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이야기16/ 2020.11.13 과학자 72명 이름을 새긴 에펠탑이 주는 메시지 - 2021.09.27 1미터의 의미
과학 이야기16/ 2020 - 2021
2020.11.13 과학자 72명 이름을 새긴 에펠탑이 주는 메시지
에펠탑 1층 각 방향에 새겨진 과학자‧수학자‧공학자
상당수가 엘리트 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
프랑스 혁명 직후엔 포용보다 ‘우리 편 챙기기’ 몰두
실력으로만 선발하는 공교육으로 ‘편 가르기’ 탈피
혼란 딛고 과학자 이름 새긴 에펠탑이 주는 메시지
과학은 이념이 아니라 경계 허문 인재풀에서 발전한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에펠탑. 늘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곳에는 72명의 프랑스 수학자, 과학자, 엔지니어들의 이름이 금빛으로 새겨져 있다. 수학자로는 라그랑주와 코시, 과학자로는 라부아지에와 라플라스, 엔지니어로는 카르노와 코리올리 등 교과서에 등장하는 쟁쟁한 이름들이다. 주목할 점은 이들 상당수가 특정 학교 출신이거나 관련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 학교가 바로 프랑스 혁명이 탄생시킨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로, 공교육이 어떻게 엘리트를 키워내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혁명이 선택한 엘리트 교육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과학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급진파들은 국왕을 투옥하고 재판에 회부하며 공화국을 선포했다. ‘좌파(left wing)’와 ‘우파(right wing)’라는 용어는 이 재판을 둘러싼 논쟁에서 출발한다. 국왕 처형에 찬성하는 급진파들은 의회의 왼쪽 자리에 앉았기에 ‘좌파’가 되었고, 반대하는 온건파는 오른쪽에 앉았기에 ‘우파’가 되었다. 과학자들조차 좌우로 나뉘어 대립했다. 과격파의 승리로 국왕이 처형되자, 온건파 과학자들은 재판정에 세워졌다.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이 울려 퍼지며 수많은 과학자가 단두대에 보내지고,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폐쇄된다.
“4대강·탈원전·가덕도, 가장 비합리적인 정책 결정”

/일러스트=백형선
혁명의 전파를 우려한 유럽 왕국들은 프랑스 공화국과 전쟁을 벌인다. 장교를 맡던 귀족 계급이 혁명으로 사라진 프랑스 군대는 도시 빈민과 농민 의용군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오로지 혁명 정신으로 무장한 의용대는 과도한 평등사상으로 투표로 전술 작전을 결정하기도 하고, 이에 반대하는 장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러한 광기에 휩쓸린 오합지졸을 보다 못한 군인 장교 하나가 나서서 전면적인 군대 개혁에 나선다. 그가 바로 에펠탑에 새겨진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 열역학을 탄생시킨 사디 카르노(Sadi Carnot)의 아버지이다.
우선, 18세부터 25세까지의 남성 전부를 강제 징집한다. 이는 서양 최초의 국민 개병제로, 불과 1년 만에 프랑스군은 150만이 되었다. 150만 대군을 무장하고 먹이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카르노는 프랑스 최고의 수학, 물리학, 공학자들을 모아 보급품의 생산과 관리에 모든 과학 역량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병력은 3배로 증가했지만, 운영 비용은 절반으로 줄었다. 이를 기점으로 전세가 뒤집히며, 카르노는 “승리의 조직자”로 불리게 된다. 그는 하급 장교였던 24세의 나폴레옹을 장군으로 초고속 승진시킨다. 귀족층의 붕괴로 경쟁 장교들이 없어진 나폴레옹에게 역사상 누구도 가져 보지 못한 대규모 군대가 주어졌다. 이를 발판으로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된다.
프랑스를 이끌고 있는 ‘그랑제콜’
혁명을 지지했지만 현실주의자였던 카르노는 좌우로 분열된 프랑스를 추스르는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고등 교육기관을 만들어 혁명 군대를 이끌 엘리트를 선발하고 지도하도록 했다. 이 학교가 에콜 폴리테크니크이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이 학교의 학생들은 아직도 군사 훈련을 받으며 중요 행사에는 군복을 입고 파리에서 시가행진한다. 카르노는 라그랑주와 라플라스 등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로 초빙해 최고의 두뇌들을 키워내는 명문교로 만든다. 또한 폐지되었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를 다시 열어,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 과학 엘리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길을 틔워 주었다.
이 학교는 신분 제한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만 학생을 선발했고, 모든 경비를 국가가 부담하는 서구 최초의 공교육 기관이었다. 비로소 혁명의 편 가르기에서 탈피한 프랑스는 폭넓은 인재풀로 과학을 선도하게 된다. 이는 다른 나라들의 교육 제도에도 큰 영향을 미쳐, 아인슈타인과 뢴트겐을 배출한 취리히 공과대학(ETH)이나 미국을 과학 강국으로 이끈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등이 모두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모방해 만들어진 학교들이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프랑스어로 최고의 학교라는 뜻의 ‘그랑제콜(Grandes École)’로 불리며, 이후 설립된 프랑스의 여러 공교육 기관들이 그랑제콜에 합류하게 된다. 현재 프랑스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그랑제콜 출신으로, 오늘날의 프랑스를 이끌고 있다.
특권 세력과 소수의 인재 구별해야
한편, 프랑스 혁명 100주년 건축을 에펠에게 맡긴 프랑스 대통령의 이름은 사디 카르노로, 라자르 카르노의 손자이자 열역학의 아버지 사디 카르노의 조카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만든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국립 교량 도로 학교에서 공학 교육을 받았다. 당시 코시와 코리올리 등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들이 이러한 길을 거쳐 갔다. 이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과 201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장 티롤(Jean Tirole) 역시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엔지니어 양성소인 국립 교량 도로 학교를 졸업한 석학들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프랑스 혁명은 신분 지배를 무너뜨렸지만, 평등해진 모두를 포용하기보다 우리 편 챙기기에 몰두했다. 과학은 이념이 아니라 경계를 허문 인재풀에서 발전한다는 것, 그리고 특권 세력과 능력 있는 소수의 인재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이러한 혼란을 딛고 과학자들의 이름을 새긴 에펠탑이 우리에게 과학 발전과 엘리트 교육에 대해 던져주는 메시지는 적지 않다.
조선일보 민태기 연구소장
월간조선 11월 호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놓은 과학자 1세대
李承晩이 씨를 뿌리고 朴正熙가 꽃을 피우다
⊙ 이승만, 한국 미군 장교부인회의 도움을 받아 인재들을 유학 보내다
⊙ 박정희, 해외 과학자들 유치해 科學立國 초석을 다지다
⊙ 이휘소 박사도 유치 대상이었으나…
⊙ 애국심만으로 일하던 해외 유치 과학자들의 희생
홍하상
전경련 교수 역임. 저서 《이병철 대 정주영》 외 30여 권. 일본, 중국, 대만, 태국 등에서 저서 12권 번역 출간

▲1966년 2월 3일 KIST 준공식.
1947년 8월 14일, 우리나라에서 선발된 젊고 유능한 학생들 30명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들은 미군 화물선 모턴호(MORTON)를 타고 인천항을 떠났다. 그들의 여권은 미 군정청이 발행한 것이었다. 그들이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하버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 틈틈이 하버드 공대, MIT 공대 등을 찾아가 미국이라는 거대강국의 과학과 공업 연구의 실상을 보았다. 그는 그때 국가가 발전하려면 과학과 공업이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 후일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철강 산업, 원자력 산업을 일으키려 한 것은 이런 연유였다.
당시 한국 최초의 유학생은 다음과 같다.
윤일선(대한적십자 총재 역임), 고병간, 닥터송(성명 불상), 정대위, 전성천(전 공보처장·목사), 최영동, 최인규(전 내무부 장관), 이기택, 이규택, 송전무, 현만규, 이상호, 김은후, 현영학(전 이화여대 교수·신학자), 윤병학, 정선모, 조자용(건축가·에밀레박물관장), 정기석, 정명하, 김도식, 현학봉, 배영, 한인근, 김제직, 김영희, 고봉경(서울여대 설립), 김순원, 김선희(조자용 부인·경북대 영문과 교수), 안토니, 문덕순씨 등.
이분들은 돈이 있어서 유학을 간 것이 아니고, 한국에 나와 있던 미군장교부인회의 주선과 후원으로 미국의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 미군장교부인회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유학생들을 지원했고, 또한 동시에 학생들이 미국의 각 주별 장교부인회로부터 도움받을 수 있도록 알선했다. 정부 수립 이전이어서 한국 정부는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유학을 간 한국의 엘리트 젊은이들은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마치고 10명이 귀국했고, 20명은 미국에서 생활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해방 이후 한국의 최초 미국 유학생들이었다. 그 후 정부가 수립되고 몇 차례 유학생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미국이나 독일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자료가 파악되지는 않는다.
1956년 들어 이승만 정부는 비교적 조직적으로 유학생을 파견한다. 그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학생들은 여전히 미군장교부인회의 도움을 받았고, 그중 몇 사람이 물리학자 이휘소, 김훈철(미시간대 조선학 박사) 등이다. 그해에 독일 유학생도 선발했는데 독일 유학생의 경우는 좀 달랐다. 독일의 경우는 대학교 학비가 무료이므로 정부가 비행기표를 사주었고, 또 하나는 정부의 공기업이 월급을 주었다는 것이다. 즉 산업은행의 경우 산업은행에 입사한 젊은이 중에 독일유학선발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독일 유학기간 내내 월급을 지불했다. 그 월급은 유학생 본인이 쓰라고 준 것이 아니라 고향에 남아 있는 부모형제의 생활비로 준 것이다. 유학생 대부분이 가난했으므로 그들이 유학을 가고 나면 부모형제들의 호구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재관 박사다. 김재관은 서울대 공대 기계과를 졸업한 후 산업은행에 입사했는데 독일국비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서 독일 뮌헨공대로 유학했다. 그는 뮌헨공대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독일의 유수한 철강기업인 데마크에서 근무하다가 12년 만인 1968년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승만 정부의 유학생들이었다. 또한 미국에 유학갔던 윤여경(유타대 경제학 석사, KIST 정보분석실장 역임), 김훈철(KIST 조선선박 실장) 등도 그 무렵 귀국한다.
즉 이승만이 뿌린 씨앗이 박정희(朴正熙) 정부 때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 유학생들, KIST로 모이다

▲최형섭 KIST 초대소장.
1964년 말, 최형섭은 청와대로부터 국가 발전을 위해서 공업과 과학에 관한 브리핑을 해달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들 앞에서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 방향, 과학교육 개편 방안, 연구소 설립과 시스템 구축, 운영 방향 등을 브리핑했다. 그리고 한국에 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해야 하며 그 모델은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처럼 연구는 물론 기업의 수탁연구를 시행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발도상국은 산업현장의 요구에 맞춰 생산에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의에 따라 대통령은 그에게 KIST 설립을 지시하고 초대소장을 맡긴다.
최형섭은 ‘한국과학기술의 개척자’ ‘과학행정의 달인’ ‘과학과 정부의 매개자’ ‘과학기술의 전도사’ 등으로 불릴 정도로 금속공학자이면서 대한민국 과학기술 연구체계의 기본 틀을 세운 과학행정가였다. 최형섭이 고민한 것 중 첫 번째는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유치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그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다.
1. 정부가 연구소의 건설비, 운영비, 운영기금을 출연하고
2. 정부는 연구소가 필요로 하는 국유재산을 무상으로 양여 또는 대여할 수 있으며
3. 연구소가 필요로 하는 재원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정부가 부담하지만 연구소는 이에 대한 정부의 회계 감사나 사업 계획의 승인을 받지 않는다.
즉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놓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행정부 및 관계된 관료들의 저항은 엄청났다.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와 청와대는 그러한 내용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국무회의 의견을 거쳐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의 반발도 거셌다.
1965년 9월에 열린 정기국회는 이 법안을 심의했으나 재경위 소속 야당 국회의원들이 반발했다. 연간 수십억원에 달하는 정부 돈을 받게 되는 연구소에 대해 국회나 정부가 회계 감사를 할 수 없고, 사업계획서마저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냐는 것이었다.
정부는 야당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부 수용하여 제5조 사업계획서는 회계 연도별로 주무장관의 승인을 받기로 하는 조건으로 1965년 12월 6일 국회를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1966년 3월 30일 일부 수정되어 법률 제1917호로 국회를 통과한다. 개정된 이 법률안은 제5조에서 “연구소의 사업계획서는 정부의 승인이 필요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966년 2월 3일 KIST 준공식

▲KIST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최형섭 KIST 소장.
홍릉 임업시험장 내에 KIST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최형섭은 서울 중구 명동에 있는 YWCA 건물 내 빈 사무실을 하나 얻어 KIST의 운영방안 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최형섭에게 KIST 소장의 임명장을 수여하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박 대통령은 최형섭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예산을 얻기 위해 경제기획원에 들어가지 마라.
둘째, 절대로 인사 청탁을 받지 마라.
당시에는 취직자리가 없어 정부의 주요 기관장들이나 정치가들이 인사 청탁을 많이 하던 때였다. 그렇게 당부해놓고도 박 대통령은 걱정이 되었던지 “최형섭 박사는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래도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장 임명장을 받기가 무섭게 자기 사람을 써달라는 청탁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최형섭은 대통령의 ‘빽’을 믿고 곧이곧대로 밀어붙였다. 어느 날 정부의 고위직에 있던 사람이 최형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KIST에서 내년 예산을 10억원 신청했다는데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2억원을 삭감하여 다른 데로 돌려야겠으니 양해해주십시오.”
상대는 경제기획원의 핵심 실세였다. 최형섭은 난감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에서 2억원을 삭감해달라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2억원 삭감안은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보고되었다. 그러자 대통령은 경제기획원의 실세에게 “KIST의 예산이 2억원 삭감되었다는데 사실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경제기획원의 실세는 “소장과 의논해서 그쪽의 양해를 얻어 삭감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다시 10억원으로 집행하시오”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으므로 경제기획원의 실세도 어쩌지 못했다. 그 후로 KIST의 예산은 어느 누구도 삭감하지 못했다.
연구의 자율성이 확보되자 연구원들은 열심히 일했다. 24시간 불이 꺼진 적이 없었다. KIST의 연구동, 행정동, 주택단지, 부대시설은 1966년 10월 착공식을 한 이후 3년 만에 완공되었다.
박 대통령은 공사 현장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자신이 직접 공사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작업자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심지어 그들에게 돈 봉투까지 쥐여주면서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박정희는 한일협정, 베트남 파병, 새마을운동, 제1차 5개년 건설계획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음에도 KIST와 관련해 엄청난 열정을 보였다. 자신의 침실에 건설현황 계획표를 차트로 만들어 걸어놓고 수시로 공사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도 했다.
3가지 조건
부지가 확정되었다고 끝은 아니었다. 연구소 건물도 지어야 하고 실험 실습실도 만들어야 하며, 그보다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인재 확보를 위해서는 최형섭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최형섭은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로 건너갔다. 당시 바텔기념연구소에는 한국인이 많이 근무하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 일찍이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한 우리 과학자들이 바텔기념연구소 초빙으로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바텔연구소는 자신들의 연구소에 근무하는 한국인 인사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있는 800여 명의 한국 출신 연구원 명단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최형섭은 바텔기념연구소 인사처에 부탁을 거듭하여 그들의 명단과 이력서를 확보했다.
일단 당장 급하게 모셔와야 할 연구원은 80명이었다. 최형섭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최형섭이 그들에게 제시한 조건은 세 가지였다.
1. 절대적으로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2. 재정적으로 충분히 안정성을 보장하겠다.
3.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봉급, 주택 등을 확실하게 제공하겠다
그는 이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국 출신 연구원들을 인터뷰하러 다녔다.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없었다. 강행군이었다. 그렇게 해서 1차로 30명을 선발했다. 다시 이들을 대상으로 2차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어 3차 인터뷰까지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18명이 선정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초기 유치 과학자들

▲1974년경 KIST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명하는 김재관 박사(당시 KIST 제1연구실장).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넨 김재관의 <한국철강산업계획안>.
김재관(독일 뮌헨공대 철강금속학 박사), 김훈철(미국 미시간대 조선학 박사), 윤여경(미국 유타대 경제학 석사), 한상준, 이경서(MIT 기계학 박사), 양제현, 정만영, 정원, 천병두, 권태완, 안영옥(미국 뒤퐁 근무), 조종수, 현경호, 장경택, 남준우(기계학 박사, 미국의 강관회사 근무), 윤용구, 최영복, 박송백 등이다.
이들은 모두 책임연구원급 연구자로 임명되었고, 봉급 외에 주택이 제공되었다. 봉급은 당시 서울대 교수 월급의 3배로 대통령 월급보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미국의 기관에 비해서는 30% 수준이었다.
첫 번째로 유치한 과학자는 철강의 김재관 박사였다. 김재관은 세계 최대 철강회사 연구원, 그것도 종합기획실에 근무하기에 충분한 봉급을 받고 있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위해 매일매일을 준비하던 그에게는 오히려 기다려오던 시간이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더 나아가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돌아갈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불러들인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18명의 연구원으로 초빙을 시도했지만 무산된 사람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이휘소 박사였다. 이휘소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유력시되던 인물이었다. 이휘소는 당시 연구가 너무 바빠 만날 시간이 없어 편지로 의사를 보냈다. 그 편지에서 이휘소는 “KIST는 기초연구보다는 당장 국가 발전에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재를 뽑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사양하면서 “나중에 기초과학 연구가 필요할 때는 자신을 반드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최형섭은 유타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있던 우리나라 화학계의 거두가 되는 이태규, 훗날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등을 만났다. 그러나 그 두 사람도 당시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 어렵다고 고사했다. 훗날 이용태는 KIST에 합류한다.
최형섭이 가장 고민한 문제는 봉급 외에 주택 문제였다. 초빙한 연구원 대부분은 10년 이상 외국에서 거주한 탓에 한국에 돌아와도 집이 없었다. 결국 그들에게 사택을 지어 지금으로 치면 30평 정도의 아파트를 한 채씩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 유치한 18명의 과학자들이 속속 귀국했다. 최상일(화학), 김영덕(물리학), 김병진(화공학), 현경호(원자력학), 박용구 등이며, 여기에 전자공학의 김완희 박사가 합류했다.
이는 신동식 당시 청와대 비서관 증언이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

▲1964년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에 차관을 빌리러 갔다가 뮌헨에서 열린 한국 유학생들과의 다과회에 참석했다. 그때 젊은 과학자 한 사람이 대통령에게 국가가 공업을 발전시키려면 제일 먼저 철강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명하고 대통령에게 <한국 철강산업 계획안>이라는 문서를 건넸다.
그의 이름은 김재관. 국가의 공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금, 그다음이 철강공장의 건설이다. 제철소가 없으면 건물, 공장, 조선, 기계, 무기 등 어떤 것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건넨 보고서는 훗날 포스코를 건립할 때 밑바탕이 된다.
대통령은 철강전문가이자 한국 최초의 뮌헨공대 기계·금속학 박사인 김재관을 불러들였다. 김재관은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철강회사인 데마크에 근무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뮌헨에서의 만남 이후, KIST가 설립되자 직접 최형섭 소장에게 김재관 박사의 유치를 요청했다. 18명의 유치 과학자 중 유럽에서 온 과학자는 김재관 박사가 유일했다. 김재관은 KIST 설립에 있어 최형섭 소장 다음으로 중요한 제1연구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김재관 박사에 대한 기대와 믿음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결국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을 마련하고, 중화학공업을 일으키는 중요한 결실로 이어지게 된다.
“나, 朴이요”
훗날 윤여경 박사는 김재관 박사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참여한 사람들 중, 김재관 박사는 달랐어요. 김재관 박사는 이미 오기 전부터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준비하고 온 사람이었어요. 이미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계획과 꿈을 가슴 속 깊이 담고 있던 분이었지요. 한국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KIST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거나 찾아왔다. 김재관이 전화기를 들어보면 뜻밖에 상대방은 박 대통령이었다.
“나, 박(朴)이요.”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에 “누구시냐”고 물었다.
“나 박정희요.”
대통령은 소탈했다. 비서관을 통해 지시할 수 있는 일도 직접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격려 차원이었다.
김재관의 자리는 책상 아래위 할 것 없이 종이쪼가리들이 천지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가 참고해야 될 자료들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 파지더미 속에서도 자신이 필요한 서류들을 즉각즉각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KIST 과학자들은 밤이고 낮이고 없었다.
“집이 코앞인데,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
과학자들이 집조차 들어가지 않고 밤낮없이 일만 하자 아내들의 불만이컸다.
박 대통령은 때때로 KIST 연구원들을 한정식집으로 불렀다. 한정식집에 가보면 그야말로 술상이 떡 벌어지게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긴장이 풀려서인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코피를 쏟는 연구원들이 많았다. KIST 연구원들은 대부분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음식을 들기도 전에 코피를 흘리며 드러눕는 연구원이 있어 안쓰러웠다.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월급이 미국에서 받던 봉급의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애국심을 가지고 일했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일찍 세상을 떠난 과학자들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KIST 설립 후 3년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직접 나누면서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었다. 건설 당시에는 현장에 직접 나와서 건설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등 신경을 많이 썼다.
또한 박 대통령은 권력이 있는 국가기관의 부당한 간섭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KIST가 요구하는 예산은 1원 한 푼 삭감하지 않고 모두 지급하도록 경제기획원에 명령했다.
일하는 척만 하는 공단
김재관이 1968년 여름 한국으로 돌아온 그해 11월 미국의 유타대학에서 경제학 MBA를 마치고 미국의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윤여경도 귀국했다. 최형섭은 김재관과 윤여경 두 사람에게 “두 달간 유급 휴가를 줄 테니 한국의 기업체들을 돌아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한국의 기업 실정을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사업계획을 짜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대뜸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분의 봉급이 들어 있었다.
이미 KIST 오기 3개월 전부터 자신의 봉급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윤여경은 KIST의 경제분석실장이 되어 각 부서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계획의 경제와 타당성을 분석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구로공단, 부평수출공단을 시찰했다. 관찰력이 뛰어난 박정희는 대번에 공단이 일하는 척만 할 뿐 실제로는 성과가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공단이 놀고 있으면서 맨날 융자 지원만 해달라고 하고 있군. KIST를 통해 기업을 철저히 진단한 후 보고하라”고 당시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는 최형섭 소장에게 하달되었다. 심문택 연구담당 부소장을 총책임자로 한 공장 진단반이 만들어졌다. 최형섭은 모든 연구실 요원은 공단 진단반에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윤여경의 경제분석실 직원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각 연구소의 실장들도 KIST 버스를 타고 현장 방문에 동행했다. 구로공단, 부평수출공단에 있는 40여 개 공장을 모두 방문했다.
공장 대부분은 가발과 와이셔츠를 만들고 있었다. 그나마 주문이 없어서 반 이상은 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구로공단에 있는 대한광학과 부평공단의 세정실업은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대한광학은 일본으로부터 OEM(주문자부착상표)으로 일감을 받아 ‘마미아’라는 상표로 카메라와 쌍안경을 만들고 있었다.
세정실업은 기타를 만드는 회사였다. 가발과 와이셔츠 공장들이 놀고 있는 와중에도 두 회사는 제법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단 진단반은 3개월 동안 대한광학과 세정실업 두 회사를 모델로 하여 <수출공단 경영합리화 방안>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대통령에게 보고할 보고문서는 각 연구실장들의 협조하에 만들어졌다. 책임자는 윤여경 실장이었다. 윤여경이 만들어놓고 보니 무려 3시간에 걸쳐 보고해야 할 긴 내용이었다.
‘청와대 박사 윤여경’

▲KIST 초기를 회고하는 윤여경 박사.
윤여경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최형섭에게 “보고서 내용을 잘 살펴보고 중요한 내용을 잘 숙지하십시오”라고 건의했다. 자신이 만든 내용이고, 경제학적 내용이라 이과 출신인 최형섭 소장이 은근히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최형섭 소장은 “당신이 만들었으니 당신이 직접 보고하시오”라고 일축했다.
대통령에게 점수를 딸 기회였으나 최형섭은 담당자의 권한과 입장을 최대한 존중해서 당사자에게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은 보고 내용을 끝까지 진지하게 듣는다. 보고하는 동안 질문이라는 것은 일절 하지 않는다. 다만 듣는 도중에 대통령의 눈이 가늘어지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 대목에서는 다시 알아듣게 상세히 설명하라. 대통령은 알아듣지 못하면 바로 메모를 시작하고 보고가 끝난 이후에는 엄청난 질문이 쏟아진다. 그렇게 되면 보고는 망치는 것이다”라고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요령까지 알려주었다.
윤여경은 최 소장이 가르쳐준 대로 차트를 넘기며 보고했다. 장·차관들이 배석한 보고는 잘 끝났다.
“역시 KIST가 낫구먼.”
대통령은 흡족해했다.
어느 날 윤여경이 박정희 대통령과 마주쳤을 때 그의 보고에 만족했던 박 대통령이 ‘점심이나 같이 하지’ 하면서 그를 붙들었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박 대통령이 윤여경 실장에게 “윤 박사, 윤 박사 내 옆에 앉아”라고 말했다.
윤여경은 유타대학에서 MBA로 석사까지만 공부한 사람이다. 윤여경이 말했다.
“각하, 저는 박사 학위가 없습니다. 이제 제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으니 나가서 마저 학위를 마치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이 말했다.
“나라에 할 일이 많은데 가기는 어딜 가? 당신은 출국 금지야.”
그러자 당시 경제기획원 김학렬 총리가 거들었다.
“각하, 이 자리에서 윤 실장에게 박사 학위를 주시지요.”
그러자 박 대통령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당신은 오늘부터 청와대 박사야. 대통령이 직접 박사 학위를 주는 거야.”
그날 이후로 윤여경은 ‘청와대 박사’로 불렸다.
윤여경 박사는 훗날 김재관 박사를 도와 포항종합제철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쓰러진 과학자들
KIST 설립 초기 대거 한국에 입국한 과학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거의 매일 새벽 3~4시까지 일하는 강행군이었다. 정부가 전폭적으로 시설이나 장비를 지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열악한 환경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최상 박사: 기술정보실장을 역임하다 백혈병으로 46세인 1973년에 별세
▲장경택 박사: 금속가공실장. 42세인 1975년 과로로 별세
▲현경호 박사: 원자력연구소 근무. 임파선암으로 53세인 1980년 별세
▲정원 박사: 한국표준연구소 부소장, 49세에 과로로 별세
▲천병두 소장: KIST 도약을 위해 일을 하다가 1986년 암으로 별세
그들의 가슴 속엔 오직 국가를 잘살게 하겠다는 애국심뿐이었다. 그들의 가슴 속엔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잘사는 국가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모두 그러했다.
그들에게는 복잡한 역사가 있었다. 6·25전쟁 중 대학에 들어갔고, 전쟁 중에 판자로 지어진 판자촌에서 강의를 들었다.
도도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미약하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한국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인들이 결국 국가를 움직였다. 그들은 KIST와 더불어 한국의 철강산업, 자동차산업, 원자력 등 국가의 주요 산업을 만들었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한국의 과학, 공업 발전의 초석을 놓은 1세대는 거의 대부분 작고하거나, 이제 몇 명만 생존해 있다. 기록도 남은 게 별로 없다. 먼 훗날을 위해 여기 기록을 남겨놓는다.⊙
2021.04.02 꿈을 좇던 과학자들이 만든 수에즈 운하
1798년 봄 나폴레옹, 병사 4만과 과학자 167명 소집령
‘해양 제국’ 영국 이기려 이집트 점령, 운하 건설 노려
英 넬슨 제독에 패해 꺾인 운하의 꿈, 19세기 초 부활
佛 레셉스와 과학자들, 증기기관차 발명한 英스티븐슨
힘 모아 해상 물류 판도 바꾼 수에즈 운하를 만들었다
지난 3월 23일, 초대형 화물선이 좌초하며 수에즈 운하가 막히는 초유의 사고가 일어났다. 단 며칠간의 봉쇄로도 세계 경제가 출렁이는 모습에 연일 뉴스가 쏟아졌다. 그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기에 앞으로 보완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수에즈 운하는 그 자체로도 인류가 오랜 기간 만들어 낸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그 과정에는 수천년의 꿈을 현실로 만든 정치와 외교, 그리고 여기에 기꺼이 동참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1798년 봄, 프랑스혁명이 탄생시킨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 조제프 푸리에는 정부의 긴급 소집 명령을 받는다.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는 ‘푸리에 변환’을 만든 그는 최고의 수학자였다. 국가의 부름에 단숨에 달려간 항구 도시 툴롱에는 무려 4만 명의 병사와 만 명의 선원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푸리에를 포함한 167명의 프랑스 과학자들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최종 목적지는 아무도 몰랐다. 곧 그들을 이끌 사령관이 나타났다. 얼마 전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시킨 스물아홉 살의 나폴레옹이었다

▲꿈을 좇던 과학자들이 만든 수에즈 운하 / 일러스트=김하경
7월, 오랜 항해 끝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집트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단번에 이집트를 점령한다. 나폴레옹이 극도로 보안을 유지하며 이집트까지 가게 된 것은 프랑스를 위협하던 영국 때문이다. 인도 무역으로 부를 쌓던 영국에 이집트는 인도와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프랑스혁명 정부 역시 야심만만한 나폴레옹을 멀리 보낼 기회였다. 프랑스군의 최종 목적지를 알아낸 영국의 넬슨 제독은 나폴레옹을 필사적으로 추격해, 8월에 나일강 하구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다. 불과 한 달 만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었다.
나폴레옹의 목적은 단순히 이집트를 점령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대에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력한 해군으로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을 이기려면 이곳에 다시 운하를 뚫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굳이 대규모 학자들을 이집트에 데려갔던 것은 이 때문이고, 푸리에는 이들을 이끌고 각종 발굴과 조사의 책임을 맡았다. 바다에서는 나폴레옹이 넬슨에게 패했지만, 여전히 육지에서 나폴레옹은 강했고 영국군 역시 함부로 상륙하지 못했다.
영국과의 전투가 소강 상태에 빠지자, 나폴레옹은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한다. 목적지는 수에즈,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지협(地峽)이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고대 운하의 흔적을 발견한다. 푸리에와 과학자들은 지도를 작성하고 운하의 재건 가능성을 검토했다. 지중해와 홍해의 해수면 차이가 심하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푸리에는 그렇지 않다며 반박했다. 사막 탐험을 이어가던 그들은 ‘신기루’가 공기의 밀도 차이로 발생한 빛의 굴절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군에 둘러싸인 나폴레옹은 더는 운하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고, 나폴레옹이 없는 프랑스 본국의 혼란도 문제였다.
1799년 위기를 느낀 나폴레옹은 푸리에와 군대를 남겨둔 채 홀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파리에서 쿠데타로 집권한다. 사령관 없이 이집트에 남겨진 프랑스군은 2년을 버티다 결국 영국에 항복했다. 프랑스군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영국과 협상을 벌인다. 이집트에서 발견한 유물을 모두 영국에 넘긴다는 조건이었다. 대영박물관으로 보내진 유물 중에는 ‘로제타석’도 있었다. 푸리에는 로제타석이 이집트 문자를 해독할 결정적 단서라는 것을 알았고, 영국에 넘기기 전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온 푸리에는 이 사본을 샹폴리옹에게 건네고, 그의 후원을 받은 샹폴리옹은 마침내 이집트 문자 해독에 성공한다.
한편,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수에즈 운하 계획은 잊혀 갔다. 묻혀 있던 운하 계획은 뜻밖의 계기로 부활한다. 1832년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이집트에 부임하러 가던 중 방역 조치로 배 안에 탑승한 채 격리된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고 읽은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폴레옹의 운하 기록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후 온통 운하 생각으로 가득 찬 그를 찾아온 프랑스인들이 있었다. ‘생시몽주의자’로 불리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주로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 과학자들이던 이들 역시 운하를 꿈꾸고 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수에즈 운하 연구 모임(Société d’Études du Canal de Suez)’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심지어 증기기관차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영국의 스티븐슨도 합류했다. 꿈을 위해서라면 국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하 건설에 걸림돌이던 지중해와 홍해의 해수면에 대한 정밀 측정 결과, 푸리에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크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 타고난 외교관이던 레셉스는 이제 확신에 차 이집트 정부를 설득하고 자금을 모았다. 1859년 시작된 공사는 10년이 걸려 1869년에야 완공되었다.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베르디가 오페라 ‘아이다’를 작곡할 정도로 해상 물류의 판도를 바꾼 수에즈 운하는 이렇게 탄생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실패였지만 그의 패배가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은 과학 탐사의 성과 덕분이다. 그는 과학자들과 함께 사막을 헤매며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을 나누었고, 결국 그 유산은 수에즈 운하를 완성하는 힘이 되었다. 이처럼 과학의 본질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꿈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꿈은 수천 년간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조선일보 민태기 연구소장
04월 21일 “4대강·탈원전·가덕도, 가장 비합리적인 정책 결정”

▲오늘 ‘과학의 날’… 과학적 정책 촉구 ‘과실연’김영오 대표
“문정부 탄소 중립 야심찬 비전
실현 가능 무시한 감성적 접근
예타면제 등 정권이 바뀌어도
반복되는 후진 정책 안타까워
사실과 근거 기반 정책수립 후
국민과 소통으로 수용성 높여야”
“정부는 산업화 시대의 유산인 기존의 정책추진체계를 과감히 버리고, 더 늦기 전에 미래를 과학적으로 대비하는 과학기술 기반의 국가경영체계로 대전환해야 합니다.”
21일 제54회 ‘과학의 날’과 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대정부 성명서를 발표한 김영오(55·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사진)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 상임대표는 20일 서울대 입구 커피숍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부는 사실과 근거에 기반한 과학적 정책수행체계로 자기 개혁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과실연은 2005년 12월에 설립된 과학기술 시민단체로 우리 사회의 현안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오픈 포럼, 이슈 페이퍼 ‘WATCH & VOICE’ 발간, 노벨과학에세이대회, 청소년 과학교실, 정책 연구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 대표는 “정부는 과학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실현 가능한 합리적 정책수단을 발굴해 국민과의 긴밀한 소통으로 정책 수용성을 높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조기 종식을 위해 정부는 백신 확보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 빠른 시일 내 전 국민이 백신 접종을 마치고 집단면역을 이뤄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뿐만 아니라 탄소 중립 등 미래 비전 먹거리에도 과학적 근거에 기반 합리적 의사 결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대표는 “정부는 지난해 탄소 중립 사회를 위한 야심 찬 비전을 내놨다”면서 “그러나 많은 전문가가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표출하고 있다. 합리적 근거와 냉철한 분석, 산업현장의 실천 가능성을 도외시한 감성적 접근이란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고 했다.
“인류는 이미 20세기 말부터 지구온난화의 주범을 이산화탄소 등의 온실가스로 지목하고, ‘감축’이라는 해법에 국제 연대를 통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10월 ‘2050년 탄소 중립’을 전 세계에 표명한 만큼 지나간 두 정부에 이어 또다시 스스로 세운 감축 목표마저 지키지 못하는 양치기 소년이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 대표는 탄소 중립 사회를 위한 에너지정책은 환경은 물론이고 산업과 경제, 사회에 대한 복합적인 고려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지 않은 대표적인 정책수행 사례로 4대강 사업과 탈원전,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꼽았다. “20년은 걸려야 할 4대강 사업을 2년 반 만에 완공했고, 수십 년간 어렵게 쌓아온 세계적 원전 시설과 기술이 일시에 비가역적 추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덕도 신공항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라는 위험천만한 급행열차에 올라타기 시작했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반복되고 있는 후진적 정책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글·사진 =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
07.05 한국의 기술로 열어가는 원자현미경의 세계
국가핵심기술의 축적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한국 경제는 2017년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었다. 지금껏 이 선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로도 어느덧 세계 10위권에 도달했다. 반도체·조선·자동차 산업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큰 돌들 사이를 메우는 핵심기술 없이는 한국 경제라는 큰 독이 채워질 리 없다.
현미경, 기술축적 필요한 대표 분야
국가 산업 수준은 현미경과 정비례
독자개발 국내 벤처 ‘파크시스템스’
세계 원자현미경 시장의 15% 점유
우리 산업의 저력을 보려면 이런 기술들이 숨어있는 현장에서 축적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빠르다. 여기에 좋은 길잡이가 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국가가 지정하고 보호하는 ‘국가핵심기술’들은 우리 산업이 어렵게 만들어낸 혁신적 기술들의 모음이다.
국가핵심기술 가운데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첨단 현미경 기술이다. 현미경이야말로 기술축적이 필요한 대표적인 분야라 개발도상국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선진국들만의 리그다. 이 분야에 우리 기업의 기술이 혁신적 개념설계로 도전하고 있다는 것은 대견한 일이다. 과학기술의 수준은 어느 정도 정밀한 현미경을 필요로 하는지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세포 크기 정도를 겨우 보는 현미경을 가지고 있을 때와 원자 단위의 미세구조를 보는 현미경을 가지고 있을 때는 연구목표 자체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일본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의 85%가 첨단 계측장비를 새로 개발하거나 성능을 개선한 덕분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다. 그 나라 산업의 수준도 필요로 하는 현미경의 수준과 정비례한다. 저가의 봉제인형이 주된 생산품이라면 원자를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은 쓸 곳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현미경은 싸다고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요구하는 해상도가 나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간 6조원이 넘는 전 세계 첨단 현미경 산업에서는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이 공급자가 예외 없이 기술 선진국의 기업들이다.
현미경의 역사는 과학과 산업발전의 역사와 함께한다. 요즘 초등학교 실험실에서도 볼 수 있는 광학현미경은 1590년 네덜란드의 자카리아스 얀센이 처음 만들었다. 이 광학현미경은 파장이 긴 가시광선을 이용하기 때문에 나노급의 미세한 구조는 관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파장이 극히 짧은 고속 전자를 이용하는 전자현미경이 1931년 등장했다. 이 전자현미경의 개념을 제시한 독일의 에른스트 루스카는 노벨상을 받았다. 현재 전 세계 첨단 연구실과 기업 현장에서 미세한 구조들을 관찰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전자현미경이다.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대표(왼쪽)가 수원 본사를 찾은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에게 반도체 공정 계측용 원자현미경 옆에서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1980년대 기존의 광학이나 전자현미경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현미경이 등장했다. 뾰족한 탐침을 시료 표면에 나노미터(㎚) 단위로 가깝게 접근시키면, 그 사이에서 전자가 벽을 통과해 지나가는 터널링 현상이나 원자 간에 밀고 당기는 미세한 힘이 발생한다. 이 여러 힘의 변화를 계측해서 표면의 특성을 읽어내자는 것이 핵심 아이디어다. 비유하자면 고양이 등을 살며시 더듬을 때 손에 느껴지는 미세한 감각의 변화로 고양이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개발된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은 독일의 게르트 비니히와 하인리히 로러가 1981년 제안하였고, 그 업적으로 1986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1985년 제안된 원자현미경은 탐침과 시료 사이를 가깝게 다가가게 한다는 핵심원리는 같지만, 탐침 끝의 원자와 시료 표면의 원자 사이에 밀고 당기는 미세한 힘을 이용한다. 엄밀하게는 원자간력현미경이라 하는데, 간단히 원자현미경이라고 한다. 이 원자현미경 개념을 제시한 미국의 캘빈 퀘이트는 2017년 비니히·로러와 함께 제2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카블리 상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이 첨단 현미경들의 역사에는 전통적인 선진국의 과학자들과 기업들의 이름만이 등장한다. 기초과학의 뿌리가 깊어야 하고, 산업 전반에 여러 핵심적인 요소기술들이 축적되어 있어야 하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은 아직 선진국과 격차가 적지 않다. 현미경을 포함한 계측기에서 국산화율은 10% 남짓에 불과하고, 그것도 첨단 광학현미경이나 전자현미경은 아직 남 이야기다. 국내의 대학과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자현미경만 해도 2000대 정도로 추산되는데, 일본에는 이런 전자현미경이 12만 대나 있다. 첨단 현미경은 모두 미국·독일·일본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참고로 독일의 자이스라는 현미경 회사는 1846년에 만들어졌다.
이 선진국 리그에 한국이 ‘비접촉식 원자현미경’이라는 독자기술로 글로벌 무대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015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기술이다. 기존의 원자현미경이 시료를 긁거나 톡톡 치면서 모양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비접촉식은 탐침이 시료의 표면 위에서 원자 한두개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치 저공비행을 하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모양을 읽어낸다. 해상도가 높은 것은 물론이고, 탐침이나 시료가 손상되지 않을 뿐 아니라 탐침의 마모로 인한 측정오차도 줄여준다. 현재는 점점 정밀해져서 0.01나노, 즉 수소 원자 한 개의 10분의 1 크기 정도까지 오차를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기술을 독자적으로 완성한 한국의 벤처기업이 글로벌 최첨단 원자현미경 시장에서 15%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 점유율을 빠르게 높여가고 있다.
이 국가 핵심기술의 개발과정은 전형적인 기술축적의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집요한 스케일업의 과정이 있었다. 1985년 원자현미경의 개념이 처음 제시된 후 여러 가지 방식이 제안되었고, 비접촉 방식도 그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론적 가설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탐침이 시료 위에 떠 있는 채로 1초에 30만번 진동하는 가운데 시료와의 간격을 나노미터 단위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만들어보면 탐침과 시료가 닿아 오류가 나기 일쑤다. 10여년에 걸쳐 탐침의 종류와 구동기의 설계, 외부 진동을 차단하는 구조물의 재질과 형태 등 여러 가지 요소기술을 개발하고 변수 조합을 바꾸어가며 수천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독자적인 비접촉 기술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고유한 경험들 때문에 선진국 기업들도 쉽사리 모방하지 못하고 있고,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핵심인력의 조합도 중요한 요소다. 창업자는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는 동안 원자현미경 개념을 제시한 켈빈 케이트 교수로부터 핵심지식을 습득하였고, 최초로 상용화한 경험도 가지고 있는 탁월한 과학자였다. 그러나 하나의 기업이 기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집단지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젊고 우수한 연구자들이 새로운 기술의 가능성을 믿고 대기업을 마다한 채 벤처기업의 기술혁신 여정에 동참했다. 이들을 보상하기 위해 스톡옵션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뿐만 아니라 병역특례로 참여했던 젊은 이공계 인력들도 혁신기술의 개발과정을 몸으로 체험한 후 특례기간 이후에도 자발적으로 회사에 합류하여 지속해서 기술축적에 기여했다. 병역특례라는 한국적 제도가 기술벤처의 인재기반에 기여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 내 존재하는 첨단 수요기업의 역할이다. 국내의 한 반도체 회사는 기존의 현미경들로 볼 수 없었던 문제를 제시하면서 비접촉식 원자현미경으로 해결이 가능한지 물어왔다. 세계 최첨단 수요기업의 이 도전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면서 기업의 기술축적 수준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 새로운 태양광 소재와 바이오 신약에 도전하는 첨단의 대학연구실들도 이전에 보지 못하던 도전적 문제를 들고 왔고, 이 숙제들과 씨름하면서 기술축적이 가속화되었다. 첨단의 원자현미경 기술과 한국의 산업현장이 함께 진화한 전형적인 사례다. 현미경과 관련한 자료를 살펴보던 중 국가핵심기술을 개발한 벤처기업의 현장을 방문했다. 젊은 연구원들이 이곳저곳에서 기구를 풀고 조이면서 토론을 거듭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수요기업 사람들과 대학의 연구자들, 그리고 원자현미경 전문가들이 뒤섞여 함께 진화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우리 산업의 미래를 보았다.
박상일 대표가 1997년 창업한 ‘파크시스템스’는 국가핵심기술인 비접촉식 원자현미경 기술을 독자 개발한 한국의 대표적인 기술기반 벤처기업이다. 수평과 수직 방향의 동작을 분리한 3축 분리형 개념과 좌우로 기울여 관찰하면서 3차원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는 혁신적 개념도 제시했는데, 모두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되었다.
중앙일보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09.27 1미터의 의미

대단히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도 1미터가 얼마나 긴지는 안다. 자기의 키가 몇 센티미터(cm, 1미터의 100분의 1)인지, 자기가 100미터를 몇 초에 뛸 수 있는지도 알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1킬로미터가 1천미터라는 것도 안다. 이렇게 우리 생활에 속속들이 박혀 있는 것이 미터이며, 또 그 이외에도 리터, 그램 등 여러가지 측정 단위를 규정해 놓은 것을 미터법이라 한다.
생각없이 상용하고 있는 이 미터법이 한국에 정착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우리 정부에서 미터법을 전면 실시한 것은 1964년이었다. 그 후에도 다년간 고기는 그램이 아니라 근으로, 곡식은 말이나 되로 흔히 판매되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전통적 단위는 거의 모를 것이다. 길이의 단위 ‘척’, 또 그 10분의 1인 ‘치’도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삼척동자’라든지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등의 표현에만 숨어 있다.
우리 생활에 깊이 파고 든 미터법
미터법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
전통적 권위를 거부한 자연주의
진정한 세계적 교류의 밑받침
미터법은 18세기말에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다. 모든 구태의연한 것을 배격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자는 꿈에 가득 찬 그 혁명가들은 정치체제를 새로 만들어낼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모든 것을 측정하는 법을 새로 만들어 낸 것이다. 전통적 측정법은 기준이 제멋대로였고, 또 각 나라마다 달랐다. 프랑스의 전통적 단위는 생소하겠지만 영국 것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이의 단위인 피트(feet)는 발이라는 foot의 복수형이다. 그런데 누구 발을 얘기한 것일까? 그것을 또 계산하기 힘들게 12개로 나눈 것을 인치(inch)라 한다. 미터법에서는 같은 개념을 다루는 다른 단위간의 관계를 전부 십진법으로 계산하기 편하게 정했다.
그런데 1미터라는 기본 단위의 실제 크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여기에 프랑스 혁명가들의 놀라운 자연주의가 들어 있다. 그들은 임의적으로 정해졌던 전통적 단위의 권위를 배척하고, 새로 만드는 단위의 근거를 자연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복잡한 토의를 거쳐 결국 채택된 안은 지구의 둘레를 측정해서 거기에 기반하여 1미터의 길이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최고의 측량사들을 동원하여 지구의 둘레를 애써 측정하였고, 그때 기술로는 아주 대단한 사업이었다. 1미터는 지구 둘레를 4분의 1로 나눈 후, 그 거리의 1천만분의 1로 정의하였다. 즉, 북극에서 적도까지 지구 표면을 따라 바로 가는 거리를 1천만 미터, 즉 1만 킬로미터로 정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1천만분의 1로 했을까? 그것은 1미터라는 길이가 사람의 크기와 대략 비슷하도록 정해서 인간들에게 최대한 유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자연주의와 인본주의의 기가 막힌 조화이며, 우주의 객관성과 인간의 주관성을 겸비한 조치였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사회제도를 개선하면서 인각과 자연관의 관계를 그렇게 근본적으로 재고했던 것이다.
미터를 정한 후에 무게의 단위도 거기에 기반하여 고안했다. 1킬로그램을 1리터 부피의 물의 무게로 정했다(1리터는 모든 모서리가 10센티미터인 정육면체의 부피). 무게와 길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한 것인데, 인간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물질인 물을 통해서 하였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만들어 내었으며, 달력까지도 개혁하였다. 왜 일주일은 7일이며 (성경 창세기에서 나왔다지만), 한달의 길이는 30일이었다 31일이었다 하며, 게다가 2월은 왜 28일밖에 없는가. 그렇게 제멋대로 정해놓은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이 타당치 않다 하여 ‘혁명력’ 또는 ‘공화력’이라 칭한 새로운 역법을 만들었다. 일주일은 10일, 한달은 30일로 매달 3주일씩 딱딱 맞아떨어지게 하였고, 그렇게 해서 1년에 12달이 들어간 후 365일중 남은 5일은 ‘혁명 전사의 날’이라는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이 공화력을 약 12년간 실시하였는데,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은 후에 폐지하고 옛날식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미터법은 보존되었고,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 3원칙에 못지 않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정신적, 물질적 유산이 되었다. 혁명 이후에도 프랑스는 미터법을 세계적으로 전파하는 노력을 했고, 자기들의 측정법을 퍼트리려는 영국과 충돌하여 결국 승리했다. 이제는 피트, 마일, 파운드 등 영국식 단위를 고집하는 미국과 같은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미터법을 공용하여 서로 편리하게 교류하고 있다. 특히 과학자들은 철저히 미터법을 따른다. 영국에서도 결국 포기하고 공식적으로 미터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현 영국 정부는 다시 영국 고유의 ‘제국척도’로 돌아가자는 말들을 흘리고 있다. 특별한 실용적이나 과학적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배타적 국수주의의 표현일 뿐이다. 측정 단위의 통일은 획일적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면서도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공동 언어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가장 합리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심했던 200년전 프랑스 혁명가들의 정신을 되살려 보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