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2022-01/ 01.01 우렁차고 용맹한 호랑이여, 다시 오라 - 01.30 ‘꽃뱀, 살인자’ 끝나지 않는 2차 가해… “지금도 난 죽음을 생각한다”
세상사 2022-01/
01.01 우렁차고 용맹한 호랑이여, 다시 오라
[2022 壬寅年, 호랑이를 말하다]
새해에는 쨍쨍한 눈빛의 새끼 호랑이들이 태어나겠지
소년·소녀의 포효를 기대한다
호랑이띠 소설가 김서령

/일러스트=이철원
어릴 적 나는 어딜 가서든 지고 오는 법이 없었다. 샘도 많고 욕심도 많고 기운도 넘쳤다. 나는 짱돌처럼 단단한 표정을 하고 동네를 쏘다녔다. 또래 아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새침데기에게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고, 어른들은 “아이고, 저 범띠 가시내!”라며 혀를 쯧쯧 찼다. 나는 호랑이띠. 삼신할머니가 호랑이 꼬리털 한 오라기 떼어내 아직 덜 만들어진 내 등뼈 중간쯤 가져다 대고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놓았다는 얘기다. 그다음 나를 안아다가 우리 엄마 배 속에다 가만히 누였던 것이지. 그러니 호랑이 꼬리털 유전자를 등뼈에 묻힌 내가 용맹한 새끼 호랑이로 자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나는 호랑이의 후예라도 된 양 매사 도도했다.
놀랍게도 나는 무럭무럭 자라 물러터진 여자가 되었다. 삼신할머니가 붙인 게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의 꼬리털이었나. 지금의 나는 노란 햇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하품 끝에 꾸벅꾸벅 조는 고양이와 훨씬 닮아있다. 어쩌면 호랑이는 그렇게 용맹한 녀석이 아닐지도 모른다. 당장 동화책만 보아도 그렇다. 동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들은 우습기 짝이 없다. 팥죽 한 그릇 얻어먹으려다 할머니에게 혼쭐이 나고, 오누이를 잡아먹으려던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잡았다가 수수밭에 떨어진다. 영리한 강아지는 몸에 기름칠을 하고 줄을 감았다.
호랑이는 그것도 모르고 강아지를 꿀떡 삼키지만 금세 뒷구멍으로 쑥 빠져나간다. 그렇게 강아지가 호랑이들 배 속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어라, 호랑이들이 줄줄이 줄에 꿰었네. 호랑이가 정말 용맹했던 적이 있기는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옛날 옛적 곰에게도 졌잖아. 고작 마늘 먹기 싸움에서.
아이를 데리고 일 년에 한두 번쯤 호랑이를 보러 간다. 그들은 어슬렁어슬렁 걷거나 바위 위에 앉아있거나 까부는 새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사납게 포효하는 호랑이를 본 적 없다. “호랑이 안 무서워?” 물었지만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는 흥, 코웃음을 쳤다. 시시한 호랑이를 보고 온 아이는 다시 집 앞 놀이터로 뛰어나갔다. 우리 집은 2층, 놀이터 바로 앞이다. 단지 내 놀이터 열 곳 중에서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이라 아이들에게 최고로 인기가 좋은 곳이다. 나는 창을 열고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았다. 뛰고 구르고 다들 야단이다. 미끄럼틀에서 데굴데굴 굴러내려오는 저 아이는 새끼 곰 같고 그네에서 겁도 없이 뛰어내리는 저 아이는 새끼 원숭이 같다. 우리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쌩쌩 달리는데, 폭주족 다람쥐다. 어느 시절의 나 같아서 가만히 보다 웃음이 터졌다. 딱지치기를 하던 아이 둘은 끝내 싸움을 벌였다. 망아지 두 마리 엉겨붙은 것 같다. 저 아이들이 다 자라 나처럼 물렁물렁한 어른이 되는 걸까? 야생의 경험은 기억 속 어딘가에 묻어두고 말끔한 얼굴로 우아한 척하며 살게 되는 걸까? 나른함과 고독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말이다. 도톰한 점퍼 속에 폭 파묻힌 병아리들은 고작 시소가 재미있다고 까르륵까르륵 웃어댄다.
어디 나처럼 눈 땡그랗게 뜨고 짱돌 같은 표정을 한 새끼 호랑이 한 마리 없나 둘러보는데 아하, 올해 새끼 호랑이들이 꼬물꼬물 태어나겠구나. 봄쯤 되면 모자를 눌러쓴 새끼 호랑이들이 유모차에 실려 나올 테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 아장아장 걸음마도 하겠구나. 넉넉잡아 3년이 지나면 제법 건장해진 새끼 호랑이들이 놀이터를 장악하겠다. 아직도 백두산엔 호랑이가 살고 있을 거야. 유리문 안 호랑이들과는 달리 목소리도 우렁차고 용맹하기 그지없을걸.
조선일보
01.07 여자친구 소방관 임용 하루 전날, 하늘로 떠난 막내 소방관
평택 물류센터 화재… 소방관 3명 순직 참사
경기 평택 물류센터 공사 현장에서 불길을 잡으러 현장에 뛰어들었던 경기 송탄소방서 119구조대 소속 소방관 3명이 6일 숨진 채 발견됐다. 가장 어린 조우찬 소방교는 스물여섯 살 청년이다. 임용된 지 약 8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송탄서 119구조대가 그의 첫 발령지였다. 소방관이 된 지 올해로 6년 된 박수동 소방장은 서른두 살이다. 두 사람 다 미혼이다. 이들과 함께 숨진 이형석(51) 소방경은 두 사람을 이끌던 팀장이었다. 약 28년 경력 베테랑으로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아버지이자 남편이었고, 아흔 노모를 모시는 아들이었다.

▲6일 경기도 평택시 청북읍의 한 냉동창고 신축 공사장에서 큰불이 나, 이 불을 끄기 위해 건물 내부에 진입했던 이형석 소방경(왼쪽부터)와 박수동 소방장, 조우찬 소방교 등 소방관 3명이 갑자기 재확산한 불길에 고립됐다가 끝내 모두 숨진 채 발견됐다./소방청
이들은 평택 송탄소방서 소속으로 이 지역 119 구조대에서 함께 근무 중이었다. 이들은 이날 오전 화재 현장에 함께 출동, 화재가 난 건물 내에서 잔불을 처리하고 혹시라도 있을 사람을 구조하는 일에 투입됐다. 하지만 내부에서 갑자기 불길이 일면서 건물 안에 고립됐다. 팀원 2명은 겨우 빠져나왔지만 나머지 3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숨진 소방관 중 가장 어린 조우찬 소방교는 여자 친구도 7일 같은 평택 송탄소방서 9급 소방관으로 임용될 예정이었다. 여자 친구가 소방관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하루 전 숨졌다. 조 소방교의 동료들은 그가 소방관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청년이었다고 전했다. 특전사에 입대해 4년 복무한 뒤 소방대원이 됐다고 한다. 그와 소방학교 동기인 김서빈(26) 소방관은 “우찬이는 늘 싹싹하고, 으쌰으쌰 힘내자며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는 친구였다”면서 “소방학교에서 체력도 가장 좋은 편이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떠난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날 오후 5시쯤 조 소방교의 부모가 아들의 시신이 있는 평택 한 병원 응급실에 들어섰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아버지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병원으로 들어갔다. 뒤따르던 어머니는 소방관 2명의 부축을 받으며 연신 눈물을 닦았다.
박수동 소방장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건실한 청년이었다. 최근 상견례도 마치고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었다. 동료 소방관은 “선후배들에게 참 잘해줬던 친구였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날 장례식장에서 영정을 가슴에 품고 “내가 미안하다. 소방 시험에 못 붙게 해야 했는데”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막둥아 미안하다. 꼭 천국에서 (만나자). 아빠도 곧 따라갈게”라고 했다.
팀장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던 이형석 소방경은 아흔 노모를 모시고 사는 효자였다. 동료 소방관은 “이형석 팀장님은 대원들 사이에서 베테랑으로 유명했다. 같이 근무를 설 때면 늘 분위기를 밝게 해주려고 노력하셨다”고 했다.
팀원 5명 중 3명이 사망한 소식이 알려진 이날 오후, 이들이 함께 일했던 119구조대 주변은 온종일 적막했다. 이날 오후 3시쯤 구조대 주자창은 텅 비어있었다. 사망한 동료를 위로할 틈도 없이 모든 소방차가 화재 현장에 가 있었다. 오후 6시쯤 현장에서 돌아온 한 소방관에게 순직한 소방관들에 대해 묻자, 그는 자리에 멈춰서 울먹거리다 “도저히 말 못 하겠다. 도저히”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소방관들의 빈소는 평택 제일장례식장에 각각 차려졌다. 소방청은 오는 8일 오전 10시 평택 이충문화체육센터에서 경기도청장으로 영결식을 열 예정이다. 경기도는 이날 이들에게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01.11 '17명 참사' 그 건설사, 아파트 또 외벽붕괴…"6명 연락두절" [영상]

▲11일 오후 3시47분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현대아이파크 공사 현장에서 아파트 외벽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 소방당국이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작년 '17명 사상자' 붕괴 참사 시공사와 동일
광주광역시의 한 초고층 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외벽이 무너져 내려 차량 20여 대를 덮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해당 건설사는 지난해 6월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 학동 주택재개발현장 붕괴 참사 현장에서 아파트 건축을 추진하던 시공사다. 소방당국은 이날 오후 7시30분 현재까지 3명을 구조하고, 연락이 두절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업자 6명의 신원과 소재 파악에 나섰다.
11일 광주시소방본부와 서구청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47분쯤 광주 서구 화정동 현대아이파크 신축 공사장에서 '아파트 1개동 외벽이 붕괴됐다'는 신고가 소방당국에 접수됐다.
이 사고로 아파트 외벽에서 떨어진 잔해물이 인근 주차장을 덮쳐 차량 20여 대가 파손되거나 매몰됐다. 소방당국은 도로변 지상 컨테이너 등에 갇혀 있던 3명을 구조하고, 1층에서 잔해물에 맞은 1명을 병원으로 이송했다. 3명은 자력으로 대피했다.

▲11일 오후 3시47분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현대아이파크 공사 현장에서 아파트 외벽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 소방당국이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소방당국 "39층 옥상서 콘크리트 타설 중 붕괴"
이번 외벽 붕괴 사고는 39층 옥상에서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하던 중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외부 압력이나 충격 등으로 외벽이 무너져 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조호익 광주 서부소방서 재난대응과장은 사고 현장에서 마련한 브리핑에서 "39층 옥상에서 콘크리트 타설 중 23∼34층 외벽이 붕괴했다"며 "타설 작업에 투입된 인원은 모두 안전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현대산업개발 작업자 6명이 연락이 두절된 것으로 확인됐다. 소방당국은 시공사인 현대산업개발을 통해 이날 28층과 29층에 3명, 31층부터 34층부터 3명이 투입될 예정인 것으로 파악했다.

▲11일 오후 3시47분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현대아이파크 공사 현장에서 아파트 외벽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 소방당국이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5명 공사장, 1명 쌍촌동…휴대전화 위치 확인"
경찰이 6명의 휴대전화 위치를 조회한 결과 5명은 아파트 공사 현장 인근, 1명은 공사 현장에서 떨어진 쌍촌동 인근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휴대전화 위치 조회는 2㎞ 반경으로 반응한다"며 "현대산업개발 측에서 이들이 실제 작업에 투입됐는지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추가 붕괴 우려에 따라 안전 진단을 마치는 대로 구조 인력을 내부로 투입하는 한편 추가 인명 피해가 있는지 확인할 예정이다. 연락이 두절된 작업자들이 실제 작업에 투입됐더라도 소방당국의 구조 작업이 이뤄지려면 현장 안전 진단을 거쳐 붕괴 위험성이 없는 것으로 나와야 가능해서다.
광천종합버스터미널 인근 주상복합건물
사고가 발생한 아파트는 광천종합버스터미널 인근의 주상복합건물이다. 지하 4층~지상 39층 규모로 1, 2단지로 나뉘어 있는데, 사고가 일어난 건물은 2단지의 201동이다. 2020년 3월 착공했고, 오는 11월 입주를 앞두고 있다.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 관계자는 "현재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현대산업개발은 지난해 6월 사상자 17명이 발생한 광주 학동4구역 주택재개발 사업 시공업체다. 지난해 6월 9일 학동4구역에서 철거 중이던 5층 건물이 도로 쪽으로 붕괴하면서 시내버스를 덮쳐 9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현대산업개발 3명 '업무상 과실치사상' 재판 중
붕괴 참사 이후 현대산업개발 현장 관계자 등 책임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현대산업개발 현장소장 서모(58)씨와 안전부장 김모(58)씨, 공무부장 노모(54)씨는 현장 및 안전 관리 책임자로서 관리·감독 책임을 소홀히 해 철거 건물 붕괴 사고를 유발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상)로 기소됐다.
조사 결과 서씨 등은 작업계획서를 작성하지 않았고, 사고 당시 부실 철거가 이뤄졌음을 인식하고도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서씨 등은 재판에서 "붕괴 원인은 해체 작업과 관련이 있는데 건축물 관리법상 해체 주체는 철거업체, 현장 감리, 해당 관청"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학동4구역 재개발 정비사업 중 석면과 지장물 철거는 재개발 조합이 다른 업체에 하청을 줬고, 일반건축물 철거는 현대산업개발이 한솔기업에 하청을 줬다. 앞서 검찰과 경찰은 무리한 철거 공사가 진행된 근본적 원인이 ▶계약 체결 과정에서의 불법적인 금품 수수 ▶실제 공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지분만 챙기는 입찰 담합 행위 ▶다단계식 불법 재하도급으로 인한 비상식적인 공사 대금 산정 등에 있다고 봤다.
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광주광역시=진창일 기자
01.13 후진국형 ‘광주 아파트 붕괴’ 책임 엄중히 물어야
동절기 무리하게 공기 단축하려다 탈 났나
시공업체와 시·구청 공무원 등 수사해야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39층 주상복합아파트 공사 현장 외벽 붕괴 참사는 후진국형 안전사고의 전형으로 보인다. 측면이 무너진 23~38층에서 작업하던 인부 6명이 실종된 만큼 설계와 시공 및 감리 과정에서 안전 수칙을 제대로 지켰는지 철저하게 수사해 법적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할 것이다.
아파트 공사장 외벽의 찢긴 모습은 마치 항공기 테러를 당한 것처럼 참담해 보였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어떻게 산사태 나듯 무너져 내렸는지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국토교통부와 사고 현장을 관찰한 전문가들은 콘크리트 타설을 위한 거푸집이 무너지고 타워크레인 지지대가 손상되면서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철근·시멘트 등 건축 자재를 정상적으로 사용했는지, 2020년 3월 착공한 이 아파트의 11월 입주 일정에 맞추려 콘크리트 양생이 더딘 동절기에 무리하게 공기 단축을 시도했는지 밝혀야 한다.
사고 아파트 시공사는 지난해 6월 광주시 서구 학동 재개발지구 철거 현장 붕괴 사고의 원청 업체와 같은 HDC현대산업개발이다. 지난해엔 철거 공사 중 5층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시내버스를 덮쳐 9명이 숨졌다. 당시 사고는 하도급 업체의 철거 과정에서 발생했지만, 검찰은 현대산업개발 관계자들도 부실 철거에 관여했다고 판단해 재판에 넘겼다. 유병규 현대산업개발 대표는 어제 사과문을 내고 “있을 수 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책임을 통감한다”며 머리를 숙였다. 7개월 만에 또 사고가 났는데 사죄로 끝낼 일은 아닌 듯하다.
사고가 발생한 지난 11일은 공교롭게도 ‘광주 철거 현장 붕괴 참사 재발 방지법’으로 불리는 건축물관리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날이었다. 건물 해체 작업자가 계획서대로 건축물을 해체하지 않고 공중의 위험을 발생하게 한 자에 대한 처벌 강화가 골자다. 마치 법 개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동일 업체의 광주 사업장에서 사고가 났으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용자의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지난해 1월 제정됐지만 1년 유예돼 오는 27일부터 시행되기 때문에 이번 사고에는 적용이 어려운 상황이다.
광주시 재난안전대책본부는 긴급 현장 대책회의를 열고, 광주 지역 소재 현대산업개발의 모든 건축 및 건설 현장의 공사를 중지시켰다. 광주경찰청 수사본부는 현대산업개발 현장소장을 입건하고 안전부장, 감리단 관계자, 타워크레인 기사 등을 상대로 이틀째 사고 경위를 집중 조사하고 있다. 광주시청 공무원들과 업체의 유착 여부도 샅샅이 수사해 안전사고가 잦은 배경에 공무원의 봐주기나 관리감독 소홀이 있었는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국토부와 총리실은 이참에 후진국형 사고가 계속 반복되는 근본 원인을 점검해 대책을 마련하길 바란다.
중앙일보 사설
01-13 벽보다 바닥 먼저 무너져…“콘크리트 덜 마른채 서둘러 층 올렸나”
[광주 아파트 외벽 붕괴]이틀째 수색에도… 6명은 어디에
광주 아파트 붕괴사고 실종자 수색… “야간엔 못해” 6시간40분만에 중단
정부, 합수본 구성 사고조사 착수… 광주시, 현산 모든 공사 중지 명령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외벽 붕괴 사고 현장에서 12일 실종 근로자 6명을 찾기 위한 수색 작업이 재개됐지만 6시간 40분 만에 성과 없이 끝났다. 수사당국은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사고 원인 규명에 착수했고, 광주시는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의 광주지역 현장 전체에 대한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광주 서부소방서는 12일 오전 전문가 안전진단을 거친 뒤 오전 11시 20분 구조견 6마리와 ‘핸들러’(구조견 관리사)를 투입해 수색 작업을 재개했다. 전날 오후 8시 2차 붕괴 우려 등으로 수색 작업을 중단한 지 15시간 20분 만이다.
전문가들과 소방당국은 소방관 154명, 차량 33대, 열영상 탐지기, 드론 등 각종 장비를 투입해 오후 6시까지 수색을 진행했다. 이날 오후 일부 수색견이 26∼28층 구간에서 특이 반응을 보여 해당 지역을 집중 수색했지만 실종자를 발견하진 못했다. 소방당국은 “안전을 감안해 야간 수색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국토교통부 등의 조사 결과 붕괴된 곳은 201동 23∼39층의 서쪽 발코니 부분으로 확인됐다. 실종자 6명은 사고 직전 28∼34층에서 일했는데 사고 층에 매몰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매몰 지점에는 아직 접근이 어려운 상황이다.
국토부 등은 콘크리트 타설(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부어넣는 작업) 도중 거푸집이 무너지면서 외벽이 붕괴해 발생한 ‘인재(人災)’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특히 “공기를 단축시키려고 서둘러 층을 올린 것 같다”는 증언이 나오는 등 부실시공 의혹도 제기된다. 하지만 현대산업개발 측은 “충분한 양생(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을 때까지 보호하는 작업) 기간을 거쳤다”며 이를 부인했다. 그 밖에 강풍 등으로 타워크레인이 외벽과 충돌하며 균열이 생겼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최근 잇따른 안전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라”며 “사전 예방과 재발 방지를 위한 안전대책 강화 등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12일 광주지검 광주경찰청 광주지방고용노동청을 중심으로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됐고, 광주경찰청은 현장소장 이모 씨(49)를 업무상과실치상 혐의로 입건했다. 또 고용노동부는 현대산업개발 전국 주요 공사 현장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에 착수했다.
광주 신축 아파트 외벽 왜 무너졌나콘크리트 양생 불량 가능성… ‘무량판 구조’ 탓 우르르 무너졌나근로자 6명이 실종된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붕괴 사고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고로 공사기간 단축을 위한 무리한 공사 강행과 콘크리트 양생(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을 때까지 보호하는 작업) 불량 등 부실 공사가 원인으로 추정된다.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 측은 “안전규정을 모두 지켰다”는 입장이지만 “강풍과 강추위에도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했다”는 증언이 속속 나오고 있다.
○ “콘크리트 양생 불량” 가능성

11일 오후 3시 46분. 화정아이파크 201동 39층 공사 현장에 있던 근로자 A 씨는 ‘쩍’ 하는 굉음을 들었다. A 씨는 이날 오전 10시 반부터 낮 12시까지 1시간 반 동안 타설(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부어 넣는 작업)을 한 뒤 시멘트를 온풍기로 말리고 외벽을 비닐로 덮는 양생 작업 중이었다. 굉음이 발생한 지 1분 후 39층 서쪽 외벽이 붕괴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23층까지 무너졌다. 반대편에 있던 A 씨는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붕괴 당시 상황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사고 원인이 ‘콘크리트 양생 불량’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사고 당일 39층 꼭대기 층에서 새로 콘크리트를 부어 넣었는데 벽은 남아있고 바닥이 무너지며 붕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통상 건설업계는 아파트 한 층을 올리는 데 최소 7일에서 10일이 걸린다고 본다. 추운 겨울철에는 콘크리트가 얼면서 양생이 제대로 안될 수 있어 더 가열, 보온을 하며 작업한다. 양생은 콘크리트 작업에서 강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지만 공사기간을 줄이려고 부실시공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홍성걸 서울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콘크리트 강도가 100이라고 하면 일단 70∼80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 작업을 해야 한다”며 “양생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 건설사 안전 담당 임원도 “상층부 거푸집을 고정할 때 하층부 천장 부분과 연결하는데, 콘크리트가 다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거푸집을 고정하고 타설 작업을 진행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날 공사 현장에 몰아친 강풍과 추위가 붕괴에 영향을 줬을 거란 분석도 나온다. 강풍으로 거푸집 고정 장치 등이 뽑히면서 충격이 발생해 외벽이 무너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고 당시 광주지역의 체감온도는 영하 1.8도였고 강풍이 불었다. 붕괴가 시작된 39층은 높이 119m로 지상보다 기온이 낮고 바람은 거세다.
안형준 전 건국대 건축대학장은 “건물을 높이 지으면 모서리에 하중이 집중된다”며 “(강풍으로) 모서리 쪽 거푸집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물과 연결된 타워크레인의 무게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을 수 있다”고 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강추위와 강풍이 밀어닥치면 가급적 타설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고 했다. 광주 서구 관계자도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작업시간을 지키지 않고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대산업개발은 “사고가 발생한 201동의 경우 타설 후 12∼18일의 양생 기간을 거쳤다. 필요한 강도가 확보되기에 충분한 기간”이라며 “공기는 예정보다 빨라 무리하게 단축할 필요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 ‘무량판 구조’가 사고 키웠나

국토교통부 등은 1차적인 사고 원인을 갱폼(외벽 거푸집) 붕괴로 추정하고 있다. 갱폼이 무너지면서 아파트 외벽이 버티지 못하고 연이어 무너졌다는 것. 특히 건설업계에선 이 아파트가 ‘무량판 구조’로 지어진 것도 사고 규모를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량판 구조 건물은 기둥과 슬래브만으로 건축된다. 하중을 수평으로 지탱하는 보가 없다 보니 39층부터 23층까지 16개 층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도미노 붕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외부 충격이 붕괴를 촉발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붕괴 당시 강풍이 불어 크레인이 흔들리다가 외벽과 충돌했고 이후 39층 옥상에 쌓여 있던 철근, 벽돌의 무게 때문에 대규모 붕괴로 이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광주=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
박창규 기자 kyu@donga.com
광주=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최동수 기자 firefly@donga.com
01월 17일 정몽규, 現産 회장직 사퇴… “붕괴 아파트 완전 철거 고려”
“국민께 죄송… 재시공도 검토
분양권 받은 분들 해지도 수용”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광주 화정동 신축 아파트(화정아이파크 8개동)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현대산업개발 회장에서 물러난다고 17일 발표했다. 정 회장은 안전점검에서 문제가 있을 경우 사고 아파트 분양계약 해지 및 철거 뒤 재시공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이날 오전 서울 용산구 HDC현대산업개발 사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광주 사고 피해자 가족과 국민께 머리 숙여 깊이 사과드린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1976년 압구정 아파트 개발로 시작해 아이파크 브랜드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으나, 최근 광주에서 두 건의 사고로 광주 시민과 국민에게 너무 큰 실망을 끼쳤다”며 “아파트 안전은 물론 회사의 신뢰가 땅에 떨어져 죄송하고 참담한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정 회장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고객과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회사의 존립 가치가 없다”며 “현대산업개발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환골탈태해 완전하게 새로운 회사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화정아이파크 현장 대책에 대해서는 “안전점검 결과, 문제가 있다고 나오면 수분양자(분양받은 사람) 계약 해지는 물론 완전 철거와 재시공까지 고려하겠다”면서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좋은 아파트를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이어 “주민들이 평생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안전품질보증을 대폭 강화해 모든 골조 등 구조안전보증 기간을 30년으로 대폭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정 회장은 “대주주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 아니라 2선 후퇴를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황혜진 기자 best@munhwa.com
01.24 코로나 확진 2만~3만 눈앞인데 너무 태평한 방역 당국
국내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23일 신규 확진자 수가 7630명을 기록했다. 역대 둘째로 많은 숫자이자, 토요일과 일요일 등 주말에 발생한 확진자 수로는 역대 최대 규모이기도 하다. 1주일 전보다 확진자 숫자가 거의 2배로 증가했다. 이 같은 수치는 신규 확진자가 하루 2만~3만명 나오는 시기가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대 정점이 10만명을 넘을지 모른다는 전문가 예측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방역 당국 대응은 태평하다고 할 정도로 느리고 부실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방역 당국은 지난 연말부터 “오미크론 대응 체제로 신속히 전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준비하고 대응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미크론 대응 체제의 핵심 중 하나는 동네 병·의원에서 코로나 환자 진찰과 진단은 물론 치료까지 맡는 점이다. 그런데 방역 당국은 아직 이런 역할을 맡을 호흡기 전담 클리닉 명단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직 준비를 덜했고 의료계와 조율도 미흡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미크론 대응 체계를 말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이런 기본적인 사안조차 준비가 부실한지 답답하기만 하다. 더구나 우리나라 동네 의원 대부분이 상가 건물에 위치해 일반인들과 호흡기 환자의 동선 분리 등 세밀하게 준비해 국민에게 알려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인력이나 시설, 장비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소규모 병·의원에 1차 진료를 맡기려면 준비를 더 잘해야 하는데 정부 준비는 정반대다.
확진자가 급증할 경우 하루 수만 명이 나올 수 있는 경증 환자는 물론 하루 수십만 명에 이를 수 있는 자가격리자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대책도 보이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큰 혼란과 국민 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회 곳곳에서 확진자가 급증할 경우 어떻게 업무를 유지할지 등을 담은 분야별 업무지속계획(BCP)도 예시를 내놓아야 기업과 기관에서 참고할 수 있는데 여태 감감무소식이다. 늑장 대처도 이런 늑장 대처가 없다. 이러다가 “환자 1만명에 대비했다”고 해놓고 실제 상황이 닥치자 허둥대기만 한 지난 12월과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아닌가. 당시 결과는 하루 100명이 넘는 희생자였다. 정부가 그토록 자랑해 왔던 K방역의 민낯이 이런 모습이었나.
조선일보 사설
01.25 코로나 신규 확진 8571명 역대 최다... “이번주 1만명 넘을수도”

24일 오후 광주시청 광장에 마련된 임시선별검사소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는 시민들이 길게 줄 서 있다. /연합뉴스
25일 0시 기준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8571명 발생했다고 방역 당국이 밝혔다. 이는 역대 최다 기록이다. 기존 하루 신규확진 최다치는 지난달 15일의 7848명이었다.
해외유입 확진자는 215명, 국내 확진자는 8356명으로 집계됐다. 총 누적 확진자 수는 74만9979명이다.
오미크론 변이 검출률이 지난주(16∼22일) 50.3%를 기록하면서 우세종이 된 이후 신규 확진자 수도 연일 급증하고 있다. 오미크론 변이가 기존 델타 변이보다 전파력이 2배 이상 빠른 것으로 드러나면서 전문가들은 이번 주 내로 하루 신규 확진자 수가 1만 명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확진자 수는 급증하고 있지만 위중증 및 사망자 증가로 이어지진 않고 있다. 이날 재원중 위중증 환자는 392명, 일일 사망자는 23명으로 집계됐다. 지금까지 누적 사망자는 총 6588명이다.
전날까지 코로나 백신을 2차까지 맞은 사람은 4384만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접종률은 85.4%를 기록했다. 3차 접종(부스터샷)을 마친 사람은 2554만명으로 인구 대비 접종률은 49.8%였다.

조선일보 안영 기자
01.27 ‘확진자 4만명’을 마지노선으로, 의료 붕괴 막아야
코로나 오미크론 대유행이 본격화하면서 26일 신규 확진자 수가 1만3012명을 기록했다. 1만명 이상은 국내 첫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이후 2년여 만에 처음이다. 지난달 1일 국내 첫 오미크론 변이 감염자가 나온 이후 56일 만에 전에 없던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날부터 방역을 ‘오미크론 대응 단계’로 전환하기로 했지만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폭증 사태를 맞고 있다는 느낌이 적지 않아 불안이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대유행이 본격화하면서 26일 오후 6시 현재 신규 확진자가 이미 1만명을 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방역 당국과 서울시 등 각 지방자치단체에 따르면 이날 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전국 17개 시도에서 총 1만164명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 종전 최다 수치인 전날의 7천439명보다 2천725명 증가하면서 사흘 연속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26일 저녁 서울 동작주차공원 임시선별검사소에서 시민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줄지어 서있다. 2022.1.26/연합뉴스
우선 코로나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해야 할 동네 병의원은 물론 정부가 지정해 놓은 호흡기 전담 클리닉 431개소도 대유행을 맞을 준비가 부족하다. 새로운 대응 체계에 따른 작동 점검 과정도 없었기 때문이다. 호흡기 클리닉만으로 대응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동네 의원들이 참여해야 하는데, 방역 당국은 아직도 가이드라인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PCR 검사 대신 신속항원검사를 도입하면 확진자 진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 대규모 전파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가시지 않고 있다. 확진자가 급증하면 따라서 늘어날 경증 환자, 자가 격리자 등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대책도 불분명하다. “환자 1만명에 대비했다”고 해놓고 실제 상황이 닥치자 허둥댄 지난해 12월 상황을 되풀이하는 것 아닌지 걱정이다.
우리는 지난해 12월 하루 확진자 8000명에 못 미칠 때도 병상 부족 등에 시달렸다. 오미크론 변이 중증도가 기존 델타변이의 5분의 1 정도로 낮다고 하더라도 확진자 수가 5배 이상으로 급증하면 우리 의료 체계가 큰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오미크론 대응을 위중증 환자 관리 위주로 하더라도 확진자 수를 적정하게 제어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이유다. 지금으로선 확진자 4만명 정도를 마지막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사설
01.27 신규 코로나 확진자 1만4518명...이틀 연속 1만명대
27일 0시 기준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1만4518명 발생했다고 방역 당국이 밝혔다. 전날에 이어 이틀째 만명대 확진자를 기록했다.
국내 발생 확진자는 1만4301명, 해외유입 사례는 217명이다. 총 누적 확진자 수는 77만7497명이다.
확진자 수는 급증하고 있지만 위중증 및 사망자 증가로 이어지진 않고 있다. 이날 재원중 위중증 환자는 350명, 일일 사망자는 34명으로 집계됐다. 지금까지 누적 사망자는 총 6654명이다.
전날까지 코로나 백신을 2차까지 맞은 사람은 4390만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접종률은 85.6%를 기록했다. 3차 접종(부스터샷)을 마친 사람은 2604만명으로 인구 대비 접종률은 50.7%였다.

조선일보 김태주 기자
01월 28일 청와대, 文 순방팀 코로나 확진 도대체 왜 숨기나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15~22일 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 순방에 동행했던 사람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다수 발생했다고 한다. 청와대는 쉬쉬하다가 보도로 정황이 알려지자 마지못해 비공식적으로 시인하는 행태를 보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보건복지부는 30명의 직원이 확진된 사실을 즉시 공개했다. 군 부대는 물론 국회 및 정당, 분초가 아까운 대선 후보들도 확진자 접촉 등의 정보를 공개한 뒤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청와대 측은 청와대 인력의 감염 정보는 ‘국가 기밀’이라는 주장을 편다. 황당하다. 대다수 민주국가에서 정상의 감염 여부를 비롯한 건강 상태를 정직하게 밝히고 있는 것과 비교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관계자들의 감염 정보는 더욱 자세히 국민에게 알려야 하며, 국민은 정확하게 알 권리가 있다. 국정 투명성과도 연결된다. 대다수 국민이 과도한 사생활 침해에도 불구하고 동선(動線) 추적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국민에 대한 배신 행위는 물론 일반 국민 위에 있다는 특권 의식으로까지 비친다. “언론에서 물어봤다면 밝혔을 것”이라는 청와대 관계자 답변을 보면 스스로 앞뒤 안 맞는 주장을 하고 있음을 자인한 것과 마찬가지다.
오미크론 확산 속에서 이뤄진 이번 순방은 당초부터 한가한 일정이라는 비판이 정부 안팎에서 있었다. 실제 성과도 한심한 수준이다. 이집트 관광 최적기의 마지막 외유(外遊)라는 비아냥까지 쏟아졌을 정도다. 이제라도 전반적 상황은 물론 감염 경로를 추적·공개해야 한다. 그러지 않다면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란 억측을 키울 뿐이다.
문화일보 사설
01.29 “코로나 투명하게 밝히라” 지시 文, 자신 문제가 되자 숨기기
지난 15일~22일 대통령의 중동 3개국 순방을 따라갔던 수행원들이 코로나에 걸렸다고 한다. 귀국 후 코로나 검사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들이 대통령과 전용기로 함께 귀국했을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는 순방팀 감염 사실을 먼저 밝히지 않았다. 대통령이 3일간 자가 격리를 하고 26일부터 출근한 배경을 언론이 취재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대통령이 감염 위험에 노출됐는지 여부는 국민이 알아야 할 문제다. 세계 각국은 관련 사실을 투명하게 공개해 왔다. 트럼프 미 대통령, 존슨 영국 총리가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는 물론, 미 백악관 참모들의 확진과 대통령과의 접촉 가능성 등도 실시간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코로나 관련 사실을 숨김없이 국민에게 밝히라고 여러 차례 지시해 왔다. 코로나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최근 30명 가까운 직원의 확진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정작 문 대통령 자신은 거꾸로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자신에게 부담이 되거나 껄끄러운 일이면 국민에 알려야 할 일도 쉬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북한이 연평도 인근에서 실종된 우리 공무원을 해상에서 총살하고 시신을 불태운 사실은 이틀 뒤에야 공개했다. 그 사이에 종전선언을 강조한 대통령의 유엔 화상 연설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오징어잡이 승선원들을 살해하고 NLL을 넘어와 귀순 의사를 밝혔던 북한 선원 두 명을 강제 북송한 사실은 국회에 출석한 청와대 관계자 휴대전화 문자를 언론사 카메라가 포착한 뒤에야 국민들이 알게 됐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사실은 미국 언론들이 보도한 뒤에야 “우리 군도 실시간으로 포착했다”고 뒤늦게 털어 놓기 일쑤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 때 “한중 관계에 기여했다”며 보내온 조전도 유족이 먼저 알고 문의하자 그때야 밝혔다. 시 주석이 정권 편 사람을 추모하는 조전을 보냈으면 그랬겠나.
청와대 측은 코로나 확진자 발생에 대해 “묻지 않아서 밝히지 않은 것뿐”이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서 밝힐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있다. 자랑거리라면 숨겼겠나. 그러니 시중에 “관광 순방이라는 말을 듣는 대통령 외유 때 코로나에 노출된 것이 드러나면 비판이 커질까봐 숨기려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1.29 국민은 사생활도 다 까더니...'순방중 확진' 은폐한 靑 이중잣대
전문기자의 촉: 청와대는 왜 숨겼을까
2020년 1월 20일 코로나19 확진자 첫 발생 이후 대구에서 31번 환자가 나올 때까지 한명 한명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질병관리본부(지금의 질병관리청)는 PCR 검사에서 신규 확진자가 나오면 한밤중에도 기자들에게 알렸다. 마감 시간에 쫓기는 기자들의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모아서 정해진 시간에 발표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국민의 알 권리 침해"라는 지적을 넘어서지 못했다. 나중에 환자가 무더기로 쏟아지면서 오전 9시 30분에 발표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변이 바이러스 발생, 백신 도입, 혈전증 발생 등도 거의 실시간으로 공개해왔다.
이런 노력 덕분에 코로나 발발 2년 동안 '은폐 의혹'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판단 착오로 인해 늦게 공개하는 바람에 늑장 공개라는 지적을 받은 게 더러 있을 뿐이다.
방역 당국의 이런 태도는 값비싼 과거 경험의 산물이다. 2003년 사스가 발발했을 때 추정환자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고 며칠 뒤 언론에 노출되면서 비판을 받았다. 2009년 신종플루 때는 멕시코를 다녀온 수녀가 기거하는 수녀원을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2015년 메르스 때는 환자가 발생한 병원 이름을 18일만에 공개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반면 확진자 발생은 즉각 공개했다. 새벽 1시, 새벽 6시대에도 신규 환자 발생을 알렸다. 호된 비난을 받은 후 확진자가 발생한 병원 이름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때는 이런 메르스 때의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확진자 정보와 동선을 너무 자세히 공개해 오히려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다. 지금은 동선이나 영업장 정보는 최소한으로 공개하거나 익명으로 처리한다.
물론 코로나19 발생 이후 중국 입국자 제한이나 영업 제한, 방역 패스 등을 논란에 휩싸인 것도 적지 않다. 화이자·모더나와 백신 계약 조건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비판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조건 미공개는 백신 늑장 도입에 따른 '을의 한계'일 수도 있다. 핵심 정보를 은폐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문 대통령도 그동안 투명한 정보 공개를 수차례 강조해왔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의 중동 순방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사실을 숨긴 게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럴만한 말 못 할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숨길 이유가 없어 보인다. 오미크론은 세계 어디에나 좍 퍼져있다. 아랍에미리트·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 모두 최근 확진이 급증하는 나라이다. 세 나라를 돌았으니 감염 위험이 클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 감염되지 않았다니 천만다행이다. 그러면 그냥 쿨하게 "몇 명 감염됐고 어떻게 조치했다"고 했으면 쉽게 넘어갔을 일이다.
감염병의 승패는 소통에 있다고들 한다.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말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감염병 소통의 대원칙으로 '조기 공개(early announcing)'를 권고한다. "잠재 위험을 빨리 알려라" "불완전한 정보도 알려라"라고 강조한다. WHO는 "공개가 늦어질수록 정부의 질병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가 낮아진다"고 지적한다.
미국 질병통제센터(CDC)의『위기, 위험, 그리고 소통』이라는 위기대응 안내서는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의 6개 원칙을 제시한다. 가장 먼저 정보를 제공하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라, 신뢰를 확보하라, 공감하라 등이다.
이 책을 편역한 한성대 행정대학원 박기수 특임교수(전 질병관리본부 대변인)는 "세계 정상들이 코로나19에 감염되는 일이 다반사인데 청와대가 숨기는 바람에 K방역의 투명성을 의심받게 됐다"며 "모범을 보여야할 곳이 이렇게 하면 그 의도와 관계없이 오히려 신뢰 자본을 갉아먹는다. 앞으로 문 대통령이 나서 코로나19 방역을 얘기하면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01.30 ‘꽃뱀, 살인자’ 끝나지 않는 2차 가해… “지금도 난 죽음을 생각한다”
박원순 성폭력 고발 책 낸
김잔디씨 단독 인터뷰
2020년 7월 10일. 서울시 9급 공무원이던 그의 인생은 한 사건으로 인해 멈춰 섰다. 자신에게 위력(威力)에 의한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고소 이틀 만에 스스로 목숨을 던진 것이다. 피고소인이 사망하면서 경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잘못을 따질 사람도, 벌을 받을 사람도 사라졌다. 그에겐 2차 가해라는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렸다. 여성운동계 대표 주자였던 남인순 의원은 그를 피해자가 아닌 ‘피해 호소인’이라 낙인찍었다. 일부 박 시장 지지자는 그의 실명을 공개하며 ‘꽃뱀’ ‘살인자’로 몰고 갔다. 서울시는 회유에만 급급했다. 그는 매일 밤 엄마를 붙잡고 울었다. “엄마, 나도 죽어야 할까?”
하지만 언제까지 숨어있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3월 취재진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2차 가해 세력에 경고 목소리를 날렸다. 서울시에 복직도 했다. 그리고 지난 20일 박 시장 성폭력 사건의 전말을 담은 300쪽 분량의 책 ‘나는 피해 호소인이 아닙니다’를 냈다. 본명 대신 ‘김잔디’라는 필명으로. 김씨는 “박 시장 사건 발생 이후 복직까지 468일간의 기록을 책에 담았다”며 “나는 이제 무서울 것이 없다. 이 책을 통해 존엄한 인간의 한 명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 모처에서 김씨를 만나 박 시장 사건 이후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씨가 단독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계속되는 2차 가해
-책을 쓴 계기는 무엇인가.
“2020년 12월 국가인권위에서 박 시장의 성폭력 혐의가 일부 인정된 이후 서울시 복귀를 생각하면서 책 출판을 고민했다. 사건 초기 쏟아지는 2차 가해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게 남은 일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회가 내가 사라져야 한다고 외치는 듯했다. 그래도 직장 복귀를 결심하면서 ‘사건에 대해 내 생각을 사실대로 드러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생각이 날 때마다 엄마와 함께 힘들었던 일을 조금씩 기록했다. 그걸 책에 담았다.”
-책 부제가 ‘끝날 수 없는 생존의 기록’이다. 피해자가 감내해야 할 현실의 벽을 말하는 건가.
“사건 이후 난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2차 가해로) 사건의 영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책을 내도 상처가 끝나진 않을 것이다. (성추행을 가한) 상대가 없는 상황이라 법적으로 마무리할 수도 없다. 2차 가해자를 고소하고 처벌이 내려져도 이에 대해 다른 누군가가 또 의혹을 제기할 테니 평생 안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나.
“일도 다시 시작했고, 정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약(항우울제)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다. 밤마다 악몽을 꾼다. (김씨는 책에 ‘집에서조차 언제 겁탈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긴장을 놓지 못했다. 꿈에서 성폭행 가해자 선배에게 시달리다가 다른 꿈에서 박 시장이 나를 괴롭혔다’고 썼다.) 치료받는 병원의 간호사가 내게 그랬다. 당뇨병처럼 평생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고.”
-지난해 서울시에 복귀했다.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오세훈 시장께서 공식 사과도 했고 내가 시청에 복귀할 때 부서 배치에 신경 쓰신 걸로 알고 있다. 주변의 지나친 배려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대체로 직원들이 담담하게 대해줘서 잘 적응하고 있는 편이다. 마스크로 얼굴이 가려지기도 하고, 구내식당이 4부제를 하고 있어서 붐비지 않아 심리적 부담감이 덜하다. 사무실 옆자리, 나보다 여덟 살 어린 직원에게는 내가 겪은 사건을 먼저 털어놓기도 했다.”
-박 시장을 옹호하는 책 ‘비극의 탄생’을 썼던 친여 성향 저자가 당신의 책이 나온 이후 “나만 없었다면 (피해자의) 완전 범죄가 됐을 텐데”라고 SNS에 글을 올렸다.
“어지간한 악플엔 초연해졌지만 ‘살인녀’라는 표현은 여전히 감당하기 어렵다. 피해 호소인이라는 단어는 사건을 겪으며 처음 들어봤다. 학자가 아니라 여성 인권의 대모라는 분이 그런 말을 해서 더 참담했다. 그분들이 추구했던 피해자 중심주의, 여성 인권이 나에겐 하나도 적용되지 않았다.”
-왜 2차 가해가 멈추지 않는 걸까.
“사건 이후 네이버 밴드와 블로그에 ‘기획 미투 여비서를 고발한다’며 내 실명과 근무지를 공개한 40대 주부를 고소했다. 그런데 법원은 1심에서 이 여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현재 항소 중이다. 한 대학교수는 2020년 12월 내 실명이 들어간 편지를 SNS에 공개했지만 고소한 지 1년이 지난 현재 기소도 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2차 가해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는 인식만 늘고 있는 것 같다.”
◇개명, 성형, 탈색
김씨는 광고 회사를 다니다 2015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시에 들어갔다. 지방직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3대 공무원 집안이 나왔다. 그것도 서울시 공무원”이라며 기뻐했다. 김씨는 5개월 만에 시장 비서실로 발령이 났고, 이후 수년에 걸쳐 박 시장의 성적 가해에 시달렸다. 김씨는 책에서 ‘내실에 둘만 있을 때 안아달라고 부탁하거나 여자가 결혼하려면 섹스를 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성행위를 묘사하는 문자를 수도 없이 보냈다’고 밝혔다.
-박 시장 지지자들은 아직도 ‘성폭력의 증거를 대라’고 주장한다.
“박 시장이 보낸 텔레그램 메시지, 비밀 대화방에 나를 초대하는 화면을 증거로 인권위와 수사 당국에 제출했다. 이제는 (둘만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강제 추행 증거를 내놓으라 한다. 폭력적 언동이다. 그분(박 시장)이 살아있다면 수사 당국을 통해 (피해자 진술은) 충분히 인정될 내용이다. 나는 당당하다.”
-경찰, 인권위 등에서 6차례 휴대폰 포렌식을 했다. 박 시장의 휴대폰은 포렌식하지 않았나.
“경찰에 박 시장 휴대폰의 포렌식 수사를 요청했지만, 사인과 관련한 포렌식만 했다.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는 포렌식이 이뤄지지 않은 채 (휴대폰을) 유족에게 돌려줬다. 진실 규명을 위해선 고인의 스마트폰도 포렌식을 해야 했다.”
-책에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다고 썼다. “박 시장을 인간적으로 이해해보려 했다”고도 했다. 성폭력 초기에 더 적극적으로 문제 삼지 못한 것이 아쉬울 것 같은데.
“후회는 되지만, 나는 9급 공무원이고 상대는 장관급인 서울시장이었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저항이) 어려웠다. 최근 한 대기업 여성 임원이 사장한테 성적으로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성폭력은 직급·나이를 떠나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 같다. 왜 성폭력 행위가 일어난 자리에서 문제 삼지 않느냐고 하면 ‘겪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직원들에게 박 시장 때문에 겪은 문제를 털어놨지만 “에둘러 표현했다”고 썼다. 더 정확하게 피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
“상급자들에게 ‘박 시장이 밤늦게 속옷 사진을 보내고 손을 잡는다. 저를 여자로 보시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60대 남성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정상이 아닌데 그분들은 적극적으로 나를 구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방마님’이라 부르며 박 시장 심기가 안 좋아 보일 때마다 어려운 결재를 대신 받아내도록 나를 도구적으로 악용했다.”
-성폭력과 직접 관련이 없는 대리 약 처방, 가족 선물 챙기기 등 유족 측에서 사자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내용도 담겼다.
“나는 박 시장에게 겪은 피해에 대해 사실대로 수사기관에 진술하고 책에 담았다. 그 안에 허위내용은 없기에 사자 명예훼손은 성립할 수 없다. 위력 성폭력이 일어나는 건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비서의 업무가 모시는 분의 사적 영역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서울시 비서실에 발령 났을 때 전임자에게 받은 업무 매뉴얼에는 ‘시장님의 통풍 약을 몇 시에 줘야 한다’처럼 본업무 외 지시가 많았다. 사적 노무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공사 구분을 허무는 요인이 되고, 그 과정에서 성적 대상화, 성적 괴롭힘이 심해진다.”
-박 시장 사망 소식을 접한 이후 “장례식에 가봐야겠다”고 했다던데.
“나는 지금도 그분(박 시장)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박 시장 사망 당시엔 빈소에 가서 그의 죽음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친구나 가족에게 아무리 하소연해도 응어리가 안 풀려 당사자에게 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자(박 시장) 사망으로 나는 법정에서 내 피해를 인정받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사건 이후 많은 게 바뀌었다.
“죽는 것 외에는 힘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은 다 해본 것 같다. 공황 장애가 심할 때 분홍색으로 머리를 탈색했다. 나를 알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도 성형했다. 실명이 드러나,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까지 바꿔야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뭐가 나아질까 생각하다 보면 허무하다. 지금 인터뷰하는 순간에도 죽음을 생각한다.”
◇“다른 피해자도 용기 내길”
김씨는 처음엔 서면 인터뷰를 원했다. 이후 사진 촬영과 녹음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대면 인터뷰에 응했다.
-신분을 드러낼 계획은 없나.
“나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법적 절차를 진행했기 때문에 (반대 진영에서) ‘피해를 인정받으려면 얼굴을 공개하라’는 비난을 숱하게 받았다. 하지만 이런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요구에 부응하면 이후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도 같은 공격이 이어질 것이다.”
-박 시장 지지자들은 책 출간을 대선 정국에 벌이는 정치적 활동이라고 비난한다.
“피해자로서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 또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사회보다는)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고 싶다. 내가 쓴 책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켜야 할 공동체의 정의와 윤리적 가능성을 묻는 유효한 질문이 되고 싶을 뿐이다.”
-앞으로 계획은.
“그저 하루하루 잘 살아가는 게 목표다. 사람들이 날 보고 ‘저런 사람도 살아가네’라고 희망과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
조선일보 최인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