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18/ 조선의 서원/ 서원 내력 - 도산서원 - 필암서원 - 향교
문화18/ 조선의 서원
■ 조선의 서원 내력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이며, 특히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열고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보급한 이래 남송·원·명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을 위한 준비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서원은 사림의 장수처(藏修處)이면서 동시에 향촌사림의 취회소(聚會所)로 정치적·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흔히 서재(書齋)·사우(祠宇) 등과 혼칭되고 성격도 비슷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 서원 사진 작품
▲남계서원 = 안장현 작 서원 작품
▲도동서원
▲도산서원
▲돈암서원
▲무성서원
▲문암서원
▲병산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
● 도산서원 - 안동
○도산서원과 퇴계 이야기
매화를 너무나 사랑한 퇴계(退溪)선생은 그냥 매화라 하지 않고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이라는
그리고 이 매화와 함께 퇴계를 이야기 할때는 늘 떠오르는 한명의 여인이 있는데 단양의 관기 두향(杜香)입니다. 이 두사람의 이야기는 아마 인터넷 어느공간에서 한 번쯤은 읽어보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1000권지폐와 도산서원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경북 안동 도산면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도산서원을 일반 대중들께 가장 널리 알려 준 것이 바로 1000원권 지페인데 구 1000원권 지폐 뒷면의 그림이 바로 도산서원 풍경입니다.
(위 그림 참조) 도산서원을 방문하는 이들은 대개가 지폐를 한장 들고 실물과 그림을 비교하는 재미를 가졌었지요.
도산서원은 퇴계가 말년에 내려와 후학들을 가르치는 조그만 서당(도산서당)이었는데 이것을 퇴계 사후에 선조의 명으로 증축하고 고쳐지어 서원으로 만든 것입니다.
위 지폐를 보시면 상단의 THE BANK 에서 BA 글자 밑에 나무가 한그루 보이는데 이 나무가 이 도산서원을 상징하고 퇴계선생을 기리는 수령이 400년 쯤 된 회화나무(아래 본문 사진 참조) 였습니다.
이것이 지난 2001년에 말라 죽어 버렸지요. 그 반면에 아래 WON 이란 글자 위에 우뚝하게 솟아 있는 나무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 있는 나무를 옮겨 심었다는 금송(아래 본문 사진 참조)입니다. 근데 이 금송이 바로 일본에선 일왕을 상징하는 왕궁의 조경수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그 뒤 뽑아 버리니마니 말들이 많았는데 이번에 보니 키가 더욱 커져서 싱싱하게 아직도
그자리에 자라고 있더이다. 이 1000원권은 이후 2006년에 새롭게 도안이 되고 크기도 줄어든 새 지폐로 변경 됩니다.
회화나무를 말라 죽게 만들었다고 안동시청 공무원들이 굉장히 시달렸는데 지폐가 바뀌고 나서는 그 그림이 보이지 않게 되어 원성이 많이 줄어 들었다는 후문입니다.
신권의 앞면에는 조선 최고의 교욱 기관이었던 명륜당과 퇴계가 그리 아끼던 매화가 20포기 정도
그려져 있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매형(梅兄)에게 물 잘 주라.'고 하였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1000원권 지폐는 크기도 줄어 들었고 그 도안이 바꿨는데 지금 사용 중인 지폐의 뒷면에는 이제 도산서원의 실물 그림은 없어지고 겸재 정선의 말년 작품인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실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이란 서화첩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황과 송시열의 호인 퇴계 우암을 선생으로 기리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계상정거도는 퇴계가 죽고 177년이 지난 다음 겸재 정선이 71살의 노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아래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물가에 있는 정자 같은 건물속에 한 선비의 모습이 보이는데(바로 아래 그림) 이 선비의 모습이 바로 퇴계 이황입니다. 겸재 정선은 그림책에서 이 장면을 설명 하기로 퇴계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집필하는 장면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자서절요란 주희(朱熹)의 주자대전(朱子大全) 가운데 문인지구(門人知舊)와 주고받은 서찰(書札)을 뽑아 엮은 서간선집(書簡選集)으로 기대승(奇大升)이 간행한 책입니다. 퇴계의 대표작인 주자서절요를 짓고 있는 이때 퇴계의 나이는 58세. 따라서 아래 그림에 보여지는 선비는 퇴계이며 이때 나이는 58세..라는 추론이 가능하여 집니다.
근데 이 지폐가 발행되고 나서 위의 그림을 가지고 논란거리가 생겼습니다. 위의 그림이 계상정거도인 것이 확실하고 이 그림의 설명으로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짓고 있는 장면이라면 이때는 도산서원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가 됩니다. 그리고 위 그림의 내용대로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집필할 당시 퇴계가 있던 곳은 계상서당(溪上書堂)이었습니다.
계상서당은 도산서당이 세워지기 전 퇴계가 세운 서당입니다. 도산서당과는 조그만 야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전혀 다른 위치의 장소입니다. 물론 이땐 도산서당은 없었구요.
근데 문제는 이 계상서당이 초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퇴계가 앉아 있는 곳은 초가가 아니구요.
그림의 전체적인 풍경도 계상서당보다는 지금의 도산서원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도산서원으로 지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즉,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집필한 곳이 계상서당이 분명한데 그림은 도산서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국은행에서도 처음에는 도산서원이라 했다가 뒤에 시대상 맞지 않은 오류를 지적하자 계상서당으로 말을 바꾸었구요.
따라서 대강 추리를 해 볼때는 이 그림을 겸재가 그릴때의 시기가 퇴계 사후 177년이 경과한 한참 뒤의 일이니 퇴계가 가장 말년에 애착을 가지고 지냈던 도산서당과 그것을 증축한 도산서원을 떠 올리며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결론을 내어 봅니다.
△걸어 들어가는 길은 꼭 시멘트 포장길처럼 보이지만 흙길이라 발 밑이 간지러운게 정말 기분 좋습니다.
목적지가 어느 사찰이라면 분명 시멘트로 포장이 되었을 것인데 그나마 서원길이라 이렇게 흙길로 남겨져 있는 것이 너무 행운입니다.
△퇴계가 두향을 잊지 못하여 손수 물을 길어 보냈다는 그 우물. 열정(冽井).
△내려다 보니 푸른 하늘이 보이네요. 두레박만 있었다면 길러 두향이 퇴계의 안녕을 비는 정한수로 사용 했다는 그 물 맛을 같이 한번 느껴 보고 싶더이다.
△또 하나의 우물인 몽천(蒙泉) '산골에서솟아나는 바가지샘을 [역경]몽괘(夢掛)의 의미를 취하여 몽천이라 하고,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제자들은 어리석고 몽매한 심성을 밝게 깨우쳐서 한방울의 샘물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엄청난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입니다.
△도산서원 이전에 원래 있던 서당 건물. 퇴계 사후 선조가 나머지 뒷편 건물을 증축하여 서원으로 만든 것입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곳인데 일전에 한번 도둑을 만나 지금은 중요한 도서는 인근의 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놓고 일반 서적만 보관하고 있습니다. 문은 옛날 '쇳대'로 잠궈져 있고 그것을 봉(封) 해 두었네요.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내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 지금은 다른 곳으로 모두 옮기고 텅 비어 있습니다.
△도산서원의 핵심인 전교당(典敎堂) 일종의 강당(講堂)건물로서 보물 210호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
△전교당의 편액인데 한석봉의 글씨입니다. 이를 선조가 도산서원에 내려 준 것이구요.
■ 병산서원 - 안동
■ 봉산서원 - 상주
▲봉산서원 - 17세기 설립한 상주시 소제 서원은 노수신 선생 위패가 봉안
■연곡서원 - 장흥
민정중(閔鼎重)과 민유중(閔維重), 이민기(李敏琦)를 배향한 서원이다. 1698년(숙종 24) 건립하였고 1716년(숙종 42)에 민유중을 추배하였다. 1798년(정조 22)과 1861년(철종 12) 중수하였는데 1871년 (고종 8)에 서원훼철령으로 헐렸다. 1898년 어필각, 1893년 강당을 중건하였다. 1988년에는 연곡 서원 창건을 주도한 이민기를 추배하였다. 민정중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현종 때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이조·공조·호조·형조판서를 지냈고 1675년 남인의 허적, 윤휴 등의 배척으로 장흥 벽사(현 장흥읍 원도리)에 귀양 와서 5년간의 세월을 보내며 지방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후에 풀려 나와 서울로 돌아감에 따라 당시 민정중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제자들이 그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원을 건립하였다. 민유중은 숙종의 계비 인현황후의 아버지로 현종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이 지방의 유풍을 일으키고 많은 선정을 베푸니 두 사람을 배향하게 되었다
■ 자운서원 - 파주
▲자운서원 - 율곡 유적지
▲율곡 이이 유적지내 경기 파주 사적 제525호 지정
■ 필암서원 - 장성
필암서원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文廟에 配享된 우리나라 18 先正가운데 한 분인 文正公 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모신 호남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고종 때 서원 철폐령에서도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훼철되지 아니하였으며, 1975년 4월23일 국가 사적 제242호로 그리고 문화재 필암서원 및 보물 제587호 14책 64매로 지정되었다.
■ 향교
▲경산향교
▲괴산향교
▲대청향교 -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 관아
▲동관왕묘 전경 - 1936.5.23 보물 제237호로 지정 1963. 1.21 보물 제142호로 제지정된 건축유적
▲진남관 = 국보제304호 1598 선조 31년에 건립 전라 좌수영 객사 - 여수
▲풍락헌 - 괴산 연풍초등하교 교정에 있는 영풍동헌은 연풍현감을 지낸 단원 김홍도의 체취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