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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동아일보) 2022-01/ 01-01(토) 팬데믹 3년차 지구촌 - 01-29(토) 배달비가 기가 막혀

상림은내고향 2022. 1. 31. 15:46

횡설수설 2022-01 동아일보 

01-01(토)  팬데믹 3년차 지구촌

 

전 세계의 코로나19 감염자가 폭증하고 있다. 어제로 중국이 우한의 바이러스성 폐렴을 세계보건기구(WHO)에 처음 보고한 지 2년이 됐지만, 미국 유럽 등 각국 확진자 수는 연일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바이러스 물결이 해일 수준을 넘어 쓰나미급이 됐다는 경보가 요란하다. 곳곳에서 새해맞이 행사들이 대거 취소됐고 항공편 취소나 대중교통 운행 중단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세계는 또다시 혼란과 불안 속에 팬데믹 3년 차를 맞았다.

▷감염병의 확산 속도는 인류의 이동 속도에 비례한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하나의 지구촌을 코로나19가 장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각국은 우선 국경의 빗장부터 걸어 잠그고 개인의 이동과 만남을 차단하고 나섰다. 바이러스는 개인의 일상은 물론이고 사고방식까지 바꿨다. 정보기술(IT)에 기초한 비대면 초연결 사회는 이제 뉴노멀(새로운 정상)이 됐다. 인간관계의 단절, 개인의 파편화로 인한 ‘코로나 블루’는 우리 정신건강마저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는 국가별 속성을 드러냈다. 폐쇄적 독재국가의 대응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북한은 국경선 1∼2km 안에 완충지대를 설정하고 침입자는 무조건 사살하도록 했다. 중국은 방역에 드론이나 안면인식 기술까지 동원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코로나는 새로운 전체주의마저 양산하고 있다. 요즘 세계 정치학계에선 위기를 이용해 반대세력을 억누르는 ‘기회 억압(opportunistic repression)’이란 개념이 회자된다. 아프거나 약한 사람에 대한 감염병 유발을 뜻하는 의학용어 ‘기회 감염(opportunistic infection)’과 상통해서다.

 

▷팬데믹 2년은 부국과 빈국 간 격차로 인한 비극의 악순환을 확인해줬다. 각자도생의 자국 우선주의는 ‘백신 민족주의’에서 분명해졌다. 선진국은 넉넉한 백신을 확보하고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 회복)에 나서는 여유를 보였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세계화가 낳은 양극화의 그늘을 파고들며 계속 진화했다. 백신은커녕 변변한 방역물품도 없이 방치됐던 빈국들에서 변이 바이러스가 속출했고 그 변이는 부메랑이 되어 선진국을 다시 위협하고 있다.

▷바이러스의 전염성과 치사율은 반비례한다고 한다. 오미크론 변이가 최초로 퍼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확산의 정점을 찍고 하락세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이다. 앞으로 나올 변이도 종국엔 유행성 독감 같은 계절병이 될 것이고, 만능백신이나 치료제 같은 인류의 대응 능력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그 방패를 뚫고 새로운 역병이 언제 어디서 창궐할지 알 수 없다. 결국 최선의 팬데믹 대책은 각자가 아닌 공동의 대응, 즉 지구촌 공존의식의 회복일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1-03(월)  실손보험료 폭탄

 

A 씨는 눈이 멀쩡한데도 브로커와 짠 한 안과병원에서 백내장 진단을 받고 1050만 원짜리 시력교정 수술을 받았다. 전체 비용 중 945만 원이 실손보험에서 나갔다. ‘사지 통증’을 호소한 B 씨는 병의원에서 250차례 진료를 받은 뒤 실손보험금으로 7400만 원을 받았다. A 씨 사례는 보험사기, B 씨 사례는 과잉진료라고 할 수 있다.

▷‘제2의 건강보험’인 실손보험을 파는 보험사들은 사기와 도덕적 해이 등으로 손해가 커졌다며 올해 보험료를 평균 14.2% 인상하기로 했다. 2017년 3월 이전 판매한 1, 2세대 보험은 16%, 2017년 4월부터 작년 6월까지 판 3세대 보험은 8.9%씩 오른다. 인상 대상 3500만 명 가운데 보험료가 3년, 5년마다 갱신되는 일부는 올해 인상률에다 과거치 인상분이 반영돼 보험료가 2배로 뛸 수 있다. 당장 이달부터 ‘보험료 폭탄’이 터질 판이다.

▷실손보험료를 이 정도로 올린다고 해서 전체 손해를 상쇄하기는 어렵다고 보험업계는 주장한다. 하지만 1년 내내 병원 한 번 가지 않는 사람에게 지금의 인상률 통보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실제 2020년 기준 실손보험금을 한 푼도 받지 않은 사람은 전체의 62%, 2181만 명에 이른다. 연간 보험금을 1000만 원 이상 받은 2.2%(76만 명) 때문에 생긴 손해를 전체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공정한 정책이냐는 비판이 적지 않다.

 

▷과잉진료는 영리에 집착한 일부 병의원과 자기 돈 들이지 않고 고가의 진료를 받고 싶어 하는 얌체 소비자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다. 백내장 수술 시 비싼 다초점렌즈를 과도하게 사용해 손해가 커지자 정부는 2016년 이 고가의 렌즈를 보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자 렌즈 가격은 내려갔지만 대신 비급여 검사비가 급등했다. 동네 의원의 1회 평균 검사비가 26만 원으로 상급 종합병원(8만 원)의 3.3배로 뛰었다. 예측 불가의 보험금 ‘풍선효과’ 때문에 약관 변경도 쉽지 않다.

▷실손보험은 비급여 항목 중 보장하지 않는 질병을 나열하고 그 이외 질병을 모두 보장하는 ‘네거티브’ 방식이다. 2005년만 해도 도수치료라는 개념 자체가 생경했다. 그때는 도수치료를 무한정 보장해도 문제 될 게 없었지만 이 치료법이 대중화한 지금은 다르다. 기술 발전으로 새로운 치료법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구조에서 실손보험의 손해는 숙명 같은 것이다. 이 숙명적 구조를 빼놓은 채 인상률만 조정해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긴 어렵다. 실손보험 적자는 지난해 3조6000억 원에서 올해 2조 원으로 줄지만 여전히 천문학적인 규모다. 보험료 폭탄을 1년 뒤로 미뤄둔 셈이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1-04  이집트 원전 수주

UAE(아랍에미리트) 쇼크.’ 한국전력이 주도하는 ‘한국형 원전 컨소시엄’이 2009년 12월 말 UAE가 발주한 바라카 원전 건설 사업자로 선정되자 일본 언론은 이런 표현을 썼다. 1978년 미국 기술로 고리 1호기 원전을 처음 가동한 한국이 31년 만에 미국 GE와 일본 히타치의 미일(美日) 컨소시엄, 프랑스 아레바를 제치고 원전 4기를 짓는 400억 달러(약 47조7000억 원)짜리 공사를 따낸 게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바라카 원전은 현재 3기까지 공사가 끝났다.

▷새해 벽두인 2일 한국수력원자력이 이집트 엘다바 원전의 2차 건설사업 부문 계약 체결을 위한 단독협상 대상자가 됐다고 밝혔다. UAE 원전 수출 이후 12년 만에 한국이 해외에서 대규모 원전 건설 수주를 따낼 가능성이 커졌다. 총 300억 달러짜리 사업 중 한국 몫은 5∼10%인 2조∼3조 원 정도로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4월 말쯤 정식 계약을 맺을 전망이다.

▷아쉬운 건 엘다바 원전이 러시아가 주도하는 사업이란 점이다.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의 자회사가 2017년 이집트에서 따낸 사업 중 한국이 맡는 부분은 부속건물 등 ‘2차 계통’이다. 원전의 심장인 원자로에는 한국이 자랑하는 ‘APR 1400’이 아닌 러시아의 ‘VVER-1200’ 모델이 들어간다. 사막인 UAE에 원전을 지어본 경험 때문에 러시아 측이 먼저 파트너가 돼 달라고 요청한 점이 그나마 자존심을 세운 부분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침체됐던 세계 원전산업은 친환경·탈탄소 트렌드에 올라타고 빠르게 부활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최근 ‘EU 녹색분류체계(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한 초안을 회원국에 발송했다. 택소노미는 특정 기술, 산업 활동이 탄소중립에 도움 되는 친환경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 정하는 가이드라인이다. 탈원전을 추진하는 독일 등의 반대가 있지만 바람이 약해져 풍력전력 생산에 탈이 난 EU 대다수 나라에 탄소 배출 없이 싸게 싸게 생산하는 원전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런데 한국 환경부는 지난해 말 ‘K택소노미’를 발표하면서 원전을 뺐다.

▷택소노미에서 빠진 사업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을 표방하는 금융회사 등의 투자 대상에서 제외된다. 막대한 자본이 드는 해외 원전 건설은 수주한 쪽도 30% 정도 자금을 대는 게 관행이다. K택소노미 제외로 한수원은 동유럽 등에서 원전 수주 경쟁을 벌일 때 국민연금 등의 지원을 받기 어렵게 됐다. 원전을 K택소노미에 넣어 달라고 한수원이 간청한 이유다. 임기를 4개월 남긴 정부의 오기 때문에 우리 원전산업의 미래가 발목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1-05  팬데믹 창업 러시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재산을 잃지만 팬데믹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기회가 됐다.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발생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자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해서 자유농과 농노의 지위가 높아졌다. 상인들도 장기적으로는 파산한 다른 상인들의 재산을 흡수해 자본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코로나 창궐이라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도 새로운 경제적 기회가 자라고 있다. 미국에서 신규 사업을 위해 세금 관련 서류를 신고한 사람이 지난해 1∼11월 사이에만 497만 명이었다. 이는 팬데믹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보다 55%나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1∼12월 미국 창업기업에는 사상 최대인 930억 달러의 투자 자금이 몰렸다.

▷미국 사례를 들자면 뉴욕 기반의 창업기업 ‘블랭크 스트리트’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커피 체인이다. 푸드트럭 형태로 좌석을 없애 비대면 상황에 적응하면서도 임차 비용을 줄였다. 그 결과 스타벅스 등 대형 체인점에 비해 값은 싸면서도 품질은 괜찮은 커피를 판매할 수 있었다. 20대 청년 2명이 2020년 여름 창업했는데 지난해 벤처 투자자들로부터 3차례나 투자를 유치했다.

 

▷코로나 시대 인류는 온라인 쇼핑 같은 비대면 산업을 성장시켜 코로나에 위축되지 않고 맞섰다. 우리나라의 온라인 거래액은 2019년 8월만 해도 11조2000억 원이었는데 지난해 8월에는 15조7000억 원이 됐다. 40%가량 증가했다. 온라인 쇼핑과 연결된 배달업에서도 많은 일자리의 기회가 생겼다. 한국은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가 됐다.

▷회사와 직원들은 코로나 기간 중 굳이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아도 업무가 무난히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는 재택근무를 통해 근무 옵션을 다양화함에 따라 인재 구하기가 수월해졌고 사무실 임차료 등 비용도 줄일 수 있게 됐다. 직원들은 재택근무를 ‘투잡’의 기회로 활용하거나 출퇴근 시간을 아껴 재교육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런 점은 창업 회사나 그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비용과 리스크를 줄이는 환경으로 작용한다.

▷코로나로 풀린 돈이 투자의 기회를 찾고 있다. 위기는 기회다. 코로나로 실직하거나 영업을 접게 된 경험은 쓰라리지만 기존의 관성적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전파력이 강력한 오미크론은 병세는 오히려 미약해져 독감처럼 변하면서 팬데믹 종식의 시작이라는 말이 나온다. 동이 트기 전에 가장 어둡다. 어두울 때 밝은 날이 올 것을 믿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성공하는 법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01-06  90년 만에 美 왕좌 뺏긴 GM

 

작년 3월 차량용 반도체칩을 만드는 일본 르네사스 공장에서 불이 났다. 자동차 주행을 제어하는 데 쓰는 ‘마이콘’ 반도체 생산라인의 피해가 특히 컸다. 이 사고로 전 세계 자동차 반도체 부품 공급에 차질이 생겼고 미국 완성차업체 제너럴모터스(GM)는 북미지역 생산량을 대폭 줄여야 했다. 반면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부품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되레 매출 신장을 이뤘다.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지난해 GM이 판매량 1위 자리를 도요타에 내줬다. 도요타 판매량이 233만2000대로 GM보다 11만4000대 많았던 것이다. GM은 작년 반도체 공급난으로 판매량이 12.9% 급감했지만 코롤라와 캠리 판매 실적이 좋았던 도요타의 전체 매출은 10.4% 증가했다. GM은 “이익 극대화에 치중했다”는 반응이지만 1931년 포드를 꺾은 뒤 지켜온 미국 차 시장 왕좌의 주인이 90년 만에 바뀐 의미는 작지 않다.

 

▷도요타의 약진은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문제를 직시하며 현장에서 먹히는 대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원래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만드는 적기(Just-in-time·JIT) 생산방식은 도요타를 상징하는 가치였다. 하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르네사스 공장이 처음 멈췄을 때 도요타는 생각을 바꿨다. JIT만 고집하면 공급망의 아랫단에서 생긴 크고 작은 문제가 전체 생산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반도체 등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사들의 재고 비중을 크게 늘리는 한편으로 공급망을 서부 일본이나 해외로 분산했고 이 전략이 공급망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올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반도체 주문량은 생산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 부품사들은 지금 2023년에 쓸 반도체칩 주문을 받고 있다. 마음이 급해진 완성차 업체들은 1차 협력사에 일을 맡기던 관행을 벗어던지고 직접 공급망의 맨 끝단까지 챙기는가 하면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와 전략적 협력관계를 맺으며 기술 통합을 꾀하고 있다. 갑도, 을도 없이 모두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뛰고 있다.

 

▷개별 기업이 발 빠르게 대응한다고 해도 복잡하게 얽힌 공급 사슬망 속에서 혼자 힘으로만 경쟁사를 압도하는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역대 최고 실적을 낸 현대자동차그룹은 자체 설계로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내재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가 없는 국내에서 기존 반도체 수급체계를 뒤집는 일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에 가깝다. 정해진 틀에 머물지 말고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도요타 웨이’가 힌트가 될 수 있다.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1-07  美 의사당 폭동 1년

 

1827년 미국 국회의사당의 중앙 로툰다홀에서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의 아들이 아버지의 정적이었던 앤드루 잭슨의 지지자에게 뺨을 얻어맞고 가격당한 것. 성난 애덤스 대통령의 재발 방지 요청에 의회는 이듬해 의회경찰 조직을 신설했다. 당시 의회경찰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190여 년이 지난 2021년 성난 미국인 2000명이 무기를 소지한 채 몰려와 의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라고는.

▷1·6 국회의사당 난입 사태가 1주년을 맞았다.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캐피톨 힐’이 유혈 폭력사태로 얼룩지는 장면은 미국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민주주의를 자유, 인권과 함께 건국의 기본 가치로 여겨온 미국에 씻기 어려운 치욕으로 기록됐다. 현재까지 703명이 기소되고 70여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진상 규명과 처벌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최소 1년 이상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아직도 현상금을 걸고 일부 용의자를 추적 중이다.

▷2020년 대선을 거치면서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 분열과 정치적 양극화의 정점을 찍은 이 사건의 상흔은 깊다. 불신과 반목 속에 정치권은 1년이 지나도록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을 둘러싼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 대외적 자존심의 상처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미국이 반민주주의적 정책을 지적할 때마다 “당신들 문제나 잘 해결하라”는 비아냥거림으로 맞받아치고 있다. 해외의 권위주의, 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논할 자격이 없다’는 식의 반발에도 직면한다. 브라질과 멕시코, 페루 등지에서 제기된 부정선거 의혹을 놓고는 “미국발 파급효과(spill-over)”라는 책임론이 거론됐다.

 

▷1·6 사태는 왜곡된 트럼피즘(Trumpism)의 극단적 분출이다. 미국인의 40%는 아직도 지난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극우음모론 집단 ‘큐어논(QAnon)’이 퍼뜨리는 각종 주장들은 여전히 물밑에서 스멀거리고, 이는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폭발적으로 재점화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형사처벌 여부는 이에 기름을 부을 뇌관이다.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6 사태로 미국이 200년 넘게 공들여온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데에는 불과 7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국제단체의 보고서에서는 ‘민주주의 후퇴국’으로 분류됐고, 미국인 10명 중 6명은 민주주의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어디 미국뿐이랴. 최근 10년간 전 세계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다. 민주주의의 이상이 온전히 현실화하는 데까지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1-08  호주 입국 못한 조코비치

 

세계랭킹 1위 노바크 조코비치(35)의 호주오픈 참가 여부가 올해만큼 주목을 끌었던 적은 없다. 남자 테니스 역사상 첫 메이저 21회 우승에 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백신 회의주의자인 그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섬나라 호주의 방역패스를 통과할 수 있을지가 경기 결과에 앞서는 관심사였다. 결국 그는 입국을 거부당해 추방될 위기에 놓였다.

▷조코비치가 5일 호주 입국을 시도한 건 대회가 열리는 멜버른의 빅토리아 주정부가 접종 면제 허가를 내줬기 때문이다. 호주 방역규정에 따르면 최근 6개월 이내에 코로나에 걸렸다 나은 사람은 백신을 맞지 않아도 입국이 가능하다. 하지만 멜버른 국제공항에서는 서류 미비를 이유로 그의 비자를 취소했다. 비자 취소 무효 소송을 제기한 그는 인근 호텔에 억류된 채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조코비치의 모국인 세르비아 대통령은 베오그라드 주재 호주 대사를 초치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철회하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호주 총리는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순 없다”고 선을 그었다. 17일 개막하는 올해 호주오픈은 메이저 대회로는 처음으로 선수 팬 자원봉사자 전원의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다. 호주는 12세 이상 90%가 접종을 완료하고도 하루 평균 3만 명의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이다. 조코비치에게 우승 트로피를 9개나 안겨준 나라지만 모든 특혜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테니스 연습시설이 있는 호텔로 옮겨 달라는 요구도 거절했고, 대회 일정을 감안해 신속히 판결해 달라는 요청도 “꼬리가 몸통을 흔들면 안 된다”며 일축했다.

 

▷특혜 시비를 빼면 이번 논란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공공이익의 충돌이다. 조코비치는 기(氣)치료에 빠져 있는 대체의학 신봉자다. “피라미드에서 영적 치유를 경험했다”는 그의 독특한 건강비법을 스타의 기벽쯤으로 여기던 팬들도 코로나 이후 그가 백신에 반대 목소리를 내자 “믿음의 자유가 타인의 건강을 해칠 권리는 없다”며 돌아섰다. 팬데믹 종식의 방해꾼으로 보는 것이다.

▷국내에선 학원과 독서실 등 교육시설의 방역패스 시행에 대해 법원이 최근 효력정지 결정을 내렸다. 방역당국은 백신의 의학적 효과를 간과한 결정이라며 항고했는데 법적으로도 의문이 남는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다수가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는 게 옳은가. 개인의 기본권이 병에 걸리지 않을 권리보다 중요한가. 경제적 피해가 막심한 거리두기가 아니라면 방역패스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이다. 당분간은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한 과학적인 방역패스를 예외 없이 적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이 조코비치라 할지라도.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10(월)  삼성전자 연매출 279조

 

지난해 7월 삼성전자의 베트남 호찌민 공장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일부 생산라인이 멈췄다. 삼성의 해외 생활가전시설 중 두 번째로 큰 호찌민 공장은 하루만 세워도 매출 목표에 큰 차질이 생긴다. 핵심 사업장의 조업 차질에 미중 무역갈등, 반도체 장비 공급 부족까지 겹쳤다. 기업 환경에 대한 우려가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지난해 매출이 1969년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인 279조 원에 이르렀다. 반도체, 생활가전, 모바일 등 전 영역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호조세를 보인 결과다.

▷연매출 279조 원은 한국 경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숫자다. 이는 2020년 기준 코스닥 1271개사 매출의 2배, 코스피 597개사 매출의 7분의 1에 달하고, 올해 정부 예산(607조 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것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사람이 국내외에서 생산 활동을 한 대가로 받은 총소득(1819조 원)의 15%에 이르는 규모이기도 하다.

▷LG전자의 지난해 매출액도 74조 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나타냈다. 이로써 글로벌 가전 분야 경쟁에서 LG는 월풀을 뛰어넘어 세계 1위로 올라설 것으로 보인다. 프리미엄 제품인 LG오브제컬렉션 라인업과 건조기, 스타일러, 식기세척기 등 스팀 가전 분야 중심으로 소비층을 공략한 전략이 통했다. 생활가전 외에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분야에 집중해 성장세가 가팔라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기업가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결단에 따라 불확실성을 떠안는 사람들이다. 그 도전 의지를 우리는 기업가 정신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대표 전자회사들이 시장 전망을 뛰어넘는 실적을 낸 것은 소비자의 요구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어두운 터널 속에서 선택하고 집중한 결과다. “창조와 혁신이 생동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이 기업가에게 더없이 귀한 순간”이라고 한 삼성 이병철 선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기업의 실적이 좋았다고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에 드리운 먹구름이 가신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변이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터에 공급망 위기와 인플레이션 장기화 우려가 겹쳤다. ‘반도체 공룡’ 인텔이 삼성전자와 대만 TSMC를 따라잡으려고 대규모 투자에 나서는 등 머니게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모바일 분야는 단순히 좋은 제품만을 만드는 것으로는 안 되고 고객에게 차원 높은 경험을 제공해야 선택받을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 됐다. 작년 11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미국 출장 직후 “현장의 처절한 목소리”를 언급했다. 이 목소리에 빨리 응답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donga.com

 

01-11  美쇠고기 수입 1위 한국

 

요즘 유튜브에선 ‘왕망치 스테이크’로 불리는 토마호크 스테이크 굽기 영상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조회수가 수백만에 달하는 유튜버들도 있다. 티본, 엘본 스테이크 굽기 영상도 많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트렌드까지 형성되며 우리나라가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최대 수입국에 올랐다. 2020년까지는 일본이 최대 수입국이었는데, 지난해 역전됐다. 2008년 ‘뇌 송송 구멍 탁’의 광우병 파동을 겪은 지 13년 만이다.

▷우리나라가 지난해 1∼11월 미국에서 수입한 쇠고기는 25만 t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6% 증가했다. 금액으론 21억 달러를 넘어 39% 증가했다. 미국산의 국내 수입 쇠고기 점유율도 54%에 달한다. 2000년대 초 한때 ‘LA갈비’를 내세워 국내 시장을 점령했지만 광우병 파동 등 곡절을 겪으며 호주산에 1위를 내줬다가 다시 시장을 장악하고 물량도 크게 늘린 것이다.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MBC PD수첩은 그해 4월 “한국인이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먹으면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94%”라는 보도로 한국 사회를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려 죽는다” “공기로도 감염된다” 등 괴담이 번졌고, 유모차 부대 등까지 광화문으로 쏟아졌다. 그 뒤 광우병 사망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미는 그해 6월 추가 협상을 통해 30개월이 안 된 소에서 나온 쇠고기만 수입하기로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광우병 집회를 ‘검역 주권’을 바로세운 시민의식의 발로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괴담이 판을 치고, 과학에 근거해 팩트를 보도하던 언론사와 기자들이 무차별 공격을 당했던 사실엔 침묵한다. 당시 광화문은 민주주의 광장으로 보기 어려웠다. 가짜뉴스와 괴담, 선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현혹돼 거리를 메운 현대판 대중조작 정치의 한 장면이었다.

▷요즘 미국산 쇠고기를 사 먹으며 “혹시 광우병?”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미국산 쇠고기를 찾는 이들은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층이 많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가성비다. 요즘은 냉동육이 아닌 냉장육의 비중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갈비 중심이던 수입 부위는 안심, 등심 등 전통적 부위를 넘어 토마호크, 티본, 포터하우스와 같은 고급 스테이크 부위로 확대되고 있다. 2026년엔 관세가 폐지돼 수입 물량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호주산과의 품질 경쟁도 치열하다.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의 주요 식자재가 된 사실은 근거 없는 괴담이 시장의 합리적 선택을 끝까지 가로막거나 왜곡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새삼 알려주고 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1-12  ‘반(反)노동’

 

‘일은 전 세계 대부분의 비참함의 근원이다. 거의 모든 악이 일에서 나온다.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미국에서 1985년 출판된 ‘일의 폐기’는 서문에서부터 과격한 주장들을 쏟아낸다.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했던 저자 로버트 블랙은 자본주의의 근로 시스템을 비판하며 현대인을 종속시키는 노동에 의문을 제기한다. 최근 급속히 세를 불리고 있는 미국의 ‘반(反)노동’ 온라인 카페도 이 책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 개설된 ‘반노동(Antiwork)’ 온라인 카페의 회원 수가 급증하고 있다. 2018년 12월까지만 해도 1만 명 미만이었던 회원 수는 불과 3년여 만인 이달 160만 명으로 불어났다. ‘부자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무직(無職)!’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 디지털 공간에서 회원들은 불합리한 처우와 근무 환경을 고발하고 퇴사 관련 정보들을 공유한다.

▷반노동이라는 단어는 국내에서 노동계를 탄압하고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돼 왔다. 반면 미국에서의 ‘반노동’은 임금근로자로 조직이나 상사에 매여 일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강해 보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장기화로 근무 방식, 환경의 변화와 함께 일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바뀌면서 빠르게 확산됐다. 미국의 경우 천문학적 규모의 코로나19 지원금과 실업급여로 여유가 생긴 것도 이유로 꼽힌다.

 

▷반노동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절반은 여전히 풀타임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한다. 일 자체를 거부한다기보다는 더 나은 근무 환경과 보상을 찾으려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표를 부추기는 분위기는 결과적으로 ‘대사직(great resignation)’ 현상을 심화시킨다. 단기간에 자산소득을 불려 조기 은퇴하려는 조급함이 ‘한탕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적지 않다.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드는 ‘파이어(FIRE)족’들의 증가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팬데믹 이후의 양극화 심화, 집값 폭등, 상대적 박탈감이 가져온 세태다.

▷일의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무의미한 야근이나 서류 업무는 마땅히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 ‘저녁이 있는 삶’도 중요하다. 인재 확보를 고민하는 기업들로서는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들이 노동의 의미 자체를 퇴색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일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그 안에서 보람과 가치를 찾아가는 게 목적이기도 하다. 또한 작용에는 항상 단기적인 반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코로나 시대가 끝난 뒤 노동의 가치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궁금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1-13  조종사 잡는 전투기

 

1950년대 말 냉전이 무르익던 시절,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제2세대 전투기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고성능화 경쟁도 한층 가열됐다. 강력한 엔진과 최신 레이더, 신예 무기를 갖추다보니 덩치가 커진 반면 기동력은 떨어졌고 가격도 매우 비싸졌다. 서방의 맹주 미국엔 고성능 막강 전투기가 필요하겠지만 다른 개발도상국 동맹국들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런 틈새를 내다본 방위산업체 노스럽사가 기존 고등훈련기를 토대로 개발한 ‘꿩 대신 닭’ 격인 전투기가 구매가격도 운용비용도 저렴한 초음속 경량 전투기 F-5A/B ‘프리덤파이터’였다.

▷인기 높은 수출 기종으로 세계적 각광을 받은 F-5A는 1965년 한국에 처음 도입돼 한국군의 초음속 전투기 시대를 열었다. 1972년부터는 성능을 향상시킨 F-5E가 나와 한국도 추가로 구매했다. 하지만 F-5E는 당시 북한이 보유한 미그-19나 미그-21보다 성능이 떨어진다는 평가에 시달렸다. 그래서 추진된 차세대 전투기 F-16 구매사업이 자금 압박으로 물량이 축소되는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에서 F-5E/F가 198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 조립 생산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은 전 세계에서 F-5 기종을 가장 많이 운용하는 국가가 됐다.

▷11일 오후 경기 화성의 한 야산에 F-5E 한 대가 추락했다. 이 전투기는 이륙 직후 좌우 엔진 화재 경고등이 켜지고 기체가 급강하했다. “이젝트(탈출)! 이젝트!” 조종사는 관제탑과의 교신에서 비상탈출을 두 차례나 외쳤으나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 추락 지점은 주택 몇 채가 있는 마을에서 100여 m 떨어진 곳이었다. 조종사가 민가로 추락하는 것을 피하려고 야산 쪽으로 기수를 돌리면서 탈출 시기를 놓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지만, 워낙 낡은 기종이어서 수리 부품조차 다른 전투기에서 빼내 돌려쓰는 판에 탈출 기능이 제대로 작동했을지나 모르겠다는 얘기도 들린다.

 

▷공군이 보유한 F-5 기종 80여 대는 통상 30년 정도인 정년을 훌쩍 넘긴 노후 전투기다. 2000년 이후에만 모두 12대가 추락했다. 이번 사고기도 운용한 지 36년이 됐다. 공군은 F-5 기종을 한국형 전투기 KF-21로 대체해 2030년까지 도태시킬 계획이다. 영공 방어를 위한 ‘전투기 적정 대수(430여 대)’ 유지 차원에서 퇴역 시기를 넘겨 운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공군은 설명한다. 초계 임무 같은 보조전투기로서의 역할이 있고 조종사의 비행시간 확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뭉치 기종을 넘어 ‘조종사 킬러’ ‘과부 제조기’로 오명만 쌓는 상황을 앞으로도 8년간 지켜봐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1-14  위기의 심상정

 

정의당은 어제 종일 어수선했다. 심상정 대선 후보가 12일 선거 일정 전면 중단이라는 폭탄선언을 한 뒤 외부와의 연락을 모두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심 후보 의원실을 찾은 여영국 정의당 대표는 “후보가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결국 정의당 선대위원들도 일괄 사퇴했다. 대선이 두 달도 남지 않았는데 정의당 선대위가 사실상 해체된 것이다.

▷심 후보는 지금의 선거 상황이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당내에선 정체 상태인 지지율이 혼돈의 도화선이 됐다는 관측이 많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비교할 순 없어도 한때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어깨를 겨뤘던 심 후보의 지지율은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3%대가 무너져 충격이 컸다고 한다. 이런 추세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묘책도 보이지 않아 더 답답했을 것이다.

▷반면 안 후보 지지율은 두 자릿수로 올라섰다. 국민의힘 내부 분란에 윤 후보의 잦은 실언으로 윤 후보에게서 이탈한 지지율이 안 후보에게 쏠린 것이다. 심 후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안 후보가 부럽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안 후보 지지율 상승은 심 후보가 빠진 채 대선 구도가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3자 구도로 재편되는 신호탄이다. 이런 판국에 설 연휴 전에 이뤄질 TV토론마저 이 후보와 윤 후보 간 양자 토론으로 굳어지자 심 후보는 “이러다가 대선 판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정의당은 지난해 9월부터 진보좌파 진영의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다. 민노총, 진보당, 녹색당 등과 함께 대선 대응 공동기구를 만들고 단일화 협상을 벌여온 것이다. 심 후보가 노린 회심의 반전 카드였다. 그러나 민노총 조합원의 직접투표와 일반여론조사 비율 등 단일화 방식을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협상은 9일 결렬됐다. 협상 무산엔 진보좌파 진영 내부에 얽혀 있는 악연도 작용했을 것이다. 심 후보는 이석기 전 의원 중심의 진보당 세력을 ‘종북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치열한 노선 갈등을 벌여왔다. 서로 합쳤다가 결별하는 이합집산을 거치는 동안 쌓인 앙금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심 후보는 ‘주 4일제’를 대표 공약으로 내걸었다. 2023년부터 시범 도입해 임기 내 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친노동 의제이긴 하지만 여론을 주도할 정도로 반향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정권교체 여론이 높은 대선 구도에서 심 후보의 입지가 어정쩡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심 후보 측은 “후보 사퇴나 단일화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심 후보가 어떤 반전 카드를 내놓을지 두고 볼 일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1-15  세계 2위 한국의 여권 파워

 

“한국에서 왔네요? BTS 노래 들어본 적 있어요.” 요즘 미국 주요 도시 공항의 출입국심사대 공무원들은 한국 여권을 내미는 방문자들에게 종종 이런 코멘트를 건넨다. 불고기를 먹어봤다거나 ‘오징어게임’을 봤다며 말을 건네기도 한단다. 출입국심사 담당자들이 깐깐하기로 악명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가운 환대다. 입국 목적과 숙소, 체류 기간 등을 취조당하듯 심사받는 다른 외국인과 달리 가볍게 심사대를 통과하면서 으쓱해졌다는 사람도 있다. 한국의 ‘여권 파워’가 최고조로 발휘되는 순간이다.

▷한국의 여권지수가 올해도 최상위권에 올랐다. 국제교류 전문업체인 헨리앤드파트너스가 발표한 여권지수에서 한국은 독일과 함께 2위에 랭크됐다. 1위인 일본, 싱가포르 다음이다. 한국 일반여권으로 비자(사증)를 받지 않고, 혹은 간단한 절차만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나라는 현재 126개국. 관용여권으로는 149개국에 이른다. 20위까지 상위권은 유럽, 북미 국가가 대부분이다.

▷헨리여권지수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각국 데이터를 바탕으로 산출된다. 무비자 국가 및 비자면제 협정을 맺은 국가가 많을수록 점수가 높다. 비자면제 협정을 체결한 상대국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국력이다. 선진국의 경우 협상 상대국의 경제력이나 지위는 물론 시민의식까지 검증한다는 게 외교부의 귀띔이다. 불법 체류자가 많은 저개발국, 테러리스트들이 활동하는 국가나 지역은 비자면제 협상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북한은 104위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39곳에 불과하다.

 

▷한국의 여권 파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면에서 더 두드러진다. 코로나19 방역 실패로 해외 입국을 제한당한 국가들은 2020년 이후 여권지수가 줄줄이 떨어졌다. 방문국 도착 시 발급되는 도착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된 탓이다. ‘여행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차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동 자유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선진 부국인 미국과 영국조차 이런 이유로 6위에 머물렀다. 반면 전 국민이 고강도 방역에 동참한 한국은 순위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손바닥 크기의 얇은 수첩 한 권에는 여권번호와 인적사항만 적혀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나라의 위상과 국력, 국제사회의 평가가 총체적으로 담겨 있다. ‘여권지수 2위’는 한국이 이뤄낸 그만큼의 경제적, 외교적 성취를 보여주는 성적표다. 전 세계적인 K콘텐츠 인기가 끌어올린 국가 이미지도 한몫했음이 분명하다. 한국은 이제 글로벌 무대에서 환영받으며 해외 입국심사대를 자유롭게 통과하는 나라가 돼 가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1-17(월)  ‘마기꾼’

 

최근 한 유튜브 채널이 진행한 ‘마기꾼(마스크+사기꾼) 대회’에서는 시청자들의 댓글이 폭발했다. 마스크 착용 사진과 벗은 사진이 다른 ‘반전’에 진행자들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고등학생 같았던 동안이 푸근한 아줌마 인상으로 확인되면서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다. 마스크를 썼을 때 얼굴이 더 예쁘거나 잘생겨 보인다는 의미의 ‘마기꾼’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생겨난 신조어다.

▷‘마기꾼’의 실체를 입증하는 과학적 연구 결과들이 주목받고 있다. 영국 카디프대의 연구 결과 마스크를 쓴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해 이성(異性)들이 평가한 매력 점수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경우보다 높았다. 외모 호감도가 낮은 사람이 마스크를 쓴 경우 매력 평가 점수가 최대 42% 올랐다는 지난해 미국 성형외과협회 연구도 나와 있다.

▷연구진은 ‘과장을 일삼는 뇌의 작동 원리’를 이유로 설명한다. 마스크를 쓰면 시각 정보가 눈에 집중되는데, 그 나머지를 뇌가 메우면서 전체를 더 멋지게 그려낸다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자인 닉 채터가 분석했듯 ‘훌륭한 이야기꾼’인 뇌가 일종의 자동 완성 기능에 희망적 상상력을 결합해 인간을 속인 셈이다. 바이러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는 의료 전문가 이미지까지 더해지면 점수는 더 올라간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마스크 착용에 대한 서구 국가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마스크 착용자는 감염병에 걸린 환자나 범죄자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지난해 2월 캐나다 요크대는 마스크 착용 시 사람을 알아보는 인지능력이 15% 떨어지고 상호 교감이나 소통에도 방해가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이런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바이러스 차단 외에 다른 목적을 마스크에 가미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정치 구호나 환경 캠페인 문구 등을 적어 넣어 메신저로 활용하는 경우는 이제 흔하다. 옷 색깔과 조화를 맞추거나 화려한 장식을 넣은 마스크로 패션에 포인트를 주기도 한다. 전문가와 의료진은 이번 연구 결과를 “마스크를 써야 할 또 다른 이유”라고 반기고 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을 감추는 마스크의 문제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는 않다. 마스크로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차단하거나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늘면서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마스크가 없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여러 이유로 마스크의 존재감은 코로나19 기세가 꺾이더라도 한동안 이어질 듯하다. ‘위드 마스크’ 시대에 외모와 내면 모두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마기꾼 효과’를 기대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1-18  중국 인구절벽

 

중국은 사람이 바다를 이뤄 전쟁하는 나라였다. 6·25전쟁 때 압록강 인근에 매복했던 중국군은 쓰러뜨리고 쓰러뜨려도 끊임없이 밀고 내려왔다. 인해(人海) 전술에 당황한 국군과 유엔군은 한동안 후퇴를 거듭했다. 중국군은 전쟁 발발 약 4개월이 지나 참전했는데도 공식적으로 밝힌 전사자만 18만 명이다. 300만 명이나 참전했으니 실제 전사자는 더 많을 것이다. 미군 전사자 3만6000명과는 비교도 안 된다.

▷마오쩌둥이 ‘사람이 국력(人多力量大)’이라고 말한 나라가 인구절벽에 직면했다. 중국의 2021년 기준 인구는 전년보다 48만 명 증가한 14억1260만 명이다. 2020년만 해도 204만 명이 증가했는데 그보다 고작 4분의 1 수준으로 증가했다. 마오의 대약진운동 실패에 따른 대기근으로 사상 처음 인구가 감소했던 1961년을 제외하면 최저 수준의 증가다. 추이로 볼 때 올해는 감소가 확실시된다. 대기근 때와는 달리 회복이 어려워 인구가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들어선 전환점으로 기록될 듯하다.

▷중국이 너무 많은 인구 때문에 산아제한을 실시한 것은 1973년부터다. 처음에는 완시사오(晩希少) 정책이라고 해서 남자는 25세, 여자는 23세 이후로 늦게(晩) 결혼해, 최소 4년 이상의 터울을 두고(希), 2명 이하로 적게(少) 낳도록 권장했다. 1980년 덩샤오핑은 더 강력한 ‘한 자녀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권장이 아니라 강제였다. 그 결과 출산율은 급격히 떨어졌으나 인구 감소라는 새 재앙이 자라고 있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중국은 2011년 두 자녀를 허용하기 시작해 최근에는 세 자녀까지 허용했으나 결국 실기했다. 가족과 사회가 하나만 낳아 아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며 키우는 쪽으로 적응해버려 사교육비 등이 크게 늘면서 이제 둘이나 셋을 낳으라고 해도 낳기 어려워졌다. 중국은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젊은층은 감소하는 반면 고령 인구는 늘어나 성장률 저하를 피할 수 없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의 비율이 7%, 14%, 20%를 넘으면 고령화, 고령, 초고령 사회라고 한다. 중국은 2000년 고령화 사회가 됐고 올해 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1970년 고령화, 1995년 고령, 2005년 초고령 사회가 됐다. 고령화로부터 고령 사회가 되기까지의 기간이 일본 25년, 중국 22년이다. 기간이 짧은 중국은 일본이 겪은 이상의 후유증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2000년 고령화, 2017년 고령 사회가 됐다. 그 기간이 17년으로 중국보다 더 짧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1-19  취임 1년 바이든의 악몽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지지율로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지도자다. 9·11테러 직후 90%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은 이라크전쟁 장기화의 피로감 등으로 임기 말 25%까지 떨어졌다. 최고치와 최저치 모두 역대급 기록을 쓰면서 격차가 65%포인트나 벌어지는 기록을 남겼다. 국정동력을 잃은 그는 사활을 걸었던 연금개혁에 실패했고 결국 민주당에 정권을 내어주고 말았다.

▷20일로 취임 1주년을 맞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지율 하락에 고전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줄곧 미끄러진 지지율이 최근 최저치인 33%까지 내려갔다. 1982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이후 7명의 대통령과 비교했을 때 꼴찌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다음으로 낮다. 미국인의 절반이 바이든 행정부 취임 이후 ‘좌절감’을 느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제 아무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 조.” 친(親)트럼프 성향 보수 논평가들의 조롱과 공격은 노골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지율 반등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과정의 대혼란으로 시작된 추락세는 1980년대 이후 최고 수준인 인플레이션과 치솟는 장바구니 물가, 빈부격차 심화, 극심한 사회분열 등으로 악화 일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는 하루에 70만 명씩 쏟아지고, 2조 달러대 매머드급 투자법안은 의회 장벽에 가로막혔다. 회의석상에서 꾸벅꾸벅 조는 78세 고령의 지도자에게서 위기 돌파 리더십은커녕 개인적인 매력도 찾기 어렵다. ‘돌아온 미국’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지쳐가고 피로감은 불만을 넘어 분노로 바뀌어간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단순히 인기 순위에 그치지 않는다. 바이든의 추락은 당장 올해 11월 미국 중간선거 결과에 직격탄이 된다. 민주당이 의회 다수당 지위를 빼앗길 경우 바이든 행정부는 임기 중반부터 조기 레임덕 현상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워싱턴의 컨설팅 업체들은 벌써부터 민주당의 대패를 점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4년에 백악관을 되찾겠다”고 공언하기 시작했다. ‘트럼프의 부활’은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과도 직결되는 폭탄급 대외변수다.

▷지지율이나 인기는 거품이다. 실력으로 보여주지 못하면 꺼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정책 결과로 인정받아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정권의 추락은 치솟았던 지지율만큼이나 극적으로 참혹하다. 반전 드라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은 30%대까지 떨어졌던 지지율을 80%대로 반등시키며 연임에 성공하는 스토리를 썼다. 바이든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어떤 그래프를 그려낼지 궁금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1-20  화산 폭발 이후 통가

 

남태평양의 외로운 섬나라가 천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위력의 화산 폭발에서 살아남아 첫 소식을 전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 통가 정부는 18일 화산 폭발 이후 최대 15m 높이의 거대 쓰나미가 통가를 강타했다고 전했다. 통가는 약 170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져 있고 이 중 36개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 다행히 전체 인구의 70%인 10만여 명이 살고 있는 본섬 통가타푸에는 파고가 80cm 정도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통가 정부가 확인한 사망자는 현재까지 3명이다. 아직 연락이 닿지 않은 섬들이 있어 인명 피해는 늘어날 전망이다.

▷쓰나미로 망고 포노이푸아 등 작은 섬들에서는 주택 대부분이 파괴됐다. 위성을 이용한 일부 통신만이 가능하고 해저 케이블이 파손돼 인터넷 연결이 끊겼다. 섬 대부분이 화산재에 덮이면서 빗물이 오염돼 식수 공급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했다. 통가에서 가장 가까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지원 채비를 하고 있으나 통가타푸섬의 국제공항 활주로가 일부는 침수되고 일부는 화산재로 덮여 항공기 착륙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통가인들은 공항의 화산재 청소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화산재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 항공기 착륙까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도 변수다. 통가는 코로나 청정국이다. 구호가 이뤄져도 바이러스가 유입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15일 화산 폭발 당시 위성이 찍은 사진을 보면 폭발로 인한 재와 연기가 반경 약 250km로 퍼져갔다, 250km는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 정도다. 화산이 폭발한 곳은 통가타푸섬에서 65km 떨어진 곳으로 1912년경 한 번 폭발했던 곳이다. 무인도인 훙가하아파이섬과 훙가통가섬이 5km 너비의 화산 분화구를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었다. 이번에 화산이 폭발하기 2시간 전 분화구가 바닷속으로 푹 꺼지더니 두 섬이 나뉘었다. 폭발은 수면 밑에서 일어났다. 엄청난 폭발력에 두 섬의 일부까지 날아가 버려 두 섬의 높은 지대만이 조금 남아 바다 위로 보이고 있을 뿐이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의를 벗은 건장한 몸을 과시하며 통가 대표팀 기수 역할을 한 스키 선수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선수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는 태권도 선수로 출전했다. 통가 피지 사모아 등 폴리네시아 문화권에서는 하카 춤이 유명하다. 보는 것만으로 전율을 느끼게 하는 용사들의 춤이다. 그들이 재난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도 뭔가 도울 방법을 찾아야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1-21  ‘조던’ 회장의 살인 고백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매년 500여 명이 총기 사고로 숨진다. 가해자와 피해자 중엔 10대가 많다. 1965년 9월 30일 밤에도 그랬다. 폭력 조직의 일원이었던 16세 소년 래리 밀러는 라이벌 폭력 조직이 친구를 죽이자 보복에 나섰다. 그런데 식당 근무를 끝내고 귀가하던 18세 청년에게 총을 쐈다. 이 청년은 친구의 죽음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술에 취해 엉뚱한 희생양을 찾은 것이다. 당시 피해자 청년에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두 살 된 아들, 곧 태어날 딸이 있었다.

▷살인죄로 체포된 밀러는 4년 반을 복역했다. 20대 초반에 출소했지만 총기 강도를 몇 차례 저질러 5년을 더 감옥에 있었다. 하지만 긴 수감 생활은 그에게 전화위복이 됐다. 재범예방 프로그램으로 고교 졸업 자격을 취득했고, 출소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MBA 과정을 마쳤을 때가 38세였다. 유명 회계 법인에 취직할 기회가 생겼지만 면접을 하면서 전과를 얘기해 탈락했다.

▷이때부터 그는 살인 전과를 숨겼다. 몇몇 식품회사에서 임원 경력을 쌓은 그는 1997년 나이키로 옮겼다. 전설적인 미국프로농구(NBA) 선수인 마이클 조던의 브랜드를 담당하는 ‘나이키 조던’ 회장을 현재 맡고 있다. 그는 ‘나이키 조던’을 40억 달러의 회사로 키웠다. 나이키 본사가 있는 포틀랜드 연고의 NBA 구단주도 지냈다. 흑인 기업가로 뒤늦게 성공한 것이다.

 

▷“나를 안에서부터 괴롭혔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던 밀러는 지난해 10월 스포츠 전문매체와의 인터뷰에서 56년 전 살인 사건을 고백했다. 그는 ‘점프’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집필해 최근 출간했다. 하지만 인터뷰 때도, 자서전에서도 피해자를 ‘한 흑인 소년’이라고 지칭했고, 먼저 피해자 유족을 찾아가 사과하지도 않았다. 피해자 유족 중 한 명이 우연히 인터뷰 기사를 읽고, 가해자인 밀러에게 연락했지만 밀러의 답이 없었다고 한다.

▷73세의 밀러는 최근 고향을 두 차례 찾아가 피해자 유족 등을 만나 피해자의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계획을 논의했다. 유족은 “이제 밀러를 적으로도, 친구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책으로 비밀은 죽었다’고 썼다. 하지만 비밀이 사라졌다고 용서가 그 자리를 바로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의 실수가 인생 최악의 실수이더라도 나머지 인생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밀러의 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교정시스템이 없었다면 그의 성공 신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1-22  日 미즈기와 대책

 

재작년 일본 명문 사립대에 입학한 A 씨는 2학년을 마쳤지만 학교 문턱도 못 밟아 봤다. 일본이 코로나 팬데믹 발생 후 외국인 입국을 전면 금지하면서 날벼락을 맞았다. 동아리 활동 등 대학생활의 낭만은 언감생심, 온라인 강의 개설 과목도 들을 만한 게 점점 줄고 있다. “이러다간 일본 땅도 못 밟아본 일본 유학생이 될 판”이라고 A 씨는 하소연한다. 외국인 신규 입국을 전면 금지하고 있는 나라는 주요 7개국(G7) 중 일본뿐이다.

▷일본은 이를 ‘미즈기와(水際) 대책’이라고 한다. 적군이 육지에 오르기 전 바다에서 해치운다는 의미의 방역 대책으로 섬나라 특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바다 건너 외국인 입국을 원천 금지해 코로나바이러스의 일본 유입을 막겠다는 것이다. 2년 전 코로나 발생 초창기에 3700여 명을 태우고 출발지로 돌아온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를 통째로 요코하마항 앞바다에 격리한 것도 미즈기와 대책의 일환이었다.

▷미즈기와 대책은 자주 약자와 타인을 배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당시 자국민이 3분의 1이나 탔는데도 크루즈선 승선자 전체를 못 내리게 해 선내 감염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올림픽을 앞두고 크루즈선 확진자는 일본 내 감염자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일본 국민의 기본 인식도 “자기 의사로 배에 올랐으니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해외에서 피랍됐다가 살해된 일본인 유족들이 울기는커녕 TV 카메라 앞에서 “폐를 끼쳤다”며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게 일본 사회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미즈기와 대책은 ‘국민을 버리는’ 기민(棄民)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패전 직후 일본은 해외 공관에 현지에 남은 자국민을 가급적 잔류시키라는 훈령을 보냈다. 660만 명의 해외 거주 일본인이 한꺼번에 귀국하면 물자 부족 등 혼란이 우려된다는 이유였다. 중국에 남겨진 자국민에 대해서도 전후 일부만 귀국시킨 채 1959년 ‘전시사망 선고’를 내려 호적을 말소했다. 일본의 이런 기질은 ‘시마구니 곤조(島國根性)’, 즉 섬나라 근성으로도 그려진다. 내부로 똘똘 뭉치되 배타성이 강하고 시야가 좁다는 의미다.

▷일본 입국을 기다리던 유학생 등 외국인들이 참다못해 들고 일어났다. 각국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시작했고 트위터에는 입국 대기 기간을 적은 플래카드를 든 사진을 줄줄이 올리고 있다. 부스터샷까지 맞았다는 이들은 일본 내 지역 감염이 활발한데 외국인만 입국을 금지하는 정책을 납득할 수 없다고 한다. 이들은 지금 또 다른 버전의 일본 기민 정책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1-24(월)  한강맨션

 

1970년 4월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는 판잣집을 헐고 대규모 아파트를 빨리빨리 지으려던 무리수가 빚은 인재(人災)였다. 땅에 떨어진 아파트에 대한 이미지를 끌어올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참사 11개월 뒤 준공된 용산구 이촌동 한강맨션이었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한강맨션 옥상에 있는 사각형 굴뚝이 랜드마크가 되고, 뒤이은 맨션아파트 분양은 단기 고성장 과정에서 쌓이고 쌓인 중산층의 주거 욕구를 해소하는 분출구가 됐다.

▷이처럼 고급 아파트 전성시대를 열었던 한강맨션이 재건축된다. 이 아파트 재건축조합은 최근 정기총회에서 GS건설을 재건축 시공사로 선정했다. 건설사 측은 일단 설계대로 35층짜리로 짓지만 규제가 풀리면 68층으로 높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강변 최고층 아파트 등장 가능성에 사람들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광주 고층아파트 외벽 붕괴 사고로 부실 공사 우려가 커진 지 열흘 만에 한강맨션이 대중의 관심사로 부각되는 상황이 50년 전과 비슷하다.

▷1970년대 한강맨션은 한국 주택시장의 흐름을 단독에서 아파트로, 소형에서 중대형으로, 후분양에서 선분양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명목상 사업 주체는 대한주택공사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애초 대형 아파트 건축을 지시하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예매분양(선분양)’으로 건설비를 충당하도록 용인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파트의 질을 높이고 한정된 재원으로 공급을 늘리는 효과가 있었지만 고급아파트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 되고 투기의 빌미가 된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강맨션에는 한국 주택시장의 명암이 녹아 있다.

 

▷아파트 재건축은 공급 확대와 집값 안정이라는 국민적 관심사와 직결돼 있다. 특히 한강변 층고 규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 층수 규제를 풀면 공급이 늘어 가격이 안정될 가능성이 있지만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아파트를 사려는 수요가 급등하면서 집값을 자극할 소지도 있다. 35층짜리로 짓느냐, 68층짜리로 짓느냐는 결정은 한강맨션뿐 아니라 향후 한강변 아파트 정책과 주택 규제 전반의 바로미터가 된다.

▷한강맨션 준공 당시 벽면의 회색 페인트칠은 입주자들의 희망을 반영한 ‘침착하고 점잖은 컬러’였다. ‘맨션 회색’이라는 별칭이 고급아파트를 상징할 정도였다. 지금 ‘회색 아파트’의 뉘앙스는 과거와 전혀 달라졌지만 서울 요지의 좋은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만은 여전하다. 한강맨션 재건축은 살고 싶은 곳에 집을 안전하게 많이 싸게 지어달라는 무주택자들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겹치면서도 충돌하는 이슈다. 한강맨션에 떨어진 숙제는 5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1-25  인도네시아 천도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2019년 재선 직후 수도 이전 계획을 발표할 때만 해도 그 실현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바섬의 인구 1000만 수도 자카르타를 대신하는 새 수도 예정지로 선택된 곳은 보르네오섬 동칼리만탄의 정글지역. 현지인들조차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오지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의회가 최근 수도 이전 법안을 통과시켰다.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은 인도네시아 전체 면적의 7%에 불과하지만 인구(2억7500만 명)의 60%가 모여 산다. 대기오염은 물론이고 시내의 차량 평균 시속이 10km일 정도로 교통 체증도 심각하다. 장관들은 국무회의에 늦지 않으려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한다. 자카르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가라앉는 도시다. 도시의 40%는 해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데 지금도 매년 지반이 25cm씩 내려앉고 있다.

▷새로운 수도가 들어설 곳은 자카르타에서 약 1200km 떨어진 열대 우림으로 오랑우탄과 긴코원숭이의 주요 서식지다. 새 수도 이름은 ‘열도’라는 뜻의 ‘누산타라’. 위도도 대통령이 80개의 후보명 가운데 선택했다. 올해 착공해 전기차와 드론 택시가 다니는 친환경 도시로 건설한 후 2024년 공공기관 이전을 시작으로 2045년 천도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이전 비용은 약 38조 원. 자카르타는 경제와 금융 중심지로 남게 된다.

 

▷정치적으로도 인도네시아의 수도 이전은 국부(國父)인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부터 품어온 숙원이었다. 네덜란드와 일본의 식민통치 시절 수도였던 자카르타를 벗어나고 싶었고, 국가 경제활동의 절반이 자바섬으로 집중된 후로는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새로운 명분이 추가됐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이전 비용이 발목을 잡았다. 자카르타 기득권층의 반발도 거셌다. 역대 대통령 9명 중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자바인이다. 결국 가라앉는 도시를 더는 고집할 수 없게 되자 자바인이며 자카르타 주지사 출신인 위도도 대통령이 나서게 된 것이다.

▷20세기 이후 독립국 가운데 약 20개국이 수도를 이전했는데 인도네시아가 눈여겨보는 나라는 브라질 말레이시아 그리고 한국의 세종시다. 브라질은 해안가에 집중된 경제력을 분산하기 위해 1960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내륙 지역인 브라질리아로, 말레이시아는 쿠알라룸푸르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1993년 푸트라자야를 새 행정수도로 지정했다. 인도네시아의 천도는 정부 기능을 분산시킨 말레이시아와 한국보다는 신수도를 건설한 브라질 모델에 가깝다. 그만큼 인도네시아의 천도가 완성돼 성공 여부를 평가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26  美 유럽 파병 딜레마

 

미국 국방부가 24일 미군 8500명을 동유럽에 파견하기 위해 비상 대기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미 우크라이나 국경에 10만여 병력과 기갑전력, 미사일장비를 배치한 러시아의 침공 협박에 맞서 단호한 군사적 대응 의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다. 아울러 미국은 상황이 악화되면 파병 규모를 10배로 늘릴 것이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그간 미국은 금융·무역제재 같은 보복조치를 경고해 왔지만 그것만으론 러시아의 도발을 막기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판단 아래 마지막 군사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대비 차원의 조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래 “미국의 이익이 심대하게 위협받지 않는 한 해외 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혀 왔다. “우리는 세계의 호구(sucker)가 아니다”며 ‘세계의 경찰’ 역할을 거부했던 전임 대통령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출구 없는 ‘전쟁의 진창’에 빠졌던 미국이다. 공화·민주 어느 행정부를 막론하고 군사적 과잉개입(overstretch)은 가장 경계해야 할 과제가 됐다. 바이든이 지난해 ‘카불의 치욕’을 감수하면서도 아프간 철군을 단행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막무가내 치킨게임 도전에 칼집에 넣어뒀던 군사 카드를 다시 저울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물론 우선순위는 외교적 해결에 있다. 미국은 조만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과 나토의 동진(東進) 금지, 러시아의 옛 소련 세력권 인정 등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요구 조건에 대한 서면 답변을 주기로 했다. 러시아의 턱없는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전쟁은 시작하긴 쉽지만 끝내기는 어렵다는 점을 푸틴도 모르지 않을 것인 만큼 타협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다. 폐기된 중거리핵전력(INF) 협정이나 군사적 신뢰구축조치(CBM) 복원 같은 큰 그림 속에 러시아를 협상으로 끌어들이는 방안이 거론된다.

 

▷전쟁의 북소리가 요란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그런 해법에 동의할지는 미지수다. 일단 임시 출구를 찾더라도 합의를 이루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당장은 시간싸움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러시아가 누려온 선제적 공세의 이점은 사라진다. 러시아 측은 질질 끄는 ‘협상의 늪’에 빠지지 않겠다고 강조한다. 3월이면 땅이 녹으면서 기갑전력의 기동이 어려워지는 만큼 서둘러 결딴을 내겠다며 벼르고 있다. 시간을 벌려면 미국도 일단 양보가 불가피한데, 당장 ‘히틀러를 달래던 유화정책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결코 전쟁을 원치 않지만 마냥 회피할 수도 없는 ‘자유주의 제국’ 미국이 처한 딜레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1-27  현대차 日시장 재도전

 

몇 년 전 한 재일(在日) 한국인 사업가가 검은색 제네시스를 몰고 호텔에 나타났다. 일본인들이 처음 보는 엠블럼에 신기한 듯 “무슨 차냐”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현대차라는 답에 흥미를 잃은 듯 이내 흩어졌다. 해외 어느 나라를 가든 마주치는 한국차지만 일본만큼은 여전히 불모지다. 한 번 쓰디쓴 실패를 맛본 현대차가 일본시장에 13년 만에 다시 진출한다고 한다.

▷현대차가 일본 시장에 처음 진출한 때는 2001년이었다. 한일문화 개방 이후 일본에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제1차 한류 붐이 불고, 2002월드컵축구 동시 개최를 앞두고 한일 관계에 훈풍이 불던 때다. 마침 같은 해에 일본 도요타자동차도 한국에 진출했다. 도요타는 고급 세단 렉서스 시리즈를 앞세워 단숨에 한국 수입차 시장을 장악했다. 2004년부터 3년 연속 수입차 시장 1위를 차지했다. 독일차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인 데다 ‘일본차는 잔고장이 없다’는 인식까지 퍼지며 승승장구했다.

▷현대차는 일본시장 진출 첫해 1000여 대를 팔아 한국에 진출한 도요타와 비슷한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남는 게 없었다. 쏘나타 그랜저 등 중형 모델을 앞세웠는데 마진은 낮고 마케팅 비용은 한국의 몇 배였다. 한국차를 한 수 아래로 보는 현지 인식도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현대차 판매량은 이듬해 2000대 이상으로 늘었으나 곧 정체됐고 2008년에는 501대로 쪼그라들었다. 결국 2009년 누적 판매량 1만5000대를 끝으로 철수했다. 연구개발 조직을 남겨 훗날을 도모했지만 도요타와 대비되는 씁쓸한 퇴장이었다.

 

▷자국 차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일본은 원래부터 ‘수입차의 무덤’으로 악명이 높다. 1980년대에는 일본차가 미국 시장을 잠식하는데 미국차는 일본 시장에서 죽을 쑤면서 미일 무역분쟁으로 번졌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수입차 비중이 한 자릿수를 넘지 못한다. 그나마 잘 팔리는 수입차는 독일차인데 한국과 달리 미니와 골프 등 해치백 스타일의 작은 차가 강세다. 도로 폭이 좁고 차고지 증명제로 좁은 집에 주차장을 만들어야 하니 크기를 따질 수밖에 없다. ‘양보다 질’로 승부해야 하는 시장이다.

▷일본 시장에 재진출하는 현대차가 이번에는 전기차 아이오닉5와 넥쏘를 앞세운다고 한다. 승산은 있다. 일본 기업들은 그동안 하이브리드 차량에 ‘올인’하면서 전기차 전환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현대차의 브랜드 파워도 옛날의 현대차가 아니다. 지난해 자동차 본고장 유럽에서 BMW, 다임러, 도요타그룹 등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판매량 4위에 올랐다. K팝과 K드라마를 앞세운 2차 한류 붐으로 한국 제품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졌다.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 결실을 볼 때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1-28  무책임한 GTX 공약

 

경기 파주시에 짓는 한 아파트 명칭은 ‘GTX운정역 ○○단지’다. 파주 동패동에 2024년 들어서는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A노선 역에서 가까운 듯하지만 실제 아파트와 역 사이는 차로 10분, 걸어서 1시간 거리다. ‘역 반경 500m’라는 역세권 개념으로 보면 다소 과장이지만 GTX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건설사가 그 관심을 영업에 활용하는 걸 사람들이 대개 알고 있으니 마케팅으로 큰 효과를 내기는 힘들 것이다.

▷여야 대선 후보들이 GTX역 가까이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희망에 편승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7일 기존 GTX 3개 노선을 연장 확대하고 새 노선 2개를 신설하는 방안을 밝혔다. 이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비슷한 구상을 내놓았다. 신설 노선의 세부 정차역이 다를 뿐 지난해 ‘김부선(김포∼부천)’ 논란이 일었던 GTX D노선을 서울 강남과 직결시키는 등 두 후보 모두 지역의 오랜 염원을 다 들어줄 것 같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한국 GTX의 모델 격인 영국 크로스레일은 서쪽 레딩과 동쪽 셰필드 118km 구간을 잇는 철도다. 우리 GTX 2개 노선을 합한 것보다 짧지만 완공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땅 밑 40m에서 기차가 시속 160km로 달리게 하는 사업은 돈이 문제지만 돈만 있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GTX를 신설하려면 5년마다 수립하는 10년짜리 국가철도망 계획에 새 구상을 반영해야 한다. 지난해 10년짜리 계획을 확정했으니 신규 계획 수립까지는 4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GTX는 긍정적, 부정적 효과를 동시에 내는 인프라다. 해당 지역 주민들이 서울 도심까지 가기 쉬워지는 반면 수도권 집중이 심해지고 경기 지역이 베드타운으로 전락할 수 있다. 교통 인프라 개선으로 해당 지역 부동산시장이 주목받지만 모처럼 안정세를 보이는 집값을 자극할 우려도 있다. 특히 GTX는 역과 역 사이 거리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거점 간 이동시간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중간중간 정차역을 계속 늘리는 식으로는 급행철도가 아닌 완행철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후보들이 GTX 공약을 남발하는 것은 초대형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을 거리낌 없이 추진하면서 나랏돈 쓰는 일에 더 이상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GTX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균형발전 같은 정치적인 고려를 하되 편익이 비용보다 커야 한다는 최소한의 기준만은 지켜졌다. 지금은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압도하면서 공약이 과대 포장됐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는다. 대선 공약이 아파트 분양 마케팅 수준이 되고 있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1-29(토)  배달비가 기가 막혀

 

미국의 배달 플랫폼 업체인 ‘도어대시’에 이달 초 소다음료인 환타 1병을 배달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2.5달러짜리 환타 1병의 배달료는 5배가 넘는 13달러. 이 내용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면서 배달비의 적정가를 놓고 한판 논쟁이 벌어졌다. ‘아이스커피 1잔 배달에 9달러를 냈다’는 등의 유사 경험담이 속속 올라왔다. 한국보다 인건비가 훨씬 비싼 해외에서도 배보다 배꼽이 커진 배달비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배달천국 한국에서도 ‘배달비 1만 원 시대’가 열리고 있다. 급증하는 배달 수요를 라이더들의 공급이 따라잡지 못하면서 배달비가 계속 오르고 있는 것이다. 폭설 등으로 배달이 어려워진 시간대의 배달비는 2만 원을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 배달 플랫폼 업체들의 단건 배달(주문 1건당 한 곳만 배달) 경쟁이 불붙으면서 라이더들의 몸값은 계속 뛰고 있다. 유튜브에는 ‘연봉 5000만 원 라이더’ ‘자전거로 월 400만 원 벌기’ 같은 동영상들이 인기다.

▷배달비 부담은 결국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고, 사용자들의 불만도 쌓여 간다. ‘배달공구(공동구매)’ ‘배달 끊기 챌린지’ ‘셀프 배달’ 같은 궁여지책들이 나오고 있다. “택시로 음식을 배달받는 게 차라리 더 쌌다”는 실험담도 나왔다. 배달비 부담이 커진 음식점 업체들도 울상인 것은 마찬가지다. 25% 안팎이던 음식점의 마진이 5%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심지어 그동안 적용받아 왔던 배달앱 수수료 할인제도 곧 줄줄이 종료된다.

 

▷정부가 다음 달부터 ‘배달비 공시제’를 시행키로 했지만 사용자들은 시큰둥한 분위기다. 플랫폼별 배달비와 거리별 할증요금, 최소 주문액 등은 이미 주문할 때 실시간으로 공개되는 정보여서 가격 상승 제한에 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인 라이더들의 공급 부족 문제를 놔두고 탁상공론식으로 미봉책을 내놓는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국내 배달 라이더는 현재 약 30만 명. 학교 교사 수보다 많아졌다지만 아직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수요 공급에 따라 가격이 오르는 시장의 작동원리 자체를 건드리기는 어렵다. 코로나19가 종식되고 배달 수요가 줄어들면 배달비도 다시 떨어질 것이다. 개발이 한창인 배달용 드론, 로봇의 상용화도 배달시장을 흔들 변수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은 자영업자와 소비자 양쪽 모두 손해를 보는 제로섬 게임이다. 배달을 중단하자니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사회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다. 배달 서비스라도 쓰지 않으면 식당 문을 닫을 처지에 놓인 자영업자들에게는 대안도 없다. 배달비는 언젠가 적정선을 찾겠지만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