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오후여담(문화일보) 2022-01/ 01월 03일(월) 박민지 ‘무조건 우승’ - 01월 28일(금) 용산공원 위협하는 세력

상림은내고향 2022. 1. 31. 16:12

오후여담 2022-01/ 문화일보

01월 03일(월)  박민지 ‘무조건 우승’

 

김종호 논설고문

‘검은 호랑이의 해’인 2022년 임인년(壬寅年)이 밝았다. 사람이 태어난 해를 동물에 비유하는 띠로는 ‘인’이 용맹의 상징인 ‘호랑이’다. ‘임’은 흑색을 나타낸다. 호랑이띠 스포츠 선수 중에서, 올해 더 큰 활약이 기대되는 대표적인 사람이 여자 프로 골퍼 박민지(24)다. 크지 않은 키에도 엄청난 힘을 폭발시키며 호쾌한 타구를 날린다. 그는 “새해 목표는 ‘다시 1승’,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겠다”고 했다. “작정하고 온 힘을 쏟으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도 해낼 수 있다는 걸 지난해에 배웠다. 선수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계속 성장하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골프를 시작한 그는 2015년 여자 골프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됐다. 국가대표로 눈부신 활약을 펼치다가, 2017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원 선수로 등록한 지 10일 만에 데뷔 대회에서 우승했다. “1년에 1승씩이라도 하게 되면 고맙겠다”고 여긴 그는 그 뒤로도 우승을 매년 한 번씩 했다. 하지만 지난해엔 6승을 거뒀다. 국내 한 시즌 최다 상금인 15억2137만 원을 받았다. 상금왕·다승왕·대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 2021년 시즌을 앞두고, 미국프로농구(NBA)의 전설인 마이클 조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를 보고 크게 감명받은 일이 새 각오를 다진 계기였다. “조던은 라이벌이 없을 정도로 이미 세계 최고였어도, 더 높은 곳을 향해 뛰었다. 우승하기 위해 태어난 조던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며 더 큰 꿈을 향해 피땀을 더 쏟았다. “나는 너무 밋밋한 선수 같다. 이럴 게 아니라, 우승을 많이 해야 한다”며 자신을 다잡으며, ‘무조건 우승’을 새 목표로 삼았다.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집념 하나가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밀어냈다. 공이 해저드에 빠지면 어쩌나, 왼쪽으로 나가는 것도 무섭고 오른쪽으로 나가는 것도 무서워서 안전하게만 치던 소심한 플레이가 과감한 도전으로 바뀌었다. ‘나는 무서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상황도 헤쳐나갈 수 있다.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새해 목표 ‘다시 1승’은 ‘또 무조건 우승’의 출발을 의미한다. 누구나 본받을 만한 각오일 성싶다.

 

01월 04일  야당의 망징(亡徵)

 

이신우 논설고문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한비자(韓非子)는 자신의 책에서 나라가 망하는 징후를 무려 47가지나 열거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법령과 금법(禁法)을 가벼이 여기고 모략과 꾀에만 힘쓰고, 나라 안의 정치는 황폐하게 만들고 나라 밖의 외교와 원조에만 의지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는 2번째 항목이다. ‘조그마한 술수로 법을 어긋나게 만들고, 사사로운 일로 공과 사를 그르치게 하며…’라는 27번째 항목도 비슷한 성격의 것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최근 행보를 지켜보면서 이런 섬뜩한 문구를 떠올리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처음에는 그저 재승박덕(才勝薄德)으로 치부했으나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대선을 눈앞에 두고 자신이 대표하는 정당을 내부로부터 흔들며 자멸을 재촉하고 있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많은 국민이 존재의 위기감을 겪는 중이다.

법령과 금법을 가볍게 여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최근의 당윤리위원회 결정을 들 수 있다. 윤리위는 이 대표의 알선수재형 성상납 논란을 무력화시켰지만, 이는 국민의힘 스스로 이율배반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이 대표는 윤희숙 전 의원이나 곽상도 전 의원에 대해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했지만, 정작 이 대표가 임명한 윤리위 위원들은 그에게 면죄부를 선물했다. 이 대표가 그동안 윤석열 대선 후보를 포함, 당 내부를 향한 총질에 전념해온 것도 ‘나라 안의 정치를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더욱 해괴한 것은 상대 정당이 그를 적극 두둔한다는 사실이다. “국민의힘이 ‘이준석 죽이기’로 날 새는 줄 모른다”면서 “청년 당대표를 그야말로 ‘쓰고 버릴’ 작정이 아니라면…”이라는 더불어민주당 측의 엄호 사격은 스모킹건이나 다름없다.

한비자는 ‘임금이 말과 논리에 능숙한 반면 이치에는 어긋나고, 다재다능한 반면 법도에 따라 일을 다루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했다. 물론 한두 번의 조짐으로 나라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무가 꺾이는 것은 반드시 벌레가 속을 파먹었기 때문이고,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숱한 나라가 일어났다 사라졌다. 그 역사의 파편들을 켜켜이 쌓아 올린 것이 한비자의 ‘망징(亡徵)’이다.

 

01월 05일  공수처 ‘통신 조회’ 당해보니

 

이현종 논설위원

김영삼 정부 당시 안기부는 ‘미림팀’이라는 도청팀을 만들어 총리, 장관, 청와대 고위직은 물론 여야 의원들에 대한 도청을 해왔다. 당시 미림팀장 집에서 압수된 도청 테이프만 274개였는데 청와대까지 보고가 됐다고 한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요원들이 대화를 나누다 슬쩍 “의원님, 요즘 그 식당 자주 가시네요” “의원님, 그분하고 친하신가 봐요. 통화도 자주 하시고”라는 말을 할 때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찰당한 경험이 있는 김대중 정부는 1999년 국가정보원·정보통신부·법무부 합동으로 ‘국민 여러분 안심하고 통화하십시오! 휴대전화는 감청이 안 됩니다’라는 신문광고를 냈다. 기술적으로 휴대전화를 도청할 수 없다는 것인데, 나중에 이 말도 거짓임이 드러났다. 신건 국정원장 시절 도청을 한 사실이 노무현 정부 출범 뒤인 2003년 밝혀져 구속되는 처지가 됐다. 휴대전화도 전화국 중계 통신망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국정원은 장비를 폐기했다.

요즘 스마트폰은 단순한 전화기가 아니다. 일상의 모든 게 담겨 있다고 할 정도다. 그래서 수사기관도 초동 수사 때 스마트폰 입수에 사활을 건다. 통화 내역을 조회하면 당사자의 인맥이 대충 그려지고, 이런 기초 정보를 종합하면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심지어 부적절한 처신이 있었다면 그것도 추적할 수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고발 사주 의혹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관련 사건 수사를 이유로 야당 의원과 기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통신 조회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필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난달 말 통신사에 조회한 결과 지난해 10월 1일 공수처 수사3부가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취재를 위해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들과 자주 통화를 하는 특성상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자주 벌어질 수 있다. 문제는 공수처가 이런 정보를 활용해 사찰 정보로 가공한다면 과거 안기부나 국정원이 했던 도청과 다를 바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앞으로 고위 공무원들은 기자들과 접촉하길 꺼릴 수밖에 없고 언론 활동도 위축될 것이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문재인 정부에는 사찰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공수처만 봐도 믿기 힘들다.
 

 

01월 06일  ‘트럼프類 퇴조의 해’

 

이미숙 논설위원

새해가 되면 개인의 길흉지사에 대한 예측인 토정비결을 보는 사람이 많다. 개인의 사주 중 태어난 연·월·일을 바탕으로 일 년 신수를 설명해주는 것인데, 길한 일엔 기대를 갖게 하고 흉한 일엔 대비를 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일정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토정비결이 개인의 운에 대한 믿거나 말거나 예측이라면, 각 언론 매체들이 내놓는 2022 세계 전망은 좀 더 과학적인 데이터에 근거해 내놓는 분석이라는 점에서 신뢰도가 높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가 매년 송년호 전면에 게재하는 다음 해 세계 전망은 적중률이 높아 많이 인용된다. FT는 지난해 12월 31일 자 기획에서 “2021년의 예측 20개 이슈 중 17개가 적중했다”고 자랑했다.

FT 올해 전망에서 두드러진 점은 코로나 팬데믹이 이어지면서 도널드 트럼프 스타일의 전제적 포퓰리스트가 퇴장할 것이란 예측이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패배한 원인이 코로나 부실 대응이었는데 그 여파는 올해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동유럽의 트럼프’로 불리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4월 총선에서 참패할 것으로 예상됐다. 철옹성 같은 그의 독재 체제는 야당이 반(反) 오르반 전선을 견고히 구축하면서 끝이 날 전망이다. ‘남미의 트럼프’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도 10월 대선 패배가 예상된다. 보우소나루는 “오직 신만이 나를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고 했지만, ‘민심은 신보다 무섭다’는 것을 실감할 듯하다. 5월 필리핀 대선 판세는 안갯속이지만, 마약범 퇴치 명분으로 시민 수천 명을 사살한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퇴장은 예정돼 있다.

우리나라 3·9대선과 관련해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2022년 세계 대전망’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당선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문재인 정권 인사들의 내로남불식 법치 무시 행태를 ‘비민주적인 진보 세력(illiberal liberal)의 일탈’로 규정한 바 있다. 따라서 한국 유권자들이 그런 세력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보다 정권교체를 택할 것이란 관측이다. 미국의 모 컨설팅회사도 지난해 정세 보고서에서 “윤 후보가 유리하지만 수많은 발언 논란이 변수”라고 했다. 대선 판세는 야당에 유리한데도 불구하고 후보가 ‘자책골’을 연발한다면 기회를 놓칠 것이란 관측이다.

 

01월 07일 승리하는 선거 캠프의 조건

 

이도운 논설위원

2020년 미국 대선 당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전국 캠프가 공개한 공식 멤버는 22명에 불과했다. 제니퍼 딜런 선거본부장을 비롯해 비서실장·선거전략·정무·재무·디지털 책임자가 있었고, 나머지는 선거 관리와 홍보·미디어 담당자였다. 대부분 바이든 측근이거나 선거전문가, 언론인, 기업인 출신. 각 분야 정책 전문가와 50개 주의 캠프는 별도로 조직돼 있었다. 2008년 버락 오바마 캠프도 고향 시카고 출신 중심으로 23명이 핵심 멤버였고, 2016년 도널드 트럼프 캠프는 딸, 사위 등이 중심이 된 사실상 가족 캠프였다.

미국 대선은 캠프 조직보다 지지자들의 열정이 좌우하는 경우도 많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인 2007년 6월 미 대선의 모든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는 ‘뉴햄프셔 정치박물관’을 방문했다. 박물관 대표 연구원은 힐러리 클린턴과 오바마가 맞붙은 민주당 경선을 전망하면서 “멍청한 백인 남자들(Stupid White Men·마이클 무어 감독의 책 제목)은 오바마를 찍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레이 버클리 뉴햄프셔주 민주당 의장은 다른 얘기를 했다. 그는 뉴햄프셔와 주변 지역 힐러리·오바마 캠프를 모두 방문했는데, 힐러리 진영은 가장 ‘프로페셔널’하고 ‘몸값이 비싼’ 선거 전문가들을 싹쓸이해서 캠프를 꾸렸다고 한다. 반면 오바마 캠프는 어디를 가든 얼굴과 이름을 아는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열정’만 가득한 아마추어들이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뭘 하는지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 버클리는 “머리는 분명히 힐러리가 이긴다고 말하지만, 가슴은 오바마를 가리킨다”고 했다.

이듬해 1월 2일 마침내 아이오와 주에서 첫 경선이 열렸다. 힐러리와 오바마 모두 주도(州都) 디모인에서 경선 전날 마지막 유세를 벌였다. 필자는 힐러리가 이길 것으로 예상하고 그쪽 유세장에 갔다. 나름 성황이었지만 뭔가 부족했다. 오바마 쪽으로 간 특파원에게 전화하니 열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오바마는 결국 경선에서 이긴 뒤 대선에서도 베트남전 영웅인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꺾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오는 3월 9일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 후보들이 각축전을 벌인다. 당과 캠프의 규모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압도적이다. 가장 열정을 갖고 움직이는 캠프는 어느 쪽인지 궁금하다.

 

01월 10일(월)  2000년 전 ‘선거의 기술’

 

박민 논설위원

“경쟁자가 자초했던 범죄와 성 추문, 부정부패를 기회가 될 때마다 무기로 활용해 그들을 압도해야 한다.” “선거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악의적인 소문은 대부분 가족과 친구에게서 시작된다.” “필사적으로 아첨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을 맞추고, 필요하다면 표정과 말투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일반 대중을 향해 명확하고 구체적인 약속을 해선 안 된다. 애매한 일반론을 고수하라.” “정치판은 속임수와 변절, 배신이 난무하는 곳이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지 말라.”

여야 선대위 내부 자료에 나올 법한 이 선거운동 지침은 2000여 년 전 작성된 것이다. 기원전 64년 로마 집정관 선거에 마르쿠스 키케로가 출마하자 동생 퀸투스 키케로는 짧은 편지 형식으로 58개의 정치적 조언을 전달했다. 당시 로마 체제는 귀족 대표 원로원과 평민 대표 민회, 집정관을 수장으로 하는 행정체제가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특권에 집착한 귀족과 고위 행정 세력이 결탁하면서 공화정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다. 평민 출신 마르쿠스가 선거에 나선 것도 공화정의 재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연설가이자 정치가인 마르쿠스에게도 30여 년간 귀족이 독점해온 집정관에 당선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현실주의자 퀸투스의 조언이 현재까지 관심을 모으는 것은 선거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2012년 버락 오바마 재선 캠프 참모들은 바쁜 선거운동 와중에 이 책을 수백 권 구매해 돌려 읽었다. 국내에는 ‘선거에서 이기는 법’(Commentariolum Petitionis)이란 제목으로 21대 총선 2개월 전 출간됐다. 이 책은 일견 당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 것을 권하는 후보용 선거지침서로 읽힌다. 그러나 후보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포퓰리즘 공약이 난무하는 이번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후보의 교묘한 해명과 매혹적인 공약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마르쿠스는 어떻게 됐을까. 집정관에 당선돼 카틸리나 역모 사건을 적발하는 등 공화정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2차 삼두정치를 연 안토니우스에 의해 살생부에 올라 동생과 함께 암살당했다.

 

01월 11일  ‘대장酒’ 와인

 

문희수 논설위원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는 일상을 많이 바꿨다. 집에서 혼자 술을 즐기는 홈술·혼술 증가는 그중의 하나다. 특히 와인이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대량 구매한 뒤 집으로 배달시키는 주문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와인이 새로운 대중주 겸 ‘대장주(酒)’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와인 수입 규모는 맥주를 추월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와인 수입액은 지난 2020년 3억3002만 달러(약 3937억 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맥주를 제친 데 이어, 지난해에도 11월까지 5억617만 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76%나 증가하는 등 폭발적인 성장세다. 반면 맥주는 같은 기간 1.7% 줄어든 2억447만 달러에 그쳤다. 국내 전체 와인 시장도 매년 급성장세다. 2020년 7000억 원을 돌파한 데 이어, 올해는 1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전통적으로 국민주(酒)로 꼽혀 온 소주·맥주의 퇴조·정체와 대조된다.

주변을 둘러보면 와인의 대중화가 실감 난다. 소비층이 중장년층에서 노년층·2030세대까지 넓어졌다. 가격대도 10만 원을 넘는 고가 외에 1만 원 이하부터 2만∼3만 원대와 4만∼5만 원대 중저가까지 다양하다. 백화점·전문점만이 아니라 대형마트·전통시장·편의점도 와인을 판 지 오래다. 한식·중식·일식집은 물론, 심지어 족발집·분식집도 와인을 잔으로 팔 정도다. 가격·등급 등을 알려 주는 휴대전화 앱 등도 많아 ‘바가지’ 걱정 없이 원하는 가격과 입맛에 맞는 제품을 고르기 쉬워졌다.

중상류층용으로 알던 와인이 친숙해진 것은 자유무역협정(FTA) 공이 크다. 칠레와의 1호 FTA가 지난 2004년 발효되면서 가격을 크게 낮춘 몬테스 알파·1865 등 칠레산을 비롯한 남미 와인이 대거 들어왔고, 이어 FTA 확대로 미국과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 와인도 줄을 이었다. 지금은 호주·뉴질랜드·남아공 등 유명 생산국 와인은 거의 없는 게 없다. 시장 개방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져 소비자의 눈과 입이 한층 즐거워졌다. 이제 와인은 기업 행사뿐만 아니라 가족 행사나 친구 생일 파티에도 빠지지 않고, 결혼식 답례품·각종 선물용으로도 많이 쓰인다. 저도주(低度酒) 선호와 함께 와인 인기도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앞으로 차례상에 와인이 오를지도 모르겠다.

 

 

01월 12일  ‘멸공’의 부활

 

이현종 논설위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불붙인 ‘멸공(滅共)’ 논란이 ‘색깔론’으로 정치권에 번지면서 대선 이슈화하고 있다. 파를 왼손에 들면 ‘좌파’, 멸치와 콩을 먹으면 ‘우파’라는 우스갯말과 인증샷이 SNS에 유행이다. 인스타그램의 셀럽인 정 부회장이 “오로지 위(북한)에 있는 애들을 향한 멸공”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반발이 거세지며 주가에 영향을 끼치자 사과했다. 북한의 도발이 기업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려한 정 부회장의 소신 한마디가 이렇게 뭇매를 맞고 있다. 공교롭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측이 12일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단 소속 경영인과 간담회에서 재계 10위인 신세계그룹을 제외하다 보니 ‘보복’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공산주의 북한과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이 전쟁을 치르고 분단된 환경에서 색깔론은 매우 민감한 단어다. 과거 독재정권이 노동운동이나 좌파 진보주의 운동을 ‘빨갱이’로 규정해 탄압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하다 보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미국에서도 매카시 선풍 이후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는 일종의 고정관념이나 강박관념으로 취급해 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생 ‘빨갱이’ 프레임으로 고초를 겪다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논란이 잦아들었다.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 등으로 공산·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레드 콤플렉스는 설 자리를 잃었다. 국내에서도 1987년 민주화 이후 김대중·노무현 등 진보 진영 대통령이 연이어 탄생하면서 “북한과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며 색깔론의 종식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정 부회장의 ‘멸공’ 주장이 20·30대와 60세 이상을 중심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20대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중국과 북한이라는 여론조사를 보더라도 시진핑(習近平) 이후 중국은 과거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의 공산 독재국가로 회귀하고 있다. 북한은 극초음속미사일 보유국이 됐다. 이들이 더 분노하는 것은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친중·친북 노선으로 국가적 자존감이 떨어졌다는 데 있다. 김여정의 하명(下命)이나 중국의 외교 홀대엔 한마디도 못하면서 ‘멸공’엔 스타벅스 커피도 마시지 않겠다는 결기가 나오는 이유가 궁금하다.

 

01월 13일  친환경 소비

 

이신우 논설고문

최근 K-팝이나 K-드라마 못지않게 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한식이다. 특히 참기름을 발라 구운 김은 반찬으로는 물론이고 술안주나 어린아이들의 주전부리로도 환영받고 있다. 하지만 구운 김은 포장 탓에 소비가 꺼려진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김은 몇 장 들어 있지도 않은데 포장지에다 심지어 플라스틱 용기까지 들어 있어 불필요한 환경오염을 생각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는 반응들이다. 국내에서는 한동안 샴푸나 액체 비누에 자리를 내줬던 고체 비누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비누 하나로 액체 비누 3통가량을 대체할 수 있는 데다 포장재가 간단해 플라스틱 통을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고체 비누에 열광하는 주 소비자는 20∼30대라고 한다. 환경친화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지구촌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친환경 소비’가 주목을 받고 있다. 오스트리아 국영 철도사 외베베는 작년부터 야간열차 ‘나이트젯’의 노선을 계속 늘리고 있다. 빈과 프랑스 파리,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노선을 확대하는 중이다. 이 같은 철도 노선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1990년대 저가 항공사의 부상으로 줄곧 내리막길을 걷던 열차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탄소 배출량 감축 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항공기 수치’(flight shame)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했다. 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비행기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그러지 않아도 항공기는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2%를 차지한다.

의류업계도 점차 전 세계 젊은이들의 눈치를 봐야 할 입장이다. 자라, H&M 등 패스트패션업계는 대량의 수자원을 낭비하고 토양이나 하천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유행 기간마저 단축시키는 바람에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의류가 인스턴트식으로 소비되면서 자연히 폐기물이 많아지고 환경에 부담을 준다는 지적이다. 육류를 거부하는 경향도 점차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국 맥도날드나 버거킹에서는 이런 흐름을 의식해서인지 대체육 메이커인 ‘비욘드미트’나 ‘임파서블 푸드’가 제공하는 원료로 만든 버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소비자 상대 기업들로서는 점증하는 친환경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01월 14일  이광조 노래 45주년

 

김종호 논설고문

어쿠스틱 기타 연주의 ‘살아 있는 전설’인 가수 함춘호가 다른 가수의 반주자인 세션맨으로 데뷔한 것은 1981년이다. 한국 발라드 음악을 대표하는 가수 중의 한 사람인 이광조(70)가 1981년 리메이크해 발표한 ‘저 하늘의 구름 따라’ 음반에 기타리스트로 나섰다. ‘저 하늘의 구름 따라 흐르는 강물을 따라/ 정처 없이 걷고 싶구나/ 바람을 벗 삼아 가며’ 하고 시작하는 노래다. 천재적인 싱어송라이터 김의철이 보성고 1학년이던 1970년 만들어, 1974년 독집 음반에 담은 뒤로 양병집·양희은·김광석 등 많은 가수가 다시 불렀지만, ‘마성(魔聲)의 가창력’ 이광조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광조가 “그의 마음처럼 맑고 깨끗하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극찬한 함춘호의 반주도 큰 몫을 했다.

이정선이 이끌던 트리오 풍선, 4인조 포크 그룹 해바라기 등의 일원으로도 활동한 이광조는 1977년 이정선 작사·작곡의 ‘나들이’로 데뷔했다. 최대 히트곡은 1985년 정규 6집에 수록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아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 맘 깊은 곳에 외로움 심으셨나요/ 그냥 스쳐 지나갈 사람이라면/ 모르는 타인들처럼/ 아무 말 말고 가세요/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리움이 더하겠지만’ 하고 시작한다. 그가 작사하고, 이태열이 작곡했다. 그 노래로 이광조는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다. 발표 이듬해에 KBS 가요대상의 가사 부문 금상도 받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대가 두려워진 그는 2000년 홀연히 미국으로 이주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홀로 떨어져 느끼는 자유”를 누리던 그는 2011년 홀어머니의 건강 악화로 11년 만에 귀국해, 가수 활동을 재개했다.

‘사랑을 잃어버린 나’ ‘연인이여’ ‘추억 속의 비’ ‘오늘 같은 밤’ ‘세월 가면’ ‘뜨거운 바람 되어’ ‘네 곁에 다가서리’ 등 명곡을 많이 남겨온 그가 지난해 12월 22일 ‘함춘호가 기타 치고, 이광조가 노래하고’를 표제로 삼은 새 앨범 ‘올드 앤드 뉴(Old & New)’를 냈다. 신곡 ‘우리 떠나가요’를 비롯해, 두 사람이 조화를 이룬 노래 10곡이 가슴을 적신다. “무대 공포증이 여전하다”면서도, “올해는 스윙 재즈에 도전하겠다”고 밝힌 그가 데뷔 45주년에 내놓을 또 다른 신곡들이 벌써 기다려진다.

 

01월 17일(월) 달나라 자원 경쟁

 

문희수 논설위원

새해에도 우주 개발·탐사는 과학기술계의 중요한 화두다. 지난해가 화성 탐사의 해였던 반면 올해는 달 탐사가 활발할 전망이다. 달에 풍부한 것으로 알려진 희토류 등 자원을 선점하려는 경쟁이다.

미국은 1972년 아폴로 17호 이후 중단된 유인 달 탐사를 50년 만에 다시 추진한다. 나사(미 항공우주국)는 이 계획의 일환으로 오는 3∼4월에 무인 아르테미스 1호를 시험 발사할 예정이다. 나사는 무인 달 착륙선을 올해부터 매년 발사하는 ‘상업용 달 탑재체 서비스’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테슬라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도 달 착륙선을 시험 비행한다.

중국은 올해 말 독자 우주정거장인 톈궁(天宮)을 완성할 예정이다. 지난해 10월 발사된 선저우 13호 승무원들이 톈궁 조립·건설을 위한 장치 설치 등을 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국제우주정거장(ISS)이 2024년 운영을 종료하면 톈궁이 유일한 우주정거장이 될 전망이다. 중국은 또 러시아와 공동으로 달 무인정거장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당초 계획보다 8년 앞당겨 2027년까지 달에 연구기지도 세울 계획이다. 달을 향한 강한 의지가 읽힌다.

러시아도 1976년 이후 처음으로 달 착륙선을 발사하며 미국과 경쟁을 벌인다. 오는 7월 무인 탐사선을 발사해 달 남극에서 토양을 채취해 분석할 예정이다. 인도 역시 2019년 실패했던 달 착륙을 3년 만에 재시도한다. 일본은 미국과 공조해 일본인 우주비행사의 달 착륙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일본의 스타트업 우주기업인 아이스페이스는 아랍에미리트(UAE)의 이동형 탐사 로봇(로버)을 달에 착륙시켜 광물자원 연구 등 달 표면 탐사에 나설 예정이다.

한국은 올 8월 머스크의 스페이스X 로켓으로 달 주위를 도는 궤도선(KPLO)을 발사할 예정이다. 최초의 지구 밖 탐사다. 2030년까지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를 이용한 달 착륙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지난해 누리호 발사에 실패했다. 비행 압력을 잘못 설계한 기초적인 오류 탓에 3단 엔진이 일찍 꺼졌다. 로켓과 미사일은 사실상 같은 원리다. 북한은 극초음속 미사일까지 쏘는 데 비해 한국은 아직 로켓을 올리지도 못한다. 이러니 달 탐사가 ‘희망 고문’으로 들린다. 달나라로 가는 길이 너무 멀다.

 

01월 18일 ‘불통’ 대통령

 

이미숙 논설위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부터 언론과 격의 없이 토론하고 학자들과도 서신을 교환해온 열린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다변가여서 말실수도 잦고, 다혈질인 관계로 기자들과 다툼도 많았지만 이내 사과 편지를 써 취재진과 화해했다는 내용이 에번 오스노스 기자가 쓴 바이든 전기에 나와 있다. 1975년 해나 아렌트의 권위주의 관련 논문이 학계에서 주목을 끌자 상원 외교위 소속 의원 자격으로 한 카피 얻고 싶다는 편지를 정중하게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바이든이 취임 1주년만에 불통 대통령이 됐다. 최근 AP통신 집계에 따르면, 바이든은 2020년 한 해 동안 고작 22회 언론 인터뷰를 했다. 같은 기간 도널드 트럼프는 92회, 버락 오바마는 156회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과 전쟁을 했던 트럼프도 바이든보다 더 열심히 기자를 만난 것이다. 이에 대해 바이든 측은 “인터뷰 대신 소셜미디어나 유튜브 저명인사들과 인터뷰를 자주 했다”고 했다. 공세적 언론을 피하고 홍보 쪽에 비중을 뒀다는 해명이다.

대통령이 얼마나 자주 언론을 접촉해야 하느냐에 대한 정답은 없다.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의 경우 지나치게 접촉한 것이 화(禍)가 돼 재선 도전을 포기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올랑드는 취임 후 르몽드 기자 2명과 60차례 이상 대담을 했는데, 이들은 이 내용을 바탕으로 ‘대통령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이란 제목의 책을 펴냈다. “엘리제 궁에서 나는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된 것 같다” “프랑스 축구선수들은 근본도 없는 빈민가 출신들”이라는 올랑드 발언이 여과 없이 담긴 책이 발간되자 사회당에서는 “자살폭탄 같은 책”이라는 말까지 나왔고 지지율은 4%로 추락했다.

올랑드를 반면교사로 삼아 바이든식 언론 회피 전법을 택한 탓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국내 언론 인터뷰를 피하고 있다. 지난해 방미를 앞두고 뉴욕타임스와 단독 대면 인터뷰를 가진 것과 비교할 때 역차별 논란도 있다. 오죽하면 청와대 출입기자가 “대통령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언제라도 어디라도 달려갈 것”이라며 ‘대통령이 직접 나와 설명하라’는 칼럼을 쓰겠는가? 출입기자들조차 문 대통령의 불통을 성토한 것인데 과한 것도 독이지만, 없는 것은 더 큰 독이다.

 

01월 19일 임진각 평화 곤돌라

 

박민 논설위원

임진각에서 운영 중인 평화 곤돌라를 타면 3가지 반전을 경험하게 된다. 2020년 9월 개통된 이 곤돌라는 하부 정류장을 출발해 민간인통제구역 내의 임진강과 논밭 위를 850m가량 운행한 끝에 상부 정류장에 도착한다. 전망대와 캠프 그리브스 전시관 등이 있는 이곳은 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 떨어진 지점이다. 관광코스를 둘러싼 철조망에는 지뢰 위험지역임을 알리는 경고판이 곳곳에 붙어 있다.

이즈음 첫 번째 반전을 경험한다. DMZ 관광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여기서는 북한의 산이나 들판 한 자락도 볼 수 없다. 능선과 전시관 건물 등이 북쪽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탈감 속에 전망대에 오르면 임진강을 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왼쪽 통일대교를 시작으로 임진각, 독개다리, 자유의 다리, 북한산, 장단반도를 보고 있으면 두 번째 반전이 찾아온다. 안도감이 평온함으로 바뀌다 나른해지기까지 한다. 도라산 전망대에서 북한 땅을 볼 때의 긴장감과는 정반대다. 민간인통제구역에서 새삼 남쪽의 자유를 느끼게 된다.

스스로 민망해 보이는 푸른색 도보다리 모형을 뒤로하고 우측 언덕을 오르면 캠프 그리브스 전시관이다. 이곳에는 6·25전쟁 이후 50년간 미2사단 506연대가 머물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장이라는 안내가 신기하지만 세 번째 반전은 다른 곳에서 찾아온다. 철망 뒤로 비어 있는 미 장교 막사와 국군이 거주 중인 막사가 공존하는 장면이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한·미 동맹을 둘러싼 논란이 떠오르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온다. 이어 들어선 전시관은 6·25전쟁의 공포와 참혹함을 상기시키는 기획으로 구성돼 있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마지막 코스에 걸려 있는 현판은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갑작스럽게 전쟁의 포화 속에 서게 되던 그날로부터 70여 년이 흘렀다.… 더 이상 총칼이 오가지 않고 포성이 멈추었을 뿐, 그 멈춘 자리에는 몇 겹의 철책이 둘러쳐진 아주 튼튼한 경계가 그어졌다.… 일견 평화로운 하루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우리는 끝나지 않는 전쟁의 그림자 한가운데 서 있는 셈이다.… 역사는 과거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이다.”

 

01월 20일 TV 토론의 신화와 현실

 

이도운 논설위원

대통령 선거에 TV 토론이 도입된 것은 1960년 미국이다. 네 차례 토론에서 민주당 후보인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 44세의 젊음과 잘생긴 외모를 앞세워, 지나치게 진중하고 ‘가르치려’ 했던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 부통령보다 시청자의 호응을 얻었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때 TV 토론이 대선 승부를 바꿀 수 있다는 신화가 탄생했다. 또, 토론 내용보다는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관념도 형성됐다.

그러나 신화는 신화일 뿐, 현실은 다르다. 토론이 상대 후보에게 뒤졌던 지미 카터(1976년), 조지 W 부시(2000년) 등도 대통령이 됐다. 미국 선거전문가들은 실제로 승부를 결정짓는 요인은 경제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1992년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기념비적 선거 구호 ‘It’s the economy, stupid!(문제는 경제야, 바보야!)’가 등장한 것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 대선을 취재하면서, 전문가들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 있다. 첫째, 유권자는 대부분 지지 후보가 토론을 더 잘했다고 느낀다. 둘째, 그 후보가 TV토론에서 밀렸다고 하더라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13차례 미 대선에서 35번의 토론이 열렸다. 이 가운데 시청률이 가장 높았던 토론은 2016년 9월 29일 도널드 트럼프-힐러리 클린턴 간 첫 대결로 8400만 명이 봤다. 이 토론에서 트럼프는 힐러리의 말을 자르고, 답변하는 그녀의 뒤에서 어슬렁거리는 저질 매너로 지탄을 받았다. 토론 직후 CNN이 여론조사를 한 결과 힐러리가 잘했다는 의견이 57% 대 34%로 훨씬 많았다. 그러나 결국 당선자는 트럼프였다.

한국 대선에서도 1997년부터 TV토론이 본격화했다. 그러나 토론이 승부를 가른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2007·2012·2017년에는 경쟁 후보에 비해 토론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후보가 당선됐다. 오는 설 연휴를 앞두고 이재명·윤석열 후보 간의 양자 TV토론을 개최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양 캠프에서는 언론·홍보·정무·정책 전문가들이 총동원돼 토론 준비가 한창이라고 한다. 요약된 정책, 말하는 기술, 표정과 몸짓, 시선 처리, 복장과 분장 등이 다 중요하다. 그러나 후보가 가장 고마워하는 사람은 토론 진행자나 상대방이 무엇을 물어볼지, 특히 예상 문제집에 없는 질문을 미리 파악해 알려주는 참모다.

 

01월 21일 대선과 무속(巫俗)

이현종 논설위원

1997년 대선을 2년 앞둔 1995년 12월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전남 신안 하의도 부친 묘소를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다. 계속 대통령 도전에 실패했던 DJ는 유명한 지관이었던 손석우 씨에게 부탁해 용인에 묘터를 잡았다. 거주지도 33년 동안 살았던 서울 동교동을 떠나 일산의 단독주택으로 옮겼다. 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2년 뒤 DJ는 대권을 잡았다.

그 뒤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한화갑 민주당 상임고문, 김덕룡 한나라당 의원, 이인제 민주당 고문 등도 잇따라 조상 묘를 이장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서울 우이동에서 경남 함양군의 선산으로 부친의 묘를 이장했다. 이낙연 전 대표도 경선 전에 부모 묘를 이장했다. 그러나 DJ를 제외하고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

대선을 앞두고 대선 주자들은 명당을 찾는 풍수지리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다. 무속인들도 대선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1997년 대선 전 무속인 대부분은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점쳤다. 그런데 1994년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예언해 화제를 모았던 무속인 심진송 씨는 김 전 대통령의 당선을 예언해 파장이 컸다. DJP 단일화로 DJ가 극적인 대선 승리를 하자 심 씨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유력 정치인들이 앞다퉈 심 씨를 만나기도 했고, 일부 의원은 심 씨의 예언에 힘입어 각종 선거에 출마도 했다. 그러나 이후 대선 예언이 틀리면서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겼다.

2002년 대선 당시 선거를 3개월 앞두고 한 매체가 역술인 5명의 예언을 실었으나 아무도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예상하지 않았다. 당시 노 후보 지지율은 10%대 초반까지 곤두박질친 상황이었으나 결과는 노 후보의 승리였다. 2007년에도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낙마를 예상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선거대책본부에 건진 법사라는 무속인이 상임고문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자 국민의힘도 역술인협회장 등이 민주당 선대본에서 임명장을 받았다고 맞불을 놓았다. 보통 무속·역술인들이 민족종교라는 이름으로 선대위에 참여해온 것은 오래됐다. 승패를 가를 진짜 답은 민심에 있는데 엉뚱한 논쟁만 벌인다.

 

01월 24일(월) 李·尹 뒤집어보기

 

이신우 논설고문

국민의힘이 언론을 향해 무차별 고발에 나섰다. MBC-TV가 지난 16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인 김건희 씨와 어느 유튜버 간의 통화 내용을 방영하자 편파방송이라며 언론중재위원회와 선거기사심의위원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에 제소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는 “방송 내용도 우리의 반론이 같은 양으로 보도되지 않는 등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편집 방향이라고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아차! 잘못 썼다. 언론중재위원회 등에 제소하겠다고 한 주체는 국민의힘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였다.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 씨가 대장동 개발사업과 관련해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지시자’로 지목한 법정 진술을 언론이 대거 보도한 데 대해 고발 조치를 협박하면서 똑같은 크기로 반론을 실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니 위 내용은 주어인 민주당과 국민의힘을 거꾸로 바꿔 쓴 오류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진짜로 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인 ‘아빠는 딸’이 바로 이런 가상의 사건을 다룬 영화다. 영화에서 딸 도연은 자기의 속옷과 아빠 속옷이 함께 세탁되는 것이 찝찝하다며 짜증을 내는 고등학생이다. 아빠는 사랑스러운 딸이 자신과 말을 섞는 것 자체도 싫어하는 모습에 섭섭함을 느낀다. 공부만 하라는 아빠와 어린애 취급 그만하라는 딸 사이의 갈등이 깊어가던 어느 날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후 서로의 몸이 바뀌고 만다. 이 영화는 사고 후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코믹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만에 하나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입장이 서로 바뀌기라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윤 후보가 친형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하면서 형수에게도 쌍욕을 퍼붓는다면 어땠을까. 윤 후보가 대장동 개발의 ‘최종 설계자’였다고 자백한다면 어땠을까. 여배우 김부선 씨가 윤 후보는 사실 자신과 불륜 관계라고 주장한다면 어땠을까. 윤 후보의 대장동 개발과 관계를 맺었던 인사들이 연이어 자살한다면 어땠을까. 윤 후보가 검사 시절 전과 4범이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MBC는 이런 사건들을 어떻게 보도했을까. 아마도 이번 대선 과정은 훨씬 더 흥미로운 사건으로 가득할 것이다. 넷플릭스의 차기작으로 추천한다.

 

01월 25일 박경리 ‘토지’ 재현

 

김종호 논설고문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한국 현대문학의 기념비적 걸작인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 ‘토지(土地)’ 마지막 문장이다. 1945년 8월 15일을 묘사한 장면이다. ‘토지’는 월간 현대문학 1969년 9월호에 연재가 시작됐다. 대단원의 막은 1992년 9월 1일부터 게재한 문화일보에서 내렸다. 26년간에 걸친 집필의 최종회 마침표가 1994년 8월 30일 자에 찍혔다. 대미(大尾)를 이룬 그 문장을 읽은 지 2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며 감회에 젖는 사람 또한 많다.

1897년 한가위 아침을 첫 문장에서 그린 ‘토지’는 200자 원고지로 3만120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웅장한 대서사문(大敍事文)이다. 나남출판사에서 21권으로 2002년 재완간하기에 앞서, 1994년 출판사 솔에서 16권으로 처음 완간했다. 문학평론가 임우기와 정호웅은 등장하는 주요 인물 104명의 성격과 역할, 사건과 장소, 동원된 어휘 2515개, 속담 438개, 풍속과 제도 179개 등을 망라한 ‘토지 사전’도 1997년 펴냈다. ‘토지’는 영어·독일어·프랑스어·일본어 등 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연극·영화·TV드라마·뮤지컬·만화 등 다양한 장르로도 재탄생했다.

박경리는 ‘토지’ 서문에 이렇게 썼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털고 일어섰다.’ 이런 대목도 있다. ‘앞으로 나는 나 자신에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그런 ‘토지’를 출판사 마로니에북스에서 20권짜리 오디오북으로 오는 2월 완간한다. 지난해 10월 29일 첫 권부터 일부는 선보여왔다. 성우 16명이 등장 인물 600여 명을 나눠 맡아 연기한 오디오북의 러닝타임은 총 240시간. 또 다른 형식의 ‘토지’ 재현이 반갑다.

 

01월 26일 커피의 가격과 가치

박민 논설위원

스타벅스가 최근 아메리카노와 라테 등 시판 중인 음료 46종의 가격을 400∼100원 인상했다. 인상의 주요 이유로 내세운 재료비는 아이스 아메리카노(4500원) 기준으로 얼마나 될까. 원두 1㎏의 가격은 통상 2만 원이고 한 잔에 15g 안팎의 원두가 들어가 원료비는 300원 상당이다. 최고급 아라비카를 쓰면 450원까지 올라간다. 컵과 뚜껑, 컵 홀더는 1000개에 각각 3만5000원, 2만 원, 1만5000원 안팎이고 빨대는 500개에 2000원 정도로 한 잔당 포장원가는 약 75원이다. 결국 판매가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커피 머신과 인테리어 비용, 임차료, 인건비, 마케팅비, 마진 등이다.

 

그러나 커피는 가격으로만 따질 수 없는 음료다. 강배전(强焙煎·Dark Roast)의 스타벅스 커피에 중독된 사람도 있지만 학습과 인터넷 서핑, 정보 교환과 토론이 가능한 매장 문화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원산지가 아랍인 커피는 예멘의 도시 모카에서 대중적인 음료가 됐다. 이후 유럽에 합리주의가 확산될 때 함께 보급돼 ‘이성(理性) 시대의 음료’로 불린다. 커피는 알코올의 대안으로 지식인과 정치인, 사업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커피하우스는 지적·상업적·정치적 대화의 장이 됐다.

1652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문을 연 커피하우스는 1663년 83개로 늘었고 17세기 말에는 3000개에 달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인터넷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실제로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의 대부분을 영국 커피하우스에서 집필했다. 계몽사상의 결정판인 ‘백과전서’에는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 등의 기고자가 참여했는데 디드로가 편찬 작업을 한 곳이 파리 커피하우스였다. 최대 보험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로이드 오브 런던’과 런던 증권거래소의 전신인 ‘더 스톡 익스체인지’도 커피하우스에서 출발했다. 프랑스 혁명의 진원지도 커피하우스였다.

이처럼 커피는 정보와 지식의 네트워킹 속에 혁신과 이성을 주도하고 혁명적 열정까지 점화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현대 커피 문화의 중심이자 스타벅스 프랜차이즈의 고향인 시애틀과 인근 지역에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보잉, 코스트코 등 세계 최대의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항공과 유통 회사의 본사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01월 27일 자율주행차 경계론

 

문희수 논설위원

낙관론 일색이던 자율주행차에 대한 경계론이 부상하고 있어 관심이다. 특히 2021년께엔 가능할 것이라던 완전한 단계의 자율주행차가 여러 한계로 오는 2025년 이후로 늦춰지는 양상이다. 자율주행차 전도사로 불리던 구글·GM의 해당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이 지난해 잇달아 물러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얼마 전 외신 보도에 눈길이 간다. 테슬라 자율주행차의 사망 사고와 관련, 해당 운전자가 우발적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는 내용이다. 미국에서 이 회사의 자율주행 보조장치인 ‘오토파일럿’을 켜고 달리던 운전자가 신호를 무시하며 과속하다가 마주 오던 승용차를 들이받아 2명을 숨지게 한 데 대해 인간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오토파일럿은 가속·제동·방향 조정 등을 보조한다. 미 당국은 일부 운전자가 이를 ‘완전 자율주행장치’로 잘못 알아 사고가 잇따르는 현실을 심각하게 주시하고 있다. 미 도로교통안전국은 “자율주행 기능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자동차는 항상 인간 운전자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자율주행차의 기능은 통상 0∼5레벨로 구분한다. 레벨3부터 기계 시스템이 차량 운행을 통제한다. 레벨5는 과거 영화 속 ‘키트’처럼 차량이 운전자 없이 목적지까지 모든 상황을 자율주행하는 단계다. 현재 레벨4를 실험 등에서 제한적으로 시현하고 있지만, 양산 차종은 아직 레벨2다. 테슬라가 레벨2.5라고 주장하는 오토파일럿도 학계 평가는 레벨2다. 일부 구간에서 자율주행 택시가 운영되는 등 기술이 진전하고 있지만, 레벨5의 현실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센서·카메라의 정확도, 데이터 실시간 전송·분석 등 기술적 문제가 여전히 많고, 이용자들의 신뢰도·이해도 역시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운전 중 불쑥 튀어나오는 사람과 장애물 등의 인식, 이면도로의 지능형 도로화 등 과제가 많다는 것이다. 기술적 문제를 모두 해결한 뒤에도 정책·입법 측면과 교통·환경 인프라 등 사회적 여건이 뒤따라야 한다. 도로를 달리는 자율주행차보다 하늘을 나는 도심항공교통(UAM)이 더 빨리 다가올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원하는 것과 실현 가능성은 다르다. 희망은 갖더라도 환상은 경계해야 한다.

 

01월 28일(금) 용산공원 위협하는 세력

 

이도운 논설위원

서울 지도를 보면 한가운데 자리 잡은 지역이 용산구다. 용산은 1896년 4월 17일 한성부 용산방으로 지정되며 역사에 등장했다. 남산부터 남쪽으로 완만한 구릉지가 이어지고 한강이 접해 있어 물류·교역이 활발했으며, 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 기지가 됐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후방 병참기지가 건설됐고,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군대 3000명이 주둔했으며, 청일전쟁·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이 주둔했다. 해방 이후 미군이 일본 기지를 접수했고, 1949년 병력을 철수했다가 6·25로 복귀했다. 현재는 우리나라의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가 자리 잡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주한미군 기지가 경기 평택시의 캠프 험프리스로 순차적으로 이전함에 따라 국가 공원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2027년까지 1조2000억 원을 투입해 300만 ㎡ 규모로 조성한다. 용산공원에서 도보로 10분 이내 거리에 지하철역만 9개일 정도로 요지 가운데 요지의 휴식 공간이 된다. 정치권과 건설업자들은 서울시의 만성적 주택난 해소를 위해 아파트 용지로 개발하자는 주장을 계속해왔는데,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도심 공원도 부족한 현실을 감안하자는 여론에 아직은 용산공원 건설 계획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최근 서울에 48만 호의 추가 주택 공급 공약을 발표하면서 또다시 김포공항 주변·1호선 지하화 공간과 함께 용산공원 일부와 주변을 끼워 넣었다.

용산공원이 예정대로 완공되면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비슷한 규모가 된다. 센트럴 파크는 1800년대 중반 맨해튼의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삶의 질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 시작하자 1853년 시가 550만 달러를 투입해 공원 부지를 확보했다. 당시에도 “뭐하러 돈 들여가며 이런 공원을 만드느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도시학자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등 지식인들이 “공원을 만들지 않으면 100년 후에는 같은 넓이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대중을 설득했다. 그 결과 1년에 2500만∼4000만 명이 찾는 세계적 명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용산공원은 정치인·업자들뿐만 아니라 산하 기관을 이전하려는 정부 부처·지방자치단체들의 탐욕에도 노출돼 있다. 뉴욕처럼 지식인들이 앞장서 막아야 할 안타까운 상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