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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중앙일보) 2022-01/ 01.03(월) 택배 - 01.28(금) 영빈관

상림은내고향 2022. 1. 31. 15:23

분수대 2022-01/ 중앙일보 

01.03(월)  택배

조선 제23대 왕 순조(재위 1800~1834)가 어느 날 밤 달을 구경하다가 선전관(경호원)에게 말한다. “냉면을 시켜라.” 조선 말기 문신인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에 담긴 내용이다. 앞서 조선 후기 학자인 황윤석(1729~1791)이 쓴 『이재난고』에는 “과거 시험을 본 다음 날 점심엔 평양냉면을 시켜먹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택배(배달)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국내 택배산업이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다. 한진택배가 92년 ‘파발마’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본격적으로 택배사업을 선언했다. 93년 대한통운, 94년 현대로지엠, 99년 CJ CLS가 잇달아 택배시장에 진입했다. 택배업체는 빠르게 늘어 2005년 62개까지 증가했다. 이미 포화였고, 과당 경쟁이 벌어졌다. 경쟁에서 밀린 업체는 사라지거나 흡수됐고 현재 21개가 남았다.

 

눈에 띄는 것은 택배 운임의 변화다. 90년대 초 택배 운임은 평균 6500원이었다. 짜장면이 1000원, 지하철요금이 300원이던 시절이다. 과당 경쟁은 평균 운임을 2221원(지난해 말 기준)까지 낮췄다. 짜장면값이 5배 뛰는 사이 택배 운임은 되레 66% 깎였다.

 

택배 운임 하락은 배송 수수료 하락으로 이어진다. 배송한 물량만큼 수수료를 받는 택배 기사는 결국 더 많은 물량을 처리해야 한다. 여기에 속도 경쟁까지 붙었다. 당일 배송·새벽 배송·빠른 배송…. 택배기사는 ‘많은 물량을 더 빠르게’ 배송하기 위해 식사를 거르고 휴식하지 못한다. 교통법규를 위반하게 되고 과로사까지 발생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주요 택배업체 기사 10명 중 7.5명은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 근무(성수기 기준)한다.

 

새해에도 코로나19는 여전히 위협적이다. 비대면 시대에 택배는 방역의 1등 공신이다. 1인당(경제활동인구) 연간 택배 이용 횟수는 지난 1년 새 22% 증가한 122건이다. 사실상 공공재 영역이다.

 

지난달 28일부터 전국택배노동조합 CJ대한통운 본부가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1년 새 6번째 파업이다. 이 때문에 하루 평균 50만여 개 택배 배송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파업의 근본 원인을 들여다보면 결국 ‘택배사→대리점→택배기사’로 이어지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정부가 내세우는 K방역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구경만 할 일은 아니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1.04  삼프로TV

경제전문 유튜브 채널 ‘삼프로TV’의 대선특집이 화제다. 삼프로TV는 후보마다 1시간 30분씩 경제 정책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고 답했다. 한국의 주식시장 저평가 및 공매도에 대한 생각, 부동산 세제에 대한 의견과 방향 등 주요 경제 정책 쟁점을 짚었다. 지난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 이어 2일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까지 네 명의 영상이 올라왔다. 3일 정오 기준 이재명 후보편(532만회), 윤석열 후보편(283만회)을 포함해 대선특집 조회수는 총 930만회에 달한다. 영상에는 “네 후보의 인터뷰를 모두 보고 나니 우량주·성장주·테마주·작전주가 보인다”거나 “뽑을 후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판단에 도움이 됐다”는 등의 감사 댓글이 달렸다. 네이버·구글 검색창에 ‘삼프로’를 치면 “삼프로가 나라를 구했다”는 문장이 자동완성으로 뜰 정도다.

 

이번 선거는 유난히 정책은 실종되고 네거티브만 난무했다. 누가 더 싫은가를 가려 덜 싫은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는 ‘비호감 월드컵’이라는 데 좌절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삼프로TV 대선특집은 이번 대선이 네거티브로 치달은 데엔 기성 언론의 책임도 크다는 걸 보여준다.

 

TV토론은 대선의 향방을 가르는 방향키였다. 1960년대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탄생시킨 것도,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을 당선시킨 것도 TV 토론이다. 한국에선 1997년 TV 토론이 공식 도입됐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첫 수혜자가 됐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은 TV 토론도 달라질 때가 된 듯하다. 삼프로TV는 기계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후보별 발언 시간을 제한하는 기존 TV토론 방식이 유권자의 판단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안겨줬다. 삼프로TV에 달린 댓글을 보면 기성 언론이 대선 이슈를 보도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가 뽑아준 기사 제목, 단편적인 사건의 전달이 아닌 후보의 생각, 마음, 자세 등을 보고 스스로 고민해보는 기회가 필요한 거였다”(‘플로케’) “포털 조회수로 돈을 버는 수준 낮은 기사 양산 시스템이 얼마나 문제인지, 언론·포털개혁이 왜 필요한지 절실히 느끼게 했다”(‘일당백’)

 

독자와 시청자의 눈높이를 따라잡는 건 언론의 과제로 남았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1.05  하방

하방(下放)은 20세기 중반 등장한 중국 공산당의 정치운동이다. “지식인은 반드시 노동자·농민과 서로 결합해야 한다”는 이념에 따라 당원과 공무원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보내 일하도록 했다. 문화대혁명(1966~1976) 와중에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이 이른바 ‘하방 지시’를 하면서 본격화했다. 이 기간 중국의 도시 지식청년 수백만 명이 농촌으로 보내져 육체노동을 했다.

 

정치적으로 하방은 숙청 내지는 유배를 뜻했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이었던 덩샤오핑은 정적들에 의해 주자파(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파벌)로 몰려 1969년 난창(南昌)의 한 트랙터 공장으로 하방을 당했다. “내 일생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라고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마오쩌둥을 향한 처절한 편지 구애 끝에 덩샤오핑은 1973년 특별열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진핑 주석에게도 하방은 아픈 기억이다. 1969년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 부총리가 숙청되면서 당시 15세였던 시 주석도 산시성 북부 량자허(梁家河)촌이라는 오지에서 7년 동안 토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토굴에서 벼룩과 싸우며 9전 10기 끝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1975년 칭화대에 입학해 가까스로 베이징 입성에 성공했다.

 

정치·역사적 맥락에서 어두운 면이 부각된 단어지만, ‘아래로 보낸다. 추방한다’는 말뜻에도 그늘은 있다. 수도를 떠나는 게 곧 신분 하락이라는 걸 암시하는 듯해서다.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권에서도 ‘하방’이 등장했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현장 선거운동을 독려하는 과정에서다. “모든 것을 비우고 하심·하방하여 새롭게 다시 출발하자”(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11월 21일)거나 “모든 국회의원·당협위원장은 하방해야 한다”(홍준표 국민의힘 의원, 12월 31일)는 말이 정치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나왔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고개 숙인 하방 인증샷을 경쟁적으로 올리고 있다.

 

A당의 한 보좌진이 은연중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하방이 뜻을 되짚어보면 부정적 의미인데, 알고 쓰는 건지…”라는 혼잣말에 가까운 되뇌임이었다. 여의도에는 “정치는 말의 예술”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잊을만 하면 설화 논란을 빚는 우리 정치가 바뀌려면, 신중한 단어 선택이 먼저 아닐까.

한영익 정치에디터

 

01.06  고시원

“그것은 방이라고 하기보다는 관이라고 불러야 할 크기의 공간이었다.”

 

소설가 박민규는 소설집 『카스테라』(2005)에 실린 단편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고시원을 이렇게 묘사한다. 소설 속 주인공(나)은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친구 집에 얹혀살다 월세 9만원짜리 고시원으로 이사한다. 몇 년 뒤 주인공은 고시원을 나와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고시원살이의 팍팍함은 ‘관(棺)’이라는 단어를 통해 또렷하고 선명하게 떠오른다.

 

고시원은 대개 6.6㎡(2평) 내외의 작은 방으로 돼있다. 자는 시간마저 쪼개가며 공부하는 고시생들을 위한 구조다. 법령에서도 ‘구획된 실(室) 안에 학습자가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숙박 또는 숙식을 제공하는 형태의 영업(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을 고시원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고시생들은 열악한 고시원보다 쾌적한 원룸을 선호한다. 대신 고시원은 취약계층으로 채워졌다. 고시원 거주 2010가구를 대상으로 한 ‘서울시 고시원 거처 상태 및 거주가구 실태조사(2020년)’에 따르면 40대 이상(55.3%)과 남자(76.6%)가 많았으며, 이혼(20.6%)이나 미혼(67.5%)으로 돌볼 가족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장애인(5%)과 금융채무 불이행자(8.5%)의 비율도 높았다

 

다닥다닥 방들이 붙은 고시원에서 불이 나면 참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018년 서울 종로구의 국일고시원에서 일어난 불로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사망자 대부분이 창문조차 없는 방에서 거주하면서 피해가 더 커졌다. 경찰 조사결과, 70대 거주자가 방안에서 사용하던 전기 히터에서 불길이 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채광과 난방이 열악하고 스프링클러조차 없는 낡은 시설이 사고를 키운 셈이다.

 

서울시는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 7월부터 고시원의 최소 실면적 기준과 창문 의무 설치 규정을 신설한 건축 조례 개정안을 시행한다. 전용면적 7㎡ 이상(화장실 포함 시 9㎡ 이상)이어야 하고, 방마다 창문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늦었지만 당연한 결정이다. 여기에 더해 고시원 거주자의 자활 등 복지 전반에 관한 정책도 계속되어야 한다. 창(窓) 하나 냈다고 뒷짐 지면, 고시원은 ‘볕 드는 관’이 될지도 모른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1.07  입덕부정기

입덕. ‘들 입(入)’자와 일본어 ‘오타쿠(御宅·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꾼 ‘오덕후’의 ‘덕’자를 합쳐 만든 말이다. 어떤 인물이나 분야에 푹 빠져 매니어가 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파생어로 자신이 몰두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뜻하는 ‘성덕’, 흥미를 잃어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는 ‘탈덕’이 있다.

 

누군가는 입덕에 앞서 입덕부정기를 거친다. 자신이 무언가에 빠졌음을 인정하지 않는 시기다. 머리로는 ‘내가 왜 ~같은 걸 좋아해’라고 부정한다. 그러나 사실은 몸과 마음이 이미 입덕에 가까워져 있다. 입덕부정기의 종착점은 입덕이어야만 한다.

 

최근 종영한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에 입덕을 하게 됐다. 같은 방송국에서 2007년 방송한 대하드라마 ‘이산’과 달리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와 후궁인 궁녀 출신 의빈 성씨의 러브스토리에 집중한 드라마다. 우연히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으로 처음 드라마를 접했다. 웹소설이 원작이라니 별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1회부터 드라마 정주행을 하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고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도 15년에 걸친 지독한 입덕부정기를 거친다. 의빈 성씨가 정조의 세손 시절을 포함해 두 번이나 승은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궁녀들을 가까이한 것이 할아버지인 영조의 눈 밖에 나는 계기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의빈 성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닐까.

 

입덕을 해보니 ‘덕질’이 주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하나는 취향이 생겼다는 점이다. 취향이 취향을 파도 타서 열성적으로 한 분야를 파고드는 행위는 삶에 활기를 부여해준다. 다른 하나는 그 취향을 공유하는 데서 온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관련 영상을 클릭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남긴 댓글을 확인한 뒤 ‘좋아요’를 누를 때다.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중앙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 여야 대선후보 모두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응답이 좋아졌다는 응답보다 높았다고 한다. 2030세대에선 두 달 전보다 오히려 부동층이 늘어났다. 국민의 입덕부정기가 길어지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점인 대선이 국민의 ‘부정’으로 끝나서는 안 될 일이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1.10(월)  멸공

한때 중·고교 교과 과정에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중장년층뿐 아니라 MZ세대의 한 축인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의 끝자락에 있는 이들도 어슴푸레 기억이 남아 있을 거다. 교련 시간에 남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모여 군인이 받는 훈련 중 하나인 제식훈련을 했다. 여학생은 간단한 응급처치·붕대법·간호법 등을 배웠다. 이는 수행평가(옛 실기평가)에 점수로 반영됐다. 1997년에서야 교련은 필수과목이 아닌 선택과목으로 바뀌면서 사실상 사라졌다.

 

짝꿍 머리에 붕대를 감던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난 건 때아닌 멸공(滅共) 논란을 지켜보면서다. 논란의 태동은 지난해 11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인스타그램에 빨간 모자·지갑을 든 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뭔가 공산당 같은 느낌인데 오해 마시기 바란다”는 글을 함께 올리며 해시태그(특정 검색어 지정)로 ‘#멸공’을 달았다. 논란에 불이 붙은 것은 인스타그램이 최근 정 부회장의 글을 삭제하면서다. 숙취해소제 사진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을 테다. #멸공”이라고 쓴 게시물이다. 이유는 ‘신체적 폭력 및 선동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정 부회장은 ‘농담’을 한 것인데, 인스타그램은 이를 ‘선동’으로 봤다. 그런데 석연찮다. 인스타그램에서 ‘멸공’을 검색하면 수천개의 게시물이 나온다. 유독 정 부회장의 특정 글만 삭제됐다. 심지어 정 부회장이 공식적으로 반발하자 하루 만에 ‘시스템 오류’였다며 삭제했던 게시물도 복구했다. 삭제에 대한 확실한 기준도 없어 보인다. ‘플랫폼 검열’ 의구심을 거둘 수 없는 모양새다.

 

멸공 논란은 정치권까지 퍼지고 있다. 대통령 후보가 이마트에서 멸치와 콩을 사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게재하더니 야당 의원들이 줄줄이 이마트에서 멸치·콩을 사는 모습을 게재하며 ‘SNS 챌린지’에 나섰다. 여당 측은 “21세기에 멸공이라는 글을 올리는 재벌 회장이 있다”며 비난하고, 야당 측은 “‘공산당이 싫어요’가 논란이 되는 나라는 공산주의밖에 없다”며 맞서고 있다.

 

짝꿍 머리에 붕대 감는 시험을 보던 그때도, 지금도 한국은 분단국가다. 그런데 대선이 코앞인 지금 걱정은 공산당보다 정보를 자체 검열하는 플랫폼이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1.11  탈모

풍성한 머리숱에 대한 동경은 고대에도 있었나 보다. BC 16세기 고대 이집트 의학서 『에베르스 파피루스』에는 11가지 탈모 치료제 제조법이 담겨 있다. 기름에 절인 고슴도치 가시를 태운 재, 손톱 부스러기, 꿀·석고·석간주(산화철이 포함된 붉은 흙) 혼합액을 잘 섞어 바른다는 식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갑자기 털이 다 빠져버린 젊은 남자에게 ‘육미지황환’을 썼더니 머리가 1치(약 3㎝) 자랐다는 치료 사례가 나온다.

 

의료 사회학자 피터 콘래드가 쓴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에 따르면 19세기 후반까지도 의학계에선 탈모에 신경 쓰지 않았다. 탈모 치료법은 의술이라기보다 연금술이나 미신에 가까웠고, 딱히 효과도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 의사들이 시도한 치료법도 오십보백보였다. 두피에 일부러 물집을 내거나, 고무 모자를 씌워 혈액 순환을 돕는 요법 등이다. 1980년대 이후 미녹시딜 등 효과 있는 치료제가 등장하면서 탈모는 비로소 의료 영역에 편입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1000만 탈모인’의 표심을 자극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원형탈모증, 지루성 탈모 등 병적인 탈모는 지금도 건강보험 급여 대상이다. 가령 원형탈모증에는 스테로이드제·자가면역치료제 등을 동원하지만, 아직 확실한 치료 약은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탈모로 진료받은 환자 수는 2016년 21만여 명에서 2020년 23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반면 호르몬·유전 탓이 큰 남성형 탈모는 ‘미용 목적’이라 보아 건강보험을 적용해주지 않는다. 프로페시아·아보다트 등의 남성형 탈모 치료제는 초기에 투약하면 진행을 막을 수 있다. 투약을 중단하면 다시 머리털이 빠지므로 탈모에 저항하는 한 약을 끊을 수 없다. 탈모인에겐 부담이고, 제약사 입장에선 효자 상품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그랜드 뷰 리서치는 2020년 약 9조원 규모였던 전 세계 탈모 치료제 시장이 2028년이면 18조원 규모로 성장하리라고 내다본다. 피터 콘래드는 이러한 산업적 배경 탓에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인 탈모까지 치료해야 할 질병에 편입됐다고 꼬집는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려면 탈모를 보는 시선을 바꿔야겠지만, 그 어려운 길을 갈 정치인은 없을 듯하다.

 

참고 도서『머리카락의 기쁨과 슬픔』(부운주 지음, 동녘)『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피터 콘래드 지음, 후마니타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1.12  밈

인터넷 용어 ‘밈’(Meme)은 본래 학술용어였다. 1976년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처음 제시했다. 모방의 뜻이 함축된 그리스어 ‘미메메’(mimeme)를 생물학 용어인 유전자(gene)와 비슷하게 변형해 만들었다. 언어와 옷, 의식과 관행, 예술과 건축처럼 유전적 방법이 아닌 모방을 통해 습득되는 문화요소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요즘은 다른 의미로 더 널리 쓰인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사진이나 짧은 영상을 밈이라 부른다. 익살스러우면서도 분명한 메시지를 담았다는 게 특징이다. 1990년대 중반 영미권에서 사진으로 태동했던 인터넷 밈은 2005년 유튜브가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영상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2010년대 이후 SNS의 확산과 함께 전성기를 맞았다. 밈을 사용하는 사람이 크게 늘면서 독창성도 배가 됐다. 미국의 한 패스트푸드 회사가 2017년 밈을 적극 활용한 마케팅을 통해 한해 50% 성장했다는 연구도 있다.

 

짧고 강렬한 메시지가 주는 매력,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는 강점은 정치권 역시 밈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2020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마이클 블룸버그 캠프는 인터넷 밈을 만드는 데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젊은 층에서의 바이럴 마케팅(입소문)을 노렸다. 78세의 고령이던 블룸버그는 밈를 통해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대선을 두달도 남기지 않은 한국의 대선 캠프 역시 ‘밈 전쟁’에 몰두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는 “이재명은 뽑는 게 아니라, 심는 것”이라고 한 탈모치료제 건강보험 적용 공약 영상으로 화제를 일으켰다. 지지자들은 영상을 2차 가공해 메시지를 정치 상품화하는데 일조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광고 카피 같은 ‘한 줄 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59초짜리 짧은 공약 발표 영상에서는 정책을 설명하는 대신 더부룩한 표정으로 배를 문지르다가 개운한 표정만 짓는다. 무거운 주제에 흥미 요소를 가미해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가려는 포석이다.

 

정치권에선 ‘포장(밈)에만 집착해 내용(정책)에 소홀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밈이 간결하면서도 뚜렷한 메시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대결 구도가 격화될 경우, 이념·혐오 콘텐트로 소비될 잠재력도 크다. 밈 홍보전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 이젠 부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때 아닐까.

한영익 정치에디터

 

01.13  오시범(誤示範)

오시범(誤示範)이란 말이 있다. ‘모범을 보임’이라는 뜻의 시범과 달리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이 말이 자주 사용돼 왔다. ‘잘못된 방법을 직접 보여준다’는 뜻으로다. 실제로 신병 교육에서 사격 자세나 제식 따위를 가르칠 때, 조교나 교관은 ‘이렇게 하면 절대로 안 된다’면서 오시범을 보여준다. 오시범이 끝난 후엔 제대로 자세를 알려주는 시범이 이어진다.

 

출범 1년을 맞이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지난 한 해 동안 오시범만 열심히 보여준 것 같다. ‘살아 있는 권력’의 중대 부패범죄를 수사한다며 야심 차게 출범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2600여 건에 이르는 사건을 접수한 뒤 24건을 수사한 끝에 달랑 1건(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불법 특별 채용 의혹)만 기소했다. 여기에 친정부 성향인 이성윤 서울고검장을 불러 조사할 때 ‘관용차 서비스’까지 제공하면서 중립성 논란을 키웠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공수처가 언론인과 야당 정치인은 물론 대선 후보 팬카페 회원까지 무더기로 통신자료를 조회했다는 사실이다. 정부나 공수처에 비판적인 인사는 물론, 수사대상이 될 수 없는 고위공직자가 아닌 사람들을 사찰했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무용론을 넘어 존폐론 이야기까지 나오는 배경이다. 진보 성향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 등도 통신자료 수집 문제에 대한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11일 공수처는 출범 1년을 맞아 전체 검사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선 최근 논란이 된 통신자료 조회와 압수수색 등의 현안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통신자료 조회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원론적 의견부터 적정성 문제가 있었다는 자성적 의견 등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김진욱 공수처장은 모두발언에서 ‘성찰적 권한 행사’를 강조했다고 한다. “적법성을 넘어 적정성까지 고려하며 국민 눈높이에 맞는 수사를 하자”는 건데, 새삼스럽다.

 

공수처 1년이 남긴 교훈은 명료하다. 논란을 자초하면서 ‘이렇게 가면 절대로 안 된다’는 점만 1년 내내 보여줬다. 이런 오시범을 통해 국민은 불편한 진실도 새삼 깨닫게 됐다. 여전히 우리의 일상은 수사기관과 권력기관에 의해 철저히 감시받고 있으며, 언젠가 나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1.14  어른

배우 오영수(78)가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배우 윤여정(75)이 떠올랐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우린 깐부잖아”라는 대사를 남긴 오영수는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내일 연극이 있다. 그 준비가 나에게 더 중요한 일”이라며 기자의 인터뷰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지난해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상을 탄 윤여정은 평소처럼 좋아하는 화이트와인을 한 잔 가져달라고 한 뒤 기자간담회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배우 인생 최대의 전성기 앞에서도 평정심을 발휘했다.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미국 양대 시상식의 트로피를 거머쥔 주인공이 된 이들에게서 ‘어른’의 역할과 무게에 대해 생각해본다. 둘 다 일흔을 넘긴 나이다. 어른다운 어른, 닮고 싶은 어른이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 패션잡지 ‘보그’의 에디터 출신 김지수는 평균 나이 72세의 어른 16명을 인터뷰해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이란 책을 냈다. ‘그 많던 어른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고민될 때 오롯이 자기 인생을 산 어른의 한마디는 성찰의 실마리를 안겨준다.

 

오영수와 윤여정은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상을 받았다. 오영수는 ‘오징어 게임’으로 명성을 얻은 뒤에도 한 예능에서 “우리 사회가 1등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흘러갈 때가 있어요. 2등은 1등에게 졌지만 3등한테 이겼잖아요. 다 승자예요”라고 말했다. 윤여정은 오스카상 수상 직후 간담회에서 “나는 최고, 그런 거 싫다. 경쟁 싫어한다. 1등 되는 것 하지 말고 ‘최중’(最中)이 되면 안 되나”라고 말해 좌중을 웃음에 빠뜨렸다. 독창적이면서 인생을 제대로 산 발언이다. 1등이 아니어도,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어른에게 2030세대는 열광한다.

 

지난해 여야 정치권에서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하기 전 3선 국회의원 출신 정치인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그는 앞으로 여야에서 ‘두 어르신’의 행보를 주목하라고 했다. 두 사람 다 대선을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어 킹메이커로 평가됐다. 당시엔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지금은 갸웃거리게 된다. 한 명은 결국 자당 후보와 결별했고, 다른 한명은 존재감이 안 느껴져서다. ‘상왕’ 노릇을 해서도 안 되지만, 원로 정객이 없어도 문제다. 정치판에서까지 어른다운 어른을 기대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1.17(월)  붕괴

1970년 4월 서울 마포구 와우지구 내 시민아파트가 무너졌다. 준공 4개월 만이다. 이 아파트 공사 기간은 평균 아파트 공사 기간의 절반 수준인 1년에 불과했다. 철근 70개가 있어야 할 기둥엔 5개뿐이었다. 이 사고로 7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95년 6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당시 매출액 기준 국내 1위 백화점이었고 준공 6년 차였다. 상가로 쓰일 건물을 백화점으로 바꾸면서 벽을 없애 건물 하중을 기둥으로만 버티는 구조였다. 그나마 철근 16개가 있어야 할 기둥엔 8개뿐이었다. 바닥과 기둥을 연결하는 철근도 지지력이 있는 ‘L’자형이 아니라 ‘ㅡ’자형을 썼다. 사망자 502명을 포함해 사상자 1445명이 나왔다.

 

2022년 1월 광주 서구 화정동 화정아이파크가 무너졌다. 준공을 10개월 앞둔 공사 중인 아파트의 외벽이 무너지며 인부 1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 상태다.

 

반세기 전도, 지금도 한국은 여전히 부실공사 늪에 빠져있다. 화정아이파크 붕괴 원인을 보자. 부실한 콘크리트 타설(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붓는 작업), 졸속 양생(콘크리트가 굳어지는 과정), 감리 부실, 안전 교육 미흡, 무리한 공사 기간 단축 등이 이유로 꼽힌다. 그런데 이 모든 이유를 유발하는 근본 원인이 있다. ‘최저가 낙찰제’다.

 

‘아이파크’ 아파트의 시공사는 현대산업개발(현산)이지만, 실제로 현산이 짓지 않는다. 설계 정도만 한다. 예컨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100명 중 현산 직원은 현장소장·공무과장 등 10명 수준이다. 나머지는 하청업체 직원이다. 현산 직원은 관리만 한다.

 

문제는 실제 공사를 할 하청업체를 선정하는 기준이다. 공사 입찰에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한 업체가 뽑힌다. 무리해서라도 공사비를 낮게 제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러니 공사가 시작되면 어떻게든 이윤을 내기 위한 온갖 방법이 동원된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5명이 작업해야 할 일을 3명이 한다. 필요한 장비도 10대가 아니라 4대만 사용한다. 공사 기간 단축은 필수다. 아예 재하청을 주기도 한다. 그러잖아도 낮게 수주한 공사비보다 더 싸게 일을 맡긴다. 부실 공사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사고 수습도 중요하지만, 70년째 최저가 낙찰제를 고수하는 정부도 이번 사고를 반면교사 삼아야 할 테다. 줄 돈은 제대로 주고 할 일은 제대로 하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1.18 방역패스 반대심리

기독교계 중학교에 다니는 A양은 종교 수업시간을 싫어한다. 다양한 종교를 다루는 게 아니라 기독교와 성경 말씀만 가르치기 때문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섬기지 말라"는 등의 금지로 가득한 십계명을 들으면 땐 "싫은데요"라는 반발심이 생긴다고 한다. 반발심은 사춘기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청개구리 같은 마음, 즉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을 땐 그 반대로 하고 싶은 반대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연구진이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에 최근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프랑스가 보건패스를 도입한 이후 접종률 자체는 늘었으나 백신에 대한 불신과 저항을 줄이지는 못했다는 내용이다. 프랑스는 지난해 8월부터 접종증명서 혹은 음성 결과지가 있어야 술집·도서관·병원 등에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2회 이상 접종 완료율은 패스 도입 이전인 지난해 7월 49%에서 12월 중순 89%로 증가했다. 그러나 굳이 공공시설에 가지 않아도 되는 고령자 등 코로나 19 취약계층의 접종률을 끌어올리는 효과는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백신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패스 도입을 기점으로 44%에서 61%까지 뛰었다. 백신을 맞은 걸 후회하거나, 나아가 강제로 맞아서 화가 난다는 응답률도 치솟았다.

 

연구진은 접종을 강요받는다고 느낄 경우 백신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리라는 믿음 탓에 ‘노시보(nocebo)’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노시보는 올바른 약을 처방했음에도 환자가 의심하면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심하면 없던 병도 생겨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가짜 약을 먹고도 환자가 약효를 믿으면 병세가 개선되는 플라시보 효과와 정반대 현상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선 백신 1차 접종 시 부작용을 겪었다는 응답자가 패스 도입 이전 34%에서 이후 57%로 급증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재판장 한원교)는 지난 14일 서울의 대형마트 및 백화점, 청소년 관련 시설 등에 적용된 방역패스의 효력을 정지했다. 법원은 방역패스의 효과는 인정하면서도 생활필수시설 미접종자 출입 제한이나 미성년 방역패스는 과도한, 혹은 합리적 근거가 부족한 제한이라고 판단했다. 정부는 전국의 생활필수시설 방역패스를 철회했다. 방역 심리 측면에선 다행스러운 결정이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1.19  티스푼 공사

지난해 9월 개통한 월드컵대교는 2010년 착공했다. 2015년 완공이 목표였지만, 예산 투입이 지지부진하면서 부분 개통까지 11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연결도로까지 포함한 완전 개통은 올 12월이 목표다. 최초 계획보다 7년이란 세월이 더 걸리면서 ‘티스푼 공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공사가 마치 티스푼으로 땅을 파는 것처럼 하염없이 느리다는 일종의 신조어다.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티스푼 예산 배정이라는 비판이 있을 정도”라며 한탄했다.

 

티스푼 공사 사례는 월드컵대교 외에도 곳곳에 있다. 1995년 계획한 수인선(수원~인천) 복선전철 사업은 공사만 15년 이상 걸렸다. 2004년 착공에 들어갔지만 개통 예정일이 2013년에서 2017년, 2021년까지 연기됐다. 최근 개통된 부산~울산 복선전철(65.7㎞) 역시 처음에는 2010년이 개통 목표일이었다. 10년 이상 공기가 지연됐다. 막대한 돈이 드는 사회간접자본(SOC) 공사에 예산이 찔끔 투입되며 생긴 일이다.

 

공사 기간이 늘어나면 사업비가 처음 계획보다 급증한다. 수인선 복선전철은 공사 지연으로 사업비 5710억원이 2조원까지 늘었다. 건설업체 역시 늘어나는 공사 기간만큼 인건비, 사무실 운영비 등 간접비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해 부담이 크다. 그런데도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공사를 빨리 끝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선거철마다 쏟아지는 정치권의 토목 공약 쓰나미를 SOC 예산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게 중론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조 단위 토목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서울 지하철 1호선 지하화, 2·7호선 연장, 경인고속도로 지하화 등을 추진 중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역시 수도권 GTX D·E·F 노선을 추가하고, 부산·울산·경남권에도 GTX를 신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경인선·경인고속도로 지하화도 함께 추진한다.

 

대선 후보들의 쏟아지는 선물 보따리를 보며 ‘얼마나 걸릴까. 과연 임기 내에 착공은 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숙원사업을 기다리는 지역주민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티스푼 공사로 인한 희망고문은 정치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선 후보들도 공사 완료 시점에 대한 대략적 청사진은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한영익 정치에디터

 

01.20  베스트셀러

베스트셀러란 단어를 잘 팔리는 책에 처음 사용한 것은 1889년 미국 일간지였던 캔자스 시티 앤드 스타였다. 하지만 이 표현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895년 미국 문예지 ‘북맨’이 주요 도시에서 많이 팔린 책들의 리스트를 꼽으면서다. 북맨은 이후 ‘퍼블리셔스 위클리’로 이름을 바꿔서 지금까지 베스트셀러를 선정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947년부터 베스트셀러를 게재해오고 있다. 100년이 훌쩍 넘는 베스트셀러 선정의 역사는 많이 팔린 책에 대한 독자들의 꾸준한 관심을 말해준다.

 

서점에서도 베스트셀러를 주기적으로 선정한다. 대형서점은 눈에 띄는 넓은 공간을 할애해 베스트셀러 매대를 설치한다. 온라인 서점 역시 홈페이지 대문에 베스트셀러 순위를 가장 먼저 보여준다. 이러다 보니 출판계에서는 사재기 의혹이 끊임없이 불거진다. 출간 초기 사재기 작전을 펼치면, 판매 부수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2016년 12월에는 출판사 대표 등 6명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끌어올리려 사재기를 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치 팬덤이 조직적으로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뛰어들고 있다. 특정 정당이나 인물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관련 서적 띄우기로 표현하는 모양새다. 이런 책은 대부분 절반 혹은 그 이하의 진실을 담은 편향성에도 불구하고,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된다. 출간 전부터 좌표를 찍어 서로 구매를 독려하다 보니, 예약 구매도 폭발적이다.

 

2020년 8월에는 조국 사건을 계기로 이른바 ‘조국백서’를 표방하며 출간된 『검찰개혁과 촛불시민』이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올렸다. 최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출간한 『그리움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가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온라인에 올라온 이들 책에 대한 서평은 책 자체에 대한 감상보다 자신의 정치성향이나 특정인에 대한 지지를 밝히는 글이 주를 이룬다.

 

정치인이나 유명인에 대한 관심이 출판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출판시장이 진영논리 기싸움으로 뒤덮이고 세(勢) 과시 경연장으로 변질하는 것은 안타깝다. 어차피 정치 팬덤이 떠받치는 ‘반짝 베스트셀러’는 금방 잊힌다. 오랜 시간 읽히는 스테디셀러가 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양서(良書)는 아무렇게나 나오지 않는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1.21  관음증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본 이들의 최후는 성경과 신화, 전설로 전해진다. 구약성서 창세기 19장에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는 천사들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이야기』에는 다이아나와 악티온 이야기가 나온다. 사냥을 하던 악티온이 샘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다이아나 여신을 놀라게 했다. 자신의 알몸을 보았다는 것에 분노한 여신이 악티온을 수사슴으로 만들어버린다. 악티온은 결국 자신의 사냥개들에 죽임을 당한다. 금기는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넘나들게 한다. 금기를 깨버린 순간은 달콤하지만 뒤이어 참혹한 대가가 따라온다.

 

중세 영국에서 탄생한 ‘레이디 고다이바’ 전설은 금기에 대한 인간 심리를 ‘관음증(voyeurism)’으로 접근한다. 마을의 영주인 레오프릭 백작은 백성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달라는 부인 고다이바의 부탁을 받는다. 영주는 “알몸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당신의 진심을 증명하라”고 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거리를 돌았다. 모든 사람이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지만, 톰이라는 재단사는 고다이바의 나체를 엿봤다. ‘훔쳐보는 톰’이라는 뜻의 ‘피핑 톰(peeping Tom)’이 관음증을 뜻하는 속어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봐서는 안 되는 것과 꼭 봐야(알아야) 하는 것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살 수 없다. 미디어의 발달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게 됐기 때문이다. 보기 싫은 것도 봐야 하고, 듣기 싫은 것도 들어야 한다. 자신이 설정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구분은 타인에게 상대적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금기를 어겼다고 권선징악을 운운하는 것이 우스워졌다.

 

그래도 꼭 모두가 봐야만 하는 것은 있다고 우기고 싶다. 미디어는 관음증을 부추긴다. 자극적인 것에 대한 즐거움은 복잡한 사유를 해야 하는 수고를 갉아먹는다. 미국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수전 손태그는 『타인의 고통』에서 “의도했든, 안 했든 우리는 관음증 환자”라는 말을 남겼다. 대중이 지나치게 무엇인가에 탐닉한다면 언제든 손태그의 말을 되새겨봄 직하다. 미디어의 생산자가 됐든 소비자가 됐든.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1.24(월)  치킨

“그게 맛있냐?” “응, 치킨이잖아. 우리 담탱이(담임선생님)가 그러데. ‘치킨은 서민이다’. 가격이 안 올랐으면 좋겠어. 아빠한테 얻어먹는 거 안 미안하게.” 영화 ‘극한직업’ 속 주인공인 고반장과 그의 딸이 나누는 대사다. 한국인의 치킨 사랑은 각별하다. 치킨을 ‘치느님’(치킨+하느님) ‘치멘’(치킨+아멘)으로 부른다. ‘치맥’(치킨+맥주)은 한국을 대표하는 K푸드로 자리 잡았고 ‘1인 1닭’이 어색하지 않다. 명실공히 한국 대표 서민 음식이다.

 

그런데 이 서민 음식조차 맘 편히 먹기 퍽퍽하다. 가격이 오르더니 치킨 한 마리가 2만원이다. 삼겹살 한 근(600g)보다 비싸다. 3인 가족이 1인 1닭이라도 하면 훌쩍 6만원이다. 한우(400g)도 사 먹을 수준이다. 비단 치킨만이 아니다. 고기·야채는 물론이고 우유·과자·커피·된장까지 값이 오르지 않은 품목을 찾기 어려운 지경이다.

 

물가가 치솟는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크게 공급과 유통으로 나눌 수 있다. 치킨은 가축 전염병 등으로 닭고기 공급량이 줄면 가격이 오를 수 있다. 한국육계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도계(도축한 닭) 평균 가격(9·10호)은 ㎏당 3340원이다. 10년 전인 2012년(3564원)보다 되레 6.7% 싸다.

 

그렇다면 인건비·배달료 등 운영비 부담이다. 올해 국내 최저임금은 9160원으로, 코로나19가 발생한 2020년보다 6.6% 올랐다. 현 정권이 들어선 2017년보단 41% 상승했다. 여기에 배달비 부담이 커졌다. 배달 매출은 배달 중개업체·앱에 중개수수료·배달비를 지불해야 해 매장(포장) 매출보다 이익이 적다. 2만원짜리 치킨을 팔아도 실제 손에 쥐는 것은 1만6000원 수준이다. 그런데 매출에서 배달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데다 배달비도 오르고 있다.

 

정부도 이런 상황을 인지했다. 그런데 빼 든 카드가 ‘배달비 공개’다. 매달 1회 배달비 현황을 조사해 공개하는 방식이다. 의아하다. 이미 주문할 때 배달비가 얼마인지 알고 있는데 말이다. 배달비가 오르는 이유는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서다. 배달 기사가 많아지면 된다. 일본처럼 인력난인 업종에 대해 인건비를 지급하는 ‘취업 지원’을 할 수 있다. 이미 국내 육체 직무의 주요 인력인 외국인 노동자 입국 방안 마련도 좋다. 단발적인 지원금 지급보단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치킨이라도 편하게 먹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1.25  낙마

조선 태종은 사냥 덕후였다. 즉위 첫해 “문하부낭사에서 태종에게 사냥을 자제하라 건의”(태종실록 권1, 태종 1년 3월 18일 기사)할 정도였다. 노루를 사냥하다 낙마한 기록도 있다.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태종실록 권7, 태종 4년 2월 8일 기사)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제작진이 낙마 장면을 찍으려 말의 다리에 묶은 줄을 당겨 고의로 쓰러뜨렸다는 폭로가 나왔다. ‘동물권행동 카라’가 공개한 현장 영상은 충격적이다. 붕 떠올라 고개를 땅으로 처박으며 고꾸라진 말은 1주일 뒤 죽었다. 스턴트맨도 낙마 직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고 한다.

 

매년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 2000여 편의 엔딩 크레딧엔 ‘No Animals Were Harmed(어떤 동물도 다치지 않았음)’ 문구가 붙는다. 동물보호단체인 미국인도주의협회가 촬영 과정에서 동물 학대가 없었음을 인증한다는 의미다. 영화 ‘제시 제임스’(1939년) 촬영 도중 말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등의 사건을 계기로 모니터링이 시작됐다. 할리우드에서도 말의 다리를 묶어 쓰러뜨리는 기법이 사용돼 수많은 말이 죽거나 다쳤지만 1939년 이후엔 금지됐다.

 

카라는 임순례 영화감독이 대표로 있던 지난 2020년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했다. “말의 걸음걸이에 이상을 주는 장치나 약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당시 카라는 촬영 관련 종사자 15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도 발표했다. 새가 멀리 날아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거북이 등껍질을 벗기고, 소에게 일부러 상처를 내고, 동물을 통제하기 위해 전기충격기를 쓰거나, 수의사 없이 스태프가 직접 마취 주사를 놓았다는 등의 증언도 모였다. 시간과 돈이 더 드는 컴퓨터 그래픽 등의 대안을 찾기보다 동물을 죽음으로 내모는 길을 선택한 현장이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겠다.

 

한국의 촬영 현장에선 동물의 안전이 위험하다는 응답이 61%, 동물 촬영 시 인간의 안전이 위험하다는 답변도 35%에 달했다. 동물의 안위가 보장되는 현장에선 사람도 덜 다치게 마련이다. 태종처럼 낙마해도 상하지는 않도록, 모든 촬영현장이 안전해지길 바란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1.26  비토크라시

비토크라시(vetocracy)는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2013년 한 기고문을 통해 알린 용어다. 민주주의(democracy)에서 대중을 뜻하는 데모(demo) 대신 거부를 뜻하는 비토(veto)를 넣어 만든 말이다. ‘거부민주주의’로 요약된다. 상대 당의 정책과 주장이라면 일단 거부하고 보는 극단적 파당 정치를 뜻한다.

 

“비토크라시가 미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는 후쿠야마의 메시지는 2013년 당시 공화당을 겨냥했다. 오바마 케어를 둘러싼 대립이 가장 극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법은 통과됐지만, 후임 트럼프 행정부가 오바마 케어 무력화에 나서는 등 정치적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한국 정치에서도 비토크라시는 ‘야당의 발목잡기’를 비유할 때 종종 언급된다. 2020년 11월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 구성을 두고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이 태클을 걸자 더불어민주당에서는 “4개월 넘게 설득했는데 비토크라시만 보였다”(김태년 당시 원내대표)고 경고했다. 민주당은 결국 야당의 공수처장 추천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공수처의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하겠다며 만든 야당 비토권이 힘으로 무력화되면서, 양당의 불신은 더 깊어졌다.

 

문제는 당장 4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대선 역시 “저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네거티브 서사가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말 지지율이 40%에 달하지만, 동시에 정권교체론 역시 절반을 넘어서는 ‘모 아니면 도’ 여론이 반영된 풍경이다. 시민들을 향해 ‘비토 후보’가 누군지 묻는 여론조사 업체도 나타났다. 집권당도 야당도 비토크라시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운 구조다.

 

극심한 여론 양극화에 풍조에 누구보다 책임을 느껴야 할 당사자는 지난 5년간 국정을 이끌어온 청와대다. 하지만 문 대통령 주변에선 높은 임기 말 지지율에 대해 “선거 국면에서 시대에 맞는 리더십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탁현민 의전비서관)이란 자화자찬이 나올 뿐, 반성 메시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새해 종교 지도자들을 만난 문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서 남은 마지막 과제가 국민 사이의 지나친 적대와 분열을 치유하고, 통합과 화합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한 말도, 그래서 공허하게 느껴진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1.27  신의 방패

그리스 신화에는 아이기스(Aegis)라는 ‘신의 방패’가 나온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제작한 것으로 한가운데에 고르곤(메두사)의 머리가 붙어 있다. ‘신들의 신’인 제우스가 자신의 딸이자 전쟁의 신인 아테나에게 준 무적방패로 유명하다. 아이기스는 한번 휘두르면 천둥과 폭풍을 일으키며, 제우스의 번개마저 거뜬히 막아낸다고 한다.

 

무적방패의 군함으로 불리는 ‘이지스함’도 아이기스의 영어식 발음(이지스)에서 따왔다. 미국이 개발한 이지스 시스템은 고성능 레이더와 중장거리 대공미사일을 이용한 통합전투체계로, 목표 탐색부터 공격까지 전 과정을 첨단 기술로 묶는 개념이다. 이 시스템이 탑재된 군함을 이지스함이라고 한다. 한국은 2007년 세종대왕함을 시작으로 현재 총 3척의 이지스함을 보유하고 있다. 이지스함 보유국은 미국과 일본 등 6개국에 불과하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의 핵심인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구속)씨는 자신을 ‘이지스함’이라 칭했다. 회계사 정영학(천화동인 5호 소유주)씨와 나눈 대화에서다. 최근 공개된 녹취록에서 그는 “김만배 방패가 튼튼해. 별명이 이지스함이야”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에 이 큰 사업을 해서 언론에서 한 번 안 두드려 맞는 거 봤어?”라고도 했다. 녹취록에는 50억을 받기로 약속받은 것으로 알려진 ‘50억 클럽’의 이름도 차례로 언급된다.

 

김씨의 변호인은 녹취록이 공개되자 “일종의 블러핑”이라고 해명했다. 친한 사이의 과장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대장동 사업의 민낯을 보면, 김씨의 이야기가 단순한 허풍으로 들리지 않는다. 유력인사 연루와 수백억원의 수익, 의원 아들의 50억원 퇴직금까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모두 믿지 못할 허풍이라고 묻힐 법한 이야기였다.

 

김씨가 이 모든 일의 몸통이고 설계자일까. 대장동 수사의 핵심은 윗선 규명이지만 검찰 수사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25일 곽상도 전 의원에 대해 정치자금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 두 달 전 기각된 영장을 재청구한 것이다. 수사 착수 4개월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이러니 부실 혹은 봐주기 수사 지적이 나온다. 검찰이 의지만 있다면 부패한 권력의 방패는 뚫리게 돼 있다. 신(神)은 그들에게 방패를 주지 않았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1.28(금)  영빈관

청와대 영빈관은 본관, 비서동과 함께 청와대를 구성하는 주요 건물 중 하나다. 대규모 회의나 외국 정상을 위한 공식 행사가 개최되는 곳이다. 청와대의 격(格)이 드러나는 셈이다.

 

지금 영빈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인 1978년에 만들어졌다. 외관은 조선시대 왕이 연회를 열었던 경복궁 경회루와 닮았다. 내부는 프랑스 루이 14세 때 발달한 건축양식을 따랐다. 청와대 상징인 봉황과 무궁화도 새겨져 있다.

 

이 영빈관에는 ‘반쪽짜리’ 논란이 따라붙는다. 외국의 영빈관과 달리 귀빈이 묵을 수 있는 숙소가 없어서다. 미국은 워싱턴 백악관 건너편에 위치한 블레어하우스(Blair House)를 매입해 국빈용 숙소로 활용하고 있다. 링컨 대통령 초상화가 걸린 링컨 룸을 비롯해 100여 개 방이 있다.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 정상이 이곳에서 묵는지, 묵는다면 몇 박을 하는지를 놓고 백악관의 환대 수위가 평가되기도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아내 김건희씨가 “(당선되면) 영빈관을 옮기겠다”는 취지로 말한 녹취록이 공개됐다. 영빈관 건물을 통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예술 수준을 느낄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터를 문제 삼은 것인지 모르겠다. 영빈관은 고종 30년(1893년)에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건립한 경농재(慶農齋)가 있던 곳이다.

 

영빈관에 대한 불만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터져 나왔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2019년 2월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어떤 상징도 역사도 스토리텔링도 없는 공간에서 국빈 만찬과 환영 공연 등 여러 국가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이 늘 착잡했다”고 말했다. 영빈관을 국가 행사가 치러지는 쇼 무대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국격 측면에서 개·보수 필요성에는 공감이 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미크론 대응에 집중하기 위해 올해 신년 기자회견을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영빈관은 문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과 2018년, 2019년, 2020년 세 차례 신년 기자회견이 열렸던 곳이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고,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고 말했다. 공간만 강조해서는 격이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공간을 채우는 내용이 진정성의 격을 높이기도 한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