발에 성공하면서였다. 정부는 1981년부터 당시로선 파격적인 240억원의 연구비를 책정, 국산 교환기 개발에 나섰다. 웬만한 공장 건립에 50억원이 들지 않던 시절이었다. 정치권 등의 반대도 많았지만 개발자들의 5년이 넘는 헌신적 노력 끝에 만성적인 가입자 적체 현상은 해소되기 시작했다. 전화가 국내에 들어온 지 90년 만에 실질적인 '전화 대중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국내에 처음으로 전화가 개통된 건 이보다 앞선 1896년이었다. 당시 궁내부에 고종 황제 전용 전화가 설치됐다. 제한적이나마 일반인도 전화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건 1902년 서울·인천 간에 전화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일제 통치 기간에 전화는 대부분 일본의 대륙 침략 전시(戰時) 행정용과 일부 특권층의 사치품으로 사용됐다. 6·25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우리나라는 1960년대 경제 개발 계획에 착수하면서 통신 인프라 재건 작업을 본격화했다. 1971년에는 서울과 부산 간 장거리자동전화가, 1983년에는 미국·일본 등 24개국과의 국제자동전화가 개통됐다. 1981년에는 현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출범했다.
한때 '부(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유선전화는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 이동통신 가입자가 4500만명에 이르면서 유선전화 사용 빈도가 빠르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유선전화 가입자는 2007년 2300만명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접어들었다. 대신 그 자리를 요금이 싼 인터넷전화가 대체해가고 있다. 인터넷전화 가입자는 현재 LG데이콤(205만명)을 포함해 600만명에 이른다.
126.클래식 감상실 녹향
마에스트로 5명, 1일 DJ로 나서
'녹향을 살립시다.'
대한민국 제1호 클래식 음악감상실은 대구에 있다. 중구 화전동 옛 대구극장 맞은편에 자리한 '녹향'이다.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 10월 문을 연 이래 일찍이 그 명성을 떨쳤다. 양주동, 이중섭, 유치환, 양명문, 최정희 등 당대 최고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음악실에 죽치고 앉아 하루를 보내던 곳. 한국인의 애창가곡 '명태'의 가사가 만들어졌으며, 비운의 화가 이중섭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클래식 선율에 흠뻑 젖으며 철학과 인생을 사색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쇠락을 거듭하면서 이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주인인 이창수씨(88)가 그 긴 세월을 지킴이로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녹향'을 살리기 위해 대구를 대표하는 교향악단의 지휘자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 녹향음악감상실에서 주인인 이창수씨가 음악을 듣고 있다.
오는 17일부터 21일까지 5일간 매일 오후 7시 30분부터 '1일 DJ'로 나선 것. 이현세(경북도향 상임지휘자), 이일구(김천시향 상임지휘자), 이재준(예술영재원 감독), 박지운(대구시립오페라단 기획), 곽승(대구시향 상임지휘자) 등 5명이다.
이들은 연주가 아닌 LP나 CD를 틀어 해설을 곁들이며 음악을 소개한다. 자신들의 음악적 견해와 철학을 들려주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들 마에스트로들은 녹향이라는 역사적 공간과 철학의 만남을 시도한다.
음악회장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웠던 마에스트로들을 일반인이 편안한 마음으로 만나고 그들의 음악적 견해와 철학을 들으면서 참된 음악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이 주최측의 설명이다.
진행은 첼리스트 박경숙과 음악평론가 최영애가 맡았고, 그랜드심포니의 실내악단이 실내악을 들려준다. 특히 녹향 대표인 이창수씨가 가곡 '선구자'를 들려줄 예정이다.
이러한 특별한 사연 때문인지 이번 행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 눈길을 모으고 있다.
'녹향'에 터를 갖고 있는 클래식 음악감상 동호회인 예육회는 행사를 앞두고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녹향의 묵은 때를 청소하고 자료도 전시한다.
얼마 전 일회용 가스레인지에 불이 붙어 녹향에 화재가 발생하자 중구청이 나서 부서진 출입문과 한쪽 벽면을 복구해 주었다. 마루커뮤니케이션과 예술기획 성우는 리플릿 디자인을 협찬하거나 현수막과 배너 광고물을 협찬해 도움을 주었다.
대구문화예술회관, 동구문화체육회관, 봉산문화회관 등 여러 문화시설의 장들이 앞장서 예매를 하는가 하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키로 했다.
예매 업무를 맡은 그랜드심포니측은 "많은 단체들이 함께 힘을 합쳐 이번 행사를 성사시켰다"며 "대구의 자랑인 '녹향'을 지키겠다는 시민들의 뜻이 좋은 결과를 맺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문의 (053)621-3301
127 전 국민 안전의식 일깨운 이리역 폭발사고
"쾅, 콰쾅!"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북 이리역(현재 익산역) 주변은 집중 폭격을 당한 듯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화약 호송원 신모(당시 36세)씨가 켜놓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40t을 실은 화물열차가 폭발한 것이다.
이 사고로 철도원 9명과 시민 등 총 59명이 숨지고 1400여명이 다쳤다. 또 주택 7800여채가 잿더미가 됐다. 이날은 금요일이었다. TV에선 테헤란에서 열린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대양주 최종 예선 한국-이란전이 중계방송되고 있었다. 주말을 앞두고 일찌감치 퇴근해 축구를 보던 주민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폭발 현장에는 깊이 15m,폭 40m의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반경 500m안쪽의 건물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나라 대형 폭발사고 1호로 기록된,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참사였다.
▲ 이리역의 폭발사고로 주택 7800여채가 잿더미가 됐다.
사고 이튿날 조선일보는 1면에 '裡里(이리)서 史上(사상) 최대 爆發慘事(폭발참사). 1천여명 사상…全 市街(전 시가) 아수라. 쾅 하자 停電(정전)…마치 戰爭(전쟁)터 방불'의 제목으로 사고 현장을 전했다.
익산시는 참사 30주년인 2007년과 31주년인 작년,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행사를 벌였다. 올해는 시 차원의 기념행사는 없고, 민간단체인 이리역 폭발사고 추모사업회가 11일 오후 2시 익산역 앞에서 추모의 자리를 마련한다.
이후 대형 폭발사고는 잊힐 만하면 한 번씩 터졌다. 1993년 6월 10일 경기도 연천 예비군 부대 폭발사고로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4년 12월 7일 서울 아현동에서 계량기 점검 도중 새어나온 가스가 환기통 주변 모닥불에 점화되면서 폭발해 12명이 죽고 100여명이 다쳤다.
1995년 4월 28일에는 대구 상인동 영남고교 네거리의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로 등굣길 학생 42명을 포함, 101명이 죽고 200여명이 다쳤다. 도시가스 배관이 뚫리면서 가스가 지하철공사장으로 유입돼 폭발한 사고였다. 280㎏짜리 철제 복공판 1000여장이 공중으로 튀어올랐고, 수십m에 달하는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1998년 9월 11일 경기도 부천시 LP가스 충전소 연쇄 폭발사고는 96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잠잠하던 폭발사고가 지난해 다시 한 번 전 국민을 놀라게 했다. 작년 1월 경기도 이천의 냉동창고 폭발 화재사건으로 50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다. 32년 전에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는 지금 우리에게 담당자들이 '기본'을 망각하고 아차하는 순간, 인명과 재산을 한꺼번에 앗아가는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128.북한 대남 간첩 남파는 1968년이 절정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끊임없이 무장·비무장 간첩을 내려보냈다. 이들은 남한 내 좌익 세력들과 결탁, 민·관 이간, 특정 인물·정당에 대한 모략선전, 국내 지식인을 접촉해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고,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혁신계 용공분자를 포섭, 사회 혼란을 야기하도록 유도했다.
휴전(休戰) 이후 간첩 활동이 절정에 달한 것은 1968년이다. 북한연구소가 펴낸 '북괴도발 30년'에 따르면 이 해 생포된 간첩은 62명, 사살된 간첩은 319명이었다. 김신조 등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31명이 침투한 1.21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이 일어난 해가 1968년이며, 1968년 10월30일부터 11월3일까지는 3차례에 걸쳐 15명을 1개조로 하는 북한 124군 부대 무장간첩 8개조 120명이 경상북도 울진군과 강원도 삼척군에 침투했다.
▲ 1.21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사진 왼쪽), 경상북도 울진군과 강원도 삼척군에 침투한 사건(사진 오른쪽).
'1.21 사태' 때 정부는 군 병력 1만9213명을 동원, 간첩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2명은 도주했다. 원래 이들은 청와대, 미 대사관,육군본부,서대문형무소,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습격, 폭파하고 요인을 살해한 뒤 간첩을 데리고 월북하려 했으나 나중에 범위를 줄였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최초 발견은 주민이 했다. 간첩선을 발견하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허위 보고를 한 근무자들과 지휘관들이 나중에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간첩 107명이 사살됐고, 7명 생포, 6명은 도주했다. 민간인 30명 등 82명이 작전과정에서 숨졌다. 9살이던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다 살해된 것도 이 때다.
북한이 언제 처음 무장간첩을 내려보냈는지에 대한 사료(史料)는 명확하지 않다. 1946년 4월15일 경기도 경찰국에서 큰 가방을 든 괴한들이 붙잡혔던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 가방 안에 기관총과 실탄이 들어있었고, 나중에 38선 이북 전곡인민위원회에서 파견한 암살단으로 밝혀졌다.
6.25전쟁 후 남한에는 잔당(殘黨)들과 남파 간첩이 섞여 활동했다. 1954년 8월24일 충남 천안군 풍세면에 무장간첩이 출현, 경찰관 1명이 중상을 입고, 양민 1명이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국군은 남한 내 간첩을 지속적으로 소탕, 1956년말 대부분 섬멸했다. 그러자 북한은 1957년 여름부터 대남 공작기구를 재정비, 무장간첩을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1957년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 무장경비정이 어로 작업 중이던 어선 1척을 나포한 것을 시작으로 7월1일에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덕현리에서 무장간첩 3명이 발견돼 1명이 사살되는 등 무장간첩 출몰은 매년 수십차례씩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129. 1984.3월 대원외고
1984년 3월 서울 중곡동 대원외국어학교(현 대원외고)에 신입생 720명이 입학했다. 당시 대원외국어학교는 지금처럼 특수목적고가 아닌 '각종학교'로 대안(代案)학교 성격을 띠었다. 영어에 흥미가 있는 학생들이 입학했으며, 교육과정이 일반계 고교보다 자유로웠다. 대원외고 1기 A씨는 "좋은 대학 가려는 목적보다 단순히 외국어에 미쳐서 입학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성적우수 학생들이 입학하는 지금에 비해 초기 외고는 '어학 영재 양성'이라는 설립취지에 맞게 운영된 측면이 있었다. 1기 신입생을 뽑던 선발고사에선 영어지필 시험만을 봤으며, 이후 국어·수학 등이 선발고사에 추가됐다. 대원외고 1기로 입학한 B씨는 "오로지 영어 실력만을 보니 영어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다"며 "일부 학생들은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치는 내용을 영어로 받아적었다"고 말했다.
초기 입학생은 또 학력 우수자들이 아니었다. 학생 간 학력 편차도 컸다. 대원외고는 '스파르타식' 지도로 유명했다. 초기 입학생들은 "매일 10시 30분까지 담임선생님이 남아서 야간 보충수업·자율학습을 했다"며 "웬만한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강하게 공부를 시켰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 대일외국어학교(현 대일외고)도 대원외고와 마찬가지로 '외고 1호'로 통한다. 두 학교 모두 1984년 3월에 설립했다. 단 신입생 입학식이 대원외고가 3월 2일, 대일외고가 3월 4일이다. 설립 인가도 대원외고가 1983년 10월 27일에 받아, 같은 해 12월 29일에 받은 대일외고보다 간발 앞선다.
이어 1985년 부산외고가 개교했으며 1990년 한영·과천외고, 1992년에 명덕·이화·청주·중산·경남외고가 문을 여는 등 전국에 외고 설립 붐이 일어났다. 평준화 체제에서 문과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엘리트 학교로 학생과 학부모의 입학 수요가 넘쳤기 때문이다. 특히 2000년 이후 경기·인천 지역에 9개의 외고가 설립되면서 경기 지역 외고와 서울지역 외고 간 '경쟁'이 본격화됐다. 외국어고가 특목고로 분류된 것은 1992년부터이다. 이 과정에서 외고 입시는 계속 어려워져 사교육을 잘 받은 학생들이 유리한 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외고 폐지 논란'으로 이어졌다.
현재 전국적으로 외고는 30개이며, 내년에 3개교가 개교하면 33개로 늘어난다. 외고 입학인원은 8900여명에 이른다. 개교 예정 학교를 포함해 경기도가 9개교로 가장 많고, 서울 6개교, 부산 3개교, 인천·충북·경남 2개교 등이다. 광주를 제외한 15개 시도에 외고가 설립됐거나 내년에 개교할 예정이다.
131.첫 해외파병, 1964년 베트남
1964년 9월 11일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과 태권도 교관단 등 국군 장병 140명이 탄 해군 상륙함(LST)이 부산항을 출항, 베트남으로 향했다. 건군 이후 16년 만에 이뤄진 첫 해외파병의 순간이었다.
1965년 3월에는 한국 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이 베트남에 추가 파병됐는데, 서울운동장에서 환송 행사가 열렸다. 국회에서 전투부대의 베트남 추가 파병 동의안이 통과됨에 따라 1965년 10월엔 해병대 청룡부대가 첫 해외파병 전투부대의 주역이 됐다.
이후 육군 맹호·백마부대 등이 차례로 파병돼 1973년 3월까지 8년 동안 연인원 31만2853명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이 기간 중 대부대 작전 1174회, 소부대 작전 57만6302회 등 57만7476회의 작전을 펴 실전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전사 4960명, 부상 1만962명이라는 적지 않은 희생도 따랐다.
▲ 1965년 3월에는 한국 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이 베트남에 추가 파병됐는데, 서울운동장에서 환송 행사가 열렸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은 명암(明暗)에 대한 논란도 컸지만 파병장병 송금 등을 통해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베트남전 이후 1980년대엔 해외파병이 없었다. 1991년 걸프전 때 의료지원단과 공군 수송단 314명이 파병된 것이 베트남전 이후 첫 해외파병이다. 이후 한국군의 해외무대 진출은 유엔 평화유지 활동을 중심으로 줄을 이었다. 1993년 소말리아 공병대대(이하 연인원 기준 516명)가, 1995년 앙골라 공병대대(600명)가 각각 파병됐다.
1999년엔 동티모르에 특전사 중심의 상록수 부대가 파견됐다. 베트남전 이후 첫 전투병 파병으로 주목을 받았던 상록수부대는 2003년 10월까지 연인원 3283명이 파견됐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항구적 자유 작전'에도 해·공군 수송지원단과 다산·동의부대를 중심으로 3388명이 참여했다.
2004년 이라크에 대한 자이툰 부대의 파병은 베트남전 이후 최대 규모로 정책결정 과정에서 많은 진통을 겪었다. 2008년 12월까지 연인원 1만7708명이 파병돼 성공적인 평화재건 활동을 펴 현지인의 찬사를 받았다. 2007년 이후엔 레바논에 동명부대(359명)가 유엔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파견돼 있다. 올 들어선 해군 청해부대 298명이 소말리아에서 선박호송 및 해적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다. 청해부대는 건군 이후 첫 해군 전투함의 해외파병이다.
현재 세계 각지에 파병돼 활동 중인 우리 군은 동명·청해부대를 포함, 13개국 15개 지역에서 716명이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건군 이후 지금까지 해외에 파병된 한국군은 총 34만4602명에 달한다. 우리 군은 이제 아프가니스탄 민간 재건팀 보호를 위한 경계병력 300여명의 아프가니스탄 파병도 눈 앞에 두고 있다.
132.첫 필화
1955년 9월 14일 오후, 대구매일신문사에 곤봉과 망치를 든 괴한 20여명이 뛰어들었다. 이들은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인쇄 시설과 집기를 때려부쉈다. 만류하던 직원들도 곤봉과 주먹 세례를 받았다. 이날 밤 삐라가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신문사를 '이적단체'로,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단체의 의거'로 규정하는 성명서였다. 우익단체 국민회 간부와 청년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들이 신문사에 몰려간 것은 전날 최석채주필이 쓴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때문이었다. 대구에 오는 고위층을 환영하기 위해 어린 중고등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한 내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측근인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는 날, 무더위 속에 학생들을 동원한 것을 빗댄 사설이었다. 경찰은 테러범 대신 최석채를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이상한 논리까지 들먹여 여론의 공분을 샀다. 고삐 풀린 자유당 독재가 빚어낸 희극이었다. 최석채는 사건 한 달 만에 불구속기소로 석방됐고, 이듬해 대법원까지 올라가 무죄가 확정됐다. 해방 후 필화(筆禍)사건이 대법원까지 가서 판결받은 첫 사례였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을 대표적인 필화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 최석채(사진 왼쪽), 함석헌(사진 가운데), 김지하(사진 오른쪽).
해방 직후에는 좌우 이념대립이 격렬해지고, 미 군정과 충돌하면서 좌익 신문이 정간·폐간되는 등 크고 작은 필화사건이 잇따랐다. 자유당 독재가 말기로 치달으면서 함석헌이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겪은 필화도 유명하다. 6·25가 미소대결로 벌어진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고 쓴 이 글로 함석헌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가 20일 만에 석방됐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으로 박정희 정부에 직격탄을 날린 곳도 '사상계'였다. 1970년 5월호에 실린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 박정희 정부 지배층의 부정 부패를 통렬하게 풍자했다. 이 사건으로 '사상계'는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처분을 받았고, 결국 잡지는 문을 닫았다. 소설가 남정현의 '분지', 해직교수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도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필화사건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1980년대 들어서는 소설가 한수산이 신문 연재소설로 신군부에 밉보여 서빙고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해방전후사의 인식' '태백산맥' 등 금서 딱지가 붙은 책들은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최근에도 국방부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책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필화'(筆禍)는 언제나 흥행수표처럼 통했던 것이다.
133.박정희 대통령 1968년 고속도로 시대 열다 2
이 도로야말로 인간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전으로써 이루어진 공사요, 우리나라의 도로 시대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1970년 7월 7일 대구. 박정희 대통령은 감동에 들뜬 목소리로 대한민국 도로 혁명의 새 시작을 알렸다. 총 연장 428㎞(현재는 직선화 등으로 416㎞), 305개(현재 353개)의 교량과 12개의 터널이 포함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됐던 것이다. 계획보다 1년이 앞당겨진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의 완공이었다. 당시 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리며, "가장 싼 값(1㎞당 약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大)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 305개(현재 353개)의 교량과 12개의 터널이 포함된 경부고속도로<오른쪽 사진>, 당시 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리며, "가장 싼 값(1㎞당 약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大)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왼쪽 사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우리나라에는 자동차가 왕래하는 신작로가 뚫리기 시작했지만 도로라 부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된 국토의 동맥(動脈)을 되살리고, 경제 부흥을 위해 박 대통령이 구상한 게 고속도로였다. 1964년 서독을 방문했던 그는 '아우토반'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박 대통령은 손수 도로망을 그려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은 "밤늦게 청와대로 불려 들어가면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 있는 서재로 데려가 직접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 보이곤 하는 일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박 대통령은 1967년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들고 나왔다. 야당 등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부유층 유람로를 만들려고 하느냐", "국가 재정이 파탄 날 게 뻔하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경부고속도로에 앞서 경인고속도로를 시험 건설했다. 1967년 3월 착공된 경인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개통되면서 국내 고속도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서울 영등포~인천 가좌동을 잇는 총 연장 23.9㎞, 왕복 4차로였다.
1968년 2월 착공된 경부고속도로의 노선, 공정 계획, 추진 방식은 대통령이 직접 결정했다. 당시 김정렴 상공부장관은 "대통령이 마치 전쟁처럼 직접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회고했다. 건설 방식도 불도저식이었다. 1공구 공사를 하며, 2·3공구를 설계해 나갔다. 인력이 없어 육사 출신 장교 22명이 2개월간의 교육만 받고 현장 감독관으로 투입되었다. 희생도 뒤따랐다. 최대의 난(難)공사 구간이었던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에선 낙반사고가 속출하며, 2년5개월의 공사기간에 77명이 순직했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전국이 '1일 생활권'이 됐고, 5년 후 국산차인 '포니'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도 열리게 됐다.
134.사시 첫 여성 합격자 1951년 이태영
지난 16일 행정안전부는 올해 행정고시 2차 합격자 292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들은 오는 11월 14~15일 면접시험 후 최종 합격자가 가려진다. 면접에서는 통상 10~20%가 탈락한다.
간부 공무원을 선발하는 고시제도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다음해인 1949년 8월 12일 국가공무원법이 제정되면서 도입됐다. 그땐 고등고시라 불렀다.
같은 해 11월 처음 치러진 고등고시에는 행정과, 사법과 등 2개 과가 있었다. 행정과는 현 행정고시, 사법과는 현 사법시험의 전신이다. 첫 고등고시 행정과엔 502명이 지원해 3공화국 시절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고(故) 김학렬씨 등 5명이 합격했다. 첫 사법과엔 625명이 지원해 법제처장을 역임한 고 김도창씨 등 16명이 합격했다.
1953년엔 고등고시에 기술과가 추가돼 행정·사법·기술, 3과 체제가 됐다. 1963년엔 기술과가 제1회 기술고시로, 사법과는 사법시험으로 분리됐다. 또 이때 고시가 채용시험으로 전환됐다. 그 이전엔 고시에 합격해도 임용이 보장되지 않았다.
▲ 1983년 4월8일 여성법률상담소 이태영 박사(사진 맨 왼쪽)가 후배 사시 합격자들을 격려 중이다.
1968년 3월엔 제1회 외무고시가 치러졌다. 1818명이 지원해 35명이 합격했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1995년부터는 지방고시도 치러졌으나, 2004년 행정고시 지역구분 모집으로 통합됐다. 기술고시도 행정고시 기술직으로 통합됐다.
2001년엔 사법시험을 법무부가 관장하기 시작했다. 이전엔 내무부·행자부가 관장했었다. 사시는 1980년대만 해도 합격자가 매년 300명 선이었으나, 1996년부터 늘어나 2000년대 들어 1000명 시대로 접어들었다.
예전 고시에선 여성 합격자가 귀했다. 고등고시 사법과에선 1951년 첫 여성 합격자가 나왔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박사다. 이후 여성 합격자가 꾸준히 증가해 작년 38%(382명)까지 올랐다.
행정고시에선 여성 합격자가 1973년 처음 나왔다. 지금의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다. 행시 두 번째 여성합격자는 1981년에 나왔는데, 지금의 장옥주 보건복지가족부 아동청소년가족정책실장이다. 이후 여성합격자 비율이 계속 늘어 작년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 51.2%(124명)가 됐다. 외무고시에선 1991년까지만 해도 매년 여성합격자가 0~1명이었으나, 점점 증가해 작년엔 65.7%(23명)를 기록했다.
고시에선 1973년부터 학력요건이 폐지됐다. 올해부턴 응시 상한연령도 없어졌다. 시험도 예전엔 필기시험 중심의 지식 평가 위주였으나, 점점 직무수행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135.해군 1호 전투함,1950년 도입 백두산함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출범한 우리 해군에는 변변한 전투함 한 척 없었다. 1946년부터 1년여의 건조 끝에 진수한 첫 300t급 국산 초계정 '충무공정' 등 소형 함정과 미국에서 도입한 상륙정, 소해정이 고작이었다.
전투함 확보를 갈망하던 해군은 1949년 6월 참모총장으로부터 말단 수병까지 전투함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해군은 모금액 1만5000달러와 이승만 대통령이 국고에서 지원한 4만5000달러를 합친 6만달러로 미국에서 '백두산함'(PC-701)을 인수했다. 2차대전 때 사용됐던 미 연안 초계정에 구경 76㎜ 함포를 장착한 백두산함은 길이 52.9m, 배수량 450t에 40㎜포 1문, 20㎜포 5문을 갖추고 있었다.
1950년 4월 진해항에 입항한 백두산함은 해군 최초의 전투함으로 기록됐다. 백두산함은 뒤에 인수된 금강산함, 삼각산함, 지리산함과 함께 창군기 해군의 주력함으로 활약했다.
▲ '백두산함'(PC-701)
백두산함은 6·25전쟁 발발 당일인 1950년 6월 25일 북한 무장 수송선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날 오후 8시30분쯤 부산 북동쪽 54㎞ 해상에서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명을 태우고 항해하던 1000t급 북한 무장 수송선을 교전 끝에 격침한 것이다. 이 무장 수송선을 격침하지 못했다면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부산 등 우리 후방기지를 교란, 상당한 타격을 입혔을 것으로 전사가들은 보고 있다.
해군의 주력 전투함인 구축함 시대는 1963년 맞게 된다. 2차대전 때 사용하던 3000t급 미(美) 구형 구축함을 도입, '충무함'으로 명명했다. 충무함은 구경 127㎜ 함포 5문으로 무장한, 당시로선 강력한 함정이었다.
본격적인 국산 전투함 시대는 1981년 한국형 호위함인 울산급(級)이 취역하면서 시작됐다. 1800t급 울산급 호위함(12척)은 1200t급인 포항급 초계함(24척)과 함께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해군의 주력 전투함이었다.
국산 구축함 1호는 1998년 취역한 3500t급 '광개토대왕함'이 기록했다. 해군은 이어 4500t급 한국형 구축함 6척을 건조했다. 이 구축함들은 소말리아 해적소탕, 선박호송 작전에 교대로 파견돼 활약 중이다. 해군은 첨단 기술의 결정체로 숙원사업이던 7600t급 한국형 이지스함 1번함 '세종대왕함'을 2008년 실전배치, '이지스함 시대'에 진입했다. 한국형 이지스함은 2012년까지 세 척이 도입된다. 하지만 척당 가격이 1조원으로 너무 비싸 해군은 이보다 작고 값싼 5600t급 중형(中型) 이지스함 6척을 2019년부터 도입할 예정이다.
136.기록상 1949년,살인범 첫 사형집행
사형(死刑)이 우리의 문화수준이나 사회현실에 비추어 보아 지금 곧 이를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사형제에 대한 위헌심판 사건에서 합헌(合憲) 결정을 내리면서 이렇게 판시했다. 헌재가 사형제에 관해 내린 유일한 결론이다.
그러나 2007년 국제사면위원회는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 국가'로 지정했다. 김영삼 정부 막바지였던 1997년 12월 30일 사형수 23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한 뒤, 12년 가까이 단 한건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미집행 사형수'는 60명을 헤아리게 됐다. 그중엔 1993년 11월 말부터 15년11개월을 복역한 사람도 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올 7월 31일 형 확정)이 60번째를 채웠다.
사형집행은 형법에 해당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하게 돼 있다. 지금은 폐쇄된 서대문 형무소에도 사형장이 있었고 역사자료로 보존돼 있다. 법무부장관이 사형집행을 결정하지만, 집권자의 뜻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 사형집행은 형법에 해당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하게 돼 있다. 지금은 폐쇄된 서대문 형무소에도 사형장이 있었고 역사자료로 보존돼 있다.
대검찰청이 만든 자료엔 1949년 7월 14일에 살인범을 처음 사형시킨 것으로 나온다. 1970년 법무부 문서보관소 화재로 정부 공식문서가 소실된 이후 대검, 교도소 등에 흩어져 있던 사형 관련 자료를 모아 복원한 결과이다. '공식 기록'을 찾기 전까지는 도리없이 이 사례를 첫 사형 집행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정부수립 이후 사형의 역사는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대검이 추산하는 사형집행자 920명 가운데는 살인·강도살인·존속살해 등 강력범이 562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국가보안법·반공법·긴급조치 위반도 254명이나 됐다. 냉전의 시대였던 이승만·박정희 정부 시절에 주로 이뤄진 '국보법 계열' 사형집행 가운데는 정치·사상범으로 불리는 억울한 죽음도 일부 있었던 것으로 이후의 재심(再審) 과정에서 밝혀졌다. 1986년을 끝으로 국보법 등과 관련한 사형집행은 없었고, 현재 남은 사형수 60명도 주로 살인 혐의가 적용된 강력범이다.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이라는 국제 공인에도 불구하고 사형제 존폐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일부 의원들은 최근 '사형폐지 법안'을 국회에 냈지만, 흉악범죄를 막을 마지막 안전판으로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2008년 현재 사형제를 없앤 나라는 프랑스·독일 등 92개국, 우리처럼 10년 이상 사형집행이 없었던 나라(실질적 폐지국)는 86개국이며 미국 대다수 주, 일본 등 59개국은 유지하고 있다.
137.의원 제명 1호 김영삼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국회 본회의 의결을 거쳐 제명된 1호 국회의원은 1979년 10월 4일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첫 제명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경우다.
발단은 제1야당 당수였던 김 의원의 뉴욕타임스 인터뷰였다. 그는 이란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 팔레비왕정 독재체제를 무너뜨렸던 사태를 언급, "이는 (팔레비왕정을 지지했던) 테헤란주재 미국대사관의 실책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미국대사관이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고 했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YS가 "국회의원으로서의 본분을 이탈했고, 반국가적 언동을 했다"며 의원직 제명안을 제출했다. 여권은 야당측이 제명안 의결을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자 의원총회장으로 자주 사용하던 국회 본청 146호실에 모여 참석 의원 159명 전원의 찬성으로 제명안을 가결했다. YS는 이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권의 무리수는 결국 YS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의 '부마(釜馬)항쟁'을 불러왔고, 22일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까지 이어졌다.
▲ 1979년 10월 4일 백두진 국회의장은 여당 의원만 참석한 가운데 여의도 국회의사당 146호실에서 본회의를 열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안을 가결, 선포했다.
국회의원 제명안이 국회 본회의까지 올라간 경우는 김 전 대통령을 포함해 모두 4차례지만 YS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건은 모두 의결까지 가지 않고 폐기됐다. 가장 먼저 상정된 제명안은 3대 국회였던 1957년 11월 14일 무소속(울산갑) 김수선 의원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건은 3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인 1958년 5월 29일까지 처리되지 않아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국회 기록은 "김 의원이 정부 질의를 하면서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가 결국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인상을 국내·국제적으로 줬다. 대한민국이 동족상잔을 좋아하는 것 같은 인상을 선전했다"고 징계 이유를 적고 있다.
다음은 1966년 9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던졌던 김두한 의원이다. 그는 본회의에서 정부를 상대로 삼성측의 사카린 밀수사건을 추궁하던 중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에게 오물을 던졌다. 화가 난 이효상 국회의장이 김 의원 징계를 요구했고, 24일 제명안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해 본회의에 올라왔다. 그러나 김 의원이 의원직 사직서를 내 제명안은 자동 폐기됐다.
1975년 10월 8일 신민당 소속 김옥선 의원이 대정부질의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딕테이터(독재자) 박'이라고 지칭했다가 제명 위기를 맞았다. 이 또한 김 의원이 먼저 사퇴서를 내 제명안은 처리되지 않았다.
138.최초의 베스트셀러,정비석의 자유부인
"2차 모임은 댄스 파티인데 남편은 안 되고 애인 데려오세요."
대학 교수의 부인으로 평범하게 살던 오선영은 어느 날 동창을 통해 명사 부인 모임에 끼게 되고, 그곳에서 자유로운 삶을 즐기는 여성들을 만난다. 남편을 졸라 양품점에서 일하게 된 선영은 남편의 제자와 춤바람이 나고 유부남과 깊은 관계에 빠져 가정 파탄의 위기에 처하지만, 남편의 아량과 이해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정비석(1911~1991)이 1954년 발표한 소설 '자유부인'은 14만부쯤 팔려 우리나라 출판 사상 처음으로 10만부를 넘긴, 명실상부한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같은 해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서울신문에 215회에 걸쳐 연재됐고, 연재 완료와 동시에 정음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연재 기간 동안 서울신문의 부수가 급증했다가 소설이 끝나면서 5만2000부가 한순간에 떨어져나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내내 장안의 화제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 소설 '자유부인'(왼쪽 사진), 동명의 영화(1956)(사진 오른쪽)
황산덕 서울대 법대 교수가 같은 해 3월 1일 "문화의 적(敵)이요, 문학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적"이라며 정비석을 비난하는 글을 '대학신문'에 쓰고, 작가는 이에 반박하는 글을 3월 11일 서울신문에 게재함으로써 전 사회적 논란거리가 됐다. 대학 교수단과 여성단체가 당국자에게 연재금지를 요구하는 한편, 다른 쪽에선 "일부 여성들의 허영심을 꼬집은 세태소설이므로 용기를 갖고 계속 집필하라"는 격려가 쏟아졌다. 동명의 영화(1956)로 제작돼 '춤바람'이란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문학평론가들은 "봉건적 질서와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 미국 문화의 유입에 따른 전후 한국사회의 과도기적 혼란상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비석의 뒤를 이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혜성같이 등장했다. 그는 1963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에세이집에서 김동리, 서정주 등 당대 문단의 거두들을 싸잡아 부정하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판본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250만부가 팔렸다.
1970년대는 최인호가 조선일보에 연재했다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별들의 고향'의 시대였다. 산업화가 초래한 비정한 사회와 인간의 배신을 다룬 이 소설은 비운의 여주인공 경아를 본떠 전국의 술집 아가씨들이 진아, 상아 등 '~아'로 이름 짓는 진풍경을 낳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선 1980년대엔 힘 있는 자를 통한 대리만족을 안겨준 '인간시장'(김홍신)과 빨치산의 세계를 그려낸 '태백산맥'(조정래) 등이 '밀리언셀러'의 시대를 열었고, 최근 금융위기와 실업 만연의 세태에 가족의 가치를 환기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그 계보를 잇고 있다.
141.근대식 최초의 서점 회동서관
지난해 8월 출판전문지 '출판문화'에 의미 있는 사진 2장이 최초로 공개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서점 회동서관(匯東書館)의 1913년 이전 사진과 1913년 이후 개축된 사옥의 사진이다.
특히 개축된 사옥의 사진에서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여 정보와 지식의 자유로운 교류를 막으려 했던 일제의 출판탄압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경성 남부 대광교(大廣橋·전 조흥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회동서관은 '고유상 서포(書鋪)'라고도 불렸다. 주인이 고유상이었기 때문이다. 1880년대 말부터 아버지 고제흥이 서점을 했고 아들 고유상은 1906년부터 가업을 이으면서 근대식 서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때부터는 출판도 겸했다. 출판학자들이 회동서관을 근대 최초의 서점으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광수의 '무정'도 여기서 출간됐다.
회동서관이 대한제국기 최대의 서점이 된 것은 물밀듯 밀려드는 근대 문물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이었다. 회동서관은 서점, 출판뿐 아니라 인쇄소도 겸했고 중국에서 책을 수입했으며 대구에 지점까지 냈다. 그러나 식민지하에서 일본 출판사 및 서점과의 경쟁에서 밀려 침체기를 맞았고 우리말과 글이 금지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50년대 중반 문을 닫았다.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서점 회동서관(匯東書館)의 1913년 이전 사진<작은 사진>과 1913년 이후 개축된 사옥의 사진<큰 사진>이다.
1945년 11월 삼중당(三中堂)이 출판에 이어 도매상을 시작하면서부터 서점의 명맥은 되살아났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엔 전국에 52개의 서점이 생겨난다. 그러나 1958년 갑자기 불어닥친 전집물 외판제도로 인해 출판·서점계가 위기를 겪게 된다. 그 여파로 1965년 유길서점, 덕흥서점, 1967년에는 문명당서포, 태양서점, 숭문사, 삼신서적이 연이어 문을 닫았다.
70년대 들어 경제개발의 성과가 나타나고 국민들의 교육수준도 높아지면서 책 수요는 크게 늘어났고 서점도 대형화되기 시작했다. 큰 도시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대형서점이 중심가에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서울엔 종로서적, 부산에는 영광도서, 광주에는 삼복서점, 대전에는 대훈서적 등이 있었다.
그러나 서점의 초대형화 추세와 인터넷서점의 등장으로 중대형 서점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1998년 5000개에 육박하던 동네서점은 이제 절반 이하로 줄었다. 중대형 서점도 상황이 녹록지 않다. 2002년 95년 역사의 종로서적이 문을 닫았고, 2008년에는 76년 역사를 자랑하던 삼복서점이 폐업했다. 또 지난 5일엔 52년 된 대훈서적이 부도처리됐다. 출판 10대강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출판계의 어두운 자화상이다.
142.골프 강국, 코리아의 발원지
양용은이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를 꺾는 드라마를 연출한 한국 골프의 여명기는 서울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었던 군자리 골프코스에서 출발했다. 군자리 골프장은 일본강점기에 지어졌으나, 영친왕이 부지와 건설비를 후원했고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정규 18홀로 복원돼,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 등 각종 국내 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군자리' 골프코스 이름은 당시 행정구역에서 유래했다. 1927년 골프 애호가들이 조선에도 18홀 정규 코스를 지닌 골프장 짓기를 간청하자, 영친왕은 경기도 고양시 뚝도면 군자리에 있던 땅 30만평을 내놓았다. 구한말(舊韓末) 왕실의 말과 양을 사육하던 곳이다. 또 건설비로 2만원을 내놓고 3년간 보조금으로 매년 5000원씩을 하사했다. 영친왕도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1929년 18홀 코스(파 69·6160야드)로 완공된 군자리 골프장은 이듬해 경성골프구락부가 직접 운영하면서 조선 골프의 중심지가 됐다. 2차대전으로 폐장했던 군자리 골프장은 1950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복원된다. "미군들이 한국에 골프장이 없어 휴일이면 오키나와에서 골프를 즐긴다"는 얘기를 들은 이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위해서 결심했다고 한다.
▲ 군자리 골프장.
한국 프로골퍼 1호인 연덕춘의 설계로 복원된 군자리 골프코스는, 한 달 만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군자리 골프코스의 복구를 지시했고, 18홀 6750야드의 정규 골프장으로 복원됐다. 운영은 서울컨트리클럽이 맡았다. 18년간 한국 골프의 맥을 이어오던 군자리 골프코스는 1972년 10월 "어린이들이 뛰어놀 곳이 필요하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어린이대공원에 자리를 넘겨 주었다.
광복 전 최초의 골프장은 1921년 개장한 효창원 골프장으로 당시 철도국 산하 조선호텔 이용객을 위한 부속시설이었다. 2300야드 9홀 규모였다. 이후 청량리 골프코스(1924년)가 건설됐고, 대구 평양 부산 원산에 골프 코스가 생겼다. 또 1887년 원산항 근처에 상주하던 영국 세관원들이 6홀짜리 간이코스를 지어 즐겼다는 일본 기록도 있다.
1960년대 경제 개발기에 국내 첫 민간자본으로 지어진 한양컨트리클럽이 1964년 문을 열었고, 1965년엔 제주컨트리클럽, 1966년 태릉과 뉴코리아, 1967년 관악, 1968년 안양컨트리클럽이 속속 개장했다. 1980년대 40여곳이던 골프장은, 지난해 310개(회원제 182곳, 퍼블릭 128곳)로 늘었다. 지난해 연인원 2400만명이 골프를 즐겼다.
143.1962년 첫 산아제한 정책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1962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가족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산아제한 정책이 담긴 가족계획을 발표했다. 대한가족계획협회를 설립하고 산아 제한 슬로건도 발표했다. 그 시절엔 달력 모양을 한 포스터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다산(多産)은 일제시대를 거쳐 이승만 정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미덕이었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헤어졌던 가족들이 재결합하고 전쟁으로 연기됐던 결혼과 출산이 줄을 이으면서 인구 증가율이 치솟자 정부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1950년대 출산율은 6.3명에 달했다. 급격한 인구증가는 가난에 허덕여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정부의 고민거리였다.
정부는 출산 억제를 위해 전국의 보건소에서 피임약을 무료로 배포했다. 정관 절제술도 마찬가지였다. 1965년엔 모자보건법(임신중절 합법화)을 국회에 상정해 가족계획사업 참여자에게 근로보상금(1인당 800원)과 시술휴가(2일)를 제공했다.
▲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1962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가족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산아제한 정책이 담긴 가족계획을 발표했다. 사진은 달력 모양을 한 포스터.
사업 초기 노인들의 반발은 컸다. 경북 경산군(현재 경산시)에서 가족계획 요원이 어느 집 며느리를 상대로 피임을 권하다 그 집 시아버지로부터 곰방대로 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산아제한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산율은 4.53명으로 줄었다. 정부가 권장하는 자녀 수도 2명으로 1950년대(5명), 60년대(4명)에 비해 줄었다. 당시 슬로건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남아(男兒)선호 사상을 타파하는 사회운동도 벌어졌다. 가족계획어머니회는 '임신 안 하는 해'(74년)→'남성이 더 피임하는 해'(75년)→'나라 사랑 피임으로'(76년)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두 자녀 이내 부모의 영구불임수술 시 공공주택과 금융대출이 우대됐고, 영구불임수술가구 자녀에겐 취학 전 의료 혜택이 주어졌다.
1978년 서울시가 발표한 '올해의 피임 결산'에 따르면 당시 매월 1만4000명의 여성이 피임약을 복용했고, 2만명의 남성이 콘돔을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출산율이 2.83명으로 떨어진 1980년대 슬로건은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산아제한 정책이 도입된 지 32년 만인 1994년 정부는 이 정책을 포기했다. 콘돔·피임약 무료 공급도 중단됐다. 출산율(1.59명)이 급격히 떨어지자 정책 방향을 바꾼 것이다.
산아제한 정책을 위해 세워졌던 가족계획협회(현 인구보건복지협회)도 2005년 출산장려기관으로 전환했다. WHO '세계보건통계 2008'에 따르면 193개국 중 한국의 출산율은 1.2명으로 최하위였다.
144."인재를 키우자" 1949년 국비 유학보내
"1949년 8월 30일 마침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제때 뜨지 않아 6개월이나 마음 졸이며 기다린 후였다. 여의도비행장에서 비행기에 오를 땐 대한민국 모든 이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듯했다."(심종섭 박사)
정부수립 해인 1948년 가을,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는 대한민국 최초 국비유학생 모집 공고를 발표했다. 나라를 이끌어갈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영어·한국사 등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해 최종 35명이 뽑혔다. 이들 국비유학 1호생들은 이듬해인 1949년 자신이 입학할 미국 대학 학사 일정에 따라 차례로 출국했고, 임학자인 심종섭 박사(예일대)를 비롯, 고(故) 김옥준 전 연세대 교수(콜로라도광업대학), 고 이한빈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하버드대) 등 6명이 1949년 8월 30일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이들 최초 국비 유학생들은 정부로부터 2년간 장학금을 받았다.
▲ 대한민국 최초 국비유학생중 한 명인 고 이한빈의 하버드 경영대학원 시절의 모습.
이후 1958년 이승만 정부는 국비유학생 제도를 부활시켜 연간 50명 한도로 뽑겠다고 발표하고 예산을 책정하기도 했지만,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중단됐다.
지금의 '국비유학생 제도'가 신설된 것은 1977년이다. 정부는 외국의 선진 학문을 배워 조국 발전에 이바지하라는 취지에서 제도를 도입했다.
첫해 미국 10명, 독일 1명, 케냐 1명 등 12명이 선발됐다. 이 중엔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도 있었다. 대학 시절 장학금을 받지 못해 유학이 좌절됐던 진 전 장관은 국비유학생 제도 덕분에 1977년 9월부터 1980년 8월까지 미국 스탠퍼드대를 다녔다. 이 밖에도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1979년·영국 옥스퍼드대), 송지용 전 LG생명과학 기술연구원 상임고문(1979년·미 코넬대), 박진 한나라당 국회의원(1983년·옥스퍼드대) 등도 국비유학생 제도가 배출한 인재들이다.
국비유학생 제도 도입 후 선발 인원은 점차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엔 120명까지 뽑았다. 이후 90년대 들어 수가 점차 줄어 최근엔 매년 30~40여명을 뽑고 있다. 올해 상반기 선발된 21명을 포함해, 지금까지 총 1980명이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47개국에 파견됐다.
미국은 선발국 중 단연 1위다. 71%인 1406명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118명), 일본(58명), 독일(45명), 러시아(41명) 등이 뒤를 이었다. 미국·캐나다·영국은 2년간 장학금을 지급하고 나머지 국가는 3년간 지급한다. 현재 하반기 선발 절차가 진행 중이다.
145. 1966년 약탈 문화재 일본서 첫 환수
1966년 5월 27일 일본이 약탈해 간 우리 문화재가 김포공항을 통해 돌아왔다. 도자기·석조미술품·고문서 등 모두 1326점이나 됐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수탈당한 문화재들이 해방 21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최순우 당시 국립박물관 미술과장이 실무적인 문화재 감정과 조사를 맡았다. 당시 정부 간 협상을 통해 문화재가 환수된 첫 사례로,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 협정(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반환 문화재 중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으로 반출되었던 '경남 창녕 교동 고분군 출토품' 106점은 회담 기간 중인 1958년 4월 16일에 미리 주일 한국대사관에 넘겨졌다.
이때 반환된 문화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보물 452호 청자 거북모양 주전자(청자귀형수주·靑磁龜形水注·고려 12세기)다. 연꽃 위에 거북이 앉아 있는 모양으로, 고려청자 명품의 하나로 꼽힌다. 약탈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알려져 있다.
▲ 보물 452호 청자 거북모양 주전자(청자귀형수주·靑磁龜形水注·고려 12세기·왼쪽 사진),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오른쪽 사진).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도 이때 돌아온 문화재 중 하나다. 영동 지방에서 출토되는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귀한 자료로 평가되는 불상이다. 보살상의 바닥에는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의 관리번호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 정부는 당시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반출해 간 고분 출토품과 일본인이 약탈해간 문화재 등 4479점의 문화재 반환을 요구했다. 대상은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된 190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약탈해 간 문화재. 그러나 일본은 국·공유 문화재 1432점만 반환했다. "민간 소유에 대해서는 정부가 자발적으로 기증하도록 권장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입장이었지만, 그뿐이었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해외에 반출되거나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는 7만6134점이다. 임진왜란·병인양요 등 외침과 일제 강점기, 6·25전쟁과 같은 혼란기를 틈타 도굴과 강탈·매매 등 다양한 경로로 문화재가 빠져나갔다.
한국은 지금까지 10개국에서 8155점을 돌려받았다. 일본에서 환수된 것이 5102점으로 가장 많고, 미국(1233점), 스페인(892점), 독일(657점), 뉴질랜드(186점) 순이다. 정부 간 협상에 의한 환수는 1729점이고 기증에 의한 환수가 5844점, 그 외 국·공립박물관이나 민간에 의한 구입이 582건이다. 정부의 적극적 노력보다는 외국의 기증이나 민간 차원의 구입에 의한 문화재 환수가 더 많은 편이다.
146.국내증시 전산거래 1979년 도입
지난 7월 한국거래소는 라오스 정부와 각각 49%, 51%씩 지분을 출자해 라오스 증권거래소를 설립하는 데 합의했다. 증권시장이 없는 라오스에 증권 거래를 위한 IT시스템과 제도를 이전해 주는 내용이다. 지난 3월엔 캄보디아와도 비슷한 계약을 맺었고 2000년 베트남 호찌민증권거래소가 설립될 때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이처럼 한국거래소는 점차 자회사인 코스콤의 IT기술력 등을 바탕으로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30년 전, 국내 증권 거래와 정보 게시를 모두 수(手)작업으로 했음을 감안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국내 증시에 전산시스템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79년 7월 2일이다. 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가 명동시대를 접고 여의도로 이전해 개장한 날이다. 이날 한국거래소 내 증권거래소시장 벽면엔 대형 전자 시세게시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 국내 증시에 전산시스템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79년 7월 2일이다. 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가 명동시대를 접고 여의도로 이전해 개장한 날이다. 이날 한국거래소 내 증권거래소시장 벽면엔 대형 전자 시세게시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의 증권 거래 방식은 증권거래소 객장 곳곳에 설치된 매매대(포스트)에서 호가표에 매매 금액과 수량을 적어내면 거래소 직원이 이를 순서대로 접수해 거래를 성사시키는 포스트매매 방식이었다. 이렇게 체결된 거래 정보를 중앙 게시판에 전달하면 사람이 일일이 매매금액, 수량을 시세게시판에 적어 넣었다. 처음엔 백묵으로 수기(手記)하다가 1975년 이후엔 자석을 이용한 숫자판으로 대체했다.
이렇다 보니 포스트에서 체결된 거래 정보가 중앙 게시판을 통해 공지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전자 시세게시판이 도입되면서 각 매매대에 단말기가 설치되고 주식 거래 정보가 중앙의 전자 시세게시판에 기록됐다. 시차(時差)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이다.
1970년대 들어 증권 거래량이 급속히 늘자 정부는 1973년부터 증권업무 전산화에 착수했다. 증권거래소 산하에 한국증권전산(현 코스콤)을 설립하고, 1978년에는 한국증권전산 소속 프로그래머 4명 등 총 7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팀이 메인컴퓨터 구매업체인 미국 스페리사 엔지니어 3명의 지원을 받아 시스템 개발작업에 들어갔다. 결국 증권거래소의 여의도 이전에 맞춰 전자 시세게시판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거래됐던 전체 주식 종목 수는 768개였다.
최초의 증시 전산화작업은 수작업으로 체결된 주식매매 정보를 온라인으로 게시하는 수준이었다. 전산시스템을 이용해 주식거래 전체를 전산관리 하기까지는 약 10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1988년 3월 21개 종목에 대해 전산 매매가 처음 이뤄졌다. 전 종목에 대한 전산 매매가 가능해진 것은 1997년 9월에 이르러서다.
147.한국산 첫 아파트, 1958년 종암아파트
해방 당시 38선 이남에는 약 300만채의 주택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2005년 말 기준으로 한국의 주택은 1250만채로 4배 이상 늘었다. 숫자만큼이나 국내 주거 문화도 빠르게 변했다. 초가집은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고, '아파트'가 우리나라의 주택을 대표하고 있다. 아파트는 이제 전체 주택의 절반을 넘는다.
우리나라에 아파트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1930년. 서울 회현동에 일본 기업인을 위한 관사로 지은 3층짜리 '미쿠니(三國)아파트'였다.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한국식 아파트는 그로부터 30년쯤 더 지나서야 탄생했다.
전후(戰後) 복구가 한창이던 1958년 11월. "서울 한복판에 명물이 등장했다"며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중앙산업㈜이 성북구 종암동 고려대 옆 언덕에 지은 '종암아파트'가 그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아파트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낙성식(落成式) 축사에서 "이렇게 편리한 수세식 화장실이 종암아파트에 있습니다. 정말 현대적인 아파트입니다"라고 감격했다.
▲ 한국산(産) 첫 아파트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
종암아파트는 국내 처음으로 수세식 변기를 집안에 들여놨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아침마다 배를 움켜쥐고 공용 화장실 앞에 줄을 서야 했던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종암아파트는 방 2칸에 거실, 주방, 창고가 있고 발코니까지 딸린 고급 주택이었다. 당시 예술인과 정치인, 교수 같은 상류층이 주로 입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암아파트는 막상 분양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높은 곳에서 자면 고공병에 걸린다'며 기피했던 탓이다. 이 아파트는 1995년 11월 재건축돼 선경아파트가 들어섰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주택난 해소를 위해 주택공사에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지시했다. 이때 탄생한 게 바로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 6층에 연탄보일러와 수세식 화장실을 갖췄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오늘날 한국 사회 전역에 보급된 단지형 아파트의 효시"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62년 말 입주가 시작됐을 때 분양률은 10%에 그쳤다. 당시 월평균 소득 6600원이었던 도시 근로자에게 월세 3500원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대학교수·연예인 등이 입주하면서 인식이 달라졌고, 2년 뒤에는 프리미엄까지 붙었다. 1968년에는 종로~퇴계로 사이의 세운상가에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의 진화는 끝없이 이뤄지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엔 IT(정보기술)와 접목된 '사이버 아파트' 시대가 열렸고, 2000년대 들어선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나 볼 수 있던 30층 이상 초고층 아파트가 전국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148. 1975년 쌀 자급 달성
"쌀 막걸리가 서울에 시판되기 시작한 8일, 서울 시내 모든 대폿집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술꾼들이 몰려들어 도심지엔 밤 8시쯤에 막걸리가 동났다."
'1호 쌀 막걸리'가 세상에 깔린 1977년 12월 8일 서울의 밤거리 풍경이다. 애주가들은 '기대보다 싱겁다', '예전 맛이 아니다', '역시 쌀로 빚으니 마실 만하다'라고 품평하며 양은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당시 쌀 막걸리의 부활이 의료보험 실시, 수출 100억달러 달성과 함께 그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정도로 화제였다.
이전까지 전국 1520개 양조장은 정부 시책에 맞춰 14년 동안 옥수수나 밀가루로 막걸리를 빚어 왔다. 쌀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해 쌀 막걸리 제조가 허용된 것도 쌀 대풍작 덕분이었다. 1974년부터 서울탁주에 근무한 성기욱 서울탁주 전무는 "업계에선 1년 묵은 쌀을 고미(古米), 2년 묵은 쌀을 고고미(古古米)라 불렀는데, 당시 정부에서 고고미나 3년 묵은 고고고미로 막걸리를 만들 수 있게 허용했다"고 말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해마다 벼베기 행사에 참여, 쌀 증산을 독려했다.
당장 먹을 쌀도 부족할 때, 묵은 쌀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통일벼'다. 1971년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통일벼의 위력은 대단했다. 보통 벼는 이삭 하나에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가 보통이었다. 많을 때는 200~300개가 달리기도 했다.
통일벼의 보급은 1974년 쌀 생산량 3000만석 돌파, 1975년 쌀 자급(自給) 달성, 1977년 4000만석 생산 돌파 등 신기록 행진을 가능하게 했다. 공식적으로는 1949년 고시·배달·새나라·만승 등 4개 벼 품종이 광복 후 가장 처음으로 품종등록 됐지만, 쌀 막걸리 부활을 가능하게 했던 통일벼가 '대한민국 1호' 쌀 품종으로 손색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해마다 벼베기 행사에 참여, 쌀 증산을 독려했다.
통일벼가 국민을 배부르게 했지만, 오래지 않아 쌀 소비가 문제로 부각됐다. 1979년 135.6㎏이었던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0년 후인 1989년 121.4㎏로 떨어졌다. 이에 맞춰 1989년 삼양식품에서 출시한 것이 '대한민국 1호' 쌀라면이다.
2007년 6월 국세청 기술연구소는 '쌀 맥주(麥酒)'를 처음 개발해 국가특허로 등록했다. 100% 쌀이 원료라서 '미주(米酒)'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할 수 있다. 쌀 맥주까지 개발된 것은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75.8㎏(2008년)까지 떨어져 쌀이 남아도는 탓이다. 30년 전과 비교해 쌀을 절반가량만 먹게 된 시대라서, 앞으로도 쌀로 만든 '대한민국 1호'가 계속 탄생할 전망이다.
149.스카우트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스카우트(scout)라는 영어 단어에는 전쟁터의 척후병(지형을 순찰하고 탐색하는 병사)이란 뜻이 있습니다. 1889년, 트란스발 공화국(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은 마을인 마페킹(Mafeking)에서 '보어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금광 붐에 따라 새로 이주한 영국 이주민과 네덜란드에서 먼저 이주한 보어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지요. 당시 영국군 수비대를 지휘한 인물이 스카우트를 창시한 베이든 포웰(Baden Powell) 소장이었습니다.
포웰 소장은 700명이라는 적은 병사를 데리고 전투를 하던 중 적에게 완전히 포위됩니다. 적에 대항할 군인이 부족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마페킹 지역의 청소년을 모아 적의 지형을 순찰하고 상급자의 명령을 전달하는 등의 일을 시킵니다. 그는 결국 소년 척후병들의 활약에 힘입어 승리하게 됩니다.
포웰 소장은 1907년 제대한 뒤 소년들의 성공적인 정찰활동을 바탕으로 이들에게 관찰력과 추리력, 유용한 기술 등을 가르치기로 합니다. 포웰 장군은 부잣집·가난한 집 자녀 구분 없이 다양한 사회적 배경의 청소년 22명을 뽑았습니다. 포웰 소장은 같은 해 8월 1일부터 9일까지 남쪽 영국의 브라운시섬(Brown sea Island)에서 자신이 만든 훈련법으로 이들과 야영을 합니다. 세계 최초의 보이스카우트 캠프였습니다.
1908년 1월, 포웰 소장은 자신만의 훈련법과 노하우가 담긴 책인 '소년을 위한 스카우트활동'(Scouting For Boys)을 펴낸 뒤 세계 최초로 보이스카우트를 결성합니다. 이 책은 유럽, 미국과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고 각국에서도 스카우트 연맹이 창설됩니다. 현재는 160개국에서 2800만명이 스카우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베이든 포웰의 동생 아그네스는 1910년에 걸스카우트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스카우트연맹은 1953년 세계스카우트연맹에 가입한 뒤 현재 36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스카우트'라는 말에는 청소년들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해 남과 국가, 세계에 이바지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스카우트에는 다른 뜻도 있습니다. 스포츠나 연예 분야에서 우수 신인을 발굴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도 스카우트라고 합니다. 고교야구대회 등을 찾아다니며 '물건'을 찾는 사람들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시 정찰하고 찾아다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