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雜事(세계사) 2021/ 07월 역사 속 세금, 세금 속 역사 - 12.11 1921년과 2021년, 히말라야 8000m에 매달린 두 사람
역사 속의 雜事(세계사) 2021
월간조선 07월 호 2021
■ 역사 속 세금, 세금 속 역사
“한 나라가 끝나고 다음 나라가 와도 稅吏는 있다” (6000년 전 수메르의 점토판)
“너에겐 神도 있고 王도 있고 사람도 있다.
하지만 네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稅吏이다.”
⊙ 오줌세, 난로세, 창문세, 수염세, 금욕세… 희한한 세금들
⊙ 근대적 소득세는 나폴레옹전쟁 중이던 영국에서 탄생… 美 소득세, 상위 1%가 내는 부유세로 출발
⊙ 뮌헨 세무서장, 히틀러의 체납액 면제해주고 국세청장으로 벼락출세
⊙ 스페인의 알카발라세, 상공업자와 서민들에게 과중한 稅 부담 안기고, 포르투갈·네덜란드 독립 촉진시켜
⊙ 세금이 원인이 된 청교도혁명,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대혁명, 비틀스 해체

▲영국의 과중한 세금 부과에 대한 항의로 발생한 ‘보스턴 티 파티 사건’은 미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1799년 7월 이집트를 원정 중이던 나폴레옹군(軍)은 알렉산드리아 동쪽의 한 작은 마을에서 망루 보수 작업 중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진 현무암 돌조각을 발견했다. 후일 로제타석(石)으로 알려진 이 돌에는 세 가지 문자가 새겨 있었다. 하나는 고대(古代) 이집트 사제(司祭) 계급이 사용하던 신성(神聖)문자, 하나는 이집트 민중문자, 하나는 그리스 문자였다.
세 가지 문자로 그 내용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바로 ‘세금’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비석이 세워진 기원전 196년 무렵 이집트는 무거운 과세(課稅)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나라는 내란(內亂) 상태에 빠져 있었다. 새로 즉위한 젊은 왕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세금 체납자들과 조세저항으로 인해 투옥된 사람들을 사면하는 한편, 사원(寺院)에 대한 면세(免稅) 혜택을 재확인했다.
죽음과 세금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다고 했던가? 그중 하나인 세금만이라도 피해갈 수 있게 된 사제들은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혜택을 안겨준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한편, 사원이 면세구역이라는 것을 길이길이 기억되도록 하기 위해 이 로제타석에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신성문자는 이 사실을 사제들에게 전하기 위해, 민중문자는 관료 및 민중에게 알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그럼 그리스 문자는 왜 사용되었을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리스계(系) 왕조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이집트의 세리(稅吏)는 이재(理財)에 밝은 그리스인들이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무서 직원들에게 ‘여기는 면세구역이니 들어올 생각 말라’고 포고(布告)한 것이다.
길이 125cm, 너비 0.7cm, 폭 28cm의 로제타석은 세금에 대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과중한 세금, 조세저항, 그리고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 기득권 계층의 존재….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지난 수천 년간 인류 역사를 통해 흔히 볼 수 있었고, 지금도 볼 수 있다.
오줌세
국가라는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 그 비용은 결국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국민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권력자들은 희한한 세금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중에서 첫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것이 로마제국 시절에 있었던 오줌세이다. 네로 황제 사후(死後) 벌어진 내전(內戰)에서 승리하고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텅 비어버린 국고(國庫)를 채우기 위해 세제(稅制)를 정비하면서 오줌세를 신설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소변을 볼 때마다 세금을 냈다는 소리는 아니다. 당시 양모가공업자들은 양털에 묻어 있는 기름기를 제거하기 위해 공중화장실에서 수거한 오줌을 사용하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렇게 수거해간 오줌에 대해 양털가공업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아들 티투스가 “아버님,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라고 진언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은화 한 줌을 아들에게 내밀면서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티투스가 “냄새가 나지 않는데요”라고 답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말했다.
“냄새가 안 난다고? 이건 오줌세로 거둔 세금인데?”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베스파시아노’라고 하면 공중화장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영국에는 난로세라는 것이 있었다. 1662년 만들어진 이 세금은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과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서 전비(戰費)를 충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난로 하나당 2실링씩 부과했는데, 가난한 가정은 교회에서 ‘빈곤증명서’를 발급받으면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 세금은 상대적으로 재산이 적은 이들의 부담이 큰데다가, 과세 대상인 난로의 수를 파악하기 위해 세리들이 집안에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납세자들의 거부감이 컸다. 심지어 집으로 들어온 세리들이 납세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또 ‘빈곤증명서’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부정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난로세를 폐지했다. 대신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과세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세원(稅源)을 발굴했다. 바로 창문이었다. 1696년 만들어진 창문세는 하나의 건물에 6개의 창문까지는 면세였지만, 7~9개인 경우에는 2실링, 10~19개인 경우에는 6실링, 20개 이상인 경우에는 8실링의 세금을 매겼다. 사실 유럽 역사에서 창문세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백년전쟁 중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미 창문세를 도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유정책 하유대책(上有政策 下有對策)’이라는 말처럼, 국민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냈다. 아예 창문을 없애는 쪽을 택해버린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대로변에 난 창문을 기준으로 세금을 물리자, 대로변의 창문은 없애고 집 뒤편이나 중정(中庭) 쪽에만 창문을 내는 형태의 집을 짓기도 했다. 이런 형태의 집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렇게 해서 햇빛을 쬐지 못하게 되자 국민의 건강이 악화됐다. 세금은 피했지만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더 커졌다. 그래도 영국에서 창문세는 1851년까지 존속했다.
가구세와 수염세
제정(帝政)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집의 문(門)에 세금을 매겼다. 표트르 1세는 당초 농가마다 가구세(家口稅)를 부과했다. 농민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같은 집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집에서도 가구마다 입구는 달리했다. 그러자 정부는 가옥의 문(입구)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그런다고 그냥 당할 농민들이 아니었다. 농민들은 아예 문을 하나만 내고 공동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표트르 1세는 수염세라는 것도 부과했다. 네덜란드와 영국 등지를 직접 순방한 적이 있는 표트르 1세는 낙후된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수염 기르는 것을 240년간에 걸친 몽골 지배가 남긴 악습(惡習)으로 규정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해 수염을 기르는 농부들에게는 1코페이카, 도시민에게는 30루블, 상인에게는 60루블, 귀족에게는 100루블을 부과했다. 그래도 수염을 남성다움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던 많은 이가 세금을 내고서라도 수염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엽기적 통치로 악명(惡名) 높았던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가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인구대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자녀를 4명 이상 낳으라고 요구했고, 이를 위해 이혼을 금지시켰다. 이혼을 못 하게 된 부부들은 별거를 선택했다. 그러자 차우셰스쿠는 금욕세(禁慾稅)라는 것을 만들어 의도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은 경우 연(年) 소득의 25%를 세금으로 내게 했다. 생물학적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에도 연 소득의 10%의 세금을 물렸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는 무자식세(無子息稅)였던 셈이다.
독일의 세금 중에는 스파클링 와인세라는 것이 있다. 탄산이 들어간 와인에 매기는 세금인데 영국과의 건함(建艦) 경쟁이 한창이던 1902년 전함(戰艦) 건조를 위해 만들어졌다. 스파클링 와인병에는 ‘이 세금은 독일제국의 전함 건조를 위한 세금’이라는 문구가 적힌 인지(印紙)가 붙었다. 이 세금은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도 굳건히 살아남아 존속했다. 독일제국-바이마르공화국-나치독일-동서분단 시절의 독일연방공화국을 거쳐 통일 이후까지도 살아남았다. 스파클링 와인세는 세금은 일단 만들어지면 당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세금’

▲근대적 소득세를 도입한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
이렇게 보면 국가나 권력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금을 만들어 국민들을 쥐어짤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새로운 세금, 특히 일반 국민들도 체감(體感)할 수 있는 세금 만드는 것을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잘못하면 민심이반을 야기하고, 정권이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루이 14세 때 프랑스의 재상 콜베르는 “세금을 걷는다는 건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떼 내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박근혜 정권 시절 조원동 경제수석비서관도 세제개편안을 설명하면서 이 말을 했다가 구설에 휘말렸다).
하지만 거위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깃털을 뽑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바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이다. 국가 존망의 위기상황 아래서 민중은 숨을 죽여야 했고, 이를 틈타 국가는 새로운 세금을 만들거나 증세(增稅)를 감행할 수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창문세도 백년전쟁을 비롯해 전쟁 때마다 단골로 등장했던 세금이다.
오늘날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소득세도 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실 국민들의 소득을 낱낱이 파악해 세금을 매기는 것은 통치자들의 오랜 로망이었다. 하지만 전근대(前近代)의 행정 능력으로는 국민들의 소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거니와 소득세 징수에 따르는 사생활(私生活) 침해 등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이 때문에 중세에도 소득세를 도입하려는 시도들이 여러 번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가거나 도입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근대적 의미의 소득세는 나폴레옹전쟁 중에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영국은 당초에는 물품세(소비세), 관세, 상속세, 토지세 등 전통적인 세금과 전시국채(戰時國債) 등을 통해 전비를 조달했지만, 이내 한계가 드러났다. 그러자 윌리엄 피트[소(小)피트] 총리는 1798년 의회를 설득해 ‘세금 및 세금납부법’을 제정, 소득세를 걷기 시작했다. 이 법은 부유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연간 소득이 60파운드 미만이면 세금을 물리지 않았지만, 60~200파운드는 10개의 소득구간에 따라 1/120~1/10, 200파운드 이상이면 소득의 10%를 과세했다. 영국은 소득세라는 세원을 발굴해낸 덕분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소득세는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세금’이라고 불렸다.
반면에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영국의 흉내를 낼 수 없었다. 조세저항이 단초가 되어 혁명이 일어났고, 국왕(루이 16세)이 단두대(斷頭臺)에서 목이 잘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폴레옹은 창문세, 소금세 같은 구태의연한 세금에 의존해야 했다. 모자라는 부분은 군대의 ‘현지조달’, 즉 약탈로 메워야 했다. 이는 점령지 주민들의 반발을 야기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러시아, 독일 등 곳곳에서 반(反)프랑스 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나폴레옹의 패배를 앞당겼다.
“소득세는 神의 형벌”
영국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인 1816년 ‘전쟁 중 임시로 만들었던’ 소득세를 폐지했다. 의회는 소득세를 폐기하면서 소득세가 되살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득세 관련 과세 기록을 폐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재무부는 몰래 과세기록 사본(寫本) 1부를 감추어두었다.
영국 재무부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다. 30년 후 로버트 필 총리는 크림전쟁으로 인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소득세를 부활시켰다. ‘국가재정이 정상화되면’ 소득세를 다시 폐지하겠다는 약속을 덧붙였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번 열린 판도라 상자의 뚜껑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소득세 반대론자들은 “우리의 죄를 돌이키려는 신(神)의 형벌”이라며, 소득세를 저주했다. 그런데 ‘신의 형벌’의 세율은 도대체 얼마나 됐을까? 3%였다.
사실 소득세 반대론자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경제적 부담이 아니었다. 소득세제가 국민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자유를 짓밟는 관료주의·전제주의·독재주의의 첫발을 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시민들의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국 정부가 탄탄하고 풍족한 세원인 소득세를 외면할 리 없었다. ‘세금계의 슈퍼스타’인 소득세는 각국으로 확대되어나갔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기간 중에 북부와 남부 모두 전비 조달을 위해 소득세를 도입했다. 여기서도 소득세와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 정도의 국민이 소득세를 납부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미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도금(鍍金)시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도래했다. 빈부(貧富)격차가 커지고, 천민(賤民)자본주의의 폐해가 드러나면서 소득세를 통해 정부가 소득 재분배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여론에 힘입어 1894년 소득세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지만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위헌(違憲)판결을 받았다.
이 위헌판결에 대해 당시 미국의 전체 주(州) 가운데 4분의 3이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1909년 연방 상하양원(上下兩院)은 헌법을 개정해 연방정부가 소득세를 징수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마련했다. 이 수정헌법은 각 주의 동의를 거쳐 1913년 확정됐다. 이에 따라 1913년 새로운 소득세법이 만들어졌는데, 부부에게는 연간 소득 4000달러, 독신자에게는 3000달러까지 공제해주었다. 당시 노동자 연평균 수입이 1200달러였다. 당초 소득세는 ‘부유세’ 개념으로 출발했던 셈이다.
美 소득세, 상위 1%가 내는 ‘부유세’로 출발
이런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바뀌고 말았다. 미국의 보수논객인 글렌 벡은 “1913년 상위 1%의 부자들에게만 적용한다고 약속했던 세법은 1939년 상위 5%의 부자들에게로 확대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미국인 75%로 크게 확대되었다”면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물리는 정책은 언제나 그 대상을 확대하게 되어 있다”고 꼬집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권 시절 소득세의 한계세율은 1936년 79%, 1940년 81%로 높아졌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1942년 4월 27일 의회 연설에서 “미국 시민이라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모든 세금을 내고 난 후에는 연 2만5000달러 이상을 벌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만5000달러는 요즘 화폐가치로 따지면 100만 달러에 해당한다. 급여를 비롯해 모든 종류의 소득을 망라해 이 액수를 넘는 돈은 100% 세금으로 거두어가겠다는 것이 루스벨트의 구상이었다. 의회는 그것은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해 최고한계세율을 94%로 결정했다. 이런 최고한계세율은 당시 연간 2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자들에게 적용되었는데, 현재 가치로 따지면 이는 600만 달러에 해당한다. 당시 평균 국민소득의 92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오늘날의 가치로 120만 달러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72~94%, 100만 달러 내외의 소득에 대해서는 25~50%의 한계세율이 적용됐다.
이러한 과도한 누진세율에 대한 반발도 생겨났다. 공화당의 중진 상원의원이던 로버트 태프트는 “정부 탈취를 통해 사회주의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미 도달한 30% 이상의 과세 부담의 지속적인 증대를 통해서도 사회주의화될 수 있다”면서 “무거운 세금의 부과야말로 자유에 대한 제한”이라고 역설했다.
196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배리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자의 양심》에서 “연간 1만 달러를 버는 사람이 수입의 20%를 내도록 되어 있는 데 반해, 연간 10만 달러를 버는 사람이 정부에 수입의 90%를 내놓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공정에 관한 나의 관념으로 용납할 수 없다”면서 “나는 성공을 징계해야 한다는 가치를 지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의 노동이 그의 이웃보다 좀 더 풍성한 결실을 생산한 사람에게 그가 산출한 풍성함을 즐길 기회를 부정하는 것은, 재산에 대한 자연권에 배치되고 따라서 부도덕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누진세는 몰수적 세금”이라면서 “그 효과와 그 의도의 상당 부분은, 모든 사람을 보통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사상을 계승한 사람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의회를 설득, 세금개혁법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최상위 구간의 소득세율은 28%로 뚝 떨어졌다. 1986년 10월 22일 세금개혁법 서명행사에서 레이건은 그간의 조세체계가 ‘비(非)미국적’이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현행 세법의 가파른 누진세율은 개인의 경제적 활기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면서 “새로운 세법은 지금껏 미국 의회가 만들어낸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 중 최고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건의 말대로, 그가 단행한 감세(減稅)정책은 1990년대 경제활황의 밑거름이 됐다. 비록 그 과실은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 출신 빌 클린턴 정부가 따 먹었고, 미국 내 양극화(兩極化) 현상이 극심해졌다는 비판도 있지만 말이다.
누진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금을 많이 내는 만큼 누진적으로 투표권을 더 주는 나라도 있었다. 프로이센에서는 공직선거나 투표에서 최고액 납세자에게는 최대 3표, 중산계급의 시민들에게는 2표, 소득이 낮거나 거의 없는 빈털터리에게는 1표를 주었다. ‘국가재정에 기여한 바가 클수록 발언할 권리도 크다’는 논리에서였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이집트 稅政의 産物
국가의 출현과 함께 세금이 출현했고, 그와 함께 세금을 다루는 전문 직업인, 즉 세리(稅吏)도 나타났다. 세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메르문명의 도시 라가시에서 발견된 점토판(실은 세금영수증이었다!)에는 “한 나라가 끝나고 다음 나라가 와도 세리는 있다” “너에겐 신(神)도 있고 왕(王)도 있고 사람도 있다. 하지만 네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세리이다”라고 적혀 있다.
비옥한 나일강 유역에서 발전한 고대 이집트에서는 국유(國有)농지를 농민들에게 임대하고 농산물의 5분의 1을 수확세로 거두어들였다. 이를 위해 일찍부터 이집트에서는 토지측량술과 기하학이 발달했다. 고대 그리스의 유클리드 기하학은 바로 이집트의 이러한 기하학 업적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집트에서 세무행정을 담당한 이들은 ‘서기’로 일컬어지는 공무원들이었다. 이들을 교육하는 국립서기학교까지 있었다. 기록에는 “서기가 되어라. 그러면 부드러운 손으로 일할 수 있다. 하얀 옷을 입고 신하들이 인사를 한다” “서기가 되면 누구한테도 지시받지 않고 어떤 직업보다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공무원은 아득한 고대부터 선호 직종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공시생(公試生)도 있지 않았을까?
반면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징세청부인(徵稅請負人)’이 세리 역할을 대신했다. 관세를 징세할 수 있는 징세권(徵稅權)을 경매(競賣)를 통해 낙찰받은 징세청부업자들이 세금을 징수했던 것이다.
일종의 ‘민영(民營)국세청’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제도는 로마로도 이어졌다. 징세청부인은 세율 10%인 속주세(屬州稅)를 거두고 그중에서 10%를 수수료로 챙겼다. 《성경》에 나오는 마태나 삭개오와 같은 세리들은 바로 이런 징세청부인, 혹은 이들로부터 재하청(再下請)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외세의 앞잡이, 죄인으로 지탄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과 소통하고 구제하려 했던 예수도 눈총을 받아야 했다.
징세청부업 제도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에서 그대로 살아남았다. ‘근대화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징세청부인이었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공포정치 시기인 1793년에 ‘적폐(積弊)’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났다.
脫稅의 달인 히틀러
권력자가 관련된 사건들을 덮어주고 출세한 검사나 경찰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어느 시대에나 공무원은 권력자에게 약하다. 세리, 세무공무원 역시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으로 1923년에 123만 라이히스마르크(RM·독일제국부터 1949년까지 쓰였던 독일의 화폐 단위. 1949년 화폐개혁으로 도이치마르크로 바뀜)의 수입을 올렸다. 뮌헨시 세무 당국은 이에 대해 60만 마르크의 세금을 물렸다. 히틀러는 20만 마르크만 납부하고 나머지는 체납(滯納)했다. 입만 열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떠들었던 히틀러지만, 세금을 내는 것은 싫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대단한 사치품이었던 자동차를 구입하고 이를 업무용으로 비용 처리하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자 뮌헨 세무서장은 그에게 “체납액을 소멸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히틀러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 달 후 그 세무서장은 국세청장으로 승진하고 월급이 40% 올랐다.
히틀러는 국가예산으로 구입해 국민들에게 뿌리다시피 한 《나의 투쟁》의 저작권료, 자신의 초상이 들어간 우표에 대한 초상권료 등도 챙겼다. 재무부와의 협상(?)을 통해 급여에 대한 세금도 면제받았다. 대독일민족의 지도자인 총통이 세금 같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신경을 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히틀러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재산이 거의 없다고 주장했지만, 2014년 6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역사가들이 세금 및 은행 서류를 조사한 결과, 히틀러는 탈세, 저작권료 등으로 국민 몰래 약 11억 라이히스마르크(2014년 가치 6조2000억원) 규모의 축재(蓄財)를 했다”고 보도했다.
원천징수
이렇게 자신은 탈세를 일삼으면서도 국민의 주머니는 철저히 털었다. 이를 위해 그는 원천징수제도를 도입했다. 종전에는 1년에 1회 세금을 부과하던 것을 12회로 나누어 매달 급여에서 원천징수하도록 한 것이다. 세무 당국의 입장에서는 세금 징수가 편리해졌다. 직장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회사가 먼저 세금을 떼서 납부하니, 조세저항도 적었다. 나치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도 1941년에 이 제도를 도입했다. 일제(日帝)가 남겨준 많은 행정시스템과 함께 원천징수제도도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승계됐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봉급쟁이들이 ‘유리지갑’ 신세를 한탄하게 만든 것은 히틀러인 셈이다(히틀러 이전에 영국과 미국에서도 원천징수제도를 시행하기는 했다).
1642년 프랑스의 한 젊은이는 세무서장이던 아버지의 세금 계산을 돕기 위해 덧셈과 뺄셈을 할 수 있는 계산기를 발명했다. 그의 이름은 블레즈 파스칼, 《수상록》으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스페인을 몰락시킨 알카발라稅
세금은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소득세가 나폴레옹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승패(勝敗)를 갈랐던 것처럼,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나라를 망친 세금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스페인의 알카발라(alcabala)세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슬람권에서 비롯된 세금으로 스페인이 800년 가까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이식됐다.
처음에는 부동산과 일부 상품 거래에만 적용되다가 16세기 후반 필리페 2세 때부터 대폭 확대된 이 세금은 일종의 부가가치세다. 현행 한국의 부가가치세가 최종 거래 단계에서 10% 부과되는 것과는 달리 알카발라세는 거래 단계마다 10%씩 부과되었다. 예컨대 맥주가 양조장에서 도매상, 소매상을 거쳐 가정으로 팔려 갈 때 단계마다 10%씩 세금이 부과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원가가 1000원인 맥주는 도매상으로 넘어갈 때에는 1100원이 된다. 도매상에서 소매상으로 넘어갈 때에는 1210원, 소매상에서 가정으로 넘어갈 때에는 1331원이 된다. 물론 이것은 따로 매 단계에서 업자가 이윤을 붙이지 않았을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다. 단계마다 업자가 이윤을 붙이면 그에 따라 세금도 당연히 올라간다. 세무 당국 입장에서는 앉아서 돈을 버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과도한 세금은 상공업 발전을 위축시키고 서민들에게도 부담이 됐다.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 이후 남미의 식민지에서 착취해 오는 금은(金銀) 이외에는 다른 산업 기반이 없던 스페인은 이 알카발라세에 과도하게 의존했다. 더 나아가 스페인은 이 세금을 자기들 지배 아래 있던 포르투갈(포르투갈은 1580~1640년 스페인에 합병됐었다)이나 네덜란드에 강제하려고 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치열한 항쟁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이후 스페인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스페인은 알카발라세를 폐지했지만, 이때쯤이면 스페인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소국으로 전락한 뒤였다.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불과 수백명의 병력으로 아스테카제국과 잉카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아스텍이나 잉카제국의 가혹한 세금 수탈에 원한을 품고 있던 현지 원주민들과 연합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가 초기에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도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토지세와 인두세 등을 면해준 것이 큰 요인이 됐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중동지역을 장악한 오스만튀르크가 향신료 등에 매기는 관세를 회피하기 위해 동양과의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지리상 대발견’의 시발이 되었다.
가톨릭 사제들은 ‘조세피난민의 후예’
세금의 역사, 세리의 역사가 뿌리 깊은 것처럼 조세저항의 역사 역시 뿌리 깊다.
가장 기본적인 조세저항은 세금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상 백성들이 세금을 피해 섬이나 산으로 도망치거나 마을을 떠나 유랑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284년 권좌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 재건을 위해 세금 징수를 강화했다. 그때 이집트에는 안토니우스라는 독실한 기독교 사제가 있었다. 그의 신앙심에 감화된 신자들은 안토니우스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세리들의 손길은 이들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러자 안토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막으로 달아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사막의 척박한 기후 때문에 여자나 아이들은 이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독신으로 살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여기서 가톨릭의 수도원과 사제 독신주의가 출발했다. 안토니우스는 후일 성인(聖人)으로 추대됐다. 《세금전쟁》의 저자인 하노 벡과 알로이스 프린츠는 “은수사(隱修士)의 독신생활은 깊은 통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안락한 삶과 면세(免稅) 중에서 면세를 택한 결과에 가까웠다”면서 “이런 관점에서 사제들은 적어도 이데올로기로서는 조세피난민의 후예들”이라고 말한다.
안토니우스가 세금을 피해 사막으로 떠났다면, 독일의 축구 스타 프란츠 베켄바워와 전설적인 카 레이서 랄프 슈마허, 스웨덴의 테니스 스타 비외른 보리, ‘프랑스의 국민배우’로 사랑받던 제라르 드파르디외, 아일랜드의 밴드 U2, 영국의 롤링스톤스와 록 스타 데이비드 보위 등은 세금을 피해 조국을 등졌다.
이들처럼 일찌감치 해외로 도망치는 방법을 몰랐던 비틀스는 최고 90%에 달하는 소득세에 시달려야 했다. 비틀스는 절세(節稅)를 위해 애플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비틀스는 뮤지션이었지, 사업가는 아니었다. 애플은 비틀스의 돈을 노리고 달려든 인간들에게 이리저리 뜯기는 신세가 됐다. 결국 애플의 경영을 둘러싸고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 간에 갈등이 벌어졌고, 이는 비틀스 해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비틀스는 1966년에 내놓은 곡 ‘Taxman’을 통해 노동당 정부의 과도한 누진세 부과를 공격했다. 비틀스 멤버 조지 해리슨은 후일 자서전에서 “우리는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번 돈의 사실상 대부분을 세금으로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사람만 세금을 피해 망명을 떠나는 게 아니다. 기업도 떠난다. ‘스웨덴 국민기업’ 이케아의 본사는 스웨덴이 아니라 네덜란드에 있다. 이케아 설립자 잉바르 캄프라드는 1974년 85%의 소득세를 얻어맞자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알몸의 백작 부인

▲고디바 초콜릿은 백성들을 위해 조세 감면을 탄원했던 고디바 부인의 모습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세금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싫으면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통사정하는 방법이 있다. 11세기 초 잉글랜드의 머시아왕국(지금의 코번트리)에는 레오프릭 백작이라는 영주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고 있었다. 그의 젊은 아내가 백성들을 위해 세 부담을 줄여달라고 호소하자 레오프릭은 “당신이 대낮에 알몸으로 말을 타고 거리를 한 바퀴 돌면, 그 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아내가 세금 감면 탄원을 그만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백성들을 위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백작 부인이 말을 타고 마을을 도는 시간에 아무도 거리에 나오지도 않고,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도 않기로 했다. 백작 부인은 결국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그의 행동에 감동받은 레오프릭 백작은 개과천선, 이후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백작 부부는 수도원을 하나 건립했는데,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가 코번트리다.
1926년 벨기에인 조셉 드랍스는 초콜릿 회사를 만들면서 레오프릭 백작 부인처럼 우아한 초콜릿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고 말을 탄 알몸의 여인 그림을 자기 회사의 로고로 삼았다. 그게 바로 고디바 초콜릿이다.
세금을 감면해달라는 탄원이 먹혀들지 않으면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곡괭이나 쇠스랑, 칼, 죽창을 들고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1358년),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1381년)은 백년전쟁 와중에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린 것이 원인이 됐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말기의 황건적의 난(184년), 남송(南宋) 말기의 방랍의 난(1120년), 원(元)나라 말기의 홍건적의 난(1351년), 명(明)나라 말기의 이자성의 난(1644년), 청(淸)나라 말기의 백련교도의 난(1796~1804년) 등에서 보듯, 왕조 말기마다 과중한 세금 부과에 항의하는 민중반란이 일어났다. 조선 말기인 1862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임술민란(壬戌民亂)도 삼정[三政: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문란이 그 원인이 됐다.
청교도혁명으로 번진 선박세
서양에서는 조세저항이 의회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215년 잉글랜드의 대귀족들은 실정(失政)을 거듭하던 존 왕을 겁박하여 봉건귀족들의 특권을 확인하는 대헌장(大憲章·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도록 했다. 주된 내용 중 하나가 “병역면제세 또는 보조금은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짐의 왕국 일반회의에 의하지 않는 한, 짐의 왕국 내에서 부과되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제12조). 이 문서는 당초에는 봉건귀족들의 기득권을 확인하기 위한 문서였지만, 근대 이후에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찰스 1세 시절 선박세 20실링 납부를 거부해 재판에 회부된 존 함덴이라는 하원의원은 “마그나 카르타에서 국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는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금은 무효”라고 항변했다. 함덴은 근소한 차이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의회는 1641년 함덴에 대한 재판이 위법이라고 결정하고 그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법관을 탄핵했다. 이로 인해 의회와 국왕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 갈등은 국왕과 의회파 간의 내란, 즉 청교도혁명(1642~1645년, 1648~1649년)으로 번졌다. 청교도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찰스 1세를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은 바로 존 함덴의 사촌이었다.
미국 독립혁명(독립전쟁) 역시 세금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7년전쟁(1756~1763년) 이후 영국은 그동안 지출한 전비와 식민지 주둔군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설탕법(1764년), 인지세법(1765년), 타운센드법(1767년), 차조례(茶條例·1773년) 등을 잇달아 제정, 아메리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했다. 차조례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직접 차를 팔 수 있게 한 법률인데, 이렇게 해서 값싼 차가 들어오게 되자 그동안 재미를 보던 차 밀수업자들이 곤경에 처하게 됐다. 이들은 시민들을 선동해 인디언으로 가장하고 동인도회사 선박을 습격, 차가 들어 있는 상자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를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후일 자유를 위한 항쟁으로 미화(美化)되었지만, 실상은 차 밀수업자들의 난동이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군대를 동원해 반영(反英)시위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시민 네명이 사살됐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식민지 대표들로 구성된 제1차 대륙회의가 1774년 열렸다. 이들은 영국 헌정의 전통을 원용(援用)해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식민지 대표들의 동의 내지 참여 없이 영국 본국의 정부나 의회의 입법으로 식민지에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륙회의는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7년간의 전쟁 끝에 1883년 독립을 쟁취했다.
프랑스대혁명
1789년 발생한 프랑스대혁명 역시 세금 문제가 도화선이 됐다. 프랑스에서는 타이유(토지세 겸 재산세)세를 비롯해 중세봉건제의 잔재인 다양한 세금이 농민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반면에 귀족과 성직자들은 세금을 면제받고 있었다.
1777년 루이 16세에 의해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스위스 은행가 자크 네케르는 파탄에 이른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세정개혁에 나섰다. 그는 징세청부업자 제도를 폐지하고 국가공무원들이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는 한편, 귀족과 성직자 계급으로부터도 세금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당연히 이들 기득권 세력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네케르는 이에 맞서 국가재정 실태를 공개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왕실비가 국가재정의 1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국민들은 분노했다. 네케르는 1781년 해직됐다.
1788년 루이 16세는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네케르를 복직시켰다. 이듬해에는 1614년 이후 열리지 않았던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에서 과세에 대한 동의를 얻어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곪을 대로 곪은 프랑스의 모순은 그해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폭발했다. 대혁명의 시작이었다.
세금으로 무너진 정권들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금 문제 때문에 정권이 무너지는 일은 현대에서도 비일비재하다. 1979년부터 11년간 집권하면서 ‘영국병(英國病)’을 치유했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주민세(인두세)를 도입하려다가 민심 이반으로 1990년 11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캐나다의 브라이언 멀로니(진보보수당) 총리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부가가치세 도입을 강행했다가 1993년 총선에서 156석이던 의석이 2석으로 줄어드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하고 몰락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의 몰락도 1977년 실시된 부가가치세제와 관련이 있다.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은 중선거구제 덕분에 의석수에서는 앞섰지만, 득표율에서는 1.11% 뒤졌다.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해 종전의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상공인들, 부가가치세제 도입 후 물가상승으로 고통받게 된 서민들의 불만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씨는 후일 “당시 새로이 부가가치세제의 적용을 받게 되는 사람은 16만명 정도였는데, 그들의 조세저항이 그토록 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제10대 총선에서의 승자를 자처하면서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5월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내건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했다. 이후 김영삼 총재의 신민당은 사사건건 박정희 정권과 각을 세웠다. 그 갈등은 결국 부마사태와 10·26사태로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전 대통령도 담배에 붙는 세금을 올리고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상공인들에 대한 과세를 강화했다가 민심 이반을 야기했고, 그것이 탄핵사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2021.12.07 해적의 나라, 신사의 나라
“드레이크의 목을 자르겠다.”
황금 검을 쥐고 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입에서 뜻 밖의 말이 나왔습니다. 주변에 있던 외국 사신과 신하들, 국민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는 여왕의 진심이 아닌 농담이었습니다.
여왕은 곧 칼을 옆에 있던 프랑스 사신에게 넘겨주더니 영광스러운 ‘기사 작위’ 수여식을 거행해달라고 했습니다. 사신은 영국·프랑스가 함께 에스파냐에 맞서는 동맹을 추진하기 위해 주군인 프랑스 앙주공과 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 문제를 협상하러온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협상을 위해 온 프랑스 사신이 영국 여왕의 부탁을 받고, 에스파냐를 상대로 한 해적질로 유명한 영국 선장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이는 당시 영국 해적들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던 에스파냐에겐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왕이 결혼을 한 것도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처녀로 살았으니까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스페인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엘리자베스 1세의 초 상화. 그녀의 오른쪽 어깨 뒤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향해 돌진하 는 영국 함대가 그려져 있다. 여왕의 오른손 아래 놓인 지구의가 미래에 다가올 대영제국의 세계 지배를 예언하는 듯하다. 당시 궁정 화가였던 조지 가워(George Gower)의 작품
왕위에 오른지 벌써 23년.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 감각·능력을 가진 왕 중 한 명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 여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대륙의 수 많은 시선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전쟁의 역사’라는 책에서 이 장면에 대해 “아마도 에스파냐 왕에게 직접적인 모욕을 주는 한편,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반목시키려고 한 행위였을 것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또,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국’이라는 책은 “그녀의 이 행동은 펠리페(에스파냐의 왕)에겐 또 다른 도전장이었다”라고 했습니다.
1581년 4월 4일 런던 남동부 템스강 기슭 데트퍼드(Deptford). 부두에 정박해 있던 300t급 갤리언 ‘골든 하인드(Golden Hind)’에서 열린 드레이크 기사작위 수여식은 이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2년 10개월 동안 세계를 한 바퀴 돌고 귀국한 프랜시스 드레이크…. 60년 전 마젤란 탐험대에 이어 두번째로 세계일주를 달성해 영국을 영광스럽게 만들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탈 능력으로 엄청난 재물을 획득해 여왕께 바친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드레이크 경(Sir)’이라고 불리게 될 터입니다. 여왕은 그를 ‘우리의 황금 기사’라고 불렀습니다.
무엇보다 이 날의 의미는 여왕이 해적을 국가의 공신으로 정식 인정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7년 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것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5세기 중엽 앵글로색슨이 처음 잉글랜드 땅을 밟은 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영국 역사에서 손에 꼽는 명장면들이 있습니다. 바이킹 침입으로 거의 모든 영토를 잃은 알프레드 대왕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애설니섬에서 재기하는 장면, 시몽 드 몽포르가 ‘최초 의회’를 소집하는 장면, 헨리 8세가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나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장면, 청교도 혁명 때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참수하는 장면, 입헌군주제를 수립한 명예혁명 등 …. 여기에 개인적으로 드레이크의 작위 수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해적, 기사가 되다
잉글랜드 남서부 데본의 타비스톡에서 프로테스탄트 농부의 맏아들(12형제 중)로 태어난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탐험가이자 선장, 해적, 해군 장교, 정치인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드레이크 선장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는 장면.(왼쪽) 영국 남부 항구도시 플리머스에 세워진 드레이크 동상(오른쪽)
어릴 때부터 뱃일을 했고, 20대에는 약탈과 노예무역으로 떼돈을 번 사촌 존 호킨스의 선단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15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비즈니스’에 뛰어들었습니다. 특히 노략질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보다 항해술을 더 잘 알지 못한다”고 자랑했습니다.
1572년 파나마 지역의 스페인령 마을과 선박 등을 습격해 짭짤한 수익을 얻은 드레이크는 이듬해 다시 파나마 약탈에 나서 20톤의 금과 은을 노획하는 ‘대박’을 터뜨립니다. 플리머스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스페인에선 ‘해적’으로 낙인찍였지만 말이죠.
파나마 지역 약탈로 이름을 날린 그에게 여왕도 큰 호감을 보였습니다. 1577년 여왕은 그에게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과 태평양 지역 원정에 나서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끄는 선단은 그해 12월 영국을 출발했습니다.
세계를 도는 동안 그가 탐험만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페루의 리마 인근 해역에서 스페인의 배 한 척을 나포했는데, 그 배에서 금 36kg과 은 2만6000kg, 금으로 된 십자가상, 각종 보석이 쏟아졌습니다. 1580년 9월 드레이크가 플리머스항에 닻을 내리자 런던은 온통 그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런던 주재 에스파냐 대사는 그를 “미지 세계의 도둑 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드레이크의 세계일주로 제일 이득을 본 사람은 여왕이었습니다. 전리품(40만 파운드어치) 중 절반이 여왕 몫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당시 여왕의 일년치 수입보다 많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드레이크는 1만 파운드를 받았다고 합니다.
튜더 왕조 시대 귀족 바로 아래 계급인 젠트리는 6000명 남짓(영국의 역사, 상, 나종일·송규범)이었다고 합니다. 젠트리는 다시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데, 제일 상층에 젠트리의 1%도 안되는 기사(knight)가 있고, 이어 에스콰이어(esquire)와 젠틀먼(gentleman)등이 있었습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해적왕이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탁월한 약탈 능력을 발휘한 드레이크는 이제 ‘기사’가 됐고, ‘경’이라 불리기 시작합니다. 해적은 신사가 됐고, ‘해외 비즈니스’의 길을 여는 주역이 됐으며, 대영제국 해군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제국은 이렇게 시작됐다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열었을 때 그 선두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415년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모로코 지역의 세우타를 점령, 해외 영토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은 해양 탐험의 선구자인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주도로 아프리카 서안을 돌아 인도로 항해하는 바닷길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유럽인들이 이전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속속 진출했습니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했고,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 인도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카스티야(이사벨 여왕)와 아라곤(페르난도 2세)의 통합으로 탄생한 에스파냐도 15세기 후반 본격적인 해외 개척에 돌입합니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고, 포르투갈 태생의 에스파냐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끈 탐험대는 1519년 8월 세비야를 출발, 세계를 한 바퀴 돈 뒤 1522년 9월에 세비야로 다시 돌아옵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은 대부분 스페인 차지였습니다. 포르투갈이 ‘무역’쪽에 관심이 컸던 반면, 에스파냐는 정복에 무게를 뒀습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9년 아즈텍 제국(멕시코)을 멸망시켰고, 1531년엔 코르테스와 친척간인 프란치스코 피사로가 180명의 군인과 말 27마리를 데리고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에스파냐는 이곳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획득하게 됩니다.
아메리카와 인도, 동남아, 아프리카 등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후추와 계피 등 향신료, 금·은을 비롯한 귀금속, 노에 등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부가 넘쳐났습니다. 유럽은 부러운 눈으로 이 두 나라를 바라봤지요.
영국의 해양·무역 관련 활동은 튜더 왕조 시대에 기지개를 폅니다.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는 보조금까지 주면서 조선 산업을 육성했습니다. 최초로 보조금을 받은 캐닌지즈 조선소는 100여명의 목수·노동자를 고용해 총 3000톤의 선박을 만들었습니다. 1485년 의회는 처음으로 항해법을 제정했습니다. 헨리 8세는 유럽 최초로 왕실 소속의 상설 함대를 창설하고, 이를 관할하는 상설 부서를 만들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 때는 런던 상인들이 모로코와 기니아 등으로 무역로 개척에 나섰습니다.
남동생 에드워드 6세(재위기간 6년)와 언니 메리 1세(5년)에 이어 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이르러 해외 진출은 본격화됩니다. 젠트리 출신인 험프리 길버트와 월터 롤리, 리처드 그렌빌 등이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했습니다. 특히 롤리는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 도착, 이 땅을 처녀(virgin) 여왕에게 바치며 버지니아(virginia)라고 명명했습니다.
나중에 대박을 터뜨리는 식민지 개척보다 이 당시에 훨씬 활발하고 수지 남는 활동은 약탈과 노예무역이었습니다. 1560년대에 존 호킨스와 1570년대엔 드레이크가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습니다. 특히 드레이크의 활약은 에스파냐에겐 적잖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신교와 카톨릭으로 갈라져 커져가던 영국과 에스파냐의 대립은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영국 왕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이들 해적들을 사략선(적선을 나포하는 면허를 가진 민간 무장선)의 선원으로 인가해 그들의 활동을 합법화했습니다. 물론 수익의 일정 부분도 받았구요.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였던 1585년에서 1604년까지 카리브해에서 에스파냐 선박들을 공격하기 위해 영국에서 출항한 배는 일년에 100~200척에 달했고, 이들이 가져온 부(富)는 한해 2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은 영국의 해적 활동을 대영제국의 맹아 또는 첫발로 평가합니다. 니얼 퍼거슨은 ‘제국’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영국인들은 최초의 제국 건설자들이 아니라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 제국들의 찌꺼기를 찾아다니는 해적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영제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즉 해상 폭력과 도둑질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다.”
◇무적함대의 허무한 참패
영국과 에스파냐의 격돌은 피할 수 없는 단계가 됩니다. 영국 해적의 약탈에 분노하고 있던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1585년 네덜란드(당시 스페인령)에서 일어난 개신교 반란을 지원하자 더 이상 영국을 그대로 놔둬선 안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던 차 국내외 카톨릭의 후원을 등에 입고 호시탐탐 영국 왕위를 노리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메리 스튜어트(헨리 7세의 외증손녀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고종사촌의 딸)가 반역을 꾀하다 참수를 당합니다. 가톨릭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에스파냐의 영국 공격 결심은 굳어졌습니다.

▲칼레 해전
양쪽은 긴박하게 움직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로 네덜란드 남부를 평정한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병력 3만명을 영국에 실어날라 엘리자베스 1세를 무너뜨리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영국은 에스파냐 동태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1587년 4월 여왕의 명령을 받은 드레이크가 에스파냐 카디스항을 기습, 스페인 선박 30척을 박살냈습니다. 이때문에 무적함대 출항은 1년 이상 늦춰졌지요. 드레이크는 이때 “에스파냐 왕의 수염을 살짝 그슬린” 것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588년 여름 영국해협 일대에서 벌어진 칼레 해전은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위풍당당하게 출항했던 130척 중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배는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1만4000여명의 병사와 선원을 잃었고 생존자는 1만명 미만이었습니다. 반면, 영국의 손실은 배 7척, 사망자 100여명, 부상자 400여명에 그쳤습니다. 불과 17년 전인 레판토 해전(1571)에서 로마 교황의 연합 함대 일원으로 참전해 오스만 투르크 함대를 궤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무적함대의 명성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사실, 무적함대가 입은 손해 중 대부분은 전투 중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교전에서 잃은 배는 몇 척에 불과합니다. 대신 칼레 해전에서 패한 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크게 돌아 도망치는 과정에서 영국인들이 ‘개신교의 신풍(神風)’이라고 부르는 폭풍우 등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중요한 건 전투 자체에서도 무적함대는 이미 영국 함대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우선 대포 성능에 차이가 컸습니다. 16세기 초반 헨리 8세는 “지옥이라도 정복할 만큼 많은” 대포를 갖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어 역사상 처음으로 무쇠 대포를 만들었습니다. 제작비는 무쇠 대포가 기존 청동 대포의 5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그 결과 칼레 해전에서 에스파냐 대포가 한 발을 쏠 때, 영국 대포는 세 발을 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총 사령관에 자신의 사촌인 하워드 경을, 부사령관에 해적 출신의 드레이크와 호킨스를 임명했습니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영국 함대의 전술과 항해 능력은 상대를 압도했습니다. 영국의 배들은 속도가 빨랐고, 움직임도 민첩했습니다. 선원들은 매우 유능했습니다. 영국 함선들은 빠르게 움직이며 무적함대를 공격했지만,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37세의 귀족 출신 사령관이 지휘하는 무적함대는 느릿느릿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당시 하워드 경은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세상 어디서도 영국 해군보다 위대한 함대는 없을 것이다. 에스파냐 왕의 함대가 수백 척이라도 우리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능히 농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엘리자베스 1세 첫번째 이야기였습니다.
12.11 1921년과 2021년, 히말라야 8000m에 매달린 두 사람
넷플릭스 신작 소재 된 맬러리와 님스
높은 산을 왜 오르는 걸까. 그래서 물어봤다.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는 겁니까?”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다. “왜 8000m 산에 오르려는 겁니까?” “우리도 할 수 있으니까요.

▲니르말 님스 푸르자가 8000m급 14개 봉우리 최단 기간 등정을 위한 '프로젝트 파서블' 중 2019년 5월 22일 에베레스트에 오른 뒤 하산하면서 찍은 사진. 세계 최고봉의 정상으로 향하는 구간에 등반가들이 몰려있는 이 장면은 당시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됐다. [AP=연합뉴스]
앞서 문답은 어디서 들어봄 직하다. 넷플릭스에서 신작으로 상영 중인 애니메이션 ‘신들의 봉우리’는 에베레스트(8848m)에서 산화한 영국의 조지 맬러리(1886~1924)가 모티브다. 뒤의 문답 주인공은 니르말 님스 푸르자(38,자신을 ‘님스다이’로 부르는데 ‘다이(dai)’는 네팔어로 형제를 뜻함). 또 다른 넷플릭스 신작인 다큐멘터리 ‘14좌 정복(14 peaks)’에 등장한다. 맬러리와 님스. 넷플릭스는 100년 가까운 차이의 두 산악인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올렸다. 두 사람은 8000m급 산에 대한 최초와 최근의 도전자다.
‘신들의 봉우리’ 소설·만화 이어 애니로

▲1924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 뒷줄 왼쪽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앤드루 어빈, 조지 맬러리다. [중앙포토]

▲1923년 5월 18일자 뉴욕타임스 . 조지 맬러리와의 인터뷰를 담았다. [중앙포토]
맬러리의 대답은 산악 관련 명언으로 꼽힌다. 1923년 뉴욕타임스(NYT) 기자와의 인터뷰 중 나온 말이다. 맬러리가 진정성은 팽개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NYT 기자가 만들어낸 말이다 등 온갖 설이 있다.
100년 전인 1921년. 맬러리는 영국의 에베레스트 1차 원정대 대원이었다. 1차 대전 뒤의 영국은 다급했다. 전쟁에 시달린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야 했다. 지구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매달렸다. 1차 원정 때는 맬러리가 에베레스트 북동능선 루트를 찾아냈다. 3차 원정인 1924년 6월 4일, 맬러리는 앤드루 어빈(1902~1924)과 함께 정상 공격에 나섰다.

▲1924년 6월 6일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에서 캠프4를 떠나는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 이들의 마지막 사진이었다. [중앙포토]
지원조인 노엘 오델은 등반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6월 8일 오후 12시 50분, 7925m 지점에 다다라서 처음으로 온전한 형태의 화석을 발견하고는 뛸 듯이 기뻤다. 갑자기 시계가 명료해졌다… 능선의 바위 구간 밑에 두 개의 점이 보였다. 하나의 점은 바위 돌출부위를 넘어 다른 하나의 점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가 다시 흐려졌다."
두 개의 점, 즉 맬러리와 어빈은 미지의 세계로 사라졌다. 그들은 정상에 올랐을까. 넷플릭스 ‘신들의 봉우리’는 여기서 출발한다. ‘신들의 봉우리’는 『음양사』로 알려진 유메마쿠라 바쿠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이후 『고독한 미식가』 등을 그린 다나구치 지로가 만화로 만들었다. 2016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산악 소설’ ‘산악 만화’라며 ‘산악’으로 선을 긋기에 이 작품은 인기가 많다. 배성우 한국산서회 총무이사는 “픽션이 가미된 ‘신들의 봉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버전으로 변신하면서 산악인은 물론 폭넓은 층이 빠져드는 콘텐트”며 “스토리텔링, 미스터리, 스릴, 휴머니티를 고루 간직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맬러리는 에베레스트에서 사라진 지 75년이 지난 1999년에 발견됐다. 에베레스트 북벽 8157m 지점이었다. 맬러리의 시신을 발견한 등반가 콘래드 앵커는 그 시신의 등산복에 박힌 G. Leigh. Mallory라는 이름을 확인했고 런던의 한 등반장비업체 상호가 적힌 영수증과 편지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항상 품 안에 간직했던 아내 사진은 없었다. 고글은 주머니에 그대로 있었다. 정강이뼈와 비골, 정수리에 손상이 있었다. 허리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로프 자국이 선명했다. 소지하던 코닥 포켓 사진기는 없었다. 이 사진기는 ‘신들의 봉우리’ 이야기를 펼친다. 소설 『신들의 봉우리』 수정본이 지난해 국내 출간됐다. 맬러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소설도 고친 것이다.
다시 100여 년 전. ‘Obterras London-Mallory Irvine Nove Remainder Alcedo-Norton Rongbuk.’ 암호로 만들어진 한 통의 전보가 티베트에서 영국으로 날아갔다. 1924년 6월 19일이었다. 맬러리와 어빈의 사망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에베레스트에 있던 맬러리가 아내 루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1924년 5월 27일 작성)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촛불이 다 타들어 가고 이제 그만 써야겠소.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당신의 걱정은 사라질 것이오. 빨리 당신에게 좋은 소식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요. 무한한 사랑을, 당신의 영원한 조지.’ 이 편지는 사망 전보보다 늦게 도착했다. 루스는 아이 셋을 침대 위로 불러 아버지의 소식을 전했다.
“더 어려운 루트, 어떻게 오르냐가 관건”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인 애니메이션 ‘신들의 봉우리’. [넷플릭스 캡처]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14좌 정복(14 PEAKS). [넷플릭스 캡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등반가입니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산악 다큐 ‘프리 솔로’의 제작자이자 등반가인 지미 친(48)은 님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리 솔로'는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요세미티의 거벽을 등반하는 알렉스 호놀드(36)를 다룬다. 님스가 2019년에 6개월 6일 만에 8000m급 14개 봉우리를 올랐다. 이전 최단 14좌 등정 기록은 7년이었다. 넷플릭스 신작 ‘14좌 정복’은 이 여정이다. 등반대 구호가 ‘미션 파서블(mission possible)’이다.
맬러리 이후 영국의 9차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1953년 5월 29일, 마침내 그 목표를 이뤘을 때 주역은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였다. 그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1914~1986)는 엑스트라였다. 텐징이 먼저 에베레스트 꼭짓점에 올라 힐러리를 도왔다는 설도 있지만, 네팔의 셰르파들은 철저히 외국 등반가들의 조력자에 그쳤다.
“출신은 중요하지 않다.” 님스가 말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말이다. 그는 영국 국적이지만 네팔 태생이다. 네팔 셰르파들로 원정대를 꾸렸다. ‘주마간산 속도전’ ‘상업등반에 기댄 보여주기 등정’이라는 혹평도 따르지만, 8000m급 14개 봉우리를 반년 만에 오른 건 화제를 넘어 충격이다.

▲지난 1월 5일 네팔 산악인들이 동계 K2 등반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네팔 산악인들은 한겨울에 8000m급 14개 봉우리 중 유일하게 동계 등정이 이뤄지지 않은 K2에 올랐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런데 이 님스가 이끄는 네팔 등반대가 지난 1월 16일 8000m급 최후의 난제인 K2(8611m) 동계 등정에 성공했다. 보통 동지인 12월 21일부터 춘분인 3월 21일 사이를 동계 등반 기간으로 본다. 8000m급 동계 등반은 ‘고통의 예술’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부른다. 혹독함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K2 정상 부근의 바람은 시속 200㎞까지 올라가고 기온은 영하 60도까지 내려간다. 등반자 3명 중 1명이 사망하는 악명 높은 산이다. 우리나라 7번째 14좌 등정자인 김미곤(49) 대장도 지난해 K2 동계 등정을 계획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올해로 연기했다. 하지만 네팔에서 먼저 등반대를 조직했다. 김미곤 대장은 “네팔 팀에서 함께 하자며 연락이 왔지만, 코로나19와 일정상 정중히 사양했다”고 밝혔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코로나19로 각국의 원정대가 네팔 입국을 못 한 것도 네팔 팀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K2 동계 등정에 세 번(1987~88, 2002~2003, 2017~2018) 나서 세 번 모두 물러난 겨울 등반의 강국 폴란드(8000m급 14개 봉우리 중 10곳 동계 등정, 한 차례는 연합팀)도 손발이 묶였다. 폴란드 산악인 크르지스토프 비엘리치(71)는 “우리의 경쟁자인 러시아·카자흐스탄·이탈리아·스페인이 성공했다면 기분이 안 좋았을 텐데, 네팔인들이 스스로 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추켜세웠다.

▲세계 최초로 K2 동계 등정에 성공한 네팔 원정대가 지난 1월 21일 카트만두 공항에 들어서고 있다. 맨앞이 니르말 님스 푸르자. [AFP=연합뉴스]
지난 1월 16일의 K2 정상에는 네팔 국가가 울려 퍼졌다. 네팔 등반대 10명은 어깨동무를 하며 동시에 정상에 올랐다. 님스는 “우리의 모든 산을 외국인들이 올랐지만, 마지막 난제인 겨울의 K2는 우리가 올랐다”며 감격했다. 이용대(85)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은 “네팔인과 셰르파들이 8000m 세계의 주연임을 스스로 드러낸 사건”이라며 “이제 8000m 정복의 시대는 저물고 있고 꼭대기를 오르는 ‘등정’보다 6000m, 7000m급 미답봉으로, 더 어려운 루트로 오르는 ‘등로주의’로 완전히 기울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1922년 6월 7일 영국의 에베레스트 2차 원정대. 조지 맬러리가 이끈 이 사진 속의 대원 대부분은 눈사태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100여 년 전인 1922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2차 원정대에도 속한 맬러리는 노스 콜(North Col)에서 7명을 잃었다. 모두 셰르파들이었다. 에베레스트 등반 사상 최초의 사망자들이었다. 하지만 엑스트라에서 이제는 주연으로, 네팔 산악인들이 자신의 산에 오르고 있다.◎
김홍준기자rimr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