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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5/ 국보5/ 국보탐방4/ [31] 국보 제 31호 경주 첨성대 - [40] 국보 제40호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상림은내고향 2022. 1. 15. 16:08

문화5/ 국보5/ 국보탐방4/ 

[31] 국보 제 31호 경주 첨성대

공식명칭 :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시대 : 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번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 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뒤 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기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

 

경주(慶州) 첨성대(瞻星臺)

경주를 일컬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거나 '찬란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라고 한다. 석굴암, 불국사를 비롯해 수십 기의 고분과 왕릉, 황룡사지 등 크고 작은 절터와 남겨진 석탑들, 불상들. 이렇게 암송하듯이 경주를 자랑하며 문화재를 제시하다가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라는 첨성대에 이르러 막상 현장을 보면 다소 뜻밖이라거나 잠시 할 말을 잊고 뜸을 들이기 쉽다. 그 명성(?)에 비하여 지극히 작고 소박한 모습 때문이다.

 

계림, 월성, 안압지, 최 씨 고택과 경주향교에 둘러싸인 시내 한가운데 평지에 조금은 빈약해 보이는 듯 서 있는 첨성대. 차라리 대릉원 주변 대형 쌈밥식당들이나 문화재 못지않게 유명한 황남빵 가게보다 작고 초라해 보이는 첨성대. 진정 국보 제31호이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첨성대가 맞는지 자문자답, 반신반의하게 된다. 최소한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쯤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국보 제31호, 첨성대.

 

그러다가 이내 반문하게 된다. 그럼 첨성대라고 해서 지금 한참 하늘을 찌르며 올라가는 제2롯데월드쯤 되는 드높은 첨탑을 기대했느냐? 아니면 끝이 안 보이게 크고 넓고 우람한 건축물을 상상했느냐? 그도 아니면 거대한 천체망원경이 설치된 돔형 지붕의 천문대 건물쯤으로 예상했느냐? 과연 저 구조물의 정체는 무엇이냐?

 

첨성대의 숨겨진 비밀

첨성대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여러 학설과 주장이 제기되었고 아직도 일부 반론과 미처 증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사람이 올라가 별을 비롯한 천체를 관측하고 매일 떠오르는 해와 달에 대한 과학적 관찰을 하던 곳임은 틀림없다.

 

높이 9.17m에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 크기의 벽돌로 쌓아진 첨성대는 아직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그 역할과 기능 외에도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이 흥미롭다. 그 해석에 따른 상징성이 생각보다 과학적이어서 놀라게 된다.

 

우선 이중의 네모진 기단(받침)이 바닥에 깔렸고, 그 위로 벽돌 쌓듯이 일정한 크기의 돌을 쌓아 올라가면서 둥근 원형을 만들었는데 그 원형의 지름이 점점 줄어들면서 아름다운 허리 곡선을 만들며 올라간 호리병 모양이다. 모두 27단을 쌓아 올렸는데 맨 위에는 네모난 모양을 만들기 위하여 일자형 석재가 서로 쐐기 박듯이 결합한 정(井)자 모양의 돌이 얹혀 있고, 앞쪽이라 할 수 있는 남쪽으로 중간쯤 되는 13단, 14단, 15단에 걸쳐 네모난 창을 내어 출입구 역할을 하게 하였다.

 

출입구 아래로는 사다리를 걸친 흔적이 있다는데 막상 식별하기는 어려웠고, 옛 기록에 이곳으로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안에서 위로 올라갔다고 하니 내부는 창문까지는 바닥을 흙으로 메꾸었고 그곳부터 꼭대기까지는 다시 또 다른 사다리 등으로 올라갔을 것이며 그런 장치들을 걸기 위한 흔적이 19단 바깥쪽으로 돌출된 돌일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첨성대의 외형을 보고 우리의 옛사람들이 말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사상을 형상화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맨 위에 얹힌 네모난 돌은 뭐냐고 질문하게 된다. 오히려 하늘을 네모로 마감하였으니 말이다. 굳이 천원지방 사상을 표현했다고 강변할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튼튼하게 세우려는 공학적 판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몸체를 쌓아 석단이 모두 27단인데 맨 위의 네모난 돌까지 합치면 28단이 되어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맨 위의 네모난 돌은 한 단이 아니고 두 단이니 그러면 29수가 아닌가? 자칫 꿈보다 해몽은 아닌가 싶다.

 

▲첨성대 맨 위쪽 석단.

 

또한 남쪽 중앙에 낸 창문을 중심으로 (13~15단에 창문을 내었으므로) 아래쪽이 12단이고 위쪽의 12단이 되니 이는 1년이 12달이라는 것과 아래위를 합쳐서 24는 1년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는 딱히 아니라고 할 것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첨성대를 쌓은 돌을 낱개로 세어보면 모두 361개와 반개라고 하는데 (어떤 이는 362개라고 함) 반개는 어디를 말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위 사진에서 퉁겨진 듯 보이는 그 돌이 아닌가 싶은데, 아무튼 이는 음력으로 1년의 날짜와 같다고 한다. 다만 필자는 현장에 가서도 첨성대를 이루는 돌들을 하나하나 세어보질 못했으니 이러한 주장은 합리적이라고 참고하기로 한다.

 

▲첨성대 남쪽으로 중앙이 되는 13~15단에 네모지게 만든 창.

 

뿐만 아니라 첨성대가 자리 잡고 있는 위치의 방향은 기단의 네모가 동서남북을 정확히 가리키고 꼭대기 정(井)자 틀은 동서남북의 중앙을 가리키니 4방과 8방이 모두 표시된 방위로 세운 것이 된다. 그리고 중간에 만든 창은 정남향이 되며 춘분과 추분에는 햇빛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하게 비추고, 동지와 하지에는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매우 과학적인 설계라고 한다. 그러나 이 현상은 춘, 추분이나 동, 하지에 현장을 목격하거나 그 현상을 표현한 사진 등이 없어 명확하게 이해가 가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아니라고 주장할 논거도 없으므로 매우 과학적인 설계라는 점으로 인정하기로 한다. 또한, 전체적으로 27단인 높이는 첨성대가 선덕여왕 대에 세워졌는데 선덕여왕이 27대 임금이라는 점도 암시하는 상징이라고 하니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과연 국보 첨성대 속에 숨겨진 비밀, 감추어진 과학이라고 해도 좋겠다.

 

다만 꼭대기로 올라가서 어떤 자세로, 어떤 기구를 사용하여 천체를 관측하고 또 어디에 어떻게 기록하였으며 그러한 일들이 어떠한 국가경영과 민생에 반영되고 보탬이 되었는지 등에 대한 사실과 실적, 연구 등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 그런데도 국보 제31호 첨성대는 이견(異見) 없이 가장 오래된 첨성대이며 그 설계와 쌓음에도 숨겨진 과학과 뛰어난 비밀들이 있다는 점, 또한 외형적으로도 아름답고 안정된 느낌에 튼튼하게 쌓아올려 천 년이 넘도록 남아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

 

▲감사원에서 제시한 첨성대 기울기.

 

2014년에 감사원은 문화재 보수·관리 실태에 대한 감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첨성대가 ‘2009년 이후 해마다 1㎜ 정도 기울고 있다’고 밝혀 첨성대의 구조적 안전이 심각하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내놓았는데 이에 대하여 문화재청에서는 관계전문가들과 함께 정밀측정 결과 2014년 9월 24일 기준으로 북쪽으로 205.05㎜, 서쪽으로 5.13㎜가 기울었으나 구조적으로 긴급한 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안전도를 점검하고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첨성대 야경, 우리 눈에 익숙하면서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32]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공식명칭 :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지정일 : 1962.12.20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수량 : 81,258
시대 : 고려
주소 :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해인사 (치인리)

 

대장경은 경()·율()·논()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 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 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1232)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골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본강점기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 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 내외, 세로 24㎝ 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문화재청)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해인사 대장경판은 우리가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며, 여기서 팔만이란 대장경 판수가 팔만 여장에 이르기에 그리 말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고대 인도에서는 많은 숫자를 표현할 때 8 5000이라거나, 인간의 번뇌가 많은 것을 8 4000 번뇌라고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길을 대중에게 설법한 것을 8 4000 법문이라 하는 것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정식 명칭은 고려대장경(또는 재조대장경)이다. 재조(再雕), 즉 다시 새겨 만든 대장경이라는 것이니 처음 만든 대장경이 잘못되어 다시 만들었음을 그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다. , 고려 때에 두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국가사업으로 간행하였는데 먼저 만들어진 대장경은 고려 현종 2(1011)에 시작하여 선종 4(1087)까지 76년에 걸쳐 판각하였다

 

이를 처음 만든 대장경이라 하여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고 부르며, 이 초조대장경은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던 중 고려 고종 19(1232) 몽골의 2차 침입 때 모조리 불에 타버리고 만다. 그래서 고종 23(1236)부터 38(1251)까지 16년간에 걸쳐 다시 만든 대장경이 지금의 해인사 대장경판, 우리가 흔히 부르는 팔만대장경으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물론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 사이에는 속장경이라 부르는 새로운 형식의 대장경이 있었는데, 이는 초조대장경이 북송칙판대장경을 원본으로 하여 경(), (), () 삼장(三藏)을 주로 모아서 기록한 것이다. 이에 비하여 속장경은 이의 주석서나 연구서라 할 수 있는 장(), ()들을 모아 간행한 것인데 대각국사 의천이 주관하여 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보관된 모습, 현재 일반인들은 해인사를 방문하여도 장경판고 내부로 들어가거나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이 속장경 역시 초조대장경과 함께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속장경이란 근거 없이 일본인 학자가 붙인 말이며 위에서 말한 삼장(三藏) 외에 주석을 단 별도의 장()을 더해 사장(四藏)으로 만들려 했다는 의천국사의 의도였다는 것으로 이에 대하여 지난 2005년부터는 교장(敎藏)으로 교과서에 수록되고 있다.

 

대장경(大藏經)은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는 대장경은 과연 무엇일까? 대장경(大藏經) , ()을 藏()한다, 담고 있다는 말인데 구체적으로는 경(), (), () 삼장(三藏)을 말한다. 경장(經藏)은 석가모니가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설파한 경()을 담은 바구니이고, 율장(律藏)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논리조항과 공동생활 규범인율()을 담은 바구니, 논장(論藏)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해 이해하기 쉽게 주석한 논()을 담은 바구니로 말한다

 

이 세 가지를 담고 있는 삼장(三藏) 3개의 바구니라 하여 산스크리트어-라틴어 혼합표기로는 뜨리삐따까(Tri-Pitaka)라고 한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영문표기는 대장경을 Tripitaka라 하며, 고려대장경은 Tripitaka Koreana라고 쓰고 있다.

 

이는 80 생애를 마치신 부처님이 45년간 설한 내용이 생전에는 문자로 기록되지 못하였다가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그해에 모여서 각자 생전에 들은 바를 여시아문(如是我問), '내가 들은 바는 이와 같다'고 하여 서로 논의하고 결집(結集)하니 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간행한 기록을 대장경(大藏經)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패엽경, 그러니까 다라나무(多羅樹) 이파리인 패다라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글자를 새긴 후 먹물을 먹인 패엽경(貝葉經)이 그 시초였다.

 

이후 다라수 외에도 각종 나뭇잎이나 대나무 등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는데 덥고 습한 기후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없었으니 수시로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하다가 기록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거나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종파별로 각각 다른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대장경이 없는 상태에서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포교되기 시작하였고 부처님 말씀을 중국어로 번역하게 됨에 따라 포교, 번역에서는 필사본 수준이었으니 오류 발생과 오랫동안 보존의 문제가 생겨 돌()이나 금속판 대장경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취급, 보존, 인쇄에 적합한 것이 나무 즉 목판(木板) 대장경이니 지금의 형태로 된 나무판에 새기기에 이르렀다.

 

세계 최초의 대장경은?

불교의 발생지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 한국을 통틀어 최초로 만들어진 목판 대장경은 중국 송나라 태조의 어명으로 태조 4(972)에 시작하여 태종 8(983)까지 11년간에 완성된 대장경으로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들고 그 위에다 부처님 말씀을 새긴 것이다.

 

이는 총 1,076 5,048권의 불경을 무려 13만 매나 되는 목판에 새겨 약 480개의 함에 보관하였다고 전해지며 송나라 휘종까지는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고 하나 금나라 침입 이후 대부분 없어져 버리고 최근에 와서 10여 권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계의 보물, 대한민국 국보 고려대장경

이렇듯 세계 최초의 대장경인 송나라 칙판대장경은 오늘날 전해지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 두 번째로 만들어진 초조대장경도 불타버리고 말았으니 지금 해인사에 보관 중인 재조대장경이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목판 대장경이다. 그 밖에도 거란 대장경, 티베트 대장경 등이 만들어지고 전해지고 있으나 고려대장경에 미치지 못하며 일본의 경우에는 근세까지도 독자적인 대장경을 만들지 못하여 조선왕조실록에도 보면 80여 차례나 우리의 팔만대장경을 분양해 달라거나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때도 이를 가져가려 했다는 말이 있다.

 

일본은 뒤늦게 우리의 대장경 등 기존대장경을 바탕으로 1881~1885년 사이에 만든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 1924~1934년의 십여 년 동안 만든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에 만족하고 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보관시설인 장경판전 구조, 예전에는 가까이 가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외곽 접근도 어렵다.

 

▲이곳에는 지금 소개하는 국보 제32호 대장경판 외에도 고려 각판이 있고, 보관시설인 장경판전도 국보건물이다.

 

세계적인 우수성을 인정받은 대한민국 국보 제32호 고려대장경은 지난 2007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으니 세계의 보물이 된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인 해인사 장경판전 역시 국보 제52호이며 1995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니 고려대장경 경판과 보호시설 모두가 세계의 보물로 인정받은 객관적인 증거인 것이다.

 

대장경판 제작 과정

하나의 경판을 만드는 과정은 상상 이상이다. 아마도 오늘날 다시 재현한다고 해도 절대 쉽지 않을 일이다. 우선 경판 나무가 부패하거나 벌레가 먹지 않고 재질도 단단해야 하니 원목을 3년 이상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 판자로 짰으며, 그것을 다시 소금물에 삶은 후 그늘에 말려 깨끗하게 대패질하여 목판을 만든다. 그 목판은 판각하는 곳으로 옮겨 각수(刻手)들이 새기는데 사경원들이 경판 수치에 맞도록 구양순체로 정성껏 쓰고 교정까지 본 경()의 내용을 한 자 한 자 돋을새김으로 새긴다.

 

판의 양 끝에는 각목으로 마구리를 덧대어 판이 뒤틀림을 방지하고 옻칠을 하여 마무리한 후 네 귀에 동판(銅版)을 장식하면 비로소 경판이 한 장 완성된다. 이렇게 하여 무려 76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보관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보관시설의 과학성이나 관리인원들의 정성 등이 추가되어 그러하지만 우선 경판 하나하나가 그렇게 만들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보관시설에 관한 이야기는 국보 제52호 소개 때 다시 하기로 한다.

 

경판은 가로 약 69cm, 세로 약 24cm이며 두께는 2.6~3.9cm이고 무게는 약 3.5kg쯤이다. 한 면에는 23줄씩 한 줄에 14자씩, 양면에 444자쯤 새겼으며 글자 크기는 사방 약 1.5cm가량이다. 판의 뒷면 끝에는 새긴 경()의 제목, 장수(張數), 천자문 순서로 함()이름을 새겼으며, 경판 끝에도 같은 표시를 새겼다. 현존 경판을 모두 쌓으면 높이는 약 3,200m, 길이는 약 60Km에 달하며 무게만도 280톤에 이르는 엄청난 물량이다.

 

▲고려 재조대장경판의 구조.

 

▲팔만대장경의 실제 모습,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새긴 경판이다. 이 밖에 그림을 새긴 경판도 있다.

 

팔만대장경은 정확히 몇 장인가? 그동안 공식기록은 81,258장이다. 각 조사자에 따라 차이가 크고 정설이 없이 일본강점기에 데라우치 총독이 인경(印經)할 때 조사한 기록이 표준으로 전해지면서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1,512종에 6,819권, 총 81,258매의 경판이라고 조사되었고 이것이 그동안 통용되어 온 수치이다.

 

▲해인사 장경판전 모습.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기도 어려우니 국보 제32호 장경판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인사 홈페이지에도 81,258매라고 되어있고 문화재청 소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국보지정이나 유네스코 지정도 81,258매이다. 그러나 지난 8월의 보도 자료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조사보다 94판이 많은 81,352판이며 100년 만에 재조사된 결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36판이 포함되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결론을 내릴 경우, 국보와 유네스코 지정에 명시된 판수도 바뀌어야 할 판이다.

 

아쉬운 점

국보, 나아가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의 실체를 볼 수는 없다. 그토록 우리에게 자부심을 느끼라고 하고, 세계적인 문화재요 보물이라고 자랑하는데 그 실체를 볼 수가 없다? 물론 천 년 가까이 보관되어온 목판, 점점 더 보관과 관리가 어려운 그 특성을 모르는 바 아니며, 앞으로도 더 오래도록 후손들에게 전하고 이어가야 함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지 국보 문화재를 국민이 볼 수도 없다니? 이건 아니다 싶다.

 

박물관에 가면 항온항습 지진방지 도난방지 시설에 필요한 전시 장치를 갖추어 국민으로 하여금 친숙하게 보게 하지 않는가? 대장경은 단순히 부처님의 말씀이나 불교의 교리를 적어놓은 출판 인쇄물이 아니다. 인쇄시설이 아니다. 그래서 국보가 아니다.

 

천 년 전 불교국가 고려가 당시 세계 문화의 정점인 불교문화를 집대성한 역사를 초월한 문화적 콘텐츠이자 민족문화이다. 21세기 오늘날 대한민국의 르네상스라고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과거 역사이자 미래 문화의 자랑스러운 유전자이다. 단순히 나라가 어렵고 백성이 피폐하여 힘을 모아 새긴 종교적, 주술적 기도문이나 암송문이 아니다.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국민이 친숙하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전체적인 시설개방과 관람이 어렵다면 몇 가지를 샘플링해서 경판에는 글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도 있고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가 담겨있다는 사실도 알게 하고, 어떻게 인쇄하여 만들어 내는지도 시연해 보인다면 좋을 것이다. 그도 어렵다면 모조 경판을 아주 세밀하게 만들어서 진품 못지않은 느낌을 받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해인사에서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국립박물관에 진품 일부라도 전시하면 어떨까 싶다.

 

하기야 지금처럼 한자 교육을 멀리하고 한글로만 쓰고 읽고 배우려 하는 시류 속에서 훗날 팔만대장경 해석과 이해는 고사하고 읽을 줄이라도 아는 사람이 나올 것인가 하는 걱정이지만, 이를 위하여 한글화하고 디지털 작업하여 수록하면 된다는 안이한 답변에 이르러서는 하품이 나오는 바이다. 장차 이 일을 어찌 할꼬?

 

2015.12.28

[33] 국보 제33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공식명칭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지정일 : 1962. 12. 20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수량: 면적 1
시대: 신라
주소: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시하면서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다. 당시 창녕군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마치 부챗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555) 신라에 병합되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군)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 안에 모셔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신라 진흥왕 22(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

 

척경비(拓境碑)

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는 듣기에 비교적 익숙한데 척경비(拓境碑)라는 말은 왠지 낯설고 어렵게 들린다. 학교 다닐 때 암기식 입시 위주 교육의 산물, 신라 진흥왕 순수비 4개는 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녕비의 바로 그 창녕비인데 북한산비는 순수비인데 반하여 창녕비는 왜 척경비인가? (마운령비, 황초령비는 함경남도에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일반적인 비석의 형태가 아니라 자연석 하나로 된 몸돌이 전부이며 보호각 안에 있다.

 

순수(巡狩)는 예전에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는 일을 이르던 말인데 북한산비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말이 있지만 창녕비에는 순수(巡狩)라는 말이 없이 새 점령지를 돌아본 것을 적었기에 국경을 넓혔다는 척경(拓境)이 맞는다는 것인데 일부 학자들은 북한산비나 창녕비나 모두 순수비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다는 주장이니 우리에겐 어렵기만 한 이야기다. 진흥왕 순수비 4개 중 2개는 북한에 있어 볼 수 없지만 창녕비는 이들보다는 단양 적성비(국보 제198)와 비슷하다.

 

비석은 언제, 어떻게 세웠나?

진흥왕 때 다른 순수비들과 함께 세워졌으나 위치적으로 보아 먼저 영토에 편입되었을 것이므로 비석도 그만큼 먼저 세웠을 것이다. , 삼국사기에 보면 진흥왕 16(555)에 비사벌(창녕의 옛 이름)을 병합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직후인 561년 진흥왕은 창녕을 직접 찾아 점령지 통치에 대한 정책들을 신하들과 함께 발표하니 이 사실을 새긴 것이 창녕비이다. 한반도에서는 가장 오랜 비석이다.

 

비석의 외형은 삼국시대 비석이 대개 그렇듯이 대석(臺石)이나 개석(蓋石)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그마저 한쪽 편이 찌그러진 모습인데 이 비석은 원래 이곳이 아니라 화왕산록(火旺山麓)에 있었으며 소풍 나온 학생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진 후 1924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비석의 글씨를 식별하기 어렵고 내용의 이해가 쉽지 않아 비석 옆에 설명 판을 세워 놓았다.

 

아쉽게도 글자는 전체적으로 27행 600자가 넘지만 그중 약 400자 정도를 판독할 수 있고, 그나마 육안으로는 대부분 식별이 어렵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알려진 비문의 내용은 다른 진흥왕 순수비와 같이 진흥왕이 이곳 점령지에 행차하여 국왕의 통치 정책과 이념을 당부한 내용, 그리고 함께 행차한 신하 42명의 속부(屬部), 인명(人名), 관직(官職), 직위(職位)를 모두 적어 놓았는데 삼국시대 신라 비문의 통상적인 기록방식으로 보인다.

 

[34] 국보 제34호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공식명칭 :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수량/면적 : 1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시장2 37 (술정리)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군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 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 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 탓에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경주 불국사 삼 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석가탑(국보 제21)과 비견되는 아름다움

창녕 술정리 동 삼 층석탑 앞에 서면 불국사 삼층석탑, 즉 석가탑이 떠오른다. 신라 탑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석가탑과 높이와 크기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전체적인 느낌과 탑의 모습이 쌍둥이 탑을 대하는 것 같다.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이라는 이 층의 기단 위에 삼 층석탑 그 모습인데 어느 곳 하나 소홀한 곳이 없으며 과하게 넘치는 곳도 없다. 전체적으로는 절제된 아름다움의 표본이라 할 만큼 조각이나 장식성을 배제하였고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듯한 비례감과 균형미는 물론 말없이 서 있는 남성적인 모습의 무게감과 안정된 솟아오름은 감탄스러울 뿐이다.

 

불국사 석가탑은 삼 층 지붕 위에 노반이 얹혀져 있고 상륜부 장식이 세워져 있는데 (이 상륜부도 역시 없던 것을 남원 실상사 탑 상륜부를 모방해 복원한 것이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탑의 석재 부분은 거의 일치할 정도로 비슷한 외관을 보인다. 마치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불국사 전각과 회랑을 날려버리고 석가탑을 벌판으로, 아니 창녕시 동네 한가운데로 보내 놓은 것 같다.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폐사지도 아니고 동네 한가운데 소공원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불국사를 여러 번 드나들다 보면 처음에는 동탑인 다보탑의 복잡 화려하고 다양한 아름다움에 현혹되지만 몇 번이고 다시 찾다 보면 서탑인 석가탑의 단순한 모습에 더 끌리게 된다. 보면 볼수록 멋지고 아름다움에 끌려 마음이 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답사 초보자는 다보탑이 좋다 하고 경륜이 쌓이면 석가탑이 좋게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창녕 술정리 삼 층석탑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이 통일신라 석탑의 표준으로 손꼽히고, 이후 경주에서 지방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하지만, 일부에서는 술정리 탑이 오히려 100여 년 앞선다고 하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국보 석탑을 가꾼 비구니 스님

이 탑은 국보 지정 몇 년 후 수리 보수를 위하여 해체, 복원되었는데 그때 삼 층몸돌에서 사리 7과와 함께 사리병등 장엄구가 발견되어 사리는 복원 때 다시 석탑에 안치하였고 나머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누구도 이에 관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박물관 수장고에 방치된 채 지나왔다. 삼 층석탑도 국보에 걸맞게 주변 민가들을 철거하여 보호구역을 확보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동네 주민이 이불빨래를 널거나 시래기를 말리는 등 천덕꾸러기였으며 동네 개들의 개똥으로 지저분하고 잡풀이 자라고 쓰레기가 널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비구니 혜일 스님과 신도들이 국보탑을 아끼며 관리하는 마음으로 매년 올리는 동탑재.

 

그러던차에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석탑주변을 매일 청소하고 가꾸면서 탑돌이와 예불로 공양하니 차츰 신도들도 따르게 되고 주민도 이해와 협조를 하게 되어 지금처럼 잘 정리된 소공원 모습을 가꾸게 되었다고 한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매년 입동(양력 11월 7일)이면 동탑재를 지내면서 탑을 가꾸고 사랑하는 행사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술정리 서 삼 층석탑 (보물 제520)

동탑과 서탑이라 하니 한자리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두 탑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500m 이상 1Km 가까이 떨어져 있다. 그런데 명확하게 어느 절에 있었는지 전해지지 않으니 그저 동탑이다 서탑이다 이름 지은듯하나 이건 어째 영 이상하다. 아무리 큰 절이라 하여도 이렇게 멀리 떨어진 두 탑을 동탑, 서탑으로 세웠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술정리 서 삼 층석탑, 보물급 석탑이건만 국보 석탑과 동서로 짝지은 탓에 늘 동탑만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튼 술정리 서탑은 그런 연유로 늘 동탑과 비교되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고 그 대접도 국보 석탑에 비하여 소홀한 것인지 주변 보호구역 설정과 관리실태가 현저하게 못 해 보인다. 아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동탑과 무관하게 자세히 살펴보면 서탑 역시 나름대로 보물 석탑으로서 자태를 갖추고 있다.

 

역시 이층 기단에 삼 층석탑인데 삼 층 위 꼭대기에는 노반과 복발로 보이는 석재가 얹혀 있으며, 우주와 탱주가 뚜렷하고 미끈한 동탑에 비하여 서탑의 2층 기단은 몇개의 석재를 블록처럼 맞추어 놓았는데 중앙에는 문비를 새기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서 삼 층석탑역시 동탑보다 높이가 약간 낮고 상대적으로 열세하지만,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이다.

 

[35] 국보 제35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공식명칭 :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求禮 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
지 정 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수량/면적 : 1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황전리)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호남 제일의 사찰답게 많은 부속 건물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보물 제132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 제133호),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청


지리산(智異山) 화엄사(華嚴寺)

삼국시대 지리산의 옛 이름은 두류산(頭流山), 며칠 계속 안개처럼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을 마을 주민 여럿이 찾아 올랐다.

 

계곡의 한 움막에서 독경소리가 새어 나오니 그들이 발을 멈추고 귀를 모으자 독경이 끝나고 잠시후 한 사문이 나왔는데 그는 얼굴 생김이나 피부 등 모습이 달랐으며 말도 통하지 않아 글로써 필담(筆談)을 나누게 되었는 바 자기는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연(鷰)이라는 짐승을 타고 비구니이신 어머니와 함께 날아서 왔다는 말에 마을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피리와 비슷한 악기를 꺼내어 입에 대고 길게 세 번 불어대니 웅장한 소리와 함께 천 년 묵은 거북만한 연(鷰)이 공중에서 날아오더니 사문 곁에 사뿐히 내려 앉았는데 그 형상이 머리는 꼭 용같고 몸은 거북이며, 몸 길이가 열자는 넘어 보이고 두 날개를 가진 짐승이었다. 사문은 연의 등에 올라타고 연은 곧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일행은 감탄을 하며 연을 타고 다니시니 연존자라 할까. 비연존자(飛鷰尊者)라 할까. 의논한 끝에 연기존자(鷰起尊者)라고 부르기로 결정하였고 몇 달이 지나 연기존자도 우리말에 상당히 익숙해져서 이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향상되었을때 마을 사람들은 법당을 건립하고자 간청을 하였고 마침내 불사를 진행하기 시작하여 설법전과 법당을 낙성하니 백제 성왕22년 갑자세(서기544년)였다.

 

▲화엄사 전경, 각황전 뒷쪽 '효대'라고 표시된 지역에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다.

 

절 이름은 그를 연기존자라 부르니 연기사(鷰起寺)라 하자 하였으나 존자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멀리 창해를 건너 화엄법문을 선양하러 온 것이니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자는 의견을 내었고 모두가 찬성하였다. 이어서 존자가 말하기를 '이 산은 멀리 백두산의 정기가 줄곳 흘러 내려와서 이뤄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일컫는다니 좋은 이름이외다. 헌데 빈도가 이 산에 처음 닿았을 적에 삼매에 들어보니 문수대성께서 일만보살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하였으니 이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 임에 틀림이 없소. 그리니 만큼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택하여 지리산(智利山)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라 하니 그리하여 智利山(지리산) 華嚴寺(화엄사)가 되었다. 

 

연기조사의 효심을 새긴 효대(孝臺)

이렇듯 백제시대 인도에서 오신 연기스님이 세운 지리산 화엄사에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기려 세운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다. 각황전에서 108계단을 올라 산중에 자리잡은 이곳을 연기조사의 효심에 비겨 효대(孝臺)라고 부르는데 고려시대 문종의 넷째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아래와 같은 시를 읊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효대(孝臺)
寂滅堂前多勝景 吉祥峯上絶纖埃 (적멸당전다승경 길상봉상절섬애 )
彷徨盡日思前事 薄暮悲風起孝臺 (방황진일사전사 박모비풍기효대 )

적멸당 앞에는 빼어난 경치도 많은데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날은 저무는데 효대에 슬픈 바람 이누나
다보탑과 함께 이형석탑(異形石塔)의 쌍벽, 사사자 삼층석탑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은 이형석탑(異形石塔)이다. 이형(異形)은 전형(典形)에 대비되는 말인데 우리가 삼층석탑하면 통상적으로 이중의 기단위에 몸돌과 지붕돌로 한층을 구성하고 이를 3개층 얹은 모습을 말하는데 이것이 삼층탑의 전형(典形)이라면 이형석탑은 이처럼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팔각 사각 원형을 복잡 다양하게 구사하거나 사사자 석탑처럼 이층기단의 모습이 전혀 다른 형태를 띄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이중기단의 2층을 4마리 사자로 조각하였다. 인간세상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려 함인가. 사자 네마리가 받치는 가운데의 인물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이고 탑 앞에서 차를 공양하는 이가 연기조사라고 한다.

 

불국사 동탑인 다보탑(국보 제20호)도 이형석탑의 대표적인 예인데,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더불어 이형석탑의 완성으로 쌍벽을 이룬다는 평(評)이다.

 

▲이를 드러낸 모습의 사자 네 마리가 네 귀퉁이를 받치는 가운데에 선 모습은 남성적인 스님 모습으로 보인다.

 

▲탑 앞의 공양상은 연기조사 자신이라고 하는데 석등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석등을 받치는 3개의 기둥 가운데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공양하려는 찻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사사자 석탑은 탑 앞에 공양상을 하나 더 세움으로써 공양을 바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표현하였으며, 효(孝)를 상징한다는 전설인데 아들인 연기조사가 비구니 어머니에게 차(茶)를 공양한다 해도 되고, 불자가 스님이나 부처님에게 공양을 한다해도 전혀 어색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탑 안에 서 있는 인물상을 자세히 보면 스님 복장을 한 남성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적멸보궁을 갖고 싶은 화엄사

일부에서는 연기조사 자신이 이 탑을 세웠다고 하나 화엄사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사사자 삼층석탑과 공양탑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과 함께 마침내 대화엄사마저도 적멸보궁의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으니 5대 적멸보궁, 8대 적멸보궁도 못미더웠는지 지난 2014년말부터 내년인 2017년 하반기까지 이곳을 일제 보수, 정비함과 더불어 적멸보궁 탑전(塔殿) 복원불사가 대대적으로 진행중이다. 현재는 공사중으로 사사자 석탑을 친견할 수 없는데 공사를 마친후 고즈넉한 그곳의 풍광은 어데로 가고 잘 닦은 공원같은 탑 지역과 고래등같은 적멸보궁 법당이 고압적으로 서 있는건 아닌지 걱정이다.

 

연기조사의 효심을 내세우던 사사자 삼층석탑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탑으로 더 높여지고 있는 지금이다.

 

▲각황전 옆, 사사자 삼층석탑으로 가는 안내판. 적멸보궁을 강조하고 있는데 현재 대규모 공사가 진행중이다.

 

어차피 절집은 부처님을 모신 곳이니 부처님 말씀이나 제자이신 스님들, 즉 불(佛) 법(法) 승(僧) 삼보가 계신 곳인고 전국에는 이미 5대적멸보궁, 8대 적멸보궁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으니 화엄사마저 적멸보궁에 집착하지 말고, 창건설화에 나오는 연기스님의 효심을 계속 높이 받들어도 무방할텐데 어쩌려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제발 크고 화려함으로 문화재도 빛이 쇠하고 절집도 산사(山寺)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빌어 본다.

 

[36] 국보 제 36호 상원사 동종

공식명칭 : 상원사 동종 (上院寺 銅鍾
지 정 일 : 1962.12.20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 1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1-50, 상원사 (동산리)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문화재청 문수신앙의 성지(聖地)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백두대간의 중간쯤인 오대산은 그 자락이 깊고 넓을뿐 아니라 산세가 크고 육중하지만 부드러운 흙산으로 일명 육산(肉山)이라고 하며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의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져 오대산이라고 한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알려진 불교의 성지이며, 자장 스님이 당나라에 건너가 오대산(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신라로 건너와 이곳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했으나 뵙지는 못한 곳이다. 신라 효소왕때 신문왕의 두 아들 보천과 효명 두 태자는 오대산에 들어가 참배하다가 동대에서 1만 관음보살, 남대에서 1만 지장보살, 서대에서 1만 대세지보살, 북대에서 1만 미륵보살, 중대에서 1만 문수보살이 나타나 일일이 참례를 하였다고 하며, 그후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성덕왕)가 재위 4년인 서기 705년에 절을 짓고 진여원(眞如院)이라 하니 상원사의 시작이다.

 

그 뒤로 상원사 이야기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가 조선시대 이르러 세조가 겪은 이적(異蹟) 두 가지가 전설처럼 전해지면서 유명해지는데 그중에서도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야기는 지금도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과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로 남아 그저 전설차원의 이야기가 아닌 실화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나라 적멸보궁 신화의 주인공 자장율사도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뵙지 못했는데 수양대군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국내 최고(最古), 최상(最上)의 상원사 동종

상원사 동종은 현존(現存)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제일 아름다운 종으로 신라 성덕왕(聖德王) 24년(725)에 조성되어 조선 예종(睿宗) 원년(元年, 1469)에 상원사로 옮겨졌다. 원래는 안동의 어느 절에 있다가 무슨 연유인지 나중에는 안동도호부의 남문 누각으로 옮겨져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상원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피부병을 고친 세조의 전폭적인 지지로 대규모 중창불사를 벌여 1466년에 낙성했지만 걸맞는 종(鐘)을 만들지 못하여 전국을 수배하여 가장 아름답고 소리가 좋은 종을 찾아 보내라는 세조의 어명에 의거하여 안동에 있던 이 종을 상원사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3천근이 넘는 동종(銅鐘)을 한양으로 옮기려니 아무리 힘을 써도 꼼짝 하지 않아서 고향을 떠나기 싫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종에 붙어있는 종유(鐘乳)를 하나 떼내어 그 자리에 묻어주었더니 그제야 움직여서 이곳까지 옮겼다는 것인데 사실은 옮기던중 험난한 고갯길에서 취급부주의로 넘어져 하나가 부러졌다는것이며 이를 숨기기위하여 관계자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반박(?)하는 說도 있으니 어차피 기록으로 남아있지도 않은 그 과정을 굳이 부정적인 소견으로 아름다운 스토리 텔링을 험담할 것 까지는 없어 보인다.

 

▲상원사 종각, 통상의 범종각이라 하지 않고 동정각(動靜閣)이라고 초서로 흘려 썼는데 탄허(呑虛)스님 글씨이다. 넓직한 종각의 중앙에 유리벽으로 둘러쌓인 진품 국보 동종, 오른쪽은 평상시 타종하며 사용하는 복제품이다.

 

이렇게 안동에서 강원도 오대산까지 올라 온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은 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그리고 임진왜란때 일본이 훔쳐간 진주의 연지사 종과 함께 신라시대 3대 범종으로 꼽히는데 하나는 일본에 보관중이며 성덕대왕 신종과 상원사 동종은 모두 더 이상 종(鐘)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박제된 모습으로 영구 보존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상원사 동종은 진품과 복제품이 함께 종루에 걸려있기는 하나 사방을 투명유리로 둘러막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쉬움이야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꼼짝없이 갇혀있는 국보급 동종의 처지가 못내 불쌍하고 가련하다.

 

상원사 동종(銅鐘)의 구조와 명칭

상원사 동종은 높이가 167㎝이며 입지름은 91㎝로  높이 3. 75m, 입지름 2.27m로 20톤 가까운 성덕대왕 신종보다 크기는 절반이하지만 제작연도가 45년이나 앞서는 한국산 종의 모범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중앙에 새겨진 비천상(飛天像) 조각이 첫 눈에 띄는데 공후와 생으로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늘로 오르는듯 옷자락이 하늘거리는 모습이며, 앞 뒤 2개의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자리인 2개의 둥근 당좌(撞座)가 역시 화려한 무늬에 둘러쌓인채 차분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8장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뿐만아니라 상대와 하대의 화려한 당초문과 정교한 새김은 탄성을 자아내며 다시 눈길을 맨 위로 올리면 한국 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음통과 용뉴가 살아있는 듯 생동감있게 보인다.

 

국보를 만난 반가움에 한달음에 달려들어 구석구석 살펴보았으나 조금 뒤로 물러서보면 전체적인 유선형의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몸체는 아랫부분에 이르러는 다시 약간 오무라든 모습이며, 비천상과 당좌 조각 사이 윗쪽으로 자리잡은 네모의 유곽(乳廓) 안에 각각 9개씩의 종유(鐘乳)가 뚜렷한데 과연 그중 하나는 부러진듯 없으니 안동에 묻어놓고 왔다는 전설이 사실이라는 증거이다.

 

한걸음쯤 물러서보니 종이 참으로 아담하고 우아하며 거대하지는 않으나 장중하고 단정한것이 과연 국보급이다.

 

다만 반사광이 어른거리는 유리로 사방을 둘러놓으니 시야가 맑지 않고 카메라에 담기도 불편하니 보호대책으로는 하책(下策)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역할을 하는 용뉴(鐘紐), 움켜쥔 발톱과 크게 벌린 입모양이 마치 살아 있는 듯 하다. 고래가 무서워 크게 운다는 용의 3男 포뢰(蒲牢)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종을 치는 당목(撞木)을 고래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용 모양 고리 뒤로 세마디 대나무 모양으로 솟아있는 것이 한국 종에만 있다는 음통(音筒)인데 각종 꽃 장식이 화려하다.

 

종의 머리, 또는 뚜껑등 윗부분에 해당하는 곳을 천판이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용뉴가 매달려 있으며 그 옆면의 여백에는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이 종의 이름과 조성 연대등 제작 연유(緣由)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開元十三年乙牙正月 八日鐘成記文部合鍮 三千三白餘兩重普衆 都唯乃孝□歲道直 

衆僧忠七沖安貞應 旦越有休大舍宅夫人 休道里德香舍上安舍 照南毛匠舍□大舍

 

개원 13년 을축 3월8일에 종이 완성되어서 이를 기록한다(開元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鐘成記之)

 

여기서 開元十三年(개원십삼년)은 신라 성덕왕 25년(725)에 해당하니 명확히 언제 주조 되었는지 알 수 있으 며, 대부분 이러한 종명(鐘銘)이 종신(鍾身)에 새겨지는 것과는 달리 상판 용뉴 좌우에 새긴 것도 이례적이다. 또한 그 내용에 시주자를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일반적인 민간의 시주가 아니라 국책사업으로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며, 종을 제조하는 데 들어간 놋쇠가 모두 3,300 정(鋌)이었음을 밝히고, 제작에 참여한 승려와 감독자, 관직 등을 열거하고 있다.

 

▲천판이라 불리우는 동종의 상판, 용뉴 좌우에 음각으로 새긴 명문(銘文)이 보인다.

 

▲종의 윗부분을 상대라고 하는데 아랫부분 하대와 대칭되며 화려한 당초문을 새긴 넓은 띠 모양이다. 또한 그 아래 사각형의 띠모양이 종유(鐘乳) 9개씩을 담고 있는 유곽(乳廓)인데 과연 종유(鐘乳) 하나가 떨어지고 없다. 이와 같은 4개의 유곽에 각각 9개의 종유를 붙인 모습은 이후 한국 종의 전형(典型)이 되어 후대에 계승된다.

 

▲종신(鐘身) 중앙에 새겨진 2쌍의 비천상(飛天像) 무릎은 접히고 천의(天衣) 옷자락은 바람에 날리는 모습으로 하늘을 나는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였으며, 우리나라 고유악기가 아닌 공후와 생을 연주하는 것은 서역이나 중국을 거쳐와 자리잡은 표현양식으로 보이는데 상원사 동종처럼 실제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의 모습은 흔치 않은 것이다.

 

▲비천상 사이에는 2개의 당좌, 즉 당목이 종을 치는 자리가 있는데 8엽의 연꽃판이 가운데에 있고 당초문으로 주위를 둘렀다.

 

▲붕긋하게 불러지며 내려오던 종신(鐘身)은 당좌나 비천상을 지나면서 다시 좁게 오그라지믄 모습을 띠면서 하대로 마무리하는데 하대 역시 상대처럼 넓은 띠모양에 화려한 당초문을 새겨 아름답게 조각한 모습이다. 그런데 하대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곳에도 드문 드문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이 보여 흥미롭다. 이 주악상은 상대에도 비슷하게 새겨져 있지만 관찰이 쉽지 않다.

 

귀중한 국보 동종이라고 방탄(?) 유리로 감싸 놓으니 번들거려 육안으로 관찰하기도 어렵고 카메라에 사진을 담기도 불편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아래쪽 허공으로 허리를 굽혀 숙인채 다시 올려다보거나 까치발을 딛고 카메라만 유리 너머로 들어올려 사진을 찍는등 난관을 극복하려 애를 쓴다. 주간에만 개방한다던지 융통성이 가능 할 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이곳 상원사와 월정사 등은 철수하는 아군이 적군의 사용을 방지하려 불태우게 되었으며 일차로 월정사를 불태운 국군들이 상원사에 이르니 방한암 스님이 '나와 함께 불사르라'고 법당에서 버티는 바람에 문짝 몇개만 불태우고 내려갔다는데 그 바람에 이 동종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불타버린 월정사에서는 804년에 제작된 영양의 선림원터 범종이 완전히 불타 녹아버려 상원사 동종급 문화재가 사라져버렸다고 하니 아쉬운 일이다.

 

이후 한국 종은 대부분이 음통과 종뉴를 위에 매달고 아랫부분이 가장 불룩한 형태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좁혀지는 붕긋하며 아담한 형태의 종신(鐘身)을 갖게 되었으며, 상대와 하대, 4개의 유곽을 갖추고 비천상과 당좌를 새기는 전형(典型)을 갖추게 된다.

자료제공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37] 국보 제37호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공식명칭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수량/면적 : 1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구황동 103번지

 

통일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2년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황복사지(皇福寺址)

경주 어느 벌판 어느 골짝인들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가 없으랴마는 황룡사지와 국립경주박물관 동남쪽의 너른 들판을 보문들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는 신라 제26대 임금 진평왕릉과 함께 설총의 묘가 있으며 들판으로 내려서면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고 그 건너편에 국보 제37호 삼층석탑이 서 있는 황복사지가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낮으막한 야산인 낭산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능지탑과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로 이어지는데 보문들판 황복사지가 있는 곳은 지역명이 구황동, 황(皇)자 들어가는 절이 9개 있었다거나 구룡(九龍) 이야기와 연관된 지명으로 보인다. 

 

진평왕릉쪽은 제법 큰 도로변이지만 황복사지라고 믿어지는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너른 들판 한가운데 농로를 따라 건너와서는 황복사지 이름을 본뜬 민박집으로 들어가듯이 접근해야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이곳이 황복사지라는 명확한 물증은 없다고 하는데 주변에서 절이름 '황복'이 쓰여진 기와조각이 발견되거나 석물 몇개가 뒹그는 등 폐사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1930년대 일본인들에 의한 발굴조사때 밭둑에서 십이지산상 일부가 나오는 등 흥미로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1930년대 일본인에 의한 황룡사지 발굴조사 사진, 밭 아래로 소(牛)모양 십이지신 석판이 보이고 곰방대를 문 채 측량 막대를 쥔 조선인의 무표정한 모습이 대조적이다. 12지신상중 3개가 이때에 발굴 되었다고 한다.

 

특히 1943년 석탑 해체수리때 발견된 명문에서 이 탑은 692년에 효소왕이 승하한 신문왕을 위하여 세웠으며, 그 효소왕도 승하하자 동생 성덕왕이 706년에 사리와 불상을 다시 넣어 아버지와 형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나왔으니 탑의 기록은 확실해보인다.

 

신라시대 경주에 세워진 대부분의 사찰들이 왕실의 기복을 위하여 세워졌는데 이곳 황복사 역시 왕실의 원찰이었을것으로 보이지만 탑의 기록이 명확한데 비하여 황복사 관련 기록은 나오지 않아 분명치 않다. 다만 이곳 황복사에서 의상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하니 의상이 출가한 653년(19세)에도 이미 황복사는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뿐만아니라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후 귀국하여 부석사를 세우고 화엄종주가 되었으니 이곳 황복사도 못지않게 위상이 높아졌을 것으로 추측 된다.

 

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통일신라 초기에 거대한 규모의 삼층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감은사지 삼층석탑(쌍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등이 그러하다.

 

거탑(巨塔)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이 삼층석탑의 완성이라는 불국사 석가탑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어 보인다.

 

즉, 이층 기단위에 삼층석탑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모습이지만 9m, 13m에 이르는 고선사지, 감은사지 석탑에 비하여 약7m 규모로 줄어들었지만 불안정해보이는 거대석탑에 비하여 안정되고 다부져보이는 모습은 석가탑을 떠올리게 한다.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 뒷편 너른 들녘이 보문들이다.

 

통일신라 초기 거탑들은 기단부는 물론 몸돌도 여러개의 큼직큼직한 판석들을 짜맞추는 방식이었는데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이르면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여 만들어진다. 그전까지는 몸돌의 모서리 기둥(우주)을 별개의 돌로 세우고 그 사이를 판석으로 막아 몸돌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부터는 하나의 돌로 몸돌을 만들되 모서리에는 우주 모양을 돋움으로 조각함으로써 간단해지면서 더욱 미적 감각을 갖추게 된다. 또한 1층 몸돌에 비하여 2층과 3층 몸돌은 급격하게 줄어들어 상승감을 살렸다.

 

탑을 받치는 기단역시 하층기단은 모서리에 우주를 세우고 면석에는 3개의 탱주가 2개로 줄어들어 단순화 된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삼층석탑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돌의 크기가 작아지고 갯수도 줄여서 감은사 석탑의 경우 모두 82장의 돌을 짜맞추었는데 삼층석탑의 완성이라는 불국사 석가탑의 경우 22장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탑의 규모를 줄이면서 절제미와 안정감을 추구함은 물론 탑을 만들어 세우기가 수월해짐으로써 9세기에 이르면 탑이 무려 5배나 넘게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13m 거탑인지라 몸돌은 물론 지붕돌도 하나의 돌로 만들지 못해 여러개의 돌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는 이렇게 판석으로 조립하여 탑을 세우니 내부 공간에 뱀이 모여 살게되어 신성한 공간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고도 한다.

 

국보 석탑에서 국보 불상 2점이 나오다

1943년 황복사지 삼층석탑 해체수리때 2층 지붕돌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금제여래좌상 2구가 나왔는데 모두 국보급인지라 현재 국보 제79호, 제80호로 지정되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그밖에도 각종 유리구슬, 팔찌 등 많은 유물들이 함께 나왔으며 특히 사리함 뚜껑 안쪽 금판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함으로써 이 탑이 언제 누가 왜 세운 것인지 명확해져 건립의도와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었으니 국보급 석탑일 수 밖에 없어 보인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국보 불상 2구, 왼쪽이 79호, 오른쪽이 80호 금제여래좌상이다.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없이 가져간 일본인들인데 이때 출토된 금불상은 온전하니 다행이다.

 

▲신라 32대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을 위해 탑을 세웠고, 동생인 성덕왕이 형과 아버지를 위하여 불상과 사리를 탑에 봉안하여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새겨진 금판, 사리함 뚜껑 안쪽에 있었는데 이로써 석탑의 이력을 잘 알수 있으니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통일신라는 불교문화, 특히 석탑을 세우는데 있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목탑을 돌로 재현한 백제탑과는 달리 중국의 전탑과 같은 형식의 분황사 모전석탑으로 시작한 신라는 삼국을 통일후 목탑과 전탑의 특징을 두루 아우르는 석탑으로 발전하게 된다.

 

2층기단과 지붕돌, 우주나 탱주등의 기둥은 목탑의 흔적으로 보이며 여러층겹으로 조각된 지붕받침 등은 전탑의 흔적이다.

 

▲상륜부는 날아가고 노반만 남아있지만 세련되고 안정된 삼층석탑의 위용이 단단해보이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통일신라 초기인 8세기 신문왕대에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세워져 거대한 석탑의 위용을 자랑하더니, 효소왕에 이르러 규모가 줄어들고 단순화되는 형상의 석탑이 나타나니 바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다. 이어 경덕왕대에 불국사가 지어지면서 석가탑이 신라 석탑의 전형이자 완성으로 완벽하게 자리잡게 되자 이후에 지어지는 석탑은 대부분이 이들을 모방하거나 추종한 석탑들로 보여진다.

 

그런의미에서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자료제공=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http://cafe.daum.net/sm-academy)

 

[38] 국보 제38호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공식명칭 :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慶州 高仙寺址 三層石塔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수량/면적 : 1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 댐 건설로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탑신도 여러 개의 돌이 조립식으로 짜 맞추어져 있으나,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지붕돌은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는데, 아래로 미끄러지는 네 귀퉁이가 들려있어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밑면에는 계단 모양으로 5단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에서 시작되어 이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문화재청

 

고선사지(高仙寺址)

경주 보문관광단지를 지나 오르막 언덕길이 시작되면 오른쪽은 바로 토함산 뒤편의 가파른 산악지형이지만 왼쪽으로는 보문호만큼 큰 인공저수지가 하나 더 보이는데 바로 덕동호이다. 덕동호 변을 따라 계속 달려가면 굽이굽이 황룡 계곡을 지나 추령을 넘어가게 되는데 물론 도로는 터널로 많이 낮아졌지만 그래도 고개턱을 넘어 내리막길로마저 달려가면 감은사지 쌍탑이 나오고 대왕암이 있는 동해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이 바로 감은사 가는 길, 감포 가도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꼽히는 길이다.

 

70년대 경주 개발사업으로 만들어진 인공저수지 덕동호는 경주 일대 상수원과 농업용수는 물론 아래편 보문호의 수위조절기능도 갖춘 다목적 인공호수인데 바로 그 덕동호 어디쯤이 고산사가 있던 곳이었으나 저수지 둑을 막고 물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절터는 물속으로 잠기고 말았으며, 삼층석탑을 비롯한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고선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원효(元曉)가 머물렀던 절로 전해지는데 1914년 5월 이 절의 삼층석탑 주변에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조각이 발견되었는바, 서당화상은 원효대사를 말하며 그의 손자인 설중업이 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고선사와 원효대사의 상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세워진 고선사지 삼층석탑, 거탑다운 거대함의 위압감과 무게감이 눌러온다.

 

국내에 국보로 선정된 탑이 모두 31기인데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감은사지 동, 서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초기 거탑(巨塔)으로 손꼽히며 이중 기단에 삼층 탑신이라는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의 시원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상륜부에 커다란 찰주가 남아있어 더 커 보이고 무언가 달라 보이지만 고선사지 삼층석탑과는 쌍둥이처럼 닮은 석탑이다.

 

▲2중 기단은 모두 우주를 두었으되 하층기단에는 탱주를 3개, 상층기단에는 탱주를 2개 둔 점이 눈에 띈다. 워낙 넓고 큰 규모인지라 기단을 구성하는 데만도 상층기단 갑석 8매를 포함하여 모두 20매의 석재가 들어갔다.

 

즉, 2단의 기단 위에 3층 몸돌과 지붕돌, 노반까지 높이가 10. 1m라는 점과 모두 82장의 석재로 이루어진 점이 서로 닮았다. 다만 고선사지 석탑에는 1층 몸돌에 문비를 새긴 점이 다를 뿐, 너무나 같은 두 탑의 양식은 이후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으로 이어진다.

 

▲1층 몸돌에는 사방 4면 모두에 문비를 새겼는데 자세히 보면 문비 상하와 중간상단쯤 3그룹의 못 자국을 볼 수 있다. 문 장식과 원형 문고리가 달렸던 흔적으로 보인다. 금속성 장식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매우 정교하고 화려했으리라.

 

▲2층과 3층은 1층 몸돌보다 현저하게 작아지면서 상승 비례감을 높이고 있는데 3층 몸돌은 1층, 2층 몸돌이 여러 개의 석재로 이루어진 데 반하여 하나의 돌로 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3층 몸돌 중앙에 사리함을 넣기 위한 까닭으로 보인다. 옥개석 아래 층급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으며, 네 귀퉁이가 모두 파손되어 풍경을 달았던 구멍의 흔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석탑 역시 목조건축의 모습을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정착된 것으로 2중 기단이나 몸돌마다 귀퉁이에 우주를 새기고 면석의 가운데에는 2개 또는 3개의 탱주를 새긴 것은 목조건축의 기둥을 표현한 것이며, 옥개석 아래에 층급받침은 공포를 간략히 표현한 것으로 보이고 옥개석의 낙수면을 두고 끝 부분을 들어 올린 것은 지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10m가 넘는 거탑임에도 안정되고 든든해 보이는 기단 위에 올려진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남성답다. 폐사지일망정 야외 절터에 남아 있어야 할 석탑이 박물관 마당에 서 있는 것이 어쩐지 안쓰럽다.

 

그러나 초기 석탑은 지나치게 크게 만들다 보니 공력도 엄청나게 많이 들었을 터이고 오랜 기간과 만만치 않은 석재료의 획득 등 석탑의 제작을 어렵게 하였을 터, 앞서 소개한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처럼 작아지면서 이런 문제점들이 해결되고 석탑 제작이 수월해져서 이후 곳곳마다 많은 석탑이 설 수 있게 된 것일 것이다.

자료제공·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http://cafe.daum.net/sm-academy

 

 [39] 국보 제39호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공식명칭 :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慶州 羅原里 五層石塔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수량/면적 : 1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현곡면 라원리 676

 

나원리 마을의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나원 백탑(白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가운데 조각을 아래층은 3개씩, 위층은 2개씩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예리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고,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부서진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잘려나간 찰주(擦柱: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다.

짜임새있는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5층 석탑으로, 탑이 지니고 있는 듬직한 위엄에 순백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맑은 기품이 잘 어우러져 있다. 높은 산골짜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습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문화재청


신라 팔괴(八怪) 백탑(白塔)

나원리 오층석탑을 신라 팔괴 중 하나라고 한다. 신라 팔괴(八怪)란 경주에 있는 여덟 가지 괴이한 것을 말하는 데 구체적이지 않고 전설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대략 열 가지 정도인데 사람에 따라 여덟 개를 정하여 팔괴라고 한다.

 

여름에 누레지는 잎사귀를 보고 최치원이 신라 국운의 쇠퇴를 예언했다는 '계림황엽', 아사달 아사녀의 전설이 서린 '불국영지', 아름다운 선도산 새벽 경치 '선도효색', 금오산 저녁 노을 '금오만하', 남산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바위 '남산부석', 안압지 물 위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떠있는 마름 풀 '압지부평', 문천(남천)의 모래는 물위에 떠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문천도사(倒沙)' 등을 말하며 나원리 오층석탑 역시 신라 팔괴에 속한다. 천 년이 넘도록 이끼가 끼거나 색이 바래지 않고 순백색을 띠어 예로부터 나원 백탑(白塔)이라고 불리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흰색이 변치 않아 백탑으로 불리는 나원리 오층석탑. 국보급 문화재에 걸맞은 당당하면서 늠름한 모습이다.

 

이 탑이 있는 지역은 화강암이 산출되는 곳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제작 당시 다른 곳에서 원석을 옮겨와 탑을 건립했다고 추정한다. 이 석탑을 품었던 사찰을 추정할 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사찰명 대신 지명을 따서 나원리 오층석탑이라고 부른다. 

 

신라의 대표적 오층석탑

나원리 오층석탑은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초기 석탑으로 손꼽힌다. 특히 거대한 규모 때문에 거탑(巨塔)이라 부르는데 대부분이 삼층석탑이지만 나원리 석탑은 드물게도 오층석탑이다. 일설에 따르면 삼층석탑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을 뜻하는데 오층탑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사상으로 부처가 온 곳에 상주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이 층의 기단 위에 오 층의 탑신이 세워진 구조이다. 아래층 기단은 모서리에 우주를 세우고 한 면에 탱주를 3개씩 조각하였다. 윗층 기단은 우주와 함께 탱주를 2개씩 조각하였다. 5층의 탑신 중 1층 몸돌은 너무 커서인지 각 면에 판석을 세운 조립형태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각 층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또한, 5개의 지붕돌은 1층과 2층의 경우 아래쪽 5개의 층급받침과 지붕돌이 별개의 석재로 되어 있다. 그리고 3층 이상은 층급받침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매끈하고 날렵한 마감처리로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다만 상륜부는 온전치 못한 노반석만 남아 있어 아쉽다.

 

국보탑이 모두 31기인데 그중 오층탑은 7기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이 백탑은 백미(白眉)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리장엄구 발견

나원리 오층석탑은 감은사지 석탑과 함께 도굴이 되지 않아 온전하게 서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그동안 도굴꾼들의 도굴 행위가 심하여 마을 사람들이 원두막을 짓고 지키기까지 하였다. 손실을 우려해 1995년 말부터 1년여간 해체 수리를 진행하였는데 3층 옥개석 윗면의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금동소탑, 금동소불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대부분 몸돌 상부에 사리공을 마련하는 데 비하여 지붕돌 상부에 사리공을 만든 것은 매우 특이한 점이다.

 

▲해체 수리 당시 나온 사리함과 구 층 탑, 삼 층 탑 그리고 금동소불 등.

 

금동사리함에서는 사리 15과가 나왔는데 조계종 차원의 진신사리 친견행사를 한 후 석탑 복원 시 다시 사리공에 넣었다. 나머지 금동구 층 탑 3기, 금동삼 층 탑 1기, 순금 소불상, 먹으로 쓴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파편, 구슬 30여 개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라고 한다. 특히 금동탑의 경우 그 형태와 모양이 온전하여 신라 탑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현재 나원리 오층석탑 뒤편에는 나원사라는 작은 절이 있지만, 이는 근래에 들어선 것이다. 석탑까지 불과 1Km도 못 되는 거리지만 접근성이 떨어진다. 우선 큰 버스는 아예 진입할 수 없고 승합차도 겨우겨우 바퀴 빠지는 걸 걱정하며 솜씨운전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국보 문화재가 위치한 곳의 여건치고는 최악이 아닌가 싶다.

 

▲오층석탑 전경. 아래쪽 주차장 노면 정비는 최근에 이루어졌으며, 큰길에서 이곳까지 진입로는 매우 협소하여 위험하다.

 

그래도 작년에 탑 아랫면을 정비하여 주차장을 세우고 화장실 등을 갖춘 듯 한데 진입로의 조속한 확장과 직선화가 필요하다. 자료제공·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http://cafe.daum.net/sm-academy

 

 [40] 국보 제40호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공식명칭 :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慶州 淨惠寺址 十三層石塔)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수량/면적 : 1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

 

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 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 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층을 크게 부각한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 덕분에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문화재청


정혜사(淨惠寺)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어려서 공부하러 드나들었다던가? 또 그가 한양에서 순탄하게 잘 나가다가 41세 때 당시 권세가이자 실력자이던 김안노의 복귀를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당하고 낙향한 뒤 독락당을 짓고 글 읽으며 세월을 보낼 때에 정혜사 스님과 깊게 교분하면서 왕래하였다 한다. 그래서 자신의 정자 계정(溪亭)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절 이름 현판을 달아놓고 맘 편하게 무시로 드나드시라고 배려하였다는, 그 정혜사는 1834년 큰 화재로 타버리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정혜사는 회재가 죽고 그를 배향한 옥산서원이 창건되자 서원에 편입되어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종이를 만들어 공급하거나 신발 등 필요한 물품들을 납품하는 역할을 하며 존재하였었다고 하니 유교에 예속되고 난 후에야 존립을 보장받은 셈이다. 생존전략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나마 유지해 오던 절집은 흔적도 찾기 어렵고 보기 드문 석탑 하나만을 남겼다.

 

십삼층석탑

숱한 국보급, 보물급 아니 비지정 문화재 석탑까지 몽땅 찾아보아도 십삼층 석탑은 없다.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에 세워진 경천사지 십층석탑 정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높은 층수의 탑들이며 듣기로는 북한의 평안북도 영변의 보현사에 팔각십삼층석탑이 있다고 할 뿐 어디에도 십삼층 석탑은 금시초문이니 신기할 뿐이다.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

 

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외우다시피 알고 있는 신라 석탑의 전형 '2단의 기단 위에 삼층석탑' 방식이 아니다.

 

기단은 1단뿐인데 그것도 다듬지 않고 큼직큼직한 잡석들을 거칠게 쌓아 올린 토단(土壇)이다. 전하기는 1911년 도굴꾼들이 위에서부터 3개 층을 떼어내다가 발각되어 도망친 후 그대로 방치되다가 1922년경 일본인들에 의하여 복원 수리되었다고 하는데 상세한 수리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때 기단부를 시멘트로 고착하였다가 그마저 파손되어 큼직한 잡석으로 기단을 구축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2011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모 국회의원은 이를 지적하여 '탑신 아래부분 기단이 흙으로 완전히 덮인 채 방치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으며, 이에 대하여 문화재청에서는 '흙으로 쌓은 1층 기단'이라는 입장이니 누구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간에 석탑의 기단으로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이렇게 말 많은 토단 위에 2단의 석재 기단을 깔아서 몸돌을 받치는 지대석으로 삼았으며 그 위에 가장 커 보이는 부분이 1층 몸돌과 지붕돌인데 마치 위에 얹혀진 작고 촘촘한 열 두 층의 탑신을 받치는 큼직한 기단처럼 보인다. 그러나 홀로 비대할 정도로 커 보이는 저 부분이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의 1층 몸돌과 지붕돌임은 분명하다.

 

▲석탑의 1층 부분. 구석의 기둥 즉 우주가 지나치게 크고 돌출되어서 몸돌이 안으로 들어가 보인다. 몸돌 부분도 중앙을 비우고 짜맞추니 자연스레 감실이 생겨 네 면마다 하나씩 부처님을 모실 공간이 생겼다.

 

1층 몸돌 위에 지붕돌을 바로 얹은 것이 아니라 석장의 받침돌을 점차 커지는 순서로 얹어 3단의 층급 받침을 이루었고 비로소 그 위에 큼직한 지붕돌을 얹었는데 네 귀퉁이는 솟아올랐으며 지붕돌 중앙에 얹은 굄대로부터 네 귀퉁이로 이어지는 처마선을 보면 살며시 도드라지게 만들어 목재건축물의 기와지붕 못지않은 곡선미를 살리고 있어 감탄스럽다.

 

이렇게 1층만 보면 비례를 맞추어 나머지 12층을 어떻게 얹을까 걱정스러운데 막상 1층 지붕돌의 굄돌 위로는 앙증맞게 줄어든 열 두 개의 층 탑이 매우 촘촘하게 쌓은 방식이다. 소위 밀첨식(密?式)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2층부터 13층까지의 열 두 층 탑은 각각 12개의 몸돌과 지붕돌이 아니라 돌 하나가 지붕돌이자 그 위에 다음 층 몸돌을 함께 지닌 모습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몸돌은 없고 지붕돌만 12개를 포개서 얹은 것처럼 볼 수도 있으니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1층 지붕돌 중앙에는 네모난 굄돌이 있고 그 위로 급격히 줄어든 크기의 2층부터 13층까지가 올려져 있다. 각 층돌은 아래부분은 1층 지붕돌과 마찬가지로 3단의 층급받침을 조각하였고, 지붕 위로 솟은 부분은 다음 층을 받치는 굄돌이 아니라 다음 층의 몸돌이 되는 것이다. 즉 돌 하나에 아래 층 지붕과 위 층 몸돌이 함께 있는 보기 드문 이형석탑이다. 그럼에도 올라갈수록 일정하게 고른 체감률을 보여 날씬하고 미끈해 보인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다.

 

원래 10층 이상의 다층탑은 중국적인 탑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경주 망덕사(望德寺) 십삼층 목탑이 중국 황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데서 그리 해석하는 듯한데, 그것만으로는 이것이 왜 중국풍이고 왜 하필 13층인지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각에서 3층 탑은 신라, 5층 탑은 고려하는 식으로 단순 분류하는 오류가 있는데 다층탑은 중국풍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간다. ◎

자료제공·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http://cafe.daum.net/sm-academy