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호 2/ 1 전기 - 48 선풍기
대한민국 제1호 2/ 조선일보
1 전기
1900년 4월 종로 불밝힌 3개의 가로등
120여년 전인 1887년 봄,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린 경복궁 내 건청궁.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하는가 싶더니 눈부신 조명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다.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의 입에선 '와~'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한 지 7년5개월 만에,
우리나라에서도 최초로 전등이 점화된 것이다.<사진> 자가발전기를 이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기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당시 고종황제 내외의 침실과 마루에 각각 한 개의 백열등을 달고 건청궁 뜰에는 한 개의 아크등을 가설해 점등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황제는 1897년 12월 31일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회사에 전기·전등·전차 설치 허가를 내주었다. 한성부윤을 지낸 이채연이 대표였고 미국인 콜브란 등이 중역으로 등재된 이 회사의 첫 사업은 전차였다. 전차사업을 먼저 시작한 이유는 전등보다 대중교통수단의 채산성이 더 높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또 고종이 자주 들르는 홍릉(명성황후의 능)에도 빨리 갈 수 있고 행차 비용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콜브란의 권유가 한몫했다. 1899년 5월 4일, 전차가 처음으로 동대문과 흥화문 구간을 시험 운행했다. 양반과 서민이 함께 이용했던 이 전차는 1년 후엔 밤 10시까지 운행을 연장했다. 밤에 정거장과 매표소를 밝혀 줄 불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1900년 4월 10일 종로에 3개의 가로등을 설치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민간에 켜진 최초의 전깃불로서, 1966년에 이날을 '전기의 날'로 제정했다.
한성전기회사는 전차사업에 이어 전등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898년 현재의 동대문시장 자리에 75㎾ 용량의 동대문발전소를 건설한 데 이어, 1901년 6월 17일 경운궁(현 덕수궁)에 영업용 전등을 최초로 설치했다. 6월 말에는 지금의 충무로인 진고개에 위치한 일본인 상가에 600여개의 전등을 추가로 달았다. 대부분 10촉광짜리로 한 달 전기요금이 1원60전이었다. 이는 거의 쌀 세 말과 맞먹는 값으로, 당시 전등 설치는 관공서나 은행, 회사 상점 또는 상류가정 등으로 제한될 만큼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회사였던 한성전기회사는 무리한 사업확장과 열강의 이권침탈 속에서 시련을 겪다가 미국인과 합작회사인 한미전기회사로 바뀌었다. 그 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전력사업의 이권을 넘기게 됨으로써 일한와사주식회사(日韓瓦斯株式會社)로 넘어가는 비운을 맛보게 된다.
2 치과의사
▲ 함석태
日의사 개업 21년 뒤 탄생한 한국인 의사 함석태
"6개월간 치과 진료비를 3할 깎아주고, 병자(病者)와 15세 미만자는 반액으로 할인합니다."
한국에서 치과를 첫 개원한 일본인 노다 오지(野田應治)가 1903년 개업 10주년 기념으로 황성신문에 낸 광고다.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에서 건너온 그는 인천공립병원에서 조수로 일했다. 그는 치과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도쿄의 다카야마(高山)치과의학원에 진학해 1893년 치과개업시험에 합격해 제물포에서 첫 치과를 열었다. 그러나 주 고객인 일본인 수가 적자, 1894년 4월 서울로 옮겨와 남대문에서 노다치과의원을 열었다. 그에게 도전장을 낸 것은 1902년부터 국내에 들어온 일본인 입치사(入齒士)들이었다. 인공치아를 만들어 심어주는 이들로, 당시는 치과의사와 입치사를 구분하는 법률이 없을 때였다. 입치사들의 공세에 밀려 노다는 파격적인 진료비 할인 광고를 신문에 냈던 것이다. 당시 '순금입치' 2~10원, '백금충전' 1~5원, '은충전' 50전~1원이었다<큰 사진>. 치아에 금을 씌워 반짝거리게 하는 것이 유행이어서 치과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입치사들에게 기공기술을 배운 한국인들이 늘면서 1907년 최승용이 서울 종로에서 처음으로 치과시술소를 연 뒤 안중수·김한표·신정휴 등이 뒤를 이었다. '이 해박는 집' '잇방' '치방'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한국인으로 정규 교육을 받고 치과의사가 된 이는 함석태(1889·작은 사진)였다. 평안북도 영변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러일전쟁(1904~1905년)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치과의과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14년 봄 귀국 후 서울 삼각동(광교)에 '한성치과의원'을 열었다. 총독부 치과의사 면허 1호였다. 그는 "일본 아동들은 칫솔을 사용하지만 조선 아동들은 손가락으로 소금을 묻혀 사용한다. 그러나 잘 닦지 않아 입안 위생이 얼마나 나쁜지 모른다"고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1922년 서울에 경성치과의학교가 생겨 졸업생들이 나오자, 함씨는 이들을 규합해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를 결성, 회장을 맡았다. 그는 해방 전해에 미국의 포격을 피해 고향인 평안도 영변에 갔다가 이후 소식이 끊겼다. 함석태 이전에도 대한자강회 회원이던 김영재(金英哉)가 '1906년 일본의 치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치과를 처음 문 열었다'(태극학보, 1908년)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실제 개원 여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는 게 없다. 미국으로 유학 간 한성외국어학교 출신 홍윌슨은 1916년 미국에서 개원했다. 함석태에 이어 1917년 일본에서 공부한 한동찬이 두 번째로 평양에서 개원했다.
3 설탕공장
시운전 때 나온 것은 덩어리 설탕
설탕이 우리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명종 때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서다. 학자들은 설탕이 그 이전부터 후추 등과 함께 중국에서 전래됐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 설탕공장은 일본 기업인 '대일본제당'이 사탕무를 원료로 하는 공장을 평양 선교리에 세운 것이 최초이다. 대일본제당은 1917년 사탕을 제조하기 위해 평양에 자회사인 조선제당주식회사를 세웠고, 이를 합병한 뒤 1919년 평양 선교리에 2300여 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해 1922년 7월에 준공했다. 그러나 생산량은 많지 않았다. 당시 대구의 흑기상점 등 서울과 평양 등에서 많은 상점들이 일본에서 설탕을 수입해 팔았다. 설탕은 피로회복제처럼 인식됐고 단맛이 인기를 모았다.
▲ 제일제당설탕공장
설탕을 좋아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이었다. '설탕을 좋아해 15전짜리 냉면에도 10전짜리 설탕 한 봉을 넣어 먹어, 그와 친한 사람들은 약간의 돈을 가지고 냉면을 내려다가는 큰코다친다.'(1931년 잡지 별건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설탕보다는 곡물과 엿기름을 이용해 만든 조청을 단맛을 내는 재료로 주로 사용해 설탕 소비량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었다.
해방 후 우리 손으로 최초로 지은 설탕공장은 1953년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이 부산 전포동에 지은 제일제당설탕공장〈사진〉이다. 제일제당은 고무공장이 불탄 자리를 매입해 공장 건물을 짓고, 일본에서 기계설비를 들여왔다. 공장건설과 생산설비 설치 후 시운전을 시작한 날이 1953년 10월 28일. 그러나 시운전 직후 쏟아져 나온 것은 설탕이 아니라 콩깻묵 같은 덩어리였다. 원심분리기가 말썽을 부렸기 때문이다. 해체와 조립을 반복하고, 투입하는 원당의 양을 이리저리 조절하면서 문제점을 찾아낸 결과 시운전 후 8일 만인 11월 5일 하얀 설탕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지금의 CJ제일제당(당시 제일제당의 후신)은 이날을 회사 창립기념일로 정했다.
당시 제일제당이 책정한 설탕값은 수입품의 3분의 1 수준인 근당 100환이어서 공장을 24시간 가동해도 수요를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1954년 4월부터 12월까지 생산시설을 두 배로 확장했다. 이해에 제일제당은 국내 설탕 총소비량 2만8923t의 33.3%에 해당하는 9635t의 설탕을 생산, 급격히 수입품을 대체해 나갔다.
4 양말공장
1909년의 서울 서상팔의 양말제조판매소와 김덕창의 중곡염직공소, 평양 손창윤의 삼공(三共)양말공장이다. 그러나 이 공장들은 같은 해에 등장했지만, 평양의 삼공양말공장은 일제 때 직공 850명을 둔 대규모 공장으로 컸다.
손창윤이 20세 때 평양 계리에 세운 삼공(三共)양말공장〈사진·원내는 손창윤〉은 창업 26년 만인 1935년에 자동식 양말 직조기계 110대, 수동식 기계 500대, 내의·장갑·타월·목도리를 짜는 기계 등을 갖췄다. 평양 최대 양말공장으로 공장 옆에 직접 판매소를 두기도 했다. 삼공양말은 전국적인 인기를 모았고 만주 등에도 수출할 정도였다.
서울의 중곡염직공소는 1909년 10월 황성신문에 ‘업무 대확장’이란 제목의 광고를 냈다. 일본에서 4년간 염색을 배운 뒤 1902년에 중곡염직회사를 만든 김덕창이 낸 광고였다. 삼합사(三合絲)양말을 10전, 모자를 45~50전에 판다며 다른 지역에서도 주문을 하면 소포로 부쳐준다고 소개했다.
서울 안현동의 양말제조판매소 주인 서상팔은 1909년 9월 황성신문에 ‘아(我)국에서 제조하는 양말’이란 제목의 광고를 냈다. ‘좋은 재료로 싼값에 파니 동포들은 속히 구매하라’는 내용이었다.
일제 당시 양말공장들은 임금 하락에 항의하는 파업이 잦았다. 부산에선 여공들이 퇴근 때 양말을 가져가는 것을 색출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하자, 이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도 양말공장을 운영 중인 광주의 무등양말공장은 1935년 창립됐다. 무등양말은 조상원씨가 사장으로, 주주는 광주지역 유지 12명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독립운동 기금 마련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신문을 보면 ‘양말은 살에 붙는 것으로 얼른 해지기 쉽습니다. 조금 신고는 곧 빨아서 다시 신는 것이 오래 신는 법입니다’라며 양말을 자주 빨것을 권했다.
5 약사
유세환, 종로3가에 인수당약국 열어
한국인 최초의 약사는 유세환(劉世煥·1876~?)이다. 1893년(고종 30년) 관립 일어(日語) 학교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뒤, 1897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0년 일본 도쿄약학교(東京藥學校), 1902년 제국대학교 의과대학 선과(選科)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당시 약대와 의대를 나온 그는 귀국 후 1903년 광제원 국립병원 위원으로 관직에 발 디뎌 대한의원(서울대병원 전신)교수<사진>(1909년 5월 2일 황성신문에 게재된 교수 임용 관보), 육군 약제관(약사)을 거쳤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된 이후 서울 종로 3가에서 ‘인수당약국’을 개원했으나 7년 뒤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저명한 의사로 알려져 1908년 일본인들이 만든 의사회 회원이 되었고, 1911년 조선총독부로 부터 의술개업 허가장을 받기도 했다. 대한의원의 약제사(1907년)로 김상섭이 임용되기도 했다.
해방 후 면허 갱신에서 약사면허 1호를 기록한 이는 이호벽이다. 이호벽은 조선약학교 1회 졸업생으로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1920년 첫 약사면허시험에서 수석 합격했다. 우리나라 약학의 정식교육은 이처럼 조선약학교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그 뿌리는 1914년에 세워진 약품취급강습고와 1915년에 세워진 1년 과정의 조선약학강습소에 두고 있다. 조선약학강습소는 당시 조선매약 사장인 이석모가 서울 구리개(을지로)의 한약업자들의 자금을 모아 만든 한국 최초의 서양 약학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가 3년 뒤 2년제인 남녀공학의 조선약학교가 된 것이다. 조선약학교는 1918년 1회 신입생을 모집해 서울 종로 6가 인근에 30여평의 한식 기와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0년 5월 첫 배출한 졸업생 40명 중 한국인은 10명이었다. 1920년 11월에 치러진 조선총독부의 첫 약제사(1953년 약사로 명칭 변경) 시험에서 11명이 합격했는데 그중 한국인은 조선약학교 출신을 포함한 5명이었다. 이호벽을 비롯해 이정재·이중규·신경휴·황호현이었다. 이호벽은 약제사 면허를 딴 뒤 총독부의원과 적십자병원에서 약제사로 근무했다. 해방 후 약국을 운영한 그는 1986년 타계하면서 대한약사회에 장학금을 기탁해 지금도 그의 아호를 딴 하봉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다. 당시 차석으로 합격한 이정재는 1922년 서울 낙원동에 약국 삼우당을 열었다.
6 성냥공장
인천 빈민 먹여살린 ‘조선인촌성냥공장’
‘불처럼 환하게 일어나라’며 집들이 선물로 인기를 끌었던 성냥. 구한말 시절에 인천·부산항을 통해 중국·일본제 성냥이 밀려오면서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성냥은 1885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 때 외교고문인 뮐렌도로프의 주선으로 1885년 11월 독일계 미국인 조셉 로젠바움이 서울에 성냥공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싼 값의 중국·일본제 성냥에 밀려 파산하고 중국 상인에게 넘겼다는 것.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술(記述)’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인천 제물포에 외국인들이 성냥공장을 설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제 성냥이 범람해 생산이 중단됐다’고 되어 있다. 서울과 인천 중 어느 곳이 먼저인지는 아직 불명확한 상태다.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4일 인천 동구 금곡동(당시 금곡리)에 세워진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사진)이다. 일본인 가래영태랑(加來榮太郞)이 사장이던 이 회사는 압록강 하류 신의주에 부속 제재소를 두고 목재를 배편으로 들여왔다. 신의주와 평양에도 공장을 두었던 이 회사는 1921년 직원들을 괴롭히던 일본인 지배인을 쫓아내기 위해 동맹파업을, 1931년에는 여직공 170명이 임금삭감에 항의하는 동맹파업을 잇달아 벌였다. 일본인 감독의 모욕적인 대우에 항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1년에 550여명이 취업, 인천 극빈층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해 ‘동포를 사랑하면 수입 성냥 대신 조선제품을 사용하자’는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패동(佩童)’,‘우록표(羽鹿票)’,‘쌍원표(雙猿票)’ 등의 상표로 하루 2만7000갑(국내 소비량의 약 20%)씩 생산하면서 1950년대까지 존속했다. 뒤이어 1920년 8월 대구 금정동에 (주)동아인촌(東亞燐寸)성냥공장이 생겨 대구지역 토호였던 장직상(張稷相)이 사장을 맡았다.
성냥공장은 이후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해방 이후 인천에는 한국·대한·조선·평안성냥공업사, 대구에는 왕자·백구·사슴표·공작·닭표성냥공장이 들어섰다. 1970년대에는 공장이 300여 개에 달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값싼 중국산 성냥과 일회용 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치명타를 입어, 지금은 경상북도 의성의 성광성냥 하나만 남았을 뿐이다.
7 소주회사
탈세 사건으로 홍역치른 평양의 '조선소주'
고려 충렬왕 때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 소주는 곡식으로 만든 고급 술이어서 서민들은 마실 엄두를 못 내는 권력가의 전유물이었다. 이런 소주가 대중화될 수 있었던 것은 1900년대 들어 전국에 '양조 공장'들이 생기면서다. 1916년에 전국에 소주 제조장이 2만8404개로 가업 형태나 주막집에서 주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내 양조장의 틀을 벗어나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최초의 소주 공장은 평양에 세워진 '조선소주'이다. 1919년 6월 15일 평양 교구정에 자본금 50만원으로 세워진 이 회사는 사장이 일본인 재등구태랑(齋藤久太郞)었다. 이 회사는 1922년 소주를 담는 그릇 계량기를 속여 1300석의 소주세를 내지 않은 사실이 확인돼 8만원의 세금을 추징당하기도 했다.<오른쪽 사진>(당시 신문에 보도된 탈세 사건 기사) 1300석은 이 회사의 한 해 전체 생산량의 3분의 1로, 당시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거액의 탈세로 주목받았다.
남한 최초로 소주를 대량 생산한 주식회사는 '조일(朝日)양조'로, '조선소주'보다 넉 달 늦은 그해 10월 12일 인천 선화동에 설립됐다. 자본금 100만원에 일본인 정본등차랑(釘本藤次郞) 등이 세운 이 회사의 상표는 '금강표(金剛表)'였다. 1925년 기계를 증설해 대량생산에 나섰고, 저렴한 가격에 맛도 좋고, 시음행사 같은 적극적인 마케팅까지 도입해 판매량을 늘렸다. 1928년 전국의 소주양조업자연합회를 만들 때 회장사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1931년 기존에 사용하던 수돗물을 지하수로 바꾸려고 대형 우물을 팠다가 인근 지역 우물을 모두 말려버렸고, 또 탱크 폭발사고도 일어나 지역 주민과 갈등이 많았다. 1939년 이후 만주, 사할린 등지에 진출할 만큼 인기를 끌었지만 일제가 전쟁으로 인해 곡물 소비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경영난에 빠졌고, 해방 후 세금 체납으로 공장이 차압되고 생산도 중단됐다.
현존하는 소주 생산업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진로도 1924년 태어났다. 그해 10월 3일 한국인 장학엽(張學燁)씨가 평남 용강군 지운면 진지리에 진천양조상회(眞泉釀造商會)를 설립한 것이 진로의 효시다.
1929년 5월 16일 합자회사가 됐다.<왼쪽 사진>(진천양조상회에서 만든 진로소주) 2009년 기준 국내시장에서 소비된 소주는 32억 병을 넘어섰고, 시장 규모는 제조사별 출고금액 기준으로 2조8500억원에 달한다.
8 조각가
▲ 김복진
법주사 미륵대불 제작하다 요절한 김복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조소작가)는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1901~1940)이다.
충북 청원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김복진은 조각뿐 아니라 미술평론·문예운동·사회주의운동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소설가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이 친동생이기도 하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시절 미술에 관심이 있었던 김복진은 학교를 졸업하고 도일(渡日), 우연히 일본 우에노 공원에서 조각 '노자(老子)'를 보고 조각가의 길을 택했다. 김복진이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0년이다.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는 이미 다른 한국인도 거쳐 갔지만 요절했다. 서양 조각과를 처음으로 입학, 졸업하면서 국내 최초의 조각가로 기록됐다. 김기진·박승희 등과 함께 토월회를 창립해 방학을 이용해 귀국해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24년 일본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여인입상'으로 입선한 그는 1925년 귀국해 조선미술전람회에 '나체 습작'을 출품해 입선했다.
그는 미술비평가로도 활약해 도쿄미술학교 선배이자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에 대해 "화가로서 장래가 대단히 위험한 분"이라는 비판을 날리기도 했다. 김복진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등에 가담한 죄로 일본 경찰에 검거됐고, 옥에서 눈뜬 것은 불상 제작이었다. 윤범모 경원대 교수는 "김복진은 구원의 세계로 미륵세계를 희구하는 한편 현실세계에서는 민중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 타계 직전에 완성한 작품 '소년'.
출소 후에는 당시 인기 연재소설의 주인공을 모델로 한 '백화(白花)'라는 여인상을 제작했는데, '백화'를 통해 내면적으로는 강한 민족성을 담고자 했다. 타계 직전에 완성한 작품 '소년'은 높은 예술성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는 걸작이었다.
김복진은 여성 교육자 '최송설당 동상' 같은 인물 동상을 다수 제작했으며 법주사의 미륵대불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요절했다.
김복진의 작품은 일제 때 전시체제로 넘어가면서 총알로 녹여지고, 6·25전쟁 때 대부분 사라져 현재 남은 작품은 거의 없다. 제자로는 그가 배재고 미술교사 시절 가르쳤던 조각가 윤효중이 있다. 김복진은 유작(遺作)이 거의 없는 데다 사회주의운동 경력 등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나, 1993년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9 고무신
순종이 신은 대륙표 고무신
고무신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널리 신던 서민들의 대표 신발이었다. 질겨서 잘 찢어지지도 않고, 비가 와도 새지 않아 누구에게나 인기였다. 고무신엔 신분도 유행도 없었다. 누구나 사서 신을 수 있어서 ‘사회적 평등’의 표상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고무신이 소개된 것은 1910년대로, 첫 고무신 공장은 외부대신을 지낸 이하영이 1919년에 한일합자회사로 만든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이다. 이하영은 주미공사 시절 갓 쓰고 도포 차림으로 서양 춤을 잘 춰 워싱턴 사교계에서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찹쌀떡 장사, 상점점원, 요리사 등으로 사업수완을 보였던 그는 한일강제병합 후 예순이 넘은 나이에 고무신 공장을 차렸다. 고무와 가죽을 섞은 일본 고무신을 개량해 고무로만 만든 ‘조선식’ 고무신을 만들었다.
1922년 9월 21일자 신문에 ‘순종과 왕자·공주, 나인들이 널리 애용해 이번에 주식회사로 출범했다. 다른 회사가 조악한 제품을 본사 제품이라 사칭하는 경우가 있으니 본사 상표 〈대륙〉에 주의하시옵소서’라는 광고까지 냈다. 고무신이 인기를 끌면서 1921년 중앙 상공주식회사, 평양에 정창 고무공장이 설립되는 등 1933년에는 전국에 고무신 공장이 72개에 달했다.
▲ 대륙고무의 특약점 광고
해방 전 인기를 끈 고무신은 ‘거북선’표의 서울고무, ‘별표’ 중앙상공, ‘천(天)자표’ 천일고무 등도 있었다.
개항 후 ‘최고 히트 상품’으로 꼽히는 고무신의 경쟁이 어찌나 치열했는지 ‘별표 고무, 꼭 한번만 신어 주시오. 모양 있고 질긴품으로 고무신중에 제일’ ‘이강(순종의 아우인 의친왕) 전하가 손수 고르셔 신고 계시는 만월표고무신’ 등의 광고전(戰)까지 나올 정도였다. 고무신은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한국인 판매상들의 판매·광고 경쟁도 치열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고무신 산업은 중흥기를 맞는다. ‘왕자표 신발’로 유명한 국제고무공업(현 국제상사)이 부산에 설립됐고, ‘범표’ 삼화고무, ‘기차표’ 동양고무(현 화승) 등 전문 업체들이 속속 탄생했다.
고무신은 수출에도 ‘효자’ 노릇을 했다. 1962년 미국 첫 수출 이후 월남전 군납 등을 거쳐 1968년엔 수출 실적이 1100달러에 달했다.
11 해병대 사령관
6·25때 '귀신 잡는 해병' 이끈 신현준 중령
1949년 4월 15일 경남 진해의 덕산 비행장에서는 해병대 창설식이 거행됐다. 해군에서 편입된 장교 26명과 하사관(현 부사관) 54명, 해군에 갓 들어와 해병대를 지원한 300명의 사병이 전부였다. 2개 대대로 출범한 해병대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소총을 들고 있었고, 훈련도 일본군 철모를 쓰고 할 정도로 장비 등이 모두 열악했다<큰 사진>. 비행장 활주로를 연병장 삼아 3개월간 고된 훈련을 받았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병의 자부심은 여기에서 키워졌다.
해병대가 창설된 것은 48년 10월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함정 4척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했던 신현준(1915~2007·작은 사진) 해군 중령이 "상륙군이 없어 반란군을 완전 진압하지 못했다"고 보고하자, 손원일 해군총참모장이 상부에 건의해 창설됐다. 초대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된 신현준 중령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해방되면서 광복군 제3지대 대대장에 임명됐고, 귀국 후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에 견습사관으로 입대했다. 신 사령관이 이끄는 해병대는 6·25전쟁 발발 뒤 7월에 장항·군산에서 북한군과 첫 격전을 벌였고 통영에서 첫 단독 상륙작전을 펴 1950년 8월 23일자 미국 뉴욕헤럴드트리뷴지에 "귀신을 잡을 정도로 용감했다"고 보도됐다. '귀신 잡는 해병'이란 별칭이 이 전투에서 붙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는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수훈을 세웠고, 도솔산 지구 전투에서 승리해 '무적 해병'이란 칭호를 받았다.
신 사령관은 창설 후 휴전 직후까지 4년 6개월 재임하면서 해병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9년 해병 1기생인 신영철이 작사한 '나가자 해병대'를 군가로 지정했고, 1951년 8월 독수리·별·닻으로 구성된 해병대 마크를 제정했다. 해병대의 상징인 '빨간 명찰'과 황색 이름도 6·25전쟁 중에 만들어졌다. 신 사령관은 휴전 후인 1953년 10월 사령관직에서 물러나 1961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신 사령관의 후임으로 2대 김석범 소장(중장 예편), 3대 김대식 중장이 대를 이었고, 현재 유낙준 중장이 30대 사령관이다. 해병대사령관은 7대 강기천, 8대 정광호, 9대 이병문 사령관 등 3명만 대장이었다
12 호텔
인천항 개항 뒤에 세운 3층짜리 大佛호텔
근대적인 숙박시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부산·원산·인천항이 개항되면서다. 1888년에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씨가 인천 중구에 3층짜리 벽돌 양옥 '대불(大佛)호텔'을 지었다.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췄다고 한다. 당시 인천항을 통해 서울에 드나들던 유럽·미국인들이 주로 묵었다. 대불호텔 길 건너에서 상점을 하던 청나라 사람 이태(怡泰)가 대불호텔을 보고 자기 건물 2층에 '스튜어드(Steward)호텔'을 개업했다고 했을 정도로 영업은 잘됐다고 한다. 그러나 1899년 경인선 개설과 함께 불황을 타기 시작해 1918년 중국인에게 넘어가 '중화루'란 요릿집으로 간판이 바뀌었고, 1978년 6월에는 건물이 헐려 지금은 식당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 '대불(大佛)호텔' / 국토와 민족생활사,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 제공
1902년 독일 여성 손탁(Sontag)이 서울 정동에 세운 '손탁호텔'은 서울에 등장한 최초의 호텔이다.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처제인 손탁은 조선 왕실과 친해 고종이 1895년 경운궁(慶運宮) 건너편에 있는 땅을 손탁에게 하사했다. 손탁은 1902년 10월 옛집을 헐고 2층짜리 서양식 건물을 지어 2층은 객실, 1층은 객실과 식당으로 사용했다. 1904년 3월과 1905년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일전쟁 때는 영국 총리가 되는 처칠(Churchill)이 묵기도 했다. 1917년 이화학당이 이 건물을 사들여 강의실, 기숙사 등으로 쓰다가 1922년 건물을 헐고 3층짜리 프라이 홀(Frey Hall)을 세웠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호텔은 1914년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이 서울 소공동에 건립한 '조선호텔', 현재의 웨스틴조선호텔이다. 독일 건축가 궤데란트의 설계로 약 1920㎡(580평) 건평에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지어졌다. 52개의 객실과 한식당·양식당·커피숍·로비라운지·바·댄스홀·도서실을 갖췄고, 엘리베이터(일명 수직열차), 아이스크림, 뷔페식사, 댄스파티, 서구식 결혼식 등 신문화 도입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광복 후 소유권도 교통부로 넘어갔다가 1983년 민영화되었다. 1992년에는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신세계가 조선호텔 주식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13 사장교
물살 빠른 울돌목에 세운 진도대교
1984년 10월 18일 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진(鹿津)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鶴洞)을 잇는 다리가 건설됐다. 길이 484m에 폭은 11.7m였다. 이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사장교(斜張橋)인 '진도대교'<사진>다. 사장교는 교각을 세우기 어려운 바닷가나 철도 도로 위에 건설하는 것으로 양쪽 육지에 높이 69m 교각을 세우고 교각 위에서 68개 강철 케이블을 늘어뜨려 다리 상판을 지탱하는 구조다.
이곳에 사장교 방식으로 건설한 이유는 물살이 빨라 교각을 여러 개 세울 수가 없었고, 수심도(25m 이상)도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크게 쳐부순 울돌목이다. 이 다리는 여수와 돌산을 잇는 돌산대교와 함께 착공됐다. 이 두 다리 건설을 맡은 시공 회사들은 '사장교 1호'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진도대교를 수주한 현대건설은 24시간 작업을 강행해 100일을 앞당겨 완공시킨 반면, 돌산대교는 두달뒤인 12월에 완공됐다. 진도대교가 더 빨리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교각을 바다에 세운 돌산대교와 달리 육상에 세워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정부는 진도대교를 건설하면서 세계은행에서 차관으로 얻어 왔다. 세계은행은 "한국 건설사는 이런 다리는 지을 기술력이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정부는 세계은행을 설득했고, 기술력을 인정받은 현대건설은 말레이시아에서 페낭대교(1985년 건설) 건설 공사도 수주할 수 있었다.
진도대교는 32t 이상의 차량 통행이 곤란해 2005년에 바로 옆에 똑같이 생긴 다리(제2진도대교)를 하나 더 건설했다. 이 때문에 진도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쌍둥이 대교'라는 기록도 갖게 됐다.
이후 우리나라에선 한강의 올림픽대교와 서해대교를 사장교로 건설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인 인천대교(인천 송도와 영종도 연결·18.3㎞)도 사장교로 삼성물산이 지었다. 지난 14일에 역사적인 사장교가 하나 건설됐다. 부산 가덕도와 거제도를 있는 거가대교다. 대우건설이 지은 이 다리 길이는 총 8.2㎞인데, 가덕도와 중죽도까지의 3.7㎞는 바닷속에 터널을 만들어 연결하는 '침매터널' 방식으로 나머지 4.5㎞는 바다 위를 지나는 사장교로 건설했다.
14 사립학교
주민들이 돈 모아 세운 원산학사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의 사립학교가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1883년(고종 20) 함경도 원산에서였다. 당시 개항과 함께 외세의 침투를 걱정하던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를 중심으로 신지식을 가르칠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줄 것을 원산 감리(개항장의 최고 책임자) 정현석(鄭顯奭)에게 요청했다. 그해 8월 정식으로 정부에서 원산학사(元山學舍)<사진>(원산학사를 계승한 일제 때 원산소학교 모습)를 승인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학교를 세웠고 지방의 개항장 업무에 대처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학습기간은 1년이었고, 문예반(50명)과 무예반(200명)으로 편성됐다. 첫 교수진은 교수 1명과 조교에 해당하는 장의(掌議) 2명이었다.
교과목은 산수·물리·기기(機器)·농업·양잠·만국공법·지리 등 광범위한 근대 학문과 일본어 등 외국어를 포괄하고 있었다. 교재는 ‘영지(瀛志)’ ‘연방지(聯邦志)’ ‘기기도설(奇器圖說)’ 등 실학적인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설립기금을 내지 못한 원산 지역민의 자제들만 아니라, 다른 지방 사람이라도 입학금을 내면 뽑았고, 무예반에 가려는 사람은 입학금이 없어도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많이 세워졌다. 장로파 선교회의 광혜원(1885),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의 배재학당(1885)과 이화학당(1886) 등이었다.
민족자본 계열의 학교들도 이에 못지않았다. 특히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전국 도처에서 숱한 사람들이 사재를 털어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광성의숙·양정의숙·보성전문학교·진명여학교·명신여학교 등이었다. ‘언젠가는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 인재를 키우자’는 뜻이었다.
일제는 1911년의 제1차 조선교육령 등을 통해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대한제국기 5000여곳에 이르던 사립학교는 1912년 1347곳, 1943년 387곳으로 급감했다. 광복 이후에는 초등교육의 의무화와 문해교육에 교육정책의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설립규정을 완화해 사립학교의 설립을 유도했다. 2009년 현재 국내 사립학교 수는 모두 1534개교(초 75, 중 650, 고 658, 대 151)다.
15 산부인과의원
남자 의사가 첫 문 연 '신필호산부인과의원'
1925년 문을 연 '신필호 산부인과'는 한국인에 의한 대한민국 최초의 산부인과 의원의 등장이었다. 아녀자들이 몸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던 시절, 본격적으로 부녀자의 골반 질병을 진료하는 '해괴망측한' 의원의 출현이자, 산파에 의존하던 가정 분만에서 '병원 분만' 시대를 연 '첨단' 출산 시스템으로의 전환점이었다.
의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 최초 산부인과 의사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남자였다. 신필호(申弼浩·1893~1952·사진 왼쪽)(허스트 박사와 함께 세브란스의전에서 회진하는 모습)는 청주에서 태어나 1914년 세브란스의학교(지금의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다.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그의 숙부였다. 그는 당시 세브란스의 산부인과 담당 교수였던 선교사 제시 허스트 박사로부터 부인과 질병 치료와 현대식 분만법을 배웠다. 나무로 깎아 만든 여성의 골반 모형을 갖고 출산 처치법을 익혔다.
조교수까지 마친 신필호는 황해도 연안에 자신의 이름을 건 산부인과 의원을 열었다. 그 지역이 일찍 기독교가 전파됐다는 점이 최초의 산부인과를 여는 데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한 듯싶다. 3년 후 신필호는 서울 인사동에서 같은 이름의 의원을 냈다. 당시 서울에는 산부인과의원이 4곳이었지만 한국인 의사로는 유일했다. 남자 의사가 산부인과를 열었다는 소식은 금세 장안의 화제가 됐다. 한옥을 개조한 그의 의원에는 환자들이 대기표를 갖고 기다릴 정도였다. 그는 11편의 산부인과학 논문도 쓰며 1935년 일본 구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뒤를 이은 산부인과 의사가 10년 후에나 나온 것을 보면, 신필호는 당시 관행을 깬 근대의학의 선구자이자 여성의 진료권을 향상시킨 선각자였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심장마비로 59세의 삶을 마쳤다.
산부인과학에 대한 신필호의 헌신은 3대(代)를 이어 나갔다. 그의 아들 신한수 전(前)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는 1960년대 산부인과 전문의 면허 제도를 도입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손자인 현(現)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신희철(63) 교수는 고위험 분만 의학의 권위자다
16 주화
미국서 만든 무궁화(10환)·거북선(50환) 동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지폐는 1950년 6·25 전쟁 직후에 나왔지만, 최초의 주화(鑄貨·동전)는 1959년에 탄생됐다. 동전을 발행하게 된 것은 화폐비용 절감 차원이었다. 주화는 지폐에 비해 사용기한이 훨씬 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는 동전 제조기술이 없어 미국 필라델피아 조폐국에 의뢰해 만들었다. 지폐공장인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6·25 때 파괴되는 바람에, 대한민국 최초 지폐를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찍은 것과 비슷한 탄생 스토리를 지닌 셈이다.
1959년 10월 20일 50·10환 동전이 첫 발행됐고, 10월 30일에는 100환 동전이 나왔다.<사진> 10환은 구리를 95% 넣어 붉은 빛깔을 띠었다. 50환은 구리(70%) 외에 아연(18%), 니켈(12%)을 넣어 백색을 띠었다. 100환은 구리 75%, 니켈을 25% 섞어 지금의 100원 동전과 비슷한 색상이었다.
발행연도는 '4292년'으로 서기(西紀)가 아닌 단기(檀紀)로 기록됐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961년까지는 단군기원(檀君紀元)을 사용토록 법제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무궁화(10환), 거북선(50환), 이승만 대통령(100환)이 등장했다. 30여년간 조폐공사와 한국은행에서 화폐 도안을 담당했던 조병수(72)씨는 "10환에는 당초 벼 이삭 그림을 넣으려고 했으나 국화(國花)인 무궁화가 더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도안이 바뀌었다"고 밝혔다. 무궁화는 1890년대 대한제국 시절부터 주화 문양으로 사용해왔다. 50환 속의 거북선은 '충무공 전서'에 수록된 거북선을 근거로 깃대는 있으나 돛대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검증절차를 거쳐 돛대가 있는 거북선이 화폐에 등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는 측면 모습으로, 1950년 발행된 1000원권 지폐의 정면 초상화와 대비되었다.
이들 최초의 동전 주화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100환짜리 동전은 3년 뒤인 1962년 환을 원(圓)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이 시작되면서 유통이 중지됐다. 그러나 50환과 10환만은 5원, 1원으로 인정돼 1975년까지 사용됐다.
원화로 표시된 최초의 동전은 1966년 8월 16일에 10·5·1원짜리 3종이 나왔다. 1970년에는 100원, 1972년에 50원, 1982년에는 500원 동전이 각기 처음으로 발행됐다.
17 특허
1948년 '유모차' 첫 실용신안 등록
우리 역사상 최초의 특허법은 1908년 8월 12일 공포된 일본의 칙령 제196호 특허령, 제197호 의장령, 제198호 상표령이었다. 이 시절 등록된 최초의 특허는 정인호(鄭寅琥)가 출원한 말총모자였다(영동대 발명특허공무원학과 왕연중 교수). 갓 모양으로 생긴 모자였다. 한국 외대 박성래 명예교수에 따르면 정인호는 대한제국 시절 중앙 공무원과 청도군수 등을 지낸 인물로 독립운동을 하다 5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71세 때인 1938년에는 말총으로 만든 모자와 가방 등을 출품, 조선미술전 공예 부문에서 특선을 수상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미(美)군정은 정부수립까지 과도기의 특허제도 운영을 위해 1946년 10월 새로 특허법을 제정했다.
새 법에 따라 특허 1호가 탄생한 것은 1948년 11월 20일. 이날 발행된 특허공보 제2호에 발명 특허와 실용신안, 의장 등록 1호가 동시에 공시됐다.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니,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 특허 1호들인 셈이다.
발명 특허 1호는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의 중앙공업연구소 안동혁 소장의 '황화염료 제조법'이었다. 이는 품질이 좋은 염료를 저렴하게 생산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실용신안 1호는 서울 충무로 신경철씨의 '아동용 보건차(保健車)'였다. 운전하기 쉽게 만든 저렴한 가격의 유모차라고 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의장(당시에는 미장) 등록 1호는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최창록씨의 '반휘장 옷고름의 모양·색채의 결합'이었다. 옷감의 안팎에 금색으로 수놓은 '福(복)'자와 국화 모양을 번갈아가며 배치한 디자인이었다.
첫 등록상표는 천일산업이 1949년 11월 28일 등록한 '天'상표〈오른쪽 작은 사진〉였다. 당시 천일산업은 고무신·운동화·농구화·고무장화 등 주로 스포츠용품에 이 상표를 사용했다. '천'자 상표는 원 안에 한문으로 천(天)을 쓴 것으로, 원래 일제 때부터 사용해 온 것이었다. 천자표 고무신은 값싸고 질긴 고무신으로 큰 인기를 모았었다. 그러나 이 상표는 1959년 11월 28일 상표권 존속기간 만료로 소멸됐다. 천일산업이 상표권 등록 연장신청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18 뇌사자 장기이식
1979년 한양대병원서 은밀히 콩팥이식
1979년 1월 13일 서울 행당동 한양대병원 수술실. 외과·내과·비뇨기과·신경외과 의사로 구성된 수술팀이 말기 신부전증을 앓는 40대 남성의 몸에 50대 남성의 신장(콩팥)을 이식했다. 뇌졸중으로 뇌사 상태에 빠진 이 남성의 부인은 "남편이 평소 '가진 건 없어도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며 기증했다. 수술이 끝난 뒤, 신장을 이식받은 환자의 몸에 연결된 튜브에서 맑은 오줌 방울이 똑 떨어졌다. 수술팀이 환호했다. 국내 첫 뇌사자 장기이식 수술이 성공을 거둔 순간이었다.
수술팀을 이끈 곽진영(71) 한양대 의대 명예교수<사진·왼쪽 두번째, 신장이식 수술 모습>는 "오줌이 배출되면 수술이 잘됐다는 뜻"이라며 "수술을 마친 뒤 '오줌이 나오나, 안 나오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튜브 끝을 노려보던 심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장기 이식은 뇌사의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데다 법률도 없어 '위법'논란의 대상이 될 뻔했다. 그래서 곽 교수는 이 수술에 대한 논문을 몇년 뒤에야 세상에 알렸다. 수술을 받았던 40대 남성은 이후 연락이 끊긴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이식은 1966년 미국 미네소타 의대 리처드 릴러하이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췌장 이식수술에 성공한 뒤, 이듬해 미국과 남아공에서 각각 최초의 간 이식과 심장 이식 수술이 이루어졌다. 이후 국내 대형병원들이 본격적으로 장기이식수술에 도전했다. 병원의 자존심을 걸고 대결하는 '레이스'였다. 1988년 서울대 김수태(81) 명예교수가 14세 소녀에게 국내 첫 간(肝) 이식수술에 성공했다. 김 교수는 "1969년부터 20년 가까이 사재(私財)를 털어가면서 쥐와 개를 대상으로 끈질기게 동물 실험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1992년 서울아산병원 송명근(59·현 건국대 교수) 교수가 첫 심장 이식수술에 도전해 10년 이상 심장병을 앓느라 빈사상태에 빠진 40대 주부를 살려냈다. 이 환자는 매일 면역억제제 등을 먹으며 서울 강북에 살고 있다.
이처럼 국내 의료진이 속속 장기이식 수술에 성공하면서 뇌사자 장기기증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1993년 대한의사협회가 뇌사판정 기준을 마련했고, 1999년에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첫 신장 이식수술이 이뤄진 지 20년 만이었다. 장기 기증자 숫자는 지난 9월 2000명을 넘어섰다(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 통계).
20 담배
조선 軍政廳(군정청)서 만든 3원짜리 '승리'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담배는 '승리'<윗쪽 사진>다. 조선군정청 전매국이 서울 의주로(현 미근동) 공장에서 만든 것으로 해방된 감격을 '승리'로 표현했다. 겉 면에는 '기념 궐련 조선군정청 전매국 정가 3원'이라고 한문으로 썼고, 담뱃갑 옆면에는 가격을 3엔이라고 표기했다. 담배 앞면에는 한글로 '승리', 뒷면에는 영어로 'Victory'라고 써 시대상을 반영했다.
'승리'는 필터가 없는 막궐련으로 한 갑(10개비)에 3원으로 비싼 값이었다. 당시 서울 시내버스 한 구간 요금이 50전으로 승리 한 갑은 버스 6구간을 갈 요금이었다. 그러나 양산되지 않아 담배를 사려면 줄 서서 기다릴 정도 였다고 한다. 1945년 9월부터 47년 5월 말까지 판매된 이 담배는 당시 2억7000만원어치가 팔려 당시 해방정국의 국가 재정 수입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서민들은 잎담배 썬 것을 봉지에 담은 것을 피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 나온 담배는 1948년에 나온 30원짜리'계명'<아랫쪽 사진>이었다. 대한민국 지도 위에 수탉이 새날이 밝았음을 그려 새 정부 탄생을 축하했다. 담뱃갑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 기념'이라고 쓰여 있었다.
1949년 5월에는 국군 창설을 기념해 필터가 없는 군용 담배인 '화랑'이 탄생했다. 화랑은 81년 12월까지 32년 9개월간 8차례 디자인을 바꾸며 27억 갑이 생산됐다. 최장수 담배였다. 반면 1962년 2월에 나온 '해바라기'는 10개월 만에 사라졌다. '해바라기'는 소련의 국화로, 담배 개비까지 14개로 소련 연방을 나타낸다는 시비에 휩싸였다. 1958년 나온 '아리랑'은 국내 최초의 필터 담배이다. 아리랑은 7번이나 포장 디자인을 바꿔 생산됐다. 1961년에는 최초 박하 담배인 '금관'이 나왔다. 신라 유물인 금관총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1969년에 나온 '청자'는 인기를 끌어 전국에 '청자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도 했다. 지금은 '에세' 등 모두 54종의 담배가 판매되고 있다.
21 세탁기
195대 팔고 생산 중단한 백조 세탁기
1969년 5월, 주부에게는 생활의 혁명과도 같은 제품이 나왔다. 금성사(현 LG전자)에서 내놓은 백조 세탁기<사진>다. 모델명은 'WP-181'로 세탁통과 탈수통이 분리된 2조식 알루미늄 수동세탁기였다.
세탁 용량은 1.8㎏에 불과했지만 주부의 가사노동 중 가장 힘들다는 빨래를 기계가 대신 해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빨래를 주무르고 두드리고 비틀어 짜는 중노동에 비하면 '세탁통에서 꺼냈다가 탈수통에 집어넣는' 정도의 작업이 힘든 축에 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비누를 사용해 손으로 빨래해야 한다는 주부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수월치 않았다. 이미 일본은 세탁기 보급률이 70%를 넘어섰지만, 우리나라에선 세탁기를 사치품으로 여겼다.
출시 첫해 생산 대수는 고작 195대였다. 당초 1500대를 계획했던 것에 비하면 참담한 결과였다. 한 대 가격이 5만3000원으로, 그 당시 대기업 대졸사원 초봉이 월 2만원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한민국 최고의 사치품 중 하나였던 셈이다.
결국 금성사는 생산을 중단했다가 2년 뒤인 1971년 '빨래는 시간의 낭비입니다'라는 세탁기 신문광고를 내세우며 생산을 재개했다. 2㎏ 용량으로 시트 5장과 와이셔츠 10장을 세탁한다고 선전했다. 1974년 생산량이 2만대를 넘어서면서 세탁기 시장이 급속히 커졌다. 경제성장으로 부쩍 늘어난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를 점차 구하기 힘들었던 이유가 컸다. 금성사 백조 외에 무지개(대한전선), 은하(삼성전자), 백구(신일산업), 비너스(한일전기) 세탁기 등이 시장에 나온 것도 그즈음이다.
1980년대 들어서 가장 큰 변화는 통 하나로 구성된 전자동 세탁기가 등장한 점이다. 세탁과 헹굼, 탈수까지 모든 과정이 자동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이어 1990년대 들어 LG전자·삼성전자·대우일렉 간 세탁기 경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2000년대 들어 세탁기 시장의 대세로 자리잡은 것은 '드럼세탁기'다. 세탁기 안의 드럼통을 돌리면서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빨래를 하는 방식이다.
그 사이 한국의 세탁기 제조산업은 세계 1·2위를 다툴 정도로 성장했다. 첫 세탁기였던 금성사 백조의 국산화율은 5%가량에 머물렀다. 대부분의 부품을 일본 히타치로부터 수입하고 한국에서는 별도의 생산라인 없이 세탁기를 조립, 생산해야 했다. 현재 우리 기업들은 세탁기에서 가장 중요한 모터 같은 핵심 부품을 모두 자체생산하고 있다.
22 국어사전
6106단어 조선어사전, 해방 뒤 16만단어로
우리나라 국어사전의 역사는 출판되지 못한 비운의 사전 '말모이(말을 모은다는 뜻)'(1914)로 시작한다. '말모이'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전 편찬에 맞서 '조선인에 의한' 조선어 사전으로 기획됐다. 편찬 작업은 최남선(崔南善)·박은식(朴殷植) 등이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소속의 국어학자 주시경(周時經)·김두봉(金枓奉)·권덕규(權悳奎)·이규영(李奎榮) 등이 맡았다. 1911년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돼 원고 집필은 거의 마무리되었으나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으로 출판이 무산됐다. 비록 출간되지 못한 원고본이지만, 우리말을 우리말로 풀이한 사전으로는 최초로 편찬된 것이어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현재 남아있는 원고는 240자 원고지 231장인데 범례인 '알기', 본문, 색인인 '찾기', 한자어 자획 색인인 '자획(字劃)찾기'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어를 '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비슷한 말의 경우 가장 흔히 쓰이는 말에 뜻풀이를 했고, 다의어는 그 뜻을 구분해 풀이하는 등 국어사전의 원형적 모습을 보인다.
이와함께 이규영 등이 5만 단어의 '사전(辭典)'이라는 이름의 국어사전도 계획했었지만, 편찬이 무산됐다. 이후 그 편찬 정신을 잇는 국어사전이 몇 차례 기획된다. 그 첫 결실이 경성사범학교 교사였던 심의린(沈宜麟)이 편찬한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사진〉이다. 1925년 경성 이문당에서 발행한 이 사전은 표제어 6106개에 불과하지만, 우리말 단일어 사전으로는 최초로 출판됐다.
이어 문세영(文世榮)은 1938년 조선어사전간행회에서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을 펴낸다. 이 사전은 수록어휘가 10만여 개에 이르고, 배열방식이나 주석의 내용도 세련돼 현대식 사전으로의 면모를 보인다. 또 '한글맞춤법통일안'(1933)에 의해 표기된 최초의 사전이기도 하다.
1947년 조선어학회가 첫 권을 펴낸 '큰 사전'은 총 16만4125개의 표제어를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사전이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면서 시작된 '큰 사전' 편찬 사업은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이 일어나면서 간행이 무산됐으나, 1945년 9월 8일 경성역장이 조선통운 상자에서 말모이 원고 일부를 극적으로 발견했다. 이에 따라 광복 이후 편찬 사업이 재개되면서 1957년 총 6권 3804쪽으로 완간됐다. 현재 국립국어원이 2008년 10월 9일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서비스하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 개정판에 실린 어휘는 51만여개다.
23 등대
석유燈으로 10㎞ 불밝힌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인천항 진입 항로에 서 있는 팔미도 등대다.
팔미도 등대는 1902년 5월에 착공해 1903년 6월 1일 처음 불을 밝혔다. 높이 7.9m, 지름 2m의 흰색 원형으로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지 않은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워졌다. 해발고도 71m의 팔미도 꼭대기에 세워져 석유등을 이용해 주변 10㎞ 해상을 비췄다.
100년간 불을 밝히던 이 등대는 2003년 높이 26m의 현대식 새 등대가 들어서면서 퇴역, 인천시 지방문화재 제40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팔미도 등대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벌일 때 켈로부대가 잠입해 불을 밝혀 연합군에게 상륙 방향을 알려준 것으로 유명하다.
대한제국 시대 세워진 이 등대는 사실상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승리한 일본이 주도해서 설치한 것이다. 일본은 청나라의 방해 없이 인천항 등을 오갈 수 있게 됐지만, 배가 암초에 부딪히는 등 사고가 잇따르자 팔미도에 등대를 설치한 것이다.
조선 후기까지는 횃불, 봉화, 꽹과리, 깃발 등을 이용해서 배가 바다의 장애물을 피해 가도록 했다.
▲ 팔미도 등대<왼쪽 사진>/현대식 새 등대<오른쪽 사진>
1910년 한일 병합이 되기 전까지 부도등대(1904년) 거문도등대(1905년) 우도등대(1906년) 등 유인(有人) 등대 20기가 설치됐다. 일제 강점기 동안 16기, 광복 이후엔 13기의 유인 등대가 세워졌다. 전체 유인 등대 중 73.5%가 광복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광복 이후에 가장 먼저 설치된 등대는 1952년 5월 12일 불을 밝힌 여수 오동도등대다. 높이 8.4m의 흰색 원형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세워졌으나, 2003년에 흰색의 8각형 구조물로 개축했다. 10초 간격으로 반짝이는 등대 불빛은 46㎞ 떨어진 먼바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등대를 관리하는 국토해양부 해양교통시설과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 4082기의 등대가 있다. 지금까지 세워진 유인 등대 49기 중 10기는 원격 조종을 하는 무인 등대로 바뀌어 유인 등대는 현재 39기다. 항구 입구나 항로를 따라 서 있는 대부분의 등대는 국가가 관리한다. 전체 등대의 63.3%인 2583기다.
나머지 1499기는 국토해양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설치한 사설(私設) 등대인데, 섬에 있는 발전소나 해상 공사 현장 등에서 소규모로 선박이 이동하는 곳에 사용된다.
24 발레단
한동인의 서울발레단, '공기의 精' 첫 공연
국내 최초의 직업 발레단은 광복 직후에 등장했다. 서울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해 가마쿠라발레연구소에서 발레를 배운 한동인(韓東人)이 1946년 만든 서울발레단이다.
해방 당시 조선무용예술협회에서 활동한 한동인은 이 단체가 해체되자, 1946년 10월 직업발레단을 창단했다.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발레단이었다. 1946년 10월 9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창단작품으로 고전발레 '공기의 정(精)(라 실피드)'을 공연했다. 당시 신문 광고를 보면 '쇼팽 백년제 기념공연'으로 출연진은 일본에서 발레를 배우고 온 정지수를 비롯해 박영식, 김영, 김리원, 조영희, 허문향, 박진원 등이었다.
▲ 연낙재 제공
서울발레단은 단원이 12~20명 정도로 1950년 6·25로 해체될 때까지 매년 정기공연을 했다. 1949년 제4회 정기공연은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한동인과 김영이 남녀 주인공을 맡은 창작발레 '꿩'〈사진〉을 선보였다.
1950년 6월 24일부터 30일까지 국립극장(옛 부민관)에서 무용극 '인어공주' '향수' 등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6월 25일 오후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으로 공연이 중단됐고 그것이 고별 무대가 됐다. 한동인을 비롯한 무용수들 대부분이 납북되거나 월북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는 진수방의 '한국발레예술무용단', 송범의 '코리아 발레단', 임성남(林聖男)의 '임성남 발레단' 등 8개가 활동했으나 단명했다. 일본에서 발레를 배운 임성남 발레단은 1957년 시공관에서 '백조의 호수 2막'을 무대에 올렸다. 발레 '백조의 호수'가 처음 소개된 자리였다.
임성남은 생전에 "내가 타이츠를 입고 춤을 추자 객석에서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발레는 그만큼 낯선 예술이었다. 공연 편수도 1년에 2편 정도여서 2010년(44편)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미미했다. 임성남 발레단은 1962년 국립무용단에 흡수됐고, 임성남은 1972년 국립발레단을 국립무용단에서 독립시켰다.
1928년 10월 일본인 후지다 시게루와 사카이 시요코가 이 땅에 처음으로 토슈즈를 신고 발레를 선보인 지 80여년이 지났다. 지금은 200여명의 직업 발레 무용수가 활동 중이다.
25 잡지
독자 6명으로 시작한 14전짜리 ‘少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1892년 1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발행한 월간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를 최초로 보기도 한다. 선교사였던 올링거(Ohlinger) 부부가 창간한 이 잡지는 영문으로 선교사들이 알아야만 하는 한국의 언어·역사·문화·시사적인 내용을 담았다. 속지(屬地)주의에 따를 경우 첫 잡지로 평가된다. 1899년 4월 59호로 폐간됐다.
속인(屬人)주의로 보면 첫 잡지는 1896년 2월 일본 도쿄에서 한인 유학생들의 모임인 대조선일본유학생친목회(大朝鮮日本留學生親睦會)가 창간한 '친목회 회보(親睦會 會報)'다. 3개월에 한 번씩 발행된 계간지로 1898년 4월까지 6호를 발행했다.
국내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발행한 최초의 잡지는 1896년 11월 30일 창간된 '대죠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다. 월 2회 발행된 이 잡지는 같은 해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의 회보(會報) 형식이었다. 국판 20~24쪽으로 값은 10전이었다. 근대 문명과 과학 지식을 조명한 각종 논설을 실었고, 근대적인 과학 지식과 서구사상을 보급하려 했다. 독립협회가 해체됨에 따라 1897년 8월 15일자 18호까지 발행되고 폐간됐다.
기관지나 특정 계층을 상대로 한 잡지를 벗어난 근대 잡지의 효시는 1908년 11월 1일 육당(六堂) 최남선이 창간한 '소년(少年·사진)'이다. 최남선이 직접 인쇄 시설을 장만해 창간한 이 잡지는 60여쪽으로 값이 14전(錢)이었다. 최남선이 지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란 최초의 신체시와 나이아가라 폭포의 대형 사진도 실렸다. 창간호 독자는 6명이었지만 아동과 어른을 모두 대상으로 하는 종합지 성격의 개화기 계몽 잡지였다. 그래서 한국잡지협회는 '소년'의 창간일인 11월 1일을 '잡지의 날'로 제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가뎡(가정)잡지'라는 여성 월간지가 그보다 2년 앞선 1906년 6월 서울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32쪽으로 발간됐다. 주시경·양기탁 등이 필진이었고 해외 특파원도 있었다. 그래서 이 잡지를 최초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순 한글로 1907년 1월 25일까지 7권을 냈다.
2010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간되고 있는 잡지의 종수는 4909종으로 월간 2861종·격월간 518종·계간 1094종·연 2회간 396종·연간 40종 이다.
26 여성 패션 모델
조혜란·송영심 등이 첫 직업모델
국내 최초의 패션쇼는 1956년 10월 디자이너 노라노가 당시 최고 건물이었던 반도 호텔(현재 롯데 호텔) 다이너스티 룸에서 열었던 여성복 패션쇼를 꼽는다.
한국 패션의 대모(代母)로 불렸던 고(故) 최경자씨가 1955년 5월에 열었던 ‘국제패션쇼’가 우리나라 최초 패션쇼라는 주장도 있지만, 남아 있는 팸플릿이나 사진 자료가 없어 입증되지 않고 있다.
당시 패션쇼에 섰던 건 전문 모델이 아니라 일반인 또는 영화배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패션모델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도 분분하다. 일제시대에도 기생이 패션모델로 나섰고, 해방 후에도 이미 몇몇 모델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설(說)도 있다.
1956년 노라노 패션쇼에는 당시 주부였던 20대 후반의 하영애씨가 영화배우 조미령씨, 미스코리아 강귀희씨 등과 함께 출연해 인기를 모았다. 하씨는 이후 1964년까지 8년간 패션모델로 활약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는 출연료로 옷을 선물받았고, 1970년대 초반에도 3만원의 거마비와 함께 옷 한 벌 받는 게 상례였다고 한다.
직업 모델이 나온 것은 1964년 3월 국제복장학원 원장 최경자씨가 전문 모델을 양성하기 위해 ‘차밍스쿨’을 열면서다. 1회 졸업생이 조혜란, 한성희, 송영심, 김혜란 등으로 이들이 직업모델 1호다. 이들은 워킹 등 모델 트레이닝을 받았다.
▲ '앙드레 김'의상발표회(앙드레 김과 조혜란) / 사진가 유재력 제공
특히 이화여고 출신인 조혜란은 특급 모델로 인정받았는데, 이미 1963년 봄 ‘앙드레 김’의상발표회(앙드레 김과 조혜란)에 첫선을 보였고 TV쇼 등에도 출연했었다. 조혜란은 키가 165㎝였다. 당시 활동했던 1세대 모델은 하나같이 키가 160㎝ 안팎의 아담하고 단아한 여성이었다.
이 판도를 바꿔놓은 게 1985년 미국에서 귀국한 모델 김동수다. 김동수 동덕여대 교수는 “내가 귀국한 이후로 키 175㎝가 넘는 훤칠한 모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예쁘고 귀여운 여성보단 개성 있는 모델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스스로 ‘1.5세대’라고 부르는 김동수의 시대를 거쳐 2세대 모델은 전문 교육기관에서 훈련받은 이들이 주도하게 된다. 진희경·박영선 등이다.
1992년엔 모델 이소라가 ‘슈퍼모델 대회’에서 1위를 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최근엔 장윤주·강승현·한혜진 같은 모델들이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컬렉션 무대에 서는 등 외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7 남성 모델
김광수·도신우·오상규 등 7명이 첫선
"1960년대 대기업 초봉은 3만원 정도였는데 양복 한 벌엔 1만5000원씩 했다. 양복점 직원은 이 비싼 옷을 팔기 위해 손님 앞에서 직접 입어 보이기도 하고, 잘 입는 방법을 알려주는 역할도 해야 했다. 따라서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들을 주로 뽑았는데, 그 직원들이 우리나라 남성 모델의 시작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남자 모델 중 한 명으로 활동했던 김광수씨의 말이다.
우리나라 전문 남자 모델의 뿌리는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1월 1일 김광수·김사성·김현동·도신우·오상규·이성호·이종재 등 7명은 '왕실 모델 클럽'을 결성했다. 이들 중 김광수·오상규 등이 1969년 우리나라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3차 아시아 남성복 패션쇼'에 전문 모델로 처음 무대에 선 것이 계기였다.
▲ 왕실 모델 클럽
대한민국 최초의 남성복 패션쇼는 1965년 디자이너 박치우가 반도호텔에서 연 것이지만, 이때 무대에 선 건 전문 모델이 아니라 영화배우·탤런트였다.
이들 중 김광수는 성균관대 경제학부 출신, 김사성은 TBC TV 카메라맨 출신이다. 현재 모델센터 회장인 도신우도 이때부터 극단에서 연극을 하다 김광수의 제안을 받고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 도신우 회장은 "그 이전에도 패션쇼에 참가한 선배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없어, 보통 1969년을 남성 패션모델의 원년으로 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패션쇼를 연출하는 이도, 분장사도 따로 없었다. 모델들은 알아서 옷을 입고 머리를 빗어 넘겼다. 패션쇼 장소도 빈약해서 반도호텔 꼭대기, 유네스코회관 경양식집 등에서 책상을 붙여 놓고 그 위에서 쇼를 했다. 이 대가로 받는 돈은 3~5만원 가량으로 대기업 초봉과 비슷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활동했던 도신우·이재연·김석기 등이 1세대 모델이라면, 2세대 모델은 안기성·안도일·양의식·이석·이종원·임주완·정회남·차승원·황인성 등 ‘모델라인’ ‘모델센터’ 같은 모델 양성기관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남자가 무슨 모델을 하느냐”는 편견을 깨고 전문 직업인으로 당당히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현재 한국모델협회가 추산하는 우리나라 모델 수는 남자 1500여명 등 남녀를 통틀어 3000여명에 이른다.
28 귀순자
지금은 탈북자란 용어를 쓰지만 예전에는 '월남 귀순 용사' '귀순 북한 동포'란 말을 썼다. '월남 귀순 용사' 1호는 통일부에 따르면 1953년 7월 31일 휴전선 중동부 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온 북한군 대위 안창식(安昌植)씨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첫 귀순용사였다.
당시 본지 보도(1953년 8월 3일자 2면 '괴뢰군 대위 휴전선 넘어 귀순'·사진)에 따르면, 안창식씨는 함경남도 갑산군 상남면 출신으로 북한군 15사단 사령부에 근무하다 월남했다. 귀순 직후 그는 우리측에 "북한군 3분의 2가 격파당해 남침은 고사하고 전선 방어도 담당할 수 없는 상태"라고 진술했다. 당시 우리 군은 빨치산들의 투항을 권고하기 위해 지리산 일대에 뿌린 '지리산 특보'(삐라의 일종)에서 안씨의 귀순 사실을 선전하기도 했다. 안씨는 49년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다가 200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통일부는 밝혔다.
그해 9월 21일에는 노금석 상위(대위)가 미그-15기를 몰고 김포공항으로 귀순했다. 미그-15기는 당시 소련제 최신예 전투기로, 6·25 당시 미군 폭격기 B-29기가 미그-15기에 의해 대거 격추되었다. 미국은 이에 미그-15기를 몰고 귀순하면 10만달러와 함께 미국 시민권 보장을 내걸고 선전하던 시절이었다. 노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가 돼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귀순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은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1950년대만 해도 관련 법조차 없었다. 보상 규정이 마련된 것은 1962년 4월 16일이다.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에 따라 정착수당을 1~3급으로 차등 지급했고, 국·공립주택 우선 입주 혜택도 줬다. 특히 당시 귀순자는 대부분 군인이어서 군사 기밀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법이 제정됐다고 한다.
체제 경쟁이 극에 달했던 1978년에는 '월남귀순용사 특별보상법'이 시행됐다. 그해 10월 13일 월남한 권정훈 하사가 이 법의 첫 번째 수혜자다. 북한군 상사로 1979년 7월 27일 귀순한 안찬일씨는 "서울 용산에 30평짜리 집과 두둑한 정착금은 물론, 취업 알선까지 받았다"고 했다. 안씨는 대학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3월 26일 개정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탈북자들은 정착금, 주거지원금, 지방거주 장려금, 정착 장려금, 가산금, 고용지원금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 국내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탈북자)은 8월 말 현재 1만9569명이다.
29 국산 맥주
1947년 OB맥주 영등포에서 첫 생산
국내에서 최초로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3년 12월이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한 서울 영등포의 조선맥주(지금의 하이트맥주) 공장<사진>에서 만든 것은 일본 맥주인 삿포로였다. 국산 상표를 붙인 맥주는 해방 이후에 처음 나왔다. 초창기 맥주 생산에 쓰인 보리와 호프 등 맥주 원료는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양식 술 문화의 효시(嚆矢)라고 할 수 있는 맥주가 국내에 처음 들어온 것은 구한말이다. 개항 이후 서울과 부산 등 항구에는 러시아·일본 등 각국의 상인들로 들끓었는데, 이들 개항지에 일본인 거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일본맥주가 흘러들어오게 됐다.
국내에 맥주소비가 크게 늘어난 것은 1910년 한일합방이 계기가 됐다. 당시 일본 맥주시장의 맞수였던 다이닛폰맥주(대일본맥주)와 기린맥주는 식민지인 한반도의 맥주시장 점유율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들은 한반도에 맥주소비가 늘어나자 운반비, 각종 세금을 줄이고 만주시장까지 맥주를 공급하기 위해 한반도에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이들 두 일본 맥주회사는 서울 영등포 인근에 나란히 맥주공장을 지었다. 영등포 인근의 한강물이 수질이 좋고 수량이 풍부해 이곳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회사 설립시기는 다이닛폰맥주가 조금 빨랐다. 1933년 8월에 다이닛폰맥주가 조선맥주를 설립했고, 기린맥주가 설립한 소화기린맥주는 넉 달 늦은 그해 12월이었다. 소화기린맥주 출범에는 고(故) 박승직 두산 창업주가 소액주주로 참여했고 이것이 인연이 돼 두산그룹은 1952년, 이 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당시 맥주는 상당한 고가품으로 인식돼 선물용이나 서울 명동, 무교동의 요정·바·카페에서 주로 소비됐다고 한다.
회사 설립은 조선맥주가 조금 빨랐지만 첫 국산 상표 맥주 탄생은 소화기린맥주공장에서 나왔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이 공장은 1947년 2월 27일에 동양맥주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OB(Oriental Brewery)맥주' 상표로 국산 맥주를 처음으로 생산했다. 맥주 원료는 수입했으며 국산 원료로 만든 맥주는 1957년에 처음 나왔다.
한국 최초의 맥주회사 조선맥주도 미 군정 관리하에 있다가 1952년에 민간으로 경영권이 넘어와 이듬해인 1953년에 '크라운맥주' 상표를 붙인 국산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판매량이 조선맥주가 많았으나 1957년 OB맥주가 역전한 뒤 1995년 다시 조선맥주 뒤를 이은 하이트맥주가 재역전했다.
30 시험관 아기
1985년 44번 시도 끝에 쌍둥이 태어나
1985년 10월 12일 오전 5시 10분.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수술실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장윤석 박사가 이끄는 시험관아기특수클리닉팀이 국내 최초로 시험관 아기 출산에 성공한 것이다. 제왕절개로 태어난 시험관 아기는 각각 몸무게 2.63kg(여아)과 2.56kg(남아)의 이란성 쌍둥이였다.<사진> 불임 부부에게 희망을 준 것으로 우리나라 산부인과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쓴 것이다. 올 노벨 생리·의학상을 탄 에드워즈 박사가 1978년 영국 맨체스터의 올드햄병원에서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킨 지 7년 만이었다.
당시 팀장이었던 장윤석(79) 서울대 명예교수는 "1년여 동안 44쌍의 부부를 상대로 거듭된 도전과 실패 끝에 이뤄냈던 '44전 45기'의 성공이었다"고 했다.
국내 산부인과 의사들이 시험관 아기 연구에 몰두한 것은 영국에 이어 미국이 1981년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킨 뒤였다. 하지만 기술 이전은 쉽지 않았다. 많은 의사들이 영국·미국 등에 가서 1~3개월간 단기 연수를 통해 기술을 배우고 실험실 연구에도 매달렸다. 1983년 서울대병원에 '시험관팀'이 구성된 뒤 1984년부터는 사람을 대상으로 직접 실험에 들어갔다.
장 박사는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이진용·문신용·김정구 박사 등 연구진은 이후 우리 불임 시술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 성공 뒤에는 병원장 재량으로 무려 7만달러의 연구비를 대준 이영균 당시 서울대 병원장과 난자 배양 기술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둔 오선경 박사(생물학) 등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장 박사는 "쌍둥이 중 누나는 현재 교직에 있고, 남동생은 군 제대 후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남매의 경우 고등학교 진학 때까지 '시험관 아기'란 이유로 주변에서 조롱을 받을까봐 신원을 철저히 숨기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시험관 시술 능력은 이후 급속히 발전해 1987년엔 차병원이 동양 최초로 난소 없는 여성의 임신이 성공한 데 이어 1988년에는 세계 최초 미성숙 난자의 체외 배양 임신 성공, 유리화 난자 동결 보존법 개발(1998년) 등의 기록을 세워나가기도 했다. 현재 국내에선 150여개 의료기관에서 연간 1만여명의 시험관 아기가 태어나고 있다.
31 국민연금 첫 수령자
남편 사망으로 가입 1년 만에 연금 받아
우리나라에 국민연금제도가 도입된 것은 1988년이다. 첫 국민연금 수령자는 이듬해 3월에 나왔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사는 윤모(55)씨는 직장에 다니던 남편이 사망하면서 1989년 3월에 7만6910원의 ‘유족연금’을 받았다. 물가 상승에 따라 액수가 올라가 윤씨가 현재 매월 받고 있는 연금액은 17만7550원이다. 윤씨의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12개월간 낸 보험료 총액은 24만5700원. 당시는 보험료가 월급의 1.5%(지금은 4.5%·회사 부담금 제외)이었다. 그러나 윤씨 가족이 그간 받은 유족연금액은 3404만원으로 낸 돈의 138.5배에 달한다.
당초 연금은 15년(1999년 이후는 10년) 넘게 가입해 60세가 되면 받도록 되어 있다(노령연금). 그러나 첫 수령자가 연금 도입 1년 만에 나온 것은 유족연금 제도 때문이다. 유족연금은 가입자가 사망했을 때 유가족이 타게 되는 연금(노령연금의 40~60% 수준)이다.
국민연금은 이처럼 노령·퇴직·장애·사망으로 소득이 없어지게 될 경우 당사자나 유족에게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소득보장제도이다. 1973년에 ‘국민복지연금법’이 제정됐으나 오일파동으로 연기되었다가 1988년 1월에 10명 이상 사업장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처음 시행되었다.
가입자가 가입기간 중 다쳐 소득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 받는 것이 장애연금(노령연금의 60~100%)이다. 장애연금은 1989년 6월에 첫 수령자가 나왔다. 부산 사하구에 사는 장모(58)씨는 국민연금에 13개월간 가입한 뒤 몸을 다쳐 1989년 6월부터 매월 5만9320원의 연금액을 타기 시작했고, 현재는 매월 15만100원의 연금을 받는다.
노령연금 첫 수령자는 1993년 3월에 5만8820원의 연금을 타기 시작한 박모(79·서울 노원구)씨다. 국민연금은 제도 도입 당시 최소가입기간인 15년 동안을 채울 수 없는 사람(당시 45~59세)에겐 ‘특례노령연금’<사진>을 줬다. 5년만 가입해도 연금을 받는 제도다. 박씨는 1988년 57세 때 연금에 가입해 5년 뒤인 62세부터 연금을 타기 시작했다.
20년 가입한 ‘완전노령연금’수령자는 2008년 1월에 479명이 나왔고, 월 100만원 이상 받는 경우가 8100여명이다. 지난 9월 말엔 300만 번째 연금 수령자가 나왔다.
32 ROTC
1961년 16개 대학에 학도군사훈련단 설치
학군사관(ROTC) 제도는 미국에서 시작됐다. 미국 독립 직후인 1819년 버몬트주에 있는 한 대학에 군사학이 정규교과목으로 설치되면서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에는 현역 장교가 아니라 예비역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제도였다. '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를 직역하면 '예비역 장교 훈련단'이란 뜻이 된다. 즉, 예비역 장교를 육성한 뒤 곧바로 소집·해제해 민간인으로 생활하도록 하다가 유사시에 동원해 군사 작전에 투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1916년 윌슨 대통령이 국가방위법에 서명함으로써 정식으로 ROTC 제도가 출범했고, 1948년엔 정규 현역 장교 양성 제도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1년 4월 제58차 국무회의가 '학도군사훈련단(학훈단)' 설치안을 의결함에 따라 그해 5월 1일부로 ROTC 제도가 시행됐다. 서울대·고려대·성균관대·연세대·경희대·중앙대·동국대·한양대·건국대·경북대·부산대·동아대·전남대·전북대·조선대·충남대 등 전국 16개 종합대학에 학훈단이 창설됐다.
대학별로 대학성적과 체력·면접·신원조회 등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3175명을 후보생으로 선발했다. 이들은 그해 6월 1일 각 대학 학훈단 창단과 함께 대한민국의 첫 ROTC 후보생이 됐다.
후보생들은 대학 3~4학년 2년 동안 총 702시간의 교육·훈련을 받았다. 학교에서 받는 교육은 350시간, 여름방학 때 4주간에 걸친 입영훈련이 352시간이었다. 그해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 때 서울지역 ROTC 1기 후보생 1500명이 행진에 참여해 ROTC의 존재를 알렸다.<사진>
1963년 2월 서울 육군본부 광장에서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ROTC 1기 임관식이 열렸다. 이때 임관한 ROTC 1기생은 2642명이었다. 1기 중에서 장군까지 진급한 사람은 모두 10명이었다. 박세환 재향군인회장은 ROTC로서는 처음으로 대장까지 진급했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과 박재윤 전 아주대총장, 이충구 유닉스전자 회장,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박규직 경기학원 이사장, 이동화 서울신문 사장 등이 ROTC 1기 출신들이다. 학도군사훈련단이란 이름은 1971년 학생군사교육단으로 바뀌었다.
33 이산가족 상봉
1985년 9월 20일 남북 이산가족 65명 처음 만나
북한이 지난 10일 전격 제의한 추석맞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간 실무접촉이 지난 17일 오전 개성에서 열렸다. 상봉이 이뤄지면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두 번째가 된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첫 번째 상봉은 작년 9월 금강산에서 열렸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는 1985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 열린 제8차 적십자 본회담 3차 실무접촉에서 남북은 광복 40주년을 계기로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양측 고향 방문단이 9월 20일 오전 9시 30분 판문점을 동시에 통과해 3박4일 일정으로 평양과 서울을 교차 방문했다.
하지만 사전에 생사확인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남측 고향방문단 50명 가운데 35명만이 북측의 가족과 친척을 상봉했고, 북측 방문단도 50명 가운데 30명만<사진>(서울 워커일호텔에서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이 남측 가족을 만났다. 평양에서의 상봉 시간은 도합 4시간30분, 서울에서는 7시간30분이었다.
'고향 방문'이란 당초 취지와 달리 방문단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점, 일회성 행사에 그치고 만 점 등이 한계로 지적된다. 김성근 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은 "그러나 당시에 경험한 시행착오가 이후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진행하는 데 큰 교훈이 됐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부터 이뤄졌다.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2000년 8월 15일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이 이뤄졌고 지금까지 모두 17차례의 대면상봉과 7차례의 화상상봉이 이뤄졌다.
일각에선 1964년 도쿄 올림픽 당시 북한 육상선수 신금단씨와 남측의 아버지 신문준씨의 만남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아버지 신씨는 1951년 1·4 후퇴 때 헤어진 딸의 올림픽 참가 소식을 접하고 도쿄로 날아가 북한 선수단이 도쿄를 떠나기 직전 7분간 극적으로 딸을 만났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북측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회담 개최를 제의, 1985년 8번째 회담에서 성사됐다.
34 은행
上京한 대구 상인, 나귀 맡기고 첫 대출 받아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우리나라엔 구한말(舊韓末)에 설립된 조선상업은행과 조흥은행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47년 6월 조선상업은행은 지점이 39개, 조흥은행은 지점이 65개였다.
조선상업은행의 뿌리는 1899년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고종 황제의 황실 자금 3만원 등을 받아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위 사진>(서울 남대문로에 있던 대한천일은행 본점, 현재 우리은행 종로지점)이다. 대한천일은행은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뜻이다. 초대 행장은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대신 등을 역임한 민병석(閔丙奭)이었고, 2대 행장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었다. 하지만 1910년 한·일 강제병합 후 조선총독부가 대한천일은행의 이름을 조선상업은행으로 강제로 변경했다.
조흥은행은 1897년 개화 관료와 기업인 등이 설립한 한성은행<아래 사진>(서울 종로 광통교 인근에 있던 한성은행 본점)이 전신(前身)이다. 창립 청원서와 인가서가 존재하는 대한천일은행과 달리 한성은행은 설립 당시 청원서나 인가서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897년 만든 '한성은행 규칙', 독립신문에 낸 광고 등을 통해 한성은행이 1897년 설립됐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당시 한 대구 상인이 서울을 찾았다가 타고 온 당나귀를 담보로 맡기고 한성은행에서 대출받은 게 우리나라 최초의 대출이라고 한다.
한성은행은 1943년 동일은행과 합병하면서 '조선을 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조흥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국기네스협회는 1995년 한성은행이 국내 최고(最古)의 은행이라고 인증했다. 다만 한성은행은 1903년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됐는데, 이를 두고 대한천일은행의 후신인 우리은행이 "한성은행은 1년 정도 운영하다 명맥이 끊기고서 새로 만든 것"이라며 "대한천일은행이 창립 후 꾸준히 영업을 해 온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은행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어 최고(最古) 은행 자리를 두고 논란 중이다.
조선상업은행은 1950년 한국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조흥은행은 이름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이 두 은행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대출해 준 기업들이 부실화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상업은행은 공적 자금을 받으면서 1998년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이 된 뒤 2002년 우리은행으로 개명했다. 조흥은행은 2003년 신한금융지주가 인수했고, 2006년 신한은행과 통합되면서 이름이 사라졌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민간이 설립한 은행은 1959년 인가를 받은 서울은행이다. 이 은행은 서울신탁은행이 됐다가 2003년 하나은행에 합병됐다.
35 외무고시
외교통상부가 지난달 실시한 전문 계약직(5급 상당) 특채에서 유명환 외교부 장관의 딸이 온갖 특혜를 받고 합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외교관을 뽑는 방식이 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외무고시는 고급 외교 전문가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다. 과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선망의 대상이던 외교관을 고시제도를 통해 선발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0년 3월이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8월 12일 국가공무원법이 제정돼 행정과·사법과로 분류된 고등고시가 탄생했다. 행정과는 제1부(일반행정), 제2부(재정), 제3부(외무)로 나뉘었다.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에는 500여명이 응시해 외무에 김학렬·전상진, 일반행정에 민유동·양용식, 재정에 이철승씨 등 모두 5명이 뽑혔다.
외무직으로 뽑힌 두 명 중 전상진(82·사진)씨는 6·25전쟁 중인 1950년 11월 첫 직업외교관으로 외무부에 들어가 32년 7개월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다. 주 카메룬·페루·말레이시아·UN 대사 등을 역임하고 초대 외무부 차관보를 거쳤다.
그러나 당시 외무직으로 뽑혔던 김학렬씨는 미국 유학 뒤 재무부로 들어가 1969~1972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
외무직 2회는 3명, 3회는 1명, 4회는 4명이 뽑혔다. 고등고시 행정과는 1953년부터 제4부(교육행정)가 추가됐다.
이후 1968년 3월 31일에는 제1회 '외무고시'가 치러졌다. 고등고시 행정과에서 외무직이 아예 분리돼 '외무고시'라는 이름으로 신설된 것이다. 1968년 치러진 제1회 외무고시는 1818명이 응시해 35명이 합격했다.
당시 합격자는 김삼훈(전 주 UN 대사), 김석우(전 통일원 차관), 박부열(전 주 마이애미 총영사), 신성오(전 외교부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씨 등이 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과 최성홍 전 외교부 장관(제31대)은 제3회이고,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은 제7회이다. 지난 6월 제44회 외무고시에는 35명의 합격자가 배출됐다.
외교부는 1968년부터 시행된 외무고시를 폐지하고 2013년부터 1단계 외교관 선발시험(서류전형→필기시험→심층면접)을 치른 뒤 '외교아카데미'에서 1년간 교육시켜 성적우수자를 외교관으로 뽑겠다는 새 '외교관 선발 제도 시안'을 지난 5월 발표했다.
36 기상관측
1904년 목포측후소, 근대적 기상관측 시작
제7호 태풍 '곤파스'가 2일 수도권을 비롯한 중부지방을 관통할 것으로 예보됐다. 곤파스가 언제 어디서 발생했고, 바람의 세기와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같은 상세한 기상정보를, 기상청은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해 예보에 활용하고 있다. 지난 6월 발사된 우리나라 최초 기상위성인 '천리안'이 고도 3만6000㎞ 상공에서 태풍의 영상 데이터를 수시로 보내오고, 초당 200조(兆)회의 연산능력을 갖춘 수퍼컴퓨터 등이 구축된 덕이다.
기상청은 우리나라에서 과학적 방식의 근대 기상관측이 시작된 때를 대한제국 시절인 1904년으로 잡고 있다. 물론 서양보다 200여년 앞서 세계 최초로 측우기(測雨器)를 발명(1441년)하는 등 우리나라의 기상관측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부터 기상관측을 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등에 기록돼 있고, 고려시대 서운관(書雲觀), 조선시대 관상감(觀象監) 같은 기구에서 기상관측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근대기상 100년사'(2004년 기상청 발간)에 따르면, 1904년 3월 25일 전남 목포에 처음으로 측후소〈사진 왼쪽〉가 설치돼 기온·강수량·날씨 등을 정기적으로 관측한 데 이어, 부산·인천·원산 등지에도 잇따라 측후소가 세워져 전국적인 관측망이 갖춰졌다. 이들 측후소에선 국제적 규범에 따라 기압·기온 같은 각 기상요소에 대한 관측·예보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손으로 그린 초보 수준의 일기도〈사진 오른쪽·1906년 제작된 초창기의 일기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1905년엔 인천측후소에서 지진관측이, 1915년엔 해양 기상관측이 처음으로 실시됐고, 1933년엔 신문에 일기도가 게재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군의 지원으로 고공기상관측장비를 비롯한 120여종의 현대식 관측기기를 갖춘 데 이어, 기상레이더 관측(1968년), 수퍼컴퓨터 1호기(1999년) 및 3호기 도입과 천리안 발사(2010년) 등으로 우리나라 기상기술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37 백화점
1930년 日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 개점
1930년 10월 24일 서울 충무로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지상 4층 지하 1층의 근대식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일본 미쓰코시(三越)백화점 경성점. 1920년대 경성(京城)에 진출해 있던 히라타(平田·지금의 충무로 1가 대연각빌딩 자리)상점이 1926년 백화점으로 전환한 것을 우리나라 백화점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최초의 근대적 백화점은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 미쓰코시백화점은 1906년 이 자리에 경성출장소 격인 '미쓰코시 오복점(吳服店·옷감과 의류를 파는 상점)'을 개점했고, 1929년 이 오복점을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으로 승격시켰다. 이듬해 신관을 지어 근대적 백화점의 모습을 갖춘 뒤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으로 독립했던 것이다.
개점 당시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은 대지 2410㎡(730평), 연건평 7600㎡(2300평)에 종업원 360명을 거느린, 일본 본토를 제외한 한국과 만주지역 최대 백화점이었다. 주요 고객은 당시 남촌(지금의 충무로)에 사는 일본인들이었지만, 북촌(지금의 종로)의 조선인 부호 손님들도 늘어났다.
지하에는 주방용품, 식료품, 일반 잡화 코너와 간이식당이 있었고, 1층에는 약국과 여행안내소, 선물·화장품·신발·고급 식료품 매장이 있었다. 2·3층은 남녀 맞춤복·기성복 매장, 4층은 귀금속·가구매장, 대형홀, 커피숍, 대형식당, 옥상공원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철저한 정찰제·반품(返品) 보장·상품권 발매 등 근대적인 판매·관리 기법을 도입, 유통체제와 소비문화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 일본 미쓰코시(三越)백화점 경성점<왼쪽 사진> / 화신백화점<오른쪽 사진>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은 1931년 서울 종로 공평동,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 들어선 화신백화점이다. 귀금속 전문점으로 출발한 화신상회를 박흥식이 인수해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백화점을 열었다. 1935년 큰 화재가 난 뒤, 1937년 11월 11일 지하 1층~지상 6층의, 당시로써는 '초고층 건물'로 신축해 다시 문을 열었다. 1980년 운영회사인 화신산업과 계열회사가 모두 해체되면서 문을 닫았다. 1984년에는 건물도 헐렸다.
미쓰코시 경성점은 해방 직후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해 영업을 했으나, 1962년 동방생명(지금의 삼성생명)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1963년 동방생명을 삼성그룹이 인수한 뒤 그해 11월 12일 '신세계'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 롯데영플라자가 된 미도파백화점은 일제강점기 때 조지야백화점의 후신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한국무역진흥을 위한 국산품 장려관으로 이용되다가 1971년 대농그룹이 인수해 미도파백화점이 됐다. 그러나 대농그룹이 해체되고 2002년 9월 롯데그룹에 인수됐다.
현재 백화점 업계 매출 순위 2위인 현대백화점은 1977년 8월 울산에서 문을 연 현대쇼핑센터(지금의 현대백화점 울산동구점)로 출발했고, 업계 1위인 롯데백화점은 1979년 11월 서울 소공동에서 지금의 본점을 열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38 전차
87년 K-1 전차 양산, '88 전차'로 명명
북한이 최근 조선중앙TV를 통해 그동안 존재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던 최신형 전차 '폭풍호'를 공개했다. 북한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소련으로부터 T-62 전차를 도입해 전력화했고, 이 전차를 모방해서 '천마호'라는 전차를 개발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천마호를 개량하는 신형 전차 개발사업을 시작했고, 2002년에 첫 생산을 시작한 것이 바로 '폭풍호'이다. 폭풍호는 125㎜ 또는 115㎜ 신형 주포를 탑재하고 한·미 연합군의 공격용 헬기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 12.7㎜ 기관총보다 강력한 14.5㎜ 소련제 KPV 대공 기관총을 장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군이 처음으로 자체 개발해 일선 부대에 배치한 전차는 K-1 전차<왼쪽 사진>이다. 1987년 9월 18일 중부전선 한 부대에서 열린 명명식에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이 전차에 '88전차'라는 이름을 붙였다. 88서울올림픽에 맞춰 생산된 전차라는 뜻이었다.
6·25전쟁 당시 소련제 최신 T-34 전차 200여대를 앞세운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던 한국군은 1970년대까지 미국제 전차에 일방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다 북한이 115㎜ 주포를 탑재한 T-62 전차를 대량 확보할 것이란 정보가 입수되자 이에 맞설 신형전차의 도입이 절실해졌다. 한국 육군은 처음에는 미국측에 M-60급 전차의 공여와 국내 양산을 요구했지만 무산되자 1970년대 중반부터 자체 개발을 시작했다.
K-1 전차는 독일의 레오파드-2, 미국의 M-1, 영국의 챌린저에 이어 세계 네 번째의 3세대 전차로 개발됐다. 김용희 육군기계화학교 무기체계연구관은 "이전 세대 전차들은 단일한 강판(단일 주물강)을 사용한 데 비해 3세대 전차들은 여러 겹의 강판을 특수용접해 붙이고 그 사이에 고강도의 복합물질을 넣는 '복합장갑'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들어 한국군은 K-1 전차를 개량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주포를 105㎜ 강선포에서 M256 120㎜ 활강포로 바꾸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오랜 연구 끝에 개발한 한국형 복합장갑을 채용했다. 이름도 K-1A1 전차라고 붙였다. M256 활강포의 유효 사정거리는 4000m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들어 가장 주목받는 한국형 전차는 '흑표'라는 이름을 가진 차기전차(X-K2)<오른쪽 사진>이다. 현존하는 세계 전차 중에서 최정상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날아오는 적의 대전차(對戰車) 미사일을 교란시켜 빗나가게 할 수 있고, 공중에서 전차를 위협하는 공격용 헬기를 직접 쏘아 맞힐 수도 있다. 120㎜ 활강포와 최신형 전차 포탄으로 북한은 물론 미국·유럽·러시아 등 선진국 최신형 주력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다. 대당 83억원 정도인 흑표는 오는 2012년부터 양산돼 일선에 배치될 예정이며, 2008년 7월에는 터키와 총 4억달러 규모의 전차개발 기술협력 계약이 체결됐다.
39 천연기념물
1호는 대구 측백수림, 獨島는 336호로 지정
대구광역시 시내 중심가에서 동북쪽으로 팔공산을 향해 나가다 보면 경부고속도로 도동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울창한 측백나무 숲<사진>을 만나게 된다.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산 180번지 일대의 전체 면적 3만5000㎡를 웃도는 절벽에 100여 그루의 측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이 1962년 12월 3일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대구 도동 측백수림'이다.
도동 측백나무 숲은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이 '대구 10경'에 포함할 정도로 주변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원래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곳을 비롯해 경상북도 영양, 충청북도 단양 등의 여러 곳에서 자생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한국을 원산지로 인정하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이 천연기념물 '1호'가 된 이유는 뭘까. 천연기념물제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됐다. 천연기념물 관련 법률이 처음 시행된 1933년 16건이 지정되는 등 일제강점기 때만 154건이 지정됐다. 이때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이 1호가 됐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이 번호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있는 측백나무 군락지로 식물 유전학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1호로 지정된 것이다.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조운연 사무관은 "국보와 보물에 붙은 번호와 마찬가지로 천연기념물 번호는 지정된 순서, 일종의 관리번호에 불과하다"며 "번호가 해당 기념물의 서열이나 중요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천연기념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의 번호는 그 문화재가 지정 해제되더라도 그 번호에 다른 문화재를 지정하지 않고 영구결번 처리한다. 현재 천연기념물은 516호까지 지정됐는데 현존하는 것은 442건뿐이다. 지정 대상 중 동·식물이 많아 태풍, 전염병 등 각종 재해로 천연기념물이 죽거나 이동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기념물지정에서 해제되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2호인 '합천 백조 도래지'가 그런 경우다. 1962년 2호로 지정됐으나 백조가 날아오지 않아 1973년 7월 19일 지정이 해제됐다. 3호 평안남도 맹산의 방풍 수림 '만주흑송수림'은 북한에 있어서 1962년 지정과 동시에 해제됐다.
천연기념물 4~9호는 모두 백송(白松)인데, 현재는 8호와 9호만 남아있다. 서울 통의동 백송(4호)은 신목(神木)으로 불리며 국민의 사랑을 받았는데 1990년 폭우 때문에 쓰러졌다. 문화재관리국은 이 나무를 되살리기 위해 대책회의까지 열었다. 서울시도 회생추진위원회를 구성, 주사를 놓고 지면을 담요로 덮어주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통의동 백송은 쓰러진 지 2년 10개월여 만에 600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통의동 백송에 이어 최고령 백송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8호인 서울 종로구 재동 백송(수령 600년 추정)이다. 독도도 천연기념물이다. 1982년 11월 16일 천연기념물 336호 '독도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생태 환경 자체가 보존 대상으로 보호되고 있다.
41 특별검사
99년 ‘옷로비’ 등 2개 특검팀 동시 발족
1999년 10월 19일 두 개의 특별검사법이 나란히 국회를 통과했다.
하나는 옷로비 특검팀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폐공사 파업유도 특검팀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특검팀은 이렇게 두 팀이 동시에 탄생했다. 두 팀은 두 달간 수사를 벌인 후 사흘 간격으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해체했다.
옷로비 사건을 맡은 최병모 특검<왼쪽 사진>은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김태정 당시 법무부 장관의 부인 연정희씨를 상대로 로비를 시도한 정황을 밝혀냈다.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특검팀은 진형구 당시 대검 공안부장이 '우리가 조폐공사 파업을 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취중 발언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구성됐다. 이 사건을 맡은 강원일 특검<오른쪽 사진>은 진형구 공안부장의 단독 행위라는 검찰 수사 결과를 뒤집고 강희복 전 조폐공사 사장을 구속했다.
특검제란 권력형 비리나 수사기관이 연루된 사건 등에서 검찰 대신 별도의 특별검사를 임명해 진상을 수사하게 하는 제도다. 특검이 처음 도입될 때는 법무부 장관의 부인과 검찰 고위간부가 연루된 사건인 만큼 검찰에 수사를 맡길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전년도인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을 수사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가 각광을 받은 것도 계기가 됐다.
가장 많은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받는 특검팀은 2001년 세 번째로 출범한 '이용호 게이트' 특검팀이다. 차정일 특검은 이용호 G&C 회장의 횡령 및 주가조작 혐의를 바탕으로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의 동생,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 등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을 줄줄이 구속했다. 여기에 김 전 대통령의 아들 홍업씨의 비리, 신 총장과 김대웅 당시 광주고검장의 수사 내용 유출 정황도 밝혀내 이들의 사법처리를 이끌어냈다.
특검이 늘 성과를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을 파헤치기 위해 2003년 구성된 김진흥 특검팀은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4억9100만원 불법자금 수수 혐의만 밝히고 문을 닫았다. 2005년 러시아 유전개발 의혹 특검은 성과를 거의 내놓지 못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특검 무용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2003년 대북송검 특검팀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수사기간 연장을 거부해 수사가 중단됐고, 특검 수사 후 정몽헌 회장이 자살해 특검팀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2008년 삼성비리 특검은 이건희 회장 등 삼성의 고위 간부 10명을 불구속 기소했고, 삼성 특검과 동시에 출범한 BBK 특검팀은 이명박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특검은 한 번 할 때마다 대체로 20억원대의 예산이 들어간다. 특검은 고등검사장, 특검보는 검사장으로 예우한다. 특검이 처음 도입됐을 때는 특검과 특검보 각 한 명 체제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규모가 늘어나고 있다. 검사 향응접대의혹을 수사 중인 민경식 특검팀은 특검보 3명에 파견검사 10명, 특별수사관 11명, 파견공무원 42명 등 67명으로 구성됐다.
42.정무장관
독립운동가 지청천·이윤영 2명 임명
대한민국 정무장관(현재의 특임장관에 해당) 1호는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이 무임소(無任所) 국무위원에 임명한 지청천 장군<왼쪽 사진·전쟁 기념관에 세워진 흉상>과 이윤영<오른쪽 사진> 전 국무총리 서리(署理)다. 대통령과, 대통령의 명(命)을 받아 국무총리가 지정하는 사무를 수행하는 정무장관은 전두환 정부 출범 전까지는 ‘무임소 국무위원 또는 장관’이란 직제로 불렸다.
일제 시절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 장군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등으로 항일전을 수행하다 광복 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이 됐다. 이 전 총리 서리는 3·1운동 때 독립선언 강연회를 갖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정부에서 총리 서리를 지냈다. 두 사람은 1948년 8월 12일 무임소 국무위원에 취임했고, 사흘 뒤 대한민국 정부수립선포식과 함께 직무를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무임소 국무위원들에게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한 ‘정무(政務)’ 역할을 주문했다. 실제 지청천·이윤영 위원은 제헌의회 의석 200석 중 이 대통령이 속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에 불과하고 무소속이 85석(42.5%)이나 돼 정파적 분열이 심했던 상황에서 여야 정치권과 정부 간의 소통과 조율에 주력했다. 정무장관이 ‘대통령·총리와 호흡을 같이하는 정치장관’(1997년 12월 정무장관실이 펴낸 정무장관실 연혁)으로 불리는 것은 이처럼 대통령의 정치적 메시지를 갖고 정치권과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국가공무원정원령을 통해 명칭을 ‘무임소장관’으로 변경하고 정원을 3명(정무 1명, 경제 2명)으로 규정하는 등 처음으로 무임소장관직을 법제화했다. 조시형 전 농림부장관이 첫 정무 파트 무임소장관을 맡았고 이후 김홍식·윤주영·김윤기·김원태·길재호·오치성·이병희·신동식·김용태·김좌겸·최광수씨 등이 무임소장관을 맡았다.
정무장관이란 명칭은 전두환 정부가 1981년 4월 무임소장관을 폐지하면서 신설됐다. 정무장관이란 정식 직함을 쓴 사람은 정종택씨였고, 노태우 전 대통령도 81년 7월부터 82년 3월까지 정무장관을 지냈다. 이처럼 정무장관에는 정권 실세(實勢)가 주로 임명됐고, 이후 정부에서도 이런 흐름은 계속됐다.
전두환·노태우 정부에서 ‘킹메이커’ 역할을 했던 김윤환 전 신한국당 대표는 세 차례 정무장관을 지냈고, 이종찬·박철언·김동영·최형우 등 각 정파의 실세들도 정무장관을 역임했다. 김덕룡 현 청와대 국민통합특보도 김영삼 정부 초대 정무장관을 지냈고 서청원·김영구·신경식·홍사덕씨 등이 정무장관을 지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폐지된 정무장관직은 2008년 현 정부 출범과 함께 ‘특임장관’이란 이름으로 부활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특임장관을 공석으로 두다 작년 9월 개각에서 대선 경선후보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을 초대 특임장관에 임명했고 지난 8·8 개각에선 현 정권의 2인자로 불리는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을 2대 특임장관에 내정했다.
43 인간문화재
'종묘제례악' 감독·해금 연주자 등 20명
'한국의 혼'이라 할 무형 문화유산이 문화재로 처음 지정된 것은 1964년이었다. 일제 식민통치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맥이 끊기다시피한 무형의 전통문화를 보존·계승하자는 취지였다. 1962년 5월 8일 열린 문화재 분과위원회는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전제한 뒤 대상 선정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국보·보물 등 유형문화재와 함께 '형태가 없는(無形) 것'도 문화재로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2년여에 걸친 수차례의 논의와 조사 작업 끝에 1964년 12월 7일, 제1호 종묘제례악<사진>,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 제3호 남사당놀이(원래 꼭두각시놀음으로 지정됐다가 1988년에 명칭을 변경)가 한꺼번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이때 해당 문화재의 기·예능을 보유한 사람들을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했는데, 이 '보유자'들을 흔히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라고 부른다.
'제1호'의 영예를 안게 된 종묘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으로, 조선시대의 기악 연주와 노래·춤이 어우러진 궁중음악의 정수이다. 1964년 12월 당시 성경린(감독)을 비롯해 김기수(집사 악장), 이강덕(편경), 김만흥(해금), 김태섭(태평소) 등 20명의 보유자가 지정됐다. 대부분 이왕직아악부양성소 혹은 국악사양성소를 졸업하고 국립국악원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2호로 지정된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중부지방에 전승되어온 산대놀이의 한 분파로, 노재영 등 16명이 보유자로 인정됐다. 3호 남사당놀이는 조선시대 유랑 연예인 집단인 남사당의 연희(演戱)로 2명이 보유자로 지정됐다.
하지만 1971년 '최초의 인간문화재'들 중 13명은 보유자 인정이 해제됐다. 1964년 지정 이후 바뀐 문화재보호법에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30세 미만이면 그 자격이 해제된다"는 규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1호인 종묘제례악 보유자 20명 중 11명이 해제돼 9명만 남았고, 이후 1968년 김천흥(해금·일무)이 추가 지정됐다. 2호 양주별산대놀이 보유자 16명 중 2명도 '나이 미달' 사유로 해제됐다.
이후 신규지정·통합·지정해지 과정을 거쳐 현재 125개 종목(세부종목 포함)에서 188명의 인간문화재가 인정된 상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 안숙선,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요리 기능 보유자인 한복려, 42호 악기장 고흥곤, 74호 대목장 신응수, 108호 목조각장 박찬수 등이 있다. 인간문화재가 사망할 때에는 전승자(傳承者) 중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청장이 지정하는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
44 국립공원
'6·25 지뢰' 설악산 대신 지리산 선정
국민의 쉼터이자 여가 장소인 국립공원이 처음 지정된 것은 1967년이었다. 그해 3월 정부가 제안한 '공원법' 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박정희 정부는 민·관 합동으로 지리산의 자연환경과 생태 등에 대한 조사를 벌여 1967년 12월 29일 지리산을 '제1호 국립공원'<사진>(국립공원 지정 전인 1965년 당시 지리산 등산 안내도)으로 지정했다.
'제1호'의 영예가 지리산에 돌아간 것은 6·25전쟁과 관련돼 있다. 당시 공원법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대표할 만한 수려한 자연경관지'를 국립공원 지정의 첫째 요건으로 규정했다. 이 기준에 따라 남한에서 풍광이 으뜸가는 것으로 꼽혀온 설악산이 우선 지정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6·25때 격전지였던 설악산에는 군(軍)이 주둔하고 있었던 데다, 전쟁 당시 묻은 포탄과 지뢰가 곳곳에 깔려 국립공원 지정을 위해 필요했던 사전 환경조사 활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국방부가 "지뢰 등을 제거하려면 많은 특수 전문인력이 필요하고 시일도 상당히 걸릴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아 지리산이 제1호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설악산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70년 3월 24일 제5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 국립공원 지정 전인 1965년 당시 지리산 등산 안내도. /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일제강점기에도 국립공원 지정 논의가 있었다. 1935년 일본인 학자 다무라(田村剛)가 백두산·금강산의 자연환경을 조사한 뒤 일본 정부에 "금강산을 국립공원으로 우선 지정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등으로 무산됐다.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은 미국 와이오밍주 등에 걸쳐 있는 옐로스톤(Yellowstone) 국립공원이다. 미국은 수십만년 전 화산이 폭발하면서 이뤄진 화산 고원지대인 옐로스톤을 18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국립공원은 모든 국민의 복리와 즐거움을 위한 공공(公共)의 공원이며 위락지"라고 선언했다. 이렇게 태동한 국립공원의 정신은 전 세계적으로 공유됐고,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년 한 해 동안 연인원 3819만명이 넘는 탐방객이 국립공원을 찾았을 정도로, 국민들 누구나 이용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국립공원 지정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사찰을 비롯한 사유(私有) 재산 이용 제한에 대한 반발 등이 컸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펴낸 '국립공원 30년사'에는 "당시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스님이 건설부 청사에 와서 칼부림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고, 경주 불국사도 주민들이 며칠 동안 집단으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국립공원은 1988년 지정된 월출산까지 20곳이다. 정부는 2012년까지 국립공원을 2~3곳 추가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45 청와대 대변인
'성북동 비둘기' 시인 김광섭씨
대통령의 '입' 역할을 하는 청와대 대변인은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1977년 작고)씨에서 비롯된다. 김씨는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의 첫 공보비서관으로 그해 8월 임명됐다.
시인으로 일제 식민지 때 교육자와 언론인으로 활동한 그는 광복 후 미군정청 공보국장을 하다 발탁됐다. 당시 대통령비서관 직제에는 비서관장(현재의 대통령실장에 해당) 밑에 정무 3명, 공보·서무·문서 각 1명씩 등 8명의 비서관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 사무분담 규정(안)에 따르면, 공보비서관은 공보에 관한 사항뿐 아니라 대통령에게 접수된 진정서·건의서 검토, 사상대책과 정보수집 등 민정(民情)에 관한 사항까지 맡았다. 공보비서관 취임 직전인 1948년 8월 4일 이 대통령의 첫 조각(組閣)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김 전 비서관은 유신(維新)체제가 등장한 이후인 1974년 '대통령'이란 시를 써 우회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비판하기도 했다.<사진>(1974년 서울 성북동 자택 서재에서 집필 중인 시인 김광섭씨)
청와대 대변인이란 직함을 처음 쓴 이는 윤보선 대통령 때 신문기자 출신의 김준하(80)씨다. 1960년 4·19혁명 이후 그해 8월 취임한 윤 대통령은 대통령 집무·거주 공간의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꾸고 국무원령 제66호로 대통령비서실 직제를 제정하면서 공보비서관과는 별도로 대변인 직제를 신설했다.
김씨는 윤 전 대통령이 5·16으로 사실상 실권(失權)하고 62년 3월 사임하게 되자 대통령 하야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15일 윤 전 대통령 20주기 추모식 강연에서 윤 전 대통령이 5·16을 주도한 군부에 협력했다는 설(說)은 오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정희 정부의 첫 청와대 대변인은 군인 출신인 이후락(2009년 작고)씨였다. 5·16후 구성된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했던 그는 1963년 12월 민정(民政) 출범과 함께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됐으나 마땅한 대변인을 찾지 못해 4달여간 비서실장과 대변인을 겸직했다.
그는 이후 주일대사·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1970년대 가장 오랫동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이는 1971년 7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4년5개월간 역임한 김성진(2009년 작고)씨로 박 전 대통령의 '입'으로 불렸다. 그는 이후 정부 대변인격인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임명돼 10·26사태 직후 박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직접 발표했다.
최규하 대통령 때는 언론인이자 소설가 출신인 서기원(2005년 작고)씨가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고, 전두환·노태우 정부 때는 4·19혁명 당시 서울대 시위를 주도한 대학 동기생인 황선필·이수정씨가 각각 청와대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에선 2002년 박선숙(현 민주당 의원)씨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청와대 대변인에 발탁됐다. 노무현 정부 때도 첫 대변인에 송경희씨가 임명돼 2대 연속 여성 대변인 기록을 낳았다.
현 정부 들어서는 신문기자 출신인 이동관씨가 초대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고 이후 홍보수석 직제가 신설되면서 산하에 방송기자 출신의 박선규·김은혜 2인 대변인 체제를 도입했다가 최근 17대 국회의원 출신의 김희정(39)씨가 대변인에 임명됐다
46 철도
한강 홍수로 경인선 개통 1년 늦어져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경인선이다. 1897년 인천 우각현(牛角峴)에서 공사를 시작해 1899년 제물포~노량진 노선을, 1900년 노량진~서대문 노선을 완공했다. 1896년(고종 33년) 미국인 J.R.모스가 부설권을 얻어 1897년 3월 29일 공사를 시작했으나 자금부족으로 중단했다.
그 후 중단된 경인선 부설권을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인철도회사가 인수해 1899년 4월부터 다시 공사에 들어가 그 해 9월 18일 제물포∼노량진 33.2km 구간을 개통(시험 운행중인 경인선 기차)했다.
당시 역사적인 경인선 기공식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현재 인천 도원역 인근에 있다. 당초 1899년 서대문까지 철로를 놓기로 했으나 한강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한강철교 공사를 제때 마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를 준공하고 7월 8일에 노량진∼서대문 노선까지 완전 개통했다. 당시 이 구간을 기차로 달리는 데 걸린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지금과 비교하면 느린 속도지만 서울과 인천을 오가려면 반나절을 걸어야 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경인선 개통은 '천지가 진동하는' 대사건이었다.
▲ 제물포-노량진역 구간 개통(왼쪽사진)과 영암선 개통비(오른쪽사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놓은 철도는 영암선(榮巖線)이다. 경상북도 영주와 강원도 철암 사이를 잇는 산업 철도로 1956년 1월 개통됐다. 당시는 산업발전의 기본인 지하자원의 개발과 수송을 위해 산업철도 건설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런 목적으로 처음 계획된 게 영암선(86.4km)으로 1949년 4월 8일 착공해 1950년 3월 1일 영주~내성 간 14.1㎞ 구간을 개통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면서 공사는 중단됐고, 휴전 후인 1953년 9월 28일 재착공해 1956년 1월 전 구간을 개통했다. 지금은 '영암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지만 1949년 착공 당시에는 해방 이후 최대 국책사업으로 불렸다.
태백산맥을 동서로 가로질러 건설한 영암선은 순수 우리 기술진에 의해 만들어졌다. 험준한 지형 때문에 터널과 교량이 많고 높낮이가 심한 것이 특징이다. 춘양~현동 간 임기 제1터널(971m), 춘양터널(698m)을 비롯해 33개의 터널은 총 길이 8312m에 달했다. 영암선 전체 구간의 10분의 1이 터널이었다. 교량도 55개로 총 길이가 2843m였다. 공사가 가장 어려웠던 경북 봉화 승부역 인근에 '영암선 개통비'를 세웠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받아 새겼다. 영암선은 그 후 동해북부선, 철암선을 하나로 연결해 1963년 5월 17일 영동선(嶺東線)으로 이름을 바꿨다.
첫 고속철도인 경부고속철도는 2004년 4월 1일 서울에서 대구까지 1단계 구간을 개통했다. 경부선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1980년대 말부터 고속철 건설을 추진했고 1994년 6월 독일의 이체(ICE), 프랑스의 테제베(TGV) 중에서 테제베를 차종으로 채택했다. 1단계 사업에 든 비용은 12조7377억원이나 됐다. 2002년에 착공한 2단계 사업은 대구~부산 구간과 대전·대구 시내 통과 구간을 신설하는 사업으로, 오는 11월 완공될 예정이다.
47 국회의장
이승만 초대 의장 국호 헌법제정 주도
대한민국 국회의 초대 의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보다 먼저 선출돼 임기를 시작했다.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이 1948년 5월 31일 첫 국회의장에 당선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7월 24일까지 의장직을 수행했다. 그 해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돼 24일 대통령에 취임<사진>(초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하면서 국회의장직을 사임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통해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으로부터 188표를 얻어 초대 국회의장으로 당선됐다. 95%에 가까운 지지율로 의장에 당선된 것은 당시 “유일한 대통령 후보”라 불릴 만큼 그의 정치적 위상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국회의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국호(國號)를 정하고 헌법 제정을 주도했다. 당시 국내에선 ‘대한민국’ 외에 ‘한국(韓國)’ ‘조선민주공화국’ ‘고려공화국’ 등 다양한 예비 국호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 전 대통령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했고, 국회는 1948년 6월 3일 국호를 공식 채택했다.
그는 초대 국회의장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의 뼈대를 만든 주역이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국회를 단원제(單院制)로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관철했다. 당시 유력 정치인이었던 유진오(兪鎭午) 박사가 주도한 헌법 초안에는 양원제(兩院制) 국회로 돼 있었다. 선거로 뽑히는 민의원(民議院)을 견제하기 위해 참의원(參議院)을 병설한다는 명분이었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우리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비용을 늘릴 필요가 없고 상하 양원(兩院)을 선출해 봐야 그 수준이 비슷해 아무런 소용이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당시 국회 헌법기초위원회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단원제를 선택했다. 지금의 대통령중심제도 이 전 대통령이 국회의장으로 있을 때 골격이 잡혔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국회는 국가권력을 입법·행정·사법부로 나누는 ‘3권 분립’에는 큰 이견이 없었지만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관계를 영국식 내각책임제로 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식 대통령제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할 경우 정당끼리 싸우느라 국가 운영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대통령제야말로 민중의 의사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제도”라며 대통령제를 옹호했다. 논란 끝에 내각책임제 주장은 밀려나고 대통령제로 귀결됐다. 이 전 대통령의 공과를 두고 이런저런 논란도 없지 않지만 그가 초대 국회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헌법과 국가체제의 틀을 세웠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이 전 대통령이 사임한 뒤 제2대 국회의장은 해공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맡았다. 이어 제3대 이기붕 정문흠 윤성순 의장 등을 거쳐 현재 18대 후반기 국회는 박희태 의장이 이끌고 있다.
48 선풍기
국산 선풍기 1호 전력 사정으로 단종
1960년 3월 여름을 서너 달 앞두고 우리나라 자체 기술로 만든 최초의 선풍기가 우리 국민에게 선을 보였다. 금성사(현 LG전자)가 내놓은 'D-301'<왼쪽 사진>이었다. 금성사는 금형과 모터를 개발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선풍기 설계에 착수한 지 2개월 만에 첫 선풍기를 내는 데 성공했다.
그전까지 국내에 나와 있던 선풍기의 대부분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등이 만든 외제 전기 선풍기였다. 첫 국산 선풍기 'D-301'은 알루미늄 날개를 사용했고 날씬한 모양을 내기 위해 쇠파이프를 휘어 몸통을 만들었다.
1년 후인 61년 3월 금성사는 'D-301'을 보완한 'D-302'를 출시했다. 이 제품은 날개와 기본 받침대를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모터와 변속기를 사용해 성능을 향상시켰다.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3단 버튼도 부착했다.
하지만 전력 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정부는 전력 소비량이 많다는 이유로 선풍기 생산 중단 결정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D-302'는 나온 지 2년여 만인 63년에 단종됐다.
금성사는 1964년에 선풍기 머리 각도를 조절할 수 있고 타이머 기능을 장착한 새 모델을 개발해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비슷한 시기에 동양정밀공업(주) 등도 선풍기를 내놓았다. 이렇게 한동안 선풍기시장을 점유해온 LG전자는 2005년 고부가가치산업 위주로 사업구조를 바꾸면서 선풍기사업을 중단했다. 현재는 한일, 신일, 쿠쿠 등의 업체가 선풍기를 만들고 있다.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와 달리 집안 공기 자체를 냉각시켜 냉방을 하는 국내 최초의 가정용 에어컨은 1968년에 등장했다. 역시 금성사가 만든 'GA-111'<오른쪽 사진>. 창문형 룸에어컨으로 개발된 'GA-111'은 자동 온도조절장치와 회전식 방향조절기를 갖췄다.
하지만 이 제품은 미국의 전자회사인 제너럴일렉트릭(GE)사로부터 주요 부품을 공급받아 조립만 해 만든 것이었다. LG전자는 1967년 GE와 1978년까지 기술 계약을 체결하고 에어컨 핵심 부품인 냉각코일 기술을 이전받아 열교환기 설비를 갖췄다. LG전자는 1980년대 말부터 주요 부품을 자체 기술로 생산하고 있다.
국내 에어컨시장에서 국산 제품이 늘어난 것은 삼성전자가 1974년부터 가정용 국산 에어컨을 만들기 시작하면서였다. 지금은 대우일렉트로닉스와 위니아 등도 에어컨을 출시하고 있다.
LG전자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8년 연속 세계 에어컨시장 점유율 1위(판매 대수 기준)에 올랐다. LG전자는 2008년 11월에 에어컨업계 최초로 누적 판매 1억대 돌파라는 기록도 세웠다.
LG전자 관계자는 "2008년 이후에는 중국 가전업체들이 내놓는 저렴한 제품에 밀려 판매 대수로 1위를 하고 있지 못하다"며 "앞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상업용 에어컨 분야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세계 에어컨시장(가정용+상업용 등)에서 LG전자와 삼성전자는 지난해 각각 4조4600억원과 2조원 정도의 매출을 올려 3~5위권을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