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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22/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01-10/<1회> 1600년 깊은 잠 깬 비단벌레 장식…- <10>경주 용강동 석실분 발굴, 조유전 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상림은내고향 2022. 1. 30. 15:48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동아일보 

<1회>- 1600년 깊은 잠 깬 비단벌레 장식…

●황남대총 발굴 주역 최병현 교수

 

《 중국 뉴허량(牛河梁) 홍산문화박물관에 가면 주 전시관 입구에 고고학자들의 인물사진과 기록이 전시돼 있다. 홍산문화 발굴과 연구에 기여한 수빙치(蘇秉琦), 궈다순(郭大順) 등의 업적을 기린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유적, 유물만 강조될 뿐 정작 그것들을 땅속에서 찾아내 생명력을 불어넣는 고고학자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광복 이후 첫 발굴인 경주 호우총 발굴 7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는 한국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들과 함께 발굴 현장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를 싣는다.  

 

1975년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남분 발굴 당시 최병현(맨위 사진 오른쪽) 1일 황남대총을 다시 찾은 모습. 그는 “벌써 40년이 넘었지만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누가 이따위로 땅을 팠어! 

1973 5월 경주 천마총 발굴 현장. 당시 김정기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불호령에 26세 청년의 낯빛이 사색이 됐다. 두 달 동안 봉토를 걷어낸 끝에 드러난 석렬(石列)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호통에 청년은 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웬만하면 흥분하지 않는 김 단장이었기에 더 부끄러웠다.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발굴단에 합류했던 청년은 그날 밤 근처 합숙소로 돌아와 몰래 보던 서양사 원서를 책상에서 치웠다. 그러고는 일제강점기부터 당시까지 발간된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보고서를 전부 찾아서 읽었다. 그는 그해 천마총 발굴에 이어 곧바로 황남대총 발굴에 투입돼 현장 인부들을 감독했다. 한때 서양사학자를 꿈꿨던 청년은 39년 뒤 비명문대 출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돼 한국 고고학계 석학으로 우뚝 섰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68)의 이야기다.


○ 비단벌레 장식, 1600년 만에 빛을 내뿜다 

1975 8월 중순 경주 황남대총 남쪽 무덤. 목곽 안에서 말띠드리개(행엽·杏葉)와 더불어 엎어진 채 땅에 묻혀 있던 안장 뒷가리개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최병현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직접 꽃삽과 대칼(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은 발굴 도구)을 잡았다. 흙을 걷어낸 뒤 안장을 살짝 들춰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1600년 동안 깊은 어둠 속에서 발하던 영롱한 빛이 그의 눈에 잡혔다. 비단벌레 2000마리의 날개를 일일이 뜯어내 붙인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였다. 

발굴 현장은 순식간에 초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이미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비단벌레 장식 파편을 발굴해 본 경험이 있어서 이 유물이 얼마나 빛과 습도에 민감한지 최병현은 알고 있었다. 즉시 커다란 솜에 물을 묻혀 장식 위에 덮고 발굴을 중단했다.

화학을 전공한 김유선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김유선은 비단벌레 날개 시료를 서울로 가져가 보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을 했다. 그가 고군분투한 1주일 동안 유물은 물에 젖은 솜을 뒤집어쓴 채 고스란히 무덤에 묻혀 있었다. 마침내 햇볕을 차단한 채 글리세린 용액에 빨리 담가야 한다는 지침이 떨어졌다. 최병현은 유물을 무덤에서 꺼내 나무상자에 넣은 뒤 글리세린을 부었다. 한 사람이 발굴부터 유물 보존처리까지 맡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비단벌레 2000마리의 날개를 뜯어서 붙인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1975 8월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출토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황남대총 발굴, 그 명과 암 

황남대총은 길이 120m, 너비 80m, 높이 23m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 무덤이자 대표적인 신라 적석목곽분이다. 규모에 걸맞게 5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신라 고분에서 최대 발굴로 손꼽힌다. 당시에는 고고학 분야 석학이던 삼불 김원룡(19221993)조차 경주 황오리의 소형 고분만 발굴해 본 정도였다. 김정기를 단장으로 김동현(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건길(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병현으로 이어진 발굴팀은 당시 고고학계에서 경험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길을 걸은 셈이다. 

최병현은 황남대총 등 여러 발굴을 통해 신라 적석목곽분이 서기 46세기 마립간의 무덤임을 규명해내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신라 적석목곽분의 상한 연대를 5세기로 내려본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탈피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는 “최 명예교수는 45세기 경주 일대를 제외한 낙동강 동부 지역이 가야 영토라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부정하고 신라의 영역이었음을 토기 유물 등을 통해 실증적으로 고증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최병현은 “지금이라면 황남대총 발굴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한국 고고학 초창기였던 당시, 정부에 의해 황남대총 발굴이 결정됐다. 천마총과 달리 황남대총 발굴은 급하게 진행돼 토층도조차 그리지 못할 정도로 봉토 조사 등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고 칠기와 금속 등 유물 손상을 막지 못했다.

 

다음은 최병현의 회고.

“김 단장은 당시 ‘현 수준에서 황남대총 발굴은 겁 없는 짓’이라고 했다. 당시 고고학 수준이 미흡한 상황에서 황남대총을 파면 도리어 유물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발굴을 주저했다. 천마총에서 유물이 꽤 나오면 황남대총까지 파지 않아도 될 것으로 기대했다. 황남대총은 지금이라면 발굴에 최소 1015년이 걸릴 현장이었다. 신라 고분 연구에 엄청난 영향을 줬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 신광섭 울산박물관장

용꿈꾼 날 건져올린 백제 최후의 걸작 ‘금동대향로’

신광섭 울산박물관장이 15일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백제금동대향로’를 보며 1993년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향로 위쪽의 산봉우리 부분을 평면에 펼친 전개도(맨아래 그림)에 각양각색의 신선과 동물들이 보인다. 부여=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여보, 간밤에 용꿈을 꿨지 뭐예요. 

“당신 늦둥이라도 낳으려는가. 하하. 

 

1993 12 12일 오후 8시 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능산리 사지) 발굴 현장에 있던 신광섭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65·현 울산박물관장)은 이날 아침 출근길에 아내와 나눈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거대한 용이 온몸을 비틀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용의 아가리 위로 연꽃이 피고 다시 그 위로 첩첩산중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펼쳐졌다.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15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신선 세계 묘사한 백제의 특급 문화재 

백제금동대향로는 지금껏 발굴된 백제 문화재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손꼽힌다. 얼마나 귀한지 국외 반출 금지 문화재로 지정돼 지금껏 한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향로는 백제 후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높이 61.8cm, 무게 11.8kg에 이르는 이 대형 향로는 중국의 박산향로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예술성이나 규모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꼭대기에 봉황이 달린 향로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다섯 겹에 걸쳐 이어져 있다. 봉우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활을 쏘는 무사부터 머리를 감는 선인(仙人), 각양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樂士)들까지 총 18명의 인물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이뿐인가. 호랑이와 사슴, 사자, 반인반수(半人半獸) 65마리의 온갖 동물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광섭이 꼽는 백미는 향로 전체를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용이다. “역동적인 용틀임은 누가 봐도 힘이 넘쳐요. 특히 용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은 ‘연화화생(蓮華化生·연꽃에서 만물이 탄생한다는 세계관)’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993 12 12일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직후의 모습(맨 위). 신광섭 관장(맨 아래)과 조사원들이 막 꺼내온 향로의 이물질을 닦아내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1500년 깊은 어둠을 뚫고 다시 세상으로 

향로가 출토된 과정은 용꿈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발굴팀은 당시 신광섭을 비롯해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김정완(현 국립대구박물관장), 학예연구사 김종만(현 국립공주박물관장) 등으로 구성됐다. 부여군이 나성(羅城)과 능산리 고분 사이에 관람객을 위한 주차장을 짓기로 함에 따라 1993년 마지막 발굴이 시작됐다. 여건상 예산이 부족한 데다 시간에 쫓겨 자칫 능산리 절터는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부여 토박이인 신광섭은 예부터 이곳에서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된 사실에 주목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 “왕릉(능산리 고분)과 나성에 인접한 곳이라면 뭔가 중요한 시설이 있을 것 같다는 감이 왔어요.

 

신광섭은 박물관계에서 ‘불도저’로 통한다.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노태섭 기념물과장(전 문화재청장)을 만났다. 발굴 현장을 많이 다녀본 노태섭도 남다른 감을 갖고 있었다. 과장 전결로 2000만 원의 예산 지원이 즉시 이뤄졌다. 신광섭은 한발 더 나갔다. 당초 시굴(발굴에 앞서 유구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일부만 파보는 것)로만 발굴 허가가 났지만 과감히 절터 서쪽 건물터(나중에 공방 터로 밝혀짐)에 대한 전면 발굴에 나섰다. 발굴 성과가 제때 나오지 않으면 주차장 공사가 강행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도왔어요. 여기서 향로가 나올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1993 12 12일 오후 4. 현장을 지휘한 학예연구사 김종만이 향로를 처음 발견했다. 절터 서쪽 공방터 안 물웅덩이에서 금속편이 살짝 노출된 것이다. 오래전 지붕이 무너져 내려 너비 90cm, 깊이 50cm의 웅덩이에는 기와 조각과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조사원들은 인근에서 나온 금동광배의 조각으로 알았다. 김종만의 보고를 받은 신광섭이 곧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인부들을 모두 퇴근시킨 뒤 엎드린 자세로 손수 기와를 하나씩 빼냈다. 웅덩이 안에서 솟구치는 물을 스펀지로 계속 닦아 내야 했다. “유물이 다칠까 봐 몇 시간 동안 맨손으로 파냈어요. 추운 겨울 저녁에 연신 손을 찬물에 담갔더니 점점 감각이 없어집디다.” 오후 8시 반. 3시간여의 작업 끝에 드디어 향로 뚜껑과 받침의 윤곽이 모두 드러났다.

 

고고학계는 백제 말기인 사비시대에도 문화예술이 고도로 융성한 사실을 금동대향로가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종래는 백제의 공예 기법이 무령왕릉이 조성된 웅진시대에 절정에 달한 뒤 사비시대부터 점차 쇠퇴한 것으로 봤다. 특히 금동대향로를 중국 남조에서 수입한 것으로 봤던 견해는 점차 힘을 잃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2007년과 2009년 부여 왕흥사지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각각 출토된 사리장엄(舍利莊嚴·사리를 봉안한 공예품)은 백제가 금동대향로와 같은 고도의 예술품을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췄음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여=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3> 몽촌토성 발굴 박순발 교수

석달간 맞춘 토기 조각… 몽촌토성의 비밀을 밝히다

 토기-기와 조각 수천 개 전수조사… 후배들과 박물관서 합숙하며 복원 
고구려의 ‘네귀 달린 항아리’ 첫 발견… 박 교수, 실측부터 통계작업 병행 
백제왕성의 높은 위상 밝혀내

 

박순발 충남대 교수가 28년 전 손수 발굴했던 몽촌토성 건물터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89 1월 서울대 중앙도서관 6층 박물관. 몽촌토성에서 발굴한 토기 조각을 하나씩 붙여 나가던 박순발 조교(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토기 가운데 귀가 네 개나 달린 묘한 토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까지 학계에 보고된 바 없는 특이한 형태였다. 박순발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여느 백제 토기와 다른 유형임을 직감했다.

 

몇 해 전 일본에서 복사한 중국 랴오닝(遼寧)대의 ‘국내성 발굴 보고서’(1984년 발간) 사진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허둥지둥 보고서를 찾아본 그는 무릎을 쳤다. 여기 실린 고구려 토기 사진과 몽촌토성 출토품의 기형(器形)이 서로 닮았던 것. 올림픽공원 건설을 계기로 진행된 몽촌토성 발굴에서 고구려 토기인 ‘네 귀 달린 긴 목 항아리(광구장경사이호·廣口長頸四耳壺)’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박순발은 망외의 소득을 거뒀다. 1977년 서울 광진구 구의동 유적에서 출토된 항아리도 광구장경사이호라는 사실이 12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한때 백제 고분으로 알려진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의 군사시설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몽촌토성과 더불어 한강 유역의 패권을 둘러싼 백제와 고구려의 대결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준 현장이었던 셈이다.

 

백제왕성 터인 몽촌토성에 고구려 토기가 묻혀 있으리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사실 1988 6월 토기 편을 현장에서 발굴한 박순발조차 조각만 봐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서른한 살 석사과정의 고고학도로 그해 몽촌토성 발굴에 나섰던 박순발의 회고. “토기와 기와 조각 수천 개를 전수조사해서 하나씩 복원해 나갔습니다. 서울대 고고학과 학부생 10명을 불러놓고 석 달간 박물관에서 먹고 자면서 퍼즐을 맞춰 나갔죠. 인고의 시간이었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박순발은 1988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한기가 올라오는 박물관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아놓고 후배들과 합숙에 들어갔다. 발굴보고서 제출 시한이 1988 12월로 임박했지만 그의 성격상 일부 유물만 조사하고 넘어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학부 24학년생이던 성정용(현 충북대 교수) 최종택(고려대 교수) 임상택(부산대 교수) 김장석(서울대 교수) 등을 모아놓고 토기 실측과 복원, 촬영, 현상 등을 한꺼번에 진행했다. 사진 현상은 박물관 화장실을 개조한 암실을 이용했다 

 

1980년대 당시 발굴 현장 모습(맨 위)과 이곳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인 ‘광구장경사이호’(맨 아래). 박순발 교수·서울대박물관 제공

 

고분이 아닌 건물터 발굴 현장에서 토기 편을 모두 실측하고 복원한 것은 1980년대에는 극히 드물었다. 복원은커녕 측량도 하지 않은 토기 편이 박물관 수장고에 굴러다니는 게 다반사였다. 박순발의 집요한 전수조사 방식은 서울대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면서 체득한 나름의 원칙이었다. 출토품을 모조리 조사하고 복원해 계통대로 유형을 분류해 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1985년 경기 용인 서리 고려백자 가마터를 발굴하면서 도자기 편을 정리해 보고서를 낼 때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박순발은 토기에 대한 실측과 복원에 그치지 않고 형태별로 세부적인 통계작업까지 병행했다. 1980년대 국내 고고학계에서 구체적인 숫자를 접목해 토기의 양식과 제조 시기를 정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는 특히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전문도기(錢文陶器·동전 무늬를 새긴 도기)3세기 중국 동오(東吳) 지역 등에서 제작됐다는 점에 착안해 몽촌토성이 3세기 후반 건립됐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현재 몽촌토성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지만 박순발의 주장이 다수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고학계는 박순발의 최대 강점을 폭넓은 공부에서 찾는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는 “박 교수는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대금구)이 중국 동진에서 넘어온 사실을 규명했다”며 “고급 사치품인 중국 동진 자기(磁器) 출토품과 더불어 왕성으로서 몽촌토성의 위상을 밝혀냈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는 따르는 법. 1980년대 몽촌토성 발굴에서 아쉬웠던 점을 묻자 박순발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유구가 복잡하게 중복된 동남지구에서 땅을 파서 만든 수혈(竪穴) 유구만 찾느라고 도로나 마당같이 지상에 조성된 유구를 놓친 게 안타까워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왕궁 터를 찾을 땐 이걸 꼭 유념했으면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4> 다호리 발굴한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

2000년 전 붓과 삭도… 한반도 문자문명 시대를 알리다

▲11일 경남 창원시 다호리 유적을 찾은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그는 28년 전인 1988년 다호리 1호 고분을 직접 발굴했다. 창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이 연구관, 창원 다호리 유적에 도굴이 심하다는데 직접 가서 조사해 보시오.

 

1988 1월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이건무 학예연구관(전 국립중앙박물관장·현 도광문화포럼 대표)에게 현장조사를 지시했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 고분군은 도굴꾼들 사이에서 ‘실습장’으로 통할 정도로 유물 도난이 빈번했다. 1980년대 국가 사적 발굴을 주도한 박물관이 묵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건무는 이영훈(현 국립중앙박물관장), 윤광진(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신대곤(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학예연구사와 함께 다호리로 향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야트막한 구릉 곳곳에 원삼국시대 고분을 파헤친 도굴갱 4050개가 줄지어 있었다. 생각보다 극심한 도굴 피해에 이건무는 다급해졌다. 한겨울 대기에 노출된 유구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급격한 손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팀원들과 하루 내내 전체 고분에 대한 현황 파악을 마친 뒤 이 중 구덩이가 제법 큰 1호분 발굴에 그달 21일 착수했다. ‘뭔가 있어 보인다’는 그의 직감은 곧 ‘월척’으로 이어졌다.

 

도굴꾼이 깔아놓은 볏단을 치우자 약 2m 깊이의 도굴갱 아래로 너비 0.8m, 길이 2.4m의 통나무 목관 상판이 드러나 있었다. 목관 내 유물을 빼내기 위해 도굴꾼들이 상판 일부를 깨뜨려 놓았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였다. 발굴팀은 목관을 빨리 수습하기로 하고 주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구덩이 안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진흙탕이 돼 바가지로 물을 퍼내야 했다. 겨울에 물을 퍼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이것은 축복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어어, 목관 밑에 뭔가 있다! 

 

목관에 체인을 감아 도르래로 들어올리자 바닥에 박혀 있던 동경(銅鏡) 조각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발굴팀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 대나무 바구니가 박힌 조그마한 구덩이가 있었다. 부장품을 따로 묻은 구덩이 ‘요갱(腰坑)’이었다. 요갱 안에는 △철검, 꺾창, 쇠도끼, 낫 등 철기와 △칼집, , 화살, (), 부채, 붓 등 칠기(漆器) △동검, 동경 등 청동기 등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원삼국시대 변한의 목관과 칠기가 부식되지 않고 20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물 덕분이었다. 매장 직후 물이 뒤섞인 진흙이 목관을 덮어 외부 공기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의 진흙 구덩이에 묻혀 있던 통나무 목관(맨위 사진). 목관을 도르래로 꺼내(두 번째) 연구실에서 세척을 마친 뒤(세 번째) 보존 처리에 들어갔다. 목관 밑 구덩이에서는 2000년 전 붓(네 번째)이 발견됐다. 이건무 대표 제공

 

이건무가 꼽는 다호리 유적 최고의 유물은 뭘까. 그는 주저 없이 붓과 삭도(削刀·목간에 잘못 쓴 글씨를 깎아내는 지우개)를 들었다. 완형으로 처음 출토된 통나무형 목관도 학술적 의미가 상당하지만, 부장된 붓과 삭도의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얘기다. 고고학계는 다호리 유적의 붓과 삭도를 기원전 1세기경 한반도에서 문자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본다. 이건무의 회고. “당시 한 일본학자가 옻칠용 붓이라며 의미를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쪽 자료를 검토해 보니 다호리와 마찬가지로 붓과 삭도, 천평(天枰·저울)이 한 세트로 출토된 사실이 확인됐어요. 마치 지금의 영수증처럼 천평으로 물건을 단 뒤 매매 기록을 죽간(竹簡)에 붓으로 기록한 흔적인 겁니다. 

 

이와 관련해 다호리 1호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대표적 위세품인 한나라 오수전(五銖錢)이 함께 나왔다. 기원전 1세기 변한의 풍부한 철기를 매개로 중국, 왜와 교역을 벌여 부를 쌓은 이 지역 수장이 묻혔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됐다.

 

28년 만에 다호리 발굴현장을 다시 찾은 그에게 혹여 아쉬움으로 남는 게 있는지 물었다. 그는 푯말 하나 없이 잡초만 무성한 1호분 자리를 한참 바라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시 겨울인 데다 추가 도굴이 걱정돼 서두른 감이 있어요. 경찰에 유구 보호를 요청하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서 발굴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땐 발굴팀원들이 돌아가면서 밤에 고분 주변을 순찰할 정도로 도굴 우려가 컸어요. 지금이라면 가설 덧집을 세우고 실측도 꼼꼼히 하면서 진행했을 겁니다. 그리고 발굴종합보고서를 2012년에야 뒤늦게 발간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김상운 기자

 

 <5>대성동 고분 발굴한 신경철 부산대 교수

20년만에 찾은 금관가야 왕릉… “이게 꿈인가” 등골이 오싹

신경철 부산대 교수가 21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 29호 고분을 복원한 노출전시관에서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해=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할배, 여기 옛날 이름이 뭡니까? 

“예전부터 ‘애꾸지’ 아이가. 

 

1989 7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온통 밭이던 야트막한 구릉 일대를 조사한 신경철 당시 경성대 교수(65·현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가 동네 토박이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애꾸지가 혹 ‘애기 구지봉’을 줄여 사투리로 부른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구지봉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탄생지. ‘그렇다면 애기 구지봉은 그의 후손인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이곳은 반경 500m 안에 김해 패총과 고인돌, 대형 옹관묘가 자리 잡고 있어 신경철이 금관가야 왕릉 후보지 중 하나로 올려놓고 있었다. 앞선 실패로 한동안 실의에 빠진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표조사에 들어갔다. 스무 번 넘게 대성동 주변을 드나들면서 토기편들을 손에 쥘 수 있었다. 

 

1990 8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1호 고분 발굴 직후 신경철 교수(오른쪽)가 현장에서 출토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신경철 교수 제공

 

신경철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대학 당국에 찾아가 “사재라도 털겠다”며 발굴 지원을 요청한 것. 앞서 그가 이끈 경성대 박물관 발굴팀은 19871988 3차에 걸쳐 김해 칠산동 고분을 발굴했지만 부산 복천동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유물들만 건졌다. 가야연맹의 맹주국이던 금관가야의 왕릉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첫 발굴 고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시 사립대의 열악한 재정 여건상 또 헛물을 켠다면 발굴은 곧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신경철은 1990 6월 대성동 구릉에서 가장 높고 입지가 좋은 동남쪽 능선 정상부에 삽을 꽂았다. 지표로부터 채 1m도 파지 않은 곳에서 토기편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도굴 갱이 발견돼 잠시 절망했지만, 3m 깊이의 흙구덩이 밑에서 통형동기(筒形銅器·창자루 끝에 꽂는 의례용 청동기)가 나왔다. 일본 고훈시대 수장급 고분에서만 1, 2점씩 들어 있는 통형동기가 8점이나 나온 데다 함께 출토된 금동 마구, 철제 무기, 그릇받침(器臺·기대)의 제작 수준이 매우 높다는 사실에 신경철은 전율했다. 게다가 목곽의 규모는 길이 6m, 2.3m에 달했다. 그는 이곳이 근 20년을 찾아 헤맨 금관가야 왕릉임을 직감했다. 

 

이달 21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 앞에서 만난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1호분 자리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부산대 사학과 재학 시절부터 방학마다 금관가야 왕릉을 찾으려고 답사를 떠났어요.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금관가야 본거지인 김해에서 왕릉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내 손으로 금관가야 왕릉을 꼭 찾아보고 싶었어요.

 

고고학계에서는 흔히 발굴 운()이 좋으면 연구 실력이 안 따르고, 연구 실력이 좋으면 반대로 발굴 운이 안 따른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신경철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고고학자로 통한다. 그는 발굴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금관가야 지배층이 부여에서 건너왔다는 파격 주장을 1992년 논문에서 처음 발표했다. 1호분 발굴 이후 4개월 만에 찾아낸 29호분(서기 3세기 말 조성)에서 중국 네이멍구 고원지역의 이름을 딴 ‘오르도스형 청동솥(銅복·동복)’과 도질토기(陶質土器·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회청색 토기), 순장 등 북방계 유목민족의 문화적 속성이 잇달아 발견된 것. 

 

“오르도스형 동복은 중국 동북지방부터 중앙아시아, 이란까지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29호분 동복을 세부적으로 관찰하면 귀의 단면이 볼록한데 이것은 주로 중국 지린(吉林) 성 북부나 헤이룽장(黑龍江) 성 남부에서 발견되는 유형이죠. 바로 부여의 근거지입니다.

 

당시 학계 반응은 차가웠다. 북방계 기마민족이 남하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도달했다는 에가미 나미오 도쿄대 교수의 ‘기마민족설’ 아류가 아니냐는 시각이었다. 이에 대해 신경철은 “에가미 교수와 나의 학설은 이동 루트부터 완전히 다르다”고 반박한다.

 

현재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동복을 부여계로 단정할 수 없고 △대성동에서 나온 고식 도질토기, 목곽묘와 비슷한 양식이 경주에서도 발견된다는 점 등을 들어 ‘부여 이동설’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서기 4세기대 문헌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금관가야 왕릉인 대성동 고분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는 게 일치된 견해다.

김상운 기자

 

  <6회> 익산 미륵사지 사리장엄 발견…

석탑 해체 중 새어 나온 1370년前 황금빛에 모두가 ‘동작 그만’

▲4일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 해체 보수 현장에서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이 탑의 심주석을 가리키고 있다. 7년 전 첫 번째 심주석 안에서 백제시대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익산=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솔직히 다보탑이나 석가탑 해체보수 때에도 느끼지 못한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실수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4일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 해체보수 현장. 석탑 1층 기단 위에서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탑의 중심 기둥 돌)을 바라보던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6)은 떨리는 목소리로 7년 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발견 당시를 회고했다.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담은 항아리(사리호·舍利壺), 사리를 모시게 된 경과를 기록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물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배 소장이 “여기서 희대의 유물이 나오리라고 생각도 못했다”며 옛 기억을 되짚는 동안 현장 인부들은 쉴 새 없이 목봉(木棒)을 내리쳐 상층 기단부의 흙을 다지고 있었다.

 

2009년 1월 14일 오전에도 이곳은 해체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번째 심주석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린 순간 배병선(당시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과 연구원들은 저절로 ‘동작 그만’이 됐다. 살짝 벌어진 심주석 틈 사이로 1370년 동안 갇혀 있던 황금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사리장엄구였다. 통상 심주석 아래 심초석(心礎石)에 들어 있는 사리장엄구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미륵사지 서쪽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맨위 사진)와 사리호(아래 사진). 사리봉영기 금판 위에 붉은색 주칠이 칠해져 글자가 선명하다.이 중 ‘백제 왕후는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명문은 백제 역사에 대한 해석을 바꿔놓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배병선은 유물 촬영 사진을 들고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허겁지겁 올라갔다. 최맹식 당시 고고연구실장(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이난영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관(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이규식 보존과학연구실장(문화재보존과학센터장) 등 전문가 29명으로 ‘유물 수습팀’이 구성돼 현장에 급파됐다.

 

심주석 안 26.5cm 깊이의 구멍(사리공)에는 금으로 만든 사리호가 온갖 구슬들에 파묻힌 상태였다. 첫눈에 봐도 지금껏 발굴된 백제 금속 유물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수습팀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유물을 꺼내는 순서를 정하는 일이었다. 사리공에는 사리호, 금으로 만든 사리봉영기, 은으로 만든 관식(冠飾), 청동합(靑銅盒), 금 구슬, 유리구슬, 유리판 등 9900여 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안치된 순서와 반대로 유물을 꺼내야 손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워낙 좁은 공간에 유물들이 밀집해 있다 보니 굴절거울 등을 동원해도 안치된 순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사리호와 사리봉영기 가운데 무엇을 먼저 꺼낼지 의견이 엇갈렸다. 배병선은 고민 끝에 사리호부터 꺼내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 “사리봉영기가 사리공 벽면에 걸쳐 있어서 밑이 살짝 뜬 상태였어요. 금판에 새긴 글자 위의 주칠(朱漆·붉은색 옻칠)이 떨어져 나갈까 봐 몹시 조심스러웠습니다. 사리호랑 직접 붙어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어요.”

 

금 구슬을 꺼낼 땐 떨어뜨릴 것을 우려해 핀셋 대신 양면 접착테이프를 붙인 막대기로 하나씩 건져 올렸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외부 공기에 노출된 유물의 손상을 막으려면 신속한 수습이 필요했다. 이틀에 걸쳐 밤을 꼬박 새우면서 강행군을 벌였다. 배병선은 발견부터 수습 완료까지 사흘 동안 6시간만 자고 버텼다.

 

사리봉영기의 명문은 백제사에 대한 해석을 바꿨다. 특히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내용은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의 건립 연도와 발원 주체를 확인시켜 줬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명문을 근거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잘못이며, 선화공주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선화공주 실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륵사가 ‘3탑 3금당’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사찰이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중앙 목탑 터에 선화공주의 사리봉영기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학)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보고서’에서 “조성 연도가 확인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구는 다른 백제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거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7>황룡사지의 비밀 캔 김동현 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22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지 목탑 터에서 심초석 위에 놓여 있는 막음돌을 가리키고 있다. 막음돌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으로 황룡사가 불탄 뒤 심초석 내 사리가 들어 있는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경주=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아이고마 보는 사람 심장이 다 떨어지겠습니더.”

 

1978년 7월 28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 터 발굴 현장. 포항제철의 크레인 기사가 최병현 조사원(현 숭실대 명예교수)에게 소리쳤다. 30t 무게의 목탑터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을 대형 크레인으로 들어올리자마자 최병현과 동료가 그 아래로 들어간 것. 이들은 심초석 밑에 혹 유물이 묻혀 있는지 샅샅이 훑었다. 심초석을 옮겨서 내려놓을 때 잔존 유물이 파괴되는 걸 막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워낙 무겁다 보니 크레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릴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동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79)의 입술도 바싹 타들어 갔다.

 

22일 팔순에 가까운 김동현은 38년 만에 다시 그 자리에 섰다. 그는 지팡이를 짚은 채 약 8만 m²의 광활한 황룡사 터 한가운데 있는 9층 목탑 터로 서서히 걸어갔다. 심초석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이윽고 입을 뗐다. “들어올릴 때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갑자기 3년 전 월지(안압지) 목선 사고가 머릴 스치더군요. 머리카락이 쭈뼛 섰습니다.”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1978년 황룡사지에서 발굴한 대형 ‘치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975년 경주 월지 뻘층에서 인부들이 목선을 파낸 뒤 옮기는 과정에서 목선이 두 동강 나는 사고가 벌어졌다. 당시 현장을 지휘한 김동현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지만 곧 반려됐다. 그는 심초석을 옮기며 그때의 악몽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다행히 돌은 무사히 빈 땅에 안착했다.

 

사실 당시 누구도 탑의 심초석 아래를 발굴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석탑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수습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구태여 무거운 심초석을 들어내 발굴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이었다. 황룡사 터 심초석 발굴 때에도 일부 학자들은 사고 위험을 거론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건축공학을 전공한 김동현의 생각은 달랐다. 탑의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가장 아랫부분의 기초를 확인해야 한다고 봤다. “난 발굴에 들어갈 때 인문학적인 요소 이상으로 공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졌어요. 천마총 발굴 땐 소요 인력이나 흙, 돌의 양을 수치로 계산해 봤습니다. 정통 고고학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영역이죠.”

 

심초석 아래는 그의 예상대로 적심석(積心石·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이 설치돼 있었다. 평평하지 않은 자연 지형에서 거대한 하중을 지탱할 수 있는 구조였다. 신라인들의 지혜가 발휘된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의 존재였다. 심초석이 놓였던 자리를 10cm가량 파내자 청동거울과 금동 귀고리, 청동 그릇, 당나라 백자항아리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한꺼번에 나왔다. 탑을 세울 때 귀족들이 사용하던 장신구를 부처에게 바친 공양품과 액땜을 위해 땅속에 묻는 예물인 진단구(鎭壇具)였다.

 

이것은 한국 고고학사에서 새로운 해석을 낳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는 장례용 의례품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황룡사 공양품으로 발원자가 착용한 귀고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것이 신라시대 당시 실생활에도 쓰였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게다가 이 귀고리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 연도(645년)를 통해 시기가 확인되기 때문에 다른 신라 귀고리의 양식이나 편년을 비교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됐다.

 

▲1978년 7월 28일 무게가 30t에 이르는 황룡사지 목탑 터 심초석을 당시 포항제철에서 빌린 크레인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무엇보다 고고학계가 꼽는 황룡사지 발굴의 최대 성과는 황룡사의 가람 배치가 1탑(塔) 3금당(金堂)식이라는 사실을 처음 규명한 것이다. 즉, 9층 목탑을 가운데 두고 북쪽에 3개의 금당을 나란히 세운 황룡사의 독특한 가람 배치를 알아낸 것이다. 1978년 이전까지 황룡사의 가람 배치는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전 도쿄대 교수가 1930년 논문에서 주장한 ‘1탑 1금당’이 정설이었다. 광복 33년 만에 일제강점기의 부실한 발굴 성과를 우리 손으로 극복한 것이다.

 

“1980년 일본 도쿄대로 유학을 갔는데 지도교수에게서 ‘황룡사 발굴 현장에 압도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내가 최고로 치는 황룡사 출토 유물은 높이 2m짜리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입니다.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신라인들은 이 거대한 치미를 통째로 가마에서 구워 냈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 사찰은 나무로 짠 틀에 동판을 붙여 치미를 겨우 흉내 냈죠. 황룡사는 위대한 선조들이 남긴 압도적인 문화유산입니다.”

 

<8>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굴 배기동 교수

▲배기동 한양대 교수가 4일 경기 연천군 전곡선사박물관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등 출토 유물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서 1978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돼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연천=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4일 경기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곳곳에 화려한 전시물과 행사용 텐트가 들어서 보통의 유적지와는 색다른 분위기였다. 다음 날 열릴 연천군의 ‘전곡리 구석기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올해로 24년째를 맞는 이 축제는 발굴로 불편을 겪는 전곡리 주민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64)가 처음 만들었다. 올해는 나흘 동안 관람객 60만 명이 행사장을 찾았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날 행사장을 둘러보던 배기동은 “한때 개발제한 때문에 주민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만 구석기 축제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잠시 뒤 그는 나무로 둘러싸인 외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한국 고고학의 대부 삼불 김원룡 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1922∼1993)의 추모비가 있다. 내년 정년퇴임을 앞둔 반백의 노(老) 교수는 비석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입을 뗐다. “삼불 선생님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삼국시대 마구(馬具)를 전공하려고 한 그에게 삼불은 구석기 연구를 권했다. 이를 계기로 배기동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을 25년에 걸쳐 발굴하게 됐다.

 

▲1980년대 경기 연천군 전곡리 유적 발굴 당시 모습(위 사진). 여기서 출토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아래 사진)는 양쪽 면을 갈아 두 손을 모은 듯한 모양이다. 배기동 교수 제공

 

1981년 11월 1일 오전 10시 전곡리 발굴현장. 한탄강변의 질퍽한 모래흙을 2m가량 파내려갔을 때 서울대 화학과 학부생 한 명이 “무언가 나온 것 같다”며 배기동을 찾았다. 타원형의 돌이 흙 사이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꽃삽과 붓으로 조심스레 돌을 노출시키던 배기동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간 흔적이 뚜렷한 옆면이 나타난 것. “처음에는 자연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파보니 전형적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였어요. 그때까지 발견된 주먹도끼들 가운데 가장 얇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양쪽 면을 갈아 타원형 모양인 전기 구석기의 대표적인 석기다. 프랑스의 생아슐 지방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약 14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생겨나 10만 년 전까지 사용됐다. 고고학계가 아슐리안 주먹도끼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찍개 등에 비해 복잡한 가공작업을 거쳐야 해 고(古)인류의 진화 과정을 풀 열쇠로 보기 때문이다. 학계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쓰임새가 많다는 이유로 ‘구석기의 맥가이버 칼’이라고도 부른다.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존재할 뿐 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모비우스의 학설’이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에 의해 발견됐다. 모비우스의 학설이 무너지고 고고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보웬이 삼불에게 주먹도끼를 보여준 이듬해부터 시작된 전곡리 발굴에 참여할 당시 배기동은 27세 청년이었다.

 

그때 발굴단에서 함께 땀을 흘린 후배들은 현재 고고학계 중진이 됐다. 최성락(목포대 교수) 임영진(전남대 교수) 이영훈(국립중앙박물관장) 박순발(충남대 교수) 김승옥(전북대 교수) 등은 주말마다 현장을 찾아와 작업을 거들었다. 당시 배기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금일봉으로 현장에 지은 유물전시관에서 아내와 기거하며 발굴을 이어갔다. 그는 “버스를 타고 오지까지 와서 주말을 희생한 후배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발굴 뒷이야기를 묻자 그는 1983년에 서울 용산의 우물업자들을 찾아간 이야기를 꺼냈다. 토층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면 2m 높이의 흙을 한꺼번에 퍼내야 했는데, 당시엔 마땅한 기술이 없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우물 파는 기술을 응용해 긴 관으로 토층 샘플을 담는 데 겨우 성공했다. 1986년 발굴 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굴착기로 땅을 파면서 6·25전쟁 때 매설된 지뢰들이 드러난 것. 만약 삽으로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고고학계는 전곡리 유적의 연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지만 전곡리가 한국 선사고고학의 개척지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지질학 등 자연과학자들이 발굴에 참여한 첫 사례로 학제 간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의미도 있다. 그는 “4만∼5만 년 전과 30만∼40만 년 전으로 엇갈린 연대 논란을 끝낼 수 있는 연구방법을 지금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9>고구려 ‘아차산 보루’ 발굴, 최종택 고려대 교수

 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20일 서울 광진구 아차산 4보루 출입 시설 앞에서 최종택 고려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20일 서울 광진구 아차산 등산로. 가파른 산길을 지나 능선을 따라 1시간을 걷자 어른 키 높이의 성벽이 나타났다. 고구려 산성의 전형적인 방어 시설 ‘치(雉·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관찰하거나 막기 위한 시설)’도 보인다. 남한 최대의 고구려 유적인 아차산 보루 중 4보루다. 명칭은 4보루이지만 1997년 아차산 보루 중 처음 발굴됐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장관이다. 삼국시대 군사 요충지답게 한강과 중랑천 주변은 물론이고 멀리 몽촌토성과 풍납토성까지 조망할 수 있다.

 

▲최종택 교수가 2005년 아차산 3보루에서 고구려 토기를 발굴하고 있다(위 사진). 1997년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後部都○兄’ 명문 토기. 최종택 교수 제공

 

함께 산에 오른 최종택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52)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보루 북쪽을 가리켰다. “저곳에 군용 헬기장이 있었습니다. ‘H’ 표시의 돌 가운데 고구려 온돌에 쓰인 뚜껑돌도 있었죠. 여기서 19년 전인 1997년 9월 23일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바로 땅을 팠습니다.”

 

○ 그토록 찾아 헤맨 ‘반쪽’을 찾다

1997년 10월 25일 아차산 4보루 중앙부에서 둥근 토기 접시 하나가 나왔다. 토기 조각은 여럿 나왔지만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최종택은 고고학자가 일생에 한 번도 만져 보기 힘든 ‘대박’임을 직감했다. 반으로 쪼개진 접시 한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자가 있었던 것. 흥분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명문을 차근차근 해석했다. ‘후부도(後部都)’였다. 그런데 일부러 깬 듯한 그릇 단면에서 글자가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단면에 낀 이끼로 추정컨대 오래전에 깨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한 명문을 찾아내야만 했다.

 

▲용마산 2보루에서 출토된 각종 토기류. 서울대 박물관

 

이때부터 지난한 토기 색출 작업이 시작됐다. 발굴을 위해 판 흙을 모두 수거해 일일이 체로 걸러봤지만 허사였다. 산을 내려가 그동안 찾아낸 토기 조각들을 풀어 놓고 하나씩 다시 조사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쪽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최종택은 가슴을 치며 안타까움을 삭여야 했다.

 

홍련봉 1보루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 최종택 교수 제공

 

지성이면 감천인가. 그토록 찾아 헤맨 반쪽은 이듬해 7월 30일 결국 발견됐다. 처음 반쪽을 찾아낸 곳에서 남쪽으로 불과 2, 3m 떨어진 지점이었다. 파낸 흙을 따로 쌓아 둘 공간이 없는 산성 발굴의 특수성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즉 1997년 발굴에서 ‘후부도’ 조각이 나온 지점을 경계로 남쪽 면에 흙을 쌓으면서 나머지 반쪽을 놓친 것이다. “9개월 동안 애를 태우다 반쪽을 찾아냈을 때의 환희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날 발굴단원들과 거나하게 한잔했지요.”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토기의 각종 명문들. 서울대 박물관

 

나머지 반쪽 그릇에는 ‘○兄(형)’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었다. 두 쪽을 모두 합치면 ‘後部都○兄’. 최종택은 후부(後部)를 고구려가 당시 한강 유역을 나눈 일부 행정구역으로, 도○형(都○兄)은 인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형은 현대의 씨(氏)처럼 고구려 특유의 존칭어구로 보인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는 고구려가 한강 이남에서 단순히 치고 빠지기 식의 군사 점령이 아닌 행정 지배를 시도한 사실과 더불어 고구려의 언어 습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 쇠솥 나온 ‘구의동 보루’ 기습에 전멸 당한 듯

▲구의동 보루의 온돌 아궁이에서 출토된 쇠솥. 서울대 박물관

 

아차산 보루는 출토 토기의 양식을 감안할 때 서기 500년경 축조돼 백제-신라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물러난 551년경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고구려의 남쪽 최전방 군사기지였다. 최종택은 장수왕이 한강을 빼앗고 남진을 본격화한 475년 이후부터 500년 직전까지 고구려는 보루 없이 몽촌토성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으로 본다.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투구. 서울대 박물관

 

아차산 보루의 고고학 증거들은 551년 후퇴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한강변에 있는 데다 소규모(10명) 병력만 주둔해 백제군의 공격에 가장 취약했던 구의동 보루에서는 쇠솥과 무기류가 꽤 출토됐다. 반면 약 100명의 군사가 산 위에 자리 잡아 기습을 피할 수 있었던 아차산 4보루에서는 쇠솥이 발견되지 않았고 무기류도 별로 없었다. 다음은 최종택의 해석. “구의동 보루는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에 비해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아차산 4보루 고구려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쇠솥과 무기를 챙겨 철수한 걸로 보입니다. 심지어 이곳 지휘관의 투구가 아궁이에서 발견됐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고구려 지휘관이 철수에 방해될까 봐 무거운 투구를 버렸을 가능성이 있죠.”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각종 토기류. 최종택 교수 제공

 

끝으로 20년 가까이 아차산 발굴에 몰두한 그에게 남은 학문적 과제를 물었다. “고구려 연구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출토 유물이 적어 부실한 편입니다. 특히 토기나 마구 등 유물을 통한 편년(연도를 설정하는 것) 연구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통일이 이뤄지기 전에 고구려 박물관을 세워 남북을 아우르는 고구려 연구, 교육의 허브를 만드는 꿈도 갖고 있어요.”

 

<10>경주 용강동 석실분 발굴, 조유전 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아무도 기대 안한 폐고분서 국내 최초로 토용 수십점 발굴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지난달 25일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을 30년 만에 다시 찾았다. 1986년 발굴 당시 봉분 위를 덮었던 쓰레기와 흙을 걷어내고 석축을 조사하고 있다(아래 사진). 경주=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아이고 망측시러버라. 뭐 이래 생긴 게 여깄노….”

 

1986년 7월 18일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 발굴 현장. 한 대학원생이 흙이 잔뜩 묻은 조각상 하나를 조유전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74)에게 가져오자 이를 본 인부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조유전과 발굴단원들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떠올랐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남근(男根) 형상이었다. 신성한 무덤에 남근상이라니 무슨 조화란 말인가….

 

호기심에 서둘러 흙을 닦아 낸 단원들은 조각상의 실체를 접하고 더 놀랐다. 남근이 아니라 얼굴 없는 여인의 전신상이었다. 진흙에 뒤덮이는 바람에 여인상을 남근상으로 오인하는 촌극을 빚은 것. 한국 고고 발굴 역사에서 최초로 발견된 토용(土俑·인물이나 동물을 흙으로 구워 만든 것)이었다.

 

○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지난달 25일 30년 만에 용강동 고분을 다시 찾은 조유전은 “여기가 발굴했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국가사적 제328호로 지정돼 깔끔하게 복원 정비된 고분 주변은 온통 아파트 숲이었다. “예전에 논밭투성이였어요. 집은 고작해야 두세 채 있었을까. (고분을 가리키며) 여기는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었지.”

 

조유전은 1986년 6월 16일 이원홍 문화공보부 장관의 지시로 용강동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앞서 경주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모임인 신라문화동인회의 요청을 계기로 정양모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 발굴을 건의했다. 그는 고분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가 쌓인 봉분 위로 오래전 심은 소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자라고 있었다. 봉토는 여기저기 파였고, 외곽 둘레돌(호석)은 상당수가 뽑혀 나가 집 정원 장식용 등에 쓰였다. 무엇보다 봉분 표면에 여러 개의 도굴 흔적이 뚜렷했다. 높이가 10m가 넘는 데다 거대한 돌무지가 쌓여 있는 적석목곽분과 달리 용강동 고분과 같은 돌방무덤(석실분)은 약 3m 높이로 규모가 작아 도굴 피해가 극심했다. 이미 수차례 도굴을 당한 폐고분이 분명해 보였다. ‘과연 여기서 유물이 나올까….’ 신라 왕경 유적 발굴로 시간에 쫓기던 조유전은 내심 “빨리 끝내자”고 생각했다.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통통한 얼굴의 여인 토용(왼쪽 사진)과 서역(아라비아)인의 얼굴을 가진 남성 토용. 이들 토용은 신라가 당나라, 실크로드와 교류한 흔적을 담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지만 꺼진 불도 다시 보자고 했던가. 발굴에 착수한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토용으로 나른했던 현장에 느닷없이 비상이 걸렸다. 조유전은 단원들에게 “여인상의 머리를 반드시 찾아내라”는 특명을 내렸다. 시신이 안치된 현실(玄室)과 연도(羨道·고분 입구와 현실을 연결하는 통로)를 가득 채운 돌과 흙무더기를 일일이 채질하고, 시신 받침대(시상)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여인상의 머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시상 앞 남측 방향에서 채색된 인형(人形) 토용 28점과 말 모양 토용 4점, 토기(土器) 15점 등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현실 벽면을 따라 청동으로 만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7점도 함께 출토됐다. 신라의 매장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대거 발굴된 것이다.

 

○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흔적

고고학계는 용강동 고분을 신라의 대외 문화 교류사를 푸는 핵심 열쇠라고 본다. 토용의 외형과 복장에서 당나라와 실크로드 문화의 영향이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조유전이 용강동 고분에서 최고로 꼽는 서역(아라비아)풍의 인물 토용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턱수염이 수북한 이 토용은 언뜻 봐도 우리 조상이 아니에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 사람이 신라 귀족의 호위무사가 된 외국 용병이 아닐까 상상합니다. 당시 순장(殉葬) 대신 인형으로 주인 곁을 지킨 게 아닐까….”

 

통통한 얼굴형의 여성을 선호한 당나라의 영향으로 용강동 고분에서 발견된 여인 토용은 한결같이 후덕한 인상이다. 복색도 당풍(唐風)이 뚜렷이 반영돼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진덕여왕 3년(649년) 중국의 의관을 받아들였고 문무왕 4년(664년) 부인들의 의복도 중국식으로 바꾼다. 이에 따라 고고학계는 이 무덤이 신라가 당나라 복식을 채용한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는 “중국식 의복을 받아들인 연대가 사서에 명확히 기록된 만큼 용강동 고분은 신라 후기 석실 고분과 토기의 연도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