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21/ 문화계의 장인들/ 문화재 이야기/ (1) 일본 사람들이 독도보다 더 탐내는 한국의 3대 문화재 - (15) 팔만대장경의 육로 운송이 불가능한 이유
문화21/ 문화계의 장인들/ 문화재 이야기/
■문화계의 장인들
2016.04.15 "두 匠人이 천년 가도 끄떡없을 문화재 만들었죠"
서예 김정호·금속공예 이경자씨 법화경 7만자 돌에 새기고 불교 문양 더한 작품 전시
"불교 경전을 사경(寫經)해 보게." 1997년 당대 최고의 서예가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1927~2007)은 제자 김정호(57)에게 한 마디 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한 마디 덧붙였다. "통일신라 때 화엄경을 돌에 새긴 '화엄석경'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깨졌다. 누군가 그걸 재현해야 할 텐데…."
보물 1040호 화엄석경은 지리산 화엄사에 있었으나 전란을 거치며 1만4000여 조각으로 깨져서 현재는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날 이후로 김씨에게 '화엄석경'은 화두(話頭)가 됐다. 김씨는 "선생님 말씀 이후로 반야심경·금강경·법화경·화엄경을 쓰고 또 썼다"며 "2007년쯤 석경을 위한 돌판을 구했고 연구를 거쳐 2011년부터 우선 7만여 자에 이르는 법화경부터 돌에 새기기 시작했다"고 했다.
▲지난 11일 경기도 안성 작업실에서 ‘법화석경’을 살펴보는 서예가 김정호(오른쪽)씨와 금속공예가 이경자씨. 두 작가는 “천년을 가는 부처님 말씀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가 사용한 돌판은 중국 저장성과 안휘성 사이에서 출토되는 벼루돌로 한 장은 약 15×30㎝ 넓이에 두께 1~1.5㎝짜리였다. 108배 하고 향(香)을 살라 마음을 가다듬은 후 오전, 오후 각각 5시간씩 몰두했다. 최대한 속도를 내도 하루 한 장, 150여 자를 새기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는 종이에 글자를 써서 돌에 붙이고 새기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돌에 전각 칼로 새겼다. 머릿속에 모든 획(劃)에 대한 설계가 끝난 후 칼을 들어야 하지만, 아차 싶으면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칼이 삐쳐나갔다. 한 글자라도 실수하면 그 판은 포기했다. 그렇게 버린 돌판이 100장 넘는다. 4년이 흘러 완성된 법화경은 모두 509장. 여기에 앞뒤 표지 한 장씩 붙여 모두 511장으로 법화석경을 완성했다. 그러나 애당초 석경을 만들겠다는 생각뿐 어떻게 전시하고, 어디에 소장할지는 계산에 없었다. 김씨는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는 것 자체가 환희였다"고 말했다.
석경이 완성될 무렵, 정각사 주지 정목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아니, 이 훌륭한 작품을 집에다 쌓아놓을 거냐?"며 코디네이터를 자청했다. 금속공예가 이경자씨를 소개해 석판 테두리를 옻을 매긴 홍송으로 싸고 연꽃·구름·물고기 등 불교적 상징 문양을 입사(入絲)한 금속판을 장식했다. 돌판을 보호하는 동시에 예술성을 높인 것. 전체 작품은 안국선원(선원장 수불 스님)이 소장하기로 결정됐다. 정목 스님은 "두 장인이 정성을 모아 천년을 가도 끄떡없을 오늘의 문화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제 법화석경을 마쳤으니 앞으론 원래 목표로 했던 화엄석경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화엄경은 모두 20여만 자(字). 김씨는 "20년쯤이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 장엄한 석경은 22일부터 5월 1일까지 서울 인사동 그림손갤러리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법화석경 511장이 전시장 벽을 꽉 채운 가운데, 둔황 벽화 연구로 유명한 화가 서용의 불화(佛畵)와 등공예가 김정순의 작품이 함께 선보인다
조선일보 안성=김한수 종교전문기자
■ 문화재 이야기
2015-10-13 조선일보 조훈철 前 동국대학교박물관 선임연구원 E-mail : agora62@hanmail.net
(1) 일본 사람들이 독도보다 더 탐내는 한국의 3대 문화재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그리고 석굴암.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재이지만 시험지에 두 줄 써 내려가기가 벅찬 우리의 현실.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 그 자체가 되어야 할 문화재이지만, 문화재 교육의 부재는 자부심과 자신감 모두를 피폐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 일본인의 입장은 어떨까? 1910년 한반도를 합병한 그들에게 지구상에서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은 목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의 언어 훈민정음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한반도에서 일본 본토로 가지고 가서 보존해야 할 조선의 대표적인 문화재 목록 속에 팔만대장경, 석굴암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은 알고 있었는가?
▲훈민정음 해례본/조선일보 DB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석굴암은 시대별로 국가가 주도한 국책 프로젝트로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최상의 문화재이다. 특히 팔만대장경은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의 침입하에 목숨을 담보로 제작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값진 유산이다. 이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그 어떤 다른 나라 문화재보다 우리에게는 더욱 소중하고 신비로우며 각별한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인들은 세 가지 문화재가 얼마나 한국인에게 소중한 것인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전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만약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이 팔만대장경과 석굴암을 일본 정부에 넘길테니 독도는 일본 땅이란 망언을 중단하고 한국의 영토임을 인정하라고 협상을 한다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만큼 팔만대장경과 석굴암은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민족 그 자체를 나타내는 징표이며,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이 지구상 사라지지 않는 한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민족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일찍이 우리의 선각자들이 이와 관련하여 언급한 내용들을 한 문장으로 엮어 본다면 “영국 사람들이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준다 하여도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그리고 석굴암과는 바꿀 수 없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는 많은 유형, 무형의 인류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그들 가운데 아름답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할지언정 우수하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려면 이론적 바탕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문화재는 단순히 아름다운 차원을 훨씬 넘어선 것이 대부분이다. 그 한 가운데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그리고 석굴암이 있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 /조선일보 DB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처럼 뛰어난 문화재들을 무관심하게 외면하고 있는 동안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그리고 석굴암이 병이 들어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말과 글이 국적없는 외톨이 마냥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국어를 못해도 대학에 들어가고 출세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팔만대장경판은 어떠한가? 재질이 목재임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벌써 764살이 되었다. 세계 최고의 대장경판,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왔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려는 노력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그 보관상태에 대해 진정성을 가지고 걱정해 본 적이 있었던가? 지금 팔만대장경판 8만 여장 가운데 1만 여장은 크고 작은 훼손으로 파괴되어 보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석굴암에 들어가 기껏 유리창문 너머로 내부공간을 살펴보는데 1분이면 족하다는 얘기나 하면서 1,300년 가까이 보존되어 왔던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를 운운하는 건 그게 과연 제대로 된 문화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내년 4월이면 전국적인 선거가 있다. 여야를 떠나서 출마자들의 가슴속에 민족의 지도자라는 자존심이 단 1%라도 있다면 우리 것을 지키고 가꾸는데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우리의 언어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그리고 석굴암은 국가가 나서서 거국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중차대한 민족문화재라는 사실을 이 나라 지도자들은 한시라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훈철 前 동국대학교박물관 선임연구원 E-mail : agora62@hanmail.net
경북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불교미술, 한국건축사로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동국대학교 및 대학원, 중앙대학교, 용인대학교, 경주대학교에서 한국미술사, 불교미술, 한국건축사, 문화재개론 등을 강의한 바 있다. 2008년 숭례문 방화사건을 목도한 후, 문화재 관련자료를 재수집하면서, 일반인을 위한 문화재공부법에 관한 책을 현장 경험을 위주로 시리즈별로 현재 집필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화재 공부법'이 있다.
(2) 경주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지정한 일제의 간계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포석정에 가면 포석정이란 정자가 없다. 다만, 입장료 1,000원을 내고 들어가 보면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다는 ‘유상곡수’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신라 55대 임금 경애왕이 왕비와 궁녀들과 함께 이곳 전복 모양의 물길 위에 술잔을 띄워놓고 잔치를 벌이고 놀다가 후백제 견훤 군대의 침입을 받고 피습된 장소라는 것이다. 결국, 포석정은 신라 멸망의 상징이란 오명만 덮어쓴 채 커다란 고목나무와 함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1934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여 보물, 고적 등으로 지정했다. 보물 1호는 남대문, 보물 2호는 동대문이었다. 그리고 경주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지정했다. 사적이 아니라 고적인 것은 그저 오래된 유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포석정은 고적 1호가 되었을까?
▲포석정/조훈철
“적이 쳐들어 와 경주가 함락하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경애왕은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술 마시고 놀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까 너희 조선인들은 나라가 함락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주연에 빠져있는 민족이니 국가를 운영할 자질이 부족하다. 그러니 식민지로 살 수 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패배의식과 열등감을 심어주기 위해 고도의 심리전을 편 계략이 포석정 고적1호에 숨겨진 비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삼국사기’였다. 저자 김부식은 집필과정에서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신라의 멸망을 당연시하는 표현들을 사용했다. 특히 ‘경애왕편’을 언급할 때 ‘유포석정(遊鮑石亭)’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때 사용된 ‘유(遊)’자를 ‘놀러갔다’라고 번역을 한 결과, 포석정은 오늘날까지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이는 놀이터로 둔갑이 되어 전해내려 오게 된 것이다. 사실 그 문장 앞에 나오는 927년 음력11월 겨울철이란 문구를 조금만 신중하게 생각했더라면, 한 겨울 어느 정신나간 임금이 야외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겠는가를 유추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글자 ‘유(遊)’자가 삼국유사에도 등장한다. 경덕왕이 백률사를 행차하는 것을 ‘유백률사(遊百栗寺)’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때 ‘유(遊)’자는 ‘가다’의 의미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글자 한 자의 의미를 확대해석하여 식민사관의 단초를 만들어내는 일본인들의 저의에 새삼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오늘날 새로운 연구결과에 의하면, 포석정은 남산 서쪽자락에 위치한 신라인의 성소로서 국가적 행사나 제사의식을 행하는 장소였다. 주변 1Km 이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이 있고, 박씨 왕들의 무덤인 오릉이 그 일대에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경애왕은 박씨 조상들을 찾아가 간절한 기도로써 국가를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장소가 바로 포석정인 것이다.
한편, 포석정을 생각할 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유적이 있다. 바로 ‘유상곡수’터이다.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유상곡수는 시를 읊으며 연회를 베풀기 위해 흐르는 자연수를 흐르도록 만든 조형물이다. 포석정이 위대한 이유는 인공적으로 자연수의 원리를 재창조했다는데 있다. 이는 자연현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분석의 결과인 것이다. 물길을 따라 물이 한 바퀴 도는 데에는 1~2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시 한 수를 짓기 위해서는 최소한 5~6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와류(회돌이현상)를 일으키도록 구조물을 변경시켜 인공적으로 자연현상인 것처럼 만든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 발명품이다. 오늘날 사적1호인 포석정은 보물이나 국보로 승격 시킬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신라인의 독창성과 과학성이 돋보이는 유적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성소(聖所)로서 제사의식을 행하는 장소에 유상곡수연을 펼치는 신라인의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혜로운 우리 후배 학자들이 풀어야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광복 70주년, 단순히 햇수만 70년이 흘러온 것이 아니라 생각도 식민사관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포석정’ 문화유적의 안내문과 홍보에서 한번 시도해보는 것이 어떨까?
(3) 성리학자 정도전이 한양 축조 때 사용한 풍수지리
얼마 전 종영된 인기 사극 ‘정도전’에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 그러면서 현장 경험이 풍부하며 발로 뛰는 정치인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1398). 조선왕조의 창업 1등 공신인 그가 고종 때 복권될 때까지 거의 500년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철저한 성리학자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해 국가를 건설하고 다스리겠다는 그의 철학은 그가 남긴 저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궁궐 조성을 하는 대목에서 그의 기량은 정점을 치닫고 있다. 궁궐의 입지 선정과 전각의 배치, 그리고 각 전각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보여준 해박한 지식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궁궐 입지를 선정한 후 그 방향성을 정할 때 무학대사와 벌인 논쟁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정도전은 풍수에 있어서도 대가라는 점이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의 스승인 왕사(王師)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적 이념으로 건국한 국가에서 신진사대부 세력을 대표하는 정도전을 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조선의 정궁은 정도전의 의견을 따라 오늘날과 같이 백악 아래에 자리 잡게 되었다.
▲청운대 /조훈철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도전의 생각대로 궁궐의 배치 및 좌향이 정해졌고, 궁궐 및 각종 전각의 이름도 짓고, 동서남북으로 성곽을 쌓은 후, 성문의 이름도 정했다. 이렇듯 수도 한양의 도성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성리학적 이념을 근거로 무학대사의 주장을 일축시켰다고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풍수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에 예전부터 면면이 이어져 온 풍수적 삶을 결코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비록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적 논리로 관철시켰으나 실제 도성을 건설할 때는 풍수비보책을 하나씩 하나씩 전개해 나갔다. 이는 문헌자료에서 절대로 알 수 없는 오직 현장에서만 확인이 가능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하려면 서울시 지도 한 장과 나침판, 그리고 약간의 발품을 팔면 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 정상을 올라가 보시라. 정상 부위인 백악마루에서 다시 조금만 내려가면 청운대(靑雲臺)라는 장소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경복궁을 중심으로 옛 한양도성을 살펴보면 풍수에 대한 정도전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있다. 군주는 남면(南面)한다는 큰 원칙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산의 기운을 받아 궁궐을 조성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됨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북한산의 정상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에서 남쪽 관악산 연주암을 잇는 남북축을 중심으로 그 축선상에 경복궁, 숭례문을 배치한 것이 경복궁 입지의 커다란 골격이다. 다만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경복궁 중심 건물의 축선이 세종로 광장과 어긋나면서 조선일보 건물과 동화면세점 사이로 축이 연결되어 숭례문이 자리하고 있다는 정도까지 일 것이다. 그리고 숭례문 현장에 직접 가서 살펴보면, 궁궐의 정문인 숭례문이 정남쪽에 위치하지 않고 서쪽으로 치우친 점, 그리고 숭례문 대문의 위치가 정남쪽이 아닌 서쪽 오늘날 효창구장쪽으로 바라보도록 배치한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성리학적인 관점이 아니고, 풍수비보책의 관점에서 배치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궁궐의 정남쪽에 남대문 즉 숭례문을 배치한다고 적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숭례문 정면 /조훈철
필자는 측량과 독도법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있기에 이런 부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언급하는 논문이나 학술서적은 별로 본적이 없는데 공론화 시킬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장 답사때 아쉬운 점은, 백악산 정상 청운대 주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된다는 점이다. 경계근무를 쓰는 군인들의 감시가 심해서 눈으로만 확인할 수 밖에 없다. 대통령이 계시는 청와대 안전에 큰 위해가 되지 않는다면 관련 기관들이 긴밀한 협조를 통해 이 곳에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정도전, 그는 비록 성리학자였지만 풍수를 알고 실천에 옮긴 한국인이었다. 단지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는 명분이 앞서 글로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 그가 직접 실천에 옮긴 풍수비보 현장은 오늘날 서울을 역사도시로 각인시키는 자양분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4) 우리 조상들이 묘를 쓸 때 배산임수
풍수(風水)는 전통지리학의 한 분야이다. 그러나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는 것은 현대지리학이다. 현대지리학에서 땅은 무생물로 취급한다. 그래서 땅을 광물이나 자원의 생산과 이용 및 개발의 대상으로 인식하여 지표상의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분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지리학인 풍수에서 땅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정한다. 즉, 땅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숨을 쉰다고 인식한다. 땅이 살아 있기에 인간도 그 위에서 목숨을 이어간다. 신토불이(身土不二), 사실 땅과 인간은 하나인 것이다. 땅이 죽으면 인간도 죽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인간의 목숨은 유한하지만, 땅의 생명력은 영원하다. 이런 점에서 땅의 이치를 탐구하는 풍수는 서양 학문들이 그렇게 신봉하는 과학을 뛰어 넘는 초과학적 학문이면서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귀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이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약자이다. ‘바람을 저장하고, 물을 얻는 일’이 풍수의 핵심이다. 우리 선조들은 바람을 막아주고 물이 있는 장소가 인간 살기에 좋은 터라고 보았다. ‘장풍득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하면 된다. 즉, 뒤에서는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서는 물을 얻는다는 원리이다. 여기에다 하나 더 추가하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이다. 좌우로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산이 있으면 더 아늑한 장소가 된다. 이처럼 배산임수와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地勢)를 따지는 것이 전통적 의미의 풍수이다.
▲세종대왕릉과 '잉'의 위치. /조훈철
우리 문화재 가운데 특히 건축 문화재의 터 잡기 밑바탕에는 자연에 대한 선조들의 생각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를 우리 선조들은 풍수라는 명칭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선호한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질 않으면 모두 미신으로 치부하고 배척하거나 제거하려고 한다. 그 버리고 싶은 한 가운데 풍수가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건대, 풍수를 언급하지 않은 한국의 건축 문화재 이야기는 2% 부족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문화재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배려심이다.
풍수용어에 ‘잉(孕)’이란 단어가 있다. 잉(孕)은 잉태한다는 의미인데, 혈 자리 바로 뒤편에서 자연 상태로 볼록 튀어 나온 부분을 말한다. ‘잉’은 우리 문화재의 혈자리 뒷부분에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 선조들은 터를 정할 때 좌청룡, 우백호보다 ‘잉’의 존재를 더욱 중시했다는 것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광경이다. 우리 문화재의 주류를 이루는 궁궐, 사찰, 서원, 양반가옥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왕릉은 거의 100% ‘잉’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래서 ‘잉’이 있는 지역은 그 지기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시설물 설치도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자연 그대로 비워두는 경향이 있다.
▲영릉(효종의 릉). /조훈철
그런데, ‘잉’이 있는 지역은 의외로 출입금지 표시가 된 곳이 많다. 사대부 양반가 종가집 내부 ‘잉’의 흔적을 보려면 종손부부와 웬만한 교류가 없으면 구경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렵다. 그나마 ‘잉’의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장소는 조선왕릉이다. 그러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봉분으로 올라가려고 문의를 하면 반드시 확인서를 받아 오라고 한다. 조선 왕릉에서 공식적으로 봉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곳은 헌릉(태종의 릉), 영릉(英陵 : 세종대왕릉), 광릉(세조의 릉), 영릉(寧陵 : 효종의 릉), 동구릉 가운데 목릉(선조의 릉) 그리고 시간에 제한을 둔 도심의 ‘선정릉’ 정도이다. 다른 지역에도 조금의 융통성을 발휘해서 제한적이나마 현장 답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원칙과 명분도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무관심’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유물이나 유적을 만져서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고, 일반인이 무관심해서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 것임을 문화재 관련 업무를 보시는 분들은 꼭 명심했으면 좋겠다.
(5) 대한민국 지명에 봉황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
국내 지명(地名)은 문화재 답사를 전문으로 가는 필자의 경우 거의 문화재와 같은 가치를 지닌 문화 콘텐츠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특히 문화재 풍수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지명은 그 지역에 관한 많은 통찰력(insight)을 제공해 준다. 이런 점에서 종종 정부기관에 의해 행정편의상 지어지는 명칭들은 오랫동안 우리 지명에 축적된 문화콘텐츠를 없애 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
산이 70%를 차지하는 대한민국에서 그 지명을 유심히 살펴보면 유독 봉황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이는 봉황 모양을 한 산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봉황이 머무르는 곳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사람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는 깔려 있다. 그래서 봉황 형태의 지형을 잘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조사해 보면 그 정성이 눈물겨울 지경이다.
▲봉황 관련 지명/조훈철
봉황은 어질고 현명한 성인(聖人)과 함께 세상에 나타난다는 성스러운 전설의 새다. 수컷을 봉(鳳)이라하고, 암컷을 황(凰)이라고 한다. 오동나무에 살면서 감천(甘泉)의 물을 마시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봉황이란 지명이 있는 곳에 오동나무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봉황을 오래 동안 머무르게 하려면 봉황의 먹이가 되는 대나무가 풍부해야 한다. 그래서 봉황의 지명이 있는 산 아래에 대나무 밭을 조성한 것은 봉황을 오래 동안 머무르게 하려는 선조들이 생각해 낸 지혜의 산물인 것이다.
강원도 횡성에 가면 ‘봉복사(鳳復寺)’라는 절이 있다. 덕고산 아래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의 절이다. 대웅전에서 참배하고 나오는데 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봉복사가 봉황의 배 부분에 해당된다면,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은 봉황의 정수리부분, 여주 봉미산에 있는 신륵사는 봉황의 꼬리부분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한반도 중부지방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가 봉황의 기운으로 뻗쳐있다는 이야기다. 학계에서 연구 성과로 발표하려면 치밀한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대한민국 중부지방 일대가 날개 펼친 한 마리 봉황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용 관련 지명/조훈철
경남에는 진주(晋州)라는 도시가 있다. 인물의 고장, 충절의 고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곳 진산의 명칭은 원래 대봉산(大鳳山)이었다. 그런데 고려때 진주 강씨 문중의 인물들이 고려 조정을 채우자 왕실에서는 이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어명으로 대봉산을 비봉산(飛鳳山)으로 바꾸어 버렸다. 날아가 버리는 봉황이라는 뜻으로 진주 진산의 기운을 날려 보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에 봉황의 기운이 날아가 버리면 진주는 끝장날 것을 우려한 이곳 사람들은 풍수 대책을 세웠다.
먼저 ‘날아간 봉황은 알자리가 있으면 돌아오는 법이니 알자리를 만들라’라는 전설같은 이야기에 근거하여 ‘비봉산 아래 도심 한가운데 ‘봉알자리’ 터를 만들었다. 그 후 돌아올 봉황의 먹거리를 위해 도시 조경수를 대나무로 식재하고, 지리산 산청에서 진주시로 들어오는 도로 명칭도 아예 오죽광장으로 지은 것이 우리 한국인의 정서이다. 만약 진주시 단체장으로 입후보하는 후보가 풍수는 미신이니 봉황과 관련된 모든 시설물을 철거하겠다라고 공약을 하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진주시장 당선은 고사하고 진주시에서 살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진주 오죽광장(왼쪽), 진주 봉알자리 안내문.
앞으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봉황과 관련된 지명을 만나면 반드시 봉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답사객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담양 소쇄원 대봉대, 곡성군 동리산 태안사, 공주시 봉황대, 안동 봉정사, 대구 팔공산 동화사 봉서루 등 이들 장소를 가거든 봉황의 이야기도 전해 듣고 봉황의 기운도 절대 놓치지 마시라.
(6)-①② 춘향전의 이도령은 실존 인물?
영주 부석사에서 국도를 따라 봉화로 넘어가다보면, ‘춘향전의 실존인물 이몽룡 생가’라는 뜻밖의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작자미상 허구의 창작소설로만 여겨 온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실존인물을 모델로 탄생했다는 사실에 순간 숨이 멎는다. 본능적으로 운전대의 방향은 이몽룡 생가로 향하고 있다.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 그가 바로 이몽룡의 실존 인물이란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가면 이몽룡 생가를 만날 수 있다. 여느 양반 가옥과 다름없이 솟을대문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사랑채 ‘계서당(溪西堂)’이 보인다. 사랑채는 안채로 연결되는 중문과 접해있고, 다른 종가(宗家)처럼 사랑채 좌측에는 사당(祠堂)이 위치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된 특이한 ㅁ자형 구조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이 곳은 현재 창녕성씨 계서공파 13대 종손(성기호, 75세) 내외가 문화해설사 겸 사과 농사를 지으면서 종택을 지키고 있다.
▲이몽룡생가 사랑채 계서당 정면. /조훈철
성이성이 ‘춘향전’의 실존 모델이라는 사실을 학술적으로 밝혀낸 이는 국문학자인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이다. 그는 성이성 본인의 일기를 후손이 편집한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성섭(成涉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성이성과 관련된 기록, 그리고 민간에서 구전된 설화 등을 지난 30년동안 면밀히 대조, 분석하면서 ‘춘향전’ 이야기 속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데 전념해 왔다.
먼저 소설 속 이몽룡은 16세에 남원 광한루에서 춘향이를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그 이듬해 17세가 될 때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남원을 떠나게 된다. 성이성은 1595년(선조 28년) 영주시 외가에서 부용당 성안의(成安義)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13세 때인 1607년, 남원부사로 발령이 난 부친을 따라 남원에 갔다. 이곳에서 여러 스승을 모시면서 학문에 매진하던 중 부친이 광주목사로 승진해서 남원을 떠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는 17세, 결국 성이성이 남원에서 머문 기간은 5년이 된다. 이때 남원에서 성이성은 춘향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젊은 시절 두 인물은 유사한 생의 이력을 보이고 있다.
▲계서당 현판 글씨. /조훈철
이후 이몽룡은 여러 성현의 말씀을 탐독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한 후 곧바로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온다. 한편, 한양에 올라 온 성이성은 33세 때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의 요직을 거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네 차례나 암행어사(暗行御使)로 파견되는데 그 중 두 번은 남원으로 내려온다. 남원에 파견 당시인 인조25년 11월부터 적어온 친필 암행어사일지 한 권만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소설 속 이몽룡보다 늦은 시기에 벼슬길에 오르고 암행어사에 제수되었지만 그 행적은 유사하다고 하겠다.
성이성의 시와 거의 일치하는 암행어사 이도령의 시
<①편에서 계속>
두 사람이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방으로 내려가는 경로 또한 흥미롭다. 소설 속 이몽룡은 남대문을 출발하여 청파역에서 말을 타고 남태령을 넘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편, 성이성이 남긴 유일한 친필 호남암행일지에 나타난 경로를 보면, 남대문을 나와 남관왕묘, 청파역, 동작동, 남태령, 과천에서 용인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춘향전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지 않고 완전한 허구였다면 이동 경로가 이렇게 유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당 동쪽에 위치한 500년 수령의 소나무, 일명 이몽룡 소나무. /조훈철
이몽룡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춘향전의 절정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변사또의 잔치상 앞에서 이몽룡이 던지고 간 칠언절구의 한시는 다음과 같다.
금준미주 (金樽美酒) 천인혈(千人血) 금동이에 좋은 술은 뭇 사람의 피요
옥반가효 (玉盤佳肴) 만성고(萬姓膏) 옥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락시 (燭淚落時) 민루락(民淚落)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가성고처 (歌聲高處) 원성고(怨聲高)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도다
한편, 성이섭의 4대손인 성섭은 그의 문집 ‘필언산어(筆苑散語)’에서 자신의 고조(高祖) 성이성이 남원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 사건’이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그 내용을 소상히 기록해 두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준중미주 (樽中美酒) 천인혈(千人血) 술동이 안의 맛있는 술은 뭇 사람의 피요
반상가효 (盤上佳肴) 만성고(萬姓膏) 판 위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락시 (燭淚落時) 민루락(民淚落)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가성고처 (歌聲高處) 원성고(怨聲高)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높도다.
위 두 편의 한시구절을 보면 네 글자만 제외하고 칠언절구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사실은 춘향전이 명확한 실존 인물인 성이성을 모델로 하여, 그 당시 전해오던 설화에 위대한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탄생된 소설이라는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
더욱 의미 있는 일은 소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실존 인물인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역사 속에 묻힐 수도 있었던 한 위대한 인물의 재발견이다. 어사 성이성! 그는 뛰어난 경세가이자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살핀 어진 목민관이었다. 특히 강계부사 재직시에는 ‘관서활불(關西活佛)’로 칭송받기도 했다. 선생 사후 조정에서는 그 공적과 청렴함을 높이 평가해 청백리로 녹선했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바쁜 현대인들에게 성이성 선생의 행적은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깊어가는 가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이몽룡 생가를 한 번 방문하심은 어떠신지?
(7)-①② 한국이 2위와 3위를 차지한 유네스코 기록유산과 인류무형문화유산
우리가 문화민족임을 나타내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는 세계 유네스코 등재유산에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포함되어 있느냐 여부이다. 세계 유네스코 등재유산이란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형, 무형의 인류가 남긴 유산을 말한다. 등재하기위해 각 나라별로 신청을 하면 세계유산위원회가 최종 결정해서 세계인이 함께 보호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는 세계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 등으로 분류해서 지정하고 있다. 현재 등록현황은 아래의 표와 같다.
우리나라는 2015년 11월 현재 총 42건의 세계등재유산을 보유한 문화강국이다. 여기에 등재된 유산들이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는 다른 나라의 문화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에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그리스),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미국), 알타미라 동굴(스페인), 타지마할(인도), 후지산(일본), 만리장성(중국) 등이 있고,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항목을 보면 중의학의 침과 뜸(중국), 가부키(일본), 멕시코 전통음식(멕시코), 탱고(아르헨티나) 등 그 나라의 전통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온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기록문화에는 구텐베르그 성경(독일), 1215년 영국대헌장 마그나카르타 (영국), 황제내경(중국) 등이 있다. 대한민국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보유한 기록유산과 인류무형문화유산의 숫자가 세계 2, 3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내재된 민족 저력이 얼마나 깊은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 /조선일보 DB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이는 ‘태조(太祖)’때부터 ‘철종(哲宗)’때까지 25대 472년간 왕조에 대한 매일 매일의 기록이다. 한 왕조가 유지되는 약 5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왕의 일상생활뿐 아니라 천문기상, 자연재해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관(史官)이 빠짐없이 기록한다는 건 외국의 다른 왕조에선 상상조차하기 힘들 것이다. 총 6,400만자라는 숫자도 숫자지만 내용면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실록을 훨씬 앞서고 있다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의견이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적 성과에 대해 세계는 주목하고 이를 기록유산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역사의 흔적을 더 이상 지우려 하지 말자. 선조들의 숨결은 너무나 소중하다. 이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 우리는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키워 나가야 한다.
<①편에서 계속>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화를 너무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이 보유한 42건의 유네스코 등재유산을 면밀히 살펴보면, 타국에서 수입된 양 낯선 것들이 많다. 우리 것을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높이 인정해서 전 인류가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고 인정해 준 외국의 전문가들이 오히려 신기하게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우리는 그렇게 미신이라고 치부하면서 배척하였던 전통 굿과 풍수지리(조선왕릉)를 오히려 인류가 공통으로 지켜야 하는 귀중한 자산이라고 외국인이 먼저 인정해 주는 현실,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배운 노래 가운데 소렌토, 나폴리 등의 지명이 나오는 이태리 가곡은 지식인의 상징인 양 떠벌리고 다녔지만, 정작 우리의 가곡 ‘가고파’, ‘망향’, ‘보리밭’ 같은 명곡들은 뇌리에서 잊혀져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 가곡을 세계의 지성들이 세계무형유산으로 인정해 주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를 너무나 비하하고 폄훼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201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교책판 내 퇴계선생문집. /조선일보 DB
한편 현재 국립도서관에도 850만권이상의 도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번역되지 않고 고이 잠들어 있는 우리 선조들이 쓴 고(古)문서가 27만권이라 한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이 고문서에는 잠재적 세계기록유산의 가능성이 있는 미지의 역사가 잠들어 있다.
이번 기회에 유네스코 등재유산을 통해 문화적 자긍심을 키워보자. 이런 표현이 박제된 언어로 책장 속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진정 이 나라가 문화의 향기가 넘치는 진정한 문화강국으로의 면모를 지닌 당당한 대한민국이 되도록 그 기반을 다지는 일에 온 국민이 합심하여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8)-(1)(2) 선조들이 건물을 지을 때 기준으로 삼은 좌향(坐向) 개념
‘아는 만큼 보인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부족한 현시대에 이 문구는 문화재를 바르게 보는 절대 진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안다고 생각했던 사실조차도 잘못된 정보였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메이저리거 추신수 선수를 좋아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의 수비 포지션이 좌익수인지 우익수인지 혼동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문화재 현장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흔한 오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좌우의 개념과 관련된 ‘좌향(坐向)’시각이다. 지금 당장 문화재 현장의 안내문이나 문화재 관련 책자를 살펴보라. 여러 군데서 그 오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화재의 좌향 개념을 이해할 때 대부분 관찰자 중심의 서양시각에 의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서양시각으로 우리 문화재를 보면 위치와 명칭이 일치하지 않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국사책 속에 등장하는 지명을 우리의 눈에 익숙한 서양식 지도에서 찾아보면 그 좌우가 반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 문화의 올바른 계승은 우리 선조들의 시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면 우리는 아직 출발도 못하고 있는 셈이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앞마당, 어도위에 서 있는 이 학생의 시각에서 좌우를 보면 관찰자 중심의 서양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조훈철
우리는 사물을 바라볼 때 좌(坐)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좌(坐)란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이다. 즉, 내가 중심이 된다. 내가 중심이 되어 앞을 바라보는데 그 방향을 향(向)이라 부른다. 따라서 내가 앉아서 앞을 바라보는 것을 두 글자로 ‘좌향(坐向)’이라 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주인시각이 된다. 우리의 모든 건축 문화재의 배치는 주인시각을 바탕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동양에서 도성계획을 세울 때 지켜야 할 주요 원칙 가운데 하나가 ‘좌묘우사(左廟右社)’이다. 이는 궁궐의 왼쪽에는 종묘를 짓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건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때 기준이 되는 궁궐이 경복궁이다. 경복궁은 조선 최초의 정궁이다.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남향으로 건립한 것이 이 궁궐이다. 이 곳이 조선의 수도 한양도시계획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남향을 한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조성했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 없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경복궁 왼쪽에 사직단이 있고 오른쪽에 종묘가 있는 것 같다. 이는 우리 선조들의 생각과 정반대의 개념으로 건축물을 읽어내는 것이다.
<②편에 계속>
문화재 안내서에 좌우가 뒤바뀌어 잘못 기술되는 이유
<①편에서 계속>
국사교과서의 지명이나 관직명에 좌수영, 우수영, 좌수사, 우수사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순신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한 뒤 전라좌수영에 부임한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 좌우를 가름하는 것은 수도 한양에 있는 정궁(正宮) 경복궁의 근정전 용상에 앉아서 남쪽을 바라보는 임금의 시각이 그 기준이 된다. 그래서 지도상 전라좌수영이 있는 도시는 해남이 아니고 여수가 되는 것이다.
사찰의 경우에도 좌우의 개념은 똑같이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불교 신도들이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과 양 옆에 계시는 두 분 보살님을 친견하게 된다. 이 두 분의 보살을 협시보살이라 부르며, 부처님과 두 분의 보살을 합쳐서 삼존불이라 한다. 아래의 사진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문수(文殊), 보현(普賢)보살을 모셔둔 법당이다. 이때 좌우 두 분의 보살 가운데 좌협시보살은 문수보살이다. 부처님이 좌정해 계시는 위치, 즉 주인시각으로 봤을 때 좌측에는 문수보살이 있고, 우측에는 보현보살이 있다고 한다.
▲서울시 관악구 소재, 관음사 대웅전 (보현보살, 석가모니부처, 문수보살). /조훈철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가면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무덤 홍릉(弘陵)이 있다. 그 안내판을 자세히 보면, ‘우허제(右虛制)’란 용어가 눈에 띈다. ‘우허제’란 왕비가 먼저 승하(昇遐)하여 능을 조성할 경우 왕이 훗날 왕비와 함께 묻히기 위하여 능의 오른쪽을 비워 두는 것을 말한다. 이때 능의 오른쪽이란 기준이 되는 돌아가신 분의 봉분에서 정자각쪽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란 의미이다.
전국적으로 문화재 현장에서 간행되는 안내문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좌우 개념을 틀리게 기술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는 우리 문화재를 보는 올바른 원칙을 가르쳐 주지 않은 교육 부재에서 생긴 현상이라 생각한다. 지금 당장 문화재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우리 주변의 문화재 해설서를 한번 살펴보시길 권한다. 우리 문화재가 세계적인 문화재로 발돋움하기를 원한다면 그 문화재를 만든 우리 선조들의 시각을 이해하는 훈련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시급한 작업일 것이다.
(9)-①②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서열이 높은 이유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은 크게 두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양택과 음택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집은 ‘양택(陽宅)’, 죽은 자의 집은 ‘음택(陰宅)’이라 하는데, 양택과 음택의 경우 왼쪽과 오른쪽의 우선순위는 정반대가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의 공간인 양택에서는 왼쪽이 오른쪽보다 서열이 높다. 이를 ‘좌상우하(左上右下)’라고 한다. 하지만 죽은 자의 공간인 음택(陰宅)에서는 이 원칙은 정반대가 된다. ‘우상좌하(右上左下)’ 즉, 오른쪽이 왼쪽보다 서열이 높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바라보는 공간에 대한 전통시각이다. ‘좌상우하(左上右下)’ 원칙을 적용하려면, 궁궐, 사찰, 서원, 사대부 가옥을,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을 적용하려면, 종묘나 사당, 왕릉 등을 답사해 보면 된다.
좌상우하의 원칙이 적용되는 대표적인 문화재는 ‘궁궐(宮闕)’이다. 궁궐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간은 정전 구역이다. 경복궁에서 정전은 ‘근정전’이다. 이 곳 앞의 넓은 공간을 ‘조정(朝庭 : 조회를 하는 마당)’이라 불렀다. TV 사극(史劇)의 단골 대사인 ‘조정대신’이란 말은 바로 이 곳 마당에 설 수 있는 신분을 말한다. 그러한 신분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문반과 무반이라 부른다. 이들을 흔히 ‘양반(兩班)’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조회를 할 때 이들의 위치는 어떻게 될까? 신하들의 좌석 배정 기준은 근정전 용상에 좌정해 남쪽을 바라보는 국왕이 된다. 국왕을 기준으로 왼쪽(동쪽) 품계석 쪽은 문반이, 오른쪽(서쪽) 품계석 쪽은 무반이 차지한다. 이때 문반은 무반보다 더 높은 지위가 된다. 그 이유는 조선사회가 문인을 무인보다 우대했기 때문이다. 조선 최고의 관직인 3정승 가운데 좌의정과 우의정이란 관직이 있다. 누가 높을까? 물어 온다면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관직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될 수 있다.
▲병산서원 강당(입교당)에서 만대루를 바라본 전경. /뉴시스
좌상우하의 원칙은 ‘서원(書院)’의 경우도 똑같이 적용된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강당의 뒤쪽에는 사당이 위치하고, 강당에서 전면을 보았을 때 앞마당의 좌우에는 각각 건물이 한 채씩 있고, 강당 정면에는 루(樓)가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서원건물의 배치법이다. 이 경우 강당에서 본 좌우의 건물들은 유생들의 기숙사인데, 왼쪽의 건물을 동재, 오른쪽 건물을 서재라 부른다. 이곳에서 좌상우하의 원칙을 적용하면, 좌측의 동재가 우측의 서재보다 서열이 높다. 따라서 유생들 가운데 선배들이 동재에 거주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②편에 계속>
② 왕릉은 오른쪽이 왕, 왼쪽이 왕비
그런데, 죽은 자의 공간 즉, 음택(陰宅)에서는 이러한 상하질서는 정반대가 된다. 바로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이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오른쪽인 서쪽이 왼쪽인 동쪽보다 지위가 높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는 종묘, 사당 또는 왕릉 등을 답사할 때 적용하면 된다.
먼저 종묘(宗廟)의 경우를 보자.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셔둔 왕가의 사당으로 중심 건물은 정전(正殿)이다. 정전의 내부에는 왕과 왕비의 위패가 19칸에 각각 모셔져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위패는 어느 곳에 모셔져 있을까? 죽은 자의 공간에서는 오른쪽이 높은 지위라 했으므로, 당연히 오른쪽(서쪽) 맨 끝 자리에 태조 이성계의 위패가 놓이게 된다. 이어서 동쪽으로 차례로 태종, 세종, 세조 등의 순서로 위패를 모시고 여기에서 누락된 임금과 왕비의 위패는 영녕전으로 옮겨간다.
이번에는 조선 왕릉으로 한 번 가보자. 조선 왕릉은 총42기인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30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 분포되어 있는데, 조선의 519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진 훌륭한 역사 체험 장소이다. 왕릉에서 좌우 우선순위를 파악하려면 주인 시각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왕릉의 주인공은 당연히 돌아가신 왕과 왕비이다. 따라서 기준이 되는 조형물은 돌아가신 분들이 누워 계시는 봉분이다. 그 봉분에서 정자각 혹은 홍살문 쪽으로 바라보는 방향이 바로 좌우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봉분에 서서 정면을 보았을 때 쌍분인 경우 오른쪽(右上)이 왕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에는 선조들의 전통적 시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지키고 가꾸려면 선행 작업으로 우리 문화재 보는 법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업이 아닐까?
(10)-①② 경복궁 근정전 월대 조각상의 비밀
근정전(勤政殿)은 조선 최초의 궁궐인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 건물이다. 이곳은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거나,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궁궐 내 가장 중요한 건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근정전은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상태로 거의 270년간 방치되어 오던 것을 흥선 대원군(고종5년, 1868년)때 중건한 건물이다. 근정전 정면 계단에는 상하에 봉황을 새긴 답도(踏道)를 두었다. 이 계단을 오르면 화강암을 다듬어 2단으로 설치한 댓돌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위의 것을 상월대, 아래의 것을 하월대라 부른다. 상하 각 월대의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사방에 둘렀다. 그리고 그 돌난간 기둥과 층계 좌우의 돌기둥의 머리 위에는 동물조각을 새겼다. 월대 난간에 새긴 동물조각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것은 사신상과 십이지상이다. 사신(四神)상은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다스리면서 우주의 질서를 받쳐주는 상징적인 동물이며, 십이지상은 시간과 방위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상징물이다.
사신도(四神圖)는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서 많이 등장하며, 십이지신상은 통일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왕릉이나 석탑의 기단부에 조성하였는데, 사신상과 십이지신상이 동시에 궁궐의 정전 주변에 배치된 예는 근정전이 유일하다.
▲경복궁 근정전에 놓여있는 사신상. 좌청룡(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순으로),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조훈철
사신상과 십이지신상은 근정전 주변에 어떻게 배치가 되었을까? 그 배치의 기준은 근정전 내부 천장에 조각된 황룡에서 찾을 수 있다. 황룡은 근정전의 동쪽 출입문에서 보면 가장 잘 보인다. 이 곳을 기준으로 전후좌우 연장선을 그어보면 상월대의 계단위 돌기둥 머리 위에 조각되어 있는 동물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상상의 동물인 사신상이다. 즉, 동의 청룡(靑龍), 서의 백호(白虎), 남의 주작(朱雀), 마지막으로 북의 현무(玄武)상이 상월대 계단위 돌기둥 머리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어서 바로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면 하월대의 돌기둥 머리위에서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십이지신상을 만날 수 있다. 바로 토끼(동),닭(서), 말(남) 그리고 쥐(북)의 조형물이다. 결국 상월대에는 하늘을 다스리는 사신상이, 하월대에는 땅을 다스리는 십이지신상을 각각의 방위에 맞게 배치한 것이 근정전 동물 조각상의 기본 원리이다.
▲근정전의 답도 및 상하월대 전경. /조훈철
양과 음을 동시에 갖춘 동물
동서남북에 해당되는 조형물을 확인한 후, 나머지 십이지신상을 찾으려하면 조금 복잡해진다. 그런데 근정전 내부 천장에는 황룡(黃龍)이 있고, 사신상 가운데 하나인 백호(白虎)는 서쪽을 수호하고 있다. 그래서 십이지가운데 용과 호랑이는 월대의 같은 선상에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한 듯하다. 이제 남은 동물은 소, 뱀, 양, 원숭이, 개, 돼지 등이다. 이 가운데 개와 돼지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동물 소, 뱀, 양, 원숭이는 어디에 있을까? 네 마리 동물은 동남쪽과 서남쪽의 상하월대 계단 돌기둥머리 위에 일직선상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뱀과 양의 조형물이 상월대에 올라와 있고, 소의 위치가 부자연스럽다. 이러한 배치의 원인 규명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비한 것 같다.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인 듯하다.
▲십이지의 방위사각. /조훈철
한편, 십이지의 순서를 정하는데 있어서 동물의 발톱(뱀은 혓바닥)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사실이다. 즉, 동물의 발톱 숫자로 음양을 구분한다는 것인데, 1,3,5,7,9,11에 해당되는 동물의 발톱은 양수인 홀수, 2,4,6,8,10에 해당되는 동물의 발톱은 음수인 짝수라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근정전 북쪽 하월대의 쥐 조형물을 보면, 앞발톱 수는 4개, 뒷발톱(원래5개)수는 3개가 보인다. 앞뒤 발톱의 수가 다르다. 십이지 가운데 첫 번째 동물로 쥐를 선정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쥐의 앞뒤 발톱 숫자가 달라 음양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양문화를 접하면서 1월을 뜻하는 January의 어원이 야누스(Janus)라는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두 얼굴을 지닌 문(門)의 신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문화 속에 이런 이중성을 나타내는 표현을 동물의 발톱에서 착상하여 실생활에 적용하는 선조들의 뛰어난 관찰력이 놀랍다. 십이지 동물의 순서에 대한 이야기는 이외에도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근정전 월대 조각상에 개와 돼지는 왜 제외되었을까?
(11)-(1)(2) 불국사 가람배치에 담긴 비밀
토함산 서남쪽에 자리 잡은 불국사(佛國寺)는 경덕왕10년(751)에 중시(재상)라는 벼슬을 지낸 김대성이 창건하였으나 생전 그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혜공왕10년, 774) 국가에서 주도하여 완성한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불국사 고금창기’에 의하면, 그 규모가 2,000여 칸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고 전하지만, 임진왜란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이후 17세기 초부터 복구와 중건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으나 많은 건물이 파손된 채 그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쳐 이루어진 대대적인 발굴과 복원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불국사의 ‘불국’은 부처의 나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를 차안(此岸), 부처의 나라 불국토는 피안(彼岸)으로 부른다. 온갖 번뇌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차안의 세계에 비해 피안의 세계는 극락정토(極樂淨土) 그 자체이다. 그래서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불국토에 태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차안의 세계를 아예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불국사는 이러한 신라인들의 염원이 그대로 반영된 사찰이다
▲석단 윗부분은 불국토를, 아랫부분은 범부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불국사 석축의 미학 /조훈철
불국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특징적인 조형물 중 하나는 대 석단이다. 석단 위는 부처의 나라인 불국을,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석단에는 특이하게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하나는 대웅전으로 향하는 청운교 백운교, 또 하나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연화교 칠보교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연화교와 칠보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이는 범부가 부처의 세계로 가려면 연못(구품연지)을 지나서 다리를 건너야 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인 것이다.
석단 위에 조성한 피안의 세계도 경전에 의거하여 다양하게 재현하고 있다. 현재 조성된 것을 보면 크게 4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하여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를 표현한 대웅전, 무량수경(無量壽經)에 근거하여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묘사한 극락전, 화엄경(華嚴經)에 근거하여 비로자나불의 연화장(蓮花藏) 세계를 형상화한 비로전과 경전에 대한 의존도가 약하기는 하지만 법화경(法華經)의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의거하여 보타락가산을 표현한 관음전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중심공간은 대웅전 영역이다. 이곳은 다리(청운교, 백운교)-중문(자하문)-건물(대웅전)에 이르는 축선과 이를 감싸고 있는 회랑으로 구성되며, 중심건물 뒤에 강당(무설전)을 두어 고대 가람의 전형적 배치형식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엔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고 가운데에 석등이 있어 대칭 속에서 비대칭을 형성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쌍탑식 가람배치로는 특이하게 탑 모양이 다른 것은 경전의 표현에 충실히 따랐음을 의미한다. 즉 다보탑은 법화경에 등장하는 과거불인 다보여래의 세계를, 석가탑은 석가모니 부처의 세계를 각각 상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인 것이다.
<②편에 계속>
불국사에 큰 연못을 복원해야 하는 이유
①편에서 계속>
한편 대웅전 영역을 극락전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넓이는 극락전의 두 배가 넘고, 전각의 크기도 대웅전(64평)이 극락전(27평)보다 훨씬 크다. 넓이뿐 아니라 높이도 차이가 있는데, 대웅전 영역이 극락전 영역보다 석축 한 단만큼 더 높다. 이렇게 석가모니 부처의 대웅전이 아미타 부처의 극락전보다 크고 높게 강조된 이유는 당시 신라인의 생각이 내세보다 현실세계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며 나아가 현실세계를 부처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염원이 강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보탑 전경. 기단 위 4면에 석사자상이 4마리 있었으나 모두 도난당하고 지금은 1마리만 남아 있다. /조훈철
이렇듯 상징성과 조형미가 뛰어난 문화유산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불국사가 비록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은 받고 있지만 이곳에서 간과하거나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불국사 가람배치의 핵심은 대석단과 그 아래에 조성한 구품연지(九品蓮池)이다. 구품연지가 불국사라는 대가람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구품연지의 복원과 관련된 좋은 사례를 보려면 일본 교토 근처 우지에 있는 뵤됴인(평등원)에 가면 된다. 인터넷에 등장하는 뵤됴인의 연못 풍광을 불국사의 대석단 앞마당에 조성한다고 생각해보라. 불국사 가람배치를 벤치마킹한 일본의 사찰이 오히려 우리보다 극락세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을 더 잘 구현한 것 같아 부럽기 그지없다. 70년대 불국사를 복원할 때 어떤 연유에서인지 연못을 복원하지 않고 묻어 버렸다. 그 당시는 사정상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 불국사 구품연지의 복원 문제는 다시 한 번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 다보탑 기단 위 4면에는 부처의 사자후(獅子吼)를 상징하는 4마리의 석사자상이 있었다. 1916년 이전 이미 도난을 당하고 지금은 한 마리뿐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있다. 1924~1925년경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배제한 채 다보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그 기록이 현재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탑 속에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석가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다보탑 내부의 유물도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문화재들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 불국사는 아직 미완의 문화재이다.
(12)-(1)(2) 집 앞에 문필봉이 있으면 큰 학자가 나온다는데...
풍수 용어에 안산(案山), 조산(朝山)이란 단어가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조그마한 산봉우리를 책상에 비유하여 안산(案山), 안산보다 좀 더 멀리 있는 산은 조산(朝山)이라 부른다. 이들은 마을을 향하여 직접 기(氣)를 발산하기 때문에 인물배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풍수적인 시각이다.
‘문필봉’은 풍수용어로 산봉우리가 붓을 닮은 뾰족한 삼각형 봉우리에 붙인 이름이다. 풍수가들은 문필봉이 정면에 있으면 공부 잘하는 학자가 많이 배출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봉우리가 붓 모양이고 붓은 문(文)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필봉이 안산으로 자리 잡고 있는 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하면 그 기운을 받아 사람도 역시 문필가나 학자가 된다고 믿는 것이 풍수와 관련된 환경심리학이다.
주위의 산세가 그 곳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것은 굳이 풍수를 들이대지 않고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19세기 미국작가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년이 큰 바위 얼굴과 서로 감응하여 나중에 위대한 현인이 되는 것처럼, 붓 모양의 봉우리가 있는 마을에서도 언젠가 그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풍수적 해석이다.
지난 2010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혼인을 통해 지난 500년 이상을 지켜온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뇌리에서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풍수가 양동마을을 통해 당당히 세계인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세계인들은 마을 입지를 선정할 때 전통적인 풍수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풍수가 건축물 배치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는 것과 이로 인해 풍수가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경주 양동마을 ‘향단’에서 본 안산 성주봉(왼쪽)과 '관가정'에서 본 안산 성주봉. /조훈철
풍수적으로 볼 때 양동마을의 입지는 설창산의 주봉 문장봉에서 출발한다. 이곳에서 뻗어 나온 4개의 지맥과 지맥사이에 이룬 골짜기가 물(勿)자 형국을 이루고 있는데, 이 능선의 끝자락에 의지하여 차례로 서백당, 무첨당, 향단, 관가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네 가옥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귀중한 고택이다. 배치상 또한 특이한 점은 이들 건물들의 사랑채나 대문, 혹은 마당의 좌향이 가옥 전면에 위치한 문필봉의 형태를 갖춘 성주봉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배치는 우리 건축이 가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지역을 답사할 기회가 있으면 위에서 언급한 가옥을 방문해서 사랑채 혹은 앞마당에 서서 전면을 살펴보라. 예외 없이 양동마을 안산격인 성주봉이 여러분을 맞이해 줄 것이다.
<②편에 계속>
율곡 이이가 과거시험을 볼 때 금강산에 들러 기도한 이유
<①편에서 계속>
이곳 풍수와 학자 배출과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고택은 ‘서백당(書百堂)’이다. 이 곳은 1454년(성종15)에 건축한 전통가옥으로 월성 손씨 종택이다. 서백당은 “참을 인(忍)자를 100번을 써야 인재를 길러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곳을 두고서 일찍이 풍수학자들은 삼남의 길지로 현인이 3명 태어날 곳이라 예언했다. 실제 이곳에서는 조선중기 뛰어난 문신이자 청백리인 우제 손중돈(1463~1529)과 외손으로 조선조 유학자로 동방 5현으로 추앙받는 회재 이언적(1491~1553)이 태어났다. 앞으로 마지막 한 사람의 현인이 태어나길 기다리면서 종가를 지키는 그 마음이 바로 한국인이 믿는 풍수 정서이다.
양동마을 이외에도 문필봉이 존재하는 마을에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심심치 않게 들린다. 청록파시인 조지훈의 고향인 경북 영양 주실 마을, 전남 임실의 삼계면, 동양학자 조용헌의 글에서 보이는 전남 해남의 윤선도 고택, 경남 산청군 금서면, 경남 사천시 곤양면, 이곳들은 모두 안산에 문필봉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임실의 삼계면 지역에서는 1개면에서 100여명 이상의 박사가 배출되었다고 하니 문필봉과 학자 배출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율곡 이이(李珥)도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문필봉이 있는 금강산 신계사에 들러 기도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문필봉에 대한 선비들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기 충분하다.
▲경남 사천시 곤양면 문필봉. /조훈철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 스토리텔링을 원한다. 과학의 시대를 뛰어넘어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풍요롭게 구사해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내느냐에 국가경쟁력의 승패가 달려있다. 스티브 잡스의 작품인 애플 아이폰, 조앤 K 롤링의 해리 포터 이야기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특히 해리 포터는 현실세계에서 가능하지 않은 일을 다룬 판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빨려들고 있다. 해리 포터의 브랜드 가치는 서적, 영화, 캐릭터 상품을 포함하면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의 브랜드 가치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고 가공하는 능력은 우리도 이들 못지않다. 한국의 K팝이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한국의 드라마가 세계 속에 진출할 수 있는 원동력에는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는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DNA가 존재하기 때문이라 믿고 싶다. 그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모티브에는 바로 ‘문필봉’과 같은 한국의 자생풍수가 자리 잡고 있다.
(13)-(1)(2) 창경궁(昌慶宮) 궁궐배치에 담긴 비밀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후기 역사적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 궁궐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숙종 시대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장소이면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명칭을 격하시키는 동시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를 대량으로 심어 밤 벚꽃놀이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아쉬운 것은 해방 후에도 휴식공간이 거의 없었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창경원은 최고의 위락공간 및 놀이동산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80년 중반 정부는 민족정기의 회복 차원에서 ‘창경궁 복원 사업’을 단행했다. 먼저 그 명칭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환원했으며, 동물원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심었던 수많은 벚나무는 모두 국내 수종인 소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재정비 작업을 통해 궁궐로서 면모를 갖춘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창경궁은 당초 생존해 계시는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세종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라는 궁터였으나, 성종 15년(1484)에 살아 계신 세 분의 대비를 위해 그 터에 주요 건물인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 등과 같은 주요 전각들을 완공하면서 이름도 창경궁이라 명명했다. 그 후 보완공사를 거쳐 궁궐다운 규모를 갖추게 된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기능을 보완하는 궁궐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창경궁은 궁궐로서 독립적인 규모를 갖추기는 했지만 당시에 왕이 기거하면서 정사를 보는 궁궐이라기보다는 왕실의 대비들이 거주하는 내전 기능이 강한 일종의 ‘대비궁’ 역할을 담당한 궁궐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의 궁궐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1616년)이며, 동향이 특징인 창경궁 명정전. 국보 제226호. / 조훈철
그러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불타 버렸다. 이후 광해군 8년(1616) 창경궁은 복구가 되었지만 몇 차례의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 구역의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화재에서 살아남은 것들과 순조34년(1834)에 다시 지은 건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명정전(明政殿)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창경궁 배치의 핵심은 그 좌향(坐向)에 있다. ‘군주는 남면’이란 유교 예제에 따라 기존에 조성한 궁궐인 경복궁과 창덕궁은 모두 남향(南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창경궁은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을 동향(東向)으로 배치를 했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창경궁을 복구할 때 광해군은 명정전의 좌향을 남향으로 할 것을 어명으로 내리지만 유교 예제에 정통한 유학자들조차 정전 건물의 남향배치를 반대한다는 상소들이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남향을 반대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치열한 풍수 논쟁이 실록에 기록되고 있는 것을 감안해볼 때 결국 유학의 이론과 반하는 풍수에서 그 답을 찾는 유학자들의 고뇌가 읽혀진다. 이런 현상은 조선 초기 남대문을 서쪽에 치우치게 건설해 놓고 실록에서 도성 축조와 각 문의 이름을 언급할 때 ‘정남(正南)은 숭례문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처럼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②편에 계속>
다른 왕궁은 남향인데 창경궁(昌慶宮)만 동향인 이유는?
<①편에서 계속>
풍수(風水)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다. ‘바람을 저장하고, 물을 얻는 일’이 풍수의 핵심이다. 옛 선조들은 바람을 막아주고 물이 있는 장소가 인간 살기에 좋은 터라고 보았다. ‘장풍득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하면 된다. 즉, 뒤에서는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서는 물을 얻는다는 원리이다. 창경궁의 입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득수’부분이다. 득수란 물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때 말하는 물은 명당수를 의미한다. 명당수는 혈 자리에 모여 있는 좋은 땅의 기운이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감싸면서 돌아가야 그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된다. 따라서 남향을 하고 있는 건물의 경우 명당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야 한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남향 배치를 한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서입동출’하면서 흐르는 궁궐 내의 물줄기는 제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경궁의 편전 문정전(文政殿), 왕이 경연을 하거나 집무를 보는 공간이며, 영조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훈철
그런데 창경궁의 명당수는 옥천교 아래로 흐르는 옥천이다. 옥천의 물줄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현재 종로4가에서 청계천과 합류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을 남향으로 배치하게 되면 건물과 물길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 내려와 창경궁에는 실제로 명당수가 존재할 수 없게 상황이 연출된다. 창경궁이 동향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교 예제에서 ‘임금은 남면’이라고 강조한 남향보다 물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이었다.
창경궁에서 건물의 배치와 더불어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건물의 기둥 형태에 관한 것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입각해서 건물을 지을 때 궁궐의 외전 구역인 정전과 편전의 건물은 원기둥을 사용하고, 생활공간인 침전의 건물에서는 사각 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이 경복궁과 창덕궁에서는 잘 지켜지고 있다. 그런데 창경궁의 경우 편전 건물인 문정전을 보면 사각기둥을 하고 있다.
정전인 명정전을 동향으로 정하고, 편전인 문정전의 기둥은 사각기둥으로 만든 창경궁 프로젝트의 최초 기획자는 성종이었다. 효심의 발로로 조성한 궁궐에서 기존 원칙과 다른 다양한 배치방식을 시도한 성종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창경궁에 담긴 비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4)-(1)(2) 착시현상을 이용한 석굴암 본존불상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경주 토함산 석굴암. 한국인의 자존심이라고 전문가들조차 당당하게 언급하는 이 작품을 불행하게도 유리 창문을 사이에 두고 먼발치에서 2~3분밖에 쳐다볼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석굴암은 지금까지 가장 많은 학자들이 언급한 우리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지만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놓여 있다. 대표적 쟁점은 석굴암에 나타나는 사상적 배경, 본존불 명칭의 문제, 입구에 기와지붕을 덮은 목조 건물의 유무, 동짓날 동해 일출의 빛이 통과하는 창문의 존재 유무, 석굴암과 불국사의 관계 등이다. 오늘은 이런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누구나 동의하는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느끼는 안정감과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흔히 조각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많이 언급한다. ‘다비드상’의 다소 비현실적인 신체 비율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들 중 이례적인 것으로, 머리와 손, 특히 오른손의 크기는 전체 신체에 비해 유난히 거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상당히 균형이 잡힌 안정감 있는 모습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본래 대성당의 지붕에 위치할 것을 감안하여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고려해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다비드상’은 르네상스 조각 작품을 대표하며 젊은 육체의 아름다움과 힘을 상징하는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상의 전경. /조훈철
서양에 ‘다비드상’이 있다면 우리는 석굴암 본존불상이 있다. 석굴암은 종교, 예술, 과학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작품이지만 특히 그 가운데 본존불상은 석굴암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굳이 ‘다비드상’과 비교하자면 본존불상의 제작 시기는 다비드상보다 750년이나 앞서며 재료도 대리석보다 훨씬 조각하기 어려운 화강암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굴암 본존불상은 작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석굴암 본존불상에 보이는 안정감 있는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 느끼는 ‘ 착시현상‘에 있다.
관람객들은 석굴암 본존불상을 참배하면서 참배자의 위치에서 보았을 때 본존불상이 대단히 자연스럽고 안정감 있다고 느낀다. 이는 철저하게 인간의 눈이 지니는 착시현상을 알고 이를 고려하여 조각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흔히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에서 보이는 배흘림 기법은 착시현상을 고려해서 만든 완벽한 건축물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운다. 시험에도 출제된다. 그래서 더욱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 건축물뿐만 아니라 석굴암 본존불상에도 그런 기법이 숨어있다.
<②편에 계속>
석굴암 본존불상이 완벽한 모습으로 보이는 3가지 이유
<①편에서 계속>
유리 창문 속에 갇혀 있어 직접 친견할 수는 없지만 멀리서나마 쳐다보았을 때 매우 안정감 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신라시대 천재 조각가의 뛰어난 예지력의 소산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래에서 언급하는 세 가지 측면이 고려된 상태에서 석굴암 본존불상은 탄생한 것이다.
첫째, 본존불상의 위치이다. 석굴암의 평면도를 보면 네모난 전실에서 복도를 지나 둥근 전실로 들어가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이 평면도에는 불교에서 추구하는 세계관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도면에서 본존불이 좌정한 위치를 살펴보라. 둥근 전실의 중앙에서 약간 뒤에 본존불을 모셨다. 왜 그렇게 배치를 했을까? 석굴암 내부에 빛이 투영되면 본존불의 앞면은 햇볕을 받아 밝아지고 뒷면은 어두워진다. 여기서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어두운 곳은 물러나 보이고 밝은 곳은 앞으로 튀어나 보인다. 그러므로 약간 뒤로 물려 놓으면 실제로는 중앙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라인들은 본존불상이 최대한 중생의 눈에 완벽한 모습으로 보여 지길 원했다. 그래서 중앙보다 약간 뒤로 모셔 놓은 것이다.
▲1913년 석굴암 해체 수리 당시 무렵 촬영한 유리원판 각종 사진. /성균관대 박물관 제공
둘째, 본존불상 손의 크기이다. 석굴암 본존불상이 완벽하게 보이도록 노력한 것은 위치뿐만 아니라 손 모양에서도 나타난다. 왼손은 선정인의 자세로 단전 근처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을 짚고 있다. 참배객의 위치에서 보면 오른손이 가깝게, 왼손은 멀게 보인다. 여기에서 또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그렇다면 석굴암 부처님의 양손가운데 어느 쪽이 클까? 당연히 왼손이 약 2cm 더 크다. 이로써 신라인들은 본존불이 최대한 중생의 눈에 완벽한 모습으로 보여 지길 또 원했다.
마지막으로, 본존불상 뒤편에 존재하는 광배의 모양이다. 석굴암 내부에서 착시현상을 교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두광(頭光)의 위치 선정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광배는 불상에 직접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석굴암 본존불상 두광의 연꽃 광배는 간격을 두고 멀리 배치하여 더 입체적인 조화를 느끼게 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광배의 둘레를 돌아가며 장식한 연꽃잎을 위로 올라 갈수록 크게 아래로 내려 갈수록 작게 만들었다. 실제 자를 가지고 재어 보면 좌우 224.2cm, 상하 228.2cm인 타원형이다. 이 역시 아래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착시현상을 이용하여 참배자가 서서 보았을 때 원으로 보이도록 설계한 경우이다. 즉, 실제 측량을 해 보면 타원형 광배이지만 참배자의 눈높이에서 보면 완벽한 원형의 광배로 보인다.
“문화재는 그 터를 떠나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라는 말은 참으로 진리이다. 착시현상까지 고려한 선조들의 지혜를 어찌 하나의 사물로서만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평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입장료 4,000원을 지불하고 석굴암에 와서 두꺼운 유리 창문 너머로 우리 문화재를 감상해야만 하는 그 심정이 답답하기만 하다.
(15) 팔만대장경의 육로 운송이 불가능한 이유
필자는 그 동안 문화재를 공부하면서, 많은 건축물들을 직접 실측해 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남긴 건축물들을 정밀하게 측량해보면 서양의 건축물처럼 반듯하거나 좌우대칭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는 궁궐, 사찰, 서원, 사대부 종가 등 거의 모든 문화재에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치방식에는 우리 선조들의 생각과 주변 자연과의 깊은 일체감이 내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문화재가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처럼 웅장하지 않고 유럽의 도시들처럼 화려하지도 않지만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 문화재를 소개하는 대부분의 책자에는 이 점을 빠뜨리고 있다.
선조들이 만든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터를 직접 가서 느껴 보아야 한다. 경주 첨성대를 알려면 동짓날 새벽 일출 광경을 첨성대에서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첨성대 설계자는 동짓날 일출을 염두에 두고 그 조형물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경주에 있는 야외 문화재는 동짓날 일출에 초점을 맞추어 만들려진 것이 의외로 많다. 석굴암, 골굴사 마애여래좌상, 남산의 감실석불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문경 고모산성 봉수대와 진남문. /조훈철
현장을 모른 채 문헌기록만 가지고 연구를 하는 박제된 지식의 대표적인 경우가 팔만대장경의 ‘육로이동설’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강화도에서 판각한 팔만대장경을 운반하는데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강화도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문경새재를 넘어 낙동강으로 내려오는 육상 운반, 또 다른 하나는 강화도 선원사에서 강화해협을 빠져나와 남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낙동강으로 올라가는 해상 운반의 경우이다. 이 가운데 육상 운반의 경우 학자들이 지도를 펼쳐서 그 코스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주, 장호원을 거쳐 충주까지는 뱃길로, 충주에 도달해서는 육로로 문경세재를 건너 낙동강으로 가면 된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팔만대장경 관련 강의를 할 때 팔만대장경의 ‘육로이동설’을 아무런 비판 없이 무심코 강의하다가 혼이 난 경험이 있다.
학생 : 선생님, 혹시 문경에 있는 ‘토끼비리’라는 곳을 가 보셨는지요?
필자 : 아니, ‘토끼비리’가 뭔데?
학생 : 아니, 선생님 현장을 보시지도 않고 그렇게 용감하게 말씀하시면 무식하다는 말 듣습니다.
필자 : 용감하다니, 그리고 무식하다니, 무슨 말이니?
학생 :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치기위해 남쪽으로 진군 시 이곳에 이르러 절벽과 강으로 길이 막혀 헤매고 있을 때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것을 보고 따라 가 보니 벼랑 옆으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 있어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왔다는 전설이 서린 길 말입니다.
▲문경 토끼비리 문화재 관람제한 안내. /조훈철
그 강의가 있었던 주말 문경 현장답사를 했다. ‘고모산성’의 진남문을 지나 ‘토끼비리’를 직접 체험했다. 이곳이 바로 한양에서 영남지방으로 가는 최단코스 옛길이었다. 현장을 모르고 책속에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문화재를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관념적이면서 위험한 것인지 토끼비리 잔도가 가르쳐 주었다. 이 곳을 한번이라도 방문하고 글을 쓰는 학자라면 팔만대장경의 ‘육로이동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현장이었다.
문화재의 현장답사를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문화재 조형 원리를 제대로 밝혀 놓은 문헌 자료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글을 남기거나 아예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풍수사상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문화재 현장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문경 토끼비리 잔도. /조훈철
숭례문의 위치 및 방향, 창덕궁 인정전 앞마당이 삐뚤어진 이유, 창경궁이 남향(南向)이 아닌 동향(東向)인 점, 정조시대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지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를 바탕으로 평면을 사각형으로 만들고 연못 중앙은 섬을 조성하여 그 모양을 둥글게 했다. 그런데 수원화성 내 방화수류정의 연못을 조성할 때 정조는 왜 둥근 형태의 연못을 만들었을까? 다른 서원들은 남향(南向)인데 반하여 도동서원이 북향(北向)인 점, 안동 병산서원의 동재 건물은 왜 방향이 뒤틀려 있는지 등등 이 모든 것을 문헌자료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하면 오리무중에 빠져 버린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선조들의 시각인 풍수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으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서양 건축의 어떤 이론을 도입하더라도 설명이 궁색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문화재는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지녔던 높은 안목으로 창출한 전통 문화의 결정체이다. 이 점을 무시한 채 서양식 사고방식과 잣대를 가지고서 우리 문화재를 해석하는 경우 오류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문화재는 서양시각이 아닌 우리 선조들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조훈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