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8/ 문화재1/ 건축물의 건립시기 아는 법 - 조선시대 건축물. 01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 40 평양 연광정(練光亭) - 인류무형문화유산
■문화8/ 문화재1/
■건축물의 건립시기 아는 법
상량문과 건축 양식 특징을 통한 건립 시기 파악
건축물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건립일 등을 기록한 상량문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상량문은 일반 한옥인 경우 대청마루에서 쳐다보면 종도리 아랫면에 간단히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규모 있는 건축물인 경우 대개 상량식 거행 때 종도리나 종도리를 받치는 장여 등에 파낸 홈 안에 넣어 보관된다. 이 경우 건립 시기를 알기 위해서는 지붕을 해체하여 상량문을 꺼내거나 건립 시기가 기록된 현판 등 별도의 자료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지나오면서 많은 사료들이 소실되어 현실적으로 건립 시기를 알지 못하는 건축물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건물 연대를 알기 위해서 무조건 지붕을 해체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전통 건축물의 외관만 보고 지어진 시기를 알 수 있을까?
전통 건축물에는 그 시대만의 특징이 담겨 있다. 고종 임금 당시에는 건축물을 신속히 지을 수 있는 건식기법乾式技法 발전에 따라 사찰 전각 등의 측후면 벽체는 흙벽(외를 엮은 바탕에 흙을 맞벽치기하여 구성한 벽)보다는 판재를 사용한 판벽으로 구성하였고, 공포부의 포벽 또는 화반벽(익공과 익공 부재 사이의 벽)도 흙벽보다는 긴 판재로 구성하였으며, 이 판재에 첨차나 화반의 모습 등을 돋을새김하고 단청하거나 돋을새김 없이 단청만으로 표현하였다. 또 실학사상의 발전과 광작 농업의 발달 등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다듬돌 초석 사용이 일반화되었고, 공포는 앙서 윗면에 연꽃을 조각하고 수서 아랫면에 연봉을 조각하여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 지붕은 취두·용두 등 당대의 고유한 미감을 담은 장식 기와로 화려하게 꾸몄다. 이들 건축 양식 특징을 통해 건립 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
건축 양식 특성의 중요성
지금은 전통문화대학교에 옮겨져 있는 안국동 별궁 사례를 보자. 고종17년(1880) 건립된 안국동 별궁 건물의 일부가 한양컨트리클럽 대지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YTN의 보도(2006. 2. 1)가 있던 다음날인 2006년 2월 2일에 필자는 현지 조사를 맡아 한양컨트리클럽에 들렀다. 현광루와 경연당, 그리고 이 두 건물을 연결하는 행각으로 이루어진 건축물 현장에는 언론사 기자들이 나와 있었고, 모두들 안국동 별궁 건물이 맞는지를 물어왔다.
현지 조사 당시 일부 변형에도 불구하고 기단과 초석, 상부 가구 및 지붕부가 원래의 모습대로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으므로 안국동 별궁의 진위는 좀더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건축물 특징을 들어 조선 말기에 지어진 왕실 관련 건물임을 기자들에게 분명히 밝힐 수 있었다. 우선 이익공 공포로 구성된 현광루와 경연당의 화반벽이 긴 판재로 구성된 점, 그리고 이 판재에 화반 모습을 양각과 단청을 함께 사용해 표현하고 있어 고종조에서도 전반기 건물임을 보이고 있는 점, 이와 함께 이 건물에 사용된 지붕 장식재인 용두와 취두 등의 모습이 19세기 후반기에 서울·경기 일원에서 사용되었던 다른 용두와 취두들의 외형적 모습과 거의 닮아 있다는 점, 이밖에 궁궐 건축에서 보이는 지붕 막새(처마 끝에 사용된 비흘림판이 달린 수키와)의 희喜자 무늬, 내림새(처마 끝에 사용된 비흘림판이 달린 암키와)의 용무늬, 너새(박공을 빗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얹은 암키와)의 거미무늬, 그리고 천장 단청의 봉황 무늬 사용을 볼 수 있어 왕실과 관련된 건축 수법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이었다.
이처럼 건축물의 양식적 특징은 건립 시기 등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 조선시대에는 건물을 매입하여 해체 후 그 나무 부재들을 그대로 활용해서 다른 건물을 짓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건축물에서 나무 나이테를 활용한 목재 연륜연대 측정값은 나무 벌채 연도는 알려주어도 건물 건립 연도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건축 양식 특성 파악이 중요한 이유이다.
새봄이 찾아온 주말에 서울 도봉구의 화계사 대웅전(1870년)이나 남양주시 별내면 흥국사 영산전(1892년) 등으로 고종 당시 건축물 특징을 찾아 문화재 나들이를 가면 문화재가 우리 곁으로 한층 더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김성도 문화재청 시설사무관, 공학박사
■ 조선시대 건축물
01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경복궁 향원정(香遠亭)경복궁 후원의 정자.
인공연못인 향원지에 작은 섬을 만들고 2층 정자를 세워 나무 구름다리 취향교(醉香橋)를 통해 건너 다니게 했다.
아래와 위층이 같은 크기이며 겹처마와 육모지붕으로 단장한 화려한 정자다. 고종 초기인 1860~70년대에 지어졌는데, 추녀마루가 모이는 곳에 탑 모양의 기와장식을 얹어 치장했다.
02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경복궁 강녕전(康寧殿)국왕의 침전(寢殿).
정면 11칸, 측면 5칸의 큰 건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1917년 창덕궁 희정전(熙政殿)이 소실되자 강녕전을 헐어 그 재목으로 중건했다.현재 경복궁에는 강녕전이 새로 복원됐다.
03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경복궁 집옥재(集玉齋)경복궁이 중건된 뒤에 건립된 고종의 서재다.
중국풍 건물로 장방형의 높은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다. 중앙에 돌계단이 있고 왼쪽의 팔각 2층 건물은 서고인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으로 언뜻 협길당(協吉堂)이 보인다.
04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일대 원래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던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퇴위하고 머물면서 궁호가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황제의 침전으로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환궁하며 세운 전각인데, 1904년 화재로 소실돼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은 이곳에서 승하했다.
05 창덕궁 부용지(芙蓉池)
창덕궁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과 누각.낮은 골짜기에 연못을 만들고 부용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어수문(魚水門)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2층 건물이 나타난다. 1층 규장각(奎章閣)은 수만 권의 책을 보관하던 서고였고, 이층 주합루는 도서를 열람하며 풍치를 즐기던 곳이다.
06 창덕궁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과 반도지(半島池)
창덕궁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과 반도지(半島池)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 관람정은 지붕이 합죽선 부채꼴.. 존덕정은 2층 겹 육모지붕의 정자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한반도 지형을 본떴다는 반도지로 추정된다.
07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일부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 낭인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1873년 창건되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가 헐어버렸다.
08 궁중연회 뒤 기념촬영
궁중연회 뒤 기념촬영궁중 연회에서 가무는 주로 의녀(醫女)
들이 맡았다. 의녀들은 의술 이외에도 악기와 노래, 춤을 배워야 했다.
사진은 덕수궁에서 연회를 마친 뒤 양복 입은 귀빈을 모시고 여악(女樂)을 맡았던 기녀들이 앞에,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뒤에 서서기념촬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09 의정부(議政府)
의정부(議政府)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이었던 의정부는 갑오개혁 시기인1895년(고종 32) 내각으로 개편되었다가 이듬해 환원되었고,1907년에 다시 내각으로 개편되며 폐지되었다. 광화문 동편에 있던 이 건물은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10 남산 주변
남산 주변1893년 남산 기슭에 세워진 일본공사관 주변 모습. 왼쪽 위편에 깃발이 꽂힌 서양식 건물이 일본공사관이고, 일장기가 있는 곳이 영사관으로 짐작된다.
11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서울 신문로2가에 있던 조선시대 서울의 4대문 중 하나.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15년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이유로 철거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12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서울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적을 막기 위해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을 쌓음
.
1869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사진 왼쪽에 전차표 판매소가 보인다.
13 비각
비각1902년 고종의 즉위 40돌과 5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장방형 대리석에 ‘대한제국이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이라는 전액(篆額)을사면에 둘렀는데,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가 쓴 글씨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기념비전을 세웠다.
14 대관정(大觀亭)
대관정(大觀亭)1897~98년경에 세워진 2층 양식 건물로 외국의 귀빈이 묵던 호텔이다.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어 고관이나 외국인들의 연회가 잦았다. 1905년에는 일본군사령관저로도 사용되었다. 소공동 조선호텔 앞쪽 언덕에 있었는데 1928년 개관한 경성부립도서관에 자리를 내줬다.
15 영국공사관(그림 없음)
영국공사관 서울정동에 검은색과 붉은색벽돌로 지은 2층건물.
1890년에 착공해 1892년에준공했다.1898년 공사관으로 승격되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뒤 총영사관으로낮아졌다. 현재의 영국대사관이다.
16 러시아공사관
러시아공사관덕수궁 북쪽에 건립된 단층의 벽돌 건물.
한국전쟁 당시 본관이 파괴되어 지금은 종탑만 남아 있다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 감시하의 경복궁을 벗어나 파천하여 1년간 머무른 곳으로 유명하다.
17 한강철교
한강철교 서울의 용산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철도교.
1899년 9월 노량진과 인천 사이 경인선이 개통된 뒤 1900년 7월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철교가 완성되었다.
경인선 부설권은 애초 미국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이 이를 인수하여완성한 것이다. 한강철교는 너비 약 5.1m, 높이 약 11.3m,길이 약 630m로 경인선 부설 공사 중 최대 난공사였다.
현재의 철교는 한국전쟁 중 파괴된 것을 복구한 것이다.
18 독립문
서울 현저동에 있는 대한제국 시기의 석조문으로 높이 14.28m, 너비 11.48m다.
독립협회의 발기로 1년간의 공사를 거쳐 1897년 11월20일 완공되었다.1980년 1월 고가도로가 나면서 이전돼 현재는 원위치에서 서북쪽 70m 떨어진 곳에 있다.
19 독립관
1896년 창립된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되던 건물.
독립문 근처에 있으며,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해 만들었다.
‘독립관’ 현판은 순종이 황태자 시절 한글로 쓴 것이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도 강연회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20 원각사지(圓覺寺址)
원각사지(圓覺寺址) 십층석탑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 석탑.
높이 12m. 국보 제2호. 탑골공원 자리는 조선 초기 원각사라는 큰 사찰이 있던 곳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형태가 특수하고 화려함과 기교에 있어 조선시대의 석탑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21 원각사비
원각사비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 1471년에 건립된 것으로높이 4.9m, 비신(碑身) 너비 1.3m이다. 보물 제3호.
귀부(龜趺)는 화강암, 비신은 대리석이다. 탑골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이 사진의 모델이 되었다.
22 노량진 도선
노량진 도선노들나루라고 불린 노량진은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충청도와 전라도로 나가는 길목이었다.
1910년대 인도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배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야 했다.
23 관왕묘(關王廟)
관왕묘(關王廟)관우(關羽)를 받들기 위하여 건립한 묘당으로 지금의 신설동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남대문 밖에 건립되었는데,이후 동대문 밖에도 동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 동관왕묘는 1602년에 완성된 것으로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 지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다.
24 북한산 산영루
북한산 산영루 북한산 자락에 있던 누각. 현재는 주춧돌만 남았지만,사진을 들여다보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정취를 즐기던 시인묵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25 한강에서 얼음 깨고 낚시
한강에서 얼음 깨고 낚시추운 겨울, 한강이 얼면 강태공들은 한강에 나가 빙판에 구멍을 뚫고 낚시를 했다.
한 가족일까, 손에 쥔 물고기를 보며 흐뭇해하는 모습이 낚시가 이들의 생업임을 짐작케 한다.
26 마포 풍경
마포 풍경 마포는 용산강이 합류하는 한강 북안의 포구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부리던 교통의 요지였다.
포구 주변의 경치가 수려해 시인묵객들이 즐겨 이곳의 경치를 예찬했다. 인근에 정자나 누각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27 동대문 밖 무덤의 문인석
동대문 밖 무덤의 문인석 무덤 앞의 문인석과 양석(羊石)으로 보아 왕족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동대문 밖 꽤 높은 산허리에 위치해 있다.해가 중천에 있는데 세상 모르고 자는 이는 나무 하러 온 아이일까.
28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은 1900년 일본거류민 편의시설로 지금의 충무로2가 서울중앙전화국 부근에 건축되었다.
1905년 한일통신협정으로 서울 전체의 우편사업을 맡게 되었고 통감부 설치 후에는 그 휘하기관이 됐다. 2층의 벽돌건물이었는데,1915년 경성우편국 새 건물이 들어선 뒤 그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건물 주변에서 인력거꾼과 지게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29 대한의원
대한의원1907년 세운 국립병원 겸 의학교로, 일본인들이 의료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종로구 연건동 마두산 언덕에 있는 이 건물은 1908년 5월 준공되었는데,붉은 벽돌 2층 건물로 중앙에 시계탑을 배치했다. 현재 서울대학병원 구내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0 일본군 사단사령부
일본군 사단사령부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했는데 사령부가 처음엔 필동에 있다가 용산으로 이전했다. 이후 용산은 일본군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31 통감 관저
통감 관저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과 동시에 한국의 내정을 장악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했다.
처음엔 남산 기슭의 일본공사관 건물을 사용하다가 1907년 벽돌로 2층 건물을 지었다. 통감 관저도 이때 지은 것이다.
32 경성이사청
경성이사청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서울의 일본영사관이 경성이사청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1896년 현재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벽돌 2층 건물의 영사관을 신축했는데, 1910년 이후
경성부청으로 사용하다가 1930년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들어섰다.
33 평양 대동문(大同門)
평양 대동문(大同門)조선 중기에 지어진 평양성의 동문.
전체 높이 19m, 석축 높이 6.5m인 2층 누각이다. 축대는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쌓았고 복판에 무지개문을 내서 사람들이 출입하도록 했다. 대동강 건너 남쪽으로 이어졌다.
34 평양 칠성문(七星門)
평양 칠성문(七星門)평양 모란봉(牧丹峯)에 있는 성문.
전형적인 고구려성으로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乙密臺)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 세워 성문을 세웠다.
35 평양 현무문(玄武門)
평양 현무문(玄武門)평양 금수산(錦繡山)의 성문.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다.
역시 고구려 때 축조되어 조선 숙종대에 중건됐다. 성문 축대는 다듬은 돌로 선과 면을 갖추어 정연하게 쌓았다. 칠성문과 함께 고구려 성곽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36 평양 부벽루(浮碧樓)
평양 부벽루(浮碧樓)산 위의 사람들은 대성산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언뜻 모란대가 보이고 왼쪽 성벽을 따라가면 을밀대로 이어지는 위치다. 오른쪽 대동강가에 있는 누각이 부벽루다.
37 평양 모란봉(牧丹峯)
평양 모란봉(牧丹峯)대동강 주변의 절경을 담은 사진이다. 왼쪽 봉우리가 모란봉이고 부근은 금수산이다.
오른쪽 섬은 능라도(綾羅島)이며 산 중턱에 부벽루가 보인다. 그 아래 문은 전금문(轉錦門), 누각은 득월루(得月樓)다. 머리에 짐을 인 아낙들이 지나는 곳은 청류벽(淸流壁)이다.
38 평양 을밀대(乙密臺)
평양 을밀대(乙密臺)모란봉 중턱에 있는 누각.
사방이 틔어 있다 해서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부른다. 고구려 때 세운 것을 조선 숙종대에 다시 세웠다.
고구려 축성술을 엿볼 수 있는 축대의 높이는 11m에 달한다.
39 평양 득월루
평양 득월루 대동강변에 보이는 누각이 득월루, 아래의 문이 전금문이다.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기린굴(麒麟窟)이 나오고 계속 올라가면 을밀대에 닿는다
40 평양 연광정(練光亭)
평양 연광정(練光亭)대동강변 덕바위(德巖)에 있는 정자로 고구려 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장방형 평면의 누정 두 채가 ㄱ자 모양으로 붙은 형태다. 관서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풍치가 빼어나다.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것이 능라도다.
41 평양 기자릉(箕子陵)
평양 기림리에 있는 기자의 가묘. 중국 은(殷)나라의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똘똘해 보이는 어린아이가 짐짓 포즈를 취했다.
42 대동강 얼음 채취
대동강이 꽁꽁 얼었다. 강 얼음을 채취해 얼음창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사용하는 것은 평양의 오랜 관습이었다. 얼음을 캐낸 자리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43 대동강에서의 빨래
이른 봄, 대동강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아낙들이 강기슭에서 겨우내 밀린 빨래를 하고 있다.
아직 강이 다 녹지 않아 얼음덩이가 떠다닌다. 강 건너편은 선교리인 듯하다.
44 대동강 철교
평양 시내와 선교리를 잇는 기차철교로 1905년에 준공되었는데, 평양역과 대동강역 사이에 있었다.
길이는 약 760m. 왼쪽은 나무로 된 인도교. 철교 아래로 나루터가 보인다. 철교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듯하다.
45 평양 신시가지
평양의 일본인 거리. 한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장기가 내걸린 건물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평양역 근처로 짐작된다.
46 평양이사청
이사청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영사관이 개편된 관청이다. 사진은 1909년 1월 순종이 서북지역을 순행하는 중에 평양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는 뜻으로 정문에 아치를 만들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내건 모습이다.
47 진남포 전경
1897년에 개항된 삼화부(三和府)로 해관(海關)이 설치되었던 항구.
일본과 청의 상인이 많이 거주했으며, 1910년 진남포부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일본의 주요 군수품 수송기지로 활용되었다.
■ 유성기 음반 이야기
말하는 기계, 나팔통으로 소리를 담다
[만고절창] 외부에서 일전에 유성기를 사서 각항 노래 곡조를 불러 유성기 속에다 넣고, 해부該部 대신 이하 제 관인이 춘경을 구경하랴고 삼청동 감은정에다 잔치를 배설하고, 서양 사람이 모든 기계를 운전하야 쓰는데, 먼저 명창 광대의 춘향가를 넣고, 그 다음에 기생 화용과 및 금랑 가사를 넣고, 말경에 진고개패 계집 산홍과 및 사나이 학봉 등의 잡가를 넣었는데, 기관器管 되는 작은 기계를 바꾸어 꾸미면 먼저 넣었던 각항 곡조와 같이 그 속에서 완연히 나오는지라. 보고 듣는 이들이 구름같이 모여 모두 기이하다고 칭찬하며 종일토록 놀았다더라. ― 『독립신문』 1899. 4. 20.
이런 실린더 레코드를 들려주고 돈을 받는 ‘감상소’가 봉상시[서울역사박물관] 건너편 북물골, 증청방 주석동, 광통교 등지에서 성업을 했다. 실린더 형 레코드는 왁스蜜蠟로 만들어서 즉석에서 취입과 재생이 가능하지만, 재질이 연약해서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다.
한국 최초의 음반, 태평양을 건너다
소리를 녹음한 평원반이 처음 발매된 것은 1907년 3월이었다. 이 음반은 경기명창 한인오와 관기官妓 최홍매가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서 취입을 하고, 원반을 배편으로 미국에 싣고 가서 음반으로 찍은 뒤 다시 한국(대한제국)으로 들여와 판매하였다. 이 때 취입한 것은 경기잡가 유산가, 양산도, 가사 황계사 등 모두 30종이며, 현재 9장이 발견되었다.
이어 1908년에는 미국 빅타 레코드가 100여 곡의 음반을 취입하여 역시 원반을 미국으로 가져가 음반을 제작하였는데, 서울에서 취입했기 때문에 다양한 곡들이 녹음될 수 있었다. 취입자는 가객 김재호·이정서, 기생 향선·남수·벽도·채옥·옥도·향월·앵앵·채봉, 율객 박팔괘·오태선, 창부 신경연·송만갑, 기타 악공 등 약 30여 명에 이르지만, 현재 10여 종만 발견되었을 뿐 대부분 실물 음반들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 콜럼비아나 빅타 레코드에서 발매한 대한제국 시절의 음반은 한쪽 면만 녹음되어 있어서 ‘쪽판’이라고 하며, 녹음기사가 직접 외국의 현지까지 가서 녹음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런 것을 ‘출장녹음’이라고 한다. 이들 음반은 우리나라 초창기 녹음으로 희귀하기도 하지만, 명인명창들의 연주가 훌륭하고, 전통음악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우리나라 음반의 다양화 과정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음반의 발매 양상은 새롭게 변하였다. 일본에서는 1909년 5월부터 자체적으로 음반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는데, 1911년 9월 ‘일본축음기상회’에서는 조선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음반시장은 본격적으로 일본에 예속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축음기상회에서는 ROYAL RECORD, NIPPONOPHONE, SYMPHONY, 닙보노홍, 일축조선소리반 등 다양한 상표로 조선음보를 발매하였으며, 1911년부터 1927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쪽판 103면, 양면반 310장 등 많은 음반을 발매하였다. 야마구치 가메노스케山口龜之助는 1912년 일축조선소리반을 취입할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선 경성에서 나가시마永島逸太郞씨가 동경으로 인솔하였는데, 송만갑·박춘재·관기 등과 반주자·보조원들을 더하여 스무 명이나 되는 큰 규모였다. 때마침 그때는 꽃놀이의 계절이라서 그들은 벚꽃 만발한 에도江戶 관광을 기대하면서, 날마다 시바구치芝口 야마시로야山城屋에 진을 치고 2백매 분량의 곡을 연주하고 노래했다.”
일축은 처음에는 녹음 스튜디오가 있는 일본 동경에까지 가서 취입하였지만, 1925년 이후에는 서울에 간이 녹음실을 설치하여 원반을 일본에 가져가서 음반을 제작하였다. 서울 취입이 이루어진 뒤부터 더욱 많은 연주자가 참여하였고, 다양한 곡들이 음반으로 제작될 수 있었다.
일축 음반은 풍부한 악곡을 담고 있는데, 박춘재·김홍도의 경기소리, 심정순·송만갑·이동백·김창룡의 판소리, 백모란·길진홍·장금화·최섬홍·이진봉·손진홍의 경서도 소리 등 다양한 옛 소리를 접할 수 있다. 또한 ‘학도가’, ‘권학가’, ‘이 풍진 세상’ 같은 창가, 안기영의 ‘내 고향을 이별하고’, 홍난파의 ‘애수의 조선’ 등 초창기 양악도 취입되었다.
개화기에 유행하던 창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학도가’는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던 ‘철도창가’라는 곡에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 나네. 낙락장송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棟梁 되네.’ 라는 계몽적인 노랫말을 붙여 각급 학교 창가 시간에 많이 불렀던 것이다.
유성기 음반, 죽음을 찬미하다
1925년 9월부터는 일동축음기 주식회사NITTO RECORD가 등장하여 ‘제비표 조선레코드’라는 상표로 한국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처음으로 이기세李基世라는 조선인이 음반 제작을 기획함으로써 더욱 다양한 연주자 선발과 선곡이 이루어졌다. 하규일·현매홍의 가곡, 최학봉·김화여·김창근·이응룡·김계선 등의 정악, 김창환·송만갑·김창룡·박월정·김녹주·박녹주의 판소리, 심상건의 가야금산조 등 중요한 녹음이 많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나 월남 이생재의 연설 ‘조선청년에게’ 등도 중요한 녹음이다. 일본에서는 유명인사들의 정치연설 같은 녹음이 많이 있지만,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는 정치적 연설을 담기 어려웠고, 이상재의 이 계몽적인 연설 음반도 대부분 압수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바노비치Ivanovich의 ‘다뉴브 강 물결Danube Waves’이란 기악곡을 번안한 것으로,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라는 후렴구를 통해 식민지 젊은이들의 절망감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1910년대 ‘학도가’ 식의 계몽주의를 지나, 3.1운동 이후 식민지 상황의 고착화로 인한 암울한 현실 속에서 문화 전반을 휩쓴 허무주의, 퇴폐주의 경향은 노래에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구나 이 노래를 취입한 윤심덕이 연인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자살함으로써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 노래 역시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각 신문에서는 대대적인 추적 보도와 함께 모방 자살을 우려하는 사설을 싣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이 음반은 최초로 대중적인 인기를 거둔 히트곡으로, 근대 대중음악, 대중문화의 시대를 알리는 음반이요, 음반의 대중매체적 속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음반이다. 또한 한국음악 유성기음반으로는 유일하게 장시간 녹음이라는 일동축음기의 신기술이 담겨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10인치 유성기음반은 보통 3분 30초가 녹음의 한계인데, 이 음반에는 무려 4분 40초가 담겨 있다.
전기녹음의 시작, 유성기 음반의 시대 꽃을 피우다
1928년부터 신기술로 전기녹음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음반은 나팔통으로 소리를 모으고, 음압으로 얇은 막을 진동시켜 밀랍 판에 소리골을 새긴 다음, 금속으로 도금하여 틀을 만들어서 끈적하게 녹인 셸락을 눌러 찍는 것이다. 음반을 만드는 방식은 같지만, 전기녹음은 마이크로폰으로 소리를 증폭시키기 때문에 더욱 크고 선명한 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이 기술로 인해 소리는 사실음에 가까워졌고, 비로소 감상할 만한 수준의 소리를 녹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음악 유성기 음반은 약 6,500종류 정도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전기녹음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전기녹음 음반이 나오고부터 음반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으며, 유성기 음반은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문화 시대를 열어간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전기녹음 음반을 제작한 회사는 콜럼비아(일축), 빅타, 포리돌, 시에론, 오케, 태평 등 보통 6대 레코드사라고 부르는 음반사와 밀리온, 고라이, 돔보, 쇼지꾸 등에서도 소량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여러 회사에서는 매월 일정량씩 음반을 발매하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면서 경쟁적으로 음반을 발매하였다. 유성기 음반에는 민요·판소리·창극·잡가 등 전통음악은 물론, 유행가(대중가요), 코미디 장르인 만담·난센스·스케치, 변사의 무성영화 설명, 신파극, 악극, 심지어 친일가요까지 당대의 모든 공연예술이 담겨 있다. 근대 공연예술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유성기 음반을 빼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겨레 정서의 원형을 전통음악 유성기 음반이 담고 있다면, 변화해 가는 시대적인 정서와 사회의 모습은 대중가요나 신파극 음반을 보면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유성기 음반은 민족적·시대적 정서의 보고인 것이다.
글·사진·배연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재 전문위원
■ 조선대원수 투구 옥장식
■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91호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는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문화재이다. 1924년 발굴될 때에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지금도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관람객의 사랑을 받는다. 주인과 하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각각 말을 탄 모습으로, 말 탄 사람의 의복과 각종 말갖춤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신라인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제 91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술이나 물을 따르는 데 쓰던 주자(注子). 말등에는 깔때기가 붙어있다
▲복제품. 이렇게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턱 밑에 수염처럼 보이는 것은 모자를 묶은 끈이다. 콧대도 무척 높다.
▲바지 모양은 갑옷과 비슷하다. 옆에 붙어 있는 것은 칼일까?
▲뒷모습도 보자. 윗도리는 무엇을 입었을까?
▲발걸이도 있다. 가죽으로 만들었나 보다. 신발 끝은 버선코 같다.
▲뿔처럼 생긴 것이 있다. 사실은 갈기를 묶어 올린 것이다. 말방울도 보인다.
▲웃는 모습이 귀엽다. 입에 재갈을 물었다
▲말안장은 앞판을 세모꼴로 장식했다. 띠고리도 보인다.
▲말띠드리개와 말다래도 있다. 천마도가 바로 이 말다래에 그린 것이다.
▲주인상과 나란히 발견된 하인상. 손에 방울을 들었다.
신라 사람들은 말을 이용한 독창적 디자인의 주자(注子)를 만들었는데, 왜 ‘말[馬]’을 디자인에 응용했을까. 이는 말이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신라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옛 무덤에서는 말과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발견된다. 천마총의 천마도를 비롯하여, 말 모양의 신라 토우나 토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토기와 함께 하인으로 여겨지는 또 하나의 기마인물형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손에 방울을 들었다. 앞장서서 하늘로 주인을 안내하는 듯하다. 실제로 발견 당시 하인상이 주인상 앞에 놓여 있었다
■ 삼국시대 문화재
▲신라시대 토우
▲첨성대
▲백제 왕흥사 터에서 출토된 소형 청동인물상
▲대나무로 만든 말다래에 장식한 금동 천마도 - 1500년의 잠에서 깨어나다
▲나전모란넝쿨무늬경함
▲고려 나전칠기 - 14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나전 칠기 8각함이 일본에서 발견 전시
▲고려화물선 - 800년만에 실물 크기로 복원
▲龜趺(귀부) -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강릉에서 발견 고려시대 제작 추정
▲왼쪽 - 14세기 중반 고려 불화, 오른쪽 - 12세기 말 13세기 초 고려청자의 정병
■ 조선시대 문화재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 보물 제1803호 1409년 태종9년에 세웠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1335-1408 의 건국 과정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자 일대기를 지어 돌에 새긴 것
▲명성황후 국장감의궤
▲문정왕후 어보 - 미국 LA 카운티 박물관에서 소장
▲송자대전=우암 송시열의 시문집
▲조선제왕 투구 - 일본 소장
■ 아리랑 이야기
▲아리랑이 2012.12.6.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 = 아리랑 영화 포스터
▲아리랑 악보 - 1955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발간된 청년학생가곡집에 수록
▲중국 랴오닝민족출판사에서 2012. 4.18. 재발간된 조선족 소개 책자 조선족에 실린 아리랑
▲조선족 책자 아리랑 소개
▲조선족 책자
▲연변 인민출판사에서 발간된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의 서로 다른 아리랑
연변 인민출판사
▲아리랑을 부르는 어른들
▲아리랑이 울려 퍼진 2002년 월드컵 시청 앞 광장
■ 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패의 공연 - 14.1.29 경복궁 홍례문 앞 농악의 유네스코 인류무향문화재유산 대표목록 등재를 축하하는 공연
▲한국의 인류무형유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